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勞動)과 신앙(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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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에 나타난 노동(일)에 관하여
잠언에서는 일하지 않는 것과 일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지혜의 잠언은 우리 일상에서의 일하는 것 즉, 노동에
대하여 귀한 사실들을 총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와 함께 노동과 함께 그 주체인 노동에 대해서도 말한다.
본 소고에서는 잠언
10-31장까지에서 노동에 해당하는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먼저 일하지 않는 것 즉, 게으름에 대하여 그 특성과 주어지는
결과를 살펴보며, 그 다음으로 일하지 않는 자와 대조되는 일하는 자에 대하여 그 해당하는 구절들을 생각해보고 일하는 자의 특징과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댓가와 일하는 자가 어떠한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일하지 않는 것(게으름)
1) 일하지 않는 자(게으른 자)의 특성
-게으른 자는 제가 사냥한 것도 굽지 않지만, / 부지런한 사람은 귀중한 재산을 얻는다.(12:27)
-아무리 바랄지라도 게으름뱅이의 갈망은 헛되지만 / 부지런한 이의 갈망은 충족된다.(13:4)
-게으르면 깊은 잠에만 빠지고 / 나태하면 배를 곯는다.(19:15)
-게으름뱅이는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 입으로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19:24)
-게으름뱅이는 제 철에 밭을 갈지 않고 / 수확철에 소출을 찾지만 아무것도 없다.(20:4)
-잠을 좋아하지 말아라 가난해진다. /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20:13)
-게으름뱅이의 욕심은 그를 죽이니 /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21:25)
-게으름뱅이는 “밖에 사자가 있어! / 길거리에 나가면 난 찢겨 죽어!” 하고 말한다.(22:13)
-게으름뱅이는 “거리에 사자 있어! / 길거리에 사자가 있어!” 하고 말한다.(26:13)
-문짝이 돌쩌귀에 달려 돌아가듯 / 게으름뱅이는 잠자리에서만 뒹군다.(26:14)
-게으름뱅이는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 입으로 가져가기조차 힘들어 한다.(26:15)
-게으름뱅이는 재치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 자기가 더 지혜로운 줄 안다.(26:16)
■ 이상의 구절들은 게으른 자의 특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해 주고 있다.
첫째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그들은 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20:13).
그들은 죽음과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고 하지 않는다(19:15).
그들은 늘 침상에서 생활을
하며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다(26:14).
완전히 짐승적인 게으름이다.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면 잠이 아주 유해하고 파멸을
초래하는 습관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상실하여 빈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둘째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이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들이다(22:13; 26:13).
그는
자신의 변명을 믿게 되고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한다.
그런데 그런 변명들은 터무니가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이
늘어놓는 그 변명에 대하여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들이다(26:16).
그들은 수월한 것을 선택하는 습관을 들임으로(‘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20:4) 그의 사업만큼 그의 인격도 손상된다.
셋째 게으른 자들은 게으름의 정도가 끝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바로 앞에 있는 그릇에도 손을 넣지 않는 극도의 게으름을
가지게 된다.
전혀 힘을 쓰지 않는 자들이다(19:24; 26:15).
그들은 늘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지 절대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자들이다(13:4).
그래서 그들은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적당한 때를 놓치고(20:4), 아예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거부해
버린다(21:25).
만일 그들이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시작부터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곧 추진력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사냥감은 부패해가고(12:27), 그의 음식은 차게 식는다(19:24; 26:15).
결과적으로 그는 만족되지 못한 갈망으로 편안함이 없고(13:4; 21:25, 26), 마치 ‘가시 울타리’같이 얽히는 그의
여러 가지 일들 앞에서 무력하고(15:19), 그를 고용하는 사람에게 많은 비용이 들게 하고(18:9)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10:26) 무용한 자이다.
2) 게으른 자가 맞이하는 결과
-게으른 손바닥은 가난을 지어내고 / 부지런한 이의 손은 부를 가져온다.(10:4)
-여름에 모아들이는 이는 사려 깊은 아들이고 / 수확철에 잠만 자는 자는 수치스러운 아들이다.(10:5)
-부지런한 이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 게으른 자는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12:2)
-제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 파괴자의 형제이다.(18:9)
-잠을 좋아하지 말아라. 가난해진다. /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20:13)
-게으름뱅이의 욕심은 그를 죽이니 /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21:25)
-내가 게으른 사람의 밭과 / 지각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갔는데
보아라, 온통 엉겅퀴가 우거지고 / 쐐기풀이 전부 뒤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24:30-31)
-‘조금만 더 자자. 눈을 조금만 더 붙이자. /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24:33-34)
■ 이상의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게으른 자가 맞이하게 되는 결과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런데 그 행동은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손을 게을리 할
때, 주어지는 결과는 바로 가난인 것이다(10:4; 20:13; 24:33-34). 손을 게을리 하는 자는 다시 말해서 일을
게을리 하는 자이다. 그리고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자기가 맡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는 자의 역할을 한다(18:9).
또한 그는 힘든 일을 피함으로 천한 노역을 자초한다(12:24). 그리고 꾸물대는 버릇으로 말미암아 그의 무질서한 삶은 뒤집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황무지가 된 것이다(24:30, 31).
2. 노동(일)
-게으른 손은 가난을 지어내고 / 부지런한 이의 손은 부를 가져온다(10:4)
-여름에 모아들이는 이는 사려깊은 아들이고 / 수확철에 잠만 자는 자는 수치스러운 아들이다(10:5)
-자기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이 넉넉하지만 / 헛것을 좇는 자는 지각이 없다(12:11)
-자기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으로 배부르고 / 헛것을 좇는 자는 가난으로 배부른다(28:19)
-부지런한 이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 게으른 자는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12:24)
-모든 노고에는 이득이 생기는 법이지만 / 입술만 놀리면 궁핍해질 뿐이다(14:23)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6:3)
-너는 제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 그런 이는 임금들을 섬기고 / 하찮은 이들을 섬기지 않는다.(22:29)
-바깥일을 정리하고 / 밭일을 준비한 다음 / 집을 지어라(24:27)
-네 양떼의 형편을 잘 파악하고 / 가축 떼에게 관심을 기울여라(27:23)
1) 일하는 자 의 특징
첫째,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부지런하며 성실하다(12;11, 28:19, 27:23). 둘째, 시기와 때를 따라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며 행한다(10:4-5). 셋째 말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행동하는 것이 앞선다(14:23). 넷째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재빠르고 민첩하게 행한다. 이것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요령을 알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일에 달인이 됨을 말한다(22:29).
2) 일하는 자에게 결과로 주어지는 대가
첫째 양식이 넉넉하고 풍부해진다(12:11, 28:19). 둘째 이득이 주어진다(14:23). 셋째 일함을 통해서 얻어진
이익이 쌓이게 되므로 부를 가져온다(10:4). 넷째 남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12:24). 다섯째 존귀한 자에게 쓰임을 받아
귀중한 사람이 된다(22:29). 여섯째 가정을 든든히 세운다(24:27).
3) 일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태도
첫째 주어진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27:23). 관심은 곧 일의 동기이며 일의 시작이다. 맡겨진 일에 관심이 없다면
일하지 않을 것이다. 관심을 기울일 때 해야 할 일이 보이고 더욱 정성스럽게 힘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둘째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10:4-5). 일은 그 시기와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것처럼 특별히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치는 일은 때를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에 대한 효과와 능률이 떨어지게 된다.
셋째 모든 일의 시작과 결과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16:3). 이것은 우리의 일의 성취가 우리의 노력과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잠자기를 좋아하고, 몸을 움직이기 조차 싫어한다.
그러나 일하는 자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민첩하다.
또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그 결과가 가난이며 남의 지배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
하지만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양식의 넉넉함과 부와 높은 지위 등이다.
우리는 잠언의 노동(일)을 싫어하는 자와 노동(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자를 통해서 어떤 삶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 될 것인지를 미리 우리에게 예견해주고 있다.
노동(일)에 관한 성경연구
1. 일해야 하는 이유
1)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에(창 2:5-15)
2)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에(창 3:16,17)
3)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출 20:9, 마21:28)
4) 내일을 대비하여야 하기 때문에(잠 6:6-8)
5) 일할 날이 길지 않기 때문에(시 90:10)
2. 노동이 주는 유익
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됨(출 20:9)
2) 수고에 따른 삯을 받음(레19:13, 잠14:23)
3)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음(시128:2)
4) 노동 후 낙을 누릴 수 있음(전3:13)
5) 사람들의 칭찬을 받음(잠31:31)
6) 잠을 달게 잠(전5:12)
7)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게 됨(전9:9)
8) 빈궁한 자를 구제할 수 있음(행20:35, 엡4:28)
3. 일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엿새동안 일하고 주일은 지킬 것(출20:9-11)
2) 즐겨 일할 것(삿5:2)
3) 자원하여 일할 것(느11:2)
4) 실망하지 않도록 수고할 것(전2:20)
5) 힘을 다하여 일할 것(전9:10)
6) 헛된 수고가 되지 않도록 할 것(사49:4)
7) 힘써 수고한 후 주께 나아가 안식할 것(마11:28)
8) 타인의 일을 간섭하지 말 것(마20:12-14)
9) 말은 일에 등한히 말 것(마21:28,29)
10) 능력에 맞게 일할 것(마25:22,23)
11)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 것(요6:27)
12)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할 것(고전16:16)
13)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할 것(엡4:28)
14)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 것(살후3:10)
15) 규모 있게 일할 것(살후3:11)
16) 종요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을 것(살후3:12)
17)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것(딤후2:15)
4. 일을 위해 고용된 자의 자세
1) 자기 할 일에 근신할 것(잠22:29)
2) 다른 사람의 보수와 비교하지 말 것(마20:12,13)
3) 정한 보수에 만족할 것(눅3:14)
4) 상전을 공경할 것(딤전6:1)
5. 성도가 쉬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해야 할 영적인 일
1) 기도하는 일(삼상7:8, 삼상12:23, 살전5:17)
2) 생명을 얻기 위한 수고(잠10:16)
3) 좋은 상을 얻기 위한 모든 일(전4:9)
4) 구제하는 일(전11:1,2)
5) 영적 파숫군으로서의 직무(사62:6)
6) 그리스도를 닮는 일(요13:14)
7) 말씀을 가르치는 일(행5:42, 행20:31)
8) 전도하는 일(행5:42)
9) 말씀을 상고하는 일(행17:11)
10) 위로하는 일(고후7:7, 살전4:18)
11)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골1:29)
12) 감사하는 일(살전2:13)
13) 권면하는 일(딛1:8, 딛2:6, 딛2:15)
14) 봉사하는 일(벧전4:10,11)
15) 찬송하는 일(계4:8)
6. 영적 수고의 결과
1) 복음이 전파됨(살전2:9)
2) 상급을 받음(눅6:35)
3) 영생에 이름(잠10:16)
4) 장차 수고를 그치고 영원히 안식함(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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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현재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행위
하나님의 노동은 인간의 존재이유와 정의에 대한 답변의 핵심
성경은 착취와 억압 반대하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쉼 보장
경제적 위기 때문일까. 실업률이 높아졌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도 정규직 임금의 50~70%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도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정규직 또한 열심히 일을 하지만 임금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하기보다는 노동에 대해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노동에 대한 생각과 노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한다. 최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평화누리와 함께 ‘노동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하는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연속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일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일(노동)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 느헤미야 연구위원 김근주 박사는 “사람이 노동을 하는 것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신구약 성경은 창조하신 세상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고하게 증거하고 있다”며 “온 세상을 지으시고 주관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노동이야말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이며, 정의를 구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경작하고 지키도록, 노동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며 “일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다. 노동은 노동이 가져오는 어떤 열매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며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결국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존재를 부정하며,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창조질서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주신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노동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경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일하다’는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다’, ‘예배하다’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쉼과 삯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노동은 억압과 착취가 된다. 김 박사는 “성경은 노동에 대한 대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쉼은 노동과 반드시 결합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며 “노동자에게 삯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 자본과 자본으로 형성되는 제물만이 삶의 안정성을 확보해준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쉴 새 없이 노동하도록 내모는 지배자와 권력자들의 행동은 성경에 반하는 억압과 착취가 될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어 “노동은 사회적으로 실패하거나 낮은 계층에 속한 이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며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노동자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노동하는 우리 이웃들과 소통하는 교회의 노력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참된 노동은 예수의 제자됨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도 다양한 직업들이 있었고, 예수님 또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직업을 ‘목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석민 박사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소개한다”고 설명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조 박사는 “요한복음에 소개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으로 인간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으로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며 “물론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자신의 본래 직업인 목수를 일은 하지는 않으셨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노동에 대해 어떤 가치를 부여했을까. 임금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품삯을 받은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으며, 노동하는 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쉼을 보장하셨다.
조 박사는 “예수님은 당시 노동자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권리, 곧 노동의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품삯과 노동에 따른 쉼을 역설하시며 노동자들을 옹호하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복음서는 노동이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와 공동체의 경제상황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며 “미래에 대한
개인적인 불안과 걱정을 위한 노동은 복음서가 가르치는 노동의 원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추수 노동자로 사는 것, 예수의
제자됨이 노동을 대신하는 새로운 노동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노동의 신학과 윤리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위임 혹은 문화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동춘 박사는 “노동은 인간이 자연을 경작하고, 다스림을 통해 역사와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총체적인 활동”이라며 “노동의
위임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에 개입하라는 요구이며,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을 책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행위”임을
강조했다.
특히 “노동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발생된 형벌과 저주라고 보는 신학적 오해를 교정해야 한다”며 “노동은 죄의 저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에 있으며, 죄의 억제와 잠재력의 발현(창조적 노동)과 같은 신적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고 피력했다.
김 박사는 노동은 그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 선을 제공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특정 ‘직업’에만 하나님의 소명이 있지 않고, 주님은 모든 직업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직업과 기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노동윤리에 대해 설명한 그는 자본가 중심의 노동관과 같은 편향된 노동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의 신실성을 요구하는 청지기적 노동관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 박사는 “청지기 윤리관은 마치 인간이 노동환경에서 상당한 자율성과 선택의 융통성이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수 있는 한계를 가질 수 있지만 일터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듯이 일하도록 도전을 준다”고 설명했다.
인권적 차원의 노동윤리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성경은 일용 노동자들(품군)에게 정당한 임금을 체납하거나 그들을 학대하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며 “노동자는 성경계시의 중심이다. 노동자에 대한 바른 대우는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몫이며, 권리의 문제”라고 피력했다.
김 박사는 “한국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이 노동의 착취와 억눌림으로부터 신음하지 않도록, 노동하는 인간이 존엄성과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비인간화된 노동구조를 대행할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야 한다”며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사회적 시장경제 등 대안적 노동사회 창출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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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나
현재 우리나라는 실업률은 높아지고 취업률은 낮아지는 실업 문제가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막상 취업을 해도 일자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되어 있어서 비정규직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와 노동 착취가 발생하고 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이 2배나 차이가 나는 임금 불평등이 벌어지고 있다.
아울러 양질의 고소득 일자리는 줄어드는 반면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같은 불안한 저소득 일자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정규직으로 취업해 임금을 제대로 받아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과거에 비해 실질 임금은 계속 떨어지고 파업과 노사 갈등이 만연하고 있다. 아울러 이주민 노동자에 대한 노동 착취와 인권 침해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임금 소득 불평등은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라고 한다.
노동의 기원, 하나님의 노동과 인간의 노동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노동은 원래 이런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 원래 노동은 선하고 거룩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노동(일)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나오며 창조와 함께 시작한다. 하나님은 노동(일)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일하셨고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맡기면서 노동하라고 말씀하신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노동을 통해 수행된다. 인간은 노동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마땅히 거룩한 노동을 해야 한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자 창조 세계를 맡아서 관리하고 다스리는 청지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노동하시는 하나님처럼 인간도 노동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노동해야할 책임과 의무, 권리가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이 노동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노동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자 문화 명령
인간의 노동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는 것이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창조 명령이자 문화 명령이다. 노동은 원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본래 목적이다.
하나님의 노동과 관련한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은 첫 장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말씀한다. 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 8:3)",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시 8:6)",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며 하나님이 손으로 노동하시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묘사한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화(文化) 명령이다. 문화 명령은 곧 노동하라는 명령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노동의 목적 변질
노동은 원래 거룩하고 선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과 타락으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된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노동 자체가 저주를 받거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이 저주를 받아 땀 흘려 노동해도 이 세상에는 늘 빈곤과 굶주림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했어도 땀 흘려 노동하면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노동에 대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고 말씀한다.
인간이 다스릴 대상인 땅이 저주를 받아 노동이 수고로움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계속 땀 흘려 노동하여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원래 의도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즐거움과 만족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 이후 피조물을 섬기면서 자연의 물질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어리석은 우상숭배(물신숭배)를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노동의 본질은 여전히 거룩함
인간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아 노동이 수고로움이 되고 인간의 우상숭배(물신숭배)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노동 그 자체가 타락하거나 바뀐 것은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 교회와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한 섬김과 봉사의 일이다.
노동은 지금도 거룩한 것이며 다른 사람과 모든 창조물에 대한 섬김과 봉사다. 성 베네딕트가 말한 것처럼 노동이 예배(기도)요 예배(기도)가 노동이다. 예배(기도)와 노동을 분리하는 것은 성속을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오류다.
예배와 기도는 거룩하고 노동은 비천한 것이라는 중세 가톨릭의 수도원적인 성속 이원론을 깬 사람들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세상의 모든 노동이 다 거룩하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알맹이다. 즉 자신의 소명과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몸소 목수로서 노동하셨고, 어부였던 베드로, 천막을 만들면서 사도의 역할을 한 바울도 모두 노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몸으로 노동한 이 분들이 바로 교회의 머리와 대들보가 되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눅 10: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유명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 말씀에서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일을 하고 싶어도 아무도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일할 수 없는 마지막 남은 사람에게도 동일한 노동권과 생존권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노동의 목적에 맞게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 교회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한 대가를 받아 사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물론 돈이 목적이 되면 잘못된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 교회를 위해 노동하고 일한 대가를 받아 사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노동해서 만들어 낸 것 혹은 이루어 낸 것은 모두 선하고 좋은 일이다. 그것이 목회든 선교든 다른 노동이든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인간이 노동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살아가도록 인간을 만드셨다. 이렇듯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의 생명을 살리고 섬기는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하다.
노동과 안식, 하나님의 안식과 인간의 안식
하나님께서는 몸소 노동하여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신다. 성경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1~3)"고 말씀한다.
안식은 창세기 말씀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십계명의 제4계명에도 나온다. 성경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고 말씀한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 즉 노동을 할 것과 함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즉 안식할 것을 함께 말씀한다. 안식은 노동처럼 원래 창조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이다.
예수님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안식일도 창조하셨다. 따라서 천지의 주인이 예수님이듯 안식일의 주인도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일하기를 싫어하여 불로소득으로 살려는 것은 잘못
안식일에는 노동을 멈추고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는 말씀은 노동하지 않고 사는 것을 금한다. 즉 땀 흘려 노동하여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것으로만 살아가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하여 만든 결과를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취하려는 부동산 투기나 여러 불로소득으로 얻으려는 마음은 성경이 금하는 잘못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나 여러 불로소득을 통해 다른 사람이 만든 노동의 열매를 취하여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일하기를 싫어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의 열매로만 살아가려는 잘못된 사람이다.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노동하여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문화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희년,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림과 노동 착취 금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정상적인 노동은 자기 땅에서 땀 흘려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토지권은 노동권과 연결된다. 일할 수 있는 자기 땅이 없으면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침해된다. 토지권이 없으면 노동권도 침해되는 것이다. 희년 말씀에서는 가난해져서 희년까지 땅을 판 형제를 보살피고(레 25:25) 품꾼(임금 노동자)으로 일을 시키면서 일한 대가를 주도록 말씀한다(레 25:39, 40).
성경에서는 품꾼을 잘 대우하고 일한 그날의 품삯을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한다(신 24:14~15).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은 예배와 공공의 업무를 하고 십일조를 받아서 살도록 말씀한다(민 18:21). 또 땅이 없는 나그네와 이방인들에게도 일거리를 주고 그들을 압제하거나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노동/고용에 관한 성경의 희년 말씀에서는 희년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품꾼과 종의 상태에서 해방되어(레 25:33~55) 자신의 땅과 집, 가족을 회복한다(레 25:2~34). 이런 희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에게 토지와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여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만든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희년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희년 말씀에서는 빈곤의 심화 단계에 따른 규례들이 자세히 나와 있다. 가난하게 되어 토지를 팔게 된 경우(레 25:25~28), 집을 팔게 된 경우(레 25:29~34), 이스라엘 형제가 가난하여 함께 머물게 된 경우(레 25:35~38), 형제가 품꾼이 된 경우(레 25:39~46),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된 경우(레 25:47~55)에 따른 규례들이다. 이 중에서 노동에 해당하는 사람의 몸을 속량하는 규례(레 25:35~55)를 살펴보자.
이스라엘 형제가 가난해져서 함께 머물 경우
먼저 형제가 가난해져서 함께 머물게 될 경우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35~38)."
땅을 팔고 난 후에도 가난한 형제가 자립을 할 수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이자 없이 돈을 빌려 주고 함께 데리고 살 의무가 있다. 이스라엘은 같은 동족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종처럼 부리면서 노동을 시킬 수 없다. 이런 희년 말씀에서 노동 착취 금지라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 형제가 품꾼이 될 경우
두 번째는 형제가 품꾼이 될 경우다.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네 종은 남녀를 막론하고 네 사방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사 올 것이며 또 너희 중에 거류하는 동거인들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사 올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자들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의 소유가 될지니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가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레 25:39~46)."
가난한 친족에게 더 이상 팔거나 담보 잡힐 땅이 없는 경우 그 사람과 가족은 부유한 친족 밑에서 희년까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팔면서 품꾼 즉 고용된 노동자가 된다. 이스라엘은 땅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자신의 몸을 파는 종이나 노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희년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자신의 땅을 회복하여 자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희년까지 자신의 노동력을 판 품꾼은 종처럼 다루어서는 안 되고 입주한 고용인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런 품꾼의 상태는 한 세대를 넘기지 않고 다음 희년까지만 지속한다. 같은 이스라엘 동족끼리는 종을 삼을 수 없고 고용된 노동자(품꾼) 신분으로 대우해야 한다.
이 말씀에서도 같은 이스라엘 동족끼리는 엄하게 부리면서 노동 착취를 금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오는 희년까지 노동의 대가를 받는 품꾼으로 살다가 희년이 되면 품꾼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 가족과 함께 자신의 땅으로 떠나 완전한 자유를 회복한다.
토지가 회복되어야 완전한 자유와 노동권이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함께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동 착취 금지와 함께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유로운 노동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될 경우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될 경우다.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 자와 계산하여 그 연수를 따라서 그 몸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로 팔린 값에서 속량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대로 속량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주인은 그를 매년의 삯꾼과 같이 여기고 네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47~55)."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되면 친족은 책임지고 그 사람을 속량(무르기)할 의무가 있다. 친족들은 책임지고 어려움에 처한 친족을 속량하여 땅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또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채권자라도 이스라엘 채무자에게 하듯이 대하게 하고 희년의 규정이 적용되도록 감시할 의무가 있었다.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된 경우에는 토지 무르기처럼 몸의 무르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몸의 무르기 즉 몸의 속량 규례는 토지 무르기 순서와 같다. 먼저 친족(goel)이 몸값을 대신 치르고 속량해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부유해졌을 때 자기가 직접 몸값을 다시 주고 자유롭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품꾼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 땅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일하는 자유노동자 된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의 품꾼이 되면 이방인 주인은 그를 엄하게 부리면서 노동 착취를 해서는 안 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품삯을 주고 인격적 대우를 할 것을 말씀한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사람의 종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한다.
품꾼이나 종이 되었어도 속량(무르기)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거나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다시 땅과 몸의 자유를 회복한다. 이처럼 희년 노동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노동 착취 금지와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유노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노동 착취 금지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관한 성경 말씀
성경에는 노동에 관한 희년 말씀뿐만 아니라 노동 착취를 금지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것을 명령하는 많은 말씀이 있다. 대표적인 말씀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은 여러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노동 착취 금지와 일한 대가를 제대로 줄 것,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랑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1~23)."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4~15)."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9)."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말 3:5)."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말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먼저 보장하고 자기 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며 살 것을 말씀한다. 즉 토지와 노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고 보장하라는 것이다.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먼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래서 희년 말씀에서는 몸의 해방과 땅의 회복을 함께 명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한 노동의 권리를 누리고 노동의 의무를 다하려면 먼저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토지/주택(부동산)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사회에서는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 모든 사람을 위해 쓰는 토지 가치 공유를 통해 공평한 토지권을 보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노동문제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리가 현대에 맞게 적용되는 것이다.
노동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원칙, 원리는 자기 땅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고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현대사회에 적용하려면 노동의 결과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법과 제도를 실시하면 된다.
예를 들어 땀 흘려 일한 노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감세나 면세를 해 줌으로써 노동의 결과를 보장해 줄 수 있다. 또 땀 흘려 열심히 일하려는 노동자를 우대 및 장려하고 노동 착취를 막을 수 있는 노동법과 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 실업자가 발생하면 직업 재교육과 일자리 알선,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하여 다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한다.
희년의 노동 정의 실천하기
자기 노동의 열매를 보장하고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과 희년 말씀을 정부가 법과 제도로 실시하기 전에라도 개인과 공동체, 교회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실천할 수 있다. 우선 고용주는 이윤 추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용 창출과 노동자의 복지 향상을 핵심 목표로 사업을 경영한다.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켰으면 노동자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충분히 주면서 노동 착취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또 회사 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혹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더라도 차별과 소외를 받지 않도록 힘쓴다.
고용주는 노동자가 쉬지 않고 계속 일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안식할 수 있도록 주말 노동은 하지 않도록 힘쓰고 회사 사정에 맞춰 노동자의 안식과 재충전을 위한 월차 휴가, 안식월 휴가, 안식년 휴가를 도입한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단지 돈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 의식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돌보며 생산 활동을 한다. 아울러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노동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교회와 공동체, 시민사회는 실업자에 대한 일자리 상담 및 알선, 의료 서비스 및 정신적 상담, 물질적 도움, 자활 지원 등을 통해 도울 수 있다. 개인은 실업 상태에 빠졌을 때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자기 계발에도 힘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유익과 덕을 끼치지 않는 사업이나 일(음란 퇴폐 산업, 도박 등 사행성 산업, 조직 폭력, 불량 식품 및 불량 상품 제조/판매 등)은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아울러 자신은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를 가로채는 일(부동산 투기를 비롯한 각종 투기, 다단계 사업, 각종 사기성 사업)은 하지 않으며 정부는 이런 사업은 규제하거나 금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