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소개된 여섯 명의 마리아


신약에 소개된 여섯 명의 마리아에 관하여


마리아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신약에 여섯 명이 있다.
그래서 때로 혼동할 때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찬송가 211장(통일 346장)이다.
"값 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라고 무심코 부르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렸다(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렇게 착각한 것은, 중세의 신학자들이 그녀와 막달라 마리아를 동일시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곧 베다니의 마리아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두 번 향유 부음을 받았다.
초대 교회의 저자 오리겐은 심지어 세 번의 향유 부음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1.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녀는 나사렛에서 살았으며, 목수 요셉과 약혼한 기간에 예수님을 잉태하였다. 그녀는 다윗 가문 출신으로, 눅 3장의 족보와 관련이 있다.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눅 2:5)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누가복음 1장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저는 주의 계집종이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한다. '계집종'을 뜻하는 헬라어 '둘레(δούλη)'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δοῦλος)'의 단수 여성형이다. 이 표현은 자식을 간구하던 한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非難)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했다.

2. 마르다와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

이 여자의 이름은 누가복음에서는 10:38이하에서 한 번만 언급되어 있는데, 이 곳에서 그녀는 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돕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었다.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는 남매지간으로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4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오가며 사역하시기 좋은 곳이 었다는 요인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수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베다니에는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집에 거주하는 삼남매가 예수님께 특별한 존재였다. 이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 11:5).

그들은 늘 예수님을 환영하며 반겼을 뿐만 아니라 여행에 지친 예수의 일행들에게 음식과 잠자리 등을 제공하며 섬겼던 아주 귀한 동역자였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 10:38)

그리고 요 11-12장에서는 그녀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음이 나타나 있는데, 4복음서 모두 이 향유 부음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3. 막달라 마리아

이 여자의 이름은 아마 갈릴리 막달라 성읍에서 유래한 듯하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으므로 이 특정한 마리아를 구별하기위해서 '막달라'라는 지명을 이름 앞에 붙였다 '막달라'는 '탑' 또는 '망루'라는 뜻의 지명으로 갈릴리 바다의 서해안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이다.

이 마리아를 특징지워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녀가 과거에는 일곱 귀신에 들려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였으나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지금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라는 점 뿐만 아니라 일곱 귀신은 최악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도(마 12:45) 이 여인에게 임한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은총을 입었으므로 그녀가 예수에게 전적인 헌신을 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인 바 예수를 따랐던 여성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짐작된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의 수난사에서 독보적(獨步的)인 증인이 된 점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할 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마 27:55,56; 막 15:40; 요 19:25), 예수의 시신이 매장되는 현장에도 있었고(마 27:61; 막 15:47; 눅 23:55), 주일날(안식 후 첫날)이른 아침에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고(마 28:1; 막 16:1; 눅 24:10),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도 바로 그녀였다(막 16:9;요 20:1-18).

누가복음 8장 2절에는 그녀가 악귀에게서 구원받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그녀를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죄 있는 여자'와 동일시하는 견해를 의심하게 된다(눅 7장). 누가는 아주 다른 묘사를 사용하기보다는 연관성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2-3)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 곳에 있었으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녀에게로 가셨다(요 20:1이하). 그 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들의 관계가 이후부터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4. 야고보의 어머니, '다른 마리아'

이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는 아마 동일인인 듯하다.

엠마오로 가던 두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 글로바였다고 누가는 증언한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글로바는 당시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는 들지 못했으나 모두가 잘 아는 유력한 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글로바(클레오파스 Κλεόπας)라 하는 자"-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요 19:25에 언급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 등)이며 둘째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말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시몬의 아버지와 동일한 인물이자 예수의 삼촌이라는 설(Origen, Zahn 등)이 있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다. 두 견해의 다른 가능성에서 제시된 인물이 동일인일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름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당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이거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특히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가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동행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신빙성있다 하겠다. 아들보다는 아내일 확율이 높은 것은 가족의 구성상 남편과 아내가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갔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소에 있었다(마 27:55,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 27:56)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무덤에 있었다(마 28:1;참고. 막 15:40이하; 눅 24:10; 요 19:25).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

저술가 헤게스푸스(Hegesippus)에 따르면 글로바는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형제였다.

5. 마가의 어머니

그녀는 유일하게 행12:12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이 곳에는 그녀의 집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 12:12)

1:13에서는 '다락'으로만 언급되어 있으나 12:12에서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본절과 1:13 및 12:12의 장소가 서로 일치한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가의 다락방'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

베드로가 감옥으로부터 구출되어 처음으로 찾아간 집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로 이곳은 줄곳 제자들의 은신처및 집회장소로 사용된 듯 하다.

참고로,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며(골4:10)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자이며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이는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이 유대식 이름인 것과 동일하다. 그는 바울의 제1차 여행때 바나바와 바울과 동행하였는데 (12:25;13:5) 2차 여행 때 그의 동행에 관한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기도 한다(15:37,38).

마가는 훗날 베드로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고 바울에게도 인정받는 사역자가 되었다(딤후 4:11). 그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보고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에 대해 상세히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6. 로마의 한 그리스도인

바울은 그녀를 수고를 많이 한 여자로 소개하고 있지만(롬 16:6), 그 외에 그녀에 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롬 16:6)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 로고스는 모든 성경에 기록된 말씀, 예수님 자신을 의미
* 레마는 기록된 말씀에서 나를 감동시키고 내게 특별하게 각인된 말씀을 의미

로고스와 레마

말씀이라는 뜻의 '로고스(logos)'와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는 뜻의 '레마(rhema)'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로고스"는 성서입니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말씀이 나의 영혼에 충격을 줍니다.
그 말씀은 나를 위해 성령으로 축복된 것으로 "레마"라고 합니다.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생활에 힘이 될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읽는 중에 아마 이렇게 말할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구절을 수백 번 읽었건만, 아직까지 아무런 의미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제야 알겠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참으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이 하셨던 말씀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씀은 자신에 대한 말씀이 되어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레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중에서 예를 들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3:2~5) 라는 구절 일수도 있습니다.

아마 어떤 병으로 고생하던 중 정말로 주님이 당신의 믿음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했다면, 바로 특별한 때, 특별한 상황에서 당신의 영혼을 위해 주신
축복받은 말씀, 곧 "레마"입니다.

어떤 성서구절이 당신을 감동시켰을 때, 그 구절을 반복하면 당신의 영혼 깊숙이 그것을 간직하려 하게 되고 드디어 그 구절이 당신의 영혼에 와 닿아 성서를 펼치면 그 똑같은 구절에 눈이 머문다고 했다면. 그 구절은 당신에게 바로 "레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레마"는 다앙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을 전하고자 하십니다.

고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전6:9~10)

마음을 열고, "레마"를 갈망하고 그 말씀을 우리 생활에 적용 하시길 바랍니다.



예를 들면 성 어거스틴의 경우(로마서 13:13-14)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후세에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으로 불린 사람입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한때, 기독교신앙을 거부하고, 한 젊은 여성과 동거하면서 아이를 낳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회심한 장면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무화과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거기서 울음을 터트리기가 무섭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나는 그런 죄악에 매어있는 것 같아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주여 언제까지 내일로 미루시고 저의 더러움을 씻어주지 않으시렵니까?”
나는 이렇게 아뢰면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슬피 울었다.
그때 이웃집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하고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 힘든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노래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성경을 펴들고 첫눈에 보이는 말씀을 읽으라는 확신이 들었다. .....

내가 그 성경을 집어 들고 첫 장을 펼쳤을 때에 첫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이랬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나는 더 이상 읽어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나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치고 모든 어두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 성서일과의 본문은 어거스틴을 성자로 변화시킨 말씀입니다.

구원의 시간

로마서 13장 11절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우리가 시기를 압니다. 우리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잠은 신령한 일을 등한히 하고, 잊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깸은 잠의 상태에서 벗어나 재림을 대비하여 믿음과 행함에 충실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빛의 갑옷

로마서 13장 12절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었습니다. 낮이 가까웠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그는 죄의 깊은 밤에서 어둠의 일을 했습니다. 어둠의 일을 하며 초라한 자신을 발견한 그는 죄의 깊은 밤에서 빛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의 세계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둠의 일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빛의 갑옷을 찾았습니다. 빛의 갑옷은 죄의 세계와 싸우는 옷입니다. 어둠의 일을 물리치는 빛의 옷입니다. 어둠의 일은 어떤 일입니까? 로마서 13장 13절 말씀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방탕,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술취함, 주님을 멀리하고 쾌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음란과 호색, 어거스틴이 특히 괴로워했던 것이 성적 욕망입니다. 그리고 다툼과 시기입니다. 다툼은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범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격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축하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어둠의 일을 어떻게 이깁니까?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빛의 갑옷은 어떤 옷입니까?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로마서 13장 14절 말씀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박수암, 로마서, 320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나의 전 인격을 채워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욕망으로 채우면, 육신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죄인이자 탕아 어거스틴, ‘은혜의 박사 ’가 되기까지

어거스틴은 33세가 된 387년 4월 세례를 받고 진정한 행복을 찾았지만, 어머니와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이후 작심한 듯 수 년 동안 철학은 물론, 신학과 성경 연구에 매진했다.
이 기간 <회의주의자들에 대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독백>이라는 단편을 저술했고, 37세이던 391년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다.
수도원을 세워 수도 생활을 시작하다, 397년 발레리우스에 이어 히포의 주교가 됐다.

이후 그는 이교와 철학의 오류들을 반박하며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기독교 교리의 수호자가 됐다.
특히 마니교, 도나티스트, 펠라기우스주의 등 3가지 주요 이단들과의 싸움에 진력하며 보편 교회의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특히 411년 286명의 가톨릭 감독들과 229명의 도나티스트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인 카르타고 회의에서, 지난 100여 년간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혔던 도나티스트들을 축출하는 일에 앞장섰다.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했고,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약화시켜 야만족들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어거스틴은 413-426년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집필한 후 430년 8월 28일 76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어거스틴의 저술과 사상

어거스틴은 평생 수많은 작품들을 썼고, 8천여 회 설교했으며, 취급한 주제들도 다양했다. 대표 저술은 <고백록(Confessiones)>으로, 397-410년 집필했으며 13권 273장으로 돼 있다. 이는 단순 자서전을 넘어, 하나님의 존재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독교 교리가 영원불변한 진리임를 증언하는 변증서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책이다.

최더함 목사

“그가 발견한 기독교 진리는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를 뛰어넘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으로, 기독교회사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한 결과”라며 “한 마디로 어거스틴의 신학적 성찰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이라는 두 줄기를 하나로 통합한 새로운 물줄기의 근원으로, 플라톤 철학 및 신플라톤주의를 재해석해 기독교 교리와의 조화를 꾀한 최초의 신학적 시도였다”고 해설했다.

“특히 내적 인간에 대한 탐구는 독창적이다. 그는 인간 영혼의 내향성(inwardness)을 진지하게 성찰해, 젖먹이에게도 드러나는 죄의 본원적 특성을 통해 인간을 죄인이자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했다”며 “그는 악이란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이자 사랑의 왜곡이라고 했다. ‘조명설’로 불리는 그의 인식론은 진리의 바른 인식을 위해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라고 했다”고 전했다.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은 제자 에보디우스와
①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②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③ 하나님은 죄인의 죄를 예지하셨는가? 등 세 가지 주제를 놓고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집필 동기는 악과 구원의 문제에 대한 마니교의 그릇된 주장들을 변증하기 위함이었다. 마니교처럼 죄는 악신이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 존재인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죄악의 문제이며, 이 타락한 자유의지를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신국론(De Civitate Dei)>은 <고백록>의 성찰을 역사와 문화로 확대 적용한 작품으로, <하나님의 도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로마 제국이 야만족의 침입을 받은 이유가 기독교 때문에 다신교를 버렸기 때문이라는 당시 민심의 비난에 대해 기독교회를 변호하기 위해 쓰였다. 그래서 전반부는 기독교 호교론(1-10권), 후반부(11-22권)는 ‘두 도성’에 관한 고찰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한 진리 안에서 완성되지만, ‘지상의 도성’은 종말의 때 분명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가장 나중에 집필한 최고의 작품으로, 신학적이면서 내면의 깊은 사색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당시 마르시온 등 초기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가현설을 주장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을 반박했다. 전반부(1-7권)는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소개하고, 후반부(8-15권)는 삼위일체론을 신학적으로 규명한다.

최더함 목사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달리,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다”며
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non peccare)으로, 타락 이전 아담의 상태다.
②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가능성(non posse non peccare)으로,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의 상태다.
③ 죄를 지을 수 없는 가능성(non poccd peccare)으로, 구속 받은 사람들의 상태”라고 분석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가능성’이 회복돼, 갇혔던 자유가 해방되어 자유를 누린다고 했다.
그러나 범죄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며, 인간의 욕망은 죽는 날까지 남아 있기에 이 땅에서의 완전한 성화와 온전한 자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와 온전한 자유를 가지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성도는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이 완전함을 누린다”고 설명했다.

은총의 박사, 어거스틴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토마스 J. 네틀스 토마스 J. 네틀스(Thomas J. Nettles) 박사는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의 역사 신학 교수이다.

교리와 경건의 조화에 있어서 어거스틴(354-430)과 맞먹을 인물은 교회사에서 찾기 드물다. 어거스틴의 작품들은 기독교 철학, 조직신학, 철학사, 논증법, 수사학, 그리고 기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다. 비록 그가 죽은 사람을 위한 중보적 기도와 제사, 연옥, 변형적 칭의의 교리를 어느 정도 지지했다 할지라도, 그의 장대한 은혜 교리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대속 교리는 개혁 신학의 여러 고백서 안에서 정밀하고 튼튼한 기틀로 세워졌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이교 사상이 아닌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명의 재건 역시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라 진행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도 그 당시 무시되었던 어거스틴의 죄와 구원 교리를 재발견하며 쌓아 올린 것이다.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주 타가스테(Tagaste)에서 354년에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타락에 있어서, “어린이들의 무죄는 마음의 어떤 상태보다 신체의 무력함에 있다(고백록 1권 7장).”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아버지 파트리시우스(Partricius)는 이교도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아버지를 상스럽고, 호색하며 화를 잘 낼 뿐 아니라 외도를 즐기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파트리시우스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로마가 통제하는 경제, 정치 체제 속에서 아프리카인으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어거스틴은 그에게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파트리시우스는 어거스틴이 17살이 되기 전에 죽음 맞았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열정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어거스틴을 향한 남다른 사랑을 지닌 모니카는 아들의 행복과 구원을 놓고 끈질긴 열심으로 쉼 없이 기도를 쏟아부었다. 모니카가 어거스틴의 회심과 정통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들었을 때는 껑충껑충 뛰며 기뻐하기도 했다. 어거스틴의 재능과 섬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태워지는 시점에 어머니 모니카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33살이 되던 해, 그녀는 5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그의 부모는 자신의 학업적 성취에만 치중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영적인 동기가 아닌 그저 아들의 출세를 위한 헛된 야심만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어거스틴의 학업이 그의 회심을 방해하기보다는 돕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런 확신은 거의 들어맞았다. 

타가스테에서 기초 소양 과정을 마친 어거스틴은 365년부터 369년까지 마다우라(Madaura)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어거스틴은 진리에 대한 적절한 언어적 표현을 찾는 것을 평생의 기쁨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연구에서는 인간과 언어의 유사점을 드러내며, 매우 기묘하며 본질적으로 선한 인간이 얼마나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했다. 단어와 웅변이가 설득과 설명을 위해 필요하지만 남용될 때는 오류와 악함을 묘사할 뿐이다. 훗날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의 규칙은 무시하면서, 문자와 음절의 규칙은 얼마나 까다롭게 지키는지도 지적했다. 

후원자 로마니아누스의 도움을 받은 어거스틴은 수사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향했다. 이때가 기원후 370년이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한 여인을 만나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3년간 지속된 이들의 관계로 얻은 결과는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였다. 동거 생활로 이끈 정욕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억했다. “진흙탕 같은 정욕과 젊음의 혈기가 내뿜는 뿌연 안개가 내 마음을 덮어 어둡게 하였기 때문에, 백색광 같은 사랑과 안개같이 희뿌연 정욕의 차이를 분별할 수 없었다(고백록 2권 2장).”

어거스틴은 9년 동안 물질주의와 이원론으로 가득 찬 마니교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다. 마니교는 기독교, 불교, 그리고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을 혼합하여 악의 문제를 다루었다. 어거스틴은 겉으로는 자신이 유년 시절에 배운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지하면서도, 악의 존재에 대한 마니교의 정교하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에 매료당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 묘한 매력을 풍기는 혼합 사상이 언어와 실체 사이의 통합을 위한 그의 탐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은, 마니교 주의자들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이며 터무니없는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이름을 뒤섞으며 말할지라도, 그것은 마귀의 올무였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늘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입에 발린 소리뿐이었다(고백록 3권 6장).”

마니교적 이원론에 대한 숙고는 어거스틴의 신학 중에 가장 심오한 주제 중 하나인 악의 문제를 끌어냈다. 어거스틴의 회심 직후에 기록한 『독백』은 하나님을 “진실로 피난처를 찾아 피신하는 소수에게 악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악은 선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모든 선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악은 단지 선의 부재일 뿐이다. 악은 침범하고 오염시키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차용된 것이며 그 영광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악이 내재한 존재도 그 자체로는 선하다. 마니교 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반대 본성을 근절한다고 해서 악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타락된 것을 정결케 함으로 제거될 수 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참된 것의 모방하지 않는 거짓된 것은 없기 때문에 진리와 거짓은 동일한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학업을 마친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곳의 교육 분위기는 실로 가관이었다. “판을 엎는 자들”로 알려진 학생들은 모든 질서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미친 사람처럼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다. 관행으로 보호되지 않았으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절망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어거스틴은 383년에 로마로 갔다.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어거스틴은 밀란 지역에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직 자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곳에 지원한 어거스틴은 그다음 해인 384년에 밀란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밀란의 위대한 설교자 암브로스를 조우한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의 수사법에서 자신의 마니학 스승이었던 파우스투스의 방식만큼 재미를 찾지는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하고 본질적인 실재를 언어에 녹인 암브로스의 설교 능력을 배우게 된다. 어거스틴은 기독교가 마니교에 대항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는 교회의 교리 문답자로 등록했다. 회의주의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신플라톤 철학은 어거스틴을 마니교 주의의 이원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새롭게 성경을 접하면서, 어거스틴이 가진 지적 성장의 빈 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창조, 섭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가 어거스틴의 지적, 영적 열망을 차고 넘치게 채워주었다. 

어거스틴은 그제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향한 찬양과 사랑을 떠나서는 영혼의 쉼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에 의해 의도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만 “사랑받으셔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만을 찬양하며 즐거워하도록 만드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분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쉼을 누릴 수 없도록 하셨다(고백록 1권 1장)”고 어거스틴은 인지했다. 

31살 된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고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들고 읽어라”고 외치는 어린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자기 주변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든 어거스틴의 눈은 성경 말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괴롭힌 불만족, 확신, 재검토의 순환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387년 4월 25일, 암브로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어거스틴은 은둔 생활을 원했다. 이전에 따르던 쾌락, 멋, 명예는 멀리하며 무소유를 실천하고, 성경 읽기와 하나님을 묵상하는 삶을 추구했다. 감독이 없는 교회들이 어거스틴을 데려오기 원했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이러한 자리들을 사양했다. 그리고 391년이 되어서 수도원 건립을 목적으로 히포로 이동했다. 히포에는 발레리우스가 감독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 발레리우스는 어거스틴을 사제로 임명하고, 395년경에는 어거스틴이 이 도시의 새로운 감독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을 목사로서 성도들을 섬겼을 뿐 아니라, 기독교 진리와 순전한 예배에 해박한 교회 지도자로서 전체 기독교 세계를 이끌었다.
철학과 신학에 대한 그의 광대한 역량을 쏟아부은 영적 자서전『고백록』은 수많은 신학 의제들을 수립했다. 그리스도, 삼위일체, 인간의 죄, 악의 성향, 타락한 의지의 내적 부패와 자유함,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필요성, 성례의 본질, 타락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되는 인류사의 향방 등의 기본을 『고백록』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명하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게 알려주십시오(고백록 10권 29장)”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펠라기우스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어거스틴은 평생 은혜의 필요성을 변증했다. 그리고 이는 그의 가장 심오하면서도 논쟁적인 신학적 입장들을 만들어 냈다. 어거스틴 사상이 지닌 이러한 특징은 안셀무스,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사람의 경건과 신학에 영감을 주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매우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여 칼세돈의 입장을 예견했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전개된 그의 놀라운 신정론은 서구사에 혁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이고 결론을 찾고 있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역동성을 창출해냈다. 또한, 도나투스파의 박해에 대한 그의 변증은 여러 나쁜 결과들을 도출하기도 했지만, 교회의 일치를 위한 그의 강력한 견해는 교리적 토론과 확증을 통해 다양한 유형 속에서 일치를 이루려는 많은 복음주의적 노력에 실체를 부여했다.

1,200여 년 전, 수도승 고트샬크가 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실이다. “사도 시대 이후, 어거스틴은 모든 교회의 선생이다.”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

1. 저작 동기와 시대적 배경

어거스틴의 생애는 논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다사다난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시기였습니다. 비록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국교화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고트족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배교자와 이교도들을 교회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고심해야 했고, 수많은 이단들이 기독교를 공격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던 시기였습니다.

고트족의 침입과 게르만 족의 황제 폐위는 결국 천년의 영원한 도성처럼 보였던 로마를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폭풍 가운데 어거스틴은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의 바른 신앙을 위하여 끊임없이 신학적 논쟁에 휘말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자처한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부탁으로 논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초기의 저작들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이 강하고 후기에 들수록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책이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던 어거스틴이 주교가 되고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멸망해 가는 카르타고와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반 이후는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신학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요한 3대 논쟁은 먼저, 마니교와의 논쟁이고, 둘째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마지막 세 번째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입니다. 세 논쟁은 시기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마니교와의 논쟁에서는 악의 기원이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논쟁을 그의 <자유의지론>이란 책을 통해 풀어 나갑니다. <자유의지론>에서 어거스틴은 악이 어떤 존재, 즉 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악용함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악의 책임과 출처가 사람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은 교회가 배교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핍박이 끝났지만 도나투스가 살았던 시대는 배교자에 대한 문제로 교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여파가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도나투스파는 배교자나 율법을 잘 지키지 않은 자들에 대해 교회가 엄격해야 하며, 그들을 교인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지었을 경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나투스파는 교회의 거룩에 대한 극단적 염려로 인해 결국 보편 교회를 버리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나가 ‘분리주의자’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릅니다.

어거스틴은 비록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람은 불완전하며,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은 교회가 받아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 논쟁은 죄의 기원을 다룬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하게 됩니다. 마니교에서 이미 죄의 기원을 다뤘지만, 펠라기우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본론에서 다루겠지만 펠라기우스의 가장 큰 문제는 아담의 죄성이 후손들에게 전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완전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엄숙주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은 마니교와의 논쟁에서 죄의 기원, 도나투스파의 완전한 삶을 종합해야 하는 신학적 복합성을 띠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과 문자>를 살펴보면서 펠라기우스 논쟁의 흐름을 짚어 나가 봅시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이후에 일어날 수많은 이단들과 중세의 타락과 종교개혁, 그리고 회심과 성화의 문제까지 두루두루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2. 책의 구조와 내용

책은 전체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어떤 논리적 귀결이나 논증을 차근차근 풀어 나가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주제로 나누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흐름에 따라 저는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1은 서론 부분이고, 2.3은 본론에 해당하며, 마지막 4는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1) 1-4장 인간에게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 5-26장 율법(문자)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3) 27-53장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집니다.
4) 54-66장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1) 1-4장 인간에게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첫 부분은 인간에게 완전함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르켈리누스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이 책은 엄밀하게 펠라기우스를 논박하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닙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은 이 책이 출간된 후 한참 후에 시작됩니다. 어거스틴이 ‘유아세례와 인간의 완전한 의로움에 관한 작은 책자’를 언급하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에게 완전한 의로움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지만, 그것은 완전함을 추구했던 도나투스파를 논박하기 위한 중요한 논지였습니다. 완전한 거룩을 추구했던 도나투스파를 향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은 절대 완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의로울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논지는 어거스틴을 ‘은총 박사’로 부르게 되는 신학적 전제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인간이 누구인지 간략하게 정의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면 죄가 없는 인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을 자기 안에서 살게 하시는 한 분 빼고는 이 땅에 누구도 이러한 완전함에 도달한 자가 없었고, 또 없을 것’(33쪽)이라고 말합니다. 즉 가능성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는 아무도 없었고,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에 이미 나타났고, 증언 되었습니다. 최고,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도 그랬고, 탁월한 능력자였던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야곱, 아브라함, 모세 등등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고 고백하며, 심지어 어거스틴도 시편 143:2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를 인용하며 그것을 증언합니다.(35쪽)

▶인간은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 또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의로울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의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 의지의 힘이나 인간 자신의 의로움을 통해 이 완전함에 도달하거나 꾸준히 그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아주 날카롭고도 사정없이 저항해야 합니다.”(37쪽)

▶인간은 계명을 따라 살 때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자칫 행위 구원의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앞으로 전개될 논지를 따라가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순종하는 의지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미 제시된 길을 가며 꾸준히 그리고 의로우며 경건하게 살게 되면 축복되고 영원한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39쪽)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인간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입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도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의 저서를 읽고 해로움을 인지하여 이곳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거스틴은 비록 인간에게는 완전한 의로움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은총)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영원한 삶, 즉 의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인간에 대한 전제를 가지고 다름 주제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5-26장 율법(문자)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곧장 자유의지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짓는 것 밖에 다른 것을 할 수 없’(41쪽)다고 말합니다. 즉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자유의지가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자유란 고작 악을 행하고, 불의를 선택하는 자유 밖에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후에 루터는 이것을 ‘노예 의지’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악한 삶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중요한 것을 지적합니다.

“말하자면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 살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죽이는 문자에 불과합니다.”(41쪽)

문자는 율법, 또는 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살리는 율법이 사람을 죽일까요? ‘모든 죄는 탐욕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43쪽) 타락한 인간은 절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통해서 사랑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47쪽)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자(율법)는 인간의 탐욕을 이끌어 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악을 행하게 됩니다. 선을 행할 수 없고, 악만을 행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들의 악을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것같이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율법의 문자는 살리는 영이 없으면 죽이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는 죄를 막기는커녕 알게 하며, 악한 욕망에 더하여서 율법을 범함도 덧붙여지기 때문입니다.”(49쪽)

▶율법은 인간이 누구인지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죄를 죄 되게’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합니다. 율법은 바울의 주장처럼 ‘죄를 깨’닫게 합니다.(롬 7:7) 율법을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을 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더러운 줄 모르다가 거울을 보고 더러운 것을 발견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하나님 없이(계명)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바른 인간관은 절대 거룩이신 하나님과 악의 실체인 인간을 비교함으로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고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의 오래됨은 성령의 새로움이 없으면 죄로부터 자유케 하기보다 죄를 알게 함으로 죄인을 만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103쪽)

3) 27-53장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집니다.

▶율법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드러내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는가?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은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비록 율법이 우리를 죽이게 하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 숨겨져 있으며, ‘그리스도 복음 안에 드러난 것’입니다.(105쪽)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은 이미 ‘두 돌판에 기록된 율법 안에’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그 비유의 그림자 속에 있습니다.’(107쪽)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율법을 통해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바울의 말을 가져와 율법은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사랑’(109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사랑입니다. 여기에 육신의 지혜로움을 굴복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돌판에 사랑의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이 육신의 지혜로움을 두렵게 하려고 행위의 법과 범죄자를 죽이는 문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라면, 믿음과 영의 법은 사랑하는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109쪽)

▶사랑은 성령으로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율법이 주어짐으로 사람들은 ‘더욱’ 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죽음의 직무이며 정죄의 직무’(113쪽)입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신약으로 끌고 옵니다. 신약의 직무를 영과 의의 직무로 표현하며, ‘성령의 선물로 인해서 우리가 의를 이루며 범법함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113쪽)는 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얻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유에서, 사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로 인해 죄인들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고후 5:21) 성령이 없는 율법이 사람을 죽였다면, 성령에 의한 삶은 의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자유의지로 사랑을 행하며 기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본성이 자체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건강한 영혼은 형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171쪽) 됩니다. 성령이 없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으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유케 하는 아들의 ‘자유’(요 8:36)가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을 행합니다.

4) 54-66장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합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또는 선물, 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악합니다. 그들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의 자유의지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합니다. 그들은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쓸 뿐..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185쪽)합니다. 그들은 종이기에 행함은 있으나 두려움이 지배하고, 절대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성령의 사람은 아들이기에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여 자유와 기쁨이 가득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알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곧 ‘사랑함으로 역사하는 믿음’(189쪽)입니다.

그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191쪽)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왔으니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더 나아가 성령 안에서의 행위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의 부패로부터 구원되며, ... 면류관을 받으며 이 땅의 선한 것뿐 아니라 영원에 속한 선한 것으로 배불리게 될 것’(197쪽)입니다.

▶율법(문자)를 더 세우게 됩니다.

결국 다시 율법의 문제로 돌아가면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완성하고, 더욱 힘써 율법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은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으며 믿음으로 부터, 곧 아름다움으로 인도되는 동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삽니다. 이 사랑은 우리 자신의 충만한 원함이나 율법의 의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201쪽)

▶인간의 삶은 부족함으로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율법의 목적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의미 속에는 타인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사랑은 서로 사랑이기에 자신의 허물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를 언급하며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만 합니다’(219쪽)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에게 ‘은총의 영’이 개입하여 ‘훗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영원히 사는 데 필요한 의로움도 완성’ 시킬 것입니다.(221쪽)

3. 나가면서

펠라기우스는 어린아이를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어른들인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담의 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부가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아담처럼 선을 행할 능력과 악을 행할 능력이 타락한 인간에게 남겨져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인간 스스로 선을 택하고, 그 선으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는 치명적인 교리적 독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이 원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전되지 않는 아담의 죄는 아담의 대표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부정하게 됩니다. 모든 선택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정하며, 구원조차 인간의 자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여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의 자유’였습니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배제하며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로 결심했을 때의 계략입니다.

비록 펠라기우스를 반박하기 위하여 쓴 글은 아니지만, 이 책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을 재고하면서 스스로 ‘펠라기우스주의를 가장 근본적으로 파괴한 책’으로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 ‘오직 은혜’라는 구호를 만들어 낼 만큼 사랑했습니다. 잘 알려진 <자유의지론>보다 이 책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정확하게 반박하고 있는데, 그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선물’ 또는 ‘하나님의 은총’이나 ‘선물’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아담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락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 의존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만물 역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이어갑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은총)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악을 행하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구제불능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성령)를 부어 주십니다. 성령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여 지성과 마음을 새롭게 하며, 의지에 힘을 주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후 사람들은 사랑의 존재이며,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살아감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솔리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어거스틴의 “원죄론”(Peccatum Originale)

“원죄(peccatum originale)”란 용어는 어거스틴이 처음으로 사용.
성경에 원죄의 개념을 처음으로 “원죄”라는 용어를 택한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계시는 성경에 풍부하게 나타난다.
즉 성경에 있으므로 택한 “명칭”이다.

어거스틴 이전에 이레니우스,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터툴리안, 시프리안, 암부로스 등도 원죄에 대해서 가르쳤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으로부터 배웠던 이레니우스는‘이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원죄를 묘사했다.

“첫 번째 사람은 그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그 결과 전 인류는 그와 더불어 타락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죽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원죄”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개념을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

 첫 번째 죄(원죄)와 그로 인해 전 인류에게 전가(유전)된 멸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창3:15)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모든 아담의 자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원죄란?

‘원죄’라는 용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의 불순종의 죄와 그로 인하여 인류에 끼친 영향.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지니게 된 죄와 그 죄책"으로 정의. 원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처지에 끼친 영향에 초점

[로마서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과 그리스도 대조(對照)

[로마서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 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원죄(original sin)가 모든 후손에게 유전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그 원죄를 속량하므로 일거에 모든 유전 된 후손의 죄와 멸망을 제거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는 자들만 죄와 멸망에서 벗어나 구원을 누린다.

카톨릭의 트렌트 공의회

​(반 종교 개혁회의)

1546년 6월 17일에 모여 신앙 고백의 다섯 번째 세션인 “원죄론”에 대한 조항. 원죄 론은 다섯 개의 조항으로 구성됐는데, 그 중에 세 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조항:

만약 누구라도 아담이 원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주셨던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지어다 (Si quis non confitetur … anathema sit).

두 번째 조항:

만약 누구라도 아담이 범한 원죄가 아담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지어다 (Si quis Adæ prævaricationem sibi soli … anathema sit).

세 번째 조항:

만약 누구라도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것으로 원죄가 치료될 수 있다고 믿거나, 침례/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임한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지어다 (Si quis hoc Adæ peccatum … aut negat ipsum … anathema sit).

원죄론에 있어서 카톨릭과 개신교(Protestant)가 차이가 없음은 모두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공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유된 원죄는

암부로스를 거쳐

어거스틴에 의해 체계화.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원죄)로 인해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제한받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이런 사유에서

​“인간은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없다

​(non posse non peccare)”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이중부정 문구가 생겨난 것.

단순한 육적 부패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어거스틴의 원죄론 신학은

캔터베리(영국 성공회).

​안셀름(1033년-1109년 – 중세 신학자)과

루터와 칼빈도 전적 동의한다.

아담은 생물학적.

​언약적 인류의 조상이며 대표자.

​둘을 분리할 수 없다.

​원죄 유전을 부정하는 사상은

반 성경적 주장이다.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펠라기우스(Pelagius, 360년?~418년)는 브리타니아(영국) 태생의 기독교 수도사(修道士)이다.

4세기 말에 로마에 와서 법률을 배운 듯하며

이어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금욕적 생활태도, 도덕적 엄격성 때문에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강조하고,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의의를 부정하였다.

원죄는 인간의 본성을 오염시키지 않았으며

도덕적 의지는 여전히 신의 도움 없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창조한 능력으로 죄 없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선한 행위를 도와준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은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원죄를 근거로 하나님의 도움 즉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 고

주장한 어거스틴의 견해와 반대되었고  <!--[endif]--> 

후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거부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신의 은혜 없이

도덕적 완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죄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완전을 이룰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로마에서는 추종자도 있었으나

아프리카나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이단으로 확정되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 Latin: Semipelagianismus)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 관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강조하였지만

펠라기우스주의는 구원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의 원 죄 론과 은총 론을 받아들이지만

거기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혼합시켰다.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구원을 향해 상당한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짐으로써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도 역시 펠라기우스주의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529년 제 2차 오렌지회의(Second Council of Orange, 529)에서

이단으로 확정되었다.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알미니안주의 다섯 항변은 1610년에 알미니우스(1560.10.10~1609.10.19)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이 요한 칼빈의 가르침에 대한 당대의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해석에 대하여 제기한 다섯 가지 이의(異意)를 가리킨다.

46명의 설교자와 설교자를 교육하던 라이덴 대학의 두 지도자는 1610년 1월 14일 헤이그에서 회동하여, 논의되던 교리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문서로 작성했다. 항변서 형식의 문서의 초안은 이안 우이텐보가르트가 잡았고 약간 손질을 본 후 7월에 모두가 서명한 후 제안되었다.

1.부분적 타락: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

2.조건적 선택: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을 믿을지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

3.보편적 속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4.가항적 은총: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베푸시는 은총을 사람은 거부할 수 있다. “선행적인 은총”.

5.탈락 가능성: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도 훗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이의는 항변서(remonstrance) 형식으로 제기 되었다. 이로 인해 도르트 총회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네덜란드 교회는 개혁주의 입장을 선택하였다. 이때 위의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한 개혁주의적 답변을 요약한 것이 소위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소위 "죄성"으로 죄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그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그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칼뱅주의(Calvinism):

원죄에 대한 칼뱅주의 견해는 성경적 가르침과 가장 잘 일치.

칼뱅주의 교리는 아담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성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유죄 상태가 되게 만들었다고 언급.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잉태됨으로 인한 결과는(시 51: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렘 17:9) 마음으로 묘사되는 사악한 본성을 물려받는 것

아담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죄책과 형벌(죽음)은 우리에게도 속하게(유전. 전가) 되었다(롬 5:12, 19).

칼뱅주의적인 견해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상에서의 그분의 속죄를 의지할 때만 얻을 수 있다.

칼빈주의 5대 강령 – 도르트 신조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質)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 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의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칼뱅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섯 솔라(Sola ),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도르트신조에서 나온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영어로는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類)파와

칼뱅주의를 구분 짓는 내용들이 된다.

다섯 솔라(Sola )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주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공로를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

(라틴어: 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

4세기 북아프리카인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주교로, 개신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히포 사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그의 이름은 ‘좋은 징조의’

‘덕망있는’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

영어로 어거스틴(Augustine)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아우구스틴(Augustin)이라고도 한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391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받은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도 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

특히 은총론, 신학적 인식론, 교회론, 영성신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중세 초기부터

은총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심지어 종교 개혁 시기의

개신교 선구자인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도

그의 은총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근대에 들어와 얀센주의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지지하였다.

395년 발레리우스 주교가 노쇠하자

그의 공동주교로 선출되어 4년 동안 주교를 보좌하다가,

이듬해 그가 죽자 히포 교구의 주교가 되어

평생동안 히포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사목하였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의 한 민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였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

(반달족의 히포 점령은 431년의 일)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두려움에 빠진 난민들을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행동은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신앙에 따른 것이었다.

어거스틴에 대한 일반적 평가

교부들 중 어거스틴에게는 많은 연구가들이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

“2000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교부”,

“초대교회의 완성자”,

“서방(로마)교회의 아버지”,

“초대 기독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 등

어거스틴(Augustine)은 영어식 이름이고,

그의 라틴어식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를 연구한 어떤 교회사가들은

어거스틴이 고대의 모든 신학적 전통을 종합하는

자리에 서 있다고 하며,

중세 이후의 모든 신학 전통을 수립·발전시키는

관문에 서 있었다고도 하고,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어거스틴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상도 없다고 할 만큼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다양하고

포괄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문학가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는 <고백록(참회록)>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중세교회를 지배했다.

개신교회, 카톨릭, 성공회 등

거의 모든 기독교회들이

그의 뒤를 잇고 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들이

가장 존경했던 신학자이며

그는 전체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어거스틴의 참회록




나머지 책들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11, 12, 13권은 창세기의 주석에 해당하는 글로써 11권 <시간의 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창조의 사역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문제를 논의한다.
12권 <창조의 말씀>에서는 태초의 세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물체의 질료, 영원성, 창세의 비화들을 논하고 있고 13권 <완성을 향하여>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피조물의 불완전한 관계를 설정하여 하나님은 영원하며 사물과 생명의 유일한 근원임을 밝힌다.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말하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돌아가기를 호소하고 그의 은혜와 경이를 찬양하며 글을 마친다.

참회록이 주는 감동

“저의 영혼은 좁은 방 한 칸의 넓이입니다. 당신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더 넓혀 주십시오” 그가 참회록에 쓴 한 구절이다.
어거스틴은 당대 유명한 수사학자로서 자신의 지혜와 세상 지식을 과신한 나머지 마니교 등의 이단 사설과 타협하고 맹신하며 하나님 속을 많이 상하게 한 죄인중의 죄인이다. 그가 이런 고백을 한다. 서슴없이 자신의 지혜와 영혼의 깊이가 보잘 것 없노라고…. 아프리카의 탕자를 성자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랑을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마치 신약의 바울사도와 비슷하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열심당 당원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 탄압의 선봉장이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의 종이 된다는 내용과 흡사한 이야기 전개. 이른바 잘 나가는 지식인이었던 어거스틴 자신도 극적인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바울처럼 현재의 자신이 있게 되었음을 알리려고 어쩌면 의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현시라는 악의적 해석으로 그의 참회록에 접근한다 할지라도 그의 개종과 이후의 그의 업적은 놀랍고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그의 일생에 있어서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회개의 매개체라고 볼 수 있다.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마니교와 방탕한 생활이라는 암흑 속에서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님 곁으로 돌아올 것을 의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간구했다. 그녀의 눈물은 어거스틴의 영혼을 구원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눈물의 자식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 느끼게 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우리는 늘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반역을 도모한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단순하기만 하다. 태초 이래로 죄악에서 심판으로, 심판 후에 참회, 회개한 뒤 용서하심의 반복은 소위 피드백(FEEDBACK)하듯 하나의 순환 도표처럼 인식되어 왔다.

우리는 이미 안다. 우리가 죄지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그러나 어이없게도 우리는 감히 도전한다. 어거스틴도 두려워한 저 악한 사단과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멸망의 길로 유인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잘살 수 있다고, 한 번 도전할만한 일이 아니냐고 일반인보다 조금 유식한 과학자들과 지성인들을 꼬드긴다. 그 꼬드김에 이른바 지식인들은 알량한 영혼과 지식을 그들에게 팔고 만다.

분명한 것은 그들 지식인들은 자신의 영혼과 지식의 넓이가 좁은 방 한 칸의 넓이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얼마나 더 비좁으랴. 이제 믿는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청결히하고 필요 없는 지식으로 가득 찬 비좁은방을 그분이 허락하신 성령이 함께 들어와 거하실 수 있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허물어진 영혼의 담을 수리하여 저들 우는 사자처럼 우리의 영혼을 강도질하고 겁탈하려 하는 악한 사단마귀 원수의 손아귀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내야 한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현대를 살아가며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리를 찾아 갈 곳 몰라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하며 하나님께로 더욱 확신함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자전적 지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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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로고스와 레마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말하기.
 1. [일반용법]
  a. 말[《반》ἔργον: ‘행동’], 눅24:19. [주] 롬15:18, 고후10:11, 골3:17, 살후2:17, 요일3:18 참고.
  b. [문맥에 따라 의미 변화] ㉠ 너의 말, 마5:37. ㉡ 설명, 눅20:20. ㉢ 질문, ἐ- ρωτήσω ὑμᾶς λόγον: 내가 네게 물을 것이다, 마21:24. ㉣ 기도, 마26:44, 막14:39. ㉤ 예언, 요2:22, 18:32. ㉥ 명령, 계명, 눅4:36, 벧후3:5,7. ㉦ 보고, 소문, 이야기, 마28:15, 막1: 45, 눅5:15. ㉧ 잠언, 속담, 요4:37. ㉨ 선포, 교훈, 훈계, 가르침, 눅4:32, 10:39, 요4:41, 17:20, 행2:41, 4: 4, 10:44, 고전1:17, 2:1.
  c. [제한된 내용의 진술] 주장, 선언, 연설, 마12:32, 15:12, 막5:36, 7:29, 눅1:29, 요4:39, 행6:5, 7:29, 11:1, 살전4:15.
  d. [복수로 쓰일 경우] 무성한 말, 마12:37, 24:35, 막13:31, 눅21:33, 행2:40, 7:22, 15:24, 20:35, 고전2: 4, 14:19.
  e. 토론 주제, 문제, 일반적인 것, 막9:10, 행8:21, 15:6.

2.  [하나님의 계시
  a.  하나님의 말씀, 행4:29,31, 13:46, 빌1:14, 히13:7, 계1:2.
  b.  복음, 눅5:1, 8:11,21, 11:28, 행6:2, 13:44, 16:32, 고전14:36, 고후2:17, 4:2, 골1:25, 벧전1:23, 계1:9, 6:9.
  c.  말씀, 마13:20, 막2:2, 4:14-20,33, 8:32, 16:20, 눅1:2, 8:12,15, 행6: 4, 8:4, 10:36, 11:19, 14:25, 16:6, 17:11, 18:5, 갈6:6, 골4:3, 살전1:6, 딤후4:2, 약1:21, 벧전2:8, 3:1, 요일2:7.

II.  셈, 계산.
 1. 이야기, 설명, 롬 14:12.
 2. 정리, 해결, 청산, 빌4:15.
 3. 존경, 안부, 존중, 관심, εἰς λόγον τινός: ~에 관하여, ~을 위하여.
 4.  이유, 원인, 동기.
  a.  τίνιλόγῳ: 무슨 이유로, 행10:29.
  b.  κατά λόγον, 행18:14.
  c. παρεκτόγου, 마5:32.

III. 도, 로고스, 말씀, 요일1:1, 계19:13.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말(마5:37, 눅1:20, 행2:22), 말씀(마8:8, 막4:15, 행6:2, 11:19, 14:25, 살전1:6), 소리(눅 3:4), 소문(눅7:17, 행11:22), 이야기(눅24:17), 글(행1:1), 언변(고전1:5), 모양(골2: 23), 일(행15:6, 18:15, 19:40), 고발(행19: 38), 전도(골4:3), 결산(마18:23, 25:19), 전파(막1: 45), 말씀(막2:2, 요2:22, 행20:35), 고(벧전4:5), 예언(벧후1:19), 이유(마5:32, 벧전3:15).

레마

로고스와 레마

ῥῆμα 스트롱번호 4487

1. 말하여진 것.  2. 예언. 3. 명령
발음 [ rhēma ]
어원  / 448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a.  말하여진 것, 말, 격언, 발표, 표현, 마12:36, 27:14, 눅2:17,50, 20:26, 24:11, 행16:38, 28:25, 고후12:4, 히12:19.
 b. 예언, 예고, 마26:75, 막9:32, 14:
 c.  명령, 지시, 눅5:5, 히11:3.
 d.  연설, 설교, 선언, 눅7:1, 행2:14, 요8:20, 롬10:18.

2.  [히브리어에서와 같이] 물건, 사물, 사건, 일, 마18:16, 눅1:37, 고후13:1.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말씀(마 4:4, 눅 1:37, 행 5:20), 말(마 5:11, 행 2:14, 고후 12:4), 일(눅 2:15, 행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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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와 레마

















교회(케리그마 / 말씀, 코이노니아 / 교제, 디아코니아 / 봉사)


교회의 세 가지 요소 - 케리그마(말씀),  코이노니아(교제),  디아코니아(봉사)

1. 케리그마 : 말씀

κήρυ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782

1. 전령이나 선구자가 외치는 선포.  2. 하나님이 보낸 사자의 메시지
발음 [ kērügma ]
어원 / 2784에서 유래 - 케루쏘(κηρύσσω) 공포하다, 크게 선포하다, 공공연히 말하다

뜻풀이부

1. 전령이나 선구자가 외치는 선포, 공포, 성명, 발표, 통지.
2.  하나님이 보낸 사자의 메시지, 선포, 설교, 전도, 마 12:41, 눅 11:32, 롬 16:2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전도(마 12:41, 고전 1:21, 딛 1:3), 전파함(롬 16:25, 고전 15:14).

2. 코이노니아 : 사귐
- 성만찬 예식

κοινω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842

1. 합동.  2. 관대.  3. 교제의 표
발음 [ kŏinōnia ]
어원  /  2844에서 유래-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 동무, 참여자

뜻풀이부

1. 합동, 교제, 친교, 고전 1:9, 고후 13:13, 갈 2:9, 빌 2:1.
2. 관대, 동정, 애타주의, 고후 9:13, 빌 2:1, 히 13:16.
3.  교제의 표, 형제 화합의 증거, 롬 15:26.
4.  참여, 나눔, 고전 1:9, 10:16, 고후 8:4, 13:13, 빌 3:10, 몬 1:6.

연관 단어
관련 성경
교제(행 2:41, 빌 2:1, 몬 1:6), 연보(롬 15:26), 참여(고전 10:16, 빌 3:10), 사귐(고후 6:14, 요일 1:3, 6, 7), 교통(고후 13:13), 나눠줌(히13:16), 경륜(엡 3:9), 친교(갈 2:9).

3. 디아코니아 : 봉사

διακο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248

1. 봉사.  2. 준비하는 일.  3. 직무
발음 [ diakŏnia ]
어원 / 1249에서 유래-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종, 협조자, 집사

뜻풀이부

1. 봉사, 섬기는 일, 행 6:4, 고전 16:15, 고후 11:8, 엡 4:12, 딤후 4:11, 히 1:14, 계 2:19.
2. 준비하는 일, 눅 10:40.
3. [예언자나 사도의] 직무, 행 1:17, 25, 20:24, 21:19, 롬 11:13, 고전 12:5, 고후 3:7,9, 4:1, 5:18, 6:3, 골 4:17, 딤전 1:12, 딤후 4:5.
4. 구조, 원조, 기증, 행 6:1, 11:29, 롬 15: 31, 고후 9:12.
5. 집사직, 롬 12:7.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직무(행 1:7, 고후 9:12, 딤후 4:5), 구제(행 6:1), 부조(행 11:29, 12:25), 일(행 20:24, 딤후 4:11), 사역(행 21:19), 직분(롬 11:13, 고전 12:5, 골 4:17, 고후 6:3), 섬기는 일(롬 12:7), 준비하는 일(눅 10:40), 힘씀(행 6:4), 사명(행 20: 24), [동] 섬기다(롬 12:7, 고전 16:15, 고후8: 4), 준비하다(눅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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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피 - 히브리어 담(דָּם) , 헬라어 하이마(αἷμα)

피(담.  dâm )   דָּם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 5, 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 22), 피 값(겔 3:18), 죄(겔 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에스겔 33:5-6 <죄 - 피>

그가 경비를 하였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를(1818) 내가 파숫군의 에서 찾으리라.
- 그 죄를(피) 1818. 히브리 단어 "피(담)"를 의미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2절) 그 죽음은 파수꾼의 직무에 관계없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의 결과임을 말한다.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
파수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 곧 백성들의 안녕과 보호의 직임을 게을리함으로써 백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값을 파수꾼에게서 찾으신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있어 영적 파수꾼된 선지자의 책무와 그에 순종해야 하는 백성들의 의무를 적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דָּם 스트롱번호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2. 명사, 남성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3. 명사, 남성 포도즙, 창49:11, 신32:14.
  a. 명사, 남성 복수 דָּמִים
  b. 명사, 남성 피, 살해, 시5:7(6), 26:9, 55:24(23),사9:4(5)
  c. 명사, 남성 살해, 살인죄

피(하이마. haima)  αἷμα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α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129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haima ]
뜻풀이부
I. 피.
 1. [문자적으로]
   a.  사랑의 피, 요 19:34. ῥύσιςαἵ- ματος : 혈루증, 막 5:25, 눅 8:43.
   b.  동물의 피, 히 9:7, 8, 25. ζᾠων τὸ αἷ : 짐승의 피, 히 13:11.
2. [상징적으로]
   a.  생명의 거처로서의 피, 마 23:30, 27: 4,6, 행 22:20, 롬 3:15, 히 12:4, 계 16:6.
   b.  대속의 희생물로서의 피와 생명, 특히 대속의 의미로서의 예수님의 피, 롬 3:25, 엡 1:7, 히 9:12, 요일 1:7, 계 1:5.
 3.하늘에 재앙의 표시로 나타나는] 붉은 색깔.
   a.  불과 연기와 함께, 행 2:19.
   b.  우박과 불과 함께, 계 8:7.
   c.  달의 색깔, 행 2:20.


* 대속의 희생물로서의 피와 생명, 특히 대속의 의미로서의 예수님의 피, 롬 3:25, 엡 1:7, 히 9:12, 요일 1:7, 계 1:5.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요한일서 1:7

저가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and from Jesus Christ, who i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has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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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피(基督-血, 라틴어: Sanguis Christi, 영어: Blood of Christ)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를 말하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보혈
(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동방 정교회 등에서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성경에서의 보혈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한다. 히브리서 9:11-22

1.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2.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14절)

3.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신학 / 로마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는 미사 성제 때 집전 사제의 축복 기도와 동시에 성령의 힘이 내려와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영과 신성이 깃들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빵과 포도주로 실체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할 때에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한 말에서 “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하게 “상징한다.”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2세기의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35~110)는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나는 하느님의 빵을 갈망한다. 이 빵은 다윗 가문의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다. 나는 하느님의 음료를 원한다. 이 음료는 썩지 않는 사랑인 그분의 피다.”

그리스도의 성혈에 대한 신심은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기점으로 발전하였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에게서 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득 찬 생명의 샘의 은총을 부각시켰다.

지극히 고귀한 그리스도의 성혈 호칭 기도문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영원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사랑과 자비의 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심을 열어 쏟아주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매 맞으실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가시관을 쓰셨을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늑방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악의 세력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직자들의 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수도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회개하는 이의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짐진 이들의 휴식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불신을 신뢰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미움을 화해로 바꾸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갈등과 고뇌하는 이의 위로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임종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마음의 안식과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영원한 생명의 증표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모든 영광과 흠숭과 찬미를 받으셔야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오, 주님! 당신의 거룩한 성혈로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 기도합시다.

하느님,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혈을 통하여 당신은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 자비로 이루신 구원을 저희 안에 견고케 하시어 저희로 하여금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구원의 열매를 충만히 체험하게 해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 자료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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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리스도의 피”라는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완전한 속죄 사역을 표현합니다.
구세주의 피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수 세대를 거쳐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수한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피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하는 속죄 수단이라는 사실은 모세 율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제사장은 사람들의 죄로 인해 성전 제단에 동물들의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

그러나 이는 그 효과에 있어서 한계가 있는 피흘림이었기에 반복해서 드려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신 희생의 전조였습니다(히브리서 7:27).
예수님의 희생이 드려진 후 더 이상 황소나 염소의 피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건네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20).

잔에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자들을 위해 흘려질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을 때, 동물들을 지속적으로 희생시켜야 했던 옛 언약의 요구는 폐하여졌습니다.
동물들의 피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사람들의 죄를 덮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지은 죄는 거룩하고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3).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던 반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완전히 갚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한 더 이상의 희생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히브리서 9:12) 완전한 구속 사역이 영원히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믿는 자들을 죄와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히브리서 9:14).

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 쓸모 없는 (죽은)”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가치 없고 비생산적인 육신의 일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자료출처 / Got Questions

용서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용서하다 ’라는 단어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덮어주고, 눈감아주며, 빚을 청산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잘못한 사람이 용서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아 마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서란 사랑, 자비, 그리고 은혜의 행위입니다. 용서는 누군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 사람에게 원한을 품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했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은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시 51: 4).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의 결과로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것입니다(마 25: 46; 요 3: 36).

용서 –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원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은 사망뿐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상반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합니다. 영원한 죽음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계획 가운데 인간이 되셨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 1, 14).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이라는 형벌을 대신 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이라는 형벌을 우리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용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고전 15:1-28).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 23b).

죄 사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신가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용서받음을 위해 우리 죄의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17절에 이 놀라운 소식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용서 – 정말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께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다음의 기도를 따라하십시오. 기억하실 것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기도문을 읊는 것만으로 무조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이며 죄에 대한 벌을 받기에 합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제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의 결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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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셨습니까?

답변


성경은 영생에 이르는 분명한 길을 제시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저질러 왔으며, 이에 형벌을 받아 마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만이 합당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러나 죄가 없으시며(벧전 2:22)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서(요 1:1, 14) 우리의 형벌을 대신 치르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요 19:31-42)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고후 5:21).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고전 15:1-4), 죄와 사망으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가짐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가 누구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왜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행 3:19).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우리의 죄값 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죄 사함 을 받고 천국 에 속한 영원한 삶을 약속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것만이 영생에 이르는 유일하고 참된 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다음의 기도를 따라하십시오. 기억하실 것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기도문을 읊는 것만으로 무조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이며 죄에 대한 벌을 받기에 합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제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의 결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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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성경에는 많은 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는 사람과 동물의 몸속의 혈관을 타고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며 노폐물을 운반하여 제거하는 일을 하는 붉은 물질의 액체로 우리 인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노아홍수 후에 주께서 노아에게 동물들을 주어 음식으로 먹게 하셨지만 그러나 고기는 먹어도 그 생명 되는 피를 먹지 말라고 금(禁)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반드시 동물들과 사람들의 피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시며 특히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되면 그 피 흘리게 한 자의 피를 반드시 찾아 보응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 4:10, 5:1, 9:4-6)

또 주께서는 육체의 생명은 피 에 있기 때문에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가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해 죄(罪)를 속(屬)하게 하였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7:11)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께서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고 금하셨고 만일 피를 먹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하셨습니다.(레 17:14)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에도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된다고 말하며 피 흘림이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고 말합니다.(히 9:22)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제도는 동물의 피를 단에 뿌려 백성들의 죄를 사하였으나 이 제의(祭儀)가 온전치 못하여 자주 반복하여 제사를 드렸고 또 온전케 되지 못하여 제사제도를 변혁(變革)하여 완전하신 여호와하나님의 의(義) 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 하고 새 언약의 피, 곧 자기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려주심으로 완전하며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시고 우리의 양심의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하늘 보좌 성소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9:12,14,10:12) 이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단번에 드리셨으며 저가 한 제물로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요1:29.히10:14)

그런데 이 예수님이 흘리신 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의 피,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참 다양하게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들에 대해 주의 깊이 생각해보지 못해 어떤 이들은 혼동하여 예수의 피를 믿어서는 소용없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어야한다는 이상한 교리를 내세워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며 실족케 하는 무리가 있는 것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실정입니다.

예수의 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육신(肉身)으로는 다윗의 혈통(血統)으로 오셨으며 성령(聖靈)과 말씀으로 마리아의 몸을 빌려 육체(肉體) 가운데 오셨습니다.(요1:14.롬1:3,9:5) 주께서 육체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 되었고 육체를 따라 그 가운데서 유전한 망령된 행실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인 인간의 육체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위해 속전이 되어 언약의 피를 흘려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많은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言約)의 피라고 스스로 증언하셨습니다.(마26:28.막14:24)

이에 예수께서 사람으로 육체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흘리신 피 가 있었고, 이는 흠 없고 점 없는 피 이기 때문에 모든 죄를 사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주를 믿는 자 마다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고 이 피를 주시려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롬5:9,10)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함을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 피를 말할 때에 “피는 육체에 생명”이라고 말하였는데 위에 제목들을 보면 많은 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만이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피 가 있음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육체의 생명을 입고 있기 때문에 피 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 다양한 피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의 피,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그러나 이 가운데 피 가 있는 분은 “육체 가운데 오신 예수께만 피 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의 피.

그런데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 피 가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말하며 그리스도는 구약의 메시야를 말하며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사명을 위해 여호와의 신인 성신(聖神)으로 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것을 말하며 이는 성령(聖靈)을 충만하게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으며 기름 붓듯이 부어주셔서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다 고치셨습니다.(삼상 2:10. 사 32:15, 42:1, 61:1. 요 1:32, 33, 3:34. 행 10:38)

그런데 우리가 의구심(疑懼心)이 드는 것은 이 기름 부으심의 주체가 되시는 “성령님이 피가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와 히브리서 기자와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피 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엡 2:13. 히 9:14. 벧전 1:2)
혹시 이들에게 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도 성령께서 피 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께서는 피 가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through the blood of Christ.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who have been chosen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the sanctifying work of the Spirit, for obedience to Jesus Christ and sprinkling by his blood: Grace and peace be yours in abundance.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고전 15:50)

그러므로 “혈(血)은 곧 피” 를 말합니다.
피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도 못하고 썩을 “피와 육신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명백하게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하느냐?

하시며 내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 39)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것은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수난 당하실 때에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 5:6)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살과 뼈는 있다고 하셨으나 “피 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다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증언에서도 “이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까요?

이는 육체가운데 성령으로 오신 예수께서 그 육체의 생명을 가진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심으로 죄 값을 치루시고 속전이 되셨음을 말하며 이 “예수님에게만 있는 피”를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한 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시기를 한 량 없이 또 기름 붓듯이 부음 받으신 “성령의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신약의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피” 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의 이름에는 성령의 기름부음 받으심과 그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피” 라고 “편의적(便宜的) 부른 것”입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의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떡에 참예함에 아니냐?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피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한 것은 독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을 믿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은 그 이름이 여호와하나님의 의(義) 이심을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렘23:6) 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안에 계신 여호와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사도는 이 예수님의 이름을 그의 제자들이 믿어야하며 또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즉 메시야 되신 분이라고 말하며 그는 아들 예수라는 이름과 기름부음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증언합니다.(요20:31)

그런데 최근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예수라는 이름은 육신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취약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신성을 격하시키려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야한다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하며 예수라는 이름을 불신(不信)시키며 폄하(貶下)하고 다른 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요14:6) 이에 제자 베드로사도 역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천하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증언합니다.(행4:12)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한분이시며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와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리스도가 한분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라고 성경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요20:31.벧전1:2) 이에 예수님이 세상에 육체로 오셔서 흘리신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 하게하시며 구원하여 생명을 주십니다.(엡1:7.요일1:7) 또 새로운 피조물가운데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데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도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주님과 같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주님과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요3:5,14:16.행2:38.딛3:5.히2:11.요일2:27)

이에 우리도 주님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주님과 동일한 생명을 받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예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시며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義)이시기 때문입니다.(렘23:6)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에는 이미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신성의 능력이 이미 선재(先在)하셨으며 그 이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골1:16,17)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는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의 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벧전1:2, 곧 하나님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하나님의 피.

레위기 서를 통해 말씀하신 피는 육체의 생명으로 동물과 사람의 피를 말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은 사역을 마치고 로마에 가서 마지막 복음을 증거하고 성령께서 각 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기다릴 것을 알게 하셨지만 순교 할 것을 예견하고 해(害) 받을 것을 말했어도 자신에게 계시하신 뜻대로 마지막에 자신을 관제로 부을 것을 각오하고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 설교 가운데 자신은 모든 이들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꺼리지 아니하고 다 전했기 때문이라고 에스겔의 파수꾼 사상을 상기(想起)하며 말합니다.(겔3:17-21.행20:23-27)

파수꾼은 하나님의 입으로, 그의 말씀을 대신하여 주님의 백성들을 깨우치는 자입니다.(겔3:17) 그는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또 동족들이 주께 돌아와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입니다.(롬9:3,11:14) 그러므로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너희는 자기를 위하고 또 온 양떼를 위해 조심하라 성령께서 너희들 가운데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행20:28)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피”, 우리의 쟁점은 “피는 육체의 생명에게만 있는 것인데” 왜 사도 바울은 “이 피를 하나님의 피” 라고 말했을까요?

실재로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 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義)이신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가운데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구원하기위해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오신 분의 피”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이 아이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사7:14,9:6,7.렘23:6.마1:21,23) 그러므로 말씀이시며 영이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 끝에 오셨는데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습니다.(요1:14)

이 아기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 라는 말에는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포함한” 내용을 말합니다. 주님은 선재(先在) 하신 분으로 마지막 날 아들로 만유를 세우시고 저로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이에 주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 하셨고 또 만물을 붙들고 계신분입니다.(요1:3.골1:16,17.히1:3) 이 예수께서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타락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체로 오셨기 때문에 피 가” 있으므로 “예수의 피” 라 고 말 한 것입니다.(히10:19,13:12)

이 “예수님”을 사도바울은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혈통"이며 다윗의 한 가지로 “유다지파 가운데서 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즉 그의 증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도 “그리스도의 것”인데 주께서 유다지파로 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예수의 나심”을 “그리스도가 나셨다” 고 말한 것이며 이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사람가운데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피” 라는 것은 곧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의 피”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저는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고 증언합니다.(롬9:5)

우리는 이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그 분을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범인(凡人)으로 알고 경배하는 자들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나라에서 유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을 능욕(凌辱)하는 자들은 주의 계명을 거역하는 자들로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십계명의 일 계명부터 삼 계명을 범하는 자들로 주의 이름을 범(犯)하는 죄(罪)를 범하는 것입니다.(출20:3-7) 우리는 다만 예수님과 그 이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고 존경하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마지막 설교를 통해 그가 떠나고 나면 흉악한 이리가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해 양떼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행20:29)

이들은 제자들이라도 끌어다 자기들을 좇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라고 일러줍니다. 즉 이와 같은 말씀들은 금세기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 그 이름을 폄하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이상한 무리들이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운운하며 각 블로그 마다 순회하며 사람들의 신앙을 헐어버리려고 하며 실족하게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성경을 통해 주께서 증언한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의 신앙을 오직 예수님께만 고정해야합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의(義)의에 문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야합니다. 주님만이 여호와께로 들어가는 문이 되십니다.(시118:19,20.사26:2.롬3:21)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진리로 자유케 하시며 여호와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분입니다.(요14:6.행4:12) 이 믿음을 우리가 견고히 잡을 때에 우리가 여호와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승리하는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주인삼아 진리로 자유를 얻은 자들만이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받게 됩니다.

행 20:28,-3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너희 중에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들을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 32,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에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 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신앙의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잠든 자들이 주께 돌아와 그의 긍휼을 입을 때입니다.(엡 5:14)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for it is light that makes everything visible. This is why it is said: "Wake up, O sleeper, rise from the dead, and Christ will shine on you."

종말이 되면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며 불법이 난무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의(義)를 보내셨고 이제 그 의롭다함을 입을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사 46:13. 계 3:20)

그리고 우리 믿음의 대상의 이름과 그 피는 “그 이름이 예수와 예수의 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라고 다양하게 부르지만 오직 우리의 신앙의 대상의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義) 이신 “예수의 이름과 그의 피를 말한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뛰어난 이름 위에 세세토록 찬양을 드리며 경배하며 영원히 의지하는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이사야 46: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시온에 베풀리라.
I am bringing my righteousness near, it is not far away; and my salvation will not be delayed. I will grant salvation to Zion, my splendor to Israel.


요한계시록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Here I am!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one hears my voice and opens the door, I will come in and eat with him, and he with me.



*자료출처 / https://wangjo49.tistory.com/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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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피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6:28   
구절 개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7:25   
구절 개념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히브리서 10:4   
구절 개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요한1서 5:6   
구절 개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히브리서 9:14   
구절 개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한1서 1:7   
구절 개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출애굽기 12:13   
구절 개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요한1서 2:2   
구절 개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1서 5:8   
구절 개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히브리서 12:24   
구절 개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에베소서 2:13   
구절 개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히브리서 10:19   
구절 개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요한계시록 19:13   
구절 개념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에베소서 1:7   
구절 개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로새서 1:20   
구절 개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요한복음 6:54   
구절 개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히브리서 10:10   
구절 개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요한복음 19:34   
구절 개념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1서 3:5   
구절 개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로마서 5:9   
구절 개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레위기 17:11   
구절 개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10:18   
구절 개념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1. 죄를 깨끗이 씻는 피(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2. 성소에 담대하기 들어가는 피(히브리서 10:19)  영원한 속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3. 피는 하나님의 말씀(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스가랴 13:1-2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  피의 샘이 터져야 한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레위기 17:11

육체생명에 있음이라 내가 이 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에 있으므로 가 죄를 속하느니라.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로마서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26:28 / 언약의 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to make her holy,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he saved us, not because of righteous things we had done, but because of his mercy. He saved us 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야고보서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Therefore confess your sins to each other and pray for each other so that you may be healed. The prayer of a righteous man is powerful and effective.

갈라디아서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which is really no gospel at all.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and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But even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a gospel other than the one we preached to you, let him be eternally condemned!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말세




데이빗 윌커슨 예언-1 :  다섯 가지 예언과 성취 / 말세의 징조   


https://blog.naver.com/acoloje/60200824499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이 지금부터 40년전인 1973년에 예언한 내용이다.  

예언은 성취여부를 통하여 그 신뢰성을 인정받는다 

성취측면에서 보면 월커슨 목사님의 예언은 참 예언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이 비전을 주신 이유는 '장차 성령충만한 백성들이 핍박을 받게 될 때가 올 것인데 이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광신자로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이미 이런 조롱하는 현상은 시작되었다

그는 환상에서 5개의 재앙이 세계와 미국에 임하는 것을 보았다 

세계와 교회는 점점 바벨론 음녀의 문화에 정복당하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 예언이 대부분 성취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종말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세계적인 경제 불황 (World-wide Economic Recession) 

 

 

잠시동안 호황 후에 혼란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을 경제적 불황이 올 것이다

유럽과 일본, 미국에도 불황이 찾아 올 것이고 대기업들이 파산할 것이다

교회들도 파산할 것이며 선교 프로젝트들은 철회될 것이다

지혜로은 사람들은 호황을 활용하여 다가올 불황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경제불황을 통하여 돈에 대한 우상화가 가속되었다  

 

예언 성취 : 일본의 10년 불황, 미국이 서브 프라임모기지와 국가부채로 인한 경제위기, 유럽국가의 재정위기로 세계적인 경제불황이 야기됨.

 

2. 자연이 해산의 산고를 시작 (Nature having labour pains)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자연적 재해들은 해산의 고통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질수록 이런 자연재해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며 세계적인 기근이 올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우주폭풍이 일어나서 하늘에 변화를 보일 것이다 

 

예언 성취 진행 : 2011년 일본 9.0 대지진으로 약 2만명 사망, 미국 토네이도,허리케인,산불재해, 중국 2008년 쓰촨성 지진으로 1만 3천여망 사망,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 약 20만명 사망

 

3.  타락의 홍수 (Flood of Filth, Prophecy of Nahum) 

 

 

나훔 선지자의 예언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나훔 3:6)

 

자정이 지나면 TV에서 음란한 성인영화를 보여 줄 것이다

음란물들이 TV를 통해 방송될 것이다

신문가판대는 음란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시킨다고 성행위가 담긴 영상을 보여 줄 것이다

법원은 음란물이 퍼지는 것을 반대하는 판결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예언성취가속 :  각 신문사의 선정적인 인터넷 메인화면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정론지인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도 다를 것이 없다, 동성애자 증가, 세계음란물 생산국 중 한국순위 6위

 

4. 거역과 반역 (Rebellion)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고 증오하는 세상이 오게 될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위선을 본 자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수백만명의 자녀들이 가출을 할 것이다

부모들은 점점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이고 한 지붕 안에서 원수처럼 살게 될 것이다 

 

예언성취가속 :  2011년 한국의 가출청소년 약 3만명, 가출사유 51%가 부모와의 갈등 

 

5. 진실된 기독교인을 대적하는 핍박  

( Persecution against true Christians)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성령강림한 오순절을 통하여 성령을 받은 진실된 믿는 자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분은 예수님이다 

요한복음 18장 15절에 의하면 저희가 핍박을 받는 이유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박해 하였은즉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핍박을 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영적으로 핍박이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알곡과 가라지, 즉 진실된 신앙과 가짜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 중에는 방언기도를 하면서도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시간이 별로 없지만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

성령을 받을 것이다. 방언을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은사주의 기독교인들도 핍박을 받을 것이다 

 

핍박의 광기가 이 땅에 올 것이다

숨겨진 있던 괴물같은 자들이 일어나서 인류가 전에 보지 뭇했던 광기로 진실된 기독교인을 핍박할 것이다.

핍박은 천천히 커져가다가 종교자유가 최고조에 이를 때 갑자가 거세져서 전세계에 퍼져갈 것이며 일종의 광기가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고위직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들어 갔다. 

 

또 하나는 험담인데 사탄이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그들은 목회자들의 모든 험담을 잡아서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을 파멸시키려고 한다

한국의 언론만 해도 마치 불의한 기자들이 비밀결사라도 맺은 것처럼 교회와 목회자 험담을 기사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지금은  TV,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통한 복음전파가 쉽다

그러나 핍박이 시작될 것이다

TV와 라디오를 통한 복음전파를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대중매체를 통한 복음전파를 다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사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아직 빛이 남아 있는 낮에 열심히 일하라

곧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도 기독교를 비판하는데 동참할 것이다

폭로와 음모성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격하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전에 없던 신성모독을 할 것이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재산세나 소득세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어 교회와 기관들이 파산할 것이다

국세청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가장 강력한 기관이 될 것이다

그렇게되면 이젠 정부가 교회를 핍박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이미 미국정부는 교회외 비영리 교회단체를 조사하고 있다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기 위한 핍박이 올 것이다

오직 완전히 순종하는 자들만이 견디어 낼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인기를 끄는 요소가  안되는 시간이 오고 있다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학생들은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증오하는 이런 움직임은 사탄이 뒤에서 조정하고 있으며 사탄을 숭배하는 자들이 일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저 변변치 않은 자들로 조롱받는 것을 넘어 모든 종류의 욕설을 들을 것이며 학교에서는 침 뱉음을 당할 것이다 

동료 학생들이 그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웃으며 찢어 버리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기독교 학생들을 향한 괴롭힘은 폭력이고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서 결국 두려워서 믿음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예언성취가속 : 기독교 안티, 개신교에 배타적인 대중매체 언론 증가, 반기독교 영화, 교회세금부과 



데이빗 윌커슨 예언-2 : 두종류의 세계교회 출현 말세의 징조  

https://blog.naver.com/acoloje/60200885536

마지막 시대에는 교회가 두 종류의 교회로 나누어진다고 예언하고 있다 

하나는 정치적 기반의 영향력이 보이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영적능력 기반의 교회다 

 

Visible Super Church 

 Invisible Super Church

연합목적

 정치적인 연합

외적으로 영향력 행사하기를 선호

 영적 연합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이름도 빛도 없는 사역

주요사역

 성공,번영,정치적 영향력,개교회성장

세계선교, 성령운동 

 사역결과

 세속화, 빚더미 건축

세상과 타협, 교파간 정치적 연합

적그리스도 출현에 기여

세계 복음화

성령운동을 통한 심령회복

그리스도 재림 열망과 준비 

 

 

전자는 세속적 교회이고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실한 교회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문제다 

두 종류의 교회는 두 개의 세계에 속한 슈퍼세계교회로 물리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연합된다

문제는 전자에 속한 교회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전자에 속한 목회자가 특별히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실패를 보이는 사람들은 아니다

사탄은 교회를 세속의 도구로 타락시키기 위해 교묘히 미혹하여 왔다

그러므로 개인은 물론 교회차원의 목회자, 특별히 대형교회 목회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기반 슈퍼세계교회가 만들어진다  

 

개신교 자유주의 세계교회운동과 로마 가톨릭이 연합해서 기본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을 갖게 된다

이 연합은 처음에는 자선사업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정치 결합이 될 것이다

외적으로 슈퍼월드교회는 영적인 단체라 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이며 이들이 하는 사업은 적그리스도적인 활동이 될 것이다 

 

이들은 교회가 인간적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것이다

사회에 개입하며 정치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며 세계정세에 관여할 것이다

세계교회연합운동이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일때 갑자기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서 이 연합의 뼈대가 만들어 질 것이다

교회는 개신교 세계교회연합운동 지도자에게 복종하라는 강요를 당할 것이다

교황은 이 교회 연합의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 간주될 것이다

 

세계교회는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누구든 제압할 수 있는 큰 정치권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불경건하고 반기독교적인 사람들이다

이 두 연합(개신교와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기적과 사랑, 화합을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종교단체들을 핍박하고 괴롭힐 것이다

세계교회는 동성애자들을 환영할 뿐 아니라 그들을 격려할 것이다

오해에 기인한 것처럼 꾸미며 동성애자들과 연합할 것이다

동성애자 목회자들이 임명을 받을 뿐 아니라 고위직에 오를 것이며 새로운 사랑의 복음에 대한 개념을 가진 선구자로 치켜질 것이다

미국과 전세게에 동성애자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져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목회자들이 사탄단체에 의해 행해지는 초자연적 역사에 현혹될 것이다

예수님과 친밀감이 없는 목회자들이 사탄과 아주 가까워지는 날이 온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해서 할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도 유혹하려고 할 것이다

 

다음에 다른 종류의 영적 기반 슈퍼교회가 일어날 것이다

그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권능을 가진자들로 이루어지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신하는 자들이 만든 연합이다

진실되게 믿는 자들로 구성된 이 교회는 일종의 지하교회가 될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 등 모든 교파와 인종과 국경을 넘어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진다

보이는 슈퍼세계교회는 정치적 권력을 갖게 되지만 다른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는 강력한 영적 권세를 갖게 될 것이다

핍박을 통해 주어진 권세다

핍박의 광기가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와 가깝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들은 교파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더 관심을 둘 것이다

성령께서 이들을 국적,인종,교파,직업에 관계없이 연합 시키실 것이다

이런 교회는 역사적으로도 존재해 왔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영향력이 없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두종류의 교회는 존재했었다)

이런 교회는 핍박이 강해질 수록 더 강하게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성령의 자연적 기름 부음 아래 능력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일종의 인터콥같은 선교단체로도 보인다, 이들 선교단체는 한중일 교회와 연합하고 교파와 세대를 초월하여 작은교회들이 연합하고 있다, 정치적 교회는 오히려 여기에 참여하는 자들을 방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제가 여기 서기까지 어떤 영적 전투를 치러왔는지 알지 못한다

사탄은 "모든 사람들이 너를 광신자라 할 것이다"하며 위협하였다

이미 신뢰를 얻고 있는 사역을 위험에 빠트리려고 하는가?

사람들은 이미 너를 존경하는데 그들앞에 바보처럼 보이려고 하는가 속삭였다

사실 저는 여러분들의 귀나 간질거리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 저는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종말에 관하여는 별로 말하지 않았었다

영적인 눈을 떠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을 보지 않고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구원이 가까지 왔음이라

 

이런 비전을 본 저는 매일밤 주님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한밤중에 주님께 이 모든 일에 물어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해야만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숨고, 모든 것이 파산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탄이 세상을 장악할 때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빚을 다 갚고, 물건을 팔고,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해 농장을 사서 앞으로 좋은 날을 기대하며 그저 숨어 지내며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토네이도와 기후 변화를 보면서 기독교인들이 제 정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추락하는 때에 우리가 어떻게 강인하게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아주 짧은 말씀으로 저를 각성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God has everything under control)

 

이것이 제가 들은 말씀입니다

세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구에 부어져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것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해산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연재해가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자연재해를 본다면 하나님이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물질을 다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탄은 당신의 믿음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탄의 권세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어린 기독교인이라도 사탄을 대적해서 물리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두려운 자연재해나 경제위기나 불황의 소식이 들려와도 하나님의 자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해치지 못합니다

마지막 환란과 심판과 아마겟돈 전쟁은 모두 하나님의 일정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에 하나씩 실행됩니다

오늘 잠라리에 들기 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

마지막 때에 젊은이는 비전을 볼 것이고 예언을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