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창세기 1:1)



히브리어 창세기 1장 1절

창세기 1장 1절(창 1:1)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히브리어구약BHS,1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새번역,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 ㉠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에' 
우리말성경,1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영어NIV,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영어NASB,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영어MSG,1  First this: God created the Heavens and Earth--all you see, all you don't see. 
영어NRSV,1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헬라어구약Septuagint,1 εν αρχη εποιησεν ο θεος τον ουρανον και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1 in principio creavit Deus caelum et terram

개역개정,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은 복수 명사이지만 "창조하시니라"는 단수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존엄을 나타내는 복수'(plural majesty)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동시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스카톨로지 프리시즈 서티어리알러지(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라는 뜻이에요.
프린스턴에서 성경 신학을 오래 가르쳤던 ‘게할더스 보스’


게르하르두스 요한네스 보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Heerenveen)에서 태어나서 19세에 기독교 개혁교회 (북아메리카)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 미시간주로 이민왔다.
그는 미국 기독교 개혁교회 (북아메리카) 교단인 칼빈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스투라스부르 대학교에 1888년 아랍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이자 성경신학분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장 저명한 신학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헤르만 바빙크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요청하였으나 칼빈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려고 돌아갔다. 1893년부터 1932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시작된 역사비평학도 주의깊게 보면서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성경중심적 신학의 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후배 학자였던 존 그레섬 메이천, 코넬리우스 밴틸, 존 머레이, 에드워드 J. 영, 리차드 게핀과 같은 많은 웨스트민스 신학교 교수들과 칼빈 신학교의 루이스 벌콥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국내 번역서로는 게르할더스 개혁교의학, 성경신학, 바울의 종말론, 구약의 종말론, 예수의 자기계시 등이 있다.

*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즉,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키는 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앞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이제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또한 여기서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이와 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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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것 & 육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로마서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남이 복음을 전한 곳은 피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했다.(20)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했으나 여러 번 막혔고, 이제는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22-23)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역 원칙이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요.
또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고, 이제는 서바나로 갈 때 로마에 들렸다가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랬다.(24)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제 성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헌금하였다.(25-26)
이를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 일을 마치고 열매를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갈 것이라 했다.(28)
여기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헌금하여 그들을 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저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유산들을 물려받았으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물질로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교제인 것이다.
말씀과 물질의 나눔이다.
말씀을 받았으면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을 위하여 물질로 섬기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예수님도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다.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의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 돕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의 교제도 실질적 도움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바란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성경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고질적인 문제다. 
예를 들어 성경 읽을 때,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복'을 이해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개념이 된다. 
이렇게 인식된 복 개념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미신적으로 채워지는 기복을 주는 종교로 둔갑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지칭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풍요와 형통은 복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런 인식의 오류는 천국, 사랑, 믿음에 대한 이해에서도 동일한 맹위를 떨친다.

이런 차원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부분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이해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 용어는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 
은사주의 자들, 혹은 신사도 운동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영적인 것’을 주로 신비적 체험으로만 관련 지어 이해한다
환상을 보거나, 영음(靈音)을 듣거나, 입신을 하는 등의 신비적 체험들에 한정하여 영적인 것이라 한다. 
때문에 그들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을 한정적으로 영적인 사람들이라 한다. 
반대로 주로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바르게 전하는 목회자들은 영적이지 못한 사람, 심하게는 육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성경은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육적이라고 가르치고 있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리는 철학이 이야기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철학적 인식론이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영적인 것이란 물질적인 것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차원에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극단적인 이분법이 플라톤주의 인식의 기초를 이룬다. 
이런 인식론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도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과 관련된 것은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리나 신학에 충실한 지적 영역을 기초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육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영적 체험이 없어서 지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무시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자.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구별은 타락한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로 본다. 

성경이 가르치는 ‘육적인 것’은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부패한 삶의 원리를 따르는 태도를 말한다. 
유다서 1:19을 보면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고 한 구절이 대표적이다. 
우리 주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했을 때, 여기서 영과 육은 물리적인 것과 그에 반대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성경)에 합한 것과 하나님의 뜻(성경)에 위배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 다음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33)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뜻(성경)에 부합한 삶이란 인간 의지의 결단이나 지적인 인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성경)을 성령님의 은총 없이 의지의 결단만으로 행(行)하면, 그 행위는 육적인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 주님은 외식(히포크리테스), 즉 ‘연극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성경)과 관계없이 영적인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거나,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육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성경에 부합하지 않은 환상이나 꿈이나 예언하는 사람들을 육적인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은혜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시고,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셔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신다.

이것을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 영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또 종교적인 것은 영적이고 비종교적인 것은 육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다 영적인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과 진리로 하면(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면) 다 영적인 것이 된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물질적인 것이 다 사라지고 영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는 세상이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통합되므로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거룩한 연금술사로 이해된다. 
죄로 타락한 육적인 영역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도록 신자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예배’다. 
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는 삶 속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며 모든 것을 영적인 것(하나님의 영광)으로 화하게 하는 연금술사로 부름받은 것이다.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차이

“영적이다”(spiritual)는 말은 “육신적이다”(carnal)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성경에서 정의하는 “영적인 사람”은 고린도전서 2:12-14에 나와 있습니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14.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 곧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일들”(spiritual things)이란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뜻하며, 그 말씀들을 서로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영적이다(spiritual)는 말은 영(spirit)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령께서 기록하신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살면 영적인 것이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뜻대로 살면 그 무엇을 해도 육신적인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어떤 종교적인 것을 말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린도전서 2:12-16)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개역한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서로 같은 도구를 통해서만 교통이 가능하고 다른 도구로서는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가장 흔한 cellular phone - PCS)


앞에서도 이미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11f) 라는 비유를 본바 있고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고 적어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모든 것들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지혜로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한바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 조차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은 당연함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12:3)고 증거하고 이다.


우리 각자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십자가의 도의 원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적어도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미1:21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증거 한바 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인간에게 거저 주신 모든 것들은 아무리 인간적일지라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뿐이다. 줘야 받고 받아야 주는 대가로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논리에서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조차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만 가능함을 인간 지혜의 시대에 인간 지혜의 중심인 고린도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치는 사람의 지혜로는 하늘로부터 주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역시 오늘 전하는 말씀자체도 사람의 두뇌로 이해하려면 불가능 할 뿐이다. 세상 것들을 이해하는 데는 무딜지라도 신령한 것들은 잘 이해하는 하늘의 성령으로 충만한 …




Ⅰ.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거하게 하신 이유.(12~13)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 세상에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영적인 존재들이 많이 있고, 이 영적인 세력은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영적인 존재에 의해서 영향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고 증거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간됨으로 이 어두움에 맞서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에 순종하여 거듭난 자들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영적인 세계를 바로 분별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더욱 쉽게 하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들은 적어도 더 이상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악한 영들에 지배 받지 않게 하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하나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악한 영들의 영향아래 있지 않게 되었음을 확신시켜주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첫 부분의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12f) 바울 사도는 이를 더욱 분명히 확신시키기 위하여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명한 이유를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b)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사랑과 은혜의 선물을 헤아리고 알게 하는 것들은 결국 육신의 지혜로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영적일 때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들이 무엇이며 얼마나 귀중한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위로부터 주어진 귀중한 것들을 육신적으로 판단할 때는 절대로 귀중하게도 … 감사하게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우리의 신앙적 삶에서 언제든지 쉽게 확인되어지는 사실들이다. 우리가 영적이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신앙적 가치는 점점 하찮게 여겨지고 세상적인 것들이 더 귀중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들이 하나님의 주신 것들보다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 이런 기준으로 믿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357후렴)“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믿음에 관한 한은 어떤 것이든지 사람의 지혜 즉,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영생에 관한 한은 사람의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알 수 없게 하셨는데 그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본질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의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 하고 …”(13f) 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을 말하거니와”는 바로 신령한 것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연이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교훈들을 자신의 머리와 지혜로 이해하려고 덤벼드는 일들이 더러 있다.[도심의 돈까스 집의 일요일 휴무-우리와 같은 성경적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주신 모든 것들은 하늘의 지혜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오늘도 영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절대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적인 사람은 영적인 일들을 바로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교회 일은 영적인 사람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질 못하고 끼워 넣기 식으로 교회 일꾼을 뽑는다면 절대로 영적인 기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고, 영적인 자격을 갖춘 자들이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4:12)


영적인 일 하늘의 왕국의 일 즉, 천국의 일은 영적으로 판단이 가능한 성령의 사람들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물질을 관리하기 위하여 뽑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6:5)들을 뽑아서 사도들이 안수하여 일을 맡겼던 것이다.


[민11:25~29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 70명에게 하나님의 신이 내려와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이것은 만고의 진리요 영원히 바꾸지 않을 신앙의 원리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과 교회의 모든 일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Ⅱ. 육신적인 자연인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진리.(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에 정 반대되는 의미이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큰 장애는 육신의 삶과 肉的인 판단, 그리고 人間的인 價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Christianity 는 Humanism 이 아니다.
여기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데 안드로포스(Psychikos de anthropos) 거듭난 사람과 반대되는-자연인, 육적인 사람]”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14f)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으로 났던 유다도 그의 서신에서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9)고 지적하고 있다.

야고보도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약 3:14~15)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성령을 보내실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f)고 증거하셨다.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14m) 육신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일은 언제나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다. 사도 중에 으뜸이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했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계획되어 있는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를 가로막고 나서다가 호되게 책망을 받았던 것 역시 오늘 우리 신앙의 부정적인 모델이다. 오늘 우리도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가로막고 나선다면 같은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영적인 일의 해답은 오로지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b) 는 것이 정답이다. 인간적으로 계산해보고 손해와 이익을 따져보기보다는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가?를 영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육신의 판단이 아닌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Ⅲ.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영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15~16)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마지막 말씀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말씀이 아니다. 바로 영육의 판단의 결론이다. 이 말씀은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40:13) 라는 이사야서의 인용이고 이를 가장 구체적으로 응용하는 바울 시도의 말씀을 로마서11:34에서 읽게 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기 전에 먼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라고 감탄한바 있다.
역사상 가장 신령한 자이셨던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혼란을 겪지 않으셨고 모든 것을 진리대로 판단하셨음을 읽을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이나 율법에 정통 하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비록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 앞에서도 결코 혼란치 않으셨던 이유는 바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는 원리에서 그러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움직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바울 역시 다르지 않았고 오늘 같은 신앙적 원리를 가지고 산다면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지혜의 성령에 붙잡혔던 솔로몬도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b)는 말씀은 다른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지도를 받고 따르는 사람의 고백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표현을 빌립보 교우들에게도 쓴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고백함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8)

성령으로 생각하고 살고 죽을 수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과 다를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가능하고 당연함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장 10-16절]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단에 나오는 표현을 봅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제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라(고린도전서 2:6-16)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분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 지혜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바울은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지혜보다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비교하며 설득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때, 그리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바울이 그들 중에 전할 때도, 세상 지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고 열정적으로 논증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본문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지혜 자체로 향하게 한다. ①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무엇이 특별한가?(특징). ②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지혜를 우리에게 알리셨는가?(계시). ③ 누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가?(적용).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그래서 무엇을 판단하거나 분별할 때는 항상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균열은 항상 서로 다른 기준(하나님의 지혜와 섞인 세상의 지혜)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내는 기준이 오직 하나님의 지혜가 되기를, 그렇게 함께 지어져 가기를 바란다.

1.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6-9절)

‘나’에서 우리로 주어가 바뀐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의 개인 경험에서, 이제는 모든 말씀 전하는 자들이 공통으로 전달한 지혜의 근원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6절). 한편, 그 지혜를 전달받은 대상으로 언급된 “온전한(장성한) 자들”이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같은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3:1). 바울은 지금 오직 영적으로 장성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지혜를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바울은 어린 아이들 같은 성도들을 가리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탄식했다(고전 3:3). 하지만 신자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다(정체성). 그러나 그들의 삶이 신분과 명백히 동떨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한 것이다(3절).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성도는 온전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지혜를 모두 듣고 따라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특징을 갖는가? 첫째,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성격이 다르다(6절):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이 있듯, 하나님의 지혜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도 널리 발견되고 통용된다(공식, 이론, 법칙, 원칙). 세상 통치자들(학자, 변론가 포함)의 지혜 역시 모두 다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지혜는 항상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하는 일을 거스른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를 온 세상에 가득 채우셨지만, 마귀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풍조를 일으켜 그 모든 지혜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그래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의 지혜도 이 땅에서 잠시 이용될 뿐, 곧 폐기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모든 지식(인)이 유기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감추어졌던 것이다(7절). ‘비밀’, ‘신비’를 뜻하는 은밀함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가 가진 특성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완벽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의 지혜나 연구, 노력과 분석으로 절대 얻어낼 수 없다. 바울은 이 지혜가 분명히 우리에겐 감추어졌던 것(완료형)이지만, 하나님께는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밝혔다(7절, 엡 1:5). 바울은 여기서 모든 종류의 지혜를 다루기보다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관한 하나님 지혜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고, 감추어두었다가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믿는 자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가져다준다(하나님을 사랑하는…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7절).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 최고의 성경(율법)학자, 영적 지도자, 철학자와 변론가, 그 누구도 이 지혜알지 못하였다(8절). 단 한 사람도. 그들의 무지함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으로 확실히 입증됐다. 또한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절).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사 64:4; 65:17), 사람이 인식하고 사고하는 필수 기관인 눈, 귀, 마음(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절대로 알 수 없다. 복음을 깨달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복음을 알게 됐나?

2.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10-13절)

하나님의 깊은 마음에 은밀히 감추어졌던 복음의 지혜와 그 능력은 믿는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졌다. 어떻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나님의 한 위격으로 “하나님의 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도 한다(11, 12절, 일체 & 위격의 구분).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모두 우리에게 복음의 지혜를 알리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에 하나 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감추신 마음속 깊은 곳의 지혜를 알고 계실까?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아신다. 바울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11절). 맞는 말 아닌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11절).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10절, ‘살피다’).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11절), 하나님께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분에게 감춰진 지혜를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로운 것들을 알기 위해 세상적인 관점(세상의 영)이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12-13절). 사도 요한도 같은 의미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바울은 당시 관용했던 원리를 이용하여 이렇게 요약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절,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로 크게 오해할 소지가 있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복음의 지혜를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크게 잘못 분별하고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첫째, 어떤 이들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니 사람의 가르침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성도에게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은사를 주시고, 누가 교회에 교사를 은사로 주시는가? 성령님이다(고전 12:8, 28).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고 가르치실 때 사람을 세워 사용하신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인 하나님 말씀을 분별할 때 영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기록하실 때 사용하신 일반적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신비로운 깨달음과 본문이 의도한 바와 아무런 상관없이 얻은 즉흥적인 교훈을 영적인 이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실 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다(요 14:26).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신다(요 16:13). 주관적이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나타나는 뜻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미리 정해진 뜻을 가르쳐 주신다.

둘째, 어떤 이들은 스콜라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져 탁월한 지적 능력과 풍부한 학문을 가진 소수가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적 탐구와 이성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곧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게 됐다(12절).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은 필요 없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알 수 없을까? 성경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책이라면 올바른 해석법을 통해 누구나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일 곧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은 오직 영적인 사람만 분별하고 받을 수 있다는 진리다.

3. 하나님의 지혜의 적용(14-16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14절).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는다. ‘받다’의 의미는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수용하다’ 등인데, 현재형 동사는 성령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혜를 육에 속한 사람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가? 설교나 성경의 메시지를 왜 받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오랜 시간 배우고 나서 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뭔지는 알겠다. 그런데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 이유가 뭘까? 첫째,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인에게 거리끼고 이방인에게 미련하게 보였던 것처럼 지금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의 관점에서 어리석어 보인다. 둘째, 오직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만이(신령한 자, 15절) 성령이 나타내신 일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육적인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의 참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여 어리석게 여기고 그래서 결국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산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나타내는 하나님 지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알아보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안에 성령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다. 신령한 자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다.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16절, 사 40:13),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그분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또 하시는지), 나아가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치에 동의하고 그 가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15절). 세상 사람이나 세상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이들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보배롭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 혹은 자녀의 구원을 점검할 때, 복음 교리를 얼마큼 많이 또는 자세히 알고 있는지, 그 가르침에 얼마큼 지적으로 동의하는지(그것도 진심으로) 따질 때가 많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하느냐이다. 얼마나 보배롭게 여기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 그것을 얼마나 경이롭게 여기며 겸손히 받아들이는가? 나의 옛본성이나 세상의 가치 기준에 비춰볼 때, 순간 어리석어 보여도,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실 때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깊고 풍성하며 보배로운지 보고 그 지혜 앞에 굴복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는가? 

당신은 언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분열은 영적인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하려면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같은 분별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가르치실 때 겸손하게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함께 영적으로 견고하게 지어져 갈 것이다.


영성이란? 영적인 삶이란?

“영성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영성 있는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어떻게 영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요즘 그리스인들 중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말만 들어도 무엇인가 어떤 높은 경지나 수준에 올라 있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영성 있는 삶, 명상의 삶, 깨끗한 삶, 영적인 삶, 성령 충만한 삶, 거룩한 삶, 경건한 삶 등 비슷비슷한 말이 많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고 시간이 날 때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며 소박하고 단출한 삶을 사는 수도사를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또는 특이한 자세와 생각과 명상을 하면서 사는 요가를 하는 힌두교인을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무당들도 영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기독교적인 영성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보통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고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산 속의 기도원이나 기도처에서 몇 년 동안 기도를 하며 묵상한 사람들이나 , 평소에 기도를 오래 하며 신비스러운 꿈, 환상, 체험을 한 사람들을 영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장차 일어날 사건이나 일들을 예언하고, 신자들의 과거 사실이나 현재의 마음을 투시하고 말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병을 잘 고치거나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의 일을 잘 감당하는 목사를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그것이 사실인지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는 논의하지 않습니다. 한편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말씀을 지키고 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들을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일까요?

흥미로운 사실은 아직 한국에 영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에서의 영성이란 이제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주로 로마 가톨릭의 영성이 기독교로 들어와 오해되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관상기도가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며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많으며 극단적으로 이단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나이 사십이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 생각, 감정,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이 말이 그 사람의 얼굴로 대표되는 마음과 영혼을 지칭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태까지 이 말을 어느 정도는 오해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인간의 내면적인 마음과 영혼으로 바라보거나 해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룩하고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달라스 윌라드는 “마음의 혁신(복있는 사람. 2011)”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시작과 비슷함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교 영성 개발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능가하는, 은혜의 산물임(37쪽)을 주장하고 곧 그것은 우리의 삶속에 거하며 교류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 개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심어지고 성장하면 진정한 사랑의 행위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에 대하여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티브 맥베이의 “은혜 영성의 파워”(우수명 역, 엔시디, 2006)”란 글을 읽고 더 이상 관심을 두고 싶지 않고 몹쓸 책이라고 결론을 내린 기억이 나기 때문입니다.

‘은혜 영성의 파워’

책의 중심 내용은 우리가 노력하여 선하고 착한 행위를 따라 살아가면 실패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성령님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진정 자유롭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요 영적인 생활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부분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설교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에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단계중 칭의와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단번(once and for all) 으로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충만함과 인간의 자기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 입니다(벌코프 조직신학 786-89쪽).
물론 그럼에도 주체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사역이 우선임은 말 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바르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없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써본 사람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고 바울도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니라”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영혼과 의지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고 영적인 삶(신비적인 부분이 아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고 한량없는 은혜와 철저히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자신의 심령에 변화를 받고 사고의 변화, 감정의 변화, 행동의 변화와 영혼의 깊은 곳이 변화가 되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윌라드는 말합니다.
여기에 찬성합니다.

더욱이 영성개발은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을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서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찬성합니다.
실제 한국교회에서는 천국은 죽어서야만 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의 삶을 중요시 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쾌락적인 삶을 적당히 즐기면서 살거나 누리면서 살고자 하는 신자들이 더욱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많이 배웠다고 하는 목회자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음은 불행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에 확신하고, 한번 구원받은 성도들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끝까지 끌어주고 이끌어 가심으로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교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칼빈의 성도의 견인(堅忍).
사실 이것은 성도의 견인(堅忍)을 견인(牽引)으로 오해하여 생긴 것입니다.
영어로는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지 Traction(or hauling) of the saints가 아닙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즉 성도의 견인이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인내와 끈기로 끝까지 믿음을 준수하고 고수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믿습니다.

오스카 쿨만이 주장한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이미(Already)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 졌으나,
아직(But not yet)으로 미완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무척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개발적인 삶도 이 땅에 살아가며 내 영혼이 변화되어, 참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겁고 행복하며 경건하게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영적인 삶이고 영성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야 말로 올바른 영성인으로서 영성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If), 때문에 사랑(because),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 less)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누가복음 5:1~11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 가 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People are often unreasonable, illogical,
and self-centered;
Forgive them anyway.
If you are kind,
people may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Be kind anyway(…)
If you are honest and frank,
people may cheat you;
Be honest and frank anyway.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someone could destroy overnight;
Build anyway.
If you find serenity and happiness,
they may be jealous;
Be happy anyway.
The good you do today,
people will often forget tomorrow;
Do good anyway.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it may never be enough;
Give the world the best you've got anyway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 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 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이 시는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에 새겨져 있는 말로서 '마더 테레사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씨의 글입니다. 하지만 누가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바르게 살아도 다른 이들이 날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 최상의 것을 내놓고 베푼다면 세상도 우리에게 언젠가는 최상의 선물을 줄 것이라고 믿어보라는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열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한 '마쓰미 토요토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에 「참사랑은 그 어디에」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세 가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참 행복이란? 이 세 가지의 사랑 중 어느 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세 가지의 사랑이란 이런 종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만약에의 사랑(IF의 사랑)

'마쓰미 토요토미'는 '만약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가령, '만약에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사랑할 것이다.' 라든가 '나에게 그것을 해주면 사랑하겠습니다.'라든가 '만약에 당신이 성공한다면 나는 당신과 결혼할 것입니다'라는 조건을 두고 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끈 달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의 끈들을 끊어 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끈 달린 사랑의 동기는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도 뭔가를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 'IF'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주 유치한 수준의 사랑입니다.

때문에의 사랑(BECAUSE)의 사랑 

그는 또 '때문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결과를 보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나 건덕지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잘 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인기가 있고, 명예가 있고, 돈이 많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랑이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해관계에서 오는 그런 사랑을 가리켜 부르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보면, 평생을 살고서도 한다는 소리가 '저 웬수'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당신에게 실망했다.'말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랐기에, 무엇을 두고 사랑했기에 실망했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보고 사랑했기에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동기와 목적이 잘못 되었고, 오리엔테이션이 잘못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조건이 없는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코 끈달린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사랑 받을만한 건덕지가 있어서 사랑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오히려 기대치 이하임에도 불구하고 용납하는 사랑을 가리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는 것이요, 이렇게 살면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어느 한순간이라도 이런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이런 사랑을 받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성경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사를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처럼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역설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세 번째 소개한 전형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신앙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한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물고기를 잡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게네사렛 호숫가'는 현제 ‘갈릴리 바다의 별칭’입니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리워 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의 폭이 12Km이고 면적이 144Km에 해당하였는데 요단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시한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따라 새벽에 돌아와 그물을 씻어 정리한다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피곤하고 짜증스러운지.... 그 이유는 아마 수고에 따른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물 정리가 끝나 갈 무렵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고, 배를 강대상 삼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 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이 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에게 뭔가 좀 보답할 뜻인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까지 수고한 밤새도록 허탕 친 바다입니다. 새 번역대로라면 ‘지금까지 애를 쓴’ 그런 바다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군소리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순종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어 동료들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시작은 낙심과 피곤과 절망과 짜증으로 시작되지만, 끝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승리와 결과에 만족하며,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무엇이 시작과 끝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 5절에 보면, “잡은 것이 없지마는”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킹제임스 버젼을 보면, “Nevertheless”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 저와 여러분의 신앙으로 삼으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실패했음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말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너무나 무식하고 거칠어서 인간적인 면으로는 전혀 성공적인 요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마는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빈손으로, 빈 배로 돌아 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빈배나 빈손은 실패를 의미합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그물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다시 재도전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오늘의 실패로 인해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소원대로 가득 채워지기만을 바라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 생애에 베드로와 같이 ‘빈 배’와 같은 위기와 실패를 경험하게도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건강문제일 수도 있고, 사업문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문제일 수도 있고, 자식문제일 수도 있고, 물질문제일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생겨지는 문제일 수도 있고, 오늘과 같은 경제적 위기와 갖가지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씻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물을 열심히 씻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다시 재도전 하려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공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업도 성공해야 하겠고, 기업도 살려내야 하겠고, 기울어 가는 가정도 바로 일으켜야 하겠고, 정치도 성공해야 하겠고, 심지어 목회도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온갖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성공을 향해서 무섭게 달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성공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만이 성공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내려가면 실패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올라갈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내려갈 때가 문제입니다. 내려갈 때의 나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 한 번의 그물을 쳐서 성공한 사람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의가 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역사상 전설적인 홈런왕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이브 루스'입니다. 그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714개의 홈런을 날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1,330개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비로써 714개의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그가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러 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실패를 했거든요?”였습니다. 과거의 그 많은 실패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는 대답입니다.

미국대학 교수 가운데 서부극에 나오는 명사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조교수가 있습니다. 그의 논문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어떻게 하면 서부극의 명사수처럼 조준을 하지 않고도 명중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그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이 끝날 때쯤 되어서는 그도 명사수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주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명사수가 될수 있느냐?” 였습니다.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맞추든 못 맞추든 걱정하지 말고 2만 발을 쏘면 자연히 명사수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2만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할 수 있다는 대답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부러 실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시작조차 안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 앞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의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라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자세에 있습니다.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도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까지 순종 하셨습니까? 빌립보 2장엔 '죽기까지'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살고,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 모두가 높아졌습니다. 주님이 쓰신 저 가시관은 오늘날 온 인류를 다스리는, 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스런 왕관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집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두 배에 가득 차는 축복을 방아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실패는 사생아”라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를 어느 각도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쉽게 느낄 수 있는 어려움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이고도 절망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수 있고, 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 질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실패’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실패는 당신이 틀렸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열심히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해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임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버려졌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날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신 분이 있습니까? 오늘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위기, 그 실패로 인하여 오늘 낙심하고 주저하고 있는 분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베드로의 모습을 통하여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씻는다는 자세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비합리적임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기를 합니까? 그렇다고 상식에 준하기를 합니까? 내 생각, 내 마음에 반절만이라도 든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전혀 엉뚱한 얘기입니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과도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말씀인가를 보십시오.

1) 시간적으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보아서 지금은 그물을 내릴 때가 아닙니다. 갈릴리 지역의 특성으로는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고기 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습니다. 물고기가 호수가로 밀려 나오는 밤에 주로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낮이었습니다.

2) 장소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장소를 봐도 고기가 잡힐 장소가 아닙니다. 고기 잡는 방법이 낚시가 아닌 그물입니다. 여기서 그물이란 “디크튀아”로써 던지는 투망입니다. 투망이라고 하는 것은 고기가 많이 몰리는 곳에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무데나 던진다고 해서 잡히는 게 아닙니다. 깊은 곳은 약 60M가 되는데 거기 투망을 던져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은 깊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던지라는 거라. 상식이나 경험에도 없는 말씀입니다.

3) 더구나 어려운 것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고기잡이에는 '비전문가’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이 40이 넘도록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전문가입니다. 어려서 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 잡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어부로 외길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갔을 때 갈릴리 바다를 건너며 베드로 고기도 먹어 보았습니다마는 그 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호수라고 해야 할 만큼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호수이기에 제 손바닥 보듯이 빤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 또한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습니다. 목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를까 목수가 어부를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리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합니다. '공자 앞에 문자 쓴다.'고 합니다.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한다.'고 합니다.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보세요, 경험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종합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 일찍이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은 신앙을 정의하기를 “신앙이란 나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나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과 주장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이러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여러 가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합리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이미 늦은 때이고, 환경 적으로 모든 여건을 뒤집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주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테도 프레마티수'라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 말을 '당신이 말씀하였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 명령을 합니다.'라고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곧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강한 역사를 일으켜서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내 몸과 마음에 명령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로고스'가 아닌 '레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되어진 말씀 자체를 말하지만 '레마'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역사 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확실한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성령의 감동으로 들려온 '레마'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입니다.

딤후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숨'이란 단어는 히브리말로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모든 말씀의 기록자이며 말씀을 통해 역사 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히4:12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마'의 말씀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다는 말은 성경대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에게 접촉하고 내 생활을 변화시키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 6절의 "그리한즉"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의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회개시키고 심령 속에 뜨겁게 역사 하는 살아 있는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신앙고백이 있은 후 즉각적인 순종이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고 말씀하는 것이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여도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개성이니 지식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제 고집이 너무 강합니다. 제 주장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개성도 좋고, 고집도 좋고, 의지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순종을 배우기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라고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그가 즐겁게만 순종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이것이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3. 불확실함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11절에 보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진정한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도, 그물도, 직업도, 심지어 처자식까지도 다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우선의 삶을 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전에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따른다고 해서 생활이 보장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기만 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전적인 신뢰"를' 한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드로의 용기가 있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너무 현실적이다 보니 적당히 타협할 때가 많고, 너무 계산적이다 보니 순수함을 잃어 가는 것 같아 마음 아플 때가 많고, 너무 안일무사하게 행동하다 보니 용기도, 뜨거움도 식어지는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찍 ‘헬렌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한데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합니다. 말함에는 용기가 있는데 행함에는 용기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아는 것은 많습니다마는 용기도 행함도 없는 현실적으로 바뀐 우리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것이 “결단성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주저하다가 세월 다 보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앞날이 불확실하기만 하다고 미적거리다가는 세월 다 가고 마는 것입니다.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고, 불투명하기만 하고, 어렵기만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여기에 베드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많은 고기를 잡았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자기를 비웠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이제 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결국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다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용기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묵묵히 따르노라면 상상도 못한 엄청난 축복의 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을 교훈삼아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순종하는 자세를 신앙으로 삼으셔서 생애의 나의 수고보다 몇 배나 가득 차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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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사람으로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 몸 된 교회에 달려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출타하신 당회장 목사님 동부인께서 안전하게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시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도 불확실하기만 하고, 어둡기만 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앞날이 불투명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전진할 수 있는 결단성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생애에 다시 한 번 실패한 빈 그물이 아니라 그물에 고기가 가득차서 넘치는 축복을 경험한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맛보게 하옵소서.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게 하옵소서.

실패한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때문에’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사랑은 대부분 이 때문에 사랑입니다.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네가 예쁘기 때문에 사랑한다.
네가 일을 잘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네가 부유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런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기도 하고 또 천박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만약이라는 사랑을 합니다.
그 사랑은 네가 만약 돈을 준다면 사랑하겠다. 네가 만약 내 말을 잘 들으면 사랑을 하겠다.
네가 만약 충성스럽게 일을 하면 사랑을 하겠다는 계약적인 사랑을 합니다.
이런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때문에나 만약에 라는 조건이 필요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똑같은 죄를 계속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은 몇 년 이었나?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노예’ 생활은 정확히 몇 년이었을까?

난해 성경절

164. 이스라엘은 애굽에 430년 동안 거주했는가?
성경절
문제
 430년의 시발점이 아브라함 때부터인가 애굽에 거주하기 시작한 때부터인가의 문제다. 만일 아브라함 때부터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훨씬 짧아지게 된다.
해석
 A.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는 두 종류의 성경 절들이 존재한다. 창세기 15:13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12:40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삽십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7:6에 보면 애굽에서 종노릇한 것이 40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행 7:6)고 말하였다. 이런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 즉 종노릇한 기간이 400-430년인 것처럼 보인다.

 B.
 그러나 또 한 편의 기록들을 보면 아브라함 시절부터 출애굽까지를 포함한 것이 430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3:15-18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이야기이다. 따라서 430년의 시작도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15:13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디까지가 이방인가? 그 당시는 가나안도 애굽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가나안 생활도 애굽생활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창세기 15:16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그 4대 란 출애굽기 6:16에 보면 레위 - 고핫 - 아므람 -모세를 말하며 대략 50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치더라도 2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이렇게 계산하 면 애굽에 실제 거주했던 기간은 200-230년 정 도가 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처음 애굽에 내려올 때 70여 명에 불과하던 야곱의 후손들이 4대 215년 만에 어떻게 200여 만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요약
 430년의 기간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전자는 아브라함부터 출애굽까지를 430년으로 보는 견해와, 후자는 순수한 애굽 체류기간만 430년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의 문맥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도 어느 한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기산점이 언제이든지간에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는 430년 동안의 이스라엘의 유랑생활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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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2:40-41 / 430년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Now the length of time the Israelite people lived in Egypt was 430 years.
At the end of the 430 years, to the very day, all the LORD's divisions left Egypt.


갈라디아서 3:16-17 / 430년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The promises were spoken to Abraham and to his seed. The Scripture does not say "and to seeds," meaning many people, but "and to your seed," meaning one person, who is Christ.
What I mean is this: The law, introduced 430 years later, does not set aside the covenant previously established by God and thus do away with the promise.

제임스 어셔는 창조 연대를 산출할 때, 갈라디아서 3장 16-17절을 근거로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 체류한 기간을 215년으로 추산했다.
이러한 현상은 70인역에도 나타난다.
이는 출애굽기 12장 40-41절에서 이집트 체류 기간이 430년이라는 말씀과 마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0-41)”.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6-17)”.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창 12:3-4)”.

제임스 어셔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과 출애굽 후 시내산에 이르러 “율법”을 받을 때까의 시간을 430년으로 읽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이 75세 때 주신 것으로 읽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75세로부터 출애굽까지 기간이 430년이라고 읽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75세 때로부터 25년 후 이삭을 낳고(창 21:5),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고(창 25:26), 야곱은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갔으므로(창 47:9) 아브람이 약속을 받은 후 자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기까지 215년(25+60+130)이 걸렸고, 따라서 이집트 체류 기간은 430년에서 215년을 뺀 215년이라고 추산했다.

이러한 연대 산정에 대해, 70인역 출애굽기 12장 40절 번역은 더욱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

“(70인역) And the sojourning of the children of Israel, while they sojourned in the land of Egypt and the land of Chanaan, was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70인역 출애굽기 12장 40절 말씀에서, 430년이라는 기간은 이집트뿐 아니라 ‘이집트와 가나안에 있었던 기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창세기 12장 10절(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75세 때 이집트로 내려간 때부터 출애굽까지를 430년으로 읽는다. 제임스 어셔 연대와 일치하는 셈이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의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에서 ‘언약’은 16절의 “약속들”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동일한 하나의 내용으로서 “오직 한 사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의 복음”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이다(창 12:3; 26:3-4; 28:13-14; 갈3:8). 그래서 17절의 ‘언약(디아데케)’은 단수명사다.

그런데 왜 16절에서는 ‘약속들(에팡겔리아이)’이라는 복수명사가 사용됐을까? 그것은 동일한 내용의 약속이 여러 번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도 주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이삭에게도)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단수)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3-4)”.

(야곱에게도)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단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3-14)”.

여기서 ‘자손(단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11장 9절에서도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장 17절의 “하나님의 정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뿐 아니라 이삭과 야곱에게도 하신 언약이므로, 아브라함의 75세 때로부터 시작되는 430년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70인역의 출애굽기 12장 40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430년의 여정의 주체는 “the sojourning of the children of Israel”,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야곱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야곱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이 430년 기간의 시작을 아브라함의 75세 때로 볼 수 없음이 명백하다.

창세기 15장 13-16절 말씀은 창세기 12장 10절 본문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며, 창세기 12장 10절의 상황 이후 아브라함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2장 10절을 창세기 15장 13-16절의 ‘사백년’의 시작으로 볼 수 없다. 참고로 여기서 ‘사백년’은 실제로 겪은 430년에 대한 어림수로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당시 전략적 모호성을 포함하신 하나님의 의도이셨다.

아마 어림수로 100년을 1대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옥스포드 원어성경대전 006 출 12:40, 30쪽 참조).

반면,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하는 개역개정 성경은 출애굽기 12장 40-41절에서 ‘430년’을 두 번 중복하여 강조하는 동시에, “끝나는 그 날에(베에쳄 하욤 핫쩨, even the selfsame day)”를 서술하여 명확한 시간을 거듭 강조한다.

아빕월 14일이 지난 아빕월 15일이 정확하게 430년이 차는 날이었다(옥스포드 원어성경대전 006 출 12:41, 31쪽 참조).

출애굽기 12장의 이 문맥은 하루, 아침, 저녁, 밤 등의 시간 단위가 매우 세밀하고 자세하게 서술되고 있는 문맥이며(출 12:2, 3, 5, 6, 10, 11, 15, 16, 18),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위중한 시간이 포함된 서술이다(출 12:5).

출애굽기 12장 40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은 이스라엘(=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가 이스라엘의 아들 레위, 레위의 아들 고핫, 고핫의 아들 아므람, 아므람의 아들 모세에 이르는 4대에 걸쳐 거주하다가, 모세가 80세 때 이집트로부터 나오기까지의 기간이다.

출애굽기 12장 40-41절갈라디아서 3장 16-17절은 언뜻 모순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단지 해석의 문제였을 뿐이며, 전혀 모순되지 않고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홍석(구약학 박사)
한국창조과학회 성경위원회, 군선교위원회 위원장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
전 국방대학교 합참대 교수
전 KC대학교 구약학 외래교수


창세기 46장 7-11절과 출애굽기 12장 40-41절 간에 모순이 있는가?

1. 문제 제기

야곱이 130세에 자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며(창 47:9),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 430년을 체류하고 나온다(출 12:40-41). 출애굽기 12장 40절을 보면 “이스라엘(=야곱)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가 창세기 15장 16에서 약속하신 4대에 해당한다.

그래서 창세기 15장 1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4대 만에 출애굽한 것이다. 출애굽기 6장 14-27절에 따르면, 레위의 수명은 137세, 고핫의 수명은 133세, 아므람의 수명은 137세였다.

아므람의 아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수행한다(출 7:6-7). 그런데 창세기 46장 7-11절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고핫)과 므라리요(창 46:7-11)”.

여기서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때, 레위가 그의 아들 고핫을 실제로 데리고 함께 내려간 것이라면 모순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고핫이 갓 태어난 상태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고핫은 133세, 아므람은 137세를 살았고, 모세가 80세 때 이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기간을 모두 합산해도 350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해석

창세기 46장 11절 말씀을 출애굽기 12장 40-41절 말씀에 따라 주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근거는 히브리어 원어성경(BHS) 창세기 46장 7절에서 표기되어 있는 문단 나누기 부호인 ‘스투마’, 즉 개역개정 성경에는 이를 따라 창세기 46장 8절이 시작되는 곳에 표기된 ‘동그라미’이다.

이는 새로운 문단의 시작을 알리는 표기로, 앞 문단과 문단을 분리하여 해석하라는 지시이다.

문단 구분에 따르면, 창세기 46장 7절의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에서 하나의 문단이 종료되었고, 창세기 46장 8절의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새로운 문단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경우 8절은 7절의 당시 상황이 아니라, 7절의 결과로 이집트로 내려가서 살았던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는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명단은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때 동행했던 명단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집트에서 체류했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명단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어법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도 거기에 동참한 것으로 말하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6장 3-4절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애굽으로 가라고 하실 때, “반드시 너를 다시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3-4)”.

우리는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후 거기서 죽었으며, 요셉이 그를 장사지낸 자리가 아벨미스라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창 50:5-11). 그리고 야곱의 유언에 따라(창 49:29) 야곱의 죽은 몸을 옮겨서 가나안에 장사지낸 것이 창세기 46장 4절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46장 4절에서 말씀하신 ‘어법’은 자손들을 조상과 동일시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식 어법이며, 성경의 말씀하시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예가 나타난다. 히브리서 7장 4-10절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나중에 아브라함의 증손자로 태어날 레위도 이미 이때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 7:4-10)”.

이러한 어법을 적용한다면, 고핫은 실제로는 야곱이 130세에 애굽으로 내려갈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레위가 이집트에 내려간 후에 낳은 아들이지만 이미 레위의 허리에 있었던 것이다(히 7:10 어법). 그래서 창세기 46장 11절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실제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수 년 전에 터키를 방문했을 때. 이스탄불에서 큰 카펫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젊은 사람을 만났는데, 형제라고 부르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화를 하던 중에 자신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참전한 것을 자신이 참전한 것으로 말한 것이다. 즉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이들의 어법이다.

당시 필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감정을 생각해보았던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독특한 어법(말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창세기 46장 11절과 출애굽기 6장 14-27절, 출애굽기 12장 40-41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히브리서 7장 10절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자면,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당시에 고핫은 레위의 허리에 있었고, 그래서 같이 내려갔다고 말할 수 있다.


▲광야로 나서는 모세와 히브리 민족의 모습. ⓒ못생긴나무 제공

3. 결론

출애굽기 12장 40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은 이스라엘(=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가 이스라엘의 아들 레위, 레위의 아들 고핫, 고핫의 아들 아므람, 아므람의 아들 모세에 이르는 4대에 걸쳐 거주하다가, 모세가 80세 때 이집트로부터 나오기까지의 기간이다.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당시 레위는 43세 정도였으며, 고핫은 레위의 허리에 있었다. 이후 레위는 이집트에서 고핫을 낳았다. 고핫은 아마 레위가 이집트로 내려간지 대략 90년 정도 지난 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창세기 46장 7-11절의 고핫에 대해서는 7절 끝에 있는 문단구분 부호에 따라 8절부터는 다른 새로운 문단으로 해석하고, 또한 성경의 어법, 히브리식 어법에 따라 조상과 자손을 동일시하는 어법을 이해하고 주석하게 되면, 어느 방법으로든지 창세기 46장 7-11절과 출애굽기 12장 40-41절 간의 모순처럼 보이는 마찰은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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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인들의 애굽체류기간은 400년인가 430년인가 자손4대인가(창세기 15:13~16)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야곱의 70명의 가족이 애굽에 들어간 해는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들이 애굽을 빠져나온 해는 또한 언제였을까? 우리는 성경의 기록들을 통하여 그때가 언제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 곧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민족이 되어 탈출하기까지 히브리인들은 과연 몇 년을 애굽에서 살다가 탈출한 것일까? 성경의 기록을 보면, 400년인 것 같기도 하고, 430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창15:13에 의하면, 애굽체류기간은 아브라함의 자손 4대일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어 보면 4대가 더 될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성경의 기록들을 통하여 실제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얼마동안 체류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떻게 성취되어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성경을 읽다보면, 어딘가에서 무엇이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본문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애굽체류기간이다. 출애굽했던 히브리인들은 과연 애굽에서 얼마동안 체류해 있었을까? 출애굽기 12장을 읽어보면, 히브리인들의 애굽체류기간은 430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곧 창15:13에 기록에 의하면, 애굽체류기간이 400년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그것도 자손 4대가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혹시 날짜를 혹시 계산하실 때에 잠깐 실수하신 것은 아닐른지... 아니면 처음 성경기록자는 제대로 기록했는데 베껴쓴 사람이 잘못 배껴쓴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나이 많은 모세가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얼마나 체류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4대"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한 분이며, 하신 약속을 어떻게 성취해가시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애굽은 무엇을 상징하여, 애굽의 바로왕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인가?

  성경의 기록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도 사실은 영적인 책이다. 영적인 비밀을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통하여 장차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어,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기록한 것이 성경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약성경은 매우 중요한 구약의 확증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을 통해서 구약에 있었던 사건의 의미가 진정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민21장에 기록된 놋뱀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출애굽2세대들이 만나에 싫증난 나머지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들에게 보내 물려 죽게 한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에게 달려와 제발 기도하여 뱀들이 떠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대 위에 높이 불뱀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가 있다면 그것을 쳐다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 물린 자들마다 놋뱀을 쳐다 보았던 사람은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뱀과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가 놋뱀을 쳐다보았을 때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주셨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니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장대위에 높인 달린 뱀은 자기에게는 죄가 없으나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를 전가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는 그 옛날 놋뱀을 쳐다본 자가 뱀의 독에서 해독될 수 있었듯이 누구든지 죄의 독으로부터 해독될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 들어간 것과 다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도 동일하게 적용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간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들어와 사는 것을 상징하며(요일5:19), 그곳에서 애굽왕 바로를 섬기고 산 것은 이 세상임금인 마귀를 섬기고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요12:31~32). 그렇다면, 이때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어떻게 생활하며 살았는가? 비록 종살이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불편함이 없이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에서 계속해서 살기를 바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가족 70명을 애굽에 들여보낸 이유는 애굽에서 영영토록 살게 하려는 데에 있지 않았다. 잠시 기근을 피해 들어가서 살다가, 반드시 그곳을 빠져나와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 들여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애굽은 한 마디로 무엇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출1:7에 의하면, "풍요로움"과 "번성"의 장소를 상징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고 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있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하여 임시로 주어진 기간인 것이지, 이 세상의 풍요로움에 푹 빠져 영영토록 이 세상에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은 번성의 장소인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은 영체와 부활체만 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번성의 축복은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 오직 물질세계이자 육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삶에서만 사람이 번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하되, 이 세상에 있는 풍요로움 속에서 번성의 축복을 해야 할 장소인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얼마동안 체류한 뒤에 나왔을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탈출하여 거기를 빠져 나왔을까? 출12:40~11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때은 이스라엘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 끝나던 해였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출12:40~41). 다시 말해, 야곱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와 증존자까지 이끌고 애굽에 들어간지 430년만에 탈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왕상6:1의 기록을 통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해가 솔로몬통치 4년이 되는 해의 2월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왕상6;1). 그해는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B.C.966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연도에 관한 놀라운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480년"이 되던 해에 성전을 지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480년이 되던 해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 오르난의 타작마장에 다윗이 정한 곳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연도는 B.C.966에다가 480년을 합친 B.C.1446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민족은 언제 애굽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출12:40~41에 의하면, 애굽땅에 거주한지 430년이 되는 해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간 해는 B.C.1876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야곱의 나이는 130세였으며(창47:9),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다가 그의 나이 147세(B.C.1859년)에 애굽땅에 죽게 된다(창49:33).

4.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틀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말씀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부터 살펴보자.

창15:13-1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우리가 이 말씀을 정확히 살펴보면서, 보통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히브리인들의 실제 애굽체류기간은 430년이었다. 그렇다면, 400년은 무엇인가? 창15:13을 보니, 그것은 이방인들(애굽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히는 기간이다. 그렇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에 들어갔다가 17년을 더 살고 죽었는데, 그후 13년이 흐른 다음에, 애굽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처음에는 강도가 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셈의 자손인 힉소스인들의 통치(애굽13~17왕조)가 끝나고, 함의 자손(제18왕조)이 다시 이집트땅을 다시 다스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고역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졌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만에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체류했던 기간은 정확히 430년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았고 147세에 .애굽에서 죽었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인 야곱의 나이 90세에 태어났다. 그런데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 야곱의 나이는 107세였다. 그러므로 야곱이 죽을 때의 요셉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리고 요셉은 110세에 죽었으니, 야곱이 죽고 나서 약 53년을 더 애굽에서 산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의 나이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얼마를 살았는지는 잘 모르는 것이다. 다만, 계보만 남아 있을 뿐이다.

  먼저, 애굽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의 자손 4대가 누구였는지부터 살펴보자. 애굽땅은 야곱이 들어갔다. 그때 야곱은 자신의 12아들들과 손자와 증존자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창46장 12절에 보면, 야곱은 넷째아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들어갔고, 유다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였던 베레스와 세라를 데리고 들어갔으며, 베레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증손자인 헤스론과 하물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이는 야곱이 자신의 자손4대를 데리고 애굽에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족보는 야곱 - 유다 - 베레스 - 헤스론이다. 그런데 이후의 사람의 족보가 역대기에 나오고(대상2:9~10), 마태복음 1장의 왕의 족보에도 나온다. 이 족보에 의하면 헤스론은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를 낳았고, 그의 둘째아들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을 나손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대상2:9~10). 그리고 나손은 살마(살몬)을 낳았는데, 살몬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탐할 때 보낸 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우선 헤스론 이후의 족보를 좀 더 보자.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이 그 족보다. 그런데 헤스론이 3명의 아들을 낳은 것까지는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야곱의 증손자 헤스론이 고손자 람(누가복음 족보에는 '아니')을 낳은 것을 기록한 족보가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다의 계보가 헤스론에서 첫째아들이 아니라 둘째아들인 람으로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람이 암미나답을 직접 낳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여러분은 혹시 람의 아들인 암미나답이 누군였는지를 알고 있는가? 암미나답(혹은 아미나답)은 아론의 부인인 엘리세바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출6:23). 다시 말해, 암미나답은 아들인 나손을 낳았고, 딸인 엘리세바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암미나답은 딸인 엘리세바를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시집보내었다. 이때 엘리세바는 아론에게 시집가서, 4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은 바로 나답과 아비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다(출6:23).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아론과 모세는 출애굽을 이끈 세대가 아닌가?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1세대들 중에 광야의 행진순서를 기록했을 때, 유다지파의 족장으로 기록한 사람이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는 것이다(민2:3). 그러니까, 암미나답이나 나손은 출애굽하고 있는 세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가나안땅에서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 - 유다 - 헤스론까지며, 헤스론이 애굽땅에서 람을 낳았으리라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암미나답과 나손은 출애굽세대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야곱이 헤스론까지는 자신이 직접 대리고 들어갔는데, 람까지가 430년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지 말이다. 람이 분명 암미나답을 낳았다고 기록하고는 있지만, 암미나답은 람의 직접적인 아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엄청 많은 세대가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족보에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다.

  왜, 성경의 기록은 람의 아들들 중에서 몇 세대를 생략한 채 기록하고 있는는 것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마태복음 1장의 메시야의 족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족보에는 여러 명의 왕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왕과 여호아하스왕의 아들 여호야긴(엘리야김)왕이 족보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마1:11).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메시야의 족보에 그 이름이 생략된 자들은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라는 공통점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람의 아들들의 수 댓수가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들이 생략되어 있고, 성경의 기록에는 람의 아들은 곧 암미나답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애굽에 체류하고 있다가 나온 세대는 딱 4대만 가리키지 않다는 것이 어느정도 확실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야곱의 후손이 4대만에 애굽에서 탈출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그것은 번역상의 잘못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원문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만에 가나안 땅에 돌아온다는 말씀이 아니라, "네번째의 세대" 때에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온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4번째 세대에 출애굽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람과 암미나답 사이에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들어있음을 추측해 본다. 그래야 사실 430년이라는 기나긴 기간이 전혀 문제가 없이 해석될 수가 있다.

5. 나오며

  성경의 기록은 사람이 썼지만 사람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들어쓰셔서 기록게 한 성령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책들은 성령의 책이자 하나님의 책인 것을 항상 염두해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체류기간에 있을지도 모를 야곱의 후손들도 이 원칙은 동일하다. 딱 4대가 아니라 네번째의 세대가 흘러간 다음에 출애굽한다는 것이 성경의 원뜻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낳게 하기 위해 준비된 유다지파의 족보에는 천국에 못 들어간 자의 이름이 생략된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족보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도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 석 자에 대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라도 꼭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원히 잊혀버리는 사람의 이름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우리의 이름의 하늘의 생명책에 남아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반드시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충성하여 하늘에서 상급을 많이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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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생활을 400년, 430년, 450년 중 어느게 맞는가?
왜 이렇게 적으셨을까? 교회가 비방받는 이유는?

요즘 불신자들의 교회공격이 도를 넘고 있다. 이러다간 얼마 안가서, 가톨릭과 wcc와 함께 교회습격, 프랑스바돌로매사건이나 종교재판때 같은, 마녀사냥이 생기지 않을까 싶을정도다. 그러므로 우린 더 열매맺는 언행과 모든계명지킴과 강력한 영적전쟁과 기도가 필요하다.


성경에선, 교회가 욕먹는 이유를 뭐라 하시는가? 거짓교사들의 음녀짓 때문에 교회가 비방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즉 성경속 바알이며, 음녀들의 어미 가톨릭과 그 음녀딸 wcc, wea 가, 영적 창녀짓 호색 음란짓 하기에 비방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벧후 2:2,) 『여럿이 저희(거짓교사들)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분명, 진리대로만 성경대로만 제대로 믿고, 교회에 침투한 가톨릭요소들=바알교리들을 모두 찾아 버리시면, 칭찬을 듣고 수도 더 는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얼마전, 어느 불신자가 올린 글중에, "성경은 거짓투성이다" "이런 거짓말을 믿지 말아야 한다" 라는 취지의 글로, 내용은, 애굽생활을 400년, 430년, 450년으로 적고 있어, 소설같다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에겐 말씀이 가려져서 잘보이지 않고, 보아도 못보게, 들어도 못듣게 하시니까 그런것도 있지만, 우리 기독교인도 제대로 답변하나 해놓은게 없어서 글을 올립니다.


또 그 가라지는, "어느게 정답이며, 또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에서 정말 4대가 400년이상이 되느냐?" 식이었다. "400년이면 40년씩만 해도 10대는 될텐데..?"


정답을 말씀드립니다.
일단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시는 분이란 걸 아셔야 한다. 전지전능하시지만, 오직 하나 못하시는 건, 거짓말이다. 거짓의 아비는 마귀다(요8:44)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 4대 만에 나온다고 하신 말씀을 보자.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여기서 잘 아는 아론. 모세의 족보를 보자.
(대상 6:1)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대상 6:2)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대상 6:3)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자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

야곱은 거의 죽기 직전에 애굽에 들어갔기에 빠집니다.
요셉의 형인 레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애굽은 아론. 모세가 이끌었기에 아론.모세까지 세어야 합니다.

레위>그핫>아므람이 고모 요게벳과 결혼(출 6:20)>아론.모세.미리암
으로 4대 만에 출애굽 했다.  그러므로 4대가 맞다.
이 당시엔 보통 120년정도씩 살던 시대다.
(신 34: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물론 노아의 홍수 전에는 거의 천년가까이 살았다.
심지어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다.
노아와 샘은, 야곱과 요셉 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족보를 보면, 정말 아이러니다.
샘의 직계자손들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때에 와서는 우상을 섬기게됐다(수24:2) 심지어 그토록 하나님을 잘섬기던 샘의 직계에서 말이다.
(창 9: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또 샘이, 같은 지역에서 생존해 있는 기간에도 말이다.

이토록 죄 때문에 점점 나이가 줄어드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역대일기를 보면, 왕들의 나이가 보통30-50세를 못산다. (시 109:8)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 레위26장 신명28장도 보면 죄때문에 저주 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400년은?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나그네)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에서 분명히 답을 주십니다. "그들을 섬기겠고,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즉 <종으로 삼아 괴롭게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분명 요셉 때는 되려 번성했고, 주인으로(창 45:9) 대우받았다. 하여 그 기간을 뺀 것이다. 요셉을 알지못하는 다음 새 왕이 나왔고(출 1:8) 즉 요셉 때 바로왕 외에 다음 바로부터는 이스라엘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정치적계산으로 학대한 것이다.


(창 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3. 430년은?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출 12:41)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갈 3:17) 『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


 430년은?  애굽에 거주한 총 기간을 말씀하신다.
즉 정확하게 하루도 차이없이, 430년 마치는 그날에 출애굽하셨다. 이렇게 정확한 하나님이시다.


4.  450년은?
(행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 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 13: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행 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성경에서 말한 430년을, 왜? 450년이라고 했을까요? 바울은 거짓말 못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확히 문맥을 깨닫지 못하니까. 거짓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시작은 16절이고, 17절에선 핵심이 <나그네 된 그 백성>이다. 즉 요셉 때 30년은,  객이 아닌 당당한 주인으로 살았다.
(창 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애굽의 <주>로 세워진 요셉으로 인해, 당당히 주인으로 살았으나, 다음 바로왕 때부터는, 요셉이 죽고나서 객=나그네로 전락된다.  즉 나그네로 학대. 압제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도 나그네를 잘 대해주라시며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다고 하신다.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바울은 17절에서,

나그네의 학대 압제받은 기간인 400년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 다음 18절의 광야 40년간과
그 다음 19절의 가나안 정복전쟁 10년을 더하여  총 약 450년을 말한 것이다. 그것도 <약 450년간>이라고 하신다.


이처럼 깨닫고 나면, 얼마나 정확하신 분인지 아는데요.
불신자나 가라지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유일신 예수님을 욕하기 바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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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회복과 430년의 기간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3-24)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리이까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아니요(행1:6-7)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겔 37:21,24)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겔 38:8)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성서적 근거
예수 그리스도는 공관복음서에서 마지막 때에 있을 징조들을 언급하면서, 우선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누가복음 21 : 23, 24절 말씀에서 각각 <이 백성>, <예루살렘>을 언급함으로써 <유대인>들로 그 범위를 국한시키고 있다. 그리고 에스겔서 37:38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38: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처럼 <말년-a long time, in the distant future>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누가복음 21:20-24절 까지의 말씀의 적용은 반드시 A.D 70년과 A.D135년의 시점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1:23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진노(Wrath)’라고 하는 단어는 원어상의 의미인 ‘호르게’로써, 즉 <분노>, <분개>와 동일한 의미인데, 이는 누가복음 13:34-35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처럼<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에스겔, 이사야, 스가랴, 학개, 그리고 스바냐 등 <바벨로 포로 이후>시대에 주로 활동했고 예언 했던 선지자들의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며, 이 예언서에서 가리키는 ‘시점’은 <종말의 때>에 맞춰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말하는 바벨론 포로와 그 이후 이스라엘 귀환의 멧세지의 중심은 <마지막 때>에 성취될 <이스라엘의 귀환과 회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선지서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최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겔38:17-23)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와 <분노>의 성격이 아닌, 하나님 그 자신의 <의>를 전 세계에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가복음 21:24절의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는 말씀은 실제로 A.D 135년 조국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이 1917년 벨포어 선언(이스라엘 건국)과, 그 뒤에 이은 1947년 UN의 합의 결의안이 있기까지 약 1900여년 동안의 <흩어진 디아스포라 기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21:24절에서 에스겔서 37:21절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의 공백기간은 약 1900여년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숫자의 상관성
성서에서는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몇 가지의 중요한 <숫자>가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12, 7, 6, 4, 3 과 같은 숫자가 그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 ‘4’ 라고 하는 숫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의미는 <고난>이며 '3은' <완전함>이다. 한편 <4>와 <3>이라는 숫자는 자주 <40일, 40년, 혹은 400년>, 그리고 3은 <30년>의<기간>을 나타낼 때 쓰이곤 한다. 그러면 성서에서의 기간, 즉 400년과 30년을 더한 430년이라는 기간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지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사건, 즉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한 가지의 독특한 공통점을 이끌어 낼 수 가 있다. 그것은 <430년>이라는 기간이다.



1.성서 속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
430년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그리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먼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을 탈출할 때,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기간이 바로 <430>년이 정확하게 차던 해라고 말을 한다. 물론 이 기간과 관련해서 학자들 간에 몇 가지의 상이한 견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분명히 <400>년 혹은 <430>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땅에서 나왔은즉(출 12:41)

모세는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을 한다. 먼저 그는 왕의 아들(애굽의 왕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미디안 광야에 들어가 40년간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목자로서의 40년이라는 기간은 하나님이 모세를 준비시키기 위한 특별한 준비기간임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후에 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후계자인 여호수아에 의해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신약으로 넘어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만난다. 앞서 언급했던 출애굽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임을 잘 알고 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 애굽에서의 430년간에 걸친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준 사건이라면, 신약의 <십자가 사건>역시 430년간의 <신구약 중간기의 암흑>을 뚫고 참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 준 사건이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B.C 4)까지의 기간을 약 400년간으로 본다. 선지자 말라기의 활동연대는 정확히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400년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기는 B.C 4년경이라는 것은 이미 일반화 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헤롯왕의 죽음(B.C 4)을 기점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거의 같은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400년의 기간동안 선지자의 활동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흔히 이 400년의 기간을 <암흑시기>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암흑시기인 400년간 이스라엘은 제국국가들의 속국으로 있었는데, 즉 바사(이란), 헬라(셀류쿠스제국-시리아), 로마제국의 속박 아래에 놓이게 된다. 특히 셀류쿠스 왕조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끔찍하고도 잔혹한 행위는 유명하다. 그는 예루살렘에 밀어닥쳐 성전에 들어가 보물을 빼앗고 시리아 군대를 주둔(B.C169-168)시킨다. 그리고 유대율법에 순종하는 일을 금지시키고 성전에 제우스신(바알신에서 유래되었으며, 로마제국 당시엔 주피터신)을 세우고 토라를 불태운다.(B.C167-164) 이렇듯 중간시대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 기간이었다. 게다가 이어서 출현한 로마제국의 폭군 헤롯대왕(B.C37-4)는 가장 잔인한 인간 중의 하나였는데, 그의 잔인함은 그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도 살해할 정도였다.

바로 이러한 암흑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적으론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A.D 30)하게 된다. 정확히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는 43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의 실제를 의미하며, 이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회복을 안겨준다.(고전10:11)


2.역사 속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
430년과 UN <이스라엘 재건국>합의 결의안 (1517-1947)
그렇다면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은 현재 이스라엘의 회복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다음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일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성서의 관점으로 재조명하려 한 시도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적어도 성서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건을 통해 언급되는 <430년>이라는 기간, 이 기간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관짓고자 한다. 또한 이 시점에 맞춰 일어나는 몇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을 같은 맥락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A.D 70년의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어서 A.D 135년에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다. 아니 사실은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세계각처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게 된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한 것 처럼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아울러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으셨다. 아니 그것은 이미 창세기에 등장하는 장자 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서(창4:10-26) 애초부터 예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1947년 11월 UN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이 합의 될 때 까지, 다시말해 이스라엘의 재건국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기까지 1900여년이 걸렸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신.구약 중간암흑시기 때에 겪었던 것 처럼, 많은 제국국가들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세계의 3대 종교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는데, 즉 유대교, 기독교(가톨릭,정교회,개신교), 이슬람교가 그것이다. 게다가 예루살렘엔 저 유명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옛 성전터 위에 세워지게 되며, 기독교도의 십자군(1096)을 시작으로 7번에 걸친 전쟁으로말미암아 수많은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 되게 된다. 1096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학살은 20세기 나치의 유대인 전멸 정책까지 유럽에서 계속 되었으며, 기독교도에 의해 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아이러니할 뿐이다.

430년간의 애굽종살이에서 출애굽사건의 시작, 그리고 430년간의 중간암흑시기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다시 마지막 때에 성취될 '이스라엘의 회복'(겔37:21)으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1517년 팔레스틴에 대한 오스만왕조의 지배와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같은 해에 시작된다는 점이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1917년 '발포어 선언'이 있기까지 <이스라엘의 재건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며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를 분리해낸 사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성격을 띤 사건이기도 하다.






A.<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기간 400년, 그리고 30년의 역사

1. 400년간의 역사의 재조명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와 멸망까지의 400년(1517-1917)
이스라엘에 대한 오스만 제국(터어키)의 지배는 정확히 400년간 지속된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며, 터어키가 회교 군주국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십자군 시대 200년간을 제외하곤 1천여년간을 거의 이슬람 교도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온 셈이다. 그리고 비로서 1917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영국군이 들어오게 되는데, 십자군 이래 처음으로 비이슬람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 이 때 유대인의 부대도 함께 입성 하는데 육군 상병 데이빗 벤 구리온(David Ben-Gurion)이라는 지도자도 함께 들어왔다. 400년간에 걸친 이스라엘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이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시작과 발포어 선언까지의 400년(1517-1917)
이스라엘의 회복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 후 인문주의의 발달로 인간성 회복의 운동에서 부터이다. 이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유대인 해방운동도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 출신의 최고 학자들이 계몽주의에 편승해서 유대인 자유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영향으로 서유럽을 위시하여 유대인 해방운동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게 되며, 이에 반해 동유럽에서는 그보다 후에 본격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영향으로 1657년 오란다에서 최초로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8세기 이래 유대인들에게 법적평등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1830년 이후부터는 유대인도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다.
전세계에서 시작된 유대인의 법적 평등 및 권리의 부여, 그리고 그로 인한 유대인의 해방은 다음과 같은 역사를 따르게 된다.

미국(1776) / 프랑스(1789) / 이탈리아및 독일(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지역' 해방) / 프랑스(1846) / 영국(1858) / 이탈리아(1871) / 스위스(1874)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들은 결국 1897년 8월 29일 204인의 유대인 대표들이 모여서 최초로 개최한 <시온주의>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이는 또한 전세계 시온주의 기구설립을 채택하게 되고, 전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촉매역할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동유럽과 러시아(거주지 제한 정책의 철폐로 인해 가능하게 됨-1917.3월 시행)에서 불모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당시 팔레스타인 땅은 굶주림과 고통이 따르는 황무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초기 정착민 중 많은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기도 했는데, 결국 유대인 민족의 저력은 지금의 키부츠(집단 공동체 농장)를 탄생시킨다. 한편 이것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는 유대출신이면서 대부호들인 재벌 및 금융가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 있는 유대인 부호들의 역할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17년의 발포어 선언, 1947년의 UN의 분할 합의안, 그리고 최종적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실로 이것은 1,900여년을 뛰어넘어, 2,600여년 만에 완전한 독립국가의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2. 30년간 역사의 재조명
발포어 선언과 UN 합의안까지의 30년(1917-1947)
1917년 발포어 선언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재건국을 승인한 1947년 UN 합의안이 있기까지의 3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독립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요청>을 잘 반영하고 있는 기간이다. 특히 세계전쟁의 발발로 인해(1914-1945 1,2차 세계대전)더욱 가속화 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된다.

또한 특이할만한 사실은 1917년 발포어 선언이 있었던 같은 해에, 러시아에서는 정말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를 탄생시켰으며, 이로 인해 세계는 극단적인 두 세계로 양극화 되기에 이른다. 즉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이념의 대립의 결과로 냉전,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해 수반되는 수많은 희생의 결과를 낳게 된다. 다시말해 비극의 시대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후에 결국 공산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최근 다시 <러시아의 부활>이 급속도로 가속화 되면서, 정치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대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이는 에스겔서를 비롯한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마지막 때의 예언을 이루는 하나의 확실한 징조를 보여주는 예이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대격동기를 경험하게 되는 이 시기에 역시 종교적으로도 하나의 큰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같은 해 1917년 포루투칼의 파티마 지역에서 일어난 <성모마리아의 출현 및 예언>사건이 그것이다. 이 파티마 사건은 가톨릭의 교황에 의해 극비로 취급될 만큼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 된다. 현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 서거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그 비밀의 전모가 알려졌으며, 그 비밀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교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정립한 사람이 바로 당시 교리성 장관으로 있었던 라칭거 추기경(현 베네딕트 16세 교황)이었다. 대략 말한다면 그 비밀의 내용이란 <세계전쟁과 최후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예언이다. 물론 전쟁에 관한 예언은 이미 제 1,2차 세계전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본다. (이것에 관하여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파티마' 예언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917년과 1947년 사이에 일어났던 20세기 초의 사건들은 이상과 같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기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히틀러에 의해 자행되어진 유대인 대량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홀로코스트는 유럽의 전체국가들에 의해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이 당시 대량학살로 인해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최대 600만이라는 통계도 있지만 상이한 견해가 존재함). 그러나 결국 이러한 핍박과 협박으로 인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 된다. 또한 1917년 러시아의 <거주지 제한 정책>이 해제 되면서 그곳에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그 어떤 나라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보다 많은 수가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된다.

제1차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또 2차적으로는 세계인류에게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안겨다준 사건들이 30년 동안 발생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 시점이 바로 <이스라엘이 재건국>하는 시점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수천년간의 침묵의 기간을 깨고, 그리고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과 아픔을 딛고 잉태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에르쯔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땅>에 돌아와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게 되며, 그 중심에는 이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개입이 있으셨음을 부인 할 수 없다.

한편 구약성서에서는 바벨론 포로와 이후에 성취될 이스라엘의 재건 사건이, 출애굽 사건과 아울러서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됨을 언급하고 있다. 또 그것은 가장 확실한 마지막 때의 징조로써 묘사되고 있다.







B.<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과정기간 60년(1947-2007)

1. 30년간의 역사의 재조명
UN 분할합의안에서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 제안까지 (1947-1977)
1947년 11월 UN 총회에서 유대국가와 아랍국가에 대한 동시 분할안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는 다시 재건되었다. 독립이 선포된 후 13명의 초대내각을 구성했으며 초대 대통령으로는 30년간 시온이즘 운동을 지도해 온 와이즈만 박사를 초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재건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다수 국가들이 속속 승인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아랍국은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이집트(애굽), 시리아(헬라-셀류쿠스 제국 ), 요르단(에돔,암몬,모압), 레바논(페니키아) 등은 강경하게 대항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스라엘은 주변국가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고, 1973년 욥키푸루 전쟁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중동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2차대전 당시, 줄곧 나치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틴으로 계속 모여들었다. 그래서 1947년 이후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정착하게 된다.

제 1차 중동전쟁(1948.5)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동시에 7개국으로 구성된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영토를 침입했다. 절대적 약세 놓여있던 이스라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통해 UN 분할안에 명시된 영토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제 2차 중동전쟁(1956. 7)
1956년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얻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이집트는 '이스라엘 국가의 전멸'을 다짐하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급기야 연합군을 결성해 시나이 반도를 급습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미국 소련의 압력을 받게 되자 연합군과 이스라엘은 철수하게 된다. 한편 가자의 이집트군 기지를 철저하게 파괴시킨다. 2차 중동전쟁에서도 이집트는 대패했다. 3만여명의 군사가 갈증으로 죽어갔으며, 이중 5,000여명 정도가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이에반해 이스라엘은 172명의 전사자와 8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제 3차 중동전쟁(1967.6)
1967년 대아랍 전쟁은 전쟁 역사상 가장 짧은 시일안에 가장 많은 영토를 점령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이 전쟁은 6일 안에 끝이 났으며 이집트로써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며 복구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선제 공격을 가함으로써 제공권을 장악, 출격 4시간만에 적기 4백여대와 군사 요충지 25개소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집트는 소련에서 지원받은 20억불의 군사장비 중 대부분을 6일 전쟁에서 소모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대의 비행기 손실을 입는데 그쳤다.
제 3차 중동전쟁은 다음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동예루살렘(이스라엘의 성지)을 점령하게 된다.
둘째, 북쪽의 시리아 골란고원(헤르몬산) 지대를 모조리 점령하게 된다.
셋째, 요단강 서안 일대를 점령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 곳이 지니는 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중요성을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 4차 중동전쟁(1973.10)
3차 전쟁에 걸쳐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아랍국가들, 특히 이집트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다시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남쪽 시나이반도는 이집트, 그리고 북쪽 골란고원을 시리아가 동시에 공격하게 된다. 개전 초기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 패전하게 되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전멸 위기에 처해진 이스라엘 군을 포기하고 시리아 군대는 작전상 후퇴함으로써 믿을수 없는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로인해 전쟁은 한 순간에 반전이 되어버린다. 다시 이스라엘은 전열을 정비한 후 수에즈운하를 이집트군으로 가장해 도강한 후 이집트 영토에 몰래 침입한다. 이집트 영토를 직접 침입하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그리고 <마긴 다비드-다윗의 별표>를 이집트 영토 안에 게양한 후 수많은 이집트군을 포위, 전멸의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다급해진 이집트 왕 사다트는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며 미국무장관 키신저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평화 협정 이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은 군대에 의해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

1977년 11월 19일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점령지역에서 철수한다면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선언하게 된다. 그래서 1978년 9월 17일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사다트 대통령 및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이 평화의 원칙에 합의한 후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2. 30년간의 역사의 재조명
이집트 평화협정 제안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까지(1977-2007)
1973년 중동 4차 전쟁까지 아랍권은, 특히 이집트를 중심으로한 연합세력은 공산권(구소련-에스겔서에서는 <곡>이라고 언급된 국가 - 겔38:16) 의 막강한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이집트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것이었다. 지난 4차에 걸쳐 치러진 중동전쟁의 성서적 의미는, 예언서에서 알수 있듯이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괴롭혔던 열국들을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심판하고 계신 다는 것이며,(슥1:16-21)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온 열국 가운데에 보여주고 계시다는 사실이다.(겔38:16)

한편 1977년 평화협정의 제안에 이어 1978년 공식적으로 평화협정에 서명한 이후, 중동은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을 맞게된다. 물론 주변국가들과의 몇차례 산발적인 충돌이 있긴 했었지만 4차에 걸친 중동 전쟁 만큼이나 큰 규모의 전쟁은 없었다. 그리고 최근 핵문제와 관련하여 이란 및 시리아와의 정치, 군사적 마찰이 일게 되었고, 그 와중에 다시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의 제안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1977년 이집트의 평화협정제안 이후 정확히 30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 미국의 중재로 2008년까지 평화협정을 완료할 예정인데, 여기에서 특이할 만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일정한 기간을 두고 이스라엘 역사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1947년-UN 분할 합의안 > 1948년-이스라엘 독립국가 재건
1977년-이집트의 평화협정 제의>1978년-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체결(미국중재)
2007년-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 제의> 2008년-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 완료 예정(미국중재)

1517년에서 1917년까지의 400년, 그리고 1947년 UN 분할 합의안까지 30년, 이후 정확히 30년간의 일정한 기간을 두고 평화협정이 제의되고 체결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성서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때가 차매>라는 말이 이럴때 쓰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한 가지 주목 해야할 것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차지한 동예루살렘 및 골란고원, 그리고 서안지역의 반환문제가 중동의 평화에 핵심적인 사안이 된다는 것이다. 1967년 이후 정확히 40년이 되는 해, 즉 작년부터 미국의 중재로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가시화 된다. 그리고 현재 부시 대통령의 중재로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동예루살렘의 성서적 의미와 가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요단강 서안지구 및 역시 골란고원(헤르몬산 부근-시리아와의 분쟁)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지금 평화협정의 중심에 서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에 대해 양보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과 관련한 성서적 근거와 그 의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차후에 논의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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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횃불 언약에서 400년에 4대가 분명한가?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횃불 언약을 하시며 그 후손이 400년, 4대(Generation)만에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400년간 단지 4대만이 있을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한 세대를 30년 정도로 계산 한다고 볼 때 400년이면 적어도 14대는 돼야 한다. 4대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의 애굽생활을 43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고, 속 시원한 답을 발견하게 됐다. 결국 필자는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400년이 옳은가 아니면 430년이 옳은가?', '4대가 맞나?'라는 질문에 일부 성경학자들은 명확한 대답을 회피한다. 또 실제로는 430년이 옳은데 하나님께서 대충 400년이라고 말씀하셨으며 4라는 숫자가 고난과 시련을 의미하므로 일종의 상징(Symbol)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바로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이는 성경의 분명한 역사(History-His Story)를 하나의 우화(Fiction)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아가야 함은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인간의 '참된 도'이다. 숫자 1은 2가 될 수 없고, 2가 1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충’ ‘어름 짐작’으로 말씀 해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다.

그러면 400년에 4대가 가능한 것인가? 그 대답은 분명히 Yes 이다. 성경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횃불 언약에서 말씀하신 400년에 4대(Generation)가 되었음을 출애굽기 6장 16절~20절이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론과 모세가 레위 후손으로 4대임을 분명히 밝혀주며, 그 조상들이 살았던 나이까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야곱의 아들인 레위는 137세, 레위의 아들 고핫은 133세, 고핫의 아들인 아므람은 137세까지 살았으며, 아므람의 아들들이 바로 아론과 모세이다. 그러므로 1대는 레위, 2대는 고핫, 3대는 아므람이며, 4대는 아론과 모세이다. 분명히 횃불언약에서 400년, 4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징이 아니요 사실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당시의 족보로 보면, 아론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고--고조 할아버지 격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 족보 순서로 최고로 높은 자 즉 아론과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더욱 증명해 주는 자료가 민수기의 열두 지파 인구 분포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레위족을 제외한 11지파의 인구는 장정 20세 이상의 남자들만 계수하여 603,550명이었다(민1:46). 그렇다면 평균 한 지파에 54,868명이 된다. 특히 유다족은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74,600명이었다. 그런데 레위족의 숫자는 생후 1개월 이상의 모든 남자의 숫자가 22,000명에 불과하다(민3:39). 이것은 레위족들은 대부분 400년 동안에 아주 늦게 자녀를 가졌거나 자녀 손이 아주 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론과 모세의 조상들은 아주 늦게 자녀들을 가졌기에 400년 동안에 4대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이 400년이 옳은가 430년이 옳은가?

출애굽기는 야곱과 그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갔던 때(날짜까지)와 나온 때(날짜까지)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이 애굽에 있었던 기간은 정확한 430년이었으며 하루라도 지나거나 모자라지 않다. 출12:41은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이스라엘)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라고 말하고 있다. 애굽에 들어간 날과 나온 날이 같다는 말이다. 이토록 성경에는 정확하게 날짜까지 기록 돼있다.

출애굽한 날은 원래 성경유대월력으로 7월 15일이었으며 장막절의 시작이다. 이스라엘은 이 날에 출애굽하여 장막을 치며 광야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날을 기념하며 장막절로 지키게 됐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달 즉 7월(디스리월/메담밈월)을 1월(니산월/아빔월)로 바꾸게 하셨다. “이 달(7월)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1월)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12:2)”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여 변경하신 것이다. 왜 바꾸셨을까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다루기로 한다.

그러므로 야곱과 그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간 날짜는 창세후 즉 ac2338년 1월 15일이며, 출애굽한 날짜도 정확히 430년 채우는 날인 창세후 즉 ac2768년 1월 15일이 된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은 주후 30년 즉 ac4034(?)년 1월 15일(수난일)이 된다.

위에 내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애굽생활은 정확한 430년이며 날짜까지 정확한데,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왜 일까? 대충 말씀하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횃불 언약에서 하나님은 “--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15:13)”라고 말씀하셨다. 즉 400년은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려 먹는 기간이지, 이스라엘이 애굽에 산 기간이 아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은 노예가 아니었다. 오히려 잘 살았고 넉넉하게 살았다. 애굽에서도 좋은 땅 라암세스에 거하며, 잘 살았었다(창47:11).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처음 30년은 애굽 총리인 요셉 때문에 잘 살았고, 그 후 요셉이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고 다른 왕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한 것이다. 애굽 사람들 눈에는 이스라엘이 남의 땅에 와서 자기들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격이었고, 이를 미워하며 그들을 노예 삼아 괴롭혔다. 그 기간이 400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400년이란 노예생활 기간이고, 430년은 정확히 애굽에 거했던 기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으며(창37:2, ac2216년), 30세(ac2229년)에 총리대신이 되었고(창41:46), 39세에 자기의 형제들과 아버지가 애굽에 내려오게 되었으며(ac2338년 1월 15일) , 그 후 대략 69세(ac2368년)까지 총리대신 이었을 것이며, 110세(ac2309년)에 죽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이 자손 삼대를 보았으니(창50:23), 즉 요셉은 약 80년 동안에 벌써 4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레위는 45세에 애굽에 가서 살게 되었으며, 애굽에서 92년 동안 살았으며, 6살 아래 동생인 요셉이 죽고 난 후에도 21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의 후손으로 아론과 모세는 400년에 4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들을 그냥 상징이거나 대충 말한 숫자라고 단정 지어버린다면,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한 가지 더. 야곱과 그 가족이 애굽에 내려갔던 가족의 숫자는 구약 창세기 46장 27절에는 70명이라고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데, 신약 사도행전 7장 14절에서는 75명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 이것에 대한 대답은 ‘성경은 절대 거짓말 하지 않는다’인데 이 또한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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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나드 한 근 / 300데나리온



순전한 나드 한 근에 담긴 존재와 삶

마태복음 26:6~1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7: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중략)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게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중략)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1~9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인에 대한 묘사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직접적으로 밝힌 요한복음과 달리,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한 여인', 심지어 '죄를 지은 한 여인'이라고 소개한다.
사실 앞 장면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자신의 절망과 상실감에 매몰되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심각한 불신앙과 원망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시몬)은 여인이 주님께 향유를 부을 때 죄인이 기름 붓는다는 점에 주목해 예수님을 판단하려 했다.
결국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왔던 것이고 그 때문에 주님 발 앞에 철저히 엎드렸던 것이다.

​향유 옥합과 여인의 태도에 대한 묘사

4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지극히 값진 향유'라고 설명하는데, 특별히 '순전한 한 나드' '옥합'으로 묘사된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이같은 향유는 당시 화폐가격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고가인데, 장례에도 쓰였고 여인이 혼인할 때 예물 혹은 지참금처럼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기름 부음이라고 묘사했다. 과연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씀하셨던 의미를 정말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마리아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 (나의 이해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께 순간의 불신으로 얼마나 큰 불경죄를 지었고 그것이 주님께 아픔을 주었다는 것에 대한 지극한 회한과 슬픔으로 마리아가 한 행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믿지 못했고 주님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 죄로 인해 주님과 끊어지고 멀어졌다는 절망과 죄책감을 표현할 수 있는 길... 그것은 미천한 자신이 주님 발앞에 고꾸라져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굴복시키고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순전한 나드 향유는 공기 중에서 변질되기 쉽기 때문에 밀봉된 옥합에 담겨 있었고, 그 옥합을 깨뜨릴 때 딱 한 번 쓸 수 있는 소량이라서 진귀하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는데, 젊은 여인에게 머리카락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소중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자신의 존재와 모든 삶을 통째로 드려 주님을 경배했다. 나의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것만 택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걸러지지 않은 가장 깊고 은밀한 심연의 한가운데서부터 끄집어올려진 100% 순복, 헌신의 의지가 주님께 '순전한 한 나드'이며 이것을 주님 앞에서 깨뜨리는 것이 가장 투박하고 진심어린 행위이다.

올해 이 말씀을 레마로 받은 나의 존재가 주님 앞에 이런 모습으로 드려져야 했다. 무익하고 죄인 그대로인 나는 왕 되신 주님 앞에 내 존재가 철저히 깨져야만 주님께 드려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내적 어둠과 쓴뿌리, 정욕과 아집, 불신앙과 죄성까지 까발려지고 온전히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굴복시켜야 한다. 마리아도 이 아픔과 온전한 헌신의 과정을 통해 주님의 온전한 신부이자 제자로 변화할 수 있었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구속 사역에 일부로 끼워맞춰졌던 것이다.

​주변인들의 반응에 대한 묘사

앞서 말했듯이 바리새인 시몬은 이 사건을 통해 마음 속에서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여인을 죄인으로 정죄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목소리 높였으며, 심지어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악심을 품었다. 요한복음의 말씀에서는 특히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가룟 유다의 은밀한 악심을 지적함으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심중까지 다 알고 계심을 전하는 것 같다. 나는 내적 고통과 어둠의 심연을 뚫고 나아가 주님께 바쳐지는 존재가 될 것인가, 주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편에 서서 주님과 상관없이 사는 존재가 될 것인가?

예수님의 결론에 대한 묘사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여인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선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여인의 행위가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대단한 영광 아닌가?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직접적인 표현보다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더라'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썼다. 사도 요한은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는 이 장면을 온전히 예수님의 관점에서 느끼고 기록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사랑과 믿음이 '향기'라는 감각으로 기억되었고, 이후의 세대에 여인의 믿음이 기억되리라는 예언을 이같은 감각적 묘사로 아름답게 기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 역시 감동적이다. 회한과 눈물로 드렸던 마리아의 절절한 사랑이 주님께 인정받고 죄사함을 받는 대목이 참 아름답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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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향유[나드]는 무엇일까?

1. 옥합을 깨뜨린 향유[나드]는 무엇일까?

성경에 나오는 나드(또는 나도)
(막 14:3∼9)와 (요 12:3∼8)에, 순전한 나드는 값비싼 향유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값은 1옥합(향수병)에 300데나리온이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일 품삯에 해당되므로, 300데나리온이면 약 1년치의 품삯에 맞먹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박물학자 프리니는, 나드 향유의 원료가 되는 나드초의 뿌리 1파운드(453g)의 가격이, 100데나리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기름을 짰으므로 10∼15배의 높은 값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나 히브리인들은 귀한 손님을 맞을 때, 화한을 손님의 머리에 씌울 뿐 아니라,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시체를 장사할 때에도 향유를 발라서 방부처리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주 귀한 손님(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분)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값비싼 나드 옥합을 깨뜨려서 머리에 부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이를 보고 비싼 것을 낭비했다고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아시고 당신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시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아가 1:12에서 "왕의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라고 말했고, 아가 4:13에서는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다"라고 했으며, 아가 4:14에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모든 귀한 향품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위에 열거된 모든 구절들은 나드가 비싸고 귀한 무역상품으로, 왕이나 부자 또는 귀족들만 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토록 값비싼 나드는 무엇이었을까요?

2. 나드는 무엇인가?

나드는 히말라야 산맥의 3,000미터 고지에 자생하는 마타리과에 속한 다년초입니다. 히말라야, 부탄, 네팔, 티베트, 인도동부 등이 나드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드는 인도산의 다른 향료나 약제와 함께 중동지역으로 거래된 역사가 오랜 진귀한 향료였습니다.

나드는 학명을 Nardostachys Jatamanse DC라고 하며, 영어명은 Spikenard, Indian Nard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의 향기를 풍긴다는 뜻의 말인 nalada가, 히브리어 Nerd, 그리스어 Nardos, 라틴어 Nardus, 시리아와 페루샤어는 Nardin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나드 향료를 Sunbul hindi(Indian spike), 즉 이삭같이 생긴 인도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어서, 나드초의 생김과 원산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드초는 키가 15∼30㎝로 자라는데, 잎이 크고 꽃은 연분홍색 잔꽃이 꽃대 끝에 뭉쳐서 핍니다. 그리고 근경에는 털이 덮여 있어서, 피기 전에는 이삭처럼 보히고, 근경 밑쪽에 굵은 뿌리가 있습니다.

이 뿌리와 근경에 강렬한 방향(芳香) 정유성분이 있습니다. 잎이 벌어지기 전에 뿌리와 근경을 파내어서 건조시킨 것을, 나드 뿌리(Nardus Root)라 하여 약으로 사용합니다. 약초일 때는 주로 이뇨·위장약으로 사용하며 복통·두통등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향료로 만들 때는, 근경을 파내어서 바로 방향성분을 증류하여, 다른 기름과 섞어서 나드 향유를 만듭니다. 휘발하기 쉬우므로, 옥합(아라파스티제 향료병)에 넣어 밀봉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수출했는데, 사용할 때는 이것을 깨뜨려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강한지, 향을 깨뜨리면 방에 나드 향이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드 향유는 지금도 인도에서 여자들의 머릿기름의 향유로 쓰이고 있습니다. 고대 유럽에서는 값비싼 향유로 즐겨쓰던 것이, 지금은 향이 너무 짙어서 향료로 쓰이지 않고, 신경 안정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료  ("성서의 식물" 최영전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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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심리학(Motivation Psychology)

인간의 행동의 근본적인 힘을 말하는 '동기'가 어떻게 발생되는지, 이를 활용해서 어떻게 업무 생산성이나 삶에서의 행복을 획득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동기 심리학은 당신의 '커리어(Career)' 방향성을 올바르게 안내하기 위해서 제가 꾸준히 공부하고 있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동기 심리학은 당신이 외적 동기가 아니라 내적 동기에 입각한 커리어를 밟을 때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1. 외재적 동기란 무엇인가?

외재적 동기는 말 그대로 외부적 보상이나 처벌과 같이 외부요인들에 의해서 유발되는 동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금전적 보상을 얻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거나 반대로 금전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금전적 보상', '금전적 처벌'은 외재적 동기라고 말할 수 있죠.

쉽게 말해서 당신이 만약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또는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외재적 동기에 의해서 촉발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래와 행동이 바로 전형적인 외재적 동기에 입각한 행동입니다. 

• 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 밤을 새워 중간 고사 준비를 하는 것
• 칭찬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
• 와이프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집안 청소를 하는 것
• 무료 음료 한 잔을 먹기 위해서 똑같은 카페를 지속적으로 방문 하는 것
• 벌금을 피하기 위해서 과속을 하지 않는 것
• 급여를 받기 위해서 오늘도 지옥철에 몸을 밀어넣는 것
• SNS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해서 멋진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
• 이력서 한 줄을 채우기 위해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2. 내재적 동기란 무엇인가?

반면 내내적 동기는 말 그대로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내부 요인들에 의해서 유발되는 동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순전히 '즐거워서' 하는 경우라면 이는 전형적으로 내재적 동기에 의해서 촉발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재적 동기에 의한 행동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것
• 스스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
•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하나뿐인 딸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 재정적 '독립'을 위해서 투자를 하는 것
• 내적 성장을 위해서 전혀 해보지 않은 경험을 추구하는 것
•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봉사활동을 하는 것
• 자존감을 향상시키고자 매주 피트니스 센터에 방문하는 것
•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

3. 외재적 동기 vs. 내재적 동기


그렇다면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 둘 중 어느 동기가 좋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내재적 동기가 더 좋은 동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돈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교양인 같아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기 심리학에서는 이런 가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적 성장보다 돈을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외재적 동기를 더 우선시 여기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돈도 좋지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내재적 동기를 우선시 여길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의 삶과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를 모두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성장'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하루에 한 끼를 겨우 사먹을 정도의 보수를 받는다면 당신은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영화 배우를 꿈꾸는 많은 분들이 결국 자신들의 꿈을 못 이루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내재적 가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지언정, '금전적 보상'이라는 외재적 가치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심리학 연구 논문들은 인간의 내재적 동기가 한 사람의 경력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지만, 외재적 동기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된 이후에 내재적 동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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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외적 보상에 의해서 무언가를 하게 될지라도,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그 행동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당신의 동기를 '내재화' 시키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현재까지 제가 축적한 동기 심리학적 지식을 토대로 당신의 커리어 방향성을 생산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따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기계적인 업무: 외재적 동기
창의적인 업무: 외재적 동기 + 내재적 동기

만약 당신이 '일'을 중요시 여김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일 굶지 않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봅시다. 이런 경우 당신이 어떤 일을 하면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굶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므로 외재적 동기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많은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외재적 동기에 의해서 기계적인 일을 한다면 생산성도 올라가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조적인 일은 다릅니다. 창조적인 일의 경우 일정한 보상을 넘어선 이후 지속적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외재적 동기가 아니라 내재적 동기에 의해서 그 일을 이어나가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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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내적 동기가 충만한 예술가들에게 '돈'이라는 보상을 통해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게 할 경우에는 오히려 예술성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죠. 

당신의 커리어 방향성을 고민하고 선택할 때에는, 당신이 외재적 동기에 입각한 선택을 할 것인지 내재적 동기에 입각한 선택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하며, 장기적으로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통합할 수 있는 커리어를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