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 하나님의 위엄(威嚴) / 거룩한 두려움



삼위일체(三位一體)

- 석 삼, 자리 위, 한 일, 몸 체

창세기 1:1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즉,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키는 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앞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이제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또한 여기서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이와 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주의 할 것 두 가지

첫째, 역활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목사, 아버지, 남편
문제는 역할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동시에 교회와 집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바람직한 설명은 아니다.

둘째, 삼신론에 의한 설명

예를 들면 성부 하나님은 창조, 성자 하나님은 말씀, 성령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모습이므로 삼신이 될 수 밖에 없다.

터툴리안은 태양으로 설명하였다.
태양은 빛, 열, 태양으로 섦명할 때 다른 곳에서는 밤이 된다면 그곳에 태양은 없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땅에 계셨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으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위엄(威嚴) - 거룩한 두려움

위엄(威嚴) 
1. 의젓하고 엄숙함    
2.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엄성     
3. 거룩한 두려움

따라서 사람의 위엄은 불완전하며, 오직 참된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양한 히브리어 단어가 ‘위엄’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테러(terror)’로 번역하였습니다(출 23:27, 신 34:12, 욥 13:21, 사 2:21).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 NIV, ESV)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I will send my terror ahead of you and throw into confusion every nation you encounter. I will make all your enemies turn their backs and run.

위엄(367) 에이마(’êymâh) אֵימָה  

1. 공포.  2. 신명기 32:25.
발음 [ ’êymâh ]
어원 / 366과 동형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여성 공포[그 원인에 대한 소유격이 수반됨], 신 32:25.



신명기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Great terror: NIV, NASB, KJV)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욥기 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Your terror: NIV)으로 나를 두렵게(terrify: NASB, ESV) 마옵실 것이니이다.

이사야 2: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terrify: ESV; terribly: KJV) 그의 위엄(the terror of LORD: ESV, NASB)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뉴스에 보도되는 테러 사건을 들을 때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람의 테러는 막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테러로 역사하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엄(테러)이 역사하시면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먼저 하나님의 위엄 앞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역사합니다.
대적 원수들에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떨림이 임하며(시 48:6), 마음에 병이 될 정도의 큰 걱정거리와 낙담이 생깁니다(출 15:15).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하나님의 위엄을 피할 수 없으며(시 76:12),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대적들의 기운이 빠지고 몸이 돌과 같이 굳어집니다(출 15:16, 삼상 25:37).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 까무러칩니다(수 2:11, 5:1, 사 13:7).

하나님의 위엄이 역사하시면 오늘부터 천하 만민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그 앞을 대적하지 못하고 얼씬도 못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종말 때에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바벨론이 아무리 무섭게 성도를 대적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셔서 강한 대적들이 죽음 앞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출 23:27, 신 28:10, 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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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엄이 앞서가면 능히 당할 자 없다

출애굽기  23:20-28, 로마서 11:22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威嚴)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로마서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출애굽기 23:27에 ‘하나님의 위엄’이 나옵니다.
‘위엄’,위엄 위(威), 엄할 엄(嚴)입니다.
위태로울 위(危), 험할 험(險)이 아닙니다.
뜻은 ‘의젓하고 엄숙함’,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성’,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위엄의 속성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류의 시조 아담, 하와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흘러 내려오는 역사(歷史)는 만세(萬歲) 전에 택하신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최후의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적 경륜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죄악 된 인간에게 말씀을 줘서 깨닫고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첫째 소원입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 18:14).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가셨죠.
키 작은 세무서장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듣지도 않으셨는데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留)하여야 되겠다.”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악질 매국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내가 남한테 토색(討索)한 것, 돈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하셨죠(눅 19:1-10).

본문에 위엄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벌써 삭개오에게 가서 역사(役事)한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창조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입니다.
세계사는 구속사예요.
그냥 제멋대로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여러분을 향해 벌써 하나님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어떤 죄인에게도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의 뜻이‘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많은 사람들한테 대접받으러 온 게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고 대속물(代贖物)로 내 몸을 바치러 왔다.”하셨죠(마 20:28, 막 10:45).
수천 년의 역사가 한강 물같이 도도히,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흐름입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요 3:16).
하나님이 역사의 근원이며, 모든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대상 29:11,12, 욥 12:23, 시 103:19, 엡 1:11).
따라서 구속사는 세계사, 즉 일반 역사의 중심핵을 이끌고 있습니다.

‘구속(救贖)’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걸머지고 죄를 사해 주고 구원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구속사의 최고 절정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십자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 그리고 위엄이 한강 물 같이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누구든지 텀벙 빠져서 목욕하면 십자가 피로 죄를 씻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이면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위엄이 그 백성과 함께하시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말씀으로 승리하고, 세상 죄와 상관없이 천국에 입성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다

참된 위엄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승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5:24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역대상 16:27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위엄’이 영어로 어떻게 돼 있는지 영어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테러’(terror)입니다.
테러, 얼마나 무섭습니까.
‘테러’는 국어사전에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는 행위. 테러리즘(terrorism)의 준말’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위엄’이 영어로 바로 ‘terror’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악한 세상, 당신의 테러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테러해도 겁나잖아요?
때려 부수고 쥐어패고 팔을 비틀고 몽둥이로 패보세요.
보는 사람이 얼마나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합니까. 마지막 심판할 때 하나님의 테러!
이 성경 구절들을 찾아 봤습니다.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My terror)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신명기 34:12에는 ‘엄청난 테러’(all the great terror, 모든 큰 위엄), 보통 테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테러는 누구도 말리지 못해요.
엄청난 테러!
욥기 13:21에는 주의 테러(your terrors),
이사야서 2:21 볼 때 하나님의 테러(the terror of the LORD)!

그러므로 하나님이 악의 세력한테 테러하실 때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는 지켜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고 또 병풍같이 둘러 진쳐 준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세상에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위엄, 즉 테러가 역사하시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죽음에 가까운 공포가 임합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위엄이 역사하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과 떨림이 임합니다. 남자들은 모르죠. 옛날에는 여인들이 아이를 낳으러 들어갈 때 마루 밑에 있는 신발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 신발을 다시 신을 수가 있을까.’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 혹은 떨림! 또, 마음의 병이 될 정도로 큰 걱정거리, 근심, 낙담이 임합니다.

출애굽기 15: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아무리 권세가 높은 자도 사기가 완전히 꺾여 마음이 돌같이 됩니다.

시편 76:12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기운이 빠지고 몸이 돌같이 굳어집니다.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사무엘상 25: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겁에 질려 기절하거나 놀라서 까무러칩니다. 맥이 팍 풀려 일어날 힘도 없고 뭐 할 생각도 못 합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 멀끔히 먼 산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수 2:11,5:1, 사 13:7).

여호수아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신 2:25)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을 위해서 많은 사람을 떨리고 두려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감히 얼씬도 못 하고, 침범도 못 합니다. 꼭 믿으세요. 신명기 28:10에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3:26에는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하셨습니다.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주검이 될 수밖에 없죠. 성령의 역사, 마지막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대적들과 싸울 때, 대적들은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 공포, 고통에 사로잡히고 간담이 서늘해져 벌벌 떱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앞서 보내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출 23:27).

위엄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성취하려면

하나님께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입니다. 길 갈 때도, 어디 갈 때도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친근히! 그러면 반드시 위엄의 역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근히 하는 자, 히브리어 말로 ‘다바크’, 즉 ‘바싹 달라붙는 자’를 대신해서 싸우십니다. 하나님께 바싹 달라붙으면 고통, 근심, 걱정,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을 대신 다 해결해 주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성경도 믿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믿어야죠.

여호수아 23:8-10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여러분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대신 싸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할 때 ‘내가 가서 혼내주겠다.’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벌써 가셔서 위엄으로 그 마음을 돌같이, 사지(四肢) 백체(百體)가 힘이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북한 김정은이 핵폭탄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위엄을 먼저 보내면 그까짓 것 다 먼지입니다. 쓰레기통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신명기 11:22-23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여기서 부종은 ‘붙을 부(附)’, ‘따를 종(從)’입니다. 히브리 원어나 국어사전에 ‘바싹 따라붙어서 따른다.’고 돼 있죠. 부종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에 세 번, 유월절과 맥추감사절,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몇천 리, 몇백 리를 걸어서 예루살렘에 다 가야 해요. 집에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걱정이 되죠. 그래서 ‘작년에 내가 갔다 왔으니, 올해는 당신만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위엄이 너희 집에 있겠으니 다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돌아올 때까지 그 집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약속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 하리라

자물쇠 잠글 필요도 없습니다. 문 다 열어놓아도 괜찮습니다. 얼씬도 못 하게 하십니다. 얼씬거렸다가는 온몸이 돌처럼 굳어져 죽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평생 예수님 믿으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위엄’을 보내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내 가정, 남편, 아내, 외국에 유학 간 자식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죠. 오늘 나와서 이 말씀 들으신 분들에게 자손만대에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리라.’(시 25:1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고, 예배드릴 때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내쫓을 때 보내신 세 가지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일곱 족속을 내쫓을 때 하나님이 세 가지를 보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보내셨습니다(출 23:20-28).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가 예비한 곳에 이르기까지 보호,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의심하거나 우습게 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이 사자에게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멸시, 천대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 대접하고 순종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내 원수의 원수가 되고, 내 대적의 대적이 됩니다. 믿는 우리 평강교회 성도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대적들이 아예 엿보지도 않고 건드릴 생각도 안 합니다. 모든 생활에 형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하나님,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세요.’ 기도했죠. 이제는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나안 여섯 족속, 아모리, 헷, 브리스, 가나안, 히위, 여부스를 다 때려 부순 것을 보세요(출 23:23).

두 번째, 하나님의 위엄을 이스라엘 앞서 보내셨습니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출 23:27)를 ‘현대인의 성경’에는 ‘너희가 만나는 백성들을 내가 두려움과 혼란 가운데 빠뜨려 너희를 등지고 달아나게 할 것이며’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를 보지도 못한 채 소문만 듣고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이런 축복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위엄을 기도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기도하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아마 바쁘실 것입니다. 평강교회가 지금까지 ‘복을 주십사, 형통을 주십사, 악한 마귀에 시험 들지 않게 해 주십사’ 이런 기도만 했죠. 하나님의 위엄 속에 그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눈뜨자마자 ‘하나님의 위엄’, 길 가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버스 타고 가다 소매치기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있으면 절대 사고 나지 않고, 도둑맞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늘 감사, 찬송하고,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며 저절로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왕벌을 보내셨습니다(출 23:28, 신 7:20, 수 24:12).

신명기 7: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누가 ‘너 가만두지 않는다. 죽여 버리겠다.’ 하죠? 왕벌이 그 마음 먹은 사람을 먼저 죽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나 죽인다는데 나 죽이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엄이 늘 함께해 달라.’ 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을 지켜줄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강대한 가나안 족속과 큰 성읍들과 하늘에 닿을 듯한 성벽과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게 될지라도 오늘날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너희 앞에 가나안 족속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을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신 9:1-3) 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우리 보고 “몽둥이 준비해라. 뭐 준비해라.” 하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가나안 7족속을 쫓아낸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도 죄는 있습니다. 사악하고 거짓말도 하죠.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말씀을 받고 양심이 있어서 회개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회개하면 죄가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하지만, 가나안 백성보다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지은 것 들통날까 봐 벌벌 떨고 있죠. 가나안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에 죽이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두 군데 기록돼 있습니다. 결단코 이스라엘이 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디도서 3:5-8을 영원히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말씀입니다.

디도서 3:5-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4-5)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말씀을 내가 이루기 위해서 너희 죄를 용서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왕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면 내쫓아 주십니다. 북한이 핵폭탄을 월등하게 많이 갖고 있다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위엄이 가서 하루아침에 전부 날려버립니다. 제 말이 맞나 안 맞나 보세요.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 믿어야죠.

신명기 4:38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가나안 족속들은 잡힌 포로를 세워 놓고 껍질을 벗기는 악한 민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자마자 질리죠. 그러나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시 68:33-35) 하신 그 위엄이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위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속사에서 실제 성취된 위엄의 역사

출애굽 때 나타난 위엄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했습니다(출 15:14-16). 모세도 뒤늦게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내용은 ‘큰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렘 32:21).

예레미야 32:21 주께서 징조와 기사와 강한 손과 드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신명기 4:34에는 ‘그 힘이 크게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큰 공포적인 것들’입니다. 신명기 11:2에는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명기 26:8-9에는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그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출애굽 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으며’라고 하셨고, 신명기 34:11-12에는 ‘애굽에서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바다가 육지같이 순간적으로 말랐습니다. 몇 날 며칠이 걸린 것이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자마자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보송보송하게 물기가 하나도 없고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말랐습니다(신 4:34-36, 6:22-23, 7:19, 29:2-3, 34:11-12, 수 24:17).

가나안 땅 점령에 나타난 위엄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도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 초기 6년 중 가나안 왕 38명을 목 베서 죽였습니다. 가장 강했던 왕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입니다. 다른 가나안 왕들도 이들에게는 벌벌 떨었죠. ‘옥’의 뜻은 ‘긴 목을 가진’, ‘둥근 목’입니다. 르바임 족속으로, 신장이 9규빗, 4m 10cm였습니다. 그가 자는 쇠 침대의 폭이 2m 82cm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천둥, 벼락 치듯 무섭게 위협하니 모두가 복속해 60개 성을 다스렸습니다. 또 ‘시혼’은 ‘청소하다’라는 뜻입니다. 역시 악질적인 왕입니다. 오죽하면 시편 135 ,136편에 시혼에 대해 노래한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두 왕을 먼저 죽였습니다(수 12:1-6, 민 21:21, 35, 신 2:24-37, 신 3:1-11). 가나안 왕과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습니다(수 2:9-11).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때 이름과 족보를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세가 또 미디안 왕 5명, 에위, 레겜, 수르, 후르, 레바를 처참하게 죽였고(민 31:8), 여호수아는 정복한 31명의 왕을 백성들 보는 앞에서 죽였습니다(수 12:7-24). 이것이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남한에 대해 오만 욕설을 다 하고 있지만 큰일납니다. 대한민국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구속사를 가르치는 평강교회가 있습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라고 말씀드렸죠. 이제 기도 좀 바꾸세요. ‘우리 가정에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남편과 자식에게 은혜 주시고 축복 주시고 근심 없는 복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위엄의 역사’ 한 가지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 여러분.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수 5:1)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에 보내실 때, 위엄을 미리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알았죠. 여호와의 구원은 무기가 많고, 전략이 좋고, 사람이 많고, 이런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삼상 14:6). 이사야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셨죠. 그러면서 믿는 성도를 향해 “너희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대신 싸워 주겠다.” 하십니다(수 23:10). 너희는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라는 것입니다(출 14:14).

그러니까 오늘부터 마음 푹 놓고, 정말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어영부영하지 말고,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고, 교회 생활에 집중적으로 하세요. 무슨 일 해도 하나님 앞에 하는 것같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위엄이 여러분들 보호해 줄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믿는 성도 하나에게 위엄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 명이 천 명을 쫓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 명이 말하는데 상대에게는 천둥이 진동하는 것처럼 들립니다(수 23:10, 사 30:17).

이사야서 30:1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두 사람이 만 명을 쫓습니다(신 32:30). 만 명이면 1개 사단입니다. 그들이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다섯이 백을, 백이 만을 쫓죠(레 26:8). 하나님께서 없는 말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 나라 갈 때까지 기도할 때마다 잊지 말고 꼭 위엄의 역사를 기도하세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죠. 위엄이 나 대신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들게 됩니다. ‘나, 나, 나’하고 내가 주인 되어 기도하면 내 욕심만 부립니다.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의 앞에 쫓아내고 오늘날까지 너를 당할 자 없다.”(수 23:9) 하셨으니 악한 원수 마귀, 북한군 수천만 명이 온다 해도 평강교회 성도 하나를 당할 자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내 것이 되고, 믿지 못하면 남의 것이 됩니다.

기드온 300용사에게 나타난 위엄

기드온이 3만 2천 군대 가운데 2만 2천을 돌려보내고, 다시 만 명 가운데 9,700명을 돌려보내고 300명을 남겼습니다. 300명이 미디안 군 13만 5천명을 이겼습니다. 1인당 450명을 이긴 것입니다. ‘위엄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무섭고 강하던 미디안 군대인데, 무기는커녕 지팡이, 작대기도 없던 300명이 다 쳐부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는데 그것도 못 합니까. 위엄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정신이 다른데 왔다 갔다 하면 여러분이 아들, 딸 가족들의 고기를 먹게 됩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레 26:19, 신 28:53, 겔 5:10, 왕하 6:29, 애 4:10). 장로, 목사, 권사라도 그 앞날이 험악합니다. 믿음으로 말씀할 때 귀담아들어야죠. 절대로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사울 왕과 사무엘 시대에 임했던 여호와의 위엄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모든 백성이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일어나고, 여호와의 두려움과 위엄이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천둥이 진동하듯 한번 말씀하실 때 전 백성이 ‘한사람 같이’ 모였습니다. 슬슬 온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30만 명이 딱 모였습니다(삼상 11:7).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집합한 것입니다. 이튿날 사울이 이스라엘 자손 30만 명, 유다 사람 3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3대로 나누고 새벽에 진 쳐 암몬과 싸우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승리했습니다(삼상 11:11).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사람과는 싸워 봐야 다 지는 것입니다.

욥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엄

‘욥에게 엄습한 하나님의 두려움’입니다(욥 6:4, 7:14, 23:16). 주님께서 꿈으로 놀라게 하고, 이상으로 두렵게 하셨습니다. 불치병에 걸려도 위엄이 임하면 모든 병이 달아날 줄로 믿습니다.

바벨론 포로 1, 2, 3차 귀환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위엄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인 주전 537년, 고레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습니다(스 1:2-3). 주전 458년 2차 귀환에도 하나님의 위엄이 따랐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해야 할 텐데 오히려 본토 사람들이 ‘포로민들이 돌아온다.’며 두려워했습니다. ‘나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유대인이 되겠습니다.’ 하며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스 8:17). 하나님께서 먼저 위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BC 444년 3차 귀환도 아닥사스다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가 임하니 느헤미야가 왕에게 요청할 때 바로 이뤄졌습니다(느 2:1-10).

초대교회 부흥도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

사도들이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자,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살아가기만 하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믿지 않는 자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 위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백성들에게는 위엄을 보내어 공포에 떨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보니 대적을 두려워하고 있었죠.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자와 담대함을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20:3, 수 1:6, 7, 9, 수 8:1, 수 10:8, 수 11:6). 오늘 본문 로마서 11:22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두려워하는 마음, 비겁한 마음, 소심한 마음, 주저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 근심, 걱정하는 마음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떨리고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큰 여리고 성도 점령해 놓고, 조그만 아이 성을 치다가 36명이 전사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해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50세겔중(重)의 금덩어리 하나를 집에 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내와 자식들까지 데려다가 돌로 죽이라.”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하니 하나님의 노가 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사기 쳤다는 것입니다.

바스훌이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뒀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 ‘바스훌’은 ‘비옥하다’라는 뜻이었지만 하나님의 종을 때리고 오만 모략을 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저주 받은 이름 ‘마골밋사빕’으로 바꾸셨습니다(렘 20:1-6). 미골빗사빕은 ‘사방의 두려움, 공포’라는 뜻이죠. ‘사비브’(사빕)가 ‘주위’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로 사방에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고치지 못합니다. 밤낮으로 떨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하나님이 그 이름을 바꾸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사방의 환난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의 위엄의 능력이 함께해 주셔서 위로하셨습니다(고후 7:5-6).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성의 모든 남자를 죽여 복수했습니다. 주변 족속들이 죽이려고 쳐들어오려 할 때(창 34:25-30) 하나님께서 위엄을 보내셔서 야곱 가족들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하신 뒤, 사면(四面) 고을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잡으러 가자고 하다가 하나님의 위엄이 임하니 잡으러 가겠다던 마음속에 겁이 생기고 맥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칼과 몽둥이를 다 내려놓았죠. 야곱의 가족들이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창 35:5). 하나님의 위엄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때도 북한이 핵폭탄 미처 쏘기도 전에 하나님의 위엄이 가셔서 다 망가뜨리십니다. 대한민국이 선제공격이고 뭐고 하지 않아도 세세 무궁토록 자유 대한민국,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신 애국가 가사와 같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아무리 열국, 강대국이 떠든다 해도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작은 교회와 성도를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하는 평강교회, 작은 교회죠. 그러나 우습게 봤다가는 큰일 납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편안하게 안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마음 놓고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 위엄이 평강교회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 나와도 이 교회는 하나님의 위엄이 지키고 있습니다.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보세요. 부모가 백번 걱정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한 번만 돌보시면 다 끝입니다. 걱정 없는 것입니다.

유다서 1:25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 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어떤 환난과 핍박으로 세계가 열두 번 뒤집어진다 해도 절대 하나님께서 안전 보장하시고, “내가 책임진다, 대신 싸운다.” 하신 말씀을 믿고 감사하고 늘 보람을 느끼고 사는 맛을 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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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09:37-50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믿음없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고,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크냐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더불어 주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이를 배제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모두 변화산에 함께 오른  세 제자와 산아래 있는 제자들은 모두 같은 상태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깨달음이 부족하고 헛된 변론과 야망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은 그들 뿐 아니라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속 위엄있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 37-43a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올때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신의 외아들을 제자들이 축귀하지 못한 것을 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고 패역함을 한탄하시고, 외아들을 불러 축귀하여 낫게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보내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랍니다. 

9:1-6에서 제자들은 축귀와 병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아 두루 많은 역사를 행하고 경험했습니다. 이에 헤롯왕도 놀랐다는 소문도 들었고, 오병이어 사건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어쩌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라면 장차 이뤄질 나라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높여질 것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잘못된 메시아 상에 대한 기대를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수난에 대한 예고과 십자가의 길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변화산에 다녀오신 이후 마침내 제자들의 상태가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전에 행하던 축귀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제자들이 그 능력과 귄위를 받았음에도 축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제자들의 상태와 태도에 있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제자들이 기대하고 고백한 그리스도는 결국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메시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고난받은 종으로서의 메시아 상으로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언급하시고 설명하시지만 다른 역사들은 수용하면서도 이 말씀만은 뒷등으로 듣고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들만 고수하게 됩니다. 축귀의 능력이 자신들이 아닌 예수님께 있음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번의 경험들이 오히려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는냥 착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패역한 세대라 함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도 볼 수 있고,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그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귀신을 향한 분노를 비롯하여 진정으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책망받던 모습입니다(예 신 32:5, 20; 눅 7:31; 11:29-32, 49-50; 17:25).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태로 인해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단하시고 온전한 믿음과 긍휼 곧 하나님의 위엄으로 아이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축귀하여 아버지에게 돌려보냅니다(사회적 관계의 회복까지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행하심). 예수님의 신실하신 믿음과 긍휼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고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연륜이 많다 하더라도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언제고 우리 삶에 질서와 관계들을 파괴되고 흐트려집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오는 충격에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주님에 대한 바른 앎에 기초한 믿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을 통해 온전히 알고 얻는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뜻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믿음이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고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무리 믿음의 관심과 방향과 목적과 내용에 대한 상태를 계속 점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의 믿음을 비춰봅니다. 믿음 없고 패역한 제자의 모습을 보거든 주님의 위엄을 의지하여 고쳐지고 회복되길 원합니다. 

# 43b-45절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며 경이로운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다시한번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귀담아 들을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위엄을 통한 역사가 일어날 때 바라보고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것이고, 그런 일을 행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기만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오해의 여지를 바로잡아 주시려 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알아야 하고 당면한 문제는 주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고난받는 메시아의 길을 가기 위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팔려 가실 때 자신들이 어느 편에 서 있어야 할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더불어 제자들이 묻기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교정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신앙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선한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을 따라 세워진 목적과 뜻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말씀앞에 서고 예배하고 주님을 대면하더라도 우리가 보고싶은 부분만 우상처럼 만들어 신앙하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매일 묻고 또 그 말씀이 그런가 하고 상고해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계속 점검해야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반듯한 길을 가더라도 수시로 전후좌우를 살피고 계기판의 속도와 오일의 양과 엔진의 온도와 실내의 공기와 상태들을 점검하고 졸음이 오는지, 동승자들은 편안한지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부지런히 살펴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이와 마차가지로 우리 신앙의 여정도 부지런히 살피고 묻고 돌아보며 점검하면서 고치고 교정하고 붙잡고 그렇게 가야 합니다. 이를 회피하고 두려워한다면 금새 우리는 곁길로 새거나 엉뚱한 길로 빠져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이 있고 살아 있다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이 여정에는 길 가, 가시밭, 돌짝밭같은 많은 유혹과 미혹과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행하기 위해 길되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야만 합니다. 그러니 회피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더라도 묻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고치고 교정하고 온전케 됨을 믿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46-48절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큰 자이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주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제자들이 변론하는 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하나 데려다 자기 곁에 세우시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고,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결국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하는 상황인데 아직 제자들은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함을 넘어서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급기야 노상에서 헛된 권력욕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워질 메시아 왕국에서 모두 어떤 자리에 앉게 될지에 대한 것을 염두하고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변론을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당대 가장 작은 자로 여겨지던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면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개념을 바꿔주시는 교훈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어린아이 곧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대 받는 이들을 향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이들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을 향한 믿음의 상태를 재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향한 섬김과 겸손 그리고 자기 부인의 길이 주님이 찾고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는 것은 당대 문화적 배경에서 같이 밥을 먹고 함께하는 이들이 누구냐에 따라 명예와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이 결국 하나님의 위엄을 가졌고, 그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낮은 그가 가장 큰 자라 하신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우회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연약한 이들에 대한 태도가 사람과 사회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러한 이들이 차별과 천대 받지 않고 살게 하는 나라입니다. 결국 그 나라에 합당한 우리 삶의 모습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자들에 대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자고하고, 더 많이 가져 부유해 지려하고, 더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고,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서 차별하려하고, 그것을 이룬 이들을 시기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자족하지 못하는 것들 모두 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주님을 믿어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분명 오늘 교회가 지향하는 나라와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주님이 그토록 경계한 맘몬과 이기와 힘과 폭력이 주인되는 그런 나라를 지향하면서 겉만 번지르하게 거룩을 운운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혼돈속에 있진 않은지요? 탐욕으로 점철된 나라를 천국이라는 상품으로 포장하고 온갖 상술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말을 설교라 하고, 복을 하나님이 아니라 번영과 성공이라고 가르치며 헌신과 헌금 갈취하면서 팔고 있는 종교 장사꾼은 아닌지요? 그런 속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만큼 서 있으며 그런 이들과 얼마나 다른지 아님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앞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오늘 주변의 비난 받는 기독교 한켠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주여….

# 49-50절 예수님은 사람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고 금했다고 요한이 예수님께 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고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있어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로 앞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 제자의 모습과 상반되고,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제자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하시려 오셔서 차별과 배제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다 모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이름을 따라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같은 소속이 아니라고, 사람이 만든 통제와 규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금하게하고 배제하는 것은 제자들이 잘못된 특권의식에 빠져서 결국 주님의 뜻과 의도와 권위를 거역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같은 주를 믿지만 섬김의 방식은 문화 세대 지역 민족 신분등의 차이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에 그런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다양한 도전들을 품어내되 진리를 훼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배제가 아니라 수용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융합해 내므로 진리를 더 굳게 세우고 더 넒고 깊고 온전하게 세워지며 다양한 이들을 살리는데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배타, 배제, 차별등은 진리를 품고 따르는 이들이 그 진리의 크고 높고 위대함의 권위를 스스로 부인하고 옹졸하고 부족한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일신학을 가진 진리의 신앙을 사는 우리는 더 넓고 더 깊고 더 온전함으로 모든 것을 넉넉하게 품으면서도 스스로 변질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을 변화과 성숙으로 세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_ 김용규_9쪽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중략)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과 같은 전근대적·신본주의 가치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인본주의 가치들, 그리고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서 같은 탈근대적·개인적 가치들까지 우리가 시대를 따라 추구했던 가치들을 모두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는 겁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



창세기 1:1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3

요한복음 14:16-17

요한일서 5:7-8|

마태복음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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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요 16:12-15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찬송 가운데 특이한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삼위일체를 주제로 찬송가를 만들어서 보급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 청년들 장년 그리고 노년들에게 그 찬송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요? 삼위일체가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삼위일체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삼위일체 영문법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영문법책에까지 삼위일체를 붙인 이유는 삼위일체는 공부법에서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역사에서 삼위일체는 힘든 역사의 기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은 많이 죽어갔습니다. 니케아회의에서 325년에 삼위일체 교리를 1차로 확정하면서 교리논쟁을 끝냈으며 451년경 칼케돈 회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보충 확정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삼위일체교리는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숫자가 셋이면 셋이고 하나면 하나인데 오늘 삼위일체는 셋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몇 분인가요? 한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님 성령 하나님 셋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삼신론에 빠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고 아들과 성령은 피조물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단에 빠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단으로 판정된 것이 양태론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시대 성자 예수님의 시대 성령 시대로 구분하는 양태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이단들은 거의 다 양태론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태론적 입장을 가지고 성령시대에 이어서 그들의 교주가 오늘날 재림주로 왔다는 것입니다. 처음 6개월 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교리교육을 시작했다가 교육이 끝날 즈음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교주 앞에서 재림주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 이단은 현대판 양태론에 빠진 이단입니다. 오늘날 이단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빗나갔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빗나갔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복잡하지만 아주 단순합니다. 한 가지만 알면 삼위일체 교리는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에 그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지 아니면 유사한 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높고 아들은 열등하다고 하면 이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하다고 주장하면 그래도 이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서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진리의 성령이 오면 아버지의 영광을 다 나타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서 보내실 성령은 누가 보내시는 것입니까? 아버지로부터 파송 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송 받는 자가 성령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가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외모는 다른 데 본질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외모에서가 아니라 질적인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질에서 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본질에서 일체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것이

정통교리




삼위가 무엇인가? 연극하는 배우들이 어떻게 하십니까? 배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을 persona라고 합니다. 영어로 pers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격이라고도 하고 가면이라고 하고 위격이라고 합니다. 한 집에 산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서 하나이지만 그 각자는 서로 다릅니다. 하는 일에 있어서 다릅니다. 아버지는 창조사역을 하는 조물주이십니다. 아들은 누구냐? 자신의 몸에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구속자이십니다. 이 일을 아들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가 세상에 깨닫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갈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가 죄에서 깨닫도록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방황할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를 뉘우치게 하고 말씀을 깨닫도록 하시는 일을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정가운데서 선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은 중보기도를 많이 할 때에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중보기도자의 덕분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을 듣고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교회와 하나님을 전혀 몰랐지만 누군가의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6장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장래까지 다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절대 신뢰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두 살짜리 딸을 둔 어느 부부가 장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이 시장을 간 사이에 그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그 사이에 무엇인가 요리를 준비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아이를 갓방으로 데리고 가서 장남감을 손에 쥐어 주고 자장가를 부르면서 잠재우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그 다음에 부엌으로 와서 오븐을 켜고 완두콩을 얹었습니다, 그 요리에 꼭 들어가야 할 양파가 생각이 나서 그것을 가지고 음식창고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자지러지면서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달려와 보니 두 살 배기 아이가 오븐에 손을 얹었던 것입니다. 그 남편이 아이를 급히 끌어안고 즉시 병원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가는 사이에 아내와 장모에게 전화를 넣고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아이의 손을 소독가제로 닦고 그리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는 사이에 두 살 배기 아이가 눈을 꼭 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감는 일이 거의 끝나가자 아이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아내가 발견합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가 얼굴에 기쁨이 넘쳐서 “엄마, 할머니, 아빠, 엄마, 할머니, 아빠....”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붕대 감는 일이 끝났고 엄마가 있고 할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아이는 걱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이가 절대 신뢰하는 엄마 할머니 아빠 곁에서 사고로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이겨내고 기쁨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성부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면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삼위일체 하나님 (요 16:12-15 찬송가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할 때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긴 논쟁으로 이어졌던 주제를 말하라고 하면 누구나 다 삼위일체 논쟁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논쟁에서 정통교리로 인정받은 사람도 수차례 투옥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아리우스와 논쟁에서 승리로 이끌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이 본질상 동등한지 아닌지입니다. 동일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우시우스”와 유사본질에 해당하는 “호모이우스”라는 라틴어 개념이 삼위일체 논쟁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본질이라는 것은 아들을 아버지보다 하등의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는 왜 목숨을 걸기까지 양보 없이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는가? 유일신 하나님을 조상대대로 믿어온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신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야만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내려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그 보혜사는 제자들 속으로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아닌 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보혜사의 가르침과 능력은 예수님의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아버지로부터 파송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 1보혜사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이후에 오신 성령은 제2 보혜사가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롬 5:1-5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우리는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들을 당연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있는 것과 건강하게 다니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중심으로 감사는 잃었던 건강을 되찾았을 때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은 특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다는 데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과 견고하고 완성된 교리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물려받은 삼위일체 교리는 많은 사람이 희생의 피를 흘린 위에서 다듬어져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에 아버지와 공동으로 파송한 성령께서 이 땅으로 왔습니다. 그 성령으로 우리가 믿음을 얻고 그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이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란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기뻐하고 소망 중에 인내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4절).”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 (시 8편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온 땅에서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것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의 모든 내용을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찬양구절로 괄호 쳐서 넣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9절).” 이것은 시인이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시인은 이 시의 내용의 전부를 다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의 프리즘으로 보려고 하는가?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창조의 신비일 것입니다. 하늘의 궁창과 달과 수많은 별들이 매달려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을 수 있는가? 그 능력의 비밀은 하나님의 손가락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구를 다 동원하여도 붙잡아 맬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지으시고 그리고 손가락의 능력으로 지으신 것들을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인간 또한 많은 창조물들 중에 하나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으로서 시인 역시 대적하는 원수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젖먹이 아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은 젖먹이에게 임하게 되지 젖먹이의 입으로도 대적들을 다 무찌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찮은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시므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4-6절).”

그렇다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만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수 있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권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성령을 받는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심을 믿고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지혜이신 하나님 (잠 8:1-4, 22-31,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잠언서는 유대의 문화적 경계 너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애굽,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 주변나라의 경험적 문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오늘 8장은 기원전 (B.C.) 6세기 중반 경 바벨론 포로기 또는 그 이후에 수집 기록 책인 1-9장, 31장의 범위에 속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지혜가 여성명사로서 의인화된 인격체로 등장합니다. 이 지혜는 창조자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 창조물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백성들을 찾아와 소리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높은 곳이나 네거리에서 그리고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곳에서 지혜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왜 지혜가 자기 백성들을 이토록 간절하게 부르고 있는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밝게 하는 명철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부요케 하여 가난에서 허덕이지 않고 부요케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에 빠져서 부패와 멸망의 길로 걷지 않고 선과 복과 공의의 길에 걸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지혜를 만나는 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이 지혜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오늘 이 지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성명사형을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이 지혜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잠언서에는 그 지혜가 우리를 돌보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성령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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