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민주주의가 무너지는가?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
윤석열 검찰 총장이 하는 말이 이슈가 되고 있다.
전체주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허울만 민주주의 독재라는 윤석열의 말이다.
이 말은 야당인 주호영국회의원도 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들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말의 근원을 따라가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가 미국의 대통령인 트럼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책으로 적어 놓은 이 책에서 비롯된다.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학자. 정당,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라틴아메리카의 정권 교체 등에 중점을 두고 연구해왔다.
현재 〈뉴욕 타임스〉, 〈더 애틀랜틱〉 등 각종 매체에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진단하는 글을 기고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 직후 저자는 민주주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은 하버드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뉴욕타임즈에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라는 제목으로 민주주의 의기를 경고하는 칼럼을 기고한다.
이글에서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에 어떤 위기가 닥쳤는지를 명료한 논리로 설명해줌으로써 정치적 이슈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대폭 좁혀놓았다. 트럼프가 어떤 거짓말을 했고, 공화당 사람들이 그 말을 얼마나 쉽게 믿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민주당은 공화당의 비신사적인 태도에 어떻게 신사적으로 대응하는지 설명한다.
이글이 100만회 이상의 인기를 얻으면서 출판사의 요청으로 책을 내게 되는데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미국 사회가 완전히 민주화된 것은 1965년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민주화 과정이 미국 유권자 집단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재편했고, 이러한 변화는 다시 정당정치의 양극화로 이어졌다.
민주당과 공화당, 진보와 보수, 양당정치가 시작이 되었다.
양당의 재건 시대 이후로 가장 골이 깊어진 양극화 현상즉 극우와 극좌는 오늘날 민주주의 규범 파괴라고 하는 전염병을 창궐시키게 된다. 이 양당정치가 미국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를 비교한 끝에 민주주의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무너졌음을 발견하고, 몇 가지 신호를 패턴화 한 것을 발견한다.
첫 번째의 패턴은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하는 정당이 대중의 인기를 토대로 하는 후보를 냄으로서 대통령의 후보와 국회의원의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하는 각 정당이 그 역할을 내던짐에서 출발을 한다.
우리나라도 대중의 인기를 토대로 호보를 정하는 정당들이 정당의 역할이 무너지기 시작을 하였다.
두 번째는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세 번째는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
네 번째는 민주주의라는 경기를 하는 감독을 매수하여 무너뜨리는 것
다섯 번째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일하는 선수를 매수하여 무너뜨리는 것
여섯 번째는 민주주의의 규칙인 헌법과 법을 개정하는 것
이러한 것이 무너지게 되면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민주주의를 무저지게 한 대통령이든 국회원이든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조건에서 선출되는지, 선출된 독재자들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 각자의 위에서 말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어떻게 민주의의가 무너졌는지 어떤 패턴화하면서 무너졌는지 패턴의 사례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헌법 같은 제도가 아니라 상호관용이나 제도적 자제와 같은 규범이다.
제도적 규범을 무너뜨리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제도적 규범들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도 함께 허물어 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도와 규범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제도와 규범으로 민주주의를 운영하면 삐그덕 거리고 민주주의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느슨한 규법을 통해서 보다 완전해지고 제대로 돌아간다.
민주주의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협상과 양보, 타협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이다.
대통령이 발의한 법안은 의회 승인을 얻지 못하거나, 사법부의 반대로 무산될 수 있다.
모든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제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비판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아웃사이더들에게, 특히 선동 성향이 강한 독재자들에게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속성은 견디기 힘든 속박이다.
견제와 균형은 그들에게 멍에와 같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이러한 형상과 타협과 양보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민주주의 규범인 위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의 패턴을 무너뜨리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임함 의미란?
주기도문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새롭게 불러 아진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이는 이 공동체의 소망과 뜻을 모아 표현하는 기도이다.
새로운 정신을 위한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새로운 기도가 요청되어졌고 이러한 필요가 주기도문에 집약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기도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란? 그의 제자들에게 보다 더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알리고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 됨과 제자 됨의 도리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떻게 오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헌신인 의존과 순종으로 그리고 이웃에 시랑으로 나태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헌신인 의존과 순종을 통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해지면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성취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샬롬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도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전히성취되지는 않았다.46)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전하게 이르지 않은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는 이미 그 나라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 곧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아직은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어있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사단의 유혹과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라는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다. 여기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며” 라는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 우리는 사단의 유혹을 거절하며 주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함축하며 한편으로 서약한다.
하나님의 나가가 임하옵시며 청원과 함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의 서약이라는 기도형식을 통해 하나님 나라오심을 의지적 삶의 현장에다 연결시켰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오심의 중심된 청원은 부수적 청원과 함께 짝을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임하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삶을 위해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풍요적 관계를 회복하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제자됨의 대가를 요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에 대해 순종으로 응답하고 이로 말미암아 당하는 모든 고난을 끝까지 인내함으로 더욱더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기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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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
저자 / 마이클 하이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존재들을 인식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이것을 다룬다.
또한 이책은 “고대적 사유로 성경 전체를 일관성 있게 읽어내는 접근방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바를 탐구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이하고 경이로운 세계관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일반 가정에서 벗어나 성경본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도록 돕고자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알수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본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한 낯에는 별이 보이지 않지만 별이 존재한다. 다만 우리의 시력의 한계 때문에 별의 존재하니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대한 이해에 대하여서도 아직 우리가 불 수 없는 세계가 엄현히 존재한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관을 넘어 구약의 세계관으로 입문하게 하여 준다.
이 책을 대충요약
인간형상 담지자로 아담과 이브를 정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명백하다. 에덴 동산을 잘 관리하고 이 땅에 에덴 동산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실패를 한다. 그리고 범죄까지 한다. 그리고 다시 이 사명을 노아에게 맡기신다. 하지만 노아도 실패를 한다. 바벨론 사건이 이것을 말하여 준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하등한 엘로힘에게 이 사명을 맡기신다. 엘로힘은 복수로 신들을 의미한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천상회의의 일원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엘로힘은 뷔페하였다. 그리고 여호와를 대적하는 신적 존제가 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신적인 존재들이 네피림을 탄생시켰고 거인 족속들이 나왔다.
( 창세기에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함께 창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여기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고 시편 82장에는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라는 표현을 한다. 기존의 해석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이 해석을 해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해석에는 이단적인 것임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엘로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 기자들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이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연관을 시키는데, 특히 시편 82편에서 엘로힘을 하나님의 아들과 연관한 내뇽이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과 연관을 시키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고대의 셈족 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위직 또한 상위의 통치권을 가진 시적인 존재를 말한 단어이다. 42-43P 하나님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이 세상 만유를 향한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와 함께 천상회의도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엘로힘은. 다른 모든 엘로힘보다 우월하신 여호와를 칭송하는 구절(시97:9)이 실은 여호와가 실재하지 않는 존재들보다 위대하시다는 뜻이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엘로힘이 단순히 하나님만 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천사와 같은 신적인 존재들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존재들을 때로는 엘로힘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했다. p63)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의 뜻을 펼치신다.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시고 다니엘을 통하여 천상 회의에 대한 목격을 하게 하신다. 이사야를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도 전하다. 그러나 실패를 한다. 이제 예수님을 보내신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왕국의 회복의 회복을 위한 선전포고이다. 하든한 엘로힘 대신할 하나님의 나라를 선설하기 위해 인간을 천상의 회의에 초대하신다.
(천상 회의는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여러 엘로힘들에게 공표하는 곳으로서 존재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동산을 천상 회의가 있는 장소로서 해석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 신적 존재, 그리고 인간이 함께 천상 회의에 참석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면서 저자는 성경 한 권을 풀어나아 간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통치를 확산시키는 자로 선택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 가족에 합류하는 것이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새로운 천상회의에 대하여 예선을 포함시켰다.
이렇게 신령한 공회, 하나님의 아들들, 순찰자, 네피림, 거인 등 오늘날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거나 적용하는 성경의 개념들을 조명하고 새롭게 통찰한다. (오직 고대와 근대 이전 세계관을 지닌 저자들의 렌즈를 통해 이해한) 본문에서 가져온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신학이, ‘모든’ 성경 교리 이해에 매우 의미 있는 방식으로 도움이 됨을 보게 될 것이다.
-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왜 놀라지 않았을까 - 네피림의 후손들은 어떻게 홍수에 살아남았을까 - 야곱은 왜 야훼와 그의 천사들을 그의 기도에 함께 융합시켰을까 -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성한 존재들의 모임은 누구일까 - 그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참여할까 - 왜 베드로와 유다는 영혼에 대한 믿음을 장려했을까 - 왜 바울은 악령을 지리적 지배의 관점에서 묘사했을까 - 천사도 감히 나무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자’는 누구일까?
주요 성경구절은
시 82: 1
창 6:1-4절
계 4:1-8절이다.
상세하게 요약
이 책은 8파트로 나누워 기록을 한다.
1파트 가장 중요한 것들
1.생전 처음 읽어 보는 것처럼
시편 82편 “하나님(엘로힘)은 싱들의 모임 가우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엘로힘)가운데서 재판하시느리라.
우리가 알기는 엘로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엘로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인식하여 왔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로힘 우상들을 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인 엘로힘이 우상들 중 하나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상들과 엘로힘이 함께 서 있었다는 것일까?
여기서는 신들즉 엘로힘이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는 일에 부패했다고 고발하는 내용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패하였다고 성토하실리는 만무하다.
어떤 학자는 엘로힘을 장로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장조들은 이방 나라 통치를 맡기 섰다는 기록이 없다.
2. 기본수칙
여과장치는 자동차 성능을 저해시키는 미새먼지를 골라내는 장치이다. 믿음을 저해하는 것을 골라내는 것이 여과장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전통이다. 우리가 성경을 정리학 위해 고안한 체계다 전통이다. 전통은 여과장치이다. 그러나 여과장치가 과장이 난다면 버려야 한다. 여과장치를 버리자 머릿속에서 성경과 교리를 정리하는 체계가 사라져 버렀다.
성경은 신학과 문학적 모자이크이다. 시편 82편도 신학과 문학적 모자이크의 조각들이다.
2파트 하나님의 권속
단원요약
하나님에게는 신적인 가족이 있다. 이는 엘로힘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천상의 모임과 천상의 회의 이다. 엘로힘은 삼위일체의 대체단어가 아니며 여호와는 엘로힘 가운데 계시지만 엘로힘보다 탁월하시다. 하나님은 엘로힘의 창조자이며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육체를 지니신 여호와이시기에 엘로힘과 구분이 된다. 엘로힘보다 우월하시다. 엘로힘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에게는 인간 가족과 행정부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천상회의 일원들과 마찬가지로 맡은바 소임을 수행함으로ㅅ써 하나님을 대표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드러내는 대표자이다. 이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을 사용하시기로 선택하였다.
하늘과 땅은 구분된 영역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에딘과 함께 하나님은 이땅에 임하셨고 이땅은 그분께 순응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충성스런 엘로힘들과 나란히 일하며 지근 거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이 두 불안전한 재들은 마음과 에 쥐어진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주시는 권한을 버리고 자신만의 권한을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의 수행단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 전에는 뭐가 있었나요? 하나님에게는 일행이 있었다.
하나님의 가족이다.
하나님의 가족
창세전에 하늘에 속한 무리, 즉 천국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욥기 38: 4-7절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지르며 거기에 있었다. 천사장 천사 같은 용어를 통해서도 드러나듯 보이지 않는 세계에는 위계 질서가 존재한다.
욥기 38장 하나님의 아들들을 새벽 별들로 칭한다. 고대인들은 신적 존재가 인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인간의 저주가 불능한 원거리에 산다고 믿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 곳을 하늘 곧 천상이었다.
새벽별은 해가 뜨기 직전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별이다. 새벽별은 새로운 생명 즉 새 날의 시작을 알린다. 새벽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시작, 세상의 창조를 목격하였다는 점에서 이 새벽별이라는 우리에게 적절한 개념을 전달한다.
아들들이라는 이름- 하나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가족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아닌 일단의 신적이 존재들을 창조하셨고 이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기에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권속
고대 이집트의 통치자를 바로라고 불렸다. 이 직함을 페르 아 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위대한 집이라는뜻이다. 권속이라는 개념은 왕조적 관료재를 가리킨다. 바로는 자기의 가족의 구성원을 주요 통치자 자리에 임명했다. 왕의 통치 구조인 관료 시스템은 주로 바로의 권속에 속한다. 엘리트 신하들로 충원되었다. 왕의 친인척인 엘리트 통치자들과 그 밑에서 그들을 섬기는 하금 관료들로 구성된 다층적인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이들은 각기 자른 권한과 서열을 가지고 있다. 천상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통치의 구조가 존재한다. 시편 82편은 이러한 통치기구를 신들의 모임으로 언급하였다.
“하나님 (엘로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엘로힘)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복수형으로 쓰였다.
그러나 의미는 복수 일수도 있고 단수 일수도 있다. 첫번째 엘로힘의 의미는 단수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두 번째의 엘로힘은 6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밝힌다.
4.유일하신 하나님
신적인 존재들은 인간이 아니다.
82편은 엘로힘으로 불리는 하나님이 다른 엘로힘들의 부패성을 심판하시는 내용이다. (2-4절)
부패한 엘로힘은 종국에 사람처럼 사형에 처해진다.(7절)
6절에서 지존자의 아들들이 인간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인간설은 삼위일체설 만큼이나 잘못이다. 성경에 어느 누구도 유대인 지도자들도 다른 열국을 다스릴 권한은 부여 받지 못하였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거주지를 가리킨다. 우리의 집은 우리가 육신으로 거하는 이 세상이다. 하나님의 천상의 회의는 지상이 아니라 하늘의 모임이다.
욥기 1:6,2:1절에서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시편 29:1-2절 너희 하나님의 아들들아
복수형 엘로힘은 다신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엘로힘으로부터 경배를 받은 유일한 엘로힘이시다 (시 29:1) 여호와가 엘로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엘로힘까지 여호와라고 이해한 것은 아니다. 여호와는 영적 세계의 모든 거민과 비교할 때 전적으로 다른 고유성을 지닌 존재로 구분이된다. 엘로힘이라는단어는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특정한 일련의 속성들과는 무관하다.
신명기 32:1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음란하게 숭배하던 엘로힘이 명백하게 귀신들이라고 말한다. 귀신이 쉐두이다. 선한영도 악한 영도 모두 쉐두라고 불렀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부정어법이다. 이 부정어법은 다른 엘로힘의 실재를 긍정하는 장에서 발견을 하게 된다. 다만 여호와를 견줄만한 다른 엘로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 47:8, 스바냐 2:15
다른 아들이 있다면 예수님이 독생자가 될수 있을까?
독생자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를 번역하는 것이다. 모노스[ 유일한] 겐나오[출생하다.] 이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예수님은 사실상 여호와와 동일시 되며 하나님을 섬기는 엘로힘들과는 다른 고유한 존재이므로 모노게네스는 구약의 언어와 모순되지 않는다.
모노게노스는 이삭이 언약에 따른 약속의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의 아들들 중에 유일 무이한 고유성을 지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5.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두 가지의 영역에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창세기부터 나타나는 내용이다.
창 1:26-28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내용은 하나님이 천상회의에 속한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형상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는 뜻인가?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란? 지성 추론능력 감정 하나님과 교감하는 능력 자의식 언어 소통능력 자유의지등 능력이나 속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만일 지적인 능력을 가춘 외계생명체가 발견된다면 이러한 담지자라는 형상의 정의는 허물어 진다.
형상을 혼의 개념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모순이다. 창세기 2:7절 사람이 생령이 된다는 것이다. 생령은 네페쉬이다. 그러나 창세기 1:20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케하라에서 번성케하다는 단어가 네페쉬이다. 창 1:30절에서 살아 있는 네페쉬가 동물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혼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네페쉬 라는 용어는 의식있는 생명체를 식물들과 대조적인 활동성을 지니는 생명체를 말한다.
영의 개념과 혼의 개념을 사무엘 상 1:15절과 욥기 7:11네페쉬(혼)와 루아흐(영) 모두 같은의미로 사용한다. 모수 사고 이성 감정 의사결정을 하는 내면의 활동으로 사용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영과 혼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뜻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창조되었다는 뜻으로 해삭을 하는 것이 좋다. 형상은 우리가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 가지의 가족 권속 회의
하나님은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행할 대표자 역할을 맡기기 위해 홀로 인간을 창조하였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엘로힘이라는 존재도 창조하였다. 이들도 하나님을 담은 자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대표자 역할을 맡으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
이두가지의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형상 담지가로 하나님의 신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들과 엘로힘은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고 통치하기를 바라신다.
이 두 가족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대표자로 지음을 받았다.
인간의 타락후에 이 계획이 변경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성령을 통해 인간 속에 장막을 치기로 경정하셨다.
6. 동산과 산
에덴동산 창 2:8절에서 에덴을 인간의 최초의 본향으로 불렀던 장소라고 생각을 한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지상의 집이자 하나님의 임재하고 인간과 함께 거주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거주지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땅을 통치 하기위하여 왕이 사는 곳은 어전회의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한 곳입니다.
에덴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모세가 살았던 고대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천상에 천상회의의 통치를 받는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인간세상을 다스리기위한 천상회의 장소가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산이다. 에덴동산이라는 이미지가 산으로 표현을 하였다. 산들은 너무 멀고 높아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곳이다. 신들이 성가신 인간들을 피해 머물기에 완벽한 장소라고 생각을 하였다. 산은 인간이 죽어서 신의 영역인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도 하였다.
고대의 왕족들을 생각할 때 신의 선택을 받아 높은 신분으로 승귀된 자들이 있었다.
우가르트의 언어의 발굴로 엘 –최고의 신이다. 엘의 아들들- 천상의 회의를 주관하는 자들이다. 엘의 공동의 통치자 바알이 있었다.
천상은 삼층의 구조로 되어 있다. 최고의 권세자- 앨 , 엘의 아들들 그리고 그 밑에는 신들 메신져가 있었다.
엘의 회의는 울창한 산 동산에서 열렸다. 엘의 장막 신전에서 열였다.
여호와의 거쳐
여호와가 계시는 곳에는 업무수행 태세를 갖춘 천상회의가 여호와를 둘러 서있다.(사 6장 , 왕상 22:13-28) 구약의 회의 기구역시 구가리티처럼 삼층구조로 되어 있으며 여호와는 그 정점에 계신다. 그아래는 하나님의 가족 권속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다, 그아래 맴 아래층은 엘로힘의 멧신져 천사 (말라킴)이 자리하고 있다.
성막은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시는 장소에 해당한다.
예루살렘성 시온산 등 은 에덴적인 언어로 표현된 적이 있다. 시내산이든지 시온산이든지 하나님은 산은 사실상 하나님의 성산이다..
함의
고대 사람들은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거쳐이자 천상회의를 통해 인간사를 관할 하는 곳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에덴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살기 원하여 만드시는 곳이다.
에덴에서 천상회의는 여호와가 계시는 곳이므로 천상과 지상의 가족 권속은 합력하여 그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에덴은 겔 2*2 “신들의 자리{ 하나님의 자리}로 묘사한다.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함으로 하나님은 신자들은 자기의 기족으로 편입시킬 구원의 방도를 내셨다. (요 1;12)
7. 에덴. 이상에 이 같은 곳이 없더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수행할 주체로서 천상의 무리들 (천군)을 창조하였다.
지구는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에덴과 지구는 따로 있습니다. 창 2: 10-14절 하나님은 창 1:18절에 땅을 창조하시고 땅이 충만해져야 할 필요성을 말씀하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사람의 본업은 자신이 거주하는 동산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에덴을 창 2:8절에 창조하였다. 하나님인 지으신 사람을 에덴에 두었습니다. 땅에는 여러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덴은 동방에 창설하였다. 창 2: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장하게 하였다. ” 에덴과 땅이 서로 구별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땅은 아직 에덴과 같지 않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을 재외한 땅은 불완전한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데로 정복하는 곳입니다.
에덴과 땅을 구분하여야 할 것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후에 에덴에서 세상의 땅으로 좇겨 났습니다.
인간은 이 땅을 하나님이 임재한 곳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땅을 에덴으로 만드는 것이 사명이 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경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땅의 부분은 정복하여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일을 수행할 자신의 형상 담지자인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새로운 지상 영역에서 자신의 형상 담지라, 즉 자신의 대표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선포와 협력관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자신의 충성된 자녀에게 그 일을 완수할 것을 명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선포하고 통치 권한을 지닌 자신의 권속에게 그 명령을 수행하도록 일임하였다.
8. 오직 하나님만 완전하시다.
천상회의 장면- 욥 1:6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나와 그분 앞에 선다. 천상회의 도중에 사탄은 회의에 등장을 한다. 여호와가 어디에서 왔으나고 물은다. 우리는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사하고 자신들이 보고 들은 바를 여호와께 보고를 한다. 욥1:7
사탄은 인칭고유명사가 아니다. the는 인격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에 붙이지 않는다. 사탄은 사탄이란 직위가 수행하는 역할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형상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이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온 땅에 확장시키고자 인류를 창조하였습니다. 인류는 번성하여 창조세계의 청지기 역할 감당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이땅을 에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치를 해야 했습니다. 땅을 돌보고 스 산물을 활용하여 동료 인간 형상 담지자들로 삶의 개선을 도모하고 그 과정속에 하나님의 임제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었다. 하나님의 닮은 꼴 때문이다. 하나님과 공유하는 지성과 창조력과 같은 속성이다. 하나님과 공유하는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이다.
엘로힘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라로 지음을 받았다.
9.위험과 섭리
선악을 알다
“창 3:5 ”너희가 무두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모두 눈이 밝아 신들 [엘로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엘로힘]이 아심이니라.“ 이구절은 시 82:1절 같이 엘로힘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복수이다. 두 번째는 단수이다. 창세기 1:26절에서 ”우리같이 하나“ 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엘로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안다.
인간은 시 8:5절에서 인간은 엘로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불순종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파트 3 신적존제들의 범죄
단원요약
지상의 모든 곳을 에덴으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좌초되었다. 나하쉬[뱀]는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려했다. 반역자는 하나니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역할에 개입하려 했지만 결국 죽은 자들의 주로 전락했다.
나하쉬[뱀]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나무로부터 차단 되었을 때 인류를 사로잡은 채 추락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땅에 다시 임할 것이다.
은혜의 복음이라는 불리는 새로운 상황은 인류에게 선택을 다시 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이 시점부터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회의의 일원으로 초대를 한다.
여호와의 분깃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여호와는 다른 열국을 흩어 내버린 사음 하등한 신들에게 이것을 배정하였다. 이때부터 신들은 여호와의 종이 아닌 하나님과 나이벌이 되었다. 신들의 통치는 부패하였다. 시 82편 창세기 6장의 잔류 자들은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열국의 거민으로 살았다. 여호와가 분깃으로택하신 땅을 둘러싼 각축전이 벌어질 것이다.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관계를 다시 시작을 할 것이다.
10. 낙원에서 일어난 문제
하와는 여호와와 그의 엘로힘들의 회의 영역인 에덴에 있었다. 하와가 자신의 대화 상대가 신적 존재임을 분명히 인지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장의 배경
신들의 세계나 신들의 직접적 개임과 연결된 마법적 영역이었다.
하나님은 인갼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창조하였으며 에덴이 하나님의 거쳐였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통치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부만을 품었다.
뱀은 일종의 동물이라기 보다는 초자연적 실체를 지칭하고있음을 우리가 안다.[고후 11:3, 살전 3:5, 계12:9]
창 3장과 에스겔서 28:13-14 “하나님의 동산 에덴 하나님의 성산,”
에스겔 28장은 하나님이 두로 왕을 책망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28장은 두로와의 비극적인 초상을 말한다. 스스로 신들의 자리인 천상회의의 우두머리라고여긴 에덴의 어즈 신적 존재에 대한 옛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인유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에덴에서 지하 세례로 추방한 빛나는 보석과 뱀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신적인 호위자인 그룹으로 묘사한다.
2절에서 두로왕은 자심을 천상회의와 관련된 표현인 신들의 자리(모샤브 엘로힘)에 죄정한 신(엘)으로 간주한다.
우가르트 사람들은 최고 지위에 있는 신을 엘이라 불렀다. 두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페니키아 종교에는 엘이 주재하는 천상회의가 있고 엘은 페니키아 문헌에서 엘룐(지극히 높은자)으로도 불리며 지상의 탕조자로 여겨졌다.
성경지자들은 여호와는 지극히 높으신 자이며 모든 신들 중 참된 왕이자 하늘과 땅의 창조자였다.
에스겔은 죽은 자들의 지하세계인 스올을 이스라엘의 대적인 할례받지 않는 용사나 왕들의 종착지로 묘사한ㄷ. 겔 32: 21,24,30,32, 사 14:9)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시켜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 바닥까지, 아니 땅 아래로까지 추락해 버린 총명한 두로 왕에 대한 개가를 부리게 하신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부르시는 애가다.
아담의 교만
에스겔 28장에서 왕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다.(13절) 그는 아름답다. 빛나다 눈부시다. (12-13) 에덴의 왕은 아담이 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보석의 아름다움은 제사장의 옷을 상징한다. 에덴의 제사장인 왕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분이 아담이다. 아담이자 제사장 왕이므로 이비유는 일관성이 있다. 두로 왕의 교만의 배후에는 뱀이 아니라 부패한 아담이 었다는 것이다. (겔 28:14-17)
언제 아담이 왕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도록 땅에 내 던져졌는가?(17절)
아담이 아니고 신적인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에스겔 28: 12절은 “너는 완전한 모범이였고 너는 완전한 인장 이었고”너는 이라는 것을 인격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성을 갖춘 사람이나 어떤 존재임이 분명해진다.
이들은 여러보석들이 인간 제사장 왕의 표식이라고 말한다. 장식은 다른 어떤 존재의 신성을 쉽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광체는 고대 근동과 구약에서 신적 존재나 신적 임재의 특성을 나타낸다. (겔 1:4-7.27-28) 에덴에 신적인 존재 그룹을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로 묘사한다. 왜나하면 신적인 분위기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은 결국 “불의 돌들 가운데” 로부터 좇겨난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적 돈재들을 별들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욥38:7절 하나님의 아들들을 별들로 칭했다. 이사야 14: 12-14절 신적 영역인 “하나ᅟᅵᆫㅁ의 별들”보다 높이 올라가려다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를 “낮의 별 새벽의 아들,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칭했다. 불의 돌들은 단지 거소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송 있는 신적 조재들을 가리킨다.
불들 가운데 좇겨났다는 것은 천산회의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사용됐을 법하는 언어이다.
뱀은 창세기 3장에서 동물이 아니라 짐승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어느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에스겔 28장은 예선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와 비기려 했던, 여호와의 어전회의에 속한 어느 진적 존재의 교만을 이야기하며 두로왕을 꾸짖는다. 보좌를 호위하던 이 신적인 존재는 에덴으로부터 땅 또는 지하세계로 쫏겨났다.
11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사야 14장에서 하나님은 바벨론 왕에 대한 조롱하는 노래를 지어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 왕은 열국을 박해하고 압제자로 불린 자입니다. (4-6절)앞재자가 낮아 질 때 결국 안식을 되찾을 것이다. 여기 주인공역시 지하세계인 스올로 내려간다.
14장은 11절이후부터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맥락으로전환한다.
바벨론왕으로 비교되는 하늘에서 떨어진 신적인 조재를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불린다.
계명성은 하나님의 아들을 계명성으로 부른다. 욥기 38:7 계명성은 일출 때 지평선에 나타나는 환한 별이다. 금성이다. 금성은 행성인데도 고대인들에게는 밝은 아침의 별로 알려져왔습니다.
이렇게 빛나는 자가 천상회의에 속한 다른 이들보다 높아지려 했음은 “ 나는 보좌를 높이리라.”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뱀이 누구인가? 창 3장 나하쉬 뱀
나하쉬는 명사로서 뱀을 뜻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다. 자음은 모음을 넣게 되면 노헤쉬가 된다. 노헤쉬는 점술가로서 초자연세계와 교통을 의미한단어가 된다.
형용사는 도시의 설립자가 된다.
그러나 뱀 나하쉬는 보좌를 호위하는 신적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이미지이다.
이것은 이사야 14장 에스겔 28장의 이미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뱀이 나하쉬가 하와에게 말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엘로힘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모두 한가족이다. 우리는 모두 창조주를 대표하지 않는가? 대체 우리가 왜 죽겠는가?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이 된다. 영광스러운 땅의 다스림의 사건이 이제는 고단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담과 하와의 심판은 나하쉬 뱀의 저주와 연결이 되어 있다.
나하쉬는 자기의 경쟁상대가 제거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하쉬를 파멸시킬 후손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한다. 하와는 출산을 통하여 속량이 된다. (딤전 2:15)나하쉬의 후손이 있음을 우리가 알게 된다. 사탄의 후손 뱀의 후손이 있게 된다.
뱀은 배로 기어다니는 저주를 받았다. 배로다니다는 에레츠로 내던져졋다는 이미지가 녹아 있는 단어이다. (겔 28:8,17, 사 14: 11-12, 15)에레츠는 흙의 비유적으로 지하세계를 뜻한다. (겔 28:17, 사 14:9, 11-12,15)
뱀은 흙을 먹는 저주가 있다. 뱀을 흙을 먹지 않는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지극히 낮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지하세계에서 짐승들보다 비천하여 질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하쉬는 짐승들보다 비쳔하여 질 것이다. 그의 영역은 사망이다.
12장 신적 존재들의 범죄
인간은 저주로 인해서 뱀의 씨와 얽히게 된다. 사탄의 씨와 얽히게 된다.
예수님도 요 8: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저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뱀의 자식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속에 성령을 지칭하는 하나님의 씨가 거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썩어지지 않는 씨로 태어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씨는 영적인 의미이다.
가인의 영적인 아버지는 나하쉬 뱀의 자식이다.
신적인 존재들의 반역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이 딸들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의 견해
창세기 6장 “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유면한 사람이었더라.”
창세기 6:1-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가?
첫 번째 이론
첫 번째의 이론은 하나님의 아들은 셋의 족속이라는 이론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공유하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아들 이란? 아벨을 가인이 살해 이후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손인 셋의 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셋의 계보 경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계보 불경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창세기 6장 26절에서 셋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맹점은 네 가지의 의심으로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셋의 계보 사람들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은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곳이 성경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인의 자손들을 가인의 딸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고 사람들을 사람의 딸들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창세기 6장이 기록될 이 당시에는 가인의 자녀들과 셋의 자녀들인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을 때이다. 그러므로 셋의 자녀들과 가인의 자녀들이 결혼을 금하는 시기가 아니라 결혼을 허락하는 시기이다.
네 번째는 창세기 6:1-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한 것은 두 집 단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집단은 인간이고 여자인 사람의 딸들이다.
두 번째의 집단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 집단은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셋의 족속이라고 말하고 사람의 딸을 가인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이론은 억지라고 주장을 한다.
2. 두 번째 이론
두 번째의 이론은 신격화된 왕의 이론이다.
창세기 6:1-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의 이론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유면한 사람이었더라.”
하나님의 아들은 신격화된 인간 통치자들이다. 시편 82편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들”을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서 인간은 왕을 신의 자손으로 여기는 고대 근동의 사상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왕은 신격화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복수형인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인간의 왕들이 아닌 신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욥 1:6, 2:1 38:7, 시 29:1 82:6)
하나님의 아들 이란? 원래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제 안에서 세상의 동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통치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비젼이다. 아담의 범죄로 이것이 좌절된다. 그리고 에덴의 비젼을 복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이스라엘 한 민족을 부르시고 메시야의 모형으로 다윗의 왕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메시야가 궁극으로 다윗 왕이 되고 메시야를 통하여 영화롭게 모든 신자들이 새로운 세계인 전 지구를 에덴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으로 땅이 부패하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용사이고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는 것이다.
3.세번째 이론
세 번째의 이론은 베드로 전후서와 유다서에서 창세기 6장을 해석하는 이론이다.
“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유면한 사람이었더라.”
베드로후서 2:1-10절 유다서 5-7절에서
베드로후서 2:1-10절 유다서 5-7절에서 창세기 6장의 이미지를 거짓 선생들과 연결시킨 이유이다. 거짓 선생들의 해괴한 지식을 공격한다. 거짓 선생들은 더러운 정욕과 호색하는 자들이다. 그 이유는 ? 창세기 6장을 해석하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였던 타락한 천사들의 범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는 홍수의 심판을 촉발한 성적인 죄로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초래한 죄와 같은 범주로 봐왔다. 이 범죄는 하나님의 권세를 멸시하고 자신들에게 마땅한 거처를 떠난 증거로 해석한다. 베드로후서 2:1-1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들였던 타락한 천사의 타락한 자들이 어둠의 쇠사들에 매여 “타르타루스”에 같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다서 5-7절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심판이 여호와의 날이라고 밝힌다.
이 이론은 홍수 이전의 메소포타미아의 압칼루에 대한이야기를 전재로 하고 있다.
압칼루는 노아 홍수 이전에 위대한 지식을 소유한 현자들의 무리가 등장을 한다. 이들을 신적인 존재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이해하였다. 이들 가운데 악한 압칼루가 있었다. 이들은 3분의 2가 되었다. 이들이 인간의 여자들과 짝을 이루고 신의 수준이 지식을 가지는 자속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압칼루가 인간의 여자들과 짝을 맺어 거인의 자손을 낳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6장 1-4절에서 나온 네피림이라는 거인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바벨론의 마두룩은 이 악한 압칼루를 땅속갚은 곳 물로 추방을 벌린다. 물은 지하의 세계의 일부로 여겨졌다. 마두룩은 다시 이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2:1-10절 유다서 5-7절에서 언급한다는 것이다.
베드로 전서,유다서기 쓰여지기 전에 신구약의 중간시대에 홍수 이전의 범죄에 대하여 나온다. 신적인 범죄자들이 인간의 골치 거리를 바로 잡기 위하여 자신들의 지식으로 인간을 계몽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내려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들이 세상의 육신으로 들어오는데 이들에 세상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육신에 충동이 되어서 성범죄로 타락을 한다. 그리고 인간의 여자들과 짝을 맺어 거인의 자손을 낳는 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6장 1-4절에서 나온 네피림이라는 거인의 사람들이다.
네피림의 단어의 의미는 추락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이단어의 철자는 원래 노펠림이 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수기 13:33절에서 네피일림이 된다.
타락한 천사들이 세상에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와서 여자들과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은 것이 네피림이라는 것이다.
4. 네 번째 이론
네 번째의 이론은 나쁜 씨의 이론이다.
바벨론의 제사장 계급인 바벨론의 지식인들은 혼수 이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그들의 신들에게 이하여 전수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들의 지적인 성취물이 홍수 이전의 지식과 연결되기를 원하였다.
압칼루는 홍수 이전의 지식을 보유한 위대한 문화적인 영웅이다. 바벨론의 왕들은 자신들이 압칼루와 다른 신적인 존재의 후손으로 믿고 있었다. 바벨론의 지식은 귀신에게서 유래한고 생각을 하였다. 이들의 자손들과 지식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 보다 못한 진적 존재들이 여호와께 반역한 결과로 생겨났다.
베드로후서 2:1-10절 유다서 5-7절에서 창세기 6장의 이미지를 거짓 선생들과 연결시킨 이유이다. 거짓 선생들의 해괴한 지식을 공격한다. 거짓 선생들은 더러운 정욕과 호색하는 자들이다. 그 이유는 ? 여호와의 천상회의의 충성된 엘로힘으로부터 이탈하여 처소를 떠난 신들처럼 거짓선지자들은 “권위를 업신여기며” 천사도 감히 꾸짖지 못하는 “영광을 훼방한다.”
이 거짓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합하여 낳은 네피림과 같은 사상을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5.다섯 번째의 이론
“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유면한 사람이었더라.”
네피림은 용사 유명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네피림의 단어는 니므롯 ‘깁보르’라고 불렀다. 니므롯은 창세기 10:6-12절에 앗수르와 바벨론 문명의 선구자로 등장을 하는 인물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하나님이 지상왕국을 이스라엘에 건설하려던 꿈을 산산히 무너뜨리는 문명의 국가이다. 니므롯은 창세기 6장에 네피림으로 신적인 존재의 범죄와 결부된 인물이다.
바벨론 바벨탑은 구약의 세계관의 중심부에 위치에 있었다.이 도시는 악한 활동과 지식의 원천으로 등장을 한다. 바벨론은 신들의 영영까지 하늘에 바벨탑을 쌓고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자 하였다.
신명기 32:8-9절은 여호와께서 바벨에서 열국을 흩으셨다. 그 결과로 열국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상속권을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열국의 백성이 더 이상 자기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탄생 이전에 바벨의 사건으로 열국이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열국이 하나님의 아들의 기업으로 그 수요대로 나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열국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머지 엘로힘인 다른 신들에게 배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열국을 하나님외에 다른 신들을 숭배하도록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천상의 회의에 있는 다른 신들이 열국을 다스리는 일에 부패하였다고 판단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들이 산위에 산다고 생각을 했다. 신들이 지구 라이트 바벨탑으로 본다. 신들의 거처인 하늘과 땅의 교차점인 산에 신들이 산다고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건축의 목적은 신들을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인간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지 않고 그 대신 다른 잡신을 섬기면 탑을 쌓고 결집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열국의 상속권을 박탈하였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른 곳은 메소포타미아였다.
아브라함에게 다시 명령하기를 열국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창 12:1-2) 열국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다시 여호와께 돌아오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15 우주적 지형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다스리는 영토가 되었다.
바벨탑사건으로 이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토와 다른 신들이 다스리는 영토로 나뉘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참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토를 지정하시고 이스라엘의 땅 그곳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신명기 4:19-20,17:2.29:25. 32:17절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신들인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역과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토란?
다윗이 사울에게 환란을 당한다. 그러나 다윗이 스스로 환란과 고난을 당하는 도중에 어떤 것에 못 참아 했는가?
다윗은 못 먹고 고난을 당하는 것 때문에 못 참아 했는가? 아니다 사울에게 쫓겨서 이스라엘의 진영 밖으로 이방의 나라로 나가는 것으로 못 참아 하였다.
다윗이 이스라엘 밖으로 좇겨 나갔을 때의 환란의 의미란?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토라는 사고에 있다.
다윗의 고통은 이방의 나라로 사울의 폭정을 피하여 도망을 감으로서 시작을 한다. 다윗은 이방의 나라로 쫓겨 감으로서 이스라엘의 땅인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 그것이 다윗의 고통이었다. (삼상 26:17-19) 이스라엘 땅은 여호와의 기업이고 분깃 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폭정을 피하여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밖으로 좇겨 나갔을 때의 환란의 의미란?
.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부터 내침을 당했다는 데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에 있었으면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다른 신들의 영역이고 이들이 다스리는 영토이다. 다른 신들의 영역인 다른 나라로 피신함으로 하나님의 영토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다윗은 진짜의 환란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기업인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의미는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온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에게 문둥병이 치료를 받고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이스라엘의 흙을 구한 나아만 장군의 의미를 우리는 자세하게 봐야 한다.
나만은 나병환자였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문을 두두리고 엘리사는 앗수르인 나아만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나만의 나병은 요단강에서 모욕으로 병이 낳는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한다. 왕하 5:15-19절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절)
그는 고향으로 돌아 갈 때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을 한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을 거룩한 땅이자 여호와의 영토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으로 봤다는 것이다. 나아만은 림몬 신의 영역에 살고 있었지만 여호와의 영토에서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하여 노새 두 마리에 흙을 잔득 실어 가져간다.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가는 것은 나아만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참 하나님인 여호와에 대한 서원을 지키는 방편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기 위한 방편이였다.
다윗이 이스라엘 밖으로 좇겨 나갔을 때의 환란의 의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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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부터 내침을 당했다는 데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에 있었으면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다른 신들의 영역이고 이들이 다스리는 영토이다. 다른 신들의 영역인 다른 나라로 피신함으로 하나님의 영토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다윗은 진짜의 환란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기업인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의미는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온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에게 문둥병이 치료를 받고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이스라엘의 흙을 구한 나아만 장군의 의미를 우리는 자세하게 봐야 한다.
나만은 나병환자였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문을 두두리고 엘리사는 앗수르인 나아만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나만의 나병은 요단강에서 모욕으로 병이 낳는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한다. 왕하 5:15-19절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절)
그는 고향으로 돌아 갈 때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을 한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을 거룩한 땅이자 여호와의 영토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으로 봤다는 것이다. 나아만은 림몬 신의 영역에 살고 있었지만 여호와의 영토에서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하여 노새 두 마리에 흙을 잔득 실어 가져간다.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가는 것은 나아만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참 하나님인 여호와에 대한 서원을 지키는 방편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기 위한 방편 이였다.
파트 4 여호와와 그의 분깃
이 단원 요약
바벨 심판으로 인해 세상은 아주 딴 판이 되고 말았다. 여호와가 열국의 상속권을 박탈하기 전에는 노아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는다. 노아의 가족은 이 언약으로 하나님의 인간의 가족을 확장하여 가는 에덴적인 세상을 이루려는 본래의 목표를 수행하여야 하였다.
바벨탑의 사건으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던 형태로 아담에게 임하여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는다.
하나님은 베벨탑의 사건으로 열국을 하나님의 상속자로 내치셨는데 열국을 하나님께 돌아 오게하는 언약을 맺으신다.
아브라함의 백성이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앞에 위협을 받을 때 여호와가 불타는 떨기 마누속에 하나님의 천사로, 광야를 통과하도록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전장에서는 군대 대장으로 이렇게 가시적으로 계입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는 필요하는 것은 믿음의 신실함과 신뢰와 순종이다.
16 아브라함과 말씀
신명기 8-9을 통해 여호와가 열국을 하등한 엘로힘들의 다스림 아래 주였다.
구약에서 눈에 보이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가?
사도행전 7:2-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나타나 아브라함이 경험하도록 나타나신 여호와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창 12장에 대화하고 나눈 사이다. 창 15:1-6절은 환상 중에 가시적인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별들을 세어보게 한다.
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가? 이분이 말씀으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8:56절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자신이 성육신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하신다.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뼈허였느니라.”
구약의 여호와하나님의 현현은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곧 말씀이라고 한 언약적인 배경이 개념적인 배경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눈에 보이는 형체로 나타나신 여호와가 이제 신약에서는 말씀인 바로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3장에서 청년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임하여 거기 서서 전과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상 3:19-21에서는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삼상 3:19-21에서는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시각적으로 체험을 한다. 하나님이 거기에 서있었다. 또한 사무엘이 하나님을 말씀으로 체험을 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하여” 라고 말한다. 예례미야는 하나님을 말씀과 동일시하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말씀으로 체험을 한다. 또한 예레미야에게도 여호와의 말씀이 눈에 보이는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형태를 가지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늘에도 계실수가 있는가?
한 여호아는 눈에 안보이는 하늘에 계시고 다른 여호아는 다양한 가시적인 형태로 땅에 계셨다는 말인가?
이 대답은 여호와의 천사. 여호와의 사자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가 있다.
청세기 22: 1-9절은 여호와의 표현의 언어가 여호와의 천사로 이행하는 전환점이다.
청세기 22:11절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였다. 아브라함은 이 음성을 듣고 누구인지를 알았다. 여기서 여호와의 천사는 진짜의 천사가 아니라 원문은 말라크 즉 메신져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메신져라는 것의 답은 청세기 22:12절에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1인칭을 쓴다. 내게 아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여호와의 천사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여호아의 천사는 하나님의 종의 천사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28: 10-22절에서 야곱의 사닥다리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사다리는 하늘과 지상을 잇는 일종이 계단식 구조물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닥다리는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시로 사용이 되었다. 야곱은 이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고 이름을 짖는다. (창세기 28:19) 여호와와 대화를 기념하기 위하여 돌기둥을 세운다.
여기서 문제는 창세기 28: 13절에서 여호와의 천사는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야곱에게 노골적으로 말한다.
창세기 32: 28-29절에서 사람과 씨름을 날이 세도록 한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 사람이 “내가 엘로힘 하나님과 싸웠다.”고 말한다. 육신을 덧입으신 하나님과 싸웠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만 찾아 보더라도 엘로힘 하나님과 천사[말라크][메신져]를 병행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창세기 48: 14-16절에서 야곱이 임종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축복을 하는 말가운데 이렇게 말을 한다. “ 이삭이 섬기는 엘로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힘 엘로힘 하나님,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천사[말라크] 그가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옵소서
야곱은 천사 [말라크]와 엘로힘 하나님을 같이 혼용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족장시대 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형태는 '여호와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계시입니다. 창세기 16:7, 22:11,15, 24:7,40, 31:11, 48:16
18 이름안에 무엇이 있는가?
출 3장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의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불타는 떨기 나무에 있었다.
출 23:20-22 역기서 천사는 하나님의 속성인 죄를 사하거나 죄를 사하지 않는 권세를 가졌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이 천사안에 있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이 천사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천사안에 있다는 것이다..
신 4:37절에서 하나님의 직접임재와 여호와의 천사가 공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
이사야 30:27-28는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그의 이름이 여호와의 자신으로 등장을 한다.
시 20:1,7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는 것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다.
신 12:2,4-5,11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성막, 거룩한 도시, 성전에 거할 하나님의 임재 자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군대대장
수 5: 13-15절에서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출 23:20-23절에서 천사는 실제로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여정에 모세와 여호수아와 동행한다.
21.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회의
율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율법을 주었을까?
이스라엘의 신분은 여호와의 분깃으로 열국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수단이다. (신 4:6-8.28:9-10)
하나님은 이들에게 율법을 주신다. 하나님은 시내산의 연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해하야 하며 두 번째의 율법은 쫓겨난 열국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고 두 번째는 이웃인 열국에 사랑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확산시키는 하나님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율법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다른 부정적인 각도도 있다.
시19:7-8에서 율법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율법을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그러나 율법은 개인과 하나님 이스라엘과 하나님 유대와 하나님 이방인과 하나님사이의 언약적 유대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고 봐야 한다.
율법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표현하는 방식이고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율법과 구원을 분리하는데 분리가 아니라 구원은 율법의 완성이다.
구약에서 구원이란?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인간은 여호와가 모든 신들중에 참 하나님임을 믿어야 하였다. 다른 열국중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언약의 관계를 선택하였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율법은 여호와의 택하심과 언약의 약속으로 이스라엘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백성은 믿음의 신실함이 율법에 대한 신실함으로 들어냐야 하였다.
신약에서도 구원이란? 복음을 믿음으로 주어진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예수님을 성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삼일에 부활하심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한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신실함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난다. (갈 6:2, 고전 9:21)
구원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패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함과 같은 의미이다.
율법의 발생지는 시내산이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 시내산의 언약은 에덴의 모형을 연상하게 한다.
에덴과 시내산은 모두 여호와의 사자들이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신 여호와를 본 성지 였다.(창 3:8 출 24:9-11) 시내산 율법이 수여되는 형장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천상회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천상회의가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곳이다.
시내산 율법이 수여되는 형장에서도 천사들이 선포하는 율법이 있었다.
시 68: 15-18 율법과 천군
신명기 33;1-4 율법과 천군이 연결되어 있다.
천사들이 율법을 전달하고 선포했다.
70인 역에서는 권세를 상징하는 위치인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천사들이 있어서 이스라엘의 율법 수여를 지켜본다.
여호와가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다. 이러한 것은 시내산 율법이 수여되는 형장에 나타난 사건들이다.
결론 적으로 말하자면 에덴과 시내산의 언약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패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함과 같은 의미이다.
갈 3:19절은 하나님과 천사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중보자가 있음을 알려준다. 바로는 이 중보자를 사람의 형체로 계신 여호와로 본 것이다.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이 토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까지 있을 것이라.”
갈 3:19절에서 율법은 천사들을 시켜서 만들어 진 것이다.
율법이 수여된 시내산에서 천사들에 의하여 율법이 돌판에 세겨진다. 이러한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천상회의가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곳과 같다는 것이다.
유월절의 식사의 의미란?
출 20장-23장에서 시내산의 언약의 비준으로 희생재물을 바치는 의식을 통해 이루어진다.(출 24:3-8) 의생의 의식을 치루는 후에는 언약의 당사자들 간에 희생 제물을 먹는 식사 시간을 갖는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새언약의 당사자로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의미가 바로 이 의미이다. 그 이유는 출 24:9-11절 천상회의 장면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열방을 돌아 오게하는 연약의 주체자로 천상회의에 참여하게 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권속들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새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열방을 돌아 오게하는 연약의 주체자로 천상회의에 참여하게 하는 의미한다.
출애굽기에서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이 적힌 돌판을 받는다. 이 돌판은 “에두트”라는 용어로 칭한다. 에두트는 여러 가지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시 19: 7, 시 78:5절에서 율법의 대응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에두트는 증인들이라는 용어로도 사용이 된다.
에두트는 돌판에 새겨진 율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만을 위하여 마련된 성스러운 공간 지성소 내부의 언약궤 안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율법 토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돌판에 새길 때 목격한 천상회의 구성원들의 대리자였음을 상징하는 물건임을 시사한다.
출 17:15 출 24:4에서는 모세의 시내산에서 율법의 토판이 시내산에서의 천상회의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만남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내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 신을 벗으라고 말한다.
이말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여호와가 거룩한 것처럼 이스라엘역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또 다른 의미는 여호와의 거처가 속한 땅은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역역에 대한 구별이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늘과 땅 초자영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역은 이 땅이다. 이땅에서 하나님이 머무는 곳은 신성하고 여호와의 임재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이 세계가 된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인간이 여호와와 한 장소에 머무르기 위해서 초청을 받았다. 그래서 정결하여야 하였다.
앞으로 성전에서 지성소에 제사장이 출입을 할 때 재 제사장은 독특한 예봇과 흉판과 “여호와께 거룩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두건을 착용해야 했다. 왜냐면 성막은 지상에 있는 하늘이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다.
성막은 개념상 하늘과 땅이 만나는 우주적 공간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에덴이라는 땅에 거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시내산에 거하시고 이제는 이스라엘 가운데 성막에 거하신다.
성막은 하나님과 다른 천사들과 회의 하는 에덴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만들어 져 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듯이 제사장들이 이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
성막안에는 구두개의 그룹이 있다. 그룹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 보좌를 상징한다.
성막안에 있는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등상이 되었다.
파트 5 정복과 실패
이 단원 요약
모세와 여화수아가 이끈 정복전쟁의 목표는 경쟁관계에 있는 신적인 혈통 사탄의 혈통을 땅에서 진멸하고 여호와의 기업 자녀들을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정하신 곳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곳이 가나안땅이다. 가나안땅에 여호와의 지상의 통치가 확립하게 될 것이다.
이세상은 여호와의 원래 비젼을 되살리기 위해서 폭력의 수단이 필요하였다.
세상은 다른 신들 사탄의 통치하에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이세상의 땅은 다시 회복이 되어 거룩하여 져야 하였다. 가나안은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을 통하여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며 상속권을 박탈당한 열국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목격하게 되고 이들이 돌아 오게 될 것이다. 열국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이스라엘이 실패를 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신적인 혈통 사탄의 혈통을 땅에서 진멸하는데 실패를 하고 이들을 가나안땅에서 좇아내는데 실패를 하는 것이다.
신적인 혈통 사탄의 혈통이 잔류세력들이 불레셋 성읍들에 남아 있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공존을 선택하게 된다. (삿 1:27-36)
하나님은 포기 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의 왕조는 사울로 인해 고전하다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하여 흥왕한다..
솔로몬의 실패로 하나님은 친히 둘째 아담인 다윗의 아들 완벽한 통치자를 이룰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을 한다. 영적인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23 거인의 문제
아담과 하와는 뱀의 후손과 충돌을 하게 된다.
뱀의 후손이란? 영적이고 은유적이다. 예수님이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뱀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하였다. 뱀이란? ‘나하쉬’는 단순히 동물 뱀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 신적인 존재 나하쉬 가 한번도 사람의 형체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좇겨난 다음에 뱀의 후손과 충돌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이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제사장의 제도를 확립한 다음에 약속의 땅 가나안땅을 향하여 출발을 한다.
가나안땅에는 거인인 네피님이 살고 있었다.
네피님은 홍수인 전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합하여 탄생하게 된 자들이다.
그런데 정복전쟁에서 가나안땅에서 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민 13: 32-33)
바벨탑이후의 하나님의 경쟁관계에 있는 사탄들이 여호와의 자녀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자녀들을 낳게 된다. 사탄들은 여호와의 아들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하여 인간의 혈통을 경쟁자로 길러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네피님이다. 경쟁관계에 있는 신적인 혈통 사탄의 혈통을 땅에서 진멸하고 가나안땅에 여호와의 지상의 통치가 확립하게 될 것이다.
24 뱀의 자리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의 정복전쟁에서 치명적인 두 세력을 마주하게 된다.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열국 백성들과 네피림의 후손들이다.
하나님은 정복전쟁을 남에서 북쪽으로 시작을 한다. 그런데 에돔과 오압과 암몬은 괴롭게 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이곳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배정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롯과 에서의 아들들에게 이곳 에돔과 오압과 암몬의 통과를 허락을 받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허락을 받아 통과를 한다.
그리고 시혼과 바산으로 진군을 한다.
왜 시혼과 바산인가?
시혼은 마음이 완고하여 졌다. 애굽에서 구원 받기전에 애굽의 바로왕을 연상하게 한다. 시혼은 아무리 왕이다. 아모리 족속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권에 속하여 있었다. 가아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이름이다.
사탄들은 여호와의 아들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하여 인간의 혈통을 경쟁자로 길러냈다는 것이다.
아무리 족속이 바로 이들이다. 바산와 옥도 이들에게 속한다.옥은 르마임의 마지막 후손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아낙의 족속이다. 이 전쟁은 옥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된다.
25 거룩한 전쟁
여호수아의 전쟁은 여리고에서 시작을 한다.
파트 6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단원 요약
이스라엘의 왕조이야기는 사울 다윗 솔로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왕정시대의 역사의 기록은 전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조이야기는 신학적이라는 것이다. 전하여야 할 멧세지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영적 인과관계,하나님의 진노, 에덴의 구상이 폐허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여호와의 계힉에 대한 것이었다.
열국은 하나님의 적대적인 사탄의 지재하에 있었다. 이스라엘과 영적인 사탄의 자녀들과 충돌이 끝이지 않는다. 사시시대에는 영적인 배교가 만영햐여 있다. 누구나 자기의 옳은 소견대로 행하였다. 무정부 상태는 왕을 달라는 요구로 귀결된다.
르바임의 잔류들이 남아 있었고 언약궤와 성막은 각각 다른 장소에 있는 제사장직이 분열되었다.
다윗의 사람들이 고리앗의 형제들을 제거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후 언약궤와 성막을 통합했다. 약속을 받은 가나안땅이 솔로몬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은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패망을 하게 된다.
여호와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신적인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임재와 권능을 확인하고 에덴적 통치를 재건하기 위한 새 언약 새해법을 선포하셨다.
26. 산과 골짜지
여호수아 11:21-23을 통해 아낙사람이 완전히 진멸되지 않았음을 배웠다.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는 분명 궁사적 충돌에 대한 기술이다.
성막의 묘사는 하나님의 성전 천상회의가 다른 신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막은 영구적인 성전 즉 그의 이름이 머물게 될 곳의 준비 과정이다.
성막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사야 40:22에서 천상에 있는 장막의 원형이 하늘 그 자체 있였음을 안다. 하늘과 땅은 여호와의 참 성막 또는 성전으로 고안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세운 지상의 성정 거처는 우주의 웅장한 거처를 모방한 것이 었다.
성막은 단지 여호와의 처소만 아니었다. 성막은 여호와의 보좌가 있는 의전 회의실 이기도했다. 여호와는 지구 위에 있는 천상 장막안에서 발을 지상에 둔 채 궁창 위에 있는 무 위에 있는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 사 66:1 그곳에는 여호와의 인배와 연관된 성물 곧 언약궤가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입성하자 언약궤가 하나님의 집을 뜻하는 벧엘에 자리잡았다. (사 20:27)벧엘은 야곱이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여호와와 그 천상회의의 천사들을 만난 장소였다. (찬 28:10-22)
시간이 흐르는 후에 성막이 벧엘어서 실로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다고 말하기 시작을 하였다. 실로는 사무엘이 육신을 입은 여호와 말씀 과 만나는 장면을 목도했다. (삼상 32장)
엘리 제사장은 어리석게도 언약궤를 권장에 내보내 불레셋의 수중에 들어가게 만들었따.
여호와의 임재가 다곤 신상을 파괴한다. 사무엘 5:5절에 불레셋 제사장들의 반응이 나온다.
다곤의 제사장들은 다곤신정의 문지방을 이제는 그들이 더 이상 감히 밟지 못하는 여호와의 지리적 영토가 되었다.
결국 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다. 처음에 다윗은 궤를 위한 성전을 짓겠다는 생각으로 임시 장막을 세워고 그곳에 궤를 안치했다. (삼하 7:17, 대하 1:3-4)
성막역시 에덴과 연관성이 깊다. 에덴은 울창한 동산이자 거룩한 산이었다. 성막의 장막덮개에도 에덴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기물과 장식이 있다.
성전 실내에는 두 개의 그룹들이 활짝 날개 끝이 서로 맞닿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룹의 날개가 여호와를 위한 보좌가 되었고 궤는 여호와의 발등상이 되었다.
여호와의 성전은 시내산처럼 우저적 산인 여호와의 거처라는 개념이 연결되었다. (시 48편)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시48: 2절에 “북쪽 꼭대기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우리는 이러한 찬송을 자주 부른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그런데 시온성의 중요한 의미란?
시온산은 위대한 산이 못된다. 시온산은 복쪽에 있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시48: 2절에 서 시온산을 이렇게 묘사하였을까? “북쪽 꼭대기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이렇게 억지 묘사를 할까?
원래 북쪽 꼭대기는 바알이 거주하며 최고의 신 엘과 천상회의의 명을 받들어 우주를 관장하던 곳이였다. 그러나 이 바알은 천상의 회의를 주관하는 신이 아니다. 천상회의의 명을 받들어 우주를 관장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바알의 영광을 훔쳐서 영광을 받아 마땅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하 표현을 “북쪽 꼭대기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온은 우주의 중심이며 하나님이 우주를 관장하는 장소이다. 바알이 아닌 여호와가 시온의 왕이고 여호와의 천상회의의 집행부이다.
우주의 의미를 성전의 의미로 생각을 하면 좋다.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성전에서 천상회의를 통하여 명령을 하달하는 곳이 성전이다.
성전은 울창한 식물과 동물로 빽빽한 에덴적 동산이기도 한다. 열왕기 상 6-7장에서 분명하게 식물과 동물로 빽빽한 에덴적 동산으로 말한다. 성전은 꽃 종려나무 박 넝쿨 삼나무 그룹 사자들 석류등이 곳곳에 특징적인 장식물로 아로 새겨져 있었다.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를 다시리는 중심의 곳을 말한다.
에스겔이 본 환상의 성전은 높은 산위에 세워져 있고(에스겔 40-48장) 뜰로 향한 현관기둥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다. (에스겔 40:31-34). 실내에는 더 많은 종려나무와 그룹이 장식으로 새겨져 있다. ((에스겔 41:17-20). 에스겔이 본성전은 동산의 에덴처럼 물이 흐르고 초자연적으로 생명을 공급하는 강이 흘렸다. (에스겔 47:1-2).
이스라엘의 신학에서 에덴과 성막과 시내산과 성전은 일관되게 여호와의 천산회의 거쳐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는 곳으로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우주적인 하나님과 우주적인 에덴동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을 하면 이스라엘은 언젠가 시온인 여호와의 통치하는 왕국이 된다는 사고를 가졌다. 시온은 바벨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을 박탈당한 열방들이 시온으로 돌아오게 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가는 미가서 4:1-2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하였다.
시온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열방을 다시 돌아오게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통치장소를 말한다.
시온성과 반대 장소 힌놈골짜기
성전과 대조를 이루는 장소가 어둠의 세력, 구체적으로 르바임 네피림 혈통과 연결되어 있다.
르바임은 거인들이다. 여호수아서 11:22절에서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아낙 사람을 진멸하는데 실패한 후 아낙 사람 일부가 불레셋 성읍인 가사, 가드, 아스돗에 남았다. 가드 출신이 골리앗이다. 골리앗에게는 형제들이 있었다.(역대상 20장4-8절)
이 거인인 르바임은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거주하게 된다.
아스다롯과 에드레이란? 우가르트 문학에서는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여겨진 두 도시이다.
다윗시대에 구약에는 르바임의 골짜기로 알려진다. 블레섹 군대가 그곳에 진을 쳤다고 나온다. (삼하 5:18,22, 23:13) 여호수아 15:8, 18:16절에 의하면 르바임의 골짜기는 다른 골짜기 힌놈골짜기와 맞닿아 있는데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알려져 있다. 힌놈의 의미는 게헨나라는 이름의 어원이다.
게한나는 죽은 자의 불타는 세계이다. 지옥이나 하데스를 일겉는 말이다.
힌놈을 통곡의 골짜기로 번역을 한다.
힌놈에서 아이들을 불살라 제사를 드렸음을 생각하면 이름이 왜 힌놈 게한나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하스 왕과 므낫게 왕이 자기 아들들을 전제로 불살라 몰렉 신에게 바쳤다. (대하 28:3,33:6절) 훗날에는 힌놈 골짜기를 도벳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적골짜기
어둠의 권세들과 여호와의 임재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인 전쟁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어둠의 권세들에게 미혹되거나 그 권세들에게 순종하는 세례가 넘쳐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에 순종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위하여 능히 어둠의 권세들과 싸울실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거부하였다.
아낙 자손과 싸울때도 앞에 가신 용사인 여호와를 버리게 된다. 장신인 사람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한다. 이들의 요구에 하나님은 다윗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만이 왕권을 이을 정당한 계승자가 될 거시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다윗과 언약을 맺는다. (삼하 7장)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다른 신들의 다스림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호와는 앗수를 재국을 사용하여 주전 722년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
27 천상회의 앞에 서다.
하나님은 인간 지도자를 택하실 때 독특한 페턴이 이 있었다.
그 패턴은 천상회의가 포함된다.
인간의 지도자인 선지자 –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최초의 선지자는 아담이다. 아담은 에덴에 저주하였다. 에덴은 여호와의 거주지이다. 여호와 자신의 회의와 더불어 통치하시던 곳이었다.
욥기 15:7-8 “너가 하나님의 회의에 들어 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에덴은 하나님의 회의가 열리는 장소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형체로 에덴에서 아담에게 나타났다. 창 3:8“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다.” 거닐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체로 나타났셨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있는 일에 익숙하였다.
아담은 하나님과 다른 세상 땅의 인간들과 중재의 역할을 하여야 하였다.
“동산에서 거닐다.” 이 표현은 이스아엘 성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적 임재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 적이 있다. (레 26:12, 신 23:14)
‘거닐다’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대표자로 사용하실 때는 하나님은 그 사람과 만나셔야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개념이다.
하나님과 동행의 개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에녹과 노아이다.
에녹은 찬 5:22-24절에서 천국의 환상과 하나님의 어전 회의실 환상의 발판 역할을 한다.
베드로 후서 2:5절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노아시대의 사람들에게 창차 다가올 홍수에 대하여 예언을 하면 심판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다.
아브라함도 ‘모레의 상수리 나무아래서 하나님의 방문과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소곰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한다고 경고할 때 멸망당하기 전에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아래 하나님의 방문이 있었다.
마지막 사사시대의 선지자는 사무엘이다. 사무엘도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만나신다.
이사야 6:1-2 이사야의 부르심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이 자신의 천상회의에 이사야를 참여 시킨다.
에스겔 1:1-28절에서 에스겔이 여호와의 보좌앞으로 들리는대신 여호와와 그의 수행원들이 에스겔에게 나오셨다.
28 신의 오도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한 하나님의 새가족 이스라엘을 창조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정복전쟁의 실패로 열두지파와 통일왕국의 분열, 다윗왕조의 붕괴, 바벨론의 포로 (하나님의 열국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민족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신 바라 그곳이 바벨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의 회복과 통치에는 반드시 인류가 참여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야 했다 성령을 통하여 자녀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고자 했다.
하나님이 성막과 선전에 거하시는 것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례미야를 통하여 새로운 언약을 맺는다.
렘 31:33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라.”
메시야 (마쉬아흐) 30번 넘게 구약에는 등장을 한다. 기름부음 받는자이다. 왕이 기름을 부음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에서야 마쉬아흐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으나 메시야의 그림이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메시야의 개념은 산재된 파편들이 조각 조각 흩어져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죽고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구약의 메시야 사상
구약의 메시야 사상이 사람을 통하여 6가지의 주요사항으로 밝혀지고 있다.
구약의 메시야의 증거는 수난당하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을 통해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거두는 메시야에 대한 증거이다.
창 3:15절은 좋은 예시이다. 뱀(나하귀)에게 그의 후손 중 하나가 하와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며 하와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롬 16:20에서는 바울은 뱀의 머리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산산이 박살나는 전망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뱀을 신자들의 발, 발 아래에서 뭉개버리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메시야의 사상이 사람을 통하여 이어진다.
메사야의 사상은 아담 – 이스라엘- 모세 — 다윗— 예수님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6가지의 중요사항으로 이어진다.
아담의 6가지의 중요사항
아담- 하나님의 아들, 통치자-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종 (애베드), 죄의 결과로 고난당함, 에덴에서 추방과 죽음(지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후손들을 통해 계속 이어짐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왕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족이다. 에덴의 통치자로 임명을 받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종으로서 땅을 경작하도록 동산에 배치되었다. (창 2:15)
이스라엘의 6가지의 중요사항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 열국중에 최고 (이스라엘의 옹이 가장 높음),종 (애베드), 죄의 결과로 고난당함, 추방과 죽음(지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유다를 통하여 계속 이어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아들로 부르신다.(출 4:23 호 11:1) 이스라엘은 열국을 비추는 빛일 뿐 아니라 열국을 다스리는 자이다. (신 15:6,26:19, 28:1)
모세의 6가지의 중요사항
하나님의 아들, 통치자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 종 (애베드), 죄의 결과로 고난당함, 추방과 죽음(지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감
예수님의 6가지의 중요사항
예수님은 메시야이다.- 왕,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다윗과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만민을 다스림, 종 (에버드) 고난당함(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죄의 결과로 고난당함, 제상에서 추방과 죽음(지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후손들에게 부활을 통해 계속 이어짐
29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
메시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
다윗의 아들은 인자인 동시에 신 (구름을 타는자)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구약의 메시야의 사상은 두 가지이다. 인간(인자)와 동시에 신 (구름을 타는자)이여 한다.
신 33:26, 시 68:32-33,시 104:1-4
파트 7 이미 임한 왕국
이 단원 요약
31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메시야 예수님이 오심은 하나님의 에덴의 계획이 실현되도록 마드는 지렛대이다.
예수님은 충생이전부터 이땅의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와 함께 하늘에 계셨다.
인간이 에덴의 비젼에서 재거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여호와의 이름(요 17:5-6, 11-12,25-26)
롬 10:13“누구든지 여호와의 읾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는 것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요 17:5-6, 11-12,25-26)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나타냈노라고 성부하나님께 말씀하셨다. (요 17: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셨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였다. (히 1:3)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가 여호와의 천사 안에 거했다. (출 23:20-23)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맡기신 제자들을 하나님의 권세와 임재, 즉 이제는 예수님 안에 성육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 23: 20-23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이스라엘 출애굽 대오의 선봉에 서셨다. 예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고 되어 있다.
요한은 자신이 이하야 40:3절의 여호와 오심을 목청껏 외치는 무명의 목소리라고 한다.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란?
새 출애굽으로 이끄는 성육신한 여호와를 표현하는 것이다.
막 1:9-11에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심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애 사랑하는 아들이라 너를 기뻐하노라 하였다.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
첫 번째는 하늘이 갈라짐이다. 갈라짐은 헬라어 기본형은 ‘스키조’이다. 이 용어는 출애굽기 14: 21절에서 홍해가 기적적인 갈라짐을 묘사하기 위하여 쓰인 단어이다. 홍해 갈라짐이 ‘스키조’이다. 여호와가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그들을 한 나라로 다시 세우고 지상에 에덴 왕국의 통치를 재건하는 것이다. 마가가 ‘스키조’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돌아 왔다. 이제는 성육신 하신 여호와가 직접 인도하시니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유다서 5절에서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애굽에서 인간의 형체로 나타난 여호와 이자 눈에 보이는 천사가 예수님이 였다는 것이다. 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삿 2:1-2, 출 23:20-23)
둘째는 마가복음 1:11절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임하였다.
사랑하는 자는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왕권, 즉 다윗 왕권의 합당한 계승자로서 그의 신분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러면 ‘사랑하는’이란? 다윗의 보좌의 최초의 계승자 솔로몬에게 사용된 단어이다.
‘사랑하는’을 히브리어로는 ‘여디디야’이다. 이 단어가 사무엘 하 12:24-25절에서 다윗의 보좌를 계승한 솔로몬에게 사용된 단어이다.
사무엘 하 12: 24-25절에서 “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여디야후가 어원이다.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이다.
여디디야는 솔로몬이 다윗의 언약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님을 나타내는 명패가 ‘사랑하는자’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너는 내사 사랑하는 자르는 것은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요. 다윗의 보좌의 합당한 계승자”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32 유명한 장소
성육신 하신 여호와의 오심은 사탄의 다스리고 있는 그 열국을 되찾아 오는 과정의 시작점이다.
예수님의 공생에는 세례를 받으시고 시작이 된다. 세례를 받음으로 물을 통과 하시므로 시작이 된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곧바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하여 광야로 가셨다. 광야는 유대 광야였다.
이스라엘은 광야는 아사셀을 포함한 ‘광야 귀신들’의 거처라고 믿고 있었다.
왜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가서 마귀와 대면하도록 인도하였을까?
구약적인 배경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광야를 통과하고 그다음 홍해바다를 통과한 다음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기 위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광야로 들어 갔다.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고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에게 미혹을 받았다. (신 32: 15-20)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미혹에서 승리를 거둔다.
첫 번째의 시험은 사탄은 돌로 떡을 만들어 주린 배를 채우라고 유혹을 한다. 굶주린 배는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 여정에서 가장 큰 시험거리였다.
신 8:3절을 통하여 사탄에게 답을 한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두 번째의 유혹은 선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자신이 천사들의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보라고 도전했다.
신명기 6:16을 인용하신다.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 번째의 시험은 사탄은 예수님께 여호와가 바벨에서 상속권을 박탈하셨던 열국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세상의 통치자 사탄은 신명기 32장에서 열국을 다스리는 신들을 통치하는 우두머리로 간주한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승리를 거주신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세우시게 된다. 열국의 탈환과 사탄의 패배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예수님은 갈리리를 떠나 가벼나움에 머무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세우기 위하여 두자기의 일을 하였다.
첫 번째는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이다.-귀신을 제어할 능력과 권세를 부여하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송하신다.
두 번째는 귀신들린 남자를 고치시는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으니라.(눅 11:20)
70인의 제자를 파송한다.
70인은 나열된 바벨에서 흩어 내버려진 열국의 수이다.
33 유익한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또 다른 의미란?
십자가의 죽음과 영적인 전쟁의 의미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묘사는 마태복음 27장은 시편 22장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 27장 35절- 시 22:18
옷을 재미 뽑아 나누고(35) —내 겉옷을 나무며 속옷을 제미 뽑나이다.(18)
마 27장 39, 41절 - 시 22:7, 17
지나가는 자들이 자기머리를 흔들며 — 희롱하여(39, 41)- 입술을 삐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7, 17)
마 27장 46절- 시 22: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1)
그런데 마태복음 27장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시편 22:12절은 크게 강조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시편 22:12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황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바산의 힘센 황소들”을 사로잡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산은 구약에서 지옥의 문, 곧 죽은 자의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말한다.
창세기 6:1-4절에서 패역한 사탄들이(하나님의 아들들) 지상에 강림한 장소가 바산이었다.
그런데 왜 바산의 힘센 황소인가?
암 4:1-3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함소들아 이말을 들으라”
암모스 선지자는 바산의 암소들은 황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북 이스라엘의 상류층 여자들을 말한다. 두 번째 아모스가 질타하는 대상은 남자 제사장들가 더불어 이방신을 숭배한 신전의 여사제들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귀신의 권세와 확실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황소들아 이말을 들으라” 라고 이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는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수천년간 하나님의 자녀를 학대하며 마귀적인 사탄이 예수님의 죽음과 고초 당한 순간에도 고난에 처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에워쌌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롱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 68: 15-23절은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보느냐?
바산과 시내산이 시편 대립하는 구도로 나온다. 바산은 불경한 땅의 상징한다. 바산이 경건한산, 하나님의 산, 시내산을 시기하여 본다. 하나님은 시내산을 거처로 삼기 원하신다.
왜 바산이 하나님의 산 시내산을 시기하느냐?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 마귀와 사탄의 본거지인 바산을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시 68: 15-23절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군대가 바산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취하시고”
하나님의 군대인 용사인 여호와가 언젠가 바산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여호와가 사로잡은 자를 줄줄이 끌고 그산에서 내려오실 것이다. (엡 4:8) 그리고 이들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68:18절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시며”로 되어있고 에베소서 4:8절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로 반대로 되어 있다.
시68:18절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시며” 승리한 군대의 사령관이 대오의 선봉에 서고 적의 포로들이 뒤를 따른다. 포로는 전쟁의 전리품이다. 인간에게 줄 전리품을 영적인 전쟁에서 선물로 받았다는 뜻이다.
마귀의 견고한 진을 정복한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분을 바울은 예수님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서 자기를 둘려 쌓인 마귀 사탄을 이기시고 이들을 결박하여 이 포로를 구경거리로 끌고 다니며 이 영적인 전리품은 예수님의 것이 된 것이다. 이것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4:8절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고 표현을 한다. 이 영적인 전리품은 예수님의 것이 된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나누워 주시는가? 바로 사도와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이다.(엡 4:11)
그런데 예수님이 영적인 전쟁에서 오르는 산 바산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한다.
에베소서 4:8-10절은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은 자들의 무리를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하였도다.
그다음의 말씀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 다음의 말씀은 “올라 가셨다 하였은즉 낮은 곳 땅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영적인 전쟁으로 바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내려감”이다.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바산으로 올라감이 “내려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올라감도 동시에 “내려감”이다. 이 땅의 낮은 곳으로 강하하셨다는 것이다. 왜 내려 가셨을까? 창세기 6장은 범죄한 사탄들을 지하의 세계로 내려 보냈다. 이 사탄을 결방하기 위하여 사탄을 만나기 위하여 “옥에 있는 영”들을 만나기 위하여 지하의 세계로 내려가셨다는 것이다.(엡 3: 18-22)
십자가의 죽음은 이들을 결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박당하 사탄을 바로 사도와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들에게 나누어 준 것다.(엡 4:11)
우리는 사탄을 예수님에게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결박당한 노예에게 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심스럽다. 예수님의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까닥이다.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들이여 예수님의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여 결박당한 사탄의 자녀들을 해방시키자.(엡 4:11)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주신 사탄이 우리 발앞에 굴복하게 하여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여야 한다.
예수님과 성령님강림의 사건의 의미란?
에베소서 4:8-10절은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은 자들의 무리를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 가셨다 하였은즉 낮은 곳 땅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올라감은 부활입니다. 내려감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전재로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육신을 입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정착케 하신 예수님이 육신을 덧입은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여호와이고 예수님이지만 육신을 덧입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의 의미는 우주의 악의 권세 사탄을 바산에서 몰락하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권능을 받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왜 교회가 권능을 받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결박하는 사탄을 우리 발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그들에게 결박당한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전쟁과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두 가지 점을 강조하면서 영적인 전쟁에 참여 시킨다는 것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 두 가지 강조점이다.
사도행전 2: 2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은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이것은 예루살렘에 모인 성도들과 제자들이 옛 선지자 엘리야처럼 천상회의에서 열방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위임을 받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왕상 2:1, 11절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위임을 받을 때 휘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하나님이 임하였다.
욥기 38:1,40:6절에서 욥도 하나님의 대리자로 위임을 받을 때 폭풍우 바람과 함께 하나님이 임하였다.
겔 1:4절에 에스겔 선지자도 하나님의 대리자로 위임을 받을 때 하나님이 큰 바람과 함께 임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열방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위임을 받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람과 함께 임하실 뿐 아니라 바람과 더불어 “번쩍 번쩍하는 불로 임하신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때도 “번쩍 번쩍하는 불로 임하신다.( 출 3:2,19: 18 20:18 사 4;5)
구약에서 “번쩍 번쩍하는 불”은 하나님의 임재, 여호와의 영광과 본제의 가시적 현현을 상징하는 소재 였다.
“급하고 강한 바람”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 두 가지 강조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과 만남가운데 열방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위임을 받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불타는 혀의 갈라짐과 온 무리가 소동함이다.
갈라짐은 “다아메리조”이다. 신명기 32:8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 나누다는 것이 갈라짐인 “다아메리조”이다.
오순절에 혀들이 갈라졌다. 갈라짐 “다아메리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열방을 돌아 오게 하는 수단인 위임을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배분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소동함은 “쉰케오”이다. 소동함은 “쉰케오”는 바벨탑의 사건에서 나오는 단어이다. “자 우리가 내려 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여기서 혼잡케 하다는 것이 헬라어로 소동함은 “쉰케오”이다. 열국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곳이 바벨이다.
이들이 성령의 멧세지로 말미암아 열국을 다시 예수님의 소유가 되도록 다시 부르시는 것에 소명을 받았음을 말하는 단어이다.
이제 이 소명을 받고 사도행전 1: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과 성령님강림의 사건의 의미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열방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위임을 받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열방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35 하나님의 아들들과 아브라함의 자손
성도와 새벽별의 의미란?
온 인류가 여호와의 지상 가족이 되어 여호와 그의 천상가족과 협력하여 통치하는 것입니다.
베벨의 반역사건이후 열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을 박탈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새로운 출발을 도무하였습니다. 열국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제자들에게 위임하면서 상속권을 박탈 당하였던 이방인들이 이제 참 하나님의 공동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엡 3:6 “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기업에 대한 지분은 아담과 하와가 세상을 에덴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엡 1:18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섬함이 무엇이며”
성도라는 단어는 거룩한자들 “하기오”라는 단어입니다. “하기오”는 거룩한 자들 가운데 영광스러운 기업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자들” 여호와의 천상회의에 참여한 신적 존재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욥 5:1, 15:15, 시 89:5-7 슥 14:5) 여기서 “케도쉼”입니다. 엡 1;18절에서 “하기오이” 거룩한 자들로 옮겨 쓴 것입니다.
시편 2:7-8 “내가 이방 나라를 에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우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고 다스릴 권한을 상속 받은자들입니다.
계시록 2:25-28절 “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런데 요한 계시록 2:28절에서 우리가 새벽별이라는 표현을 접하게 됩니다.
새벽별은 구약에서 신적인 존재들을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욥 38:7)
별은 하늘에서 움직이며 인간 영역을 넘어선 곳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28절에서 새벽별은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새벽별은 유다로부터 나올 한 신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24:17절에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종합하여 볼 때 새벽별은 메시야가 다스리는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가 밝아 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2:16“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 이라”
그런데 이 새벽별을 이기는 그들에게 주리라 (계 2:28)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공동으로 통치할 권한을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36 엘로힘보다 못하게 하시며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요일 3:1-3)
37 전쟁을 의미한다.
사탄은 하나님여호와에 의해 지배권을 부여 받았음에도 부패한 통치를 일삼으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불충을 저질렀다.
파트 8 아직 완성되지 않는 왕국
단원 요약
39 최후 평결
다니엘은 유배기간에 천상회의 장면을 환상으로 목격을 한다. 단 7장의 내용이다. 넷째의 짐승이 망해야하고 다른 짐승들이 명말을 이를 때 사탄들의 재배의 세력이 줄어 든다는 것이다.
시82편도 배경이 포로기이다. 열국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며 열국을 지배하는 사탄은 쫓겨난다.
이사야 40장도 예수님의 오심으로 왕국의 회복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지점에서 승리를 하고 그 이후로도 승리를 하실 것이다. 열국을 되찾고 에덴을 복원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지만 그 나라는 아직은 미완성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경헌하지 못한 영광의 지상의 장막이다. 우리의 참모습이 되는 과정중에 있다. 그 참모습이란? 여호와의 신 인간 자녀이자 여호와의 권속의 회의에 있다. 이것은 계시록 4-5장을 통해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을 였볼수가 있다.
계시록4-5장은 천상회의 장면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은 신적 존재가 되는 인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록 6:9-11절은 순교한 자들이 신적인 인간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순교한 자들이 장로들에 대한 묘사 이후에 옷을 받았고 그때는 장로라고 칭함을 받지 않는다.
천상회의 목적은 삼중적이다.
1)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계 4:11,5:11-12)
2)어린양의 승리를 축하하고(계 5:1-5) 어린양의 승리로 메시야를 따랐던 자들이 이들이 그땅에서 왕노릇 하게 만득 사건을 말하기 위하여서이다.
3)일곱번째의 인땜(계6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최후의 지상의 심판의 시작점이며, 여호와께 충성한 거룩한 자들 및 거룩한 자들의 백성들과 그 주권을 함께 나우는 다니엘 7장의 만남이 있는 삼중적인 목적이 있다
40 북방의 대적
고대의 짜폰산은 신령한 산으로 바알이 가나안 만신전의 신드을 다스릴 때 회의를 소집하는 장소이다.
가나안 지역에서 바알보다 서열이 높은 자는 엘 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상을 군사적인 구원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이유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다시 규합함과 위대한 메시야 목자 왕의 출현에서 볼수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열방이 돌아 오게하는 사건의 시작을 오순절의 사건으로 시작을 한다.
유월절 사건때와 오순절 사건은 성육신한 여호와인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여 성령과 새언약에 따른 상속자들이 열국을 되찾는 일이 성취된다.
바산은 영적 전쟁의 중심지이다. 죽은 자 흑암의 주 바알 세불이 패배를 한다.
41. 집회의 산
아마겟돈의 전쟁과 성도 의미란?
요한 계시록 19:11-21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 수있는 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땅에 재림을 할 때에 짐슴, 즉 적그리스도를 무찌르고 아마겟돈 충돌을 종식시킨다는 것이다.
계시록 16:16절에 그의 결정적인 사건이 아마겟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계시록 16:16 “ 새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이 모으더라.”
아마겟돈은 히브리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헬라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요한이 말세 전투의 절정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올바른 용어는 “하르마게돈”이다. “하르-마게돈”
“하르”는 하르산을 의미한다. “마게돈”은 무엇인가? 두자기의 의견이 있다. 첫번째는 “므깃도”라는 전통의 의견이다. 그러나 고대에 “므깃도”라는 산은 없었다.
스가랴 12:9-11절은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평야 하르다림몬에 있는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이것은 무깃도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열국이 목격할 최후의 전투의 장소가 예루살렘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데 “므깃도”를 예루살렘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두 번째는 니사야 14: 13절 “ 내가 자뽄의 정산에 있는 집회의 산 (하르 모에드) 위에 앉으리라.” 하르 모에드가 천상회의 거처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저가 여러 가지의 근로 볼때 “아마겟돈”은 열국이 여호와 천상회의가 열리는 장소인 시온산 즉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이 성취되지 않게 하기위하여 마지막으로 벌이는 처절한 몸부림의 장소 십자가에서 사탄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소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근거는 스가랴 12:9-11절에서 여호와는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을 한다. 그발이 감란산에 서실것이요 라고 말한다. 이러한 장면이 요한계시록 19:11-16절에서 아마겟돈의 절정의 내용과 스가랴서의 내용과 일치하다는 것이다.
성육신 하신 여호와가 인간의 몸의 형체를 입으신다. 그리고 그는 천상의 군대를 거느리신다.
그런데 결정적이 아마겟돈의 전쟁의 시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루살렘이 될 것이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열국을 돌아오게 하는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아마겟돈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2:26-2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열국을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하고 열국을 다스리는 신자를 가리키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성령을 받고 천상의 군대 천상회의에 일원이 되어서 열국을 다스리는 사탄들을 우리 발앞에 복종시키고 사탄들이 인간처럼 죽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그날에 천사들을 신판을 하게 될 것이다.. (고전 6:3)
그런데 이 전쟁이 언째 끝나는가?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재림을 할 때에 짐슴, 즉 적그리스도를 무찌르고 아마겟돈 충돌을 종식시킨다는 것이다.
42. 형언할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하늘에 속한 몸이란?
고린도 전서 15장 35-53절
우리의 구원 받은 성도의 몸은 하나님을 몸으로 반영하는 존재로 디자인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함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35-53절에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을 입는 다는 것이다. 의 진짜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늘의 신령한 몸”의 진짜의 의미가 무엇일까?
신자들이 고린도 전서 15장 45-49절에서 “하늘의 둘째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늘의 둘째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 의 진짜의 의미가 무엇일까?
바울 시대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별과 별의 유사한 존재가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별은 신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신적인 일원으로 간주 되었다. 성도가 부활하여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은 표현을 별과 별의 영광과 달의 영광과 해와 같은 영광으로 부활의 형체가 변한다는 것이다.
어러한 사상은 이교도에서 가져온 죽은 영혼의 사상이냐? 아니다. 이미 다니엘 12:2-3절에서 말씀하였다. “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볓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예수님도 마태복음 14:43절에서 “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말씀하였다. 그리고 마17:2절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의 산에서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러한 것을 볼 때 “하늘의 신령한 몸”의 사상은 이미 성경에 있었던 사상이다.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부활 후 소유했던 몸과 동일한 몸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성령과 하나 되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하나 될 것이다.
고전 6:17절 “ 주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 되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빌 3:2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영광의 몸 이며, 땅에 속하면서도 땅에 속하지 않는 몸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지금 성령과 하나 되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하나 될 것이다. 이것이 보자 되어 있다.
그런데 성도는 요한 계시록 21:7절 하나님의 아들 됨과 악을 이기고 열국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 이기는 것과 열결되어 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시록 3:5절에서 “이기는 신자들은 힌 옷을 입을 것이요.”
계시록 3: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우리는 지금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려움도 이기고 고난도 이기고 세상을 이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상상하여 보라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부활 후 소유했던 몸과 동일한 몸을 가질 것에 대하여 말이다.
현미경으로 보는 작은 세계와 망원경으로 보는 바깥 세계.
그리고 현미경과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세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인간의 시각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 현미경으로 보는 작은 세계와 망원경으로 보는 바깥 세계. 그리고 현미경과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2011년 제 52회 한국 출판문화상 교양 부문 저술상을 수상한 이론 물리학자 이강영 박사의 두 번째 책인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현대 물리학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세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자, 중성미자, 쿼크를 지나 블랙홀, 암흑 물질, 다른 차원까지. 현대 물리학이 그 존재를 확인한 여섯 주제를 통해 우리는 “본다”라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1.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아름다운 물리학의 세계
인간은 정보의 대부분을 시각에 의존하며, 눈에 보이는 것은 존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분법적인 판단을 쉽게 내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만약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존재를 알아 볼 수 있을까?
지난 수 세기 동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더 작은 세계를 보기 위해 현미경을 만들어 미시의 세계를 탐험한 사람들과 관심을 무한한 우주로 돌려 망원경을 만들고 더 넓고 광대한 바깥 세계를 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우리는 이들의 노력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현미경으로도 또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2. 물리학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입자 물리학의 세계를 다루며,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기구를 통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던 두 세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던 작은 세계는 현미경이라는 발명품을 만든 사람들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너무 멀리 있어서 볼 수 없었던 바깥 세계는 망원경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부에서는 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더 작은 세계를 다룬다. 원자, 중성미자, 쿼크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더 작은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과학자들은 이론의 벽과 함께 자신의 고독과도 싸워야 했다. 3부에서는 망원경을 통해서도 볼 수 없는 더 바깥 세계를 다룬다. 블랙홀, 암흑 물질, 다른 차원을 통해 21세기 현대 물리학이 다루고 있는 최신 연구 성과들을 소개한다.
현직 이론 물리학자가 이야기하는 이론 물리학의 세계는 우리가 마냥 어렵게만 느꼈던 현대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수식 없이(수식이 없다고 해놓고 어렵게 서술한 그런 책들과는 진짜 다른!) 역사와 인물을 통해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3. 이제, 당신의 “본다”라는 개념이 달라진다
현대 물리학은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무엇을 볼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은 이론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혹은 새로운 지식이 필요한 것일까?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원자, 중성미자, 쿼크, 블랙홀, 암흑 물질, 다른 차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존재들이고, 따라서 소박한 고전적 관점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들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방법을, 즉 현대 물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본다.”라는 것의 의미가 무한히 확장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4. 저자, 책을 말하다
▶ 21세기 초 물리학계 최고 화두였던 CERN의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를 다룬 이후 두 번째 책을 내셨습니다. 두 번째 책으로 이 책 <보이지 않는 세계>를 쓰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를 쓰게 된 데는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를 쓰면서, 입자 물리학의 세계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입자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아니, 입자까지 가기 전에, 원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과학자가 아닌 사람에게 원자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이런 얘기를 꺼내 보았더니, 사람들도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더군요. 입자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 질문이 훨씬 더 복잡하고,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서 쓰게 되었습니다.
▶ 사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않더라도 일반인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이는 세계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하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계들을 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책에 소개된 여섯 주제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에 무엇이든 “해야 할” 이유란 게 있을까요?
기초 학문이란 인간의 지식을 늘리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하는 일이지요.
이 책에 소개된 주제들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모두 다릅니다. 각각은 물리학에서 지금 현재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지요. 그래서 이 책은 본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물리학의 여러 중요한 개념들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즉 인식론을 깊이 생각하려면, 본다는 것이란 결국 물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물질세계에서 본다는 일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도 물리학자가 이런 지적을 해 두는 일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과학자, 특히 물리학자들에게 있어 “본다.”라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특히 입자 물리학의 경우, 우리가 보는 대상,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수준에서 반성하고 숙고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거지요.
▶ 과학자로서 저술을 하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책을 집필하셨는데요, 앞으로도 꾸준한 집필을 하실 계획이신지요? 선생님께 있어 책을 집필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꾸준히’가 될지는 모르지만, 쓰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쓸 생각입니다. 실제로 책을 써보니 책을 쓴다는 것이 무엇보다 제게 굉장히 크고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리학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특히 물리학을 이해하는 일 자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즉 물리학에 대한 일종의 메타-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할 때, 언제나 일어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가장 가혹한 배움이다”라고 했겠지요. 책을 진지하게 쓴다는 것은 저 자신을 지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무엇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 교보문고
출처 : 헬로디디(http://www.hellodd.com)
인간현상
테야르 드 샤르댕 [양명수 옮김]
인간은 마지막 정신적 통일체를 향해 정신적·사회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과학과 그리스도교를 혼합하여 인류의 서사시는 '십자가의 길'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지질학에 관심이 있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테야르 드 샤르댕은 예수회의 몽그레 칼리지에서 10세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정규과목뿐만 아니라 지질학에도 몰두했다. 18세 때 엑상프로방스에서 예수회 수련수사가 되었다. 24세 때 카이로에 있는 예수회 칼리지에서 3년간의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1911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지만 파리의 가톨릭대학에서 가르친 뒤 1923년 고생물학과 지질학 연구 임무를 띠고 중국으로 첫번째 파견을 나갔다.
1938년 자신의 기본 저작 〈인간현상 Le Phénoméne humain〉(1938~40)의 초고를 완성했다. 진화를 완성되지 않은 과정으로 보았으며, 진화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들을 새로 만들었다.
'우주발생'(cosmogenesis)은 인간이 중심인 세계의 발전,
'정신발생'(noögenesis)은 인간정신의 성장,
'인간화'(hominisation)와 '초인간화'(ultra-hominisation)는 인간화의 단계를 가리킨다.
〈인간의 상황 L'Apparition de l'homme〉(1956) 같은 철학 에세이들과 주로 포유류의 고생물학에 관한 과학연구서들이 있다.
미국으로 갔다. 생애 마지막 몇 년을 뉴욕 시 웬너그렌 재단에서 보냈고, 이 재단을 위해 남아프리카로 2차례의 고생물학·고고학 탐사여행을 했다.
샤르댕의 인간 형상
대략적 요약
근대 세계의 인식의 문을 연 과거 데카르트는 인간의 '생각함'을 주제로 내세우면서 중세 신앙이 갖고 있던 사유의 벽을 깨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촉발시키는 그 철학적 근거를 세웠던 점을 알게 한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를 이원적으로 보는 인식의 이러한 흐름은 과학과 종교를 점차 분리시키면서 그 골을 계속 깊어만 가게 했다는 점을 참고해 보면 21세기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새 패러다임을 제시한 샤르댕은 물질을 말하는 과학의 비 물질성을 또는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 에너지(얼)의 물리적 생물학적 작용을 펼쳐 보이며 우주는 정체적이고 불변적으로 정지한 우주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상에 있는 역동적인 우주를 알게 한다는 것에 이해를 갖게 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인간현상' 이다.
태초에 우주가 발생하고 태양의 파편으로 부터 나와 형성된 '젊은 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성하면서 생명 현상을 출현시킨다. 그는 본래 무기물계와 생명계라는 두 세계는 원래 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단 세포 단계에서는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 불분명 하듯이 이것이 낮은 단계에서는 모호하고도 희미한 존재로 있었을 뿐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이른 생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사물의 바깥만을 살피는 자연과학으로 볼 때에 그것이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적어도 세포가 출현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른 생명'이 '생명'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팽창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계통수의 생물을 번식 시키고 영장류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인간현상'을 태동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이 조용히 등장한다. 그것은 곧 '생각'의 등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대상으로 놓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헤아릴 줄 아는 '반성'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 진화의 흐름은 정신의 적극적 진화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얼누리'(=정신계)의 형성이라는 것이다.
얼의 보편적인 진화는 이러한 얼을 하나로 수렴하는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마다의 무수한 생각의 알갱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각 덩어리로 합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미래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진화의 궁극 점에 이르러 '큰 사람'의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체의 특성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을 말한다. '생명'이 낳게 되는 '다음 생명'은 이와 바로 관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샤르댕은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만이 '사랑하는 것'의 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이란 다름 아닌 '나'와 타자가 조화롭게 하나 되는 욕구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 즉 '중력'이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만을 말하며 이에 상응하는 사물의 안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서 결국은 '큰 사람' 이 될 수 있다. 중력은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 에너지야 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으로 이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그 자신의 불안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샤르댕이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나의 참다운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생존하는 그러한 정신의 합일점이 오직 내가 그리스도적 자아와 완벽하게 합일되는 차원인 것이다.
이것이 나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지평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똑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통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태동 될 것이며 우리 자신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하여 있을 것이다. 마치 분자가 결합하여 개체인 분자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포 하나를 출현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랑이 존재의 진화를 성숙케 하는 창조적 에너지라는 것을 알게 한다. 한편 이러한 진화를 말하는 그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기울여져 있는 듯 보이지만 인간의 비극적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치명적 독(毒)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곁들이며 말하는 것이다.
샤르댕은 오메가 포인트 성취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에 작동 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존재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분명히 '자율적인 중심점' 때문에 존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적 지평에서 연결되어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류의 미래는 나 자신의 책임성과 항상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메가는 우주가 최초로 진화했을 때 통일과 개성화의 자존적 궁극적 원리인 어떤 중심과 서로 만나는 점이다. 오메가는 인간이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불가역전(不可逆轉)의 최고 원리이다. 인류는 어떤 임계점을 지나 오메가와 결합되어 영구적이고 불가역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샤르댕은 오메가가 자존적인 현실적 존재라는 가정 아래 그것의 속성을 자율, 현존, 불가역전성, 초월성 등으로 규정한다. 오메가는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메가가 진화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가 오메가에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샤르댕의 오메가 개념은 바로 신 개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결국 샤르댕의 진화 현상론은 그리스도교의 바울신학과 상통하다고들 말하고 자연과학의 영역을 넘어서 믿음에서 오는 확신에 연결 된다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론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믿음의 철학적 연장이고 바로 이 믿음이 자기의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하는데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현상'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물질적 -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 영적 세계와의 종합이고 과거와 미래의 종합, 다양성과 통일성의 종합과 또한 다(多)와 일(一)의 종합으로 '인간현상'은 3중의 종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 요약한다. 그의 '인간현상'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이른 생명”= '생명 출현 이전'에서 사물의 궁극적 기초적 실재가 내포하는 속성들로 복수성, 통일성, 에네르기, 조직, 양, 전체성,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정신계와 물질계로 양분하는 실재의 두 존재 양식이 사물의 기본적인 속성 속에 내재된 내면성과 외면성의 두드러짐이라고 한다.
제 1장 우주의 바탕=1.기초물질, 2.전체 덩어리 물질, 3.물질의 변화
제 2장 사물안= 1.존재 2. 질의 성장법칙. 3. 얼 내너지
제 3장 청년 지구=1. 밖 , 2.안
제2부는 생명= '생명 단계'를 다룬다. 물질 구조가 어떤 임계(臨界)점에 이르면 생명의 출현이라는 창조적 진화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물질 진화의 1단계는 분할할 수도 없고 형체로서도 정의할 수 없는 빛나는 단순성 곧 시원적(始原的) 준원자(準原子)가 있다는 것이며 진화는 가산되는 요소들이 유기적 결합을 가속화해 가면서 단백질과 핵산의 화학 반응과 화학적 중합을 거쳐 생명의 기초 재료인 원형질로 생태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생명은 다양화하고 유기적으로 복잡화해 가면서 환산되어 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생명 진화의 임계점에서 생각하는 힘인 '의식' 인 곧 반성적인 사유의 능력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제 1장 생명의 출현= 1. 생명의 발걸음, 2.생명의 첫 출현, 3. 생명의 계절
제 2장 생명의 평창= 1. 생명의 기본운동, 2. 생명 집단의 가지치기, 3. 계통수
제 3장 땅-어머니 1. 실마리 2. 의식의 상승, 3. 때가 다가옴
제3부는 생각= '사상 곧 생각의 출현'이다. 개체 인간이 인간화해 가고 생물학적으로 인류라는 종(種)이 인간화해 가면서 지구의 표면에 정신권이 형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 정신권은 자율적 내면 진화를 가속해 가면서 현대 서구 문명에 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3부 생각
제 1장 생각의 등장 = 1. 반성의 발걸음 2. 첫 모습
제 2장 펼텨지는 얼누리 = 1. 이른사람 가지들 2. 네안네르탈인 다발 3. 호모사피엔스 4. 신석기의 변화 5. 신석기 시대의 연장 그리고 서쪽의 상승
제3장 현제의 세계= 1. 진화의 발견 2. 처신의 문제
제 4부는 다음생명= '생존을 위하여'이다. 반성적 사유 능력의 출현은 곧 인간 출현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사유는 집단화, 거대화해 가면서 집단적 초일류를 형성해 가면서 지구라는 생명체는 우주를 인격화시켜 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은 한번 인격화하면서 익어가는 과일처럼 오메가를 지향하는 지구 생명의 최고 에네르기라 한다. 여기에 인간 형성의 본질이 다루어지고 기독교라는 종교 현상의 의미와 진화하는 세계 속에서 악의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악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고 요구되는 주체의 속성의 결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악을 피조물의 불안전성으로 보며 더욱 고차적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피조물의 불안전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피조물의 불안전성 때문에 세계 내 악의 존재는 불가피한 것이며 진화의 계속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악을 존재로 보는 것이다. 세계의 최종적인 질서가 실현되어 완성을 보게 되는 날 인간이 겪는 모든 악 - 재난, 고통, 죽음, 수고 등과 같은 진화의 필연적 부수물이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악에는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것, 즉 죄악도 있다고 한다. 샤르댕은 물질계(무생물계)에서는 물리적 부조화(분열)로, 생물계에는 재난으로,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영역(인간)에서는 죄로서 악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이 범하는 죄악은 늘 자유가 전제되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이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가피한 것이고 죄악은 어느 한 개인만이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모두가 저지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 1장 집단 출구 = 1. 생각의 융합 2. 지구의 얼
제 2장 집단을 넘어 : 큰 사람 =1. 사사로운 것의 수렴과 오메가 포인트 2. 사랑의 에너지 3. 오메가 포인트의 특성
제 3장 = 넘겨짚지 말아야 한다. 2. 접근. 3. 끝
샤르댕의 인간 형상요약
제1부 “이른 생명”= '생명 출현 이전'
제 1장 우주의 바탕
1.기초물질,
서로 얽혀 있으며 어마어마하게 활동력이 있다.
물질에는 세 가지의 모습이 있다.
1) 수없이 여럿이다.
생물체나 천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모레시장의 모래와 같다.
2)쪼개고 나눌수록 물질은 원래 하나임을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된다.
물질이 하나라는 것은 서로 똑같음을 가리킨다. 무언가가 원자를 묵어준다. 공간은 수많은 여러 원소들이 가고 오는 활동의 자리이다. 원자들이 모이고 결합되어 하나의 물질이 된다. 개별의 입자의 중심에는 그들의 중심을 감싸는 무엇인가가 있다.
3) 에너지 물질의 세 번째의 모습
에너지는 한 원자가 다른 원자로 변화되며 일어나는 것이 척도다.
2.전체 덩어리 물질,
우주의 바탕은 조각을 낼수가 없다. 나눌 수 없는 유일한 실체를 이루고 있다. 우주는 강력하게 합쳐지는 힘으로 뭉친 하나의 조각이다.
1)조직
우주를 이루는 구성요소 하나 하나는 다른 요소와 기미줄처럼 얽혀 있다. 구성은 신비한 형상이다.
2)전체 덩어리
불질을 커가면서 내용의 반복이 없다. 물질은 아주 작게 작은 단위의 모임이다. 분자들의 단단한 연합이다.
3) 양자
우주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의 행동반경이 우주 끝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우너자는 작은 세계가 아니다. 아주 작으면서도 세상 전체의 중심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 양자는 자연의 운동 지속과 연관시켜야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3.물질의 진화
전에 덩어리와 양자의 정체는 우주의 탄생에서 찾을 수가 있다.
1)모양 -엄청나게 다안한 구성체들이 생기고 분자들의 집합이 어떤 수준에까지 오르면 이제 생명이 나온다.
2)수량법칙
물질의 변화가 수량계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물리학 성질이 변할 때 새로운에너지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리 화학 차원의 변화에는 열 열역학이 발생하여 가용 에너지의 일부가 반드시 ‘엔트로피’로 된다. 다시 말해서 영의 형태로 사라진다.
진화의 현실에서 보면 합쳐지고 통합할 때에 반드시 뭔가가 종합의 대가로 소모된다.
제 2장 사물 안
물질에는 안이 있다. 안은 양과 질에서 우주 에너지의 발현과 관련이 있다. 세가지 부분으로 이룬다.
1.존재
모든 존제는 모든 질량은 그 속도에 따라 변한다. 모든 물체는 방사한다. 의식은 사라에게서만 나타난다. 그런데 의식을 들여다 보면 우주로 뻗어 있고 공간과 시간으로 부한 히 연장된다.
“만일 신경 안에 있는 수십억 개의 세포들이 협력하여 우리의 의식을 이루어 낸다면 모든 사람 또는 일부가 협력할 때 콩코드가 말하는 초인과 같은 큰 존재가 생길수가 있다. [오메가 포인트]
2. 질의 성장법칙.
물질이 막 생겨날 때부터 안이 있다., 이른 생명의 단계에서 안은 영속되는 덩어리를 이루지 못하고 물질처럼 입상화 되어 있다. 총 에너지에 의해서 그들 사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주의 두 얼굴인 안과 밖은 하나 하나 정확하게 서로 화답한다.
우주가 단순한 물질 원소들이 수없이 모여 이루어진 A상태에서 복잡한 집합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B상태로 옮겨간다고 보면 발전법칙을 제대로 간파한 것이다.
3. 얼 에너지
우리의 행동이 물질의 힘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으며 얼마나 독립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먹어야 생각하는가?얼의 활동에는 물질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질 어너지와 얼의 에너지는 어떤 무엇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된다.
모든 에너지는 기본으로 얼의 성질을 지닌다. 기초 에너지는 두 개의 구성체로 나뉜다.
하나는 탄젠트 에너지-단단하게 결합하는 에너지
다른 하나는 방사에너지-더 복잡하고 더 집중된 상태를 향해 앞으로 끌고 가는 힘이다.
제 3장 청년 지구
옛날에 청년지구가 어떻게 막강한 탄생력을 가지고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도록 한다.
1. 밖 ,
우주 집단 속에는 지핵권 암석권 수권 대기권 성층권 이런식으로 이루어졌다.
지구 화학이 두방향으로 나누어 발전하였다.
1)결정체 세상- 지구의 에너지가 처음부터 발산되고 텨져나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구에서 생긴 최초의 집단은 지금껏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기하학 구조로 되어 있다.
2)종합작용-지구상의 원소들이 결정체가 되면서 에너지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자유에너지가 되었다. 방사성 물체의 원자가 붕괴하면서 자유 에너지는 증가한다.
2.안
지구의 물질안에 지초의식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젊은 지구는 최초 하학 구성부터 그 전체가 말할수 없이 복잡한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지구가 태어날때부터 안에 일정한 양의 이른 생명을 품고 있었다. 물 공기속에 미세한 단백질 알겡이가 있다. 수 없는 입자속에 원시의식의 조각이 어떤 통일성 밑에 연결되어 있다.
제2부 생명= '생명 단계’
제 1장 생명의 출현
무기물계와 생명계 우 두세계는 결국은 한몸이다.
살아 있는 원형질과 죽어 잇는 단백질 사이에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무엇이든지 덩치가 커지면 갑자기 그 면모와 성질이 바뀐다.
인계점, 상태의 변화, 경사위에 이루어진 평평한 층계참, 이렇게 해서 발전중에서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
1. 생명의 발걸음,
진정한 생명은 세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세포는 생명의 극소단위이다.
세포는 미생물 원생명으로 보았다.
바이러스- 세포가 아니지만 생명체와 접촉하여 번식하는 능력 같은 것을 볼 때 이미 유기체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른 생명에 이르기 전에 미생물과 거대 분자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신간과 공간의 결합된 어떤 환경은 물질과 생명체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생물학의 시공간속에 어떤 새로운 시대를 설정하면 지속의 축을 그만큼 늘여야 함을 뜻한다.
세포는 단일하면서 복잡하다 이러한 이유는 우주바탕에 있던 특성이 나타난 샘이다.
이른 생명의 이른 의식에 있어서 생명체의 의식으로 가는데는 분명 도약이 있는데 그도약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존제가 내면을 가지는데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안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활동 곧 의식의 움직임이다. 분자에서 새포로 옮겨가는 것 곧 생명의 발걸음은 우리는 그러한 이중변화로 설명할수 있다.
2.생명의 첫 출현,
1)환경-지구는 큰 대양이 덮고 있을 것이고 화산이 커니며 대륙이 돌출하기 시작하였다.
2)크기와 수- 우주에는 크기와 숫자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크기가 작을수록 그 수효가 많다.
3)수효의 기원-조상이 하나인가? 아니면 같은 계통이 다발로 나왔는가?
3. 생명의 계절
수십억년전 극소 미립자의 경계 구역에서거대 분자가 세포로 변하는 신비한 변화가 시작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가 우리도 무르게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상 무기물로부터 원형질이 직접 형성되는 일을 오늘날에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변화가 오래 전부터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면 우리 미래는 물론이다ㅗ 과거에도 완전히 샐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포 혁명은 진화 곡선위에서 하나의 임계점이요 발아점으로서 둘도 없는 순간이다.
우주는 단한번의 핵과 전자들이 출현했듯이 지구에 단 한번 원형질이 출현한다.
동시에 최소한 생명체도 세대를 거쳐지면서 형성되는 까닭도 설명된다.
생명의 현상을 지상에서 주기를따라 알어나는 사건들과 별개로 놓고 지구 진화의 지표로 봄으로써 우리의 가치 감각이 달라지며 세계관이 새로워진다.
생명은 탄생한수 고독한 박동으로 퍼저나간다.
제 2장 생명의 평창
1. 생명의 기본운동,
1)생식
생물권이 지산을 덮은 과정의 밑에는 생식이라고 하는 생명활동의 정형이 있다. 새포가 한번 생겼다하면 나누어져 분열번식이든 유사분열이든 비슷하게 생신 새로운 새포를 낳는다.
생존번식이었던 것이 즉각발전과 정북의 도구로 바뀌게 된다. 처음에 생식은 자기 방어를 위하여 생식을 시도한다.
2)번식
새포 분열은 일어 날수록 더 강해진다.
3)혁신
어미세포는 줄로 나누어진다. 분산되지 않고 번식한다. 생명체는 명백한 번식의 중심이면서 또한 다양함을 일으키는 실체이다.
4)집합
사실 암수 없는 생식활동은 낮은 단계의 유기체나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 가운데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하나의 개체가 무수한 생명 씨앗이 될 가능성의 문이 열였다.
5)무리짓기
세포들은 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자연에서는 모든 단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살아 남아 생식에서 생긴 것들의 퐁합과 종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6)어떤 쪽으로 쌓아 올리기
결국 지상에 유기체는 퍼저나가는 것이다. 똑같은 평면위에서 퍼지고 흩어지낟. 일정한 방향으로 더해져 나가는 법칙을 생물학에[서는 전향진화라고 한다.
2. 생명 집단의 가지치기,
전체로 보자면 생명은 앞으로 나가면서 분화한다. 스스로 여러계층으로 나뉜다. 가지치기를 한다. 세포의 유사분열처럼 거대한 생명집단은 반드시 가지치기현상을 일으킨다.
1)성장집중- 성장집중이란? 기화가 주어졌든데 복잡하게 얽히는 것이 가장 두려운 바로 거기서 단순한 유형이 번져 새롭고 예기치 못한 사실을 가리킨다.
2)성숙이 꽃핌
문은 꽤 오랜 기간 동안 자기의 자신을 더듬는다. 이때부터 변화의 리듬이 드려진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가 자리를 차지한다.
문은 집단체다. 문은 다형이고 유연하다. 문은 상당히 활발하다. 문은 퍼지는 각도 첫마디가 문을 결정한다.
3)세월의 효과
세월의 효과로 생명 가지가 늙거나 죽는 것과 관련이 있다.
3. 계통수
1)큰 혈통들
하나의 진화집단 단위를 이루는 포유류군
2)군의 군 제발짐승
포유류동물에서 시작하여 계통수를 더 밑까지 보려면 군으로 계상하여야 한다.
이 동물의 집단이 자기들의 고향인 물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점이다.
3)척추동물의 가지
4)나머지 생명
제 3장 땅-어머니
진화의 방향이 있느냐? 진화의 방향과 축이 있다.
1. 실마리
오랜 세월동안 생명체는 자기 기관의 수를 늘리고 기능을 다양화했다.
진화란 알고보면 얼 에너지 방사 에너지의 끊임없는 증가 자로 그것이다.
우리 눈으로 보이는 기계어네지 또는 탄젠트 에너지는 늘 일정한데 그 일정한 기계에너지가 뒤에서 끊임없이 증가하면 그것이 진화이다. 탄젠트 에너지 방사 에너지를 정돈이라고 했다.
신경조직의 변화에 방향이 있다는 사실을 진화에 어떤 방향이 있음을 입증한다.
2. 의식의 상승,
늘 더 큰 의식을 향해 생명의 물결을 밀고 가는 조류 신경조직이라고 불소 있다. 속에서 우리는 그 큰 운동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본다.
전형곡선이 아니라 소용돌이치는 나선형 곡선이다. 군에서 군으로 무언가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꿈틀 꿈틀 계속 자란다.
지구의 발생문제는 생물 발생 문제로 이어지낟. 그리고 생물 발생문제는 지체없는 얼의 발생문제로 이어진다.
생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요 계속 그렇게 나아가면서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심간한 재조정을 거쳐야한다는 점이다.
성장을 하려면 인계점 상태변화에 도달하게 된다.
3. 때가 다가옴
생명이 발전하는 것은 활짝핀 지구의 외투 밑에서 은밀하게 내적 에너지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1)곤충-신경구가 머리에 집중된다. 행동이 아주다양하고 섬세하다.
그 얼이 부족함이 두드려진다. 얼상태가 빨리 움직였다. 멈추는데 생긴다.
2)포유동물
포유동물은 자신의 출처에 묶여 있는 노예가 아니다.
3)연장류
연장류의 생물학적인 가치를 보면 직접 뇌가 발달하는 계통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얼이 상승하며 동시에 다른 부분은 곤충과 달리기와 사냥하는 도구로 묶여 버렸다.
제3부 생각 '사상 곧 생각의 출현
제 1장 생각의 등장
1. 반성의 발걸음
1)요소의 행보: 개체의 사람됨
본질- 사람은 내면이 드러나는 활동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형상이 ‘반성행위’이다. 반성행위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자신을 대상을 놓고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해아린느 능력이다.
반성으로 올라가는 힘은 생명이 다시 태어난것이요 다시 창조된 것이다.
본능이나 생각을 모든 활동에서 나오는 빛의 발산으로 본다.
세포속에서 얼의 온도가 올라간다. 유인원에서 100도에 이르고 거기에 열량이 더해졌다.
얼의 요소가 방사되어 사라지지 않고 내부적으로 어떤 골격을 갖춤으로써 더 강화된다.
이제 진화 운동이 생명체 안에서 끌고 가는 것은 산순히 얼의 요소가 아니라 생각이다.
제 2장 펼쳐지는 얼누리
얼이 얼 세계의 군들을 펼쳐나가는 샘이다.
사람의 역사는 모두 그처럼 조직된 팽창과 증식의 역사였다고 할수 있다.
1. 이른 사람 가지들
우리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의 무네로 풀어야 한다고 보았다. 얼의 불연속성을 지나텨 저릴 위험이 있다. 생각은 건축물이다.
2. 네안네르탈인 다발
큰 뇌를 보라 동굴의 손씨를 보라 처음으로 시테의 매장을 보라
아직 우리와 똑같지는 않았다.
3. 호모사피엔스
호모사피언스의 생각을 자류오웠다. 동굴의 벽에 생각을 쏟아 놓았다고 아직까지도 생새하다.
지질학적인 단전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됨이 근본적으로 솟아난다. 기후 탓이든지 아니면 얼의 힘을 좇아서든지 어쨌든 호노사피언스가 네안데르탈인 위로 거칠게 덮쳤다.
4. 신석기의 변화
발전이 한창 무르익어야 사회화가 나타난다.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끊기지 않는 큰 접합이 이루어진 것이 신석시대다. 조직화된 정창인이다. 따고 잡고 하는 대신에 기르고 티우게 되었다. 목자와 농부가 되었다. 전통이 생겨나고 집단적 기억이 생겨났다.
5. 신석기 시대의 연장 그리고 서쪽의 상승
사람의 역사는 나름대로 생명 운동의 연장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합리적으로이끌어져 가는 것 같다. 역사가 말하는 사회적 가지치기 형상은 여전히 자연사에 속한다.
제3장 현제의 세계
사람은 어느 시대든지 자신들이 역사의 전환점에 서있다고 생각을 하여왔다. 현대는 변화의 힘을 강하게 느끼는 시대이다. 역사의 전환점이라는 말이다.
18세기 끝 무렵 서구에서 생겨난 하고이다. 세로운 세상이라는 단어이다.
우리는 신석기의 시대의 마지막의 닷줄을 끊어 버렸다. 지금도 시대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새대가 변화되는 것에 따라 생각도 자뀐다. 그런데 윌는 몸뚱이는 별로 바뀌지 않으면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이 혁명인 변화는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가? 새로운 직관이 바라 그것이다. 다른 말로는 깨닳음이다.
1. 진화의 발견
1)시공간을 알게 됨
세상을 정복하려는 싸움에 공간이 있다. 공간의 정복이다. 지구의 중심에 보면 조직과 체계의 탄력성이 사라진다. 세상의 나선우동이다. 한바퀴 돌 때마다 거리는 더 멀러지고 그 깊이도 더 깊어지는 나선운동이 있다.
생물학의 도움으로 돌이킬수 없는 결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생명의 연쇄고리 그리고 이어서 물질의 연쇄고리를 알아 냇다. 조재를 빼면 생명의 전체의 그물이 파괴된다. 시간과 공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우주의 바탕을 짠다.
진화론은 변형론으로 생각을 한다. 모든이론 모든 가설 모든 체계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요 사실을 밝히는 빛이다. 그것이 진화이다. 의식이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고 있으며 그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타나생하고 있따는 점이다. 세상의 내면 바탕이 바뀌고 있다.
사람을 현대인으로 만드는 것은 공간과 시간뿐만이 아니라 지속이라는 생물학적인 시공간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2)지속에 둘러 쌓임
우리는 우리를 둘러
사고 있는 사물이나 사건으로부터 끊임없이 떨어지려고 하며 마치 그것들 일어나고 있는 실에 속한 한 요소라는 생각은 안하낟.
3)빛이 비침
우리의 작자의 의식 속에서 진화가 스스로 돌아보며 자신을 안다.
2. 처신의 문제
1)현대의 고민
변화의 고통이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할 수는 없다. 현대의 불안 심리는 무두 시공간에 갑자기 부딪힌 것과 관련이 있다. 먼저 가앚 일상적인 것으로 ‘시공간의 문제’가 있다.
제 4부 다음생명= '생존을 위하여‘
제 1장 집단 출구 = 1. 생각의 융합 2. 지구의 얼
제 2장 집단을 넘어 : 큰 사람 =1. 사사로운 것의 수렴과 오메가 포인트 2. 사랑의 에너지 3. 오메가 포인트의 특성
제 3장 = 넘겨짚지 말아야 한다. 2. 접근. 3. 끝
결론과 문제 제기
그의 신학 이론을 대략 살펴보면 창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무로부터 창조 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거부하고 창조의 알파 점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인간은 다만 창조에 있어서 최종 사실들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다만 창조의 최종 사실은 갑자기 터무니없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작용에 의하여 점차 진보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창조는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창조는 신의 동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물의 통일 과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및 구속 사건과 창조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면서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창조의 관점에서 재고하고 계시적 사건들을 우주 발생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는데 있다.
따라서 예수의 역사속의 삶이 진화과정의 한 부분인 동시에 완성이어야 하고 그리스도론적인 모든 사건은 어떤 형태로든지 진보에 준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관은 현상계의 진화의 임계점에서 나타난 인간은 스스로 최종적인 완성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오로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이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인간에게 취했을 때만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니셔티브와 인간의 응답이 서로 교통 가능케 하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그 분은 인간의 역사 현장에 직접 출현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샤르댕의 영성은 인간과 신과의 합일, 즉 성육신이다. 물질은 생명으로, 생명은 정신으로, 정신은 인간으로, 인간은 통일로 진화의 나선형적인 축을 따라 발전한다는 것이 샤르댕의 사상 핵심이다. 그는 인류의 진화 종국은 단순히 진화의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인간적인 노력은 물론 초자연적인 힘의 지배를 받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인류의 최대 성숙 점의 도달은 그리스도 재림의 필요요건이 갖추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인간성숙의 궁극점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존재 차원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실재로 동시에 일어나는 단일 사건이라는 말이 된다. 샤르댕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는 세계가 충분히 진화하고 준비 되었을 때 재림하신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탄생이 초자연적이듯이 재림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며 시계와 인류의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밖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은 변화와 재탄생인 동시에 일종의 죽음(진화의 종국)이며 종말로서 신과 세계는 하나의 유기체적 복합체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 동안 세계사는 인간이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종교적 물음, 즉 인간이 자신에서 출발하여 우주 자연에 대하여 신에 대하여 묻고 찾은 답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진행해 왔다. 신과 자연이 엄격히 구분되지 않는 선사시대나 고대, 정적이고 비판력이 박약하던 중세기에서는 인간의 기원이나 실존,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나름대로 흡족한 답을 가지고 왔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그런 답은 도전을 받게 된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전환되고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도 변화가 시작 되었다. 형이상학적인 모든 종교의 교의는 본격적으로 반박을 받게 되었고 후대에 이르러 그리스도교적인 계시의 실재성은 수 없이 추궁 당하였다. 영국을 무대로 성장해온 경험론은 찰스 다윈의 생물 진화론을 나오게 하고 그 진화론은 무신론적 유물론을 급성장 시켰다.
현대에 들어 와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절대기준이나 가치가 부정하는 가운데 상대주의가 만연에 이른 우리는 미래학에서 던지는 우주와 인간의 미래는 그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게 되었다. 이제 교회가 사회 내지 문화적 변혁에 대하여 어떤 입장이어야 하고 인간의 정신과 사회질서, 그리고 심리, 윤리, 종교상의 변화의 심각성과 위기를 보며 문제를 맞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샤르댕의 사상은 인간의 기원이나 실존,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얼마간의 답답증을 해소하여 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이 신 중심의 세계 운영에 인간이 수동적이고 현세 도피적인 사고방식을 지향하는 여지가 있었다면 샤르댕의 진화론적 해석은 신과 인간이 함께 이루어지는 세계이기에 인간이 안일한 태도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을 용납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샤르댕은 신앙인이기에 신은 신으로서 위치와 역할을 인간은 인간으로서 위치와 역할을 혼동하지 않고 알게 한다. 여기서 샤르댕에 대해 참고로 알 것은 그의 주장에 있어 근거 제시나 사변적 추론 없이 신의 존재를 그가 처음부터 택한 실증적 방법론과는 달리 등한히 신앙에 의탁하고 있는 인상을 갖게 한 점은 그의 주장에 대한 논박에 궁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함에 대한 생각도 갖게 한다.
그러나 샤르댕은 물질의 우연적인 진화는 바로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결부됨을 확실하게 주장한다. 성서문자주의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이 현대과학의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마냥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보거나 신을 부정한다고만 생각해 버리는 그 생각과 그 신앙의 판단이 문제 있음을 알게 한다. 이제 이러한 잘못은 근본적으로 과학이라는 편협한 이해 부족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 사르댕의 믿음의 고백이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우주천체가 하나님의 깃들임 속에서 찾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라는 말씀을 알게 한다.
모든 물질마다의 얼이 있고 그것은 진화과정에서 모이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 이르면 드디어 그 얼이 어떤 인계점을 넘어 새로운 차원을 창조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 하는 정신세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은 진화를 거듭하게 되며 진화의 종착역은 물질과 정신이 비로소 하나가된다는 오메가포인트라는 것이다.
오메가포인트(오메가 점의 이론)은 우주 진화가 최대한 이루어지는 지점을 뜻하는 용어이다.
먼 미래 우리 우주, 심지어 다중 우주를 넘어 문명이 극도에 도달하면 (오메가 포인트) 모든 우주들이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한 슈퍼컴퓨터와 같은 단계가 되어 그 매크릭스안에서 과거의 모든 사건과 존재했던 적이 있는 모든 존재들마저 부활 또는 재생성 시킬 수 있다는 개념이다.
진화론적으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이어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인간이며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인간만이 반성할 줄 아는 정신세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은 따로 가 아닌 동전의 양면이 되는 것이다.
태초에 우주가 발생하고 태양의 파편으로 부터 나와 형성된 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성하면서 생명 현상을 출현 시킨다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랑'의 점유적(占有的)인 입장이 아니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다. 포유류에도 모성애는 있으며 하찮은 미생물에게도 사랑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믿기지 않지만 사랑은 물질의 미세한 분자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낮은 단계로 갈수록 희미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에 사람은 흔히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란 나와 타자가 조화롭게 하나가 되려는 욕구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임을 말하고 이에 상응하는 사물의 안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 에너지야 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샤르댕은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으로 이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그 자신의 불안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하여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질의 우연한 진화는 필연적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며 샤르댕이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참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 정신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적 자아와 완벽하게 합일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즉 나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이 올 것이며 우리 자신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化)하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분자가 결합하여 개체인 분자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포 하나가 생기듯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진화론적인 과학 사상으로 신학과 철학의 이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학문적 근거에는 미비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로 전문적인 과학자의 눈에는 신비적이거나 사변적으로 보일 것이고 종교인이나 신학자의 눈으로는 신학 사상이라기보다는 불경적인 생물학인 진화론에 치중한 것 같을 것이며 철학자의 눈에는 생물학과 지질학과 기독론이 혼합된 것으로 보이기에 학문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우주를 보는 관점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든 그 뿌리는 우주 전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우주의 모든 관계는 그 어느 것도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우주에 단 한 번의 핵과 전자가 출현하여 수십억 년을 거쳐 서서히 진화해온 물질은 점점 조직화 되고 복잡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지구상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의 진화 속에서 '얼'(의식) 이라는 것이 항상 내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바깥은 물질의 복잡화로 나타나고 그 속에서 발현되는 사물의 안을 '정신'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사물에는 안과 밖을 가지고 있고 사물은 항상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총체적으로 이 우주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 성령론
초대 교회의 관심은 예수님의 기독론 논쟁이 주 관심사이다.
교부 시대는 삼위일체 등의 신론 논쟁이 주 관심사였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구원론 논쟁이 주 관심사였다.
현대는 칭의론과 성령론 논쟁이 주 관심사이다.
현대 칭의론의 대표논쟁은 존 파이퍼의 법정적칭의론과 톱 라이트의 유대주의 언약적칭의론이다.
현대 성령론의 대표적 논쟁은 주로 개혁파 계통의 성령론과 오순절파 계통의 성령론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오순절파의 성령론을 바로 이해하고 소화하고 흡수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령론을 주장하는 분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한번 다루어 보겠는 것이 좋을 듯하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중생(요 3:3, 5) -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의 영혼속에 심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령의 기본세례(고전 12:3, 13) - (로이드 존스는 고전 12:13에 니 난 성령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세례라고 하여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성령의 능력세례와 구분하고 있다.요한복음 1:33 참죄 -거듭난 영혼을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연합시켜(고전 12:13)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라고 부르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과 성령의 기본세례는 동일한 사건을 각각 다른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 교회에서 중생한 자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기본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령의 생활충만(엡 5:18) - 거듭나고 성령의 기본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지속적으로 온전히 받는 것” 이다.
성령의 능력세례(눅 24:49; 행1:5,8; 2:1-4) - 신자들이 성령의 생활충만한 가운데 살때 그들에게 특별한 사역을 수행시키기 위하여 능력을 부어 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로이드 존스가 본서에서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승천하신 주님께서 친히 부어주시고 오순절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통하여 계속 부어져 왔으며, 또 계속 부어짐으로써 각 신자와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령의 능력충만(행 2:1-4; 4:8,31; 7:55) - 특별한 사역과 위기의 때에 성령의 능력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능력이 충만히 임재한 상태이다. 이상의5가지 정의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살펴보면 잘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