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족보 /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장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 시대별 정리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소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 기록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일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족보에 기록된 인물들의 이름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한 사람(마태복음 1:3의 ‘람’, 누가복음 3:33의 ‘아니’)만 제외하고는 동일하나, 다윗 다음부터 예수의 부친 요셉 이전까지의 이름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까지 두며 총 77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부터 그 이름이 달라지는 이유는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다윗 이후 족보의 맥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어가고 있고(마 1:6),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다윗 이후 족보의 맥을 솔로몬의 동복 형인 나단(삼하 5:14, 대상 3:5, 14:4)을 통해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3:31). 이렇듯 서로 같은 듯하면서도 결코 같지 않은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에 감추어두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은 과연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장 족보의 특징

마태복음 족보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서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을 하향식(자손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이요, 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전체 세대를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많은 세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의도된 뜻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렷한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1: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마태복음 1장 족보를 해석하는 열쇠인 마태복음 1:17을 볼 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를 큰 사건들을 기점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고, ‘14’라는 대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4’는 ‘7’의 두 배수인데, 성경에서 ‘7’은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하늘의 상징수인 ‘3’과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땅의 상징수인 ‘4’를 합한 수로, ‘어떠한 뜻이 완성되는 성취의 기간, 가득 채워진 충만, 전체’를 뜻하는 상징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이면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일곱이면 그 자체로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셈족 사람들은 ‘7’의 두 배인 ‘14’를 더욱 무게 있는 수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시대를 14대씩 세 시기로 나누어 42대로 기록한 것은, 각 시기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시대적 경륜이 있었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온갖 흥망성쇠의 사건들의 배후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정하신 때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엡 1:4, 3:11, 딤후 1:9).

이처럼 마태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합 2:3, 막 1:15, 갈 4:2)에 오셨다는 놀라운 진리의 선포입니다.

누가복음 3장 족보의 특징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는 사건(눅 3:21-22)과 마귀의 세 가지 시험(눅 4:1-13)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다룬 마태복음 족보와 달리 구약 전체 약 4천 년간에 걸친 인물 총 77명(하나님, 예수 포함)을 상향식(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상향(上向)식 구조’는 누가복음 족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취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 첫 사람 아담까지 올라간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존재할 모든 인간과 깊은 연대를 맺고 계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친 것은,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神的起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눅 3:23, 38).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첫 사람 아담으로 끝나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여전히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仲保者)로서(요 14:6,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전 인류를 끌어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엡 2:15-16, 골 1:21-22).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엡 2:13).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인류 구원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3:23에서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요셉의 아들,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으나(마 13:55, 눅 4:22, 요 1:45, 6:42) 사실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족보의 위대한 구속사적 가치는, 언약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라는 사실을 입증한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맺으신 언약을 따라 모든 시대를 섭리하사,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최종 성취자로 이 땅에 보내셨음과(갈 4:4), 죄악된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롬 3:22, 24, 행 2:21, 10:43, 16:31)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눅 3:22, 4:3, 9, 롬 1:2-4, 눅 1:35, 2:49)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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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 42대이나 다윗이 두 번 겹쳐서 나오므로 실제 기록된 인물은 41명임.
2) 마태복음 족보는 요셉 가문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가문의 족보로 알려져 있음.
     J. A. 벵겔, 「마태복음 상」 신약 주석 시리즈, 고영민 역(도서출판 로고스, 1990), 54-55.
     Norval Geldenhuys, 「누가복음 상」, NIC 성경주석 시리즈(생명의 말씀사, 1983), 167-168.
3) 전경연, 「마태의 신학」, (도서출판 한국성서학, 2003),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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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족보와 수 열 네대(14)


“히브리인과 헬라인들은 로마인보다 더 진보해서 알파벳의 각 철자마다 그에 해당하는 숫자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알파벳을 이중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철자들은 낱말을 구성하기 위한 철자이면서 또한 수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듯이 문자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의 첫 번째 문자인 알파(Α α)는 산수에서는 항상 1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런고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어느 낱말이든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일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데 알파벳의 각 문자가 대표하는 숫자를 각 문자에 대입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이 문자들의 값을 더해주는 것이 그 단어의 게마트리아나 숫적 값을 결정해준다.” (Ed F. Vallowe의 책에서)

이처럼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하여 단어나 문장을 암호화 하는 방식을 소위 수비학(數祕學, Numerology)이라고 합니다.
이 수비학은 기원 전 6세기의 수학자이며 철학자, 그리고 종교가였던 피타고라스가 주장한 만물의 근원은 수(數)라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현대에 이르러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지고 그 사람의 미래의 운명이나 행동 패턴를 예견까지 하기에 이르러 수점술(數占術)이라고도 불리지만 이에 대한 수학적, 과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비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지만, 특히 유대인들이 그들의 문자인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함으로써 사람이나 사물, 사건 등과 관련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게마트리아(Gematria) 수비학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마태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14대씩 끊어서 세 등분하는 자기만의 법칙을 만들어 기록한 족보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마 1:17)

이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과 관련된 숫자가 바로 14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철자인 달레트(ד=4) + 바브(ו=6) + 달레트(ד=4)에 각각 부여된 숫자를 합치면 14가 되는데,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자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시의 게마트리아 수비학을 사용해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직간접적인 숫자에 대한 현실적 해석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헬라어 이름 ‘예수’를 게마트리아로 계산하면 888이 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숫자 8이 들어가는 년도마다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는 해석은 본질을 한참 빗나갔습니다. 게다가 역시 숫자 8이 들어가는 2018년은 남북통일의 해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아전인수 그 자체입니다. 마태가 그의 족보를 포함하여 마태복음을 통해서 진짜 의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문자적인 다윗 왕국보다 더 큰 왕국, 즉 하늘 왕국의 왕(마2:2)과 주(마22:41-46)이심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특정 국가를 초월하여 이 세상 속에 감추어진 채 확장되고 있는 하늘 왕국의 왕과 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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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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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누가복음 3:23-38)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1:16
야곱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 이라고 하였다.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 라고 한다.

요셉의 아버지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족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유대 사회의 수혼제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야곱과 헬리는 형제이었는데 형 야곱이 자식이 없이 죽은 후에 동생 헬리가 형수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형의 족보에 올리면 실제적인 아버지는 헬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족보상의 아버지는 야곱이 된다.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

오늘 우리는 아주 따분하고도 까다로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족보인데 이 족보는 아무리 봐도 별로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의 족보처럼 사람의 이름만 계속 나열되고 있기에 따분할 뿐이고 이처럼 사람의 이름만 나열되고 있는 그 속에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생각되니 흥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따분할 것 같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까다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 또한 우리에게 복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 부분 하나도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오늘 본문 누가복음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마태가 말하는 족보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나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가 서로 족보를 언급하며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또한 마태의 족보는 보편적인 족보 형식인 하향식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양식의 족보는 누구의 후손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남으로써 예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노선을 따라 오신 분이며 다윗 자손으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연결되고 다윗은 솔로몬과 유대의 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족보는 전혀 다릅니다. 일단 마태는 생략하고 있는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의 족보를 보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혈통을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도 마태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 이후부터 그 노선이 마태복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마태는 다윗 이후 솔로몬으로 이어지지만 누가는 ‘나단 위는 다윗’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이 아니라 단지 다윗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는 나단과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 5:14절을 보면 나단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한 아들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다윗 사이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이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족보가 서로 다른 또 하나는 마태의 족보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 1:16)라는 내용을 보면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 23절에서는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함으로써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헬리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요셉의 아버지가 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족보에 대한 이야기가 따분하기도 하지만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예수님 끝은 하나님

그러면 누가의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백성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절)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족보를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신 아들이심을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계신 분이 죄인의 몸으로 오시고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하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본문의 족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대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의 족보가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연결된 이 족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걸쳐져 있습니다. 본문의 족보에서만 77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거론된 이름들은 거의 생소합니다. 그 이름이 본문의 족보에만 등장하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의 계통을 제쳐 버리고 이름만 있을 뿐 그 행적이 언급되지 않은 나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랑할 만한 화려한 족보가 아니라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한 가문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화려한 영웅의 세계가 아닙니다. 세상은 영웅적 인물이 많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예수님의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생명의 가문은 그처럼 화려하고 자랑스러운 영웅적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고 천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을 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로 연결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벌레 보다 못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가문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는 죽은 자인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은 자라는 우리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죽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족보에 기록된 이름들

누가의 족보에는 왕도 있고 이름 밖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이 족보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업적을 높이고 자랑하며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된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족보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생각하면 누가가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헬리를 요셉의 장인으로 말하기도 하고, 마태가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야곱의 동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헬리를 요셉의 장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가가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족보에서도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헬리를 야곱의 동생으로 말한 사람은 형 야곱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유대 혼인법에 의해 동생 헬리가 형수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는데 율법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으로 말한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기 때문에 누가는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그것은 족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헬리라는 사람 역시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족보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 끝이 하나님으로 끝나는 위대한 족보에 도무지 기록될 가치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심으로 죽음에 갇혀 있던 우리가 해방되어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죄인으로 죽음에 갇힌 나를 예수님이 붙들어 구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그 같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자기 이름의 높아짐이나 영광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할 것은 오직 나처럼 비천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신자를 복이 있다고 하는 이유

로마서 5:17-18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한 사람의 범죄자인 그도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있습니다.
아담만이 아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들이 사망의 종으로 있던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들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족보에서 예수님을 삭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끝은 비록 하나님이라고 해도 시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면 그 결과는 심판입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고 해도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고 살았다고 해도 역시 심판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에 갇힌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의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에 족보에 기록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의와 용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자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인생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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