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노래는 새 노래
신령한 노래(5구절)
역대상 25:1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역대상 25:2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역대상 25:3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새노래(9구절)
시편 33: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시편 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실 찬송을 말합니다.
새(2319) 노래(7892) 쉬르 하다쉬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시편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사야 42:10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주를 높여 찬송하라(시편 66:17)
KJV. NASB
I cried unto him with my mouth, and he was extolled with my tongue.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찌로다.
출애굽기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신령한 노래는 영적인 노래
가장 영적인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양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라"
손은 섬기는 도구, 일을 하는 도구
따라서 말씀(진리)를 살아내고
그 말씀을 의지하며 찬양하는 것을 신령한 노래 또는 새 노래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노래 할 때 하나님이 그 찬송을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
온산제일교회가 설립 될 마을의 당수나무 바로 옆에 땅을 구입하여 교회와 사택을 세웠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반대가 심하여 교회가 세워지기 어렵게 되었다.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마을 이장 이수엽씨가 찾아와서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야 하는데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니 교회 전기를 이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교인들은 우상 제사를 드리는데 어떻게 교회 전기를 빌려주느냐?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때 우상 제사를 드리려고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 전기불로 불을 켜면 귀신들이 오겠느냐?
내 생각에는 귀신이 오려다 도망할 것이라며 모두 집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주무시고 내일 새벽 기도회 시간에 다시 모이자고 하였다.
교회 전설을 임시로 당수나무에 가설하고 교회당 안에 찬송가 테이프를 틀어놓고 밤새도록 찬송이 흘러나가도록 하였다.
그 다음 날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시작하였다.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려는데 귀신이 오지 않으니 더 큰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큰 동제를 위하여 각 가정에서 돈을 더 내야한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생활이 어려운데 더 돈을 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같아 마을 이장에게 교회에서 예배하면 돈을 받지 않으니 그러면 예배를 드리자.
또 교회 때문에 귀신이 도망갔다면 구태여 도망간 귀신을 왜 섬기느냐?
결국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서울무당은 신경부락에서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이 신령한 노래이며 곧 새 노래라고 하겠다.
할렐루야 (시 146:1-2 , 시 147:1-9 , 시 148:1-5, 149:1-9, 150:1-6)
히브리서 13장 15절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라고 나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찬양 하도록 하나
님은 우리를 불러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10장 21절에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
라’, 시편 118편 14절에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라’, 예레미야 17장 14절에 ‘여호와여 주는 나
의 찬송이십니다’, 로마서 1장 25절에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고린
도후서 11장 31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
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신다’ 라고 시편 22편 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찬
양을 어떤 것보다도 기뻐하신다’ 라고 시편 69편에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
신 목적도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이사야 43장 21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것?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것은 마땅합니
다. 찬양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하나님, 우리는 찬양을 드려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는 말이 4백 회나 기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할 때 영적 부흥과 함께 범사에 하나님으로부터 내리시
는 은혜가 많았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성가대원을 288명을 만들었고, 솔로몬은 성전
을 지은 다음에 레위인에게 음악을 담당하여 늘 노래하는 사람을 4천 명이나 두었습니다. 역대상 23
장에 나옵니다. 악기를 가지고 늘 찬양하는 사람도 120명이 있었습니다. 스룹바벨 시대에 바벨론에
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중 128명의 청년 남녀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것이 에스라 2장 41절
에 나옵니다. 또한 성전을 다 완성한 다음에 148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님께 늘 영광 돌렸다는 기록
이 느헤미야 7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이어야 합니까? 찬양과 기도와 감사와 말씀이 함께 잘
조화를 이룬 예배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들은
말씀이 은혜가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사도 있어야 합니
다. 그래서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소를 드리는 것보다도 찬양을 받으시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너무 찬양이 없습니다. 또한 노래도 너무 잘못된, 저속한 노래들이 많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어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려는데 어떤 남자가 들어오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사나
이 우는 가슴 그 누가 알랴’ 그러면서 노래를 계속 부르려고 하는데, 우리를 보더니 분위기가 영 안 맞
으니까 식당 주인이 다른 방으로 모시고 갑니다. 그래서 ‘우는 가슴’을 안고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요
사이 너무 답답해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그럽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는데
그 말도 맞습니다. 고향도 잃고 부모도 잃으며, 또한 자신도, 삶의 목적도 잃었습니다. 왜 사는지 어디
로 가야할지 너무 방황합니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목적과 대상
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람을 노래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대상해 보십시오. 사람은 슬픔과 약점과
불행이 많으니까 이 세상으로 자꾸 내려갑니다. 그래서 그 노래를 부르면 부를 때도 문제지만 부른 다
음이 더 나빠집니다. 부르면 자꾸 더 정신적으로도 좋지 않고, 삶도, 생활도 좋지 않아집니다. 세상에
있는 노래이고, 세상을 보고 하는 노래이니 얼마나 고통스런 일이 많은 세상인데 기쁠 수가 없는 것입
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잘못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노래들을 너무 많이 부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찬양을 불러야 하지만
이 시대에 건전한 노래를 부르고 또한 힘을 주며 소망을 주는 이런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로 이 사회
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나쁜 노래를 부르면 더 나빠집니다. 그러나
찬양은 노래의 왕입니다. 어떤 노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우리의 삶
을 차고 올라가도록 하여, 우리의 삶을 위를 향하여 소망과 자유함과 평안과 기쁨과 용기와 믿음과 신
뢰를 가져다 주며, 우리 마음에 어두움이 모두 다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 의학적으로도 노래를 가지
고 치료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모두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노래를 부릅니다. 의학뿐
만 아니라 식물도 노래를 틀어 주면 꽃도 잘 피고, 향기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모두 다 증
명이 되었습니다. 동물도 닭을 키우는데 양계장에 어떤 노래를 틀어 주느냐에 따라 닭이 달라집니다.
훨씬 더 닭이 건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찬양하도록 만들어 주셨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
을 찬양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맹목적이 며, 허무
함을 노래하는 게 아닙니다. 전능하신 자, 지혜로운 자, 창조자, 영원하신 분, 왕의 왕이신 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 아들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분,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우리는
그 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찬양은 살아 있는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거듭나고 성령이 함께 하시며 구속함을 받지 아니하면, 이 노래를 절대로 부를 수가 없습니
다.
시편은 노래의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신, 구약 성경의 엑기스를 다 모아 놓은 것
이 시편이다.’ 그렇게 말하고도 있습니다. 시편은 또한 성경의 중심에 있습니다. 신, 구약 전체에 중앙
에 있습니다. 그것이 노래입니다.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레위지파들도 노래했습니다. 예수
님도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하루 전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찬송하며 올라갔다는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노래하셨습니다. 그 노래
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시편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는 노래입니다.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양입니다.
시편의 전체의 주제는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 마지막 절 끝은 할렐루야로 마무리하
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할랄’이라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다.’에서 나왔으며, 예레미야 29장
13절입니다. ‘송축하다, 칭찬하다, 자랑하다, 빛내다’ 이런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할
렐루야에서 ‘루’자는 복수 명령형입니다.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에서 ‘야’자는 야훼의 줄인
말입니다. 그래서 야훼를, 하나님을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은 ‘하나님을 찬양하라’ 는 것입니다. 메츠헨네는 말하기를 ‘큰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거룩한
사랑과 기쁨으로 그 분을 찬양하라,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그를 찬양하라, 흑암에 대한 승
리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
나님으로 만족하면서 찬양하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경외하며 찬양하라, 하나님의 모든 섭
리에 즐겁게 순종하고 그 분의 사랑을 기뻐하며 그 분의 크신 자비 안에서 위로를 얻으면서 찬양하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찬양의 조건이 됩니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찬
양하는 것입니다. 정글에서나, 사막에서나, 바다에서나, 감옥에서나, 오늘 죽음이 나에게 올지라도 찬
송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늘 찬송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축복이고 은혜며, 힘이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일하면서도, 씨를 뿌리면서도, 거두면서도, 밤이나 낮이
나 우리의 일생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고 에베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에는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의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라고 새 번역에 기록되
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늘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5절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찬양하
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11절에는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 말씀을 새 번역 개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
을 갈아 입히셨기에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나
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감사를 드립니다. 내게 슬픔의 옷, 상복을 벗기시고 나들이옷을 갈아 입혀
주셨습니다.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속하
심이 있기 때문에 찬양이 있습니다. 구약에 모든 찬양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이 있은 다음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다음에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승리,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에 대한 감사를 주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를 이렇게 영광스럽게 해 주신
참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찬양이 더 많이 발전해야 합니다. 제가 독일 교회에 친구들이 있어서 가서 보면, 유럽
의 교회들은 백 명인데도 찬양 목사가 따로 있습니다. 미국 교회들도 보면 찬양 목사가 꼭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하는 목사가 너무 많아서 말이 많고, 찬양은 너무 적습니다. 오늘 집에서도 찬양을 많이
부르고, 좋은 오페라, 뮤지컬, 음악회, 오케스트라 이런 것이 우리에게 많아야 됩니다. 그래야 좋은 것
이 작용해서 역작용이 생깁니다 물리학적으로... 너무 나쁜 문화가 많이 밀려오는데 이 나쁜 문화를
막아 낼 힘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모두들 연약하고 그 길로 빠지니까 이걸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은 하
나님의 교회에서 좋은 찬양이 흘러 나와야 됩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들은 찬양을 많이 하
고 늘 찬송하면서 찬송 속에서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찬양은 기도입니다. 찬양하면 기쁨이, 힘이, 능
력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전쟁에서도 이기고, 병도 떠나갑니다. 다윗은 노래를 부르면서 악기
를 연주할 때 사울 왕의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요사이 과학이 발달한 것 모두 다 성경이 뒷받침합니
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장, 자장 괜찮다, 괜찮다’ 그러면 괜찮아집니다. ‘자장, 자장’ 노래
를 부르면 잠이 잘 옵니다. 노래같이 잠을 잘 오게 하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 찬송 틀며, 불러 보십시
오. 여러분에게 영적인 풍요로움으로 이 봄에 내 영혼에 시냇가의 시냇물같이 심령이 살아 역사 할 줄
로 믿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찬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도 능력입니다. 정욕의 힘으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오늘 2부 예배에 사람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3부도 많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2부가 3부보다 훨
씬 더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이렇게 2부에 몰리나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하여튼 식당까지 모
두 다 찼습니다. 전부 로비와 비디오 실 열 개가 넘는 곳이 2부에 모두 다 찼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습
니다. 이상하다 2부에 주님이 오시나 어떻게 이렇게... 나중에 보니까 야구 보러 가려고, 2부 드리고
야구 보러 가려고 그런 것입니다. 야구는 누구나 하는 게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야구를 해야 야구 근
육이 있고, 야구 근육이 발달해야 합니다. 힘은 근육에서 나오지 뼈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야구 근
육이 있습니다. 농구는 농구 근육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공을 받으면 공이 그냥 쫙쫙 나가는 것입
니다. 축구는 축구 근육이 있습니다. 따로 있습니다. 근육이 그렇게 발달합니다. 테니스도, 골프도, 탁
구도 근육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쳐 보십시오. 조금 밖에 안
나갑니다. 갈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근육이 있어야 힘이 있습니다. 알통이 없으면 안 됩니다. 찬
송도 찬송하는 영적 근육이 있어야 합니다. 찬양도 힘입니다. 실패자는 그냥 허무한 노래를 부릅니
다. 못나옵니다. 찬양은 은혜 받은 사람, 기도하는 사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구속
함을 받은 사람이 합니다. 그 근육이 찬양하는 근육으로 발달해야 합니다. 찬양하는 능력이 있어야 됩
니다. 항상 입에서 찬송이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찬송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승리의 종교입니다. 이 찬송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는 나라마다 찬양
이 울려 퍼집니다. 어떤 마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어떤 마을
에 해마다 처녀를 한 사람 제물로 바칩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어디에 바치느냐 하
면 이무기에다 바칩니다. 이무기가 그 처녀를 데려가 버립니다. 그러면 일 년 동안 그 마을에 재난이
없고 풍년이 들며, 이 이무기가 노하지 않는다 라는 이런 미신을 우리는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못에다 바친다하고 우리 마을에서도 저는 그런 이야기를 어려서 많이 들었습니다. 처녀를 바
친다, 애를 바친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 마을은 우울합니다. 살기는 살아도 해마다 바쳐
야 되니까. 그 해에도 막 불안에 떨고 있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마을에 들어와서 “어떻게 이렇게 불안
해합니까?” “아이고~ 말 마십시오. 오늘밤에 이 마을에 귀한 처녀를 한 명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 그러냐고 그 집이 어디입니까?” 그래서 그 청년이 그 집에 갔습니다. 그 집에는 온 가족이 웁니
다. 오늘 그 딸을 제물로 바쳐야 됩니다. 그래서 청년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제가 해결 하겠습
니다.” 그러고는 그 처녀가 입었던 옷을 제게 모두 다 달라고 하고는 자기가 갈아입는 것입니다. 갈아
입고 밤에 큰 연못 위에 올라갑니다. 으슥한 달밤에 올라가서 밤중이 되었습니다. 동민들은 다 보고
있는데 드디어 불이 번쩍이며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더니 그 이무기가 죽어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나 하고 한참 지나서 새벽녘이 되었는데 그 청년이 다 찢어져 가지고 다 상한 몸으로 겨
우 살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온 동민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이무기가 죽음으로 마을이 모두
다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없어졌습니다. 온 마을이 기뻐하고 그래서 그 승리한
총각을 처녀하고 결혼을 시켜서 잘 살았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이야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늘 있었던 이야기인데 이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참 많이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모두 다 죄에 눌리고 마귀에 눌리며, 사망권
세에 눌리고 우리 조상들이 미신 안 섬긴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이 교회 나와서 하
는 말이 예수 믿으니 너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날마다 불안하게 합니다. 된장 담는 것까지도
모두 다 물어야 하고, 전부 다 물어야 하는데 안 물어보고 하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우상입니
다. 그런데 예수 舅만?물어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렇게 편
할 수가 없습니다. 농촌 목회를 제가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참 편하다 그럽니다. 귀신 섬겨보십시오. 처음에 섬길 때 쉽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
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옷을, 죄인의 옷을 갈아입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모두
다 맡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우리를 그 사망의 세력에서 건지시고 지금 우리의 남편이 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무 좋아 찬송이 나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찬송은 자기 혼자 부르
는 것도 아니고 잘 살아서 부르는 것도 아니며, 기분 좋아서 부르는 노래는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환
경이 좋아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내 안에, 내 영혼에 주신 영원한 축복이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본인이 또한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끊임없는 영광을 받으시고 찬송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십
니다.
시편 146편을 한 번 보겠습니다. 전부 할렐루야입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
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평생토록 찬송해야 합니다.
내 생전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10절 마지막에 보면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
히 대대에 통치 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47편도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
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러분! 이 세상 노래 부르며 막 옷을 찢고 비틀고.. 저는 아름답지 않게 보
입니다. 모두 열광하고 막 소리 지르며, 죽는 것같이 벌벌 떨어도 그래도 제 눈에는 아름답게 안보입
니다. 노래를 왜 그렇게 부릅니까? 천천히 서서 불러도 얼마든지 되는데..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
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12절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
양할찌어다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했습니다. 이런 분을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
까? 148편에도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데서 찬양할찌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
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찌어다” 모두 전부 할렐루야입니다. 14절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
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로 나옵니
다. 149편 1절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150편 6절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하고 시편이 끝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서 끝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미국에 백화점 왕인 제이시 페니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사업이 잘 되다가 사업을 실패 했
습니다. 1929년 미국에 대 불황이 닥쳤는데 그때 사업이 다 부도나고 아내도 죽고 절망 가운데 빠졌습
니다. 자기는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죽고 싶어서 유언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이, 삼 년
아무리 병원을 다녀도 병원에서 병명을 모릅니다. 병원도 가면 조금 차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병은
사실 못 고치지 않습니까? 계속 병원에 드나드는데 아무리 가도 안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복도
를 지나가는데 이제는 더 이상 살기 싫고 죽고 싶은 마음으로 지나가는데 병원 환자실에 심방 와서 노
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변화가 왔습니다.
찬송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아 심령이 새로워지고 능력을 받아 그래서 나와 가지고 이 분이 제이시
페니라고 하는 백화점을 세워서 세계적인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 뉴욕이나 LA 어디든지
가면 제이시 페니 백화점이 없는 도시가 없습니다. 미국에만 해도 수 백 개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찬양할 때 찬양을 들어도 치료가 됩니다. 부르면 더 좋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
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성가대원입니다. 저는 사실 제 설교 잘 안 듣습니다. 늘 아쉽고
부족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은혜를 받느냐하면 성가대가 찬양할 때 제 눈에는 눈물이 주룩 흐릅니
다. 참 감사합니다. 찬양할 때 그렇게 제 영혼에 기쁨이 올 수가 없습니다. 찬양은 참 좋습니다. 그래
서 우리 한국 교회도 찬양을 좀 많이 불러야 됩니다. 이 복잡하고 괴로운 세상 교인들도 찬瑛?안 부
르고 노래방 가는 교인이 많습니다. 그런 데에 가면 안 됩니다. 찬양을 불러야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
냅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기쁠 때도 찬양, 슬플 때도 찬양, 언제나 찬양하는 것입니
다. 우리는 항상 좋아서 찬양하는 게 아닙니다. 스펄전 이라는 유명한 분은 말하기를 ‘우리는 일생이
꿀과 같이 달아도 해롭고, 쓰기만 해도 해롭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항
상 춥습니까? 항상 덥습니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좋은 날도 며칠 안 되고, 항상 햇볕만 들면 이
땅은 전부 사막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비도 오고 눈도 오며, 햇빛도 비추고 고루고루 이래야 합
니다. 우리 성도들이 날씨보고 찬양하려면 하루도 찬양 못합니다. 이런 날은 이래서 찬양하고 저런 날
은 저래서 찬양하며, 봄에는 사론의 꽃 찬양하고, 가을은 가을의 노래, 밤은 밤의 노래, 혼자 있을 때
는 혼자 있어서 찬양하고, 늘 찬송하는 이런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가대에서 한 곡 더 찬양을 하겠습니다. ♬내가 만민 중에.....
우리 교회에도 솔로몬 시대같이 주일 날 봉사하는 성가대원이 한 삼천 오 백 명이 되는데 내년에는
사천 명으로 늘리고 다음 달에는 성가대석을 2층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2층에 한 백 오십 명 정도 더
앉으면 그 쪽에 앉는 분들도 다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 6백 명 정도 봉사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했습니다. 이 분은 원래 궁중에서 왕의 행사에 언제나 작곡을 해서 행사 때마
다 자기 주어진 일을 감당을 했습니다. 그러던 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을 했
습니다. 이 작곡한 메시아 내용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할렐루야를 시작
으로 해서 끝까지 할렐루야로 가고 중간에 보면 왜 하나님을 찬양 하냐? 왜 할렐루야 하느냐? 그는 영
원히 다스린다 라고 나옵니다. ♬영원히, 영원히 할렐루야, 할렐루야 왕의 왕♬ 내가 모시는 분은 왕
이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왕에게 주는 작곡을 하지만 지금 이 노래
는 왕의 왕에게 바친다 라는 것입니다. ♬왕의 왕 또 주의 주♬ 영원히 다스린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
분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은 왕의 왕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
니다. 찬양하는 가정은 축복의 가정입니다. 어두움이 그 가정을 절대로 엿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성가 ‘비전’을 잠깐 배우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도 다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 우
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주의 피로 우린 구원 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 드
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
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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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시 146:1-10)
오늘 시편146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여호와를 찬양하라, 노래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찬양의 시입니다. 이 시편은 150개의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치는데 “할렐루야 시”의 첫 번째입니다.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는 포로기 이후의 학개와 스가랴의 작품이라고 유대 랍비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페르시아의 고레스황제가 유대인들을 돌려보내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였다가 중도에 이웃나라들이 반발하니, 중단하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이 시를 쓰고 있다고 삶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놓고 강해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편의 시를 놓고 분석해보면 내용을 보아 몇 개의 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연(聯)이라고 하면 시(詩)에서 몇 행(行)을 한 단위로 묶어서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시146편은 4연으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제1연 : 찬양하라(1-2).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이 3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물어보신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찬양시의 서론입니다. 시인은 이중적으로 찬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사람, 자기 영혼에게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스스로에게 찬양하리라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에게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생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채울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생전에”, “나의 평생에”라는 말은 나의 계속되는 존재 속에,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을 때까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 하고, 권면하고 명령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행해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어느 목사님의 하나님의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셔서 나와 동행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 에녹과 함께 300년 동안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나의 편이 되어 주셨고,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우리의 일생 다하도록 하나님을 높여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으로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 중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시편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42:8에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찬송을 다른 사람이나 우상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송받으실 여호와이십니다.
사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웹스터 사전을 보면 “찬양하라”는 말은 “칭찬하다, 찬미하다, 존경하다, 갈채를 보내다, 인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한다는 말은 어떤 사건을 인정하고 확고히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정한다는 말은 우리가 승인한 바를 받아들이고 공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환난과 질병과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한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나의 하루하루 모든 삶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가곡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밞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6월 한 달 이 복음성가를 부르려고 합니다.
2. 제2연: 여호와만 바라라 (3-5절)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고 하십니다. 귀인이라고 하면 고관, 귀족, 방백을 의미합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의지하지 말며”, “의지하지 말지니 ”라고 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면 그 날로 즉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의 모든 인격과 성품과 생각도 소멸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건강하시던 분들이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였고, 사업을 잘 하고, 건강하여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도 잠시 동안이요, 모든 소유와 가진 능력을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과 계획과 능력이 다 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야 철이 들고,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의 부모를 의지합니다. 성장할 때에야 부모님이 도와주셨고, 부모님의 은혜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존의 문제를 놓고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5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암송하면서 깊이 묵상하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영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케네스 리치라는 영성신학자는 “기독교의 영성은 그리스도께서 주도권을 잡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의 과정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성의 목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을 소유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영안을 열러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귀를 예민하게 세우면서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버림과 침묵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 말씀에서 흘러나와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핵심을 놓치고 주변의 지협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히브리 성경을 직역하면 “복되도다! 그의 도움이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소망이 여호와 자기 하나님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진정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야곱이란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약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잘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는 형님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내가 받아야 하고,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 내려오는 가문의 축복도 내가 차지하고 내가 받아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형님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가 속인 형 에서가 400명의 사람을 이끌고 동생 야곱을 치기 위해 온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얍복 강변에 엎드려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몰아가시는 것을 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가 외삼촌 집으로 갈 때는 빈손 들고 간 사람이지만,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4부인과 12명의 자녀들과 소와 양과 염소가 떼를 이루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도움과 나의 소망은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항상 사모하는 열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잡아끌어 사용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누가 복 받을 사람입니까?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올브라이트(W.F. Albright)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이스라엘을 지정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 이스라엘 나라를 3개 대륙의 열결 지점에 두신 것입니까? 위에는 앗수르와 시리아가 있고, 오른쪽에는 바벨론이 있고, 밑에는 애굽이 있고, 왼쪽으로는 블레셋과 바다가 있고 해서 사방으로 다 적에 의해서 포위되게 하셨습니다. 왜 이런 곳에 두신 것입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지정학적인 면에서 이스라엘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공장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하도 더워서 어쩔 줄을 모르다 지하실에 큰 냉동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잘 됐다 싶어 땀이나 식힐 심산으로 냉동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철커덕 소리가 나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당황한 나머지 문을 두드리고 악을 써봤지만 구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청년은 상상을 합니다. “내 몸이 점점 얼어간다. 몇 시간 후면 죽겠구나.” 이틀 후에 사람들이 냉동 창고의 문을 열어 보았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가동되지 않았고 기온이 섭씨 15도에 불과했습니다. 산소도 충분했습니다. 청년을 죽인 것은 살인적인 냉기가 아니라 절망이었다고 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동서사방을 바라보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위로 난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잘 사는 것이 소망입니까? 이 세상에서 권력을 누려보는 것이 소망입니까? 저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척 콜슨’은 자신의 감옥생활 경험을 중심으로 ‘본 어게인(Born Again)’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교도소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죄수들 사이에 세 가지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 종류는 희망이 없는 죄수로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자신의 몸을 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역시 가망이 없는 죄수들로 자기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셋째 종류는 감옥에서 나갈 날을 기다리며 기회 있을 때마다 마당에 나가서 운동을 하는 유형이었습니다. 그들은 감방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마치 내일 나갈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설령 몸은 갇혀 있지만 마음은 밖에 나가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의 삶은 자유롭습니다. 소망을 품은 사람은 희망이 넘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관주의자들은 빛 가운데서도 어둠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렘29:11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 내일을 주셨고, 희망 곧 소망이 되어주셨습니다.
유태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프랭클(Viktor Frankl) 박사는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태인 수용소에 대한 관찰한 기록으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란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있는 인간상을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희망을 끝까지 가진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자기 혼자서 희망을 이룰 뿐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이웃들을 도와주고 희망을 계속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이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한 상태에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영원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제3연 : 의로운 통치 (6-9)
제3연에서는 1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6-9절입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여기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눌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하여 정의로 심판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만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맹인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비굴한 자를 일으켜주십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6-9절의 말씀을 통하여 메시아의 시대를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서 오시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돌아보시고 신원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연약함을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제4연 : 결론(10)
10절입니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은 당신이 직접 그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고 대대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형통하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이런 말씀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은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망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비로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남은 생애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찬양으로 남은 생애를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억눌린 사람들, 주린 사람들, 갇힌 사람들, 맹인, 비굴한 사람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대대로 통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