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의 백합화(마태복음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백합화(크리논. krinŏn) κρίν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2918
뜻풀이부
1. [기본형] 백합, 마 6:28, 눅 12:27.
한국의 백합화는 하얀색의 고결한 모습으로 부활주일에 강단 장식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백합화는 한국의 백합화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야생화를(크리논, 마치 한국의 민들레) 말합니다.
야생화의 특징은 강한 생명력을 말합니다.
꽃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꽃에는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있다.
백합화(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 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생각하여 보라(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븐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꼭 일어날 일인 것처럼 염려를 했습니다.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처럼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할까?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할까? 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염려를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한다고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도 없는 염려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준비하신 일에도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쓸 것들을 미리 다 아시고 준비하신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고 염려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모두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괴롭게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알아서 맡아서 모두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염려는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행복한 내일을 기다리는 염려입니다.
기도로 이어지는 행복한 염려가 요즘의 염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공중의 새를 보라”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들의 백합화를 보라”라고 하십니다.
지난주에는 먹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염려나 고통스러운 염려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염려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잠자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 중에 입고 사는 것도 참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계절이 뚜렷하게 변하는 우리나라는 철 따라 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옷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입을 옷도 많지 않았습니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아이들이 가장 많이 기대하는 것이 새 옷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아무 때나 옷을 사서 입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런 명절이 되어야 새 옷을 사 입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형제들이 많은 가정에서는 많은 형제들에게 다 새 옷을 사 줄 수 없으니까 큰 형에게만 사 주고 동생들은 형의 옷을 물려받아서 입었습니다.
다 클 때까지 새 옷 한 번 입지 못하고 자란 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수고와 김쌈이라는 말을 같이 썼는데 정말 수고를 많이 해야 하는 일이 길쌈입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는 삼베옷이나 모시베옷을 많이 입었습니다.
삼나무나 모시나무의 껍질로 만든 옷감을 말합니다.
나무의 씨를 뿌려서 자라면 잘라다가 삶아서 껍질을 벗겨서 가느다랗게 찢어서 한 올 한 올 이어서 씨줄과 날줄로 베를 짜면 옷감이 됩니다.
말은 쉽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라서 오늘날에는 길쌈을 하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면으로 만든 옷도 많이 입었습니다.
면으로 만든 천은 고려시대의 문익점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숨겨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서 재배에 성공을 해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목화나무를 심으면 열매 속에서 하얀 솜이 나옵니다.
그 솜으로 실을 만들어서 만든 천이 면입니다.
명주비단은 어디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누에를 키워서 누에가 입으로 실을 뿜어서 자기 집인 누에고치를 만들면 그 누에고치를 뜨거운 물에 넣고 삶아서 그 실을 다시 뽑아내는 것입니다.
길쌈은 참 어렵고 수고가 많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많은 노력 때문에 의복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의복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인간들처럼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기 때문에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백합화는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의 대표적인 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합화를 보라고 할 때 꼭 백합화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생에서 자라는 들꽃들이나 이름 없는 들풀들까지도 다 입히시고 기르시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다음에 또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는 그래도 스스로 움직이면서 노력하면서 먹고살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는 움직이지 못하고 스스로의 노력도 없이 피어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은 지는 들의 꽃과 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만물의 으뜸으로 특별히 만든 너희 인간들을 입히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특별히 돌보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입을 것 때문에 걱정하게 만드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의복을 위해서 걱정을 한다고 할 때 입을 옷이 없어서 무엇을 입을까 라고 걱정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어야 더 멋있게 보일까, 더 아름답게 보일까, 더 고급스럽게 보일까, 이런 것 때문에 염려들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옷을 입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난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채색 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왕들이나 제사장의 옷도 아주 화려하게 입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 사극영화를 보면 신분에 따라 옷 입는 것이 다릅니다.
왕이나 신하들은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평민들은 그저 보통의 옷들을 입습니다.
오늘날도 그 사람이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아주 값이 비싼 일류메이커의 옷을 입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는데 정말 좋은 옷을 입으면 더 잘생긴 것 같고 못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도 비싼 옷을 사 입고 싶어 합니다.
학생들도 메이커가 없는 옷은 입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별 것도 아닌 옷들을 아주 비싸게 만들어서 그 옷을 입어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유혹을 합니다.
이처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옷 메이커가 있는 옷을 사 입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염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유행 따라 화려한 옷을 입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이 그 영광으로 입은 옷과 백합화가 입은 옷을 비교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옷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최고 화려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의 지위가 왕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최고의 부자였기 때문에 최고의 비싼 옷을 입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최고의 지혜를 가진 자였기 때문에 당대의 최고의 디자인을 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아무리 최고의 기술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솜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 한 송이에게도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도시에 사시는 분들은 꽃의 아름다움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하얀 백합화, 빨간 장미, 코스모스, 국화 꽃,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예쁜지 키워보지 않으신 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 꽃들이 다 하나하나 자기 나름대로의 멋을 가지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피었다가 지고 또 피는 것이 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그렇게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람은 겉만 화려하게 갖춘다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갖추어야 되는데 겉모양만 화려하게 갖추면 오히려 위선자가 되고 냄새나고 추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을 들에 핀 한 송이 꽃만도 못하다고 평가절하를 하셨습니다.
바르게 살지 못한 솔로몬의 인생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신분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백성을 착취해서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군대를 강하게 하고 오직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름 없는 들풀도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특별한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인데도 하나님께 영광은 돌리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하는 목사님 중에서 하얀 양복을 입고 반짝반짝하는 구두를 신고 고급시계에 비싼 반지를 끼고 온갖 멋을 부리는 목사를 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와서 하나님 말씀이나 바르게 전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아서 성도들이 충성을 해서 아무개 장로가 이 시계를 해 주고 아무개 집사가 이 양복을 해 주고 그런 자랑이나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고 말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고 고백한 그 사연도 알지 못하고 헛된 것 자랑하면서 들꽃 하나만도 못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에게 배우는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서 이상야릇하고 사치스런 의복에 욕심을 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외모를 꾸미는 일에 많은 시간과 많은 물질을 투자하면서 유행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이런 사치와 자기 자랑을 극심한 죄라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이런 성도들의 죄를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고 있는데 대해서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속사람은 그대로 두고 겉만 화려하게 가꾸려는 것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좋은 옷으로 사치를 하려는 것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옷이 없어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자기 자랑을 위해서, 자기 신분의 향상을 위해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치를 하기 위해서 염려하는 성도들에게도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비단 입는 옷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세상의 쾌락을 따라, 세상에서 더 화려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아보려고 하는 타락한 삶을 사는 인생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름 없는 들풀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없어지는 들풀도, 그가 살아있는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특별한 신분을 주시고, 자녀로까지 삼아 주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게 자기를 들어내려고 애를 쓰고, 얼마나 더 쾌락을 누리며 잘 살아보려고 염려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을 주신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 라고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옷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믿음이라는 말까지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맨 처음 옷을 입었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짓고 난 후에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입은 것이 최초의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짐승을 잡아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해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히셨습니다.옷은 죄를 가리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옷은 우리를 멋있게 폼 나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가려주는 수단입니다.
옷을 잘 입어서 화려하게 치장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문제를 어떻게 가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옷을 입고 사는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도 아마 우리들에게는 형편없이 더러운 죄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떨고 있는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그런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서신 분 앞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서신 분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 깨끗한 세마포 옷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가려주는 옷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를 때, 날 대신 피 흘려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에게 깨끗한 세마포 흰옷을 주시는데 그 옷은 나의 모든 죄악들을 완전히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옷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로몬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은 그 화려한 옷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그 세마포 흰옷이 나의 모든 죄를 가려주어서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초라한 옷을 입고 살았든지 세상에서 내 신분이 어떠했든지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보든지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깨끗한 세마포 흰 옷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이 세마포 옷을 주신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는 자처럼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이 없어서 먹을 것 때문에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십니까?
그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좀 더 화려하게 살고 싶어서 좀 더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기 위해서 염려하고 계십니까?
그 염려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염려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그런 염려는 믿음이 작은 자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에 올려주시기 위해서 세마포 흰옷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마포 흰옷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기뻐 춤 출 그날을 바라보면서 염려를 다 버리고 기쁨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지에서 백합화는 어떤 꽃일까?
성경의 꽃 중 가장 잘 알려진 꽃이면서 가장 논쟁적인 꽃이 백합화다.
성지를 30여 년 간 가이드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백합화와 샤론의 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솔로몬과 연관돼 있고, 예수님의 꽃이요, 후에 예수님이 솔로몬과 백합화를
함께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백합화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
아마도 백합화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여기서 백합화가 어떤 꽃 이길래 솔로몬이 입은 그 어떤 의복 보다도 아름다운가?
게다가 여기에 쌍벽을 이루는 연관된 꽃이 샤론의
꽃이다.
아마도 찬송가 '샤론의 꽃 예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늘 궁금해 지는 꽃이다.
이 두 꽃이 연관이 되는 것은
바로 아가서 2장 1절에 함께 나온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하브쩰레트)요 골짜기의 백합화(쇼샨)로다"
백합화가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곳이 아가서다.
구약성경에 총 12번이 언급되는데 아가서에서만 8번이 나오니 말이다.
아가서에서는
수선화와 백합화가 함께 등장하며 이후 백합화라고 언급된 히브리어 꽃명은 쇼산나다.
함께 등장한 수선화는 하브쩰레트.
즉 샤론의
하브쩰레트요 골짜기의 쇼산나로다.
분명 다른 두 꽃인데 칠십인역과 라틴역에서는 이 두 꽃을 구분없이 봤다.
그게 반영된 것이
이사야서 35장 1절이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하브쩰레트)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이 구절에서 아가서에서 수선화로 번역된 하브쩰레트를 이사야서는 백합화로 본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두 꽃을 같은
꽃으로 번역한 문학적인 관점. 왜 같은 꽃으로 보았을까?
이 관점이 이미 성지의 백합화가 무엇이냐에 힌트를 갖고 있다.
아가서에서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 한 것은 문자적인 두 꽃 이라기 보다는, 문학적인 들꽃의 총칭으로서 산지 골짜기의
백합화에서부터 해안평야 샤론의 수선화까지 이스라엘 전지역에서 피는 들꽃들이라는 것.
마치 한라에서 백두까지가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듯이, 또 창세기의 여자와 남자를 만드셨다는 표현도 모든 인류를 만드셨다라고 보는 문학적인 표현 말이다.
이 두 꽃을 혼용했던 중세시대 이후, 근대에 성경신학이 발달하면서 다시 쇼샨나는 백합화로 하브쩰레트는 수선화로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두 꽃은 모양새가 비슷하지만 쇼산나(백합화)는 세 줄기로 뻗어난 꽃으로, 하브쩰레트(수선화, 또는 들꽃)는 여러
줄기로 뻗어난 꽃으로 특징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절을 통해 설명하면, "주는 저산 밑에 백합" 할 때 백합은 쇼산나,
"샤론의 꽃 예수" 할 때는 샤론의 꽃은 하바쩰레트(수선화 또는 들의 꽃)이다.
성지순례시 가이사랴-갈멜산을 오갈 때 샤론평야를 지나며 종종 부른 찬양이 '샤론의 꽃 예수'이다.
봄철의 차창 밖에 펼쳐진
그 수많은 꽃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꽃이 바로 진한 붉은 색 아네모네다.
그리고는 "저 돋보이는 붉은 꽃이 아네모네인데 바로
성경의 백합화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아네모네가 백합화가 되었는가?
성지에서 아네모네를 가르키며 저 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백합화라 하면 의하해 한다.
"흰색의 꽃이 아니였어요? "라고 되묻는다.
백합화는 흰꽃이라 생각했는데 붉은색 아네모네라니.
심지어 성지에서 백합화는 아네모네뿐만 아니라 들녘에 피어나는 수많은 꽃들을
백합화로 부른다는 것에 다시 한번 의아해 한다.
백합화를 이해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백합화의 백자가 흰백자가 아니라
일백백자라고 알면 된다.
그래서 백합화는 성지의 들에 피는 백 여 가지나 되는 들꽃의 총칭인 것이다.
들의 핀 아네모네를 보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백합구나"라고 생각하면 무난하다.
그러나 "근데 왜 붉은색 아네모네가 백합화지?" 라고 생각하면 아주 복잡해진다.
그럼 어떻게 해서 백합화가 붉은색 아네모네가 됐는가?
구약에서 백합화로 언급된 히브리어 이름인 '쇼샨나(쇼산)'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흰색 백합화(lily) 꽃들이 나타나고, '하브쩰레트'를 검색하면 나르키스(Narcissus)과의 여러 꽃들이 보여진다.
모두가 흰색의 꽃들이다.
붉은 색 꽃은 없다.
그런데 성지에서는 붉은 색 아네모네를 백합화라 소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주셨던 갈릴리의 산야에 피어난 봄꽃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꽃이 바로 붉은 색의 아네모네다.
성지의 봄을
아름답게 수놓은 붉은 색의 꽃으로 치자면 당연히 아네모네가 있고 여기에 양귀비 아도니스가 모두 백합화에 해당한다.
피어나는 순서도
아네모네가 가장 먼저 피어나고 아도니스 그리고 양귀비가 이어 피어난다.
그러니 성지 봄은 1월부터 5월까지 온통 붉은색 카페트를
깔아놓은 듯하다.
구약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입술을 백합화(아 5:13)로 비유한 것을 보면 백합화는 당연히 입술처럼 붉은색이 됐을
것이다.
이미 4장에서 네 입술은 홍색 실 같다(아 4:3)고 하니 두말할 나위가 없이 붉은 색이다.
여기에 더해 솔로몬 왕의
자주색 옷이나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홍의에서도 자연스럽게 붉은색이 도출된 듯 하다.
성지에서 붉은색을 품은 대표적인 꽃이
아네모네인 것이다.
쇼산나(백합화)는 구약성경에 총 12번 언급되는데 그 중 8번이 아가서에 기록돼 있다.
그러고 보면 솔로몬은
백합화를 참 좋아한 듯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전은 바로 이 솔로몬이 입은 그 어떤 의복도 이 백합화만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네모네는 성지에서 가장 대표적인 꽃임에는 틀림없다.
솔로몬의 아름다운 의복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리라는 예찬은 틀린 말이
아니다.
누가 가꾸지 않아도 이렇게 산천에 스스로 피어나니 말이다.
특히 더 아름다운 것은 토양이 좋은 꽃밭이 아니라 돌짝밭의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 피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어로 아네모네를 칼라닛이라 부른다.
신부란 뜻이다. 봄의 신부.
참 어울리는
이름이다.
성지의 백합화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가시밭에서 더욱 돋보이는 꽃이기 때문이다.
황무지의 땅 가시밭에 대조되며 그
아름다움이 더욱 고조된다.
다음의 가사도 성지의 현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사실 백합화란 꽃이 어떤 꽃이냐는 것은 단지 사전적인 관심일 수 있다.
무슨 꽃이냐는 논쟁보다 그 꽃이 왜 언급되었는지를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들의 꽃은 그저 흔한 꽃이지만 인간이 온갖 권위와 사치로 꾸며놓은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아름답다는 것이요,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꽃으로 비유한 것이고, 이사야서에서는 황량한 사막에서 극적으로 대비되는 향기와 시각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쇼산(백합화)이 진짜 어떤 꽃인지 궁금해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성막의 놋바다를 설명하며 쇼샨을 언급하는 구절이다.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 하고 그 둘레는 잔 둘레와 같이 백합화의 모양을 만들었으니(대하 4:5, 왕상 7:26)"
놋다바의 모양을 했던 그 백합화가 진짜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들의 백합화, 아네모네
꽃의 여신 플로라에게는 아네모네라는 아리따운 시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남편 바람의 신 제프로스가 아네모네를
사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멀리 포모노 궁전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제프로스는 아네모네가 있는 곳을 찾아내어
사랑을 이어갔고, 도저히 그들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플로라는 마침내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랑하는
연인이 꽃이 되자 바람의 신 제프로스는 그녀를 잊지 못해 봄이 되면 언제나 부드러운 바람을 보내 화려한 꽃을 피게 했다.
그리하여 이 꽃에 ‘바람꽃’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아네모네의 꽃말과 관련된 이야기다.
해마다 2월말에서 3월이 되면 성지에는 아네모네가 만발하는데, 호수 주변에서 노란 겨자 꽃과 섞여서 지천으로 피어있는 아네모네를 볼 수 있었다.
아네모네는 자생하는 빨간 들꽃으로 키가
작다.
바로 이 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百合花)’라고 한다(마 6:28).
* 일백 백, 합할 합, 꽃 화 -
그런데 어떻게 빨간 꽃을 백합이라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백합이란 ‘흰 꽃’이
아니다.
백은 ‘흰’ 백(白)이 아니라 ‘일백’ 백(百)이다.
백 개의 인편(鱗片)이 하나의 구근(球根)을 이루고 있어서
백합(百合)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꽃을 주님이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로 보는 이유는 주님께서 산상보훈을 주신 장소가 갈릴리
호수 주변이고, 이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 아네모네는 기독교와 관련이 깊은 꽃으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가(슬픔과 죽음의 의미) 그림 안에서 자주 볼 수가 있다.
1147년 2차 십자군 원정 때
피사 대성당의 움베르토가 성지에서 가져온 흙 속에 아네모네의 알뿌리가 있어 이 흙을 사용한 십자군 순교자의 묘지에서 피와 같이
붉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순교자의 피가 되살아 난 것이라 믿게 되었고, 그후 유럽에서는 기적의 꽃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주님의 피에 비유되는 꽃이기도 하다.
들꽃이 만발한 성서의 땅을 순례하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는
말씀이 주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들판이나 사람이 보지 않는 숲속이나 나무 사이 여기저기 빨갛게 피어있는 아네모네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노란 겨자 꽃 만발한 들녘에 마치 빨간 점을 찍어놓듯 피어있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이런 대자연의 캔버스에 이런 엄청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들꽃 하나도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들의 백합화를 보라!’
들의 달맞이꽃을 보라!
들의 은방울꽃을
보라!
들의 패랭이꽃을 보라!
저 들의 한 떨기 이름 없는 꽃을 보라!
그 분의 형상인 자신을 보라!......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