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망애(信望愛) / 믿음 소망 사랑(고린도전서 13:13)



믿음 소망 사랑(信望愛)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신망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구원을 얻는 믿음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해당합니다.

소망은 현재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사건에  대한 기대이며 바램이고 또한 확신입니다.
따라서 소망은 미래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사랑이 제일이 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사랑은 현재라는 시간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근거는 믿음이며 또한 미래를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좋은 예를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내 몫을 모두 주십시오!
율법대로 해결하면 간단합니다.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당장 내쫓든지 아니면 회당으로 끌고가서 이 녀석이 무리하게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도 자기 유산을 요구합니ㅏ다.
율법은 이런 자식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돌로 쳐 죽여라!
집에서 내 쫓아라!

그럼에두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드르이 요구에 따라 그의 몫을 모두 나눠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끔찍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들이 비참한 신분이 됩니다.
심지어 끼니를 떼울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참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호되게 꾸짖으며 너 그러면 네 장래가 망가진다.
좀 더 기다려봐라!
이렇게 타일렀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것은 지나가버린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또 다른 예를 찾아봅시다.

구약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타락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런 사람과 다시 시작하는 것을 싫어하며 극구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를 에 이루어야 할 라으사랑ㅏㄷ.
을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ㅏㄷ.하서가공

1. 소망을 갖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믿음(信)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3982에서 유래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답변

히브리서 11:1은 우리에게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크리스천 삶의 요소 중에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사거나, 팔거나, 우리의 동료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은 크리스천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사전에 의하면 믿음이란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해서, 특히 논리적인 증거 없이 믿는 것, 헌신하는 것, 혹은 신뢰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또한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헌신”으로도 정의합니다. 성경은 믿음과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어서, 믿음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고,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은 실제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도 유일 하신 참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은 우리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영적인 것을 열심히 연구하거나 추구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2:8-9은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이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우리가 그것을 얻었거나, 혹은 그것을 가질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 혹은 우리의 자유 의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긍휼로그 분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분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째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 속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을 만드셨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이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6의 주요 부분에서는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적이고 충실한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의 완벽한 예를 누가복음 7:50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째서 믿음이 그토록 보람 있는 것인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시다가 한 죄 된 여인과 대화를 하게 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그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상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있게 될 것을 믿어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지탱해주는 힘이 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8-9).

믿음의 예: 히브리서 11장은 위대한 믿음의 업적들을 담고 있으므로,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주님께 기쁨의 제사를 드렸고 (4절), 믿음으로 노아는 폭우가 쏟아질 지 몰랐던 때에 방주를 준비했고 (7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가 알지 못했던 곳으로 갔고, 그 후에 기꺼이 자신의 단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쳤고 (8-10, 17절), 믿음으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했고 (23-29절), 믿음으로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하여 그녀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31절). 더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 (33-34절)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명백하게, 믿음의 존재는 행위로 입증되었습니다.

믿음은 기독교의 초석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입증하지 않고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 신지에 대해 애매하고, 일관성 없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들 삶 속에서 높으신 하나님의 지위에 필수적인 숭배가 부족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믿음은 가끔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그 분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또 우리의 믿음을 날카롭고 강하게 단련시시기 위해 시련과 힘겨운 시간들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시험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우리의 믿음이 진짜임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2-4).




소망(所望)(望)

ἐλπ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1680

1.

기대

2.

신뢰

3.

행16:19

발음 [ ĕlpis ]
어원
ἔλπω에서 유래


크리스천의 소망이란 무엇인가요?

답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망을 소원하는 것, 즉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의 소망은 “확신에 찬 기대”를 뜻합니다. 소망이란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말합니다(로마서 8:24-25; 히브리서 11:1,7). 소망은 의인의 삶의 기초적인 요소입니다(잠언 23:17-18). 소망 없는 인생은 그 의미를 잃으며(예레미야 애가 3:18; 욥기 7:6) 사망 안에는 소망이 없습니다(이사야 38:18; 욥기17:15).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소망을 갖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시편 28:7). 또한 망하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이사야 49:23).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소망이 있는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으며(예레미야 29:11) 두려움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시편 46:2-3).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2:21; 베드로전서 1:3).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구원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5).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약속된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세상에 이루어집니다(로마서 8:24-25).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미래의 소망이며(사도행전 23:6),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며(사도행전 26:6-7), 모든 육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자(로마서 8:23-25), 영원한 영광(골로새서 1:27), 성도들의 영생과 상속(디도서 3:5-7), 그리스도의 재림(디도서 2:11-14),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요한일서 3:2-3), 하나님의 구원(디모데전서 4:10) 또는 단순히 그리스도 그분 자체이십니다.

축복된 미래에 대한 확신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로마서 8:23-25), 우리 안의 그리스도(골로새서 1:27),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고린도전서 15:14-22)을 통해 보장됩니다. 소망은 고난을 견디면서 만들어지며(로마서 5:2-5) 우리가 인내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3; 히브리서 6:11).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 속에 높여지는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빌립보서 1:20).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며(히브리서 6:18-19), 우리는 소망 안에서 자랑할 수 있고(히브리서 3:6), 믿음 안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12). 그와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에베소서 2:12; 데살로니가전서 4:13).

믿음과 사랑과 함께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항상 있는 미덕이며(고린도전서 13:13) 사랑은 소망에서 말미암습니다(골로새서 1:4-5). 소망으로 인해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즐거움과 평안이 생깁니다(로마서 12:12; 15:13). 바울은 사도로서의 소명이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디도서 1:1-2). 재림에 대한 소망은 믿는 자가 자신의 삶에서 정결케 되도록 하는 기반이 됩니다(디도서 2:11-14; 요한일서 3:3).




사랑(愛)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스트롱번호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발음 [ agapē ]
어원
25에서 유래

아가페적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답변

헬라어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사랑”이라고 번역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다른 사랑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아가페적 사랑의 핵심은 선의, 박애, 그리고 사랑의 대상을 향한 의지적인 즐거움 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아가페는 로맨틱하고 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또는 헬라어로 “필리아”라 하는 진한 우정이나 형제애를 말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신실함, 헌신 및 의지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고귀한 도덕적 성격과 강한 특성으로 인해 다른 사랑과 구별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 밖에서 아가페라는 단어는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페는 그 자체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8).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으로 부터 흘러나옵니다. 아가페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묘사합니다(누가복음 10:27). 즉, 주인에 대한 종의 신실한 섬김(마태복음 6:24)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애착(요한복음 3:19)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랑의 종류는 우리에게 자주 들리는 것처럼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 존재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은 본성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항상 행위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4-5). 우리는 그런 희생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없어도 베푸시는 것이며, 자비로우며, 끝없이 그 분께서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요한일서 3:1).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결국 그분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겁니다(요한복음 3:16-18).

우리 역시 상대가 믿는 자든(요한복음 13:34), 원수이든 간에(마태복음 5:44) 서로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느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남의 필요를 위해 의지적으로 기쁘게 결심하여 하는 행동임을 그리스도께서 본보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런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듯 우리가 사랑하려 한다면, 그 사랑은 오직 그 원천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로마서 5:5; 갈라디아서 5:22).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소망’은 일반 세상에서 말하는 ‘희망’과 다르다. 후자가 막연한 인간의 바람을 말한다면 전자는 확실한 약속에 근거한 바람이며, 후자가 인간의 자의로 가지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바람이다. 후자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 마음대로 갖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가 신령한 세계를 보고, 그 완성을 향해 가지는 바람이다. ‘소망’은 ‘믿음’, ‘사랑’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세 요소다(고전 13:13). ‘믿음’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우리 구원의 강력한 행위들 가운데 놓여 있고, ‘소망’은 미래에 있을 우리 구원의 최후 완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미래에 완성될 구원에 대한 바람과 기대다. 그리고 ‘사랑’은 그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재림을 넘어 영원한 천국까지 계속될 삶이다. 그리하여 소망은 그리스도교 사도신경의 중요한 신앙고백 내용이다.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그럼, 신약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어떤 소망인가?

  신약의 소망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소망
‘소망’이란 어휘는 구약성서의 후기 문서들에서 드물지 않게 나오는데, 대개의 경우 ‘신뢰하다,’ ‘기대하다’는 뜻의 히브리어에 상당하는 의미로, 점차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의 신학적 의미의 용례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소망”, “경건한 이스라엘인의 소망”이다(스 10:2; 시 39:7; 62:5; 78:7; 146:5; 렘 14:8; 50:7; 애 3:18 등).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시 33:18), 하나님의 말씀에(시 119:8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