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十字架)


십자가(十字架)

스타우로스(4716) [ staurŏs ]  σταυρός, οῦ, ὁ     

1. 십자가.   2. 형틀.  3. 수난과 죽음의 상징
발음 [ staurŏs ]
어원  / 2476의 어간에서 유래
  • 1.  십자가.
    • a.  [문자적으로] 형틀, 마27:32,40, 막15: 21,30, 눅23:26, 요19:17,19,25,31, 빌2:8, 히12:2.
    • b.  [상징적] 수난과 죽음의 상징, 마10: 38, 16:24, 막8:34, 눅9:23.
    • c. 기독교와 그 전파 내용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5:11, 6:12, 고전1:18, 엡2:16, 골2:14.
  • 관련 성경  /  십자가(마 10:38, 막 8:34, 골 1:20).

* 2476. 히스테미() ἵστημι    스트롱번호2476

1. 놓다.  2. 세우다. 3. 내세우다
발음 [ histēmi ]

관련 성경 / 서다(마2:9, 막9:1, 요1:35), 세우다(마4:5, 행6:6, 롬3:31), 데리고 가다(마18:16), 서 있다(마20:6), 두다(마25:33), 멈추다(행8:38), 작정하다(행17:31), 그대로 두다(고전7:37), 확정하다(고후13:1), 대적하다(엡6:13), 앉다(약2:3), 일어서다(계11:11).


십자가형

우선 사형수에게 기절할 정도로 모진 채찍질을 가한다.
다만 성경에서는 예수는 이러한 채찍질을 당했다는 묘사가 있으나 다른 죄수들은 이러한 묘사가 없다는 점을 들면 일반적으로는 십자가형을 당할 죄수에게 굳이 채찍질을 가하지는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십자가형이 공개처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죄수가 오랫동안 살아있어야 공개처형의 효과가 커지니까 굳이 시작부터 반 죽여놓고 하면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쓰던 채찍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노예들에게 작업을 강요하거나 군율을 위반한 병사에게 그 대가를 가르쳐줄 목적으로 때리는 채찍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짜로 죽일 생각으로 때리는 채찍이었다.
십자가형에서 사용되는 채찍은 대부분 후자로, 벌이 목적이 아니라 사실상 사형이 목적인 도구였다.
이러한 사형 집행용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의 마음에 따라 훨씬 가닥 수가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죽끈을 꼴 때 곳곳에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온갖 위협적인 흉기들을 박아 넣었다.
게다가 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을 하루 동안 물에 담궈 불려놓아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때문에 단순히 피멍이 드는 정도는 약과고, 상처난 곳이 벌어지고, 살이 찢겨져 나갔다.

이 채찍을 이용해 사형수의 전신을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난타질한다.
이렇게 얻어터진 사형수의 피부는 모조리 뜯겨져 나오고 그 밑의 골격과 근육은 대부분 쓸려져 내리는데, 3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에우세비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리고 내장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희생자인 예수의 경우,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망가져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고 한 성경 표현에 비유할 정도이니 일반적인 채찍질과는 차원을 달리함을 짐작할 수 있다.
네로 황제가 폐위된 후 이 채찍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살했을 정도로 무서운 형벌이었다.

이렇게 채찍질을 당해 너덜너덜해진 사형수에게, 자신이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고 처형장까지 이동시킨다.
십자가 형틀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볍게 보는 학자들은 18㎏에서 무겁게 보는 학자들은 50㎏까지 다양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빈사 상태인 사람이 쉽게 지고 이동할 만한 무게는 아니다.
채찍질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 겪는 고통도 엄청난데, 이런 식으로 몸을 혹사당하면 그만큼 빨리 상처의 괴저가 일어나 전신이 불로 달구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중도 사망하는 죄수도 많았는데, 이때 사형수의 가족들은 채찍질을 가하는 집행인에게 뇌물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채찍질을 살살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채찍질을 엄청 심하게 해서 가능하면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죽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사형수가 십자가를 들고 처형장으로 오면 십자가에 매달 준비를 한다.
우선 사형수의 속옷까지 모두 벗겨 나체로 만든다.
형의 집행에 남녀를 가리는 일은 없었다.
이후 사형수를 십자가에 눕히고 손목과 발뒤꿈치에 18cm에서 13cm정도의 사람의 몸무게를 지탱할 만한 초대형 대못을 박는다.
이 못의 크기 때문에, 못에 박히는 순간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팔꿈치를 벽에 세게 부딪칠 때 혹은 척골신경을 펜치로 잡고, 비틀어서, 뭉개는 듯한 심한 고통이다.
쉽게 말해 무릎을 벽이나 책상 모서리 등 딱딱한 물체에 세게 부딪혔을 때나 정강이를 쪼인트까는 고통이 계속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걸 보고 몇몇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익히 알려진 손과 발등에 못을 박는 방식이라면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팔을 십자가에 묶는 식으로 그런 형태를 재현한다 해봤자 결국 별 차이는 없다.
일단 팔과 어깨에 가해지는 압박감이야 그대로이고, 손이란 부위 자체가 촉감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이라 손바닥에 대못을 박으면 역시 상당한 고통이 따르고, 무게로 인해 상처가 점차 찢어져갈 테니 더욱 고통스럽다.
특히 발등의 경우 뼈가 밀집한 곳이라 여기에 대못을 박는 것 자체가 뼈를 상하게 만드는 탓에, 발목에 못을 박는 것에 상응하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애초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부터가 이 전통적 인식의 십자가형에 기반한 것인데, 순화한 게 그만한 고어도를 선보였으니 말 다한 셈.

그리고 사형수가 박힌 십자가를 세워서 사형수가 죽을 때까지 방치한다.
얼핏 보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 자체는 별로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최악의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선 못박힌 상처에 몸무게와 같은 힘이 가해져 상술한 고통이 극대화되며, 못에 잔뜩 끼었을 이물질로 인한 감염 때문에 파상풍이 일어난다. 
여기에 못 박힌 팔이 몸무게 때문에 팔이 늘어나다 결국 양쪽 어깨가 탈골된다.
이를 시작으로 온 몸의 다른 관절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어그러진다.
거기다 양 팔이 대못에 고정되어 있어 가슴을 압박, 폐와 횡격막을 강제로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때문에 사형수는 생존본능상 몸을 올려서 숨을 내쉬려고 하는데, 몸을 세우려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에 힘을 줘서 몸을 들어올려야 하니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힘을 빼버리면 또 다시 숨을 못 쉬는 상태로 돌아온다.
결국 이 과정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의 수형자들은 못박힌 상태에서 대략 1,000번 정도 기절했다가 깨었다를 반복하며, 이 과정은 그야말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태라고.
그렇게 반복하다가 지치면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호흡 수가 줄어들면서 질식사하거나 혹은 호흡 산독증(酸毒症)에 빠져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게 되면서 심장이 터지거나, 심정지로 사망한다. 후술할 십자가형 마지막에 다리를 부러뜨린 이유도 이제 그만 질식사해서 빨리 죽으라고 부러뜨린 것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을 제외하더라도, 십자가형은 당시에 수치와 혐오의 상징과도 같은 형벌이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백주대낮에 알몸으로 매달려 지나가는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당연히 수치스럽지만,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면 더럽고 추한 몰골로 인간성을 잃은 채 죽기 때문이다.
우선 형 집행에 앞서 채찍질을 당한 경우, 난도질 당한 상처들이 세균 감염과 괴저 현상으로 인해 곪아터져 진물과 고름이 흐르고, 부족한 산소와 계속되는 출혈로 인해 상처투성이인 전신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때 풍기는 악취로 인해 주변의 벌레들까지 잔뜩 달라붙게 되니 사실상 목숨만 붙어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지속되는 극악의 고통으로 인해, 몸 안에 있는 모든 체액이 빠져나온다.
단순히 피만 흘리면서 깔끔하게 죽는 게 아니라는 것. 신체에 남아있던 소변, 대변 등의 오물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모조리 빠져 나온다. 한마디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온 몸에서 고름과 진물이 흐르고, 악취와 함께 전신이 산 채로 썩어들어가며, 통제를 잃은 신체에서 분비되는 자신의 배설물에 범벅이 되어 죽는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정치인이었던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역겹고 구역질 나는 형벌"이라고 묘사하며 "로마 시민의 시야는 물론 생각에서조차 지워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십자가형이 단순히 고통스럽게 피만 흘리다 죽는 형벌이었다면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를 내릴 이유가 없다.

이러한 혐오스러움으로 인해 로마 시민이나 시민권자가 아니라도 자유민으로 인정된 사람. 그리고 해방노예는 십자가형을 적용받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속주민은 적용이 가능했지만 자치가 인정되는 동방에서도 총독이 다른 사형으로 대체할 수 있었고 서방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주로 적용 가능한 사례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주인을 살해한 혹은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노예들이었다.
노예가 아닌 자들은 반란이나 연쇄살인 같은 정말 심각한 중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드물었고, 자치가 어느 정도 인정되던 동방이 아닌, 적어도 로마법이 원칙대로 집행되던 서방 지역에서 노예가 아닌 자는 차라리 맹수의 먹이가 될지언정, 십자가형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십자가형은 인간 사회의 가장 하찮은 자들 가운데서도 쓰레기들만 모아 처리하는 형벌로 인식되었고, 이 같은 관습은 형벌을 당할 때 수치스러움을 증가시켰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시점에서 "나는 죄 지은 노예 아니면 가장 나쁜 죄를 저지른 범죄자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도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는 이전에 당했던 채찍질과 못박힐 때의 출혈로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심장이 더 이상 피를 퍼올리지 않게 되고, 혈압이 떨어져서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기절한다.
그리고 신장은 남아 있는 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소변을 만드는 일을 중단하며, 몸은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 액체를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매우 목이 마르게 된다.
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도 로마 병사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주었다.
번역에 따라서는 그냥 식초라 하기도 하지만, 당시 로마군은 쉬어서 식초나 다름없게 된 포도주를 상한 물에 타 둘 다 마실 수 있게 만든 포스카(Posca)라는 음료를 주로 마셨으므로, 예수의 처지를 동정하여 포스카를 준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병사 이전에도 몰약이나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주기도 했는데 이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죄인의 고통을 덜기 위한 마취약이었다는 설이 있다.
예수는 이 몰약 섞은 포도주는 거절했지만 해면에 적신 신 포도주는 마셨다.

보통 십자가에 못박히면 하루 안에 사망한다고 하지만, 처형자가 오래 버티면 다리뼈를 부러뜨리기도 하는데, 이 경우 다리가 버티는 힘이 사라지면서 몸이 순간적으로 아래로 쳐져서 가슴을 더 압박한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발을 세워야 하는데 뼈가 부서졌으므로 몸을 들 수 없어 곧 질식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자비를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19:31-36에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앞두고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예수와 두 도적을 처리해 달라고 본티오 빌라도에게 요청했고, 로마 병사들이 가서 두 도적은 다리를 꺾어 죽였는데 예수는 이미 죽었으므로 시체를 상하게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마지막 자비.
이에 대해선 성흔 문서의 내용도 참고.
다만 이는 유대에만 국한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에선 시체를 계속 매달아 썩게 했으며 장례가 허용되지 않았다.
십자가형의 또 다른 잔인함인데, 십자가에서 내려진 두 강도의 시체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그대로 버려졌다. 
장례를 치른 예수가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

죄수가 사흘간 생존했다는 기록도 일부 보이며, 사흘을 버티면 '너는 죄값을 다 치렀다'며 살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살아봤자 이미 채찍질 과정에서 등의 피부와 근육이 박살이 나고 십자가에 박히는 과정에서 손발목의 뼈와 힘줄에도 심한 타격이 갔고, 지저분한 못으로 인해 파상풍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위생과 거리가 먼 시대고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이 재산이나 빽이 넉넉하지도 않을 테니 풀어줘도 세균 감염, 통증 등의 후유증으로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는데, 유대 전쟁 당시 요새푸스가 십자가에 처형된 유대 반란자들 중에서 지인 셋을 발견하고 티투스에게 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티투스가 십자가에서 내려주었으나 그 중 한 사람만 살고, 나머지는 전부 사망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사형이라서 로마도 사형 중에서 능지형과 함께 최악의 사형으로 규정해 두었고,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했다.

'말 못할 고통, 미칠 듯한 고통' 라는 뜻의 'excruciating'의 어원이 바로 이 십자가(cross)에서 왔으며, 문자적으로 excruciating은 '십자가로부터'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옛 로마의 문인들은 십자가형을 차마 말할 수 없이 잔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라틴어 욕 중 "천벌 받아라"는 의미의 "아비 인 말람 끄루쳄 / 아비 인 말랑 크루켕(Abi in malam crucem)!"은 직역하면 "X랄 같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라"이다.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육시랄 놈"과 의미가 일치하는 것이다.
법에서도 로마 시민들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그래서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로는 참수형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시민권자가 아니었기에 십자가형을 당했다.
십자가형을 집행하고 죄수가 죽을 때까지 보초를 서는 병사들도 그 잔혹함과 죄수가 겪는 끔찍한 고통에 무심하지는 못했던지, 과다출혈이나 질식으로 죽더라도 고통을 덜 느끼고 죽게 하기 위해 죄수에게 마취제를 투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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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까지나 죽는 데 며칠이 걸리는 십자가형에 비해 비교적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길어야 몇 시간 정도로 적을 뿐이지, 확실한 사실은 거열형이나 팽형, 화형 역시 심각한 고통을 동반하는 사형법들이다.

거열형()은 사형의 방법 중 하나이다. 환열(裂), 환형(轘刑)으로도 불린다.

중국전국시대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변법과 개혁으로 유명한 나라 재상인 상앙이 개발했다고 전하며, 과 사지를 밧줄에 묶어 의 힘으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방법이다.
이름에 수레 거가 들어가는 이유는 밧줄을 소의 몸에 묶은 모습이 우마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사극 등에서는 이를 오해하여, 실제 수레가 형 집행에 동원되는 연출이 나오기도 한다.

5마리의 를 이용해 당기기에 오우분시(五牛分屍)라고도 하고, 몸이 5조각이 나므로 오체분시라고도 한다.
잘 안 찢어질 경우에는 망나니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칼집을 내기도 했다.
능지형 정도는 아니라도 심히 아프게 죽을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거열형을 실행하면 무릎 관절 혹은 허벅지 관절부터 찢어지지만 허벅지 관절이 뜯어지는 상황은 거의 없다.
적어도 역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무릎부터 파열한다.
또한 보통 상상하는 모습대로 양 손목과 발목에 줄을 묶었다간 손발만 뜯겨져 나가 죽지 않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팔꿈치와 무릎에 줄을 묶는다.

이 벌을 고안해낸 상앙은 결국 죽은 뒤 이 형벌부관참시를 당했다.
사형대 기요틴을 고안해 낸 기요탱 박사가 기요틴의 이슬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상앙의 거열은 사실이다.
산 채로 당한 것은 아니고 숙청의 위기에 몰린 상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 시체를 함양으로 끌고 가 거열에 처했다. 그는 변법으로 진나라에게 부국강병을 이뤄주고 전국을 통일할 발판을 마련해줬지만, 무자비한 처벌을 한 터라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러서 거열당한 뒤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다투면서 그의 살을 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로 반란을 꾀한 역적을 처형할 때 쓰이며, 동양권은 물론 유럽에도 마녀이단, 반역자 등 중죄인을 처형할 때 비슷한 방법을 썼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루이 15세의 암살 미수범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이 말 3마리에 묶여 처형당한 장면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미셸 푸코의 대표 저작 <감시와 처벌>의 도입부에 전근대의 대표적인 형벌로써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잔혹함 때문에 공개처형의 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했다.

사실 고대 기준으로도 너무 잔인한 처벌이라 춘추전국시대 지식인들도 거열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며, 중국에서는 978년 요나라에서 평왕의 아들 진가가 부왕을 살해하려다 거열형에 처해진 후에는 공식 형벌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2]


[2] 사실 능지형도 FM대로 집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 보통 형대상자를 먼저 죽이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이 경우는 육시()라고 하며, 욕설 '육시랄'의 어원이 이것이다), 아니라 해도 죄수에게 마취를 목적으로 아편이라도 먹였다. 다만 이는 인도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쇼크로 너무 일찍 죽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능지형은 시신의 훼손 정도는 십자가형보다 더해도 실제로 가해지는 고통은 FM대로 집행하든 AM대로 집행하든 십자가형보다는 덜했다.[3] 그 밖에도 스카피즘이라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시행된 길고 고통스러운 사형방식이 있었다 전해지지만, 이는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다.[4]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한 십자가는 '아포툼파니스모스(Apotumpanismos)'라고 한다.[5] 스파르타쿠스는 전투 중에 전사했다.[6] 다른 건 몰라도 사형 선고만큼은 반드시 로마 행정관의 허가가 필요했다. 뒤집어 말하자면 사형 이외의 형벌은 로마인 행정관의 허가조차 필요 없었다는 뜻이 된다.[7] 다만 해당 전통이 복음서 외에서 발견된 적은 없기에, 현대 사학자들은 이 전통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본다.[8] IESVS NAZARENVS REX IVDAIORVM. 예수스 나자레누스 렉스 유다이오룸. 십자고상을 보면 명패에 INRI라는 약자로 적혀있다.[9] 일부 해설본에서는 피지배민족인 유대인들의 선동에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처형하게 되자 자존심이 상한 빌라도가 처형하는 대신 유대인들에게 엿도 먹이려고 일부러 저런 명패를 달았다는 말이 있다. 사실 당시 빌라도는 예수를 진심으로 믿었거나 원칙주의자라서 처형을 말리려 한 것이 아니라 원래도 말 안 들었던 유대인들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을 죽이라고 엄밀히 정부에서 임명받아 그들을 다스리는 빌라도에게 떼쓴 것이니 빌라도 입장에서는 당연히 순순히 내줄 이유가 없었다. 쉽게 말해 기싸움(= 당신이 이 사람 안 죽이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당신은 황제의 충신이 아니다 등등)에 져서 멀쩡한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일부러 불편한 심기를 팍팍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 해석대로면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들은 너희가 죽이는 거지 내가 죽이는 게 아니라고 선포하는 것도 일말의 양심선언이 아니라 이런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는 거라고 볼 수 있다.[10] 특히 성경 관련 영화나 매체에서는 예수는 일단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서 못에 박히는데 비해, 다른 두 죄수들은 멀쩡한 상태에서 못에 박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1] 성경에서도 누가복음 23장과 요한복음 18~19장을 통해 보면 빌라도가 군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에게 채찍질만 가한 후 풀어줄 생각이었으나, 그 후에도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12] 성경에서 보면 양의 뼛조각, 철조각 등 온갖 날카로운 조각들을 붙여놨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13] 기독교계에서 유명한 영화인,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이 장면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채찍질의 상식을 뛰어넘는다.[14] 이사야서 52장 14절: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사람 비슷한 모습도 지니고 있지 않아서 보는 사람마다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15] 참고로 이 채찍질은 십자가형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었으며, 로마 시민과 해방 노예를 대상으로 한 참수형에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당시 기록에도 남아있다. 특히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10분의 1형에서는 아예 죽을 때까지 후려쳤다고 한다.[16] 실제로 예수의 경우 골고타 언덕까지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고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다.[17] 2004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두 죄수가 가로축인 파티불룸만 어깨와 팔에 걸쳐 묶어서 지고 가는 데 반해 예수는 종래의 이미지대로 십자가 전체를 손으로 들고 가며 2011년작 My Last Day에서는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파티불룸만 진다.[18] 다만 예수는 빈사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고 이동했고 다른 대부분의 죄수들은 채찍질을 맞지 않은 상태에서 지고 이동했다. 그렇다고 건강한 상태에서도 저 무게가 가벼운 무게는 절대 아니다.[19] 비슷한 사례로, 전근대 한국에서도 죄인의 가족 등이 참수형을 집행할 망나니에게 고통 없이 한 번에 편하게 보내 달라고 뇌물을 쥐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정작 죄질이 극악할수록 오히려 채찍질을 안 하고 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행인에게 채찍질을 심하게 당하면 얼마 가지 않아 숨을 거두기 때문에 그나마 고통이 덜해지지만, 채찍질을 당하지 않고 집행하면 오히려 고통이 며칠이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십자가를 지기 전 따로 채찍질을 당한 예수는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으나, 그렇지 않은 두 강도는 안식일 시작 전(현대 기준 토요일 오전 6시)까지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려야 했다. 또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봉기를 진압한 뒤 생포된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할 때도 일부러 채찍질을 하지 않았는데, 반역자가 고통스럽게 죽는 광경을 다른 사람들이 며칠에 걸쳐 아피아 가도를 지나면서 봐야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두 강도는 채찍질을 당했다는 묘사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예수만 채찍질을 모지게 당했다는 묘사가 있는데 십자가형에 처하는 이유가 오랫동안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하기 위함이라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채찍질을 안 해야 오래 살기 때문에 그렇다. 본티오 빌라도는 성서에 나오는 묘사로는 그저 예수를 채찍질만 하고 풀어주려는 생각이었으나 십자가형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요구에 못 이겨 십자가형까지 선고해버려서 예수의 십자가형이 특히 잔혹해졌다는 평가다. 결국 예수는 두 강도보다 일찍 사망했고 두 강도는 시체를 매달아두면 안 되는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죽지 않아서 병사들이 직접 다리를 부러뜨려 죽였다.[20] 다만, 여자의 십자가형이 미술에 묘사되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다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들도 거의 최근에 와서 예술로 그려진 것들이며, 보통 십자가하면 남성인 예수를 생각하기 마련이므로.[21] 흔히 성화상에는 예수의 손바닥에 못이 박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이다. 당시의 언어가 손바닥과 손목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고대 헬라어에서는 손목이 손바닥에 속했다)이다. 상식적으로도 손목의 뼈 사이에 못을 박아야 몸이 단단하게 고정이 되며, 손바닥에 못이 박히면 몸무게 때문에 손바닥이 찢겨져 나가서 십자가에서 떨어져 버린다. 물론 팔을 밧줄로 묶어서 고정했다면 손바닥에 박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22] 팔굽에 있으며 때리면 짜릿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나는 부분의 신경.[23] 사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에서나 그나마 현실에 근접하는 고어도를 보인 정도이고, 막상 십자가가 세워진 다음 희생자가 겪는 끔찍한 고통에 대해선 그냥 대강 넘어갔다. 즉 현실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절대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24]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묘사되지 않은 증상이지만,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못박힌 손목과 발목 모두 시간이 흐르면서 끔찍스럽게 부어올랐을 것이다.[25] 혈액 속 이산화 탄소탄산으로 분해되면서 혈액의 산성이 증가하는 것.[26] 사실 이 당시엔 최대한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게 하는 사형방식이 유행이었는데, 앞서 설명한 방식대로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둔 후 손발의 통증과 서서히 조여오는 숨통으로 인해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최대 3일까지 생존한 죄수도 있다고 한다. 성서에서 예수의 양옆에 못박힌 죄수들을 빨리 죽으라며 다리를 꺾었는데 이는 예수의 처형 다음날이 유대교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였다.[27] 이들에 대한 법정 최고형은 참수형이었다. 사도 바울로가 참수형으로 순교한 것이 바로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이다.[28] 물론 네로처럼 대중에게 보여주고 방화죄를 뒤집어 씌울 겸 당시 로마에 살던 속주민 출신 기독교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네로 자체가 로마 역사상 극히 드문, 비정상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었다.[29] 고대 로마 시대에 해면의 용도는 휴지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를 두고 로마 병사의 행위는 모욕을 위한 것이었다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휴지가 화장실에서만 쓰이지는 않듯이, 이 당시의 해면도 볼일을 본 뒤 닦는 용도뿐만은 아니었다. 로마 군인들도 해면을 두 개 소지하고서는 작전 등으로 인해 주둔지 밖으로 나갈 경우 깨끗한 해면을 이용해 물을 마셨는데, 이는 해면은 압축해서 들고 다닐 수도 있기에 공간 차지가 적고, 컵과는 달리 깨질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30] 요한 복음서에서는 창으로 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유명한 롱기누스의 성창이 이때 쓰인 창이다.[31] 부활 영화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시체들을 처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의 버리다시피 하는데 시체를 처리하는 병사들이 시체의 썩는 냄새 때문인지 구역질을 해댄다.[32]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을 때 빌라도가 흔쾌히 시체를 내어주었는데 본래 십자가형을 받는 사형수는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빌라도는 죽이는 걸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죽인 예수의 시체를 도의적인 차원에서 예외로 장례를 허용해준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33] 로마 군법에는 더 상위의 처형이 하나 더 있었는데, 군단의 10% 인원을 무작위로 뽑으면 남은 동료들이 직접 때려죽이게 해서 집단 처형하는 1/10형(decimatio)이 그것이다. 워낙 악명높았기 때문에 학살을 의미하는 단어 'Decimate'의 유래가 됐다. 제노사이드보다 조금 더 광범위한 의미로 쓰인다.[34] 전자가 교회 라틴어, 후자는 로마 제국 당시 라틴어(즉 고전 라틴어) 발음.[35] 아킬레스건에 가까운 방향.[36] 요한 복음서 20장 27절.[37] 해당 언어들에서 손이라는 단어는 팔 전체를 가리키고, 발은 다리를 넘어 사타구니까지 포함한다.[38] 애시당초 개혁주의 개신교에서 성상을 꺼리는 이유에는 단순히 '비성경적이다', '우상숭배다' 외에 묘사된 성상들이 하나같이 재현 오류 투성이라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보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39] NGC 예수 이전 메시아의 부활.[40] 대부분 속옷 비슷한 걸 입힌 십자가상이나 그림이 많지만 반대로 현실대로 다 벗겨놓은 그림이나 십자가상도 있는 편이다. 구글에 검색하면 나온다. 물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정말 그대로 다 벗겨서 처형하는 장면이 나오는 건 몬트리올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정도. 대부분 영화에서는 속옷 비슷한 걸 입고 있다. 이유는 알몸 표현이 예나 지금이나 많이 터부시되고 그림은 몰라도 영화 제작에서 이렇게 알몸 표현을 하면 성(性) 관련 심의규정 등 여러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해서 편의상 입힌다고 보면 된다.[41] 정확히는 좌우 옆구리에서 창을 찔러넣어 어깨로 관통하게 찔렀다. 이 때문에 일본 책형의 경우 애초에 죄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나 방식이 십자가형과는 전혀 다르므로 완전히 동일시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사실상 창을 이용한 자살(刺殺)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42] 그 영향으로 오늘날 일본의 가톨릭 성당에 있는 십자고상 중에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형(책형)에 처해진 전근대 일본 가톨릭 신자의 모습을 한 게 많다. 그리고, 바울로는 십자가형이 아닌 참수형을 받게 되자 십자가형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고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는 것도 송구스러워하면서 역십자형으로 순교했다고 전승된다.[43] 여자의 하의를 벗긴 후에 등을 묶어 매달아서 삼각목마형 고문도구에 태우는 것이다. 문제는 목마의 안장이 그야말로 칼날 그 자체라는 것. 그걸로도 부족하면 발목에 무거운 추를 매단다. 스페인 마녀재판에 주로 사용되었고, 역시 에도 시대 천주교 박해 때도 이용되었다.[44] 잔 다르크가 당한 것 같은 방식과는 달랐다. 당시 일본의 화형은 여성과 남성을 불문하고 전라로 만들어 기름을 붓고 기름에 절은 도롱이까지 입혀서 광장에서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다.[45] 슬로바키아자유 프랑스 국기에 그려져 있는 로렌 십자와 비슷한 것.[46] 실제로 이 문화는 문경 십자가 시신 사건 발생되기 훨씬 이전에 한국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바가 있었다. 이에 해당 사건의 당사자가 이 방송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필리핀 현지인들도 어떻게 혼자서 할 수 있냐는 등의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 한다.[47] 심지어 테마곡 또한 '산제물의 역책형'.[48] 조피,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 울트라맨 잭.[스포일러] 아라가키는 이미 죽었거나 의식불명 상태로 이탈한 시점이다.[50] 애초 로마가 모티브인 집단이다, 다만 존중받을 가치가 있을 만큼 강한 이들은 참수형으로 고통 없이 끝내준다.[51]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다르다.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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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라는 단어를 한글성경에서 검색하면 신약에서만 72구절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16
마가복음 12
누가복음 8
요한복음 11
사도행전 2
로마서 1
고린도전서 6
고린도후서 1
갈라디아서 6
에베소서 1
빌립보서 2
골로새서 3
히브리서 2
요한계시록 1
_________________ 72구절

예수님께서 십자가형(十字架 刑)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형은 인간이 지닌 잔인성과 가학성,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형벌이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은 인권이 무시된 채 길가에서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다.

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참혹하고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셔야 했을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해 알려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형의 잔인성

십자가형은 사거리, 극장, 언덕 등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서 집행됐다. 이는 로마제국이 민중에게 공포심을 심어 국가를 향한 반란심이나 저항 의지를 초석부터 꺾기 위함이었다. 죄수는 대중 앞에서 십자가에 나체 상태로 매달려 처형당했다. 이러한 처형 방식은 죄수에게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수치심까지 안겨주었다.

일단 십자가형이 선고된 죄수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직접 지고 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의 질타를 받고, 십자가에 달린 이후에도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배고픔, 목마름, 수치심을 겪는다. 그러나 목숨이 끊기기 전까지는 절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다.

십자가형은 그리스어로 ‘Stauros’라 한다. 사람을 매달 수 있는 말뚝을 의미하는데, 집행 방법은 찌르기, 매달기, 묶기, 못 박기 등 다양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형틀은 기둥 모양이나, ‘T’자 모양, ‘十’자 모양이 보편적이었다.

예수님께서는 7피트(약 2m) 정도 높이의 십자가에 달리셨다. 실제 예수님을 못 박을 때 쓴 못의 길이는 5~7인치(약 12~17cm)인데, 못이 박힐 때 느껴지는 고통은 팔굽뼈의 신경을 잡고 펜치로 비틀어 뭉갤 때의 강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죄수들은 보통 9시간에서 2~3일, 길게는 일주일까지 십자가형을 당했다. 그런데 성경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예수님은 이미 생명이 위독하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 이전 태형(채찍형)을 받으셨다. 로마의 태형은 매우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다. 이 형벌에는 ‘아홉 꼬리 고양이’라는 이름의 채찍이 사용되었다. 총 39가닥의 줄로 이루어진 채찍 끝에는 동물의 뼈, 쇠구슬, 유리조각 등이 박혀 있어, 한 번만 채찍질을 가해도 죄수는 치명상을 입었다. 로마 군병들은 이 채찍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하기 위해 처형 전 미리 채찍 가죽을 물에 불려 놓았다고 전해진다. 고대에는 이 형벌을 받다가 쇼크사로 즉사한 사례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장시간 동안 채찍질을 받으셨다. 군병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묵직한 채찍은 예수님의 어깨, 팔, 가슴, 복부, 등,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 등 전신에 깊숙이 박혔다. 3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의 잔인함에 대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은 밖으로 드러나고, 근육과 근골, 창자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후에도 인간이 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견디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해 연구하는 의학자들은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극심한 호흡곤란과 혈액순환 장애를 겪었을 것’이라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뤼네발트의 작품 <십자가형>, 1515년∙유화∙운터린덴 미술관

대한민국의 한 법의학자는 그뤼네발트의 작품 <십자가형>이 예수님의 고통을 잘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슴 밑 부분이 잘록하게 파여 들어가고 흉벽에는 늑골 모양이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은 호흡곤란이 오다 지쳐서 탈진상태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못이 박힌 손바닥 부위를 보면 손가락은 부채 살처럼 퍼져 있는데 이것은 손바닥에 못이 박힐 때의 아픔 때문에 손목과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을 때 보이는 모양이다. 발 부위는 두 발이 겹쳐 못이 박혔으며 발가락의 인대들이 줄무늬처럼 일어선 것 역시 아픔 때문에 일어나는 발가락의 경련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예수님께서 선고받았던 십자가형의 의미

예수님께서 선고받으신 십자가형은 그 당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그야말로 저주의 상징이었다. 십자가는 이미 구약시대부터 저주받은 나무로 여겨졌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십자가형을 받은 이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므로, 그 시체를 밤새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고 명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2~23)

유대인들은 흉악한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중죄인을 처형한 후 나무 위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 매달려 죽은 자를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 칭했다. 그러한 십자가형을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이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예수님께서 이런 끔찍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임을 증거하시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마태복음 14:14~21),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요한복음 2:1~10) 등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정작 십자가 앞에서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잠잠한 양처럼 고난을 감내하셨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당신을 호위하게 할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신을 위한 이적과 기사를 보이셔야 할 때 그리하지 않으셨다(마태복음 26:53).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극한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성경은 우리 인류가 지은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이 죄는 하늘에서 지은 죄를 의미한다. 즉 인류는 하늘에서 지은 죄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인생을 가리켜 ‘하늘에서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하셨다(누가복음 19:10, 마태복음 9:13). 공교롭게도 우리가 지은 죄는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영혼의 심판과 죽음까지 치러야 비로소 씻어낼 수 있다(요한계시록 20:11~15, 마태복음 10:28). 그렇다면 인류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인류가 감당해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셨다(요한복음 1:29).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증거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4~6)

우리가 겪어야 했을 사망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심으로 인류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묵묵히 당하신 이유였다. 예수님의 크고 지극하신 사랑에 우리가 어찌 보답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새 언약 유월절

전 세계 모든 기독교는 교파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인류 구원을 위한 가장 큰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기념한다며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세우고 섬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작 예수님께서 그 희생을 담아 세우신 구원의 약속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하신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이 유월절 지키기를 원하고 원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새 언약의 유월절을 세우시고 전해주시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새 언약 유월절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써 세워졌으며, 그 처절한 희생의 대가로 우리에게 허락된 진리다.

진정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인류의 사망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붙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5, 19~20)












백발



백발 / 성서공회 검색 결과 9구절

1. [신명기 32:25]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까지리로다

2. [열왕기상 2: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3. [열왕기상 2:9]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찌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찌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4. [역대하 36: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5. [욥기 41:32]
자기 뒤에 광채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6. [잠언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7. [잠언 20:29]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8. [이사야 46: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9. [호세아 7:9]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센 머리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생명나무


한글 개역 성경에서 "생명나무"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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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잠언 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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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창세기 3:22-24)

22. 여호화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일반적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하여는 많이 들어 보았지만 이 생명나무에 관하여는 잘 들어보지도 못하였고 또한 잘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창세기 2:9 말씀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시므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 가운데에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도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지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임을 만든다든가 또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 가운데에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나무보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현재는 더 유명하다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나무의 공통점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창세기 3:6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하셨으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것이 무슨 지혜였는가 하면 본문 말씀 창세기 3:22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하심과 같이 뱀이 여자에게 알려준 사실대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무리와 같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봐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할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간접적인 동기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입니다.
이 두 나무가 동산 가운데에 함께 있었고 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것이 같았는데 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 먹지 말라고 명령을 하셨는가?

만약에 한, 두 살 된 어린 아이 앞에 사탕과 사탕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둔다면 아이는 그것을 입에 넣어보고 입에 단 사탕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달지도 않고 또 그 다이아몬드의 값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에게 사탕과 다이아몬드를 내 놓는다면 무엇을 가지겠습니까?
다이아몬드겠지요. 그 다이아몬드의 값어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결과로 눈이 밝아져서 벗은 줄을 알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의 무리와 같이 된 후에라야 생명나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나무에 관한 말씀은 하지 아니하시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판단한 사실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또 그 결과도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잠언서 3:15부터 말씀을 보시면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하시므로 이 생명나무 또한 지혜의 나무인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24부터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5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하셨으니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므로 영생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4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하심과 같이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계시록 22:19 말씀에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하시므로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릴 것이니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아니하면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제한다’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뺀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에 계시록이 있으면서 모르는 것과 또는 계시록을 떼어 버리고 모르는 것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한다’는 뜻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않는다’것은 ‘예언의 말씀을 안다’는 뜻인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아니하여 생명나무로 나아가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 수 있겠지요. 계시록 2:7에 보시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하셨으니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기는 자로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 말씀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하시므로 이긴 자이십니다. 이기는 자는

요한일서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이기는 자인 것을 믿습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요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다 하였는데 죽은 영혼에게는 장수와 부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장수와 부귀는 살아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지혜로 장수와 부귀를 얻을 자들은 마태복음 24:21부터 말씀에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하심과 같이 전무후무한 환난의 때에도 택하신 자들로 육체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전무후무한 환난의 때에 육체의 구원을 얻은 자들은

고린도전서
15:51-54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이니요 마지말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홀연변화를 받아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어 영생으로 옮기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는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움을 가리게 되며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의 무리와 같이 되는 지혜로 생명나무를 발견하게 될 것이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는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나무 실체는 무엇인가? 창세기와 요한복음 증언

창세기의 ‘생명과’의 실체는?

생명나무(히브리어: עֵ֥ץ הַֽחַיִּֽים)는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특별한 나무다.
성경에는 그 열매를 먹으면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젊음과 생명의 영속을 바라는 인류에게 있어, 생명나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생명나무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

생명나무 열매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처음 거론되었다.
먹으면 죽음에 이르는 선악과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으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창세기 2:16~17)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 각종 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아담과 하와에게 마음껏 따 먹도록 허락하셨다. 단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금하시며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먹어버렸다(창세기 3:4~6).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에서 살지 못하고 추방당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 그가 생명 나무의 과일을 따먹고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된다 하시고 ···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여 ···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 천사들을 배치하여 ··· 화염검으로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현대인의성경 창세기 3:22~24)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쫓아내신 후 화염검과 그룹 천사들을 에덴동산 동편에 배치하여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셨다.

죄인으로서 생명나무에 손을 댄다면 화염검에 죽임을 당했다. 이때부터 생명과를 원해도 먹을 수 없게 된 아담은 죽음의 고통에서 신음하다 결국 930세에 삶을 마쳤다(창세기 5:5). 만약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막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먹고 영생을 누렸을 것이다. 생명과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의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곤고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로마서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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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에 가는 방법을 깨달은 아벨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잃고 한탄하던 아담에게 그것을 다시 먹을 수 있는 진리를 보여주셨다.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히브리서 11:4, 13) 하나님께서는 이 진리를 두 아들 곧 가인과 아벨에게 증거하였다(히브리서 11:4). 그러나 가인은 그것을 거부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농산물로 제사했고, 아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어린양의 피를 흘려 제사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창세기 4:3~5)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신 이유는 어린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으면 결단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히브리서 9:22). 즉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할 때는 반드시 피 흘림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아벨은 이 진리를 깨닫고 어린양의 피로 제사한 것이며, 이는 곧 선악과의 죄에서 풀려나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짐승의 피로 제사하는 제도는 오랜 세월 동안 구전되어 노아, 아브라함 시대를 넘어 모세 때까지 전승되었고(창세기 8:20~22, 12:7, 15:9), 모세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규례의 제도로 성문화되었다.

구약시대 제사가 이루어진 장소는 성소였다. 앞 칸 성소와 뒤 칸 지성소로 나뉜다. 흥미로운 점은 에덴동산의 그룹 천사가 생명나무를 지켰던 것처럼, 지성소에 있는 두 그룹 천사가 법궤 즉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너는 금을 두들겨 두 그룹 천사의 모양을 만들어 궤 뚜껑 양쪽 끝에 각각 하나씩 세워라. ··· 그 그룹 천사들은 날개를 위로 펴서 속죄소를 덮고 그 얼굴은 속죄소를 향하여 서로 마주 보게 하라. 그리고 두 돌판(십계명)을 궤 안에 넣고 ···

(현대인의성경 출애굽기 25:18~21)

하나님께서 법궤가 있는 속죄소 양편에 두 그룹 천사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곳에 영생에 들어가는 생명과가 있기 때문이다. 즉 십계명은 아담과 하와가 따 먹던 생명과 대신에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9:16~17).

그렇다면 지성소 안의 십계명은 의인이 아닌 죄인이 마음대로 만질 수 있었을까? B.C. 1500년경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 벧세메스 사람들, 웃사 등은 부정한 손으로 법궤를 만지다가 불에 휩싸여 죽임을 당했다(민수기 18:3, 레위기 10:1~2, 사무엘상 6:19, 사무엘하 6:6~7). 죄인의 몸으로 법궤 곁에 가까이 가거나 만지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나무를 지키던 두 그룹 천사가 화염검을 가졌던 것처럼, 지성소 안의 법궤를 지키는 두 그룹 천사도 화염검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갈까?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있는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공동번역 히브리서 10:19~20)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는 것이다. 구약시대 대제사장들이 속죄 제물의 피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레위기 16:1~34, 히브리서 9:18~28),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가 생명나무 열매를 받게 될 것을 그림자로 보이신 것이다(히브리서 6:19~20, 로마서 3:22~25, 8:3~4). 즉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인이라도, 유명한 목사라도, 내로라하는 신학박사라도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지 않고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요한복음 6:48~57).

문제는 예수님의 피를 어떻게 힘입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단지 믿기만 하면 될 문제인가, 아니면 어떤 구체적 방법이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직접 그 해답을 알려주셨다.

예수의 시키신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잔(포도주)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28)

성력 1월 14일 저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즉 유월절 성만찬 예식을 행하셨다. 주목할 점은 이날 먹는 떡을 가리켜 “내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내 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당신의 희생의 피로 한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유월절 새 언약인 것이다. 즉 유월절 떡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이고, 유월절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것이다(누가복음 22:14~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내 살(유월절 떡)을 먹고 내 피(유월절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한복음 6:53~57)

결국 인류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을 수 있는 방법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이다. 이를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세상 끝날까지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를 힘입어 지성소에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고린도전서 11:23~26).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생명나무 열매의 비밀. 먹으면 영생을 얻게 하는 그것의 실체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새 언약 유월절이다.

생명과를 먹는 진리인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믿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기와 규례를 ‘준행’할 때야 비로소 ‘살 길’을 얻는다고 증거하고 있다(에스겔 20:11, 18:9, 레위기 18:4~5).

아담으로 시작하여 모든 인류가 바라던 ‘영생’이라는 선물이 눈앞에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선물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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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עץ החיים 에츠 하솨임 Etz haChayim),
명의 나무
, 생명수(生命樹)는 창세기에 나오는 어구이며, 야훼에덴 동산 한가운데에 심은, 불로장생과 같은 영원한 삶을 주는 열매를 지닌 나무를 가리킨다.
야훼는 생명나무와 더불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었다. (창세기 2장 9절)
그러나 일부 학자에 따르면 같은 나무에 두 가지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설도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용어 둘 다 세계수의 형태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고대 히브리어: עֵ֕ץ הַדַּ֖עַת ט֥וֹב וָרָֽע ʿêṣ had-daʿaṯ ṭōwḇ wā-rā, 영어: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창조 신화의 한 종류인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 가운데에 있는 나무이다.[1]야훼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아담에게 이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직접 명령하였다. 이와 비슷한 나무인 생명나무 또한 동산에 있었다. 그 뒤 이러한 금기를 알고 있는 하와에게 뱀이 접근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난 열매인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였다.[2] 뱀은 하와에게 이 과실을 먹으면 현명하게 될 것이라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아담과 하와는 그 금단의 열매를 먹고 그들이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다.[3] 야훼는 그들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음을 알고 이들을 동산 밖으로 쫓아내어 그들에게 불로장생을 안겨줄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였다. 야훼는 뱀과 땅에 저주를 내려 아담이 농업으로 수고하여야 살아남을 것이라 하였고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심히 늘린 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동산 동쪽에 케루빔과 번쩍이는 불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4]

이름의 의미

선악에 대한 지식을 알도록 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지은 자에 대한 논의는 가장 먼저 앤토니 버제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어거스틴 이후로 어떤 영향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고, 아담이 경험적으로 터득한 것으로 결국 선과 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았다. 또한 단순히 사건만으로는 의미를 모두 알 수 없고, 하느님의 신적 작정과 지정이 하느님이 지정했던 것보다 아담이 알지못하도록 제한을 갖도록 하였다고 밝혔다.



선악과(善惡果, 영어: forbidden fruit)는 창세기에 나오는 열매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이다.[1] 하느님이 아담에게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유일한 열매이기도 하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에덴 동산에서 이 과실을 따먹었다고 기록되었다.

성경의 기록

16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17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 공동번역 개정판, 창세기 2장 16-17절

정체

창세기에는 금지된 열매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고있지 않다. 본문에 사용된 열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페리(פֶּ֫רִי)'이다. 이 열매의 모양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여러 후보가 제기되어왔는데, 사과, 포도, 석류,[2] 무화과,[3]케럽,[2]시트론,[2], 마르멜루(모과), 버섯이 후보로 제기되어왔다. 위경에녹서타마린드 나무에 포도를 닮은 열매가 매우 아름답게 열렸으며, 그 향기가 엄청나게 멀리까지 퍼져나갔다고 서술한다.[4] 이슬람교에서는 포도나 밀로 묘사한다.[5]

사과

사과는 다양한 종교들에서 신비적이고 금지된 과일로 여겨진다. 일반적인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와아담을 유혹하여 함께 나누어 먹은 과일이 사과라고 본다. 라틴어에서 사과(라틴어: malus)와 악(라틴어: malum)을 뜻하는 단어가 유사한 까닭에 이러한 해석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람의 목에 있는 후두가 영어로 "Adam's apple"이라고 불리는 것도 아담의 목에 걸려 있는 선악과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사과의 유혹적인 빛깔, 양면성을 지는 맛(달콤하고 신), 여성을 암시하는 중심의 생김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과를 가로로 잘랐을 때 중심의 별의 모양이 바로 선악과나무에서 자랐을 열매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해석하였다.[6]

또한 지금의 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접하는 국경을 기준으로 그 남쪽에서는 포도를 숭배한 반면 북쪽에서는 포도가 잘 자라지 못하는 까닭에 사과를 숭배하였다. 그래서 그곳의 성직자들 및 드루이드들은 의식을 거행할 때 포도주 대신에 사과주를 이용한 것으로 본다. 이들은 심지어 천국을 아발론(Avalon) 즉 사과의 섬이라고 부르면서 그곳엔 사과 착즙기 같은 것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켈트족은 자신들의 신앙인 드루이드교와 기독교를 합하여 기독교의 한 분파인 켈트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4세기 경에 이르면서 로마 가톨릭과 심각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470년경, 로마 가톨릭은 켈트 기독교의 그 성스러운 과일을 선악과의 전형으로 삼기 시작한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고 본다.[7]

이슬람 종교는 경전 쿠란에서 아담과 하와의 열매에 대해 얘기하는 구절에서 사과라는 명칭은 없고 선악과로만 표시되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생명나무란 무엇인가요?

생명나무는 성경의 시작과 끝에 모두 등장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생명나무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의도하신 생명의 충만함을 상징하며 성경의 서사를 마무리합니다.

생명나무는 창세기에서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서 있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아담과 이브가 있던 낙원의 중심 요소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도 한 온갖 나무가 땅에서 자라게 하셨어요.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창세기 2:9). 이 나무는 영생과 하나님의 공급의 상징입니다. 타락하기 전 인류가 접근할 수 있었던 이 나무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타락 이후 인류는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죄의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않도록 그룹과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세기 3:22-24). 이 행위는 단순한 징벌이 아니라 인류가 깨어진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않고 구원을 기다릴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낙원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명나무는 생명수 강 양쪽에 서서 열두 가지 열매를 맺으며 열방을 치유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때 천사가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큰 성 한가운데로 흐르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서 있었고, 매달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잎사귀는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1-2).

따라서 생명나무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공급,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약속을 상징하는 강력한 성경적 상징입니다. 신성한 은혜에 뿌리를 둔 생명나무는 신과 인간 사이의 조화 회복을 상징하며, 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가족들이 종종 크리스마스 트리 주위에 모여 축하의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생명나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물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계절의 전통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신자들을 위해 다음을 살펴보세요. 크리스마스 트리에 관한 성경 구절 는 이러한 상징의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며, 창조물과의 영원한 친교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The 성경에서 나무의 상징성 는 하늘과 땅을 잇는 궁극적인 다리가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듯이 희생, 구속, 신성한 연결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명나무와 나무의 의미를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그분의 구속 계획에서 발견되는 희망을 묵상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서 처음 등장하며 영생과 하나님의 공급을 상징합니다.
  • 타락 이후, 인류는 죄의 상태에서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낙원과 영생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생명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상징입니다. 인류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에 대한 희망에 관한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설정하신 경계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도덕법과 선악에 대한 지식을 구현합니다. 이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 이 금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에 대한 순종과 신뢰의 시험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생명나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상징합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이브는 창조주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상징하는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 그들은 죄의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에서 추방당했습니다(창세기 3:22-24).

두 나무의 관계는 인간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강조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고,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었고, 이는 죄로 인해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실했음을 상징합니다.

구원과 회복의 희망은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일부로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이에게 제공하는 궁극적인 치유와 영생을 의미합니다.

요약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도덕적 경계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시험을 상징합니다.
  • 생명나무는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 지식의 나무와 관련된 불순종으로 인해 생명 나무에 대한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영생을 약속하는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을 회복시켜 줍니다.

기독교 교파마다 생명나무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다른가요?


기독교 교단은 각 교단의 고유한 교리적 강조점과 전통을 반영하여 다양한 신학적 렌즈를 통해 생명나무를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성경에 뿌리를 둔 공통적인 요소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톨릭 해석: 가톨릭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종종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구원과 영생을 제공하는 새로운 생명나무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연관성은 십자가가 생명과 치유의 원천으로 묘사되는 가톨릭 전례와 예술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에덴에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여 영생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가르칩니다.

정통 해석: 동방 정교회도 마찬가지로 생명나무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정교회 전통은 생명나무의 신비적이고 성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성찬례와 연관시킵니다. 성체성사는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과의 친교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교회 도상학에서 십자가는 종종 생명나무를 모티브로 하여 그리스도의 희생과 영생의 약속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개신교 통역: 생명나무에 대한 개신교의 해석은 교파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영생과 신의 공급에 대한 상징적 표현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개신교 전통은 생명나무를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통해 성취된 약속으로 간주하여 구속의 내러티브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생명나무를 영생에 이르는 길을 회복시켜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간주합니다.

복음주의적 해석: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구원의 개인적 측면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영생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는 종종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생명을 주는 관계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믿음과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서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반영하지만, 모두 생명나무를 하나님의 공급, 영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소망을 상징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요약

  • 가톨릭: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십자가의 예표로 여겨집니다.
  • 정통: 생명나무와 성체성사, 그리고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연결합니다.
  • 개신교: 생명나무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영생과 신성한 공급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 복음주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한 영생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생명나무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요?

초대 교회 교부들은 생명나무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풍부한 신학적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의 글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성경과 생명나무의 신학적 함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종종 생명나무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제공되는 구원과 영생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생명나무를 그리스도 자신과 연결시켰습니다. 성경의 유형학에 깊이 뿌리를 둔 이 이미지는 역사 전반에 걸쳐 기독교 전통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성경적 기원 를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생명과 희망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이러한 성찰을 통해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했습니다.

성 이레네우스: 성 이레네우스는 그의 저서 "이단에 대하여"에서 생명나무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을 주는 존재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잃어버린 생명나무에 다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생명나무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에 대한 약속으로 보았습니다.

세인트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특히 "하나님의 도성"에서 생명나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는 생명나무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지혜와 생명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생명나무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영생과 썩지 않는 생명을 상징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생명나무를 지식의 나무와 대조하여 불순종의 결과와 구원의 희망을 강조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 설득력 있는 설교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맥락에서 생명나무를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신자들이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설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변혁적 힘을 강조했습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 니사의 성 그레고리는 생명나무의 신비로운 차원을 탐구하며 이를 신을 향한 영혼의 여정과 연관시켰습니다. 그는 생명나무를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오는 영적 영양과 성장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레고리는 신성한 생명을 향한 끊임없는 상승과 새로운 창조의 종말론적 현실에서 이 여정의 궁극적 성취를 강조했습니다.

교부들의 글은 생명나무를 영생, 신성한 지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변화시키는 능력의 상징으로 종합적으로 강조합니다. 교부들의 해석은 이 성서적 상징과 기독교 신앙 및 신학과의 관련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해줍니다.

요약

  • 성 이레네우스: 생명나무 보기

그리스도와 영생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 세인트 어거스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지혜와 썩지 않는 것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톰: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강조했습니다.
  • 니사의 성 그레고리: 영혼의 영적 여정 및 하나님과의 연합과 연관시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는 영생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상징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생명나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며, 낙원의 회복과 하나님과 인류의 궁극적인 화해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는 새 예루살렘의 맥락에서 생명나무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때 천사가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성의 큰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서 있었고, 매달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잎은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이 생생한 이미지는 종말론적 비전에서 생명나무의 몇 가지 핵심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1. 영원한 생명: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매달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는 이 생명의 풍요로움과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2. 치유 및 복원: 생명나무의 잎은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모든 피조물의 완전한 회복과 치유를 나타냅니다. 이는 온전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충만함을 반영합니다.
  3. 신성한 섭리: 생명수 강가에 위치한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과 생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흐르는 강은 이 생명의 근원이 신성하고 영원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4.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는 옷을 빨고 그 문을 통해 성에 들어간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2:14).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과 인류의 회복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의 역할은 영생, 신성한 치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요약합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완성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요약

  •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영생과 신성한 공급을 상징합니다.
  • 이 잎은 회복을 의미하는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강조합니다.
  • 생명나무에 접근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생명나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관계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자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생명나무'라고도 불리는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생명나무'로서의 십자가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일부 신학적 고찰에서는 기독교에서 나무의 상징성과 다음과 같은 문화적 전통을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이교도의 기원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이러한 변형적 혼합은 하나님의 구속 내러티브가 어떻게 문화적 상징을 그분의 더 큰 목적을 향해 재조정할 수 있는지를 강조합니다.

상징적 유사점: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궁극적인 치유와 영생을 제공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나무로 여겨집니다. 이 연관성은 초기 기독교 문헌과 전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수난 대축일 미사 서문은 "인류의 구원을 십자가 나무에 두셨으니 이는 죽음이 왔으면 거기서 생명도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나무로 정복한 자도 우리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무로 정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속적 중요성: 에덴의 생명나무가 영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듯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영생을 위한 수단을 제공합니다. 성 베드로는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그 나무에 그 몸으로 우리 죄를 지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나음을 받았습니다."(베드로전서 2:24). 따라서 십자가는 영적 치유와 영생의 원천이 됩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견해: 성 어거스틴과 성 이레네우스와 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은 십자가와 생명나무를 자주 비유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통해 지식의 나무의 저주가 역전되어 죽음 대신 생명을 가져왔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십자가가 생명나무의 약속을 성취하여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길을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술과 도상학: 기독교 예술은 종종 십자가를 잎과 열매로 장식된 생명나무로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명을 주는 힘을 상징합니다. 이 이미지는 신학적 연관성을 강화하고 십자가의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이미지는 십자가와 생명나무가 처음 등장한 에덴동산을 유사하게 표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는 구속과 영생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상징과 그 의미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은 크리스마스트리는 종종 이 아이디어를 반영하여 새 생명, 희망,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기독교 예술은 이러한 시각적 요소를 결합하여 창조, 구원, 영생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심오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예술적 표현은 기독교 전통에서 십자가와 다른 생명을 긍정하는 상징 사이의 유사점을 이끌어내어 영적 울림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흥미롭게도, 일부 해석에 따르면 이 이미지와 크리스마스 트리의 역사는 모두 생명, 희망, 쇄신을 상징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이러한 시각적, 상징적 전통은 서로 어우러져 신자들이 신앙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심오한 방식을 형성해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나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신자들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한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합니다.

요약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징적으로 새로운 생명나무라고 불립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치유와 영생을 주셨습니다.
  • 초대 교회 교부들은 십자가와 생명나무를 유사하게 묘사했습니다.
  • 기독교 미술은 십자가를 생명나무로 묘사하여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생명나무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생명나무는 풍부한 상징과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어 현대 크리스천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영원한 공급, 구원의 희망, 영생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1.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 서 있던 생명나무가 영생을 제공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더라도 영생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2. 하나님의 공급과 생계: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공급과 생계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은혜를 통해 우리를 지탱해 주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고 우리의 생명과 힘의 원천이신 그분을 찾도록 격려받습니다.
  3. 회복과 치유: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는 열방의 치유를 위한 잎사귀를 맺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요한계시록 22:2). 이것은 회복과 치유라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반영하여 세상에서 치유와 화해의 주체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4. 순종과 신실함: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죄의 결과와 회개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5. 미래에 대한 희망: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나무가 궁극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와 더 이상 고통이나 아픔이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합니다. 이 비전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에 시선을 고정하고 충실히 살아가도록 영감을 줍니다.

이러한 교훈을 묵상함으로써 현대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신앙을 더욱 온전히 실천하며, 성경의 약속에서 격려와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을 상징합니다.
  • 이는 하나님의 공급과 생계를 상징합니다.
  • 회복과 치유라는 주제는 우리가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 순종과 신실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생명나무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제공합니다.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어떻게 이해되나요?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성경적 토대와 구속의 이야기에서 상징적 의미를 반영하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이해됩니다.

  1.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진정한 생명나무로 간주됩니다. 이 해석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2. 성례전 신학: 성례전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종종 성례전, 특히 성체성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찬은 영생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이 견해는 교회에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임재와 성례를 통한 신자의 지속적인 영양 공급을 강조합니다.
  3. 종말론적 관점: 종말론적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회복과 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관점은 영생에 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궁극적인 성취를 강조합니다.
  4. 윤리적 및 도덕적 의미: 현대 신학은 또한 생명나무의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탐구합니다. 생명나무는 정의, 평화, 사랑 등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생명나무는 크리스천들이 행동과 성품을 통해 삶에서 열매를 맺도록 부릅니다.
  5. 생태 신학: 최근 몇 년 동안 생명나무는 생태 신학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 관점은 모든 피조물의 상호 연결성과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위해 의도하신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환경 보호에 참여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요약

  •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에서는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봅니다.
  • 성사 신학에서는 성찬을 성체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는 영양분과 연관시킵니다.
  • 종말론적 관점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회복과 성취에 초점을 맞춥니다.
  • 윤리적, 도덕적 함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삶을 사는 것을 강조합니다.
  • 생태 신학은 모든 생명체의 상호 연결성과 피조물을 돌봐야 할 책임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생명나무에 대한 오해와 오해는 생명나무의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음은 몇 가지 일반적인 오해와 해명입니다:

  1. 그리고 생명의 나무 마법의 물건으로: 어떤 사람들은 생명나무를 내재적인 힘을 가진 마법의 물건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공급과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불멸의 마법의 원천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2. 동일하게 생명의 나무 를 사용하여 지식의 나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같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닌 별개의 나무입니다. 지식의 나무는 신이 정한 경계와 도덕법을 상징하는 반면 생명나무는 영생과 신의 공급을 상징합니다.
  3. 구약 성경으로 제한: 어떤 사람들은 생명나무가 구약의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와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에 대한 약속을 상징합니다.
  4. 심볼을 지나치게 영성화하기: 생명나무는 심오한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를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상징적 의미와 실제적 의미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5. 기독교 예술과 전례에서의 역할 무시하기: 생명나무는 기독교 예술에서 종종 묘사되고 전례에서 언급되며 그리스도와 영생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묘사를 무시하면 이 성경적 상징의 풍부한 시각적, 문화적 표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마법의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의 상징입니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는 구별됩니다.
  • 생명나무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모두 등장합니다.
  • 상징적인 의미와 실질적인 의미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 기독교 예술과 전례에서는 생명나무를 풍부하게 묘사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가톨릭 교회는 성경과 전통, 그리고 풍부한 신학적 유산을 통해 생명나무를 바라봅니다. 교회는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생명나무의 상징적이고 구속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1. 성경적 기초: 가톨릭 교회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나무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지지합니다. 생명나무는 영생의 상징이자 인류가 그분과 교제하며 살기 위한 하나님의 원래 설계로 인정합니다. 교회는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죄로 인해 상실되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었다고 가르칩니다.
  2. 기독론적 중요성: 교회는 생명나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영생의 원천이며,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나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신자들은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영원한 생명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3. 성례전 신학: 교회는 또한 생명나무가 성사, 특히 성체성사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영적인 영양과 영생의 약속을 받습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영생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4. 종말론에서의 역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궁극적인 성취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생명나무가 약속하는 영생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날을 고대합니다.
  5. 패트리스틱 인사이트: 성 어거스틴과 성 이레네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저술은 생명나무에 대한 교회의 이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초기 신학자들은 생명나무를 신성한 지혜, 영생,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으로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더욱 풍성해졌고, 성사 신학 및 종말론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요약

  • 가톨릭 교회는 생명나무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원래 설계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구속의 희생을 예표합니다.
  • 성찬은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 생명나무는 새로운 것에 대한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의 일부입니다.

생성.

  • 패트리스트의 통찰은 신성한 지혜와 구원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의 심리적 해석은 무엇인가요?

특히 칼 융의 분석 심리학의 렌즈를 통한 생명나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신학적 관점을 보완하는 상징적 이해를 제공합니다. 융은 성경의 상징을 집단 무의식 속에 있는 원형의 표현으로 보고 인간의 정신과 영적 발달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1. 온전함의 원형: 융은 생명나무를 온전함과 통합의 원형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는 정신의 의식적, 무의식적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융 심리학의 중심 원형인 자아를 상징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람이 심리적 온전함을 얻기 위해 성격의 여러 부분을 통합하는 개별화 과정을 상징합니다.
  2. 변화의 상징: 생명나무는 변화와 성장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개인은 심리적, 영적 성장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분열된 상태에서 보다 통합되고 조화로운 자아로 나아가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3. 신과의 연결: 융은 생명나무를 개인과 신 사이의 연결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생명나무는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영적 여정을 의미하며, 융은 이를 내면의 신성한 이미지와 동일시했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는 영적 깨달음과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탐구를 상징합니다.
  4. 치유와 리뉴얼: 융 심리학에서 생명나무는 치유와 재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심리적, 영적 치유를 촉진하는 정신의 일부인 '내적 치유자'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열방의 치유를 위해 잎사귀를 제공하는 생명나무에 대한 성경의 묘사와도 일치합니다(요한계시록 22:2).
  5. 반대되는 것의 균형 맞추기: 생명나무는 빛과 어둠, 의식과 무의식, 남성과 여성과 같은 상반된 것들의 균형을 잡는다는 개념을 구현합니다. 이러한 균형은 심리적 온전함을 달성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융은 진정한 개인화를 위해서는 자아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용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심리적 렌즈를 통해 생명나무를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그 상징적 의미와 개인의 성장 및 영적 발달과의 관련성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온전함과 통합의 원형입니다.
  • 심리적, 영적 변화를 상징합니다.
  • 개인과 신 사이의 연결을 나타냅니다.
  • 치유, 쇄신, "내면의 치유자"를 상징합니다.
  • 개성을 표현하는 데 필수적인 상반된 요소의 균형을 구현합니다.

사실 및 통계

  1. 성경 참조: 생명나무는 성경의 세 권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잠언, 요한계시록입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처음 등장하고 요한계시록 22장 2절에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2. 예술의 상징주의: 생명나무는 기독교 예술과 도상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티브로, 영생과 신성한 축복을 상징하는 열매를 맺는 무성한 나무로 묘사되곤 합니다.
  3. 로 교차 생명의 나무: 기독교 전통, 특히 가톨릭과 정교회 전례에서 십자가는 종종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강조하며 생명나무라고 불립니다.
  4. 에큐메니칼 중요성: 생명나무는 에큐메니칼 대화에서 통일된 상징으로, 다양한 기독교 교파가 영생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5. 심리학 연구: 생명나무에 대한 융의 분석은 인간 정신의 깊은 원형적 주제를 반영하는 심리적 완전성과 통합의 상징으로서 생명나무의 역할을 탐구합니다.
  6. 문화적 영향: 생명나무는 유대교, 이슬람교,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 등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보편적인 매력과 심오한 상징성을 강조합니다.











천지창조(창세기 1:1)



히브리어 창세기 1장 1절

창세기 1장 1절(창 1:1)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히브리어구약BHS,1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새번역,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 ㉠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에' 
우리말성경,1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영어NIV,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영어NASB,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영어MSG,1  First this: God created the Heavens and Earth--all you see, all you don't see. 
영어NRSV,1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헬라어구약Septuagint,1 εν αρχη εποιησεν ο θεος τον ουρανον και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1 in principio creavit Deus caelum et terram

개역개정,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은 복수 명사이지만 "창조하시니라"는 단수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존엄을 나타내는 복수'(plural majesty)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동시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스카톨로지 프리시즈 서티어리알러지(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라는 뜻이에요.
프린스턴에서 성경 신학을 오래 가르쳤던 ‘게할더스 보스’


게르하르두스 요한네스 보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Heerenveen)에서 태어나서 19세에 기독교 개혁교회 (북아메리카)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 미시간주로 이민왔다.
그는 미국 기독교 개혁교회 (북아메리카) 교단인 칼빈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스투라스부르 대학교에 1888년 아랍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이자 성경신학분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장 저명한 신학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헤르만 바빙크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요청하였으나 칼빈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려고 돌아갔다. 1893년부터 1932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시작된 역사비평학도 주의깊게 보면서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성경중심적 신학의 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후배 학자였던 존 그레섬 메이천, 코넬리우스 밴틸, 존 머레이, 에드워드 J. 영, 리차드 게핀과 같은 많은 웨스트민스 신학교 교수들과 칼빈 신학교의 루이스 벌콥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국내 번역서로는 게르할더스 개혁교의학, 성경신학, 바울의 종말론, 구약의 종말론, 예수의 자기계시 등이 있다.

*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즉,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키는 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앞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이제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또한 여기서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이와 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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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것 & 육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로마서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남이 복음을 전한 곳은 피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했다.(20)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했으나 여러 번 막혔고, 이제는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22-23)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역 원칙이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요.
또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고, 이제는 서바나로 갈 때 로마에 들렸다가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랬다.(24)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제 성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헌금하였다.(25-26)
이를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 일을 마치고 열매를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갈 것이라 했다.(28)
여기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헌금하여 그들을 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저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유산들을 물려받았으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물질로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교제인 것이다.
말씀과 물질의 나눔이다.
말씀을 받았으면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을 위하여 물질로 섬기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예수님도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다.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의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 돕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의 교제도 실질적 도움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바란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성경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고질적인 문제다. 
예를 들어 성경 읽을 때,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복'을 이해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개념이 된다. 
이렇게 인식된 복 개념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미신적으로 채워지는 기복을 주는 종교로 둔갑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지칭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풍요와 형통은 복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런 인식의 오류는 천국, 사랑, 믿음에 대한 이해에서도 동일한 맹위를 떨친다.

이런 차원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부분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이해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 용어는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 
은사주의 자들, 혹은 신사도 운동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영적인 것’을 주로 신비적 체험으로만 관련 지어 이해한다
환상을 보거나, 영음(靈音)을 듣거나, 입신을 하는 등의 신비적 체험들에 한정하여 영적인 것이라 한다. 
때문에 그들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을 한정적으로 영적인 사람들이라 한다. 
반대로 주로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바르게 전하는 목회자들은 영적이지 못한 사람, 심하게는 육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성경은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육적이라고 가르치고 있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리는 철학이 이야기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철학적 인식론이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영적인 것이란 물질적인 것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차원에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극단적인 이분법이 플라톤주의 인식의 기초를 이룬다. 
이런 인식론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도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과 관련된 것은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리나 신학에 충실한 지적 영역을 기초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육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영적 체험이 없어서 지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무시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자.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구별은 타락한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로 본다. 

성경이 가르치는 ‘육적인 것’은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부패한 삶의 원리를 따르는 태도를 말한다. 
유다서 1:19을 보면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고 한 구절이 대표적이다. 
우리 주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했을 때, 여기서 영과 육은 물리적인 것과 그에 반대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성경)에 합한 것과 하나님의 뜻(성경)에 위배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 다음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33)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뜻(성경)에 부합한 삶이란 인간 의지의 결단이나 지적인 인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성경)을 성령님의 은총 없이 의지의 결단만으로 행(行)하면, 그 행위는 육적인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 주님은 외식(히포크리테스), 즉 ‘연극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성경)과 관계없이 영적인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거나,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육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성경에 부합하지 않은 환상이나 꿈이나 예언하는 사람들을 육적인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은혜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시고,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셔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신다.

이것을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 영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또 종교적인 것은 영적이고 비종교적인 것은 육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다 영적인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과 진리로 하면(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면) 다 영적인 것이 된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물질적인 것이 다 사라지고 영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는 세상이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통합되므로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거룩한 연금술사로 이해된다. 
죄로 타락한 육적인 영역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도록 신자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예배’다. 
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는 삶 속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며 모든 것을 영적인 것(하나님의 영광)으로 화하게 하는 연금술사로 부름받은 것이다.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차이

“영적이다”(spiritual)는 말은 “육신적이다”(carnal)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성경에서 정의하는 “영적인 사람”은 고린도전서 2:12-14에 나와 있습니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14.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 곧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일들”(spiritual things)이란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뜻하며, 그 말씀들을 서로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영적이다(spiritual)는 말은 영(spirit)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령께서 기록하신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살면 영적인 것이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뜻대로 살면 그 무엇을 해도 육신적인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어떤 종교적인 것을 말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린도전서 2:12-16)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개역한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서로 같은 도구를 통해서만 교통이 가능하고 다른 도구로서는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가장 흔한 cellular phone - PCS)


앞에서도 이미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11f) 라는 비유를 본바 있고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고 적어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모든 것들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지혜로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한바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 조차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은 당연함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12:3)고 증거하고 이다.


우리 각자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십자가의 도의 원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적어도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미1:21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증거 한바 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인간에게 거저 주신 모든 것들은 아무리 인간적일지라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뿐이다. 줘야 받고 받아야 주는 대가로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논리에서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조차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만 가능함을 인간 지혜의 시대에 인간 지혜의 중심인 고린도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치는 사람의 지혜로는 하늘로부터 주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역시 오늘 전하는 말씀자체도 사람의 두뇌로 이해하려면 불가능 할 뿐이다. 세상 것들을 이해하는 데는 무딜지라도 신령한 것들은 잘 이해하는 하늘의 성령으로 충만한 …




Ⅰ.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거하게 하신 이유.(12~13)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 세상에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영적인 존재들이 많이 있고, 이 영적인 세력은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영적인 존재에 의해서 영향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고 증거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간됨으로 이 어두움에 맞서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에 순종하여 거듭난 자들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영적인 세계를 바로 분별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더욱 쉽게 하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들은 적어도 더 이상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악한 영들에 지배 받지 않게 하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하나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악한 영들의 영향아래 있지 않게 되었음을 확신시켜주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첫 부분의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12f) 바울 사도는 이를 더욱 분명히 확신시키기 위하여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명한 이유를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b)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사랑과 은혜의 선물을 헤아리고 알게 하는 것들은 결국 육신의 지혜로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영적일 때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들이 무엇이며 얼마나 귀중한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위로부터 주어진 귀중한 것들을 육신적으로 판단할 때는 절대로 귀중하게도 … 감사하게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우리의 신앙적 삶에서 언제든지 쉽게 확인되어지는 사실들이다. 우리가 영적이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신앙적 가치는 점점 하찮게 여겨지고 세상적인 것들이 더 귀중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들이 하나님의 주신 것들보다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 이런 기준으로 믿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357후렴)“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믿음에 관한 한은 어떤 것이든지 사람의 지혜 즉,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영생에 관한 한은 사람의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알 수 없게 하셨는데 그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본질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의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 하고 …”(13f) 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을 말하거니와”는 바로 신령한 것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연이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교훈들을 자신의 머리와 지혜로 이해하려고 덤벼드는 일들이 더러 있다.[도심의 돈까스 집의 일요일 휴무-우리와 같은 성경적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주신 모든 것들은 하늘의 지혜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오늘도 영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절대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적인 사람은 영적인 일들을 바로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교회 일은 영적인 사람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질 못하고 끼워 넣기 식으로 교회 일꾼을 뽑는다면 절대로 영적인 기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고, 영적인 자격을 갖춘 자들이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4:12)


영적인 일 하늘의 왕국의 일 즉, 천국의 일은 영적으로 판단이 가능한 성령의 사람들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물질을 관리하기 위하여 뽑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6:5)들을 뽑아서 사도들이 안수하여 일을 맡겼던 것이다.


[민11:25~29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 70명에게 하나님의 신이 내려와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이것은 만고의 진리요 영원히 바꾸지 않을 신앙의 원리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과 교회의 모든 일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Ⅱ. 육신적인 자연인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진리.(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에 정 반대되는 의미이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큰 장애는 육신의 삶과 肉的인 판단, 그리고 人間的인 價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Christianity 는 Humanism 이 아니다.
여기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데 안드로포스(Psychikos de anthropos) 거듭난 사람과 반대되는-자연인, 육적인 사람]”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14f)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으로 났던 유다도 그의 서신에서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9)고 지적하고 있다.

야고보도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약 3:14~15)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성령을 보내실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f)고 증거하셨다.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14m) 육신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일은 언제나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다. 사도 중에 으뜸이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했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계획되어 있는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를 가로막고 나서다가 호되게 책망을 받았던 것 역시 오늘 우리 신앙의 부정적인 모델이다. 오늘 우리도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가로막고 나선다면 같은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영적인 일의 해답은 오로지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b) 는 것이 정답이다. 인간적으로 계산해보고 손해와 이익을 따져보기보다는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가?를 영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육신의 판단이 아닌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Ⅲ.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영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15~16)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마지막 말씀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말씀이 아니다. 바로 영육의 판단의 결론이다. 이 말씀은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40:13) 라는 이사야서의 인용이고 이를 가장 구체적으로 응용하는 바울 시도의 말씀을 로마서11:34에서 읽게 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기 전에 먼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라고 감탄한바 있다.
역사상 가장 신령한 자이셨던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혼란을 겪지 않으셨고 모든 것을 진리대로 판단하셨음을 읽을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이나 율법에 정통 하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비록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 앞에서도 결코 혼란치 않으셨던 이유는 바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는 원리에서 그러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움직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바울 역시 다르지 않았고 오늘 같은 신앙적 원리를 가지고 산다면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지혜의 성령에 붙잡혔던 솔로몬도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b)는 말씀은 다른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지도를 받고 따르는 사람의 고백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표현을 빌립보 교우들에게도 쓴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고백함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8)

성령으로 생각하고 살고 죽을 수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과 다를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가능하고 당연함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장 10-16절]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단에 나오는 표현을 봅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제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라(고린도전서 2:6-16)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분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 지혜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바울은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지혜보다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비교하며 설득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때, 그리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바울이 그들 중에 전할 때도, 세상 지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고 열정적으로 논증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본문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지혜 자체로 향하게 한다. ①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무엇이 특별한가?(특징). ②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지혜를 우리에게 알리셨는가?(계시). ③ 누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가?(적용).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그래서 무엇을 판단하거나 분별할 때는 항상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균열은 항상 서로 다른 기준(하나님의 지혜와 섞인 세상의 지혜)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내는 기준이 오직 하나님의 지혜가 되기를, 그렇게 함께 지어져 가기를 바란다.

1.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6-9절)

‘나’에서 우리로 주어가 바뀐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의 개인 경험에서, 이제는 모든 말씀 전하는 자들이 공통으로 전달한 지혜의 근원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6절). 한편, 그 지혜를 전달받은 대상으로 언급된 “온전한(장성한) 자들”이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같은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3:1). 바울은 지금 오직 영적으로 장성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지혜를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바울은 어린 아이들 같은 성도들을 가리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탄식했다(고전 3:3). 하지만 신자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다(정체성). 그러나 그들의 삶이 신분과 명백히 동떨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한 것이다(3절).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성도는 온전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지혜를 모두 듣고 따라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특징을 갖는가? 첫째,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성격이 다르다(6절):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이 있듯, 하나님의 지혜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도 널리 발견되고 통용된다(공식, 이론, 법칙, 원칙). 세상 통치자들(학자, 변론가 포함)의 지혜 역시 모두 다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지혜는 항상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하는 일을 거스른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를 온 세상에 가득 채우셨지만, 마귀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풍조를 일으켜 그 모든 지혜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그래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의 지혜도 이 땅에서 잠시 이용될 뿐, 곧 폐기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모든 지식(인)이 유기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감추어졌던 것이다(7절). ‘비밀’, ‘신비’를 뜻하는 은밀함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가 가진 특성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완벽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의 지혜나 연구, 노력과 분석으로 절대 얻어낼 수 없다. 바울은 이 지혜가 분명히 우리에겐 감추어졌던 것(완료형)이지만, 하나님께는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밝혔다(7절, 엡 1:5). 바울은 여기서 모든 종류의 지혜를 다루기보다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관한 하나님 지혜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고, 감추어두었다가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믿는 자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가져다준다(하나님을 사랑하는…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7절).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 최고의 성경(율법)학자, 영적 지도자, 철학자와 변론가, 그 누구도 이 지혜알지 못하였다(8절). 단 한 사람도. 그들의 무지함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으로 확실히 입증됐다. 또한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절).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사 64:4; 65:17), 사람이 인식하고 사고하는 필수 기관인 눈, 귀, 마음(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절대로 알 수 없다. 복음을 깨달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복음을 알게 됐나?

2.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10-13절)

하나님의 깊은 마음에 은밀히 감추어졌던 복음의 지혜와 그 능력은 믿는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졌다. 어떻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나님의 한 위격으로 “하나님의 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도 한다(11, 12절, 일체 & 위격의 구분).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모두 우리에게 복음의 지혜를 알리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에 하나 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감추신 마음속 깊은 곳의 지혜를 알고 계실까?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아신다. 바울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11절). 맞는 말 아닌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11절).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10절, ‘살피다’).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11절), 하나님께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분에게 감춰진 지혜를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로운 것들을 알기 위해 세상적인 관점(세상의 영)이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12-13절). 사도 요한도 같은 의미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바울은 당시 관용했던 원리를 이용하여 이렇게 요약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절,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로 크게 오해할 소지가 있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복음의 지혜를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크게 잘못 분별하고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첫째, 어떤 이들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니 사람의 가르침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성도에게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은사를 주시고, 누가 교회에 교사를 은사로 주시는가? 성령님이다(고전 12:8, 28).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고 가르치실 때 사람을 세워 사용하신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인 하나님 말씀을 분별할 때 영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기록하실 때 사용하신 일반적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신비로운 깨달음과 본문이 의도한 바와 아무런 상관없이 얻은 즉흥적인 교훈을 영적인 이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실 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다(요 14:26).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신다(요 16:13). 주관적이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나타나는 뜻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미리 정해진 뜻을 가르쳐 주신다.

둘째, 어떤 이들은 스콜라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져 탁월한 지적 능력과 풍부한 학문을 가진 소수가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적 탐구와 이성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곧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게 됐다(12절).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은 필요 없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알 수 없을까? 성경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책이라면 올바른 해석법을 통해 누구나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일 곧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은 오직 영적인 사람만 분별하고 받을 수 있다는 진리다.

3. 하나님의 지혜의 적용(14-16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14절).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는다. ‘받다’의 의미는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수용하다’ 등인데, 현재형 동사는 성령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혜를 육에 속한 사람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가? 설교나 성경의 메시지를 왜 받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오랜 시간 배우고 나서 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뭔지는 알겠다. 그런데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 이유가 뭘까? 첫째,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인에게 거리끼고 이방인에게 미련하게 보였던 것처럼 지금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의 관점에서 어리석어 보인다. 둘째, 오직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만이(신령한 자, 15절) 성령이 나타내신 일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육적인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의 참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여 어리석게 여기고 그래서 결국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산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나타내는 하나님 지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알아보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안에 성령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다. 신령한 자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다.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16절, 사 40:13),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그분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또 하시는지), 나아가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치에 동의하고 그 가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15절). 세상 사람이나 세상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이들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보배롭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 혹은 자녀의 구원을 점검할 때, 복음 교리를 얼마큼 많이 또는 자세히 알고 있는지, 그 가르침에 얼마큼 지적으로 동의하는지(그것도 진심으로) 따질 때가 많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하느냐이다. 얼마나 보배롭게 여기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 그것을 얼마나 경이롭게 여기며 겸손히 받아들이는가? 나의 옛본성이나 세상의 가치 기준에 비춰볼 때, 순간 어리석어 보여도,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실 때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깊고 풍성하며 보배로운지 보고 그 지혜 앞에 굴복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는가? 

당신은 언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분열은 영적인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하려면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같은 분별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가르치실 때 겸손하게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함께 영적으로 견고하게 지어져 갈 것이다.


영성이란? 영적인 삶이란?

“영성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영성 있는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어떻게 영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요즘 그리스인들 중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말만 들어도 무엇인가 어떤 높은 경지나 수준에 올라 있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영성 있는 삶, 명상의 삶, 깨끗한 삶, 영적인 삶, 성령 충만한 삶, 거룩한 삶, 경건한 삶 등 비슷비슷한 말이 많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고 시간이 날 때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며 소박하고 단출한 삶을 사는 수도사를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또는 특이한 자세와 생각과 명상을 하면서 사는 요가를 하는 힌두교인을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무당들도 영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기독교적인 영성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보통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고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산 속의 기도원이나 기도처에서 몇 년 동안 기도를 하며 묵상한 사람들이나 , 평소에 기도를 오래 하며 신비스러운 꿈, 환상, 체험을 한 사람들을 영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장차 일어날 사건이나 일들을 예언하고, 신자들의 과거 사실이나 현재의 마음을 투시하고 말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병을 잘 고치거나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의 일을 잘 감당하는 목사를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그것이 사실인지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는 논의하지 않습니다. 한편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말씀을 지키고 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들을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일까요?

흥미로운 사실은 아직 한국에 영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에서의 영성이란 이제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주로 로마 가톨릭의 영성이 기독교로 들어와 오해되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관상기도가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며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많으며 극단적으로 이단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나이 사십이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 생각, 감정,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이 말이 그 사람의 얼굴로 대표되는 마음과 영혼을 지칭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태까지 이 말을 어느 정도는 오해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인간의 내면적인 마음과 영혼으로 바라보거나 해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룩하고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달라스 윌라드는 “마음의 혁신(복있는 사람. 2011)”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시작과 비슷함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교 영성 개발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능가하는, 은혜의 산물임(37쪽)을 주장하고 곧 그것은 우리의 삶속에 거하며 교류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 개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심어지고 성장하면 진정한 사랑의 행위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에 대하여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티브 맥베이의 “은혜 영성의 파워”(우수명 역, 엔시디, 2006)”란 글을 읽고 더 이상 관심을 두고 싶지 않고 몹쓸 책이라고 결론을 내린 기억이 나기 때문입니다.

‘은혜 영성의 파워’

책의 중심 내용은 우리가 노력하여 선하고 착한 행위를 따라 살아가면 실패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성령님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진정 자유롭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요 영적인 생활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부분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설교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에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단계중 칭의와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단번(once and for all) 으로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충만함과 인간의 자기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 입니다(벌코프 조직신학 786-89쪽).
물론 그럼에도 주체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사역이 우선임은 말 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바르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없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써본 사람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고 바울도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니라”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영혼과 의지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고 영적인 삶(신비적인 부분이 아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고 한량없는 은혜와 철저히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자신의 심령에 변화를 받고 사고의 변화, 감정의 변화, 행동의 변화와 영혼의 깊은 곳이 변화가 되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윌라드는 말합니다.
여기에 찬성합니다.

더욱이 영성개발은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을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서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찬성합니다.
실제 한국교회에서는 천국은 죽어서야만 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의 삶을 중요시 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쾌락적인 삶을 적당히 즐기면서 살거나 누리면서 살고자 하는 신자들이 더욱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많이 배웠다고 하는 목회자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음은 불행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에 확신하고, 한번 구원받은 성도들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끝까지 끌어주고 이끌어 가심으로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교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칼빈의 성도의 견인(堅忍).
사실 이것은 성도의 견인(堅忍)을 견인(牽引)으로 오해하여 생긴 것입니다.
영어로는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지 Traction(or hauling) of the saints가 아닙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즉 성도의 견인이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인내와 끈기로 끝까지 믿음을 준수하고 고수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믿습니다.

오스카 쿨만이 주장한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이미(Already)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 졌으나,
아직(But not yet)으로 미완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무척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개발적인 삶도 이 땅에 살아가며 내 영혼이 변화되어, 참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겁고 행복하며 경건하게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영적인 삶이고 영성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야 말로 올바른 영성인으로서 영성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