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 모태신앙과 고백신앙(영접신앙)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에 "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두 개의 단어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안다는 단어네 "기노스코"라는 단어와 "에이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But we know where this man is from; when the Christ comes, no one will know where he is from.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전통적인 사고의 유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중간 시대에 나온 계시 문학에서 엿볼 수 있는 사상의 결과라고 합니다.

계시 문학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구름에서 나타난다" 혹은 "해에서 나타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제 4 에스라 7:28,13:32).

전통적인 사고가 옳은 방식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적 사고가 잘못된 방식이라면 잘못을 뉘우치고 옳은 방식을 따라 진리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예언된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사람들처럼 오늘날도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에 진리가 있다고 착각(錯覺)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며 그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를 잘 알고 있는데 하늘로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요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고 하셨을 때 "아노라" 라는 헬라 단어는 "에이도(
ĕidō. εἴδω)"라고 합니다.

'에이도'라는 단어는 내용을 깊이 알고 경험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겉모양만 단순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과 실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것을 "기노스코(ginōskō. γινώσκω)" 라고 합니다.
기노스코의 앎은 마음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경험, 체험).
에이도의 앎은 머리로만 아는 것을 말합니다(지식, 정보).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안다는 것은 단지 일반적인 정보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본질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알려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단순한 방언을 하느냐?
환상을 보았느냐?
병자를 고칠 수 있느냐?
이러한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을 알 수 있는 은혜를 받았느냐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에 의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시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오이다 / 에이도와 기노스코의 차이를 말해주는 성구

요한복음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오이다)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기노스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알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체험한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3년간 최고 스승이신 예수께 교육과 훈련을 받았어도 기노스코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기 전과 후는 차이가 분명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하나님을 기노스코 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아노라(에이도. ĕidō)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관련 성경 /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알다(기노스코. ginōskō)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1. 알다.  2. 신비를~ .  3. 하나님을~
발음 [ ginōskō ]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 ,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 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모태신앙(母胎信仰) : 고백신앙(告白信仰) <迎接信仰>

모태신앙이란 용어는 기독교에서만 통용되는 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모태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무당을 이야기 할 때 강신무와 세습무라고 구분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무당들이 신을 받아야만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태신앙을 가톨릭에서는 "태중교우"라고 하며, 성공회에서는 "뿌리신자"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세를 강조하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세뇌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모태신앙이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혹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을 때부터 자신이 교회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는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말이고, 그 속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말입니다.
주일학교부터 청년회까지 교회에 꾸준히 다니면서 들려지는 매 주일 말씀을 듣고 소그룹에서 나누는 교제에도 함께했으며 침례를 받거나 만찬에 참여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모태신앙인은 디모데입니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의 배경 속에서 자랐습니다(딤후 1:5).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습니다(딤후 3:15).
그는 사도 바울의 영적 아들로(고전 4:17) 사도의 소명을 이어받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울 것을 명받았습니다(딤후 4:1-8).

또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던 사무엘도 모태신앙인입니다(삼상 1:27-28; 2:18-21).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호와께 드려졌고 여호와 앞에 자랐습니다.
왕이 없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이스라엘의 암흑기 마지막 사사로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을 세우는 중대한 일을 했습니다.
사무엘의 마지막 설교를 들으면 그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신앙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삼상 12장).

하지만, 모태신앙인이라고 무조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수많은 예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함께 대제사장 엘리의 영향 아래 자라났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녀들로 자랐고 결국 엘리 집안을 멸망시켰습니다(삼상 2:27-36). 아이러니하게도 훌륭한 모태신앙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무엘의 아들들 역시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큼 엉망이었습니다(삼상 8:3).  

오늘날에도 우리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란 흉악한 범죄자들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반대로 암울한 배경 속에서 대를 이어가는 죄악된 삶의 사슬을 끊고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세운 신앙인의 간증을 접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모태신앙”이 곧 참 신앙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좋은 신앙의 배경이 좋은 신앙인으로 자라게 하는 좋은 토양이 될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나무 자체가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랐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배경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물론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순종했다는 것을 전제로 말입니다). 그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친히 선택하시고 그들과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들에 대한 신실한 사랑을 보이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제사제도를 알려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배우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은 끝내 율법을 완성시킬 수 없기에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대신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죽을 희생제물로 삼으셨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권세를 얻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기업을 함께 이어 받을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결론 내린 것처럼 ‘이 사실을 어려서부터 들어서 안다’는 것이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와 동의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배운 그 사실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었는가’가 중요하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좋은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치 어려서부터 탁구장을 운영하는 집에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이 탁구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해서 무조건 탁구를 잘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직접 배우고 연마하여 좋은 실력을 갖추는 것이지 좋은 배경속에 있었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실력을 갖추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었고, 율법과 계명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녀들에게도 그들이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하였습니다(신 6). 그들의 정치 지도자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이방인과 구별된 모태신앙 집단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 국가였고 교육과정은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모태신앙의 배경을 갖춘 자들이 있을까요?

바울은 그들 역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들에 비해 너무나 빈약한 신앙의 배경을 가졌던 이방인과 동일하게 그들은 죄인으로서의 한계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배경이 그들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심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유익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9-18)

개와 같은 이방인들에 비해 월등한 모태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그들이 가졌던 자부심과 교만을 완전히 뿌리뽑고 바울이 외쳤던 그들의 진짜 영적 현실을 그들이 처절하게 바라보기 원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모태신앙인으로서 저는 이렇게 말하기 원합니다. 모태신앙의 배경을 가졌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곧 나의 신앙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이 곧 나의 영적 상태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나의 겸손한 순종과 믿음이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과 능력이 나를 거듭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이 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태신앙입니다”라는 말이 “그러니 저는 당연히 그리스도인입니다”가 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베드로와 같은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혹은 주께서 크다고 칭찬하신 한 이방인 여인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습니다.” 세리와 같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모태신앙’은 감사의 제목이지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라는 말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당신이 언제 그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말해주십시오.
언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죄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주십시오.
언제 하나님께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부르짖었는지 말해주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당신의 불의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는지, 당신의 온전한 자랑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는지 말해주십시오.
그것이 모든 신자가 해야 할 믿음의 고백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위대한’ 모태신앙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칼 바르트,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고경태)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정규철)




칼 바르트,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Karl Barth, 1886. 5. 10 ~ 1968. 12. 10)

스위스 개혁교회 목사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가 남겼다고 하는 유명한 말 가운데에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의 발언을 신앙인은 성경에 대해서 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조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대선 목사는 바르트의 주장을 성경에서 상황으로 순서로 이해했고, 
당시 불트만 계열이 주장했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해석법을 상황에서 성경으로 순서로 제시했다.

해석학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text and context)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성경 텍스트는 1세기 문서이고, 21세기 상황에서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는 중요한 구도일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저자가 21세기 독자에게 텍스트를 보냈는지는 큰 관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1세기 저자와 1세기 독자의 관계 문제를 규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학 비평이 도입되면서 구조 분석을 진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자반응비평(Concept of Reader-Response Criticism)으로 전개되고 있다.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의한 것이다. 

우리는 반틸 박사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로 귀결할 수 밖에 없다. 
해석자가 해석하는 목표(전제)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해서 무엇을 얻어 제공하려는 것인가? 
해석자의 전제를 파악할 수 없다면, 질문하면 된다. 공적 사역자는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신앙과 사회를 균형 있게 바라보라는 권고나, 성경에서 상황의 순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자는 성경과 신문을 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설교한다. 
설교에 적용 부분이 있다고 제시하는데, 필자는 적용이 없어도 좋은 설교라고 생각한다. 
설교는 삶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주의 말씀 들음”을 이루지 못한다면, 설교를 떠나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데, 어디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자기 계시관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관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유에 둔다. 
즉 성경(특별계시)이나 신문(일반계시), 어디에서든지 바르트의 하느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할 수 있고, 그 백성은 어디에서든지 자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있어도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수준에 어떤 문제가 없다. 

어떤 설교나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수납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불신앙이고 이단적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정통 교회는 기본적으로 성경과 교리로 하나님 말씀을 수납하는 구도를 제언한다. 
바르트는 설교하는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주체는 청자(聽者, a listener)에게 전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개혁된 신학에서는 화자(話者, a preacher)와 청자(聽者, a listener) 사이에 성령의 내적 작용이 결합되어야 한다. 
개혁파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없는 화자에게서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긴박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복음이 선포되어도 깨어있지 않는다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깊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바르트에게는 자유가 있고, 필자는 매우 규범적이고 제한적이다.

장대선 목사가 제시한 것처럼 바르트의 해석 방법과 불트만의 해석 방법은 같지 않다. 
방법이 같지 않으며 해석의 목표도 같지 않다. 
불트만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파와 같을 수는 없다. 
불트만을 대적했기 때문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을 개혁파 분야에서 긍정적으로 수납하며,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계시 이해에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제언한다. 
특별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반계시 영역에서 유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불트만의 수제자에서 돌아선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 1926-2009)에게서 잘 드러난다(에타 린네만,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송다니엘 역, 부흥과개혁사, 2010년). 
린네만은 불트만의 지도로 “Gleichnisse Jesu. Einführung und Auslegung”를 발표했고, 숨바쿰라우데(summa cum laude, 최우등상)로 1961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학자이다. 
린네만은 51세에 회심한 뒤 인도네시아로 선교 사역을 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으로 자기 이전 모든 작품을 정죄했다. 
린네만이 거부한 <예수의 비유>는 지금도 비평학계에서는 잘 인용하고 있다. 
린네만은 마가복음 우선설을 거부하고, 공관복음의 원자료설을 거부하고 독립성을 주장한다.

성경해석은 끊임없는 정진에 있다. 
교회 사역자들이 많은 글쓰기를 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글쓰기는 끊임없는 성경 본문 다룸(handling)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역자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 해석을 읽고 듣는 독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바르트의 신학을 수용하는 예장 통합, 바르트의 신학을 부정한다는 예장 합동의 열매가 유사하다면 어떤 포인트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 다 나쁜 확률은 상당히 높지만, 둘 다 좋을 확률은 거의 없다. 
성경을 해석한 해석자와 따르는 사람의 열매를 보자. 바르트, 불트만 등등 당대 시대를 주도했던 현대신학자들의 열매가 100년이 되지 않아 보이고 있는데, 동성애를 넘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로마서 주석》, 《고백교회》, 《바르멘 선언》,[1][2] 그리고 미완성의 대작인 《교회교의학》으로 잘 알려져있다.[3][4][5]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꼽히며, 바르트의 영향력은 학문적 범위를 넘어 대중 문화로 확장되어 1962년 4월 20일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기도 했다.[6]

바르트는 동시대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처럼 아돌프 폰 하르낙,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등에게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 교육을 받았다.[7] 처음에는 스위스 시골 마을 사펜빌(Safenwil)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여 "사펜빌의 빨갱이 목사"로 알려졌다.[8] 이곳에서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적 기독교에 대해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919년 첫 번째 판 로마서 주석(로마서 I)을 집필하여 신약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21년 로마서 주석의 두 번째 판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과의 공개적 단절을 선언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9]

예수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인 인간으로,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으로, 윤리적인 지침서로 이해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으로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그의 계시관과 역사관은 차이점을 보였기에 그의 이러한 신학적인 성격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폴 틸리히, 에밀 브루너루돌프 불트만과 함께 20세기 초 개신교 신학계를 주도했다. 그 외에도 바르트는 디트리히 본회퍼, 위르겐 몰트만, 헬무트 골비처, 제임스 H. 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토마스 F. 토렌스, 한스 큉,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 자크 엘륄과 같은 신학자뿐 아니라, 플래너리 오코너, 존 업다이크, 미클로시 센트쿠시(Miklós Szentkuthy)와 같은 소설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바르트는 현대 기독교 윤리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10][11][12][13] 스탠리 하우어워스, 존 하워드 요더, 자크 엘륄, 올리버 오도너번 등의 윤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10][14][15]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독일어 판 Kirchliche Dogmatik

생애

목회경험

신학자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의 장남인 칼 바르트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베른에서 보냈으며, 1904년 베른 대학교, 베를린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학생 칼 바르트는 교수들의 영향으로 당시 유럽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의 교회에서 개혁교회 목사로 목회하면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복음으로써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본가들로부터는 '빨갱이 목사'(Red Pastor)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부 공장주들은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교파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한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 설교하지 않으며 성경을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4년 8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은 그에게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반박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칼 아담은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유럽신학계의 충격은 컸는데, 칼 바르트 자신도 '나는 우연히 잡은 교회종의 줄을 잡아당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게 한 사람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전통에서 길을 찾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한 후 자신이 속한 개혁교회(Reformed)의 전통에서 길을 찾았다.그는 개혁교회 신학의 뿌리인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 및 제2 스위스 신앙고백 등의 교의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바르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 곧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기독교 사상의 열매를 맺게 했으며, 신학무용론이 지배하는 반지성적인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과 성직자들에게 신학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반 나치 운동

칼 바르트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기독교인들과 개신교 신학생들까지도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고,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면서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하자, 나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히틀러의 나치즘운동이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요, 유대인, 집시등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대중강의와 설교를 통해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반 나치이념의 특징을 보여주는 문헌은 《바르멘 선언》이다. 바르멘 선언은 1934년 독일 바르멘에서 친나치적인 독일 교회에 반대하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인들이 모여서 발표한 反 나치 신학선언으로, 하나님의 말씀(Logos)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으며, 자신을 길이요, 진리로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도, 설교의 주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주요주제이다.

결국 그는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독일밖으로 영구추방당하여, 스위스 바젤 대학교로 이직했다. 칼 바르트의 나치반대운동은 칼 바르트 연구의 핵심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폴 틸리히, 디트리히 본회퍼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었다.

전후활동

전쟁이 히틀러의 패망으로 끝난 후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1948년에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 헝가리를 방문, 헝가리 개혁교회와 대화하였다. 또한 1948년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결성된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성립과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주요 활동은 저술활동으로 《교회교의학》을 저술했으며, 인생의 말년인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는 자신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개신교 신학입문》을 저술하였다. 이중 《교회교의학》은 1968년 바르트의 죽음으로 일부내용이 저술되지 못한 미완성작품이며, 한국어판은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번역,출판 중이다. 현재 4권까지 출판되어 있다. 1968년 별세 전날 20세기의 대표 신학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16]

종교 사회주의 운동 참여

칼 바르트는 1911년부터 스위스 공단지역인 자펜빌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억압과 착취를 받는 현실을 보았으므로 현실참여적 성직자가 되었다. 바르트는 1913년 스위스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당시 유럽 교회가 관심을 갖고 있던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도 중심인물로 참여하였다.

신학

칼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업적은 그의 신학 대작인 《교회교의학》이다. 이 작품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 하나님 교리, 화해의 교리, 구속의 교리를 논하며, 모든 신학적 논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재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학의 방법

바르트의 신학적 구분법은 루터와 칼빈의 전통적 구분법인 원형/모형을 따르지 않고, 칸트의 현상적(phenomenal)/본체적(noumenal)의 구분을 따랐다. 그 뿐만 아니라, 비록 그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 반대각을 세웠지만, 슐레이어마허의 주관적인 관점을 받아들였다. 결국에는 바르트에게 성경은 객관적인 역사에 기초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실존적으로 만나는(existential encounter) 가능성을 뜻하였다.[17]

삼위일체 초점

바르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상실된 것으로 간주된 삼위일체 교리를 개신교 신학에서 회복하는 것이었다.[18] 그의 주장은 하나님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자신의 지식의 대상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며, 성경 속 계시는 인간이 단순히 자신의 직관을 통해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19]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위로부터 수직으로(Senkrecht von Oben)'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일원론 (Christomonism)

바르트는 성경전체를 신구약성서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서, 부적절한 강조라고 코닐리어스 반틸은 말한다.[20]

선택

《교회교의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논란이 된 부분 중 하나는 선택의 교리(선택론, 교회교의학 II/2)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이 각 개인을 구원하거나 정죄하도록 선택한 것이 신적 의지의 목적에 따른 것이며, 왜 어떤 사람은 선택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는 사상을 거부한다.[21]

바르트의 선택 교리는 영원하고 숨겨진 신적 계획이라는 개념을 단호히 거부한다.[22] 바르트는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으로, 인류의 구원이나 정죄를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계획에 귀속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위보다 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요소를 하나님 안에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만약 "절대적 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초기 개혁 신학 전통에서 이중예정 개념을 유지하지만, 하나님의 인류 선택과 인류 죄의 거부를 모두 구현한 것을 예수로 본다.[23]

바르트의 선택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구원론의 개인 구원 예정 교리를 개선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24] 에밀 브루너를 비롯한 이들은 바르트의 관점이 온건한 보편주의(soft universalism)로 이어져 아우구스티누스-칼빈주의와 다르다고 지적한다.[25]

구원

칼 바르트는 엄격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죄와 구원에 대한 관점이 기독교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예정론이 인간을 미리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설정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다수의 인간이 운명적으로 정죄받는다는 인식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바르트의 구원론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의 저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전체와 하나님의 화해가 본질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이미 선택되고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나는 보편구원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며 보편구원론과 거리를 두었다.[26]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영원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단순히 열린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가져야 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신학적 일관성이 우리를 이 방향으로 가장 분명히 이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자유로운 선물로만 주어지고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라며 단순히 전적 화해(total reconciliation)를 희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7]

바르트는 현대에 와서는 "전통적 신학을 상당히 넘어서는 중요한 단계"를 밟았다 평가받는다. 그는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이 다수 또는 대부분의 사람이 정죄받는 것을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반대했다. 바르트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중심이며, 정죄는 절대적인 결론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27]

말씀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명제를 가지고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높이고, 존중하는 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사람으로 오신 말씀(Logos) 예수 그리스도Messiah를 뜻하므로, 바르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말한다. 그는 신학의 출발점과 귀결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기복신앙[28]윤리를 가르쳐 온 일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교회중심의 신학

바르트는 신학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실천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즉,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에게는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학의 지혜에 따라 교회를 이끌 책임이, 신학자에게는 교회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언자적 신학

바르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인도해야 한다고 보았다.그래서 바르멘 선언을 형제교회 성직자들과 함께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 
Rudolf Karl Bultmann(1884. 8. 20 ~ 1976. 7. 30)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칼 불트만 (Rudolf Karl Bultmann, 1884-1976)은 독일의 올덴부르크의 비펠슈테데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1910년 요하네스 바이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바울의 설교 양식과 견유학파 및 스토아학파의 논쟁 화법: Der stil der paulinischen Predigt und die kynisch-stoische Diatribe). 1912년 교수자격 논문 (Die Exegese des Theodor von Mopsuestia) 통과 후 마르부르크에서 신약학을 30년 동안 가르쳤다.

우리는 새삼스럽지 않게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교과서와도 같은 그의 사상에 관한 문제점을 간단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불트만 스스로 자신의 신학 사상의 핵심을 비교적 평이한 문체로 설명했다는 (G. E. Ladd)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이동영 역, 1994)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책의 내용은 불트만이 1951년 10월경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영어로 강의한 것을 정리한 것이기에 영어판이 원본이고 독일어판이 번역본이다.

1. 현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형성되었고 일상적인 삶을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48-9). 성경의 낡은 세계관이 다시 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불러냈다는 성경의 신화적 세계관은 현대인에게 ‘진정한 걸림돌’이다 (같은 책, 49).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 사상이 신화이고,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거나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사탄의 군대와 귀신들이 모든 악의 근원이고 죄와 질병의 원인이라는 이론은 신화론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이 세계가 하늘과 땅과 지옥의 3층 건물로 구성되었다는 세계관도 신화적이다 (같은 책, 17).

불트만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현대인들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적 세계관으로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신화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신화는 현대의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역사적 실제적 사실이 아니라 고대인들이 창작한 이야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 신화의 문제와 비신화화

불트만은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에 따라 성경의 내용들을 신화로 간주하였다. 예를 들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8; 막 9:1)는 구절은 예수님의 진짜 말씀이 아니고 초대교회에 의해 그의 말씀으로 간주 되었던 본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16).

불트만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는데, 하나님 나라 사상도 신화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책, 17). 이런 방식으로 불트만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서 예수님이 인자로서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거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하여 초대교회 교인들이 신화론적 빛 안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19).

헬라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그들은 예수가 하나의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으며, 자신을 고통 가운데 내어주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던 분으로서, 창세 전부터 선재(先在)하고 계셨던 위대한 천상적 존재로 예수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개념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신화임이 명백하며, 이러한 신화들이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같은 책, 19-20).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종말, 구속자, 구원 등의 개념은 신화론적인 세계관으로서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고 폐기 처분된 것이다” (같은 책, 20).

불트만은 그와 같은 개념들이 성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기 위하여 지성을 희생시킬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가능하냐고 질문한다 (같은 쪽). 그래서 불트만은 성경의 이러한 신화적인 개념들을 비신화화 (Entmythologierung, demythologizing)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21). 그러면서 그는 비신화의 목적이 신화론적인 진술들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같은 쪽).

불트만의 신화론 문제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고 이미 폐기 처분된 것으로 성경의 초자연적 내용들을 철저히 배제한 것이다. 그렇다고 불트만의 말대로 신화적 내용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비신화화라는 방식으로 성경의 초자연적 내용들을 해석하여 초자연적 부분들을 현대인들이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의 이러한 해석방침은 성경 본래의 메시지를 희생시켜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맞도록 변형하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3. 실존 철학적 해석

불트만은 성경의 신화적인 개념들을 해석하기 위하여 실존철학을 도입했다. 신화론은 인간 실존의 특정한 이해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안적인 것을 차안적인 것으로 객관화시킨 것이 신화인데, 하늘의 하나님과 땅속의 지옥이라는 신화적 관념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에 위와 아래가 있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허구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실존주의 철학을 성경해석에 도입했다 (같은 책, 59).

“여하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한 명의 전능한 존재가 실존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미리 주어진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80-81). “하느님을 창조주로서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에 관한 이론적 진술이 될 수 없다. 그와 같은 주장은 단지 내 자신이 의존적 피조물로서 나의 실존을 하느님께 의존하는 존재라는 하나의 개인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을 뿐이다” (88). 행동으로서의 하느님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밝히는 것이 바로 비신화화론이다 (같은 책, 97).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상은 지금 여기서 말해지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나의 개인적 실존 속에 현재화된다” (99).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정신이나 인간의 지혜에 의하여 창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 그것의 기원인 것이다...이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100).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은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은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언제나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현존하며, 무시간적 진리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현존한다” (103).

이러한 성경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성경해석은 성경 본문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exegesis) 해야지 해석자의 주관이 드러나게 (eisegesis) 하면 성경의 메시지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이러한 진술들은 우리 기독교와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들을 부정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행동으로서의 하나님

이미 불트만은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이 예수님의 말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삽입한 케리그마이고, 역사적 예수의 선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신약성서신학」, 허 혁 역, 1). 이에 더하여 불트만은 하나님의 의미를 행동으로 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75). 이동영은 “The Meaning of God as Acting”을 “행동하는 자로서의 하느님의 의미”라고 번역하였으나 ‘Acting’은 ‘행동하는 자’가 아닌 ‘행동’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트만의 의도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어느 곳에나 숨겨져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성서 가운데 숨겨져 있다” (91).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역사적 인물이다” (101). 그러나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화론적 묘사이다 (같은 책, 100-101). 이러한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실제로 없다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불트만의 해설은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철학을 적용한 결과물일 뿐이고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해설이 성경이 보도하는 바가 아니고, 행동으로서의 하나님 혹은 행동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해설도 성경에서 표현하는 것을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없다. 선포되는 말씀이란 개념도 불투명하다.

그가 말하는 말씀은 그저 인간의 설교를 케리그마 선포라는 용어로 과대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거론하는 종말 개념도 성경의 종말론이 아니라 실존철학의 현존개념으로 그 의미를 바꾸었다. 이러한 해설은 기독교를 부정하고 대적하는유대교가 환영할만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신약학 교수로 30년 동안 재직했으며, 학교 동료인 하이데거실존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의 비신화화를 시도한 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연구는 《예수》(1926)에 집대성되었다.[1]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름을 따라서 불트만 학파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볼트만은 신약성경 속 선교의 실존론적 해석을 비신화화(非神話化) 방법에 의해서 행할 것을 주장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등 성경의 사건이나 서술이 신화적인 요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 이야기 전체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우주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복음서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지옥의 3층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만일 신화적 요소가 배제된다면 복음서 역사의 참다운 의미가 명확해진다고 주장했다. 즉 선교 내용을 순수하게 파악하고, 실존철학의 도움을 빌려 우리들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독일 및 유럽 신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종교사적인 방법을 구사하면서 실존론적 해석을 적용한 《요한복음서》 주해나 신약 연구의 체계적 성과를 가진 《신약신학》 등의 뛰어난 업적이 있으며, 논문집 《신앙과 이해》도 4권이나 있고 이 밖에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의 강의집 《역사와 종말론》 등을 남겼다.[1]

생애

불트만은 올덴부르크의 비펠슈테데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2] 올덴부르크에 있는 알테스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를 획득한 뒤,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두 학기가 지난 후, 불트만은 몇 학기 동안 베를린 대학교로 갔고, 결국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910년에 요하네스 바이스의 지도 아래 바울로 서신에 대한 논문으로 취득하였다.[3][4] 헤르만 궁켈빌헬름 하이트뮐러에게도 수학했다.[5] 이후 2년간 하빌리타치온을 거친 후에 마르부르크에서 신약학을 가르친다.

브로츠와프기센에서 잠시 강사로 재직한 후 1921년에 마르부르크로 돌아와서 1951년에 은퇴할 때까지 마르부르크에 머물렀다. 불트만은 한스 요나스,[6] 에른스트 케제만,[7] 귄터 보른캄,[8] 헬무트 쾨스터[9] 박사과정을 지도했으며 한나 아렌트도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 해석학파가 형성되었다. 불트만은 고백교회의 구성원으로[10] 유대인에 대한 학대와 과도한 민족주의, 그리고 아리아인이 아닌 기독교 성직자를 퇴출하는 사회적 현상에 반대하는 등[11] 나치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12][13]

신학

성서의 비신화화

 이 부분의 본문은 비신화화입니다.

불트만은 현대의 남성과 여성에게 우주의 외계인을 그리게 하는, 하늘의 도시나 삼층적 우주 같은 신화적인 용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그런 신화적 용어들 때문에 많은 현대인들이, 성서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에 나타나는 고유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대적이고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현대의 남성과 여성은, 신화적인 용어가 더 이상 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불트만은 그의 신학적 저술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신화적인 표현을, 새롭고 실존적인 해석으로 교체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성서의 역사적 관점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성서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요청하는 불트만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았다.

양식비평의 목표는, 주 예수의 말씀이나 비유, 또는 이야기의 조각이 지니는, 원래의 양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차적인 추가와 양식들을 구분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러한 배움은 전통의 역사에서 중요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 불트만, 공관복음서 전승사

불트만의 《공관복음서 전승사 (1921)》는 여전히 복음서 연구에서, 틀에 박힌 수사학적인 어구나, 모여서 복음서를 형성한 이야기 단위들에 대한 그의 분석과 불트만이 가장 영향력있는 해설자이었던 이른바 "양식 비평"이라는, 역사적으로 기원을 분석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학자들에게조차 필수적인 도구로 간주된다.

양식비평

 이 부분의 본문은 양식비평입니다.

불트만은 종교사학파의 연구 방법을 배우고 마르틴 디벨리우스와 함께 공관복음서의 양식사적 연구를 추진하여 극단적인 회의론으로까지 발전시켰는데, 1941년에는 요한복음서에 양식비평을 적용하였다.[1] 그 글에서 그는 요한이라는 복음서 저자가 의존하고 있던, 잃어버린 "복음 표적들"(Signs Gospel)[14]의 존재를 구분하여 드러내었다. 이 학술논문은 당시 상당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하나의 이정표이다. 같은 해에 이루어진 그의 신약성서와 신화 강의는,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비신화화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비신화화의 문제는, 해석자들에게 전통적인 신학을 마르틴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동료가 지닌 철학으로 대체할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현대의 독자들이 예수가 가르친 메시지의 실재에 접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불트만은 예수의 삶이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의 구조에서 우리는 그것이 희생제사 신학(offering theology)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야기의 교훈들은 신화의 익숙한 언어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설명이다. 불트만은 신앙이 현재의 실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에게, 세계의 사람들은 항상 실망스럽거나 소란스러웠다. 신앙은 의지의 결정된 중대한 행동이어야만 하고, 그것은 "고대의 증거들"을 추려 모으거나 격찬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불트만처럼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적인 신뢰도를 의심하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비판한다. 불트만의 모든 영향력은 영어판으로 《케리그마와 신화》(Kerygma and Myth, 1948년)가 출판되고 나서야 비로소 발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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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역대 왕 / 북이스라엘, 앗수르, 애굽, 바벨론의 멸망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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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유다 왕국(BC 931-586) 바벨론 느부갓네살

1. 르호보암(왕상 14장 / 대하 11-12장)

유다의 첫 번째 왕인 르호보암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남유다의 초대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던 기간은 고직 3년뿐이었습니다(대하 11:17)
3년이 지나고 나라가 견고해지고 튼튼해지자 르호보암은 여호와의 율법을 저버립니다(역대하 12 :1)
르호보암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던 해, 예루살렘은 애굽 왕 시삭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왕상 14: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유다가 행한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시삭의 손에 넘겼다고 말씀합니다(대하 12:5)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과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를 빼앗겨(대하 12:9), 놋 방패로만 궁문을 지킵니다(대하 12:10)
르호보암은 그렇게 17년 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대하 12:13)

2. 아비얌(아비야)(왕상15장 / 대하 13장)

유다의 두 번째 왕인 아비야라고도 불리는 아비얌입니다.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고, 총 3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비얌 역시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 르호보암의 모든 죄를 그대로 행합니다(왕상 15:3).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전쟁만 하다가(왕상 15:6)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3. 아사(왕상 15장 / 대하 14-16장)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입니다.
아비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고, 총 4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했고, 여러 종교 개혁들을 단행합니다(왕상 15:11)
먼저 남자 창기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 버립니다(왕상 15:12)
그리고 우상을 섬기던 할머니 마아가도 과감히 쫓아냅니다(왕상 15:13)
또 오뎃의 아들 아사랴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대하 15:1) 우상 제거와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박차를 가합니다(대하 15:8)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아사였지만 북이스라엘 바아사와의 전쟁 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아람 나라를 의지합니다.
이를 꾸짖는 예언자 하나니의 말에 몹시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대하 16:10)
아사 왕은 통치 말년에 발에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4. 여호사밧(왕상 22장 / 대하 17-20장)

유다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입니다. 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고, 2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를 따라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는데요.(대하 17:4) 여호사밧 왕 때 남유다는 굉장한 부와 영광을 떨치게 됩니다.(대하 17:5) 여호사밧 역대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아버지 아사 왕의 개혁 후에도 남아있던 남자 창기들을 모두 쫓아내고(왕상 22:46), 재위 3년 차에 신하들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뽑아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합니다.(대하 17:9) 유다는 점점 더 강성해져 갔고(대하 17:10), 북이스라엘의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동맹을 맺게 됩니다.(대하 18:1) 하지만 그것이 여호사밧의 발목을 잡게 되었고, 하나니의 아들 예언자 예후를 통해 따끔한 질책을 받게 되죠.(대하 19:2) 여호사밧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2차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유다 곳곳을 직접 다니며 백성들을 살피고 재판관을 세우며,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얼마 후,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남유다를 공격 했고, 이에 여호사밧은 유다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대하 20:5-6) 결과는 유다의 대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호사밧도 산당을 철거하지 않아서 온전한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대하 20:33)

5. 여호람(왕하8장/대하 21장)

유다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입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고, 8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람은 왕권을 잡은 후, 형제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는데요.(역대하 21:4)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해 아합의 길을 따릅니다.(대하 21:6)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람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대하 21:15) 그리고 말씀 그대로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됩니다.(대하 21:19)

6 .아하시야(왕하8-9장/대하 22장)

유다의 여섯 번째 왕인 아하시야입니다. 여호람의 뒤를 이어 막내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고, 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하시야 역시 아버지 여호람을 따라 아합의 집의 길을 따르죠.(대하 22:3) 아하시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요람과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예후와의 싸움에 휘말려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2:9)

7. 아달랴(왕하 11장/대하 22-23장)

유다의 일곱 번째 왕인 아달랴입니다. 아하시야의 죽음 뒤,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유다의 왕족을 죽이기 시작합니다.(대하 22:10)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빼내었고, 그렇게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왕하 11:2) 아달랴가 남유다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작전을 벌입니다. 작전은 성공했고,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렇게 아달랴의 6년 간의 통치가 끝나게 됩니다.

8.요아스(왕하 12장/대하 24장)

유다의 여덟 번째 왕인 요아스입니다. 할머니 아달랴의 죽음 뒤에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아스는 아달랴 시대에 방치되었던 성전을 보수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등 선한 왕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왕위에 오르게 한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돌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된 건데요. 이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 무섭게 경고하시지만, 요아스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얼만 지나지 않아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고,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요아스는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9.아마샤(왕하 14장/대하 25장)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인 아마샤입니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아마샤을 왕권을 잡은 후, 아버지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먼저 처형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와 섬기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에 크게 패배한 후에, 아마샤는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0.아사랴(웃시야)(왕하 15장 / 대하 26장)

유다의 열 번째 왕인 웃시야라고도 불리는 아사랴입니다. 아마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52년간 다스립니다. 아사랴는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성을 튼튼히 하는 등 힘을 키워갔는데요. 유다의 힘이 커지는 만큼 아사랴의 교만도 커져갔고, 어느 날 제사장에게만 허용된 향을 피우는 일이 자신이 직접 행하려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만류에도 향을 피우려던 아사랴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게 되었고, 죽을 때까지 격리되어 별궁에서 지내게 됩니다.

11.요담 (왕하 15장 / 대하 27장)

유다의 열한 번째 왕인 요담입니다. 아사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 동안 다스립니다. 요담은 성전을 증축하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에도 겸손을 잃지 않은 요담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시죠. 요담은 그렇게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12.아하스(왕하 16장/ 대하 28장)

유다의 열두 번째 왕인 아하스입니다. 요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간 다스립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데요. 바알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심지어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벌이죠. 그는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하죠. 급기야 앗시리아의 다메섹 제단을 그대로 유다로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물러간 뒤 에돔 사람이 다시 유다를 공격 해 왔고,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하스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과 다메섹 신들을 의지합니다. 마침내 아하스는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부수고 성전 문을 닫기까지 합니다. 또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을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을 쉽게 그리고 단숨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보세요.

13. 히스기야(왕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유다의 열세 번째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 왕이었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길을 따른 건데요. 히스기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먼저 아버지 아하스가 닫아 놓았던 성전의 문을 열고 수리하는 성전 정화 운동을 벌였고,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멈춰있던 제사와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또 유다 온 땅에 펴진 우상과 산당 등을 제거하고, 유명무실했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제 역할을 하도록 도왔죠. 성경은 히스기야를 유다 모든 왕들 중에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한 왕은 없었다고 평가하는데요. 그런 히스기에게도 어려움은 찾아왔습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다스린 지 육 년째 되던 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유다를 침공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쳐 주십니다. 그 무렵 히스기야는 병에 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요. 이때 히스기야는 벽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역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한 히스기야였지만, 병문안 차 방문했던 바벨론 왕의 사절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교만의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교만했던 히스기야에게 네 자손들이 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죠. 히스기야는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됩니다.

14. 므낫세(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네 번째 왕인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고, 5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길이 아닌, 할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따랐는데요. 심지어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우상의 제단을 쌓고, 손수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성전에 세우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일으키셔서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시죠. 포로가 된 므낫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므낫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 므낫세는 우상과 이방신들의 제단을 헐고,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보수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는 웃사의 동산에 장사됩니다.

15. 아몬(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다섯 번째 왕인 아몬입니다. 므낫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고, 2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몬은 아버지 므낫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신하들에 의해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6. 요시야(왕하 22-23장, 역대하 34-35장)

유다의 열여섯 번째 왕인 요시야입니다. 아몬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유다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킨 신하들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위에 올라 3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르는데요. 성전 수리를 지시했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옷을 찢었고, 백성들에게도 언약책의 말씀을 읽어 주며 다시 여호와의 언약을 세울 것을 백성들과 함께 맹세하죠. 이러한 맹세는 우상과 산당의 제거 그리고 유월절의 부활로 이어졌는데요. 이후 애굽과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요시야의 죽음에 유다의 백성들은 슬퍼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7. 여호아하스(왕하 23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일곱 번째 왕인 여호아하스입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고, 3개월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애굽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18. 여호야김(엘리야김)(왕하 23-24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여덟 번째 왕인 여호야김입니다.
동생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엘리야김)이 왕이 되고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에 의해 왕이 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19. 여호야긴(고니야, 여고냐) (왕하 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열아홉 번째 왕인 여호야긴입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석 달 열흘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바벨론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같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때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과 그릇들도 빼앗기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37년 간 포로생활을 하던 여호야긴은 후에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다스릴 때, 감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에윌므로닥 왕의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20. 시드기야(맛다니야)(왕하 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스무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세워진 왕입니다.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리는데, 역시나 돌이킬 줄 모르고 여호와 앞에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지만,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결국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BC 931-722) - 앗수르 살만에셀

1. 여로보암  :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12개의 지파 중 무려 10개의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아닌, 여로보암을 지지했으니 그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 인기를 잘 유지했습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하여 강제 노역과 세금을 경감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인기를 유지했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우상과 제사장과 절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지 이십이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상 14:20)

여로보암 ―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1대 왕

인적 사항

    (1) 여로보암은 '백성을 더하게 하소서'라는 뜻.
    (2) 에브라임 지파 출신(왕상11:25).
    (3)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22년간 통치(왕상12:2;14:20).
    (4)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모친은 수루아(왕상 11:26).
    (5) 고향은 세겜의 서쪽 사마리아 스레다임(왕상 11:26).
    (6) 아들로는 아비야나답이 있음.

시대적 배경

    여로보암 당시 이스라엘은 대변혁을 겪었다.
    즉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됨으로써(B.C.930) 남왕국은 남왕국 대로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정비를 막 서두르게 되었고, 북왕국은 북왕국대로 정치적, 종교적 정비를 서두르던 때였다.
    또한 이런 국내적 대격변과 함께 국외적으로도 솔로몬 말기부터 서서히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던 주변 국가들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상당히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던 때였다.
    그러나 솔로몬 때까지 탄탄했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남북 왕국 분열 직후인 이 당시에는 아직 외적의 침입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남북 왕국간의 적대 감정이 매우 높아 잦은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여로보암은 새롭게 북왕국을 창건한 자로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으나 종교적으로는 악한 선례를 만듦으로써 북왕국 멸망의 근본 원인을 재공하고 말았다.

주요 생애

    출생

    요셉 족속의 노역을 감독

    왕상 11:28

    자신의 왕됨을 예언 받음

    왕상 11:30-32

    솔로몬에게 반역함

    B.C.938 년

    왕상 11:26

    애굽으로 도피

    "

    왕상 11:40

    북쪽 열 지파의 요청으로 애굽에서 나옴

    왕상 12:1-3

    르호보암에게 노역 완화를 요구

    왕상 12:4-15

    북쪽 열 지파의 왕으로 추대됨

    B.C.930 년

    왕상 12:20

    세겜과 브누엘을 요새화함

    왕상 12:25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움

    왕상 12:27-30

    레위인의 제사장직을 폐함

    왕상12:31;대하11:14

    장막절의 날짜 변경

    왕상 12:32

    벧엘 제단 훼파 예언 들음

    왕상 13:1-10

    아히야에게서 재앙이 예언됨

    왕상 14:7-10

    르호보암과의 전쟁을 계속함

    왕상 14:30

    애굽 왕 시삭의 침입을 받음

    왕상 14:25

    유다 왕 아비얌과의 전쟁에서 패함

    B.C.913 년

    대하 13:1-20

    죽음

    B.C.910 년

    대하 13:20


성품

    (1) 솔로몬 왕의 인정을 받아 공사의 감독자로 발탁될 만큼 부지런하고 유능한 자(왕상11:28).

    (2) 이스라엘 분단에 대한 아히야의 예언을 듣고 곧 반란을 일으킬 만큼 정치적 야욕이 강한 자(왕상 11:26-32).

    (3) 애굽 망명 후 유다 지파와 솔로몬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목을 충동질하여 정권에 도전할 만큼 계략이 뛰어난 자(왕상12:2-4).

    (4) 이스라엘 열 지파의 추대를 받고, 북왕국의 초대 왕이 된 것을 볼 때 정치·군사적 지도력이 뛰어난 자(왕상12:1-3, 20).

    (5) 왕이 된 후 성막을 가진 유다로부터 종교적으로도 독립하는 동시에 왕권도 강화하기 위하여 북쪽 지역에 많은 산당과 우상을 만들만큼 대담한 인본주의 자(왕상 12:27, 31).

    (6) 하나님의 책망조차 무시할 정도로 교만한 자(왕상 13:1-10).

구속사적 지위

    (1)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후 북왕국의 초대 왕이 됨(왕상 12:20).

    (2) 왕권 강화를 위해 벧엘과 단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게 한 왕(왕상 12: 28).

    (3) 여로보암과 그 집을 향한 하나님의 재앙이 선포됨. 이는 세상적 정욕만을 추구하는 자에게 임할 심판의 표징이 됨(왕상 14:7-16).


주요 업적

      (1) 솔로몬의 '밀로' 건축과 예루살렘 성벽 수축 공사를 감독함(왕상 9:15).
      (2) 세겜과 브누엘을 건축하여 군사적인 요새를 강화함(왕상 12:25).


실수

    (1)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강요함(왕상 12:27-29).

    (2)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음(왕상 12:31;13:33).

    (3) 후세들에게 악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결국 북왕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함(왕상 14:10).

평가 및 교훈

    (1)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왕상12:28,29)고 하며 이를 경배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 채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곧 우상 숭배와 동일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완악한 마음이나 자신의 이해 관계가 앞서지 않도록 하며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그 분을 섬겨야 한다.

    (2) 여로보암은 일찍이 솔로몬 왕의 인정을 받아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할 만큼, 또한 북쪽 10지파의 추대로 왕이 될 만큼 부지런하고 유능한 자였다(왕상 11:28;12:20).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지도자요 존경을 받던 그였지만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 없이는 인간의 지혜와 칭찬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도 버림받게 됨을 기억해야 하겠다. 참으로 일이 형통할 때에 더욱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자.

    (3)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왕권에 대적하여 북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그는 후세들에게 이스라엘의 분열이라는 좋지 않은 전통을 남겼고, 더더욱 우상 숭배를 조장함으로써 백성들의 신앙을 변절시켰다. 혹시 우리도 여로보암 처럼 그릇된 신앙의 모습을 신앙의 후배들에게 남기고 있지는 않는가?

핵심 성구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왕상 11:31).


2. 나답 :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반복했고, 불과 2년 만에 바아사 장군의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왕상 15:28)

나답
「고상하다, 관대하다, 고귀하다」

여로보암 I세의 아들이다. BC 910년 경 왕위에 올라 아비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을행하였다. 유다 왕 아사 제 3년에 바아사에게 학살 당하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은 여로보암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형벌이었다. 나답의 재위는 겨우 2년이었다(왕상 14:10,11,20,15:2531).나답(재위 기원전 909년경-908년경)은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2대 왕으로 아버지 여로보암 1세처럼 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

나답은 아버지 여로보암 1세가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고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짓도 많이 했다. 이에 이사카르 집안 출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켜 필리시테인에 속해있던 기브톤에서 나답을 공격했다. 결국 나답은 바아사에게 살해당하고 바아사가 왕위에 올랐다.

바아사는 임금이 되자 여로보암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몰살해 전 여로보암 1세 때 베텔의 늙은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1. 나답의 출생과 초기 생애

출생과 배경
:

  • 나답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왕기상 14:20)
  • 그는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생애와 초기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여로보암의 영향:

  • 나답은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에서 자라며 왕위 계승자로 준비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적 개혁과 금송아지 숭배는 나답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 여로보암의 죄악된 길을 따라간 나답의 통치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와 불순종으로 점철되었습니다.

2. 나답의 즉위와 통치 (열왕기상 15장)

즉위와 초기 통치:

  • 나답은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왕위에 올랐으며, 북이스라엘 왕국의 두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5:25)
  • 그는 아버지의 죄악된 길을 그대로 따르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군사적 활동:

  • 나답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 그는 군대를 이끌고 블레셋의 성읍 깁브돈을 포위했습니다. (열왕기상 15:27)

3. 나답의 암살과 바아사의 반란 (열왕기상 15장)

바아사의 반란:

  • 나답이 블레셋의 깁브돈을 포위하고 있을 때, 이사갈 지파 출신의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상 15:27)
  • 바아사는 나답을 암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나답을 제거했습니다.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

  • 나답의 암살 이후,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모든 후손을 제거했습니다. 이는 여로보암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5:29-30)
  • 여로보암의 가문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그의 죄악된 통치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4. 나답의 종교적 행보 (열왕기상 15장)

우상 숭배와 죄악:

  • 나답은 그의 아버지 여로보암이 시작한 죄악된 길을 따랐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를 지속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5:26)
  • 그는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조장하며, 영적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

  • 나답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불순종과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통치는 짧았고,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 :
나답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죄악된 행보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불순종은 백성들에게 영적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 :
나답의 죽음과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며,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6. 결론
나답의 생애와 통치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짧은 통치와 죄악된 행보는 우리에게 불순종의 결과와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나답의 통치와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토론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비극의 서막 (바아사, 엘라) 

3.  바아사 :

나답을 죽이고 왕에 오르게 된 바아는 24년 동안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그가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반복했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왕상 15:34)

4.  엘라 :

바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는데요. 공교롭게도 바아사가 죽였던 나답과 같이 재위 2년 만에 시므리의 반란으로 죽게 됩니다. 

시므리가 들어가서 그를 쳐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이라(왕상 16:10)

7일 천하 (시므리) 

5. 시므리 :

시므리는 바아사의 온 집안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이고 왕위에 오릅니다.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여호와의 말씀 같이 되었으니(왕상 16:12)

그러나 전장에 나가 있던 백성들은 시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군대 지휘관이었던 오므리를 왕으로 삼고 궁전으로 쳐들어갑니다. 시므리는 성읍이 함락된 것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 왕궁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왕 위에 오른 지 불과 7일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시므리가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었으니(왕상 16:18)

이렇게 시므리의 7일 천하는 끝이 납니다. 

오므리 왕조의 시작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 

6. 오므리 :

오므리의 등장으로 혼란했던 북이스라엘은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므리는 나라의 법을 새로 세우고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는 “천도”를 실시하면서 많은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한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평가는 어땠을까요?

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왕상 16:25)

오므리는 그렇게 1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7. 아합 :

아버지 오므리에 이어 왕이 된 아합은 그 이름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
아합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천을 건축하는 끔찍한 악행을 저지릅니다.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왕상 16:32)

아합과 싸움을 벌였던 엘리야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예언자를 정리할 때 다루겠습니다.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적이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됩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왕상 22:34) 

8. 아하시야 :

지난 왕조들은 2대를 채 넘지 못했지만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면서 오므리 왕조는 3대째 왕위를 이어갑니다.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2년 만에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죽게 됩니다.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왕하 1:17) 

9. 요람(여호람) :

아하시야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동생 요람(여호람)이 왕위에 오릅니다.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왕하 1:17) 

요람은 오므리 왕조의 4번째 왕으로 1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북이스라엘 전체 200여 년의 역사 중에 4분의 1에 해당하는 48년이라는 기간 동안 오므리 왕조가 다스립니다.
더 놀라운 건 열왕기서 전체 분량 중에 삼 분의 일이 오므리 왕조의 이야기입니다.(왕상 16 - 왕하 12장)
그야말로 오므리 천하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북이스라엘의 9번째 왕까지 살펴봤습니다.
첫 번째 왕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 나답.
나답을 죽이고 새로운 왕권을 창출한 “바아사” 장군.
그러나 바아사 왕조는 그의 아들 엘라에 이르러 시므리에 의해 무너지게 되죠.
시므리는 바아사의 온 집안사람들을 다 죽이며 왕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7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오므리는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힘입어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요람에 이르기까지 48년 동안 위세를 떨칩니다.

북이스라엘 전체 역사 중에서 유례없는 전성기를 구가했던 오므리 왕조.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죠.
모든 왕들보다 더욱 악한 왕이라는 혹평을 받습니다.

예후 왕조의 시작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 

10.  예후 :

아합의 군대 장관이었던 그는 요람 왕을 죽이며 영원할 줄 알았던 오므리 왕조의 시대를 닫고, 예후 왕조의 시대를 엽니다.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그동안 쌓여 왔던 오므리 왕조의 악행을 철저하게 심판하시는데요.
오므리 왕조와 관련된 모든 이들과 특히 그들이 지극히 섬겼던 바알, 바알 숭배자들을 잔인할 정도로 처단합니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왕하 10:28)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오므리 왕조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이렇게 타락한 오므리 왕조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된 예후였지만, 그도 타락에서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31) 

예후는 28년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11. 여호아하스 :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의 재임 기간은 17년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랐던 여호아하스는 아람 나라의 공격을 받을 때는 잠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듯했지만,
상황이 다시 좋아지자 여지없이 하나님이 아닌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습니다. 

12. 요아스 :

여호아하스의 아들인 요아스가 왕위에 오르는데요. 재임 기간은 16년입니다.
요아스 때에 기억할만한 특별한 사건이 하나가 있는데요.
엘리사 선지자의 죽음입니다.
요아스 역시 여로보암 죄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13. 여로보암 2세 :

다음으로 요아스의 아들인 여로보암 2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이름이 같아서 2세로 구분한건데요.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장기 집권으로 유명하죠.
무려 41년간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만큼 백성과 신하들의 신뢰도 컸다는 이야기겠죠.
눈엣 가시와도 같았던 아람 나라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윗과 솔로몬 때로 회복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죠.
실제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요나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7)

막연한 기대는 아니었습니다.
적군이 없어지고, 영토가 회복되고, 안정을 찾아가는 나라의 모습은 분명 매우 긍정적인 신호였죠.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아모스 선지자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모스서 5장 10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보시죠. 

10-12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 진실은 인기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적나라하게 드러난 진실이 여기 있다. 너희는 가난한 이들을 악랄하게 짓밟고 그들에게서 빵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결코 너희가 건축한 화려한 집에 들어가 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결코 너희가 재배한 값비싼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희 위법이 어느 정도인지, 너희 죄가 얼마나 중대한지 정확히 알고 있다. 참으로 섬뜩하다! 너희는 의롭게 사는 이들을 괴롭히고 이리저리 뇌물을 받아 가며 가난한 이들을 바닥에 내친다. (메시지 성경) 

여로보암 2세를 향한 요나와 아모스의 상반된 평가!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회개를 외쳐야하는 절박한 순간에 희망을 노래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14.  스가랴 :

무려 41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던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위에 오릅니다.
스가랴는 아버지와는 달리 6개월 만에 살룸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예후 왕조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죽이고, 또 죽이고 

102년간을 집권했던 예후 왕조의 몰락 이후 북이스라엘은 대혼란기에 접어 듭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다섯 명의 왕들 중에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반역을 통해 왕의 자리를 빼앗거든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오직 권력에 눈이 멀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15. 살룸 :

예후의 후손인 스가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살룸은 7일 천하 시므리 다음으로 짧은 한 달간 왕으로 있다가 므나헴의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16. 므나헴 :

므나헴은 얼마나 잔인했던지, 왕이 된 후 자신을 선뜻 환영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주변 모든 임산부의 배를 갈랐습니다.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왕하 15:16)

또 그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고, 10년 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17. 브가히야 :

므나헴의 잔혹함 때문에 미처 반역할 생각을 하지 못해서였을까요?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 위에 오릅니다. 이렇게 므나헴 왕조가 시작되나 했지만 2년 만에 장관인 베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18. 베가 :

베가의 재임 기간은 20년입니다. 꽤 긴 시간동안 나라를 다스렸지만 성경에는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다.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는 기록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기록하실까요? 반역으로 왕위에 올랐던 베가는 역시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9. 호세아 :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호세아 왕입니다.
왕위에 오른 지 9년 만인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오므리 왕조의 시대를 닫고, 예후 왕조의 시대를 연 예후, 그리고 이어지는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까지.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예후 왕조도 살룸의 반역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는대요.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된 잔혹했던 므나헴, 므나헴이 무서웠던 걸까요?
반역 없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 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2년 만에 부하였던 베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베가는 20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시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도 역시 호세아가 일으킨 반역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왕 위에 오른 지 9년 만인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열왕기하 17:34

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당대에 최고라고 불리던 왕들이 여지없이 무너진 이유가 뭘까요?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이전 풍속대로, 옛 습관과 본성을 버리지 못했기 아니,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 보이지면 결국엔 자신의 욕심과 쾌락과 안위를 위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마치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자기만의 산물로 여겼던 것이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내가 누리는 것들이 나만이 가져야 하는 산물로 여기시나요?
아니면, 모두와 나눠야 할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시나요? 어리석은 왕들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7:35-39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명령하셨다. “다른 신들을 높이지 마라. 그들을 예배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지 말며, 그들에게 제사 지내지 마라. 하나님 곧 큰 능력으로 너희를 친히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여라. 그분을 공경하고 경외하여라. 그분을 예배하여라. 그분께 제사를 드려라. 오직 그분께만!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분이 가르치신 것, 너희를 위해 기록해 두신 모든 것을 너희가 사는 날 동안 행하여라. 너희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신들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너희와 맺으신 언약에서 너희가 지켜야 할 것을 잊지 마라. 다른 신들을 예배하지 마라!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여라. 너희를 원수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이는 바로 그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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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의 멸망 – 앗수르에 의한 심판과 영적 교훈


서론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성이 함락되면서 북이스라엘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약 200년간 존속했던 이 왕국의 멸망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인간의 죄악이 만나 일어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철저한 정복 정책 앞에서 북이스라엘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수많은 백성들이 이방 땅으로 끌려가 흩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언약에 불순종할 때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엄중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1.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적 배경

1) 분열 왕국의 출발

기원전 930년경 솔로몬 왕의 죽음 이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이끄는 북이스라엘은 열 개 지파로 구성되었으며, 에브라임, 므낫세, 단,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르우벤, 갓, 그리고 베냐민의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초기 수도는 세겜이었으나 후에 사마리아로 옮겨졌습니다.

2) 지리적 우위와 경제적 번영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에 비해 월등히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비옥한 토지와 지중해 연안의 항구들, 그리고 중요한 국제 교역로들이 모두 북왕국의 영토 안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북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3) 정치적 불안정

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습니다. 약 200년의 역사 동안 19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이 중 8명이 암살당하거나 반란으로 죽었습니다. 왕조의 잦은 교체는 국가 기반을 약화시켰고, 결국 외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2. 영적 타락과 우상숭배

1) 여로보암의 종교 개혁

북이스라엘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초대 왕 여로보암부터 시작된 우상숭배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정치적 목적으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직접적인 파괴행위였습니다.

2) 계승되는 죄악

성경은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는 바알 숭배가 공식화되었고, 아세라 목상 숭배와 가나안 종교의 음란한 의식들이 만연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타락은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렸습니다.

3) 사회적 불의와 부패

우상숭배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의를 동반했습니다.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들이 고발한 것처럼,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착취했고,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았으며, 상인들은 부정한 저울로 백성들을 속였습니다. 종교적 타락과 사회적 불의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북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부패시켰습니다.

3. 하나님의 경고와 선지자들의 사역

1) 지속적인 경고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약 200년 동안 끊임없이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아모스, 미가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들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지적하고, 사회 정의를 외쳤으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2) 백성들의 강퍅함

하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열왕기하 17장 14절은 "그들이 목을 곧게 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던 것 같이 믿지 아니하였고"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완악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3) 징조적 심판들

하나님은 최종 심판 전에 여러 징조적 심판들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가뭄과 기근, 전쟁과 질병, 그리고 주변국들의 침입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아람의 침공과 앗수르의 초기 공격들은 다가올 멸망의 전조였지만, 북이스라엘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4. 앗수르 제국의 침공과 멸망 과정

1) 디글랏빌레셀의 1차 침공 (기원전 734-732년)

북이스라엘 멸망의 서막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의 침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침공에서 갈릴리 지역과 길르앗 지역이 점령당했고, 상당수의 백성들이 앗수르로 끌려갔습니다. 이는 앗수르의 전형적인 정복 정책인 강제 이주 정책의 시작이었습니다.

2) 호세아의 반란과 살만에셀의 포위 (기원전 727-722년)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처음에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쳤지만, 나중에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가 사마리아를 포위했고, 이 포위 공격은 3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사마리아 성 안에서는 극심한 기근과 고통이 이어졌습니다.

3) 사르곤의 최종 정복 (기원전 722년)

살만에셀이 죽은 후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가 사마리아를 최종 함락시켰습니다. 사르곤의 기록에 따르면, 27,290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와 메대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앗수르는 다른 지역의 민족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시켜 혼합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4) 잃어버린 열 지파

강제 이주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점차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갔습니다. 이들은 역사상 "잃어버린 열 지파"로 불리며, 다시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앗수르의 민족 말살 정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5. 성경이 제시하는 멸망의 이유

1) 우상숭배의 죄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 멸망의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다른 신들을 경외하고"(열왕기하 17: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의 근본적인 위반이었습니다.

2) 가나안 민족들의 악한 풍습 따름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가나안 민족들의 풍습을 따랐습니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며, 심지어 자녀들을 불에 태워 제사하는 몰렉 숭배까지 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구별됨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3) 선지자들의 경고 무시

하나님은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증언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돌이켜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라"(열왕기하 17:13)고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4) 왕들의 계속된 악행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했고, 일부는 더욱 악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특히 아합과 므낫세 등은 바알 숭배를 공식화하고 의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지도자들의 악한 모범은 백성들의 타락을 가속화시켰습니다.

6. 영적 교훈과 현재적 적용

1)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따라오며, 선택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2)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 것

하나님은 약 200년 동안 끊임없이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북이스라엘은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에 즉시 반응하고, 회개할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히브리서의 경고가 떠오릅니다.

3) 형식적 종교의 위험성

북이스라엘은 여전히 종교적 의식들을 행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이 형식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마음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4) 사회 정의의 중요성

선지자들이 강조한 사회 정의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개인의 신앙이 사회적 책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정의를 실현하며,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5) 리더십의 중요성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악을 행했다는 것은 리더십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지도자의 영적 상태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7. 희망의 메시지와 구원의 약속

1) 남은 자의 약속

비록 북이스라엘은 멸망했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은 자"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했습니다. 일부 경건한 백성들은 남유다로 피난하여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이어갔습니다.

2) 메시아 약속의 성취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절망이 아니라 더 큰 구원 역사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실 약속을 지키셨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도 이 큰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3) 회복의 약속

에스겔과 다른 선지자들은 분산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바벨론 포로 귀환을 통해 성취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 되는 것으로 완성되었습니다.

4) 교회에 대한 교훈

초대 교회와 오늘날 교회는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삼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형식적 종교, 사회적 불의, 그리고 세상과의 타협은 교회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교회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론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언약에 불순종할 때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엄중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약 200년간 계속된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무시는 결국 민족의 완전한 소멸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공의롭게 심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완전한 계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즉시 반응하고, 형식적 종교에 빠지지 않으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리더십의 중요성과 공동체의 영적 상태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과거의 역사이지만, 그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이 역사를 거울삼아 더욱 겸손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고대 앗수르 제국의 역사 : 세계 최초의 제국에서 몰락까지


고대 앗수르 제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지역을 통일한 강력한 제국으로, 기원전 2450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약 1800년 동안 서아시아에서 정치적,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후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앗수르는 끊임없는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혁신을 통해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내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앗수르의 흥망성쇠를 역사적 관점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앗수르의 기원과 초기 역사

앗수르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기원전 2500년경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아수르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시는 남부 수메르 도시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카드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는 상당히 아카드화된 풍습과 신앙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인들은 수메르어나 아카드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2000년경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인 앗수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앗수르는 중개무역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히타이트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인들은 아나톨리아의 카네시 지역에 교역 기지를 설립하고 금, 은, 구리 등을 다른 지역으로 팔고, 이란 고원에서는 주석을, 바빌로니아에서는 직물 등을 교환하여 급속히 경제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러한 중개무역의 성공은 앗수르가 정치적 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전 19세기 말, 샴씨 아다드 1세가 앗수르를 최초로 정치적으로 통일하면서 고앗수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2. 고앗수르와 중앗수르 시대: 통일과 팽창

고앗수르 시대는 샴씨 아다드 1세의 통치로 시작되었으며, 그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마리와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하며 앗수르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앗수르는 내분과 분쟁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하였고, 바빌로니아와 미타니 왕국의 속국이 되면서 오랜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이 시기는 중앗수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로, 앗수르가 다시 부흥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아슈르 우발리트 1세의 통치 아래, 앗수르는 히타이트와의 동맹을 통해 미타니 왕국을 공격하여 독립을 쟁취하였고, 이후 아다든 이라리 1세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타니 왕국을 앗수르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앗수르는 약 160년간 팽창 정책을 펼치며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회복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2세기 바다민족의 침입과 함께 청동기 문명의 붕괴로 인해 앗수르의 팽창은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고, 주변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으며 다시 한 번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3. 신앗수르 제국의 부흥과 확장

앗수르의 부흥은 아슈르단 2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적들을 진압하고 다시 정복 사업을 재개하면서 본격적인 신앗수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빠르게 주변국들을 정복하며 앗수르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신앗수르 제국의 군사적 성공은 철제 무기와 기마병, 그리고 최초의 정규군 편성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군사력 덕분에 앗수르는 단기간에 서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통치로 유명했습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점령지에서 반란이 발생할 경우, 반란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그 기록을 남겨 다른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공포 통치를 통해 앗수르의 안전을 보장하려 했으며, 이러한 방식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문화적 융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수도를 님루드로 옮기고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하여 앗수르의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4. 앗수르의 쇠퇴와 몰락

신앗수르 제국의 전성기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 사르곤 2세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군사적 개혁과 대규모 정복 전쟁을 통해 앗수르의 영토를 서아시아 대부분으로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최초로 상비군을 편성하고, 기병대를 도입하는 등 군사 혁신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군사력 사용과 잦은 전쟁은 국력을 소모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이후 내부적인 문제와 외부적인 압력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사르곤 2세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산헤립은 수도를 니느웨로 옮기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집중했지만, 끊임없는 내분과 속국들의 반란으로 인해 제국은 점점 더 약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앗수르는 기원전 612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5. 앗수르 제국의 유산과 교훈

앗수르 제국의 멸망은 몇 가지 중요한 원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앗수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잔혹한 통치는 피정복지의 단결을 초래했고, 이는 다시 반란으로 이어져 앗수르의 국력을 더욱 소모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했지만, 오히려 앗수르 본토의 인구 과밀을 초래하고, 장기적인 가뭄이 겹치면서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앗수르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채 현재까지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로, 이라크 북부, 시리아 북서부 등에 약 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400만 명의 앗수르인이 존재합니다.

고대 앗수르 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강력한 군사력과 잔혹한 통치만으로는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과 번영을 보장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국의 영광과 몰락은 강력한 힘의 양면성을 보여주며, 그 역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멸망에 대한 예언(예레미야 46:1~26)

* 본문요약

    46장~51장은 남왕국 유다 주변에 있는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애굽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애굽과 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비록 애굽이 세계에게 가장 좋은 첨단의 무기로 무장하였을지라도

    이 전투에서 패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은 나일강의 창일함같이 그들의 세력이 불어나서 온 세상을 멸하리라고 장담하지만,

    그러나 그날은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의 칼을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 애굽을 치는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힘센 장사들이 사방에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을지라도 쓰러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몰아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애굽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붙이실 것입니다.

찬 양 : 357장(새 322)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206장(새 284)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 본문해설

1.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1~2절)

1) 열국(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애굽에 대하여 논한 것이니, 곧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제 4년에

   유프라테스강 강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패한

   애굽의 바로느고(애굽의 바로 왕 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 애굽의 바로 왕 느고(2절) :

    애굽의 바로 왕 느고는 주전 609년 므깃도 전투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왕 요시야를 죽였습니다(왕하 23:28~30).

    그는 이어서 왕이 된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포로로 잡아가고

    친애굽파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왕하 23:35).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한 보복을 이 전투를 통해 갚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 애굽의 철저한 전투준비, 애굽의 수치스러운 폐배(3~12절)

3) “‘(애굽의 장교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큰 방패, 작은 방패로 무장하고 나가서 싸우라!

4)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날카롭게 갈며 갑옷을 입으라’(라고 말할 것이겠지만)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공포가)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하셨나니,

6)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맹이 있는 자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방에서 유프라테스강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7) 저 나일강의 창일함과 흉용함같이 일어나는 저 사람들이 누구뇨?

8) 애굽이 나일강의 창일함과 강물의 흉용함같이 일어나는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엎어 성읍들과 그 백성을 멸할 것이라.

9)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급히 돌격하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에디오피아)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들이여 나올지니라’ 한다마는

10) 그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로 가득히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편 유프라테스강 강가에서 희생을 낼 것이기 때문이라.

11) 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많은 의약(의사와 약)을 쓸지라도 무효하여 낫지 못하리라.

12) 네 수치가 열방에 들렸고(네 부끄러운 소문이 여러 나라에 퍼졌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부딪쳐(용사들이 서로 부딪쳐)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니라.”

- 그가 이르되 … 루딤 사람들이여 나올지니라(8~9절) :

    애굽의 바로 왕 느고의 진격 명령입니다.

    먼저 기병이 나가고, 그 뒤를 병거가 따르고,

    그 뒤를 방패와 창을 잡은 보병과 활 쏘는 자들이 따릅니다.

-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루딤 사람들(9절) :

    구스와 붓과 루딤의 군대는 애굽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입니다.

    구스는 에디오피아이고, 붓 사람은 홍해 연안에 살던 푼트족으로 보이고,

    루딤인은 리비아 사람을 가리킵니다.

3. 애굽의 멸망의 대한 예언(13~17절)

13)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와서 애굽 땅을 공격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14) “너희는 애굽에 선포하며,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 선포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굳게 서서 예비하라(방어 태세를 갖추어라).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너를 삼킬 것이라)’하여라.

15) 너희 힘센 장사(용사)들이 쓰러짐은 어찜이뇨?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셨기 때문이라.

16) 그가 많은 사람(군인들)을 넘어지게 하시니 사람이 사람 위에 엎드러지며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토로(고향으로) 돌아가자’하며

17) 거기서 부르짖기를 ‘애굽 왕 바로가 망하였도다.

     그가 시기를 잃었도다(기회를 놓쳤도다)’하리라.”

- 애굽의 바로 왕이 기회를 놓쳤다(17절) :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군대 장관이었을 때

    애굽의 바로 왕 느고와 갈그미스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가 죽자

    바벨론으로 돌아가 바벨론의 왕이 됩니다.

    그 후로 느부갓네살은 30여 년간 두로 등 다른 나라에 집중하느라

    애굽을 침략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패배하여 도망하는 군사들이 애굽의 바로 왕이

    이 기간을 느부갓네살을 공격할 반전의 기회로 삼지 못했다며

    조롱하며 도망하는 것입니다.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침략하는 곳이 왜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인가(14절) :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는 유다인들이 머물고 있는 도시들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이들 도시를 주로 공격한 것은

    이 전쟁이 애굽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애굽에 있는 유다인들을 향한 심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애굽이 수치스러운 날(18~24절)

18)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르시되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같이, 해변의 갈멜같이 오리라.

19) 애굽에 사는 딸이여, 너는 너를 위하여 포로의 행리를(포로의 짐을) 준비하라.

     놉이 황무하며 불에 타서 거민이 없을(사람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될) 것임이니라.

20) 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라도 북에서부터 멸망에 이르렀고 이르렀느니라.

    (혹은, 북쪽으로부터 몰려오는 쇠파리 떼에 시달리는 암송아지가 될 것임이니라).

21) 또 그 중의 고용군(용병들)은

     외양간의 송아지 같아서 돌이켜 함께 도망하고 서지 못하였나니,

     재난의 날이 이르렀고, 벌 받는 때가 왔음이라.

22)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니라.

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수를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설명 : 그 숲의 나무들이 아무리 헤아릴 수 없이 많아도 다 찍을 것이라는 뜻)

24)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방 백성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

5. 애굽과 바벨론과의 전투의 결과(25~26절)

25)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아몬과 바로와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26) 내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신하들의 손에 붙이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여전히 사람 살 곳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노의 아몬과(25절) :

    ‘노’는 애굽을 대표하는 도시인 테베(Thebes)를 가리킵니다.

- 아몬(25절) :

    ‘아몬’은 테베의 수호신이었으나

    B.C. 1900년경에는 애굽 전체의 주신(主神)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의 아몬의 멸망은 애굽 전체의 멸망을 뜻합니다.

* 묵상 point

1.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

 1) 당시의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 :

    처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아주 미약하게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3년간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하리라고 예언했고,

    특히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애굽도

    느부갓네살에게 망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이 말을 허무맹랑한 조롱거리로 여겼을까요?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이 미국과 필리핀, 혹은 미국과 대만이 전투를 벌여서

    필리핀이나 대만이 미국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패배시킬 것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고,

    바벨론은 아직은 그 군사력이 미미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지난 23년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물리치리라고 예언한 것은

    참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기에

    예레미야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은 것입니다.

 2) 그러나 애굽과의 갈그미스 전투로 바벨론이 세계 최고의 나라로 등극합니다(2절)

    그런데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말이 이제 실현되는 그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하나님의 보다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여호야김 제 4년(주전 605년)에 있었던

    애굽과 바벨론간의 갈그미스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전쟁에서 애굽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패배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느고 왕은 이제 막 그 세력을 확장하려는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해 앗수르를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애굽이 크게 패하리라는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애굽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철저하게 패배하였고,

    이 일로 세계의 판도가 뒤바뀌었습니다. 애굽은 군소국으로 전락하고,

    바벨론은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3) 애굽을 쇠파리 떼에 시달리는 암송아지로 비유(20, 22절)

    애굽을 아름다운 암송아지로, 바벨론을 쇠파리 떼로 비유하여

    암송아지가 쇠파리 떼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비유하였습니다.

    (개혁 성경에는 ‘멸망’으로 되어 있으나

    개역개정에서는 본래의 뜻대로 ‘쇠파리 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송아지가 힘이 센 살진 송아지라도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면 도살당할 살진 송아지에 불과합니다.

    또 애굽을 뱀으로, 바벨론을 벌목꾼을 묘사하였습니다(22절).

    애굽에서 뱀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도끼를 든 벌목꾼이 지나갈 때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며 도망하는 뱀처럼

    애굽은 바벨론 군사를 앞에서 혼이 빠져 소리를 지르며 도망할 것입니다.

2.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예레미야의 예언

 1) 갈그미스 전투를 할 때에도 애굽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 느고의 장담은

    결코 호랑이 없는 동물의 나라에서 큰소리치는 여우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군사들도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또 경제력도 좋았기 때문에 주변 나라들로부터 용병들도 많이 사들였습니다(9절).

    애굽의 모든 병사들이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졌습니다.

    투구를 쓰고 날이 잘 선 창을 가졌으며 좋은 갑옷도 입었습니다.

    기병들은 좋은 말에 좋은 안장을 지웠습니다.

    그야말로 최첨단의 가장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객관적인 전투력으로 볼 때 바벨론은 애굽에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2) 애굽의 바로 왕 느고의 호언장담(3~4, 8~9절)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된 전투였기에

    애굽의 바로 왕 느고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나일강이 넘쳐서 주변 땅을 덮듯 애굽의 군사들이

    세상의 모든 나라의 성읍들과 그 주민들을 덮어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좋은 무기를 갖추고 말과 병거를 타고 질주하는 군사들의 모습에

    애굽의 느고 왕은 승리를 확신합니다.

 3) 그러나 이렇게 잘 준비된 전투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맞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된 전투에서 애굽은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합니다.

    좋은 무기에 잘 준비된 전투였는데 이상하게도 애굽의 군사들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하기에 바쁨니다(14~17절).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힘센 장사들도 큰 두려움에 빠져 도망하기에 바빴습니다.

    최첨단의 무기로 무장된 가장 뛰어난 군사력을 가진 애굽이

    그보다 훨씬 못한 바벨론에게 이렇게 형편없이 패하게 되는 이유는

    이 전쟁이 하나님의 보복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상대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를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멸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 갈그미스 전투를 통해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이 모두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갈그미스 전투를 통해

    그동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셨던 모든 말씀이 다 진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때부터 예레미야의 사역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전히 욕심에 사로잡힌 자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말씀을 계속해서 듣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신실한 자들은

    이때부터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4) 그 어떤 군사력도 하나님의 능력에 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투(갈그미스 전투)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왕인 요시야를 죽게 한 책임을 물어

    그들에게 보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절).

    일단 하나님께서 애굽을 상대하여 싸우겠다고 하신 만큼

    이 전쟁에서 애굽이 승리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상대하여 이길 권세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은 나의 대적이다”하고 선언하셨다면

    애굽이 가진 무기보다 10배나 더 많은 무기들을 준비하였더라도 그 전쟁에서 패합니다.

묵상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와 대적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나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어떤 계획을 품고 있든 간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3.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1) 애굽이 자랑하는 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모습(20~21절)

    20~21절에서 외양간의 암송아지가 도망한다고 한 것은

    애굽이 자랑하는 여러 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도망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20절의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는 애굽의 아피스 신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피스 신은 성스러운 황소와 풍요를 상징하는 신으로,

    애굽 사람들이 위대한 신으로 섬기는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신이 하나님 앞에서 허둥대며 도망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2) 애굽 사람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신 아몬의 멸망(25절)

    또 25절의 아몬은 태양신 라(Ra)와 결합하여 아몬레(Amon-Re)가 되어

    애굽의 모든 신들의 왕으로 간주되는 신입니다.

    이런 아몬 신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애굽이 의지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서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이 애굽과 함께 멸망을 당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애굽은 바벨론 후에 있는 바사(페르시아) 때에 완전히 멸망을 당합니다.

 3) 하늘의 여왕 신, 하늘의 왕후를 섬긴 애굽의 유다 사람들의 최후(14절)

    바벨론의 애굽을 침략할 때 애굽의 주요 도시가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가 되리라는 것은

    애굽이 바벨론에 침략당할 때 애굽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도

    함께 심판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이 애굽의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경고하셨고,

    애굽의 바로 왕 호브라가 죽을 때가 심판의 시작이 될 것임을

    알려주시기까지 했습니다(44:30).

    그러나 이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여왕 신을 섬기는 즐거움을 버리지 못한 유다인들은

    결국 애굽과 함께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헛된 것을 의지한 자들의 비참한 결과입니다.

    ● 묵상 :

       우리도 영원하신 하나님보다 세상 것에 의지하게 된다면

       그들과 같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은 눈에 보이니

       세상을 더 많이 의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결국 낡고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4) 하나님 이외에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애굽으로 피난해 온 것은

    애굽이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으므로

    그곳이 가장 안전한 안전지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결코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애굽이 바벨론에 패배한 것은 전투준비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의 심판이기에 패배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만이 안전한 곳임을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결단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5)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애굽이 멸망한다는 것을 애굽의 신들의 멸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자랑하는 아피스 신도 도망하였고,

    애굽 사람들의 최고의 신인 아몬의 신도

    하나님의 징벌에 크게 두려워하며 소리를 지르고 도망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우리의 참 신으로 믿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묵상 :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오직 예수님만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예수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방식의 신앙을 따르지 마십시오.

    애굽의 유다인들을 벌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진노를 발하실 것입니다.

* 기도제목

1. 한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깨닫게 하옵소서.

2. 예레미야처럼 이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신령한 눈과 지혜를 갖게 하옵소서.

3. 세상의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옵소서.

4. 중보기도 :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그리스도인들 중에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바벨론 제국 바벨론 제국의 멸망



바벨론 제국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성장한 주요 문명 중 하나로, 특히 신바벨론 제국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는 기원전 626년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바벨론의 왕이 되면서 시작되어,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에 의한 바벨론 멸망으로 끝납니다.

신바벨론 제국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기원전 605년부터 기원전 562년) 시대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도시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바벨론 포로). 이 시기의 바벨론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영했으며, 건축과 예술, 과학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벨론의 거대한 성벽, 이시타르 문,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공중 정원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멸망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발생했습니다. 키루스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로 유명했으며, 바벨론의 방어를 우회하여 도시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함락시켰습니다. 키루스의 바벨론 정복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종교적, 문화적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또한, 키루스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키루스 칙령).

바벨론의 멸망은 고대 근동 지역의 권력 구조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부상을 의미했습니다. 바벨론은 이후에도 중요한 도시로 남았지만, 전성기의 영광을 다시는 되찾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성경 예언의 이행으로도 간주되며, 구약성경 여러 권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바벨론 제국과 그 멸망의 이야기는 고대 세계의 정치, 문화, 종교에 끼친 영향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교만과 타락에 대한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주기도문,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영어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NIV Matthew 6:9~13


영어 주기도문(KJV 흠정역)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헬라어 주기도문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헬라어 주기도문

2016. 2. 14.

파텔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  게네데토  토  텔레마  수  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피에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알라  뤼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카이  헤  뒤나미스  카이  헤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개역개정)




김세윤박사 주기도문 강해

왜 두 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있는가?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는 성경에서 두 군데에 나온다.
마태복음 6:9-13과 누가복음 11:2-4에 나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은 핵심은 두 개이다.
참 이스라엘(마태복음의 관점)과 마지막 아담(누가복음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마지막 아담과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에게 속한 신자의 기도와 삶을 긴밀하게 연결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의존적으로 살아야 하는 아담의 삶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스라엘로서의 살아야 했으나 역시 이 두 가지의 삶을 실패한 삶이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과 참 이스라엘로 오셔서 성공적으로 사신 삶을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은 인간의 창조와 그리스도안에서 재창조의 목적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구약에서 구원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야 이스라엘의 사명과 삶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만물 지배권을 수여 받은 아담의 사명과 삶과 직결되어 있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임 맥락

누가복음 11:1-4절에서 “ <기도를 가르치시다(마 6:9-15; 7:7-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정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회개하고 순종하고 헌신하여야 한다는 종말에 대비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센파운동 바리세인들의 운동 세례요한의 운동등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운동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을 새롭게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등을 표방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이 포함 되는 공동체의 정세성이 담은 예수님께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문으로 자리를 잡게된다.

마태의 주기도문은 상상수훈의 구조상 핵심에 위치하여 있다.

산상수훈의 핵심은

마태복음 5장은 팔복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말한다. 그리고 13-16절은 이 공동체가 소금과 빛으로서 부패를 막고 세상을 살 맛나게하는 공동체가 된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라는 의미이다. 17-48절은 예수님의 새로운 법의 성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마태복음 6장은 종교적인 삶의 실천들 경건의 행위들에 대한 가르침이다. 금식 기도 자선의 행위등 유대교에서 대표적인 종교행위를 언급한다. 그런데 바로 대표적인 종교행위 이곳에 주기도문이 있다.

대표적인 종교행위가둔데 잘 못된 기도를 언급한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기도, -외식한자의 기도, 위선적인 중보기도, 유대인들의 올바른 기도-아버지께 드리는 은밀한 기도 하나님과 나사이에 은밀한 만남의 기도이다.

이방인들이 잘못된 기도. -중언 부언한기도

그렇다면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가? 이것이 주기도문이다.

마태복음의 참 이스라엘로서 삶의 핵심인 주기도문은 8개 항목이다.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 (2) 아버지의 나라 도래, (3)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 실현, (4) 일용할 양식 구함, (5) 사람들의 죄용서와 아버지께 용서를 구함, (6) 시험에 들지 않게 함, (7) 악한 자(사탄)에게서 구함,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림이다.

누가복음의 아담의 삶으로서 주기도문은 5개 항목이다.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 (2) 아버지의 나라 도래, (4) 일용할 양식을 구함, (5) 사람들의 죄용서와 아버지께 용서를 구함, (6) 시험에 들지 않게 함만을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주기도문에는 3번 (3)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 실현, 항목과 7-8번 항목인 (7) 악한 자(사탄)에게서 구함,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림이 나오지 않는다.

왜 누가는 이 세가지의 항목을 빼고 기도하고 삶을 살게 하였을까?

(3)번의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 실현은 (2) 아버지의 나래 도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뺏다. (7)번의 악 한 자(사탄)에게서 구함은 (6)번의 시험에 들이 않게 해달라는 간구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다시 표현한 것이 때문에 뺏다. 또한 (8)번의 아버지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돌리는 송영은 누가복음에는 명시되지 않고 전제되어 있었다. 이 송영은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공적인 예배 의식에 사용되면서 분명하게 명시된 것임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핵심 기도의 내용은 대략 다섯 가지의 핵심 이다.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
(2) 아버지의 나라 도래,
(3) 일용할 양식을 구함,
(4)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고백과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청,
(5) 시험에 들지 않게 함이다.

주기도문의 핵심 청원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청원이다. 두 가지 청원으로 요약이 가증하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기도이고 두 번째는 사탄의 다스림으로 부터의 보호하여 달라는 청원이다.

주기도문의 청원의 시작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아빠는 샘족의 언이이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시작을 한다. 샘족의 언어를 사용한다.

아빠라는 단어 하나에 감긴 진리는 참으로 엄청나다.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언약신학의 표현이다. 언약의 관계의 표현은 다양하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이스라엘은 백성,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이스라엘은 아들, 이스라엘을 장자로 표현하는 출애굽기 4:23절의 표현으로서 언약적인 관계를 나타내준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녀로 만드는 하나님의 독특한 이들이다. 이 사상이 아빠라는 단어속에 포함이 된다. 롬 8:15-16 그리스도의 예수가 우리속에 내주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한다는 것이다.

아빠라고 부름은 전적인 의존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사야 1:2-3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앎의 관계이다. 앎이란 서로 관계속에서 나오는 지식이다. 관계를 신실하게 맺음을 통해 나오는 지식이다.

하늘에 계시는 아빠이다. 하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우주보다 더 크므로 우주를 고칠 수 있는 바로 그 초월성인 하늘에 계신 아빠이다. 이 초월성 안에 구원론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추월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 오심이다.

아빠로 우리가 부름은 탕자의 비유에서 죄인들을 죄와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나라에서 불러내어 회개케 함으로써 사탄의 나라에서 의와 생명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 믿음으로 들어오도록 부르심이다. 새로운 백성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르심이다.

첫 번째 청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거룩 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물리적 개념이다. 피조물과 다른 추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 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쓴다. 가령 성전이 거룩하다. 선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한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 반대의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의 반대이다. 하나님과 그를 수종드는 천사들은 그릇된 행동이나 처신을 통하여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친히 그의 이름을 항상 변함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보존하신다. (레 10:3; 시편 72:19; 겔 36:23). 성경의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형용사 “거룩하다”와 연결되어 사용된 사실은 동일한 사실을 확증한다.7)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거나 훼방을 받는 것은 친히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 속에 있는 그의 자녀들의 불순종적인 삶 때문이다(레 20:3; 21:6; 사 52:5; 겔 20:9, 39; 36:23; 39:7; 43:8; 암 2:7; 말 1:6; 롬 2:24; 딤전 6:1; 딛 2:5).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는 예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그의 합법적인 자녀가 된 우리 신자들이 아버지의 인격과 성품에 합당한 행위를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8)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땅에 그의 이름을 드러내고 아버지가 그에게 맡긴 일을 함으로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가장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 신자들이 인격과 처신 속에 온전하신 아들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은 존귀를 얻게 된다.9) 신자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은 자의적인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로 삼아 주신 아버지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거룩하게 하다”를 수동태로 사용했다. 이 수동태 동사의 암시적인 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도와 그들의 인격과 행동이 그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과 존귀가 되도록 변화 시켜 주실 때에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자녀의 인격과 행동 속에 많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아버지의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존귀케 되는 될 것이고, 이와는 반대로 나타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들을 구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곧, 그의 인격과 성품)은 더럽혀져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청원의 기도의 내용은, 아버지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청원

아버지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청원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의 핵심과 목적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부연설명을 한다. “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하나님의 나라 청원이 중심이고 하나님의 나라 옴과 동시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의 필요에 대한 기도가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이 땅에서 오셔서 하시는 모든 사역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의 나라를 파괴하는 영적인 전쟁의 무기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광야시험을 출발점으로 시작하여 각 지역에 서 복음의 전파, 각종 치유와 귀신 축출을 통하여 도래하기 시작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그 절정에 도달하여 지금은 인종과 영토를 초월하여 온 땅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 최종 완성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 삼으셨다는 것은 언약신한의 표현으로 구약의 중심사상이다. 단 2장 72ᅟᅡᆼ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왕권과 통치권을 한 사람의 아들에게 위임한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를 연상할 때는 창조주가 온 세상을 창조하셔서 다스리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부왕이 된다는 말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통치권도 생각하는 단어 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기도의 요청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회복이 포함 된 단어이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이다.

예수는 인간의 근본문제는 아담적인 실존으로 보았다. 부요한 아버지로부터 분리 된 산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인 도래를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인 완성을 위한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도래와 그 최종적인 완성은 신자의 삶과 관계없이 막연하게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격과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한,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무시와 멸시는 받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 아니다.

탕자는 하나님의 가족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에게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의 간섭에서 아버지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먼 나라로 가게 되어 살게 됩니다.

먼 나라에서 살다가 보니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결국에 세상의 돼지를 키우는 집에 스스로 들어가서 스스스로 세상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먹고 살기위하여 세상의 종으로서 돼지를 치게 됩니다. 거기서 돼지들에게 먹이는 쥐엄 열매로 베부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돼지가 먹는 음식으로 배가 부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돼지들에게 먹이는 쥐엄 열매를 먹음으로 살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하는 일꾼이 많다는 복음을 깨닳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 종들도 배부르고 만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자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아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자기주장을 선언한 아담을 탕자로 봤습니다.

자기의 주장으로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로마서 6:23절에서 죄의 품삯은 사망이란는 것입니다. 여기의 품삯은 용병에게 주는 월급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통하여 사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는데 사망이라는 월급을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왜 사탄은 지옥으로 가게하는 것이 자기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삯을 줍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망이란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만들어지는 교리입니다.

사망이란? 실제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권세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결핍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는 냄새가 나는데 돼지의 쥐엄 열매입니다. 결핍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남으로 자기의 통치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인 대지 땅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대지 땅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습니까? 이미 죽음의 권세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망이 시작이 된것입니다. 영양분이 있는 동안에는 입이 푸르지만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뽑히는 순간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상태는 죽음이라는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죽음이라는 힘이 발휘됩니다. “내가 여기서 주려서 죽는 구나”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아담적인 인생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주려서 죽는 구나”

그러나 탕자는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종들도 풍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풍족한 생활을 말합니다.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는 풍족한 생활을 말합니다.

거지가 된 아들이 부유한 아버지께로 회복이 이제 가능하여 졌습니다. 왜요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입니다. 아담이 다시 하나님의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는 아버지 통치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영적인 삶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길게 늘어진 영원한 삶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영생이란? 오는 세대 즉 다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내용적으로 아담적인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에는 결핍으로부터 오는 고난이 없습니다. 지혜가 부족하여 구원에 대한 불안도 없습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사탄의 통치에 빠져서 멸망을 당할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주로 천국의 잔치입니다. 영생 즉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이 공급되는 잔치입니다.

그리고 상속의 그림입니다. 아버지가 탕자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예복을 입힙니다. 상속자로 회복하여 주십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립니다. 큰 잔치를 배풉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 났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두 번 반복하여 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예수님을 통하여 치유하고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현재적인 상황을 재영하고 있습니다.

탕자를 보고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면서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말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가는 부활을 암시합니다.

탕자의 비유의 끝은 하나님의 통치 관계회복입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게오는 복음앞에 회개하고 자기의 통치 맘몬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드립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 이웃과의 관계회복으로 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삭게오는 자기가 토색하는 사람들에게 2-4배로 값겠다는 말을 합니다.

삭게오는 이웃을 멸시하고 이웃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인 샬롬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샬롬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위한 요청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해달라는 간구에 대한 응답의 결론이다. 신자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면 높여 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잠정적이며 가시적인 실체인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사탄의 나라는 그 만큼 점진적으로 붕괴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만큼 더욱더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최종적인 완성이 예수님의 재림 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의 삶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거룩한 삶을 삶으로서 열방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인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의 청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청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청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과 그의 나라를 위해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달라는 요청이다.

일용할 양식의 청원에 대한 주석가들의 세 가지의 해석

1)삶을 가능하게 하는 청원이라는 것이다. 2) 당일에 필요한 양식의 청원이라는 것이다. 3)다가오는 하루를 위한 나의 양식을 주시옵소서의 청원이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16장에서 만나의 이야기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나를 언제 줍니까? 아침에 줍니다. 아침에 주시는 것은 하루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즉 “지금부터 시작되는 그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청은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 기도의 내용이다. 하나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나라를 위해서 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주기도문의 1-2항목), 다른 하나는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의 합당한 삶을 추구하는 자에게 날마다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의식주는 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해결하실 문제이고, 신자는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과 그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삶을 헌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양식을 위한 기도는 맘몬 숭배와 대립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가 오소서 청원 다음에 일용할 양식의 청원은 날마다 하나님 노릇 해주심을 의지하여 살겠다는 서약이 함께 담긴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이 안식일적인 삶이다.

자기가 자신의 일로 자시의 생명을 얻으려는 것 즉 아담적인 삶을 중지하는 서약이고 청원이다.

네 번째의 청원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고백과 자신의 죄 용서를 위한 청원

바리세적 경건주의 극복하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고백과 자신의 죄 용서를 위한 간구는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대인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잘 보여 준다. 이것은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수직적인 교제의 관계를 맺는 자녀들은 사람들과 어떻게 바른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함을 전제한 기도이다.

물질적인 우상숭배에 빠지면 그 돈으로부터 나의 안녕과 행복이 확보된다고 믿게 된다.

물질우상에 빠지게 되면 이웃 착취의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의 기도 교훈 에서 죄 용서가 강조되는 것은 자녀들은 사람들과 어떻게 바른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함을 잘 이해 해야 된다(마 6:14-15; 막 11:25). 사람들이 잘못을 할 때 기꺼이 용서를 해줄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삶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마 18: 6-7; 눅 17:1-2),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견지해야 한다(마 7:12; 눅 6:31; 참고 롬 14:13; 고전 10:32).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줄 경우 보상을 두 배나 해야 한다.

도한 신자들은 자기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기꺼이 죄용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 것만 아니라, 이 교훈을 통하여 죄 용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랑의 적극적인 두 표현인 이웃 사랑(마 5:43; 눅 10:27)과 원수 사랑(마 5:44; 눅 6:27-38)의 삶도 실천할 것도 전제하신 것이다.

신자들의 대인관계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삶, 상처와 해를 주지 않는 삶,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삶, 이웃사랑의 삶, 원수 사랑의 삶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죄 용서를 하는 삶의 궁극적 인 목표는 상처와 해를 주는 삶의 정반대인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청원은 마태복음 판과 누가복음의 판이 다르다.

마태복음 판에는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의 판에서는 “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구체적인 죄의 행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마태는 빚들이라하고 누가는 죄들이라고 하였을까?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고 이웃에 대한 빚으로 봤다.

근본적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죄의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사건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원수 사랑이 그 핵심이다(눅 23:34; 롬 5:6-10). 대인 관계에 있어서 신자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1번의 삶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이름 과 영광을 가려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삶은 본질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불신자들의 삶이요, 타락한 인간의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소극적으로 상처와 해를 주지 아니하는 2번의 삶 에서 원수 사랑의 5번 삶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들을 구원하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나타나 아버지의 영광이 극대화된다.

다섯 번째의 청원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간청 우리를 악에서 구출하여 달라는 청원

구원 받은 성도가 사탄의 통치에 노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청원은 두 가지의 청원이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완성되게 하소서라는 청원이다.

두 번째의 청원은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가 사탕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로부터 지금 여기서 건져냄을 받게 하소서의 청원이다.

시험은 복음서에서 모든 시험이 사탄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사실(마 4:1, 3; 16:1, 23; 26:41; 막 1: 13; 14:38; 눅 4:2, 13; 8:13; 22:31-32, 40, 46)에 비추어 볼 때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하는 시험으로 이해된다.12) 따라서 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사탄이 그들에게 가하는 시험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간청이다.

주기도문의 전체 맥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게 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데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불신자의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지 않고 구원을 받기 전에 과거에 살았던 불신자의 삶을 사는 것이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삶이다. 불신자가 사는 삶이 무엇인지는 신자의 삶을 불신자의 삶과 대조하여 교훈하는 산상수훈이 잘 제시하기 때문에 산상수훈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불신자의 삶이라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는 의식주의 삶이 자신의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구하는 대신 세상나라를 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이 불신자의 삶이다. 이러한 삶으로 전락하는 것이 신자가 사탄의 유혹으로 빠질 수 있는 시험이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을 살지 않게 하여 달라는 기도이다.

주기도문과 신자의 삶

주기도문의 내용과 신자의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주기도문의 내용과 신자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사실 이다.

예수님은 신자의 삶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복음서에서 다양하게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수훈과 같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여기서 초점의 대상은 주기도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이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서 5-7장에 있는데 주기도문이 이속에 포함되어 있다. 누가복음 평지수훈은 누가복음 6장(20-49절), 11장의 주기도(1-4절), 12장의 일부(22-34절), 13장의 일부 (22-30절)에 중간에 배치되어있다. 신자의 삶을 집중적으로 알려 주는 산상수훈이나 평지수훈의 전체를 구체 적으로 다루는 것의 중간에는 항상 주기도문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간구는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는 신자의 삶과 정확 하게 일치한다(눅 12:31).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자녀들에게 주권적인 은혜로 주는 선물이며 동시에 그들 의 삶의 목표이다. 12:32의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는13)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임을 보여 주고, 12:31의 "오직 너희는 그의[아버지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책임과 목표임을 알려 준다. 물론 문맥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방편은 돈주머니를 떨어 그의 나라를 위해서 투자 하는 것이다(눅 12:33). 여기서 아버지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서 살아야 할 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살아야 할 삶과 해야 할 기도가 동일하다. 신자의 기도내용이 곧 신자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인 셈이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청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의식주를 제공하시는 다 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의식주의 문제를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취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다(눅 12:22, 29). 부정한 새 까마귀를 기르 시며(24절), 백합화를 솔로몬 보다 더 큰 영광으로 입히시며(27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들도 입히시는(28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주 문제를 염려거나 걱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에 몰입하여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이 세상 사람들이다 (30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삶의 유일한 대안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31절).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의 청원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됨과 그의 나라 도래를 위한 간구 다음에 등장하는 것 같이 의식주 문제의 해결은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자들에게 친히 약속하신 사항이다. 신자는 의식주를 위해 살아할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잘 자들이 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진행 되야 한다. 다시 한번 의식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자 의 삶과 그의 기도는 같다.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청(모든 사람의 죄 용서 고백과 아버지께 죄용서 간구함) 역시 앞서 언급된 세 간청과 같이 신자의 삶의 교훈에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평지수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받을지언정 상처나 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정신을 근간 으로 한다. 대인관계와 관련하여 평지수훈의 핵심이 원수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인식 에 동조한다(6:27-38).14) 특히 6:37c의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란 말씀은 주기도 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랑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와 유사하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마지막 간구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신자의 삶과 대비되는 불신자들 의 삶과 관련하여 추론될 수 있다. 평지수훈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탐욕에 사로잡혀(눅 12:15) 의식주를 위해서 산다(12:30). 같은 장에 기록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암시되듯이 이 세상 사람들은 의식주가 넉넉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으로 가득 찬 곡간(세상나라)을 더욱 확장하며(12:18-19), 더 나가서 솔 로몬의 모든 영광과 같은 자신의 명성을 원한다(27절). 불신자들의 삶은 이 세 가지, 곧 의식주 추구, 곡간 의 확장으로 암시된 세상나라 추구, 솔로몬의 모든 영광과 같은 자신의 명예와 이름 추구로 특징 지워진 다. 이 세 가지는 신자들의 삶과 기도의 내용인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감으로 아버지께 영광 돌림, 그의 나라 추구함과 아버지가 해결하시는 의식주와 정 반대가 된다. 신자의 삶에서 최후의 과제가 불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대신 먹고 입고 마실 것으로 가득 찬 세상나라(본질적으로는 사탄의 나라)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대신 자신들의 이름의 존귀와 영예를 위해서 살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에 빠지는 것은 곧 신자의 삶에서 떠나 불신자의 삶으로 전락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 주기도의 내용과 신자의 삶의 내용을 비교하여 제시한 것을 요약하여 도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어주기도문 듣기/읽기/외우기 ㅣ 1시간 반복 듣기 연습 ㅣ


주 기도문🙏The Lord's Prayer 🙏열정과 혼을 담은 해설🙏하루 세번 암송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어떤 기도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구원받았으니 하나님 앞에서 기도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9절은 후토스 운 프로슈케스데 휘메이스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 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층 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 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 층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 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 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 형태가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 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 항-찬양과 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 항-개인의 현실 문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 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 겔 36:23; 벧전 1:15).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고 했는데 하기아조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의미다. 수동태는 하나님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10절은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 게네데토 토 델레마 수 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입니다.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0

나라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 눅 21:27, 28; 계 21:1-8).

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 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계 11:17;22:20). 엘코마이 동사이며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을 사용한다. 명령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시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 작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아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 달라는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 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했는데 기노마이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이다. 명령법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과거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 예견되어 있다. 수동디포는 하나님의 뜻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아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11절은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입니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1

오늘날(세메론) -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 수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일용할(에피우시온) -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 'Superstantialem'(뜻'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양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 ...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동사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 막 3:20; 살후 3:12; 약 2:15). 디도미라는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을 사용하였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달라는 의미다. 과거는 이렇게 매일같이 구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의미다. 우리는 육적인 양식도 구하지만 영적인 복음의 떡을 매일같이 구해야 한다.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 고전 4:7; 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12절은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피에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입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 신약성경에서 흔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사하여 준 것 같이 -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 시제로 보지 않고 현재 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13절은 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알라 뤼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카이 헤 뒤나미스 카이 헤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입니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13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 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알라) -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악(투 포네루) -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 살후 3:3; 요일 2:13, 14).

구하옵소서 - 이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엡 6:16; 요일 3:12). 우리는 사단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 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 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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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기도 자세와 마음가짐 : 신앙의 기본 원리


기도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신앙을 성장시키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올바른 기도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성경적 근거와 실제적인 기도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기독교에서 신앙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과정입니다. 
성경에서는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이는 신자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연결되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의 정의

기도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소망과 감사를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단순히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목적

  1. 하나님과의 교제 :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신앙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행위 : 기도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기 위한 과정입니다.
  3. 영적 성장을 위한 도구 :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앙의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4. 감사와 찬양 : 기도는 단순히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올바른 자세

기도를 할 때의 자세는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태도까지 포함됩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기도의 자세를 제시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신체적 자세

  • 무릎을 꿇는 기도
    • 다니엘 6:10에서 다니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1).
    • 이는 겸손과 경외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10)
  • 손을 들고 하는 기도
    • 디모데전서 2:8에서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디모데전서 2:8)
  • 앉아서 기도하는 자세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모습(누가복음 10:39)에서도 기도의 자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이는 묵상과 집중을 도와주는 자세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누가복음 10:39)
  •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
    • 마태복음 26:39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신 장면이 등장합니다.
    • 이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표현하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39)
  • 서서 하는 기도
    • 마가복음 11:25에서 예수님은 서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 이는 경건함과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나타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25)

기도하는 올바른 마음가짐

신체적인 자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기도는 단순한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 시편 51:17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 바리새인의 교만한 기도(누가복음 18:9-14)와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비교할 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9-14)

믿음과 신뢰

  • 마가복음 11:24에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진실된 마음

  • 하나님은 외적인 형식이 아닌 진실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 마태복음 6:7-8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7-8)

감사하는 태도

  • 빌립보서 4:6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 감사의 기도는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6)

기도의 유형과 방법

성경에서 다양한 기도의 유형을 소개하고 있으며, 각각의 기도는 신앙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합니다.

찬양과 경배의 기도

  •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하는 기도입니다.
  • 다윗의 시편(시편 150편)은 찬양 기도의 좋은 예입니다.

간구와 중보 기도

  •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입니다.
  • 중보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의 기도

  •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 다윗의 참회 기도(시편 51편)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묵상의 기도

  •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 이는 영적 성장을 돕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방식은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 방식

  1. 즉각적인 응답 : 즉시 이루어지는 기도 응답
  2. 기다리게 하시는 응답 : 하나님께서 더 나은 때를 위해 기다리게 하심
  3.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심 :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응답하심
  4. 거절하시는 응답 : 우리의 유익을 위해 거절하시는 경우

기도는 신앙의 핵심이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신앙을 성장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드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올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며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

기도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하나님과의 소통 수단이자 영적 성장을 위한 중요한 도구입니다. 성경에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우리는 기도의 본질과 중요성, 그리고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유익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의미와 중요한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기도의 정의와 본질

기도는 간단히 말해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소망과 두려움, 감사와 간구를 아뢰는 행위로써,,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기도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며, 기도는 단순한 형식적인 의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구하며, 일상 속에서 그분의 공급하심을 간구하는 중요한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도는 일방적인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하는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기도가 염려와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강을 구하는 수단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기도의 다양한 형태

성경은 기도의 다양한 형태를 가르치고 있으며, 각각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도는 감사, 찬양, 회개, 간구 등의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 시편 100편 4절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듭니다.

⊙찬양의 기도: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입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찬양의 기도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시편 145편 1-2절에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찬양의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며, 그분의 성품과 위엄을 되새기게 합니다.

⊙회개의 기도: 기도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다윗 왕의 회개 기도인 시편 51편은 회개의 기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깨끗함과 회복을 간구하였습니다.

⊙간구의 기도: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도 장려합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구의 기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로,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3. 기도의 중요성

성경은 기도의 중요성을 여러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도구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계속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도는 단지 요청을 넘어서, 신앙을 유지하고 영적 유익을 얻기 위한 지속적인 행위임을 시사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 18절에서는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기도가 영적 전투에서 중요한 무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구하고,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기도 본보기

예수님은 기도의 완벽한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과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셨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셨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수님의 기도 중 하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39).

하지만 그 후에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기도에서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5.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조건

성경은 기도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처럼, 기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겸손한 자세로 드려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드려져야 합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은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기뻐하시고 응답하십니다.

6. 기도의 응답

성경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적으로 올 수도 있고,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음을 가르칩니다. 또한, 때로는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신뢰하며, 기도의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결론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넘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도구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영적 삶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주며, 신앙의 여정에서 필수적인 기도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신앙을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도구입니다.

성경은 다양한 기도의 형태와 그 의미를 가르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의지하고 인도받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분의 계획에 맞춰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올바른 기도의 자세

1.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기를  오히려 원하고 계십니다.(요 15:7,16)

2. 성급한 태도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우리를 더욱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때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때로는 느린 것 같고 때로는 응답이 없으므로  불안 초조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3. 회개부터 하십시오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우리에게 죄악이 있을 때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며 기도 하십시오.  

기도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욕망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야 합니다.

5.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그분의 성품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6. 성령 안에서 기도 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이요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는 기도의 영이십니다.

7.기도한 것을 받은 줄로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친히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기도의 생명입니다 (막 11:24)

8. 상한 심령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잠 3:34)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 51:17)

9. 감사함으로 기도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것을 강조했습니다(빌 4:6)

10. 용서한 후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에 분을 품고 기도하는 것을 경멸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해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11. 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전심으로 기도하는 열정에 사로잡힐 때만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렘 29:13)

12.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사람이 아니라 무릎의 사람들에게 능력과 감화력을
더해 주십니다. 그리고 무릎 꿇는 자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13. 끈질긴 기도를 하십시오

열심히 없는 기도는 죽은 개로 벼룩을 사냥하는 것과 같고 눈먼 매로 빈대를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눅 18:7)

14.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근심, 초조, 불안, 낙심 가운데 기도하고,  
기도한 후에도 계속해서 근심, 초조, 불안, 낙심 가운데 살면 영원히 기도 응답의 기쁨은 없습니다.(갈 6:9)

15.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깃들게 되어있고, 능력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창 32:36)

16.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생활화, 생활의 기도화가 되면 당신의 짧은 기도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삼상 12:23)

17. 순간순간마다 기도하십시오

매 순간 매 순간 마다 깨어서 기도하는 자에게는 사탄이 유혹하거나 시험할 겨를이 없습니다.(창 24:63)

18.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육신의 부모님께 구체적으로 나의 필요를 요청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도 구체적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눅 11:5)

19.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만이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약 1:6-8)

20. 진실하고 솔직하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진실 되고 정직한 기도를 원하십니다.(마 6:7)

2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기쁘시게 한 자녀에게  모든 것을 채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마 6:33)

22.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작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막 14:36)

23.새벽에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기사와 이적은 거의 다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늦게 하는 기도는 버린 기도입니다.(막 1:35)

24. 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 기도 하셨고,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금식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25.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26. 면벽 기도를 하십시오

구약성경의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벽을 마주한 면벽 기도였습니다.(역대하 32:24-26)

27. 찬송하면서 기도하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찬송으로 옥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감옥이 그를 가둔 것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가 감옥을 가두었습니다.

28. 깊은 기도를 하십시오 

하늘의 해와 달을 멈출 수 있었던 여호수아의 능력은 깊은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출 33:11, 수 10:12)

29. 반복하여 기도하십시오
 

반복의 기도는 물이 바위를 뚫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0. 씨름의 기도를 하십시오

구약성경의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31.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쉬지 못하게 하는 기도야 말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기도입니다.(사 62:6, 7)

32. 물러서지 않는 기도를 하십시오

뒤로 물러가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과도 거리가 멀어집니다(히 10:38) 

33. 약한 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약한 것을 통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4. 기도와 무기를 동시에 만드십시오 

구약성경의 느헤미야는 무기를 잡은 채 기도하고 싸우면서 성벽을 쌓았습니다.(느 4:23)
기도에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35.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신약성경의 소경 바디메오는 눈을 뜨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부르짖었기에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마 9:27-31)

36. 믿음의 밑그림을 먼저 그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밑 그림이 없는 기도는 무정란과 같습니다.

37.모호한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모호한 기도는 모호하게 응답 받게 되어있고  구체적인 기도는 구체적으로 응답받게 되어 있습니다.

38.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기도는 기도 중의 최고 기도입니다.

39. 기도의 동역자를 만드십시오 

모세는 산꼭대기에 아론과 홀을 데리고 갔습니다. 
기도의 동역자가 있으면 넘어지더라도 힘이 됩니다.

40. 점잔을 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끝 장보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41. 교회 일을 앞장서서 하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일하는 만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42. 취할 정도로 기도하십시오

구약성경의 한나는 취할 정도로 기도했기에 사무엘을 얻는 하나님의 응답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43. 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기도 하십시오
 
예수님도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힘쓰셨고 제자들도 시간을 정하여 놓고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였습니다.(눅 22:39, 행 3:1)

44. 마음의 우상을 버리십시오

우상이란 하나님 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기도를 하려면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내게 첫째인가?" 하는 것입니다.

45. 인색한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우물물은 퍼서 써야만 새로운 물로 채워지게 됩니다.
기도의 새로운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려면 퍼 주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 7:2)

46. 의심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야고보서1:6,7)

47. 분노심을 없애 버리고 기도하십시오
 
타인에게 분노심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귀를 막아 자기의 간구를 못 듣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주의 마음은 기도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막 11:25)

48. 열정적으로 기도하십시오 

냉랭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불꽃에 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49. 겸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겸비하게 자신을 낮춘 자의 기도를 잘 들으십니다.(눅 18:9-14)

50. 뜻을 세운 기도를 사십시오.

구약 성경의 다니엘은 단지 기도만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뜻을 세운 기도였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엘로힘)과 우상(偶像)


하나님(엘로힘)과 우상(偶像)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

(행 17:24-25)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라.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친히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은 헛 것들이요, 주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출 20:11)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창조물입니다. 사람이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은 우상의 제작자요 우상은 사람의 작품입니다. 창조물은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그분을 섬겨야지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름답고 장엄한 신전들을 건축하고 그 안에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의 형상을 모셔두었습니다. 우상들은 사람들이 만든 전에 비치되어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만든 건축물은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왕상 8: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품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집이오리이까?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는 대언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르기를, 

우상들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상을 메어다가 한 곳에 고정시켜 둡니다. 만약 우상이 낡거나 파손되면 사람들이 수리를 하며, 칠이 벗겨지면 사람들이 새로 도색을 합니다. 우상은 사람들의 관리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실 필요가 없고, 사람들로부터 먹을 것을 요구하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요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50:11-12) 산의 모든 날짐승도 내가 알며 들의 들짐승들도 내 것이로다. 가령 내가 주린다 할지라도 네게 말하지 아니하리니 세상과 거기의 충만한 것이 내 것이로다. 

우상은 헛 것이며 우상숭배는 헛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하나님과 우상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능력에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을  보면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 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염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 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이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해야 할 이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헛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은 하늘을 지으신 능력의 창조주이시기에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헛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대단한 존재인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은 사람들이 나무나 돌 또는 금속 등을 이용하여 만들고, 그것에 신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생명도 없고 능력도 없는 문자 그대로 헛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살펴보더라도 우상은 그 숭배자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단지 우상이 자기를 섬기는 자들에게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허무한 삶과 헛된 죽음뿐이었습니다.  

여러분, 갈벨산에서 엘리야와 한판 대결을 벌였던 바알 숭배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열심은 오늘 우리 성도들이 가진 열심보다도 더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바알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없자,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하고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바알을 불렀습니다.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 까지 바알을 찾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열심입니까?  하지만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큰 열심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알이 이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니 꼭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왕상18 : 20-40). 이렇게 우상은 자기를 경배하는 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며, 단지 인생에 허무함을 주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게 하는, 그 자체가 헛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의 법칙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자신을 섬기는 성도들을 위해, 온 천하에 능력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압제당할 때, 그들을 위해 능력을 행하심으로 당대 최고의 왕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 내셨고, 한나와 같이 부르짖는 자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행하심으로, 그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삼상 1:1-28),  또 한 하나님은 세상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 능력을 행사하심으로, 자신의 자녀된 성도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의와 생명으로 옮기시고 영생을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6:17,18절 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상은 신으로 불린다는 점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하나님과 바알이, 하나님과 부처가 동등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과 세상의 우상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 능력자이신 반면, 우상들은 생명이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의 결정적 차이는 그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누구를 섬기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헛된 우상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능력을 행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섬겨야 할 자를 선택하십시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6)고 촉구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여호수아의 촉구를 여러분을 향한 촉구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며, 인간이 그 형상을 만들어 그를 숭배하는 것을 극도로 금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상이나 예수님의 형상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상의 의미를 성경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것이 오늘날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형상으로 만들어서 숭배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형상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물질적인 형태를 가지지 않으시며, 어떤 형태로도 그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나타내는 모양과 형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모양과 형태로도 제한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물, 공기와 같은 형상 없는 존재로, 그 형상이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분의 신성과 영원불변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어떤 형태나 모양으로 형상화해서는 안 되며,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큰 오류이며,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 숭배의 범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떤 형상으로도 고정시키지 않으시며, 그런 형상은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이란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나 형상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화한 물건을 숭배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나의 형상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그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엄격히 금하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형상을 본따 그린 성상이나 성화, 그림 등을 우상으로 간주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금하십니다. 예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딴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시지,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하나님을 예수님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엄격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그분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와 성경의 경고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그로 인해 오는 죄와 결과를 경고하십니다. 신명기 4장 15절에서는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하여,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신 중요한 교훈으로, 형상화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왜곡을 막기 위한 경고입니다.

우상 숭배는 단순히 어떤 물체나 이미지를 숭배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제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것으로 대신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모양으로 바꾸거나, 자신이 편리한 방식으로 그를 숭배하려는 모든 시도는 우상 숭배로 간주됩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분을 형상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상과 우상 숭배: 가톨릭과의 논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그린 성화나 성상에 대해 논의할 때,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성상에 대한 의견이 등장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형상이 우상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는 이와 같은 주장이 잘못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인간 예수님의 모습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형상을 숭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형상은 하나님의 고유한 형상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은 단지 그분이 사람으로서 나타내신 모습일 뿐, 하나님을 완전하게 나타내는 형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 숭배에 해당합니다.


교황의 무오성과 우상 숭배의 관계

또한, 교황의 무오성에 대한 논란은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지만, 성경에서는 인간은 절대로 무오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교황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직접 임명한 인물이 아니며, 교회의 전통과 인간의 결정을 통해 선택된 인물입니다. 따라서 교황이 주장하는 교리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교리가 그릇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교황이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해석을 통해 신앙을 지도하는 것으로, 결국 우상 숭배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교훈과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 인간의 교리나 해석이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황의 무오성 주장도 이러한 측면에서 잘못된 교리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권위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겨지는 우상 숭배의 위험이 커질 수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상 숭배의 의미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형상으로 그를 나타내지 말고, 그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우상 숭배는 단순히 어떤 물건이나 이미지를 숭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제한하거나, 그분의 권위와 가르침을 왜곡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숭배할 때는 그분의 말씀과 진리를 따르며, 어떤 형태나 물질적 상징으로 그분을 표현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 어떤 피조물로도 표현될 수 없으며, 예수님의 형상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숭배할 때는 어떤 성상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길입니다. 교회의 교리나 인간의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해야 하며, 인간의 해석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 신명기 4장 25-40절이 전하는 진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신명기 4장 25-40절은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면, 우상은 피조물에 불과하며,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파멸과 저주만을 가져옵니다. 오늘은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과 우상의 본질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우상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우상은 인간이 만든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은 후에 그 땅에 오래 살다가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 그의 노를 격발하면" (신명기 4: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상이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함을 보여줍니다.

우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 하나일 뿐, 결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우상이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2. 우상은 아무 힘도 없다

"우상은 무력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그 곳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나무나 돌로 된 신들을 섬기리니 그것들은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것들이니라" (신명기 4: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상이 아무런 힘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상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것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들으시며,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우상이 아무런 힘도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3. 우상숭배는 파멸과 저주뿐이다

"우상숭배의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진멸될 것이라" (신명기 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상숭배가 파멸과 저주만을 가져옴을 보여줍니다.

우상숭배는 파멸과 저주만을 가져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속히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경계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우상숭배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파멸과 저주만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4.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신명기 4장 25-40절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경계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경계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신명기 4장 25-40절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경계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마지막 질문

"오늘,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가? 우상숭배를 경계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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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기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2. [레위기 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찌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3. [레위기 26:30]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4. [민수기 33:52]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5. [신명기 4:16]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6. [신명기 4: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7. [신명기 4: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8. [신명기 5: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9. [신명기 7: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10. [신명기 9: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11. [신명기 27: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12. [신명기 28:6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13. [신명기 29: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14. [사사기 18: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15. [사무엘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16. [사무엘상 19:13]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17. [사무엘상 19:16]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18. [사무엘하 5:21]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19. [열왕기상 14:9]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20. [열왕기상 14:23]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21. [열왕기상 15:12]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

22. [열왕기상 15:13]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23. [열왕기상 21:26]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24. [열왕기하 11:18]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25. [열왕기하 17:12]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치 말라 명하신 일이라

26. [열왕기하 17:41]
그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더니 그 자자 손손이 그 열조의 행한 것을 좇아 오늘까지 그대로 하니라

27. [열왕기하 21:11]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28. [열왕기하 21:21]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29. [열왕기하 23:5]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30. [열왕기하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31. [역대상 10:9]
곧 사울을 벗기고 그 머리와 갑옷을 취하고 사람을 블레셋 땅 사방에 보내어 모든 우상과 뭇 백성에게 광포하게 하고

32. [역대상 14:12]
블레셋 사람이 그 우상을 그곳에 버렸으므로 다윗이 명하여 불에 사르니라

33. [역대하 11:15]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수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34. [역대하 15:16]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35. [역대하 21:11]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케 하였으므로

36. [역대하 21:13]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기를 아합의 집과 같이 하며 또 너의 아비 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37. [역대하 23:17]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38. [역대하 24: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39. [역대하 25:14]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40. [역대하 28:2]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만들고

41. [역대하 33:15]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하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산에와 예루살렘에 쌓은 모든 단을 다 성 밖에 던지고

42. [역대하 33:19]
또 그 기도와 그 기도를 들으신것과 그 모든 죄와 건과와 겸비하기 전에 산당을 세운 곳과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세운 곳들이 다 호새의 사기에 기록되니라

43. [역대하 33:22]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44. [역대하 34:3]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 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45. [역대하 34: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46. [역대하 34:7]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47. [시편 78:58]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48. [시편 106:19]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49. [시편 106:36]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50. [시편 106:38]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51. [시편 115:4]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52. [시편 115: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53. [시편 135:15]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54. [이사야 2: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55. [이사야 2: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56. [이사야 2:20]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57. [이사야 19:1]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58. [이사야 19:3]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 도모는 그의 파하신바가 되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59. [이사야 30:22]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60. [이사야 31:7]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우상, 금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버릴 것이며 


61. [이사야 40: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62. [이사야 40:20]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63. [이사야 41:7]
목공은 금장색을 장려하며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군을 장려하며 가로되 땜이 잘 된다 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도다

64. [이사야 41: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65. [이사야 41:29]
과연 그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 뿐이니라

66. [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67. [이사야 42:17]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68. [이사야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69. [이사야 44:10]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70. [이사야 44:15]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71. [이사야 44: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72. [이사야 45:16]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73. [이사야 45:20]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한가지로 가까이 나아 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

74. [이사야 46: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은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75. [이사야 57:13]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76. [이사야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77. [예레미야 10:8]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

78. [예레미야 10:14]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 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79. [예레미야 50:2]
너희는 열방 중에 광고하라 공포하라 기를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80. [예레미야 50:38]
가뭄이 물 위에 임하여 그것을 말리우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우상에 미쳤음이니라

81. [예레미야 51:17]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만든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82. [에스겔 6:4]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륙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83. [에스겔 6:5]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

84. [에스겔 6:6]
내가 너희 거하는 모든 성읍으로 사막이 되며 산당으로 황무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태양상들이 찍히며 너희 만든 것이 다 폐하며

85. [에스겔 6:9]
너희 중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86. [에스겔 6:13]
그 살륙 당한 시체가 그 우상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에, 모든 산꼭대기에, 모든 푸른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87. [에스겔 7:20]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내가 그것으로 그들에게 오예물이 되게 하여

88. [에스겔 8: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89. [에스겔 8: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 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

90. [에스겔 8:10]
내가 들어가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91. [에스겔 8: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92. [에스겔 14: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93. [에스겔 14:4]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대로 응답하리니

94. [에스겔 14: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95. [에스겔 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96. [에스겔 14:7]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97. [에스겔 16:17]
네가 또 나의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98. [에스겔 16:18]
또 네 수 놓은 옷으로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으로 그 앞에 베풀며

99. [에스겔 16:21]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100. [에스겔 16:3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며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101. [에스겔 18:6]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102. [에스겔 18:12]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억탈하거나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103. [에스겔 18:15]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104. [에스겔 20:7]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105. [에스겔 20:8]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106. [에스겔 20: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좇아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니라

107. [에스겔 20:18]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열조의 율례를 좇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108. [에스겔 20:24]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 열조의 우상들을 사모함이며

109. [에스겔 20: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110. [에스겔 20:3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이 후에도 그리하려무나 마는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찌니라

111. [에스겔 21:21]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112. [에스겔 22:3]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 가운데 피를 흘려 벌 받을 때로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113. [에스겔 22:4]
네가 흘린 피로 인하여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왔고 네 년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114. [에스겔 23:7]
그가 앗수르 중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스스로 더럽혔으며

115. [에스겔 23:30]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히 이방을 좇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음이로다

116. [에스겔 23:37]
그들이 행음하였으며 피를 손에 묻혔으며 또 그 우상과 행음하며 내게 낳아준 자식들을 우상을 위하여 화제로 살랐으며

117. [에스겔 23:39]
그들이 자녀를 죽여 그 우상에게 드린 당일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서 그렇게 행하였으며

118. [에스겔 23:49]
그들이 너희 음란으로 너희에게 보응한즉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찌라 너희가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니라

119. [에스겔 30: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우상들을 멸하며 신상들을 놉 가운데서 끊으며 애굽 땅에서 왕이 다시 나지 못하게 하고 그 땅에 두려움이 있게 하리라

120. [에스겔 33:25]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121. [에스겔 36: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22.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123. [에스겔 37: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24. [에스겔 44:10]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125. [에스겔 44: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126. [다니엘 2: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127. [다니엘 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128. [다니엘 11:8]
그 신들과 부어만든 우상들과 그 은과 금의 아름다운 기구를 다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갈 것이요 몇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 아니하리라

129. [호세아 4: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130. [호세아 8:4]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131. [호세아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32. [호세아 11:2]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133. [호세아 13:2]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134. [호세아 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찌라 내가 저를 돌아 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135. [아모스 5: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136. [아모스 8: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137. [미가 1:7]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138. [미가 5:13]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139. [나훔 1: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

140. [하박국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41. [스가랴 13: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142. [사도행전 7: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143. [사도행전 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144. [사도행전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145. [사도행전 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46. [사도행전 19:35]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147. [사도행전 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148.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49. [로마서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150. [고린도전서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51. [고린도전서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52. [고린도전서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53. [고린도전서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154. [고린도전서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155. [고린도전서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156. [고린도전서 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57. [고린도전서 10:7]
저희 중에 어떤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158. [고린도전서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9. [고린도전서 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160. [고린도전서 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161.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62. [갈라디아서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163.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64.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165. [데살로니가전서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66.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167. [요한1서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168. [요한계시록 2:14]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69. [요한계시록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170. [요한계시록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171. [요한계시록 13: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72. [요한계시록 13: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73. [요한계시록 14: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74. [요한계시록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75. [요한계시록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76.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177.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178. [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179.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180.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