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 모태신앙과 고백신앙(영접신앙)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에 "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두 개의 단어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안다는 단어네 "기노스코"라는 단어와 "에이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But we know where this man is from; when the Christ comes, no one will know where he is from.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전통적인 사고의 유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중간 시대에 나온 계시 문학에서 엿볼 수 있는 사상의 결과라고 합니다.

계시 문학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구름에서 나타난다" 혹은 "해에서 나타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제 4 에스라 7:28,13:32).

전통적인 사고가 옳은 방식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적 사고가 잘못된 방식이라면 잘못을 뉘우치고 옳은 방식을 따라 진리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예언된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사람들처럼 오늘날도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에 진리가 있다고 착각(錯覺)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며 그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를 잘 알고 있는데 하늘로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요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고 하셨을 때 "아노라" 라는 헬라 단어는 "에이도(
ĕidō. εἴδω)"라고 합니다.

'에이도'라는 단어는 내용을 깊이 알고 경험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겉모양만 단순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과 실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것을 "기노스코(ginōskō. γινώσκω)" 라고 합니다.
기노스코의 앎은 마음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경험, 체험).
에이도의 앎은 머리로만 아는 것을 말합니다(지식, 정보).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안다는 것은 단지 일반적인 정보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본질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알려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단순한 방언을 하느냐?
환상을 보았느냐?
병자를 고칠 수 있느냐?
이러한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을 알 수 있는 은혜를 받았느냐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에 의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시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오이다 / 에이도와 기노스코의 차이를 말해주는 성구

요한복음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오이다)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기노스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알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체험한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3년간 최고 스승이신 예수께 교육과 훈련을 받았어도 기노스코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기 전과 후는 차이가 분명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하나님을 기노스코 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아노라(에이도. ĕidō)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관련 성경 /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알다(기노스코. ginōskō)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1. 알다.  2. 신비를~ .  3. 하나님을~
발음 [ ginōskō ]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 ,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 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모태신앙(母胎信仰) : 고백신앙(告白信仰) <迎接信仰>

모태신앙이란 용어는 기독교에서만 통용되는 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모태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무당을 이야기 할 때 강신무와 세습무라고 구분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무당들이 신을 받아야만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태신앙을 가톨릭에서는 "태중교우"라고 하며, 성공회에서는 "뿌리신자"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세를 강조하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세뇌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모태신앙이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혹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을 때부터 자신이 교회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는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말이고, 그 속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말입니다.
주일학교부터 청년회까지 교회에 꾸준히 다니면서 들려지는 매 주일 말씀을 듣고 소그룹에서 나누는 교제에도 함께했으며 침례를 받거나 만찬에 참여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모태신앙인은 디모데입니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의 배경 속에서 자랐습니다(딤후 1:5).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습니다(딤후 3:15).
그는 사도 바울의 영적 아들로(고전 4:17) 사도의 소명을 이어받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울 것을 명받았습니다(딤후 4:1-8).

또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던 사무엘도 모태신앙인입니다(삼상 1:27-28; 2:18-21).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호와께 드려졌고 여호와 앞에 자랐습니다.
왕이 없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이스라엘의 암흑기 마지막 사사로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을 세우는 중대한 일을 했습니다.
사무엘의 마지막 설교를 들으면 그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신앙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삼상 12장).

하지만, 모태신앙인이라고 무조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수많은 예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함께 대제사장 엘리의 영향 아래 자라났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녀들로 자랐고 결국 엘리 집안을 멸망시켰습니다(삼상 2:27-36). 아이러니하게도 훌륭한 모태신앙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무엘의 아들들 역시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큼 엉망이었습니다(삼상 8:3).  

오늘날에도 우리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란 흉악한 범죄자들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반대로 암울한 배경 속에서 대를 이어가는 죄악된 삶의 사슬을 끊고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세운 신앙인의 간증을 접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모태신앙”이 곧 참 신앙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좋은 신앙의 배경이 좋은 신앙인으로 자라게 하는 좋은 토양이 될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나무 자체가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랐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배경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물론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순종했다는 것을 전제로 말입니다). 그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친히 선택하시고 그들과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들에 대한 신실한 사랑을 보이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제사제도를 알려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배우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은 끝내 율법을 완성시킬 수 없기에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대신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죽을 희생제물로 삼으셨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권세를 얻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기업을 함께 이어 받을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결론 내린 것처럼 ‘이 사실을 어려서부터 들어서 안다’는 것이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와 동의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배운 그 사실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었는가’가 중요하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좋은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치 어려서부터 탁구장을 운영하는 집에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이 탁구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해서 무조건 탁구를 잘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직접 배우고 연마하여 좋은 실력을 갖추는 것이지 좋은 배경속에 있었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실력을 갖추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었고, 율법과 계명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녀들에게도 그들이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하였습니다(신 6). 그들의 정치 지도자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이방인과 구별된 모태신앙 집단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 국가였고 교육과정은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모태신앙의 배경을 갖춘 자들이 있을까요?

바울은 그들 역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들에 비해 너무나 빈약한 신앙의 배경을 가졌던 이방인과 동일하게 그들은 죄인으로서의 한계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배경이 그들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심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유익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9-18)

개와 같은 이방인들에 비해 월등한 모태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그들이 가졌던 자부심과 교만을 완전히 뿌리뽑고 바울이 외쳤던 그들의 진짜 영적 현실을 그들이 처절하게 바라보기 원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모태신앙인으로서 저는 이렇게 말하기 원합니다. 모태신앙의 배경을 가졌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곧 나의 신앙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이 곧 나의 영적 상태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나의 겸손한 순종과 믿음이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과 능력이 나를 거듭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이 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태신앙입니다”라는 말이 “그러니 저는 당연히 그리스도인입니다”가 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베드로와 같은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혹은 주께서 크다고 칭찬하신 한 이방인 여인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습니다.” 세리와 같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모태신앙’은 감사의 제목이지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라는 말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당신이 언제 그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말해주십시오.
언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죄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주십시오.
언제 하나님께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부르짖었는지 말해주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당신의 불의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는지, 당신의 온전한 자랑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는지 말해주십시오.
그것이 모든 신자가 해야 할 믿음의 고백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위대한’ 모태신앙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루살렘과 소돔 / 경건의 도시와 타락의 도시



성경에서 도시는 어떤 의미인가?

성경에서 “도시”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도덕적, 영적, 사회적 함의를 가진 상징적 요소로 자주 등장합니다. “도시”라는 개념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상태를 반영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 인간의 타락과 구원, 공동체의 삶 등이 구현됩니다. 도시를 부정으로만 보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의 도시들은 부정적 의미가 강하지만 예루살렘도 도시고, 마지막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예루살렘도 도시입니다. 이처럼 도시는 중립적 의미이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잇습니다. 도시의 원어적 분석과 함께 성경 속에서 도시가 상징하는 다양한 의미를 주제별로 정리하겠습니다.

원어적 분석 : 도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용어

히브리어 “이르(עִיר, Ir)”

히브리어로 “도시”는 “이르(עִיר, Ir)”라는 단어로 나타나며, 이는 방벽이나 요새화된 장소, 사람들의 모임을 상징합니다. “이르”는 초기 도시 개념을 반영하며, 안전과 방어를 목적으로 발전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 전반에서 다양한 도시를 언급할 때 사용되며, 도시의 방어적인 기능과 공동체의 집합적 특성을 강조합니다.

그리스어 “폴리스(πόλις, Polis)”

신약에서 도시를 의미하는 단어는 그리스어 “폴리스(πόλις, Polis)”로, 이는 물리적 도시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헬라 문명에서 “폴리스”는 단순히 거주 지역을 넘어서서 시민들의 공동체와 생활양식을 상징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졌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예루살렘, 로마 등 중요한 도시와 관련하여 사용되며, 도시가 구속사의 중요한 무대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타락과 죄의 상징으로서의 도시

바벨탑과 바벨론

성경에서 도시의 개념은 인간의 타락과 죄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사건은 도시의 시작과 함께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이름을 내고” (창세기 11:4)자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교만을 상징합니다. 바벨탑을 중심으로 한 도시 바벨론은 이후 성경 전체에서 죄와 타락을 상징하는 도시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바벨론은 특히 예언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불경건과 세속적 권력, 우상 숭배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이사야서 13장과 예레미야서 50장에서는 바벨론의 심판이 예고되며, 그 도시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악한 세상 체계를 상징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도 바벨론은 큰 음녀로 묘사되며, 세상의 모든 죄악과 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바벨론을 비롯한 여러 타락한 도시는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인간 사회의 죄악성을 상징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소돔과 고모라는 도덕적 타락과 악의 도시로 묘사됩니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두 도시는 극도의 악행과 도덕적 부패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성경에서 인간 타락의 최종적 모습으로 자주 인용되며, 신약에서도 경고의 예시로 사용됩니다(베드로후서 2:6).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부패한 사회의 상징으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을 때 나타나는 타락의 결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상징으로서의 도시

예루살렘 :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로 자주 언급되며, 하나님의 임재와 선택을 상징하는 특별한 도시로 여겨집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통일 왕국의 수도로 정한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편 87편 2절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라는 구절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을 나타내며,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특별한 장소임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언서에서도 메시아적 회복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장소로 예언되며, 모든 민족이 주님께 나아와 예배할 거룩한 도성으로 묘사됩니다. 신약에서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진 장소로,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도시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거할 구원의 도시로 묘사됩니다.

새 예루살렘 :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과 통치의 도시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완전한 도시로 묘사됩니다.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2)라는 구절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완전한 연합을 상징하는 거룩한 도성임을 보여줍니다. 이 도시는 모든 눈물이 씻겨지고 죽음과 슬픔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분의 백성이 영원히 거할 장소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회복을 상징합니다.

인류의 죄와 구속의 역사적 무대로서의 도시

애굽과 그 도시들

애굽(이집트)은 종종 억압과 노예 제도의 상징으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받았던 도시로 묘사됩니다. 출애굽기의 시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도시 라암셋과 비돔에서 노예로 일하면서 고통을 받았으며, 이는 애굽이 인간의 억압과 압제의 도시로서의 상징성을 가지게 된 배경입니다. 이러한 애굽의 도시는 인간이 자신의 권력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악한 체제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구속사적 개입을 필요로 하는 인간 사회의 실상을 나타냅니다.

로마 : 세속적 권력과 통치의 상징

신약 시대 로마는 당대 세계의 중심지였으며, 강력한 세속적 권력과 제국주의를 상징했습니다. 로마는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 교회와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며, 이곳에서 복음이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는 성도들에게 큰 도전과 위협을 안겨주었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악한 세상 체제의 상징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로마는 세속적 권력과 물질주의를 상징하며, 인간의 탐욕과 권력 남용을 드러내는 도시로 묘사됩니다.

공동체와 신앙의 연합을 위한 상징으로서의 도시

성전과 도시 공동체

구약에서 성전이 자리잡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예배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로, 공동체의 연합과 신앙의 중심이 되는 도시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 도성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장소로 기능하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예루살렘의 성전은 중요한 장소로 남아 있으며, 초기 교회가 공동체로 함께 모여 신앙을 나누는 상징적 장소로 기능합니다.

도피성: 공동체의 정의와 보호

도피성은 구약 율법에서 도피자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제공된 특별한 도시입니다. 민수기 35장과 신명기 19장에서 설명된 도피성은 잘못으로 인해 타인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한 도시로, 정의와 보호의 상징이 됩니다. 이는 공동체가 정의와 은혜를 제공해야 함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장소로 이해됩니다.

요약

성경에서 “도시”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본성, 도덕적 상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펼쳐지는 장소로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들은 인간의 타락과 죄의 상징으로,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의 장소로, 그리고 공동체와 정의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번영하는 도시, 몰락하는 도시 | 사회정치 베스트셀러 | 이언골딘 세계은행 부총재

<번영하는 도시와 몰락하는 도시>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며 물리적 공간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는 미래의 도시는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책의 내용과 함께 살펴봅시다.

이 책은 옥스퍼드 대학 교수이자 前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세계화와 개발'분야의 석학 이언 골딘과 <이코노미스트>의 필진인 톰 리-데블린 두 분이 공동으로 쓴 책입니다.

세계은행의 부총재를 지냈기에 특정 나라에 한정된 편협된 시각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가 가네요. 또한 한 국가의 정책이 다른 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대 사회에서 세계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는 총 10장에 거쳐 도시의 역사와 도시가 가진 문제점, 미래사회에서의 도시의 역할 등을 설명합니다.

서론에서는 도시의 태동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서 인류의 역사와 도시의 탄생을 차례로 설명합니다. 도시화로 인한 불평등 문제와 코로나19로 인해 변화한 근무 환경은 어떻게 도시를 변화시킬 것인가 그리고 점차 개인화되는 사회에서 도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차례로 이야기합니다.

또한 개발도상국들의 빈곤문제 그로 인한 전염병과 기후재난 등에 대해서도 도시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18세기 초에는 인구의 약 5%만이 도시에 거주했습니다. 19세기 산업혁명과 농업기술의 발달로 농업잉여 인구가 발생했고 이들은 새롭게 부상하는 제조산업에 뛰어들며 자연스럽게 도시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도시는 각종 오염과 범죄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좁은 곳에 많은 인구가 모여들며 쾌적하지 못한 환경이었죠.

이후 자동차가 발전하면서 성장하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탈도시화가 시작됩니다. 이 때 '교외'라는 개념이 생겨나죠.

20세기 후반 도시오염과 범죄률을 줄이는 정책과 선호하는 생활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도시는 다시금 대반전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예술가들이 도시로 돌아왔고 이후 부동산개발업자, 전문직 종사자 순으로 다시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이는 도심의 부동산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고 이 때 밀려난 사람들이 교외지역에 거주를 하게 됩니다.

서양의 도시 역사가 우리나라의 도시 역사와도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많은 인구가 도심에 집중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다양합니다.

먼저 도시의 불평등 문제입니다. 과거 제조업 종사자는 교육수준이 낮더라도 고임금으로 교육수준이 높은 지식노동자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지만 제조업의 해외업무 위탁이 증가하고 자동화됨에 따라 일자리가 감소하게 됩니다.

반대로 고숙련 지식노동자의 수요는 증가하며 과거 제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고숙련 지식노동자를 위한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는 양극화된 고용시장을 야기합니다.

도시 불평등과 관련하여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용어가 있어서 함께 소개해드릴게요.

젠트리피케이션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

두산백과 두피디아

우리나라에서도 부동산 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기존 저소득층 원주민의 이주와 보상문제로 늘 시끄럽지요. 이런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어요.

책에서는 공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 주택 , 대중교통 이 세가지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부동산 가치를 갖는 지역들은 교육, 주택, 대중교통이라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지요.

또한 원격근무가 가능해지고, 물리적 공간 보다는 사이버 공간의 개념이 확대되는 미래사회에 도시는 '공동체' 결속을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편의시설을 늘리고, 거주자들간의 소통과 교류가 가능하게 공간을 구성하여 인류의 고립과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하죠.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과 가난한 지역에서의 발전없는 도시화의 문제를 지적하며 비공식 주거지의 인구 증가와 이로 인한 빈곤문제, 높은 인구밀도로 인한 전염병의 확대, 기후재난 등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하고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서 도심에 저렴한 주택공급을 늘려 도시가 팽창되는 것을 막고, 대중교통의 발달과 도시 녹지 증가, 도시 농업 장려 등의 방법을 제안합니다.

책의 내용을 한 눈에 보기 쉽게 마인드맵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x-mind

처음에는 생소한 분야라서 읽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나의 생활을 대입하며 읽다보니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실제 삶에 적용해볼 수 있는 많은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도시의 삶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 뿐만아니라 부동산에 관심있는 분들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부동산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책은 아니지만, 발전할 도시와 쇠퇴할 도시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인사이트도 함께 얻을 수 있는 교양서가 될 것 같습니다.



소돔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온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목초지 문제로 아브라함과 갈등을 빚자 집안싸움을 피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떠나와서 거주한 도시로 묘사된다.

이후 가나안 땅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13년간 섬기던 수메르(히브리어로 시날) 제국의 그돌라오멜 임금 사이에 전쟁이 터져서 소돔이 수메르에게 함락되고 롯을 포함한 주민들이 적국으로 끌려가던 중 아브라함이 300여 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이 행렬을 기습해서 수메르 군사들을 몰아내고 모든 주민들을 구출했다는 기록이 창세기 14장에 있다.

그런데 소돔의 이웃 도시인 살렘 왕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준 것과는 달리 소돔 임금은 감사하기는커녕 "얼마면 되니? 얼른 먹고 떨어져라." 식으로 아브라함을 대했다.[1] 이 내용과 유사한 내용이 수메르에서 나온 기록에도 보이는데 거기에도 '데라의 아들'이라는 인물이 중요하게 나온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름이 바로 데라다.

이후 창세기 19장 전체에 걸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차마 인간으로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불경한 죄[2]하느님을 모독한 대가로 하느님에 의해 불과 유황의 비[3]에 휩쓸려 멸망했으며 그 자리는 현재의 사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미래를 축복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깊은 죄악이 자신에게까지 들려 그 사악함을 확인하고 그 두 도시를 멸하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도시의 자비를 빌며 하느님에게 만약 저 도시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의인이 악인과 같이 벌을 받는 정의롭지 못한 일이 생길 것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자 하느님은 "의인 50명만 찾아내면 온 지역을 용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염치없음을 사죄하면서 5명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시겠는가며 물었고 하느님은 "의인 45명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아브라함은 계속 자신의 염치없음을 사과하면서 40명, 30명, 20명으로 요구조건을 깎았으나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그만큼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같은 대답을 했다.

직후 아브라함은 부디 노하지 마시라고, 마지막으로 이번만 더 아뢰겠다며 끝내 그 수를 10명까지 줄였고 하느님은 "10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그마저도 없어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멸망했다(창세기 19장 24절).

명을 받은 아브라함 입장에선 아무리 구제불능 도시라도 명색이 대도시니 최소한 10명의 의인은 있었을 줄 알았을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는 최소 숫자가 10명이라고 생각되었다. 즉, 아브라함은 최대한 적은 숫자를 이야기했다. 적어도 조카 롯의 가족만 하더라도 5명 정도는 되니까. 롯 부부, 두 딸까지 포함해서 넷. 그리고 롯의 사위들도 어쨌든 개념인에 속하는 롯이 사위감으로 인정한 사람들인 데다가 구원 리스트에도 포함되었으니까 그나마 의인이라고 쳐준다면 6명이나 된다.[4] 결혼한 두 딸, 남자를 접하지 않은 두 딸을 합쳐 롯의 딸이 4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영어에서 sodomy는 항문 성교를 뜻하는데[5] 이 단어는 소돔에서 근친상간, 동성성교, 수간이 성행했다고 한 데서 유래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성서에 이와 같은 묘사는 없다. 예레미아서 14절에 간음, 거짓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이후 기록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벌을 받는다는 표현이 나올 뿐이다. 이슬람 세계에도 이런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돔의 선지자인 롯의 이름에서 파생된 'لُوطِيّ‎ (lūṭiyy)'나 'لِوَاط‎ (liwāṭ)'를 남성과의 성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사용한다.

천사 혹은 하느님 자신이 의인을 파악하고 경고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소돔을 찾아왔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소돔의 성문에서 이들을 만나자마자[6] 끈질기게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7] 이방인이 왔다는 소식에 소돔 시민들이 전부 롯의 집으로 몰려가 "우리가 그들알려고 하니, 손님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8]

이에 당시 롯의 답변은 "처녀인 내 두 딸을 대신 보낼 테니 손님들은 건드리지 말아달라"는[9] 것이었는데[10] 롯의 제안을 들은 사람들은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냐'로 화답했고 결국 롯까지 맞아죽을 위기에 처하자 천사들은 일시적으로 시민들의 눈을 멀게 하여 롯과 가족들이 위기를 모면하게 도와줬다.

이후 천사들은 '소돔과 고모라는 곧 멸망할 테니 너 롯은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라'고 경고했다. 직후 롯은 딸들과 사위들을 불러놓고 피신을 종용하지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점점 밝아오고 이러는 롯을 보다 못한 천사들은 롯 부부와 두 딸의 손목을 잡고 성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일행에게 평야를 떠나 뒤돌아보지 말고 산속으로 도망치라고 하지만 롯이 징징대는 바람에 근처의 작은 성(초아르)에 피신하도록 허락한다. 이후 하느님의 징벌에 의해 유황덩어리들이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는 말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밖으로 나간 아브라함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연기만 나고 있는 소돔을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롯의 아내는 소돔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그 뒤 롯의 두 딸들은 가문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부친인 롯을 술에 취하게 해서 관계를 가졌으며 이런 이유로 장차 이스라엘의 주변 이민족인 모압암몬 족속이 탄생했다고 한다. 구약 시절 유대인들의 모압과 암몬에 대한 적대감을 볼 수 있는 구절인데 정작 신약 시대에는 모압과 암몬을 정복하여 강제 개종시켜서 유대인으로 동화시켰다.

하여간 야훼이 도시의 유일한 의인으로 꼽은 롯의 가족이 대략 이 정도 레벨이었다는 점에서 소돔이 얼마나 막장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롯이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브라함의 조카였기 때문에 살려줬다는 해석도 있지만 소돔의 다른 인간들은 처음 보는 손님을 범하려 드는 개막장들이었는데 롯만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 것을 보면 그래도 롯의 인간성이 다른 막장들에 비하면 훌륭했던 건 분명한 듯 하다. 손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전근대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베드로 2서에도 '의로운 롯'이라는 언급이 있고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롯과 노아를 비슷하게 취급한다.

그런데 창세기를 더 읽어보면 소돔이 멸망한 후 롯과 그의 두 딸들이 초아르라는 도시로 피신했다가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여기서 두 딸들은 "우리가 세상에 시집을 갈 남자들이 없으니, 아버지의 씨를 받아서 가문을 이어야겠다."고 말한다. 이 부분이 이상한데 초아르라는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니면 주변에 다른 도시들을 찾아가서 그곳 남자들과 결혼을 하면 될 텐데 시집을 갈 남자들이 없다고 말한 것과는 서로 모순이 된다. 그래서 영국의 신화학자인 사무엘 헨리 후크는 <중동 신화>에서 소돔 설화는 노아의 대홍수와 비슷한 인류 멸망 전설이었다고 주장했다. 혹은 사람들이 멸종해서가 아니라 롯이 사위로 인정할 마땅한 의인이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롯이 초아르로 피신하겠다고 하자 하느님은 '알았다. 그럼 그 성은 내가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허락하였는데 초아르도 원래는 멸망 계획 리스트에 포함되었고 그만큼 악의 도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롯이 후에 초아르를 떠난 것도 역시 이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벨탑


바벨탑( - 塔, 히브리어: מִגְדַּל בָּבֶל Migdal Bavel, 영어: Tower of Babel)은 구약성경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탑이다. 창세기 11장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인류가 쓰는 동일한 언어와 이에 따른 일종의 타락과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

유다 왕국 멸망으로 국민들(유대인)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끌려간 바빌론 유수 기간에, 바빌론의 에테멘앙키를 보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 에테멘앙키는 신전탑으로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건축 재료인 벽돌은 원형 경기장이나 교각 등 다른 건축물을 짓는데 이용되었다.[2]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군주"라는 신 수메르 시기(기원전 21세기)의 서사시는 엔메르카르의 치세 때 온 인류가 한 언어로 엔릴을 찬미하였지만 엔키가 나타나 인류의 언어를 다양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와 후대에 바빌론과 동일시된 도시인 에리두에 지구라트를 건축하였다는 이야기 때문에 성서 속 바벨탑 이야기의 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히기누스(Hyginus)의 파불라에도 등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온 인류가 한 언어로 제우스를 찬미하였으나 헤르메스가 인류의 언어를 다양하게 하였다고 한다[3]. 독일인 학자 P. 슈나벨은 유사-유폴레무스(Pseudo-Eupolemus)의 인용문과 히기누스(Hyginus)의 파불라를 바탕으로 마르두크 신전의 창건에 관한 베로수스의 텍스트 개요를 재구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홍수 후 마르두크가 사람들로 바빌론을 재건하고 에테멘앙키를 다시 짓게 하였을 때 나부가 온 인류로부터 한 언어로 찬미를 받는 마르두크를 질투하여 인류의 언어를 다양하게 하였다고 한다[4]. 참고로, 마르두크나부는 헬레니즘 시대 때 각각 제우스헤르메스로 자주 식별되었다.

바벨탑 건설은 이스라엘인의 '바빌론 포로(기원전 586~538)'에서의 귀환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고국에 귀환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야훼 신을 경배하는 민족적인 종교로 형성된 것이 유대교로서, 그때부터 그들은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벨은 히브리어 '혼돈'이란 뜻이라고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bab(문)와 el(신)의 합성어라는 견해도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 창세기 11장 1-9절 (공동번역)

  • 테드 창 - 소설 바벨탑은 이 탑을 모팁로 창작한 소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바벨 피쉬(Babel Fish)라는 것이 등장한다.
    이것은 사람의 뇌 속에서 헤엄치며 살 수 있는 작은 물고기이다.
    이 물고기는 말하는 사람의 뇌파를 식량으로 하고, 그것의 배설물을 청자의 뇌 속에 배설한다.
    즉, 바벨 피쉬를 뇌 속에 넣고 다니는 사람은 어떤 종족의 언어든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바벨

땅을 가르고, 하늘을 찌르는 듯한 기세로 몸을 비틀며 태어나, 온갖 인공물을 파괴하면서 성장한다.
바벨을 중심으로 트위스티드가 무리를 만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지만, 바벨이 생물인지 무기물인지, 현재로선 결정적인 증거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트위스티드의 둥지. 대충 콜로니 같은 개념인 듯. 트위스티드가 현대에 출현하자마자 지하 깊숙이 숨어다니면서 본능적으로 이것을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지하에서 오랫동안 성장을 거쳐서[1] 완전히 성장한 것이 현 시점의 거대한 탑 같은 형상인 듯 하다. 땅 속 줄기가 생기고, 어린 바벨이 되고, 그 후에 땅 위로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볼 때 초기의 성장 형태는 식물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내부에는 오브라고 하는 순환기, 동물의 몸에 비유하자면 순환계의 중추 부위라고 할 수 있는 구조물이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다. 바벨 공략전에서는 이것들을 필수적으로 파괴해야 한다. 이것들을 파괴하지 않으면 길이 막힌 채로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하기 때문. 그리고 오브가 있는 곳에 트위스티드들이 몰려든다고 해서 그 놈들부터 없애려들지 말자. 오브가 파괴되지 않는 한 끝도 없이 죽어라고 몰려온다. 바벨의 최심부에는 심장과도 같은, 이른바 빅 오브라 불리는 물체가 있다고 한다. 이 빅 오브는 트위스티드가 끌고 온 인간을 디센트해서 트위스티드로 만들어 양분화해 바벨 최심부에 존재하는 웜홀의 에너지원으로 삼는다고 한다.

챕터 2부터는 바벨 공략전에 들어가며 적어도 거의 한 챕터당 하나씩은 파괴되는 것 같다.(...) 챕터 2에서는 맵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오브를 파괴하고 마지막에는 바벨 본체에 박힌 3개의 오브를 파괴한 후에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 4번째 오브가 있는 곳에 이 한 마리 소환되는데, 이 녀석을 없애고 나면 새틀라이트 캐논을 발사할 수 있는 일종의 리모콘을 가진 병사가 한 명 추가된다. 실수로 죽어도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투입되니 걱정 말고 써주자. 참고로 바벨 본체의 3개의 오브는 새틀라이트 캐논을 얻는 곳에서 쏴 파괴할 수 있다. 당연히 스나이퍼 라이플이 필요하다. 바벨 바로 앞에서 롤러한테 맞아가면서 일일이 쏘기 싫다면 라이플은 꼭 챙겨가자. 어쨌든 바벨 본체의 오브까지 다 파괴하고 나면 바벨 최심부로 진입할 수 있다. 내부의 광경을 짧게 묘사해보자면 사람들과 건물 파편, 자동차 등이 허공에 뜬 채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고, 그 사이로 뭔가 거대한 형체가 떠다닌다. 이것이 바로 , 스토리 초반에 언급됐던 빅 오브의 정체다. 이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옮겨타면서 열심히 퀸을 쓰러뜨려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으로.
챕터 4의 카일 마디간 전에서는 C4까지 설치하고, 외부의 스피터들도 헬기로 쏴 없애기도 하고, 심지어 핵까지 써서 완전히 소멸시키게 된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는 훼이크. 주변의 바벨이 파괴되는 바벨로 모여들어 그랜드 바벨을 형성해낸다.
그랜드 바벨로 한 층 더 성장함에 따라 최심부의 웜홀도 업그레이드되는데, 이전의 것들이 아야의 OD보다 조금 후달리는 정도의 성능이었다면, 그랜드 바벨의 웜홀은 현재를 집어삼켜 무로 되돌릴 정도의 막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밤에 바벨을 올려다보면 붉은 빛이 수시로 깜박거리는 것이 마치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주를 높여 찬송하라(시편 66:17) 신령한 노래는 새 노래


신령한 노래는 새 노래

신령한 노래(5구절)

역대상 25:1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역대상 25:2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역대상 25:3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새노래(9구절)

시편 33: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시편 40:3
새 노래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실 찬송을 말합니다.

새(2319) 노래(7892) 쉬르 하다쉬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시편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시편 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사야 42:10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주를 높여 찬송하라(시편 66:17)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I cried out to him with my mouth; his praise was on my tongue.

KJV. NASB
I cried unto him with my mouth, and he was extolled with my tongue.

시편 107:32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찌로다.

출애굽기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이사야 25: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신령한 노래는 영적인 노래
가장 영적인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양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라"

손은 섬기는 도구, 일을 하는 도구
따라서 말씀(진리)를 살아내고
그 말씀을 의지하며 찬양하는 것을 신령한 노래 또는 새 노래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노래 할 때 하나님이 그 찬송을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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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예화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
온산제일교회가 설립 될  마을의 당수나무 바로 옆에 땅을 구입하여 교회와 사택을 세웠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반대가 심하여 교회가 세워지기 어렵게 되었다.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마을 이장 이수엽씨가 찾아와서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야 하는데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니 교회 전기를 이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교인들은 우상 제사를 드리는데 어떻게 교회 전기를 빌려주느냐?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때 우상 제사를 드리려고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 전기불로 불을 켜면 귀신들이 오겠느냐?
내 생각에는 귀신이 오려다 도망할 것이라며 모두 집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주무시고 내일 새벽 기도회 시간에 다시 모이자고 하였다.
교회 전설을 임시로 당수나무에 가설하고 교회당 안에 찬송가 테이프를 틀어놓고 밤새도록 찬송이 흘러나가도록 하였다.
그 다음 날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시작하였다.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려는데 귀신이 오지 않으니 더 큰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큰 동제를 위하여 각 가정에서 돈을 더 내야한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생활이 어려운데 더 돈을 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같아 마을 이장에게 교회에서 예배하면 돈을 받지 않으니 그러면 예배를 드리자.
또 교회 때문에 귀신이 도망갔다면 구태여 도망간 귀신을 왜 섬기느냐?
결국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서울무당은 신경부락에서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이 신령한 노래이며 곧 새 노래라고 하겠다.



할렐루야 (시 146:1-2 , 시 147:1-9 , 시 148:1-5, 149:1-9, 150:1-6)

  히브리서 13장 15절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라고 나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찬양 하도록 하나
님은 우리를 불러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10장 21절에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
라’, 시편 118편 14절에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라’, 예레미야 17장 14절에 ‘여호와여 주는 나
의 찬송이십니다’, 로마서 1장 25절에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고린
도후서 11장 31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
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신다’ 라고 시편 22편 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찬
양을 어떤 것보다도 기뻐하신다’ 라고 시편 69편에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
신 목적도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이사야 43장 21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것?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것은 마땅합니
다. 찬양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하나님, 우리는 찬양을 드려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는 말이 4백 회나 기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할 때 영적 부흥과 함께 범사에 하나님으로부터 내리시
는 은혜가 많았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성가대원을 288명을 만들었고, 솔로몬은 성전
을 지은 다음에 레위인에게 음악을 담당하여 늘 노래하는 사람을 4천 명이나 두었습니다. 역대상 23
장에 나옵니다. 악기를 가지고 늘 찬양하는 사람도 120명이 있었습니다. 스룹바벨 시대에 바벨론에
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중 128명의 청년 남녀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것이 에스라 2장 41절
에 나옵니다. 또한 성전을 다 완성한 다음에 148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님께 늘 영광 돌렸다는 기록
이 느헤미야 7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이어야 합니까? 찬양과 기도와 감사와 말씀이 함께 잘
조화를 이룬 예배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들은
말씀이 은혜가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사도 있어야 합니
다. 그래서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소를 드리는 것보다도 찬양을 받으시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너무 찬양이 없습니다. 또한 노래도 너무 잘못된, 저속한 노래들이 많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어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려는데 어떤 남자가 들어오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사나
이 우는 가슴 그 누가 알랴’ 그러면서 노래를 계속 부르려고 하는데, 우리를 보더니 분위기가 영 안 맞
으니까 식당 주인이 다른 방으로 모시고 갑니다. 그래서 ‘우는 가슴’을 안고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요
사이 너무 답답해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그럽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는데
그 말도 맞습니다. 고향도 잃고 부모도 잃으며, 또한 자신도, 삶의 목적도 잃었습니다. 왜 사는지 어디
로 가야할지 너무 방황합니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목적과 대상
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람을 노래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대상해 보십시오. 사람은 슬픔과 약점과
불행이 많으니까 이 세상으로 자꾸 내려갑니다. 그래서 그 노래를 부르면 부를 때도 문제지만 부른 다
음이 더 나빠집니다. 부르면 자꾸 더 정신적으로도 좋지 않고, 삶도, 생활도 좋지 않아집니다. 세상에
있는 노래이고, 세상을 보고 하는 노래이니 얼마나 고통스런 일이 많은 세상인데 기쁠 수가 없는 것입
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잘못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노래들을 너무 많이 부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찬양을 불러야 하지만
이 시대에 건전한 노래를 부르고 또한 힘을 주며 소망을 주는 이런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로 이 사회
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나쁜 노래를 부르면 더 나빠집니다. 그러나
찬양은 노래의 왕입니다. 어떤 노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우리의 삶
을 차고 올라가도록 하여, 우리의 삶을 위를 향하여 소망과 자유함과 평안과 기쁨과 용기와 믿음과 신
뢰를 가져다 주며, 우리 마음에 어두움이 모두 다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 의학적으로도 노래를 가지
고 치료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모두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노래를 부릅니다. 의학뿐
만 아니라 식물도 노래를 틀어 주면 꽃도 잘 피고, 향기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모두 다 증
명이 되었습니다. 동물도 닭을 키우는데 양계장에 어떤 노래를 틀어 주느냐에 따라 닭이 달라집니다.
훨씬 더 닭이 건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찬양하도록 만들어 주셨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
을 찬양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맹목적이 며, 허무
함을 노래하는 게 아닙니다. 전능하신 자, 지혜로운 자, 창조자, 영원하신 분, 왕의 왕이신 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 아들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분,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우리는
그 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찬양은 살아 있는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거듭나고 성령이 함께 하시며 구속함을 받지 아니하면, 이 노래를 절대로 부를 수가 없습니
다.

  시편은 노래의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신, 구약 성경의 엑기스를 다 모아 놓은 것
이 시편이다.’ 그렇게 말하고도 있습니다. 시편은 또한 성경의 중심에 있습니다. 신, 구약 전체에 중앙
에 있습니다. 그것이 노래입니다.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레위지파들도 노래했습니다. 예수
님도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하루 전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찬송하며 올라갔다는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노래하셨습니다. 그 노래
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시편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는 노래입니다.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양입니다.

  시편의 전체의 주제는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 마지막 절 끝은 할렐루야로  마무리하
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할랄’이라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다.’에서 나왔으며, 예레미야 29장
13절입니다. ‘송축하다, 칭찬하다, 자랑하다, 빛내다’ 이런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할
렐루야에서 ‘루’자는 복수 명령형입니다.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에서 ‘야’자는 야훼의 줄인
말입니다. 그래서 야훼를, 하나님을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은 ‘하나님을 찬양하라’ 는 것입니다. 메츠헨네는 말하기를 ‘큰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거룩한
사랑과 기쁨으로 그 분을 찬양하라,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그를 찬양하라, 흑암에 대한 승
리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
나님으로 만족하면서 찬양하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경외하며 찬양하라, 하나님의 모든 섭
리에 즐겁게 순종하고 그 분의 사랑을 기뻐하며 그 분의 크신 자비 안에서 위로를 얻으면서 찬양하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찬양의 조건이 됩니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찬
양하는 것입니다. 정글에서나, 사막에서나, 바다에서나, 감옥에서나, 오늘 죽음이 나에게 올지라도 찬
송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늘 찬송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축복이고 은혜며, 힘이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일하면서도, 씨를 뿌리면서도, 거두면서도, 밤이나 낮이
나 우리의 일생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고 에베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에는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의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라고 새 번역에 기록되
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늘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5절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찬양하
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11절에는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 말씀을 새 번역 개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
을 갈아 입히셨기에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나
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감사를 드립니다. 내게 슬픔의 옷, 상복을 벗기시고 나들이옷을 갈아 입혀
주셨습니다.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속하
심이 있기 때문에 찬양이 있습니다. 구약에 모든 찬양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이 있은 다음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다음에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승리,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에 대한 감사를 주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를 이렇게 영광스럽게 해 주신
참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찬양이 더 많이 발전해야 합니다. 제가 독일 교회에 친구들이 있어서 가서 보면, 유럽
의 교회들은 백 명인데도 찬양 목사가 따로 있습니다. 미국 교회들도 보면 찬양 목사가 꼭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하는 목사가 너무 많아서 말이 많고, 찬양은 너무 적습니다. 오늘 집에서도 찬양을 많이
부르고, 좋은 오페라, 뮤지컬, 음악회, 오케스트라 이런 것이 우리에게 많아야 됩니다. 그래야 좋은 것
이 작용해서 역작용이 생깁니다 물리학적으로... 너무 나쁜 문화가 많이 밀려오는데 이 나쁜 문화를
막아 낼 힘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모두들 연약하고 그 길로 빠지니까 이걸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은 하
나님의 교회에서 좋은 찬양이 흘러 나와야 됩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들은 찬양을 많이 하
고 늘 찬송하면서 찬송 속에서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찬양은 기도입니다. 찬양하면 기쁨이, 힘이, 능
력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전쟁에서도 이기고, 병도 떠나갑니다. 다윗은 노래를 부르면서 악기
를 연주할 때 사울 왕의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요사이 과학이 발달한 것 모두 다 성경이 뒷받침합니
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장, 자장 괜찮다, 괜찮다’ 그러면 괜찮아집니다. ‘자장, 자장’ 노래
를 부르면 잠이 잘 옵니다. 노래같이 잠을 잘 오게 하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 찬송 틀며, 불러 보십시
오. 여러분에게 영적인 풍요로움으로 이 봄에 내 영혼에 시냇가의 시냇물같이 심령이 살아 역사 할 줄
로 믿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찬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도 능력입니다. 정욕의 힘으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오늘 2부 예배에 사람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3부도 많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2부가 3부보다 훨
씬 더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이렇게 2부에 몰리나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하여튼 식당까지 모
두 다 찼습니다. 전부 로비와 비디오 실 열 개가 넘는 곳이 2부에 모두 다 찼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습
니다. 이상하다 2부에 주님이 오시나 어떻게 이렇게... 나중에 보니까 야구 보러 가려고, 2부 드리고
야구 보러 가려고 그런 것입니다. 야구는 누구나 하는 게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야구를 해야 야구 근
육이 있고, 야구 근육이 발달해야 합니다. 힘은 근육에서 나오지 뼈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야구 근
육이 있습니다. 농구는 농구 근육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공을 받으면 공이 그냥 쫙쫙 나가는 것입
니다. 축구는 축구 근육이 있습니다. 따로 있습니다. 근육이 그렇게 발달합니다. 테니스도, 골프도, 탁
구도 근육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쳐 보십시오. 조금 밖에 안
나갑니다. 갈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근육이 있어야 힘이 있습니다. 알통이 없으면 안 됩니다. 찬
송도 찬송하는 영적 근육이 있어야 합니다. 찬양도 힘입니다. 실패자는 그냥 허무한 노래를 부릅니
다. 못나옵니다. 찬양은 은혜 받은 사람, 기도하는 사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구속
함을 받은 사람이 합니다. 그 근육이 찬양하는 근육으로 발달해야 합니다. 찬양하는 능력이 있어야 됩
니다. 항상 입에서 찬송이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찬송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승리의 종교입니다. 이 찬송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는 나라마다 찬양
이 울려 퍼집니다. 어떤 마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어떤 마을
에 해마다 처녀를 한 사람 제물로 바칩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어디에 바치느냐 하
면 이무기에다 바칩니다. 이무기가 그 처녀를 데려가 버립니다. 그러면 일 년 동안 그 마을에 재난이
없고 풍년이 들며, 이 이무기가 노하지 않는다 라는 이런 미신을 우리는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못에다 바친다하고 우리 마을에서도 저는 그런 이야기를 어려서 많이 들었습니다. 처녀를 바
친다, 애를 바친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 마을은 우울합니다. 살기는 살아도 해마다 바쳐
야 되니까. 그 해에도 막 불안에 떨고 있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마을에 들어와서 “어떻게 이렇게 불안
해합니까?” “아이고~ 말 마십시오. 오늘밤에 이 마을에 귀한 처녀를 한 명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 그러냐고 그 집이 어디입니까?” 그래서 그 청년이 그 집에 갔습니다. 그 집에는 온 가족이 웁니
다. 오늘 그 딸을 제물로 바쳐야 됩니다. 그래서 청년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제가 해결 하겠습
니다.” 그러고는 그 처녀가 입었던 옷을 제게 모두 다 달라고 하고는 자기가 갈아입는 것입니다. 갈아
입고 밤에 큰 연못 위에 올라갑니다. 으슥한 달밤에 올라가서 밤중이 되었습니다. 동민들은 다 보고
있는데 드디어 불이 번쩍이며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더니 그 이무기가 죽어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나 하고 한참 지나서 새벽녘이 되었는데 그 청년이 다 찢어져 가지고 다 상한 몸으로 겨
우 살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온 동민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이무기가 죽음으로 마을이 모두
다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없어졌습니다. 온 마을이 기뻐하고 그래서 그 승리한
총각을 처녀하고 결혼을 시켜서 잘 살았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이야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늘 있었던 이야기인데 이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참 많이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모두 다 죄에 눌리고 마귀에 눌리며, 사망권
세에 눌리고 우리 조상들이 미신 안 섬긴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이 교회 나와서 하
는 말이 예수 믿으니 너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날마다 불안하게 합니다. 된장 담는 것까지도
모두 다 물어야 하고, 전부 다 물어야 하는데 안 물어보고 하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우상입니
다. 그런데 예수 舅만?물어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렇게 편
할 수가 없습니다. 농촌 목회를 제가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참 편하다 그럽니다. 귀신 섬겨보십시오. 처음에 섬길 때 쉽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
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옷을, 죄인의 옷을 갈아입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모두
다 맡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우리를 그 사망의 세력에서 건지시고 지금 우리의 남편이 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무 좋아 찬송이 나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찬송은 자기 혼자 부르
는 것도 아니고 잘 살아서 부르는 것도 아니며, 기분 좋아서 부르는 노래는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환
경이 좋아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내 안에, 내 영혼에 주신 영원한 축복이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본인이 또한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끊임없는 영광을 받으시고 찬송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십
니다.

  시편 146편을 한 번 보겠습니다. 전부 할렐루야입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
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평생토록 찬송해야 합니다.
내 생전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10절 마지막에 보면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
히 대대에 통치 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47편도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
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러분! 이 세상 노래 부르며 막 옷을 찢고 비틀고.. 저는 아름답지 않게 보
입니다. 모두 열광하고 막 소리 지르며, 죽는 것같이 벌벌 떨어도 그래도 제 눈에는 아름답게 안보입
니다. 노래를 왜 그렇게 부릅니까? 천천히 서서 불러도 얼마든지 되는데..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
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12절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
양할찌어다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했습니다. 이런 분을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
까? 148편에도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데서 찬양할찌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
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찌어다” 모두 전부 할렐루야입니다. 14절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
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로 나옵니
다. 149편 1절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150편 6절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하고 시편이 끝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서 끝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미국에 백화점 왕인 제이시 페니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사업이 잘 되다가 사업을 실패 했
습니다. 1929년 미국에 대 불황이 닥쳤는데 그때 사업이 다 부도나고 아내도 죽고 절망 가운데 빠졌습
니다. 자기는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죽고 싶어서 유언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이, 삼 년
아무리 병원을 다녀도 병원에서 병명을 모릅니다. 병원도 가면 조금 차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병은
사실 못 고치지 않습니까? 계속 병원에 드나드는데 아무리 가도 안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복도
를 지나가는데 이제는 더 이상 살기 싫고 죽고 싶은 마음으로 지나가는데 병원 환자실에 심방 와서 노
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변화가 왔습니다.
찬송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아 심령이 새로워지고 능력을 받아 그래서 나와 가지고 이 분이 제이시
페니라고 하는 백화점을 세워서 세계적인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 뉴욕이나 LA 어디든지
가면 제이시 페니 백화점이 없는 도시가 없습니다. 미국에만 해도 수 백 개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찬양할 때 찬양을 들어도 치료가 됩니다. 부르면 더 좋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
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성가대원입니다. 저는 사실 제 설교 잘 안 듣습니다. 늘 아쉽고
부족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은혜를 받느냐하면 성가대가 찬양할 때 제 눈에는 눈물이 주룩 흐릅니
다. 참 감사합니다. 찬양할 때 그렇게 제 영혼에 기쁨이 올 수가 없습니다. 찬양은 참 좋습니다. 그래
서 우리 한국 교회도 찬양을 좀 많이 불러야 됩니다. 이 복잡하고 괴로운 세상 교인들도 찬瑛?안 부
르고 노래방 가는 교인이 많습니다. 그런 데에 가면 안 됩니다. 찬양을 불러야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
냅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기쁠 때도 찬양, 슬플 때도 찬양, 언제나 찬양하는 것입니
다. 우리는 항상 좋아서 찬양하는 게 아닙니다. 스펄전 이라는 유명한 분은 말하기를 ‘우리는 일생이
꿀과 같이 달아도 해롭고, 쓰기만 해도 해롭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항
상 춥습니까? 항상 덥습니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좋은 날도 며칠 안 되고, 항상 햇볕만 들면 이
땅은 전부 사막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비도 오고 눈도 오며, 햇빛도 비추고 고루고루 이래야 합
니다. 우리 성도들이 날씨보고 찬양하려면 하루도 찬양 못합니다. 이런 날은 이래서 찬양하고 저런 날
은 저래서 찬양하며, 봄에는 사론의 꽃 찬양하고, 가을은 가을의 노래, 밤은 밤의 노래, 혼자 있을 때
는 혼자 있어서 찬양하고, 늘 찬송하는 이런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가대에서 한 곡 더 찬양을 하겠습니다. ♬내가 만민 중에.....

  우리 교회에도 솔로몬 시대같이 주일 날 봉사하는 성가대원이 한 삼천 오 백 명이 되는데 내년에는
사천 명으로 늘리고 다음 달에는 성가대석을 2층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2층에 한 백 오십 명 정도 더
앉으면 그 쪽에 앉는 분들도 다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 6백 명 정도 봉사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했습니다. 이 분은 원래 궁중에서 왕의 행사에 언제나 작곡을 해서 행사 때마
다 자기 주어진 일을 감당을 했습니다. 그러던 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을 했
습니다. 이 작곡한 메시아 내용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할렐루야를 시작
으로 해서 끝까지 할렐루야로 가고 중간에 보면 왜 하나님을 찬양 하냐? 왜 할렐루야 하느냐? 그는 영
원히 다스린다 라고 나옵니다. ♬영원히, 영원히 할렐루야, 할렐루야 왕의 왕♬ 내가 모시는 분은 왕
이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왕에게 주는 작곡을 하지만 지금 이 노래
는 왕의 왕에게 바친다 라는 것입니다. ♬왕의 왕 또 주의 주♬ 영원히 다스린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
분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은 왕의 왕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
니다. 찬양하는 가정은 축복의 가정입니다. 어두움이 그 가정을 절대로 엿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성가 ‘비전’을 잠깐 배우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도 다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 우
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주의 피로 우린 구원 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 드
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
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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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시 146:1-10)

    오늘 시편146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여호와를 찬양하라, 노래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찬양의 시입니다. 이 시편은 150개의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치는데 “할렐루야 시”의 첫 번째입니다.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는 포로기 이후의 학개와 스가랴의 작품이라고 유대 랍비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페르시아의 고레스황제가 유대인들을 돌려보내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였다가 중도에 이웃나라들이 반발하니, 중단하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이 시를 쓰고 있다고 삶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놓고 강해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편의 시를 놓고 분석해보면 내용을 보아 몇 개의 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연(聯)이라고 하면 시(詩)에서 몇 행(行)을 한 단위로 묶어서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시146편은 4연으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제1연 : 찬양하라(1-2).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이 3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물어보신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찬양시의 서론입니다.  시인은 이중적으로 찬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사람, 자기 영혼에게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스스로에게 찬양하리라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에게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생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채울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생전에”, “나의 평생에”라는 말은 나의 계속되는 존재 속에,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을 때까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 하고, 권면하고 명령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행해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어느 목사님의 하나님의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셔서 나와 동행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 에녹과 함께 300년 동안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나의 편이 되어 주셨고,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우리의 일생 다하도록 하나님을 높여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으로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 중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시편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42:8에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찬송을 다른 사람이나 우상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송받으실 여호와이십니다. 

사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웹스터 사전을 보면 “찬양하라”는 말은 “칭찬하다, 찬미하다, 존경하다, 갈채를 보내다, 인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한다는 말은 어떤 사건을 인정하고 확고히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정한다는 말은 우리가 승인한 바를 받아들이고 공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환난과 질병과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한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나의 하루하루 모든 삶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가곡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밞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6월 한 달 이 복음성가를 부르려고 합니다. 

2.  제2연: 여호와만 바라라 (3-5절)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고 하십니다.  귀인이라고 하면 고관, 귀족, 방백을 의미합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의지하지 말며”, “의지하지 말지니 ”라고 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면 그 날로 즉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의 모든 인격과 성품과 생각도 소멸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건강하시던 분들이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였고, 사업을 잘 하고, 건강하여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도 잠시 동안이요, 모든 소유와 가진 능력을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과 계획과 능력이 다 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야 철이 들고,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의 부모를 의지합니다.  성장할 때에야 부모님이 도와주셨고, 부모님의 은혜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존의 문제를 놓고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5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암송하면서 깊이 묵상하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영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케네스 리치라는 영성신학자는 “기독교의 영성은 그리스도께서 주도권을 잡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의 과정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성의 목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을 소유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영안을 열러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귀를 예민하게 세우면서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버림과 침묵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 말씀에서 흘러나와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핵심을 놓치고 주변의 지협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히브리 성경을 직역하면 “복되도다! 그의 도움이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소망이 여호와 자기 하나님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진정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야곱이란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약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잘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는 형님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내가 받아야 하고,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 내려오는 가문의 축복도 내가 차지하고 내가 받아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형님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가 속인 형 에서가 400명의 사람을 이끌고 동생 야곱을 치기 위해 온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얍복 강변에 엎드려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몰아가시는 것을 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가 외삼촌 집으로 갈 때는 빈손 들고 간 사람이지만,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4부인과 12명의 자녀들과 소와 양과 염소가 떼를 이루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도움과 나의 소망은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항상 사모하는 열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잡아끌어 사용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누가 복 받을 사람입니까?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올브라이트(W.F. Albright)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이스라엘을 지정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 이스라엘 나라를 3개 대륙의 열결 지점에 두신 것입니까?  위에는 앗수르와 시리아가 있고, 오른쪽에는 바벨론이 있고, 밑에는 애굽이 있고, 왼쪽으로는 블레셋과 바다가 있고 해서 사방으로 다 적에 의해서 포위되게 하셨습니다.  왜 이런 곳에 두신 것입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지정학적인 면에서 이스라엘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공장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하도 더워서 어쩔 줄을 모르다 지하실에 큰 냉동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잘 됐다 싶어 땀이나 식힐 심산으로 냉동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철커덕 소리가 나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당황한 나머지 문을 두드리고 악을 써봤지만 구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청년은 상상을 합니다. “내 몸이 점점 얼어간다. 몇 시간 후면 죽겠구나.”  이틀 후에 사람들이 냉동 창고의 문을 열어 보았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가동되지 않았고 기온이 섭씨 15도에 불과했습니다.  산소도 충분했습니다.  청년을 죽인 것은 살인적인 냉기가 아니라 절망이었다고 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동서사방을 바라보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위로 난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잘 사는 것이 소망입니까?    이 세상에서 권력을 누려보는 것이 소망입니까?  저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척 콜슨’은 자신의 감옥생활 경험을 중심으로 ‘본 어게인(Born Again)’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교도소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죄수들 사이에 세 가지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 종류는 희망이 없는 죄수로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자신의 몸을 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역시 가망이 없는 죄수들로 자기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셋째 종류는 감옥에서 나갈 날을 기다리며 기회 있을 때마다 마당에 나가서 운동을 하는 유형이었습니다.  그들은 감방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마치 내일 나갈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설령 몸은 갇혀 있지만 마음은 밖에 나가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의 삶은 자유롭습니다. 소망을 품은 사람은 희망이 넘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관주의자들은 빛 가운데서도 어둠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렘29:11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 내일을 주셨고, 희망 곧 소망이 되어주셨습니다. 

유태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프랭클(Viktor Frankl) 박사는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태인 수용소에 대한 관찰한 기록으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란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있는 인간상을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희망을 끝까지 가진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자기 혼자서 희망을 이룰 뿐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이웃들을 도와주고 희망을 계속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이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한 상태에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영원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제3연 : 의로운 통치 (6-9)

제3연에서는 1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6-9절입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여기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눌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하여 정의로 심판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만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맹인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비굴한 자를 일으켜주십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6-9절의 말씀을 통하여 메시아의 시대를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서 오시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돌아보시고 신원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연약함을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제4연 : 결론(10)

10절입니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은 당신이 직접 그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고 대대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형통하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이런 말씀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은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망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비로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남은 생애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찬양으로 남은 생애를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억눌린 사람들, 주린 사람들, 갇힌 사람들, 맹인, 비굴한 사람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대대로 통치하십니다.





인구조사



민수기 1장 1차 인구조사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랑했던 시간을 서술한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는 동안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죽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여 성장합니다. 두 번에 걸친 인구 조사를 통해 인구가 거의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민수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0장 행군 준비
11-20장 광야의 이스라엘
21-36장 요단 동편에서의 이스라엘

1부에서는 1차 인구조사와 진영의 조직, 긜고 다른 여러 규례들을 전해 줍니다.
2부에서는 시내산 중심으로 펼쳐지는 광야 생활을 담고 있습니다. 이 때 정탐꾼들이 가나안에서 돌아와 불신앙적 보고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 받고 죽을 때까지 광야에서 떠돌아 다니는 벌을 받게 됩니다.
3부에서는 2차 인구조사와 요단 동편에서의 여정을 그려줍니다. 

민수기의 몇 주제는 거룩, 질서, 불순종, 땅, 역사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좀더 요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신실한 하나님의 언약 이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는 광야의 여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포로의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모티브가 됩니다.

민수기 1장 본문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다

민수기 1: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수기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수기 1: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민수기 1:4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

민수기 1:5 너희와 함께 설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 지파에서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요

민수기 1:6 시므온 지파에서는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요

민수기 1:7 유다 지파에서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민수기 1:8 잇사갈 지파에서는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요

민수기 1:9 스불론 지파에서는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요

민수기 1:10 요셉의 자손들 중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므낫세 지파에서는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요

민수기 1:11 베냐민 지파에서는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요

민수기 1:12 단 지파에서는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요

민수기 1:13 아셀 지파에서는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요

민수기 1:14 갓 지파에서는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요

민수기 1:15 납달리 지파에서는 에난의 아들 아히라이니라 하시니

민수기 1:16 그들은 회중에서 부름을 받은 자요 그 조상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이스라엘 종족들의 우두머리라

민수기 1:17 모세와 아론이 지명된 이 사람들을 데리고

민수기 1:18 둘째 달 첫째 날에 온 회중을 모으니 그들이 각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인 남자의 이름을 자기 계통별로 신고하매

민수기 1: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민수기 1:20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각 남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21 르우벤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사만 육천오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22 시므온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각 남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23 시므온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오만 구천삼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24 갓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25 갓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사만 오천육백오십 명이었더라

민수기 1:26 유다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27 유다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칠만 사천육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28 잇사갈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29 잇사갈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오만 사천사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30 스불론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31 스불론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오만 칠천사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32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33 에브라임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사만 오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34 므낫세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35 므낫세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삼만 이천이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36 베냐민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37 베냐민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삼만 오천사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38 단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39 단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육만 이천칠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40 아셀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41 아셀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사만 천오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42 납달리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수기 1:43 납달리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오만 삼천사백 명이었더라

민수기 1:44 이 계수함을 받은 자는 모세와 아론과 각기 이스라엘 조상의 가문을 대표한 열두 지휘관이 계수하였더라

민수기 1:45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민수기 1:46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레위 지파는 계수하지 말라

민수기 1:47 그러나 레위인은 그들의 조상의 지파대로 그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민수기 1:48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수기 1:49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민수기 1:50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

민수기 1:51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민수기 1:52 이스라엘 자손은 막사를 치되 그 진영별로 각각 그 진영과 군기 곁에 칠 것이나

민수기 1:53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민수기 1:54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민수기 1장 강해

민수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들 계수하는 내용입니다. 
1-46절까지는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계수,
47-54절까지는 레위지파 계수와 결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원은 20세 이상만 계수됩니다. 20세 이상은 성인을 뜻하는 동시에 군인으로서의 자격입니다.

지파

1차 인구조사

2차 인구조사

르우벤 지파

46,500명

43,730명

시므온 지파

59,300명

22,200명

갓 지파

45,650명

40,500명

유다 지파

74,600명

76,500명

잇사갈 지파

54,400명

64,300명

스블론 지파

57,400명

60,500명

에브라임 지파

40,500명

32,500명

므낫세 지파

32,200명

52,700명

베냐민 지파

35,400명

45,600명

단 지파

62,700명

64,400명

아셀 지파

41,500명

53,400명

납달리 지파

53,400명

45,400명

총합

603,550

601,730명

1. 숫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의 증거다.
아브라함에게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시리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2.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3. 레위인은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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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장 인구 조사, 왜 하나님은 숫자를 세셨을까? (레위 지파의 시선에서)

1. 서론: 하나님은 왜 숫자를 세셨을까?

성경을 읽다 보면, 민수기 1장처럼 숫자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나오는 부분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세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레위 지파는 이 인구 조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숫자에서 빠진 걸까?”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오늘은 민수기 1장의 인구 조사를 레위 지파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과 복음적 메시지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2. 민수기 1장의 배경과 인구 조사 명령

🔹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탈출한 후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체계적인 공동체 형성과 군사 조직화가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인구 조사를 명령하십니다.

🔹 인구 조사 대상: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남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라."
— 민수기 1:2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을 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는 명단에서 제외되었습니다.

  • “왜 우리는 빠진 거지?”
  •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닌 걸까?”

당시 레위 지파 사람이라면, 이러한 의문과 혼란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3. 레위 지파는 왜 인구 조사에서 제외되었는가?

🔹 1) 전쟁이 아닌, 성막을 섬기도록 부름받음

"너희는 성소와 제사장을 맡아 거룩함을 유지하라."
— 민수기 3:6-7 (요약)

다른 지파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해 계수되었지만,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성막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제외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쟁이 아니라 ‘예배’와 ‘거룩함’을 지키는 역할을 레위 지파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 2) 숫자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선택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내게 돌리라. 이들은 내 것이다."
— 민수기 3:12

레위 지파는 민수기 1장에서 제외되었지만, 민수기 3장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따로 계수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 것”이라고 부르신 유일한 지파!

우리가 숫자에서 제외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었다!

4. 레위 지파의 고민과 깨달음: 당시 우리가 살고 있었다면?

🔹 1) “우리는 소외된 걸까?”

처음에는 “왜 우리는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 걸까?” 하는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었겠죠. 다른 지파들은 전쟁을 준비하며 자부심을 가지는데, 레위 지파는 그 명단에도 들어가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단순한 전사(군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막을 맡은 거룩한 지파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 2) “우리는 땅을 받을 수 없는가?”

이스라엘 각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기업(땅)을 분배받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땅을 배분받지 못합니다.

"레위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나니, 나는 그들의 기업이니라."
— 민수기 18:20

즉, 다른 지파는 땅을 유산으로 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자체’를 기업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

5. 신약에서의 연결: 우리가 현대의 레위 지파라면?

🔹 1) 우리는 복음을 위한 제사장이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 베드로전서 2:9

구약에서는 레위 지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현대의 레위 지파 같은 존재들입니다.

🔹 2) 숫자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눈에 띄지 않는 자리, 숫자로 보이지 않는 역할을 맡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숫자가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결론 :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시다

민수기 1장의 인구 조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조직적으로 정비하시고, 전쟁을 대비하며,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단순한 제외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모든 성도를 ‘제사장’으로 세우셨고, 우리는 현대의 레위 지파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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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인구 조사와 두 번째 인구 조사 비교 (민수기 1장 & 26장)

민수기 26장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하게 하십니다.

그 두 시간 사이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2명의 정탐꾼' 사건이 있었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들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했고, 40일 동안의 정탐 후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가나안이 좋은 땅이기는 하나,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혹평을 하지요.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을 했고요.

이 일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십니다.

현재 생존하는 광야 1세대는 모두 죽이시고, 광야 2세대를 언약의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민수기 1장에 계수 된 사람들이 1세대, 26장에 계수 된 사람들이 2세대입니다.

그렇다면, 1차 계수와 2차 계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감소한 지파: 르우벤, 시므온, 갓, 에브라임, 납달리

증가한 지파: 유다, 잇사갈, 스불론, 므낫세, 베냐민, 단, 아셀 + 레위인

두 번째 인구조사에서 몇 가지 주목할 부분

​1) 대략 40년의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는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불순종과 반역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죄와 연약함, 실패에 달려 있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2)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6장 32절에 의하면 고라의 반역으로 인해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땅에 삼키워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셨고, 고라의 아들들을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고라의 후손들은 훗날 놀라운 복을 받게 되는데요.

그들은 성전에서 음악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고, 아름다운 시편도 남겼습니다.

역대상 6장에 의하면 사무엘이 이 고라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들의 실패가 후손들의 실패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에 붙잡히지 말고 오늘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새 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3) 시므온 지파의 인구 변화입니다.

전체 인구수는 크게 변함이 없지만, 시므온 지파의 경우는 59,300명에서 22,200명으로 37,100명이나 감소했습니다.

40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시므온 지파의 급격한 인구 감소의 이유는 바알브올에서 당당하게 죄를 지었던 시므리가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시므리 뿐만 아니라 시므온 지파에 속한 많은 백성들이 함께 범죄하였고, 심판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유언의 성취를 예견하는데요.

세겜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함으로 인해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는 유언을 들었습니다.

시므온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세력이 약해지고 결국 이스라엘이 분열될 때 북쪽에 흡수되어 흩어지게 됩니다.

심판과 경고의 말씀은 회개하고 복된 자리로 돌아오라는 은혜로운 초대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죄와 불순종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경고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장 첫 번째 인구조사와 26장 두 번째 인구조사에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감신의 왕대일 교수님은 그 이유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런 순서 변경에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며, J. Sasson이라는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손(J. Sasson)은 민수기 26장이 므낫세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지파 명단의 순서에서 므낫세가 일곱 번째 순서를 차지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는 것이다. 므낫세가 27장과 36장에서 이야기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조상인 것을 감안해서 므낫세가 거룩한 수인 7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슬로브핫의 딸들도 요셉의 7대 손이다(참조.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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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인구조사와 역병(삼하 24:1-25)

하나님의 계획

다윗이 이스라엘 전국에 인구조사를 실시하였고, 이 죄 때문에 사흘간 역병이 돌았습니다.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들 드림으로 재앙이 멈추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이런 일들이야 고대 사회에 흔히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해석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설명은 우리에게 명쾌함을 주기보다는 더 큰 혼란에 빠트립니다. 무엇보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조사라는 죄를 행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죄지 인간이 무슨 죄입니까? 이런 불합리를 수용할 수 없었던지 근 150년 후에 기록된 역대기서는 달리 설명합니다. 역대상 21장 1절입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주범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맞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사탄에게 이 일을 하도록 허락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성은 사라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이 죄의 근원임은 분명합니다. 죄를 만들어내고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하는 이 불합리함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여기에 담긴 의미는 하나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과 역사에서 일어나는 불합리성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계획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계획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엄청난 일들이 맥락 없이 갑자기 우리 인생에 벌어집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운명이라 부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하심이라 부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고, 통제 아래 있습니다. 만약 이 엄청난 재앙이 정말 하나님 없이 우연히 일어났다면 그것이 더 큰 일입니다. 이 재앙을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합리함이 있다할지라도 성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결정했기에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어진 일들을, 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이 필요합니다. 빨리 수긍할수록 역설적으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처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아니면 오늘 다윗처럼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찾아 정화하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악을 만들어낸다는 이 불합리성이 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만약 악이 원인도 없이 우연하게 벌어지거나 실제 악마가 그렇게 조장한다면 우리 인생은 더 절망적입니다. 운명에 맞서 싸우다 산산이 부서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에 악이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전쟁이나 기근이나 역병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벌을 받을 것인지 선택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마치 여러 상품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태도 같습니다. 재앙보다 더 센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를 괴롭힌 것에 대해서 후회할 것 같습니까? 엄청난 재앙과 참사들이 그 비극에 대해 가슴 아파할 것 같습니까? 재앙을 만드신 하나님은 후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불합리한 운명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운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설득하면 우리는 이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일으키고 또 거두기도 하신다는 이 불합리성에 주목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는 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통하여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간절함에 더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인구조사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구조사가 죄입니까? 요압도 죄라고 느끼고 있고, 다윗은 나중에 이 죄에 대해서 회개를 합니다. 인구조사는 두 가지 목적에서 행해집니다. 하나는 전쟁에 필요한 군인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두세를 통한 세금징수입니다. 고대국가는 물론이고 현대국가에서도 인구센서스 조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정상국가가 된 이스라엘에서는 당연한 조치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요압을 통하여 9개월 20일 동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조사하여 유다 지역 50만 명, 이스라엘 80만 명이라는 숫자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죄입니까?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 광야에서 모세의 지도하에 인구조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두 번에 걸쳐서 했고 그 기록이 민수기(Numbers) 아닙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인구조사에 있지 않았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려는 다윗의 속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신뢰가 없으니 사람을 의지하고 세력을 의지하려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보다 군대가 자신의 힘이 되었습니다. 이는 예언자들이 누누이 경고했던 바입니다. 애굽의 말이나 마병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신뢰하라 하였습니다. 요압은 인구조사 명령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3) 요압은 다윗 안에 있는 불신앙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그것으로 되었지 왜 이렇게 꼼수를 쓰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는 것조차 하나님은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고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현대 사회의 인구센서스 조사는 악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인구센서스 조사는 국가의 현재 역량을 측정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만약 문제를 삼는다면 그 조사가 가지고 있는 지나친 정보노출이나 독재적 통제 가능성에 있습니다. 다윗에게 문제는 인구조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과학과 합리에 기대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말씀합니다. 운명은 폭풍처럼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이때 다른 꼼수 생각 말고 든든한 반석과 같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흘의 역병

다윗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7년의 기근이나 석 달의 전쟁이나 사흘의 전염병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13). 다윗은 이 중 짧고 또 하나님이 직접 치시는 역병을 선택합니다. 이 역병 때문에 칠만 명이나 죽임을 당합니다. 죄에 대한 벌입니다. 다윗은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다”(17)며 자기 죄를 고합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인들은 어떤 천재지변이나 큰 사고가 나면 하나님이 재앙을 일으킨 줄 알고 그 심판의 이유를 헤아리려 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는데 이는 어리석습니다. 성서에서는 재앙의 원인을 직접 지목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그 원인을 따지기 어렵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해석입니다. 또 재앙 자체가 가진 불의와 폭력성 때문에 하나님을 괴팍한 신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죄에서 재앙을 찾는 길은 신적인 과정으로 하나님이 밝히시기 전에는 알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재앙에서 죄를 찾아가는 과정이 인간의 길입니다. 재앙이 이미 벌어졌고 여기서 죄를 찾는, 곧 반성의 과정이 회개로 나타납니다. 이는 반성을 통해 이 죽음의 기운을 생명의 에너지로 전환하려는 인간의 간절함입니다. 어떤 우연한 재앙이 닥쳤습니다. 수많은 생명과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갑니다. 그렇게 끝입니까? 그러면 너무 억울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무언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아픔을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고 잃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까? 무언가를 배워야 하고 이를 통해서 더 안전한 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또 잃은 만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을 얼어붙은 땅에서 피어나고 있는 봄의 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이 회개입니다.

죽음의 천사는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멈추어  고 다윗은 그곳에 여호와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때문에 재앙이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이 예루살렘 성전 자리가 되었습니다. 역대하 3장 1절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오르난이나 아라우나가 같은 사람입니다. 재앙의 땅이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는 드리는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막론하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소서”(왕상8:37-39) 삼일의 짧지만 강력한 재앙이 만민이 기도하는 영원한 성전을 우리에게 선사하였습니다. 이것이 재앙을 복으로 만드는 법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가 필요한 까닭은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배우기 위해서고 악을 선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립과 침묵, 불안과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기운에 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이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또 이 어둠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시 빛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교훈을 잊지 말고 인생에서 허무한 것에 낭비하지 말고 소중한 것에 더욱 힘쓰며,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대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 : 교훈과 의미

다윗 왕의 인구조사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깊은 신학적, 도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에서 기록되어 있으며, 다윗 왕의 행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이 사건의 배경, 내용, 그리고 현대적 교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인구조사의 배경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를 통치하며 큰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인구조사를 명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다윗의 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 부족이 깔려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이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시작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진노하셔서 다윗을 시험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역대상 21장: 여기서는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고 묘사됩니다.

2.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

다윗은 군사력을 확인하고자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했습니다. 요압과 장군들은 이 명령이 옳지 않다고 충고했지만, 다윗은 이를 강행했습니다.

조사의 목적: 다윗이 자신의 왕국과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문제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의 숫자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반영합니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태도로 여겨졌습니다.

율법(출애굽기 30:12)에 따르면, 인구조사를 할 경우 속죄금을 내야 했지만, 다윗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다윗 인구조사 이미지

3. 인구조사 하나님의 심판

인구조사가 끝난 후,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 갓을 통해 세 가지 벌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3년 기근

3개월 동안 적군에게 쫓김

3일 동안의 전염병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겠다는 마음으로 전염병을 선택했고, 이로 인해 7만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4. 다윗의 회개와 번제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들이고 전염병을 멈추셨습니다.

5. 이 사건의 교훈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은 현대 신앙인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교만의 위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책임 있는 리더십: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진정한 회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이켰습니다. 이는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긍휼: 심판 중에도 하나님은 다윗과 백성을 향한 긍휼을 보여주셨습니다.

6.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도 다윗처럼 때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믿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의 선택이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항상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7. 결론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은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교만을 경계하며, 잘못을 회개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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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단(Joktan)



욕단(Joktan)

욕단(Joktan 또는 Yoktan, 히브리어: יָקְתָן, 현대: Yoqtan, 티베리아어: Yāqṭān, 아랍어: يقصان, 로마자 표기: Yaqṭān)
에벨의 두 아들 중 둘째였다( 10:25, 대상 1:19).
욕단은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이다.

창세기 10:25
에벨이 두 아들을 낳으니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니 이는 그 때에 땅이 나뉘었음이요 그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더라.

창세기 10:26~29
욕단의 아들들은 알모닷, 셀렙, 하살마웻,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이다.

위필로(Pseudo-Philo)의 기록(약 70년)에서 니므롯과 베네크가 각각 함 (성경 인물)야벳의 자손을 다스리는 왕자였던 것처럼 욕단은 처음으로 셈 자손의 왕자가 되었다.
그의 버전에서 세 왕자는 모든 사람에게 바벨탑을 위한 벽돌을 굽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뿐만 아니라 욕단의 여러 아들을 포함하여 12명이 명령을 거부한다.
욕단은 그들을 시날에서 산으로 밀반출해 다른 두 왕자를 짜증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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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단의 이동 경로와 한민족

성경에 ‘욕단’(이나 그의 후손(들)이 한반도나 한반도 근처로 이동을 했다는 흔적이 나타날 것입니다—그 흔적을 추적하겠습니다.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들은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창 10:26 – 30 / [  ] 안은 제 번역입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 의하면 ‘욕단’의 아들들이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말씀 드리겠듯, 메사와 스발은 현재 ‘만추리아’(만주)와 ‘시베리아’로 일컫어지는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그 동쪽 산은 ‘백두산’입니다.

그래서 욕단의 아들들이 백두산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현재의 이라크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 11:2)라는 구절이 따릅니다. 그 구절의 ‘그들’이 누구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노아의 후손들일 수도 있고, 셈의 후손들일 수도 있고, 셈의 후손들 중 에벨의 후손들일 수도 있고, 에벨의 후손들 중 욕단의 아들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그들’이 욕단의 아들들이면 문제가 생기는 듯 합니다—그렇다면 노아의 방주가 정착했던 곳에서 전 세계로 흩어진 노아의 자손들 중 욕단의 아들이 거주했던 지역인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은 중동의 어느 지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동쪽 산’이 중동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노아의 방주에서 셈이 나온 후 욕단의 형인 벨렉 (창 10:25)이 출생할 때까지 백년이 약간 넘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창 11:10 – 16) 그 방주가 정착했던 곳인 중동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백년을 넘게 이동했다면, 욕단의 아들들은 중동을 훨씬 넘어 동쪽 끝에—즉, 극동지방에; 한국에; 백두산에—도착하고도 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구절의 원어를 들여다 보면 그 구절의 ‘동방으로’라는 번역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방으로’로 번역된 부분의 원어는 ‘미 케뎀’으로 ‘동방앞에서부터,’ 즉 ‘극동으로부터’(from the Oriental East; from the Orient)라는 의미입니다—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으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그들이 극동에서부터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 11:2)와 같이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욕단의 아들들이 극동지방에 거주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1) 그 구절의 ‘그들’이 욕단의 아들들이라도 욕단의 아들들이 거주했던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에서 ‘메사’를 ‘만추리아’(만주), ‘스발’을 ‘시베리아’, 그리고 ‘동쪽 산’을 그러므로 ‘백두산’으로 보는 견해와 그 구절은 충돌되지 않고; (2) 사실, 방금 말씀드린 이유로, ‘메사’는 ‘만추리아’(만주), ‘스발’은 ‘시베리아’, 그리고 ‘동쪽 산’은 그러므로 ‘백두산’이 될 수 밖에 없고; (3) 따라서 그 구절의 ‘그들’은 ‘욕단의 아들들’이 분명합니다—다시 말씀드리는데, 노아의 방주에서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이르게 되는 동쪽 지방은—즉, 극동 지방은—한국(과 일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단의 아들들이 극동 지방의 만주에서부터 시베리아로 가는 에 있는 동쪽 에—즉, ‘백두산’에—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인용된 구절들과 그 구절들에 따르는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 11:2)라는 구절은 아래와 같이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그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만주에서부터 시베리아로 가는 길의 백두산이었더라 ……욕단의 자손들이 극동에서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 10:26 – 11:2)

그러므로 ‘욕단’이 한민족의 조상입니다. 한민족은 고조선의 후예입니다. 고조선은 백두산, 만주, 시베리아,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후예인 한민족은 ‘욕단’으로부터 비롯됩니다—‘욕단’이 한민족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욕단의 자손들이 시날 평지에 거주하면서, 시날에 바벨탑이 건설되고 언어가 다양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  한민족의 민족적 죄는 다른 민족에 비해 가볍습니다.
백두산에 살았던 욕단의 아들들이 그 먼 시날 평지로 다 갔을 리는 없습니다—그들 중 일부만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두산에 남아있던 아들들은 ‘바벨탑’을 쌓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욕단의 아들들 중 백두산에 남아있던 아들들이 한민족의 조상들입니다.
한편으로,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유대전승에 의하면, 바벨탑을 쌓은 사건은 인류의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거대한 도전이었습니다—무서운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조상들은 그 죄악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민족의 민족적 죄는 다른 민족에 비해 가볍습니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세에 한민족을 사용하십니다.
세계적인 대부흥이 한민족에게 두번이나 나타났고, 한민족이 말세에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고, 이스라엘 선교의 사명까지 감당하는 현상은 우연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한민족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민족(의 조상들)이 인류가 바벨탑에서 하나님께 도전했던 죄악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세에 한민족을 사용하십니다. 

3.  한국어는 아담이 사용했던 원래의 언어입니다.
한민족(의 조상들)은 바벨탑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실 때 바벨탑에 가지 않았던 한민족의 조상들의 언어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언어는 아담이 사용했던 원래의 언어이고 한민족이 사용하는 한국어입니다.
그래서 한국어는 아담이 사용했던 원래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민족을 부러워 마시기 바랍니다.            
한민족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민족입니다.                      



창세기 10:25-29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Two sons were born to Eber: One was named Peleg, because in his time the earth was divided; his brother was named Joktan.

욕단
알모닷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Joktan was the father of Almodad, Sheleph, Hazarmaveth, Jerah,

  • 하도람우살디글라
    Hadoram, Uzal, Diklah

  • 오발
    아비마엘과 스바와
    Obal, Abimael, Sheba.

    오빌
    하윌라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Ophir, Havilah and Jobab. All these were sons of Jok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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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조상은 성경상 욕단(Joktan)

    창세기 10장에 노아의 세째 아들 셈의 후예가 소개되어 있다.
    셈의 4대손 에벨이 낳은 장자 벨렉은 오늘날 유대인의 조상이며, 차자 욕단은 한국인의 조상(알이란 민족)이 된다. 

         셈-아르박삿-살라 - 에벨(24)--두아들 벨렉(과 욕단)-- 르우-스룩-나홀-데라 -아브라함, 

    선택받은 백성은 벨렉 계열과 욕단 계열 두 백성이 존재한다. 이 특별한 셈족들인 벨렉의 후손에서

     노아의 10대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음으로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탄생했다(창 11:10~32). 그렇다면 욕단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들이 동방의 산악 지대를 넘어 아시아로 갔다고 말한다.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창 10:30) 여기에서 ‘산’이란 히브리어로 ‘하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산맥’, 혹은 ‘산지’를 가리킨다. 동양에는 큰 산들이 많이 있다. 즉 욕단은 동쪽 산악 지대를 넘어서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 아시아로 이동했던 것이다.


    욕단의 가계는 에벨의 혈통으로서 셈족의 종가이었으므로 그들은 ‘알이랑 정신’, 곧 ‘하나님 중심 사상 ․ 신본주의 정신’이 확고한 하나님을 아는 족속이었다. 따라서 욕단 족속은 셈족의 정통성을 승계한 백성답게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즉 ‘알이랑(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찬송하면서 ‘스발’을 향해 동방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스발’의 위치는 어디일까?

    ‘스발’을 히브리어에서 음역하면 ‘새팔’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홍수로 인해 지워졌기 때문에 ‘새팔’은 결코 당시에 존재하거나 알려진 장소 이름이 될 수 없다. 욕단이 동쪽으루 이동하기까지 동양에는 아직 누구도 살지 않았다. 따라서 창세기 10장 30절에 언급된 ‘스발(새팔)’은 현실적인 지명이 아닌 ‘예시적’인 지명이다. ‘예시’란 나중에 원형으로 구체화 될 어떤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스발(새팔)’의 원형에 해당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야 한다. 예시적 지명 ‘새팔’은 일단 아시아 동쪽의 어느 곳이라고 추적한다면 욕단은 동방의 산악지대(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곳은 ‘시베리아’이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좀 더 이동하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고조선의 창건 무대인 만주 대륙이 연장된 땅으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고향이다. 알이랑 고개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 동쪽으로 멀리 이동한 욕단 족속은 만주 및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동방의 새 땅을 ‘새발’이라고 하였다. ‘새발’은 ‘ ‘새 땅’ ‘새 벌판’이라는 뜻이다. ‘새팔’과 ‘새발’은 발음이 아주 유사하다. ‘ ㅍ’과 ‘ㅂ’은 모두 ‘파열음’으로서 한 계통의 소리이이므로 자주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안팎’은 ‘안밖’이요, 동이족의 후예인 인디언은 ‘아버지’를 ‘아파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새팔’ = ‘새발’로 간주할 수 있다.[유석근, '또하나의 선민 알이랑민족' 116쪽]

    그러니까 우리 알이랑 민족인  한국인의 성경상 직계 조상은 셈의 4대손 ‘욕단’이다. 따라서 한국인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또하나의 선민인 셈이다. 셈 계열 내에서 에벨의 혈통인 욕단의 후손도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볼 수 있다. 주 하나님께서 나중에 쓰시려고 “감추어 두신 선민”이 바로 알이랑민족인 우리 한국인이다.  우리 겨레가 하나님이 감추어 두신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교훈은 새로운 선민주의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근거한 객관적 사실이다. 아시아 서쪽 땅 끝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셈족의 ‘좌측 가지’인 벨렉의 후손이다(창 10:21,25; 11:10~32). 아시아 동쪽 땅 끝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셈족의 현저한 ‘우측 가지’인 욕단의 후손이며(창 10:21,25,30).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인 것이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겉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선민도 겉으로 드러난 선민(벨렉 계열 유대인)과 속으로 감추인 선민(욕단 계열 한국인)이 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의하면 벨렉 계열과 욕단 계열은 셈족의 현저한 두 가지(branch)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족속인 ‘에벨의 혈통’이다.

    한국인의 특이한 점은 습성과 풍습이 유대인과 유사하다는 것이다.한국여성과 유대인 모두 물동이를 머리에 이는것, 외출시 얼굴을 가린다. 양 민족 모두 돌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고, 부모를 "에미","에비"라고 부른다. 또한 장례식에 베옷을 입고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한다. 유대인이 유월절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뿌리듯이 한국인은 이와 비슷하게 붉은 팥죽을 뿌린다.

    한국인은 유대인과 같이 근면하고, 흰옷을 즐겨 입으며, 종교성이 강하고, 장사 수완이 좋다. 그래서 예전에 유대인이 미국 흑인 지역에서 하던 수퍼마켓과 세탁소, 의류사업, 가발 등을 그대로 이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한국인이 유대인과 비슷한 핏줄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홍수 심판 이후 살아 남은 노아의 자손이다. 노아에게는 야벳,셈, 함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한국인은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 살라 - 에벨 - 욕단의 후손들이 한국민족이다.

     

    셈의 아들들 엘람과 앗수르의 자손은 지금의 아라랏산 부근에 살다가 바벨탑 사건 이후 동방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래서 고조선에서는 신정국가로 하늘에 있는 유일신에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하나님을 믿는 국가였다. 그런데 한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불교나 유교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해 진실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24:16 땅의 맨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렸으니 곧 의로우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라

    사41:2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사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데려오고 땅의 우두머리(돌모퉁이)들로부터 너를 불러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내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으며 너를 버리지아니하였노라, 하였노라

    사 46:11 내가 동쪽에서 굶주린 새를 부르되 곧 먼 나라에서 나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리라. 참으로 내가 그것을 말하였은즉 또한 그것을 이룰것이요. 내가 그것을 작정하였은즉 또한 그것을 행하리라.   

    사 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10: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나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1. 지능지수 높은 동아시아인

    ‘미국에 사는 백인들의 평균 지능지수(IQ)는 백(100)이고 동아시아인들의 평균치는 이보다 적게는 2∼3점, 많게는 10점이나 높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인 리처드 헤른슈타인 하버드대 교수가 명저 ‘종(鐘)모양의 곡선’에서 밝힌 말이다.

    세계 13세 어린이 수학 및 과학 경시대회에서 한국 어린이들은 보통 5등 안에 든다. 미국의 50개 주는 매년 최우수 고교졸업생 2명씩을 뽑는데 거의 매년 한국 학생이 여러명 포함된다. 미국에는 1만개가 넘는 고등학교가 있는데 많은 한국학생들이 수석졸업을 한다. 하버드대가 이들을 다 뽑는다면 주요학과는 한국인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한다. 인종 쿼터 같은 것이 있어서 입학생 수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 한국은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슷했는데 지금 1인당 소득 면에서 20배 이상 앞서게 된 것은 교육열 근면성 등에서 그만큼 앞서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은 60년대 불과 몇 조원에서 지난해에는 515조원으로 늘었다. 최근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이 방콕에서 공동 개최한‘아시아경제의 장래’에 대한 회의에서 마이클 페어뱅크는 과거 30년간 한국인의 생산성 향상은 세계 제일이라고 했다. 

    우리 주위에는 엄청난 저력을 가진 한국인들이 수없이 많다. 수많은 한국인들은 개인적으로는 헤른슈타인 교수가 밝힌대로 백인들을 능가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

     

    2. 노아의 자손들

    세상에 악이 관영하자 하나님은 B.C. 2458년에 물로 온 지구를 심판하셨고, 당시 의인이었던 노아의 가족 8명 만이 방주를 만들므로써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40일동안 주야로 비가 내려 164일동안 온 땅이 물에 잠겼고, 물이 빠진 후 방주는 아라랏산 정상에 정착했다. 지금도 그 홍수의 증거로 알프스나 히말라야 등의 고산지대에는 조개나 물고기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노아 가족이 다산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축복하셨다.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함은 네 아들을 낳았으며, 야벳은 일곱 아들을 낳았다. 셈의 자손들은 산 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주로 아라랏 산 중턱에 살았다. 함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에 정착했고, 야벳의 자손은 주로 섬과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셈의 자손들 중 일부는 산에서 내려와 우르 지방으로 내려와서 인류 최초로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족이라 불린다. 우리말에서 남자를 뜻하는 '사내' 또는 '사나이'는 말은 '산(아라랏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수메르 사람은 인류 최초 기호로 발음과 뜻을 나타내는 '쐐기문자'를 만들었다.'수메르'라는 말이 '셈'에서 나온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고 있고, 수메르어는 아담 때부터 있었던 언어로 추정된다.

    수메르어와 우리나라 말 사이에는 유사점도 많은데 우리말의 '길'이 수메르어로 'gir'이고, 우리말과 같이 님(nim)이란 존칭을 붙이며, 하늘을 'an-ur'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abba', 자신의 아버지를

    'ab'라고 부른다. 한국어와 수메르어는 모두 교착어로 주격, 소유격, 목적격을 나타내는 조사가 있고, 문장 구조도 한국어와 같은  주어-목적어-동사 순이다.

    노아로부터 저주 받은 함의 장자인 '구스'의 가문에서 태어난 '니므롯'은 영웅적 사냥꾼으로 바벨탑 문명을 건설한 인물이다. 함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은 이집트 지역으로 가 피라믿을 건설하고 수 많은 우상신을 섬기는 신비주의 종교를 만들었다.함의 넷째 아들인 가나안은 장사꾼 기질이 있어서 그의 후손은 시돈과 두로 지역에 페니키아를 건설하고 무역을 번성시켰으며, 수 많은 우상 신을 만들어 내었다. 이로써 함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사탄의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 이집트, 페니키아 문명을 건설한다. 이 곳에서는 각각 '인본주의 문명', '신비주의 종교', '물질 만능주의'가 태동되어 이스라엘과 인류를 타락시켰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장사에 도움이 되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보급하기 위해 아스다롯이란 여신을 만들어 내었다. 페니키아 신전에서는 여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사제들이 쾌락을 선사하기 위해 돈을 받고 매춘을 했다. 이 가나안의 여신이 수메르 지역에 있는 셈의 자손들에게도 스며들어 '이난나'(Inanna) 여신이 되었다.수메르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주변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신을 섬기며 타락하기 시작했다.


    3. 한민족의 원래 종교 

    우리 민족은 고조선 시대부터 유일신인 하늘님(하나님)을 믿던 민족이었다.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을 천군(天君)이라고 하는데 천군이 신격화되어 단군이 되었다. 삼국시대 이전을 기록한 역사서는 고려 말에 승려인 일연 김견명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시대의 장군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자료의 수집과 편찬 의도가 불교의 전파에 있었다. 불교의 윤회설을 입증하기 위해 인간의 조상이 곰이었다는 근거 없는 설화를 끼워 넣으면서 역사를 왜곡했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고조선 편에서는 환웅(하나님의 아들)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굴 속에서 견디라고 했는데 곰이 21일동안 견뎌 여자가 되었으며, 여자는 사람으로 변한 환웅과 혼인해 단군 왕검이란 아들을 낳았다는 근거없는 신화를 만들었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왕인 인종 때에 김부식이 삼국시대에 대해 저술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이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신라중심으로 중화사상에 젖어 쓴 역사서로 신라의 역사적 사실이 과장된 부분이 많다. 삼국사기는 불교와 유교적 관점에서 저술해 고조선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러나 김부식과 일연이 우리 민족의 참된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중국에 있는 우리민족에 관한 역사까지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중국의 고대사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숭상한 경건한 민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후한서에서 예전은: "시월이 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말씀을 읽으며 밤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無天)이라 합니다."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시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성회가 있는데 이를 동맹이라 했다."

    삼국지에서 진한은: "성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께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이라고  헸다."

     

    중국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규원사화'에도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이자 임금임을 밝히고 있다.1675년(숙종 2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규원사화'는 일본의 우리 역사 말살 때에 많은 책이 몰수, 폐기되는 와중에 무애(無涯) 양주동(梁柱東) 선생이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남창(南倉) 손진태(孫晋泰) 선생이 극비리에 필사(筆寫)하여 빛을 본 책이다.

    일제가 고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했지만 '규원사화'를 비롯한 많은 古書와 중국의 역사책에서 밝혀진 바로는 엄연히 단군조선이 있었고, ‘단군檀君’이란 말은 ‘박달(壇) 나라의 임금(君)’이란 뜻이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47대 1,195년간 존속했고, 공자를 비롯한 많은 중국의 성현들도 우리나라(동이 東夷)를 흠모했다는 기록이있고, 동방삭東方朔(한 무제 때의 사람)은 당시의 우리 민족을 가리켜 ‘태연하게 앉아 서로 범하지 않고, 헐뜯지 않고, 사람에게 근심이 있으면 서로 구해 주어 선인(善人)이라고 했다’고 기록한 바가 있다.

    고조선 시대에는 한문이 없었는데 어떻게 단군이란 이름이 생겨났는지는 규원사화에 잘 나와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박달임검지역야(朴達壬儉之譯也)'라 해서, '단군(박달나라 임금)을 번역한 것'으로 되어있다. 박달이라는 말은 옛부터 백달이나 배달로도 불렀고, 나라의 우두머리는 임검이라 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신씨이강어단목지하 이환검신인(神氏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이라 해서 그 뜻을 살펴보면, '신씨천황께서 이미 박달나무 밑에 하강했고, 환검신인이 다시 단목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단(檀)으로써 나라이름을 삼은 것이며, 단군이란 단국의 임검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단군을 환검이라고 했는데, 이 환검이 왕검이나 임검으로 변한 것입니다. 내용 중에 환검신인, 즉 단군이 박달나무 밑에서 인민들로부터 추대되어 임검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자연히 박달이라는  나라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이라는 것은 박달나라의 임검이라는 의미가 된다.


    박달나라의 임검이란 뜻인 이 '박달 임검'은 계속 불려져 내려 오다가 약 2천년 후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불교가 들어올 때를 전후해서 한문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사가들이 역사를 한문으로 서술하다 보니까, '박달 임검'을 박달단(檀)자 임금군(君)자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 때부터 단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한문이 들어오기 전에는 단군이라는 용어는 없었다는 겁니다. 즉 한문으로 박달나라의 임검이란 뜻을 번역하다 보니까 단군으로 된 것입니다. 규원사화의 내용 중에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단군이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고, 교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도를 이뤄 행하게 한지 몇해 동안의 백성들이 모두 감화되어 악은 없어지고 천하는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는 창세기에서 노아가 홍수 심판 후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8:20 노아가 주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가운데서 취하여 제단에 번제를 드리더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교시하는 내용은 성경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 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져도 새지 아니한다.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 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 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중국 고대사와 규원사화를 통해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믿는 민족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나 유교를 전통종교로 생각하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인식하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은 유일신을 믿는 민족이었습니다.

     

    4. 한민족의 기원 

    인본주의적 사학자들은 인류가 한 곳으로부터 전파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는 병행발생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놓고 볼 때 인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흩어졌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이다.

    그러므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라.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11:9)

     

    성경은 B.C 2357년경에 노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해 바벨탑을 쌓자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서로 알아 들을 수 없게 한 뒤 온 세상에 흩으셨다고 명시합니다. 국내 사학자들이 터키 아라랏산 지역으로부터 중앙 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만주에 이르는 여정을 탐사한 결과민족 이동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셈족의 특징인 환저형 토기와 생활용기가 발견되었고, 우리 말과 같은 SOV형 교착어를 사용하며, 아라랏 산에만 있는 흑요석 공구를 사용하고, 대홍수와 까마귀에 대한 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중국의 이벤허 박사가 조사결과를 중국 북경 대학에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므로 북경대학도 한 민족의 민족 이동설을 인정한 것입니다.

     

    대홍수는 B.C. 2458년에 일어났으며, 바벨탑 사건은 B.C 2357년에 일어났습니다. 고조선의 건국이 B.C. 2333년이므로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24년만에 만주에 도착한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셈족이 이동이 자유로운 유목민이었고, 조사단이 볼가강 하류의 아조프 박물관에서 바퀴 달린 집을 발견함으로써 이동속도가 빨랐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의 왕검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천재단이 있는데, 천제단의 방향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에서 섬겼던 하나님께 경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인 조상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5. 단군(檀君)은 노아의 아들 셈의 5대손인 욕단이다.

    아시아의 서쪽 끝 지방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주장하는 사상과 철학이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출발한 고조선의 개국정신과 토씨 하나까지 동일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서쪽에서 살던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민을 가서 자기들의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세계적으로 김치는 한반도의 한인들만 먹고 사는 것으로 아는데 미국에도 김치를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니 이것이 어찌된 사실이냐 물으면 한국에서부터 김치를 먹고 살았던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도 여전히 김치를 먹고 사는 것이라고 해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같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위에서 말했듯이 17세기에 저술된 규원사화(揆園史話)라는 책에 소개가 되어 있는데 이 책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숙종 1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것이다. 저자가 당시의 고기(古記)를 자료로 삼아 쓴 것인데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그리고 삼국시대의 왕들의 관한 이야기와 종교행사에 대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조의 세조가 동국통감을 편찬하면서 근 20여종의 고서를 어명으로 수집해서 궁중에 보관한 일이 있었는데 이 규원사화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는 이 책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 규원사회에 8조 금법(禁法)의 여덟 가지가 고조선의 종교와 신앙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것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고대 한국인들이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섬겼던 것인데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날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유일하신 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상의 8가지 법조문을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법조문들이 구약성경 출애급기 20장 17절에 있는 십계명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이다. 두가지가 없는 것은 생각건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돌판으로 된 십계를 받기 전에 고조선을 개국한 분들은 아시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미 이주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8조 금법이나 십계명에서 가장 핵심조항은 제 1조문과 제 2조문인데 그 내용은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너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순수하게 섬기라는 것이다. 이는 두 법조문의 핵심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감히 동방으로 이주를 했는가? 또 그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구약 성경 창세기는 모든 인류와 우주의 시작과 기원을 기록한 책이다. 모든 인종의 시작, 모든 나라의 시작, 모든 역사의 시작 그리고 모든 문화의 시작이 다 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앞으로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사실은 더욱 더 명명백백 해질 것이다. 우리는 각 민족의 역사와 기원의 사실을 창세기 9장과 10장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기원은 어떻게 될까?

    짐작컨대, 우리 한민족은 노아의 아들이며 황인종의 시조가 되는 셈의 고손자이자 4대손인 에벨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천손계보(天孫系譜)의 적통(嫡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에벨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한사람의 이름은 벨렉이다. 벨렉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고 또 다른 형제의 이름은 욕단인데 바로 이 욕단이 동방으로 이주를 하여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임금으로 보는 것이다.

    넓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에벨을 통해 이어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통해서 인류역사의 전반기를 섭리하셨다면 이제 하나님은 욕단으로 이어지는 동이족 즉 대한국인을 통해서 인류의 후반기 역사를 마무리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 대한국인을 동방의 고요한 나라요 은둔의 나라로 한적한 곳에서 비교적 순수한 혈통과 정신을 가진 종족으로 쓰시려고 보호하신 것이다.왜냐하면 미국에서 중국인들은 두셋이 모이면 식당을 열고 일본사람들은 회사를 연다는데 우리는 두 세가구가 모이면 우선 교회부터 시작하고 학교를 여는 것은 보통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천손의 혈통이 아니면 도대체 할 수 없는 신앙적인 거사를 매우 쉽게 저지르는 것이 바로 다 이런 연유 때문이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 민족이 주 하나님 유일 신앙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동안 숱한 민족적인 고난을 당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와 경륜을 이루시는데 동반자로 택정함을 받은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민족을 연단시킨 것이다.

    지금 전세계를 요동치게 만드는 이른 바 한류(韓流)란 무엇인가?
    전세계가 한국인을 사랑하고 흠모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대역사인 것이다.
    주연은 한국의 선남선녀들이지만 그 연출은 바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와 인자를 사랑하는 족속,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타 민족을 침략하지 않은 민족, 여러 가지 흠결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쓰시려고 남겨 둔 민족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요 단군의 후손들인 대한민국인 것이며 그 대한민국의 조상이라고 불렀던 단군은 성경에 나오는 욕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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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단은 누구인가? 창세기 10:30

    예수원의 설립자 대천덕 신부님은 ‘우리와 하나님’이란 책에서 욕단이 단군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창세기 10:25에 ‘에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에게는 ‘벨렉’과 ‘욕단이라는 두 아들이 있 었습니다. ‘벨렉’이란 이름의 의미는  ‘나뉘어진다’는 뜻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욕단’은 알모닷, 셀렙 등 13아들들의 조상이 되고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지로 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동방의 산지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족속들이기 때문에 동방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욕단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욕단이 혹 단군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계산은 할 수 없지 만 단군의 시대와 욕단의 시대가 비슷한 연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추측은 옳았습니다. 우리 민족사를 시작한 단군은 바로 성경상의 욕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 타당한 근거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단군 칭호의 의미와 유래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의 족속은 신적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생래적으로 타고난 특별한 천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밝고 환한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섬 기는 하나님이 밝고 환한 천국에서 빛 가운데 계시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기 때문이셨습니다. 그 리하여 욕단 족속은 빛이 시작되는 땅인 ‘새 밝나라’ 곧 ‘새발’을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밝고 환한 땅을 찾아가 온 백성이 밝고 환한 흰옷을 입고서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제사하며 삶을 영위하는 신시(神市),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소망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오직 천손민족 만 품을 수 있는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욕단은 광명의 본원지인 ‘밝의 땅’을 찾아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 고개’를 넘어 쉬지 않고 동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동해에 해 떠오르는 땅, 동방의 밝은 땅 끝 에 당도하여 아시아 동녘에서 가장(한) 높고 밝은 산인 한 밝산(태백산-백두산)과 그 변두리를 근거지로 하여 밝달 나라(배달나라)를 세워 우리 밝달겨레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 들은 욕단을 ‘밝달임금’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단은 사람들을 밝의 땅, 동방의 땅 끝 으로 이끌고 온 밝달족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욕단을 단군이라고 단정짓게 하는 결정적 단서입니다.

    ‘단군’이라는 칭호는 밝달 임금의 한자 표기식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단군이라는 칭호는 그 이름 자체에 이 인물의 성격이 어느 정도 집약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 서 단군의 정체를 밝히는데 ‘단군’이라는 칭호가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단군 칭호의 의미와 유래가 무엇인지를 해명해야 하겠습니다. 단군칭호의 의미와 유래라고 할 때에는 한자로 표현된 ‘단군’의 본래 우리말이 어떤 것이며, 그 우리말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어원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를 주로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단군(檀君)’의 ‘군’은 ‘임금’을 표현하는 우리말의 한자의역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여기서 ‘단 임금’이 됩니다. 그리고 ‘단(檀’)자의 의미는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고기’에서 ‘제단 단’ ‘壇’자로 쓴 외에 그 밖의 단군설화에서는 모두 박달나무 단(檀)자를 썼습니다. 삼국유사 정 덕본 이전의 조선왕조 초기의 다른 여러 책들에서는 단군에 대해서 전하면서 박달나무 단자를 썼습니다.  박달나무 단자는 그 자체만으로 ‘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화 에서는 ‘단’자 밑에 또 나무 수(樹)자를 덧붙여 ‘나무’라는 말을 겹말로 중복시킨 것이 나옵니다. 바로 신단수 (神壇樹)입니다. 이것은 원래 설화에 있었던 박달나무란 말의 ‘’박달 만을 ‘단’’자로 나무’ 를 ‘수’ 자로 의역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처럼 ‘단군’의 ‘단’자가 우리말의 ‘박달’을 의 미하는 것이라면 단군은 ‘박달임금’이라는 말입니다.  ‘박달’의 ‘달’은 ‘아사달’ 할 때의 그 ‘달’인 데  땅이라는 말입니다. ‘박달’의 ‘박’은 밝과 통합니다. 오늘날에도 일상회화에서 ‘밝’의 바침 ‘ㄹ’이 생략되어 ‘밝다’가 ‘박다’로 발음됩니다.

    이것은 우리 말에서 겹자음 받침을 가진 경우 앞의 겹자음 하나가 발음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음 운법칙으로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예를 들면 젊다는 점다, 밝다는 박다, 읊다는 읖다.  밟다는 밥다입니다. 이로서 박달의 박이 밝다의 밝과 통하며, 그에 따라 ‘박달’을 ‘밝달’로 볼 수 있습니 다. 그러므로 단군은 밝달임금이라는 말입니다. 밝달은 밝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즉 단군은 밝은 땅 의 임금 곧 배달임금이란 글자입니다. 밝달족 임금의 이두식 표현이 단군이라는 칭호인 것입 니다. 단군은 ‘밝달임금’ 또는’ 배달임금’ 등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우리 동방(조선) 고유의 호 칭 이었습니다. 이 토박이 말을 후세에 한자로 의역하여 박달 단, 임금 군이라고 표기하여 놓았 기 때문에 비로소 ‘단군’이라는 칭호와 발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 명사입니다. 따라서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자리를 이어 받은 후손들 모두가 단군 이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 한 사람이 천년 간 고조선을 통치한 것으로 잘 못 기록했기에 후세의 우리 들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계림유사(鷄林類事)란 책에선 말하기를 ‘밝달(檀) 은 배달(倍達)이요, 국(國)은 나라(那羅)요 군(君)은 임금이다.’하였습니다. 와유록(臥遊錄)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한밝산’은 세속에서 박달이라 일컫는데, 세상에서 밝달임금이 내려오신 땅이 라 이른다.’했습니다. 신단실기(神檀實記)란 책에서는 ‘밝달임금’ 때에는 사람들이 ‘밝달’을 ‘배 달’ 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음이 구을러 ‘박달’이 되었다’했습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배 달’은 나라 이름이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모두 배달임금(단군)이라 한다.’하였고, 동국여지승람 에선 ‘단군이란 일컬음은 곧 배달나라 임금의 칭호인 까닭에 그 나라를 잇는 임금들을 모두 ‘단 군’ 이라 일컫는다.’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때까지의 고찰로써 성경상의 한국인의 조상 ‘욕단’이 다름 아닌 민족시조 ‘단 군’이라고 충분히 단정할 수 있습니다. 욕단이 홍수 후 알이랑 고개를 넘어 사람들을 이 동방의 땅 끝 ‘밝의 땅’으로 인도해 온 우리 밝달겨레의 조상이라면 사람들은 그를 부르기를 분명히 ‘밝 달의 임금’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단군의 정체를 정확히 해명하는 작업은 학계에선 난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안다면 그것은 절대로 어려운 과제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랑 민족 배달 겨레의 조상 단군은 성경상의 욕단입니다. 사실은 단군의 시대와 욕단의 시대가 같다는 것에서 더욱 더 설득력을 얻습니다.

    둘째로 단군의 시대와 욕단의 시대

    조선의 건국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연은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 되므로 정확한 시기 가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함께 실었습니다. 《동국통감》〈외기〉에는 “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 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 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엔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중엔 백악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왕운기》 역시 건국 연도를 무진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국사편찬 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 현행 대한 민국의 국사 교과서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 2007년 교육부는 최근의 청동기 유물 발굴 결과 《삼국유사》의 건국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보고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기술을 ' ~ 건국 하였다'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 다. 왜냐하면 실제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는 그보다 더 앞선 연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에 의한 조선 건국 연대를 기원전 3000년까지 소급해서 보고 있 습니다. 일부에서는 단군의 즉위 원년의 절대 연대는 사실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삼국유사 등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군이 요와 동시에 즉위해 나라를 건국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와 순은 이상적인 나라를 건국했다는 인물의 대명사격입니다. 

    특히 요는 공자가 성군으로 추앙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그런 요임금과 단군이 동시대에 즉위해 조선을 건국했다는, 즉 우리 나라가 지나(중국)와 대등한 시기에 건국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 라라는 것을 알리려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군의 즉위 연대는 그 절대연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내세우고자 했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 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이 성경상의 욕단 의 연대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 까지 모든 연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역추적하여 계산해 보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때의 주전 원년은 4114년입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후 노아가 죽은 때는 BC 2458년입니다. 셈의 증손자 에벨은 BC 2391년에 태어나 BC 2357년에 욕단의 형제인 벨렉을 낳고 BC 1927 년까지 살았습니다. 벨렉은 239세를 향수했습니다. 그 때는 BC 2118년입니다.  BC 2118 년 과 BC 2333년과는 215년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성경 연대는 성경 연구가에 따라 계산이 조금 씩 차이가 있습니다. 4천년의 역사에서 215년은 비교적 근사한 차이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정 확 무오한 연대 산출이 아니라 욕단의 연대가 바로 단군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백두산 산정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조선을 건국한 단군이 성경상의 욕단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욕단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은 조선이라는 국명에서 드러납니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원래 ‘주신’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의 지나(중국)식 표현입니다. 한국인의 조상인 욕단은 그가 도달한 시베리아와 만주 대륙에 이르 는 더 넑은 동방의 새 땅을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신’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주신이라는 말의 옛 음이 지나의 옛 글에 식신(息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州愼),  조신(鳥愼), 조선(朝鮮)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 것입니다. 

    한 민족 최초의 나라이름인 ‘조선’의 본뜻은 ‘주신’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신 ‘조선’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아침 조, ‘빛날 선’해서 이른 단어 때문에 ‘아침 해가 빛난다’라는 뜻에서 조선이라는 국호가 생겼다 하나 조선이라는 국호는 한자가 생기기 전에 이미 있던 국호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조선이라는 말은 우리의 고대어로 무엇을 뜻하였겠습니까? 

    일찍이 단체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은 숙신((肅愼)이라고 하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숙신의 옛 이름을 ‘주신(珠申)’이라 하고, 주신은 소속관경을 가리키는 만주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말로 일정한 지역의 땅, 영토를 의미합니다. 바로 여기에 조선의 원의가 있습니다. 즉 ‘주신’이 이 ‘숙신’의 어원이요, 조선의 어원이긴 한데 우리가 사는 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라고 ‘주신(賜)’ 땅이라는 ‘주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욕단은 조선을 건국한 역사적인 그 날을 ‘하늘 문이 열렸다’는 뜻의 ‘개천(開天)’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욕단이 조선을 건국하기 전 먼 저 백두 산 산정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경건히 천제를 드렸을 때 아라랏 산정의 노아의 제사 에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욕단의 제사를 열납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나라를 세운 건국일을 개천(開天) 즉 ‘하늘이 열렸다’고 했을 것입니다.

    셋째로 한국인의 조상 단군

    창세기 10;2에 백인종의 조상인 야벳의 아들들 가운데 두발과 메섹이라는 인명이 나옵니다. 서 구 성경학자들이 쓴 주석책들을 보면 오늘날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라는 지명은 메섹에서 유 래했다고 설명합니다. 메섹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가서 정착했기에 그의 이름이 지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랄산맥 동쪽에는 토블스크라는 지방이 있는데 그것 또한 야벳의 아들 두발 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두발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가서 살았기에 그의 이 름을 따서 지명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주석가들이 무슨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의 모스크바나 토블스크로 가서 메섹과 두발을 만나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헌 상의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메섹은 모스크바, 두발은 코블스크와 발 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악착같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 니다. 대부분 그대로 수용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인물인 욕단이 ‘알이랄’고개를 넘어 동방으로 와서 밝달나라를 세운 밝달족의 우두머리 였는데 그가 단군이었다고 단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 욕단의 목적지 스발은 광명의 본원지인 새밝나라요 또한 서울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이라는 명사의 유래와 그 의미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는 사실 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서울’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어떤 말인지 그 뜻을 무엇인지를 아는 사 람은 많지 않습니다.

    ‘서울’이라는 말은 바로 ‘새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새발’의 ‘새’는 ‘싀, 스, 시’등으로  쓰였고, 오늘날엔 ‘새, 스, 시’등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발’은 ‘발-울’로 변했습니다. ㅂ-ㅂ.ㅇ-ㅇ’의 음운 전변에 의해서 ‘불-ㅂㅇ.ㄹ-울’로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블’은 현대어 ‘서울’에 까지 이르렀 습니다. 즉 ‘서울’이라는 말의 시작은 ‘시블’이었습니다. ‘시, 싀, 스, 시’는 새롭다이며, ‘블 불’은 ‘밝’에서 출발된 말이니 ‘서울’이라는 말 역시 ‘새로운 땅’,좀더 자세히 말하면, ‘밝고 새로운 나라 (땅)’이라는 뜻입니다. 즉 ‘서울’은 ‘새밝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시적 지명인 ‘새팔(시블) 은 또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기도 합니다. 시블-시불-셔울-서울로 바뀐 것이 한국의 수도 ‘서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서울’이라는 말의 어원이 ‘시블’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수도는 국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이라는 명사는 보통명사이기 때 문에 수도를 다른 지방으로 옮겨도 ‘시발’은 여전히 ‘서울’로 간주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동방으로 간 욕단계 선민이 누구인지 오늘날 우리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성경에 분명히 단서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인 욕단의 후손은 어느 땅에 있는 누구입니까? 그 존귀 한 백성은 바로 극동의 한국인입니다. 욕단의 목적지 ‘세팔’은 한 민족의 역사의 고향 ‘시블= 새 벌 =새 밝은 곳=배달이며, 또한 대한민국의 상징인 ‘서울’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알이랑 민족 한국인이 욕단계 선민이라는 사실은 그 증거가 아주 명확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욕단이 단군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역사적 인물 욕단이 알이랑(하나님과 함께) 고개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와서 밝달나라를 세운 밝달족의 우두머리 였는데 그가 단군인 것입니다. 단군이란 밝달임금의 한자식 표현입니다. 욕단의 목적지 ‘스발’은 광명의 본원지인 새밝나라요 또한 ‘서울’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욕단의 시대와 단군의 시대가 같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단군이 선포했던 ‘8조금법’이라는 배달나라 국법이 있었는데 ‘규원사화’에 의하면 제 1조가 ‘너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순수하게 섬기라’이며,  제 2조는 ‘너 희는 부모를 공경하라. 너희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니, 너희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니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받 은 십계명의 제 1계명과 5계명과 같은 것입니다.  단군이 ‘알이랑 정신’ 곧 ‘하나님 중심 사상’ 과 ‘신본주의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8조 검법’을 대했을 때에 세상 사람들이나 세속 사학자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중심으로 생각 하게 됩니다.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 단군은 대홍수 후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 앙을 갖고서 알이랑 고개를 넘어 동방으로 천동한 하나님의 사람 ‘욕단’이었다고 더더욱 단정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은 우리 민족사를 시작한 한국인의 조상 단군이십니다. 한국인의 기원은 셈의 가계, 그 중에서도 약 4300(BC 2333+AD 2000) 전에 동  양으로 이주하여 우리 배달 동이겨레의 선조가 된 욕단의 후손, 곧 단군의 자손입니다. 동방의 한국인은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선민인 것입니다. 에벨의 혈통인 욕단 의 후손은 선택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단군설화에 나오는 천손 강림의 모티브가 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의 계보가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과 욕단으로 이어지는 ‘천손민족’이라는 사실이 설화에 반영된 것입니다.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동방 ‘밝의 땅’에 당도하자 맨 먼저 백두산 산정에 올라 창조주 하나님께 천제를 드리고 조 선을 건국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성경상의 한국인의 기원은 노아의 작은 아들 셈의 현손 욕단, 즉 단군입니다. 

    결론
    대천덕신부님의 글로 시작했기에 그분이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이란  책의 한 내용을 가지고 말을 마치려고 합니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 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한국 백성에 게 공동의 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어떤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 니 만큼 한국인으로서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 이다’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국은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라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은 자신이 누구인 지를 모릅니다. 실제로 한국인은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레이 신부의 말과 같이 스스로를 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속히 회복해야 할 백성이 바로 우리 한민족입니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기록된 계시인 성경에 의하면 한국인은 천손민족, 즉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 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인의 참 모습이며 우리 겨레가 회복해야 할 본연의 모습입니다. 한국인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당신의 특별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고자 일찍 이 택하시고 감추어 놓으신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민족은 복 음의 첫 주자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한 민족은 복음의 마지막 주자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재림을 재촉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째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24:14에서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 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하신 말씀이요 둘째는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 복음 23:39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 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그들이 예수님 을 메시야로 믿고 영접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환영할 때까지 오시지 않겠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로마서 11:25에서 이스라엘이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신 것은 이 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1:14에서 이스라엘로 시기케 해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서양기독교는 유대인들을 핍박, 박해 살륙 했기에 유대인들의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서양 기 독교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시기의 대상이 될 민족은 그들의 조상 벨렉의 형제인 욕단의 후손인 한국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마지막 주자의 임무인 것 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한국민을 시기하게 됩니까?
    자신들만 천손민족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한국인도 천손민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들이 배척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그들에게 나 타난 동방의 천손민족 한국인이 전하는 복음을 그들이 시기심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마지막 주자임을 깨닫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 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민은 욕 단의 후예로서 욕단이 가진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잃 어버린 고대역사를 복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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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하버드 교수가 한국에서 밝혀낸 한자의 충격적 진실!
    동이족이 만든 한자에 성경 내용이 담겨있다? 학계가 발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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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박삿 후손 벨렉과 욕단 미스터리
    - 욕단과 단이 우리 한민족 조상?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벨탑, Pieter Bruegel the Elder, 1563, /출처 위키피디아

    아브라함의 조상 벨렉과 바벨탑 사건

    성경은 에벨(Eber)의 후손 벨렉-르우-나홀-데라-아브람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아브라함의 직계 조상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창 11:16~26; 대상 1:19-25; 눅 3:35).
    이 가운데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누어졌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창 10:25; 대상 1:19). 오직 성경 계시에서만 확인이 되는 자료다. 즉 바벨탑 사건 이전 인류는 구음(口音)이 하나요 언어도 하나였다(창 11:1,2).

    그렇다면 홍수 이전 인류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홍수 이후 최초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비알파벳) 문자(쐐기 문자와 상형문자)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로 고대 셈어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예측할 수 있다. 언어의 혼잡이 일어난 바벨탑이 위치한 곳도 이곳 메소포타미아 지방이었다.

    그 셈어 가운데 주로 히브리어에 태초 언어의 원형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이야말로 최초 문자 탄생지였던 애굽(상형문자)과 메소포타미아(쐐기문자) 문명을 모두 체험한 세계 유일 민족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유 명사 등 특정한 언어자료에 있어 홍수 이전 언어와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언어 사이의 변동 폭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말 혈통이 신라어-> 고려어-> 조선어-> 현대 국어로 계승된 이유로 오늘날 문장 파악이 어려운 부여·고구려어나 백제어들을 추적하는 사학자들이 당시의 벼슬 이름이나 왕과 귀족들에 대한 칭호와 이름, 성씨, 지명, 숫자 개념들에서 그 흔적을 추적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 태초 언어의 원형은 언제나 회복될 수 있을까? 성경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일어난 놀라운 언어 통합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암시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가 온 땅으로 흩어진 때를 성경은 벨렉 시대부터 였다고 알리고 있다(창 11:8-9).

    비옥한 초승달 지대, /출처 위키피디아

    벨렉 시대 이후 인간은 빠르게 세속화되었다. 사람들은 홍수 교훈을 쉽게 잊어버렸으며 참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 그 양상을 섬기기 시작했다. 신은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대치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다. 이렇게 에덴동산 추방 이후에도 사단의 미혹이 은밀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을 인간은 간과하였다.

    이때 영육 간에 남보다 뛰어났던 함족 니므롯은 영웅이 되었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세속화된 지도자를 중심으로 멋지고 거대한 탑이 구상되었다. 탑은 영적이면서도 문화적이며 어떤 홍수도 이겨낼 만한 견고한 당대 최신 과학이 동원된 건축물이었다. 강림하신 하나님은 이 바벨탑을 보시고 사람을 모두 흩으셨다(창 11:5-9). 하나님이 사람을 흩으신 방법은 바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방식이었다. 홍수 이전 언어의 원형은 셈의 일부 후손들에게만 남겨 졌으며 언어는 다양해졌다. 인류는 그 흩어진 언어를 따라 민족과 나라를 구성하면서 온 세계로 흩어졌다.

    아브라함 조상 벨렉보다 번성한 욕단의 후손들

    벨렉이 30세에 낳은 아들 르우는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선조였다(창 11: 18-21; 대상 1:25; 눅 3:35). 반면에 에벨의 다른 아들인 욕단(Joktan)은 13명의 아들들이 있었다(창세기 10:26~30). 알모닷, 셀렙, 하살마웻,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는 땅은 메사(Mesha)에서 동쪽 산간 지역 스발까지 였다.

    이들 종족이 지금의 어느 민족을 말하고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현재의 어디를 말하는 지 명확히 밝히는 것은 어려우나 성경은 이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별로 흩어져 살았다고 했다(창 10:31). 금으로 유명한 오빌과 사베안족과 연관된 스바의 지명을 참고할 때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아마도 오늘날 아라비아 땅에 주로 정착했다고 본다.

    성경이 벨렉의 후손들과 달리 욕단의 후손들 이름을 이렇게 상세하게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분명 욕단의 형 벨렉도 르우 말고도 많은 자녀를 낳았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창 11:18-19). 239세를 살았던 벨렉은 아마 조상인 셈-아르박삿-에벨처럼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많은 자녀들을 양육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르우 이외 벨렉의 자녀들 이름은 생략하고 동생인 욕단의 자녀들만을 소개하고 있는 걸까? 그 구체적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창세기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 욕단의 자녀들은 벨렉의 다른 자녀들과 달리 많은 이들에게 익히 알려진 족속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12지파의 모자이크. 예루살렘 Givat Mordechai Etz Yosef 회당 외관, 맨 위 줄 오른쪽에서 왼쪽: 르우벤, 유다, 단, 아셀 중간: 시므온, 잇사갈, 납달리, 요셉, 단지파의 상징은 저울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 민족이 셈족 욕단, 단 후손?

    우리 민족을 셈족으로 비정하는 주장에는 세 줄기가 있다.

    먼저 심정적으로 막연히 셈족으로 보는 경우이다. 아시아인인 이스라엘 민족이 셈족이요 한때 페르시아제국을 이루었던 오늘날 이란의 조상인 엘람족이 셈족이요 지금의 이라크 땅의 주인이었던 대제국 앗수르의 주인공도 셈족이므로 같은 아시아 민족인 우리 민족도 당연히 셈족일 거라고 여기는 심정적 셈족설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어떠한 성경적, 인종학적 결정적 증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우리 한 민족을 함족으로 비정한다. 물론 이것도 성경적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단 지파를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단군”과 “단”지파의 언어적 유사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단 지파의 오랜 무대는 가나안 땅이었다.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요 야곱 아내 라헬의 종 빌하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단이었다. 출애굽 시 성막 제조를 도왔던 아히시막의 아들 오홀리압(출 31: 6)이 단 지파였으며, 사사 삼손도 단 지파였다(참조: 삿 13-16장). 야곱의 축복 예언 가운데 단은 독사로 말의 발굽을 물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창 49:16-17). 이 예언을 통해 단 지파는 싸움에 능하고 싸움에 직면할 처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모세는 단을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강한 사자 새끼’(신 33:22)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예언처럼 단 지파는 요단강 동편에 있는 바산 부근의 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처음 단 지파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사이의 한 지역과 해안 평야 지대를 분배 받았다. 가나안 정착 이후 왕국 시대 이전까지 단 지파는 이렇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있었다(수 19:40-47). 이렇게 야고보가 모세의 예언대로 단 지파는 늘 블레셋과 아모리 족속과 충돌하면서 전쟁에 노출된 지파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스라엘의 12 지파 가운데 오직 단 지파만이 하나님의 종들 144,000명의 명단에서 누락된 것을 볼 수 있다(계 7:4-8). 단 지파는 여로보암 왕 시절 우상 숭배에 열심이었던 지파였다(왕상 12:29). 단 지파는 에브라임 중심의 북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우상의 미혹을 뿌리치지 못한 지파가 되었다. 에브라임 중심의 북 10개 지파가 사마리아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단 지파는 더욱 하나님 눈 밖에 나게 된다.

    단지파의 초기 영토는 이 지파지도에서 블레셋 북쪽의 짙은 녹색으로 나타난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렇게 단 지파는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와서 12 지파 명단에서도 탈락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사라진 그들 단 지파가 우리 한 민족 조상 단군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너무 큰 비약이다. 설령 단군이 단 지파라 하더라도 그것은 명예가 되기는커녕 우리 한 민족이 비운의 민족이라는 멍에를 덧입을 뿐이다. 일부 일본인들조차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비운의 단 지파의 후예들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기만 하다. 우상 숭배로 인해 12 지파 가운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제외되고 하나님 공동체와 멀어진 비운의 단 지파가 그리도 좋을까?

    마지막으로 욕단을 언어적 유사성으로 인해 우리의 단군에 비정하는 주장도 있다. 이것도 우리 민족을 셈족 욕단 후손이라 전제하고 억지로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려는 위험한 접근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억지로 우리 민족이 셈족 가운데 언약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닌 곁가지에 불과한 욕단 후손이라는 황당한 꿰맞추기 주장이 민족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자부심이 될까?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할례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마음의 할례가 참 할례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달신(月神)을 섬기던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마엘과 에서도 야곱의 후손들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졌다. 심지어 육적 아브라함 후손들은 오늘날 대부분 그리스도 예수를 메시아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셈의 후손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는 민족이나 국가는 없다. 지극히 소수의 개인만이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육체적 셈족이 영육 간에 복을 받는 다는 신화와 착각에서 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무 근거도 없이 굳이 우리 민족을 아브라함 반열도 아닌 욕단의 후손이라 복을 누린다는 착각과 신화와 집착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브라함과 달리 욕단에게는 육체적 할례 언약조차 없었다. 더구나 할례 언약이 중요한 언약이기는 하나 이것이 언약의 전부도 아니다. 육체적 할례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 후손들(유대, 이스마엘, 에서 등)조차 신앙과 멀어진 현실을 보라!

    지금까지 노아 후손들 행로를 추적해 볼 때 우리 민족의 큰 줄기는 셈의 계열이 아닌 야벳 족의 흐름을 따라왔다고 본다. 역사는 신앙이 오히려 이방 야벳의 땅에 씨가 뿌려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믿음의 할례가 필요하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욕단의 육적 후손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을 뿐더러 설령 욕단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발굴과정에 있는 우르의 지구라트, /출처 Woolley, C. Leonard. "The Ziggurat of Ur." The Museum Journal XV, no. 2 (June, 1924): 107-114. https://www.penn.museum/sites/journal/1235/

    아르박삿 후손들의 미래

    모든 셈의 후손들이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아니다. 또한 모든 아르박삿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니었다.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 명목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일 거라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며 거짓 선지자 노릇하는 이단, 사이비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마 7)! 명목상의 아르박삿 후손이나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만 전도하면 종말이 온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차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참 자녀를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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