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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예배(禮拜, Worship)**는 신(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종교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주로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에서 사용되며, 종교마다 예배의 방식과 의미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1. 기독교에서의 예배

기독교에서 예배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1) 예배의 의미

  • 하나님께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행위
  •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배우는 시간
  • 기도, 찬송, 설교 등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

(2) 예배의 종류

예배 종류 설명
주일 예배 매주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 (가장 중요한 예배)
수요 예배 수요일 저녁에 진행되는 예배
새벽 예배 매일 새벽에 드리는 예배
가정 예배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
특별 예배 부활절, 성탄절 등 특별한 날에 드리는 예배

(3) 예배의 구성 요소

  1. 찬양: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름
  2. 기도: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를 올림
  3. 성경 봉독: 성경 말씀을 읽음
  4. 설교: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전함
  5. 헌금: 감사의 의미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
  6. 축도: 예배를 마치며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

2. 천주교에서의 예배 (미사)

천주교에서는 **미사(Mass)**가 기독교의 예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 의미: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전례(예배 의식)
  • 구성: 성가, 성경 봉독, 강론(설교), 성찬례(빵과 포도주를 받는 의식)
  • 주일 미사: 매주 일요일 필수적으로 참여하는 미사

3. 이슬람교에서의 예배 (살라트, صلاة‎)

이슬람교에서는 **하루 5번 기도(살라트, Salah)**를 드리는 것이 예배의 형태입니다.

  • 의미: 알라(Allah)께 경배하는 의무
  • 시간: 새벽, 정오, 오후, 저녁, 밤 총 5번
  • 형식: 특정한 자세(절, 앉기, 손 들기)와 함께 기도

4. 불교에서의 예배 (예불, 禮佛)

불교에서도 예배 개념이 있으며, 이를 **예불(禮佛, 불상 앞에서 경배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 대상: 부처님(석가모니)과 불보살
  • 형식: 합장, 절(삼배), 독경(경전 읽기)
  • 목적: 깨달음과 수행을 위한 정진

결론

예배는 각 종교에서 신(또는 부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주일 예배를 중심으로, 천주교에서는 미사, 이슬람교에서는 하루 5번의 기도, 불교에서는 예불로 표현됩니다.





온라인 예배란?

**온라인 예배(Online Worship)**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 또는 녹화된 형태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기독교, 천주교 등에서 활용되며,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1. 온라인 예배의 특징

구분 온라인 예배 오프라인(현장) 예배
장소 인터넷이 가능한 곳 어디서나 가능 교회나 성당 등 지정된 장소
참여 방식 실시간 스트리밍 또는 녹화 영상 시청 직접 교회에 방문하여 참석
예배 형식 영상으로 찬양, 기도, 설교 진행 찬양, 기도, 설교, 성찬 등 직접 참여
장점 장소와 시간의 제약이 없음, 편리함 공동체 의식 형성, 집중도 높음
단점 현장감 부족, 신앙 공동체와의 교류 제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음

2. 온라인 예배의 유형

(1) 실시간 예배 (Live Streaming Worship)

  •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유튜브, 페이스북, 줌(Zoom) 등을 통해 실시간 송출
  • 성도들은 집에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
  • 댓글과 채팅을 통해 교류 가능

(2) 녹화 예배 (Recorded Worship)

  • 미리 녹화된 예배 영상을 업로드하여 자유롭게 시청 가능
  • 일정에 맞춰 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대안

(3) 메타버스 예배 (Metaverse Worship)

  • 가상현실(VR)과 메타버스를 활용한 예배
  • 제페토, 게더타운, VRChat 같은 플랫폼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아바타로 모여 예배

3. 온라인 예배의 장점과 단점

장점

언제 어디서나 예배 가능: 해외에 있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참여 가능
전도와 선교에 효과적: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 가능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 제공: 설교, 찬양, 간증 등을 따로 시청할 수 있음

단점

현장감 부족: 실제로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와 다름
신앙 공동체와의 교류 약화: 성도들 간의 교제가 어려움
집중력 저하 가능성: 환경에 따라 산만해질 가능성 높음


4. 온라인 예배의 미래

  • 하이브리드 예배(온·오프라인 병행): 현장 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함께 운영
  • 메타버스 예배 확대: 가상현실 교회와 예배 환경 발전
  • 인터랙티브 예배 증가: 채팅, 댓글, 소그룹 모임 등을 통한 교류 활성화

📌 예시:

  • 국내 주요 교회(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 등)에서 유튜브 및 자체 플랫폼을 활용한 온라인 예배 진행
  • 미국 힐송교회, 레이크우드 교회 등 글로벌 교회에서도 온라인 예배 적극 활용

결론

온라인 예배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예배드릴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신앙 공동체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어려운 한계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하이브리드 예배(온·오프라인 병행)**가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부활이란?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1. 종교적 의미의 부활

기독교에서의 부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이를 통해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 영생을 약속하셨다고 믿습니다.

  • 성경의 기록: 신약성경(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부활절(Easter):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입니다.

불교에서의 부활 개념

불교에서는 기독교처럼 '부활' 개념이 강하지 않지만, **윤회(輪廻, Samsara)**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한 생이 끝나면 업(業, Karma)에 따라 새로운 생이 주어진다고 봅니다.

이슬람교에서의 부활

이슬람교에서도 부활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최후의 심판 날(Qiyamah)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알라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2. 철학적·문학적 의미의 부활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나 재생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 철학적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사후 세계에 대한 논의에서 부활 개념이 등장합니다.
  • 문학에서: 개인의 회복, 사회의 재탄생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예: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꿈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려 하지만 결국 좌절하는 과정)

3. 현대에서의 부활 개념

오늘날 '부활'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 쓰입니다.

  • 스포츠·정치에서: 한때 실패했지만 다시 성공하는 경우 "부활했다"라고 표현합니다.
  • 문화·예술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인기를 얻는 작품이나 유행을 가리켜 '부활'이라고 합니다. (예: 레트로 열풍)

결론

부활은 종교적, 철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 새로운 시작, 재탄생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핵심 교리이며, 이슬람교와 불교에서도 각각의 방식으로 부활이나 재생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Love와 Like의 차이

영어에서 **"Love"**와 **"Like"**는 모두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지만, 감정의 강도와 의미가 다릅니다.


1. Love vs. Like의 핵심 차이

구분 Love Like
강도 매우 강한 감정 비교적 가벼운 감정
사용 대상 사람, 동물, 사물, 활동 등 주로 사물, 활동, 음식 등
감정의 깊이 깊은 애정과 헌신 단순한 호감이나 선호
예시 문장 I love you. (너를 사랑해.)
I love traveling.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해.)
I like this movie. (이 영화가 마음에 들어.)
I like playing soccer. (나는 축구하는 걸 좋아해.)

2. Love(사랑하다)와 Like(좋아하다)의 차이점

(1) 감정의 강도

  • Love열정적이고 깊은 감정을 의미합니다.
  • Like단순한 호감이나 선호를 나타냅니다.

💡 예시

  • I love pizza. → 피자를 정말 좋아하고, 먹을 때마다 행복함을 느낌.
  • I like pizza. → 그냥 피자가 맛있어서 즐겨 먹음.

(2) 사용 대상

  • Love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취미, 신념 등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Like는 음식, 영화, 음악, 스포츠 등 선호하는 것에 주로 사용됩니다.

💡 예시

  • I love my family. (나는 가족을 사랑해.) → 깊은 애정
  • I like my coworkers. (나는 직장 동료들이 좋아.) → 호감 정도

(3) 인간관계에서의 차이

  • Love연인, 가족, 친구 등과 깊은 관계를 맺을 때 사용합니다.
  • Like는 단순한 호감 단계에서 사용됩니다.

💡 예시

  • I love you. → 강한 애정과 헌신을 의미.
  • I like you. → 그냥 호감이 있다는 뜻으로, 연애 감정보다 가벼울 수 있음.

⚠️ 중요:
"Love"와 "Like"를 잘못 사용하면 상대방이 감정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3. 결론: Love와 Like, 언제 사용할까?

진심 어린 애정 → Love
그냥 좋고 마음에 들면 → Like

💬 연습 문제

  1. "나는 BTS를 정말 좋아해." → Love or Like?
  2.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해." → Love or Like?
  3. "나는 내 애인을 사랑해." → Love or Like?


선교란?

**선교(宣敎, Mission)**는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주로 기독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습니다.


1. 기독교에서의 선교

기독교에서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전파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1) 선교의 의미

  • 예수님의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sion):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심 (마태복음 28:19-20)
  •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행위

(2) 선교의 종류

구분 설명
해외 선교 다른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
국내 선교 자국 내에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
도시 선교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하는 활동
농어촌 선교 농촌이나 어촌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
의료 선교 의료 활동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활동
교육 선교 학교 설립이나 교육 활동을 통한 선교
인터넷 선교 SNS, 유튜브 등을 활용한 온라인 선교

(3) 선교사의 역할

  • 복음 전파
  • 교회 개척
  •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봉사
  • 교육 및 의료 지원

📌 예시: 한국에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등이 기독교를 전파하며 학교(연세대, 이화여대)와 병원 설립에 기여함.


2. 천주교에서의 선교

천주교에서는 선교를 **포교(布敎) 또는 전교(傳敎)**라고 부르며,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포함합니다.

  • 수도회 중심 선교: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등이 전 세계에서 선교 활동을 수행
  • 사회봉사와 결합: 의료, 교육, 빈민구제 등의 활동과 함께 진행됨

3. 불교에서의 선교 (포교)

불교에서는 선교라는 단어 대신 **포교(布敎)**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 불경(佛經)을 가르치고 불법(佛法)을 전파하는 활동
  • 사찰을 세우고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것
  • 명상, 상담, 사회봉사 등을 통한 포교 활동

📌 예시: 한국 불교의 해외 포교 사례로는 조계종의 해외 사찰 건립 등이 있음.


4. 이슬람교에서의 선교 (다와, Dawah)

이슬람교에서도 선교 개념이 있으며, 이를 **다와(Dawah, دعوة)**라고 합니다.

  • 코란(꾸란)의 가르침을 전파
  •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슬람의 진리를 알리는 활동
  • 선교보다는 타인에게 신앙을 소개하는 것에 가까움

5. 현대 선교의 변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음.

온라인 선교: 유튜브, SNS, 블로그를 활용한 복음 전파
문화 선교: 영화, 음악, 미술 등을 통해 선교
사회봉사 선교: 난민 구호, 빈민 지원 등을 통한 선교

📌 예시: 코로나 이후 온라인 예배 및 온라인 선교가 활발해짐.


결론

선교는 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활동으로,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등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현대에는 온라인, 문화, 사회봉사 선교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아 일어나라(에스겔 37:1-5)


마른 뼈들아 일어나라(에스겔 37:1-5)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라
예수님에게 이끌림을 받으라
모든 뼈들이 붙는 것은 몸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각각 흩어진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한 몸이 되어야만 온전한 사람이며 믿음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라
예수의 이끌림을 받아라
진리의 말씀의 이끌림을 받아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창세기 2:21-23



     21. 여호와 하나님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여자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여자를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되듯이 죄인을 예수에게 이끌어 의로운 인간을




고린도전서 12:3 - 12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기 위한 "몸장"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영성

신앙이 깊어지면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신앙이 깊어지면 영성에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성에 대하여 신비주의와 열광주의 자들과 관상기도하는 사람들과 루터의 영성을 다른는 사람들의 영성의 정의가 각각 다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모든 것들을 영성이라고 설명해도 될 것이다.


구약에서 영성, 또는 영적인 것에 상응하는 단어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루아흐이고 다른 하나는 네페쉬이다. 이 단어들은 영이나 혼, 또는 영혼으로 번역이 된다. 루아흐는 만물을 살리는 힘이나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되고, 네페쉬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루아흐의 의미가 신약에서는 프뉘마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특히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 로마서 8장 5절, 또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 등에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을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때 "영적", "성령" 등의 단어가 나타나는데, 여기에 바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단어의 뜻에 비춰볼 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라고 정의 할수 있다.

이러한 영성의 정의가 신비주의 열광주의로 흐르게 된 것은 9세기에 수도사 칸디두스에 의하여 변질 되게 되었다. 영성 즉 스피리투알리티(spirituality)라는 단어가 코르포랄리타스

(corporalitas: 육체)나 마테리알리타스(materialitas: 물질)와 반대되는 의미로 영성을 사용하므로 영성이 육체나 물질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육적인 물질적인 반대의 개념의 영성을 추구하게 된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신비주의 체험과 신앙의 열광주의로 영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레서 영성의 삶을 케톨릭의 중세 방식의 영성훈련의 방식 4단계로 발전하게 된것입니다.

성독 묵상 기도 관상의 영성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됩니다.

이 사다리의 아래 쪽은 땅에, 꼭대기는 구름을 뚫고 천상의 신비에 닿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에서는 개신교는 영성이란 말을 열정주의나 신비주의와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신앙생활에서 도덕적 요소와 상식적인 요소를 무시한다는 수덕이나 관상 또는 어떤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20세기 부반에 개신교에서는 영성이란 표현보다는 경건이나 헌신이란 용어를 선호했으며, 특히 종교개혁자들이 영성을 삶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영성을 추구할때도 삶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영성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의 첫 단계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의 규정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육에 의한 규정성에서 영에 의한 규정성"으로 바뀌는 본질적 변화를 말한다. 이말은 하나님의 영이 자신 속에 함께 함을 알게 되고, 나는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살려고 노력한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살려는 사람은 자기의 영를 쳐서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의 의미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는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의 영성의 훈련 과정은 삶의 현장에서 자기 부정의 단계에서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루터의 영성의 추구는 삶의 현장을 배재하고는 영성을 추구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루터의 영성의 추구 3단계를 설명하였다. 기도, 말씀묵상. 삶속에서 시련과 연단[ 견인]을 통한 믿음의 삶이다.

1단계 기도- 성령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2단계 말씀묵상 -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을 주십니다.

3단계 - 삶 속에서 시련. 삶속에서 시련과 연단[ 견인]을 통한 믿음의 삶

이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



아는 것(知)과 깨닫는 것(覺)

알 지(知) : 화살  시(矢) + 입 구(口)

지혜 지(智) : 알 지(知) + 날 일(日)


알 지(知)와 지혜 지(智)의 의미

​​알 지(知)는 화살 시(矢)에 입 구(口)의 합자. 
알고 있으면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자연스럽게 빨리 나간다는 뜻.
화살을 꿰뜷듯이 마음속의 움직임을 나타내어 확실히 결정하는 것이 알 지(知)이다.

 

지혜 지(智)는 
밝음의 의미의( 낮) 날 일(日)과 알 지(知)의 합자.
사물의 도리 시비 선악을 분별 판단하고 처리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 지(智)라 한다.

순자에 따르면 아는 것(知)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앎의 능력
지혜(智)는  앎의 능력과 실제대상이 들어 맞았을 때 라고 정의를 하고 있다.

지혜 智가 知行合一이라....知性

학지어행지이지의(學至於行之而止矣) 순자(荀子)

학문은 그것을 실행하는 데 이르러야 최상에 달했다 할 것이다.

​불문불약문지(不聞不若聞之) : 듣지 않음은 들음만 같지 못하고
문지불약견지(聞之不若見之) : 들음은 봄만 같지 못하고,
견지불약지지(見之不若知之) : 보는 것은 앎만 같지 못하며
지지불약행지(知之不若行之) : 앎은 실천함만 같지 못하다.

普智天人尊 哀愍群萌類 能開甘露門 廣度於一切(법화경)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는 것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이다.
깨닫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이란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다.
고백한 후에는 반드시 고백한 내용을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어부들은 그들의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알았지만 직접 따랐던 사람들은 제한적이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결단한 것은 왕이 부르지 않았을 때 왕 앞에 나가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깨닫고 결단하게 되었다.

γινώσκω 1097 [ginōskō]

  • 1.

    알다, 알게 되다.

  • 2.

    [사물의 대격과 함께] 신비를~, 마13:11, 막4:11, 눅8:10. 주인의 뜻을~, 눅12:47,48. 평화를 가져오는 것을~, 눅19:42. 진리를~, 요8:32. 시간[때]을~, 행1:7. 죄를~, 롬7:7. 사랑을~, 고후2:4. [독립적으로] γνόντες, 막6:38, 고전13: 9,12. [전치...

  • 3.

    [인격의 목적어와 함께] 하나님을~, 요14:7, 17:3,25, 롬1:21, 갈4:9. 요일2:3,13, 3:1,6, 4:6이하, 5:20. 예수 그리스도를~, 요14:7, 17:3, 고후5:16, 요일2:3,4. τινὰ ἔν τινι: ~으로 누구를 알다, 눅24:3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ιγινώσκω 1921 [ĕpiginōskō]
  • 1.

    알다, 이해하다, 인식하다.

  • 2.

    정확히 알다, 확실히 알다, 철저하게 알다, 눅1:4, 롬1:32, 고전13:12, 고후6:9, 골1:6.

  • 3.

    인식하다, 누군가를 다시 알다, 눅 24:16,31, 행12:14.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πειράω 3987 [pĕiraō]
  • 1.

    경험하다, 알다, 히4:15.

  • 2.

    시도하다, ~해보다, 힘쓰다, 행26:2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ίσταμαι 1987 [ĕpistamai]
  • 1.

    알다, 친숙해지다, 행18:25, 약4:14, 유1:10, ἐπίστα- ται περὶ τούτων ὁ βασιλεύς: 그 왕이 이것에 대하여 알다, 행10:28, 20:18, 15:7, 19:25, 22:19, 26:26, ποῦ ἔρχεται, 히11:8, ὄντα σε κριτήν: 당신이 재판장이 된 것...

  • 2.

    이해하다, 깨닫다, 막14:68, 딤전6:4.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νωρίζω 1107 [gnōrizō]
  • 1.

    알다, 빌1:22.

  • 2.

    알게 되다, 드러내다, 알리다, 눅2:15, 롬9:22,23, 엡6:19.

  • 3.

    [생명의 길] 행2:2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μανθάνω 3129 [manthanō]
  • 1.

    알다, 알게 되다.

  • 2.

    배우다, 익히다.

  • 3.

    [문자적, 교훈을 통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뜻풀이 13

νοέω 3539 [nŏiĕō]
  • 1.

    지각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통찰하다, 마16:9, 막8:17, 요12:40, 롬1:20.

  • 2.

    생각하다, 주의하다, 마24:15, 막13:14, 딤후2:7.

  • 3.

    상상하다, 엡3:20.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θεωρέω 2334 [thĕōrĕō]
  • 1.

    깨닫다, 감지하다, 관찰하다, 발견하다, 요4:19, 12:19, 행4:13, 28:6, 히7:4등.

  • 2.

    구경하다, 보다, 관찰하다, 인지하다, 마27:55, 막15:40, 눅14:29, 23:35, 요6:40, 계11:11,12, 바라보다, 마28:1, 주목하다, 막3:11, 5:38.

  • 3.

    [마음이나 영으로 깨닫는 것]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ίσταμαι 1987 [ĕpistamai]
  • 1.

    이해하다, 깨닫다, 막14:68, 딤전6:4.

  • 2.

    알다, 친숙해지다, 행18:25, 약4:14, 유1:10, ἐπίστα- ται περὶ τούτων ὁ βασιλεύς: 그 왕이 이것에 대하여 알다, 행10:28, 20:18, 15:7, 19:25, 22:19, 26:26, ποῦ...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ίημι 4920 [süniēmi]
  • 깨닫다, 이해하다, 통찰하다, 마13:51, 눅2:50, 롬3:11, 고후10: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είδω 4894 [sünĕidō]
  • 완전하게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의식이 있다, 알게 되다, 생각하다, 은밀히 알다, 행12: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ομορέω 4927 [sünŏmŏrĕō]
  • 알게 되다, 깨닫다, 접촉[접근, 인접, 이웃, 연속]하다, 행18: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αἰσθάνομαι 143 [aisthanŏmai]
  • 1.

    깨닫다, 지각 능력을 소유하다.

  • 2.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 3.

    이해하다, ἀγνοέω, 눅9:4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καταλαμβάνω 2638 [katalambanō]
  • 1.

    [중간태] 파악하다, 깨닫다, 찾아내다, 행25:25, 엡3:18.

  • 2.

    붙잡다, 얻다, 자기 것으로 삼다, 롬9:30, 고전9:24, 빌3:12, 움켜잡다, 이해하다, 정복하다, 요1:5, 빼앗다, 덮치다, 요1:5, 붙들다, 닥쳐오다, 요12: 35, 살전5:4, 잡다, 요8:3,4.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ὁράω 3708 [hŏraō]
  • 1.

    인식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행8:23, 히2:8.

  • 2.

    [타동사]

  • 3.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ινώσκω 1097 [ginōskō]
  • 1.

    이해하다, 깨닫다.

  • 2.

    알아채다, 깨닫다, 감지하다.

  • 3.

    알다, 알게 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κούω 191 [akŏuō]
  • 1.

    동의하다, 요9:27, 5. 이해하다, 깨닫다[목적격과 함께 쓰임], 갈4:21, 고전14:2.

  • 2.

    [문자적으로: 감각적 의미로 사용]

  • 3.

    [자동사] 듣다, 마13:16, 11:5, 13:14, 눅7:22, 행28:26, 계2:7,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βλέπω 991 [blĕpō]
  • 1.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깨닫다, 느 끼다.

  • 2.

    보다.

  • 3.

    [문자적으로: 눈의 활동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잠언 2:5b)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then you will understand the fear of the LORD and find the knowledge of God.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언 2:9)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을 깨달을 것이라.
Then you will understand what is right and just and fair--every good path.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언 4:19)

악인의 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But the way of the wicked is like deep darkness; they do not know what makes them stumble.

잠언 5:6
그는 생명의 평탄한 을 찾지 못하며 자기 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She gives no thought to the way of life; her paths are crooked, but she knows it not.




성경적인 깨달음이란 모르던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말씀 한 마디가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주는 것
영혼이 자유를 누린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not of perishable seed, but of imperishable, 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





뜻풀이 7

יָדַע 3045 [yâdaʽ]
  • 1.

    원형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알다

  • 2.

    원형 알다, 인지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감각기관을 통해] 창19:33, 사6:9.

  • 3.

    원형 [마음이나 정신을 통해] 삿13:21, 창15:8, 24:14, 출7:1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יְדַע 3046 [yedaʽ]
  • 1.

    원형 인지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단2:8,5:23

  • 2.

    원형 알게 되다, 배우다, 단4:6, 6:11.

  • 3.

    원형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단5:22.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וּשׁ 4184 [mûwsh]
  • 1.

    원형 느끼다, 더듬다, 만지다, 손대다, 깨닫다, 창27:21.

  • 2.

    원형 히필형 : 삿16:26, 시115: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שַׁשׁ 4959 [mâshash]
  • 1.

    원형 느끼다, 대다, 만지다, 더듬다, 지각하다, 깨닫다, 창27:12.

  • 2.

    원형 피엘형 : 느끼다, 감지하다, 지각하다, 더듬다[암흑 속에], 모색하다, 타진하다, 창31:34, 37, 신28:29, 신28:29, 욥5: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שְׂכִּיל 4905 [maskîyl]
  • 생각하다, 깨닫다, 시32,42,44,45,52편 제목.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טָעַם 2938 [ṭâʽam]
  • 1.

    원형 경험하다, 깨닫다, 이해하다[정신적이거나 영적으로], 시34:9(8), 잠31:18.

  • 2.

    원형 맛을 보다, 경험하다, 시식하다.

  • 3.

    원형 맛을 보다, 시식하다, 욥12:1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צָא 4672 [mâtsâʼ]
  • 1.

    원형 깨닫다, 알다, 풀다,삿14:12,18, 전3:11, 7:27, 8:17.

  • 2.

    원형 오다, 이르다, 도달하다, 도착하다, 얻다, 획득하다, 받다, 창26:12, 삼하20:6, 욥11:7.

  • 3.

    원형 [주]얻다.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안다(知)와 깨닫다(覺).

둘 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적 활동에 관한 것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깨달음은 앎에 어떤 중요한 것이 부가된 것이다.

우리는 일상언어에서 "알았지만 할 수 없었다"라는 말은 종종 사용하지만, 좀체 "깨달았지만 하지 못했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깨달음의 의미에는 '행위(行爲, action)'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1

이 행위가 앎에서 촉발된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근거가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을 지식(知識, knowledge)과 지혜(智慧, wisdom)로 구별하고, 전자는 사실에 대한 '참됨[眞]'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착함[善]'과 '아름다움[美]'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지식은 과학연구처럼 진위가 분명하고 명석한 명제와 이론으로 대표되며, 지혜는 사람살이의 '사리분별(事理分別)에 밝음'을 뜻하는 것으로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지식과 지혜는 분명히 이성적 능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둘의 작용은 서로 다르다.

칸트(Kant)는 이성을 '순수이성(純粹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으로 분리하고, 이 둘의 인식적 출발점과 영역을 확연히 구분했다.2

이점에서 인간의 이지적 활동을 정관(靜觀, theoria)과 실천(實踐, praxis)으로 나누는 것도 무리 없다고 여겨진다.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 혹은 지식과 지혜를 구별하기는 해도, 우리가 이 둘의 의미와 관계를 명백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지혜의 본성은 물론 이거니와 지식이 성립하는 조건만 따져도 결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플라톤(Platon)은 지식이란 "참된 견해(true opinion)에 로고스(logos)가 더해져야만 된다"라고 말했다.3

치점(F. Chisholm)은 이 언급을 분석하여 "지식이란 정당화된 참된 신념(Justified True Belief)"이라고 정의하고, 지식을 성립시키는 '적절한 증거(adequate evidence)'를 규명하는 것이 인식론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4

현대 인식론의 불길을 재점화시킨 그의 주장에 대해 게티어(E. Gettier)는 이른바 '게티어의 문제(Gettier's Problem)'로 알려진 인식론의 난문을 제기하며, 지식의 성격과 확실성의 추구를 향한 새로운 반성을 촉구했다.5

20세기 초반,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중요한 탐구과정이 있었다.

형식과학(formal science)인 수학과 논리학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역사적인 과업은 프레게(Frege)6, 럿셀(Russell)7,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8, 괴델(Gödel)9 등을 거치는 동안 부분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전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논리주의(logicism), 즉 수학을 논리학에 포함시키고, 모든 지식 체계를 참된 명제들로부터 연역하려는 이들의 야심만만한 시도는 형식논리학의 연역체계의 구축에서조차 참담한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사실과학(factual science)의 지식, 예를 들어 다른 학문에 비해 비교적 확실하다고 알려진 물리학을 예로 들어보자.

근대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의 천문학 이론은 뉴턴(Newton)에 의해 결정적으로 부정되었고, 확고하다고 믿었던 뉴턴의 물리학 이론 또한 아인슈타인(Einstein)에 의해 보편성과 타당성이 거부되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아직은 절대불변의 진리로 확증되지 않았다.

별과 은하와 같은 거시세계의 영역뿐만 아니다.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의 '불확실성의 원리(priciple of uncertainty)'에 따르면 원자 이하의 물질에 대한 엄밀한 기술(記述)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지식을 뒷받침하는 표준논리(standard logic)는 '진/위 이분법(True and False Dichotomy, 眞/僞 二分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순율(矛盾律)에 입각하여 참과 거짓을 구별짓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사고의 원리로 받아들여진다.

과학적 진리라고 일컫는 다윈(C. Darwin)의 '자연선택의 원리'나 '엔트로피(entropy)'로 알려진 볼쯔만(L. Boltzman)의 '열역학 제2법칙' 그리고 위에서 말한 '불확실성의 원리'도 모두 표준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하지만 괴델이 지적했듯이 표준논리에도 결함이 있고, 생성변화하는 현실의 세계에 적용하기에 범위가 너무 좁다는 것이 알려졌다. '변증법적 논리''10가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귀납추리는 물론이고 양상논리(modal logoc), 다치논리(many valued logoc), 퍼지논리(Fuzzy logoc), 카오스 논리(Chaos logoc)를 포함한 확장된 연역논리학이 발전했지만, 그 역시 엄밀하고 정확한 논리체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베이컨(Bacon)의 "지식은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11라는 말처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자연에 대한 질서정연한 통제와 효과 있는 성과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인식론의 관점에서 정작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인간은 지식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지식의 본성과 기초에 대해 또다시 미궁에 빠졌다. 그렇다면 이제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추구를 포기해야 하는가?

실용주의(實用主義) 철학자 듀이(Dewey)는 "절대적 진리와 지식은 없다. 지식이란 인간이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며, 여러 가설 중 '완결된 탐구(completed inquiry)'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12

또한 논리실증주의 철학자 포퍼(Popper)는 "유의미한 명제는 과학적 명제처럼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反證可能性)'이 있는 것이어야 하며,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진술 중 아직 반증되지 않은 것만을 지식으로 간주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13

과학사를 뒤돌아볼때 지금까지의 자연과학의 법칙과 이론은 거의 대부분 부정되었다. 그렇다면 지식을 위한 새로운 논리학이 필요한가. 과연 사고의 기본틀을 벗어난 새로운 지식 시스템의 성립이 가능한가.

지식이 이럴진대 지혜의 문제는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우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평가방식부터가 다르다.

지식의 여부는 통상 '참과 거짓(true and false)'으로 구분하고 지혜의 유무는 주로 '옳고 그름(right and wrong)'으로 판정한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일상언어에서 우리는 흔히 '착함', '좋음', '아름다움'과 같은 평가용어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것인지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솔직히 말한다면) 아직 잘 모른다.

예컨대 도덕원리의 기본 개념인 '선(善, the good)'을 고려해보자. 도대체 이 단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현대의 메타윤리학(meta-ethics)에서는 도덕적 진술의 분석('착함(善)의 의미, 선의 적용 범위 등...)을 통하여 소위 '깨달음' 혹은 '지혜'와 관련된 진술들이 진/위를 판정할 수 없는 '무의미(meaningless)'한 것이라고 말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윤리적 명제뿐만 아니라 미학적 명제를 포함한 가치론적 언급 모두가 서술적(descriptive) 기능이 없고 단지 정의적(情意的, emotive) 기능만이 있는 '사이비 명제(pseudo proposition)'라고 주장한다.14

이들에 따르면 깨달음에 관련된 모든 언급은 주관적인 한갖 '발언(utterance)'에 그칠 뿐 공통으로 옳고 그름을 논의할 수 있는 객관적 '판단(judgement)'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한갓 '헛소리(nonsense)'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과 달리, 사회과학의 탐구에 해석학적 방법(hermeneutic method)을 도입했던 신칸트주의자들은 "자연현상을 다루는 지식의 본성은 '원인-결과(cause-effect)'의 관계를 논증하는 '설명(explanation)'이고, 사람의 삶을 다루는 지혜의 본성은 '이유-귀결(reason-consequence)'의 관계를 규명하는 '이해(understanding)'이다"라고 말한다.15

생철학자 베르그송(Bergson) 역시 "인간 현상의 본질은 지속되는 '삶의 솟구침(élan vital)'이며, 논리분석의 방법이 아니라 '직관(intuition)'으로 파악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16

'깨달음', '지혜'와 같은 인간행위는 평가자의 주관적 경험이나 시간, 지역, 문화에 밀착된 인간학적 상대주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도덕철학을 객관적 학문으로 정립하려 했던 사람들은 '간주관성(間主觀性, intersubjectivity)'의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이 난점을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자의적(恣意的)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근거 없는 가설이나 모호한 개념이 남발되고, "힘이 곧 정의다"라든가 '경영철학', '상황윤리' 같이 그럴듯하기는 해도 알아듣기 힘든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윤리적 상대주의,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 intellectualist)들은 바로 이 때문에 행위의 발단을 절대적 지식에서 찾았고, "알지 못하고는 깨달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을 정초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 역시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에는 진/위가 아닌 다른 행위의 준칙이 있는가. 인간활동의 해명은 엄밀한 법칙보다는 두리뭉실한 개념인 '이치(理致)'를 추구함이 더 적합한가?

온전한 지식과 지혜를 얻기란 어렵다.

행위는 지식 이전의 행동일 수도 있고, 지식을 통한 결단일 수도 있다. 그 둘의 관계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미묘하다.

우리는 종종 지식의 획득은 '사유(思惟)'를 통해 얻어지지만 지혜를 소유하는 것은 '체득(體得)'이 라고 말한다. 속된 말로, 머리를 굴려서 얻는 것과, 몸으로 때워서 얻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몸으로 때운다는 것은 경험을 말하는데, 이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기야 인간은 누구나 죽기 전에 적어도 하나의 꼭 같은 지혜를 깨닫는다. 그것은 '인간은 죽는다'라는 명제(命題)로, 이것은 사실 최상의 확실한 지혜이기도 하다.17

그러나 나는 인생의 본질이나 종착점보다는 '지금 이 순간(hic et nunc)' 내 앞에 생생히 드러난 삶이 더 중요하다. 단순히 '카르페 디엠(Carpe Diem)'18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작금의 현실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올바른 행동준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인생의 행복과 같은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도덕률에 대한 존경과 같은 의무를 추구하는 것인가?19

종교와 신앙처럼 삶의 목적과 궁극적 지혜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논리적 사고를 부정한다.20 일부에서는 언어적 표현까지 거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과의 직접 만남', '명상을 통한 합일'과 같은 말이 나온다.

대승불교의 나갈쥬나(Nagarjuna, 龍樹)는 '중도(中道)',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바로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中庸, mesotês)으로서의 '식견(phronesis, 識見)'과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말한다. 그러나 토마스(St.Thomas Aquinas)가 주장하듯, 이성을 부정하는 이 언명을 모든 사람이 논의 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21

신비주의 종교가들은 "논리와 말을 떠나야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 그 역시 '논리와 말'에 불과하다. 인간 이성의 영역에서 논리와 말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성립할 수 없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듯 "선악과는 지혜의 나무 위에 열렸다"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으로 흔히 선불교에서 말하는 것으로 "견성오도(見性悟道)를 위해서는 '알음알이[分別智]', 즉 일상적 지식을 버려야 된다"라는 말도 새겨들을 만 하다.

하지만 나의 깨달음에 대해 타인을 확실하게 설득 못하고, 타인의 깨달음에 대해 무비판적인 동조나 배척이 있을 뿐이라면, 서로 삶의 가치를 논의한다는 것이 한낱 '허망한 바람(無明妄風)'22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지식 없는 행위는 맹목이고 행위 없는 지식은 공허하다.23

어떤 사람은 "알지 못하고 깨달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더욱이 남에게 전달할 수도 없다. 이것은 실천의 규준(規準)이 되지 못하며 깨달음으로 볼 수 없다.

앎은 깨달음의 과정이다. 지식은 지혜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조망하기에 부족하며, 자기충족적인 온전한 앎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 불완전한 앎을 완성시키는 것이다.24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일의 시초와 종국을 미리 알 수 없다.

깨달음은 이지(理智)만의 산물이 아니라 행위의 선택이다.

선택을 회피할 수는 없다. "선택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25

인생의 길은 선택의 연속이다. '무언가'가 우리로 하여금 망설임에서 선택으로 이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에 의해 결단해야만 한다.

​나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어떤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고 믿는다.

사고는 사고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언어는 언어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자 '覺(깨달을 각)'에는 '見(볼 견)'이 들어있다.
원래 학문과 지식을 뜻하는 서양어 '사이언스(science, 라틴어 Scientia, 독일어 Wissenschaft)'의 어원이 'scio(본다)'라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감각의 눈이 아니라 예지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고와 언어 너머의 세계를 직접 조망하는 것이며, 나아가 깨달음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사고(思考)의 사고' 즉 '노에시스 노에세우스(noesis noeseus)'에 도달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삶과 세계의 전체에 대한 윤리적 명제들이 인간의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라 보았다.

어쩌면 '깨닫는 것'은 오직 보여질 수 있을 뿐 '말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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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위의 에세이는 내 블로그에 있는 다른 글들과 달리 상당히 산만하고 복잡하며 또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제목은 평범하게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이라 붙였지만 실제로는 철학의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 분야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산문은 베이컨(F. Bacon)이 그의 <에세이집(The Essays)>에서 채용한 서술 방식인, 중수필(重隨筆)의 전형을 따랐다.

이 글은 오래전 철학과 학부에서 가르쳤던 강의록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논문의 규격과 체계적 논변(argument)을 갖춘 정통 학술논문은 아니지만, 논술문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체가 딱딱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세부적인 내역은 더 깊은 탐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각주>로 처리하였다.

비록 두서없이 쓴 글이지만 제시된 내용은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될 중요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분야는 철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여기에는 형이상학, 논리철학, 언어철학, 심리철학, 과학철학, 메타윤리학 등이 개입하고 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는 것', 이 회귀적이고 순환적인 질문은 종국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를 되묻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의 '영원한 문제(perennial problem)'이다.

1. 통상 말하는 '앎'의 여러 계층 중에서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지식의 본성뿐만 아니라 실천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한다. "聞義不能徙(문의불능사)",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의로운지를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論語>, 述而 3).

​2. Immanuel Kant <Critik der reinen Vernunft(순수이성비판)>, <C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실천이성비판)>, (trans. by J. M. D. Meiklejohn, Chicago: Encyclopaedia Britanica Inc., 1952).

3. Platon <Theatetos> <Menon>.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일상사의 억측(臆測, doxa)과 구별되는 진정한 지식, 즉 진지(眞知, episteme)를 다루면서 지식이 'alethes doxa(true opinion) + logos'로 정의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 로고스는 언어, 논리, 이법(理法)의 어원이며, 영어의 'explanation' 독일어의 'Erklärung'에 해당한다.

4. Roderick M. Chisholm <Perceiving(지각)>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57). 이 책에서 치점은 지식의 필요조건, 충분조건을 모색하며, 지식을 '안다(know)'가 아닌 다른 개념으로 치환 또는 번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식에 대한 '맥락적 정의(contextual definition)'로 알려진 이 시도를 통해 그는 "S가 h를 안다(S know h)"를 "(1) S believs h.", "(2) h is true.", "(3) h is evident for S."로 정의한다. 하지만 그의 정의 중 (3)에서 뜻하는 '적절한 증거(edequate evidence)'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감각적 관찰인가, 확률인가, 과거와 미래애 대한 지식의 경우 그것의 진/위 여부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적절한 증거'라는 말 속에 이미 '알려진' 즉 '안다(know)'라는 개념이 이미 들어가 있기에 '순환성'이 있는 부적절한 정의가 아닌가, 등등.

5. Edmund L.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in <Analysis>, Vol. 23, pp. 121–23 (1963). 게티어는 3쪽 밖에 안되는 짧은 논문에서 "치점의 세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었더라도 지식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이른바 '게티어의 문제'인데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증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심적 과정(mental process)' '지향성(intentionality)'과 같은 심리철학의 과제 및 인식논리학(doxatic logic)의 문제가 깊숙히 연관되어 있다.

6. Gottlob Frege, "Grundgesetze der Arithmetik(산술의 기초법칙)" in <Philosophical Writinings of Gottlob Frege> trans by Peter Geach and Max Black. (Oxford: Bsil Blackwell, 1970).

G. Frege, "Begriffsschrift(개념표기)" in op. cit. 프레게는 이 논문의 부제인 '수학적 언어를 본뜬 순수사고의 형식화된 언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언어로 의미, 추리, 판단, 논변 등을 다루는 것이 불명확하다고 보고 지금의 기호논리학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개념기호를 창안하고 이를 통해 그의 논리철학 이론을 전개하였다. 프레게의 이 논문은 현대 인식논리학의 획을 긋는 중요한 업적이다.

나는 서강대 대학원 이한조 교수의 <논리철학>을 수강할 때 이 논문을 강독한 적이 있는데, 처음 접한 난해한 기호들의 뜻을 파악하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7. Alfred N. Whitehead,and Bertrand Russel, < Principia Mathematica (수학원리)>, (Cambridge Mathematical Libra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2).

화이트헤드와 공저인 전3권, 2천여 페이지로 이루어진 방대한 과업이다. 1903년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수리논리학의 확고한 정초를 세우려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여기서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논리학은 實在에 관한 학문'이라는 신념아래 확실성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 책도 유클리데스(Eukleides)의 <Stoikeion(기하학 원론)>처럼 몇가지 공리로부터 모든 정리들를 도출하는 연역논리학의 규범을 따르고 있으며, 저자들은 ‘~’(아니, 부정)과 ‘∨’(또는) 이라는 (정의되지 않은) 오직 2개의 논리기호를 가지고 명제논리학(sentential calculus)의 기초를 정립하려 했다. 초판 발표까지 10년이 넘게 걸린 이 과업에서 레셀은 공리 중 하나가 다른 공리로부터 연역될 수 있음이 밝혀지자 그것을 나머지 공리에 통합하는 등 여러번 수정을 거쳤다. 엄밀한 형식체계는 몇가지 공리(axiom) 혹은 공준(postulate)으로부터 도출된 정리(thorem)가 완전성, 무모순성, 일관성을 충족해야 하는데, 괴델(Gödel)에 의하여, "어떠한 형식체계도 원리적으로 불완전 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러셀은 이 말고도 '확정기술이론(Theory of Definite Description)' '유형이론(Theory of Type)'을 통해 오랫동안 서구 철학의 암초로 여겼왔던 '존재론적 퍼즐(ontological puzzle)'을 비롯하여 '인식론적 난제' '논리적 난제'의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시도는 이후 오랫동안 영미 분석철학계의 화두가 되었고 탐구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지칭(reference)' '고유명사(proper name)' '분석성(analiticity)' 등에 대한 논변은 아래의 글들을 참조하면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Burtrand Russell, <On Denoting, 1905>.​

P. F. Strawson, <On Referring, 1950>.

W. V. O. Quine, <Word and Object, 1964>.

Keith Donnellan, <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 1966>.

Soal Krepke, <Naming and Necessity, 1980>.

8.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 논리철학논고)>, trans. by D. F. Pears & B. F. Mcguinness. (London: Routledge & Paul, 1961).

통상, <논고(論考)>로 불리는 이 얇은 책은 라틴어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독일어 제목은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이며, 일반의 책들과는 달리, (1.1) (3.02) (7) 등 번호에 짤막한 문장이 뒤따르고 있다. 간결한 문장에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이 편집본은 그의 스승이었던 러셀(Russell)의 긴 영어 서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원문 표현의 충실하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 독일어와 영어의 대조본으로 구성되었다. 한 문장을 예로 들면, 독일어 "(1.1) Die Welt ist die Gesamtheit der Tatsachen, niche der Dinge." 곁에 영어로는 "The World is the totality of facts, not of things."로 번역되어 있다. "세계는 사물(事物)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事實)들의 총체이다."라는 뜻인데, 소위 'Fact Ontology(사실존재론)'을 언명하는 이 간결한 문장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함으로써 서구 철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나는 대학원 학생시절과 강의를 통해 여러번 이 책을 포함하여 이에 관련된 논문들을 읽었는데,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논쟁점 역시 수두룩하다.

9. Kurt Gödel. <On Formally Undesidable Propositions of the Principia Mathematica and Related Systems>, (trans by M. Meltzer., Edinburgh and London: Oliver and Boyd, 1962).

10. '변증법(Dialectics)'을 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방법으로 채택. 변증법은 대립의 구체적 구조와 통일에 관한 논리로서, 모순율을 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와는 다르다. 현실을 力動的인 상태로 파악하고, 운동을 살아있는 현실전체와 관련지움. 모순, 대립, 운동으로서의 발전, 전체적인 포괄성을 불가분의 요소로서 철학적 논변의 구조에 도입한다. 定立(thesis)이 反定立(antithesis)을 일으키고, 그것이 綜合(synthesis)으로 止揚(aufheben)한다.

11. 이 명구(名句)는 근대 경험주의의 선구자 베이컨(Francis Bacon : 1561-1626)이 그의 주저 <신논리학,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에서 쓴 말이다. 여기서 라틴어 ‘시엔티아(scientia)’는 영어권의 ‘사이언스(science)’ 즉 ‘과학’의 어원이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인 지식전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지식’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Wissenschaft’도 ‘scientia’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힘(potentia)’이란 개인의 역량이나 삶에 미치는 영향 이상을 의미하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지식추구의 궁극적 목적과 효용을 뜻하고 있다. 위의 구절은 근대 이후에 전개된 지식의 중요한 한 조류와 그것을 통해 자연과 대면하는 인간의 자연관을 총체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12.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자, 퍼어스(Peirce), 제임스(James), 듀이(Dewey)의 입장으로, 지식의 본성에 대한 이들의 연구업적이 미국철학을 철학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옮겨놓았다.이들의 견해는 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이며 일종의 회의주의이다. 이들의 대표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Chales S. Peirce, "진리성이란 유용성(usefulness)과 동일하다.", "어떤 진술의 진/위 여부는 그 진술의 실제적 효과에 의해서 결정된다."

William James, "진술 또는 신념의 진리성은 시험이나 행동을 해보아 만족스러운 결과를 산출했을 경우 결정된다."

J. Dewey의 실용주의를 특히 '도구주의(Instrumentalism)'라 한다. "진리는 단지 '보장된 주장가능성(warranted assertability)'이고, 문제상황과 검증과정에 의해서 결정된다.", "지식이란 인간이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하는 '도구(instrument)'이자 '완결된 탐구(completed inquiry)'이다."

John Dewey, <A Common Faith>, (Yale Univ. Press, 1967).

13. '반증가능성'을 문제삼는 것은 일종의 부정의 증명방식이다. 논리실증주의자은 처음에는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을 통해 진술(statements)의 진리성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감각경험에 근거한 '의제적인 명제(protocol proposition)'조차 진리성을 확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콰인(Quine)은 '명제들의 전통적인 분류방식인 분석/종합 이분법'과 '종합판단의 경험적 요소로의 환원가능성'에 대해 비판한다.

Karl Popper. <Conjectures and Refutations(추측과 반박):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1963>. <Objective Knowledge(객관적 지식): An Evolutionary Approach, 1972, Rev. ed., 1979>.

W. V. O.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경험주의의 두 도그마), 1948>.

14. A. j. Ayer. <Language, Truth and Logic, 2nd edition, 1946>. 에이어에 의하면, 도덕철학이란 도덕적 진술의 분석을 통하여 "도덕적 판단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 지를 밝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진술이 유의미(meaningful)하려면, 그것이 분석적 진술이거나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종합명제이어야 하고, 서술적 기능이 있어야만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 그런데 규범윤리학의 도덕적 진술은 서술적(descriptive) 기능이 없고 단지 정의적(emotive) 기능 뿐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학문으로 성립할 수 없다.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m)의 이런 윤리적 회의주의를 메타(meta)윤리학의 '정의주의(情意主意, emotivism in meta ethics)'라고 부른다.

15. 신(新)칸트주의자(Neo-Kantian)들의 해석학(hermeneutics(解釋學)은 문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물음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과학들, 특히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에 있어서는 理解의 技術, 즉 해석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Dilthey, Croce, Schleiermacher에 의하여 철학적 방법론으로 등장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연은 설명하고(erklären), 정신생활은 이해(verstehen)한다.", "정신과학의 대상은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와 구조에 있어서 전체이기 때문에, 삶의 전체적인 ‘체험’과 풍부한 언어의 ‘표현’에 주목함으로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해란 곧 삶의 표현의 내적인 把握(ein inneres Erfassen)이다.", "문헌의 진정한 이해는 우리가 그 텍스트가 만들어졌던 시대적 환경과 배경에서 '되삶(re-live)' '재연(re-enact)'을 통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등이다.











성경에는 전쟁이 몇 번이나 언급되었나?


성경에는 전쟁이 몇 번이나 언급되었나?


  • 성경에는 전쟁이 400번 이상 언급되어 있습니다.
  • 성경에는 가나안 정복, 사사 시대의 분쟁, 왕정 시대의 전쟁 등 특히 구약성서에는 전쟁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종종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영적 진리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세상의 전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평화와 원수에 대한 사랑, 비폭력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접근 방식은 우리에게 갈등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을 넘어 더 높은 형태의 영적 성숙을 수용하도록 도전합니다.
  • 정당한 전쟁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신이 승인한 전쟁에 대한 구약성서의 기록과 평화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대조되는 등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사상에서는 전쟁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하려는 '정당한 전쟁' 이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기독교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과 타락한 세상의 전쟁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피할 수 없는 분쟁에서 윤리적 행동을 지지하며, 적대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인간성을 보려는 헌신을 유지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구약성경에 묘사된 주요 전쟁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형성한 전쟁과 갈등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상의 투쟁의 혼란 속에서 인간의 조건과 하나님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강력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정복입니다. 유명한 여리고 함락을 포함한 이 일련의 전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심리적으로 이러한 기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신성한 목적의식을 강화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모압, 가나안 등 주변 민족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주기적인 분쟁으로 점철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종종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여 적의 압제로 이어졌을 때 발생했습니다. 죄, 형벌, 회개, 구원의 순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깊은 영적, 심리적 역학을 드러냅니다.

왕정 시대에는 다윗과 블레셋의 갈등, 왕국 확장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을 겪게 됩니다.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 사이의 비극적인 내전은 내부 분쟁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것이 가족과 국가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된 왕국은 강력한 제국의 외부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기원전 722년 앗수르의 이스라엘 북부 왕국 정복과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유다 정복으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유배를 당한 사건은 유대인의 역사와 영성에 큰 영향을 미친 중추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성경의 서술에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적 정확성과 세부 사항은 학계의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영적 의미에 대한 경외심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텍스트에 접근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쟁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 하나님과의 관계, 선택의 결과에 대해 전쟁이 전하는 더 깊은 영적 진리를 생각해 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인간 분쟁의 비극적인 현실과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평화에 대한 지속적인 희망을 상기시켜 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전쟁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평화와 폭력,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도전하는 방식으로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이 주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 존재의 복잡한 현실과 신성한 사랑의 변혁적 힘을 반영하는 미묘하고 종종 역설적입니다.

전쟁에 대한 예수님의 가장 직접적인 언급은 종말론적 가르침의 맥락에서 나옵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쟁과 전쟁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겠지만 놀라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전쟁을 타락한 세상의 불행한 현실로 보셨지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로 보지는 않으셨음을 시사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일관되게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가르치셨죠. 또한 추종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태복음 5:44)고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종종 인간의 갈등을 특징짓는 폭력과 보복의 순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주장(마태복음 10:34)과 같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말씀과도 씨름해야 합니다. 이 역설적인 말씀은 문자 그대로 무기를 들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그 메시지의 분열적인 성격과 그것이 가족과 공동체 내에서 야기할 수 있는 갈등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자 예수님은 제자에게 "칼을 뽑는 자는 다 칼로 죽으리니 네 칼을 제자리에 꽂으라"(마 26:52)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순간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거부하셨음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공격과 자기 보호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경향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뺨을 돌려 대라고 요청함으로써 본능적인 반응을 넘어 더 높은 형태의 영적, 정서적 성숙을 수용하도록 도전합니다.

성경은 언제 전쟁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하나요?

언제 전쟁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오랜 세월 동안 신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성경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이 강력한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간단하고 명확한 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세상의 현실에 비추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해야 할 이야기, 율법, 가르침의 태피스트리를 제공합니다.

구약성서에는 신이 승인하거나 심지어 명령한 것으로 묘사되는 수많은 전쟁 사례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기록에서 "거룩한 전쟁" 또는 "야훼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는 특정 상황에서 전쟁이 신의 정의 또는 심판의 도구로 간주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텍스트가 쓰여진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인식하면서 매우 신중하고 겸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현대의 독자로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 속에 담긴 영원한 영적 진리를 분별하는 동시에 윤리적 도전도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도 신명기 20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전쟁 수행에 관한 지침이 있습니다. 이러한 법은 전쟁의 잔인성을 제한하고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시도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규정이 혼란스럽고 종종 비인간적인 무력 분쟁의 현실에 도덕적 틀을 부과하는 데 어떻게 작용했는지 심리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평화, 원수에 대한 사랑, 비폭력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모든 무력 사용을 명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는 에피소드(요한복음 2:13-22)는 예수님이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무력행사에 반대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통치 당국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범죄자에게 진노를 집행하기 위해 칼을 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종종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무력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신학자들은 이러한 다양한 성경적 관점과 씨름하며 '정당한 전쟁' 이론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같은 사상가들이 발전시킨 이 전통은 정당한 명분, 올바른 의도, 비례성 등 전쟁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하려고 시도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현대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현대 사회에서 전쟁의 본질은 성경 시대에 묘사된 갈등과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성경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의 렌즈를 통해 이러한 현대의 현실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현대 전쟁의 비극적 본질과 그로 인한 엄청난 고통에 대한 강력한 감각을 가지고 현대 전쟁이라는 주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현대 무기의 파괴력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데 있어 깊은 책임감과 긴박감을 느끼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 5:9, 44)은 전 세계가 상호 연결된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은 강력한 차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적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에 저항하고 적극적으로 이해와 화해를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중대한 악에 저항하기 위해 때때로 무력 사용이 필요할 수 있다는 현실과 씨름해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의 '정당한 전쟁' 이론은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발전했지만, 현대 분쟁에서 무력 사용을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원칙을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정당한 명분, 올바른 의도, 적절한 권한과 공개 선언, 비례성, 합리적인 성공 가능성 등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현대 무기의 전례 없는 파괴력과 현대 분쟁의 복잡한 특성으로 인해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민간인 사상자가 유감스럽지만 때로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 전쟁에서 '부수적 피해'라는 개념은 기독교 윤리와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특별한 도전을 제시합니다.

심리적으로도 현대 전쟁이 전투원과 민간인 모두에게 미치는 강력한 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현대 분쟁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악화되는 전쟁의 트라우마는 전투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상처를 돌보고 치유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글로벌 경제의 상호 연결된 특성은 전 세계 분쟁에 대한 우리의 공모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비 패턴, 정치적 선택,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세계 곳곳의 분쟁에 기여하거나 분쟁을 악화시킬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현실을 고려할 때, 기독교인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국가와 민족 간의 대화와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며 평화를 위한 끊임없는 옹호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평화적 분쟁 해결과 모든 사람의 인권과 존엄성 증진을 목표로 하는 국제기구와 노력을 지지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무력 사용이 유감스럽게도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윤리적 원칙을 가장 엄격하게 준수하고 민간인을 보호하며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지향점을 견지해야 합니다.

전도서에서 "전쟁의 때와 평화의 때"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전도서 3장 8절의 "전쟁의 때와 평화의 때"라는 강력한 말씀은 인간 존재의 리듬과 이 세상에서 신비롭게 작용하는 신성한 섭리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구절은 인생의 다양한 계절과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더 큰 시 구절의 일부로, 지상의 여정에서 기쁨과 고통의 측면을 모두 인정합니다.

이 구절을 고려할 때, 우리는 먼저 인간 삶의 복잡성과 명백한 모순을 다루는 전도서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이 구절이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솔로몬 왕으로 알려진 저자는 존재의 순환적 본질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 지혜의 한계에 대해 성찰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구절은 분쟁과 평화가 인간 경험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여겨졌던 고대 근동 생활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국을 세우고 방어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시기를 경험했고,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기간에는 평화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전쟁과 평화를 삶의 리듬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은 인간 경험의 전 범위를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분쟁의 가혹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동시에 평화의 가능성과 가치를 긍정합니다.

그러나 이 구약 본문을 읽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충만함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전쟁과 평화를 똑같이 유효한 '시기' 또는 계절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은 일관되게 평화와 화해,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우선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에서 전쟁의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시간'은 심각한 불의나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안타까운 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화의 시간'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화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시간이 됩니다.

현대의 상황에서 이 구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현명하게 분별하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는 외교와 대화, 분쟁의 근본 원인 해결을 통해 평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나요? 아니면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 사용을 통해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을까요?

전도서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인생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의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이 구절은 갈등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신뢰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최후의 승자는 전쟁이 아닌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사계절 내내 평화의 도구가 되어 증오가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서로,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평화인 하나님의 샬롬 비전을 실현하는 데 동참합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전쟁에 관한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초기 교부들, 특히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많은 교부들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우화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악에 맞서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의 예표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오리겐은 여호수아 강론에서 가나안 정복을 악과 악마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투쟁에 대한 우화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로마 제국의 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특히 콘스탄티누스 이후 일부 교부들은 정당한 전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성 어거스틴은 이 점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에서 전쟁은 비극적인 필연이며, 엄격한 조건 하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악한 사람에게 저항하지 말라"(마태복음 5:39)와 같은 구절은 국가 정책이 아닌 개인 윤리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터툴리안이나 락탄티우스처럼 일부는 비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인의 전쟁 참여를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평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밀라노의 암브로스처럼 특정 상황에서는 군 복무가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또한 구약의 호전적인 하나님과 신약의 평화의 왕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로 인해 씨름했습니다. 마르시온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긴장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레네우스와 같은 정통 교부들은 구약의 전쟁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교육적 계획의 일부로 보고 하나님의 계시의 통일성을 주장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해석에서 평화에 대한 열망과 갈등의 현실을 조화시키려는 인간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부들이 이 텍스트와 씨름하는 모습은 우리 자신의 내적 갈등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반영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해석은 교회와 정치 권력의 관계 및 폭력에 대한 접근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발전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전쟁에 대한 서구의 생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명령하신 예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가장 두드러진 예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는 여호수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여호수아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그 땅을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읽습니다. 흔히 '거룩한 전쟁' 또는 '헤렘'이라고 불리는 이 정복에는 가나안 도시와 그 주민들을 파괴하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명령은 남자, 여자, 어린이, 심지어 가축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현대 독자들에게는 특히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민수기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디안 사람들에게 복수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민수기 31:1-2). 이로 인해 다시 남자와 여자, 남자 어린이를 죽이는 군사 작전이 시작됩니다.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방 민족을 쫓아내라고 지시하는 구절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예: 신명기 7:1-2, 20:16-18). 이러한 명령에는 종종 이방 민족의 종교적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수반됩니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고대 이스라엘의 정체성 형성에서 어떻게 기능했는지 심리적으로 고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국가와 종교적 정체성이 분리될 수 없었고 공동체의 생존이 종종 위태로웠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텍스트는 부족 간의 전쟁과 땅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맥락에서 등장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에 대한 이해는 전쟁을 포함한 국가 문제에 밀접하게 관여하는 신에 대한 이해를 반영합니다.

많은 성경 학자와 신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일부로 해석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본문에서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하는 방식을 봅니다.

이 어려운 본문과 씨름할 때 우리는 단순한 해석에 저항해야 합니다. 대신 사랑의 해석학으로 접근하여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광범위한 성경적 내러티브 내에서 각 본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합시다. 또한 이러한 본문이 역사적으로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떻게 오용되어 왔는지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부르심의 렌즈를 통해 이 본문을 읽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평화와 화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항상 겸손한 자세로 이 어려운 구절들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전쟁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다른 고대 종교와 어떻게 다른가요?

신들이 변덕스럽고 종종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대 근동의 많은 종교와 달리, 성경은 전투의 결과를 통제하는 주권적인 신을 한 분으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일신론적 관점은 근본적으로 전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형성합니다. 신명기 20:1-4과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승리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종종 전쟁을 폭력의 미화가 아니라 신성한 심판의 한 형태로 묘사합니다. 특히 여호수아의 정복 이야기에서 가나안 민족이 악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장면에서 이러한 개념이 잘 드러납니다. 이 개념은 현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다른 고대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의적인 정복 전쟁과는 다릅니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평화의 이상을 향한 진전을 보여줍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전쟁 서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예언서에서는 점점 더 보편적인 평화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이사야 2:4, 미가 4:3). 이러한 종말론적 평화 비전은 고대 근동 종교들 사이에서 독특하며,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선포하는 데서 그 성취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 진행 과정에서 평화와 화해에 대한 인류의 깊은 갈망을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쟁 이야기는 이러한 큰 이야기의 맥락에서 읽을 때 인류를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평화로운 의도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 이끄는 신성한 교육학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많은 이웃 국가들과는 달리 상비군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의 이상은 전투 자체를 미화하는 전사 계급이 아니라 특정한 신의 명령에 응답하는 시민 군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성경이 전쟁에서 윤리적 행동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0장에는 공격하기 전에 평화를 제의하고 과일나무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하여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인도적인 전쟁 규칙이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비폭력과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고대 세계의 전쟁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이해를 더욱 변화시켰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지 논의해 왔지만, 이는 전형적인 고대의 태도에서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평화와 갈등 해결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성경은 평화와 갈등 해결에 대해 심오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모든 피조물로 확장되는 조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인 평화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온전함, 안녕, 올바른 관계의 상태를 포괄합니다.

성경의 시작부터 우리는 평화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인간, 자연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를 상징합니다.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은 이 평화의 회복을 위해 계속 일하시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절정에 이릅니다(이사야 9:6).

구약성서에는 평화를 추구하라는 권면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평화를 구하고 추구하라"(시편 34:14)고 촉구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천적까지 화해하는 궁극적인 평화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립니다: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인도하리라"(이사야 11:6).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시며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뺨을 돌려대며,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 5:38-48)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갈등 해결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실질적인 갈등 해결과 관련하여 성경은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예수님은 공동체 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직접 소통과 필요한 경우 더 넓은 공동체의 참여를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신자들에게 "서로 화평하게 지내며"(로마서 12:16)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3)고 촉구하면서 갈등을 자주 다루고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에서 인간의 본성과 갈등의 역학 관계에 대한 강력한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용서, 공감, 직접적인 소통에 대한 강조는 현대의 갈등 해결 기법과도 일치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는 말씀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초월하여 적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보도록 도전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성경의 원칙은 수많은 평화 이니셔티브와 분쟁 해결 노력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중세의 수도원 운동부터 현대의 평화 교회와 화해 사역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성경의 평화 비전은 불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일관되게 진정한 평화의 필수 요소로 정의를 요구합니다. 예레미야가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라고 외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 것처럼(예레미야 6:14), 진정한 평화는 정의와 진실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을 사랑하는 것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이 질문은 우리 신앙의 핵심을 건드리며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도전합니다. 적을 사랑하는 것과 전쟁의 현실 사이의 긴장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씨름해 온 문제이며, 깊은 기도와 성찰, 분별력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명령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마태복음 5:44). 이 가르침은 복음의 핵심이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반영합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 심지어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과 이웃과의 궁극적인 화해를 바라는 적극적인 헌신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전쟁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정부가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방어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CCC 2309항). 이러한 인식은 전쟁의 발생을 제한하고 전쟁이 발생했을 때 그 참혹함을 완화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보존을 위한 우리의 본능과 적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려는 경향은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능을 극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도전에 대응해 왔습니다. 초대 교회의 터툴리안 신부처럼 평화주의를 옹호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처럼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십자군 전쟁 중 술탄에게 선교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분쟁 속에서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현대의 상황에서 우리는 갈등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근본적으로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1. 분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지역사회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2. 외교적 노력과 비폭력 분쟁 해결 전략을 지원합니다.
  3. 전쟁이 발생하면 윤리적 행동, 민간인 보호, 분쟁 후 화해를 위한 노력을 강조해야 합니다.
  4.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애를 인정합니다.
  5.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모범을 따라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기꺼이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또한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승인하거나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해로운 행동에 반대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그들의 궁극적인 선을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도전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시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평화의 왕국을 세우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희망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분열된 세상에서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어려운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세상의 가혹한 현실에 직면할 때에도 모든 분열을 극복하고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신뢰하며 항상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횟수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몇 번이나 언급됩니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약 245회 언급합니다. 이 칭호는 의미심장하며 신자들이 하나님과 갖는 친밀한 관계를 반영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인물로 표현합니다. 이 제목을 이해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분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의미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오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 용어는 보살핌, 권위, 친밀감을 의미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통치자와는 달리, 하나님은 양육하는 인물, 즉 그분의 자녀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원하는 분으로 제시됩니다. 이 아버지의 이미지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 걸쳐 퍼져 있지만 특히 신약에서 강조됩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예수님은 자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깊은 관계를 반영하며 신자들이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격려받는 방법에 대한 모델이 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과 신뢰로 특징지어지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복음서의 예

  • 마태 복음 6 : 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위치를 ​​알아보라는 직접적인 부르심입니다.
  • John 14 : 6-7: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러한 사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합니다.

신자들의 삶에서 아버지의 역할

신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 초대는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고 받아들여짐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가 받은 영은 너희를 다시 종으로 삼아 다시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여러분이 받은 영이 여러분을 아들의 명분으로 입양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아바”(“아빠” 또는 “아빠”를 의미하는 아람어 단어)라는 용어는 훨씬 더 깊은 친밀감을 반영합니다.

입양의 개념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다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됩니다. 이 개념은 여러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에베소서 1 :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으니.”
  • 갈라디아서 4 : 4-7: 신자들이 어떻게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되는지 토론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는 신자들 사이의 친밀함과 상속을 함께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종종 사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약성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기록하며,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기초임을 보여줍니다.

궁극의 희생

하나님의 사랑의 심오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발견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기꺼이 궁극적인 희생을 치르고자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삽화

신약성서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탕자의 비유(눅 15:11-32)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제멋대로인 아들이 돌아온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용서와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아무리 멀리 빗나가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다시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다는 점을 확증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사랑을 강조하는 동시에 권위와 지도력도 의미합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따라야 할 규칙과 지침을 정하셨습니다.

지도 및 교정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를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신자들을 인도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5~6절은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분의 자녀를 의도된 대로 형성하는 목적에 봉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기도와 아버지와의 관계

기도는 신자가 아버지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측면입니다. 신약성경은 신자들이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 히 4 :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환영받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담대히 그분께 다가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은 또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자매임을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같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연합을 촉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고린도전서 1장 12-12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많은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으로 묘사합니다. 이 비유는 개인이 고유한 역할과 은사를 갖고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공통된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상호 지원 및 격려

신자들은 종종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공동체 의식과 지지를 키워줍니다. 이러한 가족 구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반영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지원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결론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몇 번이나 언급되는지 이해하면 그분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이 열립니다. 이 제목을 반복하는 것은 신자의 삶에서 사랑, 인도,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권위, 그리고 그분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유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그분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영해야 하는 책임에 대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Q.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몇 번이나 아버지로 불리나요?
A.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약 245회 언급합니다.

Q. 기독교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이 왜 중요한가요?
A. “아버지”라는 칭호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의미하며, 그분의 보살핌과 인도하심을 강조합니다.

Q. '아바, 아버지'란 무슨 뜻인가요?
A. “아바”는 “아빠” 또는 “아빠”를 의미하는 아람어 용어로,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깊은 친밀감을 나타냅니다.

Q.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어떻게 부르시나요?
A.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추종자들에게 친밀감과 존중의 맥락에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Q. 하나님의 양자 됨을 강조하는 성경구절은 무엇입니까?
A. 에베소서 1장 5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을 양자로 삼으시도록 예정하셨다고 단언합니다.

Q.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나요?
A.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희생과 죄인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환영하신다는 자주 반복되는 개념을 통해 나타납니다.

질문.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A. 기도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Q. 신약성서에는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나타나나요?
A.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불리며, 하나님 가족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Q.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징계하시나요?
A.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녀를 인도하시는 것과 비슷하게, 사랑으로 징계하시고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질문.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비유는 무엇입니까?
A.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준비성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