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十誡命) - 안식일,





안식일의 규례

예수님의 안식일 개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유대인의 모든 절기가 안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연구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지킬 것인가만 연구했지 왜 지켜야 하는지는 질문하거나 연구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는 ‘왜’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 목적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규칙들이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위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중요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몇 가지 규칙에 집착하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편협한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든 ‘미슈나’라는 규정집이 있는데 거기에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서른아홉가지 목록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이 말씀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극적이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지켰습니다.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에 따라 거룩한 바리새인인지 아닌지를 평가했습니다.

거룩하게 지키는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주전 167년경 당시 안티오푸스 에피파네스 황제의 군인들이 안식일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방어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죽음도 각오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들의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먹은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판합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을 지나가시는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이오?’”(1~2절).
제자들이 배가고파 길을 지나다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신명기 율법을 보면 배가고픈 사람들이 추수 전후 밀 이삭을 먹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대신 밀 이삭을 먹을 때 낫을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포도밭에서 포도를 먹는 것은 허용하지만 바구니는 들고 가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낫을 대면 욕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먹을 만큼만 먹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어하신 것입니다.

포도밭에 바구니를 들고 가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이 안식일인 것이 문제입니다. 안식일에 먹은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이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을 타작행위로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문제를 삼았습니다. 참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놓은 종교적 규칙을 어긴 것입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피해 도망갔을 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이라는 떡을 얻어먹고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자신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된 떡을 먹었지만 하나님은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히멜렉도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아히멜렉을 힘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규정은 사람을 죽이는 규정이 아닙니다. 살리는 규정이다. 인간의 필요를 억누르고 무시하는 벌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규정도 뛰어 넘으십니다. 어떤 종교적 규칙도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은 대부분 종교분쟁입니다. 이념분쟁입니다. 민족 간의 갈등, 극단적인 테러주의자들은 잘못된 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위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잘못된 종교적 위선이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버려도 되는 전통, 지키지 않아도 되는 종교적 규칙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억눌려 있습니다.

인간의 필요를 존중하고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잘못된 일을 행하는지, 고소할 트집이 없는지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일으킵니다. 회당가운데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고소할 일을 찾기 위해 엿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9절).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자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둘러보신 후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금지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은 병을 고치는 것도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확대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의논했습니다”(11절).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이 펴지는 기적을 본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에 놀라지 않고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으니 어떻게 처리할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든 종교적 규칙을 어긴 것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종교생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앙을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 만듭니다.


기독교는 종교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상해지는 이유는 종교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 규칙을 잘 행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어기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장애가 고쳐지는 역사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규칙을 어겼다는 것에 집착해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신앙의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지, 아니면 죽이든지 악한 일을 행하는지가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그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맞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문제는 왜라는 질문을 잊어버리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집중하다 보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종교적 규칙을 지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면 모든 율법을 이루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은 일,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준 일을 정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규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증거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도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병이 38년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응급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응급환자만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팔을 고치신 이후 누워 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왜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걸어다느냐는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났는데 그 사건을 보고 놀라지 않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병만 고쳐주셨으면 바리새인들이 흠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을 어기냐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핍박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유대 사람들은 이 말 때문에 더욱 더 예수를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요 5:16~18).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의도적으로 깨뜨렸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례에 해당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만든 제도입니다. 성경에는 창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안식, 인간이 지켜야 될 안식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생명을 주십니다. 안식일이라고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태양은 뜨고 우주는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놓은 안식일을 의식하고 그 날을 피해 병을 고쳤다면 권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깨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안식일 규례를 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잘못된 종교적 위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왜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왜 쉬라고 했을까요. 일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일이 사람을 부리게 됩니다.또 안식일을 통해 우리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쉼을 명령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참된 주인을 경배하라는 뜻입니다.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 것인가’에 집착하면 종교적 규칙이 주인이 됩니다. 종교적 규칙을 만든 사람이 주인이 됩니다.

종교적 규칙에 갇히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종교적 위선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묵상하다 ‘왜’ 행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사람을 얽매는 종교적 교회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확인해야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종교적 위선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합니다.



아더 핑크, 「주일, 거룩한 안식일」 1부. 안식일의 제정과 의미

주일, 거룩한 안식일

아더 핑크 / 생명의 말씀사

내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그분의 길과 관련해직접 목격한 것 가운데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고, 복음과 그것의 원천이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은혜를 통해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일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안식을 상징하는 주님의 날일 것이다.

존 오웬

1. 안식일 규례의 제정

안식일은 타락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제정되어 유래되어 온 제도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기 오래전에 이미 '안식의 날'을 정해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제정하셨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2:2,3)

일곱째 날이 곧 안식일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안식일을 본래의 영광스러운 위치로 회복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존의 제도, 곧 창조 당시에 제정된 제도로 간주했고, 그것을 더욱 강화했다.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안식일의 의무는 그 어떤 것보다 앞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하게 만들고 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안식일을 정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첫 번째 제도다. 안식일은 처음부터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제도로 정해졌다. 안식일은 지금은 사라진 낙원의 영광에 온통 둘러싸여 있을 때도 인간에게 유익했다. 앞으로 얻어야 할 더 위대한 낙원의 영광을 얻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라는 부르심이 오늘날에는 특히 더 유익하다." - 페트릭 페어번

안식은 단순히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최초의 안식을 누리셨지만, 그것은 일체의 활동을 중단한 안식이 아니었다. 창조라는 하나님의 사역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그분의 섭리 사역, 수많은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사역은 계속되었다. 휴식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이유는 오직 한가지, 인간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였다.

"인간이 생산적인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잠시 포기하더라도 안식일을 통해 심신이 새로운 활력을 얻고, 영혼이 크게 고양되며,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관심의 증대와 영적 교제가 이루어져 그것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분깃이 되고, 항상 그분께로 되돌아가 지극한 영혼의 안식을 누림으로써 넘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 페트릭 페어번

안식일은 복된 날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다고 선언하신 이유는 그날이 안식일이고, 그날을 지키면 특별한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인간을 속박하기 위해 제정되지 않았다. 그날은 무거운 짐이 아닌 축복이다.

안식일은 구별된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안식일을 지켜 거룩한 용도로 사용하도록 정하셨다. 창조주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안식일은 노동이 이루어지는 다른 엿새의 날과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일곱째 날을 복 주신 것은 그날을 엄숙히 성별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토대로 그날에 모든 일과 활동이 오롯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요구하신다. 인간은 하늘과 땅이라는 광대한 극장에 펼쳐진 하나님의 무한한 선과 정의와 능력과 지혜를 일평생 탐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에 마땅히 기울여야 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특별히 따로 구별하셨다." - 존 칼빈

일곱째 날은 영속적이다. 창조기사에는 일곱째 날이 끝나 지나갔다는 암시가 없다. 여기에는 역사가 지속되는 한, 안식일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나가야 할 날이라는 중요한 암시가 있다.

2. 십계명 이전의 안식일 규례

세상의 창조는 족장들이 믿었던 중요한 신앙의 원리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족장들이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하신 전통을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족장들이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을 엄숙히 예배했다는 사실이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에 예배했음이 틀임없다.

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일곱을 신비로운 의미를 지닌 숫자로 간주했다. 일곱이라는 신비로운 숫자에 부여된 신성한 의미가 안식일에서 비롯했음이 틀림없다.

- 노아가 새를 날려 보냈던 때의 7일 기준

- 아브라함이 따로 구별한 일곱 암양 새끼

-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구혼할 때 7년

- 야곱이 에서에게 한 일곱번의 절

- 욥의 친구들이 애곡한 칠 일

시간을 일주일 단위로 구분하는 것은 자연의 무엇을 토대로 한 것일까? 그것은 실질적이고 인위적인 구분, 곧 권위에 근거한 구분이다. 역사적인 연대표들은 모두 그런 식의 시간 구분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서 그 기원과 목적일 발견할 수 있다.

○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당도하기 전,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다시 안식일의 규례를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만나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셨다. 이는 당시에 새로운 정신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를 기대해도 될 만큼 그것 대한 지식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었다.

3. 십계명을 통해 안식일 규례가 새롭게 갱신된다

○ ​네 번째 안식일의 계명에는 다른 계명들과 다르게 '기억하라'는 특별한 명령이 주어졌다. 이런 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안식일이 매우 중요하고, 또 우리가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식일을 함부로 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안식일을 경홀히 여기는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안식일 계명은 보편적인 구속력을 지닌다. 안식일은 과거의 유대인들만큼이나 우리에게도 똑같이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는 의무다. 우리는 일곱째 날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바침으로써 그분을 우리의 시간을 관장하시는 주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안식일 준수를 통해 주어지는 축복이 필요하다.

십계명을 통해 안식일 제도를 새롭게 회복하고 강화하셨다. 하나님이 강퍅한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해 언약을 맺으신 것은 순전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은혜는 항상 의를 통해 통치하며,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철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장 경이로운 방식으로 시내산에서 자신의 율법을 새롭게 하고, 안신일의 규례를 그 중심에 올려놓으셨다.

"기억하라"

창조와 안식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소중히 여기며, 그 정당한 요구에 복종하라. 안식일은 세상의 수고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은혜로운 날이요,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날이다. 이날은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안식을 예표한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행복에 관심을 기울시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잘 보여준다.

○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을 속된 용도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온전히 바쳐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따로 구별하신 시간을 조금이라도 훔쳐 악한 일아니 세속적인 활동에 사용하는 것은 거룩한 것을 도둑질하는 죄에 해당한다.

4. 안식일 규례의 오염과 하나님의 심판

안식일은 아무런 보호책이 없다. 안식일은 울타리가 없는 포도밭과 같아서 숲에서 나온 수퇘지나 들짐승들이 마구 짓밟아 망쳐놓기 쉽다. 그러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마음 상태를 시험하는 안식일의 기능이 더더욱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은 다른 어떤 것보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행위를 통해 더욱 노골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그분의 율례를 업신여기며, 그분의 안식일을 더렵혔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죽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우리를 위한 경고다.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겔20:13,14)

○ 하나님은 자신의 경고를 정확하게 행동으로 옮기셨다. 안식일을 더럽힌 결과로 국가적인 재앙이 임했다. 성전과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렘17:27)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날을 쾌락과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날로 변질시키고 있다. 만일 회계하고 행위를 고치지 않으면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게 될 뿐이다.

5. 안식일 규례는 오늘날에도 지속되는가?

기독교의 안식일은 구약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예고되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예언의 영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장차 복음의 시대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고 예고하신 율법은 바로 십계명이었다. 그들 안에서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섬기기 될 것이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2)

- 복음 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들의 경건함을 나타내는 뚜렷한 특징으로 언급되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사56:6)

○ ​안식일의 은혜로운 본질과 특성이 기독교의 특징과 성격에 완벽하게 일치한다.

- 하나님이 안식의 날을 정하신 이유는 피조물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은혜로운 규정은 새 언약의 성격과 취지에도 똑같이 적절하게 부합한다.

- 복음의 근본적인 특징이 박애를 실천하는 데 있고, 동정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친절과 사랑으로 돌아보는 것에 있다. 안식일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존중하셨고, 그 의미를 회복시켜 주셨다.

○ ​복음의 위대한 목적이 사람들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려면 주님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 안식의 날이 꼭 필요하다. 안식일의 거룩한 휴식과 경건한 활동은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일에 익숙해잘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특권을 누리도록 허용된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날을 즐거워하고 사랑한다. 복음의 정신에 더욱 깊이 심취하고, 마음에 거룩한 율법을 기록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할수록 안식일을 '즐거운 날, 존귀한 날'로 일컬으며 더욱 열심히 지키게 된다.







2부.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언약이 바뀌면 잇따라 그 목적도 바뀌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방식도 바뀌고, 안식의 날도 바뀔 수밖에 없다.

존 오웬

1. 첫째 날(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폐지하는 것일까?

예배를 드리는 날로 정해진 첫째 날은 "주의 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에는 첫째 날이 주님이 일곱째 날에 붕하신 것과 같은 똑같은 타당성을 지닌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아담에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일곱째 날이 지녔던 특징들이 한 주간의 첫째 날로 모두 옮겨졌다.

○ 네 번째 계명의 실질적인 내용은 한 주간의 어느 요일을 정확하게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7분의 1을 하나님을 구별하여 기념(예배)하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 결론: 한 주간의 마지막 말에서 첫째 날로 요일이 바뀌고, 그것이 더 나은 또 하나의 언약과 연관을 맺음으로써 더 고귀하고 영광스로운 사역을 기념하는 날로 변경되었다고 해서 그 본래의 의무가 폐지되고, 또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2. 새 언약이 요일의 변화를 요구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유대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복음의 신앙으로 세상에 전할 적절한 표징이나 증언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을 나타내는 외적 표징이었던 할례를 폐지하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대교의 안식일을 폐지하고, 세례를 기독교의 독특한 표징으로 삼으신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갈3:27) 한 주간의 첫째 날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제정하셨다.

○ 물질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장엄하고 복된 창조, 곧 죄나 사탄이 훼손할 수 없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 구원 사역은 그 중요성과 가치에 있어서 첫번째 창조 사역을 능가한다.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의 날을 변경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예수님은 새 창조의 머리이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요, 영화롭게 된 인성의 원형이자 보증으로서 그날에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결론: 우리는 요일의 변화를 안식일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그 복된 제도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동기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낙원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낙원을 얻었고, 언약이 깨지고 기업이 훼손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언약이 비준되었으며, 요동하지 않는 왕국이 임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자연의 언약과 사역을 기리기 위해 안식일의 표징이 주어졌다면 그보다 더 고귀한 사역과 언약은 더더욱 힘서 지려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런 변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것이 제정된 본래의 목적을 이루도록 돕는 한편,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그 신성함을 일깨우고, 그날을 사랑스럽게 여기게끔 민들어 줄 특성을 새롭게 부여하기 위해서다.

페트릭 페이번


3. 한 주간의 첫째 날이 기독교의 안식일이라는 증거

이런 변화가 구약 시대에 이미 분명하게 다양한 예표와 그림자를 통해 암시되었다. 여덟째 날은 새로운 순환의 첫째 날이었다. 그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구약성경은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여덟째 날이 그리스도께서 안식에 들어가신 날이자 그분의 백성이 그것을 기념하며 안식하는 날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 태어난지 여덟째 되는 날 시행하는 할례(창17:12)

- 여덟째 되는 날에 드릴 수 있는 희생제물(레22:27)

- 여덟째 날에 완결된 대제사장 봉헌 예식(레9:1)

- 부정하게 된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여덟째 날(민6:10)

- 첫 열매의 이삭 단을 제사장에게 갖다 주는 여덟째 날(레23:11)

- 성전 봉헌 때 거룩하게 구별된 여덟째 날(대하7:9)

위의 사실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그분은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셨고, 하나님은 그분이 드린 희생 제사를 받아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영원히 거룩하게 구별되셨으며, 자기 백성을 위해 죄를 속량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한 주간 내내 제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다가 그들이 안식 후 첫째 날에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다시 나타나셨다. 이런 사실은 그분이 그날을 제자들과 만나는 날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안식 후 첫째 날에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다. 이는 그날이 기독교의 안식일로 새롭게 제장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초대 교회가 한 주간의 첫째 날을 기념했다. 사도들과 그들의 감독 아래 있던 교회가 그들의 주인이신 주님의 계시된 뜻과 일치되는 일을 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히브리서 4장은 새로운 안식일을 명확하게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이 '어느 날'을 한정해 정하셨다고 선언헀다. 그는 8절에서는 과거의 '일곱째 날'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날이 제정되었다는 증거로 '다른 날'을 언급했다. 9절에서는 그 다른 날과 그것이 기념하는 안식을 '사타티스모스'(안식일을 지키는 것)로 일컬었고, 10절에서는 안식일이 바뀐 이유(그리스도께서 안식에 들어가셨기 때문)를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으로 일컬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을 마치고 한 주간의 첫째 날에 안식에 들어가심으로써 자신의 권위로 자기 백성이 어느 날에 안식을 지켜야 할지를 결정하셨다.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의무는 무엇이든 모두 주의 날로 이전했다. 그런 의무를 그날에 이행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이유는 그것이 유대교의 안식일보다 더 우월하고, 더 탁월하고, 더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 요세비우스


3부. 안식일(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늘의 영광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준비가 되어 그 안식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주님의 거룩한 날에 성령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리처드 백스터

1. 안식일(주일)은 구별되어야 할 날이다

안식일이 '주의 날'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주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날을 정하고, 복되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마음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외적인 헌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악한 것은 무엇이든 삼가야 할 뿐 아니라, 시간이나 정력과 같은 평범한 것들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날의 전부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오전 예배에 참석했다가 오후와 저녁에는 육신을 즐겁게 하는 속된 활동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주일의 일부를 우리의 것으로 도둑질하는 것이다.


2. 일하지 말라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일, 그리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일.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대로 손으로 하는 일이든 사무를 보는 일이든,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상관없이 일과 노동을 일체 중단해야 한다.

인간은 매주 하루는 휴식해야 한다. 이 법칙은 남편이나 아내, 주인이나 종, 짐을 나르는 가축 등 모두에게 구속력을 지니며 똑같이 적용된다. 공적 생활은 물론 개인 생활,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 주부가 주일에 일주일치 밀린 빨래를 모두 하게 된다면 주부에게는 오히려 주일이 일주일 가운데서 가장 힘든 날이 될 수 있다.

세상의 일은 중단해야 하지만 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육체의 휴식도 중요하지만 영적 안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진정한 안식은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에 있다.


3. 즐거워해야 할 날이다

"이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4)

안식일에는 거룩한 기쁨이 우리 마음에서 가득 흘러 넘쳐나야 한다. 안식일은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준다. 우리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반갑게 맞이하고, 하나님을 기뻐 찬양할 수 있는 심령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 부활하신 구세주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진정으로 살아 계셔야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분을 통해 죄가 끝났고, 죄악이 용서받았으며, 영원한 의가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잠자는 백성들이 부활할 것을 보장하는 증거요 원형이다.

찬양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이다.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마음의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들을 깊이 묵상하고 노래해야 한다.


4. 두려움으로 지키지 말라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억지로 하는 노예의 노동이 아닌, 즐겁고 기꺼운 자녀의 섬김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복종과 예배는 두려움과 노예적인 태도가 아니라 은혜와 기쁨과 자유의 정신과 경건한 마음으로 드려져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들, 곧 유대인들을 영적 속박 상태에 처하게 만든 것들로부터 구원받았다. 우리의 상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 하나님은 거룩한 안식일을 지킬 때, 외적인 의무를 하나도 빠짐없이 엄격하고 꼼꼼하게 지키는 것보다 진지하고 단순한 마음과 기쁨으로 자신의 영광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

"복음이 가르치는 복종의 정신과 특성에 따라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의무를 마음으로 온전히 감당하려고 애쓰기보다 단지 외적인 의무에 관한 규칙들을 더 늘려 그것들을 꼼꼼하게 지키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결코 작은 실수가 아니다" - 존 오웬


5. 영적 자유와 육신적인 방종을 구별하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이 말씀은 실천적 경건을 위한 근본 원리를 제시한다. 계명이 확실하게 주어지지 않은 문제를 다룰 때는 항상 이 원리를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 이 말씀은 가정생활과 사생활, 공적 예배와 관련된 모든 세부적인 사항들을 규정하는 일반 원리에 해당한다. 이 원리에 주의하면 많은 문제들을 처리하는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면 많은 논쟁을 피할 수 있고, 악감정을 자제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잘 해걀할 수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사랑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는 물론, 지금도 피해야 한다. 속된 오락을 일삼거나 하찮고 무익한 대화를 나누는 등 세속적인 관심사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6. 안식일(주일)을 위한 준비

○ 토요일에 세상의 일이나 집안일을 미리 잘 생각해서 지혜롭게 처리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준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주일 음식은 최대한 간단하게 간소하게 준비하고, 가능하면 토요일에 미리 준비한다.

○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 생각도 없고 기도도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을 맞이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영광스러움을 생각하며, 죄와 믿음을 고백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업에 대한 걱정이나 세상의 염려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각이 산만해지지 않고 주님께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7. 안식일(주일)에 해야 할 일

거룩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그날을 가장 유익하게 보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덕스럽게 하는 설교 말씀을 준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과 똑같은 영적 은혜를 다른 신자들에게도 허락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공적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큰 도움이 된다.

○ 안식일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물건을 사고팔거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독려하는 일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교 모임이나 불필요한 방문으로 인해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된다.

○ 주님의 날에 불필요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안식일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그날은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과 베푸신 복들을 묵상하며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가정 교육은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다.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실천적인 적용을 제시하라. 가장들은 가족들의 영원한 영적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병자와 노인들을 찾아보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할수록 항상 선을 행하신 주님의 기쁨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다.





안식일 / 하나님의 교회의 교리

안식일은 폐지된 율법인가?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는가?

1. 예수님과 사도들은 안식일을 지켰는가?

눅 4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규례란 "법 규, 법식 례"로 하나님의 법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자기 규례"라고 하셨으니,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법으로 지킨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안식일을 규례로 지켰다.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안식일을 규례로 삼고, 거룩히 지켜야 한다.

2. 안식일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

출 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안식일을 왜 "영원한" 언약으로 삼으셨을까? 만약 안식일이 폐지될 율법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안식일이 결코 폐하여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날이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 선포하셨다. 네 번째 계명으로 선포하실 때,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기기까지 하셨다.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반포하신 역사를 통해 증명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안식일을 대대로 영원한 규례로 삼아야 한다.

3.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많다.

안식일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피이다. 우리의 죄를 위해 단번에 십자가에서 들리심으로 피를 흘리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거룩한 영적제사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곧 거룩한 산 제사이다(롬12:1).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양을 희생 제물로 드려 제사를 드렸다.

짐승의 피는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없으므로 매 안식일마다 양을 잡아야 했으며, 짐승을 잡는 과정과 절차는 하나님의 규례 안에 이루어져야 될 엄숙한 진리였으므로 특별히 제사장 지파를 선별하시고 제사를 집전하게 하셨다. 제사를 집전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일을 하지 않고, 불을 피우지 않는 등 엄격한 율법 안에서 안식일을 맞이해야 했다.

구약 안식일의 어린 양 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한다. 어린 양의 피를 흘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 안식일마다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제사를 드린 것처럼,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산 제사인 예배를 말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거룩함에 나아가는 귀한 율법이다. 어찌 이 귀한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4. 구약 율법의 안식일이냐? 새 언약의 안식일이냐?

갈 4:9~10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골 2:14~16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구약 율법은 그림자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모형에 불과하다. 거룩한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짐승이 필요치 않다. 신약시대에는 거룩한 예배를 드림으로 영적 제사를 드리게 된다. 성도들을 가리켜 모두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안식일에 제사를 집전하듯, 반드시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벧전2:9)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희생 제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다. 

위 구절의 내용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에 불과한 구약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쓴 구절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주된 내용은 "왜 구약의 방식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드리는 안식일, 유월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핍박했다. 이들의 핍박이 두려웠던 성도들이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드려지는 안식일을 이해하지 못한 성도들은 구약의 방식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깨우쳤다.

"구약 방식으로 드려지는 절기, 월삭, 안식일은 무익하다. 왜 천한 초등 학문에 불과한 방식으로 절기를 지키려 하느냐?"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흘려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의문에 쓴 증서(구약율법)을 도말하셨다. 구약의 방식은 이제 끝이 났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인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로 너희를 폄론(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구약과 신약의 안식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짓 목자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무수히 존재한다. 

5. 결코 안식일은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변호해주셨던 예수님(마12:1), 또한 안식일에 고창병 든 환자를 고쳐준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안식일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구약시대 안식일은 제사장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백성들이 지키는 안식일이 구별되어 있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양을 잡고, 불을 피우며, 제사를 집전한다. 백성들은 제사를 집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불을 피우지 않는 것으로 참여하였다.

신약 시대의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양으로 희생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제사형식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성도들 모두 영적으로 제사장이다(벧전2:9). 그래서 신약 시대 성도들은 반드시 제사를 집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안식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셨다. 즉 예배를 드리셨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참여했던 구약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다. 어린 양의 희생의 실체가 나타나셨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이 되셨지 않은가? 그래서 안식일을 당신의 희생으로 드려질 예배로 본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자도 고치시고,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던 것이다. 구약 방식은 이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니, 백성된 자인 우리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주인의 뜻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한다. 즉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