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세 유형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만 바라보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Though He does not... / Even if He does not...

다니엘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영어 성경에서는 보통  “But even if He does not…”
또는 “Even if He does not…”

핵심은 응답의 결과와 관계없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믿음입니다.

대표 인물 : 사드락·메삭·아벳느고
핵심 신앙 :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하지 않으셔도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evertheless / Even so / In spite of this / Yet

성경에서 이 개념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말씀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

영어로는   “Yet I will rejoice in the LORD…”
또는 “Nevertheless, I will rejoice in the LORD…”

여기서 Yet / Nevertheless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잘 나타냅니다.

대표 인물 : 하박국
핵심 신앙 :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오직 주만 바라보리라」

I will look only to the Lord.
I will look to the LORD alone.
I will fix my eyes on the Lord alone.

 미가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영어로는  “But as for me, I watch in hope for God my Savior; I wait for God my Savior…” (NIV)

또는 개념적으로  “I will look to the LORD alone.”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대표 인물 : 미가
핵심 신앙 :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본다.  

세 문장을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연결하면

단계 한국어 영어 대표 성구 신앙의 의미
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Even if He does not     단 3:18         응답이 없어도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Nevertheless / Yet     합 3:17–18         상황이 어려워도
③ 오직 주만 바라보리라    I will look to the LORD alone       미 7:7        하나님만 바라본다

한 문장으로 만들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겠습니다.”

영어로는  
“Even if He does not, I will still believe.
  Nevertheless, I will still rejoice.
  I will look to the Lord alone.”

이 세 문장은 「조건적 신앙 → 상황을 초월하는 신앙 →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신앙」으로 발전한다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함께 연결하면 좋은 성구

  • 다니엘 3:17–18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하박국 3:17–18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미가 7:7 —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 시편 42:5 —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 시편 62:5–6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 히브리서 12:2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히브리서 11:27 —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153마리 물고기




요한복음 21장의 “배 오른편”과 “깊은 곳”은 단순한 어업 지시를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제자들의 실패가 사명과 열매로 바뀐다는 의미
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깊은 곳”이라는 표현이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요 21:6의 헬라어는 “그물을 배 오른편(εἰς τὰ δεξιὰ μέρη τοῦ πλοίου)에 던지라”입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표현은 누가복음 5:4의 “깊은 데로 가서”(εἰς τὸ βάθος)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오른편” — δεξιά, dexia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요한복음 21:6

δεξιά(dexia)는 ‘오른쪽, 오른편’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오른편은 자주 권위·영광·승리·하나님의 인정을 상징합니다.

  • 시 110:1 — “내 오른쪽에 앉으라”
  • 마 26:64 —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
  • 행 2:33 —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이시매”
  • 계 1:16 — 예수께서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으심

그러므로 요 21장의 오른편을 설교적으로 적용한다면, 
“내 경험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방향을 바꾸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새 자기 경험과 기술로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방향을 바꾸라고 하셨을 때 비로소 그물이 가득 찼습니다.

오른편 = 예수님의 말씀에 방향을 맞추는 자리 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깊은 곳” — βάθος, bathos

이 표현은 요한복음 21장이 아니라 누가복음 5:4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깊은 데로 가서(εἰς τὸ βάθος)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여기서 βάθος(bathos)는
‘깊음, 깊은 곳, 깊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5장과 요한복음 21장을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구조가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5장 요한복음 21장
깊은 곳으로 가라 오른편에 던지라
그물을 내려라 그물을 던지라
베드로의 첫 부르심 베드로의 회복
엄청난 고기 153마리
“나를 따르라”의 시작 “나를 따르라”의 회복

그러나 “깊은 곳 = 반드시 영적으로 더 깊은 신앙”이라고 본문이 직접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설교적·신학적 적용입니다.


3. 오른편과 깊은 곳을 함께 보면

두 본문을 연결하여 설교적으로 표현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깊이는 주님께 맡기는 신앙이고,
오른편은 주님의 말씀에 방향을 맞추는 신앙입니다.

즉,

깊이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깊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도 주님의 말씀과 다른 방향이면 헛수고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이 말씀하신 곳에 그물을 던지는 것”

이것이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4. 요한복음 21장의 핵심은 “오른편”보다 더 깊습니다

사실 요 21장의 핵심은 오른쪽이라는 상징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순종했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고,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따라서 153마리의 물고기 사건은 단순히 풍어의 기적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명 회복으로 연결됩니다.

그물 → 물고기 → 예수 인식 → 사랑 → 양을 먹이는 사명

이라는 흐름입니다.


설교적으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깊은 곳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방향으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또는,

“신앙의 깊이만 추구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방향을 맞추십시오. 깊이와 방향이 만날 때 그물이 가득 찹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용하시는 ‘예수 필터’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선명합니다.

내 경험 → 예수님의 말씀
내 방향 → 예수님의 방향
내 능력 → 예수님의 명령
빈 그물 → 가득 찬 그물
실패한 제자 → 사명을 회복한 제자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의 『A History of Heaven』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의 『A History of Heaven』 


러셀의 『A History of Heaven』

조직신학적인 '천국론'이라기보다는 천국이라는 개념이 유대교· 헬라철학· 초대교회· 중세 기독교를 거치면서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추적하는 지성사적 연구 

“천국이 무엇인가를 조직신학적으로 체계화한 책이라기보다, 서양의 종교·철학·문학·문화 속에서 ‘천국’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지를 추적한 지성사(知性史)이다.”

1. 조직신학적 천국론과는 다릅니다

조직신학의 천국론이라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룹니다.

  • 천국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 죽은 성도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 부활과 천국은 어떤 관계인가?
  •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인가?
  •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어떤 관계인가?
  • 영혼의 중간 상태와 최종적 부활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러나 러셀의 관심은 이런 교리적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천국을 어떻게 상상하고 표현해 왔는가?”를 묻습니다.

2. 러셀의 연구 방법은 '개념의 역사'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Heaven이라는 개념 자체의 변천 과정입니다.

대략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흐름을 추적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하늘
↓
유대교의 천상 세계와 하나님의 임재
↓
헬라 철학의 우주론·영혼론
↓
신약성경의 하나님 나라와 천국
↓
초대교회의 천국 이해
↓
교부들의 철학적·신학적 종합
↓
중세의 천국론
↓
단테와 중세 문학
↓
종교개혁 이후
↓
근대의 천국 개념
↓
현대인의 천국 상상

따라서 러셀에게 천국은 단순한 장소(place)가 아닙니다.

천국이라는 개념 속에는 하나님 → 인간 → 영혼 → 우주 → 죽음 → 구원 → 영원 → 행복이라는 서양 문명의 핵심적인 질문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3. 특히 중요한 것은 '유대교 + 헬라철학'의 만남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천국 이해를 단순히 “성경에 천국이 있으니까 초대교회도 천국을 그렇게 믿었다.” 라고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살아갔던 세계에는 이미 히브리적 성경 전통과 헬라 철학적 우주관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שָׁמַיִם (šāmayim, 하늘)
↕
οὐρανός (ouranos, 하늘/천상)
↕
heaven

이라는 언어적·문화적 이동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기에 플라톤주의, 스토아 철학, 신플라톤주의 등의 사상이 기독교 사상가들과 만나면서 영혼·천상세계·신적 실재·영원성에 대한 다양한 사유가 발전합니다.

4.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러셀의 연구를 “성경이 가르치는 천국의 역사”라고 읽으면 곤란합니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여러 시대의 천국 개념을 비교합니다.

따라서 러셀의 설명은 “기독교의 천국관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보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천국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라는 질문에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5. 그래서 목회적·신학적으로 읽는다면 '두 개의 렌즈'가 필요합니다

저라면 이 책을 이렇게 읽겠습니다.

러셀의 관점 성경·조직신학의 관점
         천국 개념의 역사            천국에 대한 성경의 계시
인간이 천국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나님께서 천국을 어떻게 계시하셨는가
             철학·문화의 영향                            성경 본문의 증언
        시대별 천국 이미지                       하나님 나라의 신학
                  지성사                         교의학·성경신학
  “어떻게 변화했는가?”                         “무엇이 진리인가?”

따라서 러셀의 책은 조직신학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조직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읽으면, 
“오늘 우리가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 가운데 성경에서 온 것은 무엇이고, 
철학과 문화에서 온 것은 무엇인가?” 
를 분별하는 데 상당히 유익합니다.

6. 특히 요한계시록 연구와 연결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니엘 7장 → 에스겔 1장 → 요한계시록 1장 → 계시록 4–5장 → 21–22장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성경의 최종적인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 → 새 예루살렘 →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심 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즉,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새 창조”로 완성됩니다.

이것은 러셀의 천국 개념의 역사를 연구한 다음, 성경의 종말론적 천국 이해를 다시 점검할 때 매우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가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설교나 논문에서 러셀을 사용하신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상당히 정확합니다. 

“러셀은 천국의 교리를 체계화한 신학자가 아니라, 천국이라는 개념이 유대교와 헬라 철학, 초대교회와 중세 기독교,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형성되고 변형되어 왔는지를 추적한 지성사학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연구는 천국에 관한 성경적 진리를 직접 확정하는 자료라기보다, 우리가 가진 천국의 이미지가 어떤 역사적·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자료이다.”

이렇게 규정하면 러셀의 역사학과 성경의 계시, 그리고 조직신학을 서로 혼동하지 않으면서 그의 책을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보좌 신학의 성경신학적 흐름

본문 보좌의 강조점 하나님에 대한 계시
이사야 6장 높이 들린 보좌 거룩하신 하나님
에스겔 1장 영광의 보좌와 움직이는 바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다니엘 7장 불꽃 보좌와 심판의 보좌 제국과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4–5장 하늘 보좌와 어린양 어린양을 통하여 구속과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

1. 이사야의 보좌 — 거룩하신 하나님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이사야 6:1

핵심은 거룩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히브리어 קָדוֹשׁ קָדוֹשׁ קָדוֹשׁ
(qādôš qādôš qādôš)

이사야에게 보좌는 먼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성과 초월성을 보여 줍니다.

보좌 → 거룩 → 인간의 죄 → 회개 → 사명


2. 에스겔의 보좌 —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에스겔 1장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바퀴와 생물 그리고 궁창 위의 보좌는 하나님의 통치가 특정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 줍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따라서 설교적으로

에스겔의 보좌 = 어디에나 임재하시며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라고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적절합니다.

다만 “우주”라는 표현은 본문의 직접적인 단어라기보다 성경신학적 요약이라고 해 두면 좋습니다.


3. 다니엘의 보좌 — 제국과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다니엘 7장은 이 표현에 아주 잘 맞습니다.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리고 바로 이어서 심판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네 짐승은 역사 속 제국들을 상징하고, 마지막에는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갑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보좌 =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제국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 제국의 심판 → 인자에게 나라와 권세를 주심”**이라는 구조가 중요합니다.


4. 요한계시록의 보좌 — 어린양을 통한 구속과 역사 완성

여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θρόνος(트로노스, 보좌)**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계시록 4장에서는

보좌 → 창조주 하나님 → 네 생물 → 24장로 → 예배

가 중심이고,

계시록 5장에서는 그 보좌 앞에 **어린양(ἀρνίον)**이 등장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그런데 아무도 그 책을 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리고 실제로 요한이 보는 것은 사자라기보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여기서 보좌의 신학적 중심이 놀랍게 드러납니다.

보좌 → 책 → 어린양 → 십자가의 희생 → 구속 → 역사 완성

따라서 질문하신

“계시록의 보좌 — 어린양을 통하여 구속과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표현은 매우 좋은 성경신학적 요약입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발전시키면

목사님께서 지금 연구하시는 다니엘 → 에스겔 → 계시록의 연결을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보좌 신학의 네 단계》

이사야

보좌의 하나님은 누구신가?
→ 거룩하신 하나님

에스겔

보좌의 하나님은 어디를 다스리시는가?
→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다니엘

보좌의 하나님은 역사를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 제국을 심판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그 역사를 어떻게 완성하시는가?
→ 어린양을 통하여 구속하시고 새 창조로 완성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면 하나의 구속사적 상승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거룩 → 통치 → 심판 → 구속과 완성

또는 더 간결하게:

이사야의 보좌 = 거룩
에스겔의 보좌 = 통치
다니엘의 보좌 = 심판
계시록의 보좌 = 구속과 완성

그리고 마지막은 계시록 21–22장입니다.

계시록 4–5장의 하늘 보좌가 마지막에는 새 예루살렘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 계 22:3

따라서 전체 성경의 보좌 신학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며, 마침내 어린양을 통하여 구속을 완성하시고 새 창조를 이루신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보좌 신학(Θεολογία τοῦ Θρόνου, Theology of the Throne)”**의 핵심 명제로 삼아도 상당히 좋습니다.





보좌신학(寶座神學, Theology of the Throne)




보좌신학(寶座神學, Theology of the Throne)
Θεολογία τοῦ Θρόνου
Throne Theology

보좌신학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좌(θρόνος, thrónos)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떻게 통치하시고, 그 통치가 역사·창조·교회·종말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는 신학적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니엘–에스겔–요한계시록을 연결해서 읽으면 매우 중요한 성경신학적 주제가 됩니다.

보좌의 핵심 개념

헬라어 θρόνος(드로노스)는 '왕좌, 보좌'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보좌는 단순히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主權)과 통치(統治)와 심판(審判)과 영광(榮光)을 나타내는 상징 입니다.

따라서 보좌신학의 중심 명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보좌 → 왕권 → 통치 → 심판 → 구원 → 예배 → 새 창조

다니엘의 보좌 —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다니엘 7:9–10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다니엘의 보좌 장면에서는 세상의 제국들과 하나님의 왕권이 대조됩니다. 
특히 네 짐승은 인간 제국의 권력을 나타내지만, 그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국의 역사는 인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최종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보좌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歷史統治의 보좌 - "제국의 역사 위에 하나님이 왕으로 앉아 계신다."

에스겔의 보좌 — 창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에스겔 1장에서는 훨씬 독특한 보좌 환상이 등장합니다.

바퀴(אוֹפַן, ʾōp̄ān)와 네 생물, 궁창, 보좌가 함께 나타납니다.

에스겔 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리고 1:28에서는 그것을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 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특정 장소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과 땅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은 움직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보좌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宇宙統治의 보좌 -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창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다."

요한계시록 4–5장의 보좌 — 교회의 예배와 하나님의 통치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가 중심 무대가 됩니다.

계시록 4:2
 
"하늘에 보좌를 베풀고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계시록의 시선은 땅에서 하늘의 보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보좌 주변에는

  • 24장로
  • 네 생물
  • 일곱 등불
  •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네 생물이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24장로는 면류관을 벗어 보좌 앞에 던집니다. 
즉 인간과 피조물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께 되돌아갑니다.

따라서 계시록 4장의 보좌는 敬拜統治의 보좌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 + 어린양입니다.

보좌의 통치가 어린양의 구속 사역과 연결됩니다.

계시록 21–22장 — 보좌에서 새 창조로

계시록의 마지막에서는 보좌가 다시 등장합니다.

계시록 22:1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에서 시작했던 생명의 강이 계시록 22장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창세기
→ 하나님의 창조

다니엘
→ 하나님의 역사 통치

에스겔
→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임재

계시록 4–5장
→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통치

계시록 21–22장
→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과 새 창조가 됩니다. 

'보좌신학'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보좌의 강조 신학적 의미
다니엘 7장 하나님의 왕권      역사 통치
에스겔 1장 영광과 임재  창조 세계 통치
계시록 4장 보좌와 예배    하늘의 통치
계시록 5장 보좌와 어린양  구속을 통한 통치
계시록 21–22장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새 창조의 완성

그래서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다니엘서의 보좌 : 제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에스겔서의 보좌 :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계시록의 보좌 : 교회를 세워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라는 구상은 설교적·성경신학적 틀로 상당히 유용합니다.

다만 한 가지를 보완하면 더 정확합니다.

계시록의 보좌를 '교회만을 다스리는 보좌'로 제한하기보다는, 
'어린양을 통하여 교회를 포함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마침내 새 창조를 완성하시는 보좌'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니엘의 보좌는 역사를 다스리고, 
 에스겔의 보좌는 창조 세계를 다스리며, 
 요한계시록의 보좌는 어린양을 통하여 구속받은 백성을 다스리고 마침내 새 창조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것을 더 크게 묶으면 “보좌에서 보좌로”가 아니라 “보좌에서 새 창조로”라는 성경 전체의 흐름이 됩니다.

 창세기 1장 → 다니엘 7장 → 에스겔 1장 → 계시록 4–5장 → 계시록 21–22장 이라는 구조로 연구하면 '보좌신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성경신학적 주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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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보좌는 아브라함 종교 즉 주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중심이다.
다양한 성경에서는 왕좌가 유대교에서 아라보트(עֲרָבוֹת' ărāḇōṯ)라고 불리는 일곱 번째 하늘 너머에 있다고 말한다.[1]

유대교

미가야(열왕기상 22:19), 이사야(이사야 6장), 에스겔(에스겔 1장), 다니엘(다니엘 7:9)은 모두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디아 가온(Saʿadiah Gaon)과 마이모네데스와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그러한 언급을 우화로서의 "왕좌"로 해석했다.[2]

기독교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인 천국, 다윗의 보좌,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언급된다. 
신약성경은 천국 자체를 "하나님의 보좌"로 유대인들이 동일시하는 것을 계속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하늘에 있는" 것으로 위치시키고 그리스도의 시간을 위해 하나님의 우편에 이차적인 자리를 갖는다고 말한다.[3]

각주

  1. In Seventh Heaven
  2. Bowker 2005, Throne of God entry쪽
  3. Philip Edgecumbe Hughe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p. 401 1988 "The theme of Christ's heavenly session, announced here by the statement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God, Hebrews 8:1 "we have such a high priest, one who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the Majesty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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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신학을 가르치는 김영욱 교수의 논문 /  신학지남 2022년 봄호에 실린 내용 

 

'하늘보좌에 앉으신 이'라는 주제는 얼핏보면 매우 단조롭고 추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흥미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만,현실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고, 반드시 누군가 써야하는 주제입니다.

현대신학의 흐름과 또 한국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신인동형론'의 잘못된 신학을 바로잡아야 하며, 그로 인하여 바른 예배가 드려질 수 있기에 이런 논문은 현재 꼭 나와야만 하는 절박한 필요성이 있습니다.

- 목 차 - 

1. 서론 
2. 하늘보좌 
3. 하늘보좌에 앉으신 이 
4. 요한계시록의 하늘보좌 
5. 결론

1. 꼼꼼함

구약을 전공하신 분으로서 항상 구약을 시발점으로 자신의 견해를 전개해 나갑니다. 
하늘보좌에 대하여 구약성경(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을 기본으로 삼고 마침네 요한계시록의 종착역에 도착합니다.   

2. 관심 - 하늘보좌에 계신 앉아 계신 하나님

보좌라는 단어는 구약에 136회 정도 나오는데 저자는 하늘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성부)에게 집중합니다. 
사람이 앉은 보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모양)이 어떠한지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하늘보좌에 앉아 계신 분에 관하여 집중하려고 한다. 
과연 성경은 하늘보좌와 그 주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모습 또는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말하는지 하는 것이다."(p.11)

이런 관점의 글은 현재 한국교회에 너무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성도들의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지식이 없기에 막연한 대상을 향해 막연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 보좌를 상징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틀렸다.

저자 김영욱 교수는 하늘보좌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보좌를 상징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의 권위 정도로만 이해하며, 
실질적으로 보좌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들이 난무한 곳에 폭탄을 투하한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은 하늘에 보좌가 있고, 앉아계시는 분이 있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은 이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시며(시 9:4, 7),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p.12) 

 4.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형상과 동일한가? 비슷한가?

저자는 신인동형론을 주장하는 자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지 약간의 애매함을 유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형상은 똑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전치사 케(~같이)와 모양(형상)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과 유사하게,  
닮은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모습이 인간과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다는 사실은 계속 이어지는 설명에서  알 수 있다."(p. 22)

 저자는 왜 이런 애매모호한 관점을 취하게 되었을까요?

현재 인간에는 전혀 없는 요소를 하나님(성부)은 가지고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묘사하는 두 단어 - 빛과 불 -로 인하여 인간과는 전적으로 동일한 형상을 주장하기가 무리라고 본 듯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강조하는 것은 '불같고'이다. 
불이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어로 등장한다. 
이것은 모세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불'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모습에서 광채(빛)가 발한다고 말한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겔1:28)."(p. 22-23)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빛에 거하시는 분이다. 이래서 에스겔과 요한은 보석이나 무지개로 설명한다. 
 광채가 나기 때문이다."(p. 32)

 아쉽게도 저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닮았다라는 것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다만 유사함과 비슷함을 닮았다는 말의 정의를 내리는데 사용합니다. 

 다소 애매한 표현으로 논문을 마무리 합니다.

 5. 성부 하나님은 어떤 형상인가?

한국교회 최초로 성경전체 주석을 쓰셨던 박윤선 박사는 성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소극적으로 일관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물리적인 형상이 없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곧바로 "하나님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으로 전환합니다. 

모두 상징으로 보기 때문에 빚어진 참사입니다. 

 현재 반틸의 제자로 알려진 존 프레림 역시 동일한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손, 눈, 그리고 발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인가? 
그분은 확실히 우리가 손, 눈, 발로 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더 좋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적 언어와 비유적인 언어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지어야 한다.

하나님은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비록 인간의 손이 하나님의 세공 수단을 적절하게 상징한다고 해도, 
그분은 실제로 손을 가지지 않으셨다. 
우리는 성경적 해석의 건전한 방법, 특별히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함으로 문자적인 것들과 비유적인 것들을 구분한다" 
(신론, 기독교문서 선교회, 존 프레임 저, 김재성 역, p.53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무형체적(incorporeal - 실체가 없는, 무형의)이란 점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기에, 
하나님이 문자적으로 남성이냐 여성이냐 하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주장하지 않는다"(같은 책, p.548)

 하지만 김영욱 교수는 상징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형상을 묘사한 문자대로 받아들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람과 닮은 형상을 지녔고, 손과 발이 있으며, 얼굴도 있는데 자세한 묘사는 없는 것이 신구약 성경의 특징인 것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옷을 입고 머리털이 있으시며 허리가 있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계신다. 
하지만 에스겔과 요한의 표현 가운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모습을 '~같다'고 설명한 것이다. 
인간과 유사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사실이다."(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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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전체를 종합하면, 
“하늘 보좌에 성부· 성자· 성령이 세 분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특히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의 좌우에 앉아 계신다는 그림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핵심은 삼위일체의 본질과 성경이 보여주는 구속사적 계시의 장면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1. 요한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분명히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4:2) 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그 보좌 앞에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서 있는데…” (계 5:6)

따라서 계시록 4–5장의 장면을 단순화하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성부) → 보좌 앞 / 가운데에 서신 어린양(성자) → 일곱 영(성령의 충만한 사역을 상징) 이라는 구도로 볼 수 있습니다.  

2.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한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1에서도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은 삼신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위격은 구별되지만 본질은 하나라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계시의 장면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성자는 어디에 계시는가?

성경에는 특별히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1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또한  “그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 히브리서 10:12

따라서 성자가 성부의 오른편에 계신다는 표현은 성경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성부 | 성자 | 성령

세 분이 물리적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은 왕권· 통치권· 영광· 권세에 참여하심을 나타내는 성경적 표현입니다.

시편 110:1이 그 배경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신약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승천과 왕권에 연결합니다.  

4. 그렇다면 성령은 어디에 계시는가?

여기서 “성령은 보좌의 왼쪽에 앉아 계신다”라고 말하면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참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은 성령을 보좌에 앉아 있는 제3의 인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은

  • 하나님의 보좌 앞의 “일곱 영”으로 상징되기도 하고(계 1:4; 4:5)
  •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역사하시며
  • 성도 안에 거하시고
  •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며
  • 그리스도를 증언하십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상징을 가지고 “성부 중앙, 성자 오른쪽, 성령 왼쪽”이라는 도식을 만드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5.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보좌”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보좌는 하나입니다.

계시록 4장의 중심은 θρόνος (thronos) — 보좌 입니다.

그런데 5장에서는 그 보좌와 어린양이 함께 계시되면서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계시록 22:1에 가면 더욱 놀랍습니다.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와…”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가 분리된 두 보좌가 아니라 하나의 통치권 안에서 표현됩니다.

계시록 22:3은 더 놀랍습니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하나님의 보좌 = 어린양의 보좌 라는 계시가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6. 따라서 이렇게 정리하면 가장 성경적입니다

질문 성경적 이해
   보좌에 앉으신 이는 누구인가?                       특별히 성부 하나님으로 묘사됨
         성자는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의 오른편,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어린양으로 나타남
      성령은 왼쪽에 앉아 계시는가?                           그렇게 묘사한 성경은 없음
  세 분이 세 개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가?                                            아님
    삼위 하나님은 몇 하나님인가?                                        한 하나님
             위격은 몇 분인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
              보좌는 몇 개인가?             계시록의 궁극적 통치 중심은 하나의 보좌

한 문장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자리의 의자에 앉아 계신다”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며, 
성경의 계시 장면에서는 성부가 보좌에 앉으신 이로, 성자는 어린양으로서 그 오른편에 계신 분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그리고 이것이 선생님께서 지금 연구하시는 “보좌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다니엘 7장 → 에스겔 1장 → 요한계시록 4–5장 → 요한계시록 21–22장을 연결하면, 
마지막에는 “누가 보좌에 앉아 계시는가?”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하나”라는 계시로 절정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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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

제1절 : 시편 110편에 나타난 우편보좌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제사장적 왕권”

제2절 : 다니엘 언약과 우편보좌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메르카바 전승” 
“두 보좌의 사상”
“그 사람의 아들 같은”
“예수의 자기 칭호, 인자”

“메르카바 전승과 이위일체론”

제3절 :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좌소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성도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심”
“성도를 위해 기도하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믿음의 주, 성도의 믿음의 모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

제9장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우편, 하나님의 우편보좌”는 예수의 좌소로 일관되게 그려진다.

※ 하나님의 우편은 어떤 물리적 위치와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조력을 상징하며,

※ 하나님의 우편 보좌는 단순한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⓵ 그곳에 앉는 존재의 신성과

⓶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

⓷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경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 상징한다.

※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있는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때”가 오기까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있다.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 땅에 와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원의 길을 이루고 승천한다.

∙승천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 대권을 위임받고

다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세상과 만물을 다스리며 주관 한다.

∙재림하는 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악을 심판하고

믿는 자는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한다.

제1절 시편 110편에 나타난 우편 보좌​

< 시편 110:1 >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 사도행전 2:34-36 >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시편 110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목격한 하늘의 비밀을 노래하고 있고,

그 비밀은 종말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세상을 심판하고 통치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시편 110편을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사도행전 2장을 보아야 하는데,

∙사도행전 2장의

⓵ 전반부(1-13절)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차제를 이야기하고 있고

⓶ 후반부(14-36절)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이야기 하고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기조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와 다윗과의 관계로서

---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인 다윗이 마치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보고 들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 이것의 논증으로 베드로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다.

∙그레고리 보이드는 시편110:1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에 따르면, 예수가 행한 핵심적인 일은 시편 110:1을 성취한 것이다.”

예수는 패배하고 낮아진 그의 원수들을 딛고서 신적 권세를 지닌 자리에 오르셨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결론은

다윗이 “내주”라고 부른 존재가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서 못 박은 예수”이며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만물의 “주”와 “그리스도(메시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1. 시편 110:1에서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르는 존재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하나님 외에 내 주라고 부르는 존재는 신의 존재일 것.

2. 시편 110:5에서 “주의 오른 쪽에 계신 주”의

 첫 번째 주는 여호와

 두 번째에 나오는 주는 누구인가?

--- 그는 첫 번째 주인 여호와의 오른쪽에 있으며, 하나님과 동등하게 주라 불리고 있다.

3. 1절과 5절에서 다윗이 목격한 주라 칭하는 신적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신약에서 분명하게 한다.

< 마 22:41-46 >

“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메시아)를 주라 칭하였는가?

⓵ 예수가 바리세인들에게 던진 질문

⓶ 시편 110:1은 유대 신학이 풀 수 없는 문제.(삼위일체론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들에게 있어서)

⓷ 예수는 이 대화에서 자신이 다윗이 불렀던 그 ”주“라는 주장을 하고 계신다.

⓸ 예수는 시편 110:1절에서 말하는 그 ”주“, 신적 존재인 그분이 바로 자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 발판(발등상) >

 고대 왕들이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려고 온갖 장식으로 치장된 높은 보좌에 앉을 때

발을 올려 놓던 것.

--- 단순한 발판 이상의 의미

--- 왕의 위엄과 권위를 한층 높이기 위한 장치

--- 발판의 겉면에 왕의 업적을 새겨 놓아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의 존엄과 공적을 드러냄.

ex) 전쟁에서 승리해 누구의 항복을 받아냈거나 영토를 넓힌 이야기, 국난을 극복 한 이야기, 기념비적인 토목공사를 이룬 이야기 등등...

--- 이집트 국립 박물관이나 카르낙 신전에 있는 이집트 파라오의 보좌들의 발판과

중근동 지역의 앗수르나 바벨론에서 발견된 유물들에서도 이와 같은 발판들 이 발견

 고대 사회 문헌에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목을 발로 밟는 모습이 자주 나타남

--- 내가 승리 했고 이제 너와 너희 나라는 내 보좌의 발판이 되었다는 표현

--- 수 10:24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 원수를 발판으로 삼아서 정복을 선포하는 고대 풍습과 관련 있는 상징적 행위.

 이런 고대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시편 110:1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 이 되게 하기까지”를 읽을 때, 이것은 단순한 발판이 아니라 이 발판의 주인공이 자 신의 업적을 한껏 과시하고 그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가 원수인 사탄을 향해 승리를 거두고, 예수의 승리의 전리품인 사탄을 예수의 보좌의 발판(발판에 새기는, 사탄의 머리를 발로 밟 는)으로 삼는 날이 올 때 까지”로 해석 할 수 있다.

내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

내 오른 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좌소를 가리킨다.

다윗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보내 심을 받을 때까지 예수님의 좌소는 하나님 우편 보좌였다.

하나님의 우편 보좌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상징.

⇨ 예수는 “통치의 대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아 시행하는 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는 분”이지만 이 땅에 오기까지는(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신다.

4. 베드로의 해석

⇨ 사도행전 3:20-21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미리 정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의 거룩한 선지자를 통해 약속한 것은 예수를 통해 만물을 회복시키 겠다는 것이다. 그 시간이 오기까지 예수는 반드시 하늘에 머물 것이다.

⇨ 베드로는 시편 110편과 마찬가지로 초림 이전의 예수의 좌소는 하늘, 하나님 우편 보좌였다고 말하고 있다.

5. 시편 110:1의 전체 의미를 재구성해보면

⓵ 다윗이 앞으로 천년 이후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미리 보는 신비한 경험의 기록으로.

⓶ 다윗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다.

⇨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신약의 언어로 설명하면

“장차 우리의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사탄이 예수에 의해 결박당할 날 이 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그 날이 바로 원수인 사탄 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날이고, 사탄을 예수의 보좌의 발판으로 삼는 날이다.”

제사장적 왕권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왕으로써 통치하는 메시아를 가리키며

본문이 멜기세덱을 언급한 것은 “메시아의 제사장적 왕권 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전리품중 1/10을 바치면서 등장.

 히브리서 7장 1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7장 7절: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높은 자로서 낮은 자인 아브라함을

축복한 분으로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

 히브리서 6:19-20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감으로 우리에게 죄 사함의 길이 열린다.

4. 결론적으로 시편 110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관한 엄청난 신비를 목격.

 다윗은 자신보다 높은 왕권을 가진 한 신적 존재를 본다.

 그분은 “종말에 왕들을 쳐서 깨뜨릴 분”으로 그때(종말)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 에 앉았다가 때가 되면 이 땅에 와서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등상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이룰 것이다.

 예수가 바로 그 언약의 성취자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탄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등 상에 새겨 넣게 만든 사건이다

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네 원수들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성취하신다.

 또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멜기세덱의 계열의 제사장이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지성소로 들어간 사건이기도 하다.

​

​제2절 다니엘 언약과 우편보좌​

다니엘서는 전반부(1-6장)인 다니엘의 삶과 후반부(7-12장)인 다니엘이 본 환상의 묵시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이 묵시 부분은 다니엘이 꾸는 꿈과 다니엘이 본 환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묵시 부분을 요약하면

 앞으로 네 개의 짐승으로 나타나는 악의 시대를 거치게 될 것이다.

 그 악의 시대가 끝나면 깨진 언약의 갱신이 일어나고 최종적으로 악이 패하며 하나님 나 라가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메르카바 전승 

메르카바는 “전차”를 의미

메르카바 전승이란? 구약과 묵시문학 중에서 .

 하나님의 보좌 수레가 나타나고

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⓷ 두 가지 특징을 가진 환상을 가리키는 신학용어

다니엘서 1장을 보면 전차가 나오고(1:15-21),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표현(1:26)

다니엘서 7장 역시 전차(7:9)가 나오고,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7:13)으로 표현됨

< 다니엘 7:9-10 >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메르카바 전승(Merkabah Tradition)이란?

메르카바(Merkabah, מֶרְכָּבָה)는 히브리어로 “병거, 전차(chariot)”라는 뜻입니다. 
특히 에스겔 1장의 ‘하나님의 보좌를 실은 하늘의 병거’ 환상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대 유대교의 신비주의적 전승을 가리킵니다.  

1. 단어의 의미  / מֶרְכָּבָה (merkāvāh)

  • 발음 : 메르카바
  • 어근 : רכב (r-k-b)
  • 기본 의미 : 타다, 올라타다, 병거를 타다
  • 명사 מֶרְכָּבָה : 병거, 전차

따라서 메르카바는 단순히 물리적인 전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나타내는 하늘의 병거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2. 성경적 출발점 : 에스겔 1장

메르카바 전승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출발점은 에스겔 1장입니다.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환상을 봅니다. 
“하늘들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그 환상에는 네 가지 중요한 요소가 나타납니다.

① 네 생물 — חַיּוֹת (ḥayyôt)
② 네 얼굴 — 사람· 사자· 소· 독수리
③ 바퀴 — אוֹפַנִּים (’ôpannîm)
④ 궁창 위의 보좌 — כִּסֵּא (kissē’)

그리고 그 위에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있습니다(겔 1:26).

즉 구조적으로 보면  네 생물 → 바퀴 → 궁창 → 보좌 → 사람의 형상 →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하늘의 통치 장면입니다.  

3. 메르카바의 핵심은 “병거”보다 “보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에스겔의 병거 환상”이라고 부르지만, 
에스겔 1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거 자체가 아니라 그 병거 위의 보좌와 그 보좌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메르카바 전승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좋습니다.

메르카바 = 하나님의 하늘 보좌와 그 보좌를 둘러싼 천상 세계에 대한 환상과 묵상에서 발전한 전승

이것이 후대 유대교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는 신비주의적 전승으로 발전합니다. 

4. 다니엘 7장과 연결됩니다

메르카바를 연구할 때 에스겔 1장만 보면 안 됩니다.

특히 다음과 연결됩니다.

에스겔 1장
→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

다니엘 7장
→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보좌와 하늘 법정

이사야 6장
→ 높이 들린 보좌와 스랍의 “거룩하다”

요한계시록 4장
→ 하늘 보좌, 네 생물, 24장로

이렇게 보면 성경 안에서 “보좌 환상”이라는 하나의 계보가 나타납니다.  

5. 특히 요한계시록 4장과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최근 연구하신 요한계시록 4장과 연결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에스겔 1장 요한계시록 4장
    하늘이 열림              하늘에 열린 문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보좌
      네 생물                    네 생물
    생물의 눈                  생물의 눈
 보좌 주위의 광채          보좌에서 번개·음성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생물의 경배                생물의 경배
하나님의 거룩하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특히 “네 생물”과 “거룩하다”는 연결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장은 단순히 미래의 천국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에스겔의 메르카바적 보좌 환상을 새롭게 재구성한 묵시적 장면
으로 볼 수 있습니다.

 6. 그런데 “메르카바 전승 = 성경”은 아닙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의 보좌 환상

→ 에스겔 1장
→ 이사야 6장
→ 다니엘 7장
→ 요한계시록 4–5장 과 후대 유대교의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후대의 메르카바 전승에서는 천상계의 여러 단계, 천사들, 하늘로 올라가는 신비적 경험,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는 묵상 등이 점차 발전합니다.

대표적으로 헤칼롯(Hekhalot, הֵיכָלוֹת) 문헌과 연결됩니다.

Heikhalot는 문자적으로 “궁전들/성전들”이라는 뜻이며, 
신비가가 여러 천상의 궁전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는 내용이 중심이 됩니다.

 7. 메르카바 전승의 신학적 핵심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보다 “누가 우주를 통치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전승입니다.

메르카바 환상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권입니다. 
따라서 목회적으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보좌는 하나님의 통치권이다. 
병거는 하나님의 임재가 움직이는 통치이다. 
네 생물은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최근 말씀하신 
“다니엘서의 보좌는 제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에스겔서의 보좌는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의 보좌는 교회를 세워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라는 구상도 
상당히 의미 있는 성경신학적 발전 구조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메르카바 전승 자체를 그 구조의 중심으로 놓기보다는, 
에스겔 1장의 보좌 환상이 후대 메르카바 전승으로 발전했고, 
요한계시록 4–5장은 다시 그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고 구분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더 정확합니다.  

핵심 흐름

에스겔 1장
↓
메르카바(מֶרְכָּבָה) 전승
↓
헤칼롯 신비주의
↓
천상 보좌·천상 예배에 대한 유대교적 묵상
↓
요한계시록 4–5장의 보좌 환상과 비교 연구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차이는 요한계시록 5장입니다.

에스겔의 보좌 환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에 집중한다면, 요한계시록 5장은 그 보좌의 중심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등장시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보좌 신학은 궁극적으로 
“보좌 → 하나님 → 어린양 → 십자가 → 구속 → 온 우주의 예배”로 확장됩니다.

이것이 메르카바 전승과 요한계시록 4–5장을 연결할 때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차별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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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칼롯 신비주의(Heikhalot Mysticism)

헤칼롯 신비주의(히브리어 הֵיכָלוֹת, Hekhalot, “궁전들·성전의 전당들”)는 고대 유대교에서 발전한 하늘의 여러 궁전(heavenly palaces)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려는 신비주의적 전승입니다.

특히 앞서 살펴보신 메르카바 전승(Merkabah Mysticism)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1. 헤칼롯이란 무엇인가?

הֵיכָל (Hekhal)  = 궁전, 전당, 성전

복수형이 הֵיכָלוֹת (Hekhalot)입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하늘의 궁전들” 또는 “하늘의 전당들” 이라는 뜻입니다.

헤칼롯 문헌에서는 신비가가 환상 가운데 여러 하늘의 궁전들을 차례로 통과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2. 메르카바와 헤칼롯의 관계

두 전승을 구별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구분 메르카바 신비주의 헤칼롯 신비주의
    핵심 하나님의 보좌/병거                      하늘의 궁전들
 히브리어 מֶרְכָּבָה                                          הֵיכָלוֹת
성경적 중심            에스겔 1장                   에스겔 1장과 보좌 환상
관심 하나님의 보좌를 봄                 여러 하늘 궁전을 통과함
목표 하나님의 영광에 접근              궁전들을 지나 보좌 앞에 도달
중요한 인물              에스겔        랍비·신비가, 특히 Rabbi Ishmael 등
위험 거룩한 보좌에 접근하는 위험     각 궁전의 천사와 수호자를 통과하는 위험

즉, 메르카바가 “무엇을 보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헤칼롯은 “어떻게 하늘의 궁전들을 통과하여 그곳에 이르는가?”에 더 관심을 둡니다.

  3. 성경적 출발점은 에스겔 1장

헤칼롯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에스겔 1장입니다.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특히 에스겔 1:26–28의 핵심은 
“보좌의 형상”
“그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입니다.

따라서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에스겔 1장 → 메르카바 → 하늘의 궁전 → 하나님의 보좌라는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4. 왜 '궁전'이 중요한가?

헤칼롯 전승에서 하늘은 단순히 하나의 공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신비가가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갈수록 여러 단계의 궁전을 통과해야 한다고 묘사합니다.
일반적으로 일곱 궁전의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제1궁전
↓
제2궁전
↓
제3궁전
↓
제4궁전
↓
제5궁전
↓
제6궁전
↓
제7궁전
↓
하나님의 보좌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 일곱 궁전 구조를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보좌 환상에서 출발하여 후대 유대교 신비주의가 발전시킨 신비주의적 우주론입니다.  

5. 천사들이 중요한 이유

헤칼롯 전승에서는 각 궁전에 천사적 존재와 수호자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닙니다. 
거룩함의 문을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신비가는 자신이 그곳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며, 천사들에게 적절한 인장·이름·찬양·비밀 지식 등을 제시하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신학적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보좌'가 헤칼롯의 중심이다

성경에서 보좌는 단순한 의자가 아닙니다. 
보좌 = מלכות(Malkhut) = 왕권·통치 입니다.

따라서 하늘 보좌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 것이다. 라는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성전과 우주적 통치의 이미지와 연결되고, 
다니엘 7장에서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보좌에 앉으셔서 제국들을 심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하늘에 보좌를 베풀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 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스겔 → 다니엘 → 요한계시록의 보좌 신학은 매우 중요한 성경적 연결고리가 됩니다.  

7. 그러나 헤칼롯과 요한계시록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하늘 보좌와 천사, 찬양, 거룩함, 하늘의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 헤칼롯 문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헤칼롯 문헌의 대부분은 신약성경 이후의 유대교 신비주의 전승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별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안전합니다.

 성경

에스겔 1장
↓
다니엘 7장
↓
요한계시록 1장
↓
요한계시록 4–5장
↓
요한계시록 21–22장

  
후대 유대교 신비주의

에스겔의 메르카바 환상
↓
메르카바 신비주의
↓
헤칼롯 문헌
↓
하늘 궁전과 보좌로 올라가는 신비주의적 전승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8. 헤칼롯 문헌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헌들이 있습니다.

  • Hekhalot Rabbati — 「큰 헤칼롯」
  • Hekhalot Zutarti — 「작은 헤칼롯」
  • 3 Enoch / Sefer Hekhalot — 「에녹 3서」
  • Ma'aseh Merkavah — 「메르카바의 행위」

특히 3 Enoch에서는 에녹이 천상 세계로 올라가 메타트론(Metatron)이 되는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성경의 에녹 이야기와 후대의 신비주의적 에녹 전승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9. 헤칼롯 신비주의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목사님이 설교나 강의에서 정리하신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헤칼롯 신비주의는 에스겔의 메르카바 환상을 배경으로 인간이 여러 하늘의 궁전들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와 영광에 접근하려는 고대 유대교의 신비주의적 전승이다.”

그리고 성경적 보좌신학과 비교한다면 더욱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헤칼롯은 ‘하나님의 보좌에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를 묻지만,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누가 앉아 계시며 그분이 누구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시는가’를 계시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 4–5장에서는 인간 신비가가 보좌에 올라가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시의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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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보좌 사상 

다니엘 7:9의 보좌는 “보좌들(”thrones were set in place)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을 “두 보좌 사상”이라고 한다.

다니엘은 하늘에 두 개의 보좌들이 놓여 있는 환상을 본다.

이것은 유대 신학의 전통적이고 완고한 유일신론을 벗어나는 것으로

다니엘서에 기록된 두 보좌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다.

이 두 보좌 중에서 한 보좌의 주인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인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다른 보좌에 앉을 존재는 누구일까? 13절에 그 다른 보좌에 앉을 주인공(인자 같은 이)이 등장함.

 “ 그 사람의 아들”같은 

< 다니엘 7장 13절 >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like a son of man)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하늘에 놓인 두 보좌 중에서 다른 한 보좌에 앉을 그는 분명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이다. 
그 이유는?

 그는 신적 임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인 “하늘 구름을 타고(coming with the clouds of heaven)오기 때문이며,

 그는 ”인자 같은 이,like a son of man“으로 묘사 되기 때문이다.

• ”인자(son of man)“는 ”사람의 아들“로 결국 ”사람“

• ”인자 같은 이(like a son of man)“은 사람같이 생겼지만 사람이 아닌 신적 존재임을 의 미.

다니엘 7:14에서 ”그 사람처럼 생긴 신적 존재“에게 세상 통지권이 부여된다.

”사람처럼 생긴 신적 존재“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은 존재“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존재라면,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상상 할 수 없다,

시편 110편의 다윗처럼, 선지자 다니엘도 하나님의 통치 대권을 위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 보좌“의 주인임을 증언한다.

 예수의 자기 칭호, 인자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자기 칭호는 언제나 ”인자(그 사람의 아들, the son of man)이다.

예수의 자기 칭호의 의미는?

 다니엘 7장의 “인자 같은 이(사람의 아들처럼 생긴,like a son of man)와 연결된다.

 예수의 자기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에서 ”그“는 정관사 ”the“로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보았던 ”사람의 아들처럼 생긴“을 지시한다.

 예수의 자기 칭호인 ”인자, 그 사람의 아들“은 자신이 다니엘의 묵시에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처럼“생긴,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통치대권을 위임받은“

바로 그 신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호칭이다.

<마 26:63-64>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산헤드린이 예수를 심문하는 본문에서

예수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는 대제사장에게

소극적으로 ”네가 말했다“고 대답하지만

64절에서는 자신이 다니엘서 7장 묵시에 나타난 바로 그 메시아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다니엘서의 핵심 내용은?

 하나님이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있는 보좌에 앉을 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통치 대권을 맡긴다는 것

 예수님의 초림이 있기 600년전에 다니엘의 환상으로 드러난 계시는 신약에서 성취되었다.

 신약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아 세상을 통치하여

장차 다시 오셔서 사탄과 죽음을 멸하고 영원토록 왕 노릇 한다는 것이다.

 단7:14에서 말하는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권세“”멸망당하지 않을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요한 계시록 1:13-1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 게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 사도가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자 같은 이(like a son of man)“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다니엘이 본 것과 같은 ”인자 같은 이“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은 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며 결국 그는 다니엘 언약의 성취자로서의 ”인자 같은 이“인 것이다.

다니엘 언약(인자 같은 이, like a son of man)

예수(인자, the son of man)

요한계시록(인자 같은 이, like a son of man) 이 연결되고 성취 된다.

​

제3절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좌소​

< 마가복음 16:19 >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좌소가 주는 의미는?

⓵ 승천하신 예수님은 재림의 때를 기다리신다.

⓶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여전히 세상을 통치하고 보존하고 주관하는 일을 지속하신다.

⓷ 하나님이 정하신 재림 때 예수는 그 보좌에 앉아서 구원과 심판을 행한다.

성도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심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설교를 마치지도 못한 채 순교당하는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사도행전 6장에 나온다.

<사도행전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도다”

거짓 증인들에 의해 스데반은 “성전”과 “토라(모세의 율법)”을 부정한다고 고발을 당한다.

유대교 입장에서 “성전, 토라, 구원에 이를 만한 행위”중 두 가지를 부정하는 것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죄이다.

그너나 스데반은 조금도 위축됨 없이 유대인의 거짓 고발처럼 “거룩한 곳(성전)”을 거슬러 말하고, 이스라엘이 항상 율법을 거스르고 지키지 않았음을 선언한다.

스데반 설교:

⓵ <행 7:48-50> ---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성전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으 로 지은 곳, 곧 성전에 제한되어 머물러 있지 않는다고 선언함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 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⓶ <행 7:51-53> --- 유대인들이 율법을 거슬러 정작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자들을 죽였고, “의인”인 예수도 죽인 살인자로 천사가 전하여준 율 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은 죄인임을 천명함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 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 도다 하니라”

⓷ <행7:55-56>

•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보라 하늘이 열렸다,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보노라”

“주목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순교하는 현장에 ”서신 예수“이다.

• 예수의 증인이 되려고 기꺼이 죽음을 택하고 순교자의 길을 가는 스데반을 두고

평안히 보좌에 앉아 있을 수 없서 서신 예수를 보라.]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심 

< 로마서 8:33-35 >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 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 이나 칼이랴“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으며,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드려지는 예수의 끊임없는 기도는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의 확증이고 이러한 예수의 사랑의 기도 덕분에 우리는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기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 히브리서 8:1-3,6>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 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그러나 이제 그 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시라“

• 히브리서8장의 주제는 새 언약(6절에 의하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는 지금도 하늘의 참 성전에서 대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지속하 고 있다.

• 대 제사장이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

⓵ 성전에서 예불과 제사드림을 위해 세워진 자

⓶ 이를 통해 백성들은 죄 사함을 얻는다.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 대제사장직은 지상에 있는 성전의 대제사장과 다르다.

<히브리서 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 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 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 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예수 이전에는 모두가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서 대제사장의 집례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예수가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우리는 더 이상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갈 필요가없다.

• 히브리서 8:6에 의하면 예수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로

히브리서 10:12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의 우편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에 힘입어 우리는 온전케 된다.

시편 110:1의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말씀이 종말의 시작이라며,

히브리서 10“13의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 되게 하살 때까지 기다리시나니“는 마지막 종말의 최후의 심판을 의미한다.

 믿음의 주, 성도의 믿음의 모범 

< 히브리서 12:1-3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 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전체를 관통하는 상황은 “시련, 핍박”이다.

이런 핍박의 시기를 잘 통과하려면 신앙적 덕목이 인내다.

인생과 신앙의 길은 마라톤과 같다. 이는 끝까지 잘 견디며 달려가야 할 길이다.

이 마라톤과 같은 신앙의 길은 외로운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⓵ 앞서서 이 길을 달려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⓶ 무작정 방향없이 달려가는 길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길이므로

믿음의 주(히12:2절)

⓵ 아르케고스( 주 ): 아르케고스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지중해를 항하는 배의 선 원 중 수영을 가장 하는 사람이 맡는다. 고대 위험한 지중해 항해에서 배가 난파의 위기에 처하면 이 아르케고스가 허리 에 밧줄을 메고 바다로 뛰어든다. 해안가에 도착해서 배를 해안에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⓶ 이러한 아르케고스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선구자, 선두”의 뜻을 가지게 되었고.

⓷ 성경에서는 복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르케고스로 표현한다.

⓸ 예수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우리를 위하여 선두에서 사랑의 바다로 뛰어들어 부활로

이기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아르케고스이다.

2. 창시자, 임금, 주 (히브리서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 아르케고스

<히브리서 2:10>

“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 행 5:30-31 >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 느니라“

< 행 3:14-15 >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히브리서의 “창시자” 사도행전의 “임금” “주”도 아르케고스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은 아무도 가지 않는 선구자의 길이며,

우리의 선두에서 죽음을 이긴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의 창시자요, 임금이며 또한 믿음의 주”이다.

 하나님의 그 어린 양의 보좌 

<요한계시록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 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 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 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 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 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 다”

위 구절들은 구원의 최종적 상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2장은 창세기 3장의 에덴과 대비를 이루는 “새 에덴, 회복된 에덴”의 삶을 나타내고 있다.

첫 에덴에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영적, 육적 죽음이 선포 되었지만

새 에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는)서는 저주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여 어린 양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탄도, 죽음도, 죄도 없어졌기 때문 이다.

새 에덴 중앙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가 놓여 있고 이곳으로부터 생명 수 강이 흘러나오는데 바로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교제를 의미한다.

이런 교제가 이루어지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아담처럼 하나님을 피할 필요가 없이 모두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4절), 그때에 그들은 예수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3절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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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좌 (요한계시록 4:1-11)

1.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가 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하늘의 문이 열리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계 4:1).

하나님의 보좌는 천상의 중심에 위치하며,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온 우주를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보라 하늘에 보좌가 베풀어졌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4:2). 하나님께서는 이 보좌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분의 권위 아래 모든 피조물이 복종합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통치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의 청결이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과 청결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계 4:3).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광과 청결함을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스물네 장로와 일곱 등불이 있으며, 이는 성령의 일곱 영을 상징합니다. "보좌에 둘러 스물네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스물네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 4:4). 하나님의 영광은 청결함과 거룩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도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전합니다.

3. 네 생물이 있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이 있습니다. "그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계 4:6). 이 생물들은 각각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네 생물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거룩함을 노래합니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계 4:8).

이 생물들의 찬양은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그분의 거룩함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요한계시록 4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좌는 그분의 위엄과 권위, 영광과 청결, 그리고 네 생물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경외감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기억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청결함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생물의 찬양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거룩함을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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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의 이미지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미들을 갖는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 보좌는 권위, 위엄, 화려함을 의미한다. 보좌의 이미지는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들 중의 하나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린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두고 지위(status)라고 부른다. ‘서다’를 뜻하는 라틴어 stare에서 파생되었다. 어딘가에 서는 것, 그게 바로 지위이고, 지위란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위의 고하를 나누기 좋아한다. 사회의 세세한 면에 따라 그 조건은 달라질 수 있지만 지위에 높고 낮은 게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속된 말로, 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왕의 보좌는 동방에서 헬라로 들어왔다. 신의 보좌는 Zeus의 특권이지만, 때때로 Zeus와 Hera를 위한 이중 보좌가 사용되기도 한다. 동양에서 왕 또는 황제의 권세에 대한 개념과 신의 권세에 대한 개념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했다. 헬라인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기(B.C. 356-323)에 이르러서다. 동방의 황제나 왕에 대한 존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국 송나라 고승(高丞)이 편찬한 고서 사물기원(事物紀原)에서 유래했다. 천자에게는 폐하(陛下), 임금에게는 전하(殿下), 장군에게는 휘하(麾下), 높은 벼슬아치에겐 각하, 부모에겐 슬하(膝下), 그리고 다정한 친지에게는 족하(足下)라는 존칭을 쓴다고 한다. 존대의 대상이 살고 있는 건물이나 발아래서 우러러본다는 의미다. 그래서 왕의 보좌, 즉 왕좌는 높은 것이 특색이다.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성경의 한 중심적이고, 통합적인 주제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보좌의 이미지는 이 주제의 기초가 된다. 보좌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135번, 신약성경에 61번 등장한다.

솔로몬의 보좌는 여섯 계단 위에 있었다. 야훼의 보좌는 ‘높이 들려’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사 6:1). 솔로몬의 보좌는 매우 인상적이다. 상아를 새기고 그 위에 고귀한 금을 덧붙여서 만들었다. 사자, 즉 고대 근동에서 왕의 힘과 권위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물을 양 팔걸이에 놓여 있었다. 엄격하게 말해서 왕좌라는 말은 동방에서 유래한 말이다. 보좌에 앉는 것은 절대 군주의 유일무이한 존엄성과 그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완전한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좌에 앉는 것은 지배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왕의 보좌나 그가 보좌에 앉아 있는 것에 관련된 구절은 통치를 위한 힘과 권위를 나타낸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결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보좌에 않아 있을 때뿐이다. 훌륭한 장식은 그의 거룩한 존엄성을 나타낸다. 보좌의 양편에는 하늘의 수행원들, 즉 통치력을 나타내는 상징들로서의 인간의 두뇌나 사자의 머리를 지니고 있는 날개 달린 생물들이 서있다(참조, 왕상 10:18 이하).


『The Queen of Sheba visits King Solomon』, Artist:Lucas de Heere, 1559

1. 하나님 나라에서 보좌의 이미지

보좌라는 말이 성경에는 문자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 두 가지로 사용되었다. 보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כיסא’(키세)는 모든 좌석을 언급한다. 특별히 존귀한 사람이 않는 중요한 좌석을 언급할 수도 있다(왕상 2:19). 왕정제도가 확립된 이래로 보좌는 통치자(창 41:40)와 그의 친족들(왕상 2:19)이나 대리자들(느 3:7)의 전유물이었다. 본래 왕이 재판관의 직무도 수행하였음으로 보좌는 왕의 권력과 정의(시 122:5)를 상징하는 실체였다. 왕은 야훼의 대표자이므로 그의 보좌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야훼의 나라의 위’이며(대상 28:5), 하늘에 있는 야훼의 보좌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의와 공의가 그 보좌에 앉은 자에게 요구된다. 구약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보좌에 견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언약궤는 한 번도 하나님의 빈 보좌라고 언급되지 않는다.

조선 말기의 학자인 전우의 ‘간재집(艮齋集)’에 있는 글이다. ‘한 자리라도 제대로 된 자리에 머문다면 온 사방의 표준이 될 것이다(一席得其所止 四海以之爲準)’.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하였다. “땅은 사방으로 넓고 시간은 만세토록 영원한데 사람이 머무르는 것은 자리 하나와 백 년에 불과하다.” 키세 단어의 어근 ‘카사’는 덮개가 있는 구조, 즉 보좌를 시사한다. 키세와 반대로 백성들은 보통 그 앞에 굻어 엎드려 있기 때문에, 이 의자(보좌)는 위엄의 표시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를 보좌라는 의미로 사용하려면 왕의 개념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왕위의 개념은 그 나라의 위라는 어구 속에 반영되어 있다(대하 7:18). 보좌는 왕(창 41:40)이나 왕의 모친(왕상 2:19), 총독(느 3:7)을 위한 자리이다. 파라오의 장자는 보좌를 함께 나누었다(출 11:5). 솔로몬은 다윗의 자리에 앉는다(왕상 1:13). 이렇게 보좌는 통치의 상징이다.

보좌에 해당하는 ‘θρονος’(드로노스)는 인도 게르만 어근 dhere에서 유래한 말이며, 라틴어 firmus와 게르만어 dingen과 관련 있는 말이다. 자리 및 발등상과 관계있는 이 단어는 등받침과 팔받침, 그리고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장로나 교사 같은 사람들이 앉는 자리인데, 후에는 신들을 위한 자리가 된다. 이 단어의 복수형(골 1:16)은 왕이나 신의 권능을 의미할 수 있다. 본래 어떤 특별한 상징적인 의미없이 사용되었던 이 말은 Suetonius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신의 보좌(the seat of a god)’를 일컫는 말로만 사용되었던 라틴어 thronos에 비해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의 보좌에 앉으심을 연결시킨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그를 하늘의 보좌로까지 높이셨다. 성경에서 보좌를 언급한 구절들 중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것이다(약 60%). 하나님의 왕권은 성경에서 여러 번 강조되었으며, 그의 보좌는 그의 주권적인 통치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증거였다. 하나님은 그의 보좌에서 통치하신다. 보좌는 위엄과 권위를 상징한다. 이 위엄과 권위는 직접 보좌를 차지한 자를 넘어 확대할 수 있다(삼하 7:13-16).

2. 하늘의 보좌 우편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전통적인 표현이다. 이 구절은 하늘이라는 영역에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이 우주의 통치자로서 왕위에 오르신 것에 대해 말한다. 이사야 66:1 이하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부르신다(마 5:34). 이 보좌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같다. 스데반은 동일한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성전에 갇혀 계실 수 없음을 역설한다(행 7:49). 인자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보좌에서 심판하실 것이다(마 25:31 이하). 신실한 자들은 어린양의 보좌에 자리를 약속받고(계 3:21), 그리스도의 재림 전의 심판은 그들에게 위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림 후의 심판에는 크고 흰 보좌만이 있다(계 20:11).


God Inviting Christ to Sit on the Throne at His Right Hand (1645) by Pieter de Grebber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여 이제 ‘하늘’로 높아지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주셨던 위엄과 영예를 표현한다(빌 2:9-11). 하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역의 더 큰 실재를 가리킨다. 중대한 생명의 중심이 이 땅의 삶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있다.

시편 110편은 원래 왕의 대관식 시편으로 사용되어 왔을 것이다. ‘우편에 앉는다’는 왕이 종종 어떤 특정 도시나 국가의 수호신 옆에 앉는 것으로 표현되는 고대근동 세계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왕권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보좌에 앉는 것은 왕위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보좌는 끊임없이 교체되는 권력자들과 달리 항구적인 요소였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통치를 영원히 견고케하리라고 약속한 나단의 약속은(삼하 7:13) 보좌에 관한 것이었다(참조, 왕상 28:5; 29:23). 다윗의 보좌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삼하 7:22 이하). 이사야 9:6에서는 메시야의 보좌가 영원할 것이라고 언급된다. 다윗의 왕권은 하나님의 왕권을 암시하므로, 이 보좌는 야훼 왕국의 보좌(대상 28:5), 혹은 야훼 자신의 보좌(대상 29:23)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좌에 대한 언급이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언급(사 66:1)은 통치자 하나님의 위엄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 우편에 앉혔다는 것은 곧 그 통치자가 그 신을 대표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며, 또한 최고의 영예를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약성경 자체에서 야훼의 오른편은 호의, 승리 그리고 능력의 자리로 표현된다.

1세기 일부 유대인이 시편 110편을 메시야 사상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것을 사용한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이 시편을 선포하실 때 주에 해당하는 ‘아돈’이 바로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을 청중들도 인정할 것이라고 여기셨다(막 12:37). 시편 110:1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교회의 초기 신앙고백과 설교에서 증거 되었다.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자리에 앉다와 왕 혹은 신의 위엄을 지니게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기름부음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있듯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높임을 받는 것 역시 그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늘 보좌에 앉는 것은 공간적으로 비유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라는 것을 하나의 장소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권위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늘이라는 것도 지구 바깥 쪽 외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참고. 1:3).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을 때 하신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구약의 두 본문을 함께 인용하였다(시 110:1; 단 7:13). 아마도 예수님 시대에 유대주의 해석자들이 이미 이 두 본문을 메시야에 관한 본문으로 함께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대관식은 1, 2부로 진행된다. 1부는 성소에서, 2부는 왕궁이다. 성소에서 옥새가 수여되고, 기름을 붓고, 환호가 끝난 뒤에는 모두 성소를 떠나서, 새 왕이 왕위에 앉아 있는 궁전으로 간다. 예를 들면 솔로몬과 요아스이다. 이러한 행위는 권력의 인수를 표현한 것이다. ‘왕위에 앉는 것’은 ‘통치권을 잡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다.

그리스도는 지금 왕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는 죄를 속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같은 사람이자 형제로 완전하게 공감하는 것, 그리고 신적 전능하심이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보좌와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보좌는 동일한 보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지위적인 위엄에 있어 천사들보다 무한히 탁월하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땅의 장막은 하늘 성소의 한쪽이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하늘 보좌로의 왕적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등극을 상징한다. 그래서 ‘위대한 왕’은 찬송이 울려퍼지는 시온에서 뿐만 아니라, 온 땅에 걸쳐 다스린다.

그리스도의 지위는 단지 보좌 우편에 있는 지위가 아니라 그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의 우편에 있는 보좌의 지위이다. 하나님 우편에의 좌정은 초월적인 위엄에 관한 함축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하늘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하신다는 의미를 상기시킨다. 주요한 암시는 시편 110:1에 대한 것이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왕이 기름부음 받은 대제사장이라는 스가랴 6:13에 대한 부차적인 암시를 의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아들의 보좌이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천의 결과 하나님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신 왕적 대제사장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이 통치 보좌는 단순한 왕궁이 아니다. 그것은 ‘성소와 참 장막’이기도 하다. 일부 학자들은 장막이 하늘 전체를 의미하고, 성소는 가장 안쪽의 하늘의 의미한다고 해석하지만 두 표현은 것의 같은 뜻이다.

1. 그리스도는 왕적 대제사장으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다.

유대교 아론 제사장이나 레위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앉는 일이 없었다. 그들이 성소의 의무를 다하기까지 계속 ‘서 있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서서 섬겼을’ 뿐만 아니라 ‘매일 서서 섬겼다.’ 그들은 어제 제사를 드렸는데도 오늘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하며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또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율법이 존속하는 한 그들은 매일 서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렇게 그들의 ‘서 있는’ 자세는 그들의 일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벽한 왕적 대제사장으로서 ‘그 자리에 앉았다’. 이 ‘앉음’은 완성과 왕위를 모두 의미하는데, 구약 전통에서는 다윗계 왕만이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이 요점은 서언에서 왕이신 아들과 관련하여 언급하였고, 히브리서 8:1에서는 대제사장 주제에 직접 적용되어서 반복된다. 이 개념은 10:12과 12:2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왕적 대제사장으로서 제대로 완수된 사역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시편 110:1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의 희생이 죄를 해결하기에 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앉아 계신다. 이는 그의 대제사장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표시다. 제사장들의 임무는 결코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결코 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단번에 제사를 드리시고 앉으실 수 있다. 그의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멜기세덱 서열의 유일무이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만이 ‘앉아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반복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단 한 번의 제사에 의해 거룩하게 한 자들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대신한 십자가상의 자기 몸 제사는 다른 제사를 종결시키는 제사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 드린 단 한 번의 제사가 죄에 대해 궁극적 효력을 지닌다는 것과, 또한 지금은 감췄지만 곧 드러날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둘 다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과 의식들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왕적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야 한다.

대제사장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단순한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왕적 대제사장으로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고 그분의 사역이 끝났음을 확인해 준다.

대제사장으로 승천은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고

땅의 사역의 종결을 의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는 데서 그의 제사의 가치와 그의 인격의 품위가 더욱 예시되고 있다. 십자가의 수치에서 그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로 높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더욱 더 확신을 가지고 그의 대제사장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능력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왕으로서 다스린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리스도는 속죄 사역을 마치셨으므로, 더 이상 제단에 서 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승천하여 자신의 피로써 화해한 아버지의 오른편의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더구나 그의 앉으심은 ‘높은 곳’에의 앉으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여 이어서 하늘을 통과하신 일, 곧 승천한 것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완성이다. 제사장들은 앉아 있는 동안에 그들의 임무는 수행하지 않았는데, 히브리서에서 앉아 있음이 그리스도의 제사에 담긴 궁극성(finality)를 가리킨다는 점을 나타낸다. 칼빈(Calvin)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는 말을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해한다. 승천을 통해 하늘의 보좌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순종으로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영광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가 가진 것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아들로서 누리던 영광이었다(요 17:5).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 내에서 피조물을 통해 보여진 만큼만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는 왕적 대제사장으로 하늘 보좌에서 통치한다.

히브리서를 여는 첫 단락에서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존귀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분이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힌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은 대제사장으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왕이다. 저자는 8:1에서 레위직 제사장직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적 대제사장으로서의 우월성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대제사장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은 저자의 논증에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머레이(A. Murray)는 그리스도가 왕이시기에 하늘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분의 위치는 이제 아무도 것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곁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완전히 소유하고 다스릴 수 있는 등위, 즉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위치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러한 왕적 대제사장을 가졌다는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알아야 할 핵심 사항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완성한 후, 하늘 보좌에 오른다. 여기서 행위가 특별하다. 이 행위는 죄를 정결케 한 사건 이후에 발생한다. 이것은 즉위의 중요성의 핵심이 죄를 정결케 하는 것에 있다는 암시를 준다. 속죄일에 죄를 정결케 하는 대제사장의 사역과 왕으로 보좌에 등극하는 것을 암시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곧 그의 거룩한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다는 선언은 바로, 그가 우주의 통치자, 만왕의 왕이라는 선언에 상당하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 한 번 언급한다. 부활보다 하늘 보좌에 앉은 것을 강조한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이 서서 제물을 바치는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적 사역을 마치고 주권적 통치를 이행할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오른쪽에 그의 자리를 잡은 것으로 묘사된다. 메시아의 왕으로서의 역할은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능과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 책의 주된 강조점 가운데 하나를 통해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제사장적 사역을 마치고 높아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음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우편’이란 표현은 명예, 찬양, 권위, 권능을 표현하는 하나의 비유이다.

희생적 사역을 마치고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님


‘우편’이란 개념은 탁월한 능력이나 궁극적인 영광을 대변한다. 그것이 역시 ‘위대함’이나 ‘호의’의 파생적인 의미를 간직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적용될 때, 시편 110:1은 예수님의 메시야 됨, 부활과 승천을 통한 변호, 심판자로서의 역할, 주되심, 그리고 신자들을 위한 그의 중보를 지원한다. 보좌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그 왕국에 있어서 지위와 위엄 및 권세에 대한 상징이다. 왕의 우편 자리는 왕국에서 가장 위엄있는 지위에 대한 상징이다. 우편에 앉았다는 것은 지휘(imperium)가 아니라 통치(dominium), 즉 종말론적 구원의 통치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동시에 ‘중보’(intercession)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왕이신 아들이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는 선언은 시편 110:1에 대한 확실한 암시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옆에 앉으실 분을 언급하는 유일한 성경 본문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분은 아니지만 하나님 자신이다. 신인(God-man)과 왕적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높아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 중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 의미는 그들로 그의 최고의 대행자들이 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왕의 보좌 우편에 앉는 자는 왕과 함께 통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최후의 심판(백 보좌 심판)과 둘째 사망: 죄인들과 사단의 최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2(요한계시록 20장 11-15절)

가. 들면서

1. 죄인과 사단의 운명에 대해

1)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은 하늘에서 심판의 불이 내려와 멸망당한 반면, 사단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2) 미혹하던 마귀는 유황이 타는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그곳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는 곳이었습니다(19: 19, 20).

3) 그곳은 단순한 죽음이나 멸망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밤낮 없이 끊 없는 고통을 당하는 영원한 멸망과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

2. 최후의 심판

(1) 드디어 최후의 심판 장면입니다.

(2) 본문은 죄인과 사단의 운명에 있어 계시록의 그 유명한 백 보좌 심판으로 알려진 최후 심판 모습과 둘째 사망에 대한 구절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이 백보좌 심판은 무엇을 말하는 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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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본문

​

1. 백 보좌 심판(1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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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심판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백보좌 심판이라 우리가 부르는 이 심판 계시는 무엇을 말하는 지 살펴봅시다.

​

1) 첫째, 백 보좌를 보다

(1) 요한은 크고 흰 보좌(throne)를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보좌는 단순한 백 보좌가 아니라 직역하면 큰 백보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세상이 아닌 천상의 '크고 희다'는 상징에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순결성과 절대 권위를 가진 '크고 흰 하늘 보좌'의 거룩함과 권능과 영광과 위엄을 볼 수 있습니다.

​

2) 둘째, 이 큰 백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다

(1) 누가 이 심판의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있을까요? 본문은 앉으신 분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2) 심판자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심판이 있다는 점입니다.

(3) 그래서 성경은 백 보좌에 앉으신 분을 설명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그 분이 누구인지 당연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4) 성경은 심판 주를 그리스도요(요 5:22; 고후 5:10; 딤후 4:1) 하나님(계 4:2; 5:1; 단 7:9, 10)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5) 창조의 주요 구원의 주요 섭리의 주이신 그분이 바로 심판의 주인 것입니다.

​

3) 셋째,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1) 정말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것을 상상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땅과 하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2) 타락하여 썩어짐에 종노릇하던 땅과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심을 암시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모든 것이 해방되고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될 것임 암시(고대)하고 있습니다(롬 8:19-23).

(3) 따라서 이 장면은 심판의 두려움을 넘어 회복의 반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

4) 넷째, 죽은 사람들이 모두 보좌 앞에 선 것을 보다

(1) 여기서도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듯, 분명하게 죽은 자들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이들 보좌 앞에선 죽었던 자들이 누구를 말하는 지 구체적 설명이 없습니다.

(2) 이들은 인류 전체를 말할 수도 있고,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일 수도 있으며,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히 9:27).

​

​

5) 다섯째, (심판의) 책과 또 다른 생명책을 보다

(1) 이 보좌 앞에는 두 종류의 책이 펴 있었습니다.

(2) 한 종류는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3) 믿는 자들의 죽음을 말할 때 표현된 영혼(계 6:9-10; 20:4)에 대한 언급이 없고 또 한 종류의 책, 곧 생명책이 있음을 볼 때 이 책 앞에 서 있는 자들은 분명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4) 또 다른 종류의 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 아니라 바로 생명책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었습니다(눅 10:20).

(5)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단 12:1).

(6) 여기 최후의 심판과 생명책이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

둘째 사망, memento mori!(요한계시록 20장 13-15절)

momento mori! ​

1. 두 번째 죽음

​1) 두 번째 죽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2) 본문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2. 죽음이 복 될 수 있을까?

​

1)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땅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에게 성경은 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강조합니다.

2) 죽음이 복 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헛되이 왔다가 다 흙으로 돌아갈 존재"(전 3:20)이기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산자는 이것에 유념하라" 권고합니다(전 7:1-2). 죽음의 역설인 것이지요.

3) 성경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 했습니다(시 116:15).

​

3. 유한하고 미련한 인간

​

1) 그런데 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다가 믿음 없이 사망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믿음 없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거나 외면하거나 심지어 조롱하다가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2) 의로운 중에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 장수하는 악인이 있습니다(전 7:15).

3) 하지만 성경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당성을 탐구하는 신정론의 역설입니다.

4) 이제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최후 심판의 모습을 묘사하는 본문을 살펴봅시다.

​

나. 본문

1. 바다와 죽음과 음부(지옥)가 죽은 사람을 토해내다

​

1) 바다와 죽음과 음부라는 표현은 서로 연관된 이미지를 통해 이 상황의 엄중한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는 계시입니다.

2) 사람들은 바다를 낭만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바다가 그리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3)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는 잔잔하고 아름다우나 잔인해 질 수 있다”는 파라독스를 통해 바다의 양면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류는 바다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바다는 이렇게 사람을 압도하고 두렵게 만드는 이미지(호머의 <오디세이> 중에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삼켜버릴 수 있는 바다의 이 이미지를 악의 영역의 메타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4) 이렇게 바다와 죽음과 음부는 모두 불신자들이 가는 심판의 장소를 강조하는 계시인데, 놀랍게도 이 죽은 자들은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이곳에서도 내어줌을 당하였습니다.

5) 이렇게 불신자 가운데 이 심판의 부활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6) 하지만 심판의 부활 뿐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된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부활도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요 5:29).

​

2. 최후 심판의 모습

​

1)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2) 이때 사망과 지옥도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3) 사람들은 보통 사망과 지옥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 못이 또 있었습니다. 불 못은 또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4) 성경은 이 불 못이 곧 둘째 사망이라 말합니다. 불 못은 좀 더 궁극적인 최후 심판의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즉 불신자들은 죽으면 사망과 음부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심판 때에 최후 심판으로서 불 못에 던져지는 데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죽음인 것입니다.

5)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면 영원한 불 못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

다. 나가면서

​

1)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려워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늘 두려워 말라하시면서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는 두려워하라 말씀하셨습니다(눅 12:5). 그것도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고 거듭 강조하십니다.

​

2) 생명책에 기록된 그리스도인

성경은 "한 책의 책"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은 얼마나 기쁠까요?(빌 4:3-4).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국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빌 4:6).

​

3) 족보로 시작하여 생명 족보로 끝나는 성경

성경은 인류의 육적 족보로 시작하여 어린양(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계 3:5, 13:8, 17:8 20:12, 20:15, 21:27) 족보로 마치는 “한 책의 계시”임을 늘 기억하십시오.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 7:18)














가나안



1. 가나안의 지리

가나안 땅(迦南地)이란?

가나안 땅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며,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들어간 약속의 땅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 כְּנַעַן (Kenaʿan, 케나안)
헬라어 : Χαναάν (Chanaan, 카나안)
한자 : 迦南(가나안)




1. 가나안의 지리

가나안은 대체로 지중해 동쪽 연안과 요단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근동 지역입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보면 대략 다음 지역을 포함합니다.

  • 서쪽: 지중해
  • 동쪽: 요단강과 그 동쪽 지역
  • 북쪽: 레바논 일대
  • 남쪽: 네게브 및 광야 지역

따라서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을 중심으로 레바논, 시리아·요르단 일부에 걸치는 넓은 지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에서 중요한 세 단계

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 창세기 12:7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②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이르게 하리라.”
— 출애굽기 3:17

③ 여호수아를 통한 정복과 정착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여호수아 1:3 

3. 가나안 땅의 신학적 의미

가나안은 단순히 지리적인 땅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약속 → 믿음 → 순종 → 성취

라는 성경의 중요한 신앙 구조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땅이었고,
이스라엘에게는 믿음으로 들어가야 할 땅이었으며,
여호수아에게는 순종하여 차지해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을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 약속하신 땅에 나아갔으며” 라고 말합니다.

4. 설교적으로 정리하면

애굽은 종살이의 자리,
광야는 훈련의 자리,
가나안은 약속의 자리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이고,
광야는 믿음의 훈련이며,
가나안은 약속을 살아내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도에게 적용하면 
“구원받았는가?”에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 출애굽기 → 여호수아 → 히브리서 11장을 연결해서 보면, 가나안은 성경 전체의 ‘약속과 믿음과 성취’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迦南地)이란?

가나안 땅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며,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들어간 약속의 땅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 כְּנַעַן (Kenaʿan, 케나안)
헬라어 : Χαναάν (Chanaan, 카나안)
한자 : 迦南(가나안)

가나안의 지리

가나안은 대체로 지중해 동쪽 연안과 요단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근동 지역입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보면 대략 다음 지역을 포함합니다.

  • 서쪽 : 지중해
  • 동쪽 : 요단강과 그 동쪽 지역
  • 북쪽 : 레바논 일대
  • 남쪽 : 네게브 및 광야 지역

따라서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을 중심으로 레바논, 시리아·요르단 일부에 걸치는 넓은 지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세 단계

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 창세기 12:7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②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이르게 하리라.” — 출애굽기 3:17

③ 여호수아를 통한 정복과 정착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 여호수아 1:3

가나안 땅의 신학적 의미

가나안은 단순히 지리적인 땅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약속 → 믿음 → 순종 → 성취라는 성경의 중요한 신앙 구조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땅이었고,
이스라엘에게는 믿음으로 들어가야 할 땅이었으며,
여호수아에게는 순종하여 차지해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을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 약속하신 땅에 나아갔으며” 라고 말합니다.

정리

애굽은 종살이의 자리,
광야는 훈련의 자리,
가나안은 약속의 자리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이고,
광야는 믿음의 훈련이며,
가나안은 약속을 살아내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도에게 적용하면 
“구원받았는가?”에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 출애굽기 → 여호수아 → 히브리서 11장을 연결해서 보면, 가나안은 성경 전체의 ‘약속과 믿음과 성취’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