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태어나신 곳은?
[질문] 한국의 목사들은 "예수님이 마구간의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
즉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말 구유에 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인숙의 구유"에 누이셨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의 여행에서 현지 가이드들은 분명히 마구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하 동굴의 집이기에 말이나 소 같은 동물은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양들은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목사들은 마구간이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냐고 덤벼듭니다.
마음대로 추측해서 말해도 이
정도는 괜찮은 것인지요.
한국식 마구간에 들어가 잘 수 있을까요?
말이나 소가 쉬하면 웬만한 곳은 오줌 바다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미국 사람들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지요?
[답변] 미국 목사들이라고 특별한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부분에 관해선 그 기록을 당시 상황에 맞추어 해석한 여러 의견을 다 함께 소개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 때 구유에 누인 것에 관한 성경 기록은 아래 세 구절뿐입니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눅 2:12)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눅 2:16)
따라서 성경에는 구유(manger)라는 말만 나와 있지 어느 곳에 있는 구유인지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구유가 있었던 장소와 연결해서 요셉 일행의 숙박 장소를 추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 일행의 숙박 장소는 일단 성경 기록대로 사관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사관을 일반적인 여관을 뜻하는 헬라어
판도게이온(눅 10;34, 우리 말 성경에선 주막으로 번역됨) 대신에 공공숙소, 여관, 객실, 다락방 등으로 번역되는 카달뤼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예수가 탄생한 장소는 일단 여관(Hotel, Inn)의 객실은 아닙니다.
또 당시 베들레헴이 아주 작은 소읍이라는 것을 감안 하면 여관 혹은 공공숙소는 겨우 한두 개 밖에 없었을 것인데 마침 호적할 때라
여행객이 평소보다 많아 빈방이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간혹 여관 주인이 나사렛에서 온 임산부 일행을 박대해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해석은 무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나머지 가능성은 사관에 딸린 마구간 혹은 곡식창고, 일반 가정 집, 또는 들판입니다.
왜냐하면 그 세 곳에 다 구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옥외에 양떼를 모으는 곳들이 있고 구유가 있었긴 하지만 아무래도 들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당시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 할지라도 모세의 율법에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계명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며 만삭의 임산부를 문전 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간혹 들판에서 예수를 출산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 또한 무리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곳은 사관에 딸린 마구간 혹은 가정집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팔세스타인 지역의 일반적인 가옥 구조는 아래 위가 뚫린
One Room Style로서 그 중간에 다락 형태로 간을 나눠놓았습니다.
그 다락에는 사람들이, 아래는 가축이 기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서부 영화에 종종 나오는 지붕이 높은 곳간 한쪽 벽에 중간 다락을 만들어 놓은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
아래쪽에는 주로 석회석(Limestone)으로 만든 구유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즈는 대충 길이 1m, 폭 50cm, 깊이
60cm 정도였음)
그런데 사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다락방도 의미하므로 개인 가정집 아래쪽의 가축들이 기거하는 장소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또 사관을 여관으로 해석해도 요셉 일행이 여관에 방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재워줄만한 가정집을 물색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관 주인이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라도 괜찮다면 자라고 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을 했던 성경대로 분명히 구유 근처에서 출산했습니다.
그리고 구유란 가축 전용의 마구간이든, 가정집 아래층이든,
곳간이든 가축들이 항상은 아니지만 기거하는 곳입니다.
요셉 일행은 그런 곳에서 숙박하고 예수를 출산했던 것입니다.
가축들이 있다고 해서 항상 축축하고 지저분하지는 않습니다.
일부는 그렇지만 건초나 사료를 쌓아둔 마른 땅도 있습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를 젖은 땅에 둘 수도 없고, 건초가 깔린 곳이라고 해도 벌레들이 많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곳에도 쉽게 누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구유에 물이 없이 말라 있었으므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누이기에는 가장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구유에
물이 말랐다는 것은 예수가 탄생했을 때에는 마침 그곳에 가축이 없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 장소를 마구간이라고 한정하기 보다는 위에 설명한 내용대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은 요셉이 숙박한
장소에 대해선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갓 태어난 아기 예수는 분명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여졌다는 뜻입니다.
예수 탄생에 대한 잘못된 전통들
예수 탄생에 대한 기독교 전통들을 살펴 보면,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들이 있다.가장 흔한 예로, 동방에서 온 세명의 박사들 (wise men or magi)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개정되기 이전의 찬송가 123장 “저 들밖에 한 밤중에”의 4절에는 “동방 박사 세 사람” 이란 가사가 있다.
아마, 박사들이 황금, 몰약 그리고 유황을 바쳤기 때문에 세 사람으로 추정하는듯 하지만, 성경에는 언급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 “말 구유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는 전통 역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물론 “구유(Manger)” 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꼭 그 구유가 “말 구유”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1세기경 당시 일반 유대인들이 말을 사육하였는지는 매우 의심스런 일이다.
구약 성서 시대 당시 유대인들의 흔한 직업인 목축업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양, 염소, 그리고 나귀등이다.
말은 주로 전쟁이나 왕족들이 타는(삼하 13:29, 왕상 1:33, 44,
18:5) 동물로 일반인들이 소유할 수 없는 아주 비싼 동물이었다.
히브리어로 구유를 בוס (에부스)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3번 구약 성경에 등장을 한다.
18. 구유(에부스) אֵבוּס
어원 / 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외양간(욥 39:9), 구유(잠 14:4, 사 1:3).
구약 성경 / 3회 사용
-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אבוס)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3)
-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 (אבוס) 에 머물겠느냐 (욥 39:9)
- 소가 없으면 구유 (אבוס)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잠 14:4)
헬라어로 구유를 Φατνη (파트네) 라고 하는데 신약에 4번 등장한다.
5336. 구유(파트네) φάτνη, ης, ἡ
관련 성경 / 구유(눅 2:7,12, 16), 외양간(눅 13:15).
신약 성경 / 4회 사용
-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7)
-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라 (눅 2:12)
-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눅 2:16)
-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눅 13:15)
이상의 성경적 예들을 보더라도, 말 구유 전통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은 외양간 혹은 양떼나 염소들의 우리일 수도 있다.
마굿간이라고
할때 집에서 일정 거리가 떨어진 곳에 만든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외양간이 집안에 있지 않다는 것과 서양,
예를 들면 미국의 마굿간이 집밖에 있다는 개념을 성경의 마굿간, 외양간, 혹은 양 우리에 적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예수의 탄생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만삭이 되었을 때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는 것 역시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예수 탄생 기사가 자세히 기록된 눅 2:6을 주의 깊게 읽어보자.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While they were there)."
즉 이 말은 마리아와 요셉이 만삭의 때, 즉 출산 직전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기 보다는 그 보다 상당 기간 앞선 때에 베들레헴에
와 있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출발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요단 동편길을 따라 온다면, 적어도 150 km 이상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다.
만삭의 여인이 이런 장거리 여행을 짧은 기일내에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산모의 건강을 고려하였다면 요셉은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베들레헴을 향해 출발하였을
것이고, 베들레헴에 도착한 후 적어도 며칠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 마리아가 출산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눅
2:7은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마리아와 요셉이 상당 기간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었다면, 산모의 출산을 고려하여 그들은 장기 거처를 할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었어야 했다.
또한 베들레헴은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이다(눅 2:3, 4).
따라서 베들레헴에는 친족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친족들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만일 베들레헴에 그들의 친족이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유대 산골(눅
1:39)에 살고 있던 친족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있었기에 마리아와 요셉이 장기적으로 거주할 방을 구하지 못하였다면, 엘리사벳의
집에 거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예수 탄생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눅 2:7에 나오는 “여관”, 그리고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가옥 구조와 헬라어의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잠시
구약 성서로 눈을 돌려보자.
히브리어로 여관은 מלון (말론, 헬라어 카탈루마)이다.
창 42:27에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객점 (말론)"에 머물렀다.
수 4:8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유숙(말론)하였다.
여기서 "말론"은 객점이라기 보다는 들판에 임시로 머물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말론, 카탈루마는 여관, 객점, 유숙하는 곳, 혹은
객실등의 뜻이 있으며 문맥을 잘 살펴서 뜻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로 돌아가 보자.
한글 성경에는 여관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Inn 으로 번역을 하였지만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헬라어 καταλυμα (카탈루마)는 여관이라는 의미보다는 Guest Room 혹은 손님 접대용 방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카탈루마를 살펴보자.
-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 (καταλυμα)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막 14:14)
-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7)
-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눅 22:11)
1번과
3번은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 내용이며, 2번은 예수 탄생 기사에 나오는 것으로 모두 여관이 아닌 객실 (Guest
room)을 뜻한다.
성서 시대의 카탈루마는 “객실”로서 여관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산지 높은 곳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지리적
특성상, 오고 가는 상인들이 머물만한 여관이 있을 곳이 못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10장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주고, 그를 여관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는 πανδοχειον (판독세이온)으로 이 단어는 “여관 (주막)”을 뜻한다.
따라서, 눅 2:7에
“사관 (여관)”은 잘못된 번역이며, 객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사진 :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 (출처: http://lukechandler.wordpress.com/2011/06/24/a-visit-to-the-semitic-museum-at-harvard/)
다음으로 “ 있을 곳이 없음…” 이라는 표현을 보자.헬라어 τοπος (토포스)는, 여관방이 손님들로 가득 차서 빈방이 없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 공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장소가 아이를 출산할 만한 공간이 못된다는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한다.
혹, 여유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여자가 출산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다.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가옥 구조를 살펴보면, 왜 마리아가 구유가 있는 곳에서 예수를 출산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 안에 동물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두었고, 아래층에는 주로 주방과 동물 우리, 그리고 윗층에는 가족이 거주하는
방과 객실이 있었다.
물론 빈부 차이에 따라서 거주하는 공간의 넓고 좁음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발견된 1세기 경의 집터들을 보면
객실을 만들어 놓았던 증거들이 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한 곳은 그녀가 거주하고 있었던 집(눅 2:6 While they were there)의 아래층에 있는 동물들이 거하는 우리(Stall)가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마리아와 요셉이 출산을 하기 위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빈 방을 찾았다?
여관방이 손님들로 가득 차서 들어갈 수
없었다?,
아니면 사람들이 마리아의 출산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몰차게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 라는 식의 말들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전통과 상상이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장 천한 곳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비성경적인 전통들을 즐겨 언급하지만, “성경적 근거를 대시오!” 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비성경적인 전통으로 예수의 탄생을 미화하거나, 과장한다면 이는 성경을 왜곡하는 것일 뿐이다.
그 분이 말 구유가 아닌 왕궁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창조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분은 가장 낮은 곳으로, 그리고 가장 천한 곳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까?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구하기 위해 바퀴벌레가 되려는것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사랑을 확증하셨고, 구약 내내 약속해 주신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때 우리는 화려한 등장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누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예비하셨을까요? 베들레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베들레헴의 의미
베들레헴 (בֵּית לֶ֫חֶם)은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벧엘에서 ‘벧’은 집,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벧’은 집 ‘레헴’은 떡을 의미 합니다. 즉 ‘베들레헴’은 떡의 집(House of Bread)이란 뜻1 입니다.
왜 하나님은 ‘떡의 집’에서 예수님을 태어나시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이 되어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조세 등록을 위해 남편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밤에 묶을 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허름한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죠. 아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는 불결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생명의 떡’으로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게 됩니다.
그 때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구원자, 즉 메시아의 표적이 될 것이라 했고, 목자들은 정말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주셨던 모습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가 짐승의 떡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 짐승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입니다. 2 3
내가 내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자기들이 짐승임을 그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서 3:18>
사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알아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자, 배반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군 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기 위해서일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을 시켜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좋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 ‘떡의
집’ (House of Bread)에서 영생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 되어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없는 인구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4 그리고 왜 종교가 없는지에 대한 한 시민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 분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제 상황이나 고민하는게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분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즉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그것이 주 목적이 되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영생의 떡이니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영생의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쫓아온 사람들은 물론 다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그러나 예수님 곁에 남은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6:68>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더 많은 떡을 위해서 즉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어떤 분이셨습니까?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성부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낮고 천한 육신을 입고 찾아오시되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어떤 비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의 모습이나 귀족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웬만한 사람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궁에서 나셨다면 왕족이나 측근들 일부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천한 목수의 집안, 작은 마을, 마구간, 말구유에서 나셨으므로 누구나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비천한 사람도 자신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어계셨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첫 번째로 찾아와서 경배한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합니다.
당시 목자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6 이하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낮고 천하다고 생각합니까?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용납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절입니다.
교만한 사람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의사는 오직 병자들에게만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교만입니다.
비천한자라도, 가난한 자라도 교만한 사람은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탄생 하셨던 베들레헴에 가보면 예수님 탄생교회가 있습니다.
큰 성전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건물은 큰데 들어가는 문은 혼자 겨우 들어갈 수 있고 문 높이고 낮아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죄인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장소를 선택하여 이 땅에 태어 나셨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 마태복음 2:1 - 12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면
1.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말해 보세요(1절)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는데
1) 역사적으로 보면 눅2:1
[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으니 ]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지배할 때 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식민지 조세를 거두려고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본적지로 호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북쪽 나사렛에 살고 있었지만 다윗의 혈통인 유다지파였기 때문에 고향 베들레헴에 정혼한 마리와와 함께 호적을 하러와서 갔다가 예수님을 탄생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벌써 700여년 전에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6절은 바로 미가5:2절의 인용으로서
[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한
바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간 것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영이지만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당신의 뜻대로 돌리신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룩하시기 위해 로마의 시저도 들어 쓰시고 멀리 페르샤의 박사들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동방박사들은 멀리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다가 이상한 별을 보고 [ 이건 분명히 새 왕이 나타났다는 징조다 ] 라고 믿고
수 만리 길을 걸어와 유대 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탄의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동방은 페르시아를 말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란, 이라크 지역입니다.
왜냐하면 박사라는 칭호는(magi)라 해서 페르시아와 갈대아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현인들에게 붙여주는 것인데, 이 칭호가 페르시아에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가 드린 예물이 황금, 유향, 몰약을 드렸다고 해서 세 사람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확히 몇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별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있습니다만 별이 움직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별을 움직여 그가 메시야 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 즉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이 되자면 별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 별의 인도를 따라 유대 땅 까지 왔지만 깜박 자신들 생각에 왕으로 나신이 같으면 궁궐에 있겠지 하고 예루살렘 궁궐로 찾아갔을 때 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궁궐에 찾아가 헤롯 왕에게 [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 ]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함이 없는 성탄은 항상 마음을 높은데 두는 성탄이 되고 맙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말구유에 오신 예수가 아니라 궁궐에 오신 수퍼 스타 예수로 자신의 야망을 이룩하는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동방박사들의 방문 소식을 들은 헤롯 왕과 예루살렘 군중들은 이 소문을 듣고 소동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성탄절이 되면 온 나라가 소동하고 온 세상이 소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성탄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신론 국가인 일본에서도 대다수가 범신론 내지 무신론자로서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화려하게 성탄절을 준비하며, 즐깁니다.
일본의 기업가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성탄절을 취급하며 그리고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흥청거리며 놀 수 있는 날”쯤으로 성탄절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처럼 안타까운 일은 일본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있는 일인 것입니다
온 예루살렘 군중들이 소동을 하는 가운데 헤롯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에 나겠느뇨? 하고 물었습니다.
본래 서기관들은 성경에 정통이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선지자의 기록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고는 미가 5:2을 인용합니다.
[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라라 ]
예수님은 베들레헴 땅 그것도 여관의 빈방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에 대해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미가 5:2절에는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 합니다.
베들레헴은 본래 에브라다라고 불리워진 곳인데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 났습니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별의 인도함을 받다가도 순간적으로 왕이 태어났으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겠지 하고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찻아간 박사들의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별을 따라 머무는 곳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왕궁에 살기를 원하고 왕궁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우리를 왕궁에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 낮고 천한 마굿간으로 인도하십니다.
유럽 교회에 가보면 교회의 웅장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 마굿간이 세워지고 어머니 마리아 앞에 아기 예수님을 눕히고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셋트가 마련됩니다.
그 셋트가 실물크기로 만들어 졌으나 교회 건물이 하도 커서 돋보여야 할 말구유 예수가 한쪽 구석 휴지통같이 너무 초라하게 놓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교인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교회란 말구유 사건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어느 듯 교회가 말구유 사건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더 우리의 마음 속에 부각되는 것은 말구유의 예수가 아니라 궁궐 안에 있는 예수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과 쾌락의 예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만화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잊혀진 남자 - 예수라는 말이 있듯이
성탄의 주인공 예수님이 없는 성탄이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오강남>이란 교수가 서울에 있는 현암출판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근간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책이 초판 제1쇄가 발행된 몇 달 만에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못 읽어 보았습니다만 이 책 제목을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들어요. 오강남 교수가 어릴 때부터 교회 출석한 교인이요
지금도 자신은 크리스챤이라고 말합니다만 [ 그래 눈이 뜨여진 사람은 볼 것이고 눈이 안 뜨여진 사람은 못 볼 것이고 ]
못 보면 없다 할 것이고 보면 있다 할 것이고, 그렇죠?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파문이 커지니 조금 양보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현대교회가 가르치는 예수는 없다 ]
이건 좀 생각해 볼 말이 아니겠습니까?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이 있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이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궁궐에 앉아 있는 헤롯 왕 같은 사람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내려 올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의 탄생이 반갑잖은 스캔들로 듣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의 헤롯의 반응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헤롯 왕은 서기관들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가 언제인가? 라고 물으며
아기를 만나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아기를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헤롯의 꿍꿍이셈이 있습니다.
결국은 헤롯왕은 박사들이 천사들의 지시로 고국으로 말없이 떠난 후 베들레헴 지경 내에 있는 두 살이하의 어린아이를 다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을 저지럽니다.
항상 자기가 왕이 되어 있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애매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죽어야만 하는 비극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척한 마음에는 사탄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와 최고의 쾌락을 약속합니다만 그러나 결과는 실망과 파괴요 죽음이요 멸망인 것입니다.
황금은 성경에서 황금은 창세기 2장 11,12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지만 인간사에 항상 보물로 여겨 왔으며 권세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유향은 매우 향기로운 것으로 성전의 제사를 위한 향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라비아의 한 나무에서 얻은 수액을 증류해서 만든 것입니다.
몰약은 거의 아라비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낮은 가시나무에서 추출되는 귀중한 것으로 좋은 연고를 만드는 중요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23절에서는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세 가지의 예물이 상징하는 바는 황금을 드렸다는 것은 바로 아기 예수가 만왕의 왕임을 뜻하는 예물입니다.
유황을 드렸다는 것은 제사장 직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몰약을 드렸다는 것은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즉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본래 히브리 말로 메시야는 헬라말로 그리스도란 말로서 그 뜻은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메시야로서 그 분은 만왕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대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며 선지자로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경배하되 예수가 우리의 메시야라는 신앙의 고백 위에 드려지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신앙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부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제목의 보잘것없는 그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줄 믿습니다.
자신들의 보물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동방박사들이 예물처럼 오늘 나는 주님께 드릴 최대의 성탄의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했을 때 제일 먼저 예물을 드린 사람은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아니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네 번째 박사 <알타반>이 있습니다.
본래 동방에 박사 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Caspar), 멜키오(Melchior) 발사살(Balthazar) 그리고 알타반(Artaban)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재산이 많은 부자들이었고 학문이 많은 박사들이었고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야가 태어날 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태어날 때 새로운 하나의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별이 나타나면 네 사람이 10일 후 한 곳에 모여서 각기 준비한 보물을 가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메시야께 경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재산을 다 팔아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사 가지고 밤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캄캄한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흥분한 알타반 박사는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 별이다. 왕이 오셨다. 나는 왕께 경배하러 가야 한다."
알타반 박사는 가장 빠른 말에다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 약속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열흘 동안 달려서 바벨론 교외 어느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게 되었을 때 길가에 쓰러진 불쌍한 병자를 만나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빵과 포도주와 여비를 모두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른 박사들이 편지를 남기고 떠난 후 였습니다.
" 기다리다 떠납니다. 우리 뒤를 따라 사막을 건너 오십시오 "
알타반 박사는 너무 기가 막혀 땅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 음식도 포도주도 약초도 여비도 없이 지친 말을 타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한숨을 쉬면서 알타반 박사는 바벨론 도시로 돌아가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사파이어 보석을 팔아 낙타와 음식과 여비를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향해 먼 사막 길을 떠났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동방 박사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베들레헴 거리는 음산하고 삭막했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잡으려 집집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알타반 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삼일 전에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다 잡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군인들이 들이 닥쳤습니다.
아기를 안은 그 여인은 온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군인에게 커다란 루비 보석을 쥐어 주었을 때 군인 장교는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고 하면 돌아서 갔습니다.
그때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왕께 드릴 보석을 사람을 위해 또 썼습니다. 내가 왕의 얼굴을 볼 자격이 있습니까? "
알타반 박사는 다시 왕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의 곳곳을 찾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랍비를 찾아가서 물으니 " 메시야는 부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 " 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 박사는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과 노예 시장을 찾았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왕을 찾기 위해서 집을 나선지가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 있을 그의 왕 메시아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유월절 절기 때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 가를 향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 우리는 지금 처형 장면을 구경하려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강도 두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나사렛의 예수가 처형을 당하지요.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사람의 말이 알타반의 가슴에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 왕이 처형을 당하다니!
나는 이제라도 왕을 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왕을 구해야 한다.
하나 남은 보석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의 왕을 구해야 한다."
알타반은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군인들이 한 젊은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타반이 잠시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여자는 군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알타반 박사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 할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저는 지금 노예로 팔려가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알타반 박사는 또 한번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손에 진주를 꼭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딸아, 이것이 네 몸 값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보석이다."
알타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기진 맥진해서 쓰러졌습니다.
알타반의 인생 여정은 마지막 종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왕을 만나려던 그의 한 평생의 추구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알타반은 신음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저녁 노을의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알타반아! 알타반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끝났습니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께 기쁘게 열납되었습니다.
결국 네 번째 동방의 박사는 왕을 만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그의 왕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만났습니다.
오늘 나는 주님께 드릴 최대의 선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의미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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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구하기 위해 바퀴벌레가 되려는것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사랑을 확증하셨고, 구약 내내 약속해 주신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때 우리는 화려한 등장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누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예비하셨을까요? 베들레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베들레헴의 의미
베들레헴 (בֵּית לֶ֫חֶם)은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벧엘에서 ‘벧’은 집,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벧’은 집 ‘레헴’은 떡을 의미 합니다. 즉 ‘베들레헴’은 떡의 집(House of Bread)이란 뜻1 입니다.
왜 하나님은 ‘떡의 집’에서 예수님을 태어나시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이 되어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조세 등록을 위해 남편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밤에 묶을 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허름한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죠. 아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는 불결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생명의 떡’으로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게 됩니다.
그 때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구원자, 즉 메시아의 표적이 될 것이라 했고, 목자들은 정말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주셨던 모습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가 짐승의 떡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 짐승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입니다. 2 3
내가 내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자기들이 짐승임을 그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서 3:18>
사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알아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자, 배반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군 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기 위해서일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을 시켜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좋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 ‘떡의
집’ (House of Bread)에서 영생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 되어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없는 인구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왜 종교가 없는지에 대한 한 시민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 분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제 상황이나 고민하는게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분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즉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그것이 주 목적이 되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냐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영생의 떡이니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영생의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쫓아온 사람들은 물론 다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그러나 예수님 곁에 남은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6:68>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더 많은 떡을 위해서 즉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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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가?
베들레헴이 성경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35장입니다.
야곱은 아내가 네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라헬을 가장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이 온 식구들과 함께 벧엘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라헬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출산의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의 12번째 아들 베냐민이었습니다.
영어 발음으로는 벤자민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라헬은 출산의 고통으로 인해 길거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베들레헴에 묻었습니다.
창세기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성경에서 첫 번째 나오는 베들레헴은 죽음과 슬픔의 장소입니다.
지명마다 첫 인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담사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떠오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군사반란으로 인해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는 모습이 당시에는 세계의 토픽이었습니다.
또한 부엉이 바위라는 지명을 들으면 금방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생각납니다.
4대강 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 하면 첫 인상은 죽음과 슬픔입니다.
이러한 죽음과 슬픔의 장소 베들레헴에 생명의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복음을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죽음과 슬픔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을 생명과 기쁨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2. 이방인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이 두 번째 등장하는 곳은 룻기서입니다.
룻기 1:1-2
베들레헴에 사는 이스라엘 남자 엘리멜렉이 역시 베들레헴 여자 나오미와 결혼하여 기룐과 말룐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압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곳 모압에서 두 명의 아들이 이방 여인인 모압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미의 남편과 결혼한 두 아들이 자손도 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여자들만 과부로 덩그러니 셋이 남았습니다.
남편 잃고 아들 잃은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작은 며느리 룻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얼마 후 이방 여인 룻은 이스라엘 사람 보아스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 여인인 그녀가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의 피가 예수님에게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혈통은 순수 이스라엘의 혈통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 모든 사람들도 구원하시는 만인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인 우리 모두인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고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3.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의 고향입니다.
사무엘상 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사무엘상 17: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장차 메시아가 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계3:7) 거지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부를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라고 외쳤습니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므로 나를 치료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고로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리고 마태복음 1장 17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복음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히브리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알파벳마다 개인 숫자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윗이라는 이름의 알파벳 숫자를 모두 더하면 14가 나옵니다. 즉 유대인들은 14라는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14는 다윗의 숫자요,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암시가 있는 숫자입니다. 고로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한대로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되어 있기에 예수님은 다윗이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동방박사들이 방문하자 예루살렘은 크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수많은 장소 중에 예수님이 하필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4. 작은 것을 크게 들어 쓰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6)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합한 것 정도입니다. 차로 하루면 이스라엘을 다 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그 작은 나라에서 100 마을 안에도 안 들어가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당시 인구가 1,000명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마을에서 메시아가 탄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들어 크게 사용하시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건숙이라는 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 중 '지푸라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5남매를 길러 시집 장가를 보내고 나니 다 늙었습니다. 온 몸에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5년 동안 똥오줌을 받아 내며 뒷바라지 하다 보니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이제는 지푸라기 같은 인생이라고 늘 비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지푸라기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진흙땅에 떨어져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고 있었습니다. 천덕꾸러기 지푸라기였습니다. 그나마 그 지푸라기는 두 동강이 났습니다.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두 동강난 지푸라기 한 쪽을 입에 물고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새둥지를 만들었습니다. 새들이 행복하게 포근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반 동강 지푸라기는 농부가 주워 가서 새끼를 꼬는 데 넣었습니다.
그 지푸라기로 꼰 새끼가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지푸라기라도 제대로 쓰이면 쓸모가 있구나!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면 나도 쓸 데가 있겠구나!"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교회로 달렸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기도로 목사님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기도로 많은 사람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푸라기 같은 인생도 다 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우리, 보잘 것은 나도 사용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5. 마귀의 목을 꺽고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베들레헴은 유다 땅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12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땅을 분배할 때에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의 땅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죽을 때 유다를 향하여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
즉 예수님은 베들레헴 유다 땅에서 태어나 원수의 목을 잡아야 합니다. 즉 마귀의 모든 권세를 빼앗아 버려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마귀는 여자의 후손인 동정녀 탄생으로 오신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습니다, 즉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뱀이라고 불리는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홀은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 지휘봉입니다. 그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영원토록 왕으로 우리들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나셔야 했습니다.
6.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것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향하여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적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밥입니다.
빵이 빵집에서 나오고, 떡이 떡집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떡이신 예수님은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합니다. 떡은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먹으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떡이신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려 죽고 맙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해야 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사망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이방인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작은 것을 크게 들어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원수의 목을 꺾으시고 영원토록 왕으로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쪼록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행복을 가꾸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과 세금
예수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또 기독교인이라면 이것이 미가서 5:2절,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는 예언의 성취임을 압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직접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베들레헴을 가라는 명령하시기 보다는 세금이라는 세속적인 수단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1절은,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호적
등록’을 뜻하는 "아포그라페스다이(ἀπογράφεσθαι)"는 세금을 걷기 위한 호구 조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운영의 밑천이
되는 인두세를 더 많이 걷고자 호구조사 명령했습니다.
그의 명령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촌동네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정확한 숫자 파악을 위해서 황제는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요셉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정혼녀인 마리아가 언제 출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요셉은 배가
남산만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본적지인 베들레헴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법은 국가에서 가장 엄한 법입니다.
세법이 잘 지켜져서 세금이 잘 걷혀져야 나라가 운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권력자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걷고자 인두세와 더불어 각종 기이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3세가
창문에 세금을 부과하자, 부자들은 창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건물의 너비에 비례해서 세금을 내게 하자,
사람들은 건물을 높게 지었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절대 군주였던 표트르 대제는 한 때 수염세를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때
지중해의 어느 섬에서는 집 중앙에 벽돌로 아치형 기둥 짓고, 기둥 상단에 있는 벽돌 하나만 제거하면 집이 곧 바로 무너지는 구조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중앙 정부에서 세금 징수원이 나오면, 집주인은 아치 중앙의 벽돌 뺐고, 징수원이 돌아가면 다시 집을
복구했다고 합니다.
권력자들에게 세금은 주요 수입원이었기에, 그들은 시퍼런 칼을 앞세워 세법을 집행했습니다.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는 속담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2천년전
요셉도 세법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어서 몸이 불편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긴 여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무리한 여행을 강행하는 요셉에게 바가지를 굵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법이 무서워 그 고단한 여행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2017년 미국 가정은 평균적으로 수입의 24%를 연방소득세, 사회보장세, 메디케이세로 냈다고 합니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성탄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세법을 통해서 예언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매년 4월 15일은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는 히브리서 13:5절의 약속을 경험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세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세속적인 수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