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하나님



작은 아들은 왜 탕자인가?

첫째,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
-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계명을 어기는 심각한 죄악이었다.
마치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 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산은 땅(기업)입니다.
땅을 현금화하려면 급하게 팔아야 합니다.
급매는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에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먼 나라로 떠났다!
- 요즈음은 아버지를 떠나 외국으로 이민을 가는 자녀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 시대에는 출생지가 곧 정체성이었다.
따라서 아버지를 떠난다는 것은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고향 공동체
친족 공동체 

셋째, 재산을 탕진 후 돼지를 친다!
- 돼지는 매우 불결한 동물이었다.
한국인에게는 돼지 꿈은 복을 상징한다.

탈무드에는 쥐엄멸매를 먹어야 회개가 가능하다.

현대에서는 쥐엄열매가 부자들이 먹는 건강 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한국에서 꽁보리밥이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의 먹거리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건강식으로 즐겨 찾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사용한 가르침입니다.
이 비유에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모두 갖춘 종합적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호로자식

대한민국의 욕.
보통 자식, 새끼 앞에 붙여 사용한다.
후레자식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호로가 오랑캐라는 뜻이니, 호로자식 / 새끼는 오랑캐의 자식 / 새끼라는 뜻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는 화냥녀처럼 전형적인 민간어원설이다.

호로는 '~홀의'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부모없는 자식이라는 뜻.
일종의 패드립이다.

* 패드립패륜애드립의 합친 신조어로 부모님을 욕하는 방식의 욕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욕을 잘 쓰시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대체로 이 욕의 뜻을 알고 쓰신다.
또한 호로자식이나 호로새끼는 조선 사서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국어 어휘 역사>

‘호래자식’은 옛 문헌에서 잘 확인이 되지 않는다.
19세기 말의 <한불자전>(1880)에 보이는 ‘홀에식’이 그나마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 ‘호래자식’ 및 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후레자식’의 어원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호로자식(胡虜--)’ 설이 있어 왔다. 

흉노족을 비롯한 몽고족이나 만주족과 같은 오랑캐들의 등쌀에 시달려 밉던 차에 ‘호래자식, 후레자식’의 ‘호래, 후레’가 오랑캐를 뜻하는 ‘호로(胡虜)’와 음이 비슷하자 상호 결부시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민간어원이다.

‘호래’는 ‘홀의’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한불자전>(1880)이나 <한영자전>(1897)에 보이는 ‘홀에식’, 그리고 <큰사전>(1957)에 보이는 ‘홀의아들’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홀에’나 ‘홀의’의 ‘홀’은 ‘홀어미, 홀아비’에 보이는 ‘홀’과 같이 ‘짝이 없는 하나’를 뜻하고, ‘에’와 ‘의’는 속격 조사이다. 따라서 ‘홀에식’은 ‘홀것의 자식’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 즉, ‘홀어미 혼자서 키운 자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애비 없는 호래자식”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호래자식’이 ‘여자 혼자서 키운 자식’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호래자식’과 뜻이 유사한 ‘후레자식’이 있는데, 이는 ‘호래자식’과 모음의 차이를 가지는 것으로 역시 동일한 기원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한국에서는 한마을에 꼭 한 사람의 호로자식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마을의 온갖 추태는 다 부리고 무법천지에다가 땡강, 술먹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폭력사고는 다 저지르고 범죄는 혼자 다 저지르고
그럼 호로자식는 어떤 유래에서 나왔나?
임진왜란 후
멍청한 이씨조선은 한 번의 국난을 당하면서도
실리를 찾지를 못하고 또 한번의 국치를 당하는데
바로 만주족의 침입을 자초하면서
침입을 바로 당하면서 얼마 후 서울, 당시의 한양이 점령을 당했다.
만주족들은 애, 늙은이 한 것없이 여자란 여자들은 모두 겁탈을 했고,그 중에서 반반한 여자들은 모두 만주로 데려갔다.
나주에 그런 여자들을 데리고 왔지만 그때 돌아 온 여자들이 환양녀,즉 환양년
그리고 청군,즉 후금군인에게 겁탈을 당한 여자에게서 나은 자식들은 호로자식,즉 호로자식이다.
보통 한국에서 호로자식라면 아버지없는 편모슬하에서
오냐,오냐하면서 길러 세상무서운 줄 모르고 오직 편애만
하면서 길러져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공공의 이익이라고 없고 오직 자기자신만 알고 매를 들고 꾸짖지 않고 자란 아이들을 말한다.
그럼,외노센터에 물어보자,
불법체류외국인에게도 컴퓨터교육도 시키고 그러는데
한국인이 주인이 이 나라에 와 한국과 같이 사는 방법,
즉 법과 관습에 대하여 교육을 시킨 적이 있는가?
한번도 없지 않는가?
그러니 이들이 과연 한국법이 어떤 것인지 알겠는가?
당신은 이들을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으로만 생각하고 편애만 해왔다고 생각지 않는가?
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과연 이들을 꾸짖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했는가?
한번도 그러지를 않았다.
즉 한국인에게 피해만 주는 호로자식을 스스로 양산하고 있는 단체로 변질되 있다고 생각지 않는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아라.
올해에만 외국인범죄로 죽은 한국사람만 거의 100명에 이른다.

스스로 호로자식을 양산하고 있지를 않았는지.






탕자의 비유 (Parable of the Prodigal Son)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소개됩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 (15:3-7)

둘째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15:8-10)

드라크마(drachma)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화폐 한 데나리온(denarius)과 비슷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실제로는 0.88의 가치
1 drachma (Biblical Greek) = 0.8831168831169 denarius (Biblical Roman)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 입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는 노동자 열흘의 품삯의 값어치 입니다.


셋째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15:11-32)

이 세 가지 비유들은 내용은 다르지만 사실 같은 주제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세 가지 비유들을 이용해서 이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자들”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간절하신 뜻을 섬기시고자 이 땅에 오셨으며, 그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이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드렸던 기도를 기억해 봅니다(에베소서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만일 내 혈액형이 특수한 혈액형이 되어 응급 환자가 발생할 때 아무나 수혈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희귀한 혈액입니다.
어느 날 병원 응급실에서 방송국에 연락하여 특수한 혈액을 찾습니다.
지금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합니다.
같은 혈액형의 사람이 응급실에 와서 수혈을 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뉴스를 듣던 어느 경건한 부부가 병원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환자인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담당 의사가 "예, 유산 상속으로 서로 다투다 가족들이 칼부림하여 심각한 상처로 인하여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환자입니다."
담당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니, 이런 사람에게 내 소중한 피를 줄 수 없지..." 하며 응급실을 떠나려고 할 때 갑자기 하늘 위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하여 용서받을 자격이 있느냐?"
그 순간 자기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환자에게 수혈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9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4:9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10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오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장 1-2절에 따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하며, 이를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며 예수님을 힐난했습니다.

이들의 눈에 “세리와 죄인들”은 상종해서는 안 될 “나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 이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들을 얼마나 온유하게 대하셨는지는 1절 말씀이 잘 드러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합니다.
마치 양들이 그들의 목자를 둘러싸고 따라다니듯이, 온 동네의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에워싸고 앉아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즐거워하고 또 주님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립니다.

상상만 해도 입가에 “아버지의 미소”가 감도는 참으로 천국과도 같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섬기라고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는 대신 그들을 “더러운 죄인”으로 정죄하며 배척하고 멀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는커녕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가로막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곧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도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한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그들의 분깃을 각각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의 몫을 받은 둘째 아들은 그것을 모두 현금으로 바꾸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가져온 재산을 모두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끼니조차 채울 수 없는 매우 궁핍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자주 하는 두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왜 아버지가 이 둘째 아들에게 그가 원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아들이 이렇게 된 것은 일부 아버지의 탓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아들이 먼 나라에서 가서 거기서 잘 살고 성공을 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물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그의 두 아들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유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와는 많이 다른 매우 독특한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우선 “자유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며 “완전한 사랑”을 주십니다.
동시에 이 관계는 “불가분의 연합의 관계”입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는 결코 생존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으며, 또 아버지는 그 아들을 도로 찾을 때까지는 결코 쉴 수도 없고 평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연합”의 관계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 된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입니다.

이 자유로 인해 아버지는 아들을 붙잡아둘 수 없으며, 이 연합으로 인해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떠나서 성공할 수도 또 행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 사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두 질문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녀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면서 동시에 그 자녀와 완전히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늘 “극진한 사랑”으로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아들이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5: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시고,

1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32)에서도,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싫어하는 맏아들을 붙들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회개”야 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누가복음 5:32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회개”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뇌우치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개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탕한 생활로 모든 재물을 허비한 둘째 아들은 “아 내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되겠다.
앞으로는 돈도 절약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지!
무엇인가를 이루기 전에는 절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회개이고 또 나름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보면 회개가 아닙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더욱 멀어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나의 실패와 부끄러움과 자존심과 미련을 모두 뒤로 한 채 “즉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사단의 거짓(falsehood)에 속아 일어난 것이라면,
“회개”는 예수님의 진리(truth)를 통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진리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하시며 풍요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영광스러우신가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우리가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하고 두려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서 참된 회개 곧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돼지가 먹는 사료조차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가 된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탄식합니다.

(17절).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제 정신이 돌아와서”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들은 이 부분을 “When he came to his sense” 또는 “When he came to himself”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제 “진리”라는 거울을 통해 “아버지를 떠나 비참해진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탄식에는 “아버지의 풍요로움”과 “자신의 가난함”이 대조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사단 마귀의 거짓에서 깨어나 밝은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자기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4:6절 말씀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 둘째 아들은 곧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이전에는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고 당당하게 요구했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지만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전혀 그러실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직 멀리 보이는 아들을 금방 알아보고는 그를 측은이 여기며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일러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더 나아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옆에 앉히고 어루만지며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의 이 말은 그의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드러냅니다.
아버지에게는 사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그에게는 또 다른 “착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오직 이 “잃어버린 아들”에게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첫째 비유 곧 “잃은 양의 비유”에서 더욱 절실하게 드러납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는 나머지 99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그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 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착한” 양들보다도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한 마리의 “뿔난” 양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뿔난 양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이 사랑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적이 있었나요?” 하며 아버지에게 불평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 보다는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버지는 이것을 “마땅하다”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명을 어김이 없이 아버지를 섬겨왔지만, 어떤 점에서 보면 그도 사실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자유롭게 누리지 못했으며, 또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은혜 밖에 거하면서, 노예처럼 두려움에 떨며 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 내 영혼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죄인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섬기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작은 목자”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묵상함으로,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며 또 그 마음에 합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 아버지가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자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을 들어준다.
그러나, 그 아들은 방탕하고 재산을 낭비하여 결국 궁핍해진다.
더이상 버티지 못한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가서 자기를 종으로서 받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아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지않고 크게 환영 축제를 마련한 것이다.
이에 질투심을 느낀 형이 환영 축제에 참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이 네것이며 둘째 아들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왔으니 축제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구속에 관련된 비유로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주화의 비유와 함께 세번째 마지막 비유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두 자녀를 향한 사랑과 두 자녀들이 서로 형제간의 관계에서 미묘한 관계를 볼 수 있다.

보통 너와 나의 쌍방 관계에서는 불화나 불통이 있더라도 관계 회복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세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갖고 살아가면 미묘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본심에서 일어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과 교회에서도 자주 일어나게 됨을 보게 된다.
이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고 조화된 관계로 이루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집을 떠난 외적 탕자 둘째 아들 (11-21절)

1. 자부심(Pride)

둘째 아들은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여 아버지에게 종용하여 자기의 분깃을 받아 냈고 그 후 며칠 안 되어 아비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갔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허비했고 궁핍하게 되었다.(14절)

2. 진실함(True)

그는 궁핍하여 돼지를 치는 일을 하는 곳에 취직하여 일하였다.
그럼에도 극심한 궁핍 가운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어서 더욱 굶주림에 허덕이며 지내야 했다(16절).
그는 처참한 굶주림에서 자기가 치고 있던 돼지의 음식인 쥐엄 열매를 슬쩍 먹어 자기 배를 채울 수도 있었겠지만 주인의 허락 없었기에 그것을 먹지 않았다.
이를 볼 때 참으로 진실한 자임을 알 수 있다.

3. 결단력(Decision)

그는 처참한 상황에서 스스로 돌이켰다(17절). 그리고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9절)고 결단하였다. 스스로 돌이킴의 결단은 좌절과 낙담에서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는 것이다.

4. 실천력(Practical Ability)


그는 결단한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절) 진정한 회개는 결단을 가져오고 결단은 행동에 옮겨진다.

5. 겸손함(Humility)


그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서 “내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21절)라고 말했다. 아비 집을 떠날 때는 자만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아비 집으로 돌아올 때는 온유와 겸손한 자가 되어 돌아왔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을 온유와 겸손한 자로 변화시킨다.

집에 있는 내적 탕자 첫째 아들(25-30절)

1. 게으름(Laziness)

첫째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25절).
어디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그가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면 빨리 집에 들어가 몸을 씻고 쉬려고 했을 것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집안에서 잔치가 벌어짐을 알고 곧 장 들어가서 자기가 직접 무엇이 어떻게 되고 있나 확인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종까지 불러서 그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의 행동을 볼 때 그가 아비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으며 밭에서도 어떻게 무엇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있었다가 중요함이 아니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2 질투심(Jealousy)

그는 자기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찐 소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노하였고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 동생이 돌아왔음에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는 아비 집에서 계속 살고 있었지만 전혀 아버지나 자기 동생을 생각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자기중심 위주의 삶만 살아온 것이다.

3. 비방함(Slander)

그는 동생에 대한 악평을 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원문엔 당신의 아들)”(30절)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 동생”이라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의 관계를 미묘한 삼각관계로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우린 Trinity(삼위일체)의 관계를 더욱 깨달아 알고 실천해 가는 것이 참 성도일 것이다.

4. 자만심(Conceit)

그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절)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만과 교만과 자기 의에 취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5. 불평함(Complaining)

그는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는데 왜 자기와 자기 친구들을 위해 염소새끼도 주지 않았느냐고 아버지께 불평분만을 토로한다. 그는 중요한 부자지간과 형제 지간의 관계보다 자기 친구 지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왜 아버지가 자기 친구를 위해 염소새끼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어야 하는가? 자기 동생이 떠날 때 자기도 아버지로부터 분깃을 이미 받았다. 이미 자기 소유된 것에서 자기가 자기 친구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아버지도 함께 불러서 대접하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는 아비 집에 살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나 않는가?

3. 두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눅15:20-24, 31-32)

1) 집을 떠난 탕자 아들을 향한 아버지 사랑 - 둘째가 자기 분깃을 달라고 졸라댈 때 아버지는 “아직은 아닌데” 하면서도 “그래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하면서 분깃을 내 주었다. 집을 나간 둘째의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그가 돌아올 때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Compassion)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절) 라는 말씀에서. 집을 나간 탕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신 얻었다고 즐거워했다.

2) 집에 있던 탕자를 향한 아버지 사랑 - 둘째가 돌아와 기뻐하며 잔치석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엔 첫째가 어디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는 잔치석을 떠나 밖에 나가 첫째를 만나고 그에게 집에 들어가자고 권했다. 집을 나갔던 둘째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나 집 안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첫째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똑 같았다. 그 때 첫째가 자기의 동생에 대한 험담을 털어놓고 또 자기에 대한 불평불만을 발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고 말했다.

3) 미묘한 삼각관계 - 인간관계에서 너와 나만의 쌍방관계에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기에 불화가 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곧 화해가 잘 이루어진다. 그런데 삼각관계는 미묘한 관계이며 이의 해결은 그렇게 쉽지 않다. 이 미묘한 관계의 원인 첫째는 비교의식이다. 이 미묘한 관계는 아버지가 형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동생의 생각에서 그는 아버지께 내 분깃을 달라고 졸라서 받아 낸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다시 돌아온 동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은 아버지가 자기보다 동생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며, 또 시간이 흐르면 자동으로 아버지의 모든 재산 자기 것이 되리라는 자기에게 옹졸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묘한 삼각관계의 해결책?

두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 알았다면 삼각관계의 불화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이 있다.

1. 잃은 양 한 마리와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
2. 잃은 한 드라크마와 잃지 않는 아홉 드라크마
3. 집을 나간 아들과 집에 있는 아들

비유의 핵심은 잃은 것도 잃지 않은 것과 마찬 가지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는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 개인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말고 항상 위를 바라보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 옆의 이웃 형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두 아들이 사랑의 아버지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으며 이 가정의 미묘한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이 비유에서 미묘한 관계는 아담과 두 아들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사람들의 각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이 미표한 관계가 일어나고 있다.

즉 인간 역사와 함께 비교의식과 세상 욕심로 인해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사랑 즉 삼위일체의 신비한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노라면 우리들의 미묘한 관계들을 신비한 사랑의 관계로 승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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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요한복음 8:1-11)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이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멕시코시티의 대형 시장 그늘진 한 구석에 ‘포타라모’라는 인디언 노인이 있었다.
노인 앞에는 양파 스무 줄이 걸려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맙니까?”
“10센트라오.” 포타라모는 말했다.
“두 줄에는 얼맙니까?”
“20센트라오.”
“세 줄에는요”
“30센트라오.”
그러자 미국인이 말했다.
“별로 깎아 주시는 게 없군요. 25센트 어떻습니까?”
“안되오.” 인디언이 말했다.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맙니까?” 미국인이 물었다.
“스무 줄 전부를 팔 수 없소.” 인디언이 대답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미국인이 물었다.

그러자 인디언이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지나가던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얘기를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돈벌이보다 더불어 사는 이들을 중시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인디언 포타라모의 삶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것보다 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삶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인 켄 가이어는 우리에게 성스러움이란 다분히 우리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숨어 있다고 말하며 일상의 순간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보려면 걸음을 늦추고 더욱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며 살아봅시다!

그러면서 인디언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해 준다.

“인디언의 삶에는 꼭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있다.
기도의 의무, 매일 신을 찾아 뵙는 의무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매일의 예배는 날마다 먹는 양식보다 더 필수적인 것이다.


인디언은 동틀 무렵 일어나 물가로 내려간다.
그리고 차고 깨끗한 물을 얼굴에 한 움큼 끼얹거나 아예 전신을 물에 담근다.
목욕 후에는 밝아 오는 여명, 지평선 위로 춤추는 태양을 향해 똑바로 서서 침묵의 기도를 드린다.
이 예배는 동료 간에도 서로 먼저 가거나 뒤따르거나 해야지 같이 가는 법은 결코 없다.
아침의 태양, 신선한 대지, 위대한 침묵의 신을 영혼마다 단독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인생을,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보았다.
날마다 아침 햇살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고, 내 인생의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의무는 무엇이며, 매일의 예배는 내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야고보의 표현을 빌면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로 가득 차 있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태도는 희망에 찬 외경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또 하루의 선물과 함께 우리 앞에 밝아오는 새 아침마다 우리는 희망에 찬 외경의 태도로 하루 하루를 맞이해야 한다. 새로운 하루는 어찌 보면 평범한 것들 속에 비범한 것들이 있는 성찬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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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


하나님 = 사랑
동일시(Identification)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8:1-11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감람산(산 기도) 예수님의 기도의 자리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  기도 후에 가르치는 일에 열심(기도한 후에 무엇을 하는가?)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  잔인한 월권 행위(죄인은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 법관의 임무)
* 내로남불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신명기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돌로 치라 :

로마의 정권에 대한 도전                    
유대 민간인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로 치지 말라 :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것(산헤드린 공의회에 대항)
죄인으로 취급될 것

  • 고슴도치 딜레마(The hedgehog dilemma)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각자 자기를 먼저 심판하라(남의 눈에 티, 내 눈의 들보)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남을 정죄하는 월권행위를 부정, 영적 사죄의 증거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사죄의 능력(죄를 사하시는 권세)



베드로전서(1 Peter)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공동번역)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공동번역
또 세상은 무법 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음 수요일 성경 / 창세기 9: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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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왜 노아는 아들을 저주하는가?
창세기 9:20-27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
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 벌거벗었다는 것은 죄를 드러낸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나뭇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이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셨다.
   죄를 용서하셨다.
   용서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22. 가나안
의 아비 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을 레위기 18장 6절에서는 아비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고 하여 성적 범죄를 말합니다.
이러한 성경을 근거로 확대 해석하여 함이 아버지를 성적으로 범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자적으로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본 것입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려주며 너희들도 가서 보라고 한 행동입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
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왜 함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까?

창세기 10:6
함의 아들은 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공동번역)
함의 아들은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

가나안(낮은 땅, 자주 빛 땅)은 (검다, 더웁다)의 마지막 아들입니다.
함에 대한 저주가 막내 아들 가나안에게 내렸습니다.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야 할까요?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이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나안의 저주입니다.
사실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다는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의 아들은 여럿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잘못은 노아가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실수를 가리지 못한 것은 노아의 아들 함입니다.
가나안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노아가 왜 가나안을 저주 했는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질문 / 왜 함 대신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25절에 보면, 분명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조롱을 한 것은 함인데 노아가 저주하는 대상은 함의 아들 가나안입니다.
성경에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죄를 잊지 않으신다는 의미이고 앞에 나온 인자를 천 대까지 베푼다는 것이 더 강조되어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강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거의 가나안으로부터 나오는 족속 전체를 저주한 듯 보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도 가나안 자손은 죄다 노예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함이 아닌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으며, 그것도 가나안의 후손 전체가 저주를 받게 되었나요?

아버지 노아에게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셈과 야벳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말은 셈 아래로 들어가 셈의 축복을 누린다는 의미로 보여지는데, 셈이 장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축복을 가져간 것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저의 해석이 잘못된 건가요?

성경난제 해석의 두 원칙

질문하신 주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기록된 부분 내에서도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상황이 노정되는 경우가 성경에는 종종 나옵니다.

합리적 유추가 힘든 성경 난제들을 해석하는 원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에 바탕을 두고 접근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에 명확하게 계시되어 있는 여타 영적 원리나 다른 구절들과 비추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간과는 달리 완전하게 공평하신 하나님이 모순되고 불합리한 처사를 할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저주에 불공평성이 개입될 여지는 추호도 없습니다.
비록 인간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전후 사정에 따르면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가나안이 하나님께 벌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벌 받았을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비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말씀에 대한 질문자님의 생각은 옳습니다.
하나님에게나, 원죄라는 성경 원리에 아비가 공산당이면 아들도 빨갱이 취급하는 것 같은 연좌제는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반드시 개인별로 이뤄질 뿐입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빨이 시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이 굽어지게 만드는 해석은, 해석자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해도, 틀린 것입니다.

또 아비 함의 죄 때문에 아들 가나안이 벌 받았다는 해석도 잘못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 설명이 논리적으로 그럴싸해도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적 원리에 비추어서 당연히 배제 되어야 합니다.  

왜 함은 저주 받지 않았는가?

이에 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몇 개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함이 받을 형벌의 가혹함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려고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그 후손들을 저주한 것

둘째는 함이 노아의 막내아들인 것 같이 가나안도 막내이므로 같은 원리로 벌을 받은 것

이 두 해석은 아비가 받을 벌을 무죄한 아들에게, 그것도 같은 막내아들이라는 이유로 내리는 하나님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기계적인 하나님이 되어버리기에 잘못된 해석입니다.  

가나안이 아비의 수치를 먼저 보고 아비 함에게 일러바쳤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대한 변증은 분명히 됩니다.
상당한 타당성과 가능성이 있는 유추이긴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자의적으로 유추했다는 약점이 생깁니다.  

셋째는 노아는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장차 가나안 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25-27절에 나타나는 가나안과 셈과 야벳이 문맥상 의미로는 그 개인보다 종족 전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선지자들이 장래 일을 예언하는 예가 종종 있기에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만 해석하면 함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모순이 나타납니다.  

넷째는 가나안도 이미 죄악에 빠져서 함과 같은 잘못을 평소에도 잘 저지르고 다님을 조부인 노아가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드시 본인의 잘못에 따라 벌하는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비추어 볼 때에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이 저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결정적 난점에 대해 "Hard Sayings of the Bible"(성경의 난제들, Kaiser, Davids, Bruce, Brauch 공저, IVP 1996 발간)이란 책에 아주 타당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

노아는 그의 아들을 저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함과 그의 두 형들은 노아와 함께 하나님이 이미 축복한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창 9:1).
노아든 어느 누구든 그 축복을 저주로 바꿀 수는 없다.
민수기 22-24장의 발람의 예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함이 노아에게 잘못을 범한 당사자이기에 벌 받아 마땅하지만, 노아로선 이미 하나님이 직접 축복한 그를 저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아비와 같이 동일한 죄의 성향을 보이기에 그를 저주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 여타 기록에 따른 해석이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택정하여 은혜로 주신 구원이 취소 불가능함을 이미 여기서도 예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함의 잘못으로 그 후손이 다 벌 받아야 한다면 성경은 다른 아들들도 함께 언급해야 합니다.
창세기 10:6에 따르면 함에게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노아는 가나안만 지적해서 저주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었고, 가나안만 평소에 죄를 많이 범하는 줄 노아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해석에 더 타당성이 붙습니다.

상기에 인용한 책에선 가나안의 잘못을 함과 같은 성향 즉, 성적 문란함으로 해석하고 또 그런 성향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가나안 지역에선 그런 증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고, 율법에서 성적범죄에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 이유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그 지역에 있었으며,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했던 로마제국조차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근동 지역을 정복한 후에 그들의 도가 지나친 성적 타락에 대해 놀랬다고 그 책에서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성령의 간섭으로 예언한 것도,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가나안 족속이 저주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옳습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체적 실현 여부보다는 노아 때에 이미 예언한 것이 달성되는데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그런 족속에게마저 한없는 인자와 긍휼로 회개하기를 오래 동안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애굽에서 사백년 간 노예 살이 시키면서도 가나안 땅에 죄악이 차고 넘칠 때까지 그 진멸을 미루었습니다.

성경의 이중적 예언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의견이 일치됩니다.
우선 노아의 손자 대에서 세부적으로 종족들이 나눠지지만, 세 아들 중에 야벳은 백인종,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들의 조상으로 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해서 인종 간의 우열을 비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말해 백인이 가장 우월하고, 황인은 그 다음에, 흑인은 맨 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백인종이 우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역사를 따지면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은 오히려 셈족에 의해서였습니다.
최근에는 황인종의 도약이 두드러집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흑인들의 시대가 도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구절을 인종 간의 우열의 차이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비성경적이자 반역사적 해석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종차별적 저주는 더더욱 아닙니다.
분명 가나안 족속만 저주받았지 구스의 후손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저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이 구절을 (의도적으로?) 오역해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합리화시킨 잘못을 범했던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런 오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대에 이 두 제도를 금지시킨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노예제도는 영국의 윌리암 윌버포스에 의해,
인종차별은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본문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예언입니다.
성경에는 장래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그 본인은 구체적으로 전혀 몰라도 성령의 간섭으로 묵시적으로, 때로는 아주 생생한 묘사를 통해 예언하는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 그런 예언들은 한 사건보다는 점층적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는 "예언적 안목"(Biblical Prophetic Perspective) 혹은 "이중적 성취"(Dual or Dynamic Fulfillment)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본문의 예언도 역사적으로 수차에 걸쳐 달성된 것으로 봅니다.
먼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의 경우를 봅시다.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관용구입니다.
가장 비참한 종이라는 뜻이지 종들이 된 여러 종족들 밑에 있는 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예가 자기 밑에 노예를 둔다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입니다.    

이 예언은 먼저 가나안 족속들이 셈 족인 이스라엘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또 비천한 종의 신세가 됨으로서 달성되었습니다(수 9:23, 왕상 9:20-21)

여호수아 9: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긷는 자가 되리라.

열왕기상 9:20-21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남아 있는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정말로 “가나안은 셈의 종이”(26절) 되었습니다.
또 후대에 야벳 족속인 페르시아와 마게도니아와 로마 등에 의해서 가나안 족속인 페니키아가 철저히 정복당했습니다.  

27절에서 우선 “야벳을 창대케 하사”의 문자적 의미는 넓은 공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벳은 14종족의 선조가 되었고(창 10:2-5)
또 그 후손인 백인들이 헬라와 로마 제국을 이루었고 또 근대 유럽과 현대 미국에서 창대케 되었습니다.

또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는 주전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중근동과 페르시아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해서 제국에 편입시킴으로써 달성되었습니다.

야벳이 셈의 장막(지역)에 거한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에서 ‘그’라는 대명사가 받는 의미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셈족으로 받으면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종이 된 것으로, 또 야벳으로 받아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달성된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런 이중적 예언이 문자적 현실적으로 성취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진리도 자주 내포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구원이 셈 족속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셈이 장자라서기 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택정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벳을 그 장막에 거하게 하시되 창대케 한 후라고 말합니다.
셈의 장막은 당연히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영적차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야벳 족속이 처음 얼마 동안은 셈 족속과 종교적 영적으로 분리되겠지만 나중에는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족속도 야벳의 종이 되므로 언젠가는 동일한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결국 이 저주의 예언은, 성경의 다른 저주의 예언들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당장은 심판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이끄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를 통해 모든 열방을 셈의 장막으로 모을 것이 즉, 이방인의 구원 계획이 선포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범죄 당사자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지만 동시에 여자의 후손으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제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만 있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범죄했지만 동일하게 궁극적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먼저 저주의 예언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오랜 인내 후에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유대에서 발원되어 사마리아를 통과하고 유럽을 거쳐 차츰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건너오는데 근 이천 년이 걸리긴 했지만 구원의 약속도 달성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디게 이뤄지고 여전히 세상에는 온갖 고난과 죄악이 넘치는 것 같아도,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으로선 주님을 다시 보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역사 완성을 곧바로 내일이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셈의 장막 밖에 있었던(인종적 의미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우리로선 그 안으로 불러주신 은혜만도 평생을 두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항상 경성하여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세상과 사람 앞에 그분의 빛을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처럼 정미하고 엄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해지고 또 주야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9:20-21.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 홍수가 있은 후 노아 가족이 포도 농사를 짓고 그것을 수확한 후에 노아가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말씀을 했는데 홍수 후에 노아는 술에 취해서 옷을 다 벗고 잠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일을 행한 것은 노아이며 노아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함이 보고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문제는 가나안의 아비 함입니다.
물론 노아가 술에 취해 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가 보았으면 그 허물을 가려 주었어야 하는데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그 형제들로 그 아비의 하체를 가리게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원인 제공자는 노아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가 자기 처신을 잘 했더라면 함이 굳이 노아가 벌거벗고 자는 것을 보지 않았어도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일로 노아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술에서 깨어난 후에 일어나서 가나안을 저주 합니다

창세기 9:24-25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실 저주를 받아야 하면 함이 받아야 하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잘 때 그것을 본 사람은 가나안이 아니라 그 아비 함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함의 자녀들 가운데 가나안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공동번역 / 의 아들은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

물론 노아의 행위는 잘못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아비의 행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로서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도 사람입니다.

사람의 실수를 보고 특히 부모의 실수를 보고 그것을 가려주지 못하는 아들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가를 보겠습니다.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부모가 아무리 실수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가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내 부모가 정말 싫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는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를 싫어하고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부모를 싫어할 수도 있고 또 집에 들어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부모의 잘못입니다.
부모는 이런 일을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자녀가 싫어하는 행동도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자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자녀가 보기에 못 마땅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탐탁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보기에는 탐탁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내색하는 자녀는 저주를 받을지니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함이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노아를 존경하고 공경을 했다면 설령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잘지라도 그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함은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자기가 그것을 덮어주기 보다는 그 형제들도 와서 보라고 그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행위를 보고 경홀히 여기면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는 잘못을 하고 말았습니다.

함이 그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함이 노아를 사랑했다면 당연히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자기가 아비의 벌거벗은 것을 덮어 주었어야 합니다.
함은 자기 아비 노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비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오히려 드러냈습니다.

함이 저주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노아가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함이 그 아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더라도 그 허물을 가리워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함은 그 아비 노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그 허물을 가리우기보다는 오히려 형제들에게 이야기해서 허물을 들춰내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내 아버지와 부모가 나에게 모든 것을 잘해 주어서 공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가 유산이 많고 또 나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어서 공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꼭 성도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라도 그 부모를 공경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부자라서 내가 그 풍족함을 누릴 수 있어서 공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가 없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내가 태어나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성도가 된 것은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악인도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 합니다.

성도는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내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부모겠습니까?
나에게 술 취한 부모가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인들이 너무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섭리는 정말 오묘합니다.
그것을 다 깨달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 보아야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완전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더라도 때로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허물이 보일지라도 사랑이 있다면 그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라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도 때로는 그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오히려 짐이 되게 만드는 것도 모두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그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함은 노아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아비 노아를 사랑했다면 설령 술에 취해 더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 아비의 허물을 감추어 주었을 것입니다.
함은 노아의 믿음을 본 것이 아니라 노아의 행위를 보고 그것이 못 마땅하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그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잔다면 아마 쳐다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 나에게는 저런 아버지가 있냐고 원망을 할 것입니다.

아니 술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어 자기가 보기에 못 마땅하면 그 아비를 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함은 그 아비 노아를 공경 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당연히 함이 잘못을 했으면 그 당사자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왜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말씀을 많이 보아왔고 또 들어 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그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지금 이 시대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성도의 견인을 말하면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보게 됩니까?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목사들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든 못하든 한번 구원한 성도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면 율법주의 목사들에게는 너무도 치명적인 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잘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성도들이 열심을 낼까 말까 한데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잘못을 해도 끝까지 구원한다고 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아무 것도 안할 것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자세히 가르쳐 주어도 구원을 받은 성도는 더욱 더 헌신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누구를 위해 일하느냐의 차이겠지만 성도의 견인을 믿는 성도는 정말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더욱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도의 견인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함은 노아와 함께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 방주 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노아의 아들이야 아니냐를 논하기 이전에 방주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노아의 부인과 그리고 세 아들 그리고 세 자부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방주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자의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로 들여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이라고 꼭 들어가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들이라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한 자를 사람이 저주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함은 그 아비 허물을 가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아비 노아가 술 취해 벌거벗고 자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함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주에 들여보내 주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들 함이 자기를 공경하지 않고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자주를 받아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함을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노아가 함을 저주하게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아들 함이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정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노아가 함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함을 송사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은 한번 의인은 영원한 의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노아는 얼마든지 함을 저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견인입니다

한번 의인은 영원하기 때문에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저주를 한다 해도 그 저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게 됩니다.
노아의 저주가 강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이 더 강합니까?
노아가 아무리 저주를 한다 해도 함은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노아의 방주는 약속의 기업을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기업을 주신 자에게 절대로 변치 아니하십니다.
사람은 혹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바꿀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절대로 바꾸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함은 기업을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만약 노아의 저주로 그것이 변해진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보증을 해 주셨습니다.

한번 보증한 것이 내 실수로 인하여 변해진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입었지만 매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함과 같은 실수로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실수를 안 하고 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우리 육체는 역시 오늘도 함과 같이 저주를 받을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의롭다 하신 성도는 다시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죄가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의인을 송사할 수 없으며 저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에 들어간 자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내 육체는 아직도 함과 같지만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성도입니다

 

지금 이 시대 저주를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를 결코 저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람의 예로는 함과 같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저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송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저주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나를 정죄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설령 내가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 하는 죄를 지었다 해도 나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죄해서는 안 되고 또 함부로 저주를 해서도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면 내가 저주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라면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내가 함과 같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 이제는 결코 정죄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설령 누군가 나를 저주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그 아들 함이 한 행위로는 반드시 누군가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의롭다 한 함을 저주할 수 없어 가나안을 저주 했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아 주셨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함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그 아비 함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함 대신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죄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저주 받게 하셨습니다.

함은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나도 또한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 저주를 대신 받아 주는 이가 없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대신 저주 받는 것을 모형으로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모형입니다.
앞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노아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살아가면서 설령 실수를 하고 죄를 짓는다 해도 이미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설령 누가 나를 저주 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송사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송사 못합니다.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인 노아도 함을 송사할 수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함을 저주할 수 없어 대신 가나안을 저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지만 내가 받아야 하는 저주를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은 바로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은 족보가 없기 때문에 마가복음에는 족보가 나오지 않으며 종으로서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가는 성경에 기록을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과 사랑은 동일시 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라는 표현은 형용사적(adjective), 서술적(descriptive) 정의(definition)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사랑'을 치환(置換, substitution)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 방식이시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도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엡 1:4),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도(창 1:27)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해 주신 것도 독생자(골 1:16)와 택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전 3:21).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저주 아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사,그들을 구속하셨으며, 이 구속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요일 4:10, 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구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2천 년 전이었고, 각 사람이 구속의 사랑을 입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개인의 생애에서 찰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은 영원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내려져 있고, 영원 속에 함께 연루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역사 속의 유한된 사건이나, 피조물들에 의해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유한된 것들이 '영원의 영역(territory of eternity)'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 사랑의 기원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의해 작정되고 경륜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오직 부르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되는(롬 9:11)" 구원 경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기원적 사랑은 선악간의 인간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제적 어떤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무조건성'을 특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기원하고 있음을 아는 지식은, 유한된 피조물에 의해 구원이 훼방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북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하나님 사랑' 타령은, 대부분 위에 열거한 정의들과 합치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사랑' 개념은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잘못하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을,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닌 하나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이 자기에게 있게 된 시점에 둡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행위에 세울 때, 사랑의 영원성은 소멸되고, 제 하기 나름인 조건적인 것으로 전락됩니다.  

나를 사랑해 다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마 22:37)"고 요구하신 것은,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으니 너도 받은 만큼 내게 사랑을 되돌려 달라'는 반대급부적 요구가 아닙니다. 혹은 '피조물인 너는 창조주인 나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절대자의 전횡적 요구도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의 표출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 하나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잠 8:17)"는 말씀인데, 이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한다"는 조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서 그 시작이 하나님이라고 못 박기 때문입니다(요일 4:10). 사실 이 말씀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순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주려므나. 내게도 너의 사랑이 필요하단다"는 뜻입니다. 비유컨대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엄마에게 과자 하나 주면, 나중에 엄마가 장난감 하나 사주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이로부터 과자 하나를 받아야만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마는 아이가 그에게 과자를 주든 안 주든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 줄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과자가 아니라 과자를 건네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손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혹자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고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피조물 인간들을 향해 사랑 타령이실까 싶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이기에 더욱 사랑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하신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희귀하여 주님은 사랑을 구걸(?)하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아 5:2)" 고 읍소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에 마음을 뺏긴 채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은 교회(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레나데입니다.

독점적인 전부의 사랑을 다오

"마음, 성품,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30:6-8)"는 성경 말씀은 일견 현실성 없는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명분으로 우리를 그에게 종속시키려는, 사랑을 가장한 매정한 율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의 요청이고, 남겨지거나 유예된 것 없는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받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이는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부분적이거나 나눠질 수 없는 독점적 속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사랑은 나누는 것이니 다른 여성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면 마땅히 질투를 느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상을 용납지 않으시고(요일 5:21) 우리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도(신 4:24, 아 8:6, 약 4:5), 우리에 대한 사랑의 독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점적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이전에, 먼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렇게 독점적이고 완전한 전부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하셨고, 열방 가운데서 오직 우리만 알 정도로(암 3:2)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을 하셨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망각하지 않고(사 49:15), 우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사 49:16). 마지막에는 아예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고전 3:16).

이렇게 우리를 향해 독점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자신이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 독점적인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상에게 마음을 뺏겨 하나님께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향해 종일 손을 내밀며 사랑을 구걸하셨던 그 하나님은(롬 10:21), 오늘도 간음하는 여자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약 4:4) 향해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구걸(?)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하나님의 사랑"

찬송 85장 구주를 생각만해도

1절.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절.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찬송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찬송가 상단 왼쪽에는 작사자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Bernard of Clairvaux’
번역하면 "클레르보의 버나드"

버나드 즉 베르나르가 쓴 192행의 라틴어 시인 ‘예수의 이름에 붙이는 노래’를 영국 찬송 작가인 에드워즈 케스월(E. Caswall; 1814~1878)이 발췌해 번역한 것이며 다이케스(J. B. Dykes, 1866)가 곡을 붙여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을 생각만 해도
달콤함으로 나의 가슴이 가득하나이다.
그러나 더욱 달콤한 것은 당신의 얼굴을 보는 일
당신의 임재 안에 안식하는 일입니다.
목소리로 노래할 수 없고, 마음으로 말할 수 없고
기억으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복되신 이름보다 더 달콤한 것을,
오 인류의 구주시여!
오, 회개하는 모든 심령의 소망이여
오, 모든 온유한 자들의 기쁨이여
타락한 자에게 당신은 얼마나 자비하십니까!
구하는 자에게 얼마나 선하십니까!

 
베르나르의 고백은 ‘은혜롭다’는 표현보다는 ‘감미롭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늘의 평안을 체험하게 합니다.
베르나르는 85장 외에도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과 262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도 작시했습니다.
멜로디를 넣어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가사를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62장 4절 가사는 체험적 신앙이 아니면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 사랑 못 잊어 나 항상 눈물 흘리네 이 세상 어디 가든지 나 주만 생각합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중세 신비주의 신학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인식을 넘어 신비의 체험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하나님의 사랑"은 베르나르의 가장 중요한 저서입니다.
간략하게 요약정리하면서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신앙을 맛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제임스 M. 후스톤이 베르나르의 사상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서문을 기록했습니다.
후스톤은 베르나라의 신학을 서문의 소제목에서 보여주듯 다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실존적 경험,
2. 사랑의 일차적인 중요성,
3. 성경적인 성경 이해,
4. 참된 인간성의 기초:성경적 인간학,
5. 영적 우정.

베르나르뿐 아니라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경험’입니다.
어거스틴이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했다면,
베르나르는 앎의 궁극적인 방식이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고, ‘나는 경험하기 위해 믿는다’고 말합니다.
베르나르에 의하면 신앙은 경험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의 주장은 근대 후기에 일어난 오순절 성령 운동이나 18세기 부흥운동도 17세기 경건주의 운동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선 영혼의 고귀함’이란 제목을 가지고 사람의 ‘영혼’이 무엇인지를 다룹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존재 방식을 갖는지를 밝힙니다.

3장에서는 ‘은혜와 자유의지’라는 화두를 가지고 상세하게 다룹니다.

2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이란 주제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관상해야 할 것인가를 다룹니다.
2부는 이 책의 핵심이자 주제입니다.

6장에서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사상의 정수를 담은 사랑의 네 단계를 소개합니다.

3부에서는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이란 제목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논합니다.

4부 ‘영적 우정’에서는 책의 부록이자 결론에 해당하며 영적 우정이 갖는 독특성을 설명합니다.

제1부 하나님 앞에 선 영혼의 고귀함

하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기억에 의해 회상하는 것
둘째는 기능인 이해에 의해 분별
셋째는 기능인 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포옹한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기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한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자신의 전으로 삼으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는 평화를 갈구하고 진리를 묵상하고 자비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조심스럽게 표현해야 한다.”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기억, 이해, 의지라는 능력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은 우리의 예배와 모방이다.’
하나님을 모방하여 닮아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 돌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죄악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비열하고, 나약하고, 변덕스럽고,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단단히 부여잡아야 한다.

영성 생활에는 세 단계가 있다.

가장 먼저는 동물적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성적 단계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영적 상태이다.

동물적 단계에서는 ‘감각이 지배하는 삶’이다.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 단순성을 갖게 된다.
묵상과 거룩한 독서를 통해 영성 훈련을 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인 이성적 상태는 동물적 상태에서 약간 진보한 것이다.
외향적인 덕을 추구하고, 영성을 추구하는 단계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야 하고 하나님처럼 복된 삶을 살아가려고 발버둥 쳐야 한다.

마지막 영적 상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사람의 모든 사고(思考)의 중심을 차지한다.
하나님의 선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사상은 지성이 되고, 사랑이 된다. ‘사상에 대한 이해는 사랑에 대한 묵상’이다.
결국 하나님을 닮게 되며, 인간의 완성 단계에 이른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는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기능은 구원의 유일한 주체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체이시며,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동물적 욕망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동물적 욕망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른다.’
자유의지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분명하고도 습관적인 영이다. 의지가 없다면 동의도 없다.

인간에게는 ‘본성’ ‘영광’ ‘은혜’라는 삼중적 자유가 있다.
본성은 곧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영광은 ‘비판으로부터의 자유’
은혜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결된다.
악한 의지는 악마에게 속한 반면, ‘선한 의지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
악마는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든다.

“죄는 자유의지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별력을 상실했다.
비록 의지의 능력을 손상되지 않았으나 참된 지혜와 실질적인 도덕적인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회복된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인간에게 있는 선은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약 1:17)
구원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인간이 행하는 선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결국 하나님을 선택하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현대 개혁주의 신학과 상이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칼빈과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 타락했으며,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중세의 신학 자체가 베르나르 사후에 급진적으로 인간적 공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왜곡되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핀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르나르의 후대 사람으로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쪽으로 의지의 자유를 설명해 나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주장 자체만으로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현대의 개혁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2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


사랑은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육체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고, 영혼은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러나 범죄 한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 또한 육욕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 사랑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거룩한 모임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들 속에 함께 거하신다. 거룩한 모임에는 영적 가르침이 필요하고, 기도와 정화의 순서가 필요하다.

사랑은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기에 이른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퇴보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남용하며, 육적 욕망을 따른다. 그러므로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고, 이성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랑에는 오감이 있다. 촉각, 미각, 후각, 청각. 그리고 시각이 있다. 이것은 비유인데 육체는 오감을 통해 존재할 수 있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하나님은 만지고, 맛보고, 맡고, 듣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맛’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맛보고, 체험하고, 말씀을 듣고, 보게 된다.



[베르나르의 사랑의 네 단계]



사랑의 1단계 : 사람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사랑한다. 이것을 이기적 사랑이라 한다.



사랑의 2단계 : 인간은 자신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축복을 위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단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전환기라 할 수 있다.



사랑의 3단계 :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영적으로 높은 단계의 사랑이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을 맛보게 되고, 그로 인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임을 알고 사랑한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는 이유다.



사랑의 4단계 : 인간은 하나님은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다시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이것은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움이다. 자신을 죄에 방임하거나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지 않는다.



제3부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



[3부는 아가서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를 다룰 때 함께 다루겠습니다.]



제4부 영적 우정


[이 글은 1125년경 티에리의 수도원장이었던 윌리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윌리엄이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나눈 대화 형식의 글입니다. 또한 다른 몇 수도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글입니다. 일관성 없는 서신들이기 때문에 요약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문장을 발췌하겠습니다.]


“사랑이 사심 없는 열심을 영혼 안에 채울 때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우정은 탐욕이 가득한 눈과 밖을 향한 귀에서 시작됩니다.”

“영적인 우정에는 이익이라는 동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체의 품위를 위하여 갈망됩니다.”

“동등성은 참된 우정의 특성입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우정이 없는 어떠한 행복도 거의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숙한 영적 우정은 순수한 동기들을 보존하는 일로 시작됩니다.”

“당신의 친구를 영혼의 동료로 삼으려면 ... 서로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정에 특권으로 주어지는 열매는 친구를 신뢰하고 자신을 위탁할 수 있는 안정성입니다.”

“우정을 특징짓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애정, 안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정은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3. 나가면서


중세 신비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사의 큰 흐름을 ‘문자와 성령’이란 두 기둥으로 해석한다면 신비주의는 ‘성령’에 가깝습니다. 문자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교회사는 설교와 신학, 성경해석에 관련된 관점이며, 교리를 세우고 체계를 세우는 과정 속에서 강조됩니다. 반대로 성령 중심의 해석은 교리화로 인해 교회가 화석화되고 역동성과 생명력을 잃었을 때 성령 운동이 일어나는 것에 주목합니다. 오순절 부흥 운동과 주기별로 일어나는 대각성 운동은 성령에 중심을 두고 교회사를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두 주제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거나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운동이 일어나면 기도와 찬양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읽기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와 부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두 주제는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를 흐름을 살펴보면 문자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가 균형이란 중심에서 파동처럼 이동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중세 신비주의는 성령 운동에 가까우며, 하나님을 관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하려는 영적 갈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신비주의를 이해하면 이후에 일어나게 될 영적 대각성 운동의 특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도 대각성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18세기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 찰스 피니의 부흥 운동 등도 중세 신비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과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차갑게 이해하려는 시대가 있는 반면, 필립 슈페너의 경건주의 운동이나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처럼 감성적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운동이 일어나는 시대가 있습니다.

중세 신비주의는 경건주의나 부흥 운동과 맥을 같이하면서 지성을 넘어 감성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성향입니다. 감성적 하나님 이해는 위험하지만 풍성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시와 설교들은 이러한 장단점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중세 신비주의는 중요한 신앙의 해석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리적으로 혼돈스럽고, 개혁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억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의 신앙관은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려는 열정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세속 주의에 물든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으로 삶으로 실천할 때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중세 신비주의는 약간의 오류를 갖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열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영적으로 조명하면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내용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온통 사랑 고픈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미치도록 매어달리는 것도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가 비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허전한 빈 자리를 메우려고 재물에, 권력에, 지식에, 일에, 쾌락에, 육신적 사랑에, 사람들에게 분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종말이 가까워지면 세상에 불법이 많이 행해질 것이며, 그로 인하여 사랑이 식어지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2절을 보십시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면 이 시대가 종말이 가까운 때니까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만 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인 영이 죽었던 빈 껍질만의 사람일 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삼으시고 영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즉 성도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받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붓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사랑 고픈 세상에 세워진 교회가 부어줄 사랑이 없습니다.

소설가 이동철 씨의 글 중에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논픽션이 있습니다.
그 소설 중간에 주위의 창녀들 때문에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창녀들을 쫓아버린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 때문에 영업을 못하게 된 한 창녀가 교회에 항의를 합니다.
그 창녀는 술에 잔뜩 취해 알몸으로 교회 철문에 매달려 고함을 지릅니다.

“이 자식들아! 우리가 너희보고 밥을 달라고 했니?
떡을 달라고 했니? 내 몸 팔아 내가 먹고 사는데 너희들이 웬 상관이냐? 우리들 다 먹여 살려라.”고 말입니다.

이 창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사랑 고픈 사람들의 메마른 교회에 대한 항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때에도 세리와 창녀, 종들과 병든 자들 등 사회로부터 소외당하여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눈먼 자,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거지 바디매오, 세리장 삭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일곱 귀신들렸던 마리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 고아와 과부 등. 예수님께서는 세인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정죄보다는 연민의 정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사랑에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한계가 있는 가 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 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물음에는 ‘아가페(대가없는 신적인 사랑)’의 사랑이었고, 베드로의 대답에는 ‘필레오(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부모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이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끼’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의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에 입 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밤중 내가 잠자려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인과 똑 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부인의 고백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분명히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에서 그런 사랑이 거짓 사랑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대가 없이 베푸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님처럼 똑 같은 사랑은 할 수 없겠지만,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는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는 길은 주님의 사랑을 내 속에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처럼 사랑의 시작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으로 충만할 때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사랑도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4:9-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입니다.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요일4:12절을 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사랑을 서로 나누면 온전한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사해(死海)처럼 썩게 됩니다. 썩은 물에는 아무런 생명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도 흐르지 않고 혼자만의 것으로 고여 있으면 아무런 가치도 발휘할 수 없는 썩은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27:5절에서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면책’이란 ‘서로 대면한 상태에서 꾸짖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표현되지 않는 숨겨진 사랑은 차라리 대면하여 꾸짖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될 때에 진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어짐으로서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을 소유한 우리가 이 세상을 외면한다면 주님 말씀처럼 사랑은 급속하게 식어져 갈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을 흐르게 합시다. 사랑이 메말라 갈라터지는 사람들의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젖어들게 합시다. 가장 가까운 믿음의 식구들과 가족들로부터 시작합시다. 비록 서툰 몸짓이라 할지라도 흐르고 또 흐르면 아름답고 풍성한 사랑의 강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최고의 은사이며, 온전한 신앙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 대복교회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고 베풂으로서 더욱 풍요로운 사랑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