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피(寶血) - 대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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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내용 중 일부는 미국의 과학자들이 순수한 금가루를 맑은 물에 풀었을 때 갑자기 그 물의 색이 붉게 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과학자들이 보면서 모세가 금송아지를 불에 태운 후에 가루로 만들어 물에 풀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 것이며, 그 결과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한 죄에 대한 용서라고 합니다.

창세기 4:11
이 그 입을 벌려 네 에서부터 네 아우의 를 받았은즉 네가 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דָּם 스트롱번호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 명사, 남성 피, 신 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 2. 명사, 남성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 3. 명사, 남성 포도즙, 창 49:11, 신 32:14.
    • a. 명사, 남성 복수 דָּמִים
    • b. 명사, 남성 피, 살해, 시5:7(6), 26:9, 55:24(23),사9:4(5)
    • c. 명사, 남성 살해, 살인죄.
  • 문법설명 /  연계형 דַּם, 어미활용 דָּמוֹ
  • 관련 성경 /  피(창4:11, 왕하3:22, 겔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창세기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마태복음 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 무죄한 피 - 사본에 따라서는 '의로운 피' 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같은 변형은 전체 문맥과 잘 조화를 이룬다. 즉 19절절에 '의로운 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수께 사용되고 있고, 24절에도 '이 의로운 사람의 피'라는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과 '무죄한 피'와는 동일한 맥락을 이룬다. 한편 '피'는 생명의 요체로서 특히 본문에서는 사람의 전존재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무죄한 인격'이었던 것이다.

󰃨 죄를 범하였도다 - 유다는 무죄한 죄를 판 자신의 죄를 뒤늦게 고백하나, 하나님께가 아니라 공범자인 산헤드린에게 했다. 따라서 이 자인(自認)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한 인간적인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 고전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참으로 매정한 결별 선언이다. 즉 이것은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선언인 것이다.

󰃨 네가 당하라 - 똑같은 문구가 24절에 다시 한번 나온다. 여기서 '당하라'는 헬라어 '와세이'(*)는 강한 의지가 내포된 명령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가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피(하이마. haima)  α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129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haima ]
  • I.  피.
    • 1. [문자적으로]
      • a.  사랑의 피, 요19:34. ῥύσιςαἵ- ματος: 혈루증, 막5:25, 눅8:43.
      • b.  동물의 피, 히9:7,8,25. ζᾠων τὸ αἷ: 짐승의 피, 히13:11.
    • 2.  [상징적으로]
      • a. 생명의 거처로서의 피, 마23:30, 27: 4,6, 행22:20, 롬3:15, 히12:4, 계16:6.
      • b. 대속의 희생물로서의 피와 생명, 특히 대속의 의미로서의 예수님의 피, 롬3:25, 엡1:7, 히9:12, 요일1:7, 계1:5.
    • 3. [하늘에 재앙의 표시로 나타나는] 붉은 색깔.
      • a.  불과 연기와 함께, 행2:19.
      • b.  우박과 불과 함께, 계8:7.
      • c.  달의 색깔, 행2:20.
  •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생명의 피와 예수님의 보혈

무엇이 생명인가?
또한 과학적으로 생명의 속성은 무엇인가?
생명체와 무생물의 차이는 무엇이며, 다른 생명체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본 논문에서는 이들에 대한 과학적인 현상을 논의할 것이다.
기독교와 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힘드셨던 일중에 하나는 아마도 자신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준다는 말을 아마도 생명을 잉태하고 분만하는 산모들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준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본 논문에서는 피의 과학적인 기능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신앙적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I. 본문

생명이란 무엇인가?
대학에서 생명과학 과목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기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생명체는 다음과 같은 과학적인 특징이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는 동물, 식물, 미생물에게 모두 해당되는 사실이다.

첫째,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된 조직이 있고,
둘째, 에너지를 사용하여 물질대사를 하며,
셋째, 생체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으며,
넷째,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다섯째, 가장 중요한 생명체의 특징은 생식에 있다.
즉 자손을 증식시키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특징이며, DNA와 같은 유전정보가 대대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그 답은 생명체를 창조하신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으로는 육체, 혼 등을 말하며,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영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생명의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물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창조(bara.  영어로는 create)라는 동사를 3번 쓰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 그럴까?
창조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를 만들 때에 이를 창조라고 한다.
예술가가 창작물을 만드는 것은 창조활동이지만, 목수가 나무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창조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하나님의 창조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쓰신 것 같다.

첫 번째로는 제1일에 천지 및 물질을 창조하실 때 사용되었으며(창세기 1:1),
두 번째로는 제5일에 물고기와 새와 같은 동물 혹은 짐승을 창조하실 때 사용되었으며(창세기 1:21),
세 번째로는 제6일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창세기 1:27).

신기하게도 제3일에 식물은 만들다(assa; 영어로는 make)라는 동사를 쓰셨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 식물이나 미생물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란다.
(명색이 생명과학자인 제가 이러한 주장을 펼 이유가 있는가?)
또한 이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창조속성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1일에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공백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물질의 창조’이었으며, 제5일은 ‘혼(혹은 의식)의 창조’이고, 제6일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의 창조’를 뜻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체와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명의 성경적 정의는 '피”의 유무에 달려 있다.
혼 즉 의식, 느낌, 인지 및 지각능력이 있는 동물은 대체로 이들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과 피(혹은 이의 유사체)가 흘러 몸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혼을 가진 존재이다.
식물이나, 미생물 혹은 소위 이야기하는 하등동물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며, 물론 이 생명체들도 하나님의 창조물임은 이미 이야기 한바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짐승을 만드실 때에 혼을 창조하심으로 다른 생명체와 차이가 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인간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욥기 12:10).
본인은 이 세 가지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이 다 그의 에 있느니라.
In his hand is the life of every creature and the breath of all mankind.

그렇다면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는가?
하나님을 주권자로 알아볼 수 있는 ‘영의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그와 교감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이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생명으로 오셨으며, 우리 죄를 씻기 위해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보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영은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의 영”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와 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힘드셨던 일중에 하나는 아마도 자신의 육체와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피를 나누어준다는 말을 생명을 잉태하고 분만하는 산모들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준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육체와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모든 생명은 피에 있기에 죄로 죽은 생명을 살리려면 누군가 그 죄인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것이 곧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면 정결한 짐승을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며 죄를 고백하고, 제사장은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 시키고 그 짐승을 죽여 그 피를 뿌려서 죄를 정결케 하였다.
즉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어야하나 그 사람의 죄 대신 짐승이 피 흘려 죽어 죄로 죽을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며,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과학에서 피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동물의 피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혈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적혈구는 O2를 허파에서 받아 말초세포까지 나르는 역할을 한다.
그 뿐 아니라 세포에서 생긴 노폐물인 CO2와 H+ 이온을 나르는 역할을 한다.
백혈구는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면역작용을 하는 것이다.
혈소판은 피부 등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리게 되면 즉시 피를 응고시켜 우리 몸을 병균이 침투하지 못하게 보호하고 아까운 피가 흘러 없어지는 것을 막아주며 상처가 치유되도록 도와 준다.
혈장에는 항체가 있어서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며, 각종 영양분을 세포로 나르고, 세포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게 해 주며, 몸의 완충용액으로 pH, 무기염류농도, 체온 등을 적정하게 유지해 준다.
복잡한 과학이야기를 쉽게 정리해 보자.

첫째, 생명의 양식인 산소와 영양분의 공급
둘째, 노폐물을 씻어냄
셋째, 몸 보호 및 항상성 유지
넷째, 병균의 대적 및 상처의 치유

본인이 십 수년 동안 피에 대해서 강의를 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다.

첫째,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시면서 돌아가셨기에 우리에게 새 생명을 공급하셨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내신다.
셋째, 예수님이 보혈이 우리의 육체와 혼과 영을 덮어주시기에 우리 몸이 보호되고 유지된다.
넷째,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병이 들었을 때 치유 혹은 사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대적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죄를 깨끗이 사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 하와가 범죄 했을 때 그들은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지만 하나님은 동물을 잡아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 몸과 죄를 가리워 덮어 주셨는데 동물이 아담 하와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생명이 최초로 희생된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고~~~~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의 종교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했다.
예수님의 보혈로써 어두움의 세력을 무찌르고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는 사탄이 우리의 죄를 근거로 하여 우리 양심에 송사할 때 물리치고 대적하는 능력의 방패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죄에 대하여는 사함을 받은 자요 또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산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 2절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과 같이 허다한 예수님의 증인들도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고 죄인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들의 피 흘림은 복음들고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어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보혈과 믿음의 증인들의 피의 역사 위에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상기할 때 복음의 귀중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며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다.

(주) 이 내용의 일부는 ”30가지 테마로 본 창조과학”(생명의 말씀사 간, 2010)과 '창세기의 과학적이해”(한국창조과학회/생명의 말씀사 간, 2010)에서 발췌됨.
* 출처 - 2012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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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피(基督-血, 라틴어: Sanguis Christi, 영어: Blood of Christ)는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를 말하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보혈
(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동방 정교회 등에서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한다. (히브리서 9장 11-22절)

  1.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 (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2.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14절)
  3.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 (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미사 성제 때 집전 사제의 축복 기도와 동시에 성령의 힘이 내려와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영과 신성이 깃들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빵과 포도주로 실체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할 때에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한 말에서 “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하게 “상징한다.”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2세기의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35~110)는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나는 하느님의 빵을 갈망한다. 이 빵은 다윗 가문의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다. 나는 하느님의 음료를 원한다. 이 음료는 썩지 않는 사랑인 그분의 피다.”

그리스도의 성혈에 대한 신심은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기점으로 발전하였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에게서 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득 찬 생명의 샘의 은총을 부각시켰다.

지극히 고귀한 그리스도의 성혈 호칭 기도문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영원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사랑과 자비의 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심을 열어 쏟아주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매 맞으실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가시관을 쓰셨을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늑방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악의 세력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직자들의 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수도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회개하는 이의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짐진 이들의 휴식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불신을 신뢰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미움을 화해로 바꾸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갈등과 고뇌하는 이의 위로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임종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마음의 안식과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영원한 생명의 증표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모든 영광과 흠숭과 찬미를 받으셔야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오, 주님! 당신의 거룩한 성혈로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 기도합시다.

하느님,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혈을 통하여 당신은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 자비로 이루신 구원을 저희 안에 견고케 하시어 저희로 하여금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구원의 열매를 충만히 체험하게 해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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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물(代贖物) ransom

예수(Jesus)가 십자가(十字架)의 보혈(寶血)로 만민(萬民)의 죄(罪)를 대신(代身) 씻어 구원(救援)한 일.
대속(代贖) : 대신할 대, 속바칠 속  /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욥기 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시는 근거가 언급된다. 영원한 사망의 '구덩이'(22절)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것은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대속물을 보시고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속물'(*, 코페르)에 대해서는 '덮다', '화해하다', '대속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파르'(*)에서 파생되었으며, '구속하다'를 뜻하는 '파다'(*, 개역성경은 '건져서'로 번역함. 시 49:7 참조)와 연관된 속량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대속의 개념은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제사 의식과 관련이 깊다(레 1:4;4:4;16:21).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범죄에 의한 처형이 있기 전에 그 몸값을 지불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 수단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그를 놓아주라'(개역 성경은 '건지라'로 번역함)는 하나님의 명령이 '대속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는 빛이 된다.

대속물(3724)

כֹּפֶר 스트롱번호3724

1.

마을

2.

역청

3.

고벨화

발음 [ kôpher ]
어원
3722에서 유래
구약 성경
13회 사용
  • 1.
    명사, 남성 마을, 부락, 촌락, 삼상6:18
  • 2.
    명사, 남성 역청, 송진, 창6:14.
  • 3.
    명사, 남성 고벨화[작은 관목], 아1:14, 4:13.
  • 4.
    명사, 남성 속전, 몸값, 구속의 대가, 출21:30,30: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속죄금(출21:30), 속전(출30:12, 민35:31,32), 마을(삼상6:18), 대속물(욥33:24), 보상(잠6:35), 고벨화(아1:14), 뇌물(암5:12). [동]칠하다(창6:14), 갚다(삼상12:3).


대속물
λύτρ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3083

1. 속전.  2. 석방금.  3. 마 20: 28
발음 [ lütrŏn ]

어원  / 3089에서 유래
  • 1.  속전, 석방금, 마 20: 28, 막 10:45.
  • 관련 성경  /  대속물(마20:28, 막10:45).














표징을 보여주옵소서(삼상 14:8-10, 사사기 6:17,


시편 86:17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Give me a sign of your goodness, that my enemies may see it and be put to shame, for you, O LORD, have helped me and comforted me.






사무엘상 14:8-10
요나단이 가로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萬一(만일) 이같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萬一(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表徵(표징)이 되리라 하고.


사사기 6: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산 자의 하나님



1.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2. [마가복음 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3. [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마태복음 22:32)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잘 한다는 것은 주로 사람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지만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평가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하나님, 이삭하나님, 야곱하나님이니라 모세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사도행전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예수님과 논쟁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다윗 왕 때 대제사장의 후손들로 덕망 높은 명문가였지만 신앙이 타락해 영도, 부활도 부정하며 ‘사람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행 23:6-11).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지자 예수님께 도전해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7형제가 있는데 맏형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면 형수는 유대 율법에 따라 동생의 부인이 될 텐데, 그런 식으로 7형제가 모두 형수와 결혼했다가 죽는다면 그 형수는 부활 때에 7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 22:27-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부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다시 꺼내서 하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을 신봉하던 자들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놀라서 감히 더 이상 예수님께 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아브라함은 무려 2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2천 년이 흘렀으니 아브라함의 머리털까지 다 삭아 없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이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더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산 자’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언제 ‘산 자’가 됐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84세 때 장막에서 이끌어 내셔서 “네 몸에서 난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을 때입니다. 자신도 늙고, 아내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자식 얻을 소망이 없어지고 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100% 믿었습니다(창 15:6). 그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죽은 자’였던 그가 부활의 이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산 자’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벨이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 지금까지 말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히 11:4).
믿음은 우리가 말씀을 믿고 언약을 믿을 때 우리 속에서 요동합니다. 날선 검같이 예리해서 영과 혼과 육까지 찌를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받은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순간 아브라함은 부활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마 27:50-53, 눅 20:38).

창세기에는 세 조상이 등장합니다.

첫 조상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지만 불순종의 조상, 사망의 조상입니다.
사망과 고통, 괴로움, 눈물, 한숨, 우수사려를 다 가져다 준 ‘죽은 자의 조상’입니다(롬 5:12, 6:23).

아담의 10대손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사람입니다.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창 6:7-13, 1:28).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담과 똑같은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9:1). 그러나 둘째 아들 함으로 말미암아 그 축복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10대가 지나 노아의 10대손 아브라함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2천여 년 만에 이 땅에서 잊어버렸던 믿음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아무리 애써도 일이 안 되다가 도와줄 누군가를 만나면 주위에서 “야, 이제 너 살았다. 그 사람은 널 도와줄 거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분명 죽음의 조상인 아담의 후예였지만 믿음으로 살아나 새로운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불신과 사망, 무덤, 눈물, 고통, 괴로움, 근심의 조상,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이 어영부영하는 인생의 조상이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조상입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똑같은 축복을 받습니다(갈 3:7-9).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대속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생명이 있다는 보혈의 공로를 믿는 부활 신앙의 원리입니다(롬 4:3-25, 8:1-2, 벧전 1:18, 25, 히 9:22, 레 17:11, 마 20:28, 롬 6:1-23, 창 15:6-7).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브라함같이 말씀의 언약을 믿고 있습니까. 부활의 신앙을 믿지 못하면 모두 거짓입니다. 믿지 못하면 정직하지 못합니다. 성실하지 못합니다. 욕심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빌 2:5). 남을 싫어하고 저주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누가 더 좋고 누구는 싫고,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향해서 구원의 반열에 세우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말씀했습니다. 한번 성을 내면 공든 신앙의 탑이 다 무너집니다(약 1:20). 하나님의 뜻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90세가 다 된 나이에 ‘네 몸에서 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믿은 아브라함처럼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될까?’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사업도 모험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고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산 자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지만 믿고 씨를 뿌렸습니다. 믿지 않는 블레셋이 뿌린 씨는 바싹 타 죽었지만 이삭은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믿고 판 우물에 샘물이 터졌습니다, 믿지 않는 블레셋이 판 땅에는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말씀대로 하늘의 별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사람은 별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단 12:3).

성도 여러분. 산 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입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야 일어나라!”,
“다비다야 일어나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言約)’이 말씀 언(言) 자를 쓰지 않습니까.
말씀이 왔을 때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34-38절 말씀을 볼 때 아브라함은 성령을 따라 부활을 약속받는 산 자의 조상이 됐습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성령으로 살아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요 5:24-25).
그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자의 무덤에서 산 말씀을 통해 다시 새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도 자신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삭,야곱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들은 뒤 이 3대의 신관(神觀)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비로소 바로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할 때는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죽은 태(胎)’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경계를 유월절 때처럼 뛰어넘어 버리셨습니다. ‘산 태(胎)’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계 앞에 막히지 않습니다. 통과해 넘어가 버립니다. 사라는 자식이 있겠다는 하나님의 천사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장막에서 몰래 웃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사라가 웃은 것을 알고 “네가 왜 웃느냐?” 물으니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사라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을 받고 있습니다. 부활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죽지 않고 살아서 홀연히 변화됩니다. 이 말씀이 100% 믿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서, 그 터전 위에서 죽지 않고 사는, 변화의 말씀을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을 잡아먹는 놀라운 말씀의 능력과 권세, 마지막 비밀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입니다.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립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세상이 다 지나가기 전에 이룩한다”고 하는 마태복음 24:34-35 말씀을 꼭 믿으십시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하신 빌립보서 3장 21절 말씀을 믿으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산다.” (요 11:25-26) 하신 말씀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결론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려고 신앙생활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염라대왕처럼 죽은 영혼이나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데리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죽은 하나님이 아닌 산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신 5:26, 수 3:10, 시 42:2, 렘 10:10, 호 1:10, 고후 3:3, 딤전 4:10, 히 3:12). 하나님과 간격을 두지 마시고 기차들이 연결되듯 하나님께 바짝 붙어서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를 부활의 영으로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4-38)

무엇으로 살아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리고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 있습니다.
말씀으로 약속된[言約]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살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한 가지 남은 것은 살아서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 되시고 우리는 신부입니다 (계 19:7-8). 예수님은 만방에 영원히 빛날 선물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 기다리십니다. 그 결혼식에 가기 위해 입성할 때 천군 천사가 우리를 영접합니다. 죽음도, 아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는 세계입니다. 세상 고생은 한 순간에 다 잊어 버립니다(계 21:4). 그날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무슨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욕심이라면 기도할 욕심, 은혜 받을 욕심뿐이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어디 있든지 낙심하지 말고 “나는 산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용기 백배해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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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言霊. 고토다마)은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믿어지는 신앙으로, 에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영적인 힘을 말한다.
언혼(言魂)이라고도 쓴다.

소리를 내어 말한 언어가 실제 현실에 무언가 영향을 준다고 믿으며,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불길한 말을 하면 흉사가 일어난다고 여긴다. 때문에 축사를 할 때 절대로 잘못 읽는 일이 없도록 주의 받는다. 오늘날에도 일본에 많이 남아있는데, 결혼식 등에서 사용을 피하는 단어들(떠나다, 자르다, 돌아가다 등)도 언령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일본은 언령의 힘에 의해 복이 찾아오는 나라라고 하여 "언령으로 행복해지고 번영하는 나라"로 불렸다.

이러한 신앙이 생겨난 원인은, 고대에는 "말(言:고토)"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고토)"이 동일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한자가 도입된 당초에도 말과 현실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면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여진 부분이 있다.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을 "말을 입에 올리다(言挙)"라고 하는데, 그때 그 말이 자신의 교만함에 의한 것이었을 경우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 나오는 야마토타케루이부키 산에 오를 때 산신의 화신과 만났는데 야마토타케루는 그것을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길에 퇴치하겠다고 “언급”하였다. 그것이 타케루의 자만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타케루는 신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다. 즉, 언령사상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단순한 애니미즘적 사상을 넘어서서, 바른 마음가짐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타 문화권에서도 언령과 비슷한 사상이 발견된다. 구약성경의 "רוח הקודש",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서 '성령, 영'으로 번역되는 프뉴마(Πνεύμα) (동사 “불다:πνεω”를 어원으로 하며, 숨, 혹은 거대한 존재의 숨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가 해당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가 “바람은 자신이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 … 성령으로 난 사람도 모두 이와 같다”라고 언급한 구절에서 '바람'과 '성령'이 동일한 구절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소리나 말은 불길한 영혼을 내쫓고 자리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한다고 여겨진다. (예:신토에서 박수를 치는 것.) 이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제례, 축제, 악령퇴치 때 행해지는 것이다.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치는 큰북, 카니발에서의 피리, 종, 큰북, 중화권의 춘절에 쏘는 폭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람의 말도 주문이나 조서의 형태로 그 영적인 힘이 이용된다. 다만 그 근본이 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제각기 다른 견해가 있다. 예를 들어 “진리란 반석과 같은 것으로 그 위에 교회를 지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진실을 알고 싶다면 거울에 너 자신을 비춰보아라, 그로써 모든 것이 명백해 질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을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의견이 있고, 혹은 그 “현실” 자체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나 시대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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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

전 세계적으로 '말에 힘이 있다.'는 개념은 역사가 기록되기 한참 전부터 이어진, 종교의 역사와 함께한 보편적인 개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식의 속담이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어떤 문화권이건 민간신앙에 있어서 주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만 보아도 언령이라는 것이 인류 보편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미신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배척할 것 같은 이미지인 기독교에서도 '언어 자체에 힘이 있다'는 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당장 창세기에서만 봐도 빛이 있으라 하고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묘사할 정도이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고 "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었다"고 묘사하며, 이 밖에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야훼의 권능을 두고 '말씀'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전통주의 가톨릭 진영에서는 서방 교회의 표준 언어인 라틴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까지 하기도 한다. 한편 불교힌두교 등 인도 계통 종교에서는 만트라(진언)라는 개념을 정의하여 특정한 영적/물리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산스크리트팔리어 낱말이나 발음, 구절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개념은 민간사상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한민족의 경우만 해도 고조선 시절부터 말을 조심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호랑이를 "산군님"이라고 부르거나 도둑을 "밤손님"이라 부르는 등 그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 제일 먼저 호칭을 피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비슷한 의미에서 고대 중국에서는 아예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피휘라는 개념을 썼고, 그렇게 '삼가는 뜻을 표한다.'는 의미가 맞아떨어져 한반도에서도 줄곧 써먹었다.[1]

[1] 슬라브어파와 게르만어파에서의 도 마찬가지다. 다른 단어로 돌려 말하다가 아예 곰을 가리키던 본래 단어가 실전되어 버렸다.[2] 가령 노블레스에서 라이제르'꿇어라' 한 마디로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과 상대의 정신을 연결시켜 지배한 뒤 명령을 내리는 것이므로 언령이 아니다. 제시카 존스킬그레이브(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역시 범위 내에서만 자신에게 있는 특수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통제할 수 없는 강박을 일으킬 뿐, 위와 같은 정신 조작에 가깝다.[3] 금각은각형제의 호리병 앞에서 대답을 하면 호리병 안에 빨려들어가지만, 말은 어디까지나 트리거에 불과하다.[4] 말한 게 거꾸로 된다.[5] 작중에서 스틱의 힘을 이용해 말하는 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게 한다. 단, 말을 끝까지 해야만 발동된다는 약점이 있다.[6] 언령 마법을 쓸 수 있는 유이한 등장인물.[7] 단순히 화술이 뛰어난 걸 넘어서 그의 말이 권능이나 다름없기에, 그의 언변에 다들 무의식적으로 경계심을 풀고 따르게 된다.[8] 언령 실체화.[9] 소리를 실체화시키거나, 말의 의미를 구현시키는 등 언령과 유사한 능력을 보인다.[10] 저주 한정이라 주언(呪言)이라고 칭한다.[11] 이누마키의 주언을 모방한 바가 있다.[12] 본래는 화술이 뛰어난 정도에 불과하지만, 생각한대로 능력을 구현시키는 회원들을 상대로는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능력을 강화시키거나 봉쇄하는, 그야말로 말에 담긴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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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풍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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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붓다

[이처럼 일본 신도의 신들과 신도적 세계관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일본’이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신예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1973~현재)는 흔히 ‘일본의 램브란트’ 혹은 ‘빛의 작가’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절절하면서 한없이 부드럽고 또 잔혹하기까지 한 배경미술의 모노노아와레적 서정성과 함께 특히 강렬하고 세밀하기 그지없는 빛의 상징을 통한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 그는 실제 풍경을 사진 찍어서 리터칭을 통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든지, 독백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을 선호한다. 그가 최근에 내놓은 <너의 이름은 (君の名は, 2016)>은 <초속5센티미터>라든가 <언어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소설도 쓰고 애니메이션도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6년 8월 일본에서 개봉된 이래  일본영화를 통틀어 역대 2위의 흥행기록을 올려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이목을 모았다. 2017년 1월 한국에서도 공개되었고, 부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장편부문 우수상을 수상받기도 했다. 2018년 2월 까지도 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 제1위를 마크하고 있다.

  일본에서 개봉되기 두 달 전에 동명 소설이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에서 출간되어 영화 공개시점까지 매출 50만부를 돌파하고 2016년 문고부문 1위의 매출 기록을 올렸다. 소설과 영화는 스토리상의 큰 차이는 없지만 화자가 조금 다르다. 소설판은 다키와 미쓰하의 1인칭 시점만으로 서술되어 있는 데 비해, 애니메이션판은 3인칭 시점이다. 이 밖에 가노 아라타(加納新太)가 쓴 가도카와 스니커문고(角川スニーカー文庫)판 소설도 있다. 여기에는 신카이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 3개가 추가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소설 <너의 이름은>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다. 처음에 혜성이 낙하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상적인 마을 이토모리에 사는 여고생 미쓰하는 미야미즈(宮水)신사 가문에서 태어난 무녀이다. 그녀와 도쿄에 사는 고교생 다키는 꿈에서 몸이 서로 바뀌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고 둘은 서로가 남긴 메모와 일기를 통해 상대방의 인생을 알아 나가지만,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몸이 바뀌지 않게 된다. 그러자 다키는 자신이 체험한 이토모리 호수 마을의 풍경화를 여러 장 그린 후 어딘지도 모르는 그곳을 찾아 떠난다. 그의 손목에는 언제나처럼 부적 실매듭이 둘러져 있다. 하지만 언제 누구한테 받은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던 때 우연히 들른 라면집 주인이 이토모리 마을 출신이었는데, 그는 3년 전 이토모리 마을이 혜성 ‘티아마트’의 운석 재해로 전체 주민 1500여 명 중 500여 명이 죽고 나머지도 점차 마을을 떠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준다. 운석은 축제 중이던 미야미즈신사 부근에 떨어졌고, 그곳은 원래 있던 이토모리 호수 근처였기 때문에 내부에 물이 흘러들어 하나의 조롱박 형태의 새로운 호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다키는 휴대전화에 입력해 놓았던 미쓰하의 일기를 불러오지만, 그 글씨들이 다키가 보는 앞에서 모두 지워져 버린다. 도서관에서 찾아낸 관련 책자에서 다키는 미야미즈 히토하(82세), 미쓰하(17세), 요쓰하(9세)가 모두 사망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다키가 미쓰하의 구치가미자케(口噛み酒)를 마심으로써 둘은 다시 몸이 바뀌고 순간적이나마 황혼녘 때 극적인 재회를 한다. 그 직후 미쓰하의 몸으로 바뀐 다키는 마을 이장인 아버지를 설득하여 재앙을 피한다. 5년 후 다키와 미쓰하는 모두 상대방의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우연히 도쿄에서 만나 서로 이름을 묻는다.

  이 <너의 이름은>은 내가 아는 한 일본 신도의 핵심을 가장 잘 묘사한 서브컬쳐 작품이다. 몸이 바뀐다는 중심 모티브 자체가 몸에서 혼이 빠져나온다는 신도적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새로 즉위한 천황이 최초로 행하는 추수감사제인 대상제(大嘗祭, 다이조사이)에 앞서 행해지는 진혼제(鎭魂祭)는 혼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안정시키는 의식을 가리킨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오나무치(大國主神) 신화에서는 스쿠나히코나(少彦名)가 바다 저편에서 빛을 발하며 다가와 자신을 모시면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오나무치의 행혼(幸魂)・기혼(奇魂)’이라고 밝힌다. 이는 혼과 몸이 분리될 수 있다는 관념이 투영된 신화라 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에서 주인공의 혼이 자기 몸을 빠져나와 상대방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발상의 바탕에는 이와 같은 일본의 전통적 관념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런 몸의 뒤바뀜에 대해 소설판의 다키는 흥미롭게도 “인격이 서로 뒤바뀐다는 일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경험이었지만, ‘나라는 존재로부터 잠시 동안 멀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일종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셈이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우리나라 무속의 경우처럼 한(恨)을 ‘풀어내는’ 자유가 아니라 인도 요가의 경우처럼 ‘묶어내는’ 자유에 속한다. 실제로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는 묶는 것을 뜻하는 일본어 ‘무스비’(結び)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야미즈신사의 여궁사인 미야미즈 히토하는 이 무스비의 의미에 대해 손녀딸 미쓰하와 요쓰하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땅의 수호신을 말이다. 옛말로 ‘무스비’라고 부른단다. 여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지...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전부 같은 말을 쓴단다. 이 말은 신을 부르는 말이자 신의 힘이란다. 우리가 만드는 실매듭도 신의 솜씨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지...한데 모아서 모양을 만든 후에 꼬아서 휘감고, 때로는 되돌리고, 끊기고, 또 이어지고, 그것이 실매듭. 그것이 시간. 그것이 무스비...물이든 쌀이든 술이든, 무언가를 몸에 넣는 행위 또한 무스비라고 한단다. 사람 몸에 들어간 것은 영혼과 이어지는 법이지. 그러니 오늘 올리는 제사는 말이다. 미야미즈 가문의 핏줄이 몇 백 년이고 지켜온, 신과 인간을 단단히 이어주는 아주 소중한 전통이란다.” 

  “신이란 말이다, 관계를 의미한단다. 말은 사람과 사람을 엮지. 말 자체는 신이 아니지만 말에 의해 엮이는 마음 자체는 신이 되는 거야. 주먹밥은 신이 아니지만 쌀을 만든 땅과 물, 그리고 쌀을 기르고 수확한 사람과 쌀로 밥을 지어 주먹밥으로 만든 사람, 나아가 그 주먹밥을 받아서 먹는 사람을 모두 이어주지. 주먹밥으로 이어지는 그런 관계가 신이라는 뜻이지. 꿈이란 말이다, 평소와 다르게 어디인지 모르는 장소에서 상식을 벗어난 연을 맺는 일이란다. 그것도 ‘무스비’라고 부를 수 있는 게지.”

  단적으로 말해 무스비는 신(神)이다. 《고사기(古事記)》는 무스비를 원초적 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신으로서의 무스비는 모든 관계성이자 시간이고 언어이며  실매듭이면서 동시에 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과 실,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 몸과 영혼을 연결시켜 주는 신의 힘 그 자체이다. 이 중 시간과 신을 동격으로 여기는 관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관계성을 신적인 무스비로 여기는 관념은 지극히 일본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간인(間人)주의라든가 장(場)의 윤리, 역(役)의 원리, 세켄(世間), 화(和)의 원리와 같은 일본문화코드를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신을 언어와 연관시키는 발상이다. 사실 고대 일본인은 언어와 사물 사이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여 말 속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었다. 이를 ‘언령(言靈)신앙’이라 한다. 통상 신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구성에 관여하는 근원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신으로서의 무스비를 언어와 동일시하는 위의 관념은 지극히 라캉적이다. 라캉은 언어야말로 그가 상징계라고 이름붙인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구성을 결정짓는 근원적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너의 이름은>이 표현하는 세계는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무스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미쓰하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같은 신을 모시는 이토모리 마을의 오래된 미야미즈신사 집안의 손녀딸이다. 할머니가 신사를 지키는 궁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미쓰하와 요쓰하는 마쓰리 때마다 무녀로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신악무(神樂舞)를 추는 등 주역을 맡는다. <너의 이름은>의 중심 무대인 미야미즈신사는 대대로 여자가 이어받기 때문에 미쓰하는 언젠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신주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신사는 실이나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신의 힘을 ‘무스비’로서 섬기고 있으며, 신체(神體)는 이승과 저승,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장소로 여겨진다. 혜성 티아마트가 떨어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 제신의 이름은 미야미즈 가문의 조상신인 시토리노카미다케하즈치(倭文神建葉槌命)로 별칭 아메노하즈치노오노카미(天羽槌雄神)라고도 한다.

  이 신은 《고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고어습유 (古語拾遺)》에서 인간에게 베 짜는 방법을 가르친 베틀의 신으로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 따르면 천신 계열의 무신(武神)인 후쓰누시와 다케미카즈치가 토착신들을 평정하려 했을 때 별의 악신 아메노카가세오(天香香背男)만 토벌하지 못해 곤란해 했다. 이때 그들 대신 나아가 별의 신을 굴복시킨 자가 바로 베틀의 신 시토리노카미다케하즈치였다. 이토모리 마을에는 이 신이 끈을 무수히 엮어서 용을 휘감아 퇴치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처럼 일본 신도의 신들과 신도적 세계관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일본’이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chat0113@daum.net
논문으로 〈현대일본종교와‘마음’(心)의 문제-‘고코로나오시’와 심리통어기법에서 마인드컨트롤까지-〉,〈고대 오사카의 백제계 신사와 사원연구〉등이 있고, 저역서로 《일본문화사》,《신도,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정신의 풍경》,《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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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 하나님의 위엄(威嚴) / 거룩한 두려움



삼위일체(三位一體)

- 석 삼, 자리 위, 한 일, 몸 체

창세기 1:1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즉,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키는 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앞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이제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또한 여기서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이와 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주의 할 것 두 가지

첫째, 역활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목사, 아버지, 남편
문제는 역할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동시에 교회와 집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바람직한 설명은 아니다.

둘째, 삼신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성부 하나님은 창조, 성자 하나님은 말씀, 성령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모습이므로 삼신이 될 수 밖에 없다.

터툴리안은 태양으로 설명하였다.
태양은 빛, 열, 태양으로 섦명할 때 다른 곳에서는 밤이 된다면 그곳에 태양은 없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땅에 계셨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으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위엄(威嚴) - 거룩한 두려움

위엄(威嚴) 
1. 의젓하고 엄숙함    
2.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엄성     
3. 거룩한 두려움

따라서 사람의 위엄은 불완전하며, 오직 참된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양한 히브리어 단어가 ‘위엄’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테러(terror)’로 번역하였습니다(출 23:27, 신 34:12, 욥 13:21, 사 2:21).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 NIV, ESV)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I will send my terror ahead of you and throw into confusion every nation you encounter. I will make all your enemies turn their backs and run.

위엄(367) 에이마(’êymâh) אֵימָה  

1. 공포.  2. 신명기 32:25.
발음 [ ’êymâh ]
어원 / 366과 동형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여성 공포[그 원인에 대한 소유격이 수반됨], 신 32:25.



신명기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Great terror: NIV, NASB, KJV)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욥기 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Your terror: NIV)으로 나를 두렵게(terrify: NASB, ESV) 마옵실 것이니이다.

이사야 2: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terrify: ESV; terribly: KJV) 그의 위엄(the terror of LORD: ESV, NASB)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뉴스에 보도되는 테러 사건을 들을 때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람의 테러는 막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테러로 역사하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엄(테러)이 역사하시면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먼저 하나님의 위엄 앞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역사합니다.
대적 원수들에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떨림이 임하며(시 48:6), 마음에 병이 될 정도의 큰 걱정거리와 낙담이 생깁니다(출 15:15).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하나님의 위엄을 피할 수 없으며(시 76:12),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대적들의 기운이 빠지고 몸이 돌과 같이 굳어집니다(출 15:16, 삼상 25:37).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 까무러칩니다(수 2:11, 5:1, 사 13:7).

하나님의 위엄이 역사하시면 오늘부터 천하 만민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그 앞을 대적하지 못하고 얼씬도 못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종말 때에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바벨론이 아무리 무섭게 성도를 대적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셔서 강한 대적들이 죽음 앞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출 23:27, 신 28:10, 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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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엄이 앞서가면 능히 당할 자 없다

출애굽기  23:20-28, 로마서 11:22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威嚴)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로마서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출애굽기 23:27에 ‘하나님의 위엄’이 나옵니다.
‘위엄’,위엄 위(威), 엄할 엄(嚴)입니다.
위태로울 위(危), 험할 험(險)이 아닙니다.
뜻은 ‘의젓하고 엄숙함’,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성’,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위엄의 속성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류의 시조 아담, 하와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흘러 내려오는 역사(歷史)는 만세(萬歲) 전에 택하신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최후의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적 경륜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죄악 된 인간에게 말씀을 줘서 깨닫고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첫째 소원입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 18:14).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가셨죠.
키 작은 세무서장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듣지도 않으셨는데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留)하여야 되겠다.”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악질 매국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내가 남한테 토색(討索)한 것, 돈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하셨죠(눅 19:1-10).

본문에 위엄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벌써 삭개오에게 가서 역사(役事)한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창조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입니다.
세계사는 구속사예요.
그냥 제멋대로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여러분을 향해 벌써 하나님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어떤 죄인에게도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의 뜻이‘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많은 사람들한테 대접받으러 온 게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고 대속물(代贖物)로 내 몸을 바치러 왔다.”하셨죠(마 20:28, 막 10:45).
수천 년의 역사가 한강 물같이 도도히,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흐름입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요 3:16).
하나님이 역사의 근원이며, 모든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대상 29:11,12, 욥 12:23, 시 103:19, 엡 1:11).
따라서 구속사는 세계사, 즉 일반 역사의 중심핵을 이끌고 있습니다.

‘구속(救贖)’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걸머지고 죄를 사해 주고 구원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구속사의 최고 절정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십자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 그리고 위엄이 한강 물 같이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누구든지 텀벙 빠져서 목욕하면 십자가 피로 죄를 씻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이면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위엄이 그 백성과 함께하시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말씀으로 승리하고, 세상 죄와 상관없이 천국에 입성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다

참된 위엄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승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5:24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역대상 16:27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위엄’이 영어로 어떻게 돼 있는지 영어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테러’(terror)입니다.
테러, 얼마나 무섭습니까.
‘테러’는 국어사전에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는 행위. 테러리즘(terrorism)의 준말’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위엄’이 영어로 바로 ‘terror’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악한 세상, 당신의 테러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테러해도 겁나잖아요?
때려 부수고 쥐어패고 팔을 비틀고 몽둥이로 패보세요.
보는 사람이 얼마나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합니까. 마지막 심판할 때 하나님의 테러!
이 성경 구절들을 찾아 봤습니다.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신명기 34:12에는 ‘엄청난 테러’(all the great terror, 모든 큰 위엄), 보통 테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테러는 누구도 말리지 못해요.
엄청난 테러!
욥기 13:21에는 주의 테러(your terrors),
이사야서 2:21 볼 때 하나님의 테러(the terror of the LORD)!

그러므로 하나님이 악의 세력한테 테러하실 때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는 지켜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고 또 병풍같이 둘러 진쳐 준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세상에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위엄, 즉 테러가 역사하시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임합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위엄이 역사하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과 떨림이 임합니다. 남자들은 모르죠. 옛날에는 여인들이 아이를 낳으러 들어갈 때 마루 밑에 있는 신발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 신발을 다시 신을 수가 있을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혹은 떨림! 또, 마음의 병이 될 정도로 큰 걱정거리, 근심, 낙담이 임합니다.

출애굽기 15: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아무리 권세가 높은 자도 사기가 완전히 꺾여 마음이 돌같이 됩니다.

시편 76:12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기운이 빠지고 몸이 돌같이 굳어집니다.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사무엘상 25: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서 까무러칩니다. 맥이 팍 풀려 일어날 힘도 없고 뭐 할 생각도 못 합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 멀끔히 먼 산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수 2:11,5:1, 사 13:7).

여호수아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신 2:25)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을 위해서 많은 사람을 떨리고 두려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감히 얼씬도 못 하고, 침범도 못 합니다. 꼭 믿으세요. 신명기 28:10에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3:26에는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하셨습니다.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주검이 될 수밖에 없죠. 성령의 역사, 마지막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대적들과 싸울 때, 대적들은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 공포, 고통에 사로잡히고 간담이 서늘해져 벌벌 떱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앞서 보내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출 23:27).

위엄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성취하려면

하나님께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입니다. 길 갈 때도, 어디 갈 때도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친근히! 그러면 반드시 위엄의 역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근히 하는 자, 히브리어 말로 ‘다바크’, 즉 ‘바싹 달라붙는 자’를 대신해서 싸우십니다. 하나님께 바싹 달라붙으면 고통, 근심, 걱정,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을 대신 다 해결해 주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성경도 믿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믿어야죠.

여호수아 23:8-10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여러분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대신 싸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할 때 ‘내가 가서 혼내주겠다.’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벌써 가셔서 위엄으로 그 마음을 돌같이, 사지(四肢) 백체(百體)가 힘이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북한 김정은이 핵폭탄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위엄을 먼저 보내면 그까짓 것 다 먼지입니다. 쓰레기통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신명기 11:22-23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여기서 부종은 ‘붙을 부(附)’, ‘따를 종(從)’입니다. 히브리 원어나 국어사전에 ‘바싹 따라붙어서 따른다.’고 돼 있죠. 부종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에 세 번, 유월절과 맥추감사절,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몇천 리, 몇백 리를 걸어서 예루살렘에 다 가야 해요. 집에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걱정이 되죠. 그래서 ‘작년에 내가 갔다 왔으니, 올해는 당신만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위엄이 너희 집에 있겠으니 다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돌아올 때까지 그 집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약속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 하리라

자물쇠 잠글 필요도 없습니다. 문 다 열어놓아도 괜찮습니다. 얼씬도 못 하게 하십니다. 얼씬거렸다가는 온몸이 돌처럼 굳어져 죽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평생 예수님 믿으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위엄’을 보내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내 가정, 남편, 아내, 외국에 유학 간 자식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죠. 오늘 나와서 이 말씀 들으신 분들에게 자손만대에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리라.’(시 25:1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고, 예배드릴 때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내쫓을 때 보내신 세 가지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일곱 족속을 내쫓을 때 하나님이 세 가지를 보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보내셨습니다(출 23:20-28).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가 예비한 곳에 이르기까지 보호,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의심하거나 우습게 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이 사자에게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멸시, 천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 대접하고 순종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내 원수의 원수가 되고, 내 대적의 대적이 됩니다. 믿는 우리 평강교회 성도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대적들이 아예 엿보지도 않고 건드릴 생각도 안 합니다. 모든 생활에 형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하나님,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세요.’ 기도했죠. 이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나안 여섯 족속, 아모리, 헷, 브리스, 가나안, 히위, 여부스를 다 때려 부순 것을 보세요(출 23:23).

두 번째, 하나님의 위엄을 이스라엘 앞서 보내셨습니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출 23:27)를 ‘현대인의 성경’에는 ‘너희가 만나는 백성들을 내가 두려움과 혼란 가운데 빠뜨려 너희를 등지고 달아나게 할 것이며’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를 보지도 못한 채 소문만 듣고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이런 축복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위엄을 기도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기도하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아마 바쁘실 것입니다. 평강교회가 지금까지 ‘복을 주십사, 형통을 주십사, 악한 마귀에 시험 들지 않게 해 주십사’ 이런 기도만 했죠. 하나님의 위엄 속에 그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눈뜨자마자 ‘하나님의 위엄’, 길 가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버스 타고 가다 소매치기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있으면 절대 사고 나지 않고, 도둑맞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늘 감사, 찬송하고,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며 저절로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왕벌을 보내셨습니다(출 23:28, 신 7:20, 수 24:12).

신명기 7: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누가 ‘너 가만두지 않는다. 죽여 버리겠다.’ 하죠? 왕벌이 그 마음 먹은 사람을 먼저 죽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나 죽인다는데 나 죽이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엄이 늘 함께해 달라.’ 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을 지켜줄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강대한 가나안 족속과 큰 성읍들과 하늘에 닿을 듯한 성벽과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게 될지라도 오늘날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너희 앞에 가나안 족속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을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신 9:1-3) 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우리 보고 “몽둥이 준비해라. 뭐 준비해라.” 하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가나안 7족속을 쫓아낸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도 죄는 있습니다. 사악하고 거짓말도 하죠.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말씀을 받고 양심이 있어서 회개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회개하면 죄가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하지만, 가나안 백성보다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지은 것 들통날까 봐 벌벌 떨고 있죠. 가나안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에 죽이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두 군데 기록돼 있습니다. 결단코 이스라엘이 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디도서 3:5-8을 영원히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말씀입니다.

디도서 3:5-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4-5)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말씀을 내가 이루기 위해서 너희 죄를 용서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왕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면 내쫓아 주십니다. 북한이 핵폭탄을 월등하게 많이 갖고 있다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위엄이 가서 하루아침에 전부 날려버립니다. 제 말이 맞나 안 맞나 보세요.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 믿어야죠.

신명기 4:38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가나안 족속들은 잡힌 포로를 세워 놓고 껍질을 벗기는 악한 민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자마자 질리죠. 그러나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시 68:33-35) 하신 그 위엄이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위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속사에서 실제 성취된 위엄의 역사

출애굽 때 나타난 위엄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했습니다(출 15:14-16). 모세도 뒤늦게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내용은 ‘큰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렘 32:21).

예레미야 32:21 주께서 징조와 기사와 강한 손과 드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신명기 4:34에는 ‘그 힘이 크게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큰 공포적인 것들’입니다. 신명기 11:2에는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명기 26:8-9에는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그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출애굽 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으며’라고 하셨고, 신명기 34:11-12에는 ‘애굽에서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바다가 육지같이 순간적으로 말랐습니다. 몇 날 며칠이 걸린 것이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자마자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보송보송하게 물기가 하나도 없고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말랐습니다(신 4:34-36, 6:22-23, 7:19, 29:2-3, 34:11-12, 수 24:17).

가나안 땅 점령에 나타난 위엄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 초기 6년 중 가나안 왕 38명을 목 베서 죽였습니다. 가장 강했던 왕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입니다. 다른 가나안 왕들도 이들에게는 벌벌 떨었죠. ‘옥’의 뜻은 ‘긴 목을 가진’, ‘둥근 목’입니다. 르바임 족속으로, 신장이 9규빗, 4m 10cm였습니다. 그가 자는 쇠 침대의 폭이 2m 82cm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천둥, 벼락 치듯 무섭게 위협하니 모두가 복속해 60개 성을 다스렸습니다. 또 ‘시혼’은 ‘청소하다’라는 뜻입니다. 역시 악질적인 왕입니다. 오죽하면 시편 135 ,136편에 시혼에 대해 노래한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두 왕을 먼저 죽였습니다(수 12:1-6, 민 21:21, 35, 신 2:24-37, 신 3:1-11). 가나안 왕과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습니다(수 2:9-11).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때 이름과 족보를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세가 또 미디안 왕 5명, 에위, 레겜, 수르, 후르, 레바를 처참하게 죽였고(민 31:8), 여호수아는 정복한 31명의 왕을 백성들 보는 앞에서 죽였습니다(수 12:7-24). 이것이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남한에 대해 오만 욕설을 다 하고 있지만 큰일납니다. 대한민국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구속사를 가르치는 평강교회가 있습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라고 말씀드렸죠. 이제 기도 좀 바꾸세요. ‘우리 가정에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남편과 자식에게 은혜 주시고 축복 주시고 근심 없는 복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위엄의 역사’ 한 가지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 여러분.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수 5:1)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에 보내실 때, 위엄을 미리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알았죠. 여호와의 구원은 무기가 많고, 전략이 좋고, 사람이 많고, 이런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삼상 14:6). 이사야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셨죠. 그러면서 믿는 성도를 향해 “너희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대신 싸워 주겠다.” 하십니다(수 23:10). 너희는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라는 것입니다(출 14:14).

그러니까 오늘부터 마음 푹 놓고, 정말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어영부영하지 말고,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고, 교회 생활에 집중적으로 하세요. 무슨 일 해도 하나님 앞에 하는 것같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들 보호해 줄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믿는 성도 하나에게 위엄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 명이 천 명을 쫓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 명이 말하는데 상대에게는 천둥이 진동하는 것처럼 들립니다(수 23:10, 사 30:17).

이사야서 30:1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두 사람이 만 명을 쫓습니다(신 32:30). 만 명이면 1개 사단입니다. 그들이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다섯이 백을, 백이 만을 쫓죠(레 26:8). 하나님께서 없는 말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 나라 갈 때까지 기도할 때마다 잊지 말고 꼭 위엄의 역사를 기도하세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죠. 위엄이 나 대신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들게 됩니다. ‘나, 나, 나’하고 내가 주인 되어 기도하면 내 욕심만 부립니다.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의 앞에 쫓아내고 오늘날까지 너를 당할 자 없다.”(수 23:9) 하셨으니 악한 원수 마귀, 북한군 수천만 명이 온다 해도 평강교회 성도 하나를 당할 자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내 것이 되고, 믿지 못하면 남의 것이 됩니다.

기드온 300용사에게 나타난 위엄

기드온이 3만 2천 군대 가운데 2만 2천을 돌려보내고, 다시 만 명 가운데 9,700명을 돌려보내고 300명을 남겼습니다. 300명이 미디안 군 13만 5천명을 이겼습니다. 1인당 450명을 이긴 것입니다.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무섭고 강하던 미디안 군대인데, 무기는커녕 지팡이, 작대기도 없던 300명이 다 쳐부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는데 그것도 못 합니까. 위엄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정신이 다른데 왔다 갔다 하면 여러분이 아들, 딸 가족들의 고기를 먹게 됩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레 26:19, 신 28:53, 겔 5:10, 왕하 6:29, 애 4:10). 장로, 목사, 권사라도 그 앞날이 험악합니다. 믿음으로 말씀할 때 귀담아들어야죠. 절대로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사울 왕과 사무엘 시대에 임했던 여호와의 위엄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모든 백성이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일어나고, 여호와의 두려움과 위엄이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천둥이 진동하듯 한번 말씀하실 때 전 백성이 ‘한사람 같이’ 모였습니다. 슬슬 온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30만 명이 딱 모였습니다(삼상 11:7).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집합한 것입니다. 이튿날 사울이 이스라엘 자손 30만 명, 유다 사람 3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3대로 나누고 새벽에 진 쳐 암몬과 싸우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승리했습니다(삼상 11:11).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사람과는 싸워 봐야 다 지는 것입니다.

욥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엄

‘욥에게 엄습한 하나님의 두려움’입니다(욥 6:4, 7:14, 23:16). 주님께서 꿈으로 놀라게 하고, 이상으로 두렵게 하셨습니다. 불치병에 걸려도 위엄이 임하면 모든 병이 달아날 줄로 믿습니다.

바벨론 포로 1, 2, 3차 귀환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위엄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인 주전 537년, 고레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습니다(스 1:2-3). 주전 458년 2차 귀환에도 하나님의 위엄이 따랐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해야 할 텐데 오히려 본토 사람들이 ‘포로민들이 돌아온다.’며 두려워했습니다. ‘나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유대인이 되겠습니다.’ 하며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스 8:17).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BC 444년 3차 귀환도 아닥사스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임하니 느헤미야가 왕에게 요청할 때 바로 이뤄졌습니다(느 2:1-10).

초대교회 부흥도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

사도들이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자,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살아가기만 하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믿지 않는 자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 위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백성들에게는 위엄을 보내어 공포에 떨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보니 대적을 두려워하고 있었죠.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자와 담대함을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20:3, 수 1:6, 7, 9, 수 8:1, 수 10:8, 수 11:6). 오늘 본문 로마서 11:22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두려워하는 마음, 비겁한 마음, 소심한 마음, 주저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 근심, 걱정하는 마음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떨리고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큰 여리고 성도 점령해 놓고, 조그만 아이 성을 치다가 36명이 전사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해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50세겔중(重)의 금덩어리 하나를 집에 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내와 자식들까지 데려다가 돌로 죽이라.”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하니 하나님의 노가 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사기 쳤다는 것입니다.

바스훌이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뒀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 ‘바스훌’은 ‘비옥하다’라는 뜻이었지만 하나님의 종을 때리고 오만 모략을 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저주 받은 이름 ‘마골밋사빕’으로 바꾸셨습니다(렘 20:1-6). 미골빗사빕은 ‘사방의 두려움, 공포’라는 뜻이죠. ‘사비브’(사빕)가 ‘주위’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사방에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고치지 못합니다. 밤낮으로 떨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하나님이 그 이름을 바꾸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사방의 환난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의 위엄의 능력이 함께해 주셔서 위로하셨습니다(고후 7:5-6).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성의 모든 남자를 죽여 복수했습니다. 주변 족속들이 죽이려고 쳐들어오려 할 때(창 34:25-30) 하나님께서 위엄을 보내셔서 야곱 가족들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하신 뒤, 사면(四面) 고을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잡으러 가자고 하다가 하나님의 위엄이 임하니 잡으러 가겠다던 마음속에 겁이 생기고 맥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칼과 몽둥이를 다 내려놓았죠. 야곱의 가족들이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창 35:5).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때도 북한이 핵폭탄 미처 쏘기도 전에 하나님의 위엄이 가셔서 다 망가뜨리십니다. 대한민국이 선제공격이고 뭐고 하지 않아도 세세 무궁토록 자유 대한민국,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신 애국가 가사와 같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아무리 열국, 강대국이 떠든다 해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작은 교회와 성도를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평강교회, 작은 교회죠. 그러나 우습게 봤다가는 큰일 납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편안하게 안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마음 놓고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 위엄이 평강교회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 나와도 이 교회는 하나님의 위엄이 지키고 있습니다.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보세요. 부모가 백번 걱정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한 번만 돌보시면 다 끝입니다. 걱정 없는 것입니다.

유다서 1:25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 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어떤 환난과 핍박으로 세계가 열두 번 뒤집어진다 해도 절대 하나님께서 안전 보장하시고, “내가 책임진다, 대신 싸운다.” 하신 말씀을 믿고 감사하고 늘 보람을 느끼고 사는 맛을 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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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09:37-50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믿음없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고,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크냐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더불어 주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이를 배제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모두 변화산에 함께 오른  세 제자와 산아래 있는 제자들은 모두 같은 상태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깨달음이 부족하고 헛된 변론과 야망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은 그들 뿐 아니라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속 위엄있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 37-43a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올때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신의 외아들을 제자들이 축귀하지 못한 것을 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고 패역함을 한탄하시고, 외아들을 불러 축귀하여 낫게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보내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랍니다. 

9:1-6에서 제자들은 축귀와 병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아 두루 많은 역사를 행하고 경험했습니다. 이에 헤롯왕도 놀랐다는 소문도 들었고, 오병이어 사건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어쩌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라면 장차 이뤄질 나라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높여질 것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잘못된 메시아 상에 대한 기대를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수난에 대한 예고과 십자가의 길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변화산에 다녀오신 이후 마침내 제자들의 상태가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전에 행하던 축귀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제자들이 그 능력과 귄위를 받았음에도 축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제자들의 상태와 태도에 있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제자들이 기대하고 고백한 그리스도는 결국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메시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고난받은 종으로서의 메시아 상으로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언급하시고 설명하시지만 다른 역사들은 수용하면서도 이 말씀만은 뒷등으로 듣고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들만 고수하게 됩니다. 축귀의 능력이 자신들이 아닌 예수님께 있음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번의 경험들이 오히려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는냥 착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패역한 세대라 함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도 볼 수 있고,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그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귀신을 향한 분노를 비롯하여 진정으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책망받던 모습입니다(예 신 32:5, 20; 눅 7:31; 11:29-32, 49-50; 17:25).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태로 인해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단하시고 온전한 믿음과 긍휼 곧 하나님의 위엄으로 아이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축귀하여 아버지에게 돌려보냅니다(사회적 관계의 회복까지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행하심). 예수님의 신실하신 믿음과 긍휼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고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연륜이 많다 하더라도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언제고 우리 삶에 질서와 관계들을 파괴되고 흐트려집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오는 충격에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주님에 대한 바른 앎에 기초한 믿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을 통해 온전히 알고 얻는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뜻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믿음이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고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무리 믿음의 관심과 방향과 목적과 내용에 대한 상태를 계속 점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의 믿음을 비춰봅니다. 믿음 없고 패역한 제자의 모습을 보거든 주님의 위엄을 의지하여 고쳐지고 회복되길 원합니다. 

# 43b-45절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며 경이로운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다시한번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귀담아 들을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위엄을 통한 역사가 일어날 때 바라보고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것이고, 그런 일을 행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기만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오해의 여지를 바로잡아 주시려 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알아야 하고 당면한 문제는 주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고난받는 메시아의 길을 가기 위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팔려 가실 때 자신들이 어느 편에 서 있어야 할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더불어 제자들이 묻기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교정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신앙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선한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을 따라 세워진 목적과 뜻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말씀앞에 서고 예배하고 주님을 대면하더라도 우리가 보고싶은 부분만 우상처럼 만들어 신앙하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매일 묻고 또 그 말씀이 그런가 하고 상고해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계속 점검해야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반듯한 길을 가더라도 수시로 전후좌우를 살피고 계기판의 속도와 오일의 양과 엔진의 온도와 실내의 공기와 상태들을 점검하고 졸음이 오는지, 동승자들은 편안한지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부지런히 살펴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이와 마차가지로 우리 신앙의 여정도 부지런히 살피고 묻고 돌아보며 점검하면서 고치고 교정하고 붙잡고 그렇게 가야 합니다. 이를 회피하고 두려워한다면 금새 우리는 곁길로 새거나 엉뚱한 길로 빠져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이 있고 살아 있다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이 여정에는 길 가, 가시밭, 돌짝밭같은 많은 유혹과 미혹과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행하기 위해 길되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야만 합니다. 그러니 회피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더라도 묻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고치고 교정하고 온전케 됨을 믿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46-48절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큰 자이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주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제자들이 변론하는 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하나 데려다 자기 곁에 세우시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고,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결국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하는 상황인데 아직 제자들은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함을 넘어서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급기야 노상에서 헛된 권력욕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워질 메시아 왕국에서 모두 어떤 자리에 앉게 될지에 대한 것을 염두하고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변론을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당대 가장 작은 자로 여겨지던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면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개념을 바꿔주시는 교훈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어린아이 곧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대 받는 이들을 향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이들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을 향한 믿음의 상태를 재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향한 섬김과 겸손 그리고 자기 부인의 길이 주님이 찾고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는 것은 당대 문화적 배경에서 같이 밥을 먹고 함께하는 이들이 누구냐에 따라 명예와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이 결국 하나님의 위엄을 가졌고, 그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낮은 그가 가장 큰 자라 하신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우회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연약한 이들에 대한 태도가 사람과 사회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러한 이들이 차별과 천대 받지 않고 살게 하는 나라입니다. 결국 그 나라에 합당한 우리 삶의 모습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자들에 대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자고하고, 더 많이 가져 부유해 지려하고, 더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고,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서 차별하려하고, 그것을 이룬 이들을 시기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자족하지 못하는 것들 모두 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주님을 믿어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분명 오늘 교회가 지향하는 나라와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주님이 그토록 경계한 맘몬과 이기와 힘과 폭력이 주인되는 그런 나라를 지향하면서 겉만 번지르하게 거룩을 운운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혼돈속에 있진 않은지요? 탐욕으로 점철된 나라를 천국이라는 상품으로 포장하고 온갖 상술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말을 설교라 하고, 복을 하나님이 아니라 번영과 성공이라고 가르치며 헌신과 헌금 갈취하면서 팔고 있는 종교 장사꾼은 아닌지요? 그런 속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만큼 서 있으며 그런 이들과 얼마나 다른지 아님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앞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오늘 주변의 비난 받는 기독교 한켠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주여….

# 49-50절 예수님은 사람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고 금했다고 요한이 예수님께 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고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있어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로 앞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 제자의 모습과 상반되고,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제자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하시려 오셔서 차별과 배제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다 모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이름을 따라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같은 소속이 아니라고, 사람이 만든 통제와 규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금하게하고 배제하는 것은 제자들이 잘못된 특권의식에 빠져서 결국 주님의 뜻과 의도와 권위를 거역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같은 주를 믿지만 섬김의 방식은 문화 세대 지역 민족 신분등의 차이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에 그런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다양한 도전들을 품어내되 진리를 훼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배제가 아니라 수용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융합해 내므로 진리를 더 굳게 세우고 더 넒고 깊고 온전하게 세워지며 다양한 이들을 살리는데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배타, 배제, 차별등은 진리를 품고 따르는 이들이 그 진리의 크고 높고 위대함의 권위를 스스로 부인하고 옹졸하고 부족한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일신학을 가진 진리의 신앙을 사는 우리는 더 넓고 더 깊고 더 온전함으로 모든 것을 넉넉하게 품으면서도 스스로 변질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을 변화과 성숙으로 세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_ 김용규_9쪽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중략)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과 같은 전근대적·신본주의 가치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인본주의 가치들, 그리고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서 같은 탈근대적·개인적 가치들까지 우리가 시대를 따라 추구했던 가치들을 모두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는 겁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



창세기 1:1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3

요한복음 14:16-17

요한일서 5:7-8|

마태복음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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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요 16:12-15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찬송 가운데 특이한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삼위일체를 주제로 찬송가를 만들어서 보급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 청년들 장년 그리고 노년들에게 그 찬송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요? 삼위일체가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삼위일체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삼위일체 영문법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영문법책에까지 삼위일체를 붙인 이유는 삼위일체는 공부법에서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역사에서 삼위일체는 힘든 역사의 기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은 많이 죽어갔습니다. 니케아회의에서 325년에 삼위일체 교리를 1차로 확정하면서 교리논쟁을 끝냈으며 451년경 칼케돈 회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보충 확정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삼위일체교리는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숫자가 셋이면 셋이고 하나면 하나인데 오늘 삼위일체는 셋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몇 분인가요? 한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님 성령 하나님 셋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삼신론에 빠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고 아들과 성령은 피조물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단에 빠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단으로 판정된 것이 양태론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시대 성자 예수님의 시대 성령 시대로 구분하는 양태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이단들은 거의 다 양태론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태론적 입장을 가지고 성령시대에 이어서 그들의 교주가 오늘날 재림주로 왔다는 것입니다. 처음 6개월 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교리교육을 시작했다가 교육이 끝날 즈음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교주 앞에서 재림주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 이단은 현대판 양태론에 빠진 이단입니다. 오늘날 이단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빗나갔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빗나갔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복잡하지만 아주 단순합니다. 한 가지만 알면 삼위일체 교리는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에 그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지 아니면 유사한 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높고 아들은 열등하다고 하면 이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하다고 주장하면 그래도 이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서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진리의 성령이 오면 아버지의 영광을 다 나타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서 보내실 성령은 누가 보내시는 것입니까? 아버지로부터 파송 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송 받는 자가 성령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가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외모는 다른 데 본질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외모에서가 아니라 질적인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질에서 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본질에서 일체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




삼위가 무엇인가? 연극하는 배우들이 어떻게 하십니까? 배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을 persona라고 합니다. 영어로 pers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격이라고도 하고 가면이라고 하고 위격이라고 합니다. 한 집에 산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서 하나이지만 그 각자는 서로 다릅니다. 하는 일에 있어서 다릅니다. 아버지는 창조사역을 하는 조물주이십니다. 아들은 누구냐? 자신의 몸에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구속자이십니다. 이 일을 아들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가 세상에 깨닫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갈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가 죄에서 깨닫도록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방황할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를 뉘우치게 하고 말씀을 깨닫도록 하시는 일을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정가운데서 선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은 중보기도를 많이 할 때에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중보기도자의 덕분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을 듣고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교회와 하나님을 전혀 몰랐지만 누군가의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6장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장래까지 다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절대 신뢰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두 살짜리 딸을 둔 어느 부부가 장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이 시장을 간 사이에 그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그 사이에 무엇인가 요리를 준비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아이를 갓방으로 데리고 가서 장남감을 손에 쥐어 주고 자장가를 부르면서 잠재우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그 다음에 부엌으로 와서 오븐을 켜고 완두콩을 얹었습니다, 그 요리에 꼭 들어가야 할 양파가 생각이 나서 그것을 가지고 음식창고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자지러지면서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달려와 보니 두 살 배기 아이가 오븐에 손을 얹었던 것입니다. 그 남편이 아이를 급히 끌어안고 즉시 병원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가는 사이에 아내와 장모에게 전화를 넣고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아이의 손을 소독가제로 닦고 그리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는 사이에 두 살 배기 아이가 눈을 꼭 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감는 일이 거의 끝나가자 아이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아내가 발견합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가 얼굴에 기쁨이 넘쳐서 “엄마, 할머니, 아빠, 엄마, 할머니, 아빠....”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붕대 감는 일이 끝났고 엄마가 있고 할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아이는 걱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이가 절대 신뢰하는 엄마 할머니 아빠 곁에서 사고로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이겨내고 기쁨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성부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면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삼위일체 하나님 (요 16:12-15 찬송가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할 때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긴 논쟁으로 이어졌던 주제를 말하라고 하면 누구나 다 삼위일체 논쟁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논쟁에서 정통교리로 인정받은 사람도 수차례 투옥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아리우스와 논쟁에서 승리로 이끌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이 본질상 동등한지 아닌지입니다. 동일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우시우스”와 유사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이우스”라는 라틴어 개념이 삼위일체 논쟁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본질이라는 것은 아들을 아버지보다 하등의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는 왜 목숨을 걸기까지 양보 없이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는가? 유일신 하나님을 조상대대로 믿어온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신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야만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내려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그 보혜사는 제자들 속으로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아닌 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보혜사의 가르침과 능력은 예수님의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아버지로부터 파송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 1보혜사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이후에 오신 성령은 제2 보혜사가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롬 5:1-5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우리는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들을 당연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있는 것과 건강하게 다니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중심으로 감사는 잃었던 건강을 되찾았을 때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은 특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다는 데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과 견고하고 완성된 교리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물려받은 삼위일체 교리는 많은 사람이 희생의 피를 흘린 위에서 다듬어져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에 아버지와 공동으로 파송한 성령께서 이 땅으로 왔습니다. 그 성령으로 우리가 믿음을 얻고 그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이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란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기뻐하고 소망 중에 인내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 (시 8편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온 땅에서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것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의 모든 내용을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찬양구절로 괄호 쳐서 넣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9절).” 이것은 시인이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시인은 이 시의 내용의 전부를 다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보려고 하는가?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창조의 신비일 것입니다. 하늘의 궁창과 달과 수많은 별들이 매달려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을 수 있는가? 그 능력의 비밀은 하나님의 손가락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구를 다 동원하여도 붙잡아 맬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지으시고 그리고 손가락의 능력으로 지으신 것들을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인간 또한 많은 창조물들 중에 하나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으로서 시인 역시 대적하는 원수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젖먹이 아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은 젖먹이에게 임하게 되지 젖먹이의 입으로도 대적들을 다 무찌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찮은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시므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4-6절).”

그렇다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만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수 있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권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성령을 받는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심을 믿고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지혜이신 하나님 (잠 8:1-4, 22-31,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잠언서는 유대의 문화적 경계 너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애굽,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 주변나라의 경험적 문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오늘 8장은 기원전 (B.C.) 6세기 중반 경 바벨론 포로기 또는 그 이후에 수집 기록 책인 1-9장, 31장의 범위에 속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지혜가 여성명사로서 의인화된 인격체로 등장합니다. 이 지혜는 창조자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 창조물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백성들을 찾아와 소리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높은 곳이나 네거리에서 그리고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곳에서 지혜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왜 지혜가 자기 백성들을 이토록 간절하게 부르고 있는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밝게 하는 명철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부요케 하여 가난에서 허덕이지 않고 부요케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에 빠져서 부패와 멸망의 길로 걷지 않고 선과 복과 공의의 길에 걸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지혜를 만나는 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이 지혜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오늘 이 지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성명사형을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이 지혜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잠언서에는 그 지혜가 우리를 돌보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성령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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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2021 수요성서학당 제1강 / 01-06-2021
2025. 01.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47)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Ⅰ. 첫째와 마지막의 의미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란 용어에서 과 마지막은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첫 아담은 처음 사람을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마지막을 대표하는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세상은 서열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경쟁 구도 가운데서 성장하며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을 양육할 때 내 아들과 딸이 공부할 때 1등하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10등하는 것이 좋아요. 
1등하는 것을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10등을 했다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등수를 올려라!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1등을 한 번도 못했으면서 자식에게 1등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慾心)"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배경을 정리하려고 자서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장로님과 권사님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이승혁(李勝赫)" 입니다.
한문자의 의미는 이겨서 빛을 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온 삶을 회고하면 "이겨서 빛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런 내용이었는데 제가 받은 내용 중에 "목사님께서 이제까지 저희들에게 본이 되신 것이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저희는 목사님이 그 자리에 지금도 있으면서 매일 오늘의 묵상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NIV,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KJV,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빛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번역합니다.
 즉 이겨서 빛을 낸다는 것을 물리적인 빛, 세상적인 빛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자서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반드시 무슨 경쟁 구도에서 1등을 하기 때문에 이겨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빛이 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Ⅱ. 사람의 의미

서양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라고 합니다.
물론 탈레스 이전에도 철학자가 있었지만 탈레스를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처음으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냐?
만물의 근원을 아르케라고 합니다.

철학의 주제가 자연에서 사람에게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헬라 철학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주된 관심이 자연계 즉 바람, 불, 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물음표를 던지면서 철학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질문은 하였으나 아직도 명확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는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 444. anthrópos)” 
안드로포스는 인간 즉 사람이란 뜻입니다(a man, human, mankind).
안드로포스의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고 합니다.

윌리암 피터(William Peter)라는 사람의 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소년이 길을 걷다가 5달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 돈으로 유리구슬을 구입했고 먹고 싶었던 알사탕도 사서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은 길을 걸을 때마다 길바닥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생동안 길바닥만 걷다보니 결국에는 그가 얻었던 것들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동전 수백 개, 반짝이는 유리구슬,  옷핀 그리고 잡다한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바닥만 보고 걷던 습관 때문에 허리가 굽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안드로포스라는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호모 프로스팩투스, Homo Prospectus)
둘째는 희망하는 존재(호모 에스패란스, Homo Esperans)

우리들은 한국적 인간이라고 합니다(Homo Coreanicus)

호모 오란스(homo orans) : 기도하는 인간

요한복음 14:13-14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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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행하다(포이에오. pŏiĕō) ποιέω / 하다, 제조하다,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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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구하는 영(기도의 영)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대화이며,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교제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의 행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며 영적 교제를 이루는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성경 속에서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요구되었던 삶의 기본이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통로였습니다.
기도의 원어와 뜻, 성경 속 기도의 의미, 교리적 측면에서의 기도의 중요성, 그리고 기도의 다양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1. 기도의 원어와 뜻

1.1 구약에서의 기도

구약성경에서 "기도"는 주로 히브리어로 ‘팔랄’(פָּלַל)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 단어는 "중재하다", "간구하다", "중보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위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성격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부르짖다"는 의미의 ‘차아크’(צָעַק), "요청하다"는 의미의 ‘바카쉬’(בָּקַשׁ) 등 다양한 단어가 사용되어 기도의 다채로운 측면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상 1:10에서 한나의 기도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며 통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팔랄"은 자신의 깊은 내면의 고통을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나타냅니다.

1.2 신약에서의 기도

신약성경에서 "기도"는 헬라어로 ‘프로쉬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 말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고백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친밀하게 대화하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이 외에도 "간청하다"는 의미의 ‘데오마이’(δέομαι), "애원하다"는 의미의 ‘아이테오’(αἰτέω) 등이 기도를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6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은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필요를 구하며 감사하는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2. 성경 속의 기도의 의미

2.1 구약에서의 기도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수단으로 기도를 보여줍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행위이며,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1)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했던 기도는, 기도가 단지 개인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중보와 간구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신뢰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2) 다윗의 기도 (시편)

다윗은 시편에서 찬양과 간구,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고통과 죄악, 기쁨과 승리를 모두 하나님께 고백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3) 선지자들의 기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했고(출애굽기 32:11-14),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했습니다(열왕기상 18장).

2.2 신약에서의 기도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도의 본질과 삶에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도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도록 하는 영적 호흡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6:9-13에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며, 기도의 모범과 방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시며 기도를 통해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마태복음 26:39).

(2) 초대교회의 기도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에 힘썼음을 보여줍니다(사도행전 2:42). 그들의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중요한 통로였고, 교회의 부흥과 선교의 시작을 이루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 교리적으로 본 기도의 의미

3.1 기도의 본질

기도는 교리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로 정의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그분의 주권과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우리의 필요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요,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간구하며, 그의 긍휼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3.2 기도의 목적

  1. 하나님께 영광 돌림: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2. 하나님의 뜻 구함: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합니다(마태복음 6:10).
  3. 의존의 고백: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4. 영적 성장: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4. 기도에 대한 내용들

4.1 기도의 요소

기도는 다양한 요소를 포함합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균형 있게 포함되어야 합니다.

  1. 찬양: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높이며 찬양합니다(시편 145:1-2).
  2. 감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축복에 대해 감사드립니다(빌립보서 4:6).
  3. 회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요한일서 1:9).
  4. 간구와 중보: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합니다(에베소서 6:18).

4.2 기도의 자세

성경은 기도할 때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1. 겸손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며 나아가야 합니다(역대하 7:14).
  2. 믿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마가복음 11:24).
  3. 인내: 기도는 때로 긴 기다림과 끈기를 요구합니다(누가복음 18:1-8).

5. 기도의 실제적인 적용

기도는 신자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단지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삶에서 기도를 적용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1. 규칙적인 기도 시간 정하기: 매일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간을 정해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2. 기도 일기 쓰기: 하나님께 올린 기도를 기록하고, 응답하신 내용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습관을 들입니다.
  3.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기: 교회와 소그룹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믿음을 세웁니다.

6. 결론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영적 호흡이자, 신앙의 중심입니다. 성경은 기도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과 친밀히 교제하는 행위임을 가르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도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통로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 간구와 중보를 올리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 기도의 영 - 성령(로마서 8:26-27)

기도생활이 신앙생활이다. 기도의 습관, 기도의 유익과 이유를 배웠다.

오늘은 기도의 영에 대해서 말씀드리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기도는 어렵다. 오랜 신앙 연조를 쌓은 후에도 어렵다.

성경 읽는 것은 눈으로 읽으면 되기 때문에 좀 낫다. 그런데 기도는 어렵다.

찬송도 부르면 즐겁고 좋다. 그래서 찬송도 할 만한데 기도는 어렵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찌...? 어떻게 기도할찌...? 기도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려고 기도의 영(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 기도의 영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도우신다고 하셨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다.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을 물질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주고, 받는 물질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성령을 단순한 에너지, 파워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에너지는 인격이 아니다.

성령은 에너지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인격이시다.

인격이라는 말은 : 인격의 3대 요소 : 지성, 감성, 의지가 있다는 말이다.

1) 지성(知性)이란? 알고 생각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다 .

본문 --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즉,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생각이 있다.

(예) 강대상, 마이크... 물질이기 때문에 생각이 없다.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성령은 생각을 갖고 지성을 가시신 인격체이시다.

2) 감성(感性)이 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탄식이 감정이다.

3) 의지(意志)가 있는 분이시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말은 성령의 의지를 말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지성, 감성, 의지를 가지신 인격이시다.

그러한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했다.

무엇을 도우시나?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성령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 주신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기도제목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셨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성령은 같은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 옆에서 부르시는 분, 곁에 계시도록 부름 받은 자.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서 도와 주셨듯이 성령도 우리 곁에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기도를

도우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와 성령의 기도가 일치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시는가?

1)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하고, 죄악의 환난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시험에 들지 않고,

죄악의 환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해 주신다.

2)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신다.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고 있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면, 생경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도 떨어진다.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 시켜 주시는 것이 믿음이다 .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떨어진 인생은 망해가다가 마침내 죽고 만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연결시켜서

우리를 생명과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주시는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도 주시고,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 해 주신다.

혹시 형제가 시험 들고, 죄 범하고, 실족했다할 찌라도 돌이켜 네 형제를 돌이켜

굳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그대로, 3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이지만, 그가 회개하고 깨닫고 돌아와서 복음을 전할 때,

한 번에 3,000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고, 흩어졌던 사람들을 모으는 사역을 감당했다.

예수님의 기도가 베드로에게 응답되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할 때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 붙어 있고,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신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기도하신다.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즉,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 해 주신다.

◉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1) 우리 거룩함이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살전 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2)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3) 영생을 얻는 것이다.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

즉, 복음을 전해서 영혼이 구원 받게 하는 것이다.

(4)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도록 기도하고 계신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라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건과 모든 인물들과 그 상황을 다 주관하셔서

결국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 하나님의 뜻이 문맥 가운데 나타난 것은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①거룩하게 살고, ②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③전도하며 살고, ④사랑하며

사는 가운데, 변화되어 아들의 성품을 닮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성령이 기도해 주신다.

죄는 찰거머리 같아서 거기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죄의 올무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신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주님과 같은 보혜사 성령님의 기도제목 :

(1)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2)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3)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 기도 해 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령 안에서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1:20)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 어떻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

1) 서두르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해야 한다.

조급하고, 성급한 마음으로 용건만 간단히 기도하면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가 어렵다.

우리는 잠잠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따라갈 수 있도록 잠잠히 기도하라.

조급한 마음으로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홍해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말했다.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성령의 인도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

2)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되 <간절히>기도해야 한다.

목소리가 크든지, 작든지, 간절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용하게 기도하든지, 부르짖어 기도하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의 간절함이 중요하다.

(138: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이 간구가 간절한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

(142: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142:2)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소리를 내든지? 안 내든지? 큰 소리로 하든지? 작게 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다보면 내 마음이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다.

(62: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려면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 = 말씀 안에서의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기도 = 말씀으로 기도.

성령은 말씀과 항상 일치한다. 또한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기도하려면,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 하면 된다.

(결 론)

기도 생활이 신앙생활이다.

기도에 성공하면 신앙생활에 능력이 주어진다.

현재 나의 상황과 문제 앞에서 내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

그 약속된 말씀을 기억해서 붙잡고 기도하면 내 기도가 성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12:10) 내가 ...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 라고 하였다.

바로 성령이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시다. 성령은 기도의 영이시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며 사기기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 따라, 성령으로 기도할 때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을 받으며 살게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기 도)





성령의 호칭과 사역과 은사


Ⅰ. 성령의 호칭(이름)

1. 한 성령(에나 프뉴마Ένα πνεύμα, One Spirit, 성령의 유일성):

1) 한 몸, 한 성령, 부르심의 한 소망(엡 4: 4)

2)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엡 4: 5-6)

3) 평안의 매는 줄로 (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힘써 지켜야 할 것(엡 4:3)

2. 일곱 영(헵타 프뉴마타,Επτά πνεύματα, the Seven Spirits, 성령의 완전성, 편재성 및 충족성);

1)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계 1: 4)

2) 하나님의 일곱 영(계 3: 1)

3. 주 성령(the Lord, who is the Spirit, Κυρίου πνεύματος, 주의 영, 성령의 주권):

1) 성령의 주권성(고후 3: 17-18)

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4. 영원하신 성령(Πνεύματος αιωνιόυ, the eternal Spirit, 성령의 영원성)

1)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성령

2) 성령이 영원하신 것처럼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중보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한다(히 9:14-15)

5. 영광의 영(<Πνεύμα> δόξας, 영광, Θεού πνεύμα하나님의 영)

1) 성경 최고의 단어 “영광”

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다.

3)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6. 생명의 성령(Πνεύμα της ζωής, the Spirit of life, 성령의 생명성)

1)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롬 8: 2)

2) 해방(Απελευθέρωση)은 수속 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

7. 성결의 영(Πνεύμα αγιότητας, the spirit of holiness, 성령, 거룩하신 자, 거룩의 영)

1)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롬 1:4)

2)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 20)

3) 거룩하신 자(요일 2: 20)

8. 지혜로운 영(“루아흐 호크마” רוח חכמה, 지혜와 총명의 신, 지식과 모략의 신, 전지, 지혜, 모략)

1) 마음에 지혜(신앙적 지혜) 있는 자 곧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출 28: 3)

2) 여호와의 신(“루아흐 여호와”) 곧 지혜와 총명의 신, 지식와 모략의 신(사 11: 2)

9. 권능의 신(전능성, 사 11:2):

1) 성령은 “여호와의 신”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성을 지닌다

2) 모략과 재능의 권능과 전능성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성령의 존귀성, 사 11: 2) :

1) 성령의 존귀함

2) 성령의 거룩성

11. 진리의 영(πνεύμα της αλήθειας, the Spirit of truth, 진실성, 요 14: 17)

1) 세상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영

2) 이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인과 함께 거하시고 속에 계시고 성령을 알게 한다

12. 자유의 영(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시 51: 11-12)

1) 주권적 자유 : 주의 성령은 주의 구원이 기쁨을 주신다

2) 주의 구원의 즐거움 회복과 자원하는 심령

13. 은혜의 성령(Πνεύμα της Χάριτος, the Spirit of grace, 성령의 은혜, 히 10: 29)

1) 은혜의 성령을 욕 되게 하지 말 것

2) (배교의 문제를 다루며) 은혜의 성령을 욕 되게 할 때 따르는 형벌의 더 중함

14. 은총과 간구하는 영(은혜와 신뢰, 탄원, 슥 12: 10)

1)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다

2) 십자가 앞 역설적 애통(통회자복의 역설적 은혜)

15. 선교의 영(세우고, 보내심의 영)

1) 명칭은 없으나 내용적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다(보내심).

2)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선교)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 2-5)

16. 하나님의 (거룩한) 영(Το Άγιο Πνεύμα του Θεού, 성령, 신적 기원, 엡 4: 30; 고전 3: 16)

1) 하나님의 성령(엡 4:30)

2) 인 치심을 받은 자들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함

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거한다(고전 3:16)

17. 주 여호와의 신(메시야 사역 부여, 사 61: 1)

1) 메시야 사역과 관련

2) 자유와 회복과 위로(사 61: 1-2)

18. 그리스도의 영(Πνεύμα Χριστού, the Spirit of Christ, 그리스도와 같이 구속 사역, 롬 8: 9)

1)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2)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

19. 아들의 영(πνεύμα του υιου, the Spirit of his Son, 양자의 영)

1)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갈 4: 6)

2)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 아바 아버지, 롬 8: 14-15)

20. 예수의 영(πνεύμα του Ιησού)

1) 예수와 동일한 선교사역(행 16: 7)

2) 선교의 줄기(흐름)까지 바꾸시는 예수의 영

21. 성령(the Holy Spirit, Πνεύμα αγιόν)

1) 본질적인 의미에서(눅 11: 13)

2)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지 않겠는가

3) 은혜와 평강의 넘치는 복을 누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받은 자(벧전 1: 2)

22. 소멸하는 영(심판과 정결케 하심, 사 4: 3-4)

1) 심판하는 영

2) 소멸하는 영

3) 더러움을 씻고 피를 청결케 하심

23. 약속의 영(the promised Holy Spirit, 하나님의 선물 및 언약, 엡 1: 13)

1) 약속의 성령(엡 1:3, 참조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를 주심, 요 1:17; 인치고 보증으로 성령을 마음에 주심, 고후 1:22)

2)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 4-5)

24. 보혜사(Parakletos)

1) 곁에 서서 부름 받은 사람(곁에서 격려 권고하는 사람, 요 14: 26; 15: 26)

2) Helper

3) Counsellor

4) Teacher

5) Advocate(변호자)

6) 위로자

Ⅱ. ​성령의 사역(Works)

성령의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성령의 사역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 성령이 하시는 일을 소개합니다.

1.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

1)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한 번에 한 장소와 소수의 사람과만 상대하셨다.

2) 그러나 승천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한 번에 전 세계 교회와 성도들을 만나시며 동시적인 역사를 하신다.

2. 성령 사역의 본질

1) 성령은 예수의 영이니만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것과 꼭 같은 일을 한다.

2) 그 일은 성부가 원하는 일이므로 3위 1체적 사역이다.

3) 성령은 예수를 주로 높이는 사역을 한다.

3. 성령의 사역들(분야)

1) 일반 은총 사역(마5:44-45, 행 14:16-17)

(1) 일반 은총은 믿음과 무관하게 피조물인 모든 인류에게 임한다(마 5장 44-45).

(2) 일반 은총 가운데서도 계시는 늘 임하였다(행 14: 16-17). 헛된 신을 섬기라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 천지 창조 사역(창 1:2, 시 104:24-26)

(1)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그 영광(롬 11:36)

(2) 집 마다 지은 이,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히 3:4)

(3)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이 하늘 아래서 망한다(렘 10:11)

(4) 삼위일체 창조(성부 하나님 친히 말씀으로<엡 3:9; 고전 8:6>, 성자의 창조<골 1:16. 요 1:3. 내가 그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잠 8:30>, 성령<창 1:2,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욥 26:13>

(5) 삼위일체의 만유 창조와 분담 관리(만유의 아버지, 만유 위에 계심<성부>, 만유 통일<성자>, 만유 가운데<성령>, 엡 4:6)

(6) 모든 생명의 기한은 성령께 달려있다(욥 34:14,15).

3) 인간 창조 사역(창 1:26-27;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심”,욥 33:4, “전능자의 기운” Almighty Spirit, 니쉬마트 샤다이, 욥 32:8)

(1)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심”(욥 33:4)

(2)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Almighty Spirit)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니쉬마트 샤다이 욥 32:8).

(3)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

Ⅲ. 성령 받음에 따른 은사(Gifts)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사람들에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성령을 받으면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은사라 합니다.

이 은사들을 살펴봅니다.

1) 정의: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에게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특별한 속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용하도록 된 것이다.(C.P.Wagner)

2) 은사의 용어

(1) 도시스(dosis, dir 1:17): "선물"이란 의미

(2) 도레아(dorea, 고후 9:15): “거져주시는”, “자유롭게 마음대로”, 한 성령이 그 뜻대로 가구사람에게 나눠주심(고전 12:11)

(3) 카리스마(charisma, 고전 12:6; 롬 5:15): 은총, 값없이 주는 선물

3) 은사를 주시는 목적

(1) 믿음을 견고케 함(롬 1:11)

(2) 충성된 종(마 25: 15, 21)

(3) 교회와 이웃과 자신의 영혼에 유익(고전 12:7)

4) 은사의 종류(성령의 9 가지 은사, 고전 12:8-10)

(1) 지혜의 말씀(the message of wisdom) :

주를 경외함(욥 28:28), 분별력(빌 1:10), 맡은 일 감당(출 28:3; 솔로몬의 지혜, 왕상 4:29), 지혜의 메시지(모든 지혜로 권면하고 가르침, 골 1: 28-29)

(2) 지식의 말씀(the word of knowledge) :

understanding(신 4:6), 하나님을 아는 지식(고전 2:10,11),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고전 2:12), 말씀 이해(고전 12:8), 바른 지식에서 나오는 바른 열심(롬 10:2)

(3) 믿음의 은사(pistis<명>, pistos<형>, 진실, 성실, 충성, 신념, 성실, 고전 12:9) :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귀신 추방(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기도와 금식, 마 17:18-2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히 11:6).

(4) 병고침(신유, therapeuo, 치료하다, 상처와 병을 낫게하다, 고치다, 건강을 회복하다) : 예수도 의사(마 9:12), 성령도 의사(고전 12:9), 성부도 의사(출 15:26).

❶ 질병 원인:

죄값(더 심한 것 생기지 않게 죄 범치 말 것, 요 5:14, 다윗의 나의 죄, 시 38:3-8), 마귀 역사(욥 2:7; 간질병, 벙어리, 귀, 마 17:15; 막 9:25), 말씀 거역(신 28: 15-22), 과로(빌 2:5-30), 하나님 영광(나사로의 병, 요 11:4, 날 때부터 소경, 요 9:3)

❷ (성령의) 신유 방법:

(1) 믿음(막 5: 27-34; 행 3:16)

(2) 기도(약 5:14-16; 사 38:1-5),

(3) 성령이 말씀 속 역사(마 8:16-17; 잠 4:22; 요 4:46-54),

(4) 성령으로 안수(막 16:18)

(5) 능력(dunamis, 권능, 본래 하나님께서 가진 힘) 행함 :

좋은 봉사자(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 벧전 4:11), 유능한 전도자(행 1:8;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눅 24:49), 마귀 대적 힘(행 10: 38), 각종 이적(행 2:43).

(6) 예언(propheteia, 하나님의 신적 영감으로 하나님의 뜻 선포, 악한 자 책망, 권고, 괴로운 자 위로, 숨은 일을 드러냄, 미래사건 미리 알림)의 은사:

❶ 구약 예언: 성경 형성, 조금도 거짓됨이 없어야 됨(신 18:21-23)

❷ 은사 예언: 아가보의 흉년 예언(행 11:28), 부분적 은사(고전 13: 8-10), 그릇된 예언은 기독교를 점치는 종교로 만들어버리니 분별을 잘 하고 조심할 것.

❸ 성경 예언 말씀(벧후 1:20; 계 22:18): 성경 예언은 가장 완전한 예언임!

(7) 영분별(디아크리세에이스 프뉴마톤, diakriseis pneumaton, 영들 구별):

많은 거짓선지자의 출몰은 말세의 징조이니 미혹되지 말 것(마 24:4-5; 요일 4:1)

(8) 방언(glossa, 혀, 말, 언어, 방언):

=====================================

❋성경은 방언(Tong)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1. 방언은 고린도서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2. 바울은 은사들 가운데서도 방언에 대한 묘사를 비교적 자세하게 하고 있습니다.

3. 성령의 은사들(카리스마타)이란 용어는 베드로전서 4장 10절을 제외하면 모두 사도 바울이 4. 사용한 말인데, 본래 단수형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구속이나 구원을 의미합니다(롬 5:15; 6:25).

5.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하게 주시는 선물이므로 개인이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겠지요.

6. 주로 고린도서(고전 12: 10, 28, 30; 14장)를 중심으로 성경이 말하는 방언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 방언의 유익

1) 하나님이 선물로 특별히 특정한 개인들에게 주시는 개별적 은사임

2)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영적 비밀임(고전 14:2; 14-17)

3) 자기의 신앙적 덕을 세움(고전 14:4)

4) (불신자들이 체험하지 못하는 방언 은사의 신비적 현상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됨(고전 14:22)

5)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함을 하나님께 감사했음(고전 14:18)

나. 방언의 종류

1) 만국(헬라어 포네= 외국어) 방언(행 2:4-13)

바벨탑 당시 흩어졌던 언어(창 11:9)의 회복 사건

2) 대신(對神) 방언(고전 14:2)

(1) 사람에게 하는 방언이 아니므로 남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글로싸).

(2) 여기에는 각종 방언(고전 12:10, 28)이 있음.

(3) 특정한 각 개인에게 주시는 은사(선물)이므로 다양함

3) 대물 방언(민 22:28)

재물에 눈이 어두운 발람(모압왕 발락의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함)을 책망하고자 나귀가 사람 말을 한 사건(나귀가 성령 받은 것은 아님).

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방언 은사 사용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자세한 권면

1. 고린도교회 방언 은사는 말씀을 받은 고린도교회가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고 대단히 미숙한 교회였음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4장을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즉 대단히 문제가 많은 유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방언문제였음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합니다.

3. 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나, 방언은 자기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임(4)

2) 혹시 교회서 방언할 시에는 반드시 통역할 것(고전 14:5, 13)

3)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6-11)

4) 그리스도인 모두가 받는 은사가 아니라 선물 받은 사람만 해당되는 은사이므로(다른 사람이 모르면 아무 유익이 없으므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께만 해야 함(10절)

5) 공적 질서에 방해 되지 않으면 금하지 말 것(방언이 공적 질서를 방해하면 안 됨, 14-15절)

6) 방언 위주로 신앙 생활하지는 말 것: 남들보다 방언을 많이 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기는 하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나음(18-19절)

7) 교회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음(22-25절)

8) 교회는 은사의 역할도 중요하나 질서와 덕이 더욱 중요함(26절)

9) 통역이 없을 시에는 교회에서의 방언은 절제하고 개인적으로 조용히 할 것

10) 최고의 은사와 열매는!

사람의 방언이나 천사의 말이나 예언이나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다(고전 13장)

4. 다음의 방언은 참 방언이 아니니 잘 분별할 것

1) 타종교나 이단, 사이비들의 방언(ex, ABRAKADABRA)

2) 잠재의식에서 하는 중얼거림

3) 남에게 배워서하는 방언

4) 들뜬 흥분에서 자의적으로 나오는 소리를 방언으로 착각하는 것

5. 현대 방언(지금도 성경적 방언은 지속되고 있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입장

1) 오순절 계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중요한 은사임

2) 보수 개혁주의: 방언이 주요 은사이긴 하나 주로 초대교회에 그친 은사로 여김(은사중지론속 은사지속론의 부활과 논쟁 발생)

=========================================

(9) 방언 통역 은사(고전 12:10):

❶ 방언 통역:

방언은 육신의 언어가 아닌 영으로 하는 기도요 찬미이므로(고전 14:15) 육신을 가진 인간은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고전 14:2). 따라서 교회는 외국인이 오면 통역관을 세우듯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고전 14:5, 13).

❷ 방언 통역(디에르메뉴테스, diermeneutes) 의미:

해석자란 의미. 구스의 내시에게 해석해 준 빌립(행 8:31). 이마누엘에 대한 친절한 해석(마 1:23).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에 대한 해석(단 5:23).

❸ 방언 통역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유익을 위한 것이므로 기도해야 하고(고잔 14:13),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고(고전 14:20), 남용하지 말고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고전 14:40).

❹ 초대교회 미숙하고 시끄럽고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에서 방언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는 점에서 21 세기 교회들도 연륜이 짧고 미숙한 교회에서 특별히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증가할 수 있다고 보이며 영분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5. 성령의 은사와 자연적 재능과의 차이점

1) 기원

자연적 /타고난 재능 : 부모를 통해 하나님이 주심

성령의 은사 : 하나님이 직접 주심

2) 획득

자연적 /타고난 재능 : 출생시

성령의 은사 : 회심 또는 성령 충만 때

3) 목적

자연적 /타고난 재능 : 일반적으로 인류에 유용성

성령의 은사 : 영적으로 섬기는 일에 능력

4) 과정

자연적 /타고난 재능 : 인식되고 개발되고 사용

성령의 은사 : 인식되고 개발되고 사용

5) 기능

자연적 /타고난 재능 : (하나님의 영광과) 각양 활동

성령의 은사 :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 봉사

6. 은사의 구분과 종류

1) 직분적 구분

-영구적 은사 : 복음전도사, 목사, 교사

-일시적 은사 : 사도, 선지자

2) 사역적 구분

목회적 은사 :가르치는 일, 권면, 지도력, 지혜, 지식, 믿음, 행정 목사(목회자), 중보기도

선교적 은사 : 복음, 전도, 순교, 선교사, 귀신 추방, 영분별, 기적, 신유

3) 기타

특별한 은사: 예언, 방언(통역), 독신

성숙한 섬김의 은사 : 섬기는 일, 헌금, 긍휼, 서로 돕는 일, 대접하는 일, 자원적 궁핍

4) 주의 또는 분별해야 할 유사 은사들 : 안찰, 영서, 예언 기도, 투시, 입신, 진동, 천국·지옥 간증 등






* 참고 자료 : 인간에 대한 학명(學名)

호모 오란스(homo orans) : 기도하는 인간 / 12-24-2024 새벽을 깨우리로다 요한복음 14:13-14


호모 쿨투라(homo cultura) : 문화적 인간 
호모 코메르시움(homo commercium) : 교류하는 인간
호모 알테르나투스(homo alternatus) : 대안적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 있는 사람, 현명한 인간
호모 인사피엔스(homo insipiens) : 현명하지 않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 일하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homo biblos) : 기록의 인간
호모 비올로기쿠스(homo biologicus) :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 : 학문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 미학적 인간
호모 아쿠아티쿠스(homo aquaticus) : 수중적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 예술인
호모 아토미쿠스(homo atomicus) : 원자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 소비하는 인간
호모 컨버전스(homo convergence) : 융합형 인간
호모 쿠페라티부스(homo cooperativus) : 협동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제도적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 : 창의적 인간
호모 데멘스(homo demens) : 미친 인간, 광기의 인간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 이중인, 이중적인 인간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 약탈하는 사람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 : 처형하는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 : 속이는 인간
호모 데지그난스(homo designans) : 디자인하는 존재
호모 드라마쿠스(homo dramaticus) : 드라마에 몰입하는 인간
호모 에콜로지쿠스(homo ecologicus) : 생태학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호모 에로스(homo eros) : 성애적 인간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 학습하는 인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 희망하는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 윤리적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 공감하는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homo grammaticus) : 문법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유희적 인간
호모 루두스(homo ludus) : 게임하는 인간
호모 마지쿠스(homo magicus) : 마술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적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네간스(homo negans ):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언어적 인간, 말하는 사람
호모 부커스(homo bookus) : 책 읽는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 매개체적 인간
호모 쿵푸스(homo kongf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호모 노에티쿠스(homo noeticus) :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인간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 밤을 낮 삼아 활동하는 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 : 새로운 인간(피조물이 아닌 인간)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 이동하는 인간, 적극적인 사람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 : 석유 문명에 의존하는 존재
호모 이미지쿠스(homo imagicus) :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호모 휴리스틱쿠스(homo heuristicus) : 빠르고 쉽게 (의사)결정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homo nomad) : 유목하는 인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 기호의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호모 프로그레시부스(homo progressivus) : 우주적 인간
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 호혜적 인간,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 종교적 인간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영혼인(靈魂人), 영적 인간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벌거벗은 인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포비아(homo phobia) : 동성애 공포증
호모 사커스(homo soccers) : 축구하는 인간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 공생인(共生人), 더불어 사는 인간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 사회적 동물
호모 수페리오르(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 : 기술적 인간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 (두 발로) 걷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떠도는 인간
호모 자펜스(homo zappens) : 관심을 자꾸 옮기는 인간
호모 포에티쿠스(homo poeticus) : 시적인 인간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 : 음악적 인간
호모 스투디오수스(homo studios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 : 사진 찍는 인간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 휴대폰을 생활화한 인류
호모 무비쿠스(homo movicus) : 영화를 즐기는 인간
호모 미디어쿠스(homo mediacus) : 미디어적 인간
호모 비디오쿠스(homo videocus) : 비디오를 즐기는 인간
호모 사이버네티쿠스(homo cyberneticus) : 온라인에 연결된 인간
호모 서치쿠스(homo searchcus) : 검색형 인간
호모 인터넷티쿠스(homo interneticus) : 인터넷을 하는 인간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통신하는 인간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작품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곧 죽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책이 없다는 것은 결국 죽음 이후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죽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살다 신앙안에서 죽는다면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장례문화를 새롭게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그동안 관습처럼 진행하던 입관예배, 발인예배 그리고 하관예배라는 순서에 대해서 성경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육체는 이미 흙과 같습니다. 
영혼은 이미 육체에서 떠나갔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를 앞에 놓고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바람직한 신앙인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죽은 후에 가족들에게 부탁합니다.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배를 하지 말고 가족끼리 묘지에 가서 시신을 안장하고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반드시 그렇게 하기를 부탁합니다. 죽은 시신을 앞에 놓고 예배하는 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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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2강 / 01-13-2021

레위기와 거룩(레위기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 거룩이란 구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어느 교인은 물건을 팔고 받은 돈(지폐)에서 가장 깨끗하고 새것고 같은 지폐를 골라서 헌금용으로 정리합니다. 심지어 다리미로 지폐를 정리한 후에 헌금으로 구분하는 정성이 구별하는 것이며 거룩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예배에 참여하려고 교회에 들어오면 헌금 봉투에 그 자리에서 헌금을 넣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은혜와 사랑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의 유래와 번역

1. 히브리어(두루마리) 양가죽 또는파피루스
2. 헬라어(70인역, Septuagint, LXX)
- 기원전 300년 경 고대 헬라어 코이네로 70인 학자들에게 번역하도록 의뢰
3. 라틴어
4. 독일어(구텐베르크) 성경 최초의 인쇄본
5. KJV(영국)
- 킹 제임스 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이 성경을 번역하다 화형을 당한 이후 그의 유업을 이어받아 제임스 1세가 임명한 당대 최고의 학자 47명이 1604년부터 세 곳에서 6개 집단으로 나뉘어 작업한 끝에 탄생했다.
번역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로 된 성경 원본이 사용됐지만 학자들은 불가타 성경(405년에 완역된 라틴어 성경)과 기존의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성경들도 참조했다.
6. 중국어 성경(한문)
7. 한글 성경
- 처음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된 로스(John Ross)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어 성경을 들고 1874년과 1876년에 한중 국경 지대에 와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번역에 대한 오류
대표적인 예를 사도신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
(He desended into hell.)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초대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신앙수준을 고려하여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음부 즉 지옥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팬데믹 세상에서 교회가 관심을 갖고 회복해야 할 과제는 예배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1:12 / 형식적 제사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로마서 12:2 / 영적 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구약) 토라(가르침) : (신약) 노모스(법, 규범)

창세기 : 브레쉬트(태초에)
출애굽기 : 쉐모트(이름들)
레위기 : 와이크라(그리고 부르시니)
민수기 : 바다르(광야)
신명기 : 다바림(말씀들)

레위기 : 27장, 859절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 해리슨(Harrison)

창세기(선택)
출애굽기(구원)
레위기(성화, 거룩)
민수기(연단, 군대조직)
신명기(경고)

창세기 12:1-2 / 선택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출애굽기 19:5-6 / 구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레위기 11:44-45 / 성화(거룩)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

민수기 21:8 / 연단(군대 조직)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신명기 6:4-5 / 경고

이스라엘
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암송 성구
레위기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요약 정리)
레위기 27장, 859절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해리슨, Harrison)

창세기(선택)
출애굽기(구원)
레위기(성화, 거룩)
민수기(연단, 군대조직)
신명기(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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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3강 / 01-20-2021

레위기의 거룩(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을 이야기 하면 먼저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룩은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시간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일곱 째 날 다시 말하면 시간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전통은 1/10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이 주일 저녁예배에 참석하는 숫자는 대략 1/5 이라고 합니다.
수요 예배는 1/3이라고 합니다.
그런대 새벽기도회는 교인의 1/10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체 교인의 1/10이 거룩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에는 다섯 종류의 왕국(나라)이 있다.
광물의 왕국
생명이 없다.

식물의 왕국
생명은 있으나 자유가 없다.

동물의 왕국
생명, 본능, 자유가 있다.

인간의 왕국
생명, 감성, 이성, 의지, 자유가 있다.

하늘 왕국(나라)
하나님의 거룩을 닮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광물은 자기 위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자기가 극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인간의 세계가 있다.
인간도 인간 이상 없다고 한다.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인간은 위로부터 압력을 느낀다.
소망, 꿈, 사랑, 기대, 영적 갈망을 느낀다.
생명의 근원이 생명을 부른다.
거룩한 분이 거룩하지 않은 자를 부르고 계시다.
그 분이 새 삶의 중심이 되신다. 새로운 소원, 새로운 목적, 새로운 언어를 주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지혜로 쌓아야 합니다.
지식이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란 아는 것을 실 생활에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단편적인 지식을 실 생활에 활용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하여 복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란 성경적 정의는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안드로포스란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첫번째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

1. 첫째 둘째는 순서를 결정하는 서열이 아니라 대표를 의미합니다.
2. 첫째 아담은 비록 930년을 살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을 사셨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3. 따라서 첫째 아담은 죽음이지만 둘째 아담은 부활 생명입니다.

레위기와 오경의 관계
1. 창세기(하나님의 백성을 선택 :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2. 출애굽기(하나님의 백성을 구출 : 모세를 부르셨다)
3. 레위기(하나님의 백성을 성화 : 대제사장을 세우셨다)
4. 민수기(하나님의 백성을 연단 : 여호수아, 갈렙을 세우셨다)
5. 신명기(하나님의 백성을 경고 : 계명과 율법을 강조하셨다)

오경을 5P라고 합니다.
창세기 : 계획(Plan)
출애굽기 : 통과(Pass)
레위기 : 목적(Purpose)
민수기 : 백성(People)
신명기 : 선물(Present)

‘레위기’라는 책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진리에 기초한다.
‘거룩’(kadosh)이라는 말은 레위기 히브리어 원문에서 100회 이상이나 등장한다.
(단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50회 정도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악이나 흠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계시다는 의미다.


레위기에서 배워야 할 5대 거룩

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레위기는 27장 859절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거룩"이란 단어가 레위기 전체에 100회 정도 사용됩니다.
이것은 히브리 성경에서 사용된 것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50회 정도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레위기의 주제는 "거룩"입니다.

거룩(카도쉬)이란 히브리 단어는 더러움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잘라냄" "분리함"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제가 신대원에 입학 후 기숙사에서 생활 할 때 기숙사 사찰로 봉사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당시 천호동에서 밤골목의 어두운 생활을 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기도하던 중 목사 후보생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신학교 기숙사에 자원하여 봉사하는 일을 시작하셨던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두 학기를 지내며 집사님께서 시험에 삐졌습니다.
왜 기숙사 안에서 사소한 물건들이 없어지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차라리 세상에 나가야지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사 후보생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이 천국은 아니어도 정말 초신자와 같은 자신에게는 은혜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는 거룩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히브리 민족이 애급에서 노예로 생활한 기간을 430년이라고 합니다.
430년이란 히브리 민족 스스로 애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려고 애급에서 인도할 때 모세를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도 완전한 거룩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애급에 히브리 민족들이 나올 때 애급 땅에는 열 가지 재앙이 임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사용된 것들이 애급에서는 신으로 섬김을 받던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애급에서 나온 히브리 민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거룩의 훈련을 받았지만 출애급 1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출애급 2세들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출애급 1세로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정탐군으로 선발되어 약속의 땅을 탐지한 후에 돌아와서 10명의 정탐군들은 그 지역에는 거인족들이 거주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민족은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10명의 정탐군들의 보고가 모두 정확한 내용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면 그 땅을 반드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현장을 목격한 후에 10명과 2명은 다수결 원칙에 의하면 10명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구별된 생각을 갖고 구별된 언어를 사용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카도쉬" 즉 "거룩" 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지와 힘이 아니라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를 통하여 인도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모든 죄인들을 약속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거룩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하며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거룩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아무리 뜻이 높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것 중 거룩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단언한다.

카다쉬(קךש) : 거룩하다, 깨끗하다, 신성하다

1.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됨

2. 성스러운 것을 만져서 성스러워진 사람에게 사용됨
3. 거룩한 예배를 위해 정해진 성물
4. 성소, 지성소, 법궤등 가장 거룩한 것에 사용
5.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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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4강 / 01-27-2021

레위기의 거룩(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존 번연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잘 알고 있던 간수가 제안하기를 집에 다녀와도 좋다.
그러나 존 번연은 물론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 길을 택하지 않는 이유는 나는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룩을 주로 외부의 모습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거룩은 내부에서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예) 주기철목사님께서 옥중에 있을 때 잠시 집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라고 했지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목사님을 향하여 사모님께서 마음이 흔들렸느냐?
당장 감옥으로 들어가라! 차라리 죽어서 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 주목사님께서 발걸음을 돌려 옥으로 향하며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자신을 무장시켰다고 합니다.

거룩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외적 거룩(표면적 거룩)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룩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집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마에 작은 혹을 만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사람은 다른 것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거리에서 무엇에 부딪쳐 이마에 혹이 생겼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거룩하다는 모습을 자랑하려고 이렇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거룩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 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둘째는 내적 거룩(이면적 거룩)

외적인 거룩을 강조한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내적 거룩을 강조한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보여주려고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하루 종일 앉아서 묵상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이런 거룩을 강조했던 초대 교회 교부 중에 "시므온"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기둥의 높이를 점점 더 높여가더니 나중에는 기둥이 무려 30m까지 높여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은 바리새인들처럼 외적인 거룩도 아닙니다.
시므온과 같은 내적 거룩도 아닙니다.
내적인 거룩과 외적인 거룩을 모두 종합한 통합적 거룩 즉 경건한 삶을 말합니다.

성경적 거룩은 무엇일까요?

1. 주를 만날 기회를 찾는 것(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로 구분하실 때 오른 편 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가 목 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배가 고플 때믄 먹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찾아왔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때 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에게 마실 물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는 옷을 주었고 배가 고플 때는 먹을 것을 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는 찾아갔습니까? 우리는 주님에게 그렇게 행한 적이 없었다고 부끄러워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32-46)

그러자 오른편 염소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우리들에게 마실 것을 달라 옷을 달라고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틀림없이 주었을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2. 경건한 언어(야고보서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경건한 사람은 그 언어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경건한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건을 연습 즉 훈련하는 것입니다.
훈련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닫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언어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기 때문에 가급적 말을 절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말을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 한번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미래와 같다!

미국의 36대 대통령이었던 린드 존슨96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로 고민했다.
존슨은 체중감량을 위해 몇 번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그의 아내에게 의미있는 말 한마디를 듣고 다시 시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만일 당신이 자신을 조절할 수 없다면 국가도 경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존슨은 이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노력한 결과 80킬로그램까지 뺄 수 있었다.

하루에 의미있는 말 한마디씩만 듣는다면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만득이와 박서방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한국인의 언어


3. 지족하는 마음(디모데전서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만족하는 마음)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새번역)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가치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오.

(공동번역)
늙은 아낙네들이나 좋아하는 속된 이야기들을 물리치시오. 그리고 경건한 생활에 힘을 기울이는 훈련을 쌓으시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


거룩(카도쉬)의 두 가지 의미

1. 소극적 거룩 : 정결, 죄를 멀리하는 것

2. 적극적 거룩 : 구별, 하나님을 위하는 것


고린도전서 10: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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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5강 / 02-03-2021

5대 거룩 /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5. 거룩한 구세주(히브리서 10:1)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하나님은 빛(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탈무드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날 한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다.
자신은 비록 불빛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빛을 보고 부딛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한참을 가는데 어떤 사람과 그만 "탁!"하고 부딛치고 말았다.
맹인은 화를 내었다.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맹인이라 앞을 못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시오?"
그러나 부딪친 사람이 손으로 맹인이 손에 등불을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자네가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네."
등불을 들고는 있지만 이미 꺼진 줄 모르고 들고 다닌다.
꺼진 것을 모르고사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우리나라 교회가 민족사상과 근대화에 끼친 공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양문명과 자유인권 도입
둘째, 민족교회를 창건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인격교육을 함
셋째, 학교와 병원을 설립
넷째, 금주, 금연, 절제운동을 펼쳐 사회개혁을 이룩함
다섯째, 민족 지도자를 배출함(이승만. 이상재. 이승훈. 조만식.남궁억. 안창호. 이원긍. 이 준 . 김규식. 김 구 등)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선행을 통하여 사회를 밝혀 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빛으로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레위기 21:4)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카톨릭 300년, 개신교 100년의 역사가 지난 오늘날 그리스도 복음의 씨앗은 실로 기적적이라 할만큼 성장되어 왔다.
우리 나라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기독교인의 수적 증가는 앞으로 100년 후에는 전체 인구의 90%이상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태를 기대할 만큼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가 25%에서 90%가 된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교회가 개혁되지 않고, 크리스천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한국사회는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 개혁의 대명사 마틴 루터가 남긴 명언이 있다.

"새들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새들이 우리 머리 위에 둥지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악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은 차단할 수 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악에 스스로 귀속되거나, 악행을 범하지 않으면 된다.
호랑이 등에 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악에게 당하면 악으로 되갚아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이 악순환의 고리다.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 땅은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레위기 18:27)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예) 모세에게 "네 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

  로버트 리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수도 워싱턴의 한 교회를 방문하여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한 흑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리 장군은 “십자가 아래서는 모든 땅이 평평한 것이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편견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것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편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평무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종과, 사회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위로부터 난 지혜에 따라 살고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따뜻한 햇살처럼 편견의 안개를 거두어 줍니다.
당신은 매일 평평한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십니까?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 분별하라(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어떤 연구실에서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개구리를 약간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큰 비커에 집어넣었더니 놀란 개구리는 펄쩍 뛰어올라 달아났습니다.
이번에는 찬물이 담긴 비커에 그 개구리를 넣자 개구리는 여유있게 헤엄치며 놀았습니다.
잠시 후 개구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보려고 비커 밑에 램프를 놓고 1초에 화씨 0.0175씩 데워지도록 불꽃을 아주 작게 조절해 놓았습니다.
물의 온도는 서서히 놓아졌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태평스럽게 헤엄만 치고 있었습니다.
온도는 계속 0.017도씩 올라가고 서너 시간쯤 지났습니다.

과연 개구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개구리는 푹 삶아져서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물 위에 떠있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은 마냥 도취되어 놀기에 적당한 온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민한 피부 감각을 상실한 채, 선한 것과 그릇된 것을 분별치 못하고 마냥 시간을 보낸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주변의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5. 거룩한 구세주(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현대인의 성경)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나에게 순종하며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라.

 (공동번역 성경)
  아브람이 구십구 세 되던 해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없이 살아라.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어느 젊은이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 하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 나라를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았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모래밭에는 발자국이 두개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따지듯이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내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네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눈길의 발자국

옛날 북서 아메리카에 한 인디언 추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백인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추장은 그 다음 날 아침에 방문객을 오두막집에서 나오게 한 후 물었다. "당신은 지난밤에 이 오두막집을 통과한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방문객은 눈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한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추장에게 "한 사람밖에 지나간 적이 없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추장은 그에게 그 날 밤 그 오두막집을 수백 명의 인디언들이 다시 말해서 한 부족 전체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추장은 그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인디언들은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를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추장이 제일 선두에 걷고, 나머지 모든 부족이 일렬로 그를 따라가면서 추장이 밟았던 발자국을 정확히 밟고 지나감으로써 하나의 발자국만을 남깁니다. 따라서 수백 명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 지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계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부족의 적들은 그들이 간 길을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장이시다. 그는 생명의 길을 따라 제일 먼저가시면서 우리에게 그의 발자국 즉 그의 모범을 남겨 놓으셨다. 우리는 주님이 남겨 놓으신 이 발자국을 따라야만 한다.



  거룩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예) 에녹, 노아, 므두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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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4가지 의미 :

1. 구별하다
2. 밝게 빛나다
3. 따뜻하다
4. 새로워지다

레위기의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
2. 거룩한 제사장
3. 거룩한 땅
4. 거룩한 백성
5. 거룩한 구세주

레위기의 목표

1. 제사장 나라
2. 거룩한 백성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1장 - 7장 / 제사 규례
8장 - 10장 / 제사장 규례
11장 - 16장 / 결례, 규례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17장 / 제사를 통한 거룩
18장 - 22장 / 가정, 사회를 통한 거룩
23장 - 25장 / 절기를 통한 거룩
26장 / 축복, 저주를 통한 거룩
27장 / 서원을 통한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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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신앙생활 십계명


1.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입니다.

2.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 할 것입니다.

3.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것입니다.

4.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 할 것입니다.

5.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입니다.

6.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 할 것입니다.

7.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8.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습니다.

9.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입니다.

10.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 할 것입니다.


영화 <베켓>은 영국 왕 헨리 2세와 그의 술친구 토머스 베켓의 이야기이다.

헨리 2세는 여자들과 즐기고 전쟁을 일으키고 세금을 물리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원했으나 당시 대주교가 눈엣가시였다.

헨리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술, 여자, 가무’ 친구인 토머스를 대주교로 임명하는 기발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터진다.

대주교로 임명된 토머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소명, 즉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제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헨리 2세는 그의 친구가 대주교직을 적당히 수행하면서 옛 친구의 바람을 들어주도록 그를 누누이 설득했으나, 토머스 베켓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토머스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순교를 당하게 된다.


"영화와 영성"의 저자 로버트 존스톤은 고백했다.

자신이 목사의 소명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목사는 먼저 거룩한 사람이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런 그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네가 거룩할 필요는 없다.

토머스도 거룩하지 않았다.

넌 다만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토머스처럼 응답했다.

“하나님, 제 전부를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확인하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행복이나 건강이 아닌 거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욕망과 관심사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 어떤 것은 옳고 선해서 나름의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어느 시점에서 그의미를 퇴색시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당신은 거룩해져야 한다고 믿습니까? 만일 내가 당신이 거룩하지 않다고 설교한다면 다신은 분노할 것입니다. 복음의 설교는 당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목적은 오직 하나,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교는 우리를 성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축복을 주시는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정심으로 우리를 구해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신 것은 우리를 거룩한 존재가 되도록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속죄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나를 다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로 연합하셔서, 더는 어떤 그늘이나 막힘도 없게 하실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심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맞지 않는 습관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거룩이란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걸음이 절대적으로 순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입의 말, 마음의 생가, 삶의 모든일이 하나님의 철저한 심사에서 조금도 때묻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를 기억합니다. 쉐퍼 박사는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합니다. 그는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 사역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사랑했던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후의 메시지를 피를 토하듯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내용은 이상스런 것이었습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의아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러했습니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메시지는 미국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축복과 행복은 구했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꿈과 비전은 구하지만 거룩함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꿈과 비전이 우선이 아닙니다. 행복과 축복이 우선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갖고 거룩한 삶을 추구할 때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서론 및 번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죄와 고통에서 해방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온전히 그리고 자유롭게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배는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도록 바른‘희생’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출 5:3).
그 중에 번제는 가장 대표적인 희생 제사의 첫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출애굽한지 2년째 되는 날에는 성막과 제사장의 옷을 다 만들었습니다.
성막을 세웠고 제사장을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제2년 2월 20일에 시내산을 떠났습니다(민 10:11).

레위기는 길어야 두 달 정도 동안 하나님이 회막, 곧 성막의 지성소에서 모세를 불러 명령하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레위기의 내용과 적용(3대 분류)

1-10장은 제사법
11-15장은 정결법
16-27장은 거룩법

레위기란 의미는 70인역 (기원전 300년 경) 일기 디아스포라들이 읽기 어려운 히브리어 원전을 쉬운  코이네 그리스 어 번역 성경으로 번역한 것에서 나오는 ‘레비티커스’, 곧 레위인들이 알고 지켜야 할 규정들을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만든 이름인데, 원래 히브리어 원전엔 “와이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고나서 그가 부르셨다(and he called…)라는 의미입니다. 곧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르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제사에서 크게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를 배웁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는 제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사는 십자가의 제사를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배우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또한 실감나게 배웁니다.

 둘째,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배웁니다.  베드로 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제상장적 지위를 가지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첫째는 예배이고 둘째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1. 번제의 절차: 황소로 제사 지냄(1-9절)

번제는 태워드리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뜻은 ‘올려 드리는 제사’ 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올려 드리는 제사입니다.

 절차의 뜻

 번제 절차

1. 깨끗게 /죄를 사함

1. 소(양, 염소)의 수컷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까이 나옴

 

2. 제사장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함(손을 얹음)

 

3. 그 짐승을 조인 대신 죽임

 

4.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

 

5.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림

2. 거룩하게

6. 가죽을 벗김

 

7. 고기의 각을 뜸 (조각으로 나눔)

 

8. 제단 위에 불을 피움

 

9. 불 위에 나무를 쌓음

 

10. 나무 위에 정결한 부분(각뜬 고기, 머리부분, 기름)을 진열

 

11.부정한 부분(내장과 다리)을 물로 씻음

3. 영광스럽게 /화목하게

12. 다른 부위의 고기도 함께 태워 제단을 향해 연기를 냄

 

2. 번제는 곧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죄 용서와 하나님이 받으심을 표시한다.(제물들의 조건과 의미)

1) 제물은 온전한 것을 가져 와야 함(3, 4절)

제물은 온전한 것, 흠 없는 것을 가져와야 합니다.  죄인 스스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셔서 언약을 맺고 사랑의 헌신 관계를 맺습니다. 1절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은 회막에서 모세를 불러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물을 드리려거든”(2절)은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3절). 흠 없는 수컷은 건강하고 하자가 없는 수컷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번제 제물을 통해 구약시대의 성도들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도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받아 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엡 1:7).

그리스도 대속의 보혈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보혈은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우리를 온전해진 자들로 여기셔서 기쁘게 받아들여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제물로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2) : 깨끗하게 (5)

 제단 위와 주위에 제물의 피를 뿌렸습니다. 우리도 온전한 제믈이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하게 받아 들여집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 게” 하셨습니다(엡 1:4, 7, 참고, 벧전 1:18, 19).


구약성경에 피는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창 9:4, 레 17:14, 신 12:23-24, 행 15:28-29).
피를 먹지 못하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자들의 행위를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이방 우상숭배자들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피를 마시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런 사악한 행위를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생명을 존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창 9:4, 레 17:11), 하나님이 내신 생명을 경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제사 원리에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 값은 사망(죽음)이었습니다(롬 6:23).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기 위해 자기를 대신할 제물(짐승)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흘려 제단에 뿌리라고 했습니다(레 17:11). 생명이 피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것은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죽게 된 것은 죄 값을 지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죄 값을 지불한다는 것은 죄가 속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짐승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함으로 범죄한 자가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히 9:22).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희생 제물이 피 흘려 죽게 되므로 범죄한 백성들을 죄가 속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죽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골 2:17, 벧전 2:24, 1:18-19, 엡 1:7).

사도행전15:28-29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이방교회의 놀라운 선교효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割禮)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교리적 문제와 선교적 문제를 야기하는 주장이었습니다. 바울,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변론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로 보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공회로 모였는데 거기에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부가적으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해야 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렇게 결정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유대인 출신들은 할례를 받았고 또 할례를 받아야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이방인들은 할례가 외과적 수술인데다 당시 사회에서 불경하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할례 받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을 들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은 할례를 요구하므로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힘들게 하는 멍에를 벗겨 주기 위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공회에서 예루살렘교회 사도인 야고보가 사도행전15:19-20에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결정하고 말 경우 유대교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할례 멍에를 벗겼으니 이방교회에 좋은 결정이 내려졌지만 유대교회는 전통적으로 할례를 받아왔기 때문에 불평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이 좋게 생각할만한 규례를 정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유대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철저히 지키는 편이었고 이방교회에서는 그렇치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가적인 결정은 할례 문제를 이방교회에 양보하므로 섭섭할 수 있는 유대교회의 마음을 안정시킨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피를 먹는 일에 대해서 초대교회 때는 다소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산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약용(藥用)으로 사용하거나 음식 안에 공재(共在)된 경우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피 자체로 만든 음식의 경우가 있습니다 (선지국, 순대). 그런 경우는 위의 예루살렘 공회에서 피 문제를 부가적으로 결정하게 된 배경을 생각하면서 각자 양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살을 태움: 거룩하게 (6-9)

제물이 되는 짐승을 제단 북쪽에서 잡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 진열했습니다(레 1: 11, 12). 성소 안 북쪽에 있는 상 위에 진설병 떡을 진열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을 거룩하게 받으셨습니다.

 4) 향기로운 냄새: 만족스럽게 받음(9)

 짐승의 고기를 태우는 냄새를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라 하셨습니다. 성소 안에서 올리는 분향단의

연기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신약에서는 향기를 그리스도와 자신의 삶에 적용합니다. 에베소서 5장 1, 2절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 라”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 몸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기롭게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향기 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계속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엡 4:24)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을 본받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향기롭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인도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충만을 받고 성령님을 의지합시다. 불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령님 안에서 고난을 받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 우리의 죄를 용서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라고 했습니다.

 2. 양과 염소와 비둘기로 제사 드림(10-17절)

하나님께서는 다른 제물로 번제를 드릴 때도 같은 절차로 드리게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나 양, 염소가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맞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했습니다. (옛 번역엔 모이주머니가 멱통으로 번역 됌)

나)교훈: 우리의 예배와 삶을 번제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게 드리자

 1) 십자가 복음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림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은혜를 성령을 통해 받습니다. 예배하는 자들의 찬송과 기도와 예물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6)입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향기로운 번제로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향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예배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도 찬송하여 성도들끼리 서로 화답하고 주께 노래하며 모든 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에 힘쓰십시다. 그렇게 예배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엡 5:18)을 받는 복을 누립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 했습니다.

지금도 사도를 이어서 설교자들이 십자가의 복음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은 죄를 고백하며 옛 사람이 매일 죽도록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은혜로 새롭게 변화되고 그 심령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십자가와 성령님을 의지하여 예배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주일 예배에서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잘 받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예배합시다.

2) 모든 삶을 번제로 거룩하게 드림과 같이 해야 한다.

온전한 제물을 ‘받으시는’(레 1:3, ‘열납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도 온전히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를 아들과 딸로 기쁘게 ‘받으십니다’(고후 6:2). 그러므로 우리가 온갖 더러운 탐욕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고후 7:1)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징계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특별한 잘못이 없을 때도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번제로 기쁘게 받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을 때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다)믿고 복종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합시다. 예배할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시다. 우리가 예배에 나올 우리의 존재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을 가지십시다. 가난하고 힘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온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예배를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과 정성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이 그 예배를 참으로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때 우리에게도 참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매일 살아갈 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자신을 거룩하게 드립시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결론)

번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다? 죽여서 드리는 상징의 제사입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창 8:21).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막(출 40:29)과 성전(왕상 9:25)을 완성한 다음에도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사장을 위임할 때,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된 다음에, 여성이 아기를 낳은 다음 자신을 깨끗하게 할 때에도 각각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화목제 (평화의 제사)를 드릴 때 번제도 함께 드렸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헌신을 할 때에도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비둘기로도 제사를 드릴수도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번제의 희생이 된 짐승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몸소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예수를 본받아 그 십자가에 또한 나 자신을 못 박음으로써, 참된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올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로 예수 때문에 참아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 봐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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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마이어의 성경 읽기의 방법

영국의 목사님이시면서 사업가였고 작가였던 F.B 마이어(1847~1929)목사님은 자신의 묵상집 중 하나인 ‘Light on Life's Duties(1985)에서 성경 읽기의 방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 공부를 위한 시간을 내라.

방해 받지 않고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맑고 명석한 사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어야 하며, 하루 중 최고의 시간, 첫 열매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아침처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데 좋은 시간을 없다. 신문을 읽고 편지들을 개봉하고 아침 식탁에서 수다를 떨고 난 후에는 성경의 각 페이지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는 거룩한 생각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성령의 가르침을 구하라


직접 글을 쓴 저자 만큼 그 글의 의미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거룩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을 기억하라. 초보 신자라도 성령의 도움을 의지한다면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오해했거나 놓친 것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보조하는 문헌들, 당시 사람들의 관습과 난해한 암시와 역사적 사건들과 지리적 세부 사항들에 대한 자료들도 많이 알면 좋겠지만, 그런 것들은 다른 시간에 공부하고 거룩한 아침 첫 시간은 성령께 드려야 한다.


셋째, 계획을 세워서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읽어 나가는 여러 방법 중에서 1년 1독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찢어지지 않게 잘 제본되어 있고, 필기할 여백이 많은 것으로 한 권 갖고 있는 것이 좋다. 그 책은 당신의 친구이자 헤어질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관련 구절들을 찾아보기 쉽도록 자세한 관주가 있는 성경도 필요하다. 때로는 하루에 두 세 시간 씩 할애하여 성경의 한 책을 한 번에 읽어보라. 한 시대나 한 사건, 또는 한 사람의 삶을 성경 여러 곳에서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유익하다. 또 때로는 성경 용어사전을 사용해서 믿음, 사랑 등의 한 가지 개념을 성경 전체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어떤 경우든 성경 전체를 읽으며 연구하라.


넷째, 펜을 들고 성경을 읽어라

필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성경 읽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특별한 날에 깨달았던 구절들에는 밑줄을 긋고 그 날짜를 적어 놓았다. 같은 메시지를 담은 다른 구절들을 연결시키고, 새로운 관련 구절들을 적어 두며, 유용한 개념의 핵심 단어를 기록하려면 펜을 많이 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찾은 또 하나의 보화가 말씀과 함께 기록되어 남겨진다. 그럴 때 우리의 성경은 지난 시간들을 담은 소중한 유물이 되며 우리 내면의 삶의 역사가 기록이 되는 것이다.


다섯째, 개인적 유익을 간절히 추구하라.


다른 사람을 위해 성경을 읽지 말고 당신 자신을 위해 읽으라. 때로는 읽기를 멈추고 이런 진지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좋다.“성령님은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배우길 원하시는가? 이것을 내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것을 내 인격 속에 어떻게 구현해야 할까?”


여섯째, 읽은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라.


하늘의 열매들이 당신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열려 있다면 따 먹으라. 성경이 한 페이지에 백지 수표와 같은 약속이 있다면 그것을 현금으로 만들라. 성경에 기록된 기도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소망의 활에 메워 화살처럼 쏘아 올리라. 빛나는 거룩함의 예를 발견한다면 당신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진리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찬란한 빛이 당신의 삶의 영역에 별처럼 빛나게 해 달라고 간정하라. 성경말씀을 향한 거룩한 열망의 새순이 솟아오르게 하라. 성경의 깊은 지식이 갖는 유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성경은 온갖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유혹이 물러가게 하는 성령의 검이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사역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성경은 믿는 자가 모든 상황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안내서이자 지침서인 것이다.


일곱째,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기라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보다 이 마지막 권면이 당신의 마음과 기억에 남길 바란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새롭게 인식되고 정의된 임무들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세 없이 성경 지식에만 몰두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즐기기 위해서나 아는 성경 지식에 대해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거룩한 개념들과 명령들에 즉시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감추시지 않고 자신의 가장 깊고 달콤한 생각들까지 우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러시아 선교에 평생을 바친 피터 다이넥가라는 분이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소련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해 주는 일을 하였는데 한 번은 이 다이넥가 선교사가 소련의 어느 호텔에 묵으면서 "하나님, 이 성경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제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잘못 건네 주면 큰일나기 때문에 성경 건네 줄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 중에 성경을 펼쳐 놓았는데 호텔 여 종업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경을 보더니 갑자기 그녀의 눈에 광채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저 여인에게 이 성경을 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계속 그 여인을 주시했습니다.
그녀가 가까이 오더니 그 성경을 만져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웃으면서 만져도 좋다고 말하며 이 성경을 갖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감사하다고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하고 성경을 품에 안으면서 "저는 이 성경을 갖기 위해서 20 년간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가 직접 읽어보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성경이 너무 흔하게 우리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하늘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이며 하나님의 뜻은 성경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그것은 성경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견해 또한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학자와 석학들은 거의 다 성경말씀이야말로 이 세상의 귀한 책들 중에 가장 귀한 책으로 꼽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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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 원리 3단계 

1. 관찰 :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 해석 : 본문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3. 적용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단계 (관찰) -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세가지 요점(3 key thoughts) 


1) 본문의 주의를 집중시킴 

2)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 

3) 정확하게 함 


바른 질문 (Asking the right questions) 


1) 누가 2) 무엇 3) 어디서 4) 언제 5) 왜 6) 어떻게 


관찰의 대상 


1) 단어들(Words) 

2) 문장의 구조(Structure) 

3) 문장의 분위기(Atmosphere) 

4) 문학 형태(Literary form) 


2단계 (해석) - 본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1. 서론 - 핵심적인 질문 (Key question to ask) 

2. 숙지 사항 (Important matters to remember) 

3. 일반 원칙 (General rules) 


  1)문자적으로 해석. (Interpret literally) 

  2)문맥속에서 해석. (Interpret in context) 

  3)역사 문화적 배경속 해석. (Interpret in view of history and culture) 

  4)문학 형태를 고려 해석. (Interpret in view of other parts of Scripture) 

  5)성경의 다른 부분을 고려하여 해석. (Interpret in view of other parts of Scripture) 

      -난해 구절을 위한 지침. (Guidelines for difficult passages) 

  6)신학적인 일관성을 고려하여 해석하라. 

      (Interpret in view of theological consistency) 


4. 특수 원칙 (Special rules) 

  1)비유 (Parables) 

  2)잠언 (Proverbs) 

  3)시가서 (Poetry) 

  4)비유법(Figures og Speech) 

  5)상징 (Symbols) 

  6)예언서 (Prophecy) 

  7)신약내 구약의 사용 (Use of OT in NT) 


5. 해석에 있어서의 위험 (Interpretive of not obeying) 


3단계 (적용)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불순종의 결과 (Results of the not obeying) 

2. 효과적인 적용의 원칙 (Rules for effective application) 

3. 교리별 연구 (Theological-doctrinal) 

4. 경건의 시간을 위한 연구 (Devotional)  




1.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요한 계시록은 요한 당시에 소아시아에 퍼져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레니우스는 계시록이 81-96년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 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가장 먼저 박해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로마 시의 화재범으로 몰아 사나운 짐승과 불에 태우고, 참수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네로 뒤에도 몇몇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로마의 정신"은 점차적으로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프라테스, 그리고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숭배 사상" 즉 "황제숭배 사상"을 이용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없애버리고 황제숭배를 절대 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를 중심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당국은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다!" 라고 말만 하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황제 숭배 예식을 실시한 후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인간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로마 당국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교회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한 무능력한 교회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점차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박해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 앞에서 방황하는 교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황제로 인해 당황하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결국 최후에 사단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향해서 세상이나 거짓 교훈에 타협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결한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첫 사랑을 상실하고, 윤리적 영적으로 부패해 가던 당시의 교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러한 부패 요소들과 싸워 이길 것을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 요한 계시록을 해석해 온 방법을 나누어보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과거주의 학파의 해석(The prete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요한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요한이 살던 1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과거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이미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다 성취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계시의 말씀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한 천사의 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이 예언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모두 다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세기 당시의 교회와 로마 당국과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승리할 것을 (상징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과거주의적 해석 방법은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에 매우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미 과거에 다 성취된 것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을 1세기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말을 요한 당시로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히"라는 말은 "반드시"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16:20, 눅 18:7-8 참조).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과거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요긴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현재주의(역사주의) 학파의 해석(The historic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두 번째 방법은 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림할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방법을 '현재주의' 또는 '역사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을 모두 다 현재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종종 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역사 사건에 뜯어 맞추는 실수를 범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현재 역사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을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나 모슬렘의 침입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요한에게 준 작은 책을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세력을 로마 카톨릭으로 보고, 짐승의 멸망을 로마 카톨릭의 멸망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시키다가 실수하게 되는 단점도 있습니다. 


 3) 미래주의 학파의 해석(The futu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세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 계시록의 내용을 먼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를 '미래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초대교회-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모든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4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역사의 마지막 때(주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7년 대 환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라면 이 책은 요한 당시에 박해를 받던 성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주님께서 당시 교회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을 요한을 통해서 편지로 써주셨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장 로마의 칼날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중동전쟁의 위협이나 E. C. 공동체의 출현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상징주의 학파(영적 해석 학파)의 해석(The allegorical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영적(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은 어느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원리를 상징을 통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견해를 "영적인 해석"(또는 "상징주의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서 선(교회)과 악(사단)의 전쟁 속에서 선(교회)이 승리하는 보편적인 신앙의 원리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단점은 사람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종합적 해석)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네 가지 해석 방법은 모두 다 그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방법들은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방법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단점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종합형" 또는 네 가지 방법의 "절충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다음의 사항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가 요한 당시의 1세기의 교회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그 내용이 요한이 살던 1세기의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지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는 그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과거주의자들의 견해를 참고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들이 1차적으로 1세기 교회를 위해 쓴 것이지만, 동시에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해석할 때에 전시대를 걸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그리고 복음과 거짓 종교사이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영적, 또는 상징주의의 견해도 참조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한 가지 예언이 두 개 이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러한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에 이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언은 처녀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사야의 아들은 모형이었고,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는 원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을 한 사건 안에서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원근 통시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도 묵시적인 예언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근 통시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짐승이 나타나는데, 이 짐승은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의 황제, 또는 로마제국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마지막에 나타날 최후의 적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이상의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1세기의 사건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역시 현재주의나 미래주의의 견해도 참고하게 될 것입니다. 



3. 묵시문학과 요한 계시록 


 1)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의 유사점 

  우리가 계시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 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묵시사상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계시록이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또 내용상으로도 그들과 흡사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unveil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연극을 시작할 때에 막이 올려지면 그 뒤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묵시'란 말은 주전 2세기와 주 후 1세기 사이에 씌여진 유대 종교 서적들에 붙여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책들을 '묵시문서' 또는 단순히 '묵시'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 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소수 민족아 당해야만 하는 핍박과 착취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억압받는 민족의 원한을 갚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권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악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항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천재지변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악을 제거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결말은 항상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통치를 받을 때마다 항상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묵시문학을 통해서 계속되는 이방 세력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나,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을 심판 받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마침내 악이 멸망하고 평화가 깃드는 영원한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의 특징은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전해주실 계시를 매우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전달해 주셨습니다.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과, 극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과,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과 형상들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신 것도 이러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 교회의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멀리 떨어져서 태어난 우리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이나 어휘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록을 이해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의 차이점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와 최후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종말의 시기에 관해서는 단순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22:20).  또한 요한계시록은 다른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응답하여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묵시문헌의 요소를 배려하면서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4. 저자 문제 


  그러면 요한 계시록을 쓴 저자는 누구일까요? 여러분은 "그거야 당연히 사도 요한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요한 계시록은 너무나 많은 히브리적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문법에 있어서도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과 그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2) 사도 요한이 아닌 다른 요한이 본서를 썼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3) 나이가 80이 된 사도 요한이 이러한 계시를 받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누가 기록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시록의 저자를 요한으로 간주한 이상,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없는 한 이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는 (계 1:1)에서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소개했습니다(1:1,4).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며(1:1),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22:19). 그는 당시 성도들의 환난에 함께 참여한 자였으며(1:9),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를 받고 이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9). 또한 그는 당시에 서 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해서도 익숙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도시들은 요한이 유배당했던 섬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의 저자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12사도 중 하나였던 사도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외에도 요한 복음과 세 편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전체 개요 


1:1-8,  머리말과 요한의 인사 


1) 머릿말 (1:1-3) 

2) 요한의 인사 (1:4-8) 

3) 서론 (1:9-20) -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 일곱 금촛대 가운데 나타나신 인자같은 이 


1:9-3:22, 지상의 교회들에게 주는 주님의 메세지 


 2장 -3장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 에베소 교회(2:1-7) - 열정을 잃은 교회(바울이 2,3차 전도 여행 때 이곳에 교회를 세운 도시 ) 

* 서머나 교회(2:8-11) - 박해받는 교회(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던 도시) 

* 버가모 교회(2:12-17) – 이단의 교훈과 우상 숭배에 너그러운 교회(황제숭배의 중심지였던 도시) 

* 두아디라 교회(2:18-29) - 세상과 타협한 부도덕한 교회 아폴로 신을 숭배한 도시 

*사데 교회(3:1-6) - 영적으로 죽은 교회(디베료 황제와 여신 키벨레를 숭배한 도시) 

* 빌라델비아 교회(3,7-13) – 선교하는 교회(디베료 황제가 재건한 도시) 

* 라디오게아 교회(3,14-22) – 교만하고 신앙이 미지근한 교회 (안약 제조와 섬유 산업이 발달하 도시) 



        계4:1-5:14  하늘 보좌와 천상의 예배  

1)        천상의 예배. (4:1-11) 

2)        일곱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5:14) 


계 6장-16장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심판 


요한 계시록 6-16장의 내용에는 종말에 일어날 세가지 큰 재앙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인곱개의 인을 뗄떼마다 나타나는 일곱가지인 재앙, 두번째는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일곱가지 나팔 재앙, 세번째는대접을 땅에 쏟을때 나타나는 일곱가지 대접재앙 이다 


1)        일곱 봉인의 심판 (5:1-8:1) 

*인봉된 책 (5:1-14) 

*여섯개의 인을 뗌 (6:1-17) 


*중간 계시(7:1-17)  14만 4천명(= 셀수 없는 성도들 )과 천상의 예배 


2)        일곱 나팔의 심판 (8:2-11:19) 

*8:6-13 처음 4개의 나팔 소리와 심판 

*9:1-12 다섯번째 나팔 소리, 또는 첫번째 재앙 

*9:13-11:14 여섯번째 나팔 소리, 또는 두번째 재앙 

*11:15-19 일곱번째 나팔소리, 또는 세번째 재앙 


12:1-13:18여자와 용, 두 짐승 , 그리고 짐승(적그리스도)의 표 666 

14:1-5 어린 양과그의 백성들인144000명 

14:6-13 심판의 예고 

14:14-20 마지막 수확 


3) 일곱 대접의 심판 (15:1-16:21) 


참고) 일곱인과 일곱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을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 

      넷째 인 

      다섯째 인 

      여섯째 인 

      일곱째 인 → 첫째 나팔... 땅 삼분의 일의 심판 

                        둘째 나팔... 환난 세력의 등장 

                        셋째 나팔... 음녀,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으로 인한 쑥물 

                        넷째 나팔... 세계 삼분의 일이 영적 흑암에 들어감 

                        다섯째 나팔... 첫째 화(5개월 황충이 환난) 

                        여섯째 나팔... 둘째 화(유브라데 전쟁) 

                        일곱째 나팔... 셋째 화(7대접 심판) → 첫째 대접 심판 

                                                                            둘째 대접 심판 

                                                                            셋째 대접 심판 

                                                                            넷째 대접 심판 

                                                                            다섯째 대접 심판 

                                                                            여섯째 대접 심판 

                                                                            일곱째 대접 심판 


계 17:1- 19:5 대탕녀 바빌론의 패망 

*17:1-18 바벨론의 신비 

*18:1-19:5 바벨론의 심판 


계 19:6-16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그리스도의 재림 

*19:17-21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전쟁 

*20:1-6 사단의 묶임과 놓임 그리고 천년 왕국 

*20:7-15 하늘의 승리와 사탄의 패망, 마지막 심판 

계 21: 1-22:5 새 하늘과 새 땅 

*21:1-8 새창조 (새하늘과 새땅) 

*21:9-22:5 새예루살렘 


계22: 6 - 21  맺음말 

*22:6-15 요한과 천사 

*22:16:21 마지막 당부의 말 











계시록의 해석 원리와 기독론적 이해-CGM 세미나 


이 내용은 제 2회 CGM 세미나 계시록과 이단 세미나 (2010년 1월~2월) 의 일부 강의  내용입니다 

강사:  김곤주 목사 


김곤주 목사는 호주 시드니에 살면서 Morling College 대학원(M.A in Theology)에서 성경신학을 마치고 호주 무어신학교에서 Moore College 대학원 (M.A in Theology)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새언약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4가지 해석 원리 > 


1. 과거적 해석 방법 

이러한 견해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과거란 로마의 역대 황제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핍박을 가장 심하게 받았든 1세기경을 전후한 시대를 가리킵니다.이러한 견해의 한 예를 들면 적그리스도의 표인 666 짐승의 표를 초대 교회 당시 교회를 핍박했던 네로 황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2. 역사적 해석 방법 

역사적 해석 방법이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모든 계시를 인류의 역사적 무대 위에서 성취 될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세대주의: 계시록을 문자적인 해석에 촛점을 두고 연대기 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봄 


3. 상징적인 해석 

상징적인 해석은 계시록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적 해석은 때때로 영적 해석 방법과도 유사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는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실제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에 나오는14만 4천명이라는 숫자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상징하는 숫자요 새 예루살렘 성은 영화롭게 된 교회 전체를 상징한다는 견해입니다. 


십사만 사천 인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을 유의하자. 

  ① 우리 하나님의 종들(계 7:3)  ② 인 맞은 자들(계 7:4)  ③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  ④ 흰 옷을 입은 자(계 7:9) ⑤ 손에 종려 가지를 든 자(계 7:9)  ⑥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 자(계 7:9) 



4. 미래적인 해석 방법 

미래적인 해석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이 미래주의와 상징적인 의미를 받아들이는 온건한 미래주의로 구분하여 분해 볼 수있습니다. 


온건한 미래 주의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다면 극단적 미래주의란 이와는 좀더 극단적인 경향을 가지고 그 날짜를 계산하는 건전하지 못한 성경 해석의 위험성을 가진 경우를 말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네가지 해석 방법들이 요한 계시록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주요한 방법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은 어느 하나만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두 다 어느정도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참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해석과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세대주의(dispensational)란 용어는 세대 혹은 시대를 뜻하는 dispensation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한 마디로 구별되는 시대를 세대(dispensation)라고 부르며 이 '세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세대주의 적 성경 해석은 한국 교회에서 오래 동안 유행하였으나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건전한 해석의 관점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은 대부분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하기 보다는 상징적인 해석을 더 많이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세대주의 신학의 공통적 특징 


1)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과 성경 예언의 중요성 강조 

2)종말론에 있어 전천년설 지지(환난전 휴거설) 

3)선택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믿음 

4)세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 강조 등이다. 


이들은 세대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고 불리지만, 세대주의의 최초 주창자 이름을 따서 다비주의(darbyism)라고도 한다. 이들은 또한 세계 역사는 시대들 혹은 세대들로 나누는 체계를 가졌다. 

무죄세대- 인간타락 이전 하나님께서 아담과 에덴에서 언약 맺으신 시대, 

양심세대- 인간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시대, 

인간통치세대-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시대, 

약속세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유일하게 언약을 맺으신 시대, 

율법세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시대, 

은혜세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의 시대 

왕국세대-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통치하시는 시대 


이들은 대환난 이전에 교회가 휴거되고 대환난 끝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한다는 신앙을 가졌다 

이러한 고전적 세대주의 사상은 다비의 미국 여행과 형제단 운동과 스코필드의 관주성경과 췌이퍼의 조직신학등의 영향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전역에 확산되었다. 


2.세대주의 성경해석 방법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보면 그들은 문자적 성경 해석방법을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 자들의 문자적 해석의 범주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Darby의 문자적 해석이 이스라엘과 교회의 운명이 다르다는 이중적 운명이라는 근본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Scofield는 그 원리에 풍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았고, 수정세대주의 자들은 더 많은 다중적 해석원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3.문자적 성경 해석의 정의 

   문자적 해석이란 의미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한 고립된 단어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문장 속에 문맥과 관계 

    없이 그 단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자들이 가장 흔히 사용할 수 있는 의미를 말한다. 

2) 구절들을 유기적인 전체로 읽되 가급적이면 가장 평이한 방식으로 읽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명백한 비유들은 비유들로 인정하되 가장 명백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그 이상의 

    비유적인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 

3) 해석자들이 자기들 자신들이 세계관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자신들의 암시적 지식의 맥락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평범한 해석 : plain). 



                                  <계시록의 기독론적 이해 > 


요한 계시록1장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먼저 밝히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다. 요한계시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이해된다. 


1)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의 그리스도이시다(계 1:10-18). 

예수는 "인자같은 이"의 신분을 가지시고 (1:13). 그의 외모는 상징적으로 설명된다(1:13-16). 또 (1:17-18)을 보면 예수는 처음과 나중이시며(17), 산 자이시며(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신다(18).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일곱교회에서 다시 소개된다 (2-3장). 


에베소 - 일곱 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서머나 - 처음과 나중,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버가모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두아디라 -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같은 이 

사데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빌라델비아 -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라오디게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2)  천상(우주)의 그리스도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우주)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천상(우주)은 무지개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 (4:3) 우편에는 어린 양이 있고 그 앞에 일곱 영이 있으며 그곳으로 부터 생명의 강이 흐른다 (7:17; 22:1-2).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계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들려있지만 이 봉인된 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다. 이때 유대지파, 다윗의 뿌리이신 어린 양 예수께서 이 책을 취하게 되자.네 생물과 24 장로와 많은 천사들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한다(5:1-13).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 천상의 보좌를 중심으로 네 생물과 24장로, 그리고 14만4천의 성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와 천사들이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다 (7: 9-12; 14:1-5). 


예수께서는 또한 시온산에 서있는 승리의 그리스도이시다 14:1-3).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그리스도이시다(14:14-16). 그는 흰 구름에 앉으시고, 금면류관을 쓰시고,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추수를 거두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음녀 바벨론 (14:8; 16:19; 17:5; 18:10) 인 이 세상을을 심판하신다. 


3)  전투하는 영계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세계에서 전투하시는 용사로서 묘사된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16:13)와 싸우신다. 이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라 하는 곳에 집결한다(16:16). 마지막 전쟁에서도 음녀 바벨론과 세 더러운 영과 온 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지 큰 세력을 얻지만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16:15) 이 대적들을 무찌르실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19:19-20:10). 



이 요한 계시록이 쓰여질 당시는 AD 95년 경으로 사도 요한은 죄수형에 처해져서 외딴 섬인 페트모스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로마의 11대 황제인 도미티안은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면서 교회들은 큰 위기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과 불안속에서 살아갔고, 때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말할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겪어야만 했고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함으로서 믿음이 연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격력하면서 참된 소망과 믿음을 갖도록 그래서 교회가 인내하고 승리할 수있도록 주신 성경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 것입니다. 그래서 1장 3절의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자와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신 영광스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축복이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 초두에는 당시(A.D.90년경) 소아시아에 개척된 7교회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소개되어 있다. 

이 메시지들은 단지 이들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 교회는 초대 교회 이후 오고 올 모든 교회의 대표로서 이 말씀들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7교회 상황과 각 교회에 주어진 주님의 메시지를 잘 연구하여 이를 현재 나의 교회에 비교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 징

칭 찬

책 망

당 부

약 속

상 징

에베소

정통적인 교회

(2:1-7)

선행,인내,악에 대한 배격,교회 질서 확립,주를 위해 성실

첫 사랑을 잃어 버리고 퇴보함

구원의 첫 사랑을 점검,회복하라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리라

정통 고수에는 열심히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등한시 하는 교회

서머나

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2:8-11)

영적인 부를 누림

-

10일간의 환난을 두려워 말라,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둘째 사망을 피하리라

물질에 초연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교회

버가모

우상 숭배한 교회

(2:12-17)

고난과 순교의 위기에서 믿음을 굳게 지킴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아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있음

심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라

감추인 만나와 흰돌,새 이름을 주리라

혼탁한 세태와 결탁한 교회

두 아

디 라

악한 여선지자의 교회

(2:18-29)

사랑,신령한 봉사,믿음,회개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좇음, 우상숭배,행음

처참한 결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라

만국 통치권과 새벽별을 주리라

많은 이단에 심취되어 진리를 떠난 교회

사 데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교회(3:1-6)

몇 사람이 영적 순결을 지킴

극도의 형식주의,

영적 무기력, 

행함이 없는 믿음

신앙을 점검 회개하라

흰옷을 입고 주와 동행하리라,생명책에 이름이 오르리라

그릇된 교리, 형식주의에 빠진 교회

빌라델

비 아

연약하지만 충성스러운 교회 (3:7-13)

적은 능력으로도 철저히 순종함

-

면류관을 굳게 지키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리라

말씀을 잡고 바른 신앙을 견지하는 교회

라오디

게 아

부요하나 가난한 교회

(3:14-22)

-

미지근함, 교만함, 영적 가난, 영적 수치, 영적 소경

자신을 돌아보라,차든지 덥든지 하라,회개하라,열심을 내라

주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주의 보좌에 앉으리라

세태를 좇아 인기를 누리며 물질적 부를 누리는 세속화된 교회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1-3]. 




모든 사람은 잠에서 깨 아침을 맞이한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7분을 투자해 삶에 변화를 주는 '아침 습관 7가지'를 소개한다.


①1분: 미지근한 레몬물 한 잔을 마셔라.

레몬물

기상하고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몸속에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물 마시기는 사람의 몸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6~8시간 가량 수면을 취하면서 물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기상해선 반드시 물이 필요하다.


레몬은 소화기능을 깨운다. 새콤한 레몬 맛이 아침을 먹기 전, 입맛을 돋우는데 도움을 준다. 달콤한 게 당긴다면 꿀을 약간 넣자.


물을 마시고도 시간이 있다면 아침에 '그린 스무디' 마시기 습관을 길러보자. 미네랄과 섬유질이 풍부한 케일 등 초록 잎 채소는 식사대용으로도 좋다.


 

혓바닥 닦기

②1분: 마른 세수하기와 혓바닥 청소.


마른 세수 형식으로 몸을 구석구석 쓸어보자. 너무 세게 쓸어내릴 필요는 없다. 적당히 '드라이 브러시'를 하면 피부가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다. 양치할 때 이만 닦지 말고 혓바닥 청소에 집중해보자. 혓바닥을 잘 닦으면 음식맛도 더 좋아지고 입냄새를 없애는데도 도움이 된다.


 

거울 보며 웃기

③30초: 거울 보고 30초만 웃기.


거울을 보고 딱 30초만 웃어보자.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오직 나만을 향해 웃는 30초다.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 웃으면서 나를 응원한다. 행복한 자기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라.


④1분: 100번 제자리 뛰기.


제자리뛰기는 어떤 에너지음료보다 몸에 좋다. 굳이 멀리 달리기를 나갈 필요는 없다. 제자리에서 몇 번이라도 뛰면서 하루를 시작하라. 움츠렸던 다리 근육을 쓰면서 전신에 기운을 불어 넣어보자.


⑤1분 30초: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 북을 켜라.


지하철도 좋고 버스도 좋다. 어디가 됐든 당신의 귀에 새로운 자극을 주라. 자고 일어난 뒤 당신은 새로운 정보를 흡수할 준비가 되어 '영혼이 배고픈' 상태다. 아침을 잘 챙겨 먹듯이 영혼에도 좋은 음악이나 아름다운 콘텐트를 부어 넣어라.


⑥1분: 뭐든지 일단, 아침에 딱 3문장만 쓰기.

아침에 딱 3문장만 쓰기.

여기에서 포인트는 딱 3개만 쓰는 것이다. 욕심을 내서 4개, 5개씩 쓰고 나면 나중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도리어 낙담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3가지에 집중하라. 일에 관계된 문장도 좋고 개인적인 것도 좋다. 딱 3문장만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습관을 길러보자.


⑦1분: 침대정돈

침대정돈

집에서 나오기 전, 당신을 행복하게 할 습관 하나가 있다. 바로 침대 정돈이다. 찰스 두히그의 저서『습관의 힘』에 따르면 침대 정돈은 하루 일과에서 생산성 높이기에도 기여한다.


침대 정돈을 하면서 하루의 시작을 산뜻하게 하면 다른 일들도 잘 해내는데도 연결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침대 정돈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다른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에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하나의 좋은 습관을 토대로 여러 개의 좋은 습관을 기를 수 있는데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게 바로 침대 정돈이라고『습관의 힘』은 분석한다.


유튜브 상에서는 '미국 해군 대장이 말하는 매일 자기 침대를 정돈해야 하는 이유'라는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그는 "설사 그날 하루가 엉망진창이었어도 침대 정돈을 잘 하는 사람은 최소한 집에 돌아갔을 때 잘 정돈된 침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침대 정돈을 꼭 하자"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7분만 투자해 인생을 바꾸는 아침습관 7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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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대화법 열 가지


1. 들을 준비를 하고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 전에 대답하지 않는다. 

(잠언 18:13, 야고보서 1:19) 


2. 말하기를 더디 하고 먼저 생각하며 서둘러 말하지 아니한다. 

(잠언 15:23, 28, 21:23, 29:20) 


3.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한다.

(야고보서 1:19) 


4. 진실을 말하되 언제나 사랑 안에서 말한다. 사실을 부풀려 말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4:15, 25, 골로새서 3:9) 


5. 말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다투지 않고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잠언 17:14, 20:3, 로마서 13:13, 에베소서 4:31) 


6. 화를 내면서 대꾸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꾸한다. 

(잠언 14:29, 15:1, 25:15, 29:11, 에베소서 4:26, 31) 


7.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 상대가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야고보서 5:16, 잠언 17:9, 에베소서 4:32, 골로새서 3:13) 


8.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잠언 10:19, 17:9, 20:5) 


9. 상대를 책망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복시켜주고 격려한다.ᆞ 

(로마서 14:13, 갈라디아서 6:1, 데살로니가전서 5:11) 


10. 누가 말로 공격하거나 비판하거나 책망하면 똑같이 대꾸하지 않는다.

(로마서 12:17, 21, 베드로전서 2:23,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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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들이 교훈하는 인생법칙

노아의 인생 법칙 

내 인생이 하찮게 느껴질 때는 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한다.

에스더의 인생 법칙 

내 인생의 목적에 회의가 들 때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자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

요셉의 인생 법칙 

내 삶이 계획한 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기억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모세의 인생 법칙

두려움을 느끼거나 주저하게 될 때는 망설이지 말고 현재의 안전지대에서 박차고 나와 신앙 지대로 간다.

리브가의 인생 법칙

남들이 도움을 요청해 올 때는 그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 돕고 베푼다.

아브라함의 인생 법칙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항상 옳다는 것을 믿고 순종한다.

느헤미야의 인생 법칙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협력의 힘을 체험한다.

다윗의 인생 법칙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잠재력을 믿고 한계를 뛰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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