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난제해설(요한복음 20:17, 20:27-28)


성경난제해설(요한복음 20:17,  20:27-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 20:17)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행동 중에 하나다.
부활절 아침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셔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이 본문이 어려운 것은 그 후에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20:27).

왜 마리아에게는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으면서 한 주일 후에 도마에게는 그의 상처를 만져 보라고 요청까지 하셨는가?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로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였다고 하셨는데 왜 똑같은 형편에서 도마에게는 만지라고 하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1. 마리아는 예수님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2. 마리아는 시체를 만짐으로 의식적으로 더럽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3.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성찬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서 예수님을 붙잡았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제자들과 같이 최후만찬에 참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4.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의 옷을 무덤에 두시고 벗으신 상태였으므로 예수님을 만져서는 안 되었다.
5.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나타내지 못했다.
6. 원문 성경의 요한복음 20:17절이 고쳐졌거나 변경되었다.   
    만지지 말라(me haptou)가 아니라 두려워말라(meptoou)로 읽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저자가 아니면 그 앞에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씀을 요한복음 20:17절에서 오역하였다.
7.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곧 올라가시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지 말아야 한다.1)
      그 밖에 나를 예배하지 말라 혹은 믿음의 손으로만 나를 만질 수 있다는 등등으로 보기도 한다.2)

그러면 본문의 올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먼저 이 본문의 원문 번역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영역 성경으로는 흠정역(KJV)만이 우리말 성경처럼 "나를 만지지 말라"고 번역하였다.
그밖에 모든 영역 성경은 “나를 붙들지 말라, 붙잡지 말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헬라어 원문의 해석에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메 합토우(μέ ἃπτου)는 붙잡지 말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이미 시작된 행동을 금하는 말이다.3)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를 붙잡지 말라,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 내가 아직 승천할 싯점에 와 있지 않으니 나를 볼 기회가 더 있을 것이다.4)  
렌스키(Lenski)도 같은 의미로 해석하여 아직 승천 전이니 다시 나를 잃을 때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마리아가 이전(부활)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었던 교제를 원했다고 지적한다.
즉 마리아는 부활 전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런 잘못된 생각을 고치시기 위해 나를 붙잡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비슷한 해석이긴 하지만 핸드릭슨(Hendriksen)은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야 네가 나를 이렇게 꼭 붙잡으므로 나를 너와 같이 항상 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이제 너는 내가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나와 온전한 교제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본문을 만지지 말라 또 붙잡고 늘어지지도 말라는 말씀이기보다 보고 만지는 육신적인 교제에 집착하지 말고 참되고 복된 교제, 승천하신 후에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더 사모하란 뜻으로 보았다.5)  
이 해석은 결국 부활의 완성인 승천과 성령의 강림 때까지는 안전한 영적 교제가 제약적일 것임을 의미한다.6)

위의 두 해석이 다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 말씀을 전체 문맥에 연관시켜 해석해야 하며 같은 형편에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과도 연관시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20:28에 도마에게 내 상처에 손을 넣어 만져 보고 하셨는데 그때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다.
본문에서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으니 나를 붙잡지 말라는 말씀은 마리아에게 부활 전에 나를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네 선생(랍오니)이 아니라, 네 생명의 구주야, 나는 부활하였고 승천해야 한다.
그러니 그전에 선생으로, 그 교제로 그 생각과 이해로 나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붙잡지 말라는 대신에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뜻은 네가 세상에서 나를 알았듯이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나는 아직 하늘의 엄위를 되찾지 않았어, 두려워 말아라, 옛날처럼 내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것이라 한다.7)  
그러나 이 해석은 앞에 것만큼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다.

   주
   1. Robert Stein, Difficult Passages in the Gospels, Baker Book House, pp.110-111
   2. 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John's Gopspel(Augusburg Pub. Co., 1961), p.1360
   3. Ibid.,
   4. Leon Morris, John, p.840
   5. W. Hendrikse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Grand Rapids: Eerdmans, 1971), p.455
   6. J.H. Bernard, A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Vol. I
      (T. & T. Clark, 1953), p.670
   7.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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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지 말라는 말씀의 뜻

<문>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여기서 ‘붙들지’는 개역 성경에는 ‘만지지’로 번역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답>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마리아가 손을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은 다른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에 만지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것이 우리를 오해하게 한 점이 있다.
단순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면 예수님의 거룩한 부활체를 마리아의 부정한 손으로 터치하는 것을 금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 붙들지 말라고 번역한 것은 그런 면에서 더 좋은 번역이라 생각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였다.
그 의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전과 같이 늘 머물러 계시도록 붙들어 두겠다는 뜻이다.
부활 이전의 예수님은 마리아와(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실 수 있었지만, 부활 후에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예수님은 앞으로도 마리아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와 함께하시겠지만, 그 방법은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육체로 함께 하셨지만 이제 후로는, 제자들도 부활할 때까지는, 영으로만 함께 하시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의 뜻은 이제부터 함께 하시는 방법, 교제의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는 이전의 교제와는 달라졌다.
그것을 마리아가 모르고 이전처럼 붙들어 두고자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의도를 거절하시고, 이제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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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작가 루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바울선생이 말한 대로 만약 예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부활은 하나의 신앙고백적 사건으로 믿어지고 고백될 따름이지, 사진을 보여주는 등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래 지금도 논리와 이성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예수 부활사건은 큰 걸림돌이 되어 있습니다.
비신화화를 얘기하는 불트만같은 신학자는 이 부활사건을 제자들의 믿음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활은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벗어나는 사건이기에 부활의 실재에 관련한 의심과 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 사건의 현대적 조명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4개의 복음서는 각론에 들어가면 조금씩 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는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하고 어떤 복음서는 엠마오를 향해 내려갔던 두 제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몸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손을 대어 만져보라고 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가에 나타나셔서는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기도 하시어 배고픔을 느끼는 육신의 몸을 증명하여 주셨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방에 문을 열지 않고서도 들어오시는 신비의 영체를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자 마태는 부활 후 잠시 갈릴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제자의 사명을 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지만,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부활 이후 40일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이 서로 어긋난다는 이유로 부활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루쉰이 말한 희망의 정의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부모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듯이,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이는 부활의 사실성을 넘어서서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넘어선 영원을 사는 것이니까, 우리 믿는 우리들이 너도나도 이 땅에서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와 생명 그리고 정의실현이라는 하늘 진리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권력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암에 걸렸거나 직장에서 해고되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부활은 과연 있는 것이구나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 영성의 뿌리를 찾아

조선의 초기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의 모습만이 아니라, 소수이지만 내면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친 영성가들이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사람이 흔히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조선의 호세야 혹은 성 프란체스코에 비교되는 이세종 선생입니다.

이세종1880년 무등산 자락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동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형제 중 막내로 가난한 형님 댁에 얹혀살았습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인 그는 28세 되던 해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든 끝장을 보는 오기와 뚝심을 갖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고 구두쇠처럼 재산을 모아 드디어 머슴살이 10년 만에 마을에서 최고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뻐기고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도 모자란 것이 하나 있었으니 자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10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좋다는 것은 다 먹어보아도 효험이 없자 무당굿을 하기도 합니다.
자식을 얻고 싶으면 불당을 짓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고 하자 2층짜리 산당을 짓고 그 앞에 몸을 씻기 위한 연못까지 팠습니다.
거기서 하루 열두 상 차리는 제사를 지내며 정성을 다하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심히 앓아눕게 되어 사경을 헤매는데, 그때 지나가던 동네 미친 여자로부터 ‘예수를 믿어야 살지’ 하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성서를 하나 구해 놓고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가며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격이 얼마나 큰지 이런 얘기가 전해옵니다.

영성 : 청빈, 희생, 사랑의 길

이세종의 얼굴은 기쁨에 넘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가서 두 손을 쳐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고함을 지릅니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너무 흥분하여 춤을 추는 동안에 자신의 아랫도리가 벗겨진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산당을 짓고 하루 12번의 제사를 드린 공이 헛수고요,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 가는 청빈과 자기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세종은 불같은 성격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바로 실천에 옮겼는데, 그의 실천은 참으로 철저하였습니다.
그는 세리장 부자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 놓은 성서의 얘기를 읽자 이를 바로 실천에 옮깁니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에 먹을 것이 없어 땅을 판 가난한 농부의 논 오십 두락을 한꺼번에 사들이기도 했는데, 그 사람이 토지를 헐값에 빼앗기면서 얼마나 원통했겠느냐고 하며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외치신 희년 선언을 따라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리고 모조리 탕감해 줍니다.
심지어는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줍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 소문을 들은 이세종은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 달라고 사정합니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빈 공(空)이공(李空)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낙스(R. Knox 노라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밤에는 말씀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청년에게 성서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성서공부는 영해(靈解)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성교회 와는 달리 삶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의심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진리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의심나게 하는 것이 참 진리다.
진리에 대해 우리 마음에 의심이 나는 까닭은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오래 살고, 부귀하고, 자녀 많이 낳은 것을 축복과 영광이라 생각하는데, 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부모처자와 단란하게 사는 것조차 마다하면서 고생을 자처하고 종교진리를 따르니, 세상사람 눈으로 볼 때에 자기들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의심이 생기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독려하였습니다.

소문이 나자 멀리 광주에서 전도사, 선생, 목사들이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이 가운데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전도부인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 목사로는 최흥종, 그의 사위 강순명,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현동완 등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프란체스코

그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산중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거지 옷을 입고 다녔고, 한번은 광주의 교회 공식모임에 초청을 받아 가던 길이어 새 옷을 입고 가다가 길에서 걸인을 만나 그와 옷을 바꿔 입고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아버지가 반대하자 아버지와의 부자 인연을 끊고 작은 형제회를 통해 청빈의 삶을 살았던 성인 12세기의 이태리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소유나 청빈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가 선택한 맑은 가난을 말합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청빈과 무소유는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입니다.
사람은 풍요 속에서 삶의 풍성함과 생의 만족을 얻으리라고 생각하여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그 삶을 보면 사람들은 반대로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까하는 불안에 휩싸이고 그래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악착스러워지고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경쟁심에 불타오릅니다.
결국은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도가 떨어지고 자살률은 올라가고 사회 범죄는 더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물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 평화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를 비우는데 있습니다.
청빈, 맑은 가난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갖게 합니다.
악기는 속이 비어 있을 때 맑은 소리가 울려납니다.
우리 인간도 그 몸과 영혼이 비어 있을 때에 하늘의 맑은 평화의 소리가 울려납니다.

이세종님은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는데, 그것은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고,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서 먹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자연 사랑과 기독교 영성

그리고 그는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산천 초목과 금수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산길을 지나가면서도 풀잎을 쓰다듬어 주면서 다녔고, 길에 뻗어 나온 칡넝쿨을 누군가가 밟아 진액이 흐를 때에는 마치 사람의 피와 같다하여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발밑에 밟혀 죽어가는 개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빈대도 죽이지 않고 파리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내어 몰긴 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네팔에 갔을 때, 음식점 주인들이 창문에 붙어 있는 파리를 죽이지 않고 문을 열고는 살살 달래 밖으로 내보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안에 파리를 파리채를 들어 아무 생각없이 내리치는 사람과 살살 달래 집밖으로 내보내는 사람 이 둘 중 누가 참 사람에 가까운가요?

인간만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다 고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만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살아가도록 자리를 제공하는 자연 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산과 강은 무생물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낳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그동안 과학과 기술문명은 자연을 인간 욕망을 위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지구 변화는 그동안 우리가 겪어왔던 경험의 수치를 뛰어 오르고 있습니다.
천재지변의 급작스런 변화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조선의 호세야

그런데 예수를 믿어 참 기쁨을 누렸던 이세종에게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으니, 그건 아내와의 관계였습니다.
이세종은 30세 때에 14살짜리 시골처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이로 인해 예수를 만나게 되고 변화된 삶의 얘기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변화는 단순히 먹고 사는 일뿐만이 아니라, 부부생활까지 변화가 왔는데, 그는 아내와 한 방에 거처하면서 성생활을 하지 않고 남매처럼 지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이혼이 아닌 해혼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 길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일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참다 못한 아내는 남편을 떠나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갑니다.

물론 간디류영모 선생의 경우에는 아내들이 이를 받아들여 오누이처럼 살아갔지만, 이세종의 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세종은 깨끗한 신앙인이고 그의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에 눈을 뜬 20대 중반의 부인에게 금욕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의 말에 부부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내로 하여금 남의 부인이 되도록 한 것은 남편 이세종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세종 님이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것은 단지 성생활이라는 금욕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뜻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세종 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내 욕심을 채워주지 말라.
내 욕심과는 정반대되게 행하라.
부부간에도 욕심을 서로 채워주지 말라.
정반대로 하라.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일이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므로 생명과 육신의 괴로움이 없고, 영혼은 구원할 수 있다.
고기를 먹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고운 옷을 모르는 아이에게 고운 옷을 입혀 기르는 것은 그 아이의 영혼을 버리게 하는 일이다.”(엄두섭, 202쪽)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했던 이세종의 아내는 집을 나가 딴 남자에게 갑니다.
처음 아내가 몰래 집을 나가자 사람을 시켜 아내가 쓰던 세간을 옮겨다 주고, 아내 집에 심방을 가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그래 어떤 때는 아내로부터 물바가지 세례를 받기도 하고 구정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점에서 이세종님은 다른 남자를 쫓아 집을 나간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왔던 호세아 선지자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세월이 흐르자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 그 또한 50이 넘어 한글을 깨우치고 성서를 읽어 큰 은혜를 얻었습니다.
말년에 이세종이 깊은 산속에 숨어 들어가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거지꼴로 살았습니다.
이세종이 죽은 후에는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남편의 무덤을 삼년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습니다.
“나는 세상에 와서 예수 잘 믿는 남편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감사했습니다.
77세 임종할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고 남편에게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하여 바로 누워 자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세종의 예수 사랑의 힘은 결국 고멜과 같은 아내를 완전히 변화시켜 또 하나의 성인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신앙 영성의 완성

이세종 님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라는 바울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산 것이 내게 붙어 있다.
그것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살 것이요, 하느님께서 내게서 당신의 선한 것을 도로 찾아 가시면 그때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으니 나의 육체도 살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것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서 맑은 것을 도로 찾아가심으로 그 남은 것은 썩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무를 불에 태워버리면 그 나무는 죽은 줄로 알지만 태운 재를 거둬 다른 나무에 거름으로 주면 그 비료 성분 덕택으로 잘 산다.
그런고로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해서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람들의 육체도 이와 같다.”(엄두섭, 203쪽)

그는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삼 개월을 곡기를 끊어 자기 몸을 비우고, 마지막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상여를 만들어 좁은 방에 놓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누워 말하기를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내가 옆에서 울자 누워 있던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고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조금 후에 죽었습니다.
1942년 2월 그의 나이 63세였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고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남았습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동광원을 세워 그 정신을 계속 이어 개신교 영성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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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 단독으로 목격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공관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함께 부활을 목격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처음 봤으니 본인에게도 영광이고, 교회사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막달라 마리아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무시된 인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서 향유를 부은 여인이다, 거지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다, 그리고 이전에 간음하다 잡혀 온 죄지은 여인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읽어만 봐도 이 셋 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한 첫 구절은 누가복음 8장 초반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옆에서 항상 동행하며 섬긴 여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의 한 명입니다.

누가복음 8:2-3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성경 기록으로 보아 대략 대여섯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지근거리에서 도운 것입니다.

여인들이 자신의 가정도 놔두고 여자 혼자 단독으로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신분이 과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교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만큼 예수님의 제자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뒤에서 생계를 보조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비단 가사 일만 했겠습니까?
이들도 제자들만큼 예수님 옆에서 가까이 지내며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쩌면 제자들 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며 섬긴 여인 중 가장 유력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름에서 보아 대단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막달라라는 말의 뜻은 아람어독수리라는 뜻도 있고, 그리고 큰 성벽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막달라는 위대하다는 의미가 있어서, the great maria, 위대한 마리아라고 불리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외경에서 마리아 복음서가 있을 정도로 초대 교회에 큰 영향력이 있었고, 다른 외경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외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특히 베드로와 갈등 관계로 자주 그려집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왜 우리에게는 말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사적으로 이야기하셨느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은 생명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막달라 마리아를 우리로부터 떠나보내도록 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분명히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부터,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이후 초대 교회가 세워질 당시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인류 역사에서 여성 폄하로 인해 저평가되고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제도화되자, 교회는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교회 여성 지도자들을 지웠습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위주로 쓰인 기독교 역사 잊힌 신앙의 위인입니다.

빈 무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유월절 안식일이 끝난 후 새벽 일찍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아리마대 사람이 소유한 동굴 무덤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굴을 막고 있었던 큰 바위가 움직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막달라 마리아는 다급한 마음으로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고, 그 길로 바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 명의 제자와 베드로가 달려갔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자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 요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저자 자신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요한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입니다.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굽혀서 동굴 안을 살펴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도착했는데, 베드로는 저돌적인 성격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확인을 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매었던 수건이 잘 정리되어 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하다가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그냥 내려가 버렸습니다. 이걸 보면 제자들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돌아가신 선생님의 무덤이 훼손되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설령 슬픔이 올라오지는 않더라도, 우리 예법이라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이 자신들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제자들이 내려가고 난 뒤 그제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제자들도 영문을 모른 채 아무런 대책 없이 내려간 것을 보고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혼자 남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울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궁금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제자들과 달리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무엇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 중 하나가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이에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마리아는 다시 뒤로 돌아섰는데, 그 사이에 누가 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동산지기가 찾아온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 역시 마리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옮긴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리아야 하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본능적으로 “라브니!”, 즉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에 몸에 다 손을 데려고 팔을 내밀었던 것 같은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 장면에서 먼저 생각해 볼 부분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과 달리 무덤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천사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결국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태도 중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기도를 할 때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말한다면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머물러 있을 때에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시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지 그것이 지닌 장점과 매력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매력뿐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었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이라는 분이 계시죠.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정서적인 즐거움만이 아니라 몰입을 통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라고 조언합니다.
사람이 단순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면, 즐거움은 일시적인 행복만을 줍니다.
사람은 실증을 잘 내기 때문에,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질리게 되고,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도 그 기간이 지속되면 힘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몰입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어떤 활동에 빠져든 동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몰입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향하는 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고자 일관적인 행위를 지속할 때 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몰입의 태도를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지요.
예수님의 무덤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자마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빈부덤의 장소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머물러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했는데, 반대로 이런 글귀가 있지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명언을 토대로 유홍준 교수가 구절을 좀 고쳐서, 문화유산을 보는 자세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머물러 있었고, 그리고 머물러 있으면서 오래 보았기에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까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도 보았고, 무엇보다 죽음과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사랑하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마리아는 즉각적으로 ‘라보니’로 대답한 장면은 전형적인 사랑하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와도 같습니다.
생이별 뒤에 극적으로 만나는 연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지요.
그런데 음성을 듣자 예수님인 것을 알아챘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바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양인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있었던 사건에서 요한 자신이 등장한 부분에서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 또는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어느 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만이 아니라 마리아도 그중 한 명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손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게 손대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원어로 하면, ‘메 무 하프투(Μή μου ἅπτου)’라는 말이에요.
하프투(ἅπτου)’는 만지다, 접촉하다는 뜻인데, 매달리다, 집착하다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말아라, 손대지 말라고 번역도 되지만, 나에게 집착하지 말아라 라는 번역해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마리아야 나를 집착하지 말아라, 집착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집착해서는 결코 네가 간절히 만지고 싶은 나의 몸은 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보는 것은 허락되지만 몸을 만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복음서의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예수님이 잡히시기 며칠 전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이 여인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기준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여자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나 향유 부은 여인 모두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근접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한하고 변화하는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 향유 부은 여인이 예수님께 쏟아부은 것이 기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고자 한 행동이 자신의 전부라 여겨진 기름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기름은 딱딱하게 굳어진 고체와 다르고, 그리고 점액성이 전혀 없는 물과도 구분됩니다.
만약 물을 쏟아부었다면 그냥 다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고체는 딱딱해서 무한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담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름은 점액성이 있어서 유연성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 표면에 달라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부은 행동은 무한 중 무한, 도저히 우리의 이성과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고자 한 것은 향유 기름이 아니라 고체로서 붙들고자 한 것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딱딱히 굳어진 고체의 형태로 예수님을 포착하려고 한다면, 물론 일시적으로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으나,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변화하시는 역동을 담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으려고 한 것은 육신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있어도, 결코 부활하신 영과 육의 통합적인 존재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우리 인간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영과 육을 동시에 가진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예수님에게만 국한시켜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요한복음에서도 깊이 고민을 한 듯합니다.
우리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믿기가 힘든 것과 달리, 반대로 예수님의 경우는 부활하신 그 몸이 육체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주목하는 사건이 있지요.
바로 도마의 경우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거 하자 도마는 내 눈으로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있었던 문이 잠겨 있는 방 안으로 예수님이 갑자기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직접 예수님 몸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몸을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는 증언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사실 더 큰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도마에게 오실 때를 보면, 집에 문이 꽁꽁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벽을 통과한 건지 하늘에서 내려온 건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육체의 몸이 있다면 어떻게 벽을 뚫고 들어가냐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참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붙잡기 위해서는 몸을 만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몸을 만져서 도마가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도마는 사실 제대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만진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만지는 것으로는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을 만지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이 진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따라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내게 손대지 말아라, 집착하지 말아라는 말씀이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방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내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줘라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중요한 까닭은 앞서 초기 교회에서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갈등이 있었다고 했지요.
이것은 마리아에게 먼저 베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화해하고 사랑할 때에야, 그러면 너희가 부활한 나의 몸을 육체로서 만질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진실로 사랑하는 방법을 마리아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앞서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이 오래 동안 머무르며 바라보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상을 사랑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바라보게 되면 결국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게 되어서 그 대상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소유하고자 손으로 만져 버리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참된 실재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 결국에는 사랑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소유가 아니라 참되게 사랑하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가 잘 알듯이, 마지막 가장 강조했던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에야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본 것입니다.
사실 사랑과 부활의 관계는 신약에서 불쑥 등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나타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부활을 생각했을 때 떠올렸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에 더운 낮 정오에 지나가는 나그네 세 명을 대접한 사건입니다.
그 행인 중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신 다음,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시는데, 아브라함의 오랜 염원인 사라의 태에서 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이삭이야 말로, 아브라함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인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나와 이해관계가 하나 없는 내게 유익을 줄 수 없는 이웃을 환대할 때, 경험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구약 토라의 핵심이지요.
신명기 6장 5절에서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이지요?
토라 전체는 그것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만큼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나의 이웃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가르치고 그리고 실천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 소망 사랑 중 으뜸이 사랑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뭔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더라도,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사랑은 뭔가를 바라거나 기대해서가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그냥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었던 것처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활은 그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사건으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

삶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고 이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납득되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 드렸습니다.
그러니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냥 바라보는 겁니다.
보면서 또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시간을 드려서 머물러 있으면서 그냥 바라보고 계세요. 그러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 고통의 이유들이 보이고요. 또한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의외의 모습, 나름의 매력과 장점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게 빨리 보이지 않아요. 감정 기분에 휩싸여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다 가라앉고 사라진 다음, 모든 편견이 없어지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보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지요. 나에게 손을 대지 말고, 형제들에게로 가라. 집착하지 말고, 사랑해라. 바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막달라 마리아가 행할 때, 육체로나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온전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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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부터의 질문 /

부활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는 자신을 만져 보라고 권하셨으면서 그보다 얼마 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막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부 오래된 성서 번역판을 보면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개역 한글판」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

“만지다”로 번역되는 원래의 그리스어 동사는 또한 “매달리다, 붙들다, 붙잡다, 움켜 잡다, 다루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합리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가 단지 자신을 만지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무덤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그분의 발을 잡”는 것을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신세계역 성경」, 「신 예루살렘 성서」, 「신 영어 성서」 등 현대어로 된 많은 번역판들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더는 나에게 매달리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함으로,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역개정판」과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도 그 말씀을 각각 “나를 붙들지 말라”와 ‘나를 붙잡지 말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친밀한 동료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누가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온 줄 알고 근심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주와 함께 있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에 예수를 꼭 붙잡고 가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직 떠나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키기 위해 마리아에게 그만 매달리고 그 대신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부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와 도마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그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면서 예수의 못 박힌 상처를 보고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기 전에는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8일 후에 예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상처를 만져 보라고 권하셨습니다(요 20:24-27)

따라서,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셨을 때는 그분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잘못된 열망에 대응하신 것인 반면에, 도마의 경우에는 의심을 품고 있던 사람을 도우신 것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께서 그렇게 행동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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