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대한 거룩한 의문과 성경적 신앙 회복을 위하여


존 파이퍼 목사님은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민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p.131)면서, “성경에서 분명한 신학적 불일치를 보고, 그것이 통일된 진리로 다가올 때까지 밤낮으로 연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지혜 속으로 우리를 깊이 인도하는 것은 없다.”(p.135)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는 이처럼 분명한 불일치가 수백 개가 넘으며 이런 것들을 보고 연구하면서 통일성의 뿌리를 찾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에는 심오하고 놀라운 해답이 있다.”(p. 135-136)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티모시 존슨 목사님은 「의문, 진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널리 알려진 기독교 관련 내용들에 대한 의문을 통해 진정한 믿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소개하면서, 결국 실천신앙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심을 통해 믿음이 정화될 수도 있다.”(p. 18).
“나는 신학자들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도그마를 아무런 생각없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의 기초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22).

마이클 프로스트 목사님(교수)은 「일상, 하나님의 신비」라는 책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비록 책의 주제에 연관된 내용은 아니지만, ‘의문’이라는 관점에서 도움이 되는 표현이 있어 인용합니다.
“…더 현실적이고 참된 ‘두 번 태어난’ 믿음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상실이라는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상실감, 문제제기, 회의와 같은 것은 참된 믿음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과정인데, 그런 신앙은 남에게서 그냥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 터득한 믿음이다.
마치 뼈가 부러졌다가 아문 곳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이런 믿음은 믿음의 상실에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강한 믿음이라 볼 수 있다. 믿음의 상실에도 결국 살아남는 믿음이리라.”(p. 158).

성경을 깊이 이해하려는 성도라면 성경의 난제에 관한 의문과정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비록 괴로운 과정일망정 힘닿는 데까지 고민해 봅니다. 때론 명확한 이해나 결론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자체를 통해 보다 많은 보화를 발견하곤 합니다.

성경에 대해 거룩한 의문을 지니는 것은 결코 불경스러운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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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을 치라(출애굽기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반석을 명하라(민수기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

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나?
첫번째 반석은 깨져야 한다.
그러나 두번째 반석은 깨지면 안 된다.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라(누가복음 5:4-6)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요한복음 21:6)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첫 번째 돌 판과 두 번째 돌판(출애굽기 31:18, 34:1)

십계명 돌판 설교말씀 중에서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십계명 돌판이 있는데 첫 번째 돌판은 깨지고 다시 모세가 만들어 시내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은 깨지지 않은 두 번째 돌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돌 판은 율법을 상징
두 번째 돌 판은 복음을 상징

나는 첫 언약의 백성인가?
아니면 새 언약의 백성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고 이곳에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데 십계명과 성막의 식양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육적인 금식을 했지만 영적으로는 풍성한 양식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을 하셨습니다.

이때에 사람이 양식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육의 양식으로 영의 것을 채우려고 하면 절대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나의 영혼을 채워야 만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은혜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생각들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휩싸이지 않고 영적인 하늘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첫 번째 돌 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돌 판은 깨지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두 번째 돌 판을 직접 모세에게 만들어서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돌 판들을 통해서 율법과 복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첫 언약과 새 언약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첫 번째 돌 판의 신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돌 판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내가 어떤 언약 백성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말씀을 통하여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돌 판(출애굽기 31: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 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모세와 40일 동안 함께 하시면서 주셨습니다.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시련, 훈련, 결단, 기다림,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말씀의 훈련을 통하여 인내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슨 인내입니까?
육적인 배고픔의 인내입니다.
40일 동안 모세는 육적으로 금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의 훈련이 있어야 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호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이 끝나고 난 후에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는 공생애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이유

성경을 읽는 두 가지 길 : 문자와 영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이 적힌 돌판을 갖고 내려오다가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돌판을 깨뜨리는 대목이 나온다.
분노 때문일까?
실망 때문일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써주신 돌판을 깨뜨린 것은 너무 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돌판을 깨뜨린 모세의 행위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모세의 이 돌발적인 행위에 하나님도 동의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을 때 반석을 치므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때는 모세의 분노에 대해서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것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돌에 새겨진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 속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데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는 사람에게 글자나 그것을 새긴 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판에 새긴 글자 속에 담긴 영적인 은총은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차지할 수 있다.
영적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 글자나 그것을 새긴 돌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오히려 맹목적인 신앙의 우상이 될 뿐이다.
우상은 깨뜨려야 하므로 모세는 그것을 알고 미리 돌판을 깨드린 것이 아닐까?

▲ 1887년 신학 전체를 번역한 예수셩교젼셔. (대한성서공회 자료실)ⓒ복음과상황 신철민
이 문제를 어거스틴은 “문자와 영에 관하여”(On the Letter and Spirit)란 논문에서 다루었다. 그는 ‘죽이는 문자’(Letter that kill)와 ‘살리는 영’(Spirit that give life)이란 개념을 가지고 율법과 복음을 설명했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은 이렇다.
기록된 문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허튼 소리(Nonsense)만 될 것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영적인 지각 능력을 가지고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아 내적인 삶을 영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육적인 생각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법도 두 가지다.
문자로(in a literal sense) 읽는 것영으로(by spiritual intelligence) 읽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구약의 아가서를 문자로 읽으면 ‘인간의 탐욕스런 애욕’만 보지만 영으로 읽으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발견한다고 하였다.

모세의 율법도 처음엔 영으로 기록된 문자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것이 더 이상 영적인 진리를 담을 수 없는 육적인 문자로 우상처럼 군림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것을 ‘깨뜨리셨다.’

그리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 새 계명을 주셨다.
그런데 그 새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모세의 율법 속에 담겨져 있던, 그러나 문자만 숭상하던 세대들에 의해 그 의미와 능력을 상실했던, 문자 속에 갇혀있던 영이었다.

문자 속에 갇힌 영을 해방하는 것, 그것을 교회사에서 종교개혁이라 서술한다.
그래서 개혁은 언제나 번역을 수반한다.

성경이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어거스틴의 중세가 열렸고, 라틴어에 갇혔던 말씀이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면서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시대가 열렸다.

옛 문자에 갇혔던 영이 해방되어 새 문자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개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 점은 한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초대 교인들이 성경 읽던 법 : 외우며 실천하기

한글 성경이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은 개척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3년 전인 1882년이었다. 그 해에 만주 봉천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 그리고 의주 출신 교인들이 번역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인쇄되어 은밀하게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1885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이수정이 번역·인쇄한 마가복음을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가지고 내한하였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 역사는 성경을 바탕으로, 성경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었다. 사람보다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성경 중심적’(Bible-centric) 사고와 문화가 형성된 것은 당연하였다.

▲ 한국최초의 성경 예수셩교젼셔.(대한성서공회 자료실)ⓒ복음과상황 신철민

한국 초대 교인들의 독특한 ‘성경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 사경회(査經會)다. 매년 농한기(1~2월) 짧게는 한 주일 길게는 보름씩 교인들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수백, 수천 명 교인들이 양식과 이불 짐을 싸 들고 수백 리 길을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선교사들은 사경회를 ‘한국의 유월절’(Passover of Korea)이라 하였다. 지금은 그 내용과 형식이 많이 바뀌었으나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사경회는 성경 통독과 암송을 위주로 꾸며졌다. 초대 교인들은 서당에서 경전(經典) 공부하던 식으로 성경 공부를 하였다. 서당에서 암기 위주로 공부하듯 사경회도 성경을 죽죽 읽어나가며 암송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사경회 마지막 날은 성경 암송 순서로 꾸며졌다. 1906년 겨울, 개성지방 사경회에 참석했던 데밍(C.S. Deming) 선교사의 보고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국인들은 뛰어난 암기력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서 공부와 관련해 다음 세 사람의 보고가 내 관심을 끌었습니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눈이 되어주어 복음서 전체를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서 전체를 순서로 외울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매서인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 절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 문화로는 이 곳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을 통한 성경 공부의 깊은 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국 교인들이 외우기만 열중한 것은 아니다. 암송은 실천을 위한 준비였다.

1907년, 한국교회에 대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 인천에 있던 선교사 존스(G.H. Jones)를 만나러 300리 길을 걸어온 교인이 있었다. 그는 선교사 앞에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 말씀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워 보였다. 성경 암송에 집착하는 한국 교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선교사는 “성경은 외우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응답했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성경 공부를 하였습니다. 처음에 성경을 외우려고 애를 썼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했습니다. 한 절 외운 다음 이웃을 찾아가 말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랬더니 외워지는 것입니다.”

‘실천하면서 외우기’. 암기력이 뒤떨어진 시골 농부가 고안해 낸 성경 암송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의 초대 교인은 성경을 외워 말씀을 자기 안에 담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그 말씀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문자 속에 담긴 영이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다. 그 영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바꾸었다. 성경 말씀에서 만민 평등·천부 인권(天賦人權)을 읽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가정과 사회에서 실천하였다. 그 결과 복종과 순종만 강조하던 봉건시대의 수직적 옛 질서가 붕괴되고 대신 평등과 평화로 이루어지는 수평적 새 질서가 구축되었다. 역사가들은 그것을 ‘근대화’(近代化) 혹은 ‘민주화’(民主化)로 표현하였다. 한반도에서 말씀의 영이 만들어 낸 개혁의 역사였다.

새롭게 번역되어야 할 성경 : 열린 번역과 닫힌 번역

그런데 문제는 개혁의 종교가 영원히 개혁적이지 못하다는데 있다. 문자에서 해방된 영이 새로운 문자로 자신을 표현했다가 그 문자에 갇히는 형국이 될 때가 있다는 말이다. 한말과 일제강점기 민족사에서 나름대로 개혁과 해방의 종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였던 기독교가 오늘은 전혀 그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 세력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 이유가 뭘까? 개혁 직전의 역사처럼 교회가 문자에 사로잡혀 영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다수 한국교회에서 읽히고 있는 개역 한글판 성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개동시에 사람과 그 나귀를 보내고”(창 44:3)

문제는 ‘개동시’란 단어의 뜻이다. 한글로 그렇게 적어놓으니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 개역 한글판보다 20년 전 번역본인 구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동틀 때에 사람과 그 나귀를 보내니”

‘동틀 때’라는 쉽고도 아름다운 단어를 ‘개동시’(開東時)라는 난해한 단어로 바꾼 것은 분명 ‘개역’(改易)이 아니라 ‘개악’(改惡)이었다. 1930년대 성경을 개역하면서 한문 문화를 숭상하던 유식자 계층 번역자들이 쉬운 한글 대신 이런 난해한 한문 투 문장을 택하여 한글로만 표기해 놓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성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넘는 절’(passover)이 ‘유월절’(踰越節)로, ‘누룩 없는 떡’이 ‘무교병’(無酵餠)으로 바뀌었다. 어느 대학생 성경 공부 모임에 가서 ‘사신우상’(邪神偶像)이란 단어의 뜻을 물었더니 “살아계신 우상”, “네 가지 귀신과 우상” 등등의 답이 나왔다. 잘못 읽으니 풀이가 잘 될 리 없다.

▲ ⓒ복음과상황 신철민

성경은 그 시대 평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한글 성경도 복잡한 번역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 성경이 번역되었지만 지방 사투리로 된 것이어서 내한 선교사들은 초교파적으로 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신약은 1900년, 구약은 1910년에 번역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난 후 개역 작업에 착수하여 1936~37년에 구약과 신약 개역을 완성했으며 이것을 1954년 한글 맞춤법에 의거 표기법만 바꾸어 ‘한글 개역판’이라 하여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교회가 ‘공인’(公認) 성경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사이 새로운 번역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 번역은 논외로 하고 성서공회가 발행한 것으로 1967년 ‘새번역 신약 전서’, 1977년 ‘공동번역 성서’, 1993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가 나왔지만 성경 독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 교단에서 교리와 신학 전통에 어긋난다며 사용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단 번역’이라고까지 폄훼함으로 새로운 번역은 금기 대상이 되었다(할 수 없이 성서공회는 개역 한글판 성경의 오역과 난해한 표현을 바꾸어 1998년 개역 개정판을 냈으나 보수 교단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개역한글판’ 성경이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수고한 공로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은퇴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은퇴하려는데 주변에서 극구 만류하여 명예스럽게 퇴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원로 목사의 딱한 모습과 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 한국교회는 70년 전에 번역된 문자에 매여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노령화 단계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단어와 문장으로 꾸며진 성경으로는 인내심이 약한 젊은 세대의 마음을 열 수 없다. 0.1초 안에 원하는 사이트가 열리지 않으면 다른 사이트로 옮겨가는 컴퓨터 세대에게 ‘개동시’ 같은 단어로 점철된 성경은 열리지 않는 천국 문일 뿐이다.

새 번역이 나와야 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청년들이 다 나가기 전에 이들이 읽을 수 있는 ‘열린 번역’이 나와야 한다.
70년 전 고어(古語)에 갇힌 말씀의 영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교리와 신조보다 중한 것은 없다”는 교리지상주의, “일 점 일 획도 바꿀 수 없다”는 문자주의 오류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깨뜨리기 쉽지 않다.
버티고 서 있는 우상과 같다.
문자에 사로잡힌 우리를 자유롭게 할 힘은 영 밖에 없다.
자유롭게 하는 영에 사로잡힌 이들이 말씀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옛 문자에서 새 문자로 번역했던 4세기의 제롬과 15세기의 위클리프, 16세기의 루터와 틴데일, 그리고 19세기 말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초대 교인들에게 임했던 ‘자유롭게 하는 진리’(요 8:32), 그 ‘진리의 영’(요 14:17)이 오늘 한국교회에 임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나는 그 영의 능력을 믿는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릴 수 있었던 용기의 근원인 그 영의 능력 말이다.



두 번째 돌판(출애굽기 34: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오늘 본문은 모세가 두 개의 돌판을 준비하여 시내산에 오른 것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다시 강림하시는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 지시를 하시니 곧 두개의 돌판을 준비하는 것과 백성을 남겨두고 혼자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시내산에 다시 강림하셨고 거기서 그분의 이름과 본성을 새롭게 계시해 줍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 순종하는 모세, 여호와의 선포, 모세의 중보기도 등입니다.

첫 번째 돌판을 받기 위하여 모세는 구름가운데 6일을 기다렸습니다.
7일째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습니다.
아마 그 때 모세는 초 긴장 가운에 최대한 낮은 자세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돌판을 받기 위하여 모세는 역시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아침에 산 꼭대기에서 보자고 하셔 새벽부터 서둘러 올라 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서 있었습니다.

돌판을 받기 위한 두 번의 만남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모세는 6일을 기다려야만 했고 하나님의 강림 시 그는 두려워 감히 서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은 기다리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즉시로 하나님이 강림하셔 모세를 만나 주었고, 그는 감히 서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거기 서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내려오셔서 모세가 서 있는 곳에 함께 서 있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모세가 서 있는 장소로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만큼 모세는 하나님과 친밀해진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 사이에 하나님과 모세는 얼굴과 얼굴을 대할 만큼 그렇게 가까워진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 믿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많이 다녀도 하나님! 하고 부르면 1년이 가도, 5년이 가도, 30년이 가도 그냥 밋밋하게 느껴 진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정말 내 옆에 계신 것처럼, 그런 느낌과 믿음을 가져야 정상이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그 정도 가까운 것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께서는 한량없이 용서하시지만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징벌은 면하지 않되 천 대에 비하여 아주 작게 보응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 대가도 묻지 않으시지만 다만 예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에 해당되는 죄 곧 습관적이고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죄는 용서하시지 않고 처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벌에 대한 해석이 달라서 그런 견해가 나온 것 같습니다.

죄와 벌이 있습니다. 사랑과 공의가 있듯이 범죄와 형벌, 용서와 대가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를 찾지 않으셨다면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돌아 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용서만 있고 벌이 없다면 이 세상은 더 악해 졌을 지도 모릅니다. 불륜으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가진 아기가 죽은 사건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용서는 받았지만 그 대가를 치른 구약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불분명한 사건도 있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 왕자의 죽음입니다. 물론 전쟁 중에 죽었지만 모든 정황은 죄에 대한 대가임을 뒷받침해주지 못합니다.

사울 왕은 몹쓸 짓을 많이 한 왕입니다. 그 아들 요나단은 정 반대의 사람입니다. 다윗과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인격이 돋보이는 사람입니다. 용기도 대단합니다. 부관과 함께 단 둘이 적진으로 들어가 선수를 쳐 승리를 불러온 용장 중의 용장입니다. 그는 다윗이 왕위에 걸림돌이 될 줄 알면서도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다윗의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는 다음 왕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던 왕의 후계자였으나 아버지의 범죄로 인해 왕권을 스스로 다윗에게 양보한 그런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런 인물 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윗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를 미리 제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만의 하나 틀린 말이 아닐지라도, 그의 인품을 본다면 그런 말을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인간됨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다윗의 왕권의 도전세력이 될 까봐 미리 치웠다고 보기에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사울 왕은 이미 벌에 대해 많은 경고를 받았던 자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닙니다. 그렇게 일찍 젊은 나이에 갈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의 죄 때문에, 그는 왕좌도 포기하여야 했고 어쩌면 생명도 잃지 않았나 봅니다. 아버지의 악행이 자손에게 돌아간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무지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짓지 맙시다. 죄의 시작은 달콤할지 몰라도 그 끝은 씁니다. T.V. 드라마에선 불륜을 미화하고 있지만 법과 성경에서는 외도는 분명한 범죄입니다.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설령 용서받고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처음과 같지는 않습니다. 물에 젖은 두루마기 휴지를 말려서 써 본일이 있는 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풀기 조차도 어렵습니다. 이미 원 상태를 훼손했기 때문으로, 외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일단 신뢰를 잃은 것이지요. 같이 살아도 상호 믿음을 한 번 잃으면 그 만큼 힘이 들기 마련인 법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거나 큰 교회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사울 왕처럼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그만 선지자와 하나님의 경고에도 끔쩍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높은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이 아니네요.

세상에는 나이 먹을수록 더욱더 욕심을 내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젊더라도 진작 욕심을 포기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자를 교만하다고 볼 수 있고 후자를 겸손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지만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신다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대에 비하여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그 대가를 자손이 진다면 너무 큰 징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계명은 왜 두 돌판인가?(신명기 9:6-14)


이 글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은 왜 두 개인가 라는 물음을 가지고 간략한 묵상 도식에 의거해 요약한 글이다.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8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11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관찰:

1.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9절)
2.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11절)

묵상:

3. 돌판이 왜 두 개인지를 묵상함.

느낀점:

4. 통상 알려져 있기를 모세가 받은 돌판은 두 개이며, 그곳에 기록된 것은 십계명이며, 그리고 그 두 돌판에는 각각 다섯 개씩의 계명이 기록된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5 X 2 라는) 기록은 없다.

해설:

5. ‘두 돌판’이라는 명칭은 출애굽기 34장 4절에 처음 언급된다. 깨뜨린 것을 다시 깎았다는 대목에서다.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ㅡ 출 34:4.

그 앞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판’ 혹은 ‘증거판 둘’로 언급될 뿐이다.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ㅡ출 16:34.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ㅡ출 25:16.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ㅡ 출 25:21.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ㅡ출 31:18.

즉, ‘증거판 둘’ 혹은 ‘두 돌판’의 의미는 우리가 연상하는 것처럼 5 x 2, 다섯 계명 씩 두 개의 이미지가 아니라 언약이 두 쪽으로 되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화되는 대목이 신약성서의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에서다.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ㅡ 마태복음 12장 37-40

유대교 랍비의 후예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늘려서 정리하고자 한 것에 반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미 (신명기 법전 상에서) 두 개로 요약된 율법을 하나로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마가, 누가, 마태, 이들 셋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한 판으로 줄이고 있는 것은 마태라 할 수 있다.

현대 신학은 대개 아래와 같은 구조로 십계명을 분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1) 1부터 4를 對神(하나님에 대한) 계명으로 5부터 10을 對人(인간에 대한) 계명으로 보거나,
혹은 2) 우선 4계 안식일을 중심 key로 두고서 1부터 3을 對神(하나님에 대한) 계명으로 5부터 7을 對人(인간에 대한) 계명으로, 나머니 8, 9, 10을 對物(사물에 대한) 계명으로.

그러나 두 돌판은 양 편에 어떤 분류법에 의해 갈려 있는지 공지하고 있지 않다.

결단과 적용:

6.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개도 지키기 어려운 계명을 그것을 늘려 수백 가지로 만들어 스스로 도탄에 빠뜨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울은 죄가 율법을 만들었다 하지 않고 율법이 죄를 들여왔다고 이른 바 있다. 한 개를 잘 지키자

참고 글 : 613가지 율법 전문
기독교 십계명과 불교 십계명(십중계) 차이 알아두기

7. 나― 잘 지키겠나이다.
너― 잘 지키게 하소서.
우리― 계명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림묵상

800px-Rembrandt_Harmensz_van_Rijn_079Moses Breaking the Tables of the Law (1659) by Rembrandt. (Gemäldegalerie, Berlin)



기독교 십계명과 불교 십계명(십중계) 차이 알아두기

5~6분

이글은 기독교 계명이 다른 계명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약술한 글이다.

001

보편성

계명이나 계율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불교에도 기독교의 십계명과 꽤 흡사한 십중계(十重戒)라는 것이 있다. 유교에서 비롯된 충·효·예의 경우는 내세(來世)가 있는 강제 법령은 아니나 우리 사회 통념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 역시 계명의 요소를 띠고 있다 하겠다.

특히 불교의 십중계는 위 표에서 보다시피 기독교의 십계명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이 없는데도 둘은 비슷하다. 자유주의 신학자나 생태/환경 신학 하는 부류들이 둘 간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이는 인간이 사회와 체계를 이루는 ‘보편성’의 단서일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계명은 다음 다섯 가지, ‘법’, ‘명령’, ‘계시’, ‘약속’, ‘영원성’ 면에서 현저히 다르다. 기독교인은 이 다섯 가지 특질을 반드시 유념할 필요가 있다.

법으로서 계명

기독교의 계명이 다른 계율과 현저히 다른 점은 우선 그것이 법(法)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장에 죄(罪)가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불교식 카르마와는 다른 명백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죄라는 말보다 ‘업’(karma)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현실을 자극하지 않고 카르마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흠 있는 자는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법령이 있다고 했을 때(레 21장) ‘흠’이란 죄로 간주된 어떤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윤리적 범주 이상의, 여성 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체 장애를 지닌 사람까지 그 ‘흠’에 포함한다. 그것은 단순한 차별이 아니다.

그것은 ‘죄’라는 개념이 운명 카르마까지 소급하고 들어가 압도해버리는 엄정한 법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계명’을 이 무지막지한 법 개념으로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고수하는 교단/교회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변화 받지 못한 조폭이나 전과자, 고문 기술자, 아내 두들겨 패는 연예인까지 목사로 부를(calling) 정도로 법이 붕괴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령으로서 계명

두 번째 차이점은 ‘명령’으로서의 계명이다. 불교의 십중계(十重戒)와 기독교의 십계명(十誡命)에서 서로 다른 한자 ‘계’가 공교롭게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래와 같이 그 용례를 참조하면 그 명령 강도가 좀 다르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불교의 십중계에 쓴 계(戒)의 용례는,
1. 경계하다(警戒–), 막아 지키다, 경비하다(警備–) 2. 조심하고 주의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3. 타이르다, 알리다 4. 이르다, 분부하다(分付ㆍ吩咐–) 5. 재계하다(齋戒–) 6. 이르다.
반면 십계명의 계(誡)의 용례는,
1. 경계하다(警戒–) 2. 고하다(告–) 3. 분부하다(分付ㆍ吩咐–), 명령하다(命令–) 4. 훈계하다(訓戒–) 5. 경고(警告), 경계(警戒) 6. 교령(敎令: 임금의 명령(命令).

후자가 훨씬 명령의 강도를 세다.

한편, 유교에서도 충(忠)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역시 기독교 계명의 ‘명령’과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 계명은 보다 격상된 신적 명령에 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그것은 미개한 인신 번제로서가 아니라 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God’s Imperative) 하나님 명령의 예이다. 그 명령을 잘 표현한 영어 문장이 있어 참조한다.

No Ifs, Buts, or Maybes … God’s Imperative
(‘만약에’도 아니고, ‘그러나’도 아니고, ‘아마도/어쩌면’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명!)

계시로서 계명

세 번째로 중요한 차이점은 ‘계시’라는 사실이다.

마음에 맞는 몇이서 ‘이게 좋겠다ㅡ’ 해서 만들어낸 조문이 아니라, 지구 바깥 누군가로부터(초월적 존재로부터) 받은 계명이라는 것이 기독교 계명의 차이점이다. 모세는 자기가 받은 계명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예언자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받은 말을 전하되 하나님의 입을 그의 입이 ‘대신’했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의 말씀을 제1 계시로 삼는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계시란 없다. 어떤 이단들의 흔한 교설처럼 어느 날 땅속을 파보니 책이 있더라ㅡ는 계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약속으로서 계명

네 번째로 다른 점은 기독교의 계명이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밖의 일반적인 규범과 율례는 대개 그것을 준수하는 자신이나 그 자신이 포함된 세계에 이로운 준칙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에 의거한 쌍방 간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의 주된 내용은 복(福)이다. 오늘날은 복의 의미가 퇴색한 나머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약속의 내용이 복이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목적에 부합하면(준수하면) 복에 이른다는 약속이지만, 반대로 준수하지 못하면 복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이제부터 저주를 퍼붓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을 걷어내자 가시와 엉겅퀴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의미이다.

계명의 영원성

이런 네 가지 토대 ㅡ 법, 명령, 계시, 약속 ㅡ 속에서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언약’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타나신 것이다. 모든 복을 준행하지 못함으로써 나라도 빼앗기고, 성전까지 더럽히고 파괴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그 백성의 의지까지 모두 박약해져 있는 상태였는데, 바로 그 약속을 근거로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약이 강제적인 이유. 참조 글: 계약은 왜 강제적인가?)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것을 다 무시한 채 전혀 엉뚱한 새로움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약속을 토대로 한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물이 감하여 퇴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창 8:1).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그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출 2:24).

약속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기억을 하겠는가.
그래서 약속/계약과 ‘기억’은 동의어나 마찬가지이다.
(계약 = 기억)

왜냐하면 이 기억 속에서 ‘영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진시황제의 불로장생 개념이 아니라 기억과 약속(계약)에 의거한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영.원.한. 계약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이다.

새 언약으로서 계명의 형식: 내 법을 그들의 속에

그런데 그 ‘새 언약’에 이르러서는 이 법/계명이 우리 속(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렘 31:33).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다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렘 31:34).
이 ‘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대개 우리는 자라날 때 아버지에게서 하나부터 열까지 배운다. 그것은 십계명/십중계와 같은 강한 금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충·효·예의 유연한 훈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신께서 돌아가시고 내가 혼자 되었을 때 그것은 마음에서 들려오는 어떤 음성으로서 법이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변변한 육친의 아버지를 못 만난 예외의 사람들은 어떨까? (슬프게도 현대 사회일수록 그런 사람이 많다) 오히려 폭행만 일삼는 아버지도 있다. 하지만 그랬을지언정 피해자인 그가 어엿한 아버지(어머니)가 되어가고 있다면 그 마음 안에는 분명 아버지로서 어떤 음성이 들린 것이다. 그 음성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못 된 아버지에게서 못 된 아버지가 난다는 것은 세속의 가르침이다. 그런 자는 아버지가 없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려오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참된 아버지·어머니가 된 것은 학습으로 된 것인가? (십중계 식) 계명으로  된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내면에 기록된 ‘내 법’의 예시이다.

새 법의 실현,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르기를 “계명에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반문하였다(요 12:34-35).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가 사람들을 이끄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안다.’
과연 그것을 배워서 알 수 있었던가?
그냥 아는 것이다.
내 마음에 심긴 ‘법’으로.

(믿음도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나는 것이다. 믿음을 배우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위와 같은 일련의 모든 것들이 다른 계명과는 다른 기독교 ‘계명’의 원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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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흔히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등 3가지가 들어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래의 ‘스크랩’ 글은 이 문제를 비교적 타당하게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마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묘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곧 ‘정말 3가지가 법궤 안에 들어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입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 십계명 돌판 - 궤 속에 넣으라(출25:16).
○ 싹난 지팡이 - 증거궤 앞에 두라(민17:4).
○ 만나 항아리 - 여호와 앞에 두라(출16:33).

여기서 보면 십계명 돌판은 법궤 속에 넣는 것이 맞지만 싹난 지팡이나 만나 항아리는 법궤 안에 넣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두라.”는 것입니다. 법궤 밖입니다.

그런데 신약이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히9:4)라고 기록함으로써 3가지 성물이 법궤 안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 되었습니다.

아래 스크랩 글도 “이 3가지를 법궤에 넣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이동의 편의에 따랐다.”고 설명하면서 “이 3가지가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은 400년 정도(뒤에서는 30~40년 정도)”라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계산된 햇수의 편차(400년 / 30~40년)가 조금 크기는 하지만 일단 수용하더라도 문제는 ‘정말로 3가지가 법궤 안에 들어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충분히 해소되었다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규빗’으로 표현된 법궤의 규모(2.5 x 1.5 x 1.5 규빗)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침으로써 오는 착각을 주시해야 합니다.

규빗이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 까지를 칭하며 대략 45.6cm쯤으로 간주합니다(창6:15). 물론 에스겔 환상에서는 ‘규빗 + 손바닥 길이’를 합친 대략 52cm쯤으로 간주합니다(겔40:25)

성경에 기록된 법궤의 크기를 cm로 환산하면 「114.0 x 68.4 x 68.4 cm」가 되고, 법궤의 가장 긴 거리(공간)는 당연히 빗변으로서 「131.2 cm」 정도가 됩니다.

이 직육면체 궤 안에 들어있는 3가지의 크기가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십계명 돌판은 성경을 통한 크기 추정이 무척 힘듭니다. 다만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출31:18)이라는 말씀을 고려하면 손으로 들 수 있는 무게의 돌 2개였고 크기는 미상입니다. 다만 법궤의 크기보다는 작은 길이와 폭을 지녔을 것이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둘째, 만나 항아리(히:친체네트)에는 한 오멜(omer)을 넣었는데 이는 2.34 lt(1.2되)의 양입니다(출16:33). 법궤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입니다.

셋째, 아론의 지팡이는 앞에서 계산한 바대로 약 131cm 정도였을 것입니다.

결국 3가지가 모두 법궤 안에 들어가려면,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의 크기도 고려해야 하지만, 빗변 방향으로 넣더라도 지팡이의 길이는 131 cm이하여야 합니다.

영화 같은 곳에서는 모세나 아론의 지팡이가 키보다 크게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 당시 모세나 아론이 썼던 지팡이의 길이를 정확히 계산할 방법은 없습니다.

육체적 또는 상징적 필요에 의해 지팡이가 사용되었다면 대략 1~2m 규모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실제는 양몰이 보조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추정이 타당하다면 법궤 안에 지팡이도 들어갈 수는 있겠으나 그 최대 길이는 위에서 계산한 131cm 이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 지팡이를 2 또는 3등분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성경 분위기상 ‘잘라서 넣었다.’고 추정하기는 곤란할 듯합니다. 이 경우는 고려에서 제외하였습니다.

♣ 의문 : 개략적인 계산 결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법궤 안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131cm’ 이하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가 차지하는 공간을 고려한다면 지팡이의 허용 길이는 조금 더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표현상으로는 분명 ‘안’에 보관한 시기가 있었던 것 같으나, 느낌상 지팡이를 법궤 안에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싶다. 조금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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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고고학) 법궤 (2510~22)


지성소는 성막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다.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1차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히9:1-3). 지성소에 들어가면 법궤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그 위에 속죄소가 있으며 두 그룹이 양편에 서 있다.

1. 법궤의 모양

가. 크기 : 가로 2규빗 반, 세로 1규빗 반, 높이 1규빗 반
나. 재료 : 조각목으로 만들어 안팎에 모두 정금으로 싸서 만들었다.
다. 모양 :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가 둘러져 있고, 금고리 넷이 있으며,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든 채가 꼽혀 있다.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으며, 그 위에 두 그룹을 금을 쳐서 만들었다. 그룹이 편 날개는 속죄소를 덮도록 하였다.


2. 법궤의 특징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다(히9:4).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는 법궤에서 만나 주셨다(출25:21-22).

모세는 모든 계시를 법궤에서 받았다(출25:22).

구약 시대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1차 법궤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다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나면 고핫 자손만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핫 자손은 성막이 이동할 때 법궤를 담당한 사람들이었다(민4:4-15).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제는 누구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법궤는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날아야 한다. 수레에 실어 끌고 가다가 법궤를 만진 웃사가 죽임을 당했다(대상13:1-4).

법궤는 거룩하기에 3번 덮고 날라야 했다(민4:4-6).

법궤는 거룩하기에 함부로 만져서는 안된다(민4:15). 법궤는 피 없이는 만질 수 없었다(레16:2; 히9:7, 22).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 법궤가 맨 앞에서 행진하였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12지파가 순서대로 뒤를 따랐다(민10:11-28).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법궤가 앞장서서 진행하자 요단강이 갈라졌다(수3:1-17).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도 법궤가 앞장서서 돌았다(수6:1-8).

법궤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기적이 따랐다(민10:35-36).

3. 법궤 속 성물

법궤 속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 십계명이 들어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가. 만나 항아리 - 육신을 위한 양식
나. 십계명 - 영을 위한 양식
다. 싹난 지팡이 - 부활의 새생명

왕상 8:9에 보면 솔로몬이 법궤를 열었을 때 십계명 돌판만 들어 있었다. 이 세가지를 법궤에 넣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이동의 편의에 따랐다.

가. 십계명 돌판 - 궤 속에 넣으라(출25:16).
나. 싹난 지팡이 - 증거궤 앞에 두라(민17:4).
다. 만나 항아리 - 여호와 앞에 두라(출16:33).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성전에서 그대로 쓴 성막의 성물은 법궤인데, 1600년 법궤의 역사 중에서 이 세가지가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은 400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 법궤 속의 성물에 대한 오해

법궤에 십계명,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 세 가지가 들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히9:2-4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이 구절 때문에 법궤 속에 세 가지가 들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법궤가 만들어진 때가 BC 1446년, 법궤가 없어진 때가 AD 70년으로 지구상에 법궤가 있었던 기간을 약 1,500년으로 보는데 법궤 속에 세 가지가 들어있던 시간은 불과 30~40년으로 본다.

하나님은 법궤 속에 십계명만 넣으라고 하셨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는 넣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고핫 자손들이 법궤를 들고 다닐 때 이 세 가지를 넣은 것이다.

히9장은 레16장 광야시절을 베낀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법궤를 열어보니 하나님이 넣지 말라고 한 두 가지는 없어지고 십계명 두 돌판만 있었다. 그래서 십계명만 들은 법궤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존재했던 것이다.


4. 지금 법궤가 있는 곳(가설)

지금 이스라엘이 벌이는 운동이 시오니즘이다. 시오니즘의 핵심은 메시야의 도래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나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나 그 사상이 똑같다.

언제 메시야가 오느냐하면 첫 번째 세계에 흩어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와야 한다. 지금 이스라엘에 사는 백성이 400만명, 미국에 사는 이스라엘인이 600만명, 그 외 흩어진 백성이 500만명, 그들이 다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귀한을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두 번째 벌이는 운동은 법궤찾기 운동이다.

세 번째는 성지회복인데 바고 거기에 제3성전을 세워야 한다. 제3성전의 법궤는 모세가 만든 법궤여야 한다.

메시야(우리에겐 재림 예수)가 이사야서에 보면 제3성전 곡대기에 박을 디디고 내가 왔다고 선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법궤찾기 운동이 명렬히 벌어지고 있는데 어디에 있는가?

다름은 현재 법궤의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다.

가. 솔로몬이 시바 여왕을 만나고 보물 창고를 열어준 뒤 법궤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에디오피아로 가지고 갔을 것이다. 에디오피아의 악숨 사원은 지금도 법궤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예레미야가 느보산 어느 곳에 숨겼다(마카비2서 2:4).

다. 주후 70년 로마의 티토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술 때 모든 성물을 가져갔다. 티토의 개선문에 등대가 조각되어 있다(등대의 그림 참조). 현재는 바티칸 궁전에 있을지 모른다.

라. 세월이 많이 지나서 없어졌을 것이다(랍비들).


5. 법궤에 관한 마지막 구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렘3:16)

법궤가 곧 그리스도이시니, 법궤는 없어져야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기억되어야 한다. 법궤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였는데, 오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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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혼법과 예수님의 족보의 상충

 

 

신명기 25장에는 유대의 독특한 관습 중 하나를 기록하고 있는데 수혼법이 곧 그것입니다.

 

수혼법(嫂婚法:levirate marriage)이란, 계대결혼(繼代結婚) 또는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이라고도 하는 유대인의 율법(고엘제도)으로서, 어떤 사람이 후사(후손) 없이 죽었을 때 그의 동생이나 가까운 친척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처음 낳는 아들을 죽은 사람의 아들로 삼는 제도입니다.

 

수혼법은 후손보존, 유업보호, 가난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계의 지속이라는 측면이 가장 강하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수혼법은 우리나라의 양자제도(養子制度)와 유사한 면(家系의 持續이라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하는데 반하여, 유대의 경우는 실제 결혼을 통해 목적을 이룬다는 차이점도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룻기 4장에 보면, 수혼법의 한 예로 볼 수 있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수혼법의 최대 목적인 가계의 지속과는 상이한 현상으로 기록되어 혼란이 일고 있습니다.

 

즉, 기업무를 자의 자격으로 룻과 결혼한 보아스는 아들 오벳을 낳았으나, 수혼법의 정신에 따라 오벳을 롯의 본 남편인 기룐의 후사로 삼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는 선대(先代)인 과부 나오미와 결혼한 것이 아니므로 수혼법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도 과부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녀가 남편과 사별하기 전에 두 아들을 낳았었기 때문에, 수혼법의 적용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가 끊어진 사람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아니라 룻의 남편인 기룐이기 때문에, 나오미가 아닌 룻이 수혼법의 대상이 되는 것이 타당합니다.

 

아무튼, 룻기의 경우를 수혼법의 한 예라고 할 때, 예수님의 족보에 큰 차질이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수혼법의 정신에 따른다면, 성경의 기록대로 "`살몬(라합)-보아스(룻)-오벳-이새-다윗"이 아니라, "엘리멜렉-기룐(룻)-오벳-이새-다윗"이 되어야 정확한 계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 기록대로라면, 룻은 보아스와의 통상적인 재혼을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수혼법 적용 사례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경우가 된다 하겠습니다.

 

☞ 의문 :

① 룻4:18-22절의 기록은 수혼법의 정신(신25:5-6)과 예수님의 족보(마1:1-16) 사이에 묘한 상충을 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②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가 가까운 형제가 아니라 먼 친척이라 가계를 잇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③ 또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경우도 수혼법의 일례로 볼 수 있는지 및 수혼법으로 볼 수 있다면 보아스(룻)의 경우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 박진호 목사의 답변 ]

 

항상 그러듯이 이번에도 일반인 심지어 전문가마저 미처 보지 못하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3가지로 나눠서 질문을 주셨는데 각 질문에 답변을 드리기 전에 먼저 두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사람들이 절대자를 이해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므로 그 하는 일 모두가 완전하다고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입장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일을 했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논리의 눈으로 이해가 되어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1:17) 한다고 했듯이 전자에 해당합니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아진다는 뜻으로,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신과 가장 크게 다른 점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신자가 성경을 보는 태도에도 연관 되어집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지정의적 이해와 동의를 먼저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믿음을 요구하지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단 성령이 죄인의 영혼을 간섭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믿어지고 또 그렇게 믿어진 후라야 이해되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확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그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혹시 신구약 기록 간에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뭔가 잘못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진리에 문제가 있는가 의심하기에 앞서 기록된 범위 안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해야만 합니다.

 

물론 질문자님께서 이런 원리를 모를 리는 만무하며 또 성경의 말씀을 믿음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는 이유는 이 문제에 관해선 마태복음의 족보나, 신명기의 계대 결혼에 관한 기록은 그 각각이 완전하고 하등 하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족보는 족보대로, 수혼법은 수혼법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문제를 구태여 연결 시켜서 의혹을 야기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계대결혼의 진정한 의미

 

신명기 25:5-10에 규정되어 있는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은 잘 아시는 대로 결혼한 형제가 후사가 없이 죽은 경우 다른 형제가 과부된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1)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대를 이어줄 후사를 낳아 줌으로써 그 형제의 이름과 기업을 가문과 지파에서 보존해 주며, 2)이스라엘 여인이 이방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며, 3)홀로 남아 의지할 데 없는 과부를 제도적으로 보살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대결혼을 이해하는 신자들의 관점이 너무 제한적입니다. 옛날 한국에서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의 족보에 다른 형제의 아들을 입적시켜 대를 잇게 하는 관습과 연관지어 단순히 가문의 혈통을 보존하는 제도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계대 결혼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더 중요한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민수기 36:1-12에 의하면 슬로보핫은 아들 하나 없이 딸만 두고 죽었는데 모세는 그 딸들더러 그 조상 지파에게만 시집가도록 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혼 제도에 만약 집안의 혈통 보존이나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하는 목적을 더 우선시 했다면 일본처럼 데릴 사위 제도를 만들어 장가 온 남편의 성을 여자 집안의 성으로 바꾸게 하는 법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딸이 자기가 속한 “조상 지파의 가족 되는 사람에게” 시집가면 된다고 합니다. 딸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들에게 시집가 그들의 기업(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게 되는 사태를 막자는 뜻입니다. 즉 아들이 없는 형제의 미망인의 계대결혼이나, 아들 형제가 없는 딸의 결혼 문제에 관한 규정에서 근본취지는 동일합니다. 후사(後嗣)를 이어가되 그 중에서도 혈통과 가계 보존보다 땅의 보존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업으로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민36:9)

 

이스라엘 각 지파가 제비뽑기로 취득한 땅은 하나님과 그들 각 지파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축복의 보증으로 취급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 첫 소유자인 지파가 자기들의 땅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땅에 대한 안식년이나 희년 제도에서 보듯이 땅은 가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각 지파는 하나님을 대신한 청지기로서 소유보다 관리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땅은 모든 생업의 기반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땅에서 먹고 사는 모든 것들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왔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속제도는 아들 위주였고 그에 따라 아들이 없는 가정의 경우에는 그 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게 되는 불합리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 모순을 없애고 여자에게도 상속을 허용하는 획기적이고도 공평한 제도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뜻은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11:44),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것입니다. 특별히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레25:23)이기에 영영히 팔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비뽑기에 의한 땅의 분배, 땅의 안식년과 희년 제도, 계대 결혼 제도, 딸의 상속 문제 등등 모두가 당신의 그런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로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땅을 두고 분쟁하지 않고 오직 순수하고도 거룩한 당신의 백성들로만 이뤄진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질문 1. 룻기의 계대 결혼과 마태복음의 족보가 상충되지 않는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원리에 근거하면 우선 마태복음의 기록과 룻기의 기록은 그 각각이 완전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은 그 기록 자체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계대결혼을 혈통과 가문 보존으로만 해석하여 각 기록간의 모순이 있어 보이는 것에 너무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둔 마태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혈통과 남자를 중시하는 유대인의 관습과 제도에 맞추어 사실 그대로 해석해서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다윗 왕의 후손으로 왕 중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에 왕들의 이름이 주로 등장합니다. 또 비록 네 명의 여인들(이방인, 과부, 창기, 불륜의 관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반드시 남편 되는 남자의 이름, 즉 생물학적 생부(生父)의 이름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혈통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뜻입니다.

 

반면에 누가의 족보(눅3:23-38)에는 왕보다는 평범한 인물의 이름뿐입니다. 이방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메시야의 구원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족보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 된 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메시야가 났다는 것입니다.

 

만약 계대 결혼과 마태 족보 간의 상호 모순되는 점을 따지려 들면 오히려 마태와 누가의 족보의 상이점이 더 문제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원칙이 각각의 기록은 그 자체로 완전한 기록이며 그 안에 이처럼 고유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기에 구태여 두 기록 상의 차이점을 문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 족보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허위를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는 왕의 선조를 강조하기 위해 족보상에 많은 인물과 대수를 생략했기에 누가의 기록에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 누락되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룻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는 룻기에 기록된 룻과 보아스 간의 계대 결혼이 신명기의 규정대로 잘 이뤄졌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질문자님께서 의아해 하는 대로 기록이 바꿔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이방인 과부로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믿음의 여인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방인, 불륜의 태생, 과부, 창기이든 차별하지 않고 이땅의 모든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실제 생부와 왕의 선조 중심으로 기록해 나가다 보니 특이하게도 당시로선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혼인 관계에 의해 대가 이어진 사실 네 개를 발견하고 그것을 기록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비정상적인 혼인 관계를 밝히기 위해 네 여인의 이름을 족보에 등장시켰던 것입니다. 아마도 기록할 당시 본인은 그 기록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만, 후대의 독자로선 그 네 명 여인들의 배경을 살펴 보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더욱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간섭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질문 2. 보아스가 먼 친척이라 기업을 무르지 않아도 되는지?

 

이스라엘의 계대결혼은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인척부터 시작해서 차츰 먼 친척까지 확대해서 그 후보로 선정합니다. 따라서 계대결혼의 후보로 오르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의무 규정에 속합니다만 그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본인의 선택과 자유에 맡깁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일차 후보가 결혼할 의사가 없으면 그 다음 가까운 친척 순서로 이차, 삼차 후보에게 결혼할 의사를 차례로 묻게 됩니다.

 

그래서 계대결혼을 거절한 친척은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고 말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의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자,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칭하게 됩니다.(신25:8-10) 형제의 집을 세워줄 의무를 외면한 비겁한 자라는 불명예를 평생 아니 후손들에게까지 지우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 절차를 거쳤습니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룻3:12-14)

 

보아스는 분명히 룻의 죽은 남편 기룐의 친척이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따로 있었습니다. 보아스로선 계대 결혼의 순서상 제 2 후보였고 그 이외에는 기업 무를 친척이 없었습니다.(룻4:4) 제 1 후보였던 이름 모를 친척은 처음에는 룻 즉 기룐의 재산이 탐나 선뜻 결혼할 의사를 내 비췄다가 그 기업이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는 곧장 취소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하려 든 것입니다.

 

기업을 무르고 안 무르고는 촌수가 가깝느냐 머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앞선 후보가 불명예를 감수하고도 거절하면 그 다음 후보에게 차례가 돌아가고 해당 후보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만 하면 됩니다. 룻의 경우에는 후보자가 마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만약에 보아스마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를 괜스레 걱정할 염려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아스는 불쌍한 이방인 과부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룻은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신부인 신실한 신자의 예표의 역할을 맡기기 위해 이 사건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진행시키고 또 성경 기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습니다. 보아스는 보아스의 모습으로, 룻은 룻의 모습으로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 했고 또 계대 결혼도 그런 모양으로 이뤄져야 했습니다. 계대 결혼을 거절한 친척도 조연으로 등장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거짓 삯꾼 목자의 표상입니다. 룻기는 룻기대로 마태복음의 족보와는 별개의 완전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상호 모순되고 충돌 되어 보이는 의문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성경과 성경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 즉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진리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도 예수요, 그 해석을 검증하는 기준도 오직 예수입니다. 룻기의 계대결혼이나 마태의 족보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입증하는데 하등 오류가 없고 또 두 기록에서 이해되어진 예수님의 예수님 다우심에 모순이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한 기록인 것입니다.

 

질문 3.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경우도 수혼법에 해당하는지? 보아스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한 마디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아직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구체적인 율법을 받기 전이라 그런 규정에 직접적으로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익숙해 있는 문화와 관습을 완전히 무시한 채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를 이뤄나갈 수 있는 길을 기존의 관습법과 도덕법을 바탕으로 하여 당신의 선하신 뜻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 율법입니다.

 

창세기 38장의 기록으로 보아 계대 결혼은 이미 시행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관습을 율법에서 그대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는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했는데 그 일을 두고 성경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다”(창38:9,10)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계대 결혼은 모세 율법 이전에도 하나님의 제도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너는 네 자부(子婦)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레18:15)라는 율법의 규정도 유다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회에선 도덕적 관습법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나아가 유다는 자기 아들들의 장래를 결정지을 위치이므로 다말에게 계대 결혼을 주선해 줄 책임을 지고 있는 자이지,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그 결혼의 후보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보아스의 경우와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의 첫 남편이자 자기 장자인 엘이 죽자 차남 오난에게 계대 결혼을 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 둘째 아들마저 죽자 셋째 아들 셀라가 있음에도 친정으로 돌아가 수절하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말로는 마치 셀라가 결혼 적령기가 되면 계대 결혼을 시켜 줄 것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창38:11)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속 마음은 다말이 시쳇말로 남편을 죽이는 재수 없는 불길한 여자로 여겨져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고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해”(창38:14) 다말이 그 유명하고도 추한 시아비와의 통간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계대 결혼 제도로 인해 생긴 비극이긴 하지만 유다와의 사이에 후손이 생긴 것 자체는 계대 결혼과는 전혀 상관 없이 극도로 가증한 범죄의 결실입니다.

 

또 외면적으로만 보면 마치 계대 결혼의 모순 혹은 잘못으로 인해 생긴 비극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유다의 장자 엘과 차남 오난은 다말이 재수 없는 여자라 저주 받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엘도 그렇고, 오난이 땅에 설정하여 기업 무를 형제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여호아 목전에 악하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것이지 다말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가 잘못된 판단과 선입관에 사로 잡혔고,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보다 재수나 운명을 믿는 큰 죄를 범합니다. 그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을 때에 본인의 의사를 물어 만약 그가 결혼을 거절하면 셀라의 가장 가까운 사촌들에게 순차적으로 그 결혼을 권유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을 다말과 결혼시키기 싫어 한데다 만약 관습(혹은 율법)대로 계대 결혼의 절차를 거쳐서 그 결혼을 못하게 하면 자기 아들 셀라와 자기 가문이 영원토록 비겁한 자로 찍히기에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쌍한 과부 며느리 다말의 앞 날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중 삼중의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뿐 아니라 계대 결혼의 선한 뜻, 아니 신적 간섭과 주권으로 이뤄져야 할 결혼의 신성함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습니다.

 

다말로선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시아버지의 뜻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좋다.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여인인가 시험해 보자. 거기다 당신이 하나님의 신성한 뜻인 계대결혼을 거부하는데 만약 당신이 바로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에 죽나 안 죽나 보자”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유다도 그 아들도 죽지 않는 것으로 그 결말이 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장남과 차남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아비인 유다가 그들을 잘못 양육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셋째 아들 셀라에게도 계대 결혼을 제대로 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형제의 기업을 살리도록 가르쳤어야 함에도 오히려 오직 그의 생명만을 염려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을 저지릅니다. 다말 사건의 원천적인 책임과 잘못이 아비인 유다에게 전적으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다가 그렇게 된 데는 마찬가지로 그의 아비 야곱의 책임도 있습니다. 거짓과 사기와 잔혹함과 패륜성 등 온갖 타락이 야곱의 집안에 만연했습니다. 그 집안에 또 다시 치명적이며 부도덕한 시부와 며느리의 상간이라는 패륜이 추가되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아들과 자신이 비겁한 자라는 오명을 덮어쓰기 싫어 그 아비 야곱을 닮아 인간적 계략을 동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일을 통해 그를 며느리와 통간한 패륜아라는 더 더럽고 추한 비방을 영원토록 듣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다말과 유다의 사건을 인간적 상식으로만 이해하면 이보다 더 추한 사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말과 유다와 그 아들들의 온갖 인간적 계략과 욕심이 뒤얽혀져 벌어진 사건이지만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 사건만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엄정한 진리와 그에 대비해 한 없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상이 대조되는 사건도 드뭅니다.

 

유다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회개하게 됩니다. 이 일 뒤에 성경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야곱 가문이 애굽으로 요셉에게 양식을 얻으러 가는 사건을 바로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진심을 떠 보고 또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친 동생 베냐민을 담보로 애굽에 남겨두고 돌아가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에 유다는 간절하게 요셉에게 그 요구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가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창44:33,34)

 

동생 요셉을 팔아 넘긴 죄와 며느리 다말에게 계대 결혼을 시키지 않은 죄와 그 전에 아들 둘을 잃어본 아비의 심정 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나온 유다의 솔직하고도 애끓는 심정의 표현입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자식만 챙기지 않고 이제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형제와 아비를 살리려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되어진 일들의 배후에 간섭하고 그를 변화시킨 결과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유다의 그 엄청난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또 타락한 야곱의 집안을 택해 한 국가 이스라엘로 자라게 하시며 선민으로서 모든 은총과 권능을 한 없이 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런 혈통을 통해 보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다말이 일으켰지만 가깝게는 다말의 원한을 신원해주고, 유다의 잘못에 벌을 주어 회개시키며, 멀리는 유다와 다말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이 연출한 인류 구속사 중의 아주 중요한 한 페이지였습니다.

 

이처럼 다말의 사건이나, 룻의 계대 결혼이나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용서와 사랑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거듭 말하건대 각각이 완전한 의미를 지니는 별개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통일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에 어떤 모순과 충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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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죽이려 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출 4:24, 민 22:21-35)

 

 

출4:25의 기사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즉, 가기 싫다는 모세를 억지로(?)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 도중에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모세를 죽이려 하신다.

 

23절과 24절의 내용은 별개의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으므로 이 두절 사이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가능하지만, 어쨌든 모세를 죽이려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자들을 죽음으로 징계하는 경우가 구약과 신약에서 다 같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순간적으로 처리하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드시 죽이려는 의도 없이 뜸을 들이시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민수기 22장의 발람을 죽이려 했던 사건과 유사).

 

성경 기사로는 분명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태도에는 큰 망설임의 흔적이 역력하다.

 

어떤 학자는 이방인 아내 십보라가 할례의 실행을 거절한 것에 대해 모세가 미온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공동체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할례를 행했어야 하는데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자 중병(?)을 앓게 하시고 할례를 반대하던 모세의 아내가 놀라 급히 할례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모세의 생명을 구했다는 해석이다.

 

사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표시이므로 온전히 순종해야 할 율법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학자의 해석이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한 해석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징계를 결심하셨다가도 이런 저런 연유로 그 뜻을 돌이키신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는 뜻을 철회하신 사실은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하나님이 망설이신 이유도 본래의 뜻이 모세를 꼭 죽이겠다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스처를 통해 모세를 더욱 성숙시키시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이삭의 번제 사건 참조).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관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믿음이 연약한 인간은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기 쉬우나 하나님은 죽음 자체에 대해 비중을 두지 않으신다.

 

즉, 죽은 자나 산 자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 산 자이기 때문이다(욥의 첫 번째 10명의 자녀 참조).

 

따라서 이 땅에서 데려가시는 것 자체가 징벌은 아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을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안식)로 들어가는 축복이라고 믿는다(사도 바울의 견해).

 

 

 

☞ 의문 :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셨던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위에서 추론한 내용이 옳을 수 있는가?

 

※ 참조 : 1)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별지 : 조수현 목사)

2) 오경준 목사 /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홍성사/pp.44-53

 

 

 

 

 

 

 

 

<별지>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4:18-26)

(출처 : http://biblestudy.co.kr / 설교마당 /주일설교 9번)

[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출생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되어 궁중에서 키워지고 광야에서 연단과 훈련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큰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이 드디어 모세를 쓰실 그 때가 왔고, 모세는 사명을 받아 애굽으로 떠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에서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시려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80년간 애써 길러온 사명자 모세를 이제 막 사명의 길을 가는 중에 죽이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또 모세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하나님이 모든 손실을 감당하고서라도 모세를 죽이려 하실 정도로 화가 나신 것일까? ]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여기 이 본문도 이해하기가 힘든 본분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출4:24)

 

이제 막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그의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사명의 길을 향해 애굽으로 떠나는 모세를 죽이시면 애굽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80년 동안 인재를 기르셨던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것을 감수하시면서 까지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굉장히 화가 많이 나셨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40년 동안 훈련시킨 모세를 이제 사명의 길을 떠나는 마당에 죽이시려고 하셨겠습니까? 모세가 무엇을 얼마나 크게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본문 4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그제야 비로소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니라 그 때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1. 할례를 행하지 않자 죽이시려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할례를 행해야 하는 모세가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아내 십보라가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자고 해서 모세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80년을 훈련시킨 모세라 할지라도 죽이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깜짝 놀란 모세의 아내가 차돌을 취해서 두 아들의 양피를 베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놓아 주십니다.

 

도대체 할례가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자신도 아니고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사명의 길을 보내신 모세를 금방 죽이시려고 하셨는데 이 할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할례언약을 맺으시는 장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언약을 지시하시는 모습입니다.

 

할례언약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17장을 살펴봅니다. 1절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언약의 세우겠다는 말이 벌써 두 번 나왔습니다. 그리고 7절에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상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시며 여기서도 ‘언약을 세운다.’ ‘언약을 삼는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무언가 중요한 언약임에는 틀림 없는가 봅니다. 도대체 무슨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바로 할례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 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 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운 이 할례언약으로 인하여서 이후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누구나 할례를 받게 도비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서 지키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고 안 지키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하는 아주 엄중한 효력이 있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할례를 받게 되고 할례를 받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이어져 갑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시작한 이 할례를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그의 아들들에게 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할례언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철저하신 분이시므로 비록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서 크게 사용하시려고 하는 도구라 할지라도 할례언약을 어기자 그냥 죽이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2. 할례언약에 대해서 모세까지도 죽이시려 하실 정도로 엄위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철저하게 지키십니다. 자기를 두고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두고 맹세하신 이 언약에 대해서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지키시려고 그렇게 아끼는 모세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죽이시려고 하셨던 엄위하고 철저한 모습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밝히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할례언약을 세우셨습니까? 왜 하필 남자 아이들의 성기 표피를 베어 버리는 그런 이상한 언약을 세우셨습니까? 요즈음은 건강상의 이유로 포경수술을 대부분하고 있고 어린아이도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창세기 시절부터 인간의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할례를 명하셨을까요?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아예 할례를 해서 태어나게 하시지 왜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시킵니까? 하나님의 실수입니까?

 

건강을 목적으로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다른 깊은 뜻이 분명히 있으십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들에는 어떤 감추어진 깊은 뜻, 참 뜻이 있습니다.

 

신10: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신30:6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이것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진짜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로 양피를 베어 던져 버리듯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렘4:4절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여기서도 마음의 할례를 하라고 말합니다.

 

렘9:26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3. 신약시대의 할례 -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그래서 바울은 신약시대에 로마서에 이렇게 비밀을 말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참 할례는 사람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을 벗기는 것입니다. 롬2: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4. 마음에 할례 -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골2:11절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 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라스도의 하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할례는 손으로 양피를 베어서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벗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손으로 하는 할례인데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수술 칼을 들이대사 나의 더러운 육적 소욕과 욕심과 욕정의 더러운 모든 것들을 벗겨 버리고 내 속에 깨끗한 새 영혼을 만들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참 할례입니다.

 

이렇게 참 할례를 받지 않으면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서 마음이 새로워지고 죄된 욕심의 마음을 깨끗이 벗어 버리지 않으면 천국백성에서 끊쳐진다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몸에만 할례 받으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내 영혼 속에 더러운 생각, 죄된 생각, 육신의 모든 악한 생각을 다 베어서 벗어버려야 이것이 참 예수 믿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참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또 귀에다가도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느냐.” 귀가 무엇으로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못하므로 귀에 할례를 받아서 막혀져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이렇게까지 말을 합니다.

 

이렇게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언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의 피로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영접치 않은 사람이요 그러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약의 할례언약이 신약의 새언약으로 연결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5. 부싯돌로 할례를 행하라.

 

여기서 할례에 관해서는 깊이 있는 부분을 몇 부분 더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깊이 살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할례를 행할 때에 부싯돌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철로 만든 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칼로 서로 싸움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하필이면 왜 부싯돌로, 차돌로 할례를 베풀라고 했습니까? 위생적 이유 때문일까요?

 

수5:2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장군 시대는 칼로 싸우던 시대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차돌 곧 부싯돌을 취하여 그것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냥 일부러 하나님께서 장난으로 구하기 힘든 차돌을 구해서 할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돌멩이로 사람 몸에 피를 내서 육적 껍질을 벗기라고 합니까?

 

바로 성경에서는 ‘돌’ 하면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으로 뜨인 도이 셋ㅇ을 다 쳐서 멸망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뜨인 돌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신령한 물을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이처럼 돌은 곧 그리스도를 말하는 바 차돌로 할례를 행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으로 우리의 심령에 할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차돌은 어떻게 하면 날카로워집니까? 깨뜨리면 차돌은 짝 갈라져서 끝부분이 유리처럼 날카로워집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깨어졌습니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 한 근을 가지고 와서 깨트렸더니 그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가 내 장사를 예비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이 향유 옥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옥합인 예수 그리스도가 깨어져서 향유 기름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하듯이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고 자기 자신이 깨뜨려졌다는 말입니다.

 

부싯돌을 깨뜨려서 그 돌멩이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 피로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할례 해 주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6.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가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이유입니까? 7일이면 7일이지, 또 3일이면 3일이지 왜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출22:30절에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 반에 내게 줄지니라.”고 했습니다. 첫 태생은 하나님께 바치는데 소나 양이 새끼를 낳으면 태어나자마자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고 7일 동안은 그 어미에게 있게 한 후에 8일째에 하나님께 가져와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 어미가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그 새끼가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7일 동안은 젖 먹으라는 뜻입니까? 왜 7일은 놓아두었다가 8일째에 가져오라고 합니까? 왜 우리 인간에게서 태어난 아기도 8일째 하나님께 데려와서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까?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다 8일째 성전에 와서 할례를 받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도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6일 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습니다. 일하시고 쉬는 것으로 한 기간, 한 텀(term)이 끝이 납니다. 그 다음 8일째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달력에도 일, 월, 화, 수, 목, 금, 토로 되어 있습니다. 토요일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안식일입니다만 사도행전에 보면 여드레 날에, 안식 후 첫날에 예배를 드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안식일에 예배 안 드리고 주일날 예배를 드립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안식하셨습니다. 금요일 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토요일 날 하루 안식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이 세상 우리의 죄는 다 사해진 것입니다.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안식 후 첫날 다시 말하면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8일째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롭고 위대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8일째의 진리가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7일 간은 데리고 있다가 8일째는 다시 시작하는 첫 시작의 날에 하나님께 새로이 바치라는 말입니다. 그 전 7일하고는 틀립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다음 주의 첫날입니다.

 

이 8일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약시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끝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출발하는 주일날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예배드리는 것으로 안식일이 주일날로 신약시대에 새롭게 바꾸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8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관이 있습니다. 완전히 주님과 함께 새 출발을 하자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그 마음이 할례 받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인 부싯돌, 차돌로 그 마음에 피를 내서 할례 받는 것입니다. 완전히 예수 믿고 그 마음이 새로워져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로 할례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례에는 엄청난 뜻이 있었습니다.

 

7. 구약의 할례에도 엄위하셨다면 신약의 참 할례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엄위하실까?

 

예수 안 믿으면, 그 마음에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예수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자기 백성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약속입니다.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히 지옥불에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안 지키시겠습니까?

 

이 약속이 잘 믿어지지 않으면 구야시대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지금까지 80년 동안 기르고 연단시켜서 이제 사명의 길로 보낼 모세라 할지라도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이시려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엄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할례언약을 철저히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동시에 신약시대의 참 할례언약에도 철저하실 것을 이 모세의 경우를 보더라도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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