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들아 일어나라(에스겔 37:1-5)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라
예수님에게 이끌림을 받으라
모든 뼈들이 붙는 것은 몸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각각 흩어진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한 몸이 되어야만 온전한 사람이며 믿음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라
예수의 이끌림을 받아라
진리의 말씀의 이끌림을 받아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창세기 2:21-23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여자를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되듯이 죄인을 예수에게 이끌어 의로운 인간을
고린도전서 12:3 - 12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기 위한 "몸장"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영성
신앙이 깊어지면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신앙이 깊어지면 영성에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성에 대하여 신비주의와 열광주의 자들과 관상기도하는 사람들과 루터의 영성을 다른는 사람들의 영성의 정의가 각각 다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모든 것들을 영성이라고 설명해도 될 것이다.
구약에서 영성, 또는 영적인 것에 상응하는 단어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루아흐이고 다른 하나는 네페쉬이다. 이 단어들은 영이나 혼, 또는 영혼으로 번역이 된다. 루아흐는 만물을 살리는 힘이나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되고, 네페쉬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루아흐의 의미가 신약에서는 프뉘마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특히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 로마서 8장 5절, 또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 등에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을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때 "영적", "성령" 등의 단어가 나타나는데, 여기에 바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단어의 뜻에 비춰볼 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라고 정의 할수 있다.
이러한 영성의 정의가 신비주의 열광주의로 흐르게 된 것은 9세기에 수도사 칸디두스에 의하여 변질 되게 되었다. 영성 즉 스피리투알리티(spirituality)라는 단어가 코르포랄리타스
(corporalitas: 육체)나 마테리알리타스(materialitas: 물질)와 반대되는 의미로 영성을 사용하므로 영성이 육체나 물질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육적인 물질적인 반대의 개념의 영성을 추구하게 된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신비주의 체험과 신앙의 열광주의로 영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레서 영성의 삶을 케톨릭의 중세 방식의 영성훈련의 방식 4단계로 발전하게 된것입니다.
성독 묵상 기도 관상의 영성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됩니다.
이 사다리의 아래 쪽은 땅에, 꼭대기는 구름을 뚫고 천상의 신비에 닿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에서는 개신교는 영성이란 말을 열정주의나 신비주의와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신앙생활에서 도덕적 요소와 상식적인 요소를 무시한다는 수덕이나 관상 또는 어떤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20세기 부반에 개신교에서는 영성이란 표현보다는 경건이나 헌신이란 용어를 선호했으며, 특히 종교개혁자들이 영성을 삶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영성을 추구할때도 삶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영성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의 첫 단계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의 규정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육에 의한 규정성에서 영에 의한 규정성"으로 바뀌는 본질적 변화를 말한다. 이말은 하나님의 영이 자신 속에 함께 함을 알게 되고, 나는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살려고 노력한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살려는 사람은 자기의 영를 쳐서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의 의미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는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의 영성의 훈련 과정은 삶의 현장에서 자기 부정의 단계에서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루터의 영성의 추구는 삶의 현장을 배재하고는 영성을 추구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루터의 영성의 추구 3단계를 설명하였다. 기도, 말씀묵상. 삶속에서 시련과 연단[ 견인]을 통한 믿음의 삶이다.
1단계 기도- 성령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2단계 말씀묵상 -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을 주십니다.
3단계 - 삶 속에서 시련. 삶속에서 시련과 연단[ 견인]을 통한 믿음의 삶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