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것 & 육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로마서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남이 복음을 전한 곳은 피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했다.(20)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했으나 여러 번 막혔고, 이제는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22-23)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역 원칙이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요.
또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고, 이제는 서바나로 갈 때 로마에 들렸다가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랬다.(24)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제 성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헌금하였다.(25-26)
이를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 일을 마치고 열매를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갈 것이라 했다.(28)
여기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헌금하여 그들을 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저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유산들을 물려받았으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물질로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교제인 것이다.
말씀과 물질의 나눔이다.
말씀을 받았으면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을 위하여 물질로 섬기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예수님도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다.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의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 돕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의 교제도 실질적 도움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바란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성경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고질적인 문제다. 
예를 들어 성경 읽을 때,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복'을 이해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개념이 된다. 
이렇게 인식된 복 개념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미신적으로 채워지는 기복을 주는 종교로 둔갑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지칭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풍요와 형통은 복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런 인식의 오류는 천국, 사랑, 믿음에 대한 이해에서도 동일한 맹위를 떨친다.

이런 차원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부분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이해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 용어는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 
은사주의 자들, 혹은 신사도 운동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영적인 것’을 주로 신비적 체험으로만 관련 지어 이해한다
환상을 보거나, 영음(靈音)을 듣거나, 입신을 하는 등의 신비적 체험들에 한정하여 영적인 것이라 한다. 
때문에 그들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을 한정적으로 영적인 사람들이라 한다. 
반대로 주로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바르게 전하는 목회자들은 영적이지 못한 사람, 심하게는 육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성경은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육적이라고 가르치고 있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리는 철학이 이야기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철학적 인식론이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영적인 것이란 물질적인 것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차원에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극단적인 이분법이 플라톤주의 인식의 기초를 이룬다. 
이런 인식론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도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과 관련된 것은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리나 신학에 충실한 지적 영역을 기초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육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영적 체험이 없어서 지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무시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자.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구별은 타락한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로 본다. 

성경이 가르치는 ‘육적인 것’은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부패한 삶의 원리를 따르는 태도를 말한다. 
유다서 1:19을 보면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고 한 구절이 대표적이다. 
우리 주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했을 때, 여기서 영과 육은 물리적인 것과 그에 반대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성경)에 합한 것과 하나님의 뜻(성경)에 위배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 다음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33)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뜻(성경)에 부합한 삶이란 인간 의지의 결단이나 지적인 인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성경)을 성령님의 은총 없이 의지의 결단만으로 행(行)하면, 그 행위는 육적인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 주님은 외식(히포크리테스), 즉 ‘연극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성경)과 관계없이 영적인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거나,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육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성경에 부합하지 않은 환상이나 꿈이나 예언하는 사람들을 육적인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은혜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시고,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셔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신다.

이것을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 영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또 종교적인 것은 영적이고 비종교적인 것은 육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다 영적인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과 진리로 하면(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면) 다 영적인 것이 된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물질적인 것이 다 사라지고 영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는 세상이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통합되므로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거룩한 연금술사로 이해된다. 
죄로 타락한 육적인 영역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도록 신자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예배’다. 
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는 삶 속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며 모든 것을 영적인 것(하나님의 영광)으로 화하게 하는 연금술사로 부름받은 것이다.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차이

“영적이다”(spiritual)는 말은 “육신적이다”(carnal)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성경에서 정의하는 “영적인 사람”은 고린도전서 2:12-14에 나와 있습니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14.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 곧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일들”(spiritual things)이란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뜻하며, 그 말씀들을 서로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영적이다(spiritual)는 말은 영(spirit)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령께서 기록하신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살면 영적인 것이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뜻대로 살면 그 무엇을 해도 육신적인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어떤 종교적인 것을 말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린도전서 2:12-16)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개역한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서로 같은 도구를 통해서만 교통이 가능하고 다른 도구로서는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가장 흔한 cellular phone - PCS)


앞에서도 이미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11f) 라는 비유를 본바 있고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고 적어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모든 것들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지혜로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한바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 조차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은 당연함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12:3)고 증거하고 이다.


우리 각자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십자가의 도의 원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적어도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미1:21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증거 한바 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인간에게 거저 주신 모든 것들은 아무리 인간적일지라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뿐이다. 줘야 받고 받아야 주는 대가로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논리에서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조차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만 가능함을 인간 지혜의 시대에 인간 지혜의 중심인 고린도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치는 사람의 지혜로는 하늘로부터 주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역시 오늘 전하는 말씀자체도 사람의 두뇌로 이해하려면 불가능 할 뿐이다. 세상 것들을 이해하는 데는 무딜지라도 신령한 것들은 잘 이해하는 하늘의 성령으로 충만한 …




Ⅰ.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거하게 하신 이유.(12~13)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 세상에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영적인 존재들이 많이 있고, 이 영적인 세력은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영적인 존재에 의해서 영향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고 증거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간됨으로 이 어두움에 맞서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에 순종하여 거듭난 자들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영적인 세계를 바로 분별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더욱 쉽게 하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들은 적어도 더 이상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악한 영들에 지배 받지 않게 하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하나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악한 영들의 영향아래 있지 않게 되었음을 확신시켜주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첫 부분의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12f) 바울 사도는 이를 더욱 분명히 확신시키기 위하여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명한 이유를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b)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사랑과 은혜의 선물을 헤아리고 알게 하는 것들은 결국 육신의 지혜로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영적일 때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들이 무엇이며 얼마나 귀중한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위로부터 주어진 귀중한 것들을 육신적으로 판단할 때는 절대로 귀중하게도 … 감사하게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우리의 신앙적 삶에서 언제든지 쉽게 확인되어지는 사실들이다. 우리가 영적이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신앙적 가치는 점점 하찮게 여겨지고 세상적인 것들이 더 귀중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들이 하나님의 주신 것들보다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 이런 기준으로 믿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357후렴)“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믿음에 관한 한은 어떤 것이든지 사람의 지혜 즉,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영생에 관한 한은 사람의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알 수 없게 하셨는데 그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본질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의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 하고 …”(13f) 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을 말하거니와”는 바로 신령한 것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연이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교훈들을 자신의 머리와 지혜로 이해하려고 덤벼드는 일들이 더러 있다.[도심의 돈까스 집의 일요일 휴무-우리와 같은 성경적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주신 모든 것들은 하늘의 지혜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오늘도 영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절대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적인 사람은 영적인 일들을 바로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교회 일은 영적인 사람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질 못하고 끼워 넣기 식으로 교회 일꾼을 뽑는다면 절대로 영적인 기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고, 영적인 자격을 갖춘 자들이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4:12)


영적인 일 하늘의 왕국의 일 즉, 천국의 일은 영적으로 판단이 가능한 성령의 사람들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물질을 관리하기 위하여 뽑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6:5)들을 뽑아서 사도들이 안수하여 일을 맡겼던 것이다.


[민11:25~29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 70명에게 하나님의 신이 내려와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이것은 만고의 진리요 영원히 바꾸지 않을 신앙의 원리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과 교회의 모든 일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Ⅱ. 육신적인 자연인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진리.(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에 정 반대되는 의미이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큰 장애는 육신의 삶과 肉的인 판단, 그리고 人間的인 價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Christianity 는 Humanism 이 아니다.
여기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데 안드로포스(Psychikos de anthropos) 거듭난 사람과 반대되는-자연인, 육적인 사람]”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14f)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으로 났던 유다도 그의 서신에서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9)고 지적하고 있다.

야고보도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약 3:14~15)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성령을 보내실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f)고 증거하셨다.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14m) 육신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일은 언제나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다. 사도 중에 으뜸이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했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계획되어 있는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를 가로막고 나서다가 호되게 책망을 받았던 것 역시 오늘 우리 신앙의 부정적인 모델이다. 오늘 우리도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가로막고 나선다면 같은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영적인 일의 해답은 오로지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b) 는 것이 정답이다. 인간적으로 계산해보고 손해와 이익을 따져보기보다는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가?를 영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육신의 판단이 아닌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Ⅲ.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영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15~16)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마지막 말씀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말씀이 아니다. 바로 영육의 판단의 결론이다. 이 말씀은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40:13) 라는 이사야서의 인용이고 이를 가장 구체적으로 응용하는 바울 시도의 말씀을 로마서11:34에서 읽게 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기 전에 먼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라고 감탄한바 있다.
역사상 가장 신령한 자이셨던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혼란을 겪지 않으셨고 모든 것을 진리대로 판단하셨음을 읽을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이나 율법에 정통 하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비록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 앞에서도 결코 혼란치 않으셨던 이유는 바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는 원리에서 그러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움직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바울 역시 다르지 않았고 오늘 같은 신앙적 원리를 가지고 산다면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지혜의 성령에 붙잡혔던 솔로몬도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b)는 말씀은 다른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지도를 받고 따르는 사람의 고백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표현을 빌립보 교우들에게도 쓴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고백함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8)

성령으로 생각하고 살고 죽을 수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과 다를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가능하고 당연함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장 10-16절]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단에 나오는 표현을 봅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제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라(고린도전서 2:6-16)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분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 지혜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바울은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지혜보다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비교하며 설득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때, 그리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바울이 그들 중에 전할 때도, 세상 지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고 열정적으로 논증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본문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지혜 자체로 향하게 한다. ①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무엇이 특별한가?(특징). ②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지혜를 우리에게 알리셨는가?(계시). ③ 누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가?(적용).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그래서 무엇을 판단하거나 분별할 때는 항상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균열은 항상 서로 다른 기준(하나님의 지혜와 섞인 세상의 지혜)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내는 기준이 오직 하나님의 지혜가 되기를, 그렇게 함께 지어져 가기를 바란다.

1.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6-9절)

‘나’에서 우리로 주어가 바뀐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의 개인 경험에서, 이제는 모든 말씀 전하는 자들이 공통으로 전달한 지혜의 근원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6절). 한편, 그 지혜를 전달받은 대상으로 언급된 “온전한(장성한) 자들”이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같은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3:1). 바울은 지금 오직 영적으로 장성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지혜를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바울은 어린 아이들 같은 성도들을 가리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탄식했다(고전 3:3). 하지만 신자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다(정체성). 그러나 그들의 삶이 신분과 명백히 동떨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한 것이다(3절).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성도는 온전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지혜를 모두 듣고 따라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특징을 갖는가? 첫째,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성격이 다르다(6절):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이 있듯, 하나님의 지혜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도 널리 발견되고 통용된다(공식, 이론, 법칙, 원칙). 세상 통치자들(학자, 변론가 포함)의 지혜 역시 모두 다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지혜는 항상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하는 일을 거스른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를 온 세상에 가득 채우셨지만, 마귀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풍조를 일으켜 그 모든 지혜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그래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의 지혜도 이 땅에서 잠시 이용될 뿐, 곧 폐기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모든 지식(인)이 유기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감추어졌던 것이다(7절). ‘비밀’, ‘신비’를 뜻하는 은밀함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가 가진 특성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완벽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의 지혜나 연구, 노력과 분석으로 절대 얻어낼 수 없다. 바울은 이 지혜가 분명히 우리에겐 감추어졌던 것(완료형)이지만, 하나님께는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밝혔다(7절, 엡 1:5). 바울은 여기서 모든 종류의 지혜를 다루기보다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관한 하나님 지혜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고, 감추어두었다가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믿는 자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가져다준다(하나님을 사랑하는…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7절).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 최고의 성경(율법)학자, 영적 지도자, 철학자와 변론가, 그 누구도 이 지혜알지 못하였다(8절). 단 한 사람도. 그들의 무지함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으로 확실히 입증됐다. 또한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절).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사 64:4; 65:17), 사람이 인식하고 사고하는 필수 기관인 눈, 귀, 마음(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절대로 알 수 없다. 복음을 깨달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복음을 알게 됐나?

2.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10-13절)

하나님의 깊은 마음에 은밀히 감추어졌던 복음의 지혜와 그 능력은 믿는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졌다. 어떻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나님의 한 위격으로 “하나님의 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도 한다(11, 12절, 일체 & 위격의 구분).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모두 우리에게 복음의 지혜를 알리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에 하나 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감추신 마음속 깊은 곳의 지혜를 알고 계실까?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아신다. 바울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11절). 맞는 말 아닌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11절).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10절, ‘살피다’).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11절), 하나님께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분에게 감춰진 지혜를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로운 것들을 알기 위해 세상적인 관점(세상의 영)이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12-13절). 사도 요한도 같은 의미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바울은 당시 관용했던 원리를 이용하여 이렇게 요약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절,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로 크게 오해할 소지가 있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복음의 지혜를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크게 잘못 분별하고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첫째, 어떤 이들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니 사람의 가르침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성도에게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은사를 주시고, 누가 교회에 교사를 은사로 주시는가? 성령님이다(고전 12:8, 28).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고 가르치실 때 사람을 세워 사용하신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인 하나님 말씀을 분별할 때 영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기록하실 때 사용하신 일반적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신비로운 깨달음과 본문이 의도한 바와 아무런 상관없이 얻은 즉흥적인 교훈을 영적인 이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실 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다(요 14:26).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신다(요 16:13). 주관적이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나타나는 뜻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미리 정해진 뜻을 가르쳐 주신다.

둘째, 어떤 이들은 스콜라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져 탁월한 지적 능력과 풍부한 학문을 가진 소수가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적 탐구와 이성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곧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게 됐다(12절).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은 필요 없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알 수 없을까? 성경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책이라면 올바른 해석법을 통해 누구나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일 곧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은 오직 영적인 사람만 분별하고 받을 수 있다는 진리다.

3. 하나님의 지혜의 적용(14-16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14절).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는다. ‘받다’의 의미는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수용하다’ 등인데, 현재형 동사는 성령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혜를 육에 속한 사람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가? 설교나 성경의 메시지를 왜 받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오랜 시간 배우고 나서 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뭔지는 알겠다. 그런데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 이유가 뭘까? 첫째,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인에게 거리끼고 이방인에게 미련하게 보였던 것처럼 지금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의 관점에서 어리석어 보인다. 둘째, 오직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만이(신령한 자, 15절) 성령이 나타내신 일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육적인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의 참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여 어리석게 여기고 그래서 결국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산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나타내는 하나님 지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알아보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안에 성령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다. 신령한 자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다.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16절, 사 40:13),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그분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또 하시는지), 나아가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치에 동의하고 그 가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15절). 세상 사람이나 세상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이들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보배롭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 혹은 자녀의 구원을 점검할 때, 복음 교리를 얼마큼 많이 또는 자세히 알고 있는지, 그 가르침에 얼마큼 지적으로 동의하는지(그것도 진심으로) 따질 때가 많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하느냐이다. 얼마나 보배롭게 여기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 그것을 얼마나 경이롭게 여기며 겸손히 받아들이는가? 나의 옛본성이나 세상의 가치 기준에 비춰볼 때, 순간 어리석어 보여도,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실 때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깊고 풍성하며 보배로운지 보고 그 지혜 앞에 굴복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는가? 

당신은 언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분열은 영적인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하려면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같은 분별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가르치실 때 겸손하게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함께 영적으로 견고하게 지어져 갈 것이다.


영성이란? 영적인 삶이란?

“영성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영성 있는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어떻게 영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요즘 그리스인들 중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말만 들어도 무엇인가 어떤 높은 경지나 수준에 올라 있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영성 있는 삶, 명상의 삶, 깨끗한 삶, 영적인 삶, 성령 충만한 삶, 거룩한 삶, 경건한 삶 등 비슷비슷한 말이 많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고 시간이 날 때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며 소박하고 단출한 삶을 사는 수도사를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또는 특이한 자세와 생각과 명상을 하면서 사는 요가를 하는 힌두교인을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무당들도 영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기독교적인 영성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보통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고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산 속의 기도원이나 기도처에서 몇 년 동안 기도를 하며 묵상한 사람들이나 , 평소에 기도를 오래 하며 신비스러운 꿈, 환상, 체험을 한 사람들을 영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장차 일어날 사건이나 일들을 예언하고, 신자들의 과거 사실이나 현재의 마음을 투시하고 말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병을 잘 고치거나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의 일을 잘 감당하는 목사를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그것이 사실인지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는 논의하지 않습니다. 한편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말씀을 지키고 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들을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일까요?

흥미로운 사실은 아직 한국에 영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에서의 영성이란 이제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주로 로마 가톨릭의 영성이 기독교로 들어와 오해되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관상기도가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며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많으며 극단적으로 이단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나이 사십이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 생각, 감정,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이 말이 그 사람의 얼굴로 대표되는 마음과 영혼을 지칭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태까지 이 말을 어느 정도는 오해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인간의 내면적인 마음과 영혼으로 바라보거나 해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룩하고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달라스 윌라드는 “마음의 혁신(복있는 사람. 2011)”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시작과 비슷함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교 영성 개발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능가하는, 은혜의 산물임(37쪽)을 주장하고 곧 그것은 우리의 삶속에 거하며 교류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 개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심어지고 성장하면 진정한 사랑의 행위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에 대하여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티브 맥베이의 “은혜 영성의 파워”(우수명 역, 엔시디, 2006)”란 글을 읽고 더 이상 관심을 두고 싶지 않고 몹쓸 책이라고 결론을 내린 기억이 나기 때문입니다.

‘은혜 영성의 파워’

책의 중심 내용은 우리가 노력하여 선하고 착한 행위를 따라 살아가면 실패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성령님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진정 자유롭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요 영적인 생활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부분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설교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에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단계중 칭의와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단번(once and for all) 으로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충만함과 인간의 자기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 입니다(벌코프 조직신학 786-89쪽).
물론 그럼에도 주체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사역이 우선임은 말 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바르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없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써본 사람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고 바울도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니라”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영혼과 의지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고 영적인 삶(신비적인 부분이 아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고 한량없는 은혜와 철저히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자신의 심령에 변화를 받고 사고의 변화, 감정의 변화, 행동의 변화와 영혼의 깊은 곳이 변화가 되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윌라드는 말합니다.
여기에 찬성합니다.

더욱이 영성개발은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을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서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찬성합니다.
실제 한국교회에서는 천국은 죽어서야만 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의 삶을 중요시 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쾌락적인 삶을 적당히 즐기면서 살거나 누리면서 살고자 하는 신자들이 더욱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많이 배웠다고 하는 목회자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음은 불행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에 확신하고, 한번 구원받은 성도들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끝까지 끌어주고 이끌어 가심으로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교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칼빈의 성도의 견인(堅忍).
사실 이것은 성도의 견인(堅忍)을 견인(牽引)으로 오해하여 생긴 것입니다.
영어로는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지 Traction(or hauling) of the saints가 아닙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즉 성도의 견인이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인내와 끈기로 끝까지 믿음을 준수하고 고수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믿습니다.

오스카 쿨만이 주장한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이미(Already)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 졌으나,
아직(But not yet)으로 미완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무척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개발적인 삶도 이 땅에 살아가며 내 영혼이 변화되어, 참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겁고 행복하며 경건하게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영적인 삶이고 영성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야 말로 올바른 영성인으로서 영성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