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 로고스는 모든 성경에 기록된 말씀, 예수님 자신을 의미
* 레마는 기록된 말씀에서 나를 감동시키고 내게 특별하게 각인된 말씀을 의미

로고스와 레마

말씀이라는 뜻의 '로고스(logos)'와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는 뜻의 '레마(rhema)'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로고스"는 성서입니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말씀이 나의 영혼에 충격을 줍니다.
그 말씀은 나를 위해 성령으로 축복된 것으로 "레마"라고 합니다.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생활에 힘이 될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읽는 중에 아마 이렇게 말할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구절을 수백 번 읽었건만, 아직까지 아무런 의미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제야 알겠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참으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이 하셨던 말씀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씀은 자신에 대한 말씀이 되어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레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중에서 예를 들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3:2~5) 라는 구절 일수도 있습니다.

아마 어떤 병으로 고생하던 중 정말로 주님이 당신의 믿음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했다면, 바로 특별한 때, 특별한 상황에서 당신의 영혼을 위해 주신
축복받은 말씀, 곧 "레마"입니다.

어떤 성서구절이 당신을 감동시켰을 때, 그 구절을 반복하면 당신의 영혼 깊숙이 그것을 간직하려 하게 되고 드디어 그 구절이 당신의 영혼에 와 닿아 성서를 펼치면 그 똑같은 구절에 눈이 머문다고 했다면. 그 구절은 당신에게 바로 "레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레마"는 다앙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을 전하고자 하십니다.

고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전6:9~10)

마음을 열고, "레마"를 갈망하고 그 말씀을 우리 생활에 적용 하시길 바랍니다.



예를 들면 성 어거스틴의 경우(로마서 13:13-14)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후세에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으로 불린 사람입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한때, 기독교신앙을 거부하고, 한 젊은 여성과 동거하면서 아이를 낳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회심한 장면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무화과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거기서 울음을 터트리기가 무섭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나는 그런 죄악에 매어있는 것 같아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주여 언제까지 내일로 미루시고 저의 더러움을 씻어주지 않으시렵니까?”
나는 이렇게 아뢰면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슬피 울었다.
그때 이웃집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하고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 힘든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노래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성경을 펴들고 첫눈에 보이는 말씀을 읽으라는 확신이 들었다. .....

내가 그 성경을 집어 들고 첫 장을 펼쳤을 때에 첫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이랬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나는 더 이상 읽어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나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치고 모든 어두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 성서일과의 본문은 어거스틴을 성자로 변화시킨 말씀입니다.

구원의 시간

로마서 13장 11절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우리가 시기를 압니다. 우리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잠은 신령한 일을 등한히 하고, 잊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깸은 잠의 상태에서 벗어나 재림을 대비하여 믿음과 행함에 충실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빛의 갑옷

로마서 13장 12절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었습니다. 낮이 가까웠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그는 죄의 깊은 밤에서 어둠의 일을 했습니다. 어둠의 일을 하며 초라한 자신을 발견한 그는 죄의 깊은 밤에서 빛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의 세계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둠의 일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빛의 갑옷을 찾았습니다. 빛의 갑옷은 죄의 세계와 싸우는 옷입니다. 어둠의 일을 물리치는 빛의 옷입니다. 어둠의 일은 어떤 일입니까? 로마서 13장 13절 말씀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방탕,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술취함, 주님을 멀리하고 쾌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음란과 호색, 어거스틴이 특히 괴로워했던 것이 성적 욕망입니다. 그리고 다툼과 시기입니다. 다툼은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범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격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축하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어둠의 일을 어떻게 이깁니까?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빛의 갑옷은 어떤 옷입니까?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로마서 13장 14절 말씀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박수암, 로마서, 320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나의 전 인격을 채워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욕망으로 채우면, 육신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죄인이자 탕아 어거스틴, ‘은혜의 박사 ’가 되기까지

어거스틴은 33세가 된 387년 4월 세례를 받고 진정한 행복을 찾았지만, 어머니와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이후 작심한 듯 수 년 동안 철학은 물론, 신학과 성경 연구에 매진했다.
이 기간 <회의주의자들에 대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독백>이라는 단편을 저술했고, 37세이던 391년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다.
수도원을 세워 수도 생활을 시작하다, 397년 발레리우스에 이어 히포의 주교가 됐다.

이후 그는 이교와 철학의 오류들을 반박하며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기독교 교리의 수호자가 됐다.
특히 마니교, 도나티스트, 펠라기우스주의 등 3가지 주요 이단들과의 싸움에 진력하며 보편 교회의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특히 411년 286명의 가톨릭 감독들과 229명의 도나티스트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인 카르타고 회의에서, 지난 100여 년간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혔던 도나티스트들을 축출하는 일에 앞장섰다.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했고,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약화시켜 야만족들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어거스틴은 413-426년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집필한 후 430년 8월 28일 76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어거스틴의 저술과 사상

어거스틴은 평생 수많은 작품들을 썼고, 8천여 회 설교했으며, 취급한 주제들도 다양했다. 대표 저술은 <고백록(Confessiones)>으로, 397-410년 집필했으며 13권 273장으로 돼 있다. 이는 단순 자서전을 넘어, 하나님의 존재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독교 교리가 영원불변한 진리임를 증언하는 변증서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책이다.

최더함 목사

“그가 발견한 기독교 진리는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를 뛰어넘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으로, 기독교회사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한 결과”라며 “한 마디로 어거스틴의 신학적 성찰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이라는 두 줄기를 하나로 통합한 새로운 물줄기의 근원으로, 플라톤 철학 및 신플라톤주의를 재해석해 기독교 교리와의 조화를 꾀한 최초의 신학적 시도였다”고 해설했다.

“특히 내적 인간에 대한 탐구는 독창적이다. 그는 인간 영혼의 내향성(inwardness)을 진지하게 성찰해, 젖먹이에게도 드러나는 죄의 본원적 특성을 통해 인간을 죄인이자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했다”며 “그는 악이란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이자 사랑의 왜곡이라고 했다. ‘조명설’로 불리는 그의 인식론은 진리의 바른 인식을 위해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라고 했다”고 전했다.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은 제자 에보디우스와
①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②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③ 하나님은 죄인의 죄를 예지하셨는가? 등 세 가지 주제를 놓고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집필 동기는 악과 구원의 문제에 대한 마니교의 그릇된 주장들을 변증하기 위함이었다. 마니교처럼 죄는 악신이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 존재인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죄악의 문제이며, 이 타락한 자유의지를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신국론(De Civitate Dei)>은 <고백록>의 성찰을 역사와 문화로 확대 적용한 작품으로, <하나님의 도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로마 제국이 야만족의 침입을 받은 이유가 기독교 때문에 다신교를 버렸기 때문이라는 당시 민심의 비난에 대해 기독교회를 변호하기 위해 쓰였다. 그래서 전반부는 기독교 호교론(1-10권), 후반부(11-22권)는 ‘두 도성’에 관한 고찰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한 진리 안에서 완성되지만, ‘지상의 도성’은 종말의 때 분명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가장 나중에 집필한 최고의 작품으로, 신학적이면서 내면의 깊은 사색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당시 마르시온 등 초기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가현설을 주장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을 반박했다. 전반부(1-7권)는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소개하고, 후반부(8-15권)는 삼위일체론을 신학적으로 규명한다.

최더함 목사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달리,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다”며
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non peccare)으로, 타락 이전 아담의 상태다.
②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가능성(non posse non peccare)으로,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의 상태다.
③ 죄를 지을 수 없는 가능성(non poccd peccare)으로, 구속 받은 사람들의 상태”라고 분석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가능성’이 회복돼, 갇혔던 자유가 해방되어 자유를 누린다고 했다.
그러나 범죄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며, 인간의 욕망은 죽는 날까지 남아 있기에 이 땅에서의 완전한 성화와 온전한 자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와 온전한 자유를 가지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성도는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이 완전함을 누린다”고 설명했다.

은총의 박사, 어거스틴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토마스 J. 네틀스 토마스 J. 네틀스(Thomas J. Nettles) 박사는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의 역사 신학 교수이다.

교리와 경건의 조화에 있어서 어거스틴(354-430)과 맞먹을 인물은 교회사에서 찾기 드물다. 어거스틴의 작품들은 기독교 철학, 조직신학, 철학사, 논증법, 수사학, 그리고 기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다. 비록 그가 죽은 사람을 위한 중보적 기도와 제사, 연옥, 변형적 칭의의 교리를 어느 정도 지지했다 할지라도, 그의 장대한 은혜 교리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대속 교리는 개혁 신학의 여러 고백서 안에서 정밀하고 튼튼한 기틀로 세워졌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이교 사상이 아닌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명의 재건 역시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라 진행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도 그 당시 무시되었던 어거스틴의 죄와 구원 교리를 재발견하며 쌓아 올린 것이다.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주 타가스테(Tagaste)에서 354년에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타락에 있어서, “어린이들의 무죄는 마음의 어떤 상태보다 신체의 무력함에 있다(고백록 1권 7장).”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아버지 파트리시우스(Partricius)는 이교도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아버지를 상스럽고, 호색하며 화를 잘 낼 뿐 아니라 외도를 즐기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파트리시우스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로마가 통제하는 경제, 정치 체제 속에서 아프리카인으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어거스틴은 그에게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파트리시우스는 어거스틴이 17살이 되기 전에 죽음 맞았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열정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어거스틴을 향한 남다른 사랑을 지닌 모니카는 아들의 행복과 구원을 놓고 끈질긴 열심으로 쉼 없이 기도를 쏟아부었다. 모니카가 어거스틴의 회심과 정통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들었을 때는 껑충껑충 뛰며 기뻐하기도 했다. 어거스틴의 재능과 섬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태워지는 시점에 어머니 모니카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33살이 되던 해, 그녀는 5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그의 부모는 자신의 학업적 성취에만 치중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영적인 동기가 아닌 그저 아들의 출세를 위한 헛된 야심만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어거스틴의 학업이 그의 회심을 방해하기보다는 돕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런 확신은 거의 들어맞았다. 

타가스테에서 기초 소양 과정을 마친 어거스틴은 365년부터 369년까지 마다우라(Madaura)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어거스틴은 진리에 대한 적절한 언어적 표현을 찾는 것을 평생의 기쁨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연구에서는 인간과 언어의 유사점을 드러내며, 매우 기묘하며 본질적으로 선한 인간이 얼마나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했다. 단어와 웅변이가 설득과 설명을 위해 필요하지만 남용될 때는 오류와 악함을 묘사할 뿐이다. 훗날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의 규칙은 무시하면서, 문자와 음절의 규칙은 얼마나 까다롭게 지키는지도 지적했다. 

후원자 로마니아누스의 도움을 받은 어거스틴은 수사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향했다. 이때가 기원후 370년이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한 여인을 만나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3년간 지속된 이들의 관계로 얻은 결과는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였다. 동거 생활로 이끈 정욕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억했다. “진흙탕 같은 정욕과 젊음의 혈기가 내뿜는 뿌연 안개가 내 마음을 덮어 어둡게 하였기 때문에, 백색광 같은 사랑과 안개같이 희뿌연 정욕의 차이를 분별할 수 없었다(고백록 2권 2장).”

어거스틴은 9년 동안 물질주의와 이원론으로 가득 찬 마니교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다. 마니교는 기독교, 불교, 그리고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을 혼합하여 악의 문제를 다루었다. 어거스틴은 겉으로는 자신이 유년 시절에 배운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지하면서도, 악의 존재에 대한 마니교의 정교하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에 매료당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 묘한 매력을 풍기는 혼합 사상이 언어와 실체 사이의 통합을 위한 그의 탐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은, 마니교 주의자들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이며 터무니없는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이름을 뒤섞으며 말할지라도, 그것은 마귀의 올무였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늘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입에 발린 소리뿐이었다(고백록 3권 6장).”

마니교적 이원론에 대한 숙고는 어거스틴의 신학 중에 가장 심오한 주제 중 하나인 악의 문제를 끌어냈다. 어거스틴의 회심 직후에 기록한 『독백』은 하나님을 “진실로 피난처를 찾아 피신하는 소수에게 악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악은 선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모든 선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악은 단지 선의 부재일 뿐이다. 악은 침범하고 오염시키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차용된 것이며 그 영광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악이 내재한 존재도 그 자체로는 선하다. 마니교 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반대 본성을 근절한다고 해서 악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타락된 것을 정결케 함으로 제거될 수 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참된 것의 모방하지 않는 거짓된 것은 없기 때문에 진리와 거짓은 동일한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학업을 마친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곳의 교육 분위기는 실로 가관이었다. “판을 엎는 자들”로 알려진 학생들은 모든 질서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미친 사람처럼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다. 관행으로 보호되지 않았으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절망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어거스틴은 383년에 로마로 갔다.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어거스틴은 밀란 지역에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직 자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곳에 지원한 어거스틴은 그다음 해인 384년에 밀란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밀란의 위대한 설교자 암브로스를 조우한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의 수사법에서 자신의 마니학 스승이었던 파우스투스의 방식만큼 재미를 찾지는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하고 본질적인 실재를 언어에 녹인 암브로스의 설교 능력을 배우게 된다. 어거스틴은 기독교가 마니교에 대항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는 교회의 교리 문답자로 등록했다. 회의주의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신플라톤 철학은 어거스틴을 마니교 주의의 이원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새롭게 성경을 접하면서, 어거스틴이 가진 지적 성장의 빈 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창조, 섭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가 어거스틴의 지적, 영적 열망을 차고 넘치게 채워주었다. 

어거스틴은 그제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향한 찬양과 사랑을 떠나서는 영혼의 쉼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에 의해 의도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만 “사랑받으셔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만을 찬양하며 즐거워하도록 만드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분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쉼을 누릴 수 없도록 하셨다(고백록 1권 1장)”고 어거스틴은 인지했다. 

31살 된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고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들고 읽어라”고 외치는 어린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자기 주변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든 어거스틴의 눈은 성경 말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괴롭힌 불만족, 확신, 재검토의 순환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387년 4월 25일, 암브로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어거스틴은 은둔 생활을 원했다. 이전에 따르던 쾌락, 멋, 명예는 멀리하며 무소유를 실천하고, 성경 읽기와 하나님을 묵상하는 삶을 추구했다. 감독이 없는 교회들이 어거스틴을 데려오기 원했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이러한 자리들을 사양했다. 그리고 391년이 되어서 수도원 건립을 목적으로 히포로 이동했다. 히포에는 발레리우스가 감독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 발레리우스는 어거스틴을 사제로 임명하고, 395년경에는 어거스틴이 이 도시의 새로운 감독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을 목사로서 성도들을 섬겼을 뿐 아니라, 기독교 진리와 순전한 예배에 해박한 교회 지도자로서 전체 기독교 세계를 이끌었다.
철학과 신학에 대한 그의 광대한 역량을 쏟아부은 영적 자서전『고백록』은 수많은 신학 의제들을 수립했다. 그리스도, 삼위일체, 인간의 죄, 악의 성향, 타락한 의지의 내적 부패와 자유함,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필요성, 성례의 본질, 타락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되는 인류사의 향방 등의 기본을 『고백록』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명하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게 알려주십시오(고백록 10권 29장)”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펠라기우스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어거스틴은 평생 은혜의 필요성을 변증했다. 그리고 이는 그의 가장 심오하면서도 논쟁적인 신학적 입장들을 만들어 냈다. 어거스틴 사상이 지닌 이러한 특징은 안셀무스,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사람의 경건과 신학에 영감을 주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매우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여 칼세돈의 입장을 예견했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전개된 그의 놀라운 신정론은 서구사에 혁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이고 결론을 찾고 있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역동성을 창출해냈다. 또한, 도나투스파의 박해에 대한 그의 변증은 여러 나쁜 결과들을 도출하기도 했지만, 교회의 일치를 위한 그의 강력한 견해는 교리적 토론과 확증을 통해 다양한 유형 속에서 일치를 이루려는 많은 복음주의적 노력에 실체를 부여했다.

1,200여 년 전, 수도승 고트샬크가 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실이다. “사도 시대 이후, 어거스틴은 모든 교회의 선생이다.”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

1. 저작 동기와 시대적 배경

어거스틴의 생애는 논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다사다난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시기였습니다. 비록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국교화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고트족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배교자와 이교도들을 교회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고심해야 했고, 수많은 이단들이 기독교를 공격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던 시기였습니다.

고트족의 침입과 게르만 족의 황제 폐위는 결국 천년의 영원한 도성처럼 보였던 로마를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폭풍 가운데 어거스틴은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의 바른 신앙을 위하여 끊임없이 신학적 논쟁에 휘말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자처한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부탁으로 논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초기의 저작들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이 강하고 후기에 들수록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책이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던 어거스틴이 주교가 되고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멸망해 가는 카르타고와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반 이후는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신학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요한 3대 논쟁은 먼저, 마니교와의 논쟁이고, 둘째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마지막 세 번째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입니다. 세 논쟁은 시기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마니교와의 논쟁에서는 악의 기원이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논쟁을 그의 <자유의지론>이란 책을 통해 풀어 나갑니다. <자유의지론>에서 어거스틴은 악이 어떤 존재, 즉 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악용함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악의 책임과 출처가 사람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은 교회가 배교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핍박이 끝났지만 도나투스가 살았던 시대는 배교자에 대한 문제로 교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여파가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도나투스파는 배교자나 율법을 잘 지키지 않은 자들에 대해 교회가 엄격해야 하며, 그들을 교인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지었을 경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나투스파는 교회의 거룩에 대한 극단적 염려로 인해 결국 보편 교회를 버리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나가 ‘분리주의자’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릅니다.

어거스틴은 비록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람은 불완전하며,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은 교회가 받아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 논쟁은 죄의 기원을 다룬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하게 됩니다. 마니교에서 이미 죄의 기원을 다뤘지만, 펠라기우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본론에서 다루겠지만 펠라기우스의 가장 큰 문제는 아담의 죄성이 후손들에게 전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완전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엄숙주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은 마니교와의 논쟁에서 죄의 기원, 도나투스파의 완전한 삶을 종합해야 하는 신학적 복합성을 띠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과 문자>를 살펴보면서 펠라기우스 논쟁의 흐름을 짚어 나가 봅시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이후에 일어날 수많은 이단들과 중세의 타락과 종교개혁, 그리고 회심과 성화의 문제까지 두루두루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2. 책의 구조와 내용

책은 전체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어떤 논리적 귀결이나 논증을 차근차근 풀어 나가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주제로 나누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흐름에 따라 저는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1은 서론 부분이고, 2.3은 본론에 해당하며, 마지막 4는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1) 1-4장 인간에게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 5-26장 율법(문자)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3) 27-53장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집니다.
4) 54-66장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1) 1-4장 인간에게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첫 부분은 인간에게 완전함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르켈리누스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이 책은 엄밀하게 펠라기우스를 논박하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닙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은 이 책이 출간된 후 한참 후에 시작됩니다. 어거스틴이 ‘유아세례와 인간의 완전한 의로움에 관한 작은 책자’를 언급하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에게 완전한 의로움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지만, 그것은 완전함을 추구했던 도나투스파를 논박하기 위한 중요한 논지였습니다. 완전한 거룩을 추구했던 도나투스파를 향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은 절대 완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의로울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논지는 어거스틴을 ‘은총 박사’로 부르게 되는 신학적 전제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인간이 누구인지 간략하게 정의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면 죄가 없는 인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을 자기 안에서 살게 하시는 한 분 빼고는 이 땅에 누구도 이러한 완전함에 도달한 자가 없었고, 또 없을 것’(33쪽)이라고 말합니다. 즉 가능성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는 아무도 없었고,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에 이미 나타났고, 증언 되었습니다. 최고,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도 그랬고, 탁월한 능력자였던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야곱, 아브라함, 모세 등등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고 고백하며, 심지어 어거스틴도 시편 143:2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를 인용하며 그것을 증언합니다.(35쪽)

▶인간은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 또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의로울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의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 의지의 힘이나 인간 자신의 의로움을 통해 이 완전함에 도달하거나 꾸준히 그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아주 날카롭고도 사정없이 저항해야 합니다.”(37쪽)

▶인간은 계명을 따라 살 때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자칫 행위 구원의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앞으로 전개될 논지를 따라가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순종하는 의지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미 제시된 길을 가며 꾸준히 그리고 의로우며 경건하게 살게 되면 축복되고 영원한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39쪽)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인간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입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도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의 저서를 읽고 해로움을 인지하여 이곳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거스틴은 비록 인간에게는 완전한 의로움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은총)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영원한 삶, 즉 의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인간에 대한 전제를 가지고 다름 주제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5-26장 율법(문자)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곧장 자유의지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짓는 것 밖에 다른 것을 할 수 없’(41쪽)다고 말합니다. 즉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자유의지가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자유란 고작 악을 행하고, 불의를 선택하는 자유 밖에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후에 루터는 이것을 ‘노예 의지’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악한 삶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중요한 것을 지적합니다.

“말하자면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 살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죽이는 문자에 불과합니다.”(41쪽)

문자는 율법, 또는 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살리는 율법이 사람을 죽일까요? ‘모든 죄는 탐욕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43쪽) 타락한 인간은 절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통해서 사랑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47쪽)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자(율법)는 인간의 탐욕을 이끌어 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악을 행하게 됩니다. 선을 행할 수 없고, 악만을 행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들의 악을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것같이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율법의 문자는 살리는 영이 없으면 죽이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는 죄를 막기는커녕 알게 하며, 악한 욕망에 더하여서 율법을 범함도 덧붙여지기 때문입니다.”(49쪽)

▶율법은 인간이 누구인지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죄를 죄 되게’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합니다. 율법은 바울의 주장처럼 ‘죄를 깨’닫게 합니다.(롬 7:7) 율법을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을 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더러운 줄 모르다가 거울을 보고 더러운 것을 발견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하나님 없이(계명)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바른 인간관은 절대 거룩이신 하나님과 악의 실체인 인간을 비교함으로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고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의 오래됨은 성령의 새로움이 없으면 죄로부터 자유케 하기보다 죄를 알게 함으로 죄인을 만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103쪽)

3) 27-53장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집니다.

▶율법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드러내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는가?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은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비록 율법이 우리를 죽이게 하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 숨겨져 있으며, ‘그리스도 복음 안에 드러난 것’입니다.(105쪽)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은 이미 ‘두 돌판에 기록된 율법 안에’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그 비유의 그림자 속에 있습니다.’(107쪽)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율법을 통해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바울의 말을 가져와 율법은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사랑’(109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사랑입니다. 여기에 육신의 지혜로움을 굴복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돌판에 사랑의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이 육신의 지혜로움을 두렵게 하려고 행위의 법과 범죄자를 죽이는 문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라면, 믿음과 영의 법은 사랑하는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109쪽)

▶사랑은 성령으로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율법이 주어짐으로 사람들은 ‘더욱’ 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죽음의 직무이며 정죄의 직무’(113쪽)입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신약으로 끌고 옵니다. 신약의 직무를 영과 의의 직무로 표현하며, ‘성령의 선물로 인해서 우리가 의를 이루며 범법함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113쪽)는 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얻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유에서, 사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로 인해 죄인들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고후 5:21) 성령이 없는 율법이 사람을 죽였다면, 성령에 의한 삶은 의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자유의지로 사랑을 행하며 기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본성이 자체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건강한 영혼은 형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171쪽) 됩니다. 성령이 없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으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유케 하는 아들의 ‘자유’(요 8:36)가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을 행합니다.

4) 54-66장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합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또는 선물, 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악합니다. 그들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의 자유의지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합니다. 그들은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쓸 뿐..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185쪽)합니다. 그들은 종이기에 행함은 있으나 두려움이 지배하고, 절대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성령의 사람은 아들이기에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여 자유와 기쁨이 가득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알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곧 ‘사랑함으로 역사하는 믿음’(189쪽)입니다.

그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191쪽)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왔으니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더 나아가 성령 안에서의 행위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의 부패로부터 구원되며, ... 면류관을 받으며 이 땅의 선한 것뿐 아니라 영원에 속한 선한 것으로 배불리게 될 것’(197쪽)입니다.

▶율법(문자)를 더 세우게 됩니다.

결국 다시 율법의 문제로 돌아가면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완성하고, 더욱 힘써 율법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은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으며 믿음으로 부터, 곧 아름다움으로 인도되는 동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삽니다. 이 사랑은 우리 자신의 충만한 원함이나 율법의 의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201쪽)

▶인간의 삶은 부족함으로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율법의 목적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의미 속에는 타인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사랑은 서로 사랑이기에 자신의 허물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를 언급하며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만 합니다’(219쪽)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에게 ‘은총의 영’이 개입하여 ‘훗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영원히 사는 데 필요한 의로움도 완성’ 시킬 것입니다.(221쪽)

3. 나가면서

펠라기우스는 어린아이를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어른들인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담의 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부가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아담처럼 선을 행할 능력과 악을 행할 능력이 타락한 인간에게 남겨져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인간 스스로 선을 택하고, 그 선으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는 치명적인 교리적 독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이 원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전되지 않는 아담의 죄는 아담의 대표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부정하게 됩니다. 모든 선택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정하며, 구원조차 인간의 자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여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의 자유’였습니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배제하며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로 결심했을 때의 계략입니다.

비록 펠라기우스를 반박하기 위하여 쓴 글은 아니지만, 이 책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을 재고하면서 스스로 ‘펠라기우스주의를 가장 근본적으로 파괴한 책’으로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 ‘오직 은혜’라는 구호를 만들어 낼 만큼 사랑했습니다. 잘 알려진 <자유의지론>보다 이 책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정확하게 반박하고 있는데, 그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선물’ 또는 ‘하나님의 은총’이나 ‘선물’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아담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락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 의존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만물 역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이어갑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은총)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악을 행하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구제불능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성령)를 부어 주십니다. 성령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여 지성과 마음을 새롭게 하며, 의지에 힘을 주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후 사람들은 사랑의 존재이며,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살아감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솔리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어거스틴의 “원죄론”(Peccatum Originale)

“원죄(peccatum originale)”란 용어는 어거스틴이 처음으로 사용.
성경에 원죄의 개념을 처음으로 “원죄”라는 용어를 택한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계시는 성경에 풍부하게 나타난다.
즉 성경에 있으므로 택한 “명칭”이다.

어거스틴 이전에 이레니우스,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터툴리안, 시프리안, 암부로스 등도 원죄에 대해서 가르쳤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으로부터 배웠던 이레니우스는‘이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원죄를 묘사했다.

“첫 번째 사람은 그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그 결과 전 인류는 그와 더불어 타락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죽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원죄”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개념을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

 첫 번째 죄(원죄)와 그로 인해 전 인류에게 전가(유전)된 멸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창3:15)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모든 아담의 자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원죄란?

‘원죄’라는 용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의 불순종의 죄와 그로 인하여 인류에 끼친 영향.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지니게 된 죄와 그 죄책"으로 정의. 원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처지에 끼친 영향에 초점

[로마서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과 그리스도 대조(對照)

[로마서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 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원죄(original sin)가 모든 후손에게 유전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그 원죄를 속량하므로 일거에 모든 유전 된 후손의 죄와 멸망을 제거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는 자들만 죄와 멸망에서 벗어나 구원을 누린다.

카톨릭의 트렌트 공의회

​(반 종교 개혁회의)

1546년 6월 17일에 모여 신앙 고백의 다섯 번째 세션인 “원죄론”에 대한 조항. 원죄 론은 다섯 개의 조항으로 구성됐는데, 그 중에 세 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조항:

만약 누구라도 아담이 원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주셨던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지어다 (Si quis non confitetur … anathema sit).

두 번째 조항:

만약 누구라도 아담이 범한 원죄가 아담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지어다 (Si quis Adæ prævaricationem sibi soli … anathema sit).

세 번째 조항:

만약 누구라도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것으로 원죄가 치료될 수 있다고 믿거나, 침례/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임한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지어다 (Si quis hoc Adæ peccatum … aut negat ipsum … anathema sit).

원죄론에 있어서 카톨릭과 개신교(Protestant)가 차이가 없음은 모두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공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유된 원죄는

암부로스를 거쳐

어거스틴에 의해 체계화.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원죄)로 인해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제한받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이런 사유에서

​“인간은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없다

​(non posse non peccare)”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이중부정 문구가 생겨난 것.

단순한 육적 부패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어거스틴의 원죄론 신학은

캔터베리(영국 성공회).

​안셀름(1033년-1109년 – 중세 신학자)과

루터와 칼빈도 전적 동의한다.

아담은 생물학적.

​언약적 인류의 조상이며 대표자.

​둘을 분리할 수 없다.

​원죄 유전을 부정하는 사상은

반 성경적 주장이다.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펠라기우스(Pelagius, 360년?~418년)는 브리타니아(영국) 태생의 기독교 수도사(修道士)이다.

4세기 말에 로마에 와서 법률을 배운 듯하며

이어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금욕적 생활태도, 도덕적 엄격성 때문에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강조하고,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의의를 부정하였다.

원죄는 인간의 본성을 오염시키지 않았으며

도덕적 의지는 여전히 신의 도움 없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창조한 능력으로 죄 없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선한 행위를 도와준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은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원죄를 근거로 하나님의 도움 즉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 고

주장한 어거스틴의 견해와 반대되었고  <!--[endif]--> 

후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거부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신의 은혜 없이

도덕적 완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죄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완전을 이룰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로마에서는 추종자도 있었으나

아프리카나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이단으로 확정되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 Latin: Semipelagianismus)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 관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강조하였지만

펠라기우스주의는 구원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의 원 죄 론과 은총 론을 받아들이지만

거기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혼합시켰다.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구원을 향해 상당한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짐으로써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도 역시 펠라기우스주의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529년 제 2차 오렌지회의(Second Council of Orange, 529)에서

이단으로 확정되었다.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알미니안주의 다섯 항변은 1610년에 알미니우스(1560.10.10~1609.10.19)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이 요한 칼빈의 가르침에 대한 당대의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해석에 대하여 제기한 다섯 가지 이의(異意)를 가리킨다.

46명의 설교자와 설교자를 교육하던 라이덴 대학의 두 지도자는 1610년 1월 14일 헤이그에서 회동하여, 논의되던 교리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문서로 작성했다. 항변서 형식의 문서의 초안은 이안 우이텐보가르트가 잡았고 약간 손질을 본 후 7월에 모두가 서명한 후 제안되었다.

1.부분적 타락: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

2.조건적 선택: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을 믿을지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

3.보편적 속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4.가항적 은총: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베푸시는 은총을 사람은 거부할 수 있다. “선행적인 은총”.

5.탈락 가능성: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도 훗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이의는 항변서(remonstrance) 형식으로 제기 되었다. 이로 인해 도르트 총회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네덜란드 교회는 개혁주의 입장을 선택하였다. 이때 위의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한 개혁주의적 답변을 요약한 것이 소위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소위 "죄성"으로 죄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그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그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칼뱅주의(Calvinism):

원죄에 대한 칼뱅주의 견해는 성경적 가르침과 가장 잘 일치.

칼뱅주의 교리는 아담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성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유죄 상태가 되게 만들었다고 언급.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잉태됨으로 인한 결과는(시 51: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렘 17:9) 마음으로 묘사되는 사악한 본성을 물려받는 것

아담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죄책과 형벌(죽음)은 우리에게도 속하게(유전. 전가) 되었다(롬 5:12, 19).

칼뱅주의적인 견해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상에서의 그분의 속죄를 의지할 때만 얻을 수 있다.

칼빈주의 5대 강령 – 도르트 신조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質)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 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의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칼뱅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섯 솔라(Sola ),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도르트신조에서 나온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영어로는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類)파와

칼뱅주의를 구분 짓는 내용들이 된다.

다섯 솔라(Sola )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주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공로를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

(라틴어: 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

4세기 북아프리카인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주교로, 개신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히포 사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그의 이름은 ‘좋은 징조의’

‘덕망있는’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

영어로 어거스틴(Augustine)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아우구스틴(Augustin)이라고도 한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391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받은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도 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

특히 은총론, 신학적 인식론, 교회론, 영성신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중세 초기부터

은총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심지어 종교 개혁 시기의

개신교 선구자인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도

그의 은총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근대에 들어와 얀센주의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지지하였다.

395년 발레리우스 주교가 노쇠하자

그의 공동주교로 선출되어 4년 동안 주교를 보좌하다가,

이듬해 그가 죽자 히포 교구의 주교가 되어

평생동안 히포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사목하였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의 한 민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였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

(반달족의 히포 점령은 431년의 일)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두려움에 빠진 난민들을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행동은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신앙에 따른 것이었다.

어거스틴에 대한 일반적 평가

교부들 중 어거스틴에게는 많은 연구가들이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

“2000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교부”,

“초대교회의 완성자”,

“서방(로마)교회의 아버지”,

“초대 기독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 등

어거스틴(Augustine)은 영어식 이름이고,

그의 라틴어식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를 연구한 어떤 교회사가들은

어거스틴이 고대의 모든 신학적 전통을 종합하는

자리에 서 있다고 하며,

중세 이후의 모든 신학 전통을 수립·발전시키는

관문에 서 있었다고도 하고,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어거스틴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상도 없다고 할 만큼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다양하고

포괄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문학가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는 <고백록(참회록)>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중세교회를 지배했다.

개신교회, 카톨릭, 성공회 등

거의 모든 기독교회들이

그의 뒤를 잇고 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들이

가장 존경했던 신학자이며

그는 전체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어거스틴의 참회록




나머지 책들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11, 12, 13권은 창세기의 주석에 해당하는 글로써 11권 <시간의 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창조의 사역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문제를 논의한다.
12권 <창조의 말씀>에서는 태초의 세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물체의 질료, 영원성, 창세의 비화들을 논하고 있고 13권 <완성을 향하여>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피조물의 불완전한 관계를 설정하여 하나님은 영원하며 사물과 생명의 유일한 근원임을 밝힌다.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말하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돌아가기를 호소하고 그의 은혜와 경이를 찬양하며 글을 마친다.

참회록이 주는 감동

“저의 영혼은 좁은 방 한 칸의 넓이입니다. 당신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더 넓혀 주십시오” 그가 참회록에 쓴 한 구절이다.
어거스틴은 당대 유명한 수사학자로서 자신의 지혜와 세상 지식을 과신한 나머지 마니교 등의 이단 사설과 타협하고 맹신하며 하나님 속을 많이 상하게 한 죄인중의 죄인이다. 그가 이런 고백을 한다. 서슴없이 자신의 지혜와 영혼의 깊이가 보잘 것 없노라고…. 아프리카의 탕자를 성자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랑을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마치 신약의 바울사도와 비슷하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열심당 당원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 탄압의 선봉장이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의 종이 된다는 내용과 흡사한 이야기 전개. 이른바 잘 나가는 지식인이었던 어거스틴 자신도 극적인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바울처럼 현재의 자신이 있게 되었음을 알리려고 어쩌면 의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현시라는 악의적 해석으로 그의 참회록에 접근한다 할지라도 그의 개종과 이후의 그의 업적은 놀랍고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그의 일생에 있어서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회개의 매개체라고 볼 수 있다.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마니교와 방탕한 생활이라는 암흑 속에서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님 곁으로 돌아올 것을 의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간구했다. 그녀의 눈물은 어거스틴의 영혼을 구원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눈물의 자식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 느끼게 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우리는 늘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반역을 도모한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단순하기만 하다. 태초 이래로 죄악에서 심판으로, 심판 후에 참회, 회개한 뒤 용서하심의 반복은 소위 피드백(FEEDBACK)하듯 하나의 순환 도표처럼 인식되어 왔다.

우리는 이미 안다. 우리가 죄지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그러나 어이없게도 우리는 감히 도전한다. 어거스틴도 두려워한 저 악한 사단과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멸망의 길로 유인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잘살 수 있다고, 한 번 도전할만한 일이 아니냐고 일반인보다 조금 유식한 과학자들과 지성인들을 꼬드긴다. 그 꼬드김에 이른바 지식인들은 알량한 영혼과 지식을 그들에게 팔고 만다.

분명한 것은 그들 지식인들은 자신의 영혼과 지식의 넓이가 좁은 방 한 칸의 넓이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얼마나 더 비좁으랴. 이제 믿는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청결히하고 필요 없는 지식으로 가득 찬 비좁은방을 그분이 허락하신 성령이 함께 들어와 거하실 수 있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허물어진 영혼의 담을 수리하여 저들 우는 사자처럼 우리의 영혼을 강도질하고 겁탈하려 하는 악한 사단마귀 원수의 손아귀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내야 한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현대를 살아가며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리를 찾아 갈 곳 몰라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하며 하나님께로 더욱 확신함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자전적 지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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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로고스와 레마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말하기.
 1. [일반용법]
  a. 말[《반》ἔργον: ‘행동’], 눅24:19. [주] 롬15:18, 고후10:11, 골3:17, 살후2:17, 요일3:18 참고.
  b. [문맥에 따라 의미 변화] ㉠ 너의 말, 마5:37. ㉡ 설명, 눅20:20. ㉢ 질문, ἐ- ρωτήσω ὑμᾶς λόγον: 내가 네게 물을 것이다, 마21:24. ㉣ 기도, 마26:44, 막14:39. ㉤ 예언, 요2:22, 18:32. ㉥ 명령, 계명, 눅4:36, 벧후3:5,7. ㉦ 보고, 소문, 이야기, 마28:15, 막1: 45, 눅5:15. ㉧ 잠언, 속담, 요4:37. ㉨ 선포, 교훈, 훈계, 가르침, 눅4:32, 10:39, 요4:41, 17:20, 행2:41, 4: 4, 10:44, 고전1:17, 2:1.
  c. [제한된 내용의 진술] 주장, 선언, 연설, 마12:32, 15:12, 막5:36, 7:29, 눅1:29, 요4:39, 행6:5, 7:29, 11:1, 살전4:15.
  d. [복수로 쓰일 경우] 무성한 말, 마12:37, 24:35, 막13:31, 눅21:33, 행2:40, 7:22, 15:24, 20:35, 고전2: 4, 14:19.
  e. 토론 주제, 문제, 일반적인 것, 막9:10, 행8:21, 15:6.

2.  [하나님의 계시
  a.  하나님의 말씀, 행4:29,31, 13:46, 빌1:14, 히13:7, 계1:2.
  b.  복음, 눅5:1, 8:11,21, 11:28, 행6:2, 13:44, 16:32, 고전14:36, 고후2:17, 4:2, 골1:25, 벧전1:23, 계1:9, 6:9.
  c.  말씀, 마13:20, 막2:2, 4:14-20,33, 8:32, 16:20, 눅1:2, 8:12,15, 행6: 4, 8:4, 10:36, 11:19, 14:25, 16:6, 17:11, 18:5, 갈6:6, 골4:3, 살전1:6, 딤후4:2, 약1:21, 벧전2:8, 3:1, 요일2:7.

II.  셈, 계산.
 1. 이야기, 설명, 롬 14:12.
 2. 정리, 해결, 청산, 빌4:15.
 3. 존경, 안부, 존중, 관심, εἰς λόγον τινός: ~에 관하여, ~을 위하여.
 4.  이유, 원인, 동기.
  a.  τίνιλόγῳ: 무슨 이유로, 행10:29.
  b.  κατά λόγον, 행18:14.
  c. παρεκτόγου, 마5:32.

III. 도, 로고스, 말씀, 요일1:1, 계19:13.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말(마5:37, 눅1:20, 행2:22), 말씀(마8:8, 막4:15, 행6:2, 11:19, 14:25, 살전1:6), 소리(눅 3:4), 소문(눅7:17, 행11:22), 이야기(눅24:17), 글(행1:1), 언변(고전1:5), 모양(골2: 23), 일(행15:6, 18:15, 19:40), 고발(행19: 38), 전도(골4:3), 결산(마18:23, 25:19), 전파(막1: 45), 말씀(막2:2, 요2:22, 행20:35), 고(벧전4:5), 예언(벧후1:19), 이유(마5:32, 벧전3:15).

레마

로고스와 레마

ῥῆμα 스트롱번호 4487

1. 말하여진 것.  2. 예언. 3. 명령
발음 [ rhēma ]
어원  / 448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a.  말하여진 것, 말, 격언, 발표, 표현, 마12:36, 27:14, 눅2:17,50, 20:26, 24:11, 행16:38, 28:25, 고후12:4, 히12:19.
 b. 예언, 예고, 마26:75, 막9:32, 14:
 c.  명령, 지시, 눅5:5, 히11:3.
 d.  연설, 설교, 선언, 눅7:1, 행2:14, 요8:20, 롬10:18.

2.  [히브리어에서와 같이] 물건, 사물, 사건, 일, 마18:16, 눅1:37, 고후13:1.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말씀(마 4:4, 눅 1:37, 행 5:20), 말(마 5:11, 행 2:14, 고후 12:4), 일(눅 2:15, 행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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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와 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