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신자인가? 목사를 믿는 환자인가?


목사 믿는 환자인가?
예수 믿는 신자인가?


 



 


어떤 사람이 참 신자일까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 관원이 나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번 죽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부모로부터 육신이 태어나고, 두 번째에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거듭나게 되어 중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육신이 한 번만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한 번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태어난 사람은 두 번의 사망, 즉 육신으로 죽어 영혼이 지옥에 가는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사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이 없다고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이 분명히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두 번째 사망이요,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는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그 당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를 사함 받게 됨을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믿음도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사람은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로,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요일 3:10).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을 지으신 성령님께서 왜 말씀하시지 못하시겠습니까. 귀를 지으신 성령님께서 왜 듣지 않겠습니까. 다 들으시고 다 아십니다. 기도할 때 말할 때, 다 들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입니다.

본문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22장 9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소리와 영음의 차이점입니다.
세상 소리는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얘기하면 다 같이 듣습니다. 그러나 영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사울만 그 음성을 듣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영음은 한자리에 있어도 듣는 자가 있고, 듣는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영음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적 지식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흘 만에 부활하신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때가 바로 사도 바울이 중생하는 순간이고, 두 번째 태어난 시간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에 주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오늘 제가 설교를 듣는 중에 주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 성령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해주세요.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저도 주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성도님은 사업에 어려움이 생겨 하나님께 특별히 기도하던 중,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서 “아버지, 오늘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듣다가 주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서 저에게 오셔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들을 때에 주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뿐 아니라, 환난이나 질고로 어려움 당할 때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큰 은혜를 받는 기회요, 주의 음성 들을 기회요, 큰 축복받을 기회임을 아시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32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응답하시고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해지면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재앙이 임하니 그때서야 히스기야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 회개했습니다.
교만해지는 것은 매 맞을 징조입니다. 교만해지는 것은 망할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아사 왕은 왕이 된 지 39년 되었을 때에 발에 중병이 들었습니다(대하 16:12). 그런데 병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깨닫고 회개할 텐데, 어려움을 당해도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매를 맞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⑴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늙어서 우상숭배를 많이 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9~10절에 보면,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책망하셨지만, 솔로몬은 완악하니까 하나님의 책망을 들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가 두 쪽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깨달음도 없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결국 망합니다. 마음이 완악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고 망합니다.

⑵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준비된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귀가 어두워져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못합니다.

주의 음성을 들을 때의 공통점은 제 마음속에 주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할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며칠씩 기도하다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다.
그러면 저는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얼마나 축복하시는지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축복이 엄청납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망했지만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존경받는 선지자가 되어 얼마나 축복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든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축복을 받습니다. 평생 간증거리가 됩니다. 너무너무 행복해집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라야 참 신자입니다.

참 신자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깨닫습니다. 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을 믿게 된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제일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자원해서 바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이 귀한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셨을 때에 기쁨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금은보화를 다 바치고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순간,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우러나오는 마음의 기쁨으로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들이라야 참신자입니다.

항상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말만 들어봐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은혜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이 나의 인격을 보여주고, 내 믿음을 보여줍니다. 말이 내 사랑을 보여주고, 나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에 밤낮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표적을 보여주셔도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밤낮 불안과 걱정 속에서 원망 불평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제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정탐꾼들이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나머지 열 명은 믿음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고 말했습니다. 완전히 믿음 없는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 없는 말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말 그대로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사야 3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영광의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려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망했고 유다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믿음의 말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해서 모두 굶어죽게 됐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응답받고 내일 하루만 지나면 기근이 해결될 것을 백성들에게 고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이 말을 듣고 한 장관이 의심의 말을 하자 엘리사가 예언합니다.
열왕기하 7장 2절에 보면,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병환자 네 사람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되었으니 오히려 용기가 생겨서 가봤더니 이상하게 사람이 하나도 없고 먹을 것과 보물만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실컷 먹고 금은보화를 자기 장막에 쌓아 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은 성에 가서 얘기합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에는 완전히 기근이 해결되었고, 사람들은 믿음 없는 말을 했던 장관을 밟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처럼 믿음 없는 말을 한 사람은 믿음 없는 증거가 말로써 나타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가 믿음 없는 말을 한 것으로 인해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믿음 없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못 하실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다.”라고 믿음의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수록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다섯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못하면 두렵고 떨리고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참 신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 짓고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하고 양심의 거리낌도 없습니다. 죄 짓는 데 담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평생 정직하게 산 참 신자의 모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참 신자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늘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진실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시편 94편 9~11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위해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십니다(잠 2:7).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은 완전한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시편 112편 1~4절에 보면,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서 앞이 보이지 않고 절망에 빠져도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자신도 복을 받고, 후손도 복을 받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사는 사람,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여러분도 참 신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은혜로운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사찰에 가야만 신앙생활인가…코로나19가 던진 ‘빅 퀘스천(Big Question)'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온라인 종교활동이 종교계 안팎에 파장을 낳고 있다. 온라인 미사·예배·법회는 성직자와 신자들 모두에게 새로운 종교환경이자 신앙생활로, 당혹감을 안기면서 동시에 기존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로 모여 하나 되는 오프라인 신앙생활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한편으로 신앙생활이 ‘특정 시간·장소에 모여야만 하는가’ 등 그동안 해본 적 없는 근본적 질문들도 제기된다. 한국 종교계에 ‘빅 퀘스천’이 던져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종교계가 방송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용에 적극 나서면서 종교계 온라인 활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도 들린다.

■ 신앙생활에 던져진 ‘빅 퀘스천’

코로나19로 종교계는 지난달 말 사상 처음으로 종교활동의 온라인 전환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온라인 신앙생활이 11일로 2~3주간 이어지면서 종교계에는 신앙생활의 형식·내용을 둘러싼 근원적 질문들이 나오고 있다.

특정 시간·공간에 모여야만 하는가, 이 시대 성당과 교회·사찰이 지니는 의미와 기능은 무엇인가, 종교시설 밖 일상생활 속에서의 신앙활동 한계는 어떤 것인가 등이 대표적이다.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이 같은 물음은 특히 온라인 주일예배를 놓고 다양한 견해가 나온 개신교에서 두드러진다. 최근 이길주 목사는 문화선교연구원 웹진에 쓴 글에서 온라인 예배가 “교회건물에서만 예배한 교인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큰 도전과 고민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건물에 모여 예배하지 않으면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는가 고민하고, 일상이나 사회, 나 혼자의 공간에서도 예배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 대형교회 목사도 “디지털시대에 온·오프라인 예배 문제, 목회나 선교활동,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신학적·신앙적·예배학적인 다양한 물음들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며 “향후 본격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천주교, 불교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원교구의 한 신부는 “이번 경험을 통해 성당·공동체적 모임의 귀중함을 새삼 알게 됐지만 한편으론 개인적·일상생활 속에서의 신앙생활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전통사찰의 한 스님도 “법랍 40년 동안 이런 도량을 경험하지 못했다”며 “‘주말에만 절이나 교회를 찾아 고개 숙일 생각 말고 평소 일상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내용의 생전 법정 스님 법문을 떠올리는 요즘”이라고 밝혔다.

■ 종교계의 분기점 되나

온라인 종교활동이 지속되자 종교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성직자, 신자들은 서로 모이는 오프라인 종교활동의 가치와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있다. 행신침례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 김관성 목사(49)는 “처음으로 신자분들이 모이지 않은 주일예배를 유튜브로 중계했는데 너무 어색하고 신앙적 흥이 나지 않았다”며 “저는 물론 다른 목회자들, 신자들도 모여 손잡고 안부 묻고 식사를 함께하는 공예배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험은 종교계에 온라인 활동을 가속화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김관성 목사는 “개인적으로 온라인 예배에 부정적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향후 온라인 중계를 병행할 것”이라며 “주변 여러 목회자들도 공감하고 있어 이번 사태가 온라인 종교활동의 기폭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길주 목사도 문화선교연구원 웹진 글에서 온라인 예배를 위한 교회의 준비사항을 소개한 뒤 “이번 사태는 한국교회를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신교에 비해 온라인 활동에 소극적이던 천주교도 바뀌고 있다.

일부 교구는 교구장 주교의 집전 미사를 중계하거나 홈페이지·유튜브를 통한 영상 제공, 교구 차원과 신부 개인의 SNS 활용을 적극 추진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 관계자는 “온라인 채널의 확산은 물론 소통을 위한 의지표현도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계도 전례 없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산문 폐쇄 중인 합천 해인사는 최근 유튜브에 ‘해인사 TV’ 계정을 열고 예불·법회를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은 “해인사 역사 1200년의 첫 시도”라며 불자들에게 “이를 통해 또 다른 신심과 감동을 만들어보자”고 당부했다.

그동안 선교·포교수단의 하나로만 여겨지던 온라인 활동이 종교계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저는 기도하는 의사입니다”

신앙은 가끔 상식을 초월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 벼랑 끝에 섰을 때는 무엇인가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하늘에 맡기면 필히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지요. 암 환자에게도 신앙의 힘이 필요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의사입니다. 친절한 의사는 조금만 부지런하면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친절한 의사를 넘어 주님의 의사가 되는 건 그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환자를 위해 손을 잡고 기도 드리지만 저의 힘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이 도와야 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 환자 중에는 수혈을 거부하는 다른 종교 신자도 있었습니다. 국선도 신봉자나 도를 믿는 교도도 있었고 스님도 몇 분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들과도 모두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고 기도합니다. 제가 대표로 기도하긴 해도 마음속으로는 아마 각자 자신의 신을 찾았을 겁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성공적으로 수술과 투병을 마치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 자포자기했던 환자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살아나는 기적이 간혹 있었습니다. 때로는 세상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때도 예전과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의사도 사람인지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돌보던 환자가 세상을 떠나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 중압감을 못 이겨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게 되지요. 의사들의 평균 수명이 그 어떤 직업군보다 짧다는 통계를 보면, 의사들이 얼마나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는지 여실히 증명됩니다. 평생을 중압감과 싸우다 보면 다른 사람보다 빨리 지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수술을 해야 하는 외과 의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반쯤 죽었다 반쯤 살아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의사 생활에 익숙해지더라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사는 거의 없을 겁니다. 수련의 시절, 환자가 죽으면 많은 수련의들이 술과 담배를 찾았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기도에 의지했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며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자 근심과 번민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가 찾아온 겁니다.


“부족한 제 힘으로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고치신다고 믿기에, 하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하는 의사가 됩니다. 힘들고 고통받는 암 환자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들이 암을 꼭 이겨내게 하옵소서.”


삶이 좋은 것이고 죽음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이 가진 편견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일 수 있습니다. 생사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에는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곤 합니다. 결과를 하늘에 맡기자,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만 매 순 간 환자에게 충실함으로써 주님의 의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도 암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엔 기도하세요. 치료를 열심히 받고 좋은 음식을 잘 먹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면서, 생사의 결정은 신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이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암 치료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게 될 겁니다.


신에 대한 믿음처럼 의사에 대한 믿음도 환자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치료 과정에서 불신이 쌓입니다. 최악의 경우 병원을 옮기는 사태까지 발생하는데,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손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의사를 신처럼 여기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환자가 어떤 경우든 의사를 믿고 따를 수 있어야 치유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믿음이 의사도 살리고 환자도 살립니다.


기도의 힘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김재환감독

김재환 감독은 미국의 어느 유력 매체의 기자가 자신에게 했던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전하며 인터뷰의 말문을 열었다.

“그 기자가 어눌한 한국말로 이러더라, 한국 교회, 왜 이렇게 또라이예요?
외국인들이 한국적인 풍광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붉은 십자가다.
외국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가 그렇게 많은 곳은 무덤뿐이다.
내게는 그러니까 한국 기독교가 무덤이 된 것처럼 보인다.”

김재환 감독의 신작 <쿼바디스>는 그 수많은 십자가들을 향한 냉철한 자성의 목소리이며, <트루맛쇼> <MB의 추억>에 이은 통렬한 풍자화다.

- <쿼바디스>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자주 방영해주던 영화의 제목이라 낯익다. 제목을 패러디하려는 의도였나.

1951년 <쿼바디스>를 물론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맥락이 있다.
나는 나의 전작들을 ‘역지사지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트루맛쇼>에서는 미디어가 하는 행태 그대로를 빌려와 미디어를 찍어본 것이었고, <MB의 추억>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 유권자를 보는 것이었다.
<쿼바디스>에도 이런 역지사지의 면이 있다.
‘쿼바디스’라는 말뜻은 원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은 말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박해받을 때 냈던 신음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교회를 보며 오히려 예수님이 신음을 내고 계실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원래 그 말의 향방을 거꾸로 바꾸어서 지금 한국 교회에 묻고 싶었다.
신음하는 예수님이 한국 교회에 묻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교회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하고.

- 시사회는 좀 열어봤나, 반응은 어떤가.

=많이 했다. 의외로 70~80대 어르신들이 많이 오신다.
그분들에게 “51년 <쿼바디스>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닌가요?” 하고 물으면 다들 빙그레 웃으시며, 다 알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목사님들도 많이 보러 오셨다.
그분들은 잘 알고 있는 거다.
대형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위중한 한국 교회에 단지 빨간 약만 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 기독교인인가.

=그렇다. 영화에서 기독교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던가?
(웃음)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기독교 영화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영화는 한국 교회의 민낯, 한국 교회의 욕망을 보자는 것이다.
<MB의 추억>으로 유권자의 욕망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처럼.
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국 기독교 성공학의 결정판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 영화로 비기독교인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하고 싶었다.

- 한국 대형 교회의 폐단에 대한 비판이 주요 내용이다. 관련자들도 등장하고. 소란스러워질 여지가 있을 텐데.

=안 그래도 영화에 등장한 교회의 몇몇 관계자들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하더라.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왔나 걱정됐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진짜 웃긴 상황이다. 그들이 보러온 자리는 펀딩에 참여한 분들을 위한 유료 시사회였으니까, 이 사람들은 내 영화를 확인하려고 영화의 펀딩에 참여를 한 거다. (웃음) 준비는 다 되어 있고 법적으로 걸어도 내가 이긴다. 오히려 내가 서글픈 건 주변으로부터 “두렵지 않느냐, 어디 해외라도 잠시 다녀와라” 이런 말을 들을 때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구나,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닌 거다. 그래서 <쿼바디스>의 포스터에 메인 카피를 이렇게 적어놨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본래의 제 의미를 상실하여 이미 교회가 아닌 것들을 대상으로,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새삼 말하려니 오히려 허무하기까지 하다.

-참고한 자료들이 있는가.

=일단 많은 책을 참고했는데, 그중에서도 청어람 아카데미 양희송 대표의 책 <다시 프로테스탄트>에 크게 빚졌다.
그 책에서는 한국 교회의 폐단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성직주의.
한국 교회가 목사들로 다 대표된다는 것이다.

둘째, 성장주의.
성장이라는 가장 큰 목표를 설정해두고는 다른 모든 문제는 다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셋째, 승리주의.
세상을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전체 맥락의 구성에 있어서는 어떤 흐름을 따랐나.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라는 패러다임 안에 있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맥락화했다. 때로는 장소가 아주 중요했다. 예를 들면 평화 기도회에 참석한 조지 부시의 장면과 이랜드 해고 노동자들의 농성 장면을 연결시켜놓은 부분이 그렇다. 시간차는 나지만 둘 다 배경이 되는 장소가 상암월드컵경기장이다. 어떤 나라의 경우에는 부시를 전쟁 범죄자로까지 취급한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 와서는 평화를 간증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간증하기 위해 섰던 월드컵경기장 그 아래층 홈에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기독교적 기업이라 자처하던 이랜드가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해고했고 그들의 농성이 있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우리나라의 민중과 교회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랜드 노동자들이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이 시무 장로로 있었던 사랑의 교회를 찾아가 농성하는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랑의 교회 증축에 관한 언급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그 증축에 땅값까지 포함해 3천억원이 넘는 예산이 들어갔다.
영화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이슈들을 농축하고 있는 상징물처럼 여겨졌다.
지금 한국 대형 교회의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부끄러운 면모를 담고 있는 상징적 건축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목사 의존주의, 성직주의, 성장주의 등 많은 문제가 거기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 교회의 목사는 “우리 교인들 중에 판검사가 몇명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직접 볼 수 있는 이 건물의 이미지로 영화를 열고 닫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마이클 모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미국의 다큐 감독 마이클 무어의 인상착의를 흉내냈다.

=가상의 인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이클 ‘모어’라고 이름 지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보면 그가 친구인 토머스 모어의 이름을 빌려와 패러디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 책에서 영감을 받아 가져온 부분들이 많다. 그 배경을 아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다가 한번씩 빵빵 터지는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같은 중세 시대의 종교 개혁자였다. 중세 유럽 기독교가 처한 상황은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만연하는 한국 교회의 헌금 중시주의를 보자. 중세 시대에 면죄부를 파는 것과 똑같은 거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해당 목사들의 인터뷰가 없다. 안 만나주던가.

=당연히 안 만나준다. 만나려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매번 따돌림 당했다. 돌아온 답변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그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웃음) 쉽게 만날 수 없는 분이라니, 이 말, 정말 웃기지 않나. 목사님 만나는 게 예수님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조용기 목사에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 맞습니까?” 하고 감독이 외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조용기 목사의 법정 출두 장면이다.
날짜와 장소가 정해져 있었으니 미리 아침부터 기다릴 수 있었다.
카메라맨들을 건물 입구마다 보내 대기하고 있었는데, 내쪽으로 와서 마침 찍을 수 있었다.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정해놓은 건 아니었다.
뭘 질문할까 생각했는데 그냥 답답하기만 했다.
내 마음속에서 본능적으로 나오는 말을 따라보자, 했던 것인데 그 말이 나온 거다.
생각보다 내 울분이 컸었나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이 영화는 다큐와 픽션이 섞여 있는데, 성추행 파문을 일으켰던 전병욱 목사 부분을 묘사할 때는 다른 사안에서보다 픽션을 더 적극 활용했다.

=다른 분들 내용에서도 그런 극화된 환상 장면들이 좀 있었는데, 뺐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병욱 목사가 쓴 책의 내용을 피해자 여성들이 그에게 다시 읽어주는 장면이 꼭 필요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대형 서점에서 팬 사인회를 하면 한 시간이 지나도 줄이 줄어들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나한테도 그분 책이 네권이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자기가 쓰는 글과 삶이 다른,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다. 잘못한 것을 알지만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방법을 못 찾는 자의 고뇌를 표현하고도 싶었고. 그 부분만 환상이 들어갔는데, 많이 이상하던가?

-갑작스럽게 인물의 내면이 표현되는 장면이어서 돌출적으로 보였다. 다만 영화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상호 기자, <뉴스타파> 최승호 PD 등도 픽션 부분에 등장하여 연기에 한몫하던데.

=<뉴스타파> 최승호 PD는 내 10년 선배다. 최 선배가 오래전에 <경찰청 사람들>이라는 프로를 했었다. 이번에는 마치 자신이 거기 나오는 사람들처럼 연기를 한 거다. (웃음) 그리고 이상호 선배는 기자하기 전에 KBS 슈퍼탤런트 최종 본선 무대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기독교 내부 개혁자들의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가 상당수 등장한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어떤 방점일 것이다.

=되도록 많은 관련 서적을 읽고 난 뒤에 그중 내가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분들을 선별했다. 그분들의 책의 내용과 이 영화가 어떤 접점을 이루기를 바랐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출연을 거절했다. 이 영화의 내용이 더 좋은 교회로 만들기 위한 개혁에 관한 것인지, 단지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에 관한 것인지 의심스러워 그랬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대형 교회 관련한 인터뷰 자체가 싫다는 분들도 계셨다. 시달려서 싫다는 것이었다. <트루맛쇼>에서처럼 하나의 프레임을 정해놓고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체의 욕망과 방향을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전반적인 개혁이나 변화를 바라는 관점이 잘 드러나기를 바랐다.

-인터뷰이 중 한분은 문제의 핵심을 “돈과 권력”으로 집약한다. 김홍도 목사가 그 예로 등장한다. 김 목사는 현재 법정 구속 상태다.

=어떤 분이 그런 농담을 하시더라. 전국을 돌며 <쿼바디스> 무대 인사를 함께해주어야 할 이 시점에 거기 계신다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일가의 문제도 유사하다. 그러니까 우린 물어야 한다. 당신은 목사를 믿는 환자인가, 예수를 믿는 신자인가.

-<쿼바디스>가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나.

=늘 그랬다.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변화를 원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미세한 변화들이 늘 감지되곤 한다. 그래서 힘들어도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쿼바디스>도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일반적인 기독교 관련 휴먼다큐는 많이 있다. 나는 오히려 다른 변화의 시작이 되는 그런 걸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만 있다면, 이 영화를 본 몇 사람의 마음만이라도 바뀌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만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스스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도마에 오르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김재환 감독은 비기독교인의 눈에 <쿼바디스>가 어떻게 비치는지 많이 궁금해했다.
답하자면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아도 <쿼바디스>는 사회적 상식에 관한 정당한 질문이 담긴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기독교 외부에서 내부를 단죄하거나 계몽하려는 대신 기독교 내부의 자정적 목소리를 모았다는 것은 신뢰할 만한 일이다.
김재환 감독 스스로가 그 일원 중 하나인 것은 당연하다.
그 방법이 풍자일 뿐이다.
적어도, 한국의 기독교 상황에 관한 한, 특히 대형 교회들의 정황에 관한 한, 김재환 감독은 당대의 에라스무스가 되기를 자청한 것 같다.

*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 10. 27-1536. 7. 12)
일반적으로 에라스무스라고 부른다.
네델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 인문주의자.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준 기독교 시학자.

이름 뒤에 Roterodamus를 붙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라틴어 필명이었다.
데시데리우스는 갈망(desire)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사인 데시데리움(desiderium)의 변형이고, 에라스무스는 '사랑받는'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라스미오스(ἐράσμιος)의 변형이고, 로테르다무스는 네덜란드 도시인 ' 로테르담의'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