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의”는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실이나 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와 관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으로
“의”는 “정의”나 “공의”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의인이라고 인정을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구약에서는 율법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노아, 욥, 다니엘 (겔 14:14).
에스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을 말합니다(롬 1:17).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義)”는 관계(relation)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다면 내가 의식주의 문제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문제를 갖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로마서 14:17)와 하나님의 의(로마서 3:22)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자녀는 부모님이 계시므로 그런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는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성경에서의 의(義)
1. 공의
2. 정의
3. 관계
어느 것을 사용할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1:17은 유명한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서도 ‘의’란 ‘관계’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이걸 공의나 정의로 해석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실수하거나 오해하여 복음에는 공의/정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복음에는 공의나 정의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자녀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최소한 이 두 구절(마 6:33, 롬 1:17)만큼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히 12:11도 "관계"로 해석하여 전체적으로 올바른 해석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속에서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짐) 로마서 14:17
“의”(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나는 그의 아들이요 딸이다)를 구하고 찾으라 로마서 3:22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내 마음, 내 가족, 우리 교회, 우리 나라, 모든 세계에 이루어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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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1. 의는 사적 - 개인적인 덕목
2. 정의는 공적 - 사회적인 덕목
3. 공의는 공적 - 법적인 덕목
의(義) :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뜻함.
공의(公義) : 공명정대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속성. 공의의 원어는 의로 번역됨.
정의(正義) : 하나님의 본성. 타락전 인간의 완전한 의.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의와 공의
랍비 리스킨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You must help again and again with him/출23:5)"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출21:1)” :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어서 공표하도록 지시하신 이 '법규'의 히브리 원어는 '미슈파트(משפט)'로 그 의미는 '도덕적 정의에 관한 법(the laws of the moral justice)'이다.
모세가 미슈파트(mishpat)의 개념을 통하여 첫 번째 이스라엘 족장인 아브라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루시려 했던 거룩한 뜻을 이제 모세로 하여금 구체화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tzedakah)와 정의(mishpat)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18:19)".
하나님 나라의 두 큰 이상(ideals)이자 두 기둥, 즉 '공의와 정의(righteousness and justice*)'는 성경에 그 뒤로도 계속해서 반복하여 언급된다 :
"시온은 정의(mishpat)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tzedakah)로 구속함을 받으리라(사 1:27)"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특히 예레미아의 이 예언적 가르침을 우리는 성전파괴 추도일이자 주권상실의 날인 Tishab B'av(아브월 9일)에 찬양으로 지어 항상 부르고 있다.
이 도덕적 정의(moral justice:mishpat)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법과 질서 없이 정의사회와 자유세상을 구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공의(체다카:Tzedekah:צדקה:righteousness)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카리타스(karitas)라고 하였지만, 사실 카리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헨(hen: חֵן)으로 자비(graciousness)의 뜻이므로 결국 charity(자선)의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체다카(Tzdeakah)를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성경의 의도인가? 이 핵심단어가 갖는 이중(ambigous)의 의미가 토라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예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인간의 모범적 감성을 보이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백성이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an act of tzedakah)이 되리라(신24:10-13)".
히브리어 체덱(tzedek:צדק)은 정의(justice), 명확(precise), 그리고 양 당사자 간의 정확한 일 처리(exact treatment of both side)를 의미한다. 그런데 체다카(Tzedakah:צדקה)는 체덱과 동의어이긴 하지만 사실은 명백히 다른 명사라고 봐야 한다. 체다카는 자애심(loving-kindness)과 정의(justice)가 융합된 단어로서,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충분하지 못한 대접으로 대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 필요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도 스스로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토라가 제시하는, 칠 년에 2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는 십일조는 비교적 적은 양이다. 또 모든 농지 소유자들은 그들 땅의 일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떼어놓아 그들로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매일 아침 일어나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밭을 매고 추수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룻기는 모압여인 룻이 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타지에서 처절한 가난과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마을의 유지인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을 주었던 장면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같은 내용이다. 탈무드는 우리의 이웃이 비록 적일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도 우리와 함께 하는 형제이므로, 우리에게 끝까지 그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더라도 그의 짐승이 구덩이에 빠져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없을 때에는 끝까지 그를 도와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미슈나(Mishna)에 "여행 중에 한 사람이 함께 동행하는 다른 사람에게 ‘내 것은 내 것이고 당신 것은 당신 것이요’라고 했다면 아마도 중용의 도리로는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당신 것은 내 것이요’라는 뜻이겠지만, 무지한 사람에게는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당신 것도 당신 것이요’가 되어 법의 요구를 넘어 ‘당신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은 내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짓이다(One who says that 'mine is mine and yours is yours' travels the middle of the road, perhaps even the golden mean; 'mine is yours and yours is mine' is an ignoramus; 'mine is yours and yours is yours' goes beyond the requirement of the law; 'yours is mine and mine is mine' is wicked.)" 라고 나온다.
가난한 자가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요구만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유일한 해법은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가 세상에 올바로 정립되어 부자들에게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를 보장하여 주는 한편, 그들이 속한 사회를 개선시키도록 독려 또는 명령하여 그들이 기금을 내어 그것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Tzedakah and Mishpat(צדקה ומשפט) : 체다카 와 미슈파트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본 이유이자 하나님의 사회정의(social justice)실현의 표어라 할 수 있는 "의와 공도(창 18:19)"의 히브리어 단어로써 신/구약을 아우르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이지만, 우리 한글성경에는 여러 다른 단어들로 번역이 되어있어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이사야서에는 주로 "정의와 공의"로 번역이 되어 있으며,
랍비 리스킨은 이것을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와 도덕적 정의(moral justice)"로 표현하였고,
랍비 삭스는 "분배의 공점함(Distributive Justice)"와 "재판의 공정함(Retributive Justice)"으로 정의하였다.
요약하면 체다카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재화의 분배(자선)를,
미슈파트는 올바르고 공정한 법의 집행을 강조하여 억울하고 소외됨이 없는 평등한 정의 사회실현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 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 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의(義)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를 잉어권에서는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의의 한국말 새김이 '옳음'인데, '롸이쳐스니스'의 어근 '롸이트(right)'도 '옳다'는 뜻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의(正義)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3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잉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공적인 덕목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잉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잉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편5절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장5절에서 잉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로 똑같이 "체다카"인 것을 잉어 성경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달리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레미야서 23장5절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잉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 개념은 원래는 의와 같은 개념이었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덕분에 개인적/사적인 덕목과 사회적/공적인 덕목을 구분해야 했던 사정에 따라서 분화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띵가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예수님-성직자의 관계는 양-목자-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공의(公義)
이 낱말도 역시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져서 20세기초에 한반도에 들여온 일본식 한자인데, 정의와 마찬가지로 '저스티스'의 번역어였습니다.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래의 번역어였던 '저스티스'와 '젓지먼트(judgment)'를 가리키는 말로 그냥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의와 정의와 공의는 모두 '옳음'이라는 덕목을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런 덕목이 자리를 잡는 위치가 제각각 다릅니다.
의(義)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수신 덕목입니다.
정의(正義)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약속된 공통의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덕목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한 덕목입니다.
공의(公義)
정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이지만, 그 적용은
정의에 비해 훨씬 제한적입니다.
명시적인 법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에 비추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공식적인 심판 과정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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