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聖經)
주후 2015. 2. 8 주일설교
성경(요한복음 5:30-39)
(도입 이야기)
첫돌 잔치 때마다 돌잡이 행사를 합니다. 요즈음은 돌잡이 장난감 세트를 사용합니다. 돌잡이 장난감 세트에는
골프채, 청진기, 마이크, 야구공, 축구공, 판사봉, 연필, 실, 비행기, 마우스, 여자 아이를 위한 미스코리아 왕관이
사용됩니다.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돌잡이 행사를 신앙생활에 비유해서 ‘성경책 한권과 100만 불 시가의 아파트 입주권’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을 잡겠습니까?
이민자들의 삶을 생각할 때 성경책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책을 잡는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과연 누가 성경책을 잡을까요? 왜 성경책을 잡을까요?
극동방송국에서 대북방송을 진행하며 성경읽기라는 프로를 실시합니다. 한번은 담당자 앞으로 북한에서 어느 교인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요지는 사무엘상 15장을 받아쓰지 못했는데 한 번만 더 읽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후 사무엘상 15장을 다시 읽었는데 얼마 후에 ‘이제야 성경 전체를 받아썼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성경은 한 짐입니다. 그래도 성경을 갖게 된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라는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이라면 아파트 입주권보다 성경책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잡을 것인지 나의 신앙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2월의 성구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아멘
성경책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파트 입주권을 잡을 것인가?
성경책을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답이 요한복음 5장 39절에 소개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아멘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제임스 왕 시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임스 왕은 성경을 너무나 좋아 하여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 성경을 킹 제임스 성경이라고 합니다(King James Version).
성경이 번역되었을 때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가 있었는데 사형수가 왕에게 ‘왕이시여! 나는 사형수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왕이 번역한 성경을 한번 읽고 죽고 싶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왕은 사형수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다 읽었느냐?’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형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성경은 모두 3만절이 넘는 데 하루에 한 구절씩 연구하며 읽고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제임스 왕은 깊은 감동을 받아 ‘집에 가서 성경을 다 읽고 죽어라’ 이렇게 말하며 사형수를 석방했다고 합니다.
죽어야 할 사형수가 성경 때문에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잡아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책을 갖고 있기만 해도 정치수용소로 보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성경을 받아 적고 성경을 가졌다는 기쁨으로 감격하며 감사하는 북한 지하 교회의 성도처럼 우리들도 성경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성경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자동차가 흔한 시대이지만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에 자동차를 구입하면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은 자동차 사고가 없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만들 때 반드시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야만 사고가 없도록 자동차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고사를 지내는 까닭은 그렇게 하므로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교인들은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성경찬송을 올려놓고 다니는 것은 안전을 위한 방법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다만 기독교 신앙은 돼지머리가 아니라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십일조, 감사헌금 등과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모르면 성경과 찬송은 돼지머리와 같은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증거’ 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무엇을 증거 합니까?
진리를 증거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계시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 신앙에서 계시를 무시하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는 것과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는 것은 방법만 다를 뿐이지 목적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계시에서 찾아야 합니다. 계시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시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신앙을 확증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느 군 장교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아주 유능한 군인이지만 술을 입에 대면 그때부터 술에 취하여 계속적으로 술을 마시므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알콜 중독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군법에 회부될 위기에 직면하여 군목을 만나 상담했는데 군목이 그 장교에게 성경책을 한 권 주며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성경을 한 장 읽고 그래도 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다시 또 성경 한 장을 읽으라고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얼른 성경책을 펴서 한 장을 읽고 또 읽고 하여 결국 술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법관들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는 김홍섭판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961년 사형선고를 받는 피고인에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나와 피고인 어느 쪽이 죄인인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단죄하는 것이니 이해 바란다.”고 판결을 했다고 합니다. 며칠 뒤 쌀 한 말씩을 들고 생계가 어려운 피고인 가족들을 찾아가 쌀을 건네주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걸 늘 두려워하면서 겸허한 자세를 잃지 않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권위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한번은 김홍섭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가 탄 버스가 검문소 앞에서 멈추었고 순경이 올라와서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순경은 아무래도 그의 행색이 조금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그의 앞에 와서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라고 질문하자 그는 사실대로 “예, 저는 대법원 판사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순경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화를 벌컥 내며 신경질적으로 “당신 지금 누구를 놀리는 거요? 무슨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오? 어디 신분증 한 번 내보시요!” 그러자 신분증을 꺼내어 순경에게 보여주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라도 말했다고 합니다. 순경이 그의 신분증을 보니까 대법원 판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순경은 그 자리에서 경례를 하고 용서를 빌고는 급히 버스에서 내려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성도는 김홍섭 판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잘못된 버릇과 습관이라도 고쳐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 방법 중에 장좌불와라는 수행이 있습니다. 잠을 잘 때에도 그 자리에 앉아서 잠을 자는 수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수행하며 도를 찾는 스님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진리는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읽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읽는 재미가 날마다 지속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이홍머리방을 운영하던 가위손으로 유명한 미용사 이호영씨가 돈을 긁어모으던 직업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도대체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듯이 살던 사람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를 취재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날 때 그곳에서 1500명 이상이 참석하는 헤어쇼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형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장례와 뒤처리를 하느라고 행사를 취소했는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만일 그 때 행사를 진행했다면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사업 문제로 머리가 복잡하여 1996년 1월 처음으로 기도원을 찾았는데 평소 드문드문 읽던 성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마음이 평온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복잡한 머리가 정리되고 완전한 행복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다음해에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호영씨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함께 일을 하던 여자 동업자 홍씨가 날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탈북자 최초로 감리교신학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안란희(42·여)씨의 고백입니다.
안란희씨는 지난 1년간 국내 거주 중인 탈북자 170명을 대상으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신앙생활 습관 등을 조사해 논문 ‘탈북민들의 기독교신앙과 목회사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국민일보 2월 3일자 30면 참조).
돈이 없어 브로커에게 생명을 담보로 약속하기를 남한에 가서 돈을 벌어 갚아주겠다고 하여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켜는 순간 부탄가스가 폭발하여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유서를 작성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하나님’이란 단어였습니다.
북한과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개신교에 반감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돌봐주던 봉사자에게 부탁해 성경책을 구했고 성경 읽기를 시작하던 중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였을 때 거짓말처럼 병세는 회복되었고 퇴원하자마자 교회를 찾아갔고 신앙생활을 하며 탈북자들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기독교인 탈북자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연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삶을 하나님을 위해 내놓을 수 있습니다.
남한에 2만 5000여 탈북자들을 양육해 통일 후 북한지역 선교의 선봉자가 되도록 돕겠다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는 판사가 아닙니다.
군 장교도 아닙니다.
탈북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생을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에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영생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생명을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은총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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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
구약 929장, 신약 260장 합계 1,189장
1.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암모니아스"가 A.D 220년경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 요한복음)를 '장'만 구분 하였습니다.
2. 센트카로의 '후고'가 성경 전체 1,189장의 '장'으로 구분 하였습니다.
'Hugo'는 A.D 1263년에 죽었으며 라틴어 성경 신,구약 929장+260장 1,189장으로 나눈 것 입니다.
3. 로버트 스테반은 A.D 1555년에 성경전체를 장, 절로 구분 하였습니다.
즉 구약 23,026절, 신약 7,957절 합계 30,993절로 나눈 것입니다.
1,189장에는 모두 이의가 없으나 절수에 대해서는 책마다 다릅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다 배불리 먹고(막 6: 41)’ ‘항상 기뻐하라(살전 5 :16)’ 모두가 여섯 자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은 사무엘하 14장 32절 말씀으로 130자 입니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개역성경의 절수는 구약 23,144절 신약 7957절 총 31,101절입니다.
그중에는 (없음)이라고 된 13절을 포함한 것입니다.
삼상 30:31이 끝절이므로 (없음)이 안 나온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참고로 NIV, NKJV 등은 총 31,102절입니다.
개역 개정판은 (없음) 15절을 포함하여서 31,103절입니다.
고후 13:14이 끝절이므로 (없음)이 안 나오기도 하므로 31,102절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365bible이 가지고 있는 성경 데이타 절은 31.102절로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1533
출애굽기 1213
레위기 859
민수기 1288
신명기 959
여호수아 658
재판관기 618
룻기 85
사무엘상 810
사무엘하 695
열왕기상 816
열왕기하 719
역대기상 942
역대기하 822
에스라 280
느헤미야 406
에스더 167
욥기 1070
시편 2461
잠언 915
전도서 222
솔로몬의 노래 117
이사야 1292
예레미야 1364
예레미야 애가 154
에스겔 1273
다니엘 357
호세아 197
요엘 73
아모스 146
오바댜 21
요나 48
미카 105
나훔 47
하박국 56
스파냐 53
학개 38
스카랴 211
말라키 55
구약 총절수 23,145
----------------------------------------------신약
마태복음 1071
마가복음 678
누가복음 1151
요한복음 879
사도행전 1007
로마서 433
고린도전서 437
고린도후서 257
갈라디아서 149
에베소서 155
빌립보서 104
골로새서 95
데살로니가전서 89
데살로니가후서 47
디모데전서 113
디모데후서 83
디도서 46
빌레몬서 25
히브리서 303
야고보서 108
베드로전서 105
베드로후서 61
요한일서 105
요한이서 13
요한삼서 14
유다서 25
요한계시록 404
신약 총절수 7,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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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총절수 31,102구절
성경의 전체의 장수는 1.189장
성경 전체의 절수는 31.173절
구약성경은 929장 구약의 중간 장은 욥기29장
신약성경은 260장 신약의 중간 장은 로마서 13장
성경전체의 중간 장이며 가장 짧은 장은 시편117편
가장 긴장은 시편119편
하나님의 칭호가 한번도 없는 장은 구약에 에스더 서
구약성경의 총 구절은 23.214 절
신약성경은 총7959 절
성경전체의 중 간 절은 시편118편8절
구약의 중간 절은 역대하 20장 17절
구약에 짧은 절은 역대상 1장 25절
신약의 가장 짧은 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16절
성경의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장 9절
서로 비슷한 내용의 장은
열왕기하 19장과 이사야 37장
사무엘하 22장과 시편 1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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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통일된 책이지만, 구약과 신약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신,구약은 서로 보완이 됩니다.
구약은 기초가 됩니다.
신약은 그 기초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추가적인 계시를 더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원칙들을
세웁니다.
구약에는 신약에서 성취된 많은 예언들이 들어 있습니다.
구약은 한 백성의 역사를 제공합니다.
신약의 초점은 ‘한
분’에게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구약은 메시아를 예언하고(이사야 53장)
신약은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요한복음 4:25-26).
요한복음 4:25-26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구약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그 율법을 성취하셨는지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5:17;
히브리서 10:9).
구약에서는 주로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로 교회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16:18).
옛 언약 아래에서 (신명기 29:9) 약속된 이 땅의 축복은
새 언약 아래에서는
영적인 축복으로 바뀝니다 (에베소서 1:3).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지만 상당히 모호한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그
모호한 부분들이 분명하여 집니다.
예를 들어,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죽음 (이사야 53 장)과 메시아의 왕국(이사야 26
장)의 설립에 대해 말하였지만, 두 사건의 연대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즉, 메시아의 고통과 왕국의 설립
사이에는 수천년의 기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메시야가 두 번 출현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처음에 오셔서는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고 (그리고 부활하셨고), 두 번째로 오실 때는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이기 때문에, 신약은 구약에서 소개된 원칙들에 대하여 더욱 예리하게 밝혀줍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참 대제사장이신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단번의 희생이 과거의 모든 희생 제사를 대신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구약의
유월절 양 (에스라 6:20)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됩니다 (요한복음 1:29).
구약은 율법을 제시합니다.
신약에서는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율법이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의도되었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로마서 3:19).
구약은 아담 때문에 잃어버린 낙원을 보여줍니다;
신약은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을 통하여 어떻게 낙원이 회복되는지 보여줍니다.
구약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선언하고 (창세기 3장),
신약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서 3-6장). 구약은 메시아의 삶을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서신서는 그분의
생애를 해석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요약하면, 구약은 세상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실 메시아가 오실 수 있도록 토대를 놓습니다 (요한일서 2: 2).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한 다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되돌아 보며 어떻게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 두 언약은 죄를
정죄하면서도 속죄의 희생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거룩하고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공히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가 믿음을 통해 어떻게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15:6;
에베소서 2:8).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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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아담에서 다윗까지, 천지창조에서 세상에 새 생명을 주고, 신적 통치가 땅 끝까지 확대될 성전 건축까지, 족보와 땅, 왕조와 통치는 ‘타나크’(개별 책들을 무작위로 연결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구조와 분명한 시작과 중간 부분과 결말이 있는 하나의 큰 책)의 이야기이며, 다윗의 집에서 누군가 나와 만물의 회복을 가져올 집을 세우기를 기다리면서 여전히 일종의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다.
주석과
함께 줄거리로 제시되는 이 전체 메시지는 ‘타나크’가 잡동사니가 아닌 한 권의 책임을 보여준다.
확실히 ‘타나크’는 많은 개별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본문들은 더 큰 본문의 일부다. 많은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윗 왕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잃어버린 통치를 회복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며, 그 이야기는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구조적 특징 중 하나는 모형론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쓰여졌고, 이 지면에서 모형론에 대해 상세히 다
다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모형론이 사라지게 된 한 가지 확실한 요인은 성경 본문을 포괄적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Frie 1974).
모형론적
특징들은 성경 본문을 하나의 큰 본문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왕조와 통치의 쌍둥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특별히 더
분명해진다. 각각의 경우 보편적인 것에서 특정한 것과 특정한 것에서 다시 보편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지만 그 과업에 실패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는 이스라엘로 대체된다.
한 부족이
이스라엘 내에서, 한 가정이 그 부족에서 선택되고, 결국 한 개인 다윗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다윗과 그의 아들들의 실패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통치의 유익을 가져올 한 의로운 다윗 계열의 왕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통치는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 시작하고, 그런 다음, 가나안 땅이 초점이 되며, 그런 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 특정 장소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과 열방, 심지어 땅 끝까지 확대된다. 공간 및 시간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는 모래시계 이미지가 이런 발전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류와 우주, 이스라엘과 가나안, 다윗과 시온이 구약의 시공간 줄거리라면, 다시 신약에 와서 새로운 다윗인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과 가나안, 인류와 우주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그림이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복음서, 사도행전), 주석(서신서), 이야기(요한계시록)로 된 신약이 구조적으로 ‘타나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록 마지막 책은 엄격히 말해 이야기가 아니지만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에서 시작된 줄거리를 결론까지 가져간다.
신약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포함하는 계보로 시작한다(마 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신약은 ‘타나크’의 시작과 결말을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시킨다. 창세기와 역대기에서 아담, 아브라함,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다윗의 조상들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며, 각각 열네 대로 이루어진 균등한 세 시대, 즉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바벨론에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마 1:1-17)가 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숫자 ‘14’는 다윗을 강조하는데, ‘14’는 다윗의 히브리 이름의 숫자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포로생활에 종결을 가져올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인 새로운 다윗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생은 이방인들에게 빛을 가져다준다.
마태복음 2장 2절은 동방에서 떠오른 한 별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민 24:17). 따라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새 아담과 새 이스라엘로서 예수님은 옛 아담과 옛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한다(마 4:1-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에게 승리하고, 언젠가 온 땅이 영토가 될 하나님 왕국을 알린다. 그리고 이것은 고난받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높임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뿐 아니라 온 세계의 권세를 부여받는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서 강조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영토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한다(참조, 마 28:18-20; 단 7:13-14).
하늘에 닿으려는 바벨탑은 성령을 기다리는 오순절로
각 복음서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다윗의 집의 두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조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이 오랫동안 고대해 온 후손으로서, 부활을 통해 다윗의 왕좌에 앉는 다윗의 후손이다(눅 1:32; 행 2:30-35).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한나의 예언적인 노래의 성취를 반영하는 이중창을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성전으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화되고 예수님에게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샘솟는 강이 흘러나온다(참조, 요 2:19-22, 7:37-39; 겔 47:1-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교회는 탑으로 땅과 하늘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교만에 의해서가 아닌 생명의 강수인 성령의 은사를 겸손하게 기다림으로써 먼저 형성된다. 그리하여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뒤집어놓고, 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열방 가운데서 잃어버린 조화를 가져올 것임을 보여준다(행 2:1-21; 창 11:1-9).
다윗 왕조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점점 더 많은 제자들의 무리가 유대에서 땅 끝까지 퍼져 나간다(행 1:8). 새 다윗에게서 새로운 ‘토라’를 배운 예수님을 믿는 무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마 5:14)가 되어,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자신들의 선한 행위의 빛을 열방에 비추게 된다(21-48절).
‘타나크’의 중반부에서 이야기 줄거리는 주석을 제공하기 위해 잠시 중지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약속하는 바벨론에서의 유다 왕의 방면이 마지막 역사적 언급이었다(왕하 25:27-30).
마찬가지로 신약의 중반부에서 줄거리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이라는 주석에 의해 중단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바벨론(로마)에서 다윗 계열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급진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허락받은 포로에 대한 마지막 역사적인 언급이다(행 28:30).
이 이야기 줄거리에 대한 바울의 주석은 모든 열방으로 구성된 초기 교회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며, 단지 한 나라가 아닌 전 세계가 교회의 기업이라는 것이다(롬 4:13). 시내 산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원하기에는 힘이 없었지만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할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필요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불순종한 자들을 위해 나무에 달리는 선고를 받는 순종적인 아들이다(참조, 갈 3:10-14; 단 21:18-23). 모든 열방과 민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뱀을 정복하는 최후의 싸움이 이어진다(갈 3:28-29; 롬 16:20).
신약 끝 부분에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역사’가 다니엘서와 같은 방식으로 재개되는데, 요한계시록은 그 메시지에서 하나의 놀라운 파노라마적인 환상 속에서 ‘타나크’의 광대한 만화경 같은 마지막 날에 대한 환상들을 포착해낸다.
인자가 있으며(계 1:13; 단 7:13), 인자의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는데(계 1:13) 인자는 촛대 사이에 있는 분(계 1:13; 슥 4장),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 창 49:9-10), 다윗의 뿌리다. 보좌에 앉으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이 메시아이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 포로 생활과 심판의 끝을 강조한 70주간은 새로운 세상 질서의 탄생에 필요한 과도기인 세 번의 칠중 재난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상 질서는 모든 기대를 초월하는 질서다. 새로운 세상은 에덴동산의 이미지들을 반영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할 만큼 형언할 수 없다. ‘타나크’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성전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과 성도들이다(참조, 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이 생명나무들은 지속적으로 잎이 푸르고 그 잎들은 만국을 치료한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소가 되었다(참조, 렘 3:16-17).
그 결과 인간들은 마침내 그들이 잃었던 왕적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이마에 새긴 채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계 22:5). “여호와와 여호와의 백성은 함께 있고 한 몸이 된다”(Barth 1958: 315).
* 자료 출처 / 스티븐 뎀프스터(캐나다 애틀랜틱 침례대학교의 스튜어트 머리 종교학 교수),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부흥과개혁사)에서
성경(聖經)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 [마태복음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3. [마태복음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4. [마가복음 12: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5. [마가복음 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6. [마가복음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7.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8. [누가복음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9. [누가복음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0. [누가복음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11. [요한복음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2.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3.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14.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15. [요한복음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16.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7. [요한복음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8.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9. [요한복음 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0. [요한복음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1. [요한복음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22. [요한복음 19: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23. [요한복음 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24. [사도행전 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25. [사도행전 8: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26. [사도행전 13: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27. [사도행전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28.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29. [사도행전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30. [사도행전 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31.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2.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33. [로마서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34. [로마서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35. [로마서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37.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8. [고린도전서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39. [갈라디아서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40.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41. [갈라디아서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2.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3:15-16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45. [히브리서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46. [베드로후서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외경에 관하여
양재훈 교수(협성대, 신약학, 초기기독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용하는 성경과 좀 다른 성경을 발견하셔서 좀 당혹스러우셨겠군요. 질문자께서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보고 질문하셨는데, 사실, 이것 말고도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 등 동방교회의 성경도 있습니다. 성경을 말하기 위해 먼저 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오늘날 한국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중요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시기를 크게 살펴보면, (1)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대략 서기 30년 정도), (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대략 서기 30~70년 정도), (3) 복음의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나고 후속 세대들이 이어가던 시기(70~4세기 초 기독교 공인), (4)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서 종교개혁(1517년)까지 시기, (5)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까지의 시기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위의 (1)번,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의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생각하는 신구약 성경전서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두루마리로 된 구약의 성경들을 사용했지요. 예를 들면,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토라도 있었고, 이사야서와 같은 성경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을 때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서 낭독하셨지요(눅 4:17). 그러면 마태복음이나 로마서는요? 물론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 재림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에(막 9:1)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서 후손들에게 전수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바로 (2)번 시기가 이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나 하셨던 일에 관한 이야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요. 물론 당시 대부분 사람이 문맹이었고, 책으로 만드는 비용도 너무 비싸서 안 만든 것뿐만 아니라 못 만든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사역 당시에 살던 제 1세대들이 죽기 시작하고 재림이 지연되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예가 바로 누가복음 1:1-4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복음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성경’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태나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소위 거룩한 말씀(성경)이라는 것은 토라(모세오경)나 예언서 같은 히브리 성경(타나크 TNK)의 말씀이었지, 감히 자신의 복음서를 성경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세기 즈음이 되면 서서히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 사도가 남긴 편지글의 권위가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예가 디모데전서 5:1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타작 마당에서 낟알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5:4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성경 말씀이지요. 그런데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말씀은 구약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거든요(눅 10:7).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까지 가리켜서 “성경에 이르기를”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서서히 성경의 자리로 올라가는 흔적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 사도의 편지도 성경의 권위를 갖기 시작합니다. 베드로후서 3:16을 보면 바울 사도의 편지가 어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바울의 편지도 잘못 해석한다고 경고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성경과 바울의 편지를 나란히 놓고 있는데요, 이것은 바울 서신서가 성경의 권위를 서서히 갖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세기 초, 폴리캅 감독께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말씀들이 여러분에게 감추인 바 없으며, 이 말씀들에 여러분이 잘 양육되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 이 성경들에 기록된 바와 같이, ‘여러분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기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 폴리캅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 12:1
폴리캅 감독께서 남기신 이 글을 보면 에베소서 4:26의 말씀을 가리켜서 성경이라고 합니다. 또한, 2세기 초에 활동했던 순교자 유스티니아누스(Justin Martyr)께서 변증록을 썼는데, 여기에 보면 예배 시간에 성경을 낭독하는 시간이 있는데(딤전 4:13) 그때 사도들의 회고록을 낭독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한곳에 모여서 사도들의 회고나 예언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읽습니다. 그리고 낭독자가 다 낭독하면 집례자가 이 좋은 모범을 따라 살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 후에 모두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기도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집례자는 같은 방식으로 자기의 권한으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회중은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 순교자 유스티니아누스 <1 변증록>, 67.
즉, 2세기 초에 이르면 복음서라든지 바울과 베드로 등 사도들의 편지들이 성경의 권위를 갖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결론이 난 것도 아니고, 정리된 것도 여전히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유다서 1장 14~15절에는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은 에디오피아 정교회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제1 에녹서 1: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제1 에녹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데, 정작 우리가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유다서에서는 이 말씀을 성경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3)번의 시기 즉, 대략 2~4세기가 바로 신약성경이 정리되어가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 많은 문헌이 나오는데요, 소위 신약 외경이라는 문서들이 만들어진 것이 이 시기입니다. 신약성경은 (1) 복음서 (2) 행전 (3) 서신서 (4) 계시록 등 크게 네 장르로 이루어지는데, 신약 외경도 비슷합니다. 신약 외경 복음서는 <마리아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도마 복음서> 등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나 어록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행전 장르의 경우 정경에는 사도행전이 있지만, 외경에는 <베드로행전>, <빌립행전>, <도마행전>, <바울과 테클라행전>, <안드레행전> 등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로마서나 빌립보서, 베드로서신 등 사도들의 편지가 있다면, 신약 외경에도 <베드로가 야고보에게 보낸 편지>, <라오디게아서>, <클레멘스서> 등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경우 신약성경에는 요한계시록이 있지만, 신약 외경에도 <베드로 묵시록>, <바울 묵시록>, <야고보의 비전> , <요한의 비전> 등의 계시록 장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문서들을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함께 신앙의 표준으로 삼기에는 부족하고 심지어 기독교적 영지주의라는 이단적 성향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서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걸러내 졌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2~4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이 외에도 초기 기독교에는 다양한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 규칙을 담고 있는 2세기 초의 문서인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라든지, 다양한 기독교 변증서들이나 이단 반박문 등이 있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교회의 지도자였던 교부나 감독들이 쓴 글도 많고, 그 내용도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읽어도 도움이 될만한 좋은 글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이 글들을 신약 외경의 문서들처럼 이단으로 배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의 표준인 성경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4세기 말 정도에 이르면 교회는 성경(정경)의 목록을 어느 정도 정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27권 신약성경 목록이 최초로 완결되어 나온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감독이 보낸 부활절 서신(367년)입니다. 신약과 구약의 성경 목록은 397년에 있었던 카르타고 공의회 히포 시노드(Hippo Synod)에서 제시되었고,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목록이 일단 완결되기까지 거의 4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그리고 이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구약 목록이 오늘 논의의 발단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86(혹은 587)년에 바빌론 제국에 의해 나라가 망한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제국, 로마제국에 연이어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 이스라엘을 떠난 디아스포라(흩어졌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그 대표적인 예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다소라고 하는 지금의 터키 지역의 도시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세계의 공용언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민자 생활을 하다 보니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모국어를 잊어버리고 그리스어(코이네 그리스어)로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데, 히브리어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이들은 구약의 말씀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지금의 이집트 해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70인역 성경(LXX, 셉투아진트)입니다. 이 성경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입니다.
1세기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사용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바울의 선교사역으로 세워진 이방인 교회 교인이었고, 그들은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라서 이들이 이 70인역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이후로도 이 그리스어 70인역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중심부로 들어오고, 제국의 각 지역 사람들도 이제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시리아어, 콥트어 등 다양한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서로 많이 다르게 되는 등 문제점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4세기 말, 교황 다마수스는 히에로니무스를 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통일된 언어로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게 한 것인데, 히에로니무스(제롬)께서 번역한 이것이 바로 불가타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히에로니무스는 불가타 역본을 만들면서 <므낫세의 기도> 등 70인역에서 몇 개의 문서를 제외했고, 이후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카논 24조(Canon XXIV)를 통해 그 목록이 확정되었는데, 이때 받아들인 구약성경의 목록이 70인역의 목록이 아니라 불가타 성경의 목록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집회서(벤 시라의 지혜), 지혜서(솔로몬의 지혜), 바룩, 토빗, 유딧, 마카베오 상, 마케베오 하 등 총 7개의 문서가 들어있습니다(에스더와 다니엘은 그 내용이 몇 군데 추가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개신교 성경의 에스더와 다니엘이 살짝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가리켜 제2 정경이라고 부릅니다. 이 문서들은 모두 제2 성전기 후반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문서들입니다.
이렇듯 신약성경 27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구약성경 목록이 개신교와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서로 차이를 보입니다. 가톨릭은 서방교회에 해당하고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 등은 동방교회에 속하는데,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 달리 불가타가 아닌 70인역 성경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의 경전에는 서방교회인 가톨릭의 구약성경 목록 외에 추가로 더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동방교회도 어느 정교회인가에 따라 목록이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하여튼, 이렇게 서방 가톨릭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인정한 불가타 바탕의 성경 목록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던 중,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구약성경 목록에 반기를 듭니다(1534년 루터 성경).
히브리 성경에는 맛소라판 성경이 있습니다. “맛소라”라는 말은 ‘전승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요, 히브리어에는 자음만 있지, 모음을 표기하는 문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을 읽는 발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에 자음만 있으니 헷갈리는 겁니다. 한글로 비유를 들자면, ‘ㄷㄹㅁ’ 등 자음만 있으니 이것을 ‘다리미’라고 읽어야 하는지 ‘두루미’라고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이들이 정확한 발음을 위해 글자에 모음을 달아놓았는데, 이 성경이 바로 맛소라판 성경(Masoretic Text)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토빗, 유딧 등과 같은 위의 문서들은 ‘외경’이라고 하여 빼내어서 라틴어 불가타 구약성경을 거부하고 이 맛소라판 히브리 성경의 구성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가 가진 39권 성경 목록이 된 이력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구약성경이 유대교인들이 가진 히브리 성경(타나크)과 같은 내용의 성경이 됩니다(물론 각 문서를 묶는 방식과 문서 배열 순서는 다릅니다만).
가톨릭에서는 그리스어 70인역에서 출발한 라틴어 불가타역을 바탕으로 구약성경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7개의 제2 정경 목록이 포함된 구약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히브리 성경(맛소라판 성경)이 원래(original) 구약성경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내용구성에서는 이 성경을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창세기로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구약성경 목록 순서에서는 70인역의 순서를 따릅니다. 유대인의 성경인 맛소라 판 히브리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해서 역대기로 마무리됩니다. 즉, 창조로 시작해서 다윗의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는 것을 꿈꾸는 구도로 순서를 배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내용은 같아도 순서만큼은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말라기로 끝나는 70인역 성경의 순서를 따릅니다. 즉, 창조로 시작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말라기로 구약성경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신약성경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복음서로 시작합니다(저작 시간 순서로 따지면 신약 27권 중에서 데살로니가전서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즉,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제일 마지막에 넣어서 주님의 재림과 창세기와 대조를 이루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기대합니다.
개신교는 제2정경의 7개 문서를 성경말씀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가톨릭도 이전에는 이 문서들을 제2 경전이라고 하여 따로 떼어놓았는데, 최근에는 구약성경 중간중간에 끼워 넣고 나머지 다른 구약의 문서와 대등한 권위의 성경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 7개의 문서를 비록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서들을 이단 문서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서들은 제2 성전기 후반부에 구약의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신앙 서적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경 66권 외에도 우리의 신앙에 좋은 표본이 되는 문서들도 많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들이 성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문서들이 이단적인 문서라고 보면 안 됩니다. 도리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들로 읽는다면(시중에 나온 개인 간증 서적은 많이 읽으면서 왜 이런 문서들을 읽는 것은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 원본은 어디에 있나요?
민경식 교수 (연세대학교)
1. 원본과 사본, 그리고 본문비평
우선,
첫 번째 질문을 살펴볼까요? “성경은 원본이 없고, 사본만 있다.”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일반 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원본이 없다”는 것은 성경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문헌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수천 년이나 된 책이 오늘날 고스란히 남아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 잃어버렸거나 삭아버렸을 것입니다. 화재로 인해 훼손되는 경우라든지 물에 젖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겠지요.
아주 먼 옛날에는 인쇄기술이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조금 더 앞서기는 하지만,
서구사회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15세기 중엽입니다. 이때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찍어낸 책이 소위
『42행성서』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손으로 베껴서 책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물론 목판인쇄가 있기는 하였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필사한 경험이 있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부활절마다 교인들이 함께 손으로 써서 만든 성경을 봉헌합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책을 만들었습니다. 손으로 베꼈다고 해서, 이것을 “필사본” 또는 “수사본”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사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사본”은 한편으로는 “원본”의 반대 개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쇄본”의 반대 개념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성경의 “원본”을 기록하였겠지요. 구약의 경우, 매우 오랜 기간 구전을 통하여 내려오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베꼈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또 베꼈을 것이고요.
이것이 당시에 책을 만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식이었으니까요. 즉, 한 번 문서화된 것을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신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예수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문서화된 기록들을 수집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하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이를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의 말씀입니다.
“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새번역>)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에 대한 많은 자료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예수의 이야기를 엮어낸 사람들이 많다고 하잖아요(1절). 그런데 그렇게 예수의 이야기를 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의 첫 제자들이나 예수 사건의 목격자들이 아닙니다. 제1세대 목격자들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제2세대)이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2절). 그리고 자신도 이러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한다고 합니다(3절). 그러니 <누가복음> 저자는 제3세대나 제4세대 정도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때 그가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의 “원본”이겠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원본”을 접한 사람들은 이 책을
갖고 싶어 하였고,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서 소장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이 생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본”입니다. <누가복음>을 갖고 싶었던 사람이 단지 한 사람만은 아니었겠지요? 각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마다
<누가복음>을 하나씩 베끼고, 또 필요에 따라서 여러 권을 베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에서 많은 사본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바울의 편지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어? 이거 바울 선생님의 편지
아닙니까? 제가 이거 좀 베껴 가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바울의 편지들도 사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구약의 책들도 비슷한
과정으로 필사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최소한 약 2,000년 전의 문서입니다. 2,000년의 세월
속에서 바울이 처음 썼던 편지들은 언젠가 사라졌습니다. 또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최초의 문서, 즉 복음서 원본들은 사라졌습니다.
물론 구약 문헌들의 첫 원고도 같은 과정 가운데 사라졌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사본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본들이 얼마나 남아있을까요?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다수의 고대문헌들은 사본이 몇 개 없습니다.
플라톤의 작품이 그러하고, 타키투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작품 또한 그러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꽃이요 가장 위대한 작품인
호메루스의 『일리아드』의 사본은 수백 개 정도인데, 신약성경의 사본은 약 25,000개에 달합니다. 이 가운데 원어인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본만도 약 5,700개입니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사본들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으니, 이 수자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신약은 고대의 어느 문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본이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본들 가운데 똑같은 사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베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한 번이라도 손으로
성경을 베껴 써본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잘 이해될 것입니다. 오탈자가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한 줄을 빠뜨리고 베끼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2,000년에 걸쳐 베끼고 베끼는 과정에서 성경의 본문은 원문에서 차금차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러한 방대한 양의 사본들을 하나하나 읽고, 분석하고, 연구해서, 소위 “원문”에 가장 가까울 것 같은 본문을
재구성하였습니다. “본문비평”이라는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작업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본문비평 학자들은 이 고단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의 본문이 원문과 같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더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회복하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이 방법론적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또
새로운 고대의 사본들이 끊임없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정경과 외경, 그리고 정경화과정
두
번째 질문은 “정경화”의 기준이 무엇인가와 관련됩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기독교 세계 안에 유포되었던 고대의 많은 문헌들
가운데 왜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이 되었고, 왜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정경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신약성경에는 4권의 복음서만 포함되어 있지만,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복음서가 수십 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의 작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서들이 언급되어 있거든요. 즉,
텍스트 없이 제목(과 내용 일부)만 전해지는 복음서들이 있습니다. 또한 본문이 전해지는 복음서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대략
20개입니다. 신약의 네 복음서를 포함하여 여러분이 잘 아는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빌립복음』, 『베드로복음』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유다복음』도 2006년에 발표가 되었지요? 이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4개의 복음서만이 최종적으로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정경화”라고 합니다. 우리의 성경에는 하나의 행전만 있지만,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약 20개에 이르는 행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행전』, 『베드로행전』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당시에는 서신교환도 활발하였으며, 이에 우리는 이 당시의 편지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바울의 편지 몇 개와 베드로 등 다른 제자들의 편지 몇 개가 정경에 포함되었고, 나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의 경우도 사정은 같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최종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초기 기독교의 문헌들을 “외경”이라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외경 개념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구약 본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된 마소라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원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을 칠십인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칠십인역에는 마소라 본문에는 없는 책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지혜서, 집회서 등). 구약의
외경은 바로 이것들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들을 가리켜 “제2성경”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문서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이 정경과 외경을 갈라놓았을까요?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있습니다. 오래된 문서이어야 한다는 “고대성”, 사도들이 저술한 문서이어야 한다는 “사도성”, 당시 공교회의 신앙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정통성” 등입니다. 그러나 정경에 포함된 문서들과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문서들에 이 기준을
적용하여 보면, 일관성이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고대성의 예를 들자면, 신약성경의 일부 문서들(목회서신 등)은 2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문서들(『클레멘스서신』 등)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단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정경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성이 결정적인 기준일까요?
정경에 포함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사도성이 없는 작품인데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반면,
『베드로복음』, 『베드로행전』, 『베드로계시록』 등은 베드로의 저술로 알려졌지만,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신학적 또는
신앙적 정통성도 정경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 다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외경 가운데 정경에 포함되었을 만한 신학적
색채를 띠는 『디다케』와 『헤르마스의 목자』 등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무원칙의 원칙”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합리적인 수준의 “기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보충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거룩한” 문서로 여기는 것들이 처음부터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서신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바울이 각
공동체에 보낸 편지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문서가 아니라 “그냥” 편지였습니다. 복음서들 역시도 처음에는 예수에 대한 평범한
기록일 뿐이었습니다. 제1세대 목격자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기억을 문자로 남겨야 할 필요에 따라 생산된 문서들입니다. 반면에,
1세기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보았던 “성경”은 구약이었습니다. 물론 이 구약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 전반에는 토라(오경), 예언서들 가운데 몇 개, 그리고 시편 등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약 문서는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던 시기입니다. 1세기 중엽 이후로 신약의 문서들이
기록되었지만, 이것이 곧바로 거룩하게 여겨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4개의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들은
2세기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거룩한 문서”로 인식되었고, 2세기 중반에 이르러야 구약과 어깨를 견주는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년경에는 구약의 권위를 넘어서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 가운데 일부 문서들에만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도
<베드로후서>라든지 <요한계시록> 등은 그 권위를 의심받고 있었거든요. 이와 동시에, 오늘날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문서들 가운데서도 많은 것이 특정 지역에서는 “거룩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특정
문서들이 “성경”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 가운데 또 일부는 그 지위를 잃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즉, 넓은 의미의 정경화 과정은
좁은 의미의 정경화(선택, canonization)와 비정경화(배제, decanonization)의 합의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전승을 따랐고,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일부 문서들을 공유하기도 하였지만, 서로 다른 문서들을 거룩하게 여기기도
하였는데, 경쟁에서 승리한 공동체가 정통이 되었고, 그들의 문서가 최종적으로 정경에 포함되었겠지요. 이러한 정경화 작업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의 책이 정경에 포함되어 우리의 신앙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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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의 필요성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Ⅰ. 성경 읽기의 필요성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셨습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고, 인간의 기원과 구원, 영생에 이르는 유일 한 길을 가르쳐 주며 끝없는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은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힘이 되어 줍니다. 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조언해 주며 우리의 죄를 꾸짖고, 매일의 삶 에 필요한 영감을 줍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문학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총서입니다. 성경은 역사, 시, 희곡, 전기, 철학, 예언, 과학 등 영감과 교 훈을 주는 모든 지식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또는 일부가 1,2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해마다 어떤 책보다 더 많이 애독되고 있습니다. 그러 면 우리가 성경을 읽음으로써 가장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 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론적인 신이나 관념적인 신이 아닙니 다. 기독교의 신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요, 인격적인 사랑의 하 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 신을 계시해 준 유일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신성과 권능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계시만으로 하 나님을 알기에는 너무 막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이 '특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 신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는 자기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밝히 보여 주셨 습니다. 이 모든 계시를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 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끔 열심히 신앙 생활 을 하다가 중도에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 버린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 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예배의 대상도 모르면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도 모르면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것은 미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이분들 은 자기들이 생각해 낸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다가 신앙의 참 도를 알지 못하 고 도중에서 포기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의문을 가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왜 태어났 는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많은 질 문을 해 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해답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많은 책을 읽어보아도 분명한 해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지성인들이 적당 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방황합니다. 하루하루 의미 없는 삶을 되풀이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본질적인 문제보다 우선 당면한 실존 문제 해결에 급급하며 살아갑니 다. 그러면 인간이 왜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울이 없으면 자기 얼 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를 알게 되면 피조물인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밝히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절 대자 앞에서 자기 발견을 하게 될 때만이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 다. 한 번뿐인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서게 됩니다.
셋째, 만물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 만능 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하나님같이 섬 기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일평생 썩어질 것들을 위해 다 바 칩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 러나 행복은 돈의 양이나 소유욕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물질이 필 요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의 행복을 위해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물질의 가치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현대인들이 숭상하고 있는 만물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은 숭상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 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질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Ⅱ. 성경 읽는 입장
성경은 BC 16세기 모세가 오경(五經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을 기록한 이후 약 1,700년 동안 여러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들 중 에는 모세와 같이 애굽(이집트)의 모든 학문에 통달한 사람도 있고, 사무엘과 같은 사사나 다윗과 같은 시인, 농부, 귀족, 왕, 어부, 세리, 의사 등 아주 다양합니다. 그 래서 오늘날 우리의 지식과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 나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되었음은 의심할 여 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저자가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기록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저자의 기본 입장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 저자는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기록했습니까?
첫째, 유신론적 입장(유신론과 무신론)
세상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신론적 입장과 무신론적 입장입니다.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 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180도 달라 질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 는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 떨어진 빗물이 압록강을 통해서 동해로 갈 수도 있고, 두 만강을 통해 서해로 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출발은 작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적 입장에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본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근원을 물, 불 , 바람(공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근세 어떤 생물학자는 인간의 기원을 아메바라고도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 두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대로 세상의 기원을 물, 불, 바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까?
첫째, 만물의 기원이 '물', '불', '바람'이라면 그 '물', '불', ' 바람'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둘째, 이런 '물', '불', '바람'으로부터 어떻게 인격적인 인간이 생겨날 수 있는가?
셋째, 만일 이러한 것들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면 과연 인간에게 는 어떤 존재 의미가 있는가?
넷째, 인간이 아메바에서 진화했다면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가?
우리가 무신론적인 입장에 설 때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볼 때는 명쾌한 해답을 얻 을 수 있습니다. 유신론적인 입장은 태초에(In the beginning) 하나님이 존재하셨다 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하 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인간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창세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도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유신론적 인 입장에서 성경을 읽어야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역사적 입장(사건과 역사)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두 가지 서술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일어난 일을 순서적 으로 빠짐없이 나열하는 서술 방법입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 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역사가가 분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의미 있는 중요한 사건만을 추려서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성경 저자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기 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역사의 나열이 아닙니다. 저자가 독특한 역사 관을 가지고 기술한 '사건으로서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논리와 이성, 합리적 인 생각으로 전후 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 해설을 달아 놓지 않은 부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는 아담 이후의 모든 사건들 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며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러므로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의 역사 원칙에 입각하여 중요한 사건만 추려서 창세 기를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면 성경 저자의 원칙이란 무엇입니까? 저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 과 불행을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의 연관성 속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아담의 낙 원 상실은 아담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어긴 데서 온 결과라고 했습니다. 이것 은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상실할 때 비참해지고 만다는 역사 원칙을 말 해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이 며, '하나님>인간>만물'의 창조 질서가 파괴될 때 어떻게 되는가 등을 기록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역사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원칙에 입각하여 성경을 읽어야 성경 말씀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셋째, 신앙적 입장(성경과 과학)
성경은 과학적인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을 통해서 자연 과학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 현대적인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과학적 지식을 목적으로 쓰여졌다면 지금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낡고 형편없는 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해마다 과학적 지식이 홍수처럼 옛 학설을 뒤엎으며 나옵니다. 그러 나 이러한 지식의 홍수 시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그 가치와 권위를 잃지 않고 있습 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해 주고자 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과학에서 완전히 떠 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며,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 찬 그 시대에 우주와 자연 질서가 가장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기록된 책은 성경밖에 없습니 다. 자연과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와 조화, 사물의 내 부에 존재하는 질서와 법칙들을 발견해 내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이 발 달할수록 하나님의 큰 권능과 무한한 창조의 지혜가 높이 드러날 뿐입니다. 또 순 수하게 학문을 하는 자연 과학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 계는 우연히 존재하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질서 정연하고, 필연적인 인과법칙으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연 과학적인 입장에서 단편적인 지식을 얻고 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세계를 우리 앞에 열어 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성인들은 과학적인 사고 방법에 연단 되어 있기 때문에 모 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그 모든 사실들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그 러므로 성경을 읽으려면 일단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입장에서 읽 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관계성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성경 읽기에 임해야 합니다.
Ⅲ. 성경 읽는 자세
성경은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이요 지침서입니다. 성경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올 바른 이해가 없이는 신앙 생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크 리스천들이 성경 말씀의 참 뜻을 잘 모릅니다. 성경을 읽어도 마음을 들여 읽는 사 람이 드뭅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성경 말 씀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양식
마태복음 4장 4절을 보십시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신명기 8 장 3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그들이 영양실조에 걸 려 죽어 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 먹을 양식에 대한 걱정 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같이 일만 하면 왕이 먹여 주고 입혀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한 조각의 빵을 얻어먹기 위해 소같이 일만 하는 노예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40년 동안 주리게 하시며 하 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주셨습니다(신 8: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것은 빵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사단의 간교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당시 예 수님은 40일을 주리시고 한 끼만 더 굶으시면 죽을 지도 모르는 극한 한계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극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시며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 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영혼의 양식을 얻고자 하는 소원으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 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 무를 두셨습니다. 이 나무들은 아담의 영혼의 만족을 주는 생명의 양식들이었습니 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그것 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동 산에서 이 나무를 쳐다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인간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에게는 영혼의 양식이었습 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영혼이 굶어 죽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본능대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 다(창 6:3 ; 눅 17:26,27).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름다운 처녀도, 젊은 청년도 다 피곤하여 지쳐서 비틀거릴 수밖에 없습니다(암 8:11-1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게 되면 독수리가 새 힘을 얻듯이 힘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우리들의 시들은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삶의 지혜와 명철을 줍니다(시 19:7, 8).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밤새도록 말씀을 묵상하며(시 119:148), 그 맛이 꿀맛과 같다고 노래했습니다(시 119:103). 예수님께 서도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63). 시몬 베드로는 "영생의 말 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요 6: 68). 현실이 어렵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만이 생명의 길이 요,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 고, 마음의 양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의 권위
마태복음 5장 17절과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율 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완성하 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셨 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절대적인 진리의 말 씀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전파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과 5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 로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3절에 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상에서 볼 때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도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이요, 예수님의 말씀도 결코 폐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 씀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취사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동양 사람들은 윤리 적인 교훈들은 잘 받아들이지만 영적인 진리는 잘 안 받아들입니다. 어떤 분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자녀들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엡 6:2,3). 그러면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받아들입니다(엡 6:4). 또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자기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하도록 강요합니다(엡 5:22). 그러나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하 라는 말씀은 안 받아들입니다(엡 5:25).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이고 자기중 심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 유익을 위해 취사선택하는 자들이요 더하거나 빼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정당화 하는 욕심쟁이들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의 말씀을 신화나 꾸며낸 이야기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라 든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인정하지 않고 할 수 있으면 인간적인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불트만'과 같은 사람은 성경을 비신화화 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심지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사건도 가짜 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자기 먹을 것을 감추고 있는 데 한 아이가 헌신적으로 내어 놓으니 감동을 받아서 저마다 자기 먹으려고 숨겨 놓았던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풍족하게 먹고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사건도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중에 바닷가에서 계셨는데 예수님의 그림자가 달빛에 비취어서 물위에 어른거린 것을 제자들은 예수님이 걸어오신 것처 럼 느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모든 말씀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으셨습니다. 천지창 조를 인정하셨습니다(마 19:4-6).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이나, 40년 동안 하나님 께서 만나를 먹이신 사건도 믿으셨습니다(요 6:49).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도 믿으셨습니다(눅 17:28,29). 요나가 삼일삼야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사 건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으셨습니다(마 12:40). 그 외에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과 인물들, 그리고 그 내용을 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 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점일획도 꾸밈이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승천, 재림, 심판 등 아무 것도 사실로서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요 구원받을 수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성도 믿지 않으니 썩어질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영원한 하나 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완전 무결한 생명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17).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나의 작은 머리로 이 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현재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지만 신앙이 좀더 성숙한 후에는 그 말씀을 밝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서 그 말씀의 참뜻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셋째, 성경의 중심 내용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한 것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또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 에게도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24:27).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그를 통해서 이루실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약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볼 때도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 기 위해서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나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 또 곧 체포되실 것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검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바 불법자의 동류(同類)로 여기심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 었습니다(눅 22:37).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에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 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만 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3,5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도 자기에게 기록된 말씀을 온전히 이루 시기 위해서 투쟁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심한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 통으로 기진맥진하셨습니다. 이제 곧 숨을 거두실 순간이 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 신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요 19:28). 예수님은 목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자기로 말미암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열 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에 기초하여 생각하시고 계획 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신비로운 체험보다도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참 뜻을 깨 닫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에 철저하게 뿌 리를 박고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신약 성경은 구약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은 오 실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입니다. 신약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과 동시에 장차 구름 타고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엽적 인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중심 되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넷째, 말씀의 적용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은 제자들을 보고 맹렬하게 비난을 퍼 붓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2:3)?"고 반문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 경에 ... ... 라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 때가 많습니다(마 21:16,42).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기는 읽지만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두개인들에
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유대인 들을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 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 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이상의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항상 성경을 읽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성 경 말씀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어떤 문제든지 성경 말씀으로 해결해 나가셨습니다.
특히 복음 역사를 시작 하실 때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막 10:4-9 ; 12:26,27). 특 히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아시고 예수님은 많은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으로 모든 아픔을 이기셨습니다(막 14:21).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들을 보면 거의가 인간의 창조, 결혼의 창설, 아벨의 피, 노아 시대 사람들의 모습,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아브라함의 믿음 등 거의
중요한 사건들을 다 언급하 셨습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 만나를 내리신 사건, 민수기의 놋뱀을 든 사건도 언급하셨습니다. 또
사무엘서의 다윗의 망명 시절 성전에서 떡을 먹은 사건, 열왕기서의 솔로몬의 부귀영화,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 엘리사의 사역을 말
씀하셨습니다. 다니엘서의 재림에 관한 말씀, 예레미야서의 성전에 관한 말씀과 새 언약에 관한 말씀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스가랴의 순교
사건까지 알고 계셨습 니다 마치 구슬을 꿰듯이 꿰뚫어 알고 계시며 자유자재로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 의 마음은 성경 말씀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각, 계획, 방향, 모든 활동을 하실 때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셨으며 귀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깊이 연구하셨는가를 증거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시험이 와 도 즉시 합당한 말씀으로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도 말씀에 기초하여 과감하게 책망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형식과 전통의 사슬에 매 이지 않고 율법의 근본 정신을 바로 실천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완 전히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생애였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 모든 우리의 생활이 예수님과 같이 성경 말씀에
근거할 때 가장 보람되며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 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자녀들을 책망도 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과 구원의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 님의 자녀들로 온전케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주님의 책망과 가르치심을
받아 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이 될 때까지 묵상하고, 실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