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God's Will)

대한성서공회 성경 검색 사이트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씀을 찾아보면 32구절이 소개된다.
구약에서 1구절
신약에서 31구절
이 모든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에스라 7: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쓸찌며.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예물은 제물로 사용한 것 이외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마태 22:21. 마가 12:17. 누가 20:25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세상의 가족은 혈육에 의한 원칙을 따를 뿐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 14:18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다.
다만 세상도 정욕도 모두 지나가 버릴 것 뿐이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당장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반드시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적인 삶의 자세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리트머스 시험지
로버트 보일(1627-1691)이 제작한 것으로, 리트머스 이끼에서 추출한 용액에 종이를 담갔다가 말린 것이다.
이것으로 '산성(산)'과 알카리성(염기)'를 구분할 수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의 색상은 빨강과 파랑이 있다.
빨간색은 pH 8.0보다 염기쪽인 물질에 반응하여 파란색으로 변한다.
파란색은 pH 5.0보다 산성쪽인 물질에 반응하여 빨간색으로 변한다.
따라서 리크머스 시험의 색갈이 어떤 색으로 변하느냐에 따라 용액의 성분을 가늠할 수 있다. 
 

산과 염기를 쉽게 구별 가능하다는 장점덕에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는 방법이지만, 산과 염기만을 구별 할 뿐, 정확한 수소 이온 농도의 값을 알 수는 없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리크머스 시험지를 사용하여 용액의 성분을 알아내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말씀의 대표적인 구절이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이라고 하겠다.

항상 기뻐하라 -
판토테 카이레테(παντοτε χαιρετε)

기뻐하라(5463) 카이로(chairō χαίρω 스트롱번호 5463

1. 기뻐하다.   2. χαῖρε. 3. 안녕
발음 [ chairō ]

기뻐하다(마 2:10, 고후 6:10, 빌 4:10), 즐거워하다(마 5:12, 눅 19:6, 벧전 4:13), 평안하다(마 27:29, 눅 1:28, 요 19:3), 즐겁다(눅 15:5), 문안하다(행 15:23, 23:26), 기쁘다(고전 7:30, 요이 1:4), 기쁘게 하다(고후 7:7).

항상 기뻐하라 - '항상 기뻐하라'(*, 판토테 카이레테)는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일에도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해서 나타날수 없는 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다(롬 14:17;갈 5:22). 혹자는 빌 4:4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와 같이 본절도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의미한다고 한다(Bruce).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그 상황에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 자식을 낳지 못한 한나의 기도
(예)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서 바울의 기도
(예)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기도
(예) 풀무불에 던져닌 아벳느고, 사드락, 메삭의 기도
(예) 돌에 맞는 죽는 현장에서 스데반의 기도

쉬지말고 기도하라 -
아디알레잎토스 프로슈케스데( αδιαλειπτως προσευχεσθε )

기도하라(4336) 프로슈코마이( prŏsĕuchŏmai ) προσεύχομαι 스트롱번호 4336

1. 기도하다.  2. 막 1:35. 3. 눅 1:10
발음 [ prŏsĕuchŏmai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엡 6:18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눅 18:1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셨다. 또한 롬 12:1에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혹자는 이 구절이 본절에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Bruce). 한편 '쉬지 말고 기도하라'(*, 아디알레이프토스 프로슈케스데)는 말은 24시간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단히 의지하는 자세나(Thomas),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갖추는 것(Lenski)등 항상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잠을 자는 시간과 음식을 섭취하는 시간과 때로는 휴식 즉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
심지어 부부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하였는가?

노동이 곧 기도
기도가 곧 노동
Opus est orandi
Oratio est opus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노동은 단지 우리가 날마다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창조사업에 동참하며, 물질과 맞서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을 형성시킨다.”(로버트 엘스버그)

우리가 매체를 통해 날마다 마주치는 ‘광고’는 행복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노동할 때보다 여가나 휴가를 보낼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일이란 휴가나 여가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막이나 동굴에서 홀로 살던 수도승들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이것은 일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 노동이 영적인 삶을 방해하기는커녕, 우리는 일을 통해 치유되고, 지루함과 슬픔을 몰아낸다고 믿었다. 여기에 굳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지 않아도 좋다. 일은 복음적 명령 이전에 인간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막교구 폴 아빠스는 종려나무로 바구니를 짜면서, 바구니가 광에 가득 차면 태워버리고 다시 짜곤 했다. 그는 수도승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고, 거룩함의 길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일이나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삶을 계속할 수 없다.

이상대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 : 레오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나, 귀족사회에서 이룬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했고, 그러한 거룩함을 가난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오히려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리 고달파도 아침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하고 기본적으로 인생은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밤이면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의 에너지를 온통 바치고 나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를 다룬 창세기의 내용처럼, 농민들은 그들의 노동을 징벌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룩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한가한 사람들에게 주는 말>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며, 내가 받은 교육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눌 것입니다. 어떤 단체를 세우거나 책을 써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농민들과 소박하게 살았으나, 집에 와선 비단옷을 입고 자야하는 삶에서 갈등을 느끼며 과로워하다 아스타포보 마을 철도역장 집에서 82세로 숨졌다.

여기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상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이상처럼 살기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삶이란 “보편적 도덕률이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혜, 곧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원을 타면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대로 늦잠을 자도 될 텐데!’하는 환상을 거부하고 “이기심과 경쟁보다 사랑과 연대를 나누며 사는” 비전으로 매일매일의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톨스토이가 발견했지만 살지 못한 이상은 기도와 일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의 삶이 기도와 공부, 노동으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네딕토는 기도라는 거룩한 영역과 노동이라는 세속적 행위를 갈라놓지 않았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이므로,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란 단순히 얌전하게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이 기도할 때처럼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 때 노동은 곧 기도가 된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에 물을 주거나 하는 단순한 노동뿐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길 때처럼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계를 다룰 때에도 “일이 담고 있는 선을 존중”한다면 기도행위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을 쓴 부활의 로랑 수사는 80살에 죽기까지 수도원에서 40년 동안 부엌일을 하며 냄비와 프라이팬을 뒤집었다. 그의 영적 삶은 단순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일을 하면서 “하느님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계시다.”고 확신했다. 그는 말한다. “나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 없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가운데 하느님을 모신다.” 이처럼 로랑 수사는 성무일도와 미사 같은 전통적인 영적 수련행위와 얼룩을 없애고 야채를 다지는 등 날마다 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결국 거룩함은 그 일의 성격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내적 태도에 달려 있다. 로랑 수사는 이를 두고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고 그 일을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일은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 섬기며 자선을 베푸는 기회요 기도가 될 수 있으며 아름답고 진실하며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엘스버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접수를 하고 요금을 받거나 식품점에서 계산하면서도 은총과 사랑으로 일터를 거룩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성인들이다. 당신은 학교나 골목길이나 바다에서, 교회나 기차, 가게와 찻집에서 성인을 만날 수 있다.”

고유한 나의 길을 따라서

“나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원의 문제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며 참된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토머스 머튼)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 가야하는 정해진 길은 없다. 바람직한 직업도 없다. 다만 자기 고유의 길이 있을 뿐이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성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찾았다. 물론 예수님처럼 모두 십자가에 못박힐 필요도 없다. 목수였던 유용주 시인은 예수는 못박힘으로써 가장 위대한 목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목수이면서 시인의 고유한 길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우고
20년 가까이 세상 공사판을 떠돌아다닌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수, 유용주)

샤를 드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거룩하고 완전해지라고 초대하시며, 당신을 더 가까이 따르며 당신 뜻에 복종하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영혼이 똑같은 일로 각자의 사랑을 당신께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똑같은 사다리로 천국에 오르고 똑같은 방식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천국에 이르는 나의 길은 어떤 길인가? 나는 어떤 삶으로 나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는가?”

만약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내 고유한 자리에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 길을 발견한다면 모든 길이 꽃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발견하더라도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말한다.

도로시 데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회심 : 도로시 데이의 응답

도로시 데이의 ‘회심’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응답 가운데 나타났다. 특별한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공감하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성인들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하면서도 한편에선 이렇게 물었다. “내 마음 속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왜 애초에 악을 방지하지 않고 그 치료에만 그토록 매달리는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는 것도 좋지만 노예제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성인들은 없는가?” 교회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한 도로시 데이는 종교에 등을 돌리고 진보정치에 희망을 두었다. 그러나 역사의 한복판에 참여하며 분투했던 젊은 날의 도로시 데이에게 다가온 것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이었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딸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길을 찾다가 결국 가톨릭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의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민자들의 교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적인 그의 동료들에게 가톨릭은 부자들의 교회요 기득권자들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신앙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

1927년에 세례를 받고 5년 동안 방황하던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직후에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가 된 피터 모린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하느님의 응답은 하늘에서 들려오지 않고 강한 53살의 프랑스 억양을 지닌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피터 모린은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서에 담긴 사회적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운동을 제안했다. 더 이상 교회와 정부의 프로그램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더욱 선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가톨릭일꾼운동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복음을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자발적 가난을 살고, 가난한 이들의 당장에 필요에 응답하면서,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운동이었다. 이른바 ‘세상 속에 더 깊이 내려가고, 세속적 가치와 전혀 다른 삶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그들은 1933년 5월 1일 노동자 성요셉 축일이자 메이데이에 유니온광장에서 <가톨릭일꾼> 신문을 배포하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는 성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도로시 데이는 “네가 바로 그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생애 50년 동안 이 길에서 행복했다.

부르심 속의 부르심

도로시 데이가 아나키스트로서 살다가, 다시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거듭 새삼 새로운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어떤 책을 접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아님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는 이런 체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보통 ‘부르심’이라고 하면 수도자가 된다거나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좁게 해석하기 쉽지만, 수도성소나 사제성소 안에서도 더 근본적인 부르심에 노출될 수 있다.

평신도의 경우에도 자신이 그동안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실현을 해 왔다고 장담하더라도 뜻밖의 전혀 다른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면서 그 일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과업에 헌신하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거룩함을 찾는 이에게 ‘회심’은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회심이 일어나면 무질서한 마음을 벗어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예전에는 평범한 삶에 짓눌려 버거웠지만 회심한 뒤로는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이러한 회심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생명력을 준다. 마더 데레사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걸 보고 어느 기자가 “저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겁니다.”하고 말하자, 그녀 역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했다.

‘의미’ 있는 노동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일 속에서 충만한 의미를 찾는 일이다.
의미가 생기면 그 일은 무엇이든 어디서라도 기쁨으로 용약한다.
예수회 사제요 신비가요 과학자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하거나 활동할 때 우리를 기다리신다.
펜이나 삽, 빗이나 바늘 안에도 계신다.
우리가 자신이 하는 일에 환 획, 한 줄을 긋고 한 땀 한 땀 뜨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성을 기울이고 의지를 다해 완성해 나가면 최종 목표에 다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거룩함이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가 “그때에 비로소 성인들이 말하는 노동의 진정한 행복을 맛본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길(노동)을 통해 기쁨으로 충만한 하느님께 이르는 거룩함이다.
그게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삶의 목표다.

1965년 성공회 고 대천덕 신부가 세운 공동체, 예수원.
예수원은 ‘노동이 기도’이며 ‘기도가 노동’이라는 정신으로, 찾는 이들에게 하루의 일거리를 부여하고 있다.
매 순간을 하나님께 대하 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예배이자 기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있었던 장작 패기, 오늘 식사의 반찬이 될 쑥 캐기, 그리고 예수원 곳곳의 보수공사 등등. 모든 게 낯설고 단순한 노동이지만, 이를 통해 복잡했던 일상에서 깨닫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박정섭 씨(모리아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도시에선 바쁘고, 일상에선 바쁘고.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 나의 삶 속에서 일상에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원에서 하루 3번 드리는 예배에서는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홀로 찾은 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 자매로 영적인 교제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김길수 씨(온누리교회)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서로 같이 나누실 때 개인적으로 기도도 드리고 한다”고 말했다.
또한 하루 3번 씩 종을 울려,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묵상 시간을 갖고 있다.
안애단 신부(예수원)는 “코이노니아. 예배해서 떡을 나누고, 같이 소유를 나누고,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을 나누고 살았다. 여기 오는 우리들과, 손님들과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경험하며 하나님의 형존을 공동체를 통해, 영광을 돌리자.또 그분들이 우리에게 축복한 것을 함께 섬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예수원은 노동과 중보기도로 하나님나라를 그려가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 -

감사하라(2168) 유카리스테오( 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 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축사하다(마 15:36, 막 8:6, 행 27:35), 감사 기도하다(마 26:27, 눅 22:19), 감사하다(눅 18:11, 요 11:41, 고전 10:30).




엔 판티 유카리스테이테( εν παντι ευχαριστειτε)

󰃨 범사에 감사하라 - '범사'의 헬라어 '엔 판티'(*)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라는 의미이다(in all circumstances, NIV).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한편 감사는 1: 2에 기록된 대로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빌 4: 6에는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하나님의 뜻'은 4:3에 언급된 바 '신자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 혹자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성령께서 신자들을 성화시키는 내적인 역사로 본다(Bruce).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이며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신자들의 성화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할 수 없다.

에벤에셀의 돌비의 뜻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입니다.

‘인생을 감사로 물들여라!’


 

 

  첫째,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유대인의 인생 독본인 탈무드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마음과 육체는 병들기 쉽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체는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감사하면 맥박이 고르게 되고 위장의 활동을 도와 소화력을 증진시켜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기 때문에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평은 혈액순환을 방해하여 맥박을 급하게 하는 동시에 위장의 운동을 정지시켜 뱃속으로 들어온 음식의 소화를 거부해 건강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유무와 환경의 조건에 관계없이 감사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세계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해서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가장 행복한 나라는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뽑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아제르바이잔이 2위이고, 나이지리아가 3위에 올랐습니다. 반면에 경제 대국이며 최고의 문화시설과 교육환경, 자연환경 등을 두루 갖춘 선진국들인 미국, 스위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이 40위권 밖으로 밀려나 큰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 또한 23위에 머물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지수는 이와같이 물질적 소유 또는 환경의 조건에 반비례하게 나타났기에 행복의 척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100분의 1 수준인 200달러밖에 안 됩니다. 인구밀도는 세계 1위이고 문맹률도 90%에 육박합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이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심지어 몸이 불편해 찾아갈 병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1위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이웃들 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행복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선진국의 사람들은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소외감과 소유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불행을 더욱 심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를 방해하는 적 중, 하나가 바로 비교 의식입니다. 비교 의식은 상대방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우월감으로 교만해지든지, 아니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기비하에 매몰되게 합니다.

  다음으로 사람의 욕심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의 욕심은 너무 높아 컷트라인이 없는데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욕심을 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감사를 방해하는 적 하나를 더 소개하면 바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염려하는 문제의 오직 10%만 현재에 부딪힌 문제이지, 나머지 90%는 쓸데없는 과거의 일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6: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은 미래의 일을 앞당겨 염려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마음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빌 4:6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가 심령이 위축되고 짓눌리는 불안한 현상이라면 감사는 심령에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이처럼 행복지수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지표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사실, 행복에는 절대 기준이 없습니다. 행복에는 교과서나 참고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식이나 모범 답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다만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행복의 크고 작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합니다. 결코 행복은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자족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이,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변할 때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힐터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을 감사로 뽑았습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므로 행복지수를 높혀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감사는 분명 행복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둘째, 감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브라질 사람들은 ‘오브리가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틈만 나면 ‘오브리가도’를 외친다고 하지요. ‘오브리가도’는 무슨 뜻일까요? 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오브리가도입니다. 아무리 말수가 적은 사람도 하루 평균 열 번 이상은 오브리가도란 말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 역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Thank you’입니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생활 속에서 작은 일에도 ‘땡큐’라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50개를 선별했는데, 그 가운데서 ‘땡큐’가 28%를 차지하여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감사가 몸에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증거일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평균 2만 6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감사합니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인간의 언어도 ‘감사합니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 중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혀에 붙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감사에 대한 훈련이 안 되어 있기에 감사에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감사는 있지만 진정한 감사를 찾기가 쉽지 않아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상스러운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민망함을 넘어 당혹스러움까지 느끼는 게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를 향해서 이런 악한 말들 말고 감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 엡 5:3, 4 말씀입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나는가 하면,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방을 찔러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는 쉽게 화를 내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는 말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내가 내뱉는 말로 인해 상대방이 깊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최근에 사모가 타는 차가 말썽입니다. 시장 보러 가서 시장을 보고 출발하려고 하니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주일 준비를 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자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순간 제가 전화를 받고 나가면서 ‘왜 또, 혹시 뭐 열기구 켜놓고 운전한 것 아니요.’라고 짜증을 내면서 운전자 탓을 했답니다. 그리고 보험사에 연락해서 시동을 걸고 보니 전기 공급을 하는 발전기 일명 제네레다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순간 사모님한테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릅니다.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아프게 한 가시와 같은 말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누에가 자기의 입에서 나온 실로 집을 짓고 살 듯,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기 입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풀로랑스 스코벨 쉰’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남에게 준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 삶은 부메랑이다.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되돌려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희한에게도 우리 자신을 명중시킨다”

  그렇습니다. 불평의 말이든 감사의 말이든 언젠가는 메아리가 되어 나의 삶을 향해 돌아옵니다. 이것이 인생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인생은 자기 말대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열두 명의 정탐꾼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바라보면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파송합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달랐습니다. 고로 보고도 달랐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조상에게 약속한 거룩한 축복의 땅이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충분히 차지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순종하자고 한 반면에 열 명의 정탐꾼은 그리할 수 없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하며 지극히 원망적이고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면서 민 14:27~30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민 14:27~30 말씀입니다.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그 사람의 인생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말 한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방황하다가 인생을 비참하게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요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 한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말은 씨가 되고, 인격이 되며,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말대로 되는 인생입니다. 한마디의 말이 삶에 희망을 주고 인생의 목적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케 하기도 하고, 인생을 포기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말의 힘은 정말 놀랍습니다.

농업진흥청에 ‘농작물사업소’에서의 연구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는 물론 물 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였는데 물 한잔을 앞에 놓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정, 즉 완전한 육각수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물을 마시게 되면 우리 몸에 무한한 면역력이 생겨 더욱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 한잔을 놓고 짜증 부리고 욕설을 퍼부으면 물의 결정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인체에 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탄이라는 말을 각 나라말로 물컵 위에 붙여 놓았더니 물의 육각수가 다 깨지고 물의 결정에 구멍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한다’, ‘감사한다’라는 말을 붙여 놓았더니 물은 완전한 육각수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감사와 사랑 중에 어떤 것이 물의 결정을 더 완전한 육각수로 만드는지 실험했는데, 감사의 결정이 사랑의 결정보다 힘과 영향력 면에서 두 배나 강했다고 합니다.
결국 감사의 말은 우리 인체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메마른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입술로 날마다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며, 여유로운 삶으로 더욱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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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 7: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쓸찌며

2.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3. [누가복음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4. [요한복음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5. [사도행전 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6. [사도행전 18: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7. [사도행전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8. [로마서 1: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9. [로마서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0. [로마서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11.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로마서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3.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14. [고린도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5. [고린도후서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6.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7.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8.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9. [에베소서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20. [골로새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1.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22.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23.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24. [디모데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5. [히브리서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26. [히브리서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27.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28. [베드로전서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29.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0. [베드로전서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31.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2.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