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說敎者)
이런 설교자를 소개하고 싶다
목수(木手)는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
석수(石手)는 돌을 잘 다루는 사람
토수(土手)는 흙을 잘 다루는 사람
그렇다면 성경을 잘 다루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부를까?
"고수(高手)"라고 하면 어떨까?
명설교가(名說敎家)는 설교를 잘하여 이름난 설교가
‘명불허전(名不虛傳)’
‘소문난 명성이 헛된 게 아니더라’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두 부류의 설교자로 나눌 수 있다.
‘본문에 강한 설교자’와 ‘전달에 강한 설교자’ 말이다.
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대부분이 성도 수가 많지 않고, 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대형교회로 부흥한 교회인 경우가 많다.
성도들은 보통 본문이 좋은
설교보다는 전달이 탁월한 설교를 좋아한다.
솔직히 말해서 성도들은 본문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어떻게 저런 보화를 캐낼 수 있을까?’
‘그걸 또 어떻게 저렇게 빼어난 방식으로 전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리도 청중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방식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고의 설교자가 가진 10가지 특징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만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설교자를 정의하는 것은 주관적이라서,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설교를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몇 가지는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말씀을 사랑한다.
말씀이 강단에서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그의 입술에 있다.
그의 설교는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대한 고백과 감사가 넘쳐난다.
2. 말씀을 가르친다.
그의 목표는 청중들에게 성령을 통해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들으러 다시 온다.
3. 설교자의 삶이 그의 메시지를 신뢰하게 한다.
즉,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실천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도는 설교자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소식을 듣고 싶어한다.
4. 설교 준비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는 매주 준비할 시간을 따로 떼어 놓기 때문에, 준비 없이 강단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례로, 능력 있는 설교자들은 일반적으로 매주 10~12시간 정도 설교 준비를 한다고 한다.
5. 기도하는 사람이다.
최고의 설교자는 또한 가장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 중 일부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이 일은 나 혼자 할 수 없으니 도와주세요”라는 것이다.
6. 확신과 사랑을 가지고 설교한다.
그는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정말로 믿지만, 다른 사람들도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하고,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유한다.
청중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7. 설교의 서론과 결론을 열심히 준비한다.
설교 본론이 중요하지만, 서론과 결론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서론과 본론은 간결하고 명확해야 한다.
서론은 듣는 사람을 설교 속으로 끌어들이고, 결론은 그들을 봉사하고 사역하도록 돕는다.
8. 설교에 대한 명확한 적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적용할
수 없는 설교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불필요한 정보가 된다.
효과적인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들이 방금 들은 말씀을 기초로 행할
수 있는 적용과 실천에 대해서도 알게 됨으로, 말씀의 가르침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헷갈릴 필요가 없다.
9.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환영한다.
휼륭한 설교자는 그의 설교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설교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이야기에 감사하고, 고치기 위해서 노력한다.
10. 강단에서 청중을 인도한다.
자기 교회에 모인 특정 사람들을 목양하는 목회자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가져다 주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청중을 참된 사역의 길로인도한다.
이 기사를 읽는 사람이 설교자라면 이 10가지 중에서 자신의 설교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헤아려 보라.
그리고 내년에는 더 나은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생각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란 무엇인가
『설교자란 무엇인가』는 '설교자들의 스승으로 불리는 존 스토트가 설교자를 청지기, 사자, 증인, 아버지, 종이라는 다섯 가지 은유로 풀어내는 신선하고도 실천적인 연구서다. 신약 성경에 계시된 설교자의 이상과 과업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확립해 주는 책으로, 설교자의 사명과 역할을 성경적 정확성과 명료한 문체로 제시한다.
지은이: 존 스토트 (John Stott, 1921~2011)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목회 수련을 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다녔던 영국 런던의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 교구 목사로 30여 년 간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1974) 입안자로
참여했고, 그 후로도 로잔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 활동해 왔다. 대표적인 저서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진정한 기독교』,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도행전 강해』, 『로마서 강해』, 『디모데전서·디도서 강해』, 『디모데후서
강해』, 『기독교의 기본 진리』 등이 있다.
존 스토트,『설교자란 무엇인가?』
설교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조건은 없다
John R. W. Stott, Preacher’s Portrait,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s Co,), 1964
청지기 A Steward
설교자의 메시지와 권위
설교자는 선지자가 아니다. 독보적인 직통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한 위치로서의,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자들로서의 사도된 위치도 설교자에게 부적절하다. 설교자는 청지기이다 (딛 1:7, 고전 4:1).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맡은 청지기이다. 기독교 설교자의 메시지는 선지자 혹은 사도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오지 않고, 설교자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직 일회적으로 계시되어 지금 현재 그가 고귀한 청지기로서 맡고 있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24).
(1) 설교자의 동기: 설교자는 낙심할 수 없다. 그가 위탁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그를 의지하고 있으며, 가족들이 그의 공급을 고대하고 있다. (2) 설교자의 메시지: 설교자 자신이 메시지를 공급하지 않고 오히려 공급받는다. 선한 청지기는 말씀을 왜곡하지도, 혼잡하게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 (고후 4:2, 고후 2:17). 이것이 충실한 설교의 정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빠짐없이 전하도록 부름받았다. 이와 같은 성실한 가르침은 수개월 앞선 신중한 계획이 필요하다. 강해설교자는 전력을 다해 성경을 정확하고 선명하게 해석하며, 그것을 강력하게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39). (3) 설교자의 권위: 설교자의 권위는 선지자의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이다. 설교자는 말씀이 자신에게도 적용됨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청중에게 생기있게 다가오려면 설교자에게 우선 생기있게 다가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교자에게 말씀하실 때에만 청중 역시 그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본문에 밀착된 친밀성, 그것을 먼저 자신의 영혼을 향해 얼마나 강하게 선포했는가 그것에서 설교자의 권위가 세워진다. 자신의 인격이 성경이 비추는 빛으로 가려지고 자신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잠겨야 한다 (41-42). (4) 설교자의 헌신: 설교자는 성경의 궁극적 저자이신 성령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 헌신적이고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를 성실히 해야 한다. 그에게 드러내 주신 보화들을 차곡차곡 노트북에 정리해 두어야 한다 (마 13:52). 풍부한 자원들 가운데 하나의 메시지를 어떻게 뽑아낼지 고민해야 한다.
2. 사자 A Herald
설교자의 선포와 호소
설교자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이 포고된 선포, 케리그마를 통해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선언한다(고전 1:21, 23). 사자에게는 온 세상에 선포할 좋은 소식이 주어지며,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행위이다. 사자에게 선포는 호소로서 듣는 이들의 반응과 행동의 변화를 기대한다. 사자의 선포를 통해 왕은 자신의 목소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로버트 마운스, 신약 설교의 근본적 성격, The Essential Nature of New Testament Preaching, 1960)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기에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고전 1:23; 고후 4:5). 우리를 그에게로 화목케 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공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설교자의 선포를 통해 사람들을 대면하실 뿐 아니라, 설교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전 1:21).
우리는 선행되는 선포 없이 호소를 발해서는 안된다.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에 대한 선언이다. 선언이 있기 전에는 제대로 된 초청이 주어질 수 없다. 초기 사도적 케리그마는 확고한 디다케로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에게 확고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그들을 설득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또한 호소없이 선포를 발해서는 안된다. 극단적 칼뱅주의가 존재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설교하면서도 전혀 마음에 감동이 없다면 안 된다.
- “설교단에서 내려올 때면 내가 좀 더 진중하고 좀 더 열정적으로 설교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양심이 나를 후려치지 않을 때가 거의 없다. ‘너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고작 그 정도의 열정으로 말할 수 있느냐? 저 사람들을 위해 울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 눈물이 네 말을 가로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크게 통곡하며 저들의 범죄를 드러내 보여 주며 생명과 죽음에 관해 저들에게 강청하며 탄원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리처드 백스터, 참 목자상
3. 증인 A Witness
설교자의 경험과 겸손
요 15:26-27,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것
증인은 인격적인 체험의 권위로 지속적인 삶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증인은 법적인 은유이다. 기독교적 증언은 세상 앞에서 행해진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믿지 않는 세상의 반대 때문이다. 기독교적 증언은 아들을 증언한다. 간증은 포장된 자기 자랑이 아니다. 참된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증언이다. 기독교적 증언은 아버지에 의한 증언이다. 아버지의 궁극적 관심은 아들을 영광스럽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요 8:54; 17:1). 기독교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증언은 세상 앞에서 성령과 교회를 통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증언이다.
제자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요 15:27, 눅 24:48; 행 24:48, 요 1:32, 요 3:11-13; 요일 1:2; 4:14; 행 26:16).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생생하게 경험한 증인으로서 이 말씀을 해설하고 이 행위를 선포한다. 참된 증인은 투명한 유리처럼 신실한 사람이다. 어리석은 증인이 되거나 말할 것이 없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주의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늘 살펴야 한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 헌신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기도 없는 설교는 공허하다. 설교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조건은 없다. 메시지에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증인의 설교에는 따뜻함, 직설적인 단순함, 실재의 깊이가 담겨 있는데, 이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친밀한 지식에서 연유한다.
참된 설교 준비는 우리가 특별히 할애하는 몇 시간이 아니라, 설교가 솟아나는 원천이 되는, 설교자가 가진 총체적인 기독교적 경험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M. Bounds “그 사람, 그의 전인이 그 설교의 배후에 있다. 설교는 한 시간의 연주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넘쳐흐름이다. 하나의 설교를 만드는데 20년이 소요되는 것은, 한 사람을 만드는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증인이 고난과 밀접하게 연계되는 것, 증인에 해당하는 martys 가 순교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하나님 경험의 중요성 때문이다. 고난을 통해, 자기 피로 그를 증언할 준비가 된 이들이 되라.
설교단에는 허영의 유혹이 있다. 기독교적 증언은 자기 증언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이 될 뿐이다. 우리 증언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요 3:25-30).
4. 아버지 A Father
설교자의 사랑과 온유함
아버지라 부르기를 주저 않았던 사도 바울
설교자는 자신이 말씀으로 섬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마음을 쏟는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설교자와 청중은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다. Philips Brooks, “설교자는 실재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목회자여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 사역의 위엄을 생생하게 품고 사는 설교자여야 한다. 목회자가 아닌 설교자는 그 마음이 메말라가고, 설교자가 아닌 목회자는 그 사람됨이 시시해진다.” (121) 설교자의 설교는 청중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마 23:9). 설교자는 사람들이 의존하는 우월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자녀들과 친밀한 관계성을 갖는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가진다 (고전 4:14-15).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다는 말씀처럼, 설교자는 아버지처럼 자녀를 훈육하는 권위를 가진다. 이와 같은 부성은 유약하고 병약한 감상이 아니라, 훈육을 배제하지 않고 돌봄을 지향하는 강하고 이타적인 사랑이다.
(1)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회중을 이해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만큼, 사람들과 친밀하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 시간과 수고를 투자한다. 직장에서의 도덕적 결단, 압력, 경쟁, 동료들과의 관계, 긴장, 매일의 출퇴근. 그들의 고뇌와 책임감과 당혹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매주 사람들을 방문하고 면담할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청중과의 공명이 가능하다. 사랑은 직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할 때, 비로소 그들은 ‘그가 우리를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다. (2) 설교자는 아버지의 온유함을 가진다 (딤후 2:24-25). 분노하거나 좌절한 나머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3) 가르침을 단순하게 한다. 루터, “누군가에게 유치하고 천박해 보이는 식으로 설교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 설교의 단순성은 주제 선정에서부터 적용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복음의 중심 주제들을 해설하는데 들여야 할 것이다. 스타카토 스타일로 설교하라. 단순한 주제, 단순한 스타일, 단순한 단어를 사용하라. 무엇이라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셨듯이, 생생한 그림 언어를 사용하라. (4) 아버지의 사랑은 호소함에 있어 우리를 진지하게 만든다 (행 20:31). 위험에 처해 있는 자녀들에게 아무 경고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눈에 눈물없이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멸망에 대하여 말하라. Chad Walsh, 설교자의 참된 기능은 평안한 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며 괴로운 자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사람들에게 경고하라. 평안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이 잃어버린 영혼들의 피를 우리 손에서 찾으신다 (겔 33:1-9). 리처드 백스터,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진정 진지함으로 하고 있음을 보게 하라.” (5)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모범을 보이게 만든다 (고전 4:16). 청중은 설교자를 본받는다. 그는 매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Inge, “기독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력한 시각 자료는 언행이 일치된 그리스도인이다. 스스로 설교한 것을 어기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우리의 선포에 동화되어야 한다. “한 시간동안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준비하는데는 한 주도 충분하지 않으면서, 한 주를 어떻게 살 것인지를 연구하는데는 한 시간도 너무 많아 보인다.” (6)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성실하게 기도하도록 만든다. 규칙적으로 회중을 위해 기도하라! 백스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는 진심으로 설교하는 자가 아니다”
5. 종 A Servant
설교자의 능력과 동기
지극히 부당하고 어울리지 않는 존경이 오늘날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게 돌려지는 현실. 설교는 도구이지 작품이 아니다. 설교는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영혼 구원을 위한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칭송을 은근히 기대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설교자는 종(디아코노스)이다 (고전 3:5).
설교에 있어 하나님의 능력이 절박하게 필요하다. 분주한 프로그램과 집회들, 그러나 능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첫걸음은 우리에게 능력이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들은 통계치로 교회가 처한 한심한 현실을 선뜻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결과 교회의 세속화를 보지 못하고, 확신의 부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지독한 형식주의, 우리가 나누는 교제의 피상성, 복음전도에 관한 우리의 불순종, 우리 삶이 한참이나 미치지 못함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연약한 인간의 능력을 의지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다. 설교자의 주장이나 수사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이해나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다!
(1)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고전 1:18-24; 2:4-5; 1:19-20).
(2)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고전 1:18-24)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3) 능력은 성령 안에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1:4)
당신의 값없는 구원을 말할 때마다 오직 당신으로만 충만한 생각이 나의 마음과 영을 사로잡게 하소서 또한 당신 말씀의 힘 아래 모든 마음들이 감동하여 엎드릴 때 나를 당신의 십자가 뒤에 숨기소서
01. 설교자로서의 자족과 겸손,
02. 존 스토트는 본문들의 강해를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 글을 쓸 때 한 가지 주제를 말씀을 통해서 해설하고 그 깊이를 퍼올리고 있다!
03. 본문중, 설교자는 말쟁이가 아니기에 다른 이들의 말이나 글은 적절하게 출처를 밝히면서 정직하게 사용해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상의 머리는 왜 나발(螺髮; 소라모양의 곱슬머리)일까?
그리고 머리 위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나발(螺髮)과 육계(肉髻; 우스니샤)
나발(螺髮)이란 한자어를 낱개 한자별로 풀이하면 "소라 나(螺)"에 "머리털 발(髮)"이다.
"소라 머리털이라고? 소라에도 머리털이 있어?"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풀이는 잘못된 것이고, 제대로 풀면 '소라 껍데기 모양으로 말아올려진(螺) 머리(髮)'가 맞다.
이제 나발의 의미는 알겠으나 더 큰 물음에 우리는 직면하게 된다.
부처님은 활동 당시 삭발, 즉 머리가 민 상태였을 것이라 알고 있는데, 왜 붓다 사후에 만들어진 부처 동상은 머리털이 빽빽하게 자라난 나발이란 말인가?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
석가모니 부처(활동시기 기원전 563년~483년)는 기원전 5세기쯤 열반에 드셨고, 신적인 존재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부처는 유언으로 '내가 가르쳐준 진리와 너 스스로를 믿고 의지할지언정, 생물학적인 나의 몸은 허구이니 숭배하지 말라'고 하셨다. 즉, 부처는 자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이나 불탑 등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합장하고 절하는 우상숭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 사후 초반에는 우상숭배를 경계했기에 제자와 도반들은 부처님 얼굴과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수레바퀴(법륜)나 부처님의 사상이 응축되어 있는 발바닥 모습(족상
또는 족적), 해탈을 의미하는 보리수 나뭇잎 등을 그려 놓고 자신들의 신앙심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예경과 공경의 대상을 쉽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인간의 열망은
잠재되어 있다가 발현하기 시작했다.
일단 부처님을 화장하고 남은 육신의 흔적인 사리가 담겨진 탑이 여기저기 세워졌다.
여러 불탑이
세워졌지만 인도아 대륙에서 불상은 만들어지지 않던 시기였다.
그리고 불교는 동북쪽이 히말라야 산맥에 막혀있어 서서히 서북쪽으로
전파되어 나아갔다.
불교와 그리스 문명의 만남
그런데
부처님 사후 기원전 326년에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이 일어났다.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는 당시 인도 서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알렉산더의 군대가 물러간 이후에도 그의 부하와 그리스인들이 정주하고 박트리아라는 국가를 세우기도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서북부 진출과 그리스인들의 해당 지역 잔류와 지배계급으로의 성장, 불교에 대한 관심과 귀의가 일어나면서 드디어 현재
파키스탄 서북부 간다라 지역에서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인도 동북부에서 일어난 불교사상이 만나게 된다.
나발(螺髮) - ‘나발’은 삭발을 거룩하게 표현하는 방법
‘나발’은 삭발을 거룩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내 개인적인 나발에 대한 생각은 불상은 그 시대를 살아간 권력자들의 열망이 상당 부분 투영되어 나타난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 시대의 권력자들이 나발과 육계를 한 모습의 부처상을 원했기에 그 형태태로 용인되어 부처상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육계(肉髻; 우스니샤)
불상의 부처 형상 중 머리 모양이 특이하다.
구불구불한 머리칼, 즉 나발을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맨, 우리의 상투를 한 모습과 흡사하다.
이것이 바로 육계(肉髻; 우스니샤)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주의 종(Servants of the Lord)"은 목회자를 가리키는 것인가
"주의 종 (Servants of the Lord)"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로,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섬김의 정신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 개념에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포함됩니다:
1. 하나님에 대한 헌신 :
주의 종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그분의 뜻과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합니다.
이는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지도를 따르는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2. 그리스도의 예수 섬김 :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따릅니다.
이는 사랑, 겸손, 용서, 봉사 등 그리스도의 가치를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 :
주의 종은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깊은 관계를 갖습니다.
이 관계는 복종과 섬김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노력이 포함됩니다.
4.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 :
주의 종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기여하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전도, 사회적 봉사, 정의를 위한 행동, 교회 및 공동체 내에서의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주의 종이 되는 것이 단순히 신앙을 가진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종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에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주의 종(Servants of the Lord)"은 목회자를 가리키는 것인가
"주의 종"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전문적인 목회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개념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 즉 일반 신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물론 목회자들도 "주의 종"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 용어는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1. 일반 신자들의 적용 :
"주의 종"은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이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2. 목회자와의 관계 :
목회자들은 특별히 교회를 이끄는 역할을 하며, 그들 또한 "주의 종"으로 불립니다.
그들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주의 종"이라는 개념은 목회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3. 다양한 역할과 사명 :
"주의 종"은 다양한 형태와 역할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 사회적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 직장이나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 등 모두가 "주의 종"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의 종"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와 자세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