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역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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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유다 왕국(BC 931-586) 바벨론 느부갓네살

1. 르호보암(왕상 14장 / 대하 11-12장)

유다의 첫 번째 왕인 르호보암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남유다의 초대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던 기간은 고직 3년뿐이었습니다(대하 11:17)
3년이 지나고 나라가 견고해지고 튼튼해지자 르호보암은 여호와의 율법을 저버립니다(역대하 12 :1)
르호보암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던 해, 예루살렘은 애굽 왕 시삭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왕상 14: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유다가 행한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시삭의 손에 넘겼다고 말씀합니다(대하 12:5)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과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를 빼앗겨(대하 12:9), 놋 방패로만 궁문을 지킵니다(대하 12:10)
르호보암은 그렇게 17년 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대하 12:13)

2. 아비얌(아비야)(왕상15장 / 대하 13장)

유다의 두 번째 왕인 아비야라고도 불리는 아비얌입니다.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고, 총 3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비얌 역시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 르호보암의 모든 죄를 그대로 행합니다(왕상 15:3).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전쟁만 하다가(왕상 15:6)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3. 아사(왕상 15장 / 대하 14-16장)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입니다.
아비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고, 총 4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했고, 여러 종교 개혁들을 단행합니다(왕상 15:11)
먼저 남자 창기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 버립니다(왕상 15:12)
그리고 우상을 섬기던 할머니 마아가도 과감히 쫓아냅니다(왕상 15:13)
또 오뎃의 아들 아사랴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대하 15:1) 우상 제거와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박차를 가합니다(대하 15:8)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아사였지만 북이스라엘 바아사와의 전쟁 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아람 나라를 의지합니다.
이를 꾸짖는 예언자 하나니의 말에 몹시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대하 16:10)
아사 왕은 통치 말년에 발에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4. 여호사밧(왕상 22장 / 대하 17-20장)

유다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입니다. 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고, 2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를 따라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는데요.(대하 17:4) 여호사밧 왕 때 남유다는 굉장한 부와 영광을 떨치게 됩니다.(대하 17:5) 여호사밧 역대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아버지 아사 왕의 개혁 후에도 남아있던 남자 창기들을 모두 쫓아내고(왕상 22:46), 재위 3년 차에 신하들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뽑아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합니다.(대하 17:9) 유다는 점점 더 강성해져 갔고(대하 17:10), 북이스라엘의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동맹을 맺게 됩니다.(대하 18:1) 하지만 그것이 여호사밧의 발목을 잡게 되었고, 하나니의 아들 예언자 예후를 통해 따끔한 질책을 받게 되죠.(대하 19:2) 여호사밧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2차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유다 곳곳을 직접 다니며 백성들을 살피고 재판관을 세우며,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얼마 후,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남유다를 공격 했고, 이에 여호사밧은 유다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대하 20:5-6) 결과는 유다의 대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호사밧도 산당을 철거하지 않아서 온전한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대하 20:33)

5. 여호람(왕하8장/대하 21장)

유다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입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고, 8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람은 왕권을 잡은 후, 형제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는데요.(역대하 21:4)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해 아합의 길을 따릅니다.(대하 21:6)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람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대하 21:15) 그리고 말씀 그대로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됩니다.(대하 21:19)

6 .아하시야(왕하8-9장/대하 22장)

유다의 여섯 번째 왕인 아하시야입니다. 여호람의 뒤를 이어 막내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고, 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하시야 역시 아버지 여호람을 따라 아합의 집의 길을 따르죠.(대하 22:3) 아하시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요람과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예후와의 싸움에 휘말려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2:9)

7. 아달랴(왕하 11장/대하 22-23장)

유다의 일곱 번째 왕인 아달랴입니다. 아하시야의 죽음 뒤,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유다의 왕족을 죽이기 시작합니다.(대하 22:10)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빼내었고, 그렇게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왕하 11:2) 아달랴가 남유다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작전을 벌입니다. 작전은 성공했고,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렇게 아달랴의 6년 간의 통치가 끝나게 됩니다.

8.요아스(왕하 12장/대하 24장)

유다의 여덟 번째 왕인 요아스입니다. 할머니 아달랴의 죽음 뒤에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아스는 아달랴 시대에 방치되었던 성전을 보수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등 선한 왕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왕위에 오르게 한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돌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된 건데요. 이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 무섭게 경고하시지만, 요아스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얼만 지나지 않아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고,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요아스는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9.아마샤(왕하 14장/대하 25장)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인 아마샤입니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아마샤을 왕권을 잡은 후, 아버지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먼저 처형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와 섬기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에 크게 패배한 후에, 아마샤는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0.아사랴(웃시야)(왕하 15장 / 대하 26장)

유다의 열 번째 왕인 웃시야라고도 불리는 아사랴입니다. 아마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52년간 다스립니다. 아사랴는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성을 튼튼히 하는 등 힘을 키워갔는데요. 유다의 힘이 커지는 만큼 아사랴의 교만도 커져갔고, 어느 날 제사장에게만 허용된 향을 피우는 일이 자신이 직접 행하려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만류에도 향을 피우려던 아사랴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게 되었고, 죽을 때까지 격리되어 별궁에서 지내게 됩니다.

11.요담 (왕하 15장 / 대하 27장)

유다의 열한 번째 왕인 요담입니다. 아사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 동안 다스립니다. 요담은 성전을 증축하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에도 겸손을 잃지 않은 요담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시죠. 요담은 그렇게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12.아하스(왕하 16장/ 대하 28장)

유다의 열두 번째 왕인 아하스입니다. 요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간 다스립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데요. 바알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심지어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벌이죠. 그는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하죠. 급기야 앗시리아의 다메섹 제단을 그대로 유다로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물러간 뒤 에돔 사람이 다시 유다를 공격 해 왔고,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하스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과 다메섹 신들을 의지합니다. 마침내 아하스는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부수고 성전 문을 닫기까지 합니다. 또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을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을 쉽게 그리고 단숨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보세요.

13. 히스기야(왕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유다의 열세 번째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 왕이었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길을 따른 건데요. 히스기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먼저 아버지 아하스가 닫아 놓았던 성전의 문을 열고 수리하는 성전 정화 운동을 벌였고,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멈춰있던 제사와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또 유다 온 땅에 펴진 우상과 산당 등을 제거하고, 유명무실했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제 역할을 하도록 도왔죠. 성경은 히스기야를 유다 모든 왕들 중에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한 왕은 없었다고 평가하는데요. 그런 히스기에게도 어려움은 찾아왔습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다스린 지 육 년째 되던 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유다를 침공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쳐 주십니다. 그 무렵 히스기야는 병에 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요. 이때 히스기야는 벽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역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한 히스기야였지만, 병문안 차 방문했던 바벨론 왕의 사절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교만의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교만했던 히스기야에게 네 자손들이 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죠. 히스기야는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됩니다.

14. 므낫세(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네 번째 왕인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고, 5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길이 아닌, 할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따랐는데요. 심지어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우상의 제단을 쌓고, 손수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성전에 세우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일으키셔서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시죠. 포로가 된 므낫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므낫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 므낫세는 우상과 이방신들의 제단을 헐고,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보수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는 웃사의 동산에 장사됩니다.

15. 아몬(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다섯 번째 왕인 아몬입니다. 므낫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고, 2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몬은 아버지 므낫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신하들에 의해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6. 요시야(왕하 22-23장, 역대하 34-35장)

유다의 열여섯 번째 왕인 요시야입니다. 아몬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유다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킨 신하들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위에 올라 3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르는데요. 성전 수리를 지시했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옷을 찢었고, 백성들에게도 언약책의 말씀을 읽어 주며 다시 여호와의 언약을 세울 것을 백성들과 함께 맹세하죠. 이러한 맹세는 우상과 산당의 제거 그리고 유월절의 부활로 이어졌는데요. 이후 애굽과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요시야의 죽음에 유다의 백성들은 슬퍼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7. 여호아하스(왕하 23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일곱 번째 왕인 여호아하스입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고, 3개월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애굽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18. 여호야김(엘리야김)(왕하 23-24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여덟 번째 왕인 여호야김입니다.
동생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엘리야김)이 왕이 되고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에 의해 왕이 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19. 여호야긴(고니야, 여고냐) (왕하 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열아홉 번째 왕인 여호야긴입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석 달 열흘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바벨론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같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때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과 그릇들도 빼앗기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37년 간 포로생활을 하던 여호야긴은 후에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다스릴 때, 감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에윌므로닥 왕의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20. 시드기야(맛다니야)(왕하 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스무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세워진 왕입니다.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리는데, 역시나 돌이킬 줄 모르고 여호와 앞에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지만,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결국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BC 931-722) - 앗수르 살만에셀

1. 여로보암  :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12개의 지파 중 무려 10개의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아닌, 여로보암을 지지했으니 그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 인기를 잘 유지했습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하여 강제 노역과 세금을 경감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인기를 유지했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우상과 제사장과 절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지 이십이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상 14:20)

여로보암 ―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1대 왕

인적 사항

    (1) 여로보암은 '백성을 더하게 하소서'라는 뜻.
    (2) 에브라임 지파 출신(왕상11:25).
    (3)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22년간 통치(왕상12:2;14:20).
    (4)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모친은 수루아(왕상 11:26).
    (5) 고향은 세겜의 서쪽 사마리아 스레다임(왕상 11:26).
    (6) 아들로는 아비야나답이 있음.

시대적 배경

    여로보암 당시 이스라엘은 대변혁을 겪었다.
    즉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됨으로써(B.C.930) 남왕국은 남왕국 대로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정비를 막 서두르게 되었고, 북왕국은 북왕국대로 정치적, 종교적 정비를 서두르던 때였다.
    또한 이런 국내적 대격변과 함께 국외적으로도 솔로몬 말기부터 서서히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던 주변 국가들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상당히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던 때였다.
    그러나 솔로몬 때까지 탄탄했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남북 왕국 분열 직후인 이 당시에는 아직 외적의 침입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남북 왕국간의 적대 감정이 매우 높아 잦은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여로보암은 새롭게 북왕국을 창건한 자로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으나 종교적으로는 악한 선례를 만듦으로써 북왕국 멸망의 근본 원인을 재공하고 말았다.

주요 생애

    출생

    요셉 족속의 노역을 감독

    왕상 11:28

    자신의 왕됨을 예언 받음

    왕상 11:30-32

    솔로몬에게 반역함

    B.C.938 년

    왕상 11:26

    애굽으로 도피

    "

    왕상 11:40

    북쪽 열 지파의 요청으로 애굽에서 나옴

    왕상 12:1-3

    르호보암에게 노역 완화를 요구

    왕상 12:4-15

    북쪽 열 지파의 왕으로 추대됨

    B.C.930 년

    왕상 12:20

    세겜과 브누엘을 요새화함

    왕상 12:25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움

    왕상 12:27-30

    레위인의 제사장직을 폐함

    왕상12:31;대하11:14

    장막절의 날짜 변경

    왕상 12:32

    벧엘 제단 훼파 예언 들음

    왕상 13:1-10

    아히야에게서 재앙이 예언됨

    왕상 14:7-10

    르호보암과의 전쟁을 계속함

    왕상 14:30

    애굽 왕 시삭의 침입을 받음

    왕상 14:25

    유다 왕 아비얌과의 전쟁에서 패함

    B.C.913 년

    대하 13:1-20

    죽음

    B.C.910 년

    대하 13:20


성품

    (1) 솔로몬 왕의 인정을 받아 공사의 감독자로 발탁될 만큼 부지런하고 유능한 자(왕상11:28).

    (2) 이스라엘 분단에 대한 아히야의 예언을 듣고 곧 반란을 일으킬 만큼 정치적 야욕이 강한 자(왕상 11:26-32).

    (3) 애굽 망명 후 유다 지파와 솔로몬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목을 충동질하여 정권에 도전할 만큼 계략이 뛰어난 자(왕상12:2-4).

    (4) 이스라엘 열 지파의 추대를 받고, 북왕국의 초대 왕이 된 것을 볼 때 정치·군사적 지도력이 뛰어난 자(왕상12:1-3, 20).

    (5) 왕이 된 후 성막을 가진 유다로부터 종교적으로도 독립하는 동시에 왕권도 강화하기 위하여 북쪽 지역에 많은 산당과 우상을 만들만큼 대담한 인본주의 자(왕상 12:27, 31).

    (6) 하나님의 책망조차 무시할 정도로 교만한 자(왕상 13:1-10).

구속사적 지위

    (1)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후 북왕국의 초대 왕이 됨(왕상 12:20).

    (2) 왕권 강화를 위해 벧엘과 단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게 한 왕(왕상 12: 28).

    (3) 여로보암과 그 집을 향한 하나님의 재앙이 선포됨. 이는 세상적 정욕만을 추구하는 자에게 임할 심판의 표징이 됨(왕상 14:7-16).


주요 업적

      (1) 솔로몬의 '밀로' 건축과 예루살렘 성벽 수축 공사를 감독함(왕상 9:15).
      (2) 세겜과 브누엘을 건축하여 군사적인 요새를 강화함(왕상 12:25).


실수

    (1)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강요함(왕상 12:27-29).

    (2)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음(왕상 12:31;13:33).

    (3) 후세들에게 악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결국 북왕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함(왕상 14:10).

평가 및 교훈

    (1)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왕상12:28,29)고 하며 이를 경배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 채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곧 우상 숭배와 동일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완악한 마음이나 자신의 이해 관계가 앞서지 않도록 하며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그 분을 섬겨야 한다.

    (2) 여로보암은 일찍이 솔로몬 왕의 인정을 받아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할 만큼, 또한 북쪽 10지파의 추대로 왕이 될 만큼 부지런하고 유능한 자였다(왕상 11:28;12:20).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지도자요 존경을 받던 그였지만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 없이는 인간의 지혜와 칭찬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도 버림받게 됨을 기억해야 하겠다. 참으로 일이 형통할 때에 더욱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자.

    (3)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왕권에 대적하여 북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그는 후세들에게 이스라엘의 분열이라는 좋지 않은 전통을 남겼고, 더더욱 우상 숭배를 조장함으로써 백성들의 신앙을 변절시켰다. 혹시 우리도 여로보암 처럼 그릇된 신앙의 모습을 신앙의 후배들에게 남기고 있지는 않는가?

핵심 성구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왕상 11:31).


2. 나답 :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반복했고, 불과 2년 만에 바아사 장군의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왕상 15:28)

나답
「고상하다, 관대하다, 고귀하다」

여로보암 I세의 아들이다. BC 910년 경 왕위에 올라 아비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을행하였다. 유다 왕 아사 제 3년에 바아사에게 학살 당하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은 여로보암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형벌이었다. 나답의 재위는 겨우 2년이었다(왕상 14:10,11,20,15:2531).나답(재위 기원전 909년경-908년경)은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2대 왕으로 아버지 여로보암 1세처럼 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

나답은 아버지 여로보암 1세가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고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짓도 많이 했다. 이에 이사카르 집안 출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켜 필리시테인에 속해있던 기브톤에서 나답을 공격했다. 결국 나답은 바아사에게 살해당하고 바아사가 왕위에 올랐다.

바아사는 임금이 되자 여로보암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몰살해 전 여로보암 1세 때 베텔의 늙은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1. 나답의 출생과 초기 생애

출생과 배경
:

  • 나답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왕기상 14:20)
  • 그는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생애와 초기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여로보암의 영향:

  • 나답은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에서 자라며 왕위 계승자로 준비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적 개혁과 금송아지 숭배는 나답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 여로보암의 죄악된 길을 따라간 나답의 통치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와 불순종으로 점철되었습니다.

2. 나답의 즉위와 통치 (열왕기상 15장)

즉위와 초기 통치:

  • 나답은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왕위에 올랐으며, 북이스라엘 왕국의 두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5:25)
  • 그는 아버지의 죄악된 길을 그대로 따르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군사적 활동:

  • 나답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 그는 군대를 이끌고 블레셋의 성읍 깁브돈을 포위했습니다. (열왕기상 15:27)

3. 나답의 암살과 바아사의 반란 (열왕기상 15장)

바아사의 반란:

  • 나답이 블레셋의 깁브돈을 포위하고 있을 때, 이사갈 지파 출신의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상 15:27)
  • 바아사는 나답을 암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나답을 제거했습니다.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

  • 나답의 암살 이후,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모든 후손을 제거했습니다. 이는 여로보암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5:29-30)
  • 여로보암의 가문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그의 죄악된 통치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4. 나답의 종교적 행보 (열왕기상 15장)

우상 숭배와 죄악:

  • 나답은 그의 아버지 여로보암이 시작한 죄악된 길을 따랐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를 지속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5:26)
  • 그는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조장하며, 영적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

  • 나답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불순종과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통치는 짧았고,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 :
나답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죄악된 행보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불순종은 백성들에게 영적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 :
나답의 죽음과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며,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6. 결론
나답의 생애와 통치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짧은 통치와 죄악된 행보는 우리에게 불순종의 결과와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나답의 통치와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토론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비극의 서막 (바아사, 엘라) 

3.  바아사 :

나답을 죽이고 왕에 오르게 된 바아는 24년 동안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그가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반복했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왕상 15:34)

4.  엘라 :

바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는데요. 공교롭게도 바아사가 죽였던 나답과 같이 재위 2년 만에 시므리의 반란으로 죽게 됩니다. 

시므리가 들어가서 그를 쳐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이라(왕상 16:10)

7일 천하 (시므리) 

5. 시므리 :

시므리는 바아사의 온 집안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이고 왕위에 오릅니다.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여호와의 말씀 같이 되었으니(왕상 16:12)

그러나 전장에 나가 있던 백성들은 시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군대 지휘관이었던 오므리를 왕으로 삼고 궁전으로 쳐들어갑니다. 시므리는 성읍이 함락된 것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 왕궁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왕 위에 오른 지 불과 7일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시므리가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었으니(왕상 16:18)

이렇게 시므리의 7일 천하는 끝이 납니다. 

오므리 왕조의 시작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 

6. 오므리 :

오므리의 등장으로 혼란했던 북이스라엘은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므리는 나라의 법을 새로 세우고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는 “천도”를 실시하면서 많은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한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평가는 어땠을까요?

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왕상 16:25)

오므리는 그렇게 1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7. 아합 :

아버지 오므리에 이어 왕이 된 아합은 그 이름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
아합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천을 건축하는 끔찍한 악행을 저지릅니다.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왕상 16:32)

아합과 싸움을 벌였던 엘리야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예언자를 정리할 때 다루겠습니다.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적이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됩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왕상 22:34) 

8. 아하시야 :

지난 왕조들은 2대를 채 넘지 못했지만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면서 오므리 왕조는 3대째 왕위를 이어갑니다.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2년 만에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죽게 됩니다.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왕하 1:17) 

9. 요람(여호람) :

아하시야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동생 요람(여호람)이 왕위에 오릅니다.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왕하 1:17) 

요람은 오므리 왕조의 4번째 왕으로 1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북이스라엘 전체 200여 년의 역사 중에 4분의 1에 해당하는 48년이라는 기간 동안 오므리 왕조가 다스립니다.
더 놀라운 건 열왕기서 전체 분량 중에 삼 분의 일이 오므리 왕조의 이야기입니다.(왕상 16 - 왕하 12장)
그야말로 오므리 천하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북이스라엘의 9번째 왕까지 살펴봤습니다.
첫 번째 왕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 나답.
나답을 죽이고 새로운 왕권을 창출한 “바아사” 장군.
그러나 바아사 왕조는 그의 아들 엘라에 이르러 시므리에 의해 무너지게 되죠.
시므리는 바아사의 온 집안사람들을 다 죽이며 왕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7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오므리는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힘입어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요람에 이르기까지 48년 동안 위세를 떨칩니다.

북이스라엘 전체 역사 중에서 유례없는 전성기를 구가했던 오므리 왕조.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죠.
모든 왕들보다 더욱 악한 왕이라는 혹평을 받습니다.

예후 왕조의 시작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 

10.  예후 :

아합의 군대 장관이었던 그는 요람 왕을 죽이며 영원할 줄 알았던 오므리 왕조의 시대를 닫고, 예후 왕조의 시대를 엽니다.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그동안 쌓여 왔던 오므리 왕조의 악행을 철저하게 심판하시는데요.
오므리 왕조와 관련된 모든 이들과 특히 그들이 지극히 섬겼던 바알, 바알 숭배자들을 잔인할 정도로 처단합니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왕하 10:28)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오므리 왕조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이렇게 타락한 오므리 왕조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된 예후였지만, 그도 타락에서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31) 

예후는 28년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11. 여호아하스 :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의 재임 기간은 17년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랐던 여호아하스는 아람 나라의 공격을 받을 때는 잠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듯했지만,
상황이 다시 좋아지자 여지없이 하나님이 아닌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습니다. 

12. 요아스 :

여호아하스의 아들인 요아스가 왕위에 오르는데요. 재임 기간은 16년입니다.
요아스 때에 기억할만한 특별한 사건이 하나가 있는데요.
엘리사 선지자의 죽음입니다.
요아스 역시 여로보암 죄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13. 여로보암 2세 :

다음으로 요아스의 아들인 여로보암 2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이름이 같아서 2세로 구분한건데요.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장기 집권으로 유명하죠.
무려 41년간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만큼 백성과 신하들의 신뢰도 컸다는 이야기겠죠.
눈엣 가시와도 같았던 아람 나라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윗과 솔로몬 때로 회복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죠.
실제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요나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7)

막연한 기대는 아니었습니다.
적군이 없어지고, 영토가 회복되고, 안정을 찾아가는 나라의 모습은 분명 매우 긍정적인 신호였죠.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아모스 선지자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모스서 5장 10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보시죠. 

10-12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 진실은 인기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적나라하게 드러난 진실이 여기 있다. 너희는 가난한 이들을 악랄하게 짓밟고 그들에게서 빵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결코 너희가 건축한 화려한 집에 들어가 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결코 너희가 재배한 값비싼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희 위법이 어느 정도인지, 너희 죄가 얼마나 중대한지 정확히 알고 있다. 참으로 섬뜩하다! 너희는 의롭게 사는 이들을 괴롭히고 이리저리 뇌물을 받아 가며 가난한 이들을 바닥에 내친다. (메시지 성경) 

여로보암 2세를 향한 요나와 아모스의 상반된 평가!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회개를 외쳐야하는 절박한 순간에 희망을 노래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14.  스가랴 :

무려 41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던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위에 오릅니다.
스가랴는 아버지와는 달리 6개월 만에 살룸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예후 왕조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죽이고, 또 죽이고 

102년간을 집권했던 예후 왕조의 몰락 이후 북이스라엘은 대혼란기에 접어 듭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다섯 명의 왕들 중에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반역을 통해 왕의 자리를 빼앗거든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오직 권력에 눈이 멀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15. 살룸 :

예후의 후손인 스가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살룸은 7일 천하 시므리 다음으로 짧은 한 달간 왕으로 있다가 므나헴의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16. 므나헴 :

므나헴은 얼마나 잔인했던지, 왕이 된 후 자신을 선뜻 환영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주변 모든 임산부의 배를 갈랐습니다.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왕하 15:16)

또 그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고, 10년 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17. 브가히야 :

므나헴의 잔혹함 때문에 미처 반역할 생각을 하지 못해서였을까요?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 위에 오릅니다. 이렇게 므나헴 왕조가 시작되나 했지만 2년 만에 장관인 베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18. 베가 :

베가의 재임 기간은 20년입니다. 꽤 긴 시간동안 나라를 다스렸지만 성경에는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다.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는 기록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기록하실까요? 반역으로 왕위에 올랐던 베가는 역시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9. 호세아 :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호세아 왕입니다.
왕위에 오른 지 9년 만인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오므리 왕조의 시대를 닫고, 예후 왕조의 시대를 연 예후, 그리고 이어지는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까지.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예후 왕조도 살룸의 반역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는대요.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된 잔혹했던 므나헴, 므나헴이 무서웠던 걸까요?
반역 없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 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2년 만에 부하였던 베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베가는 20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시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도 역시 호세아가 일으킨 반역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왕 위에 오른 지 9년 만인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열왕기하 17:34

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당대에 최고라고 불리던 왕들이 여지없이 무너진 이유가 뭘까요?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이전 풍속대로, 옛 습관과 본성을 버리지 못했기 아니,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 보이지면 결국엔 자신의 욕심과 쾌락과 안위를 위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마치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자기만의 산물로 여겼던 것이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내가 누리는 것들이 나만이 가져야 하는 산물로 여기시나요?
아니면, 모두와 나눠야 할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시나요? 어리석은 왕들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7:35-39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명령하셨다. “다른 신들을 높이지 마라. 그들을 예배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지 말며, 그들에게 제사 지내지 마라. 하나님 곧 큰 능력으로 너희를 친히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여라. 그분을 공경하고 경외하여라. 그분을 예배하여라. 그분께 제사를 드려라. 오직 그분께만!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분이 가르치신 것, 너희를 위해 기록해 두신 모든 것을 너희가 사는 날 동안 행하여라. 너희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신들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너희와 맺으신 언약에서 너희가 지켜야 할 것을 잊지 마라. 다른 신들을 예배하지 마라!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여라. 너희를 원수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이는 바로 그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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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Text) & 컨텍스트(Context)



텍스트(Text) & 컨텍스트(Context)


성경 해석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

성경 해석에서 문자적 접근을 넘어 상황적 해석이 필요한 이유

성경 해석은 단순히 문자(텍스트) 그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록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컨텍스트)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더 깊이 깨닫고, 그것이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과정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참여와 역사적 책임이 성경 해석과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성경이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작용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본 글에서는 문자적 해석의 한계와 상황적 해석의 필요성을 신학적, 역사적, 실천적 측면에서 탐구하며, 성경 해석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논의하겠습니다.


문자적 해석의 한계와 성경의 상황적 이해

1. 성경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기록하신 계시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문자 그대로만 해석할 경우, 원래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시대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을 할 위험이 있습니다.

  •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언급된 정결법과 제사 규례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종교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지만,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히 10:1-14).
  • 바울 서신에서도 여성의 역할(딤전 2:12)이나 노예제도(엡 6:5-9)에 대한 언급을 오늘날의 사회 구조와 동일하게 적용할 경우, 본래의 의도를 벗어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2. 문자적 해석이 성경의 본래 메시지를 제한할 수 있음

문자적 해석은 본문에 기록된 단어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지만, 이것이 성경의 깊은 의미를 모두 담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 대라"라고 하신 말씀을 단순한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기독교인의 윤리적 원칙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 성경은 시적, 비유적, 예언적, 교훈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각각의 문학적 장르에 따라 해석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많은 신학적 오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해석과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1. 성경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한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의 영적 성장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공동체적 메시지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은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기독교인은 세상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 선지자들은 당시 사회의 부정의와 불의를 비판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했습니다(암 5:24, 미 6:8).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을 넘어, 가난한 자를 돌보고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키는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하셨습니다(눅 4:18-19).

2.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임과 성경 해석

기독교인은 성경을 단순히 영적인 가르침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천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사회 정의, 평등, 인권 등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돌아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 19세기 노예제 폐지 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사회적 정의의 원리로 해석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사회 변혁의 원동력으로 삼아 인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오늘날에도 환경 문제, 난민 문제, 경제적 불평등 등의 이슈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경 해석과 실천적 적용

1.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성경 해석

성경은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해석될 때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며, 그것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 초대 교회에서는 성경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그 가르침을 함께 실천하였습니다(행 2:42-47).
 * 신학적으로도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성경 해석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하며, 신자들이 교회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성경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2.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삶에 적용하기

성경을 해석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성경에서 정의를 강조하는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될 수 있습니다.
 * 이웃 사랑의 원칙은 난민,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돕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교회는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성경 해석은 단순히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말씀이 기록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이는 기독교인의 사회적 참여와 역사적 책임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며, 정의와 사랑을 이루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성경 해석이 단순한 신학적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삶으로 이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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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와 Context

hermeneutics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대상이 있다면 Text, 즉 본문입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없다면, 성경해석이라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성경해석의 출발점이며 또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출발점과 도착점을 가진) 성경해석이지만, 그 여정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의 수들이 매우 많습니다. 다시말해 해석의 결과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해석들은 다양한 이해를 넘어서, 상이한 결과들까지도 야기합니다. 동일한 본문에 대한 너무도 다른 해석과 주장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성경해석의 시작과 끝은 성경텍스트이겠지만, 그 여정의 완성은 Context, 즉 문맥과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맥과 배경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고대근동의 이해가 그렇습니다. 성경이 집필되던 시기의 시대상과 또 당시에 통용되던 문학적/문화적/지리적 이해 등이 그렇습니다. 흔히 성경의 여러 이야기나 이미지들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 비교하는 작업이 좋은 예입니다. 둘째로는 성경본문을 집필하던 (인간)저자의 의도와 그 공동체의 신학적/신앙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이해는 성경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닌, 인간이 창작한 모든 종류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매우 자연스럽고 또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영상을 먼저 시청해보겠습니다. 이 영상은 무엇을 말하는 영상인지를 생각하시면서 시청하시면 되겠습니다.

보셨다시피 이 영상은 현대의 어느 감독이 만든 영화 중 한 대목을, 어느 유튜버가 추출 및 편집한 결과물입니다. 21세기 홍수처럼 쏟아지는 다른 영상물들과 비교해볼 때, 원본 영상물과 편집본 모두 그렇게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가진 영화는 아닙니다. 어쩌면 B급 영화 수준의 매우 일반적인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용도 지루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린 소년이 거대한 장수를 대상으로, 돌팔매질을 한다는 상황설정이 황당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럴싸한 전쟁장면 없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결과가 비평가들의 지탄을 받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아마도 저급 코미디 영화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작 의도와 감독의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해당 영상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 영상이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특정 공동체의 신앙과 신학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상미나 촬영기법등은 더 이상 핵심 평가 요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비록 이 영상에서 표현하지도 않았고, 또 특정 대사로 담아내지도 않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선이해 할 때, 이 영상의 의미와 가치는 달라질 것입니다. 마치 거친 글씨로 쓰여진 편지이지만, 그 편지가 자녀를 향한 노모의 손글씨 편지일때 느낄 수 있는 감동처럼 말입니다.

성경해석의 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본문의 배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본문을 집필하고 또 전수하였던 이들이 가졌던 고백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만의 특수한 고백를 선이해하지 않고서는, 해당 본문의 온전한 평가와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이해가 없는 해석자들에게는, 성경 본문이 단순한 짜집기의 B급 창작물로 밖에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이라는 관점을 이해하는 해석자들에게는, 해당 본문의 의미와 가치는 심히 다를 것입니다. 결국 성경해석의 여정이란, 성경을 고대의 단순한 역사적 문서로만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 성경을 간직하고 전수하던 이들의 신앙적 문서로도 볼 것인지의 (선택/해석/평가/수용)문제입니다. 때문에 성경해석은 신앙고백의 문제이자 신학적 관점의 갈림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어떤 선택지를 택하든 그것은 해석자들의 권리겠지만, 그 평가와 해석적 결과물이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컵에 들어있는 물을 그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은 신학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낙관론자: 물이 반이나 남았군 / 비관론자: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군 / 타노스: 물이 딱 완벽하군

만약 여기까지의 논리전개를 잘 이해하시고 따라오셨다면, 신구약성경의 입체적 해석을 위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심지어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나 아브라함도 더할 나위 없는 유대인이자 유대인들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나는 그들의 고백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물을 단순한 시대적 유산물이 아닌, 신앙적/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한 일종의 통로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신앙고백이 어떻게 또 얼마나 지속되어 왔는지를 비교 연구하는 것도 성경해석의 또 다른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문헌과 유대학 연구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 해석전통에 유의미한 기여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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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적 성경 읽기》
콘텍스트로 나아가면, 텍스트는 어떻게 되나요?

         11000 세계관적 성경읽기 / 전성민 지음 / 성서유니온 펴냄 / 11,000원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자기 생각이나 관점을 성경 메시지로 오해하곤 한다.
아무리 성경을 객관적으로 읽어낸다고 한들, 읽는 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경험을 성경 이해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성경읽기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인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전성민 원장은 이 책을 통해 ‘세계관적 성경읽기’를 제안한다.
‘세계관적 성경읽기’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고 이 시대에 성경을 적절히 읽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성경읽기 태도로 ‘겸손함’을 강조한다.
“성경을 나의 입장이 아니라 저자의 세계관 속에서 이해하려는 성실함과 나의 읽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며, 세계관적 성경읽기를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긍정하며 타자와 겸손히 대화하는 성경읽기”라고 정의한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의 신앙고백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우리가 “나와 언어와 신앙과 이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다면, ‘내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고백과 달리 우리는 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107쪽)

성경읽기는 결코 골방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 행위’에 그칠 수 없으며, 이웃의 필요와 창조세계에 관심을 두는 ‘공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2019년에 최종원 교수의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비아토르)가 출간된 이후 강의에서 나온 “콘텍스트로 나아간 다음 텍스트는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부제도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이다. 이 책은 “콘텍스트에서 생긴 질문을 품고 텍스트를 읽을 때에만 텍스트가 살아난다”고 밝힌다.

후반부에는 ‘세계관적 성경읽기’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살펴보는 작업과 한국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자리와 방향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한국 기독교가 ‘평화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혐오와 차별, 독선과 대결을 넘어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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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성경해석과 텍스트)

◈ 키에르케고르의 읽기와 성찰에 대한 세 가지 비유담

야고보서 1:22~27 :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이 자기를 보기 위해 거울 표면을 검사하는 것을 넘어설 경우에만, 말씀을 들여다봄으로 유익을 얻는다고 하였다.
‘거울 이미지’는 우리에게 현대 해석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텍스트 안에는 독자의 해석 활동과 별개로 독립되어 있는 어떤 실체를 반영하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면 텍스트는 오로지 독자의 실재를 반영할 뿐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연애 편지(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이상한 말로 쓰인 편지를 받은 한 남자에 관한 것) :

언어적이며 역사적인 학문적 작업은 진짜 읽기에 해당되지 않고, 이러한 작업은 거울을 통해 거울 안을 들여다보기보다는 거울 면을 바라 보는 것과 같음. 이 비유를 통해 근대 성경 비평의 위험 제안

왕의 칙령 : 공포된 왕의 조례에 순종하는 대신 새로운 해석을 하는 신복들에 대한 이야기

키에르케고르는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해를 추구하면서‘신앙 안에’있는지 자신을 살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 비유담의 교훈은, 독자들이 해석의 특권과 책임을 진지하게 취급하기를 중단했으며 해석의 목적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닌 타자로부터 온 메시지를 회복시키고 그 메시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 철학과 문학 이론 : 플라톤에서 포스트모더니티까지

‘포스트모던적’ 조건-해석 이론과 실천에 관한 오늘날의 논의는“의미에 대한 불신(incredulity toward meaning)이라 할 수 있다.

1) 의미에 대한 불신

① 의미란 무엇인가?

※ 플라톤의 대화록「클라툴루스」

◎ 헤르모게네스(소피스트들의 제자) : 단어들은 그저 관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기에 단어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믿을 만한 안내자가 되지 못함. 언어를 임의적 관례들의 체계로 봄 ➡ 소쉬르의 언어학에 영향을 미침

◎ 크라툴루스 : 전부가 아니면 포기하는 입장. 이름은 사물에 대한 완전한 표현 아니면 그저 불명료한 발음에 불과하다고 주장.‘지시로서의 의미’에 대한 근대적 강조와‘의미의 무규정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강조점을 담고 있음. 사물들에 해당되는 무상성을 기호들에게도 적용. 언어도 세계도 계속 변화하는 흐름 가운데 있기에 아무것도 참되다 할 수 없음

◎ 소크라테스 : 언어는 관례적이기도 하며 본성적이기도 하다는 중간 입장을 전개. 그는 어원들 또는 단어의 기원에 호소하며 언어를 흉내내는 소리라 함

② 필자의 의견 :‘의미’는‘명명하기’이상이라는 현대 사상가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참되게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옹호하는 플라톤의 관심사를 계속해서 공유하지만, 플라톤과는 반대로 언어와 언어 해석의 문제에 대해 신학이 갖고 있는 연관성을 쉽게 기각하지는 않음

③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생각

◎ 언어와 실재에 대한 진리는 유동적이라는 것

◎ 마골리스 :“실재는 불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흐름인가?”. 해석이란 어떤 객관적 실재에 대해 주관적인 주해를 다루는 것이 아닌 텍스트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

2) 현대 철학의 문학적 전환

① 철학의 문학적 전환

◎ 자크 데리다(해체주의의 아버지) : 해체는 모든 형태의 담론에서 작용하는‘텍스트성’을 탐구함으로 과거에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던 단단하고 견고한 경계선을 흐리게 만듬

◎ 중심과제는 해석자들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이론적 작업.

◎ 해석은 텍스트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실천적 작업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며, 해석자의 상황을 자리매김하는 정치적 작업에까지 확대시켜야 한다.

② 다양한 본문 해석 이론과 실천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철학적 쟁점들

◎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 : 텍스트에 진짜 무엇인가가 있는지의 문제

◎ 인식론의 문제 : 텍스트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는지의 문제

◎ 윤리학에 대한 문제 : 텍스트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독자들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

➜ 이 문제들은 “인간이 된다는 것, 의미의 작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

③ 해석학의 위치

◎ 과거 해석학은 학문의 신데렐라

◎ 19C에 와서야 학문의 무도회장에 초청 받음(해석학은 인간 이해 일반에 대한 연구가 됨)

◎ 20C 후반에 와서 해석학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다루게 됨 ➜ 해석학은 역사 의식의 사촌이며, 실재는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전통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다.

◎ 해체주의, 문예 비평 철학자들에 의해 해석학에 대한 매력이 점차 없어져 감

◎ 데리다(문예 비평 철학자들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의 주장 : 반성이나 자기 반성에 의해 자신들의 제한된 관점들을 넘어 세계와 자신을 신이 보듯 볼 수 없다고 주장

◎ 니체에게 예술가는 최상의, 가장 정직한 철학자, 즉 창조적 해석자임

3) 권위와 이데올로기

① 데리다의 해체 전략 배후에 있는 동기 : 권위에 대한 부당한 호소와 권력의 부당한 행사들에 대한 경각심에서 비롯됨. 확정된 또는 정확한 견해해 도달했다고 으스대는 철학자와 주해자에게 도전

② 인문학에서 권위의 문제, 즉 역사와 문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인간성 자체에 관한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결정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 의미와 해석 : 문학적 지식의 도덕성

▶ 해석학은 모든 것이 일종의‘텍스트’인 한, 즉 해석을 요청하고 있는 인간 삶의 표현인 한, 삶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

1) 의미와 해석

◎ 전통적으로 해석은‘의미’를 끄집어 내는 절차를 가리키는데, 의미라는 용어에 대해 최근의 학자들은 모라토리움을 요구함 ➜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많은 일들을 단지‘의미’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에

◎ 한 가지 해석을 하나의 선택안 이상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적 지식이 진실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필자는‘의미’라는 용어를 채택하기로 결정함

2) 하비(Harvey)와 피쉬(Fish)

◎ 하비의「역사가와 신자 : 역사 지식의 도덕성과 기독교 신앙」: 신념이 역사적 탐구를 왜곡시키는 효과를 가짐. 하비의 지식의 도덕성을 뒷받침하는 가치관은 계몽주의에서 비롯. 도덕적 신념은 합리적 평가와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 함. 비판적으로 해석된 현재적 경험이 과거에 대한 주장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됨. 하비는 의심이 믿음보다 더‘도덕적인 것’이라고 결론 내림

◎ 피쉬의「이 수업에는 텍스트가 있는가」: 독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텍스트 내부의 의미 같은 것은 전혀 읽을 수 없고, 의미는 독자의 읽는 활동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활동의 산물임.

3) 성경 연구와 관련한 주해자들의 싸움

◎ 해석학에 대한 피쉬의 접근 방식은 성경에서 권위를 제거한다

◎ 해석은 궁극적으로 텍스트가 아닌 독자의 정체성에서 그 단서를 얻음. 독자의 해석 체험을 지배하는 것은 정전(canon)이 아닌 공동체

4) 이 책의 목적

◎ 읽는 자들이 정당하고 책임성 있게 성경에 대한 문학적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 가능성을 명시하고 옹호

◎ 텍스트에 어떤 의미가 있고, 그 의미가 읽는 자에게 알려 질 수 있으며, 읽는 자들은 그 의미를 알고자 노력해야 함을 확언하기 위함

◈ 비평의 세 시대 : 책의 평면도

▶ 문학 비평의 역사 : 저자, 텍스트, 독자에 차례대로 몰두해 왔던 역사

▶ 필자가 현대 해석학에 대한 주요 도전을 다루는 이유

◎ 전통적 형태의 주해와 해석학에 대한 도전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도전들에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기에

◎ 현대 해석 이론의 위기는 사실상 신학적 위기이기에

◎ 실천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1) 저자의 시대 : 해석학적 실재론과 비실재론

◎ 슐라이어마허의 해석의 목표 : 저자가 이해하듯이 혹은 저자보다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하는 것

◎ 해석학적 실재론 : 해석에 선행해서 존재하는, 텍스트 속의‘거기에’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주장. 무엇인가는 해석자에게 알려 질 수 있으며, 해석자는 그것을 책임감 있게 다루어야 한다

◎ 해석학적 비실재론 : 의미가 해석 활동에 선행한다는 점을 부인하고 해석의 진리는 읽는 자의 반응에 의존하다고 함. 세계 또는 텍스트의 의미는 생각의 구성물이라고 주장

◎ 필자의 주장 : 의미가 일종의 행위 형태라고 주장하며, 저자성 개념이 궁극적으로 신학적임 것임을 보여 주고자 함. 인간의 저자성은 성육신과 계시의 행위들을 통해 자신을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는 것

2) 텍스트의 시대 : 해석학적 합리성과 상대주의

◎ 1940년대 신비평은 저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리고 텍스트의 형식적 특징에 초점을 맞춤, 1960년대 구조주의 비평학자들은 텍스트의 역사적 정황보다 텍스트의 언어적이며 문학적인 관례들을 연구

◎ 텍스트 지향적 해석 방법은 텍스트에 내재해 있는 뜻을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이 방법의 목표는 텍스트 자체의 형식과 구조, 즉 텍스트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려는 것

◎ 텍스트의 시대에서 비평적 초점은 해석적 합리성의 성격으로 옮겨 감.

◎ 필자의 주장 : 해석 과정이 어떤 합리적 절차들에 의해 지배되며, 텍스트를 복합적 문학 행위로 보며 정경적 차원을 비롯해 다양한 차원을 존중하는‘두터운 기술’의 과정을 통해 의미가 적절하게 밝혀질 수 있다

3) 독자의 시대 : 해석학적 책임성인가? 자유로운 놀이인가?

◎ 1970년대와 80년대 텍스트 실증주의를 배격하고 대신 독자의 역할을 검토하기 시작.

◎ 독자 반응 비평은 텍스트가 독자가 구성하거나 또는 해체하기 전까지는 미완료 상태라는 텍스트의 미완결성을 강조함. 우리는 사회적이고 문화적 편견들로 구성된 명확히 구획되어 있는 틀 가운데서 텍스트를 읽음.

◎ 필자의 주장 : 해석 원리에 대한 한 사람의 선택의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한 이해가 그리고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놓여 있다. 더욱이 문학적 지식의 도덕성은 해석자의 덕성이 없다면, 불충분하기 짝이 없다. 윤리적 해석은 일종의 영적 실천이며, 이해의 영은 바로 성령. 의미의 윤리학에 대한 논의에 기여하는 신학 교리는 성령론과 성화론

◈ 어거스틴주의 해석학

▶ 신학자가 의미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 이유?

◎ 신학에 해석적인 차원이 담겨 있고, 해석에 신학적 차원이 담겨 있기에

1) 신학의 해석적인 차원 : 신학은 텍스트 중심의 학문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질문과 성경 해석에 대한 질문은 실제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없음. 텍스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게서 축적된 부를 박탈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2) 해석의 신학적인 차원

◎ 포스트모던 독자는 더 이상 하나님이나 저자를 믿지 않으며, 현재의 해석학적 불가지론적 분위기는 신학적 도전을 나타냄

◎ 신학은 성경 해석에 대해서만 아니라 일반 해석학에 대한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을 가지며. 신학은 텍스트와 독자 각각의 권리에 관한 토론과, 문화를 촉진시켜 주며 문화가 개발해 내는 가치들에 대한 토론에 기여

3)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 우리는 믿는 존재, 우리의 믿음을 심화시키고 입증하기를 추구하는 존재들임. 텍스트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신앙 행위임.

◎ 해석하게 대한, 의미의 실재에 대한 필자의 어거스틴주의적 변호와 다른 두 가지 반대 입장

a. 텍스트를 이해할 때 저자의 의도가 아닌 다른 열쇠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헤르메스주의자

b. 의미와 이해는 더 이상 성취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냉소주의자들

➜ 우리는 텍스트라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알게 될 수 있다

◎ 폴 리쾨르의 해석학적 순환 : 믿기 위해서 이해하야 하며 이해하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 해석자의 신앙 고백 : 나는 해석학적 실재론 ‧ 합리성 ‧ 책임성을 믿는다.

◎ 어거스틴의 저작들이 문학적 지식의 기독교적 도덕성을 뒷받침 해주는 신학 형성 작업에 주는 지침

a.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믿음(언어적 기호들을 통해 의미를 전달)

b.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얻는 이해가 단어들 자체보다 훨씬 중요함

c. 모든 이단설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서술 : 텍스트와 그에 대한 주석을 구별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해석학적 이단설일 것

d. 문학적 이해의 도덕성과 관련해 최상의 해석학적 덕목인, 사랑을 옹호함 : 해석학적 첫 반응은 저자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함

◎ 텍스트는 의미의 보고

◎ 어거스틴의 해석학적 공리 :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장 많이 낳는 해석을 선택하라!

◎ 필자가 추천하는 해석학적 덕목 : 믿음, 소망, 사랑, 겸손

◎ 좋은 해석학은 좋은 이웃을 만드는데, 해석학에서나 윤리학에서 황금률은 텍스트들,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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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텍스트의 4 요소 (4 Elements of Context)

 4  4 Elements ofContext

컨텍스트 쇼핑, 컨텍스트 검색, 컨텍스트의 시대 (Age of context)까지 이제 컨텍스트라는 용어가 넘쳐난다. 그런데 컨텍스트란 대체 무엇인가? 이 포스트는 컨텍스트의 확장된 의미, 속성, 본질을 나누기 위한 글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컨텍스트를 4가지 요소(발견, 선택, 경험, 공유)로 정리했다. 편의상 구분을 했지만 실제로 4요소는 끊김이 없이 발현된다는 점, 컨텍스트란 연결을 만들며 진화하는 하나의 ‘상태’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이 4요소는 사업자(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컨텍스트는 앞으로 모든 비즈니스의 핵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면 본질을 보기가 어렵다. 컨텍스트를 사용자 관점에서 차근히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일러두기: 쉬운 이해를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사례로 다루었으나 ‘연결의 6하원칙과 IoT 네트워크‘에서 언급한 ‘컨텍스트 네트워크’를 포함하여 컨텍스트의 쟁점은 모든 비즈니스에 적용된다. 여러분들의 피드백에 따라 필요한 경우는 다른 비즈니스 사례도 추가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전통적 미디어 환경의 컨텍스트

예전에는 컨텍스트가 사업자에게도, 사용자에게도 간단했다. 95년도 국내 드라마의 전설을 만든 SBS 24부작 ‘모래시계’의 컨텍스트를 생각해보자. 일명 ‘귀가시계’라는 별명은 전통미디어에서 컨텍스트가 어떤 특성을 지니는지 한마디로 암시한다.

프로그램은 편성표가 24시간, 주간 단위로 나와 있으니 수목 밤 10시에 어김없이 발견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본방사수 개념이 줄어들어 시청률 10%도 많다고 하지만 20년전 상황은 달랐다. 주로 지상파 3사가 저녁시간을 좌우하니, 이시간에 무엇을 할(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최민수가 ‘나, 떨고 있니?’하며 죽어가던 대목에서 순간 시청률은 75%에 달했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 프로그램을 발견, 선택, 경험, 공유하는 컨텍스트가 비교적 간단했던 시절이다.

콘텐츠를 시청(경험)하는 컨텍스트는 어떤가? TV가 있는 거실에 모여 앉든, 방에서 혼자 보든, 방법은 많지 않았고 정전이 되거나 누군가 채널을 돌리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경험이었다. 콘텐츠만 좋다면 그 콘텐츠를 경험하는 컨텍스트 따위는 큰 고민거리가 아닌 것이다.

콘텐츠에 대한 공유는 집, 학교, 직장에서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하며 재잘재잘 수다를 떨면 이야기는 기록도 없이 사라진다. 그 모임에 없었던 사람들은 내가 어느 대목에서 울었는지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잔뜩 수다를 떨었으니 마음만은 후련할 것이다.

컨텍스트, 사용자와의 교감이 시작되다

그러나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물리적 시공간 개념은 해체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주간 편성표라는 공간에 매여 있지 않고 24시간의 규칙안에 순차적으로 담겨 있지 않다. 신문기사가 종이신문의 지면을 비집고 들어갈 필요도 없고 1면이라는 공간은 유일하지도, 절실하지도 않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1면이 생겼고 우리의 프라임타임은 매일매일 시시각각 변한다. 이처럼 시공간의 해체와 함께 물리적 유통 채널 위에 군림해 온 모든 사업자들의 전통적 권력은 해체되었다.

컨텍스트의 발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세상의 가치가 ‘관계’ 기반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1]. 기존의 단순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컨텍스트는 미디어에서,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시공간의 해체속에 컨텍스트는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컨텍스트의 확장된 정의

여기서 컨텍스트란 커뮤니케이션을 둘러싼 모든  정보와 환경으로, 주어진(given) 환경으로서의 컨텍스트(시공간, 주변정보 등 실시간 상황), 사용자의 경험, 체험, 학습 등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미치는 사용자의 기억 정보[2], 나아가 사용자의 참여를 통해 계속 연결되고 진화하는 컨텍스트 모두를 포함한다.

“Context shapes language and language shapes context. […] Context is not simply a constraint on language, but also a product of language use.” [Duranti & Goodwin, Rethinking context: Language as an interactive phenomen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30]

컨텍스트가 단순히 언어를 규정하는 조건(제약)이 아니라 ‘언어사용의 생산물’이기도 하다는 언어학적 정의는 미디어 관점에서도 유효하다. 컨텍스트를 단순히 미디어를 사용하는 시간, 공간적 조건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과정 및 결과에서 발현되는 작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사용자에게 ‘주어지는 컨텍스트 (contexte défini, conditionnant, donné)‘의 수는 무한대다. ‘지금, 여기(시간과 공간)’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경험과 지식을 쌓았는지, 그 밖의 무수한 상황(관계, 역할 등)에 따라 앞으로의 경험도 당연히 달라진다. 그렇게 각자는 유일한 순간을, 그 순간의 연속으로 삶을 살아간다. 미디어 환경에서 대화, 거래, 구매, 검색, 감상 등은 각각 다른 컨텍스트에서 발생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경험을 따라간다.

우리가 보는 검색 결과 화면, 페이스북의 뉴스 피드, 아마존의 상품 추천 페이지는 모두 다르다. 각자의 데이터의 기록이 만드는 각자의 세상이다. 사용자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모든 상황과 찰나가 모여 전체(universe)를 구성한다. 다만 사례 하나, 상황 하나만을 놓고 보면 참 시시하고 핵심의 주변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컨텍스트가 사용자와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진화한다는 점이다(context construit, transformateur, évoluant)[3]’. 사용자 개개인의 참여 활동(대화, 거래, 구매, 검색, 감상 등)은 새로운 연결을 낳고 그것은 곧 ‘새로운 컨텍스트의 발현’을 의미한다. 아래의 킨들 사례가 그렇다.

나의 밑줄이 정보가 되고 책의 컨텍스트를 진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대목에서 몇명이 밑줄을 쳤는지 발견하게 된다. 나의 밑줄도 이렇게 “인기있는 구절“이라는 정보를 생성하는데 기여한다. 나는 혼자 책을 읽지만 그 무심한 소비 과정이 다른 사람의 의사결정과 소비의 경험을 바꾸는 컨텍스트를 새롭게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서에 대한 내 경험도 진화한다. 오직 참여만이 컨텍스트를 발현시킨다. 각자의 유일한 컨텍스트들이 만드는 매 찰나 사소한 연결들이 결국은 컨텍스트를 진화시키는 것이다.

사용자의 개입으로 발현되는 컨텍스트는 발견, 선택, 경험, 공유로 그룹핑될 수 있다. 이 요소들은 독립배타적이지 않고 순차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김이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다중적으로 발생한다. 컨텍스트란 정지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하나의 상태(status)다.

해석에 따라 이들을 컨텍스트의 하위 컨텍스트 또는 컨텍스트의 종류 또는 사용자 경험을 통해 결과적으로 발현되는 컨텍스트, 컨텍스트 비즈니스의 구성요소 등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4         4  action      4               status

(오가닉) 미디어에서 컨텍스트를 규정하는 4가지 작용(action)을 구분하였다. 발견, 선택, 경험, 공유 컨텍스트는 사용자와 상호작용으로 발현된다.

1. 발견하는 컨텍스트 (Discovering context)

발견 컨텍스트는 콘텐츠, 제품, 메시지 등을 만나는 접점이자 계기다. 예전에는 편성표로 시청자를 만나고 광고로 주목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 접점이 도처에 깔려 있다. 페이스북에서 지인이 이 노래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한소절 적어올린 포스팅은 ‘도대체 어떤 노래길래?’ 하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만약 링크를 클릭해서 들어갔는데 전혀 공감도 유익함도 없었다면 이것은 발견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지인이 얼마나 감성적인지는 발견했을지 모르겠다.)

   Kpop Star 4

페이스북의 지인이 공유한 Kpop Star 4. 여기서 발견한 정승환, 박윤하라는 어린 가수들의 팬이 되어버렸다. 이런 발견은 때때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문득 나에게 온다.

발견의 컨텍스트는 문득 나에게 온다. 사용자가 헤매고 검색하고 돌아다니다가 만날 수도 있고 이런 수고가 없이 뜻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발견의 컨텍스트에서 완전한 우연이란 없다. 아니, 사용자는 뜻밖에 문득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지만 그것은 페이스북의 뉴스피드 알고리즘, 검색엔진 알고리즘, 콘텐츠의 추천 알고리즘 등을 통해 연결된 결과다. 이러한 발견의 경로도 제품, 정보, 콘텐츠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2. 공유하는 컨텍스트 (Communicating context)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콘텐츠, 제품, 정보 등은 나 자신을 통해 어딘가로 연결되고 공유되어 갈 것이다. 직접 공유버튼을 누르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지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요소는 도처에 깔려 있다. 지인이 공유한 동영상을 클릭하는 순간 그 조회수가, 지인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그 공감이, 그리고 이 가수들의 노래를 검색하고 챙겨 듣는 모든 흔적들이 이 콘텐츠를 누군가에게 (데이터로, 정보로, 내 목소리로, 글로) 전달하는 행위가 된다.

컨텍스트가 중요한 환경에서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콘텐츠, 제품, 정보의 소비활동과 구분되지 않고 양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니, 끊김이 없이 연결되기를 지향한다. 위에서 언급한 아마존 킨들처럼 각자의 밑줄이 ‘인기있는 구절’이라는 정보에 기여한다면 각자의 밑줄은 공유행위, 커뮤니케이션 행위다(보다 자세한 사항은 매개의 4가지 유형 참조).

우리는 서로의 발견을 돕는 조력자들이다. 사업자는 이 조력자들이 더욱 그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컨텍스트를 최적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견의 경험은 매우 제한될 것이다.

3. 선택하는 컨텍스트 (Choosing context)

선택의 컨텍스트가 짧고 최적화되면 선택하는 과정 자체를 인지하기 어렵게 된다. 발견의 컨텍스트가 ‘문득’ 나에게 오는 것처럼 선택의 컨텍스트는 ‘저절로’ 부지불식간에 이뤄진다.

 TV         TV   IMDb

아마존 Fire TV는 어떤 영상을 감상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준다. Fire TV 시청자들의 평점과 IMDb 사용자들의 평점이 나란히 나와 있다. 또한 아마존 커머스와 같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본 다른 영화’가 새로운 영상을 발견하는 컨텍스트로 이어진다.

위의 이미지는 아마존 Fire TV에서 영화를 선택하는 컨텍스트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점이 의사결정 시간을 줄여주는데 기여할 것이고, 아래 이어지는 추천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본 다른 영화)을 통해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는 컨텍스트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양적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사용자 혼자의 힘으로 어떤 제품과 브랜드, 서비스, 콘텐츠, 정보를 소비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물론 모든 것을 고객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 선택하도록 방치하는 사업자들도 많다). 정확성, 최신성, 적합성 순으로 필터링하여 선택의 폭을 좁혀주는 검색엔진처럼 고객의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은 덤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 행위는 다시 검색 엔진의 성능을 높이고 다른 사용자의 검색 시간을 줄여주는데 활용될 것이다.

결국 선택의 컨텍스트란 “다음에 뭐보지?, 다음에 뭐먹지?, 다른거 뭐사지?, 다음에 어디가지?”라는 질문을 하는 컨텍스트를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다.  끊김이 없이 다음 제품, 콘텐츠, 서비스가 ‘연결’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사용자의 컨텍스트(누구인지, 무엇을 보는지, 좋아하는지 등에 대한 데이터)를 알아야만 가능한 연결이란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4. 소비하는 컨텍스트 (Experiencing context)

예전에는 제품, 콘텐츠, 정보재를 ‘경험’하는 컨텍스트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다. 콘텐츠는 주어진 것이고 일단 소비를 하게 하는 것만이 즉 시청률, 도달률, 매출만이 핵심 과제였을 때는 그랬을 것이다. 그 시각으로 보면 소비 컨텍스트는 TV를 볼 때 거실에서 모여서 보느냐, 쾌적한 쇼파냐, 지하철 퇴근길 스마트폰이냐 정도로 제한될 것이다.

며칠전 Kpop 스타의 준결승전을 보느라 PC로 700원을 지불했다. 그 여정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시청할 수 있는 기기가 애플 제품들 뿐이었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사용하지 않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결국 VM(Virtual Machine)을 통해 구매를 했지만 여기로 옮겨온 후에도 막다른 길에 대한 경험은 수차례 계속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문득’ 발견하고 ‘저절로’ 선택, 지불하는 경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대신 다시는 유료로 동영상을 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구매는 중요한 소비 컨텍스트다.

네트워크의 끊김이 없이 얼마나 쾌적한 경험을 제공하는지,모바일로 보던 것을 집에 가면 TV로 이어서 보여주는지 등 경험의 컨텍스트는 수도 없다(물론 발견, 선택, 공유도 콘텐츠 경험의 컨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제품 소비(사용) 과정 자체에 국한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영화 펄프픽션의 유명한 그 장면, 우마써먼과 존트라볼타가 복고춤을 추는 장면이다. 안방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콘텐츠의 정보를 “X-ray“로 힐끔 거리며 시청중이다. 등장 인물, 배경, 배우의 다른 작품 등 모든 정보를 손안에 연결한다. 어디 TV뿐이겠는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제품을 사용하는 환경들이 모두 경험의 컨텍스트를 제공하며 우리의 매순간만큼 변덕스런 기분만큼 모든 컨텍스트는 유일하고 무한하다.

  Amazon Fire   TV

침대에 누워 Amazon Fire로 영화를 시작했다가 ‘TV로 보기’ 버튼을 누르니 화면이 넘어간다. 보는 동안 장면마다 정보는 스마트폰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컨텍스트의 연결이 끊김이 없을 때 (Seamless context)

모신문사에서 컨텍스트 연결을 강의하니 청중에서 ‘기자는 일일이 기사에 댓글을 달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4요소에서 살펴본 것처럼 컨텍스트를 발현시키고 연결하는 것은 사업자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연결이 반드시 댓글이나 좋아요도 아니다. 혼자 발품 팔아 어찌 지구 저편까지 소식을 전하겠는가. 우리는 사용자가 연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수행하면 된다.

콘텐츠에 그만한 가치도 있어야 하지만 컨텍스트의 4요소가 살아서 발현되도록 환경(사용자 인터페이스, 콘텐츠들의 관계, 데이터 분석 등)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사용자 관계, 콘텐츠 관계, 데이터 관계가 모이면 그것이 사업자의 자산 즉 네트워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단번에 발현된다면 컨텍스트 가치는 극대화된다. 아래 이미지처럼 말이다.

       4

아마존 킨들 파이어에서 독서 중이다. 읽고 있는 책의 참고자료들과 연결되는 경험이다. 컨텍스트의 4가지 요소가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된다.

종이책의 참고문헌을 보고 스스로 검색을 하고 서점을 찾아가 책을 직접 구매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논문을 써야 하는 특수 환경이 아니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관련된 책의 표지, 개요, 사람들의 평점이 함께 있고 클릭 한번으로 샘플 저장(내 온라인 책장에 책이 바로 담기는 경험), 심지어 구매를 하거나 지인들에게 바로 알릴 수도 있다면 어떨까?

여기서는 새로운 것을 문득 발견하고 저절로 선택이 이뤄지며 (샘플을 클릭해서 서재에 담겼다면 이미 선택은 이뤄졌다) 독자들이 서로 암묵적인 도움을 주고 이 모든 컨텍스트가 다시 책을 읽는 경험 자체를 극대화 시켜준다. 4가지 요소가 동시다발적으로 부지불식간에 발현되며 여기서 나의 무의식적인 활동 (클릭 한번)이 새로운 컨텍스트를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연결시킨다. 컨텍스트가 흐르고 진화한다.

컨텍스트의 본질에서 다시 출발하는 비즈니스

지금까지 사용자 참여 관점에서 컨텍스트를 4가지로 그룹핑하여 살펴보았다. 컨텍스트는 쉽지 않은 주제다. 컨텍스트가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아직 정보미디어나 IT, 비즈니스쪽에서는 그 개념이 표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영역이 언어학, 인지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지고 많은 융합 연구가 시도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진화를 이해하려면 비껴갈 수 없는 영역이고, 사용자 경험(UX)을 논하자면 더욱 그렇고, 네트워크 시장에 대처하려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공간이 해체되고 경계가 없는 오가닉 미디어 시대에 연결이란 바로 컨텍스트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컨텍스트는 결국 매우 사소한 사용자의 그리고 사용자에 의해 발현되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이 작은 작용들이 모여 미디어를 만들고 의미를 만들고 비즈니스를 만든다. 이에 예외가 될 수 있는 비즈니스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이 당신의 생각, 경험, 체험에 어떤 변화를 주게 된다면, 당신이 이 글을 발견하고 읽고 나누는 일련의 과정은 다시 이 글의 컨텍스트를 진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여러분들의 참여를 측정하고 수렴하고 동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관련 포스트>

* 글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April 14, 2015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facebook: yun.agnes, organicmedialab
Twitter: @agnesyun
Google+: gplus.to/agnes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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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더 읽을 힘이 남아있는 분들을 위한 각주입니다^^)
[1] Context는 라틴어 ‘contextus, contextere’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con-‘은 ‘함께(together)’를 뜻하고 ‘texere’는 ‘짜다(weave), 만들다’를 의미한다. 즉 컨텍스트는 이미 어원적으로 ‘함께 관계를 만들다’라는 의미를 내포해왔다고 볼 수 있다.

[2] 이와 같은 관점은 언어학 (특히 화용론(Pragmatics))에서 논의하는 컨텍스트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발화(utterance(énonciation))’보다 미디어 관점에서 컨텍스트를 살펴보고 있으나 사용자의 참여(engagement)와 경험(UX)의 확장된 의미에서 보면 상당 부분이 맞닿아 있다(D. Sperber, D. Wilson, 인지적 화용론 (Relevance: Communication and Cognition), 김태옥 등역, 한신문화사, 1993(원서출판: 1986))

[3] 맹그노(D. Maingueneau)는 ‘담화분석사전(Dictionnaire d’analyse du discours)‘에서 담화와 맥락의 관계를 두 가지 대립/보완적 관점에서 정리한 바 있다. 이미 주어진 맥락이 담화를 규정하는 한편 담화 과정에서 상황이 지속적으로 재정의되고 맥락 또한 재구성된다는 점이다(“Le discours est une activité tout à la fois conditionnée (par le contexte) et transformatrice (de ce même contexte) ; donné à l’ouverture de l’interaction, le contexte est en même temps construit dans et par la façon dont celle-ci se déroule ; définie d’entrée, la situation est sans cesse redéfinie par l’ensemble des évènements discursifs.” (Patrick Charaudeau, Dominique Maingueneau, Dictionnaire d’analyse du discours, Edition du Seuil, 2002, p.135).





사회의 각 분야가 날로 전문화되고 있어서 전문지식을 가진 감정인의 역할이 재판에서 점차 더 중요해지고 있다. 재판부는 전문적인 감정결과를 판별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피상적인 심리를 거쳐 감정결과가 상당 부분 받아들여지곤 하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이제 감정인은 ‘법관의 보조자’라는 본질적 지위를 벗어나 실질적으로 판결의 결론을 좌우하며, 때때로 ‘법관의 소외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건설, 의료, 첨단기술분쟁인 경우에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이처럼 감정이 판결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되었으므로 감정절차에 관하여 대리인은 어떤 점보다도 각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감정절차의 준비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감정 준비의 첫 단계는 ① 감정의 기준과 ② 감정 자료를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예컨대 건물의 하자감정이라면 하자판정의 기준도면이 어느 설계도인지, 하자보수비 산정 시점은 어느 때로 할지 등 감정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감정인이 검토할 자료도 감정대상과 관련성이 있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을 자료로 제출하는지 살펴야 한다. 의료소송에서 치료 관련 서류를 내면서 ‘의심스러운 기록지’를 슬며시 끼어 제출한 경우도 보았다.

 

1989년 검찰은 삼양식품이 라면에 공업용 우지를 사용했다고 발표하면서 회사 관계자들을 구속하였고 삼양식품은 하루아침에 도산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6년에 걸친 재판 끝에 식품위생법위반죄가 무죄로 확정되었다. 무죄의 근거는 감정의 대상인 우지를 수거한 방법이 잘못되어 그 결과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문제가 미세한 흠결 하나에서 뒤집히는 상황은 일반 감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자료가 적정한 것인지 세밀하게 검토하기 바란다.

 

둘째, 감정기일에 감정의 기본요소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나는 감정이 필요한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을 고르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1차 감정기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감정기준과 감정자료에 관하여 상대방과 협의를 하거나(간단한 사건의 경우), 협의가 안 되면 ‘감정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감정인으로 하여금 감정의 기준과 자료를 확정하도록 해야 한다. 감정인이 감정의 전체 틀을 짤 때 당사자의 입장을 충분히 주장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의견서는 법률 지식이 부족한 감정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면서도 명확하게 쓰는 것이 좋겠다. 쌍방 의견이 달라서 감정인이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쌍방 주장에 따라 복수로 감정하는 경우도 있다. 필요하면 감정 중간에 2차 의견서를 내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다.

 

셋째, 감정인이 감정을 완료하여 감정서를 제출하면 당사자는 감정결과에 대하여 조회신청(실무상 사실조회라고 표현하지만 법적 성질은 감정보완신청이다)을 하여 다투게 된다. 하지만 일단 감정서를 제출한 감정인은 자신의 감정서에 관하여 철저히 방어적이 되어서 탄핵 효과가 크지 않다. 동문서답방식으로 일관하여 회피하는 감정인들이 종종 있다. 재판부가 이럴 경우 경고해야 하는데 이런 재판부가 별로 없었다. 감정결과에 모순점이 많으면 2차 감정인신문을 신청하여 법정에서 감정인 신문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데 재판 실무상 허용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재판부가 보다 이를 넓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넷째, 감정결과가 매우 불합리하면 재감정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좁은 길이다. 웬만한 사정이 없는 한 재감정은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증거보전 감정결과가 엉터리로 나온 사건에서 감정결과를 낱낱이 분석하여 2년간 다툰 끝에 재감정 결정을 받았고, 다시 2년 걸려서 위 감정을 뒤집는 재감정결과를 받아 승소한 적이 있다. 현재 실무상 합리적 기준에 미달하는 전문성이 부족한 감정인이 많은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에 대응하기 위하여 당사자 입장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옥상옥의 부담이지만 불가피한 면이 있다.

 

나아가 현재 과학 기술 수준상 정확한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가 붕괴의 위험성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었는데 붕괴 위험성을 둘러싸고 ① 증거보전 감정은 3년 내 붕괴, ② 재감정은 60년 이상 사용 가능 결론을 내렸다. 두 감정결과가 워낙 차이가 나고 중대한 사건이라서 나는 당시 재판장으로서 ③ 3차 감정을 명하였는데 나중에 그 결과는 후자에 가까웠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사건에서의 감정 수준이 이런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수한 감정인이 선정되도록 특히 법원이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감정은 원칙적으로 소송이 진행되 어 쟁점과 기초 사실이 어느 정도 밝혀진 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 소송 초기에 감정신청을 하여 감정을 하였다가 나중에 쟁점이 바뀌거나 다른 사실이 밝혀지면 감정결과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송 제기와 동시에 감정신청서를 내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 다만 대상이 소멸될 위험이 있거나 특별히 급박한 사정이 있다면 증거보전 신청을 하거나 또는 소송 초기에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엄마가 아들에게 “공부해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언제 하였는가’에 따라 그 평가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아들이 자야 할 시간인 밤 12시에 이 말을 했다면 엄마는 ‘무섭고 가혹한’ 사람이 되기 쉽고, 공부를 해야 할 아침 10시에 했다면 아들이 ‘게으른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례에서 엄마가 아들에게 말을 했다는 것은 ‘텍스트’이고 말을 한 동기와 상황은 ‘컨텍스트’에 해당한다. 텍스트는 외적인 ‘사실’들의 모음이고, 컨텍스트는 사실의 진짜 의미를 밝혀주는 ‘맥락’이라고 하겠다.

 

재판은 항상 인정된 ‘사실’을 판단의 출발점으로 한다. 하지만 동일한 사실(텍스트)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였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컨텍스트의 인정이 재판의 결론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컨텍스트의 힘을 직접 경험한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한다.


# 식품회사 사장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냉장 식품의 포장을 비위생적으로 하여 부패한 식품을 판매했다는 것이 혐의 사실이었다. 압수된 식품의 사진을 보니까 포장이 약해 보이고 일부는 벌어져 있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텍스트). 영세업자가 생산한 식품의 유통경비를 줄이려고 싸구려 포장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준비 미팅을 끝내면서 혹시나 하여 회사의 판매량을 물어보니까 동종 식품 업계 6위라는 것 아닌가! 당시 피의자의 회사보다 작은 업체가 광고를 활발히 하였는데 그 회사보다 판매량이 많았던 것이다. 회사의 규모를 대입하자 갑자기 이 사건의 실체가 달리 보였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라면 상품 관리 차원에서라도 이런 식으로 포장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컨텍스트). 이는 식품회사의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일부 대리점에서 실수를 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구속영장심문기일에 이런 상황을 주장하였고, 구속영장은 당연히 기각되었다.

 

# 공사업자가 공사 중단 시까지의 기성대금을 청구하였고, 도급인이 지체상금을 반소로 구하였다. 기성 공사대금 일부가 미지급인 사실은 다툼이 없었지만(텍스트), 공사업자는 도급인의 무리한 횡포를, 도급인은 공사업자의 시공 지연을 서로 주장하였다. 심리 결과 당시 도급인은 자금사정이 넉넉했던 반면에, 공사업자는 이 공사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공사를 하면서 자금이 쪼들려 여러 하수급인들에게서 항의를 받았던 사정(컨텍스트)이 밝혀졌다. 도급인의 파이팅 넘치는 담당 직원이 공사업자의 하수급인들을 어렵게 찾아내서 이런 진술서들을 받았던 것이다. 공사업자의 부실하였던 경영 상황이 드러나자 컨텍스트가 명확해졌다. 결국 기성공사대금 미지급은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인정되어 도급인의 주장이 인용되었다.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만, 컨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다의적(多義的)일 수 있다. 텍스트는 컨텍스트에 비추어 볼 때에만 실제 사정이 드러나고 이때 비로소 판단이 가능해진다. 결국 텍스트는 바꿀 수 없으므로 컨텍스트가 최종 판단을 좌우하는 열쇠인 셈이다. 따라서 변호사가 노력을 집중하는 대상은 ‘바꿀 수 없는 텍스트’가 아니라, ‘바꿀 가능성이 있는 컨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컨텍스트는 외적인 사실이 발생했을 때의 상황과 원인들 가운데 제시되는 것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컨텍스트를 효과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자료를 철저히 들여다보아 유리한 세부 사항들을 수집하는 것이 관건이고, 이들을 잘 엮으면서 상상력 한 줌을 얹는 것이 그 방법 아닐까. 당사자들은 서로 상반되는 컨텍스트를 내세울 때가 많으므로 상식과 감정에 맞는 자연스러운 컨텍스트를 주장해야 한다. 이렇게 간접적 정황사실을 잘 구성하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고려 없는 텍스트의 단순한 나열은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큰 힘이 없다. 항상 컨텍스트 단위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칭찬과 비난


법구경 /  단단한 돌은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듯이
               현명한 사람은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숫타니파타 /  말과 행동과 생각하는 바가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사람,
                      남들이 존경해도 우쭐대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사람,
                     남들이 비난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남들의 칭찬과 관심을 받기를 바라지 말라. 칭찬과 관심을 받으면 기쁘지만, 관심 받지 못하면 좌절하는 삶이란 남들의 말에 휘둘리는 나약한 자아를 대변할 뿐이다. 칭찬을 받거나 관심어린 시선을 받을 때를 조심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그 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그것은 내 중심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중심 잡힌 대장부 수행자는 외부적인 칭찬이나 비난에 휘둘리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 중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칭찬에 크게 기뻐하는 사람일수록 비난에 크게 낙담하는 법이다. 그러나 칭찬에 크게 들뜨지 않으며 자신을 지키는 자는 설사 큰 비난을 받더라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비난을 싫어하지 않으며, 칭찬과 비난이 오더라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비난을 받기 싫다면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그 마음부터 놓아야 한다. 칭찬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놓으면, 자연히 비난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놓여진다. 양 극단은 결국 하나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칭찬과 비난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다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 칭찬을 듣더라도, 존경을 받더라도 크게 우쭐할 것 없고, 비난을 듣더라도 크게 좌절할 일은 아니다.

‘나 자신’ 스스로 중심이 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남들의 말에 휘둘릴 것이 없다. 뿌리 깊은 나무나 큰 산은 아무리 비바람이 불더라도 흔들리지 않듯, 자기 중심이 딱 잡혀 있는 대장부 수행자라면 외부적인 그 어떤 말이나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칭찬과 비난, 어느 쪽을 더 많이 하시나요?

미국 듀크대학교 연구팀은 사람의 뇌가 칭찬과 비난을 각각 다른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처리한다고 밝혔습니다.
비난처럼 부정적인 내용은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 영역에서 처리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내용은 편도 영역을 자극하지 않고 보다 논리적인 접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에 대해서는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는 반면 부정적인 행동은 고의로 한 일이라 여기며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짙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비난보다 칭찬을 가까이해야 할 듯합니다.
비난을 쉽게 내뱉고 칭찬에 인색한 사람보다, 비난은 자제하고 칭찬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니까요.

칭찬에 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뇌의 작용 원리를 거슬러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은 우연이나 실수로, 선한 행동에 대해서는 이타적이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칭찬도 비난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칭찬은 어떤 대상에 대한 장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칭찬은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잘못된 칭찬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며, 역효과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칭찬(compliment)과 역지사지(易地思之)

칭찬(compliment)을 많이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역지사지(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 하는 마음으로 칭찬하고 배려한다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행복이 찾아옵니다.

1. 칭찬(compliment) 이란?

1) 칭찬(compliment)의 정의

칭찬(稱讚)이란, 좋은 점이나 착하고 훌륭한 일을 높이 평가하거나 또는 그런 유사한 말을 의미합니다. 칭찬(稱讚)의 한문적 해석은 일컬을 칭(稱), 기릴 찬(讚)입니다. 칭찬(稱讚)은 영어로 compliment, praise입니다.

2) 영어 표현

① 칭찬받다  : win [receive, enjoy] praise, gain the good word, get praised

② 칭찬받을 만하다 : deserve to be praised, be praiseworthy, deserve praise

③ 칭찬을 듣다 : be praised, get [win] a praise

④ 칭찬을 받다 : be [get] praised, win praise

3) 칭찬(compliment)에는 힘이 있습니다

① 자신에 대한 칭찬 : 자신을 칭찬하는 것은 자신감입니다. 스스로의 허물이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내면의 스스로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자학하거나 자괴하는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며 만족과 긍정의 힘은 만들어 줍니다.

② 타인에 대한 칭찬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사납고 포악한 범고래를 조련사가 공연장안의 관객들 앞에서 준비된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조련사가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포식자인 범고래를 이처럼 잘 따를 수 있게 조련을 하는 것은 조련사의 열린 마음으로 범고래를 신뢰하고 칭찬하였기에 가능했다는 책의 설명입니다. 상대에 대한 칭찬은 최악을 상황을 오히려 최상의 행복으로 만들어 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2. 역지사지(易地思之)

1)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맹자(孟子)》의 〈이루 편(離婁編)〉 하(下) 29장에 나오는 ‘역지 즉 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말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지사지 [易地思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 역사 속의 역지사지(易地思之)

우(禹)는 중국 하(夏) 나라의 시조로 치수(治水)에 성공한 인물로 알려진 인물이다. 후직(后稷)은 신농(神農)과 더불어 중국에서 농업의 신으로 숭배되는 인물로 순(舜)이 나라를 다스릴 적에 농업을 관장했다고 전해집니다. 맹자는 우 임금과 후직은 태평성대에 세 번 자기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못해 공자가 그들을 어질게 여겼으며,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는 난세에 누추한 골목에서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다른 사람들은 감내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태도를 잃지 않아 공자가 그를 어질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맹자는 “우와 후직, 안회는 모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 서로의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모두 같게 행동했을 것(禹稷顔回同道 … 禹稷顔子易地則皆然)”이라고 평하였습니다. 곧, 맹자는 안회도 태평성대에 살았다면 우 임금이나 후직처럼 행동했을 것이며, 우 임금과 후직도 난세에 살았다면 안회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며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러했을 것”이라는 뜻으로 ‘역지 즉 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지사지 [易地思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3. 칭찬과 역지사지

칭찬을 하려면 먼저 역지사지 하는 마음으로 인정(recognize, concede)을 해야 합니다.

인정이란, 나 자신이든 상대방이든 받아들이는 마음의 과정입니다. 인정은 또한 배려(consideration)입니다. 그래서 칭찬과 역지사지(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는 별개가 아니라 같이 움직이는 젓가락과 같습니다. 젓가락 하나로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두 개의 젓가락이 같이 움직여야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칭찬과 역지사지(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하는 말을 많이 표현하면 본인의 내면에 긍정적인 변화도 빨리 옵니다.

4. 인간의 기본 심리

인간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사회적 승인을 얻고 싶다고 하는 욕구가 대단히 강합니다. 때문에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만큼 괴롭고 슬픈 일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장발한 갈색머리라는 외모를 보고 판단하여 그 인품에 대해서는 우선 제대로 보지 않고, 별로 관계를 갖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무시합니다. 그들 로서는 그런 취급을 당하면 당할수록 이번에는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싶어서 이상한 행동을 취합니다.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꼭 특별한 인간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여성들이 반지나 귀걸이, 목걸이와 같은 액세서리를 몸에 지니는 이유는 자기만족이라는 자아도취도 있지만, 그것은 남에게 보다 잘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칭찬의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무인도에 있다면 아무도 액세서리를 지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인간 심리의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는 사람을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5. 칭찬과 역지사지를 이용하는 방법

1) 상대방의 장점 찾기

상대방의 내면을 알아 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성격이나 MBTI도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작은 장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합니다. "정말 보기 좋아", "뭐든지 잘하네"라고 좋든 싫든 말을 건네 보세요.

2) 상대방과 공감하기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긍정의 표현과 부정이 표현이 섞여서 들릴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물론, 상대방의 몸짓이나 행동, 그리고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만큼 상대를 평가하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상대방의 말 중에 청중 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표현해 보세요. "정말?", "많이 힘들어겠다", "지금은 괜찮은 거지?", "그랬구나"라고 상대를 공감하는 표현을 해 보세요. 

3) 인내하면 상황을 기다리기

우리는 미래의 어떤 상황을 너무 좋게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심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상상 이상의 기대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긍정적인 응답이 오지 않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6. 기대효과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인간관계와 부딪힙니다. 상황이 나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 좋든 싫든 누군가를 만나서 나를 알리고 평가를 받거나 상대를 평가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칭찬(compliment)과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말을 말하는 언어의 습관과 태도를 만들어 보세요. 분명, 당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가고 있을 것입니다.








비난(非難)은 개인이나 단체의 사회적 또는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불신임하고 나쁘게 말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용어는 칭찬의 반의어이다.
누군가가 무언가 잘못된 일을 한 데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때 이 행위는 비난을 받을 가치가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떤 사람이 옳은 일을 하는 데 도덕적 책임이 있을 때, 그 사람의 행동은 칭찬받을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다른 칭찬과 비난의 의미도 있다.
누군가의 좋은 옷차림을 칭찬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옷차림 감각을 자신의 스타일 감각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신경학

비난은 측두두정접합(TPJ)부의 뇌 활동을 수반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편도가 기여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긍정적인 행위에 반응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평온(平穩)과 평안(平安)



평온
평평할 평
편안할 온
  • 1.
    조용하고 평안(平安)함.


평온무사
평평할 평
편안할 온
없을 무
일 사
장단음
평온-무사 
  • 1.
    조용하고 평안(平安)하여 아무 일이 없음.

쉐레브

שֶׁלֶו 스트롱번호7959

1.

평온

2.

안전

3.

시30:7.

발음 [ shelev ]
어원
7951에서 유래
구약 성경
1회 사용
  • 1.
    명사, 남성 평온, 안전, 시30:7(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형통할 때(시30:6).




(역사)

평안
평평할 평
편안 안


    • 1.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無事)히 잘 있음.


    일로평안
    한 일
    길 로(노)
    평평할 평
    편안 안
    성어 주제
    장단음
    일로-평안 
    • 1.
      먼길이나 여행(旅行) 중(中)의 평안(平安)함.



    평안(平安)  샤롬

    שָׁלוֹם 스트롱번호7965

    1.

    온전한

    2.

    창43:27

    3.

    렘13:19.

    발음 [ shâlôwm ]
    어원
    79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37회 사용




    평온(平穩)

    1. [열왕기하 11:20]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2. [역대하 23:21]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

    3. [시편 107: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4. [시편 131: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5. [전도서 4:6]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평안(平安)

    1. [창세기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2. [창세기 26: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 [창세기 26:3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4. [창세기 28: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5. [창세기 29: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6. [창세기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7. [창세기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8. [창세기 43: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9. [창세기 44:17]
    요셉이 가로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10. [출애굽기 4:18]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1. [출애굽기 18:23]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12. [출애굽기 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13. [신명기 12: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14. [신명기 23:6]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찌니라

    15. [신명기 28:65]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 [신명기 29: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찌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17. [여호수아 10:21]
    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으나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

    18. [사사기 8:9]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19. [사사기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20. [사사기 18: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21. [사사기 18:7]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 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아무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22. [사사기 18:10]
    너희가 가면 평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23. [사사기 18:27]
    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24. [룻기 1: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25. [사무엘상 1: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26. [사무엘상 20:7]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찌니

    27. [사무엘상 20:13]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28. [사무엘상 20:21]
    아이를 보내어 가서 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찌니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29. [사무엘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30. [사무엘상 24: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31. [사무엘상 25: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32. [사무엘상 29:7]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

    33. [사무엘하 3:21]
    아브넬이 다윗에게 고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가니라

    34. [사무엘하 3:22]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35. [사무엘하 3:23]
    요압과 그 함께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혹이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36. [사무엘하 7:1]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37. [사무엘하 7: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38. [사무엘하 15:9]
    왕이 저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저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39. [사무엘하 15: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으로 돌아가라

    40. [사무엘하 17:3]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41. [사무엘하 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42. [사무엘하 19:30]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43. [사무엘하 20: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체하매

    44. [열왕기상 2: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45. [열왕기상 22:17]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46. [열왕기상 22: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47. [열왕기상 22:28]
    미가야가 가로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찐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가로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찌어다 하니라

    48. [열왕기하 4:23]
    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49. [열왕기하 4: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50. [열왕기하 5:19]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

    51. [열왕기하 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52. [열왕기하 5: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53. [열왕기하 9:11]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54. [열왕기하 9:17]
    이스르엘 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어 맞아 평안이냐 묻게 하라

    55. [열왕기하 9:18]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파숫군이 고하여 가로되 사자가 저희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56. [열왕기하 9:19]
    다시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었더니 저희에게 가서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57. [열왕기하 9: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58. [열왕기하 9: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가로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59. [열왕기하 22:20]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60. [열왕기하 25:24]
    그달리야가 저희와 그 좇는 자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신복을 인하여 두려워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우연히와 하나님의 섭리


    우연(偶然)히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攝理)


    한글개역 성경에서 "우연히"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모두 6구절로 나타났다.
    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1. [민수기 35:22]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 [룻기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3. [사무엘상 6: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줄 알리라

    4. [사무엘하 1:6]
    그에게 고하는 소년이 가로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라보니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병거와 기병은 저를 촉급히 따르는데

    5. [열왕기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6. [역대하 18:33]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반면에 섭리 또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용어를 검색하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연히와 섭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