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榮光)


하나님께 영광(榮光)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날 광(光)

 불 화(火) + 불 활(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영화 영자는 사람이 십자가와 같은 무거운 짐 또는어려운 짐을 짊어진 후에 내가 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 후에 불꽃이 피어오르듯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이 연기가 되어 올라가듯(번제, 올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빛 광(光) = 작을 소(小) + 어진 사람인 발(儿)

* 빛이 되려면 먼저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과 생각이 어진 사람의 흔적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사람은 욕망이 강하여 내가 무엇을 행한 후에 내가 하였다는 자기 의(義)에 도취되기 쉽습니다.

헬라어의 영광 -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스트롱번호 1391

1. 광명.   2. 눅 2:9.  3. 위엄
발음 [ dŏxa ]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 1380. 도케오(dŏkĕō)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 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dŏkĕō ]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 :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 헬라어의 영광이란 스쳐가는 가벼운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 즉 묵상의 결과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다쳤는가?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
  그러나 영광을 돌리려는 사람은 어려운 사건과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혹시 어긋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한성서공회 성경 검색 / 하나님께 영광(한글 개역 성경)

- 신약에서 25구절이 소개된다.


영광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9:1-8)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본문에서 예수님께는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번째 말씀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두번째 말씀은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6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할까요?
율법의 학자들은 첫번째 예수님의 말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은 참람(僭濫)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참람(僭濫)이란 한자의 훈은 "주제 넘을 참(僭)" "넘칠 람(濫)"이라고 합니다.
참람의 뜻은 "하는 짓이 분수에 지나치다" 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참람을 "블라스패메오"라고 합니다.
βλασφημέω 스트롱번호 987

1. 중상하다.  2. 모독하다.  3. 행 19:37.
발음 [ blasphēmĕō ]
어원 / 미완료 ἐβλασφήμουν, 제1부정과거 ἐβλασφήμ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βλασφημήθην, 미래수동태 βλασ- φημηθή σομαι, 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신성을 모독하다(마 9:3, 요 10:36), 모욕하다(마 27:39, 막 15:29), 모독하다(막 3:28, 눅 12:10, 행 26:11), 비방하다(눅 23:39, 행 13:45, 19:37, 벧후 2:12), 비방을 받다(딛 2:5, 벧후 2:2), 욕하다(눅 22:65), 비방을 받다(롬 14:16, 고전 10:30), 치욕을 당하다(벧전 4:14), 모독을 받다(롬 2:24).

NIV 영어 성경에서는 "블라스패밍(blaspheming)"
KJV  영어 성경에서는 "블라스패메스(blasphemeth"
NASB  영어 성경에서는 "블라스페메스(blasphemes)"

영어 성경의 단어가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참람하다는 단어가 유래한 것이지요.
그래서 헬라어 성경을 참조하는 것이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참람하다는 것을 신약 성경에서 "신성 모독(Blasphemy)"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시 내가 참람한 일을 행했던 경우가 기억나시는지요?
아니면 내 주위에서 참람하게 행동했던 어떤 일을 기억하고 있었는지요?
오늘 이 시간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시 참람하게 행했던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참람한 행동을 또는 참람한 말을 하지 않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모두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대표적인 인물을 세례 요한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예수님은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요한복음 3장 30절 말씀을 한문 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아필쇠미 타필흥왕(我必衰微 他必興旺)
- 나 아, 자기 아(我)
- 반드시 필(必)
- 쇠할 쇠(衰)
- 작을  미(微)

- 다를 타(他)
- 반드시 필(必)
- 일어날 흥(興)
- 성할 왕(旺)

* 나는 반드시 쇠하고 작아야 하며, 예수님은 반드시 흥하게 일어나야 하리라.

하나님께 영광이란 바로 세례 요한과 같은 믿음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예수님께 하셨던 두 가지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믿는 것(2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러분은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죄 사함을 받았던 은혜의 자리가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공통성이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립니다.

저는 남자 형제 4명중 제가 장남입니다.
막내 제수씨가 결혼 할 당시 교회에 다니는 유치원 교사이었는데 제가 개척교회를 할 때 저희 교회에 와서 여름성경학교 유치부 교사로 봉사를 했었습니다.
제가 뉴욕으로 이주하여 목회를 할 때 저희 교회에 등록하고 은행원이었기에 재정부원으로 임명하여 봉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믿음이 없구나! 하는 것을 주위 여러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제가 나이 70이 되었을 때 형제들은 각자 다른 교회를 선택하여 각자 원하는 교회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막내 제수씨가 저희 어머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어머니!
저 혜선입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전화를 드리고 싶은데 어머니 귀가 불편하셔서 편지를 드립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옛날 일이 생각납니다.
저 결혼하기 전에 어머니로부터 긴 장문의 편지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편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싶으신 말씀은 딱 한가지 였어요.
"예수 잘 믿어라"
그때는 그 말씀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하면 되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뉴욕으로 오고 엄마도 오시고 하영이랑 신혁씨랑 잘 살고 있습니디.
이러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하루 별다른 큰일 없이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함도 모르고 바쁘게 그냥 살았습니다.
올해 들어서 저희가 교회를 옮기고 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교회를 정하기 위해 주일에 집근처 교회 몇군데 갔었어요.
현재 등록한 신광교회는 1월 마지막 주일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2월 쯤에 성령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고 그 예배 드리는 중에 너무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저에게 찾아와 주셨어요.
제가 결혼하고 30년 가까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녔지만 그냥 몸만 다녔습니다.
처음으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일어났어요.
내가 죄인이고 이 죄인을 위하여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용서하시려고 기다려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어요.예배 시간에 엉엉 울었어요.
너무 기뻤어요.
저희는 3월 첫째주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어머니!
처음으로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길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줄도 알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몰랐어요.
교회에 의무감으로 가야 하고 말씀도 교회에 가서 들어야 했어요.
가기 싫어서 아플 때도 있었고 꾀를 부릴 때도 있었어요.
근데 어머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요일에도 가고 싶어서 가고 오후 주일 찬양예배도 갑니다.
너무 좋아요.
전에는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몸이 뒤틀리고 읽어야 하니깐 할 수 없이 말씀이 아닌 성경책을 읽었어요.
지금은 말씀이 너무 좋고 성경을 묵상하는게 너무 기쁘고 재미가 있어요.
이러는 제 자신에게 제가 놀라고 있어요.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오랜 기도의 응답이 지금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어머님!
저는 요즘 매일 죽습니다.
그대신 제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제 주인이 되셔서 하루 하루를 감하고 기쁘게
나는 없고 예수님과 함께 가는 날이 되려고 매일 기도합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자주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를 위해서 계속 기도해 주세요.
다음 달 가족 모임에 찾아 뵐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릴께요.
어머님 사랑합니다.

2019년 3월 27일
막내 혜선 드림

여러분,
내가 지금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중보 기도자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 기도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답게 열매를 맺혀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중보기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결정하세요.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내 마음판에 기록하시고 매일 식사 때마다 감사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세요.
기도의 응답이 들려올 때 모두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둘째는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6절)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침상이란 내가 누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불편한 자리를 말합니다.
사람마다 침상이 다를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침상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침상은 이제부터는 더 이상 나를 그 자리에 눕혀 놓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나를 묶어두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침상은 이제부터는 더 이상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자리가 아닙니다.

나의 침상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두 아들 사무엘과 다니엘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매우 총기가 있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병명이 한국에서는 "자베트(Jabert)"라고 진단했습니다(세브란스 소아과 고창준박사, 뉴욕에서 한국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의사가 진단한 결과 병명이 다르게 알려졌습니다.
"댄디 워커(Dandy Walker)"
병명을 정하는 방법은 그 원인을 처음으로 찾아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려지더군요.
자베트와 댄디 워커는 그와 같은 병을 갖는 장애인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증세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다니엘의 증세는 사람의 뇌에 큰 뇌와 작은 뇌가 있는데 다니엘의 경우 작은 뇌의 일부가 형성되지 않고 물로 채워져 있어서 뇌 MRI 촬영을 하면 그 부분이 시커먼 색으로 나타납니다.
뇌는 이식 할 수 없기 때문에 평생을 안고 가야 한다고 합니다.

저희가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 것도 다니엘을 담당했던 세브란스병원 의사가(고창준박사) 뉴욕으로 가면 이런 장애인들을 위한 시스템과 재활 교육을 찾을 수 있다고 추천하여 마침 영주권이 나와서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00년 7월 4일이었습니다.
지금이 2024년이므로 벌써 24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니엘이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것이 재활 교육과 후속 프로그램을 찾는 것에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갖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니엘과 같은 증세의 장애인이 없어서 일대 일의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므로 그것도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먼저 성경 중에서 마가복음이 제일 짧은 말씀이라 마가복을을 읽게 했습니다.
처음에 한 장을 읽으면 한 단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다만 한 글자 정도 기억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쟈베트라는 장애는 자근 뇌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작은 뇌가 중추신경계와 운동 신경이 둔하게 나타나는 증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력이 일반인보다 월등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한 결과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영어도 간단한 대화는 가능하도록 성장했습니다.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은행 업무도 다니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것 적어주면 물건 구입도 합니다.
그래도 부모의 마음에는 좀 더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처음 중세보다는 훨씬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욕심이 생기거든요.

지금도 다니엘의 문제를 갖고 씨름합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주님으로부터 이런 음성과 응답을 받기를 소망하면서...........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침상이 있습니까?
나를 그 자리에 눕혀 놓고 꼼짝할 수 없도록 무능력하게 붙잡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침상을 내려놓든지 그 침상에 대하여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사랑으로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미는 잘 알면서도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형식에는 아주 능숙했지만 율법의 속뜻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마치 속담에서 "수박 겉핥기"와 같은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실천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합시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두 번째 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을 읽기 전에 예수님의 삼대 사역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것(Teaching)  - 다디스케(didachē) διδαχή

διδα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322

1. 가르침.  2. 교훈. 3. 마 16:12.
발음 [ didachē ]
어원  / 1321에서 유래

둘째는 전파하는 것(Preaching) -  케뤼그마(kērügma) κήρυγμα


κήρυ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782

1. 전령이나 선구자가 외치는 선포
2. 하나님이 보낸 사자의 메시지
발음 [ kērügma ]
어원  / 2784에서 유래

셋째는 치유하시는 것(Healing) - 데라페이아(thĕrapĕia) θεραπ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322

1. 섬김.  2. 병든 자에 대한 치료. 3. 눅 9:11.
발음 [ thĕrapĕia ]
어원 / 2323에서 유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 이 세 면과 관련해서 사역하셨습니다.

영(靈)의 구원을 위해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
혼(魂)의 구원 즉 정신, 인격의 변화를 위해서 가르치셨고,
몸(肉)의 구원을 위해서는 치료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4:23-25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데가볼리예루살렘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가르치시며(1321) 디다스코(didaskōδιδάσκω 

1. 마 4:23.  2. ~을 가르치다. 3. 마15:9
발음 [ didaskō ]


전파하시며(2784) 케룻소(kērüssōκηρύσσω  

1. 공포하다.  2. 크게 선포하다. 3. 공공연히 말하다
발음 [ kērüssō ]
어원 / 미완료 ἐκήρυσσον, 미래 κηρύξω, 제1부정과거 ἐκήρυξα, 제1부정과거 부정사 κηρύξ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κηρύχθην, 미래수동태 κηρυχθήσο- μαι.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고치시니(2323) 데라퓨오(thĕrapĕuō) θεραπεύω  

1. 섬기다.  2. 행 17:25.  3. 돌보다
발음 [ thĕrapĕuō ]
어원  / 미완료 ἐθεράπευον, 미완료 수동태 ἐθεραπευόμην, 미래 θεραπεύσω, 제1부정 과거 ἐθεράπευσα, 완료 수동태분사 τεθεραπευ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θεραπεύθην, 2324와 동일어에서 유래


온 갈릴리 - 예수의 사역 당시 갈릴리는 동쪽은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 서쪽은 지중해, 남쪽온 사마리아, 서북쪽은 베니게로 둘러싸여 남북이 약 80km, 동서가 약 45km정도의 작은 지역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저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Life 235<45>;war , 41-43<iii, 2>)에 의하면 갈릴리는 204개의 대소 성읍들과 촌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 비록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는 매우 비옥하여 농경과 목축에 적합하고 근처에는 호수가 위치했기 때문에, 그 당시 최소한 3백만이나 되는 많은 인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Josephus, De Bello Jud. iii, 3, 1). 그러므로 이곳을 예수께서 매일 2개의 마을씩 순회하며 모든 동리를 다 돌아보려고 하였다면 안식일도 쉬지 않고 강행한다 하더라도, 3개월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육체적인 힘이 소모(消耗)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모든 동리를 샅샅이 돌아다녔음을 뜻하기 보다 갈릴리의 전구역을 이리저리 왕래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암시한다(9:35).

회당(*, 쉬나고가이스) - 이곳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종교 집회와 교육의 장소로서 신약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신 31:11과 시 74:8을 인용하여 회당이 매우 일찍이 기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바벧론 포로 중에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느 8:1-8, Carolus Sigonius). 예수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유대인 랍비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만 460개 내지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Winer). 그런데 백성들은 안식일이나 주요 명절 때에 이곳 회당에 모여 기도와 율법을 배우는 일에 힘썼다. 특히 구약 율법서는 여러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허락에 의해 율법 교육에 합당하며 권위있는 자가 나서서 율법을 해석,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당을 전도 활동의 무대로 활용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나(막 9:5;요 1:38) 백성들에게(막 10:51;요 20:16) '랍비'라고 불리웠다. 이 회당이란 용어는 본서에서 '가르침'과 연결되어 나온다(9:35;13:54). 더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부분을 참조하라.

가르치시며...전파하시며...고치시니(*, 디다스콘...케륏손...데라퓨온)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전도의 세 가지 특수한 양식(樣式)으로서 모두 천국(메시야 왕국)과 그리스도에 의한 통치를 암시하고 있다.
'가르치다'는 예수의모 든 활동이 근본적으로 '교훈'(*, 디다스코)과 관계가 있으며,
'전파하다'는 예수자신이 오심과 함께 천국의 도래가 가까왔다는 '복음'(*, 유앙겔리온)과 관계가 있다.
'고치다'는 예수께서 천국이 축복과 더불어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행하신 바 이는 흑암의 왕국(16절)이 파괴되고 천국이 '회복'(*, 아포카타스타시스; 행 3:21)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이 세 가지 전도 방법(teaching, preaching, healing)은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선교 역사에 계승되었다.

천국 복음(*, 토 유앙겔리온 테스바실레이아스) - 이 용어는 본서 9:35과 24:14에 다시 나타나는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메시야가 임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 말이다. 한편 '천국(의)'은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비교 눅 8:1 '하나님의 나라')으로서 복음이 천국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천국'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고(3:2;4:17), 또한 그것은 산상수훈(5-7장)의 중심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한 메시지의 핵심이 '천국 복음'일진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모든 자들은 이것을 명심하여 그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병...약한 것
- '병'(*, 노소스)은 일반적인 '질병'(sickness), 그중에서도 만성적이고 중한 질병을 의미하고, '약한 것'(*, 말라키아)은 그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생활적 기능의 쇠약'을 의미한다.
실로 사랑이 많으신(9:36) 예수께서는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이 그의 사역의 최종 목표였으나 인생의 현세적 구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찾아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질병도 치유해 주셨다. 이것은 바로 천국이 임하신 사실에 대한 예보(豫報)이자 천국 왕의 신임장(credentials of the King)이다(Walvoord, 사 35:4-6;마 11:2-6).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38절에서도 본문과 똑같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이테는 나무의 단면이지만 거기에는 나무의 역사와 여러 가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몇 년 됐고, 언제 많이 자랐고, 언제 가뭄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나이테와 같습니다.
비록 짧은 본문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공생애 삶을 간단히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 이 세 면과 관련해서 사역하셨습니다.
영의 구원을 위해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혼의 구원 즉 정신, 인격의 변화를 위해서 가르치셨고,
몸의 구원을 위해서는 치료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예수님의 사역, 즉 교회의 사명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심, 둘째는 전파하심, 셋째는 치유하심입니다.

첫번째는 가르치심

가장 먼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가르치심이 가장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3년 동안 12명의 제자만을 가르치셨고,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을 이 세상에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했는데 회당은 바벨론 포로 이후 생겨난 제도로서 유대인이 거주하는 마을이면 회당이 건립되었습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만 460개 내지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나 주요 명절 때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고 기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배척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회당 밖의 비공식적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오라”고 부르시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최종 목표는 배우고 일군이 되어 가서 제자 삼는 사역을 감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르는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믿는 일은 배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 인격을 키워주는 진리의 학교입니다.

그런데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덮어놓고 믿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맹신(盲信)입니다.
영적 성장에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은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족하면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의 태도에 있어서는 자족해야 하지만 성장에는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기까지 계속 성장해야 하고 우리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함게 있으면서 삶을 통해 가르치시고 나가서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제자를 세우시고 전도를 위해 두 명씩 짝을 지워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는데 그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아, 또 주님의 유언에 따라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분문에서 ‘천국 복음’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의 성격을 규정해주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 시사 이야기, 경제 이야기, 철학 이야기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강단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천국 복음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명심해야 할 주제인 것입니다. 강단에서건,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자리에서건 전파되는 말씀은 천국 복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과 아울러 열정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신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도는 단순한 의무감, 또는 일시적으로 흥분된 감정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의 모습,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비참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눈과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없으면 전도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아무런 아쉬움이 없으면서도 아쉬운 듯 애걸해야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외아들 예수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복을 주지 못해 “제발 복을 좀 받아 달라”고 애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불구덩이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원하려면 불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만약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원하려면 물속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불에 데지 않고 불 속에 있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고, 물에 옷이 젖지 않고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며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전도했습니다. 그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라고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전도 대상자들의 자리에 서서 눈높이를 맞추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세 번째는 치유하심인데 이 이유에 대한 내용은 24절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모습을 주목해 보면 예수님께서 찾아가서 병자를 고치시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도 데려오는 자들을 고치셨는데 병 고침의 사역은 어떻게 보면 부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목적은 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심도 있지만 치유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대해서는 교단마다 한결같지만 병 고침에 대해서는 입장에 차이가 있습니다.
기적을 초대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는 기적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반면에 오늘날도 동일하게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상황은 오늘날과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날과 초대 교회 때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필요하면 언제라도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결교의 경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전도 표제로 삼고 있고 이것을 사중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신유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유를 믿는다고 해서 의학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결코 아닙니다.
의학도 하나님의 자연은총에 속하는 것입니다.
의학을 감사해야 합니다.

치유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병이 나는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병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사망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질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한히 오래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회복 불가능한 질병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병이 믿음으로 낫는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해서 병을 주셨을 경우 무슨 수를 써도 회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연단을 위한 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세우시고 훈련하시기 위해 질병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어떤 병들고 눈먼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이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셨고,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질병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병,
연단을 위한 병,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입니다.
이 가운데 마지막 병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치유해 주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1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치료자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했어도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치유가 항상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세 번씩이나 자신의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이 낫고 안 낫고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 되심을 믿고 기도할 뿐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병의 성격입니다. 대개 사람의 병은 몸의 병, 마음의 병, 영혼의 병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몸의 병은 의사가 고칩니다. 마음의 병은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상담자의 몫입니다. 영혼의 병은 목사가 고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몸, 마음, 영혼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아프면 모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치유는 세 영역에서 다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셨지만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나가자 수리아에서 뿐 아니라 이제는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본문에서 좀 생소한 지명은 데가볼리인데 이곳은 요단강 동편과 갈릴리 바다 남쪽에 위치한 도시들의 연맹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소문은 쉽게 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팔레스틴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유대 그리고 요단강 동편 지역에 이르기까지 퍼지고 허다한 무리들이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따르던 사람들은 단순한 추종자였지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이적과 축복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단순히 종교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군중이 아니라 제자입니다.
우리는 군중 속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인정하고 따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받아 행할 수 있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단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전파, 가르침, 치유는 예수님의 3대 사역입니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하고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지상 목표를 향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세 가지 사역은 오늘날 교회가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할 교회의 삼대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많은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됩시다.


마태복음 15:29-31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ref / 마가복음 7:31-37
평행 구절인 마가복음 7:31-37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대표적인 인물 세례 요한의 삶을 위한 성경 말씀 기억하시나요?

요한복음 3장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지난 한 주간 얼마나 주님을 높여 드렸으며 나는 얼마나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는지요?
오늘은 여러 환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두었을 때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치유(治癒) 사역이 있습니다.

치유(治癒) - 다스릴 치(治),  병 나을 유(癒)
'치유'란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에 고치다는 의미의 여러 단어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고쳐주다라는 헬라어는 "데라퓨오(2323)" 라고 합니다.
'데라퓨오'라는 헬라어에서 영어의 '떼라피(therapy)"라는 단어가 유래합니다.

θεραπεύω 스트롱번호 2323

1. 섬기다.  2. 행 17:25. 3. 돌보다
발음 [ thĕrapĕuō ]
어원 / 미완료 ἐθεράπευον, 미완료 수동태 ἐθεραπευόμην, 미래 θεραπεύσω, 제1부정 과거 ἐθεράπευσα, 완료 수동태분사 τεθεραπευ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θεραπεύθην, 2324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섬기다, 종이 되다.
    • a. 섬기다, 행 17:25.
    • b.돌보다, 시중들다, 치료하다, 고치다, 회복하다, 마 4:24, 8:7,16, 10:8, 막 1:34, 눅 4:23 등.
  • 관련 성경 / 고치다(마 4:23, 막 1:34, 눅 10:9), 고쳐주다(마 8:7, 12:22, 눅 14:3), 병 고치다(마 12:10, 눅 13:14),  섬김을 받다(행 17:25), 나음을 얻다(행 5:16), 고침 받다(눅 8:43, 13:14), 병 낫다 (요 5:10, 행 4:14), 낫다(행 8:7).

본문 30절과 3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큰 무리가 여러 다양한 환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절뚝발이(5560) 코로스(chōlŏs) χωλ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5560

1. 기본형으로 보임 : 저는.  2. 절뚝거리는. 3. 불구의
발음 [ chōlŏs ]
  • 1. 기본형으로 보임 : 저는, 절뚝거리는, 불구의, 마11:5, 눅7:22, 요5:3, 행3:2, 히12:13.
  • 관련 성경 /  못 걷는 (사람)(마11:5, 눅7:22, 행14:8), 다리 저는 (사람)(마15:30, 막9:45, 요5:3), 저는 (자)(마21:14, 눅14:13).


불구자(2948) 퀼로스(küllŏs) κυλλ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2948

1. 불구의.  2. 못 쓰는. 3. 저는
발음 [ küllŏs ]
어원 / 2947과 동일어에서 유래
  • 1. 불구의, 못 쓰는, 저는, 마15:30,31, 18:8, 막9:43.
  • 관련 성경 /  불구의, 장애자(마15:30, 18:8, 막9:43).


소경(5185) 투프로스(tüphlŏs) τυφλ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5185

1. 눈이 먼.  2. 막 10:46. 3. 눈 먼 사람
발음 [ tüphlŏs ]
어원 / 5187에서 유래
  • I. 눈이 먼.
    • 1. [문자적으로]
      • a.  [형용사] 막10:46, 요9:1, 행13:11.
      • b. [명사] 눈 먼 사람, 맹인, 마9:27,28, 11:5, 막8:22.
    • 2. [상징적으로]마음과 영혼이 눈 먼 것.
      • a. [형용사] 마15:14, 요9:40.
      • b. [명사] 마23:17.
  • 관련 성경 / 맹인(마11:5, 눅6:39, 벧후1:9), 눈 먼 자(눅 4:18). [동] 눈 멀다(마12:22, 계3:17), 맹인 되다(요9:1,24,41).
벙어리(2974) 코포스(kōphŏs)  κωφ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2974

1. 둔한.  2. 벙어리의. 3. 귀먹은
발음 [ kōphŏs ]
어원  / 2875에서 유래
  • 1. 둔한, 무딘, 예민하지 못한.
    • a. 벙어리의, 마9:32, 12:22, 15:30,31, 눅1:22, 11:14.
    • b. 귀먹은, 마11:5, 막7:32,37, 9:25, 눅 7:22.
    • c. 귀먹고 말못하는.
  • 관련 성경 / 말 더듬는(막7:32), 말 못하는(마9:32, 막9:25, 눅11:14), 못 듣는(마11:5, 눅7:22).

기타(2087) 헤테로스 여럿(4183) 포루스

ἕτερος, α, ον 스트롱번호2087
1. 다른.
2. 둘 가운데서 다른
3. 둘 이상 가운데서.
발음 [ hĕtĕ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πολύς, πολλή, πολύ, gen. πολλού, ῆς, οῦ 스트롱번호4183

1. 많은.
2. ㉠ 많은
3. ㉠ 맹렬한
발음 [ pŏlüs ]
어원 / 속격. πολλός에서 유래




두매(4496) 맆토(rhiptō) ῥίπτω 스트롱번호 4496

1. 던지다.  2. 맡기다. 3. 놓다
발음 [ rhiptō ]
  • 1. 던지다, 맡기다, 놓다, 뉘우다[사나움이나 강렬함을 내포하지 않고], 마9:36, 15:30.

    문법설명 / 4495와 동일

  • 관련 성경 /  앉히다(마 15:30), 던져 넣다(마 27:5), 넘어뜨리다(눅 4:35), 던지다(눅 17:2), 내버리다(행 27:19).


큰 무리가...여럿을 데리고
- 평행 구절인 마가복음 7:31-37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사실 그 당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慢性的)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 본문의 '불구자'(퀼루스)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비된 자를 가리킨다.
아무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위대한 의사로서 영.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발앞에 두매
- '두다'라고 하는 헬라어 '마토'(*)는 사람이나 무거은 물건을 마치 경쟁하듯이 서둘러 내려 놓는다고 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해 와 진지한 열성(熱誠)으로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더구나 '두다'의 미완료형 '엘마산'(*)은 병든 사람을 예수의 발 앞에 내려놓는 행위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예수 앞에 앉아 그의 만져심과 고쳐주심을 기대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ἰάομαι 2390 [iaŏmai]
  • 1.

    고치다, 치료하다.

  • 2.

    [문자적으로] 눅5:17, 6:19, 요4:47, 행9:34, 10:38등, [수동] 마8:8, 15:28, 눅7:7, 8:47, 요5:13, 약5:16등.

  • 3.

    [상징적으로] [여러 종류의 병으로부터 온전하게 됨] 회복하다, 마13:15, 요12:40, 행28:2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καταρτίζω 2675 [katartizō]
  • 1.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정돈하다, 정리하다, 고치다, 마4:21, 막1:19, 고후13:11, 갈6:1.

  • 2.

    정돈하다, 복구시키다.

  • 3.

    완전하게 하다, 채우다, 눅6:40, 고전1:10, 살전3:10, 히13:2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θεραπεύω 2323 [thĕrapĕuō]
  • 1.

    돌보다, 시중들다, 치료하다, 고치다, 회복하다, 마4:24, 8:7,16, 10:8, 막1:34, 눅4:23등.

  • 2.

    섬기다, 종이 되다.

  • 3.

    섬기다, 행17:2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병자를) 고치다

    Gattaca | 2022-03-14
오픈사전
μετανοέω 3340 [mĕtanŏĕō]
  •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 마3:2, 막1:15, 눅10:13, 행2:38, 8:22, 고후12:21,계2:21,22, 16: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태복음 15: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4. [누가복음 2: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5. [누가복음 5: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6. [누가복음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7. [누가복음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8. [누가복음 13: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9. [누가복음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0. [누가복음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1. [누가복음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12. [누가복음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13. [요한복음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4. [사도행전 4: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15.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6. [사도행전 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17. [로마서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18. [로마서 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19. [로마서 15: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20. [고린도전서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21. [고린도후서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2. [고린도후서 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23. [고린도후서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24. [베드로전서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25.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천로역정 성구


천로역정 성구

천로역정 chapter11죽음의 강 건너 마침내 천성 - 천로역정 chapter11죽음의 강 건너 마침내 천성
14/완주 그리고 영원한 삶의 시작소망,과수원지기,빛나는 천사들,천성 시민들,하나님,헛된 소망,무지

천로역정  chapter1첫발을떼다.다 보이지 않아도 - 천로역정  chapter1첫발을떼다.다 보이지 않아도
1/멸망의도시> 절망의늪>시내산 >도덕의마을
이사야 64:6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눅14:33)
이와같이 너희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시38: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 할 수  없나이다.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16:30~31)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히9:27)
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욥 10::21~22)
내가 돌아오지 못할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전에 그리하옵소서
22이땅은 어두워서 흑암같고 죽음의 그늘이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겔 22:14)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찌라.

(사30:33)
대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


(마3:7)
요한 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베푸는데 오는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천로역정chapter2좁은문으로 들어가다(은혜와 은혜 아닌것) - 천로역정chapter2좁은문으로 들어가다(은혜와 은혜 아닌것)
2/ 좁은문>>해석자의 집
선의,해석자,집주인,율법,복음,정의,인내,불끄는 마귀,기름 붓는 예수

마태복음 7:13-14 KRV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벧후1:19)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눅14:26)
무릇 내게 오는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창19:17)
그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렘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 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천로역정chapter2좁은문으로들어가다 - 천로역정chapter2좁은문으로들어가다
3/은혜와 은혜 아닌것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것은 보이는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것은 영원 함이니라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돠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히11: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않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된것이니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히9:17~21)
유언은 그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자가 살았을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없이 세운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술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히13:20,21)
양의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일에 너희를  온전케 히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딛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거ㅛ인데
(사45: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요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세 주ㅛㅣㄹ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니라.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자인 연고라
(마13:43)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쎄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계7:16,17)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상하지 아니 할찌니17.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발을 가리었 고  그둘로는 날며
(살전4: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닉 그리하여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니


(계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더라.
(계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14:1~5)
또 내가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난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를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아니하고 정절이있는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천로역정chapter2 - 천로역정chapter2
4/좁은문>해석자의 집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것이요 이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고후5:2~3
과연 우리가 여기있어 탄식하녀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사55:1~2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것을 먹을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

요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시40:2
나를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삼상12:21~22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실  것이요

고전7:29
형제들아 내가 이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앴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출19: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12: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하늘로 쫒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마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막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자가 되지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일4:5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갈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천로역정chapter2좁은문으로 들어가다 - 천로역정chapter2좁은문으로 들어가다
5/선의,해석자,집주인,율법,복음,정의,인내,불끄는 마귀,기름붓는 예수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 하리라.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쫒지 아니 하리라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롯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갈4:19
나의 자녀들아 나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것으로  섬길것이요 의문의 묵은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엡5:26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
,
눅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때에 네 좋은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고후4:18
우리의 돌아 버는것은 보이는것이 나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니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행24: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눅8:13
자위우ㅏ에 있다는것은 말씀을 들을때에 기쁨으로 잗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잗을때에 배반하는 자요

히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눅19: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히10:28,29
28.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케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고전15:

살전4;

유1: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갼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일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단7:9,10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욮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말3:2,3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줄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 같이 그들을 연단 하리니 그들이 의로운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13:30
둘다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말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니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디 아니할 것이로되

눅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쫒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롬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 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천로역정chapter3옥죄던 죄짐을 벗어버리고충전과 무장의 시간 - 천로역정chapter3옥죄던 죄짐을 벗어버리고충전과 무장의 시간
6/구원의 담> 십자가 언덕> 고난의 길> 정자> 아름다운 저택

사26:1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 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 하듯 하리로다.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슥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엡1:13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히11:15,16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 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잭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 하셨느니라.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요일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으ㅔ로움이라.

겔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그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 하리라.

히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

삼상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과이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위에 세우셨도다.

시113:7
가난한 잘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히11:33,34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늬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눌리치기도 하며

사33:16,17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하뉴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7. 너의 눈은 그 영광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 하겠고


천로역정chapter4 이기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골짜기 - 천로역정chapter4 이기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골짜기
7/아블루온,열 정탐군의 후손,교황

겸손의 골짜기> 사망의 음참한 골짜기> 이교도의 동굴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미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롬8:37
그러나 이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 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이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민13:27~33
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땅의 실과니이다.28.그러나 그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렛인은 남방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텨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르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이다.

시44:19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시107:10
사람이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욥3: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 구름이 그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욥10:22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렘2:6
그들이 우리를 애굽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시69: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을 위하여 구하고

암5: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리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자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롬12:21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욥12:22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것을 드러내시녀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데로 나오게 하시며

욥29:3
그 때는 그의 등불니 내 머리에 지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천로역정chapter5든든한 벗 신실과 손 잡다 - 천로역정chapter5든든한 벗 신실과 손 잡다
8/말로만 믿는 믿음
행함으로 드러나는 믿음

이교도의 동굴> 길위> 헛됨의 시장

신실,수다쟁이,변덕,음녀,첫번째 아담,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불난,수치

렘29:18,19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쫒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피소와 모욕 거리가 되게 하리니  19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벧후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창39:11~13
11.그러할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집에 들어 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12.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13. 그기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잠22: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잠5:5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욥31::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썪어져 가는 구습을쫒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쫒아 온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골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잠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고전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세상에서 지혜 있는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 하던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 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요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눅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일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잠23:3
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니라.

롬2:2425,
기록되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뉼법ㄹ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마13:30
둘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

레11장

신13장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늘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고전13장

요13:12
자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더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13:27
조각을 받은 후 사단이 그 속에 들너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시119:34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요16;8,9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갓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하라 이는 내가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마5:19
스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녕을 지키리라.

고후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챙찬하시는 자니라.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천로역정chapte6헛된 유혹과 모진 핍박속에서 - 천로역정chapte6헛된 유혹과 모진 핍박속에서
9/마음을 지킨다는것의 의미
신실,전도자,시장 관리자,상인들,질투,미신,어첨쟁이,재판관,배심원,맹목,불량,악의,호색,방탕,무모,거만,증오,거짓말쟁이,잔인,빚,혐오,완강

광야> 헛됨의시장,신실이 처형 당함

요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 하라.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 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 할 것을 얻고자 하느니라.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하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사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 할 줄 아노라.

사40: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전1:2,4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것이 헛되도다.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2:14,17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인줄을 내가 깨닫고  17. 이러므로 내가 하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막4:8
더러는 좋은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 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눅4:5~7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로 나의 원한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것이 되리라

고전2:6~8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세상 지혜가 아니요 또 이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8. 이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시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빌3:19,20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닌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잠23:23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고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히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잗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것을 나타냄이라.15. 저희가 나온자 본향을 생각하였더년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느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출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단3장

단6장

천로역정 chapter7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나아가며 - 천로역정 chapter7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나아가며
10/쉽고 안락한 믿음의 쓴 열매

소망,사심,돈 사랑,세상 집착,구두쇠,데마,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절망의 거인,자신 없음

안락평야> 은광> 금전산> 하나님의 강과 초원> 샛길 초원> 쉼터> 의심의 성지하 감옥

잠26: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것은  그 마음에 일곱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욥27:16,17
그가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예비 할찌라도 17.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

요6장

창34:20~23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성문에 이르러 그 마을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러나 우리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적되기를 허락할 것이라,23.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눅20:46,47
긴 옷을 압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47.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마27:3~10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점하였도다 하니 자ㅣ가 가로되 그것이 으리에게 므슨 상관리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우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목매어 죽은지라.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 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9. 이에 선지자 예례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기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자와 같으니라.하였더라.

행8:18~23
시넌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잗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사로되 이권능을 내게 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잗세 하여 주소서 하니 20.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 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낭할찌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리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본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새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줄의에 네인바 되었도다 .

호4:18
저희가 마시기를 다하고 는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르류기뻐하느니라.

딤후4:10
데마는 이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마26:14,15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롯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27:2~5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녀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패를 팔고 죄를 점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누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ㅠ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창19:26
아지를 구박하고 어미를 쫒아 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시65: 9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지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계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난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다라

겔47:1~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2.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4.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늘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6.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안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7. 내가 돌아 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흐르는 각처에 모든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니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 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렘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 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 오라

욥7:15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것이 나으니이다.


천로역정chapter8비밀한 세계를 엿보다 - 천로역정chapter8비밀한 세계를 엿보다
11/ 환대와 지혜와 축복을 누리는 기쁨

소망,네 목자( 지식,경험,경계,성실)

기쁨 산맥> 임마누엘의 땅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영들늘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호14: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히13: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딤후2:17,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 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잠21: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천로역정chapter9(맹공을 퍼붓는 믿음 강도들) - 천로역정chapter9(맹공을 퍼붓는 믿음 강도들)
12/ 소심과 불신,죄책감의 실체

소망,무지,배신자,작은 믿음,소심,불신,죄책감큰 은혜,아첨꾼,빛나는 천사,무신론자

자만 마을> 갈림길> 함정> 마법의 땅

잠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것이 있느니라.

전3:10
하나님이 인생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것을 내가 보았느니라.

마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 가서  거하니 그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잠5:22
악인은 자기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벧후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히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창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렘2:24
너는 광야에 익숙한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자들이 수고치 아니하고 그것의 달에 만나리라.

벧전5:8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욥41:26~29
칼로 칠찌라도 쓸데 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 27. 그것이 철을 초개같이 ,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28. 살이라도 그것을 도망하게 못하겠고 물매 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여기우는구나.29. 몽둥이도 검불같이 보고 창을 던짐을 우습게 여기며

욥39:19~25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22.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찌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24. 땅을 삼키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나팔소리 나는대로 소소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세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엡6: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출33: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시3:5~8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6.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햐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꺽으셨나이다.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시37:1~3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요 푸른 채소 같이 쇠잔 할 것임이로다.3.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사10:4
포로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삼상17: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도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이다.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게시기를 원하노라.

잠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시17:4
사람의 행사를 논하면 나는 주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단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것이니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고후11:13,14
저런 사람들은 거짓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롬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며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렘22:12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전10:15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

잠19:27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히10: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살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 할찌라.

전4:9
두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엡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사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눅17:10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

히10:

롬4:

골1:

벧전1: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시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 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레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민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히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합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루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않고 정녕 응하리라.

엡1:18,19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행16:30,31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혁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 하리라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 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천로역정 chapter10무지 생명의 권면을 끝내 무시하다 - 천로역정 chapter10무지 생명의 권면을 끝내 무시하다
13/선과 의,두려움,옛 삶

무지,소망,잠시,후퇴,자력 구원

함정> 마법의 땅

잠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28:26
자기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늠 구원은 ㄹ 얻을 자니라.

롬3:10
기럭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 하지 아니 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ㅐ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내가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시125: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찌어다.

잠2:15
그 길는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

롬3: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엡1:18,19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아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과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ㅠ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요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나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잗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리더라

욥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았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잠1:7
여호와를 경외 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벧후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개가 그 토하였던 곳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잠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천로역정 chapter11죽음의 강 건너 마침내 천성 - 천로역정 chapter11죽음의 강 건너 마침내 천성
14/완주 그리고 영원한 삶의 시작소망,과수원지기,빛나는 천사들,천성 시민들,하나님,헛된 소망,무지

쁄라의 땅>죽음의 강> 천성

사62:4,5,11,12
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11.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아2:10~12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피고 새의 노래 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5: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

신23: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것이요.

계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 하리라.

시73:4,5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이 없나니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 행할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히12:22,23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 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 할 것이라
사57:1,2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 갔나니 무릇 경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ㄴ 만홀히 여김을 잗지 아네하시나니 샤람이 무엇ㄹ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니믜 자녀라장래에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 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ㅠ같을 줄을 안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살전4:13~17
형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ㄹ찐대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ㄴ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6. 주께서 호령과 펀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쫒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유1:14,15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르류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단7:9,10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고전6:2,3
성도가 세상을 판단 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ㅇ이 족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날씀이라 하기로.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사26:2
너희는 문ㄹ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 찌어다

계5:13,14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쁄라의 땅>죽음의 강> 천성

사62:4,5,11,12
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11.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아2:10~12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피고 새의 노래 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5: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

신23: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것이요.

계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 하리라.

시73:4,5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이 없나니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 행할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히12:22,23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 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 할 것이라
사57:1,2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 갔나니 무릇 경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ㄴ 만홀히 여김을 잗지 아네하시나니 샤람이 무엇ㄹ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니믜 자녀라장래에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 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ㅠ같을 줄을 안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살전4:13~17
형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ㄹ찐대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ㄴ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6. 주께서 호령과 펀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쫒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유1:14,15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르류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단7:9,10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고전6:2,3
성도가 세상을 판단 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ㅇ이 족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날씀이라 하기로.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사26:2
너희는 문ㄹ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 찌어다

계5:13,14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아버지의 이름 예수


아버지의 이름 예수(요한복음 17:6-8)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석가모니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6세기경 현재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카필라바스투(가비라성, 지금의 네팔 틸라우라코트)를 중심으로 샤캬 공화국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캬 공화국은 일종의 혼합정체가 행해지고 있었다.
라자냐라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 일부였다.

공자(孔子,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孔夫子,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kənfjú:ʃəs] 콘푸키우스[*]),는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정치인 · 사상가 · 교육자이고[1],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였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석가모니는 예수님보다 600년 전, 500백년에서 600년 이전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성경과 불경에, 아주 흡사한 가르침이나 에피소드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학자들의 주장처럼, ‘늦게 태어난 예수님이, 일찍 가르침을 뿌리고 간, 석가모니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붓다는, 사십일 단식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사십일 금식과 마귀의 시험과 흡사하죠? 불경 상부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붓다는 열두 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에게 파견하였다.
열두 제자 파송하고 똑같아요. 아함경입니다.
붓다의 열성적인 제자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던 중, 붓다의 확신을 받고, 다시 끝까지 걸어갔다.
본생경 무쌍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붓다는 바위에 있는 한 개의 떡으로도, 오백 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
본생경에 나오는 말이죠.
붓다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잡보장경입니다.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진다.
소경이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
똑같죠? 무문자설경이예요.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했다.
본생경에 나오는데, 목자들이 저 천사들을 목격한 그 사건과 흡사해요.
니르바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비슷하죠?
무문자설경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불경의 기록들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불교학자들의 의하면, 예수님은 열세 살 때부터 서른 살까지!
그러니까 주님이 열두 살 때, 부모님과 성전에 올라가셔서, 랍비들과 토론하셨던 그 장면 있죠?
그 이후부터 공생애까지 예수님의 행적이 성경에는 전혀 기록이 안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불교학자들은 고 시점부터, 공생애 시작 때까지, 예수님이 티베트로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라고 주장을 해요.
‘인도로 간 예수!’ 뭐 이런 책도 있죠?
그래서 불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성경에 많이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불교의 가르침을 십칠 년간 받으시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 낸, 수많은 교주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예수님보다 오백 년을 먼저 살다 간 사람은 맞지만, 불경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성경의 기록이 완전히 끝난, 그 시점으로부터, 수백 년 후예요. 그때까지 그냥 구전으로만 전달되었습니다.
그 중 오래 되었다고 하는 법화경도, AD 393년에 기록이 된 거예요.

​반면에 성경은 BC 1500년경,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AD 95년경 사도요한의 책을 끝으로 완결이 돼요.
불경은, 모든 불교의 경전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이 완전히 끝난 뒤부터 기록이 된 거예요.
뿐만 아니라, 불교학자들이 예수님의 불교 영향설을 주장하는 건, 불교 자체의 모순을 가져오게 됩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얼마나 허술하고 보잘  없고, 수준 낮은 종교이기에, 십칠 년간 불교를 공부한 청년이, 불교와 정반대의 교리를 가진 타력 종교를 만들어냅니까?
불교는 자력종교예요.
스스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자력종교.
불교는 원래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처에게 뭔가를 빌어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 하는 오늘날의 불교는, 가짜 불교예요.
그런 불교는 없어요.
무속신앙에게 먹혀 버린 불교입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하면서 했다는 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이 잘 반영하고 있듯이,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 신은 없고, 나! 곧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내가 최고다!’가 불교의 핵심 교리인 거예요.

​십칠 년 동안이나 불경을 공부한 사람이, 유일신 종교를 만들어 냅니까?
그건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거 아니에요?
십칠 년간 공부를 하고, 완전 반대의 종교를 만들어 내다니요?

​불교는 윤회(輪回)를 믿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십칠 년간 불경을 공부하고 오셨다는 우리 예수님은, 양고기와 포도주를 아주 즐겨 드셨어요.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라고 나와 있죠?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열세 살부터 서른 살까지 인도에 가 계셨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언제 목수의 기술을 배우셔서, 목수라는 이름을 들으셨을까요?
목수라는 이름은, 하루 이틀 배워서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에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만 경험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혀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배워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로 생각할 뿐입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고난(苦難)의 바다,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을 통과하면서, 그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 낸, 인간을 위한 창작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종교가 이런 저런 물증을 갖다 대면서, ‘우리가 맞다! 우리가 우월하다!’하고 디밀면, 금방 흔들려 버리는 거예요. 왜냐면 그들의 종교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똑같거든요. 이름만 달리 부르는 거예요. 알라! 부처! 문선명! 예수! 그런데 그 종교를 통하여 얻어 내고자 하는 것은 똑같아요. 그러니까 다른 데에서, 뭔가 신빙성 있는 물증을 제시하면, 거기로 혹 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기독교가, 기독교에서 추구해야 할 바와, 기독교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신앙의 그런 짜릿한 어떤 경험을, 교회가 경험해 보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나오게 되면, 요리 흔들렸다 조리 흔들렸다, 내가 진짜 제대로 믿고 있는 건 맞는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 이 세상의 고난을 피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찾아와서, 당신을 계시(啓示)하시므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永生)을 살게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러한 영생이 과연 무엇이며, 그건 어떠한 상태이며, 영생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거예요. 가르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기독교는요!

그리고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왜 인간이, 지고의 복인 그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시고, 그렇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죄(罪)라는 소품을 사용하여, 창세기 1장부터 이제 설명을 해 가시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 죄를 해결하시고, 즉 어떻게 하나님이 그 불가능한 존재들을, 가능함 속으로 인도하시는지, 그걸 죄의 해결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는지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죄의 문제와, 하나님나라라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심이나 채우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든지, 다른 종교로 이사를 하거나, 교회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이라는 소품과, 무대장치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무엇을 위해, 어떠한 상태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배우고, 하나님나라로 입성을 하는, 그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예요. 절대 종교가 추구하는 그런 것을 얻어내는, 그런 무당잡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나라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나님나라에 가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종교와 똑같은 목적을 갖고 있으니까, 기독교가 그것들과 뭐가 달라요? 다를 게 없으니까,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언제든지 여길 떠날 수도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위해 기도하시는 대상 즉 제자들과 교회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나타냈습니다.
그들을 위해 내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단 말입니다.

​6절 안에 담겨있는 성도의 신분에 관한 마지막 고찰에 이르른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 즉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나타난, 말씀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보게 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는데, 모두에게 나타내신 게 아니라,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에게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어서, 이해시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냈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올바로 이해하고 가야 돼요.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잘 정의하고 있어야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이름은, 언제나 속성을 대변합니다.

예를 들어서, ‘야! 그는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해. 이름이 났어!’
그럴 때 거기에서 이름 안에는, 훌륭한 변호사로서의 속성이 들어가 있는 거죠.
‘그 사람은 가수로 이름을 날려!’ 거기에서 이름은, 노래를 잘하는 그 사람의 특징과 속성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름은, 어떤 존재의 성품과 능력과 기술과 이해심 등 모든 것을 대변하는 거예요.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한 뒤에, 그 존재가 여늬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일 처음 물은 게,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었어요?
이름을 알고 싶다는 건, ‘당신의 전 존재를, 내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인 거예요.
전 존재의 상징! 그것이 바로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기술과 이해심! 특징! 속성! 등등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님의 전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이름! 그것을, 예수가 나타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삶과 죽음과,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 존재를 드러냈다는 거예요.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의 모든 도움이다.’라고도 한 거고,
잠언 기자 또한, ‘여호와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달려가 피할 망대라!’라고 한 거예요.
무슨 이름에 가? 어떻게 갔다 피해요? 우리, 이름에 어떻게 숨어요? 그런 이름의 정의를 잘 알지 못하면, 그런 구절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거죠. ​

시편 124:7-8
7.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의 도움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만 우리의 도움이다.’
이 세상의 다른 힘 즉 돈, 명예, 지위, 어떤 관계, 인기, 이런 것들은 나의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18:10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고 합니다.
의인(義人)은 그곳으로만 달려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안전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즉 이름은 속성이며 성품이므로 여호와께로 피하면 여호와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체로, 우리의 도움이시며, 그 자체로, 우리가 피할 안전한 망대예요.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들에게, 그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냈더니,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했다는 거예요.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돈! 인기! 명예! 등이 자신들을 도와주며, 자신들의 안위를 책임져 줄 것이라고 착각을 하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에만, 우리의 도움과 안위가 있다는 사실을 안 성도들은, 그러한 것들을, 자신들의 도움과 안위의 방편으로 삼아 살지 않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된 성도는, 이 땅에서, 진정으로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타 다른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이 목적삼아 추구하는 그것들을 좇지 않고,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들을 보낸 이유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역사와 우주 속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의 본질이 뭔지를 알아, 그것에 착념하고 전념하고 집중하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사에 개입을 하시며, 왜 당신의 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온 아들은, 이 땅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다가 가셨는지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7:7-8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아버지께, 내가 아버지께로서 나온 줄을 안다는 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거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다는 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며, 하나님이 그분을 왜 보냈는지를, 알았다는 뜻이에요.
그건 지금, 여기서 제자들이 이 시점에 알았다는 게 아니라, 제자들로 상징되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로 인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오게 될, 모든 교회들은,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하여, 이 세상에서 지어져가게 된다는 것을, 그런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요. 중보자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그 분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직접 살고, 그래서 살고 죽었어요. 그리고 다시 부활했습니다. 삶으로 직접 살고, 입으로 말씀으로 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신 것이고, 성도는, 그분의 삶과 그 분의 가르침이 모두, 하나님의 작정과 뜻임을 아는 자들을 말하는 거예요.

​성도는, 예수님의 죄 사함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획이 되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성취가 된 것을, 믿는 자들인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서, 이 세상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성도의 본질을, 이미 확정이 되고 완성이 된 것으로, 과거와 완료시제로 쓰고 계신 것은,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임을, 단언하여 말씀하신 거예요.

‘그들이 믿었습니다. 그들이 지켰습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지키긴 뭘 지켜요? 금방 도망갈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켰습니다. 믿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버지와 나는, 이들을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낼 거죠? 아버지! 그러니까 보존하여 지켜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는 거예요.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바로 그 기도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건, 만사형통이나 소원성취!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의 자리에서의 그 해방(解放)! 그 창조의 목적으로의 그 회귀(回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말이에요.

아무튼 그런 예수님의 하나님 이름 선포는, 구약에서부터 이미 반복하여 예언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메시아의 시 시편 22편을 봅시다.
시편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여기서 주가 Lord예요.
바로 이 예언의 성취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편 22편은, 메시아 시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윗 개인의 시편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다윗은 성도를 대표하기도 하고, 예수를 상징하기도 하는 인물인데, 다윗이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은, ‘메시아가 이런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도도 그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다윗 자체가 살아내므로 말미암아, 이중으로 계시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이름 계시 사건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돼요.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그런 예수님의 삶이 동일하게 반복이 된단 말이에요. 그게 다윗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이런 시를 쓴 거예요. 다윗이!

자, 그러면 도대체 그 삶이 어떤 삶인가? 열왕기상 11장 36절 보세요.

(열왕기상 11:36)

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예루살렘? 뭡니까?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거죠? 하나님의 백성! 선택한 백성! 그들에게 뭘 둔다, 그래요? 내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 그래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름을 두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삶에 들어오는 건, 그 즉시 ‘행복 끝! 고생 시작!’이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삶이 그랬잖습니까? 민수기 6장 27절 보세요.

(민수기 6:27)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보세요. ‘내 이름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 뒤로 이스라엘의 삶이 복된 삶이었습니까?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 가시와 담으로, 열심히 두들겨 맞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삶이, 그 때부터 시작 되었어요. 그걸 복이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복(福)! 계시록 14장 1절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14:1)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십사만 사천은 12×12×1000. 그래서 열두 지파! 열두 사도!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숫자인 거죠.)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어린 양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성도의 이마에, 탁 박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그렇게 드러났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리고 그 삶은, 천국에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죄가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제가 주일날 잘 설명해 드렸으니까, 잘 아시죠? 마귀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 이 땅에서는 고난으로 나타나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이, 천국에 들어가면, 죄가 싹 없어진 곳에, 그 곳에 들어가면, 이게 가장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그 이중적인 나타남! 드러남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계셔야 되는 거예요. 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과,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그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을 살면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거죠. 이길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이런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순종의 삶을 통하여, 십자가에 그대로 나타내셨고,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이름과, 이 세상에 드러난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어요.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우리 성도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신, 나타내신 것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정말 가난하게 살다 가셨어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쏟아 부으셨죠? 그 삶이, 사도행전으로 가면, 베드로와 요한의, 그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의, 작은 에피소드로, 그림으로 또 드러나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봅니다. 미문이 뭡니까? 아름다운 문이에요. 거기에 누가 돕지 않으면 절대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가 앉아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 거기다가 그 앉은뱅이를 갖다 놓고 갔더니, 동냥 바구니를 놓고 동냥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그 동냥 바구니만 보고 있어요.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문인 줄 알고, 미문인 줄 알고, 그게 진짜 좋은 건 줄 알고 거기 앉아서, 실제로는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 동냥 바구니만 바라보면서, ‘누가 동냥 안 해주나?’라고 기다리고 있는 게, 바로 오늘날의 이 세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동냥 바구니를 보면서, 거기에 그 동냥 바구니로 얻어내는 모든 것은, 그냥 동냥에 불과한 거예요. 거지 동냥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천 만 불을 벌어도, 그건 거지 동냥에 불과한 거예요.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어딜 보냐? 나를 봐라!’ 그러잖아요? ‘주목하라! 나를 주목하라! 왜 동냥 바구니만 보고 있어? 나를 봐!’

봤더니, 개뿔이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동냥이나 받을 줄 알고 봤더니, 한다는 소리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지금 네가 원하는 건, 은과 금이잖아? 그래서 너는 지금 동냥 바구니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봐!’ 그러더니,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게 복(福)이란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받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가 드러내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하고, 예수의 이름을 받아 세상으로 나간 성도는, 바로 은과 금을 무장해제 당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제자들을, 열두 사도 파송할 때, 칠십 인의 제자 파송할 때, 전부 ‘내가 양을 이리 떼에게 보내는 것 같다.’ 그러면서 홀딱 벗겨서 보내는 거예요. ‘전대도 가져가지 마! 신발도 두 개 가져가지 마! 지팡이만 갖고 가!’

양을 이리에게 보내면서, 그럴 수가 있어요? 왜 세상의 힘을 전부 무장해제 시키고 보내죠? 하나님의 일은, 은과 금으로 하는 거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티끌인 상태로 내려가면서, 하나님이 내 안에서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완전히 티끌인 상태로, 흙덩어리인 상태로 내려 가셨다니까요. 자기가 가진 힘을 자기를 위해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완전히 흙덩어리! 이리 굴리면 이리 굴러가고, 저리 굴리면 저리 굴러가는 그런 삶으로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 안에서 전부 일을 하셔서, 결국에는 살려 내시기까지 하시고, 승천시켜, 하나님나라로 끌어올리시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전부 하나님께 우리의 전 존재를 맡겨 버리는 걸,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나는 자꾸 흙덩어리로 낮아지는데, 내 안에서 하나님이 일을 하셔요. 그러더니 나를 부활시키고, 승천까지 시켜 버리시는 거예요. 그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이 세상에서는, 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모습으로 드러나요. 비전과 야망과 소망과 뜻이 기각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타날 것 아닙니까? 내 야망과 내 욕심이 없어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런 것들이 자꾸 부인을 당해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그 분의 권능에 의해서!

그런데 내 안에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분이 성품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점점 바보가 됐는데, 하나님은, ‘네가 어떻게 그렇게, 저렇게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고 있어?’ ‘아니야! 나는 바보가 되고 있었어요. 내가 뭔데 저런 사람을 질타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판단해? 내가 티끌인데! 내가 흙덩인데!’ 이렇게 점점 부인이 되고 바보가 됐는데, 내 삶 속에서, 그 부인에 의해, 용서라는 게 격발되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인도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나라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만 듣고, 하나님의 뜻만 좇아, 완전히 비워지는 그릇으로 사는 것! 그것이 ‘왔다구나!’를 이 세상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다른 종교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단 말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극과 극 대척점에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요!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바람만 불어도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 땅에서 배울 것만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우리를 미혹(迷惑)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앞으로도 엄청난 것으로 우리를 시험할 거예요. 우는 사자처럼, 우리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은, 문만 열면 들어오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문을 너무 자주 열잖아요? 그렇다니깐요. 마귀라는 존재는 그렇게 실존하는 존재예요.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마귀의 공격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이며 안전한 삶이다.’라는 걸, 또 가르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마귀에게 물리고 당하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계속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절대 마이너스가 없습니다. 손해가 없어요. 여러분의 모든 삶이 합력하여, 선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 원래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복만을 의지해서, 자신의 뜻과 의지를 전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도록 지어진 존재예요. 그래서 첫 번째 인간의 이름이, ‘아담’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느 날 흙으로 어떠한 형체를 빚었어요. 그리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담! 한글로 번역하면 ‘사람’이지만, 그 뜻은, ‘흙덩어리’라는 뜻이에요. 흙, 티끌이 ‘아다마’거든요. 그 ‘아다마’로 만들어진 존재가, ‘네페쉬’가, 아담인 거예요. 그러니까 흙덩어리예요. 흙덩어리!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저주하시고 뭐라 그래요? ‘네가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잘 알아먹으라.’고 그러면서, 흙을 갈게 하죠? 땅을 갈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냥 흙덩어리예요. 하나님 앞에서, 그냥 흙덩어리로 살아야 돼요. 하나님이 생기불어 넣어 주시면, 그 앞에서 재롱이나 피우면서, 하나님이 살라는 대로 살면 되는 게, 인간이에요. 이 사실을 마음에 올바로 각인하고 간직한 아담은, 한 평생 하나님께 의존하며, 동시에, 다른 동료 흙덩어리를 향해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했어요. 잘난 척할 수 없잖아요? 흙덩어리를 자각한 흙덩어리가!

그런데 아담이 흙덩어리인 자신의 신분을 잠시 망각했죠? 그것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던 사건이에요. 하나님의 흙덩어리! 즉 티끌로 살아야 하는 도덕적 피조물이, 티끌의 자리를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 자기 가치 향상의 삶을 살고, 자기의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그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러한 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사건이에요.

그 뒤로, 아담들! 그 흙덩어리들은요. 매일 같이 그 흙덩어리에 이것, 저것 명품으로 걸치기도 하고, 또 그 위에, 최상의 화장품을 바르기도 하고, 흙덩어리를 깎아서 성형도 하고, 학력이라는 것과, 재력이라는 것과, 권력이라는 것과, 지능이라는 것으로도, 흙덩어리를 치장하고 위장하며 살죠?

그런데 그 치장과 위장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본인들도, 자신들이 흙덩어리라는 것을 순식간에 잊어 버려요. 그래서 전 인류가, 자기가 흙덩어리라는 것을 잊어 버렸어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文明)과, 이 세상의 힘들 때문에!

그런데 그 흙덩어리가 흙덩어리로 발각이 될 때가 있어요. 흙덩어리에다가 아무리 예쁘게 화장을 해놓고 치장을 해 놓아도, 그 흙덩어리가 흙덩어리임을 발각이 될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언젭니까? 비가 올 때! 은혜의 단비가, 그의 삶의 내리면, 그의 흙덩어리 됨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 뒤부터, 계속해서 우리의 흙덩어리 됨을 폭로 당해요. 그 때 진짜 생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계속 폭로 당하면서, ‘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어야 되는 자이구나!’를 가슴 속 깊이 새기는, 그 삶을 사는 것을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은 뭐 전부, 그 흙덩어리에다가, 더 많은 어떤 치장과 위장을 할 수 있게, 나에게 힘을 허락해 달라고, 그렇게 구하고 있는 게, 오늘날 기독교의 실정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 분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티끌의 자리로 내려 가셨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했고, 급기야 그 흙덩어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살해를 해 버렸어요. 묵사발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예 흙덩어리의 무력함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에요. 진흙을 마치 십자가의 척 붙여서,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사건처럼, 세상이 예수님을 들어서 십자가에다가 척 붙였더니, 그냥 말라 죽어 버리셨어요. 흙덩어리의 무력함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끝까지 그 흙덩어리의 삶을 고수하셨어요. 자기의 힘을, 그냥 흙덩어리가 되어서, 자기의 힘을, 자기를 위해 요만큼도 안 쓰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 보세요.

(마태복음 26:53-54)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할 수 있다는 거죠.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가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천사 하나가 내려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한 칼에 몰살시켰는데, 열두 영이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군단이 내려와요. 천사가! 이 세상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할 수 있는데, 안한다는 거예요. 난 그냥 흙덩어리로 죽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가 그거 인거예요. 여러분! 삼위일체의 연합의 원리가 그거인 거 아세요? 서로가 상대방을 위해, 자기를 비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연합의 원리인 거예요.

자,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를 보호하시고, 대적을 쳐 낼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셨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이루시는 삶을 사셨던 거예요.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만 들어야 된다는,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사셨던 거예요. 내 능력을, 나를 위해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고, 그 분이 나에게 말씀하신 게 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에요. 그게 아담의 삶이었어야 했어요. ‘먹지 마!’ 그럼 먹지 말았어야 돼요. 그게 뭔지 몰라도, 그냥 먹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이 인생을 통하여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를 믿고도, 수천 번, 수만 번 계속 선악과를 또 따먹고, 또 따먹고, 또 따먹고 있는 거예요. 아닙니까? 오늘도 여러 개 따 드시고 오셨잖아요? 하지 말라는 거! 여러 개 하고 오셨잖습니까? 그 일로 여러분이 얼마나 힘들어요? 얼마나 마음이 불편합니까? 천국에서 그런 마음 갖고 사실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아니죠? 예,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흙덩어리 됨을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거예요. 그 분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당신의 힘을, 당신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원수를 살리는 데 쓰실 수 있는, 그런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그 어떤 존재도, 자기의 그 엄청난 힘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원수를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권능(權能)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권세(權勢)예요.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삶 속에 드러난다니까요. 이제!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힘을, 여러분 자신을 위해 못 쓰고, 원수를 위해 쏟아 내어지는 삶으로, 자꾸 바보처럼 바뀌어 가는 거예요. ‘옛날 같았으면, 저걸 그냥 확!’ 그런데 내가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에이 대충 그냥 이렇게 살지 뭐!’ 사람들이 볼 땐, ‘너는 왜 이렇게 바보가 됐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삶이라고요.

어떻게 하나님 말고 다른 존재가, 자기를 위해서 쓰던 힘을, 원수에게 돌려, 그를 유익하게 삶을 사냐고요?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어떻게 그를 섬깁니까?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그런 삶이 드러나게 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나타나고 드러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점점 비워지는 삶을 살게 되고, 흙덩어리로 폭로가 되고, 결국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그 삶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겁니다. 계속 죽고, 죽고, 죽고 죽다가, 육신의 죽음으로 완전히 죽어, 거기에서 최종승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죽는 순간이, 여러분이 승리하는 순간이거든요.

따라서 그 때가 최종승리! 승리의 절정이라면, 여러분의 삶은 어디로 수렴되어야 된다? 계속 죽는 쪽으로! 그러니까 기독교는 종교와 다른 거예요.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공격에, 응전을 하지 못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돼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감싸 안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성령이 오시면, 권능을 받고…’ 그러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마아터, 순교자가 되리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증인이 순교자란 단어가 똑같은 단어니까! 자,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이에요.

그렇게 작정된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 안에도, 그대로 담겨 있어요. 모세는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애굽의 왕자가 되죠. 어느 날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요. 그러한 모세 속에 애족의식이 싹텄어요. 그러던 중에,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모세는 그 자리에서 그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고, 살인자가 됩니다. 모세는 그 길로 광야로 나가서 사십 년간을,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을 쳤어요.

여든이 된 모세가 하루는, 호렙산이라 하는 곳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 곳은 나중에 모세가 율법을 받게 되는 시내산이죠? 시내산과 호렙산은 같은 산이에요. 그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면,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셨어요.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불은 계속 활활 타고 있어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그림에, 뭔가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제일 먼저 그에게,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래요. 그 말은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는 삶! 거기가 거룩한 곳이죠? 그 삶은, 스스로의 신발을 신고, 스스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갈 수 없는 그런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거룩한 곳!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모든 존재는, 신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신발 신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면서, ‘하나님! 빨리 와서 나를 도우라!’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는 게 아니에요. 신을 벗어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는 밖에서 띠 띄우고 너를 끌고 갈 존재가 있다고, 목을 확 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곳에 선 성도! 거룩한 무리잖아요?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 말씀 뒤에, 모세와 하나님의 난상 토론이 벌어져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의 폭정에서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물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하실 것이고, ‘너는 나의 대리인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게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모습인 것입니다. ‘네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너를 태워서, 너의 능력과 너의 언변! 너의 소질! 이런 걸 태워서, 일을 할 게 아니라, 내가 내 힘으로 불태워 일을 할 거야.’가 고 그림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고 그림 안에는, ‘지금 내 백성이 애굽에서, 이렇게 풀무 불같은 고난을, 고통을 겪고 있지만, 절대 그들은 그 풀무 불에, 진멸되지 않을 것이고, 그 불은, 단지 그들의 온전함을 위해, 양육용으로 준 것이다. 절대 그들은 나의 보호 아래에서, 절대 거기에 불타서, 진멸되지 않을 것이다.’를 보여주기도 하는 그림이기도 한 거예요.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의하고 있는 거예요.

모세가 그것을 알아먹었어요. 그걸 우리도 알아들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바로 그 현실을 알아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의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셨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죠. 세상의 풀무불은, 그를 십자가의 매달아 놓고, 확 태워 버릴 줄 알았어요. 다 태운 줄 알았는데, 예수가 그 자리에서 다시 살 났어요. 고 현장에서 불은 분명히 타고 있었는데, 고난의 불이, 십자가의 불이 타고 있었는데, 예수가 죽지 않고, 안타고, 그대로 다시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시고 그들과 함께 애굽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애굽의 그 풀무 불같은 고난을 당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뭔가 배우게 하시고, 그래서 그들을 그 풀무 불같은 고난이, 다 태워서 진멸하지 못하게 지키시며, 결국은 당신의 힘으로, 모세라는 인물을 들어서 썼지만, 그들을 완성해 내고 마신다는, 그 복음의 현실이, 그 전체 그림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지맞은 인생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복음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도대체 뭘 더, 더 이상 원할 게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의 삶! 십자가의 삶! 부활! 승천! 전~부 하나님의 개입하심이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 그런다고요. 예수님도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살려 내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내려가 버리신 거예요. 우리 때문에!

그리고 ‘바로 너희가 이런 삶을 살게 될 거야.’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하나님이 살려내시지 않으면, 일으켜 내시지 않으면, 영원히 무덤 속에 거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까지 내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자기를 다 비워 버렸어요. 자기를 위해 자기의 신성을 전혀 쓰지 않기로 작정을 하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왜? 너희가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은 그렇게 흙덩어리의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수시로,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했다.’ 제자들에게 수시로 반복하여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무슨 생각도 없습니까? 그런데 왜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다, 그래요? 아버지가 왜 시키는 일만 했다 그래요? 바로 그게 우리의 삶이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급기야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은, 이 잔이 내게서 비껴가는 건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세요.’라고 기도를 하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안 들으시고, 아버지 뜻대로 그냥 해 버리셨죠? 그 삶이 너의 삶 속에서 일어날 거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의 뜻이 있지만, 그건 우리의 이 얄팍한, 좋아봐야 150! 거기서 나오는 지혜 밖에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도 결국에는,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로 바뀌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고백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무릎 꿇고 앉아서, 죽자 사자 기도하는 거예요. ‘왜 이게 안 되죠? 왜 자꾸 내 뜻이 올라와요. 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자꾸 내 눈에 보여요. 아버지!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하나님과의 연합(聯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연합이 되는 게 기도라면,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추시겠어요? 내가 하나님 뜻에 맞춰야죠. 그런 자로 내가 자꾸 해체되어져 가는 게, 기도란 말입니다. 기도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거니까!

자,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그 분의 능력이, 밖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도구로 쓰이는 이의 그 흙덩이 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흙을 개어서 벽돌을 만드는 자들로, 낮아져야 했던 이유를 아시겠어요? 그들을 애굽에 들여보내셔서, 흙을 개어, 벽돌을 굽게 함으로, 너희들이 흙이라는 것을, 거기서, 그 애굽의 삶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그 속에서 그들이, 그 고통으로 절대 안 죽더라는 것입니다. 살려 내셔서, 결국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시더라는 거예요. 그럴 거면 애굽에는 뭐 하러 넣었다 빼요? 필요하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이스라엘은, 동일한 삶을 산거죠. 예수님도 흙덩이가 되어서, 완전히 비워 버렸고, 하나님이 살려낼 때, 그냥 살아난 것뿐이에요.

이스라엘? 마찬가지입니다. 흙덩이가 되어서 그곳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큰일 나겠어요.’라고 부르짖었더니, 아버지가 그 부르짖음을 듣고, 그 전까지는 못 들었나요? 아니오. 부르짖게 만드신 거예요. 아버지가! ‘아버지의 도움이 나에게 필요하군요.’라고, 부르짖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걸 아버지가 들었다고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보죠. 모세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죠. 제가 그 장면을 조금 드라마틱하게 각색을 한번 해 볼게요.

‘하나님! 이제는 열정도 정열도 다 시들었습니다. 그 때 내가 분연히 일어나서, 애굽사람을 쳐 죽였을 때, 그 때 찾아와서 일을 시키시죠? 그 때는 왜 침묵하시고, 내가 처갓집에 가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다가, 이제 여든이 되어서, 이렇게 무력해진 이 시점에 와서, 저에게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지난 수십 년간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양무리의 문을 열고 닫는 일 그것뿐이었어요. 하나님! 당신은, 제 인생의 시간을 잘 못 읽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잘못 찾아 오셨어요. 저는 게다가 입이 둔하여 말도 잘 못합니다. 대중연설도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동적인 연설은, 더 더욱 못해요. 그러니까 저는 이 일의 적격자가 아닙니다.’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끈질기게 불타는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모세를 설득하셨어요. ‘네 힘으로 하는 거 아니야! 네 능력! 네 언변! 태워서 일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라면 가!’ 계속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모세는, 마지못해서, 하나님의 청을 받아들이죠. 그런데 또 다른 조건이 있었어요.

‘하나님! 제가 애굽에 가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사람들이 ‘네가 무슨 권한으로, 네가 그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를 보냈느냐?’ 그러면, 제가 누가 보냈다고 해야 됩니까?’ 물어봐요. 그 말은 ‘당신 명함 하나 주세요! 갖다가 보일 테니까! 당신 명함 하나 주세요!’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그러는 거예요. 그들이 ‘너 누가 보냈어?’ 그랬을 때, 내가 딱 그들에게 내 놓아서, 그들이 납득할 만한, 그런 당신 명함을 나에게 하나 달라는 거예요. ‘아! 그 분이 보냈으면, 오케이!’ 라고, 그들이 인정할 만한 당신 명함을 달라는 거예요.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물어본 거예요. ‘누가 보냈다 그래야 돼요?’ 그 때 하나님이 명함을 주시죠.

그 명함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이름 풀이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다시금, 왜 하나님이 자기의 명함을 주시게 되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왜 줬다고요? 모세가 애굽, 애굽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구원하러 갔을 때, 그들이 ‘도대체 누가 너를 보낸 거냐?’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때 보여줄 이름을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이 이름을 주신 거 아녜요?

그러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이름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는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같죠? ‘에흐헤!’ 가운데 글자인 ‘아쉐르’는 문법적으로 관계사예요. 두 단어를 연결 짓는 연결사죠. 그렇다면 ‘에흐헤’라는 단어의 뜻만 풀면, 하나님의 이름이 풀이가 되겠죠? ‘에흐웨’는 문법적으로 ‘무엇 무엇 이다. 있다.’ 거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1인칭 단수 미완료 동사예요.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 이런 뜻이어야 맞아요.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곧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표준 새번역에도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좀 부족해요.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름 같죠?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온갖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을 추출해낸다면, 그건 잘못 해석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책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건 전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진공상태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학문적 상아탑에서, 논의되는 이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구체적이고, 매우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 아래서 주어진, 복음인 거예요. ‘누가 너를 보냈어?’ 그랬을 때, ‘이 분이 보냈어!’라고 주어질 복음인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고난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생수와 같은 좋은 소식을 담고 있는 이름이에요. 그 분의 이름 자체가, 복음이고, 희망이고, 미래이며, 위로의 원천이에요. 어떻게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름 세 글자를 담고 있는 그 명함을 건네 주셨을 때, 모세도 알아야 하고, 그 고난의 풀무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도 알아야 하며, 여러분과 저도 알아야만 하는 그 복음의 메시지가, 그 이름 속에 담겨 있었어요.

몇 년 전에 작고한 그 저명한 신학자! 루이스 스메데스가, 이 광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풀었어요? Wherever you are, I am The One who will always be with you there. 네가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이,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 그게 바로 네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리고 어떤 사건 속에 처해 있든지, 그곳에 항상 함께 있는 게, 바로 나다! 그게 ‘I am Who I am’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던 이스라엘이, 그 명함을 척 받았을 때, 어땠겠어요? ‘아! 우리가 이 애굽에서 이렇게 고난을 당한 것이, 그냥 하나님도 모르는 어떤 곳에서, 우리가 아무 유익이 없이 당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기 위해 준 고난이었구나!’를 알게 된 거예요. 그게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인 것입니다. 나는 네가 어느 곳에 있을 때에도, 너와 항상 함께 있는 존재야! 그게 임마누엘 아닙니까?

그러니까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는 임마누엘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풀무 불같은 애굽의 고난 속에서도 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죽일 거였다면, 거기서 다 죽였겠죠. 그런데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붙은 불처럼, 풀무의 불이 그들을 연단하고 있는데, 그 안의 이스라엘은, 온전한 채 보전되고 있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인 교회! 이 시대의 교회는, 그렇게 애굽을 살면서, 이 세상을 살면서, 풀무불 같은 고난과 연단 속에 던져져요. 그러나 여러분은 절대 상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하죠? 그건 여러분을 방해하거나, 미혹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교회로서의 여러분의 본분은, 절대 상함이 없다는 거예요. 연결이 되시죠? 떨기나무 불꽃과, 불과, 애굽의 이스라엘의 이야기!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 전체에 함께 하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고난으로 몰고 간 것의 정체는, 이 세상의 죄였죠? 이 세상의 죄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사셨을 때,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죄가 예수님을 두들겨 패고, 죄가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가 불살라 버리지 못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분이, 세상의 죄가 자꾸 불을 사르는데도, 온전하게 보존이 되시다가, 새 몸으로 부활을 하신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애굽에 들어갔다 나온 이스라엘의 삶이고, 그게 교회의 삶!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걸 성경전체가 그냥 일관성 있게 반복하고, 점층적이며,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좀 더 알기 쉬운 그림! 이렇게! 창세기부터는 유치원 수준으로 설명하다가, 나중에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이렇게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은, 그 그림이 선명하게 확 드러나 버리는 거죠. 성도의 삶의 현실과, 천상의 교회의 모습! 이게 동시에 드러나잖아요? 요한계시록에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그릇은, 한없이 약해져야 하는 거고, 그 질그릇 같은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예수와 똑같은 삶을 살며,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자,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그 이름! ‘I am who I am’이라는 그 이름이, 출애굽 때 처음 주어졌는데, 자, 그 출애굽이 언제 약속이 됐던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창세기에서! 거길 보면 조금 더 명확해 지겠죠? 창세기 15장 7절 보세요.

(창세기 15:7-17)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이게 애굽의 약속이에요.)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즉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필연적인 약속의 땅 입성을 약속하시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바로 위에는, 불임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장면이 붙어 있어요. 나와요. 그 언약의 장면에, 쪼갠 고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영토의 완성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창조! 이게 약속이 되면서, 쪼갠 고기가 등장하는 것이죠? 당시 고대시대 사람들은 어떤 약속을 할 때, 항상 고기를 쪼개놓고, 그 사이를 둘이 손잡고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둘 중에 하나가 이 약속을 어기면, 요렇게 쪼개져서 죽는다.’를 확약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 백성들의 그 창조가 약속이 되는 그 현장에서, 고기가 쪼개져 있는데,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신단 말이에요. 왜? 인간 측에서는, 거기에 어떤 것도 보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혼자 지나가요. 그리고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그 일을 방해하는 게 바로, 우리의 죄성(罪性)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라도 너희들을 나는, 반드시 완성해 내고 말거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쪼개져서라도, 나는 반드시 만들어 내고 말거야! 그리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셔서 혼자 쪼개져 버리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그러한 엄청난 하나님 측에서의 손해와, 상함이 감수 되었다는 걸, 우리에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벌써!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창조가 약속되는 데에, 그들의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 종의 삶이, 끼어들어가 있단 말이에요. 필연적 과정으로! 너희들이 분명히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전에, 어떤 일을 겪어야 되냐면, 사백 년 동안, 사백이라는 단어가 뭐, 숫자가 뭐라 그랬어요? 사십 년 광야! 인생! 너희들은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이 세상살이, 이 삶을 통과하여, 뭔가를 배우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출애굽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약속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들을 진짜 출애굽 시키실 때,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이 되는 거예요. 내가 다 한 거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한 거야!’ 내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여, 너희들을 그리로 들여보냈고. 야곱에게, 하나님이 ‘들어가라!’ 그래요. 그 전에는 들어가면 죽인다고 그러더니, 야곱한테 가서는 또, ‘들어가라!’ 그래요. 빨리 들어가라 그래요.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래놓고 거기서 종살이 하게 만든 다음에, 하나님이 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뭘 가르쳐서! 그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전체 내용인 거예요.

무슨 마귀새끼가 반역을 해서, 걔에 의해서, 막 모든 것이 주도가 되어 인간도 타락을 하고…,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게 동화적으로 해석을 하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성경과 역사를!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전지전능한 창조주세요! 그 분이 아무런 계획과 목적도 없이 일하시겠습니까?

그 우리가 그러한 애굽살이! 애굽의 종살이를 통하여 배워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두 가지로 나누면,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 즉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난 자들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이 되는, 이 세상에 종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끌어내어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가서는, 다시 애굽으로 밀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배우고 오라는 거예요.

우리는 천상의 교회로 완성이 되어 있는데, 이 세상 애굽으로 잠시, 하나님이 밀어 내리신 거예요. 다시 끌어 들이실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세가 그 역할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추구해야 되겠냐고요? 아휴! 답답할 때가 많아요. 천국에 가면, 도대체 거기에 몇 명이나 있을까? 굉장히 궁금해요. 여러분!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절대 애굽을 벗어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직시하게 하시기 위함인 거예요. 그들은 또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배움터인 그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그 고난의 풀무 속에서도 절대 타지 않고, 온전히 보존이 되어서, 오히려 연단이 되어서, 하나님나라로, 입성을 하게 될 것임을, 다 아우르고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예요. 그 이름이 여러분이 삶 속에 나타났단 말이에요. 드러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흙덩이로 낮아지고 굳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삶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고,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삶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 현상만 보고, ‘야! 난 지지리도 복도 없어! 하나님이 날 지금 미워하시나 봐! 야! 저 사람은 참 복 받았어!’ 이렇게 판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 땅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하늘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떨기나무 불로 일하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하고도, 자랑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뻐기거나,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거고! 왜? 그것이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난하고 연약한 자리에서도, 기죽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 현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단 말입니다.

그 그림이 잘 표현이 된 게, 우리가 이미 배웠던 실로암 사건이에요.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실로암 사건! 요한복음 9장 7절 보면,

(요한복음 9:7)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이 ‘실로암’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설명을 하죠. 그건 요한이, 이 에피소드에서 강조되어야 할 메시지가 바로, 그 이름 안에 담겨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 유다를 침공한다는 정보가, 첩보가 들어왔어요. 그 때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에서 한 500m 정도 떨어진, 그 기혼 샘에서, 지하수로를 뚫어서, 예루살렘 성 안에다가 연못을 하나 만들어요. 식수 때문에! 포위가 되면 물을 먹어야 되니까! 그게 실로암 연못이에요. 그러니까 실로암 못은, 기혼으로부터 보내진 물이, 여기서 현상으로부터 나타난 것뿐이죠?

그런데 현상으로 나타난, 소경이라는 현실을 보면서, 제자들이, ‘이거 누구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죠?’ 라고 묻고 있단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건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라고, 소경 됨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밝히 드러내세요. 그런 다음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거예요.

왜? 실로암은, 이 자체가 수원이 아니라, 기혼 샘이라는 수원이 있는데, 거기서 보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실로암만 보면서, 이 실로암이, 이 물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이는, 소경이고, 이 실로암이 어디서 보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보는 자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본다고 하는 자가, 눈먼 자고, 눈먼 자가 바로, 보는 자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그걸 자기가 올바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면서, ‘조 놈은 나쁜 놈! 조 놈은 악한 놈! 요 사람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 요 사람 착한 사람! 조 사람 저주받은 사람! 요 사람 복 받은 사람!’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연단이나, 그 분의 은혜의 손길이나, 긍휼의 손길이나, 이런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나는 현실과 현상만으로 판단해 버리는 게, 소경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어떤 사건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를,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 크게 사고를 쳤어요. 이거는 누가 봐도 명백히 못된 짓을 한 거예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할 말 없는 그런 일을 했어요. 그 때 내가 같이 ‘야! 이 나쁜 놈아! 너 때문에 내가 창피해 죽겠다.’ 그리고는 머리 질끈 동여매고 앓아눕는 거! 이게 현상과 현실만 보고, 자기 스스로 그냥 판단해 버린, 소경들입니다.

성도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이 아이와 우리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실 게 있는 거고, 이 일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분명히 뭔가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혹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임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것을 쳐내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는 자! 그가 보는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현실과 현상 뒤에 숨어서, 당신의 일을 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천상의 교회로서,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떠한 힘과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를, 이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셨는지를, 잘 배우는 거예요. 흙덩이들은, 흙덩이로 살아야지! 거기다가 아무리, 위장을 하고, 변장을 하고, 치장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 아래서는, 생얼이 된다는 거를, 잘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점점 그런 위장과, 변장과 치장을 덜할 수 있게 되는 거! 그게 성도의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εἰ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1525

1. 오다.  2. 마 8:5. 3. ㉠ 히 9:12, 24, 25
발음 [ ĕisĕrchŏmai ]
어원 /  미래 εἰ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εἰσῆλθον , 과거 완료분사 εἰσεληλυ- θώς, 1519와 204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들어가다(마 5:20, 눅 4:16, 히 9:12), 들어오다(마 8:8, 눅 7:45, 고전 14:24), 참여하다(마 25:21, 23), 들다(마 26:41, 눅22:40, 46), 나가다(막 10:25), 오다(눅 8:41), 일어나다(눅 9: 46), 데리다(눅 14:23), 돌아오다(눅 17:7), 출입하다(행 1:21), 이르다(행11:20).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4-25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된 이래로(눅 1:26-38), 회의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에 관해 질문을 제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약혼자였던 요셉이 임신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두려워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마 1:18-24).
요셉은 마리아가 가진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천사로부터 확인한 후에야 그녀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천사가 요셉에게 말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했을 때 천사는 이사야의 예언을 암시했습니다(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은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아기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마 16:13; 막 8:27).
그 대답은 오늘날과 같이 다양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더 자세히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베드로가 올바른 답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사실이라고 확증하시고 그 진리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16:18).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본성과 정체성에는 영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에 관한 바른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9-10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질에 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요 1:1-14).

빌립보서 2:6-7에서는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9에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인간이시며, 그분의 성육신은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사셨지만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가 없으셨습니다(히 2:14-18; 4:15).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죄성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에게 전해졌습니다(롬 5:12).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인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요 8:29; 히 9:1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300개 이상의 예언을 성취해야 했습니다(마 4:13-14; 눅 22:37; 사 53; 미 5:2).

인간이 타락한 후(창 3:21-23), 인간이 하나님과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무고한 제물의 피가 필요했습니다(레 9:2; 민 28:19; 신 15:21; 히 9:22).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영원히 만족시킨 최종적이고 완전한 제물이었습니다(히 10:14).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적합했으며 예수님의 몸을 통해 그 구속 사업에 필요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그런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마 26:28; 요일 2:2).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예수님이 단지 선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에게도 죄의 본성이 있고 완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누군가를 구원할 능력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고 그로 인해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갚으실 수 있습니다.
죽음과 무덤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요1:12; 고전 15:3-4, 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

 1. 성육신의 의미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14 말씀에 근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요 1:3) 성탄은 바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이 같은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이 같이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創造物)에 불과한 인간(人間)과 같이 되셨다는 성탄의 사건은 천지창조(天地創造) 보다도 더 경이(驚異)로운 사건이다.

기독교신앙은 역사적(歷史的)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오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敬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絶頂)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1) 구원론의 차원과 2)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성육신사건은 기독교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는가?
  • 성육신사건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 성육신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樣式)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2. 성육신의 구원론적 의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救援論的)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경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使者)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神性)과 참 인성(人性)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贖罪)의 사역을 대신하시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成肉身)의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게 된다.                  

3. 성육신의 신론적 의미

다음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神論的)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일까?”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像, Image)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릿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며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自信)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교회는 이 문제에 관해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성’(유사본질, homoiousios, 아리우스의 주장)을 가졌을 뿐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동일본질, homoousios, 아타나시우스 주장)을 가졌는가?”
‘homoiousios’와 ‘homoousios’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자 한 자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被造物)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超越的)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저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相衝)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로서의 성경과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그저 추상적(抽象的)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不滅)하시며 무한(無限)하시며 불변(不變)하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며, 유한하지 않으시고, 변하시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性稟)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像, image)은 우상(偶像)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골 1:15)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우리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요 15:1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像, image)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독생 성자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학 사상과 같은 추상적 개념(槪念)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人格的)으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首肯)만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信賴)와 순종(順從)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行動)  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被造物)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 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原理)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사랑을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抽象的)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4. 성육신과 기독교 영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런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신앙은 어떠한 삶의 양태(樣態)를 요구하는가? 다시 말하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신앙은 이 세상을 부정(否定)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經綸)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해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마치는 말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 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해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장경철 교수(서울여대 조직신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장로회신학대학원,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신학박사)
출처 / 월간 ‘교육교회’ 19995.11월호(장신대 기독교교육연구원 제공)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靈)이 육신(肉身)으로
비실체에서 실체로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것, 즉 하나님이 육신 된 것이다. 육신이 하는 사역은 곧 영이 하는 사역이다. 영이 하는 사역은 육신을 통해 실체화되고, 육신을 통해 발현된다. 하나님이 거하는 육신 외에는 누구도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 인성만이 신성 사역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처음 성육신했을 때 29세 이전까지 정상 인성이 없고, 태어나자마자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세상의 모든 일을 꿰뚫어 보며, 말을 떼자마자 천상의 말씀을 하고, 사람의 생각과 품고 있는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사람은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육신은 육신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이었다면 성육신의 의의와 본질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이 ‘육신’된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그가 정상인의 성장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더더욱 그의 육신이 정상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그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존재임을 충분히 보여 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이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그 본질이 그의 사역을 방해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망치는 일도,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말도 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경영을 방해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다. 성령 역사의 본질은 인류 구원과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위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인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그의 본질을 육신에 실체화하여 육신이 충분히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기간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영의 모든 사역을 대신하고, 성육신 기간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핵심으로 하며, 다른 어떤 시대의 사역도 섞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의 신분으로 사역하며, 육신으로 온 이상 육신에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든 어쨌든 모두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직분을 다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그리스도란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이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가짜다. 그리스도란 땅에서의 하나님의 발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특유한 육신이다. 그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중에서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며,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혹은 참도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서문> 중에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삶과 사역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의 삶이다. 일반인의 가정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며,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 윤리와 법칙, 정상적인 필요(의식주 등), 정상적인 연약함과 정상인의 희로애락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계에서는 신성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면서 정상인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의 삶이다. 이때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닌 평범한 인성으로 살며, 겉모습에는 조금도 초자연적인 부분이 없지만, 직분을 이행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때의 정상 인성은 오로지 신성의 사역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정상 인성이 이미 직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정상 인성으로 직분을 이행하는 삶이자,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첫 번째 단계의 삶이 완전히 평범한 인성으로 사는 삶인 이유는 그때의 인성이 신성의 모든 사역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인성이 성숙해질 때까지, 즉 직분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인 이상,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의 삶은 그저 정상 인성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인성으로 사역을 충분히 담당하고 직분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직분을 이행하는 기간의 삶은 바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만약 성육신 하나님이 태어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고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만 행한다면, 육신의 본질은 없어진다. 그래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의 본질을 위해 존재하고, 인성이 없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성이 없는 사람은 비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신의 인성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성육신 하나님께는 신성만 있고 인성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다. 이는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성육신의 원칙과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의 외형을 지닌 신성으로 살며 사역한다. 다만, 이때의 인성은 오로지 신성이 정상 육신에서 사역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역사하는 것은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이다. 즉,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지 인성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성은 인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인성이 아닌 완전한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단, 역사하는 것은 육신이며, 이 육신을 사람이라고도,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되고, 사람의 외형과 본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사람이기에 창조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외형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인성을 지닌 모든 사람 가운데 오직 그만이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 외에는 모두 창조된 인류인 것이다. 똑같이 인성을 갖추고 있지만, 창조된 사람은 인성 말고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다르다. 그의 육신에는 인성 말고도 무엇보다 중요한 신성이 있다. 인성은 육신의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신성은 쉽게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은 인성이 있는 전제하에 나타나며,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비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장 측량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음에도 너희 대다수는 이에 대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다고 하면 그의 본질은 인성과 신성의 결합체이다. 이 결합체를 하나님 자신이자 땅의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 안에 있는 신성의 정상적인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며,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정상 인성과 육신의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시켜 준다.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 육신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면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육신으로 해야 할 사역을 영원히 완성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지니고 있지만, 그의 사역에는 사람의 사유가 섞여 있지 않다. 그는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하고, 사유를 지닌 인성의 전제하에서 사역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발휘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육신의 사유가 얼마나 고차원적이든, 그의 사역에는 논리학도, 사고학도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은 육신의 사유를 통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신성의 사역을 인성으로 직접 나타낸 것이다. 그의 사역은 전부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이지, 그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십자가에 달린 것은 머리로 상상한 것이 아니며, 두뇌의 사유를 지닌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복 사역도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지만 이 사역은 전부 사람의 뜻이 아닌 신성이 해야 하는 일로, 육에 속하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반드시 두뇌의 정상적인 사유와 정상 인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가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의 본질이자,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단지 정상 인성으로 살았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성육신 하나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그저 그를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정상 인성은 하나님이 육신 되었음을 실증하고, 은혜시대는 영이 아닌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한 시대임을 실증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완전히 육신으로 실체화했으며,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대에는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정상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정상 인성과 정상적인 이성, 정상적인 사유를 가진 육신으로 실체화한 것이다. ‘실체화’란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이 정상 인성을 지닌 육신에 거하면서 그 육신을 통해 신성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체화’, 즉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처음 성육신하였을 때는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야 했다. 그가 하는 사역이 속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그의 사역은 바로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 사역은 그가 사람을 죄와 더러움에서 구원할 것임을 예시했다. 은혜시대이기에 그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어야 했고, 그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는 은혜시대 은혜의 상징이다. 은혜시대에는 주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 또는 물질적인 축복이 은혜시대의 상징이자 예수를 믿는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지닌 육신의 본능이었다.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하여 행한 사역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육신에 거하면서 그런 사역을 행했으며 육신을 초월하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든 여전히 정상 인성을 지니고, 인성의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성육신의 시대에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전부 육신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의 육신이 육신의 본질을 완전히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육신이 이적을 나타낼 수 있으며, 아주 가끔 육신을 초월하는 사역을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모두 그가 직분을 이행한 후에 나타난 일이다. 그가 40일 동안 시험을 받은 것이나 산 위에서 형상을 바꾼 것이 그 일례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으로 성육신한 의의가 완전해지지 않았고, 일부만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육신의 모든 삶이 지극히 정상이었으나, 사역을 시작한 후로는 육신의 외형만 유지했다. 그가 하는 사역은 신성의 발현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상적인 기능을 뛰어넘었다. 어쨌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 만큼 육에 속하는 사람과 같지 않았다. 물론 그도 평상시에는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집에 사는 등 정상적인 의식주 활동을 했고, 정상인의 이성과 두뇌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정상인이었으나, 그가 행한 사역은 아주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는 어떤 사역이든 평범한 정상 인성으로 했다. 또한 그가 사역하는 때일수록 그의 이성은 더욱 정상적이었고, 그의 생각은 더욱 맑고 또렷했으며, 모든 정상인의 이성과 생각을 뛰어넘었다. 이러한 이성과 생각도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신성의 사역은 가장 정상적인 이성과 가장 맑고 또렷한 생각을 지닌 육신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육신으로 신성의 사역을 발현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예수는 33년 반 동안 세상에 있었다. 그는 33년 반 동안 시종일관 정상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그가 3년 반 동안 행한 직분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가 매우 비범하고, 그전보다 훨씬 초자연적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사실, 예수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이나 후나 정상 인성에 변함이 없었으며, 항상 똑같은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직분을 이행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들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성육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본래 갖고 있던 정상 인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으로 살아야 하고,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직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인성은 육신의 근본이므로 그의 육신이 지닌 정상 인성은 없어서는 안 된다. 직분을 시작하기 전, 예수의 육신은 완전하고 정상적이었으며, 정상인의 모든 활동을 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면이나 이적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하게 추구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가장 정상적인 인성의 모습이었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신분은 물론, 그의 육신의 남다른 점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그는 어떤 이적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 자신의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니고 정상 인성의 이성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행하며, 평범한 인간, 즉 육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정상 인성이 없다고 여겼으며, 그를 완전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아닌 불완전한 육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행한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정상 인성이 없는 육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사람이 성육신의 의의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이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신성 사역이고, 그 사역은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통해 사역하면서 정상 인성이 가려졌기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비록 그가 육신에 거하고 있으나 그의 인성이 육에 속한 사람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한 성격이 있으며, 그 성격 역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에는 연약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연약함이란 그의 인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연약함은 신성을 어느 정도 제약하지만 무한정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와 기한이 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의 정상 생활 이외에도 인성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신성에 좌우된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하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직접적으로 신성에 지배되며, 그에게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이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고 사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종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그는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이 땅에 왔기에 피조물의 외형, 전에 없었던 인성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 이는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이요,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 자신임에도 그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육신의 위치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그의 어떠함이다.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어떠함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하나님을 거역할 리 없고,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리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보다도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을 갖고 있다. 그 권병은 신성이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어떠함이다. 그 성품과 어떠함으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무리 정상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든, 그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그 자체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권병에서 나온 모든 것에 순종할 수도 있다. 영의 사역과 육신의 사역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에 대한 권병을 지니고,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 육신 역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모든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고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권병이지만, 그의 육신은 그의 권병에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고, 이를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사역은 더욱 하지 않는다. 영과 육신이 하는 사역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이든 육신이든 모두 같은 뜻을 이루려 하며, 같은 사역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비록 영과 육신이 서로 아무 상관 없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고는 하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모두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신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패역의 성분이 없으며, 하나님의 본질은 선하다. 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의 발현이자 모든 사랑의 발현이다.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하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독선적이거나 자만하는 성분이 없고, 오만 방자하거나 교활한 성분도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사탄은 모든 추함과 악함의 근원이다. 사람이 사탄과 같은 속성을 갖게 된 이유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속성만 있을 뿐, 사탄의 속성은 없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생활할 때 사역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의 육신이 아무리 연약해져도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며 거역하는 일은 더더욱 저지르지 않는다. 육신이 고통받을지언정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그는 똑같이 육신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 사명을 완수한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본질만 있을 뿐 하나님의 본질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사람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직접 담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경영을 자신의 당연한 본분으로 삼아 이행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사탄의 속성을 가진 자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과 앞날을 위함이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은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 역시 마찬가지로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이 같은 육신은 오로지 공의로운 일, 인류에게 유익한 일, 거룩하고 빛나며 위대한 일만 할 수 있다. 진리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할 리 없고, 하나님의 영을 배반하는 일을 할 리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므로 그의 육신 또한 사탄에 의해 패괴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람과는 다른 본질을 가진 육신이다. 사탄이 패괴시키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게다가 사탄은 하나님 자신의 육신을 패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 그리스도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도 사람만 사탄에게 점령되고, 이용당하고, 해를 입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절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는다. 사탄은 영원히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희는 나를 배반하는 존재는 오직 사탄에게 패괴된 인류뿐이며, 이 문제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육신에 관련된 성경구절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을 말합니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인 성자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며, 자기비하의 초기과정에 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딤전 3:16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성육신가 부활, 부활 후의 승천, 만국에 전파되심의 모든 과정을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성육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죄있는 육신으로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낳음을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피조 되신 것이 아닙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율법 아래 나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심으로 완전하게 낮아지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감내해야할 모든 것을 스스로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승천하시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다시 하나님되심을 회복하셨습니다. 

성육신 이전 하나님의 본체

말씀(로고스)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낳으심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성육신의 과정

성령으로 잉태되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율법 아래에서 나심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죄인의 형상을 입음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육신의 목적

1. 죄를 사하심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심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3. 마귀를 멸하심

요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히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요한1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기독론(基督論, Anthropology)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기독론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인물이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독교 복음의 중심 내용이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전도의 중심 내용이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셨다.”는 말로 증거 했다.(요 1:14)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 1:1)을, ‘육신’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합된 신비를 잘 증거 한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의 본질(本質) 즉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초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진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혹은 한 분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주는 신적 구주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필요성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이셔야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죄(罪)의 형벌(刑罰)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 하였으므로 사람이 죽어야 마땅했다. 더욱이 그는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이셔야 했다. 만일 그가 죄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代身)하는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시려면 그는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성경은 과연 그가 죄가 없으셨고 택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孕胎)되어 탄생(誕生)하심과 관계된다. “이러므로 나실 자는 거룩한 자요.”(눅 1:35) 만일 그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아담에게서 전가(轉嫁)되고 유전(遺傳)되어 내려오는 원죄(原罪)로부터 제외되신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부수적으로 그는 사람으로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폐하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또 그가 사람의 연약성을 체험(體驗)하셨기 때문에 그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도우실 만한 구주이시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4)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필요성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셔야 했는가? 구주가 단순히 사람이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가 죄 없는 대속(代贖) 제물로서 속죄(贖罪) 사역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그는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과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의 신성(神性)의 도움으로 그는 범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그의 인성(人性)이 범죄(犯罪)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범죄 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신성은 그의 속죄(贖罪) 사역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 되게 하셨다. 신적 인격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또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여기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죄 곧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이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하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또한 그의 속죄 사역을 택하신 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는데도 필요하였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지금 그의 영(靈) 곧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죄에서 실제로 불러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신다. 즉 신적인 구주께서는 죄인들의 ‘실제적’ 구주이신 것이다. 그는 피 흘려 사신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40)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本質)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우리는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다음 4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신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주’(主, κύριος, אֲדֹנָי)라는 명칭으로 불리신다. 신약성경에서 ‘주’라는 명칭이 예수님께 약 667회 사용되었다. 신약의 ‘주’라는 명칭(퀴리오스 κύριος)은 구약의 ‘여호와’(아도나이, אֲדֹנָי)라는 명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우주와 인간의 참 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칭이다. ‘영광의 주’(고전 2:8)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롬 10:9)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 2:11) 

그는 또한 빈번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예수께 12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존칭어가 아니고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 11:27)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하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17,18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同等)함을 주장했다고 이해했다. 그는 특히 ‘하나님’으로 불리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요일 5:20) (사 9:6)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요일 5:20)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딛 2:13) 이 외에도 요한복음 20:28, 로마서 9:5을 참고할 수 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성경이 그를 ‘하나님,’ ‘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오류(誤謬)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 신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승천하신 예수께서 땅 위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屬性)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피조물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영원(永遠)하심에 대해 증거 하였고 또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원하심을 증거 하셨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맨 처음에 말씀이계셨다.)”(요 1:1)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창세 전’은 영원을 가리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이 표현은 그의 영원하심을 증거 한다.

또 그는 신적지식(神的知識)을 가지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자신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아시고”(마 9:4)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요 2:24,25)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요.”(마 17:27) 예수님의 지식은 초인간적(超人間的)이요 적신(神的)이다.

또 그는 신적 능력(能力)을 가지신 자로 증거 되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이 같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屬性)들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 증거 하고 있다. 골로새서 2:9은 이 사실을 요약하여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했다.

  • 신적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먼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을 창조(創造)하신 일에 관여하신 자 곧 창조자로 증거 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략) 다 그로 말미암고”(골 1:16) 창조는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 성경은 예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 가진 자로 증거 한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이도 피조물(被造物)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한 그는 신적 권위(權威)를 가지신 자로 말씀하시고 교훈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중략)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28) 특히 그는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기적(奇蹟)들을 행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문둥병, 중풍병, 열병, 혈루병 등에 걸린 자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나사로), 떡 기적들을 행하셨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예수님은 또 사람들의 죄(罪)를 용서(容恕)하셨고 그들을 죄에서 자유(自由)하게 하신다고 말씀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이 말하되)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5,7,10)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히 1:3)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또 그는 참된 안식(安息)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피조물 중에는 없다.

또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기도의 응답은 피조물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요 15:26) “내가 그(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 하나님의 영(靈)을 보내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또 그는 마지막 날 세상 모든 사람을 심판(審判)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딤후 4:1)

  • 신적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란히 언급되심으로 신적 영광(榮光)을 받으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신적 영광을 선포하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하였다.(요 10:31-33)           

그는 아버지와 함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자이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특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돌린다.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 지어다 하니”(계 5:12,13)

이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써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神的) 영광을 알고 확신하자. 신적 구주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이 사실과 이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그가 ‘참 사람’이심을 또한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다음 3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인적(人的)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를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씨’(창 22:18), ‘한 아기’(사 9:6), ‘이새의 줄기’(사 11:1) 등으로 불렀다. 이것들은 다 그가 사람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이 명칭은 복음서에 약 84회 나오는데 일차적으로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 한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롬 5:15)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고전 15:21) 

  • 인적(人的)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는 어린 아기로 출생하셨고 그 지혜와 키가 자라셨다.(눅 2:40,52) 또 그는 몸의 연약하심도 보이셨다. 그는 40일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고(마 4:2, 21;18)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배에서 주무셨고(마 8:24) 길을 걸으실 때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셨고(요 4:6)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을 때 고통당하시고 목마르셨다.(요 19:28)

또 그는 영과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증거 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σάρξ)는 인간 본질 즉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히 2:14)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그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 피와 물을 흘리셨다.(요 19:34)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발을 보이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눅 24:39-43)  그는 참으로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또 그는 지식의 제한(制限)을 보이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막 11:1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막 13:32) 

  • 인적(人的)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히브리서 4:15는 증거 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셨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마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마 14:2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3.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인격 즉 한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 nature)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 인격(人格, person)은 지식(知識)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를 가진 행동 주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정의(知情意)의 특질 자체는 인격에 속한다기보다 성질(性質, nature)에 속한다고 본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증거 된다.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항상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그를 위하여 ‘나는, 나의, 나를, 당신은, 당신의, 당신을, 그는, 그의, 그를’ 등의 단수(單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를, 당신들은, 당신들의, 당신들을,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등의 복수(複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않았다.

  •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사이에 어떤 인격적 구별이나 교제의 증거가 없다.
  •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다 한 분 예수께 돌려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신성)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과 사역이 인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그의 인적 속성과 사역이 신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도 있다.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2)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태초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이 계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격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독립적 인격이 아니고 신적 인격이신 말씀과 결합함으로 그 인격 안에서 인격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 인격’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신적 인격과 결합하자마자 인격이 되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초대 교회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 480-543)와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 같은 이들은 ‘내(內) 인격’(interpersonal)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신적(紳的) 인격 내에서 인격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의(知情意)는 성(性, 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特質)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의지(紳的意志) 뿐만이 아니라 인적의지(人的意志)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의지와 그의 인적의지는 조화(調和)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의지는 그의 신적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Third Council of Constantinople, 680-681 AD)는 이것을 이렇게 진술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신인적(神人的, theanthropic) 인격 즉 신인(神人, God-man)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性)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3)  신성과 인성 연합의 결과 : 삼중적 전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單一) 인격(人格) 안에 연합된 결과 삼중적(三重的) 전달이 있다.          

  • 속성(屬性)의 전달이다.

예수는 신적속성과 인적속성을 함께 갖고 계시나 그것들은 한 인격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인적속성)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신적속성)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신적속성)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인적속성),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신적속성)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사역(事役)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사역들과 인적사역들은 다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사역은 신인적(神人的) 성격을 가진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 은혜(恩惠)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은혜와 영광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존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4.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오해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여러 가지의 오해들이 있었다.

(1) 에비온파와 알로기파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는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와 그에게 메시아(Messiah)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分離)시킴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2) 도케티파

도케티파(Docetism, 假現說)은 그노시스주의(Gnostics), 게린더스(100년경), 말시온, 사벨리우스파 등의 생각으로서 위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입장에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신적 그리스도께서 그의 세례 받을 때 내려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그를 떠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환영(幻影, phantasm)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분명히 증거하고(요 1:14)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했다.(요일 4:2,3, 요이 7)   

(3)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Arius, 250/256-336)는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첫 피조물’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주장했다. 초대교부 오리겐(Origenes Admantius, 185?-254)은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시며 영원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이런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요 ‘크신 하나님’(딛 2:13)이라고 증거 했다.            

이 아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의 거센 반박을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同一)한 본질(本質)이심을 주장했다. 주후 325년 니케야회의(The First Council of Nicaea, 32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ὁμοούσιος, homoousios, 호모우시오스, 동일본질)는 신앙을 바른 견해로 선언했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말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半) 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라.”(ὁμοιούσιος, homoiousios, 호모이우시오스, 유사본질)고 주장했다. 비록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라는 말이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와 ‘아이’(i)자 하나만 다르지만 그러나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즉 반(半) 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이 명백히 증거 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4) 아폴리나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 310-390)는 사람이 영(靈)과 혼(魂)과 몸(肉)의 세 실체(實體)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靈)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본질 중 혼(魂)과 몸(肉)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예수께서 완전한 ‘참 사람’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5)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신적(神的) ‘말씀’이 인성과 한 인격체로 유기적(有機的) 결합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 속에 거하셨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두 인격 곧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 참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6) 유티커스파(Eutychianism)

유티커스(Eutyches, 378-456)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混合) 된 제3의 본질 혹은 성(性)이 되셨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區別)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7)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

일의설(一意說)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意志)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性, 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 신적의지(神的意志)와 인적의지(人的意志)를 가지고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질(本質)과 신적의지와 인적의지 두 의지(意志)를 고백한 것이었다.                

(8) 양자설(養子說)

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Theodotus of Byzantium, 2nd century)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사람이며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Felix, bishop of Urgel, Spain, ?-818)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9) 속성(屬性) 전달설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이나 루터파(Lutheran)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sm)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

(10) 인성 중심의 기독론

  •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理想的) 윤리적(倫理的)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은 무의미하고 그의 도덕적 교훈을 따르는 것이 구원(救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인류역사가 절대자의 자기 전개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과정의 절정이고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汎神論) 사상에 불과하다.
  •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끊임  없는 완전한 연합의식을 가지셨고 하나님은 그 안에 완전히 거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무죄 완전한 인격으로 이상적 인간성을 충분히 실현하셨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이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그것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셨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재(先在), 성육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리들은 종교적으로 무가치하며 신앙에 방해거리가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11) 게노시스설(Kenoticism)        

19세기 어떤 루터파 학자들이 주장한 게노시스설은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ἐκένωσε, 에케노세)라는 말씀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왔다. 이 견해 주장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신적 속성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그 모든 속성들을 회복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과 충돌된다.(말 3:6, 약 1:17) 또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빌립보서의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추시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심으로써 마치 신성이 없으신 자처럼 행동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 점진적 성육신설

도르너(Isaak August Dorner, 1804-1884)는 게노시스설에 반대하여 성육신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점진적(漸進的)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씀’(로고스)께서 인성의 수용성의 성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인성과 연합되셨고, 그 연합이 부활 때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식(意識)과 한 의지(意志)를 가지신 신인(神人)이 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다.

결 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 혹은 사상은 역사적 신조들에 잘 진술되어 있다.            

  •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있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 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 칼케톤 신조(Definition of Chalcedon, 451)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선조들을 따라 모든 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니, 그는 신성(神性)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호모우시온),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한 본질이시고(호모우시온);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시되 죄는 없으시고; 신성에 의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혼동 없이(아슁퀴토스 άσυgcύτως), 변화 없이(아트렙토스 άτρέπτως), 분할 없이(아디아이레토스 άδiaiρέτως), 분리 없이(아코리스토스 άcωρίστως) 인정되실 유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시고;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그 연합에 의해 결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한 실존(위, 位)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므로 두 인격들로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거룩한 선조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대로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

 제8장 2항 :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와 동등하신데 때가 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의 본질을 받아 잉태되심으로 그 모든 근본적 특성들과 공통적 연약성들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두 개의 전체적, 완전한, 구별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었다.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며 그러나 한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8)

제21문 :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상의 신조적(信條的) 진술들의 요지(要旨)는 다음과 같다.        

  • 그의 참된 신성(神性) 
  • 그의 참된 인성(人性) 
  • 그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시다. 그러나 그는 한 인격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주와 중보자는 이와 같이 놀라운 신인적(神人的) 인격이시다. 그는 놀라운 구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시다.(*) 김효성 목사 / 연세대학교(철학과) 졸업 (B.A.);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신학대학원] 졸업 (M.Div. equiv.); 미국, 페이스(Faith) 신학대학원 졸업 (Th.M. in N.T.); 미국, 밥 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 졸업 (Ph.D. in Theology);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뉴욕노회에서 목사 안수; 총회신학연구원(합동보수-냉천동) 교수 역임; 예수교 장로회 신학연구원 교수 역임; 현재, 합정동교회(서울, 마포구 합정동) 담임목사; 현재,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PART Ⅱ

동정녀 탄생과 그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의미 

예수의 동정녀(童貞女) 탄생이란 예수의 동정녀에 의한 수태(受胎) 즉 남자와의 성적 접촉이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 동정녀 탄생은 모든 정통 기독교의 신앙고백들에 공통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는 이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대한 반대 또한 계속되어 왔다. 더욱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면서 이 조항은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성경이 지닌 표준의 지위를 부정하고 때로는 기적의 가능성을 추정한 데서 귀결된 결과였다. 여기서는 그 반대 교리에 대한 주장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고찰 해보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동정탄생초대교전승반대

(1) 사도 신경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으셨음을 고백하는 오늘날 사도 신경의 형태는 5,6세기경 고울(Gaul) 지방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그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사도 신경은 로마교회의 세례고백에 근거한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사도신경의 후기 본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기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사도신경 초기형태는 이미 2세기 중반에 전 로마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북 아프리카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과 고울과 소아시아 지방의 이레네우스(Irenaeus, 140-202)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로마 중요 교회들의 초기 고백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가 출현했다는 것은 사도신경이 다른 새로운 교리와 섞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반대

2세기에 나타난 강력한 증거는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歷史性)과 사실성(事實性)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 다 동정녀 탄생을 지지(支持)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초기에도 반대(反對)가 있었다.

이교도(異敎徒)들의 반대도 있었으나 주로 유대인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좀 더 정확하게 예수 관련 전승(傳承)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파급효과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켈수스(Celsus)와 케린투스(Cerinthus), 카포크라테스(Carpocrates) 그리고 초대교회 때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에비온파(Ebionites) 등이 있었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 문제에 대해 2세기 이후 부정적 증거들은 순수하게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철학적이거나 교리적 전체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로 오면서 동정녀 탄생 기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더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서 폰 캄펜하우젠(Hans Erich Freiherr von Campenhausen, 1903–1989)은 마태의 족보(族譜)가 그 자신의 동정녀 탄생 제시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H.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r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E.T., 1964, 10ff.)

그런가 하면 테일러(Vincent Taylor, 1887–1968)는 ‘Proto-Luke’ 가정(假定)에 근거해서 누가복음 1,2장은 본래의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삽입(揷入)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Vincent Taylor, Behind the Third Gospel [1926], 164ff.) 로빈슨(John Arthur Thomas Robinson, 1919–1983)은 동정녀 탄생 교리가 예수를 우리와 달리 참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1874)는 역사적(歷史的) 기독교를 부정하면서 신앙적 기적과 초자연을 모두에 대해서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은 스트라우스에게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다. 케어드(George Bradford Caird, 1917–1984)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이야기가 그리스 세계에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오해(誤解)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G. B. Caird, Luke [1968], 31)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도 동정녀 탄생은 유대적 맥락이 아닌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91ff.) 그의 제자인 콘첼만(Hans Conzelmann, 1915–1989)은 이를 다신론(多神論)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교(異敎)에서의 신현(神顯)과 성육신 이야기들을 언급하고 있다.(Conzel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78)

3. 동정녀 탄생의 교리의 중요성 

많은 사람들의 이 같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한 일반생육법(一般生育法)에 의해 출생(出生)하셨다면 그도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罪人)일 뿐이며 그 자신이 죄인이므로 자신 뿐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 1921)는 초자연적(超自然的) 그리스도와 구원이 초자연적 출생의 필연적 결과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주는 반드시 ‘하나님의 속성’과 ‘죄(罪) 없는 인간의 인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동정녀 수태 교리는 정통 기독론의 중요한 골격 중 하나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과 혼동한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영원하신 성자(聖子)가 인간(人間)이 되셨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인간이신 예수께서 인간 아버지를 두시지 않았음을 말한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는 성육신을 ‘선재(先在)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人間性, (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超歷史的)인 분이 역사(歷史)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사건’으로 보았다. 동정녀 탄생이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예수는 이처럼 이 세상과 역사 가운데로 오실 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들 가운데 오셨다.      

이것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의 영역을 벗어난 사건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취하실 때 그는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방식을 취하셨다. 따라서 그녀의 몸 안에서 다른 태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10개월 동안 자라 태어나신 것이다. 성육신의 사실은 우리의 성찰(省察)에 앞서 이미 있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을 생물학적(生物學的)으로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브루너는 성육신 교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동정녀 탄생 교리는 거부한다. 그는 예수가 만약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는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메시아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육신 하도록 하셨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찰과 성찰에 따라서 이 사건이 바뀌거나 그 의미가 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브루너와 달리 동정녀 탄생 교리를 성육신 교리와 연관시킨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 교리 속에서 성육신의 표징을 보았다. 바르트는 이사야 7:14을 아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는 동정녀 탄생에서 상징화(象徵化)되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사실(事實)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모든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태도는 우리 시대와 같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시대에 아주 필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4.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 반대에 대한 비판 

   (1) 동정녀 탄생이 신약에 두 단락에서만 진술된다는 문제 

동정녀 탄생은 신약성경의 두 단락에서 명백하게 진술되고 있다.(마 1:18-25, 눅 1:26-38)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으나 다른 단락에서도 가끔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막 6:3, 요 1:13, 갈 4:4) 신약성경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때로 이 교리의 부족한 역사성을 말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두 유아기 기사에 공통되는 부분이 동정녀 탄생 기사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기사가 초기의 공동 전승을 기초로 삼았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한 마태복음 1:23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이사야 7:14을 인용하고 있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예언의 배경은 유대왕 아하스가 하나님을 떠나 앗수르의 이방 왕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를 꾸짖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표적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어 ‘알마’(המלע)의 번역인데 일반적으로 ‘알마’는 처녀를 가리키기보다 ‘젊은 여성’ 혹은 ‘결혼 적령기의 여성’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약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LⅩⅩ)에서 명확하게 ‘처녀’라는 말인 ‘팔데노스’(παρθὲνος, 남자를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정절을 지킨 처녀를 의미)로 번역했다. 그 말은 구약의 ‘알마’라는 말이 ‘처녀’를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確證) 하는 것이다.

‘처녀’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베투라’(הꗚוּתꔶ)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요 예수님이 꼭 동정녀 탄생을 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마’라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과 처녀는 기능(機能)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녀 마리아’를 ‘알마’로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마리아는 젊은 여성으로 ‘처녀’였다. 그것은 누가복음 1:34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그녀에게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요?”라고 자신이 처녀인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또 잔(Theodor von Zahn, 1838–1933)은 제롬(Jerome, 347-420) 시대 이래로 구약에서 ‘알마’(המלע)가 나오는 모든 구절은 항상 ‘처녀’(virgin)로 쓰여 왔다고 했다. 더구나 70인 역이나 마태는 젊은 여인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잉태하리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 처녀는 미가 5:3에 언급된 특수한 처녀를 가리켰다.

‘가나혼인잔치 기적’(요 2:1-11)이 성경에 단 한번 소개되었다고 이 표적(標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동정녀 탄생은 분명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가 기적(奇蹟)이었음과 인간 아버지를 두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옳다.  

(2) 동정녀 탄생이 완전한 인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견해 

예수의 부모 중 한 사람만 인간이라면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몇 사람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성(人性)의 본질과 그것이 한 세대에 다른 세대에 대해 혼동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완전(完全)한 인간이었고 특히 아담의 경우는 어떤 의미든 간에 그에게 인성을 전해준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남성 인자(因子)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견은 무시될 수도 있다.

이런 의견은 지나치게 자의적(恣意的) 해석이며 실제 그런 일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예수는 마리아의 유전인자(遺傳因子)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는 마리아에 의한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여성(女性)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남성인자(男性因子)로 구성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정자(精子)가 마리아의 난자(卵子)와 결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실존하는 남성에 의해 제공된 정자가 아니라 이 경우를 위해 성령의 능력에 의해 특별히 생성(生成)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동정녀 탄생이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중요한 견해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를 선택(選擇)하면 다른 하나는 부인(否認)할 수밖에 없다. 선재(先在)와 현재(現在) 이 둘은 시간적으로 상호 배타적(排他的)이며 결코 보완적(補完的)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부정적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선재론(先在論)은 그의 신성(神性)과 관련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은 그의 인성(人性)과 관계된다. 삼위 중 제2위 하나님으로서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언제나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런데 한 유한(有限)한 시간(時間) 속에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땅에서의 생애가 시작부터 순수한 성육신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선재론’과 ‘동정녀 탄생’이 모순(矛盾)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4) 동정녀 탄생이 자연법칙에 위배된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인간의 생물학적(生物學的) 지식과 인간 출생에 관한 지식에 상반(相反) 된다는 근거 하에 거부되어 왔다. 우리가 지금 성경의 기적과 초자연이 받아들어지지 않는 인간 역사의 연대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평주의(批評主義)는 기독교 신앙이 자연(自然)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규칙성(規則性)을 부인하여 과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반대하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적(異蹟)을 정의하는 데 있어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교부시대로 웅변적으로 되돌아가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적은 언제라도 검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자연을 산발적(散發的)으로 일어나는 현상 혹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인 일이다. 자연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통일성(統一性)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와 과학(科學) 간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학 혹은 세계관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구조(構造)에서 바라볼 때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인간 구속(救贖)이라고 하는 위대한 초자연적(超自然的) 구도(構圖) 가운데 일부이다. 자신의 과학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신적계시’라고 하는 고차원적 근거 위에서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상 구속’을 믿는다. 만일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의 이 세대의 위대하고 장대한 ‘구원역사’(救援歷史)’ 드라마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면 그 교리는 지나간 민족 설화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또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아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동정녀 탄생’은 부적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평가하기 어려운 말이다. 분명히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고백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언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을 고백하고 있다. 처녀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처녀의 몸으로부터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참 인간’이셨음을 하나님께서 아셨다는 사실은 역사신학(歷史神學)에서 하나의 무언(無言)의 전제(前提)임이 분명하다. 우리들 의견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조들이 그의 인격과 그 진정성을 또한 확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현대의 심리학적 연구와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따라 우리가 인간을 만드는데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교리화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증식된 개구리가 그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개구리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 인간됨의 뜻과 인간의 유전학에 관한 보다 많은 지식을 갖기까지는 위의 반대의견은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5) 동정녀 탄생은 지엽적 문제라는 견해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기독교신앙 가운데 지엽적(枝葉的) 문제라는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이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정녀 탄생 교리에 대한 증거들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된다. 또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결코 신약성경 본문들 가운데 기록된 ‘복음’ 혹은 ‘케리그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신학적 내용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평가절하 하거나 제거(除去)하려는 것이 비평적 혹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다른 기준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이 동정녀 탄생에 침묵하고 있다고 말할 때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이 동정녀 탄생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다른 기준이란 ‘동정녀 탄생’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설사 알려졌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기준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침묵으로부터의 주장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 논법은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의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외의 부분)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이라는 논법이 논리적인 면에서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동정녀 탄생’과 ‘주님의 최후만찬’을 흥미 있게 비교했다. 주님의 만찬보다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자료가 더 많다. 만일 어떤 사실의 중요성 여부(與否)를 그에 관해 기록한 본문의 구절 수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그처럼 평가절하 한다면 주님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도 그만큼 평가절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1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가 절수를 세는 방법으로 주님의 만찬에 관한 신학적 중요성을 계산해낸 사람은 없다. 어떤 주어진 개념이 그에 관한 성경의 증언 가운데 제아무리 물량적으로 풍부하더라고 그것을 신학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신학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관한 아주 광범위한 논의가 구약성경 가운데 존재한다. 어떤 개념의 중요성을 매기는 것은 그 개념 자체에 의해서 이며 따라서 역사적 기독론의 방법론에서 볼 때 동정녀 탄생 교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6) 타종교 전설과의 유사성 견해    

성경에 기록된 동정녀 탄생 기사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제안이 있다. 즉 다른 종교문헌들 속에 나타나는 유사(類似)한 기록들을 적용시켰다고 보는 견해이다.  

플루타르크(Lucius Mestrius Plutarchus, 45-157)는 한 여인이 신적 영(靈, (Pneuma)에 접했을 때 임신(妊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의 ‘누마’(Numa) 전설에 관해 말하면서 누마는 자신에 아내가 죽은 후 신적(紳的) 존재인 에게리아(Egeria)와 관계를 맺기 위해 고독(孤獨)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제우스가 어떻게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그리고 알렉산더를 낳았으며 아폴로가 어떻게 이온과 아스클레피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를 낳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런 맥락(脈絡)에서 ‘동정녀 탄생’을 신화(神話)나 전설(傳說)로 보려는 시도다.

하지만 신화 속에 나타난 탄생 이야기는 동정녀가 아닌 단지 신(紳)과 인간 사이의 간음(姦淫)에 불과하다. 성경의 ‘동정녀 탄생’은 전적으로 이와는 다르다. 무디(Dale Moody, 1915-1992)는 이교도들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성적 문란 신화와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고상한 일신론(一神論)의 간격은 너무나 넓어 아무리 조심스럽게 연구해도 그 틈새를 메울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둘 사이에 유사성은 적고 차이점은 크다.

그러므로 이방(異邦) 신화들이 복음서에 섞여들어 왔을 거라는 생각은 맞지 않다. 이와는 다르게 성경기사를 이방종교 대신 유대교와 관련해서 보는 사람이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유대적인 색채가 매우 강함으로 직접적인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본다. 유대교가 이방 종교로부터 나온 생각을 어느 정도 따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적인 특성을 띠고 기독교에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문제는 유대교가 실질적으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었다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동정녀 탄생은 사실 이교도의 생각이며 그 생각이 기독교에 직접적으로 수용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대교로 흘러들어 갔다가 점차 기독교에서 이를 수용했다고 하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믿음이 들어가 있었음에 분명하다고 가정한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에 대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6문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고 묻고 이에 대해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영원하신 성자(聖子)는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無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볼 때에 유한한 인간은 늘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의심과 시비를 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동정녀 탄생 교리에 있어서도 풀리지 않은 부분이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기록은 여전히 신적 권위 아래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http://irt.kr(국제개혁신학목회연구원)

예언성구 예언주제 성취성구
창 3:15 1. 여자의 후손 갈 4:4
창 12:2,3 2. 아브라함의 씨 마 1:1
창 49:10 3. 유다의 홀 눅 3:33
사 9:7 4. 다윗의 자손 눅 1:32,33
단 9:25 5. 예수 탄생시기 눅 2:1,2
미 5:2 6. 베들레헴에서 탄생 눅 2:4-7
호 11:1 7. 이집트로 피신 마 2:14,15
사 9:1,2 8. 예수의 갈릴리사역 마 4:13-17
사 61:1,2 9. 상처 받은 자 치유 눅 4:18,19
사 53:3 10. 유대인에게 버림받음 요 1:11
시 110:4 11. 멜기세댁반차 제사장 히 5:5,6
슥 11:12,13 12. 은 30에 팔림 마 26:15, 27:5-7
사 53:12 13. 참혹한 희생 막 15:27,28
시 69:21 14. 초에 저린 쓸개를 줌 마 27:34
시 22:18 15. 그의 옷을 나눔 마 27:35
시 34:20 16. 뼈가 부러지지 않음 요 19:32,33,36
슥 12:10 17. 옆구리를 찔림 요 19:34
사 53:9 18. 부자의 묘에 장사 마 27:57-60
시 49:15 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막 16:6,7
시 68:18 20. 하늘에 오르심 막 16: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육신(Incarnation) 
육체(Car) + 안에( in ) + 태어나는 것(natus)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을 뜻하는 말로 성경에는 이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 되심에 대한 성육신의 교리는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요 1:14; 롬 8:3; 골 2:9; 딤전 3:16)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골 2:9).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교리는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리로 하나님이신 성자의 자기 비움, 자기 낮아짐을 보여 준다(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성육신의 교리가 확정된 것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확정된 성육신의 교리 내용은 “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며 … 서로 혼합될 수 없고, 변하지 않으며, 나뉠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는 두 본성을 가지신 것으로 … 각 본성의 성질은 그대로 보존되며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고 …”이었다.

성육신의 교리에 반대하여 아리우스(Arius, 256-336)는 그리스도를 천사나 하나님의 피조물로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파괴하는 이론을 주장하는가 하면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님의 인성은 시인하면서도 그분의 인격 속에는 육과 혼이 있고 신성 속에 영(spirit)이 있다고 주장하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

유튀크스(Eutyches)도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들의 그것과는 다르며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하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케노시스(Kenosis)파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신성의 일부 또는 전부를 비워두고 오셨다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이 모든 주장들은 성경에서 증언하는 성육신의 교리를 부분적으로 보았거나 잘못 본 것들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결론적으로 성육신 교리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신이자 인간이신 분으로 그 양성(신, 인간)은 모두 완전하고 참이며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양성은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연합하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이며 믿음으로만이 받을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

 예수님은 왜 하나님이신가? (요1:9~14)

몇 가지 이유로 예수님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이라고 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 부자의 개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부자의 개념과 다릅니다. 이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위격을 설명하는 말이지 한 분이 다른 한 분보다 더 열등하다거나 혹은 피조되었다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격이 다른다는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속성을 가지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주옵소서 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 분은 성부로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성자로 부르셨는가? 그것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육신이란 무엇인가?

성육신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기 전, 다시 말해 성 관계를 갖기 전에,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셨고 보통 아이들과 같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누가 복음 2:52절을 보면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인간적 출생과 성장 과정을 생략한 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단순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고 했고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구절을 종합할 때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태초에 말씀 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은 요한복음 서론에 있어서 가장 축이 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떻게 말씀되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바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 이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 일서 1장에서는 더 구체적인 언어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14절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입니다. 여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할 때 “되었다” 는 말은 번역할 때 매우 주의를 요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 한 마디를 잘못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파괴되어 이단으로 몰릴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되었다는 말은 만들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혹은 피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게네토”라는 말인데 전혀 새로운 상태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데 영어로는 became 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저 되었다고 해석하면 제일 좋습니다.

이 말 때문에 초대 교회 시절 많은 이단 논쟁이 있었습니다. 4세기 초에 아리우스 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은 피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초로 성부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을 피조물의 위치에 둔 것입니다. 또 5세기 초반 유티케스 라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 둘이 아니라 이 둘이 합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단성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에 대해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아다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본체를 가지신, 세상 이전에 출생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의 어머니의 본체를 가지신 이 땅에 태어나신 인간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자 인간이시다. 그럼에도 둘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이다. 신격이 육신으로 변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됨을 취하셔서 하나가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만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감추시고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됨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육신은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입으신 이 "육신"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여기 쓰여진 “육신”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싸르크스” 라는 말인데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 시절 “아폴로나리우스”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어야 한다면 이 둘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 때 그는 결론 내리기를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기는 했지만 보통 인간이 가지는 지성이나 영혼은 입지 않았으며 그 자리를 로고스가 대신하였다 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인정했지만 예수님이 인간임을 거절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사르크스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지정의를 가진 전인, 호울 펄슨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가지셨고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해 하셨고, 주리기도 하셨고, 목 마름도 경험하셨으며, 주무시기도 하셨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극치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한결 같이 고통을 당신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 거하신다는 말은 “스케노오” 라는 말로 “거처를 정하다, 텐트를 치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장막 삼으셔서 거처를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사신 것입니다. 인간의 틈 바구니 속에 찾아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 성육신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백악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비서진을 통해서 대통령이 당신 집에 가서 하루 밤 머물고자 하는데 허락해 달라고요. 놀랍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처를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특성이 무엇입니까?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죽으시려면 인간의 육신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 죄가 용서 받으려면 누군가 그 죄 값을 대신 치르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므로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 지고 죽어 주신 것입니다. 벧전 2:24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27,28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연약성을 친히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성인으로 이 땅에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겉 모습만 인간이고 속은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상적인 출생의 과정을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연약성을 친히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하셨고 피곤함을 경험하셨고 슬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어떤 초자연적인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군대가 출동하지도 않았습니다. 고통이 전혀 감소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해 주신다. 친히 겪어 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53:6,7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죄를 담당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온전히 다 겪으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다쳤습니다. 제대로 날지를 못합니다. 그 새를 보았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료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새는 자꾸 도망갑니다. 이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너를 치료해 주려고 해 너를 도와 주려고 해 그러나 이 새는 그 마음을 모른 체 자꾸 도망갑니다. 이 때 이 사람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새를 도와 주려면 내가 새가 되야겠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 는 것입니다. 여기 우ㅠ리는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계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친히 눈으로 보고 손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 보았다는 말은 그저 스쳐 지나가듯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에테아사메타” 라는 말로 “관찰했다. 목격자 되었다” 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로 극장이라고 하는 “띠어터”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 주의 깊게 음미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조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면밀히 검토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니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을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반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이는 어떤 연구 결과가 아닙니다. 직접 보고 느낀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복음 자체에 대한 논쟁 거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았다.” 단순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문제 제기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친히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보았을 때 은혜와 진리가 전달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은혜와 진리와 경험적으로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였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받아드리고 받아 들이지 않고를 떠나서 여전히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할 때 이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진리가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 진리가 개인적으로 경험적인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고 그 때 그에게 임한 은혜와 진리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과 같이 직접 독생자의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땅을 떠나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광경을 직접 목도한 사도 요한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우리도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는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전달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그 놀라운 진리를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거절하는 사람이요 다른 한 부류는 받아 들이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통해서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요한의 증거를 들을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 마음 분을 여십시다. 요한이 증거한 그 증거, 요한이 본 그 영광 나도 보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은혜와 진리가 우리 맘 가운데 전달되는 게시의 역사를 보여 주옵소서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은 가장 완벽한 인격화이다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주님”, “예수 그리스도” 등 예배와 기도에 쓰이는 호칭에서 그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모세가 신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신은 “나는 나다”라고 대답했다.다시 말하면 그는 존재하는is 자being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신은 너무 신성해서 입에 올릴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네 개의 자음으로 표기했고, 이를 영어로 옮긴 것이 YHWH이다.

여기에 모음을 붙여 Yahweh(야훼)라고 쓰고 여기에서 여호와(Jehovah)가 나왔다.

이슬람교에는 동정심의 아라만(Ar-Rahman), 복수의 알문타킴(Al-Muntaqim) 등 알라의 속성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신의 이름 아흔아홉”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바그완(Bhagwaan)은 하나님, 이스바(Ishvar)는 우주의 통치자, 파라마트마(Paramatma)는 최고의 영이다. 브라마, 바슈누, 크리슈나, 라마 같은 이름은 그래도 친숙한 편이다.

불교도들은 인간보다 높은 경지의 존재인 천신devas이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불교는 비유신론으로, 주동자로서의 신 개념이 없다. 따라서 누구 또는 무엇, 즉 인격적 존재인가 비인격적 존재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실존 인물인 붓다는 영적 창시자, 보살, 깨달은 자의 속성을 지닌다.그는 자력으로 열반을 얻었고, 깨달은 자, 즉 붓다의 드러나지 않는 측면인 다르마카야(Dhrmakaya)의 화현으로 이해된다.

붓다는 누구라고 물을 수 있는 실존인물이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는 정신적 모범이었다.

신이 누구, 즉 인격적 존재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속성과 특질을 논할 수 없는 추상적 존재인 사람들도 있다.

인격화 신이라도 말에 담길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명사와 대명사로 그 부분을 붙들기도 한다.

절대적, 보편적인가 하면 또 상대적, 개인적인 신 개념 안에서 적절히 긴장을 유지하며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이 어느 종교에서나 화두이다.

종교와 신앙도 진화한다는 점에서 세상 만물과 별다르지 않다.

유대교의 천재성은 다신교의 온상에 일신교의 씨앗을 뿌린 데 있다. 기독교의 천재성은 성육신 개념에 있다.

즉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알 수 없는 존재를 알 수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은 가장 완벽한 인격화이다.

서구 문화권은 신을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게 했으며, 나아가 신을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요컨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는 육화한 영, 즉 무엇이면서 누구가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25) 독생자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성경 교리를 살펴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면서 주님의 인격을 고찰하였다. 하지만 특별히 구속의 교리를 살펴볼 때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접할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의 교리이며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발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분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마귀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에 대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성육신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성육신(聖肉身)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 좌우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속의 교리 또한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 알게 된다.

(2)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肉體)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인간적 본성과 결합해 한 인간을 형성한 것이 단순한 신적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동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혼합되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분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셨다. 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이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요점은 성육신 교리는 성자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그런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겉모습에는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상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계실 때도 그분은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 교리를 설명해선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was made’라는 문구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것은 번역이 최선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육신이 되어’(he becomes flesh) 또는 ‘그가 육신을 입어’(he took on flesh)로 번역되어야 한다. ‘made’ 즉 ‘만들다’라는 개념은 일종의 변화의 의미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본성의 모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있는데 이 천사들은 분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육신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천사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구약에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즉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한번 이상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를 ‘신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한다. 신의 현현은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 7)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만 메시아가 그에게로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 주님이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단순히 몸만 입으셨다고 주장하거나 몸과 동물적인 혼만 성자가 취하시고 영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단적 주장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성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취하셨다. 이 말은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성의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새로운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절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성육신 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 즉 구원에 대한 교리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에 분명하게 밝히듯 우리가 혈육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성육신 교리가 조금이라도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2. 동정녀(童貞女) 탄생

신비로운 성육신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바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다룰 수밖에 없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 있어 그 순서도 매우 중요하다.

(1) 동정녀 탄생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최초의 위대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을 보자.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신비로 가득 찬 위대한 주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교리에 접근할 때는 우리가 이전까지 배웠던 교리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확실히 하였다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성경, 계시, 하나님에 대한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 등)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성경과 기적에 대한 교리에도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이성을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나의 작은 이성이 항상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의지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는 동정녀 탄생 교리의 기초가 되는 두 구절이 있다.

– 누가복음 1:26-38 : 동정녀 탄생이 마리아에게 고지되는 장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주목하자. 천사에 대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벌써 어려움에 봉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놀랐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마리아는 놀라 주저 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놀란 마리아에게 천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 마태복음 1:18-25 : 동정녀 탄생이 요셉에게 고지되는 장면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놀랐다. 요셉은 선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였으나 꿈속에 천사가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믿음에 대해 잊고 지나간다. 그는 아무런 반대나 망설임 없이 믿고 그대로 행동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살펴볼 때 무엇보다 우리는 이 교리가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교리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이 교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에 남자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창세기 첫 부분의 교리들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남자에게 있고 여자는 그 남자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남자가 한쪽 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남자 는 이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 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타 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약속을 기억해보자. 그 약속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 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자, 이제 위의 창세기 3:15의 원복음의 은혜 언약 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남자 는 성육신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과 창조의 결과에 의해 특별히 타락의 결과로 인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성육신 사건에서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하나님은 오직 여자만 사용하셨다.

이 사실은 다시 한 번 타락이후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요셉을 통해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과 실패가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위한 인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가장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다. “주님의 신성에 어머니가 없었던 것처럼 주님의 인성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이 말은 매우 훌륭한 표현이다.

307722) 동정녀 탄생은 성령님이 행하신 위대한 신비다.

누군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아무도 대답 못한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마리아로부터 그녀의 세포 하나로부터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있다.
– 성육신은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의 결과이다.
– 성령님은 성자가 취하신 인성이 죄가 없도록 하셨다.

“나실 바 거룩한[(죄가 없고 순결한) 이는”(눅 1:35) – 이것은 마리아가 죄 없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그녀의 일부분이라도 거룩하게 되었음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성령님은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인성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셨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셔서 모든 죄와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의미

1) 성육신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분명한 모양이 되었다.

당신이 정말로 성육신의 교리를 믿는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가 정말로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것은 사실이다)이심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비의 표적이다. 주님에 대한 모든 것이 신비하다. 주님의 탄생도 그러하고 세상을 떠나가신 일도 그러하며 부활하심도 그러하다. 동정녀 탄생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부활에 대해서도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2) 주님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죄 없는 인성을 입으셨다.

만일 당신이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가 만약 요셉의 아들이었다면 그도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라는 말씀이 적용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원죄와 죄책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위해 특별한 인성을 새로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단적 가르침이라 미리 말했다.
주님은 인성을 마리아를 통해 받으셨고 그의 인성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와 모든 오염에서 자유롭게 된 인성이었다.

우리는 그런 주님 앞에 서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경건의 비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행위 중 가장 최고의 행위였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며 일찍이 일어났던 모든 일중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남자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성육신 사건은 우리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받기 위해 벌어진 일이란 것을 깨닫고 기억하자.

< 참고 >

제22문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5문 :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제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 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육신적 선교원리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든지 보내든지 하는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우선 ‘선교적인 삶(Missional Life)’을 평생 살도록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선교적인 삶을 산다는 말은 타 문화권에 직접 가서 사역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평생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세계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변화하는 선교 환경에 따라 각 시대에 따라 선교의 수단과 방법, 전략이 달라졌다. 특히 교통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더 복음 전파의 속도가 빨라졌고, 영역이 넓어졌으며 이에 따라서 나타난 선교의 열매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2)”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현장에 여전히 많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특히 인간관계에 갈등이 많고,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가장 큰 요인이 동료 선교사들과의 갈등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선교를 수행하는 선교사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며, 왜 현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기는가? 선교의 수단이나 방법 그리고 전략 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이 비본질적인 요소에 집중하면서 정작 잊지 말아야 하는 본질적인 선교의 성경적인 원리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교 137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받는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전환된 후, 지난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해 1,5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한국선교는 위기를 맞고 있고, 선교사의 파송 숫자가 급감하고 있으며, 특히 코로나 시대에는 더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꾸준히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난 2월에 KWMA(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리서치 전문기관인 KRIM(한국선교연구원)이 공동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0년 말 한국은 168개국에 22,259명의 한국 국적의 장기 선교사가 사역하므로 여전히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도 2021년 3월 현재 55개국에 49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사역함으로 양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성경적인 선교의 원리를 선교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양적 성장의 변곡점을 넘어서고 있는 고신선교도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그러면, 본질적인 선교의 원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육신적 선교원리이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1. 성육신(Incarnation)이란 무엇인가?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말은 본래 ‘육신으로(With the flesh)’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동정녀 탄생으로 그 자신이 본래 가지신 신성에 더해진 본성, 즉 인성을 취하신 것을 가리킨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히 흠 없는 신성이 있으신데 여기에 인성이 더해진 100% 하나님이자 100% 사람이 되신 것이다. 즉, 그는 50%는 하나님이고 나머지 50%는 사람인 존재가 아니라 100% 하나님이자 100% 사람이시다. 그래야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온전한 인격체이시므로 구속사역을 능히 하실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는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시고 그분이 사람 가운데 거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시고 '은혜와 진리' 충만하신 중보자가 되셨다.

 

   ‘은혜’라는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분에 넘치는 귀한 것’이란 뜻이 있다. 둘째로 ‘아름답다’라는 뜻이 있다. 셋째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와 도움’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을 다른 목적이나 사심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행위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받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것, 분에 넘치는 것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자의 모습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시다. 진리란 인생의 등불과 같은 것이고, 등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참된 진로를 밝혀줄 참된 가치가 된다. 또한 진리는 곧 생명이다. 진리는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죄에 매여있고, 두려움에 매여있고, 심판에 매여있다. 우리는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모든 삶에서 묶여있다. 그러나 다음 성경 구절은 이에 대한 해답을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영원히 한 인격 안에 죄 없는 인성을 소유하셨다. 이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한 죄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기 때문에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실 수가 있고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의 은혜이다.

 

 

 

2. 이 성육신이 어떻게 선교사에게 나타나야 하는가?

 

   효과적인 타 문화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는 선교지 사람과 동일화(Identification)가 되어야 한다. ‘동일화’라는 말은 ‘대상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현지인과의 동일화’란 그들의 문화와 의식주 생활을 무조건 모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태도의 문제로써 그 목적은 선교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신뢰감을 주도록 하는데 있다.

 

   한국선교는 여전히 세계 선교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으나 한국식 패턴과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는 한국적 선교, 선교지를 한국화하는 선교, 비서구인데도 비서구교회를 무시하는 태도 등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지속해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선교를 위해 한국선교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再考)가 불가피하다. 이것은 선교사라면 응당 ‘동일화(Identification)에 대한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성육신의 목적은 동일화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선교의 접촉은 먼저 인간 대 인간의 신뢰감이 확보된 후에 인간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 실례는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 동일화 작업을 통해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셨다.

 

   선교사는 모름지기 선교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그가 전하려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소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가장 좋은 접촉점은 선교사 자신이다. ‘선교사가 타 문화권으로 들어갈 때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교훈을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라고 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선교지에서 모름지기 작은 예수로서 선교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선교사는 선교지 문화 속에서 성육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교사는 그저 단순히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 분명히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러기 위해서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원의 메시지를 소유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메시지를 실제로 구체화하여 가르치며,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선교사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려고(엡 3:8)’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말이나 글로 가르친다고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선교사는 사역의 성격상 자기와 매우 다른 사람들과도 끊임없이 접촉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본을 따른다는 것은 철저한 ‘개인적 재교육(Personal Reorientation)’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철저하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타락한 이기주의의 본성을 버리고 죄인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며 철저하게 이타주의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자신을 다시 훈련하는 것’을 말한다. 이 훈련은 단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민족적 우월주의와 선민의식을 떨쳐버리고 복음을 전해 받는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동화하며, 피선교지 주민들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피선교인 지향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0~23)”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All things to all men)’의 전도 방법을 취하였는데 이것은 결코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방법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영혼 구원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의 목적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동일한 목적이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역에 있어서 선교사가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과 나아가 선교지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에서 어긋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선교의 토착화(Indigenization)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선교사역의 목표가 선교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들고 서로의 교제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선교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항상 자기보다 선교지 사람들을 더 낫게 여겨야 하는 낮아진 종의 위치에 서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선교의 상황이 격변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선교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극단적으로는 ‘선교사 무용론(宣敎師 無用論)’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는 선교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왜 교회가 굳이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며, 왜 선교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지에 있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면 굳이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 있지 않아도 비대면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경제적인 지원도 온라인으로 하여 이제는 선교지에서 현지인 스스로 선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굳이 예수님을 몸으로 이 땅에 보내주셨듯이 교회가 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하여 거기에서 작은 예수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선교지의 사람들이 선교사의 삶을 통해서 배워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려면 선교사가 현장에서 그의 삶으로 그 말씀이 진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SNS(Social Network Service)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3. 성육신(Incarnation)과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동일화(Identification)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가 된다’는 뜻인데 ‘모든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환경의 짐도 함께 짊어지고 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동일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동일화에 대해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라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이방 사람에게는 이방 사람’으로 동일화함으로 성공적인 선교를 하였다.

 

   그러므로 동일화만이 선교지 사람들의 언어와 풍속과 문화를 깊이 알게 되며, 또 복음을 전달받는 사람들과 마음의 일치를 가질 수 있다. 타 문화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마음으로 선교지 주민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섬기며 그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그 복음은 듣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깊숙이 뚫고 들어가 영혼을 일깨워 회개와 신앙의 결단으로 인도하게 된다.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의 전신인 CIM(중국내지선교회, China Inland Mission)을 세워서 18,625명의 중국인 성도뿐 아니라 1,152명의 중국인 사역자를 배출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중국인처럼 되기 위해 변발을 하고 중국인 복장으로 중국인처럼 살면서 중국인의 마음을 얻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동일화가 그 당시 동료 서양 선교사들에게 논란이 되었고 또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길이라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내려놓았고 그들처럼 낮아졌다. 그로 인해 드디어 막혔던 선교사역이 본격적으로 열렸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마음이요 선교사가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로버트 웨버(Robert E. Weber)는 동일화 모델을 가리켜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Incarnational Communication)”이라고 부르면서, “성육신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완벽한 모델”임을 주장했다.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로버트 웨버’는 세 가지 모델을 소개했다.

   첫째는, ‘분리의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와 대립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세상 문화는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다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오류에 빠지게 해서 결국 신자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도록 만든다. 이 모델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델이다.

   둘째는, ‘동일시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를 지지하고 그것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세상의 문화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회가 세속화될 수 있다. 이 모델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는 ‘변혁의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는 말씀은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이 견해는 복음에는 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문화까지도 변혁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바람직한 모델이다.

 

   장중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초문화적 존재(Supracultural Being)인 하나님이 인간의 문화 속에 들어와서 문화적 규제하에 있는 인간과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구속(Redemption)을 실현하신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인 인간의 실존 속으로 들어오셔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문화와 접촉하시고 인간의 언어 세계를 통해 직접 인간과 커뮤니케이션을 하신 것이다.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선교사를 통해 들은 메시지 가운데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던가?’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집 정원을 거닐다가 한 무리의 개미떼가 열심히 집을 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아침에 일기예보를 통해 오후에 큰 비가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는 저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큰 비가 쏟아질 것이고 그러면 그동안 개미들이 수고하여 지은 집이 다 떠내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이 폭우는 개미들의 생명까지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곧 닥칠 이 위험을 개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개미들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안타까웠다. 만약에 개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이 재난을 피할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만일 개미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자기가 개미처럼 낮아져 개미의 언어로 그들에게 곧 일어날 엄청난 재난에 대해 말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어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에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해 주신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목적에 대해서 찰스 크레프트(Charles Kraft)는 그의 책, ‘기독교와 문화’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과의 친족관계(relationship)를 원하고, 인간에게 완전한 친족관계가 열쇠라는 응답을 끌어내려고 하며 또 그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은 수신자들을 그들의 고유한 상황으로부터 분리하여 발신자의 상황 속으로 끌어오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그 반대로 수신자와 동일시하는(identificational) 성육신적(incarnational) 방법을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바와 같이 발신자를 통해 수신자의 준거 기준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제임스 엥겔(James F. Engel)은 그의 책, ‘당신의 메시지는 전달되고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예수님은 인간의 죄성을 아셨다. 그러기에 죄인인 인간을 해방시키는데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함을 아셨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그러므로 스스로는 구원의 가능성이 제로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둘째, 예수님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며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구원의 시작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셋째, 예수님은 말씀을 적합하게 전달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쉽게 그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사물과 자연 만물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는 예화들을 사용하심으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도우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4. 타 문화에서의 성육신

 

   선교사에게 있어서 성육화의 목적은 어디에서 사역하든지 낮아진 모습으로 선교지 사람들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그들과 선교사의 삶을 나누는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 문화 속에서 성육화를 이루기 위해서 선교사는 편안하고 안락한 자기 문화에서 불편한 선교지 문화로 적응해가야 한다. 빛과소금의 교회에서 사역하는 친구 김낙춘 목사의 목회 철학은, “자발적인 불편함”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선교사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는 말씀으로 도전받고 선교지 사람들의 문화 속으로 성육화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남미 파라과이에서 선교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파라과이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한국 사람을 닮았다”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파라과이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날 나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5.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

 

   문상철 박사는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말한다. 그것은 1) 하나됨 2) 낮아짐 3) 상황화 4) 소프트파워 5) 성령의 임재가 있는 선교이다.

 

1) 하나됨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 가운데 실현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3~4)”고 말한다. 삼위일체의 동일성과 동일 실체성은 ‘그 실체가 3개로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인 채로 3위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실체가 나누어지지 않고 3개로 존재하는 것’이 삼위일체이다.

   성경에서 하나됨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은 죄인된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인의 삶으로 명령받았기 때문에 하나됨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분리의 영’이므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성도와 성도 사이를 하나 되지 못하도록 이간시키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선교를 위해서도 하나됨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연합과 교제 가운데서 있어야만 복음으로 즐겁게 세상을 섬길 의지가 생긴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의 방법을 통한 선교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쁘신 의지가 있었다. 21세기 선교에 있어서도 교회와 선교단체들의 연합과 협력이 필요하다. 교회의 보편성과 선교단체의 전문성이 함께 연합하고 협력할 때 시너지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 분파화되고 경쟁적인 구도 속에서의 선교는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 또한 오랫동안 분열되고 개교회 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지역교회들의 한계가 극복되지 않는 한 수준 높은 선교를 하기 어려워진다. 한국교회는 이제 일치단결하여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선교지에서도 선교사들끼리 동역자들끼리 그리고 현지인들과 하나가 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속담에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 집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이 하나되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면 선교지에서 나타날 현상은 불 보듯 뻔하다.

 

2) 낮아짐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낮아짐과 비움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심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섬기신 모습을 통해 선교사들에게 모본을 보이셨다.

 

   선교사의 삶은 모름지기 본국에서의 모든 문화적인 익숙함과 특권들을 버리고 타 문화권에서 불편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헌신에는 자기 문화를 기준으로 삼고 살던 삶의 패턴을 선교지의 문화를 기준으로 삼는 변화된 자세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우월감을 가지거나 자기만족을 위한 활동들을 경계하고, 순수하게 그야말로 성육신의 자세로 선교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외형과 규모를 자랑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가는 선교지는 대부분 우리의 상황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이 많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들을 쌀 신자(Rice christian)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결국 말씀으로 승부를 거는 선교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순수하게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교사는 고국을 떠날 때, 마치 물품 보관소에 자신의 물건을 모두 맡기고 떠나는 사람처럼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한국 사람이 아니라 선교지의 사람이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선교지에 도착하면 거기에서는 선교지의 상황에 맞추어 선교지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안식년으로 귀국하면 물품보관소에 보관했던 그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아서 고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선교지로 출국할 때는 다시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낮아짐의 원리를 삶의 현장과 사역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다.

 

3) 상황화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원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문화 가운데서 사셨지만, 결코 신성을 잃지 않으셨다. 그의 삶과 메시지는 세상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세상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으셨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구원의 역사가 가능케 되었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라고 말함으로 복음에 대한 분명한 선포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상황화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아 유대교와 성경에 정통한 자일뿐 아니라 다소에서 태어나 헬라철학에도 능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부터 보호받으며 선교할 수 있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다.

 

   복음은 보편적인 것이며, 지구상의 모든 문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계시하시고, 또 타 문화권 전도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화적 상황은 각양각색이다. 전달과정에서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황화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한 다음, 메시지의 내용을 그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정의하고 각색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문화권 사역자가 수행해야 할 상황화의 과제이다. 물론 상황화에 있어서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모든 문화는 부패하였기 때문에 문화를 복음의 메시지 속에 가지고 들어오게 될 때 참과 거짓이 섞일 수도 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싸워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타문화권 사역자는 선교지의 문화를 알기 전에 반드시 성경과 성경의 본질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유형의 타문화권 선교이든지 간에 성경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일차적인 진리와 이차적인 진리 간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세례를 주는 것은 1차적인 진리요, 주는 방법에 대하여는 2차적인 진리이다. 2차적인 진리로 불필요한 논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

 

   21세기 선교에 있어서도 문화적인 동화를 실현하면서도 영적인 정체성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비판적인 상황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문화적으로는 한국인이면서도 선교지 문화권의 사람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적응하면서도 보편적인 윤리의 기준에서 잘못되고 비성경적인 문화를 변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사는 문화를 선도할 책임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형이 한국 선교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4)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진리의 선포와 함께 소프트파워 혁명의 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함을 안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힘을 오용하지 않는다. 군사력은 물론, 정치력이나 경제적인 영향력, 심지어 미디어의 힘마저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서 어떤 영향력 있는 현지인들과 인맥 관계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영향력을 행세하려 든다면 그것은 성육신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에 우리는 진리의 힘을 믿는다. 진리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혁할 것을 믿는다. 진리의 힘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드파워는 겉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정신으로 임하는 선교는 진리의 역사와 함께 진정한 변화의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한 도시를 변화시키고, 한 종족을 변화시키는 힘은 바로 진리가 선포될 때 생겨난다. 이 진리가 무엇인가? 소프트 파워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초가 되는 성육신 선교의 원리이다.

 

5) 성령의 임재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통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33년의 생을 사셨고, 겨우 3년간 사역을 하셨지만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온전히 이루시고 세상을 변화시키신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임재로 인해 가능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고 권능으로 옷 입으심으로 능력있게 사역을 잘 감당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들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예수님께서 맡기신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선교는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동행하지 않으시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할 수 없다. 선교 역사상 크게 쓰임 받은 선교사들은 한결같은 성령의 사람들이었고, 하나같이 영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 원리는 21세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가운데 그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변함없는 선교의 근본 원리이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한국의 국력도 아니고, 한국교회의 경제력도 아니고, 오직 성령의 임재와 교통하심이다.

 

 

 

나가는 말

 

   과거의 선교는 마치 선교전략이 모든 선교의 열매를 좌우하는 양 전략을 세우는 일에 집중을 했다. 또한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돈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선교 재정을 어떻게 하면 풍성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지혜를 모았다. 물론 이런 것들도 당면한 과제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선교를 선교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선교계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어떤 선교전략이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뜨거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코로나19로 인해 이 주제는 쑥 들어가고 아예 이제는 기존의 선교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하면서 아무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선교 환경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본질적인 원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더 가속화하고 본질적인 선교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촉매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니 코로나19는 어쩌면 변화하는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는 모든 선교의 기초이다. 우리가 이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된 열매를 맺는 선교를 할 수 있다. 또한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에 따라 순수성을 회복할 때 한국선교는 이 어려운 시기에도 변함없이 그 사명을 다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KPM도 이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성육신적인 선교원리를 사역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하는 선교사들에게는 이 원리의 회복이 더욱 더 절실한 과제이다.

 

   경남 거창에 있는 거창고등학교는 초대 교장인 전영창 교장 선생의 교육철학에 따라 신앙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학교로 소문이 나 있다. 이 학교에는 “직업십계명”이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물론 이것은 전 교장이 만든 그의 교육철학의 일부인데 이 직업 십계명이 성육신적 선교원리를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되어 인용함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직업 십계명

1. 월급이 많은 곳보다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3. 승진 조건이 없는 곳으로 가라.

4.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아니라 황무지를 택하라.

5. 앞 다투어 모이는 곳으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으로 그러나 기쁘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7.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변방으로 가라.

9. 주위 사람과 배우자가 반대하면 틀림없다. 그곳으로 가라.

10.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단두대가 있고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고스’를 번역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요한복음 1장 1-2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시체(詩體)로 기록된 이 요한복음의 서두는 독자로 하여금 영원에의 깊은 상념(想念)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그 가운데 있는 ‘로고스’(Logos)라는 어구 때문이다. 그러면 이 로고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 낱말의 번역에서부터 문제를 만난다. 제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는 ‘로고스’라는 어휘를 가장 많이(1,300회 이상) 사용한 사람으로서, 로고스 개념 파악에 중요한 단서를 준다. 필로의 로고스 이론은 한 마디로 유대의 종교와 헬라의 철학을 조화 절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최고신(the supreme God)의 형상이라고 말한다(G.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IV 80면 이하). 이러한 필로의 로고스 이론은 인격(person) 이 아니고, 성육신이 불가능하며, 완전한 신이 아니며, 선재자(先在者)가 아니며, 메시야가 아닌 점 등에서 요한의 로고스 이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로고스라는 어휘, 즉 소위 ‘로고스 찬양’(Logos hymn)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1-18 본문의 주제어는 신약에 330여회 사용되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말’/‘말씀’(word/Word)을 뜻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로고스는 그 문자적인 의미(‘말’이란 뜻)와 요한복음 서론에서의 실질적인 개념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으므로 우선 이 어휘의 번역에서부터 어려움을 경험한다. 일찍이 괴테(Goethe, 독일의 시인, 극작가인 동시에 철학자)는 그의 작품 ‘파우스트’(Faust)에서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 처음에 ‘das Wort’(말씀, 영어의 the Word)로 했다가 불만이어서, ‘der Sinn’(사상, 영어의 thought)으로 했다가 또 불만이어서 ‘die Kraft’(힘, 영어의 power)로 했다가 또 불만, 마지막으로 ‘die Tat’(행동, 영어의 act 또는 deed)로까지 시도하고는 단념하였다. 영어성경에서는 대개가 ‘the Word’로 번역하고 있으나, Moffat 역은 영어의 ‘the Word’ 나 다른 어떤 어휘로도 번역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Logos’ 라는 원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음, 중국어역 성경을 보면 최근의 ‘今日聖經’(1979년)이 ‘基督’이라고 의역한 것 외에는 모두가 ‘道’로 번역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그 어느 나라 언어의 번역보다도 합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이다.

첫째 중국어의 ‘道’는 도교(道敎)의 우주론 또는 우주생성론(cosmology/cosmogony)에서 우주의 근원을 가리킨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면 우주와 만물의 생성에 대해서 “道 生 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抱陽 冲氣爲和”(42장)라고 하여,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가 만물의 근원적실재로 표현한 ‘하나’(das Eine)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道’는 모든 현상(現象)의 근원적 본체로서, 道에서 一氣(太極)가 나오고, 一氣에서 음양(陰陽) 二氣가 나오고, 二氣와 冲氣(조화의 힘)가 합하여 三氣가 되고, 三氣에서 만물이 생하며, 그 만물은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의 원리, 즉 금은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금을 생기게 하여 만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道’의 성질로는 “視而不見 名曰夷, 聽而不聞 名曰希, 搏而不得 名曰微 ... ” 즉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색깔이 없는 것이요(夷는 無色),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소리가 없는 것이요(希는 無聲), 쥐어도 쥐이지 않으니 형체가 없는 것이라(微는 無形)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둘째 중국어에서의 道(도) 는 여러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언’(言, 말씀)이란 뜻이다. 道를 이러한 뜻으로 쓰는 것은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볼 수 있거니와, 우리말 성경 구역(1911년 발행)이 ‘말’(말씀)이라 번역하고 괄호 안에 “혹은 도라”고 한 것은 중국어역 성경을 그대로 따르는 데 있어서 도교의 사상을 고려에 넣은 것이라 해석된다.

그 외에 노자의 體道편에서 “道可道非常道”(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道는 영구불변한 본연의 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나, 한비자(韓非子)의 ‘解老’편에서 “道者萬物之所然也”(도는 만물의 본연)라고 한 것 등은 道의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성격을 말하는 점에서 로고스와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여훈’(女訓) 가운데 “口

不道淫聲”(입으로 음란한 것을 말하지 말라) 한 것과,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의 시 가운데 “主人莫道無顔色”(주인이여, 낯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등에서 ‘道’ 자가 ‘언’(言, 말하다)의 뜻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일어역에서는 모두가 ‘고도바’(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어에서 ‘고도바’라는 말은 한자로는 ‘言葉’로 기록하는데 요한복음 번역에서 Logos 는 ‘言葉’로 기록하지 않고 ‘言’이나 ‘御言葉’(共同譯)로만 기록하는 것이 그 특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틴어’로는 verbum(말) 또는 Ratio(도리, 이성, reason)로 되어 있고, 불어로는 Verbe(1988년) 또는 Parole(1910년) 로 번역하고 있다.

















신앙(信仰)의 4요소


"자연인"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자연인으로 생활하게 된 동기가 사회적응 부적격자가 된 상태에서 죽어도 산에서 혼자 조용히 죽기로 다짐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텐트 하나 갖고 들어가서 겨우 하루 하루 지내다가 점점 몸이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으면 전혀 새로운 삶의 재미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인(靈性人)"으로 회복해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올바른 영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4요소 / 청(聽), 신(信), 지(知), 행(行)

첫째, 듣는 것(로마서 10:17)  Hear.   ἀκοή.    청(聽)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아라; 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로 '듣는 행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예화) 절에 열심히 다니던 어느 할머니가 어느 날 절에서 불법 강론을 듣던 중 마음에 감동을 받아 "아멘"이라고 화답하였다고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저 불자가 그렇게 열심히 절에 다녔는데 왜 '아멘'이라고 화답할까?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할머니 불자의 생신을 맞이하여 출가했던 딸들이 친정에 모였을 때 할머니가 딸들에게 최근 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그러자 딸들이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하며 딸들이 어머니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도록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딸들이 친정에 오면 '아멘'하고 말을 하였는데 '아멘'이 귀에 익숙해졌다고 합니다.

(예화) 스님 김진규씨가 진지하게 수도를 하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임마누엘" 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사찰과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임마누엘'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노력하던 중 마땅한 대답을 듣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작은 암자에 계시다는 노스님을 찾아가던 중에 작은 기도원을 지나가려는데 '임마누엘 기도원' 이라는 간판을 보고 기도원의 원장에게 도대체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라고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둘째, 믿는 것(사도행전 16:31)  Believe.  πιστεύω.   신(信)

사도행전 16:31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thou shalt be saved, and thy house.

(예화) 신대원 재학 중 하루는 어느 길을 가는데 길 건너편에서 무당이 굿을 하고 있었지요.
맞은 편에 서서 그 굿을 바라보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무당이 대야에 물을 떠서 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쏟기 시작합니다.
속으로 무당이 굿이 안 되는구나!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셋째, 아는 것(요한복음 17:3)  Know.   γινώσκω.   지(知)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And this is life eternal, that they might know thee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예화) 아는 것이 힘이다!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입니다.
베이컨은 사람을 세 종류의 곤충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1. 거미
2. 개미
3. 꿀벌






넷째, 행하는 것(야고보서 2:26)  Deed.  ἀκροατήριον.  행(行)

야고보서 2:26
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For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lso.

(예화) 믿음과 행함의 문제
"믿음으로 구원, 행함으로 축복"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ἀκροα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201

1. 청취실.  2. 심문소. 3. 청중석
발음 [ akrŏateri- ŏn ]
어원  / 202에서 유래

1. 청취실, 심문소, 청중 석, 관람석, 강당, 행 25:23.
관련 성경 / 접견 장소(행 2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