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히 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7:8-10.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 비밀히(2927)
κρυπτός, ἡ, όν 스트롱번호2927
-
1. 감추인, 비밀의.
-
a. [형용사] 막 4:22, 눅 12:2, 벧전 3:4.
-
b. [명사로 사용할 때] 숨은 것, 숨은 생각, 눅 8:17, 롬 2:16, 고전 14:25.
-
-
관련 성경
은밀한(마 6:6, 롬 2:16), 숨은(마 10:26, 눅 8:17, 벧전 3:4), 숨기는(막 4:22), 감추인(눅 12:2, 고전 4:5), 묻힌(요 7:4), 은밀히(요 7:10, 18:20), 이면적(롬 2:29).
* 2928 κρύπτω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
마태복음 6:1-18
잠언 11:24-25
누가복음 6:38
누가복음 11:41
시편 50:15
이사야 58:6-9
신약에서 경건(敬虔) - (헬) [유세베이아] : 유/(잘)+세베이아/(경외함으로 서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두려워함)으로 바르게 잘 서다, 행한다 하나님 면전(面前)에서 걷는다, 행한다
구약에서 경건 - (히) [할락 리페네 야웨] 할락 : 걷다. 행하다.
리페네 : 면전에서(전치사) 야웨 :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는 자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의미가 서로 일치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자세를 가리킨다.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사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며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칼빈의 좌우명(座右銘),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신앙과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면전에서 사는 자들이다.
오늘 본문에는 3가지 경건 생활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인데, 구제, 기도,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5절) 하고, 자랑하려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구제, 기도, 금식하라는 것이다. (조심해야 할 주의 사항과 함께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다.)
1. 구제 생활 (1-4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신문 기자 부르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자신의 선행이 이미 칭찬받고, 박수도 받았으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구제하라.
그래야 하나님이 칭찬해 주고, 상도 주시고 갚아 주신다.
구제는 마음을 담아 물질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로 구제하면 복을 받아 더 풍족해진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富)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영적인 법칙이다.
전도서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구제하면 얼마 안 가서 도로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은 죄성이라는 것이다.
그 죄성은 욕심으로 나타나고, 이기심으로 나타난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물욕, 명예욕, 권세욕 같은 것들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욕심부린다.
그래서 욕심에 붙잡혀 사는데, 구제는 이러한 이기심, 욕심을 사라지게 한다.
누가복음 11:41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정말, 구제에는 놀라운 축복이 들어 있다.
문제는 은밀히 해야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이것이 참된 경건한 생활이고,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구제가 된다.
2. 기도 생활 (5-6절)
기도는 정말 축복된 경건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이고, 은혜 받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외식이라는 말이다.
기도가 자랑이 되면 기도의 은총과 축복을 놓치는 일이 된다.
(5-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왜 은밀히 기도하라고 할까요?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않아도 은밀한 중에 다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7-8절)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험과 유혹을 받기도 하고,
실족하여 죄짓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환난을 당할 때도 있다.
환난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나를 부르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환난에서 구원해 주고, 건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환난 중에 기도해야 하고, 또한 풍성한 삶(요 10:10)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
즉,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 주여 넓으신 은혜 베푸사 나를 받아 주시고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되기 위하여 주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예배 때 많이 사용한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다. (마 6:9-13)
주기도문 안에는 6가지 간구가 있다.
☆ 대신 간구(3가지) :
①하나님의 이름
②하나님의 나라
③하나님의 뜻.
☆ 대인 간구(3가지) :
①공급 ②용서 ③보호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범이고, 기도 중의 기도이다.
주기도문 마지막에 (대개)라는 말은 (호티)인데 왜냐하면(For)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기도해야 한다.
3. 금식 생활 (16-18절)
금식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도 금식기도 하면서, 티내지 말고, 금식기도 후에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다.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은 자기 욕망에서 벗어날 때 할 수 있다.
금식은 식욕의 욕망을 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문제는 금식이 공로가 되고,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은밀히 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는 말이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인가?
이사야 58:6-9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금식 기도하는 것이 귀하지만, 자랑 거리가 되고, 공로가 되면 안 된다.
모든 경건 생활은 하나님만 의식하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경건 생활은 정말 중요하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주의 사항과 함께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다.
구제, 기도, 금식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자랑하지 말라.
공로심으로 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하라.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갚아 주신다는 말씀이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 생활을 바르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인정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신령한 기쁨도 누리게 된다.
신학교 교훈 중에, [경건과 학문] 이란 것이 있다.
이 두 가지가 신학교의 중요한 교훈이다.
경건이 없이는 아무리 신학과 학문을 많이 닦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경건한 삶을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은밀한 구제(마태복음 6:2-4)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가 신앙의 생활을 영위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사람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맺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여도 우리의 신앙은 정상적이지 못할
것이며, 아울러 사람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 역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는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참 좋은 것 같은데 사람과의 관계는 엉망으로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인정받지 못하며, 반면
사람과는 좋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서로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데 하나님을 향하여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올바르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이러한 두 가지가 아름답게 균형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과의 관계는 구제한다는 말로서 즉,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의와 선을 행하는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선대할 것이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를 남에게
나누면서 의를 행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구제를 행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그분의 명령을 중시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합당한 삶을 행해 갈 때 아주 조심하여야 할 사항을 강조하시며 세 가지의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 나팔을 불지 말 것(2~)
미담(美談), 미행(美行), 미덕(美德) 등은 메마른 삶에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합니다. 반면에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은 주님께서
지적하심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외식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심은 본장에서만 1절, 5절, 16절에 걸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하십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연보와 봉사 그리고 더 나아가 구제하는 것까지 사람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사람 앞에서 칭찬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행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유욕
가능한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입니다.
둘째는 출세욕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출세의 본능입니다.
정치적인 욕망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명예욕
그 다음으로 내세우고 싶어 하는 명예의
욕망입니다.
인정을 받으려하고, 칭찬을 받고자하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본능입니다(마 23:2~7. 눅 18:11~12). 우리
역시 이러한 것들을 조심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적이며, 육신적인 미혹됨에 빠지게 됩니다(요일 2:15~16).
‘선량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내용을 잘 알 것입니다(눅 10:30~37). 혹자는 이 사건이 만약에 후미진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거리 한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안보는 곳이었기에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이었기에 할 것을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사람들이
보니까 하는척하면서 행세하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는 사람에게 들려 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아뢰는 비밀스런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나 기도할 때에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우리의 육신적 유혹을 이기고. 다만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아뢸 것입니다(빌 4:6. 골 4:2).
둘째, 구제는 은밀하게 할 것(3~4a).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삼대 덕목으로서 구제와 기도, 금식을 지적하십니다. 이것들은 각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제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금식은 자신에 대한 행위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면의 행위를 대표한다고 말해도
과언(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구제는 선행입니다. 예로부터 선행은 장려되었습니다. 선행만큼 칭찬 받을만한 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끌기 위한 방법으로 자선행위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구제의
문제부터 지적하신 것입니다.
구제는 은밀히 해야 합니다. 자신까지도 이를 마음에 두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밀해야 참된 자선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상급이 따릅니다. 사람의
칭찬을 원하게 되면 자선(慈善)의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상급도 이미 받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려고” 무엇인가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려고” 이 말은 “구경거리로”라는 말입니다. 극장과 위선이라는 용어는 상호
연계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려고 “외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배우들”을 말합니다. 거짓으로 웃고
거짓으로 우는 것이 배우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일에 부지런히 따라 다니면서 나팔을 불었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당시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나팔을 불어서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제적인
나팔이 아니라 “오버-액션” 즉 과장되게 떠벌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밖으로 시끄럽게 공포되는 것은 거의 모두가 나팔(의도적)을 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호화롭게 자기를 칭송하는 교만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너그러움과 행위를 나타내려고 신문이나 방송에 그 사실을
발표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구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가운데 하나이며(갈 2:10), 동시에 경건한 삶의 부분이 됩니다(약 1:26~27).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로다(시 41:1)”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선행에 대한 보상이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러한 명령은 여전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0)” 사도바울은 전도와 함께 중요한 또 하나가 구제라고 역설합니다(고후 8:1). 구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태도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재물이 아깝지 않고 또 자만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제는 자신의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팔을 불어 자신의 선행을 선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행하든 은밀하게 행하든 그러한 행위를 하늘 아버지께서 보십니다. 이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하는 일을 즉, 구제하고 기도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다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처럼 감동스럽고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야 무어라 하든,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만 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사람들은 그를 몰라주었습니다. 친구도, 아내도 그를 멸시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고 말하면서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욥 6:2, 31:6).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 중에서도
하나님은 살피고 계시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믿음의 일들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진실해야만 하고 오직
그분께 인정받는 믿음의 행위를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의식하십시다(계
2:23).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자세보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삶의 자세로 살아 갈 것입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하다가
미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나를 보시고 계심을 알고 그 분 앞에서 믿음의 행위를 살아갑시다.
셋째, 아버지께서 갚으심(4b~)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하나님만 보면서 행하는 자를 다 보시고 아시면서 반드시 갚아 보상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하면 그것을
보상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기록하고 있으며,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분명한 약속을 보십시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시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말없이 행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갈 6: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헛되고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제 발견하십시다. 왜, 그토록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었는지,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한다고 하여도 왜, 열매가 없었는지, 부지런히 구제를 하여도 왜, 기쁨과 은혜가 없었는지, 도리어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미혹에 빠지고, 다툼이 생기며, 하지 않은 만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그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의 일에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랑과 칭찬을 위하여서 그리고 세상의 허영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고 무엇보다
공명정대하신 하나님만이 알아주시면 된다는 믿음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행하기를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은밀한 기도(마태복음 6:5-8)
성경 공부 시간에 기도에 대한 교육을 이미 받은 대로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우리의 대화의 대상이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와 대화하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바를 기도란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우리의 대화자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좁은 의미로는 바로 나 지신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양지 삼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시어,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나라에서 살고, 그곳에서 상 주시려고 우리를 간섭하시며, 인도하시며, 늘 돌보시는 분으로 24시간을 언제, 어디서나 그의 눈이 우리를 관찰하시며, 늘 함께 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의 존재로 보존하시기 위해 우리가 순수하고, 거짓이 없이 진실하며, 세상보다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고,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를 요약한다면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하나님은 창조자요, 나는 피조물, 하나님은 아버지시오, 나는 그의 자녀,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진실이시오, 영원한 영적 존재이시며,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대화할 수 있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라시고, 자녀와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대화하시기를 바라시는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고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우리가 살기를 바라시는 아주 자상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런 아버지와의 대화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루 24시간을 연속적으로 가져야할 필수적인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바를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5-8절까지에서 주님이 주시는 3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5절)
[2]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절)
[3]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7-8절)
하나하나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5절)
신자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만큼 서로 다투어 열심히 기도를 해오고 있는 과정에서 기도의 본질이 변화되어 오열되고, 부패된 기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이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뭐가 많은 줄 아세요? 가짜가 많은 것입니다.
귀하지 않을 것을 가짜로 만들 필요 없어요. 기도가 그토록 중요하다 하심은 가짜 기도가 있어서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거라 했지요? 하나님에게. 하나님 중심의 기도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매일 드리는 기도문 두 가지가 있어서, 이런 기도문을 암송해온 경과를 거치며 몇 가지 기도의 불순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성도에게 늘 따라야할 중요한 것이므로 자기의 경건을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귀의 생각이 마음속에 찾아 와서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눈에 보이도록 자랑을 위해, 자기가 아주 기도 열심히 하는 경건한 교인, 경건한 교회 지도자임을 보이려고 일부러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거리에나 회당에서 기도 흉내를 낸 것을 주님의 꿰뚫어 보시고, 이를 지적하시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연 상관없는 기도를 했으므로 하나님이 주실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라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시에 하나님 이름을 여러 번 들먹거렸으나 입술만 움직였지 마음으로는 않고, 사람의 눈을 생각했으며, 기도는 소리 크게 질러 하나님께 들리도록 한 것 같지만 그 기도는 결국 사람 귀의 높이까지만 올라가고 그 이상 올라가지 못한 기도가 되므로 하나님이 들으실 몫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주실 상은 없고, 본인의 인간의 눈을 의식했던 대로 그 보상만으로 사는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팔아 우리를 샀는데 우리는 하나님 팔아 사람을 산 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를 하지 말도록 권하십니다.
[2]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절)
6절 말씀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진정코 아버지께 얻기를 기도하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라는 말은 첫째, 내가 기도하는데 내 주변에 들러리가 필요 없고, 증인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나와 하나님 둘만의 장소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아니하고 내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고 전달할 수 있는 밀실을 말합니다. 골방이란 연극배우와 같이 사람을 의식하여, 소리를 크게 해야 한다든지, 이상한 소리를 내서 기도의 사람을 과시해야 한다거나 이상한 몸짓하여 능력이 역사한다는 흉내를 내서 보여야할 어떤 외적 요소가 없는 분위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골방이란 아주 작은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조용하고, 아무 방해받지 않은 곳을 말합니다. 아니 아무리 넓은 들에서나, 산에서도 그 누구의 방해 없이 하나님과 내가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와 마음가짐이라면 그 곳도 골방이 될 수 있으며, 수 만 군중 틈에서도 이웃의 귀, 눈과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드릴 수 있다면 그 곳도 골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작은 골방에서도 내 마음이 집중이 되지 아니하고 설레 이는 마음으로 안정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므로 골방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는 참뜻을 깊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기도원에 가서 하는 것이 통념인데 혹시 기도원에서 내가 했던 기도가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의미에 어긋난다면 40일 금식기도도 받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40일 금식 기도의 상은 누구에게 받을까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라는 권면이십니다.
[3] 중언부언하지 말라 입니다(7-8절)
갈릴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이웃에 살았고, 또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 살았던 관계로 갈릴리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이방신에게 드리는 기도 모습에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신 앞에서 반복하여, 오랫동안 질질 기도를 끌어감으로 이방신도 지겹고
기도하는 사람도 지겹게 되는 기도 습관이 있었는데, 유대인들도 이를 닮아 오래 기도 하는 것은 경건의 정도를 의미하며, 오래
기도할수록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져, 기도를 오래하는 것으로 이력을 삼은 사실을 주님이 아시고 시정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중언부언이란 반복 기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란 오래 기도를 해야 철야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줄 알고, 특별한 의미도 없이 간절함도 없이, 감동도 없이, 시간을 늘리는 기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기도의 형식을 갖추어 있고, 좋은 기도의 낱말로 잘 짜여진 기도이나 내 마음이 살러지지 않은, 감동이 없는 외워진 기도나, 글로 써진 기도를 읽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준비 없는 기도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고, 듣는 이들로 혼잡케 하는 기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기도의 참뜻을 모르고 기도의 원칙을 전연 무시한 혼자만의 중얼거림일 수도 있습니다. 또 중언부언이란 기도하는 동안 생각을 딴 곳에 두고 하는 기도나 입버릇처럼 주님과 할렐루야를 섞어가며 이를 경건미를 내는 것이라 여기는 입버릇의 기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똑 같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3번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3번이지만 더 많이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배를 탔는데, 파선되어 있다고 가정합시다. 밤새도록 ‘주여 살려주십시오’를 수 백 번 반복했어도 나를 중언부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전능 자 하나님이 계시고, 능력자의 힘을 필요로 하는 갈급함이 있고, 진실 된 표현이 있다면, 아무리 여러 번 반복되어도 중언부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7-8절에 보니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아는데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구할 것을 다 아신다는 말은 또 기도란 필요가 없다는 말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주님의 요청을 잘 알고 있으나, 필요 없이 긴 기도, 엿가락 느리듯 늘리는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표현하신 말씀인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길어진 기도의 이유가 뭐겠어요? 그것은 길게 해야 한다는 오해, 준비 없는 기도, 하나님께서는 일이 되어진 상황 설명까지 다 설명이 필요하신 분 인줄 아는 기도, 하나님께 성경 공부를 시키는 기도, 지금 기도하는 참 목적을 바로 모르고 방황하는 이유로 기도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전 5:1-2에 “너는 하나님 앞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은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아버지라도 준비하고, 정중하고, 진실하며, 요약하며, 분명하게 기도하므로 중언부언의 기도에서 치료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도 습관으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습관과 자기 경험도 좋지만 주님이 주신 기도의 처방에 따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기도가 있다고 지적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기도를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귀에 관심이 가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지 아니하고 인간을 가르치거나 인간의 귀에 들려주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자기 기도가 중언부언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 기도가 거리와 회당 즉 교회에서나 사람 보는 대해서만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 기도원에서만 하고 있고, 그런 것만 좋아하고 있는지? 기도원 기도를 높이 평가하고 골방에서 혼자 하는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 소리 내어 떠들어대는 기도를 조용한 소리로 드리고 기도보다 더 좋아하는지 우리 기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과 전연 상관없는 장소에서 우리 둘만의 은밀한 장소에서 대화하기 원하십니다.
어떤 이유로도 둘 사이에 방해가 되는 아무 것도 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 이외의 다를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보다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통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 통해 소식 듣는 것 말고 직통 전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침에 일찍 QT Time을 갖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연속적인 경건과 기도가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진실 된 기도 통해 믿음이 더욱 향해지고 소망과 사랑과 확신을 늘려주는 그런 기도가 매일 연속되기를 원합니다. 짧은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마음이 실려진 기도가 응답 받는다고 했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로 우리의 생활이 더욱 활력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