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메트) 인애(헤세드) 지식(다아트) 사랑(아하브)



진실(에메트) 인애(헤세드) 지식(다아트)

에메트 אֱמֶת

히브리어 <에메트 אֱמֶת >는 ‘진실/진리/성실/참/진실무망’따위로 번역되는 명사이다. 그리스어로는 <알레테이아 ἀλήθεια>라고 번역된다. 전도서에서 이 단어는 딱 한 번 언급되는데 ‘진리’(개역) 또는 ‘참됨’(새번역)이라고 번역되었다(전12:10).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피스티스 πίστις >라고도 번역된다(히11:1). 히영사전은 firmness / certainty 라고 정의한다.

<에메트>는 <헤세드 חֶסֶד >라는 단어와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헤세드>는 자신의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시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음을 표현하여서 <에메트>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 둘이 나란히 사용되면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상용구가 된다.

오경에는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된 구절이 다섯 군데 나온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며느리를 구하려고 밧단아람으로 갈 때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인자<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자기에게도 보여 달라고 기도한다(창24:27). 그 늙은 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친척인 라반에게도 요구하였다(창24:49). 야곱이 에서를 상봉하기 전날 밤에 너무나 두려워서 하나님께 은혜<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다(창32:11, 개역). 임종을 앞둔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아들 요셉에게 부탁하면서 인애<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요구하였다(창47:29, 개역). 믿음의 조상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시내산에서도 모세에게 계시되었다. 금송아지 숭배로 타락한 백성을 용서해주시고 새 언약을 맺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진면목은 <락훔>, <한눈>, <에렉 아파임>, <헤세드>와 <에메트>, 다섯 가지의 단어들로 묘사하고 있다(출34:6).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나 거짓이 없이 진실하다.

<에메트>는 <아만 אָמַן >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동사 <아만>은 연약한 아기를 보살피는 부모가 보살피는 것에 비견하여 양육하고 키우는 강력한 후원행위를 가리킨다. 건물의 기둥을 가리키는 명사 <옴나 אֹמְנָה >도 이 동사에서 파생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튼튼한 기둥처럼 강력하게 떠받치고 계신다. 이것은 어떤 가능성이나 장래의 희망 사항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확실한 일이다. 이 사실을 확고히 믿는 것이 성서적 믿음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늘 도우신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곧 신자(信者)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에게 존재의 기반을 제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신7:9). 여호와는 믿음의 조상들과 불변의 진실한 언약을 맺으시고 항상 자신의 백성을 확실하게 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시89:28).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아하스 왕의 믿음을 독려하였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7:8 개역),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모든 기도를 ‘아멘’이란 확언으로 끝맺는다. 지금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정말 참되고 확실하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표현으로 <아멘 אָמֵן >이라 외치는 것이다.


“헤세드(חֶסֶד)”에 대하여 – 잠언 20장 28절에 대한 묵상


  • 어원적 의미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우리말 딱 한 단어로 번역하기 무척 까다로운 어휘입니다. 헤세드는 계약관계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전문용어로, 그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1) 계약의 내용: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끼리 서로 잘 대해 주자.

2) 계약의 영속성: 한 번 맺은 계약은 쉽게 깨지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을 비롯한 근동세계에서 어떤 집단이나 개인 사이에 계약을 맺는 목적은 기본적으로 서로 나쁘게 대하지 말고 좋은 관계를 맺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구두로 맺어진 계약이었습니다. 그 맺은 계약을 공식 문서로 공증 받고 감시, 감독할 상급기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한번 맺은 계약은 쉽사리 파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약의 지속성, 혹은 영속성은 계약이 갖는 핵심적인 속성이 됩니다.

      창세기 21장 22-31절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은 헤세드의 두 가지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21:23 그런즉 너(아브라함)는 나(아비멜렉)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개역개정)

계약의 내용을 쉽게 정리하면, 서로 진실하게 행하고 잘 대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하나님께 맹세함으로써 그 지속성이 보장됩니다. 계약의 영속성을 위한 장치를 창세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21:30-31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두 계약당사자 사이에 어떤 문서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주고 받음으로써 계약이 성립되고, 그 장소의 이름(“브엘세바” = 맹세의 우물)을 통해 그 계약이 후대에 계속 기억됩니다. 이 계약의 영속성을 보증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계약당사자 각자가 믿는 신에 대한 신앙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계약입니다. 여기서 맹세의 보증이 되는 “하나님(엘로힘)”은 유일신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일반명사로서 “신(神)”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이민족 사이의 대화가 나타나는 창세기의 장면들에서 엘(אֵל)혹은 엘로힘(אֱלֹחִים)은 고대근동 전역에서 통용되는 표현이고, 반면에 여호와/야훼(יהוה)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신으로 특정됩니다.  

야곱과 라반 사이의 계약에 대한 창세기 31장 역시 헤세드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성경 본문입니다.

       창31: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창31: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계약의 내용은 자신(라반)의 딸들(레아와 라헬)에게 잘 대해 주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해를 가하지 않기로 하자는 것이고, 그 계약의 영속성은 돌무더기를 통해 표현됩니다. “증거의 돌”을 히브리어로는 “갈-에드(גַּלְעֵד)”라 하고, 아람어로는 “여가르-사하두타(יְגַר שָׁחֲדוּתָא)라고 합니다.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창31:47). 그리고 이 계약은 각자가 믿는 신의 보증을 받습니다.

       창31: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히브리어 원문에는 “판단하옵소서”라는 동사는 복수동사로 되어 있습니다(이쉬페투יִשְׁפְּטוּ).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신과 나홀(라반의 할아버지)이 믿는 신, 그 두 신이 이 계약의 보증인이 되어달라고.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창31:53).

  • 헤세드의 용례와 그 번역의 예들

계약의 두 가지 속성(잘 대해 줌과 오래 지속됨)은 헤세드(חֶסֶד)라는 계약언어로 하여금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도록 합니다.

1) ‘잘 대해 줌’에서 파생된 의미: 인자, 자비, 사랑, 인애 등

2) ‘오래 지속됨’에서 파생된 의미: 성실, 신실, 신뢰,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 등

히브리어 헤세드의 번역어로 주로 쓰이는 인자(kindess), 자비(mercy), 사랑(love), 인애(loving-kindess) 등은 헤세드의 첫번째 의미가 강조된 경우입니다. 반면에 성실(faithfulness), 신실(trustworthiness), 신뢰(trust) 등은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인 오래 지속됨,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이 강조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번역어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영어의 “steadfast love”라는 번역이 1) 잘 대해 줌(love)과 2) 오래 지속됨(steadfast)의 두 의미를 최대한 함께 담으려고 애쓴 번역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헤세드를 모두 “steadfast love”로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헤세드의 용례 중에 두번째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근 아멘(אמן)에서 파생된 에메트(אֶמֶת)나 에무나(אֱמוּנָה) 등과 함께 쓰일 때는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오래 지속됨, 변함없음, 흔들림없음)이 강조되는 경우입니다. 어근 아멘(אמן) 역시 그 어원은 “토대가 굳건하다, 흔들림 없다(to be established firmly)”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세드와 에메트, 혹은 에무나는 서로 다른 개념의 단어가 아니라 비슷한 개념을 나타내는 ‘짝단어’라는 것입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를 우리말 번역은 습관적으로 “인자와 진리”로 번역하는데, 본문의 맥락을 무시한 이러한 기계적 번역을 저는 번역자의 의무를 충실히 하지 않은 ‘아주 게으른 번역’이라 칭합니다. 문맥과 상관없이 헤세드를 “인자”로 번역하는 경우는 우리말 번역 성경에 너무 많아 그 예를 다 들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 잠언 20장 28절의 헤세드  

잠언 20장 28절은 헤세드(חֶסֶד)와 에메트(אֶמֶת)가 동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개역개정: 왕은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헤세드)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새번역: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가 왕을 지켜 주고, 정의(헤세드)가 그의 보좌를 튼튼하게 한다.

       공동번역: 임금은 친절(헤세드)과 신실(에메트)로 스스로 보위하고 정의(헤세드)로 그 자리를 다져야 한다.

       카톨릭성경: 자애(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임금을 지켜 주고 정의(헤세드)가 그의 왕좌를 받쳐 준다.

대표적인 한글 성경들은 헤세드를 “인자, 친절, 자애”로 번역하고, 에메트는 “진리, 신실, 진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두 헤세드의 첫번째 의미가 부각된 번역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개역개정을 제외하고, 새번역과 공동번역, 카톨릭번역은 하반절의 헤세드를 모두 “정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에 해당하는 번역입니다. 우선 번역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개역개정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한 문장에 쓰인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번역한 것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새번역 등의 번역자들은 헤세드의 두 가지 의미를 한 문장 안에 다 포함시키려고 노력한 것이겠죠.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과연 이 문맥에서 헤세드의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잠언 20장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지혜로운 왕”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진노”하고(2절) “심판 자리에” 앉아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합니다(8절). 하나님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를 미워하시고(10절), “속이는 저울”을 싫어하십니다(23절). 그는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시는 분입니다(26절). 이 모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분명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악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시고, 그분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선악 기준이 변함없이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잠언 20장 어디서도 인자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8절에서 “인자한 왕”이 등장합니다. 그의 왕위가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그러나 다시 뼈에 사무치게 꾸짖고 벌을 내려서라도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속성이 묘사됩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30절).”

잠언 20장 전체의 문맥은 “인자, 친절, 자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헤세드는 첫번째 의미(“잘 대해 줌”)와는 관련 없이 두번째 의미(“변함없음, 흔들림 없음”)가 강조된 경우입니다. 왕의 자리는 친절과 자애,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확고한 가치관에 의해 보호되고 견고해 집니다. 따라서, 잠언 20장 28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합니다.

       “변함없음(헤세드)과 확고함(에메트)이 왕을 보호하고, 그의 왕위는 변함없음으로 말미암아 확고해 진다.”

성경에 쓰인 헤세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의 맥락이 “잘 대해 줌”이 강조된 경우인가, 아니면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이 강조된 경우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메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아>  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나게 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죄도 짓지 않았을 것 아닌가?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는가?
잘못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려는 시도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대답이 내려졌어도 이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기존의 답변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선악과(善惡果)’란 용어는 성경에 없다.
창세기 2장 17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장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메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아>이다. 이 장황한 명칭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해야만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다. 우선 <메에츠מֵעֵץ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메 מֵ>는 전치사로서 영어의 from에 해당한다.
<에츠 עֵץ>는 ‘나무’이다.
<메에츠>는 ‘그 나무에서부터’ from the tree란 뜻이다.
이것을 창세기 2:17은 ‘나무의 열매’라고 옮긴 것이다.
그러나 <메에츠>가 나무의 열매만이 아니라 뿌리나 잎이나 가지를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열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퍼리פְּרִי >가 창3:3, 6에서 두 차례 등장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직접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에츠>는 열매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 긴 호칭을 줄여서 사람들은 ‘선악과(善惡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용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다아트 הַדַּעַת>란 요소이다.

<하 הַ>는 정관사이고 <다아트 דַּעַת>는 ‘알다’란 동사 <야다 יָדַע>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지식/앎/knowledge’이란 뜻이다. 여기에 <토브 우라아 טוֹב וָרָע>란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토브 טוֹב>는 ‘선(善)’, <라아 רַע>는 ‘악(惡)’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개념은 매우 폭이 넓다. <토브 טוֹב>는 ‘좋음/선/good/유익함/아름다움’이란 뜻으로서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라아 רַע>는 ‘싫음/악/evil/나쁨/해로움/추함’이란 부정적인 개념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라고 줄여서 표현하지 않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 열매’ 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일부러 장황하게 표기하고 있다. 이 나무를 굳이 한자어로 축약하여 표현하자면 ‘선악지식수(善惡知識樹)’가 될 것이고 그 열매는 ‘선악지식과(善惡知識果)’가 될 것이다. ‘선과 악’은 성서의 매우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헬레니즘의 핵심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윤리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선과 악의 문제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주제를 다루었고, 그들의 윤리학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헬레니즘에 있어서 ‘선과 악’을 판별하는 주체는 ‘나(에고)’이다. 나에게 유익한 것은 ‘선’이고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이다. 이러한 윤리적 인식론에서 ‘인간주의’(humanism)가 출발하며 그 범주 속에 이기주의(egoism) 또는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가 포함된다. 창세기의 ‘선악지식과’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성서의 저자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는 본디 하나님이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피조물이 아니기에 모든 존재자를 다 품으시는 공공자(公共者), 또는 ‘공변성’(catholicity)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들을 살리는 공공자이기에 인간의 에고(ego)만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하다 하시면 사람에게도 좋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좋은 일이 된다. 하나님에게 좋은 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에게도 좋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과 한마음이 될 때 그 사람은 모든 타자에게 유익한 존재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과 어긋나게 되어 공공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게 되었다(창3:23; 4:2). 사람은 하나님과 계속창조의 사역을 하면서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엇박자로 살면 더 이상 하나님과 동역할 수가 없게 된다. ‘선악지식수’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만든 리트마스 시험지이다. ‘선악지식과’를 먹지 말라고 엄금한 까닭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같은 일을 도모하는 상태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선악지식과’를 먹는 행위 자체가 벌써 하나님과 딴생각을 품었다는 증거이며 공공자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행위 자체는 이미 변질된 존재자의 표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역자인 사람의 존재를 항상 점검하시기를 원하신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공공자이신 하나님에서부터 개별자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만물을 위해 선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는 개별자가 하나님을 판단하게 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좋은 존재인지 나쁜 존재인지를 판단하려고 든다. 이로써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중심주의가 생겨났고, 공공의 유익을 추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이기주의라는 불신앙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출23:33). 이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경계한다. 인간이 자기에게만 좋은 것을 선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규열이 생기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저버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헛된 우상을 섬기게 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를 살지 못하고 사람의 이기(에로스)를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의 진의가 여기에 있다. 요한복음은 헬레니즘의 에로스적 가치관과 질서를 가리켜서 ‘세상’(코스모스)라고 정의한다. ‘선악지식과’의 금령을 표현한 동사구는 히브리어로 <로 토칼 לֹא תֹאכַל>이다. 이는 ‘먹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의 동사구는 십계명에 아홉 차례나 등장한다(출20:1~17).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령을 나타낸다. 창2:17의 금령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지시한다. 바울 사도는 이 금령을 해석한다.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다라고(롬3:30; 5:13, 20; 7:5, 7, 8, 9). 계명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된다. 선악과의 금령이 있었기에 사람의 죄성이 드러났다. 자신이 죄인인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모름지기 은혜를 아는 데 있다(갈2:22). 인간 실존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해에 재빠른 지식(self-interest)을 택할 것인가. 사람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 항상 시험과 검증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유한성이다. 사람은 로보트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공공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로 결단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창조동역자인 사람이 늘 결단하여 하나로 남아주기를 원하셨다. 사랑의 열정을 느끼고 싶으셨을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시험에 낙방하였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께서는 시험을 통과하셨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 속에서 이 시험을 늘 통과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다. 죄인의 실존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려는 속성을 품고 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발생한 수많은 원망과 불평의 사건들이 죄성을 증명해 준다(신명기9장; 출애굽기 15~18장; 민수기 10~20장). 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의 관계를 깨뜨려 버리려는 유혹자였다. 응시자를 떨어뜨리려고 파견된 시험관이 사탄이다.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성장이 기다린다. 시험은 성장을 향한 창조의 원리이다.


사랑 אַהֲבָה (아하바)


사랑(아하바. אַהֲבָה )

히브리어로 ‘사랑’을 아하바(אַהֲבָה) 라고 한다.
이 명사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아헤브( אָהֵב )에서 파생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그리스어로 γαπω (아가파오)라고 흔히 번역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하는 데서부터 게으름뱅이가 게걸스럽게 먹는 식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을 전달한다.
동사 피엘형은 16회에 걸쳐 나오는데, ‘잘못된 애정행각’을 표현하여 우상숭배를 경고하기도 한다(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동사 אָהֵב(아헤브)는 대체로 사람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처럼 부자간의 사랑(창22:2)이나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형제간의 사랑(창37:3)을 그리는가 하면, 노예가 주인을 좋아해 평생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출21:8), 이웃사랑을 명령하는 문장에도 사용된다(레19:18). 성도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10:19). 삼손이 데릴라를 사랑했다(삿14:16; 삿16:15). 룻이 나오미를 사랑한다(룻4:15). 엘가나는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다(삼상1:5).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25:28). 히람은 다윗을 사랑하여 국제 동맹을 맺었다(왕상5:1).

이상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אָהֵב(아헤브)가 아니라 כָּבֵד (카베드)로서 ‘존중하다/순종하다’란 의미이다. 즉, 자녀의 ‘사랑’ 대신에 ‘도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효(孝)’라는 단어도 한글성경에는 오로지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딱 한 번 나올 뿐, 구약성경에는 전혀 없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딤전5:4, 개역).

이 문장의 “효”는 그리스어로 ἀποδίδωμι (아포디도미)를 번역한 것인데, 새번역/공동역은 이를 “갚다/보답하다”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אָהֵב(아헤브)가 사용된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식도락(창27:4)을 표현하기도 하고, 취향으로서 기름(잠21:17)이나 은(전5:9)이나 선물(사1:23)을 좋아하는 경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시119:47), 율법(시119:97), 언약(시119:119), 교훈(시119:159)을 좋아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사람들은 마땅히 선(암5:15), 진리와 평화(슥8:19), 구원(시40:16), 지혜(잠29:3), 그리고 하나님(신6:5)을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도 많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표현에도 이 동사를 사용한다(신4:37: 사43:4; 말1:2).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들로는 자기 백성 외에도 시온의 성문(시87:2), 정의와 공의(시33:5), 성전(말2:11)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악(시52:3), 죽음(잠8:36), 허무(시4:2), 저주(시109:17), 거짓 맹세(슥8:17)를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다. 백성은 방황하기를 좋아하고(렘56:10), 게을러서 잠자기를 좋아한다(사56:10).

우정을 분사형으로 표현하여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할 때 이 용어를 차용했다(대하20:7). 강세형 피엘로 사용될 때 ‘아헤브’는 매춘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호2:7; 9:12; 겔16:33, 36-37; 렘22:20, 33; 30:14; 애1:19; 슥13:6).

명사형 אַהַב (아하브)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잠5:19와 호8:9에 두 차례만 등장한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아내를 “사랑스런” 암사슴에 비유했지만(LXX φιλα), 호세아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서 에브라임의 우상숭배를 매매춘 행위에 비유하여 “연인에게 제 몸을 팔았다”라고 묘사하였다(LXX γαπω).

추상명사로 쓰일 때는 אַהֲבָה (아하바)로 표현된다. 이 여성명사는 야곱의 라헬 사랑처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가리킨다(창29:20). 이에 빗대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신7:8; 대하2:11).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도 이 단어로 표현되었다(삼상18:3; 20:17; 삼하1:6).

지혜서들과 일부 예언서에서 이 단어는 잠언 10장 12절과 같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따위의 순수 추상명사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채소만 있어도 사랑을 곁들인 식사가 좋다”(사역, 잠15:17; 전9:1, 6). 아가서에서 “임의 사랑이 내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어요”(아2:4)와 같이 연인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견준 표현이 10차례 나오는데, 이는 저자의 공교로운 솜씨로 느껴진다(아2:5; 5:8; 8:6, 7, 등).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맥락에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렘31:3; 호11:4; 믹6:8). 재미있는 것은 미가서 6장 8절에는 ‘아하바’와 ‘헤세드’가 연결되어 나온다는 점이다(אַהֲבַת חֶסֶד).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을 가리켜 חֶסֶד(헤세드)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글성경에서는 흔히 “은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헤세드’를 매우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5장 10절 한 문장 안에 ‘헤세드’와 동사 ‘아헤브’가 함께 나오지만, ‘헤세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란 뜻을 전달하고 있다. 아래를 비교해 보라.

한글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새번역)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공동역)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가톨릭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헤세드’도 성경에 언급되는 빈도수가 매우 높다. 창세기에 열 차례 나오고, 출애굽기에는 네 차례, 레위기에 한 차례, 민수기에 두 차례, 신명기에 세 차례, 도합 20차례 언급된다. 이 단어는 특히 시편에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 시편의 시인들은 이 단어를 무려 128회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고 위대한지를 노래하였다.

칠십인역 성경은 히브리어 ‘아헤브’나 ‘헤세드’를 모두 그리스어 ἀγαπάω (아가파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어는 창세기에 10차례 나오는데, 대부분 동사 (아헤브)의 번역어이다(창27:4, 9, 14; 37:4은 제외). 창세기에 나오는 חֶסֶד(헤세드)는 열 차례 중 여섯 차례나 δικαιοσύνη(디카이오쉬네)라고 번역되어 있다(창19:19; 20:13; 21:23; 24:27, 49; 32:11).

이로써 오늘날 ‘사랑/love’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성경 시대의 언어에 담긴 의미와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더욱 특이한 점은 연인이나 친족이나 친구,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하여 ‘아하바’ 곧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효(孝)’라는 관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다만 구약성서의 ‘아헤브’란 용어가 헬라어 역본에서 아가페나 아가파오란 용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헬라어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전문용어로 특정화되었는지를 연구하는 일은 앞으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쉬(אִישׁ)”와 “잇샤(אִשָּׁה) – 남자와 여자에 대한 묵상

1. 어원에 대한 논쟁

‘남자, 남편’을 뜻하는 히브리어 이쉬(אִישׁ)와 ‘여자, 아내’를 뜻하는 잇샤(אִשָּׁה)의 어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오랜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두 단어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데, 꼼꼼히 들여다 보면 차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쉬에는 중간에 요드(י)가 있지만 잇샤에는 없고, 또 잇샤의 쉰(שׁ)은 중복되어 있는데 이쉬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단어의 어근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두 단어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이쉬의 어근은 알레프-바브-쉰(אושׁ)으로, 그 의미는 ‘강하다(strong)’이고, 반면에 잇샤의 어근은 알레프-눈-쉰(אנשׁ)으로, 뜻은 ‘약하다(weak), 부서지기 쉽다(fragile)’입니다. 어근의 의미를 이렇게 본다면 결국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주로 유대 랍비들이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가부장적인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해석일 뿐입니다.

2. 전통적 견해의 문제점

위의 주장은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이쉬(남자)의 어근이라 알려진 알레프-바브-쉰(אושׁ)의 어원이 ‘강하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박약합니다. 우가릿어와 아랍어에서 알레프-바브-쉰은 동사로 ‘주다(give)’, 명사로 ‘선물(gift)’이라는 뜻이지 ‘강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HALOT 참조).

둘째, 이쉬(남자)의 복수형은 아나쉼(אֲנָשִׁים)으로, 잇샤(여자)의 어근과 동일한 알레프-눈-쉰(‘약하다, 부서지기 쉽다’)입니다. 만약 위의 주장대로 이쉬(남자)의 어원이 ‘강하다’라면, 남자가 혼자 있을 때는(단수) 강하지만, 여러 명이 함께 있을 때는(복수)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나옵니다.

셋째, 남녀를 포함한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에노쉬(אֱנוֹשׁ)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주장대로라면, 남자(이쉬)는 강하지만, 사람(에노쉬)은 약하다는 또다시 말이 안 되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따라서, 이쉬(남자)와 잇샤(여자), 그리고 에노쉬(사람) 모두 알레프-눈-쉰(אנשׁ)이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합니다. (혹시, 왜 이쉬와 잇샤에 눈(נ)이라는 어근이 보이지 않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히브리어 자음 눈(נ)은 그 다음에 바로 따라오는 자음에 동화되는 경향(자음동화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스스로도 이쉬와 잇샤가 한 뿌리에서 나온 단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이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잇샤)라 부르리라 하니라

3. 이쉬(אִישׁ)와 잇샤(אִשָּׁה)의 공통 어근 알레프-눈-쉰(אנשׁ)의 의미와 성경의 용례

알레프-눈-쉰의 어원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약하고(weak) 부숴지기 쉬운(fragile)’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근이 동사로 사용된 경우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데,

삼하12:15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וַיֵּאָנַשׁ)

다윗이 불의하게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얻은 아이는 약하게 태어났습니다(어원적인 의미에서는, 병들고 아프게 된 것보다는 연약하게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아이는 다윗의 금식기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만에 죽고 맙니다.  

연약한 존재인 사람을 나타내는 에노쉬(אֱנוֹשׁ)는 검붉은 흙(아다마 אֲדָמָה)에서 만들어진 아담(אָדָם)과 평행어로 성경에 아주 흔하게 쓰입니다(사13:12, 51:12, 56:2, 시73:5, 90:3, 144:3 욥15:14, 25:4, 36:25 등).

이 중 몇 가지 본문을 살펴보면,

이사야 51:12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에노쉬)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아담)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시90:3 주께서 사람(에노쉬)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담)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에노쉬(אֱנוֹשׁ)는 흙 알갱이인 아담(אָדָם)과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부숴지기 쉬운 인간 존재를 나타냅니다.
영어성경에서 주로 “mortal”로 번역되는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나름 적절한 번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히브리어의 어원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약한 존재입니다.
모두 죽을 존재이고, 한 포기 풀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다마(אֲדָמָה)의 티끌에서 와서 다시 티끌로 돌아갈 존재일 뿐입니다.


성령과 율법(πνεῦμα vs. νόμος), 다른 점 네 가지


1.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한시적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παιδαγωγός(파이다고고스)에 비교하였다. 파이다고고스는 6-16세 정도의 어린 사람(파이스"παῖς)을 교육적으로 인도하는 노예 신분의 가정교사를 이르는 말이다. 가정교사와 다른 점은 배우는 장소로 오가는 길에 동행하고 배움 과정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직접 가르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파이스가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하라" "~하지 마라" 간섭하는 교육 책임자가 파이다고고스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이 파이다고고스와 같다고 비유하면서, 파이다고고스는 한 인물의 성장 단계에서 파이스(어린아이 + 청소년) 시절에만 필요한 존재이 듯 율법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역할하는 것이라고 율법의 한시성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두 구절의 말씀으로 이 점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3: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16a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2. 율법은 행위를 변화시키고, 성령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율법은 행위 하나 하나에 대하여, "무엇 무엇은 하라" "무엇 무엇은 하지마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규정을 준다. 이런 규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어나서, 토라를 넘어 미드라쉬와 탈무드로 확대되었다. 죄가 되는 행위를 피하려는 노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수많은 죄된 행위들이 새롭게 규정된 것이다. 이 많은 규정들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차치하고, 외울 수 있는 사람 조차 없게 되었다. 

행위를 규제하는 율법과 달리 성령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행위 하나 하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가 알아서 판단하고 실행할 문제이다. 다음 성구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나열한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를 로마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 명명하고, 생명과 평화의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3. 율법은 우리를 죄에 묶고, 성령은 우리를 해방한다.

아래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네 구절은 율법의 역할이 우리를 죄 아래 묶어 두는 것임을 알려 준다.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는 하지만,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율법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율법으로 인하여 오히려 우리는 죄 아래 있게 되었다. 

로마서 3:19-20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로마서 6: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7:5, 8-10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 . .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서 3: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근래의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보여주는 것도 핵심은 같다. 죄가 무엇인지 판별하고 처벌하는 "새진리회"는 판별과 처벌만 할 수 있을 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죄의 공포에 묶이고 서로를 죄인으로 비난하는 세상이 되었다. 결국 그런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 "지옥"의 숨겨진 메시지이다.

반면 성령은 우리를 해방하는 해방의 영이다. 이사야가 말한 성령, 요엘이 말한 성령, 예수에게 임한 성령 모두가 해방의 영이다. 

이사야 61:1-2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요엘 2:28-29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며 출정사를 대신 하심으로(누가복음 4:18-19), 예수님께서는 그와 동행하신 성령이 해방의 능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바울 서신에서 성령이 해방의 영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구절은 아래의 말씀이다. 

로마서 8: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아래 갈라디아서 말씀도 다르지 않은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4:6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성령의 역할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로 인하여 정죄 받지 않고(롬 8:1), 죄된 길을 멀리하며(갈 5:16),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으며(롬 8:39),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담보로 (갈 4:7, 롬 8:17, 엡 1:15) 성령을 받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묶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존재가 되었다. 

4. 율법은 문자이고, 성령은 바람이다.

율법은 문자이다. 모든 행위는 그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판단해야 하는데, 행위에 대한 지시가 율법 규정으로 문자화 되고 나면, 이제 상황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문자화된 율법 규정은 생명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빚문서가 될 뿐이다. 

고린도후서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빌립보서 2:14, 20-2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 . .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 하니, 웬 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 한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으로서,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반면 성령은 바람과 같다. 어디에 적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갇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성령의 특징은 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 3: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고, 그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쓰여진 대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은 성령의 방식이 아니다. 성령은, "무엇은 하라" "무엇은 하지마라"라는 온갖 규정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의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봄바람 처럼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도 바람처럼 살도록 인도하신다.   


히브리 알파벳의 의미

히브리 문자의 비밀

ת‘타브’ 십자, 표시 400

히브리어 글자 가운데 마지막 글자는 ‘타브’다. 그리고 이것은 이를 테면 히브리어 글자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인장이나 도장으로 묘사된다. 또한 의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인장 또는 표식으로 불려지거나 보여진다. 현자들은 하나님의 표식은 ‘에메트’, 즉 진리, 라고 말한다. ‘알레프’는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이고, ‘멤’은 중간에 끼어 있으며, ‘타브’는 마지막 글자다. 하나님의 표식을 다른 말로, “모든 실재의 관점에서 여기에 진리가 있으며, 여기에 섭리가 있다”고 말한다.

토라의 첫 번째 단어인 ‘베레쉬트’의 마지막 글자는 ‘타브’이다. 그리고 처음 세 단어들의 마지막 글자들은 ‘에메트’, 즉 진리, 라는 철자이다. 우리는 창조의 시초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표식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일곱 째 날인 안식일을 얻는다. 세 단어들 “버락 엘로킴 마소트” 가운데 마지막 글자들로부터 하나님은 ‘에메트’를 판독하도록 만드셨다.

따라서 창조의 시초부터 하나님의 표식은 글자 ‘타브’로 끝나는 ‘에메트’이다. 그리고 창조 그 자체인 안식일의 최종 목표는 하는 것을 마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정의 중요성에 관해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배웠던 다른 글자들은 이 세상에서 유대인의 임무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브’가 하나님의 진리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영혼이 육체 안으로 들어오듯, 영혼에 각인된다.

‘타브’는 실제로 두 개의 글자 ‘달렛’과 ‘눈’으로 구성되었다. 이 글자들은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의 철자가 된다. 매우 흥미롭게도 ‘단’은 광야를 지나는 지파 가운데 막내였으며, 그의 임무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이었다. 글자 ‘타브’가 알파벳의 맨 마지막 글자이듯, ‘타브’를 구성하는 두 글자 ‘단’ 또한 행진하는 대열 가운데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이 뒤에 남긴 것들을 깨끗이 치운다. 그 표식은 뒤에 남겨진 배경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표식과 형태는 이 세상의 모든 차원의 실체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전의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 주변의 물리적 실체 안으로 새겨지는지에 대한 사례로는 화석들을 볼 수 있다. 영혼 차원에서는 영혼 환생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이전 생애가 바로 지금의 우리의 인생 속에 도장과 같이  새겨진다. 모든 실체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뚜렷한 특징들이 화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성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는다.

‘단’은 또한 심판(judgment)을 나타낸다. 심판은 또한 모든 차원의 실체에 존재한다. 이 말은 완전한 심판을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영혼은 심판받고 글자 ‘타브’로 끝나는 죽게 되어야 만나게 되는 죽음 자체를 위한 세계와 바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이고 그것은 또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심판 받고, 그 다음에 환생을 통해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신성 차원에서 우리는 두 개의 힘이 하나님의 네 글자 이름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실체들 속에 가득하다고 말한다. 바로 네 글자 이름“엘로힘 이즈 헤세드 엔 구불라”, 즉 “친절을 사랑하고 압제를 심판하심”을 통해.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적대적인 방법이 아닌 자연의 법에 따른다. 그리고 우주의 질서 정연한 활동은 하나님의 구속과 통제 그리고 법과 질서의 표현이다.

글자 ‘타브’는 숫자 사백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즉 우리가 죽음에 다가가서, 우리가 ‘타브’와 함께 끝나면서 만나지게 되는 죽은 후에 오는 세계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신성한 기쁨을 지닌 사백 개의 세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성한 기쁨이 있는 이 사백 개의 세계들은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라의 매장지를 산 아브라함과 관련 있다. 이 사라의 매장지를 취득하는 과정에 아브라함의 사려분별로 인해 이스라엘의 모든 땅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획득이다. 

글자 ‘타브’가 마지막에 위치한다는 것을 고려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묵상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종결이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는지, 어떻게 모든 주기(cycle)는 스스로 반복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표식과 진리가 우리의 생각과 영혼 그리고 마음을 포함해서 모든 실체의 본질에 새겨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ש‘쉰’ 치아 300

현자들에 따르면 ‘쉰’은 불의 글자다. ‘쉰’을 자세히 보면, 세 개의 사선들이 있다. 사실상 히브리어의 불이라는 단어는 ‘이쉬’, 즉 ‘알레프 쉰’이다. ‘쉰’은 ‘불(fire)’이고, ‘알레프’는 ‘여기(at here)’이다. 우리는 불이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안다.

따라서 불은 여기 이를 테면, 타고 있는 불에 생명을 주고 있는 중이다. ‘쉰’의 세 사선들은 좌우대칭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글자들 가운데 가장 좌우대칭인 것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많은 ‘바브’와 ‘요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선들은 ‘바브’를 나타낸다. ‘바브’의 꼭대기는‘요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요드’가 있는 아랫부분에서 만난다. 따라서 다 합치면, 네 개의 ‘요드’와 세 개의 ‘바브’가 ‘쉰’을 구성한다. 이 일곱 요소들은 네 명의 어머니와 세 명의 아버지를 암시한다.

이 장면은 매우 아름답게 서로 뒤섞인 모습이다. 이들 가운데 한쪽에는 규칙적인 세 선들의 ‘쉰’이 있고 다른 쪽에는 우리가 히브리 알파벳에서 보지 못하는 네 개의 사선들의 모호한 ‘쉰’이 있다. 이 일곱 개의 구성물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과 아내들을 나타낸다.

네 개의 ‘요드’와 세 개의 ‘바브’를 취하면, 이 모두는 오십 팔인데, 이는 은혜(grace)를 의미하는 ‘크레인’이란 단어다. 카발라주의는 좌우대칭의 개념이 이 ‘은혜’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은혜를 입는다. 이것은 모든 것이 이상이 없이 괜찮으며, 느낌이 좋고, 같이 관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은혜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는 단계가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단계가 있다. 단어 ‘크레인’이 토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때다. 그리고 그것은 노아에 대한 단어와 ‘크레인’은 반대로 하면 서로 같은 글자들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쉰’은 잠들어 있다는 ‘쉐이나’의 어근이고, 또한 평온을 의미하는 ‘샤난’의 어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의 느낌은 조용함이다. 반면에 ‘쉰’은 일정한 주기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해(year)’를 나타내는 ‘샤나’의 어근이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 그 자체인 ‘쉬누이’는 어근이 되는 ‘쉰’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사고를 가진다. ‘수면(sleep)’과 ‘평온(serenity)’은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해(year)는 물론 변화한다. “아닌 하샨 로쉬니티”, 즉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변치 않는다”. 여기서 단어 ‘변화하다’, 즉 ‘쉬니티’는 ‘쉰’이 근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최고의 개념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은 불변이시며, 영원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모든 변화는 오로지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만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고, 나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부동의 권능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불을 나타내는 ‘쉰’에 대한 하나의 사고이다. 우리가 불을 보면, 그것은 항상 춤추고 항상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에 녹아버린다. 우리는 양초의 불길에도 녹는다. 얼마 안 있어 거기에 은혜가 있다. 모닥불에 곧 평온함이 있고, 불길이 사라져 간다.

‘쉰’의 수의 값은 삼백이다. 심판의 이름인 ‘엘로킴’이란 이름을 취하면, 네 개의 철자로 구성된 그 단어의 글자들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알레프’는 ‘알레프’와 ‘페’로 구성된다. 등등. 이 글자들의 모든 수의 값은 삼백과 동일하다.

‘엘로킴’은 팔 십 칠이며, ‘하테바’, 즉 자연(nature), 와 동일하다. 따라서 ‘쉰’의 불에 최고의 결합은 힘이며,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전자기적인 에너지이다. 변화와 불변에 대한 또 다른 최고의 사례가 ‘쉰’에 의해 나타나듯, 우리는 ‘모든 유대의 가정’, 사실 ‘집에 있는 모든 방’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드나드는 정문에서다. 그리고 ‘아메트’는 글자 ‘쉰’이다. 단어 “메주사”는 “활동하는”을 의미하는 단어 “자즈” 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 밖으로 나가면, 우리가 나가고 우리가 들어올 때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메주자”에 입맞춘다.

아직도 역설적으로 “메주사”를 세울 때, 우리는 “리크볼라 메주사”라는 말로 축복한다. 영원한 곳에 ‘메주사’를 두기 위해, 많은 글자들에서 우리는 이 달려감과 되돌아옴의 개념을 찾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그것이 ‘쉰’의 모습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불 자체를 본다. 불은 항상 움직이고 달려가고 그리고 되돌아온다.

‘쉰’과 연계될 수 있는 묵상은 불 속에 있는 활 모양의 것과 연계된다. 영혼의 불과 연결되기 위해 그것은 스스로를 표현하기 원하며,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기 원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길 원한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ר‘레이쉬’ 뒷머리 100

‘레이쉬’는 단어 ‘로쉐’, 즉 머리, 와 관련 있으며,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신년은 ‘로쉬 하사나’라고 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 해의 머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토라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의 의미가 ‘태초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레이쉬 베레쉬트’는 ‘레이쉬’와 관계가 있다. 토라에 ‘레이쉬 타크마 이라 타샨’, 즉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의 근심이거나 하나님의 향기다’, 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다른 글자가 굽은 ‘레이쉬’의 모양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굽은’은 머리부터다. 머리가 굽었다.

머리는 지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는 지력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토라는 지혜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베레쉬트’, 즉 태초에, 에 대한 번역들 가운데 하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지혜와 함께 창조하셨다’로 번역된다.

따라서 ‘레이쉬’는 지혜, 이성과 함께 행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굽어져 있음을 본다. ‘레이쉬’의 또 다른 의미 가운데 하나는 ‘라쉬’인데, 불쌍한 사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세상의 또 다른 관점에서 ‘레이쉬’는 그의 짐으로 인해 구부러진 불쌍한 사람을 굽게 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관점에서 지성은 자신에게 우리가 자녀들과 관련될 수 있는 그런 많은 사례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이큐 180을 가질 수 있는 자녀들에게 설명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가 이해하는 방식에 그것을 맡기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이 먹은 교수나 의사는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그들의 학생들에게 맡겨야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그의 지혜가 토라를 통해 양도될 수 있도록 비상한 노력을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토라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에 암시되고 있는데, 모든 창조가 나오는 토라의 지혜는 또한 ‘로쉬’와 연계된다.

만일 ‘베레쉬트’의 글자들의 순서를 바꾸면, 그것은 ‘로쉬 바이트’, 즉 ‘집의 머리’, 가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라는 집 안에 계시기 위해, 이를 테면 그의 무한한 실재, 그의 비상한 노력을 끝낸다. 카발라에서 사용되는 지력은 다양한 종류의 협력과 매우 관계가 깊다.

매일 매 순간은 믿을 수 없이 많은 자극 정보와 함께 되돌아온다. 두뇌의 지능은 모든 자극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우선순위를 통해 분류해야만 한다. 이것은 카발라에서 ‘하시툿’, 즉 명확화 방법’, 이라 불린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작업들은 히브리어로 ‘비루어’이다.

이 세상이 모든 것에 관해서라는 것을 명백히 할 때, 지능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개의 ‘레이쉬’를 쓴다. ‘레이쉬’가 또한 태초를 의미하는 ‘로쉬’를 의미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여태껏 ‘레이쉬’는 알파벳의 아주 끝자락에 나타난다. 그리고 ‘레이쉬’의 숫자 이백은 실제로 우리가 히브리 글자들에게 다가갔던 길의 중간 지점이다.

히브리 글자들은 일부터 사백까지의 값을 지닌다. 따라서 ‘레이쉬’는 비록 마지막 글자들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숫자 상의 값은 중간이다. ‘레이쉬'는 처음부터 중간까지, 마지막까지 모든 실체에 스며듦으로써 하나님의 지혜인, 토라의 지혜를 나타낸다.

‘레이쉬’에 대해 묵상한다는 것은 정화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할 수 있기 위해,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준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ק‘코프’ 바늘귀 100

‘코프’는 스물 두 개의 표준 글자 가운데 한 글자가 선보다 아래에 고스란히 나와 있는 유일한 글자다. 우리가 ‘라메드’가 선 위에 있는 유일한 글자라고 배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 외에 이것은 글자 ‘차디’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리자가 그 글자를 ‘차디크’라고 불렀다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글자 ‘코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자 ‘짜디’를 참조한다.

이는 우리가 글자 ‘짜디’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것은 창조 가운데 신성한 불꽃들을 찾아 그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해 내려가는 정의로운 사람, ‘차디크’이다. 글자 ‘코프’는 내려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이동, 즉 이 세상에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육체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전형인 것이다.

글자 ‘코프’, 즉 내려가는(going down), 와 보다 더 깊이 관련이 있을 때, ‘코프’는 ‘신성한(holy)’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카도쉬’를 시작한다. ‘코프’, 즉 내려 가는(going down), 의 또 다른 중요한 표명은 이 세상에서 임무를 완수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영혼이 육체 속으로 어떻게 내려 가는가 하는 것이다.

‘코프’는 신성, 즉 ‘카도쉬’, 을 의미한다. 반면에 반대말인 ‘클리바’, ‘껍데기(shells)’를 의미하는, 단어를 시작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신성의 불꽃들이 있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올가미(trap) 또는 껍데기(shells) 또는 용기(vessels)와 틀(blocks)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같은 글자가 서로 반대인 두 가지 의미들을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들의 많은 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예다. 신성함(holiness)과 ‘클리바’,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연계되는지 본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제는 외관으로부터, 즉 ‘클리바’로부터, 신성의 불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프’의 모양은 실제로 ‘레이쉬’와 ‘자인’의 두 개의 글자들로 구성된다. ‘레이쉬’는 ‘바브’와 ‘자인’이 선 아래에 가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글자 ‘잘’ 또는 ‘랄즈’의 글자들을 배열한 규정을 따른 결과이다. ‘잘’은 낯선(strange)이라는 의미다. 이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낯선 세계다. 그것은 복잡함과 비밀 그리고 떨어진 불꽃들로 가득하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 즉 이 세계에서 낯선 느낌, 을 가진 경험이 있다. 때로는 고독한 느낌, 이방인 같은 느낌 그리고 거기 아무도 없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랄즈’는 방법이 다르다. ‘랄즈’는 비밀(secret)을 의미한다. 숨은 뜻, 숨은 의도가 있는 비밀들은 모든 생소함 속에 새겨져 있다. ‘클리바’로부터 불꽃들을 추출하려는 생각은 생소하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그 안에서 위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얻어진다.

‘자인’과 ‘레이쉬’는 거기에서 영광의 근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개의 유대인이 이 세계에서 지도자가 되고 대리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이다. 정의로운 사람인 ‘차디크’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라. ‘코프’의 수는 백이다. ‘차디크’에서 우리는 이삭이라는 이름을 분석하였고, 우리는 이삭이 태어날 당시에 아브라함은 백세였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우리는 다른 글자들에서 어떤 수에 십 배수한 수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백은 십의 십 배수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열 번의 시험을 가졌음을 보았다. 가장 위대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두 단어들 ‘라크 라카’는 백에 해당하고 오십과 오십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가장 위대한 잠재력은 자녀를 갖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가려하였고, 구하려 하였으며, 열 가지 시험들을 통과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가 백세에 아이를 낳은 이유다.

십의 열 배수는 백세의 나이에 이삭을 낳음과 동일하다. 후에 이삭은 그가 장성해서 농사하여 백배나 얻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깊은 잠재력으로부터 이삭을 낳을 때까지의 하나의 완전한 주기를 본다. 이삭에게 자신의 목적을 완수한다는 것은 글자 ‘코프’와 백이라는 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의 생소함을 얻고, 게다가 목적을 맡기기 위해 숨겨져 있는 불꽃들을 찾음으로서,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험들에게 우리의 완전한 잠재력을 완수하기 위해, 그리고 이 세계에 새로운 통찰력을 낳기 위해,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목적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멤’ 40 상형 의미 : 물

‘멤’은 두 개의 모양을 지닌 다섯 개의 글자 가운데 하나이다. 단어 중간에 처음 나오는 형태와 단어의 마지막 글자로 나타나는 마지막 형태가 있다. 이런 ‘멤’의 두 가지 모습은 물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에서 물을 나타내는 단어 “마임”은 표준적인 ‘멤’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 오는 ‘멤’으로 끝난다. 중간에 ‘요드’를 가진 표준적인 ‘멤’은 물의 형체를 나타낸다. 그것은 정사각형과 같다. 그런데 왼편에 벌어진 틈이 있는데, 이것은 열린 모습의 물들인 샘, 강, 시내를 나타내고, 마지막 ‘멤’은 닫힌 모습의 물들인 대양, 호수, 늪을 나타낸다.

그리고 “마임”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그 단어 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두 가지 형태의 ‘멤’으로 만들어 졌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방울처럼 생긴 ‘요드’는 물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방울들이다. 우리 모두는 물 없이 생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물은 생명을 준다. 우리는 일주일, 아니 한 달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지만,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지구 표면의 70퍼세트가 물로 덮여있음을 안다. 또한 인간의 육체는 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함축된 내용은 생명에 대한 물과 연결된다.

탈무드에 “에인 마임 엘로 토라”, 즉 “토라가 바로 물인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토라에 나와 있는 물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토라에 대한 환영이라는 것이다. 물이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토라는 생명을 준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네카 노베아 코 코흐마”, 즉 “지혜의 근원으로부터 천천히 흘러가는 시내”. 그리고 카발라적으로 토라는 지혜, 즉 “(חכמה호크마 2451)”, 라고 불리는 곳으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멤’은 “호크마”라는 단어에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생과 그리고 지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멤’은 히브리 글자 가운데 열세 번째 글자다. 열세 번째는 판독하면 단어 ‘아하바’, 즉 사랑, 이란 단어가 된다. 따라서 물처럼 속도가 떨어질 때 이것은 사랑과 관련된 몇 가지 능력과 연계된다. 물의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일깨워 준다. 십삼은 중요한 수인데, 그 이유는 “십삼 미돗 라흐민” 이라고 불리는 것의 수이기 때문이다. “더 슈로소스 미돗 라흐민”은 “긍휼의 열세 가지 모습들”이다. 십자가의 긍휼은 사랑과 관련된다. 따라서 ‘멤’은 생명, 사랑, 지혜 그리고 토라의 모든 개념들과 연계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십 인‘멤’의 수에서 매우 명백한데, 그 이유는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사십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사십이라는 수는 토라 자체를 나타낸다. 그리고 ‘멤’의 모습에서 보듯, 정사각형이 된다. 우리가  글자들에 대한 많은 논의를 통해 배웠듯이, 이 글자들은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따라서 ‘멤’은 또한 전형적인 주기, 즉 자체만으로 이루어진 주기인 정사각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라에서 사십과 함께 해야만 하는 매우 많은 다른 주기들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사십 일을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실제로 모세는 세 단계의 사십 일을 보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모세는 유대민족에 대해 용서를 간구하는 또 다른 사십일을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을 받는데 세 번째 사십 일을 보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세상이 다시 새롭게 되어질 때, 노아 시대에 비가 사십 일 간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관계는 구 개월의 임신기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사십 개월인 구 개월 하고 사 주인 것이다. 탈무드는 임신기간 사십 주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태아에게 편안한 환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이다. 따라서 이 모든 관계들에서 우리는 ‘멤’이 지혜와 관련된 생명의 글자이고, 그리고 출생과 순환의 글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적절한 묵상은 물, 샘이나 강이나 시내 등, 의 형체를 상상하고, 어떤 의미에서 누군가의 육체를 그리고 누군가의 영혼을 에워쌈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하며, 그리고 토라의 지혜에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성실한 접속자들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צ‘차디’ 낚시 바늘 90

‘차디’는 위대한 카발라 학자인 ‘알리자 차디크’에 의해 명명되었다. 그는 ‘차디’의 다음 글자인 ‘코프’를 글자 ‘차디’에 추가했다. ‘코프’를 추가해서 ‘차디크’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로운 사람”, 즉 “거룩한 사람”을 의미하게 된다.

‘차디’의 모양은 ‘요드’와 쐐기꼴의 굽은 ‘눈’을 같이 가지고 있는 충성스러운 종을 의미한다고 배웠던 굽은‘눈’모양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차디크’를 정의 내릴 수 있게 한다. ‘차디크’는 하나님의 종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의 종이다.

그리고 적음이 많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글자 ‘요드’에 대한 서술이 그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차디크’는 어떤 의미에서 유기적인 세계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글자의 순서가 바뀌면, ‘차디’의 또 다른 의미는 ‘싸이드’, 즉 ‘뒤쫓아 잡는(to hunt)’이다.

이것은 카발라적 관점에서 ‘차디’의 실제적인 역할 기능을 나타낸다. ‘알리자’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 이전 세계는 창조의 빛을 처음의 그릇들 가운데 던졌고 그것들이 깨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깨지면, 거룩함 속에 있는 섬광들은 이 그릇들 각각이 있는 진열장인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에 의하면 티쿤의 세계, 수정된 세계라고 불리는 이 세계는 이전 세계의 깨진 그릇들로 만들어진다. 특별히 의로운 사람인 ‘차디크’에 대한 우리의 사명은 떨어진 신성의 불꽃들을 뒤쫓고, 구하고, 찾아서 그것들을 끌어올리고, 그것들과 연계하고, 그것들을 듣고, 그것들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토라에서 ‘윳작’, 즉 ‘이삭’에 관해 말하는 것과 관련 있다. 토라에서는 ‘이삭’이 그의 입을 쫓았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생각이다. 이삭이 왜 감정의 사람인 ‘에서’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누가 진짜 잘못된 건지 그러나 카발라 학파는 말하기를 ‘윳작’이 커다란 잠재성을 근거로 생각했다고 한다.

밀폐된 외관으로 둘러 싸인 신성하지 않은 빛의 점들. 그리고 ‘윳작’은 실제로 ‘에서’의 이러한 점들을 추출하기 위해 추적하는 중이었다. Those who were from families convert from the seed of ‘Esau’. 따라서 전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굽은 ‘눈’ 모양의 ‘차디크’는 밑으로 내려가서 물리적 세계를 떠받치려 하는 중이고, ‘차디’의 수는 구십이다.

이것은 첫 번째 유대인의 자녀를 낳은 나이다. 그리고 잠재적으로 모든 유대인의 아이가 미래의 ‘차디’라고 말하는데, 최고의 (라메즈)는 그 안에 ‘차디’를 지닌 ‘윳작’의 이름으로 그 장면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의식에서 모든 사람은 ‘차디’이다. 잠재적으로 우리 모두는 ‘차디’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윳작’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요드’는 십과 동일하다.

이는 아브라함의 열 가지 시험을 나타낸다. 가장 위대한 시험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디’는 구십과 동일한데, 구십은 사라가 생산한 나이다. 글자 ‘헤트’는 팔과 동일한데, 이는 할례를 행한 팔일을 나타낸다.

이삭은 팔 일 만에 할례를 한 첫 번째 유대 자녀이다. 마지막 글자인 ‘코프’는 백과 동일하다. 이는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겸비해져서, 이삭이 태어난 아브라함의 나이다. 모든 요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간 이름 ‘윳작’에서 최고의 ‘레메즈’ 는 이를테면, 실체다.

궁극적인 생각에 대한 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차디크 카타마 이후라크”인데, 즉 “그것은 야자수 꽃무 같은 ‘차디크’이다”. 꽃무 ‘페락’은 이백 팔십팔과 동일하다. ‘알리자’는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그릇이 깨짐으로 해서 떨어진 이백 팔십팔 개의 불꽃들이 있었다고 가르친다. 이 숫자는 떨어진 모든 불꽃들을 나타낸다. 그 이면에는 ‘차디크’가 이 모든 불꽃들을 도로 찾아서 하루 안에 그것들을 밝게 빛나게 만들 것을 암시하고 있다.

‘차디’라는 글자이든 또는 ‘엘리자’가 명명한 ‘차디크’이든,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묵상은 내부를 깊이 살펴보는 것이고, 의로운, 신성한 것 안에 있는 핵심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굽어져서 세상의 짐을 지고 가는 ‘차디크’처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모든 세계에 치유와 조정과 숭고함을 가져오는 사명에서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פ‘페’ 입, 80

‘페’는 입을 의미한다. 전형적인 에너지로서 그것은 소통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글자들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말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말은 대단히 중요하고, 이 세상을 창조한다. 또한 인간은 말을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나는 잘못된 것을 말을 함으로써, 오랜 유대 관계를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절한 말을 함으로써, 또는 적시에 올바른 말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거나 또는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은 대단히 강력하다. 하나님이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시면, 우리는 항공우편 이동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항공우편 이동은, 사람이 살아 있는 영이 되었다는 것은 말하는 존재로 전환되었음을 단언한다.

다른 말로, 언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나타낸다. 추상적 사고의 관념은 말로 표현된다. 우리는 성문화 된 토라와 구전 토라라고 불리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구전 토라는 사천 년 동안의 법률, 전통 그리고 보다 정신적 가르침에 대한 편찬물이다. 그리고 대체로 천팔백 년 전에 전도활동의 내용이 쓰일 때까지, 진짜로 구전만 존재했던 이천 년 동안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구전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해서 학생을 맡기는 선생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문자적 의미에서 전환될 수 있는 구전 토라 “토라 슈 바우페”에 대한 표현은 말의 교사인 토라이다. 글자 ‘페’는 이런 의사소통의 개념을 나타내며, 시대를 초월해서 전통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나타낸다.

‘페’와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 있다. ‘페’를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 ‘페’의 안 쪽에 ‘베이트’가 있다. 이것은 글자가 글자 안에 있는 모든 글자들 가운데 유일하다. 아름다운 외관은 커다란 ‘베이트’로 시작하는 토라의 첫 번째 단어인 “베레쉬트”를 상고하게 한다. 그리고 글자 주변의 흰 공간을 상상하면 이를 테면, 창조하려는 세상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같다.

이것은 놀라운 생각이고, 우리는 생생하게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시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하나님의 입에 대한 이 표현이 실제 사용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유일하게 한 번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백성의 리더인 사람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미피한두볼라’, 즉 권세의 입으로부터’, 가 나와 있는 토라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통해 유대 민족과 모든 인류에 대한 자신의 뜻을 나타낸 말씀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페’는 또한 능력이 되는데, 이것은 “여기 지금”을 의미한다. ‘페’는 소통(communication)을 그리고 ‘헤’는 표현(expression)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 지금” 있기 원하면, 우리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의미에서 과거 또는 미래 또는 공상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곧바로 여기 지금 우리의 영혼을 보다 많이 표현하는 말을 할 것이다.

‘페’에 대한 묵상은 무엇보다도 모든 전통은 살아 있고, 분명하며, 모든 세대가 그것을 더해 가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전통의 일부분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말의 중요성, 말의 능력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단어를 평가하기를 배우고, 그것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든 말이 치유와 사랑을 이 세상에 가져올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ע‘아인’ 70

‘아인’은 눈을 의미한다. ‘아인’의 모양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활용해서 ‘아인’의 꼭대기에 두 개의 가지 모양의 것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각각은 눈을 나타내고 두 선은 내려가서 한 선과 만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중추신경조직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신경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물체와 같이 보일 수 있다.

이것은 그 생긴 모양에 ‘아인’의 의미를 연계하는 창조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방법이다. 토라에는 여러 번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이 아셨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물리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않으심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눈이란 “신성한 신의 섭리”, 즉 “하시카 하 프로티”라고 불리는 하나의 개념이다.

하나님은 살피시고, 통제하시며,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 나는 모든 것에 관여하신다. 이것이 신성한 신의 섭리이다. 토라에서 최고의 구절은 “이 해의 시작부터 이 해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을 두둔하신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라고 불리는지, 그리고 왜 이 거룩한 나라로부터 이렇게 많은 종교인들과 종교들이 나왔는지, 그리고 왜 모든 사람이 시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원하는 것인지, 우리는 이것이 이것들에 대한 이해 가운데 하나임을 배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해의 시작에서 그 해의 마지막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눈 때문이다. ‘아인’은 칠십에 해당한다. 우리는 어떤 수의 십 배수는 그 수의 완전한 계시라고 배웠다. 칠십은 칠의 십 배수이다. 갑자기 가장 전형적인 숫자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엿 새 동안 창조하시고 쉬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안식일을 가지게 되었다는 아주 전통적인 주기를 나타낸다.

모든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는 같은 주기를 따른다. 따라서 우리는 엿 새 동안 일하고 쉰다. 그러나 창조에 있어서 안식일에 쉰다는 것은 창조의 완성 그리고 창조의 목적 그 이상까지도 의미한다. 따라서 칠의 십 배수인 칠십은 상징적으로 칠십은 보다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리고 이를 테면 하나님의 눈을 통해 모든 개개의 차원에서 그 목적이 얼마나 명백한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유대의 군인들이 광야로 갔을 때 노아의 자손들의 수 칠십을 안다. 광야에서의 장로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칠십 인의 멤버들. 이 모든 것들과 아울러 충분히 흥미롭게도 이것은 일과 칠십 사이의 관계성이다. 왜냐하면 노아와 그의 칠십 대의 자손들이 있다.

야곱과 칠십 명이 애굽에 이르렀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와 칠십 명의 다른 멤버들로 해서 실제 멤버는 칠십 일이다. 여기서 글자 ‘알레프’가 일에 해당함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그 수가 칠십인 ‘아인’이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서로 교체할 수 있다.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 우리는 여러 번 ‘아인’으로부터 ‘알레프’로 그리고 ‘알레프’로부터 ‘아인’으로 교체한다. 전체적으로 그 단어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아인’에 대한 최고의 묵상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어떻게 존재하시는지, 그의 섭리가 우리에게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다른 국면들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듯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싸멕’ 60 버팀목

‘싸멕’은 하나의 원이다. 원은 가장 전형적인 숫자 영의 모양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싸멕’은 원이 나타내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주위(surrounding)”의 개념, “에워싸다(surround)”의 히브리 단어는 ‘쏘벤’이고, ‘싸멕’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테면,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두 가지의 계시가 있음을 안다. “쏘베르 코 얼로민”, 즉 ‘세계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불리는 하나가 있으며, 그리고  “멀레이 코 얼로민”, 즉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은 세계를 감지하심”이다. ‘싸멕’은 주위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영혼의 차원에서, 원을 의미하는 ‘싸멕’은 환생의 개념을 나타낸다. 히브리어로 환생은 ‘길 구오’이다. ‘가우’는 실제 원을 의미하고, ‘길 구오’는 원 안에 있는 원의 개념이다. 원은 주기, 즉 반복적인 주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영혼의 차원에서 ‘싸멕’이 원을 나타내는 것처럼, 반복적인 주기들이 ‘싸멕’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기와 프로세스와 반복적인 원형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싸멕’은 도처에 원과 주기의 개념을 나타내는 글자다. 우리는 그것을 계절의 바뀜에서 본다. 우리는 그것을 일 년을 주기로 나무의 나뭇잎이 떨어지고, 새로운 잎과 열매가 나는 나무에서 본다. 따라서 세상을 에워싸고 있는 신성의 차원에서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순환하는 영혼의 차원에 까지, 만물이 이 세상에서 변천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모든 만물은 순환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순환에 기초한다. “쏘메흐”, 즉 “지지함”, 를 의미하는 ‘싸멕’은 그 모습과 매우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하그”와 마찬가지로 “에워싸는 것”은 “지지”다. 여러 번에 걸쳐,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안락과 지지를 주기를 원할 때, 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하그”를 주는데, 이는 그 사람을 지지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에 대한 물리적 표출이다.

실습 방식이 학생의 서계식일 때, 그것을 ‘스미카’, 즉 고래로부터의 방식, 라고 부른다. 선생은 자신의 두 손을 학생의 머리 위에 올리고, 그를 자신의 에너지로 에워싸고, 자신의 학생에게 모든 것을 주려는 바램을 가지고 행한 그 모든 것들의 대리인을 만든다.

In the put and the sum of (   ) rate a hundred-forty-fifth sum. 그것은 스물 두 개의 히브리 글자에 준해서 “다비드 말라크”에 의해 쓰여졌다. 오로지 한 글자만이 누락되었는데, 그것은 ‘눈’이다. 우리가 과거 ‘눈’에 관해 배웠듯이, ‘눈’은 아주 열심인 종이다. But also (it) starts to (world) to fall, no fall. So “dalid” who himself is referred to in the term of by “naslat” as the fallen one. Literally the miscarriage did not want to put it on ‘ashurei’ which is a very joyous praise of God the idea is falling.

따라서 그는 글자 ‘눈’을 건너 뛰었다. 게다가 다음 구절은 “쏘메이 카샨두 콜린 무슐린”, 즉 하나님은 타락한 모든 자들을 도우신다, 이다. 따라서 그것은 글자 ‘눈’과 ‘싸멕’ 사이의 최상의 연계다. 원은 위든 아래든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기 때문에, 원 위의 모든 점은 어떤 의미에서 동일하다. 모든 사람은 맞은편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다.

따라서 개개의 점이 어떤 의미에서 원에서는 무의미하므로, 현자들은 ‘싸멕’의 수인 육십을 사용해서 무효화라는 개념을 표현한다. 유대 전통에서 서클 댄싱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그 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더 큰 것도 더 작은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평등(equality)과 받듦(support)이 있다. 따라서 현자들은 누군가 앞으로 어떤 것이 무효화됨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육십이라는 수를 사용할 것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음식물 금기와 관련해서 만일 우유와 고기를 함께 섞으면, 그 음식은 먹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예를 들어, 우유가 기존의 육십 분의 일이거나 그보다 적은 양이 고기의 일부분이 되면, 그것은 먹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육십 분의 일의 비율은 우유를 무효화 시킨다. 육십이 더 큰 부분 때문에 우유의 맛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현자들이 계속해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잠은 죽음의 육십 분의 일이라 말한다. 꿀은 사막에 있는 사람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말한다. 불은 지옥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린다. 안식일은 도래할 세계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리며, 꿈은 예언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육십의 개념은 한 사물이 다른 것에 포함되는 방법이며, 그리고 또한 다른 것으로 무효화 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글자 ‘싸멕’에 대한 최고의 묵상은 하나님의 도우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느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생을 마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얼마나 무가치한지 느끼는 대신에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위대한 도우심을 느끼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נ‘눈’ 50

(상형 : 물고기, 의미 : 구원, 탈출, 생명, 씨앗, 진리의 사역)

눈은 두 개의 모양을 가진 글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표준적인 ‘눈’은 그 모양에서 보다시피 굽어 있다. 단어의 끝에 위치하는 ‘눈’은 긴-귀 모양이다. 현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두 가지 형태 모두가 종, 충성스러운 종을 나타낸다. 히브리어 단어 ‘충성스러운’즉 ‘메트안만’은 굽은 모양의 ‘눈’으로 시작하고 긴-귀 모양의 ‘눈’으로 끝난다. 굽은 모양은 겸비한 상태의 복종하는 상태의 종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복종하는’ 은 좋은 어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최상의 찬사는 하나님이 모세를 “에딛 멧 안 마우” 즉 충성스러운 종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는 내 집에 모세처럼 충성스러운 종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아주 일상적인 것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하늘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 된다라는 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자 ‘달렛’을 보는 것처럼 다시 보게 되는데 ‘달렛’ 또한 불쌍한 사람, 즉 겸비한 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름에 두 개의 ‘달렛’을 가진 ‘달릿’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생이고, 가장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세를 볼 수 있다.

토라에서 모세는 지구 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로 묘사된다. 이것은 리더의 강함은 겸비한 봉사자의 입장으로부터 나온다는 유대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훌륭한 도덕심에 관해 그리고 메시아, 즉 유대 민족의 궁극적인 리더, 라는 이름에 관해 이야기 된다. 그리고 이 견해 가운데 하나는 메시아의 이름이 ‘눈’이고 이것은 글자 ‘눈’에서 왔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메시아와 관련된 시편의 한 구절로부터 왔다.

“이어 눈 쉬마르”는 ‘눈’의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는 글자 ‘눈’이 역설적으로 열심인 종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되는데 실제로 그가 모든 리더 가운데 가장 강한 리더인 것이다. 이것은 ‘눈’이 오십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오십은 요벨의 해다. 일곱 번의 안식 주기인 사십구 년 다음 해가 오십 년인 요벨의 해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연한 부종들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 시간, 구속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눈’의 개념과 관련 있다. 토라는 이집트로부터 나온 오십 일째 되는 날 주어졌다. 우리는 사십구 일을 센다. 그리고 오십 번째 되는 날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는다.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았다는 것은 유대인이 하늘나라의 구속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궁극적 표현이다.

우리는 토라를 보기 전에 “나하세부쉬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글자 ‘눈’에 대한 의미 있는 묵상은 이 세계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고, 궁극적으로 이것이 힘의 근원임을 알기 위해 한 번은 순결한 겸비함과 결합되며 그리고 리더가 되기 위한 힘과 능력을 한층 더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