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비유

예수는 교훈을 할 때 비유를 아주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가복음 4:33-34에서는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 표현은 과장법적 표현으로 에수의 가르침 전체가 비유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만큼 비유를 많이 사용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땅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하늘 이야기》(이국진목사 저)에서 예수가 비유를 많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영적인 교훈의 난해성을 꼽는다.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이야기에 빗대어 가르쳐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인류의 영원한 고전-신약성서》(정승우 저)에서 예수가 비유를 사용한 이유로 청중들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이는 어설픈 설명일 뿐이다.

예수의 비유를 해석하는 방법으로는 오래 전부터 비유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에 각각의 의미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해석하는 방법인  알레고리가 많이 사용되었다.

* allegory[æləɡɔːri] 우화, 풍자 (→fable)a political allegory정치적 우화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어거스틴"은 예수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은 아담을 상징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간 것은 율법과 선지자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을 상징
선한 사마리아인이 도와준 것은 예수님을 의미하며,
여관은 교회를 상징하고,
다시 온다는 것은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배격되었고,
결국 율리허(Adolf Jülicher)는 알레고리를 배격하고 비유에는 오직 하나의 뜻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서게 되자, 비유 자체는 어떤 하나의 의미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 처럼 다양한 의미에 열려 있어서 해석자가 나름대로 창의적을 해석하는 것을 환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가 비유를 말했을 때, 그 때에 의도했던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의미 있는 과제일 것이다.



비유(parable)를 통한 하나님 나라 가르침(I)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이미 현실화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예수는 한편으로는 메시아적 권능적 치유사역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적 임재를 증시하시고, 다른편으로는 설교와 가르침 사역으로써 다양한 비유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적 임박성을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basileia tou theou, the Kingdom of God)는 예수의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사역의 주제였다. 하나님 나라는 신구약의 주제요, 역사와 우주의 주제이며, 지구상에 사는 인류 개인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예수의 비유는 여러가지 다른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주제를 가르치나 이것들은 모두 통합적인 주제인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to come)에 집중되고 있다. 저자는 예수 비유를 주제 별로 하나님 나라 비유, 잃은 것 비유, 선한 목자 비유, 불의한 자 비유, 부유한 자 비유, 슬기로운 종 비유, 포도원 품꾼 비유, 종말론적 잔치 비유로 나누어 성찰해 보기로 한다. 이 다양한 주제들은 하나의 통합적인 큰 주제인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재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 나라 비유

1) 씨뿌리는 자 비유(마 13:1-9; 막 4:3-9; 눅 8:4-8)

(1) 복음의 씨는 다양한 심령의 밭에 뿌려진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씨뿌리는 자(the Sower) 비유”로 설명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9).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예수 자신이며, 이 비밀들은 그의 메시지와 사역의 효과들이다. 하나님 나라 비밀은 복음의 메시지 전파와 치유 사역이라는 복음의 씨를 통하여 뿌려진다. 씨가 뿌려져서 자라고 결실하는 데는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다. 길가에 떨어진 씨들은 공중의 새들이 보이는대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흙이 얇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들은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싹이 나오나 해가 돋아 올라 비취면 뿌리가 없어 말라죽어 버린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들은 싹이 나오나 가시가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옥토에 떨어진 씨들은 자라 무성하게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 이처럼 씨가 길가에 떨어져 새에 의하여 먹어 치우거나, 돌짝밭에 떨어져 말라 죽거나, 가시떨기에 짓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옥토에 떨어져 결실하는 다양한 모습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와 같다.

(2) 씨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예수는 씨 뿌리는 자(the Sower) 비유의 의미를 해석하신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19-23).

예수의 해석에 의하면 씨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막 4:14). 예수는 복음의 씨가 뿌려진 심령의 다양한 상태를 묘사하신다. 길가에 뿌려진 자는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메시지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마태가 악한 자라고 표현한 것을, 마가는 사탄(막 4:15)이라고 말한다. 돌밭에 뿌리운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넘어지는 자(막 4:16-17)다.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막 4: 18-19)를 뜻한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인간과 사회 안에서 여러가지 시련과 박해를 거치면서 자란다. 복음의 씨는 결국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들의 마음과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 안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막 4:13)와 달리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비유의 뜻을 깨달은 사람들로 표시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마 13:11a)

2) 가라지 비유(마 13:24-30)

(1) 하나님 나라는 추수때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것 같다.

예수는 가라지(the Weeds)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24-30).

씨 뿌리는 자가 좋은 씨를 밭에 뿌렸는데 밤에 원수들이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다. 그리하여 싹이 나고 자라날 때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보인다. 종들이 길쌈을 하면서 가라지를 뽑겠다고 주인에게 말한다. 그러나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한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지혜를 말한다. 주인은 추수까지 함께 자라게 두고 추수 때에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하고 알곡은 곳간에 넣는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라지는 밀밭에서 곡식과 함께 자라는 독보리를 일컫는데, 검은색 열매를 맺을 때에 구분이 된다. 이렇게 가려낸 가라지는 땔감으로 사용된다. 가라지는 마구 뽑을 것이 아니라 검은 색 열매를 맺어 알곡과 구분이 될 때 제거되는 것 처럼 때가 되면 지혜롭게 제거되어야 한다.

(2) 역사의 종말에는 가라지의 분리됨이 있다.

예수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 이들에게 가라지 비유를 해설하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복음의 좋은 씨 뿌리는 자는 인자인 예수요 그의 제자들이다. 밭은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세상이다. 좋은 씨들은 천국의 아들들, 선인(善人)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악인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 사탄이며, 추수 때는 이 세상의 끝인 종말 때다.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이 세상은 그냥 돌고 도는 영겁 회귀(die ewige Wiederkehr)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때를 향하여 가고 있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심판이 일어 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신화적인 진술이라고 간주하나 이 비유는 문자 그대로 받아야 한다.

이 비유는 “세상 심판의 비유”(마 25: 31-46)와도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한다. 임금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이들에게 합당한 판결을 명하신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3-34, 45-46). 예수는 여기서 역사 종말 심판의 두가지 결과에 관하여 언급하고 계신다.

하나는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영생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을 위하여 마련된 영벌의 길이다. 이 비유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영생과 영벌은 맹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역사의 과정 속에서 우리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사는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하여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 역사 종말에는 두가지 종류의 판결이 있다: 영생과 영벌의 판결이다. 선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벌로 들어간다. 심판이 없다면 우리의 역사과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선을 위한 고난과 박해에 대한 보상도 없으며 우리의 도덕 윤리적 행위에 대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3) 가라지는 미리 제거할 것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알곡을 거두는 데 있어서 그릇된 인본주의적 행동주의를 경계한다. 좋은 씨를 뿌린 자리에 가라지가 자라난 것을 보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실 것이며, 가라지는 불에 던지시고 알곡을 거두실 것이다. 가라지를 분리해 내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한다. 심판 시에 가라지는 가려질 것이다. 인간 스스로 가라지를 제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심판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의 선한 일에 힘쓰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구제와 돌봄을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경외요 존경으로 보신다는 점이다. 종교적 신앙과 경건이란 이웃, 특히 소외된 자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3)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눅 13:18-19)

(1)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겨자씨(the Mustard Seed)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갈릴리 지방에서 많이 자생하는 십자화과(科) 식물(눅13:19)의 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지극히 작은 것'(마17:20)의 대명사로 언급되나 성장하면 키가 4-5m나 되는 특징을 가진다. 겨자씨는 이처럼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씨다. 그 안에는 큰 나무가 들어 있다. 겉으로 볼 때 작아서 하찮은 것으로 보고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씨에서 싹이 나와서 줄기가 되고, 더 커서 가지가 되고, 더욱 크게 자라 큰 가지가 되고, 완숙하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 만한 거대한 겨자나무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나라는 초라하다. 하나님 나라는 무식하고 사회적으로도 낮은 계층들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혀 크게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겨자씨가 겨자나무가 되는 것처럼 되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등록 신자가 모두 참 신자라고 볼 수는 없다. 알곡(참) 신자와 가라지(명목) 신자가 모두 교회 안에 있으나, 이 구분은 종말에나 드러난다.

(2)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전 인류가 믿게 되는 공동체로서 묘사된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작은 아브라함의 가족과 영세(零細)한 12지파에서 시작되어 이스라엘 민족으로 확장되었다가 이스라엘의 배도와 귀양살이로 인해 남은 자들로 수렴되고 예수에게로 집중되었다. 예수로부터 다시 12제자, 120 제자들, 초대교회, 이방전도, 세계선교 등으로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나사렛 예수에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신자를 가진 종교가 되었다. 신구교 합하여 2014년 기준으로 등록된 기독교인 수는 21억명 정도 된다. 한국에서는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천3백5만명(개신교: 967만명, 천주교:389만명, 2015년 기준) 정도 된다. 한국에서 개신교 19.7%·불교 15.5%로 1995·2005년 순위가 바뀌어 불교에 첫 역전하여 개신교가 1위가 되었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계시를 통하여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을 보고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6-27). 예수의 비유가 언급하는 겨자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이란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될 이방인들을 염두에 둔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모습과 거기에 속하게 될 이방인을 지시하고 있다.

4) 씨의 성장 비유(막 4: 26-29)

(1) 하나님 나라는 씨가 자라 곡식 열매를 맺음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씨의 자람과 같다고 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 26-29).

하나님 나라는 밭이라는 이 세상에서 씨앗으로 현존한다. 씨앗은 미래를 품은 현재다. 씨앗 안에는 장차 올 것이 숨겨져 있다. 씨앗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으로 스스로 모든 의심과 염려를 물리치고 자란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결실한다. 씨가 뿌려져 싹이 나고 이삭을 맺듯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파되어 결신자를 만들고 이들이 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전파자가 된다.

(2)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씨)이 발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으로 하나님 나라 도래 시간을 계산하려고 하고,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율법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프로그램에 의한 인위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플로레타리아 독재라는 이상향을 당원들의 전략적 속임수와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실현하려다 70년 이데올로기 실험 가운데서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짐으로 실패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의 이상향을 추구하여, 생물학과 컴퓨터 공학과 인터넷 기술의 결합으로 인위적으로 도출하려고 하나 예기치 못한 여러가지 부작용이 도출되고 있다. 환경과 생태 오염과 파괴, 지구온난화, 인간의 소외, 부익부, 빈익빈 등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이상향 첨단기술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복음의 능력으로 실현된다. 하나님 나라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 복음의 말씀 전파와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심령 가운데서 먼저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공동체 가운데서 파편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그 자체가 가진 능력으로 역사의 추수 때를 가져 온다. 복음의 능력이란 예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의 사랑이다. 예수는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제자들에게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예언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는 여기서 자신의 십자가 희생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 25-28).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한 알의 밀알로서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하여 그가 지실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심이라고 해석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과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계신다.

(3)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원리(희생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으심은 씨앗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는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취를 결실한다. 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서로부터 많은 믿는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심판자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낫을 가지시고 알곡을 거두어 들이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 낫으로 추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4).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犧牲)제물(祭物)이 되신 예수는 최후의 심판 때는 흰보좌의 심판자로 나타나신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1-12). 흰 보좌 앞에 죽은 자들이 보좌에 펴진 생명책과 행위책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예수는 최종의 심판에서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나,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

5) 누룩 비유(마 13:33; 눅 13:20-21)

(1)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누룩(Leaven)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빵을 구울 때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난 번에 빵을 굽고 남겨 놓았다가 띄운 반죽 한 조각을 뜸팡이로 썼다. 이런 식으로 누룩은 이스라엘의 집에 늘 비치되어 있어서 빵을 굽는 데 사용되었다. 누룩에는 퍼지는 성질이 있다. 이 퍼지는 성질로 인하여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여 빵을 만들도록 한다.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퍼져 빵을 부풀게하는 누룩과 같다. 누룩은 발효를 통하여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 같이 변혁(transformation)을 야기한다. 이 변혁이란 복음의 능력에 의한 삶의 방식과 사고와 가치관의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자들은 선한 누룩이 되어 그가 속한 가정과 사회속에서 퍼지는 역할을 한다. 가정과 사회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한다.

(2)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는 퍼져나가는 성질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죄로 인하여 죽은 인류가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속죄 공로를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한다. 예수의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를 설립하였고, 거기서 안디옥 교회로 전파되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세우고 희랍교회와 로마교회를 세우고 박해를 거치면서도 로마제국을 점령하여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고 서구사회로 퍼져나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을 이루고 아프리카와 남미에 교회를 이루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아시아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오늘날 지구촌 오지(奧地)의 미지(未知)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이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지고 있다.

6)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마 13:44)

(1) 하나님 나라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발견하고 전 소유를 팔아 사는 자와 같다

예수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the Hidden Treasure)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하나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아서 그것은 발견하는 자만 그 밭의 가치를 아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다. 그러나 그 보화의 가치는 숨겨져 있다.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귀중한 것을 산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 있다.

전도서 저자 솔로몬은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종교의 씨를 심어놓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성, 모든 사람들의 초청됨과 그 진정한 가치의 은폐성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3-4). 이 구절에 의하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론적으로 주어지는 빛이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요 종교의 씨다. 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 어두움이란 세상 내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부패한 인간은 자기에게 비쳐진 빛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복음 빛의 은폐성이다.

(2) 하나님 나라 보화(寶貨)를 발견한 자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를 구입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 보화가 있는 밭을 그냥 값어치가 없는 일반적인 땅으로 간주하고 지나쳐간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헤롯왕과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베들레헴에 탄생한 아기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 이들은 아기 예수 신분의 존귀성을 알기만 알았으나 그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과 생모의 마리아만 예수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의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그리고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과부된지 38년이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다가” 아기 예수에 관하여 말하였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7-38). 시므온과 안나는 당시 마리아와 요셉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아기 예수의 비밀을 성령의 조명 속에서 알고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물과 성령으로 중생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산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감추인 밭을 자기의 전 소유를 팔아서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소유를 모두 처분한다. 그리하고 이 밭을 사게 된다. 하나님 나라 보화는 밭에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발견하는 자만이 밭의 가치를 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항상 일상적인 삶 속에 감추어져 있다. 자연적인 눈을 가진 자에게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복음의 진리를 듣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여태까지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숨겨진 보화가 있는 밭을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우리가 가진 모두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세상의 부귀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사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주기철, 손양원, 김관주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이 그들의 삶을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바쳤다.

7) 값진 진주(眞珠) 비유(마 13:45-46)

(1)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사는 장사와 같다.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값진 진주(the Pearl)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값진 진주도 아무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보는 눈이 있는 장사만이 그것의 진가(眞價)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산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비밀에 접하여 그 진리를 아는 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진주를 산다. 복음을 아는 자는 복음을 얻기 위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는 헌신(獻身)을 한다.

(2)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얻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예수는 십계명을 어린 시절 부터 지켰다고 자랑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 모든 소유를 팔아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자 청년은 이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부자 청년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실족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될 때 지체 없이 자기 모든 소유를 팔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구원을 재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오는 것이며 이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값진 진주를 산다는 것은 새로운 이윤창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긴박성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 그 값진 진주를 사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감추어 놓고 몰래 가서 자신의 집을 정리하고 그 모든 소유의 대가를 지불하고 값진 진주가 감추인 밭을 산다. 이것이 복음이다.

8) 그물의 비유(마 13:47-50)

(1) 하나님 나라는 물고기를 잡아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갈라내는 그물과 같다.

예수는 그물(the Net)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7-50).

하나님 나라는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에 비유된다. 그물이 가득 차게 될 때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을 내버린다. 역사의 종말에 신인과 악인의 분리가 있다. 선한 자는 천국으로, 악한 자는 풀무불이 있는 지옥에 던져 넣는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2) 유신론적 이원론

어부들이 던지는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들이 들어 온다. 물고기 가운데는 질(質) 좋은 물고기가 있고 질 안좋은 물고기가 있다. 어부가 그물을 끌어 올려서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안좋은 물고기는 버린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가라지 비유와 같다. 전도와 선교라는 그물은 선인과 악인을 공동체 안에 끌어 들인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함께 있다. 악한 자들을 미리 가려내거나 제거할 필요가 없다. 악한 자를 가려내고 제거하다가 선한 자까지 다치고 어려움을 당할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이유는 인간의 판단은 제한되고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악한 자도 어떤 계기를 통하여 회개할 수도 있고 선한 자도 어떤 계기를 통하여 시험에 빠지고 잘못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는 선한 자들의 것이며 악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고 풀무불에 던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신론적 이원론이 예수의 비유에는 핵심사상으로 지배하고 있다.

2. 잃은 것 비유

1) 잃은 양 비유(눅 15:3-7; 마 18:10-14)

(1)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의 기쁨

예수가 들려주시는 잃은 양(the Lost Sheep) 비유는 다음이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3-7).

잃은 양(the Lost Sheep) 비유는 하니님으로부터 소외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누가는 예수가 잃은 사람을 찾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누가는 이 장에서 세가지(양, 은전, 아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주인의 기쁨에 관한 예수의 비유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무리에서 이탈한 양은 잃어버린 양이 된다. 개나 소나 고양이 같은 가축과 달리 양들은 자기 우리를 찾아오는 능력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목자가 양을 찾아와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늑대나 이리의 밥에 되어 버린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을 때 그 기쁨은 너무나 큰 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잃은 양을 찾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복된 소식이다.

(2) 잃어버린 소자 중 하나라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연민

마태복음 비유에서는 누가복음에는 없는 잃어버린 소자 중 하나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첨가되어 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사람들은 큰 자에 대한 관심을 주로하며 지극히 작은 소자를 잃어 버렸을 때 찾으려는 애착이 적고 찾다가 못찾으면 포기해 버린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지극히 작은 소자를 찾은 것에 대하여 크게 기쁘하신다. 비유는 인간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도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저를 지키시고 저를 돌보신다. 심지어는 예수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소자와 동일시 하신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자기에게 한 것이며, 그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자기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작은 자, 소외자, 헐벗은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가치관은 큰 자, 권력자와 부자와 유명한 자를 귀하게 여기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3) 의인 아흔 아흡보다 잃은 죄인 하나의 돌아옴을 기뻐함: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의 죄 때문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 된 것을 원치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긍휼을 베푸신 준비가 되어 계신다. 이미 예언자 에스겔은 죄인을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뜻을 그의 잃어버린 백성 이스라엘에 선포하였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겔 33:11).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하나님은 악인이 죄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악인이 돌이키면 그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 구절은 악인의 숙명론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론을 말하고 있다.

예언자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는 메시아로서 약속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with justice)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 예수는 메시아로서 예스겔이 예언한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목자의 역할을 하신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 23-24).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가지시는 식사행위는 잃은 자들을 되 찾았을 때 맛보는 즐거움의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 곁에 만연한 기쁨의 지상적 광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사면의 표징과 실행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앞으로 맛보게 될 영원한 복락의 선취다.

2) 잃은 은전(銀錢) 비유(눅 15:8-10)

(1)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전승된 비유

잃은 은전(the Lost Coin) 비유는 누가가 유일하게 전승해 주는 예수의 비유로서 다음이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8-10).

잃은 양 비유에서는 한 남자에 관하여 말하는데 잃은 은전(the Lost Coin) 비유에서는 한 여자에 관하여 말한다. 드라크마(δραχμα, drachma)는 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당시에 평민들의 집은 내부에 방 하나만 있었다. 출입문은 하나 있었으나 창문은 없었다. 그리고 바닥은 다진 진훍으로 되어 있다. 방안은 컴컴하다. 은전이 떨어졌을 경우 방안을 밝히기 위해 등잔불을 켜서 빗자루로 집안을 쓴다. 그리하여 잃은 은전(銀錢)을 찾아낸다.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동전을 찾았을 경우 여인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품삯을 찾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즐거움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기뻐하는 것과 같다.

(2) 잃은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의 즐거움

한 여인이 잃어버린 방바닥을 빗자루 쓸면서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발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찾다가 찾아내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서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고 기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기뻐한다.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예수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천사들이 기쁨을 드라크마 하나를 잃고 부지런히 찾다가 찾으면 즐거워하는 한 여인의 즐거움에 비유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어느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소외된 자들을 찾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종교 특권층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 나병환자들, 혈루병자들(요 5:3),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등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고 소외된 자들을 고치고 저들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율법에 입각한 가치관이 아니라 복음에 입각한 가치관을 교훈하고 있다. 인간들은 죄인을 멸시하고 의인을 칭송하기를 좋아하고 의인의 친구가 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와 창기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고 이들이 바르고 건강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

3) 잃은 아들(탕자) 비유(눅 15:11-32) :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1) 잃은 아들의 돌아옴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잃은 아들(the Prodigal Son) 비유는 다음이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잃은 아들(the Prodigal Son)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자유로 허락된 가능성만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에 대하여 냉담하고 무감각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와 집, 가족, 자기 나라와 동족으로부터 멀리 떠나가서 오늘날 오랜지 족처럼 아주 사치스럽게 살며, 창녀들과 방탕한 삶을 살고 그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그 나라에 흉년이 와서 아주 삶이 어려운 시기에 그 나라의 백성 중 하나에게 의탁하여 살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백성의 법과 질서를 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돼지지기로 고용되어 부정한 동물인 돼지의 먹는 쥐엄열매로 굶주림을 면하려 하였는데 그것 조차도 거절되었다. 이는 탕자가 직면한 최악의 상태를 말한다.

탕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의 무절제한 소모 속에서 자기의 본질을 소모해버렸고,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상실해 버렸다. 탕자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인간 영혼의 모습이다. 거짓된 자유란 노예상태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떠나가 자율성의 주인이 되고자 한 탕자는 쾌락과 방종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짐승인 돼지지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소외되고 비참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알려준다.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던 탕자는 비참한 노예가 된 것이고 이것은 스스로의 방종이 초래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최악의 고통 상태에서 비로소 자신의 본향을 생각한다. 그리고 겸손해지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생각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주고 잔치를 배설한다.

(2) 고통과 고난이란 인간을 정화시키는 수단

아들이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가 돼지지기를 하면서도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 굶주려 죽는다는 최악으로 낮아진 상태에서 비로소 자신의 고향과 아버지 집을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탕자가 당하는 역경은 그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 15:18). 그리고 자신의 큰 죄와 허물을 깨달으면서 극도로 겸허해지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의 자격이 없고 단지 품꾼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9). 이러한 외롭고 고달픈 타국의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내몰리면서 여태까지 은폐되었던 사실, 아버지 집의 종들이 지금까지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자기보다 더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회심이란 아들로서 누리는 자신의 참된 존재의 자유로운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회심(conversion)이란 인간이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본래 모습(the original status)이란 하나님 형상의 모습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영광스러운 숙명(glorious destiny)이다.

인간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과대 망상 속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각성하게 되고 전능자 하나님에게로 귀환하게 된다. 이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자신 본연의 처지에서 떠나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자신의 소외된 처지를 깨닫고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것을 말한다. 역경과 고통 가운데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속에 있는 본향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마비되어 있는 종교성(종교의 씨)이 이러한 역경이라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발현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사회에 다가오는 흉년이라는 자연 재해와 인간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의 순기능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들은 재난과 고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주에는 선한 신이 아니라 악한 신이 있으며, 그리고 우주와 역사에 부조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C. S. 루이스(Lewis)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자연 재해와 고통과 고난을 주셨다. 그리하여 인간의 신앙과 자기 존재 각성은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재난 속에서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처한 고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알게되고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 마치 메마른 황야에 비가 내리게 될 때 각종 초목이 싹을 내는 것과 같다.

(3) 인간의 성적 자유권(동성애, 성 매매)을 행사하는 오늘날 인간: 인간 존엄성 상실

오늘날 현대 인간은 계몽주의 이래로 정신적 탕자로서 기독교 전통이 강조해온 하나님의 법, 초월적 법(transcendent law)을 이탈하여 인간 이성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쳐 오늘날 이성의 길까지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에 도달하였다. 모더니티는 그래도 규범과 가치의 통일성과 단일성과 품위를 존중했는데 포스트모더니티는 다원성과 다양성의 명목 아래 각종 무질서와 혼돈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
특히 2010년대에 들어와 구미(歐美)사회를 이미 장악한 동성애 축제인 퀴어축제가 한국사회에 들어와 매년 서울 시민의 휴식처인 서울광장에서 개최되면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허용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시민운동 샬롬나비는 2016년 6월 9일 ‘반동성애 다섯 명제’를 선언하였다:

1.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며 자연 질서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2. 동성애 문화축제(퀴어 축제)는 가족 공동체 해체하고 전통가치관 붕괴시킨다.
3. 동성애 문화축제는 개인의 자유를 남용하고 공동체 질서를 해친다.
4.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를 한국 문화축제의 중심지인 서울광장에서 개최하는 것은 자신들의 성적인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켜 동성애 문화를 조장하려는 것이다.
5. 퀴어 축제는 성(性)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미화 내지는 동성애에 대한 옹호를 조장하는 것이다.

남녀 동성애자들은 에이즈(AIDS: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면역결핍증)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게 되며, 남성동성애자들은 에이즈 외에 항문성교로 인한 항문 파열이라는 치명적 질환에 시달려 생명을 단축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문의들은 경고해주고 있다. 성(性)이란 가정 안의 부부 간 사랑의 확인으로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방종으로 나갈 때 인간에게 주어진 개인과 가정의 천부적 존엄성은 무너지고 아버지를 떠나온 탕자가 돼지지기가 된 것처럼 방종과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4) 최악의 상태의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다.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조국을 떠나 타국에 가서 창녀와 동거하면서 호랑방탕하면서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였다. 그는 자기 민족을 떠나 타국으로 가서 생활했다. 그는 자기의 고향에서 섬기던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여태까지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탕자는 그가 지녔던 최소한의 양심과 신앙과 규범에서도 이탈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자유의 남용 속에 살았다. 그러한 탕자는 흉년이라는 자연의 재앙과 함께 들어 닥친 주변 환경의 극도의 핍절에 영향을 받으면서 물질적 빈곤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호구지책을 위하여 낯선 나라의 사람에게 의탁하여 살았는데 돼지지기를 할 정도로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고 그나마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주려 죽음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최악의 상태로 낮아진 탕자는 절망과 자포자기의 상황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부르심을 그의 존재 밑바닥에서 체험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러한 탕자의 자기 독백은 그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본향을 갈망하는 것이며 우리 영혼의 심연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바같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안식을 누리지 못 살도록 한다: “우리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ad te)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5) 하늘 아버지는 여전히 반항하는 인간이 자기에게 되돌아 오기를 바라신다.

비유는 무례하게 유산을 받아 가지고 자신을 떠난 아들이 집으로 되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긍휼이 크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준다. 비유가 그려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패역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은 에언자 호세아의 예언을 통하여 전해진다: “이스라엘아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1-2). 비록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떠났으나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 같다. 성공하여 금의환향하는 아들이 아니라 유산을 모두 허랑 방탕한 생활에 소모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긍휼의 마음을 느끼고 아들을 포옹하여 맞아 준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 20).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가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패역과 반항에서 돌이켜 자기에게로 돌아 오기를 원하신다.

탕자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적 상황을 알려준다. 탕자의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 받은 첫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은혜의 울타리, 선악과에 접근하지 말라는 금령을 이기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을 비유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으로부터의 멀어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단절이요 자기 본연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의 소외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자유의 만끽은 방종(放縱)이요 자기 본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인간의 진정한 자율성(true autonomy)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의 자유다. 인간 자유의 진정한 기반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보존이며, 그가 주시는 계명을 지킴이다. 이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고 얽매는 사슬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는 울타리요 보호막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근원적 자유의 가능성이란 역설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탕자의 진정한 자기 회복이란 그가 떠난 사랑하는 아버지로의 귀환에서만 실현된다.

모더니티(modernity)는 전통에 대한 거부와 자율적 인간 정신을 추구했으나, 이러한 모더니티의 극단성은 모든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를 산출했으며, 오늘날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가 지켜온 이성적 기준과 규범까지 해체함으로써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의 사람들은 구약 사사기의 사람들처럼 윤리와 가치의 규범을 해체하고 각자 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여태까지 금지되어온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점차로 주변적 사례가 아니라 정상적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생물학적 성(sex)이 무시되고 사회학적 성(gender)으로 대체되면서 오늘날 21세기 사회에는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성문화혁명이 몰려오고 있다.

(6) 탕자가 돌아 왔을 때 하늘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라고 말했으나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단지 잃어버린 아들이 되돌아 온 것만으로 아버지에게는 족하다. 아버지는 실적이나 조건을 보지 아니하신다. 단지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 온 것만으로 족하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포용한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목을 안음과 입맞춤은 용서의 표시이다(삼하 14:33; 창 45:15). 아버지는 종에게 잔치를 배설하라고 명하신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2). 반지를 끼우는 것은 그가 완전한 자격으로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폐인 된 아들을 단지 응급조처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폐인 된 자리에서 새롭게 아들된 자리로 끌어 올린다.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변혁적 사랑(transforming love)이라는 것을 시시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옷을 갈아 입힌다. 그 이유란 잃어버린 아들이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3). 아들은 자기 몫을 챙기고 아버지를 떠났을 때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상태에 있어서 이미 죽었다. 그런데 그 죽었던 아들이 회심함으로써 살아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율적으로 살면서 허랑방탕했던 자신의 죄을 뉘우치고 스스로 아들의 직분을 포기하고 품꾼의 하나로 보아달라고 하는 비천(卑賤)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이 좋은 옷이란 은총의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다. 에덴에서 지식의 실과를 먹고 범죄하여 수치를 느끼고 수풀에 숨은 최초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창 3:21).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권면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라칭거는 다음같이 해석한다: “교부들에게는 이 ‘가장 좋은 옷이란 잃어버린 은총의 옷’을 가르키는 것으로 인간이 태초에 입고 있다가 죄를 짓는 바람에 잃어버렸던 옷이다. 그런데 이제 그 ‘가장 좋은 옷’을 다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로서 입는 옷이다.”

아들의 돌아옴과 아버지의 용서는 그를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존재 관계,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존재 관계가 바로 인간의 운명을 규정짓는 것이다. 다른 동식물이나 피조 생물들은 흙으로 지음으로 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흙으로 빗어졌으나 하나님의 입김(성령)으로 생령이 되었다.

(7) 많은 죄 지은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아나 아버지 곁에 있는 큰 아들은 알지 못한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환영하는 태도에 비교하여 맏 아들의 동생에 대한 태도는 대조적이다. 맏아들은 성실한 아들이었다.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는다(눅 15:25). 맏아들은 한 종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종은 대답한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눅 15:27). 이에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기는 커녕 화를 내면서 환영 잔치에 들어가지 아니하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는 데 아버지에게 불평을 틀어 놓는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맏아들은 성실한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밭을 잘 관리하였고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였다. 그러나 맏아들은 그가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있다는 사실, 그가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모르고 살았다. 맏아들은 자신의 처지만 생각했고 잃어버린 동생의 처지를 생각하지 아니했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은 아버지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맏아들은 잘 믿는다는 신자들 오늘날 교회 안의 우리들일 수 있다. 율법의 차원에서 우리 신자들은 우리의 공로와 의만 내세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율법의 의는 우리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자 한다. 이에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그 이유를 말한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 31-32). 맏아들은 자신이 항상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누린 존재적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존재적 은혜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아버지의 것이 모두 자기 것이라는 존재적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작은 아들과 맏아들이 느끼는 은혜는 그 순위가 바뀌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를 그의 잃어버린 관계에서부터 회복함으로 인하여 아버지와의 무조건적 사랑을 깊이 인식했다. 그런데 맏아들은 성실함으로 인하여 그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존재적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8) 종교적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의 위험성

비유의 마지막 단락(25절-32절)은 처음 1-2절에 세리와 죄인에 대조시킨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입장을 재론하고 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로 가까이 오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에 대하여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하였다. 예수의 비유 관점에서 보면 세리와 죄인은 둘째 아들, 종교적 경건을 내세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맏아들에 해당한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분개하고 있는 맏아들을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보다 덜 사랑스럽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는 아버지가 맏아들보다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작은 아들에 대한 기쁨이 맏아들에 대한 기쁨보다 큰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보다는 복음의 우위성을 말하는 것이요, 인간은 율법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얻고 새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교훈해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비유는 종말론적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잃은 자의 구원이라는 종말 때의 하나님 사업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할 마음의 준비가 안된 사람은 이로써 영생의 잔치에 스스로를 배제할 위험에 내맡긴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자신보다는 남을 낫게 여기고 이웃 사람의 구원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겸손한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성경은 종말론적 심판의 준엄함에 대한 측면을 항상 우리에게 교훈해주고 있다.

3. 선한 목자 비유

1)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37): 이웃 사랑

(1)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선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 비유는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어느 율법사가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 예수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 25b). 율법사는 예수가 이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자 하였다. 예수는 율법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통하여 스스로 대답하도록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사는 정확하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웃 사랑이라는 토라의 교훈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율법사는 예수에게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질문한다. 이에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 30-37).

예수는 비유에서 유대사회의 지도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행한 일을 당한 자를 당연히 돌봐줄 이웃이라고 생각한 통념을 깨뜨리고 전혀 이웃으로 생각치 않았던 이방인이 불행을 당한 자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 진정한 이웃이란 단지 고향이 같다거나, 같은 학교를 나왔다거나, 인종이 같다거나, 피부색이 같다거나, 가문이 같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족이 다루고, 언어가 다르고, 성이 다르고, 고향이 다르고, 학교가 다르고, 가문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주고, 대화하고,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자가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예수 자신이야 말로 당시 유대사회에서 변두리 출신으로 병든 자와 헐벗고 소외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2) 진정한 신앙은 이웃 사랑 실천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으로 결속된 공동체로서 이웃은 이스라엘 민족에 속하는 동족이었다.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누구나 서로에게 책임이 있으며 공동체 전체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각 개인은 자기 동족을 전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섞여 함께 사는 이주민만 동족사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단자, 밀고자, 반역자들은 이웃으로 간주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합인으로 멸시받았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시하신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노상 강도짓이 자주 발생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았으나 지나쳐 버린다. 이들은 전문가들로서 종교적인 열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신앙 문제와 율법 문제를 놓고 서로 논쟁하며 서로 간에 경계선을 긋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의 곤궁을 간과하거나 그것을 보고도 못본체 지나쳐 버리는 위선(僞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상처에 싸매어주고 그를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교의 모든 종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경멸을 당했다. 비유는 이런 사마리아인이 올바른 일을 행하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의로운 일을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뽐내는 집단 밖에서도 하나님의 뜻(자비와 긍휼)을 그들보다 훨씬 더 잘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교훈해준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잘 알았으나 율법의 기본 정신은 조항을 외우거나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정한 신앙인이란 단지 율법 조항을 외우고 적용하는 자가 아니라 이웃의 곤경을 보고 이를 도우는 사랑과 긍훌의 마음을 가지는 자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긍휼히 여기고 그를 도와 줄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이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3)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리적 인간 이전에 참된 이웃으로 나타나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진정한 신앙인이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율법을 공부하고 외우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적용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종교적이고 교리적 행위를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이웃 사랑의 교리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실천하지 않는 위선적 삶을 살았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소위 보수정통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는 성경 제일을 내세우고 하나님 주권을 내세우나 그들의 삶으로는 인본주의적으로 교단 연합 사업 선거에 돈봉투를 돌리고 사람들을 돈봉투로 회유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교단 일(심지어 신학대 총학장 선임)을 하는데 의당히 촌지(寸志)를 요구하고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권무술수를 사용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보수정통주의자라고 하나 실천적으로는 무신론자들이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심판날 다음같이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0-23). 자신들이 교리적으로 보수 정통을 내세우는 자들은 혹시나 이러한 실천적 무신론적 삶을 살지 않는가 깊이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라고 증언한다. 바울이 증언하는 것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표적과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삼층천의 비밀을 안다고 하드라도 그에게 성화(聖化)된 겸손과 자기 비움이 없으며, 이웃 사랑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령의 역사의 본질은 표적이나 능력을 통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항상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철저한 관리를 통한 자기 비움과 겸손이요 섬김이다.

(4) 인류동포주의

여기서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특권 계층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멸시를 받은 무명의 사마리아인이다. 그는 사회에서는 이방인으로 취급받았고. 강도만난 자를 구해줄 아무런 사회적 지위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만나 쓰러진 자를 불쌍히 보고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를 주막에 데러다 재우고 그의 숙박비까지 부담하여 그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사마리아인은 비록 이방인이나 예수께서 교훈하신 원수 사랑 계명을 실천한 자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b-28).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지만 내면의 긍휼과 사랑의 명령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익명의 다른 사람, 강도에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아가페의 실천자였다. 아가페란 “내가 해준 만큼 너도 해달라”(do ut des)는 등가 원칙을 깨뜨리고, 조건 없이 어려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긍휼행위다. 사마리아인은 아가페를 실천하였다. 그의 행위는 모든 인습적인 관행과 규범을 초월하였다. 이러한 자에게 예수가 말씀하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이라는 새로운 규범이 타당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다. 이 새로운 규범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도움이 필요로 되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인류동포주의(cosmopolitanism)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주는 메시지는 이웃 사랑, 더 크게는 인류동포주의로서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오늘날 지구촌 사회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대기업의 공세는 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19세기와 20세기에 이어 많은 토착민들의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을 만들어 내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 속에서 많은 토착민들이 저들의 토지와 삶의 근거를 상실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신매매, 섹스관광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오늘날 기업하는 기독실업인들은 저들이 신식민지 수탈의 대상이 아니라 개발과 발전의 혜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류애 경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각 나라의 정부기구와 대기업도 이들 저개발국가들이 개발과 발전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 이들 노동력이 착취되지 않고 생존권과 인권이 존중되고 성장의 혜택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기독론적 해석: 이웃 사랑의 동력자로서의 예수는 모든 종교를 능가

우리들은 교부들이 이미 시도한 바같이 이 비유를 기독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이란 예수 자신을 가르킨다고 말할 수 있다. 강도만나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어 사탄에게 침탈당한 인간 자신이다. 그리고 그를 구해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 자신은 당시에 제사장이나 레위인 등 종교 특권층으로부터 경멸받았던 이방인이었다. 예수는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 지역으로 있었던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가난한 농촌출신으로서 정규적인 율법공부도 하지 못한 촌부(村夫)였다.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을 공부했으나 율법이라는 제도에 얽매어 있었다. 이처럼 사탄에 의하여 강탈당하여 하나님 형상을 상실하여 쓰러진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령의 기름과 보혈의 포도주를 공급하여 살리고 교회라는 주막에 데리고 가서 쉬게 하고 중생의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해준 것이다.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은 진정한 목자다. 그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 5:44)고 이웃 사랑을 가르쳤다. 예수는 가르치신대로 그의 생명을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주셔서 그의 생애 자체가 아가페 사랑의 실천이었다.

참 빛이 어두움에 비쳤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강도만난 자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참 빛을 비춰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자연적 빛인 참 빛을 받아 새 생명, 광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참 빛을 받아 새 생명의 빛을 얻는 신자들은 초자연적인 빛인 참 빛을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 이웃 사랑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처소에서 낮선 사람들에게 비쳐줄 수 있어야 한다. 신자들은 이 사랑의 빛을 기독교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타종교인들(힌두교인, 무슬림, 불교인, 무교인, 유교인, 도교인, 각종 신비종교인들 등)에게도 비쳐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교리는 바른 가르침이긴 하나 저들을 설득할 수 없으나 우리가 가진 이웃 사랑은 보편성을 지니고 저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신자들이 실천하는 이웃 사랑은 타종교인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성에 새로운 점화(點火)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여기에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교 간의 대화의 새로운 길이 있다.

2) 선한 목자 비유(요 10:1-15)

(1)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선한 목자(the Good Sheperd) 비유로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18).

선한 목자(the Good Sheperd) 비유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비유로서 예수가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명료히 드러내시는 설교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나 삯꾼이나 절도나 강도는 이리가 오면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달아나 양들이 희생을 당한다. 삯꾼이나 절도나 강도는 거짓 선지자나 정치 지도자나 양들을 수탈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선한 목자다.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양들을 구원하는 선한 목자다.

(2) 예수는 양의 문

예수는 그를 통하여 양들이 우리(sheep pen)를 들어 오고 나가는 통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요 10:2)다.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문을 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들은 따라간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 10:3-4). 팔레스타인에서 밤이면 울타리나 담으로 에워싼 구역 안으로 양떼를 몰아 넣었으며, 문지기가 그리로 들어가는 문을 지켰다. 이른 아침에 목자들은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양떼를 끌고 나와 목초지로 인도했다. 양들은 양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가고 나가면서 잃어버리지 않고 생명의 손실 없이 사육되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인도함을 따른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예수가 문이라는 사실은 그의 양들인 신자들에게도 해당한다(요 10:9). 오직 예수 안에서만 생명으로 가는 문이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

(3) 문을 통하지 않는 자들은 절도, 강도, 삯꾼

예수는 양의 문(gate)을 통해서 들어 오신다. 그래서 그는 적법한 목자임을 입증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이 유일하게 적법한 출입문이다(요 10:7). 그를 제외하고 혹은 그를 스쳐 지나서 양떼에 손을 데려고 하는 자들은 절도요 강도이다. 절도나 강도는 목자가 아침에 나타나기 전에 밤중에 온다. 양의 목자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나, 절도나 강도는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요 10:1)다. 절도나 강도나 삯꾼들은 예수보다 먼저 온 자들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요 10:13). 양들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한다(요 10:5). 예수는 이 비유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절도요 삯꾼으로 암시하신다. 그 이유는 이들이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예수의 증언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6). 그리고 절도요 강도는 그외에도 정치 지도자나 거짓 예언자들나 거짓 메시아 등을 의미할 수 있다.

(4) 예수 외 다른 구원자를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 내지 종교혼합주의 거부

선한 목자 비유는 양의 문인 예수 외에 다른 문으로 양을 인도하는 자를 절도, 강도, 삯꾼으로 비유하면서 예수 자신만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살린 선한 목자인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 비유는 오늘날 WCC가 1970년대부터 인도 신학자 사마르타 등을 종교대화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종교대화를 시작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사마르타, 니터, 토마스 등 인도신학자들은 성경을 타종교의 경전과 같이 취급하고, “타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김영한, “WCC 핵심 사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 2013년 한국복음주의 조직신학회 가을학회 논문발표, 나사렛 대학교. 조직신학 연구,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2014 봄 여름, 제20호, 15-17.) 이 종교대화 프로그램은 이미 1968년 스위덴 웁살라 총회에서 결의되었다. 1989년 산 안토니오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WME)는 “타종교 안에서 하나님은 발견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 비기독교 종교들 사이에서 사역하시고, 하나님의 구원능력에는 한계가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고 있는 하나님은 타종교인들의 삶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1990년 정초에 스위스 바아르(Baar)에서 WCC, 정교회, 가톨릭교회가 함께 논의하고 이끌어 낸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은 종교다원주의를 천명한다: “타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하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비를 다각도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http://www.cyworld.com/dudrka8888/4734415) 이 선언문은 창조주 하나님 내지 성령이 타종교인들 즉, “산 신앙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과, 타종교들 속에서 구원의 신비를 인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대화에서 그들에게 접근하는 자세라고 주장한다. 2000년 WCC 산하 CWME는 다음같이 ‘그리스도 바깥 구원 가능성’을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어떤 제한을 둘 수 없다. 이상의 두 문장 사이에는 긴장이 있으나, 이 긴장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2005년도 선교와 전도문서: “교회의 치유선교” 선언문 73항에서 77항까지에서 CWME는 “다른 종교에서 유래된 치유요법, 즉 다양한 전통종교의 처방, 요가, 영기(靈氣)요법, 수기요법, 선(禪) 명상 등에 대한 개방성과 의존성은 교회와 기독교 관련의료기관에서 많이 토의되는 주제이다”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른 종교의 치유의 영성과 호환을 희망하며 “모든 치료수단에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그리스도인은...기독교가 아닌 특정 종교의 세계관과 연관된 위험스러운 치료관습에 정성을 들인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은 겉보기에는 유익하게 보이는 치유 요법 뒤에 숨어 있는 악령의 힘이 자신의 파괴적인 모습을 감추고 있음을 잘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WCC는 “다른 종교에 뿌리를 둔 치료 요법과 기(氣)치료 등을 대할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치료방법과 고대로부터 내려온 영적 전승을 교회 자체 안에서 재해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중립적으로 주장한다. WCC는 치유에 있어서도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 영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WCC는 전통종교 유산으로 말미암는 치유를 기독교에 혼합주의적으로 수용하면서 창조자의 영과 창조신앙이 없는 범신론자들이나 다신론자들의 “능력”에 대해서 영분별의 필요성을 명료하게 주제화하지 않는다.

(5) 예수는 선한 목자: 양들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목자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리고 예수는 양들이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희생을 하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 삯꾼이나 품꾼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 획득이 주 관심사이며 양들과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양들을 잘 알고 이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예수는 자기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이 영생은 예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예수와 양들 사이의 관계는 그 깊이에 있어서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내적 관계에 정확히 상응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이 구절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증여하심을 통한 예수의 대속 사건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영원한 구속의 섭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 무리에 들어 올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이란 부활절 이후에 이방민족 선교에 의하여 복음을 믿게 될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시사해주고 있다.

(6) “나는... 이다”(ego...eimi, I am...) 어법: 메시아적 자아의식 표현

예수는 “나는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이다“ 라고 “나는.. 이다” 어법을 사용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a),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b),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나는... 이다“의 어법은 이미 구약에서 절대적인 어법으로 나타난다: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b),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1),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사 48:12b). 구약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어법은 하나님이 이방에 포로되어 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 세상의 유일한 주관자요 주관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이다“ 어법은 예수 자신이 일반 사람이나 사물과 일치되는 내용을 넘어서는 계시적 절대적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έγὼ καί πατήρ έν ἐσμεν, The Father and I are one, 요 10:30). 이 문장은 예수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절대적 어법이다. 이러한 어법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그의 신성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수는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자기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8-11). 예수는 이 문장에서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격됨을 천명하신다. 우리는 그의 어법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한 것처럼 나사렛 예수가 자기의 메시아됨에 대하여 회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성령으로 내면적으로 충만한 메시아적 자아의식 속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7)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지닌 메시아인 예수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 17). 예수는 자신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예수는 자신의 권능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말씀하신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 17). 예수는 자신이 가진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여기서 나사렛 예수가 하신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을 수록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말씀은 역사적 예수의 원천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핵심을 드러내는 계시적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한다. 안식일에 베데스타 연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도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여 대답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이러한 예수의 대답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를 더욱 없애고자 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요 10:33b)이라는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는 그 증거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음과 자신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메시아적 권능 사역과 자신 안에 아버지의 내주(內住)를 증언하신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이 모든 예수의 말씀과 치유에서 나타난 권능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명료히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인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재화된 것이다.



4. 불의한 자 비유

1) 부정직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1)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로운 처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경감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부정직한 청지기(the Dishonest Steward) 비유를 말씀하신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4절)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13).

부정직한 청지기(the Dishonest Manager) 비유에서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이 자신이 행한 사실을 듣고 자신을 해고할 것을 알고 이에 대비한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그들의 빚을 감면해준다. 교활한 청지기(shrewd steward)의 행한 일을 들은 주인은 그를 칭찬한다. 비유가 주는 가르침은 사라질 재물에 집착하지 말고 주변의 가난한 자들과 소유를 나누어 영원한 거처(eternal dwellinghouse)에 저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재물(wealth)을 남용하여 잘못을 범했을 때, 사회적으로 소외된 어려운 자들에게 저들의 빚을 감해주는 방식으로 불의한 재물을 바르고 충실하게 처리할 때 이들이 우리를 영원한 삶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재물은 소멸하지만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재물에 대한 지혜로운 사용법 교훈: 재물을 가난한 채무자들에게 나누어 줌.

예수는 세상에서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기 위해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려주신다. 부정직한 청지기는 어느 부자의 재정관리를 담당하였다. 그는 주인의 재정을 관리하는 전반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고, 심지어는 주인의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다. 이런 직무를 위임받은 청지기는 청렴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 청지기는 자신에게 위탁된 자금을 잘못 관리하여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방만(放漫)하여 주인의 돈을 유용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 받은 주인은 청지기에게 “보던 일을 셈하라”(눅 16:2)고 위탁된 일에 대한 결산을 요구하였다. 결산을 본 후에 그 청지기를 해고하기 위하여 회계 관련 서류 제출을 요구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직무 사용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신다.

(3) 해고를 면할 묘안으로 청지기는 어려운 자들의 빚을 탕감.

청지기는 앞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궁리를 한다. 그는 노동을 하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 자산관리를 불실하게 한 전과(前過) 때문에 그를 다시 재정관리로 고용할 자도 없다. 그리하여 그는 빚진 자들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교활한 안을 생각해 낸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빚을 삭감해준다. 유대인들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이자를 부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주석가들은 그 부자가 채무장부에 이자를 기록하지 않고 숨겼을 것이며 이 청지기가 그 돈을 횡령하여 재산을 축척하여 정식으로 액수를 기록하지 않고 숨겼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빚의 액수를 줄여준다고 해서 주인에게 손해가 될 것이 전혀 손해가 될 것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Bruce B. Barton, Dave Veerman, Linda K. Taylor, Luke, 『누가복음』, 620). 그는 이것이 나중에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당시 거래 계약은 기름과 밀인데 이것은 대표적인 생필품이었다. 토지를 근거로 한 임차 계약을 포함한 상업적 거래이었을 것이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모두 불러 상당한 빚을 탕감해주었다. 청지기가 행한 일은 문서 위조(僞造)요 사기극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교활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단 빚이 면제되자 청지기의 이러한 업무처리는 그 주인이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게 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의 두 가지 악한 행위(낭비와 문서조작)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하였다. 예수는 이를 세상의 관점보다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다.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는 구절이다.

(4) 세상의 아들이 빛의 아들보다 더 지혜롭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교(秘敎)지혜로 표현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more shrewd)”(눅 13:8b).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하는 내용과 비교(秘敎)지혜는 문맥상 곧 바로 연결되지 않는 점이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의 지혜는 이기적인 지혜라는 점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은 불의한 재물을 자신의 이득과 욕망 충족을 위하여 사용한다. 빛의 아들들은 세상의 불의를 미워하고 이 세상 사람들과 분리된다, 이러한 이분법이 초기 기독교에 확립되었다. 쿰란 문서에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에 관한 이원론적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IQM). 예수께서 빛의 아들들과 이 세대의 아들들이라는 이원론적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는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비교하기 위함이다. 비유에서 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의한 청지기를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하면 민첩하고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데, 선민이라는 자들이 임박한 종말에 대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민들은 시대에 민감하지 않고 대처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신앙과 성실성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자기 생존과 유익을 위해 술수를 쓰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자기 소유를 팔고 구제함으로 하늘나라에 저축하는 지혜를 말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자기 이윤과 욕망 충족을 위해 온갖 지혜를 창안해 낸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젠더시대에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은 세상의 아들들로서 자기들의 유익과 권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이기적 지혜를 발휘한다. 동성애를 인권으로 포장하여 동성애를 합법화하려고 하고 이들은 사회적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동성애 비판자들을 처벌하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한다. 이들은 이웃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재산이나 권리에 있어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빛의 아들들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이웃과 타자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하고 헌신하고자 한다. 오늘날 구미(歐美)사회에서 세상의 아들들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 빛의 아들들에게 큰 법적 손실을 끼치고 이들이 가진 양심, 표현, 출판, 신앙의 자유에 법적 족쇄를 채우고 있다.

(5)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것이 영원한 보상을 준다: 지상의 선한 일은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진다.

부정직한 청지기의 행위가 칭찬받는 이유는 어려운 자들과 재물의 나눔이다. 예수는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이란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을 참된 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우상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의한”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다. '불의한 재물'이란 부정한 재물을 뜻한다기 보다는 하늘의 보화와 대조되는 세상적인 재물, 즉 불의한 세대에 속한 재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unrighteous mammon)이란 “세속적인 소유,” 즉 이 불의한 시대의 특징을 지닌 재산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그것은 돈만을 뜻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재화들, 그리고 실로 우리가 여기서 갖고 있지만 내세로 가지고 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뜻한다. 재산, 능력, 학식, 시간, 명예, 권력 등은 이 생(生)에 속해 있지만 우리가 내세에 가지고 갈 수 없다.

'친구를 사귀라'란 세속적인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내세에 들어갈 때 일어나는 일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가지고 있는 재산, 능력, 학식, 시간, 명예, 권력을 사용하는 결과에 따라 결산(심판)을 하게 된다. “재물이 없어질 때에”(눅 16:9)란 우리가 죽을 때를 말한다.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행위구원으로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으로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가난한 자들과 물질을 나누어야 한다. 성도들은 저들의 친구가 되도록 우리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것은 도움을 받는 가난한 자들이 친구가 된 우리를 천국에서 영접할 것이라는 의미다.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자는 세상이 끝날 때 영원한 처소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는 말씀도 이웃에 대하여 위탁된 선물과 과제를 성실하게 관리하는 자가 천국에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뚯한다. 그리고 사회적 선행은 썩지 않고 “너희의 것”(τὸ ὑμέτερον)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우리를 영접함은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는 보상이 될 것이다. 신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돕기 위하여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거나 전도와 선교와 공익의 목적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지상의 투자는 천국을 위한 투자가 될 것이다.

(6)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것에 재물을 사용하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불의한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길은 자기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이란 불공평하고 불의가 편재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나 이 재물 자체는 중립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용권을 위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과 지배욕이 작동하게 될 때는 재물은 불의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된다. 그러나 이 재물이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데 사용되면 재물은 하늘의 무한한 보고(寶庫)가 될 수 있다. 재물의 성격은 사용하는 자에게 달려 있다. 불의한 재물을 의롭게 사용될 때 불의한 재물은 의로운 재물이 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e)는 독일 사업가인 쉰들러(Oskar Schindler)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들 집단 처형 가운데서 나치 독일 장교를 돈(뇌물, 불의한 재물)으로 환대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어 천 2백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살리는 실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들려주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자 비유는 쉰들러의 이야기에서 가장 바르게 적중된다.

독일 나치시대에 어디서도 피난처가 없었던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공장은 안전이 보장된 유일한 천국으로 통했다.
그 과정에서 쉰들러는 '한 인생 생명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다.
그러나 절명의 위기가 곧 닥쳐온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유대인은 아우슈비츠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린 것이다.
그때 그는 잠 못이루는 번민 끝에 놀라운 선택을 한다.
수백만 마르크의 돈으로 유대인의 생명을 산 것이다.
'돈'에서 '생명의 고귀함'으로 그의 가치관이 확고하게 전환된 것이다.
무려 1,200명의 유대인이 그를 따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7개월 후 독일이 항복하자 유대인들은 자유인이 되고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별의 순간,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만든 금반지를 그에게 선물한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 그는 곧 전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이 글귀를 보고 통곡한다. 그리고 외친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좀 더 구해 낼 수 있었어.
왜 이 차를 안 팔았지. 최소한 열 명은 구했을텐데.
왜 이 금뱃지를 팔지 못했지. 두 명은 구했을 거야.
최소한 한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구하지 못했어.....".
그의 통곡은 계속되었다.
쉰들러야 말로 불의한 재물로 죽어가는 수많은 유대인 생명을
구해낸 불의한 재물에 대한 충성가라고 말할 수 있다.

(7) 재물(財物)신(神)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은 재물(돈)에 신기한 능력을 부여하셔서 재물은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교훈하신다. 돈은 물질이기 때문에 돈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과 권력을 섬기는 것이 된다.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재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인간이 자기 욕망과 권력과 명예 추구를 버리기를 명하시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돈이나 부(富)가 아니라 돈과 부를 취급하는 인간의 태도다. 성경에는 바른 신앙을 가진 부자들(아브라함, 욥, 다윗, 솔로몬, 아리마대 요셉, 고넬료 등)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재물이나 권력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비극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이것들을 섬김의 대상(물신, 物神)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는 예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불의한 재물(이웃 착취와 이웃과의 불화)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재물 섬김과 불의한 행위를 버려야 한다. 돈이나 권력이나 재물은 인간의 목표가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다. 돈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란 지혜롭게 맡아 관리하고 이웃과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맡기신 대부금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섬긴다면 세상의 부나 권력이나 명예에서 자유로운 참다운 부요(富饒)함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회적 공의를 이루도록 해야 하고, 재물이 하나님 섬기는데 사용되도록 하는 참된 부요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8) 비유 해석에 있어서 종말론적 차원(하늘 나라의 영원한 보상을 위해 재물 사용)을 놓지 않아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오늘날 신약학자들의 주석에 있어서 다드(C. H. Dodd)는 미래 준비 민첩성, 키스트메이커(Simon J. Kistemaker)는 즉각적인 상황판단에 중점을 둔다. 이들에 의하면 주인이 자기를 해고하고자 하는데 채무자들에게 빚을 감해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민접한 대처, 삶의 위기에 대한 상황판단과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포기)하여 대처하는 태도 변화가 비유의 중점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미래 준비에 민첩하며 직면하는 위기 속에서 즉각적인 상황판단과 대처를 강조하는 장점이 있으나, 재물을 소외자들과 나누며 천국에 저축하여 하나님과 결산하는 종말론적 차원을 약화시키고 있다.

윌리엄(F. E. Williams)는 윤리경영적 시사를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경영학에서 대리인 이론으로서 위임받은 청지기의 권한을 사용하여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준 청지기의 약삭빠름에 대해 주인이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이 청지기의 자기를 위한 경영적인 약삭빠름은 오늘날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태도이긴 하다. 하지만 사회적 소외자들에 대한 긍휼과 나눔의 정신으로 가난한 자들과 재물을 나누면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계산을 약화시키고 있다.

데릿(D. M. Derett)는 실리와 평판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중동문화의 명예와 수치의 관점에서 비유를 해석하는 관점이다. 돈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중동문화에서 주인은 청지기의 탕감으로 자신이 관용하다는 주민들의 평판을 즐겼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출애굽기 22장 25절(“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이 주인이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한 배경으로 본다. 피츠마이어( J. A. Fitzmyer)는 소작농을 배경으로 하는 부재지주의 경영인으로서 청지지가 탕감한 이자란 청지기의 구전(口錢)로서 그가 사업상 얻어질 자기 몫을 포기하였다고 해석한다. 이 관점은 비유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 역시 현세적인 실리와 평판에 치중함으로써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 재물을 사회적 소외자와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하나님과의 종말론적 결산을 등한시하고 있다.

이 비유의 더 중요한 의미는 임박한 미래 대처, 즉각적인 상황판단, 윤리경영적 시사, 실리와 평판이라기보다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 앞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가난한 자들의 빚을 청산하는데 재물을 의롭게 사용함으로써 직무를 지혜롭게 했다는 것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이란 각종 탐욕(권력과 뇌물로 인한 부정부패)으로 오염된 것일찌라도 가난한 자들의 구제, 사회적 자선사업, 채무자들의 빚 탕감 등으로 선하게 사용될 때 현세적 삶의 개선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속적 배당금이 된다.

재물이란 죽음의 목전에서 더 이상 효용성이 없어진다. 재물은 지나가는 세상과 더불어 없어진다. 재물은 사회적 약자들의 구제 등 선한 용도로 사용될 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지속적인 것으로서 가치성을 발휘할 수 있다.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빚 진자들의 빚을 탕감시킨 데 사용한 것처럼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도우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불의한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불의한 행위를 회개하도록 고무한다.

(9) 하나님 나라는 변혁적 정의를 가르친다: 하늘나라의 경영방식은 세상경영방식과 다르다.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해고될 것을 알고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빚을 경감해 주였다. 그런데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의 일을 지혜로운 경영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경영은 세상적인 경영에서는 정말 미련한 짓이며, 영구히 퇴출될 경영방식이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경영은 세상 방식과 다르다. 하늘나라 경영은 채무자들의 빚을 경감해주는 경영이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의 빚을 경감해주었다. 불의한 청지기는 해고된 후의 대비로서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가 생각하여 빚을 감해주는 이기적인 선을 행했다. 예수의 눈으로 볼 때 그 청지기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의 단호한 행동은 모범적이다. 이 일로 인하여 주인은 채무자로부터 자비하고 관대한 분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음으로 주인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8절).

주인은 하늘나라의 경영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그만 선행을 크게 보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이를 사용하신다. 조엘 그린은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Kingdom Economics)이라고 붙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호의의 확장에서 증명된다.“ 청지기의 채무자 탕감 목적도 주인의 유익보다는 빚진 자들로부터의 호의를 입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다.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자에게 참된 것을 맡긴다”(눅 16:11)는 의미는 부도덕한 청지기가 가난한 자들과 재물을 나눔으로써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정의(正義)는 이기적 정의였다. 하지만 주인은 불의한 청지가의 정의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포상해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정의(transforming justice)를 말한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주인은 사랑과 자비의 분이시며 우리의 자그만 이기적 정의 자체도 높혀서 차원 높은 진정한 이타적 정의로 만드시는 분이다. 이기적 정의를 이타적 정의로 높이는 것이 변혁적 정의다. 하나님 나라에는 죄인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은혜로 허물을 덮어시는 초풍성의 은혜 법칙(a law of grace of superabundance)이 지배한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변혁적 정의다.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란 나의 행한 대로 그 행위만큼 나의 몫을 보상 받는 정의다. 이것은 세상의 율법적 정의다. 이에 반해서 변혁적 정의(transforming justice)는 하늘나라의 정의로서 세상의 정의보다 질적으로 차원 높은 정의다. 전혀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었고, 그래서 주인이 관대하고 선한 분이라는 칭찬을 받게 했다는 비의도적 결과만을 가지고 의(義)를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변혁적 정의다. 이 하나님의 변혁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세상의 불의한 재물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거주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2) 불의한 재판관 비유(눅 18:1-8)

(1) 간청하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 불의한 재판관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불의한 재판관(the Unjust Judge) 비유로 가르치신다: “어떤 시(市)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2-8).

불의한 재판관(the Unjust Judge) 비유에서 한 불의한 재판관이 자기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는 과부의 지속적인 간청을 무시하다가 번거롭게 함을 인하여 들어 준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눅 18:1).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이 할찌라고 과부의 지속적 간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늘 아버지는 그가 택하신 자들의 모든 간구를 넉넉히 들어주신다고 교훈하고 있다.

(2) 하나님은 밤낮 간구하는 택한 자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간청을 무시하다가 그녀가 끈질기게 간청하니 번거로움을 인하여 그녀의 원한을 풀어줄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4b-5).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6-7). 예수는 무정하고 불의한 재판관도 번거로와서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성도들이 간구를 들어 주실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무속 신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헌신의 삶 없는 재물 헌납은 무속 신에게 드리는 것으로 인격적 신에 대한 진실한 관계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무속 신은 재물에 관심을 가지고 윤리성에 대한 관심은 없다. 무속 신 제사자들은 단지 무서워하여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신에게 뇌물을 드리는 것과 같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드린 제물에 대하여 예언자 사무엘은 다음같이 비판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순종과 인격적 헌납없는 사울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을 지니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기름이나 물질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물질에 깃든 제사자의 마음, 순종을 흡양하신다. 사울은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사는 방편이나 은혜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은사는 그칠 수 있으나 은혜는 언약관계로 지속한다.

(3) 인자가 올 때는 믿음을 보기 어려운 시대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b). 인자가 재림할 때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익으며 믿음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는 말세에 관한 예수의 예언적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0-12). 역사적으로 각 시대마다 큰 환란이 있었다. 476년 만족(蠻族, 게르만 족)의 칩입에 의한 서로마의 멸망, 중세의 페스트로 인한 많은 인명 손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 무너짐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2001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미국 맨허턴 공격과 함께 이슬람 근본주의 알카에다 집단 출현, 2014년 IS(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그룹이 세운 이슬람국가)로 인한 지하드 전쟁과 반대자들 집단 처형, 중동지역민들의 난민생활과 유럽 주요도시의 테러, 문화적으로 성(性)자유화 물결 속에서 간통을 개인의 성적 결정권으로 인정, 서구사회에서는 성매매 허용, 동성애 인정과 차별금지법 제정 등으로 21세기 지구촌 사회는 새로운 성적 문화충돌로 고통을 받고 있다.

오늘날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였던 영국, 화란, 미국 등의 교회가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동성애 성직자들을 안수하기에 이르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부산물로 예수 외에 다른 종교의 구원자를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세력을 가지면서 주류 기독교를 점차 장악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때를 예시하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셨다. 과학기술의 고도발전과 첨단 기술이 인간 평균수명을 연장하여 100세 시대를 열면서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는 가운데 전통 기독교 신앙도 세속주의에 물들어 편의주의적으로 변질되고 있다. 20세기 세계교회사에 유래없는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도 교회성장의 동력이 된 성수주일, 주일저녁,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및 기도원 운동의 영성이 약화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와 한국기독교는 다시 한번 선조들이 가졌던 청교도 신앙, 말씀 묵상과 공부, 에배의 회복, 기도와 전도에 힘씀과 성령의 충만, 거룩한 삶의 회복이 요청된다.(김명혁, “신앙의 선배님들이 지녔던 복음의 영성,” 기독교학술원 영성아카데미영성학 수사과정 2016년 9월 22일 가을학기 강의 원고)

3) 세리와 바리새인 비유(눅 18:9-14)

(1) 두 부류의 인간: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부류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부류

예수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하여 “세리와 바리새인”(the Tax-Collector and the Pharisee) 비유로 교훈하신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0-14)

세리와 바리새인(the Tax-Collector and the Pharisee)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기도드린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에 반해서 세리는 성전 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멀리서서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드린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 중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들보다는 더 많은 좋은 일을 행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만과 자기 행위의 의(義)를 자랑하였다. 이에 반하여 세리는 자기 백성의 세금을 포탈하는 나쁜 짓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자기의 의(義)를 하나님 앞에 자랑했으나 세리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하나님은 전자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않고 후자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을 받아주신다.

(2) 하나님 나라는 겸손한 자들의 것이다: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에 자기 자신의 업적을 내세운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한 비애(悲哀) 때문에 그리고 회개와 속죄를 수행하는 관습에 따라서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였다. 이들의 경건성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에 정위되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 서서 기도하였다”(마 6:5). 이들은 자선할 때에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나팔을 불었다(마 6:2). 이들의 경건은 하나님의 영광과 죄인에 대한 긍휼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하는 위선(僞善)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만(自慢) 속에서 자신들이 내면적으로 처한 결핍과 곤경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의 외형적 기도나 금식 같은 행위는 심령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없었다. 이들은 동료 인간, 세리나 죄인들 등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졌다. 이들이 동료 인간에 대하여 눈이 멀은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진 불손한 태도에 상응한다. 하나님은 자만과 위선으로 경건을 치장한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만한 종교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이와는 반대로 세리들은 직업상 저지르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b)라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리를 의롭다 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번제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제사를 즐겨하신다고 고백하였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자의 것이며, 온유한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고, 주변의 악과 불의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들의 것이다. 이러한 자들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하고, 항상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의 뜻에 정위되어 있다.



5. 부유한 자 비유

1)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

(1) 가난한 자에 대한 축복과 부한 자에 대한 저주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부자와 나사로(The Rich Man and Lazarus) 비유에서 예수는 두 부류의 인간 형(型)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려준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in hell) the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19-31)

부자는 호의 호식하는 세상적으로 부유한 자들의 대표요 나사로는 부자들이 식탁에서 내던진 빵 부수러기 조차도 주워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대표다. 부자는 호화롭고 즐기고 방탕(放蕩)한 삶을 사는 자를 상징하며, 나사로는 세상에서 가난하나 경건한 삶을 사는 자를 상징한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을 깔보고 하나님을 비웃는 이들은 지상에서 성공을 거듭하면서 복이란 복은 다 누린다. 호의 호식하는 부자들은 마음이 공허한 사람들이고, 자기 안에 있는 공허함을 억누려는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비록 무화과 나무의 소출은 적으나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 보도된 예수께서 평지에서 행하신 축복과 저주 선언에 대한 일종의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0-26).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는 세상적인 부자에 대한 경고 내지 저주 선언과 세상적인 가난한 자에 대한 위로와 축복 선언이 동반되어 있다. 나사로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대표한다. 가난한 사람이란 경건성의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나사로는 죽은 후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은총과 영광을 차지한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 부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죽어 화려한 장례식을 마친 후에 “죽은 자들의 나라”인 음부(陰府)에 들어간다. 음부(hell은 희랍어 Haidēs, 희브리어 Sheol이나 Gehenna의 번역)는 선한 자나 악한 자를 막론하고 죽은 자들의 거처이다. 나중에 거의 배타적으로 죽은 악인들의 처소로 사용되어졌다. 음부는 지옥, 즉 악인들을 위한 형벌 장소다: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 13:28b).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3-14). 예수는 유신론적 사후세계의 관점에서 천국과 지옥을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현세에서 끝나지 않고 내세에서는 현세의 삶에 대한 판결로서 믿음의 선한 삶을 산 자들은 천국에서 복락과 안식의 삶을 살게되고, 세상의 열락과 악한 삶을 산 자들은 불못으로 불리워지는 지옥에서 보응과 고통의 삶을 살게 된다.

(2) 현세의 삶의 결과에 대한 내세 하나님 나라의 보상

비유에서 부자는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고 연락을 즐겼다. 거지 나사로는 피부병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에서 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워며 살았다. 거지 나사로가 신앙이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그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속에 안긴 것으로 보아서 살았을 때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안식(安息)하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청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5-26). 아브라함은 내세는 현세의 삶에 대한 결산이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는 건너갈 수 없는 심연(深淵)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에 부자는 청한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부자는 저승에서 온 사람이 현세로 가서 내세의 실재를 알리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부자는 저승에서 온 사람의 증언을 사람들이 믿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 지옥의 실재에 관한 징표로서 나사로를 저승에서 온 사람으로 자기 집 가족들에게 보내어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다.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성경말씀을 하나님 나라와 지옥 실재에 대한 유일한 증거와 표준으로 제시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거란 구약의 증거를 말한다. 오늘날 신약시대 우리들에게는 신약의 증거가 보태진다. 신구약 성경 말씀의 증거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저승에서 온 사람의 증언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는 인간의 체험적 진리로 대체(代替)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는 각종 각색의 인간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다양한 체험적 간증 이야기로 대체될 수 없다.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증거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최선의 증거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의 못자국을 만지고서야 믿는 도마를 행하여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나거나 내세를 보고 왔다는 신앙 간증이 반드시 기독교 신앙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나 박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동생 베다니 나사로의 부활 기적에 의하여 많은 평범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층에서는 최고의회가 소집되어 나사로 부활 기적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룬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군중이 동요하면 로마인들이 개입할 수 있는 안보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다. 이런 경우에는 나사로 부활 기적이 바른 믿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자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드는 것이다(요 11:45-53). 기적 신앙이 전도의 만능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나 박해의 계기된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 하나님 나라와 지옥의 실재 그리고 이 세상의 질서와 다름

이 비유는 단지 내세에 대한 상징으로 끝나지 않고 보이는 세상의 배후에 영적 실재로서의 하나님 나라와 지옥의 실재에 관하여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부자가 머문 곳은 하데스(Hades, 음부)라고 하는데 그곳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로서 나중에 죽은 자를 최종 상태에 가두는 게헨나(Gehenna, 지옥)는 아니다. 부자가 음부(陰府)의 불꽃에서 고통 중에서 괴로워하면서 목이 타 갈증을 풀도록 천국의 청량수를 그 손가락 끝에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청은 받아들려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상호교류 불가하며, 연결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국과 지옥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두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설교에서 자주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언급하신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눅 13: 28-29).

부자의 증언에 의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면(免)하기 위해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눅 6:29)이라고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것이란 율법과 예언을 경청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매우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의 의무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그리고 부자가 만일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받게 될 운명, 이행할 경우 받을 복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9-10). 이외에도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 여러 곳에 궁핍한 자 학대에 대한 형벌이 언급되어 있다(출 22장 20-26; 사 10:1-4; 암 2:6-16; 암 5:11-12; 암 8:4-10; 합 2:6-16). 죽은 자 가운데서 누군가가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에서 실현되었다. 그런데 모세와 예언자들의 음성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부활소식과 부활하신 분이 새롭게 하신 회개의 요구와 복된 소식을 쉽사리 거부한다. 율법과 예언이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는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나 성경은 곧 나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요 5:39)이라고 하셨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6086




비유 해석 중요 서적
  1.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의 比喩』 (분도출판사, 1974)
  2. 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이레서원, 2017)
  3.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 『예수님의 비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4. 존 팀머, 『하나님 나라 방정식: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새로운 접근』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5. 홍창표, 『하나님 나라와 비유』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4)
  6. 유진 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IVP, 2008)
  7. 권성수,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횃불, 1993)
  8.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본문, 해석 그리고 설교/ 적용』 (이레서원, 2001)
  9. 이국진, 『땅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하늘 이야기』 온라인 출간 서적: http://iwbs.org/?p=76</ref>
  10. Craig L.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Downers Grove: IVP, 1990)

비유 목록

번호 사건 마태복음(마태오복음서) 마가복음(마르코복음서) 누가복음(루카복음서) 요한복음(요한복음서)
1 자라나는 씨
Mark 4:26-29

2 두 빚진 자

Luke 7:41-43
3 말 밑의 등불 Matthew 5:14-15 Mark 4:21-25 Luke 8:16-18
4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Luke 10:30-37
5 밤중의 벗

Luke 11:5-8
6 어리석은 부자

Luke 12:16-21
7 지혜롭고 어리석은 건축가 Matthew 7:24-27
Luke 6:46-49
8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Matthew 9:17-17 Mark 2:21-22 Luke 5:37-39
9 강한 자의 비유 Matthew 12:29-29 Mark 3:27-27 Luke 11:21-22
10 씨 뿌리는 자의 비유 Matthew 13:3-9 Mark 4:3-9 Luke 8:5-8
11 가라지 Matthew 13:24-30


1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Luke 13:6-9
13 겨자씨의 비유 Matthew 13:31-32 Mark 4:30-32 Luke 13:18-19
14 누룩 Matthew 13:33-33
Luke 13:20-21
15 진주의 비유 Matthew 13:44-46


16 물고기를 모는 그물 Matthew 13:47-50


17 감추인 보화 Matthew 13:44-44


18 비용의 예산

Luke 14:28-33
19 잃어버린 양 Matthew 18:10-14
Luke 15:4-6
20 용서하지 않는 종 Matthew 18:23-35


21 잃어버린 동전

Luke 15:8-9
22 방탕한 아들의 비유

Luke 15:11-32
23 불의한 청지기

Luke 16:1-13
24 부자와 나사로

Luke 16:19-31
25 주인과 하인

Luke 17:7-10
26 불의한 재판장

Luke 18:1-9
27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Luke 18:10-14
28 포도원의 품꾼들 Matthew 20:1-16


29 두 아들 Matthew 21:28-32


30 악한 농부들 Matthew 21:33-41 Mark 12:1-9 Luke 20:9-16
31 혼인잔치 Matthew 22:1-14
Luke 14:15-24
32 잎사귀 나는 무화과나무 Matthew 24:32-35 Mark 13:28-31 Luke 21:29-33
33 미더운 종 Matthew 24:42-51 Mark 13:34-37 Luke 12:35-48
34 열 처녀 Matthew 25:1-13


35 달란트와 므나 Matthew 25:14-30
Luke 19:12-27
36 양과 염소 Matthew 25:31-46


37 혼인잔치의 비유

Luke 14:7-14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
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
가 익으면 곧 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씨앗의 성장 원인은 씨앗 그 자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밭에 뿌려진 씨는 그 생명이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자라갑니다.
스스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추수 때에 밭에 곡식이 충실하게 여문 것을 보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입니다.
이것은 천국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래한 후에 성장해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있기 때문에 그 천국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그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다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것과 열심으로 수고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심는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그 일을 했다고 해서 그 결실을 바로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심은 천국 복음을 자라나게 하여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수고의 결실을 즉시 얻지 못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마치 씨앗을 심은 농부가 추수 때의 결실을 바라보며 날마다 맡은 일을 힘써 수고하듯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을 갖고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실로 천국 복음을 결실 맺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 천국 복음을 사람들에게 심고 물주며 가꾸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고린도전서 3:5-7)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나 그런 자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풍성한 곡식의 단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천국 복음을 심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시 126:5-6, 고후 9:10).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수고하는 자세는 사역자들만이 가질 자세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자신들 안에 도래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그 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바라보며 그곳에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맡은 일에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는 그를 하나님은 능력으로 함께 하시면서 천국 백성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일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방해와 장애도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호시탐탐 갖은 계략을 써서 미혹과 대적하는 일을 병행하여 믿는 자들을 주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이로 인해서 자칫하면 믿음에 열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다든지 또는 배도의 길을 가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낙심하지 말고 참음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음 생활에 열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을 결실 보게 될 것입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느냐고 묻는 것은 굉장히 우매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베이컨은 우리가 학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편견이나 선입관에서 벗어나야 하며<우상론(偶傷論)>,
그 다음에 올바른 연구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귀납법>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쌓자는 것만이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사회적인 권력을 잡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당시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까지 들어 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 이로 인해 걱정만 쌓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속담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22장에서는 “듣지 않으면 마음에 번뇌가 없다.”는 말로 무소유와 비어있음의 자유를 말합니다.
자연의 순리에 의해서 저절로 되는 것에 대하여 굳이 알지 못해도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알면 번뇌가 생기고 병이 되어 몸과 마음을 해치는 일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의식함으로써 일을 망칠 때도 있습니다. <지네의 발 이야기; 15-20쌍, 170쌍>

물론 두 가지의 격언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 좋겠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선택을 하며 지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동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서 아는 것보다는 모르고 지내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또한 꼭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이루어지고 ......

“스스로(은밀히) 자라는 씨”라는 제목의 이 비유는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하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인간이 취해야 할 바와 하느님이 이룩할 바 사이의 관계와 한계를 밝혀줍니다. 씨 뿌리는 사람과 그 씨가 싹이 트게 하는 땅과 자라면서 열매를 맺게 하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사람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역사의 흐름을 사람이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만들어집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로 온갖 비리의 원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먹고 살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의 경제성장의 근간은 현장에서 묵묵히 일한 노동자들입니다. 지금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우리가 기억하거나 알지 못해도 그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땅은 싹을 틔우고 하늘은 자라서 열매 맺게 합니다. 그 과정이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하느님의 일은 땅과 하늘이 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다림과 여유, 그리고 겸손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의 결과를 너무 성급하게 취하려 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일을 내가 책임지고 완성하려는 것은 교만입니다.

설익은 열매를 취하거나 남의 몫를 빼앗는 사람들

인간이 담당하는 씨 뿌림의 원초적 노력으로 스스로 모든 것은 완성하겠다는 야욕이나 강제적 폭력을 구사하여 그것을 구축하려는 의지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경고의 메시지가 됩니다. 이 비유는 한 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활동에 있어서 자신의 정치적 힘이나 폭력의 사용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자기 행동의 결과를 바라면서 설익은 열매를 먹으려고 숙성제를 뿌리는 사람은 부도덕하거나 불의한 일을 합니다. 자기 행위에 대한 결과를 자기가 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역사에 대하여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일을 자화자찬하면서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자화자찬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들어줄 수는 있지만, 전혀 국민들의 의사나 지지율과는 멀리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요즘 정치인들과 공무원의 상태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쌀소득등보전직접지불금” 제도를 악용하는 것입니다. 쌀 직불제는 “정부가 쌀 지배 농가 소득을 일정 수준으로 보장하기 위해 지급하는 보조금으로 쌀 산지 가격이 목표가격보다 낮으면 그 차이의 85%를 현금으로 보전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정부가 쌀 시장 개방에 대비하여, 지난 2005년 기존의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공공비축제로 전환하면서 벼농사 종사자의 소득 보전 수단으로 고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직불금을 수령한 공무원이 4만 명이 넘는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가 공개되고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의 직불금 신청으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불법수령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칼뱅의 신정독재와 ‘성시화’ 운동

개신교 역사에서 하느님 나라를 조급하게 이루려고 독재로 제네바를 통치했던 사람이 바로 칼뱅입니다. 제네바는 당시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의 표준이 되었던 것이 성경이었고 시의회· 행정· 사법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을 구현하는 데 쓰였습니다. 바로 ‘신정독재’가 펼쳐졌던 것입니다.

칼뱅이 지배한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인구 1만 6천여 명의 소도시 제네바에서는 58명이 사형(교수형 13명, 참수형 10명, 화형 35명)을 당했고, 76명은 추방당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습니다.

가톨릭의 교조주의에 맞서 관용의 정신을 말했던 칼뱅이었지만, 그는 제네바를 지배하면서 불관용의 화신으로 거듭났습니다. 칼뱅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가톨릭을 이용해 삼위일체론의 오류를 지적한 스페인 신학자 세르베투스를 제거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후 나중에 그를 체포한 칼뱅은 모든 형벌 중 가장 고통스러운, 즉 산 채로 불태우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칼뱅이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업적을 남겼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개신교 최초의 ‘종교적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훗날 잘못을 깨달았고, 세르베투스가 화형된 자리에는 지금 “칼뱅의 결정은 종교개혁과 복음주의의 원칙인 ‘양심의 자유’에 어긋났다”는 자기비판을 담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 16세기 칼뱅의 망령이 21세기 한국에 부활했습니다. 서울을 봉헌한다고 망언을 한 이명박 씨를 시작으로 각 지자체별로 성시화 운동을 펼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시화 운동을 이끌고 있는 김준곤 목사는 “성시화 운동의 철학과 비전”이라는 글에서 노골적으로 “성시화 운동은 칼뱅의 제네바 성시운동을 모델로 한다.”고 합니다.

그들과 칼뱅이 이루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 그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을 향해 거룩해지는 일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욕심을 채우는 자기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욕망과 이익을 채우기 위한 나라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수고와 땀방울, 그리고 ......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40년을 살아오면서 구걸하던 사람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어리둥절해 하면서 몰려들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어찌하여 이 사람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우리의 능력이나 신앙심(경건)으로 그를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이 말은 자칫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를 높이거나 자기의 이름을 내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은 씨만 뿌리고 아무 일도 아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리고만 있으면 됩니까? 아니죠. 비록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땅과 하늘의 일이지만, 씨를 뿌리는 일뿐만 아니라 씨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밤과 낮에 자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일상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어쩔 수 없이 밤과 낮이 바뀌어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농부에게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고 일과입니다.

한 톨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 농부들의 수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밭을 갈아엎고 고르게 정리하고 잡초도 제거하고 거름을 주는 일은 농부의 일입니다. 쌀을 한자로 쌀 미(米)자를 쓰는 이유는 추수를 하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미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란 말은 쌀알 하나를 만들려면 농부가 일곱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쌀알 한 알 한 알이 모두 고생과 노력의 산물입니다.

씨 뿌리고 가꾸는 사람의 수고와 함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뿌려 놓은 씨앗이 당장 싹이 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싹이 틀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에는 열매로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 또한 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늘과 땅은 열매를 맺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더디더라도 기다려라. 믿음과 희망을 가져라. 하느님이 그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다. 씨 뿌리는 행동,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그 믿음, 그 모험이야말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모험 속에 하느님이 가담하게 되고, 그래서 추수는 약속됩니다.(시편 126:5-6) 그것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것을 가르치려고 할 때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깨닫게 하는 교육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다양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농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막 4장에는 씨를 주제로 하는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막 4:1-9절로서 씨 뿌리는 사람과 밭에 대한 이야기
둘째는 26-29절로서 저절로 자라는 씨에 대한 이야기
셋째는 30-32절로 겨자씨에 대한 이야기

오늘 우리가 읽은 제3 독서는 위 이야기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

막 4:26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이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씨 뿌림은 인간만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고대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씨를 다룰 줄 안다는 것입니다. 수렵활동으로만 살았다면 인간 문명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는 금년에 집 마당 한 구석에 대 여섯 평의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거기서 나는 채소를 먹습니다. 가장 일찍 나오는 것은 상추 종류고, 다음으로는 깻잎과 고추와 오이입니다. 앞으로 토마토와 가지와 호박이 나올 겁니다. 텃밭에 그물망으로 펜스를 쳤습니다. 펜스가 없으면 고라니가 다 먹어치웁니다. 동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수렵활동으로만 먹고 삽니다. 그들의 삶은 고단하고, 더 나가서 살벌하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인류 조상들도 그렇게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삶의 기본은 씨를 뿌리는 겁니다. 지금 본문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이런 전통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를 주인공으로 놓고 말씀을 따라가 보십시오. 어느 농부의 손에 의해서 밭에 심겨졌습니다. 그는 어두운 땅 속에 갇혔습니다. 종자 씨 주머니에 담겨있을 때는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괜찮았지만, 이제 땅속에는 외톨이로 그 상황을 버텨내야만 합니다. 낮에는 따뜻한 온기가 있지만 밤이 되면 춥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피부가 썩기 시작하다가 몸체도 썩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몸에서 가녀린 줄기가 삐져나오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자기 몸을 뒤덮고 있던 흙을 걷어내고 세상으로 머리를 내밀게 되었습니다. 땅 밖은 별천지였습니다. 햇빛과 물과 탄소가 자신의 몸 안에서 생리적 작용을 일으키면서 몸이 쑥쑥 자랍니다. 자신의 몸이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를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힘이 자기를 그렇게 밀어 올리는 걸 느낄 뿐입니다.

 

농부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다시 보실까요? 그는 추수 때가 올 것을 기대하고 씨를 뿌렸습니다. 그가 한 일은 좋은 씨를 가려서 보관하고, 밭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쟁기질을 하고, 적당한 퇴비를 주는 겁니다. 씨를 뿌리고 며칠 뒤에 밭으로 나갔습니다. 아주 작은 떡잎이 보입니다. 얼마 후에는 부쩍 자란 줄기가 보였습니다. 때가 되자 이삭이 패고 열매가 달렸습니다. 그런 과정에 농부가 직접 관여한 일은 없습니다. 그는 자고 씻고 먹고, 다른 일을 하다가, 나중에 씨가 움이 터서 자란 결과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 막 4:28절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여기서 강조점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모르는 것처럼, 또는 외면하면서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이 온갖 걱정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처럼 간단하고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잠간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다 저절로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들을 손에 꼽아보십시오. 공기가 없으면 5분 이상 버텨낼 수 없습니다. 공기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지구 생태환경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태양 빛도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물도 필수입니다. 빛과 물은 인간이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게 아닙니다. 공기와 태양과 물 때문에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대개의 걱정은 공연한 것들입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밤잠을 못잡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실연당한 것으로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물론 감당하기 힘든 큰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불치병에 걸린다거나 사업이 파산하면 크게 낙담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견뎌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극단의 경우보다는 사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서 근심 걱정에 휩싸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놓쳐서 벌어지는 비극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막 4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다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시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이 건설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 종류의 집단이 거기에 속했습니다. 첫째는 사회 혁명가들입니다. 이들은 무력 혁명을 꿈꾸는 이들입니다. 평소에 칼을 품에 숨기고 다니다가 친(親)로마 매국노 등을 처단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런 계열에 속한 이가 있었다는 게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둘째는 율법학자들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서기관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교 신학자들로서 율법을 연구 발전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일궈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실제 삶에서 완벽하게 구현해내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는 이들입니다. 나름으로 성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주장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통해서라도 사회 정의를 세워보려는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통해서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휴머니즘에 근거한 도덕과 윤리가 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그런 노력으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행하고 이루시는 겁니다. 이런 말이 멀리 느껴지시는지요. 오늘 제3 독서의 두 번째 비유를 읽으면 이 사실을 좀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겨자씨 비유

막 4:30-32절에는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겨자씨만이 아니라 씨는 다 작습니다. 코스모스와 채송화 씨는 웬만해서 눈에 잘 뜨이지 않습니다. 지난 몸에 저는 집 마당 여러 곳에 해바라기 씨를 심었습니다. 그게 지금 6,70센티미터 크기로 자랐습니다. 앞으로 2-3미터 가까이 자랄 겁니다. 겨자씨는 더 작지만 3-4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본문 32절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와 줄기를 각각 따로 본 것으로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니라 외계인이 본 것으로 합시다. 어떤 느낌이 들까요? 씨는 겨우 눈에 보일 정도로 작습니다. 줄기는 씨에 비해서 수천, 수만, 수십만, 그 이상으로 큽니다. 모양도 완전히 다릅니다. 두 가지를 서로 연결해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변해서 거대한 줄기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매일, 매순간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기적의 세계, 마술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놀라운 일들이 차고 넘칩니다. 이런 것에 눈을 뜬다면 다른 일로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공연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은 도사들에게나 어울리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하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당장 돈 벌고 인생 설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 하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 신비와 그 능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건 곧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추상적으로만 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상투성이라고 부릅니다. 사물과 세상 이치와 인간관계와 역사를 뻔한 것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가 상투성입니다. 그런 상투성은 영혼을 질식시킵니다. 그런 삶은 실제 숨을 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로봇에게나 어울립니다.

 

예수 사건은 일종의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는 평범한 유대인 한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형제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아무도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혹은 메시아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대교 최고위층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양측 사이에 충돌이 심해지면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합니다.
이를 주도한 집단은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대법원입니다.
이들의 눈에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볼품없는 겨자씨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생전에 이루신 일도 사실 별 볼일이 없습니다.
그는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생애라고 해봐야 3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80세를 살았고,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63세를 살았습니다.
이들은 이미 생존 시에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물적, 인적 토대를 탄탄하게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실패였습니다.
마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썩는 것과 같습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운명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다는 것이 사도신경이 전하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로 하여금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었다는 본문에 딱 어울리는 일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벌어진 겁니다.

마가복음 독자들은 일련의 씨 비유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운명이 하나님 나라와 일치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가복음 독자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설명에 실감이 덜 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몰이해나 오해, 또는 무관심이 그 대답입니다. 너무 현란하여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이 세상의 삶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들어도 ‘그게 뭔데!’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죽어서 가게 될 천당인가, 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죽어 천당이야, 하고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신앙언어와 세상언어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게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은 곧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는 걸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걸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숨 쉬고,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완성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인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함으로써 생명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쪽이 진리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이 그걸 그대로 인정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과의 진리 논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옳은지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염려에 빠지지 않고, 기쁨과 평화가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영혼의 풍요로움입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씨 비유’ 두 가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씨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하다는 비유였습니다. 두 비유 모두 씨와 열매, 또는 씨와 줄기의 관계를 밑그림으로 합니다. 씨는 작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줄기와 꽃과 열매는 화려합니다. 지금 우리를 포함한 세상은 씨와 같습니다. 아직 생명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이 곧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를 믿는 우리는 생명의 완성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아직은 씨처럼 볼품이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풍성한 꽃이나 열매입니다. 그게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기쁨과 평화의 능력이 그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연한 것으로 인해서 좌고우면, 일희일비, 좌불안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저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제대로 살고 있을까요? 

 

이런 삶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지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씨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렇습니다. 씨만 보면 꽃과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꽃과 열매는 씨에 은폐되어 있어서 신앙의 눈이 아니면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일단 씨를 보지 말고 씨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 여러분이 처한 삶의 조건을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된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 약속된 미래에 비하면 지금 살아가는 조건의 차이는 미미합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나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나 부활의 빛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친구나 가족이 많아서 늘 자랑스럽고 유쾌하게 사는 사람이나 혼자 평생 외롭게 산 사람이나 생명이 완성될 부활의 차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씨에는 약간의 상처가 있어도 생명만 남아 있으면 아무 상처가 없는 씨와 마찬가지로 결국 똑같은 꽃과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풍요로운 생명의 열매를 맺을 미래가 바로 저곳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