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



거듭남

땅의 일과 하늘 일(요한복음 3:9~15)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 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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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 본 것, 경험한 것, 확실한 것, 아주 뚜렷한 사건을 말하고 있는데도 상대방이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 단절된 관계가 우리를 매우 가슴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단절의 시대" 라고 합니다(미국의 경영 전문가 피터 드러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자신의 존재를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확인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웅겔스마(Ungelsma)는 이렇게 말합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흔히들 군중 속의 고독을 운위하면서 세상에 나 혼자인 듯이 말합니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다 쓸쓸해서 하는 말이요, 역설적인 넋두리입니다. 어쩔수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가 경험한 것, 내가 확실하게 본 것을 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이 증거를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내 존재 자체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자기 존재의 상실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현대를 일컬어 '단절의 시대'라고 합니다. 지나온 시대를 통틀어 아마도 지금이 가장 대화가 안 통하는 시대일 것입니다. 의사소통에 대하여, 심리학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연구하고 배우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가 가장 communication이 안 되는 시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단절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단절의 시대」|미국 경영학자「드러커」

최근 구미의 사회과학계는 어느때없이 「용어의 풍년」을 맞고있다.
이들은 그 신선도나 기발한면에서 매력적이기까지하다.
미래를 예측하는 저술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이다.
미래는 그만큼 미지의 세계이며 그것을 이해하는길은 새로운 용어밖엔 없을것이다.
미국의 경영학자「피터·F·드러커」는 최근 『단절의 시대』(The Age of Dis continuity)라는 저서를 내놓아 또다시 관심과 매력을 자아내고 있다.
「과거」「현재」「미래」를 그는「단절」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있다.

「드러커」는 과거에 있었던 몇가지 사례를 장래에 투영하여 예측하는 입장을 극복했다.
인류의 역사란 「단절」하는 「프로세스」라는 것이다. 그의 견해를 빌리면 우리는 오늘날 단절의 시대에 태어났으며 바로 그 단절때문에 고민한다.

<「연속성」의 무시>
그렇다면 「단절」이란 무엇인가. 「단절」이란 연속적인 과거의 세력을 토대로하여 그위에 서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속을 건너뛴다는 커다란 비약을 뜻한다. 현대는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온 과거의 축적위에 세워질수없기 때문에 이것을 비연속=단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드러커」자신은 「비연속」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미 있었던 사실과의 여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실과의 도전, 쌍방에 의해 짜여진 가까운장래의 자태-.』

<기업혁신에 업적>
확실히 과거를 이해하는 종래의 자세들은 겸허하지 못했다. 이른바 「세대간의 갭」이라는 말은 어느 시대에나 붙어다니는 것이지만 그것처럼 싱거운말은 없게 되었다.
과거를 정확히 인식하는 태도에서부터 오류를 밟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드러커」는 영지의 학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의 경영 「콘설턴트」이면서 「뉴요크」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이며, 저자「단절의 시대」로 경영및 기업조직에 큰 업적을 쌓은 셈이다.
세계의 실업계에선 이미 그의 행동을 통해 저명하게 되었지만 학계나 지식인사회에선 그다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과학이 지엽말단적인 「테마」에 정신을 팔고있는 상황에선 그의 위치는 마땅히 그렇게 간과될 수밖에 없는것도 같다.

<4개분야로 세분>
「단절의 시대」는 현재의 사회와 우리의 생활을 협공해오는 단절성에 대해 4개의 주요 분야로 나누어 고찰했다.
ⓛ기술 ②경제 ③사회 및 정치조직 ④지식의 역할.
이 지식의 역할서는 지식을 오늘날의 경제를 이룩하는 자본이며 비용이며 주요한 자원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지식은 제1차산업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새지식 공급돼야>

<경제>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가 지금까지의 생산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네오·케인즈언」의 낡은 지식을 믿고 여기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품지않는 정부는 언젠가는 불쾌한 사태를 당할것이다.

<사회및 정치조직>「드러커」는 「사적체제의 복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정부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실천을 정부이외의 조직에 맡겨 행하도록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교육기간 장기화>

<지식사회>평균수명의 연장은 노동수명을 그이상 증가시키며 따라서 지식노동자를 출현시킨다. 동시에 이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얻어진 햇수의 대부분을 학교교육에 사용하려는 대중일반의 경향에 기인한다. 「드러커」는 『교육기간의 장기화때문에 노동력이 되는 연령이 늦어져 현재 선진국의 노동수명은 1세기전의 2배, 제1차대전무렵 보다는 5할이나 증가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개인의 잠재적 수입은 2배이상이 되었고 이것은 『경제사상 부와 복지의 최대발전』이다.
그러나 「지식사회」가 도래함에 따라 육체노동자와는 달리 「지식노동자」는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만 만족할수 없게 되었다.
지식노동자는 중년이 되면 벌써 직업에 권태를 느끼고 의욕을 잃는다.
「드러커」는 재출발을 하는것만이 그 자신에 있어서나 조직체에 있어서 새로운 동기를 주는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것에 적응하는 「교육」이다. 「드러커」는 여기에 예리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현재의 고교나 대학은 과거 1세기이래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드러커」의 논리는 매우 정밀하고 풍성하며 합리적인 예증을 구사하고 있는것에 바로 매력이 있다.
그는 이 저서의 서문에서 자신의 주장들을 「게릴라」지역의 「손수레」 에 비유한다.
대화물열차의 선두에서 재빨리 지뢰를 탐지해서 제거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아이러니」이다.


'단절의 시대'는 지식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위대한 책이다.
지식사회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그는 지식사회라는 개념도 이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1969년에 출간된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미래에 대한 분석과 예측이 너무도 정확해 여전히 읽히고 있는 경영의 바이블이기도 하다.
 
단절의 시대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피터 드러커는 지식사회를 예언하면서 지금의 지식 노동자들을 위해 중요한 조언을 남기고 있다.
'단절의 시대'에서 우리들이 실제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 번째 조언.

'지식 근로자는 어떤 것을 성취하려면 그것을 최고로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럭저럭 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지식 근로자는 자신의 생산성을 스스로 높여야 하는 일종의 경영자이다.
자신의 마음과 머리, 손끝에서 모든 작업이 완성되는 것이 지식 노동자의 노동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대충 해서는 안되며 남보다 무언가 하나는 탁월하게 잘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최고로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두 번째 조언.

지식 작업에 대한 동기부여는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
산업사회에서는 임금이나 근로의 조건들이 중요한 동기부여 요인이었다.
하지만 지식 근로자에게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식 근로자의 작업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의 결과는 그의 것이다. 결과는 그의 평판이 되고 그의 경쟁력이 되며 그의 브랜드가 된다.
스스로 성취 욕구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하고 강한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도전 정신이 없다면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의 질문이 가능해 진다.
"나는 도전하며 살고 있는가?"


세 번째 조언.

평생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조언이다.
그것은 '지식 탐구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현대사회는 지식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어떤 것을 배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다기망양이ㅡ 시대가 온 것이다. 이것은 기업의 경영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소이다.
배울 것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당황하게 될 것이고, 결국 제대로 된 배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낯선 질문에 답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단절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지 예전에 비해 그 주기가 점점 짧아졌을 뿐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감지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자주 당황하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노출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피터 드러커가 큰 시대의 물줄기를 통해 구체적인 현실을 들여다보았듯이 우리도 이 시대를 보는 큰 눈과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들을 가지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보는 눈을 가지는 것과 자신에게 현명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이다.


첫째, 언어의 단절

말이 안 통합니다. 용어가 틀립니다. 계층간에 다르고, 연령 간에 다르고, 직업간에 다릅니다. 정말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왜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의 젊은이들이 쓰는 말 좀 들어보십시오. 정말 모르겠습디다. 얼마 전에도 젊은 사람들이 모여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빵 좋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더군요. 도대체 '대빵'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대빵'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철판'이라는 뜻이거든요. '대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시는 분이 있기에 제가 스스로 설명을 만들었습니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하지요. 그것을 '대빵'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어찌 달라져서 '대빵 좋다'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간신히 엮어 설명을 합니다마는, 도대체 이것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Nobody knows.-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언어이기는 합니다.

쓰는 대로 통하면 좋은 언어요, 통하지 않으면 죽은 언어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통하지 않는 데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빵 좋다' 할 때에도 '아, 아주 좋다는 말이구나'라고 알아들을 수 있다면 된 것입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상관할 바 없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했으면 족한 것입니다. 이렇듯 언어의 문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과 말하다가 '야, 그거 무슨 말이니?'하고 물어보십시오. 대번에 '알 필요 없어요' 할 것입니다. 멋모르고 물어보았다가 무안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대가 틀리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문제입니다.

둘째, 학문의 단절

전부가 각기 협소한 의미에서 전문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용하는 말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법과를, 어떤 사람은 의과를, 어떤 사람은 문과를 전공합니다. 그리고 의사끼리도 내과와 외과가 서로 틀립니다. 자기 분야만 열심히 연구해서 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는 의사가 세상에서 제일 무식합니다. 자기의 전공분야만 연구하느라고 다른 것은 들은 일도 없고 본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대화가 안됩니다.

간혹 보면 남편과 대화가 안 통한다느니, 남편이 집에 오면 말이 없다느니 하며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부터도 집에 가서는 말을 잘 안 합니다. 밖에서 너무 말을 많이 하다보니 집에서는 말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듣는 것도 짐스러우니까요. 그리고 실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휴식인 것입니다. 여기다 대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더는 입력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전문성, 전문적인 위치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오히려 협소해지고, 나아가 대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야기가 안됩니다.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마주앉기만 하면 그저 수지가 맞느니 안맞느니 증권이 어떻다느니 하는데, 공부하는 사람은 딴소리를 합니다. 그러니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학문의 전문화가 언어의 단절을 가져오게 했다는 말입니다.

용어만 해도 그렇습니다. '콘덴서(condens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전문적으로 상당히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 '콘덴서'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먼저, '콘덴서'는 전자부품의 하나를 일컬을 때에 쓰입니다. '저항 콘덴서'라고 하여 쓰입니다. 또한 렌즈의 종류 가운데 하나가 '콘덴서'입니다. '콘덴서'는 특수한 렌즈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화학분야에서는 거르는 기계를 '콘덴서'라고 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콘덴서인데도 쓰임에 따라서 그 뜻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사용하는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은 '콘덴서'라고 하면 당연히 렌즈만을 떠올립니다마는, 이 콘덴서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인데 그 개념은 저마다 다릅니다. 모든 말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 나름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 역시 그 나름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쓰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아듣기 힘드니까 안하고, 말하기 힘드니까 안 하기에 대화가 단절 되어 가는 것입니다.

셋째, 도덕의 단절

이것은 가치관의 단절을 말합니다.

특별히 이데올로기의 대립하에서는 이것이 더욱 심각합니다. 극렬한 대결하에서 보면 이쪽에서는 간첩이 저쪽에서는 애국자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는 애국자가 우리 나라에 와서는 간첩이요, 우리 나라에서는 애국자가 북한에 가서는 간첩일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혀 틀립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도덕적으로 보더라도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옳은 것인데 저 사람에게는 틀린 것이요, 이 사람에게는 선한 일인데 저 사람에게는 악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그만큼 복잡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빌 1:10)'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절대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상대화해버렸기에 그 기준이 없어졌습니다. 절대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에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 도덕성이 상실되고 맙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언어를 이토록 혼잡하게 하고 대화가 없는, 말이 안통하는 시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가장 슬픈 일은 언어소통의 상실에 있습니다. 언어가 언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다르기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현지 토착민의 말을 잘하는, 언어 재주가 있는 선교사가 선교활동에 성공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통계를 내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토착민의 언어를 잘 구사하는 선교사치고 선교활동에 성공한 예는 극히 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만 잘한다고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가하면 토착민의 말을 못해서 현지에서 40년을 살면서도 설교 한번을 못한 선교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토착민의 언어로 설교는 못해봤을지언정 행동으로 많은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 가운데도 보면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문까지 배워서 논어 맹자도 압니다. 우리보다 더 잘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언제나 별 할일도 없이 나가나 들어오나 환영을 못 받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에 와서 30년, 40년을 일하면서도 한국말로 제대로 설교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선교사가 오히려 활동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특히나 교역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 인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은 가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언어의 단절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만 열려 있으면 대화는 절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안 해도 됩니다. 얼굴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눈만 마주침으로 아무 말 없이도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마음이 닫히고 나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밤새껏 말을 해도 타인이요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싸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들을 생각은 않고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있습니다. 남 말하는 도중에 끼어 들어 가만있으라고, 나 말 좀 하자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과하겠다 하고는 싸웁니다. '미안합니다'라는 사과 한마디로 끝났으면 좋을 텐데 거기서 그치지를 못하고 한마디 더하다가 싸웁니다. 사과해가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것은 용어의 문제가 아니요 전문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슴의 문제입니다. 가슴이 닫혔기 때문에 언어가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것입니다. 말의 유식하고 무식하고는 문제가 안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어머니를 보십시오.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지 통하지도 않는 말을 주고받습니다 마는, 어린아이와 어머니는 잘도 통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가면서 듣는데도 곧잘 통합니다. 서로가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잘 통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심의 문제입니다. 공통의 관심거리를 가져야 합니다. 관심을 별도로 가진 채 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공통의 관심을 위해서는 먼저 경험이 같아야 합니다. 경험이 다르면 안됩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잘 통합니다.

요즈음 가만히 보니 젊은 사람들의 결혼연령 차이가 옛날보다 좀 작아진 것 같습니다. 동갑이나 몇 살 차이 안 나는 사람들끼리 많이 합니다. 언어가 잘 통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나이 차이가 7년 이상이면 대화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지 대화적으로는 영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여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우리 남편은 바가지를 긁어도 잘 참아줘요"라고 자랑합니다마는, 그것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봐주는 것입니다. 말 같지 않으니까 대답을 안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싸운 적이 없노라 으스댑니다만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대화가 없으니까 안 싸우는 것입니다. 상대가 안 되는데 어떻게 싸웁니까? 어린아이하고 할아버지가 싸우겠습니까? 이렇듯 대화는 같은 경험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말을 조금 합니다.

그런가하면 공산치하에서도 살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유학하느라 영어도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파란만장하게 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살았으니까요. 그래서인지 6․25를 겪지 않은 사람들, 일제하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는 '아, 이거 이야기해도 모를 텐데 내가 괜히 이러는구나' 싶어집니다. 같이 경험하지 않은 것이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요즘 사람들, 그 때 그 시절 많이 굶었노라 하면 "굶기는 왜 굶습니까? 냉장고에서 꺼내먹으면 되지" 합니다. 그 어려운 시절, 쌀이 없어서 밥을 숱하게 걸렀노라 하면 "밥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요. 참 이상하시네요" 합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경험하지 않고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굶는다'는 것의 뜻이나 제대로 알겠습니까? 며칠이나 설명해야 알 것 같습니까? 이렇듯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소원이 다릅니다. 욕망과 소원이 다르면 의사소통이 안됩니다. 꿈이 다르면 대화가 안됩니다. 이상이 다르면 대화가 안됩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요 소원인 사람과 명예를 바라는 사람과의 사이에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돈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상하다. 수억씩 없애면서 뭣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합니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전혀 이상이 다르니까요. 소원이 다르니까요. 이렇게 idea가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주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면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마음의 문제요 가슴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이야기를 위의 시각에서 보십시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 중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게네세나이 아노센'-'위로부터 다시 나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가 다시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지금 어리석게도 '나는 늙었는데, 그래도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는가'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리면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답니까? 이 사람 디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떨었나, 왜 '늙으면'이라는 말이 여기서 튀어나옵니까? 어린아이는 모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 말은 자기 경험에 집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니고데모 자신이 늙었거든요. 그래서 어찌하다보니 '늙으면' 하고 튀어나왔지만, 그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모태에는 늙으나젊으나 다시 못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번 나왔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대화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상대가 되겠습니까?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이 말씀 역시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리 없지요.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라고 니고데모가 묻고 있지 않습니까? 거듭나는 일이나,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신비로운 생활과 신비로운 체험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망신을 주신 것 같습니다. 무안을 주신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10절)" --- 이스라엘의 랍비가 되어서 이 정도도 모르느냐, 그동안 무엇을 가르쳤느냐, 하고 묻고 계심입니다. 그 자신 늙었다고 생각하는 니고데모가 30세밖에 안되신 예수님께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무엇을 배웠느냐고 무안을 당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온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해도 '중생'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중생의 문제를 모르고, 생명의 문제를 모르고야 어떻게 무엇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오늘의 잠언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 여기서 땅의 일이란 세상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요, 인간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늘'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단순히 푸른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하나님께 대한 별칭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함부로 부르기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여 십계명 가운데 제3계명으로 엄히 정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잘못 불렀다가는 하나님께로서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경계의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부르지를 못한 것입니다. 가능하면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다른 호칭을 쓰려 했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하늘 일은 하나님께 관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잠언말씀에 담긴 뜻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욕망의 초점이 땅에 있기 때문에 설사 하늘의 일을 생각해도 땅의 시각에서. 땅의 중심에서 이해하려든다는 말입니다. 관심과 이상과 지식과 경험이 전부 땅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교회 나와서 예배드릴 때에 보면 이 말씀을 내가 구원받고, 내가 성장하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로서는 데에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더군요. 그리고 때때로 보면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받아 적는 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에게 "무엇을 쓰셨습니까? 왜 쓰셨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저를 실망시키기 일쑤입니다. "회사에서 직원회의 할 때에 훈시하려고요." 교회 다니기 전에는 훈시할 때마다 할말이 없어서 '에, 에……' 하다 말았는데 교회에 다니고 부터는 말씀을 적어놨다가 하니 할말이 많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글쎄요. 그것도 전도로 생각한다면. 전도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괜찮겠습니다 마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교회에 나와서는 부부일지라도 같이 앉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같이 안으면 서로 말씀 듣는 것을 미루게 됩니다. 자신이 들으려 하지 않고 상대에게 '잘 들어둬'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말씀은 내가 들어야 합니다.

하늘로 향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직선적으로 통하는 열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땅 중심으로 땅의 세계관에서만 생각하고, 땅의 언어로 땅의 소원으로만 바라보기에 무엇을 듣든지 전부 땅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합디다. "목사님은 돈을 벌었으면 잘 벌었을 것 같아요. 설교 들으면서 가만히 보니 저런 머리로 돈을 벌었으면 잘 벌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하더군요. "글쎄요" 하고 말았지만, 보십시오. 모든 일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땅의 일을 통하여 하늘 일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하늘의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땅의 이치를 가지고 하늘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입니다. 이것이 상징입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생각과 마음과 관심이 하늘에 있어야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는데, 생각이 땅에만 있고보니 하늘 일을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땅의 이야기로 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 이와 똑같이 답답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긷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그녀 역시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물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그 여인이 다시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라고 말합니다. 저 같으면 가만 안 뒀을 것 같습니다. 호되게 한 마디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앉으셔서 솟아나는 생수를 보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실물교육을 하시고 계십니다. 우물에서 긷는 이 물은 마신 뒤에는 다시 목마르겠으나, 내가 주는 물은 영혼 속에 들어가서 영원히 솟아나는 물이기에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런데 이 귀하디 귀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은 대낮에 물길으러 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인지,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특별히 많이 있습니다. 어리석고 우둔하고 미련한 생각들입니다.

오늘의 잠언말씀인즉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그리스도께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무엇인지, 그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면 안됩니다. 주제를 바로 알아야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강의할 때에 보면 학생들이 잘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서 어떤 패에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험을 치게 해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떤 학생은 얼마나 확실하게 알아들었는지 제가 의도했던 바를 시험지에 완벽하게 써놓았습니다. 그럴 때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생은 쓰기는 열심히 썼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게 썼습니다. 그 사람은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말하려고 하는 근본의도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맥락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 모든 선교, 모든 교훈, 모든 이적, 모든 사역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나라'라고 하니까 세상으로, 혹은 대한민국이니 일본이니 하는 세상적인 나라로 받아들이고는 이것은 전쟁 없는 사회, 평등한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말씀을 놓고도, 그 이적이 현재에 있다면 경제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을 텐데 합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八福)'을 기억하시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 10)."

여러분, 핍박이 무엇입니까?
재산을 뺏기는 것이요,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요, 생명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이것을 하늘나라 말이 아닌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순교자가 되면 기념비를 세워주겠다' 하겠습니까? '순교자의 후손은 오래오래 잘산다' 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중심을 두지 않고는 한마디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빛을 말씀하시든지 씨뿌리는 이야기를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하늘나라 이야기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조용하게 하신 이야기를 접해도 하늘나라로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보아도 하늘나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땅의 일을 보면서 하늘의 이치를 이해합니다. 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꽃을 하나 들어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를 하나 들어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일어 거칠어진 바다를 보며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시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계십니다. 보시고, 들으시고, 경험하신 바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증거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통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 어디를 읽든지 말씀이 통합니다. 언제 기도하든지 말씀이 통합니다. 언제 설교를 듣든지 그 신령한 말씀이 내 귀에 확연히 와 닿습니다. 마음에 와서 부딪칩니다. 이렇듯 말씀이 통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마음이 닫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의 잠언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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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1939- )

인물소개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지성.감성.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교육철학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는 미대륙을 포함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워크숍, 포럼, 강연회를 열고 있으며 '교사의 교사'로 불린다. 미고등교육학회 임원과 페처연구소의 수석 고문을 맡고 있으며 미공립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사양성 프로그램을 창설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전미 1만여 명의 교육기관 관계자들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요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의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경력

  • 미공립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사양성 프로그램 창설
  • 1997 전미 1만여 명의 교육기관 관계자들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요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의 한 명으로 선정


지식을 얻는 세 가지 과정(단계)

1. 능동적 지식 :

내가 주체가 되고 다른 대상은 객체가 되어 아는 것
(예) 책을 읽는다, 자료를 모은다,

2. 수동적 지식 :

나는 객체가 되고 상대가 주체가 되는 것
(예) 내가 생각하는 나 -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
(예) 나는 쓸모가 없다 -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 체험적 지식 :

참여와 헌신에 의한 것
(예) 십자가 - 주관적인 십자가 / 날 위하여
                     객관적 십자가 / 모든 죄인을 위하여
                     종합적 십자가 /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지식에서 진리로 변화해야 한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7세기 잉글랜드 연방의 정치인이자 군인.

젠트리 계급 지주 출신으로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고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스스로 종신 호국경이 되었다. 군주가 되어 크롬웰 가문의 새 왕조를 개국하려고 하였으나 군부가 반대하자 설득을 시도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아들 리처드 크롬웰후계자로 지명하여 호국경 자리를 세습했지만, 결국 그가 세운 잉글랜드 연방은 무너졌다.

크롬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젠트리 가문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통해 독실한 청교도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런던에서 법률 공부를 한다. 그리고 1620년 런던 부호의 딸인 엘리자베스 부처와 결혼을 하게 된다.

1628년 고향인 헌팅던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629년 찰스 1세의 의회 해산으로 인해 의회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1640년 단기의회와 장기의회가 차례대로 소집되자 여기에 케임브리지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한다.

그렇게 평범한 잉글랜드의 하원의원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은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바뀌게 된다.

메리 여왕에 의하여 사형 언도
종탑의 여섯번째 종이 울릴 때 "길로틴"에 의해서 처형을 받는다.
그러넫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여자가 크롬웰을 위하여 종의 추에 매달려 자기를 희생한 결과
여왕은 크롬웨을 사형에서 사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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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1. 서론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은 성경의 중심 사상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뜻하는 나라이며,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며(마 6:33)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마태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 중)라고 기록했으며,
마가는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는 기록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예수님의 주된 사역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님도 직접적으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시며(마 6:9~10)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언급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으로써 하나님께서 하늘과 이 땅을 직접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현재 세상 속에서, 특히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이면서도 궁극적인 소망이 되고 있다.

2.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시작은 구약이다.
조지 래드(George Eldon Ladd)는 하나님 나라의 출발점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그 분의 목적을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통해 이루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곧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와 같은 소망은 하나님 자신이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계시한 구약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사상은 구약성서의 신적 계시와 신앙의 대망 가운데 깊이 잠재해 있었다고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이러한 대망은 곧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에 근거해 하나님은 좀 더 강하고 종말론적인 의미에서의 왕이 될 것이라는 대망 사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정왕국으로 말해지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하나님의 통치 사상에 의한 것으로써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장차 올 미래에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오셔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소망이 피력된 것이다.
결국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하는 나라, 온 세상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라는 대망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메시아적 예언은 미래에 참다운 하나님의 왕국이 메시아 중심으로 설립되어질 것을 제시하는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는 평화의 통치자로 오시고(사 11:1~9), 그의 왕권은 초자연적이며 신적이고, 영원한 특징을 갖는 것이다(미 5:1~9).

특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아 대망사상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근거를 형성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선포했다. 평화의 그 날이 오면 모든 인간적인 갈등이나 사회적인 문제가 없고, 악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와 안전이 미래에 약속됐다고 믿은 것이다. 김회권도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절대 선언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죄, 악, 고난, 질병과 죽음, 전쟁 패배와 포로살이로부터의 구출과 해방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복음은 우주의 통치자인 하나님의 왕적 칙령으로써 하나님 없는 상황이 종식되며,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작동할 것이라는 선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와 같은 묵시와 예언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됐다. 마태는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고 기록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언제, 어떤 모양으로 임하는지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도 다양한 사역과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특정한 단어로 설명하기는 매우 힘들다.

특히 로마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며 하나님 나라를 현재 각자가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실체로까지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여되는 유업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영적 상태이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 때 얻을 수 있는 것으로써 ‘이미’라는 현재성과 ‘아직’이라는 미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조지 래드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체이면서(마 12:28), 미래적 축복(고전 15:50), 다시 태어난 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요 3:3) 영적인 내적 축복이면서(롬 14:17) 또한 이 세상 나라의 통치(계 11:15)와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람들이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현재적 영역이면서 나중에 들어갈 수 있는 미래적 영역(마 8:11), 믿는 자에게 상속되는 미래적 축복의 나라이면서(눅 12:32), 현재에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나라(막 10:15)라고 강조한다.

3. 하나님 나라의 어원적 의미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성과 풍요로움은 하나님 나라를 섣불리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어원적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그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나님 나라는 ‘말쿠트’(malkeuth)다. 약 200회 정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인간 왕에게 적용될 경우, 주로 ‘통치’, ‘지배’, ‘왕권’ 등과 같은 추상적, 역동적 의미로 사용됐다. 하지만 지극히 부차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공간적 영역, 지역, 영토의 의미로도 쓰였다.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바실레이아’(basileia)’라로 표현한다. 히브리어인 ‘말쿠트’와 동일하게 추상적, 역동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는 구약의 ‘말쿠트’와 신약의 ‘바실레이아’가 갖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과 ‘왕권’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는 항상 통치, 다스림 또는 주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사상이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만물의 주인이시다. 눈에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주인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도 복종해야 하는 만민의 주인이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만 주인이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에도 주인이신 것이다.

구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를 통해 당신의 열방을 드러내려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거역하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이들을 돌이키시려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북 이스라엘, 남 유다에 이른다. 이러한 심판과 바빌론 포로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 선지자’, 또는 ‘다윗의 자손’, ‘여호와의 종’을 간절히 기다린다. 바로 ‘주의 날’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부르시며 악인들과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의인들과 그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서 깨어졌던 만물이 회복될 것을 약속하신다. 구약은 이렇게 메시아를 대망하며 마무리된다.

그리고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신약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의 이러한 대망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지 끊임없이 가르치셨다. 복음서는 단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시킨 메시아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에 대한 증언임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다고 반복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사복음서는 거의 ‘하나님 나라’로 표기하고 일부는 ‘천국’으로 표시하고 있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기록됐고, 마태복음에서는 네 곳(12:28, 19:24, 21:31, 43)을 제외하고 ‘천국’이라고 기록됐다.

결국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대망했던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했으며, 현재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백성들을 통해 이루어지심을 통해 자라가고 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또는 어원적 의미는 ‘왕 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통치, 주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한 왕이시며 만물을 다스린다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 개념이기도 하며, 단순히 영역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주권적인 나라,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자라면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 복을 누리는 곳, 마지막 날 예수님의 재림 후에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4.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모두 104번 사용되고 있는데, 거의 전폭적으로 예수 자신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다. 그렇다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즉 아직 기다려야 하는 미래적인 나라인 것이 반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종이라는 소명을 받은 후 고향 땅에 돌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이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는 선포이었다(막 1:14~15, 마 4:17).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한 도래에 대한 기대나 준비를 위한 선언이 아니라 선포하는 예수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착했다는 선언이며, 지금 예수 안에서 도착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단의 요청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예수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 물었다(눅 17:20).
그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깨우치셨다(눅 17:20~21).
당대 유대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의 때와 장소에 관한 두 가지 사상(하나님의 나라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속해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나라라는 사상)에 동의하지 않음을 지적하셨다.

물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의 구현 및 윤리를 표방하는 등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포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이며, 전 세계적이며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는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속적인 나라가 아니며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미 도래했음을 선언하시기도 하셨다(“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눅 11:20).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인간 중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중심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마 5:2), 구하는 자의 것이며(마 6:33),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받드는 자의 것이며(마 18:3, 19:14, 막 10:14, 눅 18:17), 거듭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요 3:5).

그러나 미래에 완성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하며(마 5:10),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하며(마 5:10),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고 선언하셨다(마 7:21).

결국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중심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그 분의 왕권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중심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5.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말씀하셨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6~18).

특히 예수님께서는 ‘에클레시아(ekklesia)’, 곧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규정하셨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내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줘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기초해 있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불가분의 관계는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 확장된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 있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에 따르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일치시키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증표로, 하나님 나라의 봉사자로, 하나님 나라의 ‘선 경험’이 돼야 한다.

양용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제자들의 현재적 삶은 그 자체로서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경성된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지극히 강조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도 매우 확고하게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를 한 순간도 소홀히 하거나 잊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완전한 그 때의 도래를 늘 기다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더욱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실존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면서 예수님의 재림 이후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할 때까지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다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6. 교회의 궁극적 사명

교회,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비록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는 완전한 축복의 상태로 실현되어지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악과의 무서운 싸움 속에서 보증되어지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투쟁을 감당하는 기구인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됐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게 됐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그 지은 죄의 결과로 죽음을 가져다줬다(롬 6:23). 결국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게 창조자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가장 큰 이유이다. 죄인들로 하여금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러내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막 2:17). ‘회개’와 ‘믿음’으로 죄인인 인생이 사단의 나라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선포하셨고, 친히 십자가에서 그 길을 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을 왕으로 섬기는 삶의 방식, 곧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았던 삶의 모습을 회개하고,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즉, 피조물로서의 인생이 가진 궁핍함에서 창조주의 부요함으로 들어가며, 인생의 유한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통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교회, 즉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앞으로 임하시게 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과 환경,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시켜야 하는 청지기의 사명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누리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에 기초해 하나님의 법을 찾고 따라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은 항상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하시고 항생 행동하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존재하고 항상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산다는 것은 결국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김형국은 “교회는 단지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수용하고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되고(마 5:14~16, 엡 5:8~9, 빌 2:15, 골 1:12, 살전 5:5), 우리 가운데 있는 소망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사명을 갖고 있다(벧전 3:15)”고 강조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온전한 회심을 이루어야 한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값싼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총체적인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섬기는 사역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답게 하기 위해 교회에 소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며 그 분을 닮아갈 것인지 고민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

7. 결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주권적인 나라,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에게 주어진 나라다.
그 나라는 이미 임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최종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갈망해야 한다. 그 때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속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백성공동체이며 하나님 나라의 표지인 교회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공동체로서 예수님의 삶을 뒤따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소개할 수 있는 힘과 능력, 촉매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들어왔다고 선언해야 한다.

교회는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현재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인 공동체다. 예수님의 부활부터 고대하는 재림, 곧 종말 사이에 위치한 이 마지막 때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끌어야 한다.

교회는 이미 설립된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증거자로서 곧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에 대한 증거자로서 세상 속에 보내어졌다.
따라서 교회는 이미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승리와 성취된 승리를 믿고, 아직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

특히 인간사회가 이미 세워놓은 모든 장벽들을 초월하는 신앙공동체를 세상 앞에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의 흔적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는 지체를 넘어서서 세상 속에 선행과 형제사랑을 확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복음을 교회 안에 담아둘 수 없는 것처럼 그 아가페(사랑)를 더 이상 교회 안에 가두어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기 위해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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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신앙


노동(勞動)과 신앙(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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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에 나타난 노동(일)에 관하여

잠언에서는 일하지 않는 것과 일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지혜의 잠언은 우리 일상에서의 일하는 것 즉, 노동에 대하여 귀한 사실들을 총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와 함께 노동과 함께 그 주체인 노동에 대해서도 말한다.
본 소고에서는 잠언 10-31장까지에서 노동에 해당하는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먼저 일하지 않는 것 즉, 게으름에 대하여 그 특성과 주어지는 결과를 살펴보며, 그 다음으로 일하지 않는 자와 대조되는 일하는 자에 대하여 그 해당하는 구절들을 생각해보고 일하는 자의 특징과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댓가와 일하는 자가 어떠한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일하지 않는 것(게으름)

1) 일하지 않는 자(게으른 자)의 특성

-게으른 자는 제가 사냥한 것도 굽지 않지만, / 부지런한 사람은 귀중한 재산을 얻는다.(12:27)
-아무리 바랄지라도 게으름뱅이의 갈망은 헛되지만 / 부지런한 이의 갈망은 충족된다.(13:4)
-게으르면 깊은 잠에만 빠지고 / 나태하면 배를 곯는다.(19:15)
-게으름뱅이는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 입으로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19:24)
-게으름뱅이는 제 철에 밭을 갈지 않고 / 수확철에 소출을 찾지만 아무것도 없다.(20:4)
-잠을 좋아하지 말아라 가난해진다. /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20:13)
-게으름뱅이의 욕심은 그를 죽이니 /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21:25)
-게으름뱅이는 “밖에 사자가 있어! / 길거리에 나가면 난 찢겨 죽어!” 하고 말한다.(22:13)
-게으름뱅이는 “거리에 사자 있어! / 길거리에 사자가 있어!” 하고 말한다.(26:13)
-문짝이 돌쩌귀에 달려 돌아가듯 / 게으름뱅이는 잠자리에서만 뒹군다.(26:14)
-게으름뱅이는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 입으로 가져가기조차 힘들어 한다.(26:15)
-게으름뱅이는 재치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 자기가 더 지혜로운 줄 안다.(26:16)

■ 이상의 구절들은 게으른 자의 특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해 주고 있다.

첫째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그들은 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20:13).

그들은 죽음과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고 하지 않는다(19:15).
그들은 늘 침상에서 생활을 하며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다(26:14).
완전히 짐승적인 게으름이다.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면 잠이 아주 유해하고 파멸을 초래하는 습관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상실하여 빈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둘째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이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들이다(22:13; 26:13).

그는 자신의 변명을 믿게 되고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한다.
그런데 그런 변명들은 터무니가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이 늘어놓는 그 변명에 대하여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들이다(26:16).
그들은 수월한 것을 선택하는 습관을 들임으로(‘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20:4) 그의 사업만큼 그의 인격도 손상된다.
  
셋째 게으른 자들은 게으름의 정도가 끝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바로 앞에 있는 그릇에도 손을 넣지 않는 극도의 게으름을 가지게 된다.
전혀 힘을 쓰지 않는 자들이다(19:24; 26:15).
그들은 늘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지 절대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자들이다(13:4).
그래서 그들은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적당한 때를 놓치고(20:4), 아예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거부해 버린다(21:25).
  
만일 그들이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시작부터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곧 추진력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사냥감은 부패해가고(12:27), 그의 음식은 차게 식는다(19:24; 26:15).

결과적으로 그는 만족되지 못한 갈망으로 편안함이 없고(13:4; 21:25, 26), 마치 ‘가시 울타리’같이 얽히는 그의 여러 가지 일들 앞에서 무력하고(15:19), 그를 고용하는 사람에게 많은 비용이 들게 하고(18:9)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10:26) 무용한 자이다.

2) 게으른 자가 맞이하는 결과

-게으른 손바닥은 가난을 지어내고 / 부지런한 이의 손은 부를 가져온다.(10:4)
-여름에 모아들이는 이는 사려 깊은 아들이고 / 수확철에 잠만 자는 자는 수치스러운 아들이다.(10:5)
-부지런한 이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 게으른 자는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12:2)
-제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 파괴자의 형제이다.(18:9)
-잠을 좋아하지 말아라. 가난해진다. /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20:13)
-게으름뱅이의 욕심은 그를 죽이니 /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21:25)
-내가 게으른 사람의 밭과 / 지각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갔는데
보아라, 온통 엉겅퀴가 우거지고 / 쐐기풀이 전부 뒤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24:30-31)
-‘조금만 더 자자. 눈을 조금만 더 붙이자. /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24:33-34)

■ 이상의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게으른 자가 맞이하게 되는 결과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런데 그 행동은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손을 게을리 할 때, 주어지는 결과는 바로 가난인 것이다(10:4; 20:13; 24:33-34). 손을 게을리 하는 자는 다시 말해서 일을 게을리 하는 자이다. 그리고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자기가 맡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는 자의 역할을 한다(18:9).
  또한 그는 힘든 일을 피함으로 천한 노역을 자초한다(12:24). 그리고 꾸물대는 버릇으로 말미암아 그의 무질서한 삶은 뒤집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황무지가 된 것이다(24:30, 31).

2. 노동(일)
-게으른 손은 가난을 지어내고 / 부지런한 이의 손은 부를 가져온다(10:4)
-여름에 모아들이는 이는 사려깊은 아들이고 / 수확철에 잠만 자는 자는 수치스러운 아들이다(10:5)
-자기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이 넉넉하지만 / 헛것을 좇는 자는 지각이 없다(12:11)
-자기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으로 배부르고 / 헛것을 좇는 자는 가난으로 배부른다(28:19)
-부지런한 이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 게으른 자는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12:24)
-모든 노고에는 이득이 생기는 법이지만 / 입술만 놀리면 궁핍해질 뿐이다(14:23)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6:3)
-너는 제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 그런 이는 임금들을 섬기고 / 하찮은 이들을 섬기지 않는다.(22:29)
-바깥일을 정리하고 / 밭일을 준비한 다음 / 집을 지어라(24:27)
-네 양떼의 형편을 잘 파악하고 / 가축 떼에게 관심을 기울여라(27:23)

1) 일하는 자 의 특징
  첫째,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부지런하며 성실하다(12;11, 28:19, 27:23). 둘째, 시기와 때를 따라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며 행한다(10:4-5). 셋째 말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행동하는 것이 앞선다(14:23). 넷째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재빠르고 민첩하게 행한다. 이것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요령을 알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일에 달인이 됨을 말한다(22:29).

2) 일하는 자에게 결과로 주어지는 대가
  첫째 양식이 넉넉하고 풍부해진다(12:11, 28:19). 둘째 이득이 주어진다(14:23). 셋째 일함을 통해서 얻어진 이익이 쌓이게 되므로 부를 가져온다(10:4). 넷째 남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12:24). 다섯째 존귀한 자에게 쓰임을 받아 귀중한 사람이 된다(22:29). 여섯째 가정을 든든히 세운다(24:27).

3) 일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태도

  첫째 주어진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27:23). 관심은 곧 일의 동기이며 일의 시작이다. 맡겨진 일에 관심이 없다면 일하지 않을 것이다. 관심을 기울일 때 해야 할 일이 보이고 더욱 정성스럽게 힘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둘째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10:4-5). 일은 그 시기와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것처럼 특별히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치는 일은 때를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에 대한 효과와 능률이 떨어지게 된다.
  셋째 모든 일의 시작과 결과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16:3). 이것은 우리의 일의 성취가 우리의 노력과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게으른 자)와 일하는 자(부지런한 자)의 특징이 너무도 뚜렷하게 들어나고 그 특징이 서로 상반되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잠자기를 좋아하고, 몸을 움직이기 조차 싫어한다.
그러나 일하는 자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민첩하다.
또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그 결과가 가난이며 남의 지배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
하지만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양식의 넉넉함과 부와 높은 지위 등이다.
우리는 잠언의 노동(일)을 싫어하는 자와 노동(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자를 통해서 어떤 삶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 될 것인지를 미리 우리에게 예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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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에 관한 성경연구

1. 일해야 하는 이유

1)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에(창 2:5-15)
2)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에(창 3:16,17)
3)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출 20:9, 마21:28)
4) 내일을 대비하여야 하기 때문에(잠 6:6-8)
5) 일할 날이 길지 않기 때문에(시 90:10)

2. 노동이 주는 유익

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됨(출 20:9)
2) 수고에 따른 삯을 받음(레19:13, 잠14:23)
3)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음(시128:2)
4) 노동 후 낙을 누릴 수 있음(전3:13)
5) 사람들의 칭찬을 받음(잠31:31)
6) 잠을 달게 잠(전5:12)
7)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게 됨(전9:9)
8) 빈궁한 자를 구제할 수 있음(행20:35, 엡4:28)

3. 일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엿새동안 일하고 주일은 지킬 것(출20:9-11)
2) 즐겨 일할 것(삿5:2)
3) 자원하여 일할 것(느11:2)
4) 실망하지 않도록 수고할 것(전2:20)
5) 힘을 다하여 일할 것(전9:10)
6) 헛된 수고가 되지 않도록 할 것(사49:4)
7) 힘써 수고한 후 주께 나아가 안식할 것(마11:28)
8) 타인의 일을 간섭하지 말 것(마20:12-14)
9) 말은 일에 등한히 말 것(마21:28,29)
10) 능력에 맞게 일할 것(마25:22,23)
11)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 것(요6:27)
12)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할 것(고전16:16)
13)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할 것(엡4:28)
14)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 것(살후3:10)
15) 규모 있게 일할 것(살후3:11)
16) 종요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을 것(살후3:12)
17)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것(딤후2:15)

4. 일을 위해 고용된 자의 자세

1) 자기 할 일에 근신할 것(잠22:29)
2) 다른 사람의 보수와 비교하지 말 것(마20:12,13)
3) 정한 보수에 만족할 것(눅3:14)
4) 상전을 공경할 것(딤전6:1)

5. 성도가 쉬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해야 할 영적인 일

1) 기도하는 일(삼상7:8, 삼상12:23, 살전5:17)
2) 생명을 얻기 위한 수고(잠10:16)
3) 좋은 상을 얻기 위한 모든 일(전4:9)
4) 구제하는 일(전11:1,2)
5) 영적 파숫군으로서의 직무(사62:6)
6) 그리스도를 닮는 일(요13:14)
7) 말씀을 가르치는 일(행5:42, 행20:31)
8) 전도하는 일(행5:42)
9) 말씀을 상고하는 일(행17:11)
10) 위로하는 일(고후7:7, 살전4:18)
11)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골1:29)
12) 감사하는 일(살전2:13)
13) 권면하는 일(딛1:8, 딛2:6, 딛2:15)
14) 봉사하는 일(벧전4:10,11)
15) 찬송하는 일(계4:8)

6. 영적 수고의 결과

1) 복음이 전파됨(살전2:9)
2) 상급을 받음(눅6:35)
3) 영생에 이름(잠10:16)
4) 장차 수고를 그치고 영원히 안식함(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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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현재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행위


하나님의 노동은 인간의 존재이유와 정의에 대한 답변의 핵심
성경은 착취와 억압 반대하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쉼 보장

경제적 위기 때문일까. 실업률이 높아졌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도 정규직 임금의 50~70%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도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정규직 또한 열심히 일을 하지만 임금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하기보다는 노동에 대해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노동에 대한 생각과 노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한다. 최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평화누리와 함께 ‘노동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하는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연속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일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일(노동)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 느헤미야 연구위원 김근주 박사는 “사람이 노동을 하는 것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신구약 성경은 창조하신 세상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고하게 증거하고 있다”며 “온 세상을 지으시고 주관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노동이야말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이며, 정의를 구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경작하고 지키도록, 노동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며 “일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다. 노동은 노동이 가져오는 어떤 열매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며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결국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존재를 부정하며,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창조질서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주신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노동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경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일하다’는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다’, ‘예배하다’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쉼과 삯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노동은 억압과 착취가 된다. 김 박사는 “성경은 노동에 대한 대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쉼은 노동과 반드시 결합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며 “노동자에게 삯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 자본과 자본으로 형성되는 제물만이 삶의 안정성을 확보해준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쉴 새 없이 노동하도록 내모는 지배자와 권력자들의 행동은 성경에 반하는 억압과 착취가 될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어 “노동은 사회적으로 실패하거나 낮은 계층에 속한 이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며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노동자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노동하는 우리 이웃들과 소통하는 교회의 노력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참된 노동은 예수의 제자됨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도 다양한 직업들이 있었고, 예수님 또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직업을 ‘목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석민 박사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소개한다”고 설명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조 박사는 “요한복음에 소개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으로 인간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으로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며 “물론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자신의 본래 직업인 목수를 일은 하지는 않으셨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노동에 대해 어떤 가치를 부여했을까. 임금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품삯을 받은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으며, 노동하는 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쉼을 보장하셨다.

조 박사는 “예수님은 당시 노동자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권리, 곧 노동의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품삯과 노동에 따른 쉼을 역설하시며 노동자들을 옹호하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복음서는 노동이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와 공동체의 경제상황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며 “미래에 대한 개인적인 불안과 걱정을 위한 노동은 복음서가 가르치는 노동의 원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추수 노동자로 사는 것, 예수의 제자됨이 노동을 대신하는 새로운 노동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노동의 신학과 윤리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위임 혹은 문화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동춘 박사는 “노동은 인간이 자연을 경작하고, 다스림을 통해 역사와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총체적인 활동”이라며 “노동의 위임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에 개입하라는 요구이며,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을 책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행위”임을 강조했다.

특히 “노동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발생된 형벌과 저주라고 보는 신학적 오해를 교정해야 한다”며 “노동은 죄의 저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에 있으며, 죄의 억제와 잠재력의 발현(창조적 노동)과 같은 신적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고 피력했다.

김 박사는 노동은 그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 선을 제공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특정 ‘직업’에만 하나님의 소명이 있지 않고, 주님은 모든 직업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직업과 기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노동윤리에 대해 설명한 그는 자본가 중심의 노동관과 같은 편향된 노동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의 신실성을 요구하는 청지기적 노동관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 박사는 “청지기 윤리관은 마치 인간이 노동환경에서 상당한 자율성과 선택의 융통성이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수 있는 한계를 가질 수 있지만 일터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듯이 일하도록 도전을 준다”고 설명했다.

인권적 차원의 노동윤리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성경은 일용 노동자들(품군)에게 정당한 임금을 체납하거나 그들을 학대하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며 “노동자는 성경계시의 중심이다. 노동자에 대한 바른 대우는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몫이며, 권리의 문제”라고 피력했다.

김 박사는 “한국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이 노동의 착취와 억눌림으로부터 신음하지 않도록, 노동하는 인간이 존엄성과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비인간화된 노동구조를 대행할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야 한다”며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사회적 시장경제 등 대안적 노동사회 창출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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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나

현재 우리나라는 실업률은 높아지고 취업률은 낮아지는 실업 문제가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막상 취업을 해도 일자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되어 있어서 비정규직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와 노동 착취가 발생하고 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이 2배나 차이가 나는 임금 불평등이 벌어지고 있다.

아울러 양질의 고소득 일자리는 줄어드는 반면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같은 불안한 저소득 일자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정규직으로 취업해 임금을 제대로 받아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과거에 비해 실질 임금은 계속 떨어지고 파업과 노사 갈등이 만연하고 있다. 아울러 이주민 노동자에 대한 노동 착취와 인권 침해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임금 소득 불평등은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라고 한다.

노동의 기원, 하나님의 노동과 인간의 노동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노동은 원래 이런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 원래 노동은 선하고 거룩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노동(일)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나오며 창조와 함께 시작한다. 하나님은 노동(일)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일하셨고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맡기면서 노동하라고 말씀하신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노동을 통해 수행된다. 인간은 노동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마땅히 거룩한 노동을 해야 한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자 창조 세계를 맡아서 관리하고 다스리는 청지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노동하시는 하나님처럼 인간도 노동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노동해야할 책임과 의무, 권리가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이 노동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노동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자 문화 명령

인간의 노동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는 것이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창조 명령이자 문화 명령이다. 노동은 원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본래 목적이다.

하나님의 노동과 관련한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은 첫 장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말씀한다. 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 8:3)",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시 8:6)",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며 하나님이 손으로 노동하시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묘사한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화(文化) 명령이다. 문화 명령은 곧 노동하라는 명령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노동의 목적 변질

노동은 원래 거룩하고 선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과 타락으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된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노동 자체가 저주를 받거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이 저주를 받아 땀 흘려 노동해도 이 세상에는 늘 빈곤과 굶주림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했어도 땀 흘려 노동하면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노동에 대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고 말씀한다.

인간이 다스릴 대상인 땅이 저주를 받아 노동이 수고로움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계속 땀 흘려 노동하여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원래 의도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즐거움과 만족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 이후 피조물을 섬기면서 자연의 물질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어리석은 우상숭배(물신숭배)를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노동의 본질은 여전히 거룩함

인간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아 노동이 수고로움이 되고 인간의 우상숭배(물신숭배)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노동 그 자체가 타락하거나 바뀐 것은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 교회와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한 섬김과 봉사의 일이다.

노동은 지금도 거룩한 것이며 다른 사람과 모든 창조물에 대한 섬김과 봉사다. 성 베네딕트가 말한 것처럼 노동이 예배(기도)요 예배(기도)가 노동이다. 예배(기도)와 노동을 분리하는 것은 성속을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오류다.

예배와 기도는 거룩하고 노동은 비천한 것이라는 중세 가톨릭의 수도원적인 성속 이원론을 깬 사람들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세상의 모든 노동이 다 거룩하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알맹이다. 즉 자신의 소명과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몸소 목수로서 노동하셨고, 어부였던 베드로, 천막을 만들면서 사도의 역할을 한 바울도 모두 노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몸으로 노동한 이 분들이 바로 교회의 머리와 대들보가 되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눅 10: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유명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 말씀에서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일을 하고 싶어도 아무도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일할 수 없는 마지막 남은 사람에게도 동일한 노동권과 생존권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노동의 목적에 맞게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 교회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한 대가를 받아 사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물론 돈이 목적이 되면 잘못된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 교회를 위해 노동하고 일한 대가를 받아 사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노동해서 만들어 낸 것 혹은 이루어 낸 것은 모두 선하고 좋은 일이다. 그것이 목회든 선교든 다른 노동이든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인간이 노동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살아가도록 인간을 만드셨다. 이렇듯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의 생명을 살리고 섬기는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하다.

노동과 안식, 하나님의 안식과 인간의 안식

하나님께서는 몸소 노동하여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신다. 성경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1~3)"고 말씀한다.

안식은 창세기 말씀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십계명의 제4계명에도 나온다. 성경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고 말씀한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 즉 노동을 할 것과 함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즉 안식할 것을 함께 말씀한다. 안식은 노동처럼 원래 창조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이다.

예수님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안식일도 창조하셨다. 따라서 천지의 주인이 예수님이듯 안식일의 주인도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일하기를 싫어하여 불로소득으로 살려는 것은 잘못

안식일에는 노동을 멈추고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는 말씀은 노동하지 않고 사는 것을 금한다. 즉 땀 흘려 노동하여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것으로만 살아가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하여 만든 결과를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취하려는 부동산 투기나 여러 불로소득으로 얻으려는 마음은 성경이 금하는 잘못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나 여러 불로소득을 통해 다른 사람이 만든 노동의 열매를 취하여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일하기를 싫어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의 열매로만 살아가려는 잘못된 사람이다.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노동하여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문화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희년,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림과 노동 착취 금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정상적인 노동은 자기 땅에서 땀 흘려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토지권은 노동권과 연결된다. 일할 수 있는 자기 땅이 없으면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침해된다. 토지권이 없으면 노동권도 침해되는 것이다. 희년 말씀에서는 가난해져서 희년까지 땅을 판 형제를 보살피고(레 25:25) 품꾼(임금 노동자)으로 일을 시키면서 일한 대가를 주도록 말씀한다(레 25:39, 40).

성경에서는 품꾼을 잘 대우하고 일한 그날의 품삯을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한다(신 24:14~15).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은 예배와 공공의 업무를 하고 십일조를 받아서 살도록 말씀한다(민 18:21). 또 땅이 없는 나그네와 이방인들에게도 일거리를 주고 그들을 압제하거나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노동/고용에 관한 성경의 희년 말씀에서는 희년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품꾼과 종의 상태에서 해방되어(레 25:33~55) 자신의 땅과 집, 가족을 회복한다(레 25:2~34). 이런 희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에게 토지와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여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만든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희년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희년 말씀에서는 빈곤의 심화 단계에 따른 규례들이 자세히 나와 있다. 가난하게 되어 토지를 팔게 된 경우(레 25:25~28), 집을 팔게 된 경우(레 25:29~34), 이스라엘 형제가 가난하여 함께 머물게 된 경우(레 25:35~38), 형제가 품꾼이 된 경우(레 25:39~46),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된 경우(레 25:47~55)에 따른 규례들이다. 이 중에서 노동에 해당하는 사람의 몸을 속량하는 규례(레 25:35~55)를 살펴보자.

이스라엘 형제가 가난해져서 함께 머물 경우

먼저 형제가 가난해져서 함께 머물게 될 경우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35~38)."

땅을 팔고 난 후에도 가난한 형제가 자립을 할 수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이자 없이 돈을 빌려 주고 함께 데리고 살 의무가 있다. 이스라엘은 같은 동족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종처럼 부리면서 노동을 시킬 수 없다. 이런 희년 말씀에서 노동 착취 금지라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 형제가 품꾼이 될 경우

두 번째는 형제가 품꾼이 될 경우다.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네 종은 남녀를 막론하고 네 사방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사 올 것이며 또 너희 중에 거류하는 동거인들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사 올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자들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의 소유가 될지니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가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레 25:39~46)."

가난한 친족에게 더 이상 팔거나 담보 잡힐 땅이 없는 경우 그 사람과 가족은 부유한 친족 밑에서 희년까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팔면서 품꾼 즉 고용된 노동자가 된다. 이스라엘은 땅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자신의 몸을 파는 종이나 노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희년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자신의 땅을 회복하여 자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희년까지 자신의 노동력을 판 품꾼은 종처럼 다루어서는 안 되고 입주한 고용인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런 품꾼의 상태는 한 세대를 넘기지 않고 다음 희년까지만 지속한다. 같은 이스라엘 동족끼리는 종을 삼을 수 없고 고용된 노동자(품꾼) 신분으로 대우해야 한다.

이 말씀에서도 같은 이스라엘 동족끼리는 엄하게 부리면서 노동 착취를 금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오는 희년까지 노동의 대가를 받는 품꾼으로 살다가 희년이 되면 품꾼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 가족과 함께 자신의 땅으로 떠나 완전한 자유를 회복한다.

토지가 회복되어야 완전한 자유와 노동권이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함께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동 착취 금지와 함께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유로운 노동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될 경우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될 경우다.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 자와 계산하여 그 연수를 따라서 그 몸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로 팔린 값에서 속량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대로 속량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주인은 그를 매년의 삯꾼과 같이 여기고 네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47~55)."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되면 친족은 책임지고 그 사람을 속량(무르기)할 의무가 있다. 친족들은 책임지고 어려움에 처한 친족을 속량하여 땅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또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채권자라도 이스라엘 채무자에게 하듯이 대하게 하고 희년의 규정이 적용되도록 감시할 의무가 있었다.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된 경우에는 토지 무르기처럼 몸의 무르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몸의 무르기 즉 몸의 속량 규례는 토지 무르기 순서와 같다. 먼저 친족(goel)이 몸값을 대신 치르고 속량해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부유해졌을 때 자기가 직접 몸값을 다시 주고 자유롭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품꾼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 땅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일하는 자유노동자 된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의 품꾼이 되면 이방인 주인은 그를 엄하게 부리면서 노동 착취를 해서는 안 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품삯을 주고 인격적 대우를 할 것을 말씀한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사람의 종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한다.

품꾼이나 종이 되었어도 속량(무르기)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거나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다시 땅과 몸의 자유를 회복한다. 이처럼 희년 노동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노동 착취 금지와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유노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노동 착취 금지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관한 성경 말씀

성경에는 노동에 관한 희년 말씀뿐만 아니라 노동 착취를 금지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것을 명령하는 많은 말씀이 있다. 대표적인 말씀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은 여러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노동 착취 금지와 일한 대가를 제대로 줄 것,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랑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1~23)."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4~15)."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9)."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말 3:5)."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말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먼저 보장하고 자기 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며 살 것을 말씀한다. 즉 토지와 노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고 보장하라는 것이다.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먼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래서 희년 말씀에서는 몸의 해방과 땅의 회복을 함께 명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한 노동의 권리를 누리고 노동의 의무를 다하려면 먼저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토지/주택(부동산)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사회에서는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 모든 사람을 위해 쓰는 토지 가치 공유를 통해 공평한 토지권을 보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노동문제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리가 현대에 맞게 적용되는 것이다.

노동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원칙, 원리는 자기 땅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고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현대사회에 적용하려면 노동의 결과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법과 제도를 실시하면 된다.

예를 들어 땀 흘려 일한 노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감세나 면세를 해 줌으로써 노동의 결과를 보장해 줄 수 있다. 또 땀 흘려 열심히 일하려는 노동자를 우대 및 장려하고 노동 착취를 막을 수 있는 노동법과 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 실업자가 발생하면 직업 재교육과 일자리 알선,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하여 다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한다.

희년의 노동 정의 실천하기

자기 노동의 열매를 보장하고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과 희년 말씀을 정부가 법과 제도로 실시하기 전에라도 개인과 공동체, 교회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실천할 수 있다. 우선 고용주는 이윤 추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용 창출과 노동자의 복지 향상을 핵심 목표로 사업을 경영한다.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켰으면 노동자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충분히 주면서 노동 착취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또 회사 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혹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더라도 차별과 소외를 받지 않도록 힘쓴다.

고용주는 노동자가 쉬지 않고 계속 일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안식할 수 있도록 주말 노동은 하지 않도록 힘쓰고 회사 사정에 맞춰 노동자의 안식과 재충전을 위한 월차 휴가, 안식월 휴가, 안식년 휴가를 도입한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단지 돈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 의식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돌보며 생산 활동을 한다. 아울러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노동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교회와 공동체, 시민사회는 실업자에 대한 일자리 상담 및 알선, 의료 서비스 및 정신적 상담, 물질적 도움, 자활 지원 등을 통해 도울 수 있다. 개인은 실업 상태에 빠졌을 때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자기 계발에도 힘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유익과 덕을 끼치지 않는 사업이나 일(음란 퇴폐 산업, 도박 등 사행성 산업, 조직 폭력, 불량 식품 및 불량 상품 제조/판매 등)은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아울러 자신은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를 가로채는 일(부동산 투기를 비롯한 각종 투기, 다단계 사업, 각종 사기성 사업)은 하지 않으며 정부는 이런 사업은 규제하거나 금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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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성경(聖經)

주후 2015. 2. 8 주일설교
성경(요한복음 5:30-39)

(도입 이야기)
첫돌 잔치 때마다 돌잡이 행사를 합니다. 요즈음은 돌잡이 장난감 세트를 사용합니다. 돌잡이 장난감 세트에는 골프채, 청진기, 마이크, 야구공, 축구공, 판사봉, 연필, 실, 비행기, 마우스, 여자 아이를 위한 미스코리아 왕관이 사용됩니다.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돌잡이 행사를 신앙생활에 비유해서 ‘성경책 한권과 100만 불 시가의 아파트 입주권’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을 잡겠습니까?

이민자들의 삶을 생각할 때 성경책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책을 잡는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과연 누가 성경책을 잡을까요? 왜 성경책을 잡을까요?

극동방송국에서 대북방송을 진행하며 성경읽기라는 프로를 실시합니다. 한번은 담당자 앞으로 북한에서 어느 교인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요지는 사무엘상 15장을 받아쓰지 못했는데 한 번만 더 읽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후 사무엘상 15장을 다시 읽었는데 얼마 후에 ‘이제야 성경 전체를 받아썼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성경은 한 짐입니다. 그래도 성경을 갖게 된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라는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이라면 아파트 입주권보다 성경책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잡을 것인지 나의 신앙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2월의 성구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아멘

성경책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파트 입주권을 잡을 것인가?

성경책을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답이 요한복음 5장 39절에 소개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아멘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제임스 왕 시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임스 왕은 성경을 너무나 좋아 하여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 성경을 킹 제임스 성경이라고 합니다(King James Version).

성경이 번역되었을 때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가 있었는데 사형수가 왕에게 ‘왕이시여! 나는 사형수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왕이 번역한 성경을 한번 읽고 죽고 싶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왕은 사형수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다 읽었느냐?’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형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성경은 모두 3만절이 넘는 데 하루에 한 구절씩 연구하며 읽고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제임스 왕은 깊은 감동을 받아 ‘집에 가서 성경을 다 읽고 죽어라’ 이렇게 말하며 사형수를 석방했다고 합니다.

죽어야 할 사형수가 성경 때문에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잡아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책을 갖고 있기만 해도 정치수용소로 보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성경을 받아 적고 성경을 가졌다는 기쁨으로 감격하며 감사하는 북한 지하 교회의 성도처럼 우리들도 성경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성경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자동차가 흔한 시대이지만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에 자동차를 구입하면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은 자동차 사고가 없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만들 때 반드시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야만 사고가 없도록 자동차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고사를 지내는 까닭은 그렇게 하므로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교인들은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성경찬송을 올려놓고 다니는 것은 안전을 위한 방법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다만 기독교 신앙은 돼지머리가 아니라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십일조, 감사헌금 등과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모르면 성경과 찬송은 돼지머리와 같은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증거’ 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무엇을 증거 합니까?

진리를 증거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계시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 신앙에서 계시를 무시하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는 것과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는 것은 방법만 다를 뿐이지 목적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계시에서 찾아야 합니다. 계시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시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신앙을 확증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느 군 장교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아주 유능한 군인이지만 술을 입에 대면 그때부터 술에 취하여 계속적으로 술을 마시므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알콜 중독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군법에 회부될 위기에 직면하여 군목을 만나 상담했는데 군목이 그 장교에게 성경책을 한 권 주며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성경을 한 장 읽고 그래도 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다시 또 성경 한 장을 읽으라고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얼른 성경책을 펴서 한 장을 읽고 또 읽고 하여 결국 술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법관들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는 김홍섭판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961년 사형선고를 받는 피고인에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나와 피고인 어느 쪽이 죄인인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단죄하는 것이니 이해 바란다.”고 판결을 했다고 합니다. 며칠 뒤 쌀 한 말씩을 들고 생계가 어려운 피고인 가족들을 찾아가 쌀을 건네주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걸 늘 두려워하면서 겸허한 자세를 잃지 않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권위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한번은 김홍섭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가 탄 버스가 검문소 앞에서 멈추었고 순경이 올라와서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순경은 아무래도 그의 행색이 조금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그의 앞에 와서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라고 질문하자 그는 사실대로 “예, 저는 대법원 판사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순경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화를 벌컥 내며 신경질적으로 “당신 지금 누구를 놀리는 거요? 무슨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오? 어디 신분증 한 번 내보시요!” 그러자  신분증을 꺼내어 순경에게 보여주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라도 말했다고 합니다. 순경이 그의 신분증을 보니까 대법원 판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순경은 그 자리에서 경례를 하고 용서를 빌고는 급히 버스에서 내려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성도는 김홍섭 판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잘못된 버릇과 습관이라도 고쳐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 방법 중에 장좌불와라는 수행이 있습니다. 잠을 잘 때에도 그 자리에 앉아서 잠을 자는 수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수행하며 도를 찾는 스님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진리는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읽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읽는 재미가 날마다 지속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이홍머리방을 운영하던 가위손으로 유명한 미용사 이호영씨가 돈을 긁어모으던 직업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도대체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듯이 살던 사람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를 취재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날 때 그곳에서 1500명 이상이 참석하는 헤어쇼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형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장례와 뒤처리를 하느라고 행사를 취소했는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만일 그 때 행사를 진행했다면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사업 문제로 머리가 복잡하여 1996년 1월 처음으로 기도원을 찾았는데 평소 드문드문 읽던 성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마음이 평온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복잡한 머리가 정리되고 완전한 행복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다음해에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호영씨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함께 일을 하던 여자 동업자 홍씨가 날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탈북자 최초로 감리교신학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안란희(42·여)씨의 고백입니다.  

안란희씨는 지난 1년간 국내 거주 중인 탈북자 170명을 대상으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신앙생활 습관 등을 조사해 논문 ‘탈북민들의 기독교신앙과 목회사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국민일보 2월 3일자 30면 참조).

돈이 없어 브로커에게 생명을 담보로 약속하기를 남한에 가서 돈을 벌어 갚아주겠다고 하여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켜는 순간 부탄가스가 폭발하여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유서를 작성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하나님’이란 단어였습니다.
북한과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개신교에 반감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돌봐주던 봉사자에게 부탁해 성경책을 구했고 성경 읽기를 시작하던 중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였을 때 거짓말처럼 병세는 회복되었고 퇴원하자마자 교회를 찾아갔고 신앙생활을 하며 탈북자들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기독교인 탈북자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연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삶을 하나님을 위해 내놓을 수 있습니다.
남한에 2만 5000여 탈북자들을 양육해 통일 후 북한지역 선교의 선봉자가 되도록 돕겠다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는 판사가 아닙니다.
군 장교도 아닙니다.
탈북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생을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에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영생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생명을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은총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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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

구약 929장, 신약 260장 합계 1,189장
 
1.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암모니아스"가 A.D 220년경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 요한복음)를 '장'만 구분 하였습니다.

2. 센트카로의 '후고'가 성경 전체 1,189장의 '장'으로 구분 하였습니다.

'Hugo'는 A.D 1263년에 죽었으며 라틴어 성경 신,구약 929장+260장 1,189장으로 나눈 것 입니다.

3. 로버트 스테반은 A.D 1555년에 성경전체를 장, 절로 구분 하였습니다.
즉 구약 23,026절, 신약 7,957절 합계 30,993절로 나눈 것입니다.

1,189장에는 모두 이의가 없으나 절수에 대해서는 책마다 다릅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다 배불리 먹고(막 6: 41)’ ‘항상 기뻐하라(살전 5 :16)’ 모두가 여섯 자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은 사무엘하 14장 32절 말씀으로 130자 입니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개역성경의 절수는 구약 23,144절 신약 7957절 총 31,101절입니다.

그중에는 (없음)이라고 된 13절을 포함한 것입니다.

삼상 30:31이 끝절이므로 (없음)이 안 나온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참고로 NIV, NKJV 등은 총 31,102절입니다.         


개역 개정판은 (없음) 15절을 포함하여서 31,103절입니다.

고후 13:14이 끝절이므로 (없음)이 안 나오기도 하므로 31,102절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365bible이 가지고 있는 성경 데이타 절은 31.102절로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1533

출애굽기 1213

레위기 859

민수기 1288

신명기 959

여호수아 658

재판관기 618

룻기 85

사무엘상 810

사무엘하 695

열왕기상 816

열왕기하 719

역대기상 942

역대기하 822

에스라 280

느헤미야 406

에스더 167

욥기 1070

시편 2461

잠언 915

전도서 222

솔로몬의 노래 117

이사야 1292

예레미야 1364

예레미야 애가 154

에스겔 1273

다니엘 357

호세아 197

요엘 73

아모스 146

오바댜 21

요나 48

미카 105

나훔 47

하박국 56

스파냐 53

학개 38

스카랴 211

말라키 55

구약 총절수 23,145

----------------------------------------------신약


마태복음 1071

마가복음 678

누가복음 1151

요한복음 879

사도행전 1007

로마서 433

고린도전서 437

고린도후서 257

갈라디아서 149

에베소서 155

빌립보서 104

골로새서 95

데살로니가전서 89

데살로니가후서 47

디모데전서 113

디모데후서 83

디도서 46

빌레몬서 25

히브리서 303

야고보서 108

베드로전서 105

베드로후서 61

요한일서 105

요한이서 13

요한삼서 14

유다서 25

요한계시록 404

신약 총절수 7,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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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총절수 31,102구절


성경의 전체의 장수는 1.189장 

성경 전체의 절수는 31.173절 

구약성경은 929장 구약의 중간 장은 욥기29장 

신약성경은 260장 신약의 중간 장은 로마서 13장 

성경전체의 중간 장이며 가장 짧은 장은 시편117편 

가장 긴장은 시편119편 

하나님의 칭호가 한번도 없는 장은 구약에 에스더 서 

구약성경의 총 구절은 23.214 절 

신약성경은 총7959 절 

성경전체의 중 간 절은 시편118편8절 

구약의 중간 절은 역대하 20장 17절 

구약에 짧은 절은 역대상 1장 25절 

신약의 가장 짧은 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16절 

성경의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장 9절 

서로 비슷한 내용의 장은 

열왕기하 19장과 이사야 37장 

사무엘하 22장과 시편 1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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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통일된 책이지만, 구약과 신약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신,구약은 서로 보완이 됩니다.
구약은 기초가 됩니다.
신약은 그 기초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추가적인 계시를 더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원칙들을 세웁니다.
구약에는 신약에서 성취된 많은 예언들이 들어 있습니다.
구약은 한 백성의 역사를 제공합니다.
신약의 초점은 ‘한 분’에게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구약은 메시아를 예언하고(이사야 53장)
신약은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요한복음 4:25-26).

요한복음 4:25-26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구약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그 율법을 성취하셨는지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5:17; 히브리서 10:9).

구약에서는 주로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로 교회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16:18).

옛 언약 아래에서 (신명기 29:9) 약속된 이 땅의 축복은
새 언약 아래에서는 영적인 축복으로 바뀝니다 (에베소서 1:3).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지만 상당히 모호한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그 모호한 부분들이 분명하여 집니다.

예를 들어,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죽음 (이사야 53 장)과 메시아의 왕국(이사야 26 장)의 설립에 대해 말하였지만, 두 사건의 연대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즉, 메시아의 고통과 왕국의 설립 사이에는 수천년의 기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메시야가 두 번 출현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처음에 오셔서는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고 (그리고 부활하셨고), 두 번째로 오실 때는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이기 때문에, 신약은 구약에서 소개된 원칙들에 대하여 더욱 예리하게 밝혀줍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참 대제사장이신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단번의 희생이 과거의 모든 희생 제사를 대신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구약의 유월절 양 (에스라 6:20)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됩니다 (요한복음 1:29).
구약은 율법을 제시합니다.
신약에서는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율법이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의도되었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로마서 3:19).

구약은 아담 때문에 잃어버린 낙원을 보여줍니다;
신약은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을 통하여 어떻게 낙원이 회복되는지 보여줍니다.

구약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선언하고 (창세기 3장),
신약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서 3-6장). 구약은 메시아의 삶을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서신서는 그분의 생애를 해석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요약하면, 구약은 세상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실 메시아가 오실 수 있도록 토대를 놓습니다 (요한일서 2: 2).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한 다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되돌아 보며 어떻게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 두 언약은 죄를 정죄하면서도 속죄의 희생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거룩하고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공히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가 믿음을 통해 어떻게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15:6; 에베소서 2:8).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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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아담에서 다윗까지, 천지창조에서 세상에 새 생명을 주고, 신적 통치가 땅 끝까지 확대될 성전 건축까지, 족보와 땅, 왕조와 통치는 ‘타나크’(개별 책들을 무작위로 연결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구조와 분명한 시작과 중간 부분과 결말이 있는 하나의 큰 책)의 이야기이며, 다윗의 집에서 누군가 나와 만물의 회복을 가져올 집을 세우기를 기다리면서 여전히 일종의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다.

주석과 함께 줄거리로 제시되는 이 전체 메시지는 ‘타나크’가 잡동사니가 아닌 한 권의 책임을 보여준다.
확실히 ‘타나크’는 많은 개별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본문들은 더 큰 본문의 일부다. 많은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윗 왕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잃어버린 통치를 회복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며, 그 이야기는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야기, 주석, 이야기’ 흐름이 신구약의 공통 구조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구조적 특징 중 하나는 모형론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쓰여졌고, 이 지면에서 모형론에 대해 상세히 다 다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모형론이 사라지게 된 한 가지 확실한 요인은 성경 본문을 포괄적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Frie 1974).

모형론적 특징들은 성경 본문을 하나의 큰 본문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왕조와 통치의 쌍둥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특별히 더 분명해진다. 각각의 경우 보편적인 것에서 특정한 것과 특정한 것에서 다시 보편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지만 그 과업에 실패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는 이스라엘로 대체된다.
한 부족이 이스라엘 내에서, 한 가정이 그 부족에서 선택되고, 결국 한 개인 다윗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다윗과 그의 아들들의 실패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통치의 유익을 가져올 한 의로운 다윗 계열의 왕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통치는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 시작하고, 그런 다음, 가나안 땅이 초점이 되며, 그런 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 특정 장소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과 열방, 심지어 땅 끝까지 확대된다. 공간 및 시간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는 모래시계 이미지가 이런 발전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류와 우주, 이스라엘과 가나안, 다윗과 시온이 구약의 시공간 줄거리라면, 다시 신약에 와서 새로운 다윗인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과 가나안, 인류와 우주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그림이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복음서, 사도행전), 주석(서신서), 이야기(요한계시록)로 된 신약이 구조적으로 ‘타나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록 마지막 책은 엄격히 말해 이야기가 아니지만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에서 시작된 줄거리를 결론까지 가져간다.

신약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포함하는 계보로 시작한다(마 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신약은 ‘타나크’의 시작과 결말을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시킨다. 창세기와 역대기에서 아담, 아브라함,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다윗의 조상들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며, 각각 열네 대로 이루어진 균등한 세 시대, 즉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바벨론에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마 1:1-17)가 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숫자 ‘14’는 다윗을 강조하는데, ‘14’는 다윗의 히브리 이름의 숫자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포로생활에 종결을 가져올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인 새로운 다윗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생은 이방인들에게 빛을 가져다준다.

 

마태복음 2장 2절은 동방에서 떠오른 한 별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민 24:17). 따라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새 아담과 새 이스라엘로서 예수님은 옛 아담과 옛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한다(마 4:1-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에게 승리하고, 언젠가 온 땅이 영토가 될 하나님 왕국을 알린다. 그리고 이것은 고난받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높임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뿐 아니라 온 세계의 권세를 부여받는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서 강조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영토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한다(참조, 마 28:18-20; 단 7:13-14).

 하늘에 닿으려는 바벨탑은 성령을 기다리는 오순절로

 각 복음서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다윗의 집의 두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조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이 오랫동안 고대해 온 후손으로서, 부활을 통해 다윗의 왕좌에 앉는 다윗의 후손이다(눅 1:32; 행 2:30-35).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한나의 예언적인 노래의 성취를 반영하는 이중창을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성전으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화되고 예수님에게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샘솟는 강이 흘러나온다(참조, 요 2:19-22, 7:37-39; 겔 47:1-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교회는 탑으로 땅과 하늘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교만에 의해서가 아닌 생명의 강수인 성령의 은사를 겸손하게 기다림으로써 먼저 형성된다. 그리하여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뒤집어놓고, 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열방 가운데서 잃어버린 조화를 가져올 것임을 보여준다(행 2:1-21; 창 11:1-9).

 

다윗 왕조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점점 더 많은 제자들의 무리가 유대에서 땅 끝까지 퍼져 나간다(행 1:8). 새 다윗에게서 새로운 ‘토라’를 배운 예수님을 믿는 무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마 5:14)가 되어,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자신들의 선한 행위의 빛을 열방에 비추게 된다(21-48절).

 

‘타나크’의 중반부에서 이야기 줄거리는 주석을 제공하기 위해 잠시 중지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약속하는 바벨론에서의 유다 왕의 방면이 마지막 역사적 언급이었다(왕하 25:27-30).

 

마찬가지로 신약의 중반부에서 줄거리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이라는 주석에 의해 중단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바벨론(로마)에서 다윗 계열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급진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허락받은 포로에 대한 마지막 역사적인 언급이다(행 28:30).

 

이 이야기 줄거리에 대한 바울의 주석은 모든 열방으로 구성된 초기 교회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며, 단지 한 나라가 아닌 전 세계가 교회의 기업이라는 것이다(롬 4:13). 시내 산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원하기에는 힘이 없었지만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할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필요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불순종한 자들을 위해 나무에 달리는 선고를 받는 순종적인 아들이다(참조, 갈 3:10-14; 단 21:18-23). 모든 열방과 민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뱀을 정복하는 최후의 싸움이 이어진다(갈 3:28-29; 롬 16:20).

 

신약 끝 부분에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역사’가 다니엘서와 같은 방식으로 재개되는데, 요한계시록은 그 메시지에서 하나의 놀라운 파노라마적인 환상 속에서 ‘타나크’의 광대한 만화경 같은 마지막 날에 대한 환상들을 포착해낸다.

 

인자가 있으며(계 1:13; 단 7:13), 인자의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는데(계 1:13) 인자는 촛대 사이에 있는 분(계 1:13; 슥 4장),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 창 49:9-10), 다윗의 뿌리다. 보좌에 앉으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이 메시아이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 포로 생활과 심판의 끝을 강조한 70주간은 새로운 세상 질서의 탄생에 필요한 과도기인 세 번의 칠중 재난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상 질서는 모든 기대를 초월하는 질서다. 새로운 세상은 에덴동산의 이미지들을 반영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할 만큼 형언할 수 없다. ‘타나크’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성전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과 성도들이다(참조, 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이 생명나무들은 지속적으로 잎이 푸르고 그 잎들은 만국을 치료한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소가 되었다(참조, 렘 3:16-17).

 

그 결과 인간들은 마침내 그들이 잃었던 왕적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이마에 새긴 채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계 22:5). “여호와와 여호와의 백성은 함께 있고 한 몸이 된다”(Barth 1958: 315).

 * 자료 출처 /  스티븐 뎀프스터(캐나다 애틀랜틱 침례대학교의 스튜어트 머리 종교학 교수),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부흥과개혁사)에서


성경(聖經)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 [마태복음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3. [마태복음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4. [마가복음 12: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5. [마가복음 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6. [마가복음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7.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8. [누가복음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9. [누가복음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0. [누가복음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11. [요한복음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2.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3.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14.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15. [요한복음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16.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7. [요한복음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8.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9. [요한복음 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0. [요한복음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1. [요한복음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22. [요한복음 19: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23. [요한복음 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24. [사도행전 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25. [사도행전 8: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26. [사도행전 13: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27. [사도행전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28.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29. [사도행전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30. [사도행전 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31.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2.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33. [로마서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34. [로마서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35. [로마서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37.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8. [고린도전서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39. [갈라디아서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40.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41. [갈라디아서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2.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3:15-16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45. [히브리서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46. [베드로후서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외경에 관하여

양재훈 교수(협성대, 신약학, 초기기독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용하는 성경과 좀 다른 성경을 발견하셔서 좀 당혹스러우셨겠군요. 질문자께서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보고 질문하셨는데, 사실, 이것 말고도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 등 동방교회의 성경도 있습니다. 성경을 말하기 위해 먼저 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오늘날 한국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중요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시기를 크게 살펴보면, (1)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대략 서기 30년 정도), (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대략 서기 30~70년 정도), (3) 복음의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나고 후속 세대들이 이어가던 시기(70~4세기 초 기독교 공인), (4)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서 종교개혁(1517년)까지 시기, (5)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까지의 시기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위의 (1)번,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의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생각하는 신구약 성경전서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두루마리로 된 구약의 성경들을 사용했지요. 예를 들면,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토라도 있었고, 이사야서와 같은 성경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을 때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서 낭독하셨지요(눅 4:17). 그러면 마태복음이나 로마서는요? 물론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 재림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에(막 9:1)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서 후손들에게 전수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바로 (2)번 시기가 이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나 하셨던 일에 관한 이야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요. 물론 당시 대부분 사람이 문맹이었고, 책으로 만드는 비용도 너무 비싸서 안 만든 것뿐만 아니라 못 만든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사역 당시에 살던 제 1세대들이 죽기 시작하고 재림이 지연되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예가 바로 누가복음 1:1-4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복음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성경’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태나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소위 거룩한 말씀(성경)이라는 것은 토라(모세오경)나 예언서 같은 히브리 성경(타나크 TNK)의 말씀이었지, 감히 자신의 복음서를 성경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세기 즈음이 되면 서서히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 사도가 남긴 편지글의 권위가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예가 디모데전서 5:1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타작 마당에서 낟알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5:4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성경 말씀이지요. 그런데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말씀은 구약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거든요(눅 10:7).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까지 가리켜서 “성경에 이르기를”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서서히 성경의 자리로 올라가는 흔적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 사도의 편지도 성경의 권위를 갖기 시작합니다. 베드로후서 3:16을 보면 바울 사도의 편지가 어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바울의 편지도 잘못 해석한다고 경고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성경과 바울의 편지를 나란히 놓고 있는데요, 이것은 바울 서신서가 성경의 권위를 서서히 갖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세기 초, 폴리캅 감독께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말씀들이 여러분에게 감추인 바 없으며, 이 말씀들에 여러분이 잘 양육되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 이 성경들에 기록된 바와 같이, ‘여러분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기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 폴리캅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 12:1

폴리캅 감독께서 남기신 이 글을 보면 에베소서 4:26의 말씀을 가리켜서 성경이라고 합니다. 또한, 2세기 초에 활동했던 순교자 유스티니아누스(Justin Martyr)께서 변증록을 썼는데, 여기에 보면 예배 시간에 성경을 낭독하는 시간이 있는데(딤전 4:13) 그때 사도들의 회고록을 낭독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한곳에 모여서 사도들의 회고나 예언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읽습니다. 그리고 낭독자가 다 낭독하면 집례자가 이 좋은 모범을 따라 살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 후에 모두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기도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집례자는 같은 방식으로 자기의 권한으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회중은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 순교자 유스티니아누스 <1 변증록>, 67.

즉, 2세기 초에 이르면 복음서라든지 바울과 베드로 등 사도들의 편지들이 성경의 권위를 갖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결론이 난 것도 아니고, 정리된 것도 여전히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유다서 1장 14~15절에는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은 에디오피아 정교회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제1 에녹서 1: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제1 에녹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데, 정작 우리가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유다서에서는 이 말씀을 성경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3)번의 시기 즉, 대략 2~4세기가 바로 신약성경이 정리되어가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 많은 문헌이 나오는데요, 소위 신약 외경이라는 문서들이 만들어진 것이 이 시기입니다. 신약성경은 (1) 복음서 (2) 행전 (3) 서신서 (4) 계시록 등 크게 네 장르로 이루어지는데, 신약 외경도 비슷합니다. 신약 외경 복음서는 <마리아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도마 복음서> 등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나 어록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행전 장르의 경우 정경에는 사도행전이 있지만, 외경에는 <베드로행전>, <빌립행전>, <도마행전>, <바울과 테클라행전>, <안드레행전> 등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로마서나 빌립보서, 베드로서신 등 사도들의 편지가 있다면, 신약 외경에도 <베드로가 야고보에게 보낸 편지>, <라오디게아서>, <클레멘스서> 등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경우 신약성경에는 요한계시록이 있지만, 신약 외경에도 <베드로 묵시록>, <바울 묵시록>, <야고보의 비전> , <요한의 비전> 등의 계시록 장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문서들을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함께 신앙의 표준으로 삼기에는 부족하고 심지어 기독교적 영지주의라는 이단적 성향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서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걸러내 졌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2~4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이 외에도 초기 기독교에는 다양한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 규칙을 담고 있는 2세기 초의 문서인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라든지, 다양한 기독교 변증서들이나 이단 반박문 등이 있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교회의 지도자였던 교부나 감독들이 쓴 글도 많고, 그 내용도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읽어도 도움이 될만한 좋은 글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이 글들을 신약 외경의 문서들처럼 이단으로 배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의 표준인 성경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4세기 말 정도에 이르면 교회는 성경(정경)의 목록을 어느 정도 정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27권 신약성경 목록이 최초로 완결되어 나온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감독이 보낸 부활절 서신(367년)입니다. 신약과 구약의 성경 목록은 397년에 있었던 카르타고 공의회 히포 시노드(Hippo Synod)에서 제시되었고,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목록이 일단 완결되기까지 거의 4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그리고 이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구약 목록이 오늘 논의의 발단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86(혹은 587)년에 바빌론 제국에 의해 나라가 망한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제국, 로마제국에 연이어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 이스라엘을 떠난 디아스포라(흩어졌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그 대표적인 예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다소라고 하는 지금의 터키 지역의 도시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세계의 공용언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민자 생활을 하다 보니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모국어를 잊어버리고 그리스어(코이네 그리스어)로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데, 히브리어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이들은 구약의 말씀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지금의 이집트 해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70인역 성경(LXX, 셉투아진트)입니다. 이 성경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입니다.

1세기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사용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바울의 선교사역으로 세워진 이방인 교회 교인이었고, 그들은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라서 이들이 이 70인역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이후로도 이 그리스어 70인역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중심부로 들어오고, 제국의 각 지역 사람들도 이제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시리아어, 콥트어 등 다양한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서로 많이 다르게 되는 등 문제점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4세기 말, 교황 다마수스는 히에로니무스를 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통일된 언어로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게 한 것인데, 히에로니무스(제롬)께서 번역한 이것이 바로 불가타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히에로니무스는 불가타 역본을 만들면서 <므낫세의 기도> 등 70인역에서 몇 개의 문서를 제외했고, 이후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카논 24조(Canon XXIV)를 통해 그 목록이 확정되었는데, 이때 받아들인 구약성경의 목록이 70인역의 목록이 아니라 불가타 성경의 목록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집회서(벤 시라의 지혜), 지혜서(솔로몬의 지혜), 바룩, 토빗, 유딧, 마카베오 상, 마케베오 하 등 총 7개의 문서가 들어있습니다(에스더와 다니엘은 그 내용이 몇 군데 추가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개신교 성경의 에스더와 다니엘이 살짝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가리켜 제2 정경이라고 부릅니다. 이 문서들은 모두 제2 성전기 후반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문서들입니다.

이렇듯 신약성경 27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구약성경 목록이 개신교와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서로 차이를 보입니다. 가톨릭은 서방교회에 해당하고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 등은 동방교회에 속하는데,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 달리 불가타가 아닌 70인역 성경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의 경전에는 서방교회인 가톨릭의 구약성경 목록 외에 추가로 더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동방교회도 어느 정교회인가에 따라 목록이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하여튼, 이렇게 서방 가톨릭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인정한 불가타 바탕의 성경 목록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던 중,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구약성경 목록에 반기를 듭니다(1534년 루터 성경).

히브리 성경에는 맛소라판 성경이 있습니다. “맛소라”라는 말은 ‘전승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요, 히브리어에는 자음만 있지, 모음을 표기하는 문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을 읽는 발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에 자음만 있으니 헷갈리는 겁니다. 한글로 비유를 들자면, ‘ㄷㄹㅁ’ 등 자음만 있으니 이것을 ‘다리미’라고 읽어야 하는지 ‘두루미’라고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이들이 정확한 발음을 위해 글자에 모음을 달아놓았는데, 이 성경이 바로 맛소라판 성경(Masoretic Text)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토빗, 유딧 등과 같은 위의 문서들은 ‘외경’이라고 하여 빼내어서 라틴어 불가타 구약성경을 거부하고 이 맛소라판 히브리 성경의 구성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가 가진 39권 성경 목록이 된 이력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구약성경이 유대교인들이 가진 히브리 성경(타나크)과 같은 내용의 성경이 됩니다(물론 각 문서를 묶는 방식과 문서 배열 순서는 다릅니다만).

가톨릭에서는 그리스어 70인역에서 출발한 라틴어 불가타역을 바탕으로 구약성경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7개의 제2 정경 목록이 포함된 구약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히브리 성경(맛소라판 성경)이 원래(original) 구약성경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내용구성에서는 이 성경을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창세기로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구약성경 목록 순서에서는 70인역의 순서를 따릅니다. 유대인의 성경인 맛소라 판 히브리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해서 역대기로 마무리됩니다. 즉, 창조로 시작해서 다윗의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는 것을 꿈꾸는 구도로 순서를 배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내용은 같아도 순서만큼은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말라기로 끝나는 70인역 성경의 순서를 따릅니다. 즉, 창조로 시작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말라기로 구약성경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신약성경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복음서로 시작합니다(저작 시간 순서로 따지면 신약 27권 중에서 데살로니가전서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즉,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제일 마지막에 넣어서 주님의 재림과 창세기와 대조를 이루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기대합니다.

개신교는 제2정경의 7개 문서를 성경말씀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가톨릭도 이전에는 이 문서들을 제2 경전이라고 하여 따로 떼어놓았는데, 최근에는 구약성경 중간중간에 끼워 넣고 나머지 다른 구약의 문서와 대등한 권위의 성경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 7개의 문서를 비록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서들을 이단 문서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서들은 제2 성전기 후반부에 구약의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신앙 서적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경 66권 외에도 우리의 신앙에 좋은 표본이 되는 문서들도 많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들이 성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문서들이 이단적인 문서라고 보면 안 됩니다. 도리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들로 읽는다면(시중에 나온 개인 간증 서적은 많이 읽으면서 왜 이런 문서들을 읽는 것은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 원본은 어디에 있나요?
민경식 교수 (연세대학교)

1. 원본과 사본, 그리고 본문비평

우선, 첫 번째 질문을 살펴볼까요? “성경은 원본이 없고, 사본만 있다.”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일반 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원본이 없다”는 것은 성경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문헌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수천 년이나 된 책이 오늘날 고스란히 남아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 잃어버렸거나 삭아버렸을 것입니다. 화재로 인해 훼손되는 경우라든지 물에 젖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겠지요.
아주 먼 옛날에는 인쇄기술이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조금 더 앞서기는 하지만, 서구사회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15세기 중엽입니다. 이때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찍어낸 책이 소위 『42행성서』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손으로 베껴서 책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물론 목판인쇄가 있기는 하였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필사한 경험이 있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부활절마다 교인들이 함께 손으로 써서 만든 성경을 봉헌합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책을 만들었습니다. 손으로 베꼈다고 해서, 이것을 “필사본” 또는 “수사본”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사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사본”은 한편으로는 “원본”의 반대 개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쇄본”의 반대 개념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성경의 “원본”을 기록하였겠지요. 구약의 경우, 매우 오랜 기간 구전을 통하여 내려오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베꼈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또 베꼈을 것이고요. 이것이 당시에 책을 만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식이었으니까요. 즉, 한 번 문서화된 것을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신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예수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문서화된 기록들을 수집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하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이를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의 말씀입니다.
“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새번역>)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에 대한 많은 자료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예수의 이야기를 엮어낸 사람들이 많다고 하잖아요(1절). 그런데 그렇게 예수의 이야기를 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의 첫 제자들이나 예수 사건의 목격자들이 아닙니다. 제1세대 목격자들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제2세대)이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2절). 그리고 자신도 이러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한다고 합니다(3절). 그러니 <누가복음> 저자는 제3세대나 제4세대 정도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때 그가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의 “원본”이겠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원본”을 접한 사람들은 이 책을 갖고 싶어 하였고,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서 소장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이 생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본”입니다. <누가복음>을 갖고 싶었던 사람이 단지 한 사람만은 아니었겠지요? 각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마다 <누가복음>을 하나씩 베끼고, 또 필요에 따라서 여러 권을 베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에서 많은 사본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바울의 편지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어? 이거 바울 선생님의 편지 아닙니까? 제가 이거 좀 베껴 가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바울의 편지들도 사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구약의 책들도 비슷한 과정으로 필사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최소한 약 2,000년 전의 문서입니다. 2,000년의 세월 속에서 바울이 처음 썼던 편지들은 언젠가 사라졌습니다. 또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최초의 문서, 즉 복음서 원본들은 사라졌습니다. 물론 구약 문헌들의 첫 원고도 같은 과정 가운데 사라졌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사본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본들이 얼마나 남아있을까요?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다수의 고대문헌들은 사본이 몇 개 없습니다. 플라톤의 작품이 그러하고, 타키투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작품 또한 그러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꽃이요 가장 위대한 작품인 호메루스의 『일리아드』의 사본은 수백 개 정도인데, 신약성경의 사본은 약 25,000개에 달합니다. 이 가운데 원어인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본만도 약 5,700개입니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사본들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으니, 이 수자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신약은 고대의 어느 문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본이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본들 가운데 똑같은 사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베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한 번이라도 손으로 성경을 베껴 써본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잘 이해될 것입니다. 오탈자가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한 줄을 빠뜨리고 베끼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2,000년에 걸쳐 베끼고 베끼는 과정에서 성경의 본문은 원문에서 차금차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러한 방대한 양의 사본들을 하나하나 읽고, 분석하고, 연구해서, 소위 “원문”에 가장 가까울 것 같은 본문을 재구성하였습니다. “본문비평”이라는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작업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본문비평 학자들은 이 고단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의 본문이 원문과 같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더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회복하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이 방법론적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또 새로운 고대의 사본들이 끊임없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정경과 외경, 그리고 정경화과정

두 번째 질문은 “정경화”의 기준이 무엇인가와 관련됩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기독교 세계 안에 유포되었던 고대의 많은 문헌들 가운데 왜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이 되었고, 왜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정경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신약성경에는 4권의 복음서만 포함되어 있지만,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복음서가 수십 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의 작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서들이 언급되어 있거든요. 즉, 텍스트 없이 제목(과 내용 일부)만 전해지는 복음서들이 있습니다. 또한 본문이 전해지는 복음서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대략 20개입니다. 신약의 네 복음서를 포함하여 여러분이 잘 아는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빌립복음』, 『베드로복음』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유다복음』도 2006년에 발표가 되었지요? 이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4개의 복음서만이 최종적으로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정경화”라고 합니다. 우리의 성경에는 하나의 행전만 있지만,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약 20개에 이르는 행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행전』, 『베드로행전』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당시에는 서신교환도 활발하였으며, 이에 우리는 이 당시의 편지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바울의 편지 몇 개와 베드로 등 다른 제자들의 편지 몇 개가 정경에 포함되었고, 나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의 경우도 사정은 같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최종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초기 기독교의 문헌들을 “외경”이라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외경 개념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구약 본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된 마소라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원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을 칠십인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칠십인역에는 마소라 본문에는 없는 책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지혜서, 집회서 등). 구약의 외경은 바로 이것들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들을 가리켜 “제2성경”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문서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이 정경과 외경을 갈라놓았을까요?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있습니다. 오래된 문서이어야 한다는 “고대성”, 사도들이 저술한 문서이어야 한다는 “사도성”, 당시 공교회의 신앙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정통성” 등입니다. 그러나 정경에 포함된 문서들과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문서들에 이 기준을 적용하여 보면, 일관성이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고대성의 예를 들자면, 신약성경의 일부 문서들(목회서신 등)은 2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문서들(『클레멘스서신』 등)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단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정경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성이 결정적인 기준일까요? 정경에 포함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사도성이 없는 작품인데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반면, 『베드로복음』, 『베드로행전』, 『베드로계시록』 등은 베드로의 저술로 알려졌지만,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신학적 또는 신앙적 정통성도 정경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 다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외경 가운데 정경에 포함되었을 만한 신학적 색채를 띠는 『디다케』와 『헤르마스의 목자』 등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무원칙의 원칙”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합리적인 수준의 “기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보충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거룩한” 문서로 여기는 것들이 처음부터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서신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바울이 각 공동체에 보낸 편지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문서가 아니라 “그냥” 편지였습니다. 복음서들 역시도 처음에는 예수에 대한 평범한 기록일 뿐이었습니다. 제1세대 목격자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기억을 문자로 남겨야 할 필요에 따라 생산된 문서들입니다. 반면에, 1세기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보았던 “성경”은 구약이었습니다. 물론 이 구약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 전반에는 토라(오경), 예언서들 가운데 몇 개, 그리고 시편 등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약 문서는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던 시기입니다. 1세기 중엽 이후로 신약의 문서들이 기록되었지만, 이것이 곧바로 거룩하게 여겨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4개의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들은 2세기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거룩한 문서”로 인식되었고, 2세기 중반에 이르러야 구약과 어깨를 견주는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년경에는 구약의 권위를 넘어서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 가운데 일부 문서들에만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도 <베드로후서>라든지 <요한계시록> 등은 그 권위를 의심받고 있었거든요. 이와 동시에, 오늘날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문서들 가운데서도 많은 것이 특정 지역에서는 “거룩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특정 문서들이 “성경”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 가운데 또 일부는 그 지위를 잃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즉, 넓은 의미의 정경화 과정은 좁은 의미의 정경화(선택, canonization)와 비정경화(배제, decanonization)의 합의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전승을 따랐고,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일부 문서들을 공유하기도 하였지만, 서로 다른 문서들을 거룩하게 여기기도 하였는데, 경쟁에서 승리한 공동체가 정통이 되었고, 그들의 문서가 최종적으로 정경에 포함되었겠지요. 이러한 정경화 작업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의 책이 정경에 포함되어 우리의 신앙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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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의 필요성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Ⅰ. 성경 읽기의 필요성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셨습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고, 인간의 기원과 구원, 영생에 이르는 유일 한 길을 가르쳐 주며 끝없는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은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힘이 되어 줍니다. 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조언해 주며 우리의 죄를 꾸짖고, 매일의 삶 에 필요한 영감을 줍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문학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총서입니다. 성경은 역사, 시, 희곡, 전기, 철학, 예언, 과학 등 영감과 교 훈을 주는 모든 지식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또는 일부가 1,2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해마다 어떤 책보다 더 많이 애독되고 있습니다. 그러 면 우리가 성경을 읽음으로써 가장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 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론적인 신이나 관념적인 신이 아닙니 다. 기독교의 신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요, 인격적인 사랑의 하 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 신을 계시해 준 유일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신성과 권능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계시만으로 하 나님을 알기에는 너무 막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이 '특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 신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는 자기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밝히 보여 주셨 습니다. 이 모든 계시를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 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끔 열심히 신앙 생활 을 하다가 중도에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 버린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 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예배의 대상도 모르면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도 모르면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것은 미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이분들 은 자기들이 생각해 낸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다가 신앙의 참 도를 알지 못하 고 도중에서 포기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의문을 가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왜 태어났 는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많은 질 문을 해 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해답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많은 책을 읽어보아도 분명한 해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지성인들이 적당 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방황합니다. 하루하루 의미 없는 삶을 되풀이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본질적인 문제보다 우선 당면한 실존 문제 해결에 급급하며 살아갑니 다. 그러면 인간이 왜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울이 없으면 자기 얼 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를 알게 되면 피조물인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밝히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절 대자 앞에서 자기 발견을 하게 될 때만이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 다. 한 번뿐인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서게 됩니다.

셋째, 만물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 만능 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하나님같이 섬 기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일평생 썩어질 것들을 위해 다 바 칩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 러나 행복은 돈의 양이나 소유욕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물질이 필 요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의 행복을 위해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물질의 가치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현대인들이 숭상하고 있는 만물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은 숭상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 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질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Ⅱ. 성경 읽는 입장

성경은 BC 16세기 모세가 오경(五經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을 기록한 이후 약 1,700년 동안 여러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들 중 에는 모세와 같이 애굽(이집트)의 모든 학문에 통달한 사람도 있고, 사무엘과 같은 사사나 다윗과 같은 시인, 농부, 귀족, 왕, 어부, 세리, 의사 등 아주 다양합니다. 그 래서 오늘날 우리의 지식과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 나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되었음은 의심할 여 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저자가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기록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저자의 기본 입장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 저자는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기록했습니까?

첫째, 유신론적 입장(유신론과 무신론)

세상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신론적 입장과 무신론적 입장입니다.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 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180도 달라 질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 는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 떨어진 빗물이 압록강을 통해서 동해로 갈 수도 있고, 두 만강을 통해 서해로 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출발은 작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적 입장에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본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근원을 물, 불 , 바람(공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근세 어떤 생물학자는 인간의 기원을 아메바라고도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 두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대로 세상의 기원을 물, 불, 바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까?

첫째, 만물의 기원이 '물', '불', '바람'이라면 그 '물', '불', ' 바람'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둘째, 이런 '물', '불', '바람'으로부터 어떻게 인격적인 인간이 생겨날 수 있는가?

셋째, 만일 이러한 것들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면 과연 인간에게 는 어떤 존재 의미가 있는가?

넷째, 인간이 아메바에서 진화했다면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가?

우리가 무신론적인 입장에 설 때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볼 때는 명쾌한 해답을 얻 을 수 있습니다. 유신론적인 입장은 태초에(In the beginning) 하나님이 존재하셨다 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하 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인간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창세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도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유신론적 인 입장에서 성경을 읽어야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역사적 입장(사건과 역사)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두 가지 서술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일어난 일을 순서적 으로 빠짐없이 나열하는 서술 방법입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 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역사가가 분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의미 있는 중요한 사건만을 추려서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성경 저자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기 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역사의 나열이 아닙니다. 저자가 독특한 역사 관을 가지고 기술한 '사건으로서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논리와 이성, 합리적 인 생각으로 전후 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 해설을 달아 놓지 않은 부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는 아담 이후의 모든 사건들 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며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러므로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의 역사 원칙에 입각하여 중요한 사건만 추려서 창세 기를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면 성경 저자의 원칙이란 무엇입니까? 저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 과 불행을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의 연관성 속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아담의 낙 원 상실은 아담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어긴 데서 온 결과라고 했습니다. 이것 은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상실할 때 비참해지고 만다는 역사 원칙을 말 해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이 며, '하나님>인간>만물'의 창조 질서가 파괴될 때 어떻게 되는가 등을 기록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역사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원칙에 입각하여 성경을 읽어야 성경 말씀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셋째, 신앙적 입장(성경과 과학)

성경은 과학적인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을 통해서 자연 과학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 현대적인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과학적 지식을 목적으로 쓰여졌다면 지금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낡고 형편없는 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해마다 과학적 지식이 홍수처럼 옛 학설을 뒤엎으며 나옵니다. 그러 나 이러한 지식의 홍수 시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그 가치와 권위를 잃지 않고 있습 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해 주고자 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과학에서 완전히 떠 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며,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 찬 그 시대에 우주와 자연 질서가 가장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기록된 책은 성경밖에 없습니 다. 자연과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와 조화, 사물의 내 부에 존재하는 질서와 법칙들을 발견해 내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이 발 달할수록 하나님의 큰 권능과 무한한 창조의 지혜가 높이 드러날 뿐입니다. 또 순 수하게 학문을 하는 자연 과학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 계는 우연히 존재하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질서 정연하고, 필연적인 인과법칙으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연 과학적인 입장에서 단편적인 지식을 얻고 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세계를 우리 앞에 열어 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성인들은 과학적인 사고 방법에 연단 되어 있기 때문에 모 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그 모든 사실들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그 러므로 성경을 읽으려면 일단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입장에서 읽 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관계성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성경 읽기에 임해야 합니다.

Ⅲ. 성경 읽는 자세

성경은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이요 지침서입니다. 성경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올 바른 이해가 없이는 신앙 생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크 리스천들이 성경 말씀의 참 뜻을 잘 모릅니다. 성경을 읽어도 마음을 들여 읽는 사 람이 드뭅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성경 말 씀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양식

마태복음 4장 4절을 보십시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신명기 8 장 3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그들이 영양실조에 걸 려 죽어 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 먹을 양식에 대한 걱정 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같이 일만 하면 왕이 먹여 주고 입혀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한 조각의 빵을 얻어먹기 위해 소같이 일만 하는 노예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40년 동안 주리게 하시며 하 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주셨습니다(신 8: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것은 빵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사단의 간교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당시 예 수님은 40일을 주리시고 한 끼만 더 굶으시면 죽을 지도 모르는 극한 한계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극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시며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 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영혼의 양식을 얻고자 하는 소원으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 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 무를 두셨습니다. 이 나무들은 아담의 영혼의 만족을 주는 생명의 양식들이었습니 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그것 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동 산에서 이 나무를 쳐다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인간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에게는 영혼의 양식이었습 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영혼이 굶어 죽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본능대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 다(창 6:3 ; 눅 17:26,27).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름다운 처녀도, 젊은 청년도 다 피곤하여 지쳐서 비틀거릴 수밖에 없습니다(암 8:11-1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게 되면 독수리가 새 힘을 얻듯이 힘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우리들의 시들은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삶의 지혜와 명철을 줍니다(시 19:7, 8).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밤새도록 말씀을 묵상하며(시 119:148), 그 맛이 꿀맛과 같다고 노래했습니다(시 119:103). 예수님께 서도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63). 시몬 베드로는 "영생의 말 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요 6: 68). 현실이 어렵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만이 생명의 길이 요,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 고, 마음의 양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의 권위

마태복음 5장 17절과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율 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완성하 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셨 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절대적인 진리의 말 씀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전파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과 5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 로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3절에 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상에서 볼 때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도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이요, 예수님의 말씀도 결코 폐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 씀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취사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동양 사람들은 윤리 적인 교훈들은 잘 받아들이지만 영적인 진리는 잘 안 받아들입니다. 어떤 분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자녀들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엡 6:2,3). 그러면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받아들입니다(엡 6:4). 또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자기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하도록 강요합니다(엡 5:22). 그러나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하 라는 말씀은 안 받아들입니다(엡 5:25).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이고 자기중 심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 유익을 위해 취사선택하는 자들이요 더하거나 빼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정당화 하는 욕심쟁이들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의 말씀을 신화나 꾸며낸 이야기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라 든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인정하지 않고 할 수 있으면 인간적인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불트만'과 같은 사람은 성경을 비신화화 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심지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사건도 가짜 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자기 먹을 것을 감추고 있는 데 한 아이가 헌신적으로 내어 놓으니 감동을 받아서 저마다 자기 먹으려고 숨겨 놓았던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풍족하게 먹고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사건도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중에 바닷가에서 계셨는데 예수님의 그림자가 달빛에 비취어서 물위에 어른거린 것을 제자들은 예수님이 걸어오신 것처 럼 느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모든 말씀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으셨습니다. 천지창 조를 인정하셨습니다(마 19:4-6).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이나, 40년 동안 하나님 께서 만나를 먹이신 사건도 믿으셨습니다(요 6:49).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도 믿으셨습니다(눅 17:28,29). 요나가 삼일삼야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사 건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으셨습니다(마 12:40). 그 외에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과 인물들, 그리고 그 내용을 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 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점일획도 꾸밈이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승천, 재림, 심판 등 아무 것도 사실로서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요 구원받을 수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성도 믿지 않으니 썩어질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영원한 하나 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완전 무결한 생명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17).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나의 작은 머리로 이 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현재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지만 신앙이 좀더 성숙한 후에는 그 말씀을 밝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서 그 말씀의 참뜻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셋째, 성경의 중심 내용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한 것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또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 에게도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24:27).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그를 통해서 이루실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약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볼 때도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 기 위해서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나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 또 곧 체포되실 것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검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바 불법자의 동류(同類)로 여기심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 었습니다(눅 22:37).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에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 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만 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3,5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도 자기에게 기록된 말씀을 온전히 이루 시기 위해서 투쟁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심한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 통으로 기진맥진하셨습니다. 이제 곧 숨을 거두실 순간이 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 신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요 19:28). 예수님은 목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자기로 말미암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열 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에 기초하여 생각하시고 계획 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신비로운 체험보다도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참 뜻을 깨 닫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에 철저하게 뿌 리를 박고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신약 성경은 구약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은 오 실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입니다. 신약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과 동시에 장차 구름 타고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엽적 인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중심 되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넷째, 말씀의 적용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은 제자들을 보고 맹렬하게 비난을 퍼 붓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2:3)?"고 반문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 경에 ... ... 라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 때가 많습니다(마 21:16,42).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기는 읽지만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두개인들에 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유대인 들을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 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 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이상의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항상 성경을 읽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성 경 말씀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어떤 문제든지 성경 말씀으로 해결해 나가셨습니다.
특히 복음 역사를 시작 하실 때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막 10:4-9 ; 12:26,27). 특 히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아시고 예수님은 많은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으로 모든 아픔을 이기셨습니다(막 14:21).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들을 보면 거의가 인간의 창조, 결혼의 창설, 아벨의 피, 노아 시대 사람들의 모습,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아브라함의 믿음 등 거의 중요한 사건들을 다 언급하 셨습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 만나를 내리신 사건, 민수기의 놋뱀을 든 사건도 언급하셨습니다. 또 사무엘서의 다윗의 망명 시절 성전에서 떡을 먹은 사건, 열왕기서의 솔로몬의 부귀영화,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 엘리사의 사역을 말 씀하셨습니다. 다니엘서의 재림에 관한 말씀, 예레미야서의 성전에 관한 말씀과 새 언약에 관한 말씀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스가랴의 순교 사건까지 알고 계셨습 니다 마치 구슬을 꿰듯이 꿰뚫어 알고 계시며 자유자재로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 의 마음은 성경 말씀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각, 계획, 방향, 모든 활동을 하실 때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셨으며 귀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깊이 연구하셨는가를 증거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시험이 와 도 즉시 합당한 말씀으로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도 말씀에 기초하여 과감하게 책망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형식과 전통의 사슬에 매 이지 않고 율법의 근본 정신을 바로 실천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완 전히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생애였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 모든 우리의 생활이 예수님과 같이 성경 말씀에 근거할 때 가장 보람되며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 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자녀들을 책망도 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과 구원의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 님의 자녀들로 온전케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주님의 책망과 가르치심을 받아 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이 될 때까지 묵상하고, 실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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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God's Will)

대한성서공회 성경 검색 사이트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씀을 찾아보면 32구절이 소개된다.
구약에서 1구절
신약에서 31구절
이 모든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에스라 7: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쓸찌며.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예물은 제물로 사용한 것 이외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마태 22:21. 마가 12:17. 누가 20:25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세상의 가족은 혈육에 의한 원칙을 따를 뿐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 14:18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다.
다만 세상도 정욕도 모두 지나가 버릴 것 뿐이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당장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반드시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적인 삶의 자세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리트머스 시험지
로버트 보일(1627-1691)이 제작한 것으로, 리트머스 이끼에서 추출한 용액에 종이를 담갔다가 말린 것이다.
이것으로 '산성(산)'과 알카리성(염기)'를 구분할 수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의 색상은 빨강과 파랑이 있다.
빨간색은 pH 8.0보다 염기쪽인 물질에 반응하여 파란색으로 변한다.
파란색은 pH 5.0보다 산성쪽인 물질에 반응하여 빨간색으로 변한다.
따라서 리크머스 시험의 색갈이 어떤 색으로 변하느냐에 따라 용액의 성분을 가늠할 수 있다. 
 

산과 염기를 쉽게 구별 가능하다는 장점덕에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는 방법이지만, 산과 염기만을 구별 할 뿐, 정확한 수소 이온 농도의 값을 알 수는 없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리크머스 시험지를 사용하여 용액의 성분을 알아내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말씀의 대표적인 구절이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이라고 하겠다.

항상 기뻐하라 -
판토테 카이레테(παντοτε χαιρετε)

기뻐하라(5463) 카이로(chairō χαίρω 스트롱번호 5463

1. 기뻐하다.   2. χαῖρε. 3. 안녕
발음 [ chairō ]

기뻐하다(마 2:10, 고후 6:10, 빌 4:10), 즐거워하다(마 5:12, 눅 19:6, 벧전 4:13), 평안하다(마 27:29, 눅 1:28, 요 19:3), 즐겁다(눅 15:5), 문안하다(행 15:23, 23:26), 기쁘다(고전 7:30, 요이 1:4), 기쁘게 하다(고후 7:7).

항상 기뻐하라 - '항상 기뻐하라'(*, 판토테 카이레테)는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일에도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해서 나타날수 없는 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다(롬 14:17;갈 5:22). 혹자는 빌 4:4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와 같이 본절도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의미한다고 한다(Bruce).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그 상황에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 자식을 낳지 못한 한나의 기도
(예)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서 바울의 기도
(예)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기도
(예) 풀무불에 던져닌 아벳느고, 사드락, 메삭의 기도
(예) 돌에 맞는 죽는 현장에서 스데반의 기도

쉬지말고 기도하라 -
아디알레잎토스 프로슈케스데( αδιαλειπτως προσευχεσθε )

기도하라(4336) 프로슈코마이( prŏsĕuchŏmai ) προσεύχομαι 스트롱번호 4336

1. 기도하다.  2. 막 1:35. 3. 눅 1:10
발음 [ prŏsĕuchŏmai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엡 6:18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눅 18:1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셨다. 또한 롬 12:1에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혹자는 이 구절이 본절에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Bruce). 한편 '쉬지 말고 기도하라'(*, 아디알레이프토스 프로슈케스데)는 말은 24시간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단히 의지하는 자세나(Thomas),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갖추는 것(Lenski)등 항상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잠을 자는 시간과 음식을 섭취하는 시간과 때로는 휴식 즉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
심지어 부부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하였는가?

노동이 곧 기도
기도가 곧 노동
Opus est orandi
Oratio est opus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노동은 단지 우리가 날마다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창조사업에 동참하며, 물질과 맞서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을 형성시킨다.”(로버트 엘스버그)

우리가 매체를 통해 날마다 마주치는 ‘광고’는 행복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노동할 때보다 여가나 휴가를 보낼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일이란 휴가나 여가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막이나 동굴에서 홀로 살던 수도승들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이것은 일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 노동이 영적인 삶을 방해하기는커녕, 우리는 일을 통해 치유되고, 지루함과 슬픔을 몰아낸다고 믿었다. 여기에 굳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지 않아도 좋다. 일은 복음적 명령 이전에 인간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막교구 폴 아빠스는 종려나무로 바구니를 짜면서, 바구니가 광에 가득 차면 태워버리고 다시 짜곤 했다. 그는 수도승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고, 거룩함의 길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일이나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삶을 계속할 수 없다.

이상대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 : 레오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나, 귀족사회에서 이룬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했고, 그러한 거룩함을 가난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오히려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리 고달파도 아침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하고 기본적으로 인생은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밤이면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의 에너지를 온통 바치고 나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를 다룬 창세기의 내용처럼, 농민들은 그들의 노동을 징벌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룩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한가한 사람들에게 주는 말>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며, 내가 받은 교육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눌 것입니다. 어떤 단체를 세우거나 책을 써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농민들과 소박하게 살았으나, 집에 와선 비단옷을 입고 자야하는 삶에서 갈등을 느끼며 과로워하다 아스타포보 마을 철도역장 집에서 82세로 숨졌다.

여기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상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이상처럼 살기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삶이란 “보편적 도덕률이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혜, 곧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원을 타면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대로 늦잠을 자도 될 텐데!’하는 환상을 거부하고 “이기심과 경쟁보다 사랑과 연대를 나누며 사는” 비전으로 매일매일의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톨스토이가 발견했지만 살지 못한 이상은 기도와 일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의 삶이 기도와 공부, 노동으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네딕토는 기도라는 거룩한 영역과 노동이라는 세속적 행위를 갈라놓지 않았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이므로,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란 단순히 얌전하게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이 기도할 때처럼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 때 노동은 곧 기도가 된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에 물을 주거나 하는 단순한 노동뿐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길 때처럼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계를 다룰 때에도 “일이 담고 있는 선을 존중”한다면 기도행위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을 쓴 부활의 로랑 수사는 80살에 죽기까지 수도원에서 40년 동안 부엌일을 하며 냄비와 프라이팬을 뒤집었다. 그의 영적 삶은 단순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일을 하면서 “하느님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계시다.”고 확신했다. 그는 말한다. “나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 없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가운데 하느님을 모신다.” 이처럼 로랑 수사는 성무일도와 미사 같은 전통적인 영적 수련행위와 얼룩을 없애고 야채를 다지는 등 날마다 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결국 거룩함은 그 일의 성격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내적 태도에 달려 있다. 로랑 수사는 이를 두고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고 그 일을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일은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 섬기며 자선을 베푸는 기회요 기도가 될 수 있으며 아름답고 진실하며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엘스버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접수를 하고 요금을 받거나 식품점에서 계산하면서도 은총과 사랑으로 일터를 거룩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성인들이다. 당신은 학교나 골목길이나 바다에서, 교회나 기차, 가게와 찻집에서 성인을 만날 수 있다.”

고유한 나의 길을 따라서

“나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원의 문제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며 참된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토머스 머튼)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 가야하는 정해진 길은 없다. 바람직한 직업도 없다. 다만 자기 고유의 길이 있을 뿐이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성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찾았다. 물론 예수님처럼 모두 십자가에 못박힐 필요도 없다. 목수였던 유용주 시인은 예수는 못박힘으로써 가장 위대한 목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목수이면서 시인의 고유한 길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우고
20년 가까이 세상 공사판을 떠돌아다닌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수, 유용주)

샤를 드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거룩하고 완전해지라고 초대하시며, 당신을 더 가까이 따르며 당신 뜻에 복종하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영혼이 똑같은 일로 각자의 사랑을 당신께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똑같은 사다리로 천국에 오르고 똑같은 방식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천국에 이르는 나의 길은 어떤 길인가? 나는 어떤 삶으로 나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는가?”

만약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내 고유한 자리에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 길을 발견한다면 모든 길이 꽃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발견하더라도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말한다.

도로시 데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회심 : 도로시 데이의 응답

도로시 데이의 ‘회심’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응답 가운데 나타났다. 특별한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공감하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성인들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하면서도 한편에선 이렇게 물었다. “내 마음 속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왜 애초에 악을 방지하지 않고 그 치료에만 그토록 매달리는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는 것도 좋지만 노예제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성인들은 없는가?” 교회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한 도로시 데이는 종교에 등을 돌리고 진보정치에 희망을 두었다. 그러나 역사의 한복판에 참여하며 분투했던 젊은 날의 도로시 데이에게 다가온 것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이었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딸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길을 찾다가 결국 가톨릭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의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민자들의 교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적인 그의 동료들에게 가톨릭은 부자들의 교회요 기득권자들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신앙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

1927년에 세례를 받고 5년 동안 방황하던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직후에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가 된 피터 모린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하느님의 응답은 하늘에서 들려오지 않고 강한 53살의 프랑스 억양을 지닌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피터 모린은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서에 담긴 사회적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운동을 제안했다. 더 이상 교회와 정부의 프로그램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더욱 선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가톨릭일꾼운동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복음을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자발적 가난을 살고, 가난한 이들의 당장에 필요에 응답하면서,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운동이었다. 이른바 ‘세상 속에 더 깊이 내려가고, 세속적 가치와 전혀 다른 삶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그들은 1933년 5월 1일 노동자 성요셉 축일이자 메이데이에 유니온광장에서 <가톨릭일꾼> 신문을 배포하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는 성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도로시 데이는 “네가 바로 그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생애 50년 동안 이 길에서 행복했다.

부르심 속의 부르심

도로시 데이가 아나키스트로서 살다가, 다시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거듭 새삼 새로운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어떤 책을 접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아님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는 이런 체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보통 ‘부르심’이라고 하면 수도자가 된다거나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좁게 해석하기 쉽지만, 수도성소나 사제성소 안에서도 더 근본적인 부르심에 노출될 수 있다.

평신도의 경우에도 자신이 그동안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실현을 해 왔다고 장담하더라도 뜻밖의 전혀 다른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면서 그 일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과업에 헌신하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거룩함을 찾는 이에게 ‘회심’은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회심이 일어나면 무질서한 마음을 벗어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예전에는 평범한 삶에 짓눌려 버거웠지만 회심한 뒤로는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이러한 회심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생명력을 준다. 마더 데레사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걸 보고 어느 기자가 “저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겁니다.”하고 말하자, 그녀 역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했다.

‘의미’ 있는 노동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일 속에서 충만한 의미를 찾는 일이다.
의미가 생기면 그 일은 무엇이든 어디서라도 기쁨으로 용약한다.
예수회 사제요 신비가요 과학자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하거나 활동할 때 우리를 기다리신다.
펜이나 삽, 빗이나 바늘 안에도 계신다.
우리가 자신이 하는 일에 환 획, 한 줄을 긋고 한 땀 한 땀 뜨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성을 기울이고 의지를 다해 완성해 나가면 최종 목표에 다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거룩함이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가 “그때에 비로소 성인들이 말하는 노동의 진정한 행복을 맛본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길(노동)을 통해 기쁨으로 충만한 하느님께 이르는 거룩함이다.
그게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삶의 목표다.

1965년 성공회 고 대천덕 신부가 세운 공동체, 예수원.
예수원은 ‘노동이 기도’이며 ‘기도가 노동’이라는 정신으로, 찾는 이들에게 하루의 일거리를 부여하고 있다.
매 순간을 하나님께 대하 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예배이자 기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있었던 장작 패기, 오늘 식사의 반찬이 될 쑥 캐기, 그리고 예수원 곳곳의 보수공사 등등. 모든 게 낯설고 단순한 노동이지만, 이를 통해 복잡했던 일상에서 깨닫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박정섭 씨(모리아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도시에선 바쁘고, 일상에선 바쁘고.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 나의 삶 속에서 일상에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원에서 하루 3번 드리는 예배에서는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홀로 찾은 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 자매로 영적인 교제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김길수 씨(온누리교회)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서로 같이 나누실 때 개인적으로 기도도 드리고 한다”고 말했다.
또한 하루 3번 씩 종을 울려,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묵상 시간을 갖고 있다.
안애단 신부(예수원)는 “코이노니아. 예배해서 떡을 나누고, 같이 소유를 나누고,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을 나누고 살았다. 여기 오는 우리들과, 손님들과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경험하며 하나님의 형존을 공동체를 통해, 영광을 돌리자.또 그분들이 우리에게 축복한 것을 함께 섬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예수원은 노동과 중보기도로 하나님나라를 그려가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 -

감사하라(2168) 유카리스테오( 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 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축사하다(마 15:36, 막 8:6, 행 27:35), 감사 기도하다(마 26:27, 눅 22:19), 감사하다(눅 18:11, 요 11:41, 고전 10:30).




엔 판티 유카리스테이테( εν παντι ευχαριστειτε)

󰃨 범사에 감사하라 - '범사'의 헬라어 '엔 판티'(*)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라는 의미이다(in all circumstances, NIV).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한편 감사는 1: 2에 기록된 대로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빌 4: 6에는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하나님의 뜻'은 4:3에 언급된 바 '신자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 혹자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성령께서 신자들을 성화시키는 내적인 역사로 본다(Bruce).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이며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신자들의 성화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할 수 없다.

에벤에셀의 돌비의 뜻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입니다.

‘인생을 감사로 물들여라!’


 

 

  첫째,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유대인의 인생 독본인 탈무드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마음과 육체는 병들기 쉽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체는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감사하면 맥박이 고르게 되고 위장의 활동을 도와 소화력을 증진시켜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기 때문에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평은 혈액순환을 방해하여 맥박을 급하게 하는 동시에 위장의 운동을 정지시켜 뱃속으로 들어온 음식의 소화를 거부해 건강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유무와 환경의 조건에 관계없이 감사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세계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해서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가장 행복한 나라는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뽑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아제르바이잔이 2위이고, 나이지리아가 3위에 올랐습니다. 반면에 경제 대국이며 최고의 문화시설과 교육환경, 자연환경 등을 두루 갖춘 선진국들인 미국, 스위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이 40위권 밖으로 밀려나 큰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 또한 23위에 머물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지수는 이와같이 물질적 소유 또는 환경의 조건에 반비례하게 나타났기에 행복의 척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100분의 1 수준인 200달러밖에 안 됩니다. 인구밀도는 세계 1위이고 문맹률도 90%에 육박합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이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심지어 몸이 불편해 찾아갈 병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1위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이웃들 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행복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선진국의 사람들은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소외감과 소유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불행을 더욱 심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를 방해하는 적 중, 하나가 바로 비교 의식입니다. 비교 의식은 상대방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우월감으로 교만해지든지, 아니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기비하에 매몰되게 합니다.

  다음으로 사람의 욕심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의 욕심은 너무 높아 컷트라인이 없는데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욕심을 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감사를 방해하는 적 하나를 더 소개하면 바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염려하는 문제의 오직 10%만 현재에 부딪힌 문제이지, 나머지 90%는 쓸데없는 과거의 일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6: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은 미래의 일을 앞당겨 염려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마음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빌 4:6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가 심령이 위축되고 짓눌리는 불안한 현상이라면 감사는 심령에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이처럼 행복지수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지표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사실, 행복에는 절대 기준이 없습니다. 행복에는 교과서나 참고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식이나 모범 답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다만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행복의 크고 작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합니다. 결코 행복은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자족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이,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변할 때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힐터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을 감사로 뽑았습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므로 행복지수를 높혀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감사는 분명 행복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둘째, 감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브라질 사람들은 ‘오브리가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틈만 나면 ‘오브리가도’를 외친다고 하지요. ‘오브리가도’는 무슨 뜻일까요? 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오브리가도입니다. 아무리 말수가 적은 사람도 하루 평균 열 번 이상은 오브리가도란 말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 역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Thank you’입니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생활 속에서 작은 일에도 ‘땡큐’라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50개를 선별했는데, 그 가운데서 ‘땡큐’가 28%를 차지하여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감사가 몸에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증거일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평균 2만 6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감사합니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인간의 언어도 ‘감사합니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 중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혀에 붙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감사에 대한 훈련이 안 되어 있기에 감사에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감사는 있지만 진정한 감사를 찾기가 쉽지 않아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상스러운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민망함을 넘어 당혹스러움까지 느끼는 게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를 향해서 이런 악한 말들 말고 감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 엡 5:3, 4 말씀입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나는가 하면,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방을 찔러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는 쉽게 화를 내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는 말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내가 내뱉는 말로 인해 상대방이 깊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최근에 사모가 타는 차가 말썽입니다. 시장 보러 가서 시장을 보고 출발하려고 하니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주일 준비를 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자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순간 제가 전화를 받고 나가면서 ‘왜 또, 혹시 뭐 열기구 켜놓고 운전한 것 아니요.’라고 짜증을 내면서 운전자 탓을 했답니다. 그리고 보험사에 연락해서 시동을 걸고 보니 전기 공급을 하는 발전기 일명 제네레다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순간 사모님한테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릅니다.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아프게 한 가시와 같은 말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누에가 자기의 입에서 나온 실로 집을 짓고 살 듯,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기 입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풀로랑스 스코벨 쉰’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남에게 준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 삶은 부메랑이다.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되돌려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희한에게도 우리 자신을 명중시킨다”

  그렇습니다. 불평의 말이든 감사의 말이든 언젠가는 메아리가 되어 나의 삶을 향해 돌아옵니다. 이것이 인생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인생은 자기 말대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열두 명의 정탐꾼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바라보면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파송합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달랐습니다. 고로 보고도 달랐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조상에게 약속한 거룩한 축복의 땅이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충분히 차지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순종하자고 한 반면에 열 명의 정탐꾼은 그리할 수 없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하며 지극히 원망적이고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면서 민 14:27~30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민 14:27~30 말씀입니다.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그 사람의 인생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말 한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방황하다가 인생을 비참하게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요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 한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말은 씨가 되고, 인격이 되며,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말대로 되는 인생입니다. 한마디의 말이 삶에 희망을 주고 인생의 목적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케 하기도 하고, 인생을 포기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말의 힘은 정말 놀랍습니다.

농업진흥청에 ‘농작물사업소’에서의 연구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는 물론 물 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였는데 물 한잔을 앞에 놓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정, 즉 완전한 육각수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물을 마시게 되면 우리 몸에 무한한 면역력이 생겨 더욱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 한잔을 놓고 짜증 부리고 욕설을 퍼부으면 물의 결정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인체에 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탄이라는 말을 각 나라말로 물컵 위에 붙여 놓았더니 물의 육각수가 다 깨지고 물의 결정에 구멍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한다’, ‘감사한다’라는 말을 붙여 놓았더니 물은 완전한 육각수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감사와 사랑 중에 어떤 것이 물의 결정을 더 완전한 육각수로 만드는지 실험했는데, 감사의 결정이 사랑의 결정보다 힘과 영향력 면에서 두 배나 강했다고 합니다.
결국 감사의 말은 우리 인체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메마른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입술로 날마다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며, 여유로운 삶으로 더욱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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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 7: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쓸찌며

2.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3. [누가복음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4. [요한복음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5. [사도행전 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6. [사도행전 18: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7. [사도행전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8. [로마서 1: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9. [로마서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0. [로마서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11.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로마서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3.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14. [고린도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5. [고린도후서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6.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7.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8.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9. [에베소서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20. [골로새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1.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22.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23.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24. [디모데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5. [히브리서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26. [히브리서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27.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28. [베드로전서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29.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0. [베드로전서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31.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2.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