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에 "착각(錯覺)"이란 단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착각이란 한자의 훈은 "어긋날 착" "깨달을 각" 이라고 합니다.
착각이란 한자어의 사전적 정의는
1. (어떤 대상(對象)ㆍ현상(現象)을 실제(實際)와 다른 대상(對象)ㆍ현상(現象)으로) 잘못 보거나 듣거나 느끼는 것.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진리가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만이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쓴 뿌리'란 무엇인가?(히브리서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새번역)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쓰다는 표현은 보통 분노 및 원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5에서 과연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쓴 뿌리"는 (나무 토막처럼) 뿌리가 쓰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뿌리가 식물로 자라난 후
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까요?
둘째, 히브리서 12:15의 쓰다는 것은 곪아 터진 분노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독이 있고 더러운
것을 의미할까요?
셋째, "쓴 뿌리"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는 신명기 29:18에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새번역)
당신들 가운데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가, 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멀리하여,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 가운데 독초나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NIV) Make sure there is no man or woman, clan or tribe among you today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 our God to go and worship the gods of
those nations; make sure there is no root among you that produces such
bitter poison.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역자주: 영어성경을
번역하면 "독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의 배경은 앞선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도움이 됩니다: 뿌리 자체가 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쓴 열매는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쓴 열매는 어쩌면 곪아 터진 분노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쓴 열매가 나오도록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
신명기 29장의 그 다음
절은 놀랍지만 히브리서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줍니다.
1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독초와 쑥(쓴 열매)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그 후 19절은 이 뿌리를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그렇다면 쓴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평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내게는 평안[=구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건너짚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몇몇 영적 체험 때문에 혹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자들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이렇게 자신의
안전을 추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치료하여,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의 성실한 견인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싸움에 열심을 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3, 3:12,14, 6:4-7, 10:23-29).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라는 용어의 문맥을 보아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4-15). 이는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많은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는 믿음의 싸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깨어 경계하는 삶 없이도 구원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도록 교회
안에서 권장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며, 자신의 유업을
아무렇게나 대하여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했던 에서처럼 되게 이끕니다.
질문 /
성경은 쓴 뿌리에 대해 뭐라고 하나요?
답변 /
쓴 뿌리는 분개하고 냉소적인 마음으로써 상대에 대한 극심한 적대감이나 반감을 낳습니다.
성경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가르치며 더 나아가 그러한 쓴 뿌리와 그 산물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1-42).
형용사로 “쓰다(bitter)”라는 단어는 “화살같이 날카로운, 톡 쏘는 듯한, 무례한, 앙심에 찬”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기 5:18에서 간통 혐의를 받은 여자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받은 것에서 착안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쓴
뿌리(bitterness)”는 좀먹거나 “갉아먹히고 있는” 정신/정서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쓴 뿌리는 극심한 슬픔을 주거나 독이
몸에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쓴 뿌리는 분노의 감정을 의지적으로 붙잡아 언제든 기분 상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금방이라도 분노를 폭발 시킬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쓴 뿌리에 굴복하여 내 마음을 그 감정에 지배받게 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더 이상 영혼이 화해를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쓴 뿌리는 분노로 이어져 내부의 감정이 밖으로 폭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터져 나온 분노는 시끄러운 싸움질로
이어집니다.
분노한 사람이 자신에게 몰두하여 소란스럽게 자신의 불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쓴 뿌리로 인해
나타나는 또 다른 악은 비방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비방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나 단순히 사람에 대한 중상모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부터 뿜어 나오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모든 말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악의로 이어집니다.
악의란 극심한 증오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태도는 감정적이며 사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악의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의도적 시도입니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악의”는 버려야 합니다(에베소서 4:31).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은 보통 분해하고, 냉소적이며, 냉혹하고, 차갑고, 가차없고, 함께 있기 불쾌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죄를 짓는 것으로, 그분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육에서 온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9-21).
히브리서 12:15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쓴 뿌리가 우리 마음속에 자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쓴 뿌리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요?(히브리서 12:15)
『열심히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
질문 /
대부분의 성경 해석에는 쓴뿌리를 "배교자(이단자)"라고 해석합니다. 그 외에도 죄책감으로 인한 좌절감, 죄의식, 심한 자책감, 사람의 행위로 오는 상처,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 등으로 생긴 쓴뿌리로 해석하십니다.
이 부분말씀을 가지고 내적치유 세미나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쓴뿌리를 배교자 외의 것들로 설명하는 것도 성경적인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답변 /
쓴 뿌리는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갖는 분노나 좌절감, 괴로움, 불평, 염려 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주변 성도들에게 전염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쓴 뿌리는 "육신적인 삶"이나 "죄에 종노릇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교회를 더럽히므로, 성도 각자는 그러한 것이 자신 안에 없는지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쓴 뿌리’에 대한 오역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에서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인용한다.
유명한 양육단체인 D단체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에 대해서는
일전에 설명한바가 있으니 생략한다.
하지만, ‘쓴 뿌리’에 대한 주장 역시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은 이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D단체는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저주나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모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영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곳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경을 인용하되 올바른 해석을 적용해야만 그곳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위 단체들이 ‘쓴 뿌리’를 주장하면서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 히브리서 12:15~17을 살펴보자.
성경의 ‘쓴 뿌리’라는 용어는 본래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를 뜻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더욱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12장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신 29:17~19).
히브리서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해야만 하는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자를 뜻하거나 도중에 믿음을 포기하는 경우를 뜻할 것이다. 혹간은 계속되는 둘째, 셋째, 넷째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둘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불신앙과 배교가 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또한 ‘쓴 뿌리’의 ‘쓴’이라는 단어는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다.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싹’ 혹은 ‘눈’을 의미하기도 한다.
셋째, 음행하는 자와 넷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셋째와 넷째를 한 가지 문제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인용하여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12:15~17 본문은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신앙, 배교, 음행, 망령된 행동을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자와 같은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해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을 내적치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는 주장도 있다. 과연 그런 내적치유가 비성경적인 주장에 근거를 둔 행위로 치유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당신의 행동에 숨겨진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존 파이퍼 외 | 이지혜 역 | 생명의말씀사 | 176쪽 | 10,000원
죄를 지적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행동을 분석하여 그 속에 숨겨진 죄를 찾겠다면, 그만큼 불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냥 죄도 아니고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 마치 7대 질병을 검사하기 위해 온몸을 검진받는, 불편하고 두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검진은 필요하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내 몸 상태를 바르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아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유익하다.
우리 영혼을 타락시키고 병들게 하는 죄, 다른 죄와 밀접하게 연결된 죄를 알고 성경적으로 대처한다면 영혼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행동에 숨겨진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의 저자는 총 8명이다.
모두 디자이어링갓(desiringGod)
기관 사역에 몸담고 있거나(데이비드 마티스, 토니 레인케, 조너선 파넬), 존 파이퍼 목사가 목회했던 베들레헴 침례교회
목사이거나(제이슨 마이어), 베들레헴 침례신학교의 교수이다(조 리그니, 조나단 바워스, 라이언 그리피스).
이 책을 총 편집한 사람은 마셜 시걸로 존 파이퍼의 비서이자 디자이어링갓 필진이다.
모두 같은 신학적 문맥 안에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편집자 시걸이 들어가는 말을 쓰고, 그리피스가 1장에서 죄의 역사를 짧게 다루었으며, 2장부터 8장까지 나머지 저자들이 각각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을 설명했다.
모든 장에서 죄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을 중심으로 설명됐고, 그 해결책을 제시했다.
원서 제목이 ‘Killjoys: Seven Deadly Sins’이다.
죄가 우리의 참된 기쁨을 죽인다는 걸 강조하는데, 결국 이 책의 목적은 영혼의 건강을 되찾아 구원의 참된 기쁨을 회복시키려는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1장에서 그리피스가 설명한 것처럼 죄는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수백 년 전부터 교회가 일곱
가지 대죄를 언급한 이유는 이 죄들이 나머지 모든 죄를 대표하는 죄의 종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26쪽).
이 죄에서 나머지
죄들이 가지처럼 뻗어 나온다는 말이다.
일곱 가지 죄는 육신의 죄(탐식)부터 영혼의 죄(교만)까지 포함하고, 다른 죄들의 근원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여 일곱 가지 죄 외의 죄를 억제하고 통제하는 데 유익하다.
우리가 죄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해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된 기대의 중심에 있는 문제를
해결함으로 우리 기쁨의 이유를 오롯이 그리스도로 삼는 걸 훈련할 수 있기 때문에, 일곱 가지 죄를 다루는 것은 중요하다.
이 책은 전체 분량이 176쪽으로 한 주제당 20쪽이 되지 않거나 살짝 넘는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인은 길고
복잡한 내용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 면에서 부담되지 않는 양으로 각각의 죄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 해서 내용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각 장에서 독자는 저자가 다루는 죄의 문제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그리스도 중심적, 복음 지향적 해결책을 얻게 될 것이다.
먼저, 교만은 일곱 가지 죄 목록 중에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죄의 정수’이다. 교만은 첫 사람 아담이 범한 죄이기도 하다. 다소 추상적인 ‘교만’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거나, 반대로 자기를 비하하고 격하하며 자책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벽한 겸손과 온유의 본이 되신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을 옷
입을 수 있다. 우리가 회심할 때, 날마다 거룩함을 입을 때, 마침내 영화롭게 될 때, 교만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겸손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시기와 분노는 참 다양하게 표출된다. 조 리그니는 시기가 ‘천의 얼굴을 지닌 적’이라 말했고, 조너선 파넬은 분노가 ‘다른 죄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시기의 적은 만족과 감사, 분노의 적은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운 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시기하거나 나에게 없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한 분노를 배우는 자, 죄인인 자신을 향해 베푸신 끝없는
사랑을 계속해서 음미하는 자는 악한 분노를 품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속에 있는 악과 세상에 만연한 죄를 미워하여 거룩한 분노를
낸다.
나태가 흥미로운 것은 게으른 것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바쁜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예배하기 위해 하지 않는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토니 레인케는 지역 교회에서 나태의 뿌리를 뽑으라고 말한다. 교회가 함께 모인 곳에서 반복하여 예배하고 사랑을 실천하면, 나만 생각하고 나만 위하는 나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탐욕은 하나님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두고 가장 강렬하게 원하는 우상 숭배이다. 탐식은 다른 무언가가 음식이 된 경우다.
오직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그분을 가장 최고의 원함으로 삼을 때, 욕구에 맞서 절제하는 훈련을 할 때, 우상 숭배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마지막 정욕을 다루면서 파이퍼는 성적인 욕구를 이겨낼 방법을 여섯 가지로 제시했다: ①피하라 ②거절하라 ③돌아서라 ④붙잡으라 ⑤즐기라 ⑥움직이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욕망을 일으키는 유혹을 피하고 거절하는 것. 거기에서 돌아서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분명한 약속을 붙잡고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는 사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각자 더
쉽게 넘어지는 영역이 있고, 그 고통과 결핍이 강렬할수록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만족 대신 추구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교만과 시기, 분노와 탐욕, 탐심과 나태, 정욕이 솟구칠 때, “나는 과연 그리스도로 충분한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가?” 질문해 봐야 한다.
이 질문은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든 믿음으로 붙잡으려는 헛된 행위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를 믿음으로 맛보는 행위이다.
독자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자기 영혼 속에서 찾으며, 영적 건강을 해치는 악을 제거하시고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선, 기쁨, 만족으로 영혼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을 도구로 삼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쓴 뿌리(신명기 29:18-21)
모든 죄악의 현상들은 사탄이 사람의 심령 깊이 박혀 있는 쓴뿌리를 통하여 역사 기 때문입니다. 이 쓴 뿌리는 여러가지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치 료되지 않으면 일평생 그 사람을 괴롭히며 나아가 주위의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 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 원인으로는; (1)어릴때부터 받은 상처로 (2)죄로 말미암아 (3)심한 경젱의식으로 말미암아 (4)외모의 약점으로 말미암아 I. 쓴 뿌리의 유형들
1.혈기-모세(민12:3, 약4:7)->(온유) 젊은 40년의 세월을 혈기로 보냄. 이 혈기의 원인은 바로의 남아 학살정책에 따 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애굽의 위협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임 다시 애굽에서 쫓겨나 광야 40년동안 이 쓴뿌리인 혈기를 치료받음. 그래서 모세 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승하더라는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교만-사울 왕(삼상15:22-,약4:6-7, 벧전5:5-6)->(겸손) 처음에는 겸손하여 아름답게 쓰임받았는데 나중에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 순종하고 타락함.
3.고집-삼손->(순종) 말씀에 불순종
4.음행-솔로몬->(정결)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함(1000명의 아내)
5.두려움-여호수아(민27:18)->(강하고 담대함)(수1:5)(출17:14) 모세 사후 자신의 지도력에 비교하여 과소평가하여, 요단강물이 범람하여 우려 하여 두려워함.
두려움이 있으면 어떤 손해가 있는가 (1)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함 (2)자신감을 잃음 (3)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음 (4)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없음 따라서, 두려움의 쓴뿌리가 있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6.열등의식 열등의식이 있으면; (1)생각이 많아진다.
(2)자신감이 없어진다.
(3)두려움이 생긴다.
(4)마음이 좁아진다. 넓은 마음을 주소서!
7.교활함-야곱->(진실)
8.편애-요셉->(공평)
9.탐심-아간, 가룟 유댜, 롯->(청빈) II. 쓴 뿌리의 증세와 현상(신29:18-21)
1. 언어가 단절된다.
2. 불만이 생긴다(삼상15:22) 그래서, (1)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며 (2)하나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붙인다.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김-예, 아브라함이 창12:1절 이하에서 자기 본토 고향 을 떠날 때에 시키지도 않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나감으로 불화와 전쟁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는 죄앙을 만남./ 사울 왕도 사무엘 선지자의 하나님 명령에 대한 전 갈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아각 왕을 살려 놓고 살찌고 좋 은 짐승들을 살려 놓음> 다윗과 사울 왕의 신앙의 비교
다 윗 사 울 1) 죄를 지적할 때 즉시 회개 1) 죄를 지적하여도 회개치 않음 2) 기도의 사람이었음 2) 기도 하지 않았음 3)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 3) 백성을 의식, 사람을 의지 4)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 4)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 5) 말씀에 순종한 사람 5) 주의 종의 권면과 말씀에 불순종 6) 전적으로 하나님을 높임 6) 전적으로 자신을 높임
3.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인격에 균열이 생긴다.
4. 공격적인 사람이 된다(사14:12) 강하게 반항한다.1)십자가의 원리는; (1)순종 과 (2)섬김이다.
2)모든 죄는 교만과 불신앙에서 비롯된다(롬14:23)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 1)하나님의 말씀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순종-말씀이 곧 하나님의 주권 2)주일성수 3)십일조 출석하는 교회에대 할 것.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4)주의 사자(계1:20, 계2:1-)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심, 예 수님의 손에 쥐고 있는 일곱 별(교회 목회자) 그러므로 교역자는 하나님께 서 책임지신다. 잘못하고 실수하여 징계르 받아도 예수님께서 직접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양떼들)이 심판 방망이를 잡아서는 안된다.
5)인간의 생명 <A> 쓴 뿌리의 증세1)동질성끼리 모임 상처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남.
2)자기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한다.
3)다른 사람을 시기한다.(질투, 증오, 정죄) 4)극단적이 된다(욥10:1).
<B> 쓴 뿌리의 현상1)그런 환경을 만나면 아픔을 느낀다.
2)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학대(자학), 노이로제로 발전 3)다른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쓴다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
4)별 문제가 아닌데 화를 낸다.
5)매사에 불평 불만.
6)고집이 있다.
7)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
8)정서가 불안하다.
9)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빈정거리기 잘하고 칭찬이 없다 10)편파와 분당을 만든다.
11)신앙 생활에 힘이 없다. 고독, 외로워함 12)성실함이 없다. 충성, 책임감이 없음.
III. 쓴 뿌리를 치료 받는 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길이 치료 받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란 1)온유 6)친절 11)은혜 2)의로우심 7)전능 12)불변함 3)거룩 8)공의 13)질투 4)긍휼 9)신실 5)사랑 10)인내
1. 치료 방법1)회개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은 쓴뿌리이므로 2)상처를 준 사람(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만일 용서치 않으면 (1)예수님과 관계가 멀어짐 (2)자유함이 없고 속박이 온다.
(3)살인하는 것이 됨(미워하는자는 살인한 것이라고 함) (4)인격의 성장이 없음 (5)용서 못받음(마6:14-15)
어떻게 용서해야 하나 (1)기억지 아니함(엡4:32)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 같이(엡3:15) (2)바다 깊은 곳에 던짐(미7:10) (3)등 뒤로 던짐(사37:8,17) (4)죄를 멀리 옮김(시103:10-14)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랑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시간 을 바치고, 물질을 마치고, 몸을 바치라! 이 모든 것보다, 생명을 바치는 것(순교)이 가장 중요<순교적 자세로 신앙 생활하면 못 감당할 것이 없다>
목사 영접 = 예수님 영접(마10:40)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함(살전5:12-13)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감(롬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 복을 가지고 나아갈 줄로 알라!" 3)원망, 불평하는 마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원망, 불평할 일이 있거든 그 일로 인하여 기도하도록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홍해 앞에서 원망하였지만, 모세는 똑같은 상황하에서 기도함으로 문제를 오히려 해결하였다.
이스라엘 광야 교회가 원망한 원인은 곧 우상숭배(탐심) 때문었다.
4)두려워 하는 마음을 찬송하는 마음으로 바꾸라! 마음이 주님을 찬양할 때에 두려움도 분노도 사라진다. 찬송중에 두려움과 분 노가 틈탈 기회가 없다. 찬송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사12:2)
5)원망, 불평을 감사로 바꾸라!
6)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쓴 뿌리와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
우리는 간혹 ‘성경적’이라는 용어를 ‘성경에 기록된 용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를 성경과 다른 뜻으로 짜맞추는 것을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들과 G12, 두날개와 같은 양육프로그램을 하는 곳에서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특히 신사도운동을 하는 단체에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인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이 용어가 과연 성경적인 내용인지 살펴보자.
1) 쓴 뿌리
많은 단체에서 사용하는 ‘쓴 뿌리’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단체들은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두날개와 G12등은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어느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하므로서 귀신이 묶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Soul-Tie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되, 성경과 일치한 올바른 해석을 적용하여야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쓴 뿌리’라는 용어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쓴 뿌리’를 주장하는 곳에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히브리서 12장 15-17절인데, 본문을 살펴보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어느 개인의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자 또는 배교자를 말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신 29:17-19)
히브리서의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하여야만 하는 몇가지의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성경은 계속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적용한다.
첫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쓴 뿌리’에 ‘쓴’은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서 본문과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퍼진다, 증식된다’는 뜻과 ‘싹, 눈이 나온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음행하는 자를 말한다
셋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둘째와 셋째를 한가지 문제점으로 포함시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쨋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의 경우를 인용하므로서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그릇에 팔아버림으로서 하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서,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와 배교, 음행, 망령된 것의 경우를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뜻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하여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이나 혈통유전설과 같은 잘못된 주장을 앞세워 ‘내적치유’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여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주장은 이단성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고 내적치유를 하여주는 곳이 있는데, 과연 그런 비성경적인 주장에 근거를 둔 행위로 치유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성경은 악의 뿌리를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2) 견고한 진을 파하라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양육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종이에 죄, 약점, 질병, 과거의 상처등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며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특히 두날개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의식을 “견고한 진을 파한다”라고 칭하는데, 당사자가 종이에 죄를 적어 태울 때에 옆에서 참가자들이 “견고한 진을 파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고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죄에 대한 회개를 이러한 무속적인 의식을 통하여 하였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메타노에오)란 ‘방향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며 불신으로부터 믿음, 죄로부터 돌이키는 내면적인 전향을 의미하며, 죄를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운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회개는 이런 어떤 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이에 적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가? 그 이후에 다시 짓는 죄는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다시 태우는가? 이러한 형식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보다 보다 진정한 회개의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지 않는가?
또 수백만원을 들여 중동지역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땅밟기와 대적기도, 선포기도를 하고 오는 선교라고 할 수 없는 선교가 몇몇 선교단체들에 의하여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데, 과연 그 지역의 귀신들이 땅밟기와 대적기도에 놀라서 쫓겨나 이스람교인들이 기독교로 저절로 개종이 된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데, 단지 기도를 하기 위한 선교라면 굳이 수백만원을 들여서 현지에 갈 필요없이 한국에서 기도를 하면 되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것을 뜻하며, 땅밟기나 귀신축사로 전도를 한 경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단기선교 여행경비를 현지선교사들에게 후원한다면 더 효과적인 선교비로 사용될 수 있다고 현지 전문선교가들은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더욱이 요즈음 인카운터라고 하는 양육프로그램의 수양회에서는 쓰러짐과 넘어짐, 진동, 입신, 임파테이션등과 같은 신사도운동의 현상적 집회를 도입하면서 그것을 용어를 바꾸어서 사용하도록 하거나, 외부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가르친다는 제보까지 들어오고 있다.
2011년 합신과 고신은 이미 신사도운동을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고, 2012년 예장통합 은 극단적신비주의를 도입및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으며, 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 금이빨 사건, 입신이라고 구체적으로 일일이 지적하였다.
또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의 예언에 관한 책을 발간하며, 지역귀신에 위한 영적도해에 관한 책도 발간하고 있다. 또 너도 나도 마이크 비클의 아이합을 모방하여 24/7예배를 모방하며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으로(히9:11) 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할 필요가 없으며, 다윗은 24시간 7일 동안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장에는 영적도해와 귀신축사와 같은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고후 10:4을 인용한 것인데, 이 성경구절은 결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3-4)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방침이나 강령을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견고한 진’이란 사탄의 진도 아니며, 소위 죄의 통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약점이나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적인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성령의 무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견고한 진’이라는 것은 죄의 근원이나 과거의 상처를 뜻하는 고유명사 또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성이나 요새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무너진다는 형용사적인 의미의 단어일 뿐이다.
고후 10:3-4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KJV] (For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carnal, but mighty through God to the pulling down of strong holds;)
[NIV]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견고한 진’은 헬라어 ‘오퀴로마’가 사용되었는데 ‘견고하다’는 별도의 뜻을 가진 단어는 원문에는 없으며, 그 의미는 원래 ‘성, 요새’라는 뜻이다. 즉 ‘성, 요새’라는 단어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며, 즉 성령의 무기를 가지면 “성과 요새와 같은 아무리 견고한 것들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유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육체를 가진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이나 행위로서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만 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정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더욱이 ‘견고한 진’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는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마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에서 아주 작은 것으로 비유된 ‘겨자씨’를 인간의 몸 안에 실제로 있는 어떤 고유명사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겨자씨를 갖어야만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견고한 진’은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우면 죄가 없어진다는 무속적인 행위나 대적기도, 선포기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외적 행위들은 성령하나님의 강한 무기도 아니며, 영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종이 위에 쓴 육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구성요소인 육체와 영을 이원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과 성령으로 구별하여 육체가 아닌 성령의 병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육체를 갖고 있어서 제한이 있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의 의지나 행동과 같은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것이라는 뜻이다. 종이 위에 생각나는대로 적은 사람의 행위는 오히려 육체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은 곧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7)
에베소서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인간이 만든 어떤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전신갑주를 입고,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어떤 물체 종류의 허리띠나 흉배, 방패, 투구와 검을 쓰면 악한 영과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석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한 선교단체와 양육프로그램은 성령의 무기에 대해서 종이에 죄를 적는 것이나 혹은 공개적인 죄 자백을 하는 것으로 왜곡시켜서 그것을 불태우거나 어떤 기도문을 외우거나, 이상한 구호를 외침으로서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오역하여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곧 육체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선교단체의 양육프로그램을 통한 방법으로는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없으며, 쓴뿌리를 제거할 수도 없음이 명백하다.
더욱이 많은 양육프로그램과 적지 않은 선교단체들이 교류금지로 발표된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으며 녹취록에도 어김없이 가계저주론이 나타난다. 그런 저주가 어느 인위적인 프로그램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로 없어진다는 주장은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선포기도와 대적기도가 예수 십자가 대속보다 더 권세가 있다는 뜻인가?
최근에 널리 행하여지는 양육프로그램들은 현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교인들을 숫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첫째 목적이기 때문에, 비신학적이며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문제삼지 않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전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혹간 사람들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라는 본문을 인용하며 교리와 신학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문자적인 해석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학교도 가지 말아야 하며 공부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비성경적인 이단교리와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 되겠지만, 성경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체계적인 도움을 준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움으로서 죄가 없어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정통신학 자체는 구원이 아니지만, 성경을 요약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어느 신학교수는 정통신학은 구원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파하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은 학교의 공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을 뜻하며, 이러한 교만을 파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떤 권세를 파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적인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사로 잡아”(아이크말로티존테스)라는 단어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과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며,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고, 죄를 종이에 적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는 이상한 의식을 하지 말자. 이제는 넘어지고 딩구는 유치한 현상적인 집회를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그만 중지하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가르치며, 일년에 몇 번씩 열고 있는 부흥성회를 좀 줄이고 성도들에게 건전하고 올바른 정통신학과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간을 만들자.
솔직히 말하자면, 이단만 성경을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에서도 성경을 오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는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수평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교인들을 양육하는 목적으로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며 비건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러한 프로그램이 한국교회에서 용납되거나 묵인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파운동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던 교단들이 알파운동보다 몇배나 더 위험하고 더 문제가 많은 G12와 두날개와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유명한 선교단체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앞 다투어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이단들이 성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성경과 정통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숫적부흥만을 도모하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의 책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