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의 의미



만나 - 이것이 무엇이냐

מָן Storng number4478
1.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2.

만나

3.

민11:7

Pronunciation [ mân ]
Etymology
4100에서 유래
Old Testament
15회 사용
  • 1.
    Noun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만나, 민11:7,9, 출16:31이하, 민11:6.

Reference

Grammar Explanation

어미활용 מַנְּךָ

Related Words

  • 문법설명
    어미활용 מַנְּךָ
    관련 성경
    ☞만나(출16:31, 신8:3, 수5:12).


메추라기 - שְׂלָו (셀라브, selav)


שָׁלֵו Storng number7961
1.

안전한

2.

안락하게 거주하는

3.

태만한

Pronunciation [ shâlêv ]
Etymology
7951에서 유래
Old Testament
8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안전한, 보증되어 있는, 대상4:40
  • 2.
    형용사, 남성 [특별한 의미로] 안락하게 거주하는,욥16:12, 시73:12.
  • 3.
    형용사, 남성 [나쁜 의미로] 태만한, 게으른, 부주의한, 겔23:42.

Reference

Grammar Explanation

[שָׁלֵיו 욥21:23, שְׁלֵיו 렘49:31]. 복수 연계형 שַׁלְוֵי, 여성형 שְׁלֵוָה

Related Words

  • 문법설명
    [שָׁלֵיו 욥21:23, שְׁלֵיו 렘49:31]. 복수 연계형 שַׁלְוֵי, 여성형 שְׁלֵוָה
    관련 성경
    ☞평안한(대상4:40, 욥16:12, 시73:12, 렘49:31), 안전한(욥21:23). [명] 평안(욥20:20),[부] 평온히(슥7:7).


קֹרֵא Storng number7124
1.

자고새

2.

메추라기

3.

삼상26:20

Pronunciation [ qôrêʼ ]
Old Testament
2회 사용
  • 1.
    명사, 남성 자고새, 메추라기, 삼상26:20, 렘17:11[6981을 참조].

Reference

Grammar Explanation

7121의 능동태 분사형

Related Words

  • 문법설명
    7121의 능동태 분사형
    관련 성경
    ☞메추라기(삼상26:20), 자고새(렘17:11).

만나의 의미

“만나”(מָן, man / מָן הוּא, man hu)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하늘의 양식을 가리킵니다. 
주로 출애굽기 16장에 등장합니다.

1. 히브리어 원어 의미

מָן (man)

“만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명확한 어원이 완전히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성경 본문에서는 다음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됩니다.

מָן הוּא” (man hu)
“이것이 무엇이냐?” — 출애굽기 16:15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보는 하얀 양식을 보고 놀라며:

“만 후?” = “이게 뭐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만나”가 되었습니다.

즉, “만나”에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급
  • 하늘에서 오는 신비한 양식
  • 날마다 의지해야 하는 은혜

2. 성경적 특징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하신 음식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 출애굽기 16:4

만나는

  • 인간의 노동 생산물이 아니라
  •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었습니다.

3. 영적 의미

 
(1)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에서는 만나를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신 핵심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신명기 8:3

따라서 만나는

  • 육체의 음식
  • 동시에 영혼의 양식을 상징합니다

 (2) 날마다 의지하는 삶

만나는 하루치만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욕심내어 많이 저장하면 썩었습니다.

의미

  • 하나님은 “매일의 신뢰”를 원하심
  • 오늘의 은혜로 오늘을 살게 하심
  • 내일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게 하심

(3)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요한복음 6장

광야의 만나:

  • 육체의 생명을 유지했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렀고,

그리스도는:

  •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 만나로 계시됩니다. 

4. 히브리적 관점의 핵심

만나는 단순한 “기적의 음식”이 아니라:

  • 하나님의 임재의 공급
  • 언약 백성을 살리는 은혜
  • 하늘 질서에 대한 신뢰
  • 말씀에 대한 순종 훈련
  • 매일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굶주림의 장소”가 아니라,
“만나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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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추라기의 의미

성경에서 “메추라기”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히브리어로 메추라기는 שְׂלָו (셀라브, selav) 라고 하며, 주로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고기로 등장합니다.


1. 메추라기의 성경적 배경

대표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출애굽기 16장
  • 민수기 11장
  • 시편 78편, 105편

하나님은 광야에서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 아침에는 만나
  • 저녁에는 메추라기

를 보내셨습니다.


2. 메추라기의 상징적 의미

① 하나님의 공급하심

메추라기는 먼저 하나님의 실제적 공급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하늘과 자연을 통해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즉 메추라기는:

  • 생존의 공급
  • 육체적 필요의 채우심
  • 하나님의 돌보심

을 상징합니다.

시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합니다.

“그가 또 메추라기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시며”
— 시편 105편


3. 만나와 메추라기의 차이

흥미롭게도 성경은 두 음식을 약간 다르게 묘사합니다.

만나 메추라기
하늘의 양식 땅의 고기
날마다 공급 일시적 공급
영적 의미 강조 육체적 욕구와 연결
하나님 의존 훈련 욕망 시험과 연결

만나는 종종:

  • 말씀
  • 생명
  • 영적 양식

의 상징으로 발전합니다.

반면 메추라기는:

  • 인간의 욕구
  • 육체적 필요
  • 탐욕 시험

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민수기 11장의 메추라기: 욕망의 시험

특히 민수기 11장에서는 메추라기가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바뀝니다.

백성들은 만나를 싫어하며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라고 원망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엄청난 양의 메추라기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축복만이 아니라 심판의 의미도 포함합니다.

백성들이 탐욕스럽게 먹을 때 재앙이 임합니다.

즉 여기서 메추라기는:

  • 절제 없는 욕망
  • 육체 중심 신앙
  • 감사 상실
  • 탐욕의 결과

를 드러내는 상징이 됩니다.


5. 히브리적 관점의 의미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 만나를 사모함 → 하나님 의존
  • 메추라기만 원함 → 육체적 욕망 우선

이라는 대조가 형성됩니다.


6. 영적 적용

메추라기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긍정적 의미

  • 하나님은 우리의 실제 필요를 아신다
  • 육체의 필요도 돌보신다
  • 광야에서도 공급하신다

부정적 의미

  • 욕망이 감사보다 커질 수 있다
  • 하나님의 뜻보다 감각적 만족을 추구할 수 있다
  • 축복도 탐욕이 되면 심판이 될 수 있다

핵심 정리

메추라기는 성경에서:

  • 하나님의 공급
  • 육체적 필요의 채우심
  • 인간 욕망의 시험
  • 탐욕에 대한 경고

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특히 만나와 대비되며,
“하나님 자체를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원하는가”
라는 영적 질문을 던지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는 성경 해석과 세계관 이해에서 자주 비교되는 두 흐름입니다.
다만 실제로는 완전히 분리된 이분법이라기보다, 강조점의 차이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히브리적 사고(Hebraic Thinking)

 1. 관계 중심

히브리 사상은 존재를 “관계 속”에서 이해합니다.

  • 하나님 ↔ 인간
  • 인간 ↔ 공동체
  • 인간 ↔ 언약

즉, “무엇인가?”보다 “어떤 관계 안에 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예, 죄 ;  단순 법 위반이 아니라
      의 ;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2. 동적(動的) 사고

히브리어는 움직임과 행동 중심 언어입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보다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강조합니다.

예,  믿음(אֱמוּנָה, emunah)

  • → 단순 지적 동의가 아니라
    → “신실하게 붙드는 삶”
  • 알다(יָדַע, yada)
    → 정보 습득이 아니라
    → 경험적·관계적 앎 

3. 통합적 사고

히브리적 사고는 영과 육, 삶과 신앙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

  • 예배 = 삶 전체
  • 거룩 = 일상 속 구별됨
  • 축복 = 영적·물질적·공동체적 복의 통합

그래서 성경의 히브리 세계에서는 “영적인 것만 거룩하다”는 개념이 약합니다. 

 4. 시간 이해

히브리적 시간은 직선적이면서도 “의미 중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 연대가 아니라:

  •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
  • 그 사건이 공동체에 어떤 의미인가

그래서 절기와 기념은 단순 회상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헬라적 사고(Greek Thinking)

 1. 본질·개념 중심

헬라 철학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대표 질문:

  • 그것은 무엇인가?
  • 본질은 무엇인가?
  • 영원한 형상은 무엇인가?

이 흐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2. 이성·논리 중심

헬라 사상은 체계적 분석과 논증을 중시합니다.

예:

  • 정의의 정의
  • 존재론
  • 형이상학
  • 논리학

따라서:

  • 개념 정리
  • 체계화
  • 철학적 분류

가 매우 중요합니다. 

 3. 이원론 경향

특히 플라톤적 전통에서는:

  • 영 = 고귀
  • 육 = 낮음

이라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반면 히브리 전통에서는 인간을 “분리된 영혼”보다 “통합된 생명체”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4. 추상화 경향

헬라적 사고는 보편 원리와 추상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예:

  • 진리란 무엇인가
  • 선의 이데아
  • 존재의 본질

그래서 철학·과학·논리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경 안에서의 만남

성경은 기본적으로 히브리적 토양에서 나왔지만,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에는:

  • 히브리적 세계관
  • 헬라적 언어 표현이 함께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Paul the Apostle는
히브리적 구원 이해를 헬라 세계의 언어와 논리로 설명했습니다.

또 John the Apostle의 “로고스(λόγος)” 사용은
헬라 철학 언어를 활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히브리적 “창조의 말씀”으로 재해석한 사례입니다.

 대표적 차이 비교

히브리적 사고 헬라적 사고
  관계 중심    본질 중심
  행동·삶    개념·논리
  공동체적   개인적·철학적
  통합적   이원론 경향
  경험적 진리   추상적 진리
  이야기 중심   논증 중심
  순종의 지혜   분석의 지혜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는 점

“히브리 = 좋음 / 헬라 = 나쁨”은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

  • 히브리적 사고는 신앙의 생명성과 관계성을 지켜주었고,
  • 헬라적 사고는 교리를 체계화하고 변증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삼위일체·기독론 정리도 헬라 철학 언어 없이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

  • 히브리적 관계성과 삶
  • 헬라적 명료성과 논리를 균형 있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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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는 단순히 “유대인 vs 그리스인”의 차이만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의 차이를 말합니다.
성경 해석, 인간 이해, 하나님 이해에도 깊은 영향을 줍니다.

1. 핵심 차이 한눈에 보기

구분 히브리적 사고 헬라적 사고
중심             관계와 삶        논리와 개념
관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진리         체험되는 것         정의되는 것
사고 방식          통합적            분석적
시간관   역사적·직선적      순환적·철학적
언어 특징      동사 중심         명사 중심
하나님 이해   살아 역사하시는 분     존재론적 절대자
인간 이해       관계적 존재       이성적 존재
앎(지식)      경험·순종       추상적 이해

2. 히브리적 사고의 특징

 
(1) “존재”보다 “행동” 중심

히브리어는 명사보다 동사적 세계관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 구원하시고
  • 인도하시고
  • 언약하시고
  •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상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에 집중합니다.

  (2) 진리는 삶으로 증명됨

히브리적 사고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 지식이 아닙니다.

예:

  •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
    → 친밀한 관계와 실제 경험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 지적 이해
  • 관계적 체험
  • 실제 참여를 포함합니다.

즉 진리는 설명보다 삶 속에서 드러난다입니다.

  (3) 통합적 사고

히브리적 사고는 영과 육, 삶과 신앙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 :

  • 먹는 것
  • 노동
  • 안식
  • 절기
  • 경제
  • 가족

모두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철학책보다 “삶의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됩니다. 

3. 헬라적 사고의 특징

헬라(그리스) 사상은 철학 중심입니다.

대표적으로 Plato, Aristotle 등의 영향이 큽니다. 

 (1) 본질과 정의 추구

헬라적 사고는 질문합니다.

  •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 “선이란 무엇인가?”
  • “존재란 무엇인가?”

즉 개념을 분석하고 정의하려 합니다. 

  (2) 이성과 논리 중심

헬라 철학은:

  • 논증
  • 체계화
  • 분류
  • 분석

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서양 신학은 종종:

  • 조직신학
  • 교리 체계
  • 존재론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3) 이원론 경향

헬라적 사고에는:

  • 영 ↔ 육
  • 거룩 ↔ 세속
  • 정신 ↔ 물질

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플라톤 철학에서는:

  • 물질세계는 불완전
  • 영적 세계는 완전

이라는 관점이 강합니다.

반면 히브리 사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자체를 선하게 봄에 더 가깝습니다.  

4. 성경 속 두 사고의 만남

성경은 기본적으로 히브리적 배경 위에 기록되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헬라 문화가 강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특히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는:

  • 히브리적 내용
  • 헬라적 표현

이 함께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Paul the Apostle은:

  • 히브리적 신앙을 가지고
  • 헬라 세계 속에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5. 대표적 차이 예시

 
히브리적 질문

  •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것인가?
  •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헬라적 질문

  • 하나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 선과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 인간 존재의 본체는 무엇인가? 

6.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이유

성경을 지나치게 헬라적으로만 읽으면:

  • 개념적 교리 중심
  • 논리 체계 중심
  • 추상화

로 흐르기 쉽습니다.

반면 히브리적 배경을 이해하면:

  • 언약
  • 관계
  • 역사
  • 삶의 순종
  • 공동체

의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믿음”은 단순 동의가 아니라
히브리적으로는:

신뢰하며 따라가는 삶

에 가깝습니다. 

7. 가장 압축된 차이

 
히브리적 사고 
 “진리는 살아내는 것이다”

 헬라적 사고 
 “진리는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이다”

성경은 두 요소를 모두 사용하지만,
뿌리는 대체로 히브리적 세계관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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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세계관 & 헬라적 세계관

히브리적 세계관과 헬라적 세계관은 성경 해석과 인간 이해 방식에 큰 영향을 준 두 사고 체계입니다.
둘은 단순히 “유대 vs 그리스”의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히브리적 세계관 (Hebraic worldview)  

핵심 특징 : “관계와 삶 중심”

히브리적 사고는 추상적 철학보다 삶·관계·행동·경험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특징

① 존재보다 “행동”을 중요시

헬라적 사고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지만,
히브리적 사고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봅니다.

예:

  • 믿음 = 단순 동의가 아니라 “순종”
  • 사랑 = 감정이 아니라 “행동”

성경에서 “안다”(יָדַע, yada)는
지식 습득보다 관계적 체험을 의미합니다.

예:

“아담이 하와를 알매”

여기서 “알다”는 단순 정보가 아니라 깊은 관계와 연합입니다. 

 ② 시간 중심 사고

히브리인은 시간을 직선적으로 봅니다.

  • 창조
  • 타락
  • 언약
  • 구속
  • 회복

즉 역사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 “왜 존재하는가?”보다
  •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는가?”에 집중합니다.

 ③ 공동체 중심

개인보다 언약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 아브라함의 집
  • 이스라엘
  • 언약 백성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④ 통합적 사고

영과 육, 신성과 인간성을 지나치게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

  • 식사
  • 절기
  • 노동
  • 결혼

이런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봅니다.

즉:
“거룩”은 세상 도피가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⑤ 진리는 “삶으로 드러나는 것”

히브리적 진리는 실천적입니다.

예:

  • 지혜 = 삶의 기술
  • 의 = 올바른 관계
  • 믿음 = 충성됨

그래서 성경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더 강조합니다.  

2. 헬라적 세계관 (Greek worldview)

  
핵심 특징 : “이성과 본질 중심”

헬라적 사고는 철학적·분석적·논리적 접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징  

 ① 존재와 본질 탐구

“이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

  • 인간의 본질
  • 선의 본질
  • 존재의 근원

헬라 철학은 추상적 개념 분석을 발전시켰습니다.  

 ② 이원론 경향

영과 육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플라톤은:

  • 영 = 고귀
  • 육체 = 낮은 것

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영향은 후대 영지주의에도 연결됩니다. 

 ③ 공간 중심 사고

헬라 세계관은 시간보다 “완전한 이상 세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즉:
현실은 불완전하고
참된 실재는 보이지 않는 이상 세계에 있다고 봅니다.  

④ 개인 중심

개인의 이성과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철학자는 스스로 사고하고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진리를 철학적·논리적으로 체계화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 정의란 무엇인가?
  • 존재란 무엇인가?
  • 선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3. 두 세계관의 차이 요약

히브리적 사고 헬라적 사고
관계 중심 본질 중심
행동 강조 존재 강조
공동체 중심 개인 중심
시간 중심 공간/이상 중심
통합적 이원론적 경향
경험적 분석적
삶의 실천 철학적 사유 

4. 성경과 두 세계관

성경은 기본적으로 히브리적 배경 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헬라 문화가 강했기 때문에:

  •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 헬라 철학의 언어를 일부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헬라 문화권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논리적 설명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중심은 여전히:

  • 언약
  • 관계
  • 순종
  • 하나님 나라
  • 삶의 변화

같은 히브리적 흐름에 더 가깝습니다. 

5. 중요한 차이 하나

히브리적 질문  
“당신은 하나님과 어떻게 살아가는가?”

헬라적 질문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성경은 둘 다 사용하지만, 특히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아는 것”보다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강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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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는 성경을 이해할 때 자주 비교되는 두 사고 체계입니다.
단순히 “유대인 vs 그리스인”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1. 핵심 차이 

구분 히브리적 사고       헬라적 사고
      중심           관·삶·행동           개념·논리·분석
     진리          살아내는 것            이해하는 것
  하나님 이해        언약 속 인격적 하나님          철학적 절대자 개념
   시간관         순환·과정·역사               직선·분석·추상
  인간 이해         공동체적 존재              개별적 존재
     지식            체험적 앎                이론적 앎
 언어 특징           동사 중심                명사 중심
     신앙          순종과 삶               교리와 체계 

2. 히브리적 사고의 특징

히브리 사상은 “삶 속에서 경험되는 진리”를 중요하게 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 지식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 경험하고
  • 관계 맺고
  • 실제로 살아내는 것

입니다.

예: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

여기서 “안다”는 단순 정보 습득이 아니라
관계적 연합입니다.

즉 히브리 사고에서는:

  • 믿음 = 삶
  • 순종 = 앎
  • 진리 = 행동

입니다.

3. 헬라적 사고의 특징

헬라(그리스) 사상은 철학과 논리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핵심은:

  • 정의
  • 분류
  • 분석
  • 개념화

입니다.

그래서 헬라적 사고는:

“진리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본질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통이 여기에 속합니다. 

4. 성경에서 나타나는 차이  

 히브리적 표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는 단순 사상 동의가 아니라:

  • 삶을 바꾸고
  • 길을 함께 걷고
  • 행동으로 들어오는 것

입니다. 

 헬라적 접근

후대에는 신앙이 점점:

  • 교리 체계
  • 논리적 정리
  • 철학적 해석

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 삼위일체 논쟁
  • 본질 논쟁
  • 존재론 논쟁

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성경 본래의 “삶의 신앙”보다
“개념의 신앙”으로 흐를 위험도 생겼습니다.

 5. 히브리인은 “존재”보다 “행동”을 본다

히브리어는 동사 중심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의인 :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
 악인 : 악을 행하는 사람

즉 “상태”보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도 
 “믿는다” = 실제 삶으로 나타난다 입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도 매우 히브리적 사고입니다. 


 6. 시간 개념도 다름

 히브리적 시간

시간은 “의미 있는 사건의 반복과 성취”입니다.

예, 절기, 안식일, 출애굽 기억

과거 사건이 현재 안에서 반복적으로 살아납니다. 

헬라적 시간

시간은 직선적이고 측정 가능한 흐름입니다.

그래서 역사보다 연대, 구조, 체계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7.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이유

성경은 기본적으로 히브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대부분 헬라적 사고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자주 

 개념만 찾고
 정의만 찾고
 체계만 만들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종종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묻습니다.

 8. 대표적인 차이 한 문장

  히브리적 사고
 
 - 진리는 살아내는 것이다.

  헬라적 사고
  - 진리는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 안에는 사실 두 흐름이 모두 일부 존재합니다.
 신약은 히브리적 토대 위에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을 깊이 이해하려면 

히브리적 세계관
유대적 배경
헬라어 표현 방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는 히브리적 사고인가 아니면 헬라적 사고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보서 2:26)는 표현은 전체적으로 매우 히브리적 사고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당시의 일부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를 교정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왜 히브리적 사고인가?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 믿음 = 삶
  • 진리 = 존재 방식
  • 앎 = 행동
  • 순종 = 관계의 실제 표현입니다.

즉 히브리 세계에서는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알다”인 야다(יָדַע) 는 관계적· 체험적 앎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유에서는:

  • 하나님을 믿는다
    → 하나님을 따른다
    → 삶이 변한다
    →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하나의 흐름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핵심

야고보는 단순히:

“행동 많이 해야 구원받는다”

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삶으로 드러난다”

를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은
“믿음”을 머리 속 개념으로만 붙잡는 태도를 반박합니다.

예를 들어: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지적 인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헬라적 사고와의 대비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적 흐름에서는 종종:

  • 영혼 > 육체
  • 정신 > 행동
  • 관념 > 현실

처럼 분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 “나는 마음으로 믿는다”
  • “지식적으로 안다”
  • “교리를 동의한다”

가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사유에서는:

  •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
    = 아직 완전한 믿음이 아님

입니다.

즉 존재와 행동이 하나입니다.


아브라함 예시도 히브리적 구조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 믿음이 있었고
  • 그 믿음이 이삭을 드리는 순종으로 나타났으며
  •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히브리 언약 사상의 전형입니다.

언약은 단순 동의가 아니라:

  • 듣고
  • 순종하고
  • 살아내는 것

입니다.


바울과 충돌하는가?

표면적으로는:

  • 바울: “믿음으로 의롭다 함”
  • 야고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음”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바울은:

  • 율법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생각을 반박했고,

야고보는:

  • 삶 없는 추상적 믿음을 반박했습니다.

둘 다 히브리적 기반 안에 있습니다.

즉:

  • 바울 → “행위로 구원 못 얻는다”
  • 야고보 →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살아 움직인다”

입니다. 

히브리적으로 정리하면

히브리 사유에서 믿음(אֱמוּנָה, 에무나)은
단순 신념보다:

  • 신실함
  • 지속적 충성
  • 관계적 신뢰
  • 실제 삶의 태도

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라는 말은 히브리적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적 믿음은
원래 “살아 움직이는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는 히브리적 사고인가 아니면 헬라적 사고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보서 2:17)는 표현은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히브리적 사고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헬라적 사고와 대비되는 성경적·히브리적 세계관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왜 히브리적 사고인가?

히브리 사상에서는
믿음(אמונה, 에무나) 이 단순한 “생각”이나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에무나는 원래:

  • 견고함
  • 신실함
  • 지속적 충성
  • 실제 삶으로 드러나는 신뢰

를 뜻합니다.

즉 히브리인에게 믿음은:

“마음속에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는 충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은 항상 행동과 연결됩니다.

예:

  • 아브라함은 믿었기 때문에 떠났고
  • 모세는 믿었기 때문에 애굽을 버렸고
  • 이스라엘은 믿으면 순종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행함은 믿음의 “추가 옵션”이 아니라 믿음의 “가시적 형태”입니다. 

반대로 헬라적 사고는?

전통적인 헬라 철학은 상대적으로 

정신 ↔ 육체
이론 ↔ 행동 
앎 ↔ 삶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특히 플라톤적 흐름에서는 “참된 지식”이 높은 영역이고 물질적 행동은 낮은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헬라적 사고는 종종  “무엇을 아는가”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반면 히브리적 사고는  어떻게 사는가 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핵심

야고보는 히브리적 언약 사고 안에서 말합니다.

그의 논리는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난다 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믿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됩니다.

야고보서 2장의 구조 자체가 히브리적입니다.

예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 
      “라합이 사자들을 숨겨준 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여기서 믿음은 추상 개념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완성되는 신실함입니다. 

바울과 충돌하는가?

겉으로는 
바울 → “믿음으로 의롭다”
야고보 →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루는 대상이 다릅니다.

바울은 “율법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태도”를 반대했고, 
야고보는 “삶의 변화 없는 죽은 신앙”을 경고했습니다.

둘 다 히브리적 언약 신앙 안에 있습니다.

바울도 결국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갈라디아서 5:6) 을 말합니다.

즉 성경의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참된 믿음 → 반드시 삶을 변화시키고
순종과 행함 → 믿음의 열매입니다.

 핵심 정리

구분 히브리적 사고 헬라적 사고
      믿음 삶으로 드러나는 충성        정신적 동의·관념
      진리         살아내는 것              아는 것
      행함    믿음의 본질적 표현        믿음과 분리 가능
야고보서 2장      매우 히브리적      헬라적 이원론과 대비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는 성경의 전형적인 히브리적 사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노아는 술에 취하였을까



왜 노아는 술에 취하였는가

성경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홍수 이후 농사를 시작하고 “포도원을 심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상태로 장막 안에 누워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노아가 술에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직접적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첫째, 새로운 환경과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홍수 이후 노아는 처음으로 포도 재배를 했고, 포도주 발효와 그 효과에 익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를 의인으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무결함”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창조 이후 새 출발의 긴장 속에서의 실수입니다. 
홍수 이후는 사실상 인류의 “재시작”인데, 그 첫 장면에서 노아의 취함은 인간이 새 시대에서도 여전히 실수할 수 있다는 상징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셋째, 문학적·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술 문제를 말하기보다, 이후 이어지는 함(Ham)의 행동과 가나안(Canaan)에 대한 저주 이야기로 연결되며, 인간의 존중과 질서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정리하면, 성경은 노아가 술에 취한 “구체적 심리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새로운 시대에도 반복되는 도덕적 긴장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왜 노아는 술에 취하였을까

창세기 9장에 따르면 노아가 술에 취한 이유는 단순히 “실수”라기보다, 포도주를 만든 뒤 그 결과를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서술됩니다.

본문 흐름을 보면 상황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 대홍수 이후, 노아는 농사를 시작하고 포도원을 가꿉니다.
  • 포도주를 만들어 마신 뒤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게 됩니다(창 9:21).
  • 이 장면에서 핵심은 “술 자체”보다 술을 만든 뒤의 절제 실패와 취함 상태입니다.

왜 이런 일이 강조되었을까를 해석하면 보통 세 가지로 봅니다:

  1. 인간의 연약함 강조
    • 홍수 이후 “의인”으로 평가받던 노아도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 구원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타락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메시지입니다.

  2. 새 시작 이후의 시험
    • 홍수는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그 이후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다시 문제로 드러납니다.

  3. 포도주 자체보다 ‘절제’의 문제
    • 성경은 포도주를 무조건 악으로 보지 않지만, “과음과 무절제”를 문제로 다룹니다.

즉, 노아가 술에 취한 이유는 단순한 생리적 과음 사건이 아니라, 성경적으로는 의인도 절제 없이는 무너질 수 있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이해됩니다.


함의 행동과 저주 이야기까지 왜 이어지는지

이 이야기는 창세기 9장 20–27절에 나오는 짧지만 해석이 많이 갈리는 본문입니다. 
핵심 흐름부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건의 흐름

  •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듭니다.
  • 그의 아들 함이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 반대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와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고 덮어줍니다.
  • 노아가 깨어난 뒤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2. 왜 “보기만 한 것”이 문제가 되었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왜 그냥 본 것만으로 저주까지 이어지는가?”

전통적인 해석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조롱/폭로”의 행동

히브리어 표현은 단순히 “봤다”가 아니라,

  • 무례하게 드러내고
  • 형제들에게 말하며
  • 아버지의 수치를 공공화한 행동 으로 이해됩니다.

즉, “실수로 본 것”이 아니라 수치를 소비하거나 조롱한 태도로 보는 해석입니다. 

 (2) 가족 질서(권위) 훼손

고대 근동 문화에서 부모의 벌거벗음은 단순한 신체 문제가 아니라 권위와 존엄의 붕괴입니다.

  • 함은 아버지의 “연약한 상태”를 보호하지 않고
  • 오히려 그 질서를 깨뜨린 것으로 해석됩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은 그 질서를 “회복”합니다. 

 (3) 가나안 저주의 이유 (핵심 쟁점)

노아가 직접 함을 저주하지 않고 “가나안”을 저주한 이유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 가나안은 훗날 이스라엘이 맞닥뜨릴 민족으로, 본문이 후대적 관점에서 정리되었을 가능성
  • 함의 죄가 “가문 전체의 성향”으로 이어진다는 상징 구조
  • 또는 함의 행동이 가나안 계통으로 대표된다는 문학적 표현

3. 핵심 메시지

이 이야기는 단순히 “술 취함 + 벌거벗음 + 저주”가 아니라 다음을 강조합니다:

  • 수치를 드러내는 태도 vs 수치를 덮는 태도
  • 관계의 회복 vs 관계의 파괴
  • 존중 vs 조롱

4. 중요한 균형

현대적으로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본문은 “술을 마시면 저주받는다”는 단순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난 순간,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중심으로 읽는 본문입니다.


1. 사건의 흐름

  •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듭니다.
  • 그의 아들 함이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 반대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와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고 덮어줍니다.
  • 노아가 깨어난 뒤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2. 왜 “보기만 한 것”이 문제가 되었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왜 그냥 본 것만으로 저주까지 이어지는가?”

전통적인 해석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조롱/폭로”의 행동

히브리어 표현은 단순히 “봤다”가 아니라,

  • 무례하게 드러내고
  • 형제들에게 말하며
  • 아버지의 수치를 공공화한 행동

으로 이해됩니다.

즉, “실수로 본 것”이 아니라 수치를 소비하거나 조롱한 태도로 보는 해석입니다.


(2) 가족 질서(권위) 훼손

고대 근동 문화에서 부모의 벌거벗음은 단순한 신체 문제가 아니라 권위와 존엄의 붕괴입니다.

  • 함은 아버지의 “연약한 상태”를 보호하지 않고
  • 오히려 그 질서를 깨뜨린 것으로 해석됩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은 그 질서를 “회복”합니다.


(3) 가나안 저주의 이유 (핵심 쟁점)

노아가 직접 함을 저주하지 않고 “가나안”을 저주한 이유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 가나안은 훗날 이스라엘이 맞닥뜨릴 민족으로, 본문이 후대적 관점에서 정리되었을 가능성
  • 함의 죄가 “가문 전체의 성향”으로 이어진다는 상징 구조
  • 또는 함의 행동이 가나안 계통으로 대표된다는 문학적 표현

3. 핵심 메시지

이 이야기는 단순히 “술 취함 + 벌거벗음 + 저주”가 아니라 다음을 강조합니다:

  • 수치를 드러내는 태도 vs 수치를 덮는 태도
  • 관계의 회복 vs 관계의 파괴
  • 존중 vs 조롱

4. 중요한 균형

현대적으로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본문은 “술을 마시면 저주받는다”는 단순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난 순간,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를 중심으로 읽는 본문입니다.


원하면 “왜 하필 가나안이 저주 대상이 되었는지” 또는 “이 이야기가 후대 이스라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까지도 더 깊게 이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설명해 주세요 함의 행동과 저주 이야기까지 왜 이어지는지

이 이야기가 “노아의 술 취함 → 함의 행동 → 가나안 저주”로 이어지는 구조는, 단순 사건 나열이 아니라 고대 문학적 장치와 신학적 메시지가 겹쳐 있는 본문입니다. 흐름을 연결해서 보면 이해가 훨씬 명확해집니다.


1. 사건의 핵심 연결 구조

  •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상태로 누움
  • 함이 그 상태를 “보고” 형제들에게 말함
  • 셈과 야벳은 옷으로 덮어 아버지의 수치를 가림
  • 노아가 깨어난 뒤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함

2. 왜 “술 취함 + 벌거벗음”이 중요한 출발점인가?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벌거벗음이 단순한 노출이 아니라:

  • 권위의 붕괴
  • 질서의 역전
  • 수치와 모욕의 상태

를 의미합니다.

즉, 노아의 상태는 “개인 실수”가 아니라 가정 질서가 무너진 상징적 장면입니다.


3. 함의 죄는 단순히 “본 것”이 아니다

본문은 “봤다”라고만 말하지만, 해석은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1) 조롱/폭로의 행위

  • 단순 관찰이 아니라
  • 형제들에게 말하며 수치를 확산시킴
    → “아버지의 수치를 공개화”

(2) 권위에 대한 무례

  • 고대 사회에서 부모의 수치는 보호 대상
  • 이를 드러내는 것은 질서 파괴

(3) 더 강한 해석(일부 전통)

  • 일부 유대 전승이나 학자들은 더 나아가
    • 성적 모욕
    • 또는 아버지 권위를 적극적으로 훼손한 사건
      으로 보기도 합니다 (본문 자체는 명확히 말하지 않음)

4.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 저주받는가?

여기가 가장 핵심 논쟁입니다.

(1) 문학적/역사적 관점

  • “가나안”은 훗날 이스라엘과 충돌하는 민족
  • 본문이 후대 이스라엘 시각에서 정리되었을 가능성
    → “원인 설명을 과거로 투사”

(2) 대표성 구조

  • 함의 죄가 개인이 아니라 “계통의 성향”으로 표현됨
  • 가나안은 함의 아들 중 대표 상징

(3) 서열 역전의 강조

  • 아버지를 무시한 태도 → 자식 계통으로 되돌아간다는 구조
  • “행위의 결과가 계보에 남는다”는 고대적 사고

5. 전체 메시지 (핵심)

이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연결됩니다:

① 노아의 취함

→ 인간의 연약함 노출

② 함의 태도

→ 연약함을 “덮지 않고 이용/확산”

③ 셈과 야벳

→ 수치를 덮어 질서 회복

④ 가나안 저주

→ 질서 파괴의 결과가 “계보적 결과”로 표현됨


6. 핵심 요약 한 문장

이 본문은 “술 이야기”가 아니라

연약함이 드러난 순간, 그것을 조롱할 것인가 덮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적 언어 생활 함이 사실을 이야기한 후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함을 저주하셨는가? 함은 있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해

성경에서 창세기 9장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실을 말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수치를 어떻게 대했느냐의 문제로 읽혀 왔습니다.

사건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 노아 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장막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 아들 함 은 그것을 보고 밖에 나가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 반면 셈 과 야벳 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고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단순한 “목격”보다도,
수치를 드러내고 퍼뜨리는 태도
수치를 덮어 주는 태도를 대비합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벌거벗음”은 단순한 육체 상태가 아니라

  • 수치,
  • 권위의 붕괴,
  • 인간의 연약함
    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함의 문제는 “거짓말을 했느냐”보다,
아버지의 약함을 존중 없이 노출하고 소비한 태도에 있다고 보는 해석이 많습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은 잘못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수치를 “덮었습니다.”

이 점은 후대 성경의 정신과도 연결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 베드로전서 4:8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본문에서 직접 저주를 받은 이는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인 가나안 입니다. 이것 때문에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여러 해석을 해왔습니다.

  •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를 반영한 본문이라는 해석
  • 함의 가문 전체의 방향성을 상징한다는 해석
  • 단순한 개인 윤리보다 “가문의 영적 태도”를 보여 준다는 해석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히
“사실을 말했다 → 저주받았다”
라기보다,

  • 타인의 수치와 약함을 어떻게 대하는가,
  • 권위와 관계를 어떻게 존중하는가,
  • 허물을 폭로하는가, 덮어 주는가

를 묻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가깝습니다.


왜 함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 하고 저주를 받았는가

성경에서 함이 저주를 받은 장면은 창세기 9장입니다. 핵심은 단순히 “사실을 말했다”는 데 있지 않고, 아버지 노아의 수치를 어떻게 대했는가에 있습니다.

사건을 보면:

  •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장막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 함은 그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 반면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하여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하며 덮어 주었습니다.

본문은 함이 “본 것”보다, 그 수치를 드러내고 밖으로 가져간 태도를 문제 삼는 흐름으로 읽힙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부모의 수치를 덮는 것은 존중과 언약적 질서를 지키는 행위였고, 반대로 그것을 퍼뜨리는 것은 조롱·모욕·권위 훼손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함의 죄를 다음과 같이 봅니다.

  1. 아버지의 수치를 즐기거나 조롱함
  2. 수치를 덮지 않고 공개함
  3. 부모의 권위를 가볍게 여김

반대로 셈과 야벳은 “진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면서도 사랑과 존중으로 덮었습니다.

이 점은 성경 전체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즉, 성경은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수치를 소비하거나 폭로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방향에 가깝습니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본문에서 직접 저주받는 대상이 함이 아니라 그의 아들 가나안이라는 점입니다. 이 부분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 함의 가문 전체에 대한 상징적 선언으로 보는 견해
  •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의 후대 관계를 설명하는 서사로 보는 견해
  • 함이 단순 폭로 이상으로 더 심각한 행위를 했다고 보는 고대 해석들

하지만 본문 자체만 놓고 보면 가장 분명한 초점은 “아버지의 수치를 어떻게 대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질문에 직접 답하면:

함은 단지 사실을 말했다고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수치를 사랑으로 덮지 않고 밖으로 드러낸 태도” 때문에 문제시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본문의 핵심에 더 가깝습니다.


함이 저주를 받은 이유

성경에서 흔히 “함이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보면 창세기 9장에서는 함 자신보다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다.
본문은 창세기 9:20–27입니다.

사건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 노아 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채 장막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에 나가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 반면 셈과 야벳은 옷을 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버지의 수치를 덮었습니다.
  • 이후 노아가 깨어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핵심은 단순히 “사실을 말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고대 히브리 문화에서 부모의 수치를 드러내고 그것을 밖으로 퍼뜨리는 행위는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를 훼손하는 태도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 해석은 함의 죄를 다음과 같이 봅니다.

  1. 아버지의 수치를 존중하지 않음
  2. 그것을 덮기보다 드러냄
  3. 조롱하거나 경멸하는 태도가 있었음
  4. 가족 질서를 깨뜨림

반대로 셈과 야벳은 “보지 않으려 하며 덮어 주는 행동”을 했습니다.
본문은 단순한 음주 사건보다, 타인의 허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를 대비시키는 구조입니다.

유대 전승과 일부 학자들은 더 심각한 범죄(성적 모욕이나 권위 찬탈)를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 자체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아버지의 수치를 존중 없이 드러낸 행위”입니다.

또 중요한 점은, 성경이 노아의 잘못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아 역시 술에 취해 벌거벗은 상태가 되었고, 성경은 그것 또한 기록합니다. 즉 이야기는 “완벽한 의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가족의 태도와 존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여 주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성경적 복의 의미



호모 베아투스(Homo Beatus)

  • Homo = 인간, 사람
  • Beatus = 복된, 행복한, 축복받은

즉 : 복 있는 인간,  축복받은 사람,  참된 행복의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적· 성경적 뉘앙스로는 특히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과 연결되는 표현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느낌으로 확장하면 :

  • Homo Beatus Deo
    → “하나님 안에서 복된 인간”

  • Homo Vere Beatus
    → “참으로 복된 인간”

  • Beatus Vir
    → “복 있는 사람”
    (라틴 성경에서 시편 1편 전통 표현)

특히 Beatus Vir는 고전적이고 성경적인 울림이 강합니다.

신령한 축복

은 신령한 축복을 의미하는데 복음서 와 계시록에 가장 많이 사용되어 있다 (마 5:3-11, 11:6, 눅 11:28, 요 20:29, 계 1:3, 14:13, 20:6). a. 죄 사함을 받는 것 (시 32:1) b. 영생의 (시 133:3) c.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평강 (시 29:11) d. 지경을 넓히는 것과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는 것 e. 아름답고, 지극한 (시 21:3,6) 2. 께서 주시는 대상 주의 백성............................ 시 3:8;29:11

히브리어 원어 '바라크(Barak)'를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복의 정의 3단계

1. 성경적 복의 핵심 : '명사'가 아닌 '동사'

우리는 흔히 복을 '내가 소유한 것(명사)'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복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사건과 과정(동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Input), 사람을 변화시키고(Process), 세상을 향해 나가는(Output)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성경적 복의 3단계 통합 정의

성경에서 "복"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아래의 3단계 틀을 대입하면 문맥이 명확해집니다.

​• 1단계 [본질] 
하나님과의 연결 (Presence)
 
가장 본질적인 복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계시는 상태' 그 자체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시는 것이 복의 시작이며,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 곧 저주입니다.

​• 2단계 [역량]  
생명력의 부여 (Vitality & Power)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에너지가 내 삶을 온전하게 회복하고 번성케 하는 힘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생명력과 한계를 돌파하는 지혜가 내면에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3단계 [목적]  
통로와 사명 (Mission & Overflow)
 
나에게 고인 복이 담장을 넘어 타인과 세상에 선한 영향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성경적 복은 결코 개인의 소유로 끝나지 않으며, 나를 통해 주변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타나는 사명으로 완성됩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보는 깊은 통찰 : '바라크'와 '아쉐르'

성경에는 '복'으로 번역되는 두 가지 주요 단어가 있습니다.

바라크(Barak)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생명력과 권세이며, 어원적으로는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에서 왔습니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겸손히 머물 때 진정한 복이 시작됩니다.

아쉐르(Asher)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과 만족을 뜻합니다.

삶에 적용하기 : 야베스의 기도와 만능 공식

역대상 4장 10절의 '야베스의 기도'는 단순한 기복 신앙이 아닙니다. 
야베스는 고통이라는 운명을 끊어낼 생명력(바라크)을 구했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사명의 범위(지경)를 넓혀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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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4편 
히브리어 바라크(בָּרַךְ)로 읽는 성경적 ‘복’의 본질 

복이란 무엇인가?

“복 받으세요.”
“그분은 참 복 있는 분이에요.”
 우리는 일상 속에서 ‘복’이라는 단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하지만 정작 “복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복이란 단순히 일이 잘 풀리는 것일까요?
 건강과 경제적 안정, 자녀의 성공처럼 우리가 기대하는 ‘좋은 일’의 총합일까요?
우리는 흔히 복을 외적 조건이나 성취 중심으로 이해합니다.그러나 성경은 ‘복’을 훨씬 더 깊고 거룩한 차원에서 정의합니다.성경에서 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존재의 상태이며,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방향성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을 나타내는 대표적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시편 1편에서 등장하는 “애쉐르(אַשְׁרֵי)”입니다. 

이 단어는 ‘행복하다’, ‘바른 길을 걷는 자’라는 의미로, 방향성과 태도를 강조합니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시 1:1)라는 말씀처럼, 악한 길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삶의 자세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늘 함께 살펴볼 시편 24편에 나오는 “베라카(בְּרָכָה)”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을 뜻하며, 그 어근 “바라크(בָּרַךְ)”는 ‘축복하다’와 동시에 ‘무릎을 꿇다’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복이란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앞에 무릎 꿇는 예배자의 삶에 부어지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시편 24편은 이 ‘베라카’가 누구에게 임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시편 24편이 말하는 복의 세 가지 본질이 있습니다. 

첫째, 복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은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 24:3)
복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시편 기자는 ‘복’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설 수 있는 자격과 특권으로 정의합니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으며,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v.4) 이러한 내적·외적 정결함을 가진 자에게 임재의 복, 즉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는 복이 주어집니다. 복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존재의 상태입니다.

 둘째, 복은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v.5)
이 말씀은 복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안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복은 단지 ‘의로운 삶’의 보상이 아닙니다.복은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얼굴을 찾는 자에게 임하는 응답입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그는 하나님 그분 자체를 구합니다.하나님을 통하여 무언가를 얻으려 하기보다,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그분과 동행하려는 삶, 그것이 복입니다.

 셋째 복은 공동체로 흘러가는 하나님의 은혜

시편 24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v.7)
개인의 경건이 공동체의 예배로 확장됩니다.복은 한 사람의 거룩함에 머물지 않습니다.복 있는 자의 순전한 신앙은 공동체를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진정한 복은 나 하나만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복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모든 이가 함께 살아가는 조화이며,그분의 임재가 공동체에 머무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복이란 무엇인가?
복은 단지 좋은 일이 생기는 상태가 아닙니다.복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는 특권이며,그분과 깊은 교제와 신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입니다.

복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는 삶에서 흐르고,그 은혜가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흘러갈 때 완성됩니다.

복은 샬롬입니다.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그분의 동행 안에서 삶이 평안하게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만,진정한 복은 그분 자체를 갈망할 때 주어집니다.
복은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선물입니다.그분을 찾는 자는 결코 복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5)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그분 앞에 무릎 꿇는 자,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자,그가 진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설교본문: 잠언  10:22

주의 복, 그것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그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설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찾아오는 특별한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태양이 일 년에 한 번만 뜬다고 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은 그 해를 보고 감탄할 것이며, 해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뜹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감사할 것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아주 자주 불평 거리만을 찾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

우리는 축복에 익숙해져 있는 마음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치료 방법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보고 듣는 것마다 신기해하며 놀라움을 발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평범한 은혜와 생활의 위안,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좋은 음식과 옷, 따뜻함과 빛, 그리고 공기, 가정의 평화와 사랑의 신성한 끈 등 우리가 해야 할 감사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아주 진지해져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일들은 우리 주위에 항상 있습니다.

미국선교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미의 미개척지에서 선교사님 한 분이 매우 중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이 더 하였던 것은 그녀에게 돈이 도착하지 않아서 자신이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날마다 오트밀과 깡통에 든 우유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점차 회복이 되었으며 꾸준히 30일 동안 오트밀 음식을 먹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송금한 돈을 받게 되었고, 다른 것들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휴가 때가 되자 그녀는 이 시련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간증을 듣던 사람 중에 한 의사가 그녀의 병의 증상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심한 소화불량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돈이 빨리 도착했었더라면 당신은 오늘 나에게 여기서 말할 수 없었을 거요. 우리가 그 병을 위하여 항상 처방하는 음식이 바로 30일간의 오트밀 식사랍니다."

그녀의 고난이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축복을 싸고 있는 보자기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오늘 우리가 함께 보고자 합니다. 그 은혜로운 뜻을 알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시는 저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 10장 22절의 말씀입니다.

주의 복, 그것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그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하게 한다는 말씀을 영어로 보시면, rich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주변 환경으로나 아주 풍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는 슬픔이 더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힘을 얻어내는 물질과 부유함에는 슬픔이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온전하며 슬픔이 더해지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은 구약에서의 복과 신약에서의 복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던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였습니까? 네, 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야곱도 부자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 역시도 부자였습니다. 다윗도 부자가 되었고, 솔로몬도 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던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사람으로 오실 때부터, 남의 집 마구간 말구유에서 오셨고,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더 부자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다 버렸습니다.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자기에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고 더 가난해졌습니다.

이것은 아주 큰 흐름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지만 정말 가난하였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하나님의 대언자였지만, 가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신실한 대언자였지만 감옥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또 신약시대에도 부자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습니다.또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믿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부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교회의 역사를 볼 때도 부자들이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단의 진젠돌프 백작도 부자였고, 스탠리 탬도 하나님께 신실한 사업가이자, 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주 특수한 몇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은 물질적인 복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면 만수르나,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오늘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은 물질적인 번영이 아닙니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물질적인 보상과 영광은 이 땅에 세워질 천년왕국에서 주어질 것입니다. (엡 1:3)

즉,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복은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입니다. “영적인 복”이라는 것은 먼저 죄들이 용서받고 가려진 복을 말합니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은혜와 평강과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 “영적인 복”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

일본에 사는 “미우라 아야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소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일생, 77년 동안 그녀는 병과 싸웠습니다. 그녀는 24세부터 결혼하기 전 37세까지 13년 동안은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예수님을 알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그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그 감격을 전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사람의 비극은 자신은 억울하게 고통당한다는 생각의 오해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속의 빙점을 극복하면 어느 누구도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다”라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이러한 깨달음을 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일평생 결핵성 척추염, 대상포진, 직장암, 파킨슨병 등의 난치병과 싸우면서도 고백했습니다;

“병으로 잃은 것은 오직 건강뿐이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신앙을 갖게 돼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공을 구하고, 축복을 구하고, 문제 해결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삶의 위기가 있을 때에도 우리는 주의 은혜에 감사할 것이고,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곧 축복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극심한 고난이 있어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마귀와 질병과 저주는 순식간에 결박당하고 그의 앞길에는 축복의 대로가 활짝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 있는 것이 바로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길로 나가야 합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진 “언약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어떤 이가 목사님을 찾아와 항의를 했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가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에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인 우리에게 그 아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눈만 뜨면 무섭게 달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지난해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성도님 살아있는 교회는 헌신을 요구한답니다. 죽은 교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헌신의 요구에 대해 응할지 말지는 성도님의 몫이랍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로 살 수 있을까요? 신명기 30장 20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아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은 그 축복의 세계에 머물 수 있는 비결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삼은 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은 축복의 세계에서 사시는 분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축복 가운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는 주 하나님

우리는 오늘 만복의 근원되시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길 가운데에는 슬픔이 더해지지 않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적 복의 개념

1.어원적 의미

a. (바락)

원래의 뜻은 '무릎을 꿇다'는 뜻으로 낮은 자가 높은 자를 경배하고 찬양할 때(시

72:15)에 쓰였다.또 축복을 빌 때(대상4:10)나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하여 찬양할

때(시145:1-2,대상29:10,느9:5) 쓰이기도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축복

하실 때(창1:28,9:1,12:2,22:16-18)에 쓰이고 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실 때는 영적이며 물질적이며 동시에 후손이 받을 먼 훗날의 축복까지

포함했다.

b. (유로게오)

히브리어 '바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쓰여진 말로 '칭찬하다' '복을 빈다'는 뜻

이다.예외는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영적인 축복을 가리킬 때 쓰인다(행3:26,갈

3:8-9,엡1:3).

c. (마카리오스)

'근심없는 평안'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이 복은 신령한 축복을 의미하는데 복음서

와 계시록에 가장 많이 사용되어 있다(마5:3-11, 11:6, 눅11:28, 요20:29, 계1:3,

14:13, 20:6).

* 영적인 복

a.죄 사함을 받는 것(시32:1)

b.영생의 복(시133:3)

c.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평강(시29:11)

d.지경을 넓히는 것과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는 것

e.아름답고,지극한 복(시21:3,6)

2.주께서 복주시는 대상

주의 백성............................시3:8;29:11

의인.................................5:12;잠10: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신115:13

정직하고 선량한 일 행하는 자..............신6:18

3.복받는 시기

천지 창조전............................엡1:3,4

현재...................................마25:34

미래...................................마25:34

아브라함은 어떤 복을 받았다고 본문이 말씀하는가?

①큰 민족을 이루는 복:이스마엘(에짚트 출신 시녀였던 하갈),이삭(리브가),

그두라(다섯아들)---

(성경)계7: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나라와 각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수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나오더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영광스러운 민족,큰 민족을을 이루는 조상이

된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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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이름이 창대케 되는 복: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이 누구의 이름

이겠는가?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이름,존귀한 이름이 누구겠는가? 예수 그

리스도 아닌가?

(성경)빌2: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 발 앞에 굴복하게

하셨다."

마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은 세

상에서 불려졌던 이름 중 가장 위대한 이름을 자손으로 낳음으로 창대한 이

름을 얻었다.예수님의 이름을 빼고 인간 중에는 가장 큰 이름을 얻었다.

③복의 근원이 되는 복:3절 다같이 읽자.

#유산 안물려주기 운동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 중에 돈이 가장 작은 것이다.

돈 보따리 물려주면서 자녀들의 돈 싸움이 훤히 내다보여 두눈을 차마 못감

고 죽는 아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 주는 것 중에 돈이 가장 작은 것인줄 깨닫는 이 시간

되시길 축원한다.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의 약속대로 자기 후손들에게,모든 민족들에게,바로 저

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귀한 복을 물려준 복의 근원이 되었다.

(성경) 갈3:14,"이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아브라함의 복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약속의 성령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

1.우르를 떠나라.

2.하란을 떠나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면...

1.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의 가장 근본은 萬事亨通(만사형통)이다. 아브라함이 갈바를

2. 자손들이 잘 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은 그 자손들이 잘 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3. 항상 즐겁게 살게 된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영혼은 언제나 즐겁다. 천국이 무엇인가? 슬픔과 고통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1.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야

2. 복을 귀한줄 알아야

3. 축복을 사모하여야

------------------------------------------------------------------------------------------

2.주께서 복주시는 대상

주의 백성............................시3:8;29:11

의인.................................5:12;잠10: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신115:13

정직하고 선량한 일 행하는 자..............신6:18

5.복받는 시기

천지 창조전............................엡1:3,4

현재...................................마25:34

미래...................................마25:34

아브라함은 어떤 복을 받았다고 본문이 말씀하는가?

①큰 민족을 이루는 복:이스마엘(에짚트 출신 시녀였던 하갈),이삭(리브가),

그두라(다섯아들)---

(성경)로마서 ,갈라디아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 세상에 이만큼 큰 민

족의 조상이 어디있는가?

(찬송168)"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때에 예수 영광중에 구름 타시

고 천사들을 세계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성경)계7: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나라와 각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수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나오더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영광스러운 민족,큰 민족을을 이루는 조상이

된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한다.

②이름이 창대케 되는 복: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이 누구의 이름

이겠는가?

#어떤 아이들에게 "네 아버지 존함이 무엇이냐?"하면, "김 자 준자 수자이십

니다."---어떤 분은 그것이 너무 버릇이 되어,"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제

이름을 물어보는대도 ,"예,제 이름은 김자 준자 수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이름,존귀한 이름이 누구겠는가? 예수 그

리스도 아닌가?

(성경)빌2: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 발 앞에 굴복하게

하셨다."

마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은 세

상에서 불려졌던 이름 중 가장 위대한 이름을 자손으로 낳음으로 창대한 이

름을 얻었다.예수님의 이름을 빼고 인간 중에는 가장 큰 이름을 얻었다.

③복의 근원이 되는 복:3절 다같이 읽자.

#유산 안물려주기 운동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 중에 돈이 가장 작은 것이다.

돈 보따리 물려주면서 자녀들의 돈 싸움이 훤히 내다보여 두눈을 차마 못감

고 죽는 아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 주는 것 중에 돈이 가장 작은 것인줄 깨닫는 이 시간

되시길 축원한다.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의 약속대로 자기 후손들에게,모든 민족들에게,바로 저

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귀한 복을 물려준 복의 근원이 되었다.

(성경) 갈3:14,"이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아브라함의 복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약속의 성령입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에게 다른 것 못 물려줘도,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업

으로 물려줄 수 있는 부모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그렇게 하면 최고,최상의

부모이다. 돈 몇푼 집 한채 더 물려줄려고 잠 못자고,쉬지도 못하고 아둥바

둥하면서 ,그리스도와 말씀과 교회에 대한 신앙생활은 건성으로 하는 사람들

은 틀림없이 잠시후 후회할 것이다. 아주 크게 후회할 것이다. 자기도 망하

고 자녀도 망하는 길을 지금 가고 있기 때문이다.------ 죽을 때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불러 앉혀 놓고,찬송 부르고 통성 기도하고,말씀을 읽고,한사람씩

머리에 손 얻고 안수하며 축복기도한 다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달

려갈 길을 다 마쳤으니 이제는 우리 주님께서 씌어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러 가노라"---하고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자손들에게 둘려서 주님께로

가시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

1.우르를 떠나라.

우르---아브라함의 고향이다. 바벨론의 해변가에 있었다. 우상의 도시였

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력을 신으로 섬겼다. 태양,달,바람,강등 의 자연력이

인생의 생사화복을 지배하는것으로 여겼다. 또 그들은 性을 신성시 했다. 왜

냐하면 모든 것이 性을 통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전에서의 여사제

들과 남자들과의 성교는 자연스럽게 이뤄졌고,모든 부인 ,처녀와 과부들도

그런 예식에 적어도 한번은 참여해야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환경 속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환경의 좋

고 나쁨을 따지지 않으신다. 우리들을 보아도 그렇다. 대부분이 하나님을 모

르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 풍속을 좇던 가문과 환경에서 불러내셨다. 우리

주변에 더럽고 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교만하게 오물처럼 뒹굴며

사는 영혼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이 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축원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 부르심은 어떤 것이었는까?

①주권적,은혜로 인한 부르심:아브라함이 가장 무력할 때 하나님이 그를 불

러내신다.11:30--,"사래는 잉태치 못함으로 자식이없었더라" 자녀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난처한 입장이었다. 마치 죽은자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큰 민족'의 약속으로 불러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

르심은 이처럼 먼저 찾아오셔서 죽은자 가운데서 불러내시는 은혜와 구원의

부르심이다.

엡2:8,너희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하나님

에 대한 믿음은 먼저 우리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으로

인하여 일어난 나의 긍정적 반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고,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말미암

아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②개인적 부르심: #아무리 어미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식 밥 먹는다고

어미 배가 부르지는 않는다. 어떤 여자 성도님의 은혜로운 간증,6.25 때 얼

마나 배가 고프든지 업고 가던 애기 먹던 주먹밥을 뺏어 먹었단다. "먹어야

젖이 나올 것 아니냐---!"

노아도,에녹도 다 자기의 의로 자기 하나만 구원할 것이다---말씀하신다. 하

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개인적으로 받았는

가? 그러면 우르를 떠나십시오! 완전히 세상의 타락한 풍속과 양심에서 떠나

십시오. 아내의 믿음이 여러분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순장의 열심이 여러분

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자녀의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다.

③희생을 요구하는 부르심:고향을 떠나라.친족을 떠나라.익숙하던 생활과

안정을 보장하던 생업과 터전을 모두 버리라.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부르

심이었다. 그렇게 날 사랑하던 부모에게서 등을 돌려야 하다니,그렇게 날 아

껴주던 친척,동료들을 원수로 삼아야 하다니,그렇게 좋아하던 오락과,술과

취미와 쾌락을 다 버려야 하다니----. 하나님의 부르심은 때로는 직장도 일

터도 내버려야만 하는 때도 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르 부인하

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④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부르심이다:네가 버린

친척보다 더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네가 버린 고향 보다 더 좋은 땅을 네게

주고,고향에서 버린 바된 네 이름을 창대케 해주리라. 별수 없는 오물덩어리

에 불과했던 너를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마.

하나님과의 만남은 사람 팔자를 이렇게 바꾸어 버린다. 더럽고,추하고,쓸

모없는 것들,원래부터 내버려야 할 것들을 내버리게 하시고,전혀 생각지도

못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썩지않을 것들로 대신 주신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줄로 믿

으시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의 우르는 어디인가? 여러분의 우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 앞에 깨끗이 내 버리고 떠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

원한다.

2.하란을 떠나라

아버지 데라와 아브라함과 롯이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내려오다가 머물

게 되는 중간 지점이다.

우르의 서북쪽 960km, 가나안의 동북쪽 640km

하란이란 이름의 뜻이 "교차로"이듯이,장사꾼 대상,군대들이 통과하는 길목.

바벨론,앗시리아,수리아,소아시아,애굽으로 통하는 길목. 이미 잘 개척되었

던 도시.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이곳에 머물러 버린다. 아예 보따리

풀고 주저 앉아 2백5세에 죽을 때까지 하란을 떠나지 못한다. 데라는 먼길을

떠나 오다 지쳤던가 보다. 고향 우르가 너무 그리워졌던가 보다. 고향 우르

와 비슷한 동네 하란에 오자마자 생각이 싹 달라져 버렸다. 가나안으로 향하

던 발을 돌려 하란에다 못박아버렸다. 더 이상 옛 생활의 맛과,그리운 냄새

와 평안한 삶의 즐거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주

어 먹듯이 버렸던 옛생활의 오물들을 다시 삼켜 버렸다.

아브라함과 함께 순례의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데라는 영원히 변치 않았던

이교도였다. 그는 약속의 사람,믿음의 사람이 못되고,여전히 우르의 사람으

로 남아 있었다. 그런 그가 자나가게 된 하란에는 골목골목에서 "과거로 돌

아가라","과거로 돌아가라"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딱 끊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던 아버지가 가끔 술

을 보시거나 티브이 선전 보다가도 눈 빛이 달라지고,꼴깍거리신다. 그 때

다시 시작하셨으면 우리 아버지는 아직 하란에 머물러 계셨을 것이다.

오늘날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다가 하란에 머물러 옛생활로 되돌

아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는 교인들이 없는가? 겉으로는 교인인데,마음은

여전히 육욕이 그득하다. 옛생활의 맛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옛 고향의

즐거움과 능력들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란의 즐거움을 결코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가나안의 즐거움이 얼마나 다르고 좋을지를 미처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나안을 향하여 더 진행하지 못하고 다시 하란에 머물러/

옛고향 우르의 삶을 다시 살고 있는 것이다. 하란은 우르와 멀리떨어진 곳

같으나 역시 우르인 곳이다. 그들이 죽고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힐 것이

다. "000는 70세를 향유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하란에 머물다 죽은 데라는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자기 자녀들도 그곳에

붙잡아 두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믿음으로/ 가나안을 향하여/ 계속 전

진하지 못하고/ 믿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하란에 머물러 있는 부모들은/ 자

녀들을 더 낳은 신앙생활로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열이면 열/ 다/ 자기 자녀

들을 하란의 풍습,하란의 사상,하란의 경계선 안에 붙잡아 둔다. "지금 이대

로도 좋다,지금 이대로도 괜찮은데 뭘 더 나가려고 하느냐---" 여러분과 여

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하란의 속삭임에 속지 않으시기를 축원한다.

행7:4,"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

서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데라가 죽으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데라를 죽여야 한다. 옛날이 더 좋다. 옛날로 돌아

가자. 지금 이대로도 좋다. 여기서 머물러도 되겠다. 하란이나 가나안이나

마찬가지 비슷하지 않겠느냐. 가나안의 복과 즐거움이 하란의 즐거움보다 나

을 것이 무엇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데라이다!

데라의 죽음은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즉시 믿고 순

종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의

증거이다.그는 마침내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에게는 우르라는 고향의 위협,교차로 하란의 위기,영원히 변치

않는 이교도 아버지 데라의 방해가 있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

안에 도착했다.

여러분이 아직 우르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미련없이 그곳을 떠

나시라. 권력의 자리인가? 돈방석의 자리인가? 향내나는 비단 침대 쾌락의

자리인가? 뱀 처럼 미끄럽게 넘어가는 술과 노름의 자리인가? 떠나라! 믿음

과 순종의길을 떠나라.비록 그 길이 어렵고 괴로워도,눈에 보이는 것,손에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떠나라. 그 길만이 가나안으로 나가는 길,복의근원이

되는 길이다.

여러분이 지금 하란에 머물고 있는가? 우르에선 떠난 것이니까 아주 나

쁜 죄인은 아니겠지---? 하란은 우르의 복사판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

닌 곳은 다 우르이다.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손목을 잡은 데라의 손을 떨쳐

버리고 약속의 땅을 향해 힘차게 길을 떠나시라. 가나안의 것들은/ 우르와

하란의 것들처럼/ 눈에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여

/계속 나아가면/여러분을 우르에서,하란에서,데라에게서 불러내신 하나님께

서 마침내 여러분을 약속의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지금은 비록 미약하

지만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루고,창대한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 죄수(경찰에 의해 감옥에 넘겨지는,살인범)와 어린 소녀(부모 손을 잡

고 우연히 그 광경을 보게된 )."나는 아저씨가 너무 불쌍해요--"."예수님도

아저씨를 불쌍히 여기셔요" 도망가 숨었다. "너무 포악한 녀석입니다. 당신

들 매우 고생하실 것입니다.조심하십시오." 그런데 다음날 부터 이 죄수는

전혀 딴 사람이 되 있었다. 법을 잘 지키고,청소를 도맡아하고,친절하고,얼

굴에 환한 웃음이 피기 시작하였다. 조그만 한 소녀의 단 두마디 말때문이었

다.

여러분,부자나 가난한 자나,배운자나 못배운자나,병든자나 건강한자나,어

느 민족 어느 족속 누구에게든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보

혈을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장사한지 삼일만에 부활하여 죽음

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생명의 첫열매가 되신 에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르는 것이 복중의 복이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마다 불행

에서 행복으로,사망에서 생명으로,슬픔에서 기쁨으로,원망하던자가 위로자로

변화되는 줄로 믿는다. 이와 같은 복이 여러분의 것이되고,또 여러분이 그

복을 전하고 물려주는 복의 근원이 되시길 축원한다.

福된 사람이 되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면...

그렇다. 세상에서 얻는 모든 것은 다 이와같은 것이다. 그

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세상의 이와같은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

께서 주시는 복은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섞여 있지 않는 참으로 고귀하고 놀라운

것이기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이 생명만큼이나 이와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것이다. 그럼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구체

적으로 성경의 증거를 찾아 보도록 하자.

1.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의 가장 근본은 萬事亨通(만사형통)이다.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부모형제와 정든 고향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일일이 그 발걸음을 인

도하여 형통케 해 주셨다. 그는 두 번씩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자신

의 생명을 부지하려고 부끄럽게 처신했지만(창세기 장,20장을 참고 하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바로와 아비멜렉 앞에서 두 번씩이나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였다), 하나

님께서는 그 때마다 초자연적인 역사로 바로나 아비멜렉의 손에서 사래를 보호해

주셨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좋은 땅 선택하기를 종용하여 롯이 젖

과 꿀이 흐르는 소돔성을 선택하여 茫然自失(망연자실)하여황량한 들판만 바라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도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너는 눈을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

르리라"(창세기 13:14-15)고 보장해 부셨다. 또한 아브라함이 자식 하나 없이 늙어

가매 하나님께서 기적같은 역사로 이삭을 주시어 그 이삭을 통해 야곱이 나오는 자

손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자의 삶이 어떻

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

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

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같으리라"(예레미야 17:7-8)는 말씀이나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

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3)는 말씀만 보아도, 복 받은 자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게 알수가 있다. 그렇다. 우리 성도는 다 이렇게 하나

님의 복을 받아 형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실로 이것은 상상만 하여도 황홀하지 않

는가? 그러니 이와같은 축복을 한갖 추상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생활 속에 실제적

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보장된 역사인줄 확신하여 끝까지 이와같은 복을 받을 수 있

도록 최선을 다하는 우리 빌립보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2. 자손들이 잘 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은 그 자손들이 잘 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복을 받으니 그의 자손들이 덤으로 복을 받았다. 이삭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 해에 농사하여 백배나 얻었고 마침내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

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창세기 26:12-13참조). 야곱도 복을 받아 아들을 열 둘

씩이나 낳았고, 그 아들들이 다 이스라엘의 열 두지파가 되었다. 이렇듯이 하나님

의 복을 받으면 자손들이 다 잘 되게 되어 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시편 112:1-2)고 성경은 또한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그

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 당대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시냇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처럼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누려야 하겠지만 이처럼 우리들의 사랑하는 후대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하겠다.

3. 항상 즐겁게 살게 된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영혼은 언제나 즐겁다. 천국이 무엇인가? 슬픔과 고통

이 없는영원토록 즐거운 그곳이 천국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여호와의 복을 받은 심

령은 언제나 즐거움을 누리니 그는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

의 축복 그 자체가 즐거움이요 기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손 대접하기

를 너무나도 즐거워 하였고, 그렇게 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큰 복을 받

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만약 자신의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다

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활도 골몰스러운데 어떻게 지나가

는 나그네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

으로 늘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노래하기를, "주

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

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고 노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앞이나 옆이나 다 즐거움이요 기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복을 받는 자는 이

렇게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신명기 16:15에도 이와같은 말씀이 남아 있는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지니라"고. 여호와의 복은 즐거움을 창조케 하는 것

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상실하며 삶에 食傷(식상)한체 살

아가고 있다. 소리 내어 웃어 본적이 언제인지 모른체 그렇게 하루 하루를 겨우 延

命(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말세의 징조를 따라 사랑이 식어져 삭막하기 그

지없고, 자기 욕심에 이끌리어 모두가 자기에게 잘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좌절과 절

망가운데서 분노만이 재산처럼 득세를 하는 그런 현실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그러

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와같은 놀라운, 세상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기쁨을 누리며 보배 같은 웃음을 나누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웃으며 사는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니까 말

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이제 본격적으로 복에 관한 진리를 공부해 보자. 먼저 우리는 어떻게 하여

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거기에는 틀림없이 복을 받는

길이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

자.

1.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야

말씀 서두에서도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복을 보장

해 주셨는데, 그와같은 복을 보장하시기 전에 前提條件(전제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명령을 순종하라"는 명령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풍

성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이는

신,구약성경의 전체 사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하나님의 축복은 있을 수 없

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 이두 가지

를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을 순종하고 아브라함처럼 복을 선택 할 수도 있고(창세기 22장의 이삭을 바치는

순종), 사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분순종하고 저주를 선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순종하는

참신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해 보라. "오

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예레미야 7:23)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

종하는 것과 그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가장 확실히 가르쳐 주

는 성경 진리다. 뿐만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출애굽기

20:6참조). 그리고 이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 같은 변덕쟁이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야고보서 1:17; 신명기 7:9참조). 그러므로 그렇게 "순종하

는 자에게 복을 주시마"고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들의 신앙을 말씀중심으로 변화시키면 틀

림없이 복을 받을 수 있다.

2. 복을 귀한줄 알아야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시기를

원하신다.우리는 언제나이것을 분명하게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못하고 경홀히 여기면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속적인 축복을 받지

못한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

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을까?(마태복음 7:6참조). 여기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

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개와 돼지는 예수님을 저버리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

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귀하게 여기고 사모하여야한다. 하나님의 복을 누구보다

도 많이 받았던 다윗을 보라. 그는 고백하기를,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

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편 16:2)고 하였다. 그러니 그는 세상에 많고 많은 복

이 있지만 하나님이 곧 가장 귀한 복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복을 귀하게

여기는 다윗을 하나님은 이미 귀하게 여기시고 그의 평생을 통하여 복을 허락해 주

셨던 것이다. 그러나 에서를 보라.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뿌리가 되는 장자의 직분

을 그렇게 귀한줄 모르고 내동이 쳤다가 눈물로 뉘우쳤으나 끝내 축복을 받지 못했

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매우 신중히 그리고 명확하게 증거해 주고 있

는데,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구하되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2:16-17)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귀한 것을 귀한줄 모르는자는 서

러운 버림을 받게 되어 있는 법이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사울은 하나님이 내려 주

신 성령을 만홀히 여기고 버렸다가 하나님으로부터 가차없이 버림을 당하는데 참아

눈으로 보기에도, 마음으로 상상하기에도 가련하고 불쌍하기 이를데 없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

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돌아 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

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

으매 찢어진지라"(사무엘상 15:24-27). 이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데 없는 성

경 인물의 최대 비극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말자. 하나

님의 것을 귀한줄 알고 고맙고 감사하게 간직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5병2어로 5

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푸시고 나서 저희가 배부른 후에 그들에게 명령하

시기를,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한복음 6:12)고 하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떠문에 배물리 먹었는데, 그 가치 없는 부스러기

를 버리지 말라고 명령하시는가?그리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능력 많으신 주님께

서 또 만드실 수 있는데 그까짓 부스러기를 왜 버리지 말라고 하시는가? 거기엔 비

록 부스러기일망정 하나님의 축복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이렇게

귀하게 여겨야 끊임없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는 때때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신령한 직분을 시애틀 한인회장 자리보

다도 덜 귀하게여기지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내릴 축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

인생들에게 속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경고하신다.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속으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코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소홀히 하지 말자. 하나님께

서 주신 것이면 지극히 작은 부스러기 하나라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며 사모하는

심정으로 간직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놀라운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

이다.

3. 축복을 사모하여야

하나님의 축복을 귀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늘 그것을 얻지 못해 안타까와

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법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필요로하고 찾아오기를 너무나도 원하신다. 성경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종합해 보면 이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

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여 진홍 같

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18)고 하신 말씀이라든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

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

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이사야 55:1-3)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대변해 준

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그 하나님께서 주실 축복을

사모하여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

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 8:17)고, 간절하게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겠다

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세기 33:26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날이 밝아 오자 천사가 "나로 가게 하라"고 하자,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는 말씀을 말이다. 이것은 얼핏 우리들에게 두 가지의

의미를 제공해 준다. 하나는 '야곱이라는 인물은 참으로 하나님꼐 대하여 뻔뻔스런

인간이다'는 인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을 달라고 간절히 매달

리면 하나님은 결국 뿌리치지 못하시고 복을 주시는구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

체적인 본문의 해석은 바로 후자이다. 야곱은 그렇게도 축복을 사모하였다. 만약

이 자리에서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따내지 못하면, 날이 새고나면 그는 형 에서로

부터 영원히 보복을 면하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

신과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모습은(13-23까지를 참조하라), 차마 눈물

겨울 정도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하나님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는 이 말은 오늘날 우리들이 나름대로 먹고 살면서 '하나님께

서 복을 주시면 더욱 생활이 윤택해지고 여유 있게 되겠으나 주시지 않으셔도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우리들의 현실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그런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우리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축복을 바로 이와같은 야

곱의 심정으로 사모해야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의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가시더라도 진정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생명을 건

기도와 간절함이 우리 속에서 우러 나와야 되겠다는 말씀이다. 진실로 우리의 영적

인 투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환도

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실 복만 있다면 나는 매달리겠다는 決

死(결사)의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다. 슬프고 힘든 세상에서 우리가 과연 사모하고

누려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차라리 바라는 소망마져도 망각한체 살고 있지는 않

는지? 신앙 없는 세상을 바라보면 측은하고 불쌍하기 그지가 없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열심히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

고 있지 않거나 귀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결코 살아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시지 않았

던가?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바라고 기대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우

리는 자칭 잘 났고 잘 산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비참하다. 그러

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지 말고 가슴을 활짝 열고 하나님

께 나아 가자. 그리고 정말로 간절히 그분의 말씀을 경청 하자. 말씀이 없는 영혼

은 이미 죽은 영이다. 그러므로 죽은 영에는 하나님의 고귀한 축복이 담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들의 영혼도 하나님의 축

복을 사모하여 쇠약하여져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모하는 영은 만족케 하시니

까 말이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축복을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가져야한다. 만약에 은행이 우리들의 재산을 귀하게 여기고 잘

보관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재산을 갖다 맡기겠는가? 어림도 없을 것이다. 우리 연

약한 인생도 내것을 귀하게 여겨야 갖다 맡길줄 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얼마

나 더 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축복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

렇게 하여 복을받게 되면 우리는 이제 엄청난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기쁨이 우리들의 것이 될 것이고, 우리들의 자손들이 땅에서 강성할 것이며, 마침

내 우리들의 모든 삶이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황홀한 결실인

가? 우리 빌립보의 모든 가족들이 바로 이와같이되기를 충심으로 축원하는 바이

다.

신자의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잘못된 복의 개념

성경이 가르치는 복 관념을 살피기 전에 우리의 복관념을 알아야 볼 필요가 있다.

한국민의 복관념은 곧 우리의 속에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속적 현세적 복관념은 중국의 복관념에서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고래로 5복

을 말할 때 훌륭한 아내를 맞는 것 부유해지는 것 평안을 누리는 삶 덕을

쌓는 일 죽을 때 뜻을 이루는 일 등을 말해왔다.복(福)자의 글자풀이를 하는 사람

가운데,'옷 衣'字 옆에 '입 口'字,그리고 '밭 田'字,맨 위에 '한 一'字로서 한 인생

의 행복이란 겨우 옷 한벌입고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전답이나 있으며 하는 지극히

소박하며 현시적인 것이라 하는 이도 있다.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神觀은 창조주로서

의 하나님이나,윤리적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다.막연한 인간 운명의 대명사로

서 인간에게 화와 복을 내리시는 '보이지 않는 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빈다'는 표현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비는 기도가 아

니라,자기의 유익만을 비는 자기 중심적인 기도이다.불교나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와서 처음부터 샤만이즘과 동화되질 아니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동화되었

듯이 기독교도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차원의 구원 개념보다 현실적 구복사상(求福

思想)으로 기울어져 왔다.이러한 한국인의 신앙적 의식구조 속에 깔린 샤만이즘의

암반이 순수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기복적(祈福的)신앙이 일반화됨에 따라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성경 강해보

다는 돈벌고 병낫고 축복받았다는 신비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체험 간증이 더 환영을

받게 된다.그러나 돈벌고 병낫고 잘되는 현실적 축복은 아무에게나 고루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땅을 정복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창1:28,살후3:10).

성경적 축복 개념

1.어원적 의미

a. (바락)

원래의 뜻은 '무릎을 꿇다'는 뜻으로 낮은 자가 높은 자를 경배하고 찬양할 때(시

72:15)에 쓰였다.또 축복을 빌 때(대상4:10)나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하여 찬양할

때(시145:1-2,대상29:10,느9:5) 쓰이기도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축복

하실 때(창1:28,9:1,12:2,22:16-18)에 쓰이고 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실 때는 영적이며 물질적이며 동시에 후손이 받을 먼 훗날의 축복까지

포함했다.

b. (유로게오)

히브리어 '바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쓰여진 말로 '칭찬하다' '복을 빈다'는 뜻

이다.예외는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영적인 축복을 가리킬 때 쓰인다(행3:26,갈

3:8-9,엡1:3).

c. (마카리오스)

'근심없는 평안'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이 복은 신령한 축복을 의미하는데 복음서

와 계시록에 가장 많이 사용되어 있다(마5:3-11, 11:6, 눅11:28, 요20:29, 계1:3,

14:13, 20:6).

2.성경에 나타난 축복문들

a.구약성경의 축복문들

구약성서에서 축복문들은 거의 시편기자들과 지혜문학가들의 저작 속에서만 나타

난다.이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양식을 사용하였다.이들 축복문들

은 의로운 사람,악행을 멀리하는 사람,안식일을 욕되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포

되고 있다.즉,이러한 사람은 평화,재산,가정생활의 만족,성전과 예배의 기쁨,새로운

힘의 획득 등의 지상적 보상들을 안심하고 기대할 수 있다(시41:1,65:4,84:5,128:1,

잠8:32,사32:20).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사유되었던 것이 아니라

지상적 삶을 영위하는 동안 실현될 수 있는 하나의 해택으로 간주되었다.

구약 서두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복으로 시작하여,이 자손

번영의 축복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자손을 가질 것을 예언한 것

으로 구체화되었다.이 자녀번창은 동시에 사업번창을 수반한 것으로 축복이 나타난

다.구약의 성도들은 밭의 농사,들의 짐승들이 많은 생산을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깨달았다.후에 축복은 적을 무찌르게 하심에서 나타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구약에 전반적으로 나타난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엮어져 간다.

b.신약성경의 축복문들

구약의 축복문들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내용상 신약성경의 축복문들은 한가지 중

요한 점에서 구약성서의 축복문들과 다르다.신약성서의 축복문들은 이 지상적 삶에

대한 보상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종말적 기쁨을 더 강조하였다.현

재에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즉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가난한 사람들,재난

을 당한 자들 등)은 복되다고 선언되었다.이들 개인들은 심판날에 정죄됨을 면할 것

이다.왜냐하면 ,그들은 심판날의 도래를 위하여 깨어있음으로써 (마24:46,눅

12:37-38,계16:15),적대의 감정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들음으로써(마11:6),믿

음의 눈으로 메시야의 도래의 표적들을 봄으로써(눅1:45,10:23,요20:29) 그들의 새

롭게 발견된 믿음을 구체적 행위로 표현함으로써(마24:46,약1:12,25,계14:13,22:7)

스스로를 예비했기 때문이다.

신약의 축복문은 마5:3-11,눅6:20-26,요20:26-29,갈3:1-9등을 참조하라.

* 영적인 복

a.죄 사함을 받는 것(시32:1)

b.영생의 복(시133:3)

c.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평강(시29:11)

d.지경을 넓히는 것과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