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레미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편 105:8-10
8 그가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요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10 그것을 야곱에게 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자녀로 여겨 사랑과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그들을 아버지로서 돌보시며, 자녀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고 눈썹 사이 이마에 털을 밀지 말라
호세아 1:10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고린도후서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하나님의 양으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자신을 목자로, 백성을 양으로 비유하십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고 인도하며 보호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따라야 하며, 목자의 보호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시편 23:1-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사야 40:11
그는 목자와 같이 자기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요한복음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는 특별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백성을 지키시며, 그들을 기뻐하고 축복하십니다.
이사야 43: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너를 대신하여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는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백성을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사야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백성
성경은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로 묘사하며,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사랑과 헌신의 언약 관계로 설명합니다. 신부된 백성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62:4-5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결혼한 여자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 같이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질투하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백성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 구별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보호와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험에서 지키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회복과 승리를 주십니다.
이사야 41:8-10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시편 121:4-5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이스라엘의 사명과 역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세상에 전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러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신명기 4:6-7
6 너희는 이것을 지켜 행하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명철이라 이것을 듣는 모든 민족들이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지혜와 명철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 약속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0: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호세아 2: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기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사야 62: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결혼한 여자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 같이 될 것임이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자녀로 여겨 사랑과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그들을 아버지로서 돌보시며, 자녀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고 눈썹 사이 이마에 털을 밀지 말라
호세아 1:10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고린도후서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하나님의 양으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자신을 목자로, 백성을 양으로 비유하십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고 인도하며 보호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따라야 하며, 목자의 보호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시편 23:1-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사야 40:11
그는 목자와 같이 자기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요한복음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는 특별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백성을 지키시며, 그들을 기뻐하고 축복하십니다.
이사야 43: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너를 대신하여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는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백성을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사야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백성
성경은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로 묘사하며,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사랑과 헌신의 언약 관계로 설명합니다. 신부된 백성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62:4-5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결혼한 여자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 같이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질투하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백성
하나님은 백성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 구별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모두 우상을 섬기던 시대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모든 우상은 거짓이고 여호와 하나님만 참 신임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애굽과 그 신에 벌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며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그 모든 일도 자신이 참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신 4:32-35)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의 중앙에 거하는 것이나 비록 작은 국가지만 강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것, 또 노벨상의 1/3을 차지할 만큼 머리가 우수한 것도 다 이스라엘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또, 1900여 년간 나라없이 흩어져 살다가 독립하여 고토(故土)에 나라를 다시 세우고, 그 땅을 개척하여 에덴동산과 같이 아름답게 가꾸어 성경에 예언된 모든 것을 그대로 성취한 사실도 이스라엘 배후에 하나님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으로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 사 43: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구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여기에는 예수님을 보내실 것과 그의 행적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 신약성경을 완성하게 하여,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실과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맡겨 두었던 성경을, 예수님이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후에는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모든 민족에게 전할 준비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후략)” (롬 9:4-5)
약속대로 정한 때에, 기록한 곳에서 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신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시고 이적으로 보여 주셨으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이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내용 중 일부는 미국의 과학자들이 순수한 금가루를 맑은 물에 풀었을 때 갑자기 그 물의 색이 붉게 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과학자들이 보면서 모세가 금송아지를 불에 태운 후에 가루로 만들어 물에 풀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 것이며, 그 결과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한 죄에 대한 용서라고 합니다.
창세기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דָּם스트롱번호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1. 명사, 남성
피, 신 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관련 성경 / 피(창4:11, 왕하3:22, 겔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창세기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마태복음 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무죄한 피 - 사본에 따라서는 '의로운 피' 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같은
변형은 전체 문맥과 잘 조화를 이룬다. 즉 19절절에 '의로운 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수께 사용되고 있고, 24절에도 '이 의로운
사람의 피'라는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과 '무죄한 피'와는 동일한 맥락을 이룬다. 한편 '피'는 생명의 요체로서 특히
본문에서는 사람의 전존재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무죄한 인격'이었던 것이다.
죄를 범하였도다 - 유다는 무죄한 죄를 판 자신의 죄를 뒤늦게 고백하나,
하나님께가 아니라 공범자인 산헤드린에게 했다. 따라서 이 자인(自認)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한 인간적인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 고전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참으로 매정한 결별 선언이다. 즉 이것은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선언인 것이다.
네가 당하라 - 똑같은 문구가 24절에 다시 한번 나온다. 여기서 '당하라'는
헬라어 '와세이'(*)는 강한 의지가 내포된 명령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가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피(하이마. haima) α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129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haima ]
I. 피.
1. [문자적으로]
a. 사랑의 피, 요19:34. ῥύσιςαἵ- ματος: 혈루증, 막5:25, 눅8:43.
b. 동물의 피, 히9:7,8,25. ζᾠων τὸ αἷ: 짐승의 피, 히13:11.
2. [상징적으로]
a. 생명의 거처로서의 피, 마23:30, 27: 4,6, 행22:20, 롬3:15, 히12:4, 계16:6.
b. 대속의 희생물로서의 피와 생명, 특히 대속의 의미로서의 예수님의 피, 롬3:25, 엡1:7, 히9:12, 요일1:7, 계1:5.
3. [하늘에 재앙의 표시로 나타나는] 붉은 색깔.
a. 불과 연기와 함께, 행2:19.
b. 우박과 불과 함께, 계8:7.
c. 달의 색깔, 행2:20.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생명의 피와 예수님의 보혈
무엇이
생명인가? 또한 과학적으로 생명의 속성은 무엇인가? 생명체와 무생물의 차이는 무엇이며, 다른 생명체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본
논문에서는 이들에 대한 과학적인 현상을 논의할 것이다. 기독교와 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힘드셨던 일중에 하나는 아마도 자신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준다는 말을 아마도 생명을 잉태하고 분만하는 산모들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준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본 논문에서는 피의 과학적인 기능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신앙적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I. 본문
생명이란 무엇인가? 대학에서 생명과학 과목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기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생명체는 다음과 같은 과학적인 특징이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는 동물, 식물, 미생물에게 모두 해당되는 사실이다.
첫째,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된 조직이 있고, 둘째, 에너지를 사용하여 물질대사를 하며, 셋째, 생체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으며, 넷째,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다섯째, 가장 중요한 생명체의 특징은 생식에 있다. 즉 자손을 증식시키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특징이며, DNA와 같은 유전정보가 대대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그 답은 생명체를 창조하신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으로는 육체, 혼 등을 말하며,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영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생명의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물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창조(bara. 영어로는 create)라는 동사를 3번 쓰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 그럴까? 창조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를 만들 때에 이를 창조라고 한다. 예술가가 창작물을 만드는 것은 창조활동이지만, 목수가
나무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창조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하나님의 창조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쓰신 것 같다.
첫
번째로는 제1일에 천지 및 물질을 창조하실 때 사용되었으며(창세기 1:1), 두 번째로는 제5일에 물고기와 새와 같은 동물 혹은
짐승을 창조하실 때 사용되었으며(창세기 1:21), 세 번째로는 제6일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창세기
1:27).
신기하게도 제3일에 식물은 만들다(assa; 영어로는 make)라는 동사를 쓰셨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
식물이나 미생물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란다. (명색이 생명과학자인 제가 이러한 주장을 펼
이유가 있는가?) 또한 이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창조속성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1일에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공백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물질의 창조’이었으며, 제5일은 ‘혼(혹은
의식)의 창조’이고, 제6일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의 창조’를 뜻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체와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명의 성경적 정의는 '피”의 유무에 달려 있다. 혼 즉 의식, 느낌, 인지 및 지각능력이 있는 동물은
대체로 이들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과 피(혹은 이의 유사체)가 흘러 몸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혼을 가진 존재이다.
식물이나, 미생물 혹은 소위 이야기하는 하등동물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며, 물론 이 생명체들도 하나님의 창조물임은
이미 이야기 한바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짐승을 만드실 때에 혼을 창조하심으로 다른 생명체와 차이가
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인간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욥기 12:10). 본인은 이 세 가지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In his hand is the life of every creature and the breath of all mankind.
그렇다면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는가? 하나님을 주권자로 알아볼 수 있는 ‘영의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그와 교감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이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생명으로 오셨으며, 우리 죄를
씻기 위해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보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영은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의
영”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와 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힘드셨던 일중에 하나는
아마도 자신의 육체와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준다는 말을 생명을 잉태하고 분만하는
산모들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준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육체와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모든 생명은 피에 있기에 죄로
죽은 생명을 살리려면 누군가 그 죄인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것이 곧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면 정결한 짐승을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며 죄를 고백하고, 제사장은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 시키고 그 짐승을 죽여
그 피를 뿌려서 죄를 정결케 하였다. 즉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어야하나 그 사람의 죄 대신 짐승이 피 흘려 죽어 죄로 죽을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며,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과학에서 피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동물의 피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혈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적혈구는 O2를 허파에서 받아 말초세포까지 나르는 역할을 한다. 그 뿐 아니라 세포에서 생긴 노폐물인 CO2와
H+ 이온을 나르는 역할을 한다. 백혈구는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면역작용을 하는 것이다. 혈소판은 피부 등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리게 되면 즉시 피를 응고시켜 우리 몸을 병균이 침투하지 못하게 보호하고 아까운 피가 흘러 없어지는 것을
막아주며 상처가 치유되도록 도와 준다. 혈장에는 항체가 있어서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며, 각종 영양분을 세포로 나르고, 세포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게 해 주며, 몸의 완충용액으로 pH, 무기염류농도, 체온 등을 적정하게 유지해 준다. 복잡한
과학이야기를 쉽게 정리해 보자.
첫째, 생명의 양식인 산소와 영양분의 공급 둘째, 노폐물을 씻어냄 셋째, 몸 보호 및 항상성 유지 넷째, 병균의 대적 및 상처의 치유
본인이 십 수년 동안 피에 대해서 강의를 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다.
첫째,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시면서 돌아가셨기에 우리에게 새 생명을 공급하셨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내신다. 셋째, 예수님이 보혈이 우리의 육체와 혼과 영을 덮어주시기에 우리 몸이 보호되고 유지된다. 넷째,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병이 들었을 때 치유 혹은 사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대적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죄를 깨끗이 사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 하와가 범죄 했을 때 그들은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지만 하나님은 동물을 잡아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 몸과 죄를 가리워 덮어
주셨는데 동물이 아담 하와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생명이 최초로 희생된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고~~~~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의 종교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했다. 예수님의 보혈로써 어두움의 세력을 무찌르고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는 사탄이 우리의 죄를 근거로 하여 우리 양심에 송사할 때 물리치고 대적하는 능력의 방패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죄에 대하여는 사함을 받은 자요 또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산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 2절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과 같이 허다한 예수님의 증인들도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고 죄인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들의 피 흘림은 복음들고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어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보혈과
믿음의 증인들의 피의 역사 위에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상기할 때 복음의 귀중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며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다.
(주) 이 내용의 일부는 ”30가지 테마로 본 창조과학”(생명의 말씀사 간, 2010)과 '창세기의 과학적이해”(한국창조과학회/생명의 말씀사 간, 2010)에서 발췌됨. * 출처 - 2012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그리스도의 피(基督-血, 라틴어: Sanguis Christi, 영어: Blood of Christ)는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피를 말하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보혈(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등에서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는 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 (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14절)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 (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미사 성제 때 집전 사제의 축복 기도와 동시에 성령의 힘이 내려와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영과 신성이 깃들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빵과 포도주로 실체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할 때에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한 말에서
“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하게 “상징한다.”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2세기의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35~110)는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나는 하느님의 빵을 갈망한다. 이 빵은 다윗 가문의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다. 나는 하느님의 음료를 원한다. 이 음료는 썩지 않는 사랑인 그분의 피다.”
그리스도의 성혈에 대한 신심은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기점으로 발전하였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에게서 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득 찬 생명의 샘의 은총을 부각시켰다.
지극히 고귀한 그리스도의 성혈 호칭 기도문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영원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사랑과 자비의 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심을 열어 쏟아주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매 맞으실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가시관을 쓰셨을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늑방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악의 세력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직자들의 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수도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회개하는 이의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짐진 이들의 휴식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불신을 신뢰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미움을 화해로 바꾸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갈등과 고뇌하는 이의 위로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임종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마음의 안식과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영원한 생명의 증표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모든 영광과 흠숭과 찬미를 받으셔야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오, 주님! 당신의 거룩한 성혈로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 기도합시다.
하느님,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혈을 통하여 당신은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 자비로 이루신 구원을 저희 안에
견고케 하시어 저희로 하여금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구원의 열매를 충만히 체험하게 해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욥기 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시는 근거가 언급된다. 영원한 사망의 '구덩이'(22절)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것은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대속물을 보시고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속물'(*,
코페르)에 대해서는 '덮다', '화해하다', '대속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파르'(*)에서 파생되었으며, '구속하다'를 뜻하는
'파다'(*, 개역성경은 '건져서'로 번역함. 시 49:7 참조)와 연관된 속량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대속의 개념은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제사 의식과 관련이 깊다(레 1:4;4:4;16:21).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범죄에 의한 처형이 있기 전에 그
몸값을 지불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 수단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그를 놓아주라'(개역 성경은 '건지라'로 번역함)는
하나님의 명령이 '대속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는 빛이 된다.
시편 86:17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Give me a sign of your goodness, that my enemies may see
it and be put to shame, for you, O LORD, have helped me and comforted
me.
사도행전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예수님과 논쟁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다윗 왕 때 대제사장의 후손들로 덕망 높은
명문가였지만 신앙이 타락해 영도, 부활도 부정하며 ‘사람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행 23:6-11).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지자 예수님께 도전해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7형제가 있는데 맏형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면 형수는 유대 율법에 따라 동생의 부인이 될 텐데, 그런 식으로 7형제가 모두
형수와 결혼했다가 죽는다면 그 형수는 부활 때에 7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 22:27-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부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다시 꺼내서 하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을 신봉하던 자들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놀라서 감히 더
이상 예수님께 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아브라함은 무려 2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2천 년이 흘렀으니 아브라함의 머리털까지 다 삭아 없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이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더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산 자’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언제 ‘산 자’가 됐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84세 때 장막에서 이끌어 내셔서 “네 몸에서 난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을 때입니다. 자신도 늙고, 아내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자식 얻을 소망이 없어지고 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100% 믿었습니다(창 15:6). 그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죽은
자’였던 그가 부활의 이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산 자’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벨이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 지금까지
말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히 11:4).
믿음은 우리가 말씀을 믿고 언약을 믿을 때 우리 속에서 요동합니다. 날선 검같이 예리해서 영과 혼과 육까지 찌를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받은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순간 아브라함은 부활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마 27:50-53, 눅 20:38).
창세기에는 세 조상이 등장합니다.
첫 조상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지만 불순종의 조상, 사망의 조상입니다. 사망과 고통, 괴로움, 눈물, 한숨, 우수사려를 다 가져다 준 ‘죽은 자의 조상’입니다(롬 5:12, 6:23).
아담의 10대손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사람입니다.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창 6:7-13, 1:28).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담과 똑같은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9:1). 그러나 둘째 아들 함으로 말미암아 그 축복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10대가 지나 노아의 10대손 아브라함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2천여 년 만에 이 땅에서 잊어버렸던 믿음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아무리 애써도 일이 안 되다가 도와줄 누군가를 만나면 주위에서 “야, 이제 너 살았다. 그 사람은 널 도와줄
거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분명 죽음의 조상인 아담의 후예였지만 믿음으로 살아나 새로운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불신과 사망, 무덤, 눈물, 고통, 괴로움, 근심의 조상,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이 어영부영하는 인생의 조상이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조상입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똑같은 축복을 받습니다(갈 3:7-9).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대속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생명이 있다는 보혈의 공로를 믿는 부활
신앙의 원리입니다(롬 4:3-25, 8:1-2, 벧전 1:18, 25, 히 9:22, 레 17:11, 마 20:28, 롬
6:1-23, 창 15:6-7).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브라함같이 말씀의 언약을 믿고 있습니까. 부활의 신앙을 믿지 못하면 모두 거짓입니다. 믿지
못하면 정직하지 못합니다. 성실하지 못합니다. 욕심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빌 2:5).
남을 싫어하고 저주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누가 더 좋고 누구는 싫고,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향해서 구원의 반열에 세우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말씀했습니다. 한번 성을 내면
공든 신앙의 탑이 다 무너집니다(약 1:20). 하나님의 뜻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90세가 다 된 나이에 ‘네 몸에서 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믿은 아브라함처럼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될까?’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사업도 모험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고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산 자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지만 믿고 씨를 뿌렸습니다. 믿지 않는 블레셋이 뿌린
씨는 바싹 타 죽었지만 이삭은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믿고 판 우물에 샘물이 터졌습니다, 믿지 않는 블레셋이 판 땅에는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말씀대로 하늘의 별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사람은 별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단 12:3).
성도 여러분. 산 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입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야 일어나라!”, “다비다야 일어나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言約)’이 말씀 언(言) 자를 쓰지 않습니까. 말씀이 왔을 때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34-38절 말씀을 볼 때 아브라함은 성령을 따라 부활을 약속받는 산 자의 조상이 됐습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성령으로 살아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요 5:24-25). 그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자의 무덤에서 산 말씀을 통해 다시 새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도 자신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삭,야곱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들은 뒤 이 3대의 신관(神觀)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비로소 바로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할 때는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죽은 태(胎)’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경계를 유월절 때처럼 뛰어넘어 버리셨습니다. ‘산 태(胎)’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계 앞에 막히지 않습니다. 통과해
넘어가 버립니다. 사라는 자식이 있겠다는 하나님의 천사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장막에서 몰래 웃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사라가 웃은 것을 알고 “네가 왜 웃느냐?” 물으니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사라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을 받고 있습니다. 부활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죽지 않고 살아서 홀연히 변화됩니다. 이
말씀이 100% 믿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서, 그 터전 위에서 죽지 않고 사는, 변화의 말씀을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을 잡아먹는 놀라운 말씀의 능력과 권세, 마지막 비밀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입니다.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립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세상이 다 지나가기 전에 이룩한다”고 하는 마태복음 24:34-35 말씀을 꼭 믿으십시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하신 빌립보서 3장 21절 말씀을 믿으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산다.” (요 11:25-26) 하신 말씀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결론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려고 신앙생활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염라대왕처럼 죽은 영혼이나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데리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죽은 하나님이 아닌 산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신 5:26, 수 3:10, 시 42:2, 렘 10:10, 호
1:10, 고후 3:3, 딤전 4:10, 히 3:12). 하나님과 간격을 두지 마시고 기차들이 연결되듯 하나님께 바짝 붙어서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를 부활의 영으로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4-38)
무엇으로 살아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리고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 있습니다. 말씀으로 약속된[言約]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살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한 가지 남은 것은 살아서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 되시고
우리는 신부입니다 (계 19:7-8). 예수님은 만방에 영원히 빛날 선물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 기다리십니다. 그 결혼식에 가기
위해 입성할 때 천군 천사가 우리를 영접합니다. 죽음도, 아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는 세계입니다. 세상 고생은 한 순간에 다
잊어 버립니다(계 21:4). 그날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무슨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욕심이라면 기도할 욕심, 은혜 받을
욕심뿐이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어디 있든지 낙심하지 말고 “나는 산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용기 백배해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언령(言霊. 고토다마)은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믿어지는 신앙으로, 말에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영적인 힘을 말한다. 언혼(言魂)이라고도 쓴다.
소리를 내어 말한 언어가 실제 현실에 무언가 영향을 준다고 믿으며,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불길한 말을 하면 흉사가 일어난다고 여긴다. 때문에 축사를
할 때 절대로 잘못 읽는 일이 없도록 주의 받는다. 오늘날에도 일본에 많이 남아있는데, 결혼식 등에서 사용을 피하는
단어들(떠나다, 자르다, 돌아가다 등)도 언령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일본은 언령의 힘에 의해 복이 찾아오는 나라라고 하여
"언령으로 행복해지고 번영하는 나라"로 불렸다.
이러한 신앙이 생겨난 원인은, 고대에는 "말(言:고토)"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고토)"이 동일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한자가 도입된 당초에도 말과 현실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면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여진 부분이 있다.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을 "말을 입에 올리다(言挙)"라고 하는데, 그때 그 말이 자신의 교만함에 의한 것이었을 경우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 나오는 야마토타케루가 이부키 산에
오를 때 산신의 화신과 만났는데 야마토타케루는 그것을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길에 퇴치하겠다고 “언급”하였다.
그것이 타케루의 자만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타케루는 신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다. 즉, 언령사상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단순한 애니미즘적 사상을 넘어서서, 바른 마음가짐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타 문화권에서도 언령과 비슷한 사상이 발견된다. 구약성경의 "רוח הקודש",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서 '성령, 영'으로 번역되는 프뉴마(Πνεύμα) (동사 “불다:πνεω”를 어원으로 하며, 숨, 혹은 거대한 존재의 숨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가 해당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가 “바람은 자신이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 … 성령으로 난 사람도 모두 이와 같다”라고 언급한 구절에서 '바람'과 '성령'이 동일한 구절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소리나 말은 불길한 영혼을 내쫓고 자리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한다고 여겨진다. (예:신토에서 박수를 치는 것.) 이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제례, 축제, 악령퇴치 때 행해지는 것이다.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치는 큰북, 카니발에서의 피리, 종, 큰북, 중화권의 춘절에 쏘는 폭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람의 말도 주문이나 조서의 형태로 그 영적인 힘이 이용된다. 다만 그 근본이 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제각기 다른 견해가 있다. 예를 들어 “진리란 반석과 같은 것으로 그 위에 교회를 지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진실을 알고 싶다면 거울에 너 자신을 비춰보아라, 그로써 모든 것이 명백해 질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을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의견이 있고, 혹은 그 “현실” 자체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나 시대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말에 힘이 있다.'는 개념은 역사가 기록되기 한참 전부터 이어진, 종교의 역사와 함께한 보편적인 개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식의 속담이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어떤 문화권이건 민간신앙에 있어서 주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만 보아도 언령이라는 것이 인류 보편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미신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배척할 것 같은 이미지인 기독교에서도 '언어 자체에 힘이 있다'는 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당장 창세기에서만 봐도 빛이 있으라 하고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묘사할 정도이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고 "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었다"고 묘사하며, 이 밖에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야훼의 권능을 두고 '말씀'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전통주의 가톨릭 진영에서는 서방 교회의 표준 언어인 라틴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까지 하기도 한다. 한편 불교나 힌두교 등 인도 계통 종교에서는 만트라(진언)라는 개념을 정의하여 특정한 영적/물리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산스크리트나 팔리어 낱말이나 발음, 구절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개념은 민간사상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한민족의 경우만 해도 고조선
시절부터 말을 조심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호랑이를 "산군님"이라고 부르거나 도둑을 "밤손님"이라 부르는 등 그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 제일 먼저 호칭을 피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비슷한 의미에서 고대 중국에서는 아예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피휘라는 개념을 썼고, 그렇게 '삼가는 뜻을 표한다.'는 의미가 맞아떨어져 한반도에서도 줄곧 써먹었다.[1]
[1] 슬라브어파와 게르만어파에서의 곰도 마찬가지다. 다른 단어로 돌려 말하다가 아예 곰을 가리키던 본래 단어가 실전되어 버렸다.[2] 가령 노블레스에서 라이제르의 '꿇어라' 한 마디로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과 상대의 정신을 연결시켜 지배한 뒤 명령을 내리는 것이므로 언령이 아니다. 제시카 존스의 킬그레이브(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역시 범위 내에서만 자신에게 있는 특수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통제할 수 없는 강박을 일으킬 뿐, 위와 같은 정신 조작에 가깝다.[3]금각은각형제의 호리병 앞에서 대답을 하면 호리병 안에 빨려들어가지만, 말은 어디까지나 트리거에 불과하다.[4] 말한 게 거꾸로 된다.[5] 작중에서 스틱의 힘을 이용해 말하는 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게 한다. 단, 말을 끝까지 해야만 발동된다는 약점이 있다.[6] 언령 마법을 쓸 수 있는 유이한 등장인물.[7] 단순히 화술이 뛰어난 걸 넘어서 그의 말이 권능이나 다름없기에, 그의 언변에 다들 무의식적으로 경계심을 풀고 따르게 된다.[8] 언령 실체화.[9] 소리를 실체화시키거나, 말의 의미를 구현시키는 등 언령과 유사한 능력을 보인다.[10] 저주 한정이라 주언(呪言)이라고 칭한다.[11] 이누마키의 주언을 모방한 바가 있다.[12] 본래는 화술이 뛰어난 정도에 불과하지만, 생각한대로 능력을 구현시키는 회원들을 상대로는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능력을 강화시키거나 봉쇄하는, 그야말로 말에 담긴 힘을 보여준다.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풍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일본 신도의 신들과 신도적 세계관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일본’이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신예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1973~현재)는 흔히 ‘일본의 램브란트’ 혹은 ‘빛의 작가’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절절하면서 한없이 부드럽고 또 잔혹하기까지 한 배경미술의 모노노아와레적 서정성과 함께 특히 강렬하고 세밀하기
그지없는 빛의 상징을 통한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 그는 실제 풍경을 사진 찍어서 리터칭을 통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든지, 독백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을 선호한다. 그가 최근에 내놓은 <너의 이름은 (君の名は,
2016)>은 <초속5센티미터>라든가 <언어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소설도 쓰고 애니메이션도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6년 8월 일본에서 개봉된 이래 일본영화를 통틀어 역대 2위의 흥행기록을 올려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이목을 모았다. 2017년 1월 한국에서도 공개되었고, 부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장편부문 우수상을 수상받기도
했다. 2018년 2월 까지도 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 제1위를 마크하고 있다.
일본에서 개봉되기 두 달 전에 동명 소설이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에서 출간되어 영화 공개시점까지 매출 50만부를
돌파하고 2016년 문고부문 1위의 매출 기록을 올렸다. 소설과 영화는 스토리상의 큰 차이는 없지만 화자가 조금 다르다. 소설판은
다키와 미쓰하의 1인칭 시점만으로 서술되어 있는 데 비해, 애니메이션판은 3인칭 시점이다. 이 밖에 가노 아라타(加納新太)가 쓴
가도카와 스니커문고(角川スニーカー文庫)판 소설도 있다. 여기에는 신카이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 3개가 추가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소설 <너의 이름은>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다. 처음에 혜성이 낙하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상적인 마을 이토모리에 사는 여고생 미쓰하는 미야미즈(宮水)신사 가문에서 태어난 무녀이다. 그녀와 도쿄에 사는 고교생
다키는 꿈에서 몸이 서로 바뀌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고 둘은 서로가 남긴 메모와 일기를 통해 상대방의 인생을 알아 나가지만,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몸이 바뀌지 않게 된다. 그러자 다키는 자신이 체험한 이토모리 호수 마을의 풍경화를 여러 장 그린 후
어딘지도 모르는 그곳을 찾아 떠난다. 그의 손목에는 언제나처럼 부적 실매듭이 둘러져 있다. 하지만 언제 누구한테 받은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던 때 우연히 들른 라면집 주인이 이토모리 마을 출신이었는데, 그는 3년 전
이토모리 마을이 혜성 ‘티아마트’의 운석 재해로 전체 주민 1500여 명 중 500여 명이 죽고 나머지도 점차 마을을 떠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준다. 운석은 축제 중이던 미야미즈신사 부근에 떨어졌고, 그곳은 원래 있던 이토모리 호수 근처였기 때문에
내부에 물이 흘러들어 하나의 조롱박 형태의 새로운 호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다키는 휴대전화에 입력해 놓았던
미쓰하의 일기를 불러오지만, 그 글씨들이 다키가 보는 앞에서 모두 지워져 버린다. 도서관에서 찾아낸 관련 책자에서 다키는 미야미즈
히토하(82세), 미쓰하(17세), 요쓰하(9세)가 모두 사망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다키가
미쓰하의 구치가미자케(口噛み酒)를 마심으로써 둘은 다시 몸이 바뀌고 순간적이나마 황혼녘 때 극적인 재회를 한다. 그 직후 미쓰하의
몸으로 바뀐 다키는 마을 이장인 아버지를 설득하여 재앙을 피한다. 5년 후 다키와 미쓰하는 모두 상대방의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우연히 도쿄에서 만나 서로 이름을 묻는다.
이 <너의 이름은>은 내가 아는 한 일본 신도의 핵심을 가장 잘 묘사한 서브컬쳐 작품이다. 몸이 바뀐다는 중심
모티브 자체가 몸에서 혼이 빠져나온다는 신도적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새로 즉위한 천황이 최초로 행하는 추수감사제인
대상제(大嘗祭, 다이조사이)에 앞서 행해지는 진혼제(鎭魂祭)는 혼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안정시키는 의식을 가리킨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오나무치(大國主神) 신화에서는 스쿠나히코나(少彦名)가 바다 저편에서 빛을 발하며 다가와 자신을 모시면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오나무치의 행혼(幸魂)・기혼(奇魂)’이라고 밝힌다. 이는 혼과
몸이 분리될 수 있다는 관념이 투영된 신화라 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에서 주인공의 혼이 자기 몸을 빠져나와
상대방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발상의 바탕에는 이와 같은 일본의 전통적 관념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런 몸의 뒤바뀜에 대해 소설판의 다키는 흥미롭게도 “인격이 서로 뒤바뀐다는 일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경험이었지만,
‘나라는 존재로부터 잠시 동안 멀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일종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셈이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우리나라 무속의 경우처럼 한(恨)을 ‘풀어내는’ 자유가 아니라 인도 요가의 경우처럼 ‘묶어내는’ 자유에
속한다. 실제로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는 묶는 것을 뜻하는 일본어 ‘무스비’(結び)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야미즈신사의 여궁사인 미야미즈 히토하는 이 무스비의 의미에 대해 손녀딸 미쓰하와 요쓰하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땅의 수호신을 말이다. 옛말로 ‘무스비’라고 부른단다. 여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지...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전부 같은 말을 쓴단다. 이 말은 신을 부르는 말이자 신의 힘이란다.
우리가 만드는 실매듭도 신의 솜씨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지...한데 모아서 모양을 만든 후에 꼬아서 휘감고, 때로는 되돌리고,
끊기고, 또 이어지고, 그것이 실매듭. 그것이 시간. 그것이 무스비...물이든 쌀이든 술이든, 무언가를 몸에 넣는 행위 또한
무스비라고 한단다. 사람 몸에 들어간 것은 영혼과 이어지는 법이지. 그러니 오늘 올리는 제사는 말이다. 미야미즈 가문의 핏줄이 몇
백 년이고 지켜온, 신과 인간을 단단히 이어주는 아주 소중한 전통이란다.”
“신이란 말이다, 관계를 의미한단다. 말은 사람과 사람을 엮지. 말 자체는 신이 아니지만 말에 의해 엮이는 마음 자체는
신이 되는 거야. 주먹밥은 신이 아니지만 쌀을 만든 땅과 물, 그리고 쌀을 기르고 수확한 사람과 쌀로 밥을 지어 주먹밥으로 만든
사람, 나아가 그 주먹밥을 받아서 먹는 사람을 모두 이어주지. 주먹밥으로 이어지는 그런 관계가 신이라는 뜻이지. 꿈이란 말이다,
평소와 다르게 어디인지 모르는 장소에서 상식을 벗어난 연을 맺는 일이란다. 그것도 ‘무스비’라고 부를 수 있는 게지.”
단적으로 말해 무스비는 신(神)이다. 《고사기(古事記)》는 무스비를 원초적 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신으로서의
무스비는 모든 관계성이자 시간이고 언어이며 실매듭이면서 동시에 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과 실,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 몸과 영혼을 연결시켜 주는 신의 힘 그 자체이다. 이 중 시간과 신을 동격으로 여기는 관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관계성을 신적인 무스비로 여기는 관념은 지극히
일본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간인(間人)주의라든가 장(場)의 윤리, 역(役)의 원리, 세켄(世間), 화(和)의 원리와 같은
일본문화코드를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신을 언어와 연관시키는 발상이다. 사실 고대 일본인은 언어와 사물 사이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여 말 속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었다. 이를 ‘언령(言靈)신앙’이라 한다. 통상 신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구성에 관여하는 근원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신으로서의 무스비를 언어와 동일시하는 위의 관념은 지극히 라캉적이다. 라캉은
언어야말로 그가 상징계라고 이름붙인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구성을 결정짓는 근원적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너의
이름은>이 표현하는 세계는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무스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미쓰하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같은 신을 모시는 이토모리 마을의 오래된 미야미즈신사 집안의 손녀딸이다. 할머니가 신사를
지키는 궁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미쓰하와 요쓰하는 마쓰리 때마다 무녀로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신악무(神樂舞)를 추는 등 주역을
맡는다. <너의 이름은>의 중심 무대인 미야미즈신사는 대대로 여자가 이어받기 때문에 미쓰하는 언젠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신주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신사는 실이나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신의 힘을 ‘무스비’로서 섬기고 있으며,
신체(神體)는 이승과 저승,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장소로 여겨진다. 혜성 티아마트가 떨어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 제신의 이름은 미야미즈 가문의 조상신인 시토리노카미다케하즈치(倭文神建葉槌命)로 별칭 아메노하즈치노오노카미(天羽槌雄神)라고도
한다.
이 신은 《고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고어습유 (古語拾遺)》에서 인간에게 베 짜는 방법을 가르친 베틀의 신으로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 따르면 천신 계열의 무신(武神)인 후쓰누시와 다케미카즈치가 토착신들을 평정하려 했을 때 별의 악신
아메노카가세오(天香香背男)만 토벌하지 못해 곤란해 했다. 이때 그들 대신 나아가 별의 신을 굴복시킨 자가 바로 베틀의 신
시토리노카미다케하즈치였다. 이토모리 마을에는 이 신이 끈을 무수히 엮어서 용을 휘감아 퇴치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처럼 일본 신도의
신들과 신도적 세계관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일본’이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chat0113@daum.net 논문으로
〈현대일본종교와‘마음’(心)의 문제-‘고코로나오시’와 심리통어기법에서 마인드컨트롤까지-〉,〈고대 오사카의 백제계 신사와
사원연구〉등이 있고, 저역서로 《일본문화사》,《신도,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정신의 풍경》,《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등이
있다.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즉,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키는
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앞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이제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또한 여기서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이와 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주의 할 것 두 가지
첫째, 역활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목사, 아버지, 남편 문제는 역할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동시에 교회와 집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바람직한 설명은 아니다.
둘째, 삼신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성부 하나님은 창조, 성자 하나님은 말씀, 성령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모습이므로 삼신이 될 수 밖에 없다.
터툴리안은 태양으로 설명하였다. 태양은 빛, 열, 태양으로 섦명할 때 다른 곳에서는 밤이 된다면 그곳에 태양은 없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땅에 계셨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으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위엄(威嚴) - 거룩한 두려움
위엄(威嚴) 1. 의젓하고 엄숙함 2.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엄성 3. 거룩한 두려움
따라서 사람의 위엄은 불완전하며, 오직 참된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양한 히브리어
단어가 ‘위엄’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테러(terror)’로 번역하였습니다(출 23:27, 신
34:12, 욥 13:21, 사 2:21).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 NIV, ESV)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I will send my terror ahead of you and throw into
confusion every nation you encounter. I will make all your enemies turn
their backs and run.
위엄(367) 에이마(’êymâh) אֵימָה
1. 공포. 2. 신명기 32:25.
발음
[ ’êymâh ]
어원 / 366과 동형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여성
공포[그 원인에 대한 소유격이 수반됨], 신 32:25.
신명기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Great terror: NIV, NASB, KJV)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욥기 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Your terror: NIV)으로 나를 두렵게(terrify: NASB, ESV) 마옵실 것이니이다.
이사야 2: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terrify: ESV; terribly: KJV) 그의 위엄(the terror of LORD: ESV, NASB)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뉴스에 보도되는 테러 사건을 들을 때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람의 테러는 막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테러로 역사하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엄(테러)이 역사하시면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먼저 하나님의 위엄 앞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역사합니다.
대적 원수들에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떨림이 임하며(시 48:6), 마음에 병이 될 정도의 큰 걱정거리와 낙담이
생깁니다(출 15:15).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하나님의 위엄을 피할 수 없으며(시 76:12),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대적들의
기운이 빠지고 몸이 돌과 같이 굳어집니다(출 15:16, 삼상 25:37).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 까무러칩니다(수 2:11,
5:1, 사 13:7).
하나님의 위엄이 역사하시면 오늘부터 천하 만민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그 앞을 대적하지
못하고 얼씬도 못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종말 때에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바벨론이 아무리 무섭게 성도를 대적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셔서 강한 대적들이 죽음 앞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출 23:27, 신 28:10, 33:26).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威嚴)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로마서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출애굽기 23:27에 ‘하나님의 위엄’이 나옵니다. ‘위엄’,위엄 위(威), 엄할 엄(嚴)입니다.
위태로울 위(危), 험할 험(險)이 아닙니다. 뜻은 ‘의젓하고 엄숙함’,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성’,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위엄의 속성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류의 시조 아담, 하와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흘러 내려오는 역사(歷史)는 만세(萬歲) 전에 택하신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최후의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적 경륜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죄악 된 인간에게 말씀을 줘서
깨닫고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첫째 소원입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 18:14).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가셨죠. 키 작은 세무서장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듣지도 않으셨는데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留)하여야 되겠다.”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악질 매국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내가 남한테 토색(討索)한 것, 돈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하셨죠(눅 19:1-10).
본문에 위엄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벌써 삭개오에게 가서 역사(役事)한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창조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입니다. 세계사는 구속사예요. 그냥 제멋대로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여러분을 향해 벌써 하나님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어떤 죄인에게도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의 뜻이‘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많은 사람들한테 대접받으러 온
게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고 대속물(代贖物)로 내 몸을 바치러 왔다.”하셨죠(마 20:28, 막 10:45). 수천 년의
역사가 한강 물같이 도도히,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흐름입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요
3:16). 하나님이 역사의 근원이며, 모든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대상 29:11,12, 욥 12:23, 시 103:19,
엡 1:11). 따라서 구속사는 세계사, 즉 일반 역사의 중심핵을 이끌고 있습니다.
‘구속(救贖)’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걸머지고 죄를 사해 주고 구원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구속사의 최고 절정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십자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 그리고 위엄이 한강 물 같이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누구든지 텀벙 빠져서
목욕하면 십자가 피로 죄를 씻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이면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위엄이 그 백성과 함께하시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말씀으로 승리하고, 세상 죄와 상관없이 천국에 입성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다
참된 위엄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승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5:24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역대상 16:27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위엄’이 영어로 어떻게 돼 있는지 영어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테러’(terror)입니다. 테러, 얼마나
무섭습니까. ‘테러’는 국어사전에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는 행위.
테러리즘(terrorism)의 준말’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위엄’이 영어로 바로 ‘terror’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악한 세상, 당신의 테러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테러해도 겁나잖아요? 때려 부수고 쥐어패고 팔을 비틀고 몽둥이로 패보세요.
보는 사람이 얼마나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합니까. 마지막 심판할 때 하나님의 테러! 이 성경 구절들을 찾아 봤습니다.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신명기 34:12에는 ‘엄청난 테러’(all the great terror, 모든 큰 위엄), 보통 테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테러는 누구도 말리지 못해요. 엄청난 테러! 욥기 13:21에는 주의 테러(your terrors), 이사야서
2:21 볼 때 하나님의 테러(the terror of the LORD)!
그러므로 하나님이 악의 세력한테 테러하실 때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는 지켜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고 또 병풍같이 둘러 진쳐 준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세상에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위엄, 즉 테러가 역사하시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임합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위엄이 역사하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과 떨림이 임합니다. 남자들은 모르죠. 옛날에는 여인들이 아이를
낳으러 들어갈 때 마루 밑에 있는 신발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 신발을 다시 신을 수가 있을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혹은 떨림! 또, 마음의 병이 될 정도로 큰 걱정거리, 근심, 낙담이 임합니다.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사무엘상 25: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서 까무러칩니다. 맥이 팍 풀려 일어날 힘도 없고 뭐 할 생각도 못 합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 멀끔히 먼 산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수 2:11,5:1, 사 13:7).
여호수아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신 2:25)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을 위해서 많은 사람을 떨리고 두려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감히 얼씬도 못 하고, 침범도 못 합니다. 꼭 믿으세요. 신명기 28:10에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3:26에는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하셨습니다.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주검이
될 수밖에 없죠. 성령의 역사, 마지막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대적들과 싸울 때, 대적들은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 공포, 고통에 사로잡히고 간담이 서늘해져 벌벌 떱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앞서 보내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출 23:27).
위엄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성취하려면
하나님께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입니다. 길 갈 때도, 어디 갈 때도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친근히! 그러면 반드시 위엄의 역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근히 하는 자, 히브리어 말로 ‘다바크’, 즉 ‘바싹 달라붙는 자’를 대신해서 싸우십니다. 하나님께 바싹
달라붙으면 고통, 근심, 걱정,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을 대신 다 해결해 주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성경도 믿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믿어야죠.
여호수아 23:8-10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여러분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대신 싸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할 때
‘내가 가서 혼내주겠다.’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벌써 가셔서 위엄으로 그 마음을 돌같이, 사지(四肢) 백체(百體)가 힘이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북한 김정은이 핵폭탄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위엄을 먼저 보내면 그까짓 것 다 먼지입니다. 쓰레기통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신명기 11:22-23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여기서 부종은 ‘붙을 부(附)’, ‘따를 종(從)’입니다. 히브리 원어나 국어사전에 ‘바싹 따라붙어서 따른다.’고 돼 있죠. 부종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에 세 번, 유월절과 맥추감사절,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몇천 리, 몇백 리를 걸어서
예루살렘에 다 가야 해요. 집에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걱정이 되죠. 그래서 ‘작년에 내가 갔다 왔으니, 올해는 당신만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위엄이 너희 집에 있겠으니 다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돌아올 때까지 그 집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약속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 하리라
자물쇠 잠글 필요도 없습니다. 문 다 열어놓아도 괜찮습니다. 얼씬도 못 하게 하십니다. 얼씬거렸다가는 온몸이
돌처럼 굳어져 죽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평생 예수님 믿으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위엄’을 보내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내 가정, 남편, 아내, 외국에 유학 간 자식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죠. 오늘 나와서 이 말씀 들으신 분들에게 자손만대에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리라.’(시 25:1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고, 예배드릴 때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내쫓을 때 보내신 세 가지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일곱 족속을 내쫓을 때 하나님이 세 가지를 보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보내셨습니다(출 23:20-28).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가 예비한 곳에 이르기까지 보호,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의심하거나 우습게 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이 사자에게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멸시, 천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 대접하고 순종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내 원수의 원수가 되고, 내
대적의 대적이 됩니다. 믿는 우리 평강교회 성도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대적들이 아예 엿보지도 않고 건드릴 생각도 안 합니다.
모든 생활에 형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하나님,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세요.’ 기도했죠. 이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나안 여섯 족속, 아모리, 헷, 브리스, 가나안, 히위, 여부스를 다 때려 부순 것을 보세요(출 23:23).
두 번째, 하나님의 위엄을 이스라엘 앞서 보내셨습니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출 23:27)를 ‘현대인의 성경’에는 ‘너희가 만나는 백성들을 내가 두려움과 혼란 가운데 빠뜨려 너희를 등지고 달아나게
할 것이며’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를 보지도 못한 채 소문만 듣고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이런 축복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위엄을 기도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기도하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아마 바쁘실 것입니다. 평강교회가 지금까지 ‘복을 주십사, 형통을 주십사, 악한 마귀에 시험 들지 않게 해 주십사’ 이런 기도만
했죠. 하나님의 위엄 속에 그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눈뜨자마자 ‘하나님의 위엄’, 길 가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버스 타고 가다 소매치기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있으면 절대
사고 나지 않고, 도둑맞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늘 감사, 찬송하고,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며 저절로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왕벌을 보내셨습니다(출 23:28, 신 7:20, 수 24:12).
신명기 7: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누가 ‘너 가만두지 않는다. 죽여 버리겠다.’ 하죠? 왕벌이 그 마음 먹은 사람을 먼저 죽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나 죽인다는데 나 죽이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엄이 늘 함께해 달라.’ 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을 지켜줄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강대한 가나안 족속과 큰 성읍들과 하늘에 닿을 듯한 성벽과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게 될지라도 오늘날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너희 앞에 가나안 족속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을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신 9:1-3) 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우리 보고 “몽둥이 준비해라. 뭐 준비해라.” 하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가나안 7족속을 쫓아낸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도 죄는 있습니다. 사악하고
거짓말도 하죠.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말씀을 받고 양심이 있어서 회개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회개하면 죄가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하지만, 가나안 백성보다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지은 것 들통날까 봐 벌벌 떨고 있죠. 가나안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에 죽이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두 군데 기록돼
있습니다. 결단코 이스라엘이 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디도서 3:5-8을 영원히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말씀입니다.
디도서 3:5-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4-5)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말씀을 내가 이루기 위해서
너희 죄를 용서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왕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면 내쫓아 주십니다.
북한이 핵폭탄을 월등하게 많이 갖고 있다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위엄이 가서 하루아침에 전부 날려버립니다. 제 말이 맞나
안 맞나 보세요.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 믿어야죠.
신명기 4:38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가나안 족속들은 잡힌 포로를 세워 놓고 껍질을 벗기는 악한 민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자마자 질리죠. 그러나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시 68:33-35) 하신 그 위엄이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위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속사에서 실제 성취된 위엄의 역사
출애굽 때 나타난 위엄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했습니다(출 15:14-16). 모세도 뒤늦게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내용은 ‘큰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렘 32:21).
예레미야 32:21 주께서 징조와 기사와 강한 손과 드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신명기 4:34에는 ‘그 힘이 크게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큰 공포적인 것들’입니다. 신명기
11:2에는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명기 26:8-9에는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그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출애굽 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으며’라고 하셨고, 신명기 34:11-12에는 ‘애굽에서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바다가 육지같이 순간적으로 말랐습니다. 몇 날
며칠이 걸린 것이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자마자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보송보송하게 물기가 하나도 없고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말랐습니다(신 4:34-36, 6:22-23, 7:19, 29:2-3, 34:11-12, 수 24:17).
가나안 땅 점령에 나타난 위엄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 초기 6년 중 가나안 왕 38명을 목 베서
죽였습니다. 가장 강했던 왕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입니다. 다른 가나안 왕들도 이들에게는 벌벌 떨었죠. ‘옥’의 뜻은
‘긴 목을 가진’, ‘둥근 목’입니다. 르바임 족속으로, 신장이 9규빗, 4m 10cm였습니다. 그가 자는 쇠 침대의 폭이 2m
82cm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천둥, 벼락 치듯 무섭게 위협하니 모두가 복속해 60개 성을 다스렸습니다. 또 ‘시혼’은
‘청소하다’라는 뜻입니다. 역시 악질적인 왕입니다. 오죽하면 시편 135 ,136편에 시혼에 대해 노래한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두 왕을 먼저 죽였습니다(수 12:1-6, 민 21:21, 35, 신 2:24-37, 신 3:1-11). 가나안 왕과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습니다(수 2:9-11).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때 이름과 족보를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세가 또 미디안 왕 5명, 에위, 레겜, 수르, 후르, 레바를 처참하게
죽였고(민 31:8), 여호수아는 정복한 31명의 왕을 백성들 보는 앞에서 죽였습니다(수 12:7-24). 이것이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남한에 대해 오만 욕설을 다 하고 있지만 큰일납니다. 대한민국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구속사를 가르치는 평강교회가 있습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라고 말씀드렸죠. 이제 기도 좀
바꾸세요. ‘우리 가정에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남편과 자식에게 은혜 주시고 축복 주시고 근심 없는 복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위엄의 역사’ 한 가지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 여러분.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수 5:1)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에 보내실 때, 위엄을 미리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알았죠. 여호와의 구원은
무기가 많고, 전략이 좋고, 사람이 많고, 이런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삼상 14:6). 이사야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셨죠. 그러면서 믿는 성도를 향해
“너희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대신 싸워 주겠다.” 하십니다(수 23:10). 너희는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라는 것입니다(출 14:14).
그러니까 오늘부터 마음 푹 놓고, 정말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어영부영하지 말고,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고, 교회 생활에 집중적으로 하세요. 무슨 일 해도 하나님 앞에 하는 것같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들
보호해 줄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믿는 성도 하나에게 위엄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 명이 천 명을 쫓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 명이 말하는데 상대에게는 천둥이 진동하는 것처럼 들립니다(수 23:10, 사 30:17).
이사야서 30:1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두 사람이 만 명을 쫓습니다(신 32:30). 만 명이면 1개 사단입니다. 그들이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다섯이
백을, 백이 만을 쫓죠(레 26:8). 하나님께서 없는 말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 나라 갈 때까지 기도할
때마다 잊지 말고 꼭 위엄의 역사를 기도하세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죠. 위엄이 나 대신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들게 됩니다. ‘나, 나, 나’하고 내가 주인 되어 기도하면 내 욕심만 부립니다.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의 앞에
쫓아내고 오늘날까지 너를 당할 자 없다.”(수 23:9) 하셨으니 악한 원수 마귀, 북한군 수천만 명이 온다 해도 평강교회 성도
하나를 당할 자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내 것이 되고, 믿지 못하면 남의 것이 됩니다.
기드온 300용사에게 나타난 위엄
기드온이 3만 2천 군대 가운데 2만 2천을 돌려보내고, 다시 만 명 가운데 9,700명을 돌려보내고 300명을
남겼습니다. 300명이 미디안 군 13만 5천명을 이겼습니다. 1인당 450명을 이긴 것입니다.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무섭고 강하던 미디안 군대인데, 무기는커녕 지팡이, 작대기도 없던 300명이 다 쳐부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는데 그것도 못 합니까. 위엄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정신이 다른데
왔다 갔다 하면 여러분이 아들, 딸 가족들의 고기를 먹게 됩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레 26:19, 신
28:53, 겔 5:10, 왕하 6:29, 애 4:10). 장로, 목사, 권사라도 그 앞날이 험악합니다. 믿음으로 말씀할 때
귀담아들어야죠. 절대로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사울 왕과 사무엘 시대에 임했던 여호와의 위엄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모든 백성이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일어나고,
여호와의 두려움과 위엄이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천둥이 진동하듯 한번 말씀하실 때 전 백성이 ‘한사람 같이’ 모였습니다. 슬슬 온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30만 명이 딱 모였습니다(삼상 11:7).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집합한 것입니다. 이튿날
사울이 이스라엘 자손 30만 명, 유다 사람 3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3대로 나누고 새벽에 진 쳐 암몬과 싸우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승리했습니다(삼상 11:11).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사람과는 싸워 봐야 다 지는 것입니다.
욥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엄
‘욥에게 엄습한 하나님의 두려움’입니다(욥 6:4, 7:14, 23:16). 주님께서 꿈으로 놀라게 하고, 이상으로 두렵게 하셨습니다. 불치병에 걸려도 위엄이 임하면 모든 병이 달아날 줄로 믿습니다.
바벨론 포로 1, 2, 3차 귀환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위엄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인 주전 537년, 고레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습니다(스 1:2-3). 주전
458년 2차 귀환에도 하나님의 위엄이 따랐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해야 할 텐데
오히려 본토 사람들이 ‘포로민들이 돌아온다.’며 두려워했습니다. ‘나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유대인이 되겠습니다.’
하며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스 8:17).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BC 444년 3차 귀환도 아닥사스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임하니 느헤미야가 왕에게 요청할 때 바로 이뤄졌습니다(느 2:1-10).
초대교회 부흥도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
사도들이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자,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살아가기만 하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믿지 않는 자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 위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백성들에게는 위엄을 보내어 공포에 떨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보니 대적을 두려워하고 있었죠.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자와 담대함을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20:3, 수 1:6, 7, 9, 수 8:1, 수 10:8, 수 11:6). 오늘
본문 로마서 11:22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두려워하는 마음, 비겁한 마음, 소심한 마음, 주저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 근심,
걱정하는 마음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떨리고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큰 여리고 성도 점령해 놓고, 조그만 아이 성을 치다가 36명이 전사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해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50세겔중(重)의 금덩어리 하나를 집에 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내와
자식들까지 데려다가 돌로 죽이라.”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하니 하나님의 노가 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사기 쳤다는 것입니다.
바스훌이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뒀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 ‘바스훌’은 ‘비옥하다’라는
뜻이었지만 하나님의 종을 때리고 오만 모략을 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저주 받은 이름 ‘마골밋사빕’으로 바꾸셨습니다(렘
20:1-6). 미골빗사빕은 ‘사방의 두려움, 공포’라는 뜻이죠. ‘사비브’(사빕)가 ‘주위’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사방에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고치지 못합니다. 밤낮으로 떨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하나님이 그 이름을
바꾸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사방의 환난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의 위엄의 능력이 함께해 주셔서
위로하셨습니다(고후 7:5-6).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성의 모든 남자를 죽여 복수했습니다. 주변
족속들이 죽이려고 쳐들어오려 할 때(창 34:25-30) 하나님께서 위엄을 보내셔서 야곱 가족들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하신 뒤,
사면(四面) 고을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잡으러 가자고
하다가 하나님의 위엄이 임하니 잡으러 가겠다던 마음속에 겁이 생기고 맥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칼과 몽둥이를 다 내려놓았죠. 야곱의
가족들이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창 35:5).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때도 북한이 핵폭탄 미처 쏘기도 전에 하나님의
위엄이 가셔서 다 망가뜨리십니다. 대한민국이 선제공격이고 뭐고 하지 않아도 세세 무궁토록 자유 대한민국,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신 애국가 가사와 같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아무리 열국, 강대국이
떠든다 해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작은 교회와 성도를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평강교회, 작은 교회죠.
그러나 우습게 봤다가는 큰일 납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편안하게 안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마음 놓고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 위엄이 평강교회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
나와도 이 교회는 하나님의 위엄이 지키고 있습니다.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보세요. 부모가 백번 걱정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한 번만 돌보시면 다 끝입니다. 걱정 없는 것입니다. 유다서 1:25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 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어떤 환난과
핍박으로 세계가 열두 번 뒤집어진다 해도 절대 하나님께서 안전 보장하시고, “내가 책임진다, 대신 싸운다.” 하신 말씀을 믿고
감사하고 늘 보람을 느끼고 사는 맛을 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믿음없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고,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크냐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더불어 주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이를 배제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모두 변화산에 함께 오른 세 제자와 산아래 있는 제자들은 모두 같은 상태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깨달음이 부족하고 헛된 변론과 야망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은 그들 뿐 아니라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속 위엄있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 37-43a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올때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신의 외아들을 제자들이 축귀하지 못한 것을 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고 패역함을
한탄하시고, 외아들을 불러 축귀하여 낫게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보내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랍니다.
9:1-6에서
제자들은 축귀와 병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아 두루 많은 역사를 행하고 경험했습니다. 이에 헤롯왕도 놀랐다는 소문도 들었고,
오병이어 사건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어쩌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라면 장차 이뤄질 나라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높여질 것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잘못된 메시아
상에 대한 기대를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수난에 대한 예고과 십자가의 길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변화산에
다녀오신 이후 마침내 제자들의 상태가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전에 행하던 축귀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제자들이 그 능력과 귄위를 받았음에도 축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제자들의 상태와 태도에 있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제자들이 기대하고 고백한 그리스도는 결국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메시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고난받은 종으로서의 메시아 상으로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언급하시고 설명하시지만 다른
역사들은 수용하면서도 이 말씀만은 뒷등으로 듣고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들만 고수하게
됩니다. 축귀의 능력이 자신들이 아닌 예수님께 있음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번의 경험들이 오히려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는냥 착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패역한
세대라 함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도 볼 수 있고,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그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귀신을 향한 분노를 비롯하여 진정으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책망받던 모습입니다(예 신 32:5, 20; 눅 7:31;
11:29-32, 49-50; 17:25).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태로 인해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단하시고 온전한 믿음과 긍휼 곧 하나님의 위엄으로
아이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축귀하여 아버지에게 돌려보냅니다(사회적 관계의 회복까지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행하심). 예수님의 신실하신
믿음과 긍휼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고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연륜이 많다 하더라도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언제고 우리 삶에 질서와 관계들을 파괴되고
흐트려집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오는 충격에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주님에 대한 바른 앎에 기초한
믿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을 통해 온전히 알고 얻는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뜻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믿음이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고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무리 믿음의 관심과 방향과 목적과 내용에 대한 상태를 계속 점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의 믿음을 비춰봅니다. 믿음 없고 패역한 제자의 모습을 보거든 주님의
위엄을 의지하여 고쳐지고 회복되길 원합니다.
# 43b-45절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며 경이로운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다시한번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귀담아 들을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위엄을 통한 역사가 일어날 때 바라보고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것이고, 그런 일을 행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기만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오해의 여지를 바로잡아 주시려 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알아야 하고 당면한 문제는 주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고난받는 메시아의 길을
가기 위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팔려 가실 때 자신들이 어느 편에 서 있어야 할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더불어
제자들이 묻기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교정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신앙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선한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을 따라 세워진 목적과 뜻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말씀앞에 서고 예배하고 주님을 대면하더라도 우리가 보고싶은 부분만
우상처럼 만들어 신앙하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매일 묻고 또 그 말씀이 그런가 하고 상고해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계속
점검해야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반듯한 길을 가더라도 수시로 전후좌우를 살피고 계기판의 속도와 오일의 양과 엔진의 온도와 실내의 공기와 상태들을
점검하고 졸음이 오는지, 동승자들은 편안한지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부지런히 살펴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이와 마차가지로 우리 신앙의 여정도 부지런히 살피고 묻고 돌아보며 점검하면서 고치고 교정하고 붙잡고 그렇게 가야 합니다. 이를
회피하고 두려워한다면 금새 우리는 곁길로 새거나 엉뚱한 길로 빠져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이 있고 살아 있다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이 여정에는 길 가, 가시밭,
돌짝밭같은 많은 유혹과 미혹과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행하기 위해 길되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야만 합니다.
그러니 회피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더라도 묻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고치고 교정하고 온전케 됨을 믿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46-48절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큰 자이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주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제자들이 변론하는 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하나 데려다 자기 곁에 세우시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고,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결국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하는 상황인데 아직 제자들은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함을 넘어서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급기야 노상에서 헛된 권력욕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워질 메시아 왕국에서 모두 어떤 자리에 앉게 될지에 대한 것을 염두하고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변론을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당대 가장 작은 자로 여겨지던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면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개념을 바꿔주시는 교훈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어린아이 곧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대 받는 이들을 향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이들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을 향한 믿음의 상태를 재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향한 섬김과 겸손 그리고 자기 부인의 길이
주님이 찾고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는 것은 당대 문화적 배경에서 같이 밥을 먹고 함께하는 이들이 누구냐에 따라 명예와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이 결국 하나님의 위엄을 가졌고, 그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낮은 그가 가장 큰 자라 하신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우회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연약한 이들에 대한 태도가 사람과 사회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러한 이들이 차별과 천대 받지 않고
살게 하는 나라입니다. 결국 그 나라에 합당한 우리 삶의 모습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자들에 대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자고하고, 더 많이 가져 부유해 지려하고, 더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고,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서 차별하려하고, 그것을 이룬
이들을 시기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자족하지 못하는 것들 모두 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주님을
믿어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분명 오늘 교회가 지향하는 나라와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주님이 그토록 경계한 맘몬과 이기와
힘과 폭력이 주인되는 그런 나라를 지향하면서 겉만 번지르하게 거룩을 운운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혼돈속에 있진
않은지요? 탐욕으로 점철된 나라를 천국이라는 상품으로 포장하고 온갖 상술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말을 설교라 하고, 복을
하나님이 아니라 번영과 성공이라고 가르치며 헌신과 헌금 갈취하면서 팔고 있는 종교 장사꾼은 아닌지요? 그런 속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만큼 서 있으며 그런 이들과 얼마나 다른지 아님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앞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오늘 주변의 비난 받는 기독교 한켠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주여….
# 49-50절 예수님은 사람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고 금했다고 요한이 예수님께 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고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있어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로 앞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 제자의 모습과 상반되고,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제자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하시려
오셔서 차별과 배제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다 모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이름을 따라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같은 소속이 아니라고, 사람이 만든 통제와 규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금하게하고 배제하는 것은 제자들이 잘못된
특권의식에 빠져서 결국 주님의 뜻과 의도와 권위를 거역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같은
주를 믿지만 섬김의 방식은 문화 세대 지역 민족 신분등의 차이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에 그런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다양한 도전들을 품어내되 진리를
훼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배제가 아니라 수용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융합해 내므로 진리를 더 굳게 세우고 더
넒고 깊고 온전하게 세워지며 다양한 이들을 살리는데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배타, 배제, 차별등은 진리를 품고 따르는 이들이 그
진리의 크고 높고 위대함의 권위를 스스로 부인하고 옹졸하고 부족한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일신학을 가진
진리의 신앙을 사는 우리는 더 넓고 더 깊고 더 온전함으로 모든 것을 넉넉하게 품으면서도 스스로 변질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을
변화과 성숙으로 세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_ 김용규_9쪽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중략)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과 같은 전근대적·신본주의 가치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인본주의 가치들, 그리고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서
같은 탈근대적·개인적 가치들까지 우리가 시대를 따라 추구했던 가치들을 모두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는
겁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찬송 가운데 특이한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삼위일체를 주제로 찬송가를 만들어서 보급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 청년들 장년 그리고 노년들에게 그 찬송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요? 삼위일체가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삼위일체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삼위일체 영문법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영문법책에까지 삼위일체를 붙인 이유는 삼위일체는 공부법에서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역사에서 삼위일체는 힘든 역사의 기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은 많이 죽어갔습니다. 니케아회의에서 325년에 삼위일체 교리를 1차로 확정하면서 교리논쟁을 끝냈으며 451년경 칼케돈 회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보충 확정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삼위일체교리는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숫자가 셋이면 셋이고 하나면 하나인데 오늘 삼위일체는 셋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몇 분인가요? 한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님 성령 하나님 셋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삼신론에 빠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고 아들과 성령은 피조물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단에 빠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단으로 판정된 것이 양태론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시대 성자 예수님의 시대 성령 시대로 구분하는 양태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이단들은 거의 다 양태론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태론적 입장을 가지고 성령시대에 이어서 그들의 교주가 오늘날 재림주로 왔다는 것입니다. 처음 6개월 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교리교육을 시작했다가 교육이 끝날 즈음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교주 앞에서 재림주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 이단은 현대판 양태론에 빠진 이단입니다. 오늘날 이단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빗나갔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빗나갔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복잡하지만 아주 단순합니다. 한 가지만 알면 삼위일체 교리는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에 그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지 아니면 유사한 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높고 아들은 열등하다고 하면 이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하다고 주장하면 그래도 이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서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진리의 성령이 오면 아버지의 영광을 다 나타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서 보내실 성령은 누가 보내시는 것입니까? 아버지로부터 파송 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송 받는 자가 성령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가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외모는 다른 데 본질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외모에서가 아니라 질적인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질에서 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본질에서 일체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
삼위가 무엇인가? 연극하는 배우들이 어떻게 하십니까? 배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을 persona라고 합니다. 영어로 pers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격이라고도 하고 가면이라고 하고 위격이라고 합니다. 한 집에 산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서 하나이지만 그 각자는 서로 다릅니다. 하는 일에 있어서 다릅니다. 아버지는 창조사역을 하는 조물주이십니다. 아들은 누구냐? 자신의 몸에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구속자이십니다. 이 일을 아들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가 세상에 깨닫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갈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가 죄에서 깨닫도록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방황할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를 뉘우치게 하고 말씀을 깨닫도록 하시는 일을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정가운데서 선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은 중보기도를 많이 할 때에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중보기도자의 덕분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을 듣고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교회와 하나님을 전혀 몰랐지만 누군가의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6장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장래까지 다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절대 신뢰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두 살짜리 딸을 둔 어느 부부가 장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이 시장을 간 사이에 그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그 사이에 무엇인가 요리를 준비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아이를 갓방으로 데리고 가서 장남감을 손에 쥐어 주고 자장가를 부르면서 잠재우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그 다음에 부엌으로 와서 오븐을 켜고 완두콩을 얹었습니다, 그 요리에 꼭 들어가야 할 양파가 생각이 나서 그것을 가지고 음식창고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자지러지면서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달려와 보니 두 살 배기 아이가 오븐에 손을 얹었던 것입니다. 그 남편이 아이를 급히 끌어안고 즉시 병원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가는 사이에 아내와 장모에게 전화를 넣고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아이의 손을 소독가제로 닦고 그리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는 사이에 두 살 배기 아이가 눈을 꼭 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감는 일이 거의 끝나가자 아이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아내가 발견합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가 얼굴에 기쁨이 넘쳐서 “엄마, 할머니, 아빠, 엄마, 할머니, 아빠....”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붕대 감는 일이 끝났고 엄마가 있고 할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아이는 걱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이가 절대 신뢰하는 엄마 할머니 아빠 곁에서 사고로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이겨내고 기쁨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성부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면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삼위일체 하나님 (요 16:12-15 찬송가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할 때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긴 논쟁으로 이어졌던 주제를 말하라고 하면 누구나 다 삼위일체 논쟁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논쟁에서 정통교리로 인정받은 사람도 수차례 투옥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아리우스와 논쟁에서 승리로 이끌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이 본질상 동등한지 아닌지입니다. 동일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우시우스”와 유사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이우스”라는 라틴어 개념이 삼위일체 논쟁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본질이라는 것은 아들을 아버지보다 하등의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는 왜 목숨을 걸기까지 양보 없이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는가? 유일신 하나님을 조상대대로 믿어온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신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야만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내려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그 보혜사는 제자들 속으로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아닌 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보혜사의 가르침과 능력은 예수님의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아버지로부터 파송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 1보혜사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이후에 오신 성령은 제2 보혜사가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롬 5:1-5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우리는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들을 당연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있는 것과 건강하게 다니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중심으로 감사는 잃었던 건강을 되찾았을 때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은 특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다는 데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과 견고하고 완성된 교리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물려받은 삼위일체 교리는 많은 사람이 희생의 피를 흘린 위에서 다듬어져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에 아버지와 공동으로 파송한 성령께서 이 땅으로 왔습니다. 그 성령으로 우리가 믿음을 얻고 그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이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란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기뻐하고 소망 중에 인내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 (시 8편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온 땅에서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것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의 모든 내용을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찬양구절로 괄호 쳐서 넣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9절).” 이것은 시인이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시인은 이 시의 내용의 전부를 다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보려고 하는가?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창조의 신비일 것입니다. 하늘의 궁창과 달과 수많은 별들이 매달려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을 수 있는가? 그 능력의 비밀은 하나님의 손가락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구를 다 동원하여도 붙잡아 맬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지으시고 그리고 손가락의 능력으로 지으신 것들을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인간 또한 많은 창조물들 중에 하나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으로서 시인 역시 대적하는 원수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젖먹이 아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은 젖먹이에게 임하게 되지 젖먹이의 입으로도 대적들을 다 무찌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찮은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시므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4-6절).”
그렇다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만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수 있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권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성령을 받는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심을 믿고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지혜이신 하나님 (잠 8:1-4, 22-31,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잠언서는 유대의 문화적 경계 너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애굽,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 주변나라의 경험적 문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오늘 8장은 기원전 (B.C.) 6세기 중반 경 바벨론 포로기 또는 그 이후에 수집 기록 책인 1-9장, 31장의 범위에 속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지혜가 여성명사로서 의인화된 인격체로 등장합니다. 이 지혜는 창조자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 창조물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백성들을 찾아와 소리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높은 곳이나 네거리에서 그리고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곳에서 지혜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왜 지혜가 자기 백성들을 이토록 간절하게 부르고 있는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밝게 하는 명철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부요케 하여 가난에서 허덕이지 않고 부요케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에 빠져서 부패와 멸망의 길로 걷지 않고 선과 복과 공의의 길에 걸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지혜를 만나는 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이 지혜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오늘 이 지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성명사형을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이 지혜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잠언서에는 그 지혜가 우리를 돌보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성령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지혜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