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εἰ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1525
발음 [ ĕisĕrchŏmai ]
어원 / 미래 εἰ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εἰσῆλθον , 과거 완료분사 εἰσεληλυ- θώς, 1519와 204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들어가다(마 5:20, 눅 4:16, 히 9:12),
들어오다(마 8:8, 눅 7:45, 고전 14:24), 참여하다(마 25:21, 23), 들다(마 26:41, 눅22:40, 46),
나가다(막 10:25), 오다(눅 8:41), 일어나다(눅 9: 46), 데리다(눅 14:23), 돌아오다(눅 17:7),
출입하다(행 1:21), 이르다(행11:20).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4-25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된 이래로(눅 1:26-38), 회의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에
관해 질문을 제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약혼자였던 요셉이 임신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두려워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마
1:18-24).
요셉은 마리아가 가진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천사로부터 확인한 후에야 그녀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천사가 요셉에게 말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했을 때 천사는 이사야의 예언을
암시했습니다(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은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아기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마 16:13; 막 8:27).
그 대답은 오늘날과 같이 다양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더 자세히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베드로가 올바른 답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사실이라고 확증하시고 그 진리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16:18).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본성과 정체성에는 영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에 관한 바른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9-10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질에 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요 1:1-14).
빌립보서 2:6-7에서는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9에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인간이시며, 그분의 성육신은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사셨지만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가 없으셨습니다(히 2:14-18; 4:15).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죄성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에게 전해졌습니다(롬 5:12).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인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요
8:29; 히 9:1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300개 이상의 예언을 성취해야 했습니다(마
4:13-14; 눅 22:37; 사 53; 미 5:2).
인간이 타락한 후(창 3:21-23), 인간이 하나님과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무고한 제물의 피가 필요했습니다(레 9:2; 민
28:19; 신 15:21; 히 9:22).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영원히 만족시킨 최종적이고 완전한
제물이었습니다(히 10:14).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적합했으며 예수님의 몸을 통해 그 구속 사업에 필요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그런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마 26:28; 요일 2:2).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예수님이 단지 선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에게도 죄의 본성이 있고 완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누군가를 구원할 능력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고 그로 인해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갚으실 수 있습니다.
죽음과 무덤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요1:12; 고전 15:3-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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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신학적 의미
1. 성육신의 의미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14 말씀에 근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요 1:3) 성탄은 바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이 같은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이 같이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創造物)에 불과한 인간(人間)과 같이 되셨다는 성탄의 사건은 천지창조(天地創造) 보다도 더 경이(驚異)로운 사건이다.
기독교신앙은 역사적(歷史的)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오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敬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絶頂)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1) 구원론의 차원과 2)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성육신사건은 기독교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는가?
- 성육신사건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 성육신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樣式)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2. 성육신의 구원론적 의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救援論的)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경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使者)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神性)과 참 인성(人性)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贖罪)의 사역을 대신하시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成肉身)의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게 된다.
3. 성육신의 신론적 의미
다음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神論的)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일까?”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像, Image)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릿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며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自信)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교회는 이 문제에 관해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성’(유사본질, homoiousios, 아리우스의 주장)을 가졌을 뿐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동일본질,
homoousios, 아타나시우스 주장)을 가졌는가?”
‘homoiousios’와 ‘homoousios’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자 한 자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被造物)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超越的)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저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相衝)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로서의 성경과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그저 추상적(抽象的)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不滅)하시며 무한(無限)하시며 불변(不變)하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며, 유한하지 않으시고, 변하시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性稟)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像, image)은 우상(偶像)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골 1:15)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우리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요 15:1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像, image)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독생 성자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학 사상과 같은 추상적
개념(槪念)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人格的)으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首肯)만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信賴)와 순종(順從)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行動) 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被造物)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 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原理)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사랑을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抽象的)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4. 성육신과 기독교 영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런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신앙은 어떠한 삶의 양태(樣態)를 요구하는가? 다시 말하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신앙은 이 세상을 부정(否定)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經綸)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해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마치는 말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 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해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장경철 교수(서울여대 조직신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장로회신학대학원,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신학박사)
출처 / 월간 ‘교육교회’ 19995.11월호(장신대 기독교교육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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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靈)이 육신(肉身)으로
비실체에서 실체로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것, 즉 하나님이 육신 된 것이다. 육신이 하는 사역은 곧 영이 하는 사역이다. 영이 하는 사역은 육신을 통해 실체화되고, 육신을 통해 발현된다. 하나님이 거하는 육신 외에는 누구도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 인성만이 신성 사역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처음 성육신했을 때 29세 이전까지 정상 인성이 없고, 태어나자마자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세상의 모든 일을 꿰뚫어 보며, 말을 떼자마자 천상의 말씀을 하고, 사람의 생각과 품고 있는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사람은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육신은 육신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이었다면 성육신의 의의와 본질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이 ‘육신’된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그가 정상인의 성장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더더욱 그의 육신이 정상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그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존재임을 충분히 보여 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이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그 본질이 그의 사역을 방해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망치는 일도,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말도 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경영을 방해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다. 성령 역사의 본질은 인류 구원과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위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인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그의 본질을 육신에 실체화하여 육신이 충분히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기간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영의 모든 사역을 대신하고, 성육신 기간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핵심으로 하며, 다른 어떤 시대의 사역도 섞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의 신분으로 사역하며, 육신으로 온 이상 육신에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든 어쨌든 모두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직분을 다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그리스도란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이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가짜다. 그리스도란 땅에서의 하나님의 발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특유한 육신이다. 그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중에서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며,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혹은 참도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서문> 중에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삶과 사역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의 삶이다. 일반인의 가정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며,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 윤리와 법칙, 정상적인 필요(의식주 등), 정상적인 연약함과 정상인의 희로애락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계에서는 신성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면서 정상인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의 삶이다. 이때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닌 평범한 인성으로 살며, 겉모습에는 조금도 초자연적인 부분이 없지만, 직분을 이행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때의 정상 인성은 오로지 신성의 사역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정상 인성이 이미 직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정상 인성으로 직분을 이행하는 삶이자,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첫 번째 단계의 삶이 완전히 평범한 인성으로 사는 삶인 이유는 그때의 인성이 신성의 모든 사역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인성이 성숙해질 때까지, 즉 직분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인 이상,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의 삶은 그저 정상 인성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인성으로 사역을 충분히 담당하고 직분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직분을 이행하는 기간의 삶은 바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만약 성육신 하나님이 태어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고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만 행한다면, 육신의 본질은 없어진다. 그래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의 본질을 위해 존재하고, 인성이 없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성이 없는 사람은 비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신의 인성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성육신 하나님께는 신성만 있고 인성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다. 이는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성육신의 원칙과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의 외형을 지닌 신성으로 살며 사역한다. 다만, 이때의 인성은 오로지 신성이 정상 육신에서 사역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역사하는 것은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이다. 즉,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지 인성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성은 인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인성이 아닌 완전한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단, 역사하는 것은 육신이며, 이 육신을 사람이라고도,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되고, 사람의 외형과 본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사람이기에 창조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외형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인성을 지닌 모든 사람 가운데 오직 그만이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 외에는 모두 창조된 인류인 것이다. 똑같이 인성을 갖추고 있지만, 창조된 사람은 인성 말고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다르다. 그의 육신에는 인성 말고도 무엇보다 중요한 신성이 있다. 인성은 육신의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신성은 쉽게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은 인성이 있는 전제하에 나타나며,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비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장 측량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음에도 너희 대다수는 이에 대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다고 하면 그의 본질은 인성과 신성의 결합체이다. 이 결합체를 하나님 자신이자 땅의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 안에 있는 신성의 정상적인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며,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정상 인성과 육신의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시켜 준다.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 육신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면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육신으로 해야 할 사역을 영원히 완성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지니고 있지만, 그의 사역에는 사람의 사유가 섞여 있지 않다. 그는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하고, 사유를 지닌 인성의 전제하에서 사역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발휘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육신의 사유가 얼마나 고차원적이든, 그의 사역에는 논리학도, 사고학도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은 육신의 사유를 통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신성의 사역을 인성으로 직접 나타낸 것이다. 그의 사역은 전부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이지, 그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십자가에 달린 것은 머리로 상상한 것이 아니며, 두뇌의 사유를 지닌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복 사역도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지만 이 사역은 전부 사람의 뜻이 아닌 신성이 해야 하는 일로, 육에 속하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반드시 두뇌의 정상적인 사유와 정상 인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가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의 본질이자,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단지 정상 인성으로 살았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성육신 하나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그저 그를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정상 인성은 하나님이 육신 되었음을 실증하고, 은혜시대는 영이 아닌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한 시대임을 실증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완전히 육신으로 실체화했으며,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대에는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정상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정상 인성과 정상적인 이성, 정상적인 사유를 가진 육신으로 실체화한 것이다. ‘실체화’란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이 정상 인성을 지닌 육신에 거하면서 그 육신을 통해 신성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체화’, 즉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처음 성육신하였을 때는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야 했다. 그가 하는 사역이 속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그의 사역은 바로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 사역은 그가 사람을 죄와 더러움에서 구원할 것임을 예시했다. 은혜시대이기에 그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어야 했고, 그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는 은혜시대 은혜의 상징이다. 은혜시대에는 주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 또는 물질적인 축복이 은혜시대의 상징이자 예수를 믿는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지닌 육신의 본능이었다.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하여 행한 사역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육신에 거하면서 그런 사역을 행했으며 육신을 초월하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든 여전히 정상 인성을 지니고, 인성의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성육신의 시대에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전부 육신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의 육신이 육신의 본질을 완전히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육신이 이적을 나타낼 수 있으며, 아주 가끔 육신을 초월하는 사역을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모두 그가 직분을 이행한 후에 나타난 일이다. 그가 40일 동안 시험을 받은 것이나 산 위에서 형상을 바꾼 것이 그 일례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으로 성육신한 의의가 완전해지지 않았고, 일부만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육신의 모든 삶이 지극히 정상이었으나, 사역을 시작한 후로는 육신의 외형만 유지했다. 그가 하는 사역은 신성의 발현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상적인 기능을 뛰어넘었다. 어쨌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 만큼 육에 속하는 사람과 같지 않았다. 물론 그도 평상시에는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집에 사는 등 정상적인 의식주 활동을 했고, 정상인의 이성과 두뇌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정상인이었으나, 그가 행한 사역은 아주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는 어떤 사역이든 평범한 정상 인성으로 했다. 또한 그가 사역하는 때일수록 그의 이성은 더욱 정상적이었고, 그의 생각은 더욱 맑고 또렷했으며, 모든 정상인의 이성과 생각을 뛰어넘었다. 이러한 이성과 생각도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신성의 사역은 가장 정상적인 이성과 가장 맑고 또렷한 생각을 지닌 육신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육신으로 신성의 사역을 발현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예수는 33년 반 동안 세상에 있었다. 그는 33년 반 동안 시종일관 정상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그가 3년 반 동안 행한 직분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가 매우 비범하고, 그전보다 훨씬 초자연적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사실, 예수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이나 후나 정상 인성에 변함이 없었으며, 항상 똑같은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직분을 이행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들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성육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본래 갖고 있던 정상 인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으로 살아야 하고,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직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인성은 육신의 근본이므로 그의 육신이 지닌 정상 인성은 없어서는 안 된다. 직분을 시작하기 전, 예수의 육신은 완전하고 정상적이었으며, 정상인의 모든 활동을 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면이나 이적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하게 추구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가장 정상적인 인성의 모습이었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신분은 물론, 그의 육신의 남다른 점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그는 어떤 이적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 자신의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니고 정상 인성의 이성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행하며, 평범한 인간, 즉 육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정상 인성이 없다고 여겼으며, 그를 완전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아닌 불완전한 육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행한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정상 인성이 없는 육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사람이 성육신의 의의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이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신성 사역이고, 그 사역은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통해 사역하면서 정상 인성이 가려졌기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비록 그가 육신에 거하고 있으나 그의 인성이 육에 속한 사람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한 성격이 있으며, 그 성격 역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에는 연약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연약함이란 그의 인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연약함은 신성을 어느 정도 제약하지만 무한정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와 기한이 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의 정상 생활 이외에도 인성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신성에 좌우된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하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직접적으로 신성에 지배되며, 그에게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이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고 사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종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그는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이 땅에 왔기에 피조물의 외형, 전에 없었던 인성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 이는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이요,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 자신임에도 그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육신의 위치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그의 어떠함이다.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어떠함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하나님을 거역할 리 없고,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리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보다도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을 갖고 있다. 그 권병은 신성이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어떠함이다. 그 성품과 어떠함으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무리 정상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든, 그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그 자체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권병에서 나온 모든 것에 순종할 수도 있다. 영의 사역과 육신의 사역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에 대한 권병을 지니고,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 육신 역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모든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고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권병이지만, 그의 육신은 그의 권병에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고, 이를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사역은 더욱 하지 않는다. 영과 육신이 하는 사역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이든 육신이든 모두 같은 뜻을 이루려 하며, 같은 사역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비록 영과 육신이 서로 아무 상관 없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고는 하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모두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신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패역의 성분이 없으며, 하나님의 본질은 선하다. 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의 발현이자 모든 사랑의 발현이다.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하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독선적이거나 자만하는 성분이 없고, 오만 방자하거나 교활한 성분도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사탄은 모든 추함과 악함의 근원이다. 사람이 사탄과 같은 속성을 갖게 된 이유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속성만 있을 뿐, 사탄의 속성은 없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생활할 때 사역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의 육신이 아무리 연약해져도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며 거역하는 일은 더더욱 저지르지 않는다. 육신이 고통받을지언정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그는 똑같이 육신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 사명을 완수한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본질만 있을 뿐 하나님의 본질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사람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직접 담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경영을 자신의 당연한 본분으로 삼아 이행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사탄의 속성을 가진 자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과 앞날을 위함이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은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 역시 마찬가지로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이 같은 육신은 오로지 공의로운 일, 인류에게 유익한 일, 거룩하고 빛나며 위대한 일만 할 수 있다. 진리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할 리 없고, 하나님의 영을 배반하는 일을 할 리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므로 그의 육신 또한 사탄에 의해 패괴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람과는 다른 본질을 가진 육신이다. 사탄이 패괴시키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게다가 사탄은 하나님 자신의 육신을 패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 그리스도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도 사람만 사탄에게 점령되고, 이용당하고, 해를 입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절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는다. 사탄은 영원히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희는 나를 배반하는 존재는 오직 사탄에게 패괴된 인류뿐이며, 이 문제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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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에 관련된 성경구절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을 말합니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인 성자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며, 자기비하의 초기과정에 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딤전 3:16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성육신가 부활, 부활 후의 승천, 만국에 전파되심의 모든 과정을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성육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죄있는 육신으로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낳음을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피조 되신 것이 아닙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율법 아래 나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심으로 완전하게 낮아지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감내해야할 모든 것을 스스로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승천하시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다시 하나님되심을 회복하셨습니다.
성육신 이전 하나님의 본체
말씀(로고스)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낳으심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성육신의 과정
성령으로 잉태되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율법 아래에서 나심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죄인의 형상을 입음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육신의 목적
1. 죄를 사하심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심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3. 마귀를 멸하심
요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히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요한1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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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기독론(基督論, Anthropology)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기독론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인물이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독교 복음의 중심 내용이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전도의 중심 내용이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셨다.”는 말로 증거 했다.(요 1:14)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 1:1)을, ‘육신’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합된 신비를 잘 증거 한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의 본질(本質) 즉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초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진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혹은 한 분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주는 신적 구주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필요성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이셔야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죄(罪)의 형벌(刑罰)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 하였으므로 사람이 죽어야 마땅했다. 더욱이 그는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이셔야 했다. 만일 그가 죄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代身)하는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시려면 그는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성경은 과연 그가 죄가 없으셨고 택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孕胎)되어 탄생(誕生)하심과 관계된다. “이러므로 나실 자는 거룩한 자요.”(눅 1:35) 만일 그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아담에게서 전가(轉嫁)되고 유전(遺傳)되어 내려오는 원죄(原罪)로부터 제외되신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부수적으로 그는 사람으로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폐하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또 그가 사람의 연약성을 체험(體驗)하셨기 때문에 그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도우실 만한 구주이시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4)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필요성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셔야 했는가? 구주가 단순히 사람이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가 죄 없는 대속(代贖) 제물로서 속죄(贖罪) 사역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그는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과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의 신성(神性)의 도움으로 그는 범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그의 인성(人性)이 범죄(犯罪)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범죄 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신성은 그의 속죄(贖罪) 사역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 되게 하셨다. 신적 인격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또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여기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죄 곧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이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하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또한 그의 속죄 사역을 택하신 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는데도 필요하였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지금 그의 영(靈) 곧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죄에서 실제로 불러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신다. 즉 신적인 구주께서는 죄인들의 ‘실제적’ 구주이신 것이다. 그는 피 흘려 사신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40)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本質)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우리는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다음 4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신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주’(主, κύριος, אֲדֹנָי)라는 명칭으로 불리신다. 신약성경에서 ‘주’라는 명칭이 예수님께 약 667회 사용되었다. 신약의 ‘주’라는 명칭(퀴리오스 κύριος)은 구약의 ‘여호와’(아도나이, אֲדֹנָי)라는 명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우주와 인간의 참 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칭이다. ‘영광의 주’(고전 2:8)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롬 10:9)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 2:11)
그는 또한 빈번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예수께 12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존칭어가 아니고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 11:27)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하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17,18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同等)함을 주장했다고 이해했다. 그는 특히 ‘하나님’으로 불리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요일 5:20) (사 9:6)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요일 5:20)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딛 2:13) 이 외에도 요한복음 20:28, 로마서 9:5을 참고할 수 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성경이 그를 ‘하나님,’ ‘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오류(誤謬)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 신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승천하신 예수께서 땅 위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屬性)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피조물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영원(永遠)하심에 대해 증거 하였고 또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원하심을 증거 하셨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맨 처음에 말씀이계셨다.)”(요 1:1)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창세 전’은 영원을 가리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이 표현은 그의 영원하심을 증거 한다.
또 그는 신적지식(神的知識)을 가지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자신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아시고”(마 9:4)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요 2:24,25)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요.”(마 17:27) 예수님의 지식은 초인간적(超人間的)이요 적신(神的)이다.
또 그는 신적 능력(能力)을 가지신 자로 증거 되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이 같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屬性)들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 증거 하고 있다. 골로새서 2:9은 이 사실을 요약하여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했다.
- 신적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먼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을 창조(創造)하신 일에 관여하신 자 곧 창조자로 증거 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략) 다 그로 말미암고”(골 1:16) 창조는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 성경은 예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 가진 자로 증거 한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이도 피조물(被造物)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한 그는 신적 권위(權威)를 가지신 자로 말씀하시고 교훈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중략)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28) 특히 그는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기적(奇蹟)들을 행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문둥병, 중풍병, 열병, 혈루병 등에 걸린 자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나사로), 떡 기적들을 행하셨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예수님은 또 사람들의 죄(罪)를 용서(容恕)하셨고 그들을 죄에서 자유(自由)하게 하신다고 말씀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이 말하되)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5,7,10)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히 1:3)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또 그는 참된 안식(安息)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피조물 중에는 없다.
또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기도의 응답은 피조물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요 15:26) “내가 그(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 하나님의 영(靈)을 보내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또 그는 마지막 날 세상 모든 사람을 심판(審判)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딤후 4:1)
- 신적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란히 언급되심으로 신적 영광(榮光)을 받으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신적 영광을 선포하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하였다.(요 10:31-33)
그는 아버지와 함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자이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특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돌린다.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 지어다 하니”(계 5:12,13)
이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써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神的) 영광을 알고 확신하자. 신적 구주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이 사실과 이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그가 ‘참 사람’이심을 또한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다음 3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인적(人的)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를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씨’(창 22:18), ‘한 아기’(사 9:6), ‘이새의 줄기’(사 11:1) 등으로 불렀다. 이것들은 다 그가 사람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이 명칭은 복음서에 약 84회 나오는데 일차적으로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 한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롬 5:15)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고전 15:21)
- 인적(人的)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는 어린 아기로 출생하셨고 그 지혜와 키가 자라셨다.(눅 2:40,52) 또 그는 몸의 연약하심도 보이셨다. 그는 40일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고(마 4:2, 21;18)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배에서 주무셨고(마 8:24) 길을 걸으실 때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셨고(요 4:6)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을 때 고통당하시고 목마르셨다.(요 19:28)
또 그는 영과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증거 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σάρξ)는 인간 본질 즉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히 2:14)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그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 피와 물을 흘리셨다.(요 19:34)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발을 보이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눅 24:39-43) 그는 참으로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또 그는 지식의 제한(制限)을 보이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막 11:1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막 13:32)
- 인적(人的)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히브리서 4:15는 증거 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셨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마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마 14:2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3.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인격 즉 한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 nature)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 인격(人格, person)은 지식(知識)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를 가진 행동 주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정의(知情意)의 특질 자체는 인격에 속한다기보다 성질(性質, nature)에 속한다고 본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증거 된다.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항상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그를 위하여 ‘나는, 나의, 나를, 당신은, 당신의, 당신을, 그는, 그의, 그를’ 등의 단수(單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를, 당신들은, 당신들의, 당신들을,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등의 복수(複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않았다.
-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사이에 어떤 인격적 구별이나 교제의 증거가 없다.
-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다 한 분 예수께 돌려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신성)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과 사역이 인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그의 인적 속성과 사역이 신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도 있다.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2)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태초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이 계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격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독립적 인격이 아니고 신적 인격이신 말씀과 결합함으로 그 인격 안에서 인격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 인격’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신적 인격과 결합하자마자 인격이 되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초대 교회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 480-543)와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 같은 이들은 ‘내(內) 인격’(interpersonal)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신적(紳的) 인격 내에서 인격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의(知情意)는 성(性, 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特質)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의지(紳的意志) 뿐만이 아니라 인적의지(人的意志)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의지와 그의 인적의지는 조화(調和)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의지는 그의 신적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Third Council of Constantinople, 680-681 AD)는 이것을 이렇게 진술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신인적(神人的, theanthropic) 인격 즉 신인(神人, God-man)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性)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3) 신성과 인성 연합의 결과 : 삼중적 전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單一) 인격(人格) 안에 연합된 결과 삼중적(三重的) 전달이 있다.
- 속성(屬性)의 전달이다.
예수는 신적속성과 인적속성을 함께 갖고 계시나 그것들은 한 인격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인적속성)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신적속성)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신적속성)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인적속성),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신적속성)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사역(事役)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사역들과 인적사역들은 다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사역은 신인적(神人的) 성격을 가진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 은혜(恩惠)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은혜와 영광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존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4.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오해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여러 가지의 오해들이 있었다.
(1) 에비온파와 알로기파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는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와 그에게 메시아(Messiah)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分離)시킴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2) 도케티파
도케티파(Docetism, 假現說)은 그노시스주의(Gnostics), 게린더스(100년경), 말시온, 사벨리우스파 등의 생각으로서 위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입장에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신적 그리스도께서 그의 세례 받을 때 내려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그를 떠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환영(幻影, phantasm)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분명히 증거하고(요 1:14)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했다.(요일 4:2,3, 요이 7)
(3)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Arius, 250/256-336)는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첫 피조물’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주장했다. 초대교부 오리겐(Origenes Admantius, 185?-254)은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시며 영원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이런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요 ‘크신 하나님’(딛 2:13)이라고 증거 했다.
이 아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의 거센 반박을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同一)한 본질(本質)이심을 주장했다. 주후 325년 니케야회의(The First Council of Nicaea, 32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ὁμοούσιος, homoousios, 호모우시오스, 동일본질)는 신앙을 바른 견해로 선언했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말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半) 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라.”(ὁμοιούσιος, homoiousios, 호모이우시오스, 유사본질)고 주장했다. 비록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라는 말이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와 ‘아이’(i)자 하나만 다르지만 그러나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즉 반(半) 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이 명백히 증거 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4) 아폴리나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 310-390)는 사람이 영(靈)과 혼(魂)과 몸(肉)의 세 실체(實體)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靈)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본질 중 혼(魂)과 몸(肉)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예수께서 완전한 ‘참 사람’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5)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신적(神的) ‘말씀’이 인성과 한 인격체로 유기적(有機的) 결합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 속에 거하셨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두 인격 곧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 참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6) 유티커스파(Eutychianism)
유티커스(Eutyches, 378-456)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混合) 된 제3의 본질 혹은 성(性)이 되셨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區別)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7)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
일의설(一意說)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意志)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性, 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 신적의지(神的意志)와 인적의지(人的意志)를 가지고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질(本質)과 신적의지와 인적의지 두 의지(意志)를 고백한 것이었다.
(8) 양자설(養子說)
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Theodotus of Byzantium, 2nd century)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사람이며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Felix, bishop of Urgel, Spain, ?-818)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9) 속성(屬性) 전달설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이나 루터파(Lutheran)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sm)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
(10) 인성 중심의 기독론
-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理想的) 윤리적(倫理的)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은 무의미하고 그의 도덕적 교훈을 따르는 것이 구원(救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인류역사가 절대자의 자기 전개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과정의 절정이고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汎神論) 사상에 불과하다.
-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끊임 없는 완전한 연합의식을 가지셨고 하나님은 그 안에 완전히 거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무죄 완전한 인격으로 이상적 인간성을 충분히 실현하셨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이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그것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셨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재(先在), 성육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리들은 종교적으로 무가치하며 신앙에 방해거리가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11) 게노시스설(Kenoticism)
19세기 어떤 루터파 학자들이 주장한 게노시스설은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ἐκένωσε, 에케노세)라는 말씀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왔다. 이 견해 주장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신적 속성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그 모든 속성들을 회복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과 충돌된다.(말 3:6, 약 1:17) 또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빌립보서의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추시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심으로써 마치 신성이 없으신 자처럼 행동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 점진적 성육신설
도르너(Isaak August Dorner, 1804-1884)는 게노시스설에 반대하여 성육신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점진적(漸進的)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씀’(로고스)께서 인성의 수용성의 성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인성과 연합되셨고, 그 연합이 부활 때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식(意識)과 한 의지(意志)를 가지신 신인(神人)이 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다.
결 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 혹은 사상은 역사적 신조들에 잘 진술되어 있다.
-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있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 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 칼케톤 신조(Definition of Chalcedon, 451)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선조들을 따라 모든 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니, 그는 신성(神性)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호모우시온),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한 본질이시고(호모우시온);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시되 죄는 없으시고; 신성에 의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혼동 없이(아슁퀴토스 άσυgcύτως), 변화 없이(아트렙토스 άτρέπτως), 분할 없이(아디아이레토스 άδiaiρέτως), 분리 없이(아코리스토스 άcωρίστως) 인정되실 유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시고;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그 연합에 의해 결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한 실존(위, 位)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므로 두 인격들로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거룩한 선조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대로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
제8장 2항 :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와 동등하신데 때가 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의 본질을 받아 잉태되심으로 그 모든 근본적 특성들과 공통적 연약성들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두 개의 전체적, 완전한, 구별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었다.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며 그러나 한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8)
제21문 :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상의 신조적(信條的) 진술들의 요지(要旨)는 다음과 같다.
- 그의 참된 신성(神性)
- 그의 참된 인성(人性)
- 그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시다. 그러나 그는 한 인격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주와 중보자는 이와 같이 놀라운 신인적(神人的) 인격이시다. 그는 놀라운 구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시다.(*) 김효성 목사 / 연세대학교(철학과) 졸업 (B.A.);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신학대학원] 졸업 (M.Div. equiv.); 미국, 페이스(Faith) 신학대학원 졸업 (Th.M. in N.T.); 미국, 밥 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 졸업 (Ph.D. in Theology);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뉴욕노회에서 목사 안수; 총회신학연구원(합동보수-냉천동) 교수 역임; 예수교 장로회 신학연구원 교수 역임; 현재, 합정동교회(서울, 마포구 합정동) 담임목사; 현재,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PART Ⅱ
동정녀 탄생과 그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의미
예수의 동정녀(童貞女) 탄생이란 예수의 동정녀에 의한 수태(受胎) 즉 남자와의 성적 접촉이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 동정녀 탄생은 모든 정통 기독교의 신앙고백들에 공통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는 이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대한 반대 또한 계속되어 왔다. 더욱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면서 이 조항은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성경이 지닌 표준의 지위를 부정하고 때로는 기적의 가능성을 추정한 데서 귀결된 결과였다. 여기서는 그 반대 교리에 대한 주장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고찰 해보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초대교회 전승과 반대
(1) 사도 신경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으셨음을 고백하는 오늘날 사도 신경의 형태는 5,6세기경 고울(Gaul) 지방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그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사도 신경은 로마교회의 세례고백에 근거한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사도신경의 후기 본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기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사도신경 초기형태는 이미 2세기 중반에 전 로마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북 아프리카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과 고울과 소아시아 지방의 이레네우스(Irenaeus, 140-202)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로마 중요 교회들의 초기 고백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가 출현했다는 것은 사도신경이 다른 새로운 교리와 섞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반대
2세기에 나타난 강력한 증거는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歷史性)과 사실성(事實性)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 다 동정녀 탄생을 지지(支持)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초기에도 반대(反對)가 있었다.
이교도(異敎徒)들의 반대도 있었으나 주로 유대인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좀 더 정확하게 예수 관련 전승(傳承)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파급효과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켈수스(Celsus)와 케린투스(Cerinthus), 카포크라테스(Carpocrates) 그리고 초대교회 때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에비온파(Ebionites) 등이 있었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 문제에 대해 2세기 이후 부정적 증거들은 순수하게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철학적이거나 교리적 전체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로 오면서 동정녀 탄생 기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더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서 폰 캄펜하우젠(Hans Erich Freiherr von Campenhausen, 1903–1989)은 마태의 족보(族譜)가 그 자신의 동정녀 탄생 제시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H.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r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E.T., 1964, 10ff.)
그런가 하면 테일러(Vincent Taylor, 1887–1968)는 ‘Proto-Luke’ 가정(假定)에 근거해서 누가복음 1,2장은 본래의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삽입(揷入)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Vincent Taylor, Behind the Third Gospel [1926], 164ff.) 로빈슨(John Arthur Thomas Robinson, 1919–1983)은 동정녀 탄생 교리가 예수를 우리와 달리 참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1874)는 역사적(歷史的) 기독교를 부정하면서 신앙적 기적과 초자연을 모두에 대해서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은 스트라우스에게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다. 케어드(George Bradford Caird, 1917–1984)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이야기가 그리스 세계에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오해(誤解)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G. B. Caird, Luke [1968], 31)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도 동정녀 탄생은 유대적 맥락이 아닌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91ff.) 그의 제자인 콘첼만(Hans Conzelmann, 1915–1989)은 이를 다신론(多神論)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교(異敎)에서의 신현(神顯)과 성육신 이야기들을 언급하고 있다.(Conzel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78)
3. 동정녀 탄생의 교리의 중요성
많은 사람들의 이 같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한 일반생육법(一般生育法)에 의해 출생(出生)하셨다면 그도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罪人)일 뿐이며 그 자신이 죄인이므로 자신 뿐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 1921)는 초자연적(超自然的) 그리스도와 구원이 초자연적 출생의 필연적 결과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주는 반드시 ‘하나님의 속성’과 ‘죄(罪) 없는 인간의 인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동정녀 수태 교리는 정통 기독론의 중요한 골격 중 하나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과 혼동한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영원하신 성자(聖子)가 인간(人間)이 되셨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인간이신 예수께서 인간 아버지를 두시지 않았음을 말한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는 성육신을 ‘선재(先在)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人間性, (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超歷史的)인 분이 역사(歷史)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사건’으로 보았다. 동정녀 탄생이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예수는 이처럼 이 세상과 역사 가운데로 오실 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들 가운데 오셨다.
이것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의 영역을 벗어난 사건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취하실 때 그는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방식을 취하셨다. 따라서 그녀의 몸 안에서 다른 태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10개월 동안 자라 태어나신 것이다. 성육신의 사실은 우리의 성찰(省察)에 앞서 이미 있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을 생물학적(生物學的)으로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브루너는 성육신 교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동정녀 탄생 교리는 거부한다. 그는 예수가 만약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는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메시아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육신 하도록 하셨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찰과 성찰에 따라서 이 사건이 바뀌거나 그 의미가 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브루너와 달리 동정녀 탄생 교리를 성육신 교리와 연관시킨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 교리 속에서 성육신의 표징을 보았다. 바르트는 이사야 7:14을 아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는 동정녀 탄생에서 상징화(象徵化)되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사실(事實)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모든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태도는 우리 시대와 같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시대에 아주 필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4.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 반대에 대한 비판
(1) 동정녀 탄생이 신약에 두 단락에서만 진술된다는 문제
동정녀 탄생은 신약성경의 두 단락에서 명백하게 진술되고 있다.(마 1:18-25, 눅 1:26-38)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으나 다른 단락에서도 가끔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막 6:3, 요 1:13, 갈 4:4) 신약성경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때로 이 교리의 부족한 역사성을 말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두 유아기 기사에 공통되는 부분이 동정녀 탄생 기사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기사가 초기의 공동 전승을 기초로 삼았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한 마태복음 1:23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이사야 7:14을 인용하고 있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예언의 배경은 유대왕 아하스가 하나님을 떠나 앗수르의 이방 왕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를 꾸짖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표적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어 ‘알마’(המלע)의 번역인데 일반적으로 ‘알마’는 처녀를 가리키기보다 ‘젊은 여성’ 혹은 ‘결혼 적령기의 여성’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약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LⅩⅩ)에서 명확하게 ‘처녀’라는 말인 ‘팔데노스’(παρθὲνος, 남자를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정절을 지킨 처녀를 의미)로 번역했다. 그 말은 구약의 ‘알마’라는 말이 ‘처녀’를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確證) 하는 것이다.
‘처녀’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베투라’(הꗚוּתꔶ)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요 예수님이 꼭 동정녀 탄생을 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마’라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과 처녀는 기능(機能)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녀 마리아’를 ‘알마’로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마리아는 젊은 여성으로 ‘처녀’였다. 그것은 누가복음 1:34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그녀에게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요?”라고 자신이 처녀인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또 잔(Theodor von Zahn, 1838–1933)은 제롬(Jerome, 347-420) 시대 이래로 구약에서 ‘알마’(המלע)가 나오는 모든 구절은 항상 ‘처녀’(virgin)로 쓰여 왔다고 했다. 더구나 70인 역이나 마태는 젊은 여인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잉태하리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 처녀는 미가 5:3에 언급된 특수한 처녀를 가리켰다.
‘가나혼인잔치 기적’(요 2:1-11)이 성경에 단 한번 소개되었다고 이 표적(標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동정녀 탄생은 분명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가 기적(奇蹟)이었음과 인간 아버지를 두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옳다.
(2) 동정녀 탄생이 완전한 인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견해
예수의 부모 중 한 사람만 인간이라면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몇 사람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성(人性)의 본질과 그것이 한 세대에 다른 세대에 대해 혼동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완전(完全)한 인간이었고 특히 아담의 경우는 어떤 의미든 간에 그에게 인성을 전해준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남성 인자(因子)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견은 무시될 수도 있다.
이런 의견은 지나치게 자의적(恣意的) 해석이며 실제 그런 일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예수는 마리아의 유전인자(遺傳因子)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는 마리아에 의한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여성(女性)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남성인자(男性因子)로 구성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정자(精子)가 마리아의 난자(卵子)와 결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실존하는 남성에 의해 제공된 정자가 아니라 이 경우를 위해 성령의 능력에 의해 특별히 생성(生成)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동정녀 탄생이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중요한 견해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를 선택(選擇)하면 다른 하나는 부인(否認)할 수밖에 없다. 선재(先在)와 현재(現在) 이 둘은 시간적으로 상호 배타적(排他的)이며 결코 보완적(補完的)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부정적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선재론(先在論)은 그의 신성(神性)과 관련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은 그의 인성(人性)과 관계된다. 삼위 중 제2위 하나님으로서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언제나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런데 한 유한(有限)한 시간(時間) 속에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땅에서의 생애가 시작부터 순수한 성육신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선재론’과 ‘동정녀 탄생’이 모순(矛盾)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4) 동정녀 탄생이 자연법칙에 위배된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인간의 생물학적(生物學的) 지식과 인간 출생에 관한 지식에 상반(相反) 된다는 근거 하에 거부되어 왔다. 우리가 지금 성경의 기적과 초자연이 받아들어지지 않는 인간 역사의 연대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평주의(批評主義)는 기독교 신앙이 자연(自然)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규칙성(規則性)을 부인하여 과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반대하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적(異蹟)을 정의하는 데 있어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교부시대로 웅변적으로 되돌아가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적은 언제라도 검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자연을 산발적(散發的)으로 일어나는 현상 혹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인 일이다. 자연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통일성(統一性)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와 과학(科學) 간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학 혹은 세계관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구조(構造)에서 바라볼 때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인간 구속(救贖)이라고 하는 위대한 초자연적(超自然的) 구도(構圖) 가운데 일부이다. 자신의 과학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신적계시’라고 하는 고차원적 근거 위에서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상 구속’을 믿는다. 만일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의 이 세대의 위대하고 장대한 ‘구원역사’(救援歷史)’ 드라마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면 그 교리는 지나간 민족 설화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또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아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동정녀 탄생’은 부적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평가하기 어려운 말이다. 분명히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고백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언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을 고백하고 있다. 처녀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처녀의 몸으로부터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참 인간’이셨음을 하나님께서 아셨다는 사실은 역사신학(歷史神學)에서 하나의 무언(無言)의 전제(前提)임이 분명하다. 우리들 의견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조들이 그의 인격과 그 진정성을 또한 확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현대의 심리학적 연구와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따라 우리가 인간을 만드는데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교리화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증식된 개구리가 그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개구리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 인간됨의 뜻과 인간의 유전학에 관한 보다 많은 지식을 갖기까지는 위의 반대의견은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5) 동정녀 탄생은 지엽적 문제라는 견해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기독교신앙 가운데 지엽적(枝葉的) 문제라는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이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정녀 탄생 교리에 대한 증거들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된다. 또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결코 신약성경 본문들 가운데 기록된 ‘복음’ 혹은 ‘케리그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신학적 내용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평가절하 하거나 제거(除去)하려는 것이 비평적 혹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다른 기준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이 동정녀 탄생에 침묵하고 있다고 말할 때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이 동정녀 탄생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다른 기준이란 ‘동정녀 탄생’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설사 알려졌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기준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침묵으로부터의 주장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 논법은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의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외의 부분)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이라는 논법이 논리적인 면에서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동정녀 탄생’과 ‘주님의 최후만찬’을 흥미 있게 비교했다. 주님의 만찬보다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자료가 더 많다. 만일 어떤 사실의 중요성 여부(與否)를 그에 관해 기록한 본문의 구절 수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그처럼 평가절하 한다면 주님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도 그만큼 평가절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1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가 절수를 세는 방법으로 주님의 만찬에 관한 신학적 중요성을 계산해낸 사람은 없다. 어떤 주어진 개념이 그에 관한 성경의 증언 가운데 제아무리 물량적으로 풍부하더라고 그것을 신학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신학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관한 아주 광범위한 논의가 구약성경 가운데 존재한다. 어떤 개념의 중요성을 매기는 것은 그 개념 자체에 의해서 이며 따라서 역사적 기독론의 방법론에서 볼 때 동정녀 탄생 교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6) 타종교 전설과의 유사성 견해
성경에 기록된 동정녀 탄생 기사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제안이 있다. 즉 다른 종교문헌들 속에 나타나는 유사(類似)한 기록들을 적용시켰다고 보는 견해이다.
플루타르크(Lucius Mestrius Plutarchus, 45-157)는 한 여인이 신적 영(靈, (Pneuma)에 접했을 때 임신(妊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의 ‘누마’(Numa) 전설에 관해 말하면서 누마는 자신에 아내가 죽은 후 신적(紳的) 존재인 에게리아(Egeria)와 관계를 맺기 위해 고독(孤獨)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제우스가 어떻게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그리고 알렉산더를 낳았으며 아폴로가 어떻게 이온과 아스클레피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를 낳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런 맥락(脈絡)에서 ‘동정녀 탄생’을 신화(神話)나 전설(傳說)로 보려는 시도다.
하지만 신화 속에 나타난 탄생 이야기는 동정녀가 아닌 단지 신(紳)과 인간 사이의 간음(姦淫)에 불과하다. 성경의 ‘동정녀 탄생’은 전적으로 이와는 다르다. 무디(Dale Moody, 1915-1992)는 이교도들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성적 문란 신화와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고상한 일신론(一神論)의 간격은 너무나 넓어 아무리 조심스럽게 연구해도 그 틈새를 메울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둘 사이에 유사성은 적고 차이점은 크다.
그러므로 이방(異邦) 신화들이 복음서에 섞여들어 왔을 거라는 생각은 맞지 않다. 이와는 다르게 성경기사를 이방종교 대신 유대교와 관련해서 보는 사람이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유대적인 색채가 매우 강함으로 직접적인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본다. 유대교가 이방 종교로부터 나온 생각을 어느 정도 따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적인 특성을 띠고 기독교에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문제는 유대교가 실질적으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었다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동정녀 탄생은 사실 이교도의 생각이며 그 생각이 기독교에 직접적으로 수용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대교로 흘러들어 갔다가 점차 기독교에서 이를 수용했다고 하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믿음이 들어가 있었음에 분명하다고 가정한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에 대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6문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고 묻고 이에 대해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영원하신 성자(聖子)는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無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볼 때에 유한한 인간은 늘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의심과 시비를 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동정녀 탄생 교리에 있어서도 풀리지 않은 부분이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기록은 여전히 신적 권위 아래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http://irt.kr(국제개혁신학목회연구원)
예언성구 | 예언주제 | 성취성구 |
창 3:15 | 1. 여자의 후손 | 갈 4:4 |
창 12:2,3 | 2. 아브라함의 씨 | 마 1:1 |
창 49:10 | 3. 유다의 홀 | 눅 3:33 |
사 9:7 | 4. 다윗의 자손 | 눅 1:32,33 |
단 9:25 | 5. 예수 탄생시기 | 눅 2:1,2 |
미 5:2 | 6. 베들레헴에서 탄생 | 눅 2:4-7 |
호 11:1 | 7. 이집트로 피신 | 마 2:14,15 |
사 9:1,2 | 8. 예수의 갈릴리사역 | 마 4:13-17 |
사 61:1,2 | 9. 상처 받은 자 치유 | 눅 4:18,19 |
사 53:3 | 10. 유대인에게 버림받음 | 요 1:11 |
시 110:4 | 11. 멜기세댁반차 제사장 | 히 5:5,6 |
슥 11:12,13 | 12. 은 30에 팔림 | 마 26:15, 27:5-7 |
사 53:12 | 13. 참혹한 희생 | 막 15:27,28 |
시 69:21 | 14. 초에 저린 쓸개를 줌 | 마 27:34 |
시 22:18 | 15. 그의 옷을 나눔 | 마 27:35 |
시 34:20 | 16. 뼈가 부러지지 않음 | 요 19:32,33,36 |
슥 12:10 | 17. 옆구리를 찔림 | 요 19:34 |
사 53:9 | 18. 부자의 묘에 장사 | 마 27:57-60 |
시 49:15 | 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 막 16:6,7 |
시 68:18 | 20. 하늘에 오르심 | 막 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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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Incarnation)
육체(Car) + 안에( in ) + 태어나는 것(natus)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을 뜻하는 말로 성경에는 이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 되심에 대한 성육신의 교리는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요 1:14; 롬 8:3; 골 2:9; 딤전 3:16)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골 2:9).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교리는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리로 하나님이신 성자의 자기 비움, 자기 낮아짐을 보여 준다(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성육신의 교리가 확정된 것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확정된 성육신의 교리 내용은 “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며 … 서로 혼합될 수 없고, 변하지 않으며, 나뉠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는 두 본성을 가지신 것으로 … 각 본성의 성질은 그대로 보존되며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고 …”이었다.
성육신의 교리에 반대하여 아리우스(Arius, 256-336)는 그리스도를 천사나 하나님의 피조물로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파괴하는 이론을 주장하는가 하면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님의 인성은 시인하면서도 그분의 인격 속에는 육과 혼이 있고 신성 속에 영(spirit)이 있다고 주장하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
유튀크스(Eutyches)도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들의 그것과는 다르며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하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케노시스(Kenosis)파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신성의 일부 또는 전부를 비워두고 오셨다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이 모든 주장들은 성경에서 증언하는 성육신의 교리를 부분적으로 보았거나 잘못 본 것들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결론적으로
성육신 교리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신이자 인간이신 분으로 그 양성(신, 인간)은 모두 완전하고 참이며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양성은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연합하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이며 믿음으로만이 받을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이신가? (요1:9~14)
몇 가지 이유로 예수님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이라고 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 부자의 개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부자의 개념과 다릅니다. 이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위격을 설명하는 말이지 한 분이 다른 한 분보다 더 열등하다거나 혹은 피조되었다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격이 다른다는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속성을 가지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주옵소서 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 분은 성부로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성자로 부르셨는가? 그것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육신이란 무엇인가?
성육신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기 전, 다시 말해 성 관계를 갖기 전에,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셨고 보통 아이들과 같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누가 복음 2:52절을 보면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인간적 출생과 성장 과정을 생략한 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단순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고 했고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구절을 종합할 때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태초에 말씀 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은 요한복음 서론에 있어서 가장 축이 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떻게 말씀되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바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 이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 일서 1장에서는 더 구체적인 언어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14절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입니다. 여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할 때 “되었다” 는 말은 번역할 때 매우 주의를 요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 한 마디를 잘못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파괴되어 이단으로 몰릴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되었다는 말은 만들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혹은 피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게네토”라는 말인데 전혀 새로운 상태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데 영어로는 became 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저 되었다고 해석하면 제일 좋습니다.
이 말 때문에 초대 교회 시절 많은 이단 논쟁이 있었습니다. 4세기 초에 아리우스 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은 피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초로 성부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을 피조물의 위치에 둔 것입니다. 또 5세기 초반 유티케스 라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 둘이 아니라 이 둘이 합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단성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에 대해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아다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본체를 가지신, 세상 이전에 출생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의 어머니의 본체를 가지신 이 땅에 태어나신 인간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자 인간이시다. 그럼에도 둘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이다. 신격이 육신으로 변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됨을 취하셔서 하나가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만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감추시고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됨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육신은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입으신 이 "육신"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여기 쓰여진 “육신”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싸르크스” 라는 말인데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 시절 “아폴로나리우스”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어야 한다면 이 둘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 때 그는 결론 내리기를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기는 했지만 보통 인간이 가지는 지성이나 영혼은 입지 않았으며 그 자리를 로고스가 대신하였다 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인정했지만 예수님이 인간임을 거절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사르크스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지정의를 가진 전인, 호울 펄슨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가지셨고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해 하셨고, 주리기도 하셨고, 목 마름도 경험하셨으며, 주무시기도 하셨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극치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한결 같이 고통을 당신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 거하신다는 말은 “스케노오” 라는 말로 “거처를 정하다, 텐트를 치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장막 삼으셔서 거처를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사신 것입니다. 인간의 틈 바구니 속에 찾아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 성육신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백악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비서진을 통해서 대통령이 당신 집에 가서 하루 밤 머물고자 하는데 허락해 달라고요. 놀랍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처를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특성이 무엇입니까?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죽으시려면 인간의 육신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 죄가 용서 받으려면 누군가 그 죄 값을 대신 치르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므로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 지고 죽어 주신 것입니다. 벧전 2:24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27,28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연약성을 친히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성인으로 이 땅에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겉 모습만 인간이고 속은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상적인 출생의 과정을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연약성을 친히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하셨고 피곤함을 경험하셨고 슬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어떤 초자연적인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군대가 출동하지도 않았습니다. 고통이 전혀 감소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해 주신다. 친히 겪어 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53:6,7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죄를 담당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온전히 다 겪으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다쳤습니다. 제대로 날지를 못합니다. 그 새를 보았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료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새는 자꾸 도망갑니다. 이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너를 치료해 주려고 해 너를 도와 주려고 해 그러나 이 새는 그 마음을 모른 체 자꾸 도망갑니다. 이 때 이 사람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새를 도와 주려면 내가 새가 되야겠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 는 것입니다. 여기 우ㅠ리는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계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친히 눈으로 보고 손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 보았다는 말은 그저 스쳐 지나가듯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에테아사메타” 라는 말로 “관찰했다. 목격자 되었다” 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로 극장이라고 하는 “띠어터”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 주의 깊게 음미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조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면밀히 검토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니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을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반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이는 어떤 연구 결과가 아닙니다. 직접 보고 느낀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복음 자체에 대한 논쟁 거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았다.” 단순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문제 제기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친히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보았을 때 은혜와 진리가 전달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은혜와 진리와 경험적으로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였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받아드리고 받아 들이지 않고를 떠나서 여전히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할 때 이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진리가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 진리가 개인적으로 경험적인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고 그 때 그에게 임한 은혜와 진리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과 같이 직접 독생자의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땅을 떠나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광경을 직접 목도한 사도 요한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우리도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는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전달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그 놀라운 진리를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거절하는 사람이요 다른 한 부류는 받아 들이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통해서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요한의 증거를 들을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 마음 분을 여십시다. 요한이 증거한 그 증거, 요한이 본 그 영광 나도 보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은혜와 진리가 우리 맘 가운데 전달되는 게시의 역사를 보여 주옵소서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은 가장 완벽한 인격화이다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주님”, “예수 그리스도” 등 예배와 기도에 쓰이는 호칭에서 그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모세가 신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신은 “나는 나다”라고 대답했다.다시 말하면 그는 존재하는is 자being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신은 너무 신성해서 입에 올릴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네 개의 자음으로 표기했고, 이를 영어로 옮긴 것이 YHWH이다.
여기에 모음을 붙여 Yahweh(야훼)라고 쓰고 여기에서 여호와(Jehovah)가 나왔다.
이슬람교에는 동정심의 아라만(Ar-Rahman), 복수의 알문타킴(Al-Muntaqim) 등 알라의 속성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신의 이름 아흔아홉”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바그완(Bhagwaan)은 하나님, 이스바(Ishvar)는 우주의 통치자, 파라마트마(Paramatma)는 최고의 영이다. 브라마, 바슈누, 크리슈나, 라마 같은 이름은 그래도 친숙한 편이다.
불교도들은 인간보다 높은 경지의 존재인 천신devas이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불교는 비유신론으로, 주동자로서의 신 개념이 없다. 따라서 누구 또는 무엇, 즉 인격적 존재인가 비인격적 존재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실존 인물인 붓다는 영적 창시자, 보살, 깨달은 자의 속성을 지닌다.그는 자력으로 열반을 얻었고, 깨달은 자, 즉 붓다의 드러나지 않는 측면인 다르마카야(Dhrmakaya)의 화현으로 이해된다.
붓다는 누구라고 물을 수 있는 실존인물이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는 정신적 모범이었다.
신이 누구, 즉 인격적 존재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속성과 특질을 논할 수 없는 추상적 존재인 사람들도 있다.
인격화 신이라도 말에 담길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명사와 대명사로 그 부분을 붙들기도 한다.
절대적, 보편적인가 하면 또 상대적, 개인적인 신 개념 안에서 적절히 긴장을 유지하며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이 어느 종교에서나 화두이다.
종교와 신앙도 진화한다는 점에서 세상 만물과 별다르지 않다.
유대교의 천재성은 다신교의 온상에 일신교의 씨앗을 뿌린 데 있다. 기독교의 천재성은 성육신 개념에 있다.
즉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알 수 없는 존재를 알 수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은 가장 완벽한 인격화이다.
서구 문화권은 신을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게 했으며, 나아가 신을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요컨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는 육화한 영, 즉 무엇이면서 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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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교리강좌(25) 독생자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성경 교리를 살펴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면서 주님의 인격을 고찰하였다.
하지만 특별히 구속의 교리를 살펴볼 때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접할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의 교리이며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발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분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마귀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에 대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성육신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성육신(聖肉身)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 좌우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속의 교리 또한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 알게 된다.
(2)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肉體)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인간적 본성과 결합해 한 인간을 형성한 것이 단순한 신적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동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혼합되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분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셨다. 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이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요점은 성육신 교리는 성자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그런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겉모습에는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상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계실 때도 그분은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 교리를 설명해선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was made’라는 문구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것은 번역이 최선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육신이 되어’(he becomes flesh) 또는 ‘그가 육신을 입어’(he took on flesh)로 번역되어야 한다. ‘made’ 즉 ‘만들다’라는 개념은 일종의 변화의 의미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본성의 모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있는데 이 천사들은 분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육신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천사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구약에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즉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한번 이상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를 ‘신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한다. 신의 현현은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 7)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만 메시아가 그에게로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 주님이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단순히 몸만 입으셨다고 주장하거나 몸과 동물적인 혼만 성자가 취하시고 영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단적 주장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성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취하셨다. 이 말은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성의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새로운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절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성육신 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 즉 구원에 대한 교리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에 분명하게 밝히듯 우리가 혈육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성육신 교리가 조금이라도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2. 동정녀(童貞女) 탄생
신비로운 성육신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바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다룰 수밖에 없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 있어 그 순서도 매우 중요하다.
(1) 동정녀 탄생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최초의 위대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을 보자.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신비로 가득 찬 위대한 주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교리에 접근할 때는 우리가 이전까지 배웠던 교리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확실히 하였다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성경, 계시, 하나님에 대한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 등)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성경과 기적에 대한 교리에도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이성을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나의 작은 이성이 항상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의지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는 동정녀 탄생 교리의 기초가 되는 두 구절이 있다.
– 누가복음 1:26-38 : 동정녀 탄생이 마리아에게 고지되는 장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주목하자. 천사에 대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벌써 어려움에 봉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놀랐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마리아는 놀라 주저 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놀란 마리아에게 천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 마태복음 1:18-25 : 동정녀 탄생이 요셉에게 고지되는 장면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놀랐다. 요셉은 선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였으나 꿈속에 천사가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믿음에 대해 잊고 지나간다. 그는 아무런 반대나 망설임 없이 믿고 그대로 행동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살펴볼 때 무엇보다 우리는 이 교리가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교리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이 교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에 남자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창세기 첫 부분의 교리들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남자에게 있고 여자는 그 남자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남자가 한쪽 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남자 는 이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 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타 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약속을 기억해보자. 그 약속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 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자, 이제 위의 창세기 3:15의 원복음의 은혜 언약 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남자 는 성육신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과 창조의 결과에 의해 특별히 타락의 결과로 인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성육신 사건에서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하나님은 오직 여자만 사용하셨다.
이 사실은 다시 한 번 타락이후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요셉을 통해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과 실패가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위한 인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가장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다. “주님의 신성에 어머니가 없었던 것처럼 주님의 인성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이 말은 매우 훌륭한 표현이다.
누군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아무도 대답 못한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마리아로부터 그녀의 세포 하나로부터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있다.
– 성육신은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의 결과이다.
– 성령님은 성자가 취하신 인성이 죄가 없도록 하셨다.
“나실 바 거룩한[(죄가 없고 순결한) 이는”(눅 1:35) – 이것은 마리아가 죄 없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그녀의 일부분이라도 거룩하게 되었음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성령님은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인성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셨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셔서 모든 죄와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의미
1) 성육신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분명한 모양이 되었다.
당신이 정말로 성육신의 교리를 믿는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가 정말로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것은 사실이다)이심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비의 표적이다. 주님에 대한 모든 것이 신비하다. 주님의 탄생도 그러하고 세상을 떠나가신 일도 그러하며 부활하심도 그러하다. 동정녀 탄생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부활에 대해서도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2) 주님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죄 없는 인성을 입으셨다.
만일 당신이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가 만약 요셉의 아들이었다면 그도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라는 말씀이 적용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원죄와 죄책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위해 특별한 인성을 새로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단적 가르침이라 미리 말했다.
주님은 인성을 마리아를 통해 받으셨고 그의 인성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와 모든 오염에서 자유롭게 된 인성이었다.
우리는 그런 주님 앞에 서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경건의 비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행위 중
가장 최고의 행위였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며 일찍이 일어났던 모든 일중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남자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성육신 사건은 우리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받기 위해 벌어진 일이란 것을 깨닫고 기억하자.
< 참고 >
제22문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5문 :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제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 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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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적 선교원리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든지 보내든지 하는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우선 ‘선교적인 삶(Missional Life)’을 평생 살도록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선교적인 삶을 산다는 말은 타 문화권에 직접 가서 사역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평생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세계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변화하는 선교 환경에 따라 각 시대에 따라 선교의 수단과 방법, 전략이 달라졌다. 특히 교통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더 복음 전파의 속도가 빨라졌고, 영역이 넓어졌으며 이에 따라서 나타난 선교의 열매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2)”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현장에 여전히 많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특히 인간관계에 갈등이 많고,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가장 큰 요인이 동료 선교사들과의 갈등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선교를 수행하는 선교사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며, 왜 현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기는가? 선교의 수단이나 방법 그리고 전략 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이 비본질적인 요소에 집중하면서 정작 잊지 말아야 하는 본질적인 선교의 성경적인 원리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교 137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받는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전환된 후, 지난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해 1,5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한국선교는 위기를 맞고 있고, 선교사의 파송 숫자가 급감하고 있으며, 특히 코로나 시대에는 더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꾸준히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난 2월에 KWMA(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리서치 전문기관인 KRIM(한국선교연구원)이 공동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0년 말 한국은 168개국에 22,259명의 한국 국적의 장기 선교사가 사역하므로 여전히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도 2021년 3월 현재 55개국에 49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사역함으로 양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성경적인 선교의 원리를 선교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양적 성장의 변곡점을 넘어서고 있는 고신선교도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그러면, 본질적인 선교의 원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육신적 선교원리이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1. 성육신(Incarnation)이란 무엇인가?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말은 본래 ‘육신으로(With the flesh)’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동정녀 탄생으로 그 자신이 본래 가지신 신성에 더해진 본성, 즉 인성을 취하신 것을 가리킨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히 흠 없는 신성이 있으신데 여기에 인성이 더해진 100% 하나님이자 100% 사람이 되신 것이다. 즉, 그는 50%는 하나님이고 나머지 50%는 사람인 존재가 아니라 100% 하나님이자 100% 사람이시다. 그래야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온전한 인격체이시므로 구속사역을 능히 하실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는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시고 그분이 사람 가운데 거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시고 '은혜와 진리' 충만하신 중보자가 되셨다.
‘은혜’라는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분에 넘치는 귀한 것’이란 뜻이 있다. 둘째로 ‘아름답다’라는 뜻이 있다. 셋째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와 도움’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을 다른 목적이나 사심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행위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받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것, 분에 넘치는 것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자의 모습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시다. 진리란 인생의 등불과 같은 것이고, 등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참된 진로를 밝혀줄 참된 가치가 된다. 또한 진리는 곧 생명이다. 진리는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죄에 매여있고, 두려움에 매여있고, 심판에 매여있다. 우리는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모든 삶에서 묶여있다. 그러나 다음 성경 구절은 이에 대한 해답을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영원히 한 인격 안에 죄 없는 인성을 소유하셨다. 이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한 죄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기 때문에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실 수가 있고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의 은혜이다.
2. 이 성육신이 어떻게 선교사에게 나타나야 하는가?
효과적인 타 문화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는 선교지 사람과 동일화(Identification)가 되어야 한다. ‘동일화’라는 말은 ‘대상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현지인과의 동일화’란 그들의 문화와 의식주 생활을 무조건 모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태도의 문제로써 그 목적은 선교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신뢰감을 주도록 하는데 있다.
한국선교는 여전히 세계 선교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으나 한국식 패턴과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는 한국적 선교, 선교지를 한국화하는 선교, 비서구인데도 비서구교회를 무시하는 태도 등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지속해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선교를 위해 한국선교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再考)가 불가피하다. 이것은 선교사라면 응당 ‘동일화(Identification)에 대한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성육신의 목적은 동일화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선교의 접촉은 먼저 인간 대 인간의 신뢰감이 확보된 후에 인간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 실례는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 동일화 작업을 통해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셨다.
선교사는 모름지기 선교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그가 전하려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소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가장 좋은 접촉점은 선교사 자신이다. ‘선교사가 타 문화권으로 들어갈 때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교훈을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라고 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선교지에서 모름지기 작은 예수로서 선교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선교사는 선교지 문화 속에서 성육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교사는 그저 단순히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 분명히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러기 위해서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원의 메시지를 소유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메시지를 실제로 구체화하여 가르치며,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선교사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려고(엡 3:8)’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말이나 글로 가르친다고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선교사는 사역의 성격상 자기와 매우 다른 사람들과도 끊임없이 접촉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본을 따른다는 것은 철저한 ‘개인적 재교육(Personal Reorientation)’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철저하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타락한 이기주의의 본성을 버리고 죄인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며 철저하게 이타주의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자신을 다시 훈련하는 것’을 말한다. 이 훈련은 단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민족적 우월주의와 선민의식을 떨쳐버리고 복음을 전해 받는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동화하며, 피선교지 주민들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피선교인 지향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0~23)”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All things to all men)’의 전도 방법을 취하였는데 이것은 결코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방법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영혼 구원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의 목적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동일한 목적이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역에 있어서 선교사가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과 나아가 선교지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에서 어긋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선교의 토착화(Indigenization)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선교사역의 목표가 선교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들고 서로의 교제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선교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항상 자기보다 선교지 사람들을 더 낫게 여겨야 하는 낮아진 종의 위치에 서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선교의 상황이 격변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선교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극단적으로는 ‘선교사 무용론(宣敎師 無用論)’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는 선교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왜 교회가 굳이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며, 왜 선교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지에 있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면 굳이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 있지 않아도 비대면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경제적인 지원도 온라인으로 하여 이제는 선교지에서 현지인 스스로 선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굳이 예수님을 몸으로 이 땅에 보내주셨듯이 교회가 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하여 거기에서 작은 예수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선교지의 사람들이 선교사의 삶을 통해서 배워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려면 선교사가 현장에서 그의 삶으로 그 말씀이 진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SNS(Social Network Service)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3. 성육신(Incarnation)과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동일화(Identification)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가 된다’는 뜻인데 ‘모든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환경의 짐도 함께 짊어지고 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동일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동일화에 대해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라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이방 사람에게는 이방 사람’으로 동일화함으로 성공적인 선교를 하였다.
그러므로 동일화만이 선교지 사람들의 언어와 풍속과 문화를 깊이 알게 되며, 또 복음을 전달받는 사람들과 마음의 일치를 가질 수 있다. 타 문화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마음으로 선교지 주민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섬기며 그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그 복음은 듣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깊숙이 뚫고 들어가 영혼을 일깨워 회개와 신앙의 결단으로 인도하게 된다.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의 전신인 CIM(중국내지선교회, China Inland Mission)을 세워서 18,625명의 중국인 성도뿐 아니라 1,152명의 중국인 사역자를 배출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중국인처럼 되기 위해 변발을 하고 중국인 복장으로 중국인처럼 살면서 중국인의 마음을 얻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동일화가 그 당시 동료 서양 선교사들에게 논란이 되었고 또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길이라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내려놓았고 그들처럼 낮아졌다. 그로 인해 드디어 막혔던 선교사역이 본격적으로 열렸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마음이요 선교사가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로버트 웨버(Robert E. Weber)는 동일화 모델을 가리켜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Incarnational Communication)”이라고 부르면서, “성육신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완벽한 모델”임을 주장했다.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로버트 웨버’는 세 가지 모델을 소개했다.
첫째는, ‘분리의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와 대립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세상 문화는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다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오류에 빠지게 해서 결국 신자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도록 만든다. 이 모델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델이다.
둘째는, ‘동일시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를 지지하고 그것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세상의 문화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회가 세속화될 수 있다. 이 모델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는 ‘변혁의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는 말씀은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이 견해는 복음에는 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문화까지도 변혁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바람직한 모델이다.
장중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초문화적 존재(Supracultural Being)인 하나님이 인간의 문화 속에 들어와서 문화적 규제하에 있는 인간과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구속(Redemption)을 실현하신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인 인간의 실존 속으로 들어오셔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문화와 접촉하시고 인간의 언어 세계를 통해 직접 인간과 커뮤니케이션을 하신 것이다.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선교사를 통해 들은 메시지 가운데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던가?’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집 정원을 거닐다가 한 무리의 개미떼가 열심히 집을 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아침에 일기예보를 통해 오후에 큰 비가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는 저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큰 비가 쏟아질 것이고 그러면 그동안 개미들이 수고하여 지은 집이 다 떠내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이 폭우는 개미들의 생명까지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곧 닥칠 이 위험을 개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개미들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안타까웠다. 만약에 개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이 재난을 피할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만일 개미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자기가 개미처럼 낮아져 개미의 언어로 그들에게 곧 일어날 엄청난 재난에 대해 말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어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에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해 주신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목적에 대해서 찰스 크레프트(Charles Kraft)는 그의 책, ‘기독교와 문화’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과의 친족관계(relationship)를 원하고, 인간에게 완전한 친족관계가 열쇠라는 응답을 끌어내려고 하며 또 그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은 수신자들을 그들의 고유한 상황으로부터 분리하여 발신자의 상황 속으로 끌어오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그 반대로 수신자와 동일시하는(identificational) 성육신적(incarnational) 방법을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바와 같이 발신자를 통해 수신자의 준거 기준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제임스 엥겔(James F. Engel)은 그의 책, ‘당신의 메시지는 전달되고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예수님은 인간의 죄성을 아셨다. 그러기에 죄인인 인간을 해방시키는데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함을 아셨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그러므로 스스로는 구원의 가능성이 제로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둘째, 예수님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며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구원의 시작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셋째, 예수님은 말씀을 적합하게 전달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쉽게 그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사물과 자연 만물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는 예화들을 사용하심으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도우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4. 타 문화에서의 성육신
선교사에게 있어서 성육화의 목적은 어디에서 사역하든지 낮아진 모습으로 선교지 사람들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그들과 선교사의 삶을 나누는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 문화 속에서 성육화를 이루기 위해서 선교사는 편안하고 안락한 자기 문화에서 불편한 선교지 문화로 적응해가야 한다. 빛과소금의 교회에서 사역하는 친구 김낙춘 목사의 목회 철학은, “자발적인 불편함”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선교사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는 말씀으로 도전받고 선교지 사람들의 문화 속으로 성육화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남미 파라과이에서 선교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파라과이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한국 사람을 닮았다”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파라과이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날 나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5.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
문상철 박사는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말한다. 그것은 1) 하나됨 2) 낮아짐 3) 상황화 4) 소프트파워 5) 성령의 임재가 있는 선교이다.
1) 하나됨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 가운데 실현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3~4)”고 말한다. 삼위일체의 동일성과 동일 실체성은 ‘그 실체가 3개로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인 채로 3위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실체가 나누어지지 않고 3개로 존재하는 것’이 삼위일체이다.
성경에서 하나됨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은 죄인된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인의 삶으로 명령받았기 때문에 하나됨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분리의 영’이므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성도와 성도 사이를 하나 되지 못하도록 이간시키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선교를 위해서도 하나됨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연합과 교제 가운데서 있어야만 복음으로 즐겁게 세상을 섬길 의지가 생긴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의 방법을 통한 선교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쁘신 의지가 있었다. 21세기 선교에 있어서도 교회와 선교단체들의 연합과 협력이 필요하다. 교회의 보편성과 선교단체의 전문성이 함께 연합하고 협력할 때 시너지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 분파화되고 경쟁적인 구도 속에서의 선교는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 또한 오랫동안 분열되고 개교회 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지역교회들의 한계가 극복되지 않는 한 수준 높은 선교를 하기 어려워진다. 한국교회는 이제 일치단결하여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선교지에서도 선교사들끼리 동역자들끼리 그리고 현지인들과 하나가 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속담에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 집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이 하나되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면 선교지에서 나타날 현상은 불 보듯 뻔하다.
2) 낮아짐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낮아짐과 비움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심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섬기신 모습을 통해 선교사들에게 모본을 보이셨다.
선교사의 삶은 모름지기 본국에서의 모든 문화적인 익숙함과 특권들을 버리고 타 문화권에서 불편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헌신에는 자기 문화를 기준으로 삼고 살던 삶의 패턴을 선교지의 문화를 기준으로 삼는 변화된 자세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우월감을 가지거나 자기만족을 위한 활동들을 경계하고, 순수하게 그야말로 성육신의 자세로 선교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외형과 규모를 자랑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가는 선교지는 대부분 우리의 상황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이 많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들을 쌀 신자(Rice christian)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결국 말씀으로 승부를 거는 선교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순수하게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교사는 고국을 떠날 때, 마치 물품 보관소에 자신의 물건을 모두 맡기고 떠나는 사람처럼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한국 사람이 아니라 선교지의 사람이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선교지에 도착하면 거기에서는 선교지의 상황에 맞추어 선교지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안식년으로 귀국하면 물품보관소에 보관했던 그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아서 고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선교지로 출국할 때는 다시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낮아짐의 원리를 삶의 현장과 사역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다.
3) 상황화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원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문화 가운데서 사셨지만, 결코 신성을 잃지 않으셨다. 그의 삶과 메시지는 세상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세상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으셨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구원의 역사가 가능케 되었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라고 말함으로 복음에 대한 분명한 선포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상황화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아 유대교와 성경에 정통한 자일뿐 아니라 다소에서 태어나 헬라철학에도 능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부터 보호받으며 선교할 수 있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다.
복음은 보편적인 것이며, 지구상의 모든 문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계시하시고, 또 타 문화권 전도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화적 상황은 각양각색이다. 전달과정에서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황화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한 다음, 메시지의 내용을 그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정의하고 각색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문화권 사역자가 수행해야 할 상황화의 과제이다. 물론 상황화에 있어서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모든 문화는 부패하였기 때문에 문화를 복음의 메시지 속에 가지고 들어오게 될 때 참과 거짓이 섞일 수도 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싸워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타문화권 사역자는 선교지의 문화를 알기 전에 반드시 성경과 성경의 본질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유형의 타문화권 선교이든지 간에 성경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일차적인 진리와 이차적인 진리 간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세례를 주는 것은 1차적인 진리요, 주는 방법에 대하여는 2차적인 진리이다. 2차적인 진리로 불필요한 논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
21세기 선교에 있어서도 문화적인 동화를 실현하면서도 영적인 정체성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비판적인 상황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문화적으로는 한국인이면서도 선교지 문화권의 사람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적응하면서도 보편적인 윤리의 기준에서 잘못되고 비성경적인 문화를 변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사는 문화를 선도할 책임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형이 한국 선교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4)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진리의 선포와 함께 소프트파워 혁명의 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함을 안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힘을 오용하지 않는다. 군사력은 물론, 정치력이나 경제적인 영향력, 심지어 미디어의 힘마저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서 어떤 영향력 있는 현지인들과 인맥 관계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영향력을 행세하려 든다면 그것은 성육신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에 우리는 진리의 힘을 믿는다. 진리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혁할 것을 믿는다. 진리의 힘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드파워는 겉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정신으로 임하는 선교는 진리의 역사와 함께 진정한 변화의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한 도시를 변화시키고, 한 종족을 변화시키는 힘은 바로 진리가 선포될 때 생겨난다. 이 진리가 무엇인가? 소프트 파워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초가 되는 성육신 선교의 원리이다.
5) 성령의 임재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통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33년의 생을 사셨고, 겨우 3년간 사역을 하셨지만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온전히 이루시고 세상을 변화시키신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임재로 인해 가능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고 권능으로 옷 입으심으로 능력있게 사역을 잘 감당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들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예수님께서 맡기신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선교는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동행하지 않으시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할 수 없다. 선교 역사상 크게 쓰임 받은 선교사들은 한결같은 성령의 사람들이었고, 하나같이 영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 원리는 21세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가운데 그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변함없는 선교의 근본 원리이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한국의 국력도 아니고, 한국교회의 경제력도 아니고, 오직 성령의 임재와 교통하심이다.
나가는 말
과거의 선교는 마치 선교전략이 모든 선교의 열매를 좌우하는 양 전략을 세우는 일에 집중을 했다. 또한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돈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선교 재정을 어떻게 하면 풍성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지혜를 모았다. 물론 이런 것들도 당면한 과제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선교를 선교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선교계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어떤 선교전략이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뜨거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코로나19로 인해 이 주제는 쑥 들어가고 아예 이제는 기존의 선교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하면서 아무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선교 환경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본질적인 원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더 가속화하고 본질적인 선교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촉매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니 코로나19는 어쩌면 변화하는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는 모든 선교의 기초이다. 우리가 이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된 열매를 맺는 선교를 할 수 있다. 또한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에 따라 순수성을 회복할 때 한국선교는 이 어려운 시기에도 변함없이 그 사명을 다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KPM도 이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성육신적인 선교원리를 사역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하는 선교사들에게는 이 원리의 회복이 더욱 더 절실한 과제이다.
경남 거창에 있는 거창고등학교는 초대 교장인 전영창 교장 선생의 교육철학에 따라 신앙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학교로 소문이 나 있다. 이 학교에는 “직업십계명”이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물론 이것은 전 교장이 만든 그의 교육철학의 일부인데 이 직업 십계명이 성육신적 선교원리를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되어 인용함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직업 십계명
1. 월급이 많은 곳보다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3. 승진 조건이 없는 곳으로 가라.
4.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아니라 황무지를 택하라.
5. 앞 다투어 모이는 곳으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으로 그러나 기쁘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7.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변방으로 가라.
9. 주위 사람과 배우자가 반대하면 틀림없다. 그곳으로 가라.
10.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단두대가 있고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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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를 번역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요한복음 1장 1-2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시체(詩體)로 기록된 이 요한복음의 서두는 독자로 하여금 영원에의 깊은 상념(想念)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그 가운데 있는 ‘로고스’(Logos)라는 어구 때문이다. 그러면 이 로고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 낱말의 번역에서부터 문제를 만난다. 제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는 ‘로고스’라는 어휘를 가장 많이(1,300회 이상) 사용한 사람으로서, 로고스 개념 파악에 중요한 단서를 준다. 필로의 로고스 이론은 한 마디로 유대의 종교와 헬라의 철학을 조화 절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최고신(the supreme God)의 형상이라고 말한다(G.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IV 80면 이하). 이러한 필로의 로고스 이론은 인격(person) 이 아니고, 성육신이 불가능하며, 완전한 신이 아니며, 선재자(先在者)가 아니며, 메시야가 아닌 점 등에서 요한의 로고스 이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로고스라는 어휘, 즉 소위 ‘로고스 찬양’(Logos hymn)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1-18 본문의 주제어는 신약에 330여회 사용되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말’/‘말씀’(word/Word)을 뜻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로고스는 그 문자적인 의미(‘말’이란 뜻)와 요한복음 서론에서의 실질적인 개념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으므로 우선 이 어휘의 번역에서부터 어려움을 경험한다. 일찍이 괴테(Goethe, 독일의 시인, 극작가인 동시에 철학자)는 그의 작품 ‘파우스트’(Faust)에서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 처음에 ‘das Wort’(말씀, 영어의 the Word)로 했다가 불만이어서, ‘der Sinn’(사상, 영어의 thought)으로 했다가 또 불만이어서 ‘die Kraft’(힘, 영어의 power)로 했다가 또 불만, 마지막으로 ‘die Tat’(행동, 영어의 act 또는 deed)로까지 시도하고는 단념하였다. 영어성경에서는 대개가 ‘the Word’로 번역하고 있으나, Moffat 역은 영어의 ‘the Word’ 나 다른 어떤 어휘로도 번역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Logos’ 라는 원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음, 중국어역 성경을 보면 최근의 ‘今日聖經’(1979년)이 ‘基督’이라고 의역한 것 외에는 모두가 ‘道’로 번역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그 어느 나라 언어의 번역보다도 합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이다.
첫째 중국어의 ‘道’는 도교(道敎)의 우주론 또는 우주생성론(cosmology/cosmogony)에서 우주의 근원을 가리킨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면 우주와 만물의 생성에 대해서 “道 生 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抱陽 冲氣爲和”(42장)라고 하여,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가 만물의 근원적실재로 표현한 ‘하나’(das Eine)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道’는 모든 현상(現象)의 근원적 본체로서, 道에서 一氣(太極)가 나오고, 一氣에서 음양(陰陽) 二氣가 나오고, 二氣와 冲氣(조화의 힘)가 합하여 三氣가 되고, 三氣에서 만물이 생하며, 그 만물은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의 원리, 즉 금은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금을 생기게 하여 만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道’의 성질로는 “視而不見 名曰夷, 聽而不聞 名曰希, 搏而不得 名曰微 ... ” 즉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색깔이 없는 것이요(夷는 無色),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소리가 없는 것이요(希는 無聲), 쥐어도 쥐이지 않으니 형체가 없는 것이라(微는 無形)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둘째 중국어에서의 道(도) 는 여러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언’(言, 말씀)이란 뜻이다. 道를 이러한 뜻으로 쓰는 것은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볼 수 있거니와, 우리말 성경 구역(1911년 발행)이 ‘말’(말씀)이라 번역하고 괄호 안에 “혹은 도라”고 한 것은 중국어역 성경을 그대로 따르는 데 있어서 도교의 사상을 고려에 넣은 것이라 해석된다.
그 외에 노자의 體道편에서 “道可道非常道”(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道는 영구불변한 본연의 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나, 한비자(韓非子)의 ‘解老’편에서 “道者萬物之所然也”(도는 만물의 본연)라고 한 것 등은 道의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성격을 말하는 점에서 로고스와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여훈’(女訓) 가운데 “口
不道淫聲”(입으로 음란한 것을 말하지 말라) 한 것과,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의 시 가운데 “主人莫道無顔色”(주인이여, 낯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등에서 ‘道’ 자가 ‘언’(言, 말하다)의 뜻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일어역에서는 모두가 ‘고도바’(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어에서 ‘고도바’라는 말은 한자로는 ‘言葉’로 기록하는데 요한복음 번역에서 Logos 는 ‘言葉’로 기록하지 않고 ‘言’이나 ‘御言葉’(共同譯)로만 기록하는 것이 그 특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틴어’로는 verbum(말) 또는 Ratio(도리, 이성, reason)로 되어 있고, 불어로는 Verbe(1988년) 또는 Parole(1910년) 로 번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