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은 말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았지만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기근이 오자 애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또한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안 믿은 것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라고 해도 순종한 것입니다.
이 때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좋은 예가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해도 내 욕심 때문에 잘 베풀지 못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들처럼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속임수와 유혹에도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고 악인들에게 미혹되지도 않습니다.
내 생각보다 성경 말씀을 더 따라야 합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이 정도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내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을 회개합시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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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공동번역)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믿음(530) 에무나(ĕmûwnâh) אֱמוּנָה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 '그의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쇼'는 '영', '생명'(KJV,RSV)이라 번역할 수 있고, '욕망','욕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접미사 '그의'는 1:2-2:1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갈대아(바벨론)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펠라'는 '아팔'의 푸알형으로 본래 '부풀어 오름'을 의미하며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민 14:44). 이는 교만한 자의 심중이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런 심적 상태를 소유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믿음'의 히브리어 '에무나토'는 '공평', '견고', '확실', '영원'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한다.
본 구절에서 믿음의 속성은 '그의'라는 소유격앞에 위치한 '의로운'에 의해 잘 설명된다.
믿음은 의를 실천하려는 그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의미하는 바, '믿음'은 의의 개념과 동일하게 사용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3:4,5; 40:10; 96:13; 119:75,138; 143:1).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청의의 교리를 가르친다.
믿음이란?
1. 정직한 것에서 시작한다.
2. 교만하지 않은 것이다. -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나서는 것(민수기 14:44)
민수기 14:41-44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 의를 실천하려는 변함이 없는 태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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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공동번역)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새번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믿음이 적은 자들아(3640) 올리고피스토스(ŏligŏpistŏs) ὀλιγόπιστος, ον
뜻 풀이부
1. 믿음이 작은, 마 6:30, 8:26, 16:8, 눅 12:28.
적은(올리고스. ŏligŏs) 3641 ὀλίγος, η, ον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어원 / 3982에서 유래
* 3982. 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뜻풀이부
1. [현재완료, 과거완료 외의 능동태]
a. 확신을 가지게 하다, 수긍시키다, 행 18:4, 19:29.
b. 설복하다, 호소하다, 애원하다, [나쁜 의미로] 감언으로 속이다, 그릇 인도하다, 고후 5:11, 갈 1:10.
c. 끌어들이다,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행 12:20, 14:19, 갈 1:10.
d. 화해하게 하다, 만족시키다, 마 28:14, 달래다, 요일 3:19.
2. [현재완료가 현재의 뜻을 가진다]
a.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믿다, 눅 11:22, 갈 5:10, 빌 1:14.
b. 확신을 가지다, 확신하다, 롬 2:19, 히 13:18, 빌 1:6.
3. [수동완료형 이외의 수동태
a. 설복을 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게 되다, 믿다, 행 17:4.
b. 복종하다, 따르다, 롬 2:8, 갈 3:1, 히 13:17.
4.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확신하다, 확실하다, 눅 20:6, 롬 8:38, 히 6:9.
오늘 있다가(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아궁이에(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들풀(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대부분의 개혁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은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크다.
물론 이것도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며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대부분 개혁교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8:15-17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19:1-7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믿는 것과 아는 것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성경 : 마태복음 16:15-17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는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신적지식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드디어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게 하다란 아포칼립토 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 계시하다, 보여주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이 바로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것을 열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지식이며 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얻는 지식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경험과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터득한 지식은 내가 직접 체험해서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며 간접적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는 과연 믿는 사람인지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영접하다(인격적으로 받아들이다) 라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때문에 진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과 동일한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요14:12절은 금요기도회 때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4:7-9/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린 사람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죽음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만약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불신앙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참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행17: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경험했을 때 드디어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드디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요2: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적인 동의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의 한계는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드디어 삶이 달라지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예수 믿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신이 보화처럼 여겼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3. 그래서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삶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약2:14-17/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환경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주위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7:16-20/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아는 자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공간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제자들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불안해 하였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믿는 자가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위기나 죽음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으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됩니다! 히11:35-40/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들이야말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못 말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마지막 특징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엡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나의 몸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계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잠을 잘 때 예수님과 함께 잡니다.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공부할 때 예수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설교준비를 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도 예수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처럼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엡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과는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성경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문제를 만나고 삶의 파도를 만나게 되면 평안이 사라져 저립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만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빨리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Question
하나님을 만나는 것
1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난생 처음 듣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신비적인 것인지? 아니면 지식적인 것인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Answer
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선지자들....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임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은혜로 대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 즉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며, 기도하고, 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복음의 일꾼들을 세워주시고, 그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담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그 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은 예수를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는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며 교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며,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아룁니다.
그리고 찬송을 통해서 감사를 표현하고 그
이름을 높입니다.
3.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교회를 오랫 동안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공통점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아지지 않고, 찬송을 불러도 은혜가 되지 않으며, 자기 열심으로 말씀을 지키다가
교만해지거나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요 3장을 보면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이며 선생이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후였습니다.
4.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다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를 하다가 말씀을
깨닫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치의 병을 고침받음으로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도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나님을
만나시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1.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확인해본다.
이 대답에 진심으로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다면 이미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완료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만일
1)번의 질문에 "글세요!"나 "No"라고 대답한다면, 먼저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경우에 요한복음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여러 번 읽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3. 기간을 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간절히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며 기도할 때에, 반드시
약속 대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