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The Lord's Prayer)
영어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NIV Matthew 6:9~13
영어 주기도문(KJV 흠정역)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헬라어 주기도문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헬라어 주기도문
2016. 2. 14.
파텔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 게네데토 토 텔레마 수 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피에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알라 뤼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카이 헤 뒤나미스 카이 헤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개역개정)
김세윤박사 주기도문 강해
왜 두 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있는가?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는 성경에서 두 군데에 나온다.
마태복음 6:9-13과 누가복음 11:2-4에 나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은 핵심은 두 개이다.
참 이스라엘(마태복음의 관점)과 마지막 아담(누가복음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마지막 아담과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에게 속한 신자의 기도와 삶을 긴밀하게 연결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의존적으로 살아야 하는 아담의 삶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스라엘로서의 살아야 했으나 역시 이 두 가지의 삶을 실패한 삶이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과 참 이스라엘로 오셔서 성공적으로 사신 삶을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은 인간의 창조와 그리스도안에서 재창조의 목적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구약에서 구원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야 이스라엘의 사명과 삶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만물 지배권을 수여 받은 아담의 사명과 삶과 직결되어 있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임 맥락
누가복음 11:1-4절에서 “ <기도를 가르치시다(마 6:9-15; 7:7-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정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회개하고 순종하고 헌신하여야 한다는 종말에 대비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센파운동 바리세인들의 운동 세례요한의 운동등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운동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을 새롭게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등을 표방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이 포함 되는 공동체의 정세성이 담은 예수님께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문으로 자리를 잡게된다.
마태의 주기도문은 상상수훈의 구조상 핵심에 위치하여 있다.
산상수훈의 핵심은
마태복음 5장은 팔복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말한다. 그리고 13-16절은 이 공동체가 소금과 빛으로서 부패를 막고 세상을 살 맛나게하는 공동체가 된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라는 의미이다. 17-48절은 예수님의 새로운 법의 성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마태복음 6장은 종교적인 삶의 실천들 경건의 행위들에 대한 가르침이다. 금식 기도 자선의 행위등 유대교에서 대표적인 종교행위를 언급한다. 그런데 바로 대표적인 종교행위 이곳에 주기도문이 있다.
대표적인 종교행위가둔데 잘 못된 기도를 언급한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기도, -외식한자의 기도, 위선적인 중보기도, 유대인들의 올바른 기도-아버지께 드리는 은밀한 기도 하나님과 나사이에 은밀한 만남의 기도이다.
이방인들이 잘못된 기도. -중언 부언한기도
그렇다면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가? 이것이 주기도문이다.
마태복음의 참 이스라엘로서 삶의 핵심인 주기도문은 8개 항목이다.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 (2) 아버지의 나라 도래, (3)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 실현, (4) 일용할 양식 구함, (5) 사람들의 죄용서와 아버지께 용서를 구함, (6) 시험에 들지 않게 함, (7) 악한 자(사탄)에게서 구함,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림이다.
누가복음의 아담의 삶으로서 주기도문은 5개 항목이다.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 (2) 아버지의 나라 도래, (4) 일용할 양식을 구함, (5) 사람들의 죄용서와 아버지께 용서를 구함, (6) 시험에 들지 않게 함만을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주기도문에는 3번 (3)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 실현, 항목과 7-8번 항목인 (7) 악한 자(사탄)에게서 구함,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림이 나오지 않는다.
왜 누가는 이 세가지의 항목을 빼고 기도하고 삶을 살게 하였을까?
(3)번의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 실현은 (2) 아버지의 나래 도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뺏다. (7)번의 악 한 자(사탄)에게서 구함은 (6)번의 시험에 들이 않게 해달라는 간구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다시 표현한 것이 때문에 뺏다. 또한 (8)번의 아버지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돌리는 송영은 누가복음에는 명시되지 않고 전제되어 있었다. 이 송영은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공적인 예배 의식에 사용되면서 분명하게 명시된 것임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핵심 기도의 내용은 대략 다섯 가지의 핵심 이다.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
(2) 아버지의 나라 도래,
(3) 일용할 양식을 구함,
(4)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고백과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청,
(5) 시험에 들지 않게 함이다.
주기도문의 핵심 청원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청원이다. 두 가지 청원으로 요약이 가증하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기도이고 두 번째는 사탄의 다스림으로 부터의 보호하여 달라는 청원이다.
주기도문의 청원의 시작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아빠는 샘족의 언이이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시작을 한다. 샘족의 언어를 사용한다.
아빠라는 단어 하나에 감긴 진리는 참으로 엄청나다.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언약신학의 표현이다. 언약의 관계의 표현은 다양하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이스라엘은 백성,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이스라엘은 아들, 이스라엘을 장자로 표현하는 출애굽기 4:23절의 표현으로서 언약적인 관계를 나타내준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녀로 만드는 하나님의 독특한 이들이다. 이 사상이 아빠라는 단어속에 포함이 된다. 롬 8:15-16 그리스도의 예수가 우리속에 내주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한다는 것이다.
아빠라고 부름은 전적인 의존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사야 1:2-3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앎의 관계이다. 앎이란 서로 관계속에서 나오는 지식이다. 관계를 신실하게 맺음을 통해 나오는 지식이다.
하늘에 계시는 아빠이다. 하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우주보다 더 크므로 우주를 고칠 수 있는 바로 그 초월성인 하늘에 계신 아빠이다. 이 초월성 안에 구원론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추월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 오심이다.
아빠로 우리가 부름은 탕자의 비유에서 죄인들을 죄와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나라에서 불러내어 회개케 함으로써 사탄의 나라에서 의와 생명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 믿음으로 들어오도록 부르심이다. 새로운 백성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르심이다.
첫 번째 청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거룩 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물리적 개념이다. 피조물과 다른 추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 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쓴다. 가령 성전이 거룩하다. 선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한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 반대의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의 반대이다. 하나님과 그를 수종드는 천사들은 그릇된 행동이나 처신을 통하여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친히 그의 이름을 항상 변함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보존하신다. (레 10:3; 시편 72:19; 겔 36:23). 성경의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형용사 “거룩하다”와 연결되어 사용된 사실은 동일한 사실을 확증한다.7)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거나 훼방을 받는 것은 친히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 속에 있는 그의 자녀들의 불순종적인 삶 때문이다(레 20:3; 21:6; 사 52:5; 겔 20:9, 39; 36:23; 39:7; 43:8; 암 2:7; 말 1:6; 롬 2:24; 딤전 6:1; 딛 2:5).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는 예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그의 합법적인 자녀가 된 우리 신자들이 아버지의 인격과 성품에 합당한 행위를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8)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땅에 그의 이름을 드러내고 아버지가 그에게 맡긴 일을 함으로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가장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 신자들이 인격과 처신 속에 온전하신 아들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은 존귀를 얻게 된다.9) 신자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은 자의적인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로 삼아 주신 아버지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거룩하게 하다”를 수동태로 사용했다. 이 수동태 동사의 암시적인 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도와 그들의 인격과 행동이 그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과 존귀가 되도록 변화 시켜 주실 때에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자녀의 인격과 행동 속에 많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아버지의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존귀케 되는 될 것이고, 이와는 반대로 나타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들을 구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곧, 그의 인격과 성품)은 더럽혀져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청원의 기도의 내용은, 아버지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청원
아버지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청원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의 핵심과 목적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부연설명을 한다. “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하나님의 나라 청원이 중심이고 하나님의 나라 옴과 동시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의 필요에 대한 기도가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이 땅에서 오셔서 하시는 모든 사역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의 나라를 파괴하는 영적인 전쟁의 무기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광야시험을 출발점으로 시작하여 각 지역에 서 복음의 전파, 각종 치유와 귀신 축출을 통하여 도래하기 시작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그 절정에 도달하여 지금은 인종과 영토를 초월하여 온 땅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 최종 완성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 삼으셨다는 것은 언약신한의 표현으로 구약의 중심사상이다. 단 2장 72ᅟᅡᆼ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왕권과 통치권을 한 사람의 아들에게 위임한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를 연상할 때는 창조주가 온 세상을 창조하셔서 다스리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부왕이 된다는 말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통치권도 생각하는 단어 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기도의 요청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회복이 포함 된 단어이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이다.
예수는 인간의 근본문제는 아담적인 실존으로 보았다. 부요한 아버지로부터 분리 된 산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인 도래를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인 완성을 위한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도래와 그 최종적인 완성은 신자의 삶과 관계없이 막연하게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격과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한,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무시와 멸시는 받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 아니다.
탕자는 하나님의 가족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에게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의 간섭에서 아버지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먼 나라로 가게 되어 살게 됩니다.
먼 나라에서 살다가 보니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결국에 세상의 돼지를 키우는 집에 스스로 들어가서 스스스로 세상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먹고 살기위하여 세상의 종으로서 돼지를 치게 됩니다. 거기서 돼지들에게 먹이는 쥐엄 열매로 베부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돼지가 먹는 음식으로 배가 부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돼지들에게 먹이는 쥐엄 열매를 먹음으로 살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하는 일꾼이 많다는 복음을 깨닳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 종들도 배부르고 만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자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아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자기주장을 선언한 아담을 탕자로 봤습니다.
자기의 주장으로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로마서 6:23절에서 죄의 품삯은 사망이란는 것입니다. 여기의 품삯은 용병에게 주는 월급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통하여 사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는데 사망이라는 월급을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왜 사탄은 지옥으로 가게하는 것이 자기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삯을 줍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망이란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만들어지는 교리입니다.
사망이란? 실제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권세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결핍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는 냄새가 나는데 돼지의 쥐엄 열매입니다. 결핍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남으로 자기의 통치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인 대지 땅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대지 땅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습니까? 이미 죽음의 권세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망이 시작이 된것입니다. 영양분이 있는 동안에는 입이 푸르지만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뽑히는 순간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상태는 죽음이라는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죽음이라는 힘이 발휘됩니다. “내가 여기서 주려서 죽는 구나”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아담적인 인생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주려서 죽는 구나”
그러나 탕자는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종들도 풍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풍족한 생활을 말합니다.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는 풍족한 생활을 말합니다.
거지가 된 아들이 부유한 아버지께로 회복이 이제 가능하여 졌습니다. 왜요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입니다. 아담이 다시 하나님의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는 아버지 통치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영적인 삶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길게 늘어진 영원한 삶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영생이란? 오는 세대 즉 다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내용적으로 아담적인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에는 결핍으로부터 오는 고난이 없습니다. 지혜가 부족하여 구원에 대한 불안도 없습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사탄의 통치에 빠져서 멸망을 당할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주로 천국의 잔치입니다. 영생 즉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는 잔치입니다.
그리고 상속의 그림입니다. 아버지가 탕자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예복을 입힙니다. 상속자로 회복하여 주십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립니다. 큰 잔치를 배풉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 났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두 번 반복하여 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예수님을 통하여 치유하고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현재적인 상황을 재영하고 있습니다.
탕자를 보고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면서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말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가는 부활을 암시합니다.
탕자의 비유의 끝은 하나님의 통치 관계회복입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게오는 복음앞에 회개하고 자기의 통치 맘몬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드립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 이웃과의 관계회복으로 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삭게오는 자기가 토색하는 사람들에게 2-4배로 값겠다는 말을 합니다.
삭게오는 이웃을 멸시하고 이웃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인 샬롬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샬롬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위한 요청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해달라는 간구에 대한 응답의 결론이다. 신자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면 높여 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잠정적이며 가시적인 실체인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사탄의 나라는 그 만큼 점진적으로 붕괴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만큼 더욱더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최종적인 완성이 예수님의 재림 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의 삶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거룩한 삶을 삶으로서 열방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인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의 청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청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청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과 그의 나라를 위해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달라는 요청이다.
일용할 양식의 청원에 대한 주석가들의 세 가지의 해석
1)삶을 가능하게 하는 청원이라는 것이다. 2) 당일에 필요한 양식의 청원이라는 것이다. 3)다가오는 하루를 위한 나의 양식을 주시옵소서의 청원이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16장에서 만나의 이야기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나를 언제 줍니까? 아침에 줍니다. 아침에 주시는 것은 하루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즉 “지금부터 시작되는 그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청은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 기도의 내용이다. 하나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나라를 위해서 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주기도문의 1-2항목), 다른 하나는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의 합당한 삶을 추구하는 자에게 날마다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의식주는 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해결하실 문제이고, 신자는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과 그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삶을 헌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양식을 위한 기도는 맘몬 숭배와 대립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가 오소서 청원 다음에 일용할 양식의 청원은 날마다 하나님 노릇 해주심을 의지하여 살겠다는 서약이 함께 담긴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이 안식일적인 삶이다.
자기가 자신의 일로 자시의 생명을 얻으려는 것 즉 아담적인 삶을 중지하는 서약이고 청원이다.
네 번째의 청원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고백과 자신의 죄 용서를 위한 청원
바리세적 경건주의 극복하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고백과 자신의 죄 용서를 위한 간구는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대인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잘 보여 준다. 이것은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수직적인 교제의 관계를 맺는 자녀들은 사람들과 어떻게 바른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함을 전제한 기도이다.
물질적인 우상숭배에 빠지면 그 돈으로부터 나의 안녕과 행복이 확보된다고 믿게 된다.
물질우상에 빠지게 되면 이웃 착취의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의 기도 교훈 에서 죄 용서가 강조되는 것은 자녀들은 사람들과 어떻게 바른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함을 잘 이해 해야 된다(마 6:14-15; 막 11:25). 사람들이 잘못을 할 때 기꺼이 용서를 해줄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삶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마 18: 6-7; 눅 17:1-2),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견지해야 한다(마 7:12; 눅 6:31; 참고 롬 14:13; 고전 10:32).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줄 경우 보상을 두 배나 해야 한다.
도한 신자들은 자기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기꺼이 죄용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 것만 아니라, 이 교훈을 통하여 죄 용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랑의 적극적인 두 표현인 이웃 사랑(마 5:43; 눅 10:27)과 원수 사랑(마 5:44; 눅 6:27-38)의 삶도 실천할 것도 전제하신 것이다.
신자들의 대인관계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삶, 상처와 해를 주지 않는 삶,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삶, 이웃사랑의 삶, 원수 사랑의 삶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죄 용서를 하는 삶의 궁극적 인 목표는 상처와 해를 주는 삶의 정반대인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청원은 마태복음 판과 누가복음의 판이 다르다.
마태복음 판에는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의 판에서는 “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구체적인 죄의 행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마태는 빚들이라하고 누가는 죄들이라고 하였을까?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고 이웃에 대한 빚으로 봤다.
근본적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죄의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사건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원수 사랑이 그 핵심이다(눅 23:34; 롬 5:6-10). 대인 관계에 있어서 신자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1번의 삶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이름 과 영광을 가려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삶은 본질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불신자들의 삶이요, 타락한 인간의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소극적으로 상처와 해를 주지 아니하는 2번의 삶 에서 원수 사랑의 5번 삶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들을 구원하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나타나 아버지의 영광이 극대화된다.
다섯 번째의 청원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간청 우리를 악에서 구출하여 달라는 청원
구원 받은 성도가 사탄의 통치에 노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청원은 두 가지의 청원이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완성되게 하소서라는 청원이다.
두 번째의 청원은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가 사탕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로부터 지금 여기서 건져냄을 받게 하소서의 청원이다.
시험은 복음서에서 모든 시험이 사탄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사실(마 4:1, 3; 16:1, 23; 26:41; 막 1: 13; 14:38; 눅 4:2, 13; 8:13; 22:31-32, 40, 46)에 비추어 볼 때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하는 시험으로 이해된다.12) 따라서 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사탄이 그들에게 가하는 시험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간청이다.
주기도문의 전체 맥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게 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데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불신자의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지 않고 구원을 받기 전에 과거에 살았던 불신자의 삶을 사는 것이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삶이다. 불신자가 사는 삶이 무엇인지는 신자의 삶을 불신자의 삶과 대조하여 교훈하는 산상수훈이 잘 제시하기 때문에 산상수훈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불신자의 삶이라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는 의식주의 삶이 자신의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구하는 대신 세상나라를 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이 불신자의 삶이다. 이러한 삶으로 전락하는 것이 신자가 사탄의 유혹으로 빠질 수 있는 시험이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을 살지 않게 하여 달라는 기도이다.
주기도문과 신자의 삶
주기도문의 내용과 신자의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주기도문의 내용과 신자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사실 이다.
예수님은 신자의 삶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복음서에서 다양하게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수훈과 같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여기서 초점의 대상은 주기도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이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서 5-7장에 있는데 주기도문이 이속에 포함되어 있다. 누가복음 평지수훈은 누가복음 6장(20-49절), 11장의 주기도(1-4절), 12장의 일부(22-34절), 13장의 일부 (22-30절)에 중간에 배치되어있다. 신자의 삶을 집중적으로 알려 주는 산상수훈이나 평지수훈의 전체를 구체 적으로 다루는 것의 중간에는 항상 주기도문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간구는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는 신자의 삶과 정확 하게 일치한다(눅 12:31).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자녀들에게 주권적인 은혜로 주는 선물이며 동시에 그들 의 삶의 목표이다. 12:32의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는13)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임을 보여 주고, 12:31의 "오직 너희는 그의[아버지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책임과 목표임을 알려 준다. 물론 문맥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방편은 돈주머니를 떨어 그의 나라를 위해서 투자 하는 것이다(눅 12:33). 여기서 아버지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서 살아야 할 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살아야 할 삶과 해야 할 기도가 동일하다. 신자의 기도내용이 곧 신자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인 셈이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청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의식주를 제공하시는 다 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의식주의 문제를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취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다(눅 12:22, 29). 부정한 새 까마귀를 기르 시며(24절), 백합화를 솔로몬 보다 더 큰 영광으로 입히시며(27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들도 입히시는(28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주 문제를 염려거나 걱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에 몰입하여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이 세상 사람들이다 (30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삶의 유일한 대안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31절).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의 청원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과 그의 나라 도래를 위한 간구 다음에 등장하는 것 같이 의식주 문제의 해결은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자들에게 친히 약속하신 사항이다. 신자는 의식주를 위해 살아할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잘 자들이 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진행 되야 한다. 다시 한번 의식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자 의 삶과 그의 기도는 같다.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청(모든 사람의 죄 용서 고백과 아버지께 죄용서 간구함) 역시 앞서 언급된 세 간청과 같이 신자의 삶의 교훈에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평지수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받을지언정 상처나 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정신을 근간 으로 한다. 대인관계와 관련하여 평지수훈의 핵심이 원수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인식 에 동조한다(6:27-38).14) 특히 6:37c의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란 말씀은 주기도 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랑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와 유사하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마지막 간구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신자의 삶과 대비되는 불신자들 의 삶과 관련하여 추론될 수 있다. 평지수훈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탐욕에 사로잡혀(눅 12:15) 의식주를 위해서 산다(12:30). 같은 장에 기록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암시되듯이 이 세상 사람들은 의식주가 넉넉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으로 가득 찬 곡간(세상나라)을 더욱 확장하며(12:18-19), 더 나가서 솔 로몬의 모든 영광과 같은 자신의 명성을 원한다(27절). 불신자들의 삶은 이 세 가지, 곧 의식주 추구, 곡간 의 확장으로 암시된 세상나라 추구, 솔로몬의 모든 영광과 같은 자신의 명예와 이름 추구로 특징 지워진 다. 이 세 가지는 신자들의 삶과 기도의 내용인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감으로 아버지께 영광 돌림, 그의 나라 추구함과 아버지가 해결하시는 의식주와 정 반대가 된다. 신자의 삶에서 최후의 과제가 불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대신 먹고 입고 마실 것으로 가득 찬 세상나라(본질적으로는 사탄의 나라)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대신 자신들의 이름의 존귀와 영예를 위해서 살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에 빠지는 것은 곧 신자의 삶에서 떠나 불신자의 삶으로 전락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 주기도의 내용과 신자의 삶의 내용을 비교하여 제시한 것을 요약하여 도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어주기도문 듣기/읽기/외우기 ㅣ 1시간 반복 듣기 연습 ㅣ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어떤 기도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구원받았으니 하나님 앞에서
기도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9절은 후토스 운 프로슈케스데 휘메이스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 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층 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 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 층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 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 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 형태가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 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 항-찬양과 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 항-개인의 현실 문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 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 겔 36:23; 벧전 1:15).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고 했는데 하기아조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의미다. 수동태는 하나님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10절은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 게네데토 토 델레마 수 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입니다.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0
나라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 눅 21:27, 28; 계 21:1-8).
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 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계 11:17;22:20). 엘코마이 동사이며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을 사용한다. 명령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시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 작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아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 달라는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 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했는데 기노마이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이다. 명령법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과거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 예견되어 있다. 수동디포는 하나님의 뜻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아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11절은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입니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1
오늘날(세메론) -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 수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일용할(에피우시온) -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 'Superstantialem'(뜻'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양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 ...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동사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 막 3:20; 살후 3:12; 약 2:15). 디도미라는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을 사용하였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달라는 의미다. 과거는 이렇게 매일같이 구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의미다. 우리는 육적인 양식도 구하지만 영적인 복음의 떡을 매일같이 구해야 한다.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 고전 4:7; 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12절은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피에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입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 신약성경에서 흔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사하여 준 것 같이 -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 시제로 보지 않고 현재 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13절은 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알라 뤼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카이 헤 뒤나미스 카이 헤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입니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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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 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알라) -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악(투 포네루) -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 살후 3:3; 요일 2:13, 14).
구하옵소서 - 이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엡 6:16; 요일 3:12). 우리는 사단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 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 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