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知)과 깨닫는 것(覺)
알 지(知) : 화살 시(矢) + 입 구(口)
지혜 지(智) : 알 지(知) + 날 일(日)
알 지(知)와 지혜 지(智)의 의미
알 지(知)는 화살 시(矢)에 입 구(口)의 합자.
알고 있으면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자연스럽게 빨리 나간다는 뜻.
화살을 꿰뜷듯이 마음속의 움직임을 나타내어 확실히 결정하는 것이 알 지(知)이다.
지혜 지(智)는
밝음의 의미의( 낮) 날 일(日)과 알 지(知)의 합자.
사물의 도리 시비 선악을 분별 판단하고 처리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 지(智)라 한다.
순자에 따르면 아는 것(知)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앎의 능력
지혜(智)는 앎의 능력과 실제대상이 들어 맞았을 때 라고 정의를 하고 있다.
지혜 智가 知行合一이라....知性
학지어행지이지의(學至於行之而止矣) 순자(荀子)
학문은 그것을 실행하는 데 이르러야 최상에 달했다 할 것이다.
불문불약문지(不聞不若聞之) : 듣지 않음은 들음만 같지 못하고
문지불약견지(聞之不若見之) : 들음은 봄만 같지 못하고,
견지불약지지(見之不若知之) : 보는 것은 앎만 같지 못하며
지지불약행지(知之不若行之) : 앎은 실천함만 같지 못하다.
普智天人尊 哀愍群萌類 能開甘露門 廣度於一切(법화경)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는 것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이다.
깨닫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이란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다.
고백한 후에는 반드시 고백한 내용을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어부들은 그들의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알았지만 직접 따랐던 사람들은 제한적이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결단한 것은 왕이 부르지 않았을 때 왕 앞에 나가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깨닫고 결단하게 되었다.
γινώσκω
1097
[ginōsk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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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다, 알게 되다.
-
2.
[사물의 대격과 함께] 신비를~, 마13:11, 막4:11, 눅8:10. 주인의 뜻을~,
눅12:47,48. 평화를 가져오는 것을~, 눅19:42. 진리를~, 요8:32. 시간[때]을~, 행1:7. 죄를~, 롬7:7.
사랑을~, 고후2:4. [독립적으로] γνόντες, 막6:38, 고전13: 9,12. [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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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격의 목적어와 함께] 하나님을~, 요14:7, 17:3,25, 롬1:21, 갈4:9.
요일2:3,13, 3:1,6, 4:6이하, 5:20. 예수 그리스도를~, 요14:7, 17:3, 고후5:16, 요일2:3,4.
τινὰ ἔν τινι: ~으로 누구를 알다, 눅24:3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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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다, 이해하다, 인식하다.
-
2.
정확히 알다, 확실히 알다, 철저하게 알다, 눅1:4, 롬1:32, 고전13:12, 고후6:9, 골1:6.
-
3.
인식하다, 누군가를 다시 알다, 눅 24:16,31, 행12:14.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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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도하다, ~해보다, 힘쓰다, 행26:2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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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다, 친숙해지다, 행18:25, 약4:14, 유1:10, ἐπίστα- ται περὶ τούτων ὁ βασιλεύς: 그 왕이 이것에 대하여 알다, 행10:28, 20:18, 15:7, 19:25, 22:19, 26:26, ποῦ ἔρχεται, 히11:8, ὄντα σε κριτήν: 당신이 재판장이 된 것...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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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게 되다, 드러내다, 알리다, 눅2:15, 롬9:22,23, 엡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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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명의 길] 행2:2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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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우다, 익히다.
-
3.
[문자적, 교훈을 통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뜻풀이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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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각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통찰하다, 마16:9, 막8:17, 요12:40, 롬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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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각하다, 주의하다, 마24:15, 막13:14, 딤후2:7.
-
3.
상상하다, 엡3:20.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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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깨닫다, 감지하다, 관찰하다, 발견하다, 요4:19, 12:19, 행4:13, 28:6, 히7:4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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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경하다, 보다, 관찰하다, 인지하다, 마27:55, 막15:40, 눅14:29, 23:35, 요6:40, 계11:11,12, 바라보다, 마28:1, 주목하다, 막3:11, 5:38.
-
3.
[마음이나 영으로 깨닫는 것]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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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다, 친숙해지다, 행18:25, 약4:14, 유1:10, ἐπίστα- ται περὶ τούτων ὁ
βασιλεύς: 그 왕이 이것에 대하여 알다, 행10:28, 20:18, 15:7, 19:25, 22:19, 26:26,
πο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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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다, 이해하다, 통찰하다, 마13:51, 눅2:50, 롬3:11, 고후10: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완전하게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의식이 있다, 알게 되다, 생각하다, 은밀히 알다, 행12: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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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되다, 깨닫다, 접촉[접근, 인접, 이웃, 연속]하다, 행18: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2.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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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하다, ἀγνοέω, 눅9:4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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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간태] 파악하다, 깨닫다, 찾아내다, 행25:25, 엡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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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붙잡다, 얻다, 자기 것으로 삼다, 롬9:30, 고전9:24, 빌3:12, 움켜잡다, 이해하다,
정복하다, 요1:5, 빼앗다, 덮치다, 요1:5, 붙들다, 닥쳐오다, 요12: 35, 살전5:4, 잡다, 요8:3,4.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인식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행8:23, 히2:8.
-
2.
[타동사]
-
3.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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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해하다, 깨닫다.
-
2.
알아채다, 깨닫다, 감지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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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의하다, 요9:27, 5. 이해하다, 깨닫다[목적격과 함께 쓰임], 갈4:21, 고전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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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자적으로: 감각적 의미로 사용]
-
3.
[자동사] 듣다, 마13:16, 11:5, 13:14, 눅7:22, 행28:26, 계2:7,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2.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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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자적으로: 눈의 활동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잠언 2:5b)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then you will understand the fear of the LORD and find the knowledge of God.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언 2:9)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Then you will understand what is right and just and fair--every good path.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언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But the way of the wicked is like deep darkness; they do not know what makes them stumble.
잠언 5:6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She gives no thought to the way of life; her paths are crooked, but she knows it not.
성경적인 깨달음이란 모르던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말씀 한 마디가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주는 것
영혼이 자유를 누린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not of perishable seed, but of imperishable, 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
뜻풀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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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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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형
알다, 인지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감각기관을 통해] 창19:33, 사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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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형
[마음이나 정신을 통해] 삿13:21, 창15:8, 24:14, 출7:1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1.
원형
인지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단2:8,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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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형
알게 되다, 배우다, 단4:6, 6:11.
-
3.
원형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단5:22.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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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
느끼다, 더듬다, 만지다, 손대다, 깨닫다, 창27:21.
-
2.
원형
히필형 : 삿16:26, 시115: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1.
원형
느끼다, 대다, 만지다, 더듬다, 지각하다, 깨닫다, 창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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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형
피엘형 : 느끼다, 감지하다, 지각하다, 더듬다[암흑 속에], 모색하다, 타진하다, 창31:34, 37, 신28:29, 신28:29, 욥5: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생각하다, 깨닫다, 시32,42,44,45,52편 제목.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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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
경험하다, 깨닫다, 이해하다[정신적이거나 영적으로], 시34:9(8), 잠31:18.
-
2.
원형
맛을 보다, 경험하다, 시식하다.
-
3.
원형
맛을 보다, 시식하다, 욥12:1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1.
원형
깨닫다, 알다, 풀다,삿14:12,18, 전3:11, 7:27, 8:17.
-
2.
원형
오다, 이르다, 도달하다, 도착하다, 얻다, 획득하다, 받다, 창26:12, 삼하20:6, 욥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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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형
[주]얻다.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안다(知)와 깨닫다(覺).
둘 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적 활동에 관한 것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깨달음은 앎에 어떤 중요한 것이 부가된 것이다.
우리는 일상언어에서 "알았지만 할 수 없었다"라는 말은 종종 사용하지만, 좀체 "깨달았지만 하지 못했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깨달음의 의미에는 '행위(行爲, action)'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1
이 행위가 앎에서 촉발된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근거가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을 지식(知識, knowledge)과 지혜(智慧, wisdom)로 구별하고, 전자는 사실에 대한 '참됨[眞]'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착함[善]'과 '아름다움[美]'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지식은 과학연구처럼 진위가 분명하고 명석한 명제와 이론으로 대표되며, 지혜는 사람살이의 '사리분별(事理分別)에 밝음'을 뜻하는 것으로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지식과 지혜는 분명히 이성적 능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둘의 작용은 서로 다르다.
칸트(Kant)는 이성을 '순수이성(純粹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으로 분리하고, 이 둘의 인식적 출발점과 영역을 확연히 구분했다.2
이점에서 인간의 이지적 활동을 정관(靜觀, theoria)과 실천(實踐, praxis)으로 나누는 것도 무리 없다고 여겨진다.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 혹은 지식과 지혜를 구별하기는 해도, 우리가 이 둘의 의미와 관계를 명백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지혜의 본성은 물론 이거니와 지식이 성립하는 조건만 따져도 결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플라톤(Platon)은 지식이란 "참된 견해(true opinion)에 로고스(logos)가 더해져야만 된다"라고 말했다.3
치점(F.
Chisholm)은 이 언급을 분석하여 "지식이란 정당화된 참된 신념(Justified True Belief)"이라고 정의하고,
지식을 성립시키는 '적절한 증거(adequate evidence)'를 규명하는 것이 인식론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4
현대
인식론의 불길을 재점화시킨 그의 주장에 대해 게티어(E. Gettier)는 이른바 '게티어의 문제(Gettier's
Problem)'로 알려진 인식론의 난문을 제기하며, 지식의 성격과 확실성의 추구를 향한 새로운 반성을 촉구했다.5
20세기 초반,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중요한 탐구과정이 있었다.
형식과학(formal science)인 수학과 논리학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역사적인 과업은 프레게(Frege)6, 럿셀(Russell)7,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8, 괴델(Gödel)9 등을 거치는 동안 부분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전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논리주의(logicism), 즉 수학을 논리학에 포함시키고, 모든 지식 체계를 참된 명제들로부터 연역하려는 이들의 야심만만한 시도는 형식논리학의 연역체계의 구축에서조차 참담한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사실과학(factual science)의 지식, 예를 들어 다른 학문에 비해 비교적 확실하다고 알려진 물리학을 예로 들어보자.
근대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의 천문학 이론은 뉴턴(Newton)에 의해
결정적으로 부정되었고, 확고하다고 믿었던 뉴턴의 물리학 이론 또한 아인슈타인(Einstein)에 의해 보편성과 타당성이
거부되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아직은 절대불변의 진리로 확증되지 않았다.
별과
은하와 같은 거시세계의 영역뿐만 아니다.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의
'불확실성의 원리(priciple of uncertainty)'에 따르면 원자 이하의 물질에 대한 엄밀한 기술(記述)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지식을 뒷받침하는 표준논리(standard logic)는 '진/위 이분법(True and False Dichotomy, 眞/僞 二分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순율(矛盾律)에 입각하여 참과 거짓을 구별짓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사고의 원리로 받아들여진다.
과학적
진리라고 일컫는 다윈(C. Darwin)의 '자연선택의 원리'나 '엔트로피(entropy)'로 알려진 볼쯔만(L.
Boltzman)의 '열역학 제2법칙' 그리고 위에서 말한 '불확실성의 원리'도 모두 표준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하지만 괴델이 지적했듯이 표준논리에도 결함이 있고, 생성변화하는 현실의 세계에 적용하기에 범위가 너무 좁다는 것이 알려졌다. '변증법적 논리''10가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귀납추리는
물론이고 양상논리(modal logoc), 다치논리(many valued logoc), 퍼지논리(Fuzzy logoc), 카오스
논리(Chaos logoc)를 포함한 확장된 연역논리학이 발전했지만, 그 역시 엄밀하고 정확한 논리체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베이컨(Bacon)의 "지식은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11라는 말처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자연에 대한 질서정연한 통제와 효과 있는 성과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인식론의 관점에서 정작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인간은 지식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지식의 본성과 기초에 대해 또다시 미궁에 빠졌다. 그렇다면 이제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추구를 포기해야 하는가?
실용주의(實用主義) 철학자 듀이(Dewey)는 "절대적 진리와 지식은 없다. 지식이란 인간이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며, 여러 가설 중 '완결된 탐구(completed inquiry)'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12
또한 논리실증주의 철학자 포퍼(Popper)는 "유의미한 명제는 과학적 명제처럼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反證可能性)'이 있는 것이어야 하며,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진술 중 아직 반증되지 않은 것만을 지식으로 간주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13
과학사를 뒤돌아볼때 지금까지의 자연과학의 법칙과 이론은 거의 대부분 부정되었다. 그렇다면 지식을 위한 새로운 논리학이 필요한가. 과연 사고의 기본틀을 벗어난 새로운 지식 시스템의 성립이 가능한가.
지식이 이럴진대 지혜의 문제는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우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평가방식부터가 다르다.
지식의 여부는 통상 '참과 거짓(true and false)'으로 구분하고 지혜의 유무는 주로 '옳고 그름(right and wrong)'으로 판정한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일상언어에서 우리는 흔히 '착함', '좋음', '아름다움'과 같은 평가용어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것인지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솔직히 말한다면) 아직 잘 모른다.
예컨대 도덕원리의 기본 개념인 '선(善, the good)'을 고려해보자. 도대체 이 단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현대의 메타윤리학(meta-ethics)에서는 도덕적 진술의 분석('착함(善)의 의미, 선의 적용 범위 등...)을 통하여 소위 '깨달음' 혹은 '지혜'와 관련된 진술들이 진/위를 판정할 수 없는 '무의미(meaningless)'한 것이라고 말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윤리적 명제뿐만 아니라 미학적 명제를 포함한 가치론적 언급 모두가 서술적(descriptive) 기능이 없고 단지 정의적(情意的, emotive) 기능만이 있는 '사이비 명제(pseudo proposition)'라고 주장한다.14
이들에
따르면 깨달음에 관련된 모든 언급은 주관적인 한갖 '발언(utterance)'에 그칠 뿐 공통으로 옳고 그름을 논의할 수 있는
객관적 '판단(judgement)'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한갓 '헛소리(nonsense)'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과
달리, 사회과학의 탐구에 해석학적 방법(hermeneutic method)을 도입했던 신칸트주의자들은 "자연현상을 다루는 지식의
본성은 '원인-결과(cause-effect)'의 관계를 논증하는 '설명(explanation)'이고, 사람의 삶을 다루는 지혜의
본성은 '이유-귀결(reason-consequence)'의 관계를 규명하는 '이해(understanding)'이다"라고 말한다.15
생철학자 베르그송(Bergson) 역시 "인간 현상의 본질은 지속되는 '삶의 솟구침(élan vital)'이며, 논리분석의 방법이 아니라 '직관(intuition)'으로 파악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16
'깨달음', '지혜'와 같은 인간행위는 평가자의 주관적 경험이나 시간, 지역, 문화에 밀착된 인간학적 상대주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도덕철학을 객관적 학문으로 정립하려 했던 사람들은 '간주관성(間主觀性, intersubjectivity)'의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이 난점을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자의적(恣意的)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근거 없는 가설이나 모호한 개념이 남발되고, "힘이 곧 정의다"라든가 '경영철학', '상황윤리' 같이 그럴듯하기는 해도 알아듣기 힘든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윤리적 상대주의,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 intellectualist)들은 바로 이 때문에 행위의 발단을 절대적 지식에서 찾았고, "알지 못하고는 깨달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을 정초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 역시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에는 진/위가 아닌 다른 행위의 준칙이 있는가. 인간활동의 해명은 엄밀한 법칙보다는 두리뭉실한 개념인 '이치(理致)'를 추구함이 더 적합한가?
온전한 지식과 지혜를 얻기란 어렵다.
행위는 지식 이전의 행동일 수도 있고, 지식을 통한 결단일 수도 있다. 그 둘의 관계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미묘하다.
우리는 종종 지식의 획득은 '사유(思惟)'를 통해 얻어지지만 지혜를 소유하는 것은 '체득(體得)'이 라고 말한다. 속된 말로, 머리를 굴려서 얻는 것과, 몸으로 때워서 얻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몸으로 때운다는 것은 경험을 말하는데, 이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기야 인간은 누구나 죽기 전에 적어도 하나의 꼭 같은 지혜를 깨닫는다. 그것은 '인간은 죽는다'라는 명제(命題)로, 이것은 사실 최상의 확실한 지혜이기도 하다.17
그러나 나는 인생의 본질이나 종착점보다는 '지금 이 순간(hic et nunc)' 내 앞에 생생히 드러난 삶이 더 중요하다. 단순히 '카르페 디엠(Carpe Diem)'18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작금의 현실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올바른 행동준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인생의 행복과 같은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도덕률에 대한 존경과 같은 의무를 추구하는 것인가?19
종교와 신앙처럼 삶의 목적과 궁극적 지혜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논리적 사고를 부정한다.20 일부에서는 언어적 표현까지 거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과의 직접 만남', '명상을 통한 합일'과 같은 말이 나온다.
대승불교의 나갈쥬나(Nagarjuna, 龍樹)는 '중도(中道)',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바로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中庸, mesotês)으로서의 '식견(phronesis, 識見)'과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말한다. 그러나 토마스(St.Thomas Aquinas)가 주장하듯, 이성을 부정하는 이 언명을 모든 사람이 논의 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21
신비주의 종교가들은 "논리와 말을 떠나야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 그 역시 '논리와 말'에 불과하다. 인간 이성의 영역에서 논리와 말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성립할 수 없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듯 "선악과는 지혜의 나무 위에 열렸다"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으로 흔히 선불교에서 말하는 것으로 "견성오도(見性悟道)를 위해서는 '알음알이[分別智]', 즉 일상적 지식을 버려야 된다"라는 말도 새겨들을 만 하다.
하지만 나의 깨달음에 대해 타인을 확실하게 설득 못하고, 타인의 깨달음에 대해 무비판적인 동조나 배척이 있을 뿐이라면, 서로 삶의 가치를 논의한다는 것이 한낱 '허망한 바람(無明妄風)'22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지식 없는 행위는 맹목이고 행위 없는 지식은 공허하다.23
어떤 사람은 "알지 못하고 깨달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더욱이 남에게 전달할 수도 없다. 이것은 실천의 규준(規準)이 되지 못하며 깨달음으로 볼 수 없다.
앎은 깨달음의 과정이다. 지식은 지혜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조망하기에 부족하며, 자기충족적인 온전한 앎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 불완전한 앎을 완성시키는 것이다.24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일의 시초와 종국을 미리 알 수 없다.
깨달음은 이지(理智)만의 산물이 아니라 행위의 선택이다.
선택을 회피할 수는 없다. "선택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25
인생의 길은 선택의 연속이다. '무언가'가 우리로 하여금 망설임에서 선택으로 이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에 의해 결단해야만 한다.
나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어떤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고 믿는다.
사고는 사고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언어는 언어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자 '覺(깨달을 각)'에는 '見(볼 견)'이 들어있다.
원래 학문과 지식을 뜻하는 서양어 '사이언스(science, 라틴어 Scientia, 독일어 Wissenschaft)'의 어원이 'scio(본다)'라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감각의 눈이 아니라 예지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고와 언어 너머의 세계를 직접 조망하는 것이며, 나아가 깨달음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사고(思考)의 사고' 즉 '노에시스 노에세우스(noesis noeseus)'에 도달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삶과 세계의 전체에 대한 윤리적 명제들이 인간의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라 보았다.
어쩌면 '깨닫는 것'은 오직 보여질 수 있을 뿐 '말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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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위의
에세이는 내 블로그에 있는 다른 글들과 달리 상당히 산만하고 복잡하며 또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제목은 평범하게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이라 붙였지만 실제로는 철학의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 분야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산문은 베이컨(F. Bacon)이 그의 <에세이집(The Essays)>에서 채용한 서술 방식인, 중수필(重隨筆)의 전형을 따랐다.
이
글은 오래전 철학과 학부에서 가르쳤던 강의록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논문의 규격과 체계적 논변(argument)을 갖춘 정통
학술논문은 아니지만, 논술문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체가 딱딱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세부적인 내역은 더 깊은
탐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각주>로 처리하였다.
비록
두서없이 쓴 글이지만 제시된 내용은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될 중요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분야는
철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여기에는 형이상학, 논리철학, 언어철학, 심리철학, 과학철학, 메타윤리학 등이 개입하고 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는 것', 이 회귀적이고 순환적인 질문은 종국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를 되묻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의 '영원한 문제(perennial problem)'이다.
1. 통상 말하는 '앎'의 여러 계층 중에서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지식의 본성뿐만 아니라 실천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한다. "聞義不能徙(문의불능사)",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의로운지를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論語>, 述而 3).
2.
Immanuel Kant <Critik der reinen Vernunft(순수이성비판)>, <C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실천이성비판)>, (trans. by J. M. D. Meiklejohn,
Chicago: Encyclopaedia Britanica Inc., 1952).
3.
Platon <Theatetos> <Menon>.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일상사의 억측(臆測, doxa)과
구별되는 진정한 지식, 즉 진지(眞知, episteme)를 다루면서 지식이 'alethes doxa(true opinion) +
logos'로 정의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 로고스는 언어, 논리, 이법(理法)의 어원이며, 영어의 'explanation'
독일어의 'Erklärung'에 해당한다.
4.
Roderick M. Chisholm <Perceiving(지각)>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57). 이 책에서 치점은 지식의 필요조건, 충분조건을 모색하며, 지식을 '안다(know)'가
아닌 다른 개념으로 치환 또는 번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식에 대한 '맥락적 정의(contextual
definition)'로 알려진 이 시도를 통해 그는 "S가 h를 안다(S know h)"를 "(1) S believs h.",
"(2) h is true.", "(3) h is evident for S."로 정의한다. 하지만 그의 정의 중 (3)에서 뜻하는
'적절한 증거(edequate evidence)'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감각적 관찰인가, 확률인가, 과거와
미래애 대한 지식의 경우 그것의 진/위 여부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적절한 증거'라는 말 속에 이미 '알려진' 즉
'안다(know)'라는 개념이 이미 들어가 있기에 '순환성'이 있는 부적절한 정의가 아닌가, 등등.
5.
Edmund L.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in
<Analysis>, Vol. 23, pp. 121–23 (1963). 게티어는 3쪽 밖에 안되는 짧은 논문에서
"치점의 세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었더라도 지식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이른바 '게티어의
문제'인데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증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심적
과정(mental process)' '지향성(intentionality)'과 같은 심리철학의 과제 및 인식논리학(doxatic
logic)의 문제가 깊숙히 연관되어 있다.
6.
Gottlob Frege, "Grundgesetze der Arithmetik(산술의 기초법칙)" in
<Philosophical Writinings of Gottlob Frege> trans by Peter Geach
and Max Black. (Oxford: Bsil Blackwell, 1970).
G.
Frege, "Begriffsschrift(개념표기)" in op. cit. 프레게는 이 논문의 부제인 '수학적 언어를 본뜬
순수사고의 형식화된 언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언어로 의미, 추리, 판단, 논변 등을 다루는 것이 불명확하다고 보고 지금의
기호논리학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개념기호를 창안하고 이를 통해 그의 논리철학 이론을 전개하였다. 프레게의 이
논문은 현대 인식논리학의 획을 긋는 중요한 업적이다.
나는 서강대 대학원 이한조 교수의 <논리철학>을 수강할 때 이 논문을 강독한 적이 있는데, 처음 접한 난해한 기호들의 뜻을 파악하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7.
Alfred N. Whitehead,and Bertrand Russel, < Principia Mathematica
(수학원리)>, (Cambridge Mathematical Libra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2).
화이트헤드와
공저인 전3권, 2천여 페이지로 이루어진 방대한 과업이다. 1903년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수리논리학의 확고한 정초를 세우려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여기서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논리학은 實在에 관한 학문'이라는 신념아래 확실성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
책도 유클리데스(Eukleides)의 <Stoikeion(기하학 원론)>처럼 몇가지 공리로부터 모든 정리들를 도출하는
연역논리학의 규범을 따르고 있으며, 저자들은 ‘~’(아니, 부정)과 ‘∨’(또는) 이라는 (정의되지 않은) 오직 2개의
논리기호를 가지고 명제논리학(sentential calculus)의 기초를 정립하려 했다. 초판 발표까지 10년이 넘게 걸린 이
과업에서 레셀은 공리 중 하나가 다른 공리로부터 연역될 수 있음이 밝혀지자 그것을 나머지 공리에 통합하는 등 여러번 수정을
거쳤다. 엄밀한 형식체계는 몇가지 공리(axiom) 혹은 공준(postulate)으로부터 도출된 정리(thorem)가 완전성,
무모순성, 일관성을 충족해야 하는데, 괴델(Gödel)에 의하여, "어떠한 형식체계도 원리적으로 불완전 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러셀은
이 말고도 '확정기술이론(Theory of Definite Description)' '유형이론(Theory of Type)'을
통해 오랫동안 서구 철학의 암초로 여겼왔던 '존재론적 퍼즐(ontological puzzle)'을 비롯하여 '인식론적 난제'
'논리적 난제'의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시도는 이후 오랫동안 영미 분석철학계의 화두가 되었고 탐구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지칭(reference)' '고유명사(proper name)' '분석성(analiticity)' 등에 대한 논변은 아래의 글들을 참조하면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Burtrand Russell, <On Denoting, 1905>.
P. F. Strawson, <On Referring, 1950>.
W. V. O. Quine, <Word and Object, 1964>.
Keith Donnellan, <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 1966>.
Soal Krepke, <Naming and Necessity, 1980>.
8.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 논리철학논고)>,
trans. by D. F. Pears & B. F. Mcguinness. (London: Routledge &
Paul, 1961).
통상,
<논고(論考)>로 불리는 이 얇은 책은 라틴어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독일어 제목은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이며, 일반의 책들과는 달리, (1.1) (3.02)
(7) 등 번호에 짤막한 문장이 뒤따르고 있다. 간결한 문장에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이
편집본은 그의 스승이었던 러셀(Russell)의 긴 영어 서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원문 표현의 충실하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
독일어와 영어의 대조본으로 구성되었다. 한 문장을 예로 들면, 독일어 "(1.1) Die Welt ist die
Gesamtheit der Tatsachen, niche der Dinge." 곁에 영어로는 "The World is the
totality of facts, not of things."로 번역되어 있다. "세계는 사물(事物)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事實)들의 총체이다."라는 뜻인데, 소위 'Fact Ontology(사실존재론)'을 언명하는 이 간결한 문장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함으로써 서구 철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나는 대학원 학생시절과 강의를 통해 여러번 이 책을 포함하여 이에
관련된 논문들을 읽었는데,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논쟁점 역시 수두룩하다.
9.
Kurt Gödel. <On Formally Undesidable Propositions of the Principia
Mathematica and Related Systems>, (trans by M. Meltzer., Edinburgh
and London: Oliver and Boyd, 1962).
10.
'변증법(Dialectics)'을 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방법으로 채택. 변증법은 대립의 구체적 구조와 통일에 관한 논리로서,
모순율을 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와는 다르다. 현실을 力動的인 상태로 파악하고, 운동을 살아있는 현실전체와 관련지움. 모순, 대립,
운동으로서의 발전, 전체적인 포괄성을 불가분의 요소로서 철학적 논변의 구조에 도입한다. 定立(thesis)이
反定立(antithesis)을 일으키고, 그것이 綜合(synthesis)으로 止揚(aufheben)한다.
11.
이 명구(名句)는 근대 경험주의의 선구자 베이컨(Francis Bacon : 1561-1626)이 그의 주저 <신논리학,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에서 쓴 말이다. 여기서 라틴어 ‘시엔티아(scientia)’는 영어권의
‘사이언스(science)’ 즉 ‘과학’의 어원이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인 지식전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지식’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Wissenschaft’도 ‘scientia’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힘(potentia)’이란 개인의 역량이나
삶에 미치는 영향 이상을 의미하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지식추구의 궁극적 목적과 효용을 뜻하고 있다. 위의 구절은 근대 이후에
전개된 지식의 중요한 한 조류와 그것을 통해 자연과 대면하는 인간의 자연관을 총체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12.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자, 퍼어스(Peirce), 제임스(James), 듀이(Dewey)의 입장으로, 지식의 본성에
대한 이들의 연구업적이 미국철학을 철학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옮겨놓았다.이들의 견해는 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이며 일종의
회의주의이다. 이들의 대표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Chales S. Peirce, "진리성이란 유용성(usefulness)과 동일하다.", "어떤 진술의 진/위 여부는 그 진술의 실제적 효과에 의해서 결정된다."
William James, "진술 또는 신념의 진리성은 시험이나 행동을 해보아 만족스러운 결과를 산출했을 경우 결정된다."
J.
Dewey의 실용주의를 특히 '도구주의(Instrumentalism)'라 한다. "진리는 단지 '보장된
주장가능성(warranted assertability)'이고, 문제상황과 검증과정에 의해서 결정된다.", "지식이란 인간이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하는 '도구(instrument)'이자 '완결된 탐구(completed inquiry)'이다."
John Dewey, <A Common Faith>, (Yale Univ. Press, 1967).
13.
'반증가능성'을 문제삼는 것은 일종의 부정의 증명방식이다. 논리실증주의자은 처음에는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을
통해 진술(statements)의 진리성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감각경험에 근거한 '의제적인 명제(protocol
proposition)'조차 진리성을 확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콰인(Quine)은 '명제들의 전통적인
분류방식인 분석/종합 이분법'과 '종합판단의 경험적 요소로의 환원가능성'에 대해 비판한다.
Karl
Popper. <Conjectures and Refutations(추측과 반박):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1963>. <Objective Knowledge(객관적 지식): An
Evolutionary Approach, 1972, Rev. ed., 1979>.
W. V. O.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경험주의의 두 도그마), 1948>.
14.
A. j. Ayer. <Language, Truth and Logic, 2nd edition, 1946>. 에이어에
의하면, 도덕철학이란 도덕적 진술의 분석을 통하여 "도덕적 판단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 지를 밝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진술이 유의미(meaningful)하려면, 그것이 분석적 진술이거나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종합명제이어야 하고, 서술적 기능이
있어야만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 그런데 규범윤리학의 도덕적 진술은 서술적(descriptive) 기능이 없고 단지
정의적(emotive) 기능 뿐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학문으로 성립할 수 없다.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m)의 이런 윤리적 회의주의를 메타(meta)윤리학의 '정의주의(情意主意, emotivism in meta
ethics)'라고 부른다.
15.
신(新)칸트주의자(Neo-Kantian)들의 해석학(hermeneutics(解釋學)은 문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물음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과학들, 특히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에 있어서는 理解의 技術, 즉
해석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Dilthey,
Croce, Schleiermacher에 의하여 철학적 방법론으로 등장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연은
설명하고(erklären), 정신생활은 이해(verstehen)한다.", "정신과학의 대상은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와 구조에
있어서 전체이기 때문에, 삶의 전체적인 ‘체험’과 풍부한 언어의 ‘표현’에 주목함으로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해란 곧
삶의 표현의 내적인 把握(ein inneres Erfassen)이다.", "문헌의 진정한 이해는 우리가 그 텍스트가 만들어졌던
시대적 환경과 배경에서 '되삶(re-live)' '재연(re-enact)'을 통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