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은 어떻게 다른가?

구약과 신약이 ‘율법’과 ‘복음’으로 요약 구별되는 것과 유사하게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또한 다른 개념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인 복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완전히 잘못하게 된다. 구약에서 말하는 복과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대체로 육신적인 복(예: 장수, 건강, 부귀 등)인데 대해,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영적인 복(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마음이 청결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등)이다. 구약의 복사상은 동양의 5복사상(장수, 강녕, 부귀, 유호덕, 고종명)과 흡사하다.

2)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현세적인 것인데 대해,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예수의 산상보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국(내세적)의 복(마 5:3-12)을 말한다.

3)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조건적인 복(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신 28:1-14)인데 대해,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무조건적인 복이다(롬 3:23-24, 엡 1:3-5). 그리스도인은 구약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받는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값(=조건) 없이 복(=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그 전체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복 사상(창 12:1-3; 시 1:1 등)이 그 반대인 저주와 더불어 인과응보적인 논리로 선포되어 있으므로(신 28:1-19),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할 때는 구약의 복이 아니고 신약의 복을 뜻하는 것이다.



팔복에 관한 메시지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개역개정,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새번역,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그, '심령이'
우리말성경,3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3  "You're blessed when you're at the end of your rope. With less of you there is more of God and his rule.
영어NRS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3 beati pauperes spiritu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3 אשרי עניי רוח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심령이 가난한 자(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 40:17; 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 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 70:5; 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 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 51:17; 사  66:2).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심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마음과 영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롭게 가지게 되는 생각들을 ‘관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보이는 부분에 대한 관심을 주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잘 신경쓰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팔복’으로 많이 알려진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산에 오르셔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이란 무엇인가요? 혹은 어러분은 ‘어떤 복’을 받고 싶은가요?

사람들은 흔히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자녀들이 잘 되었거나 건강하거나 장수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돈, 건강, 생명 등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 즉 ‘소유하지 않은 상태’ 가 복있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는 마태복음의 첫 번째 복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아무 것도 잠가둘 것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 (Blessed are they who have nothing to lock up) 

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잠가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생기고, 소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생기면서 전에는 없었던 염려와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이것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떻게 빼앗기지 않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더 늘리고 가져야 할지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걱정과 염려를 주는 존재가 동시에 ‘복’이 된다는 것이 모순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됩니다. 물질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성가들은 가난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거룩한 가난’(holy poverty)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성가들은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가난을 통해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놓는 훈련을 했습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물질에 대해 바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물질을 갖기 위해 삶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나누는 삶이 되는 것의 축복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먼저 본문 3절을 읽어봅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PPT한영)

마태복음의 첫 번째 팔복의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만이 아니라, 내면의 가난함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을 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건강을 잃었을 때, 학업이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삶의 큰 시련을 맞이했을 때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때, 나의 무기력함과,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마음의 가난이 절망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가난 속에서, 무엇으로 채울까… 성경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는데,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적 관점이 강한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계명을 따라서 '하나님'이란 말이 나오면 다른 단어로 고쳐서 쓰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도 '하늘나라', 하늘 '천'자에 나라 '국'자로 바꾸어서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만 '하늘나라', '천국'이란 말로 쓰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심령"이란 말이 없고 그냥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 "가난"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뜻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πένης’ [penes]란 단어이고, 둘째는 ‘πτωχός’ [ptochos] 라는 단어입니다. 예를들어, 페네스는 수입은 있지만 남는 게 없고 여유가 없는 가난, 즉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가난입니다. 

그러나 프토코스는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고, 파산을 당하거나 해서,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10초에 한 명 꼴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프토코스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하고 절대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은 바로 두 번째 프토코스의 가난입니다. 가장 절망적이고 무력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저주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꼭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하게 되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인종이나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소유’, '부', 즉, '넉넉함'입니다. 물질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것을 다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부’를 추구하고, ‘풍요’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의 이해와는 반대로, 역설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좋아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 절망한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분명히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시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부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부자의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태를 ‘복’있는 상태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의 상태가 복된 상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하지 않으면 복이 없는가?' '부자는 복이 없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언뜻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넉넉한 삶을 살아가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가난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성경에서 ‘가난함’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가난함 그 자체가 옳다고 말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보면 가난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함은 영적이든 경제적이든 하나의 '현상'일 뿐, 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잘 못 해석하여 가난한 것,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그 자체를 미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소유’라는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만일 가난 자체가 복이라면, 우리가 노력하고 발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일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난 자체를 복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 자체를 축복하시고, 또 부와 물질 자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 때문에 어떻게라도 무언가를 구걸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자 상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으로는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데, 헬라어로 보면 이 구절 중간에서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οτι’(호티), 즉 ‘왜냐하면’이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천국을 소유한 사람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즉 가난한 것, 혹은 영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가난’이라는 것은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심령, 곧 마음과 영혼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 즉 이 세상 기준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고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을 잘 믿는 부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지금 잠시 나에게 있을 뿐, 원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것을 내가 잠시 맡아두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청지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복되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 삶의 기준이, 이 세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되다, 하신 이유는 단지 ‘가난’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필요하다는 믿음 곧 ‘심령의 가난’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고, 그래서 복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유’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돈, 학벌, 경험 등, 내가 가질 수 있는, 혹은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가하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소유는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잠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와 조금 다릅니다. 우리 삶의 배경은 모두 다르겠지만, 한국의 경우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후에 경제성장이 되어서, 70년대 말부터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넉넉한 환경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있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물론 각 가정형편이 다르겠지만, 상대적 빈곤을 경험했을 뿐이지, 절대적인 빈곤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상대적 빈곤이란, 누군가와 비교해서 어려운 것을 의미하고, 절대적 빈곤이란, 모든 사람이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함께 어려운 시절을 경험하진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자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자란 분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미국은 이미 강대국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분들이나, 십대에 미국에 와서 자란 분들 모두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입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로 경제성장이 멈추고,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여러분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입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넉넉하지만, 개인의 만족도는 낮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풍요롭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시는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않은 것처럼」에 실린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제프 딕슨이 처음 인터넷에 이 시를 올린 뒤, 많은 사람이 한 줄씩 덧보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삶은 풍요롭고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한쪽이 풍요로우면 한쪽은 더 피폐해진다.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우리 시대의 역설 
- 제프 딕슨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 출처 :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않은 것처럼』 오래된 미래. 2005.03.



“우리시대의 역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한번쯤은 곱씹어 볼 내용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난다.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로 늘어났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서두르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엄청나게 일을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유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맞벌이가 늘어나지만 이혼은 늘고

집은 근사해지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식품은 다양해졌지만 영양가는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친구는 줄어들었다.

교통수단은 더 빨라지지만 소통은 더 막히여졌고

광고는 더 많아졌지만 상업 양심은 더 줄어들었다

쾌락을 느끼게 하는 약들은 많이 졌지만

행복을 느끼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축복’이라는 것은 결코 소유를 통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질까’, 즉 ‘소유’에 집착한다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심령의 가난함을 간직할 때,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적 소유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인데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라는 성경구절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외우기도 하는 구절일텐데요, 11절과 12절을 함께 외우는 분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11절과 12절을 함께 보시죠.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때로는 가지지 않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마카리오이 호이 펜둔테스 호티 아우토이 파라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4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영어NI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영어NASB,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영어MSG,4  "You're blessed when you feel you've lost what is most dear to you. Only then can you be embraced by the One most dear to you.
영어NRS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헬라어신약Stephanos,4 μακαριοι οι πενθουντες οτι αυτοι παρα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4 beati mites quoniam ipsi possidebunt terram
히브리어Modern,4 אשרי האבלים כי הם ינחמו׃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라에이스 호티 아우토이 클레로노메수신 텐 겐

개역개정,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말성경,5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영어NI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영어NASB,5 "Blessed are the gentle,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영어MSG,5  "You're blessed when you're content with just who you are--no more, no less. That's the moment you find yourselves proud owners of everything that can't be bought.
영어NRS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5 μακαριοι οι πραεις οτι αυτοι κληρονομησουσιν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5 beati qui lugent quoniam ipsi consolabuntur
히브리어Modern,5 אשרי הענוים כי המה יירשו הארץ׃

온유한 자(*,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마카리오이 호이 페이논테스 카이 딮손테스 텐 디카이오쉬넨 호티 아우토이 코르타스데손타이

개역개정,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새번역,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우리말성경,6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배부름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영어NI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영어NASB,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영어MSG,6  "You're blessed when you've worked up a good appetite for God. He's food and drink in the best meal you'll ever eat.
영어NRS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헬라어신약Stephanos,6 μακαριοι οι πεινωντες και διψωντες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οτι αυτοι χορτασ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6 beati qui esuriunt et sitiunt iustitiam quoniam ipsi saturabuntur
히브리어Modern,6 אשרי הרעבים והצמאים לצדקה כי הם ישבע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 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엘레에모네스 호티 아우토이 엘레에데손타이

개역개정,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7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들이여,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영어NI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영어NASB,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receive mercy.
영어MSG,7  "You're blessed when you care. At the moment of being 'carefull,' you find yourselves cared for.
영어NRS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receive mercy.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ακαριοι οι ελεημονες οτι αυτοι ελε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7 beati misericordes quia ipsi misericordiam consequentur
히브리어Modern,7 אשרי הרחמנים כי הם ירחמו׃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마카리오이 호이 카다로이 테 카르디아 호티 아우토이 톤 데온 옾손타이

개역개정,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새번역,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우리말성경,8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가톨릭성경,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영어NI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영어NASB,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영어MSG,8  "You're blessed when you get your inside world--your mind and heart--put right. Then you can see God in the outside world.
영어NRS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ακαριοι οι καθαροι τη καρδια οτι αυτοι τον θεον οψονται
라틴어Vulgate,8 beati mundo corde quoniam ipsi Deum videbunt
히브리어Modern,8 אשרי ברי לבב כי הם יחזו את האלהים׃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 정. 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마카리오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호티 아우토이 휘오이 데우 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 ㉣그, '아들들이라고'
우리말성경,9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가톨릭성경,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영어NI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NASB,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MSG,9  "You're blessed when you can show people how to cooperate instead of compete or fight. That's when you discover who you really are, and your place in God's family.
영어NRS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9 μακαριοι οι ειρηνοποιοι οτι αυτοι υιοι θεου 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9 beati pacifici quoniam filii Dei vocabuntur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 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마카리오이 호이 데디오그메노이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 호티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새번역,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10 "Blessed are those who have been persecuted for the sak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10  "You're blessed when your commitment to God provokes persecution. The persecution drives you even deeper into God's kingdom.
영어NRS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0 μακαριοι οι δεδιωγμενοι ενεκεν δικαιοσυνης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10 beati qui persecutionem patiuntur propter iustitiam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10 אשרי הנרדפים על דבר הצדקה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마카리오이 에스테 호탄 오네이디소신 쉬마스 카이 디옼소신 카이 에이포신 판 포네론 칻 휘몬 프슈도메노이 헤네켄 에무

개역개정,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새번역,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터무니없는 말'이 없음
우리말성경,11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 
가톨릭성경,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영어NI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NASB,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and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MSG,11  "Not only that--count yourselves blessed every time people put you down or throw you out or speak lies about you to discredit me. What it means is that the truth is too close for comfort and they are uncomfortable.
영어NRS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헬라어신약Stephanos,11 μακαριοι εστε οταν ονειδισωσιν υμας και διωξωσιν και ειπωσιν παν πονηρον ρημα καθ υμων ψευδομενοι ενεκεν εμου
라틴어Vulgate,11 beati estis cum maledixerint vobis et persecuti vos fuerint et dixerint omne malum adversum vos mentientes propter me
히브리어Modern,11 אשריכם אם יחרפו וירדפו אתכם וידברו בשקר עליכם כל רע בעבורי׃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카이레테 카이 아갈리마스데 호티 호 미스도스 휘몬 폴뤼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후토스 가르 에디옼산 투스 프로페타스 투스 프로 휘몬

개역개정,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새번역,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우리말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 
가톨릭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영어NIV,12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NASB,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n heaven is great,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MSG,12  You can be glad when that happens--give a cheer, even!--for though they don't like it, I do! And all heaven applauds. And know that you are in good company. My prophets and witnesses have always gotten into this kind of trouble.
영어NRSV,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χαιρετε και αγαλλιασθε οτι ο μισθος υμων πολυς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ουτως γαρ εδιωξαν τους προφητας τους προ υμων
라틴어Vulgate,12 gaudete et exultate quoniam merces vestra copiosa est in caelis sic enim persecuti sunt prophetas qui fuerunt ante vos
히브리어Modern,12 שמחו וגילו כי שכרכם רב בשמים כי כן רדפו את הנביאים אשר היו לפניכם׃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역설하는 보상의 개념은 대부분 이런 범주(範疇)에 속한다. 진정 우리가 천국의 규범 아래서 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에서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박해와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전에 박해받았던 예언자들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것이다(대하 24:21; 느 9:26; 렘 20:2; 행 7:52; 살전 2:15).

선지자들을...핍박하였느니라
- 구약성경은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들을 말한다. 한 예로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기도 했으며(렘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대하 24:21), 유대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므낫세 치하중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Alford).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위시하여 핍박의 역사는 중단된 적이 없다. 이 구절들은 박해받기를 자칭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보복하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구속사('예언자들')와 영원('하늘에서의 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들은 합당한 신앙의 응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행 5:41; 고후 4:17; 벧전 1:6-). 실로 제자직이란 고난 받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로 부름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이다(Bonhoeffer).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새로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니'(Bonnard)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10장과 24장에서 다시 언급할 박해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Carson).



◯ 우리가 산상수훈으로 알고 있는 말씀의 시작은 팔복으로 시작한다. 이에 앞서 보면 이 산상수훈의 시작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온 사람들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또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것을 듣고서, 천국 복음을 듣고자, 또한 병을 낫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보고자 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니 제자들이 나왔다고 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는 것, 즉 제자들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먼저 사시고, 그 사심을 보고 들은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라'하시니 그들의 마음이 동하여 제자로 따라 나서는 그런 관계이다. 지금 이 산상수훈의 말씀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듣고, 병이 나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르치신 말씀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제자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만 가르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는 가르치는 이의 삶을 보고, 그 본 것이 자기 안에 땅에 씨가 뿌려지듯 심겨져 그것이 싹이 나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가고 그렇게 제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있어 사람의 삶이 빠지면 안 되는 그런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이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시고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가 흔히 <팔복>으로 일컫는 말씀이다. 팔복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가난(헬라어 프토코스)은 절대적인 빈곤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절대적인 빈곤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그런 빈곤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빈곤하게 된 과정보다 다시 일어서기 힘든 지경이 된 가난에 의미가 있는 그런 가난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난함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씀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마음도 가난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 곧 마음과 영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채워 넣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대변된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워서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어지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뭔가를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사람의 그 마음이 가난해지면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앞에서 이 가난함은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가난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상태라는 것은 자신이 그 빈곤을 채울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람 스스로 채운 것이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의 속 심령 안에 어떤 것도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이 저희 것이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공허함, 살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공허하게 하는 '왜 사는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그 공허함이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왕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국의 모든 것으로 자신의 가난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것이 달리 천국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것을 자기 안에 마음껏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공허함, 사람의 심령의 가난함은 원래가 하나님 나라의 의가 채워져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하나님의 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로 다스려지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람에서 비롯된 유흥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것으로 채워질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빈곤과 같이 사람으로는 어떻게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가 채워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가난, 사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사람의 공허함이 원래 채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의로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가 몇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펜데오라는 헬라어는 헬라어 중 가장 극심한 슬픔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애통하고 슬픈 이유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수고한 노력의 결과로서의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와 같이 사람이 자신의 일부로 자신의 사랑으로 여기던 것을 잃어버려서 이제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애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애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 그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연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의미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함은 그 인생의 의미가 없어진 애통함, 그 극심한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돈이나 명예와 같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에 두고 있다가 잃어버린 그런 애통함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사람이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 이 삶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 자신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애통한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알지 못하여 애통한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를 찾을 것이고, 자신이 비롯된 뿌리를 찾고자 할 것이며, 그것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자신으로는 그것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너무 애통한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한 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위로>라는 것은 등을 두드려주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위로는 <가까이 부른다.>는 의미를 가진 팔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부른다는 것은 같은 자리로 부르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리라는 것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는 공간에서의 자리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같은 정체성으로 부른다는 말씀인 것이다.


애통하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알지 못함으로 느끼는 애통함이다. 이런 애통함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극심하게 느껴야 하는 애통함이지만 알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오는 것들이 알고 보면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만한 것이 그렇게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는 보편성과는 다른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 보면 된다. 모두는 위한 복음이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하여 순종하는 모두이어야 하고, 그 순종에 관해서 사람이면 가능한 것이기에 모두를 위한 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것 보다는, 돈이 없는 것이 더 애통한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공허함을 세상의 것으로 채운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음과 같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기(명)가 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인데, 사람이 육신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어 그릇과 같은 자기 안에 세상에서 사람이 만들고 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채우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세상에 있는 재물과 명예에 두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애통해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가까이,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에 부르시지 않는 것이다. 즉 위로함이 없는 것이다.


애통하고 위로하는 것은 육신을 가졌기에 육신에 관한 것으로 애통해할 수 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 사람이 왜 살고,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는 가난함과 그것이 없어 애통한 마음 그것이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부르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존재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에 복음을 전하시면서 그 말씀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성경공부에 있어 성경에 사용된 원어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보편성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누가 읽어도 자신의 말씀이 되도록 말씀하신 것이지, 원어나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알 수 있는 말씀이 되면, 그것은 만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어의 의미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한다. 그 원어가 주는 의미가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언어로 읽어도 하나님을 아는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경영하시기 때문이다.


이 온유라는 것은 헬라어로 '프라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흥분을 진정시킨다는 의미가 있어 진정제의 약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어의 통상적인 용법은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건 정말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온유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정말로 부당하게 취급한 행동의 경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하고, 또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왕이신 이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고 죽이려고 처형한 형틀이 바로 십자가고 그것을 억울하게 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땅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로 단편적으로 정의하면 그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그렇고, 사람이 자신이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어디서든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넓은 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당하게 십자가를 지시는 온유함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 얼마나 넓은 땅을 얻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온유함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죄인에게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이 더 좋고, 말씀의 계시가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했을 때, 신앙 없는 사람을 훈계하려 한다면 그것은 온유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 신앙 없는 사람(땅)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을 얻으려면, 때로 계시가 어두운데 주장하는 것에 의하여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따라가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온유함이다. 


그렇게 한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더 밝은 것인지를 알게 하실 것이고, 어두우면서 밝은이를 끌고 간 사람이 그것을 깨달을 때 자신보다 더 밝고 분명히 알면서 자신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고, 그것을 맞는 것으로 여겨 수고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그런 관계, 곧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온유함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온유함을 아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 얻으신 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시기를 그런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얻는 일이 자신의 기업,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사람 앞에서 더 아는 것을 주장하거나 안다고 모르는 이들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깨달을 때 까지 그들의 주장에 수고하는 희생을 보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하신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일과 기업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인 것이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에 사용된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인데, 이는 신학적 성격이 강한 단어라고 한다. 이 '의'는 신적 본질에 속하는 속성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리고 목마른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의 먹을 것, 사람의 고픈 배를 채우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이 배고픔은 육신의 배고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베고픔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며 육신의 배가 불러진다는 의미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육신의 배가 부르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배부르게 채워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에게 '네가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면 네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목마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문자로 표현된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듯 해야 하는 것이다. 심청전을 문학적으로 연구한다고 심청전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는 것이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것이듯, 성경을 읽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배부르게 채워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본질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즉 그것에 순종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려고 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 '불쌍히 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엘레에몬'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신 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나 알듯이 죄에 빠진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누이 강조하듯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알기 위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대속하신 것이지만,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반복되게 이야기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없다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고, 수학박사가 낙제생에게 수학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런 구조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표현한 긍휼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단지 나보다 안 좋은 형편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긍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긍휼은 나 보다 못한 사람이 나 보다 더 잘난 줄로 알고 나를 가르치고 심판하려 하는 것에 나를 내어줌으로 그 사람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때 까지 수고하는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법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쉬울 것 같지만 무지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것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는 쉬운 것인데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이 있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 힘든 것이다.


어떤 공동체, 무엇을 추구하는 모임에서는 그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앞선 사람이 늘 있고, 그것을 배워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의에 대하여 더 아는 사람이 아직 배워야 하는 사람을 심판하거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나아가서 알 때까지 그 사람보다 더 아는 것이 어린 사람을 위한 수고가 되는 것, 희생이 되는 것 그것이 긍휼인 것이다.


그런 긍휼을 보이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사람이라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것이 청결(헬 : 카다로스)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청결하다는 것은 있을 것이 깨끗한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채워져야 할 것, 그리고 그 채워진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청결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았는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원래 있던 곳(사람 속)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보고 이전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2장, 눅 11장) 즉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것을 채워야 하는가 하는 것이 청결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무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깨끗한 것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셔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우고자 하시는 것이 채워졌을 때 그것이 바로 청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것, 우리 안에 채워졌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청결하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채워져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처음 존재가 누구신가 했을 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온전하게 있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정말로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보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 영상과 이미지가 각인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아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또한 그런 사람을 알아보기에 그런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본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으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본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 대접하였고, 야곱도 에서를 만날 때에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어서,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며, 그런 사람은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이 마음 안에 있어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인생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과 의가 그 사람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러한 것이 온전히 마음속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나오는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잘 아는 바와 같이 평화인데 그 의미는 평화라는 것은 서로 균형이 맞춰진 상태일 때 평화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이후에 '평안하뇨?'라고 하실 때 그 평안이 바로 이 에이레네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러니까 형체가 없으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 형상이란 영어로 image이다. 즉 그것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떠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와 같이 육신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생명(유전자)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표현되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시고 동일한 육신을 가지셨기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안이고 화평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평안이 되는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화평이고 평안인 것이다. 에이레네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에 나오는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티오코'라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뜻을 따르다,' '좇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는 것은 '의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떤 핍박이 수반되어도 따라 간다는 것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그 의를 옳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이 탈북하여 남쪽으로 오는 것을 의로 표현해 본다면, 사람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안에서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탈북하여 남쪽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탈북 과정도 의를 좇아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들은 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다. 즉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저희의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의인 민주주의를 좇아 온 사람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흔히들 핍박이라고 하면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를 따라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곤고함이라는 것은 핍박이 맞지만, 예를 들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예수 믿으라고 떼를 쓰다가 그 사람들이 한 소리 하는 것은 핍박이라 할 수 없다. 그건 핍박이라기보다 자초한 일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벌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또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 의를 좇아가면서 겪는 곤고함은 수고와 희생의 곤고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아니라, 의를 따라가다 보니 감당하는 곤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곤고함이 바로 다른 사람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지, 그런 원인인자 없이 당하는 곤고함, 그리고 다른 사람을 능동적으로 자극함으로 받는 반사작용을 핍박이라 하면 곤란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핍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핍박을 받으셨는데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잡히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군사들로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혀서 처형당하신 그런 핍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핍박이다. 그것이 의를 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왔다고 하니,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 말씀으로 사람의 마음을 시끄럽게 능동적으로 자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겪는 육신의 수고와 비난과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과정이 표준이다. 그렇게 할 때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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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


◯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서 말씀하실 때 나아온 제자들을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이다.

소금은 모든 요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소금이 없으면 맛을 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금은 그 짠맛으로 인해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한다.
그런데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소금이 가진 형태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소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소금이 가진 하얀 결정체로서의 모양은 소금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소금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이 소금인 것은 소금이 가진 짠 맛 때문이다.
그 짠맛은 소금이 결정 상태로 있어서는 절대로 낼 수 없다.
녹아서 그 형태가 없어질 때 그 때 비로소 소금이 소금다워 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고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면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소금이 짠맛은 없고 그 결정체인 모양만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없이 신앙의 형태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형식은 녹아 없어지지만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육신의 삶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잘 아는 이야기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소금이 녹는 것과 같은 육신의 소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말씀하신 <착한 행실>과 연관이 있다.
소금이 녹아서 맛을 내는 것은 삶을 투자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비와 투자가 착한 행실이 되었을 때 소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착한 행실은 공통된 가치관이 아니다.
그러니까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가치관에서 볼 때는 착한 행실이고 어떤 가치관으로 볼 때는 극악무도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살폭탄 테러는 시도하는 가치관에서 보면 순교지만, 당하는 쪽에서 보면 극악무도한 테러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착한 행실은 누구의 관점에서 볼 때 착한 행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게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착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착한 행실로 여기시는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삶이라야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그런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그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맛인 것이다.
그 맛, 즉 소금이 녹아서 형태가 없어지듯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맛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것을 착한 것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맛으로 여기는 것, 즉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자신을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삶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삶의 표본이시기에 그 삶을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를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소금이 가진 그 결정의 모양이 짠 맛을 가진 것이 아니듯,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과 방법과 형태가 하나님 의의 본질이 아니다.
소금은 그 모양이 어떠해도 짠 맛을 내듯, 사람의 삶도 생긴 것이 어떻던, 어떤 행함으로 공로를 세우든 그런 것 때문에 짠맛이 나듯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기신 존재 목적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짠 성분인 염화나트륨과 같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또 부패하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포함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소금과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라는 맛을 찾기 원하시고,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 또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등불을 감추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고 하셨다.
(영어성경에서는 촛불을 감추지 않고 촛대에 꽂는다고 함)
이것은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전해지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소금과 같은 기능, 빛과 같은 본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 능동적이다.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사명감이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능동적 형태를 한정하는 말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간과하거나 부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의 근간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와 또 말씀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자.
서울역에 가서 전하는 것은 너무 뻔한 것이라 빼 놓더라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너무 능동적인 열심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냥 길가는 사람, 하나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마구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적으로 전하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들으려 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싶고, 또 필요로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았고, 어떤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자신을 보고, 또 상관이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볼 때, 정말 저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 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빛을 높이는 것이 빛이 높이 서서 복음을 능동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저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방향만 바꾸면 누구나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낮은 땅, 사람들이 무시하는 그런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이건 겸손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애굽의 가치관이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그러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출애굽이고, 그것이 인간의 자리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 인간의 자리가 바로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로 가는 것이다.
즉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천한 동네, 그리고 사람의 낮은 자리가 바로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회복하는 것, 제 자리를 찾아 가는 것, 그것이 자리를 벗어난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자리가 낮다고 하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낮은 자리이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자리가 영광스럽고, 죽음 가운데서도 살려낼 정도로 존귀한 자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치관은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귀함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낮은 자리에서는 외칠 것이 없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과 갈릴리에서 사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있었기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이니 병을 고치신 것이다.
이는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등불이 스스로 등경 위로 올라가듯 능동적인 성과를 내려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며 소란을 떠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는 말씀으로 무조건 전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그런 사람은 시미청전을 문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사람이 때와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라는 것이지, 시간 정해서 전도하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든 내라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능동적이고 주입식이 아니라, 보고 배울 것이 있게 하므로 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NCIS라는 미드를 아주 좋아한다.
그 안에 주인공인 '깁스'라는 보스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렇다.
극중에서 그는 부하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보고 배우게 한다.
또 실수를 지적질도 하지 않는다. 알고 고칠 때까지 자신이 대신 수고한다.
바로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해서 그 미드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보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은 인식이라 했다.
즉 자신에게 무엇을 인식하게 하는 것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되었다면 그 본이 된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빛,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인식하게 해서 어떤 세계를 알게 한 그 빛, 그 사람의 삶을 모든 집을 밝히듯이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