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 하나님의 위엄(威嚴) / 거룩한 두려움



삼위일체(三位一體)

- 석 삼, 자리 위, 한 일, 몸 체

창세기 1:1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즉,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키는 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앞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이제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또한 여기서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이와 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주의 할 것 두 가지

첫째, 역활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목사, 아버지, 남편
문제는 역할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동시에 교회와 집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바람직한 설명은 아니다.

둘째, 삼신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성부 하나님은 창조, 성자 하나님은 말씀, 성령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모습이므로 삼신이 될 수 밖에 없다.

터툴리안은 태양으로 설명하였다.
태양은 빛, 열, 태양으로 섦명할 때 다른 곳에서는 밤이 된다면 그곳에 태양은 없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땅에 계셨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으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위엄(威嚴) - 거룩한 두려움

위엄(威嚴) 
1. 의젓하고 엄숙함    
2.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엄성     
3. 거룩한 두려움

따라서 사람의 위엄은 불완전하며, 오직 참된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양한 히브리어 단어가 ‘위엄’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테러(terror)’로 번역하였습니다(출 23:27, 신 34:12, 욥 13:21, 사 2:21).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 NIV, ESV)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I will send my terror ahead of you and throw into confusion every nation you encounter. I will make all your enemies turn their backs and run.

위엄(367) 에이마(’êymâh) אֵימָה  

1. 공포.  2. 신명기 32:25.
발음 [ ’êymâh ]
어원 / 366과 동형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여성 공포[그 원인에 대한 소유격이 수반됨], 신 32:25.



신명기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Great terror: NIV, NASB, KJV)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욥기 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Your terror: NIV)으로 나를 두렵게(terrify: NASB, ESV) 마옵실 것이니이다.

이사야 2: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terrify: ESV; terribly: KJV) 그의 위엄(the terror of LORD: ESV, NASB)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뉴스에 보도되는 테러 사건을 들을 때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람의 테러는 막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테러로 역사하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엄(테러)이 역사하시면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먼저 하나님의 위엄 앞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역사합니다.
대적 원수들에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떨림이 임하며(시 48:6), 마음에 병이 될 정도의 큰 걱정거리와 낙담이 생깁니다(출 15:15).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하나님의 위엄을 피할 수 없으며(시 76:12),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대적들의 기운이 빠지고 몸이 돌과 같이 굳어집니다(출 15:16, 삼상 25:37).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 까무러칩니다(수 2:11, 5:1, 사 13:7).

하나님의 위엄이 역사하시면 오늘부터 천하 만민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그 앞을 대적하지 못하고 얼씬도 못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종말 때에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바벨론이 아무리 무섭게 성도를 대적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셔서 강한 대적들이 죽음 앞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출 23:27, 신 28:10, 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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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엄이 앞서가면 능히 당할 자 없다

출애굽기  23:20-28, 로마서 11:22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威嚴)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로마서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출애굽기 23:27에 ‘하나님의 위엄’이 나옵니다.
‘위엄’,위엄 위(威), 엄할 엄(嚴)입니다.
위태로울 위(危), 험할 험(險)이 아닙니다.
뜻은 ‘의젓하고 엄숙함’,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성’,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위엄의 속성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류의 시조 아담, 하와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흘러 내려오는 역사(歷史)는 만세(萬歲) 전에 택하신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최후의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적 경륜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죄악 된 인간에게 말씀을 줘서 깨닫고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첫째 소원입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 18:14).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가셨죠.
키 작은 세무서장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듣지도 않으셨는데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留)하여야 되겠다.”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악질 매국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내가 남한테 토색(討索)한 것, 돈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하셨죠(눅 19:1-10).

본문에 위엄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벌써 삭개오에게 가서 역사(役事)한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창조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입니다.
세계사는 구속사예요.
그냥 제멋대로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여러분을 향해 벌써 하나님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어떤 죄인에게도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의 뜻이‘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많은 사람들한테 대접받으러 온 게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고 대속물(代贖物)로 내 몸을 바치러 왔다.”하셨죠(마 20:28, 막 10:45).
수천 년의 역사가 한강 물같이 도도히,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흐름입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요 3:16).
하나님이 역사의 근원이며, 모든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대상 29:11,12, 욥 12:23, 시 103:19, 엡 1:11).
따라서 구속사는 세계사, 즉 일반 역사의 중심핵을 이끌고 있습니다.

‘구속(救贖)’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걸머지고 죄를 사해 주고 구원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구속사의 최고 절정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십자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 그리고 위엄이 한강 물 같이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누구든지 텀벙 빠져서 목욕하면 십자가 피로 죄를 씻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이면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위엄이 그 백성과 함께하시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말씀으로 승리하고, 세상 죄와 상관없이 천국에 입성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다

참된 위엄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승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5:24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역대상 16:27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위엄’이 영어로 어떻게 돼 있는지 영어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테러’(terror)입니다.
테러, 얼마나 무섭습니까.
‘테러’는 국어사전에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는 행위. 테러리즘(terrorism)의 준말’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위엄’이 영어로 바로 ‘terror’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악한 세상, 당신의 테러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테러해도 겁나잖아요?
때려 부수고 쥐어패고 팔을 비틀고 몽둥이로 패보세요.
보는 사람이 얼마나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합니까. 마지막 심판할 때 하나님의 테러!
이 성경 구절들을 찾아 봤습니다.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신명기 34:12에는 ‘엄청난 테러’(all the great terror, 모든 큰 위엄), 보통 테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테러는 누구도 말리지 못해요.
엄청난 테러!
욥기 13:21에는 주의 테러(your terrors),
이사야서 2:21 볼 때 하나님의 테러(the terror of the LORD)!

그러므로 하나님이 악의 세력한테 테러하실 때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는 지켜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고 또 병풍같이 둘러 진쳐 준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세상에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위엄, 즉 테러가 역사하시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임합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위엄이 역사하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과 떨림이 임합니다. 남자들은 모르죠. 옛날에는 여인들이 아이를 낳으러 들어갈 때 마루 밑에 있는 신발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 신발을 다시 신을 수가 있을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혹은 떨림! 또, 마음의 병이 될 정도로 큰 걱정거리, 근심, 낙담이 임합니다.

출애굽기 15: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아무리 권세가 높은 자도 사기가 완전히 꺾여 마음이 돌같이 됩니다.

시편 76:12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기운이 빠지고 몸이 돌같이 굳어집니다.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사무엘상 25: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서 까무러칩니다. 맥이 팍 풀려 일어날 힘도 없고 뭐 할 생각도 못 합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 멀끔히 먼 산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수 2:11,5:1, 사 13:7).

여호수아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신 2:25)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을 위해서 많은 사람을 떨리고 두려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감히 얼씬도 못 하고, 침범도 못 합니다. 꼭 믿으세요. 신명기 28:10에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3:26에는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하셨습니다.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주검이 될 수밖에 없죠. 성령의 역사, 마지막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대적들과 싸울 때, 대적들은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 공포, 고통에 사로잡히고 간담이 서늘해져 벌벌 떱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앞서 보내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출 23:27).

위엄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성취하려면

하나님께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입니다. 길 갈 때도, 어디 갈 때도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친근히! 그러면 반드시 위엄의 역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근히 하는 자, 히브리어 말로 ‘다바크’, 즉 ‘바싹 달라붙는 자’를 대신해서 싸우십니다. 하나님께 바싹 달라붙으면 고통, 근심, 걱정,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을 대신 다 해결해 주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성경도 믿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믿어야죠.

여호수아 23:8-10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여러분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대신 싸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할 때 ‘내가 가서 혼내주겠다.’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벌써 가셔서 위엄으로 그 마음을 돌같이, 사지(四肢) 백체(百體)가 힘이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북한 김정은이 핵폭탄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위엄을 먼저 보내면 그까짓 것 다 먼지입니다. 쓰레기통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신명기 11:22-23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여기서 부종은 ‘붙을 부(附)’, ‘따를 종(從)’입니다. 히브리 원어나 국어사전에 ‘바싹 따라붙어서 따른다.’고 돼 있죠. 부종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에 세 번, 유월절과 맥추감사절,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몇천 리, 몇백 리를 걸어서 예루살렘에 다 가야 해요. 집에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걱정이 되죠. 그래서 ‘작년에 내가 갔다 왔으니, 올해는 당신만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위엄이 너희 집에 있겠으니 다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돌아올 때까지 그 집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약속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 하리라

자물쇠 잠글 필요도 없습니다. 문 다 열어놓아도 괜찮습니다. 얼씬도 못 하게 하십니다. 얼씬거렸다가는 온몸이 돌처럼 굳어져 죽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평생 예수님 믿으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위엄’을 보내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내 가정, 남편, 아내, 외국에 유학 간 자식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죠. 오늘 나와서 이 말씀 들으신 분들에게 자손만대에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리라.’(시 25:1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고, 예배드릴 때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내쫓을 때 보내신 세 가지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일곱 족속을 내쫓을 때 하나님이 세 가지를 보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보내셨습니다(출 23:20-28).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가 예비한 곳에 이르기까지 보호,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의심하거나 우습게 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이 사자에게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멸시, 천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 대접하고 순종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내 원수의 원수가 되고, 내 대적의 대적이 됩니다. 믿는 우리 평강교회 성도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대적들이 아예 엿보지도 않고 건드릴 생각도 안 합니다. 모든 생활에 형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하나님,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세요.’ 기도했죠. 이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나안 여섯 족속, 아모리, 헷, 브리스, 가나안, 히위, 여부스를 다 때려 부순 것을 보세요(출 23:23).

두 번째, 하나님의 위엄을 이스라엘 앞서 보내셨습니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출 23:27)를 ‘현대인의 성경’에는 ‘너희가 만나는 백성들을 내가 두려움과 혼란 가운데 빠뜨려 너희를 등지고 달아나게 할 것이며’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를 보지도 못한 채 소문만 듣고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이런 축복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위엄을 기도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기도하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아마 바쁘실 것입니다. 평강교회가 지금까지 ‘복을 주십사, 형통을 주십사, 악한 마귀에 시험 들지 않게 해 주십사’ 이런 기도만 했죠. 하나님의 위엄 속에 그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눈뜨자마자 ‘하나님의 위엄’, 길 가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버스 타고 가다 소매치기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있으면 절대 사고 나지 않고, 도둑맞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늘 감사, 찬송하고,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며 저절로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왕벌을 보내셨습니다(출 23:28, 신 7:20, 수 24:12).

신명기 7: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누가 ‘너 가만두지 않는다. 죽여 버리겠다.’ 하죠? 왕벌이 그 마음 먹은 사람을 먼저 죽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나 죽인다는데 나 죽이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엄이 늘 함께해 달라.’ 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을 지켜줄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강대한 가나안 족속과 큰 성읍들과 하늘에 닿을 듯한 성벽과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게 될지라도 오늘날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너희 앞에 가나안 족속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을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신 9:1-3) 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우리 보고 “몽둥이 준비해라. 뭐 준비해라.” 하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가나안 7족속을 쫓아낸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도 죄는 있습니다. 사악하고 거짓말도 하죠.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말씀을 받고 양심이 있어서 회개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회개하면 죄가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하지만, 가나안 백성보다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지은 것 들통날까 봐 벌벌 떨고 있죠. 가나안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에 죽이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두 군데 기록돼 있습니다. 결단코 이스라엘이 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디도서 3:5-8을 영원히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말씀입니다.

디도서 3:5-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4-5)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말씀을 내가 이루기 위해서 너희 죄를 용서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왕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면 내쫓아 주십니다. 북한이 핵폭탄을 월등하게 많이 갖고 있다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위엄이 가서 하루아침에 전부 날려버립니다. 제 말이 맞나 안 맞나 보세요.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 믿어야죠.

신명기 4:38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가나안 족속들은 잡힌 포로를 세워 놓고 껍질을 벗기는 악한 민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자마자 질리죠. 그러나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시 68:33-35) 하신 그 위엄이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위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속사에서 실제 성취된 위엄의 역사

출애굽 때 나타난 위엄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했습니다(출 15:14-16). 모세도 뒤늦게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내용은 ‘큰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렘 32:21).

예레미야 32:21 주께서 징조와 기사와 강한 손과 드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신명기 4:34에는 ‘그 힘이 크게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큰 공포적인 것들’입니다. 신명기 11:2에는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명기 26:8-9에는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그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출애굽 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으며’라고 하셨고, 신명기 34:11-12에는 ‘애굽에서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바다가 육지같이 순간적으로 말랐습니다. 몇 날 며칠이 걸린 것이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자마자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보송보송하게 물기가 하나도 없고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말랐습니다(신 4:34-36, 6:22-23, 7:19, 29:2-3, 34:11-12, 수 24:17).

가나안 땅 점령에 나타난 위엄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 초기 6년 중 가나안 왕 38명을 목 베서 죽였습니다. 가장 강했던 왕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입니다. 다른 가나안 왕들도 이들에게는 벌벌 떨었죠. ‘옥’의 뜻은 ‘긴 목을 가진’, ‘둥근 목’입니다. 르바임 족속으로, 신장이 9규빗, 4m 10cm였습니다. 그가 자는 쇠 침대의 폭이 2m 82cm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천둥, 벼락 치듯 무섭게 위협하니 모두가 복속해 60개 성을 다스렸습니다. 또 ‘시혼’은 ‘청소하다’라는 뜻입니다. 역시 악질적인 왕입니다. 오죽하면 시편 135 ,136편에 시혼에 대해 노래한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두 왕을 먼저 죽였습니다(수 12:1-6, 민 21:21, 35, 신 2:24-37, 신 3:1-11). 가나안 왕과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습니다(수 2:9-11).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때 이름과 족보를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세가 또 미디안 왕 5명, 에위, 레겜, 수르, 후르, 레바를 처참하게 죽였고(민 31:8), 여호수아는 정복한 31명의 왕을 백성들 보는 앞에서 죽였습니다(수 12:7-24). 이것이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남한에 대해 오만 욕설을 다 하고 있지만 큰일납니다. 대한민국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구속사를 가르치는 평강교회가 있습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라고 말씀드렸죠. 이제 기도 좀 바꾸세요. ‘우리 가정에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남편과 자식에게 은혜 주시고 축복 주시고 근심 없는 복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위엄의 역사’ 한 가지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 여러분.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수 5:1)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에 보내실 때, 위엄을 미리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알았죠. 여호와의 구원은 무기가 많고, 전략이 좋고, 사람이 많고, 이런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삼상 14:6). 이사야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셨죠. 그러면서 믿는 성도를 향해 “너희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대신 싸워 주겠다.” 하십니다(수 23:10). 너희는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라는 것입니다(출 14:14).

그러니까 오늘부터 마음 푹 놓고, 정말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어영부영하지 말고,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고, 교회 생활에 집중적으로 하세요. 무슨 일 해도 하나님 앞에 하는 것같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들 보호해 줄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믿는 성도 하나에게 위엄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 명이 천 명을 쫓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 명이 말하는데 상대에게는 천둥이 진동하는 것처럼 들립니다(수 23:10, 사 30:17).

이사야서 30:1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두 사람이 만 명을 쫓습니다(신 32:30). 만 명이면 1개 사단입니다. 그들이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다섯이 백을, 백이 만을 쫓죠(레 26:8). 하나님께서 없는 말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 나라 갈 때까지 기도할 때마다 잊지 말고 꼭 위엄의 역사를 기도하세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죠. 위엄이 나 대신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들게 됩니다. ‘나, 나, 나’하고 내가 주인 되어 기도하면 내 욕심만 부립니다.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의 앞에 쫓아내고 오늘날까지 너를 당할 자 없다.”(수 23:9) 하셨으니 악한 원수 마귀, 북한군 수천만 명이 온다 해도 평강교회 성도 하나를 당할 자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내 것이 되고, 믿지 못하면 남의 것이 됩니다.

기드온 300용사에게 나타난 위엄

기드온이 3만 2천 군대 가운데 2만 2천을 돌려보내고, 다시 만 명 가운데 9,700명을 돌려보내고 300명을 남겼습니다. 300명이 미디안 군 13만 5천명을 이겼습니다. 1인당 450명을 이긴 것입니다.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무섭고 강하던 미디안 군대인데, 무기는커녕 지팡이, 작대기도 없던 300명이 다 쳐부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는데 그것도 못 합니까. 위엄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정신이 다른데 왔다 갔다 하면 여러분이 아들, 딸 가족들의 고기를 먹게 됩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레 26:19, 신 28:53, 겔 5:10, 왕하 6:29, 애 4:10). 장로, 목사, 권사라도 그 앞날이 험악합니다. 믿음으로 말씀할 때 귀담아들어야죠. 절대로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사울 왕과 사무엘 시대에 임했던 여호와의 위엄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모든 백성이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일어나고, 여호와의 두려움과 위엄이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천둥이 진동하듯 한번 말씀하실 때 전 백성이 ‘한사람 같이’ 모였습니다. 슬슬 온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30만 명이 딱 모였습니다(삼상 11:7).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집합한 것입니다. 이튿날 사울이 이스라엘 자손 30만 명, 유다 사람 3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3대로 나누고 새벽에 진 쳐 암몬과 싸우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승리했습니다(삼상 11:11).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사람과는 싸워 봐야 다 지는 것입니다.

욥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엄

‘욥에게 엄습한 하나님의 두려움’입니다(욥 6:4, 7:14, 23:16). 주님께서 꿈으로 놀라게 하고, 이상으로 두렵게 하셨습니다. 불치병에 걸려도 위엄이 임하면 모든 병이 달아날 줄로 믿습니다.

바벨론 포로 1, 2, 3차 귀환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위엄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인 주전 537년, 고레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습니다(스 1:2-3). 주전 458년 2차 귀환에도 하나님의 위엄이 따랐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해야 할 텐데 오히려 본토 사람들이 ‘포로민들이 돌아온다.’며 두려워했습니다. ‘나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유대인이 되겠습니다.’ 하며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스 8:17).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BC 444년 3차 귀환도 아닥사스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임하니 느헤미야가 왕에게 요청할 때 바로 이뤄졌습니다(느 2:1-10).

초대교회 부흥도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

사도들이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자,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살아가기만 하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믿지 않는 자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 위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백성들에게는 위엄을 보내어 공포에 떨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보니 대적을 두려워하고 있었죠.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자와 담대함을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20:3, 수 1:6, 7, 9, 수 8:1, 수 10:8, 수 11:6). 오늘 본문 로마서 11:22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두려워하는 마음, 비겁한 마음, 소심한 마음, 주저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 근심, 걱정하는 마음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떨리고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큰 여리고 성도 점령해 놓고, 조그만 아이 성을 치다가 36명이 전사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해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50세겔중(重)의 금덩어리 하나를 집에 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내와 자식들까지 데려다가 돌로 죽이라.”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하니 하나님의 노가 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사기 쳤다는 것입니다.

바스훌이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뒀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 ‘바스훌’은 ‘비옥하다’라는 뜻이었지만 하나님의 종을 때리고 오만 모략을 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저주 받은 이름 ‘마골밋사빕’으로 바꾸셨습니다(렘 20:1-6). 미골빗사빕은 ‘사방의 두려움, 공포’라는 뜻이죠. ‘사비브’(사빕)가 ‘주위’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사방에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고치지 못합니다. 밤낮으로 떨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하나님이 그 이름을 바꾸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사방의 환난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의 위엄의 능력이 함께해 주셔서 위로하셨습니다(고후 7:5-6).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성의 모든 남자를 죽여 복수했습니다. 주변 족속들이 죽이려고 쳐들어오려 할 때(창 34:25-30) 하나님께서 위엄을 보내셔서 야곱 가족들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하신 뒤, 사면(四面) 고을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잡으러 가자고 하다가 하나님의 위엄이 임하니 잡으러 가겠다던 마음속에 겁이 생기고 맥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칼과 몽둥이를 다 내려놓았죠. 야곱의 가족들이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창 35:5).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때도 북한이 핵폭탄 미처 쏘기도 전에 하나님의 위엄이 가셔서 다 망가뜨리십니다. 대한민국이 선제공격이고 뭐고 하지 않아도 세세 무궁토록 자유 대한민국,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신 애국가 가사와 같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아무리 열국, 강대국이 떠든다 해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작은 교회와 성도를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평강교회, 작은 교회죠. 그러나 우습게 봤다가는 큰일 납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편안하게 안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마음 놓고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 위엄이 평강교회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 나와도 이 교회는 하나님의 위엄이 지키고 있습니다.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보세요. 부모가 백번 걱정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한 번만 돌보시면 다 끝입니다. 걱정 없는 것입니다.

유다서 1:25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 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어떤 환난과 핍박으로 세계가 열두 번 뒤집어진다 해도 절대 하나님께서 안전 보장하시고, “내가 책임진다, 대신 싸운다.” 하신 말씀을 믿고 감사하고 늘 보람을 느끼고 사는 맛을 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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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09:37-50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믿음없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고,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크냐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더불어 주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이를 배제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모두 변화산에 함께 오른  세 제자와 산아래 있는 제자들은 모두 같은 상태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깨달음이 부족하고 헛된 변론과 야망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은 그들 뿐 아니라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속 위엄있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 37-43a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올때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신의 외아들을 제자들이 축귀하지 못한 것을 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고 패역함을 한탄하시고, 외아들을 불러 축귀하여 낫게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보내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랍니다. 

9:1-6에서 제자들은 축귀와 병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아 두루 많은 역사를 행하고 경험했습니다. 이에 헤롯왕도 놀랐다는 소문도 들었고, 오병이어 사건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어쩌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라면 장차 이뤄질 나라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높여질 것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잘못된 메시아 상에 대한 기대를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수난에 대한 예고과 십자가의 길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변화산에 다녀오신 이후 마침내 제자들의 상태가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전에 행하던 축귀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제자들이 그 능력과 귄위를 받았음에도 축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제자들의 상태와 태도에 있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제자들이 기대하고 고백한 그리스도는 결국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메시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고난받은 종으로서의 메시아 상으로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언급하시고 설명하시지만 다른 역사들은 수용하면서도 이 말씀만은 뒷등으로 듣고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들만 고수하게 됩니다. 축귀의 능력이 자신들이 아닌 예수님께 있음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번의 경험들이 오히려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는냥 착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패역한 세대라 함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도 볼 수 있고,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그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귀신을 향한 분노를 비롯하여 진정으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책망받던 모습입니다(예 신 32:5, 20; 눅 7:31; 11:29-32, 49-50; 17:25).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태로 인해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단하시고 온전한 믿음과 긍휼 곧 하나님의 위엄으로 아이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축귀하여 아버지에게 돌려보냅니다(사회적 관계의 회복까지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행하심). 예수님의 신실하신 믿음과 긍휼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고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연륜이 많다 하더라도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언제고 우리 삶에 질서와 관계들을 파괴되고 흐트려집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오는 충격에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주님에 대한 바른 앎에 기초한 믿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을 통해 온전히 알고 얻는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뜻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믿음이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고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무리 믿음의 관심과 방향과 목적과 내용에 대한 상태를 계속 점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의 믿음을 비춰봅니다. 믿음 없고 패역한 제자의 모습을 보거든 주님의 위엄을 의지하여 고쳐지고 회복되길 원합니다. 

# 43b-45절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며 경이로운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다시한번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귀담아 들을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위엄을 통한 역사가 일어날 때 바라보고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것이고, 그런 일을 행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기만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오해의 여지를 바로잡아 주시려 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알아야 하고 당면한 문제는 주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고난받는 메시아의 길을 가기 위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팔려 가실 때 자신들이 어느 편에 서 있어야 할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더불어 제자들이 묻기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교정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신앙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선한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을 따라 세워진 목적과 뜻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말씀앞에 서고 예배하고 주님을 대면하더라도 우리가 보고싶은 부분만 우상처럼 만들어 신앙하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매일 묻고 또 그 말씀이 그런가 하고 상고해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계속 점검해야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반듯한 길을 가더라도 수시로 전후좌우를 살피고 계기판의 속도와 오일의 양과 엔진의 온도와 실내의 공기와 상태들을 점검하고 졸음이 오는지, 동승자들은 편안한지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부지런히 살펴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이와 마차가지로 우리 신앙의 여정도 부지런히 살피고 묻고 돌아보며 점검하면서 고치고 교정하고 붙잡고 그렇게 가야 합니다. 이를 회피하고 두려워한다면 금새 우리는 곁길로 새거나 엉뚱한 길로 빠져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이 있고 살아 있다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이 여정에는 길 가, 가시밭, 돌짝밭같은 많은 유혹과 미혹과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행하기 위해 길되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야만 합니다. 그러니 회피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더라도 묻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고치고 교정하고 온전케 됨을 믿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46-48절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큰 자이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주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제자들이 변론하는 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하나 데려다 자기 곁에 세우시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고,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결국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하는 상황인데 아직 제자들은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함을 넘어서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급기야 노상에서 헛된 권력욕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워질 메시아 왕국에서 모두 어떤 자리에 앉게 될지에 대한 것을 염두하고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변론을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당대 가장 작은 자로 여겨지던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면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개념을 바꿔주시는 교훈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어린아이 곧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대 받는 이들을 향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이들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을 향한 믿음의 상태를 재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향한 섬김과 겸손 그리고 자기 부인의 길이 주님이 찾고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는 것은 당대 문화적 배경에서 같이 밥을 먹고 함께하는 이들이 누구냐에 따라 명예와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이 결국 하나님의 위엄을 가졌고, 그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낮은 그가 가장 큰 자라 하신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우회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연약한 이들에 대한 태도가 사람과 사회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러한 이들이 차별과 천대 받지 않고 살게 하는 나라입니다. 결국 그 나라에 합당한 우리 삶의 모습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자들에 대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자고하고, 더 많이 가져 부유해 지려하고, 더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고,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서 차별하려하고, 그것을 이룬 이들을 시기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자족하지 못하는 것들 모두 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주님을 믿어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분명 오늘 교회가 지향하는 나라와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주님이 그토록 경계한 맘몬과 이기와 힘과 폭력이 주인되는 그런 나라를 지향하면서 겉만 번지르하게 거룩을 운운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혼돈속에 있진 않은지요? 탐욕으로 점철된 나라를 천국이라는 상품으로 포장하고 온갖 상술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말을 설교라 하고, 복을 하나님이 아니라 번영과 성공이라고 가르치며 헌신과 헌금 갈취하면서 팔고 있는 종교 장사꾼은 아닌지요? 그런 속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만큼 서 있으며 그런 이들과 얼마나 다른지 아님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앞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오늘 주변의 비난 받는 기독교 한켠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주여….

# 49-50절 예수님은 사람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고 금했다고 요한이 예수님께 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고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있어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로 앞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 제자의 모습과 상반되고,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제자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하시려 오셔서 차별과 배제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다 모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이름을 따라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같은 소속이 아니라고, 사람이 만든 통제와 규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금하게하고 배제하는 것은 제자들이 잘못된 특권의식에 빠져서 결국 주님의 뜻과 의도와 권위를 거역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같은 주를 믿지만 섬김의 방식은 문화 세대 지역 민족 신분등의 차이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에 그런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다양한 도전들을 품어내되 진리를 훼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배제가 아니라 수용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융합해 내므로 진리를 더 굳게 세우고 더 넒고 깊고 온전하게 세워지며 다양한 이들을 살리는데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배타, 배제, 차별등은 진리를 품고 따르는 이들이 그 진리의 크고 높고 위대함의 권위를 스스로 부인하고 옹졸하고 부족한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일신학을 가진 진리의 신앙을 사는 우리는 더 넓고 더 깊고 더 온전함으로 모든 것을 넉넉하게 품으면서도 스스로 변질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을 변화과 성숙으로 세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_ 김용규_9쪽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중략)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과 같은 전근대적·신본주의 가치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인본주의 가치들, 그리고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서 같은 탈근대적·개인적 가치들까지 우리가 시대를 따라 추구했던 가치들을 모두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는 겁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



창세기 1:1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3

요한복음 14:16-17

요한일서 5:7-8|

마태복음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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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요 16:12-15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찬송 가운데 특이한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삼위일체를 주제로 찬송가를 만들어서 보급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 청년들 장년 그리고 노년들에게 그 찬송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요? 삼위일체가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삼위일체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삼위일체 영문법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영문법책에까지 삼위일체를 붙인 이유는 삼위일체는 공부법에서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역사에서 삼위일체는 힘든 역사의 기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은 많이 죽어갔습니다. 니케아회의에서 325년에 삼위일체 교리를 1차로 확정하면서 교리논쟁을 끝냈으며 451년경 칼케돈 회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보충 확정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삼위일체교리는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숫자가 셋이면 셋이고 하나면 하나인데 오늘 삼위일체는 셋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몇 분인가요? 한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님 성령 하나님 셋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삼신론에 빠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고 아들과 성령은 피조물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단에 빠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단으로 판정된 것이 양태론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시대 성자 예수님의 시대 성령 시대로 구분하는 양태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이단들은 거의 다 양태론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태론적 입장을 가지고 성령시대에 이어서 그들의 교주가 오늘날 재림주로 왔다는 것입니다. 처음 6개월 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교리교육을 시작했다가 교육이 끝날 즈음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교주 앞에서 재림주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 이단은 현대판 양태론에 빠진 이단입니다. 오늘날 이단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빗나갔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빗나갔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복잡하지만 아주 단순합니다. 한 가지만 알면 삼위일체 교리는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에 그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지 아니면 유사한 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높고 아들은 열등하다고 하면 이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하다고 주장하면 그래도 이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서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진리의 성령이 오면 아버지의 영광을 다 나타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서 보내실 성령은 누가 보내시는 것입니까? 아버지로부터 파송 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송 받는 자가 성령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가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외모는 다른 데 본질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외모에서가 아니라 질적인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질에서 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본질에서 일체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




삼위가 무엇인가? 연극하는 배우들이 어떻게 하십니까? 배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을 persona라고 합니다. 영어로 pers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격이라고도 하고 가면이라고 하고 위격이라고 합니다. 한 집에 산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서 하나이지만 그 각자는 서로 다릅니다. 하는 일에 있어서 다릅니다. 아버지는 창조사역을 하는 조물주이십니다. 아들은 누구냐? 자신의 몸에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구속자이십니다. 이 일을 아들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가 세상에 깨닫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갈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가 죄에서 깨닫도록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방황할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를 뉘우치게 하고 말씀을 깨닫도록 하시는 일을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정가운데서 선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은 중보기도를 많이 할 때에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중보기도자의 덕분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을 듣고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교회와 하나님을 전혀 몰랐지만 누군가의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6장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장래까지 다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절대 신뢰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두 살짜리 딸을 둔 어느 부부가 장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이 시장을 간 사이에 그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그 사이에 무엇인가 요리를 준비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아이를 갓방으로 데리고 가서 장남감을 손에 쥐어 주고 자장가를 부르면서 잠재우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그 다음에 부엌으로 와서 오븐을 켜고 완두콩을 얹었습니다, 그 요리에 꼭 들어가야 할 양파가 생각이 나서 그것을 가지고 음식창고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자지러지면서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달려와 보니 두 살 배기 아이가 오븐에 손을 얹었던 것입니다. 그 남편이 아이를 급히 끌어안고 즉시 병원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가는 사이에 아내와 장모에게 전화를 넣고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아이의 손을 소독가제로 닦고 그리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는 사이에 두 살 배기 아이가 눈을 꼭 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감는 일이 거의 끝나가자 아이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아내가 발견합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가 얼굴에 기쁨이 넘쳐서 “엄마, 할머니, 아빠, 엄마, 할머니, 아빠....”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붕대 감는 일이 끝났고 엄마가 있고 할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아이는 걱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이가 절대 신뢰하는 엄마 할머니 아빠 곁에서 사고로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이겨내고 기쁨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성부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면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삼위일체 하나님 (요 16:12-15 찬송가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할 때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긴 논쟁으로 이어졌던 주제를 말하라고 하면 누구나 다 삼위일체 논쟁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논쟁에서 정통교리로 인정받은 사람도 수차례 투옥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아리우스와 논쟁에서 승리로 이끌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이 본질상 동등한지 아닌지입니다. 동일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우시우스”와 유사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이우스”라는 라틴어 개념이 삼위일체 논쟁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본질이라는 것은 아들을 아버지보다 하등의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는 왜 목숨을 걸기까지 양보 없이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는가? 유일신 하나님을 조상대대로 믿어온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신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야만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내려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그 보혜사는 제자들 속으로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아닌 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보혜사의 가르침과 능력은 예수님의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아버지로부터 파송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 1보혜사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이후에 오신 성령은 제2 보혜사가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롬 5:1-5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우리는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들을 당연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있는 것과 건강하게 다니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중심으로 감사는 잃었던 건강을 되찾았을 때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은 특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다는 데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과 견고하고 완성된 교리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물려받은 삼위일체 교리는 많은 사람이 희생의 피를 흘린 위에서 다듬어져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에 아버지와 공동으로 파송한 성령께서 이 땅으로 왔습니다. 그 성령으로 우리가 믿음을 얻고 그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이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란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기뻐하고 소망 중에 인내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 (시 8편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온 땅에서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것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의 모든 내용을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찬양구절로 괄호 쳐서 넣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9절).” 이것은 시인이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시인은 이 시의 내용의 전부를 다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보려고 하는가?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창조의 신비일 것입니다. 하늘의 궁창과 달과 수많은 별들이 매달려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을 수 있는가? 그 능력의 비밀은 하나님의 손가락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구를 다 동원하여도 붙잡아 맬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지으시고 그리고 손가락의 능력으로 지으신 것들을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인간 또한 많은 창조물들 중에 하나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으로서 시인 역시 대적하는 원수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젖먹이 아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은 젖먹이에게 임하게 되지 젖먹이의 입으로도 대적들을 다 무찌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찮은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시므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4-6절).”

그렇다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만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수 있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권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성령을 받는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심을 믿고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지혜이신 하나님 (잠 8:1-4, 22-31,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잠언서는 유대의 문화적 경계 너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애굽,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 주변나라의 경험적 문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오늘 8장은 기원전 (B.C.) 6세기 중반 경 바벨론 포로기 또는 그 이후에 수집 기록 책인 1-9장, 31장의 범위에 속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지혜가 여성명사로서 의인화된 인격체로 등장합니다. 이 지혜는 창조자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 창조물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백성들을 찾아와 소리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높은 곳이나 네거리에서 그리고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곳에서 지혜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왜 지혜가 자기 백성들을 이토록 간절하게 부르고 있는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밝게 하는 명철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부요케 하여 가난에서 허덕이지 않고 부요케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에 빠져서 부패와 멸망의 길로 걷지 않고 선과 복과 공의의 길에 걸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지혜를 만나는 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이 지혜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오늘 이 지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성명사형을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이 지혜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잠언서에는 그 지혜가 우리를 돌보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성령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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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2021 수요성서학당 제1강 / 01-06-2021
2025. 01.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47)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Ⅰ. 첫째와 마지막의 의미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란 용어에서 과 마지막은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첫 아담은 처음 사람을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마지막을 대표하는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세상은 서열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경쟁 구도 가운데서 성장하며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을 양육할 때 내 아들과 딸이 공부할 때 1등하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10등하는 것이 좋아요. 
1등하는 것을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10등을 했다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등수를 올려라!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1등을 한 번도 못했으면서 자식에게 1등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慾心)"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배경을 정리하려고 자서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장로님과 권사님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이승혁(李勝赫)" 입니다.
한문자의 의미는 이겨서 빛을 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온 삶을 회고하면 "이겨서 빛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런 내용이었는데 제가 받은 내용 중에 "목사님께서 이제까지 저희들에게 본이 되신 것이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저희는 목사님이 그 자리에 지금도 있으면서 매일 오늘의 묵상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NIV,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KJV,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빛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번역합니다.
 즉 이겨서 빛을 낸다는 것을 물리적인 빛, 세상적인 빛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자서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반드시 무슨 경쟁 구도에서 1등을 하기 때문에 이겨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빛이 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Ⅱ. 사람의 의미

서양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라고 합니다.
물론 탈레스 이전에도 철학자가 있었지만 탈레스를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처음으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냐?
만물의 근원을 아르케라고 합니다.

철학의 주제가 자연에서 사람에게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헬라 철학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주된 관심이 자연계 즉 바람, 불, 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물음표를 던지면서 철학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질문은 하였으나 아직도 명확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는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 444. anthrópos)” 
안드로포스는 인간 즉 사람이란 뜻입니다(a man, human, mankind).
안드로포스의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고 합니다.

윌리암 피터(William Peter)라는 사람의 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소년이 길을 걷다가 5달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 돈으로 유리구슬을 구입했고 먹고 싶었던 알사탕도 사서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은 길을 걸을 때마다 길바닥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생동안 길바닥만 걷다보니 결국에는 그가 얻었던 것들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동전 수백 개, 반짝이는 유리구슬,  옷핀 그리고 잡다한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바닥만 보고 걷던 습관 때문에 허리가 굽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안드로포스라는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호모 프로스팩투스, Homo Prospectus)
둘째는 희망하는 존재(호모 에스패란스, Homo Esperans)

우리들은 한국적 인간이라고 합니다(Homo Coreanicus)

호모 오란스(homo orans) : 기도하는 인간

요한복음 14:13-14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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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행하다(포이에오. pŏiĕō) ποιέω / 하다, 제조하다,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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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구하는 영(기도의 영)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대화이며,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교제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의 행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며 영적 교제를 이루는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성경 속에서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요구되었던 삶의 기본이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통로였습니다.
기도의 원어와 뜻, 성경 속 기도의 의미, 교리적 측면에서의 기도의 중요성, 그리고 기도의 다양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1. 기도의 원어와 뜻

1.1 구약에서의 기도

구약성경에서 "기도"는 주로 히브리어로 ‘팔랄’(פָּלַל)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 단어는 "중재하다", "간구하다", "중보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위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성격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부르짖다"는 의미의 ‘차아크’(צָעַק), "요청하다"는 의미의 ‘바카쉬’(בָּקַשׁ) 등 다양한 단어가 사용되어 기도의 다채로운 측면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상 1:10에서 한나의 기도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며 통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팔랄"은 자신의 깊은 내면의 고통을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나타냅니다.

1.2 신약에서의 기도

신약성경에서 "기도"는 헬라어로 ‘프로쉬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 말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고백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친밀하게 대화하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이 외에도 "간청하다"는 의미의 ‘데오마이’(δέομαι), "애원하다"는 의미의 ‘아이테오’(αἰτέω) 등이 기도를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6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은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필요를 구하며 감사하는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2. 성경 속의 기도의 의미

2.1 구약에서의 기도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수단으로 기도를 보여줍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행위이며,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1)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했던 기도는, 기도가 단지 개인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중보와 간구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신뢰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2) 다윗의 기도 (시편)

다윗은 시편에서 찬양과 간구,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고통과 죄악, 기쁨과 승리를 모두 하나님께 고백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3) 선지자들의 기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했고(출애굽기 32:11-14),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했습니다(열왕기상 18장).

2.2 신약에서의 기도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도의 본질과 삶에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도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도록 하는 영적 호흡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6:9-13에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며, 기도의 모범과 방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시며 기도를 통해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마태복음 26:39).

(2) 초대교회의 기도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에 힘썼음을 보여줍니다(사도행전 2:42). 그들의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중요한 통로였고, 교회의 부흥과 선교의 시작을 이루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 교리적으로 본 기도의 의미

3.1 기도의 본질

기도는 교리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로 정의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그분의 주권과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우리의 필요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요,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간구하며, 그의 긍휼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3.2 기도의 목적

  1. 하나님께 영광 돌림: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2. 하나님의 뜻 구함: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합니다(마태복음 6:10).
  3. 의존의 고백: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4. 영적 성장: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4. 기도에 대한 내용들

4.1 기도의 요소

기도는 다양한 요소를 포함합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균형 있게 포함되어야 합니다.

  1. 찬양: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높이며 찬양합니다(시편 145:1-2).
  2. 감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축복에 대해 감사드립니다(빌립보서 4:6).
  3. 회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요한일서 1:9).
  4. 간구와 중보: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합니다(에베소서 6:18).

4.2 기도의 자세

성경은 기도할 때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1. 겸손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며 나아가야 합니다(역대하 7:14).
  2. 믿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마가복음 11:24).
  3. 인내: 기도는 때로 긴 기다림과 끈기를 요구합니다(누가복음 18:1-8).

5. 기도의 실제적인 적용

기도는 신자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단지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삶에서 기도를 적용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1. 규칙적인 기도 시간 정하기: 매일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간을 정해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2. 기도 일기 쓰기: 하나님께 올린 기도를 기록하고, 응답하신 내용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습관을 들입니다.
  3.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기: 교회와 소그룹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믿음을 세웁니다.

6. 결론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영적 호흡이자, 신앙의 중심입니다. 성경은 기도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과 친밀히 교제하는 행위임을 가르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도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통로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 간구와 중보를 올리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 기도의 영 - 성령(로마서 8:26-27)

기도생활이 신앙생활이다. 기도의 습관, 기도의 유익과 이유를 배웠다.

오늘은 기도의 영에 대해서 말씀드리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기도는 어렵다. 오랜 신앙 연조를 쌓은 후에도 어렵다.

성경 읽는 것은 눈으로 읽으면 되기 때문에 좀 낫다. 그런데 기도는 어렵다.

찬송도 부르면 즐겁고 좋다. 그래서 찬송도 할 만한데 기도는 어렵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찌...? 어떻게 기도할찌...? 기도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려고 기도의 영(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 기도의 영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도우신다고 하셨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다.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을 물질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주고, 받는 물질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성령을 단순한 에너지, 파워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에너지는 인격이 아니다.

성령은 에너지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인격이시다.

인격이라는 말은 : 인격의 3대 요소 : 지성, 감성, 의지가 있다는 말이다.

1) 지성(知性)이란? 알고 생각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다 .

본문 --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즉,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생각이 있다.

(예) 강대상, 마이크... 물질이기 때문에 생각이 없다.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성령은 생각을 갖고 지성을 가시신 인격체이시다.

2) 감성(感性)이 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탄식이 감정이다.

3) 의지(意志)가 있는 분이시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말은 성령의 의지를 말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지성, 감성, 의지를 가지신 인격이시다.

그러한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했다.

무엇을 도우시나?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성령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 주신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기도제목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셨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성령은 같은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 옆에서 부르시는 분, 곁에 계시도록 부름 받은 자.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서 도와 주셨듯이 성령도 우리 곁에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기도를

도우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와 성령의 기도가 일치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시는가?

1)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하고, 죄악의 환난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시험에 들지 않고,

죄악의 환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해 주신다.

2)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신다.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고 있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면, 생경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도 떨어진다.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 시켜 주시는 것이 믿음이다 .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떨어진 인생은 망해가다가 마침내 죽고 만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연결시켜서

우리를 생명과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주시는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도 주시고,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 해 주신다.

혹시 형제가 시험 들고, 죄 범하고, 실족했다할 찌라도 돌이켜 네 형제를 돌이켜

굳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그대로, 3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이지만, 그가 회개하고 깨닫고 돌아와서 복음을 전할 때,

한 번에 3,000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고, 흩어졌던 사람들을 모으는 사역을 감당했다.

예수님의 기도가 베드로에게 응답되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할 때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 붙어 있고,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신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기도하신다.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즉,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 해 주신다.

◉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1) 우리 거룩함이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살전 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2)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3) 영생을 얻는 것이다.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

즉, 복음을 전해서 영혼이 구원 받게 하는 것이다.

(4)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도록 기도하고 계신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라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건과 모든 인물들과 그 상황을 다 주관하셔서

결국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 하나님의 뜻이 문맥 가운데 나타난 것은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①거룩하게 살고, ②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③전도하며 살고, ④사랑하며

사는 가운데, 변화되어 아들의 성품을 닮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성령이 기도해 주신다.

죄는 찰거머리 같아서 거기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죄의 올무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신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주님과 같은 보혜사 성령님의 기도제목 :

(1)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2)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3)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 기도 해 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령 안에서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1:20)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 어떻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

1) 서두르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해야 한다.

조급하고, 성급한 마음으로 용건만 간단히 기도하면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가 어렵다.

우리는 잠잠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따라갈 수 있도록 잠잠히 기도하라.

조급한 마음으로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홍해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말했다.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성령의 인도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

2)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되 <간절히>기도해야 한다.

목소리가 크든지, 작든지, 간절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용하게 기도하든지, 부르짖어 기도하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의 간절함이 중요하다.

(138: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이 간구가 간절한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

(142: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142:2)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소리를 내든지? 안 내든지? 큰 소리로 하든지? 작게 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다보면 내 마음이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다.

(62: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려면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 = 말씀 안에서의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기도 = 말씀으로 기도.

성령은 말씀과 항상 일치한다. 또한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기도하려면,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 하면 된다.

(결 론)

기도 생활이 신앙생활이다.

기도에 성공하면 신앙생활에 능력이 주어진다.

현재 나의 상황과 문제 앞에서 내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

그 약속된 말씀을 기억해서 붙잡고 기도하면 내 기도가 성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12:10) 내가 ...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 라고 하였다.

바로 성령이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시다. 성령은 기도의 영이시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며 사기기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 따라, 성령으로 기도할 때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을 받으며 살게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기 도)





성령의 호칭과 사역과 은사


Ⅰ. 성령의 호칭(이름)

1. 한 성령(에나 프뉴마Ένα πνεύμα, One Spirit, 성령의 유일성):

1) 한 몸, 한 성령, 부르심의 한 소망(엡 4: 4)

2)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엡 4: 5-6)

3) 평안의 매는 줄로 (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힘써 지켜야 할 것(엡 4:3)

2. 일곱 영(헵타 프뉴마타,Επτά πνεύματα, the Seven Spirits, 성령의 완전성, 편재성 및 충족성);

1)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계 1: 4)

2) 하나님의 일곱 영(계 3: 1)

3. 주 성령(the Lord, who is the Spirit, Κυρίου πνεύματος, 주의 영, 성령의 주권):

1) 성령의 주권성(고후 3: 17-18)

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4. 영원하신 성령(Πνεύματος αιωνιόυ, the eternal Spirit, 성령의 영원성)

1)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성령

2) 성령이 영원하신 것처럼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중보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한다(히 9:14-15)

5. 영광의 영(<Πνεύμα> δόξας, 영광, Θεού πνεύμα하나님의 영)

1) 성경 최고의 단어 “영광”

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다.

3)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6. 생명의 성령(Πνεύμα της ζωής, the Spirit of life, 성령의 생명성)

1)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롬 8: 2)

2) 해방(Απελευθέρωση)은 수속 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

7. 성결의 영(Πνεύμα αγιότητας, the spirit of holiness, 성령, 거룩하신 자, 거룩의 영)

1)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롬 1:4)

2)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 20)

3) 거룩하신 자(요일 2: 20)

8. 지혜로운 영(“루아흐 호크마” רוח חכמה, 지혜와 총명의 신, 지식과 모략의 신, 전지, 지혜, 모략)

1) 마음에 지혜(신앙적 지혜) 있는 자 곧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출 28: 3)

2) 여호와의 신(“루아흐 여호와”) 곧 지혜와 총명의 신, 지식와 모략의 신(사 11: 2)

9. 권능의 신(전능성, 사 11:2):

1) 성령은 “여호와의 신”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성을 지닌다

2) 모략과 재능의 권능과 전능성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성령의 존귀성, 사 11: 2) :

1) 성령의 존귀함

2) 성령의 거룩성

11. 진리의 영(πνεύμα της αλήθειας, the Spirit of truth, 진실성, 요 14: 17)

1) 세상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영

2) 이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인과 함께 거하시고 속에 계시고 성령을 알게 한다

12. 자유의 영(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시 51: 11-12)

1) 주권적 자유 : 주의 성령은 주의 구원이 기쁨을 주신다

2) 주의 구원의 즐거움 회복과 자원하는 심령

13. 은혜의 성령(Πνεύμα της Χάριτος, the Spirit of grace, 성령의 은혜, 히 10: 29)

1) 은혜의 성령을 욕 되게 하지 말 것

2) (배교의 문제를 다루며) 은혜의 성령을 욕 되게 할 때 따르는 형벌의 더 중함

14. 은총과 간구하는 영(은혜와 신뢰, 탄원, 슥 12: 10)

1)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다

2) 십자가 앞 역설적 애통(통회자복의 역설적 은혜)

15. 선교의 영(세우고, 보내심의 영)

1) 명칭은 없으나 내용적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다(보내심).

2)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선교)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 2-5)

16. 하나님의 (거룩한) 영(Το Άγιο Πνεύμα του Θεού, 성령, 신적 기원, 엡 4: 30; 고전 3: 16)

1) 하나님의 성령(엡 4:30)

2) 인 치심을 받은 자들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함

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거한다(고전 3:16)

17. 주 여호와의 신(메시야 사역 부여, 사 61: 1)

1) 메시야 사역과 관련

2) 자유와 회복과 위로(사 61: 1-2)

18. 그리스도의 영(Πνεύμα Χριστού, the Spirit of Christ, 그리스도와 같이 구속 사역, 롬 8: 9)

1)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2)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

19. 아들의 영(πνεύμα του υιου, the Spirit of his Son, 양자의 영)

1)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갈 4: 6)

2)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 아바 아버지, 롬 8: 14-15)

20. 예수의 영(πνεύμα του Ιησού)

1) 예수와 동일한 선교사역(행 16: 7)

2) 선교의 줄기(흐름)까지 바꾸시는 예수의 영

21. 성령(the Holy Spirit, Πνεύμα αγιόν)

1) 본질적인 의미에서(눅 11: 13)

2)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지 않겠는가

3) 은혜와 평강의 넘치는 복을 누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받은 자(벧전 1: 2)

22. 소멸하는 영(심판과 정결케 하심, 사 4: 3-4)

1) 심판하는 영

2) 소멸하는 영

3) 더러움을 씻고 피를 청결케 하심

23. 약속의 영(the promised Holy Spirit, 하나님의 선물 및 언약, 엡 1: 13)

1) 약속의 성령(엡 1:3, 참조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를 주심, 요 1:17; 인치고 보증으로 성령을 마음에 주심, 고후 1:22)

2)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 4-5)

24. 보혜사(Parakletos)

1) 곁에 서서 부름 받은 사람(곁에서 격려 권고하는 사람, 요 14: 26; 15: 26)

2) Helper

3) Counsellor

4) Teacher

5) Advocate(변호자)

6) 위로자

Ⅱ. ​성령의 사역(Works)

성령의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성령의 사역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 성령이 하시는 일을 소개합니다.

1.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

1)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한 번에 한 장소와 소수의 사람과만 상대하셨다.

2) 그러나 승천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한 번에 전 세계 교회와 성도들을 만나시며 동시적인 역사를 하신다.

2. 성령 사역의 본질

1) 성령은 예수의 영이니만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것과 꼭 같은 일을 한다.

2) 그 일은 성부가 원하는 일이므로 3위 1체적 사역이다.

3) 성령은 예수를 주로 높이는 사역을 한다.

3. 성령의 사역들(분야)

1) 일반 은총 사역(마5:44-45, 행 14:16-17)

(1) 일반 은총은 믿음과 무관하게 피조물인 모든 인류에게 임한다(마 5장 44-45).

(2) 일반 은총 가운데서도 계시는 늘 임하였다(행 14: 16-17). 헛된 신을 섬기라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 천지 창조 사역(창 1:2, 시 104:24-26)

(1)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그 영광(롬 11:36)

(2) 집 마다 지은 이,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히 3:4)

(3)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이 하늘 아래서 망한다(렘 10:11)

(4) 삼위일체 창조(성부 하나님 친히 말씀으로<엡 3:9; 고전 8:6>, 성자의 창조<골 1:16. 요 1:3. 내가 그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잠 8:30>, 성령<창 1:2,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욥 26:13>

(5) 삼위일체의 만유 창조와 분담 관리(만유의 아버지, 만유 위에 계심<성부>, 만유 통일<성자>, 만유 가운데<성령>, 엡 4:6)

(6) 모든 생명의 기한은 성령께 달려있다(욥 34:14,15).

3) 인간 창조 사역(창 1:26-27;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심”,욥 33:4, “전능자의 기운” Almighty Spirit, 니쉬마트 샤다이, 욥 32:8)

(1)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심”(욥 33:4)

(2)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Almighty Spirit)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니쉬마트 샤다이 욥 32:8).

(3)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

Ⅲ. 성령 받음에 따른 은사(Gifts)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사람들에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성령을 받으면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은사라 합니다.

이 은사들을 살펴봅니다.

1) 정의: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에게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특별한 속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용하도록 된 것이다.(C.P.Wagner)

2) 은사의 용어

(1) 도시스(dosis, dir 1:17): "선물"이란 의미

(2) 도레아(dorea, 고후 9:15): “거져주시는”, “자유롭게 마음대로”, 한 성령이 그 뜻대로 가구사람에게 나눠주심(고전 12:11)

(3) 카리스마(charisma, 고전 12:6; 롬 5:15): 은총, 값없이 주는 선물

3) 은사를 주시는 목적

(1) 믿음을 견고케 함(롬 1:11)

(2) 충성된 종(마 25: 15, 21)

(3) 교회와 이웃과 자신의 영혼에 유익(고전 12:7)

4) 은사의 종류(성령의 9 가지 은사, 고전 12:8-10)

(1) 지혜의 말씀(the message of wisdom) :

주를 경외함(욥 28:28), 분별력(빌 1:10), 맡은 일 감당(출 28:3; 솔로몬의 지혜, 왕상 4:29), 지혜의 메시지(모든 지혜로 권면하고 가르침, 골 1: 28-29)

(2) 지식의 말씀(the word of knowledge) :

understanding(신 4:6), 하나님을 아는 지식(고전 2:10,11),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고전 2:12), 말씀 이해(고전 12:8), 바른 지식에서 나오는 바른 열심(롬 10:2)

(3) 믿음의 은사(pistis<명>, pistos<형>, 진실, 성실, 충성, 신념, 성실, 고전 12:9) :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귀신 추방(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기도와 금식, 마 17:18-2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히 11:6).

(4) 병고침(신유, therapeuo, 치료하다, 상처와 병을 낫게하다, 고치다, 건강을 회복하다) : 예수도 의사(마 9:12), 성령도 의사(고전 12:9), 성부도 의사(출 15:26).

❶ 질병 원인:

죄값(더 심한 것 생기지 않게 죄 범치 말 것, 요 5:14, 다윗의 나의 죄, 시 38:3-8), 마귀 역사(욥 2:7; 간질병, 벙어리, 귀, 마 17:15; 막 9:25), 말씀 거역(신 28: 15-22), 과로(빌 2:5-30), 하나님 영광(나사로의 병, 요 11:4, 날 때부터 소경, 요 9:3)

❷ (성령의) 신유 방법:

(1) 믿음(막 5: 27-34; 행 3:16)

(2) 기도(약 5:14-16; 사 38:1-5),

(3) 성령이 말씀 속 역사(마 8:16-17; 잠 4:22; 요 4:46-54),

(4) 성령으로 안수(막 16:18)

(5) 능력(dunamis, 권능, 본래 하나님께서 가진 힘) 행함 :

좋은 봉사자(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 벧전 4:11), 유능한 전도자(행 1:8;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눅 24:49), 마귀 대적 힘(행 10: 38), 각종 이적(행 2:43).

(6) 예언(propheteia, 하나님의 신적 영감으로 하나님의 뜻 선포, 악한 자 책망, 권고, 괴로운 자 위로, 숨은 일을 드러냄, 미래사건 미리 알림)의 은사:

❶ 구약 예언: 성경 형성, 조금도 거짓됨이 없어야 됨(신 18:21-23)

❷ 은사 예언: 아가보의 흉년 예언(행 11:28), 부분적 은사(고전 13: 8-10), 그릇된 예언은 기독교를 점치는 종교로 만들어버리니 분별을 잘 하고 조심할 것.

❸ 성경 예언 말씀(벧후 1:20; 계 22:18): 성경 예언은 가장 완전한 예언임!

(7) 영분별(디아크리세에이스 프뉴마톤, diakriseis pneumaton, 영들 구별):

많은 거짓선지자의 출몰은 말세의 징조이니 미혹되지 말 것(마 24:4-5; 요일 4:1)

(8) 방언(glossa, 혀, 말, 언어,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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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방언(Tong)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1. 방언은 고린도서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2. 바울은 은사들 가운데서도 방언에 대한 묘사를 비교적 자세하게 하고 있습니다.

3. 성령의 은사들(카리스마타)이란 용어는 베드로전서 4장 10절을 제외하면 모두 사도 바울이 4. 사용한 말인데, 본래 단수형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구속이나 구원을 의미합니다(롬 5:15; 6:25).

5.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하게 주시는 선물이므로 개인이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겠지요.

6. 주로 고린도서(고전 12: 10, 28, 30; 14장)를 중심으로 성경이 말하는 방언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 방언의 유익

1) 하나님이 선물로 특별히 특정한 개인들에게 주시는 개별적 은사임

2)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영적 비밀임(고전 14:2; 14-17)

3) 자기의 신앙적 덕을 세움(고전 14:4)

4) (불신자들이 체험하지 못하는 방언 은사의 신비적 현상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됨(고전 14:22)

5)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함을 하나님께 감사했음(고전 14:18)

나. 방언의 종류

1) 만국(헬라어 포네= 외국어) 방언(행 2:4-13)

바벨탑 당시 흩어졌던 언어(창 11:9)의 회복 사건

2) 대신(對神) 방언(고전 14:2)

(1) 사람에게 하는 방언이 아니므로 남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글로싸).

(2) 여기에는 각종 방언(고전 12:10, 28)이 있음.

(3) 특정한 각 개인에게 주시는 은사(선물)이므로 다양함

3) 대물 방언(민 22:28)

재물에 눈이 어두운 발람(모압왕 발락의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함)을 책망하고자 나귀가 사람 말을 한 사건(나귀가 성령 받은 것은 아님).

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방언 은사 사용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자세한 권면

1. 고린도교회 방언 은사는 말씀을 받은 고린도교회가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고 대단히 미숙한 교회였음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4장을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즉 대단히 문제가 많은 유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방언문제였음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합니다.

3. 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나, 방언은 자기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임(4)

2) 혹시 교회서 방언할 시에는 반드시 통역할 것(고전 14:5, 13)

3)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6-11)

4) 그리스도인 모두가 받는 은사가 아니라 선물 받은 사람만 해당되는 은사이므로(다른 사람이 모르면 아무 유익이 없으므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께만 해야 함(10절)

5) 공적 질서에 방해 되지 않으면 금하지 말 것(방언이 공적 질서를 방해하면 안 됨, 14-15절)

6) 방언 위주로 신앙 생활하지는 말 것: 남들보다 방언을 많이 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기는 하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나음(18-19절)

7) 교회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음(22-25절)

8) 교회는 은사의 역할도 중요하나 질서와 덕이 더욱 중요함(26절)

9) 통역이 없을 시에는 교회에서의 방언은 절제하고 개인적으로 조용히 할 것

10) 최고의 은사와 열매는!

사람의 방언이나 천사의 말이나 예언이나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다(고전 13장)

4. 다음의 방언은 참 방언이 아니니 잘 분별할 것

1) 타종교나 이단, 사이비들의 방언(ex, ABRAKADABRA)

2) 잠재의식에서 하는 중얼거림

3) 남에게 배워서하는 방언

4) 들뜬 흥분에서 자의적으로 나오는 소리를 방언으로 착각하는 것

5. 현대 방언(지금도 성경적 방언은 지속되고 있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입장

1) 오순절 계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중요한 은사임

2) 보수 개혁주의: 방언이 주요 은사이긴 하나 주로 초대교회에 그친 은사로 여김(은사중지론속 은사지속론의 부활과 논쟁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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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방언 통역 은사(고전 12:10):

❶ 방언 통역:

방언은 육신의 언어가 아닌 영으로 하는 기도요 찬미이므로(고전 14:15) 육신을 가진 인간은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고전 14:2). 따라서 교회는 외국인이 오면 통역관을 세우듯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고전 14:5, 13).

❷ 방언 통역(디에르메뉴테스, diermeneutes) 의미:

해석자란 의미. 구스의 내시에게 해석해 준 빌립(행 8:31). 이마누엘에 대한 친절한 해석(마 1:23).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에 대한 해석(단 5:23).

❸ 방언 통역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유익을 위한 것이므로 기도해야 하고(고잔 14:13),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고(고전 14:20), 남용하지 말고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고전 14:40).

❹ 초대교회 미숙하고 시끄럽고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에서 방언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는 점에서 21 세기 교회들도 연륜이 짧고 미숙한 교회에서 특별히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증가할 수 있다고 보이며 영분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5. 성령의 은사와 자연적 재능과의 차이점

1) 기원

자연적 /타고난 재능 : 부모를 통해 하나님이 주심

성령의 은사 : 하나님이 직접 주심

2) 획득

자연적 /타고난 재능 : 출생시

성령의 은사 : 회심 또는 성령 충만 때

3) 목적

자연적 /타고난 재능 : 일반적으로 인류에 유용성

성령의 은사 : 영적으로 섬기는 일에 능력

4) 과정

자연적 /타고난 재능 : 인식되고 개발되고 사용

성령의 은사 : 인식되고 개발되고 사용

5) 기능

자연적 /타고난 재능 : (하나님의 영광과) 각양 활동

성령의 은사 :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 봉사

6. 은사의 구분과 종류

1) 직분적 구분

-영구적 은사 : 복음전도사, 목사, 교사

-일시적 은사 : 사도, 선지자

2) 사역적 구분

목회적 은사 :가르치는 일, 권면, 지도력, 지혜, 지식, 믿음, 행정 목사(목회자), 중보기도

선교적 은사 : 복음, 전도, 순교, 선교사, 귀신 추방, 영분별, 기적, 신유

3) 기타

특별한 은사: 예언, 방언(통역), 독신

성숙한 섬김의 은사 : 섬기는 일, 헌금, 긍휼, 서로 돕는 일, 대접하는 일, 자원적 궁핍

4) 주의 또는 분별해야 할 유사 은사들 : 안찰, 영서, 예언 기도, 투시, 입신, 진동, 천국·지옥 간증 등






* 참고 자료 : 인간에 대한 학명(學名)

호모 오란스(homo orans) : 기도하는 인간 / 12-24-2024 새벽을 깨우리로다 요한복음 14:13-14


호모 쿨투라(homo cultura) : 문화적 인간 
호모 코메르시움(homo commercium) : 교류하는 인간
호모 알테르나투스(homo alternatus) : 대안적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 있는 사람, 현명한 인간
호모 인사피엔스(homo insipiens) : 현명하지 않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 일하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homo biblos) : 기록의 인간
호모 비올로기쿠스(homo biologicus) :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 : 학문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 미학적 인간
호모 아쿠아티쿠스(homo aquaticus) : 수중적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 예술인
호모 아토미쿠스(homo atomicus) : 원자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 소비하는 인간
호모 컨버전스(homo convergence) : 융합형 인간
호모 쿠페라티부스(homo cooperativus) : 협동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제도적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 : 창의적 인간
호모 데멘스(homo demens) : 미친 인간, 광기의 인간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 이중인, 이중적인 인간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 약탈하는 사람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 : 처형하는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 : 속이는 인간
호모 데지그난스(homo designans) : 디자인하는 존재
호모 드라마쿠스(homo dramaticus) : 드라마에 몰입하는 인간
호모 에콜로지쿠스(homo ecologicus) : 생태학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호모 에로스(homo eros) : 성애적 인간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 학습하는 인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 희망하는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 윤리적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 공감하는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homo grammaticus) : 문법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유희적 인간
호모 루두스(homo ludus) : 게임하는 인간
호모 마지쿠스(homo magicus) : 마술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적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네간스(homo negans ):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언어적 인간, 말하는 사람
호모 부커스(homo bookus) : 책 읽는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 매개체적 인간
호모 쿵푸스(homo kongf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호모 노에티쿠스(homo noeticus) :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인간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 밤을 낮 삼아 활동하는 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 : 새로운 인간(피조물이 아닌 인간)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 이동하는 인간, 적극적인 사람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 : 석유 문명에 의존하는 존재
호모 이미지쿠스(homo imagicus) :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호모 휴리스틱쿠스(homo heuristicus) : 빠르고 쉽게 (의사)결정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homo nomad) : 유목하는 인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 기호의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호모 프로그레시부스(homo progressivus) : 우주적 인간
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 호혜적 인간,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 종교적 인간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영혼인(靈魂人), 영적 인간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벌거벗은 인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포비아(homo phobia) : 동성애 공포증
호모 사커스(homo soccers) : 축구하는 인간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 공생인(共生人), 더불어 사는 인간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 사회적 동물
호모 수페리오르(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 : 기술적 인간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 (두 발로) 걷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떠도는 인간
호모 자펜스(homo zappens) : 관심을 자꾸 옮기는 인간
호모 포에티쿠스(homo poeticus) : 시적인 인간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 : 음악적 인간
호모 스투디오수스(homo studios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 : 사진 찍는 인간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 휴대폰을 생활화한 인류
호모 무비쿠스(homo movicus) : 영화를 즐기는 인간
호모 미디어쿠스(homo mediacus) : 미디어적 인간
호모 비디오쿠스(homo videocus) : 비디오를 즐기는 인간
호모 사이버네티쿠스(homo cyberneticus) : 온라인에 연결된 인간
호모 서치쿠스(homo searchcus) : 검색형 인간
호모 인터넷티쿠스(homo interneticus) : 인터넷을 하는 인간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통신하는 인간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작품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곧 죽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책이 없다는 것은 결국 죽음 이후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죽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살다 신앙안에서 죽는다면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장례문화를 새롭게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그동안 관습처럼 진행하던 입관예배, 발인예배 그리고 하관예배라는 순서에 대해서 성경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육체는 이미 흙과 같습니다. 
영혼은 이미 육체에서 떠나갔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를 앞에 놓고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바람직한 신앙인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죽은 후에 가족들에게 부탁합니다.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배를 하지 말고 가족끼리 묘지에 가서 시신을 안장하고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반드시 그렇게 하기를 부탁합니다. 죽은 시신을 앞에 놓고 예배하는 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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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2강 / 01-13-2021

레위기와 거룩(레위기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 거룩이란 구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어느 교인은 물건을 팔고 받은 돈(지폐)에서 가장 깨끗하고 새것고 같은 지폐를 골라서 헌금용으로 정리합니다. 심지어 다리미로 지폐를 정리한 후에 헌금으로 구분하는 정성이 구별하는 것이며 거룩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예배에 참여하려고 교회에 들어오면 헌금 봉투에 그 자리에서 헌금을 넣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은혜와 사랑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의 유래와 번역

1. 히브리어(두루마리) 양가죽 또는파피루스
2. 헬라어(70인역, Septuagint, LXX)
- 기원전 300년 경 고대 헬라어 코이네로 70인 학자들에게 번역하도록 의뢰
3. 라틴어
4. 독일어(구텐베르크) 성경 최초의 인쇄본
5. KJV(영국)
- 킹 제임스 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이 성경을 번역하다 화형을 당한 이후 그의 유업을 이어받아 제임스 1세가 임명한 당대 최고의 학자 47명이 1604년부터 세 곳에서 6개 집단으로 나뉘어 작업한 끝에 탄생했다.
번역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로 된 성경 원본이 사용됐지만 학자들은 불가타 성경(405년에 완역된 라틴어 성경)과 기존의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성경들도 참조했다.
6. 중국어 성경(한문)
7. 한글 성경
- 처음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된 로스(John Ross)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어 성경을 들고 1874년과 1876년에 한중 국경 지대에 와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번역에 대한 오류
대표적인 예를 사도신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
(He desended into hell.)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초대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신앙수준을 고려하여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음부 즉 지옥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팬데믹 세상에서 교회가 관심을 갖고 회복해야 할 과제는 예배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1:12 / 형식적 제사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로마서 12:2 / 영적 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구약) 토라(가르침) : (신약) 노모스(법, 규범)

창세기 : 브레쉬트(태초에)
출애굽기 : 쉐모트(이름들)
레위기 : 와이크라(그리고 부르시니)
민수기 : 바다르(광야)
신명기 : 다바림(말씀들)

레위기 : 27장, 859절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 해리슨(Harrison)

창세기(선택)
출애굽기(구원)
레위기(성화, 거룩)
민수기(연단, 군대조직)
신명기(경고)

창세기 12:1-2 / 선택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출애굽기 19:5-6 / 구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레위기 11:44-45 / 성화(거룩)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

민수기 21:8 / 연단(군대 조직)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신명기 6:4-5 / 경고

이스라엘
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암송 성구
레위기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요약 정리)
레위기 27장, 859절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해리슨, Harrison)

창세기(선택)
출애굽기(구원)
레위기(성화, 거룩)
민수기(연단, 군대조직)
신명기(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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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3강 / 01-20-2021

레위기의 거룩(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을 이야기 하면 먼저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룩은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시간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일곱 째 날 다시 말하면 시간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전통은 1/10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이 주일 저녁예배에 참석하는 숫자는 대략 1/5 이라고 합니다.
수요 예배는 1/3이라고 합니다.
그런대 새벽기도회는 교인의 1/10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체 교인의 1/10이 거룩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에는 다섯 종류의 왕국(나라)이 있다.
광물의 왕국
생명이 없다.

식물의 왕국
생명은 있으나 자유가 없다.

동물의 왕국
생명, 본능, 자유가 있다.

인간의 왕국
생명, 감성, 이성, 의지, 자유가 있다.

하늘 왕국(나라)
하나님의 거룩을 닮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광물은 자기 위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자기가 극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인간의 세계가 있다.
인간도 인간 이상 없다고 한다.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인간은 위로부터 압력을 느낀다.
소망, 꿈, 사랑, 기대, 영적 갈망을 느낀다.
생명의 근원이 생명을 부른다.
거룩한 분이 거룩하지 않은 자를 부르고 계시다.
그 분이 새 삶의 중심이 되신다. 새로운 소원, 새로운 목적, 새로운 언어를 주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지혜로 쌓아야 합니다.
지식이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란 아는 것을 실 생활에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단편적인 지식을 실 생활에 활용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하여 복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란 성경적 정의는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안드로포스란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첫번째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

1. 첫째 둘째는 순서를 결정하는 서열이 아니라 대표를 의미합니다.
2. 첫째 아담은 비록 930년을 살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을 사셨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3. 따라서 첫째 아담은 죽음이지만 둘째 아담은 부활 생명입니다.

레위기와 오경의 관계
1. 창세기(하나님의 백성을 선택 :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2. 출애굽기(하나님의 백성을 구출 : 모세를 부르셨다)
3. 레위기(하나님의 백성을 성화 : 대제사장을 세우셨다)
4. 민수기(하나님의 백성을 연단 : 여호수아, 갈렙을 세우셨다)
5. 신명기(하나님의 백성을 경고 : 계명과 율법을 강조하셨다)

오경을 5P라고 합니다.
창세기 : 계획(Plan)
출애굽기 : 통과(Pass)
레위기 : 목적(Purpose)
민수기 : 백성(People)
신명기 : 선물(Present)

‘레위기’라는 책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진리에 기초한다.
‘거룩’(kadosh)이라는 말은 레위기 히브리어 원문에서 100회 이상이나 등장한다.
(단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50회 정도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악이나 흠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계시다는 의미다.


레위기에서 배워야 할 5대 거룩

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레위기는 27장 859절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거룩"이란 단어가 레위기 전체에 100회 정도 사용됩니다.
이것은 히브리 성경에서 사용된 것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50회 정도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레위기의 주제는 "거룩"입니다.

거룩(카도쉬)이란 히브리 단어는 더러움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잘라냄" "분리함"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제가 신대원에 입학 후 기숙사에서 생활 할 때 기숙사 사찰로 봉사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당시 천호동에서 밤골목의 어두운 생활을 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기도하던 중 목사 후보생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신학교 기숙사에 자원하여 봉사하는 일을 시작하셨던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두 학기를 지내며 집사님께서 시험에 삐졌습니다.
왜 기숙사 안에서 사소한 물건들이 없어지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차라리 세상에 나가야지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사 후보생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이 천국은 아니어도 정말 초신자와 같은 자신에게는 은혜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는 거룩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히브리 민족이 애급에서 노예로 생활한 기간을 430년이라고 합니다.
430년이란 히브리 민족 스스로 애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려고 애급에서 인도할 때 모세를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도 완전한 거룩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애급에 히브리 민족들이 나올 때 애급 땅에는 열 가지 재앙이 임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사용된 것들이 애급에서는 신으로 섬김을 받던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애급에서 나온 히브리 민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거룩의 훈련을 받았지만 출애급 1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출애급 2세들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출애급 1세로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정탐군으로 선발되어 약속의 땅을 탐지한 후에 돌아와서 10명의 정탐군들은 그 지역에는 거인족들이 거주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민족은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10명의 정탐군들의 보고가 모두 정확한 내용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면 그 땅을 반드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현장을 목격한 후에 10명과 2명은 다수결 원칙에 의하면 10명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구별된 생각을 갖고 구별된 언어를 사용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카도쉬" 즉 "거룩" 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지와 힘이 아니라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를 통하여 인도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모든 죄인들을 약속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거룩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하며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거룩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아무리 뜻이 높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것 중 거룩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단언한다.

카다쉬(קךש) : 거룩하다, 깨끗하다, 신성하다

1.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됨

2. 성스러운 것을 만져서 성스러워진 사람에게 사용됨
3. 거룩한 예배를 위해 정해진 성물
4. 성소, 지성소, 법궤등 가장 거룩한 것에 사용
5.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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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4강 / 01-27-2021

레위기의 거룩(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존 번연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잘 알고 있던 간수가 제안하기를 집에 다녀와도 좋다.
그러나 존 번연은 물론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 길을 택하지 않는 이유는 나는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룩을 주로 외부의 모습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거룩은 내부에서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예) 주기철목사님께서 옥중에 있을 때 잠시 집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라고 했지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목사님을 향하여 사모님께서 마음이 흔들렸느냐?
당장 감옥으로 들어가라! 차라리 죽어서 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 주목사님께서 발걸음을 돌려 옥으로 향하며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자신을 무장시켰다고 합니다.

거룩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외적 거룩(표면적 거룩)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룩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집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마에 작은 혹을 만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사람은 다른 것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거리에서 무엇에 부딪쳐 이마에 혹이 생겼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거룩하다는 모습을 자랑하려고 이렇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거룩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 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둘째는 내적 거룩(이면적 거룩)

외적인 거룩을 강조한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내적 거룩을 강조한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보여주려고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하루 종일 앉아서 묵상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이런 거룩을 강조했던 초대 교회 교부 중에 "시므온"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기둥의 높이를 점점 더 높여가더니 나중에는 기둥이 무려 30m까지 높여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은 바리새인들처럼 외적인 거룩도 아닙니다.
시므온과 같은 내적 거룩도 아닙니다.
내적인 거룩과 외적인 거룩을 모두 종합한 통합적 거룩 즉 경건한 삶을 말합니다.

성경적 거룩은 무엇일까요?

1. 주를 만날 기회를 찾는 것(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로 구분하실 때 오른 편 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가 목 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배가 고플 때믄 먹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찾아왔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때 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에게 마실 물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는 옷을 주었고 배가 고플 때는 먹을 것을 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는 찾아갔습니까? 우리는 주님에게 그렇게 행한 적이 없었다고 부끄러워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32-46)

그러자 오른편 염소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우리들에게 마실 것을 달라 옷을 달라고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틀림없이 주었을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2. 경건한 언어(야고보서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경건한 사람은 그 언어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경건한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건을 연습 즉 훈련하는 것입니다.
훈련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닫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언어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기 때문에 가급적 말을 절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말을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 한번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미래와 같다!

미국의 36대 대통령이었던 린드 존슨96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로 고민했다.
존슨은 체중감량을 위해 몇 번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그의 아내에게 의미있는 말 한마디를 듣고 다시 시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만일 당신이 자신을 조절할 수 없다면 국가도 경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존슨은 이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노력한 결과 80킬로그램까지 뺄 수 있었다.

하루에 의미있는 말 한마디씩만 듣는다면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만득이와 박서방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한국인의 언어


3. 지족하는 마음(디모데전서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만족하는 마음)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새번역)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가치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오.

(공동번역)
늙은 아낙네들이나 좋아하는 속된 이야기들을 물리치시오. 그리고 경건한 생활에 힘을 기울이는 훈련을 쌓으시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


거룩(카도쉬)의 두 가지 의미

1. 소극적 거룩 : 정결, 죄를 멀리하는 것

2. 적극적 거룩 : 구별, 하나님을 위하는 것


고린도전서 10: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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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5강 / 02-03-2021

5대 거룩 /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5. 거룩한 구세주(히브리서 10:1)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하나님은 빛(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탈무드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날 한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다.
자신은 비록 불빛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빛을 보고 부딛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한참을 가는데 어떤 사람과 그만 "탁!"하고 부딛치고 말았다.
맹인은 화를 내었다.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맹인이라 앞을 못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시오?"
그러나 부딪친 사람이 손으로 맹인이 손에 등불을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자네가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네."
등불을 들고는 있지만 이미 꺼진 줄 모르고 들고 다닌다.
꺼진 것을 모르고사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우리나라 교회가 민족사상과 근대화에 끼친 공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양문명과 자유인권 도입
둘째, 민족교회를 창건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인격교육을 함
셋째, 학교와 병원을 설립
넷째, 금주, 금연, 절제운동을 펼쳐 사회개혁을 이룩함
다섯째, 민족 지도자를 배출함(이승만. 이상재. 이승훈. 조만식.남궁억. 안창호. 이원긍. 이 준 . 김규식. 김 구 등)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선행을 통하여 사회를 밝혀 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빛으로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레위기 21:4)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카톨릭 300년, 개신교 100년의 역사가 지난 오늘날 그리스도 복음의 씨앗은 실로 기적적이라 할만큼 성장되어 왔다.
우리 나라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기독교인의 수적 증가는 앞으로 100년 후에는 전체 인구의 90%이상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태를 기대할 만큼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가 25%에서 90%가 된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교회가 개혁되지 않고, 크리스천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한국사회는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 개혁의 대명사 마틴 루터가 남긴 명언이 있다.

"새들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새들이 우리 머리 위에 둥지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악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은 차단할 수 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악에 스스로 귀속되거나, 악행을 범하지 않으면 된다.
호랑이 등에 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악에게 당하면 악으로 되갚아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이 악순환의 고리다.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 땅은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레위기 18:27)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예) 모세에게 "네 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

  로버트 리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수도 워싱턴의 한 교회를 방문하여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한 흑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리 장군은 “십자가 아래서는 모든 땅이 평평한 것이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편견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것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편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평무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종과, 사회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위로부터 난 지혜에 따라 살고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따뜻한 햇살처럼 편견의 안개를 거두어 줍니다.
당신은 매일 평평한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십니까?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 분별하라(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어떤 연구실에서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개구리를 약간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큰 비커에 집어넣었더니 놀란 개구리는 펄쩍 뛰어올라 달아났습니다.
이번에는 찬물이 담긴 비커에 그 개구리를 넣자 개구리는 여유있게 헤엄치며 놀았습니다.
잠시 후 개구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보려고 비커 밑에 램프를 놓고 1초에 화씨 0.0175씩 데워지도록 불꽃을 아주 작게 조절해 놓았습니다.
물의 온도는 서서히 놓아졌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태평스럽게 헤엄만 치고 있었습니다.
온도는 계속 0.017도씩 올라가고 서너 시간쯤 지났습니다.

과연 개구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개구리는 푹 삶아져서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물 위에 떠있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은 마냥 도취되어 놀기에 적당한 온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민한 피부 감각을 상실한 채, 선한 것과 그릇된 것을 분별치 못하고 마냥 시간을 보낸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주변의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6)
    3. 거룩한 땅(레위기 20:24)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5. 거룩한 구세주(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현대인의 성경)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나에게 순종하며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라.

 (공동번역 성경)
  아브람이 구십구 세 되던 해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없이 살아라.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어느 젊은이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 하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 나라를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았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모래밭에는 발자국이 두개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따지듯이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내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네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눈길의 발자국

옛날 북서 아메리카에 한 인디언 추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백인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추장은 그 다음 날 아침에 방문객을 오두막집에서 나오게 한 후 물었다. "당신은 지난밤에 이 오두막집을 통과한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방문객은 눈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한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추장에게 "한 사람밖에 지나간 적이 없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추장은 그에게 그 날 밤 그 오두막집을 수백 명의 인디언들이 다시 말해서 한 부족 전체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추장은 그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인디언들은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를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추장이 제일 선두에 걷고, 나머지 모든 부족이 일렬로 그를 따라가면서 추장이 밟았던 발자국을 정확히 밟고 지나감으로써 하나의 발자국만을 남깁니다. 따라서 수백 명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 지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계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부족의 적들은 그들이 간 길을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장이시다. 그는 생명의 길을 따라 제일 먼저가시면서 우리에게 그의 발자국 즉 그의 모범을 남겨 놓으셨다. 우리는 주님이 남겨 놓으신 이 발자국을 따라야만 한다.



  거룩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예) 에녹, 노아, 므두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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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4가지 의미 :

1. 구별하다
2. 밝게 빛나다
3. 따뜻하다
4. 새로워지다

레위기의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
2. 거룩한 제사장
3. 거룩한 땅
4. 거룩한 백성
5. 거룩한 구세주

레위기의 목표

1. 제사장 나라
2. 거룩한 백성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1장 - 7장 / 제사 규례
8장 - 10장 / 제사장 규례
11장 - 16장 / 결례, 규례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17장 / 제사를 통한 거룩
18장 - 22장 / 가정, 사회를 통한 거룩
23장 - 25장 / 절기를 통한 거룩
26장 / 축복, 저주를 통한 거룩
27장 / 서원을 통한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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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신앙생활 십계명


1.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입니다.

2.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 할 것입니다.

3.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것입니다.

4.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 할 것입니다.

5.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입니다.

6.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 할 것입니다.

7.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8.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습니다.

9.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입니다.

10.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 할 것입니다.


영화 <베켓>은 영국 왕 헨리 2세와 그의 술친구 토머스 베켓의 이야기이다.

헨리 2세는 여자들과 즐기고 전쟁을 일으키고 세금을 물리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원했으나 당시 대주교가 눈엣가시였다.

헨리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술, 여자, 가무’ 친구인 토머스를 대주교로 임명하는 기발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터진다.

대주교로 임명된 토머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소명, 즉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제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헨리 2세는 그의 친구가 대주교직을 적당히 수행하면서 옛 친구의 바람을 들어주도록 그를 누누이 설득했으나, 토머스 베켓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토머스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순교를 당하게 된다.


"영화와 영성"의 저자 로버트 존스톤은 고백했다.

자신이 목사의 소명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목사는 먼저 거룩한 사람이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런 그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네가 거룩할 필요는 없다.

토머스도 거룩하지 않았다.

넌 다만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토머스처럼 응답했다.

“하나님, 제 전부를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확인하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행복이나 건강이 아닌 거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욕망과 관심사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 어떤 것은 옳고 선해서 나름의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어느 시점에서 그의미를 퇴색시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당신은 거룩해져야 한다고 믿습니까? 만일 내가 당신이 거룩하지 않다고 설교한다면 다신은 분노할 것입니다. 복음의 설교는 당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목적은 오직 하나,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교는 우리를 성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축복을 주시는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정심으로 우리를 구해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신 것은 우리를 거룩한 존재가 되도록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속죄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나를 다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로 연합하셔서, 더는 어떤 그늘이나 막힘도 없게 하실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심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맞지 않는 습관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거룩이란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걸음이 절대적으로 순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입의 말, 마음의 생가, 삶의 모든일이 하나님의 철저한 심사에서 조금도 때묻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를 기억합니다. 쉐퍼 박사는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합니다. 그는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 사역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사랑했던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후의 메시지를 피를 토하듯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내용은 이상스런 것이었습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의아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러했습니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메시지는 미국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축복과 행복은 구했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꿈과 비전은 구하지만 거룩함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꿈과 비전이 우선이 아닙니다. 행복과 축복이 우선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갖고 거룩한 삶을 추구할 때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서론 및 번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죄와 고통에서 해방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온전히 그리고 자유롭게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배는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도록 바른‘희생’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출 5:3).
그 중에 번제는 가장 대표적인 희생 제사의 첫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출애굽한지 2년째 되는 날에는 성막과 제사장의 옷을 다 만들었습니다.
성막을 세웠고 제사장을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제2년 2월 20일에 시내산을 떠났습니다(민 10:11).

레위기는 길어야 두 달 정도 동안 하나님이 회막, 곧 성막의 지성소에서 모세를 불러 명령하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레위기의 내용과 적용(3대 분류)

1-10장은 제사법
11-15장은 정결법
16-27장은 거룩법

레위기란 의미는 70인역 (기원전 300년 경) 일기 디아스포라들이 읽기 어려운 히브리어 원전을 쉬운  코이네 그리스 어 번역 성경으로 번역한 것에서 나오는 ‘레비티커스’, 곧 레위인들이 알고 지켜야 할 규정들을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만든 이름인데, 원래 히브리어 원전엔 “와이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고나서 그가 부르셨다(and he called…)라는 의미입니다. 곧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르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제사에서 크게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를 배웁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는 제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사는 십자가의 제사를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배우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또한 실감나게 배웁니다.

 둘째,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배웁니다.  베드로 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제상장적 지위를 가지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첫째는 예배이고 둘째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1. 번제의 절차: 황소로 제사 지냄(1-9절)

번제는 태워드리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뜻은 ‘올려 드리는 제사’ 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올려 드리는 제사입니다.

 절차의 뜻

 번제 절차

1. 깨끗게 /죄를 사함

1. 소(양, 염소)의 수컷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까이 나옴

 

2. 제사장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함(손을 얹음)

 

3. 그 짐승을 조인 대신 죽임

 

4.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

 

5.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림

2. 거룩하게

6. 가죽을 벗김

 

7. 고기의 각을 뜸 (조각으로 나눔)

 

8. 제단 위에 불을 피움

 

9. 불 위에 나무를 쌓음

 

10. 나무 위에 정결한 부분(각뜬 고기, 머리부분, 기름)을 진열

 

11.부정한 부분(내장과 다리)을 물로 씻음

3. 영광스럽게 /화목하게

12. 다른 부위의 고기도 함께 태워 제단을 향해 연기를 냄

 

2. 번제는 곧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죄 용서와 하나님이 받으심을 표시한다.(제물들의 조건과 의미)

1) 제물은 온전한 것을 가져 와야 함(3, 4절)

제물은 온전한 것, 흠 없는 것을 가져와야 합니다.  죄인 스스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셔서 언약을 맺고 사랑의 헌신 관계를 맺습니다. 1절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은 회막에서 모세를 불러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물을 드리려거든”(2절)은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3절). 흠 없는 수컷은 건강하고 하자가 없는 수컷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번제 제물을 통해 구약시대의 성도들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도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받아 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엡 1:7).

그리스도 대속의 보혈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보혈은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우리를 온전해진 자들로 여기셔서 기쁘게 받아들여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제물로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2) : 깨끗하게 (5)

 제단 위와 주위에 제물의 피를 뿌렸습니다. 우리도 온전한 제믈이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하게 받아 들여집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 게” 하셨습니다(엡 1:4, 7, 참고, 벧전 1:18, 19).


구약성경에 피는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창 9:4, 레 17:14, 신 12:23-24, 행 15:28-29).
피를 먹지 못하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자들의 행위를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이방 우상숭배자들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피를 마시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런 사악한 행위를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생명을 존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창 9:4, 레 17:11), 하나님이 내신 생명을 경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제사 원리에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 값은 사망(죽음)이었습니다(롬 6:23).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기 위해 자기를 대신할 제물(짐승)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흘려 제단에 뿌리라고 했습니다(레 17:11). 생명이 피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것은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죽게 된 것은 죄 값을 지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죄 값을 지불한다는 것은 죄가 속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짐승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함으로 범죄한 자가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히 9:22).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희생 제물이 피 흘려 죽게 되므로 범죄한 백성들을 죄가 속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죽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골 2:17, 벧전 2:24, 1:18-19, 엡 1:7).

사도행전15:28-29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이방교회의 놀라운 선교효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割禮)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교리적 문제와 선교적 문제를 야기하는 주장이었습니다. 바울,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변론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로 보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공회로 모였는데 거기에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부가적으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해야 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렇게 결정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유대인 출신들은 할례를 받았고 또 할례를 받아야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이방인들은 할례가 외과적 수술인데다 당시 사회에서 불경하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할례 받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을 들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은 할례를 요구하므로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힘들게 하는 멍에를 벗겨 주기 위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공회에서 예루살렘교회 사도인 야고보가 사도행전15:19-20에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결정하고 말 경우 유대교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할례 멍에를 벗겼으니 이방교회에 좋은 결정이 내려졌지만 유대교회는 전통적으로 할례를 받아왔기 때문에 불평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이 좋게 생각할만한 규례를 정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유대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철저히 지키는 편이었고 이방교회에서는 그렇치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가적인 결정은 할례 문제를 이방교회에 양보하므로 섭섭할 수 있는 유대교회의 마음을 안정시킨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피를 먹는 일에 대해서 초대교회 때는 다소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산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약용(藥用)으로 사용하거나 음식 안에 공재(共在)된 경우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피 자체로 만든 음식의 경우가 있습니다 (선지국, 순대). 그런 경우는 위의 예루살렘 공회에서 피 문제를 부가적으로 결정하게 된 배경을 생각하면서 각자 양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살을 태움: 거룩하게 (6-9)

제물이 되는 짐승을 제단 북쪽에서 잡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 진열했습니다(레 1: 11, 12). 성소 안 북쪽에 있는 상 위에 진설병 떡을 진열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을 거룩하게 받으셨습니다.

 4) 향기로운 냄새: 만족스럽게 받음(9)

 짐승의 고기를 태우는 냄새를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라 하셨습니다. 성소 안에서 올리는 분향단의

연기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신약에서는 향기를 그리스도와 자신의 삶에 적용합니다. 에베소서 5장 1, 2절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 라”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 몸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기롭게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향기 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계속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엡 4:24)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을 본받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향기롭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인도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충만을 받고 성령님을 의지합시다. 불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령님 안에서 고난을 받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 우리의 죄를 용서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라고 했습니다.

 2. 양과 염소와 비둘기로 제사 드림(10-17절)

하나님께서는 다른 제물로 번제를 드릴 때도 같은 절차로 드리게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나 양, 염소가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맞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했습니다. (옛 번역엔 모이주머니가 멱통으로 번역 됌)

나)교훈: 우리의 예배와 삶을 번제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게 드리자

 1) 십자가 복음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림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은혜를 성령을 통해 받습니다. 예배하는 자들의 찬송과 기도와 예물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6)입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향기로운 번제로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향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예배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도 찬송하여 성도들끼리 서로 화답하고 주께 노래하며 모든 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에 힘쓰십시다. 그렇게 예배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엡 5:18)을 받는 복을 누립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 했습니다.

지금도 사도를 이어서 설교자들이 십자가의 복음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은 죄를 고백하며 옛 사람이 매일 죽도록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은혜로 새롭게 변화되고 그 심령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십자가와 성령님을 의지하여 예배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주일 예배에서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잘 받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예배합시다.

2) 모든 삶을 번제로 거룩하게 드림과 같이 해야 한다.

온전한 제물을 ‘받으시는’(레 1:3, ‘열납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도 온전히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를 아들과 딸로 기쁘게 ‘받으십니다’(고후 6:2). 그러므로 우리가 온갖 더러운 탐욕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고후 7:1)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징계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특별한 잘못이 없을 때도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번제로 기쁘게 받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을 때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다)믿고 복종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합시다. 예배할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시다. 우리가 예배에 나올 우리의 존재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을 가지십시다. 가난하고 힘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온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예배를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과 정성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이 그 예배를 참으로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때 우리에게도 참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매일 살아갈 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자신을 거룩하게 드립시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결론)

번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다? 죽여서 드리는 상징의 제사입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창 8:21).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막(출 40:29)과 성전(왕상 9:25)을 완성한 다음에도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사장을 위임할 때,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된 다음에, 여성이 아기를 낳은 다음 자신을 깨끗하게 할 때에도 각각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화목제 (평화의 제사)를 드릴 때 번제도 함께 드렸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헌신을 할 때에도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비둘기로도 제사를 드릴수도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번제의 희생이 된 짐승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몸소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예수를 본받아 그 십자가에 또한 나 자신을 못 박음으로써, 참된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올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로 예수 때문에 참아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 봐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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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마이어의 성경 읽기의 방법

영국의 목사님이시면서 사업가였고 작가였던 F.B 마이어(1847~1929)목사님은 자신의 묵상집 중 하나인 ‘Light on Life's Duties(1985)에서 성경 읽기의 방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 공부를 위한 시간을 내라.

방해 받지 않고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맑고 명석한 사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어야 하며, 하루 중 최고의 시간, 첫 열매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아침처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데 좋은 시간을 없다. 신문을 읽고 편지들을 개봉하고 아침 식탁에서 수다를 떨고 난 후에는 성경의 각 페이지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는 거룩한 생각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성령의 가르침을 구하라


직접 글을 쓴 저자 만큼 그 글의 의미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거룩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을 기억하라. 초보 신자라도 성령의 도움을 의지한다면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오해했거나 놓친 것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보조하는 문헌들, 당시 사람들의 관습과 난해한 암시와 역사적 사건들과 지리적 세부 사항들에 대한 자료들도 많이 알면 좋겠지만, 그런 것들은 다른 시간에 공부하고 거룩한 아침 첫 시간은 성령께 드려야 한다.


셋째, 계획을 세워서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읽어 나가는 여러 방법 중에서 1년 1독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찢어지지 않게 잘 제본되어 있고, 필기할 여백이 많은 것으로 한 권 갖고 있는 것이 좋다. 그 책은 당신의 친구이자 헤어질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관련 구절들을 찾아보기 쉽도록 자세한 관주가 있는 성경도 필요하다. 때로는 하루에 두 세 시간 씩 할애하여 성경의 한 책을 한 번에 읽어보라. 한 시대나 한 사건, 또는 한 사람의 삶을 성경 여러 곳에서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유익하다. 또 때로는 성경 용어사전을 사용해서 믿음, 사랑 등의 한 가지 개념을 성경 전체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어떤 경우든 성경 전체를 읽으며 연구하라.


넷째, 펜을 들고 성경을 읽어라

필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성경 읽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특별한 날에 깨달았던 구절들에는 밑줄을 긋고 그 날짜를 적어 놓았다. 같은 메시지를 담은 다른 구절들을 연결시키고, 새로운 관련 구절들을 적어 두며, 유용한 개념의 핵심 단어를 기록하려면 펜을 많이 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찾은 또 하나의 보화가 말씀과 함께 기록되어 남겨진다. 그럴 때 우리의 성경은 지난 시간들을 담은 소중한 유물이 되며 우리 내면의 삶의 역사가 기록이 되는 것이다.


다섯째, 개인적 유익을 간절히 추구하라.


다른 사람을 위해 성경을 읽지 말고 당신 자신을 위해 읽으라. 때로는 읽기를 멈추고 이런 진지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좋다.“성령님은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배우길 원하시는가? 이것을 내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것을 내 인격 속에 어떻게 구현해야 할까?”


여섯째, 읽은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라.


하늘의 열매들이 당신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열려 있다면 따 먹으라. 성경이 한 페이지에 백지 수표와 같은 약속이 있다면 그것을 현금으로 만들라. 성경에 기록된 기도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소망의 활에 메워 화살처럼 쏘아 올리라. 빛나는 거룩함의 예를 발견한다면 당신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진리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찬란한 빛이 당신의 삶의 영역에 별처럼 빛나게 해 달라고 간정하라. 성경말씀을 향한 거룩한 열망의 새순이 솟아오르게 하라. 성경의 깊은 지식이 갖는 유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성경은 온갖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유혹이 물러가게 하는 성령의 검이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사역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성경은 믿는 자가 모든 상황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안내서이자 지침서인 것이다.


일곱째,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기라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보다 이 마지막 권면이 당신의 마음과 기억에 남길 바란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새롭게 인식되고 정의된 임무들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세 없이 성경 지식에만 몰두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즐기기 위해서나 아는 성경 지식에 대해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거룩한 개념들과 명령들에 즉시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감추시지 않고 자신의 가장 깊고 달콤한 생각들까지 우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러시아 선교에 평생을 바친 피터 다이넥가라는 분이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소련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해 주는 일을 하였는데 한 번은 이 다이넥가 선교사가 소련의 어느 호텔에 묵으면서 "하나님, 이 성경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제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잘못 건네 주면 큰일나기 때문에 성경 건네 줄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 중에 성경을 펼쳐 놓았는데 호텔 여 종업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경을 보더니 갑자기 그녀의 눈에 광채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저 여인에게 이 성경을 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계속 그 여인을 주시했습니다.
그녀가 가까이 오더니 그 성경을 만져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웃으면서 만져도 좋다고 말하며 이 성경을 갖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감사하다고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하고 성경을 품에 안으면서 "저는 이 성경을 갖기 위해서 20 년간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가 직접 읽어보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성경이 너무 흔하게 우리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하늘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이며 하나님의 뜻은 성경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그것은 성경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견해 또한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학자와 석학들은 거의 다 성경말씀이야말로 이 세상의 귀한 책들 중에 가장 귀한 책으로 꼽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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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 원리 3단계 

1. 관찰 :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 해석 : 본문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3. 적용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단계 (관찰) -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세가지 요점(3 key thoughts) 


1) 본문의 주의를 집중시킴 

2)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 

3) 정확하게 함 


바른 질문 (Asking the right questions) 


1) 누가 2) 무엇 3) 어디서 4) 언제 5) 왜 6) 어떻게 


관찰의 대상 


1) 단어들(Words) 

2) 문장의 구조(Structure) 

3) 문장의 분위기(Atmosphere) 

4) 문학 형태(Literary form) 


2단계 (해석) - 본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1. 서론 - 핵심적인 질문 (Key question to ask) 

2. 숙지 사항 (Important matters to remember) 

3. 일반 원칙 (General rules) 


  1)문자적으로 해석. (Interpret literally) 

  2)문맥속에서 해석. (Interpret in context) 

  3)역사 문화적 배경속 해석. (Interpret in view of history and culture) 

  4)문학 형태를 고려 해석. (Interpret in view of other parts of Scripture) 

  5)성경의 다른 부분을 고려하여 해석. (Interpret in view of other parts of Scripture) 

      -난해 구절을 위한 지침. (Guidelines for difficult passages) 

  6)신학적인 일관성을 고려하여 해석하라. 

      (Interpret in view of theological consistency) 


4. 특수 원칙 (Special rules) 

  1)비유 (Parables) 

  2)잠언 (Proverbs) 

  3)시가서 (Poetry) 

  4)비유법(Figures og Speech) 

  5)상징 (Symbols) 

  6)예언서 (Prophecy) 

  7)신약내 구약의 사용 (Use of OT in NT) 


5. 해석에 있어서의 위험 (Interpretive of not obeying) 


3단계 (적용)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불순종의 결과 (Results of the not obeying) 

2. 효과적인 적용의 원칙 (Rules for effective application) 

3. 교리별 연구 (Theological-doctrinal) 

4. 경건의 시간을 위한 연구 (Devotional)  




1.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요한 계시록은 요한 당시에 소아시아에 퍼져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레니우스는 계시록이 81-96년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 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가장 먼저 박해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로마 시의 화재범으로 몰아 사나운 짐승과 불에 태우고, 참수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네로 뒤에도 몇몇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로마의 정신"은 점차적으로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프라테스, 그리고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숭배 사상" 즉 "황제숭배 사상"을 이용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없애버리고 황제숭배를 절대 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를 중심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당국은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다!" 라고 말만 하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황제 숭배 예식을 실시한 후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인간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로마 당국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교회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한 무능력한 교회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점차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박해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 앞에서 방황하는 교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황제로 인해 당황하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결국 최후에 사단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향해서 세상이나 거짓 교훈에 타협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결한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첫 사랑을 상실하고, 윤리적 영적으로 부패해 가던 당시의 교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러한 부패 요소들과 싸워 이길 것을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 요한 계시록을 해석해 온 방법을 나누어보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과거주의 학파의 해석(The prete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요한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요한이 살던 1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과거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이미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다 성취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계시의 말씀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한 천사의 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이 예언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모두 다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세기 당시의 교회와 로마 당국과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승리할 것을 (상징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과거주의적 해석 방법은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에 매우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미 과거에 다 성취된 것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을 1세기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말을 요한 당시로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히"라는 말은 "반드시"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16:20, 눅 18:7-8 참조).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과거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요긴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현재주의(역사주의) 학파의 해석(The historic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두 번째 방법은 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림할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방법을 '현재주의' 또는 '역사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을 모두 다 현재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종종 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역사 사건에 뜯어 맞추는 실수를 범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현재 역사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을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나 모슬렘의 침입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요한에게 준 작은 책을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세력을 로마 카톨릭으로 보고, 짐승의 멸망을 로마 카톨릭의 멸망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시키다가 실수하게 되는 단점도 있습니다. 


 3) 미래주의 학파의 해석(The futu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세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 계시록의 내용을 먼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를 '미래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초대교회-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모든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4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역사의 마지막 때(주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7년 대 환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라면 이 책은 요한 당시에 박해를 받던 성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주님께서 당시 교회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을 요한을 통해서 편지로 써주셨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장 로마의 칼날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중동전쟁의 위협이나 E. C. 공동체의 출현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상징주의 학파(영적 해석 학파)의 해석(The allegorical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영적(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은 어느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원리를 상징을 통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견해를 "영적인 해석"(또는 "상징주의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서 선(교회)과 악(사단)의 전쟁 속에서 선(교회)이 승리하는 보편적인 신앙의 원리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단점은 사람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종합적 해석)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네 가지 해석 방법은 모두 다 그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방법들은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방법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단점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종합형" 또는 네 가지 방법의 "절충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다음의 사항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가 요한 당시의 1세기의 교회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그 내용이 요한이 살던 1세기의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지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는 그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과거주의자들의 견해를 참고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들이 1차적으로 1세기 교회를 위해 쓴 것이지만, 동시에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해석할 때에 전시대를 걸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그리고 복음과 거짓 종교사이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영적, 또는 상징주의의 견해도 참조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한 가지 예언이 두 개 이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러한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에 이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언은 처녀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사야의 아들은 모형이었고,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는 원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을 한 사건 안에서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원근 통시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도 묵시적인 예언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근 통시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짐승이 나타나는데, 이 짐승은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의 황제, 또는 로마제국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마지막에 나타날 최후의 적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이상의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1세기의 사건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역시 현재주의나 미래주의의 견해도 참고하게 될 것입니다. 



3. 묵시문학과 요한 계시록 


 1)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의 유사점 

  우리가 계시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 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묵시사상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계시록이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또 내용상으로도 그들과 흡사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unveil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연극을 시작할 때에 막이 올려지면 그 뒤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묵시'란 말은 주전 2세기와 주 후 1세기 사이에 씌여진 유대 종교 서적들에 붙여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책들을 '묵시문서' 또는 단순히 '묵시'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 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소수 민족아 당해야만 하는 핍박과 착취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억압받는 민족의 원한을 갚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권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악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항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천재지변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악을 제거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결말은 항상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통치를 받을 때마다 항상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묵시문학을 통해서 계속되는 이방 세력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나,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을 심판 받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마침내 악이 멸망하고 평화가 깃드는 영원한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의 특징은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전해주실 계시를 매우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전달해 주셨습니다.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과, 극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과,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과 형상들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신 것도 이러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 교회의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멀리 떨어져서 태어난 우리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이나 어휘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록을 이해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의 차이점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와 최후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종말의 시기에 관해서는 단순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22:20).  또한 요한계시록은 다른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응답하여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묵시문헌의 요소를 배려하면서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4. 저자 문제 


  그러면 요한 계시록을 쓴 저자는 누구일까요? 여러분은 "그거야 당연히 사도 요한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요한 계시록은 너무나 많은 히브리적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문법에 있어서도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과 그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2) 사도 요한이 아닌 다른 요한이 본서를 썼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3) 나이가 80이 된 사도 요한이 이러한 계시를 받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누가 기록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시록의 저자를 요한으로 간주한 이상,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없는 한 이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는 (계 1:1)에서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소개했습니다(1:1,4).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며(1:1),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22:19). 그는 당시 성도들의 환난에 함께 참여한 자였으며(1:9),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를 받고 이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9). 또한 그는 당시에 서 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해서도 익숙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도시들은 요한이 유배당했던 섬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의 저자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12사도 중 하나였던 사도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외에도 요한 복음과 세 편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전체 개요 


1:1-8,  머리말과 요한의 인사 


1) 머릿말 (1:1-3) 

2) 요한의 인사 (1:4-8) 

3) 서론 (1:9-20) -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 일곱 금촛대 가운데 나타나신 인자같은 이 


1:9-3:22, 지상의 교회들에게 주는 주님의 메세지 


 2장 -3장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 에베소 교회(2:1-7) - 열정을 잃은 교회(바울이 2,3차 전도 여행 때 이곳에 교회를 세운 도시 ) 

* 서머나 교회(2:8-11) - 박해받는 교회(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던 도시) 

* 버가모 교회(2:12-17) – 이단의 교훈과 우상 숭배에 너그러운 교회(황제숭배의 중심지였던 도시) 

* 두아디라 교회(2:18-29) - 세상과 타협한 부도덕한 교회 아폴로 신을 숭배한 도시 

*사데 교회(3:1-6) - 영적으로 죽은 교회(디베료 황제와 여신 키벨레를 숭배한 도시) 

* 빌라델비아 교회(3,7-13) – 선교하는 교회(디베료 황제가 재건한 도시) 

* 라디오게아 교회(3,14-22) – 교만하고 신앙이 미지근한 교회 (안약 제조와 섬유 산업이 발달하 도시) 



        계4:1-5:14  하늘 보좌와 천상의 예배  

1)        천상의 예배. (4:1-11) 

2)        일곱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5:14) 


계 6장-16장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심판 


요한 계시록 6-16장의 내용에는 종말에 일어날 세가지 큰 재앙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인곱개의 인을 뗄떼마다 나타나는 일곱가지인 재앙, 두번째는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일곱가지 나팔 재앙, 세번째는대접을 땅에 쏟을때 나타나는 일곱가지 대접재앙 이다 


1)        일곱 봉인의 심판 (5:1-8:1) 

*인봉된 책 (5:1-14) 

*여섯개의 인을 뗌 (6:1-17) 


*중간 계시(7:1-17)  14만 4천명(= 셀수 없는 성도들 )과 천상의 예배 


2)        일곱 나팔의 심판 (8:2-11:19) 

*8:6-13 처음 4개의 나팔 소리와 심판 

*9:1-12 다섯번째 나팔 소리, 또는 첫번째 재앙 

*9:13-11:14 여섯번째 나팔 소리, 또는 두번째 재앙 

*11:15-19 일곱번째 나팔소리, 또는 세번째 재앙 


12:1-13:18여자와 용, 두 짐승 , 그리고 짐승(적그리스도)의 표 666 

14:1-5 어린 양과그의 백성들인144000명 

14:6-13 심판의 예고 

14:14-20 마지막 수확 


3) 일곱 대접의 심판 (15:1-16:21) 


참고) 일곱인과 일곱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을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 

      넷째 인 

      다섯째 인 

      여섯째 인 

      일곱째 인 → 첫째 나팔... 땅 삼분의 일의 심판 

                        둘째 나팔... 환난 세력의 등장 

                        셋째 나팔... 음녀,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으로 인한 쑥물 

                        넷째 나팔... 세계 삼분의 일이 영적 흑암에 들어감 

                        다섯째 나팔... 첫째 화(5개월 황충이 환난) 

                        여섯째 나팔... 둘째 화(유브라데 전쟁) 

                        일곱째 나팔... 셋째 화(7대접 심판) → 첫째 대접 심판 

                                                                            둘째 대접 심판 

                                                                            셋째 대접 심판 

                                                                            넷째 대접 심판 

                                                                            다섯째 대접 심판 

                                                                            여섯째 대접 심판 

                                                                            일곱째 대접 심판 


계 17:1- 19:5 대탕녀 바빌론의 패망 

*17:1-18 바벨론의 신비 

*18:1-19:5 바벨론의 심판 


계 19:6-16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그리스도의 재림 

*19:17-21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전쟁 

*20:1-6 사단의 묶임과 놓임 그리고 천년 왕국 

*20:7-15 하늘의 승리와 사탄의 패망, 마지막 심판 

계 21: 1-22:5 새 하늘과 새 땅 

*21:1-8 새창조 (새하늘과 새땅) 

*21:9-22:5 새예루살렘 


계22: 6 - 21  맺음말 

*22:6-15 요한과 천사 

*22:16:21 마지막 당부의 말 











계시록의 해석 원리와 기독론적 이해-CGM 세미나 


이 내용은 제 2회 CGM 세미나 계시록과 이단 세미나 (2010년 1월~2월) 의 일부 강의  내용입니다 

강사:  김곤주 목사 


김곤주 목사는 호주 시드니에 살면서 Morling College 대학원(M.A in Theology)에서 성경신학을 마치고 호주 무어신학교에서 Moore College 대학원 (M.A in Theology)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새언약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4가지 해석 원리 > 


1. 과거적 해석 방법 

이러한 견해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과거란 로마의 역대 황제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핍박을 가장 심하게 받았든 1세기경을 전후한 시대를 가리킵니다.이러한 견해의 한 예를 들면 적그리스도의 표인 666 짐승의 표를 초대 교회 당시 교회를 핍박했던 네로 황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2. 역사적 해석 방법 

역사적 해석 방법이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모든 계시를 인류의 역사적 무대 위에서 성취 될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세대주의: 계시록을 문자적인 해석에 촛점을 두고 연대기 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봄 


3. 상징적인 해석 

상징적인 해석은 계시록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적 해석은 때때로 영적 해석 방법과도 유사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는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실제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에 나오는14만 4천명이라는 숫자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상징하는 숫자요 새 예루살렘 성은 영화롭게 된 교회 전체를 상징한다는 견해입니다. 


십사만 사천 인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을 유의하자. 

  ① 우리 하나님의 종들(계 7:3)  ② 인 맞은 자들(계 7:4)  ③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  ④ 흰 옷을 입은 자(계 7:9) ⑤ 손에 종려 가지를 든 자(계 7:9)  ⑥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 자(계 7:9) 



4. 미래적인 해석 방법 

미래적인 해석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이 미래주의와 상징적인 의미를 받아들이는 온건한 미래주의로 구분하여 분해 볼 수있습니다. 


온건한 미래 주의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다면 극단적 미래주의란 이와는 좀더 극단적인 경향을 가지고 그 날짜를 계산하는 건전하지 못한 성경 해석의 위험성을 가진 경우를 말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네가지 해석 방법들이 요한 계시록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주요한 방법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은 어느 하나만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두 다 어느정도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참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해석과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세대주의(dispensational)란 용어는 세대 혹은 시대를 뜻하는 dispensation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한 마디로 구별되는 시대를 세대(dispensation)라고 부르며 이 '세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세대주의 적 성경 해석은 한국 교회에서 오래 동안 유행하였으나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건전한 해석의 관점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은 대부분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하기 보다는 상징적인 해석을 더 많이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세대주의 신학의 공통적 특징 


1)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과 성경 예언의 중요성 강조 

2)종말론에 있어 전천년설 지지(환난전 휴거설) 

3)선택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믿음 

4)세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 강조 등이다. 


이들은 세대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고 불리지만, 세대주의의 최초 주창자 이름을 따서 다비주의(darbyism)라고도 한다. 이들은 또한 세계 역사는 시대들 혹은 세대들로 나누는 체계를 가졌다. 

무죄세대- 인간타락 이전 하나님께서 아담과 에덴에서 언약 맺으신 시대, 

양심세대- 인간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시대, 

인간통치세대-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시대, 

약속세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유일하게 언약을 맺으신 시대, 

율법세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시대, 

은혜세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의 시대 

왕국세대-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통치하시는 시대 


이들은 대환난 이전에 교회가 휴거되고 대환난 끝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한다는 신앙을 가졌다 

이러한 고전적 세대주의 사상은 다비의 미국 여행과 형제단 운동과 스코필드의 관주성경과 췌이퍼의 조직신학등의 영향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전역에 확산되었다. 


2.세대주의 성경해석 방법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보면 그들은 문자적 성경 해석방법을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 자들의 문자적 해석의 범주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Darby의 문자적 해석이 이스라엘과 교회의 운명이 다르다는 이중적 운명이라는 근본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Scofield는 그 원리에 풍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았고, 수정세대주의 자들은 더 많은 다중적 해석원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3.문자적 성경 해석의 정의 

   문자적 해석이란 의미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한 고립된 단어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문장 속에 문맥과 관계 

    없이 그 단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자들이 가장 흔히 사용할 수 있는 의미를 말한다. 

2) 구절들을 유기적인 전체로 읽되 가급적이면 가장 평이한 방식으로 읽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명백한 비유들은 비유들로 인정하되 가장 명백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그 이상의 

    비유적인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 

3) 해석자들이 자기들 자신들이 세계관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자신들의 암시적 지식의 맥락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평범한 해석 : plain). 



                                  <계시록의 기독론적 이해 > 


요한 계시록1장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먼저 밝히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다. 요한계시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이해된다. 


1)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의 그리스도이시다(계 1:10-18). 

예수는 "인자같은 이"의 신분을 가지시고 (1:13). 그의 외모는 상징적으로 설명된다(1:13-16). 또 (1:17-18)을 보면 예수는 처음과 나중이시며(17), 산 자이시며(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신다(18).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일곱교회에서 다시 소개된다 (2-3장). 


에베소 - 일곱 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서머나 - 처음과 나중,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버가모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두아디라 -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같은 이 

사데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빌라델비아 -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라오디게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2)  천상(우주)의 그리스도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우주)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천상(우주)은 무지개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 (4:3) 우편에는 어린 양이 있고 그 앞에 일곱 영이 있으며 그곳으로 부터 생명의 강이 흐른다 (7:17; 22:1-2).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계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들려있지만 이 봉인된 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다. 이때 유대지파, 다윗의 뿌리이신 어린 양 예수께서 이 책을 취하게 되자.네 생물과 24 장로와 많은 천사들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한다(5:1-13).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 천상의 보좌를 중심으로 네 생물과 24장로, 그리고 14만4천의 성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와 천사들이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다 (7: 9-12; 14:1-5). 


예수께서는 또한 시온산에 서있는 승리의 그리스도이시다 14:1-3).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그리스도이시다(14:14-16). 그는 흰 구름에 앉으시고, 금면류관을 쓰시고,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추수를 거두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음녀 바벨론 (14:8; 16:19; 17:5; 18:10) 인 이 세상을을 심판하신다. 


3)  전투하는 영계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세계에서 전투하시는 용사로서 묘사된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16:13)와 싸우신다. 이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라 하는 곳에 집결한다(16:16). 마지막 전쟁에서도 음녀 바벨론과 세 더러운 영과 온 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지 큰 세력을 얻지만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16:15) 이 대적들을 무찌르실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19:19-20:10). 



이 요한 계시록이 쓰여질 당시는 AD 95년 경으로 사도 요한은 죄수형에 처해져서 외딴 섬인 페트모스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로마의 11대 황제인 도미티안은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면서 교회들은 큰 위기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과 불안속에서 살아갔고, 때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말할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겪어야만 했고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함으로서 믿음이 연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격력하면서 참된 소망과 믿음을 갖도록 그래서 교회가 인내하고 승리할 수있도록 주신 성경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 것입니다. 그래서 1장 3절의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자와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신 영광스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축복이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 초두에는 당시(A.D.90년경) 소아시아에 개척된 7교회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소개되어 있다. 

이 메시지들은 단지 이들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 교회는 초대 교회 이후 오고 올 모든 교회의 대표로서 이 말씀들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7교회 상황과 각 교회에 주어진 주님의 메시지를 잘 연구하여 이를 현재 나의 교회에 비교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 징

칭 찬

책 망

당 부

약 속

상 징

에베소

정통적인 교회

(2:1-7)

선행,인내,악에 대한 배격,교회 질서 확립,주를 위해 성실

첫 사랑을 잃어 버리고 퇴보함

구원의 첫 사랑을 점검,회복하라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리라

정통 고수에는 열심히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등한시 하는 교회

서머나

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2:8-11)

영적인 부를 누림

-

10일간의 환난을 두려워 말라,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둘째 사망을 피하리라

물질에 초연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교회

버가모

우상 숭배한 교회

(2:12-17)

고난과 순교의 위기에서 믿음을 굳게 지킴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아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있음

심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라

감추인 만나와 흰돌,새 이름을 주리라

혼탁한 세태와 결탁한 교회

두 아

디 라

악한 여선지자의 교회

(2:18-29)

사랑,신령한 봉사,믿음,회개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좇음, 우상숭배,행음

처참한 결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라

만국 통치권과 새벽별을 주리라

많은 이단에 심취되어 진리를 떠난 교회

사 데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교회(3:1-6)

몇 사람이 영적 순결을 지킴

극도의 형식주의,

영적 무기력, 

행함이 없는 믿음

신앙을 점검 회개하라

흰옷을 입고 주와 동행하리라,생명책에 이름이 오르리라

그릇된 교리, 형식주의에 빠진 교회

빌라델

비 아

연약하지만 충성스러운 교회 (3:7-13)

적은 능력으로도 철저히 순종함

-

면류관을 굳게 지키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리라

말씀을 잡고 바른 신앙을 견지하는 교회

라오디

게 아

부요하나 가난한 교회

(3:14-22)

-

미지근함, 교만함, 영적 가난, 영적 수치, 영적 소경

자신을 돌아보라,차든지 덥든지 하라,회개하라,열심을 내라

주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주의 보좌에 앉으리라

세태를 좇아 인기를 누리며 물질적 부를 누리는 세속화된 교회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1-3]. 




모든 사람은 잠에서 깨 아침을 맞이한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7분을 투자해 삶에 변화를 주는 '아침 습관 7가지'를 소개한다.


①1분: 미지근한 레몬물 한 잔을 마셔라.

레몬물

기상하고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몸속에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물 마시기는 사람의 몸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6~8시간 가량 수면을 취하면서 물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기상해선 반드시 물이 필요하다.


레몬은 소화기능을 깨운다. 새콤한 레몬 맛이 아침을 먹기 전, 입맛을 돋우는데 도움을 준다. 달콤한 게 당긴다면 꿀을 약간 넣자.


물을 마시고도 시간이 있다면 아침에 '그린 스무디' 마시기 습관을 길러보자. 미네랄과 섬유질이 풍부한 케일 등 초록 잎 채소는 식사대용으로도 좋다.


 

혓바닥 닦기

②1분: 마른 세수하기와 혓바닥 청소.


마른 세수 형식으로 몸을 구석구석 쓸어보자. 너무 세게 쓸어내릴 필요는 없다. 적당히 '드라이 브러시'를 하면 피부가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다. 양치할 때 이만 닦지 말고 혓바닥 청소에 집중해보자. 혓바닥을 잘 닦으면 음식맛도 더 좋아지고 입냄새를 없애는데도 도움이 된다.


 

거울 보며 웃기

③30초: 거울 보고 30초만 웃기.


거울을 보고 딱 30초만 웃어보자.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오직 나만을 향해 웃는 30초다.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 웃으면서 나를 응원한다. 행복한 자기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라.


④1분: 100번 제자리 뛰기.


제자리뛰기는 어떤 에너지음료보다 몸에 좋다. 굳이 멀리 달리기를 나갈 필요는 없다. 제자리에서 몇 번이라도 뛰면서 하루를 시작하라. 움츠렸던 다리 근육을 쓰면서 전신에 기운을 불어 넣어보자.


⑤1분 30초: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 북을 켜라.


지하철도 좋고 버스도 좋다. 어디가 됐든 당신의 귀에 새로운 자극을 주라. 자고 일어난 뒤 당신은 새로운 정보를 흡수할 준비가 되어 '영혼이 배고픈' 상태다. 아침을 잘 챙겨 먹듯이 영혼에도 좋은 음악이나 아름다운 콘텐트를 부어 넣어라.


⑥1분: 뭐든지 일단, 아침에 딱 3문장만 쓰기.

아침에 딱 3문장만 쓰기.

여기에서 포인트는 딱 3개만 쓰는 것이다. 욕심을 내서 4개, 5개씩 쓰고 나면 나중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도리어 낙담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3가지에 집중하라. 일에 관계된 문장도 좋고 개인적인 것도 좋다. 딱 3문장만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습관을 길러보자.


⑦1분: 침대정돈

침대정돈

집에서 나오기 전, 당신을 행복하게 할 습관 하나가 있다. 바로 침대 정돈이다. 찰스 두히그의 저서『습관의 힘』에 따르면 침대 정돈은 하루 일과에서 생산성 높이기에도 기여한다.


침대 정돈을 하면서 하루의 시작을 산뜻하게 하면 다른 일들도 잘 해내는데도 연결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침대 정돈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다른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에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하나의 좋은 습관을 토대로 여러 개의 좋은 습관을 기를 수 있는데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게 바로 침대 정돈이라고『습관의 힘』은 분석한다.


유튜브 상에서는 '미국 해군 대장이 말하는 매일 자기 침대를 정돈해야 하는 이유'라는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그는 "설사 그날 하루가 엉망진창이었어도 침대 정돈을 잘 하는 사람은 최소한 집에 돌아갔을 때 잘 정돈된 침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침대 정돈을 꼭 하자"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7분만 투자해 인생을 바꾸는 아침습관 7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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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대화법 열 가지


1. 들을 준비를 하고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 전에 대답하지 않는다. 

(잠언 18:13, 야고보서 1:19) 


2. 말하기를 더디 하고 먼저 생각하며 서둘러 말하지 아니한다. 

(잠언 15:23, 28, 21:23, 29:20) 


3.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한다.

(야고보서 1:19) 


4. 진실을 말하되 언제나 사랑 안에서 말한다. 사실을 부풀려 말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4:15, 25, 골로새서 3:9) 


5. 말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다투지 않고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잠언 17:14, 20:3, 로마서 13:13, 에베소서 4:31) 


6. 화를 내면서 대꾸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꾸한다. 

(잠언 14:29, 15:1, 25:15, 29:11, 에베소서 4:26, 31) 


7.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 상대가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야고보서 5:16, 잠언 17:9, 에베소서 4:32, 골로새서 3:13) 


8.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잠언 10:19, 17:9, 20:5) 


9. 상대를 책망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복시켜주고 격려한다.ᆞ 

(로마서 14:13, 갈라디아서 6:1, 데살로니가전서 5:11) 


10. 누가 말로 공격하거나 비판하거나 책망하면 똑같이 대꾸하지 않는다.

(로마서 12:17, 21, 베드로전서 2:23,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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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들이 교훈하는 인생법칙

노아의 인생 법칙 

내 인생이 하찮게 느껴질 때는 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한다.

에스더의 인생 법칙 

내 인생의 목적에 회의가 들 때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자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

요셉의 인생 법칙 

내 삶이 계획한 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기억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모세의 인생 법칙

두려움을 느끼거나 주저하게 될 때는 망설이지 말고 현재의 안전지대에서 박차고 나와 신앙 지대로 간다.

리브가의 인생 법칙

남들이 도움을 요청해 올 때는 그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 돕고 베푼다.

아브라함의 인생 법칙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항상 옳다는 것을 믿고 순종한다.

느헤미야의 인생 법칙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협력의 힘을 체험한다.

다윗의 인생 법칙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잠재력을 믿고 한계를 뛰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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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잠언 10구절 - 된 사람, 될 사람, 안 될 사람



된 사람, 될 사람, 안 될 사람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된 사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

예를 들면 바울이란 젊은이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에 응답한 후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될 사람
될 사람은 하나님의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

예를 들면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는데 공교롭게도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급하게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은 이전에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잘못된 일을 행하였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했으니 이제부터는 종이라고 하지 말고 동역자로 함께 섬기라고 부탁합니다.

세번째는 안 될 사람
안 될 사람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비뚤어진 사람

유월절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겨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탄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넣는 순간 그 생각을 실천하는 일에 집중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안 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점검하고 확인한 후에 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된 사람을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근본이란 히브리 단어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브레쉬트)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근본이란 곧 시작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문호 궤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처음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수 없다"

출발이 잘못되면 그 결과는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신앙의 출발 즉 신앙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대학 시절 데칼트를 전공하셨던 최명관교수님으로부터 데칼트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한 학기에 3학점으로 전공 필수 과목이므로 매우 중요한 과목입니다.
기말 시험을 치루는데 칠판에 여러 문장을 적은 후에 강의실 밖으로 나가든지 도서관에 가든지 대학원생을 만나든지 시간 안에 답을 적어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교수님은 아주 독특한 철학자이셨습니다.
학생들이 이번 시험 어떻게 출제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항상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런 성경구절을 소개합니다.

아무리 문장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동안 시험지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그 아래에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학기에 재수강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애국가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적었다고 합니다.
성적을 받았는데 저는 A학점입니다.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D학점을 받았습니다.
제가 당시 과대표로 있었기에 교수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자 나도 모르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그러면서 철학이란 살아서 시험에 응하면 기본 점수 60점은 받기 때문에 무슨 답을 적든지 기본은 받지만 솔직하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대답이 정답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왜 재수강을 결심한 줄 아세요?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기 때문에 엉터리 답을 적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둘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모든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희생 할 수 있는 것
믿음은 맡길 수 있는 것
어떻게 맡길 수 있나요?
맡깁니다! 맡겼습니다!
이런 언어의 유희가 아닙니다.
온전히 맡기려면 밤을 새워 기도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맡긴다는 히브리 단어 "야라"

יָרָה 스트롱번호3384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yârâh ]
구약 성경
81회 사용
1.
원형 던지다, 투표하다, 제비를 뽑다, 운명에 맡기다, 수18:6, 삼상20:36,37, 시11:2, 64:5(4), 민21:30.


관련 성경
☞던지다(출15:4, 욥30:19), 뽑다(수18:6), 쏘다(삼상20:36, 잠26:18), 놓다(욥38:6), 활 쏘다(대하35:23), 적시다(호6:3), 가르치다(출4:12,13, 잠4:11), 교훈하다(왕하12:2), 가리키다(출15:25), 점치다(미3:11), 윤택하다(잠11:25), 알게 하다(잠6:13). [명] 선생(잠5:13),스승(사30:20, 합2:18), 교훈(합2:19, 욥36:22), 활 쏘는 자(삼상31:3, 대상10:3).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서 다윗는 자신을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결론을 피력하고 있다(W. a. Vangemeren).

󰃨 네 짐(*, 예하브카) - 이는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하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너의 몫'(Rawlinson). 혹은 '네게 주어진 것'(Hupfeld)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짓누르던 '염려' 혹은 '근심'을 가리킨다(Calvin, C. B. Moll, NIV).

󰃨 너를 붙드시고 - 여기서 '붙드시고'(*, 쿨)는 원래 '기르다' 혹은 '먹을 것을 주다'의 뜻(창 47:12;50:21)으로서,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근본(7225) 레쉬트() רֵאשִׁית   

1. 처음.   2. 이전의 상태. 3. 처음 것
발음 [ rêʼshîyth ]
어원  / 7218과 동형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처음, 시작, 창1:1, 10:10, 렘28:1
    2. 명사, 여성 이전의 상태, 욥42:12, 이전의 때, 사46:10.
  • 3. 명사, 여성 처음 것, 첫 열매.
    [시간의 견지에서] 첫 열매, 창49:3,레2:12, 23:10, 신18:4, 26:10, 33:21, 잠8:22.
    [위엄의 견지에서] 첫째의, 주요한, 암6:1,6.

  • 관련 성경  /  태초(창1:1), 시작(창49:3, 욥8:7, 전7:8), 처음(출23:19, 느10:38, 겔48:14), 첫(레23:10, 겔20:40), 으뜸(민24:20, 욥40:19, 렘49:35),장자(신21:17), 맏물(신26:2,10), 가장(삼상2:29, 15:21), 근본(시111:10, 잠1:7, 미1:13), 제일(잠4: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곧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 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 3374)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경외(3374) 이르아() יִרְאָה 스트롱번호3374

1. 두려워함.  2. 두려움.  3. 존경
발음 [ yirʼâh ]
구약 성경  /  44회 사용
  • 1.  명사, 여성 두려워함, 무서워함, 신4:10, 5:26, 6:24, 10:12, 14:23, 삼하3:11, 느1:11
  • 2.  명사, 여성 두려움, 무서움, 공포, 신2:25, 욥4:6,시55:6(5), 사7:25, 욘1:10.
  • 3.  명사, 여성 존경, 경외, 경배, 욥28:28, 시2:11,5:8(7), 19:10(9), 34:12(11), 111:10,잠1:7, 사11:2.

문법설명 / 3373의 여성형
관련 성경  /  두려워함(창 20:11, 시 90:11, 욘 1:10), 경외함(출 20:20, 대하 19:9, 잠 16:6), 무서움(겔 1:18), 두려움(시 55:5, 겔 30:13).


‘된 사람’의 근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 절은 잠언 전체의 주제성구로 종종 인용됩니다.
여기 ‘근본’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창조기사에서 ‘태초’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성경 전체의 용례를 두루 보아도 이 말씀은 “하나님 경외는 인간 지성활동의 요체, 알파와 오메가”라는 식의 해석보다, 배움과 성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평이한 이해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말씀에는 ‘인식론의 전제로서의 지식’ 같은 건조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없는 포괄적이고도 역동적인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잠언에서 지식은 정보가 아니라 슬기로운 판단과 삶의 태도를 아우르는 인격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한 인격은 지속적인 성찰과 훈련을 통해 빚어지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난 사람’이지만 인격자는 ‘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된 사람’이 갖춘 ‘됨’의 상태가 잠언이 말하는 지식-분별-지혜의 인성을 표현하다면, 된 사람으로 되어 가는 그 과정의 출발점에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놓인다는 것이 여호와 신앙, 구약 신앙의 핵심입니다. 

잠언이 지혜의 책이라는 말은 그 지혜가 어떤 지혜인가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지혜를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 구별하는 근본적 변별성이 바로 ‘하나님 경외’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할 반응으로, 우리 내면의 태도와 더불어 일상의 선택을 통해 표현하는 신앙적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은 잠언 1:7에 담긴 신앙선언문이 잠언 9:10에 변주되어 1~9장의 프레임을 이루며(“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마지막 장인 31장에서도 이상적인 여인상의 결론이자 잠언 전체를 마무리하는 핵심표현으로 ‘여호와 경외’가 등장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 시문은 주로 평행(병치)되는 두 시행을 함께 살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1:7 상반절의 하나님 경외가 하반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과 대비되는 데 주목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어 ‘에빌’인데, 잠언에서 어리석은 자를 가리키는 세 단어 중 가장 불량한 사람을 가리켜 쓰입니다.
즉 지력이 떨어지거나 지식이 없어서 실수하는 사람이 1단계, 반복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2단계라면, 아집과 교만에 빠져 가르침을 비웃는 상태에 있는 3단계 바보가 에빌입니다.

시편 1:1에도 복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행동들이 나오는데, 동일한 방식으로 악인→죄인→오만한 자로 점점 더 악화되는 인간군상 중 최종단계가 바로 '비웃는자' 레쯔입니다.
참된 신앙은 겸손한 인격으로 발현됩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지혜의 화신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인생은 반석 위에 세운 집, 불순종한 인생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라 하셨습니다(마 7:24~2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이 땅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된 인생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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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잠언 14:26-27)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두 가지가 바뀐다. 
하나는 가치관이고 다른 하나는 우선순위이다. 

가치관이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우선순위란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하고 덜 중요하고 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중에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가치관이 분명하면서도 우선순위가 잘못된 경우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그것을 먼저 하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말한 것과 행동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한 결과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고 올바른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아야 좋은 것을 얻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 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 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전에 따라가던 것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전에 먼저 하던 일을 이제는 나중에 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빌립보서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오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여도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는 패역하게 행한다”라고 하는 것이 뜻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잘났든지 못났든지, 의로워 보이든지 악해 보이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패역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경외(敬畏)란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따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시편 139:1-8)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시편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기를 힘쓴다.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둘째,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생각하는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누구를 먼저 찾아가는가? 하나님이 자녀라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한다. 사람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내가 하나님께 피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

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가? 사람은 의지할 존재가 못 되기 때문이다. 시편 62: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 시편 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래서 믿고 의지했다가 실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해도 복을 주신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2:1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셋째,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힘쓰는 신앙이다. 

삶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과 은혜를 풍성히 부어 주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주시는 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넷째,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기에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옳고 선하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룩하고 선한 소원을 주실 때에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패역한 사람은 이와는 정반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산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라. 내 뜻과 소원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지 말라. 내 소원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거나 고집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는 복을 네 가지를 말씀한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견고한 의뢰 즉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로 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신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면 아무도 넘어뜨릴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산성이요 피할 바위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뜨리려면 하나님을 넘어뜨려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후손에게도 복을 주신다. 

“26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으로 살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편 112: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이 믿음을 심어주라.

셋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생명의 샘물처럼 계속 주어진다.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면 어떤 경우라도 그 생명이 살게 해주시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편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사사기 15장에 삼손이 블레셋 족속과 싸워 이긴 후에 너무 힘들고 지쳤는데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워 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마른 땅에서 샘물을 내주셨다. 사사기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리고 마른 땅에서라도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셔서 얼마든지 먹고 마시고 소생하게 해주신다.

넷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27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사망의 그물’이란 나를 얽어매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죽게 만드는 문제를 말한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어떤 사탄의 공격이나 환난이 와도 건져주신다. 꼼짝할 수 없는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사탄의 공격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시편 124:7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면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먼저이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일을 잘해도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열려 있지 않고 분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다가 중단하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일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 
일 때문에 기도를 중단하지 말라. 
오히려 더 기도에 힘쓰라. 
그러면 일하는데 지혜가 솟아나고 힘이 솟아나서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교회에서의 일은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그 사람의 믿음이 깊어지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의 성취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믿음에 손해가 가게 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일이 좀 늦어지더라도, 일이 원하는 대로 잘 안되더라고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유지되고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연히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37이하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일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 

빌립보서 2:13-1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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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와 복종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는 삶의 자세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며, 그중에서도 '경외'와 '복종'은 믿음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단순한 행위나 감정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 삶의 기초가 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포함합니다.
본 서론에서는 경외와 복종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1. 경외의 의미 :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

'경외'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경외는 단순히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포함합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경외가 신앙생활의 시작점임을 강조합니다.
경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경외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 복종의 의미 : 자기의 뜻을 버리고 올바른 권위와 요구를 따르는 것

'복종'은 자기 뜻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권위나 요구에 따르는 것
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복종은 종종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치며, 경외와 복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복종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의 관계에서 나타나며,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경외와 복종의 상호 관계 : 경외와 복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입니다.
또한, 경외와 복종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외가 없는 복종은 형식적이고, 복종이 없는 경외는 공허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경외와 복종

경외와 복종은 성경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들입니다.
본론에서는 성경에서 경외와 복종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경외의 성경적 의미와 사례

1.1 경외의 정의 경외는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포함합니다.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에 기반한 존경심입니다.

1.2 구약에서의 경외 구약 성경에서는 경외가 하나님의 지혜와 연관되어 자주 언급됩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이 구절은 경외가 지혜의 시작점임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지혜로운 삶의 출발점임을 보여줍니다. 욥기 28장 28절: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이 구절은 경외가 단순히 두려움이 아니라, 악을 피하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명철과 연결됨을 보여줍니다.

1.3 신약에서의 경외 신약 성경에서도 경외는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느라." 이 구절은 초기 교회가 경외를 통해 성장하고 강화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경외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 구절은 경외가 개인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유지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2. 복종의 성경적 의미와 사례

2.1 복종의 정의 복종은 자기 뜻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권위나 요구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복종은 종종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련되며,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2.2 구약에서의 복종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22장 2~3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는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언약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속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2.3 신약에서의 복종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종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돌아가심이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복종은 우리의 본보기가 됩니다. 에베소서 6장 1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구절은 가정 내에서의 복종을 강조하며, 복종이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올바른 삶의 태도임을 가르칩니다.

3. 경외와 복종의 상호 관계

3.1 경외와 복종의 연관성 경외와 복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입니다.

3.2 균형 잡힌 신앙생활 경외와 복종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외가 없는 복종은 형식적이고, 복종이 없는 경외는 공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복종에만 집중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


1.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의미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거룩함, 사랑, 희생을 깊이 인식하고, 그분을 존경하며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위대함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에 합당한 경외심을 품는 것입니다.

1.2 경외의 중요성 경외는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진정한 순종과 헌신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2. 경외심을 기르는 방법 2.1 성경 묵상과 기도 성경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배우고, 그분을 더욱 경외하게 됩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의 경외심을 강화해 줍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구절은 성경 말씀이 우리의 영적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2 찬양과 예배 찬양과 예배는 우리의 경외심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과 사랑을 찬양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분을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시편 95편 6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 구절은 경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3 공동체 생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해 줍니다. 서로의 신앙을 나누고 격려함으로써 우리는 경외심을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구절은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과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 경외의 삶을 통한 변화 3.1 성품의 변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아 겸손, 사랑, 인내, 자비 등의 덕목을 실천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런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3.2 행동의 변화 경외심은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 구절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3.3 관계의 변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은 우리의 대인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구절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경외와 복종의 본보기


1.1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과 사역 전반에 걸쳐 분명히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이 아버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셨음을 보여줍니다.

1.2 기도와 경외 예수님은 기도 생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종종 혼자 있는 시간을 내어 기도하며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16절: "예수께서 자주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느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자주 기도하셨음을 보여주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과의 교제를 소중히 여겼음을 나타냅니다.

2. 예수님의 복종 2.1 십자가의 순종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복종이 단순한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깊은 신뢰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돌아가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그분의 절대적인 복종과 겸손을 보여줍니다.

2.2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과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구절은 예수님이 자기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분의 복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나타냅니다.

3. 예수님의 경외와 복종의 교훈 3.1 신뢰와 사랑의 경외 예수님의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도 마찬가지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3.2 철저한 순종의 본보기 예수님의 복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예수님을 본받아 완전한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3.3 기도와 교제의 중요성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유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유지하고, 기도 생활을 통해 경외와 복종을 실천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결론

경외의 의미와 중요성 경외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경외의 중요성 :
경외는 신앙생활의 시작점입니다.
잠언 1장 7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듯이, 경외는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따르는 데 필수적입니다.

경외의 영향 :
경외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이는 성경 묵상, 기도, 예배, 공동체 생활을 통해 더욱 강화될 수 있습니다.

복종의 의미와 중요성 복종은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위와 요구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복종의 중요성 :
복종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이는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입니다.

복종의 영향 :
복종은 우리의 행동과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경외와 복종의 상호 관계 경외와 복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외 없는 복종 :
경외가 없는 복종은 형식적이고 공허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외적인 행위에만 집중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복종 없는 경외 :
복종이 없는 경외는 참된 신앙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의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경외와 복종의 적용 경외와 복종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묵상 :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고, 그분들을 더욱 경외할 수 있습니다.

기도 :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본보기: 예수님의 경외와 복종을 본받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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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란?

첫째, 악을 미워하는 것(잠언 8:13)

둘째, 정직하게 행하는 것(잠언 14:2)

셋째, 칭찬을 받는 것(잠언 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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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결과

첫째,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14: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

잠언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잠언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언 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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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구절이 몇 번이나 등장하나요?

킹 제임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정확한 문구가 30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성경 전체에서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 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같은 관련 문구를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납니다.

고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텍스트에서는 영어로 "공포"로 번역되는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두려움, 경외감 또는 경외심을 뜻하는 '이랴'가 가장 흔합니다.
그리스어에서는 "포보스"가 자주 사용되며, 이는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이러한 반복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빈번한 언급은 신자들의 영적 삶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수많은 권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잠언에서는 이 개념을 지혜의 시작이라고 강조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강조점이 다소 바뀌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개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확한 숫자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개념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응답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의미가 풍부하지만 현대의 맥락에서는 종종 오해되기도 합니다.
성경의 지혜와 인간 이해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 개념을 마음과 머리로 탐구해 봅시다.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체적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능력, 거룩함, 권위에 대한 강력한 경외심, 경외심, 존중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본성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1편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이다"라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이해와 올바른 삶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에 떨며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신 앞에서 우리의 한계와 취약성을 건강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겸손과 지혜, 그리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명기 10:12-13에는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니라"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이 개념은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해와 점점 더 결합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부담이 아닌 창조주와의 더 깊은 관계로 초대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경외심과 순종,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행동의 마비로 이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영감을 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나요?

이것은 창조주와의 관계의 핵심을 건드리는 강력한 질문입니다.
이 문제를 탐구하면서 신학적 통찰력과 심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고통이나 불안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권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마비되는 공포가 아니라 지혜와 순종, 영적 성장으로 이끄는 경건한 경외심입니다.

심리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 정서적 안녕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오해나 자신의 하나님 이미지에 투영된 부정적인 경험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불안, 영적인 문제에 대한 회피 또는 하나님을 가혹하고 징벌적인 존재로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성경적 개념은 심리학자들이 "건강한 존경심" 또는 "경건한 경외심"이라고 부르는 것과 더 비슷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안정감과 목적 의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관점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출애굽기 20:20과 같은 구절에서 이러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하러 오셨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여러분과 함께하여 죄를 짓지 않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두려움과 의로운 삶으로 이끄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빠지기 위해 노예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쇠약해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로 특징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살펴볼 것을 권합니다. 고통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이해와 치유를 구하세요.
요한일서 4:18의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세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며, 이 사랑에 대한 이해가 커질수록 두려움은 경건한 경외심과 신뢰로 바뀝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관한 주요 성경 구절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구절 중 하나는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진정한 지혜와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영적, 지적 성장은 하나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분께 의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한 수많은 언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1:10은 잠언을 인용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그분의 교훈을 따르는 자는 명철을 얻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지혜를 얻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도 연결됩니다.

전도서 12장 1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 이것이 모든 인류의 의무이니라"라는 인간의 의무에 대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인도해야 하는 원칙임을 시사합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옥에서 영혼과 육체를 모두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구성하여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외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서 초대 교회의 특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전역의 교회는 평화의 시간을 누리고 힘을 얻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성장과 강화에 핵심적인 요소였음을 시사합니다.

저는 이 구절들이 지혜에 대한 욕구, 목적에 대한 탐색,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향 등 인간 본성의 다양한 측면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개념이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 이야기 전반에 걸쳐 중심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다른가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그분의 능력과 심판에 대한 인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명기 6:2과 같은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와 네 자손과 그 후손이 내가 네게 주는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켜서 네가 사는 동안 주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장수를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직결됩니다.

시편과 지혜서에서는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임을 자주 강조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의로운 삶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끄는 경건한 경외심으로 묘사됩니다. 잠언 14장 2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물이며, 사람을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가면서 강조점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계시와 점점 더 결합되고 있습니다.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이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영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 두려움 속에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은 영이 여러분을 아들의 자녀로 입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18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형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러한 진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합니다. 구약성경이 강조하는 두려움과 순종은 구조와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다루지만,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사랑과 은혜는 수용과 소속에 대한 우리의 깊은 갈망을 말해줍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두 가지 관점을 긴장감 있게 받아들이기를 권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경외의 필요성을 상기시키지만,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그분과 더 친밀한 관계로 초대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면 어떤 유익이 있나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가르칩니다(잠언 9:10).
이 지혜는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과 조화롭게 사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입니다.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때, 우리는 그분의 인도와 가르침에 자신을 개방하여 그분의 지혜가 우리의 삶과 결정에 스며들도록 허용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적, 도덕적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순결하여 영원히 지속된다"(시편 19:9)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정신의 순수함은 유혹에 저항하고 의를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영적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신성한 보호를 약속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주위에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편 34:7).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을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겸손과 창조세계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길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겸손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더 깊은 신뢰와 그분의 뜻에 우리의 삶을 기꺼이 내맡기려는 의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기쁨과 성취감을 가져다줍니다.
잠언 14장 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의 충만한 사랑과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는 세속적인 추구를 초월하는 목적과 의미로 이어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성품을 형성하고 행동을 인도하며 창조주와의 관계를 깊게 하는 변화의 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아버지 앞에서 지혜, 순결, 보호, 겸손, 기쁨의 삶으로 인도하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것은 영적 성장과 신앙의 깊이를 더하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인내로 길러야 하는 마음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몰입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라고 제롬 성인이 현명하게 말했듯이 말입니다.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위대한 행적, 그리고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기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위엄 앞에 경외감과 경건함으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데 있어 또 다른 필수 요소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정직한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 우리 삶에서 그분의 임재와 능력을 더 잘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그분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키웁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묵상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주의 광대함, 생명의 복잡함, 자연의 아름다움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늘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시편 19:1)라고 외칩니다.

겸손을 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인식하면 주님을 올바르게 경외하게 됩니다. 이것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성사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성사, 특히 성체성사와 화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임재를 만나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부르심을 상기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삶을 연구하면 하나님을 더 깊이 경외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이 거룩한 남녀의 삶을 통해 주님을 건강하게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그 결과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사랑의 열망에서 비롯된 처벌에 대한 노예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것은 평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인내와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커질수록 이러한 두려움이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더 큰 자유와 기쁨,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셨나요?

예수님은 무한한 지혜로 우리에게 경외와 사랑의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전능하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깊이 돌보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마태복음 6:9)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친밀한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 순종과 신뢰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혼과 육체를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은 지상의 모든 권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새 두 마리가 한 푼에 팔리지 않느냐?"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도 너희 아버지께서 돌보시지 아니하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통제를 인정하는 건강한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마비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담대한 믿음과 섬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14-30)에서 두려움 때문에 달란트를 묻어둔 종은 책망을 받았고, 달란트를 사용한 종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이 적극적이고 용기 있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혜와 분별력과 연결시키셨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우선순위를 비판하며 "너희는 박하, 딜, 커민 등 향신료의 10분의 1을 바칩니다. 그러나 너희는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인 정의, 자비, 신실함을 소홀히 하고 있다"(마태복음 23: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 그분의 뜻과 우선순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이어진다는 교훈을 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랑에 관한 것임을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습니다(마 22:37-39).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에 뿌리를 둔 이 완전한 사랑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요한일서 4:18).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는 데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온 존재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셨어요.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성취를 얻는 길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성경적 개념을 어떻게 해석했나요?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식과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관점은 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이끄는 경건한 두려움의 변화적 본질을 강조합니다.

웅변적인 설교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호하는 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적을 막는 가장 강력한 방어의 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경건한 두려움을 부담이 아니라 영적 위험으로부터 신자를 보호하는 방패로 간주합니다.

오리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우정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전하는 점진적인 여정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발달적 관점은 영적 성장과 성숙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바실 대제,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겸손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두려움을 신의 완전성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은혜에 겸손하고 개방적인 자세로 나아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밀라노의 성 암브로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도덕적 행동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과의 친교를 유지하려는 열망에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의롭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아누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순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이 신앙을 위해 박해와 심지어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믿었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동의했지만, 그것이 잘못 해석될 가능성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건강하지 않고 마비시키는 두려움과 영적 성장으로 이끄는 거룩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두려움을 구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킹제임스성경(KJV)은 다른 번역본과 비교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을 어떻게 번역하고 표현하나요?

KJV는 히브리어 이라트 아도나이와 그리스어 포보스 테우를 번역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다"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문구를 일관되게 사용합니다. 이 직역은 현대인의 귀에 거칠게 들릴 수 있는 원문의 강한 언어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잠언 9장 10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번역은 영어에서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부 현대 번역에서는 이 개념을 더 부드럽게 표현하거나 명확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새 국제 버전(NIV)에서는 "두려움" 대신 "경외" 또는 "경외심"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생활번역(NLT)에서는 "존경" 또는 "경외"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두려움'을 단순한 공포로 오해할 수 있는 현대 독자들에게 경건한 두려움의 미묘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KJV는 '두려움'을 일관되게 사용함으로써 전능자 앞에서 경외심, 경외심, 심지어 어느 정도의 두려움까지 포함하는 원래 개념의 다층적인 특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도서 12장 13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도리이니라"는 KJV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KJV의 접근 방식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다른 덕목 또는 축복 사이의 연관성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11편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혜가 있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번역은 두려움, 지혜, 순종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유지합니다.

KJV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두려움"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공포를 분명히 의미하는 문맥에서는 다른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접근 방식은 세심한 독자들이 건강에 해로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한 KJV의 표현은 성경에서 이 개념의 역설적인 성격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은 고통이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사이의 이 명백한 모순은 경건한 두려움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킵니다.

KJV의 고풍스러운 언어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때때로 어렵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타자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빌립보서 2:12)과 같은 구절은 구어체 번역이 효과적으로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경외감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에 대한 KJV의 번역은 성경 원어의 힘과 복잡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좀 더 신중한 해석이 필요할 수 있지만, 이 강력한 영적 개념에 더 깊이 관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도 합니다. 다른 번역본과 함께 KJV를 읽을 때, 우리는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랑스럽고 놀라운 하나님께 다가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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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성경적 정의는 무엇인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구절은 잠언 9:10, 시편 111:10, 욥기 28:28 등 성경의 여러 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가르침의 중심이 되는 심오한 신학적, 철학적 원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에 대한 경외심, 경건함, 존중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란 무슨 뜻인가요?

  1. 경외심과 경외심: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함'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 거룩함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고 인간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2. 지식의 기초: 이 두려움은 참된 지혜와 이해의 기초가 되는 원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서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3. 도덕적, 윤리적 생활: 성경적 의미의 지혜는 단순히 지적 또는 철학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즉,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개인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인도합니다.
  4. 지혜의 시작: "시작"이라는 용어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인 출발점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근본적인 태도 없이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의 예:

  •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어리석은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 구절은 지식과 지혜를 연결하여 둘 다 주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 그분의 교훈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명철을 얻느니라." 이 구절은 이해력과 지혜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데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욥 28:28: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피하는 것이 명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과 악을 피하는 것을 연결하며, 이는 지혜롭게 사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존경과 경외심을 의미하며,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잠언 9:10에 따라 신자들이 의로운 삶을 살도록 원동력이 되며 지혜를 길러줍니다.
  • 신약 성경에서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계명에 겸손히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신성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 '두려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적 성장의 자양분이 되고 평안함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숙고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대한 강력한 이해로 이어지고, 나아가 이 무한한 우주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둔 주목할 만한 개념이며, 그 의미는 우리의 신앙을 구성하는 성소 안에서 강력하게 울려 퍼집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헤아릴 수 없는 허공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신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정적인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능력과 공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인간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지만)를 증명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랑과 은혜. 우리 의식의 풍경 속에서 전능하신 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지만, 그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은 신비롭게 가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중요성은 그 이상으로 확장됩니다. 성경은 수많은 성스러운 구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진심으로 신뢰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넘어 우리의 영적 핵심에서 가시적인 세상에서의 행동으로까지 뻗어나가는 삶의 변화를 촉발합니다. 그러므로 사랑, 순종, 신뢰라는 소중한 가치는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상호 연결된 측면입니다. 신자들은 스트레스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깊은 사랑과 순종,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에서 영적 나침반이 신성한 법과 계명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인생의 결정은 크든 작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두려움은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도덕적 나침반우리를 둘러싼 세상뿐 아니라 그분께서도 기뻐하시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그것은 외부적이고 사회적인 검증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승인을 얻는 것에 관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적 의식을 넘어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 우리 존재의 모든 순간에 스며듭니다. 

매일 선택의 눈사태가 우리를 포위하는 이 시대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확고한 기반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단순히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나침반을 다듬고, 신성한 계명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형성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사랑과 능력, 은혜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감사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분의 신성한 우월성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분에 대한 사랑과 순종, 신뢰로 이어집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인생에서 내리는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 이 두려움은 그분의 신성한 법칙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둘러싼 이해의 매듭을 푸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

  1. 경건과 존중: 이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존경심, 경외심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 거룩함, 권위를 인정하며 깊은 경배와 복종으로 이어집니다.
  2. 긍정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긍정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조성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인정하고 사랑과 존경으로 순종하려고 노력합니다.
  3. 지혜와 이해: 이러한 유형의 두려움은 삶을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추기 때문에 지혜와 이해의 기초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4. 자신감과 신뢰: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와 확신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공의, 자비에 대한 신자들을 안심시킵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것:

  1. 공포와 두려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종종 형벌이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공포와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죄책감, 수치심,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싶은 욕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2. 부정적 관계: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부정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만듭니다. 그것은 개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복종과 순종보다는 회피와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3. 이해 부족: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종종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그분의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열망을 간과합니다.
  4. 불안과 불안: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보다는 하나님의 보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불안과 불안을 낳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역설이자 경이로움으로,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겸손으로 자신을 굴복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한 모습을 갈망하고 그분의 자비로운 은혜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어느 정도의 분리와 부정성을 의미하며, 종종 처벌이나 잠재적 해악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심어주는 도덕성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불가피성을 인정합니다. 신성한 정의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과 동시에 신의 용서와 자비, 영원한 구원의 약속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심어줍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은 일반적인 의미의 두려움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강력한 경외심과 경건한 존중입니다.
  •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위와 능력에 대한 인식과 그에 비해 인간의 무의미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정교한 관계를 향한 여정을 촉진하여 사랑, 신뢰, 순종을 촉진합니다.
  • 부정과 분리를 나타내는 두려움과 달리,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공의를 환영하고 용서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희망을 키워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개념을 풀어내려면 신학적 깊이에 대한 깊은 몰입과 함께 성경에 묘사된 신의 기념비적인 위상을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훈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의 강력한 힘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은혜와 감사, 경외심이 가득한 삶을 포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적 여정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적 두려움은 다가오는 위험이나 즉각적인 위협으로 인해 유발되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용어와 연관된 불안과 떨림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경외심, 존경심, 경외심이 합쳐진 것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벌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우리를 계속 지탱해 주시는 무한히 부드러운 사랑에서 비롯된 경외심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흥미로운 측면은 그것이 양심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깊은 성찰과 자기 평가를 유도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결점과 허물은 우리 앞에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이해하면 이러한 두려움이 완화되고 동시에 회개와 변화를 향한 우리의 길이 밝혀집니다. 

신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키우는 것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대한 의식적인 반응으로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촉구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기도, 묵상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장된 관점이 발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묘목이 자라기 위해 햇빛과 물, 영양분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도 번성하기 위해 창조주에 대한 감사와 숭배, 존경의 식단을 꾸준히 유지해야 합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노력이 아니라 그분의 강력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영적인 여정입니다.
  • 이 신성한 두려움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존경심, 경외심이 합쳐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성찰과 자기 평가를 불러일으키며 회개와 변화의 길을 깨닫게 해줍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하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지며,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됩니다.
  • 겸손과 기도, 하나님의 말씀 묵상을 지속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전능자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영적인 틀을 일상적인 실천에 통합하고, 적극적으로 전인적인 삶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이 길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길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 그리고 신성한 부모님을 이해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길입니다. 

신앙과 헌신의 관찰 가능한 표현인 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디딤돌 이 여정에서. 매일의 기도는 이러한 노력에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기도는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여 깊은 존경심과 경외감을 촉진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키울 때 기도는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측면입니다. 하느님을 집단적으로 경배하는 행위는 강력한 경건함을 심어주며, 개인이 교회와 공동체의 거룩함에 나타난 하느님의 위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은 결코 다음과 같은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예배 혼자서. 양심 시험과 같은 자기 성찰과 도덕적 판단의 순간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이러한 시험은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부분을 파악하여 주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해성사는 이러한 두려움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해성사는 죄에 대한 후회를 불러일으켜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 즉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매일 겸손하게 걷고,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선택을 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배양됩니다. 신성한 인도. 이러한 수준의 사고를 일상 생활에서 구현하면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을 일치시켜 궁극적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증폭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일상 생활에 영적인 틀을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 매일의 기도, 미사 참여, 양심 성찰을 통한 자기 성찰, 참회 성사 등의 실천이 이러한 노력에 큰 역할을 합니다.
  •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하느님의 승인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개인 생활에 통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측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모순되나요?


종교적 헌신의 본질적인 요소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기독교의 근본적인 약속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사이의 긴장은 신학계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논쟁거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다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지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 그리고 사랑.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오해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지혜와 성숙함에 따라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유동적일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 원어인 히라 또는 그리스어 포보스에서 번역된 성경적 관점에서 '두려움'을 생각해 보면, 신앙의 맥락에서 이러한 개념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더 깊이 연구해보면 이 두려움은 위험이나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경외심, 신의 주권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힌 인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간청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능력과 지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그분의 길을 겸손히 인정하라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권적 보좌에 모시고 우리 자신을 위해 그 자리를 빼앗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보완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와 신성한 공의를 인정하지 않는 안일한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안주하고 그분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의 두려움이 순전히 공포나 절망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놀랍도록 강력하고 의로우시지만 무한히 사랑스럽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은혜, 두려움이 복잡하고 신성한 춤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

그러므로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저는 우리가 두려움과 사랑을 인식하는 세상적인 렌즈를 버리고이를 보완적인 힘으로 바꾸고 능숙하고 섬세하게 직물로 짜여진 신성한 관점을 받아들이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요약해 보겠습니다: 

  • 성경적 맥락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경건한 경외심과 존경을 의미합니다.
  • 이러한 두려움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완하는 것입니다.
  •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안일함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주님의 신성한 권위와 공의를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의 두려움을 상쇄하고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상기시켜 줍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그분의 사랑, 은혜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개념에 대한 우리의 세상적인 관점을 초월한 신성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깨끗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우리는 종종 경전에서 언뜻 보기에 역설적이거나 모순되어 혼란스럽거나 당황스러운 느낌을 주는 문구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 중 하나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깨끗하다"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묵상한 시편 19:9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 여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본질에 대한 내밀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깨끗하다'고 묘사될 때, 그것은 이 두려움의 순수성, 즉 때 묻지 않은 본질을 가리킵니다. 혼란이 아니라 명확함을, 어둠이 아니라 빛을, 정체가 아니라 성장을 가져다주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 이 신에 대한 경외심는 우리의 지각을 정화하고, 우리의 이해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며, 밝은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거짓 증거가 진짜처럼 보이거나 쇠약하게 만드는 공포와 같은 인간의 일반적인 두려움과 관련된 불순물이 없습니다.

이 '깨끗한' 두려움의 본질적인 측면은 영적인 '경보'로서의 기능에 있습니다. 옛 현자들과 성인들에 따르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신과의 관계에 대한 바로미터 역할을 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정의의 길역경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악의 무서운 유혹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과 사고 과정을 정화하여 고독 속에서도 우리의 신성한 책임감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깨끗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또한 지혜의 시작을 안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경외심과 경외심는 지혜가 깊어지는 길을 열어줍니다. 지식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광대무변한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무한함에 비해 우리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이 '깨끗한 두려움'은 우리를 이해로 인도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지혜가 성장한 결과인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깨끗하다'는 시편 19편 9절에 나오는 주제 표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정결하고 깨달음을 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 이 '깨끗한' 두려움은 인간의 일반적인 두려움과 관련된 불순물이 없는 명료성을 유도하여 삶을 바라보는 깨달음의 관점을 촉진합니다.
  • 이는 '경종'의 역할을 하여 의로움을 장려하고 악과의 교전을 억제함으로써 사고 과정과 행동을 정화합니다.
  •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위엄을 인정하면 지혜가 확장되고 이해가 깊어지는 등 두려움은 지혜의 기초가 됩니다.

교부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교회 교부들은 이 고대의 지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움츠러드는 공포가 아니라 참된 지식과 미덕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인 성 어거스틴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그들 안에 있지 않을까 두려워서, 진심으로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모두 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신자와도 거리가 멀다!"라고 썼습니다. (성 어거스틴 하마 컬렉션, nd)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지혜는 위대한 미덕이며,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이 아름답게 표현했듯이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계명의 끝'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참된 미덕입니다."라고 말했죠. (성 어거스틴 하마 컬렉션, nd)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악에서 떠나도록 이끌고 이해로 인도합니다.

위대한 오리겐은 우리의 이해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합니다. 그는 지혜는 도덕적 훈련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도덕적 훈련과 기록된 내용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너희가 지혜를 구하였으니 계명을 지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라고."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이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한 우리 삶의 실제적인 방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암브로스 성인은 지혜롭게도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성령의 선물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것이 은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진정한 힘은 오직 주 예수님을 따르고 아버지께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라고 썼습니다. (프란치스코, 2015)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것"이라고 묘사한 성 보나벤투레의 말을 생각해 봅시다. (Murray, 2011) 이 이미지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살아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교부들의 가르침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랑과 순종, 변화의 여정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참된 지혜와 하느님과의 연합을 향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을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에 마음을 열어주는 선물로 받아들입시다.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할 수 있나요?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이 심오한 영적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흐리게 할 수 있는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하라"는 말을 들으면 공포와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상상하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폭군이나 예측할 수 없는 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서 저는 하느님은 가혹한 명령자가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라는 점을 자주 강조해 왔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러한 두려움은 견뎌야 할 짐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프란치스코, 2015)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야말로 위대하고 참된 미덕"이라고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하마의 성 어거스틴 컬렉션, nd)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창조주에 대한 더 깊은 사랑과 경외심으로 인도합니다.

또 다른 오해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들만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성자든 죄인이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암브로스 성인의 가르침처럼, "주님을 경외하면 모든 것이 은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진정한 힘은 오직 주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2015) 그것은 우리의 실패에 대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으로 마비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나벤처의 설명처럼 "거룩한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나무"입니다. (Murray, 2011) 두려움은 우리를 거룩함과 지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원시적인 이해에 속하는 구시대적인 것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여러분, 이 성령의 은사는 성경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것은 미신이나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와 위엄에 대한 깊은 경외심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하면 자신감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순수하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시편 19:9) 이러한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기쁨을 증진시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오해에 현혹되지 맙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귀한 선물입니다. 두려움은 공포나 복종이 아니라 경외심과 경건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깊은 열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 속에서 성장하면서 사랑과 기쁨, 그리고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도 함께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다른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에 대한 이해와는 크게 다른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두려움은 종종 불안, 공포 또는 해를 피하려는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용어로 존경은 종종 성취나 지위에 대한 존경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제한된 이해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더 깊고 변화적인 관점을 제공합니다.

먼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위협이나 위험을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려고 기다리는 폭군이 아니라 우리의 선을 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성 요한 크리소스톰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과 지혜와 이해의 샘이며... 그 열매로 사람을 채운다"라고 말한 것과 더 비슷합니다. (보이쿠와 오덴, 2014) 이 두려움은 생명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두려움은 종종 우리를 마비시키거나 후퇴하게 만들지만,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영적 여정을 전진하게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 어거스틴 하마 컬렉션, nd) 두려움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지혜와 이해, 궁극적으로는 사랑으로 이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종종 업적이나 지위를 통해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의 업적(비록 그것이 측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인 그분의 본성 자체에 근거합니다. 보나벤쳐가 아름답게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신성한 능력의 숭고함과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고려"에서 비롯됩니다. (Murray, 2011) 이것은 감탄을 넘어 하나님의 신비와 위엄에 대한 깊은 경외심에 이르는 존경심입니다.

게다가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은 종종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을 보호하거나 개인적인 이득을 얻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우리를 밖으로 향하게 합니다. 시라크서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면류관이며, 평화와 온전한 건강이 번성하게 합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캐나다, nd)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평화, 타인과의 평화,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평화로 인도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은 종종 외적인 요인에 기반하는 반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음의 내적인 성향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자주 강조했듯이, 두려움은 외형적인 규칙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고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암브로스 성인의 가르침처럼 이 두려움은 "마음을 열어 용서와 자비, 선함과 아버지의 애무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합니다. (프란치스코, 2015)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은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순수하며 영원히 지속된다"고 말합니다. (시편 19:9) 그것은 세상의 의견이나 상황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우리 삶의 안정적인 토대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세상의 두려움이나 존경과는 전혀 다른 주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품어 봅시다. 두려움은 우리를 지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 두려움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 내면으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고 진정한 지혜와 거룩함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가톨릭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항상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발견되는 이 심오한 진리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영적 삶의 초석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요약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 중 하나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려움은 부정적이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선물로 제시됩니다. 교회는 이 두려움이 형벌에 대한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두려움, 즉 효도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목자로서 저는 교회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사랑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 중 한 명인 성 어거스틴은 이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계명의 끝'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참된 미덕입니다." (하마의 성 어거스틴 컬렉션, nd) 이 두려움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고, 사랑은 이 두려움을 완성합니다.

교회는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오리겐은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도덕적 훈련과 기록된 내용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너희가 지혜를 원하였으니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라고."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를 순종과 도덕적인 삶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교회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힘과 위안의 원천으로 여깁니다. 암브로스 성인은 "주님을 경외하면 모든 것이 은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진정한 힘은 오직 주 예수님을 따르고 아버지께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프란치스코, 2015) 두려움은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를 열어주는 선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점진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함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성 보나벤투르는 이를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것"이라고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Murray, 2011) 우리가 이 은사를 가꾸어 나갈 때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겸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이해합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상기시키며, 우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리와 일치시킴으로써 우리를 높여줍니다. 제가 자주 말했듯이 겸손은 우리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덜 생각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시라크서에서 읽은 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죄를 쫓아내고 그것이 있는 곳에서는 진노를 물리칩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두려움은 유혹에 저항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죄와 이기심의 폭정에서 해방시켜 하느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의 심리적 해석은 무엇인가요?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주로 영적인 개념이지만, 심리적으로도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자로서 저는 이 성경적 지혜가 우리의 인간 본성 및 심리적 안녕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리적 관점에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한계와 더 높은 힘에 대한 의존을 건강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극심한 불안이나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창조의 거대한 계획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성숙한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성 보나벤쳐의 가르침처럼, 이러한 두려움은 "신성한 힘의 숭고함과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고려"에서 비롯됩니다. (Murray, 2011) 심리적으로는 경외감과 경이로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정신 건강과 웰빙에 유익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교만과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경향에 대한 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 용어로 나르시시즘과 자만심을 견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하며(성 어거스틴의 하마 컬렉션, nd), 심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지혜에는 현실적인 자기 평가와 겸손이 포함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건강한 자기 인식은 개인의 성장과 긍정적인 관계에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또한 자기 초월이라는 심리적 개념, 즉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와 연결될 수 있는 능력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삶의 만족도와 회복력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라크서에서 읽은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면류관이며, 평화와 완전한 건강을 번성하게 합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심리적으로 정신적, 정서적 웰빙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 보나벤투레가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나무"(Murray, 2011)라고 묘사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의 점진적인 성격은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심리적 모델과도 일치합니다. 이는 정적인 상태가 아닌 역동적인 성숙과 지혜의 증가 과정을 제시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심리적 측면에서 안전한 애착의 한 형태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고 권위적인 부모 앞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암브로스 성인의 가르침처럼 "마음을 열어 용서, 자비, 선하심, 아버지의 애무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합니다. (프란치스코, 2015)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안전한 애착은 심리적 건강을 위한 안정된 토대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캐나다, nd)에서 언급했듯이 죄에 대한 보호 수단으로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기 규제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자들이 초자아 또는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과 의사 결정을 안내하는 내적 나침반을 제공합니다.

이 개념은 또한 통제력의 중심점이라는 심리적 원리와도 공명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외적 통제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책임감 측면에서 내적 통제력을 촉진합니다. 이러한 균형은 더 나은 정신 건강 결과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인지 발달에 관한 심리학 이론과도 일치합니다. 이는 단순하고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현실과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이해로 나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러한 심리적 해석은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할 수는 있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영적 차원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이 성경적 지혜는 사랑의 창조주께서 설계하신 우리의 인간 본성과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거룩한 두려움의 선물이 우리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심리적 안녕에도 기여한다는 것을 알고 이 선물을 받아들여 봅시다.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지혜와 평화,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개념을 다루면서 성스러운 영역을 밟을 때, 우리는 영적인 심오함이 가득한 물속을 헤엄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려면 먼저 이 맥락에서 두려움이 두려움이나 공포의 일상적인 의미를 초월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강력한 경외심과 경외심, 신의 위대함에 대한 인식,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무게에 대한 의식을 포괄합니다. 

우주적 포옹의 따스함으로 우리를 감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친밀한 유대감이며,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강물입니다. 인간 존재 신성한 바다로 인도합니다. 사랑이 커질수록 경외심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집니다. 

이러한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맞물려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영적 다리를 만들어냅니다. 두려움은 진심 어린 존경과 경외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뒷받침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편재하심, 공의에 의해 촉발됩니다. 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의 씨앗을 키워서 다음과 같은 나무로 키웁니다. 확고한 믿음 그리고 순종.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과 하나님의 의식에 기꺼이 복종하는 정신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두려움과 사랑은 같은 신학적 동전의 양면으로, 강력한 영성의 순환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신에 대한 사랑에서 자라며, 다음에 대한 죄를 피하려는 욕구를 강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촉발되고 자극을 받아 그분의 신성한 명령에 충실하고자 하는 깊은 순종과 갈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강력하게 두려워해야 합니다. 

요약: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깊은 경외심과 경외심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위대함과 우리 행동의 도덕적 중력에 대한 인식을 이끌어냅니다.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강력한 인식으로 키워진 신과의 친밀한 유대감을 상징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은 깊은 영성의 순환적인 춤 속에서 서로를 키워줍니다.
  •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범죄를 피하려는 욕구를 강화하고, 이 두려움은 더 깊은 사랑을 촉발하여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을 촉구합니다.
  •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절대적인 경외심과 존경심을 의미하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두려움이 필수적입니다.

사실 및 통계

미국 성인의 801TP3%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기독교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5%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개념을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종교 관련 연구에 참여한 응답자의 약 60%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경건함과 경외심과 연관시켰습니다.

한 종교 텍스트 연구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문구가 성경에 300번 이상 등장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000명의 신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5%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명령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종교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0%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깊은 존경과 사랑의 형태로 해석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기독교인 중 약 651%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 요소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종교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0%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로 이어진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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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라 (잠 19:20-29)

운영자
6~8분

본문 19장 23절을 읽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신명기 10장 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수아 24장 14절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충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사야 8장 13절에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고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잠언 1장 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즉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였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래 우리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로써 하나님께서 이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실 때에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다음부터는 인간을 유익하게 해주는 본래의 지경을 지나서 도에 넘치게 되고 또한 그러한 형태가 변해서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도에 지나게 많은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공포심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인간 생활을 해하는 하나의 하나의 감정적인 요소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를 두려워합니다. 흔히 민주 사회에서 여론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지 아니하더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살피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 더구나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한 말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해서 멀리 애굽으로 팔아 버린 후 자기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어떻게 했어요? 형들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에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묻혀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는 나이 많은 야곱에게 내밀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보더니 ‘내 사랑하는 아들을 짐승이 잡아먹었구나’하면서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해 후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은밀한 가운데 지은 죄는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애굽의 궁중에서 환하게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간음한 뒤에 자기의 범한 죄를 덮어 버리기 위해서 그 남편 되는 우리아를 모함하였습니다. 우리아를 말하면 다윗의 충신입니다. 비밀문서를 써서 우리아에게 주며 요압 장군에게 갖다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아로 하여금 최일선인 암몬성 가까이에 가서 싸우게 해서 암몬사람의 칼에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왕의 부탁대로 했더니 사실 우리아는 적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손을 대지 아니하고 적의 손을 통해서 죽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아가 일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일시로 사람의 눈을 가리웠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험악한 죄는 오래가지 아니해서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을 다 보십니다. 사람의 눈은 혹시 피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실 뿐더러 모든 죄를 죄대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귀는 두 가지로 인간을 시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니까 너 아무리 죄를 회개해보라. 그는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아무리 죄를 범해도 벌하시는 분은 아니다”고 유혹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인 까닭에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중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해 주시지마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형벌을 내리십니다.

금생에도 내리시고 내생에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때로는 양심을 통해서, 때로는 육신의 병을 통해서, 때로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3,4대까지 내려가면서 형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무서운 것은 마지막 심판입니다. 민수기 32장 23절에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범한다고 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보십니다. 그 죄는 그 사람의 뒤를 항상 졸졸 따라 다닙니다. 그러다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씀처럼 요긴한 대목에 가서 꼭 마주칩니다. 그 죄가 꼭 사람을 벌하고야 맙니다. 심은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의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 형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잠깐 실수해서 범한 죄 때문에 영원히 벌할 수가 있겠는가?”고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5장 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47절에서 48절에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정 두려워하여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보지 못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죄를 범합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뿐만은 아닙니다. 공기가 보입니까? 전파가 보입니까? 세상에 보이지는 않지마는 실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있지 아니합니까?

히브리서 기자도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꼭 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지으셨습니다. 눈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감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 이 단에 서서 여러분을 대개 다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의 방향, 몸의 자세를 다 봅니다. 누가 재미있게 듣고 계시나, 누가 졸고 계시나 하는 것을 다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는 것은 제가 여기서 여러분을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십니다.

병원엘 가면 X-레이 촬영실이 있습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몸의 밖의 부분만 봅니다. 그러나 X-레이를 비치면 이 몸의 내부를 볼 수 있습니다. 뼈가 다 보입니다. 폐나 심장, 위장, 내장들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속마음, 심령의 상태를 다 보십니다. 밖으로는 아무리 웃는 낯으로 말하지마는 속에 칼날을 품고 있는 것을 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생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레이보다 더 밝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해서 사람이 흠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 포로 생활을 하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의 친구 셋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바르게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행해 기도했는데 계속하게 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선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던 그대로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무섭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세요! 그 청년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습니까? 그들을 책잡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는 여기에다 절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시기하는 바벨론 동관들이 다른 것으로는 흠을 잡을 수 없으니까 그들이 하나님 외에는 무엇에게나 절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이것으로 그물을 쳤습니다. 왕이 세운 금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결국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섬기지 아니하는 일이라고 해서 이 세 청년을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어오게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노해서 사실을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지마는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인데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실 신이 어떤 신이냐?”고 하였습니다.

이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한 말이 이러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어떻게 이렇게 대왕 앞에서 포로의 신세로 있는 청년들이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정죄할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장래를 위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요? 장래가 분명히 약속되고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란 대심판이요 형벌이기 때문에 이것처럼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항상 조심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청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내가 어찌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으랴?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혹 어떻게 잘못해서 죄를 범하면 즉시 회개합니다. 깨끗이 씻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볼 때에는 두려운 재판장의 얼굴이 아니요 인자하신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으면 이 두려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변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다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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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의 두 아들들 -



사무엘의 아들들 - 요엘, 아비야

사무엘상 8:1-3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사무엘은 선지자의 대표로 불립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면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주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사명을 완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사역의 과정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모세는 40이 되어서야 민족을 돌아볼 마음이 들었다면 사무엘은 아주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가운데 성전에서 성장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일백 이십 세가 되었을 때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삶을 마친 반면 사무엘은 자신이 세운 왕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가운데(삼상15:35) 자신이 기름 부어 세운 왕 사울을 더 이상 대면하지 않는 가운데 일생을 마쳤습니다(삼상 25:1)

사무엘은 기도하는 선지자였고(삼상 7:5), 사무엘이 선포한 말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며(삼상 3:19), 사무엘이 기도했을 때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물리쳐 주실 정도로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도 해 주셨습니다(삼상 7:10), 뿐만 아니라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삼상 7:15-17) 열심과 성심으로(삼상 12:1-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본다면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붙어있게 하기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봉사. 사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들이 그와 같지 않았다는데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들 요엘과 아비야

삼상 8장 2절에는 사무엘의 두 아들이 등장을 합니다.
한 사람은 ‘요엘’이요 또 한 사람은 ‘아비야’입니다.
‘요엘’ 이란 이름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인데 ‘우상을 대적 한다’라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 란 뜻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성적(父性的) 신뢰를 표현하는 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의 끊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이란 친숙한 어의(語意)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이름에 담긴 뜻만큼 신앙의 인물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사사가 되어서 율법이 엄히 금하고 있는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던 것입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사무엘의 아들들이 이렇게 성장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무엘이 사역에 너무 바쁜 나머지 양육자로서의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기인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즉, 사무엘의 아들들은 혹 ‘아버지의 부재(不在)’ 인 가운데 성장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모 대학 연구소에서 임신 중에 엄마가 다이어트를 하거나 아니면 건강상의 이유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이 때 태중에 있던 아이는 태어나서 음식을 탐하며, 비만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태중에 있을 때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 태아는 본능적으로 ‘음식은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고 뇌에 각인을 한다고 합니다.
언제 또 음식이 공급되지 않을지 모르니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인식을 하게 되고, 이것이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식습관이 그들을 비만으로 성장시킨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필요한 것을 적절한 때에 공급받는 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스스로 그 부족을 채우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바쁜 사역으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물질, 관심과 보호 등을 충분히 그리고 제때에 공급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사가 되어서 뇌물이라도 받아서 자기의 필요한 것을 스스로 채우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그렇다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 상담을 해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성장배경을 추적해 보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물질, 사랑, 관심, 보호 등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뭘 달라고 해서 얻은 것이 있어야지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도 육신의 아버지처럼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공급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것저것을 잘도 구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면 그 아버지가 공급해준 것이 많으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이처럼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또한 중요합니다. 사춘기 이전에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 그 엄마의 사랑을 찾아 이 여자 저여자로 방황할 수 있습니다. 여성편력이 심한 사람은 어릴 때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각 사람은 사회적 위치와 신분이 다양합니다. 대통령도 있고, 재벌총수도 있고, 장관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교사도 있고, 목사도 농부도 있고 구멍가게 사장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위치와 신분이 다르기는 하지만 각자가 일하는 위치에서 가정으로 돌아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일은 누구나 똑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사장님을 하면 직원이 제반 일을 다 해줄 수 있어 사장님은 지시만 하면 조직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가정만큼은 누구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몸소 남편의 역할을 해야 하고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청소도 하고 음식쓰레기도 내다 놓아야 하고, 아이들과 같이 목욕도 하고 무등도 태워주고, 축구도 같이 하고, 대화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법도 배우고 돈 쓰는 방법도 매우고 분노하고 푸는 방법도 배웁니다. 요즈음은 이러한 것들이 생략된 채 학원에만 보내는데 이렇게 하면 지식은 늘지 모르지만 정서는 늘지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들은 지능지수(IQ)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잘하는 정서지수(EQ)가 높은 사람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역할은 누가 대신할 수도 없으며 그 역할은 무척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우리의 선조들도 명심보감에서 '아버지를 알고 싶으면 아들을 보라'(欲知其父 先視其子1) 라고 했겠습니까?

한편, 사무엘이 이렇게 바쁜 사역 가운데 가정 사역을 소홀히 하고 자녀 양육에 실패한 것은, 자신도 어머니 한나의 서원기도로 말미암아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를 떠나서 성장하는 바람(삼상1:21-28)에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아버지 엘가나로부터 영향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까닭도 조금은 있다고 보여 집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그를 닮은 아버지가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사역과 가정 & 자녀양육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결코 세습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부동산처럼 자녀에게 자동으로 상속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육환경이 좋고,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을 하고, 훌륭한 신앙의 가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구체적이고 면밀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각 개개인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다고 하여 아들의 이가 시(醋)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렘31:29). 대신 집에서 하는 아버지의 신앙의 모습이 그자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이렇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또는 후손에게 믿음(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자녀에게 삶으로 "하나님의 모습(무섭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사랑, 용서, 거룩, 관용, 기다려줌, 공급 등 하나님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녀를 위한 간절한 기도(하나님께 의탁)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많은 목사님 가정에서 자녀들이 방황하고 곁길로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버지 목사님의 이중적인 생활을 보고 혼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역(하나님께 봉사)을 위해서 가정을 내팽개치고 소홀히 하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사역은 사역을 위해서 가정도 자녀도 버리고 사역만 하라는 것도 아니고 가정과 자녀를 떠나 광야나 굴에 들어가 수도승처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은 세미나에서 ‘내가 사역을 함으로 가정이 망가진다면 나는 차라리 가정을 살리기 위해 사역을 그만 두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사역 이전에 주신 건강한 가정의 삶의 의무를 저버리고 나홀로, 사역을 위해 자기를 불태우는 신앙은 은혜로 하는 사역이 아니고 자기열심과 탐욕에 기인한 것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은 비인간적인 사고와 결과를 낳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종교를 가짐으로 가정이 살아나고 화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화목이 깨지고 자녀가 망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은 지극히 건강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물론, 사역과 봉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업무량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짐을 자기 스스로 모두 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민11:11)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잘 모르는 무지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한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일정 분량의 짐을 내려 놓거나 나눠 줌으로서 짐을 가볍게하고(하나님께 의탁으로 하고) 가벼워진 짐으로 가정과 자녀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출18:13-23).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는 자기만 남아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큰 일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왕상19:14). 하지만 하나님은 아합임금과 이세벨의 폭압과 사악한 통치 가운데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인을 남겨두고 계셨던 것입니다(왕상19:18).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에 혹은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열심으로 봉사 충성하면 나머지 모든 가정의 일들을 하나님이 자동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사무엘의 가정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으로, 바쁘게 한 것으로 치면 사무엘처럼 일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녀들은 자녀들의 때에 적당하고 충분한 사랑을 부모님으로 부터 받아야 건강한 한 사회개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저절로 인격자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격자로 성장하는 때를 놓치면 회복되는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게 됩니다.

연구에 의하면 어릴 때 충분한 보살핌과 공급,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른이되어 도박과 같은 중독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어린이 때에 장남감을 가지고 놀아보지 못하면 어른이되어 장남감을 가지고 놀게 됩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남감은 자동차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 때 장남감을 가지고 충분히 놀아 보지 못한 사람이 어른이 되어 새삼스럽고 유치하게 자동차, 모형 비행기, 각종 모형 만들기, 각종 게임기 등에 몰두 합니다.  

어른이 되어 어른으로서 바쁘게 해야할 일이 많음에도, 지나간 때가 족한 것을 모르니까  어른 장난감 가지고 어린아이 처럼 놀고 있는 것이지요..... 장난감 가지고 노는 어른아이 때문에 속상해 하는 주부를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교회에 가서 청소로 봉사하고 기도많이 한다고 해서(물론 이것은 필요하고 권장할만 하며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지는 않고 자기열심으로 청소,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저절로 건강한 신앙의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동으로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가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농사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뙤약볕에 땀흘리며 김을 매고 비오는데 논 물 보며 이슬 맞으며 비료줄 때 풍성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도가 쌓이면 더 풍성한 열매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가정이나 그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의 세밀한 관심과 전폭적인 지지와 충분한 공급과 사랑과 보호 밑에서 성장을 해야 건강하게 사회를 살 수 있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지게 됩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외적인 사역을 열심히 하고 성심으로 하여야 하는 만큼 가정의 머리된 자로서의 가정의 내적의무를 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너무 사역에 바쁜 나머지 가정과 자녀들 양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회구성원으로 영향도 받고 영향도 끼치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보내심을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미명으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끊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성공과 자녀의 겸손

부모가 사업으로, 고위 공직으로, 큰 목회사역으로 성공을 하면 자녀들은 자칫 자신들도 부모님과 같지 않을까 하고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마치 요즘 방영되고 있는 월화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아버지가 거대한 그룹총수를 하니까 장남은 자신도 카드 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큰 딸은 호텔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모 대통령의 아들이 대선에 출마하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모두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자칫하면 자녀들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사무엘 가정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사무엘을 존경하니까 그 아들들이 겸손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사회적 지위가 사무엘의 아들들에게 겸손을 배우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교만하여 방종으로 나아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무엘의 아들인 나는)뇌물을 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성경에서 뇌물을 금하는 이유는 모든 것의 공급자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힘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받겠다는 불신앙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가끔 재벌 총수의 2세들이 사회를 요란케 하는 일들을 보면 모두 이러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대외적인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일수록 가정과 자녀의 교육, 양육, 아내에 대한 사랑 등에 관심이 부족하기 쉽습니다. 너무 바쁜 탓에 말입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핑계도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이것 까지도 소홀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면 그로말미암아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게 됩니다.  

사무엘의 아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왕을 구하는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명심할 일입니다.  

자칫하다가는 평생 바쁜 사역을 하면서 얻은 명성을 잘 못 키운 자식 때문에 그 명성이 빛이 바랠 뿐만 아니라 평생에 회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자녀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자칫 그 일그러진 아버지의 상(像)이 자손 대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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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강화







다락방 강화(요한복음 13-16장)

소위 ‘다락방 강화(the Upper Room Discourse)’라고 불리는 13-17장은 예수께서 인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자리인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다락방 강화의 목적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과 부활 숭천을 목전에 두신 상황에서 이제 자신의 부재시에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사랑(Loving one another)’,
‘위안과 평강(Comfort and Peace)’,
‘예수 안에 거함(Abiding in J esus)’,
‘세상에 대한 승리의 확신(Conviction of Victory against the World) 등이 강화의 주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락방 강화의 내용 구조는 크게 세 부분,
13장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도,
14-16장의 주님의 고별 설교,
17장의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로 구성되었다.

​17장은 강화의 완결(Consummation) 부분으로서 다락방 강화의 일부에 속하지만 그 내용의 특성상 독립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13-16장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1-20절),
가룟 유다의 배반과 이탈(21-30절),
예수의 부활 승천에 대한 암시적 예고와 사랑의 새 계명 수여(31-35 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36-38절) 등 최후의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중 가룟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둥 공관복음서들이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보도함에 있어서 신약의 중요한 2대 성례 중 하나인 성만찬(聖曉餐) 제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성만찬 제정 부분을 모두 생략하고 대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속해서 ‘사랑의 새 계명’을 수여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뚜렷한 차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기사로서, 이후에 이어지는 긴 강화와 별개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몸으로 보이신 설교’라고 할 만큼 이후의 강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었다.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저녁, 예수님의 마음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 먼저 한 가지 행동을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각인(刻印)시키신 것이다.

그 메시지란 우선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1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다. 장차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을 아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 자기를 팔 자인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셨다는 것은 무조건적이고도 변함없는 그분의 초월적 사랑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회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눅 22:24을 참조해 볼 때, 사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가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곧 예수께서 이루리라고 생각한 정치적 메시야 왕국에서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신약 공동체의 모델이 되어야 할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순간에까지 여전히 시기와 경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기보다는 몸으로 그들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친히 모범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교훈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주와 스승’이신 분으로서 제자들의 발 씻기시기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새 계명(New Commandment)’ 을 주신다(31-35절).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새로운’ 계명이란 시간적인 차원에서 옛것에 비해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질적인 면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이미 구약의 율법에 주어졌으며(레 19:18), 또 구약 율법의 요약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눅 10:27). 따라서 여기서 새로움이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즉, 옛계명이 이웃 사랑의 기준을 인간의 자기 사랑에 두고 있는 데 비해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과 더 나아가 신약의 교회 공동체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완전하고도 신적인 사랑을 모델(Model)로 삼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새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되지 말고 예수께서 몽소 보이신 대로 무조건적이고도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14-16장은 예수께서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그 자리에서 주신 고별 설교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그 중 14장에서는 이제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남아 세상이 주는 각종 핍박을 감수하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과 나아가 전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는 주님의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예수께서 자신이 곧 떠나시지만 그 떠나시는 목적이 곧 아버지 집에 제자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는 데 있음을 언급하시며 다시 오셔서 그들을 자신이 계신 곳에 영접하여 인도할 것임을 약속하신다. 또한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the Way, the Truth, the Life)이라는 자기 선언을 하시며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밝히신다(1-7절). 이어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벌립의 요청에 대해 자신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으며 또 아버지는 자신 안에 계시다고 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라고 하는 단일성(Oneness)을 보다 명확히 계시하신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자신이 그것을 시행하실 것이며 이로써 성부께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밝히신다(8-15절).

이어 14:16-31에서는 예수께서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the Counselor)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과 또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끼치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또 다른 보혜사’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시다(롬 8:9 ; 고전 12:3 ; 갈 4:6).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신다는 것은 곧 예수께서 그의 영으로써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바로 깨닫는다면, 남겨진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예수님의 약속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가 있을 수 없다. 비록 예수께서 ‘몸으로는’ 제자들을 떠나시게 되지만,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셈인 것이다.

다음 15:1-11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 안에 거하는 것(Abiding in J esus)에 관해 교훈하신다. 즉 제자들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하듯이 그렇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기도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이 곧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써(10절),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어서 15: 12-17 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준수를 재차 언급하며 촉구하신다.

이어 15:18~16:33의 네 문단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며 세상에 대한 숭리의 확신을 가질 것을 권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와 성령이 오셔서 행하실 사역에 대해서 예언과 교훈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 및 승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예고하신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회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할 것이다(16:2). 사실 핍박을 당해도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면 견디고 이겨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핍박하는 자가 오히려 의의 편에 선 듯한 상황이 되면 핍박을 받는 제자들은 두려울 뿐 아니라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죄(罪), 의(義), 심판(審判)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곧 죄,의,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보혜사의 이러한 사역은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를 주는 사역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으로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성부와 성자께 속한 모든 영광의 비밀들을 알려주실 것이다(16:13-15).

13장에서부터 이어져 온 긴 강화의 결미 부분에 가까이 이르게 되자, 드디어 예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임박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승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해 주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모든 강화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에 있다고 그 목적을 밝히신 후 세상에 대해 승리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16:33).

물론 예수님의 이같은 심오한 강화를 제자들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 내일 새벽이 되면 예수님은 체포되실 것이고, 제자들은 평소의 충성의 장담(마 26:35)과는 달리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말 것 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미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치 않으셨으며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자신의 지상 사역의 종결(終結)이 곧 보혜사 성령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의 강림이라는 새로운 시작(始作)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결코 주님과 떨어져 있지 않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상황을 초월하여 세상이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주지도 못하는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을 바르게 깨닫고 상기하게 되며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보혜사가 오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떠나심이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진정 유익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16:7).

* 자료출처 / 옥스퍼드 주석. 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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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강화(講話) 1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 16장에서 다락방 강화에 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17장에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다락방강화는 요한복음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이 마지막 강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말씀이 교회를 세우는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락방 강화(講話)의 의의(意義)

고난주간 목요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갖는다.
유월절 만찬이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제자들에게 고별 강화를 하시는 시간이고 앞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제자훈련의 시간이라 하겠다.
제자들에게 유언의 의미를 갖는 강화를 하셨다.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의 개요를 보아두도록 한다.

다락방 강화 개요(요한복음 13장-16장) 고난주간 제5일 목요일 마지막 만찬에서

      주   제

       장   소

      마   태

       마   가

       누   가

       요   한

1. 서로 섬기라

마가 다락방




13:12-17

2.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마가 다락방




13:31-34

3.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곧 그리스도

마가 다락방




14:1-14

4.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야속

마가 다락방




14:15-31

5.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강화

마가 다락방




15:1-17

6. 세상의 증오에 대한 경고

마가 다락방




15:18-16:4

7. 성령에 관한 강화

마가 다락방




16:5-15

8.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도의 기쁨 강화

마가 다락방




16:16-33

고난주간 목요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갖는다.
유월절 만찬이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제자들에게 고별 강화를 하시는 시간이고 앞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제자훈련의 시간이라 하겠다.
제자들에게 유언의 의미를 갖는 강화를 하셨다.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은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설명하셨고 성령을 설명하심으로 신학적 진리를 제자들에게 강화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르치셨고, 제자의 길을 가르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하는 아주 쉽고 편리한 방법이라고 하겠다(마 11:29).

다락방 강화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신 것이다.
제자는 그 선생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다락방 강화는 신학적 진리를 강화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말씀을 주신 것이다.
아마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 내용은 제자들이 살아가야할 길이며 성도가 성화되어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강화 내용은 크게  여덟 가지로 볼 수 있다.
13장에서 마지막 만찬의 준비와 만찬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 13:1-11)과 “서로 섬기라”(요 13:12-17)
가롯 유다의 배반 예언과 그의 배반(요 13:18-30), 만찬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새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요 13:31-35)
그리고 만찬이 계속되는 동안 14장∼16장에서 6개의 강화를 더 하셨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화셨고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강화하셨다.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강화를 통해서 생명,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강화를 하셨다. 그리고 세상의 핍박과 그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신다.

16장에서 성령에 대한 강화와 그리스도의 승리로 우리들은 주님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강화하셨다.

다락방 강화(講話) 1. 서로 섬기라

성경 요 13:12-17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로 섬기는 길을 가르치신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도록 하라는 것이 주님의 강화 내용이다.
선생과 주가 되어서 제자의 발을 씻기신 것은 산 교육이셨다.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서로 섬긴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길이다.
이 만찬은 이제 십자가를 앞에 둔 선생님의 절박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강화하시는 자리이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메시아 관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만찬장에 이르러서도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높으냐의 논쟁이 있었고 섬긴다는 생각은 종이나 낮은 자들의 길이라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길은 섬기는 길이요 낮아져서 종이 되는 길이었다.
이것이 가장 높아지는 길이라고 하셨다.
제자의 길이며 성화된 사람의 삶이 아닐까!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하나님과 동등 되려하지 않으시고 인간으로 낮아져서 이 세상에 섬기는 분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품성을 온유와 겸손이라 하셨다.
섬기는 사람의 품성이 겸손이겠지,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 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 성화된 사람, 자기완성을 이루어 자신만만한 사람, 성품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겠지, 이런 사람은 섬기는 것이 몸에 젖어있어서 자연스럽게 섬기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성화된 삶을 살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복음을 전하라는 강화이시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은 사람의 진정한 행복이시다.
참 행복이 어디서 올까?
사랑으로 성화된 삶이다.
그 속에 섬김이 있고 나눔이 있고 내가 낮아지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2 /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35)

중요 메시지 : 율법의 완성으로 사랑의 길을 가르치신다.

가롯 유다가 제사장에게 간 뒤 예수님은 죽으심과 부활을 은유하시는 말씀을 하시고 다정하게 제자들을 부르신다.
영어 성경에는 my children(요 13:33)이라고 번역했는데 그 뜻이 부합하다.
그리고 사랑하라고 하셨다.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 것이다.
Christian이란 말이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란 바로 그 냄새가 나는 사람들, 그 맛이 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를 믿는 것은 사랑으로 표출(레 19:18)되며 이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갈 5:6).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사랑은 공허(空虛)하고 사랑으로 역사 할 수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고전 13:2).
그래서 성화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되며, 이는 믿음에서 나온 사랑을 말한다.
믿음은 우리 신앙생활의 기반(infra)이고 사랑은 그 기능(function)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을 강화하셨다.
예수님의 강화는 요 13:34에서 “서로 사랑하라” 이다.
이 명령은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명령이고 다락방 강화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이다.

사랑에 대한 강화를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 목적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강화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장(擴張)해서 강화하신다.
사랑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일체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제자의 품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제자훈련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다.
사랑은 다락방 강화의 중심 덕목이 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2

다락방강화 II는 요한복음 14장의 내용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만찬과 성만찬의 제정,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과 서로 섬기라는 강화, 성만찬을 세우신 후에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강화하셨다.
다락방강화는 제자를 훈련 하시는 내용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구원은 오로지 성자 예수그리스도로만 이룰 수 있고, 예수님이 떠나시면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지켜 주심을 강화하신다.
다락방 강화 II 에서는 뒤의 두 명제를 중심으로 다루게 된다.

다락방 강화(講話) 3.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14:1-14)

  3-1 :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요 14:1-11)

  3-2 : 능력과 영광이 같이하는 믿는 자(요 14:12-14)

다락방 강화(講話) 4.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요 14:15-31)

  4-1 : 보혜사 성령의 약속(요 14:15-19)

  4-2 : 사랑 안에서 하나 됨(요 14:20-24)

  4-3 : 보혜사 성령의 깨우치심(요 14:25-31)

다락방 강화(講話) 3.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 (14:1-14)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며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영광이 있음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이심을 증언하셨다.
이 항목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구원의 통로이심을 말씀하시고
다음 그렇게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삶 즉 능력이 있고 빛나고 거룩한 삶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하신 통로임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요 14:6).
주검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그 가는 길을 모르고 있고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그 자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식후에 제자들에게 강화하셨다.
요 14:11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일체이심을 다시 설명하신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보아도 알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락방 강화는 훗날을 위한 사랑의 강화라 할 것이다.

두 번째 단락(요 14:12-14)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을 주실 것이요 그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하여 빛날 것을 말씀하셔서 믿는 자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설명하신다.
훗날 제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생명의 복음을 전할 것이고 이에 의해 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니 그 영광이 어떠하겠는가?!

다락방 강화는 제자훈련을 하시는 것이다.
이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제자들에 의해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세계열방을 향한 구원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다락방 강화는 아마 그 선교사역의 일꾼들을 기르시는 강화일 것이다.

묵 상 : 1. 나는 생명의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가?

           2.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빛나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3-1 :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요 14:1-11)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안한 심리와 예수님 떠나신 후의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강화를 계속 하셨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가신다는 점을 밝힌다(요 14:1-4).
도마가 길을 묻는다(요 14:5-7).
빌립이 아버지를 보기를 원한다(요 14:8-11).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요 14:6).
히브리 문학에서 강조 용법은 3번을 반복한다.
그러나 다른 용어를 쓴다.
길, 진리, 생명은 같은 말이다.
생명의 진리이며, 생명의 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생명을 얻는다는 강화를 하신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였으나 주님은 자신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음과 우리가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있음을 설명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 예수님과 우리들이 일체 이심을 설명하시고 전체가 유기체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이는 다락방강화 5에서 다시 설명하신다.
예수님을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요 14:9).
빌립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었다.

제자들에게 신학적 진리를 강화하신 것이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며, 그의 나라가 임재하시는 길이며, 메시아 왕국을 이루시는 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분명히 하신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마 6:10)

제자들은 그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그래야 세상을 향하여 그 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모르는데 어떻게 타자를 인도할 수 있겠는가?
제자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분명히 알고 전해야 한다.

또 성부, 성자, 성령이 일체 이심을 강화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일체이시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과 일체가 된다는 강화는 제자훈련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강화하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3-2 : 능력과 영광이 같이하는 믿는 자(요 14:12-14)

주를 믿는 자들은 주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넉넉히 할 수 있다.
믿음의 기도는 모두 이루어 주실 것을 이르셨다.
특히 요 14:15에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다.
이로써 율법이 완성된다.
이를 보면 그의 삶이 빛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 알게 된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다.
그 삶에서 냄새가 나고, 빛을 발하게 된다. 주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러 성도(聖徒)라 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4.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요 14:15-31)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설명 하신다.

불안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para,klhton,, helper, counselor, the Holy Spirit)을 설명하신다.
이 강화는 세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하겠다.
요 14:15-19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요14:20-24에서 보혜사 성령이 사랑으로 임재하심을, 요 14:25-31에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가 깨달음을 얻게 됨을 설명하신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는 영(靈)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나 제자들은 알고 함께 거하게 된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시어 하늘로 올라가시지만 보혜사 성령은 항상 우리와 같이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로써 보혜사 성령의 존재를 설명하셨고 성도들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음을 강화하셨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체(一體)이시고, 예수님과 우리 성도가 하나이심을 설명하신다.
하나 됨은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여기 두 개의 세계(world)가 있다. 하나는 주님의 세계(cosmos)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모른 자들의 세계(chaos)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왕국은 전연 다르다는 것이다.
다락방 강화에서 세계(world)라는 단어가 40번 나온다.
주님은 두 개의 세계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것이다.

셋째로 보혜사 성령을 통한 깨달음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우리로 알게 하시는 이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진리는 듣고 알아야하고 알아서 깨달아야한다.
깨달음이 있어야 변화가 있게 된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제자가 될 수 있고 사랑 안에 거(居) 하게 된다.

묵 상 : 1.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되는가?

           2. 주님의 계명을 생각해 보자.

           3. 나에게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4-1 : 보혜사 성령의 약속(요 14:15-19)

제자들의 불안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씀 또 가롯 유다의 이탈 등 마지막 유월절 만찬은 어수선하고 제자들에게는 불안한 저녁이었을 것이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실 것을 이르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도 말씀하셨다.
이 보혜사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같이 하신다고 한다.
삼위이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설명이 된다.
우리의 삶, 경영, 생각이 모두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해 주신다.

다락방 강화(講話) 4-2 : 사랑 안에서 하나 됨(요 14:20-24)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
어떻게 일체가 될 수 있을까?
앞 단락(요 14:16-19)에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다.
요 14:15과 이 단락의 요 14:21을 연계해서 생각해야 한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사랑으로 임하시며 이로써 우리가 서로 그 안에 거하게 된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높은가를 논쟁하였다.
아직 그들에게는 세상(chaos)의 욕망이 넘쳐 났다.
서로 하나 되기에는 길이 먼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까지 기다려야 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완전한 변화(또는 총체적 갱신, 고후 5:17)가 이루어져야 그때 모두가 일체가 된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제자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도 받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유기체로서의 교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성도 그 모두가 유기체이다.
유기로서의 관계를 이루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중요한 요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유기체인 것 같다.

다락방 강화(講話) 4-3 : 보혜사 성령의 깨우치심(요 14:25-31)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우리를 지켜주시는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셔도 제자들을 지켜주실 성령이 임하시며 그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눈과 귀가 있어도 듣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으며 지금 제자들의 상태도 이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깨달음과 감격과 생동하는 힘이 생긴다.
이것이 참 지혜이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근심이나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보아도 들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보고 듣는 대로 알고 깨닫게 된다.
보고 듣는 것의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진리(원리)까지 알게 된다.
이 덕목 역시 제자훈련 중 아주 중요한 훈련이다. 제자는 진리를 알고 그 숨어있는 뜻을 깨달아야한다.

이 강화를 마치시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떠나자고 하신다(요 14:31).
그러나 다락방 강화는 요한복음 15장, 16장에 계속된다.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이동하셨다.

다락방 강화는 예수님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강화이다. 이 강화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주로 다루셨다고 보인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 세계 열방으로 전파될 것이기에 제자훈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락방 강화 III은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한다. 강화 5는 하나님, 예수님과 우리가 유기적 관계에 있음을 설명하신다. 강화 6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치 “사랑”은 형식주의자들의 가치와 충돌 한다. 그러나 제자들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다락방 강화 III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락방 강화(講話) 5.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강화] (요15:1-17)

[다락방 강화(講話) 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15:1-5)

[다락방 강화(講話) 5-2: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 (요15:6-8)

[다락방 강화(講話) 5-3: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9-15)

[다락방 강화(講話) 5-4: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요15:16, 17)

[다락방 강화(講話) 6. 세상의 증오에 대한 경고] (요15:18-16:4)

[다락방 강화(講話) 6-1: 새로운 규범과 믿는 자에게 닥칠 박해] (요15:18-27)

[다락방 강화(講話) 6-2: 진리를 핍박하는 것은 진리를 몰라서] (요16:1-4)

강화 5

다락방 강화(講話) 5.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강화] (요15:1-17)

중요 메시지: 예수님과 성도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심

  이 강화는 마지막 만찬 후에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강화이다. 요14:31에서 여기를 떠나자고 하셔서 이 때 다락방을 떠났다고 생각 할 수 있으나 떠나신 것이 아니고 강화는 계속되어 16장까지 강화하시고 17장에서 기도하시고 감람산으로 가셨다.

  강화 4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체이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체 이심을 강화하셨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때 일체가 됨을 밝히셨다. 요한복음 15장은 앞의 두 장 즉 13장과 14장에 근거하여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강화를 하신 것이다. 제자훈련에 대들보 같은 강화라 해야겠다.

  강화 5는 이스라엘의 가장 많은 과수이기도하고 메시아를 상징하기도 하는 포도나무 강화이시다. 이 강화로 예수님과 그 제자가 일체임을 다시 설명하신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의 관계를 유기체의 관계로 설명하신다. 또한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유기적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강화 5는 요15:1-5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그 제자들은 가지로 관계를 설정하신다.

  요15:6-8에서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의 실상을 설명하시고 요15:9-15에서 사랑 안에 거하라는 강화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강화하신다. 요15:16, 17에서 구원은 일방적 주님이 택하셨음을 설명하신다. 이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음으로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며 즉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묵 상: 1. 나무와 가지가 연결되어 있을 때 유기적 관계를 갖게

            된다. 나는 주님과 연결되어 유기적 관계

            즉 하나가되어 있는가?

         2. 유기적 관계는 영적으로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주님과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       3. 나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해서 구원하셨음을 받아드리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15:1-5)

  이 강화는 마지막 만찬 후에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강화이다. 하나님-예수님-우리 제자들이 일체 임을 요한복음 14장 20-24절에서 강화하셨다. 일체가 되는 주된 요인은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14장에서 강화하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포도나무를 예로 드시며 설명하신다. 이 단락에서는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신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은 유기적 관계에 있다. 떨어져 나가면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지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열매가 없으면 잘라버릴 것이다. 성도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랑의 열매이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I am the true vine)이시고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으며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주안에서만 생명의 역사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5-2: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 (요15:6-8)

[요의(要義)]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한 가지는 마르고 모아서 불에 사르게 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생명이 있다. 그때 아버지의 능력을 나타내게 된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힘이 있고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의 증거요 받을 만하신 향기로운 냄새가 될 것이다. 열매 맺음은 가지가 해야 할 일이며 그 열매가 있음으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음을 알게 되며 좋은 열매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임을 증명한다.

  가지에 감이 열려있으면 그 나무가 감나무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사랑 안에서 행하는 행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다락방 강화(講話) 5-3: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9-15)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라.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은 본질적 요소이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믿음 생활에서 믿음은 infra structure(essence)이고 사랑은 그 기능 function(behavior)이다. 사랑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될 수 없다(고전13:1-3).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언급 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친구를 위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사랑 없이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친구에게 몸을 내어 주는 행동이라도 사랑 없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또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사랑하시는 것임을 주시해야 한다.

  강화 2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 이다. (요13:34, 35) 주님은 강화 5에서 강화 2에서 하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포도나무와 가지”를 설명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새 계명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신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며 사랑은 곧 생명임을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제자들 사이에도 사랑으로 연결될 때 그들이 하나가 될 것이다. 유기적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니까!


[다락방 강화(講話) 5-4: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요15:16, 17)

  우리(사람)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주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택함을 받은 자만이 열매를 맺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행위는 그 심령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은 이미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심령의 변화가 있으면 완전한 변화(총체적 갱신, 고후5:17)가 이루어지며 행위는 자연 수반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미워함을 받게 될 것이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임의로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우리는 그의 가지가 되었다(롬8:35).

[다락방 강화(講話) 6-2: 진리를 핍박하는 것은 진리를 몰라서] (요16:1-4)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진리를 몰랐고 자기들의 율법에 비추어보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가치 충돌이다. 세상 사람들(유대교인)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진리의 종을 배교자라 생각할 것이요 따라서 출교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진리의 사람을 죽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는 외식하는 자라할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전한 복음을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고 형식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참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락방 강화는 예수님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강화이다. 이 강화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주로 다루셨다고 보인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 세계 열방으로 전파될 것이기에 제자훈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락방 강화 IV는 요한복음 16장을 중심으로 한다. 강화 7과 8로 구성되는데 강화 7은 보혜사 성령에 관한 강화이시고 강화 8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거기서 오는 영원한 기쁨, 믿고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나 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락방 강화 IV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다락방 강화(講話) 7. 보혜사 성령에 관한 강화] (요16:5-15)

   [다락방 강화(講話) 7-1: 보혜사 성령의 약속] (요16:5-7)

   [다락방 강화(講話) 7-2: 보혜사 성령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 (요16:8-11)

   [다락방 강화(講話) 7-3: 진리로 인도 받는 제자] (요16:12-15)

[다락방 강화(講話) 8.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도의 기쁨] (요16:16-33)

   [다락방 강화(講話) 8-1: 부활에서 오는 영원한 기쁨] (요16:16-22)

   [다락방 강화(講話) 8-2: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요16:23, 24)

   [다락방 강화(講話) 8-3: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음] (요16:25-28)

   [다락방 강화(講話) 8-4: 말씀을 믿게 된 제자들] (요16:29-32)

   [다락방 강화(講話) 8-5: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요16:33)

                               다락방 강화(講話) 7과 8

강화 7

[다락방 강화(講話) 7. 보혜사 성령에 관한 강화] (요16:5-15)

중요 메시지: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 대신으로 오심, 우리로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다락방 강화 4에서 먼저 말씀하셨다(요14:15-19). 다락방 강화 4에서는 보혜사 성령의 약속과 보혜사 성령으로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강화 5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유기체의 속성을 다시 설명하시면서 그 근거가 사랑임을 설명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다락방 강화 4와 5가 연계되어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다시 사랑방 강화 7과 연계됨을 알 수 있다. 다락방 강화 7에서 다루는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 대신으로 오시는 분(요16:5-7)이며 보혜사 성령의 역할(요16:8-11)과 그가 우리를 인도해 주심(요16:12-15)을 설명 하셨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으로 이로써 삼위일체 신앙이 정립된다. 그리고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실 것이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생명으로 인도 할 것이다.

묵 상: 1. 예수님 대신에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       2.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무엇을 깨닫게 하실까?

.        3.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인도해 주실 진리는 무엇일까?

[다락방 강화(講話) 7-1: 예수님이 가셔야 오시는 보혜사 성령] (요16:5-7)

[요의(要義)]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셔야 영원히 제자들과 같이 계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설명함으로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자들과 항상 같이 계심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이로써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7-2: 보혜사 성령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심] (요16:8-11)

[요의(要義)]

  보혜사 성령(the Helper; the Counselor)이 오시면 그가 죄, 의(義)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으로 깨닫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죄는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 이상의 죄는 없다. 의(義)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심령이다. 주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신다. 이로써 의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순전한 의를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우리의 공로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공로로 이루어진다. 심판은 세상의 왕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에 대한 것이다. 성령이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심으로 악의 세계와 의의 세계를 분명히 하실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7-3: 진리로 인도 받는 제자] (요16:12-15)

[요의(要義)]

보혜사 성령은 우리로 진리를 깨닫고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신다. 성령은 능력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을 알려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롬8:26, 34). 보혜사 성령은 우리들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 주신다.

강화 8

[다락방 강화(講話) 8.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도의 기쁨] (요16:16-33)

장소: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셨고 하나님께 돌아가시며 이는 제자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시기 위하신 것이다.

[종합 요의]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 8은 승리하신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제자들의 영원한 기쁨을 설명하시며 하나님께 구할 것은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요16:16-33의 내용은 1. 부활에서 오는 영원한 기쁨(요16:16-22) 2.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요16:23, 24) 3.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음(요16:25-28) 4. 말씀을 믿게 된 제자들(요16:29-32) 5.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요16:33) 으로 나눌 수 있으나 예수님의 돌아가심은 또 다른 전환 즉 영원히 성도들과 같이하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함께하신다는 메시지를 주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음을 알게 하신 일이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영원한 기쁨이 우리와 같이하심을 이르신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심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겠다.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오히려 성도들은 큰 기쁨 안에 살게 된다.

  이로써 하나님에게 구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하셨고, 이 메시지를 통해서 구원을 위시한 우리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될 것이고 아무 의심도 없는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강화에서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16:25-28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신다고 강화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진리를 믿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때 제자들은 어렴풋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뒤 그들은 선생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간다.

  이 강화 중 요16:29-32에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를 확인하시고 제자들이 다 도망 갈 것을 예언하시고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며 다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세상권세를 이기신 일이며 우리 성도들에게 참 평안을 주시고 이 평안은 구원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제자들의 기뻐하는 삶을 이루신다는 강화이다.

묵 상: 1.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가?

        2. 왜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3. 그리스도의 승리와 구원에서 오는 평안은 무슨 관련이 잇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8-1: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부활 설명] (요16:16-22)

[요의(要義)]

  공관복음에서는 주님의 돌아가심과 부활에 대해 3차 예언하셨고(1차: 마16:21-23; 2차: 마17:22, 23; 3차: 마20:17-19) 또 마지막 고난주간에도 예언하셨다(마26:1-5).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이 예언은 다소 모호하게 표현되어서 제자들이 질문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풀어서 설명하시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류에 기쁨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신다. 그 비유로 산모의 해산 고통과 어린아이의 탄생 기쁨을 들어 자기 죽음과 부활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다락방 강화(講話) 8-2: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요16:23, 24)

[요의(要義)]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제자들 앞에 서시어 부활을 확증하신다면 제자들에게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확실해 졌기 때문이다. 이 확신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주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고난도 다 감내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의 인도로 믿음에 거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승리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누구나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가 되셨다. 구원사역은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말씀이고 그 기쁨이 충만할 것을 이르셨다.

[다락방 강화(講話) 8-4: 말씀을 믿게 된 제자들] (요16:28-32)

[요의(要義)]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 예언을 수차에 걸쳐하셨지만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메시아관이 일치하지 못했었고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도 제자들에게는 모호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에서 어렴풋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 모양이다. 아마 확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도망갈 것을 미리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제자들에게 이르셨고, 제자들은 흩어져서 다시 오순절에 새로운 변화를 입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오늘의 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한다.


다락방에서 주님의 기도(요한복음 17:1-26)

다락방에서 주님의 기도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님의 자신을 위한 기도(17:1-5)
제자들을 위한 기도(17:6-19)
성도들을 위한 기도(17:20-26)


이 기도를 마치시고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과 가셨다.
다락방에서 주님 기도(祈禱)의 개요(槪要)

      주   제       장   소       마   태        마   가        누   가       요   한
1.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마가 다락방


17:1-5
2. 제자들을 위한 기도 마가 다락방


17:6-19
3. 장래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마가 다락방


17:20-26

주님의 기도 1. 예수님, 성부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요 17:1-5)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구한다.

요의(要義)

세 단계로 구성된 기도 중 첫째 기도이고 이 단락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요 17:1-5).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의 영광은 그 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아버지는 그 권세를 아들에게 주셔서 영화롭게 하셨다.
아들은 만민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아들과 아버지는 영화롭게 되신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은 만민을 구원하시는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심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고, 이로써 아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성도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의 은총을 입고 성화된 삶을 살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냄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蘇生)케 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이며 이 때문에 우리는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한다.

묵상(默想)

1.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2.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왜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을까?


주님의 기도 2. 예수님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 17:6-19)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예수님 떠나신 후의 제자들의 성공적 삶을 위한 기도

요의(要義)

공관복음에서 다룬 겟세마네 피의기도(마 26:36-46; 막 14:32-42; 눅 22:40-46)가 요한복음에서는 생략되어있다.
대신에 장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전계 된다.
중보기도 세 단계 중에서 둘째 단락의 내용은 제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간절히 구하는 기도이다(요 17:6-19).
제자들이 승리하는 거룩한 삶을 구하는 기도내용은 그들을 보전하시고, 하나 되기를, 아들의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하기를, 악에서 이기기를 구하시고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중보 기도하신다.

제자를 위한 주님의 기도 내용

첫째,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기를 위한 제자들의 영적 연합을 구하는 기도(요 17:11)

둘째,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에게서도 충만히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쁨이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요 17:13).

셋째,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한 기도 즉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요 17:15).

넷째,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요 17:17-18).
 

묵상(默想)

1. 제자의 길은 하나님과 일체, 기쁨 충만, 악을 이기는 것, 거룩한 삶이라 한다면 우리의 매일의 삶을 이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주님의 기도 3. 예수님 장래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요 17:20-26)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앞으로 믿을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영광을 알기를 위한 기도

요의(要義)  

중보기도의 세 단계는 제자들의 복음 전파로 자신을 믿게 될 성도들의 신령한 연합을 위한 기도입니다(요 17:20-26).
모든 주를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로서(요 17:20)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 것을 믿도록하고(요 17:21),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거룩한 성도가 서로 그 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요 17:22-26).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두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녹여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그 기도의 대상이 앞으로 예수를 믿을 모든 사람(요 17:20)
둘째, 성도들도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고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도록 하시는 기도(요 17:21)인데 이는 성도들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기도이다(요 17:22).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시기를 위한 기도이다(요 17:23),
넷째,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 같이 그 사랑이 성도 안에 있음을 알므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구하는 기도이다(요 17:24-26).

묵상(默想)  

1.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는가?

2.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