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복합 명사)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1. 하나님은 창조주(엘 로힘, Elohim) 

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여호와, Jehovah)

3.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분(엘 로이, El Roi)

4.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엘 샤다이, El Shaddai)

5.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엘 올람, El Olam)

6.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나함, Naham)

7. 하나님은 모든 것 다해 사랑하시는 분(엘 칸나 , El Kanna)

8.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여호와 치드케누, Jehovah Tsidkenu)

9.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여호와 이레, Jehovah Jireh)

10.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엘 엘리온, El Elyon)

11.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여호와 삼마, Jehovah Samma)

12.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분(챈, Chen)

13.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분(여호와 닛시, Jehovah Nissi)

14.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여호와 카도쉬, Jehovah Kadesh)

15. 하나님은 평강(여호와 샬롬, Jehovah Shalom)

16. 하나님은 우리의 왕(여호와 멜렉, Jehovah Melek)

17. 하나님은 치료자(여호와 라파, Jehovah Rapha)

18. 하나님은 부드러운 분(알룹, Al lup)

19. 하나님은 목자(여호와 로이, Jehova Roi)

20. 하나님은 능력(여호와 체바오트, Jehova Sebaot)

21.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여호와 추리, Jehova Tsuri)

22.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아도나이, Adonai)

23.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마누엘, Immanuel)

24.  하나님은 말씀(로고스, Logos)

25.  하나님은 용서 하시는 분(암모스, Amnos)

26.  하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자오 히도르,  Zao Hydor)

27.  하나님은 빛(포스, Phos)

28.  하나님은 거룩한 영(프뉴마, Pneuma)

29.  하나님은 사랑(아가페, Agape)

30.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하사, Has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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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사무엘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Do not keep talking so proudly or let your mouth speak such arrogance, for the LORD is a God who knows, and by him deeds are weighed.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the LORD is a God who knows)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니라

한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기쁨의 원천은 사무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도에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기를 못 낳는 수치와 고통에서 건져 내고 영예로운 위치로 올려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대적 브닌나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체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응답해 주신 하나님보다 응답 자체를 더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나는 또한 세계를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기대와는 다르게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분이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 번영과 쇠퇴, 행복과 불행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예언적 성격을 띱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왕권이 수립될 것을 내다봅니다. 이 왕권은 메시아의 모형인 다윗에서 첫 실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에서 완전히 성취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대적을 깨뜨리시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신 왕입니다.
한나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단순한 감사 찬송을 넘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우주적인 메시아의 통치를 언급하는 구속사적인 대 예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의 찬송은 우주적 및 특히 경제, 출산, 신분, 등과 같은 개인적 문제에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노래합니다.
그리하여 세상만사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 주권자이시며,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할 피조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본 찬송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 하는 이상적인 지상 왕국이 건설될 것임도 노래합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에 멀지 않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이 세워질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 왕국의 건설을 준비할 자는 바로 사무엘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한나의 찬양은 사무엘의 소명을 미리 예시해 주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볼 때 한나의 찬양은 단순한 인간적 감성을 초월한, 성령에 감화되어 읊은 일종의 예언 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진리를 꿰뚫고 있으니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황금 열쇠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일명 ‘구약 교회의 송가’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구속의 찬가로는 미리암의 노래, 드보라의 노래, 그리고 신약의 마리아의 노래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여경지근 - 호와를 외하는 것이 식의
주경지근(主敬知根)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 다섯 가지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란 말씀을 사자성어로 간략하게 줄여서 성명한다면 "여경지근"이라고 하겠다.

첫째,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가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의 학업성취가 향상된다.

교육은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권위가 높은 데서부터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현상이다. 여기에서의 권위는 '권위주의'와는 구별돼야 한다. 진정한 권위는 교육에 있어 너무나 소중한 가치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교육이 회복될 때 학업성취는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둘째, 경청할 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경청하게 될 때, 그 집중하는 태도는 그대로 학업 태도로 전이된다. 자녀가 당장 몇 점의 점수가 오르고 더 많은 지식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청하는 태도다. 왜냐하면 경청하는 태도는 고기잡는 법을 알아서 수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는, 지식을 얻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부모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공손한 자세로 눈을 부모님의 눈에 맞추면서 정성껏 경청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더 깊이 알아갈 때 그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고(벧후1:4), 그의 성품을 닮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맺게 되는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지혜의 샘과 같아서 지속적으로 학업에 진보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지금 성적이 높지 않아도 또한IQ가 높지 않아도 충성스럽고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자녀는 향후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크리스천의 자녀교육 성공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녀교육의 성공은 우리의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 일류 기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된 자들이다.

넷째,  비전과 꿈을 갖게 된다.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 저도 모세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 '저도 다윗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 '저도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라는 비전과 꿈이 생기는데 이 비전과 꿈이야말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동기유발'이다. 왜 공부하는지를 알고 공부하는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공부하려는 욕구가 생기게 된다.

오늘날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도 왜 공부하는지를 모른다. 대부분이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그리고 부모의 강제에 의해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공부한다. 그래서는 공부의 능률이 오를 리가 없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 품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 대한 비전과 꿈은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갖게 된다. 이러한 교육의지를 지닌 학생에게는 학업성취의 향상이 따라 오게 된다.

우리 자녀들에게 비전과 꿈을 심어주는 것은 당장의 성적을 올리는 일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게 될 때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을 깨닫게 된다. 자기 인생의 목적이 생기게 되고 달려갈 방향이 잡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나의 달려갈 길'(행20:24)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마이 웨이'(My Way)를 깨닫게 되면 달려가게 되고, 그런 비전과 동기가 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다섯째, '통찰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이 땅의 보이는 실재가 아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을 떠서 초월을 바라봐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거룩한 상상이다. 이 상상이야말로 계시와의 접촉점이 된다.

실재하시는 하나님이 초월해 계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상상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는 이 거룩한 상상력이 계발된다. 이것은 엄청난 지혜의 보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고, 초월의 세계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은 모든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또 여호와를 경외할 때 갖게 되는 통찰력은 마치 정찰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내려다 보는 것과 같다. 지상에서는 모퉁이길을 돌아설 때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랐지만, 높은 곳에서는 전체를 볼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갖게 되는 이 통찰력은 공간적으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창조부터 종말까지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준다.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이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여가삭 어떻게 시작되서 어떻게 발전해서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자녀들 개인의 삶의 여정에 대한 깨달음도 갖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얻게 되는 이 지혜는 단지 지식과 정보를 얼마 더 습득하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이 지혜는 모든 지식의 샘과 같아서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수많은 지식을 얻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우리 자녀들이 더 많은 지식을 쌓는 일보다 먼저 이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신앙-태도-학업의 관계 구조다. 신앙과 태도, 그리고 학업은 서로 연결돼 있다. 여경지근의 원리는 바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권위를 인정하고 경청하게 되며 새 성품이 형성되며 꿈과 비전이 생기고 통찰력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바로 학업성취를 향상시키는 능력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성경적인 교육법은 이 세 가지 연계성에 주목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세우고 그래서 그의 태도가 달라지고 그 태도의 변화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은사가 개발되도록 돕는 것"이라며 "신앙과 태도가 형성되지 않은 채, 억지로 공부시키며 학업 성적만을 올리려는 노력은 지혜롭지 못하다. 왜냐면 기본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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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저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겪고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되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였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하여 영원히 천국에 거하며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태초부터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2000여년 전에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친히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님께서 그 하늘의 보좌를 뒤로 하시고 이 세상에 까지 오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는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말로는 ‘사랑한다’ 또는 ‘믿는다’ 라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믿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또한 사랑과 믿음이란 것은 관계적인 단어들이기 때문에 혼자서 할 수 없으며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단어들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과 예배, 찬양과 기도를 드려야 하며 우리의 가지고 있는 모든 고난과 짐, 그리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바 아버지
생명의 근원이시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창조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용서도 하시지만 심판도 하시는 하나님
전능자이시지만 절제하시는 하나님
영존하시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또한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
모든 것을 충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
성실하시고 신실하시며 진실하신 하나님
피난처요 요새요 방패이시고 산성이신 하나님
목자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므로 우리가 대면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의 눈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그 존재도 알 수 없고 알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감사하게 담겨 있습니다. 위에 있는 목록은 정말 어떻게 보면 대표적인 하나님에 관한 표현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표현을 성경을 묵상하시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 질문을 해 봅시다. 과연 하나님께는 이름이 있을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필요하실까요? 성경 곳곳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봉사를 하고 레아와 라헬을 포함한 가족을 데리고 이제 에서를 대면하게 됩니다. 그 전에 야곱은 압복나루에서 다른 가족을 다 건네고 혼자 남아 하나님과 씨름을 날을 새도록 하게 됩니다. 이때 야곱은 날이 새도록 하나님을 보내지 않고 하나님께 축복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이 씨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에 야곱이 청하되 “원컨대, 당신의 이름을 내게 고하소서” 하니, 그 사람이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세기 32:29)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왜 이름을 묻느냐 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여호와의 천사를 만나 태움제를 드리며 천사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 마노아는 부인을 통해 삼손에 대해 계시를 받지만 다시 한번 그 계시를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천사가 다시 한번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시는데 이때 마노아는 하나님께 태움제를 드리며 이 질문을 합니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천사에게 묻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하리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사사기 13:17-18)

이 부분 (빨간 글씨)은 한국말 번역이 원어하고 다른 부분입니다. 영어와 원어를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Why askest thou thus after my name, seeing it is Wonderful?”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위에 빨간 글씨로 된 부분을 비교한다면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물었을 때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매우 특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 리스트 중에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한국말로는 여호와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히브리어는 . (나중에 ‘여호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로는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표현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지만 만 번 넘게 언급되는 하나님의 이름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바로 (약 6518번) 여호와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애굽의 왕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기를 위해 부르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주신 이름입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보옵소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에흐예 (여호와)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에흐예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3-14)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특별히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사랑하고 관심이 가고 감사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더욱 알기 원하게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더 알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런 만남과 시간을 통하여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 앞에서 하지 않게 되고 좋아하는 것은 자신을 고쳐서라도 맞추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기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고 좋아하시는 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매우 적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과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일 무엇일까요?

“여호와의 싫어하시는 것들 여섯이 있고 또 그의 마음에 미워하시는 것들 일곱이 있으니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다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6:16-19)
이 외에도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증오하시는 것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건 무엇일까요?
긍휼 성실, 진실, 사랑,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 통회하는 심령, 공의를 행하는 거, 곧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의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생이요 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는 거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갈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에베소서 5:31-32)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지식은 정말 열심히 배워가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도 자식교육에 세상 교육만 강요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정작 가장 중요한 지식은 외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야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기에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존재인지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초자연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불가능이다 라고 주장하고 불가론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인 이유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지 않으신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어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허락하신 것이고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사람은 창조되고 얼마 후에 타락하게 된 것일까요? 만약 아담과 하와가 오랫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에 대해 알았다면 사탄의 꾀임에 쉽게 넣어갔었을까요? 이 부분은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창조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고 확신이 없었던 것을 아닐까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축복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강조하신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가 멸망하고 영원한 지옥불로 가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확실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 6:3)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태움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예배당에는 매주 출석하지만 과연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매우 적은 수가 하나님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론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뿐이고 피가 피를 따를 뿐이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4:1-6)

아무리 세상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다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저술하고 읽고 논문을 쓰고 연구하여도 이는 썩어질 것이지 절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세상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꾀였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 지식을 먼저 많이 습득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 잘 산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부자로 산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없는 사람을 못 사는 사람이라 하지만 돈 없어도 멋있고 신실하게 잘 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 중에는 잘 사는 사람들이 드문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잘못된 표현인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박아둔 잘못된 사상인 것입니다.

다시 이 표현을 제대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도 모를뿐더러 하나님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모르면 망하는 것인데 이를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축복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에서도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목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외치지 않으며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거나 싫어하는 것도 모르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크시고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희에게 보이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백히 저희 속에 있음이라.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격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느니라.” (로마서 1:19-2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셨지만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옛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 중에 시각적 모형으로 주신 제사 율법 그리고 여호와의 절기 등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가 이 아들로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세계도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2)
“이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브리서 1: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 외에도 이 마지막 날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셨고 십자가의 사역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도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로는 매우 쉬워 보이지만 이해하기 매우 힘든 부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여인의 뱃속에서부터 십자가 사건을 겪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으셔서 죽음과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서부터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모든 부분. 하늘의 보좌를 두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이 사역을 감당하셔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사랑과 은혜.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사람들은 이 부분에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부분입니까?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현실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십계명 (3번째 계명)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2번을 걸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계명에서 3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부분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출애굽기 20:7)

유대인들이 이 부분을 신성모독죄라 하는데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성호 즉 하나님의 이름을 공부하는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영어로 보면 한국말로 번역된 3번째 계명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어와 비교해 보면 한글성경은 원어에서 의도한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만 본다면 3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또는 실없이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Thou shalt not take the name of Yehowah thy God in vain, for Yehowah will not hold him guiltless who taketh His name in vain.”

Take 나싸 (naw-saw) (한글로는 부르다 라고 번역이 된 부분입니다) 이를 원어에 더 충실히 번역을 한다면 한글성경에 있는 내용을 보완하여 수정할 수 있습니다.
Vain 솨브 (shawv)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게, 거짓되게, 무익하게, 가치없게 가지고 다니면 죄 없다 아니하리니”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원어에 충실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백성들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된 것인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거짓되게 무익하게 가지고 다니면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외에도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는 것일까요?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정말 열심히 부르짖지만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는 증거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이는 십계명 중에서 제 3 계명을 어긴 사람들의 예 중에 하나입니다. ‘주여’라며 하나님의 이름은 열심히 부르짖고 다니지만 정작 하나님의 자녀로써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라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주여 주여’ 말로만 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몇 구절을 살펴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봅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시 91:14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 사 5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렘 16:21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9:7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1,12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6,7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또한 나와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말4: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 2:32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시 79: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 2: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19:12.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축복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이 그리로 달려가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언 18:10)

하나님을 이름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는 것은 그 분을 관계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는 천국과 지옥, 풍성과 메마름 그리고 죽음과 영생의 차이점입니다. 완전히 상반되는 것임에도 그리고 너무나 확실하고 중요한 것임에도 이런 차이점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혹은 병거를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리로다.” (시편 20:7)

구약 시대에는 병거와 말이 공격과 방어에 매우 귀하게 쓰였던 시대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었던 믿음의 조상 중에 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이제 병거와 말을 다른 것들로 비유할 수 있지만 과연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자랑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내 삶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돈이나 권력 또는 다른 세상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의지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나,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느니라.” (잠언 21:31)

요즘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매우 드문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세상적으로 썩어질 것들을 내세우고 자랑하고 다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다니면서도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계속 쫓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을 그 분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면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게 됩니다. 그 이름이 우리에게 견고한 망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이든지 환난의 때이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성호를 한번 리스트 해봅시다. 이 중에는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 성호/이름이 있기도 하지만 중요한 단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필요하시지 않으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주신 이름들이 성경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호라고 해야 할지 이름이라 할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지만 밑에는 우선 리스트만 먼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엘로힘 (~2500 번) –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데 이름이라 할지 title인지 공부할 부분입니다. (창세기 1장에 각 절마다 등장하는 성호가 엘로힘입니다)
여호와/야훼 (~6500 번) – 창세기 2장에 등장하며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기에 우린 이 이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이름에 관하여는 나중에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발음하면 큰일난다 생각하기에 아도나이라고 고쳐서 발음합니다.
아도나이 (~430 번) – 유대인들이 여호와를 아도나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십계명 3번째 계명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도나이 (요드 + 헤 + 바우 + 헤)
야후 (요드 + 헤 + 바우) 아도나이에서 ‘헤’가 빠져서 서기관들이 실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성호도 있다. => 예후, 여호수아의 여호, 이사야의 ‘야’

나머지는 이제 위에 3 이름에 더해져서 불리어지는 것으로 (compound name)복합단어들입니다.

엘 엘리온 (여호와 엘리온) – 지존자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God the most high)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처음 쓰여집니다.
엘 로이 – 주는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갈이 만난 하나님)
엘 샤다이 – 전능자 하나님 / 모든 것을 충족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엘 울람 – 영원하신 하나님 /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로페 –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26)
여호와 사바옷 – 만군의 여호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여호와 자딕/여호와 자디케노 –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이레 – 친히 준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수양)
여호와 샬롬 – 평강의 하나님
여호와 로히 – 목자 (시편 23:1)
여호와 메코티신케 –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샴마 – 거기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 그 가운데 계신 자
야 – 여호와의 짧은 형태 (요드 + 헤) 할렐루야의 야가 이 형태입니다. (Praise God)

하나님의 이름을 배운다는 것 또한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귀한 한 학기가 되도록 간구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호 (엘 엘욘 / 엘리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배워가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와 대적하는 자가 바로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반응이 틀린 것이 참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배워가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한 부류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전지전능하심을 깨닫고 그 크신 보좌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하게 되거나 하나님을 지존자와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믿고 교만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소개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지존자로 고백하는 믿음의 조상 중에 한 분이십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지존자 하나님이라 인정하게 되는지 성경에 있는 스토리를 통해 알아봅시다.

창세기 14장에는 시날, 엘라살, 엘람, 그리고 고임 왕들이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그리고 소알 왕들과 전쟁을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전쟁에서 다섯 왕은 오고 있는 길에 있던 민족들과 거민들까지 몰아낸 넷 왕에게 밀려 도망가게 되는데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소식을 도망한 자 하나가 아브람에게 알리는데 아브람은 말도 안되는 기적을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집에서 훈련한 318명만을 거느리고 4 왕들을 치고 이기는 장면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브람의 돌아오는 길에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댁이 아브람을 영접하러 나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더라.” (창세기 14:18)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여 말하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요 지존자 하나님이시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아브람의 대적을 그의 손에 붙이신 지존자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9-20)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요 지존자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고 맹세하노니”” (창세기 14:22)

아브람이 파한 4 왕들은 이미 5 왕들의 군대를 파한 군대였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나 무모하고 말도 설명이 되지 않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통해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장면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르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가족이 정착했었던 집을 버리고 조카인 룻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아브람은 이때 본토를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친척은 떠나지 못하고 룻과 함께 동행을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란 땅에 갔다가 아버지인 데라가 죽은 후에 가나안 땅으로 룻과 함께 가게 됩니다. 이때 아브람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왔지만 기근이 있어 애굽 땅에 가게 됩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이제 보시요, 나 알기에 그대는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라. 그러므로 애굽 사람들이 그대를 볼 때에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청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고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살겠노라” 하니라.” (창세기 12:11-13)

아브람의 예상대로 애굽 사람들은 사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고 바로는 사라를 취하여 궁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며 신으로 대접을 받았던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브람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무도 건들지 못하고 대적하거나 함부로 말도 할 수 없었던 바로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개입하셔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아내도 다시 얻었으며 많은 소유도 얻게 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브람은 알게 된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를 한 번에 무릎을 꿇게 하신 하나님을 아브람은 믿게 되고 애굽에서 떠나 네게브 지방으로 올라오면서 하나님께서 처음에 명령하신대로 친척인 롯과 헤어집니다. 이때 롯이 선택한 땅이 요단 온 들로 가 소돔에 정착하게 되고 롯과 헤어지고 나서야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보여주시면서 그 당시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 약속을 애굽 땅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기 전에 주셨으면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을 했었을까요? 과연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이미 나이가 75세가 넘었으며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도 아닌 자신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아브람은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럼 다시 14장에서 보인 아브람의 자세와 12장에서 나누었던 아브람의 자세의 다른 점을 살펴봅시다. 그냥 보기에도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아브람의 행동과 성격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브람이었지만 이런 아브람이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만을 데리고 4 왕의 연합군을 친 것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며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런 무모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아브람이 이런게 담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아내도 아니고 자신을 떠난 조카 롯을 위해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갑자기 무모한 행동을 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든든한 백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애굽에 있었던 사건이 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며 좌절했었을 아브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권세를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겼을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브람에게는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에게 아내를 찾아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아브람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롯과 헤어지고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살펴보면 아브람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자녀가 생길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간섭하시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 믿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장에 나오는 아브람의 무모한 행동은 성경의 문맥을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이 사건 후입니다. 멜기세덱은 지존자 하나님 곧 엘 엘룐의 제사장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엘 엘룐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이신 지존자이십니다. (God the Most High!)
창세기 11장까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사라지고 니므롯과 세미라미스를 통해 만들어진 거짓 종교 곧 우상을 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족보 중에 있는 데라마저 우상을 만들어 팔던 인물이었을 정도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희미했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싶으셨던 것이고 아브람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존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며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멜기세덱을 통해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심과 지존자 하나님이 저희의 대속주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시편 78:35)

다니엘에서 이 부분을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지존자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레슨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주인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살았을 때에는 그 당시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바로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바벨론이었습니다. 절대 왕정을 설립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왕이 바로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그 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 기록된 대로 인류의 역사의 주인을 하나님이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존자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아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의 놀라움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4:2-3)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명한 말대로니 이는 지존자께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인생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 (다니엘 4:17)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다니엘 4:26)

다니엘의 꿈풀이에도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잊고 교만해 졌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라의 도성을 삼고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다니엘 4:30) 같이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이 사람에게 쫓겨 하나님께서만이 지존자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존자께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대하였나니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 말하여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다니엘 4:34-35)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곧 지존자 하나님께서 지상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 엘룐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배우고 알아야 하며 인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마귀가 이 세상을 먹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한 주권자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지존자가 아니시며 가장 높으신 분이 되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4,27)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되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9-10)

하나님이 지존자이심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지 모르고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면 걱정하고 조마조마할 수 밖에 없으며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지 해결하려다가 역부족인 것을 알게 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평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몸과 혼을 함께 지옥에 능히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가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28-31)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포함하여 영적인 세계 또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은 그 분의 손에 맡겨져 있으며 하나님께서만이 이 세상의 지존자이시므로 주권자이시므로 다음 구절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요셉의 스토리를 예로 들어봅시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린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오해를 사 감옥에 까지 가게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기 위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감옥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감옥에 간 것인데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망하고 쓴 소리를 하게 되고 미움만 가득차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쌓여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소서. 이는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신 것이니이다.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당신들을 세상에 남겨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이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5,7-8)

요셉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했었으므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들이나 하나님의 향한 원망을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고백입니다. 요셉은 엘 엘룐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원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엘 엘룐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면 이 말씀이 좀더 이해가 될 것이며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 엘룐이라는 것을 알면 마음에 평강이 생기고 세상적으로 힘들고 좌절할 수 있어도 감사함으로 쓴소리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나의 주이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로페 / 라파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술로 나온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다른 경우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나눌 여호와 로페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배경 스토리

 

야곱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요셉을 통하여 애굽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7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215년이 지난 후 출애굽했을 당시에는 약 8500 배가 늘어난 장정만 60만명이 넘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늘어나고 번성하자 애굽의 바로 역시 이를 두려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이 늘어나 심히 강대해져서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애굽기 1:7)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자기 백성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할수록 더욱 번성하고 늘어나니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니라.” (출애굽기 1:8-12)

 

그리고 바로는 늘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히브리어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하지만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명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이로 인하여 남자 아기들을 나일강에 던지라고 하는데 이 당시에 이미 아론은 태어났고 모세가 태어났을 당시에 이런 명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아론과 모세는 3살 차이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론은 나일강에 버리라는 바로의 명이 내려지기 전에 태어났기에 (하지만 산파들이 바로의 명을 어겼기에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숨기울 필요가 없었던 거 같습니다.

 

모세 또한 태어났을 때에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어머니인 요게벳이 모세를 3달 동안 숨기다가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보내어집니다. 이때 정말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의 딸은 아버지인 바로가 히브리인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이를 불쌍히 여겨 히브리 사람 아기인 모세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누이인 미리암이 바로의 딸에게 유모를 부르자고 부탁하자 이를 허락하게 되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결국 모세를 양육하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2:1-9) 정말 요게벳과 미리암의 지혜로운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가 젖을 떼기 전까지 양육하였는데 늦으면 3-4살까지 모세를 키웠던 것입니다. 요게벳은 모세가 장성하면서 아이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두가지 설이 모세와 바로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합니다. 한가지 설은 바로가 모세를 신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설은 바로의 신하들이 모세를 탐탁지 않게 여겨 모함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설이든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40년 동안 지내게 됩니다. 애굽의 왕자로써 애굽의 모든 학문과 기술 등은 습득하게 되고 애굽인처럼 자랐겠지만 모세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나름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만 애굽 사람을 죽임으로 광야로 쫓겨나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에게 장가를 가 40년은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때를 정하시는 엘 올람 하나님께서 정하신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게 되는데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까지 가서 떨기나무 불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에게 세우라고 요구하는 모세였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바로 앞에서 담대하게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장자의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예비하신 유월절의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 죽음을 면하게 하십니다. 쓴 나물, 무교병, 어린양은 유월절에 먹어야 하는 음식입니다. 유월절은 215년 동안의 애굽생활을 청산하고 자유인의 신분으로 출애굽하게 되는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다시 한번 홍해에서 바로가 이끌고 오는 군대들을 막으셔서 홍해를 가르셨으며 그 마른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게 하십니다.

 

여호와 로파 소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출애굽기 15장) 힘든 노예 생활을 마치게 해 주시고 자신들을 쫓던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멸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즐겁고 흥겨운 마음으로 찬송하였을까요?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사 애굽에서부터 다시 자신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보며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었을까요? 비록 급하게 애굽 땅에 나오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애굽인들로부터 많은 보물도 받게 하시고 자신들을 압제하였던 바로의 손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고 위대한 분인지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여정이지만 사흘 길을 행하는면서 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물 없이 삼일을 지내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해 마음이 상했을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에 이르러 물을 만나게 되지만 써서 마시지 못했는데 이때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물을 보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질서를 지키면 물을 마셨을까요? 너무나 목이 마른 상황에서 물 속에 뛰어들어가 물을 마시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3일 동안 물을 못 마셔서 웬만하면 물을 그냥 마셨을텐데 물이 얼마나 쓰면 마시지 못했을까요? 그 실망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에는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겠지만 삼일 동안 물을 얻지 못하니깐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자마자 물을 3일동안 마시지 못하게 하시고마시지도 못하는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셨을까요? (이는 모세가 그냥 백성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고 인도하심으로 마라로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만사형통하는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걱정 근심없는 길이 아니고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길로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니, 그러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7-1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내가 어리석은 자 같이 말하나 나는 더하니라. 수고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옥에 갇히기도 더 자주 하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며 내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내가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았으며, 세 번 파선하였는데 꼬빡 하루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잦은 여행에 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중에서 위험을 당하였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자주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자주 굻고, 추우며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2:23-26)

 

이스라엘 백성도 이제 자유인으로 만사형통할 줄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흘 길에 물을 만나지 못하게 하시고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계시도 해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면 안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하여서도 우리 모습을 직접 보게 해주시고 그 와중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긍휼하심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가시고 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 속에 있는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그가 자신을 보고 가서 자기의 생김이 어떠한 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케 하는 완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 1:23-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신실하게 붙잡고 있었기에 불쌍히 여기사 출애굽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215년 동안 애굽에 지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다렸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었으므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부터 건져내신 것입니다.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여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기 15:2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여 한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여서 물을 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며” 출애굽의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15:26)

아니 아도나이 (여호와/야훼) 로페(카) – 히브리어 발음

 

여호와 로파의 뜻

 

로페카 어근 = 라파/Rapha (치료하다) = 본질적으로 치료해주시는 하나님

상징적인 의미로도 치료하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육체인 질병인 외에도 정신적, 영적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치료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질병만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곳곳에는 치료의 하나님을 표현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데 이 부분은 유대인들이 지적을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17)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야훼 로파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사라고 표현하심으로 구약에 나오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병든 자들이 자신이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원을 찾아가야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원이 있어도 환자가 먼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가 씻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의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그 분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배워야 하는데 인정을 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플 때 병원에 찾아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참된 치료자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특정한 의사와 약들을 그리고 다른 방법도 사용하시지만 성경을 보면 우린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아픔을 아뢰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그런 도구를 통하여 우리가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들을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아사 왕은 발에 중병을 앓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 아뢰지 않고 의원들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사 왕은 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였지만 나중에는 하나니의 말씀을 전한 선견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몇 학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에 병이 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음에도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역대하 16:12)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리게 되자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치료를 바로 해주실 수 있으셨지만 다른 방법으로 그를 치료하십니다.

“이에 이사야가 명하여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그들이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열왕기하 20:7)

 

나아만 장군 또한 그 예 중 하나입니다.

“엘리사가 사람을 저에게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여전하여 네가 깨끗하게 되리라” 하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말하되 “보라,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 환처 위에 손을 대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5:10-11)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눈먼자를 바로 고치실 수 있었지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고치신 적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 하는 뜻이라. 이에 그가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복음 9:6-7)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세상에서 최고의 의원에게 아뢴다 하여도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인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로 하고자 할 때에 내 마음이 낙담하는도다. 보라, 딸 내 백성이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곧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여호와께서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 내 백성은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도다’ 하는도다. 이는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두려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예레미야 8:18-22)

 

길르앗은 약재로 사용되는 유향으로 유명하고 의원들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약재로도 의원들도 치료가 안되는 것입니다. 오직 치료자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이 우상 섬김인데 본질적인 것을 치료하지 못하면 육체의 아픔과 상처도 치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료자이신 여호와/야훼 로페에게 모든 것을 아뢰고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 또한 시편을 통해 하나님이 치료자이심을 고백하는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이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사오니 이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같이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시편 38: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대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시고,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리로다.” (시편 103:1-4)

 

육신의 질병보다도 먼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로 보내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무를 던지게 하셔서 물을 달게 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죄와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질병은 죄 때문일까요? 만약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질병이 생겼을까요? 죄가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는 질병이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병과 죽음은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거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상함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 하는 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로 너를 징계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그러나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무릇 너를 치는 자는 다 포로가 되며 너를 탈취하는 자는 탈취를 당하며 무릇 너를 약탈하는 자는 내가 그로 약탈을 당하게 하리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리운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0:12-17)

 

그럼 우리가 겪는 모든 질병이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만 병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또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원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리는 예가 몇 군데 있습니다.

 

“길 가실 때에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그의 제자들이 묻기를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9:1-3)

 

다른 예는 바로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랑하실만큼 의인이었음에도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욥 자신도 육신적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욥을 위로하겠다고 온 세 친구들은 계속 욥을 죄인으로 몰며 회개하라고 하지만 욥은 자신을 의인이라고 죄가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므로 겪는 모든 질병이 죄의 댓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죄의 댓가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악한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대주재라고 고백도 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데 고집을 부리며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도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신장을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10)

 

“어찌하여 너희가 매를 더 맞겠느냐? 너희가 더욱 더 반역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 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거늘 상처를 짜고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사야 1:5-6)

 

이스라엘 백성들은 툭하면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마라의 쓴 물보다 더 쓰고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자신들의 평가를 좋게 내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보이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만 스스로 높이며 자신 멋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대로 자신이 죄인이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을 살피면 치료를 받기 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이를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데 바로 만나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을 의미합니다. 육일 동안은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고 육일 째에는 두 배로 거두고 제 칠일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이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지키지 않은 이유는 바로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많은 것을 쌓아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나를 쌓아두어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먹지 못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쌓아두는 것 또한 썩어질 것입니다. 이는 질병 뿐만 아니라 영혼이 망하는 길입니다.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것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질병말고도 죄의 문제까지 해결해주시는 분이 바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가득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서 순종할때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책임지고 인도해주시는 분이 바로 대주재이시고 창조주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야훼 로파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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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 엘 로이 (El Roi)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번제나 태움제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시고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을 통해 배우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성호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면 그 분께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축복이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창조주이심을 깨달으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엘 로이 하나님의 성품

‘엘 로이’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지존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서를 살펴보면 엘로힘 (창조주 하나님 =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여호와/야훼 (처음과 끝이신 하나님), 그리고 아도나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로 나열 되는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셨으므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라는 여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인 엘 로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밀하고 숨겨져 있어 보이는 모든 것을 보시고 듣는 분이 바로 엘 로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14장에 나오는 사단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알고 계시며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 또한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쪽 끝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존자와 같이 되리라” 하나.” (이사야 14:13-14)

하나님은 사단의 마음도 알고 계셨으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도 아십니다. 사단 역시 마음에 혼자 교만한 마음을 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으며 살펴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이사야 14:16)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눈같이 흰 양털 같고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요한계시록 1:14)

하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모든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은밀한 것까지 다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관점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이 중요했던 거 같습니다. 만약에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에는 첩을 들이거나 여종을 첩으로 주든지 하여 아들을 낳게 하여 낳은 그 아들로 대를 잇게 했던 거 같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이스마엘과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별처럼 자손이 많게 해 주실거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엘 엘리온 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의 주권자라 배웠습니다. 우르 땅에서 나와 하란 땅을 걸쳐 가나안 땅에 왔으며 애굽에서 있었던 사건과 318명을 데리고 4 왕의 군대를 쳐서 이긴 사건 등 아브라함은 여러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의 소유주이신 지존자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정식적으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 또한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표현을 쓰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이때 아브람은 “대주재 여호와여, 무엇을 제게 주려 하시나이까?” 라고 되묻습니다. 이 장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멜기세덱을 만나고 얼마 후인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얼마 전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선 아브람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하시고 나서 아브람 역시 의문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식을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계속 후사를 주시지 않자 아브람은 하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자신의 상속자는 자신의 피를 받지 않은 다메섹 엘리에셀이라 하나님께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며 그 후사를 통해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질 거라 약속하십니다. 이 부분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이미 75세의 나이가 지난 아브람, 그리고 후사도 없었던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라.” (창세기 15:6)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blood covenant 피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이 탄생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75세 나이에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86세에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사래를 통해서 주실 거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니라. 다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세기 15:4)

그러므로 아브람에게는 2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옵션은 첩을 들이지 않고 끝까지 사래를 통해 후사를 낳는 방법과 다른 방법은 첩을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세히 약속을 주지 않으셨으므로 아브람에게는 선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아브람을 통해 난 자가 후사가 될 거라 하셨습니다) 75세 처음 하나님의 명을 받은 아브람은 86세가 되어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언제쯤 자신에게 후사를 허락하실지 더 궁금해지고 조바심도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래가 첩을 들이자고 제안을 했을 때 아무런 반대없이 허락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아브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사래의 제안을 반대하고 100세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브람의 후사는 사래를 통해 태어날 거라는 것을 말씀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이로 인하여 인류는 나누어지고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삭의 자손이고 아랍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자손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후사는 사래를 통해 낳을거라 말씀하셨으면 이스마엘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문제도 없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에는 아브람이 86세이고 사래는 76세 였습니다.

아브람이 애굽 땅에 내려갔을 때에 사래는 바로의 첩으로 들어갈 뻔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바로의 손에서 사래를 구하셔서 아브람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바로를 통하여 많은 제물과 남종 그리고 여종을 아브람으로 얻게 하셨습니다. 바로가 사래를 첩으로 삼으러 할 때 여종들을 많이 사래에게 주었을 텐데 이 중에 한 명이 하갈이었다고 추측합니다. 애굽 여인이었던 하갈은 이렇게 아브람과 사래와 함께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하갈에 대해 나누면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사래/사라의 관점

사래는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므로 자신감이 없어졌을 것이고 가나안에 들어오고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의 사래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도 자식이 없었던 사래는 10년이란 괴로운 세월을 더 보내고 아브람에게 첩을 들이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이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라 사래가 제안한 것이라는 것을 다음 구절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청켄대 나의 여종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나이다” (창세기 16:2)

사래는 분명히 자신이 자식을 얻을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래는 아브람에게 이 제안을 하면서 마음이 아팠을까요? 긴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하고 이 제안을 아브람에게 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제안을 듣고 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하여 하갈은 여종에서 첩이 되었고 임신까지 하여 신분이 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래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결점을 이용하여 하갈은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만 봐서는 하갈이 성품이 착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교만하기도 하고 겸손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고하자 아브람은 사래에게 모든 것을 임의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갈은 아브람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갈은 자신이 아브람의 자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랬던 거 같지만 아브람은 사래의 손을 들어줍니다. 사래가 그 전에 하갈에게 멸시를 당하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것은 두려움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사래가 자신의 위치를 빼앗길 수 있다는 점에서 두려워 했던 거 같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괴로워 했던 부분이기 때문에 아브람의 사랑을 빼앗기거나 하갈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아브람이 혹시 하갈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지 걱정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하갈을 첩으로 들이자고 제안했던 것은 아브람이 아니라 사래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허락으로 사래는 하갈을 마음 놓고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하갈의 관점

사래가 애굽 땅에서 잠시 바로의 첩으로 들어갔을 때에 바로는 사래에게 많은 여종을 주었을 것입니다. 원래는 바로의 궁에 영원히 거했을 하갈인데 다시 바로가 사래를 아브람에게 보냈을 때 하갈 또한 가나안 땅으로 아브람과 함께 갔습니다. 사래에게는 하갈 외에도 다른 여종이 있었을 것이지만 왜 하갈을 택했는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적은 처녀였을 것이고 사래 또한 평소에 하갈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므로 아브람에게 제안을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어느 점을 사래가 마음에 두고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들이자고 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브람의 자식을 잉태하게 되었지만 위에서 나누었듯이 하갈은 교만해 집니다. 자신의 신분이 상승했다는 이유인지 모르지만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서부터 여종이었던 하갈이 갑자기 주인의 첩이 되어 자식까지 잉태하게 되니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지만 만약 하갈이 겸손하고 온유했던 인물이라면 사래에게 끝까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한 이유는 아브람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는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하갈은 또한 자신이 도망치기 바로 직전까지는 자신이 아브람의 자식을 가졌다는 점 때문에 아브람이 자신을 잡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 나오고서는 막막했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함께 도망친 하갈은 답답했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직 태아 중에 있습니다) 이때 과연 하갈의 편은 누구였을까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그나마 믿었던 아브람마저 사래의 손을 들어주었으므로 하갈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쳤으며 광야에 왔을 때에는 정말 막막했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하갈에게 하나님의 등장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사래의 여종이요 하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알고 계셨으며 축복도 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하갈에게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등장하셨을 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세기 16:8)
“이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주는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 엘 로이)’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갈이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자의 뒤를 보았는고” 함이더라.” (창세기 16:13)

여기가 바로 성경에서 단 한번 엘 로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진 곳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시고 은밀하신 것도 다 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종의 위치로 평생 살아오고 믿었던 아브람마저 사래의 손을 들어준 상황에서 하갈은 더더욱 이 부분이 마음이 와닿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이름까지 지어주셨으며 축복까지 해 주신 하나님은 하갈에게 큰 위로가 된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눈은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시편 33:18)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살피시고 그의 귀를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되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신다” (베드로전서 3:12; 시편 34:15-16)
이때 하갈은 하나님을 통해 힘을 얻고 하나님의 통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순종하라.”” (창세기 16:9)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권면하리로다” (시편 32:8)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니, 보라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창세기 16:14)
Beer-Lahai-Roi = “well of Living One Who sees me”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돌아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을 함께 살게 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두가지 경우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 행하는 자들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억울하게 당하는 자들의 고통 또한 하나님께서 듣고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치유의 시작도 엘 로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 주옵소서. 저희가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하는 것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예레미야애가 3:59-60)

“그가 내 길을 감찰하시고, 내 걸음을 다 세시지 아니하느냐?” (욥기 31:4)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욥기 34:21)

모든 것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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