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민족 /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 /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이다


창세기 10:30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The region where they lived stretched from Mesha toward Sephar, in the eastern hill country.

 



아리랑의 의미

아리랑은 한자로 아리랑(我理朗)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으로 보면 아리랑은 '나를 깨닫는 기쁨', '내가 깨닫는 기쁨'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평상시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아'를 말한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일컫는 말이다



민요 '아리랑'은 깨달음의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에게 민요 ‘아리랑’은 우리의 주식인 쌀밥과 같은 존재이다.
그만큼 익숙하고 널리 애창된다.
그런데 ‘아리랑’이 어떤 의미인지, 어디서 유래했는지, 언제부터 불렀는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기원설과 어원설로 다양한 견해만 존재할 뿐 정설이 없다.
이를 일컬어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아리랑 어원설엔 말도나 많다"고 하기도 한다.

아리랑이라는 말은 난랑(卵郞, 알랑)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하고 발(光明)에서 알로, 다시 아리로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처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아 아리랑설(我離娘說)로 보는 이도 있다.

서정범 교수는 '알라이요'의 알(卵)을 근원적인 것, 핵심으로서의 알(卵)로 설명한다.

김용운 교수는 ‘아리리요’를 ‘아 신이요’로 설명한다.
“아라리요는 '아 날이요'에서 나온 것이며 요즘 말로 하면 '아 신이요' 와 같다.

가령 “아라리 요 아라리 요 /~ /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라리 요 아라리 요” 에서와 같이 한스러운 노랫가락에서 '아라리 요'를 '아 신이요'의 뜻으로 새기고 들으면 한층 실감이 난다.
'아 날이요‘가 '아 나리요' 또는 '아라리 요' 가 되고 마침내 '아리랑' 으로 변한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과 일본인3, 같은 씨앗에서 다른 꽃이 핀다》, 한길사)

우실하 교수는 중국 동북방 소수민족 에벵키(Ewenki)족이 아직도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 ‘아리’, ‘쓰리’ 등의 말을 쓰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아리랑과 쓰리랑의 의미를 설명한다.
우 교수의 논문 <‘아리랑’·‘쓰리랑’의 의미와 어원(語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현재의 에벵키족은 북만주 동쪽 읍루(挹婁)지역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하여 북방 대흥안령 자락과 흑룡강 중·상류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대 우리 민족들과 교류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어와 에벵키어는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우 교수는 설명한다.

에벵키어의 ‘아리랑’이라는 말은 주로 “맞이하다/영접하다”와 “이별이나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다"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런 에벵키어가 한국어 속에 흡수되었다면 ‘아리랑’이라는 말은 님을 보내면서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다, 감수하다, 인내하다’ 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랑’의 이중적인 의미구조로 보면 님을 보내는 ‘이별의 아리랑’도 가능하지만 님을 맞이하는 ‘만남의 아리랑’도 가능하다고 우 교수는 설명한다.

이렇게 에벵키어를 참조하여 우 교수가 해석한 아리랑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해석1) 인내하자 인내하자 (님이 나와)다르구나.
(님이) 이별고개로 넘어간다
(해석2) 참자 참아내자 혼란스럽구나
(님이)이별고개로 넘어간다
(해석3) 인정하자 인정하다(님이 나와)다르구나
(해석4) 감수하자 감사하자 어지럽구나
(님이)이별고개로 넘어간다

우 교수는 ‘쓰리랑’과 거의 유사한 발음을 지닌 에벵키어 SERERENG와 SERIRENG에서 “잠든 ‘영혼’이 깨어나다‘라는 의미가 된다”며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의 본래 의미는 ‘(사자의 영혼을) 맞이하세 맞이하세, (잠든 영혼이) 깨어났네 깨어났네’의 의미로 새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아리랑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우 교수의 다음 설명이 도움 될 것이다.


“ ‘아리랑’은 고대 북방 샤마니즘의 ‘영혼을 맞이하다’는 의미에서, 2차장 풍속과 관련되어 이별의 슬픔을 ‘참다, 인내하다’의 의미가 부가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쓰리랑’도 본래는 ‘잠든 영혼이 깨어나다’라는 의미에서 ‘깨다, 깨닫다, 알아차리다’ 등의 의미로 확대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불리고 있는 여러 지방의 아리랑 가사에 나타나는 ‘아리랑’‘쓰리랑’ 등은 전체 노래가사와 연관해서 보면, 본래적인 의미인 ‘영혼을 맞이하다’ ‘영혼이 깨어나다’라기 보다는 이별의 슬픔을 ‘참다/인내하다’, ‘알다/깨닫다’ 등의 파생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보아야 전체 노래가사와 어울리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은 2차장의 풍습이 일찍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은 민요 ‘아리랑’을 ‘나를 찾아가는 기쁨의 노래’로 풀이한다.(이승헌, 《한국인에게 고함》, 한문화, 참조) 이 총장은 아리랑을 ‘우리 민족의 얼이 영글고 영글어서 만들어진 영혼의 노래’라며 “겉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가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님이 삶의 영원한 근원, 참나, 커다란 민족적 자아로 받아들여졌다”고 본다. 《한국인에게 고함》을 토대로 아리랑의 의미를 알아보자.

깨달음의 노래로 보면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 아리랑은 한자로 아리랑(我理朗)을 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으로 보면 아리랑은 ‘나를 깨닫는 기쁨’, ‘내가 깨닫는 기쁨’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평상시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아’를 말한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일컫는 말이다.

아리랑에서 말하는 ‘아’는 그 개인의 역사가 생기기 이전의 근원적인 ‘나’, 이름이 있기 전의 ‘나’이다. 그것이 진정한 ‘나’의 실체이다. 그래서 ‘아’를 깨달은 사람은 참나를 깨달은 사람이며 모두가 다 하나이고 형제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의미는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을 다 함께 누립시다.’ 이런 뜻이 된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여기서 ‘나’는 참나를 말한다. 그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참나를 버리고 거짓나를 위한 욕망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십’은 통합, 완성,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깨달음을 이루지도 못하고 장애가 생긴다는 뜻이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인간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의 장애자가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리랑은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큰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아리랑을 부르는 것 아닐까.

"아리랑은 잠든 나를 깨우는 노래요,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깨우는 힘을 가진 노래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영적인 노래이며 인류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깨달음의 노래이다.”

출처 :  K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


'아리랑'의 뜻을 아시나요

이종대씨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뜻이 고개 이름이나 '떠나간 님'이 아니라 '하늘의 주인', 곧 '하느님'이라고 썼다.
'아리'는 하늘을 뜻하는 '알'의 변음(變音)이고, '랑(郞)'은 사내· 남편 외에도 '주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50년 전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발굴된 8500년 전 토기에 새겨진 그림 문자를 근거로 들었다.
다섯 봉우리 산 위에 반달 같은 모양이 있고 그 위에 둥근 해가 있는 그림 문자였다.
이씨는 "학계에서는 이 그림이 아사달을 뜻한다고 보지만 사실 아리랑을 뜻한다"며 "직계 자손인 우리가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잊고 살았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이씨를 만나봤다.
70세인 그는 전기제품 회사에 다니던 30년 전부터 우리 역사를 공부했는데 15년 전에 고대 그림 문자를 보고 아리랑의 뜻을 풀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을 내려고 했지만 출판사들이 거절해 작년에 자비로 40권을 찍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인터넷과 자료를 찾아봤다.
아리랑의 어원(語源)에 대해 30종 가까운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었다.
경복궁 중건 때 원납전을 내라는 말에 저항한 민초(民草)들이 '내 귀는 멀었다'며 '아이롱(我耳聾)'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이 기원이 됐다는 설, '밝(光)'의 고어인 '아리'와 고개를 뜻하는 '령(嶺)'이 합쳐졌다는 양주동의 '아리령설', 고대 낙랑시대 교통의 관문이었던 자비령의 이름인 '아라'에서 유래했다는 이병도의 '낙랑설' 등이 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96년 최초의 아리랑 악보와 영문 가사를 남기면서 "한국인들에게 아리랑의 뜻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어원을 추적한 첫 연구는 1930년 일제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조선 민요 아리랑'이었다.
'아이롱설'과 나를 버리고 떠난 임이라는 '아리랑(我離娘)설' 등 6가지 설을 들고 있다.

아리랑 연구가 조용호 박사는 이 논문이 "아리랑을 희화화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2011년 조선족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우리는 2012년 아리랑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지만 우리 무형문화재로는 올리지 못하고 있다.
2005년에 국내에 소개된 러시아 학자 추지노브와 유게라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인종학적으로 고대 아리아족에서 갈려 나와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아리아족과 아리랑이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아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아리야'는 '신성하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종대씨의 '하느님설'과 닮았다.

외국인들이 아리랑을 먼저 연구했고 지금도 세계를 뒤지며 다양한 방법으로 근원을 찾고 있으며 중국은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한반도에서만 찾고 있어서 그동안 여러 연구가 있었어도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바라지 않더라도 학자들이 각성해서 과학적 연구로 하루빨리 아리랑의 뜻을 복원해야 한다.
그것이 후손 된 도리다.
"잘못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 민족은 영원히 부평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다"는 이씨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아리랑의 뜻, 아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Meaning of Arirang, Dr. Harry Cho, Soongsil University, Korea

문학박사 조용호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영화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행가는 아니었다.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노랫말 속에는 특수한 문장으로 된 또 다른 아리랑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노랫말을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아리랑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우선, 아리랑과 아라리요는 뜻 모르는 후렴구이므로 첫 행 전체가 의미가 없다.
둘째 행, 아리랑 고개는 땅 위에 없는 허구의 장소인데, 그곳을 넘어가므로 또한 의미가 없다.
셋째 행, 나를 버리고 가시는으로 말을 올리면서 동시에 2행에서는 넘어간다,
4행에서는 발병난다 등으로 말을 내리고 있어 가시는 님에 대한 존칭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발병이 나는 것은 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지, 십 리라는 거리와는 큰 상관이 없다.
꼭 발병이 나야 한다면, 한 발자국도 못 가서 발병난다 정도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나를 버리고 간다고 해서 반드시 발병이 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십 리도라는 표현을 보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진다.
동양문학이나 한국인의 관념상 십 리(4km)라는 거리는 명사십리 해당화 등과 같이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어감을 갖고 있는데, 아리랑에서는 짧거나 모자라는 경우에만 사용되는 조사 ‘도’와 같이 쓰이고 있어서, 십 리도라는 표현 자체가 틀린 용법이 된다. 이렇게 되면, 아리랑이라는 겨우 네 줄밖에 안 되는 노래는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된 곳이 없는 온통 의미 없는 후렴구 상태에 빠지게 된다.

노랫말에 이러한 문제점들이 생기게 된 이유는 미래를 예언하는 노래인 고려 참요 아리랑이 금지곡이 되었고, 민간에서 구전되며 민요화되는 과정 속에서 영화 속의 유행가로 편집되었으며, 이때, 가사의 일부분이 당시의 상황에 맞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참요나 고려가요 등에 나오는 문장 형태로 된 뜻을 모르는 후렴구들은 특수한 문장으로, 현재의 암호문에 해당한다.

​암호문을 여는 비밀의 열쇠는 아리랑 쓰리랑(啊女郞 是女郞)으로 아리랑은 신성한 아가씨(女郞)라는 뜻이다. 암호해독열쇠를 노랫말에 대입하여 600년 전의 언어로 재구하면 한문과 고려어로 된 다섯 개의 아리랑이 만들어진다.

​남녀 대화체로 된 한문 아리랑은, 충신은 한 임금만을 섬긴다는 불사이군을 나타내고, 고려 아리랑은 젊은 아가씨가 스님에게 “나를 베리고 가오 스님은!”이라는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인 남녀상열지사의 장면이 된다. 아리랑은 비교 문학상 중국 원대에 유행한 원곡(元曲)과 유사한 형태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가극으로 상연하였다. 남녀간 대화의 내용을 변형하면 가극 속의 주제가가 되며, 바로,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의 원형인 고려어로 된 아리랑이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곡애- 나마간다
날 바리고 가시- 니믄
시니이 마까서 발화병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니이 마'를 '십리도 몯'으로 바꿔, 노랫말의 외면적 의미를 달리 표현하게 된다. 고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있다는 심층 구조를 숨긴 채, 북으로 끌려가는 공녀의 한 맺힌 이야기를 표현하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곡애- 나마간다
날 바리고 가시- 니믄
십리도 몯 가서 발화병난다

​아리랑은 1392년 7월 28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되던 왕조 교체기에 개경의 만수산 두문동에서 만들어졌다.
아리랑의 원형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넘어간다’를 ‘나마간다’, ‘가시는 님’은 조사가 생략된 형태의 ‘가시- 님’, 아리랑 고개는 '아리이랑 곡애(谷涯)'의 발음기호로 푸른 물결을 뜻하며, 땅 위가 아니라 물 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 고개는 땅 위에 존재할 수 없었다.

​아리랑에는 푸른 물결을 뜻하는 아리 이랑과 신성한 아가씨를 뜻하는 아아 리랑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아리랑 노래를 불러보면 '아아리랑 아아리랑 아아라리요'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아아 리랑이며, 아리랑 보다 더 오래된 구(舊)아리랑을 주의 깊게 잘 들어보면 '아리이랑 아리이랑 아라리로구료오'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아리 이랑이다.
또한, ‘십 리도 못 가서’가 아니라 ‘신이 막가서’ 발병나는 것이며, 이것을 참요의 내용으로 풀이하면, 신이(臣李) 막가서, 즉, 역적 신(臣)하 이(李)가 막가서 고려가 망할 것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왕조를 부정하고, 고려를 부활시키자는 내용이 된다.
'십리도 못 가서'로 바뀐 가사는 공녀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한 맺힌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유신들은 참요 아리랑을 만들어 전국에 있는 동지들과 2년여에 걸쳐 비밀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개경 만수산 두문동에서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온갖 형태의 참요들이 이에 화답하여 창화(唱和)하며 자신들만이 이해하는 암호문 통신 체계로 비밀스러운 대화를 시작하였다.

​강강수월래과(나를 따라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剛剛隨我來過),
늴리리야(넌 어느 편이야?),
애루하(어떤가? 唉, 如何?),
지화-자(計画-하자, 계획하자),
어기여차(내가 돌아간다),
어강됴리(금방 도착한다. 我剛要到了),
애 야노 야노 야(노를 저어라),
마득사리(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니사득마? 你舍得嗎?),
쾌지나칭칭나네(감빵 갔다 나왔네. 감빵가게 될 거야),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니 아니랑께 역적 이는 임금이 아니고 신하랑께),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밤이 되니 더욱더 쓸쓸해진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린다),
두어렁셩(냉정한 이 세상이여! 對我冷淸!)

​그러나 1394년 11월 17일, 노랫말에 숨겨진 내용의 일부가 조선군 암호해독부대에 의해 풀이되어 두문동은 불태워져 말살되고 노래는 금지곡이 된다.

​금지곡 상태에서 구전되던 아리랑은 한양 천도로 인해 개경에서 한양으로 지역이 바뀌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언어적인 변화도 일어나게 된다. 물결을 뜻하던 '곡애를'은 땅 위에 있는 '고개를'로 오해되기 시작하고, '나마간다'는 '넘어간다', '바리고'는 '버리고', '발화병난다'는 '발병난다'로 바뀌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나룰 바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몯 가서 발병난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민간에서만 조심스럽게 불리던 고려의 아리랑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궁궐에서도 아리랑을 공연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노래로 공인되었고, 이를 통해 민족(民族)의 노래로 성장하게 된다.

​1926년 10월 1일, 민간에서 불리던 아리랑이 영화 속의 유행가로 편집되면서 노랫말에 변형이 일어난다. ‘가시는 님’이 ‘가는 님’이라는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인데, 이는 영화 가사를 편집한 사람들이 원래의 가사를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또한, 여말선초 이후에 노랫말이 민간에 구전되는 과정 속에서 미세한 변형이 일어났고, 구어체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발병난다’는 ‘발병이 나네’라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네

​이렇게 되면 십 리라는 거리는 명사십리 해당화 등과 같이 먼 거리를 뜻하게 되고, 이것과 결합되는 조사는 짧거나 모자라는 경우에만 쓰이는 ‘도’가 되어 ‘십 리도’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 된다.
그렇지만 노랫말을 편집한 사람들도 이런 생각까지는 못했고, 노래를 부르는 우리 자신도 지금까지 몰랐다.

​변이와 지속의 과정 속에서 가사의 일부분이 바뀌기는 하였지만, 노래라는 것은 일정 부분 원형으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다. 즉, 가시는 님, 발병난다 등의 표현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라는 부분만은 ‘십 리도 못 가서’라는 형태로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유행가가 아니라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신들의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은 한민족의 혼이고 민요의 정수가 되었다.

​지금부터의 아리랑은 뜻 모르는 후렴구의 노래가 아니다.
아리랑에 숨겨져 있던 애국애족의 정신과 조상의 위대한 정신문화 유산을 전 세계에 알려 나가야 한다.
세계 속의 아리랑으로 부활(復活)시켜야 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혼을 세계인과 공유하며, 더불어 조화롭게 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Dr. Harry Cho's Decoding. By restoring the original form of Arirang by means of decryption, it is possible to know the nature of the song; secret song, song with political message in the early years of Chosun Dynasty(14C), song of lovers, theme song of theatre play, song of sadness, song of loyal servants, song of resistance militia, song as a reflection of the contemporary lifestyle, song of ethnic ethos (Han(恨) in Korean) prevalent nationwide.


하느님 = 한알님
한알님 - 하날님 - 하늘님 - 하느님



08. 아리랑 고개의 의미


둘째는 고개 이름에서 왔다는 설이다. ‘아리랑’은 옛날 고대 국가인 낙랑(樂浪)의 남쪽에 있는 ‘자비령(慈悲嶺)’의 원래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낙랑’은 ‘악랑(樂浪)’이라고도 읽으며, ‘아라’로도 발음이 된다고 하여, 나라 이름인 ‘아라’와 ‘자비령’의 옛이름으로 인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리랑’의 ‘아리’는 ‘밝다[光(광)]’의 어간인 ‘밝’의 옛말이고, ‘랑’은 ‘령(嶺)’의 전음(轉音: 다른 음으로 바뀐 음)으로 ‘아리랑 고개’는 ‘광명한 고개’라는 견해도 전한다.

셋째는 한자어(漢字語)에서 왔다는 설이다. 먼저 ‘아리랑’은 ‘我(나 아)+ 離(떠나갈 리)+娘(아가씨 낭)’의 뜻으로 ‘나는 사랑하는 임을 떠나간다’라는 말이 ‘아리랑’으로 되었다 한다. 또 하나는 ‘아리랑’은 ‘我(나 아)+耳(귀 이)+聾(귀머거리 롱)’이라고도 하는데, 직역하면 ‘나는 귀머거리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속뜻은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싶다’를 의미하는 것이란다. 옛날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축할 때, 나라는 어수선하고 부역에 끌려온 백성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들끓으니 대원군이 말하길, “차라리 귀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서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넷째는 여음(餘音)에서 왔다는 설이다. 고려 속요(高麗俗謠)로 간주되는 청산별곡(靑山別曲)의 후렴구가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인데, 바로 이 후렴구의 ‘얄리얄리’가 ‘알리알리’를 거쳐 ‘아리아리’로 된 것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산별곡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부분에서는 ‘청산에 살겠다’고 하였지만 뒷부분에서는 ‘너보다 근심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서 운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하리이까?’,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고 지낸다’ 등 대부분이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출한 것으로 보아 ‘아리랑’은 한민족의 한의 정서가 엿보이는 노래기도 하다.

다섯째는 알{卵(란)}에서 왔다는 설이다. ‘아리랑’이나 ‘아라리요’에서 어근을 찾는다면 ‘알’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근 ‘알’은 ‘알[卵(란)]’과 의미가 상통한다고 보는 것이다. 옛날 설화에 의하면, 신라, 가야, 고구려의 시조(始祖)인 혁거세왕, 수로왕, 동명성왕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시조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알’은 한민족의 시조이기도 하고, 뿌리이기도 하며, 국가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개’는 민족의 수난과 같은 어려운 고비를 이겨내는 한민족의 은근과 끈기의 은유적 표현일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아리랑 고개’의 ‘아리랑’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시조 즉 ‘알[卵(란)]’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아리랑 고개’에 대한 연구자와 연구물이 많이 있고, 또한 그들의 연구 내용은 나름대로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연구한 것이므로 앞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두가 ‘아리랑 고개’를 이해하는 데 의의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리랑 고개’에 관련된 많은 연구물이 있지만, 필자는 그들의 연구 내용과는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선 ‘아리랑’의 ‘랑’은 고개를 뜻하는 ‘嶺(고개 령)’의 바뀐 음(音)으로 생각되며, ‘아리랑 고개’는 앞 글에서 언급되었던 두들기 고개, 재랭이 고개, 무릎 고개를 비롯하여 박달재 고개, 대관령 고개, 추풍령 고개처럼 실존하는 그런 고개가 아니다. 아리랑 고개는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보릿고개’처럼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한이 되어 머무르는 가상의 고개로 보는 것이다.

둘째로 ‘아리랑’의 ‘랑’이 고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면 ‘아리랑’만 써도 되는데 왜 ‘아리랑 고개’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이 원래 천성이 착하여 상대방을 배려하는 습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에도 ‘일요일(日曜日)’ 하면 될 것을 ‘일요일날’이라고 하여 ‘날’을 더 붙여 주고, ‘역전(驛前)’을 ‘역전앞’, ‘우두(牛頭)’를 ‘우두머리’, ‘대하(大蝦)’를 ‘대하새우’, ‘청천(靑天)’을 ‘청천하늘’, ‘생률(生栗)을 ‘생률밤’, ‘황토(黃土)’를 ‘황토흙’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아리랑을 넘어간다’보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가 더 쉽고 편하고 확실한 느낌이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아리랑’의 ‘아리’와 ‘쓰리랑’의 ‘쓰리’는 어떤 뜻일까? ‘아리’와 ‘쓰리’를 다른 곳에서 그 뜻을 찾으려 하지 말고 글자 자체에서 의미를 찾으면 되리라 생각한다. ‘아리’는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는 뜻을 가진 어휘 ‘아리다’의 어간 ‘아리’로 보고, ‘쓰리’는 ‘마음이 쑤시는 것처럼 아프고 괴롭다’는 뜻을 가진 어휘 ‘쓰리다’의 어간 ‘쓰리’로 보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랑 고개’는 우리 한민족의 마음속에 한이 서려 있는 가상의 고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5천 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백성들은 끼니 한번 마음 편히 먹지 못하고 평생을 가난 속에 허덕이며 살아왔고, 또한 5~6년에 한 번씩 전쟁을 치르면서 부모는 아들을 잃고, 아내는 지아비를 잃고, 자녀는 아버지를 잃으며 살아왔으니,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 지아비를 잃은 아내의 심정,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의 가슴속에 맺힌 그 한이 오죽하겠는가. 바로 이처럼 가슴에 한이 맺힌 고개가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넷째로는 ‘아리랑 고개’의 노랫말에도 이별의 한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신화와 전설 등에 의하면 ‘고개’는 이별의 장소였다. 앞 글에서 언급하였던 두들기 고개, 무릎 고개 그리고 그 유명한 박달재 고개에 전하는 유래처럼 ‘고개’에는 이승과 이별을 고(告)하고 저승으로 가는 별의 한이 서려 있기도 하다. ‘아리랑 고개’도 사랑하는 아들, 지아비 그리고 아버지와 가슴에 한이 맺힌 이별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아리랑 고개’의 노랫말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말은 아들, 지아비, 아버지와 같은 사랑하는 이들이 사지(死地)로 떠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고,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는 말은 사랑하는 이들이 전쟁터로 떠난 후에 그들의 생사(生死)가 염려되어 걱정하는 것이며, ‘눈이 오려나 억수 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는 말은 떠난 이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쌓여 간다는 뜻이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는 말은 전쟁이 끝나고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뜻이라 생각된다.

하여튼 가난한 농부가 해마다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듯이, 아들을 잃은 늙은 어버이가, 지아비를 잃은 외로운 아내가,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자녀가 가슴에 한을 품고 평생을 넘어왔고 또 넘어가야 하는 고개이면서도 한편으로 고개 너머에는 이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이 있기를 기대하며 넘는 고개가 바로 한이 맺혀 아리고 쓰린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과 그 상징성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이론이 워낙 많고 정설로 굳어진 것이 없는지라 답답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대표적인 설은 다음과 같으며, 각기 제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리한 해석이 많은 듯 싶다.

1) 南師古(1509-1571)의 亞裡(아리)嶺설
2) 이승훈(1790)의 啞魯聾(아로롱)설
3) 황현(1900)의 阿里娘(‘아리랑’)설
4) 김지연(1930)의 閼英(알영)설
5) 권상노(1941)의 啞而聾설
6) 이병도(1961)의 樂浪(아라)설.
7) 양주동(1962)의 아리(明)嶺설.
8) 원훈의(1977)의 아리다(疼痛)설
9) 임동권(1980)의 後斂(助興)설
10) 정선 설화(1987)에서의 아리오(알리오)설
11) 김연갑(1988)의 메아리('메'의 탈락)설
12) 박민일(1988)의 啞剌唎(아라리)-阿賴耶(아라야)설
13) 정호완(1991)의 아리다-쓰리다(‘아리랑’<알?>-쓰리랑<슬?>)설
14) 정익섭의 얄리얄리얄라리설(국어국문학사전)
15) 김덕장의 我離娘(나는 아내를 여의었다)설
16) 남도산의 我耳聾(나는 귀가 먹었다)설
17) 강대호의 我難離(나는 가정을 떠나기가 어렵다)설
19) 일인 학자의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하자)설
20) 최재억의 卵郞(卵娘)설
21) 김재수의 阿娘(아랑 전설)설
22) 이능화의 兒限偉(상랑문의 아랑위 포랑동에서 유래)설
23) 이규태의 아린(여진어 차용)설
24) 서정범의 알(卵)아리요설
25) 김승국의 阿利嶺(크고 높은 고개)설

그러나 ‘아리랑’의 어원에 대하여서는 워낙 많은 이론들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정설이라고 분명히 할 수는 없지만 국악인이라면 최소한 ‘아리랑’이란 이러 이러한 뜻을 갖고 있으며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러 이러하다라고 설명해 줄 수는 있어야 한다.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의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전국아리랑경연대회' 한 장면.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지금까지 초ㆍ중등 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면 유감스럽게도 대답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초?중등교육에 허점이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국제교류 현장에서 외국인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갖는 상징성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람들과 만날 때 마다 내 나름대로 연구하였던 ‘아리랑’의 어원과 그 상징성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 문체부와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아리랑 세계화사업의 일환으로, ‘마음을 이어주는 세계인의 노래, 아리랑 4집’ 음반을 지난 2월에 발매했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물론 내가 전문적으로 어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므로 학문적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아리랑’에 대하여 어차피 굳어진 정설이 없고 내 나름대로의 설명의 근거가 있는 만큼 나는 감히 나의 주장을 피력해왔다.

내가 연구하고 생각해온 ‘아리랑’의 어원과 상징성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이라는 낱말은 각 지방 ‘아리랑’의 후렴 구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낱말의 구성은 진도 ‘아리랑’의 가사(아리 아리 랑 쓰리 쓰리 랑 아라리가 났네)에 나타난 것처럼 ‘아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이고 ‘랑’은 무슨 뜻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래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 을 보면 수도 서울을 가르고 흘러가는 오늘날의 ‘한강(漢江)’을 ‘아리수(阿利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 殘不服義, 敢出迎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
(....., 잔불복의, 감출영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
-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2면 3행
釋文 : ......, 백잔은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영전했다. 왕은 위엄으로 대로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물론 아리수(阿利水)라는 명칭의 구성도 ‘아리’+‘수’일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강(江)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수(水)라고 불렀으니 ‘아리’+‘수’가 틀림없을 것이다. 한강도 옛날에는 한수(漢水)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즘도 한수 이북, 한수 이남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아리(阿利)’라는 한자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순수한 우리말 음(音)을 한자로 차용하여 쓴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수(阿利水)’의 ‘아리(阿利)’라는 우리말은 무슨 뜻을 가진 것일까? 또한 ‘아리’라는 낱말은 한강의 ‘한(漢)’과는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을까?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한 프로그램인' 전국아리랑경연대회' 현장 모습.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오늘날 한강의 한자표기 ‘한(漢)’은 ‘큰’, 혹은 ‘위대한’이란 뜻으로 쓰인 순수 한국 고대어 ‘한’의 차음(借音) 표기라는 설이 지배적이며 중국에 있는 강인 한수(漢水)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라는 설도 있다. 또한 한강 양안에 살던 고대인들은 한반도에서 원시 농경단계에 먼저 들어간 선진부족이었으며 '한'부족으로 불렸고 이들의 일부가 고조선 건국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 ‘한'부족이 그 후 한문자(漢文字)로 韓, 桓 등 여러 글자로 차음 표기됐다고 한다. 한강의 ‘한(漢)’을 우리의 고유한 말인 ‘한’의 한자 차용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한’과 ‘아리’는 같은 뜻이거나 비슷한 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리’는 ‘크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리랑’의 ‘랑’은 어떤 뜻을 지닌 말일까? ‘아리랑’ 뒤에 항상 등장하는 낱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고개라는 낱말이다. 왜 각 지방의 ‘아리랑’ 다음에는 반드시 고개라는 낱말이 따라 나올까? ‘랑’과 ‘고개’는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느 날 여행 중 대관령 고개를 우연히 넘다가 나의 뇌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말에는 같은 뜻의 형태가 겹쳐 글에 군살을 끼게 만드는 비경제적 동의중복(同意重複) 표현, 즉 겹말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한자어와 고유어의 동의어가 많다보니 생긴 현상이다.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의 한 프로그램인' 뽐내라 아리랑' 행사의 한 장면.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예를 들어 추풍령고개(‘령’과 ‘고개’ 중복), 동해바다(‘해’와 ‘바다’ 중복), 약숫물(‘수’와 ‘물’의 중복), 무궁화꽃(‘화’와 ‘꽃’ 중복), 농번기철(‘기’와 ‘철’), 황토흙(‘토’와 ‘흙’ 중복), 초가집(‘가’와 ‘집’ 중복), 역전앞(‘전’과 ‘앞’ 중복), 족발(‘족’과 ‘발’ 중복), 고목나무(‘목’과 ‘나무’ 중복), 단발머리(‘발’과 ‘머리’ 중복) 등과 같은 동의 반복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추풍령의 ‘령(嶺)’은 고개‘령(嶺)’인데 그 뒤에 또 고개라는 같은 뜻의 우리말을 습관적으로 붙여 말하고 있듯이 ‘아리랑 고개’의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變音)으로 ‘랑’ 다음에 고개를 습관적으로 붙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아리랑’의 ‘랑’을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 본다면 자연스럽게 ‘아리랑 고개’는 ‘크고 높은 고개’로 해석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마을에는 임을 보내고 가신 임을 기다리는 고개가 어디에나 있었다. 고개는 이별과 기다림의 의미를 지닌 특별한 장소였다. 각 지방에 퍼져있는 ‘아리랑’의 가사를 보면 떠나는 임을 아쉬워하고, 돌아오지 않는 임을 원망하고 목 놓아 기다리는 한(恨)의 정서가 군데 군데 잘 배어져 있다.

정리해 본다면 ‘아리랑’이라는 낱말은 ‘아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아리’는 ‘크고 높다’는 뜻을 가진 우리의 순수 고대어이며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서, ‘아리랑’은 ‘크고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고개라는 것이 우리 조상들에게 이별과 기다림의 장소였으므로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한(恨)이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각 지역에 퍼져있는 ‘아리랑’은 그 곡조와 가사가 서로 달라도 공통적으로 이별과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주장에 오류가 있을지 모른다. 허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갖는 상징성에 대하여 한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국사람이라면 어린 자식들이나 혹은 외국인들이 물었을 때 옹색하나마 나름대로 답변할 말은 준비해두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다.

출처 : 서울문화투데이(http://www.sctoday.co.kr)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민족은 코레아인가?

로마서 10:9-10, 19-20, 이사야 55:5-6

우리나라가 2018년 2월 9일 부터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게 되는데 이번평창동계올림픽에는 92개국 2925명 선수가 참가하는데 역대 동계올림픽치고는 최대규모라고 한다. 이제 다음주부터는  전세계가 다시 한번 코레아를 주목하고 있다.

 30년전 1988년에도 하계올림픽이 열려서 코레아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때 보다 한국의 k-pop, 영화, 스마트폰, 첨단전자제품등을 통해 우리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나는 전세계인들이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 축제를 통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면 이제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바란다 왜냐하면 한국기독교가 아주 짧은 기간동안 얼마나 부흥되었는지 전국 곳곳에 크고 작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한국 와서 한국의 교회들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밤에 차를 타고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 십자가탑에서 비쳐지는 붉은 네온 십자가를 보게 된다면 한국의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스마트 산업보다도 한국의 기독교가 이렇게 성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세계인들은 한국의 영적인 수준을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까지만 하여도 공중권세잡은 자 사탄마귀에 의한 각종 우상숭배와 조상귀신 미신등 잡신을 섬기며 살았왔던 희망도 없고 꿈도 없는 버림받았던 민족이나 다름없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금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권세잡은 자 사탄 마귀를 따라가는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사랑하사 130년전 미국으로부터 선교사들을 이 땅에 보내사 복음을 듣게 하여 영적 어두움에서 깨어나 하나님 말씀을 통해 명철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주의 말씀은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되어 영원한 영생을 간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변방있었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세계인들이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코리아가 전세계의 중심국가로 올라서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는 세계인들의 겨울스포츠를 2월 9일부터  평창에서 하게 되니 다시한번 우리나라가 전세계인들의 스포라이트를 받게 되었다는 것에 다시한번 자부심을 갖게 되며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이지만 그들이 하나님말씀 듣기를 거부하므로써 언젠가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이방민족을 통해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이미 모세도 언급하였고 이사야대언자도 언급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줄 민족이 우리민족이면 참 좋겠지요.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를 움직여 질투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헛된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움직여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라.

사65:   1.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찾아내었고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아니하던 한 민족에게 말하기를 나를 보라 보라 하였노라

개역성경에는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였노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한 이방민족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한 개인도 전도하여야  돌아오듯이 이스라엘민족도 어느 한 이방민족이 가서 복음을 전해주어야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민족을 백성이 아닌민족이며 어리석은 민족이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그러면 그 민족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사24: 16  땅의 맽 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렸으니 곧 의로우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라

사41:2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사 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데려오고 땅의 우두머리들로(모퉁이)부터 너를 불러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내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으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였노라, 하였노라.

장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부르실 민족은 동쪽에 있으며  땅 끝에 있으며  땅 모퉁이에 있는 민족이라는 말씀이다.

롬 11:11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지게 되었느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오히려 그들의 넘어짐을 통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것을 그들이 질투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이제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그들의 쇠퇴함이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많이 부요함이 되겠느냐?

25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29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3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는 이스라엘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였던 것이 오히려 이방민족에게 복음이 전하여졌고 그 이방민족을 통해 이스라엘이 부끄러워지면서 그 이방민족으로 부터 복음을 전하여 져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2000년 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주장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 10: 9-11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또 성경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


롬10장의 이 말씀은 그동안 개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였지 이스라엘도 개인이 구원받는것 처럼 이렇게 구원시킨다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서 9장부터 11장 까지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기록한 것인데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과거사로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가 왔었을 때는 메시야를 거절하고 배척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 10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선 차별이 없다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의로와지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의를 쫓아 갔지만 율법의 의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지난 2000년 동안 이해를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 누구든지 구원받을려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듯이 이스라엘도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개인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주제는 믿음인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듯이 12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므로 한 개인도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어느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전했고 이사야가 다시 말했고  바울이 구약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다시 말하는 것이 롬10: 19-21 말씀이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그런데 롬10: 19-20에서 말하는 이방민족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알고 보면 이 부분 백성이 아닌 자들,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민족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결론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되면 11: 25 열방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고 마지막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하나의 피라믿을 쌓을 때  피라믿의 마지막 위에 얹히는 돌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이란 돌이 놓이지기 위해서 전제된 조건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쌓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 갈 것이다.

로마서 11:25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질 때까지 되어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9:27)

70억 인구가 다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보시는 숫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한 돌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한 한 민족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인데 그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롬10: 19-20은  사 55: 5  신32:21의 말씀이다.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신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를 움직여 질투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헛된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움직여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라

하나님께선 이방인 한 민족을 부를 것이고 그들이 너에게 달려올 것은 너의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온다는 것인데 그 나라 백성들이 달려 온다는 것은 너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혹시 한국민족이 아닌가요?   그것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행전 16장 6-8절을 통해서 보면 그 나라는가  아시아권의 한 나라라는 것이다. 아시아권이라고 써 있지는 않지만 동쪽이면서 북쪽인 나라 라는 것이다.

왜 바울이 소아시아지역에서 자꾸 북쪽에 있는 비두니아지방으로 즉 위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려고 하였는지 행14장을 보면  1차선교여행에서 바울은 그 지역에서 매도 맞으면서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하였음에도 바울이 다시 그 쪽(아시아- 무시아- 비두니아)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의 소망은 아시아로 갈려고 했는데  성령님이 막으셨고 무시아에서 북쪽 비두니아쪽으로 갈려고 하였는데  주님의 영이 막으시고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중에 바울을 불러서 마케도니아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본 후 즉 서쪽으로 복음의 행선지를 정했다. 바울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주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선 빨리 동쪽에 있는 이방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급박한 당위성 필연성 때문에 가급적이면 북쪽이면서 동쪽으로  가고자 하였다. 이 말은 아시아권의 한 나라가 맞는데 우리나라가 동쪽은 맞지만 과연 북쪽은 맞을까?

1999년 12월 31일 AM 00시 밀레니엄 시대를 알리기 위해 전세계 카메라 맨들이 동쪽에서 해드는 광경을 찍었는데 어디일까요?  그 시간 우리나라에서는 DJ가 보신각 종을 쳤는데 그 분이 종을 치면서 우리나라는 이스라엘 보다 동쪽에 있다고 이스라엘에서 정동쪽이 대한민국이라고 말을 하였는데 너무 신기한 말이지요.

물론 우리나라가 동쪽인 것만은 사실인데 북쪽으로 보기엔 이스라엘은 위도 35도이고 우리나라는 38도이니 이스라엘보다 3도 위이니 그렇네요.

동서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미국은 우리나라 보다 동쪽에 있지만 왜 미국사람을 동양놈하지 않고 서양놈이라고 하는가? 중요한 것은 기준이 어디냐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기준이 되면 우리보다 오른쪽은 동쪽 왼쪽은 서쪽이라고 하지만 세계지도는 중심 기준이 어디냐 하면 에스겔서 38:12 세상 중앙에 거주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 보듯이 이스라엘이 중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 서쪽을 정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동쪽은 맞지만 북쪽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 세계언론인들 카메라맨들이 밀레니엄 일출을 찍은 곳은 뉴질란드이었다. 뉴질란드가 지구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지역이라고 전세계 언론인이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뉴질란드에 볼 때 북쪽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이사야 55:5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굉장히 강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정도 보고 우리나라라고 할 수는 없고 단지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이사야 말씀을 보자.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방인 어느 한 나라를 부를 것이고 그들이 너에게 달려올 것은 너의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속에는 그 나라는 단수이며 그들이 너에게 달려온다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복수이다. 이것은 뭐냐하면 그 나라 땅이 올 수는 없고 그 나라 백성들이 온다는 것이다. 왜 달려오냐 하면 이방인들이 너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 이방민족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부르다 to call = kara 히브리어로 카라인데 이것을 명사로 하면 부르는 자 kore가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요 주라고 하거나 그 분이름을 부르는 대명사 여러 가지 있는 가운데 하나가 하이다. 이 글자를 앞에다 하면 하가 되고 뒤에 두면 아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임마뉴엘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글지 합성어인 임마누엘 (히브리어: עִמָּנוּאֵל, Imanu'el)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사 7:14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마1: 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글자의 합성어를 예로 들었듯이  두 단어 합성어인 코레아도

코레아 :  히브리어로 의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코레아란 의미를 알고나면 말을 못할 정도이다.

유대인들에게 코레아라는 것이 단지 고유명사라고 알았지 한번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중요한 것은 한 이방민족이 복음을 갖고 그들에게 온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을 받을 수 있느냐?  이것은 신앙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때가 바로 주를 만날만한 때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55:6)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 설교자들이 이 6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5절 말씀이 전제 되어야 한다.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이렇게 이방인인 한 민족이 복음을 가지고 올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요 가까이 계실 때에 악인은 그의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10 언제가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물이 다시 올라가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내 말은 언제가 반드시 성취하리라는 것이다. 만일 이 부분이 맞다면 우리는 로마서 10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부르셨다면 이 말씀이 왜 주요한 것인가 하면 초림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오셨지만 재림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통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시고자 왕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자물쇠와 같다는 것인데 바로 이 키에 해당되는 또 다른 민족이 와서 자물쇠를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0장을 통해 로마서 10장은 누가 말해도 한 개인의 구원받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도 복음 전파자가 있어야 구원받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구원받기 위해선 한 이방민족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방민족은 언제 예언되어 있느냐 하면 ?

모세때 예언되어 있었고 이사야가 예언하였고   사도바울이 그것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롬10: 18-21에서 말하는 이방민족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이렇게 예언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시기하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줄 이방민족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 민족에게 복음을 빨리 전해주고 싶었다고 생각해 보자.   다시한번 반복된 말씀이지만

사도행전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 지 아니하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북쪽을 거쳐 동쪽으로 갈려고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들도 북한 우리 민족에 복음을 전해주고 싶듯이 바울의 심정도 이런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여 주는 민족이 만일 우리 민족이라고 결정났으니 한번 우리민족이 그 사명을 감당할 것을 가정 해보자. 우리민족은 정말 엄청난 에너지가 있는 민족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라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지는 역할을 하고 있는 민족이요 자물쇠인 이스라엘나라에 대해 복음의 키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요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내 교회 하나 잘 되는 것만 비젼이면 안되겠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꿈군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뭔가 하나의 구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분모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교회끼리 경쟁적인 구도가 아니라 협력적인 구도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개인적인 비젼이나 교회적인 비젼은 있지만 민족적인 비젼 국가적인 비젼이 없으므로 이스라엘까지 복음화하는 전략을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이러기 위해선 작은 교회뿐 아니라 큰 교회들까지 새로운 부흥이 와야 하며 교단으로 분열된 기독교계가 하나로 통합하는 일부터 하여야 될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우리가 이스라엘과 닮은 점이 있다.

이스라엘 독립 건국은 1948년 5월 14일 우리나라는 1948년 8월 15일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왜 이나라들의 건국을 말하느냐 하면 만약 이스라엘이 건국되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스라엘에 전하여 준다면 이것을 방해하여야 할 사탄의 세력이 있었다. 사탄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원지 않고 또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는 것도 원치 않다는 것을 안다. 나라가 세워졌다 할지라도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였던 것은  누가 바로 이방인의 한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사단이 볼 때 가장 두려운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해주어 회복시키는 나라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가 부흥되도록 내버려 두면 될 까요? 만일 그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 건국 당시 제2의 예루살렘이 어디냐 하면 평양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단의 전략에 의해 북한을 자기의 왕국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 그래서 김일성을 통해서 1948년 9월 9일 북한을 사탄왕국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우상이 전역 어디에나 세워져 있는 사탄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종교로 분류하면 신도수가 1,900만인 세계10위 규모의 종교라는 것이 오늘날의 북한정권이다. “1950년대 시작된 주체사상은 북한이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는 관점에서 정부 주도의 사상이며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명백하게 하나의 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다.

 

북한정권의 통치행태가 특히 유사(類似)기독교 성향을 띠고 있는 것같은 강한 종교적 색채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선 북한의 헌법보다 상위규범은 ‘조선로동당규약’이며, 그보다 상위규범은 ‘유일사상확립을 위한 10대원칙’이다. 金日成을 절대화하는 10대원칙은 기독교 10계명과  같다. 기독교인들이 10계명을 암송하듯, 북한주민들은 10대원칙을 달달 외워야 한다. 종교적 성소(聖所)에 해당하는 ‘金日成혁명사상연구실’은 북한 전역에 4∼5만 개나 있는데 이는 한국의 교회  숫자 약 51,000개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 북한의 金日成연구실 수는 남한의 교회수와 비슷하다.

  金日成 동상인 우상은 북한 전역에 약 35,000개에 달한다. 북한주민들은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는 영생할 것이다”라는 표어 아래 동상 앞에서 참배와 묵념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북한주민들은 이곳에서 가정의 대소사를 치르기도 한다. “북한은 국가라기 보다는 수령이 교주가 된 사교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아무리 김일성 교주의 사탄왕국이라 하여도 평양의 행정구역에는 선교구라는 행정구역이 있으며 전철역중에는 부흥역이라는 역이 있다. 우리 한국에도 없는 행정구역과  전철역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흔적임을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출처: http://hansarang91.tistory.com/


  한가지 중요한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나라가 우리 나라가 맞는다면 우리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라이름조차 대한민국이 아닌가! 바울이 우리나라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맘에 와 닿는 느낌은 너무나 벅차고 큰 사명임을 생각나게 한다.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과거사로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가 왔었을 때는 메시야를 거절하고 배척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 10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선 차별이 없다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의로와지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의를 쫓아 갔지만 율법의 의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주제는 믿음인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듯이 12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므로 한 개인도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어느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전했고 이사야가 다시 말했고  바울이 구약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다시 말하는 것이 롬10: 19-21 말씀이다.

  이 말씀을 지난 2000년 동안 이해를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 누구든지 구원받을려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듯이 이스라엘도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개인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여서 이방으로 전달하였지만 2000년 동안 흩어져 살면서 만신창이가 되어서 이제는 자기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특정한 민족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것을 말하였는데 이 말씀을 어디서 가져왔느냐 하면 모세가 신명기에서 하였던 말씀과 이사야가 하였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 마지막 때 이방의 한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민족을 복음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쪽이면서 북쪽인 나라. 저는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기를 확신하는 바이다.

바울의 의지와는  반대로 복음은 유럽을 향해서 진행하였다. 만일 바울의 의도대로 복음이 동쪽으로 왔다면   인도의 힌두문화에  변질되어 버렸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당시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헬라문화를 택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헬라문화에선 창조주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서쪽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복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전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사야서 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다.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 오리니 그 나라가  어느 한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달려온다는 것이다.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고 찾아야 할 때이므로 거절하지 말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보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거기로 되돌아 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땅이 열매를 맺게 하고 싹을 내게 하여 곡식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나도 내 말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냐하면 이방인들 중 한 민족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줄 것을 이미 예언한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7-8, 7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 분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그런데 거기 한 민족을 부른다는 말씀이 있다. 이 부른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어원이 카라입니다 그런데 부르는 자 명사로 하면 코레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표시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부르실 때는 아버지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셨어요.

 유대인 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 때로는 하라고 하는데 뒤에 있으면 아로 발음 나는 것이다. 

 아 발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대명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이름이 코레아요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말하고 해석을 하면

히브리어로 코레아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이보다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이름을

대한민국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한국과 이스라엘의 비교 (창세기10:21-32)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음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이스라엘의 조상)

셈->....25.에벨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었으니 이는 그의 날들에 땅이 나뉘었기 때문이더라.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었는데 (한국인의 조상 단군의 다른 이름)

창10: "30 그들이 거하는 곳은 네가 동쪽의 산 스발로 갈 때에 만나는 메사에서부터 시작되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아들들 곧 그들의 가족들과 언어들에 따라 그들의 영토들과 민족들대로 셈의 아들들이니라.

 32 이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가족들 곧 그들의 세대들에 따라 그들의 민족들대로 노아의 아들들의 가족들이라. 홍수 이 후에 이들로 말미암아 땅에서 민족들이 나뉘었더라."

"욕단은 메사에서 스발로 가는 길에 동편산에 거주하였으니 메사는 모스크바, 스발은 시베리아다. 동편 산은 백두산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단군은 욕단과 관계 된 인물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한국의 조상들이 지켜온 열 두 절기 중

 정월대보름과 팔월대보름은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수장절과 의미가 동일하다.

8월 대보름인 추석이 성경의 수장절과 일치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욕단의 후손 한민족은 아리랑 하나님을 불렀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엘로힘 하나님을 불렀다. 아브라함은 초림 예수님의 족보의 조상이고, 욕단 단군 후손인 한민족은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후손들이 될 것이다."

이 코레아의 의미를 이해하시는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한 이방나라를 한 이방민족을 부르시겠다고 하셨어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코레아라고 하는데 이 뜻을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주께서 부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 할 수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대한민국 화이팅. 샬롬. 마라나다,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이었다!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민족

 대한예수교 장로회 알이랑교회의 유석근 목사 저서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고 설명했다. 유석근 목사가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아리랑의 어원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나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 고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니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고서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 가사부터 복원하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해석하는 열쇠는 ‘연음법칙’ 이다.
  왜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규칙이 있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벗이랑→버시랑”    알이랑 → 아리랑   /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한 적이 없다.
   ⑤ ‘알이랑’은 ‘알’과 ‘접미사 이랑’의 합성어이다.  ‘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노아의 홍수후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하나님을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나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 창조주 하나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이었다.
  ⑥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나온 말이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랍어 성경책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라’라고 표기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⑦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너랑 나랑).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며 바로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본래 의미이다.
  ⑧ 왜 ‘알’이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나온다. 그래서 ‘알’은 ‘모체요, ‘근원이요, ‘시작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⑨ 다만 우리 민족은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나님]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다.
   ⑩ 우리 나라 시조설화에 고구려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온것, 신라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그리고 가야의 김수로왕이 알에서 나왔다는 것. 지도자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한알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므로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⑪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한알님(하나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⑫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의 핵심이었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작의 기원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⑬ 하나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나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시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성경원어인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그러므로 ‘알’은 성경의 ‘엘’과 동의어이다.
   ⑭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나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큰 지식이다.
   ⑮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이다. 왜 그럴까? 경희대 서정범 교수(국문학과)는 그것이 ‘큰 알’(한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고,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한알님(하나님) 나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엘)에서 왔으니 한알(엘)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민족’이 아닐 수 없다.

▲ ‘알이랑민족’의 무덤 양식은 ‘한알’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충분히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고 밝힐 수 있다.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하나님이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그 ‘고개’란 우리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 고원을 중국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를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 알이랑민족의 선조인 셈의 4대손 욕단의 가계는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창 10:21~30).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그러므로‘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밝달~배달)를 찾아 동방으로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전통 민요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고 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이며 7천만 한민족의 노래를 넘어 70억 세계인이 함께 부르고 같이 보존해야 할 인류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써야 할 당위성 및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해석은 이상의 논거와 같이 고증학적으로 풍부한 증거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인은 잃어버린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시원과 그 기원을 함께 한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이다.
 
그렇다면 알이랑이란 의미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나?
꼭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리랑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러한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유석근 목사는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을 갖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연구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을 <알이랑민족>이라는 제목의 도서로 출간했다. 이것은 필자가 부여받은 시대적 사명이다.    
<알이랑민족> 244~282쪽에는 우리 조상들이 섬긴 ‘한알님’(한알님~하날님~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유일신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음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자료들이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오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유대민족 뿐이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란 개념은 성경적인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창조주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는 어느 교수의 주장도 실은 그러한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조속히 깨져야 할 아주 그릇된 고정관념이다. 왜? 아브라함 이전 시대와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던 이방인들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귀한 이방인들은 누구일까?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 아브라함 이전과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이방인 >  
  <알이랑민족>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어원이 ‘한알님’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한알님~하날님~~하나님- ‘알’에 관한 인문학적 지식과 이해의 폭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그러므로 ‘알’은 성경의 ‘엘’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곧 ‘알’은 ‘천신’(天神) 즉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는 일종의 원시 단어였다. 이 ‘알’에서 ‘엘’도 ‘얼’도  높은 분의 말씀을 뜻하는 ‘왈’(曰)도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 ‘알’(한알님)은 가장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의미하는 단어 ‘일’(1)도 바로 ‘알’이 어원이다. ‘알’은 유일신으로서 오직 하나(1)이기 때문이다. 즉 ‘알’에서 ‘엘’ ‘얼’ ‘왈’ ‘일’ 등의 단어들이 전부 가지쳐 나왔다. 
  ‘알이랑’은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왜? 우리 겨레의 성경상의 조상은 하나님을 아는 셈의 4대손 욕단이었기 때문이다(창 10:21~30). 에벨의 자손인 욕단의 가계는 형인 벨렉의 가계와 더불어 셈족 중에서도 선택된 특별한 종족이었다(창 10:21). 그러므로 에벨의 혈통인 이 두 계열은 셈족을 대표하는 족속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거룩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대홍수 후 가장 먼저 산맥(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양으로 이주한 족속이 벨렉의 아우인 욕단의 가계였다(창 10:30). 그런고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종족답게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고개 즉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는 ‘산지’를 넘어 동방의 새 땅(새파르=새바르=새발=새벌=스발)으로 멀리 천동(遷動)했다. 그리고 마침내 광명의 본원지인 동방 땅 끝에 도달하여 유일신 하나님(한알님)께 천제를 드리고 배달(밝달)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제천민족’인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이랑’은 성경과 관계가 있다. ‘알이랑’은 한국인의 조상이 욕단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외증(外證)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인류 최고의 찬송가 ‘알이랑’은 기록된 계시인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민요 아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누구보다 국어학자, 그리고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는 음대 교수들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8년전 이화여대 음대학장인 주영자 교수로부터 ‘알이랑’에 대해 직접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대를 방문, 음대교수들만 모인 자리에서 아리랑의 원의에 대해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해석은 아리랑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보다 타당한 해석이라고 했다. 고증학적인 증거 및 자료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이다”는 이 해석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킬 이유는 조금도 없다. 
 장신대 미주지역 총동문회장을 역임한 신학자 한화영 박사(트리니티신학대학교 대학원장)는 <알이랑민족> 추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알이랑민족>은 한국인이 또 하나의 성민(聖民)임을 외증 과 내증으로 증명한 역저이다. 외증으로는 역사적, 지리학적, 고고학적, 과학적인 사실을 연역적이고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불러온 민족의 노래 ‘알이랑’에 ‘하나님과 함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은 외증의 하나이다.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 &Christian College, Genesis University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윤사무엘 박사 역시 <알이랑민족>의 핵심 내용을 소개하고 강의하신다.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다.
 < 자랑스러운 알이랑 민족 >
 미주장로회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윤사무엘 박사(현 감람원선교신학원 총장)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교회와 신학"(쿰란출판사刊)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한국교회가 서구 기독교 선교를 받은 지 130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앞에 한국적 신학을 내놓아야 한다.”
윤사무엘 박사는 <한국교회와 신학>에서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신학"을 "한국의 신학"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적극 소개하고 있다. 필자의 은사이신 신성종 교수(전 총신대 신학대학원장, 전 충현교회 담임)는 유석근 목사의 아리랑 찬송가론에 대해서 자신은 견해가 일치한다고 했다.  
 이단사이비 문제를 집중 연구하는 ‘아레오바고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단종파를 다루는 월간지 「현대종교」의 편집위원과 편집장을 장기간 역임한 이영호 목사가 대표로 있다. 그는 지금도 ‘사이비종교 피해대책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아레오바고 사람들’을 이끌면서 이단사이비집단을 척결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영호 목사는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에 대해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밝혀주는 도서로서 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책”이라고 평가했다.
 침례신학대학의 원어교수를 역임한 김선기 목사(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장)는 <알이랑민족>의 추천서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참으로 놀랍고 획기적인 책이다.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위시한 민족사관 학자들의 한국사를 오랫동안 탐구해 오던 나에게 유석근 목사님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은 모든 것들을 단번에 정리시켜 주는 통쾌한 저서였다.”
성막론의 권위자 강문호 목사(갈보리교회)는 CTS에서 "아리랑은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는 제목으로 연속 방송 특강을 했다. CT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시청할 수 있다. 본 사이트에도 올려져 있다.
 아미(AMI) 선교회의 황용현 목사도 필자가 <알이랑민족> 에서 역설한 아리랑 찬송가론을 가르치신다.


   ‘알이랑교회’라는 교회 명칭 
  필자는 예장합동 교단에 소속된 목사로서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목양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의 이름은 “알이랑교회”이다. 원래는 ‘상동중앙교회’였는데 수년 전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알이랑교회’로 전 성도들의 결의를 얻어 교회명칭을 변경했다.
그런데 필자가 소속된 예장합동 교단은 교회명칭을 변경하려면 반드시 노회의 정기회에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노회의 허락 없이 지교회 차원에서 임의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수 없다. 우리 교회 역시 ‘알이랑교회’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때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노회에서는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지 검토했다. 그 후에 교회명칭변경을 허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이름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알이랑교회” 이다. 아마 이런 교회이름은 전국에서 아직 하나뿐일 것이다. 


다시한번 정리하자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인데 연음법칙으로 인해 ‘아리랑’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 찾으려면
가사부터  ‘알이랑’으로 복원해야 한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엘’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어원은 ‘한알님’이다

(한알님~하날님~하나님).   ‘이랑’은 ‘~와 함께’라는 조사이다(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그래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뜻이다.”

 아리랑의 원의(原意)를 풀어준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계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밖에서도 아리랑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보다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리랑은 우리나라민요를 뛰어넘어 전세계인들이 불러보는 인류 최초의 찬송가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