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08-2023(토) 새벽 묵상 시간에
신앙생활과 더불어 생활신앙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이제까지는 주로 신앙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밝고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생활신앙을 바르게 가르쳐야 하겠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결과물은 대형교회를 세운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생활신앙의 결과물은 세상은 대형교회가 세워지기 전보다 더 부패했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활신앙의 결과물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파송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하겠다.
그 말씀의 근거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소금(鹽)
鹽자는 ‘소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鹽자는 監(볼 감)자와 鹵(소금 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監자는 대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금이라는 글자로는 이미 鹵자가 있지만 鹽자는
식용 소금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다.
이미 가공한 상태의 소금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는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키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마솥에 끓여서 증발시키는 방법이었다.
鹽자는 대야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監자를 응용해 가마솥에서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소금을 뜻하는 鹵(로)와 음과 함께 짜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監(감→염)으로 이루어짐. 소금의 뜻. 암염과 구별(區別)하여 사람이 만든 소금의 뜻으로 쓰임.
너희는 세상의 빛(光)
光자는 ‘빛’이나 ‘빛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光자는 儿(어진사람 인)자와 火(불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光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빛이 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光자를 보면 儿자 위로 火(불 화)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 주위가 매우 밝게 빛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光자는 ‘빛’이나 ‘비추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火(화 ☞ 불)과 사람인(人(=亻) ☞ 사람)部의 합자(合字).
「사람이 횃불을 들고 밝게 비추고 있다」는 뜻이 합(合)하여 「빛」을 뜻함.
또 전(轉)하여 「번영하다」로 되고 가차(假借)하여 「광대(廣大)ㆍ광원(廣遠)」의 뜻.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년 1월의 암송 성구(마태복음 5:3-10)
팔복의 사람 / 복 있는 사람(마태복음 5:3-12)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세 가지의 시험을 예수께서는 모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며
성경의 말씀으로 다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그 후, 예수께서 12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다.
가르치며(Teacning)과 복음을 선포하며(Preaching)과 병을 고치시는(Healing) 일을 하시니 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따라와 이들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이를
'산상보훈'이라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인가'를 말씀하시며 설교를 시작하신다.
과연 복 있는 자는 어떤 자인가 생각해
보며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복 있는 자는?
1. 심령이 가난한 자
- 세상에서 사람은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성경은 실제로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을 때, 그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워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어진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31)에서 부자는 지옥에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마9:23-24)고도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위대한 신앙인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욥, 다윗, 솔로몬, 다니엘은 부자였다. 이뿐 아니라 세리장 삭개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등등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를 섬겼던 여인들(눅8:2-3)도 있다. 저들은 물질은 부요했으나 심령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다 마음이 가난했다. 이 말씀은 심령이 겸손한(Humble) 자들이란 말이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이다.
2. 애통하는 자
-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밝은 빛을 통해 자신을
볼 때, 비로서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자신을 보려해도 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잘못도 발견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잣대로 자신을 측량해 볼 때,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전능자 앞에서 선 자신을 볼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와 애통함이 따라 온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된다. 곧바로 그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고 고백하였다.
3. 온유한 자
-
온유하다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야생마는 아주 다루기 힘들다. 그러나 잘 길들여지고 재갈을 물리어진 말은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주인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이와 같이 온유한 자는 자기 욕심이나 자만이나 분노를 잘 절제하며 자기 일을 잘
감당하는 자를 말한다.
예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니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고 말씀하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굶주린 자는 먹을 음식을 구하며, 목마른 자는 마실 물을 찾는다. 목마른 사슴은 시냇물을 찾아 헤맨다. 복 있는 사람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의(Righteousness)'를 구하는 자라는 뜻이다. 의는 법적인 용어이다. 죄를
범하여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무죄여서 처벌을 면하느냐의 문제다.
성경은 원래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고 선포한다. 모두 죄인이며, 죄인은 다 그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죄인이 형벌을 면하려면 법정에서 재판장의 선처를 바라며 의롭다고 인정되어지길 간청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애통이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는 단계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재판장에게 자기의 형벌을 탕감해주길 간구하며 매달리는 단계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마침내 의롭다함을 인정을 받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고, 영생을 누리는 길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며 다시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참되며 진실되이 의의 길을 걸어가길 원하는 자들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
6. 마음이 청결한 자
7. 온유한 자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인 사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말이다. 죄 지은 자를 결코 그냥 놓아 줄 수 없으심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다. 그러나 이 죄의
결과가 형벌임을 심각히 깨닫고 심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하고 매달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그가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대속의 은혜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16). 예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사함을 이루었음을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얻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명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고 성경은 말한다. 죄사함의 은총을 통해 의롭다함을 입고 영생을 얻는 자만이 참되고 영원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된다. 이러한 자들이 모두 그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복(요삼1:2)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건강을 잘 유지하려면 좋은 음식을 잘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며 의사에게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신앙인은 영육간에 강건함을 잘 유지하기 위해 매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잘 섭취하고 행함으로 말씀 생활을 하며 매일 자신이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2023년 2월의 암송 성구(시편 1:1-6)
복 받을 사람
회개의 사람(다윗)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따라 내 죄과(transgression)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iniquity)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sin)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죄악"은 마땅히 지켜야 할 모습에 왜곡 혹은 변형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길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시편은 영혼의 해부학"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로 인하여 죄를 짓고 회개한 참회의 시로 인간의 죄를 세 개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죄과(트랜스그레션. transgression) 위반
둘째는 죄악(이니쿼디. iniquity) 부정
셋째는 죄(신. sin) 죄
세 개의 용어를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 단어로 페샤(Transgression), 아온(Iniquity), 하타(Sin) 라고 합니다.
첫째는 죄과 : 페샤
둘째는 죄악 : 아온
셋째는 죄 : 하타
죄과(Transgression) 페샤 / 고의적인 죄,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
죄과는 "침해하다, 침범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고의로 어기고 반항하는 마음과 행동의 죄를 죄과라 합니다.
이와 같은 죄를 시편 19편에서는 "고범죄" 라고 하였습니다.
죄과는 "고의적인 죄" 즉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고의적으로 범하고 어긴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기질이 있어서 하나님 말씀이 옳은 줄 알면서도 이것을 침해하고 침범하는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과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21-23)
그래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반항하여 대적하는 것이 죄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일축해 버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깁니다.
자기 추구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연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도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전에 양도천목사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계룡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육체의 욕망이 힘들게 하므로 고환을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절제하기 어려웠으면 이렇게 자기 몸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고통을 선택하였을까요?
그런데 노년에 다른 사람의 고환을 돈을 주고 사겠다고 광고를 하여 더 놀라게 했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하나님의 힘으로 절제하고 다스려야지 인간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깨닫게 하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죄악(Iniquity) 아온 / 구부러진 마음, 악독한 마음
아온이란 "온전한 것을 구부러 뜨리다(Make it crooked), 뒤집다(Perverted)"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삐뚤어져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가야 속이 시원한
변태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마음이 죄악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악독, 즉 악하고 독한 마음"이 들어있기에 자식을 키워도 똑바로 자라는 애들이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구부러진 마음 악독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계속적인 진실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러한 죄과들이 말갛게 씻겨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씻기다'라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몸을 씻는다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고 특별히 옷을 빠는데 사용되는 단어인데 아주 심하게 더렵혀져 있는 옷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아주 강하게 반복적으로 내리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교회학교 유아부에 다닐 때 부장 권사님에게 사무엘이 헌금할 때 어떻게 하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께서 동전 한 개만 헌금주머니에 넣는다고 일러주셨습니다.
당시 헌금을 하도록 동전을 두 개를 주머니에 넣어 주었는데 한 개는 다른 주머니에 감춘 것입니다.
당시 동전의 용도를 전혀 모를 때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인간의 본성이 참 악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죄악은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뿌리를 깊숙히 내리고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Sin) 하타 / 과녁을 빗나가다, 미달이 되가
하타란 단어는 “과녁을 빗나가다” “미달이 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타”의
개념은 "길을 잘못 들다", "코스에서 이탈이 되다" 라는 으로도 사용합니다.
인간의 말과 생각과 행동하는 것이 이미 목표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가야할 길과 인생의
코스를 분명히 정해 놓으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죄과, 죄악, 죄”란 세 단어는 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기도 하는데 죄는 인간의
모든 영적 정신적 육적인 문제를 포괄하는 용어로서 모든 인간의 본질이며 현주소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병을 고치려면 먼저 병원을 찾아가서 의사를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병의 상태를 알아 고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구원론을 말하기에 앞서 인간의 죄 즉 “인죄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이방인의 죄를 다루고 있고 로마서 2장에서는 유대인의 죄를 다루고 있으며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목표에서 벗아난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결과는 '파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나라 안에서 밧세바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간 우리아의 아내를 데려와서 동침하는 하타라는 죄를 범하는 것은 한 때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과 맞설 수 있는 믿음이었으나 그 믿음이 항상 다윗을 지켜주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우주를 망가뜨리고, 사람들의 삶을 오염시키고,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성을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해치고 상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런 행위들에 대해 용서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의 범죄에서부터 그리고 이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본절이 두 개의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앞 부분의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죄과'(페솨. 6588)는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뜻한다(Delitzsch, Weiser).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죄과'를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1. 밧세바와의 간통(삼하 11:2-4)
2. 그 남편 우리아 살해(삼하 11:14-17)
두가지의 죄를 범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
관련 성경 / 허물(창 31:36, 왕상 8:50, 잠 10:12), 악(출 34:7, 겔 33:12), 범함(레 16:16), 죄악(민 14:18, 욥 35:6, 사 24:20), 죄(욥 34:37, 시 19:13, 잠 28:2),죄과(잠 17:19, 사 59:20), 범죄(잠 29:6,22), 패역(사 57:4).
구약 성경 / 93회 사용
'도말하소서'(*, 므헤)는 '문지르다', '부드럽게 하다', '없애다'는 뜻이며 채무 관계를 청산하는 뜻에서 차용증서를 없앨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범죄 사실을 지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69:28;출 32:32). 한편 고대 바벨론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그 범죄 사실을 토판(土版)에 기록했고, 용서를 받았을 경우에는 그 토판을 깨어버렸다고 한다(Kraus).
'죄악'(아온. 5771)은 '구부리다', '왜곡하다'는 뜻의 '아와'(*)에서 유래한 말로 '사악함', '왜곡'의 의미이다(Delitzsch).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악한 의도'를 가리킨다(L. Kohler). 그리고 '씻기시며'의 '카바스'(*)는 원래 '짓밟다'라는 뜻인데 옷감을 발로 밟아서 씻는다는 의미에서 '씻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출 19:10, 14;삼하 19:24). 상징적으로 렘 2:22에서는 본문에서처럼 죄악을 씻어 없앤다는 뜻으로 쓰였다. 구약의 희생 제사와 정화 의식은 죄악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죄악(아온. 5771) עָוֹן
1. 사악. 2. 부패한 행동. 3. 죄에 대한 징계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벌(창 4:13), 죄악(창 15:16, 삼상 3:13, 겔 4:6), 죄(출 20:5, 민 30:15, 애 4:6), 죄책(출 28:38), 악(출 34:7, 신 19:15, 잠 5:22), 허물(레5:1, 삼하3:8, 욥7:21), 불의(레16:21, 욥33:9, 사27:9), 형벌(레26:41, 느19:29), 벌(삼상28:10,왕하7:9), 범죄(시89:32, 겔4:5), 죄짐(사43:24), 불의함(호14 : 1).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죄'(헤트. 2403)는 '빗나가다',
'상실하다', '범죄하다'는 뜻의 '하타'에서 유래한 말로 '범죄', '과오' 혹은 '형벌'을 뜻한다.
그리고 '깨끗이
제하소서'(타헤르)는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적으로도 정결하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이다(레 13:6, 13).
이것은 곧 다윗이 죄의 오염을 나병만큼이나 무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죄(하타트) 2403 חַטָּאָת
1. 죄. 2. 속죄제. 3. 우상에 대하 적용되기도 함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חָטָא
대저(*, 키) - '왜냐하면'의 뜻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절은 다윗이 1,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를 한 까닭을 설명해주는 부분인 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죄의 간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본절과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1, 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가 진실되며 또한 간절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동사 '아오니'(*, 에다)가 본 문구의 주어가 1인칭 단수임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별도의 1인칭 단수인칭대명사 '나는'(*, 아니)을 덧붙이고 있다.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A.Cohen). 한편'아오니'의 기본형인 '야다'(*)는 단순한 지적(知的) 앎이 아닌 체험적 앎을 가리킨다(호 6:3주제 강해, '야다'의 개념). 결국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뼈에 사무칠 만큼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사이다.
시51편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영원한 속죄와 단번속죄를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얻었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자의든 타의든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때 그 죄를 해결하는 비결은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신자들이 혹 어떤 실수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기 이전에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롬8:31-39).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될지의 여부는 오직 그 회개 기도의 질의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시32:5).
Ⅰ. 죄에 대한 인식(3)
“대저”-“왜냐하면”
다윗은 1,2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除)하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즉 다윗은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간구하였는데, 그가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단락이 3,4절입니다.
다윗은 그 이유에 대해 첫째,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1,2절에서 “죄과”, “죄악”, “죄”로 자신의 죄를 이미 세 가지의 용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죄과”는 국가적, 도덕적,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죄과”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타나는데, 다윗은 밧세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일을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까지 그의 죄악이 심각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과에 대해 “아오니” 즉 알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말한 고백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음이 강력하게 내포되었습니다. 즉 1인칭 단수 대명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아오니”라는 단어에는 다윗이 자신의 죄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오니”는 히브리어 “yadah(야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남녀가 결혼을 의미하는 “동침”이라는 의미로, 깊이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한 것은 그는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것이 큰 죄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또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서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난 후에 그 죄책으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 죄가 그 영혼을 끝까지 괴롭힐 것입니다.
Ⅱ. 죄의 성격(4)
죄의 일차적인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한 것은 그가 범한 죄가 사람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범죄가 인간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가서 보디발의 집의 총무가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 선지자 나단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인간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범죄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범죄에 대한 인식-“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다윗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에게 완전히 알려졌다는 것을 고백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은밀히 죄를 범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죄든지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아가 전시중이라는 이유로 동침하는 것을 거절하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즉 다윗은 전시중이라는 이유로 자기 아내와 동침하는 것조차 사양한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그의 영혼을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양심의 메아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밧세바와 어떤 관계냐? 왜 밧세바를 왕궁으로 끌어들였느냐? 우리아는 어떻게 되었느냐? 우리아는 누가 죽였느냐? 우리아는 왜 죽였느냐? 이런 송사가 그의 양심으로부터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마지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 목전에서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이루어졌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삿3:7)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의로우며 순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정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인 것이므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재판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순전하시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즉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범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한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따라 정죄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순전하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범죄를 따라 정죄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3,4)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의로우시며 순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숨기기보다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정죄하실 수도, 용서하실 수도 있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