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성경(聖經)

주후 2015. 2. 8 주일설교
성경(요한복음 5:30-39)

(도입 이야기)
첫돌 잔치 때마다 돌잡이 행사를 합니다. 요즈음은 돌잡이 장난감 세트를 사용합니다. 돌잡이 장난감 세트에는 골프채, 청진기, 마이크, 야구공, 축구공, 판사봉, 연필, 실, 비행기, 마우스, 여자 아이를 위한 미스코리아 왕관이 사용됩니다.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돌잡이 행사를 신앙생활에 비유해서 ‘성경책 한권과 100만 불 시가의 아파트 입주권’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을 잡겠습니까?

이민자들의 삶을 생각할 때 성경책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책을 잡는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과연 누가 성경책을 잡을까요? 왜 성경책을 잡을까요?

극동방송국에서 대북방송을 진행하며 성경읽기라는 프로를 실시합니다. 한번은 담당자 앞으로 북한에서 어느 교인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요지는 사무엘상 15장을 받아쓰지 못했는데 한 번만 더 읽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후 사무엘상 15장을 다시 읽었는데 얼마 후에 ‘이제야 성경 전체를 받아썼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성경은 한 짐입니다. 그래도 성경을 갖게 된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라는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이라면 아파트 입주권보다 성경책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잡을 것인지 나의 신앙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2월의 성구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아멘

성경책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파트 입주권을 잡을 것인가?

성경책을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답이 요한복음 5장 39절에 소개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아멘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제임스 왕 시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임스 왕은 성경을 너무나 좋아 하여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 성경을 킹 제임스 성경이라고 합니다(King James Version).

성경이 번역되었을 때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가 있었는데 사형수가 왕에게 ‘왕이시여! 나는 사형수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왕이 번역한 성경을 한번 읽고 죽고 싶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왕은 사형수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다 읽었느냐?’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형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성경은 모두 3만절이 넘는 데 하루에 한 구절씩 연구하며 읽고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제임스 왕은 깊은 감동을 받아 ‘집에 가서 성경을 다 읽고 죽어라’ 이렇게 말하며 사형수를 석방했다고 합니다.

죽어야 할 사형수가 성경 때문에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잡아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책을 갖고 있기만 해도 정치수용소로 보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성경을 받아 적고 성경을 가졌다는 기쁨으로 감격하며 감사하는 북한 지하 교회의 성도처럼 우리들도 성경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성경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자동차가 흔한 시대이지만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에 자동차를 구입하면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은 자동차 사고가 없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만들 때 반드시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야만 사고가 없도록 자동차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고사를 지내는 까닭은 그렇게 하므로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교인들은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성경찬송을 올려놓고 다니는 것은 안전을 위한 방법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다만 기독교 신앙은 돼지머리가 아니라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십일조, 감사헌금 등과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모르면 성경과 찬송은 돼지머리와 같은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증거’ 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무엇을 증거 합니까?

진리를 증거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계시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 신앙에서 계시를 무시하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는 것과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는 것은 방법만 다를 뿐이지 목적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계시에서 찾아야 합니다. 계시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시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신앙을 확증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느 군 장교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아주 유능한 군인이지만 술을 입에 대면 그때부터 술에 취하여 계속적으로 술을 마시므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알콜 중독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군법에 회부될 위기에 직면하여 군목을 만나 상담했는데 군목이 그 장교에게 성경책을 한 권 주며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성경을 한 장 읽고 그래도 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다시 또 성경 한 장을 읽으라고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얼른 성경책을 펴서 한 장을 읽고 또 읽고 하여 결국 술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법관들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는 김홍섭판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961년 사형선고를 받는 피고인에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나와 피고인 어느 쪽이 죄인인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단죄하는 것이니 이해 바란다.”고 판결을 했다고 합니다. 며칠 뒤 쌀 한 말씩을 들고 생계가 어려운 피고인 가족들을 찾아가 쌀을 건네주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걸 늘 두려워하면서 겸허한 자세를 잃지 않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권위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한번은 김홍섭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가 탄 버스가 검문소 앞에서 멈추었고 순경이 올라와서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순경은 아무래도 그의 행색이 조금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그의 앞에 와서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라고 질문하자 그는 사실대로 “예, 저는 대법원 판사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순경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화를 벌컥 내며 신경질적으로 “당신 지금 누구를 놀리는 거요? 무슨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오? 어디 신분증 한 번 내보시요!” 그러자  신분증을 꺼내어 순경에게 보여주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라도 말했다고 합니다. 순경이 그의 신분증을 보니까 대법원 판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순경은 그 자리에서 경례를 하고 용서를 빌고는 급히 버스에서 내려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성도는 김홍섭 판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잘못된 버릇과 습관이라도 고쳐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 방법 중에 장좌불와라는 수행이 있습니다. 잠을 잘 때에도 그 자리에 앉아서 잠을 자는 수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수행하며 도를 찾는 스님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진리는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읽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읽는 재미가 날마다 지속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이홍머리방을 운영하던 가위손으로 유명한 미용사 이호영씨가 돈을 긁어모으던 직업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도대체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듯이 살던 사람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를 취재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날 때 그곳에서 1500명 이상이 참석하는 헤어쇼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형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장례와 뒤처리를 하느라고 행사를 취소했는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만일 그 때 행사를 진행했다면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사업 문제로 머리가 복잡하여 1996년 1월 처음으로 기도원을 찾았는데 평소 드문드문 읽던 성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마음이 평온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복잡한 머리가 정리되고 완전한 행복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다음해에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호영씨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함께 일을 하던 여자 동업자 홍씨가 날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탈북자 최초로 감리교신학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안란희(42·여)씨의 고백입니다.  

안란희씨는 지난 1년간 국내 거주 중인 탈북자 170명을 대상으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신앙생활 습관 등을 조사해 논문 ‘탈북민들의 기독교신앙과 목회사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국민일보 2월 3일자 30면 참조).

돈이 없어 브로커에게 생명을 담보로 약속하기를 남한에 가서 돈을 벌어 갚아주겠다고 하여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켜는 순간 부탄가스가 폭발하여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유서를 작성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하나님’이란 단어였습니다.
북한과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개신교에 반감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돌봐주던 봉사자에게 부탁해 성경책을 구했고 성경 읽기를 시작하던 중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였을 때 거짓말처럼 병세는 회복되었고 퇴원하자마자 교회를 찾아갔고 신앙생활을 하며 탈북자들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기독교인 탈북자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연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삶을 하나님을 위해 내놓을 수 있습니다.
남한에 2만 5000여 탈북자들을 양육해 통일 후 북한지역 선교의 선봉자가 되도록 돕겠다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는 판사가 아닙니다.
군 장교도 아닙니다.
탈북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생을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에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영생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생명을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은총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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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

구약 929장, 신약 260장 합계 1,189장
 
1.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암모니아스"가 A.D 220년경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 요한복음)를 '장'만 구분 하였습니다.

2. 센트카로의 '후고'가 성경 전체 1,189장의 '장'으로 구분 하였습니다.

'Hugo'는 A.D 1263년에 죽었으며 라틴어 성경 신,구약 929장+260장 1,189장으로 나눈 것 입니다.

3. 로버트 스테반은 A.D 1555년에 성경전체를 장, 절로 구분 하였습니다.
즉 구약 23,026절, 신약 7,957절 합계 30,993절로 나눈 것입니다.

1,189장에는 모두 이의가 없으나 절수에 대해서는 책마다 다릅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다 배불리 먹고(막 6: 41)’ ‘항상 기뻐하라(살전 5 :16)’ 모두가 여섯 자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은 사무엘하 14장 32절 말씀으로 130자 입니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개역성경의 절수는 구약 23,144절 신약 7957절 총 31,101절입니다.

그중에는 (없음)이라고 된 13절을 포함한 것입니다.

삼상 30:31이 끝절이므로 (없음)이 안 나온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참고로 NIV, NKJV 등은 총 31,102절입니다.         


개역 개정판은 (없음) 15절을 포함하여서 31,103절입니다.

고후 13:14이 끝절이므로 (없음)이 안 나오기도 하므로 31,102절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365bible이 가지고 있는 성경 데이타 절은 31.102절로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1533

출애굽기 1213

레위기 859

민수기 1288

신명기 959

여호수아 658

재판관기 618

룻기 85

사무엘상 810

사무엘하 695

열왕기상 816

열왕기하 719

역대기상 942

역대기하 822

에스라 280

느헤미야 406

에스더 167

욥기 1070

시편 2461

잠언 915

전도서 222

솔로몬의 노래 117

이사야 1292

예레미야 1364

예레미야 애가 154

에스겔 1273

다니엘 357

호세아 197

요엘 73

아모스 146

오바댜 21

요나 48

미카 105

나훔 47

하박국 56

스파냐 53

학개 38

스카랴 211

말라키 55

구약 총절수 23,145

----------------------------------------------신약


마태복음 1071

마가복음 678

누가복음 1151

요한복음 879

사도행전 1007

로마서 433

고린도전서 437

고린도후서 257

갈라디아서 149

에베소서 155

빌립보서 104

골로새서 95

데살로니가전서 89

데살로니가후서 47

디모데전서 113

디모데후서 83

디도서 46

빌레몬서 25

히브리서 303

야고보서 108

베드로전서 105

베드로후서 61

요한일서 105

요한이서 13

요한삼서 14

유다서 25

요한계시록 404

신약 총절수 7,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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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총절수 31,102구절


성경의 전체의 장수는 1.189장 

성경 전체의 절수는 31.173절 

구약성경은 929장 구약의 중간 장은 욥기29장 

신약성경은 260장 신약의 중간 장은 로마서 13장 

성경전체의 중간 장이며 가장 짧은 장은 시편117편 

가장 긴장은 시편119편 

하나님의 칭호가 한번도 없는 장은 구약에 에스더 서 

구약성경의 총 구절은 23.214 절 

신약성경은 총7959 절 

성경전체의 중 간 절은 시편118편8절 

구약의 중간 절은 역대하 20장 17절 

구약에 짧은 절은 역대상 1장 25절 

신약의 가장 짧은 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16절 

성경의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장 9절 

서로 비슷한 내용의 장은 

열왕기하 19장과 이사야 37장 

사무엘하 22장과 시편 1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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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통일된 책이지만, 구약과 신약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신,구약은 서로 보완이 됩니다.
구약은 기초가 됩니다.
신약은 그 기초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추가적인 계시를 더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원칙들을 세웁니다.
구약에는 신약에서 성취된 많은 예언들이 들어 있습니다.
구약은 한 백성의 역사를 제공합니다.
신약의 초점은 ‘한 분’에게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구약은 메시아를 예언하고(이사야 53장)
신약은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요한복음 4:25-26).

요한복음 4:25-26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구약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그 율법을 성취하셨는지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5:17; 히브리서 10:9).

구약에서는 주로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로 교회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16:18).

옛 언약 아래에서 (신명기 29:9) 약속된 이 땅의 축복은
새 언약 아래에서는 영적인 축복으로 바뀝니다 (에베소서 1:3).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지만 상당히 모호한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그 모호한 부분들이 분명하여 집니다.

예를 들어,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죽음 (이사야 53 장)과 메시아의 왕국(이사야 26 장)의 설립에 대해 말하였지만, 두 사건의 연대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즉, 메시아의 고통과 왕국의 설립 사이에는 수천년의 기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메시야가 두 번 출현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처음에 오셔서는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고 (그리고 부활하셨고), 두 번째로 오실 때는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이기 때문에, 신약은 구약에서 소개된 원칙들에 대하여 더욱 예리하게 밝혀줍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참 대제사장이신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단번의 희생이 과거의 모든 희생 제사를 대신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구약의 유월절 양 (에스라 6:20)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됩니다 (요한복음 1:29).
구약은 율법을 제시합니다.
신약에서는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율법이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의도되었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로마서 3:19).

구약은 아담 때문에 잃어버린 낙원을 보여줍니다;
신약은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을 통하여 어떻게 낙원이 회복되는지 보여줍니다.

구약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선언하고 (창세기 3장),
신약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서 3-6장). 구약은 메시아의 삶을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서신서는 그분의 생애를 해석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요약하면, 구약은 세상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실 메시아가 오실 수 있도록 토대를 놓습니다 (요한일서 2: 2).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한 다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되돌아 보며 어떻게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 두 언약은 죄를 정죄하면서도 속죄의 희생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거룩하고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공히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가 믿음을 통해 어떻게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15:6; 에베소서 2:8).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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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아담에서 다윗까지, 천지창조에서 세상에 새 생명을 주고, 신적 통치가 땅 끝까지 확대될 성전 건축까지, 족보와 땅, 왕조와 통치는 ‘타나크’(개별 책들을 무작위로 연결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구조와 분명한 시작과 중간 부분과 결말이 있는 하나의 큰 책)의 이야기이며, 다윗의 집에서 누군가 나와 만물의 회복을 가져올 집을 세우기를 기다리면서 여전히 일종의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다.

주석과 함께 줄거리로 제시되는 이 전체 메시지는 ‘타나크’가 잡동사니가 아닌 한 권의 책임을 보여준다.
확실히 ‘타나크’는 많은 개별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본문들은 더 큰 본문의 일부다. 많은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윗 왕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잃어버린 통치를 회복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며, 그 이야기는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야기, 주석, 이야기’ 흐름이 신구약의 공통 구조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구조적 특징 중 하나는 모형론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쓰여졌고, 이 지면에서 모형론에 대해 상세히 다 다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모형론이 사라지게 된 한 가지 확실한 요인은 성경 본문을 포괄적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Frie 1974).

모형론적 특징들은 성경 본문을 하나의 큰 본문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왕조와 통치의 쌍둥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특별히 더 분명해진다. 각각의 경우 보편적인 것에서 특정한 것과 특정한 것에서 다시 보편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지만 그 과업에 실패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는 이스라엘로 대체된다.
한 부족이 이스라엘 내에서, 한 가정이 그 부족에서 선택되고, 결국 한 개인 다윗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다윗과 그의 아들들의 실패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통치의 유익을 가져올 한 의로운 다윗 계열의 왕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통치는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 시작하고, 그런 다음, 가나안 땅이 초점이 되며, 그런 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 특정 장소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과 열방, 심지어 땅 끝까지 확대된다. 공간 및 시간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는 모래시계 이미지가 이런 발전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류와 우주, 이스라엘과 가나안, 다윗과 시온이 구약의 시공간 줄거리라면, 다시 신약에 와서 새로운 다윗인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과 가나안, 인류와 우주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그림이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복음서, 사도행전), 주석(서신서), 이야기(요한계시록)로 된 신약이 구조적으로 ‘타나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록 마지막 책은 엄격히 말해 이야기가 아니지만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에서 시작된 줄거리를 결론까지 가져간다.

신약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포함하는 계보로 시작한다(마 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신약은 ‘타나크’의 시작과 결말을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시킨다. 창세기와 역대기에서 아담, 아브라함,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다윗의 조상들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며, 각각 열네 대로 이루어진 균등한 세 시대, 즉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바벨론에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마 1:1-17)가 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숫자 ‘14’는 다윗을 강조하는데, ‘14’는 다윗의 히브리 이름의 숫자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포로생활에 종결을 가져올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인 새로운 다윗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생은 이방인들에게 빛을 가져다준다.

 

마태복음 2장 2절은 동방에서 떠오른 한 별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민 24:17). 따라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새 아담과 새 이스라엘로서 예수님은 옛 아담과 옛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한다(마 4:1-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에게 승리하고, 언젠가 온 땅이 영토가 될 하나님 왕국을 알린다. 그리고 이것은 고난받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높임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뿐 아니라 온 세계의 권세를 부여받는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서 강조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영토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한다(참조, 마 28:18-20; 단 7:13-14).

 하늘에 닿으려는 바벨탑은 성령을 기다리는 오순절로

 각 복음서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다윗의 집의 두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조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이 오랫동안 고대해 온 후손으로서, 부활을 통해 다윗의 왕좌에 앉는 다윗의 후손이다(눅 1:32; 행 2:30-35).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한나의 예언적인 노래의 성취를 반영하는 이중창을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성전으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화되고 예수님에게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샘솟는 강이 흘러나온다(참조, 요 2:19-22, 7:37-39; 겔 47:1-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교회는 탑으로 땅과 하늘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교만에 의해서가 아닌 생명의 강수인 성령의 은사를 겸손하게 기다림으로써 먼저 형성된다. 그리하여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뒤집어놓고, 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열방 가운데서 잃어버린 조화를 가져올 것임을 보여준다(행 2:1-21; 창 11:1-9).

 

다윗 왕조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점점 더 많은 제자들의 무리가 유대에서 땅 끝까지 퍼져 나간다(행 1:8). 새 다윗에게서 새로운 ‘토라’를 배운 예수님을 믿는 무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마 5:14)가 되어,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자신들의 선한 행위의 빛을 열방에 비추게 된다(21-48절).

 

‘타나크’의 중반부에서 이야기 줄거리는 주석을 제공하기 위해 잠시 중지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약속하는 바벨론에서의 유다 왕의 방면이 마지막 역사적 언급이었다(왕하 25:27-30).

 

마찬가지로 신약의 중반부에서 줄거리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이라는 주석에 의해 중단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바벨론(로마)에서 다윗 계열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급진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허락받은 포로에 대한 마지막 역사적인 언급이다(행 28:30).

 

이 이야기 줄거리에 대한 바울의 주석은 모든 열방으로 구성된 초기 교회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며, 단지 한 나라가 아닌 전 세계가 교회의 기업이라는 것이다(롬 4:13). 시내 산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원하기에는 힘이 없었지만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할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필요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불순종한 자들을 위해 나무에 달리는 선고를 받는 순종적인 아들이다(참조, 갈 3:10-14; 단 21:18-23). 모든 열방과 민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뱀을 정복하는 최후의 싸움이 이어진다(갈 3:28-29; 롬 16:20).

 

신약 끝 부분에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역사’가 다니엘서와 같은 방식으로 재개되는데, 요한계시록은 그 메시지에서 하나의 놀라운 파노라마적인 환상 속에서 ‘타나크’의 광대한 만화경 같은 마지막 날에 대한 환상들을 포착해낸다.

 

인자가 있으며(계 1:13; 단 7:13), 인자의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는데(계 1:13) 인자는 촛대 사이에 있는 분(계 1:13; 슥 4장),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 창 49:9-10), 다윗의 뿌리다. 보좌에 앉으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이 메시아이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 포로 생활과 심판의 끝을 강조한 70주간은 새로운 세상 질서의 탄생에 필요한 과도기인 세 번의 칠중 재난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상 질서는 모든 기대를 초월하는 질서다. 새로운 세상은 에덴동산의 이미지들을 반영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할 만큼 형언할 수 없다. ‘타나크’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성전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과 성도들이다(참조, 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이 생명나무들은 지속적으로 잎이 푸르고 그 잎들은 만국을 치료한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소가 되었다(참조, 렘 3:16-17).

 

그 결과 인간들은 마침내 그들이 잃었던 왕적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이마에 새긴 채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계 22:5). “여호와와 여호와의 백성은 함께 있고 한 몸이 된다”(Barth 1958: 315).

 * 자료 출처 /  스티븐 뎀프스터(캐나다 애틀랜틱 침례대학교의 스튜어트 머리 종교학 교수),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부흥과개혁사)에서


성경(聖經)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 [마태복음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3. [마태복음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4. [마가복음 12: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5. [마가복음 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6. [마가복음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7.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8. [누가복음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9. [누가복음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0. [누가복음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11. [요한복음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2.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3.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14.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15. [요한복음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16.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7. [요한복음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8.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9. [요한복음 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0. [요한복음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1. [요한복음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22. [요한복음 19: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23. [요한복음 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24. [사도행전 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25. [사도행전 8: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26. [사도행전 13: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27. [사도행전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28.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29. [사도행전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30. [사도행전 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31.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2.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33. [로마서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34. [로마서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35. [로마서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37.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8. [고린도전서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39. [갈라디아서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40.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41. [갈라디아서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2.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3:15-16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45. [히브리서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46. [베드로후서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외경에 관하여

양재훈 교수(협성대, 신약학, 초기기독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용하는 성경과 좀 다른 성경을 발견하셔서 좀 당혹스러우셨겠군요. 질문자께서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보고 질문하셨는데, 사실, 이것 말고도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 등 동방교회의 성경도 있습니다. 성경을 말하기 위해 먼저 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오늘날 한국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중요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시기를 크게 살펴보면, (1)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대략 서기 30년 정도), (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대략 서기 30~70년 정도), (3) 복음의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나고 후속 세대들이 이어가던 시기(70~4세기 초 기독교 공인), (4)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서 종교개혁(1517년)까지 시기, (5)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까지의 시기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위의 (1)번,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의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생각하는 신구약 성경전서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두루마리로 된 구약의 성경들을 사용했지요. 예를 들면,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토라도 있었고, 이사야서와 같은 성경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을 때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서 낭독하셨지요(눅 4:17). 그러면 마태복음이나 로마서는요? 물론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 재림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에(막 9:1)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서 후손들에게 전수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바로 (2)번 시기가 이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나 하셨던 일에 관한 이야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요. 물론 당시 대부분 사람이 문맹이었고, 책으로 만드는 비용도 너무 비싸서 안 만든 것뿐만 아니라 못 만든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사역 당시에 살던 제 1세대들이 죽기 시작하고 재림이 지연되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예가 바로 누가복음 1:1-4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복음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성경’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태나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소위 거룩한 말씀(성경)이라는 것은 토라(모세오경)나 예언서 같은 히브리 성경(타나크 TNK)의 말씀이었지, 감히 자신의 복음서를 성경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세기 즈음이 되면 서서히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 사도가 남긴 편지글의 권위가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예가 디모데전서 5:1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타작 마당에서 낟알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5:4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성경 말씀이지요. 그런데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말씀은 구약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거든요(눅 10:7).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까지 가리켜서 “성경에 이르기를”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서서히 성경의 자리로 올라가는 흔적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 사도의 편지도 성경의 권위를 갖기 시작합니다. 베드로후서 3:16을 보면 바울 사도의 편지가 어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바울의 편지도 잘못 해석한다고 경고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성경과 바울의 편지를 나란히 놓고 있는데요, 이것은 바울 서신서가 성경의 권위를 서서히 갖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세기 초, 폴리캅 감독께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말씀들이 여러분에게 감추인 바 없으며, 이 말씀들에 여러분이 잘 양육되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 이 성경들에 기록된 바와 같이, ‘여러분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기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 폴리캅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 12:1

폴리캅 감독께서 남기신 이 글을 보면 에베소서 4:26의 말씀을 가리켜서 성경이라고 합니다. 또한, 2세기 초에 활동했던 순교자 유스티니아누스(Justin Martyr)께서 변증록을 썼는데, 여기에 보면 예배 시간에 성경을 낭독하는 시간이 있는데(딤전 4:13) 그때 사도들의 회고록을 낭독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한곳에 모여서 사도들의 회고나 예언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읽습니다. 그리고 낭독자가 다 낭독하면 집례자가 이 좋은 모범을 따라 살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 후에 모두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기도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집례자는 같은 방식으로 자기의 권한으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회중은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 순교자 유스티니아누스 <1 변증록>, 67.

즉, 2세기 초에 이르면 복음서라든지 바울과 베드로 등 사도들의 편지들이 성경의 권위를 갖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결론이 난 것도 아니고, 정리된 것도 여전히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유다서 1장 14~15절에는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은 에디오피아 정교회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제1 에녹서 1: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제1 에녹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데, 정작 우리가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유다서에서는 이 말씀을 성경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3)번의 시기 즉, 대략 2~4세기가 바로 신약성경이 정리되어가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 많은 문헌이 나오는데요, 소위 신약 외경이라는 문서들이 만들어진 것이 이 시기입니다. 신약성경은 (1) 복음서 (2) 행전 (3) 서신서 (4) 계시록 등 크게 네 장르로 이루어지는데, 신약 외경도 비슷합니다. 신약 외경 복음서는 <마리아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도마 복음서> 등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나 어록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행전 장르의 경우 정경에는 사도행전이 있지만, 외경에는 <베드로행전>, <빌립행전>, <도마행전>, <바울과 테클라행전>, <안드레행전> 등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로마서나 빌립보서, 베드로서신 등 사도들의 편지가 있다면, 신약 외경에도 <베드로가 야고보에게 보낸 편지>, <라오디게아서>, <클레멘스서> 등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경우 신약성경에는 요한계시록이 있지만, 신약 외경에도 <베드로 묵시록>, <바울 묵시록>, <야고보의 비전> , <요한의 비전> 등의 계시록 장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문서들을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함께 신앙의 표준으로 삼기에는 부족하고 심지어 기독교적 영지주의라는 이단적 성향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서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걸러내 졌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2~4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이 외에도 초기 기독교에는 다양한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 규칙을 담고 있는 2세기 초의 문서인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라든지, 다양한 기독교 변증서들이나 이단 반박문 등이 있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교회의 지도자였던 교부나 감독들이 쓴 글도 많고, 그 내용도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읽어도 도움이 될만한 좋은 글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이 글들을 신약 외경의 문서들처럼 이단으로 배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의 표준인 성경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4세기 말 정도에 이르면 교회는 성경(정경)의 목록을 어느 정도 정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27권 신약성경 목록이 최초로 완결되어 나온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감독이 보낸 부활절 서신(367년)입니다. 신약과 구약의 성경 목록은 397년에 있었던 카르타고 공의회 히포 시노드(Hippo Synod)에서 제시되었고,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목록이 일단 완결되기까지 거의 4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그리고 이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구약 목록이 오늘 논의의 발단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86(혹은 587)년에 바빌론 제국에 의해 나라가 망한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제국, 로마제국에 연이어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 이스라엘을 떠난 디아스포라(흩어졌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그 대표적인 예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다소라고 하는 지금의 터키 지역의 도시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세계의 공용언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민자 생활을 하다 보니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모국어를 잊어버리고 그리스어(코이네 그리스어)로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데, 히브리어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이들은 구약의 말씀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지금의 이집트 해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70인역 성경(LXX, 셉투아진트)입니다. 이 성경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입니다.

1세기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사용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바울의 선교사역으로 세워진 이방인 교회 교인이었고, 그들은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라서 이들이 이 70인역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이후로도 이 그리스어 70인역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중심부로 들어오고, 제국의 각 지역 사람들도 이제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시리아어, 콥트어 등 다양한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서로 많이 다르게 되는 등 문제점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4세기 말, 교황 다마수스는 히에로니무스를 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통일된 언어로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게 한 것인데, 히에로니무스(제롬)께서 번역한 이것이 바로 불가타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히에로니무스는 불가타 역본을 만들면서 <므낫세의 기도> 등 70인역에서 몇 개의 문서를 제외했고, 이후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카논 24조(Canon XXIV)를 통해 그 목록이 확정되었는데, 이때 받아들인 구약성경의 목록이 70인역의 목록이 아니라 불가타 성경의 목록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집회서(벤 시라의 지혜), 지혜서(솔로몬의 지혜), 바룩, 토빗, 유딧, 마카베오 상, 마케베오 하 등 총 7개의 문서가 들어있습니다(에스더와 다니엘은 그 내용이 몇 군데 추가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개신교 성경의 에스더와 다니엘이 살짝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가리켜 제2 정경이라고 부릅니다. 이 문서들은 모두 제2 성전기 후반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문서들입니다.

이렇듯 신약성경 27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구약성경 목록이 개신교와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서로 차이를 보입니다. 가톨릭은 서방교회에 해당하고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 등은 동방교회에 속하는데,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 달리 불가타가 아닌 70인역 성경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의 경전에는 서방교회인 가톨릭의 구약성경 목록 외에 추가로 더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동방교회도 어느 정교회인가에 따라 목록이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하여튼, 이렇게 서방 가톨릭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인정한 불가타 바탕의 성경 목록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던 중,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구약성경 목록에 반기를 듭니다(1534년 루터 성경).

히브리 성경에는 맛소라판 성경이 있습니다. “맛소라”라는 말은 ‘전승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요, 히브리어에는 자음만 있지, 모음을 표기하는 문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을 읽는 발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에 자음만 있으니 헷갈리는 겁니다. 한글로 비유를 들자면, ‘ㄷㄹㅁ’ 등 자음만 있으니 이것을 ‘다리미’라고 읽어야 하는지 ‘두루미’라고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이들이 정확한 발음을 위해 글자에 모음을 달아놓았는데, 이 성경이 바로 맛소라판 성경(Masoretic Text)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토빗, 유딧 등과 같은 위의 문서들은 ‘외경’이라고 하여 빼내어서 라틴어 불가타 구약성경을 거부하고 이 맛소라판 히브리 성경의 구성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가 가진 39권 성경 목록이 된 이력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구약성경이 유대교인들이 가진 히브리 성경(타나크)과 같은 내용의 성경이 됩니다(물론 각 문서를 묶는 방식과 문서 배열 순서는 다릅니다만).

가톨릭에서는 그리스어 70인역에서 출발한 라틴어 불가타역을 바탕으로 구약성경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7개의 제2 정경 목록이 포함된 구약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히브리 성경(맛소라판 성경)이 원래(original) 구약성경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내용구성에서는 이 성경을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창세기로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구약성경 목록 순서에서는 70인역의 순서를 따릅니다. 유대인의 성경인 맛소라 판 히브리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해서 역대기로 마무리됩니다. 즉, 창조로 시작해서 다윗의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는 것을 꿈꾸는 구도로 순서를 배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내용은 같아도 순서만큼은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말라기로 끝나는 70인역 성경의 순서를 따릅니다. 즉, 창조로 시작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말라기로 구약성경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신약성경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복음서로 시작합니다(저작 시간 순서로 따지면 신약 27권 중에서 데살로니가전서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즉,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제일 마지막에 넣어서 주님의 재림과 창세기와 대조를 이루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기대합니다.

개신교는 제2정경의 7개 문서를 성경말씀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가톨릭도 이전에는 이 문서들을 제2 경전이라고 하여 따로 떼어놓았는데, 최근에는 구약성경 중간중간에 끼워 넣고 나머지 다른 구약의 문서와 대등한 권위의 성경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 7개의 문서를 비록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서들을 이단 문서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서들은 제2 성전기 후반부에 구약의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신앙 서적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경 66권 외에도 우리의 신앙에 좋은 표본이 되는 문서들도 많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들이 성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문서들이 이단적인 문서라고 보면 안 됩니다. 도리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들로 읽는다면(시중에 나온 개인 간증 서적은 많이 읽으면서 왜 이런 문서들을 읽는 것은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 원본은 어디에 있나요?
민경식 교수 (연세대학교)

1. 원본과 사본, 그리고 본문비평

우선, 첫 번째 질문을 살펴볼까요? “성경은 원본이 없고, 사본만 있다.”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일반 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원본이 없다”는 것은 성경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문헌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수천 년이나 된 책이 오늘날 고스란히 남아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 잃어버렸거나 삭아버렸을 것입니다. 화재로 인해 훼손되는 경우라든지 물에 젖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겠지요.
아주 먼 옛날에는 인쇄기술이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조금 더 앞서기는 하지만, 서구사회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15세기 중엽입니다. 이때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찍어낸 책이 소위 『42행성서』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손으로 베껴서 책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물론 목판인쇄가 있기는 하였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필사한 경험이 있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부활절마다 교인들이 함께 손으로 써서 만든 성경을 봉헌합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책을 만들었습니다. 손으로 베꼈다고 해서, 이것을 “필사본” 또는 “수사본”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사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사본”은 한편으로는 “원본”의 반대 개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쇄본”의 반대 개념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성경의 “원본”을 기록하였겠지요. 구약의 경우, 매우 오랜 기간 구전을 통하여 내려오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베꼈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또 베꼈을 것이고요. 이것이 당시에 책을 만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식이었으니까요. 즉, 한 번 문서화된 것을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신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예수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문서화된 기록들을 수집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하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이를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의 말씀입니다.
“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새번역>)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에 대한 많은 자료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예수의 이야기를 엮어낸 사람들이 많다고 하잖아요(1절). 그런데 그렇게 예수의 이야기를 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의 첫 제자들이나 예수 사건의 목격자들이 아닙니다. 제1세대 목격자들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제2세대)이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2절). 그리고 자신도 이러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한다고 합니다(3절). 그러니 <누가복음> 저자는 제3세대나 제4세대 정도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때 그가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의 “원본”이겠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원본”을 접한 사람들은 이 책을 갖고 싶어 하였고,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서 소장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이 생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본”입니다. <누가복음>을 갖고 싶었던 사람이 단지 한 사람만은 아니었겠지요? 각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마다 <누가복음>을 하나씩 베끼고, 또 필요에 따라서 여러 권을 베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에서 많은 사본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바울의 편지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어? 이거 바울 선생님의 편지 아닙니까? 제가 이거 좀 베껴 가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바울의 편지들도 사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구약의 책들도 비슷한 과정으로 필사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최소한 약 2,000년 전의 문서입니다. 2,000년의 세월 속에서 바울이 처음 썼던 편지들은 언젠가 사라졌습니다. 또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최초의 문서, 즉 복음서 원본들은 사라졌습니다. 물론 구약 문헌들의 첫 원고도 같은 과정 가운데 사라졌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사본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본들이 얼마나 남아있을까요?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다수의 고대문헌들은 사본이 몇 개 없습니다. 플라톤의 작품이 그러하고, 타키투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작품 또한 그러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꽃이요 가장 위대한 작품인 호메루스의 『일리아드』의 사본은 수백 개 정도인데, 신약성경의 사본은 약 25,000개에 달합니다. 이 가운데 원어인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본만도 약 5,700개입니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사본들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으니, 이 수자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신약은 고대의 어느 문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본이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본들 가운데 똑같은 사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베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한 번이라도 손으로 성경을 베껴 써본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잘 이해될 것입니다. 오탈자가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한 줄을 빠뜨리고 베끼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2,000년에 걸쳐 베끼고 베끼는 과정에서 성경의 본문은 원문에서 차금차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러한 방대한 양의 사본들을 하나하나 읽고, 분석하고, 연구해서, 소위 “원문”에 가장 가까울 것 같은 본문을 재구성하였습니다. “본문비평”이라는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작업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본문비평 학자들은 이 고단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의 본문이 원문과 같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더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회복하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이 방법론적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또 새로운 고대의 사본들이 끊임없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정경과 외경, 그리고 정경화과정

두 번째 질문은 “정경화”의 기준이 무엇인가와 관련됩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기독교 세계 안에 유포되었던 고대의 많은 문헌들 가운데 왜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이 되었고, 왜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정경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신약성경에는 4권의 복음서만 포함되어 있지만,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복음서가 수십 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의 작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서들이 언급되어 있거든요. 즉, 텍스트 없이 제목(과 내용 일부)만 전해지는 복음서들이 있습니다. 또한 본문이 전해지는 복음서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대략 20개입니다. 신약의 네 복음서를 포함하여 여러분이 잘 아는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빌립복음』, 『베드로복음』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유다복음』도 2006년에 발표가 되었지요? 이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4개의 복음서만이 최종적으로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정경화”라고 합니다. 우리의 성경에는 하나의 행전만 있지만,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약 20개에 이르는 행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행전』, 『베드로행전』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당시에는 서신교환도 활발하였으며, 이에 우리는 이 당시의 편지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바울의 편지 몇 개와 베드로 등 다른 제자들의 편지 몇 개가 정경에 포함되었고, 나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의 경우도 사정은 같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최종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초기 기독교의 문헌들을 “외경”이라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외경 개념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구약 본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된 마소라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원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을 칠십인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칠십인역에는 마소라 본문에는 없는 책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지혜서, 집회서 등). 구약의 외경은 바로 이것들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들을 가리켜 “제2성경”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문서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이 정경과 외경을 갈라놓았을까요?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있습니다. 오래된 문서이어야 한다는 “고대성”, 사도들이 저술한 문서이어야 한다는 “사도성”, 당시 공교회의 신앙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정통성” 등입니다. 그러나 정경에 포함된 문서들과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문서들에 이 기준을 적용하여 보면, 일관성이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고대성의 예를 들자면, 신약성경의 일부 문서들(목회서신 등)은 2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문서들(『클레멘스서신』 등)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단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정경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성이 결정적인 기준일까요? 정경에 포함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사도성이 없는 작품인데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반면, 『베드로복음』, 『베드로행전』, 『베드로계시록』 등은 베드로의 저술로 알려졌지만,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신학적 또는 신앙적 정통성도 정경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 다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외경 가운데 정경에 포함되었을 만한 신학적 색채를 띠는 『디다케』와 『헤르마스의 목자』 등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무원칙의 원칙”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합리적인 수준의 “기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보충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거룩한” 문서로 여기는 것들이 처음부터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서신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바울이 각 공동체에 보낸 편지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문서가 아니라 “그냥” 편지였습니다. 복음서들 역시도 처음에는 예수에 대한 평범한 기록일 뿐이었습니다. 제1세대 목격자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기억을 문자로 남겨야 할 필요에 따라 생산된 문서들입니다. 반면에, 1세기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보았던 “성경”은 구약이었습니다. 물론 이 구약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 전반에는 토라(오경), 예언서들 가운데 몇 개, 그리고 시편 등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약 문서는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던 시기입니다. 1세기 중엽 이후로 신약의 문서들이 기록되었지만, 이것이 곧바로 거룩하게 여겨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4개의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들은 2세기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거룩한 문서”로 인식되었고, 2세기 중반에 이르러야 구약과 어깨를 견주는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년경에는 구약의 권위를 넘어서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 가운데 일부 문서들에만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도 <베드로후서>라든지 <요한계시록> 등은 그 권위를 의심받고 있었거든요. 이와 동시에, 오늘날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문서들 가운데서도 많은 것이 특정 지역에서는 “거룩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특정 문서들이 “성경”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 가운데 또 일부는 그 지위를 잃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즉, 넓은 의미의 정경화 과정은 좁은 의미의 정경화(선택, canonization)와 비정경화(배제, decanonization)의 합의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전승을 따랐고,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일부 문서들을 공유하기도 하였지만, 서로 다른 문서들을 거룩하게 여기기도 하였는데, 경쟁에서 승리한 공동체가 정통이 되었고, 그들의 문서가 최종적으로 정경에 포함되었겠지요. 이러한 정경화 작업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의 책이 정경에 포함되어 우리의 신앙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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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의 필요성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Ⅰ. 성경 읽기의 필요성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셨습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고, 인간의 기원과 구원, 영생에 이르는 유일 한 길을 가르쳐 주며 끝없는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은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힘이 되어 줍니다. 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조언해 주며 우리의 죄를 꾸짖고, 매일의 삶 에 필요한 영감을 줍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문학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총서입니다. 성경은 역사, 시, 희곡, 전기, 철학, 예언, 과학 등 영감과 교 훈을 주는 모든 지식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또는 일부가 1,2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해마다 어떤 책보다 더 많이 애독되고 있습니다. 그러 면 우리가 성경을 읽음으로써 가장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 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론적인 신이나 관념적인 신이 아닙니 다. 기독교의 신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요, 인격적인 사랑의 하 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 신을 계시해 준 유일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신성과 권능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계시만으로 하 나님을 알기에는 너무 막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이 '특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 신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는 자기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밝히 보여 주셨 습니다. 이 모든 계시를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 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끔 열심히 신앙 생활 을 하다가 중도에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 버린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 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예배의 대상도 모르면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도 모르면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것은 미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이분들 은 자기들이 생각해 낸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다가 신앙의 참 도를 알지 못하 고 도중에서 포기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의문을 가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왜 태어났 는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많은 질 문을 해 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해답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많은 책을 읽어보아도 분명한 해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지성인들이 적당 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방황합니다. 하루하루 의미 없는 삶을 되풀이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본질적인 문제보다 우선 당면한 실존 문제 해결에 급급하며 살아갑니 다. 그러면 인간이 왜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울이 없으면 자기 얼 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를 알게 되면 피조물인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밝히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절 대자 앞에서 자기 발견을 하게 될 때만이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 다. 한 번뿐인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서게 됩니다.

셋째, 만물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 만능 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하나님같이 섬 기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일평생 썩어질 것들을 위해 다 바 칩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 러나 행복은 돈의 양이나 소유욕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물질이 필 요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의 행복을 위해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물질의 가치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현대인들이 숭상하고 있는 만물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은 숭상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 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질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Ⅱ. 성경 읽는 입장

성경은 BC 16세기 모세가 오경(五經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을 기록한 이후 약 1,700년 동안 여러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들 중 에는 모세와 같이 애굽(이집트)의 모든 학문에 통달한 사람도 있고, 사무엘과 같은 사사나 다윗과 같은 시인, 농부, 귀족, 왕, 어부, 세리, 의사 등 아주 다양합니다. 그 래서 오늘날 우리의 지식과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 나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되었음은 의심할 여 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저자가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기록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저자의 기본 입장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 저자는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기록했습니까?

첫째, 유신론적 입장(유신론과 무신론)

세상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신론적 입장과 무신론적 입장입니다.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 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180도 달라 질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 는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 떨어진 빗물이 압록강을 통해서 동해로 갈 수도 있고, 두 만강을 통해 서해로 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출발은 작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적 입장에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본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근원을 물, 불 , 바람(공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근세 어떤 생물학자는 인간의 기원을 아메바라고도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 두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대로 세상의 기원을 물, 불, 바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까?

첫째, 만물의 기원이 '물', '불', '바람'이라면 그 '물', '불', ' 바람'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둘째, 이런 '물', '불', '바람'으로부터 어떻게 인격적인 인간이 생겨날 수 있는가?

셋째, 만일 이러한 것들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면 과연 인간에게 는 어떤 존재 의미가 있는가?

넷째, 인간이 아메바에서 진화했다면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가?

우리가 무신론적인 입장에 설 때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볼 때는 명쾌한 해답을 얻 을 수 있습니다. 유신론적인 입장은 태초에(In the beginning) 하나님이 존재하셨다 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하 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인간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창세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도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유신론적 인 입장에서 성경을 읽어야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역사적 입장(사건과 역사)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두 가지 서술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일어난 일을 순서적 으로 빠짐없이 나열하는 서술 방법입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 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역사가가 분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의미 있는 중요한 사건만을 추려서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성경 저자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기 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역사의 나열이 아닙니다. 저자가 독특한 역사 관을 가지고 기술한 '사건으로서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논리와 이성, 합리적 인 생각으로 전후 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 해설을 달아 놓지 않은 부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는 아담 이후의 모든 사건들 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며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러므로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의 역사 원칙에 입각하여 중요한 사건만 추려서 창세 기를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면 성경 저자의 원칙이란 무엇입니까? 저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 과 불행을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의 연관성 속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아담의 낙 원 상실은 아담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어긴 데서 온 결과라고 했습니다. 이것 은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상실할 때 비참해지고 만다는 역사 원칙을 말 해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이 며, '하나님>인간>만물'의 창조 질서가 파괴될 때 어떻게 되는가 등을 기록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역사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원칙에 입각하여 성경을 읽어야 성경 말씀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셋째, 신앙적 입장(성경과 과학)

성경은 과학적인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을 통해서 자연 과학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 현대적인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과학적 지식을 목적으로 쓰여졌다면 지금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낡고 형편없는 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해마다 과학적 지식이 홍수처럼 옛 학설을 뒤엎으며 나옵니다. 그러 나 이러한 지식의 홍수 시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그 가치와 권위를 잃지 않고 있습 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해 주고자 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과학에서 완전히 떠 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며,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 찬 그 시대에 우주와 자연 질서가 가장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기록된 책은 성경밖에 없습니 다. 자연과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와 조화, 사물의 내 부에 존재하는 질서와 법칙들을 발견해 내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이 발 달할수록 하나님의 큰 권능과 무한한 창조의 지혜가 높이 드러날 뿐입니다. 또 순 수하게 학문을 하는 자연 과학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 계는 우연히 존재하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질서 정연하고, 필연적인 인과법칙으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연 과학적인 입장에서 단편적인 지식을 얻고 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세계를 우리 앞에 열어 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성인들은 과학적인 사고 방법에 연단 되어 있기 때문에 모 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그 모든 사실들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그 러므로 성경을 읽으려면 일단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입장에서 읽 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관계성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성경 읽기에 임해야 합니다.

Ⅲ. 성경 읽는 자세

성경은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이요 지침서입니다. 성경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올 바른 이해가 없이는 신앙 생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크 리스천들이 성경 말씀의 참 뜻을 잘 모릅니다. 성경을 읽어도 마음을 들여 읽는 사 람이 드뭅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성경 말 씀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양식

마태복음 4장 4절을 보십시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신명기 8 장 3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그들이 영양실조에 걸 려 죽어 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 먹을 양식에 대한 걱정 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같이 일만 하면 왕이 먹여 주고 입혀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한 조각의 빵을 얻어먹기 위해 소같이 일만 하는 노예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40년 동안 주리게 하시며 하 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주셨습니다(신 8: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것은 빵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사단의 간교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당시 예 수님은 40일을 주리시고 한 끼만 더 굶으시면 죽을 지도 모르는 극한 한계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극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시며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 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영혼의 양식을 얻고자 하는 소원으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 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 무를 두셨습니다. 이 나무들은 아담의 영혼의 만족을 주는 생명의 양식들이었습니 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그것 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동 산에서 이 나무를 쳐다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인간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에게는 영혼의 양식이었습 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영혼이 굶어 죽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본능대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 다(창 6:3 ; 눅 17:26,27).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름다운 처녀도, 젊은 청년도 다 피곤하여 지쳐서 비틀거릴 수밖에 없습니다(암 8:11-1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게 되면 독수리가 새 힘을 얻듯이 힘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우리들의 시들은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삶의 지혜와 명철을 줍니다(시 19:7, 8).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밤새도록 말씀을 묵상하며(시 119:148), 그 맛이 꿀맛과 같다고 노래했습니다(시 119:103). 예수님께 서도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63). 시몬 베드로는 "영생의 말 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요 6: 68). 현실이 어렵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만이 생명의 길이 요,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 고, 마음의 양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의 권위

마태복음 5장 17절과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율 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완성하 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셨 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절대적인 진리의 말 씀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전파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과 5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 로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3절에 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상에서 볼 때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도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이요, 예수님의 말씀도 결코 폐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 씀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취사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동양 사람들은 윤리 적인 교훈들은 잘 받아들이지만 영적인 진리는 잘 안 받아들입니다. 어떤 분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자녀들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엡 6:2,3). 그러면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받아들입니다(엡 6:4). 또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자기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하도록 강요합니다(엡 5:22). 그러나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하 라는 말씀은 안 받아들입니다(엡 5:25).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이고 자기중 심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 유익을 위해 취사선택하는 자들이요 더하거나 빼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정당화 하는 욕심쟁이들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의 말씀을 신화나 꾸며낸 이야기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라 든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인정하지 않고 할 수 있으면 인간적인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불트만'과 같은 사람은 성경을 비신화화 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심지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사건도 가짜 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자기 먹을 것을 감추고 있는 데 한 아이가 헌신적으로 내어 놓으니 감동을 받아서 저마다 자기 먹으려고 숨겨 놓았던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풍족하게 먹고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사건도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중에 바닷가에서 계셨는데 예수님의 그림자가 달빛에 비취어서 물위에 어른거린 것을 제자들은 예수님이 걸어오신 것처 럼 느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모든 말씀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으셨습니다. 천지창 조를 인정하셨습니다(마 19:4-6).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이나, 40년 동안 하나님 께서 만나를 먹이신 사건도 믿으셨습니다(요 6:49).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도 믿으셨습니다(눅 17:28,29). 요나가 삼일삼야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사 건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으셨습니다(마 12:40). 그 외에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과 인물들, 그리고 그 내용을 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 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점일획도 꾸밈이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승천, 재림, 심판 등 아무 것도 사실로서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요 구원받을 수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성도 믿지 않으니 썩어질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영원한 하나 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완전 무결한 생명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17).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나의 작은 머리로 이 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현재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지만 신앙이 좀더 성숙한 후에는 그 말씀을 밝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서 그 말씀의 참뜻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셋째, 성경의 중심 내용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한 것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또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 에게도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24:27).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그를 통해서 이루실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약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볼 때도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 기 위해서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나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 또 곧 체포되실 것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검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바 불법자의 동류(同類)로 여기심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 었습니다(눅 22:37).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에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 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만 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3,5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도 자기에게 기록된 말씀을 온전히 이루 시기 위해서 투쟁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심한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 통으로 기진맥진하셨습니다. 이제 곧 숨을 거두실 순간이 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 신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요 19:28). 예수님은 목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자기로 말미암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열 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에 기초하여 생각하시고 계획 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신비로운 체험보다도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참 뜻을 깨 닫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에 철저하게 뿌 리를 박고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신약 성경은 구약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은 오 실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입니다. 신약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과 동시에 장차 구름 타고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엽적 인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중심 되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넷째, 말씀의 적용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은 제자들을 보고 맹렬하게 비난을 퍼 붓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2:3)?"고 반문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 경에 ... ... 라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 때가 많습니다(마 21:16,42).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기는 읽지만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두개인들에 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유대인 들을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 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 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이상의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항상 성경을 읽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성 경 말씀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어떤 문제든지 성경 말씀으로 해결해 나가셨습니다.
특히 복음 역사를 시작 하실 때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막 10:4-9 ; 12:26,27). 특 히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아시고 예수님은 많은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으로 모든 아픔을 이기셨습니다(막 14:21).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들을 보면 거의가 인간의 창조, 결혼의 창설, 아벨의 피, 노아 시대 사람들의 모습,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아브라함의 믿음 등 거의 중요한 사건들을 다 언급하 셨습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 만나를 내리신 사건, 민수기의 놋뱀을 든 사건도 언급하셨습니다. 또 사무엘서의 다윗의 망명 시절 성전에서 떡을 먹은 사건, 열왕기서의 솔로몬의 부귀영화,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 엘리사의 사역을 말 씀하셨습니다. 다니엘서의 재림에 관한 말씀, 예레미야서의 성전에 관한 말씀과 새 언약에 관한 말씀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스가랴의 순교 사건까지 알고 계셨습 니다 마치 구슬을 꿰듯이 꿰뚫어 알고 계시며 자유자재로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 의 마음은 성경 말씀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각, 계획, 방향, 모든 활동을 하실 때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셨으며 귀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깊이 연구하셨는가를 증거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시험이 와 도 즉시 합당한 말씀으로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도 말씀에 기초하여 과감하게 책망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형식과 전통의 사슬에 매 이지 않고 율법의 근본 정신을 바로 실천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완 전히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생애였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 모든 우리의 생활이 예수님과 같이 성경 말씀에 근거할 때 가장 보람되며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 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자녀들을 책망도 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과 구원의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 님의 자녀들로 온전케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주님의 책망과 가르치심을 받아 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이 될 때까지 묵상하고, 실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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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God's Will)

대한성서공회 성경 검색 사이트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씀을 찾아보면 32구절이 소개된다.
구약에서 1구절
신약에서 31구절
이 모든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에스라 7: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쓸찌며.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예물은 제물로 사용한 것 이외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마태 22:21. 마가 12:17. 누가 20:25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세상의 가족은 혈육에 의한 원칙을 따를 뿐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 14:18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다.
다만 세상도 정욕도 모두 지나가 버릴 것 뿐이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당장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반드시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적인 삶의 자세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리트머스 시험지
로버트 보일(1627-1691)이 제작한 것으로, 리트머스 이끼에서 추출한 용액에 종이를 담갔다가 말린 것이다.
이것으로 '산성(산)'과 알카리성(염기)'를 구분할 수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의 색상은 빨강과 파랑이 있다.
빨간색은 pH 8.0보다 염기쪽인 물질에 반응하여 파란색으로 변한다.
파란색은 pH 5.0보다 산성쪽인 물질에 반응하여 빨간색으로 변한다.
따라서 리크머스 시험의 색갈이 어떤 색으로 변하느냐에 따라 용액의 성분을 가늠할 수 있다. 
 

산과 염기를 쉽게 구별 가능하다는 장점덕에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는 방법이지만, 산과 염기만을 구별 할 뿐, 정확한 수소 이온 농도의 값을 알 수는 없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리크머스 시험지를 사용하여 용액의 성분을 알아내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말씀의 대표적인 구절이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이라고 하겠다.

항상 기뻐하라 -
판토테 카이레테(παντοτε χαιρετε)

기뻐하라(5463) 카이로(chairō χαίρω 스트롱번호 5463

1. 기뻐하다.   2. χαῖρε. 3. 안녕
발음 [ chairō ]

기뻐하다(마 2:10, 고후 6:10, 빌 4:10), 즐거워하다(마 5:12, 눅 19:6, 벧전 4:13), 평안하다(마 27:29, 눅 1:28, 요 19:3), 즐겁다(눅 15:5), 문안하다(행 15:23, 23:26), 기쁘다(고전 7:30, 요이 1:4), 기쁘게 하다(고후 7:7).

항상 기뻐하라 - '항상 기뻐하라'(*, 판토테 카이레테)는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일에도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해서 나타날수 없는 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다(롬 14:17;갈 5:22). 혹자는 빌 4:4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와 같이 본절도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의미한다고 한다(Bruce).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그 상황에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 자식을 낳지 못한 한나의 기도
(예)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서 바울의 기도
(예)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기도
(예) 풀무불에 던져닌 아벳느고, 사드락, 메삭의 기도
(예) 돌에 맞는 죽는 현장에서 스데반의 기도

쉬지말고 기도하라 -
아디알레잎토스 프로슈케스데( αδιαλειπτως προσευχεσθε )

기도하라(4336) 프로슈코마이( prŏsĕuchŏmai ) προσεύχομαι 스트롱번호 4336

1. 기도하다.  2. 막 1:35. 3. 눅 1:10
발음 [ prŏsĕuchŏmai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엡 6:18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눅 18:1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셨다. 또한 롬 12:1에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혹자는 이 구절이 본절에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Bruce). 한편 '쉬지 말고 기도하라'(*, 아디알레이프토스 프로슈케스데)는 말은 24시간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단히 의지하는 자세나(Thomas),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갖추는 것(Lenski)등 항상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잠을 자는 시간과 음식을 섭취하는 시간과 때로는 휴식 즉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
심지어 부부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하였는가?

노동이 곧 기도
기도가 곧 노동
Opus est orandi
Oratio est opus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노동은 단지 우리가 날마다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창조사업에 동참하며, 물질과 맞서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을 형성시킨다.”(로버트 엘스버그)

우리가 매체를 통해 날마다 마주치는 ‘광고’는 행복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노동할 때보다 여가나 휴가를 보낼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일이란 휴가나 여가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막이나 동굴에서 홀로 살던 수도승들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이것은 일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 노동이 영적인 삶을 방해하기는커녕, 우리는 일을 통해 치유되고, 지루함과 슬픔을 몰아낸다고 믿었다. 여기에 굳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지 않아도 좋다. 일은 복음적 명령 이전에 인간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막교구 폴 아빠스는 종려나무로 바구니를 짜면서, 바구니가 광에 가득 차면 태워버리고 다시 짜곤 했다. 그는 수도승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고, 거룩함의 길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일이나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삶을 계속할 수 없다.

이상대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 : 레오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나, 귀족사회에서 이룬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했고, 그러한 거룩함을 가난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오히려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리 고달파도 아침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하고 기본적으로 인생은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밤이면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의 에너지를 온통 바치고 나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를 다룬 창세기의 내용처럼, 농민들은 그들의 노동을 징벌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룩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한가한 사람들에게 주는 말>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며, 내가 받은 교육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눌 것입니다. 어떤 단체를 세우거나 책을 써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농민들과 소박하게 살았으나, 집에 와선 비단옷을 입고 자야하는 삶에서 갈등을 느끼며 과로워하다 아스타포보 마을 철도역장 집에서 82세로 숨졌다.

여기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상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이상처럼 살기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삶이란 “보편적 도덕률이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혜, 곧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원을 타면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대로 늦잠을 자도 될 텐데!’하는 환상을 거부하고 “이기심과 경쟁보다 사랑과 연대를 나누며 사는” 비전으로 매일매일의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톨스토이가 발견했지만 살지 못한 이상은 기도와 일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의 삶이 기도와 공부, 노동으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네딕토는 기도라는 거룩한 영역과 노동이라는 세속적 행위를 갈라놓지 않았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이므로,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란 단순히 얌전하게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이 기도할 때처럼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 때 노동은 곧 기도가 된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에 물을 주거나 하는 단순한 노동뿐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길 때처럼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계를 다룰 때에도 “일이 담고 있는 선을 존중”한다면 기도행위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을 쓴 부활의 로랑 수사는 80살에 죽기까지 수도원에서 40년 동안 부엌일을 하며 냄비와 프라이팬을 뒤집었다. 그의 영적 삶은 단순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일을 하면서 “하느님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계시다.”고 확신했다. 그는 말한다. “나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 없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가운데 하느님을 모신다.” 이처럼 로랑 수사는 성무일도와 미사 같은 전통적인 영적 수련행위와 얼룩을 없애고 야채를 다지는 등 날마다 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결국 거룩함은 그 일의 성격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내적 태도에 달려 있다. 로랑 수사는 이를 두고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고 그 일을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일은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 섬기며 자선을 베푸는 기회요 기도가 될 수 있으며 아름답고 진실하며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엘스버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접수를 하고 요금을 받거나 식품점에서 계산하면서도 은총과 사랑으로 일터를 거룩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성인들이다. 당신은 학교나 골목길이나 바다에서, 교회나 기차, 가게와 찻집에서 성인을 만날 수 있다.”

고유한 나의 길을 따라서

“나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원의 문제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며 참된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토머스 머튼)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 가야하는 정해진 길은 없다. 바람직한 직업도 없다. 다만 자기 고유의 길이 있을 뿐이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성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찾았다. 물론 예수님처럼 모두 십자가에 못박힐 필요도 없다. 목수였던 유용주 시인은 예수는 못박힘으로써 가장 위대한 목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목수이면서 시인의 고유한 길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우고
20년 가까이 세상 공사판을 떠돌아다닌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수, 유용주)

샤를 드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거룩하고 완전해지라고 초대하시며, 당신을 더 가까이 따르며 당신 뜻에 복종하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영혼이 똑같은 일로 각자의 사랑을 당신께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똑같은 사다리로 천국에 오르고 똑같은 방식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천국에 이르는 나의 길은 어떤 길인가? 나는 어떤 삶으로 나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는가?”

만약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내 고유한 자리에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 길을 발견한다면 모든 길이 꽃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발견하더라도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말한다.

도로시 데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회심 : 도로시 데이의 응답

도로시 데이의 ‘회심’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응답 가운데 나타났다. 특별한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공감하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성인들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하면서도 한편에선 이렇게 물었다. “내 마음 속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왜 애초에 악을 방지하지 않고 그 치료에만 그토록 매달리는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는 것도 좋지만 노예제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성인들은 없는가?” 교회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한 도로시 데이는 종교에 등을 돌리고 진보정치에 희망을 두었다. 그러나 역사의 한복판에 참여하며 분투했던 젊은 날의 도로시 데이에게 다가온 것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이었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딸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길을 찾다가 결국 가톨릭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의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민자들의 교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적인 그의 동료들에게 가톨릭은 부자들의 교회요 기득권자들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신앙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

1927년에 세례를 받고 5년 동안 방황하던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직후에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가 된 피터 모린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하느님의 응답은 하늘에서 들려오지 않고 강한 53살의 프랑스 억양을 지닌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피터 모린은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서에 담긴 사회적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운동을 제안했다. 더 이상 교회와 정부의 프로그램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더욱 선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가톨릭일꾼운동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복음을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자발적 가난을 살고, 가난한 이들의 당장에 필요에 응답하면서,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운동이었다. 이른바 ‘세상 속에 더 깊이 내려가고, 세속적 가치와 전혀 다른 삶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그들은 1933년 5월 1일 노동자 성요셉 축일이자 메이데이에 유니온광장에서 <가톨릭일꾼> 신문을 배포하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는 성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도로시 데이는 “네가 바로 그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생애 50년 동안 이 길에서 행복했다.

부르심 속의 부르심

도로시 데이가 아나키스트로서 살다가, 다시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거듭 새삼 새로운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어떤 책을 접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아님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는 이런 체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보통 ‘부르심’이라고 하면 수도자가 된다거나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좁게 해석하기 쉽지만, 수도성소나 사제성소 안에서도 더 근본적인 부르심에 노출될 수 있다.

평신도의 경우에도 자신이 그동안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실현을 해 왔다고 장담하더라도 뜻밖의 전혀 다른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면서 그 일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과업에 헌신하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거룩함을 찾는 이에게 ‘회심’은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회심이 일어나면 무질서한 마음을 벗어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예전에는 평범한 삶에 짓눌려 버거웠지만 회심한 뒤로는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이러한 회심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생명력을 준다. 마더 데레사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걸 보고 어느 기자가 “저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겁니다.”하고 말하자, 그녀 역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했다.

‘의미’ 있는 노동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일 속에서 충만한 의미를 찾는 일이다.
의미가 생기면 그 일은 무엇이든 어디서라도 기쁨으로 용약한다.
예수회 사제요 신비가요 과학자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하거나 활동할 때 우리를 기다리신다.
펜이나 삽, 빗이나 바늘 안에도 계신다.
우리가 자신이 하는 일에 환 획, 한 줄을 긋고 한 땀 한 땀 뜨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성을 기울이고 의지를 다해 완성해 나가면 최종 목표에 다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거룩함이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가 “그때에 비로소 성인들이 말하는 노동의 진정한 행복을 맛본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길(노동)을 통해 기쁨으로 충만한 하느님께 이르는 거룩함이다.
그게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삶의 목표다.

1965년 성공회 고 대천덕 신부가 세운 공동체, 예수원.
예수원은 ‘노동이 기도’이며 ‘기도가 노동’이라는 정신으로, 찾는 이들에게 하루의 일거리를 부여하고 있다.
매 순간을 하나님께 대하 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예배이자 기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있었던 장작 패기, 오늘 식사의 반찬이 될 쑥 캐기, 그리고 예수원 곳곳의 보수공사 등등. 모든 게 낯설고 단순한 노동이지만, 이를 통해 복잡했던 일상에서 깨닫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박정섭 씨(모리아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도시에선 바쁘고, 일상에선 바쁘고.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 나의 삶 속에서 일상에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원에서 하루 3번 드리는 예배에서는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홀로 찾은 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 자매로 영적인 교제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김길수 씨(온누리교회)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서로 같이 나누실 때 개인적으로 기도도 드리고 한다”고 말했다.
또한 하루 3번 씩 종을 울려,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묵상 시간을 갖고 있다.
안애단 신부(예수원)는 “코이노니아. 예배해서 떡을 나누고, 같이 소유를 나누고,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을 나누고 살았다. 여기 오는 우리들과, 손님들과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경험하며 하나님의 형존을 공동체를 통해, 영광을 돌리자.또 그분들이 우리에게 축복한 것을 함께 섬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예수원은 노동과 중보기도로 하나님나라를 그려가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 -

감사하라(2168) 유카리스테오( 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 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축사하다(마 15:36, 막 8:6, 행 27:35), 감사 기도하다(마 26:27, 눅 22:19), 감사하다(눅 18:11, 요 11:41, 고전 10:30).




엔 판티 유카리스테이테( εν παντι ευχαριστειτε)

󰃨 범사에 감사하라 - '범사'의 헬라어 '엔 판티'(*)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라는 의미이다(in all circumstances, NIV).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한편 감사는 1: 2에 기록된 대로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빌 4: 6에는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하나님의 뜻'은 4:3에 언급된 바 '신자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 혹자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성령께서 신자들을 성화시키는 내적인 역사로 본다(Bruce).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이며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신자들의 성화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할 수 없다.

에벤에셀의 돌비의 뜻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입니다.

‘인생을 감사로 물들여라!’


 

 

  첫째,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유대인의 인생 독본인 탈무드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마음과 육체는 병들기 쉽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체는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감사하면 맥박이 고르게 되고 위장의 활동을 도와 소화력을 증진시켜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기 때문에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평은 혈액순환을 방해하여 맥박을 급하게 하는 동시에 위장의 운동을 정지시켜 뱃속으로 들어온 음식의 소화를 거부해 건강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유무와 환경의 조건에 관계없이 감사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세계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해서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가장 행복한 나라는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뽑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아제르바이잔이 2위이고, 나이지리아가 3위에 올랐습니다. 반면에 경제 대국이며 최고의 문화시설과 교육환경, 자연환경 등을 두루 갖춘 선진국들인 미국, 스위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이 40위권 밖으로 밀려나 큰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 또한 23위에 머물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지수는 이와같이 물질적 소유 또는 환경의 조건에 반비례하게 나타났기에 행복의 척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100분의 1 수준인 200달러밖에 안 됩니다. 인구밀도는 세계 1위이고 문맹률도 90%에 육박합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이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심지어 몸이 불편해 찾아갈 병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1위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이웃들 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행복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선진국의 사람들은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소외감과 소유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불행을 더욱 심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를 방해하는 적 중, 하나가 바로 비교 의식입니다. 비교 의식은 상대방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우월감으로 교만해지든지, 아니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기비하에 매몰되게 합니다.

  다음으로 사람의 욕심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의 욕심은 너무 높아 컷트라인이 없는데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욕심을 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감사를 방해하는 적 하나를 더 소개하면 바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염려하는 문제의 오직 10%만 현재에 부딪힌 문제이지, 나머지 90%는 쓸데없는 과거의 일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6: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은 미래의 일을 앞당겨 염려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마음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빌 4:6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가 심령이 위축되고 짓눌리는 불안한 현상이라면 감사는 심령에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이처럼 행복지수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지표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사실, 행복에는 절대 기준이 없습니다. 행복에는 교과서나 참고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식이나 모범 답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다만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행복의 크고 작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합니다. 결코 행복은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자족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이,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변할 때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힐터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을 감사로 뽑았습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므로 행복지수를 높혀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감사는 분명 행복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둘째, 감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브라질 사람들은 ‘오브리가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틈만 나면 ‘오브리가도’를 외친다고 하지요. ‘오브리가도’는 무슨 뜻일까요? 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오브리가도입니다. 아무리 말수가 적은 사람도 하루 평균 열 번 이상은 오브리가도란 말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 역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Thank you’입니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생활 속에서 작은 일에도 ‘땡큐’라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50개를 선별했는데, 그 가운데서 ‘땡큐’가 28%를 차지하여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감사가 몸에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증거일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평균 2만 6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감사합니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인간의 언어도 ‘감사합니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 중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혀에 붙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감사에 대한 훈련이 안 되어 있기에 감사에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감사는 있지만 진정한 감사를 찾기가 쉽지 않아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상스러운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민망함을 넘어 당혹스러움까지 느끼는 게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를 향해서 이런 악한 말들 말고 감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 엡 5:3, 4 말씀입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나는가 하면,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방을 찔러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는 쉽게 화를 내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는 말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내가 내뱉는 말로 인해 상대방이 깊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최근에 사모가 타는 차가 말썽입니다. 시장 보러 가서 시장을 보고 출발하려고 하니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주일 준비를 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자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순간 제가 전화를 받고 나가면서 ‘왜 또, 혹시 뭐 열기구 켜놓고 운전한 것 아니요.’라고 짜증을 내면서 운전자 탓을 했답니다. 그리고 보험사에 연락해서 시동을 걸고 보니 전기 공급을 하는 발전기 일명 제네레다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순간 사모님한테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릅니다.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아프게 한 가시와 같은 말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누에가 자기의 입에서 나온 실로 집을 짓고 살 듯,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기 입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풀로랑스 스코벨 쉰’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남에게 준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 삶은 부메랑이다.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되돌려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희한에게도 우리 자신을 명중시킨다”

  그렇습니다. 불평의 말이든 감사의 말이든 언젠가는 메아리가 되어 나의 삶을 향해 돌아옵니다. 이것이 인생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인생은 자기 말대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열두 명의 정탐꾼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바라보면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파송합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달랐습니다. 고로 보고도 달랐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조상에게 약속한 거룩한 축복의 땅이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충분히 차지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순종하자고 한 반면에 열 명의 정탐꾼은 그리할 수 없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하며 지극히 원망적이고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면서 민 14:27~30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민 14:27~30 말씀입니다.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그 사람의 인생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말 한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방황하다가 인생을 비참하게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요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 한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말은 씨가 되고, 인격이 되며,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말대로 되는 인생입니다. 한마디의 말이 삶에 희망을 주고 인생의 목적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케 하기도 하고, 인생을 포기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말의 힘은 정말 놀랍습니다.

농업진흥청에 ‘농작물사업소’에서의 연구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는 물론 물 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였는데 물 한잔을 앞에 놓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정, 즉 완전한 육각수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물을 마시게 되면 우리 몸에 무한한 면역력이 생겨 더욱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 한잔을 놓고 짜증 부리고 욕설을 퍼부으면 물의 결정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인체에 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탄이라는 말을 각 나라말로 물컵 위에 붙여 놓았더니 물의 육각수가 다 깨지고 물의 결정에 구멍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한다’, ‘감사한다’라는 말을 붙여 놓았더니 물은 완전한 육각수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감사와 사랑 중에 어떤 것이 물의 결정을 더 완전한 육각수로 만드는지 실험했는데, 감사의 결정이 사랑의 결정보다 힘과 영향력 면에서 두 배나 강했다고 합니다.
결국 감사의 말은 우리 인체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메마른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입술로 날마다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며, 여유로운 삶으로 더욱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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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 7: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쓸찌며

2.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3. [누가복음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4. [요한복음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5. [사도행전 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6. [사도행전 18: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7. [사도행전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8. [로마서 1: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9. [로마서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0. [로마서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11.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로마서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3.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14. [고린도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5. [고린도후서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6.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7.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8.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9. [에베소서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20. [골로새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1.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22.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23.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24. [디모데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5. [히브리서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26. [히브리서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27.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28. [베드로전서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29.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0. [베드로전서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31.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2.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죄의 쓴 뿌리(bitter root of sin)


한자에 "착각(錯覺)"이란 단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착각이란 한자의 훈은 "어긋날 착" "깨달을 각" 이라고 합니다.
착각이란 한자어의 사전적 정의는

1. (어떤 대상(對象)ㆍ현상(現象)을 실제(實際)와 다른 대상(對象)ㆍ현상(現象)으로) 잘못 보거나 듣거나 느끼는 것.

2. (어떤 사실(事實)을 실제(實際)와 다른 상태(狀態)로) 잘못 생각하거나 이해(理解)하는 것.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진리가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만이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쓴 뿌리'란 무엇인가?(히브리서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새번역)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쓰다는 표현은 보통 분노 및 원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5에서 과연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쓴 뿌리"는 (나무 토막처럼) 뿌리가 쓰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뿌리가 식물로 자라난 후 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까요?

둘째, 히브리서 12:15의 쓰다는 것은 곪아 터진 분노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독이 있고 더러운 것을 의미할까요?

셋째, "쓴 뿌리"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는 신명기 29:18에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새번역) 당신들 가운데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가, 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멀리하여,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 가운데 독초나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NIV) Make sure there is no man or woman, clan or tribe among you today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 our God to go and worship the gods of those nations; make sure there is no root among you that produces such bitter poison.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역자주: 영어성경을 번역하면 "독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의 배경은 앞선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도움이 됩니다: 뿌리 자체가 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쓴 열매는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쓴 열매는 어쩌면 곪아 터진 분노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쓴 열매가 나오도록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
신명기 29장의 그 다음 절은 놀랍지만 히브리서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줍니다.
1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독초와 쑥(쓴 열매)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그 후 19절은 이 뿌리를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그렇다면 쓴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평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내게는 평안[=구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건너짚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몇몇 영적 체험 때문에 혹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자들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이렇게 자신의 안전을 추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치료하여,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의 성실한 견인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싸움에 열심을 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3, 3:12,14, 6:4-7, 10:23-29).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라는 용어의 문맥을 보아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4-15). 이는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많은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는 믿음의 싸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깨어 경계하는 삶 없이도 구원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도록 교회 안에서 권장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며, 자신의 유업을 아무렇게나 대하여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했던 에서처럼 되게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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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성경은 쓴 뿌리에 대해 뭐라고 하나요?

답변 /

쓴 뿌리는 분개하고 냉소적인 마음으로써 상대에 대한 극심한 적대감이나 반감을 낳습니다.

성경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가르치며 더 나아가 그러한 쓴 뿌리와 그 산물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1-42).

형용사로 “쓰다(bitter)”라는 단어는 “화살같이 날카로운, 톡 쏘는 듯한, 무례한, 앙심에 찬”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기 5:18에서 간통 혐의를 받은 여자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받은 것에서 착안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쓴 뿌리(bitterness)”는 좀먹거나 “갉아먹히고 있는” 정신/정서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쓴 뿌리는 극심한 슬픔을 주거나 독이 몸에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쓴 뿌리는 분노의 감정을 의지적으로 붙잡아 언제든 기분 상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금방이라도 분노를 폭발 시킬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쓴 뿌리에 굴복하여 내 마음을 그 감정에 지배받게 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더 이상 영혼이 화해를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쓴 뿌리는 분노로 이어져 내부의 감정이 밖으로 폭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터져 나온 분노는 시끄러운 싸움질로 이어집니다.
분노한 사람이 자신에게 몰두하여 소란스럽게 자신의 불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쓴 뿌리로 인해 나타나는 또 다른 악은 비방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비방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나 단순히 사람에 대한 중상모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부터 뿜어 나오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모든 말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악의로 이어집니다.
악의란 극심한 증오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태도는 감정적이며 사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악의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의도적 시도입니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악의”는 버려야 합니다(에베소서 4:31).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은 보통 분해하고, 냉소적이며, 냉혹하고, 차갑고, 가차없고, 함께 있기 불쾌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죄를 짓는 것으로, 그분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육에서 온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9-21).

히브리서 12:15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쓴 뿌리가 우리 마음속에 자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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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요?(히브리서 12:15)

『열심히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

질문 /

대부분의 성경 해석에는 쓴뿌리를 "배교자(이단자)"라고 해석합니다. 그 외에도 죄책감으로 인한 좌절감, 죄의식, 심한 자책감, 사람의 행위로 오는 상처,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 등으로 생긴 쓴뿌리로 해석하십니다.

​이 부분말씀을 가지고 내적치유 세미나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쓴뿌리를 배교자 외의 것들로 설명하는 것도 성경적인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답변 / ​

쓴 뿌리는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갖는 분노나 좌절감, 괴로움, 불평, 염려 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주변 성도들에게 전염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쓴 뿌리는 "육신적인 삶"이나 "죄에 종노릇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교회를 더럽히므로, 성도 각자는 그러한 것이 자신 안에 없는지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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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 ‘쓴 뿌리’에 대한 오역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에서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인용한다.
유명한 양육단체인 D단체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에 대해서는 일전에 설명한바가 있으니 생략한다.
하지만, ‘쓴 뿌리’에 대한 주장 역시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은 이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D단체는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저주나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모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영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곳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경을 인용하되 올바른 해석을 적용해야만 그곳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위 단체들이 ‘쓴 뿌리’를 주장하면서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 히브리서 12:15~17을 살펴보자.
성경의 ‘쓴 뿌리’라는 용어는 본래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를 뜻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더욱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12장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신 29:17~19).

히브리서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해야만 하는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자를 뜻하거나 도중에 믿음을 포기하는 경우를 뜻할 것이다. 혹간은 계속되는 둘째, 셋째, 넷째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둘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불신앙과 배교가 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또한 ‘쓴 뿌리’의 ‘쓴’이라는 단어는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다.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싹’ 혹은 ‘눈’을 의미하기도 한다.

셋째, 음행하는 자와 넷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셋째와 넷째를 한 가지 문제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인용하여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12:15~17 본문은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신앙, 배교, 음행, 망령된 행동을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자와 같은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해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을 내적치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는 주장도 있다. 과연 그런 내적치유가 비성경적인 주장에 근거를 둔 행위로 치유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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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행동에 숨겨진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존 파이퍼 외 | 이지혜 역 | 생명의말씀사 | 176쪽 | 10,000원

죄를 지적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행동을 분석하여 그 속에 숨겨진 죄를 찾겠다면, 그만큼 불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냥 죄도 아니고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 마치 7대 질병을 검사하기 위해 온몸을 검진받는, 불편하고 두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검진은 필요하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내 몸 상태를 바르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아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유익하다.
우리 영혼을 타락시키고 병들게 하는 죄, 다른 죄와 밀접하게 연결된 죄를 알고 성경적으로 대처한다면 영혼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행동에 숨겨진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의 저자는 총 8명이다.
모두 디자이어링갓(desiringGod) 기관 사역에 몸담고 있거나(데이비드 마티스, 토니 레인케, 조너선 파넬), 존 파이퍼 목사가 목회했던 베들레헴 침례교회 목사이거나(제이슨 마이어), 베들레헴 침례신학교의 교수이다(조 리그니, 조나단 바워스, 라이언 그리피스).

이 책을 총 편집한 사람은 마셜 시걸로 존 파이퍼의 비서이자 디자이어링갓 필진이다.
모두 같은 신학적 문맥 안에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편집자 시걸이 들어가는 말을 쓰고, 그리피스가 1장에서 죄의 역사를 짧게 다루었으며, 2장부터 8장까지 나머지 저자들이 각각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을 설명했다.

모든 장에서 죄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을 중심으로 설명됐고, 그 해결책을 제시했다.
원서 제목이 ‘Killjoys: Seven Deadly Sins’이다.

죄가 우리의 참된 기쁨을 죽인다는 걸 강조하는데, 결국 이 책의 목적은 영혼의 건강을 되찾아 구원의 참된 기쁨을 회복시키려는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1장에서 그리피스가 설명한 것처럼 죄는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수백 년 전부터 교회가 일곱 가지 대죄를 언급한 이유는 이 죄들이 나머지 모든 죄를 대표하는 죄의 종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26쪽).
이 죄에서 나머지 죄들이 가지처럼 뻗어 나온다는 말이다.

일곱 가지 죄는 육신의 죄(탐식)부터 영혼의 죄(교만)까지 포함하고, 다른 죄들의 근원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여 일곱 가지 죄 외의 죄를 억제하고 통제하는 데 유익하다.

우리가 죄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해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된 기대의 중심에 있는 문제를 해결함으로 우리 기쁨의 이유를 오롯이 그리스도로 삼는 걸 훈련할 수 있기 때문에, 일곱 가지 죄를 다루는 것은 중요하다.

이 책은 전체 분량이 176쪽으로 한 주제당 20쪽이 되지 않거나 살짝 넘는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인은 길고 복잡한 내용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 면에서 부담되지 않는 양으로 각각의 죄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 해서 내용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각 장에서 독자는 저자가 다루는 죄의 문제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그리스도 중심적, 복음 지향적 해결책을 얻게 될 것이다.

  lsquo   1485rsquo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칠죄종과 네 가지 종말(1485)’.

먼저, 교만은 일곱 가지 죄 목록 중에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죄의 정수’이다. 교만은 첫 사람 아담이 범한 죄이기도 하다. 다소 추상적인 ‘교만’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거나, 반대로 자기를 비하하고 격하하며 자책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벽한 겸손과 온유의 본이 되신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을 옷 입을 수 있다. 우리가 회심할 때, 날마다 거룩함을 입을 때, 마침내 영화롭게 될 때, 교만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겸손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시기와 분노는 참 다양하게 표출된다. 조 리그니는 시기가 ‘천의 얼굴을 지닌 적’이라 말했고, 조너선 파넬은 분노가 ‘다른 죄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시기의 적은 만족과 감사, 분노의 적은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운 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시기하거나 나에게 없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한 분노를 배우는 자, 죄인인 자신을 향해 베푸신 끝없는 사랑을 계속해서 음미하는 자는 악한 분노를 품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속에 있는 악과 세상에 만연한 죄를 미워하여 거룩한 분노를 낸다.

나태가 흥미로운 것은 게으른 것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바쁜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예배하기 위해 하지 않는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토니 레인케는 지역 교회에서 나태의 뿌리를 뽑으라고 말한다. 교회가 함께 모인 곳에서 반복하여 예배하고 사랑을 실천하면, 나만 생각하고 나만 위하는 나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탐욕은 하나님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두고 가장 강렬하게 원하는 우상 숭배이다. 탐식은 다른 무언가가 음식이 된 경우다.

오직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그분을 가장 최고의 원함으로 삼을 때, 욕구에 맞서 절제하는 훈련을 할 때, 우상 숭배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마지막 정욕을 다루면서 파이퍼는 성적인 욕구를 이겨낼 방법을 여섯 가지로 제시했다: ①피하라 ②거절하라 ③돌아서라 ④붙잡으라 ⑤즐기라 ⑥움직이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욕망을 일으키는 유혹을 피하고 거절하는 것. 거기에서 돌아서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분명한 약속을 붙잡고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는 사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각자 더 쉽게 넘어지는 영역이 있고, 그 고통과 결핍이 강렬할수록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만족 대신 추구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교만과 시기, 분노와 탐욕, 탐심과 나태, 정욕이 솟구칠 때, “나는 과연 그리스도로 충분한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가?” 질문해 봐야 한다.

이 질문은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든 믿음으로 붙잡으려는 헛된 행위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를 믿음으로 맛보는 행위이다.

독자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자기 영혼 속에서 찾으며, 영적 건강을 해치는 악을 제거하시고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선, 기쁨, 만족으로 영혼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을 도구로 삼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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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신명기 29:18-21)


모든 죄악의 현상들은 사탄이 사람의 심령 깊이 박혀 있는 쓴뿌리를 통하여 역사 기 때문입니다. 이 쓴 뿌리는 여러가지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치 료되지 않으면 일평생 그 사람을 괴롭히며 나아가 주위의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 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 원인으로는; (1)어릴때부터 받은 상처로 (2)죄로 말미암아 (3)심한 경젱의식으로 말미암아 (4)외모의 약점으로 말미암아 I. 쓴 뿌리의 유형들

1.혈기-모세(민12:3, 약4:7)->(온유) 젊은 40년의 세월을 혈기로 보냄. 이 혈기의 원인은 바로의 남아 학살정책에 따 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애굽의 위협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임 다시 애굽에서 쫓겨나 광야 40년동안 이 쓴뿌리인 혈기를 치료받음. 그래서 모세 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승하더라는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교만-사울 왕(삼상15:22-,약4:6-7, 벧전5:5-6)->(겸손) 처음에는 겸손하여 아름답게 쓰임받았는데 나중에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 순종하고 타락함.

 3.고집-삼손->(순종) 말씀에 불순종

4.음행-솔로몬->(정결)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함(1000명의 아내)

5.두려움-여호수아(민27:18)->(강하고 담대함)(수1:5)(출17:14) 모세 사후 자신의 지도력에 비교하여 과소평가하여, 요단강물이 범람하여 우려 하여 두려워함.

두려움이 있으면 어떤 손해가 있는가 (1)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함 (2)자신감을 잃음 (3)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음 (4)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없음 따라서, 두려움의 쓴뿌리가 있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6.열등의식 열등의식이 있으면; (1)생각이 많아진다.

(2)자신감이 없어진다.

(3)두려움이 생긴다.

(4)마음이 좁아진다. 넓은 마음을 주소서!

7.교활함-야곱->(진실)

8.편애-요셉->(공평)

9.탐심-아간, 가룟 유댜, 롯->(청빈) II. 쓴 뿌리의 증세와 현상(신29:18-21)

1. 언어가 단절된다.

 2. 불만이 생긴다(삼상15:22) 그래서, (1)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며 (2)하나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붙인다.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김-예, 아브라함이 창12:1절 이하에서 자기 본토 고향 을 떠날 때에 시키지도 않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나감으로 불화와 전쟁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는 죄앙을 만남./ 사울 왕도 사무엘 선지자의 하나님 명령에 대한 전 갈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아각 왕을 살려 놓고 살찌고 좋 은 짐승들을 살려 놓음> 다윗과 사울 왕의 신앙의 비교

다 윗 사 울 1) 죄를 지적할 때 즉시 회개 1) 죄를 지적하여도 회개치 않음 2) 기도의 사람이었음 2) 기도 하지 않았음 3)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 3) 백성을 의식, 사람을 의지 4)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 4)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 5) 말씀에 순종한 사람 5) 주의 종의 권면과 말씀에 불순종 6) 전적으로 하나님을 높임 6) 전적으로 자신을 높임

3.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인격에 균열이 생긴다.

 4. 공격적인 사람이 된다(사14:12) 강하게 반항한다.1)십자가의 원리는; (1)순종 과 (2)섬김이다.

2)모든 죄는 교만과 불신앙에서 비롯된다(롬14:23)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 1)하나님의 말씀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순종-말씀이 곧 하나님의 주권 2)주일성수 3)십일조 출석하는 교회에대 할 것.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4)주의 사자(계1:20, 계2:1-)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심, 예 수님의 손에 쥐고 있는 일곱 별(교회 목회자) 그러므로 교역자는 하나님께 서 책임지신다. 잘못하고 실수하여 징계르 받아도 예수님께서 직접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양떼들)이 심판 방망이를 잡아서는 안된다.

5)인간의 생명 <A> 쓴 뿌리의 증세1)동질성끼리 모임 상처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남.

2)자기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한다.

3)다른 사람을 시기한다.(질투, 증오, 정죄) 4)극단적이 된다(욥10:1).

<B> 쓴 뿌리의 현상1)그런 환경을 만나면 아픔을 느낀다.

2)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학대(자학), 노이로제로 발전 3)다른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쓴다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

4)별 문제가 아닌데 화를 낸다.

5)매사에 불평 불만.

6)고집이 있다.

7)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

8)정서가 불안하다.

9)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빈정거리기 잘하고 칭찬이 없다 10)편파와 분당을 만든다.

11)신앙 생활에 힘이 없다. 고독, 외로워함 12)성실함이 없다. 충성, 책임감이 없음.

III. 쓴 뿌리를 치료 받는 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길이 치료 받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란 1)온유 6)친절 11)은혜 2)의로우심 7)전능 12)불변함 3)거룩 8)공의 13)질투 4)긍휼 9)신실 5)사랑 10)인내

1. 치료 방법1)회개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은 쓴뿌리이므로 2)상처를 준 사람(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만일 용서치 않으면 (1)예수님과 관계가 멀어짐 (2)자유함이 없고 속박이 온다.

(3)살인하는 것이 됨(미워하는자는 살인한 것이라고 함) (4)인격의 성장이 없음 (5)용서 못받음(마6:14-15)

어떻게 용서해야 하나 (1)기억지 아니함(엡4:32)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 같이(엡3:15) (2)바다 깊은 곳에 던짐(미7:10) (3)등 뒤로 던짐(사37:8,17) (4)죄를 멀리 옮김(시103:10-14)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랑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시간 을 바치고, 물질을 마치고, 몸을 바치라! 이 모든 것보다, 생명을 바치는 것(순교)이 가장 중요<순교적 자세로 신앙 생활하면 못 감당할 것이 없다>


목사 영접 = 예수님 영접(마10:40)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함(살전5:12-13)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감(롬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 복을 가지고 나아갈 줄로 알라!" 3)원망, 불평하는 마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원망, 불평할 일이 있거든 그 일로 인하여 기도하도록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홍해 앞에서 원망하였지만, 모세는 똑같은 상황하에서 기도함으로 문제를 오히려 해결하였다.

이스라엘 광야 교회가 원망한 원인은 곧 우상숭배(탐심) 때문었다.

4)두려워 하는 마음을 찬송하는 마음으로 바꾸라! 마음이 주님을 찬양할 때에 두려움도 분노도 사라진다. 찬송중에 두려움과 분 노가 틈탈 기회가 없다. 찬송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사12:2)

5)원망, 불평을 감사로 바꾸라!

6)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7)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4:18) 온전한 사랑= 완성된 사랑= 십자가 사랑= 아가페(하나님) 사랑= 예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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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와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

우리는 간혹 ‘성경적’이라는 용어를 ‘성경에 기록된 용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를 성경과 다른 뜻으로 짜맞추는 것을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들과 G12, 두날개와 같은 양육프로그램을 하는 곳에서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특히 신사도운동을 하는 단체에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인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이 용어가 과연 성경적인 내용인지 살펴보자.

1) 쓴 뿌리

많은 단체에서 사용하는 ‘쓴 뿌리’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단체들은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두날개와 G12등은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어느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하므로서 귀신이 묶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Soul-Tie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되, 성경과 일치한 올바른 해석을 적용하여야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쓴 뿌리’라는 용어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쓴 뿌리’를 주장하는 곳에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히브리서 12장 15-17절인데, 본문을 살펴보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어느 개인의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자 또는 배교자를 말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신 29:17-19)

히브리서의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하여야만 하는 몇가지의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성경은 계속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적용한다.

첫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쓴 뿌리’에 ‘쓴’은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서 본문과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퍼진다, 증식된다’는 뜻과 ‘싹, 눈이 나온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음행하는 자를 말한다

셋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둘째와 셋째를 한가지 문제점으로 포함시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쨋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의 경우를 인용하므로서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그릇에 팔아버림으로서 하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서,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와 배교, 음행, 망령된 것의 경우를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뜻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하여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이나 혈통유전설과 같은 잘못된 주장을 앞세워 ‘내적치유’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여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주장은 이단성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고 내적치유를 하여주는 곳이 있는데, 과연 그런 비성경적인 주장에 근거를 둔 행위로 치유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성경은 악의 뿌리를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2) 견고한 진을 파하라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양육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종이에 죄, 약점, 질병, 과거의 상처등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며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특히 두날개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의식을 “견고한 진을 파한다”라고 칭하는데, 당사자가 종이에 죄를 적어 태울 때에 옆에서 참가자들이 “견고한 진을 파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고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죄에 대한 회개를 이러한 무속적인 의식을 통하여 하였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메타노에오)란 ‘방향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며 불신으로부터 믿음, 죄로부터 돌이키는 내면적인 전향을 의미하며, 죄를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운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회개는 이런 어떤 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이에 적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가? 그 이후에 다시 짓는 죄는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다시 태우는가? 이러한 형식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보다 보다 진정한 회개의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지 않는가?

또 수백만원을 들여 중동지역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땅밟기와 대적기도, 선포기도를 하고 오는 선교라고 할 수 없는 선교가 몇몇 선교단체들에 의하여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데, 과연 그 지역의 귀신들이 땅밟기와 대적기도에 놀라서 쫓겨나 이스람교인들이 기독교로 저절로 개종이 된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데, 단지 기도를 하기 위한 선교라면 굳이 수백만원을 들여서 현지에 갈 필요없이 한국에서 기도를 하면 되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것을 뜻하며, 땅밟기나 귀신축사로 전도를 한 경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단기선교 여행경비를 현지선교사들에게 후원한다면 더 효과적인 선교비로 사용될 수 있다고 현지 전문선교가들은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더욱이 요즈음 인카운터라고 하는 양육프로그램의 수양회에서는 쓰러짐과 넘어짐, 진동, 입신, 임파테이션등과 같은 신사도운동의 현상적 집회를 도입하면서 그것을 용어를 바꾸어서 사용하도록 하거나, 외부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가르친다는 제보까지 들어오고 있다.

2011년 합신과 고신은 이미 신사도운동을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고, 2012년 예장통합 은 극단적신비주의를 도입및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으며, 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 금이빨 사건, 입신이라고 구체적으로 일일이 지적하였다.

또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의 예언에 관한 책을 발간하며, 지역귀신에 위한 영적도해에 관한 책도 발간하고 있다. 또 너도 나도 마이크 비클의 아이합을 모방하여 24/7예배를 모방하며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으로(히9:11) 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할 필요가 없으며, 다윗은 24시간 7일 동안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장에는 영적도해와 귀신축사와 같은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고후 10:4을 인용한 것인데, 이 성경구절은 결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3-4)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방침이나 강령을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견고한 진’이란 사탄의 진도 아니며, 소위 죄의 통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약점이나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적인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성령의 무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견고한 진’이라는 것은 죄의 근원이나 과거의 상처를 뜻하는 고유명사 또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성이나 요새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무너진다는 형용사적인 의미의 단어일 뿐이다.

고후 10:3-4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KJV] (For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carnal, but mighty through God to the pulling down of strong holds;)

[NIV]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견고한 진’은 헬라어 ‘오퀴로마’가 사용되었는데 ‘견고하다’는 별도의 뜻을 가진 단어는 원문에는 없으며, 그 의미는 원래 ‘성, 요새’라는 뜻이다. 즉 ‘성, 요새’라는 단어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며, 즉 성령의 무기를 가지면 “성과 요새와 같은 아무리 견고한 것들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유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육체를 가진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이나 행위로서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만 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정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더욱이 ‘견고한 진’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는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마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에서 아주 작은 것으로 비유된 ‘겨자씨’를 인간의 몸 안에 실제로 있는 어떤 고유명사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겨자씨를 갖어야만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견고한 진’은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우면 죄가 없어진다는 무속적인 행위나 대적기도, 선포기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외적 행위들은 성령하나님의 강한 무기도 아니며, 영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종이 위에 쓴 육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구성요소인 육체와 영을 이원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과 성령으로 구별하여 육체가 아닌 성령의 병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육체를 갖고 있어서 제한이 있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의 의지나 행동과 같은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것이라는 뜻이다. 종이 위에 생각나는대로 적은 사람의 행위는 오히려 육체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은 곧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7)

에베소서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인간이 만든 어떤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전신갑주를 입고,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어떤 물체 종류의 허리띠나 흉배, 방패, 투구와 검을 쓰면 악한 영과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석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한 선교단체와 양육프로그램은 성령의 무기에 대해서 종이에 죄를 적는 것이나 혹은 공개적인 죄 자백을 하는 것으로 왜곡시켜서 그것을 불태우거나 어떤 기도문을 외우거나, 이상한 구호를 외침으로서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오역하여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곧 육체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선교단체의 양육프로그램을 통한 방법으로는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없으며, 쓴뿌리를 제거할 수도 없음이 명백하다.

더욱이 많은 양육프로그램과 적지 않은 선교단체들이 교류금지로 발표된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으며 녹취록에도 어김없이 가계저주론이 나타난다. 그런 저주가 어느 인위적인 프로그램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로 없어진다는 주장은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선포기도와 대적기도가 예수 십자가 대속보다 더 권세가 있다는 뜻인가?

최근에 널리 행하여지는 양육프로그램들은 현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교인들을 숫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첫째 목적이기 때문에, 비신학적이며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문제삼지 않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전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혹간 사람들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라는 본문을 인용하며 교리와 신학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문자적인 해석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학교도 가지 말아야 하며 공부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비성경적인 이단교리와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 되겠지만, 성경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체계적인 도움을 준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움으로서 죄가 없어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정통신학 자체는 구원이 아니지만, 성경을 요약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어느 신학교수는 정통신학은 구원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파하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은 학교의 공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을 뜻하며, 이러한 교만을 파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떤 권세를 파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적인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사로 잡아”(아이크말로티존테스)라는 단어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과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며,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고, 죄를 종이에 적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는 이상한 의식을 하지 말자. 이제는 넘어지고 딩구는 유치한 현상적인 집회를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그만 중지하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가르치며, 일년에 몇 번씩 열고 있는 부흥성회를 좀 줄이고 성도들에게 건전하고 올바른 정통신학과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간을 만들자.

솔직히 말하자면, 이단만 성경을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에서도 성경을 오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는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수평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교인들을 양육하는 목적으로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며 비건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러한 프로그램이 한국교회에서 용납되거나 묵인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파운동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던 교단들이 알파운동보다 몇배나 더 위험하고 더 문제가 많은 G12와 두날개와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유명한 선교단체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앞 다투어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이단들이 성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성경과 정통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숫적부흥만을 도모하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의 책임이 될 것이다.










메시아 예언과 성취


메시아 예언과 성취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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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의 위를 상속받음(누가복음 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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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마태복음 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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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의 탄생(누가복음 1:31)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눅 1장27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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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헤롯왕의 유아 학살(마태복음 2:16-18)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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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애굽으로 피난감(마태복음 2:14-15)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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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누가복음 3:3-6)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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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의 아들(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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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릴리에서 전도하심(마태복음 4:13-16)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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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8:2-4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비유로 가르치심(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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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선지자로 오심(사도행전 3:20-22)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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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1-2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 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심(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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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에게 배척 당하심(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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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친구에 의해 배반당함(누가복음 22:47-48)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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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은 삼십에 팔리심(마태복음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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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5:11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거짓증인들에게 고소됨(마가복음 14:57)
△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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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고소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심(마가복음 15:4-5)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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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능욕 당하심(마태복음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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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대신 고난을 받으심(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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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히심(마가복음 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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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손과 다리가 찔림(요한복음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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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7-8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조롱과 모욕당하심(누가복음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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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심(마태복음 27:34)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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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17-1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옷을 제비뽑음(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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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

뼈가 꺾이지 않음(요한복음 19:32-33)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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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옆구리가 찔림(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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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냄(마태복음 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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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49:15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부활하심(마가복음 16:6-7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하라 하는지라.

부활하심(고린도전서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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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승천하심(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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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꿈에 대한 성경적 이해

이집트라는 제국의 황제(파라오)가 자신이 꾸었던 꿈을 해석한 요셉을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제정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현대의 국가들은 공식적 업무를 결정하고 진행 할 때 종교적 현상인 꿈이나 환상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인정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한 제국의 황제가 꿈(의 해석)에 따라 제국의 정책을 결정하고 진행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듧니다. 
그러나 제정일치가 원칙이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꿈이나 환상 등의 종교적 현상을 무시 할 수 없었습니다—인정하고 (그 해석을) 심각하게 고려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종교적 현상에 대해 해석하고 조언할 수 있는 술객(?)들이 왕실에 신하들과 함께 황제의 주변에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꿈 해석에 대한 기법이 수백가지가 되었습니다—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왕실의 술객이 되려면 그 수백가지나 되는 꿈 해석의 기법에 정통 해야 했습니다—실제 왕실의 술객들은 꿈 해석에 정통 했습니다.  
어떠한 꿈도 그들의 꿈 해석 기법을 피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주셨던 꿈만은 그 많은 기법들을 다 피했습니다—술객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술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파라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그 꿈이 범상하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요셉이 그 꿈을 해석 하니까 놀라서 당장 요셉을 인정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에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황제의 꿈을 해석할 당시에도 상황이 비슷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황제도 다니엘을 인장 했던 것입니다. 
이쯤이면 파라오가 자신의 꿈을 해석한 요셉을 총리로까지 임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이해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소속된 제국의 황제들까지도 꿈 해석으로 놀라게 했던 요셉과 다니엘은 꿈이나 환상(의 해석)과 관련된 설교나 강의 등에 항상 인용될 정도로 꿈이나 환상(의 해석)과 관련된 주제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다니엘에게도 해석 못한 꿈과 환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은 자신이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을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양식을 구하고자 굽신거릴 때까지 해석하지 못했습니다—자신의 꿈도 해석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아무리 요셉과 다니엘이라도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직접 양육하셨던 수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가 욥바라는 곳의 한 옥상에서 기도 중에 환상을 봤습니다—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행 10:9 – 17). 

베드로 조차도 해석 하지 못했던 환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아무리 베드로라도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 다니엘, 그리고 베드로에게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저희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요셉, 다니엘, 그리고 베드로가 해석이 안되는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달라고 기도 했을 것이라는 추정에 반대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해석을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저희가 아무리 기도 해도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석의 은사가 있다면서 모든 꿈과 환상을 해석하는 사람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 입니다.)

그러나 요셉, 다니엘, 그리고 베드로가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몰랐다고 해서 신앙 생활에 손해를 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던 것은 아닙니다—하나님께서도 그들이 해석을 모른다고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처럼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저 신앙 생활만에 전념하면 되는 것입니다—알고 모르는 것이 신앙 생활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탓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꿈과 환상(의 해석)에서 자유로와 지시기 바랍니다.

꿈을 꾸셨거나 환상을 보셨으면 하나님께 그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십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해석을 주고 안주시고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해석을 받으셨다고 우쭐해 하실 필요도 없고 받지 않으셨다고 좌절하고 낙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석을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신앙 생활에만 전념 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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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장~8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장~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장~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1. 나귀 새끼(스가랴 9:9)  550년 후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마태복음 21:5-7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2. 은 30에 팔릴 것(스가랴 11:12)  550년 후 성취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스가랴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마태복음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3.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스가랴 11:13) 550년 후 성취

스가랴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마태복음 27: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메시아를 거절 후 흩어진 백성(디아스포라)(스가랴 7:11~14) 590년 후 성취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스가랴 7:11~14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5. 예루살렘으로 귀환(스가랴 8:1:1~13)  2468년 후 성취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스가랴 8:1~13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7-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가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강제적인 분할 계획을 채택하여 실행을 추진하였으나, 이에 동의한 유대인과 달리, 이에 동의하지 않은 아랍인은 추후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다.

1948년 5월 14일, 세계 시오니즘 단체 경영이사, 그리고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구의 대통령 다비드 벤 구리온은 "에레츠 이스라엘"에서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이스라엘 국가로 한다고 선언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함께 독립이 되었다.
영국군이 철수한 다음날 동시에, 근처의 아랍 군대는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이스라엘 군대와 싸웠다.
이스라엘은 여러 번의 중동 전쟁을 하는 동안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시나이 반도(1967년 ~ 1982년 사이), 남레바논(1982년 ~ 2000년 사이), 가자 지구와 골란 고원을 점령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지역을 부분 합병했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국경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은 여전히 이 지역의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6.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스가랴 12:2~3)  2540년 후 성취

스가랴 12:2~3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미성취 예언)

7.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스가랴 12:3~9, 14:12~15)

8-9.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8.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스가랴 12:10~13:1)

12:10-11.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3:1.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9.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스가랴 14: 4~5)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10.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스가랴 14:16~21)

16-18.
예루살렘
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08. 04. 2021(수)

Patris Church
  08. 04. 2021(Wed) pm 7:00
  Seoul Korea 08-05 am 8:00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
       12:3, 무거운 돌
       신앙고백
       찬송 / 511장(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신,  죄, 구원)

<신> 단일신론 : 삼위일체
- JX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죄>율법(소극적) : 마음(적극적)
- 눈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   

<구원> 제3의 성전 재건 : 메시아 재림
- 예수는 저주를 받고 지옥으로 가야 할 존재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프로톤)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먼저(프로톤 / πρῶτον)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스가랴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거운 돌(에벤 마아마사)
돌(에벤, ’eben) אֶבֶן   

베드로전서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the living Stone)

다니엘  2: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2년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을 꾸었으며 그 꿈의 내용을 해석하라!
희한한 일이다.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않는 신들 외에는 그것을 보일 자가 없다.

큰 신상을 보셨다.
정금 머리 : 사자 바벨론
은 가슴 : 곰 메대 바사
놋 허리 : 표범 헬라
철 다리 : 짐승 로마
열 발가락 : 열 왕, 열 뿔

뜨인 돌 - 메시아 나라

이사야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스가랴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마태복음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2: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람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의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먼저 지붕을 그리고 지붕 아래에 집을 그린 후에 여러 개의 창을 그린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집을 지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귀, 눈, 입으로만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을 직접 짓는 사람은 집을 그리라고 하면 먼저 땅을 그린다고 합니다.
어떤 땅에 집을 지어야 할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몸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앙생활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을 그릴 때 지붕을 먼저 그리고 창을 그리며 집의 모양을 그리는 사람은 마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집을 지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먼저 모양을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문제가 예수님을 내가 만난 것이 아니라 자주 많이 듣기 때문에 이미 내 머리 속에 형성된 예수님에 대한 정보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초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내가 직접 집을 지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가 되는 땅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에서도 예수, 신약에서도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어느 성경을 읽든지 그곳에서 예수를 찾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읽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니엘 금신상의 비밀 -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 2:31~35 

1. 금머리 : 바벨론(사자)

금 머리는 북부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리아 왕조의 계승국으로 소위 갈대아 나라로 불리워지는 신 바벨론을 의미하는데,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되는 이 나라는 엄청난 힘을 과시했던 천하무적의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두려움을 주는 세상나라를 상징한다. 

건국자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우고 경배하도록 하였다(단 3장 이하).
바벨론은 나라가 부강해지므로 유브라데 강 좌우에 구리를 재료로 하여 견고한 성을 쌓았는데 그 규모가 대단했다. 

그러나 엄청난 시설로 건축된 성의 힘만 의지하여 인간의 교만함을 드러내던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인 벨사살 왕 때에 무너졌다. 그 무너질 때의 상황을 보면, 밤에 1,000명의 기생과 술잔치를 벌이며 자기들의 신을 찬양할 때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침공하여 유브라데 강물을 다른데(레토릭 호수)로 돌리고 강 밑으로 대군을 몰고 건너가 벨사살 왕을 죽임으로 금 머리로 묘사된 바벨론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① 예루살렘을 멸망시킴

 *1차 침공 : 주전 606~605,
   2차 침공 : 주전597. 3. 15,
   3차 침공 : 주전 586

② 유대의 인물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감

③ 이스라엘을 70년간 지배함

2. 은가슴 : 메데 바사(곰)

가슴 팔로 묘사된 메데 바사는 고레스Ⅱ세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지금의 이란 지역에 세운 나라로서 국법이 왕권에 우선한 국가였는데, 이는 다리오 왕이라도 법을 마음대로 바꿀 권한이 없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되었을 정도였다(단 6:1~10).
그러므로 “왕만큼 못한 나라가 서리라”는 예언대로 된 것이다.

주전 558년 페르시아 제국과 합병하여 메데 바사로 불리게 된 이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들을 보면 사자로 상징되는 바벨론 제국과는 정 반대의 일들을 하였으니 곧 곰으로 상징되는 나라의 특성과는 달리 이스라엘에게 숫양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도 주전 331년 헬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메데 바사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① 바벨론에 의해 포로 된 유대인을 해방
② 성전을 건축케 함
③ 이 나라 통치 때 칠십 이레 예언

3. 놋허리 : 헬라(표범) 

헬라제국은 가장 크고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로 심지어 인도까지 정복하되, 표범처럼 속히 정복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28세의 알렉산더가 5년 만에 세계를 정복하고 친구의 죽음에 인생의 허무를 느껴 술에 취하여 병들어 32세에 요절하자 그 나라는 부하 4명에 의하여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이 나라의 통치 때에 저 유명한 마라톤 전쟁이 일어났으며, 로마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으니 짐승의 성격으로 볼 때에 헬라는 표범에 해당하는 국가였다.

역사가들도 헬라의 멸망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꼬집어 말하지 못하나, 주전 168년 혹은 주전 164년 혹은 주전 64년으로까지 보는 예도 있다.

4. 철다리 : 로마 (짐승)  

지금의 이태리로 “세계의 길은 로마로 열려 있다”고 할 만큼 철 문화가 발달된 국가로서 주전 64년부터 중동 아시아를 지배해 온 무섭고 강력한 제국으로서 천하무적의 국가였으나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단 2:41)라는 예언처럼 주후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 후 두 아들에 의해서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분할되어 통치되었다.

5. 열발가락 : 열왕 (열뿔)

열발가락은 철다리 로마가 쇄락하면서, 생겨난 유럽을 중심으로한 유럽 각 국 이며,
이런 유럽국가들이 연합하여 만든 유럽 EC를 뜻한다.
또한 이때는 다른 인종이 석이나 석이지 않음 같이 되는 때 즉 우리는 많은 인종들이 서로 석여 있으나  인종 차별을 하는 등 석여 있으나 석이지 않는 상황을 볼 수 있는 지금의 시대를 말 하고 있다.

이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하나를 세우시는데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신상을 부숴뜨리며 그 나라가 굳건히 설 것을 예언 하고 있다. 

즉 느브갓네살이 꾼 꿈은 말일에 되어질 일을 예언 한 것이며, 금머리부터 시작하여 열발 까락까지 모두 이루어 졌으며, 산에서 띄인독 즉 거룩한 산인 시온에서 오실그리스도의 강림만 남겨두게 되었다.

이렇듯 성경은 말세에 되어질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항상 깨어 근신하며, 인자가 문앞에 이른줄 알라라는 말씀을 상고하며 주의 강림의 날에 어떠한 내가 되어 있어야 할지를 생각 해보아야 할 것이다.

금신상의 예언과 적그리스도 국가
다니엘 2:25-35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분명 종말의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는 종말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진리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종말에 나타날 여러 징조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 주님의 재림에 이르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포함됩니다.

성 중건령이 내린 BC 457년부터 계산하여 7 이레와 62 이레에 성이 중건되었고,
메시야의 기름부음이 정확히 AD 3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야의 끊어짐과 예루살렘 성의 철저한 훼파 사건(AD 70년)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공백기인 신약시대를 지나 이제 마지막 한 이레의 직전에 와 있음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나타나고 있는 시기입니다.


오늘은 다니엘의 기록 중 또 다른 중요한 구원 달력이 되는 금신상의 예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즉위 2년 어느날 이상한 꿈을 꿨는데,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번민하게 되었습니다(단 2:1).
왕은 온 나라의 박수, 술객, 점장이, 갈대아 술사들을 불러 세우고, 자신이 잊어버린 꿈 내용을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해괴한 요구입니다.
물론 이 사건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술객들의 대답입니다.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11절).

이 말에 격분한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모든 박사들을 죽이라 명했고, 그들과 함께 애꿎은 다니엘과 친구들까지 죽게 되었을 때(12-13절),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기도하니 그 밤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상 중에 왕의 꿈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왕 앞에 선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해석하면서 언급한 말을 보십시오.

28절,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과연 왕의 금 신상 꿈은 세계의 역사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니엘 시대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접하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1. 꿈의 내용과 다니엘의 해석

31-33절,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 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본 신상은 크고 광채가 특심하고 그 모양이 심히 두려웠습니다.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 후에 한 뜨인 돌이 철과 진흙의 발을 쳐부수었는데(34절),
그 결과 신상은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습니다(35절).

하나님께서는 왕이 꾸고도 까맣게 잊어버린 꿈을 제 3자인 다니엘에게 정확하게 알게 하셨고, 또 그 해석까지 한점 막힌 바 없이 알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우상의 금 머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고(36-38절),
은 가슴과 팔은 왕만 못한 다른 나라이며(39절),
놋 배와 넓적다리는 온 세계를 다스릴 다른 나라이고(39절),
넷째 나라인 철 종아리는 강하기가 철 같을 것이며(40절),
그 나라가 얼마는 철의 발로 얼마는 진흙의 발로 분리될 것이고, 서로 섞이지만 합해질 수 없는 열왕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나라가 일어나(44절), 신상으로 상징되는 세상 나라들을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서게 될 것입니다.

2. 역사 속의 금 신상 비밀

우리는 다니엘의 해석에 근거하여 수천 년의 역사를 한 눈에 조명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지자에게는 모든 것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대부분 과거 세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신상 부위에 따라
금 머리는 바벨론(BC 605~539),
은 가슴과 팔은 메대·바사(BC 539~331),
놋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제국(BC 331~168),
철 종아리는 로마 제국(동로마 AD 1453까지, 서로마 AD 476까지)으로 보는 것이 거의 모든 복음주의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과연 금 머리 바벨론은 부강한 나라로서 유프라데스 강 좌우 언덕에 구리를 재료로 하여 견고한 성을 쌓았습니다.
주변 열국을 점령하여 천하에 이름을 드날렸고, 교만하여 두라 평지에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강제로 경배케 할 정도였습니다.

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성 둘레가 54마일, 높이는 300척, 성문은 100개나 되었습니다.
그의 손자 벨사살 때 1000명의 기생과 술잔치를 벌일 정도로 세계 최대 최강의 나라였으나, 메대·바사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은 가슴·팔로 묘사된 메대·바사는 고레스(Cyrus) 2세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지금의 이란 지역에 세운 나라로서 국법이 왕권에 우선한 나라였는데, 왕이라도 법을 바꿀 권한이 없어 다리오 왕 때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왕보다 못한 나라가 서리라”는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메대·바사는 이전 나라인 바벨론에 의해 포로 된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건축케 했고, 이 나라 통치 때 70 이레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놋 배·넓적다리로 묘사된 헬라 제국은 “온 세계를 다스린 나라”로서, 28세의 알렉산더가 5년 만에 페르샤와 인도까지 정복했을 정도로 크고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32세에 요절하자 네 명의 부하 장군들에 의해 네 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철 종아리로 묘사된 로마는 지금의 이태리를 중심으로 하여 철 문화가 발달된 국가로서, BC 64년부터 지중해 전역과 중동 아시아를 지배해 온 무섭고 강력한 제국이 되어 천하무적의 군사력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2:41) 라는 예언처럼 AD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 후 두 아들에 의해서 동·서로 분할되었습니다. 서로마는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토아케르에 의해 AD 476년에 망하였고, 동로마는 오랜 후인 1453년 이슬람교도의 공격을 받아 오스만투르크에 멸망당했습니다.

신상이 금속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 보면, 처음 금으로부터 은, 놋, 철, 흙으로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흐를수록 점점 더 타락하는 모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머리는 무거운 금이고 발은 가벼운 진흙인 것은 결국 세상 나라가 무너지게 될 불안정한 모습을 말해줍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바벨론은 실제로 금을 많이 사용하여 우상들과 신당들을 금으로 단장했고, 메대·바사는 실제로 은을 돈으로 활용했으며, 헬라는 무기를 제조하는데 놋을 사용했고, 로마는 갑옷과 무기 모두를 철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금속까지 그 시대를 예표하고 있음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며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느부갓네살 왕이 꾼 금 신상의 꿈은 역사적으로는 세상나라의 발전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영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핍박하는 나라들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하나이므로 바벨론은 한 국가였습니다.
가슴과 팔은 두 팔이므로 메데·바사가 같은 시기에 강국으로 나타났습니다.
종아리는 둘이므로 동·서 로마로 분리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열 발가락의 비밀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예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밀은 임박한 재림 때의 여러 나라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3. 발(足)의 국가

41절,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절,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
43절,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진흙·철 발가락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발의 국가는 임박한 재림을 앞두고 출현할 열국(列國)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적그리스도가 배출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발과 종아리는 서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종아리는 철이요,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2) 신상의 부서짐에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34절).
재림하실 주님에 의해 이루어질 사건이므로, 종아리의 국가와 발의 국가는 동일한 국가가 아님이 자연스럽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3) 계 17:9-10절이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여기서 사도 요한 당시에 있던 국가는 로마였고, “아직 이르지 아니한” 나라는 미래 적그리스도 국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발의 국가는 네 번째 나라인 로마제국의 부패된 말기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게 될 열국(列國)의 성격을 지닌 국가로서, 적그리스도를 배출하게 될 한 나라로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발의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그중 가장 지지받고 있는 것은 발의 국가가 유럽연합국(EU)이 될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1) 그 나라가 나눠지기 때문입니다(단 2:41).

단 7:23~24,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네째 짐승은 곧 땅의 네째 나라인데 이는 모든 나라보다 달라서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숴뜨릴 것이며,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
열 뿔로 상징되는 열국(列國)은 넷째 나라인 로마 제국의 영토에서 나타나게 될 것임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의 유럽 연합의 회원국들은 옛 로마 제국의 영토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지기 때문입니다(단 2:42).

현재 27 회원국 중 영국· 프랑스·독일·이태리 등의 강대국들과 약소국들이 섞여 있습니다.

3) 이들은 반목 속에서도 협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단 2:43).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EU를 구성하는 민족은 게르만계, 라틴계, 슬라브계로 나뉘는데, 이들은 역사상 은원관계가 많고 감정의 골이 깊어 하나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합쳐져야 할 이유는 군사적으로는 러시아를 대항하고 경제적으로는 미국을 대항하기 위함입니다.

4) 정치적 국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금·은·놋·철 네 나라가 정치적 강국이었기 때문에 열 발가락으로 상징되는 EU 또한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유럽 연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1952년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ECSC)로 시작하여 1957년에 유럽 경제공동체(EEC), 1967년에 유럽 공동체(EC), 그리고 1993년 EU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1999년 1월부터 공용 화폐인 ‘유로’(EURO) 달라를 전 회원국이 함께 사용하고 있고, 금년 6월 새 조약이 발효하여 EU 대통령이 2009년부터 나타날 전망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EU는 다니엘과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열 뿔 권세를 지닌 강력한 국가로서의 출발을 예고하는 요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모든 사건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예의 주시하며, 더욱 종말 신앙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4. 유럽연합(EU)과 로마 카톨릭

계 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기 짐승(=적그리스도)은 여덟 째 왕인데, 이는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일곱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EU를 상징하는데, 그 중 일곱 째 나라인 EU에서 여덟 째 왕인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EU는 오래지 않아 최강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EU의 모든 국가가 단합해서 적그리스도에게 권력을 줄 것입니다.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계 17:13). 이렇게 막강한 권세를 지닌 적그리스도는 전 세계의 통치자로 등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EU의 첫시작이 로마 교황청에서 비롯된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1957년 3월 25일 ‘로마조약’ 체결). 유럽 국가들의 70%는 카톨릭 국가입니다. 바티칸의 영향력이 어떠함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 유력 언론사들의 심층 취재는 EU가 로마제국의 재건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002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EU는 종교적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일찍이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교황을 적그리스도의 후보로 지목했듯이, 지금의 로마 카톨릭 제도하의 교황은 오늘의 EU로부터 솟아날 강력한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로마 황제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듯이 종말에는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종말에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5. 뜨인 돌의 심판

34-35절,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본문의 뜨인 돌은 재림 예수를 상징합니다. 재림 예수께서 적그리스도 국가를 심판하시되 ‘신상을 쳐서 부숴뜨리듯이’, ‘여름 타작마당 같이’ 바람에 날린 쭉정이를 모아 아궁이 속에 태워버릴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에는 재림 예수께서 검으로 만국을 치시고 철장으로 부수어뜨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계 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왕국은 영원히 망하지 않습니다. 이 왕국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계 20:6).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이 느껴지십니까?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와 같은 위대한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미리 정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오신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이 보이십니까?

지난 육십 구 이레의 모든 것을 이루신 우리 주님은 이제 마지막 한 이레의 예언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발의 국가, 곧 적그리스도 국가의 출현이 임박했습니다.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 성전에 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종말 신앙, 재림 신앙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마지막 시대의 이기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의 환상을 이야기한 책입니다. 더 나아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의 환상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도 이사야처럼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9-11장에서는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했는데,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의 왕으로 오실 것에 대해서(9:9), 은 30개에 팔리실 것에 대해서(11:12) 예고했습니다. 또한 12-14장에서는 메시아의 통치를 예언했는데, 자신들이 십자가에 죽인 메시아를 하나님의 백성이 바라보고 애통할 것이며(12:10), 그날에 죄를 씻는 샘물이 열릴 것이며(13:1), 열방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나님께 경배하는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14:16-21)을 예고했습니다.

제목

이 책을 쓴 선지자 스가랴의 이름입니다. 스가랴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저자

이 책을 쓴 스가랴는 에스겔처럼 선지자로 부름받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에스겔이 새 성전에 대한 환상을 노래한 선지자라면, 스가랴는 재건 성전에 대한 환상을 노래한 선지자입니다. 

기록 연대

스가랴의 연대는 성전 재건 이전과 이후로 크게 둘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1-8장으로 스가랴 선지자가 처음 계시를 받은 다리오왕 2년(1:1, B.C. 520년)에서부터 다리오왕 4년(7:1, B.C. 518년)까지 2년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 9-14장에는 기록시기를 짐작할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고, 다만 '헬라'(9:13)라는 표현이 언급될 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본서 후반부가 성전 재건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스가랴 선지자 말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대략 B.C. 480-470년경).

배경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이 인솔하는 1차 포로 귀환 때(B.C. 537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후 1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본격적으로 선지자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B.C. 520년). 이때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역이 중단된 지 14년이 흐른 뒤였고, 동시대의 선지자였던 학개의 두 번째 예언(학 2:1-9)과 세 번째 예언
(학 2:10-19) 사이에 해당되는 시기였습니다.

스가랴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1:3)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벨론 유수라는 징계를 내리셨지만 결코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셨습니다. 스가랴가 본 8가지 환상(1:7-6:15)은 학개를 통해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한 귀환 공동체에 큰 격려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귀환자들 중에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지 질문한 자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진정성 있는 예배와 순종의 삶을 촉구함으로 내면의 영성을 세우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학개의 예언이 시작된(학1:1, 다리오왕 2년 6월 1일) 두 달 뒤 예언하기 시작한(1:1, 다리오왕 2년 8월)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가 2장에 걸쳐서 성전 재건과 메시아 도래를 예언한 것을 14장에 걸쳐서 확장판으로 예언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스가랴는 메시야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세상 종말과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장래의 모든 인류 역사가 장차 메시야와 그분의 왕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실제로 신약은 선지자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아직 성취되지 않는 세상 종말의 역사들 역시 선지자가 보여 주고, 신약의 여러 사도들이 보여 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내용과 구성

성전 재건에 관한 10가지 환상(1-6장)
금식 문제와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7-8장)
메시아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9-14장)


산 돌과 신령한 돌들
     
베드로는 그 이름의 뜻이 “돌, 바위, 반석”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돌이었던 베드로는 교회의 진정한 반석, 진정한 초석과 바위와 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돌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를 자주 반석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익숙한 유대인이나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반석과 돌로 부르는 것에 낯설지 않습니다(사 28:16; 시 118:21-23 참조).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그 돌, 그 바위, 그 반석”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언제나 약속하신 메시야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흔하고 흔한 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보배로운 돌이었고, 그는 반석이었으며, 무엇보다 그는 산 돌(Living Stone)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살아있고 보배로운 돌이요, 유일한 반석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돌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제일 먼저 성전을 떠올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제사(예배)의 중심지였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그런 보이는 성전, 죽은 돌들로 이루어진 성전이 신앙의 목표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성전이나 제사 제도나 제사장 제도를 허락하시고 세우신 것은 그것들을 통해서 보다 큰 어떤 영적 실체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의 모형으로 두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들로 건축된, 보이는 성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영적 실체를 나타내고 그것을 기다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 말씀을 읽어보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도 이 산 돌에 연결되어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의 그림자로 세워진 것인데, 그 성전의 실체는 그리스도와 그에게 연합되고 연결된 성도들, 곧 그리스도와 교회를 보여주는 심상(image)이었습니다. 산 돌이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연결된 돌들, 곧 그의 몸의 지체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된 성도들은 신령한 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신령한 돌들로 세워지고, 서로 연결되어 자라가는 살아있는 돌들이며,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보배로운 산 돌(the precious living stone)”이라고 하셨고, 성도들을 가리켜서는 “신령한 돌들(spiritual house)”로 세워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이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신약의 성전, 신령한 집도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택한 백성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경배를 받으시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온 땅에 흩어진 교회요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모이고 성령으로 연합되고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지어야 할 집이 바로 이런 집이요, 우리 자신이 그러한 신령한 집의 한 부분인 산 돌, 신령한 돌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반석(Rock)이십니다. 그는 신자들의 반석이요 주춧돌이요 초석이요 모퉁이돌이요 산 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석이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허탄한 것에 우리의 영혼의 뿌리를 세우고 자신의 삶을 세워가기를 바라는 자들은 곧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리스도는 산 돌이고 성도들은 신령한 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전의 실체이시고 성도들은 그 신령한 집의 한 지체와 돌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처럼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요 성도들은 이런 대제사장에게 연결되어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오늘날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히 7:23-25 참조). 목사나 장로만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지 않으셨고, 모든 성도들을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여 지어져가는 신령한 돌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이들이 다 거룩하고 신령한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도 성도들을 가리켜서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늘 영적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 참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다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소위 “만인 제사장” 교리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일 때 그것은 거룩한 제사장들의 회집입니다. 그냥 친목으로 모이는 단체도 아니고, 어떤 인종과 혈연으로 맺어진 집단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흩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 택한 족속이었던 것처럼, 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합니까? 신령한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죄 사함을 위한 속죄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문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 희생과 화목의 제물로 자신을 완전히 드리신 그 제사에 의지하여,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제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감사제는 곡식을 빻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곡식을 빻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깨뜨리고, 자기라고 하는 돌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제사이며, 자기를 부인하여 드리는 자기부인의 제사입니다.
      이러한 신령한 제사도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드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도 열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드리는 것뿐이면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누더기와 같고 지푸라기와도 같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에 의지하고 연합하여 드리는 제사, 그것은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피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갔기 때문인데, 그 피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 메시야의 피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제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완전한 제사였고, 영원한 제사였습니다(히 9:28).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선을 행하고 구제하며 서로 나눠주는 것, 이런 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순종하는 순종의 삶,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미 6:6-8 참조). 또한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롬 6:13).
      오늘 우리가 보배로운 산 돌, 우리의 머릿돌과 모퉁이돌, 초석과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연결되어 웅장한 성전의 신령한 돌들로 자라가고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합시다. 우리 모두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 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신분이 종에서 아들로 변화된 결과가 무엇이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서 이제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근신하고 깨어 하늘에 간직한 산 소망을 온전히 바라고, 욕심과 정욕을 좇지 않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로 빚어져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아들로 입양하여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만세 전에 뜻두신대로 형제를 피차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뜻이다.


베드로전서 2 장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1-3 절은 1 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원동력임을 말씀하고 있다. 4-10 절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기초에 세워졌으며 어떻게 자라고 있으며 왜 세우셨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가리킨다.


먼저, 사도 베드로는 1 장의 결론으로서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2:1-3)


왜 베드로 사도는 곧바로 순전한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대신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듣기에 거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한 이유는 첫째는 악을 버리지 아니하면 신령한 젖을 사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상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두번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을 버릴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면 요구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베드로 사도가 나열한 것은 우리가 모두 매일 경험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를 버릴 수 있는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독과 거짓과 악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1:9). 이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계명에 순종할 수가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젖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다. 이때 우리 안에 떨어져 심어진 말씀이 우리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 갓난 아이가 얼마나 엄마 젖을 사모하는지 모른다. 성장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사모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위함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좋은 마음 밭에 떨어진 씨앗은 삽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과거 우리의 사욕과 욕심대로 살았다. 그때는 아무리 후회하고 그렇지 않겠다고 작심해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한가지 예로 예전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돌아온 탕자를 다시 아들로 맞아주신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우리는 모두 경험하였다. 또한 매일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날마다 그의 피로 씻음을 받고 정결하게 되어 하늘 보좌 생수의 강에서 흐르는 생수를 마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둘째는, 예수님은 그의 몸인 교회의 반석이 되신다. 4 절에 나와 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예수님을 왜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하였는가? 돌은 움직이지 않고 요동함이 없는 것을 상징한다. 산 돌이라는 표현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세 전에 이미 그의 아들을 보배로운 산 돌로 택정하셨다.


산 돌이신 예수님은 그의 몸된 교회의 반석이 되신다.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을 받았기 때문이다. 5 절에 나와 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집이라고 한 것은 계속 지어져가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이 신령한 집은 이천년 가까이 지금까지 계속 지어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산 돌 같이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죄아래 죽었던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부분으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에 세우신 목적은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그림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성막이다. 성막에는 짐승을 잡는 바깥뜰, 성소, 지성소가 있다. 그런데 성소는 제사장만이 들어갈수가 있고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번씩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일반 백성은 짐승과 같은 예물을 가지고 성막의 바깥뜰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다.


우리를 제사장이 되게 하신 뜻이 무엇인가?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만민 제사장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신 이유는 그곳에 나와서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죄라는 장벽 때문에 반드시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제사장으로서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 둘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가는 장벽이었던 죄가 제하여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받은 우리를 정죄치 아니하시고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 진리를 뒷밤침하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2:6-8)


예수님은 어떻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거부를 당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림을 받고 죽으신 그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그의 몸된 교회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다. 왜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머릿돌이 되셨는가?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도 머릿돌이셨다. 그런데도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피가 없이는 사함이 없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이다.


또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후에 머릿돌이 되신 것은 아무도 핑계치 못하게 하심이다. 조상 아담 탓으로 돌리거나 무슨 잘못이 있는지 항변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시기 위함이다.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하나, 대신 사랑하사 죄의 노예에서 해방 받을 수 있는 길을 아무 값없이 내어주셨다. 하나님이 애굽 왕과 백성들에게 내리신 마지막 재앙인 유월절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죽음의 천사는 문설주의 피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안전하였다. 누구라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받지 아니한다. 부끄러움을 받는다는 것은 배척 받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을 받은 우리를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선물로 부어 주신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신다. 왜 예수님이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되시는가?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말미암아 나왔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 가운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아니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요한복음 1:3).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 나왔기 때문이다. 풀과 같고 이슬과 같은 것이 인생이나 우연히 왔다가 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 심판의 기준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잣대가 존재한다. 소위 성공이 가장 잘알려진 잣대이다. 어떤 이는 철학이나 이념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도덕과 선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성공도 철학도 도덕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 1:15-18)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공평과 공의로 심판하실 수 있는 유일무이한 분이심을 밝혀주고 있다. 모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우주 만물을 있는 그대로 존재케하는 응집력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일어나 서고 앉고 걷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주 예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지구의 공전과 자전 속도가 조금이라도 변동이 있거나 그 궤도에서 이탈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무지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이시요 왕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배척한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소위 믿는 자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상황을 탄식하고 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2-3)


그들이 넘어지는 것은 완악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치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장자인 에서가 차자인 야곱을 섬길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저희가 멸망의 자식인 것을 아시지만 (사람은 모르지만),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셔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순종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정하신대로 영원한 부끄러움에 처하게 된다.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에서 그의 종들이 가라지를 제거하려고 하였을 때 가만 두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제거하다가 알곡을 함께 뽑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천사를 보내어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게 하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교회의 역할이다. 9-10 절에 나와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은 만세 전에 우리를 아시고 택하시고 때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르셨다. 이제 교회는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를 한 족속 혹은 한 나라로 부르고 있다. 여기에는 모든 인종과 모든 족속과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 포함하고 있다. 모든 종교와 모든 철학과 문화와 이념과 도덕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 조건은 단 한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가이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기이한 빛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기이한 빛을 나타내는가? 이는 그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외적인 표식은 아무 것도 없다. 성경책을 들고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가 1 장에서 말한 서로 형제 간에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그의 기이한 빛 안에 거한다는 증거이다. 또한 베드로전서 2 장 후반부에서 말하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가족과 이웃에게 우리가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케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요 또한 이제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아들로 변화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하신다 (마태복음 10:8). 우리는 아무 값없이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형제간에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모든 악독과 거짓과 시기와 외식을 버리고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이 성장하고 자라도록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교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산 돌로 세워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이래로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세워가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주님,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우리를 먼저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신 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말씀을 부지런히 사모하고 형제간에 피차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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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슥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 (슥 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슥 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슥 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슥 4:1~14)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슥 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슥 5:5~11)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 (슥 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슥 7: 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슥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 (슥 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슥 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믿음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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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티스 [pistis]  πίστις, εως, ἡ 4102 [pistis]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 성경이 강조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라>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이란?
곧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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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 신뢰, 신용.
2. ἡ πίσ- τις τοῦ ὀνόματος αὐτοῦ : 그 이름을 믿는 믿음, 행 3:16, 빌 1:27.

사도행전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By faith in the name of Jesus, this man whom you see and know was made strong. It is Jesus' name and the faith that comes through him that has given this complete healing to him, as you can all see.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Whatever happens,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en,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only hear about you in my absence, I will know that you stand firm in one spirit, contending as one man for the faith of the gospel.

*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3. [신용이나 신앙을 일으키게 하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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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βραάμ, ὁ 11 [Abraam]

“많은 무리의 아버지” :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마 1:1, 2, 17, 3:9, 눅 1:73, 3:34.

Ἀβραάμ, ὁ 스트롱번호 11

1. “많은 무리의 아버지” :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2. 마 1:1, 2, 17. 3. 마 3:9
발음 [ Abraam ]
어원 / 히브리어 85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많은 무리의 아버지” :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마 1:1, 2, 17, 3:9, 눅 1:73, 3:3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아브라함(마 1:1, 2, 눅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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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문자적으로] 결혼생활에서 태어난 아이, [상징적으로] 믿음의 권속, 빌4:3, 딤전1:2, 딛1:4.

  • 2.

    순진한, 진짜의, τὸ γ. 진실[사랑의], 충실함, 고후8: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비겁한, 겁먹은, 믿음 없는, 마8:26, 막4:40, 계21: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ὀλιγόπιστος, ον 3640 [ŏligŏpistŏs]
  • 믿음이 작은, 마6:30, 8:26, 16:8, 눅12:2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불경건함, 신을 믿지 않음, 믿음이 없음, 롬1:18, 딤후2:16, 딛2:12. [복수로 사용하여] 롬11:26, 유1:1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여리고에 살던 기생으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던 자 ‘라합’, 수6:17, 25. [주]믿음의 의로움과 환대의 모델로서 언급됨, 히11:31, 약2:2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믿음 없는, 믿지 않는, 마17:17, 막9:19, 눅9:41.

  • 2.

    믿을 수 없는, 믿어지지 않는, 행26:8.

  • 3.

    [도마의 불신] 요20:27, 고전6:6, 7:15, 10:2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 [ἔν τινι와 함께] ~에 있어서 유능한, 힘있는, 뛰어난[말과 행실이], 눅24:19, 행7:22. ㉣ [성경에 대해서] 능통한, 행18:24. οἱ δ. [믿음이] 강한 사람들, 롬15:1.

  • 2.

    힘있는, 강한, 능력있는, 강력한.

  • 3.

    [인격과 그것의 속성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형용사 δοκίμιος의 중성단수] 순수한, 섞은 것이 없는, τὸ δ. ὑμῶν τῆς πίστε ως: 너희 믿음의 순수성, 벧전1:7.

  • 2.

    추정.

  • 3.

    [명사] 시련, 시련의 도구, 약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κατὰ τὴν ἀ. τῆς πίστεως: 믿음에 합당하게, 롬12:6.

  • 2.

    바른 관계, 균형, 어울림.

  • 3.

    κατὰ(τὴν) ἀναλογίαν: 어울리게, 일치하게, 바른 관계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κ 1537 [ĕk]
  • 1.

    οἱ ἐκ π ίστεως: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갈3:7,9, [참조] 롬3:26, 4:16.

  • 2.

    모음 앞에서는 ἐξ, 소유격 지배전치사: ~로부터, ~에서, ~의 밖으로.

  • 3.

    [분리를 지칭하기 위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ζάω 2198 [zaō]
  • 1.

    ㉢ ζ. κατὰ θεὸν πνεύματι: 하나님처럼 영으로 산다, 벧전4:6. ㉣ ὁ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롬1:17, 갈3:11, 히10:38등.

  • 2.

    살다.

  • 3.

    [죽음에 반대되는 육체적 삶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ινώσκω 1097 [ginōskō]
  • 1.

    [목적어로서의 대격과 함께] τοῦτο, 막5:43, 눅24:18, 행21:34, 22:30. 우리의 사정을~, 골4:8. 너희 믿음을~, 살전3:5. [수동] ~에게 알려지게 되다, 알려지다, [인격의 대격과 함께 쓰이거나 혹은 없이도 쓰인다]: 은밀한 것들이~, 마10:...

  • 2.

    알다, 알게 되다.

  • 3.

    [사물의 대격과 함께] 신비를~, 마13:11, 막4:11, 눅8:10. 주인의 뜻을~, 눅12:47,48. 평화를 가져오는 것을~, 눅19:42. 진리를~, 요8:32. 시간[때]을~, 행1:7. 죄를~, 롬7:7. 사랑을~, 고후2:4. [독립적으로] γνόντες, 막6:38, 고전13: 9,12. [전치...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ίνομαι 1096 [ginŏmai]
  • 1.

    관련된 사람의 여격과 함께: ㉠ [부정사가 뒤따르는 경우] 행20:16. ㉡ [부사나 부사구가 첨가된 경우]. 첫 째, κατὰ τὴν πίστιν ὑμῶν γενηθή τω ὑμῖν: 너희 믿음로 너희에게 되라, 마9:29. 둘째, γέ- νοιτό μο...

  • 2.

    [그 자신의 의미와 함께 동사로서]~이 되다, 일어나다, 발생하다.

  • 3.

    탄생되다, 태어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ί 1909 [ĕpi]

  • 1.

    τῇ πίστει: 믿음의 기초에, 행3:16, 빌3:9, ἐπ᾿ ἐλπίδι: 희망에 근거하여, 행2:26, 26:6, 롬4:18, 8:20, 고전9:10, 딛1:2, ἐ. δυσὶν μάρτυσιν: 두 증인의 증언을 기초로 해서, 히10:28...

  • 2.

    [상징적으로] ㉠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권세, 지배, 통솔을 나타낼 때, βασιλεύειν ἐπί τι- να: 누군가를 지배하다, 눅1:33, 롬5:14, κριτὴν ἐφ᾿ ὑμᾶς: 너희를 다스리는 재판관, 눅12:14, ἡ- γούμενον ἐπ...

  • 3.

    [속격과 함께 쓰일 때]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μετά 3326 [mĕta]
  • 1.

    [두 명사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낼 경우] ἀγάπη μ. πίστεως: 믿음있는 사람, 엡6:23, 골1:11, 딤전1:14.

  • 2.

    [소유격이 수반될 경우] ~와 함께, ~와 더불어.

  • 3.

    [장소의 뜻을 나타냄] ~가운데, ~속에, ~중에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διά 1223 [dia]
  • 1.

    믿음의 법으로, 롬3:27, 갈2:19. 기타, 롬1:12, 3:22, 7:8,11, 고전1:21, 4:15, 히7:11, 갈2:16.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롬15:32.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고전1:1, 고후1:1, 8:5...

  • 2.

    ~을 통하여.

  • 3.

    [속격지배]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ἵστημι 2476 [histēmi]
  • 1.

    [상징적으로] ㉠ 견고히 서다, 고전10:12, τ. πίστειἕσ- τηκας: 너는 믿음 때문에 견고히 서 있다, 롬11:20, 고전7:37, 딤후2:19. ㉡ ~안에 있다, ~안에서 있다, 롬5:2, 고전15:1, 고후1:24등.

  • 2.

    [타동사, 현재, 미완료, 미래, 제1부정 과거 능동태] 놓다, 두다, 위치해주다.

  • 3.

    [문자적으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καθ᾿ ἑαυτόν: 혼자서. ㉠ μέ- νειν: 혼자서 지내다, 행28:16. ㉡ πίσ- τις νεκράἐστιν καθ᾿ ἑαυτήν: 믿음 그것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다, 약2:17. ㉢ βασιλεία μερισθεῖσακαθ᾿ ἑαυ- τῆς: 서로 맞...

  • 2.

    [삼인칭 단수나 복수에 대해 그것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과 동일인임을 지시해준다]

  • 3.

    [주]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능동] 신임하는, 신뢰하는, 믿는, 믿음을 가진, 믿음이 가득한, 믿음 있는, 갈3:9, 요20:27, 행16:15.

  • 2.

    [수동] 믿을 만한, 신실한, 신뢰할 만한, 믿을 마음을 일으켜 주는

  • 3.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σθενής, ές 772 [asthĕnēs]
  • 1.

    [도덕적으로] 연약한, 롬5:6, 믿음의 연약성, 고전8:7,9,10, 9:22, 살전5:14.

  • 2.

    약한, 무력한.

  • 3.

    [문자적으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