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 예수


아버지의 이름 예수(요한복음 17:6-8)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석가모니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6세기경 현재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카필라바스투(가비라성, 지금의 네팔 틸라우라코트)를 중심으로 샤캬 공화국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캬 공화국은 일종의 혼합정체가 행해지고 있었다.
라자냐라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 일부였다.

공자(孔子,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孔夫子,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kənfjú:ʃəs] 콘푸키우스[*]),는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정치인 · 사상가 · 교육자이고[1],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였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석가모니는 예수님보다 600년 전, 500백년에서 600년 이전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성경과 불경에, 아주 흡사한 가르침이나 에피소드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학자들의 주장처럼, ‘늦게 태어난 예수님이, 일찍 가르침을 뿌리고 간, 석가모니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붓다는, 사십일 단식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사십일 금식과 마귀의 시험과 흡사하죠? 불경 상부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붓다는 열두 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에게 파견하였다.
열두 제자 파송하고 똑같아요. 아함경입니다.
붓다의 열성적인 제자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던 중, 붓다의 확신을 받고, 다시 끝까지 걸어갔다.
본생경 무쌍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붓다는 바위에 있는 한 개의 떡으로도, 오백 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
본생경에 나오는 말이죠.
붓다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잡보장경입니다.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진다.
소경이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
똑같죠? 무문자설경이예요.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했다.
본생경에 나오는데, 목자들이 저 천사들을 목격한 그 사건과 흡사해요.
니르바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비슷하죠?
무문자설경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불경의 기록들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불교학자들의 의하면, 예수님은 열세 살 때부터 서른 살까지!
그러니까 주님이 열두 살 때, 부모님과 성전에 올라가셔서, 랍비들과 토론하셨던 그 장면 있죠?
그 이후부터 공생애까지 예수님의 행적이 성경에는 전혀 기록이 안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불교학자들은 고 시점부터, 공생애 시작 때까지, 예수님이 티베트로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라고 주장을 해요.
‘인도로 간 예수!’ 뭐 이런 책도 있죠?
그래서 불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성경에 많이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불교의 가르침을 십칠 년간 받으시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 낸, 수많은 교주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예수님보다 오백 년을 먼저 살다 간 사람은 맞지만, 불경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성경의 기록이 완전히 끝난, 그 시점으로부터, 수백 년 후예요. 그때까지 그냥 구전으로만 전달되었습니다.
그 중 오래 되었다고 하는 법화경도, AD 393년에 기록이 된 거예요.

​반면에 성경은 BC 1500년경,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AD 95년경 사도요한의 책을 끝으로 완결이 돼요.
불경은, 모든 불교의 경전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이 완전히 끝난 뒤부터 기록이 된 거예요.
뿐만 아니라, 불교학자들이 예수님의 불교 영향설을 주장하는 건, 불교 자체의 모순을 가져오게 됩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얼마나 허술하고 보잘  없고, 수준 낮은 종교이기에, 십칠 년간 불교를 공부한 청년이, 불교와 정반대의 교리를 가진 타력 종교를 만들어냅니까?
불교는 자력종교예요.
스스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자력종교.
불교는 원래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처에게 뭔가를 빌어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 하는 오늘날의 불교는, 가짜 불교예요.
그런 불교는 없어요.
무속신앙에게 먹혀 버린 불교입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하면서 했다는 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이 잘 반영하고 있듯이,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 신은 없고, 나! 곧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내가 최고다!’가 불교의 핵심 교리인 거예요.

​십칠 년 동안이나 불경을 공부한 사람이, 유일신 종교를 만들어 냅니까?
그건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거 아니에요?
십칠 년간 공부를 하고, 완전 반대의 종교를 만들어 내다니요?

​불교는 윤회(輪回)를 믿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십칠 년간 불경을 공부하고 오셨다는 우리 예수님은, 양고기와 포도주를 아주 즐겨 드셨어요.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라고 나와 있죠?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열세 살부터 서른 살까지 인도에 가 계셨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언제 목수의 기술을 배우셔서, 목수라는 이름을 들으셨을까요?
목수라는 이름은, 하루 이틀 배워서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에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만 경험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혀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배워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로 생각할 뿐입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고난(苦難)의 바다,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을 통과하면서, 그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 낸, 인간을 위한 창작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종교가 이런 저런 물증을 갖다 대면서, ‘우리가 맞다! 우리가 우월하다!’하고 디밀면, 금방 흔들려 버리는 거예요. 왜냐면 그들의 종교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똑같거든요. 이름만 달리 부르는 거예요. 알라! 부처! 문선명! 예수! 그런데 그 종교를 통하여 얻어 내고자 하는 것은 똑같아요. 그러니까 다른 데에서, 뭔가 신빙성 있는 물증을 제시하면, 거기로 혹 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기독교가, 기독교에서 추구해야 할 바와, 기독교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신앙의 그런 짜릿한 어떤 경험을, 교회가 경험해 보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나오게 되면, 요리 흔들렸다 조리 흔들렸다, 내가 진짜 제대로 믿고 있는 건 맞는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 이 세상의 고난을 피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찾아와서, 당신을 계시(啓示)하시므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永生)을 살게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러한 영생이 과연 무엇이며, 그건 어떠한 상태이며, 영생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거예요. 가르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기독교는요!

그리고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왜 인간이, 지고의 복인 그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시고, 그렇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죄(罪)라는 소품을 사용하여, 창세기 1장부터 이제 설명을 해 가시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 죄를 해결하시고, 즉 어떻게 하나님이 그 불가능한 존재들을, 가능함 속으로 인도하시는지, 그걸 죄의 해결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는지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죄의 문제와, 하나님나라라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심이나 채우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든지, 다른 종교로 이사를 하거나, 교회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이라는 소품과, 무대장치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무엇을 위해, 어떠한 상태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배우고, 하나님나라로 입성을 하는, 그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예요. 절대 종교가 추구하는 그런 것을 얻어내는, 그런 무당잡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나라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나님나라에 가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종교와 똑같은 목적을 갖고 있으니까, 기독교가 그것들과 뭐가 달라요? 다를 게 없으니까,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언제든지 여길 떠날 수도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위해 기도하시는 대상 즉 제자들과 교회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나타냈습니다.
그들을 위해 내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단 말입니다.

​6절 안에 담겨있는 성도의 신분에 관한 마지막 고찰에 이르른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 즉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나타난, 말씀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보게 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는데, 모두에게 나타내신 게 아니라,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에게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어서, 이해시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냈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올바로 이해하고 가야 돼요.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잘 정의하고 있어야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이름은, 언제나 속성을 대변합니다.

예를 들어서, ‘야! 그는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해. 이름이 났어!’
그럴 때 거기에서 이름 안에는, 훌륭한 변호사로서의 속성이 들어가 있는 거죠.
‘그 사람은 가수로 이름을 날려!’ 거기에서 이름은, 노래를 잘하는 그 사람의 특징과 속성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름은, 어떤 존재의 성품과 능력과 기술과 이해심 등 모든 것을 대변하는 거예요.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한 뒤에, 그 존재가 여늬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일 처음 물은 게,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었어요?
이름을 알고 싶다는 건, ‘당신의 전 존재를, 내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인 거예요.
전 존재의 상징! 그것이 바로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기술과 이해심! 특징! 속성! 등등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님의 전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이름! 그것을, 예수가 나타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삶과 죽음과,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 존재를 드러냈다는 거예요.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의 모든 도움이다.’라고도 한 거고,
잠언 기자 또한, ‘여호와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달려가 피할 망대라!’라고 한 거예요.
무슨 이름에 가? 어떻게 갔다 피해요? 우리, 이름에 어떻게 숨어요? 그런 이름의 정의를 잘 알지 못하면, 그런 구절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거죠. ​

시편 124:7-8
7.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의 도움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만 우리의 도움이다.’
이 세상의 다른 힘 즉 돈, 명예, 지위, 어떤 관계, 인기, 이런 것들은 나의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18:10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고 합니다.
의인(義人)은 그곳으로만 달려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안전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즉 이름은 속성이며 성품이므로 여호와께로 피하면 여호와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체로, 우리의 도움이시며, 그 자체로, 우리가 피할 안전한 망대예요.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들에게, 그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냈더니,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했다는 거예요.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돈! 인기! 명예! 등이 자신들을 도와주며, 자신들의 안위를 책임져 줄 것이라고 착각을 하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에만, 우리의 도움과 안위가 있다는 사실을 안 성도들은, 그러한 것들을, 자신들의 도움과 안위의 방편으로 삼아 살지 않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된 성도는, 이 땅에서, 진정으로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타 다른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이 목적삼아 추구하는 그것들을 좇지 않고,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들을 보낸 이유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역사와 우주 속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의 본질이 뭔지를 알아, 그것에 착념하고 전념하고 집중하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사에 개입을 하시며, 왜 당신의 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온 아들은, 이 땅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다가 가셨는지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7:7-8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아버지께, 내가 아버지께로서 나온 줄을 안다는 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거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다는 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며, 하나님이 그분을 왜 보냈는지를, 알았다는 뜻이에요.
그건 지금, 여기서 제자들이 이 시점에 알았다는 게 아니라, 제자들로 상징되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로 인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오게 될, 모든 교회들은,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하여, 이 세상에서 지어져가게 된다는 것을, 그런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요. 중보자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그 분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직접 살고, 그래서 살고 죽었어요. 그리고 다시 부활했습니다. 삶으로 직접 살고, 입으로 말씀으로 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신 것이고, 성도는, 그분의 삶과 그 분의 가르침이 모두, 하나님의 작정과 뜻임을 아는 자들을 말하는 거예요.

​성도는, 예수님의 죄 사함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획이 되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성취가 된 것을, 믿는 자들인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서, 이 세상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성도의 본질을, 이미 확정이 되고 완성이 된 것으로, 과거와 완료시제로 쓰고 계신 것은,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임을, 단언하여 말씀하신 거예요.

‘그들이 믿었습니다. 그들이 지켰습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지키긴 뭘 지켜요? 금방 도망갈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켰습니다. 믿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버지와 나는, 이들을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낼 거죠? 아버지! 그러니까 보존하여 지켜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는 거예요.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바로 그 기도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건, 만사형통이나 소원성취!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의 자리에서의 그 해방(解放)! 그 창조의 목적으로의 그 회귀(回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말이에요.

아무튼 그런 예수님의 하나님 이름 선포는, 구약에서부터 이미 반복하여 예언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메시아의 시 시편 22편을 봅시다.
시편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여기서 주가 Lord예요.
바로 이 예언의 성취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편 22편은, 메시아 시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윗 개인의 시편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다윗은 성도를 대표하기도 하고, 예수를 상징하기도 하는 인물인데, 다윗이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은, ‘메시아가 이런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도도 그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다윗 자체가 살아내므로 말미암아, 이중으로 계시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이름 계시 사건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돼요.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그런 예수님의 삶이 동일하게 반복이 된단 말이에요. 그게 다윗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이런 시를 쓴 거예요. 다윗이!

자, 그러면 도대체 그 삶이 어떤 삶인가? 열왕기상 11장 36절 보세요.

(열왕기상 11:36)

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예루살렘? 뭡니까?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거죠? 하나님의 백성! 선택한 백성! 그들에게 뭘 둔다, 그래요? 내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 그래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름을 두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삶에 들어오는 건, 그 즉시 ‘행복 끝! 고생 시작!’이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삶이 그랬잖습니까? 민수기 6장 27절 보세요.

(민수기 6:27)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보세요. ‘내 이름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 뒤로 이스라엘의 삶이 복된 삶이었습니까?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 가시와 담으로, 열심히 두들겨 맞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삶이, 그 때부터 시작 되었어요. 그걸 복이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복(福)! 계시록 14장 1절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14:1)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십사만 사천은 12×12×1000. 그래서 열두 지파! 열두 사도!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숫자인 거죠.)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어린 양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성도의 이마에, 탁 박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그렇게 드러났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리고 그 삶은, 천국에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죄가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제가 주일날 잘 설명해 드렸으니까, 잘 아시죠? 마귀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 이 땅에서는 고난으로 나타나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이, 천국에 들어가면, 죄가 싹 없어진 곳에, 그 곳에 들어가면, 이게 가장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그 이중적인 나타남! 드러남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계셔야 되는 거예요. 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과,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그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을 살면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거죠. 이길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이런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순종의 삶을 통하여, 십자가에 그대로 나타내셨고,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이름과, 이 세상에 드러난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어요.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우리 성도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신, 나타내신 것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정말 가난하게 살다 가셨어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쏟아 부으셨죠? 그 삶이, 사도행전으로 가면, 베드로와 요한의, 그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의, 작은 에피소드로, 그림으로 또 드러나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봅니다. 미문이 뭡니까? 아름다운 문이에요. 거기에 누가 돕지 않으면 절대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가 앉아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 거기다가 그 앉은뱅이를 갖다 놓고 갔더니, 동냥 바구니를 놓고 동냥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그 동냥 바구니만 보고 있어요.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문인 줄 알고, 미문인 줄 알고, 그게 진짜 좋은 건 줄 알고 거기 앉아서, 실제로는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 동냥 바구니만 바라보면서, ‘누가 동냥 안 해주나?’라고 기다리고 있는 게, 바로 오늘날의 이 세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동냥 바구니를 보면서, 거기에 그 동냥 바구니로 얻어내는 모든 것은, 그냥 동냥에 불과한 거예요. 거지 동냥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천 만 불을 벌어도, 그건 거지 동냥에 불과한 거예요.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어딜 보냐? 나를 봐라!’ 그러잖아요? ‘주목하라! 나를 주목하라! 왜 동냥 바구니만 보고 있어? 나를 봐!’

봤더니, 개뿔이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동냥이나 받을 줄 알고 봤더니, 한다는 소리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지금 네가 원하는 건, 은과 금이잖아? 그래서 너는 지금 동냥 바구니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봐!’ 그러더니,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게 복(福)이란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받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가 드러내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하고, 예수의 이름을 받아 세상으로 나간 성도는, 바로 은과 금을 무장해제 당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제자들을, 열두 사도 파송할 때, 칠십 인의 제자 파송할 때, 전부 ‘내가 양을 이리 떼에게 보내는 것 같다.’ 그러면서 홀딱 벗겨서 보내는 거예요. ‘전대도 가져가지 마! 신발도 두 개 가져가지 마! 지팡이만 갖고 가!’

양을 이리에게 보내면서, 그럴 수가 있어요? 왜 세상의 힘을 전부 무장해제 시키고 보내죠? 하나님의 일은, 은과 금으로 하는 거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티끌인 상태로 내려가면서, 하나님이 내 안에서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완전히 티끌인 상태로, 흙덩어리인 상태로 내려 가셨다니까요. 자기가 가진 힘을 자기를 위해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완전히 흙덩어리! 이리 굴리면 이리 굴러가고, 저리 굴리면 저리 굴러가는 그런 삶으로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 안에서 전부 일을 하셔서, 결국에는 살려 내시기까지 하시고, 승천시켜, 하나님나라로 끌어올리시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전부 하나님께 우리의 전 존재를 맡겨 버리는 걸,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나는 자꾸 흙덩어리로 낮아지는데, 내 안에서 하나님이 일을 하셔요. 그러더니 나를 부활시키고, 승천까지 시켜 버리시는 거예요. 그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이 세상에서는, 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모습으로 드러나요. 비전과 야망과 소망과 뜻이 기각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타날 것 아닙니까? 내 야망과 내 욕심이 없어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런 것들이 자꾸 부인을 당해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그 분의 권능에 의해서!

그런데 내 안에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분이 성품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점점 바보가 됐는데, 하나님은, ‘네가 어떻게 그렇게, 저렇게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고 있어?’ ‘아니야! 나는 바보가 되고 있었어요. 내가 뭔데 저런 사람을 질타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판단해? 내가 티끌인데! 내가 흙덩인데!’ 이렇게 점점 부인이 되고 바보가 됐는데, 내 삶 속에서, 그 부인에 의해, 용서라는 게 격발되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인도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나라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만 듣고, 하나님의 뜻만 좇아, 완전히 비워지는 그릇으로 사는 것! 그것이 ‘왔다구나!’를 이 세상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다른 종교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단 말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극과 극 대척점에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요!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바람만 불어도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 땅에서 배울 것만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우리를 미혹(迷惑)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앞으로도 엄청난 것으로 우리를 시험할 거예요. 우는 사자처럼, 우리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은, 문만 열면 들어오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문을 너무 자주 열잖아요? 그렇다니깐요. 마귀라는 존재는 그렇게 실존하는 존재예요.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마귀의 공격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이며 안전한 삶이다.’라는 걸, 또 가르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마귀에게 물리고 당하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계속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절대 마이너스가 없습니다. 손해가 없어요. 여러분의 모든 삶이 합력하여, 선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 원래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복만을 의지해서, 자신의 뜻과 의지를 전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도록 지어진 존재예요. 그래서 첫 번째 인간의 이름이, ‘아담’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느 날 흙으로 어떠한 형체를 빚었어요. 그리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담! 한글로 번역하면 ‘사람’이지만, 그 뜻은, ‘흙덩어리’라는 뜻이에요. 흙, 티끌이 ‘아다마’거든요. 그 ‘아다마’로 만들어진 존재가, ‘네페쉬’가, 아담인 거예요. 그러니까 흙덩어리예요. 흙덩어리!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저주하시고 뭐라 그래요? ‘네가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잘 알아먹으라.’고 그러면서, 흙을 갈게 하죠? 땅을 갈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냥 흙덩어리예요. 하나님 앞에서, 그냥 흙덩어리로 살아야 돼요. 하나님이 생기불어 넣어 주시면, 그 앞에서 재롱이나 피우면서, 하나님이 살라는 대로 살면 되는 게, 인간이에요. 이 사실을 마음에 올바로 각인하고 간직한 아담은, 한 평생 하나님께 의존하며, 동시에, 다른 동료 흙덩어리를 향해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했어요. 잘난 척할 수 없잖아요? 흙덩어리를 자각한 흙덩어리가!

그런데 아담이 흙덩어리인 자신의 신분을 잠시 망각했죠? 그것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던 사건이에요. 하나님의 흙덩어리! 즉 티끌로 살아야 하는 도덕적 피조물이, 티끌의 자리를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 자기 가치 향상의 삶을 살고, 자기의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그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러한 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사건이에요.

그 뒤로, 아담들! 그 흙덩어리들은요. 매일 같이 그 흙덩어리에 이것, 저것 명품으로 걸치기도 하고, 또 그 위에, 최상의 화장품을 바르기도 하고, 흙덩어리를 깎아서 성형도 하고, 학력이라는 것과, 재력이라는 것과, 권력이라는 것과, 지능이라는 것으로도, 흙덩어리를 치장하고 위장하며 살죠?

그런데 그 치장과 위장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본인들도, 자신들이 흙덩어리라는 것을 순식간에 잊어 버려요. 그래서 전 인류가, 자기가 흙덩어리라는 것을 잊어 버렸어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文明)과, 이 세상의 힘들 때문에!

그런데 그 흙덩어리가 흙덩어리로 발각이 될 때가 있어요. 흙덩어리에다가 아무리 예쁘게 화장을 해놓고 치장을 해 놓아도, 그 흙덩어리가 흙덩어리임을 발각이 될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언젭니까? 비가 올 때! 은혜의 단비가, 그의 삶의 내리면, 그의 흙덩어리 됨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 뒤부터, 계속해서 우리의 흙덩어리 됨을 폭로 당해요. 그 때 진짜 생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계속 폭로 당하면서, ‘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어야 되는 자이구나!’를 가슴 속 깊이 새기는, 그 삶을 사는 것을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은 뭐 전부, 그 흙덩어리에다가, 더 많은 어떤 치장과 위장을 할 수 있게, 나에게 힘을 허락해 달라고, 그렇게 구하고 있는 게, 오늘날 기독교의 실정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 분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티끌의 자리로 내려 가셨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했고, 급기야 그 흙덩어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살해를 해 버렸어요. 묵사발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예 흙덩어리의 무력함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에요. 진흙을 마치 십자가의 척 붙여서,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사건처럼, 세상이 예수님을 들어서 십자가에다가 척 붙였더니, 그냥 말라 죽어 버리셨어요. 흙덩어리의 무력함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끝까지 그 흙덩어리의 삶을 고수하셨어요. 자기의 힘을, 그냥 흙덩어리가 되어서, 자기의 힘을, 자기를 위해 요만큼도 안 쓰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 보세요.

(마태복음 26:53-54)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할 수 있다는 거죠.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가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천사 하나가 내려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한 칼에 몰살시켰는데, 열두 영이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군단이 내려와요. 천사가! 이 세상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할 수 있는데, 안한다는 거예요. 난 그냥 흙덩어리로 죽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가 그거 인거예요. 여러분! 삼위일체의 연합의 원리가 그거인 거 아세요? 서로가 상대방을 위해, 자기를 비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연합의 원리인 거예요.

자,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를 보호하시고, 대적을 쳐 낼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셨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이루시는 삶을 사셨던 거예요.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만 들어야 된다는,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사셨던 거예요. 내 능력을, 나를 위해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고, 그 분이 나에게 말씀하신 게 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에요. 그게 아담의 삶이었어야 했어요. ‘먹지 마!’ 그럼 먹지 말았어야 돼요. 그게 뭔지 몰라도, 그냥 먹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이 인생을 통하여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를 믿고도, 수천 번, 수만 번 계속 선악과를 또 따먹고, 또 따먹고, 또 따먹고 있는 거예요. 아닙니까? 오늘도 여러 개 따 드시고 오셨잖아요? 하지 말라는 거! 여러 개 하고 오셨잖습니까? 그 일로 여러분이 얼마나 힘들어요? 얼마나 마음이 불편합니까? 천국에서 그런 마음 갖고 사실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아니죠? 예,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흙덩어리 됨을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거예요. 그 분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당신의 힘을, 당신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원수를 살리는 데 쓰실 수 있는, 그런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그 어떤 존재도, 자기의 그 엄청난 힘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원수를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권능(權能)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권세(權勢)예요.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삶 속에 드러난다니까요. 이제!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힘을, 여러분 자신을 위해 못 쓰고, 원수를 위해 쏟아 내어지는 삶으로, 자꾸 바보처럼 바뀌어 가는 거예요. ‘옛날 같았으면, 저걸 그냥 확!’ 그런데 내가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에이 대충 그냥 이렇게 살지 뭐!’ 사람들이 볼 땐, ‘너는 왜 이렇게 바보가 됐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삶이라고요.

어떻게 하나님 말고 다른 존재가, 자기를 위해서 쓰던 힘을, 원수에게 돌려, 그를 유익하게 삶을 사냐고요?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어떻게 그를 섬깁니까?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그런 삶이 드러나게 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나타나고 드러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점점 비워지는 삶을 살게 되고, 흙덩어리로 폭로가 되고, 결국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그 삶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겁니다. 계속 죽고, 죽고, 죽고 죽다가, 육신의 죽음으로 완전히 죽어, 거기에서 최종승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죽는 순간이, 여러분이 승리하는 순간이거든요.

따라서 그 때가 최종승리! 승리의 절정이라면, 여러분의 삶은 어디로 수렴되어야 된다? 계속 죽는 쪽으로! 그러니까 기독교는 종교와 다른 거예요.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공격에, 응전을 하지 못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돼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감싸 안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성령이 오시면, 권능을 받고…’ 그러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마아터, 순교자가 되리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증인이 순교자란 단어가 똑같은 단어니까! 자,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이에요.

그렇게 작정된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 안에도, 그대로 담겨 있어요. 모세는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애굽의 왕자가 되죠. 어느 날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요. 그러한 모세 속에 애족의식이 싹텄어요. 그러던 중에,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모세는 그 자리에서 그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고, 살인자가 됩니다. 모세는 그 길로 광야로 나가서 사십 년간을,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을 쳤어요.

여든이 된 모세가 하루는, 호렙산이라 하는 곳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 곳은 나중에 모세가 율법을 받게 되는 시내산이죠? 시내산과 호렙산은 같은 산이에요. 그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면,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셨어요.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불은 계속 활활 타고 있어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그림에, 뭔가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제일 먼저 그에게,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래요. 그 말은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는 삶! 거기가 거룩한 곳이죠? 그 삶은, 스스로의 신발을 신고, 스스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갈 수 없는 그런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거룩한 곳!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모든 존재는, 신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신발 신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면서, ‘하나님! 빨리 와서 나를 도우라!’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는 게 아니에요. 신을 벗어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는 밖에서 띠 띄우고 너를 끌고 갈 존재가 있다고, 목을 확 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곳에 선 성도! 거룩한 무리잖아요?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 말씀 뒤에, 모세와 하나님의 난상 토론이 벌어져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의 폭정에서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물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하실 것이고, ‘너는 나의 대리인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게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모습인 것입니다. ‘네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너를 태워서, 너의 능력과 너의 언변! 너의 소질! 이런 걸 태워서, 일을 할 게 아니라, 내가 내 힘으로 불태워 일을 할 거야.’가 고 그림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고 그림 안에는, ‘지금 내 백성이 애굽에서, 이렇게 풀무 불같은 고난을, 고통을 겪고 있지만, 절대 그들은 그 풀무 불에, 진멸되지 않을 것이고, 그 불은, 단지 그들의 온전함을 위해, 양육용으로 준 것이다. 절대 그들은 나의 보호 아래에서, 절대 거기에 불타서, 진멸되지 않을 것이다.’를 보여주기도 하는 그림이기도 한 거예요.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의하고 있는 거예요.

모세가 그것을 알아먹었어요. 그걸 우리도 알아들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바로 그 현실을 알아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의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셨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죠. 세상의 풀무불은, 그를 십자가의 매달아 놓고, 확 태워 버릴 줄 알았어요. 다 태운 줄 알았는데, 예수가 그 자리에서 다시 살 났어요. 고 현장에서 불은 분명히 타고 있었는데, 고난의 불이, 십자가의 불이 타고 있었는데, 예수가 죽지 않고, 안타고, 그대로 다시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시고 그들과 함께 애굽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애굽의 그 풀무 불같은 고난을 당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뭔가 배우게 하시고, 그래서 그들을 그 풀무 불같은 고난이, 다 태워서 진멸하지 못하게 지키시며, 결국은 당신의 힘으로, 모세라는 인물을 들어서 썼지만, 그들을 완성해 내고 마신다는, 그 복음의 현실이, 그 전체 그림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지맞은 인생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복음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도대체 뭘 더, 더 이상 원할 게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의 삶! 십자가의 삶! 부활! 승천! 전~부 하나님의 개입하심이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 그런다고요. 예수님도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살려 내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내려가 버리신 거예요. 우리 때문에!

그리고 ‘바로 너희가 이런 삶을 살게 될 거야.’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하나님이 살려내시지 않으면, 일으켜 내시지 않으면, 영원히 무덤 속에 거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까지 내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자기를 다 비워 버렸어요. 자기를 위해 자기의 신성을 전혀 쓰지 않기로 작정을 하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왜? 너희가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은 그렇게 흙덩어리의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수시로,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했다.’ 제자들에게 수시로 반복하여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무슨 생각도 없습니까? 그런데 왜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다, 그래요? 아버지가 왜 시키는 일만 했다 그래요? 바로 그게 우리의 삶이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급기야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은, 이 잔이 내게서 비껴가는 건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세요.’라고 기도를 하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안 들으시고, 아버지 뜻대로 그냥 해 버리셨죠? 그 삶이 너의 삶 속에서 일어날 거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의 뜻이 있지만, 그건 우리의 이 얄팍한, 좋아봐야 150! 거기서 나오는 지혜 밖에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도 결국에는,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로 바뀌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고백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무릎 꿇고 앉아서, 죽자 사자 기도하는 거예요. ‘왜 이게 안 되죠? 왜 자꾸 내 뜻이 올라와요. 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자꾸 내 눈에 보여요. 아버지!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하나님과의 연합(聯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연합이 되는 게 기도라면,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추시겠어요? 내가 하나님 뜻에 맞춰야죠. 그런 자로 내가 자꾸 해체되어져 가는 게, 기도란 말입니다. 기도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거니까!

자,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그 분의 능력이, 밖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도구로 쓰이는 이의 그 흙덩이 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흙을 개어서 벽돌을 만드는 자들로, 낮아져야 했던 이유를 아시겠어요? 그들을 애굽에 들여보내셔서, 흙을 개어, 벽돌을 굽게 함으로, 너희들이 흙이라는 것을, 거기서, 그 애굽의 삶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그 속에서 그들이, 그 고통으로 절대 안 죽더라는 것입니다. 살려 내셔서, 결국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시더라는 거예요. 그럴 거면 애굽에는 뭐 하러 넣었다 빼요? 필요하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이스라엘은, 동일한 삶을 산거죠. 예수님도 흙덩이가 되어서, 완전히 비워 버렸고, 하나님이 살려낼 때, 그냥 살아난 것뿐이에요.

이스라엘? 마찬가지입니다. 흙덩이가 되어서 그곳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큰일 나겠어요.’라고 부르짖었더니, 아버지가 그 부르짖음을 듣고, 그 전까지는 못 들었나요? 아니오. 부르짖게 만드신 거예요. 아버지가! ‘아버지의 도움이 나에게 필요하군요.’라고, 부르짖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걸 아버지가 들었다고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보죠. 모세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죠. 제가 그 장면을 조금 드라마틱하게 각색을 한번 해 볼게요.

‘하나님! 이제는 열정도 정열도 다 시들었습니다. 그 때 내가 분연히 일어나서, 애굽사람을 쳐 죽였을 때, 그 때 찾아와서 일을 시키시죠? 그 때는 왜 침묵하시고, 내가 처갓집에 가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다가, 이제 여든이 되어서, 이렇게 무력해진 이 시점에 와서, 저에게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지난 수십 년간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양무리의 문을 열고 닫는 일 그것뿐이었어요. 하나님! 당신은, 제 인생의 시간을 잘 못 읽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잘못 찾아 오셨어요. 저는 게다가 입이 둔하여 말도 잘 못합니다. 대중연설도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동적인 연설은, 더 더욱 못해요. 그러니까 저는 이 일의 적격자가 아닙니다.’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끈질기게 불타는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모세를 설득하셨어요. ‘네 힘으로 하는 거 아니야! 네 능력! 네 언변! 태워서 일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라면 가!’ 계속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모세는, 마지못해서, 하나님의 청을 받아들이죠. 그런데 또 다른 조건이 있었어요.

‘하나님! 제가 애굽에 가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사람들이 ‘네가 무슨 권한으로, 네가 그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를 보냈느냐?’ 그러면, 제가 누가 보냈다고 해야 됩니까?’ 물어봐요. 그 말은 ‘당신 명함 하나 주세요! 갖다가 보일 테니까! 당신 명함 하나 주세요!’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그러는 거예요. 그들이 ‘너 누가 보냈어?’ 그랬을 때, 내가 딱 그들에게 내 놓아서, 그들이 납득할 만한, 그런 당신 명함을 나에게 하나 달라는 거예요. ‘아! 그 분이 보냈으면, 오케이!’ 라고, 그들이 인정할 만한 당신 명함을 달라는 거예요.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물어본 거예요. ‘누가 보냈다 그래야 돼요?’ 그 때 하나님이 명함을 주시죠.

그 명함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이름 풀이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다시금, 왜 하나님이 자기의 명함을 주시게 되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왜 줬다고요? 모세가 애굽, 애굽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구원하러 갔을 때, 그들이 ‘도대체 누가 너를 보낸 거냐?’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때 보여줄 이름을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이 이름을 주신 거 아녜요?

그러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이름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는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같죠? ‘에흐헤!’ 가운데 글자인 ‘아쉐르’는 문법적으로 관계사예요. 두 단어를 연결 짓는 연결사죠. 그렇다면 ‘에흐헤’라는 단어의 뜻만 풀면, 하나님의 이름이 풀이가 되겠죠? ‘에흐웨’는 문법적으로 ‘무엇 무엇 이다. 있다.’ 거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1인칭 단수 미완료 동사예요.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 이런 뜻이어야 맞아요.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곧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표준 새번역에도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좀 부족해요.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름 같죠?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온갖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을 추출해낸다면, 그건 잘못 해석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책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건 전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진공상태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학문적 상아탑에서, 논의되는 이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구체적이고, 매우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 아래서 주어진, 복음인 거예요. ‘누가 너를 보냈어?’ 그랬을 때, ‘이 분이 보냈어!’라고 주어질 복음인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고난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생수와 같은 좋은 소식을 담고 있는 이름이에요. 그 분의 이름 자체가, 복음이고, 희망이고, 미래이며, 위로의 원천이에요. 어떻게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름 세 글자를 담고 있는 그 명함을 건네 주셨을 때, 모세도 알아야 하고, 그 고난의 풀무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도 알아야 하며, 여러분과 저도 알아야만 하는 그 복음의 메시지가, 그 이름 속에 담겨 있었어요.

몇 년 전에 작고한 그 저명한 신학자! 루이스 스메데스가, 이 광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풀었어요? Wherever you are, I am The One who will always be with you there. 네가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이,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 그게 바로 네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리고 어떤 사건 속에 처해 있든지, 그곳에 항상 함께 있는 게, 바로 나다! 그게 ‘I am Who I am’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던 이스라엘이, 그 명함을 척 받았을 때, 어땠겠어요? ‘아! 우리가 이 애굽에서 이렇게 고난을 당한 것이, 그냥 하나님도 모르는 어떤 곳에서, 우리가 아무 유익이 없이 당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기 위해 준 고난이었구나!’를 알게 된 거예요. 그게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인 것입니다. 나는 네가 어느 곳에 있을 때에도, 너와 항상 함께 있는 존재야! 그게 임마누엘 아닙니까?

그러니까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는 임마누엘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풀무 불같은 애굽의 고난 속에서도 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죽일 거였다면, 거기서 다 죽였겠죠. 그런데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붙은 불처럼, 풀무의 불이 그들을 연단하고 있는데, 그 안의 이스라엘은, 온전한 채 보전되고 있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인 교회! 이 시대의 교회는, 그렇게 애굽을 살면서, 이 세상을 살면서, 풀무불 같은 고난과 연단 속에 던져져요. 그러나 여러분은 절대 상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하죠? 그건 여러분을 방해하거나, 미혹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교회로서의 여러분의 본분은, 절대 상함이 없다는 거예요. 연결이 되시죠? 떨기나무 불꽃과, 불과, 애굽의 이스라엘의 이야기!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 전체에 함께 하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고난으로 몰고 간 것의 정체는, 이 세상의 죄였죠? 이 세상의 죄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사셨을 때,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죄가 예수님을 두들겨 패고, 죄가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가 불살라 버리지 못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분이, 세상의 죄가 자꾸 불을 사르는데도, 온전하게 보존이 되시다가, 새 몸으로 부활을 하신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애굽에 들어갔다 나온 이스라엘의 삶이고, 그게 교회의 삶!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걸 성경전체가 그냥 일관성 있게 반복하고, 점층적이며,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좀 더 알기 쉬운 그림! 이렇게! 창세기부터는 유치원 수준으로 설명하다가, 나중에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이렇게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은, 그 그림이 선명하게 확 드러나 버리는 거죠. 성도의 삶의 현실과, 천상의 교회의 모습! 이게 동시에 드러나잖아요? 요한계시록에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그릇은, 한없이 약해져야 하는 거고, 그 질그릇 같은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예수와 똑같은 삶을 살며,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자,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그 이름! ‘I am who I am’이라는 그 이름이, 출애굽 때 처음 주어졌는데, 자, 그 출애굽이 언제 약속이 됐던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창세기에서! 거길 보면 조금 더 명확해 지겠죠? 창세기 15장 7절 보세요.

(창세기 15:7-17)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이게 애굽의 약속이에요.)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즉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필연적인 약속의 땅 입성을 약속하시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바로 위에는, 불임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장면이 붙어 있어요. 나와요. 그 언약의 장면에, 쪼갠 고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영토의 완성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창조! 이게 약속이 되면서, 쪼갠 고기가 등장하는 것이죠? 당시 고대시대 사람들은 어떤 약속을 할 때, 항상 고기를 쪼개놓고, 그 사이를 둘이 손잡고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둘 중에 하나가 이 약속을 어기면, 요렇게 쪼개져서 죽는다.’를 확약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 백성들의 그 창조가 약속이 되는 그 현장에서, 고기가 쪼개져 있는데,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신단 말이에요. 왜? 인간 측에서는, 거기에 어떤 것도 보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혼자 지나가요. 그리고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그 일을 방해하는 게 바로, 우리의 죄성(罪性)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라도 너희들을 나는, 반드시 완성해 내고 말거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쪼개져서라도, 나는 반드시 만들어 내고 말거야! 그리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셔서 혼자 쪼개져 버리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그러한 엄청난 하나님 측에서의 손해와, 상함이 감수 되었다는 걸, 우리에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벌써!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창조가 약속되는 데에, 그들의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 종의 삶이, 끼어들어가 있단 말이에요. 필연적 과정으로! 너희들이 분명히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전에, 어떤 일을 겪어야 되냐면, 사백 년 동안, 사백이라는 단어가 뭐, 숫자가 뭐라 그랬어요? 사십 년 광야! 인생! 너희들은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이 세상살이, 이 삶을 통과하여, 뭔가를 배우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출애굽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약속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들을 진짜 출애굽 시키실 때,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이 되는 거예요. 내가 다 한 거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한 거야!’ 내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여, 너희들을 그리로 들여보냈고. 야곱에게, 하나님이 ‘들어가라!’ 그래요. 그 전에는 들어가면 죽인다고 그러더니, 야곱한테 가서는 또, ‘들어가라!’ 그래요. 빨리 들어가라 그래요.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래놓고 거기서 종살이 하게 만든 다음에, 하나님이 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뭘 가르쳐서! 그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전체 내용인 거예요.

무슨 마귀새끼가 반역을 해서, 걔에 의해서, 막 모든 것이 주도가 되어 인간도 타락을 하고…,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게 동화적으로 해석을 하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성경과 역사를!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전지전능한 창조주세요! 그 분이 아무런 계획과 목적도 없이 일하시겠습니까?

그 우리가 그러한 애굽살이! 애굽의 종살이를 통하여 배워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두 가지로 나누면,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 즉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난 자들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이 되는, 이 세상에 종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끌어내어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가서는, 다시 애굽으로 밀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배우고 오라는 거예요.

우리는 천상의 교회로 완성이 되어 있는데, 이 세상 애굽으로 잠시, 하나님이 밀어 내리신 거예요. 다시 끌어 들이실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세가 그 역할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추구해야 되겠냐고요? 아휴! 답답할 때가 많아요. 천국에 가면, 도대체 거기에 몇 명이나 있을까? 굉장히 궁금해요. 여러분!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절대 애굽을 벗어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직시하게 하시기 위함인 거예요. 그들은 또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배움터인 그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그 고난의 풀무 속에서도 절대 타지 않고, 온전히 보존이 되어서, 오히려 연단이 되어서, 하나님나라로, 입성을 하게 될 것임을, 다 아우르고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예요. 그 이름이 여러분이 삶 속에 나타났단 말이에요. 드러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흙덩이로 낮아지고 굳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삶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고,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삶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 현상만 보고, ‘야! 난 지지리도 복도 없어! 하나님이 날 지금 미워하시나 봐! 야! 저 사람은 참 복 받았어!’ 이렇게 판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 땅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하늘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떨기나무 불로 일하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하고도, 자랑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뻐기거나,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거고! 왜? 그것이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난하고 연약한 자리에서도, 기죽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 현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단 말입니다.

그 그림이 잘 표현이 된 게, 우리가 이미 배웠던 실로암 사건이에요.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실로암 사건! 요한복음 9장 7절 보면,

(요한복음 9:7)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이 ‘실로암’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설명을 하죠. 그건 요한이, 이 에피소드에서 강조되어야 할 메시지가 바로, 그 이름 안에 담겨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 유다를 침공한다는 정보가, 첩보가 들어왔어요. 그 때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에서 한 500m 정도 떨어진, 그 기혼 샘에서, 지하수로를 뚫어서, 예루살렘 성 안에다가 연못을 하나 만들어요. 식수 때문에! 포위가 되면 물을 먹어야 되니까! 그게 실로암 연못이에요. 그러니까 실로암 못은, 기혼으로부터 보내진 물이, 여기서 현상으로부터 나타난 것뿐이죠?

그런데 현상으로 나타난, 소경이라는 현실을 보면서, 제자들이, ‘이거 누구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죠?’ 라고 묻고 있단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건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라고, 소경 됨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밝히 드러내세요. 그런 다음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거예요.

왜? 실로암은, 이 자체가 수원이 아니라, 기혼 샘이라는 수원이 있는데, 거기서 보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실로암만 보면서, 이 실로암이, 이 물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이는, 소경이고, 이 실로암이 어디서 보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보는 자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본다고 하는 자가, 눈먼 자고, 눈먼 자가 바로, 보는 자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그걸 자기가 올바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면서, ‘조 놈은 나쁜 놈! 조 놈은 악한 놈! 요 사람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 요 사람 착한 사람! 조 사람 저주받은 사람! 요 사람 복 받은 사람!’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연단이나, 그 분의 은혜의 손길이나, 긍휼의 손길이나, 이런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나는 현실과 현상만으로 판단해 버리는 게, 소경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어떤 사건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를,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 크게 사고를 쳤어요. 이거는 누가 봐도 명백히 못된 짓을 한 거예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할 말 없는 그런 일을 했어요. 그 때 내가 같이 ‘야! 이 나쁜 놈아! 너 때문에 내가 창피해 죽겠다.’ 그리고는 머리 질끈 동여매고 앓아눕는 거! 이게 현상과 현실만 보고, 자기 스스로 그냥 판단해 버린, 소경들입니다.

성도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이 아이와 우리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실 게 있는 거고, 이 일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분명히 뭔가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혹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임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것을 쳐내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는 자! 그가 보는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현실과 현상 뒤에 숨어서, 당신의 일을 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천상의 교회로서,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떠한 힘과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를, 이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셨는지를, 잘 배우는 거예요. 흙덩이들은, 흙덩이로 살아야지! 거기다가 아무리, 위장을 하고, 변장을 하고, 치장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 아래서는, 생얼이 된다는 거를, 잘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점점 그런 위장과, 변장과 치장을 덜할 수 있게 되는 거! 그게 성도의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