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Text) & 컨텍스트(Context)



텍스트(Text) & 컨텍스트(Context)


성경 해석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

성경 해석에서 문자적 접근을 넘어 상황적 해석이 필요한 이유

성경 해석은 단순히 문자(텍스트) 그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록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컨텍스트)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더 깊이 깨닫고, 그것이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과정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참여와 역사적 책임이 성경 해석과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성경이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작용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본 글에서는 문자적 해석의 한계와 상황적 해석의 필요성을 신학적, 역사적, 실천적 측면에서 탐구하며, 성경 해석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논의하겠습니다.


문자적 해석의 한계와 성경의 상황적 이해

1. 성경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기록하신 계시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문자 그대로만 해석할 경우, 원래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시대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을 할 위험이 있습니다.

  •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언급된 정결법과 제사 규례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종교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지만,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히 10:1-14).
  • 바울 서신에서도 여성의 역할(딤전 2:12)이나 노예제도(엡 6:5-9)에 대한 언급을 오늘날의 사회 구조와 동일하게 적용할 경우, 본래의 의도를 벗어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2. 문자적 해석이 성경의 본래 메시지를 제한할 수 있음

문자적 해석은 본문에 기록된 단어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지만, 이것이 성경의 깊은 의미를 모두 담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 대라"라고 하신 말씀을 단순한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기독교인의 윤리적 원칙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 성경은 시적, 비유적, 예언적, 교훈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각각의 문학적 장르에 따라 해석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많은 신학적 오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해석과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1. 성경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한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의 영적 성장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공동체적 메시지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은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기독교인은 세상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 선지자들은 당시 사회의 부정의와 불의를 비판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했습니다(암 5:24, 미 6:8).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을 넘어, 가난한 자를 돌보고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키는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하셨습니다(눅 4:18-19).

2.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임과 성경 해석

기독교인은 성경을 단순히 영적인 가르침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천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사회 정의, 평등, 인권 등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돌아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 19세기 노예제 폐지 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사회적 정의의 원리로 해석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사회 변혁의 원동력으로 삼아 인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오늘날에도 환경 문제, 난민 문제, 경제적 불평등 등의 이슈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경 해석과 실천적 적용

1.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성경 해석

성경은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해석될 때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며, 그것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 초대 교회에서는 성경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그 가르침을 함께 실천하였습니다(행 2:42-47).
 * 신학적으로도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성경 해석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하며, 신자들이 교회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성경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2.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삶에 적용하기

성경을 해석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성경에서 정의를 강조하는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될 수 있습니다.
 * 이웃 사랑의 원칙은 난민,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돕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교회는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성경 해석은 단순히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말씀이 기록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이는 기독교인의 사회적 참여와 역사적 책임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며, 정의와 사랑을 이루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성경 해석이 단순한 신학적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삶으로 이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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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와 Context

hermeneutics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대상이 있다면 Text, 즉 본문입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없다면, 성경해석이라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성경해석의 출발점이며 또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출발점과 도착점을 가진) 성경해석이지만, 그 여정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의 수들이 매우 많습니다. 다시말해 해석의 결과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해석들은 다양한 이해를 넘어서, 상이한 결과들까지도 야기합니다. 동일한 본문에 대한 너무도 다른 해석과 주장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성경해석의 시작과 끝은 성경텍스트이겠지만, 그 여정의 완성은 Context, 즉 문맥과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맥과 배경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고대근동의 이해가 그렇습니다. 성경이 집필되던 시기의 시대상과 또 당시에 통용되던 문학적/문화적/지리적 이해 등이 그렇습니다. 흔히 성경의 여러 이야기나 이미지들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 비교하는 작업이 좋은 예입니다. 둘째로는 성경본문을 집필하던 (인간)저자의 의도와 그 공동체의 신학적/신앙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이해는 성경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닌, 인간이 창작한 모든 종류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매우 자연스럽고 또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영상을 먼저 시청해보겠습니다. 이 영상은 무엇을 말하는 영상인지를 생각하시면서 시청하시면 되겠습니다.

보셨다시피 이 영상은 현대의 어느 감독이 만든 영화 중 한 대목을, 어느 유튜버가 추출 및 편집한 결과물입니다. 21세기 홍수처럼 쏟아지는 다른 영상물들과 비교해볼 때, 원본 영상물과 편집본 모두 그렇게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가진 영화는 아닙니다. 어쩌면 B급 영화 수준의 매우 일반적인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용도 지루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린 소년이 거대한 장수를 대상으로, 돌팔매질을 한다는 상황설정이 황당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럴싸한 전쟁장면 없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결과가 비평가들의 지탄을 받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아마도 저급 코미디 영화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작 의도와 감독의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해당 영상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 영상이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특정 공동체의 신앙과 신학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상미나 촬영기법등은 더 이상 핵심 평가 요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비록 이 영상에서 표현하지도 않았고, 또 특정 대사로 담아내지도 않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선이해 할 때, 이 영상의 의미와 가치는 달라질 것입니다. 마치 거친 글씨로 쓰여진 편지이지만, 그 편지가 자녀를 향한 노모의 손글씨 편지일때 느낄 수 있는 감동처럼 말입니다.

성경해석의 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본문의 배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본문을 집필하고 또 전수하였던 이들이 가졌던 고백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만의 특수한 고백를 선이해하지 않고서는, 해당 본문의 온전한 평가와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이해가 없는 해석자들에게는, 성경 본문이 단순한 짜집기의 B급 창작물로 밖에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이라는 관점을 이해하는 해석자들에게는, 해당 본문의 의미와 가치는 심히 다를 것입니다. 결국 성경해석의 여정이란, 성경을 고대의 단순한 역사적 문서로만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 성경을 간직하고 전수하던 이들의 신앙적 문서로도 볼 것인지의 (선택/해석/평가/수용)문제입니다. 때문에 성경해석은 신앙고백의 문제이자 신학적 관점의 갈림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어떤 선택지를 택하든 그것은 해석자들의 권리겠지만, 그 평가와 해석적 결과물이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컵에 들어있는 물을 그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은 신학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낙관론자: 물이 반이나 남았군 / 비관론자: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군 / 타노스: 물이 딱 완벽하군

만약 여기까지의 논리전개를 잘 이해하시고 따라오셨다면, 신구약성경의 입체적 해석을 위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심지어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나 아브라함도 더할 나위 없는 유대인이자 유대인들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나는 그들의 고백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물을 단순한 시대적 유산물이 아닌, 신앙적/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한 일종의 통로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신앙고백이 어떻게 또 얼마나 지속되어 왔는지를 비교 연구하는 것도 성경해석의 또 다른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문헌과 유대학 연구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 해석전통에 유의미한 기여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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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적 성경 읽기》
콘텍스트로 나아가면, 텍스트는 어떻게 되나요?

         11000 세계관적 성경읽기 / 전성민 지음 / 성서유니온 펴냄 / 11,000원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자기 생각이나 관점을 성경 메시지로 오해하곤 한다.
아무리 성경을 객관적으로 읽어낸다고 한들, 읽는 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경험을 성경 이해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성경읽기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인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전성민 원장은 이 책을 통해 ‘세계관적 성경읽기’를 제안한다.
‘세계관적 성경읽기’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고 이 시대에 성경을 적절히 읽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성경읽기 태도로 ‘겸손함’을 강조한다.
“성경을 나의 입장이 아니라 저자의 세계관 속에서 이해하려는 성실함과 나의 읽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며, 세계관적 성경읽기를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긍정하며 타자와 겸손히 대화하는 성경읽기”라고 정의한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의 신앙고백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우리가 “나와 언어와 신앙과 이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다면, ‘내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고백과 달리 우리는 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107쪽)

성경읽기는 결코 골방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 행위’에 그칠 수 없으며, 이웃의 필요와 창조세계에 관심을 두는 ‘공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2019년에 최종원 교수의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비아토르)가 출간된 이후 강의에서 나온 “콘텍스트로 나아간 다음 텍스트는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부제도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이다. 이 책은 “콘텍스트에서 생긴 질문을 품고 텍스트를 읽을 때에만 텍스트가 살아난다”고 밝힌다.

후반부에는 ‘세계관적 성경읽기’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살펴보는 작업과 한국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자리와 방향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한국 기독교가 ‘평화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혐오와 차별, 독선과 대결을 넘어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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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성경해석과 텍스트)

◈ 키에르케고르의 읽기와 성찰에 대한 세 가지 비유담

야고보서 1:22~27 :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이 자기를 보기 위해 거울 표면을 검사하는 것을 넘어설 경우에만, 말씀을 들여다봄으로 유익을 얻는다고 하였다.
‘거울 이미지’는 우리에게 현대 해석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텍스트 안에는 독자의 해석 활동과 별개로 독립되어 있는 어떤 실체를 반영하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면 텍스트는 오로지 독자의 실재를 반영할 뿐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연애 편지(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이상한 말로 쓰인 편지를 받은 한 남자에 관한 것) :

언어적이며 역사적인 학문적 작업은 진짜 읽기에 해당되지 않고, 이러한 작업은 거울을 통해 거울 안을 들여다보기보다는 거울 면을 바라 보는 것과 같음. 이 비유를 통해 근대 성경 비평의 위험 제안

왕의 칙령 : 공포된 왕의 조례에 순종하는 대신 새로운 해석을 하는 신복들에 대한 이야기

키에르케고르는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해를 추구하면서‘신앙 안에’있는지 자신을 살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 비유담의 교훈은, 독자들이 해석의 특권과 책임을 진지하게 취급하기를 중단했으며 해석의 목적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닌 타자로부터 온 메시지를 회복시키고 그 메시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 철학과 문학 이론 : 플라톤에서 포스트모더니티까지

‘포스트모던적’ 조건-해석 이론과 실천에 관한 오늘날의 논의는“의미에 대한 불신(incredulity toward meaning)이라 할 수 있다.

1) 의미에 대한 불신

① 의미란 무엇인가?

※ 플라톤의 대화록「클라툴루스」

◎ 헤르모게네스(소피스트들의 제자) : 단어들은 그저 관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기에 단어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믿을 만한 안내자가 되지 못함. 언어를 임의적 관례들의 체계로 봄 ➡ 소쉬르의 언어학에 영향을 미침

◎ 크라툴루스 : 전부가 아니면 포기하는 입장. 이름은 사물에 대한 완전한 표현 아니면 그저 불명료한 발음에 불과하다고 주장.‘지시로서의 의미’에 대한 근대적 강조와‘의미의 무규정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강조점을 담고 있음. 사물들에 해당되는 무상성을 기호들에게도 적용. 언어도 세계도 계속 변화하는 흐름 가운데 있기에 아무것도 참되다 할 수 없음

◎ 소크라테스 : 언어는 관례적이기도 하며 본성적이기도 하다는 중간 입장을 전개. 그는 어원들 또는 단어의 기원에 호소하며 언어를 흉내내는 소리라 함

② 필자의 의견 :‘의미’는‘명명하기’이상이라는 현대 사상가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참되게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옹호하는 플라톤의 관심사를 계속해서 공유하지만, 플라톤과는 반대로 언어와 언어 해석의 문제에 대해 신학이 갖고 있는 연관성을 쉽게 기각하지는 않음

③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생각

◎ 언어와 실재에 대한 진리는 유동적이라는 것

◎ 마골리스 :“실재는 불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흐름인가?”. 해석이란 어떤 객관적 실재에 대해 주관적인 주해를 다루는 것이 아닌 텍스트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

2) 현대 철학의 문학적 전환

① 철학의 문학적 전환

◎ 자크 데리다(해체주의의 아버지) : 해체는 모든 형태의 담론에서 작용하는‘텍스트성’을 탐구함으로 과거에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던 단단하고 견고한 경계선을 흐리게 만듬

◎ 중심과제는 해석자들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이론적 작업.

◎ 해석은 텍스트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실천적 작업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며, 해석자의 상황을 자리매김하는 정치적 작업에까지 확대시켜야 한다.

② 다양한 본문 해석 이론과 실천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철학적 쟁점들

◎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 : 텍스트에 진짜 무엇인가가 있는지의 문제

◎ 인식론의 문제 : 텍스트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는지의 문제

◎ 윤리학에 대한 문제 : 텍스트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독자들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

➜ 이 문제들은 “인간이 된다는 것, 의미의 작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

③ 해석학의 위치

◎ 과거 해석학은 학문의 신데렐라

◎ 19C에 와서야 학문의 무도회장에 초청 받음(해석학은 인간 이해 일반에 대한 연구가 됨)

◎ 20C 후반에 와서 해석학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다루게 됨 ➜ 해석학은 역사 의식의 사촌이며, 실재는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전통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다.

◎ 해체주의, 문예 비평 철학자들에 의해 해석학에 대한 매력이 점차 없어져 감

◎ 데리다(문예 비평 철학자들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의 주장 : 반성이나 자기 반성에 의해 자신들의 제한된 관점들을 넘어 세계와 자신을 신이 보듯 볼 수 없다고 주장

◎ 니체에게 예술가는 최상의, 가장 정직한 철학자, 즉 창조적 해석자임

3) 권위와 이데올로기

① 데리다의 해체 전략 배후에 있는 동기 : 권위에 대한 부당한 호소와 권력의 부당한 행사들에 대한 경각심에서 비롯됨. 확정된 또는 정확한 견해해 도달했다고 으스대는 철학자와 주해자에게 도전

② 인문학에서 권위의 문제, 즉 역사와 문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인간성 자체에 관한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결정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 의미와 해석 : 문학적 지식의 도덕성

▶ 해석학은 모든 것이 일종의‘텍스트’인 한, 즉 해석을 요청하고 있는 인간 삶의 표현인 한, 삶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

1) 의미와 해석

◎ 전통적으로 해석은‘의미’를 끄집어 내는 절차를 가리키는데, 의미라는 용어에 대해 최근의 학자들은 모라토리움을 요구함 ➜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많은 일들을 단지‘의미’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에

◎ 한 가지 해석을 하나의 선택안 이상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적 지식이 진실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필자는‘의미’라는 용어를 채택하기로 결정함

2) 하비(Harvey)와 피쉬(Fish)

◎ 하비의「역사가와 신자 : 역사 지식의 도덕성과 기독교 신앙」: 신념이 역사적 탐구를 왜곡시키는 효과를 가짐. 하비의 지식의 도덕성을 뒷받침하는 가치관은 계몽주의에서 비롯. 도덕적 신념은 합리적 평가와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 함. 비판적으로 해석된 현재적 경험이 과거에 대한 주장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됨. 하비는 의심이 믿음보다 더‘도덕적인 것’이라고 결론 내림

◎ 피쉬의「이 수업에는 텍스트가 있는가」: 독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텍스트 내부의 의미 같은 것은 전혀 읽을 수 없고, 의미는 독자의 읽는 활동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활동의 산물임.

3) 성경 연구와 관련한 주해자들의 싸움

◎ 해석학에 대한 피쉬의 접근 방식은 성경에서 권위를 제거한다

◎ 해석은 궁극적으로 텍스트가 아닌 독자의 정체성에서 그 단서를 얻음. 독자의 해석 체험을 지배하는 것은 정전(canon)이 아닌 공동체

4) 이 책의 목적

◎ 읽는 자들이 정당하고 책임성 있게 성경에 대한 문학적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 가능성을 명시하고 옹호

◎ 텍스트에 어떤 의미가 있고, 그 의미가 읽는 자에게 알려 질 수 있으며, 읽는 자들은 그 의미를 알고자 노력해야 함을 확언하기 위함

◈ 비평의 세 시대 : 책의 평면도

▶ 문학 비평의 역사 : 저자, 텍스트, 독자에 차례대로 몰두해 왔던 역사

▶ 필자가 현대 해석학에 대한 주요 도전을 다루는 이유

◎ 전통적 형태의 주해와 해석학에 대한 도전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도전들에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기에

◎ 현대 해석 이론의 위기는 사실상 신학적 위기이기에

◎ 실천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1) 저자의 시대 : 해석학적 실재론과 비실재론

◎ 슐라이어마허의 해석의 목표 : 저자가 이해하듯이 혹은 저자보다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하는 것

◎ 해석학적 실재론 : 해석에 선행해서 존재하는, 텍스트 속의‘거기에’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주장. 무엇인가는 해석자에게 알려 질 수 있으며, 해석자는 그것을 책임감 있게 다루어야 한다

◎ 해석학적 비실재론 : 의미가 해석 활동에 선행한다는 점을 부인하고 해석의 진리는 읽는 자의 반응에 의존하다고 함. 세계 또는 텍스트의 의미는 생각의 구성물이라고 주장

◎ 필자의 주장 : 의미가 일종의 행위 형태라고 주장하며, 저자성 개념이 궁극적으로 신학적임 것임을 보여 주고자 함. 인간의 저자성은 성육신과 계시의 행위들을 통해 자신을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는 것

2) 텍스트의 시대 : 해석학적 합리성과 상대주의

◎ 1940년대 신비평은 저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리고 텍스트의 형식적 특징에 초점을 맞춤, 1960년대 구조주의 비평학자들은 텍스트의 역사적 정황보다 텍스트의 언어적이며 문학적인 관례들을 연구

◎ 텍스트 지향적 해석 방법은 텍스트에 내재해 있는 뜻을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이 방법의 목표는 텍스트 자체의 형식과 구조, 즉 텍스트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려는 것

◎ 텍스트의 시대에서 비평적 초점은 해석적 합리성의 성격으로 옮겨 감.

◎ 필자의 주장 : 해석 과정이 어떤 합리적 절차들에 의해 지배되며, 텍스트를 복합적 문학 행위로 보며 정경적 차원을 비롯해 다양한 차원을 존중하는‘두터운 기술’의 과정을 통해 의미가 적절하게 밝혀질 수 있다

3) 독자의 시대 : 해석학적 책임성인가? 자유로운 놀이인가?

◎ 1970년대와 80년대 텍스트 실증주의를 배격하고 대신 독자의 역할을 검토하기 시작.

◎ 독자 반응 비평은 텍스트가 독자가 구성하거나 또는 해체하기 전까지는 미완료 상태라는 텍스트의 미완결성을 강조함. 우리는 사회적이고 문화적 편견들로 구성된 명확히 구획되어 있는 틀 가운데서 텍스트를 읽음.

◎ 필자의 주장 : 해석 원리에 대한 한 사람의 선택의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한 이해가 그리고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놓여 있다. 더욱이 문학적 지식의 도덕성은 해석자의 덕성이 없다면, 불충분하기 짝이 없다. 윤리적 해석은 일종의 영적 실천이며, 이해의 영은 바로 성령. 의미의 윤리학에 대한 논의에 기여하는 신학 교리는 성령론과 성화론

◈ 어거스틴주의 해석학

▶ 신학자가 의미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 이유?

◎ 신학에 해석적인 차원이 담겨 있고, 해석에 신학적 차원이 담겨 있기에

1) 신학의 해석적인 차원 : 신학은 텍스트 중심의 학문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질문과 성경 해석에 대한 질문은 실제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없음. 텍스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게서 축적된 부를 박탈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2) 해석의 신학적인 차원

◎ 포스트모던 독자는 더 이상 하나님이나 저자를 믿지 않으며, 현재의 해석학적 불가지론적 분위기는 신학적 도전을 나타냄

◎ 신학은 성경 해석에 대해서만 아니라 일반 해석학에 대한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을 가지며. 신학은 텍스트와 독자 각각의 권리에 관한 토론과, 문화를 촉진시켜 주며 문화가 개발해 내는 가치들에 대한 토론에 기여

3)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 우리는 믿는 존재, 우리의 믿음을 심화시키고 입증하기를 추구하는 존재들임. 텍스트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신앙 행위임.

◎ 해석하게 대한, 의미의 실재에 대한 필자의 어거스틴주의적 변호와 다른 두 가지 반대 입장

a. 텍스트를 이해할 때 저자의 의도가 아닌 다른 열쇠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헤르메스주의자

b. 의미와 이해는 더 이상 성취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냉소주의자들

➜ 우리는 텍스트라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알게 될 수 있다

◎ 폴 리쾨르의 해석학적 순환 : 믿기 위해서 이해하야 하며 이해하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 해석자의 신앙 고백 : 나는 해석학적 실재론 ‧ 합리성 ‧ 책임성을 믿는다.

◎ 어거스틴의 저작들이 문학적 지식의 기독교적 도덕성을 뒷받침 해주는 신학 형성 작업에 주는 지침

a.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믿음(언어적 기호들을 통해 의미를 전달)

b.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얻는 이해가 단어들 자체보다 훨씬 중요함

c. 모든 이단설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서술 : 텍스트와 그에 대한 주석을 구별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해석학적 이단설일 것

d. 문학적 이해의 도덕성과 관련해 최상의 해석학적 덕목인, 사랑을 옹호함 : 해석학적 첫 반응은 저자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함

◎ 텍스트는 의미의 보고

◎ 어거스틴의 해석학적 공리 :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장 많이 낳는 해석을 선택하라!

◎ 필자가 추천하는 해석학적 덕목 : 믿음, 소망, 사랑, 겸손

◎ 좋은 해석학은 좋은 이웃을 만드는데, 해석학에서나 윤리학에서 황금률은 텍스트들,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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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텍스트의 4 요소 (4 Elements of Context)

 4  4 Elements ofContext

컨텍스트 쇼핑, 컨텍스트 검색, 컨텍스트의 시대 (Age of context)까지 이제 컨텍스트라는 용어가 넘쳐난다. 그런데 컨텍스트란 대체 무엇인가? 이 포스트는 컨텍스트의 확장된 의미, 속성, 본질을 나누기 위한 글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컨텍스트를 4가지 요소(발견, 선택, 경험, 공유)로 정리했다. 편의상 구분을 했지만 실제로 4요소는 끊김이 없이 발현된다는 점, 컨텍스트란 연결을 만들며 진화하는 하나의 ‘상태’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이 4요소는 사업자(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컨텍스트는 앞으로 모든 비즈니스의 핵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면 본질을 보기가 어렵다. 컨텍스트를 사용자 관점에서 차근히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일러두기: 쉬운 이해를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사례로 다루었으나 ‘연결의 6하원칙과 IoT 네트워크‘에서 언급한 ‘컨텍스트 네트워크’를 포함하여 컨텍스트의 쟁점은 모든 비즈니스에 적용된다. 여러분들의 피드백에 따라 필요한 경우는 다른 비즈니스 사례도 추가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전통적 미디어 환경의 컨텍스트

예전에는 컨텍스트가 사업자에게도, 사용자에게도 간단했다. 95년도 국내 드라마의 전설을 만든 SBS 24부작 ‘모래시계’의 컨텍스트를 생각해보자. 일명 ‘귀가시계’라는 별명은 전통미디어에서 컨텍스트가 어떤 특성을 지니는지 한마디로 암시한다.

프로그램은 편성표가 24시간, 주간 단위로 나와 있으니 수목 밤 10시에 어김없이 발견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본방사수 개념이 줄어들어 시청률 10%도 많다고 하지만 20년전 상황은 달랐다. 주로 지상파 3사가 저녁시간을 좌우하니, 이시간에 무엇을 할(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최민수가 ‘나, 떨고 있니?’하며 죽어가던 대목에서 순간 시청률은 75%에 달했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 프로그램을 발견, 선택, 경험, 공유하는 컨텍스트가 비교적 간단했던 시절이다.

콘텐츠를 시청(경험)하는 컨텍스트는 어떤가? TV가 있는 거실에 모여 앉든, 방에서 혼자 보든, 방법은 많지 않았고 정전이 되거나 누군가 채널을 돌리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경험이었다. 콘텐츠만 좋다면 그 콘텐츠를 경험하는 컨텍스트 따위는 큰 고민거리가 아닌 것이다.

콘텐츠에 대한 공유는 집, 학교, 직장에서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하며 재잘재잘 수다를 떨면 이야기는 기록도 없이 사라진다. 그 모임에 없었던 사람들은 내가 어느 대목에서 울었는지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잔뜩 수다를 떨었으니 마음만은 후련할 것이다.

컨텍스트, 사용자와의 교감이 시작되다

그러나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물리적 시공간 개념은 해체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주간 편성표라는 공간에 매여 있지 않고 24시간의 규칙안에 순차적으로 담겨 있지 않다. 신문기사가 종이신문의 지면을 비집고 들어갈 필요도 없고 1면이라는 공간은 유일하지도, 절실하지도 않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1면이 생겼고 우리의 프라임타임은 매일매일 시시각각 변한다. 이처럼 시공간의 해체와 함께 물리적 유통 채널 위에 군림해 온 모든 사업자들의 전통적 권력은 해체되었다.

컨텍스트의 발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세상의 가치가 ‘관계’ 기반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1]. 기존의 단순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컨텍스트는 미디어에서,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시공간의 해체속에 컨텍스트는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컨텍스트의 확장된 정의

여기서 컨텍스트란 커뮤니케이션을 둘러싼 모든  정보와 환경으로, 주어진(given) 환경으로서의 컨텍스트(시공간, 주변정보 등 실시간 상황), 사용자의 경험, 체험, 학습 등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미치는 사용자의 기억 정보[2], 나아가 사용자의 참여를 통해 계속 연결되고 진화하는 컨텍스트 모두를 포함한다.

“Context shapes language and language shapes context. […] Context is not simply a constraint on language, but also a product of language use.” [Duranti & Goodwin, Rethinking context: Language as an interactive phenomen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30]

컨텍스트가 단순히 언어를 규정하는 조건(제약)이 아니라 ‘언어사용의 생산물’이기도 하다는 언어학적 정의는 미디어 관점에서도 유효하다. 컨텍스트를 단순히 미디어를 사용하는 시간, 공간적 조건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과정 및 결과에서 발현되는 작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사용자에게 ‘주어지는 컨텍스트 (contexte défini, conditionnant, donné)‘의 수는 무한대다. ‘지금, 여기(시간과 공간)’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경험과 지식을 쌓았는지, 그 밖의 무수한 상황(관계, 역할 등)에 따라 앞으로의 경험도 당연히 달라진다. 그렇게 각자는 유일한 순간을, 그 순간의 연속으로 삶을 살아간다. 미디어 환경에서 대화, 거래, 구매, 검색, 감상 등은 각각 다른 컨텍스트에서 발생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경험을 따라간다.

우리가 보는 검색 결과 화면, 페이스북의 뉴스 피드, 아마존의 상품 추천 페이지는 모두 다르다. 각자의 데이터의 기록이 만드는 각자의 세상이다. 사용자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모든 상황과 찰나가 모여 전체(universe)를 구성한다. 다만 사례 하나, 상황 하나만을 놓고 보면 참 시시하고 핵심의 주변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컨텍스트가 사용자와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진화한다는 점이다(context construit, transformateur, évoluant)[3]’. 사용자 개개인의 참여 활동(대화, 거래, 구매, 검색, 감상 등)은 새로운 연결을 낳고 그것은 곧 ‘새로운 컨텍스트의 발현’을 의미한다. 아래의 킨들 사례가 그렇다.

나의 밑줄이 정보가 되고 책의 컨텍스트를 진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대목에서 몇명이 밑줄을 쳤는지 발견하게 된다. 나의 밑줄도 이렇게 “인기있는 구절“이라는 정보를 생성하는데 기여한다. 나는 혼자 책을 읽지만 그 무심한 소비 과정이 다른 사람의 의사결정과 소비의 경험을 바꾸는 컨텍스트를 새롭게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서에 대한 내 경험도 진화한다. 오직 참여만이 컨텍스트를 발현시킨다. 각자의 유일한 컨텍스트들이 만드는 매 찰나 사소한 연결들이 결국은 컨텍스트를 진화시키는 것이다.

사용자의 개입으로 발현되는 컨텍스트는 발견, 선택, 경험, 공유로 그룹핑될 수 있다. 이 요소들은 독립배타적이지 않고 순차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김이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다중적으로 발생한다. 컨텍스트란 정지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하나의 상태(status)다.

해석에 따라 이들을 컨텍스트의 하위 컨텍스트 또는 컨텍스트의 종류 또는 사용자 경험을 통해 결과적으로 발현되는 컨텍스트, 컨텍스트 비즈니스의 구성요소 등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4         4  action      4               status

(오가닉) 미디어에서 컨텍스트를 규정하는 4가지 작용(action)을 구분하였다. 발견, 선택, 경험, 공유 컨텍스트는 사용자와 상호작용으로 발현된다.

1. 발견하는 컨텍스트 (Discovering context)

발견 컨텍스트는 콘텐츠, 제품, 메시지 등을 만나는 접점이자 계기다. 예전에는 편성표로 시청자를 만나고 광고로 주목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 접점이 도처에 깔려 있다. 페이스북에서 지인이 이 노래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한소절 적어올린 포스팅은 ‘도대체 어떤 노래길래?’ 하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만약 링크를 클릭해서 들어갔는데 전혀 공감도 유익함도 없었다면 이것은 발견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지인이 얼마나 감성적인지는 발견했을지 모르겠다.)

   Kpop Star 4

페이스북의 지인이 공유한 Kpop Star 4. 여기서 발견한 정승환, 박윤하라는 어린 가수들의 팬이 되어버렸다. 이런 발견은 때때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문득 나에게 온다.

발견의 컨텍스트는 문득 나에게 온다. 사용자가 헤매고 검색하고 돌아다니다가 만날 수도 있고 이런 수고가 없이 뜻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발견의 컨텍스트에서 완전한 우연이란 없다. 아니, 사용자는 뜻밖에 문득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지만 그것은 페이스북의 뉴스피드 알고리즘, 검색엔진 알고리즘, 콘텐츠의 추천 알고리즘 등을 통해 연결된 결과다. 이러한 발견의 경로도 제품, 정보, 콘텐츠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2. 공유하는 컨텍스트 (Communicating context)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콘텐츠, 제품, 정보 등은 나 자신을 통해 어딘가로 연결되고 공유되어 갈 것이다. 직접 공유버튼을 누르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지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요소는 도처에 깔려 있다. 지인이 공유한 동영상을 클릭하는 순간 그 조회수가, 지인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그 공감이, 그리고 이 가수들의 노래를 검색하고 챙겨 듣는 모든 흔적들이 이 콘텐츠를 누군가에게 (데이터로, 정보로, 내 목소리로, 글로) 전달하는 행위가 된다.

컨텍스트가 중요한 환경에서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콘텐츠, 제품, 정보의 소비활동과 구분되지 않고 양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니, 끊김이 없이 연결되기를 지향한다. 위에서 언급한 아마존 킨들처럼 각자의 밑줄이 ‘인기있는 구절’이라는 정보에 기여한다면 각자의 밑줄은 공유행위, 커뮤니케이션 행위다(보다 자세한 사항은 매개의 4가지 유형 참조).

우리는 서로의 발견을 돕는 조력자들이다. 사업자는 이 조력자들이 더욱 그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컨텍스트를 최적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견의 경험은 매우 제한될 것이다.

3. 선택하는 컨텍스트 (Choosing context)

선택의 컨텍스트가 짧고 최적화되면 선택하는 과정 자체를 인지하기 어렵게 된다. 발견의 컨텍스트가 ‘문득’ 나에게 오는 것처럼 선택의 컨텍스트는 ‘저절로’ 부지불식간에 이뤄진다.

 TV         TV   IMDb

아마존 Fire TV는 어떤 영상을 감상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준다. Fire TV 시청자들의 평점과 IMDb 사용자들의 평점이 나란히 나와 있다. 또한 아마존 커머스와 같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본 다른 영화’가 새로운 영상을 발견하는 컨텍스트로 이어진다.

위의 이미지는 아마존 Fire TV에서 영화를 선택하는 컨텍스트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점이 의사결정 시간을 줄여주는데 기여할 것이고, 아래 이어지는 추천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본 다른 영화)을 통해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는 컨텍스트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양적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사용자 혼자의 힘으로 어떤 제품과 브랜드, 서비스, 콘텐츠, 정보를 소비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물론 모든 것을 고객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 선택하도록 방치하는 사업자들도 많다). 정확성, 최신성, 적합성 순으로 필터링하여 선택의 폭을 좁혀주는 검색엔진처럼 고객의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은 덤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 행위는 다시 검색 엔진의 성능을 높이고 다른 사용자의 검색 시간을 줄여주는데 활용될 것이다.

결국 선택의 컨텍스트란 “다음에 뭐보지?, 다음에 뭐먹지?, 다른거 뭐사지?, 다음에 어디가지?”라는 질문을 하는 컨텍스트를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다.  끊김이 없이 다음 제품, 콘텐츠, 서비스가 ‘연결’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사용자의 컨텍스트(누구인지, 무엇을 보는지, 좋아하는지 등에 대한 데이터)를 알아야만 가능한 연결이란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4. 소비하는 컨텍스트 (Experiencing context)

예전에는 제품, 콘텐츠, 정보재를 ‘경험’하는 컨텍스트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다. 콘텐츠는 주어진 것이고 일단 소비를 하게 하는 것만이 즉 시청률, 도달률, 매출만이 핵심 과제였을 때는 그랬을 것이다. 그 시각으로 보면 소비 컨텍스트는 TV를 볼 때 거실에서 모여서 보느냐, 쾌적한 쇼파냐, 지하철 퇴근길 스마트폰이냐 정도로 제한될 것이다.

며칠전 Kpop 스타의 준결승전을 보느라 PC로 700원을 지불했다. 그 여정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시청할 수 있는 기기가 애플 제품들 뿐이었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사용하지 않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결국 VM(Virtual Machine)을 통해 구매를 했지만 여기로 옮겨온 후에도 막다른 길에 대한 경험은 수차례 계속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문득’ 발견하고 ‘저절로’ 선택, 지불하는 경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대신 다시는 유료로 동영상을 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구매는 중요한 소비 컨텍스트다.

네트워크의 끊김이 없이 얼마나 쾌적한 경험을 제공하는지,모바일로 보던 것을 집에 가면 TV로 이어서 보여주는지 등 경험의 컨텍스트는 수도 없다(물론 발견, 선택, 공유도 콘텐츠 경험의 컨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제품 소비(사용) 과정 자체에 국한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영화 펄프픽션의 유명한 그 장면, 우마써먼과 존트라볼타가 복고춤을 추는 장면이다. 안방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콘텐츠의 정보를 “X-ray“로 힐끔 거리며 시청중이다. 등장 인물, 배경, 배우의 다른 작품 등 모든 정보를 손안에 연결한다. 어디 TV뿐이겠는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제품을 사용하는 환경들이 모두 경험의 컨텍스트를 제공하며 우리의 매순간만큼 변덕스런 기분만큼 모든 컨텍스트는 유일하고 무한하다.

  Amazon Fire   TV

침대에 누워 Amazon Fire로 영화를 시작했다가 ‘TV로 보기’ 버튼을 누르니 화면이 넘어간다. 보는 동안 장면마다 정보는 스마트폰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컨텍스트의 연결이 끊김이 없을 때 (Seamless context)

모신문사에서 컨텍스트 연결을 강의하니 청중에서 ‘기자는 일일이 기사에 댓글을 달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4요소에서 살펴본 것처럼 컨텍스트를 발현시키고 연결하는 것은 사업자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연결이 반드시 댓글이나 좋아요도 아니다. 혼자 발품 팔아 어찌 지구 저편까지 소식을 전하겠는가. 우리는 사용자가 연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수행하면 된다.

콘텐츠에 그만한 가치도 있어야 하지만 컨텍스트의 4요소가 살아서 발현되도록 환경(사용자 인터페이스, 콘텐츠들의 관계, 데이터 분석 등)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사용자 관계, 콘텐츠 관계, 데이터 관계가 모이면 그것이 사업자의 자산 즉 네트워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단번에 발현된다면 컨텍스트 가치는 극대화된다. 아래 이미지처럼 말이다.

       4

아마존 킨들 파이어에서 독서 중이다. 읽고 있는 책의 참고자료들과 연결되는 경험이다. 컨텍스트의 4가지 요소가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된다.

종이책의 참고문헌을 보고 스스로 검색을 하고 서점을 찾아가 책을 직접 구매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논문을 써야 하는 특수 환경이 아니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관련된 책의 표지, 개요, 사람들의 평점이 함께 있고 클릭 한번으로 샘플 저장(내 온라인 책장에 책이 바로 담기는 경험), 심지어 구매를 하거나 지인들에게 바로 알릴 수도 있다면 어떨까?

여기서는 새로운 것을 문득 발견하고 저절로 선택이 이뤄지며 (샘플을 클릭해서 서재에 담겼다면 이미 선택은 이뤄졌다) 독자들이 서로 암묵적인 도움을 주고 이 모든 컨텍스트가 다시 책을 읽는 경험 자체를 극대화 시켜준다. 4가지 요소가 동시다발적으로 부지불식간에 발현되며 여기서 나의 무의식적인 활동 (클릭 한번)이 새로운 컨텍스트를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연결시킨다. 컨텍스트가 흐르고 진화한다.

컨텍스트의 본질에서 다시 출발하는 비즈니스

지금까지 사용자 참여 관점에서 컨텍스트를 4가지로 그룹핑하여 살펴보았다. 컨텍스트는 쉽지 않은 주제다. 컨텍스트가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아직 정보미디어나 IT, 비즈니스쪽에서는 그 개념이 표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영역이 언어학, 인지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지고 많은 융합 연구가 시도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진화를 이해하려면 비껴갈 수 없는 영역이고, 사용자 경험(UX)을 논하자면 더욱 그렇고, 네트워크 시장에 대처하려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공간이 해체되고 경계가 없는 오가닉 미디어 시대에 연결이란 바로 컨텍스트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컨텍스트는 결국 매우 사소한 사용자의 그리고 사용자에 의해 발현되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이 작은 작용들이 모여 미디어를 만들고 의미를 만들고 비즈니스를 만든다. 이에 예외가 될 수 있는 비즈니스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이 당신의 생각, 경험, 체험에 어떤 변화를 주게 된다면, 당신이 이 글을 발견하고 읽고 나누는 일련의 과정은 다시 이 글의 컨텍스트를 진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여러분들의 참여를 측정하고 수렴하고 동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관련 포스트>

* 글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April 14, 2015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facebook: yun.agnes, organicmedialab
Twitter: @agnesyun
Google+: gplus.to/agnes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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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더 읽을 힘이 남아있는 분들을 위한 각주입니다^^)
[1] Context는 라틴어 ‘contextus, contextere’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con-‘은 ‘함께(together)’를 뜻하고 ‘texere’는 ‘짜다(weave), 만들다’를 의미한다. 즉 컨텍스트는 이미 어원적으로 ‘함께 관계를 만들다’라는 의미를 내포해왔다고 볼 수 있다.

[2] 이와 같은 관점은 언어학 (특히 화용론(Pragmatics))에서 논의하는 컨텍스트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발화(utterance(énonciation))’보다 미디어 관점에서 컨텍스트를 살펴보고 있으나 사용자의 참여(engagement)와 경험(UX)의 확장된 의미에서 보면 상당 부분이 맞닿아 있다(D. Sperber, D. Wilson, 인지적 화용론 (Relevance: Communication and Cognition), 김태옥 등역, 한신문화사, 1993(원서출판: 1986))

[3] 맹그노(D. Maingueneau)는 ‘담화분석사전(Dictionnaire d’analyse du discours)‘에서 담화와 맥락의 관계를 두 가지 대립/보완적 관점에서 정리한 바 있다. 이미 주어진 맥락이 담화를 규정하는 한편 담화 과정에서 상황이 지속적으로 재정의되고 맥락 또한 재구성된다는 점이다(“Le discours est une activité tout à la fois conditionnée (par le contexte) et transformatrice (de ce même contexte) ; donné à l’ouverture de l’interaction, le contexte est en même temps construit dans et par la façon dont celle-ci se déroule ; définie d’entrée, la situation est sans cesse redéfinie par l’ensemble des évènements discursifs.” (Patrick Charaudeau, Dominique Maingueneau, Dictionnaire d’analyse du discours, Edition du Seuil, 2002, p.135).





사회의 각 분야가 날로 전문화되고 있어서 전문지식을 가진 감정인의 역할이 재판에서 점차 더 중요해지고 있다. 재판부는 전문적인 감정결과를 판별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피상적인 심리를 거쳐 감정결과가 상당 부분 받아들여지곤 하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이제 감정인은 ‘법관의 보조자’라는 본질적 지위를 벗어나 실질적으로 판결의 결론을 좌우하며, 때때로 ‘법관의 소외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건설, 의료, 첨단기술분쟁인 경우에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이처럼 감정이 판결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되었으므로 감정절차에 관하여 대리인은 어떤 점보다도 각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감정절차의 준비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감정 준비의 첫 단계는 ① 감정의 기준과 ② 감정 자료를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예컨대 건물의 하자감정이라면 하자판정의 기준도면이 어느 설계도인지, 하자보수비 산정 시점은 어느 때로 할지 등 감정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감정인이 검토할 자료도 감정대상과 관련성이 있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을 자료로 제출하는지 살펴야 한다. 의료소송에서 치료 관련 서류를 내면서 ‘의심스러운 기록지’를 슬며시 끼어 제출한 경우도 보았다.

 

1989년 검찰은 삼양식품이 라면에 공업용 우지를 사용했다고 발표하면서 회사 관계자들을 구속하였고 삼양식품은 하루아침에 도산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6년에 걸친 재판 끝에 식품위생법위반죄가 무죄로 확정되었다. 무죄의 근거는 감정의 대상인 우지를 수거한 방법이 잘못되어 그 결과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문제가 미세한 흠결 하나에서 뒤집히는 상황은 일반 감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자료가 적정한 것인지 세밀하게 검토하기 바란다.

 

둘째, 감정기일에 감정의 기본요소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나는 감정이 필요한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을 고르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1차 감정기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감정기준과 감정자료에 관하여 상대방과 협의를 하거나(간단한 사건의 경우), 협의가 안 되면 ‘감정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감정인으로 하여금 감정의 기준과 자료를 확정하도록 해야 한다. 감정인이 감정의 전체 틀을 짤 때 당사자의 입장을 충분히 주장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의견서는 법률 지식이 부족한 감정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면서도 명확하게 쓰는 것이 좋겠다. 쌍방 의견이 달라서 감정인이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쌍방 주장에 따라 복수로 감정하는 경우도 있다. 필요하면 감정 중간에 2차 의견서를 내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다.

 

셋째, 감정인이 감정을 완료하여 감정서를 제출하면 당사자는 감정결과에 대하여 조회신청(실무상 사실조회라고 표현하지만 법적 성질은 감정보완신청이다)을 하여 다투게 된다. 하지만 일단 감정서를 제출한 감정인은 자신의 감정서에 관하여 철저히 방어적이 되어서 탄핵 효과가 크지 않다. 동문서답방식으로 일관하여 회피하는 감정인들이 종종 있다. 재판부가 이럴 경우 경고해야 하는데 이런 재판부가 별로 없었다. 감정결과에 모순점이 많으면 2차 감정인신문을 신청하여 법정에서 감정인 신문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데 재판 실무상 허용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재판부가 보다 이를 넓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넷째, 감정결과가 매우 불합리하면 재감정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좁은 길이다. 웬만한 사정이 없는 한 재감정은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증거보전 감정결과가 엉터리로 나온 사건에서 감정결과를 낱낱이 분석하여 2년간 다툰 끝에 재감정 결정을 받았고, 다시 2년 걸려서 위 감정을 뒤집는 재감정결과를 받아 승소한 적이 있다. 현재 실무상 합리적 기준에 미달하는 전문성이 부족한 감정인이 많은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에 대응하기 위하여 당사자 입장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옥상옥의 부담이지만 불가피한 면이 있다.

 

나아가 현재 과학 기술 수준상 정확한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가 붕괴의 위험성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었는데 붕괴 위험성을 둘러싸고 ① 증거보전 감정은 3년 내 붕괴, ② 재감정은 60년 이상 사용 가능 결론을 내렸다. 두 감정결과가 워낙 차이가 나고 중대한 사건이라서 나는 당시 재판장으로서 ③ 3차 감정을 명하였는데 나중에 그 결과는 후자에 가까웠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사건에서의 감정 수준이 이런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수한 감정인이 선정되도록 특히 법원이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감정은 원칙적으로 소송이 진행되 어 쟁점과 기초 사실이 어느 정도 밝혀진 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 소송 초기에 감정신청을 하여 감정을 하였다가 나중에 쟁점이 바뀌거나 다른 사실이 밝혀지면 감정결과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송 제기와 동시에 감정신청서를 내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 다만 대상이 소멸될 위험이 있거나 특별히 급박한 사정이 있다면 증거보전 신청을 하거나 또는 소송 초기에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엄마가 아들에게 “공부해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언제 하였는가’에 따라 그 평가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아들이 자야 할 시간인 밤 12시에 이 말을 했다면 엄마는 ‘무섭고 가혹한’ 사람이 되기 쉽고, 공부를 해야 할 아침 10시에 했다면 아들이 ‘게으른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례에서 엄마가 아들에게 말을 했다는 것은 ‘텍스트’이고 말을 한 동기와 상황은 ‘컨텍스트’에 해당한다. 텍스트는 외적인 ‘사실’들의 모음이고, 컨텍스트는 사실의 진짜 의미를 밝혀주는 ‘맥락’이라고 하겠다.

 

재판은 항상 인정된 ‘사실’을 판단의 출발점으로 한다. 하지만 동일한 사실(텍스트)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였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컨텍스트의 인정이 재판의 결론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컨텍스트의 힘을 직접 경험한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한다.


# 식품회사 사장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냉장 식품의 포장을 비위생적으로 하여 부패한 식품을 판매했다는 것이 혐의 사실이었다. 압수된 식품의 사진을 보니까 포장이 약해 보이고 일부는 벌어져 있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텍스트). 영세업자가 생산한 식품의 유통경비를 줄이려고 싸구려 포장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준비 미팅을 끝내면서 혹시나 하여 회사의 판매량을 물어보니까 동종 식품 업계 6위라는 것 아닌가! 당시 피의자의 회사보다 작은 업체가 광고를 활발히 하였는데 그 회사보다 판매량이 많았던 것이다. 회사의 규모를 대입하자 갑자기 이 사건의 실체가 달리 보였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라면 상품 관리 차원에서라도 이런 식으로 포장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컨텍스트). 이는 식품회사의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일부 대리점에서 실수를 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구속영장심문기일에 이런 상황을 주장하였고, 구속영장은 당연히 기각되었다.

 

# 공사업자가 공사 중단 시까지의 기성대금을 청구하였고, 도급인이 지체상금을 반소로 구하였다. 기성 공사대금 일부가 미지급인 사실은 다툼이 없었지만(텍스트), 공사업자는 도급인의 무리한 횡포를, 도급인은 공사업자의 시공 지연을 서로 주장하였다. 심리 결과 당시 도급인은 자금사정이 넉넉했던 반면에, 공사업자는 이 공사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공사를 하면서 자금이 쪼들려 여러 하수급인들에게서 항의를 받았던 사정(컨텍스트)이 밝혀졌다. 도급인의 파이팅 넘치는 담당 직원이 공사업자의 하수급인들을 어렵게 찾아내서 이런 진술서들을 받았던 것이다. 공사업자의 부실하였던 경영 상황이 드러나자 컨텍스트가 명확해졌다. 결국 기성공사대금 미지급은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인정되어 도급인의 주장이 인용되었다.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만, 컨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다의적(多義的)일 수 있다. 텍스트는 컨텍스트에 비추어 볼 때에만 실제 사정이 드러나고 이때 비로소 판단이 가능해진다. 결국 텍스트는 바꿀 수 없으므로 컨텍스트가 최종 판단을 좌우하는 열쇠인 셈이다. 따라서 변호사가 노력을 집중하는 대상은 ‘바꿀 수 없는 텍스트’가 아니라, ‘바꿀 가능성이 있는 컨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컨텍스트는 외적인 사실이 발생했을 때의 상황과 원인들 가운데 제시되는 것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컨텍스트를 효과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자료를 철저히 들여다보아 유리한 세부 사항들을 수집하는 것이 관건이고, 이들을 잘 엮으면서 상상력 한 줌을 얹는 것이 그 방법 아닐까. 당사자들은 서로 상반되는 컨텍스트를 내세울 때가 많으므로 상식과 감정에 맞는 자연스러운 컨텍스트를 주장해야 한다. 이렇게 간접적 정황사실을 잘 구성하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고려 없는 텍스트의 단순한 나열은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큰 힘이 없다. 항상 컨텍스트 단위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