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干證)
방패 간(干), 증거 증(證)
1. 예수교인(--敎人)이 자기(自己)의 지은 죄(罪)를 고백(告白)하여 증명(證明)함.
2. 범죄(犯罪)에 관계(關係) 있는 증인(證人).
[명사] testimony, [동사] give a testimony
마태복음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Whoever acknowledges me before men, I will also acknowledge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But whoever disowns me before men, I will disown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하나님의 유머
기독교 철학자인 엘튼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의 저서
중에는 '그리스도의 유머'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하나님은 매우 유머가 풍부한 분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유머 넘치는 분인지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께 다가가는 방법은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훨씬 더 친밀해질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성경 속에 그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의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가 다 되어가고 그의 아내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생산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웃기시네요. 제가 이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 부부에게 약속한 자녀를 주셨고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을 아들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웃기셨다는 뜻입니다.
한 여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저에게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웃겼더니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물어보니까 이러한 내막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랜 시간동안 우리 남편을 위해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남편은 교회에 나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예배 때 남편 구두를 교회 가지고 나와서 강대상에 놓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구두가 먼저 나왔사오니 주인도 이 구두 따라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요.
제가 기도하긴 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지요.
그래서 그날 다른 기도는 하나도 못하고 실컷 웃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 주일날 남편이 갑자기 저를
따라 교회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요즘 계속 교회에 나오고 있답니다.
제가 하나님 한 번 웃겼더니 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조셉 톤 목사의 순교의 신앙과 순교의 신학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를 맡아 시무하셨던 조셉 톤 목사님은 너무
유명해서 루마니아의 공산정권과 독재자들에게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루마니아 정부는 국제적인 여론 때문에 차마 이
목사님을 죽이지 못하고 추방하였습니다.
그분은 미국으로 오셔서 여러 신학교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분이 가는 곳마다 많은 신학생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 분은 위대한 목회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조셉 톤 목사님은 "당신의 신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신학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던 학교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쯤에는 공산권이 서서히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에 미국 복음주의 잡지사의 한 기자가 조셉 톤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그 분은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기자가 의아한
얼굴로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당신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낸답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운 것은 동구권이 개방이 되어 나의 조국에
돌아갔을 때, 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 까봐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 29
루마니아에 조셉 톤(Joseph Ton)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인지라 당시 루마니아의 공산정권과 독재자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그 목사님이 눈엣가시 같았지만 그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으로 가서 설교도 하고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 없습니다. 나의 신학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훗날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던 시기에 미국복음주의 잡지사의 한 기자가 조셉 톤 목사에게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당신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렵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운 것은 동구권이 개방되어 나의 조국에 돌아갔을 때,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까 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
< 본문 - 빌립보서 1:29-30 >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년)는 행동하는 신앙인, 행동하는 신학자로 유명합니다. 1906년에 출생한 그는 21세 때인 1927년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 중에 수재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을 위해서 교회까지도 그의 말에 복종하는 ‘제국교회’로 통합시켜버렸습니다. 여기에 저항한 일부 목사들은 ‘긴급목사동행’을 결성하고 제국교회를 반대하는 ‘고백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물론 고백교회에 속한 목사들은 파면당하고, 투옥당하고, 교회가 폐쇄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히틀러의 악행에 저항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본훼퍼 목사입니다.
1939년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 초청교수로 있던 본훼퍼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돌아갑니다. 미국과 독일에 있는 성도들이 ‘독일로 가지 말라.’고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기독교를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독일로 갑니다. 그가 독일로 돌아온 지 불과 두 달도 안 돼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본훼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1943년 4월 5일 독일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4월 9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대에서 처형을 당함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간 본훼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진진한 자세로 기도를 드린 후 처형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짧게 기도한 후 용감하게 교수대를 붙잡았습니다. 수용소 의사인 피셔 휠슈트룽은 39세의 천재 신학자 본훼퍼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50년 동안 의사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본훼퍼가 처형된 3주 뒤 히틀러는 자살했고, 1945년 5월 8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 본훼퍼는 기독교 평화신학과 평화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1934년 덴마크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교회와 열방의 세계’라는 제목의 유명한 평화설교를 했고, 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피력했습니다. 평화는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군비증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야 실현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평화주의자인 목사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본훼퍼는 감옥에서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한다.’ 본훼퍼는 그 미친 운전사인 히틀러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려고 히틀러 암살조직에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본훼퍼의 신학은 삶과 직결됩니다. 그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와 순종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 설파했습니다.
이런 본훼퍼의 설교나 삶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말이 거창하게 ‘행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야고보서의 표현대로 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야고보서 2:17)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 표현된 삶을 성경은 행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신앙의 가치와 내 신앙의 삶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과 내가 행동하는 내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곳으로 몰려들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마태복음 3:7-9)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 정통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어떤 삶을 살든 아브라함의 후손이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아주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그런 거짓된 생각을 버리라고 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바른 신앙의 삶입니다.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답게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신대로 구원받은 자다운 삶의 모습이 없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것이고, 헛된 것이고,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 구원을 가져다주는 참된 믿음이라면 그에 걸맞는 삶의 모습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바른 신앙입니다. 본훼퍼가 강조한 말로 한다면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의 신앙을 건물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 건물의 설계도이고, 그 설계도에 맞춰 세워진 건물이 바로 신앙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건물을 세워가는 힘은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신앙이 만들어가는 신앙의 건물이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은 그 건물이 설계도에 맞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계도와 다르게 세워진 건물은 아무리 크고 웅장하게 세워진다 하더라도 좋은 건물이 아니듯이, 우리의 신앙의 가치와 다르게 드러나는 삶은 결코 하나님께 기뻐하는 신앙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의 건물을 세워가는 힘이 은혜라고 한다면 그 은혜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임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은혜는 평강과 기쁨 가운데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은혜가 더 자주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서 고난을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더 큰 세상의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고난이 없는 삶은 우리의 신앙을 가볍게 만들고 결국에는 신앙이 왜곡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우리가 힘들다고 여기는 고난의 현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고난의 자리가 바로 믿음이 회복되는 자리이고, 고난의 자리가 믿음이 견고해지는 자리입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우리를 거대한 유혹 앞에 서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유혹은 거짓으로 치우치고 거짓으로 물들어감에도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1: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 풍성한 은혜로 인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었고, 우리가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내 의지나 내 지혜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두 번째 이유가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고난을 받게 하려는 것이란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우리를 고난의 자리로 내모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마태복음 7:14)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 좁은 길과 반대되는 것이 큰 문과 넓은 길입니다. 크고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이 갑니다.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좁은 문 좁은 길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좁고 협착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평안하고, 형통하고, 아무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힘든 투쟁이 있을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과 싸우는 투쟁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나를 둘러싼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야 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고난과 역경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이유는 그것만이 우리가 참된 신앙을 끌어안고 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 더욱 감사하고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그런 은혜가 주어지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금방 잊어버리고 자아도취에 빠지고 맙니다. 마치 내가 잘 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고, 우쭐거리며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때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우리가 겸손해지고,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의 순간이고, 더 믿음을 의지하게 만드는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고난 속에 머물기를 원하시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밀어 넣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말입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고난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길을 가기보다는 기쁨과 형통의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시인처럼 우리도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는 삶이 복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나를 바르게 되돌아보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배워갈 수 있기에 고난당한 것이 때로는 내게 유익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때로 지금 내 삶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고난 속으로 밀어 넣으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그럴 때에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인도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 영혼이 순수해지고 깨끗해지기에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밀어 넣으실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복을 가슴에 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난 없이는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난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우리들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신앙과 삶이 함께 가는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 로마시대에 우리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다 잡혀가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순교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 교회와 성도들은 더 바른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고, 더 복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주후 111년에 터키 북부 비두니아(Bithynia) 지역에 ‘플리니’(Plini)가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비두니아 지역에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고 이방 신전들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총독이 임명되어 오자 어떤 사람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갖다 주며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플리니 총독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스파이를 잠입시켰습니다. 스파이가 교회에 잠입하여 동태를 파악한 후 총독에게 보고하였고, 폴리니 총독은 이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로마의 황제 트랴얀(Trajan)에게 보냈습니다.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황제에게 보낸 그 보고서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본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스파이를 잠입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낯선 사람이 와도 따뜻하게 환영하였고, 어느 나라 어디 출신인지 따지지 않았고, 노예나 여자들도 함께 어울려 서로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스파이라는 사실이 들통 났어도 끝까지 형제처럼 대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미소를 지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모일 때마다 서로 식사를 나누었고, 자기의 것을 스스럼없이 내놓아 가난한 자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없이 언제나 사자같이 담대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그들은 진정으로 '참된 신자들이며, 그들의 교회는 참된 교회'라 판단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그들을 체포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보고서는 우리에게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제 순교의 현장에서 희생될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박해자들이 보아도 감동이 될 만큼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랑할 줄 알았고, 누구든 품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를 실천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 그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초대교회가 엄청난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거대한 로마의 권력을 이겨내고 부흥을 가져온 힘임 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남긴 고귀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바른 믿음은 반드시 바른 삶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은 고난을 통해서 정제되고 힘을 얻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더욱 향기 나는 믿음을 붙들고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신앙입니다. 그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고 고난 속에서도, 세상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교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신앙을 지키지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피의 순교’ 또는 ‘붉은 순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와 같이 신앙에 자유가 있는 곳에서는 그런 붉은 순교, 피의 순교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럼에도 순교신앙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또 하나의 순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붉은 순교’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로 ‘백색 순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백색 순교’라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피를 흘려 죽음의 자리까지 가는 것은 아니지만,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내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 하시는 곳에 사용되도록 기꺼이 내어놓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복음의 청빈한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정결한 신부로 살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 가기 위해서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가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나를 포기하는 것, 내게 주어진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도록 하나님 앞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백색 순교입니다.
너무 편안하고 안일한 신앙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하고 말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우리의 삶에 내 욕심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고 말입니다. 고난을 거부하고 형통하고 평안만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야 할 삶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정결한 마음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의 영성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가치를 따라 바른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면 바로 그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