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하지 말라(에베소서 5:18) / 현재(계속적) 수동태(체험적) 명령형(무제한적)


술 취하지 말라(에베소서 5:18) 현재(계속적) 수동태(체험적)  명령형(무제한적)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 바울은 본절에서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로 잠언 23:29-35을 인용하여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당시 술 취하는 일은 불신자 세계에 있어서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딤전 3:3; 딛 1:7;2:3, Wood, Foulkes, Hendriksen).
술 취함은 단순히 그 자체에만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생활이 무절제하게 되고 방탕하기 쉽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소티아'는 술 취함의 현상을 잘 나타내 주는 단어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방종' 혹은 '돈과 육욕의 무절제한 낭비'를 의미했다(Wood).
이것은 신약성경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 방탕한 생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눅 15:13).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로서 생활하려면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 곧 어리석음의 일을 금해야 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와는 다르다(1:13; 4:30; 요 3:5;14:16; 롬 8:9; 고전 3:16).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는 단회적 사건인 반면에 '성령 충만'은 구원의 때뿐 아니라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행 4:8, 31;6:3, 5;9:17;13:9, 52)
그리스도인이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행 10:38;11:24; 살전 1:5; 벧전 4:11, Lincoln).
즉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신 성령께서(롬 8:9; 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온전히 지배하며 인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충만을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루스데'는 현재수동태 명령형이다.
이것은 다음의 내용을 함축한다.
1. '현재 시제'는 성령 충만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채워져야 함을 시사한다(Lincoln).
2. '수동태'는 성령 충만이 인위적(人爲的) 체험이 아니라(갈 3:2, 5) 성령에 의해서 체험됨을 시사한다(Wood).
3. '명령형'은 성령 충만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임을 시사한다(Wood).

갈라디아서 3:2, 5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취하다(3182) 메두스코(mĕthüskō)  μεθύσκω 

1. 술취하게 하다.  2. 술취하다. 3. 누가복음 12:45
발음 / 메두스코[ mĕthüskō ]
관련 성경 / 취하게 되다(눅 12:45), 취하다(엡 5:18, 살전 5:7)
신약 성경 / 3회 사용

누가복음 12: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데살로니가전서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충만을 받으라(4137) 플레로오(plērŏō) πληρόω 

1. 가득하게 하다.  2. 시간을 채우다. 3. 마치다
발음 / 플레로오[ plērŏō ]
어원 / 미완료3인칭단수 ἐπλήρου, 미래 πλη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πλήρωσα, 완료 πεπ λήρωκα, 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ηρώκει, 수동태, 미완료 ἐπλη- ρούμην, 수동태완료 πεπλήρωμαι, 수동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ήρωτο, 제1부정과거수동 ἐπληρώθην, 미래수동 πληρωθήσομαι, 413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루어지다(마2:23, 26:54), 이루다(마3:15, 27:9, 행3:18), 완전하게 하다(마5:17), 가득하다(마13:48, 고후7:4, 빌1:11), 채우다(마23:32, 골1:9), 차다(막1:15, 행7:30, 롬15:14), 메워지다(눅3:5), 응하다(눅4:21), 마치다(눅7:1, 행12:25, 13:25), 별세하다(눅9: 31), 충만하다(눅2:40, 요3:29, 행13:52, 엡1:23, 5:18, 골2:10), 응하게 하다(요15:25, 19:36), 지나다(행24:27), 편만하다(롬15:19), 풍족하다(빌4:18), 온전하다(계3:2)
신약 성경 / 87회 사용

* 4134. πλήρης, ες 
1. 가득 찬
발음 / 플레레스 [ plērēs ]
어원 / 4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찬(마 14:20, 막 6:43), 충실한(막 4:28), 충만한(눅 4:1), 심히 많은(행 9:36), 가득한(행 13:10, 19:28), 온전한(요이 1:8)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4130.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발음 / 플레도[ plēthō ]
관련 성경 /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 자료소개

1. https://blog.naver.com/kjyoun24/220504596216

2. 왜 한국 교회는 술·담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술·담배 금지 논의가 명확한 신학적 논리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보수 교회가 낙태·동성애 반대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신학적·성서적 근거를 끌어다 쓰는 반면에, 한국 교회의 술·담배 금지는 그 근거가 거의 최소한으로 제시된 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기독교인들이 술·담배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복음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가 훨씬 더 많다.

이를테면 "예수님 별명이 먹보에 술꾼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도덕적 잣대에 갇히지 않으신다"거나, "술·담배는 아디아포라(선과 악이 명확한 문제가 아닌, 아무래도 괜찮은 '비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뜻)에 속한다" 같은 논의가 그것이다.

한국 교회는 미국 보수 교회의 판박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양자가 주된 의제로 삼는 윤리(도덕)적 쟁점은 꽤나 다르다.
미국 교회가 집중하는 '도덕 이슈'의 중심에 낙태와 동성애 문제가 있다면(그래서 종종 이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한국 교회의 중심에는 '술과 담배'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은 이 문제가 그토록 집요하게 한국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을 적실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머리로는' 술·담배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일요일이 아닌 주중의 사석에서는 큰 거부감 없이 술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그 태도는 돌변한다.
이를테면 자신들이 주중에 술을 마시는 건 괜찮아도, 목사나 전도사, 혹은 교회의 책임 있는 사람이 술과 담배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왜 그럴까? 사실 이 문제는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술·담배 금지가 한국 교회의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방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술·담배 금지 : 구별 짓기를 통한 정체성 확인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유독 한국 교회에서 술·담배가 중요한 도덕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선교 초기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다.
통상적인 설명은 그 당시 조선은 술·담배·오입질의 문제가 심각한, '매우 타락한' 상태였고, 따라서 선교사들의 전략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선교 전략'이란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타 문화권에 기독교를 전파한다고 할 때 교회는 여러 가지 전략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그 문화권의 언어로 복음을 번역하는 토착화의 전략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초기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그것은 강고한 '구별 짓기'의 전략이었다.
(물론 이는 매우 복잡한 결들이 지나가고 있는 초기 선교 역사를 매우 단순하게 설명한 것임을 밝혀 둔다.)

선교사들은 이 중에서 구별 짓기 전략을 취했다.

첫째는 문명·비문명의 구별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는 '복음'이 하나의 '상류 문화' 혹은 '고상한 삶의 길'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은 각종 '문명적 삶'을 '복음'과 거의 동일시하여, 선교사가 들어가는 곳마다 '문화 전쟁' 또한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선교 전략에서 일부일처제·근대 교육·질병 관리 체계 등은 '복음'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두번째 전략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구별 짓기의 전략이었다.
그것은 일상의 도덕적·문화적 삶을 선교사들이 통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교회를 다닌다면(복음을 믿는다면) 술·담배·오입질을 그만두라"는 것. 교회가 세속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기관'인 것은 단지 영적으로만 알려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은 '표징'을 요구한다. 한국 교회의 경우는 그 시작에 술·담배 금지가 핵심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신앙 수행에서 기독교인들은 술과 담배를 금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의 구별된 집단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토착화 전략이 추구하는 지난하며 어려운 성찰적 과정보다는 훨씬 더 쉬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교인됨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복음은 아주 단순한 것(예수 믿고 교회를 다녀서 이전의 술·담배 하던 습관이 사라지는 것)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선교사 자신들은 그다지 엄격하게 주초 금지를 지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선교 모국에서도 술·담배 문제가 그다지 기독교인들의 구별 짓기 코드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선교사들의 집에서는 가끔 와인 파티가 열리기도 했고, 골초 선교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일종의 '문명인으로서의 자유함' 정도로 여겨졌고, 그들의 지도를 받는 조선인 교인들은 상당히 엄격한 수준에서 술·담배를 금함으로써 자신들의 '구별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술·담배 문제가 '아디아포라'라고, 혹은 예수가 '먹보에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였다는 것을 긍정하더라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술을 입에 댈 때 불편함을 느끼고,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보면 움찔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술과 담배가 도덕적 이슈나 기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르는 구별 짓기의 코드로서 오랫동안 습속화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술·담배를 자유롭게 하는 기독교인을 아무리 신학적으로는 받아들이더라도, '기독교인 공동체의 어떤 유대감이나 소속감'이 그 순간 흐트러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보다도 기독교인의 기독교인 됨을 손쉽게 확인할 표지가 바로 술·담배 문제인 것이다.

복음은 '구별 짓기'인가?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독교인들에게 물어야 할 것은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복음을 하나의 '내용'으로, 특히 '기독교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떤 내용으로 이해할 때 나는 결코 순수한 복음을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래, 술·담배 문제는 복음의 본질이 아니니, 복음의 본질에나 집중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복음의 본질'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떤 내용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물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코드들과 더불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선행, 따뜻한 성품, 형제자매애, 호칭, 교회의 용어들, 신학적 담론들, 예배 시의 신체 동작이나 방언 등 다양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무언지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렇게 이해하는 한 영원히 복음은 한 '정체성 집단'의 것으로, 끊임없이 동일한 것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만다. 술·담배 금지 같은 유치한 기준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타자와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복음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이 이런 것일 때 '전도'는 언제나 타자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기독교인(공동체의 회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바로 (복음의 '시작'인) 1세기에 예수와 바울이 부딪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들의 적수였던 바리새인,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제나 '복음'과 '하느님나라'를 하나의 '구별 짓기'를 통해 이해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소속되고자 했다. 하느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그들의 수많은 선행, 할례 등의 의례들, '이방인'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체험들(우리는 손쉽게 유대교를 '율법의 종교'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로 이해하는 후대의 이해를 폐기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역시 '은혜'를 전면에 내세운 종교였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느님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항하여 '믿음'을 내세운다. 따라서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뭐든 간에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여 그들과 '구별 짓는' 관계가 아닌 '열린'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믿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조건으로 기능하고 말 것이다.

예수의 영구 혁명 : '복음'은 '교회'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의 이런 전략은 너무도 쉽게 구별 짓기의 전략으로 회수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걸 증명해 준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으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논한다. 사실 바울의 서신들(신약성서의 1/3에 해당한다)을 읽어 보면 바울 자신도 결코 일관된 전략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방향은 바울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뭐,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거지만, 그래도 교회 설립 운동은 해야 하겠고…. (이런 고민이야 오늘날 사회주의자들도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주의 혁명은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구별된 소집단(혁명가 집단)이 필요하고…' 하는 식으로.)

반면 예수의 전략은 그러한 회수가 좀 더 힘든 어떤 측면을 보여 준다. 예수의 삶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에서, 특히 이른 시기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결코 어떤 '구별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그리고 어떤 '내부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껏 병을 고쳐 놓고는 동네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식인 것이다. 예수 복음의 핵심은 바리새인들의 구별 짓기 전략에 맞서서 그 '구별'이 은폐·조장하는 폭력을 고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 선포는 바리새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구별의 논리 속에서 배제당한 자들로 하여금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전략만 가지고 무슨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그런 공동체를 통한 어떤 혁명 전략을 수행하지 못하고 몸소 그런 구별의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점에서 예수 운동은, 그 '복음'은 어쩌면 '교회'라는 것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영구 혁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바울의 전략에 의해 하나의 교회를 만든다 할지라도, '구별 짓기를 철폐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 교회가 결코 '닫힐 수 없는' 어떤 것임을 계속해서 증명해 내는 전거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그가 화석화한 하나의 기억으로 갇히지 않고 지금도 교회의 구별 짓기에 대항하는 존재로 살아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교회에 의한 예수의 신격화는 오히려 이 '부활하여서 지금도 구별 짓기를 철폐하는 예수'를 구별 짓기의 논리로 회수하여 안전한 동일성의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그리고 '구원'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아니라, 매 순간 구체적인 삶 속에서 동일시하는 어떤 폭력이나 배제로부터 벗어나는 '사건' 속에서만 잠시 잠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쩌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 교회가 강요하는 구별 짓기의 논리를 거부하는 주당들과 골초들이야말로 '예수 사건'을 체험하는 '복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공동체 내부의 논리 속에서만 머무르려 하는 '착한 그리스도인'들보다는 말이다.

출처 : NEWS M(http://www.newsm.com)

3. 한국교회사에서 본 금주 단연 운동 
- 이상규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한국교회는 한 때 금주,단연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술과 담배는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음주나 흡연이 그 어느 측면에서도 이롭지 못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사회적 환경때문에 어쩔수 없이 우리 시대의 문화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교회의 전통인 금주 단연이 약화되고 있고, 그것은 교회가 지도할 사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적 사안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술과 담배에 대해 한국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해왔는지를 뒤돌아보는 일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이 되리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초기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금주 단연운동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음주,흡연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에서의 금주,단연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술과 담배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교회 초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성탄절에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또 장로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인 언더우드(H.G.Underwood)는 한때 흡연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화란 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주초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또 부산 경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호주 선교사들 중에도 흡연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흡연장면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말하자면 음주와 흡연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 곧 불간섭의 영역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문제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90년대를 거쳐가면서 그들은 술과 담배의 해악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금주와 단연은 신앙상의 유익과 건덕(建德)의 차원에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지역적 차이는 있으나 한국에서는 초기부터 술과 담배가 신앙생활은 물론, 건강이나 경제적 손실, 그리고 극기나 절제등 국민 정신상 무익하다는 점을 가르쳐왔다.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선교할 때는 아편 사용에 대하여는 엄격한 입장이었으나 음주,흡연문제는 비교적 관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사정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평소 그처럼 착한 사람도 일단 술을 마시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과 음주로 인하여 패가망신한 경우를 수차 목격하자 금주,단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신학적인 면에서나 생활자세에 있어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이들은 안식일을 성수하고 노름을 범죄로 생각했으며 먹어도 유익이 없고, 안 먹어도 모자람이 없는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신자들에게 금주 단연을 권고하게 된 것은 주초의 심각한 폐단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의 악습과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금주,단연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00년대 후반기부터 금주,단연은 단순히 신앙생활의 유익이나 건강상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운동, 혹은 민족정신 함양운동의 차원에서 교회적으로 강조되었다. 


금주,단연운동의 초점 

선교사들은 금주 단연 운동의 추진 이유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말했는데 그 첫째는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술 먹다가 죽으면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없지 않았다("계주론",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 32호, 1897.9.8). 즉,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주,단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둘째로는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래서 우생학적으로 본 음주의 해독에 대해 강조하고 관계 연구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셋째는 개화 혹은 국민의식 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교회의 금주 단연 운동을 시기적으로 간단히 살펴보자. 


(1) 1900년 이전 

한국에서 금주 단연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금주 단연에 대한 권고와 경계가 있었음을 이미 말한 바이다.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에는 술과 담배에 대해 어느 정도 허용하는 입장이었으나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나갔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청교독적 신앙생활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신앙적 유익과 사회적 개화를 위한 의도가 있었다. 즉, 술은 백성의 재산을 폐하여 백성을 점점 곤궁토록 만들며, 장부의 기운을 꺾어 회복하지 못하게 해서 건강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교회는 계주론을 전파하고 교인들과 일반 백성의 금주를 권고하였던 것이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했는데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교회의 금주 입장을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장로교도 이와 유사한 시기에 금주 단연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4월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에는 제주도에서 한 교인이 단주(斷酒)한 사실을 들어 "참 새로 난 사람"이라고 보도한 일이 있었다. 술의 폐해가 켰기 때문에 금주를 입신(入信)의 전환적 결단으로 보았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를 전후하여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술의 해악을 지적하는 계주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술은 바른 생애로 수고하야 모흔 제물을 빼아스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케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졍을 셩행케 하야 사무를 그르치고 국재를 람용하며 부셰를 묵엄게 하고 유익한 일에 쓸 돈을 여러 백만금식 해로운 일에 허비하야 항상 이젼졍 군색하게 하니, 만일 술에 업새는 재물을 일용지물에 쓰면 사롱공상이 다 흥왕하고 돈 업서 어려워하는 괴로움이 구름갓치 헛터줄지니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업시할 물건이어날 오날날 어찌 그대로 두니 괴이하도다.("업시할 물건",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 1897년 12월29일자) 

감리교의 조이스(Joice) 감독은1897년경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술 담배를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1900년 감리교의 존스(G.H.Jones) 선교사는 전도인, 권사, 속장들의 모임에서 술을 마시는 교유들을 "즉시 출교"하겠노라고 경고한 일이 있었다. 장로교회의 새문안교회는 음주자를 치리한 일도 있었다. 이 교회은 음주 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設)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초기 한국교회가 단연 운동을 전개한 것은 흡연으로 인한 신체적 해독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 신문' 1897년 5월 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차츰 한국교회는 신체적 해독만이 아니라 도덕적 향상, 흡연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는 전(殿)으로서의 몸에 대한 신앙적 동기 등에서 단연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제사 중지, 노름 및 도박의 금지, 축첩(蓄妾) 금지 등과 함께 금주 단연은 세례받을 때 가장 중요하게 취급외었던 다짐이었다. 이 다섯 가지는 삶의 뚜렷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당시의 환경으로 볼 때 매우 힘겨운 요구였다. 그러나 이런한 결단을 통해 기독교인다운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고, 성수주일, 금주 단연 등은 그 이후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표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선교사 노혜리(H.A.Rhodes)는 음주에 대한 경고의 글에서 "다행한 점은 조선의 불신자들은 신자는 의례히 금주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같이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교회는 절대 금주를 주장합니다. 신자는 금주 운동의 선험자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2) 190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1900년대부터였다. 이 운동은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민족 지도자들은 국체보상운동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절제운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금주 단연 운동이 단순히 건강상의 이유나 신앙상의 이유에서만이 아니고 민족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금주 단연함으로써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을 하자는 논리였다. 그것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상당한 정신적 효과가 있었다. 

1911년 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절제회'를 조직하여 1년동안 금주 단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가 조직되었고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계연회는 단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도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1941년까지)는 주일학교 '장(長)감(監)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는 1920년부터 각 지방 YMCA를 통해 금주 단연회를 주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감리교회도 각 지방에 금주회를 조직하였다. 1930년에는 각 연회에 절제부를 두어 이 운동을 총괄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폐망케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 금지" 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 '금주가'가 19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장로교회의 경우는 음주만이 아니라 누룩의 제조 판매를 금지하는 문제가 장로교 총회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1924년 함남노회는 누룩매매업에 관여하는 교인의 치리문제를 헌의하였는데, 총회에서는 "누룩 장사하는 교인에 대하여 치리할 문제는 본 당회가 권면하여 보고 그 형편에 따라 치리할 것"을 결의한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매년 1회씩 『구세신문』의 '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계몽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호 『구세신문』에 실린 "단음함이 가함"이라는 글에서는 "대개 술이라 하난 음식은 재앙과 패망과 죄악과 형벌을 이루난 바 좋지 못한 물건"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밖에도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논지로 『구세신문』의 각 특집호는 술과 담배의 경제적, 건강상의 손실과 윤리적, 심령적 타락 가능성을 일깨웠고, 나아가 민족 경제의 문제까지 계몽하였다. 구세군의 이러한 운동에 사회 각층의 인사들이 조력하였고, 『구세신문』의 '금주호'는 가두 판매는물론 철도 공무원 전체에 대한 배부, 호별 방문 배부 등으로 널리 보급하였다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금주 결심을 촉발시켰고, 이것이 작성되어 구세군 본영에 송부되면서 절제운동은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일익을 감당했다. 이는 일제 말기까지 계속되었고 현재도 구세군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계속되고 있다. 

절제운동이 이처럼 한국교회를 통해 전개되자 당시 언론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 운동을 격려하였다. 1934년 3월 2일자 『동아일보』는 "절제있는 생활"이라는 사설을 통해 삶의 목적이 여흥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술은 개인이나 사회에나 백해무익하다고 지적하였다. 또 "조선에서 1년에 1백70만 석의 술이 양조되고 있는 한, 해마다 조선 내에서 3,530만 원이란 거액의 돈을 담배 빨어 연기로 태워버리는 우맹한 행동이 유지되는 한 생활고를 운운하는 것은 광자(狂者)이다. 청년아 맹성(猛省)이 있을지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금주 단연 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35년 2월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 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 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뱃대를 꺾어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찬송가에는 금주를 권장하는 찬송가가 편입되어 널리 불리기도 했는데 이때 불린 금주가 중에는 이런 가사도 있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오 
건강기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 두렵다 

2. 폐가망신될 독주는 
빚을 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후렴)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우리 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나니라 


(3) 1930년대 이후의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제정 노력 

한국교회는 1910년대 절제운동을 통해 금주 단연 운동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활동으로 전개하였는데, 이 절제운동을 단순히 국민의식 운동이나 정신운동으로만이 아니라 입법활동을 통해 법제화하려는 운동이 일어난 때는 1930년대였다.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1930년대 이후 미성년자의 금주 단연을 법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청소년을 음주와 흡연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미 1929년 9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조선기독교에 감리연회, 조선기독교 남감리4연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4단체 등은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실시 기성동맹회'를 조직하고 입법촉구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곧 와해되었다. 그후 1932년에는 앞서 말한 바처럼 '조선기독교 절제운동회'가 창립되었고, 1935년 12월 16일에는 이 조직을 중심으로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실시 촉성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윤치호(위원장), 정인과, 양주삼, 오긍선, 백낙준, 김창준, 이대위 드을 위원으로, 송상석을 총무로 한 이 촉성회는 포스터 제작, 순회강연, 위정당국 교섭, 여론 형성 등을 통해 이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7년 6월에는 당시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실시에 관한 참고자료'를 제출하고 이 법을 실시해야 할 필요성과 이유를 설명하였다. 

특히 『금주신문』이라는 제호의 기관지를 발간하여 이 운동을 확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당시 총무였던 송상석 목사는 "무슨 까닭으로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을 조선에는 실시하지 않느냐! 정부 당로자여! 빨리 각성하십시오. 우리들은 금반 양법을 조선에도 실시되도록 하는 운동을 개시했다. 당국의 색안경과 일부의 반대가 있는 것은 예상되지마는 천하 정의인도의 인사여, 하의 각 항에 대한 이해 있으시기 바라노라"고 하며 금주 단연법 제정의 필요성을 6가지로 정리하기도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이미 미성년자 흡연이 1900년 3월 6일자로 발표된 법률 제 33호로, 음주는 1922년 3월 29일 제정된 법률 제 20호로 각각 금지되고 있었으나 조선에서 이와 같은 양법을 제정하는 데는 미온적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근본적으로 우민화 정책이었고 따라서 한국에 유곽의 설치와 공창(公娼)제도를 도입하고 아편이 공공연하게 판매되도록 허용했던 것을 보면 일제가 한국 청소년들의 건전한 육체와 정신 함양에 소극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1938년 3월 26일, 미성년자 금주 단연법이 칙령 제 145호로 법령으로 제정되어 1938년 4월 1일자로 효력을 발생하였다. 미성년자의 음주 및 흡연 금지를 위한 입법 요구 활동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얻을 결과였다. 이 당시 20세 이하는 미성년자로 간주되었는데 이러한 입법활동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4) 오늘의 현실 

이상에서 우리는 금주 단연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이를 금하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술과 담배는 신자의 생활과 건덕상 유익하지 않다고 보아 금지하였으나 일제하에서는 이를 거교회적 차원에서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정신을 계도하고 절제운동을 통해 국민정신 게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금주 단연이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술과 담배가 신자의 순결한 삶을 위해서나, 육체의 건강에 조금도 유익하지 않다고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자명하다. 금주 단연은 우리들의 신앙 선배가 물려 준 소중한 전통으로, 이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계승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성결과 순결이 경시되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구별된 삶의 방식은 그 자체가 가장 힘 있는 사회개혁의 방법이 될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18세기부터 금주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였고, 개인의 변화는 그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를 변화시켜 갔던 것이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금주와 단연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의 재고를 요구하고 있고, 실제로는 음주 흡연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절제하는 생활, 성결에의 촉구, 그리고 건덕의 차원에서도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계승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계의 일부 목사들은 "아직도 술 담배가 문제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민족의 문제, 민중의 삶의 현실 같은 명분있는 문제에 관심을 돌려야지 아직까지 술과 담배로 공방을 벌여야 하느냐고 반론하고 있으나, 한 개인의 거룩함을 추구하려는 노력, 성결한 삶, 당연한 권리라도 이웃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건덕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가치를 마냥 경시해서는 안된다. 술과 담배는 우리의 사회적 환경과 삶의 여건을 고려해 볼 때, 이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살 그 자체가 이 시대를 향한 가장 힘 있는 개혁이 아닐까? 

- 자료출처 /  기독정보넷

4.

41. 기독교인은 왜 술 담배를 하면 안되는가?

기독교인은 왜 술 담배를 하면 안되는가?
 
■ 술 담배가 죄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기독교인은 왜 술과 담배를 하면 안되는 거지요?  
 
■ 가톨릭 신부님들은 술 담배에 구애받지 않는데 목사님들은 왜 술 담배를 안합니까?  
 
■ 교인들은 일상적으로 술을 마시면서 교회에서는 안마시는 척 하는 것은 위선적 이중생활이 아닙니까? 
 
예수님 시대 담배 있었다면 금하셨을 것  

한국교회 금주·금연 운동 사회에 큰 공헌
 

우선 전제할 것은 성서에는 담배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담배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만약 예수님 당시에 담배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담배를 금하셨을 것입니다. 담배는 피우는 사람의 건강뿐만 아니라, 옆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니까요. 그런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을 예수님이 권장하셨을 리 만무하고,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그 거룩한 몸을 니코틴으로 파괴하지 않도록 하시오.”(참고/고전 3:16∼17)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에 관해서는 성서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술은 주로 포도주였는데, 당시에는 포도주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음식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포도주도 과하게 마실 경우, 노아가 술에 취해 자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이야기처럼(창 9장), 실수와 방탕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엡 5:18)라고 경고했으며,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술을 즐기지 않는 자” 또는 “술에 탐닉하지 않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딤전 3:3, 8).

그리고 성서에는 일반 포도주 정도로 취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강한 술을 마셨던지, 독주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레 10:9, 사 28:7, 미 2:11 등 참고). 그리고 그 옛날에도 술자리를 2차, 3차로 옮겨 다니며 마셔대는 사람들이 있었던지, “늦게까지 술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잠 23:30)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폭탄주 같은 술이 있었던지 “혼합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잠 23:30)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술에 대해서는 긍정적 발언보다는 부정적 발언들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기적의 사건(요 2장)은 잔치에서 필수요소인 포도주가 동났을 때, 잔치를 잔치되게 하신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권면했습니다.

또 구약 아가서에서는 남녀간의 달콤한 사랑을 포도주에 비유한 표현들이 나옵니다(아 1:2, 7:9). 이러한 긍정적인 보도도 있지만 부정적인 보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포도주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소란스럽게 만든다”(잠 20:1),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다”(신 32:33), “음행의 포도주”(계 17:2) 등등.

이처럼 술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술취함으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실수와 방탕과 범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대와 오늘 우리 한국사회와의 시간적·공간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오늘날의 술 문제에 관한 절대적 기준을 성서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궁극적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윤리적 기준은 약한 이웃에 있다  

저는 술 담배를 비롯해서 종교나 교단에 따라 금기시하는 제반 음식문제에 대해 우리가 성서에서 배워야할 윤리적 기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울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사도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이런 대답을 줍니다. “나는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신앙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내가 그 고기를 먹는 것이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평생 그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 8장). 즉 건강한 사람의 자유가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음식문제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권면합니다(롬 14:13∼15). 이러한 바울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믿음(신앙수준, 의식, 지적수준 등)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 어떤 음식을 삼가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사도의 가르침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술 문제에 대한 사회윤리적 기준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처신이 비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주금연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술과 담배 문제에 관해 생각해야할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술과 담배를 금한 것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점입니다. 금주금연운동은 초창기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되었고, 교회 내부뿐 아니라 1910년대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YWCA, 기독교절제회 같은 기독교 단체들이 한국사회의 절제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금주금연운동은 한국사회 전반에 상당히 긍정적 공헌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금주금연은 한국교회가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과 윤리의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전통 속에는 ‘금욕과 절제’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금주금연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율과 청소년 흡연율이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는 실정에서, 또한 주폭(酒暴)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시한번 각성하여 금주금연을 실천하고,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고 보존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

5. 초기 선교사들, 술·담배 폐단 보며 운동 불붙여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화란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단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시작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권고하게 된 것은 이의 폐단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선교회에서 금주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금연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년 5월 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조직화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는 ‘장·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는 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 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가 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연 1회 ‘구세신문’에 ‘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년 2월 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고신대, 역사신학)


6.

술은 구원의 기준이나 훌륭한 신앙의 기준 아냐
오해 이유, 문화적·윤리적 관점 기준 없기 때문
선교사 교훈 따라 음주는 절주, 절주는 금주로
한 순간에 끊을 수도 없어, 하나님 은혜가 먼저
음주 자유로운 사람, 자신의 음주 정당화 말고
교회도 술 한 잔에 지옥 갈 것처럼 정죄 말아야

직장선교 사역을 오래 진행해 온 강하룡 목사(예함교회)가 지난 3월 27일 SNS에서 '크리스천의 음주 문제'를 정리한 글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강 목사는 먼저 술에 대해 부정적인 성경 구절(민수기 6:2-3, 잠언 23:29-33; 31:4, 누가복음 1:15)과 긍정적인 성경 구절(시편 104:15, 마태복음 11:19, 누가복음 22:20, 요한복음 2:10-11) 등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먼저 술은 구원의 기준, 신앙의 기준이 아님을 전제하고자 한다. 구원의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다. 술 한 잔 마셨다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전제는 '술은 훌륭한 신앙의 기준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신앙의 기준은 가정과 일터에서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배우고 순종하는 태도에 있다(마 28:19-20)"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지만, 직업인으로 엉망인 삶을 살았던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다. 건강한 신앙은 음주 여부가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서의 삶의 질로 평가돼야 한다"고 전했다.

셋째로는 "직업인들이 각자의 일을 주께 하듯,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다. 따라서 술은 신앙과 관련되어 비본질"이라며 "본질이 없으면 비본질에 목숨 걸게 된다. 술 문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한국교회 신앙의 현실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술과 신앙에 대하여 오해와 혼란이 많은 이유'로는 "술을 문화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 윤리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강하룡 목사는 "문화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의복 문화, 음식 문화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윤리는 옳고 그름이 있다.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며 "성경에서는 술을 문화로 보는 관점도, 윤리로 보는 관점도 있다"고 소개했다.

강 목사는 "술을 문화로 보는 관점은 술에 대한 긍정적인 성경 구절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신 첫 표적은 '양조(釀造)'였다"며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포도주를 즐기셨고, 새 언약을 포도주로 제정하셨다"고 했다.

또 "술을 윤리로 보는 관점은 술에 대한 부정적인 성경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잠언 23장의 경우 심각한 술 취함에 대한 경고"라며 "술 취함은 분명하게 윤리적으로 옳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사회법에서도 술을 몇 잔 즐기는 것은 문화로 보지만, 주폭(酒暴)은 범죄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술에 대한 부정적인 성경 구절 중 나실인의 율례와 왕에게 주는 교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실인의 율례는 자원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에게 포도주 뿐만 아니라, 포도열매도 먹지 않도록 요구했다"며 "왕에게 포도주를 금한 것은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해, 식생활에서 어느 정도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절제의 미덕"이라고 평가했다.

강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술 문제와 관련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신앙 전통이 있다. 100년 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술을 윤리적인 문제로 규정했다"며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술을 윤리적 문제로 인식한다. 술을 윤리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민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선교사들의 그런 결정이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결정은 한국 교회에 축복"이라며 "술 문제는 이성 문제, 재정 문제, 폭력 문제 등 너무 많은 문제를 끌고 들오는 악의 통로와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하룡 목사는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결론에서 "교회 지도자들, 중직자들, 성숙한 자들의 경우 나실인의 서원, 왕에 대한 포도주 교훈, 바울의 절제 전통,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엄격한 절제가 성경의 가르침"이라며 "당연히 금주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말했다.

강 목사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신앙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음주하는 사람은 절주, 절주하는 사람은 금주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음주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짜피 한 순간에 술을 끊을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과의 만남과 은혜가 먼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음주에 자유로운 사람은 다른 크리스천에게 자신의 음주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권하고 싶다. 약한 자의 믿음과 삶을 보호하기 위해, 음주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마 18:6)"며 "단, 교회에서는 술 한 잔 하는 것에 대하여 지옥 갈 것처럼 정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 목사는 "어쩔 수 없이 술 한 잔 받는 것에 대해, 배도한 것처럼 몰아가지 않기를 바란다"며 "과도하게 경직된 기준을 제시하다 보니 성도들은 반감을 가지게 되고, 결국 자원하는 절제, 경건의 유익보다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됐다"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7. 한국교회 금주전통의 발자취
  

본문


 

1925년경 한때 어깨띠를 두른 부녀자들이 ‘금주로 구국하자!’라고 적혀 있는 플래카드를 높이 치켜들고 광주 시내 밤거리를 돌면서 주점이나 요정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손님들에게 눈총을 받으면서도 금주를 권하는 선전지를 열심히 나눠주었다. 이들은 또 장날이면 모여서 시장 한 귀퉁이에 플래카드를 세워놓고 합창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영문 모를 노랫소리에 이끌려 장터사람들이 삽시간에 모여들곤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빛내리

4. 천부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게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이 찬송은 이화여전 출신의 여류 성악가 임배세(林培世) 선생이 작사·작곡하여 1920년경부터 불러온 금주가로 알려져 있다. 좬신정찬송가좭(1931)에 포함되었고 좬합동찬송가좭(1949)에 실리기도 하였다. 이 금주가에서는  몸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1절), 패가망신하기 때문(2절), 술값 낼 돈으로 학교를 세워 자녀수양을 하기 위해서(3절), 재능과 귀체를 망치지 않고 국가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4절) 등을 금주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비록 좬합동찬송가좭 이후 더 이상 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때나마 금주가가 교회에서 찬송으로 불렸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금주문화를 중요한 전통으로 여겼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의 대부분에서는 금주를 지켜 마땅한 ‘교칙’(敎則)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금주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래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술, 선교사 눈에 비친 악습
주지하다시피 한국에 기독교를 전래한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이다. 이들 눈에 처음 비친 당시 조선의 풍습은, 도박·음주·싸움질 등 ‘아편을 피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모든 악습을 다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선 남자들은 노름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만약 노름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었다면 자기의 아내를 노비로 팔아서까지 노름에 미쳐 버린다. 조선에서는 술 마시기도 널리 유행하고 있다. 술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흰색의 걸쭉한 액체(막걸리)이고 다른 하나는 맑고 깨끗한 약주술이다. 이 술은 모두 쌀, 보리, 혹은 밀로 만든다. 주막은 안주를 곁들여 술을 먹는 사람들도 거의 매일 붐빈다.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감상주의자들 혹은 술주정꾼들이 서로 상투를 잡아당기며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인들의 생각은 단순하다. 그래서인지 사회적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타락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조선인은 유순하고 예의 바른 이방인으로서 특이하게도 아편을 피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모든 악습을 다 갖고 있다.1)

초기 내한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춤추고 담배 피우고 노름하는 것을 죄로 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라 생각했다. 청교도적 신앙으로 비추어 볼 때, 도박·음주·흡연 등은 ‘사회적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타락행위’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즉 청교도적 신앙의 실천은 선교사에게나 한국인들에게 ‘문명개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2)

술, 문명개화의 걸림돌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전파만이 아니라 문명개화에도 적잖은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2) 문명개화의 과제는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각종 악습을 철폐하고 문명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술을 통해 일어나는 각종 폐해를 목격했던 것이다. ‘가슴이 벌넉벌넉하고 미친 사람 같이 혹 처자를 때리며 혹 가산을 붓기도 하고 혹 남과 싸움도 하다가 술이 깬 후에는 사지가 아프고 구미가 없고 정신이 없어 마치 중병앓고 난 사람’3)같이 만드는 술은 선교사들에게 미개의 상징 또는 ‘문명개화의 걸림돌’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좬죠션크리스도인회보좭는 다음과 같이 술을 경계하고 있다.

개화를 크게 해하는 물건은 술인고로 옳게 생각하는 사람마다 이것을 없이하기에 힘쓸지니 술은 바른 생애로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빼앗으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정(私情)을 성행케하여 사무를 그르치고 국재를 남용하며 부세를 무겁게 하고 유익한 일에 쓸 돈을 여러 백만금씩 해로운 일에 허비하여 항상 이전정 군색하게 하니 만일 술에 없애는 재물을 일용지물에 쓰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다 흥왕하고 돈 없어 어려워하는 괴롬이 구름같이 흩어질지니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없이할 물건이어늘 오늘날까지 그대로 두니 괴이하도다.4)

즉 술은 ‘재물을 빼앗으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게 하는 빈궁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음주는 직접적인 금전적 지출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협잡과 뇌물과 사정을 성행케 하여 사무를 그르치고 국재를 남용하’게 하여 부가적인 지출 또한 유발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회비용적 차원에서 볼 때, 술을 마시는 데 드는 비용을 유익한 곳에 사용한다면 경제적 손실을 막고 미래의 수입에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제적 의미에서 한걸음 나아가 종교적 이유에서 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술을 조선 안에서 먹는 까닭에 그 백성이 가산을 패하며 점점 곤궁도 하며 고생을 하여 장부의 기운이 아무리 하여도 회복하지 못하며 또 술 먹는 것이 크리스도교의 큰 원수도 되려니와 교중 일에 방해가 되니 우리 교에 유전하는 말대로 무론 무슨 술이던지 도무지 일절 금단하며 우리가 우리 고향 교우에게 간절히 바라노니 온갖 마땅한 계책을 써서 조선 교우가 술을 일절 먹지 않게 하고 몸들이 모두 정결하게 하기와 또 조선 교우들에게 지금부터 술 금하는 글을 지어 동토 사람 가운데 힘써서 전파하라고 미이미교회 열두째 연환회에 결정을 하였사오니 교우들은 이 작정한 조건을 자세히 읽어보시고 힘써 이것 행하시기들을 바라옵.5)

이처럼 음주는 ‘크리스도교의 큰 원수도 되려니와 교중 일에 방해’되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금주하는 것은 ‘몸들이 모두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연회에서 금주를 결정하고, 교우들에게 ‘힘써 이것 행하시기들’을 바란다고 권유했다. 이즈음부터 음주는 기독교 안에서도 금기시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술 마시는 것은 영혼구원에도 문제 또는 범죄가 된다는 인식도 싹트기 시작했다.

우리 주 예수를 믿던 사람은 만일 수화(水禍)에 몸은 죽더라도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고 호랑이나 사자에게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거니와 술먹다가 죽으면 어찌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으리오. (중략) 또 술 먹는데 죄 되는 걸로 말하면 취토록 먹어 죄는 것이 아니라 한 모금만 마셔도 죄 되나니 그 먹음으로 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죄 되느니라. 처음에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고 아담 이와에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고 경계한 후에 배암이 꾀이는 소리를 듣고 그 실과를 볼 때에 곧 범죄하는 마음이 나고 한 번 따서 맛본 것이 큰 죄가 되었으니 그 먹음으로 죄가 아니오 마음으로 죄 되었느니라 그럼에 술 먹는 것도 그러하니.6)

술 먹다가 죽으면 영혼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음주는 아담이 저지른 원죄에 비견할 만한 중대한 죄라고 강조하고 있다. 신학적 음미의 필요성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술에 대한 당시의 엄중한 시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의 금주문제는 문명개화에서 강조되던 악습철폐에서 나아가, 종교적 이유에서 문제가 되고 팔요하다는 인식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음주를 비롯한 각종 악습의 전폐(全廢)를 거의 동등한 무게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은 우상숭배와 조상제사 폐지, 주일성수, 부모에 대한 효경, 가정의 순화와 더불어 축첩·음주·거짓말·잡기·간음 등의 악습 전폐 등을 세례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7) 감리교의 경우, 제12회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금주를 결의하기도 하였다.8) 감리교 선교사 존스는 전도사들과 속장 등에게 술마시는 교인들은 출교시킬 것이고 다른 교회 교인이라면 감독에게 보고하여 책망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9)
이에 초기 한국 교인들은 술·담배·아편 등의 행위들을 죄로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예수를 믿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결심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제사·축첩 금지와 아울러 금주·금연은 이전과 구별되는 믿는 자의 본보기로 여겨졌다. 교인이 된다는 것은 금주·금연을 실행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선교사들의 권유에 따라 금주와 금연을 했다기보다는 스스로 이성적 판단에 의해 결행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한국교인들은 스스로 금주·금연 실천을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당대적 과제로 부상했던 문명개화의 한 단면으로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당시 선교사의 증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과 연관된 흥미 있는 사실 하나는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려는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악한 것은 그 모양도 버려라’고 하셨을 때 뜻하신 바, 새신자들은 사악한 이교도의 종교행위나 그럭저럭 용인되는 사회적 관습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모두 그들의 생활에서 내몰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려야 할 종교에 관련된 것들 가운데는 마술·점술·우상·주물·조상제사와 관계있는 위패와 제물들이 있다. 사악한 사회적 관습에는 축첩, 음주와 흡연 등이 있다. 때로 금연은 선교사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압박을 가한 사안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초기 기독교인들 자신의 이성으로 금연하였던 것이다.10)

술, 몸과 마음과 사회의 해독(害毒)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자금을 본국정부의 지원 없이 식민지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 주세법(1909)이 세율이 낮고 미비한 조항이 많다는 판단 하에 주세를 증진할 목적으로 1916년 주세령을 실시하였다. 특히 3.1운동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 좌절감은 자포자기적인 향락문화로 빠져 들게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요리집’, ‘카페’, ‘유곽’은 늘어만 갔다. 음주·흡연 등의 소비 또한 일제가 ‘주세령’을 실시한 의도에 부합할 정도로 늘어갔음은 물론이다. 연구에 의하면, 주세는 전체 조세량의 약 10.8%로 증가하였고, 연초세는 전체 조세량의 18%를 차지하며 총독부 재정수입의 주요기반이 되었다.11)
그런데 마침 미국에서 금주법(1919)이 실시되면서, 미국의 금주운동 상황, 또는 유명 인사들의 금주금연 사례가 좪기독신보좫 등의 교계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당시 기독교 문명국으로 인식되었던 미국의 예는 기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금주법은 문명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편으로까지 인식되었다.12)
이와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초교파적인 ‘기독교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주문화는 기독교 전래 초기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이라면 의례히 지켜야 할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에서 금주문제가 ‘패가망신’으로 대표되는 개인 윤리적 차원 또는 ‘영혼구원’과 관련된 종교적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절제운동’에서는 총독부 재정만 살찌우는 주초 소비를 절약하여,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고 파멸에 임한 사회를 개조하는 사회운동’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었다.13)  기독교의 절제운동 초기부터 각 교회는 금주·금연을 통해 주초비를 저축하여 계를 조직한다든가 공동농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구체적 성과를 보였다. 본격적인 소비조합운동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소비조합 설립운동은 ‘죠션교회의 나아갈 길’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절제운동은 교회연합운동 차원에서 초교파적으로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는 매년 음력 1월 15일을 ‘전조선절제주일’로 지키기로 했다. 특히 1933년을 금주년으로 정해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고 전국 각 교회에서 동일한 순서로 금주선전을 추진하였다.14) 금주·금연 절제운동은 명실공이 ‘사회를 개조하는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전에 비해 금주의 논리가 정밀해졌다는 것이다. 술이 몸과 마음에 해독(害毒) 된다는 점을 의학적·과학적 논거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음주가 신체에 여(與)하는 해독을 거(擧)하면 심장마비, 혈관경화증, 뇌출혈, 면역소파괴, 매독, 결핵, 뇌막염, 정신병 등등이라 한다. 더욱이 두려운 것은 음주의 해독이 호올노 자신에 지(止)할 뿐이아니오 자손후대에 까지 유전됨을 증명하였다.15)

술은 신체의 장기, 즉 심장을 마비시키고 혈관을 딱딱하게 하고 뇌출혈을 유발하여 몸을 위태하게 할 뿐만 아니라, 면역소를 파괴하여 신체를 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몸 건강에 아주 나쁜 존재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신체에 대한 폐해는 자신의 몸에만 그치지 않고 자손후대에까지 유전으로 전이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술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에도 치명적인 독소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독일 의학박사 삘-씨 론(論)에 의하면 ‘주독(酒毒)은 혈구(血球)에 변동을 주어 뇌의 작용을 운둔(運鈍)케 하며 심하게 되면 경뇌막(硬腦膜)에 마비를 생(生)하야 정신운동이 저능하고 운동신경의 민활(敏活)한 활동력을 멸살(滅殺)식히며 결국은 정신이상까지 기(起)케 된다’고 하엿다. 그리고보니 금일(今日)에 우리 민족이 일반적으로 태정(怠情)하고 일하기를 실혀하며 낫잠을 조화하고 쾌활(快活)치 못한 것이 민족의 근성이 아니오 우리 선조의 과음한 인과적(因果的) 증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16)

음주는 뇌의 작용을 둔하게 만들어 뇌의 마비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운동신경을 말살하여 정신이상에 빠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이 게으르고 노동을 기피하고 성격이 쾌활치 못한 것은 민족의 근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과음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금주의 이유를 성서에서 찾고자 했다. 몸과 마음에 해독한 술인 바, “하느님께서 신성으로 거하시고저 하시는 성전이 된 우리 몸에 다가 미치게 하고 악하게 하는 술을 퍼 넣으며 담배내를 피워서 더럽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죄악”으로 여겼다.17) 즉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의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전(殿)’인 우리 몸을 술과 담배로 망쳐서는 안된다는 논리이다. 뿐만 아니라 좪신학지남좫의 기고문에는 금주의 근거가 되는 성서구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18) 인용하면, 레 10:9, 잠 20:1, 잠 23:20-21, 잠 23:29-30, 잠 31:4-7, 사 5:11;22, 마 24:47-51, 눅 21:34, 롬 13:13, 엡 5:18 등이다. 다시 말해 금주의 논리를 종교적 이유에 근거하기 위해서 ‘영혼구원’ 등의 논리로 제시하기 보다는, 성서에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훨씬 설득력을 더해 가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음주는 조선사회의 민생경제를 위협하는 해독으로 인식하고 있다.

주초(酒草)의 소비액은 실(實)노 놀날만하다. 최근 일년간에 조선의 주대(酒代)는 구천삼백여만원, 여귀에 연초대(煙草代)를 가(加)하면 적어도 일억사천만원 이상, 아 근난(饉難)한 우리 살님에 얼마나 거대한 소비인가. 동포의 팔할(八割)이 농민이라고 하면 이는 모다 그들의 혈한(血汗)이 석긴 신성한 재물이엇을 것이다. 이 거대한 금전(金錢)을 죄스럽게 낭비하는 배면(背面)에 빈곤한 세민(細民)은 얼마나 울고 잇스며, 기아선상(飢餓線上)에 방황하는 부상(不祥)한 생명은 그 수가 얼마나 많으냐.19)

즉 음주는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 살림살이에 막대한 낭비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 논자는 이외에도, 양심의 마비, 사회질서 문란, 육체상 해독, 정신건강 침해, 역사적 근거 등을 들어 금주의 이유를 조목조목 논하고 있다.
또한 이 논자는 금주의 방책으로서, 국법의 제재, 일반적 금주교육, 종교의 감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종교의 감화를 제일 중요한 방책으로 꼽고 있다. 왜냐하면 국법의 제재나 일반적 금주교육은 일시적 효과밖에 얻을 수 없는 피상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철저하고 근본적인 방책은 기독교운동으로써 금주사업을 합리화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논하고 있다.

닫는 글
이상으로 한국교회 금주전통의 발자취를 대략 살펴보았다. 한국교회의 금주문화는 애초에 선교사들의 문명개화론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종교적 이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금주를 세례의 조건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본보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즈음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선교사의 권유에 이끌려서라기보다는, 스스로 이성적 판단을 통해 금주·금연을 실행했다. 이는 당대의 문명개화적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으로 여겨진다.
또한 3.1운동을 전후로 금주운동은 ‘사회를 개조하는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교회는 주초비를 저축하여 계를 만들어 상호부조에 충당하기도 하였고, 절제운동을 통해 소비조합을 설립하여 경제적 자강을 모색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 또한 당대의 사회적 요청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응답이었다.
현재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금주전통을 교칙(敎則)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금주전통이 형성되어진 시대적 배경과 의미는 매우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국교회의 금주전통을 되짚어 보면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에게 요청되는 한국사회의 시대적 요청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치만 l  교수는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교회사 조교수이다.


8.
역사적 관점, 현대적 시각 조명 술과 담배는 기독교에서 금하고 있는 식품? 언뜻 듣기에도 기독교와 술, 담배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비교적 술과 담배에 자유로운 자유주의 신학이 널리 퍼진 오늘날에도 술과 담배 때문에 신앙적 갈등을 겪는 성도들이 비일비재하고 신앙인이 술과 담배를 하면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술, 담배와 함께 한국교회 신자들이 갈등하고 있는 또하나의 문제는 제사 부분이다. 제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현재까지 명료하지 않은 상태이다. ‘신앙심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는 끊어진다’는 목회자 혹은 신자들의 말처럼 신앙심이 깊어지면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제사는 우상숭배로 기독교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신앙의 시작에 걸림돌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는 아직 술과 담배, 그리고 제사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  떳떳하지 못한 기독교인의 술과 담배, 그리고 정립되지 못한 제사문제에 대한 역사적 관점과 현대적 시각에서 짚어본다.한국교회의 숙제 `술·담배'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사실 술과 담배의 부정적인 시각은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갖게됐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술과 담배를 금한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하다보면 성탄절에 술을 빚어서 교인들과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나 예배 전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를 마치고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에게 술과 담배를 금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중국에서는 선교사들이 아편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술과 담배 문제는 관대하게 처리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직접 들어온 수보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같은 활동은 신앙적 내용보다는 사회 계몽적인 차원이 강했다.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사회 계몽적인 운동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다. 한국실천신학연구소 박세환 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대중설교가로 알려진 무디나 R. A. 토레이 또는 조지 휫필드의 영향을 받은 보수 청교도주의자들이었다. 당시 보수 청교도주의자들은 신앙운동으로 내면적인 경건 운동을 펼쳤으며 음주, 금연은 물론 껌을 씹는 것이나 연극을 보는 것까지 금할 정도로 삶에 직접적으로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해 철저히 금하고 있었다.” 당시 금주, 금연 운동은 부정적 사회상과 박세환 박사의 말처럼 신앙적인 면을 정화하기 위한 모두를 내포한 운동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선교사들에 의해 금주, 금연 운동이 펼쳐지자 금주, 금연 운동은 각 교단별로 확대되어 진행됐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펼쳤으며 같은 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교회의 금주 입장을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또한 장로교도 비슷한 시기에 금주, 금연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금주, 금연을 강조했던 단적인 예가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음주자를 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새문안교회는 음주 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 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設)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고 실제 이 문제로 인해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기에 한국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제사 중지, 노름 및 도박의 금지, 축첩(蓄妾) 금지 등과 함께 금주 단연은 세례 받을 때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그러나 당초 대사회적 운동과 신앙적인 부분이 하나가 되어 시작되었던 금주, 금연 운동은 어느새 신앙적인 척도로 자리잡아왔다. 최근은 담배와 음주에 대한 폐해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속속히 드러나면서 점차 목소리가 줄고 있긴 하지만 술, 담배 금지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발도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얼마전 A 교회 황 모 장로는 술, 담배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한국에 방문한 한 미국인 목사님을 접대하던 중 미국인 목사님이 아무 거리낌없이 담배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그 뒤로 황 모 장로는 자신이 배워온 신앙관으로서는 담배는 분명히 금지되어 있는데 꽤 저명한 목사님이 담배를 피는 모습을 봤으니 갈등할 만도 하다. 어떤 이는 술, 담배를 금했던 당시의 상황과 현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계몽적인 차원에서도 현저히 틀리고 술과 담배가 가지고 있는 사회화의 기능, 즉 술 담배를 통하여 스트레스를 풀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나아가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에 대한 긍정적 면은 어떻게 해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기독교에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술과 담배는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황 모 장로나 질문을 던진 사람의 문제는 술, 담배에 대한 신앙적 해석의 모호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박세환 박사는 “기독교의 전통주의가 자유주의 신학론 때문에 변질된 결과”라고 말한다. 본지에서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기독인들을 대상으로 ‘기독인의 술, 담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 실시, 총 179명 중 126명(70.3%)이 반대의사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과 담배는 이미 알게 모르게 기독인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이 설문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많은 수가 술, 담배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이 보편화되어 있음에도 거부를 표하는 것은 술, 담배에 대해 그만큼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직장사역연구소 윤여길 목사는 이같은 모습이 사회적 관점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에서 술, 담배를 거부한 것은 하나의 문화였지만 지금은 윤리화 되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이 ‘기독교인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관점이 스스로를 억압해 자꾸 숨게 되는 것이다.” 또 이러다 보니 교회에서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사회에 나가서는 술, 담배에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되어 ‘신앙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아직도 숨어서 담배 피고, 술마시는 기독교인들은 어쨌든 마음이 복잡하다. 일반적인 통념대로 예수 믿고 신앙이 깊어지면 술, 담배는 자연스럽게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술, 담배 하는 사람은 신앙이 없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답변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다. 이제 술과 담배를 교리로 정하는 시대는 어느 정도 탈피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술과 담배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목회자도 술, 담배에 관한한 쉽게 말하지는 못한다.  결국 기독교인들의 술, 담배문제는 `신앙의 이중성'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에 대한 명확한 정립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가 돌출했다면 이제 한국교회가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할 때가 된 것이다.제사문제는 어떠한가? 제사의 문제 역시 처음 시작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반대에서 비롯되었다. 제사문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술과 담배와는 달리 처음부터 거부했다. 1883년 서상윤이 만주에서 세례받고 돌아온 이후 1891∼1897년까지 세례자의 서약 일곱가지중에 제사를 거부하는 약속을 하게 했다. 때문에 당시에 신앙을 택하기 위해서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당시 제사의 문제가 거론된 이유로는 제사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고, 재액이나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동기가 있다. 죽은 자를 대상으로한 신앙이요,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예배가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고 이는 십계명중 1계명 `다른 신을 섬기지말라', 2계명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에 어긋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제사문제로 비교가 되는 곳이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지금도 제사를 허용하는데 사실 가톨릭 역시 처음에는 제사를 반대했다. 처음 가톨릭은 유교의 제사에 대해 비판적 입장 취했고 신자들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자, 전라도의 윤지충, 권상연 등이 순교 당하는 신해박해 사건이 1791년에 발생하는 등 강경한 입장있었다. 그러나 1939년 로마교황청이 제사 문제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표명 했고 신사참배나 조상숭배의식은 종교의미가 아니라 시민적 의식(civil rite)이라고 교황 피우스12세가 교서를 내린 이후 제사가 허용됐다. 물론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사에 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본지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총 179명 중 135명(75.4%)이 제사 참여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반면 제사를 드려도 된다고 응답한 수가 29명(16.2%)에 불과해 아직까지 제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결과는 대체로 한국교회가 제사문제에 대해 우상숭배로 강하게 교육해 왔고 십계명에 우상숭배에 대해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제사 문제에 관해서 색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요즈음 와서는 제사에 대해 미신적인 요소보다도 부모나 조상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겨났다. 즉 의무로써가 아니라 가정의 평화,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이고,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학적 결론이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제2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사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제사문제에 대해 철저히 거부하는 이유로는 제사가 철학적으로 과거지향적인 순환론적 사고론이라는 것이다. 또 대부분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근거로 죽음 후 영과 육이 분리되었을 때, 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는 두절된 것으로 설명하고 제사를 산자와 죽은자의 만남으로 여기는 자체가 신앙적 모순이라고 말한다. 현재 기독교는 제사대신 추도예배나 추모예배를 드린다. 사실 추도예배는 1904년 중국의 중앙선교협의회가 조상숭배와 기독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제사 대신 추도식을 가진 것이 기원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후에도 `무당적 요소'나 `기복신앙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것 같이 현재는 기독교는 대부분 추모·추도예배를 권장한다.  추모·추도예배가 제사를 못드리게 하는 대신 만들어진 것이지만 제사처럼 특별한 형식은 없다. 때문에 형식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그런데로 경동교회가 좋은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경동교회에서 제시하는 추모예식은 기본적으로 검소하면서도 정성을 다하되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상제례 특히 추모제(기제사) 때에 고인의 사진이 없어 추모제 의식에서 “중심(中心)의 상징”이 필요한 경우에는 위패나 지방을 써 붙이지 아니하고 그 대신 “OOO씨 제 O주기 추모제”라고 화선지에 쓰고, 그 아래에 짧은 성경구절을 써 붙이고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다고 제시하고 있다. 늘 문제시 되어왔던 절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돋보이는데 절이라는 형식을 예(禮)표현의 고유한 양식으로 보고 굳이 `절하는 예법'으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으나 가족과 일가 친척 중에서 때와 장소를 따라 `절하는 예법'으로써 조의, 추도, 추모의 뜻을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함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상제례시에 제사상 위에 음식물을 진설하는 문제는 고인이 생시에 즐기던 음식을 중심으로하여 정성스럽게 음식물을 마련하거나 고인의 수의 문제에 대해서도 복식예법에 필요한 형태로서 간소화한 수의를 입히는 등 나름대로의 예법을 설명한다. 하지만 추모예배가 제사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이 신앙의 내부적인 충돌이 있음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제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교회는 장례식과 기타 의례준칙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어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제사에 대해 타협이 없다. 새신자 중에는 이 때문에 교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기도 한다. 특히 아직 유교적 풍습이 강한 상황에서 제사 반대만 고집하다가는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실제로 여러 곳에서 이미 제사 문제로 충돌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조건 반대의 입장을 내세웠던 한국교회는 여기저기 유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수천년간 내려온 유교의 풍습을 기독교가 아무런 변질 없이 수용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며 제사를 기독교 신학에 맞춘다는 것이 애초부터 문제가 된다. 제사문제는 여전히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숙제 그러나 더이상 고유한 한국의 문화를 뒤로한 채 서구 기독교의 문화 속에만 머무르는 것을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 정신을 살리며 우리 고유한 문화와 접목시키는 작업,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기독인이 마땅히 심사숙고 하며 내놓아야 할 과제다. 최성주 기

출처 : 복음인(http://www.ingn.net)

9.음주와 흡연에 대한 성서적 고찰 / 보수적 견해 / 진보적 견해

1. 술
(1) 술의 기원
술의 기원에 대하여 신화(神話)로 전해진 것은 에집트(EGYPT)에서는 오시리스(OSIRIS) 신이 곡물신에게 곡물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며, 희랍신화에는 박카스 신이 포도를 재배하는 방법과 아울러 포도주를 빚는 방법을 전했다 한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스펜다라메트, 시리아의 몰로크, 리비아의 오라탈, 인도의 소마신(蘇麻神), 일본의 스사노오느미고도가 술을 만들었다 한다. 중국에서는 우왕의 딸 이적이 곡주를 만들어 드렸더니 우왕은 이것을 마신후 이 술로 인하여 후세에 반드시 몸을 망칠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술은 5천년전부터 있어 왔는데 한문자로 주(酒)는 두강(杜康)이 계세유시(癸歲酉時)에 양조를 시작 해서 "水"변에 "酉"자를 붙인 것. 또는 술독에서 더운 김이 나는 것과 술을 먹는 사람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합해서 "酒"자가 되었다고도 한다. 일본의 サケ는 시르게의 전용이라 한다. 이 술에 관하여 하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B.C1728-1676) 108-111조(주점(酒店)에 관한 법률)에는 술집 주모의 범죄는 사형, 화형, 투수(投水)로 처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술에 대한 설화는 고구려의 동명왕 주몽이 천제(千帝)의 아들 해모수가 응심연가에서 하백의 딸 3형제를 취하려 할 때 미리 술을 만들어 먹여 취해서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세 처녀 중에서 큰딸 유화와 인연을 맺어서 주몽을 낳게 되었다는 고구려 건국담이 있다.
삼한시대 이전에도 제사와 잔치에 술을 썼고 동이전에는 마한에서 5월과 10월에 신에게 제사할 때 술을 썼으며 고구려전(傳)에는 신라주가 중국에까지 갔고, 고려시대에는 절에서도 술을 파는 폐단이 있었다고 하였다. 탁주, 청주이외에 소주도 고려시대, 이조시대에 유행되었다. 그리고 백제 다루왕 시대의 금주령, 세종대왕 26세시 금주권고, 중종, 효종, 숙종, 경종, 순종 시절에 때에 따라 술을 금한 사실은 이 땅의 술의 기원이 오래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2) 성경과 술
성경에는 술에 대한 7가지 난제(難題)가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바울이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한 것(딤전 5:23).
 2) 바울이 절주를 용납한 것(딤전 3:8).
 3) 구약시대에 제주로 사용한 것(민 15:5).
 4) 인심과 생명을 즐겁게 한다는 것(시 4:7).
 5) 멜기세덱,  족장들,  다윗의 음주(창 14:18, 대하 32:28), 성전의 수장(느             5:18).
 6) 예수의 포도주 사용(마 11:19).
 7) 예수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요 2:1-11)(예수님은 사람에게 해로운 것             은 만드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신구약 66권에서 술에 관계된 귀절 중 직접관계된 귀절은 212 귀절, 간접 관계된 귀절은 175귀절, 총계 387귀절이 있다. 이와같은 성경귀절을 살펴볼 때 성경의 금주훈은
  1) 술에 그 몸을 태운다(사 5:11).
  2) 술 취하는 자는 가난하여 진다(잠 23:21).
  3) 술에 미혹되는 자는 지혜가 없다(잠 20:1).
  4) 술을 즐기는 자는 사악한 자다(합 2:5).
  5) 술을 마시고 법을 잊어버린다(잠 31:5).
  6) 재앙, 근심, 투쟁, 번민이 있는 자다(잠 23:29-30).
  7)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전 6:10).
  8) 술의 위험을 경계하다(잠 23:31).
  9)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10) 참된 신앙생활은 술보다 더 기쁘다(시 4:7).
그 밖에 금지된 귀절과 실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역사문학에 나타난 것(레 10:9, 민 6:2-3, 신 29:5-6, 삿 13:4-14, 삼상              1:12)
  2) 지혜문학과 시편(잠 4:17, 21:7, 23:29, 31:4-5, 전 2:10, 10:19, 시 60:3,               107:27).
  3) 선지서(사 5:11, 12, 22, 28:7, 렘 35:14, 겔 44:21, 단 1:8, 5:3, 호 4:18,               7:5, 14, 암 4:1, 6:6, 미 2:11).
  4) 신약의 교훈(마 24:49, 눅 1:15, 7:33, 고전 5:11, 6:10, 갈 5:21, 살전 5:7,             딤전 3:3, 딛 1:7, 벧전 4:3).
  5) 성경의 술의 악한 실례
       노아의 추태(창 9:21), 룻의 딸들의 패륜(창 19:33), 금송아지 앞의 잔             치(출 32:4), 아론의 아들들의 급사(레 10:2), 세겜 사람들의 장담(사               9:27), 나발의 완고함(삼상 25:36), 아말렉의 참패(삼상 30:16), 우리야를             속임(삼하 11:13), 벤하닷의 패주(왕상 20:16), 아하스에로의 왕후 파면             (에 1:10), 벨사살왕 망국(단 5:4), 헤롯의 요한 참살(막 6:27).
  6) 금주가의 모범
       나실인(민 6:3), 마노아(삿 13:14), 레갑사람(렘 35:14), 다니엘(1:8,15),  세례 요한(눅 1:15).
노아가 포도를 재배할 때 악마가 와서 도와준다면서 양, 사자, 돼지, 원숭이의 썩은 피를 포도뿌리에 거름으로 주었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마시면 처음에는 양같이 순하다가 사자같이 사납고, 돼지같이 더럽고, 원숭이같이 추태를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탈무드).
(3) 술의 정체
 1) 술은 영양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술은 쌀, 보리, 고구마, 옥수수, 과실 등으로 빚는데 당분이 있는 액체에 효모균을 섞으면 발효해서 산소와 비타민은 없어지고 무수탄산과 알코올 곧 주정(酒精)이 되어 버린다.
영양물은 ① 질소를 포함한 단백질물로써 신체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적 영양물이요, ② 질소가 없는 전분 및 지방으로 연소해서 열을 발하는 호흡 영양물이다. 그러므로 쌀술 보리술은 쌀, 보리의 영양가를 그대로 지닌것이 아니다.
빵 두개는 한상자의 맥주보다 더 영양이 있다. 빵은 신체안에 저장되어 유조(有助)하지만 술성분은 위에 남아서 소회되지를 않고 즉시 혈액에 혼합되며 물에 녹은 알코올은 오줌으로 방출되고 호흡으로 즉시 발산해 버린다. 또한 맥주를 먹으면 배가 나오는 것은 덜 연소된 지방이 축척되기 때문이다. 만국의학 대회에서는 "알코올은 인체에 들어가서 영양의 효력은 전연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2) 백약지장(百藥之長)이 아니다.
한의학상으로 술은 덥게 하며, 불순한 기운을 헤치고, 적제된 울분을 내리며, 부간(扶肝), 양비, 후장위(厚腸胃)하고 피부를 윤택케 한다고 하지만 현대의학은 알코올은 생성세포를 죽이는 독물로써 발광, 간질, 정신허약, 신체 퇴폐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3) 술은 마취제요, 극약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취하는 맛 때문인데 취한다는 것은 마취작용이다. 술은 아편, 몰핀, 코카인과 같이 마취작용을 하여 세포의 원형질 가운데서 생리화학적 산화작용을 방해하여 근육의 동작, 신경, 정신의 기능의 둔화되어 지혜와 판단이 흐려지게 됨은 사격실습, 인쇄공의 채자( 豆), 학생의 수학, 운전기사의 위험감각이나 속도조절 등의 실험으로 그 사실이 입증되었다.
 4) 술의 습관성
술은 먹을수록 내주성과 내약성이 생겨서 중독이 되고 습성화해서 그 강도가 더해간다. 초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그것이 습관화 되므로 그 노예가 되어서 인격적 자유를 잃게 된다.
 5) 무서운 착각 현상
착각현상이란 오관기(五官器) 신경 또는 정신적 지각의 부분적 마취로 생기는 현상인데 그 착각 현상은 아래와 같다.


 6) 술과 변질 현상
술은 세포와 신경 마취, 착각케하고 조직 세포를 변질케해서 영구적으로 퇴화케하여 간장경변, 신장위축, 심장의 지방변성, 혈관의 경화, 중병, 불치병에 걸리게 한다.
 7) 술은 면역성을 파괴한다.
백혈구를 감약케하고 적혈구를 파괴한다. 술을 많이 먹는 자는 금주가보다 3배나 병에 더 잘 걸리며 12년간을 단명한다고 한다.
(4) 술의 해독
 1) 건강의 적
알코올이 신체 각 부분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a. 수분을 흡수하고 또 지방을 용해한다.
b. 마취작용을 일으킨다.
c. 뇌의 고상한 기능을 둔하게 한다.
d. 내장의 여러 기관이 알코올에 침식된다.
e. 중독성 해독.
f. 기만작용과 신경 파괴 작용.
g. 병에 대한 면역을 약하게 한다.
세부적으로 말하면 구공과 소화기(위장)을 해치며 심장, 혈관(동맥경화증), 간장(간경변증), 신장, 뇌 및 신경계통(정신병), 비만증, 피부병, 신진대사기 병, 결핵, 성병 등 각 병에 미치는 그 해독은 막대하다.
그 밖에 골치 때리는 주범(主犯)은 알데히드. 흥분제가 아닌 마취제이며 농도에 따라서 머리복잡, 수다스럽고, 걱정을 잊고, 다행감, 과대망상, 잔소리, 불평, 혼수, 전신마취,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술독 근처만 가도 취하고 알콜성 지방간은 48-72시간이 지나야 정상화되고, 간염, 간장염의 만성화, 판단력 감퇴, 작업능률 저하, 기억력, 학습력 저하, 혈액 100cc중 알콜 300MG면 급성중독, 다발성 신경염, 정신장애, 사시, 혈압상승, 영양실조, 천치의 원인이 된다.
 2) 유전과 우생학
알코올 중독으로 인하여 신체 구성 물질 가운데 특히 생식세포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손상을 입게 되는데 손상을 당하게 된 그 생식 세포로부터 발생하는 후손의 신체 또는 생식 세포에 결함이 생기게 하고 그 후손 역시 그와같은 불구적 생식 세포로 결함이 되어 그 후손들에게 결함을 전통 또는 유전케 한다.
 3) 술과 생명
① 음주가의 사망율, ② 음주가와 금주가의 생명비율, ③ 음주가와 금주가의 연령별 사망 비교표, ④ 보험가입자의 사망율 조사표, ⑤ 유아 사망율과 술, ⑥ 술꾼의 변사와 자살 등의 여러 통계표를 대조해 볼 때 음주가의 수명이 금주가의 그것 보다는 단명함은 확실하다.
 4) 술과 빈곤
술은 빈곤의 어머니다. 경제생활에서 본다면 빈곤의 최대 원인은 술임에 틀림없다. 영국에서 25%, 미국에서 24%, 독일에서 22.5%가 빈곤의 원인이 술이라는 것이 조사된 바 있다.
 5) 술과 능률
타이프 타자, 인쇄 식자공, 군대 행진, 사격명중, 시력측정 등에서 술로 인한 능률 저하가 증명되었다.
 6) 술과 범죄
주해(酒害)의 실증으로 음주 발악, 취중 만용(蠻勇), 취중 폭력 살인, 취중 윤리범, 취중 가정윤리 파괴, 취중 잔인무도한 악행, 음주 결례, 음주 변태 심리, 취중 강력범, 술꾼의 사교 실례, 취중 교통 재해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한국 절제 교육연구 사료집 송 상석편에는 술의 해독의 실증으로써 1933년부터 주요 일간신문에 보도된 천여종의 사실을 스크렙 하였는데 그것을 보면 술의 해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술은 교통사고의 원인도 된다. 또한 술은 이성과 양심을 마비시켜 파렴치한이 되게 하여 음란한 죄도 예사로이 범하게 되며, 난폭한 습성을 가진 자는 살인도 불사하는 예가 있다(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다음은 술이 술을, 마지막으로는 술이 사람을 삼킨다).
(5) 알코올 중독자에 대한 이해
 1) 알코올 중독이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① 생리적 문제가 따르는 신체적 원인 곧 내분비선의 분비가 고르지 못한데서 오는 경우. ② 심리적 원인으로서 알코올 중독은 심중의 문제들을 반영시킨 한 증상에 불과하다. 그네들은 마음과 인격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이로써 이중으로 병을 악화시킨다. ③ 사회적 원인으로는 돈을 벌며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술은 매력적 남성적 사교에 절대 필요한 것, 대인 관계에 꽃을 피우는 것, 그리고 인격 조절을 하는 매개물이라고 한다. ④ 철학적 종교적 요소로는 철학이나 종교에서 밝히듯이 생의 근본적 불안이 해소되지 않을 때 술에 탐닉한다.
 2) 중독자에 대한 지도자의 태도
① 윤리문제나 도덕적, 경제적 책임 추궁 보다는 지도자를 신뢰하고 자기의 무가치성, 무의미성, 무능성을 자각하고 병에서 재기하고자 하는 용기를 주어 인격의 전체적 변화 성장에 집중할 것. ② 전문지식, 기술, 통찰력, 긴밀성으로 그들의 문제를 꿰뚫고 동참할 것. ③ 상담자로서 양심을 괴롭히는 직선적 설교로 권고를 하되 비위맞춤을 피하고 자원해서 도움을 구하려는 분위기 조성과 불안의 심정을 같이 느끼는 태도가 중요하다. ④ 복음의 약으로 접근하여 무한한 용서와 사랑으로 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고 마음의 병을 복음의 약으로 고쳐주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술을 끊게 된다. 그러나 술꾼의 교정은 지극히 힘들다. 그것은 재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보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6) 음주의 이유와 음주의 길
왜 술을 마시는가를 연구해 볼 때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그것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교제상, 원기 증가, 기분 전환, 습관성 등으로 대별되는데 또 다른 이유로는 남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하여, 불만족의 애정대신, 이상과 현실의 갈등으로, 책임회피, 수치, 열등감에서 탈출시도, 실패를 망각하고자, 성적 부조화와 혼란, 공포 불안에서 해방, 자기 비판의 죄악감을 축출, 자기처벌 수단, 생리적 고통 완화를 위해서 술을 마신다. 이러한 음주를 하므로서 미치는 해독은 건강손실, 수명단축, 지혜혼탁, 타락에의 길, 낭비, 가정파괴, 자손악화, 범죄, 사회풍기 손상, 유전, 영혼 멸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같은 해독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고자 하면 먼저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금주를 단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금주의 방법은 술의 해독을 깊이 생각하고, 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회개하며, 단연코 금주할 것을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고 즉시 금주를 단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금주는 하였지만 어떻게 하면 금주를 계속할 것인가? 계속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금주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주주위를 공표하고 술집과 술자리에서 멀리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진격적(적극적) 태도를 취하며, 교회(신앙적 단체)에 소속,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술-위궤양-위암-성병-심장병-충심(衝心)-뇌일혈-발광-유전-죽음-적빈(赤貧)-가족이산-아내의 고생-자녀의 눈물은 모두 동의어다. 이러한 것을 깊이 명심하는 것도 금주의 동기를 도울 것이다.
* AA운동(Alcoholics Anonymous)
주해자 익명회라 하여 교파나 종파, 정치 단체에 가담하지 않고 회원 상호간의 금주문제 해결에 노력하는데 일본에서는 단주신생회, 단주벗의회, 단주호조회 등의 명목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금주 봉사회에서 시도한 적이 있다.
* 주객 감화원
스웨덴, 호주 등 여러나라는 주세(酒稅)의 일부를 법적으로 사용하여 술꾼 교정에 힘쓴다.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서 음주의 경향도 늘어나는데 교수, 기사, 기업가, 의사도 이 학습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자성관(自省館)을 열어서 50명을 수용하여 전문가의 지도하에 의학, 심리 및 신앙 감화로 구제를 추진하고 있다. 적당한 노동(폐품개작, 농장작업), 스포츠, 영화, 오락, 독서 등으로 심신의 위안을 주며 극히 실제적인 종교 예배로 감화를 주는데 6개월 혹 1년이 지나면 교정의 실효를 거두는 예도 많다.
(7) 한국인과 술
한국의 2천 4백만 술꾼은 1979년 한해 동안에 5,600억원어치의 술을 마셨다. 1973년에 1천 700억원이던 것이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15가지 술 가운데 소주는 일인당 58명, 막걸리는 일인당 41되, 청주는 20세이상 남자가 평균 3병을 마신 셈이다. 5천억원이면 100억짜리 은행 50개, 50억짜리 대학 100개, 10억짜리 공장 500개를 세울수 있는데 이것을 마셔버린 것이다. 사무실이나 일터를 떠나 집으로 가는 길에 한 잔 마시는 자들은 모두 중독자로 간주될 수 있다. 각국의 술의 소비율은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순이며 미국이 13위, 일본이 21위인데 한국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2. 담배
(1) 담배의 기원
담배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한국 절제 교육 연구 사료집), 대체로 원산지는 멕시코이며, 아메리카 토인들 사이에 퍼진것이 1492년 콜럼버스의 탐험대에 의하여 스페인에 전파되고 1558년 프랜시스코 퍼낼도스가 유럽으로 수입하였다. 16세기 말엽에는 포르투갈인에 의하여 인도, 동 아시아 및 일본에 전파되었다(일본은 1550-70). 한국에는 광해(光海) 10년 무오년(1618년)에 들어왔는데 처음 피운 사람은 계곡 장유씨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이익 선생은 이미 담배의 득실을 말하였는데, 유익된 점은 ① 담이 목구멍에서 잘 나오게 하고, ② 기(氣)역하고 침이 돌때, ③ 음식이 소화가 잘 안될 때, ④ 체하여 토산할 때, ⑤ 추울때 어한에 좋다고 하였다.
한편 해로운 것은 안으로 ① 정신을 해하고 밖으로 이목을 해하고, ② 두발이 속히 희게하고, ③ 얼굴이 창백하여지며, ④ 이가 삭고, ⑤ 피육이 여위고, ⑥ 속히 늙고, ⑦ 악취, ⑧ 재산소모, ⑨ 허송세월이라고 지적하였다.
(2) 담배의 해독
중추신경 계통 - 손떨리고 어지럽다.
심장맥관 - 심장고동 증가, 혈압 상승.
호흡기 계통 - 구공, 인후, 성대, 기관지 자극 - 기침.
소화기 - 식욕감퇴, 혈액순환 지장.
혈액 - 적혈구중 일산화탄소 증가 - 산소 운반율 감퇴
벤즈피렌 14종 - 발암 물질포함 - 간암 유발
* 흡연학생의 성적불량표
10-17세 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뉴욕의 D.L 로드교수가 담배를 피우는 학생과 담배를 피우지 않는 학생을 조사하여 나온 통계는 다음과 같다.


"냄새나는 호흡, 더러운 침, 구강암, 더러운 이, 피부 원동력이나 운동 능력 감소, 생산능력 격감, 7년 수명 단축, 둔한 두뇌, 약한 정신, 도덕적 및 정신적 감각 괴멸, 끊임없는 욕구불만의 노예, 위궤양, 미음미용(美音美容) 상해, 이(齒) 손상, 불면증, 영양실조"(岡田道 박사의 "煙草"에서).
담배는 ① 신경 진통제 ② 식욕증진 ③ 변비조절 ④ 살균 - 결핵균 사멸 ⑤ 살빼기 ⑥ 위안을 준다는 말은 합리성이 없으며 담배는 백해무일리(百害舞一利)일 뿐이다.

오늘의 연초독설(煙草毒說)
하루 1갑 이상을 피우면 수명은 6년이 단축되며 폐암 등으로 인한 사망율도 24배나 된다. 흡연하는 자는 비흡연자보다 사망율이 32%나 높다. 그리고 흡연자의 심장병, 혈관병, 기관지염, 늑막염, 폐기증, 위궤양, 12지장궤양, 간경변 등에 의한 사망율도 역시 높다. W.H.O(세계 보건기구)는 "자살이며 타살 행위다"고 강경하게 경고하였다.
담배는 니코틴 등 화학물질 200여종이 포함되어 있고, 그 중 타르색소는 발암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850℃에서 생성된 벤즈피렌은 실험 결과 쥐의 피부에서 암이 발생하였다. 담배의 니코틴 흡수량은 한개비에 1mg인데 급성중독이 되면 설사, 호흡이 거칠어지며, 마비 현상도 나타난다. 특히 임산부가 흡연을 하면 태아가 성장하는데 지장이 있다. 그리고 1일 25개피 피우는 끽연자는 사망율이 비끽연자보다 40배에 달한다. 간경변증에 의한 사망율도 역시 높으며, 동맥경화를 촉진하며 발병 가능성은 2배나 높다. 이 니코틴은 뇌에 허혈 발작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해독성을 지닌 담배는 서인도의 토바코라는 섬이름에서 유래하였다하며 니코틴은 1868년 빈(오스트리아)에서 존 니코트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며 그 중독 현상은 1868년 하인리히 및 투워루아크에 의해 밝혀졌으며 그 화학적 구조식은 1893년 빈네르에 의해 밝혀졌다.
(3) 담배를 피우는 이유
국제 금연 협의회 조사에 의하면 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어른 세계를 향한 도전과, 호기심,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조상문씨의 조사에 의하면 호기심에서(30.8%), 친구와 어울리기 위해서(17.8%), 맛이 있어서(7.3%), 어른된 기분으로(6.5%)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왜 담배를 피우는가를 살펴볼 때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자극형 - 자극을 찾아서 - 피우고 싶고, 기분전환, 잠 깨우려고.
심심해서형 - 만지작 거리고, 불붙이고, 비벼서 끄는 취미.
쾌락형 - 끽연 자체에 쾌락을 느낌.
마음의 의지처형 - 울분, 불유쾌, 걱정, 속상할때 피움.
갈망형 - 안절부절하며 못참고 몹시 피우고 싶음.
습관형 - 무의식중, 재떨이에서 타는데 또 새 것을, 또는 입에 물고 있는 것                도 잊고서.
주전 3천년에 애굽에서 태양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예식에 대마초 끽연을 했고, 주전 7백년 흑 6백년에 헬라에서도 종교적 의식으로 대마초를 끽연했다. 서력 기원 초기에 담배 요법으로 환부에 연기를 쏘이게 했고, 주후 470 -620년간에 마야족도 종교의식으로 끽연을 했다. 곧 뿌리가 깊은 것이 습관 형성의 연유가 된 것이다.
(4) 한국인과 담배
1978년 한 해 동안에 한국의 끽연 인구 1천만명이 632억개비의 담배를 피워 1인당 6,320개비 곧 316갑이었다. 그 길이를 합치면 지구에서 달까지 7.6회, 서울에서 부산까지 6280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금액은 5,365억원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담배 생산량은 세계 제 8위, 수출은 세계 제 4위, 단보당 생산실적은 제 2위 그리고 1일 개인 평균 소비량은 14.9본(미국 10.4본. 영국,일본 각 8.8본, 서독 7.2본, 이탈리아 5.2본, 프랑스 5.1본)으로 세계에서 첫번째이다.
근자에는 학생층에도 담배피우는 자가 많아 중고교생 5명중 1명이 담배를 피운다하며 특히 여대생 가운데도 그 수효가 상당수에 이른다 한다. 한편 일본은 남자 2,915만명, 여자 647만명이 년간 2조8천5백70억 7,800만엔을 담배값으로 지불했으며, 미국은 5,300만명이 6,200개비를 피웠다. 그런데 1972년경에 한국인구 300만명 끽연자가 연간 1천억원 어치의 담배를 태운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위의 수치로 보아 엄청난 증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의 문제는 젊은 기독교인의 끽연 현상의 만연인데 어떤 조사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1) 얼마나 피우는가?
1일 1갑 정도 : 25%,   2일 1갑 정도 : 37%,
1일 2갑 이상 : 6%,   가끔 : 10%,
절대금연 : 19%,    불답 : 3%
 2) 왜 피우는가?
정신 해독 : 23%,    심심풀이 : 22%,
대인 관계 : 20%,    습관 : 19%,
자극 : 9%,     기타 : 7%
 3) 왜 안피우는가?
불건강 : 57%,    생리적 혐오 : 21%,
비위생적: 12%,    죄책 : 10%
 4) 피우면서 갈등을 느꼈는가?
다소간 : 7%,    전연 안느낌 : 43%,
약간 거북스러움 : 42%,   불답 : 8%
 5) 교회의 흡연 문제 해결책은?
금지 : 8%,     불간섭 : 52%,
절제권장 : 37%,    불답 : 3%
이 조사는 교회 안에도 끽연의 악습이 만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교회가 시대의 추세를 따라서 추종되는 현상임을 말하는데 반면에 절대 금연을 고수하는 자도 많다.

3. 교회의 절제운동
3세기 교회생활 특징의 하나는 금식, 독신주의 수도원 생활이었고, 성 프랜시스 교단의 기초는 눅 9:1-6, 마 16:24-27의 빈고(貧苦)의 복음이었으며, 루터의 독일 크리스찬 귀족서한에는 ① 호사 사치금지, ② 향료 제한, ③ 음식의 남용, ④ 창가(娼街) 폐지였다. 그리고 칼빈의 제네바 교회훈련 제 4조는 무도, 도박, 취주, 음란가곡 금지였다.
금주운동의 시작은 1745년 웨슬레의 "음주 및 주류판매를 죄악시함"의 장정(章程) 설정에 기인하였다. 영국교회는 1818년, 미국교회는 1826년, 일본교회는 1876년에 노력하였는데 특히 1874년에 미국의 월라드 여사가 창설한 여자기독교 절제회로 이 운동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초기의 강령 7개조 중 제 7조는 술과 도박의 금지였으며(1905년 이전), 장로교회 단일총회시절(1912년)의 특별 교훈 제 3조에는 술, 아편, 담배를 금했다.
문헌상으로는 구세군신문 1910. 6월호에 "단음함이 가흠"이라 했고, 1916년에 현순 목사, 1917년에 노불 부인, 1918년에 김 장준목사가 기독신문에 금주를 논했다. 장로교회의 주일학교 절제통일 공과는 1917-1941년까지, 60공과에 금주를 다루었다. 그리고 1919년에는 선교회에서, 1920년에는 YMCA에서 특히 1923년에는 틴링양의 발족으로 설취된 여자기독교 절제회를 통해서 맹활약을 하게 되었다.
구세군은 1921년 구세신문 금주 특집호 2만부를 시발하였고 감리교는 1923년 지방회에서, 1926년 연회에서, 장로교는 1928년에 상설 절제부를 조직했고 1932년 총회의 승인을 얻었다. 1932년에는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에서 1월 15일을 전국 금주주일로 정했다. 더우기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자산, 자급, 자립 운동으로 그 활동이 더욱 활발하였다.
장로교 선교회 절제본부는 1934년 1월 금주, 금연의 절제교육의 철저한 실천을 부탁하는 근청문(謹淸文)을 각 교회에 보냈다.
1936년 6월 1일 조선일보 사설에는 5월 5일 단오절의 기독교 금주운동 지지단체가 1,200임을 밝히고 당시 2천만 인구의 술값 4천만원(1인당 2원)을 경고했다.
한편 1948. 5. 10선거시에 미군정청은 전국에 금주령을 발표했다.
1978년 9월 7일에는 서울에서 송상석, 박형룡, 강신명 등 원로목사들이 한국기독교 절제회를 재건하고 고문, 임원, 실행위원을 선정하여 이 절제운동에 활력을 가하게 하였다.

4. 한국교회와 주초문제
(1) 주초문제로 교회는 많은 젊은이들을 상실하고 있다. 주초를 해도 교회생활이 가능한데 무작정 금하기에 그들은 2중인격, 혹은 자기 체념을 하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기도 하다.
(2) 주초가 복음의 내용과 구원 사실에 위배되거나 저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3) 문제시 않을 것(성경에 계율적, 금욕적 금령이 없음)을 문제삼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를 낳는다.
(4)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고민을 해소하려고도 하지않음은 우리의 심각한 문제다.
(5) 다른 선도책이 없음도 또한 문제를 낳는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주초를 금하게 된 이유는
(1) 초창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복음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적 신앙 배경으로 금주 금연을 실천했다.
(2) 당시의 민중은 절망, 원한, 공허를 달래려고 술, 담배, 노름에 열중해서 이를 추방하고자 했고, 구한말 국체 보상운동으로 금주, 금연운동이 벌어졌다.
(3) 금주, 단연은 새 사람의 새 생활임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여러가지 배경으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의 교리화가 되어있는 금주, 금연은 기호품으로 자유선택하도록 하되 복음에 취해서 술맛이나 담배맛을 잃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 안에는 술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는 자들이 적지않고 많은 젊은이들은 술, 담배 자체가 신앙생활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술, 담배를 하면서 교회에 나가고 있는 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술, 담배로 교회에서 평신도를 처벌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주초문제는 한국교회와 교인의 심각한 문제가 되어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술, 담배가 죄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① 바울의 말씀같이 주초를 하는 자와 아니하는 자 간에 서로 멸시와 판단을 말 것(롬 14:2-3). ② 주초로 성(聖) 속(俗)의 구별을 삼지말고 신앙 양심에 따를 것(고전 8:8). ③ 남에게 정죄될 일은 말 것(롬 14:15, 고전 8:9-10). ④ 절제 교육이 필요하다(고전 6:12, 8:9, 롬 14:20).
금주의 이유는 파생적인 죄를 범하는 죄원(罪源)이며, 한국인의 술 먹는 태도가 유별나서 술은 술로 보답하고자 하며, 건덕(建德)상 좋지 못하며 안하는 것이 하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또한 기계문명 사회에서 술은 살인자의 역할을 하며, 범죄 부도덕의 증가를 촉발시킨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은 가정 경제 파탄, 인격 부조화, 자아와 용기상실, 만성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 바울, 사도들의 교훈을 따라 저스틴 마터, 클레멘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쯔빙글리, 웨슬레 그리고 칼빈(신앙 생활의 3대적은 댄스, 도박, 음주라 함)은 금주를 강조했다. 또한 술은 아무 이익이 없고 절주(節酒)는 금주보다 힘들며 남을 실족케하고, 많은 선을 행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1) 담배 연기의 화학적 분석
 1) 니코틴은 중추신경계, 심장, 혈관에 유해한 작용.
 2) 타르분(分)은 피부암의 원인.
 3) 휘발성 자극물 10여종이 있어서 기관지계통에 유해한 작용을 하며 폐안            에 오염물질을 형성.
 4) 일산화 탄소는 관상 동맥혈전, 혈관 내면 질환을 유발.
(2) 끽연에 기인한 의료문제
 1) 폐암 : 과거 25년간 8배로 사망율이 증가했는데 27.15% 담배가 원인임.
 2) 관상동맥의 이상에 의한 심장병 : 끽연자 사망율은 2배 더 높음.
 3) 기관지염과 폐기종증 : 비끽연자보다 5배 위험.
 4) 기타 질환 : 위, 12지장궤양, 구강, 후두, 식도암, 방광암, 치은염(齒銀炎)                        등의 원인.
 5) 임신 : 매일 10개비 피우는 임산부는 태아의 성장이 지연되며 유산, 조                   산, 사산율이 증가하고 사망 영아를 출산할 위험이 높다.
 6) 여명(餘命) : 25세 남자가 하루 15-20개비의 담배를 피운다면 40.4년 밖                        에 못살지만 비끽연자는 48년을 살 수가 있다.
 7) 약물 의존 : 속히 습성화되며 대마초, 환각제 사용을 유발.
(3) 비용
35세부터 하루 25개비씩 65세까지 피운다면 약 420만원 가량 소비.
(4) 예방
담배의 해독을 인식하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손해될 것이 없고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며 교육상 좋다. 선생, 의사, 운동가, T.V연출자의 끽연벽이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아뭏든 담배는 습관성이므로 처음부터 철저한 예방이 절대 필요하다.
(5) 도덕문제
열성적 그리스도인에게는 끽연은 육체, 마음, 영성에서 볼 때 바울의 고전 6:19-20의 말처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전이므로 끽연은 ① 건강해독, ② 불결, ③ 금전낭비, ④ 타인에게 폐, ⑤ 태도 불단정하게 되므로 피하는게 좋다.

5. 우리의 각오
서양의 통계는 끽연자의 10%는 10세때에, 65%는 고등학교 시절에 습성화 된다고 한다. 습관 형성의 중대한 시기는 12-14세이며 서양의 아동의 3인중 1인은 15세까지 상습 끽연자가 된다. 일본의 경우는 남자 2,935만명, 여자 677만명이 끽연자인데 연간 3조5백70억7천8백만원이 담배값으로 지불되며, 미국은 5천5백만명이 6천4백억개비를 태웠다.
한국은 중고교생 5명에 한 명은 담배를 피운다는 보고가 있다.
민병기박사는 "자라나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을 흡연과 음주의 해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인들부터 스스로 금연, 금주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며, 적절한 여가 선용책과 함께 교육적, 제도적, 사회적 대책이 적극적으로 이루워져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금연을 알려주는 책자도 있다("당신도 담배를 끊을 수 있다" 권명달역, "담배가 깨끗이 끊어지는 책" 김성숙역).
금연을 위해서는 니코틴의 무서운 독을 익히 알고 타력(他力)주의를 버려야 한다. 점진주의도 안되고 즉시 즉각시작하여야 하는데 중(重)중독자는 금연을 해도 죽지는 않고 두어주간 병들 정도다. 또 상식적으로는 금연의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하며, 양을 줄이고 흡인할 때 연기의 양을 줄이는 것도 중요한 금연의 방법이다. 그리고 흡연의 해독을 인식하고 스포츠 등으로 취미를 전환하여 금연하는 방법도 있다.
통속적으로 금연에 성공할 확률은 300분의 1이라 한다. 이와같이 금연이 매우 어려운 것을 실감할 때 어릴때부터 습성화 되지 않도록 주안에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 음주에 대하여
(1) 술에 대한 성경의 견해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이 술과 담배의 해독과 신앙 건덕상의 이유로 주초(酒草)를 금했으며 이것이 좋은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여러가지 시비와 문제를 안게 되었다. 또 복음전도에 있어서 이미 주초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먼저 술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해 본다.
구약시대에 술을 마셔서 실수한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의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다(창 9:21의 노아, 창 19:30-38의 롯). 또한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 않은 언행과 판단을 가져옴으로 금주를 장려한 구약성경 귀절이 많이 있다(잠 20:1, 렘 25:15, 사 5;11, 28:7, 호 4:11). 그리고 특별한 사람은 술을 금해야 한다는 귀절이 있다(레 10:9, 렘 35:5-10, 겔 44:21). 그외에 나실인에게는 술을 금했으며 특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결심한 사실이 다니엘서 8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포도주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생각한 귀절도 있고(창 14장, 27:28, 호 2:8),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출 29:40, 레 23:13). 특히 포도주는 양식과 함께 유대인의 일상생활의 필수품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느 5:15). 이렇게 구약은 금주와 허락하는 양면을 말하고 있다.
신약에는 포도주를 약으로 또는 주님의 피로 말씀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막 2:22, 눅 22:20, 요 2:1-11, 딤전 5:23). 이는 음주를 허락한 부분이다. 그러나 금주의 교훈은 더 많이 있는 것을 알수 있다(눅 1:15, 고전 5:11, 엡 5;18, 딤전 3:8, 딛 1:7, 2:3). 이렇게 신약도 허락하는 곳도 있고 금하는 곳도 있다.
여기서 성경을 요약하여 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① 술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사람이 선하게 쓰면 선이 되고, 악하게 쓰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노아의 추태나 롯의 추행으로 보아 기타 음주자의 괴벽이나 술의 해독, 악한 일의 촉진제가 되는 것으로 보아 과음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③ 그리고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겠다. 곧 제사장이나 레위사람들이 회막 성전에 들어 갈 때 술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④ 지도자는 마시지 말아야 겠다(직분자, 감독, 목사, 장로기타 신앙의 지도자는 건덕을 위해서 술을 금해야 할 것이다).
⑤ 그러나 약용으로는 쓸 수 있겠다. 이 말은 술을 권장하는 말이 아니다. 병자가 약용으로 쓸 수 있되 병이 나으면 안해야 한다. 그러니 건강한 사람은 마실 필요가 없겠다. 요사이는 좋은 약이 많으므로 특별히 술을 약으로 마셔야 할 병이 있겠는지는 의문이다.
⑥ 우리의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요 2:13-22, 롬 12:1, 고전 3:16-17). 그러므로 마음과 같이 몸도 술의 해독과 술이 가져다 주는 잘못된 습관과 악행의 염려에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하겠다. 그러나 율법적으로 제재(制裁)를 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술을 조금 마시는 것은 분명히 죄가 아니요 구원에 관계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문제는 성경의 근본적인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음주가 비록 죄와 구원과는 무관하더라도 그 해독, 특히 술에 중독이 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술이 자신의 건강이나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손실을 끼칠 수 있으므로 사람이 유익을 위해서 술을 조금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극력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는 일단 술을 마시는 사람을 정죄만 할 것이 아니라 일단 복음을 전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하면서 여러가지로 지도해 나갈 것이요,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과거의 잘못된 생활의 구습에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아직까지도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그 구습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도록 술이 주는 해독을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한다.
(2) 술이 주는 해독(害毒)
① 신체에 해롭다.
술의 주성분인 알콜은 사람의 힘(정력)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뇌신경의 작용을 방해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또한 몸의 각 기관에 알콜이 들어가면 그 작용이 둔화되고 이것이 오래 쌓이게 되면 몸의 각 기관세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모든 질병의 근원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지나친 음주로 인하여 폐가망신한 사람을 많이 보고 있거니와 건전한 사회인으로서 특히 성령께서 그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나친 음주는 신앙생활에 특히 신령한 생활에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② 정신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알콜은 또한 판단력과 분별력을 둔화시키며 이것이 계속되면 정신계에 큰 영향을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소극적이요 나아가서는 퇴폐적, 부정적인 생각이 들도록 유도하는 확률이 높다. 자칫하면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③ 지적감퇴를 가져온다.
우리나라에서 1년간의 술 판매액은 도서 판매액의 수십배 또는 그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알콜의 과음은 사람을 지적으로 감퇴시킨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더우기 주초를 하는 임산부는 기형아를 출생시킬 확률이 금하는 사람의 몇배나 된다는 것도 이미 의학적으로 밝혀져 있다.
④ 경제적인 손실을 가져오며 이로 인해 가정불화의 주된 원인이 된다.
해마다 1년동안에 마셔 버리는 술로 인해서 엄청난 곡식과 돈이 낭비된다. 그리고 이 숫자는 해마다 늘어만 간다고 한다. 물질적인 손해도 손해이거니와 이로인해 겪게 되는 가정적인 어려움은 또 얼마겠는가! 또한 여러가지의 퇴폐풍조와 비도덕적인 행태는 어떠하겠는가? 이와같이 지나친 음주는 경제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악이 조장(助長)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알콜이 주는 해독은 여러 면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므로 건덕을 위해 금주의 좋은 전통을 이어 받아온 한국교회는 더욱 이를 지켜 나가는 동시에 아직도 술의 마성(魔性)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와 관용의 입장에서 우선 교회로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신앙으로 지도하여 믿음의 힘으로 이러한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겠다. 또한 신자의 이유있는 음주는 건덕과 신앙양심에 맡기는 수 밖에 없겠다.

* 흡연에 대하여
(1) 담배에 대한 성경의 견해
성경에서 담배에 대해 언급한 곳은 한군데도 없다. 이는 그 당시에 담배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몇몇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담배에 대한 간접적인 성경의 견해라고 하지만 이는 성경해석을 잘못한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이다.
(2) 담배의 유래(由來)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Columbus) 탐험대의 일행은 이 신대륙에서 참으로 신기한 놀라운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 가운데는 그곳 원주민들이 불붙인 무엇을 입에 물고 빨아들이면서 코와 입으로 연기를 내뿜는 것도 있었다. 다름아닌 타바코(tabacco), 즉 담배였다. 이 때가 1492년 10월말 아니면 11월초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담배 피우는 습속(習俗)이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1500년대에 와서 스페인 사람, 포르투 사람들에게 전해지다가 차츰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한편 스페인이 필리핀을 침략하여 동양무역의 확장을 꾀한 것이 1565년이었으니 이즈음에 담배가 동양에 처음 들어왔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에 일본의 해외무역자들에 의해 그들 나라로 수입되어 1570년에서 1580년 사이에 전국으로 퍼졌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는 1607년에 연초금령(煙草禁令)이라는 게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담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 수광의 지봉유설(之峯類說, 161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담바고는 다른 이름이 남영초(南靈草)이다. 근래(近來)에 왜국(倭國)에서 건너왔다"고 하고서는 담배가 무슨 약초인양 소개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실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임술(壬戌, 1622) 동래왜관에 큰 불이 났다. 이것은 왜인(倭人)들이 담배 피우기를 즐기는고로 담뱃불에서 옮겨 붙은 까닭이다"고 하였다. 또한 이보다 좀 뒤의 기록으로서는 효종(孝宗) 후비(后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생부(生父)인 장유(張維)의 계곡만필(1635)에서도 볼 수 있다. 위의 기록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오기는 임진왜란(1592)때부터 비롯했다고 하겠다. 또한 고추와 호박도 이때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담배가 일본의 침략군에 의해서 묻어 들어왔는데 한일합방이후 1921년에 또 일본인이 처음으로 연초전매령을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924년에는 대구에 현대식 담배공장이 최초로 준공되었던 것이다.
(3) 담배의 용도 및 보급
담배의 줄기와 잎에는 니코틴(Nicotine) 성분이 들어 있다. 이것을 추출(抽出)하여 주로 유산 니코틴을 만들어서 살충제로 쓰기도 하나 잎으로 담배를 제조하는 것이 주된 용도이다. 상기한 지봉유설에 "잎을 따서 말리우고 열을 가한다. 병자가 담뱃대로 연기를 마시면 탄질기가 치료되고 취한 술을 깨워준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심고 사용도 하지마는 그 공(功)만 볼 것이 아니라 독(毒)이 있음을 알고 가볍게 사용치 말라"고 한 기록이 있다. 니코틴 소량을 물에 푼다면 아주 치명적인 독물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담배는 이렇도록 사람의 신체와 정신에 장해를 주는 해독 뿐인데도 인간생활의 매력적인 기호물로써 수많은 금연법과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 퍼졌고, 애연가의 수는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이로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 또한 막중한 것이다.
(4) 흡연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문제들
흡연은 과연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서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선물로써 곧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으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흡연과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금연의 전통을 지켜오고 또 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생활의 건덕과 열매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생활에 유익하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흡연은 복음을 받는데 있어서 조건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리스도인이 되고 안되는 어떤 자격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흡연은 위생상, 생활 에티겟상 흡연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여러가지의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피우지 않는 우리의 입장만 너무 생각하지 말고 피우는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더우기 죄악시하거나 율법적으로 보려는 생각은 절대 금물인 것이다. 신자인데도 여러가지 사정으로 흡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는데 이들은 그들의 신앙이 점점 성장해 감에 따라 흡연이 신앙생활에 유익하지 못하며 또한 여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닫고 저절로 끊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노력과 동시에 기도해야 할 것이다.

술과 담배와 교회

김 경재(한신대 교수, 목사)

술보, 먹보, 형편없는 패거리의 왕초, 이것은 이천년 전에 유대 나라에 살았던 예수의 별명이 됨직한 이름들이다. 고요한 산 속에 들어가 때로는 밤을 새워 기도하며 울부짖기도 하던 경건한 랍비, 전문적인 구약성경 해석자들보다 훨씬 더 깊고 권위있게 민중에게 구약성경을 풀이해 주던 훌륭한 선생, 수정같이 맑은 마음과 진리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밝은 눈으로 더러운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며 산상 수훈을 가르쳐 준 예수의 별명이 "술보, 먹보, 형편없는 패거리의 왕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경건한 정통파 기독교 신자는 예수를 이렇게 모독할 수 있느냐고 펄펄 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건이라는 색안경을 벗어 버리고 복음서를 읽어 본 사람들은 예수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런 평을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이 때문에 오히려 예수에게서 넉넉한 인간미를 느낄 것이다.
신약성경에 있는 공관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그대로 적어놓은 이른바 예수의 자서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쓴 예수의 일대기인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별명이나 세상 사람들의 평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것을 보고서는, 보아라, 저 사람은 먹고 마시기만 좋아하고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합니다"(공동 번역 마태복음 11장 19절과 누가 복음 7장 34절)라는 말처럼 그때의 유대 사람들로 부터 항상 죄인으로만 업신여김을 받은 세리나 창녀들과 어울려 실컷 마시고 먹고 떠들기 좋아하는 예수가 요즈음 말로 술보, 먹보, 형편없는 패거리의 왕초와 같은 별명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 낳은 역사가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 인류의 역사 속에 소크라테스가 살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한때 예수가 우리와 함께 살았었다는 사실은 그보다 몇백 곱절이나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왕관을 쓰지 않은 왕 중의 왕, 창녀도 숙녀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학자도 무식장이도, 대통령도 막일꾼도, 신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를 한번 알게 되면 누구나 친한 친구처럼 느끼고 아무리 존경해도 자기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예수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쉬쉬 하고 있는 술과 담배를 놓고 어떻게 얘기했을까?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술을 먹으라고 권해 본 적도 없고 자기를 따르려면 반드시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 적도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처럼 술 한잔을 들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남의 눈치를 살핀 적도 없고, 술은 자유롭게 마신다며 개화된 신앙을 뽐낸적도 없다.
예수가 살고 있던 그때의 이스라엘에는 담배가 없었으니까 성경에 담배 이야기는 없지만 술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가 보여 준 첫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빚어낸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때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그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포도로 포도주를 담가 누구든지 서슴없이 마셨으며 석류, 사과, 대추, 곡식, 꿀 같은 것으로도 술을 빚었다.
예나 이제나 술이 있는 곳에는 독한 술이 있기 마련이고 독한 술에 취하여 추태를 부리고 도덕과 윤리의 생활이 깨어져, 끝내는 사람과 사회를 망치게 하는 것은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성경엔 술에 취하지 말라는 경고와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삼손과 같은 나실 사람들 중에는 종교의 전통에 따라 포도주뿐만 아니라 아예 포도 나무 열매에서 나는 것은 입에 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계율화되다시피한 술과 담배의 금기나 금욕주의는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예수의 생각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생각과 같았더라면 예수가 가나 마을에서 벌어진 혼인 잔치에서 술을 만들었다는 것이나,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주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신약 성경 속에 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디모데 전서 5장 23절의 "이제 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라는 말은 더욱 더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기독교에는 금연과 금주가 계율화 되다시피 했을까?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곧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이고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은 곧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며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 해도 죄에 빠진 엉터리 교인이란 논리가 왜 자리잡게 되었을까? 이 우수꽝스러운 이야기, 그러나 부끄럽게도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심각한 이 문제의 핵심과 그 문제성에 숨겨진 본질과 오해들을 웃으면서 이야기해 보자.
1885년 언더우드나 아펜셀러 같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새로운 학문과 의료 기술과 복음을 들고 왔을 때 이미 한국에는 백년의 역사로 터를 잡은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 혼돈과 황혼이 깃든 조선 시대 말기에 한국 사회에 들어온 개신교가 대원군의 서슬이나 위정척사파들의 살기에 눌려 요사이처럼 우뚝우뚝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서민층에 한번 뿌리를 내린 한국 개신교는 끊임없이 신자가 불었고 인간과 사회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힘은 폐쇄적인 봉건 사회 체제 아래서 수천년 동안 눌려 살던 한국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에게 시원한 샘물과 새로운 바람으로 받아들여져 갔다.
개신교의 복음은 수천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칭칭 감아왔던 혈연, 지연, 전통 따위의 쇠사슬을 풀어 주었고 벗을래야 벗어 버릴 수 없었던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었으며 칠흑처럼 캄캄하던 민중의 가슴 속에 환한 빛을 비추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한국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의 배경은 복음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청교도 형이었다. 복음에 대한 순수한 신앙, 헌신적인 뜨거운 정열, 경건하고 성실한 삶의 태도들은 이러한 종파 선교사들이 갖춘 훌륭한 점이다. 그러한 장점이 없고서야 편안하고 행복한 자기들 나라의 생활을 뒤에 두고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꼭꼭 막힌 쇄국의 나라에 와서 어떻게 젊음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인가. 사람을 사랑하는 뜨거운 정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목숨을 다 바쳐 삶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던 이 나라 민중의 찢겨진 마음을 복음으로 감싸고 의술로써 어루만지며, 미신과 악령과 폐쇄적인 전통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행방시키려고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한글말 사전을 만들며, 문맹자들에게 글을 일깨움으로써 거의 반신불수가 되어 죽어가던 이 땅의 민중에게 새로운 피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언더우드, 아펜셀러, 게일, 맥켄지와 같이 위대한 선교사들이 모두 이삼십대의 청년 선교사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신앙의 배경이 복음주의와 경건주의라고 해서 그들의 관심이 술과 담배와 같은 작은 문제에 얽매일 사람들은 아니었다.
초가집 넓은 마루를 예배당으로 삼아 예배를 드리던 한국 초대 교회의 사진을 보면 1905년까지, 아니 그 뒤에도 교회당의 처마나 싸리 대문 이곳 저곳에 장죽이 천연스럽게 꽂혀 있는 광경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성경대로 살려는 순수한 정열로 불타 있었던 한국 초대 교인들은 성경이 주는 놀라운 힘과 복음의 빛으로 아주 새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한국 초대 교회 신도들이 점차로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술과 담배가 꼭 지켜야 하는 금기의 계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 사람된 사람의 자연스러운 변화 곧 거듭난 사람의 변화가 기호품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복음에 취한 사람들의 입에는 술과 담배의 맛은 시시해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 정신을 계승한 한국 기독교의 맥박이다.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인 지도자와 신도가 모두 이처럼 차원 높은 금주와 금연을 했지, 그 뒤에 잘못되어 간 것처럼 율법의 금기에 쫓겨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육이오 때에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순교하신 송창근 목사의 이야기이다. 송창근 목사는 오늘의 영락 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와 한국 신학 대학을 이끌어온 김재준 목사와 더불어 미국에 있는 프린스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일본 제국주의 밑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동포를 복음으로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약속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젊어서 김천 지방에서 목회를 할 적에 하루는 어느 마을의 "영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수는 교회의 직분 가운데 하나로서 나이가 지긋하고 신앙 생활을 오래한 신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송 목사가 같이 간 사람들과 영수 집에 불현듯 들어섰을 때 주인은 마침 마당에서 고추를 널면서 긴 곰방대에 담배를 뻐끔뻐끔 빨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목사와 신도들을 보고 이 영수는 어찌할 줄 모르고 타고 있는 담뱃대를 엉겁결에 등 뒤에다 감추었다. 그때에 송 목사는 모른 척하지 않고 얼른 담뱃대를 빼어 주면서 "영수님, 등을 데지 않으셨읍니까?"고 물었다. 이 영수는 "목사님, 제가 속병이 있어서 약초를 좀..." 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데 송 목사가 얼른 그 말을 받아 "암, 약에는 개똥도 쓰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이 되어 예배를 보다가 송 목사는 "영수님은 속병 때문에 담배를 태우고 계시니까 모두들 그리 아시고 탓들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지금 들으면 우습고 재미있는 토막 이야기이긴 하지만 술과 담배를 금기로 삼아 가던 그때의 교회에서 술과 담배에 매이지 않은 목사와 신도의 모습을 보며 술과 담배에 관한 지혜로운 해답을 얻는다. 만일 어떤 목사나 장로가 참새구이 장수를 기어코 전도하려고 포장마차의 포장을 들추고 들어가, 오뎅 한 접시와 닭똥집 한 점을 시키고 소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세상살이 이야기를 했다면 그 다음날 그 목사와 장로는 지금까지 다녔던 교회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노회나 교회 기관에서 엄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목사나 장로가 대낮에 얼굴이 벌게 되어 다니는 꼴은 덕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우기 술에 취하여 추태를 부린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에 이 목사와 장로가 실제로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참새구이 장수 내외를 만나는 곳이 그때 그곳 뿐이어서 그 내외가 정성들여 만들어 파는 음식에 그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이런 저런 세상살이 얘기를 나다면 그것 자체는 아무 문제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상스러울 만큼 이러한 일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왜 한국 교회에서는 금주와 금연이 율법화되었을까? 거기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지난 날의 역사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유럽 대륙 쪽의 선교 기관에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의 개신교파의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 주의와 경건주의를 따르는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열정과 희생적인 헌신은 그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강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들이 배우고 자라 온 사회 관습과 공동체 속의 삶의 형태를 어쩔 수 없이 닮아 가는 존재이다. 복음주의와 경건주의는 위에서 말한 훌륭한 점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부정적으로 발전할 소지를 담고 있었다. 복음과 새 하늘을 우러러 섬기는 신앙은 잘못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을 멸시하는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갖게 만들고,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신자답게 살아가겠다는 생각은 모든 것을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갈라, 성스러운 것은 곧 좋은 것이고 세속적인 것은 곧 나쁜 것이라는 이원론적인 삶의 태도로 발전시켜 종교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계율을 절대화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 이러한 기질과 경향을 가진 한국의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그때의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는 금주와 금연령을 제때에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조 말기는 부서진 배가 방향을 잃고 떠돌아 다니는 상태와 같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는 그 빛을 잃어 갔고 사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힘을 쓰지 못했으며 여기에 사회 지도 세력의 수탈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관료주의에 젖은 양반 계층의 몰락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 기강의 혼란으로 민중은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 나라의 민중이 그들의 혼 밑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절망과 원한과 공허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술과 담배와 노름뿐이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사회 경제의 구조와 생산 양식이 제약되고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한 농촌 사회까지도 농한기에는 담배 연기 자욱한 사랑방 구석에서 날 지새는 줄을 모르고 노름판을 벌였다. 가장이 노름 끝에 집 문서, 논 문서를 날리는 바람에 수많은 아낙네들이 울어야 했고 먹고 살 식량도 아쉬운 판에 밀주를 담그는 술장수는 번창해 갔다.
그때 한국 사회를 사회 병리학적으로 진단한 지도자들은 저마다 술독과 담배 연기와 노름 속에서 한국 혼이 썩어 가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민족이 사는 길은 민중의 속 정신이 다시 태어나서 당장 술과 담배와 노름 따위에서 손을 떼게 하는 길 밖에 없다는 뚜렷한 명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한 금주, 금연운동이 그때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청교도적인 기질과 공통 분모를 갖게 되었고 더우기 구한 말의 국체 보상 운동의 한가지 방법으로 한국 기독교계가 벌인 금연, 금주 운동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생활 규범으로 굳어져 가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이요,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은 옛 관습에서 손을 씻고 나온다는 것이므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옛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못된 것의 상징이요, 술과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새 사람, 새 정신으로 살겠다는 신앙의 상징이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열심히 일하는 초대 기독교 신자는 생활이 점점 윤택해져 갔고 특히 서북 지방에서는 한국의 새로운 중산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상인 계층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술과 담배를 끊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졌다.
한국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초기 개화 시대의 금주, 금연 운동이 한국 사회의 도덕 정화 기능과 건실한 생활상 형성에 기여한 높은 공헌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처음의 그 기백과 그 정신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생생한 영의 운동도 날이 지날수록 타율적인 율법으로 굳어져가는 것이 종교 역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 듯하다.
한국 초대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벌였던 위대한 도덕 갱신 운동과 새 생활 혁신 운동, 그것의 한 방법으로 펼쳐진 금주, 금연 운동도 탁월한 초대 선교사들의 정신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이대, 삼대 선교사들과 또 그들에게서 철저한 타율적인 종교 교육을 받은 한국 교계 지도자들에 의해 금주와 금연이 마치 기독교인의 자격을 결정하고 구원을 받고 못 받고의 표징으로 삼을 만한 절대 규범으로 바뀌어 갔다. 더우기 1905년의 한일 합방 뒤부터 절망스럽게 펼쳐져 가는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은 한국 교회의 신앙 형태를 점점 현실과는 거리가 먼 다른 세상 곧 내세에 기우는 신령 중심의 금욕적인 기독교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의 기질은 참다운 청교도 정신의 적극적인 생활 자세 곧 개척자 정신과 개혁 정신과 근면하고 성실한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들을 발전 시키기보다 계율적인 도덕주의를 발전시켜 오늘의 한국 개신교로 하여금 무력한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와 이원론적인 굴레 속에서 신음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금주, 금연 운동 곧 영으로 시작한 운동이 육으로 끝마치게 된 한국 교회의 간략한 역사이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삼십년대까지 선교사가 공급해 주는 우유병 속의 우유만 먹고 자란 셈이었다. 세계 신학계의 움직임이나 기독교 유형에 다른 종류가 있는 줄도 몰랐고 있을 턱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십년대부터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서서히 미국으로 영국으로 캐나다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때에 유학을 떠날 정도면 쟁쟁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고 한국 교회에서는 이미 지도적인 인물로 누구나가 공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쓴 글과 논문을 읽고 훌륭한 사상에 마음이 움직여 꿈에라도 그와 같은 훌륭한 신학자들의 얼굴을 바로 맞대어 보기를 몹시도 그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막상 만난 대 신학자들은 쉬는 시간이면 학생들과 함께 곰방대를 열심히 빨고, 저녁 식사 때는 부끄러움 없이 맥주를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 속에서 자라고 또 신도들을 그렇게 가르쳐 온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충격적인 모습이었고 분노마저 자아내는 태도였다. 술과 담배를 멋대로 마시고 피우는 그런 신학자로부터 올바른 복음과 신학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은 그들의 사람됨의 성실성까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견디다 못해 미국이나 캐나다 안에서도 좀더 보수적이고 경건한 학교로 옮겨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달이 가고 한해가 흘러 술과 담배를 즐기는 교수와의 인간적이고 학문적인 사귐이 깊어 갈수록 그들의 신앙과 학문과 인격이, 그들이 즐겨 마시고 피우는 술과 담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짧은 유학 생활이나마 나에게도 인상깊은 추억이 있다. 미국 시카고 북부 아이오아 주에 인구 십만의 교육 도시인 듀북이 있는데, 그곳에는 역사 깊은 대학과 신학교가 여럿 있었다. 어느해 가을 내가 택한 과목 가운데 "니코스 카차키스의 문학과 종교"라는 과목이 있었다. 이 과목은 강의와 세미나와 토론뿐만이 아니라 그 작가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시청각 교육까지 하였다. 하루는 "희랍인 조르바"라는 흑백 영화를 보면서 주연으로 나온 안소니 퀸의 연기에 빠져 있는데 앞 자리에서 어느 미국인 친구가 치즈 한 덩어리와 술 한병을 넘져 주지 않는가? 밤 아홉시가 넘었으니까 이 시청각 교실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기숙사에 돌아가 자는 일 밖에 남지 않았었다. 이 친구의 말은 우두커니 앉아서 싱겁게 영화만 보지 말고 뭘 좀 씹고 마시면서 보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까 그 친구는 비오는 날마다 나를 자기 차에 싣고 강의실까지 데려다 주는 믿을 만한 친구였다. 이미 그 친구의 진실성과 성실성과 헌신적인 삶의 태도 그리고 실력파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나에게는 그 친구가 건네주는 치즈 덩어리와 술병이 오히려 새롭게 보이고 멋있게 느껴졌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밤이었다. 기숙사생들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고 집도 절도 없는 동양인 유학생 몇명만이 덩그렇게 빈 기숙사에 남아 자취를 하면서 연말의 향수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듀북 신학교의 본부에서 좀 떨어진 가톨릭의 아퀴나스 신학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기숙사의 빈 방을 지키는 우리들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약속한 라운지에 가보니 벽난로에 장작불을 빨갛게 지피고 열 사람 남짓한 신부가 스무 가지가 넘는 술과 갖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크리스마스 전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이처럼 그들의 음식에는 술과 담배가 적당히 끼어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술과 담배에 먹히지 않았다. 술과 담배가 그들의 신앙과 경건과 학문을 털끝만치라도 방해를 하거나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의 권능의 손 아래에서는 사단과 악도 하나님을 봉사하는 머슴이 되어 버리듯이 그들에게 술과 담배는 우정과 친교를 두텁게 해 주는 다리 구실을 했다.

술과 담배가 사람의 몸에 끼치는 해독
은 의학에서도 이미 충분히 밝혀냈다. 담배 속에 들어있는 니코친이 끈적끈적한 타액으로 기관지에 착색된 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와질 것이다. 그리고 술이 사람의 몸에 끼치는 해독과 정도에 지나친 술로써 생기는 도덕의 파탄을 다시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술과 담배의 해로움과 술과 담배 때문에 빚어지는 실수가 아무리 엄청나다고 해도 그것들은 기호품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지 신앙이나 윤리의 본질과 관련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은단이나 커피나 조미료를 다루듯이 술과 담배도 그와 같이 다루어야할 기호훔일 따름이다.
한국 교회는 술과 담배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야 한다. 이 말은 술과 담배를 권장하거나 도덕적인 절제 생활을 철폐하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복음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라는 따위의 세상 풍속에 얽매인 시시한 소식이 아니다. 복음은 술과 담배를 먹고 마시지 않아도 삶을 멋있고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주며 또한 술과 담배를 마시고 피워도 재미있고 알맞게 인간 관계를 위해 봉사하는 자리에 묶어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멋있는 삶은 취할 수 있는 삶이다. 다만 무엇에 취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예술에 취하고 학문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고 자연에도 취한다. 술에 취하고 니코친의 향내에 취하는 것도 삶의 멋일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존재에 취하고 반해서 예수 밖의 다른 것으로는 취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 여자 교육의 선구자인 김활란 박사가 독신으로 일생을 마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김활란 박사에게 독신주의가 당신의 삶의 철학이냐고 물었을 때, 김활란 박사는 자기가 독신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와 민중과 한국의 여자 교육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취해서 일하느라고 혼인할 틈도 정신도 없어서 저절로 그렇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기독교인에게 술과 담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매력과 향기에 취해서 술과 담배의 맛이 시시해져 버린 사람들을 우리는 왜 존경하지 아니하겠는가? 한국 기독교인 모두가 예수의 사랑과 사람됨에 취하여 술과 담배의 맛쯤은 영원히 우습게 여기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그랬듯이 다른 단체를 이끌어 술과 담배를 금하는 운동을 꾸준히 벌이는 힘있는 모체가 되어 사람들의 건강까지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제발 술과 담배를 못하게 하는 한국 교회의 계율에 매인 율법주의에서는 해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제발 술과 담배를 마시고 피우는 사람들을 자기보다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도덕적인 교만과 종교적인 오만에서 하루바삐 벗어나기를 바란다.
술과 담배는 기호품이다. 복음을 들고 싸우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기껏 기호품을 쓰고 안쓰고 하는 문제를 놓고 신경과 정력을 쏟기엔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 많다. 문제다운 문제를 문제삼기 위해서 술과 담배문제에서 자유를 얻자. 그래야 복음이 가진 그 싱싱한 샘물을 민중에게 다시금 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 아랍, 흑인 등 다른 종족들에 비해 체질상 술에 훨씬 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충남대 김 영진교수(생물학)가 지난 해 7월부터 남녀대학생 5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인 집단에 있어서의 아세트알데히드탈수소효소의 유전인자결핍에 관한 연구"에서 나타난 것. 서독 함부르크대의 "괴테"박사가 고안한 모근추출법을 써서 "아세트알데히드탈수소효소유전인자"의 존재여부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된 이 조사분석결과, 남녀 학생모두 35%가 ALDH-1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ALDH란 알콜(술)성분이 체내에서 분해될때 생기는 아세트알데히드를 분해, 초산으로 바꿔주는 대사효소로 ① - ④까지의 4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 ①형(型)이 가장 강력한 분해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술을 마시면 체내에 들어간 알콜성분은 알콜탈수소효소(ADH)에 의해 아세트알데히드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ALDH의 작용으로 초산이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탄산가스와 물로 분해된다. 그런데 술의 대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세트알데히드의 분해과정이다. 왜냐하면 이 물질이 가장 많은 독성을 체내로 배출하기 때문에 빨리 분해되지 않을 경우 얼굴이 빨개지고 심박동이 빨라지며 위가 불편하거나 잠이 오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몸이 말을 안듣거나 인사불성이 되는 등 이른바 "취하게"되는 것이다. 어느 교수(동물학 교수)에 따르면, 서양사람의 경우 음주 후, 위의 고통 6%, 가슴두근거림 0%, 얼굴홍조 3%, 근육무기력증 3%, 어지럼증 9%, 졸리거나 잠에 빠짐 6%인데 비해 동양인은 위의 고통 53%, 가슴두근거림 26%, 얼굴에 홍조 44%, 근육무기력증 26%, 어지럼증 37%, 졸리거나 잠에 빠짐 51%로 서양인보다 최소 4배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ALDH결핍에 따른 체내 알콜거부현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민족별 ALDH결핍률을 보면 미국, 유럽 등 서구인과 이집트, 수단 등의 아랍인, 라이베리아 등 흑인들의 경우 0.5%로 결핍률이 거의 없는데 비해 중남미 고지대의 인디언 69%, 베트남인 57%, 일본인 44%, 중국인 35%, 인도네시아인 39%는 ALDH가 없어 동양인이나 인디언이 술에 약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실제로 서양사람들의 경우 술을 마시면서 토하거나 졸기, 술마신 후 비틀거리는 사람을 보기힘든 것은 그들이 술을 천천히 마시는데도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ALDH가 우리보다 풍부해 분해능력에서 앞선 때문이라는 것이 교수의 설명이다.

서양사람에게 알콜중독자가 많은 것도 ALDH가 풍부해 술을 마시는 능력이 좋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ALDH의 분량은 어떻게 결정되며 증가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다른 효소도 마찬가지지만 ALDH도 염색체속의 유전인자 안에 생산능력이 결정돼 선천적으로 타고 나기 때문에 민족마다, 또 사람에 따라 다른 비율로 ALDH결핍률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간혹 예전엔 술을 마시면 각종 거부 반응과 부작용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최근들어 주량이 부쩍 늘어 났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듭되는 음주로 염색체내의 ALDH 생산유전인자가 자극을 받아 생산량이 증가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한국 사람은 술에 약하기 때문에 폭주를 삼가고 마시더라도 ALDH의 분해능력 안에서 서서히 마시는 것이 현명한 음주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