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전쟁이 몇 번이나 언급되었나?


성경에는 전쟁이 몇 번이나 언급되었나?


  • 성경에는 전쟁이 400번 이상 언급되어 있습니다.
  • 성경에는 가나안 정복, 사사 시대의 분쟁, 왕정 시대의 전쟁 등 특히 구약성서에는 전쟁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종종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영적 진리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세상의 전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평화와 원수에 대한 사랑, 비폭력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접근 방식은 우리에게 갈등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을 넘어 더 높은 형태의 영적 성숙을 수용하도록 도전합니다.
  • 정당한 전쟁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신이 승인한 전쟁에 대한 구약성서의 기록과 평화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대조되는 등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사상에서는 전쟁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하려는 '정당한 전쟁' 이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기독교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과 타락한 세상의 전쟁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피할 수 없는 분쟁에서 윤리적 행동을 지지하며, 적대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인간성을 보려는 헌신을 유지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구약성경에 묘사된 주요 전쟁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형성한 전쟁과 갈등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상의 투쟁의 혼란 속에서 인간의 조건과 하나님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강력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정복입니다. 유명한 여리고 함락을 포함한 이 일련의 전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심리적으로 이러한 기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신성한 목적의식을 강화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모압, 가나안 등 주변 민족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주기적인 분쟁으로 점철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종종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여 적의 압제로 이어졌을 때 발생했습니다. 죄, 형벌, 회개, 구원의 순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깊은 영적, 심리적 역학을 드러냅니다.

왕정 시대에는 다윗과 블레셋의 갈등, 왕국 확장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을 겪게 됩니다.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 사이의 비극적인 내전은 내부 분쟁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것이 가족과 국가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된 왕국은 강력한 제국의 외부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기원전 722년 앗수르의 이스라엘 북부 왕국 정복과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유다 정복으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유배를 당한 사건은 유대인의 역사와 영성에 큰 영향을 미친 중추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성경의 서술에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적 정확성과 세부 사항은 학계의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영적 의미에 대한 경외심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텍스트에 접근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쟁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 하나님과의 관계, 선택의 결과에 대해 전쟁이 전하는 더 깊은 영적 진리를 생각해 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인간 분쟁의 비극적인 현실과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평화에 대한 지속적인 희망을 상기시켜 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전쟁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평화와 폭력,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도전하는 방식으로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이 주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 존재의 복잡한 현실과 신성한 사랑의 변혁적 힘을 반영하는 미묘하고 종종 역설적입니다.

전쟁에 대한 예수님의 가장 직접적인 언급은 종말론적 가르침의 맥락에서 나옵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쟁과 전쟁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겠지만 놀라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전쟁을 타락한 세상의 불행한 현실로 보셨지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로 보지는 않으셨음을 시사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일관되게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가르치셨죠. 또한 추종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태복음 5:44)고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종종 인간의 갈등을 특징짓는 폭력과 보복의 순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주장(마태복음 10:34)과 같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말씀과도 씨름해야 합니다. 이 역설적인 말씀은 문자 그대로 무기를 들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그 메시지의 분열적인 성격과 그것이 가족과 공동체 내에서 야기할 수 있는 갈등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자 예수님은 제자에게 "칼을 뽑는 자는 다 칼로 죽으리니 네 칼을 제자리에 꽂으라"(마 26:52)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순간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거부하셨음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공격과 자기 보호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경향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뺨을 돌려 대라고 요청함으로써 본능적인 반응을 넘어 더 높은 형태의 영적, 정서적 성숙을 수용하도록 도전합니다.

성경은 언제 전쟁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하나요?

언제 전쟁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오랜 세월 동안 신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성경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이 강력한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간단하고 명확한 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세상의 현실에 비추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해야 할 이야기, 율법, 가르침의 태피스트리를 제공합니다.

구약성서에는 신이 승인하거나 심지어 명령한 것으로 묘사되는 수많은 전쟁 사례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기록에서 "거룩한 전쟁" 또는 "야훼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는 특정 상황에서 전쟁이 신의 정의 또는 심판의 도구로 간주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텍스트가 쓰여진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인식하면서 매우 신중하고 겸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현대의 독자로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 속에 담긴 영원한 영적 진리를 분별하는 동시에 윤리적 도전도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도 신명기 20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전쟁 수행에 관한 지침이 있습니다. 이러한 법은 전쟁의 잔인성을 제한하고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시도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규정이 혼란스럽고 종종 비인간적인 무력 분쟁의 현실에 도덕적 틀을 부과하는 데 어떻게 작용했는지 심리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평화, 원수에 대한 사랑, 비폭력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모든 무력 사용을 명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는 에피소드(요한복음 2:13-22)는 예수님이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무력행사에 반대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통치 당국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범죄자에게 진노를 집행하기 위해 칼을 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종종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무력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신학자들은 이러한 다양한 성경적 관점과 씨름하며 '정당한 전쟁' 이론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같은 사상가들이 발전시킨 이 전통은 정당한 명분, 올바른 의도, 비례성 등 전쟁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하려고 시도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현대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현대 사회에서 전쟁의 본질은 성경 시대에 묘사된 갈등과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성경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의 렌즈를 통해 이러한 현대의 현실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현대 전쟁의 비극적 본질과 그로 인한 엄청난 고통에 대한 강력한 감각을 가지고 현대 전쟁이라는 주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현대 무기의 파괴력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데 있어 깊은 책임감과 긴박감을 느끼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 5:9, 44)은 전 세계가 상호 연결된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은 강력한 차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적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에 저항하고 적극적으로 이해와 화해를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중대한 악에 저항하기 위해 때때로 무력 사용이 필요할 수 있다는 현실과 씨름해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의 '정당한 전쟁' 이론은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발전했지만, 현대 분쟁에서 무력 사용을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원칙을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정당한 명분, 올바른 의도, 적절한 권한과 공개 선언, 비례성, 합리적인 성공 가능성 등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현대 무기의 전례 없는 파괴력과 현대 분쟁의 복잡한 특성으로 인해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민간인 사상자가 유감스럽지만 때로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 전쟁에서 '부수적 피해'라는 개념은 기독교 윤리와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특별한 도전을 제시합니다.

심리적으로도 현대 전쟁이 전투원과 민간인 모두에게 미치는 강력한 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현대 분쟁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악화되는 전쟁의 트라우마는 전투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상처를 돌보고 치유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글로벌 경제의 상호 연결된 특성은 전 세계 분쟁에 대한 우리의 공모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비 패턴, 정치적 선택,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세계 곳곳의 분쟁에 기여하거나 분쟁을 악화시킬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현실을 고려할 때, 기독교인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국가와 민족 간의 대화와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며 평화를 위한 끊임없는 옹호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평화적 분쟁 해결과 모든 사람의 인권과 존엄성 증진을 목표로 하는 국제기구와 노력을 지지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무력 사용이 유감스럽게도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윤리적 원칙을 가장 엄격하게 준수하고 민간인을 보호하며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지향점을 견지해야 합니다.

전도서에서 "전쟁의 때와 평화의 때"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전도서 3장 8절의 "전쟁의 때와 평화의 때"라는 강력한 말씀은 인간 존재의 리듬과 이 세상에서 신비롭게 작용하는 신성한 섭리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구절은 인생의 다양한 계절과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더 큰 시 구절의 일부로, 지상의 여정에서 기쁨과 고통의 측면을 모두 인정합니다.

이 구절을 고려할 때, 우리는 먼저 인간 삶의 복잡성과 명백한 모순을 다루는 전도서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이 구절이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솔로몬 왕으로 알려진 저자는 존재의 순환적 본질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 지혜의 한계에 대해 성찰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구절은 분쟁과 평화가 인간 경험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여겨졌던 고대 근동 생활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국을 세우고 방어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시기를 경험했고,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기간에는 평화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전쟁과 평화를 삶의 리듬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은 인간 경험의 전 범위를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분쟁의 가혹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동시에 평화의 가능성과 가치를 긍정합니다.

그러나 이 구약 본문을 읽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충만함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전쟁과 평화를 똑같이 유효한 '시기' 또는 계절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은 일관되게 평화와 화해,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우선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에서 전쟁의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시간'은 심각한 불의나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안타까운 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화의 시간'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화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시간이 됩니다.

현대의 상황에서 이 구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현명하게 분별하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는 외교와 대화, 분쟁의 근본 원인 해결을 통해 평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나요? 아니면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 사용을 통해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을까요?

전도서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인생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의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이 구절은 갈등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신뢰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최후의 승자는 전쟁이 아닌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사계절 내내 평화의 도구가 되어 증오가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서로,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평화인 하나님의 샬롬 비전을 실현하는 데 동참합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전쟁에 관한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초기 교부들, 특히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많은 교부들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우화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악에 맞서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의 예표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오리겐은 여호수아 강론에서 가나안 정복을 악과 악마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투쟁에 대한 우화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로마 제국의 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특히 콘스탄티누스 이후 일부 교부들은 정당한 전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성 어거스틴은 이 점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에서 전쟁은 비극적인 필연이며, 엄격한 조건 하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악한 사람에게 저항하지 말라"(마태복음 5:39)와 같은 구절은 국가 정책이 아닌 개인 윤리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터툴리안이나 락탄티우스처럼 일부는 비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인의 전쟁 참여를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평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밀라노의 암브로스처럼 특정 상황에서는 군 복무가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또한 구약의 호전적인 하나님과 신약의 평화의 왕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로 인해 씨름했습니다. 마르시온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긴장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레네우스와 같은 정통 교부들은 구약의 전쟁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교육적 계획의 일부로 보고 하나님의 계시의 통일성을 주장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해석에서 평화에 대한 열망과 갈등의 현실을 조화시키려는 인간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부들이 이 텍스트와 씨름하는 모습은 우리 자신의 내적 갈등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반영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해석은 교회와 정치 권력의 관계 및 폭력에 대한 접근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발전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전쟁에 대한 서구의 생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명령하신 예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가장 두드러진 예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는 여호수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여호수아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그 땅을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읽습니다. 흔히 '거룩한 전쟁' 또는 '헤렘'이라고 불리는 이 정복에는 가나안 도시와 그 주민들을 파괴하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명령은 남자, 여자, 어린이, 심지어 가축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현대 독자들에게는 특히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민수기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디안 사람들에게 복수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민수기 31:1-2). 이로 인해 다시 남자와 여자, 남자 어린이를 죽이는 군사 작전이 시작됩니다.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방 민족을 쫓아내라고 지시하는 구절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예: 신명기 7:1-2, 20:16-18). 이러한 명령에는 종종 이방 민족의 종교적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수반됩니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고대 이스라엘의 정체성 형성에서 어떻게 기능했는지 심리적으로 고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국가와 종교적 정체성이 분리될 수 없었고 공동체의 생존이 종종 위태로웠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텍스트는 부족 간의 전쟁과 땅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맥락에서 등장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에 대한 이해는 전쟁을 포함한 국가 문제에 밀접하게 관여하는 신에 대한 이해를 반영합니다.

많은 성경 학자와 신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일부로 해석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본문에서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하는 방식을 봅니다.

이 어려운 본문과 씨름할 때 우리는 단순한 해석에 저항해야 합니다. 대신 사랑의 해석학으로 접근하여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광범위한 성경적 내러티브 내에서 각 본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합시다. 또한 이러한 본문이 역사적으로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떻게 오용되어 왔는지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부르심의 렌즈를 통해 이 본문을 읽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평화와 화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항상 겸손한 자세로 이 어려운 구절들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전쟁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다른 고대 종교와 어떻게 다른가요?

신들이 변덕스럽고 종종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대 근동의 많은 종교와 달리, 성경은 전투의 결과를 통제하는 주권적인 신을 한 분으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일신론적 관점은 근본적으로 전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형성합니다. 신명기 20:1-4과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승리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종종 전쟁을 폭력의 미화가 아니라 신성한 심판의 한 형태로 묘사합니다. 특히 여호수아의 정복 이야기에서 가나안 민족이 악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장면에서 이러한 개념이 잘 드러납니다. 이 개념은 현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다른 고대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의적인 정복 전쟁과는 다릅니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평화의 이상을 향한 진전을 보여줍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전쟁 서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예언서에서는 점점 더 보편적인 평화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이사야 2:4, 미가 4:3). 이러한 종말론적 평화 비전은 고대 근동 종교들 사이에서 독특하며,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선포하는 데서 그 성취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 진행 과정에서 평화와 화해에 대한 인류의 깊은 갈망을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쟁 이야기는 이러한 큰 이야기의 맥락에서 읽을 때 인류를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평화로운 의도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 이끄는 신성한 교육학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많은 이웃 국가들과는 달리 상비군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의 이상은 전투 자체를 미화하는 전사 계급이 아니라 특정한 신의 명령에 응답하는 시민 군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성경이 전쟁에서 윤리적 행동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0장에는 공격하기 전에 평화를 제의하고 과일나무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하여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인도적인 전쟁 규칙이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비폭력과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고대 세계의 전쟁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이해를 더욱 변화시켰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지 논의해 왔지만, 이는 전형적인 고대의 태도에서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평화와 갈등 해결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성경은 평화와 갈등 해결에 대해 심오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모든 피조물로 확장되는 조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인 평화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온전함, 안녕, 올바른 관계의 상태를 포괄합니다.

성경의 시작부터 우리는 평화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인간, 자연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를 상징합니다.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은 이 평화의 회복을 위해 계속 일하시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절정에 이릅니다(이사야 9:6).

구약성서에는 평화를 추구하라는 권면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평화를 구하고 추구하라"(시편 34:14)고 촉구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천적까지 화해하는 궁극적인 평화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립니다: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인도하리라"(이사야 11:6).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시며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뺨을 돌려대며,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 5:38-48)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갈등 해결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실질적인 갈등 해결과 관련하여 성경은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예수님은 공동체 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직접 소통과 필요한 경우 더 넓은 공동체의 참여를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신자들에게 "서로 화평하게 지내며"(로마서 12:16)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3)고 촉구하면서 갈등을 자주 다루고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에서 인간의 본성과 갈등의 역학 관계에 대한 강력한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용서, 공감, 직접적인 소통에 대한 강조는 현대의 갈등 해결 기법과도 일치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는 말씀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초월하여 적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보도록 도전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성경의 원칙은 수많은 평화 이니셔티브와 분쟁 해결 노력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중세의 수도원 운동부터 현대의 평화 교회와 화해 사역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성경의 평화 비전은 불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일관되게 진정한 평화의 필수 요소로 정의를 요구합니다. 예레미야가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라고 외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 것처럼(예레미야 6:14), 진정한 평화는 정의와 진실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을 사랑하는 것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이 질문은 우리 신앙의 핵심을 건드리며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도전합니다. 적을 사랑하는 것과 전쟁의 현실 사이의 긴장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씨름해 온 문제이며, 깊은 기도와 성찰, 분별력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명령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마태복음 5:44). 이 가르침은 복음의 핵심이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반영합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 심지어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과 이웃과의 궁극적인 화해를 바라는 적극적인 헌신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전쟁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정부가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방어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CCC 2309항). 이러한 인식은 전쟁의 발생을 제한하고 전쟁이 발생했을 때 그 참혹함을 완화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보존을 위한 우리의 본능과 적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려는 경향은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능을 극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도전에 대응해 왔습니다. 초대 교회의 터툴리안 신부처럼 평화주의를 옹호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처럼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십자군 전쟁 중 술탄에게 선교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분쟁 속에서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현대의 상황에서 우리는 갈등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근본적으로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1. 분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지역사회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2. 외교적 노력과 비폭력 분쟁 해결 전략을 지원합니다.
  3. 전쟁이 발생하면 윤리적 행동, 민간인 보호, 분쟁 후 화해를 위한 노력을 강조해야 합니다.
  4.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애를 인정합니다.
  5.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모범을 따라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기꺼이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또한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승인하거나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해로운 행동에 반대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그들의 궁극적인 선을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도전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시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평화의 왕국을 세우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희망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분열된 세상에서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어려운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세상의 가혹한 현실에 직면할 때에도 모든 분열을 극복하고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신뢰하며 항상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횟수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몇 번이나 언급됩니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약 245회 언급합니다. 이 칭호는 의미심장하며 신자들이 하나님과 갖는 친밀한 관계를 반영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인물로 표현합니다. 이 제목을 이해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분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의미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오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 용어는 보살핌, 권위, 친밀감을 의미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통치자와는 달리, 하나님은 양육하는 인물, 즉 그분의 자녀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원하는 분으로 제시됩니다. 이 아버지의 이미지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 걸쳐 퍼져 있지만 특히 신약에서 강조됩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예수님은 자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깊은 관계를 반영하며 신자들이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격려받는 방법에 대한 모델이 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과 신뢰로 특징지어지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복음서의 예

  • 마태 복음 6 : 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위치를 ​​알아보라는 직접적인 부르심입니다.
  • John 14 : 6-7: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러한 사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합니다.

신자들의 삶에서 아버지의 역할

신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 초대는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고 받아들여짐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가 받은 영은 너희를 다시 종으로 삼아 다시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여러분이 받은 영이 여러분을 아들의 명분으로 입양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아바”(“아빠” 또는 “아빠”를 의미하는 아람어 단어)라는 용어는 훨씬 더 깊은 친밀감을 반영합니다.

입양의 개념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다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됩니다. 이 개념은 여러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에베소서 1 :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으니.”
  • 갈라디아서 4 : 4-7: 신자들이 어떻게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되는지 토론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는 신자들 사이의 친밀함과 상속을 함께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종종 사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약성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기록하며,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기초임을 보여줍니다.

궁극의 희생

하나님의 사랑의 심오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발견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기꺼이 궁극적인 희생을 치르고자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삽화

신약성서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탕자의 비유(눅 15:11-32)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제멋대로인 아들이 돌아온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용서와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아무리 멀리 빗나가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다시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다는 점을 확증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사랑을 강조하는 동시에 권위와 지도력도 의미합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따라야 할 규칙과 지침을 정하셨습니다.

지도 및 교정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를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신자들을 인도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5~6절은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분의 자녀를 의도된 대로 형성하는 목적에 봉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기도와 아버지와의 관계

기도는 신자가 아버지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측면입니다. 신약성경은 신자들이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 히 4 :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환영받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담대히 그분께 다가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은 또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자매임을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같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연합을 촉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고린도전서 1장 12-12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많은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으로 묘사합니다. 이 비유는 개인이 고유한 역할과 은사를 갖고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공통된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상호 지원 및 격려

신자들은 종종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공동체 의식과 지지를 키워줍니다. 이러한 가족 구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반영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지원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결론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몇 번이나 언급되는지 이해하면 그분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이 열립니다. 이 제목을 반복하는 것은 신자의 삶에서 사랑, 인도,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권위, 그리고 그분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유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그분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영해야 하는 책임에 대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Q.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몇 번이나 아버지로 불리나요?
A.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약 245회 언급합니다.

Q. 기독교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이 왜 중요한가요?
A. “아버지”라는 칭호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의미하며, 그분의 보살핌과 인도하심을 강조합니다.

Q. '아바, 아버지'란 무슨 뜻인가요?
A. “아바”는 “아빠” 또는 “아빠”를 의미하는 아람어 용어로,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깊은 친밀감을 나타냅니다.

Q.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어떻게 부르시나요?
A.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추종자들에게 친밀감과 존중의 맥락에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Q. 하나님의 양자 됨을 강조하는 성경구절은 무엇입니까?
A. 에베소서 1장 5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을 양자로 삼으시도록 예정하셨다고 단언합니다.

Q.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나요?
A.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희생과 죄인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환영하신다는 자주 반복되는 개념을 통해 나타납니다.

질문.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A. 기도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Q. 신약성서에는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나타나나요?
A.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불리며, 하나님 가족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Q.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징계하시나요?
A.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녀를 인도하시는 것과 비슷하게, 사랑으로 징계하시고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질문.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비유는 무엇입니까?
A.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준비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다섯 가지 축복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세기 1:27-28)


하나님의 다섯 가지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문자( 율법)로 보고 이차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복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계시므로 일차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진의를 잘 알지 못하여 자신이 변화를 받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드리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를 빌어 영적 세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난 뒤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품성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뜻 합니다

롬8:29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같은 형상)하기 위하여 미리정하셨으니 ....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형상입니다

갈4:19 >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두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 거듭났다, 타고난 본 능적 죄의 생명이 멸하고 새 생명인 예수 생명을 받았다고 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곧 거듭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복은 히브리어 바라크( 무릎꿇다, 찬양하다 , 높이다 ,선물하다 )

때문에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들이 되게하여 무릎을 꿇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복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가진 영생의 복 ,생수의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133:3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원한 생수)

따라서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이 된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으로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다시피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면서도 살아 생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지가 못햇습니다 그것도 말년에 자식을 나을 수 없는 나이 100세 사라는 경수가 끊어져 애기를 낧을 수가 없엇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는 복은 자식을 많이 낳은 복이 아니라 영적인 자손을 낳는 복임을 알 수 잇습니다

갈3:16 >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나 천주교의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창1:28 >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때문에 공동 번역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봐서 그렇게 열국들이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식민지를 삼앗던 것을 봅니다

성경에서 복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것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라는 생물학적인 말씀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려면 그 단어가 어떤 부분에서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용례를 잘 살펴서 봐야 합니다 그러면 해석하는데 희미한 것이 뚜렷하니 보여집니다

생육하다(파라)

פָּרָה 스트롱번호6509

1.

맺다.

2.

열매를 맺다

3.

번창하다

발음 [ pârâh ]
구약 성경
29회 사용



히브리어< 파라 = 결실하다, 열매를 맺다 ,다산하다 >으로 자식을 낳고 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용례를 보면 사람, 동물 , 식물 다양하게 쓰이는데 영적의미로 메시야 예언이나 구원의 열매를 맺을 때 쓰이는 것을 봅니다

사11:1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파라) 것이요

사45:8 >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를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여호와가 이일을 창조하였느니라

한마디로 생육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의의 열매 , 평강의 열매 , 성령의 열매 ,생명의 열매인 구원의 열매 맺는 복된 인생들이 되라는 것 입니다

번성하다(라바)

רָבָה 스트롱번호7235

1.

증가하다

2.

확대되다

3.

위대해지다

발음 [ râbâh ]
구약 성경
176회 사용


히브리어 < 라바 = 많다, 증가하다, 크게 만들다, 성장하다 ,충분하다, 쏘다 >로 30배 60배 100배로 열매 맺는 백성으로 자라가라 증가해라 많게 하라 하고 또 견디고 인내하여 성숙해져 가라는 2가지 뜻이 담겨 잇습니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진리의 말씀으로 후손들을 가르쳐 점점 진리로 지경이 넓어지게 하여 선한 백성이 많아지게 하라 땅의 모래와 같은 백성뿐만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구원얻는 백성이 많아지게 하라

행6:7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잇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충만하다(마래)


מָלֵא 스트롱번호4390

1.

타동사 채우다

2.

창1:22

3.

출16:32

발음 [ mâlêʼ ]
구약 성경
250회 사용



히브리어 < 말레 =가득참 , 완성하다, 온전하다 >

시작된 일을 완성시키거나 약속의 말씀을 성취나 완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사11:9 >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 할 것임이라

죄악으로 가득찬 땅을 말슴의 물로 덮어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씀으로 완성시켜라는 것 입니다

곧 하나님의 집을 온전한 마음으로 완성시켜라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 ,내가 온전하니 너도 온전하라, 내가 충만하니 너도 성령으로 충만하라 내가 십자가에서 약속을 완성하엿으니 너도 성령으로 구원을 완성하여라

골1:28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한마디로 성령 충만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많아지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복하다(카바쉬)


כָּבַשׁ 스트롱번호3533
1.

발로 밟다

2.

복종시키다

3.

창1:28.

발음 [ kâbash ]
구약 성경
14회 사용
  • 1.
    원형 발로 밟다, 짓밟다, 발로 뭉개다, 미7:19
  • 2.
    원형 복종시키다, 종속시키다, 강요하다, 속박하다, 정복하다.
    • a.
      원형 [짐승에 대해] 창1:28.
    • b.
      원형 [적이나 노예나 적국에 대해] 민32:22,29, 대하28:10, 렘34:11, 느5:5.
  • 3.
    원형 폭행을 가하다, 폭행하다, 강간하다[여자를], 에7:8.
    • a.
      원형 피엘형 : 복종시키다, 강요하다, 정복하다, 종속시키다, 삼하8:11.
    • b.
      원형 니팔형
    • c.
      원형 복종하다, 강요되다, 정복되다, 민32:22,29, 수18:1
    • d.
      원형 폭행당하다, 강간당하다, 느5:5.

참고 정보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כְבּוֹשׁ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כְבּוֹשׁ
    관련 성경
    ☞밟다(슥9:15, 미7:19), 압제하다(대하28:10), 강간하다(에7:8), 정복하다(창1:28, 삼하8:11), 복종시키다(렘34:11, 수18:1), 복종하게 하다(민32:22, 대상22:18), 항복하다(민32:29).[명] 종(느5:5).



히브리어 < 카바쉬= 발로 밟다, 파괴하다, 결박하여 묶다>로 군대 용어입니다

땅에 종족들을 보존하기 위해 자식들을 충만하게 많이 낳아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것이 부족하면 남의 나라 땅을 짓밟고 정복하라는 생태계를 파괴시키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을 땅을 파서 광산을 만들어 석탄을 캐고 금을 캐고 보석을 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땅을 정복하여 자연을 개발하여 택지를 만들고 스키장, 골프장을 만들어 땅을 뚫어 지하철을 만들고 에베르트 산을 정복하고 히말라야 산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은 바다에 어항을 만들어 전복을 키우고 바다의 돌고래를 훈련시키고 땅의 호랑이를 훈련시켜 관람용으로 서커스용으로 다스리고 하늘의 독수리를 잡아 훈련시키고 다스려서 사냥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에 정복하라는 문자적 말씀이 어떻게 나타낫는가를 찾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하여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육하고 번성케하여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충만해진 백성들을 출 애굽시켜 광야에서 훈련 시켜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멸하여 정복하고 다스렸습니다

이 말씀을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묶은 땅을 갈고 뒤 엎어 흙을 정복하라는 것으로 이것은 묵은 땅을 경작하지 않고 씨를 뿌리면 곡식과 열매가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렘4:3 >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같이 이르노라 너희 묶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성경에서 땅은 물리적 땅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땅을 만드시고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첫 사람 아담을 만들었으므로 땅을 전복하라는 것은 그 흙인 사람을 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사람을 정복하라고 하니 목사 되어서 성도들 인격을 발로 밝고 압제하여 정복하여 자기 사람 만들어 충성 봉사하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위정자가 되어서 백성을 정복하여 로봇으로 만들라는 말도 아닙니다 깡패처럼 주먹을 휘둘러서 정복하여 부하로 삼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그 땅적인 사람을 정복하라는 것으로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내 옛 사람을 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일3:8 > 죄를 짓는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심이라

즉 내 안의 더러운 가시와 엉겅퀴로 둘러 쌓인 죄악의 옛 속성들 마귀적인 가나안 칠 족속을 짓밟고 파괴하고 결박하여 묶고 정복하여 옛 사람을 멸하여 새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악의 옛 속성인 가나안 칠 족속을 정복하라는 것을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골3:5-6-7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7/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니라 ..

다스리다(라다)

רָדָה 스트롱번호7287

1.

짓밟다

2.

정복하다

3.

소유

발음 [ râdâh ]
구약 성경
25회 사용
  • 1.
    원형 짓밟다, 밟다, 욜4:13, [בְּ를 수반하여] 사람을 짓밟다, 시49:15(14)
  • 2.
    원형 정복하다, 통치하다[בְּ를 수반하여], 창1:28, 레26:17, 시68:28(27), 사14:6, 겔34:4, [황폐하게 하는 불에 사용되어] 애1:13.
  • 3.
    원형 [비유적으로] 소유, 취하다, 삿14: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다스리다(레26:17, 왕상4:24, 사41:2, 겔29:15), 사로잡다(사14:2), 물러가게 하다(애1:13), 거느리다(왕상5:16), 억압하다(사14:6), 치다(삿5:13). [명] 고관(시68:27), 주권자(민24:19).



히브리어 < 라다 =정복하다 지배하다 , 통치하다, 치리하다 ,철저하게 부수다 ,포도주 틀을 밟다, 압제하다 ,돌보다 > 뜻입니다

인간 왕들이 세상 나라를 포도주 틀을 밟듯이 철저히 부셔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통치 행위를 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 나라의 왕이었던 폭군이요 독재자들이 생각 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 나라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기에 세상 나라를 다스려 정복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그 하나님 나라에서 통치하는 행위를 말씀 합니다

삼상15:1-3 >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이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시고 제일 먼저 왕노릇하게 한 것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고 젖 먹는 아이부터 키우고 있는 짐승들까지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싸그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욕심이 나서 죽이지 못하엿습니다 그래서 폐위의 원인이 됩니다

여기 삼상15장 말씀은 등골이 서늘한 말씀으로 두려운 말씀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으로 들려져야 할 것입니다

제가 글을 이렇게 쓰고는 있지만 한편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금 저를 돌아 보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울처럼 왕 노릇하고 있는 세상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너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젖 먹는 아이와 짐승들을 죽이라 >>

이 말씀은 결과적으로 젖 먹는 아이 같고 짐승같은 아말렉이 왕노릇하는 옛 사람 아말렉 왕을 죽이라는 것으로 죄라는 죄는 아무리 작은 사소한 죄라도  용납하지 말고 씨를 말려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아말렉 왕 아각을 아작내 도륙하지 않고 형제를 삼았습니다

이것의 영적의미는 사울 왕 속에 귀신의 왕이며 죄악의 왕인 아말렉을 죽이고 쫒아내지 않고 함께 어깨동무하며 산다는 것으로 죄악이 주는 즐거움에 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롬5:21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내 안의 짐승같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아말렉을 쳐서 죽이고 대신에 주님이 주시는 의로 왕노릇하며 다스리라고 영생의 복으로 예수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닮은 그 생명으로 하나님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단지 문자적으로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곤충에게도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데 이것이 참으로 새와 곤충과 언약을 하겠다는 말이겠습니까

호2:18 / 4:3 >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4/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 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 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때문에 < 바다의 물고기>는 세상 바다에 빠져 유유자적하며 사는 세상 사람으로 (이방인=죄악된 본 성으로 사는 사람)을 말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하늘의 새 > 는 공중을 나는 새로 하늘 공중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배 부르면 하늘로 올라 내가 왕이다 하며 에햄하며 군림했다가 배 고프면 땅에 내려와 죽은 영혼인 시체(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를 뜯어 먹고 사는 양다리 걸치는 바리세인 같이 음흉스런 놈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마13장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공중의 새를 악한자“ 라 하며 막4장에서는 사탄” 이라 하며 눅8장 에서는 마귀“라고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 > 세상 땅이 좋다고 세상에서 땅 따먹기 하며 땅에 코박고 살며 혼적으로 잔 대가리로 잔 머리 굴리며 자기 멋으로 자화 자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 모든 생물 >은 히브리어 < 네폐쉬 하야 = 산 혼, 산 생명으로 살아있는 목숨, 살아있는 생혼으로 생령으로 번역이 되어 히브리어와 헬라어 < 프쉬케 자오 = 네페쉬 하야 >와 같습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사람은 짐승으로 표현하기에 “ 네폐쉬 하야” 는 산 혼, 살아있는 목숨 육의 몸으로 모든 생물에 짐승에게도 같이 쓰이는 것을 봅니다

고전15:45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 프쉬케 자오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

즉 고전15장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과 땅에 속한 혼적인 존재의 상태를 말씀하는 장으로 여기 본문에서 모든 생물은 혼적인 육의 몸으로 짐승처럼 신앙생활하고 있는 아담들을 총칭하여 모든 생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정복과 다스림은 공존 관계로 바늘과 실과 같은 관계로 긍정적으로 사용하면 사람을 살리고 부정적으로 사용되면 죽이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 양날 검으로  심판과 구원을  말씀합니다 

때문에 결론적으로 종합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난 자녀는 점점 자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열매 맺고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 노릇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바다에 사는 이방인들과 율법적으로 신앙 생활하며 하늘로 땅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며 신앙 연조를 자랑하며 직분을 자랑하는 공중의 새같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며

그리고 땅에 코박고 욕심 부리며 탐심으로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 참된 복음을 전하여 복종시키고 다스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되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한 것과 맥락은 같은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이제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않는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의 삶이 궁극적으로 이렇게 5가지 과정인 육적, 영적의 삶으로 마쳐짐을 봅니다

생육하고 —>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 다스리라

하나님의 명령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여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발효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일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고 지금도 오셔 계시며 그 누군가를 위하여 지금도 속히 오시고 계십니다 때문에 성경 마지막 계시록 끝장에 끝절에 이렇게 기도로 마칩니다

계22:20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결론적으로 창1:27-28절 내용의 연관 본문으로 예수님은 신약적으로 마태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을 맺습니다

마28:18-19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








예수 그리스도의 49가지 명령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49 가지 방법들은 무엇인가?

신구약의 주제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마 22:40과 요 13:34을 참조할 것.)

 

명령 해당되는 성경구절 품성자질
1. 회개하라 마 4:17 겸손
2. 나를 따라 오너라 마 4:19 온유
3. 기뻐하라 마 5:12 기쁨
4.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 마 5:16 후함
5. 하나님의 율법을 삼가 준행하라 마 5:17-18 사랑
6. 화목하라 마 5:24-25 책임감
7. 간음치 말라 마 5:29-30 절제
8. 약속을 지켜라 마 5:37 진실성
9. 상대방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베풀라 마 5:38-41 경의심
10.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4 창의성
11. 온전하라 마 5:48 성실성
12. 제자의 도리를 은밀하게 행하라 마 6:1-18 믿음
13. 보물을 쌓아두라 마 6:19-21 검약
14.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마 6:33 솔선
15. 비판하지 말라 마 7:1 분별력
16.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마 7:6 신중함
17.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 마 7:7-8 자원력
18. 남을 대접하라 마 7:12 민감성
19. 좁은 길을 선택하라 마 7:13-14 과단성
20.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 마 7:15 경계심
21. 일꾼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마 9:38 자비
22. 뱀같이 지혜로워라 마 10:16 지혜
23.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6 담대함
24.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마 11:15 경청
25. 나의 멍에를 메라 마 11:29 순종
26.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마 15:4 공경 / 존경
27.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6 덕성
28. 너 자신을 부인하라 눅 9:23 결단력
29.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마 18:10 포용력
30.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서 권면하라 마 18:15 정의
31.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눅 12:15 만족
32. 네게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라 마 18:21-22 용서
33. 결혼을 귀중하게 여겨라 마 19:6 충성
34. 섬기는 사람이 되라 마 20:26-27 유용성
35. 기도하는 집이 되라 마 21:13 설득
36. 믿음으로 구하라 마 21:21-22 인내
37. 가난한 사람들을 청하라 눅 14:12-14 환대
38.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마 22:19-21 감사
39.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열심
40.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마 22:39 온순
41. 나의 재림을 예비하며 기다리라 마 24:42-44 시간엄수
42. 이것을 받아 먹으라 그리고 받아 마시라 마 26:26-27 철저함
43. 거듭나라 요 3:7 안정
44. 나의 계명을 지키라 요 14:15 근면
45. 깨어 기도하라 마 26:41 끈기
46.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6 믿음직함
47. 나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 마 28:19 조심성
48.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라 눅 24:49 정돈
49. 제자를 만들라 마 28:20 융통성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성경공부를 하는 방법 중에 명령과 약속, 사실과 교훈을 나누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방법입니다.
특별히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명령과 약속은 순종과 믿음의 대상이므로 오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명령은 일방적인 명령이 있고, 약속있는 명령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대표적인 명령입니다.
그 중에 9가지는 일방적인 명령입니다.

첫째, [너는 네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에서부터 열번째 계명인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20:3-17)는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으로 주신 명령입니다. 여기에는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 중에 5번째 계명은 약속있는 계명(명령)입니다. 이런 약속있는 계명은 계명을 지킨다는 전제 조건하에서만 약속이 주어지고, 성취됩니다. 명령은 순종의 대상입니다. 약속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사실, 명령, 약속, 교훈을 잘 나누어서 공부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이 넷은 서로 다르면서도 절묘하게 연결되어 상호 작용을 합니다. 사실은 역사적 사실과 예언적 사실로 나누어집니다. 그것은 인간이 믿든, 믿지 않든 변화되지 않으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권의 역사서요, 법전인 동시에 정치 서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논쟁이나 토론을 거쳐서 생긴 결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셔서 대속을 완성하신 것 역시 사실입니다. 3일만에 부활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 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무조건 믿음의 대상이지만 예언적 사실은 약속을 믿을 때 그것이 내 안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그런 것들입니다. 구원에 관련된 모든 사실은 믿음으로 받을 때 내 안에 사실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믿는 자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내가 믿을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예언적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명령은 무조건 순종과 복종의 대상입니다. 아담에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한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노아에게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런 일방적인 명령은 결국 인간을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십계명을 비롯한 많은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이런 명령들은 성경 구절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모두 목적이 있고, 선한 의도가 있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의 손길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이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약 173가지가 나옵니다. 이 많은 명령들을 다 지키려면 차라리 포기하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은 불법의 시대요, 무법 천지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법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철폐했거나 성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명령들을 명령이 아니라 단순히 교훈이나 권고 사항 정도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교훈이나 권고는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령은 어디까지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명령을 경찰이나 행정 명령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계명 외에는 아무 계명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아무 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늘 사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살펴보고 명령의 목적대로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갖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 구약 전체의 명령을 단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6-40절,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달려 있느니라.](마22:36-40). 사랑은 율법의 성취이며 많은 명령들은 다 이 말씀 들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로마서 13:8-10,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음이니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어떤 명령이 있을지라도,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느니라.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성경은 십계명과 많은 명령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명령으로 압축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두 가지 명령을 한시도 잊지 말고, 항상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외에 도대체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란 생각이 드는 분들은 내 마음에 넓게 부어주신 성령의 사랑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네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향해서 명하신 첫 번째 명령은 [회개하라]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 번째 설교 제목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막1:15)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는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음이라, 하시니라.](마9:13). 회개는 이중적인 것입니다. 죄에서 떠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같이 무지하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17:30). 회개는 주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이것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더 이상 회개가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완악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나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 명령은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복음을 믿으라.] 이것은 명백한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에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이 명령에 순종할 때 주어진 약속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에 불순종할 때 주어질 심판과 진노는 영원한 지옥입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 명령에 순종한 것만으로도 현재와 미래에 약속된 수많은 약속들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위대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알라를 믿는 성도와 마리아를 믿는 성도와 죽은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이 같은 삶의 수준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믿는 바에 따라 격이 달라져야 합니다. 전에 어떤 자매가 법률회사에 근무했는데 변호사 한명에 비서 한명씩이 배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서가 다 같은 비서가 아닙니다. 대표 변호사 비서와 신참 변호사의 비서는 격이 다르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비서 실장과 총리 비서실장이 같은 격일 수 없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시고, 지존무상하신 분이라면 우리는 다른 잡신들, 우상들을 숭배하는 자들과는 당연히 철저히 차별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 번째 명령은 [성령을 받으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회심만이 유일한 방법이며, 믿음만이 우리를 복된 소망 가운데 있게 해 줍니다. 불신자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복음을 믿어야 하는 반면 이미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주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헌신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관계된 일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신분의 전환입니다. 성령 충만은 신분이 아니라 능력있는 사역, 봉사,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과 연관하여 몇 가지 명령이 더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엡4:30). 우리는 이런 명령을 아주 가벼운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명령 불복종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기도하라고 할 때 TV를 보고 있든지, 성경을 읽으라고 할 때, 잡담을 하고 있든지, 전도를 하라고 할 때 유희를 즐기는 일들은 모두 성령을 억누르고 슬프게 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네 번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를지니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이 명령은 약속이 분명하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곧 제자로의 부르심에 응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믿는 신자들이 모두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입니까? 제자입니까?”란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신자는 모두 제자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주님을 따르는 대신 세상을 따르거나 자신의 육신을 따름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군복을 입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이 “군인이 여기서 뭐합니까?” 물었습니다. “저는 군인이 아니고 군복을 일복으로 입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삽니다. “저는 크리스챤이 아니고 교회만 다닐 뿐입니다.” “저는 신자는 아니고 그냥 왔다갔다 할 뿐입니다.” 이런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 이것 역시 엄중한 주의 명령입니다. 사람들이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명령권자의 권위를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영이 서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는 군대가 강할 수 없고, 그 사회가 건강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서지 않는 교회는 잘 정비된 사회 단체만도 못한 법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어느 명령보다 이 명령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 명령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어느 한 순간에 단 한번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종해야 하는 지속적인 명령입니다. 오늘은 순종했지만 내일은 순종하지 않을 수 있고, 어제는 불순종했지만 오늘부터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불러 주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주님의 명령은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과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섯 번째 명령은 [기도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명령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요, 반드시 지켜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명령에는 여타 어떤 명령보다도 풍성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으며, 순종하는 당사자에게 많은 복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명령은 살펴보면 볼수록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시고 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서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주님은 제자들이 십자가를 앞에두고 우왕좌왕하지 않고, 시험에 빠지지 않고,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고, 넉넉히 승리할 수 있도록 한 가지 명령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영성 훈련이 아니었습니다. 멀리 도망하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이 해야 할 한 가지 일로 명하신 주님의 명령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였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닥칠 환란과 재앙,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모든 사건들로부터 피하고 합당하게 서기 위해 여러분이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입니다. 주님이 체포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명령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눅22:40). 제자들은 이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이 피곤해서 곯아 떨어졌고, 예수님이 체포되자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잠이 온다고 다 잠자고, 피곤하다고 잠자고, 할 일이 없어서 잠자고, 자야 할 시간이어서 잠자고, 내일을 위해서 잠자고 하다보면 아주 작은 시험도 이기지 못합니다. 기도는 여타 어느 명령보다 체감 지수가 높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섯 번째 명령은 [성경을 공부하라]입니다. 동양인들은 이성이나 논리보다는 직관과 감각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책을 통해 공부하는 것보다 명상이나 마음을 닦는 수행이 한 차원 높은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몇 천년의 문화 유산이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문서에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깨치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것보다 성경없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에 직접 접해 보고자 하는 무속적인 시도를 신령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5:39).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고, 기억하고, 인용하고, 사용하십시오. [성경을 탐구하라.] 이것은 어느 명령보다 우선되어야 할 명령이며, 우리의 삶에서 맨 윗줄에 자리 잡아야 할 명령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고민이 있을 때, 어느 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경을 찾아보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 차례 [성경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는 매우 엄한 책망을 하셨습니다. 저는 몇 일 전에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모든 이단 교리들을 두루 섭렵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 때 나눈 대화를 생각하며 몇일간이나 성경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머리를 스쳐지나간 한 가지가 있습니다. 논쟁을 위하여 이렇게 찾을 것이 아니라 매사에 이렇게 말씀을 찾아야 한다!였습니다. 우리는 형제들간에 서로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하며, 사회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가정 문제, 교육 문제 등 모든 사안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곱 번째 명령은 [빛을 비추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당연히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비추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도들은 성경을 보고,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행동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 같아 보여도 기독교에 대해서 말이 나올 때면 자기 주위에 기독교인들이 하는 행태에 대해서 보고들은 것을 매우 소상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성경이나 성경의 교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동료나 친구들, 친지들에게서 본 그들의 행동을 말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고, 교회가 어떻고 어떻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절대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유념해서 지켜봅니다. 성도는 제 2의 Bible입니다. 성도는 매우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등이 무슨 소용이 있고,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 처럼 걸으라.](엡5:8).

하나님이 주신 여덟 번째 명령은 [탐심을 물리치라.]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활 방식, 경제 활동 등에 대한 표준이 되는 명령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쵸코파이를 한 개 먹었습니다. 그는 한 개를 더 집다 말고, 이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탐심을 물리치라.] 내가 지금 집은 것은 순전히 먹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란 사실에 그는 집었던 쵸코파이를 내려 놓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심은 자금의 순환을 돌게 하는 힘이며, 생산과 소비를 촉진시키는 일등 공신입니다. 모든 광고는 탐심을 자극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생활의 규모를 줄이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충고나 권면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주님의 명령들을 깊이 생각하고, 틈날때마다 다시 한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한다](시19:8)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탐심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15,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탐욕을 조심하라.](눅12:15). 마태복음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이 명령은 거지들이 구걸할 때 실천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잠언3:27,28을 보십시오. 11:24,25을 보십시오. 19:17을 보십시오. 이 말씀들은 마음 가운데 탐욕이 있을 때 절대 순종할 수 없는 명령들입니다. 탐욕은 그 한 가지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명령들을 걸고 넘어지는 그런 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홉 번째 명령은 [위선을 조심하라]입니다. 위선이란 겉다르고 속 다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다 사람들 앞에서 더 거룩하고, 더 정직하고, 더 헌신적이고, 더 순수하고, 더 신실하다면 그것이 위선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하고, 순수하고, 헌신적인데 사람들 앞에서는 무례하고, 거칠고,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훈련이 덜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접하면 접할수록 거칠고 투박한 행동들을 비집고 나오는 아름다운 영혼의 빛이 나오게 됩니다. 반면에 위선자는 처음에는 매우 훌륭해 보여도 접하면 접할수록 솟아 나오는 악취로 인해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이 다른 것을 성경은 위선이라고 하고, 세상은 예의바르다, 인격 수양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먼저 이것을 이르시되, 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눅12:1).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종교적이고, 믿음 좋고, 신앙에 충실하고, 훌륭하다고 평가받았는지 모릅니다. 백성들은 이들의 종교적 경건성에 대해서 감복하고, 그들이 하는 말이라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서 마귀를 힘입어 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위선자였습니다. 위선자는 위선이 벗겨지기 전까지 최고의 인격자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바를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종교적 위선자라고 할 것입니다.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행하지는 말라. 이는 그들이 말만하고 행하지는 아니하며](마23:1,2). 이것이 그들의 위선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저히 성경적이었고, 그들의 믿음은 근본, 보수의 정화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위선자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위선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분리와 성별을 외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추구하고, 영적 지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위선자가 되기에 합당한 조건과 여건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열 번째 명령은 [복음을 전파하라]입니다. 신자들은 각자 처해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명령은 가장 영광스러운 명령이며,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누가복음 24:47, 마가복음 16:15, 마태복음 28:19,20. 요한복음 21:15-17.각 복음서의 말미에 대미를 장식하는 명령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라.]입니다.




설교자(說敎者)



설교자(說敎者)


이런 설교자를 소개하고 싶다

목수(木手)는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
석수(石手)는 돌을 잘 다루는 사람
토수(土手)는 흙을 잘 다루는 사람
그렇다면 성경을 잘 다루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부를까?
"고수(高手)"라고 하면 어떨까?

명설교가(名說敎家)는 설교를 잘하여 이름난 설교가


‘명불허전(名不虛傳)’
‘소문난 명성이 헛된 게 아니더라’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두 부류의 설교자로 나눌 수 있다.
‘본문에 강한 설교자’와 ‘전달에 강한 설교자’ 말이다.
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대부분이 성도 수가 많지 않고, 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대형교회로 부흥한 교회인 경우가 많다.
성도들은 보통 본문이 좋은 설교보다는 전달이 탁월한 설교를 좋아한다.
솔직히 말해서 성도들은 본문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어떻게 저런 보화를 캐낼 수 있을까?’
‘그걸 또 어떻게 저렇게 빼어난 방식으로 전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리도 청중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방식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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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설교자가 가진 10가지 특징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만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설교자를 정의하는 것은 주관적이라서,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설교를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몇 가지는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말씀을 사랑한다.

말씀이 강단에서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그의 입술에 있다.
그의 설교는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대한 고백과 감사가 넘쳐난다.

2. 말씀을 가르친다.

그의 목표는 청중들에게 성령을 통해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들으러 다시 온다.

3. 설교자의 삶이 그의 메시지를 신뢰하게 한다.

즉,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실천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도는 설교자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소식을 듣고 싶어한다.

4. 설교 준비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는 매주 준비할 시간을 따로 떼어 놓기 때문에, 준비 없이 강단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례로, 능력 있는 설교자들은 일반적으로 매주 10~12시간 정도 설교 준비를 한다고 한다. 

5. 기도하는 사람이다.

최고의 설교자는 또한 가장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 중 일부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이 일은 나 혼자 할 수 없으니 도와주세요”라는 것이다.

6. 확신과 사랑을 가지고 설교한다.

그는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정말로 믿지만, 다른 사람들도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하고,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유한다.
청중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7. 설교의 서론과 결론을 열심히 준비한다.

설교 본론이 중요하지만, 서론과 결론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서론과 본론은 간결하고 명확해야 한다.
서론은 듣는 사람을 설교 속으로 끌어들이고, 결론은 그들을 봉사하고 사역하도록 돕는다. 

8. 설교에 대한 명확한 적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적용할 수 없는 설교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불필요한 정보가 된다.
효과적인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들이 방금 들은 말씀을 기초로 행할 수 있는 적용과 실천에 대해서도 알게 됨으로, 말씀의 가르침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헷갈릴 필요가 없다.

9.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환영한다.

휼륭한 설교자는 그의 설교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설교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이야기에 감사하고, 고치기 위해서 노력한다. 

10. 강단에서 청중을 인도한다.

자기 교회에 모인 특정 사람들을 목양하는 목회자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가져다 주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청중을 참된 사역의 길로인도한다. 

이 기사를 읽는 사람이 설교자라면 이 10가지 중에서 자신의 설교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헤아려 보라.
그리고 내년에는 더 나은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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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란 무엇인가

존 스토트 (John Stott) ( John Robert Walmsley Stott )

『설교자란 무엇인가』는 '설교자들의 스승으로 불리는 존 스토트가 설교자를 청지기, 사자, 증인, 아버지, 종이라는 다섯 가지 은유로 풀어내는 신선하고도 실천적인 연구서다. 신약 성경에 계시된 설교자의 이상과 과업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확립해 주는 책으로, 설교자의 사명과 역할을 성경적 정확성과 명료한 문체로 제시한다.

지은이: 존 스토트 (John Stott, 1921~2011)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목회 수련을 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다녔던 영국 런던의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 교구 목사로 30여 년 간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1974) 입안자로 참여했고, 그 후로도 로잔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 활동해 왔다. 대표적인 저서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진정한 기독교』,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도행전 강해』, 『로마서 강해』, 『디모데전서·디도서 강해』, 『디모데후서 강해』, 『기독교의 기본 진리』 등이 있다.  

 

존 스토트,『설교자란 무엇인가?』
설교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조건은 없다

John R. W. Stott, Preacher’s Portrait,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s Co,), 1964

청지기 A Steward

설교자의 메시지와 권위

설교자는 선지자가 아니다. 독보적인 직통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한 위치로서의,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자들로서의 사도된 위치도 설교자에게 부적절하다. 설교자는 청지기이다 (딛 1:7, 고전 4:1).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맡은 청지기이다. 기독교 설교자의 메시지는 선지자 혹은 사도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오지 않고, 설교자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직 일회적으로 계시되어 지금 현재 그가 고귀한 청지기로서 맡고 있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24).

(1) 설교자의 동기: 설교자는 낙심할 수 없다. 그가 위탁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그를 의지하고 있으며, 가족들이 그의 공급을 고대하고 있다. (2) 설교자의 메시지: 설교자 자신이 메시지를 공급하지 않고 오히려 공급받는다. 선한 청지기는 말씀을 왜곡하지도, 혼잡하게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 (고후 4:2, 고후 2:17). 이것이 충실한 설교의 정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빠짐없이 전하도록 부름받았다. 이와 같은 성실한 가르침은 수개월 앞선 신중한 계획이 필요하다. 강해설교자는 전력을 다해 성경을 정확하고 선명하게 해석하며, 그것을 강력하게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39). (3) 설교자의 권위: 설교자의 권위는 선지자의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이다. 설교자는 말씀이 자신에게도 적용됨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청중에게 생기있게 다가오려면 설교자에게 우선 생기있게 다가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교자에게 말씀하실 때에만 청중 역시 그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본문에 밀착된 친밀성, 그것을 먼저 자신의 영혼을 향해 얼마나 강하게 선포했는가 그것에서 설교자의 권위가 세워진다. 자신의 인격이 성경이 비추는 빛으로 가려지고 자신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잠겨야 한다 (41-42). (4) 설교자의 헌신: 설교자는 성경의 궁극적 저자이신 성령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 헌신적이고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를 성실히 해야 한다. 그에게 드러내 주신 보화들을 차곡차곡 노트북에 정리해 두어야 한다 (마 13:52). 풍부한 자원들 가운데 하나의 메시지를 어떻게 뽑아낼지 고민해야 한다.

2. 사자 A Herald

설교자의 선포와 호소

설교자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이 포고된 선포, 케리그마를 통해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선언한다(고전 1:21, 23). 사자에게는 온 세상에 선포할 좋은 소식이 주어지며,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행위이다. 사자에게 선포는 호소로서 듣는 이들의 반응과 행동의 변화를 기대한다. 사자의 선포를 통해 왕은 자신의 목소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로버트 마운스, 신약 설교의 근본적 성격, The Essential Nature of New Testament Preaching, 1960)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기에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고전 1:23; 고후 4:5). 우리를 그에게로 화목케 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공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설교자의 선포를 통해 사람들을 대면하실 뿐 아니라, 설교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전 1:21).

우리는 선행되는 선포 없이 호소를 발해서는 안된다.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에 대한 선언이다. 선언이 있기 전에는 제대로 된 초청이 주어질 수 없다. 초기 사도적 케리그마는 확고한 디다케로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에게 확고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그들을 설득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또한 호소없이 선포를 발해서는 안된다. 극단적 칼뱅주의가 존재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설교하면서도 전혀 마음에 감동이 없다면 안 된다.

- “설교단에서 내려올 때면 내가 좀 더 진중하고 좀 더 열정적으로 설교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양심이 나를 후려치지 않을 때가 거의 없다. ‘너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고작 그 정도의 열정으로 말할 수 있느냐? 저 사람들을 위해 울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 눈물이 네 말을 가로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크게 통곡하며 저들의 범죄를 드러내 보여 주며 생명과 죽음에 관해 저들에게 강청하며 탄원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리처드 백스터, 참 목자상

3. 증인 A Witness

설교자의 경험과 겸손

요 15:26-27,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것

증인은 인격적인 체험의 권위로 지속적인 삶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증인은 법적인 은유이다. 기독교적 증언은 세상 앞에서 행해진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믿지 않는 세상의 반대 때문이다. 기독교적 증언은 아들을 증언한다. 간증은 포장된 자기 자랑이 아니다. 참된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증언이다. 기독교적 증언은 아버지에 의한 증언이다. 아버지의 궁극적 관심은 아들을 영광스럽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요 8:54; 17:1). 기독교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증언은 세상 앞에서 성령과 교회를 통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증언이다.

제자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요 15:27, 눅 24:48; 행 24:48, 요 1:32, 요 3:11-13; 요일 1:2; 4:14; 행 26:16).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생생하게 경험한 증인으로서 이 말씀을 해설하고 이 행위를 선포한다. 참된 증인은 투명한 유리처럼 신실한 사람이다. 어리석은 증인이 되거나 말할 것이 없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주의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늘 살펴야 한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 헌신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기도 없는 설교는 공허하다. 설교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조건은 없다. 메시지에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증인의 설교에는 따뜻함, 직설적인 단순함, 실재의 깊이가 담겨 있는데, 이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친밀한 지식에서 연유한다.

참된 설교 준비는 우리가 특별히 할애하는 몇 시간이 아니라, 설교가 솟아나는 원천이 되는, 설교자가 가진 총체적인 기독교적 경험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M. Bounds “그 사람, 그의 전인이 그 설교의 배후에 있다. 설교는 한 시간의 연주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넘쳐흐름이다. 하나의 설교를 만드는데 20년이 소요되는 것은, 한 사람을 만드는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증인이 고난과 밀접하게 연계되는 것, 증인에 해당하는 martys 가 순교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하나님 경험의 중요성 때문이다. 고난을 통해, 자기 피로 그를 증언할 준비가 된 이들이 되라.

설교단에는 허영의 유혹이 있다. 기독교적 증언은 자기 증언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이 될 뿐이다. 우리 증언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요 3:25-30).

4. 아버지 A Father

설교자의 사랑과 온유함

아버지라 부르기를 주저 않았던 사도 바울

설교자는 자신이 말씀으로 섬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마음을 쏟는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설교자와 청중은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다. Philips Brooks, “설교자는 실재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목회자여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 사역의 위엄을 생생하게 품고 사는 설교자여야 한다. 목회자가 아닌 설교자는 그 마음이 메말라가고, 설교자가 아닌 목회자는 그 사람됨이 시시해진다.” (121) 설교자의 설교는 청중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마 23:9). 설교자는 사람들이 의존하는 우월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자녀들과 친밀한 관계성을 갖는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가진다 (고전 4:14-15).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다는 말씀처럼, 설교자는 아버지처럼 자녀를 훈육하는 권위를 가진다. 이와 같은 부성은 유약하고 병약한 감상이 아니라, 훈육을 배제하지 않고 돌봄을 지향하는 강하고 이타적인 사랑이다.

(1)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회중을 이해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만큼, 사람들과 친밀하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 시간과 수고를 투자한다. 직장에서의 도덕적 결단, 압력, 경쟁, 동료들과의 관계, 긴장, 매일의 출퇴근. 그들의 고뇌와 책임감과 당혹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매주 사람들을 방문하고 면담할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청중과의 공명이 가능하다. 사랑은 직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할 때, 비로소 그들은 ‘그가 우리를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다. (2) 설교자는 아버지의 온유함을 가진다 (딤후 2:24-25). 분노하거나 좌절한 나머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3) 가르침을 단순하게 한다. 루터, “누군가에게 유치하고 천박해 보이는 식으로 설교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 설교의 단순성은 주제 선정에서부터 적용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복음의 중심 주제들을 해설하는데 들여야 할 것이다. 스타카토 스타일로 설교하라. 단순한 주제, 단순한 스타일, 단순한 단어를 사용하라. 무엇이라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셨듯이, 생생한 그림 언어를 사용하라. (4) 아버지의 사랑은 호소함에 있어 우리를 진지하게 만든다 (행 20:31). 위험에 처해 있는 자녀들에게 아무 경고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눈에 눈물없이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멸망에 대하여 말하라. Chad Walsh, 설교자의 참된 기능은 평안한 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며 괴로운 자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사람들에게 경고하라. 평안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이 잃어버린 영혼들의 피를 우리 손에서 찾으신다 (겔 33:1-9). 리처드 백스터,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진정 진지함으로 하고 있음을 보게 하라.” (5)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모범을 보이게 만든다 (고전 4:16). 청중은 설교자를 본받는다. 그는 매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Inge, “기독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력한 시각 자료는 언행이 일치된 그리스도인이다. 스스로 설교한 것을 어기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우리의 선포에 동화되어야 한다. “한 시간동안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준비하는데는 한 주도 충분하지 않으면서, 한 주를 어떻게 살 것인지를 연구하는데는 한 시간도 너무 많아 보인다.” (6)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성실하게 기도하도록 만든다. 규칙적으로 회중을 위해 기도하라! 백스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는 진심으로 설교하는 자가 아니다

5. 종 A Servant

설교자의 능력과 동기

지극히 부당하고 어울리지 않는 존경이 오늘날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게 돌려지는 현실. 설교는 도구이지 작품이 아니다. 설교는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영혼 구원을 위한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칭송을 은근히 기대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설교자는 종(디아코노스)이다 (고전 3:5).

설교에 있어 하나님의 능력이 절박하게 필요하다. 분주한 프로그램과 집회들, 그러나 능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첫걸음은 우리에게 능력이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들은 통계치로 교회가 처한 한심한 현실을 선뜻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결과 교회의 세속화를 보지 못하고, 확신의 부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지독한 형식주의, 우리가 나누는 교제의 피상성, 복음전도에 관한 우리의 불순종, 우리 삶이 한참이나 미치지 못함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연약한 인간의 능력을 의지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다. 설교자의 주장이나 수사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이해나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다!

(1)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고전 1:18-24; 2:4-5; 1:19-20).

(2)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고전 1:18-24)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3) 능력은 성령 안에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1:4)

당신의 값없는 구원을 말할 때마다 오직 당신으로만 충만한 생각이 나의 마음과 영을 사로잡게 하소서 또한 당신 말씀의 힘 아래 모든 마음들이 감동하여 엎드릴 때 나를 당신의 십자가 뒤에 숨기소서

01. 설교자로서의 자족과 겸손,

02. 존 스토트는 본문들의 강해를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 글을 쓸 때 한 가지 주제를 말씀을 통해서 해설하고 그 깊이를 퍼올리고 있다!

03. 본문중, 설교자는 말쟁이가 아니기에 다른 이들의 말이나 글은 적절하게 출처를 밝히면서 정직하게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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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머리는 왜 나발(螺髮; 소라모양의 곱슬머리)일까?
그리고 머리 위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나발(螺髮)과 육계(肉髻; 우스니샤)

나발(螺髮)이란 한자어를 낱개 한자별로 풀이하면 "소라 나(螺)"에 "머리털 발(髮)"이다.

"소라 머리털이라고? 소라에도 머리털이 있어?"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풀이는 잘못된 것이고, 제대로 풀면 '소라 껍데기 모양으로 말아올려진(螺) 머리(髮)'가 맞다.

이제 나발의 의미는 알겠으나 더 큰 물음에 우리는 직면하게 된다.
부처님은 활동 당시 삭발, 즉 머리가 민 상태였을 것이라 알고 있는데, 왜 붓다 사후에 만들어진 부처 동상은 머리털이 빽빽하게 자라난 나발이란 말인가?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

석가모니 부처(활동시기 기원전 563년~483년)는 기원전 5세기쯤 열반에 드셨고, 신적인 존재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부처는 유언으로 '내가 가르쳐준 진리와 너 스스로를 믿고 의지할지언정, 생물학적인 나의 몸은 허구이니 숭배하지 말라'고 하셨다. 즉, 부처는 자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이나 불탑 등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합장하고 절하는 우상숭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 사후 초반에는 우상숭배를 경계했기에 제자와 도반들은 부처님 얼굴과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수레바퀴(법륜)나 부처님의 사상이 응축되어 있는 발바닥 모습(족상 또는 족적), 해탈을 의미하는 보리수 나뭇잎 등을 그려 놓고 자신들의 신앙심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예경과 공경의 대상을 쉽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인간의 열망은 잠재되어 있다가 발현하기 시작했다.
일단 부처님을 화장하고 남은 육신의 흔적인 사리가 담겨진 탑이 여기저기 세워졌다.
여러 불탑이 세워졌지만 인도아 대륙에서 불상은 만들어지지 않던 시기였다.
그리고 불교는 동북쪽이 히말라야 산맥에 막혀있어 서서히 서북쪽으로 전파되어 나아갔다.

불교와 그리스 문명의 만남

그런데 부처님 사후 기원전 326년에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이 일어났다.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는 당시 인도 서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알렉산더의 군대가 물러간 이후에도 그의 부하와 그리스인들이 정주하고 박트리아라는 국가를 세우기도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서북부 진출과 그리스인들의 해당 지역 잔류와 지배계급으로의 성장, 불교에 대한 관심과 귀의가 일어나면서 드디어 현재 파키스탄 서북부 간다라 지역에서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인도 동북부에서 일어난 불교사상이 만나게 된다.

나발(螺髮) - ‘나발’은 삭발을 거룩하게 표현하는 방법

‘나발’은 삭발을 거룩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내 개인적인 나발에 대한 생각은 불상은 그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들의 열망이 상당 부분 투영되어 나타난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 시대의 권력자들이 나발과 육계를 한 모습의 부처상을 원했기에 그 형태태로 용인되어 부처상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육계(肉髻; 우스니샤)

불상의 부처 형상 중 머리 모양이 특이하다.
구불구불한 머리칼, 즉 나발을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맨, 우리의 상투를 한 모습과 흡사하다.
이것이 바로 육계(肉髻; 우스니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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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Servants of the Lord)"은 목회자를 가리키는 것인가

"주의 종 (Servants of the Lord)"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로,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섬김의 정신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 개념에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포함됩니다:

1. 하나님에 대한 헌신

주의 종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그분의 뜻과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합니다. 
이는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지도를 따르는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2. 그리스도의 예수 섬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따릅니다. 
이는 사랑, 겸손, 용서, 봉사 등 그리스도의 가치를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

주의 종은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깊은 관계를 갖습니다. 
이 관계는 복종과 섬김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노력이 포함됩니다.

4.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

주의 종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기여하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전도, 사회적 봉사, 정의를 위한 행동, 교회 및 공동체 내에서의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주의 종이 되는 것이 단순히 신앙을 가진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종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에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주의 종(Servants of the Lord)"은 목회자를 가리키는 것인가

"주의 종"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전문적인 목회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개념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 즉 일반 신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물론 목회자들도 "주의 종"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 용어는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1. 일반 신자들의 적용

"주의 종"은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이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2. 목회자와의 관계

목회자들은 특별히 교회를 이끄는 역할을 하며, 그들 또한 "주의 종"으로 불립니다. 
그들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주의 종"이라는 개념은 목회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3. 다양한 역할과 사명

"주의 종"은 다양한 형태와 역할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 사회적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 직장이나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 등 모두가 "주의 종"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의 종"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와 자세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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