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선지자보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수아보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보다 더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언약과 모든 제사보다 탁월하시고, 모든 제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신 분입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우월(탁월)하신 예수님 | |
우월/탁월하신 예수님 |
히브리서 구절 |
예수님은 선지자들보다 우월하십니다. |
1:1-3 |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우월하십니다. |
1:4-14; 2:5 |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십니다. |
3:1-6 |
예수님은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십니다. |
4:6-11 |
예수님은 아론 계열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십니다. |
5:1-10; 7:26-8:2 |
예수님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십니다. |
6:20-7:25 |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십니다. |
7:1-20 |
예수님의 사역은 성막의 사역보다 우월하십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성막의 역할보다) |
8:3-6 9:1-28 |
예수님의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우월하십니다. |
8:7-13 |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시대 제사보다 우월하십니다. |
10:1-14 |
이스라엘 백성의 시내산 경험(임재)보다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이 우월합니다. |
12:18-24 |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우월하심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의 거의 절반이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 Abridged Edition: The New Testament,
by Kenneth L. Barker; John R. KohlenbergerⅢ. By the Zondervan Corporation.
@ 히브리서의 특징
1)설교처럼 시작해서 편지처럼 끝내는 책이며(13:22-25),
저자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고 수신자도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2)권고(권면)의 말(히 13:22)이라고 하는 묘사적 문구는 문서적 형식의 설교에
적합한 것이며, 설교자가 여기에 몇 가지 개인적인 말을 마지막에 덧붙인 것이다.
1)기독론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바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2)히브리서는 특별히 풍부한 기독론을 가지고 있는 문서다.
3)히브리서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이고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심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1)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은 신약의 기독론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신약성경 가운데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하는
2)대속죄일의 예식과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을 연관시켜 기독론을 전개한다.
@ 히브리서의 역사적 배경
1. 글라우디오 황제 칙령(AD 49) : 로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 추방(로마서 배경과 동일)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로마 교회의 상황을 조금 알 수 있지만 당시 역사적인 배경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아서 로마서만 가지고는 교회 상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증거 자료들을 기초하여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 교회에 대한 첫 역사적 증거 자료는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쓴 로마 열 두 황제들의 생애(The Lives of The Twelve Caesars)에 나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애(Life of Claudius)’에 나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책에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크레스토스(chrestos) 때문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항상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A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유대인 모두를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1,2절에 보면,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바울의 직업과 동일한 천막을 만드는 것이어서 동업자가 되었고, 결국 복음을 위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라스길라 부부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로 와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로마 교회가 생겨나고 성장하게 된 배경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로마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유대인의 회당에 규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복음의 불덩이를 가슴에 품은 기독교인들이 전하지 않고 그냥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인들은 평소 다니던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다고 보는 이유는 당시 회당 예배의 규칙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회당 예배는 성인 남자 열 명 이상이 모이면 시작되었습니다. 회당장이 그 안식일에 읽도록 정해진 구약 성경의 본문을 한 구절 읽은 후에는 “우리 중에 혹 이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위로나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청합니다.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유대 기독교인들은 회중 앞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했던 것처럼 유대 기독교인들은 그것도 회당에서 “지금 여러분들이 들은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약속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하면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도시에서처럼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에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아마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적극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두 부류의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1)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과 2)하나님을 믿지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 유대인들이 유대 기독교인들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은 기존 신도들을 많이 잃게 되어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고, 그게 폭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로 정치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글라오디오(Claudius) 황제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AD 49년에 글라오디오 황제의 로마에 살던 모든 유대인 추방 명령은 로마 교회에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추방되어 생긴 빈자리에 이방 기독교인들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 중에서 유대 기독교인들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사도행전 18:1,2).
AD 57년,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로마를 떠났던 유대 기독교인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교회 성도명단에서 발견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16:3,4).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유대 기독교인들이 로마를 떠난 사이에 이방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다수가 되었고, 교회의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AD 54년, 글라오디오 황제가 죽고, 네로가 새로운 황제가 되자 로마에서 추방된 모든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하나는, 글라오디오가 황제가 죽음으로 그가 내린 칙령 –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 추방 – 이 자동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2)다른 하나는 글라오디오를 이어 황제가 된 네로가 돈이 필요해서 유대인들을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했기 때문입니다.
네로 당시 로마는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재정은 유대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는데, 유대인들이 다 추방되자 로마의 재정 상황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돈이 필요한 네로는 추방된 유대인들을 로마로 돌아오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가대를 지휘하고, 설교도 하고, 교회 행정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이 없는 5년 동안 교회를 잘 지켜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처음에는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이방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음식법도 달랐습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돼지고기 먹는 게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유대인들은 레위기 11장에 어긋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고기를 안 먹고 채식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배 스타일도 다르고, 특별한 날 지키는 것에서도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5년만에 다시 로마로 돌아온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과거 그들이 해왔던 일의 주도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방 기독교인들은 지난 5년 동안 교회를 안정적으로 잘 이끌어왔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주도권을 내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로마 대 화재(AD 64. 7. 18-19)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기록한 그 시기에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히브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이 ‘로마 대 화재’입니다.
AD 64년 7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로마의 경기장 북서쪽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올라왔다.
불이 순식간에 퍼졌다.
로마 시내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 팔레틴 언덕으로 옮겨붙어 그곳에 있는 원로원의 저택들과 과거의 영웅들의 입상들이 다 불에 타 버렸다.
이때 네로는 출타 중이었는데, 황제의 궁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듣고 귀경한다.
네로는 즉시 국고를 열어 이재민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고, 집이 불에 타 없어진 시민들을 위한 집을 지어주었다.
로마 전역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시민들을 위한 공원을 계획하였다.
네로 황제는 수개월간 새로운 로마 건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민들은 냉담하고 호응이 없었다.
오히려 네로가 당시 새로운 로마의 건립을 위한 광적인 집념이 있던 터라, 새로운 궁을 건립할 욕심으로 처음 방화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은 확대되어 심지어는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마치 옛 트로이 성의 화려한 멸망을 연상하듯 무대 위에서 바라보며 악기를 타며 시를 읊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런 안 좋은 소문 때문에 맹렬한 민중의 원망이 네로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당시 네로가 원로원에서 신 로마 건설을 위해 도시를 새롭게 건축하자고 말했던 곳이 북서쪽이었다.
사람들이 네로에게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위의 모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돌리려고 했다.
왜냐하면 불타지 않은 4곳이 유대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로의 부인 포비아가 유대인이어서 일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민중의 원성은 거 커져만 갔다.
이러한 민중의 적개심을 다른 상대로 돌리기 위하여 네로는 친위대를 명하여 기독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고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네로는 희생양을 날조하였다.
그리고는 소위 이 타락한 기독교도들을 (저들은 그렇게 불렀다) 가능한 모든 수단에 의하여 처형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인에 대한 사형집행을 오락 삼아 자행하였다.
짐승의 가죽을 입혀 맹수에게 찢기게 하였고, 십자가로 처형하였고, 밤중에 거리를 비출 가로등 대신에 저들을 달아 매어 놓고 콜타르를 칠한 후에 불을 질렀다.
어떤 때는 공연장에서 기독교도들을 살해하는 무대를 꾸며 네로 자신이 관객과 섞여 구경하거나 전차를 몰고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타키투스는 부연하여 “그러나 아무리 기독교 신자들을 무거운 죄목으로 처형을 해도 사람들은 동정하였다.
그들은 나라의 이익과 상관없이 한 개인의 잔혹한 속성 때문에 희생되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Tacitus, Annals of Rome, 15, 44).
로마 시민들은 네로가 로마에 불을 낸 방화범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의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네로가 지목한 방화범들을 핍박하는 일에 동조했다. 로마 시민들도 대화재의 범인(사실은 희생양)으로 지목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바울이 쓴 빌레몬서 바로 뒤에 나오기 때문에 바울이 쓴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13:23절에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해서 바울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교회에 보낸 편지들 |
바울이 개인에게 보낸 편지들 |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
☞ 히브리서는 바울이 히브리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에 쓴 편지인지,
히브리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히브리서를 야고보서부터 유다서처럼 사도들이 로마의 핍박 때문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보낸 7권 공동서신에 포함시켜야 할까요? 만약 히브리서를 공동서신에 포함시키려면 공동서신의 특성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공동서신은 모두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이 그 책의 이름입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가 기록한 편지일까요?
만약 히브리서가 공동서신이라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처럼 ‘히브리’도 초대교회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고, 구약 특히 제사(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누구인지 몰라서 지금까지도 히브리서를 바울서신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공동서신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편지들과 형식 자체가 다릅니다. 모든 바울 서신들은 첫 부분에 누가 누구에게 기록했는지 나옵니다. 히브리서 바로 앞에 나오는 빌레몬서 1:1,2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빌레몬과 그 집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장 어디에도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인지 설명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절부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1-3)
@ 히브리서의 특이한 점 - 서론 없이 바로 본문으로!
빌레몬서 |
히브리서 |
1) 발신인 이름: 1a절 2) 수신인 이름: 1b-2절 3) 인사/축복: 3절 4) 기도와 감사: 4-7절 5) 본문: 8-22절 6) 끝인사: 23-24절 7) 축도(복): 25절 |
1)발신인 이름 없음 2)수신인 이름 없음 3)인사/축복 없음 4)기도와 감사 없음 5)본문 1:1-13:23 6)끝 인사 13:24 7)축도 13:25 |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구약 율법과 제사는 물론이고 복음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은 구약의 제사와 대제사장을 그리스도와 예수와 연결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갈 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the way)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또한, 예수님은 길을 만드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길을 만드셨습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하루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10:19,10절입니다.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마태복음 27:51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
마가복음 15:38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
누가복음 23:45 |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
성소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천입니다.
성소의 휘장은 얇은 커튼이 아닙니다.
성소 휘장은 24개의 실로 꼬아서 만든 줄 72개를 섞어 짠 아주 튼튼한 천입니다.
휘장은 두께는 9.34cm, 길이는 22.4m, 넓이는 11.2m나 되는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천입니다.
성소 휘장을 성전에 달기 위해서는 먼저 휘장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휘장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정결탕(깨끗한 물)에 집어넣었다가 꺼내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 휘장을 성소로 옮겨서 매답니다.
그때 정결탕에 넣은 휘장을 꺼내서 성소로 옮기려면 제사장 300명이 힘을 다 모아야 합니다.
그만큼 휘장이 크고 무겁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렇게 자연적으로 찢어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것도 자연스럽게 찢어져서 둘이 하나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삼손이나 골리앗 같은 힘센 장사가 아래에서 위로 찢을 가능성도 전혀 없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사건은 한 마디로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을까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려고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찢어진 성소 휘장'입니다. 찢어진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몸)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은 구약의 동물 제사로는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연결시켰습니다.
성소 휘장(커튼)은 사람이 찢을 수 있는 천이 아닙니다.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으셨을까요? 또,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돌아가셨을까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성소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그 길을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 –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심 - 이 더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이 더 중요하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브리서 4:14)
2. 새 언약의 그리스도가 옛 언약보다 더 나은, 더 좋고 완전한 것임을 가르치려고
3.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만을 따르는 믿음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
히브리서 한 눈에 보기(1)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굳 게 잡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라(4:14) | ||||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1:1-10:18) |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는 사람들(10:19-13:25) |
|||
뛰어나신 큰 대제사장 JX (1:1-4:16) |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큰 대제사장 JX(5:1-7:28) |
새 언약의 중보자와 더 좋은 제물 되신 JX (8:1-10:18) |
믿음의 사람들(10:19-11:40) |
믿음의 삶(12:1-13:25) |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잡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라(4:14) | |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1:1-10:18) | |
뛰어나신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1:1-4:16) |
선지자,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1:1-2:18) |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3:1-19) | |
여호수아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4:1-16) | |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5:1-7:28) |
아론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5:1-14) |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6:1-20) | |
멜기세덱의 반차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7:1-28) | |
새 언약의 중보자와 더 좋은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8:1-10:18) |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8:1-9:22) |
더 좋은 제물(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9:23-10:18) | |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는 사람들(10:19-13:25) | |
믿음의 사람들 (10:19-11:40)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19-39)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11:1-40) | |
믿음의 삶 (12:1-13:25) |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12:1-29) |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13:1-25) |
저작 연대
히브리서는 AD 95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로마의 클레멘트가 클레멘트 1서에서 이미 인용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는 제 4대 교황(재위 88년 ~ 99년)으로, 기독교의 첫 번째 교부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나아가 기록 연대를 AD 70년 이후로 잡기도 거의 어려운데, 그것은 히브리서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둔다.
만약 본 서신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쓰여졌다면, 저자가 구약적인 제사 제도의 종결에 관해서도 분명한 언급을 했을 것인데 오히려 저자는 구약적인 제도가 아직도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8:4,13; 9:6-9; 10:1-3).
또한 히브리서 2:3이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2대째 기독교인 세대를 의미하고 있다고 볼 필요도 없다.
오히려 본문은 명백히 저자가 이미 알고 있던 디모데의 생존기간(히 13:23)에 쓰여 졌음이 분명하다.
만약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면 히브리서 13:23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디모데는 그의 출옥 후 바울과 합류하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저작 연대는 AD 68년이나 69년으로 추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히브리서 서신을 처음 받았던 독자들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떤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즉 이 독자들은 나름대로 의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저자는 그들의 ‘전날’(히 10:32-34)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그들이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베푸는 과거와 현재의 관대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며(히 6:10) 그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히 12:4-6; 13:7-9).
더구나 저자는 그들과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또한 디모데와 함께 그들을 방문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기도 했으며(히 13:19, 23)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히 13:18).
또 이 서신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유대적 원형들(prototypes)파 레위기의 제사 제도의 영원성을 고수하거나 복고하려는 경향에 대해 반대한다(히 7:11-28).
그리고 이방인 신자에게 문제가 되었던 할례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다루고 있지 않으며 복음으로 돌아온 뒤 믿음에서 타락하여 예전의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던(히 6:4-6; 10:26-29, 37-39) 사림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점들로부터 유추해 볼 때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약 속의 레위기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니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를 없애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인간의 죄를 없애는 방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엄격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였다.
그러나 동물의 피를 드리는 희생 제사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동물 제자를 드려야 했다.
반면 신약의 히브리서에는 온전한 제사법이 적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완전히 없애신 제사 즉 단 한번 번만으로도 충분한 효력이 있는 제사이다(히 9:12).
히브리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제사법을 적은 ‘신약 속의 레위기’이다(히 9, 10장 참고).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해서
바울의 저작이라는 전통적 견해는 가장 오래전부터 주장되어 왔던 것인데, 사실 지금까지도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판테누스(AD 190년경 사망) 시대로부터 이 서 신이 바울적인 요소를 풍기고 있다는 의견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 원어로 본문을 썼고, 후에 누가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오리겐은 문학 양식의 근본에 있어서 바울의 저작과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의심하였으나 “누가 이 책을 기록했는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바울의 저작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굳이 맞서려고 하지 않았다. 히브리서의 바울 저작설은 근래까지 주로 동방에서 주장되어 왔으며, 또한 제롬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에서 조차 바울 저작설을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문체나 내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비울 저작설이 배제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히브리서를 헬라어로 읽을 때 그 안에서 풍기는 영적인 내음에 있어서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의 유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도 사실이나, 아주 미묘하게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전통이 오직 바울만을 그 저자로 증언했다면 이러한 다소 주관적인 추론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초대교회 때 이미 바울의 선교 동역자였던 바나바의 저작설이 유포되고 있었음이 그 하나의 예이다. 이 설(說)은 서방교회 터툴리안에 의해 제일 먼저 제기되었다. 그는 한 논쟁적인 글에서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이름 하에 히브리서를 인용하였다. 더구나 이것이 그 자신만의 의견인 듯이 표현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독자들이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임을 암시하고 있다.
바나바가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하는 견해는 후에 제롬에 의해서도 언급되었고, 4세기의 저작자들이었던 엘비라의 그레고리와 필라스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코덱스 클레어몬타누스(Codex Claremotanus)라고 불리는 서방 사본에서 발견된 고대 정경 목록에서도 히브리서는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부제로서 기록되어 있다.
바나바의 저작이라는 증거는 그리 충분하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것들이 서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히브리서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지명이 이탈리아(히 13:24)이므로 바나바의 저작이 사실이라면 그 설이 이 지역으로부터 유포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 즉 바나바가 레위인이었다는 사실(행 4:36)은 히브리서 저자가 관심있게 묘사하는 레위 제도(제사장과 제사법)와 깊은 연관을 지을 수 있고, 그가 바울과 깊은 연대를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바울적인 사상 문제 역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바나바의 저작설에 신빙성을 더한다.
더구나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지에서 개종했던 디모데가 이미 바나바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만약 히브리서를 쓸 당시에 바울이 이미 고인이었다면 디모데가 바울의 전 동역자였던 바나바를 만나려고 했던 것도 극히 자연스럽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불화(행 15:37-39)는 이미 화해되었고, 후에 바울은 바나바의 사촌 마가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참조 골 4:10; 딤후 4:11). 물론 바나바의 저작설은 바울의 저작설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 단지 여타의 다른 설(說)들에 비해 가능성이 조금 더 큰 편이다.
히브리서 1장
제가 앞으로 히브리서를 공부할 때 참고할 주석서도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오토 리켈이라고 하는 독일 사람이에요. 제가 설교할 때도 보고 있는 성서주석, 국제성서주석의 43번째, 마흔 세 번째 책입니다. 굉장히 긴 전집으로 되어있어요. 이게 1984년도 괴팅겐이라는 곳에서 출판 됐습니다. 그게 우리나라말로 번역이 된 거죠. 이 책이 몇 쪽까지 있냐면 772쪽까지 있습니다. 굉장히 자세하게 나오고 있어요. 이런 책을 주석한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2천년동안 신학이 굉장히 많이 발전했고요. 특히 계몽주의 이후로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이 나오면서부터 훨씬 많이 연구가 됐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성경이 연구가 됐어요. 그거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여기 있는 내용을 제가 이제 천천히 차례대로 따라서 읽어 가면서 참고적으로, 여기 있는 내용을 다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전문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혹시 보고 싶은 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빌려 드릴 테니까.
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한 번 펴보세요. 히브리서가 1장부터 13장까지 있는데 일단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히브리서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생각이 있으신 분들 말씀 해 보시죠. 히브리서하면 어떤 생각이 난다 그런 게 있습니까? 여기에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죠? 아마 아실 거예요. 믿음에 대한 이야기요. 너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거니까, 거기 중요한 거라서 한 번 볼까요? 11장입니다. 아마 이게 가장 유명한 구절이 아닐까 싶네요.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많이 들었던 거예요. 이 히브리서의 특징은 주로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예표적으로 많이 설명을 하는 거예요. 뭘 비교하죠. 천사, 제사장, 비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려는 그러한 성경입니다. 이게 이제 서신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서신이라기보다는 신학 논문이라고 분류하는 게 맞습니다. 누가 썼냐? 이것도 확실하게 드러난 게 없습니다. 모든 성경이 저자가 확실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이 히브리서가 사도 바울의 편지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글 쓰는 방식이 다른 거구요. 그렇다고 해서 바울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학자들의 의견이 굉장히 분분합니다. 일단 본문을 좀 보죠. 분문을 우리가 1장 1절부터 14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읽고 차례대로 가면서 한절 씩 읽어 보시겠어요. 숫자가 다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가는데 까지만 읽겠습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그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6.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아멘. 어떻습니까? 읽어 가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나 문장이 눈에 띠나요? 보십시오. 전체적으로 기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요? 8절에 규라고 나와 있는데 무슨 뜻이지 아시는지요? 규, 지팡이 맞죠? 또 단어 중에서 혹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까? 13절에 보면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나오죠? 발등상, 이 단어가 뭔지 아시나요? 발등이 아니라 발을 올려놓는 판, 이런 걸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등받이가 없이 판으로 되어 있는 것 있죠? 발을 올려놓는 어떤 납작한 상,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또 단어나 문장에서 애매한 것 있을까요? 이것의 신학적 이야기나 영적인 이야기는 둘째 치고, 그것은 우리가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 중에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이와 같습니다. 이게 직접적인 말이 아니라 메타포에요. 은유에요. 이것은 손가락과 같아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아서, 달은 안보이고 일단 손가락만 보입니다. 손가락을 통해서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 쪽으로 가야되는데 그 작업이 사실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런 게 좀 어려운 점이고요. 또 하나를 본다면 시간적인 차이입니다. 2천년이라고 하는 것. 2천 년 전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다르잖아요? 그 차이를 우리가 어떻게 뛰어 넘을까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꾸준하게 연구를 했고요. 그리고 또, 그래도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고 그것이 공부가 가능하다고 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이게 꾸준하게 2천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서 텍스트를 안고 씨름했고 그것을 해석을 했고 전하고 해서요. 교회 전승 안에 흐름 속에 있어서 우리가 이것을 공부 하는데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게 한 점이 있고. 또 어떤 차원에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성령이죠,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에 이게 공부가 가능합니다.
14절까지 있는데 좀 보실까요? 한 절씩 제가 천천히 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설명 하겠습니다. 여러 분들이 미리 생각했던 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또 비슷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집에서 읽고 어떤 뜻인가 미리 공부를 스스로 조금씩이라도 하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1절 이렇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 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다짜고짜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데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선지자가 누군지는 아실 거고요.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다른 말로 예언자라고 얘기하고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들이에요. 구약에 종교적인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지자고 또 하나는 제사장이겠죠. 서로 성격이 달라요. 자세한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고, 어쨌든 제사장은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번제나 여러 가지 제사 행위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이고요. 첫째 안정적으로 갈 수 밖에 없고요. 왕, 이런 사람들하고 가까울 수밖에 없어요. 이것에 반해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야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게 아니라 개혁적이고, 이러한 양축을 중심으로 해서 유대교가 쭉 내려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는 일들이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것인데, 그 행위를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하면 신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위임받아서 말씀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오라클(Oracle)이라고 영어로 써요. ORACLE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라고 하는 것은 신탁을 받은 특별한 집단들, 오늘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러한 학파, 하나님 말씀과 관계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을 1절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부터 히브리서의 어떤 성격이 드러나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바탕으로 놓고 얘기를 하는 거죠. 구약은 그런 면에서 참 중요합니다.
2절 보십시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이미 앞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역사적으로 하신 거예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런데 종말론적으로는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두 개가 비교되죠? 앞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여기 2절에서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은 역사적인 것이고요. 유대인의 역사들,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역사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고 아들을 통해서는 뭐라고요? 어떻게? 종말론적으로, 마지막에 라고 하는 거예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자주 쓰시는 게 좋습니다. 이게 그냥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종말, 종말, 예수님의 재림, 마지막, 그런 얘기를 하는데 종말론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약간 낯설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억지로 우리가 학자들 흉내를 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좋은 단어는 알고 있는 게 좋고요. 아는 것뿐만 아니라 입에서 그것을 표현 하는 게 좋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게 특별한 힘이 있어서요. 그것을 자기가 다 모르고 서도, 말라도 자꾸만 하게 되면 어느 때인가 언어의 세계가 자기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뜻도 모르고 염불 외우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게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염불을 통해서 어떤 세계에 들어가는 노력이니까요. 종말론적인 거예요. 두 가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하고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 두 개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도 아주 큰 주제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하는 그런 차원에서 간단하게 한 말씀만 드리면 이렇습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 하나의 점진적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어떠한 일들이 전개해 나가는 것, 이런 방식으로, 왕이 정의롭게 통치를 해야 된다. 선지자들이 그런 것 많이 얘기하잖아요. 과부와 고아를 힘들게 하지 마라라든지 그런 것들이 이 사회가 점진적으로 괜찮아지는 그러한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종말론적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어떤 생명 사건이 완성된 그 차원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두 가지 종말론적인 아들의 말씀, 종말론적인 아들을 통한 종말론적 말씀, 아들을 통한 종말론적인 계시, 이렇게 바꿔서 얘기할 수도 있어요. 사실 히브리서가 전부 그걸 얘기 하려는 겁니다. 아들 예수 그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말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거를 이제 말하기 위해서 초장부터 이 히브리서 기자가 짚고 있습니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음, 이미 여기서 어떤 창조에 대한 문제에 아들 예수가 참여한 것으로 설명이 되네요. 비슷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도 나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뭐 그런 거 있죠. 잠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등등. 그리고 요한복음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마임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까지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있는 비슷한 차원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금방 얘기한 게 전달이 됐습니까?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게 어떤 근거로 가능한지? 예수가 왜 창조의 근원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냥 교리적으로는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사셨던 그러한 분이고 창조된 다음에. 우리 오늘의 물리학적인 어떤 정보에 의하면 120억년 내지는 130억년 쭉 지난 다음에 아주 최근에 2천 년 전에 역사에 사셨는데 바로 그 분이 어떻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에 깊숙이 관여 했냐, 창조 사건의 근원이 됐냐 하는 거죠. 왜 그런지, 그건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각자 생각할 수 있는데 따라 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오늘 제가 그것까지 또 말을 하지는 않겠어요. 여러분들 머리가 복잡 해 지실 것 같으니까. 앞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비슷한 얘기가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따라 가야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그냥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런 걸 얘기해요. 내가 뭐 예수 믿고 죄 용서를 받았다라고 할 때 증거가 있습니까? 죄 용서 받았다는 게? 우리가 믿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잘 와 닿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없이 우격다짐으로 가르치는데 그건 아닌 거예요. 거기에 충분한 근거들,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이제 숨겨져 있다고 할까요? 그 안에 들어 있어요. 확 들어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이 그런 것들을 경험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다른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면,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 즐겁잖아요. 즐거운데 왜 즐거운지를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은 음악 감상에서 뛰어난 감상을 하는 겁니다. 설명을 하지 못해도 즐거울 수는 있어요. 그러나 왜 즐거운지 이게 화음이 어떻게 되고 그리고 어떤 주제고 어떻게 반복 돼가지고 우리들의 마음들, 감정, 어떻게 끌어가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좋은 음악 경험이 된다고 설명할 수 있으면, 그리고 알고 들으면 좋은 감상이 되는 거고 음악적인 어떤 힘들이 더 많아집니다. 신앙도 비슷합니다. 꾸준하게 가야죠.
3절, 이는 ‘이는’은 뭘까요? ‘이는’은 아들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아들이 있을까요? 아들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그리고 여기 보면 6절에 보면 맏아들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맏아들이 있다면 둘째 아들이 있다는 건가? 그래서 사이비 이단 교주들은 이런 근거를 가지고 나는 둘째 아들이다 이렇게 얘기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 계시 받았으니까 내가 몇 째 아들이다 얘기 하는데요. 왜 이런 아들 그리고 다른 데에는 맏아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독생자 외아들 많이 표현하지 않습니까? 외아들, 맏아들, 그냥 아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고 각각 나름대로 그 단어를 쓴 성서 기자의 어떤 영성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와 그 당시 신앙의 어떤 자료들, 그런 것을 바탕에 두고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시오. 점점 더 어려운 단어가 나오네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마어마한 개념들이 여기 3절에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 말부터 시작해서 사실은 그렇습니다. 영광, 광채, 본체, 형상, 만물, 죄 정결, 높은 곳, 지극히 크신 이, 그 분의 우편, 이런 단어들이에요. 이런 것들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메타포에요. 시적인 언어에요.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혹은 개인이 이런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접어두고 단어 하나하나 우리가 다 지금 따라가기는 힘들고요. 한 가지만 봅시다. 우편이라고 하는 것. 우편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사도신경에도 나오죠. 다른데도 조금 몇 군데 나옵니다. 하나님에게 오른편이 있고 왼편이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는 않죠. 하나님에게는 동서남북 이런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전적인 타자에요. 바르트식으로 표현하면 전적인 타자,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모든 대상들, 이런 것들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사물을 만지고 있다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거하고는 전혀 다른 타자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는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많이 노력해서 머리가 좋아가지고 어디에 닿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신학은 그걸 계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어떤 궁극적인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사실 기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합니다만 우리가 생명이 뭔지를 다 모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냥 숨 쉬고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적인 생명, 근원적인 거, 그거 자체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어떤 지성적인 노력을 통해서 또 신학적인 노력을 통해서도 사실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오신다, 자기를 드러내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여기 우편이라고 얘기 했는데 하나님에게는 오른편도 없고 왼편도 없어요. 무슨 얘길까요 이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고대 유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그걸 전제하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유대교를 아는 게 우리 기독교는 그게 모판으로 해서 나왔기 때문에 중요한 거예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우편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어떤 이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를 가진 분으로 계시다. 그걸 이제 말 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 말도 그냥 알고 있을 거예요. 조금 더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우편, 그래요,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 이렇게까지 우리 생각할 수 있는데 정말 그게 뭔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 하나님의 존재 자체, 그게 뭔지에 대해서 말이죠. 됐습니다.
그 다음 4절,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천사 이야기가 나와요. 그게 1장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려고 하는 중요한 구약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5절부터 쭉 보면 14절까지 7번 정도 구약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시편이고요. 그 다음에 사무엘하가 한군데 있나? 시편이 주로 나오는데 7번 정도 구약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5절, 천사와 예수님이 비교가 될 수 있냐. 비교 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천사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 이 히브리서에 독자일겁니다. 그들을 위해서, 천사에 대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 그걸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그 다음에 이제 두 가지가 인용됐어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시편 2편 7절입니다. 그 다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사무엘하 7장 14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얘기 했겠느냐 너희가 천사를 위대하게 생각하지만 천사에게는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거다 그 얘기입니다. 6절,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맏아들, 외아들이라고 해도 좋고요. 바로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외아들하고 맏아들,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하나님과 성, 남자다, 여자다, 그런 생각을 뛰어 넘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성, 관계를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상도 아니고 아버지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성격도 하나님에게 많이 있는 거죠.
그런데 아버지라는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정말 우리 육체적인 아버지, 남자로서 아버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뭐라고 혹시 제가 언젠가 얘기 했는데 기억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아버지라는 표현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특별히 아빠 아버지라고 표현했잖아요. 진짜 우리의 아버지는 아니죠. 자신의 영혼까지 다 맡길 수 있는 그 대상, 그 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얘기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 자체에 여러분들이 자꾸만 빠지면 안돼요. 하나님, 야훼, 엘로힘, 아빠 아버지, 뭐 이러한 단어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을 더 잘 표현하려고 했던 거지 이 안에 담기면 안돼요. 그걸 어려운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범주 안에다 끌어 들이면 안 됩니다. 범주라고 하면 카테고리를 말해요. 그러니까 아버지하면 아버지라는 범주가 있잖아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아내, 고체, 이런 것처럼 말이죠. 성서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게 많이 있어요. 탕자와 이런 비유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고 또 무소불위하다는 그러한 거라든지 이런 것들도 범주, 속성이라는 겁니다. 거기 안에 하나님이 담기지 않으니까 하여튼 거기까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단어로 설명한 것이지 그 단어 안에 담기진 않습니다. 6절에서요.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그냥 오게 한다고 하지 않고 다시 들어오게 하신다고 했어요. 이게 뭘 가리킬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죠. 다시 오신다 그건 기독교 신앙에 기본 바탕에 있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 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비교가 되죠. 예수님은 아들로서 세상에 올 때 천사들이 경배를 해야 돼요. 비교의 대상이 아닌 거죠 사실은요. 8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절,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아들 예수에 대한 그러한 적극적인 평가를 지금 시편 45편 6절 이하를 인용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0절, 여기도 인용이죠. 시편 102편 25절입니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절,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표현이 재미있네요.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이번 돌아오는 주일 제 설교 제목이 태초에 라는 건데 창세기 1장 1절부터 5절까지 나오는 말씀이 교회력에 따라서 중진 성서 일과, 돌아오는 주일에 제목인데 제 1독서 구약 성경의 본문입니다. 태초인데 여기도 지금 태초가 나오네요. 오늘 이 구절이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초에 땅에 기초를 두셨고 땅과 하늘 이게나오죠. 태초 할 때는 천지, 하늘과 땅, 온 세계를 가리켜요. 아주 어마어마하죠. 일단 그것을 여러분들이 고대인의 시각으로 천지를 보셔야 됩니다. 옛날에는, 구약성경 1장에도 나오지만, 하늘에도 물이 있고 땅에도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밑에도 물이고 하늘과 땅, 전체가 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창조할 때, 여러분들 기억을 하시겠습니다만, 제일 첫날 창조한 게 빛이었어요. 빛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고대인들의 생각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을 신으로 대다수가 섬겼어요. 이집트도 그렇고, 로마도 그렇고, 바벨론도 그렇고, 잉카 문명도 그렇고, 이 태양은 신입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 보면 창조한 게, 궁창, 하늘이에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하늘을, 궁창인데, 그것을 그냥 창조한 게 아니라 물과 물을 나눈 겁니다. 이 전체가 물이에요 이렇게 세계가. 그 당시에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것을 나눠가지고 하나는 위로 올라가고 하나는 밑으로 내려가게 해가지고 이 중간 이것을 갖다가 하늘이다, 궁창이다 그렇게 불렀다는 거죠. 그래서 물이라고 하는 것을 고대인들이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헬라 철학자 탈레스도 만물의 본질이 물이라고 얘기 한 것도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와 있는 재미난 이야기는 제가 지난주일 저녁에 서울에 신학공부 창조론 공부 하면서 얘기 한 겁니다만 다시 반복되네요. 두 번째 날에 창조한 하늘과 궁창은 그 전에 이미 물이 있어, 그럼 물이 어디서 왔을까요? 일단 물을 창조하고 그 다음에 물과 물을 나눠가지고 하늘을 창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는 걸로 전제가 되겠어요. 이 성경 창세기 앞부분에 보면. 그러니까 이게 논리적으로 약간 맞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물리학이나 이런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약간의 착오가 있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고대인들의 시각으로 하늘과 땅, 태초, 이런 것들을 생각하시라는 뜻으로 잠깐 옆으로 나가는 말씀을 드렸어요. 대단한 거죠. 하늘과 땅. 그런데 11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게 이제 근동 지방의 종교하고 유대교하고 큰 차이에요. 태양 이런 것들을 정말 엄청난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슷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도 피조물이라고 봅니다. 없어질 거로 봤거든요. 그걸 신성화 하지 않았습니다. 보기에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않은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집트나 다른데서는 신으로 섬겼지만 유대교는 신이 아니고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말합니다. 오늘 여기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30분되기 전에 제가 정리를 하겠습니다. 11절에 보면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낡아진다. 어떻게 이러한 시각에 도달했을까요? 그 당시의 사람들이. 태양 같으면 정말 영원할 것처럼 보일 텐데요. 그 당시에 시각으로 봤을 때요. 오늘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양도 앞으로 45억년 있으면 없어지는 거니까 세계가 다 그런 것처럼. 현대 물리학이 나올수록 성서가 말하는 어떤 세계관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창조만 하더라도 무로부터 창조를 얘기하잖아요. 이게 현대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빅뱅하고 상당히 구도가 맞는 거예요.
12절도 그렇고요. 세계는 아무리 대단해도 없어 진다고 얘기를 하면서 이제 아들의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13절이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구절입니다. 인용한 부분 보겠습니다. 각주로 달아서 나왔습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발을 놓는 의자에, 의자가 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고요. 초기 기독교가 시편 110편 1절, 많이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시편을 많이 인용했어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시편이 중요했습니다. 이 구절도 그와 같은 거예요. 보십시오. 그 구절 그냥 보십시오. 내가 네 원수로, 원수는 누굴까요? 네 원수, 네라고 할 때는, 내가 나는 이제 하나님이죠. 너의 원수라고 할 때 너는 오늘 히브리서 기자 입장에서 볼 때 아들 예수고요. 원수는 누굴까요? 예수의 구원을 막는 어떤 악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네 발판이 되기까지는, 이건 완전히 굴복한다는 뜻이죠. 발로 밟는다는 뜻이니까요. 그럴 때까지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이 말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재림의 순간에는 이 세계에 예수님의 원수들, 생명과 적대적인 것들, 악한 세력들은 다 파괴되는, 다 정복되는 때다 그런 걸 우리가 알 수 있죠. 당연한 이야기죠. 우리가 알고 있던 바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곧 우리의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생명의 완성이에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 완성 된다 그러한 뜻입니다.
마지막 14절입니다.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아마 천사를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단들이 초기 기독교에 있었던 것 같아요. 뒤에 보면 또 나올지 모릅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약간 다르게 가르치는 거예요. 같이 길을 가다가 약간 옆으로 샛길로 빠지는 것을 얘기 하거든요. 초기 기독교에도 이단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만, 우리 한국 교회에 많은 게 아니라 원래 많았습니다. 그러한 신앙이 외곡 되거나 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위험 속에서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성서 기자들과 사도들과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 거예요. 천사 숭배하는 자들을 향해서 아니다 천사들은 오히려 아들 예수를 섬겨야 될 영이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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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오늘은 간단하게 A4용지 한 장으로 공부할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문건으로 드렸습니다. 참고하시면 되겠어요. 1절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하자, 들은 것, 들은 것은 구약입니다. 율법이에요. 초기 기독교는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시작 할 때요. 상당한 시간 동안 없었어요. 당연히 그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보고 살았습니다. 들은 것, 그런 거 율법에 열심히 좀 하고, 그리고 그거는 제가 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되겠네요. 다음 주에 제가 좀 더, 지금 말씀드려야겠네요. 집에서 읽고 할 때는 율법으로 생각을 했는데 다시 읽다 보니까 아닐 수도 있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이, 그 교회 공동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대한 것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가리키는지 아니면 정말 율법을 가리키는지, 제가 약간 혼란이 돼서요. 그 정도로 접어 두겠습니다. 이거 다 끝마칠 때쯤 정확하게 생각이 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것을 잘 유념해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은 부화뇌동한다, 왔다갔다,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유지하지 못하는 거죠. 이게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게 구약에서도 유대인들이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잘되지 않는 거예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일단 들은 것, 이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일상생활이 너무 여러 가지로 복잡하기 때문에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그 안에서 서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그런 말이 될지 모르겠어요. 이게 쉬운 게 아닌 겁니다. 이게 쉬운 거라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죠. 잘 붙들고 있어라. 이런 것들이 상투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붙든다고 하는 게 많이 읽어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고요, 그 말씀대로 서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어요. 그게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 수 있을까요?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잖아요. 지금 뭐 다 배우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겠습니다만. 어쨌든 1학년 들어가서 공부할 때 선생님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 바둑아 이리 오너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단어, 문장 하나하나 바로 서는 거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사물의 대한 이해도 더 넓어지고 어떤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커지고 합니다. 신앙도 비슷한 거거든요. 우리가 수요일 공부하는 것도 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거죠. 그러한 한 걸음 한 걸음 그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기독교 영성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불가능 합니다 기본적으로.
2절,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건 율법이 확실한 거예요.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그러니까 그 안에 전통이 된 거에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천사가 거기 역할 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 2장에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와요. 1장에서도 많이 나왔습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이제 모세가 율법과 십계명, 그런 것들을 받아서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전통으로 굳건하게 서게 됐습니다. 그런데 범죄함과 순종하지 않음으로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해서 거기에 대한 벌, 책임, 그걸 당하게 되었다. 간단한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드린 유인물을 보시면, 2절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대가를 예로써 몇 가지 들었어요. 바벨론의 포로, 로마 식민으로 떨어진 것들, 그리고 각종 고난들, 이런 것들이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고난과 이런 것들이 무조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많아요, 사실은요. 사건 사고도 많고 이렇게 저렇게 인생살이가 엮여져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전체 흐름에서 볼 때, 전체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게 됨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건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죠.
3절, 그런데 율법에 관계는 그렇고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율법을 바로 순종하지 못함으로써도 그러 한 징벌과 책임,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하물며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되겠냐, 더 심각한 것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큰 구원이라고 얘기했어요. 구원이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지는 않습니다. 중요하다 그런 뜻이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구원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여러분들이 구원이 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은 그렇게 자주해요. 구원 받았다, 구원 얻어야 된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구원이 잡히나요? 제가 앞에서 찬송가 부를 때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 찬양한다고 할 때 주에 대한 생각이 어떠냐 했잖습니까? 그 질문을 여러분들이 자꾸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것 같아도, 사실 근본은 다 끝나지 않은 거예요. 종말까지 가기 때문에 여러분 질문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란 것도 그렇고 지금 구원이라는 것도 그런 거예요. 구원이 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간단히 교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 아니라 살아서 평화를 누린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의 기쁨을 누린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상당히 관념적인 거예요. 틀렸다는 게 아니고 옳은 이야기인데 그것이 더 실질적인 내용으로 보충 되어야 합니다. 그건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보충되어질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실 겁니다. 그냥 한 말씀만 거기다가 생각을 그런 쪽으로 하시라는 차원에서 도움의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게 생명에 관계된 문제에요. 과연 인간의 생명이 뭐냐, 삶이 뭐냐, 그거를 이해하는 게 깊어질수록 이 구원에 문제도 더 깊어지게 됩니다. 만약에 인생살이가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그런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늘 구원을 그런 차원으로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죽어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여기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듯이 그런 걸 머릿속에 넣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정도 수준에 떨어지게 되고 말겁니다. 그런데 생각이 좀 있는 사람들이나 등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철학에서도 여러 가지를 많이 얘기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질문하자, 구원이 뭐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라 그 뜻입니다.
3절입니다. 중반부터 보겠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 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내용은 간단하죠. 예수님 말씀 하신 거고요. 그리고 들은 자들이, 이들은 누구일까요? 들은 자들은. 당연히 제자들이죠. 사도들, 초도 기독교 1세대나 2세대 그러한 사람들이죠. 그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거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들은 자들이 전해준거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누가 기도를 많이 하고 갑자기 번쩍, 이렇게 깨달음이 있어서 들어간 게 아니라 역사에요. 그러니까 예수가 말한 내용, 바실레이아, 하나님 나라, 그분이 그 얘기를 어떻게 했느냐, 말씀하신 거와 구원이 연관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제 안계시니까 예수님을 본 사람들, 직접 만난 사도들, 이 사람들이 뒤에 전한 거잖아요. 계속 여기까지 내려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역사죠 흘러 내려 온 것. 이것을 소상하게 따라가는 게 신앙에서 중요한 거예요. 복음서에 어떤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지 사도들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그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쭉 역사를 거쳐서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을 아는 게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게, 배우는 거죠. 신앙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분명히 얘기하잖아요. 주로 말씀하신 거고 또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거다.
4절,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굉장히 단어들이 좀 복잡하죠. 표적, 기사, 능력, 성령이 나눠 주신 것, 이런 게 나와 있습니다.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라서 다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 당시에 이 사람들이 어떤 뜻으로 썼는지 우리가 그대로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요. 다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그리고 제자들이 후세대에게 전해 준 것, 그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 구원의 문제가 지금까지 내려오게 됐는데 그러나 그런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은 다 성령의 활동이시다, 성령의 역사이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거기까지가 한 패러그래프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성경에도 4절까지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죠? 큰 구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5절, 조금 주제가 바뀌면서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다시,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천사들이 나와요. 몇 번 나옵니다. 2절에서도 천사가 나왔고요. 천사라고 하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날개달린 어떤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천사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 또 주의 사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이는 날아다니는 천사, 날개가 있는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 그렇게 하면 약하고요. 신학적인 상상력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는 어떤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천사에요.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 할 수 있으세요?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성경도 기록됐고 많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냥 연결 되지 않는 거예요. 헬라 철학에서는 제우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신을 가리켜서 헤르메스라고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그 어떤, 보이지 않으나 분명한 힘을 가진 어떤 이를 가리켜서 천사라고 얘기한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헷갈릴 수 있어요. 천사라고 하는 낱말이 있으니까 자꾸만 구체적으로 생긴 어떤 것을 생각을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허황된 것, 확실하지 않은 건데 말만 붙인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도 안 되고요. 그러한 완전히 우리하고 다른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그 뜻이 인간에게 알려지는 그 사건, 그걸 가리켜서 계시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알린다고 하는 것, 거기에는 그냥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떤 시각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는 사람의 어떤 인식이 굉장히 좋아서, 지적으로 굉장히 날카로워져서 알아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거기서 있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힘, 알리심, 그걸 천사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많았어요. 굉장히 그런 것에 대한 생각들이 절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사라고 생각을 한 기독교 집단들도 있었어요. 이단이라기보다도 천사는 초월적이니까, 뛰어나니까,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천사쯤으로 생각을 한 거죠. 초기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거예요. 천사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하고 연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안에도 사실은 영지주의, 신비롭게 뭔가를 안다, 영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상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건강 했어요 이런 면에서. 굉장히 신비스러운, 비밀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비이고 비밀이지만 그것을 조금 아까 얘기한 전문적인 용어로 영지주의, 천사론, 이런 쪽으로 가지 않고 대단히 역사적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으로 꾸준하게 밀고 나갔어요. 물론 예수님이 인간만은 아니죠.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긴장을 쉽게 해소 시키지 않았어요.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5절,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천사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천사 중요한 게 아니다.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라고 얘기 했잖아요.
6절,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서에서 증언하여 가로되 거기서부터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어요. 6절부터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계속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각주에 ‘ㄴ’보면 시편 8편 4절 이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과 인자, 이건 뜻은 다르지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 재밌어요. 그를, 그는 누구죠. 여기 나오는 사람과 인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를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그 잠시라고 하는 단어에도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조금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기독교에서 어떤 파가 예수님을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것은 굉장히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우월성, 어떤 초월성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천사가 우월하잖아요, 사람보다. 날아다닐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선지, 뭘 미리 내다 볼 수 있고 말이죠. 어떤 영향을 받지 않잖아요. 배고프지도 않고 그렇지 않습니까. 신적인 어떤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런 쪽에 가두어 가지고 쉽게 처리하지 않고 계속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붙든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인간과 천사를 놓고 볼 때 누가 더 뛰어나요. 천사가 당연히 뛰어나죠. 그걸 해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천사보다 못하다. 외롭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 다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죠. 예수님의 인간성, 그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래도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잠시 동안 그렇게 된 거다. 잠시 동안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동안일까요. 예수님이 살아 계신 공생애 동안이죠.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예수님의 부활, 예를 들자면, 그걸 통해서 예수님에게는 천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영광과 존귀의 그 분이 되셨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천사들에게 복종한 게 아니라고 얘기했고, 이건 여러분들 머릿속에 구도를 보고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사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니다 인간이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서 이것을 교통정리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순전한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고 했었던 영지주의나 천사론 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의 입장이 옳은 게 아니다 그걸 말하려고 하는 거죠.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만물이 복종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참 이 히브리서 기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하네요. 그리고 어렴풋하게 얘기하지 않죠. 아주 정확하게 얘기 하는 거죠. 이게 눈에 들어오시죠. 그리고 애매하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되는데 그게 실제로는 아직까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8절 후반절에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당하고 힘들고 죽고 세상에 악이 있고 계속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걸 그냥 어렴풋하게 지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9절,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난, 십자가죠.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 이런 말들도 굉장히 관념적이죠.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광채, 이렇게 표현 많이 해요.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이런 게 다 영광이라고 하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들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얼굴,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고요. 하나의 은유 방식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걸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영광과 존귀라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의 사건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 아주 궁극적인 생명으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기서 십자가와 구원, 십자가와 영광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보세요. 영광은 승리죠. 정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에요. 십자가는 실패에요. 고난이고 이건 누구라도 다 피하고 싶은 거고요. 이 세계는 아직까지도 십자가의 모습들이 많이 있는데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비약, 뭐가 좀 필요합니다. 생각의 비약,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천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꾸만 초월적인 능력자로만 보아요. 그렇게 또 보려고 했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굉장히 중요한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요소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거는 실질적으로 실패입니다. 그거는 고난이고 말이죠. 천사는 죽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당하셨는데 오히려 천사들은 죽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초월적인 능력이 있고 그 방식으로는 영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인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로 하면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나 사건을 가리키는데 그게 연결이 되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였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사는 거죠.
그 다음 10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래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러니까 천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없죠. 죽을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죽으셨고요.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과 존귀의 관으로 씌우셨기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살리신다, 구원하신다, 그렇게 온전하게 하신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러한 기독교의 기초 교리입니다. 그것을 이제 성서가 반복해서 말을 하고 있고요. 우리가 그것을 좀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여기서 거룩하게라고 하는 것은 하기오스, 그러한 단어인데 구별되었다는 뜻이에요. 성서 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1절은 어떤 제사 행위와 연관된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구별되느냐.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11절,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게라고 하는 말은 구별시켰다는 뜻이다. 세상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말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신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은 거기서부터 구별된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별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11절에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에요. 그 다음 12절, 12절에 이제 시편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형제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3절에서도 계속해서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4절, 자녀들은, 형제와 비슷한 차원의 의미에요.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혈과 육, 피와 살인데요. 그냥 인간의 구체적인 형체를 가리켜요.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때동안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앞에 있는 이야기하고 좀 비슷한 반복입니다. 똑같이 인간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받으셨다는 그러한 뜻이죠.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표현이 좀 재밌죠.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듯알듯한데 확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했다. 대충 그러려니 생각하면 되긴 하겠지만 과연 뭘까요?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하나의 공식하고 비슷한 건데 이런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그건 이제 죽음의 세력한테 굴복 당하신 건데 결국 예수님도 천사처럼 초능력이 있어 가지고 십자가에 달렸다고도 용케 풀려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성경의 기록처럼 확실하게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의 세력에 굴복 당한 건데, 무너진 건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전제한다면, 부활이 뭐냐 지금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걸 전제하게 된다면 앞으로 죽게 될 모든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 공식은 이해하시겠죠. 그렇다면 결국 마귀를 멸한 거죠. 죽음의 세력이 무너진 거죠. 그런데 이것은 부활이 뭐냐 이런데 까지 더 이야기가 돼야 되는데 그건 오늘 주제는 아닙니다. 이미 그런 것들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에요. 제가 8시 30분까지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활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 믿음, 그런 게 있다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당연히 자유로워 진거죠. 종노릇하는 것에서부터 풀리는 거죠. 16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요. 천사 많이 나오죠. 그 때 당시 천사론 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얘기예요. 그건 굉장히 매력적인 거예요. 그렇잖아요. 내가 뭐 신기한 거 봤다 요즘에도 많이 기독교 신앙이 그렇잖아요. 환상 봤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비슷한 것들이에요. 그게 아니다. 천사를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이다.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후손들, 혈과 육을 가진 그런 나약한 사람들이다. 그걸 붙들어 주려하심이라 되어있습니다. 17절, 그러므로, 거의 결론에 갑니다. 그가 범사에, 그는 누구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그가 범사에 모든 일에 형제와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처럼 되어야만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만 구원이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하심이라.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대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구약적인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랑 똑같이 죽었어요. 그게 천만다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를 믿음으로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고 하는, 그러니까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켜주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 그 얘기죠.
마지막 18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계속 반복해서 나오죠.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우리와 똑같이 그렇게 사셨다는 이야깁니다.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까지입니다. 이게 여러분들 쭉 공부하면서 봤듯이 천사주의자들과 대립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예수님을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써, 단순히 그들에 대한 반론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쨌든 천사에 대한 호감, 이런 걸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 혈과 육을 지니심으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제사장이시다.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2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 그 과정에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그 길에서, 귀중한 디딤돌이 되도록, 영적인 소양이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천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기에 죄와 죽음가운데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셨다는 그 놀라운 고백, 그리고 증언을 저희들이 듣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지금도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줄로 믿습니다. 2015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금년 마칠 때까지 우리의 삶을, 특별히 신앙의 삶을 주님께서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3장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절,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절,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7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절,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절,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절,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절,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절,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절,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9절까지 있네요. 아주 긴 장은 아니고 정당한 길이의 장이네요. 우리가 함께 읽으면서 대충 내용은 파악이 됐습니다. 여기에 특별히 어려운 단어가 어디 있을까요? 일단 단어나 문장이나 그 자체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어디 있나 보실까요? 특별한 거는 없어 보입니다. 9절에 보면 약간 우리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나와요. 증험한다, 증명하고 경험 한다 그런 뜻일까요? 시험한다, 같이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고 시험했고 또 증거가 되려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한 뜻입니다. 다른 단어나 문장 특별한 건 없습니다. 제가 3장의 제목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 조금 부정적인 표현이죠. 그거는 불자만 빼면 적극적인 겁니다. 순종과 신앙,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3장 전체가 얘기하려는 것은 유대 역사에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고 올바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된 걸까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말을 역사적으로 보면 출애굽 한 다음에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야 되잖아요.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들이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이게 대다수가 못 들어갔어요. 심지어는 모세도 못 들어갔으니까 아주 어렸던 사람들만 들어갔고 스무 살 이상 되는 친구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들어가지 못했어요.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걸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있다. 그 이유가 불순종, 불신앙, 이거다. 그렇게 역사를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인거에요. 정확하게 바라봐야 됩니다. 신학성경 다른 복음서 같은 것도 예수님의 역사죠. 벌어졌던 이야기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게 있었던 역사들, 그런 것들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제목으로 이거를 공부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유인물을 보시면 거기 서론 부분에 그 이야기를 썼어요. 잠깐 서론 부분만 보겠습니다. 18절, 19절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그거를 불순종과 불신앙이라고 한다. 세 가지 단어, 하나님의 안식, 근데 이게 뭘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안식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안식이요. 종교적인 용어들을 우리는 다 놓치고 있습니다. 굉장히 세속적이랄까? 어떤 종교적인 깊이를 현대인들 놓치고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여기 정말 성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도는 그러한 게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이 성서 기자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하고 불순종과 불신앙, 이런 겁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은 공부 끝날 때 제가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고요.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만 조금 더 보도록 합시다.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쉰다고 하는 거예요. 안식하면 안식을 이것도 연관이 되죠. 안식일,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람에게는 쉼이 참 안됩니다. 그냥 쉽게 얘기하면 돈벌이라든지 사람들이 경쟁하고 이 세상살이가 쉼이 없어요. 그런 것들은 아주 부지런해가지고 그리고 경쟁하기 위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실존 자체가, 실존이라고 할까요? 본질이라고 할까요? 그게 우리의 안식하고는 거리가 멀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요?
이런 거죠. 자기가 자기를 완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그건 나쁜 게 아니에요. 굉장히 우리가 성실하게 산다, 뛰어나다, 그렇게 많이 얘기하는 그러한 삶들이요. 그런 것들은 결국 자기를 스스로 노력해서 채우려는 것들 아니겠습니다. 다 좋은 것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율법 같은 것도 다 채워나가는 건데 그건 아무리 죽도록 해봤자 안식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 자체가,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가 안식하고는 좀 거리가 먼 그러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열심히 해서, 노력해서 어떤 걸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이루기만 한다면 좋을 것 같아서 마음이 간절한데 이루고 나면 그걸로 안식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어거스틴 유명한 시, 기도문에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 안에서 내가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 얘기입니다. 그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르고 삽니다. 그냥 인생살이가 그렇지, 애쓰고 힘들고 그래도 그게 인생이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 성서 기자들은, 영성가들은 정말 안식, 어떤 것을 경험한 거예요.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해탈이라고 할까? 똑같은 개념은 아닙니다만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얽어매고 있는, 그리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어 보려고 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럴 때만 안식이 가능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우리는 전제하고 이제 하나님을 믿는 그러한 신앙의 훈련, 그 쪽 방향으로 우리가 나가야 되는 겁니다. 네 그게 서론 부분이에요.
1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약문으로는 다 자세하게 제가 설명하지는 않고 토막토막 필요한 부분들만 설명했습니다. 1절만 보더라도 참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거리가 많습니다. 보세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게 느껴집니까? 어떤 건지.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얘기하잖아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명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이제 대충 알긴 압니다. 신학교에 갈 때도 신학생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건 아무도 증명은 못합니다. 이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자기가 착각할 수 있는 거고요. 하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 어떤 건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하늘의 부르심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거죠. 그래서 거룩한 형제들아 그렇게 얘기해요. 다시 한 번 그 문장 읽어 보겠습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고 있어요. 그거만 하더라도 참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늘, 부르심, 거룩함, 형제, 이렇게 나가고 있어요. 거룩하다고 하는 거는 보이지 않는 거죠.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구별됐다고 하는 그러한 뜻인데요. 구별됐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뭐로 알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게 표시는 안 나잖아요. 예수 믿는 다고해서 우리가 다 잘돼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늘 마음이 평화로운 것도 아니고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어떻게 거룩한 형제들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됐다는 뜻인데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딱 부러지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거는 궁극적으로 얘기하면 종말론적인 사건이고요. 종말에,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셨죠? 우리를 종말론적으로 구원 시키신다, 그런 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게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거를 종말에, 죽음에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구별된다고 하는 데에 막연하게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오늘 현재에 어떻게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하는 게 기독교 영성의 핵심인거예요. 이게 잘 안돼요. 자꾸만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기 확신을 하려고 하거든요. 자기최면, 자기도취라고 할 수 있거든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래서 이게 숙제입니다. 그건 꾸준하게 공부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세계, 구원의 세계, 성서가 말하는 세계에 가까이 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게 구별되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 같은 1절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벌써 예수님을 두 가지로 호칭하네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여러분 나왔어요. 지난번에도 나와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대제사자이라고 불렀죠? 앞에서 공부하신 거 기억해 보십시오. 중보자니까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중보자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떤 뜻인지를 여러분들이 설명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그건 하나의 공식이고 수학에도 어떤 공식이 있잖아요. 피타고라스의 공식에 이등변삼각형의 무엇 무엇은 어떻다 이러한 것 말이죠. 그런 것처럼 지금 말씀드린 이런 거는 기독교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그 공식 안에, 피타고라스 공식에 많은 수의 세계가 들어있는 것처럼, 이러한 기독교의 고백문, 이러한데도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요. 이걸 차근차근 따라가야 정말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 대제사장, 지금 제가 다시 한 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해가 돼야 하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인지, 그냥 우리가 예수님 없어도 맘 착하게 살면 되자 않냐 사람들은 생각할 텐데 기독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죠. 왜 생각하지 않는지를 더 알아야 됩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건 흔히 들었던 이야기고 또 하나는 사도라는 나와 있어요. 조금 이상하죠? 예수님을 사도라고 얘기하는 건 조금 맞지 않아요. 예수님의 제자를 사도라고 얘기하는데 이 사도라고 하는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와 같은 그러한 차원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그러한 뜻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도라고 표현하는 구절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 하나에요. 다른 데는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어떤 관점에서 이 사람이 여기 쓴 것 같습니다.
그 다음, 2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여러분들 요약문에는 3절로 되어 있는데 오타네요. 2절부터 봐야 되겠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 여긴 이제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대목입니다. 2절부터 6절까지요. 그냥 제가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겁니다. 딱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고요. 이 모세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게서 시작 한 게 율법이죠. 물론 여러분들 짐작하시기겠지만 모세가 율법을 다 쓴 건 아닙니다. 그거는 이스라엘 역사에 오랫동안 축적된 법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함무라비 법전이 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법전이 있는데요. 그게 율법인거죠. 가장 유대 사회에 준거가 되는 거라서 준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인 모세 이름을 붙여서 율법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모세 율법이라고 많이 얘기를 합니다. 율법이 하나고요. 또 하나는 같은 율법의 문제인데, 모세에게서 시작된 게 제사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제사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게 왜 이렇게 연결이 되냐 하면, 그 전에도 개인별로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식으로 하면 예배, 제사를 드린 게 구약 성경에 나오죠. 그건 개인적으로 한 거고요. 이집트에 들어가서는 가나안땅에 살면서, 요셉과 더불어서, 그 쪽으로 이민을 떠나지 않습니까. 3, 4백년 살았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구약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3, 4백년은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엔 성서 기자의 관심이 없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도 나름대로 활동을 하기는 했을 텐데 전혀 언급이 없어요. 역사가 비약해가지고 모세가 등장하게 되는데. 모세가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때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아닌데 성전의 원형이라고 하는 회막이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거기서 제사 드리는 그런 일들이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세하고 연관된다 하는 거예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판단에 따르면 모세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 왜 그런 얘기를 할까요? 종은 하나님의 아주 성실한 일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뛰어난 일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잖아요. 일단 율법이니 핵심적으로. 율법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회가. 좋아져요. 건강해집니다. 그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율법대로 그 사회를 끌어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 성경에 있는 율법만이 아니라 불문법,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뭐 미드라쉬인가, 제가 이름을 다 거명을 못하겠습니다만 굉장히 많은 시행세칙들, 헌법이 있으면 나머지 법률들이 있고 시행세칙, 대통령령, 지금도 그렇게 있는 것처럼 유대도 율법을 중심으로 한 법칙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대로 하면 정말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신약성서기자들은 그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거죠. 판단한 것만 아니라 증명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자들과 예수님과의 충돌이 많이 있었어요. 이런 거예요. 율법이 좋기는 한 건데 그걸로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그걸로 만족하고요. 율법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뭔가 불안하고 그런 거예요. 늘 상대적인 가치, 가치론적인 거예요. 아, 그렇게 표현하면 되겠네요. 율법은 가치에요. 조금 더 괜찮은 삶이 있고 좀 못 미치는 삶이 있고, 그러한 상대적인 겁니다. 그런데 그래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연봉을 1억 갖고 사느냐 8천만 원 갖고 사느냐 조금 더 밑으로 떨어져서 5천만 원을 갖고 사느냐 삶의 어떤 형식들은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걸로 다 문제가, 오천만원 받는 사람보다 1억 원 연봉 받는 사람의 삶이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게 괜찮아진다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비슷하잖아요, 약간의 차이만 있지. 율법은 그러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노력하는 자체는 괜찮은 겁니다. 그런 것을 종의 역할이다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이라고 그랬어요. 6절 보시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6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 아들로서 그렇게 하셨으니 확실하게 그를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특별히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런데 제가 이런 용어를 쓰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아니면 아무 생각이 안들 수도 있어요. 대다수의 신자들은 생각안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만 그냥 대충,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들인가부지 생각하지 그게 이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한계에요. 그렇게 알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에요.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호칭했을까?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거예요. 누가 대답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조금씩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정리가 들 겁니다. 이게 신학적인 거고 인문학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단어, 용어에 있는 어떤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다는 뜻이에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다 이러한 뜻입니다. 그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그렇게 경험을 했을까요? 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 영적인, 종교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라고 인식했을까요? 그건 뭐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시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뭘 경험했다고요? 생명을 경험한 거예요. 이건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그것을 경험한 겁니다. 율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서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럼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생명, 궁극적인 생명이 뭐냐 이런 얘기를 하려면 더 많이 필요하니까 지금 우리가 다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튼 방향은 그렇다. 자꾸만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생각을 정리 하셔야 됩니다. 2절에서 6절을 봤습니다. 모세는 사실은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종이었다. 아들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된다, 그의 집이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7절에서 11절입니다. 여기에 구약성경이 많이 인용이 됩니다. 여러분 각주에 보면 'ㄹ'이렇게 되어있어요. 시편 95편 7절 이하의 내용들이 인용이 돼요. 신약성경이 구약을 인용할 때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시편 95편 7절을 찾아보면 똑같은 이야기는 아닌 거예요. 그러나 비슷한 게 있고 부분적으로 겹치는 게 있고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잖아요. 히브리어 성경이 원래 있고요. 그러나 여기 신약성서 기자들이 주로 인용한 성경은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70인역이라고 해서 구약 히브리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성경이 있어요. 그걸 주로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왜 헬라어로 번역을 했을지는 여러분들 상식적으로 생각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틴에 살지 않고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 말, 언어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알랙산드리아인가, 거기서 모여서 학자들 70명 정도가 번역을 했다고 해서 그 성경을 가리켜서 70인역, 얘기하는데 권위가 있는 성경입니다. 주로 그거를 많이 인용을 한 것 같아요. 내용은 간단한 겁니다. 광야 생활을 다시 한 번 언급하는 거예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너희들 조상들이 거기서 고집을 피우다가 망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너희들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그걸 이제 시편 95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거죠. 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여기서 시험하던 날에는 구약에 나온 어떤 사건들인지는 대충은 아시죠? 뭘 시험 했냐 그러한 거죠. 만나, 메추라기, 사실은 이거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기보다도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결과인거예요. 하여튼 그래서 계속해서 이 유대인들은 40년 동안, 여러분들이 출애굽기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불안했어요. 가나안땅에 들어간다는 확신도 없었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집트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도 많이 하고요. 그리고 모세에 대한 불평, 불만 이런 것들도 많이 있었고요. 굉장히 그렇습니다. 약간 전문적인 말씀을 드리면 애굽에서 뛰쳐나온 사람들 있잖습니까. 이 사람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하는데 그 히브리라고 하는 말이 꼭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근동 지역의 하층민들을 가리키는 히브루라는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정말 순수하게 유대인 자기 민족만 끌고 나온 게 아니라 욕구 불만, 사회 불만이 있는 사람들, 하층민, 노예들 이런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 반란을 일으켜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걸 다 시험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완고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어요. 완고하다. 여기 보면 8절에도 있고요 13절에도 나오고 15절, 이건 다시 반복한 시편 인용문인데 완고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완고하다고 하는 건 신앙하고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저 사람 완고하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이상한 사람들, 괴팍한 사람들,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것, 사실 그런 게 완고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7절에서 11절 부분 정리했는데 잠깐 보겠습니다. 세 번째 문장부터 봐요. 성령은 신구약을 관통하게 하는 진리의 힘이다. 그러니까 시편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를 유대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부분이 못했어요. 이유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마음이 완고한 것이다. 완고하다는 표현이 반복된다.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를 신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완고, 교만 비슷한 겁니다. 대게 우리는 그렇게 살죠. 저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복하기가 참 쉽지 않아요. 우리 어떤 전 이해에 너무 강하고 이렇게 저렇게 교육받은 것도 있고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교회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그런 위험성은 있다고 볼 수 있죠. 결국 11절에 보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 한다 그러한 경고를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요약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제가 정리한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러한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오니까요. 이건 그냥 의인화한 거예요. 하나님이 살고, 말고 그런 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어떤 다른 걸 가리키는 거예요. 영적인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문제에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 그건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은 거죠.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하는 우리의 영적인 태도에서 가능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게 경험 한다 아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제가 어저께 밤에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린 커피에 대한 이야기 잠깐 드리면 이렇습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이게 색깔, 향, 잔, 찰찰 넘치는 거품 등등이 있어요. 그리고 커피를 갈아서 넣고 거기 관계되는 많은 것들, 물을 넣어서, 물이 이제 중력에 따라 내려와서 커피가 내려진다는 말입니다. 그 사건 자체가 어마어마한 이 우주 전체에 신비한 생명의 힘들이 작용한 거다 전 그렇게 보여요. 커피 알 갈고, 가루, 물, 수증기, 색깔, 이런 것들이 어마어마한 온 세계를 담고 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느끼는 사람은 느낄 수 있고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지금 빨리 한 잔 마시고 나서 다른 일 해야 된다고 마음이 쫓기게 되면 우리 일상에 대한 모든 것들을 놓치는 거하고 비슷하게 하나님 경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이게 계시는 건 아닌 거거든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경험 하냐하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거를 제가 요약문 안에 정리를 했습니다. 보시면 되겠어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해야만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늘 여기서 반복해서 얘기하듯이, 그건 13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완고한 마음, 이런데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게 하라.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보통 이런 글들을 읽으면 도둑질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하시는데요. 성서는 그렇게 유치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도덕가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죄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교묘해서 선으로 위장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집중이라고 하는 게 죄인데 자기를 스스로 성취하려고 하는 아주 강력한 욕망, 이게 죄에요. 이상하죠? 우리는 보통 자기 긍정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르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유혹하면 이상한 것 생각하지 말고요. 아주 파렴치한 그런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는 유혹,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것에 있게 되면 완고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경험이 점점 줄어들게 되죠. 시간이 많이 돼서 제가 30분까지 정리를 해야 되는데요. 좀 빨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에서 19절입니다. 이게 오늘 결론이기도 하지요. 다시 한 번 요약문을 보겠습니다. 7절에서 인용된 시편 95편 7절이 다시 인용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요청입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입니다. 이건 귀를 기울이려고 억지로 해봐야 사실 되지 않습니다. 이건 자기의 영혼이 그쪽으로 마음이 가야되는데 이게 쉬운 가요. 안되잖아요. 이거 저걸로 우리가 쫓기고 있는데 어떻게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에 귀가 가겠습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인거죠. 크게 엄청나게 잘못한 거보다도 살인, 강도, 이거는 그냥 정말 파렴치한, 파괴적인 행위고요. 성서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순종을 통해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순종이라고 하는 게 신앙하고 비슷한 얘긴데 어려운 거예요. 순종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런 것들이 잘 잡히지가 않으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뭘까. 내가 교회 열심히 나와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뭐 그런 건가. 아니면 심지어는 주의 종, 목사에게 순종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자꾸만 생각을 해요.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거 거부하고 청백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됩니다. 자기합리화에 빠질 수도 있고요.
제가 요약문에 예수님의 경우를 썼어요.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그렇죠? 십자가라는 것은 인류 구원의 길이 아니라 이거는 자기 파멸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파멸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잖아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 하나님 나라가 올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십자가가 점점 가까이 오니까 이게 받아들이기가 힘든 겁니다.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도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아마 그래서 제자들은 피하라고 많이 얘기 했잖아요. 그건 아주 상식적인 거예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순종하신 거죠. 자기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 그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에게 자기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일종의 결단이죠.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야 뭐 그렇게 엄청난 인류 구원,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냥 일상적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야 되는 건데 이런데서 순종이 뭐냐 한, 두개로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하게 어떠한 말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이거 결정하기도 힘든 문제고요. 제 삼자가 말해 줄 수도 없는 문제고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게 순종해야될 거냐 아니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그거 어떤 구체적인 사항보다도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것,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들어간 것만큼 어떻게 말하고 행동을 하는지 그러한 방향이 잡히겠죠. 문제는 용기가 있냐, 없냐, 그러한 건데. 그럼 안 되는 것을 희생해가지고 억지로 해라 전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건 자학적인 거 그걸 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얻는 길인 거예요. 손에 잡히는 거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내가 당연히 가야될 길이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 그럴 때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생명을 얻게 되는 거죠. 신앙의 선진들은 다 그런 길을 갔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는 것 몇 줄만 읽으면 되겠습니다. 순종, 또는 그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그 대상을 더 깊이 알아야 된다. 내가 따라가야 할 대상을 알아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대한 공부가 필수다. 두 번째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공부는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다 보이는 게 아닌 거예요.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그 대상에게 자기의 운명을 완전히 맡길 수 있어야 된다. 저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이다, 구도적인 거다, 죽을 때까지 계속 그 긴장이 있어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공부를 해야 되고요. 정말 이건 필요한 건데 우리 수요 공부팀은 그런 면에서 좋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따로 공부실수도 있는 거고요. 꾸준하게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그러한 수행과 구도로써의 기독교인의 삶이 돼야 되지 않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3장,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준 그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눴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시험하여 결국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그 생명에, 궁극적인 현실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이 어려운 시절에 우리의 신앙이 날로 달로 더 심화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4장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절,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절,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절,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절,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절,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자, 제목은 4장 여러분들 유인물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안식과 말씀의 관계예요. 안식과 말씀입니다. 이 안식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3장에서도 같이 본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쉼 그러한 거예요. 근데 이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안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단순히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던지 아니면 어디 요양을 가서 좀 쉬었다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예요. 공관복음서에서 핵심을 이야기한다면 키워드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생명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에게서 이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가장 궁극적인, 어떤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총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요 다른 때도 여러분들이 느끼셨겠습니다만 궁극적이고 총괄적인 것들은 손에 잡히는 게 아니에요. 막연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우리의 생각으로 다 따라갈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꾸준하게 그 세계가 어떠냐하는 것을 넓혀갈 뿐이지 이걸 갖다가 어떤 걸 딱 고정시켜서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 부활, 예수님의 재림, 그런 것들과 다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인 거예요. 이 안식이라고 하는 그 개념, 오늘 여기 3장에 이어서 4장에 반복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걸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는 것을 지금 4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게 참,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보다도 저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목사가 설교하고 교회 운영하고, 목회하고 이런 저런 하는 것 자체로 사람이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교회일 자체가 우리를 피곤하게 할 수 있어요. 피곤하다는 말이 정확한 건 아닌데 거기에 묶여 버려갖고 영혼의 안식, 이런 거하고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 평생 살았는데 어떻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이러한 안식이 내 영혼에 깊이 자리 잡을 수 있느냐 숙제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이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닌 문제예요. 천천히 한 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제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면 이렇게 중요한 안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갈 때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 다시 한 번 생각난 김에 짚고 지나가야겠네요. 그러니까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인 거거든요. 당장 이 땅에 살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건 종말론 적인 거고 약속이에요. 그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 그거를 우리가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따라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사로 잡혀야 되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야 되는 거죠. 그러한 기본적인 관점을 갖고 오늘 말씀을 천천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절, 여러분들 가지고 계신 강의 요약문 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1절에 이렇게 시작하죠. 우리는 두려워하자, 이거 조심 좀 하자, 이런 이야기에요. 어떤 거냐면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 테니까 그걸 좀 두려워해라, 그걸 조심해라, 좀 심각하게 생각해라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좀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를 하는데 이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성경 말씀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거예요. 말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긴 있는데 말로 그거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힘든 거예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꾸 이제 공부를 통해서 성서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에 더 가까이 가는 그런 게 최선입니다.
예, 이 말씀이에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있고 들어간 사람도 있다고 하는 건데 이게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거기에 무조건 매달리는 거죠. 실제로 성서가 얘기하는 안식을 모르면서도 나는 안식을 얻었다. 다른 말로 구원 얻었다,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반대로 냉소적으로 생각해서 도대체 안식이 가능 하냐, 기독교가 얘기하는 구원이 실체가 있냐, 그렇게 조금 무시하면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식의 약속이라고 하는 말을 조금 더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약속인 거예요. 잘 보세요. 약속.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구원도 약속인 거예요. 약속이라는 것은 지금 이루어 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아직 안 이루어진 미래적인 거예요. 미래에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이 안식과 구원을 완성하거나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늘 조금 마음이 완벽하지 않은 거예요. 마음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도 계속 시행착오가 있고 뒤뚱뒤뚱 대고 아무리 믿음 있어서 안 됩니다. 약속인 거예요. 아 그러면 현재 삶하고는 별로 상관없이 약속이니까 미래적인 것 만이겠네 생각하면 그거도 오해입니다. 약속이 미래적인 것이긴 하되 그게 어떻게 우리의 삶에 실질적이냐 그 관계를 잘 따라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정확한 인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울도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잡힌 바 된 것을 따라간다. 잡힌 바 된 정도예요. 우리가 지금 신앙하고 있는 세계는 그와 같습니다. 완전히 이룬 게 아니라 어떤 힘에 붙잡혀서 어느 쪽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그러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절 말씀 보세요. 여긴 안식의 약속인데 이르지 못할 자가 왜 그러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2절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습니다.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이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그건 믿지 못했다 그 얘기입니다. 아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얘기 하겠네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제하고 하는 얘기에요. 유대인을 비롯하여 등등의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지로는 믿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게 참 이상합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몰라요. 내가 지금 믿고 있는지 아닌지도 분간을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믿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마음은 다른 데 가있는 거예요. 이런 게 많죠. 이런 경우가. 그러니까 안식의 약속을, 그것에 대한 복음을, 말씀을 실질적으로 믿어야 되는데 믿지 못하는 거죠. 그게 어떤 상태냐 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니까 그냥 넘어 가도록 하고 여러분들이 개인 적으로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3절과 4절, 여기에는 강의안을 잠깐 보시죠.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제가 요약을 했어요. 안식의 약속에 대한 복음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간다.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거예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와 들어간 자에 대한 차이점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안식은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고 얘기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표현 될 수도 있고 저렇게 표현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거예요. 구원을 받았습니까, 받지 못했습니까. 이런 질문에서요.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그거는 기본적으로는 약속이고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아주 궁극적인 일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아직 받지 못했다는 건 맞아요. 그러나 구원 받았습니다 이야기 하는 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중적인 거예요. 긴장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아주 궁극적으로는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 아니지만, 그러나 그 약속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창조 사건하고 연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절에 이렇게 되어 있죠. 후반절 보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창조 6일 동안 하고 마지막 7일째 안식했다고 하는 그 사건. 그 창조는 기본적으로 안식 사건,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뒤에 또 나올지 모르겠는데 이 쉼이라고는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무덤에 가면 유럽이나 뭐 이런데 보면 비석 같은 거 세워 놓거든요. 거기에 누구누구가 여기에 영원한 안식을 얻다, 누워 있다, 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독일에 있을 때 잠깐 무덤에 보니까 거기에 쓴 단어가 루에라고 해요. 루에, RUHE해서 루에, 쉼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참된 쉼은 죽는 거죠. 이게 왜 참된 쉼이냐하면 살아 있는 한 자기 것하고 계속 뭐가 연결되어 생각합니다. 쉼이 없어요. 그러니까 죽음을 가리켜서 이 사람이 영원하고 참된 안식에 들었다, 쉼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짚고 있는 걸 거예요. 결국 죽어야 쉼을 얻게 되는 거죠. 그럼 이 땅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냐. 무의미한 것은 아니되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겁니다.
지난주에 제 설교 혹시 기억하시는 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설교라기보다도 그 안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들 말이죠. 뭐뭐 아닌듯해라 이렇게 얘기 했잖습니까.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웃는 사람처럼 하라. 그 반어법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 얘기는 곧 너무 몰입하지 마라 그러한 뜻이었어요. 그래야 참된 안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열심히 살 필요가 없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오해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를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죽어야만 쉼이 있어요. 그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그걸로 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흥분하는 거죠. 열광하고 있을 뿐이지 열광하는 것이 쉼은 아니잖아요. 그건 푹 꺼져요 금방.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을 이야기할 때도 죽어야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죽음이 곧 쉼이고 죽음이 곧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살아야 되요. 그러니까 긴장이죠, 불안하죠, 갈등이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미래에 있는 죽음, 그게 구원의 관문인데 그걸 미리 살아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죽음을 당겨서 사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핵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죽음을 미리 당겨서 살아가는 그 종교 의식을 가리켜서 세례에요. 세례 받는 것. 그렇잖아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본 관문이 세례이지 않습니까. 그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거잖아요. 그건 죽음입니다. 세례는 다른 게 아니라. 물론 삶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산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같이 있는 거예요. 하여튼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3절과 4절, 여기에 따르면 안식 혹은 구원, 하나님 나라, 생명, 이러한 것들이 이미 창조 때부터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창조와 제 7일 안식하신 것, 그 사건을 가리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하다가 여러분들 혹시 갑자기 질문할 게 생각이 나면 손들어주세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질문할 때 안하면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즉시즉시 손드시면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5, 6, 7절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고 있네요. 5절에 인용한 시편은 95편 11절이에요. 쭉 여러 번 그렇게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강의안을 좀 보십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설명한다. 복음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이 복음이 뭐죠? 안식의 약속인거예요. 구원의 약속인거예요. 다시 한 번 여러분들 생각해 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성서를 이해하는데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이 약속이니까요. 구약과 신약, 약속입니다. 복음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왜 복음이냐, 왜 복음이라고 합니까, 정말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냐,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순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쳐놓으니까 말할 것도 없어요. 그들을 얘기 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인데 말씀을 실제로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거기 강의 요약에 두 가지로 제가 분류해봤어요. 일번, 구약의 말씀을 전해들은 유대인들, 그걸 받았으나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두 번째, 복음을 전해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 읽으면 참 믿음도 없다, 불순종 했다고 하는 잘못된 사람들이다,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표현이 정확하지 않네요. 그건 누가 봐도 뻔하게 아는 잘못, 이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니까. 겉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순종 했다, 믿지 못했다하는 것은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방해하거나 교회를 방해하거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안에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이 다른 데에 흩어져있는, 다른 데로 가있는 그런 겁니다. 자기 자신도 그걸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위험성이 많아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이게 자기의 잘못, 이런 것들을 인식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목사들에게는 그러한 위험성이 더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죠.
거기 강의 요약문에 제가 그래서 그렇게 묘사했어요. 이 불순종, 완고한 마음은 파렴치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세련돼 있지만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완고한 마음입니다. 불순종인 거예요. 구분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 내가 정말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 아는 길은 별로 없어요. 스스로도 우리를 잘 모르니까. 그냥 기도하는 게 최선입니다. 나로 하여금 순종하는 사람, 목사에 순종하라는 게 아니라, 교회 질서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게 아니라, 안식의 약속, 이건 굉장히 궁극적인 거잖아요. 종말론적인 어떠한 하나님의 통치이고 생명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이는, 거기에 마음이 가야되는 이게 순종인데 이게 잘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게 최선이죠. 성령이 우리 영혼을 끌어주셔서 거기에 마음이 가도록 해주십사 하는 기도가 최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고요. 목사도 할 수 없고 그분만이 할 수 있죠. 그분에게 전권이 있고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때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가사, 혹은 기도 가사는 성령이여 오소서입니다.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주관하지 않으면 이게 계속 흔들리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는 마음들이니까요. 그렇게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확하게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이러한 기도지요.
다음, 8절과 9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 들어가는 자, 이런 것들을 설명하고 있어요. 구약에 있는 많은 시편과 어떤 사건들을 곁들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9절에는 여호수아가 나와요. 재밌어요. 8절 이렇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각주에도 나왔듯이 예수라는 말로도 같이 사용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건 구약의 역사를 아셔야 되는데 출애굽기에 나온 이야기고요. 또 등등 쭉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더라면 이라고 하는 거는 가나안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들어가는 거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요. 그게 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거예요. 상상해 보면 이거는 당연합니다. 이집트의 어떤 소수민족으로써 어려움을 겪다가 그리고 광야에서 생존조차 불확실한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생존이 보장되는 농경문화가 자리를 잡은 곳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최소한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는 거예요. 광야에서는 유목생활이고 떠돌이 생활이고 노마드라고 해서 이렇게 생활이 전혀 안정이 되지 않으니까 쉼이 없는 거죠.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정말 쉼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룬 사람이 여호수아에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가나안땅에 들어간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쉼을 얻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못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못 얻은 거죠. 그걸로 완성되지 않았다 얘기하는 거죠.
가나안은, 광야와 가나안은 이 땅에서의 모든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광야 40년 동안 굉장히 척박했어요. 광야에서의 삶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있을 때 삶은 그래도 비교적 농산물이 어느 정도 풍족해서 괜찮았습니다. 약간 가난했던 시절이나 조금 풍족했던 시절이나 안식은 없는 거죠. 이거는 뭐 설교조로 말씀을 해서 조금 그렇습니다마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나 상대적으로 조금 부자로 사는 사람이나 안식이 없는 것은 똑같습니다. 개인 소득이 삼만 달러, 사만 달러, 된다고 하는 걸 정치인들이 이야기하지만 가능한대로 우리나라도 그렇게 가면 좋긴 하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살아봤자 안식이 없어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경험 하는바 일겁니다. 그래도 거기 죽자 살자 매달리는 이유는 다른 안식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마저도 이제 기복신앙에 만약에 떨어진다면, 이거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아시죠. 하나님 잘 믿고 헌금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떻게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이거는 가나안 바알 종교하고 똑같은 거고 그걸로 결코 만족이 안 된다는 걸 아실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유혹을 많이 받긴 하는데 또 그거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살 수도 없는데 가나안의 어떤 풍족한 삶을 완전히 버리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게 축소가 돼야죠. 우리 삶의 영역에서 축소가 되고 이제 다른 안식, 다른 안식이기 보다도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는 식으로 하자면 안식의 약속, 그리고 더 밑바탕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통치, 그리고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세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비전, 혹은 영적인 감수성, 영적인 통찰, 그런 게 우리의 삶에서 풍부해져야 되는 거죠. 그래야 가나안과 40년 광야생활의 그러한 압박, 유혹, 그런 거로부터 우리가 훨씬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야기는 그겁니다. 그 걸로는 안돼서 만약에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안식이 됐다면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안식할 때가 아직 남아 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 부분을 조금 읽어 보겠습니다. 안식할 때, 9절에 나온 것이 아직 남아있다. 안식은 아직 진행중이고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그게 필요한 것 같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안식의 깊이가 풍부해져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되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세상은 일종의 가나안이다. 나름으로 생활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도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이다. 이 말은 몇 가지 뜻이 있어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말을 머릿속에 꼭 넣어 두십시오. 제가 다른 때도 이야기 했지만 이 단어, 이름을 이거를 여러분들이 자꾸만 입으로 내 뱉어야 돼요. 종말론적이라는 말도 자꾸만 해보십시오. 그러면 개념이 더 우리들에게 풍부하게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리고 종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으니까 가능한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 더 좋고요. 이거는 간단하게 우리의 공부 모임의 규모에 맞도록 이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미래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네요. 현재는 아직은 아닌 거예요. 미래적이다. 여기서 그거를 어떤 방식으로 성취해 내려고 노력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미래적이기 때문에 그 때를 기다리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림절 신앙이 기초입니다. 기다림이에요. 미래에 있게 될 그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게 한 가지고요. 미래적이라고 하는 게 하나고요. 두 번째는 절대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경험한 것을 자꾸만 연장해서 조금씩 좋아지는 거, 이런 것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이 조금 배부르게 먹는 다거나 우리가 건강이 더 좋아진다거나 미래의 조건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이렇게 좋아지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절대적인 그러한 생명, 구원, 통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기다림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 정도로 보시고요.
10절, 11절, 강의안 좀 더 보겠습니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 자기의 일을 쉰다고 얘기한다. 거기 그대로 나와 있네요. 다시 한 번 성경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신 것 같이 그도 자기 일을 쉰다. 살아 있는 한 안식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을 쉰다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위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멈춘다고 하는 의미에요. 앞에서 이미 제가 말씀드린 거네요. 죽지 않으면 안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지요. 세례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와 더불어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할까요. 죽은 사람들은 신경 안 쓰잖아요. 다른 것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얘기할까, 다른 사람 말에 그렇게 부하뇌동하지 않잖아요. 죽은 사람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는 예수와 더불어서 죽음사람으로 세상을 사는 거죠.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눈만 뜨면 계속해서 신경 쓰고요. 눈 뜰 때만이 아니죠. 잘 때도 꿈속에서도 꿈도 사납고 말이죠. 계속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안식을 누린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다음, 마지막으로 12절에서 13절입니다. 위의 사실을 전하는 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 얘기를 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로 표현되어 있더군요. 헬라어 성경에 로고스 투 데우라고 해서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특성을 12절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어요. 살아있다. 활력이 있다. 예리하다.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그리고 생각을 판단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나오고 있어요. 이런 경험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우리는 예술가나 시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그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 영혼, 내 삶 전체가 화염에 불사르듯이 그 말씀에 휩싸이는 그런 경험들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우리가 원하는 바인데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어떤 유행가 가수, 일반 통속 노래 부르는 그분이, 다른 클래식 가수도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납니다. 단 하루도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벌써 음감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들 전문가거든요. 연습을 안 해도 언제나 완벽하게 노래를 부른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만 노래 연습을 안 해서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어떤 소리와 음의 세계가 자기하고 거리가 있어지게 되는 게 느끼게 되요.
우리 기독교인에게 그러한 게 좀 필요하죠. 그런데 매일 우리는 다른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듯이 절간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보다 못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매일 노래를 열심히 연습해야만 노래의 어떤 감각을 유지하는 가수들처럼 수도사들 이런 사람들은 계속 그 안에서 삽니다. 그래야지 영적인 내공이라고 하는 게 유지가 되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 살잖아요 현실적으로. 그게 좀 어렵습니다. 하는 만큼 해야죠. 제가 다른 때 말씀드렸듯이 재가 수도승처럼 가능한대로 최다한 우리가 그런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는 부족하니까 불쌍히 여겨주소서. 퀴리 엘레이송, 그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속성들을 쭉 열거 됐네요. 재밌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보시고요.
강의안 중간에 보겠습니다. 12절, 13절 중간, 그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종말 때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어요. 13절에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 우리의 마지막, 그 모든 것을 받으실 이에 눈앞에 만물이 다 드러난다. 그러한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에 가서 모든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한 뜻이죠. 그 말은 곧 지금 이 세상의 만물은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숨어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지금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그 때가 와야 실체로 서로를 알게 될 것이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죠 사실은요.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 누군지 모릅니다. 내가 어디 선생이다, 목사다, 어디 이름이 뭐다 이런 거가 우리 자신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우리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만물이, 실체를 드러낸다는 그런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체 이런 거 아는 거하고 우리의 실제 삶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여러분들 혹시 그러한 질문을 하실까 모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제가 드리기는 힘듭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대답을 드려야겠네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하냐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해주는 게 아닙니다. 근원적인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서 그 세계에 우리가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앎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거지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돈벌이 어떻게 할 거냐? 이웃하고 어떻게 하냐? 사이가 나쁜 부부사이는 어떻게 하냐? 등등.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이 말씀을 통해서 해결하는 건 아닌 거예요. 그런 건 여러분들이 신앙이 깊어지면 지혜롭게 잘 할 수 있는 거고 좀 잘 안되면 시행착오도 겪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내가 이렇게 인격적으로 이럴 수밖에 없나 그런 것에 대해서 너무 조바심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굉장히 고상한 사람이 되거나 심리적으로 어떤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 그것을 알고 앎으로써 그분의 통치, 그분의 하시는 사건 속에 우리가 휘말려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또 말씀을 배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고 안식의 약속이 어떻고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는 내려놓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하나님 말씀이 어떤 걸 가리키고 있는지 거기에 여러분들이 조금 더 매진하는 게 필요합니다.
14절에서 16절은 오늘 공부할 게 아닙니다. 이건 대제사장이라는 주제로 5장에 넘어가거든요.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들에게 전해준 우리들을 예상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의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 해 주신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안식의 약속이라고 하는 놀라운 가르침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안식의 세계에 이끌림을 받도록,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모저모로 혼란스러운 세상, 그리고 손에 확실하게 붙잡히지 않는 그러한 모든 세상살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푯대가 분명하여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옳은 신앙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5장
1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절,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절,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절,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절,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절,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절,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절,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절,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절,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네, 어떻습니까. 이 내용이 우리가 교회를 다녔으면 익숙한 거예요. 특별하게 다르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걸 교회의 어떤 경험을 접어두고 현대인들의 시각에서만 읽으면 이 이야기들은 참 먼 이야기가 돼요. 예수님이 제사장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속죄를 받고 한다는 이야기가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과연 얼마나 우리 실제 삶에서 실질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나 이건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본문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위해서 하나하나 짚으면서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목이 대제사장 예수라고 하는 게 붙은 5장을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근데 이 5장은 5장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듯이 4장 14절, 지난주에 마지막 단락으로 우리가 약간 제쳐놓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10장 31절까지 계속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이게 히브리서의 핵심이에요.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하면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은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틀린 게 아닙니다. 일단 그걸 여러분들 머릿속에 넣어 두시면 되겠어요. 각인 시켜놓으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설명한 신약성경, 이게 히브리서다 하시면 돼요.
이 제사장들은 물론 많이 있어요. 계급에 제사장들이 있는데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당연히 제사 업무를 담당하는 거죠. 그런데 모든 제사장이 그거를 하지 않습니다. 돌아가면서 하는데 해당 연도에 제사를 맡은 사람들이 대제사장이에요. 제사를 드리는 핵심이 뭘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를 드리는 것. 우리나라도 전래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여튼 제사라는 말은 똑같은 거예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감사하는 그러한 의미도 있고 또 핵심적으로는 속죄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하나의 의식으로써 제사를 드려요. 속죄도 있고 감사도 있고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그거를 핵심적으로 얘기하면 속죄행위입니다. 왜 죄를 용서받는데 제사를 드려야 되나 생각해 보십시오. 편안하게요.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다 해결할 수 있으면 굳이 제사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그냥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 그거를 신앙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그냥 말 자체만 생각하려고 하는 겁니다.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한테 잘못을 하면은 가서 화해할 수 있죠. 해결은 돼요 그거는. 빚 적어가지고 나중에 빚 갚으면 그건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빌렸다 안 갚았다든지 남에게 해를 끼쳤다든지 이런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이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혹은 반대로 잘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거꾸로 잘못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판단자체가 우리들에게 사실은, 조금은 할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러한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자칫하면 회피, 현실도피적일 수 있어요 무책임하게. 하나님께 제사 드려서 죄 용서 받았으면 다냐. 요즘 기독교인들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가리켜서 값싼 은혜,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다 죄 용서 받았으니까 자기의 어떤 사회적인 책임,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있어요. 그거는 도피적인 거죠. 신앙이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거든요.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제사 행위를 핑계로 해서 내가 뭐 여기서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라 죄의 문제를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서 대면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제사라고 하는 게요. 더 근원적인 차원이에요. 그걸 우리는 이제 학문적인 용어로 해서 존재론적 차원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그거를 이렇게 저렇게 다루어 가지고 모양을 내고 세련되게 살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그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 그거 자체가 존재론적인 어떤 깊이이기 때문에 우리 것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만 할 수 있다는 그 차원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그러한 차원이죠.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첫 번 패러그래프 맨 마지막 문장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걸 가능하게 한다. 뭘 가능하게 할까요? 죄의 실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게 실질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해요. 여전히 그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벗어난 어떠한 그 세계를 우리가 바라보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사는 거죠.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의 어떤 죄책감 그런 걸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걸 또 인식하고 있고 새롭게 일어나려는 용기도 서고요. 자기의 어떤, 죄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능력이잖아요. 뭐 현대인들, 지난 번 설교시간에도 잠깐 말씀드렸나, 그리고 여러분들도 많이 듣고 있듯이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병, 우울증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도 사실은 죄책감, 이런 데서 많이 옵니다. 그러한 죄의 실질적인 깊이들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데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의 빛을 이렇게 보는 사람은 그리고 그 빛에 가 있는 사람은 거기서부터 벗어나 있는 거죠 기본적으로.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의 죄의 현실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아, 그래서 그렇구나, 그럴 수밖에 없구나, 그래서 그거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삶을 이해하면서 같이 풀어나가려고 노력하는 그러한 삶의 자세가 가능합니다. 정말 우리가 제사를 바르게 드리고 예배를 바르게 드리면 그런 것이 풍요로워지는 거예요. 이건 분명합니다. 집사람 가끔 집에 돌아가면서 주일날이나 수요일 저녁에도 가끔 얘기하는데 복잡한 게 많이 있다가도 여기 와서 저의 성경공부를 들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얘기를 합니다. 맞을까요? 나중에 물어보세요. 내가 과장을 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예배를 드린 다음에, 약간 집중이 안 될 때도 있지만, 예배 전체를 통해서 거기에 참여하게 되니까 마음이 평화, 뭐 그렇게 되더라. 그건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습관적이라기보다도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의식적으로라도 어쩌면 반강제적으로라도 어떤 점에서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성경 공부와 예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 그러면 이 본문을 좀 보도록 합시다. 4장 14절에서 16절까지, 지난주에 읽고 접어 두었던 그 대목입니다. 여기서 이런 말로 시작하죠.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당연히 예수님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승천하신 이라고 얘기했어요. 이건 사도신경에도 나오는 이야기고요. 예수님을 승천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주기도문에 나오지는 않죠. 여기에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니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승천하신 대제사장이라고 지금 이렇게 그런 말로 시작하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10장까지 그런 말을 합니다. 승천,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하늘이 뭘까요? 물론 이제 저 하늘이죠. 근데 주석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히브리어로 하늘이라고 가리키는 단어는 없다고 해요. 궁창일까요 뭘까요? 제가 지금 정확하게 말씀드리기 힘든데 굉장히 미묘한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저 하늘 공간 어디에 하나님이 있다 그게 아니라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손에 닿을 수 없는 세계이거든요. 거기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살아가는 모습들을 알 수 있지만 하늘은 더 숨겨진 거예요. 생명이 숨겨진 곳으로 그들이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든 그러한 생명의 비밀이자 근원이다 그런 뜻으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아주 절대적인 세계인 하늘도 사실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고요. 그걸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네 그러한 이야기가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강의안 두 번째 패러그래프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의 연약함, 실수도 하고 흔들리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잘못도하고 죄를 얘기하겠죠.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우리 인간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그러한 시험을 받은 분이다. 공생애 시작할 즈음에 세 가지 시험도 있고요. 공생애 중에서도 많이 이런저런 어려움도 당하고요. 또 눈물도 흘리시고 외롭다고 하시고 다 시험이에요. 사람이 당하는 희로애락 같은 것들 다 예수님도 똑같이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다 아신다는 거죠. 그러나 15절 끝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똑같은 희로애락 그리고 시험을 당하셨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죄의 경향성이 있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신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간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죄가 없는 그러한 분, 신성. 그래서 이 부분에서도 예수님의 정체성의 두 성격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 정체성의 두 성격이란 인성과 신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베레 호모, 참된 사람. 베레 데우스, 참된 하나님. 이러한 고백문이 교부시대 때부터 성서 안에도 그러한 의미들이 있고요. 아주 핵심적인 예수님을 이해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그리스도론 할 때 예수님의 인간성과 신성의 하나 되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잖아요. 참된 인간, 참된 하나님. 두 정체성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됐다는 게 말로는 여러 번 들었는데 실제로 이해가 되나 그런 질문이에요. 그런 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이면 인간이고 신이면 신인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가 결합된다는 것은 더 모호하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모호하잖아요. 신이면 신이고 인간이면 인간이지 어떻게 두 개가 동시에 있는 어떤 분이 있을 수 있겠냐 하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런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예수님 계실 때 아 신이다, 인간이다 그 두 개가 보이는 게 아니에요. 이 표현들이 여러분들이 자칫 오해하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보여 가지고 제자들이 그걸 이해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한 많은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 거예요. 그럼 확실하지 않은 건데 제자들이 그렇게만 깨달았다는 말이냐 그것도 아닌 거예요. 하여튼 그런 물음까지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뭔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는 게 기독교 신앙을 공부하는데, 성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예수님처럼 두 성격, 아니면 두 정체성, 신성과 인성, 이 결합된 그러한 것은 이 세상에는 없어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하기 힘드니까, 뭘 감당하기 힘들어요? 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그 신앙을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한쪽으로 가는 거예요. 완전히 신이었다로 가든지, 완전히 인간이었다로 가든지 이런 흐름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당연히 있죠. 그래서 투쟁한 거예요. 신학적으로 논쟁한 겁니다. 그러니까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에 논쟁을 통해서 결정된 거예요. 그것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는 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딱 정해진 거 없어요. 이게 진리 논쟁이에요. 어떤 면에서요. 그럼 확실하지 않은 거가 신학자들의 논쟁에 의에서 그냥 됐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기독교의 교리라는 게 확실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거는 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문제라기보다도 어떤 진리의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오히려 그러한 투쟁, 진리 논쟁,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 게 기독교가 살아있는 진리라고 하는 증거인 거예요. 그러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들어내시고 그러한 자기를 들어내시는 것을 초기 기독교인과 이천년 기독교 역사가 잘 이해해서 어떤 사상적인 투쟁의 과정을 거쳐서 어떤 대답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오늘 우리 공부에 어쩌면 그거 하나만이라도 생각을 여러분들이 잘 하고 돌아간다면 오늘 먼 걸음 하셨는데 소기의 목표는 도달하지 않았을까. 다른 것도 필요합니다마는 하여튼 지금 말씀드리다 보니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거죠. 이건 눈에 보이는 거니까. 같이 뭐 먹고 자고 화도 내시고, 예수님 당연히 화내시지 않겠어요? 복음서에도 그런 부분들은 많이 있고. 심지어는 성전에 가서 거의 폭력적인 걸로 정화시키고 그런 일도 하시고.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저 친구는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 아니냐. 그 동생들도 알고 형제들도 안다. 그런 증언들이 복음서에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걸 보면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명백했던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참된 인간인데, 베레 호모인데 그런데도 참된 신이었다. 어떻게 이런 데까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신비롭죠. 어떻게 거기에 달했을까요. 그거는 오늘 우리가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핵심주제는 아닌 거예요. 다만 그게 기독교를 쭉 끌어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하는 결정적인 근거다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 아신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죄가 없는 신성의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속죄하는 대제사장으로서 정말 그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간다. 그래서 담대히 나간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성경 기자들은 단어 하나하나 의미 없이 쓴 게 없어요. 제가 만약에 이 히브리서 4장 16절 한 절만 갖고 설교를 한다면, 그 중에서도 담대히 라고 하는 단어 하나만 띄워서도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어떤 의미냐 차근차근 들어가면 할 말이 많이 있는 거죠. 그 중에서 한 대목만 말씀 드리면 이런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거와 좀 연결이 되네요. 우리 자신만 보면 절망하잖아요. 작은 일 가지고 이래저래 짜증이 나기도 하고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기도 싫고 그런 것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떤 새로운 결단으로 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게 잘 안되기도 하고. 불안한 거죠.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 자신만 보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담대하게, 거기에 주눅 드는 게 아니죠.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인류 구원의 사건 앞에 나간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토대입니다. 이걸 실질적으로 느끼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비슷한 찬송가도 많이 부르기도 합니다. 다 좋은 이야기에요. 다른 나에게 있는 한계들에 절망하지 않고 나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들의 잘난 점, 그런 것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또한 나의 잘났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자랑거리가 아니고 오직 은혜의 사건, 은혜의 보좌, 그런 것만이 나를 끌어가는 토대, 삶을 견인해 가는 핵심이 되는 것, 이게 기독교 신앙이죠.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정말 자유로워 지고 평화로워 지고 자비, 연민 이런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해방과 자유, 점점 풍요로워 지는 거죠. 네, 그래서 이 대제사장이라는 게 그러한(오늘 서론적으로만 말씀드린 건데)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깔고 있으니 히브리서 기자가 얼마나 감격스럽게 이 이야기를 썼겠어요. 시인과 같은, 영적인 시인이지 성서기자는 그렇습니다. 영적인 시인들의 마음으로 구구절절하게 어떤 풍요로운 세계를 담아내려고 하는 간절한 그리고 치열한 노력들이 여기에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제 5장으로 넘어가네요. 오늘 우리가 주로 공부할 본문이라고 생각하는 5장입니다. 핵심적인 건 다 말씀드린 건데 5장부터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에 나오는 두 인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론이고 다른 하나는 멜기세덱이에요. 이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출애굽기에 이 아론이 많이 등장합니다. 주로 모세가 주인공처럼 묘사되어 있기는 해요. 그런데 아론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자랐는지 그런 얘기는 없고요. 모세가 아주 어릴 때에 갈대상자에 던져져서 강물에 띄워질 때는 누나는 나와, 미리암이라고 누나는 나오는데 형은 안 나와요. 그냥 거기서 살았겠죠. 성서기자가 그런 데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네요. 고센이라고 하는 곳에, 다 유대인들은 소수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에 아론이 등장하는 거는 주로, 모세는 말을 좀 못했어요. 나는 말이 어눌하니까 뭐라고 사람들에게 얘기하냐, 그리고 바로하고 협상을 벌여야 하는데 그런 건 자신 없다 그렇게 하자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네 형이 있다 형이 말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해서 출애굽을 바로 앞에 가서 이야기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설득하고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애굽기에 모세하고 아론이 가서 백성들하고 정치 협성하는 것이 길게 나오지 않았으니까 간단했을 거라 생각을 하시겠죠.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서 아론이 큰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아론에 관계된 얘기 중에서 조금 핵심적인 것은, 모세는 정치적인 카리스마가 확보된 사람이라면 아론은 종교적인 카리스마가 확보된 사람으로서 형제에요.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온 대단한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에, 일 년에 한 번 있었어요. 평소에는 조금만 죄를 용서하지만 그 대속죄일에는 모든 민족의 죄를 용서받는 종교적 세레모니를 했는데 지성소에 일 년에 한 번 제사장이 들어가요. 그 역할을 아론이 한 겁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민족이 태동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은 더 오래전 이야기고요, 정말 민족적인 정체성을 가진 것은 모세로부터 본다면 그 때 대표적인 종교 업무를 한 사람이 아론. 그래서 지금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설명하는 이 과정에서 아론을 거론한 겁니다. 이 아론이 잠시 미리암하고 같이 모세를 약간 거부한 적이 있어요. 그 이야기는 제가 다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론이 크게 잘못한 것도 있는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그러한 일들에 자기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민중들이 원하니까 그러한 일들을 하기도 하고 그런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출애굽, 광야 생활 등에서 큰 역할을 한 그런 사람입니다.
또 한사람은 멜기세덱이에요. 창세기 14장 17절에서 24절 사이에 나옵니다. 아주 고대 유대인들에 구전에 의존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구전, 전승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다 전승이에요.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에요. 그렇다보니까 약간씩 단어가 틀리기도 하고 숫자가 착오가 있기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합니다. 멜기세덱 이야기는 아브라함 전승에 포함된 어떤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가 납치를 당한 것을 보고 쫓아가서 전쟁을 벌여요. 당시 아브라함이 상당한 재력도 있었고 사병이라고 하죠. 정식 나라의 군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용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돈을 주고 사서 만드는 군사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펼치는 사람이었어요. 전쟁을 해서 롯을 구해서 다시 돌아오잖아요. 그 때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중 나온 사람이 이 멜기세덱입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걸 강조하려고 하는 거죠. 제사장. 아주 고대인데 그가 바로 멜기세덱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증명, 그런 것들을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에 이야기는 여러분들 아실 거예요. 돌아 올 때 멜기세덱이 나와서 축복을 해 주지 않습니까.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줘요. 보통 십일조라고 이야기하죠. 가끔 십일조를 강조하는 강사 분들이 성서적 근거를 드는 게 그 멜기세덱의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아브라함에게 받은 거하고 말라기서에 나와 있는 그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전리품 십분의 일 그 이야기가 아니라 제사장 멜기세덱이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깊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그 클래스의 수준에 따라서 다릅니다. 우리는 일반 평신도로서 들어갈 수 있는 정도까지 가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한다면 전문적으로 연구를 해야 되겠죠. 제사 업무에 대한 것, 그리고 그 당시에 여러 제사의 종류들도 있고 이스라엘의 제사 업무의 기원 이런 것들을 샅샅이 다 연구하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제사 행위와 근동지방의 제사 행위 사이에는 어떤 비슷한 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는가, 그런 데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최소한 핵심을 놓치지 않는 정도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11절에서 14절입니다. 여긴 참 교훈적인 이야기가 나오네요.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편지, 신학적인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12절을 보십시오. 참 책망일까요, 권면일까요, 안타까움의 표현일까요. 참 재밌습니다. 너희가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믿은 세월이 얼마냐 하나님을 믿은 세월이 오래됐는데 그만한 정도 됐으면 남을 가르칠 정도가 됐는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해서, 배워야 될 위치에 서 있으니 참 안타깝다 이거죠. 초보도 모른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게 초보가 제일 중요한 거고요. 그리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다 보면 등한히 할 수 있고요. 여기서 초보는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한다, 속죄의 그 분이다, 그런 걸 바탕에 두고 하는 겁니다.
그런 건 이제 이런 거예요. 약간 설교조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교회생활 오래 하다보면 이런 거에 관심이 없게 돼요. 교회 일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성경에 대한 지식도 늘어나간 나는데 그 근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퀴즈 대회 해가지고 점수는 많이 딸 수는 있어요. 이런저런 기독교의 정보에 대해서는 많이 말할 수는 있는데 예수를 믿고 내가 회심한다고 하는 것, 예수와 일치된다고 하는 것, 예수와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세례의 기본 원리, 이런 것들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안다고 전제하는 거예요. 근데 그건 죽을 때까지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할 신앙의 화두, 초석이지 이 기초는 마스터한 사람이 없어요. 예수와 같이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말로는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얼마나 인식하고 경험하냐,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정말 그 기초에 대해서 깊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거 안하고 너희들 뭐하고 있냐, 안타깝다 그 얘기죠. 그러면서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네요.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됐다. 달콤한 말만 들으려고 하는 거죠.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아주 따끔한 경고가 되는 그런 말씀이에요. 신앙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도 그러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근본에 대해서 탄탄해 지는 사람이 있고 허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산은 늘어나고 명예가 있어도 기초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 수도하는 사람들은 기초, 근본 이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도 그렇고 삶의 문제도 그렇고 그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13절과 14절에서 그걸 젖 먹는 자, 단단한 음식이라는 것을 나누어서 설명을 했어요. 13절은 이렇습니다. 어린아이에요. 젖을 먹는 자에 불과해요. 젖을 먹는 어린아이. 그런 사람이 하나 있고 14절에서는 장성한 사람이 있는데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써 분별한다. 그러니까 해석, 판단, 분석, 평가할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이죠. 그런 게 점점 풍요로워 지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양쪽에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과 장성한 자의 구분하는 기준은 본문에 나와 있죠. 의에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혹은 선악을 분별하는 것, 선악도 의의 문제니까요. 그런 것을 깊이 깨달을 줄 아냐 못 하냐 이게 어린아이와 장성한자를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여기서 의의 말씀, 선악을 분별하는 것 이렇게 하니까, 뭐 이미 아시겠죠. 행단보도에서 빨간불에 건너가면 안돼요.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르치듯이 그런 차원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야 뭐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아는 거니까. 도둑질하면 안 된다 이런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장성한 사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서 의, 선악, 이런 걸 얘기하는 핵심은 당연히 전체 주제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바르게 알아서 무엇이 정말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사실은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풍요로워 지면 비록 완벽하게 살아가지 못할지라도 흔들리고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바른 쪽으로 갈 수 있는 거죠. 오늘 여기까지 우리가 전체를 다 본겁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전체 주제가 대제사장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우리의 죄, 우리의 반 생명,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어떤 세력, 여기서부터 해방시켜주는 유일하신 대제사장이다 그 이야기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고요 또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2015년 2월 초 우리가 또 세월이 가면 이 시간과 순간을 까먹겠지만 그러나 긴 시간 속에서 이 말씀을 같이 이렇게 믿음의 동반자로써 공부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천년 전 이 히브리서기자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는 그저 들은 풍월이 아니라 진리로써 생명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받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 풍요로워지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6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절,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절,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절,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절,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절,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절,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절,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절,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절,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여기 단어 하나만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20절에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나와 있죠. 지난번 5장에서도 반차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사실은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에요. 이 반차가 차례, 순서이긴 하되 조금 더 엄격한 질서를 가진 순서라고 할 수 있어요. 영어로 오더(order)라고 합니다. 어떤 체계가 잡힌 질서, 선한 질서, 이런 걸 얘기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차례차례 직임을 자기가 수행하잖아요. 그 순서, 이런 걸 갖다가 반차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6장은 전체 제목을 신앙의 성장이라고 잡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5장에서도 보면 어린 아이 신앙이 있고 좀 장성한 사람의 신앙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믿음을 큰 믿음이다 작은 믿음이다 우리가 얘기를 하긴 하지만 그 말하기에 따라서 약간 관점이 다른 겁니다. 뭐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고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게 다 똑같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근원적으로 보면 이 믿음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은사라고 한다면 큰 은사가 있고 작은 은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 똑같은 겁니다. 목사직, 이것도 은사고요. 교회 봉사하는 것들, 주일학교 교사들 등등을 은사라고 얘기합니다. 카리스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아시겠지만 카리스마라고 하는 단어가 일반적인 세속에서는 저 사람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어 하면 어떤 강한 지도력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원래 카리스마라고 하는 단어가 그 뜻은 아닙니다. 선물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카리스마가 있어 얘기하는 것은 틀린 말은 또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하니까 힘이 느껴지는 거죠.
이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걸 크다 작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라고 하는 카리스마나 성가대원이라고 하는 카리스마나 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기능의 차이, 어떤 일을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런 거예요. 그러나 이 믿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성장하는 믿음이 있고 정체되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성장하는 건 큰 믿음이라고 보통 얘기 할 수 있고 정체되는 건 작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 자체는 완전하게 표현하기는 힘들어요.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보겠냐 그런 말씀이 있는 것처럼 그 믿음에 정말 들어가게 되면 비록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존재론적인 힘이 있어서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하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 이것은 약간 다른 차원입니다. 그게 인제 뭔가 하는 것을 6장에서 천천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6장을 전체적으로 세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도 보면 동그라미를 쳐가지고 단락이 구분되어 있어요. 그것에 따라서 제가 구분을 했습니다. 1절에서 8절까지가 하나고 두 번째는 9절에서 12절까지이고요. 세 번째는 13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각각 소제목을 붙였습니다마는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문맥에서 중요하다 싶은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소제목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1절에서 8절까지 소제목이 두 번째 회개 위험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거는 6절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일단 그거 먼저 보십시오. 6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회개 못한다. 두 번째 회개는 불가능하다 그런 뜻이죠. 이 말 자체로 보면요. 그래서 아주 옛날 교부시대 때에는 이러한 말에 근거해서 가능한대로 세례를 나중에 받으려고 했습니다. 세례 받은 다음에 또 잘못하면 용서받지 못한다. 이거 회개가 불가능하다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틴, 콘스탄티누스, 기독교를 공인한 그 황제가 일을 많이 했거든요. 4세기 초반, 중반에 역할을 한 사람인데 니케아 회의도 소집하고 굉장히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거의 죽을 때 이르러서 세례를 받았어요. 논리가 그겁니다. 자기가 황제로 살다보니까 잘못도 많이 하겠고 전쟁도 일으키고 해야 되니까 그런 걸 염두에 둬서 그런지 회개한 다음에 또 잘못하면 큰일 난다 생각을 해갖고 거의 죽음에 이르러가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6절에서 말하는 것은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실수를 안 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런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콘스탄티누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약간 못 미친 거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오해한 거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실수를 했다 안 했다 그 문제가 아니라 아예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미 마음이 떠나면 돌이키려고 해봐야 되지 않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회심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걸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거죠. 그 이야기입니다. 1절에서 8절까지의 핵심 단어를 두 번째 회개의 위험성이라고 정해서 어떤 뜻인가를 먼저 말씀드렸어요. 1절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합시다. 1절은 앞에 써 있는 5장 이어지는 거예요. 이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렇게 나와 있어요. 뭘 버리라고 이야기하죠. 버리라, 떠나라 하는 겁니다. 그 도라고 하는 단어를 각주에 보니까 말씀이라고 나와 있죠.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진리, 그런 것의 초보, 기초죠, 출발점이죠. 이걸 버려라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사실 이게 중요한 거거든요. 초보를 버릴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초보를 붙들어야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의 처음 시작이 중요하니까요. 기초가 중요하니까요. 여기서는 초보가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머물러서 성장이 없는 거. 만날 젖을 먹는 어린아이처럼 기초에만 머물러 있어 가지고 더 이상 성장이 없는 그러한 건 문제가 있다 그걸 말하면서 거기서 좀 떠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셨을 겁니다.
2절에, 1절 다시요. 초보를 버리고 그 다음에 설명이 나오죠. 죽은 행실과 회개와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심판에 대한 교훈의 터를, 이게 정말 중요한 거잖아요. 다시 닦지 말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시 반복됩니다마는 중요하되 거기서만 머물러 있지 말고 더 완전한 데로 나가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나가야된다 얘기하고 있어요. 그 완전한 데가 뭔가 그건 설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게 실질적으로 들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초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거를 반복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었던 어떤 경험, 그거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약간 식어지게 되면 예수 영접 회복해라 그래서 거기에 머물러 있죠. 제가 자주 예로 드는 것처럼 구구단을 자꾸만 반복해서 외우는 거예요. 수학은 잘 모르는 거예요. 구구단이 필요 없는 건 아니되 구구단을 기초로 해서 점점 수의 오묘한 세계로 들어가야 그 쪽으로 성숙한 수학을 아닌 게 아니겠어요. 이러한 준비, 훈련들이 우리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다툼, 갈등, 교단 분열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많은 경우에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기초만 가지고 이걸 어떻게 써먹나, 좀 편하게 얘기해서요. 예수 믿는 걸로 어떻게 세상에서 복을 받는 자, 그럴듯한 기독교인이 되나 이런 거만 생각하지 더 나가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점점 완전한 데로 나가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거기에 다시 터를 닦지 말고 자꾸만 돌아가지 말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나가야 되는데 못나가는 그런 상태로 있지 말고 2절 후반절에 보면 안전한 데로 나가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점점 가야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신앙생활하면서 내 신앙이 진보하고 있다, 완전한 데로 점점 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완전한 거를 성취는 못해요. 그러나 그 불빛이 점점 환하게 비추가 있다는 그러한 느낌, 인식, 깨달음, 경험들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그건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자면 부활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낱말 뜻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니면 내가 죽었다 산다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해도 세례는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입으로 자기가 고백하게 되면. 그런데 거기서 더 완전한 데로 나가게 되면 그 생명의 신비들,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과 예수의 재림과 그러한 하나님과 일치된 생명의 세계가 더 가까이 경험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점점 우리에게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면 죽음이라는 것도 작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어디로 통과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적인 자기도취, 자기착각이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것에 대한 깨우침, 경험 죽음으로부터 자유, 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데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과정이 있는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수행이라고 해요. 이건 불교식으로 수행이 아닌 거예요. 불교는 자기가 막 갈고 닦는 거잖아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초보의 단계에서 점점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어떤 과정, 길, 이러한 신앙의 성격을 가리켜서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일단 관심도 없고요. 이게 참 딜레마인데요. 제가 여태까지 평생 동안 많은 사람들,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고. 제가 다른 사람보다 일찍 목사 안수를 받고 군목 갔다 오고 해서 부목사라든지 이런 경험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잠깐잠깐 있었는데 주로 단독 목회를 젊었을 때부터 해서요. 그래도 목사 생활을 하니까 지방이나 총회에 여러 사람들을 알고요. 장로님이나 목사들 많이 알기 때문에 그 분들의 관심이 어디 있나에 대해 대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단 관심이 없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서, 성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같은 목사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목사님들도 이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성경, 신학, 영성, 이런 것들이 방편이 돼버려요. 방편이 돼가지고 그걸 통해서 어떻게 교회를 어떻게 키우냐. 그런 식의 관심들이 제일 많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종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부활에 대해서도 사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거는 구구단처럼 딱 주어진 거라서 그거를 이용해서 내가 구구단을 멋있게 화려하게 잘 외운다. 그런 일종의 쇼처럼 보여주기 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좀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교회 안에 사도신경과 교회 예배가 살아 있으니까 그런 허물이 있어도 나갈 수 있긴 있는데 그런 걸 잘 알고 신앙 생활하는 거 하고 아닌 거하고 차이가 좀 많이 있는 거죠. 그런 점을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생각을 해서 과연 내가 신앙의 초보가 아니라 완전한 데로 나가고 있는 그러한 수행으로써 살고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그 다음 6절, 이건 아까 얘기한 거예요. 이게 타락한 자가 새롭게 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얘기예요. 그건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돌아가기 힘든 거는 내가 실수를 한 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건 누구나 하는 거고요. 세례 받아도 그런데 이제 마음이 완전히 강퍅하게 된 거,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난 버린 거 그런 상태에서는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한 위험성.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과 8절은 창조의 문제를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실을 맺도록 다 만들어 놓으셨는데 맺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 엉겅퀴가 돼서 버림을 받는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8절 마지막에 보면 불 태워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의 훈련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그 얘기를 한 겁니다. 다음 9절에서 12절입니다. 여러분 강의안 요약본 잠깐 보실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신앙의 초보와 성숙과 두 번째 회개의 불가능성 등등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편지, 혹은 신학 논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정말 신앙의 근본에 가게 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한 자세를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신앙의 성장도 있고 신앙의 능력, 그런 것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데요. 그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대게 형식에 떨어지거나 또는 자기 열광에 빠지는 거예요. 신앙하고 자기 열광하고는 정말 다른 겁니다. 내가 믿음 있는 것 같아하면서 그 쪽으로 열심을 내는 것. 그게 아니라 정말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부활과 종말의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관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 분의 약속, 가르침, 여기에 정말 마음이 가야 신앙이 좀 성숙해질 수가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다 성숙하게 신앙생활하기 힘들어요. 다는 불가능합니다. 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도 있어야 되고요. 그걸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신앙으로 가는 사람들이 필요하고요. 우리들이 그런 쪽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뭐냐, 참된 신앙의 근원이 뭐냐, 이거를 11절과 12절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 가지예요. 소망, 믿음, 오래 참음. 11절과 12절이에요. 신앙의 성격을 얘기하는 거예요. 혹은 본질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소망과 믿음과 오래 참음. 이 세 단어만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돌아가셔도 공부에 참가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보통 우리가 많이 소망, 희망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간다. 그러한 희망, 그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거는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하는 한 부분인 거예요. 소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어떤 속사정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 강의 요약문 좀 보십시오. 오늘 제가 글을 잘 설명해야 될 텐데 일단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소망, 믿음, 오래 참음 이게 중요하다고 얘기하는데요. 이런 신앙적인 태도는, 그렇잖아요. 소망, 믿음, 오래 참음이 우리의 태도잖아요. 이런 것들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약속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이라는 말을 잘 생각하세요. 약속과 희망, 믿음, 오래 참음이 다 연결되는 이야기에요. 약속은 어때요 이미 받았어요? 아직 못 받았어요? 못 받은 거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직 우리가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해서 어떤 걸 이루었다. 그런 걸 받은 거다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약속의 부스러기들입니다. 그건 결정적으로 우리의 약속은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뭘까요 쉽게 생각해서. 구원이죠. 하나님의 나라 거기에 참여하는 것, 부활 생명을 얻는 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부활을 이루었나요? 아니 잖아요. 그게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제가 건강을 달라고 기도해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건강하게 산다거나 10년 더 산다거나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그건 그래봤자 조금 더 머물다 가거나 먼저 가거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걸 여러분들이 다 아실 겁니다.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구원이죠. 구원을 다른 말로 부활이라고 얘기하고 다른 말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거를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절대적인 것이라서 한, 두 단어로 딱 끝낼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 신약성서입니다. 복음서는 복음서대로 서신은 서신대로 요한계시록은 요한계시록대로 말이죠. 본문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데 이미 우리 손 안에 들어 온 것이나 그리고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상관없어요. 막 노력해서 뭘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생각한다면 참 하나님의 약속이 유치해지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증적으로 어떤 것을 준 게 아니다. 여기서 실증적이라고 하는 말은 물건처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을 얘기합니다. 이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약속인 거예요. 지금 끝난 문제가 아니야. 앞으로 되어 질 일. 그러니까 기대가 되죠. 여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 잘 먹고 잘 산다 그걸 확실하게 보장해 주었다. 이걸로 머문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거는 세상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거예요. 돈 많이 벌면 어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약속입니다. 정말 잘 생각하셔야 돼요. 아직 성취된 거 아니에요. 그러나 정말 신실한 분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운명을 걸고 사는 거죠.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해요. 왜냐하면 확실하게 손에 든 게 아니라 약속에 근거한 거니까 말이죠. 약속한 분을 우리가 신뢰할 만하니까 따라가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헛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사도신경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얘기하잖아요. 그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으며 그렇게 나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믿을 만 한 분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그 분으로부터 온 거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사도신경이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을 만한 분인지 좀 알아야 되잖아요. 알지 않고도 믿습니다하면 되긴 돼요. 사람은 신기해서 자기마저도 속입니다. 자기마저도 기만하고 그래서 실제로는 믿지 못해 신뢰가 가지 않으면서도 열광적으로 매달리다 보면 정말 자기가 믿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잘못된 신앙인 거죠. 그렇게 가능한 거예요. 사이비 이단들의 믿음이 좋은 건 아실 거예요.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이 왜 믿을 만한 분인지를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하고 신학만이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단어죠. 약속입니다. 구원의 약속,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을 기독교인들은 상속 받은 겁니다. 12절에 보면 기업으로 받는 자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게 상속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그렇게 된 사람들,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재밌는 표현이에요. 너희들은 상속받은 자다 이렇게만 말하지 않고요. 상속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인 거예요. 그냥 혼자서 날고 기고 해갖고 번쩍해서 기도 많이 해서, 뭘 받아가지고 깨닫는 게 아닙니다. 앞에 간 사람을 따라가는 거예요. 본받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도들 속사도, 교부들, 지난 몇 천 년 동안 경험한 사람들이 앞에 가고 있잖아요. 우리도 그 길을 가야죠. 잘못 가게 되면 또 삐뚤게 가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려면 그렇게 기업을 받은 앞의 선배들이 어떤 신앙이었냐는 것을 알아야죠. 배워야죠.
이런 것들이 바로, 성서와 신학이, 역사입니다. 우리가 꾸준하게 배우는 게 최선입니다. 여러분, 공부 이런 것들이 당장 신앙이 불 같이 뜨거워지는 경험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래도 문득문득 여러분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어떤 단어라든지 어떤 개념 설명 그런 걸 통해서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경험들을 조금씩 하게 될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확 더 열리게 됩니다. 그런 단계까지 가는 건데 여기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에 빌리면 완전한 데까지 나가는 거죠. 갑자기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준비 없이는 안 됩니다. 만날 젖만 마시고 달콤한 데만 머물러 있다가는 성장하지 못하죠. 히브리서 기자가 예로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 딱딱해도 약간 써도 음식을 자기가 깨물어 먹고 신학도 공부하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뭐냐, 존재한다는 게 뭐냐, 시간이 뭐냐, 그런 걸 예를 들어서.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학습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지금까지 수 천 년 동안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알 수 있고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건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왔다 가거든요. 돈이 있으면 좋은 집에 산다거나 건강하면 조금 건강하게 산다거나 그런 거예요. 그런 것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받는다고 하는 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보다 우리들에게 더 시급한 게,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게 뭘까요.
다음 마지막 13절에서 20절입니다.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 애틋한 마음으로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권고를, 충고를 했어요.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구약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약속 개념, 이게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에요. 기본적인 걸 잠깐 말씀드리면요. 성서의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혼자 고고하게 있어서 밑에 있는 인간들을 자기 마음대로 체스 놀이하듯이 여기 놨다, 저기 놨다하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람과 약속하는 분으로 성서가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약속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대표적인 출발이 아브라함입니다. 여기 약속이라고 하는데 단어가 두 가지가 나와요. 약속과 맹세. 그래서 이 단락의 소제목을 그렇게 잡았습니다. 두 가지가 비슷한 거예요. 비슷한데 좀 차이가 있죠. 약속에 근거해서 맹세하는 거예요. 이건 내가 변하지 않고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확인, 이게 맹세예요.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시고 또 맹세하셨다. 약속은 서로 관계에서 한 건데요. 맹세는 어떤 근원적인 걸 두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표현하면 되겠네요. 국기에 대한 맹세, 이런 거 있죠. 우리나라 예식을 공공기관에서 뭐할 때 말이죠. 그건 국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거예요. 약속은 아니죠. 약속을 어떤 권위에 근거해서 확인하는 걸 가리켜서 맹세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요. 맹세할 때는 더 높은 권위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더 권위가 있는 존재가 없기에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빌려서 맹세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약속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에 근거해서 맹세했다 그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약속과 맹세 두 가지가 어떻게 차이 있냐, 그건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고요. 어쨌든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16절이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고 확증이니라. 그러니까 맹세를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논란이 잠재워 진다는 거죠. 나는 국기에 이름에 나라에 맹세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 앞에서는 애국적이냐, 아니냐, 그런 논란이 필요 없이 해결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핵심적인 표현은 아닌데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지금 여기 약속과 맹세가 반복해서 나왔어요. 여기에 근거해서 여러분 강의 요약문 넷째 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우리의 소망이 확실해진다. 하나님과의 약속,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 그리고 맹세에서 우리의 소망이 확실해집니다. 이거는 조금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거기까지만 접어두고 넘어가지요. 19절에서 소망을 가리켜서, 여기 지금 소망이 중요한 거였어요. 앞에서 소망의 풍성함, 믿음,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이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건데 지금 다시 13절부터 그 약속과 맹세를 이야기 하면서 결국은 그게 확실해야 우리가 소망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얘기한 거예요. 19절에서 이 소망을 재밌게 표현 했습니다. 영혼의 닻, 참 표현이 문학적으로 멋집니다. 영혼은 우리 사람의 가장 심층에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다 밝혀지지가 않았어요. 우리가 아직 미쳐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서와 성서에 근거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신학의 설명에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에요. 그게 살아 있어야 정말 사람이 사는 거죠.
우리를 정말 살아 있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 영혼인데 영혼의 닻이다, 닻은 배에서 쓰는 건데요. 닻을 내려야 배가 안정적이잖아요. 우리 영혼이 안정적으로 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근데 이 소망은 약속한 맹세에 근거에서 가능한 거예요. 그 약속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약속이 신실하다는 걸 알고 그 약속에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사는 거죠. 그렇게 된 사람은 그 영혼이, 생명의 근원이, 닻을 내린 배와 같은.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안정이 될 수가 없어요. 그 어떤 것으로 안 됩니다.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여기서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그 휘장을 가리킵니다. 성전에는 여러 마당도 있고 건물도 몇 개 있는데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어요. 가장 거룩한 장소라서 거기는 유대 대제사장이 매번 안식일마다 들어가지 못해요. 일 년에 딱 한 번 들어갑니다. 휘장을 열고 들어가는 거예요. 가장 거룩한 곳, 그건 생명의 비밀을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닻을 내린 배와 같아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휘장 안에 들어간다, 생명에 중심으로 들어간다. 멋진 표현입니다.
저도 이렇게 히브리서를 여러분들과 공부하지 않으면 구석구석 낱낱이 확인할 수 없었는데 공부가 여러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표현들은 제가 잘 알고 있으면 다른 글을 쓰거나 설교할 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도 계속 억지로라도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수요일만 하지 말고 매일 모일까요? 무슨 뜻 인가요 웃음이.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입니다마는 제 꿈, 비슷한 게 수도원 원장 되는 겁니다. 그럼 이제 거기서 매일 성경 가르치고 노동할 수 있으니까, 근데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런 말씀들을 우리가 매일 같이 읽고 보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닻을 내린 것처럼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러분 강의 요약문 마지막 문장만 보겠습니다. 휘장 안은 생명의 비밀이다. 이런 사건이 예수를 통해서 일어났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공부가 좀 많이 된 히브리서 6장 공부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이렇게 또 순서에 따라서 히브리서 6장을 공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도의 초보, 중요하되, 근본이되, 거기만 머물러 있지 말고 완전한 데까지 나가라고 하는, 그 지성소의 비밀까지 나가라고 하는 간절한 호소를 듣습니다. 저희들에게 히브리서 기자의 간절한 호소가 우리 신앙에 자극, 공명, 그리고 동기가 되도록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그 소망을 안고 영혼의 닻을 내린 것처럼 한 평생을 살아가게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7장
1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절,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절,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절,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절,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절,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절,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11절,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절,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절,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절,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절,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절,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절,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0절,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절,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절,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절,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절,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느니라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 번 읽었는데요. 전체적인 내용이 들어오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한 번 읽고 이거를 탁 파악했으면 정말 위대한 학자입니다. 신약학 박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여기에 많은 단어들이 나와요. 우리가 익숙하지 않는 단어들과 구약에 있는 여러 가지가 나오고요. 우리가 잘 쓰지 않는 관용어가 나오기도 하고요. 굉장히 복잡하게 여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계급은 12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에서 나옵니다. 레위 지파가 다 제사장이 되는 건 아니고요 거기서 그 사람들이 성전 일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 그들이 가나안땅을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정복할 때 12지파가 땅을 배분 받아요. 그러니까 유다는 어디, 누구는 어디 등등해서 12지파가 가나안 지역을 배분 받습니다. 그리고 그쪽을 지배를 하기위해 자기들이 공격을 해서 땅을 차지해야 됩니다. 그 때에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배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전통이 세워졌어요. 그래서 나머지 지파들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십분의 일씩 레위지파에게 주고 그들이 그걸 기본으로 해서 먹고 살면서 성전업무 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제사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아까 맹세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요. 레위지파이기 때문에 혈통을 통해서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제사장이 되겠다고 맹세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레위지파에 속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되는데 예수님의 경우는 하나님이 맹세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 더 확실하다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이 왜 등장하냐면 레위지파는, 이 논리를 조금 생각을 하셔야 돼요. 어떻게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게 비약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 사람의 설명이 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확실성을 말 하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근데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내려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럼 여기에 전통이 있어야 되는데 이 레위지파의 우두머리는 어디에요. 레위지파는 야곱에게서 나온 거잖아요. 야곱에게 올라가고 야곱 위로 올라가게 되면, 이삭은 좀 생략됩니다.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렇게 네 족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파(派)에요. 조금 더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사실은 할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내려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12지파 이야기들이 따로따로 이스라엘 역사에 쭉 내려왔어요. 그게 일정한 시점에 편집한 어떤 성서 기자가 할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정리를 다시 한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 아들, 이렇게 알고 있어요. 그걸 갖다가 제가 신학적인 그런 걸 말씀드렸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하여튼 성서가 얘기하는 걸 따라가게 되면 이 레위지파도 결국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인데 이삭은 좀 빠져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들어가게 되는데 그래도 참고적으로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게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아니라 각각의 따로따로 있었던 전승이라는 걸 어떻게 아냐. 그건 학자들이 잘 연구하면 드러나게 되는 거고요. 그중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똑같은 일들이 이삭에게도 일어나요.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비슷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이거는 따로따로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 사람하고 붙어서 쭉 전해서 내려오다가, 보통 우리도 구전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구비문학이라고 해서 민요 이런 것들은 다 옛날에 입을 전해서 내려온 거예요. 이스라엘에도 성경이 있기 전에는 다 구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계급의 레위가 결국은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에게 가요. 아브라함에게 가는 겁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10절 후반절에 보면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섰음이라. 아브라함의 허리라고 하는 것은 생산 능력, 남녀 관계에서 하는 그런, 배 안에 이미 씨앗이 들어있다 그런 뜻으로 사용 한 겁니다.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십분의 일,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이죠. 깨끗한 돈은 아닙니다.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하러 갔다가 구출만 해온 게 아니라 완전히 상대방을 초전박살 내버리고 많은 물건을 빼앗아 온 거예요. 그 중에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지파의 근원으로 올라가게 되면 아브라함인데 그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쳤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그 사람, 멜기세덱입니다. 구약에 보면 멜기세덱은 제사장으로 나오고 있어요. 이 멜기세덱이 이스라엘 종교의 제사장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 그 부분을 잠깐 볼까요. 창세기 14장 멜기세덱에 대한 창세기 이야기 14장 17절에서 20절입니다. 그 14장에 소제목이 이렇게 붙어있죠.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다. 롯이 사로잡혔다고 하는 걸 쫓아가서 구출 했어요. 그 당시에 이미 굉장히 개인적인 사병이라고 하죠.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부호가 된 거예요. 전쟁을 해서 이겼고요. 그 다음에 17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 전이 아브람이었어요. 아브람이나 아브라함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소돔왕이면 소돔과 고모라, 별로 좋은 도시는 아닌데. 그렇게 됐고 그 다음 18절은 살렘왕은 샬롬, 이러한 뜻도 같이 있는 겁니다. 평화 이런 거죠.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살렘이에요. 왕 멜기세덱이,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이, 예루살렘은 천연 요새라서요.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이 정복하지 못한 땅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들어갔지만 성공하지 못했고요. 다윗시대에 이르러서 겨우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 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하기에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약간 그런 쪽으로 온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제사장 계급이 생긴 것은 훨씬 후이니까요.
18절이요.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고요.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정리가 됐고 그 다음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축복했다고 그래요. 20절에는 아브람이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의 제사장 지파인 레위보다도 이 멜기세덱의 전통이 더 우월하다. 그걸 강조하는 거죠. 그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 나왔잖아요. 멜기세덱의, 여기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그러한 서열을 따라서 예수가 정말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걸 이제 얘기하려고 하는 거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죠. 내용을 좀 천천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3절, 여기에는 멜기세덱에 대한 성서적 근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로 본 거예요. 창세기 14장 17절에서 20절 사이에 나옵니다. 여기서 내용을 금방 바로 설명한 거예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3절에 히브리서 7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준 멜기세덱에 대해서 살렘의 왕이고 평강의 왕이라고 하면서 3절에 보면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이 나와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이건 멜기세덱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것도 조금 비약이 약간 있는 듯 보입니다. 여기 멜기세덱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을까요. 성서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버지 없고 어머니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이유가 있겠죠.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멜기세덱도 역시 그랬다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죠.
실질적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다 있죠. 예수님에게도 사실 요셉과 마리아가 있는 것처럼. 이런 것은 사람에게 아버지, 어머니 없이 태어날 수 있느냐 그렇게 따지고 들면 곤란하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의 이야기 중에서 십일조가 연관돼서 나옵니다. 4절에서 10절까지예요. 그래서 간혹 교회에서 하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말할 때 이 부분도 나오긴 합니다. 말라기서가 제일 많이 나오지만 이 부분도 나와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했다는 겁니다. 십분의 일 이거는 고대 유대인들의 12지파 중에서 레위지파가 땅도 받지 못했으니까 먹고 살기위한 전통도 있고요. 여기 멜기세덱 이야기하고 연관해서 십분의 일이 나오는 걸보니 고대인들에게는 통상적인 관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공부 요약안 두 번째 해당하는 것 잠시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십일조를 근거해서 설명한다. 레위지파들도 주변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아요? 안 받아요? 받지요. 그러나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걸보면 이미 레위지파의 씨앗이라고 할까 그게 이미 아브라함에게 있는 거니까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하다 그러한 논리입니다.
강의안을 좀 보십시오. 레위지파는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열두 아들에 기원한다. 레위지파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에서 제외 되었고 아까 설명한 겁니다. 다른 지파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아서 살게 됐다.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멜기세덱이 이스라엘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보다 우월하다 그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을 하는 겁니다. 아주 히브리서 기자의 독특한 시각이에요. 신학적인 시각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바울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잘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주로 로마서에서 인용하는 구약 인물은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거론하는데 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십일조를 준 것에 의해서 멜기세덱을 더 우위에 놓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1절에서 14절 소제목으로 제가 옛 제사장직의 붕괴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개를 대비시키고 있어요.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레위지파의 제사장 계급하고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110편 4절에 근거해서 멜기세덱을 거기에 대립하는 그러한 제사장 계급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계급은 조금 부족한 거죠. 조금이 아니라 이거는 한계가 있는 거죠. 멜기세덱에 비해서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한계가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11절에서 14절 사이에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옛 제사장직의 한계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강의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 지파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어떤 멜기세덱의 질서에 따라서 대제사장이 됐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제 이 제사장의 직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완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장의 그것을 뒤집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율법도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모세가 제사장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유다지파, 그러니까 모세가 얘기했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에 의하면 레위지파가 제사장이 돼야하는 거고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모세는 제사장 문제와 연관해서 유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야곱의 몇 째 아들이죠? 세 번째, 네 번째? 그 정도 되죠. 그런데 유다지파는 다윗 가문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될 수 없었어요. 모세가 한 번도 제사장과 연관해서 유다지파를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제 멜기세덱의 더 우월한 제사장 직분에 근거해서 볼 때 이러한 율법도 새롭게 해석해야 된다. 레위지파에서 나온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율법의 어떤 관점, 흐름, 이런 것들이 새롭게 해석돼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해석을 누가합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아니고 어느 지파가 해야 돼요? 유다지파가 되는 거죠. 이게 굉장히 아슬아슬한 거예요. 구약에 의하면 당연히 레위지파여야 되는데 그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에서 제사장, 참된 제사장이 나와야되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 얘기죠. 예수님이 유다지파라고 하는 거 맞나요? 맞지요? 성경에 여러 번 나와 있죠. 복음서에도 나와 있고 다윗 후손이라고 하니까 그게 다 같은 지파니까 분명한 것 같습니다. 12지파 중에서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레위지파여야 되는데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새로운 해석에 의하면 유다지파여야 된다. 그 근거의 출발을 어디서 잡아요? 멜기세덱이 참된 제사장이고 레위지파의 제사장들보다 먼저 있었고 레위지파 제사장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오히려 축복을 받고 축복을 할 때는 윗사람이 밑에 사람에게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멜기세덱이 영적으로 훨씬 우월한 사람이었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 이러한 논리입니다.
대충 동의가 되나요? 아니면 조금 비약이 있어 보이나요. 내가 보기엔 그런 시각이 가능하다 생각이 됩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씀을 한마디만 드리겠습니다. 성서는 해석의 문제인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하는 거잖아요. 구약에 있는 레위지파, 모세 율법,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런 사건들을 해석하는 거죠. 이 사람의 독특한 해석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고 게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죠. 그 다음, 15절에서 19절입니다. 율법의 한계에요. 요약문 잠깐 보겠습니다. 본문은 예수가 멜기세덱의 전통에서 오신 분이므로 율법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율법의 전통을 따르면 레위지파여야 되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전통에 있기 때문에 율법이 한계가 있는 거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한계다. 15절 성경보세요.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 보니 더욱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죠. 16절에 그는 육신에 속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이거는 레위지파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율법을 따르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랐다. 이거는 부활을 가리킵니다. 불멸의 생명의 능력. 거기에 따라서 그분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다. 여기서 계속해서 율법의 한계, 그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이제 시편을 인용해서 하는 이야기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멜기세덱을 인용하는 건 딱 두 개, 아까 말한 창세기 14장에 있는 거하고 여기 시편 이 두 개 약간 좀 성서 근거로 보면 빈약하죠. 그래도 그것에 근거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제사장이라고 하는 확신 가운데서 그렇다면 레위지파에서 오는 제사장 직분이 왜 문제가 있느냐. 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논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인용한 시편 110편 4절을 잠깐 확인을 해 드릴게요.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구절이에요.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아사상이 여기 있다 보고요. 그래서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서열에 따라 영원히 제사장이 된 분, 이미 시편기자가 말하고 있지 않냐.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결국 18절에 보면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였다. 계명은 물론 율법이고요. 또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7장의 틀 안에서 본다면 레위지파에게 제사장 직이 대물림된다고 하는 한계를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은 폐하게 됐다. 다음, 20절에서 22절. 여기는 맹세라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제가 공부 시작할 때 잠깐 말씀 드렸습니다. 레위지파는 맹세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대를 이어서 하는 거니까. 자기 족보만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다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대제사장이 되겠다고 맹세하셨다는 건 아니에요. 이것도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맹세하신 거죠. 내가 예수 외아들을 십자가에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 그러므로 영원한 번제물로 드려지게 됐고 속죄의 길이 됐고 그래서 참된 제사장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맹세를 하셨다고 하네요. 하나님이 딱 맹세했다는 말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아까 인용한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는 거예요. 그 부분을 갖다가 하나님의 맹세다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22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정말 참된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여기 소제목은 하늘 대제사장 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입니다. 히브리서에서 7장이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합니다. 핵심이에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레위지파보다 더 우월한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고 십분의 일을 바치었던 그 시편 110편 4절에서 언급된 그 멜기세덱의 반차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의 맹세에 의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옳다 지금 말하고 있는 거죠. 강의 요약문 좀 보겠습니다. 본문은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장 직분의 질적인 차이를 여기서 밝힌다.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죽어야 되기 때문에 숫자가 많다. 계속 대를 이어서 끊임없이 제사장을 하게 되는데 예수는 죽지 않으시기에, 부활이에요. 제사장 직분은 누구에게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제사장. 한 번으로 완성된 그러한 제사장이다. 지금 대제사장, 제사장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는 거죠? 예수님이 제사장 가운 입고 성전에서 제사장 직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런 일을 하셨다는 뜻에서 제사장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것의 핵심은 부활인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몸을 던지셨고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계속 역할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은 분. 결정적인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부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죄인들이기에 스스로의 죄,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날마다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돼요. 두 양쪽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반복해야 돼요. 왜냐하면 제사장 스스로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는 반복하지 않고 단번에 자기를 드렸다. 유일회성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과 생명 부활사건의 유일회성 인거죠. 그런 점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바울이나 다른 편지들과 조금 특이하게 접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의 신앙의 중심에 서있는 건 분명합니다. 단번에 드리심, 단번에 구원을 이루심, 이런 것이 바탕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뭐 중요하나 여러분들이 혹시 생각할 수 있어요. 단번이면 어떻고 반복이면 어떠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만약에 반복해야 된다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가 또 나와야 되는 거예요. 약간 자유주의적인 분들은, 그리고 훨씬 해방 신학적인 입장에 있는 분들은 모택동이 오늘의 그리스도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 해방을 했으니까. 그리고 또 민중 그리스도론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고 하는,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내려오는, 그리고 신학성서 곳곳에 배어있는 이러한 구원의 유일회성에 근거하면, 십자가의 드리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유일회성에 근거하면, 반복되는 건 아니에요. 이미 그건 끝난 문제에요. 여기서부터는 더 이야기할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건 오늘 접어두고요. 레위 제사장들은 제사를 자꾸 반복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한 번에 끝난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제사하고는 조금 다른 거예요. 다시 반복하는 건 아닌 거예요. 이미 그건 끝났습니다. 죄 용서 받는 이 사건은 더 이상 똑같이 우리가 반복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끝나게 된 거고 그래도 여전히 죄에 휩싸여 있다는 딜레마 속에 있긴 있으나 그건 우리가 극복해야 될 문제이고 일단 그거는 유일회적으로 다 이룬 것으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조금 더 요약문 보십시오. 마지막 부분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인간을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율법 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 부활의 예수를 제사장으로 세웠다. 그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28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어떻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쭉 끌고 가는 어떤 방향은 이해하시겠죠. 구도도 정확하게 나와 있는 거죠. 그 안으로 우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 가냐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일단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신앙과 신학의 기본 구도, 이건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참된 제사장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단 번에 이루셨다. 그래서 반복될 필요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회성입니다. 근데 왜 이걸 자꾸 구약에 있는 멜기세덱과 연결해서 반복해서 말 하냐. 왜 그러겠어요. 그런 걸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한 반론입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 율법, 토라, 이런 것들을 여전히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 당시에 당연히 있는 거죠. 거기서부터 유대교의 전통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투쟁을 한 거예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기 남아 있는 거고. 적당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요. 바울 같은 사람들은 완전히 빠져나왔고 신약성서에 기록된 이런 사람들은 다 그 공동체 전통으로부터, 그걸 부정하고 까부시는 건 아니되 왜 다르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기본적으로 구약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분인데 유대 전통이 잘못 해석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율법을 넘어서는, 율법을 부정하지는 않되, 율법을 근원적으로 넘어서는 복음의 사건이다 그거죠. 저도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히브리서를 제가 여러 번 읽긴 읽었습니다마는 대게 그냥 지나가게 되네요. 근데 공부하려고 차분하게 읽고 하다보니까 좋은 영적인 시각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때인가 가서는 기독교 영성의 큰 틀 안에 들어가 있구나, 느끼게 될 겁니다. 단숨에 되는 건 아닙니다. 꾸준하게 이러한 공부에 참여하는 게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7장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런저런 일들로 쫓기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함께 읽고 공부하게 하신 것 하나님의 은총인 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그의 참된 대제사장 되심, 그것을 초기 기독교가 처한 독특한 상황에서 잘 풀어서 설명한 이 히브리서 기자의 오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또 귀한 공부시간에 참여한 우리 믿음의 식구들 각각의 삶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형편들이 다 다릅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 모든 삶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함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에 토양들이 되도록, 그리고 토대가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늘 주님께서 감춰 주시기를 원하고 늘 새로워지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8장
1절,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절,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절,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절,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절,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절,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절,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우리가 앞에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말하는데 구약의 어떤 한 인물을 거론하면 이야기를 했습니다. 멜기세덱이었어요. 이 사람은 성경에 그렇게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조카 룻을 구출하러 갔다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때 여러 지역에 있는 왕들, 옛날에는 씨족사회 그런 정도니까 왕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는 의미하고는 다르죠. 추장, 씨족 족장, 이런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여러 사람이 나왔습니다. 나오게 된 이유는 성경이 말을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추측은 할 수 있어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았을 거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이기더라. 오히려 다른 군대가 더 강할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이 다 때려 부수고 많은 노획물을 갖고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으니까요. 저 아브라함에게 잘 보여야 되는 게 아닌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관계를 터놓는 게 신상에 좋겠다는 생각들을 곳곳에 있는 씨족, 추장들이 당연히 생각을 했겠죠. 제가 추정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한 인물이 멜기세덱이었어요. 이 사람이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그랬어요. 어디 왕이라고 그랬죠? 살렘이에요.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살렘, 샬롬, 같이 통하는 말들이죠. 평화라는 뜻이에요. 고대 사회에는 왕이 제사장하고 많이 겸했습니다. 종교하고 정치가 하나였어요. 신정정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멜기세덱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하지는 않겠습니다. 멜기세덱 그 흐름은 다시 한 번 말씀드려야겠네요.
히브리서 기자가 왜 멜기세덱을 말하는지는 아시겠지요?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레위지파로 생각한 거예요.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들만 혈통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게 아니라 레위보다도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한, 더 근원적인 제사장인 멜기세덱이야 말로 레위지파보다 더 뛰어난 제사장이다. 이 멜기세덱의 반차, 순서에 따라서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 되었다 그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1장부터 7장까지 쭉 한 겁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확실하다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8장부터 10장 18절까지 이 대제사장의 직분이 뭐냐,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이 뭐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직무를, 다른 제사장들이 따라올 수 없는 탁월성을 갖고 감당하셨다. 그걸 이제 설명합니다. 물론 여기서도 구약하고 많이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와요. 전체적으로는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무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건 아주 원천적인 거다, 근원적인 거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이 제사장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에 비교할 때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걸 말하려는 거예요. 1절 잠깐 보십시오. 표현이 재밌어요.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죠. 여태까지 7장까지 얘기한 것 중에서 이것을 요약적으로 말을 하면 다음의 사실이다 하는 거죠. 대제사장, 이건 약점이 없는 완전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 이거죠.
그런데 그 대제사장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서 1절 후반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여기서 지극히 크신 이는 물론 당연히 하나님이시고요. 하늘은 당연히 하늘을 가리키는데 그걸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져요. 어떤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걸 읽게 되면 여러분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정말 예수님이 사진에서 본 그러한 모습으로 하늘 어느 공간에 임금이 앉듯이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이 오른쪽에, 우편이라고 했으니까, 여기 괜찮은 자리에 앉아계시겠다. 그런 그림이 그려지죠. 일단 이 표현은 그렇습니다. 그건 하나의 그림이에요.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약간 어린아이의 수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동화를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여기에는 더 근원적인 어떤 세계를 이 방식으로 설명한 거예요. 하나님에게 오른편이 어디 있고 왼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은 시간 전체에요. 창조와 종말 그 전체가 하나님인 거예요. 그리고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것,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다 모르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설명한 것이 정리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 전체 시간을 통치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분은 어떤 형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형상, 이런 거 만들지 말라 얘기하잖아요. 하나님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확인 하려고 하지 마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마라라 이야기합니다.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그 이름 안에 가두는 거예요. 사과 이렇게 얘기하면 사과라는 그게 딱 있잖아요. 어떤 이름을 붙여 버리면 제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처럼 앉아 있고 오른쪽이라는 걸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다 그걸 가리키는 거예요. 이건 이미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된 건지를, 그리고 여태까지 관용적으로 유대인들에게서, 이 성경은 유대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걸 알고 읽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 1장 13절에 이미 한 번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시편 110편 1절에 근거한 거예요. 잠깐 읽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이 굉장히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읽혔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성경이에요. 물론 모세오경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경전이었지만 시편은 그거하고는 좀 다른 차원에서 중요했습니다. 랍비들이 회당에서 종교 행위를 할 때 시편을 많이 읽었어요. 당연히 예수님도 이 시편을 많이 읽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외우셨을 거예요. 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런 것들이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이에요. 예수님이 외우고 계시고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그걸로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는 뭐고 주는 뭐냐,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주를 예수님으로 생각을 한 거죠.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이러한 말씀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말씀으로 이해를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한 겁니다. 우편이라고 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어떤 뜻으로 사용했냐면 오른편이다 왼편이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대제사장인 그 예수님이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똑같은 창조와 인간을 살리는 것, 세계 완성, 그런 권능이 있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설명을 제 강의안에 적어 놨으니까 보십시오. 강의안 1번에 두 번째 패러그래프, 거기서 셋째 줄 보면 이렇습니다. 우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리킨다. 우편에 앉아있다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 아까 영적인 권위라고 얘기했는데,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에 오르셨다는 뜻이다. 이 궁극적인 생명, 이런 표현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시겠죠.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는 것은 궁극적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죠. 지나가는 거예요. 잠정적이라고 합니다. 무상성이라고 해요. 이게 무의미하다는 거하고는 다른 거예요. 굉장히 오늘 현실이 중요하죠. 그러나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더 확장시켜 준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지금 말한 궁극적 생명, 이걸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말하면 부활 생명, 그런 거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차이가 있다, 동일하다 어느 쪽?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동일한가. 오늘 그것까지 설명하기 시작하면 너무 많은 이야기로 들어가게 되요.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이야기를 하고 오늘은 그 사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에서 동일한 능력이 있는 분이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2절에 보면 그걸 조금 더 설명하는 거예요. 성서와 참 장막을 섬기는 이시라. 이게 바로 예수님이죠. 대제사장이죠. 성서와 참 장막, 이건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고 사람이 세운 게 아니다 이렇게 비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서와 참 장막이야 말로 영원한 생명, 궁극적 생명이 감춰진 하나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을 두 가지로 설명하네요. 하나는 참 장막이 있고, 이건 주님께서 세우신 것인데, 또 하나는 누가 세운 게 있죠. 사람이 세운 것. 하나는 주님께서 세우신 것, 또 하나는 사람이 세운 것. 이 사람이 세운 것은 유대인들의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모세로부터 시작했죠. 성전과 성막. 성전하고 성막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차이가 있어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고요. 그걸 솔로몬이라고 하는 왕이 지은 거예요. 그걸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성전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막은 성전이 세우기 전에 광야 생활할 때 천막 비슷한 걸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이동식 성전을 가리켜서 성막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게 성전의 원형이긴 하죠. 성막을 비롯해서 그 모든 제사를 드릴 때 습관이나 형식, 그 제사장의 복장, 모든 성서와 성막, 이런 것들 일체에 대한 정보, 자료, 이런 것들은 다 모세에 기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과 등등을 받았을 때 그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오거든요. 그게 이제 사람이 만든 거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걸 얘기하려고 하는지 감은 오시죠. 유대인들의 제사장 전통도 레위로부터 내려온 굉장히 그들로써는 대단한 건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게 정말 참된 제사장의 전통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멜기세덱으로부터 더 가게 되는 거죠.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성전이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이 만든 거야, 모세 전통에 의해서 오긴 온 건데 그래도 율법도 그렇고 성전도 그렇고 다 사람에게서 온 거다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 성소 혹은 성막. 두 가지 개념이 있어요. 이스라엘 전통에 있었던 그것은 사람이 만든 거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분이 만드신 것은 참된 성막 인거죠. 이 두 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강의안 2번 보십시오. 계속 히브리서 기자가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땅의 제사장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보십시오. 유대 레위지파에 속하는 땅의 제사장들이 하는 행위는 모두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다. 5절에 나와 있어요. 굉장히 거룩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형이고 그림자다. 진짜가 아니다. 그 실체는 하늘의 성소인거죠. 그건 주님께서 지으신 성소입니다. 이게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보면 헬라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와 세계관계가 약간 비슷할 수 있어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 대목에서 성소와 연관해서 말하는 핵심은 간단한 겁니다. 정말 참된 성소가 하늘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밑에 있는 유대인들의 성소는 그것의 그림자에요. 모형인 거예요. 원천은 거기 있는 거예요. 사실은 이러한 생각들이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약간 연관이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가 모든 근원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그것의 비춰진 어떤 영상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모든 것들이 나와서 잠깐 있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그렇게 플라톤이 설명을 했는데 오늘 여기서도 두 가지 성소, 땅에 있는 성소와 하늘에 있는 성소가 그렇게 읽혀 질수가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기자가 철학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원론적이에요. 이 세상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하늘의 성소와 땅의 성소는 그런 거는 아닌 거죠.
강의안 중간 부분을 좀 더 보겠습니다. 땅의 제사가 하늘 제사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땅의 제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하늘 제사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죠. 약간 관점의 차이인 거예요. 하늘의 성소가 온전한 거니까 거기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 거기로부터 부여 받은 거다, 그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 제사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곧 이가 예수다. 그걸 히브리서 기자가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설명들이 들어오시나요. 이런 표현들은 종교적인 언어라서 좀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잘 잡히지가 않는 거예요. 하늘의 성소라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건데, 그리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그렇습니다. 참 저도 이 부분에서 설명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늘 망설여져요. 그런 것을 극복하려면 생각을 약간 돌려야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어떤 사물이 있는 거만 있다고 생각하는 걸로 생각이 고정되어 있어요. 그걸 넘어서야 되는 건데, 근본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는 거죠. 인문학적 사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예요. 노자와 장자가 얘기하는 도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이 도라고 하는 게 노자와 장자에게는 가장 리얼한 거, 핵심인 거예요. 다른 것들은 다 지나가고 마는 거예요. 도가 정말 근원이에요.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도라고 하는 게 눈에 보이나요. 안 보이지요. 그래도 안 보이지만 더 확실하게 느껴서 잘 설명한 게 그 분들의 책인 거예요.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도가 어떻다는 게 잘 자리를 잡는 거 그게 공부에요. 그건 공부하지 않으면 전혀 되지가 않습니다.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 한 유명한 이야기, 도가도 비상도라고 말이죠. 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딱딱 결정해서 되는 게 아니다. 도를 갖다가 도라고 불러 버리면, 이미 말해 버리면, 아까 하나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얘기 했잖아요. 규정해버리면 근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를 도라고 이름 부르면 더 이상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게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려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정말 실질적인 것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조금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서 먹고 살기 바쁘고 만날 돈과 연관되어 살면서 그거 말고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늘 그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차분하게 천천히 그렇게 가면 언젠가는 좀 더 확연하게 들어올 때가 있을 거예요.
여기서 모형과 그림자라고 하는 그 말이 키워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인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너희들 말이지, 모세의 율법을 받아서 예루살렘 성전과 모든 율법 체계들, 그리고 제사장의 어떤 일들, 이런 것들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걸 특권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결국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에 의해서 된 하늘의 성소로부터 온 그림자다 그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그림자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실제로 건물이 있고 제사장 제도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권위가 있어 보이니까. 그에 반해 하늘의 성소 이것은 보이지 않는 거라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걸 봐라, 그게 핵심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걸 조금 직접적으로 말씀드려야겠네요. 성소, 제사장,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던 어떤 종교적인 제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실제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우주 공간 하늘에 정말 어떤 성소가 있다 그런 뜻은 아닌 거예요. 그럼 왜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언어 등을 통해서 말을 하려고 했던 핵심이 뭘까요. 그건 여러 번 얘기했기 때문에 다 아실 겁니다. 생명을 얻는 거예요. 제사장이 하는 일도 뭡니까. 속죄 제물 드리고 번제 드리는 역할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유대인과 레위지파를 통해서 내려오는 것은 근원적인 게 아니라 그림자고 정말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 받는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의 종교 제도를 통해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요약문에 나와 있는 단락 보십시오. 모형과 그림자는 한계가 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인간이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약속의 성소와 제사장직은 7절에 나와 있는 대로 무흠하지 못하다. 흠결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을 통해서 중보자를 세웠는데 그가 곧 예수다 이 얘기죠. 이 히브리서 기자만이 아니라 신약의 많은 성서 기자들, 초기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들의 화려했고 역사가 깊은 종교 행태들을 뛰어 넘어서, 그런 것들은 그림자고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 생명에 대한 경험, 하나님 경험이 정말 확실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고 경험해야 될 것이 바로 그거인거죠. 그런데요. 기독교 기초 교리 여러분들이 다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통해서 구원 받고 부활의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 안에 들어간다, 그건 이제 우리가 교리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내가 그걸 경험하냐, 확실하냐, 이게 관건입니다.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 깊은 세계를 다 이해해야만 구원받는 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그 세계에 깊이 들어 갔나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속죄 능력으로 그 분의 부활의 힘이 미래와 우리의 운명을 지배 한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 받는다, 안 받는다하고는 좀 차원이 다른 겁니다. 구원 받았지만 더 신비한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거죠.
그 다음 네 번째,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구약의 어떤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하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하는 이야기를 아시겠지요. 유대인들의 전통, 성전, 성소, 대제사장들, 이런 것들은 흠결이 있다, 그건 완전한 게 아니라 그림자다, 그림자만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되냐, 더 좋은 약속, 더 참된 성소, 바로 그 분에게 그것을 지으신, 혹은 거기서 제사장이신 그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된다,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상대화하고 더 참된 약속으로 들어 가야한다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그 새로운 약속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했다는 거예요.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더 좋은 언약이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에서 이미 오래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모세에게서 나온 거 말고 더 새로운 약속을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셨는데 그게 예수님이다 하는 거죠. 여기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새기겠다, 그 얘기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다는 이야기에요. 왜 그러냐면 모세의 법은 어디에다 새겼죠. 돌에 새겼잖아요. 이걸로는 한계가 있고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주겠다. 이건 예레미야에게 준 예언인데 이게 바로 예수님의 참된 성소, 참된 제사장, 더 근원적인 언약 그거다 얘기하는 거죠.
둘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신다.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거예요. 모세의 법에 따르면 그냥 용서가 없어요. 일단 벌을 받아야 돼요. 잘못했으면 벌 받고 해결돼요. 그런데 이 방식으로는 똑같은 잘못을 또 해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법의 한계인거예요. 근데 법이 없으면 세상은 안돌아가되 그 법으로 인간과 사회를 구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냥 용서하는 거죠. 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약속을 주셨다. 그 새로운 언약, 두 가지 조건, 하나는 돌 판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에 새겨주셨다. 또 하나는 잘못된 것, 죄를 징벌이 아니라 용서해 준다고 하는 새로운 언약인데 여기에 부합되는 분이 예수다 그 얘기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논리는 따라 오시겠죠. 속으로 우리가 얼마나 들어 가냐는 둘째 치고 굉장히 명쾌하게 분명한 관점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항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옛 언약은 낡아졌다고 말한다. 이 옛 언약은 모세의 법이죠. 유대인들이 딱 붙들고 있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들 조상들에게 내려온 법을 너희들은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 한다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옛날 모세로부터 내려온 언약은 낡아진 거예요. 더 이상 모세의 법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한적이고 그림자이고 모형인 거예요. 참된 것이 왔을 때는 옛것은 낡아지는 거죠. 그걸 완전히 해체하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되 그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주장을 선뜻 받아드리지는 못할 거예요. 자기들은 여전히 모세의 법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겠죠. 그런 점에서 유대교와 우리는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이게 그들을 부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다만 그들은 히브리서 입장에서 본다면 그림자 안에 있어요.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진짜는 아닌 거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을 얻는데 원본이다, 참된 성소다, 그 사실을 계속 변증해 나가고 우리의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써 나아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이 어디에서 결정적으로 형성됐다고 생각이 되세요. 이 말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디서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경험했을까요? 부활이죠. 예수님의 부활. 요즘 제가 사순절 묵상을 쓰고 있는데 톰 라이트라고 하는 성공회 신학자의 사순절 묵상이라는 글도 읽고 있어요. 재미있어요. 톰 라이트의 글을 여러분들이 안심하고 읽으셔도 됩니다. 굉장히 글이 재밌고 토대가 탄탄하고 괜찮습니다. 거기서 부활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설득력이 있어서 생각이 나서 말씀드립니다. 이 부활 경험이 초기 기독교의 핵심이었고 우리도 거기서 참된 성소다, 그림자다,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기독교적인 전통으로 알고 있는 거거든요. 모세의 법을 통해서는 부활 생명, 여기에 닿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재밌는 설명을 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 부활 경험을 주변에서는 믿지 않으려고 했고 심리학적으로 어떤 것이 떠오르는 그런 정도로 평가하려고 했었다는 거죠. 지금도 기독교인들의 부활 신앙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 있습니다. 그 당시에 어떤 사건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댈 때 여자들이 증인을 설 수가 없어요. 여자가 확실하게 봤다 이야기하면 코웃음을 치는 겁니다. 만약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증인을 내세우려면 누구를 내세워야 되요. 남자를 내세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복음서 보면 누구입니까. 여자예요. 제일 첫 장면 빈 무덤에 가서 본 사람은 여자들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가지고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등등을 야이기 하는데 그런 점도 우리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기도하고 질문 있으면 질문, 대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사순절 이렇게 지나는 중 수요일 저녁 저희들이 또 히브리서 공부로 모여서 함께 생각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글자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럽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 다시 한 번 느낍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 놀라운, 신비로운 증언을 이천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가 다시 읽고 경험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무상한 이 실존을 포함하면서 또 이것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인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참 성소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자리라고 설명한 그 근원적인 생명, 부활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지켜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9장
이스라엘 신앙의 큰 줄기를 이야기한다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얘기하는 성전 중심의 제사장 제도요. 성전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이거는 한 군데입니다. 또 하나가 있다면 회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당은 제사 드리는 곳은 아니에요. 말씀 읽고 공부하는 곳입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거예요. 제사를 드리는 거하고 구약성경을 공부해서 율법대로 잘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똑같은 건 아닙니다. 다른 건데 이 두 가지가 이스라엘 신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히브리서 앞에서 공부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거예요. 대제사장도 레위지파 혈통이 아니라 그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오히려 축복을 받으면서 자기의 십일조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참된, 더 근원되는 제사장의 반차를 따라서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됐다고 얘기하고 있죠. 그 사람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레위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 아브라함보다 더 신앙적으로 우월한, 영적으로 우월한 그런 쪽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구약성서가 얘기하는 그게 극복되었다 얘기하는 거고요, 이 회당 중심의 율법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새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 언약, 이 율법은 옛날 언약이니까요. 이 율법을 왜 언약이라고 하는지는 아시겠지요. 약속 언약이라는 거요. 율법을 그렇게 말하는 거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율법 정신이 언약인 거예요. 율법이 누구한테서 시작을 했죠. 모세잖아요. 모세에게 주면서 너희들 이렇게 저렇게 살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언약이거든요. 히브리서 설명에 따르면 그건 옛날 언약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옛날 언약과 제사장과 성전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되 그 한계를 보고 참된 대제사장, 새 언약, 이게 정말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길이다 그걸 알라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복음의 지평에서 설명합니다. 표현이 좀 딱딱하죠. 특별하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내가 왜 이런 말을 붙였냐면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누구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신앙생활 하는 거거든요. 율법과 대립적인 차원에 있는 겁니다. 여기서 누구를 믿느냐는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속죄 받았다고 하는 사실. 이건 우리가 율법적으로 착하게 살고 이런 방식이 아니라,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을 착하게 만들어 가는 거예요. 모범생을 만들어 가는 거죠. 바리새인들이 한 일들이 다 그런 겁니다. 굉장히 좋은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공부하면서 나오겠습니다만 반복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하는 그런 일들인 거예요. 그에 반해 예수님이 하신일은 우리가 착하게 율법을 잘 지켜서, 모범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길이 아니라 단 번에 자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의 근본적인 죄가 용서 받는다는 그 사실이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된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된다는 겁니다. 오늘 9장이 길기 때문에 한꺼번에 읽고 공부하기가 매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요약문에서 볼 수 있듯이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한 단락 공부할 때마다 본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5절까지 읽겠습니다. 여기는 세상의 성소라고 하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것을 그냥 풀이한 거예요. 1절에서 5절까지 함께 통독으로 읽겠습니다.
1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절,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절,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절,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아멘. 이거는 예루살렘 성전을 간략하게 설명한 겁니다. 굉장히 예루살렘 성전이 복잡해요. 일단 마당이 있어요. 마당도 이방인의 뜰이 있고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고 유대인들의 뜰이 있고 제사장의 뜰이 있고 이렇게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칸이 나누어져 있어요. 아마 맨 바깥에 있는 게 이방인의 뜰인지 싶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단계마다 있고요. 안에 가게 되면 성소가 있어요. 그건 건물이죠. 마당이 아니라 건물인데 그 성소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지성소는 아니에요. 제가 거기를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설명하기 힘들고요. 그리고 성소도 조금씩 달라졌어요. 그래서 이걸 복원도 한다고 하지만 시대마다 형태도 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성소 건물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면 일반적인 성소고요. 휘장이 있는데 그곳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가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지성소라고 하는 말뜻은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거기는 제사장들이 들어가지 못하고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속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지성소가 그렇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 히브리서 기자가 성전 안에 있는 구조들과 기물들을 간단하게 소개했어요.
여기서 지성소와 언약궤가 중요합니다. 그냥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늘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데 지성소는 그렇지 못해요. 이 지성소 안에 몇몇 기물들이 있어요. 여기 2절에 보면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낱말 어려운 거 없죠. 등잔대, 촛불 켜는 것. 상(床), 올려놓는 것, 그리고 진설병이 있습니다. 진설병은 이게 한자고 요즘 잘 쓰지 않는데 병은 떡이고요. 빵이겠죠. 진설, 빵가게 가면 빵 진열해 놓지 않습니까. 진열 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올려놓은 빵이 있는 거예요. 지성소 안에는 빵이 늘 있는 거예요. 다윗이 언젠가 도망가다가 그 안에 들어가서 그걸 먹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좀 특이하죠. 등잔대와 상이 있는 건 이해가 되는데 진설병은 왜 거기다 놨을까요? 정말 거룩한 곳인데 빵을 거기다 놨을까요? 자세히 모르겠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죠. 이게 먹고 사는 생명의 양식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옛날에 제사 지낼 때 밥해서 제사상에 올리잖아요. 지금도 절 같은데 가면 늘 부처상 앞에 차려 놓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차려놓은 것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성소에 있고요. 휘장이 두 개라고 그러네요. 첫 번째 들어가면 성소에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고. 둘째 휘장이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고 하는데 거기에 있는 중요한 게 언약궤라고 하네요. 금으로 싼 언약궤라고 합니다. 보통 다른 말로는 법궤라고도 많이 하죠. 이게 귀해서 금으로 쌌다고 하는데 이 안에 들어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건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거기 다 나와 있어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만나, 이 만나는 출애굽기에 보면 만나를 걷어 들여도 그게 밤이 되면 녹아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라고 했으니까 만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항아리만 놓은 건지 사실적인 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만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어요. 두 번째는 아론의 지팡이입니다. 이것도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에피소드하고 연관이 돼요. 아론이 모세의 형으로서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왜 너만 그걸 하냐고 여러 지파 사람들이 일종의 항거를 했습니다. 그 때 각각 지파마다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해서 땅에 꽂아 놨는데 다음날 보니까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어요. 이게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게 아니냐는 그러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는 겁니다. 사실은 아론의 지팡이보다 모세 지팡이가 더 중요하기는 한데 아론 것이 들어있다고 하네요. 세 번째는 언약의 돌판이라고 하네요. 이게 뭘까요. 십계명이 적혀있는 돌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도 있을까요? 물론 없지요. 예루살렘 성전이 여러 번 무너졌습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초토화 됐는데 그 때 성전 안에 있던 귀한 것은 다 약탈당해 갔어요.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조금 가져 왔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얼마나 가져오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진나라에서 폐물 같은 거 다 가져오잖아요. 나폴레옹도 아프리카, 이집트인가를 공격해서 많이 약탈하고 유럽의 박물관 보면 헬라라든지 이집트의 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좀 있어요. 뺏어 온 거죠. 우리나라 보물도 일본이 많이 가져갔는데 이걸 반환하는 운동도 벌이고 있기는 한데요. 가져 간 것도 때에 따라서는 불법적인 것도 있지만 합법적으로 가져 간 것도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사 간 거예요. 그 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귀한 건지 모르고 있다가 돈 많이 준다고 하니까 팔아서 그렇게 됐는데요. 유럽이라든지 일본과 같은 나라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돌려 달라 얘기를 하니까 만약에 그 때 안 가져갔으면 이것도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해라 그런 입장인데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있던 것들은 물론 없어요. 몇 군데에 문헌에 따라서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설명이었습니다. 다음, 6절에서 10절까지 이것도 함께 읽겠습니다.
6절,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절,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아멘. 여기에는 옛 계약과 제사 제도 이런 것의 간단한 설명이 나왔어요. 이거는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에 포함돼있는 겁니다. 6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첫 장막에 들어가서 의식을 행해요. 이건 일상적으로 하는 겁니다. 촛불도 켜고 이런 저런 거, 진설병 나르는 일 등을 해야 되겠죠. 둘째 장막은 지성소이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가서 백성 전체의 사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9절에 보면 하나의 비유라고 하는 거예요. 참된 건 아닌 거죠. 9절 조금 더 보면 이렇습니다. 이에 따라 드리는, 그러니까 옛 계약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 구약에 근거한 예루살렘 성전, 성막에서 드리는 것들은,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의 형식에 떨어질 뿐이지 양심에서 정말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양심이라고 하는 말이 탁 와 닿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양심하면 도덕적으로 옳다 그리다. 양심적으로 판단해야지. 그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양심이라는 것은 그것이라기 보다 더 근원적인 우리의 인식의 능력이라고 봐야 됩니다.
제가 그거를 잠깐 설명을 했는데 그 다음 단락이군요. 여러분 강의안 3번에 셋째 줄에도 양심이 나와요. 옛 계약과 제사 제도에 따라서 드리는 그러한 제사로써는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데 세 번째 단락에서는 새 계약의 피, 이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키죠, 이걸 통해서는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걸 헬라어를 통해서 더 세세하게 알면 좋겠습니다만 거기가지 갈 필요는 없고요. 그냥 그 뜻을 세 번째 단락 세 번째 줄에 설명해놨습니다. 양심은 단순히 도덕적인 판단 능력이 아니라 인식의 가장 깊은 차원의 어떤 능력이다. 번역으로는 탁 와 닿지 않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제사를 잘 드림으로써 옛 계약에 따라서, 의식에 따라서, 오늘 히브리서의 설명에 따르면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의례에 따른 그런 것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는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거죠. 하나님만이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데 아주 화려하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온전하게 해주실 수 있는 우리의 심층에 있는 인식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표현하기가 쉽지 않네요. 10절 보십시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이런 것들이 다 율법에 있는 거예요.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손을 어떻게 씻고, 옷을 어떻게 입고,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이 나와 있거든요. 이런 것들은 다 육체의 예법일 뿐이다. 양심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게 아니라, 심층에서 작동될 수 있는 우리의 인식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거다.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거라고 했어요. 개혁이라는 건 전체적으로 흐름에서 어울리는 단어는 아닌데 정말 바르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올 때까지 일시적으로 제사제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락입니다. 11절에서 14절까지 읽겠습니다.
11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아멘. 지금 굉장히 히브리서 기자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옛 계약은 아무리 화려하게 보여도 한계가 있는 거고 하나의 형식이고 일시적인 거예요. 그리고 황소, 염소, 양의 피를 잡아서 하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게 못 된다. 일단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이제 세 번째 단락에서 새 계약의 피가 정말 온전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이에요. 12절에 재밌는 표현이 나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피로, 피는 구약에서부터 신약 이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데까지 생명의 근원으로 있고요. 사실은 그건 늘 생명이죠.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건 옛 계약이고요.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 자기의 죽음이죠. 그걸 통해서 속죄를 이루사, 속죄는 죄를 용서받는 겁니다.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이루시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고 유대인들이 레위지파 제사장들을 통해 쭉 실현돼 왔던 이 제사에서, 동물들의 피를 뿌리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기들의 죄가 일시적으로나마 용서받았다고 하는 그런 생각, 믿음이 있었는데, 그런 거는 옳은 거예요. 그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최선으로 그 방식에서 속죄를 경험한 거예요. 동물의 피로도 그렇게 그들이 생각을 했는데, 이제 예수님의 피라고 한다면 우리의 양심을 정말 깨끗하게 할 거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잠깐 보시죠.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 그리스의 피, 그의 속죄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 확실하다, 그걸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 네 번째 단락 15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이 말씀도 함께 읽어 볼까요.
15절,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절,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절,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절,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아멘. 네 번째 단락의 소제목을 피를 통한 계약의 체결이라고 잡았습니다. 15절에서 22절이에요. 그 내용에 대한 요약을 강의안에 간단하게 적었습니다. 그걸 좀 보시죠. 세 번째 단락에서 한 거하고 이어지는 거예요. 동물의 피를 잡아서 드린 그들도 일시적이나마 죄가 용서 되었는데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오죽하겠느냐 우리가 양심의 차원에서, 가장 깊은 차원에서 온전하게 된다, 그렇게 세 번째 단락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이제 예수는 과거의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에 의한 중보자라 할 수 있다. 옛 언약에는 동물의 피를 뿌려라, 이게 다 언약이에요. 아시겠죠. 율법이 언약입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에 다 있는 내용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제사를 지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예수는 과거의 언약 그런 차원이 아니라 새 언약에 의한 중보자다. 이게 왜 새롭냐. 겉모양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고 완전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새 언약의 중보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다고 설명을 하고 있어요. 중보자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역할입니다. 이 단락에서 피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설명되고 있어요. 이게 논리가 이런 거예요. 앞부분에서는 유언이 나오잖아요. 이건 약속의 차원에서 말을 하는 건데 유언장을 쓰게 된다면 유언장의 효력은 죽어야 되잖아요. 죽는다는 게 피를 가리키거든요.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 기자의 머릿속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하고는 다른 거죠. 이천년 전 이기도하고 그 당시 유대인들의 온갖 제사제도를 바탕에 놓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그 모든 것의 완성자인지 그걸 지금 논증해 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잘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피가, 이건 죽음을 가리키는 거고, 죽음은 곧 유언장의 효력 가능성을 말하기 때문에 이 피를 반복해서 얘기한 거예요. 율법에 따라서 드리는 제사도 동물의 피를 인한 언약이에요. 피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생명 자체였습니다. 피를 흘리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피를 먹지 말라 얘기했잖아요. 근동 지방의 다른 종교에서는 피를 많이 먹었어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엄금되어 있었습니다. 이건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근동 다른 지방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 지금도 조금 문자주의 신앙을 가진 교파가 있죠. 여화와 증인, 지금도 독실한 사람은 수혈 안하죠?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려면 그렇게 따르는 게 나을지 모르겠어요. 피는 고대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것으로 받아 드려졌습니다.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요. 내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단락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피의 중요성, 이게 유언장과 효력 시점과 죽음, 피를 연관시키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온전하게 속죄함을 얻었다, 죄를 씻기게 됐다 그 얘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교리적인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이해하냐,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게 몸으로 느껴지냐가 중요합니다. 일단 세례 받을 때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은 것을 믿습니까. 아멘해서 그런 식으로 세례를 받긴 하는데요. 그때는 잘 모르더라도 기본적인 교리를 자기 입으로 고백하면 세례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끝나게 되면 어린아이 신앙에 머무르게 되는 거고 점점 성숙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용서 받는다고 하는 것, 이게 확 와 닿으시나요. 이천년 전, 우리하고 너무나도 거리가 먼 유대인 한 남자였던 예수의, 사실은 예수님의 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는 죽음인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 십자가의 처형. 그걸 피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진짜 피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닌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인거예요. 거기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천천히 더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건 간단하게 되는 문제는 아니에요. 거기까지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면 좋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세례 받을 때 교리 문답한 거, 그 정도 틀만이라도 잘 유지하고 있고요. 그리고 사실 이런 문제들은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어서요. 웬만큼 신학공부를 해도 잘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일반 평신도들은 두말할 것도 없죠.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다 신학자가 되어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신학자가 되어야만 기독교 영성에 깊이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알면 좋지만 몰라도 거기에 연결될 수 있어요.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예배 안에서 실행되는 그런 것들을 접함으로써 다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고 이거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로써만 가능한 그 어떤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 그걸 믿으면 되는 거죠.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 그걸 피라고 하는 아주 자극적인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23절에서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23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절,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아멘. 오늘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 8장에 비해서 두 배가 되네요. 강의 요약문을 잠깐 보시죠. 소제목에 속죄의 유일회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속죄가 반복되는 게 아니에요. 그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난 거예요. 예수 사건으로. 그래서 우리가 제사를 드리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유대의 역사에서 동물의 피를 잡아서 드리는 제사, 하나의 모형으로써, 하나의 그림자로써 그런 일을 하는 것뿐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드림으로써 그 제사를 완성시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는 속죄 제사라기보다도, 제사는 제사인데 의미가 다른 거예요. 속제 제사가 아니라 속죄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이에요. 기억으로서 종교 의식을 하는 것뿐이지 유대 제사처럼 또 속죄 받고 피를 뿌리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속죄 제사는 단번에 끝난 거예요. 그거를 지금 23절에서 28절 사이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강의 요약문을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의 성소에서 행해지는 동물피의 희생제사는, 세상의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이거는 반복돼야 해요. 그 자체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근본이 아니라 모형이에요. 하나의 비유에요. 하나의 그림자이고 오리지널이 아니라 복사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짝퉁인거죠. 그래서 그거는 반복돼야 됩니다. 근본은 예수의 희생제사다. 그래서 여기 몇 번 반복해서 단번이라는 게 강조되고 있어요. 12절에도 이미 나왔죠.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건 유일회적으로 그분에게만 일어난 거예요. 근본은 예수의 희생제사다.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하시려고, 26절입니다.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죠. 단번에 죄를 없이하시려고 자기를 제물로 드린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어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후반부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감당하려고, 죽음으로 우리 모든 인간들은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일종의 삶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느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그 심판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안 되는 거거든요. 그것의 근본적인 것의 해결, 이게 단번에 자기를 희생제사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더 이상의 속죄제사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종교의식인 거예요. 거룩한 의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속죄를 완성했다는 이 엄청난, 아주 우주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써의 예배가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이루셨는데, 현실로 다 해결이 됐나요? 아직 안 된 거예요. 여전히 죄나 이런 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거고 우리 스스로도 그 세력 안에 있고요. 그것의 완성은 언제 일어나죠. 예수님 재림이죠. 다시 오시리라 마지막 구절에 붙어 있습니다. 이 긴장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요. 이게 계속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행착오도 하고 마음이 찜찜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거기에 얽혀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서 우리가 심판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아직은 아닌 거예요.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의 재림, 그 때까지 우리가 기다려야 됩니다. 참아야 되기도 하고 견뎌야 하는 거예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루어 졌는데 우리에게까지 현실로는 아직 되지 못한 그 심판 너머에 있는 거룩한 성소로 들어가는 그 때까지 우리는 이러한 중간 시간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힘든 일이 있거나 실수도 할 수 있고요. 너무 거기에서 절망하지 마시고요.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살면 안 되는 거고 예수그리스도가 단번에 그 일을 이루셨다는 그 사건에 조금 더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두 번째 단락은 11절부터 1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일회적이고 완전한 제사다.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 합니다. 자연스러운 얘기죠. 구약이 얘기하고 있는 제사 행위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리키고 있는 제사의 완전성, 그게 또 유일회적이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유일회적이라는 말을 왜 붙이는 걸 대충 이해하시겠죠. 구약 제사하고 비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행위의 절대성을 가리키는 겁니다. 구약 제사는 반복하죠. 계속해서 똑같이 해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속죄의 사죄행위는 유일회적으로 한 번에 끝난 거예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유일하듯이 이 제사행위도 단 한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이었다라고 두 번째 단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은 19절에서 25절이에요. 앞에 나와 있는 두 가지를 전제하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을 굳게 지켜야 된다. 그냥 신앙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도 되지만 여기서는 희망, 희망의 신앙, 희망한다는 말이에요. 속죄 받았으니까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 이 말은 곧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희망의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라. 유대인들의 제사 행위 그런 걸로 정신이 혼란스러워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회적이고 온전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고 생명의 세계로 인도된다는 사실에 대한 희망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단락은 26절에서 31절입니다. 여기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왔다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요. 초기 기독교에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일종의 배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아들었고 왔었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해서 떠난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26절에서 31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2절에서 39절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 이게 오늘 10장의 전체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섯 단락으로 나눴어요. 우리가 천천히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10절까지 교독해서 읽으시죠.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내용을 잘 보면서 읽으세요.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절,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절,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절,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절,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절,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절,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아멘. 1절에서 10절까지 같이 읽었습니다. 강의 요약문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종교적 전통을 매개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내용입니다. 구약 전통의 핵심은 율법과 제사는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1절이 이것을 정확하게 짚고 있어요. 율법은 그림자다. 실체가 아닌 거죠.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필요 없는 거예요. 실체가 오지 않았을 때는 그림자만이라도 조금 필요합니다. 율법은 그런 정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시겠죠. 제사와 연관된 문제인데요. 1절 후반절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과 제사는 온전한 게 아니라 그림자에요.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모사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낱말 뜻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질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좀 다릅니다. 그걸 조금 더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돼요. 율법도 좋은 거예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해하시죠. 그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고요. 지금도 율법 없이는 못 삽니다. 교회 생활하는 것 자체가 율법인 거예요. 주일을 지킨다든지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기 위해서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하고요. 우리가 기독교인들답게 사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율법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우리가 인정받을 수 없는 거예요. 완전한 상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 사람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조금 덜 하고 그런 차이가 있는 거죠. 더 많이 봉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고 약간 덜 하는 사람이 못하고 이런 건 사람의 기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그림자이지 그걸로 사람을 완전히 평가하기는 힘든 겁니다. 약간 겉으로 볼 때는 봉사를 덜 하더라도 그래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한 사람이 있는데 그거는 율법으로 평가를 못하는 거예요. 율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 도덕, 법하고 비슷한 건데, 그런 윤리, 도덕, 법이 아무리 많이 발달됐다고 해도 그 사회가 그것만으로 온전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닿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인정하는 데로 들어가는 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그러한 관점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물론 알고 계시는 문제인데 그래도 놓칠 때가 많이 있어요. 강의 요약문 다시 보세요. 율법은 그림자이며 또 그래서 그것에 근거한 제사는 온전하지 못하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사람의 죄를 없애지 못 한다. 이게 다 율법에 따른 제사 행위에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시편 40편 6절을 근거로 해서 확인합니다. 인용을 한 거예요. 시편 40편 6절 이하의 내용이 히브리서 10장 5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 ‘ㄱ’해서 각주를 달았어요. 그걸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니, 그걸 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핵심은 아니라는 뜻이죠. 이에 내가 말하기를, 시편기자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거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뜻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건데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제사와 예물, 이것으로는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인용한 이야기를 8절에서 다시 해석을 해요.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 않는다. 강조법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반드시 있었어야 되는 거였어요. 그림자마저 없으면 혼돈 속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림자만이라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그것은 참된 것은 아닌 것, 실체는 아닌 것이죠. 그래서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걸 다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아무리 반복해서 제사를 지내도 실제로 속죄가 가능하지 않는 거죠. 반복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제사에는 이제 매달릴 필요가 없는 거죠. 여전히 율법에 매달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일어난 참된 것을 몰랐기 때문이죠. 참된 것을 모를 때는 약간 사이비 이런 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분명하게 이야기하네요.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의 의가 아니라, 내가 의로워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여기에 구약과 다른 복음의 능력이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게 자칫 오해하게 되면 값싼 율법 무용론에 떨어질 수 있어요. 율법 해체론에 떨어지는 것, 이것은 복음은 아닌 거예요.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고 율법보다 더 분명한 삶의 내용들을 담아 낼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핵심인거죠. 복음을 오해하면 무율법주의에 떨어지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에 실제로 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맘대로 살아도 된다. 이미 율법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당인가? 그런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런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무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이걸 다 포함하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율법을 내가 스스로 지는 이러한 긴장, 이게 복음의 능력인 겁니다. 최선의 노력은 하지만 이게 부담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써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들을 잘 감당해나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락입니다. 11절에서 18절이에요. 이것도 교독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11절 읽겠습니다.
11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절,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절,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네, 예수 죽음을 통해서 드려진 희생제사의 유일회적이며 완벽한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재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다. 예수 스스로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신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은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 사도신경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죠. 시편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내 오른편에 앉으라는 표현들이 시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차원의 영적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가 확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 보세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는 이 말을 아마 세상 사람들은 잘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유대인의 한 남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어떻게 인류의 죄를 용서받냐고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일 거예요. 이 부분은 그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어떤 깊이를 이해할 때만 이게 자기에게 정말 진리로서 와 닿게 되는 거지 그게 안 돼 있으면 어려운 거예요. 이런 게 있습니다. 기독교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대로 설득시켜야 되는데 설득을 모두 시킬 수는 없어요.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눅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건 클래식 음악을 예로 들자면 클래식 음악에 깊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설득 시킬 수 있겠어요? 안 되는 겁니다.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바둑도 마찬 가지에요. 프로기사들이 두는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창호, 이세돌의 이 수를 아냐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알아듣겠어요? 안 되는 거예요.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비밀스러운 그러한 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없이 무조건 내 길만 간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능사는 아니고요. 가능한대로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준비를 하되 안 된다고 해서 불안하게 생각할 건 없고 일단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한발 한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방금 제가 예로 들은 것처럼 바둑의 어떤 수의 깊이로 들어가야만 프로 바둑 기사가 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영적인 전문가가 돼야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이말, 이걸 지금 제가 다시 설명하지 않겠어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아는 걸 전제하고 쓰는 겁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많은 필요한 거예요. 인간이 왜 죽냐. 이런 문제부터 시작해서 왜 죄의 결과가 죽음이냐, 우리가 죽어야 될 운명에서 어떻게 생명을 얻느냐, 죄가 용서 받아야 되는데 인간의 죄가 용서 받는 길이 뭐냐 이런 것들을 촘촘히 따라가야 되는 거거든요. 이런 것들을 제가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미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아는 것으로 전제하고 기록하기 때문에 천천히 더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그 사실, 영적 권위가 예수에게, 권세죠, 그것이 확보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밌어요. 이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는 한데 모든 악이 제거되기까지 그리스도는 기다리신다. 모든 악이 제거된다는 것을 여기서는 어떤 단어로 설명했을까요. 13절에 나온 걸 보면,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이러한 표현이 모든 악이 제거되고 완벽한 세계가 완성된다고 하는 것, 그걸 가리키는 겁니다. 발등상이라고 하는 것은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발걸이를 가리키는 거예요. 악이 제거되는 거죠. 보통 우리가 사탄, 악, 귀신, 이렇게 얘기하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어떤 세력들을 마귀, 악, 사탄,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는 이 세계에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잖아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완전한 생명을 얻으셨는데 아직은 과도기에요. 신학적인 용어로 중간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시대가 있고 마지막이 완성되는 것, 이건 악이, 원수가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는 때에요. 이때까지 과도기가 있습니다. 이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거죠.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레미야 31장 33절 이하를 인용합니다. 9절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그것은 옛 약속이 아니라 새 약속이다. 그 약속은 돌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새긴 것이다. 11절에서 18절 이야기를 제가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이 돌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십계명이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는 뜻이죠. 다시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 이게 정말 확실한 거다 그 얘기죠. 이 마음을 주관하는 이는 성령이고요. 그 약속이 구약에는 돌판에 새겨졌어요. 율법, 문자로 됐어요. 이제는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겁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내용은 뭐냐. 그걸 이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한 겁니다. 예레미야서를 인용해서 설명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의 죄와 불법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약속인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방법은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 데까지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많이 노력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거죠. 그 방식으로는 우리가 완전한 거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레미야서를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을 하고 바울도 로마서하고 갈라디아서 등등에서 여러 번 반복을 이야기 했듯이, 요즘 말로 하면 패러다임이 바뀐 거예요. 어떤 틀이 바뀐 거예요. 우리가 노력해서 이만큼 수준에 올라가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걸 기억도 안하는 거예요. 무얼 통해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그렇다고 하는 거죠.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거예요. 이게 실감이 나지 않으면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한 거고요. 이게 실질적으로 리얼하게 이해가 되고 경험이 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온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러한 죄와 불법을 아예 기억을 하지 않으신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또 죄와 불법을 행해도 된다? 그건 아니죠. 그걸 오해하게 되면 혼란스럽게 돼요. 구원파에 가면, 그런 사이비 이단들은 전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잘 가요. 그래서 정통 교회가 좀 놓쳤던 부분들을 잘 붙들고 가요. 가다가 너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되는 겁니다. 구원파라든지, 영지주의 이런데서 그런 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다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거죠. 제사 행위의 유일회성입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이야기했는데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 제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다시 한 번 제사를 반복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예수 십자가 죽음으로 유일회적으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걸 반복적으로 드리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됐습니다. 세 번째 단락 19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이것도 읽어 보실까요. 교독하겠습니다. 마지막절은 같이 읽어야겠네요.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절,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네, 그 단락은 강의 요약을 읽는 것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설명은 더 하지 않겠어요. 보십시오. 앞에서 말한 그 이야기들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성소에 들어갈 용기를 얻는다. 그 근거는 예수의 피다. 예수의 죽음이다. 성소는 생명의 세계를 가리킨다. 22절에서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이 잘 설명돼 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예수의 피 뿌림이죠.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악한 양심이 뭐에요. 죽음에 대한 공포에요. 거기서 벗어나고, 정말 놀라운 생명 경험이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성령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됐다는 거예요. 세상이 요구하는 틀이 있잖아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성령에 의존하는 것. 그러니까 성경의 언어가 종교적이기 때문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근본을 잘 살펴서 이해하셔야 됩니다.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런 뜻이에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멋진 권면이에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입니다. 25절에는 실제 신앙생활에 대한 권면이 나와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하지 말라. 같은 기독교인들인데 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여러 종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어요. 우리가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굉장히 애매한 표현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종류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보다 어수선했어요. 지금은 오랫동안 역사 과정을 통해서 검증되고 잘못된 것 떨어져 나가고, 사이비 이단 떨어져 나가고 그렇게 논증을 통해서 기독교가 체계를 잡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교파가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인 것은 똑같습니다. 사도신경 이런 거는 똑같은 거예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달라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달랐습니다. 그건 제가 언젠가 초기기독교의 형성이라는 책을 설명한 적이 있을 텐데 거기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 이 말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얘기죠. 모여 봐야 뭐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거 이게 매너리즘입니다. 똑같이 공부하고 예배드리고 성찬하고 여기에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렇게 할 건 없다.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겠죠. 그래서 모이는 걸 등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 가까이 예수님께서 오신다. 재림의 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재림하면 가장 먼저 뭐가 생각나세요. 그림으로도 생각날 거고 의미로도 생각날 텐데 휴거 이런 걸 생각하겠죠. 그거는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림들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묘사된 겁니다. 너무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 근본 의미를 아닌 게 중요하죠. 예수의 재림하면 생명의 완성이에요. 우리는 지금 생명이 완성되지 않은 거예요. 그 생명이 완성되는 때가 오기를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그게 완성된다고 봤죠. 다음 네 번째 단락, 26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이것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26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절,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절,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네,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초기 기독교가 굉장히 여러 가지로 다양했다. 그리고 이단들도 대단히 많았다고 말씀드렸어요. 26절부터는 그런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으로 나쁜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왔다가 완전히 배교, 배신이죠.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 메시지가 여기 있어요. 2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죠.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여기서 진리는 뭐죠. 그리스도 사건, 예수를 앎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배웠는데도 짐짓 죄를, 의도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부인하는 거죠. 의도적으로 부정하면 다시 속죄 받을 수 없다 그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런 논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단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 근데 그거 자체를 부정하게 되니까, 한 번 끝났으니까 다시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배신, 배교, 기독교를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완전히 막을 수는 없잖아요. 이건 아마 히브리서 교회 공동체에 특별한 사건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몰라요. 아마 공동체가 허물어질 정도로 배교행위가 일반화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례 받고 다시 또 죄를 졌을 때에 용서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초기 기독교에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어요. 여러분들이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기독교를 로마에 공인한 황제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한 황제가 따로 있고 공인한 황제가 따로 있어요. 공인한 것이 중요한 거죠. 밀라노 칙령이죠. 그 사람의 이름이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가 전쟁을 앞두고 십자가 환상을 봤나 봐요. 전쟁에서 이겼어요. 그래서 기독교를 공인한 일을 하고 그 때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중심 종교가 됐습니다.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한 60년 이상 정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테오도시우스라는 황제가 정식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했어요. 그러니까 로마의 식민 통치가 있는 나라에서는 태어나자마자 모두가 다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게 기독교 쪽에서 볼 때 잘 된 거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교회 역사학자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는 로마 제국의 어용적인 태도를 기독교가 좀 보이게 됐어요. 그러니까 황제로부터 수도원 생기면 땅 많이 받고 사제들은 군대도 안가지 등등해서 많이 챙겨주니까 황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교회가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쨌든 옆으로 얘기 나가지 말고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렇게 기독교 신앙이,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있는 걸로 자기가 공인을 하고 업적도 많이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는 죽기직전에 받았어요. 그 이유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고 죄지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게 세월이 지나면서 신학적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래서 더 이상 누구도 세례 받고 죄 지은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이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가 처음 생성될 때 아주 생생하고 아직 정리가 되지 않고 그리고 기독교가 생존의 위기에 빠져있는 그런 걸 전제하고 읽으셔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가 사실은 유대교와 로마 정치 사이에서 버텨내서 이렇게 세계 종교가 됐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공동체의 위기를 경험한 히브리서 기자가 배교한 사람들에 대한 아주 준엄한 경고로써 속죄하면 더 이상 제사가 없다. 그들은 끝장이다.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쭉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절망적이라는 걸 얘기해요. 31절에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그러니까 배교한 사람들이 당해야 될 어떤 두려운 미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형벌, 사죄 없음, 용서 받지 못함, 그런 걸로 끝나지 않아요. 그거는 어쩔 수 없이 짚어야 될 부분이고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라 다음이에요. 31절부터 39절까지, 이것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32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절,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쭉 하고, 상처 난 이야기도 하다가, 또 과격한 표현도 하다가, 이제 신앙의 근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걸로 10장이 정리가 됩니다. 32절부터 34절까지 한 번 눈으로 보세요. 그 구절이 무얼 가리키는지. 32절부터 34절, 초기 기독교인들이 당했던 고난, 아주 비참했다고 하는 걸 알 수 있겠죠.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내긴 했어요. 비방과 환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방 당하고, 환란 당하고 그리고 구경거리가 되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릴 수밖에 없어요. 이 사회에 참여하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소유를 빼앗기기도 하고 등등. 그러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처참했던 고난의 과정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그렇게 표현해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버텨 냈기 때문에 기독교가 역사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거죠. 그게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버텨냈을지 참 신기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부끄러운 건 아니잖아요. 세계 종교 얘기도 하고 미국이나 유럽 이런데서 종교가, 뭐 이슬람 같은 종교는 약간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거 자체로 어려움을 당할 일이 없지만 초기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가 신흥 종교에요. 그리고 기독교가 믿고 있는 대상이 십자가에 죽은 자에요. 그리고 나이도 어려, 삼십대 초반이에요.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이러한 불이익을 감당하면서까지 그걸 견뎌 냈을지요. 그 안에 뭔가 있는 거예요. 그들의 신앙 경험이 말이죠.
네, 그런 것들을 바탕에 놓고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그 경험의 내용을 한 가지로 요약을 한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인거예요. 그리스도라는 것은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가 생명이다. 이런 경험이 그들에게 확실했던 거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 시대를 버틸 수 없습니다. 잠깐 추종하다가 시련이 오면 다 떠나지 이렇게 계속 붙어있을 수가 없었어요. 예, 이러한 어려움의 시절을 조금 지나왔어요. 그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35절에 너희들 그렇게 고난의 행군을 다 거쳤으니 이제 담대함을 버리지 마라. 받을 상이 크다, 큰 상을 얻게 된다. 여기서 상을 얻는다는 것은 당연히 생명을 얻는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희락과 평강,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그게 상인 거예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고요. 또 하나 필요한 게 있다고 하는데 36절에 보면 인내에요. 두 가지를 얘기했어요. 담대한 거하고 인내. 담대함만 갖고는 조금 안 되죠. 용기만 갖고는 힘들어요. 이게 한 번 내가 용기를 내갖고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서 해결되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계속 오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걸 버텨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 두 가지요. 담대함과 인내를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에게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구약을 인용하네요. 하박국이에요. 히브리서 10장은 구약을 세 군데 인용했습니다. 시편, 예레미야, 그 다음에 하박국이에요.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인용을 했습니다. 인용을 할 때 어떤 때는 히브리 성경을 인용도 하고 칠십인역도 하고. 이 칠십인역을 많이 했죠.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하박국의 유명한 구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이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39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거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정말 소중한 말씀이네요. 우리는 뒤로 물러가서 멸망당할 자가 아니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도망가는 거죠, 그래서 멸망당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고 했습니다. 영혼 구원, 보통 기독교에서 영혼 구원 얘기 많이 합니다. 이것도 오해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삶은 아무 쓸데없고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혼, 영은 생명의 총체성을 가리키는 거예요. 정말 생명의 근본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거는 영, 육이 둘로 갈라졌기 때문에 육은 썩어 문드러져도 되고 영만 구원 받으면 된다 이건 영지주의자들의 입장이고 기독교에서는 구약, 신약 통틀어서 이원론적으로 인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보면 우리 부활 때도 영혼만 부활된다고 하지 않고 몸이 부활된다고 하고 있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몸이라는 것도 단백질로 구성된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요. 여전히 생명의 본체, 실질은 하나님 안에 비밀로 감춰져 있는 것인데 그것이 혼, 영, 그런 쪽으로만이 아니라 아주 총체로써의 인간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몸으로 다시 부활하고, 여기서는 영혼의 구원함이라고 하는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다, 우리가 그렇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놀라운 히브리서 기자가 전해준 말씀 중에 한 장, 10장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의 가운데 요일, 수요일. 봄비가 하루 종일 이른 새벽부터 내린 정말 좋은 날, 이 지구의 비라는 현상에 우리가 감동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생명 현상에 찬양을 부르기도 하는 이러한 때, 이 수요일 저녁 더욱 놀랍게 이 말씀을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 히브리서 기자의 우리를 향한 권면이 우리의 신앙의 초석이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담대함과 인내를 허락하시어 주님 오실 때까지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잘 간수하고 확장 시킬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멘. 1절 보십시오.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게 번역이에요. 헬라어로부터 번역이 됐습니다. 헬라어는 철학적인 언어에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제논 등등 굵직굵직한 서양 철학의 대표자들이 다 헬라어로 자기의 철학을 논한 거예요. 이게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런데요. 이게 문자잖아요. 글이잖아요. 단어잖아요. 이 단어가 어떤 근본을 그대로 잘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안 됩니다. 물론 사물들은 가능하죠. 책이다, 하는 것들은 가능한데 철학적 언어들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했는데 그가 말하는 질료와 형상이 낱말로 다 해명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철학자들이 쓴 글, 혹은 성령도 마찬가지인데요. 성령이 오순절 강림 때 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령에 대한 표현들이 많이 있잖아요. 성령이라는 말 자체로 정말 성령을 다 담아 낼 수 있냐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됐다면 신학은 필요가 없어요. 확 들어나게 된다면. 삼위일체라고 하는 게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얘기할 때 핵심 개념이잖아요. 트리니티라고 하는 거, 이걸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확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잘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거예요. 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위격으로는 셋인데 본질로서는 하나라고 말하는 거 아니겠어요. 여기서 말한 위격이 뭐냐, 본질이 뭐냐를 알아야 삼위일체가 들어오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게 뭔지를 설명은 할 수는 있지만 아직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확인하기는 힘든 겁니다. 페르조나라고 하는 게 위격이라고 합니다. 이 페르조나에서는 분리된다, 우시우스라는 이 본질에서는 동일하다는 게 삼위일체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제가 괜히 빙빙 돌려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기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라고 번역이 됐잖아요. 실상이 뭐냐, 헬라어에서 번역된 거거든요. 지금 제가 헬라어를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게 번역이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번역이 돼야합니다. 정확한 말로 해야 되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에요. 루터의 번역을 제가 그대로 직역을 해서 다시 번역을 했습니다. 믿음은 희망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신뢰이고, 이 마틴 루터의 성경이 우리말 성경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 부분인데 실상이라고 하는 것을 루터는 분명한 신뢰라고 번역했어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죠. 그 다음에, 보지 못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증거라고 하는 단어를 루터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독일어로 그렇게 돼있어요. 이거는 하나의 예인데 성경의 세계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지금도 학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요. 그리고 번역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1절 아주 유명한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이렇게 하면서 그게 뭐냐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합니다. 설명하면서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여요. 여기 11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 이름, 그리고 그 사람들의 어떤 활동, 이런 것만 알아도 사실은 구약 성경을 다 꿰뚫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오는지 우리가 차차 보겠습니다.
그 실상이라고 하는 단어가 우리나라 말로 그렇게 되어 있지만 딱 그건 아니다를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거고요. 오히려 그것을 진리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있듯이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모든 진리가 경험되고 실현된다. 이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입니다. 전달이 됐죠. 그런데 이걸 막연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믿음이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안되지만 ‘믿습니다’ 해가지고 믿는 건 아닌 거예요. 그 믿음은 어떤 진리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근거가 없는 대상을 향해서 믿는 것은 아닌 거죠. 왜 하나님이 믿을 만한 분이냐는 것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고 그 근거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그게 아직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신뢰하는 거죠. 그럼 이제 그게 진리에 도달하는 바른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조금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부부 간이라도 좋고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좋습니다. 정말 상대방을 신뢰할 만하다는 그 관계가 정말 참되려면 그 사람을 믿어야 되는 거죠. 허황되게 믿는 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식이 지금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다고 하더라도 믿으면 그 길을 가게 되거든요. 그게 언젠가는 드러나죠. 아직까지는 묻혀있어서 그걸 믿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해 가는 영적인 태도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사람 관계도 그럴 진대요. 자식들도 그렇게 정말 믿어주면 그렇게 되죠. 그렇게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자꾸 우리 입장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하지만 어쨌든 믿음의 관계가 사람 사이에서도 그게 중요한데 하물며 하나님 관계에서야 두말할 것도 없죠. 그런 걸 바탕에 놓고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믿음의 본질, 실체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우선 1절에서 7절까지 나오는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아담은 제외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저렇게 두드러지는 인물들 세 사람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에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니고요. 이건 역사가 아니라, 보통 신학에서는 원역사라고 얘기합니다. 역사의 근원이 되는 역사, 모든 인류의 보편사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노아 홍수까지예요. 노아 홍수가 끝나고 바벨탑 사건까지겠죠. 다 홍수와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전체 보편적인 근거를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세 사람 인물 아벨, 에녹, 노아가 나옵니다. 재밌는 것은 이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과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나왔어요. 그걸 근거로 해서 그런지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고 판단을 하네요. 그러니까 아벨이 형 가인보다 믿음이 좋았다 그런 얘기입니다. 4절에 나와 있어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 근데 사실은 이게 실제로 창세기 안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아벨이 가인보다 믿음으로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은 없고 결과적으로 이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시면 되겠어요.
에녹 이야기. 에녹 이야기도 별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엘리야와 더불어서 성경퀴즈대회 많이 나왔던 이야기인데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 두 사람이 누구냐고 할 때 엘리야하고 에녹이거든요. 사실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건 그 당시의 문학적인 표현이고, 어떻게 두 사람이 죽지 않고 승천하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믿음이 그만큼 돈독하다는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거죠.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아담 이후로 죽음은 우리의 통과해야 될 문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이 에녹도 결국은 믿음으로 죽지 않고 옮겨졌다고 이야기해요. 근데 이건 사실적인 이야기라기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노아 이야기. 이것도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7절에 나왔어요. 노아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건 뭐냐. 홍수 사건이 아직 멀었잖아요. 대충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가 일어날 거다 약속이 있은 다음에 몇 년 후에 일어났죠? 120년 후 정도 될 겁니다. 상당히 후에요. 몇 년 후가 아니라 우리 지금 시대로 말하면 몇 세대, 30년을 한 세대라고 한다면, 고대 창세기의 나이 계산이 좀 다르긴 했습니다마는, 상당히 여러 세대가 흘러갈 정도의 기간이 지난 후에 홍수가 시작이 되거든요. 그 전까지는 노아가 감당해야할 짐은 무거웠던 거예요. 사람들이 볼 때 웃기는 이야기거든요. 노아가 산꼭대기 비슷한데 가서 방주 짓고 하는 게 전혀 근거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믿음을 갖고 120년 후의 어떤 사건을 확실한 것으로 자기가 받아들인 거죠. 예, 그런 점을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나와 있는 인물을 짚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면 된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말한 대상이 신뢰할만한 분이여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그거를 기다리고 뚫고 나가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거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죠. 오스틴 목사라는 사람이 긍정의 힘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맨 앞부분부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젊었을 때 어디 길을 가다보니까 멋진 전원주택이 있어서 하나님께 믿고 기도했더니 이루어지더라. 이걸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그 차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기독교 신앙이, 성서 신앙이 왜곡되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단락, 드디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세 번째 단락에서도 이어지는데 두 번째 단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8절에서 16절, 이것도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절,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는 바울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다는 그 주제요. 그게 이제 기독교 전체의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고 특별히 로마 카톨릭하고 비교할 때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 이야기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게 복음의 핵심인데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강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바울은 아브라함을 봐라.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 얘기를 했어요.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거론하는 핵심은 땅에 대한 거예요. 팔레스타인 가나안땅. 갈데아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다가, 거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인 거기서, 고향이 거기에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방, 바벨론 문명의, 메소포타미아, 바벨론 같은 지역이죠. 거기였어요. 아버지가 데라였고, 거기를 떠나라. 이주하는 여러 가지 과정들이 창세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었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될지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거기에 신뢰를 갖고 떠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아직 갈 바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미래의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아주 분명한 신뢰이고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진리이고 의심하지 않는 것. 그런 차원이라고 하는 거죠.
이걸 우리 기독교의 신앙생활과 연결해서 생각할 하면요. 아직 우리는 부활 실체가 아니잖아요. 약속으로 받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같이 부활의 생명으로 변한다는 약속을 받은 겁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걸 온전히 믿으면 믿음에 의해서, 혹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부활이 주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런 표현들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확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걸 극복하는 게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영성이기도 하고요. 아직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의 증거, 실체, 의심하지 않는 것, 진리로 경험하는 겁니다.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잘못하면 망상으로 떨어지는 이상한 집단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사이비 이단들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음으로 처리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에요. 우리가 믿고 있는 바의 그 내용이 온전하게 우리가 정말 신뢰를 하고 의심하지 않되 그것이 왜 근거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을 꾸준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자기 성찰이 없어요. 그냥 믿는다고 하는 자기 주관성에 빠져버린 겁니다. 자기 성찰을 하려면 역사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신학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그러한 것들이 같이 가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 주류는 계속해서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도 있었고 그러면서 점점 기독교 진리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깊어지게 됐습니다.
약속의 땅을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거를 믿고, 나왔고, 길을 갔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죠. 시간, 역사의 흐름은 어떤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의 과정이었어요. 여기서 과정이라고 해서 금방 차근차근 그대로 순서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오히려 약속이 아닌 거 아닌가하는 그런 회의와 시행착오가 많은 거예요. 그럴 때 방향을 잘 정해서 꾸준하게 일관성을 갖고 가야되죠.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경건 훈련도 필요하고요. 그런 점에서는 믿음의 동지들도 필요하고 같이 가는 도반들도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중요한 겁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명석하고 영성이 깊어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아닌 거예요. 같이 격려하고 더불어서 같이 성찰하고 그러한 공동체에 근거하여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같이 신앙에서 실제로 담아내야 되는 거죠. 네, 약속의 땅 그 문제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곁들여서 사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라가 믿음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구약성서는 남성 중심으로 많이 되어 있어요. 그 당시는 가부장적이어서 여자들은 종속변수로 등장이 됩니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했을 때 사라가 처음에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말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결과론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아까 아벨을 얘기할 때도 아벨이 정말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지는 창세기에서 말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니까 믿음으로 드렸다고 해석하는 것처럼 이 사라 이야기도 사라가 믿음이 있었다는 근거는 창세기에 없지만 그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다는 결과를 놓고 보면 믿음이 있었다고 보는 거죠. 세 번째 단락이요. 17절부터 22절까지입니다. 여기도 우리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17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절,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아멘, 여기까지요. 여기서 한 번 더 아브라함이 언급돼요. 족장들의 선봉장이라서 그렇습니다. 족장들은 대표적으로 네 명이에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까지입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족장 전승이라고 해요. 전승이란 말을 이해하시겠죠. 구전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얽힌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삭, 야곱, 요셉, 이런 것들이 사실은 독립적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창세기를 편집한 어떤 학자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다시 정리를 한 거예요. 성경에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되어있는데 그렇게 말 하냐. 이걸 신학적으로 연구하면 다 나옵니다. 그런 것까지는 일반 신자들이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가 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대표적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족장이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로 보면요 일반 역사하고 비슷한 거예요. 보통 인류 고대사를 따질 때 씨족사회가 있고 그 다음에 부족 사회가 있고 왕정이 있고 봉건주의 그 다음에 민주사회가 쭉 내려오잖아요. 어쩐 체재가요. 씨족사회가 성경에 보면 족장들 시대에요. 아브라함은 씨족이에요. 이스라엘 씨족의 우두머리들입니다. 씨족사회가 쭉 진행이 됐고요. 그 다음에 인류의 역사에서 부족 사회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은 말하자면 작은 군주에요. 씨족에서 확장된 거예요. 사사시대에 마지막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사이기도 하고 예언자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사무엘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어요. 부족사회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오는 그 길목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무엘 뒤에 왕정시대가 시작이 되잖아요. 사울이 첫 왕이 됐습니다만 사울을 왕으로 삼지 않습니다. 왕정시대의 특징은 세습이에요. 아들이 왕이 돼야 되요. 사울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왕이라고 할 수 없고요. 다윗이 실제 왕이고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조입니다. 다윗 왕조라고 하죠. 사실은 이스라엘에 다툼은 많았습니다. 그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데 성경에는 일관되게 흐름이 있긴 한데 그 안에서도 서로 싸우고 북왕조, 남왕조 분리 되고 그런데서 우리나라가 북한과 남한이 갈라져 있듯이 서로 정통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단락에 족장들이 나와요. 아브라함, 이삭이야기가 나와요. 이게 다 믿음으로 된 거예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간단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두 가지의 하나님 명령에 끼어있던 거예요. 하나는, 친자식 이삭이 후손이 된다는 분명한 약속이었어요. 또 하나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여기서 이게 어려운거죠. 이걸 그대로 순종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결국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에 다 충실한 거예요. 이삭을 바치라는 말에도 순종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후손이 이삭을 통해서 된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확실하게 믿은 거죠. 서로 충돌되는 사건인데 같이 믿은 거예요. 거기에 어떤 믿음을 통해서 결정적인 사건이 증거가 되고 확실성이 되고 그게 정말 모든 것의 근거, 진리다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오늘 이 시간에 믿음의 정체를 다 빠삭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이게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도피적으로 그냥 믿습니다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를 꿰뚫고 들어가는 영적인 태도에요. 이거는 근거가 없어서 종교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실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신비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참된 신뢰 안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될 바른 영적 태도입니다. 이런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이고요. 그게 정말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삭, 야곱, 에서, 쭉 얘기 나오지요. 그 다음 네 번째 단락, 23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여기는 모세가 주로 나와요. 이거는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23절 읽겠습니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절,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절,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여기 모세에 대한 이야기인데 거의 기계적으로 믿음으로 했다고 구절구절마다 강조를 했습니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모든 걸 다 믿음으로 기록을 했어요.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시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참된 것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 보세요. 믿음으로 쭉 나오죠. 23절, 24절, 27절, 28절, 29절, 30절, 31절, 라합까지 나오네요. 기생 라합. 여리고성을 칠 때 정탐꾼들을 도와줬던 여자입니다. 그건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스라엘 역사를 쭉 따라가면서 이 모든 게 다 믿음으로 일어났던 사건이다를 말하려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이 믿음은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어서 어디로 도피하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 과학은 확실한 거고, 실증적인 거고 이 믿음은 그렇지 않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계가 그렇게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얘기 잠깐 더 붙이면요.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 가나안 까지 들어가서 약속의 땅으로 거기서 정착하게 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어요. 그거는 계산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거기에 우연한 많은 사건들이 개입돼서 아브라함의 전체 역사에 드러나게 된 거죠. 우리는 굉장히 복잡하지 않습니까. 생각할 것도 많고요. 정치도 있고, 교육, 가정, 사회, 많은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골치 아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명이 완성되는가 하는, 여기에도 솔깃하고 저기에도 솔깃하고 많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면 안 되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이야기하는 고유한 삶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은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의 시각, 혹은 그러한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 계산해 내도 다 답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붙드는 것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거룩한 영적 상상력, 거룩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32절에서 40절입니다. 여기 사사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요. 여기도 교독 하실까요. 제가 32절을 읽겠습니다.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절,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절,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절,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이 11장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장엄해요. 어떻게 보면 큰 교향악단의 노래를 듣듯이 이 믿음의 세계를 아주 화려한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서 풀어가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공부를 위해서 몇 번 읽었어요. 많이 더 깨달았습니다. 어떻다고 하는 게. 목사도 나름대로 교회 전문가이고 신학 전문가인데 멈춰 있는 게 아니에요. 거의 종말까지 계속 열려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진보, 앞으로 신앙이 나가야 되는 거예요. 목사도 계속 수행적인, 구도적인 자세로 일을 해야겠죠. 오늘도 이렇게 읽으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 말씀이 깊은 어떤 것들을 전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엄한 필치로 그 내용을 담고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나오는 사람들,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나오네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가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온다면 다윗이 아니라 사무엘이 나와야 되죠. 순서대로 따진다면.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거든요. 그런데 순서가 좀 바뀌었어요. 아마 히브리서 기자가 사무엘을 거의 왕 수준으로 보는 건지요. 시대적으로 보자면 사무엘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사울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다윗이 나와야 되는 거죠. 여기서 순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지자들도 나와요. 이름은 나오지 않네요.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아까 제가 말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보세요. 씨족 사회, 족장들, 그 다음에 부족, 사사 시대, 그 다음 왕정 시대로 내려오는데, 예언자들이 주로 어느 때 활동을 했을까요. 당연히 왕정 시대죠. 그 전에는 사사들이 직접 그런 일들도 했으니까요. 왕정 시대에 들어오면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물론 이스라엘은 그래도 여전히 하나였지만, 그래도 좀 하는 역할이 분리되고 문명, 문화가 발달하면서 서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때가 왕정시대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생활을 했다. 믿음으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얘기 하면서요. 특별히 이 대목에서 강조하는 거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다고 얘기합니다. 선지자들도 고난 많이 당했어요. 다음 주가 종려주일이고요. 고난주간이라고도 합니다. 부활절 앞두고 있는 주일인데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 그게 지금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셨지. 그리고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으로써 여기에 오셔서 그렇게 감당하셔야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의 비천한 데에 오셔서 정말 낮은 데에 처하셨지, 케노시스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짐, 이런 것들을 굉장히 많이 들어서 알고 있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자연스러웠을까요? 그건 굉장히 앞, 뒤가 안 맞는 얘기예요. 메시야가 고난 받고 죽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은 그동안의 해석을 통해서 구약의 여러 가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야기나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가 충분히 해석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걸 알아듣는 거죠. 정말 예수님의 제자들하고 추종하던 사람들하고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건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난 받는 얘기가 쭉 나오잖아요. 결국 36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뭘 말하는 걸까요. 믿음으로 사사 역할을 하고 선지자 얘기 하고 다윗처럼 왕의 역할을 했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과 조롱을 받았다.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런 고난을 지금 받고 있다. 그러니 영적인 전통이 기독교인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거다.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초기 기독교인들은 믿음, 믿음이 유대인들과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온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받은 고난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어요. 시대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좀 괜찮을 때도 있었어요. 황제에 따라서 좀 난폭한 황제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조금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있으면 마이너리티를 공격함으로써 정치 위기를 헤쳐 나가지 않습니까. 로마 황제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정말 그 땐 어려웠고요. 그리고 로마 제도가, 기독교는 로마하고 뗄 수 없습니다. 로마 정치. 로마 황제, 황제주의죠 말하자면. 거기는 왕하고는 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가 굉장히 세련된 집단입니다. 왕이라고 하면 세습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황제들은 세습을 하지 않습니다. 원로원이나 이런데서 민주적으로 뽑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로마의 황제, 이 제도를 우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곳곳 관공서 이런데다가, 황제의 이름을 까먹었는데, 황제 상을 세워놓고 공무원 되는 사람들은 절하고 인사하고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거 안 하니까 로마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그런 등등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여러분 강의안을 좀 보시죠. 밑에서 마지막 넷째 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러한 믿음에 의해서 살던 사람들이 받은 고난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모범들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전수된다는 사실을 전한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인물들은 믿음을 통해서 참된, 이거는 나중에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쓴 거예요. 구약의 위대한 사람들, 믿음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약속된 것은 받지 못했다. 그 약속된 게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요. 부활이요.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그건 못 받았어요. 그들만 있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를 통해서 구약의 믿음이 완성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지자나 사사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도 그 약속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쭉 설명합니다. 재미있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서 나오는 믿음의 실체,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천년 전 히브리서 기자의 이 놀라운 신학 선언, 그리고 간증, 혹은 설교, 이것을 오늘 우리들이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부활 생명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더 깊어지고 그것을 이미 오늘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주님 이렇게 한 주간의 중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또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각각 여러 형편들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필요한데로 인도하시사 믿음의 길을 잘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12장
첫째 항목은 1절부터 11절까지예요. 징계와 연단입니다. 징계인데 그걸 통해서 연단이 되고 또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의 어떤 열매들이 맺혀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걸 1절부터 11절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12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그 이야기를 이제 에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에서와 쌍둥이 형제 야곱의 장자의 명분, 직분이 어떻게 가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고요. 그 다음 세 번째 항목은 18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다시 한 번 히브리서 기자의 특징이 나타나요. 구약에 있는 이야기를 잘 해주죠. 거기에 믿음도 있고 제사도 있고 속죄도 있고 다 있어요. 그러나 그것으로는 완전하지 않은 것들을 짚어요. 여기서도 시내산을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분명히 약속을 받았다. 모세의 십계명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살아가야할 이런저런 것들을 받았는데 그것은 불완전한 거죠.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 여기서 약속의 말씀이 정말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항목은 25절부터 29절까지예요.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시온산에서 주는 말씀이야말로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말씀이다. 세계를 완성하는 말씀이다. 시내산에서도 사람들이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이 시온산의 말씀에서는 더 근원적인 두려움, 떨림. 우리의 삶이 다 새로워져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것을 붙드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우리가 좀 살펴봅시다. 1절부터 11절까지 같이 교독으로 하겠는데요. 홀수니까 마지막 절은 함께 읽으면 되겠습니다.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절,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절,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 번 읽는 것으로는 확 들어오지 않죠. 이 히브리서에는 그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게 구약의 이런저런 어떤 상징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에요. 그래도 천천히 읽어보면 대체적으로 모를 거는 없습니다. 첫 번째 단락 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근거한 믿음의 전통을 바르게 받았어요. 그리고 믿음이 완성되는 겁니다. 구약에 나와 있는 여러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들마저 알지 못했던 언약을 우리는 알기에 그 믿음의 길을 잘 가야하는 거죠. 그런데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고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한 번 뜨거워져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이라고 하는 게 조수미가 몇 일 날에 콘서트를 여니까 티켓을 사가지고 가지고 있는 것, 이런 상태 아니잖아요. 그거는 과정입니다. 바울도 그런 것들을 여러 번 얘기했어요. 젖을 먹는 상태에 머물지 말고 장성하라,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하고요. 꾸준하게 가야되는 겁니다. 다른 인생살이도 비슷하잖아요. 노래를 배우는 사람도 초보자였다가 점점 좋아지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서도 어린아이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건 일종의 구도라고 할 수 있고 근본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단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번갯불에 맞아 갖고 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서, 하나하나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요. 거기서 당연히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불행한 일도 있고, 여러 가지 차원에서요. 그걸 감수해야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약간 착각하는 게 있어요. 자기에게 좀 어려운 일만 생기면 하나님한테 잘못한 게 있나 이런 쪽으로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죄책감 비슷하게 빠지게 됩니다. 자기의 삶 하나하나를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걸 죄의식 같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를 쓰고 있는 공동체에서도 신자들이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이 있고 이런저런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 사람은 어떻게 받아 들이냐면, 징계로 보았는데, 말은 징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벌 받는 건가 이런 차원에서의 징계는 아닙니다. 원어로 징계라는 뜻은 교육하다는 뜻이 더 강한 거예요. 가르치다, 교육하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의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는 어떤 과정으로 받아드린 겁니다. 그래서 여기 재밌는 표현이 있잖아요. 7절 이후에 쭉 나오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혼내거나 할 때 정말 친아들이니까 그렇게 하지 징계를 받지 않는 아들이 있다면 이거는 좋은 게 아니라 사생자, 친아들이 아닌 거라고 8절에 나와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데 그런 게 없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런 어려운 일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다. 그 정도까지 가고 있는 거죠.
이게 참 중요한 건데요. 우리는 늘 편하게 살려고만 하는데 이거는 나쁜 마음은 아니에요. 누구나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가기도 하는데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과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나를 더 올바른 뜻에 가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 혹은 가르침이 아니냐. 이런 쪽으로 가야죠. 그런데 그게 좀 위험성도 있긴 한데 그걸 잘 파악해야 되요. 내 삶은 좋다, 불행한 일이 있어도 만족스럽다.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고요. 정말 힘들죠. 그런 거를 책임질 걸 책임지고 자기가 마땅히 감당해야 될 것은 감당하면서 궁극적으로 이것이 내 신앙을 성장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단계까지 가는 게 참 필요합니다. 아주 성실하게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영적인 시각을 얘기하는 거죠. 거기 11절에 보면 그렇게 얘기합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실재로 그렇잖아요.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니까 어려움들이 사람들을 두 가지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어요. 내 인생이 왜 이래라든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이것이 계속 악순환이 되가지고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분노가 많게 되거든요. 공격적으로 변하고 그렇게 되면 징계라는 것이 나쁘게 영향을 미치는데 오늘 이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이런 쪽의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역경과 징계가 풍요롭게 끌고 가는 거죠. 그거를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신앙을 구도의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데 그걸 핵심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 그게 토대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인격적으로 된다든지, 마인드 콘트롤을 한다거나, 요즘 힐링 얘기하는데 심리적인 치료, 이런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은 세상의 방법이에요.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참고사항이에요. 그거는 건강을 위해서 산책을 한다든지 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거는 그냥 일반적인 그런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고유한 삶의 태도로 그러한 길을 가는 거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주목하는 것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 뭔지를 아는 것이고 그와의 일치를 경험하는 것이 핵심인 거죠. 그런데 이 번역, 2절을 보세요. 우리가 예수를 바라봐야 되는데, 2절 전반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게 번역이 좀 서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믿음의 주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주님 할 때 주란 말이에요. 믿음의 주요하니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주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보통 퀴리오스라고 얘기하는데 이거는 그게 아니라 아르케로 나가는 단어가 있어요.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토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믿음의 초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토대, 믿음의 출발점이요, 그리고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것은 믿음을 완성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이 뭔지를 우리들에게 정말 알게 해준 기초이고 믿음을 완성한 분이다. 그런 뜻입니다. 공동번역이 그걸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을 했어요.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보시면 제가 그걸 그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 바라보자. 이게 더 잘 들어오죠. 우리 말 번역은 약간 잘못된 거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는 것, 여기서부터 믿음의 길이 열리는 거죠. 제가 신학공부, 꼭 신학이라기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아야 되고 중요하다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일단 알아야 되잖아요. 그게 그냥 세례 받을 때 몇 가지 문답하는 거, 교회 생활하면서 익숙하게 하는 거, 이건 아니잖아요. 교회 생활은 생활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은 다른 거예요. 사실은 교회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몰라도 자기 열심을 가지고 할 수 있고 이런저런 동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신학 공부나 이런 쪽으로 준비가 되어야 되는 거죠. 많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단락, 12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이것도 교독하십시다.
12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절,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아멘, 여기 12절부터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너무 약한데 머물지 말고 반듯하게 신앙생활 좀 해라 그 얘기에요. 12절에 보면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힘을 내고 다리를 절듯이 그렇게 어그러뜨리지 않고 고침을 받고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가야되지 않냐하는 겁니다. 그런 충고를 하면서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네요. 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사람들과 더불어서 화평함과, 이걸 이루는 거죠, 그리고 거룩함을 따르라. 이거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하나님과 연결 되는 거죠. 여기서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화평, 평화,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누리는 거죠.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거는 아닙니다. 단순하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거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잖아요. 제가 자주자주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마는 기독교 신앙을 일반 상식적인 차원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걸 넘어서는 거예요. 상식은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거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물론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런저런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건 상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문장을 통해서 어떤 다른 실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라는 말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라기보다, 그거는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 해야 마땅한 것이고요. 이걸 좀 생각 해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날 목사의 설교나 성경공부, 이런 것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셔야 되는 거예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학생들이 대학교가서 교수나 이런 사람들에게서 많이 배우지 않습니다. 몇 년 동안 배우는 양은 굉장히 적어요. 배우는 게 뭐냐면 어떻게 학습하는가,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는가 방법론을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학문의 가장 중요한 관문을 박사학위로 얘기하잖아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굉장히 그런 쪽에서 우수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최소한도 이 부분에서 어떤 근거를 갖고 연구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러한 자격증정도에요. 그러니까 박사학위를 받아도 꾸준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이건 아무런 업적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용섭 목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다 옳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걸 제가 다 풀어 낼 수도 없고요. 다만 정용섭 목사가 과히 다른 길로 나가지 않고 그래도 비교적 바른 방향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해 주시겠죠? 어쨌든 그런 것을 통해서 성경을 이렇게 접근하는 구나. 그걸 통해 또 여러분들이 접근하는 방법을 익숙하게 하면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화평을 누려라, 평화를 누려라 할 때 이런 것들을 사이좋게 지내라는 구나 이렇게만 생각하면, 나쁜 건 아니지만 깊이로 들어간 건 아닙니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려면 먼저 화평이 뭔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샬롬, 에이레네라고 하는 헬라어, 그리고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화평이 뭐냐 이런 걸 알아야 이러한 문장들이 점점 넓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정말 이상한 사람하고 무조건 화평을 이루는 건 잘못된 거죠. 싸우지 않는 게 무조건 화평은 아닌 겁니다. 최소한의 문장으로 요약을 한다면, 이웃들과 생명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 이게 화평을 누리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악을 행하는 것, 이건 화평이 아닌 거죠. 생명이 아닌 거니까. 그래서 이런 문장들이 간단한 게 아닙니다. 또 다른 단어는 거룩함을 따르라.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습니다만 그래도 낱말 한마디만 보충하겠습니다. 보통 거룩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저 목사는 목소리부터 거룩해. 신학교 다닐 때 그런 얘기 많이 했습니다. 부흥 강사들이 오면 홀리 보이스라고 해서 목소리를 탁하게 해서 은혜 끼치는 거 있지 않습니까. 홀리 보이스라고 거룩한 목소리, 태도도 근엄한 이런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말을 세련되게 잘 한다거나 도덕적인 우월감이 있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그게 구별된 거죠. 하기오스라는 단어를 쓰거든요. 저 사람이 몇 평 아파트에 사냐, 이걸로 구별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적인 지휘, 이런 게 아니라 기독교에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게 바로 구별된 것, 거룩한 것이죠.
여기 에서가 인용이 됐어요. 에서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자기 장자 명분을 팔았다는 이야기요.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장자라는 명분을 소홀하게 생각한 거죠. 그거 동생한테 팔았다고 해서 팔리냐, 배고프니까 먼저 해결하고 그냥 잘하면 되겠지. 너무 그것에 대해 의식이 없었죠. 그래서 결국 그 친구는 장자의 명분을 잃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안 되더라. 기회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그런 기회가 오기 힘든 거죠. 일반적인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그게 우리가 실수 한 번 하면 다시 용서받지 못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비유와 같을 거예요. 작은 거 충성하는 사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작은 하나하나, 달란트 자체의 액수는 큽니다만, 그런 기회에 성실하고 그거를 진지하게 자기 삶의 무게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대충 되겠지 이렇게 되면 나중에 정말 값진 것에 대한 시각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상에서 그런 하나님의 관계에 정직하고 진지하지 못하면 그게 결국 중요한 것들을 다 놓치게 됩니다. 이제 에서가 그런 사람의 전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음 세 번째 단락, 18절에서 24절까지 마지막절은 같이 읽어야 되겠네요. 교독하겠습니다.
18절,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절,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절,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절,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절,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멘, 예 여기도 아주 복잡합니다. 핵심적으로 이 단락에서는 두 개의 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있었던 산이고요. 하나는 역사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으로 그것과 비교돼서 나오는 산입니다. 앞에 산은 시내산이고 뒤에 산은 시온산이에요. 시내산에서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었어요. 거기 시내산에서 임했던 하나님 임재의 특징이 일곱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불, 산, 침침함, 흑암, 폭풍, 나팔소리, 말소리, 이런 것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경험된 거죠. 루돌프 오토가 쓴 책의 주제도 이거하고 많이 연결돼서 설명되고 있어요. 누미노제의 경험이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시내산만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득한 역사와 미래의 자기 자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막막함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표현으로는 현묘, 한자로 하면요. 현묘, 어두운 묘함, 그러한 경험들을 살면서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조금 더 저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을 더 느껴요. 옛날에도 그랬습니다만, 지금 세상에서 나에게 보이는 것들이 다 형체가 변하잖아요. 고정돼 있는 게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한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저에게 조금 더 절실하게 생각이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과일 모양이었다가 꽃 모양이었다가 배가 되고 계속 변하잖아요. 무심하게 우리가 보긴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와 같은 거죠. 여기 안경집이 있어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는데 플라스틱의 재료는 석유에서 왔잖아요. 석유에서 모양이 바뀐 거예요. 석유는 아주 옛날에 수백만 년 전에 나무가 땅속에 묻혔다가 변화된 거 아닙니까. 나무였다가 석유 덩어리 원액이었다가 그게 제조돼갖고 이렇게 플라스틱 통이 되고요. 이렇듯 이 세계가, 우리는 너무 천천히 변하니까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걸 짧게 축소시켜서 보게 되면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런 세계에요. 이게 뭔가,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특별히 놀랄 것은 없는데 그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고 큰 변화 속에서 나는 과연 뭔가, 나도 점 하나로 있다가 변하는 큰 흐름 속에 하나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생각하면 현묘, 이 시간, 역사, 그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님을 느끼게 되죠. 말이 좀 옆으로 갔습니다만 시내산에서 고대 모세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그렇게 일곱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것들을 언어로 표현한 겁니다.
그것에 반해서 기독교인들은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22절에 보시면 나와요. 구약에서는 시내산이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임재이긴 했으나,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게 아니고요. 22절에 보면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까지 기독교인들이 왔다, 정말 거기에 딱 들어왔다고 얘기합니다. 이것도 우리말 성경이 좀 까다로워서 공동번역으로 제가 인용했습니다. 거기 한 번 보십시오. 강의 요약문,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굉장히 종교적 상징이죠. 그러나 막연한 게 아니라 리얼리티가 있는 거예요.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신학이고 영성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연한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있고, 이런 것들이 정말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시나요, 리얼하게 느껴지시나요. 하늘의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계시고 아벨의 피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 피가 있습니다. 참 놀라운 표현들입니다. 이 의미를 잘 모르면 구약의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 거구나 정도로 들어올 거고 더 깊숙이 들어가면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역동성을 경험할 수 있어요. 어쩌면 이 22절에서 24절만 갖고도 책 한 권을 충분히 쓸 만한 주제가 나올 겁니다. 하나하나가 다 무게가 있는 거거든요.
예를 들자면, 천사 문제만하더라도, 천사라고 하고 잔치라고 하고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계속된 문헌, 전승들, 그들의 어떤 생각들과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초기 기독교가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십자가 재림, 이런 것과 연관해서 생각을 했는지 그런 것도 우리가 촘촘히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거죠. 이러한 공부들을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많이 해야 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게 아니라 기초적인 것이 안 된 상태에서 졸업을 많이 해요. 성서를 해석할 만한 준비들을 갖추지 못하고 나와서 조금 아쉽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목회 현장에서 본인들이 열심을 내서 극복을 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고요. 그래도 잘 하는 젊은 친구들을 잘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우리가 약속한데서 5분정도 남았네요. 마지막 단락을 보겠습니다. 25절에서 29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25절,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절,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절,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아멘, 여기 진동한다는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오죠. 진동, 흔들린다. 기본 토대가 흔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고대 이스라엘의 사도 중에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도의 제자일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익명의 저자가 쓴 건데, 이 사람들이야 현대 물리학을 전혀 몰랐겠죠. 그래도 현대 물리학이 풀어주는 것들을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의 영적 통찰력이 있습니다. 진동한다, 세계가 흔들린다는 게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 지구가 계속 땅이 움직인다는 것 아시죠. 판 운동이라고 하는데 지구가 공처럼 생겼잖아요. 이 껍질이 계속 움직여요.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하고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아니라 지구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전문적인 용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뜨거운 불덩어리들이 쇳물처럼 녹아 있어서 계속 움직이다가 약한 지층이 있으면 뚫고 나오는데 그게 화산입니다. 이걸 조금 더 나가게 되면 지금 우리가 시간과 공간으로 세계를 경험하잖아요. 산이 있고 나무가 있는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질 수도 있어요.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변화되는 거죠. 신앙적으로 얘기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죠. 그 세계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완전한 그 변화를 가리켜서 진동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만 미래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우리는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등의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으로 결정할 수 없는 그러한 미래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인 거죠.
제 이야기가 좀 비약이 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비약이라도 여러분들이 알아서 들이시길 바라요. 그럼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하고 전혀 상관없다면 거기가 뭐가 좋다는 거냐, 가봐야 별 볼일 없겠네, 사실은 가는 게 아니라 맞이하는 거지만,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잖아요. 그 생각은 신앙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 고 있는 좋은 것을 축소시켜야 돼요. 하나님의 자유에 그 나라를 맡겨야지 내 자유로 하나님을 속박하려고 하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수 없는, 당연히 못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이루시는 자유에 우리가 온전히 신뢰를 해야죠. 그게 가능합니다. 그러면 자유, 평화, 아까 본문에서 얘기한 거룩함,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거기에 삶을 맡기게 되는 거죠.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키워드,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거기에 일치가 돼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모든 것들이 다 저주받은 상태까지 내려가는 거잖아요. 부활은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라는 분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거죠. 거기에 내 삶이 실질적으로 일치가 된다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 걱정을 안 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자유로우심,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에 나를 온전히 의존시키는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 여기 마지막 구절에 진동한다는 말만 제가 간단히 설명한 거예요. 그 단락을 강의 요약문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내산에서의 말씀과 시온산에서의 말씀을 비교해서 시온산에서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설명한다. 시내산은 땅이고 시온산은 하늘이다. 하늘에서의 말씀은 모든 세상을 진동시킨다. 그러나 진동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영원히 지킨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우리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의 나라이다. 모든 것은 흔들리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나라,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그러한 신앙의 세계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영속적으로 하나님이 지키신다. 27일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흔드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히브리서 기자가 우주론적인 거대한 생각을 갖고 기록하고 있네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고난 주간의 가운데 수요일 저녁, 우리 믿음의 식구들, 소수이지만 함께 모여서 이천 년 전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문자로 전해준 히브리서 말씀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비밀이 담겨 있어서 읽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꿀송이 보다 더 달다는 그러한 표현처럼 이 말씀이 우리를 근본에서 살리심을 믿습니다. 이제 고난 주간 앞으로 며칠, 잘 주님 안에서 지내고 부활절 아침 기쁨으로 다시 만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13장
히브리서는 신약성서 중에서도 앞에서 많이 우리가 접하는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기도 해서 약간 뒤로 쳐지는 성경이었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에 같이 읽으니까 여러 가지로 좋았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고요. 1절부터 25절까지 있습니다. 일단 이 말씀을 교독해서 전체 읽고 천천히 전체 13장까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설명을 하고 듣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절,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절,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절,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절,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절,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여기 여러 가지 모양이 가지각색이에요. 주제가 앞에 하고는 좀 다르게 여러 가지 분산되어 있습니다.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고요. 특별히 여기에 13장, 마무리를 하면서 일부러 그걸 강조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좀 생각해라는 게 있네요. 지금의 목사를 가리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하여튼 교회 공동체를 끌어가는, 말씀을 전하거나 목회를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말도 있고 생각 좀 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두고 ‘거봐라 성경에 있지 않냐, 교회 목사에게 순종해라’ 이렇게 말하면 좀 곤란한 겁니다. 모든 말씀이라는 것은 상황이 있기 때문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이거를 일반화 시키면 성경을 좀 오해하게 되는 거죠. 이 말씀을 따다가 무조건 순종하라고 억압적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아마 히브리서 공동체의 정확한 배경이 뭔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만 여기 지도자들을 생각해봐라 반복해서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거기에 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러한 풍토나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 질서가 허물어지고 덕스럽게 운영이 되지 않은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건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네, 그런 것들이 있어요. 여기 본문에 해당하면 조금 더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13장에서는 실제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어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잘 해야 되냐. 그러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 이런 것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잖아요.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의 일치, 종말에 대한 희망을 갖잖아요. 기본적인 신앙이잖아요. 그걸 전문적인 신앙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날 제가 서울에 예배 인도 하러갈 때 예배 마치고 신학공부를 해요. 지난 공부 주제가 칭의와 성화였어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려놨으니까 보십시오. 거기서 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다른 건 빼고 하나만 얘기할게요. 칭의, 이걸 굉장히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거든요. 예수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된다, 그렇게만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이론, 신학 개념들은 이론이기 전에 실체에요. 리얼리티에요. 그러니까 성서 기자들도 그렇고요. 신학자들도 그렇고 이론을 잘 계산해갖고 어떤 상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뭐다, 신앙이 뭐다를 말한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신앙의 실체를 경험한 거예요. 그걸 합리적으로 설명한 게 신학입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정말 그 신앙의 능력 안에 들어간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 이론적인 설명인 거예요.
그런데 이게 기독교인들이 이론에만 떨어져서 그게 어떤 건지를 조금 눈치를 못 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칭의의 능력, 역동성, 그거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 세상에서는 어떻습니까. 똑똑해야 인정받죠. 돈이 있어야 이 사람 괜찮다 인정받죠. 스펙이 있어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다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가 돌아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을 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다는 사실을 자기가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된다면 능력 있게 사는 거죠. 보세요. 시시한 사람들이 인정하냐, 아니냐에 우리는 너무 예민하게 작용을 하는데 하나님이 인정한다, 너 의롭다, 칭의가 그런 말이니까요. 그 인정한다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날 인정하냐, 아니냐는 정말 작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어떤 학교에 한 반이 있습니다. 거기 한 학생이 있어요. 그 학생을 자기 친구들이 조금 소홀하게 대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얘를 인정해 주는 거예요. 약간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이 인정해 주면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칭의라고 하는 거는 그냥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완성하실 그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자기의 삶, 자기의 인식, 자기의 영혼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정말 자유로울 수 있는 거죠. 이건 자기 합리화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실질적인 깨달음이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험이기도 합니다.
조금 말이 옆으로 지나갔네요. 오늘 본문하고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닌데 여기 신앙생활하고 실제 삶이 어떻게 연결 되나를 설명하려다 보니까 칭의가 뭐냐를 말씀드린 겁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칭의와 예수님과의 관계. 그러나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거기에 걸 맞는 실제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그걸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칭의와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실제적으로 삶이 변화되는 거잖아요. 이 두 관계가 어떤 거냐를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논의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3절 사이에 세 가지 삶의 중요한 태도를 가르쳐요. 세 가지예요. 형제 사랑, 손님 접대, 갇힌 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될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거죠. 형제 사랑, 손님 대접, 갇힌 자라고 하는 것, 이것도 일일이 다 어떤 거냐를 꼼꼼히 살피려면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정리를 하면 되겠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실질적으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에 받아들여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 시각으로 이웃들을 대하게 되거든요. 나그네, 손님들, 형제, 그리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어려움을 당한 갇힌 자들을 생각하고 또 그런 삶들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힘을 나눠야겠죠.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 도덕주의는 아니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살되 그건 단순히 윤리학은 아니 겁니다. 그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잖아요. 말하자면 휴머니즘이죠. 그건 아름다운 거예요. 기독교인이 휴머니즘적으로 사는 건 당연하되 기독교 신앙이 휴머니즘은 아닌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잘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4절. 여기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가르침이죠. 음행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사실은 한, 두 마디 갖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게 일종의 성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가정 윤리라든지. 그런 것들이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해요.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 시작할 때 나온 문제들은 로마 윤리하고 굉장히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조금 구분해서 봐야하는데 너무 전문적인 거라서 사실은 일반 신자들이 그걸 다 구분해서 보기는 힘듭니다. 이런 거예요.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들을 보면 성령의 열매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기독교적이라고 보다도 사실은 로마의 윤리적인 가치, 용어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관용에서 사랑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구절을 갖다가 기독교인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음적이라고 설교를 하면 조금 부족한 거예요. 관용적으로 살아야죠. 그러나 그건 일반 윤리이고 다 좋은 거예요.
성경 내용이 어떤 사실을 얘기하잖아요. 어떤 때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사실을 지칭, 가리킬 때가 있는 거예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어떠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사실이 말하려고 하는 다른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를 기독교적인 신앙의 본질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가 욕을 먹기도 하고 혹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뭔가 혼란스러워서 ‘예수 믿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교회 안에서 싸우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지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위기를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런 걸로만 충분하지 않으면 율법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하나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일일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르치듯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책 하루에 얼마나 읽어야 돼’ 이런 것처럼 실질적으로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냐 그러한 요구가 교회 안에서 나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지잖아요. 그런 걸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쭉 이야기한 다음에 이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이런 것들을 언급함으로써 기독교인 공동체가 복음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거기에만 집중하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부도덕한 일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소극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러한 열매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갈라디아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뭐냐를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좀 까다롭죠. 일반 신자들이 성전 읽고서 그런 것을 다 분석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제가 4절을 설명하다가 옆으로 얘기가 나왔는데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은 성윤리, 로마 시대가 굉장히 혼탁했죠.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빴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는데, 성도라는 뜻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성윤리, 그런데 좀 끼지 마라 그런 얘기인 거죠. 그 당시에는 매음굴, 창녀촌이라고 하나요. 굉장히 일반화 됐습니다. 그래서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났어요. 아기들을 로마 광장에다 버리면 소위 말해서 포주들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들이 끼워서 다시 윤락가에 보내고요.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기들은 모르지만 남자가 윤락가의 여자 대상이 자기의 딸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동성애 이런 것도 굉장히 파괴적인 일이 있었어요. 원래는 헬라 시대 때는 좋은 거였어요. 이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플라토닉러브, 이게 동성애였어요. 그 당시는 결혼해서 남, 여 간의 관계가 애기 낳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정말 순수한 사랑은 애기 낳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거다. 플라톤 시대에 플라토닉러브라고 해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동성애였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문헌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그게 로마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성애가 굉장히 타락한 방식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점점 문란하게 돼서 바울이 경고 한 거죠. 그게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성경 말씀은 다 배경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촘촘히 따지지 않고 그것만 가져다가 ‘봐라! 이렇게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5절에서 6절.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나왔네요.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가 않죠. 기독교인들도 이런 점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사랑한다.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둘 다 진정한 사랑은 못 되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운명을 맡기는 건데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하고 돈에게 맡기는 것,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두 가지는 하지 못합니다. 이게 지금의 자본주의, 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속에서,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 속에서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근거라는 걸 더 철저하게 깨닫는 것,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서 개인이 그런 것을 다 못하니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도록 달라져야 돼요. 정치적인 것들도 필요합니다. 복지 문제도 우리의 현황이 되고 있는데 약간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국가차원에서 보장 해준다면 그렇게 돈에 많이 치우치지는 않을 수 있거든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목회 활동이 점점 열악해져서요. 목사의 품위,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에게 품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태도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목회하기가 쉽지 않아요. 젊은 목회자에게 더 그렇습니다. 부목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일 년 뒤에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학생회, 청년회, 어느 교구를 맡았던지 그 동안 얼마나 성정을 시켰는지를 평가 받고요.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인 추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온순한 목사들은 일반교회 부목사로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면 자기 뜻대로 양심껏 하려면 담임목사를 가야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갈 수가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상태인데다가 신학생들은 계속 많이 나오고요.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데 공급은 계속 되고 있으니까 불균형, 이게 목사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고 교회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다 보니까 자기를 비하하게 되거나 과욕을 많이 부리게 되고 총체적으로 악순환 속에 빠져있습니다. 하여튼 품위인데 복지가 최소한 보장이 되면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겨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두 가지 방법이에요. 기독교인들이 똑바로 자기의 신앙적인 인식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생명이 확보된다는 것을 정말 깊이 깨닫는 것하고 그 다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하도록 서로 노력해 나가는 것. 같이 좀 병행해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절, 8절. 드디어 여기 나오네요. 교회 지도자들을 좀 생각해라. 7절에 나오죠. 너희를 인도하던 자를 생각해라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늘날하고 상황이 다르게 순교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 다음 9절. 이것도 여러 가지 교훈 중에 하나에요. 영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9절에 재미있는 게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으로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죠. 이거는 음식 규정, ‘이걸 먹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 그러한 율법적인 규정을 잘 지켜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려는 그러한 것들. 그건 별 거 아니다. 그런 것들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 한다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0절에서 16절. 이건 조금 복잡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학자들도 이게 정확한 뜻이 뭔가를 다 풀지 못했어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난해 구절이라고 할 수 있어요.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게 무슨 비유, 상징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냥 제가 하나의 틀로만, 전체적인 그림으로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소유한다거나 거기 가까이 갈 수 있다거나 그렇게 되지 못 한다. 그건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그 뒤에서 조금씩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하고 있어요. 12절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여기서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골고다인데 예루살렘성 밖이라는 뜻입니다. 성이라면 예루살렘 성이죠. 안에서 십자가 달리신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셔서 고난 받으셨어요.
13절,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우리도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절대적인 도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요. 그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 골고다죠, 성문 밖에 있는 그거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는 그런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두루두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14절에서 좀 더 정확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영구한 도성, 영원한 성읍, 하나님 나라, 그런 건 없다. 어디에도 없다.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예루살렘 도시도 아니다. 물론 로마 제국, 황제도 아니다. 그건 장차온다. 새 예루살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겁니다.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에도 제가 지금 인용한대로 새 예루살렘 그 얘기가 나오거든요. 새 하늘과 새 땅 얘기 하거든요. 온다고 하는 것이 실감이 나나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표현들 말입니다. 그건 바깥에서 주어진다는 뜻인데 우주 공간 어디에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힘든 게 우리는 세계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살아서 그렇습니다. 이 나무 책상입니다. 우리는 그냥 나무 책상으로만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하늘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질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게 하늘이 우리에게 오는 거죠. 그런데 제가 그걸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아무도 묘사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하여튼 그런 정도까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변화될 때를 기다려야 되는데, 부활도 그런 거예요. 저도 전적으로 변화 됐으면 좋겠어요. 현대와 같은 상태, 이런 거로는 영원한 생명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그러나 현재 이 몸도 중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그 때를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이 나네요. 오늘 입관 예배 갔다가 제가 성경을 한 군데 읽었어요. 간단하게 설교를 했는데 그 부분이 기억이 또 나네요. 지금 전적인 변화를 얘기하다 보니까요.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4절,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탄식이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이상하게 모든 좋은 일들은 짐하고 같이 옵니다. 모든 게 그래요. 그래서 이 삶은 숙제를 푸는, 짐을 진 것과 같은데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게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죽을 거잖아요. 생명에 삼킨바 된다. 우리가 없이 지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완전히 초월하는 게 아니라, 생명으로 삼킨바 되는, 그 때를 우리가 바란다는 거죠. 바로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질적인 변화, 그게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고요. 그걸 우리가 기다리고 사는 거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10절에서 16절이라고 쓴 대목의 밑에 있습니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15절이 가리키는 찬송의 제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16절이 말하는 선한 행위이다. 재밌게 16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것을 제사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일상의 제사죠. 앞에 있는 거는 실제 우리가 예배드리는 제사고요. 제사라기보다도 찬양이죠. 두 번째 선함과 함께 나눔, 이런 것들은 일상의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전체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와 연관되는 거예요. 신앙의 중심과 하나님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그거로만 끝나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성화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17절에서 19절. 여기에 두 번째로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충고가 나오네요. 재밌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순종하라, 복종하라' 그런 얘기도 하고요. 그 다음 좀 내려오면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런 일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억지로 하게 하지 말라고 얘기했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밑줄 쳐 놓고 잘 읽어두세요. 그리고 저를 잘 봐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늘 즐겁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18절에 보면,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도 교회 지도자들이죠. 우리가 바로 지도자들입니다. 그 다음, 20절에서 21절까지. 여기는 축복입니다. 축복기도에요. 내용이 재밌습니다.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 쭉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5절입니다. 마지막 인사 몇 마디에요. 22절에 보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여태까지 권면한 거예요.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그런데 간단한 건 아니네요. 13장까지 굉장히 길게 썼는데 간단하게 썼다고 했을까 모르겠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가 봅니다. 줄이고 줄여서 썼나보네요.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은 것을 너희가 알라, 감옥에 같이 있다가 풀려났나 봐요. 이런 걸 보면 바울이 이 편지를 썼다는 암시이기도 하고 아니면 바울과 아주 가깝게 아는 어떤 사람일수도 있고요. 디모데하고 같이 일 한, 감옥에까지 같이 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 여기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또 나오네요. 문안하라, 그렇게 얘기했고요.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지금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방문을 받았나 봐요. 이달리야, 이탈리아죠. 로마 교인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지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한 마디만 우리가 잘 생각해도 우리 신앙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 실제 삶에 역동성이 생겨요. 이거는 사회에서 심리 치료 받고, 힐링 치료 받는 거하고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걸 자꾸 놓치기 때문에 다른 데 한눈을 파는 거죠. 은혜라고 하는 것, 받았다고 하는 것, 선물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은혜 한 마디만 가지고도 사실은 많은 이야기가 가능한 거예요. 그냥 받았다고 하는 것, 너무 크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 사실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세상은 다 주고 받고 하는 차원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 이거를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13주에 걸쳐서 히브리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천년 전, 전혀 우리와 상관없던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던 이들의 문서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특별히 우리 대구샘터교회, 수요일 성경 공부하는 이 시간까지,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이 시간까지 내려왔는지 그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13주 동안 같이 공부한 히브리서의 그 영적인 깊이, 그러한 리얼리티, 우리의 신앙의 긴 발걸음에 좋은 디딤돌이 되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우리 다시 또 새롭게 다음 주부터 시작하게 될 욥기서 공부할 때도 진리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