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Jesu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백팔번뇌(百八煩惱) : 쉼(Rest)
불교는 백팔번뇌를 갖고 석가모니에게 나와야 합니다.
백팔번뇌의 내용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서 지내야 하는 번뇌
만나고 샆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며 살아가야 하는 번뇌
기독교는 무거운 짐을 갖고 나와야 합니다.
마태복음 12:2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백팔번뇌(百八煩惱)는 불교에서 나온 말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108가지 번뇌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번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기복과 감정의 경험으로 나타나며, 이 성어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 세계와 마음의 상태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유래를 살펴보면, 백팔번뇌는 불교에서 나온 개념으로, 육관(六官) 즉 귀(耳), 눈(目), 입(口), 코(鼻), 마음(心), 몸(體)이 서로 작용해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번뇌들은 총 18가지로, 좋고(好), 나쁘고(惡), 좋지도 싫지도 않은(不好不惡) 평등(平等)의 3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 성어에서의 18가지 번뇌에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고려하면 18 × 6 = 108가 되어 백팔번뇌라고 합니다.
한자풀이
이제 '백팔번뇌(百八煩惱)'의 각 한자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 百 : 일백 백
- 八 : 여덟 팔
- 煩 : 번거로울 번
- 惱 : 번뇌할 뇌
위의 한자들을 이해하고 조합하여 백팔번뇌(百八煩惱)의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백'은 일백을, '팔'은 여덟을, '번'은 번거로운 것을, 그리고 '뇌'는 번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합쳐진
'백팔번뇌'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다양한 번뇌와 감정 상태를 잘 표현해 줍니다.
실생활 예시
- 그녀는 진로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백팔번뇌를 겪으며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지 고민하였다.
- 출근길에 음악을 들으면서 일상의 백팔번뇌를 잠시 잊어 누운다.
- 연인 사이에서도 때로 맞추기 어려운 성격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백팔번뇌를 느끼며 이 관계를 이어갔다.
- 영화의 주인공은 가족 간의 갈등과 이해관계로 인해 백팔번뇌를 겪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곤 한다.
- 드라마 속 인물들은 가련한 운명에 굴하지 않고, 백팔번뇌를 이겨내며 삶의 전환점을 찾아낸다.
- 뉴스에서 전직 대통령이 정치적 백팔번뇌를 타개하려는 모습을 보며, 국가를 이끄는 것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 옛날 일본의 문학 작품 중 하나에서는 주인공이 적철명월(적절한 때에)을 기다리며 혼란에 휩싸인 정치 세력 속에서 백팔번뇌를 겪게 된다.
- 시에서 시인은 화려한 술집에서의 인생을 묘사하며, 백팔번뇌를 느끼며도 참아낸다.
-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와 부모님의 기대를 동시에 충족하는 것에 대한 백팔번뇌를 겪었다.
- 하루 종일 일을 보며 사람들은 백팔번뇌 속에 취해 파도 치는 바다 먼방에 있는 평온한 바다가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불교에는 용서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용서가 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 밖에서 의심을 갖고 계속적인 질문만 던지고 있다.
따라서 철학은 질문이며 복음은 해답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가?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가?아들이란 개념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자식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개념은 아들이란 반드시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의해서 얻은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도 하나님과 마리아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과 마리아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리아의 몸에 생명을 주어 그 생명이 남자의 씨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성령) + 마리의 몸 = 예수
예수님은 사람들의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혼하셔서 아들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셔서 그녀와 함께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복음 1:1, 14).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게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 대제사장이 요구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태복음 26:63).
이때 예수께서는 “네가 말한 대로 그러하다고”
답하셨습니다.
또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태복음 26:64)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며 고소하였습니다(마
26:65-66).
후에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신 것이 신성모독 죄로
여겨지며 또한 사형 선고를 받아야만 합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구로 무엇을 뜻하시는지 정확히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본질이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 죄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기 24장 15절을 따라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이(그
아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또 다른 예를 요한복음 17장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 6장 71절은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에서 유다를 “멸망의 자식” 이라고 부른 의미는 무엇입니까?
“멸망”이란
말은 “파괴, 파멸, 폐기”를 뜻합니다.
유다가 말 그대로 파멸, 파괴, 그리고 폐기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유다의 삶의 정체였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멸망의 나타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1, 14).
____________________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이신가?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셨으면서 왜 또 기도하실 때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지, 이 부분은 전에 잘 이해가 안 되고 고민스러웠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어떻게 정확히 알게 되었는지 공유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여기에서 확실한 답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어느 날 아침, 저는 딸과 함께 성경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8~10) 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엄마, 목사와 장로님은 설교할 때 다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이라고 하셨잖아요. 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도 이 문제를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때는 딸에게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번 이 성경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알고 싶어 목사와 장로님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질만한 게 뭐가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갈 수 있고 주님을 따르는 게 확실한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제가 몇 마디 더 물어보면 그들은 말을 얼버무리곤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서 확실한 답을 듣지 못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에 대해 여전히 구분할 수 없었고 이 문제는 나에게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그 후 저는 여러 차례 기도드리며 주님께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구했으며, 주 안의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면서 해답을 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왕 자매와 성경 몇 구절을 찾아 읽다가 오랫동안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문제에 대해 얘기를 꺼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왕 자매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실 때, 성령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였고,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도 그의 아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으니,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자신일까요? 요한복음 14장 8절 말씀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니, 그 때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9~10) 여기에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부자 관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단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어서 왕 자매가 나에게 두 대목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예수 안에 있는 영과 하늘의 영, 그리고 여호와의 영은 모두 하나이다. 성령이라고도 불리고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불리며 일곱 배 강화된 영이자 만유를 포함하는 영이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의 영은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홍수로 세상을 멸할 수도 있으며, 전 인류를 속량할 수도 있고, 더욱이 전 인류를 정복하거나 멸할 수도 있다. 이 사역은 모두 하나님이 혼자서 하는 사역이지 그 어떤 위격의 신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은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전능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는 주이고, 그리스도이며, 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으며, 전 우주 위에도 있고 만인 가운데도 있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관자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 사역은 하나님의 영이 혼자 행한 것이다. 하늘에서 행한 사역이든지 육신으로 행한 사역이든지 모두 그의 고유한 영이 행한 것이다. 하늘의 피조물이든지 땅의 피조물이든지 모두 그의 전능한 손에 달려 있으며, 모두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므로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그가 하늘에서 영일지라도 그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사람 가운데서 육신으로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다….』
말씀을 읽은 후, 왕 자매가 말했습니다.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된 후부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경륜을 시작하셨어요.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율법을 반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땅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는데, 이러한 사역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영의 방식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인류가 점점 심하게 타락하고 율법에 어긋나 여호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자꾸 하게 되자, 사람들은 율법을 범한 죄로 정죄받고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한 인류의 필요에 따라, 성육신하여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셨는데, 사실상,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여셨고,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나타내시고,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동시에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어요.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말 한마디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재웠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등 완전히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왕 자매의 교제를 듣고 나니 마음속이 갑자기 밝아지며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인자로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왕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부르신 거죠?”
왕 자매가 말했습니다. “우리 같이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이해하시게 될 거예요.” 『그 당시 예수가 기도할 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지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었고, 피조물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일지라도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인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인자라고 말한 이상, 인자는 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남자든 여자든, 결국 모두 사람의 외형을 갖추었음).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가 처음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너희가 외웠던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기억하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 또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와 평등한 위치에 서서 하늘의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상, 예수는 자신을 너희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택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여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 또한 너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땅에서 얼마나 큰 권병을 가졌든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자이자 땅의 피조물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역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하늘의 영)을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 영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위치에 섰을 뿐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자로 된 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음성을 발하시든, 혹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시든, 예수님의 본질은 신성이지 인성이 아니예요. 예수님 역시 육신의 형상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낮추심과 순종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의혹이 생기는 것은 주요하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을 알지 못하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글귀의 의미로만 해석을 해서 생긴 것입니다.”
자매님의 교제를 듣고 나니 비로소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되신 것이고 주님이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하고, 또한 인류에게 율법을 반포하신 이 땅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피조물의 각도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의 본질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마음속이 환해졌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나의 깨우침을 딸에게 전해 주어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심오한 비밀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성육신에 관한 진리의 내용을 추천드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 아직 고민스럽거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소통의 창을 통해 연락주십시오!
[신학 Q&A] 예수님이 "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의 차이점은 뭐죠?
Q :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의 차이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A:
1.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위격"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이
때에 장로 중에 하나였던 "아리우스"는 당시 감독이었던 알렉산더가 설교 중에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그릇된 언급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감독 알렉산더의 설교 내용 중에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러나 문제는 알렉산더 감독을 비난한 장로 아리우스 역시 성자에 대해 옳지 않은 주장을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 아리우스는 헬라식 이원론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은 직접 관련을 맺기에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하는 성자 역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자를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중간에 있는 존재 로 생각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성부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는 성자를 하나님께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자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창조되신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시로 만들어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노래로 부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으며, 알렉산더
감독은 321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장로 아리우스의 장로직을 박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아리우스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그 문제가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분쟁
조짐까지 보이게 되자 323년 동로마 제국까지 석권한 콘스탄틴 황제는 위기감을 느끼고 이 두 사이를 중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3. 그러자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25년 5월
20일 전체 기독교권을 말라하는 대종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니케아에서 열린 이 회의는 전체 기독교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여한
최초의 회의였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 편을 지지했던 사람은 니코메디아라는 감독이었으며, 알렉산더를 지지한 사람은
아다나시우스였습니다. 아다나시우는 이미 "성자의 성육신"에 관한 논문을 통해 당시 신학자로 크게 인정받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중간 입장에 서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였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중간 입장에서 자신이 속해 있던 가이사랴 교회의 세례 문답을 양쪽 모두가 동의할 수 있도록 "기본
교리"로 제시했습니다. 이 교리 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말씀, 하나님 중의
하나님....독생자, 하나님에 의해 처음 창조되신 분, 성부 하나님에 의해 잉태되신 분....등"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4.
그러나 이러한 고백문은 당시에 일어났던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논쟁에 대한 만족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 대표자들은 이 고백문을 아리우스의 논쟁에 답변을 제시할 수 있도록 다시 수정했습니다. 이 때에 수정된 고백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으며, 진정한 하나님 중의 진정한 하나님이며, 창조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은 본질로 나셨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 고백문은 당시에
참석한 모든 교회의 대표자들이 동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회의 공식 교리로 체택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아리우스의 입장을
지지했던 두 명의 감독만은 끝내 이 교리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이 두 감독은 파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5.
여기에서 논쟁이 되었던 문제는 성자께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 즉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고 계신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버지와 같은", 또는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 을 가진 분으로 표현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고백에 대해서 한 발도 양보하지를 않았습니다. 이때에 교회의 대표자들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 만일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회는 본질이 서로 다른 두 분의 신을 믿는 이신론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표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2) 또한 성자의 신성을 양보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중보할 중보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중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6.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국 니케아 교회 회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 이라는 교리를 공식으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는 후에 몇 차례 논쟁(2차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3차 에베소 회의)을 거치면서 더욱 더
분명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51년에 열린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최후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수용되어 성도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교회에서 세례 문답을 할 때에 성자 예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7. 이와 같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13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서 4차례의 전 세계 교회
대표자들의 모여서 심사숙고하여 결정된 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전통 교리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 동안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러한 기독론을 무너뜨리거나 반대하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다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기독론에 대한 이단은 대부분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도전을 합니다. 첫째는 성자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둘째는 성자께서 참 사람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자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교리를 부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왜 이사야가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기 600 여년 전에 다음과 같이 소리 높여서 예언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신앙문답: 기독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의 차이점이 뭔가요?
Q :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의 차이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A:
1.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위격"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이때에
장로 중에 하나였던 "아리우스"는 당시 감독이었던 알렉산더가 설교 중에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그릇된 언급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감독 알렉산더의 설교 내용 중에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러나 문제는 알렉산더 감독을 비난한 장로 아리우스 역시 성자에 대해 옳지 않은 주장을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 아리우스는
헬라식 이원론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은 직접 관련을 맺기에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 하는 성자 역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자를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중간에 있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성부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는 성자를 하나님께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자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창조되신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시로
만들어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노래로 부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으며, 알렉산더 감독은 321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장로 아리우스의 장로직을 박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아리우스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그 문제가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분쟁 조짐까지 보이게
되자 323년 동로마 제국까지 석권한 콘스탄틴 황제는 위기감을 느끼고 이 두 사이를 중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3. 그러자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25년 5월 20일 전체
기독교권을 말라하는 대종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니케아에서 열린 이 회의는 전체 기독교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여한 최초의
회의였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 편을 지지했던 사람은 니코 메디아라는 감독이었으며, 알렉산더를 지지한 사람은 아다나시우스였습니다.
아다나 시우는 이미 "성자의 성육신"에 관한 논문을 통해 당시 신학자로 크게 인정받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중간 입장에 서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4. 그러나 이러한 고백문은 당시에 일어났던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논쟁에 대한 만족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 대표자들은 이 고백문을 아리우스의 논쟁에 답변을
제시할 수 있도록 다시 수정했습니다. 이때에 수정된 고백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으며,
진정한 하나님 중의 진정한 하나님이며, 창조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은 본질로 나셨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 고백문은 당시에 참석한 모든 교회의 대표자들이 동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회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아리우스의 입장을 지지했던 두 명의 감독만은 끝내 이 교리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이 두 감독은 파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5. 여기에서 논쟁이 되었던 문제는 성자께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 즉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고 계신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버지와 같은", 또는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진 분으로 표현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고백에 대해서 한 발도 양보하지를 않았습니다. 이때에 교회의 대표자들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 만일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회는 본질이 서로
다른 두 분의 신을 믿는 이신론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표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2) 또한 성자의 신성을
양보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중보 할 중보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중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6.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국 니케아 교회 회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교리를 공식으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는 후에 몇 차례
논쟁(2차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3차 에베소 회의)을 거치면서 더욱더 분명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51년에 열린 제4차 종교회의인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최후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수용되어 성도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교회에서 세례 문답을 할 때에 성자
예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7. 이와 같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13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서 4차례의 전 세계 교회 대표자들의 모여서 심사숙고하여 결정된 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전통 교리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동안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러한 기독론을 무너뜨리거나
반대하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다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기독론에 대한 이단은 대부분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도전을 합니다. 첫째는 성자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둘째는 성자께서 참 사람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자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교리를 부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왜 이사야가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기 60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소리 높여서
예언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출처:biblenara.com]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 자신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까?주님의 은혜를 받은 후 저는 마태복음 3장 17절에 기록된 성경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설교하실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내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천 년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다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형제자매님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시니 주님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9~10)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한복음 10:30)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데 왜 주님께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하신 걸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마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아버지와 아들로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 자신일까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펼치신 후 율법시대가 막을 내리고 은혜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지내셨습니다.
당시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셨고 예수님 역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일까
성경을 본 형제자매님이라면 모두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께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음을 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시대 사역을 하실 때도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에게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9~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육신에 실제화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정상적인 인성뿐만 아니라 완전한 신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어떤 책에 적힌 내용처럼 말입니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분은 하나님 영이 실제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실 때 긍휼과 자애의 성품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게 율법시대가 끝나고 은혜시대가 시작되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3:2)와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등의 가르침과 함께 사람이 새롭게 실천해야 할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모두 권능과 능력이 있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또 말 한 마디로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시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 중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속성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생하신 하나님 자신이며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현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
어쩌면 형제자매님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라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이 문제에 관하여 한 단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가 기도할 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지 창조된 사람의 관점에서 부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었고, 피조물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일지라도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인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인자라고 말한 이상, 인자는 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남자든 여자든, 결국 모두 사람의 외형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가 처음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창조된 사람의 관점에서 부른 것이다. 너희가 외웠던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기억하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는 모든 사람으로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 또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와 평등한 선상에 서서 하늘의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상, 예수는 자신을 너희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택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여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 또한 너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땅에서 얼마나 큰 권능을 가졌든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자이자 땅의 피조물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역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하늘의 영)을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 영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취한 관점이 다른 것이지 위격이 다른 것은 아니다….』(<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중에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는 단지 피조물의 입장, 다시 말해 사람의 입장에서 부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영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의 신분은 인자이시고 정상적인 인성이 있고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며 보통 사람들처럼 먹고 자며,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조물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순종을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말투나 호칭으로 기도드렸건 그분의 본질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또한 정상적인 인성과 함께 완전한 신성도 갖추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사역을 하시는 기간에는 말씀을 선포하시거나 이적을 나타내신 것 모두 하나님 영의 지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신분으로 모든 진리를 선포하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시어 사람에게 진리와 길, 생명을 베풀어 주셨으며 천국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사역하신 것입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일까
또 일부 형제자매님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마태복음 3장 17절에 기록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다음 단락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라고 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 말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증거한 것이다. 단지 다른 관점으로 그 자신을 증거한 것이고, 하늘에서 영의 관점으로 그가 입은 육신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는 그가 입은 육신이지 하늘에 있는 그의 아들이 아니다. 너는 이해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의 영이 원래 하나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위아래로 분리된 것이 아니냐? 사실, 여전히 하나이다. 어쨌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증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하늘의 영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을 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어떻게 독생자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성육신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렸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단지 하늘과 땅에 있는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중에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사랑하는 아들’은
하나님께서 영의 관점에서 그분이 성육신하시어 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자신을 위해 증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만약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직접 증거하셨다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막 접했고 성육신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인자가 바로 하나님 영의 화신이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임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선포하고 역사를 하시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에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께서 현현하셨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고
엘리야이며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분량을 생각하시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잠시나마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생각과도 맞고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도 쉬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구속 사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칭하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으면 그들의 죄는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신 선택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분량과 무지함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살피시는 하나님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애쓰시는 마음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긴다면 그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한 사람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사역하신 몇 년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끝내신 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없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누가복음 8: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고린도후서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아들(휘오스)
υἱ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5207
관련 성경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 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局限)되는 서론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역(LXX)의 총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 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3:11;5:7;9:7;12:6;13:32;14:36,61;15:39).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 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야'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조).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 내용이 '케뤼그마'(*, '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6:28
구절 개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7:25
구절 개념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히브리서 10:4
구절 개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요한1서 5:6
구절 개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히브리서 9:14
구절 개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한1서 1:7
구절 개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출애굽기 12:13
구절 개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요한1서 2:2
구절 개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1서 5:8
구절 개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히브리서 12:24
구절 개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에베소서 2:13
구절 개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히브리서 10:19
구절 개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요한계시록 19:13
구절 개념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에베소서 1:7
구절 개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로새서 1:20
구절 개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요한복음 6:54
구절 개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히브리서 10:10
구절 개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요한복음 19:34
구절 개념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1서 3:5
구절 개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로마서 5:9
구절 개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레위기 17:11
구절 개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10:18
구절 개념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1. 죄를 깨끗이 씻는 피(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2. 성소에 담대하기 들어가는 피(히브리서 10:19) 영원한 속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3. 피는 하나님의 말씀(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스가랴 13:1-2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 피의 샘이 터져야 한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히브리서 9:22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to make her holy,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he saved us, not because of righteous things we had done, but because of his mercy. He saved us 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야고보서 5:16
Therefore confess your sins to each other and pray for each other so that you may be healed. The prayer of a righteous man is powerful and effective.
갈라디아서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which is really no gospel at all.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and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But even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a gospel other than the one we preached to you, let him be eternally condemned!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예수님의 기도
1.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기도에 대한 여러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 전서 5:17)
"항상 기도하십시오"(로마서 12:12)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3)
"나는 밤, 낮 기도할 때마나 그대를 기억합니다."(디모데후서 1:3)
기도는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도는 전체 생명입니다.
기도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숨 쉬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매 순간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등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시간을 요구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기도하는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는
이러한 질문들은 잘못된 이분법에서 기인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하느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모든 행동과 몸짓, 미소조차도
찬송가나 찬양 또는 봉헌과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다음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린도 전서 10:31)
더 깊은 영적 생활에 들어가고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 정교회의 전통은 심장의 기도라고도 불리는
예수 기도를 전해줍니다.
예수 기도는 우리의 내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함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가장 잘 쓰이는 예수기도의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이 기도는 단순 명료함 안에 성경에 근원을 두고 성령에 의해 인도된 새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기도는 성령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린도 전서 12:3)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예수기도의 성서적 근원
성경은 예수기도의 구체적 형식과 신학적 바탕을 제공합니다.
예수기도는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성서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기도의 간단명료함(마태복음 6:8)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 처럼 쓸데없는 말을 되풀이 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이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성서에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은 그의 이름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열성적으로 부르며 호소하면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지막
이름입니다.
예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고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라고 쓰여 있습니다.(빌립보서 2:9-10)
이 이름으로 마귀는 쫓겨나가고 (루가 10:17),
기도가 응답 받고(요한 14:13-14),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습니다(사도행전 3:6-7).
예수님의 이름은 그치지 않는 영적인 힘입니다.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리고 근처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38),
나병환자 열 사람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크게 소리쳤고(루가
17:13),
세리는 "오, 하느님! 죄 많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루가 18:14).
죄를 인식하게 한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방황하는 것을 알게하는 영적인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예수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이 절대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요한일서 1:8).
3. 예수기도의 삼단계
기도는 살아있는 현실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므로 어떠한 분석이나 분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기도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성숙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넓고 일반적인 안내를 위해서, 19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은둔자 훼오판은 기도를 수행하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을 지었습니다.
말로하는 기도 또는 입술의 기도. 간단한 암송의 단계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러한 기도의 단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외적이고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과 심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혼란 없이 기도하는 단계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혼란없이 기도하게 되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훼오판은 "마음이 말에 집중되어 있는" 기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심장의 기도가 되는 단계
이 상태에서는 기도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성령의 선물이고 탕아처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루가 15:11-32).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디아 4:6). 심장의 기도인 예수기도는 위의 성경말씀처럼 성령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4. 예수기도의 열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있는 왕국의 현존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무명 러시아 작가의 "순례자의 길(The Way of the Pilgrim)"는 예수기도가 두가지 구체적인 효과를 나타냄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순례자의 길의 작가는, "내가 마음속 깊이 기도할 때 내 주의의 모든 것이 기쁘고 경이롭게 보였다. 나무들, 풀들, 새들, 공기, 햇빛은 그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나는 내 방랑길을 출발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전처럼 걱정에 가득 차서 걷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나를 기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생각하면 모욕과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잊혀졌다"
5. 끝없는 성장
훼오판은 "기도에 있어서 성장은 끝이 없다 만약 이러한 성장이 멈추면, 그것은 삶이 멈추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마음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그 영광의 깊이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기도는 우리 모두가 떠나야 할 여정인 영적 오솔길의 길잡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