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2. [마가복음 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3. [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마태복음 22:32)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잘 한다는 것은 주로 사람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지만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평가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사도행전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예수님과 논쟁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다윗 왕 때 대제사장의 후손들로 덕망 높은
명문가였지만 신앙이 타락해 영도, 부활도 부정하며 ‘사람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행 23:6-11).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지자 예수님께 도전해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7형제가 있는데 맏형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면 형수는 유대 율법에 따라 동생의 부인이 될 텐데, 그런 식으로 7형제가 모두
형수와 결혼했다가 죽는다면 그 형수는 부활 때에 7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 22:27-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부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다시 꺼내서 하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을 신봉하던 자들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놀라서 감히 더
이상 예수님께 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아브라함은 무려 2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2천 년이 흘렀으니 아브라함의 머리털까지 다 삭아 없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이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더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산 자’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언제 ‘산 자’가 됐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84세 때 장막에서 이끌어 내셔서 “네 몸에서 난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을 때입니다. 자신도 늙고, 아내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자식 얻을 소망이 없어지고 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100% 믿었습니다(창 15:6). 그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죽은
자’였던 그가 부활의 이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산 자’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벨이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 지금까지
말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히 11:4).
믿음은 우리가 말씀을 믿고 언약을 믿을 때 우리 속에서 요동합니다. 날선 검같이 예리해서 영과 혼과 육까지 찌를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받은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순간 아브라함은 부활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마 27:50-53, 눅 20:38).
창세기에는 세 조상이 등장합니다.
첫 조상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지만 불순종의 조상, 사망의 조상입니다.
사망과 고통, 괴로움, 눈물, 한숨, 우수사려를 다 가져다 준 ‘죽은 자의 조상’입니다(롬 5:12, 6:23).
아담의 10대손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사람입니다.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창 6:7-13, 1:28).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담과 똑같은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9:1). 그러나 둘째 아들 함으로 말미암아 그 축복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10대가 지나 노아의 10대손 아브라함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2천여 년 만에 이 땅에서 잊어버렸던 믿음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아무리 애써도 일이 안 되다가 도와줄 누군가를 만나면 주위에서 “야, 이제 너 살았다. 그 사람은 널 도와줄 거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분명 죽음의 조상인 아담의 후예였지만 믿음으로 살아나 새로운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불신과 사망, 무덤, 눈물, 고통, 괴로움, 근심의 조상,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이 어영부영하는 인생의 조상이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조상입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똑같은 축복을 받습니다(갈 3:7-9).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대속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생명이 있다는 보혈의 공로를 믿는 부활 신앙의 원리입니다(롬 4:3-25, 8:1-2, 벧전 1:18, 25, 히 9:22, 레 17:11, 마 20:28, 롬 6:1-23, 창 15:6-7).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브라함같이 말씀의 언약을 믿고 있습니까. 부활의 신앙을 믿지 못하면 모두 거짓입니다. 믿지
못하면 정직하지 못합니다. 성실하지 못합니다. 욕심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빌 2:5).
남을 싫어하고 저주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누가 더 좋고 누구는 싫고,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향해서 구원의 반열에 세우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말씀했습니다. 한번 성을 내면
공든 신앙의 탑이 다 무너집니다(약 1:20). 하나님의 뜻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90세가 다 된 나이에 ‘네 몸에서 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믿은 아브라함처럼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될까?’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사업도 모험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고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산 자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지만 믿고 씨를 뿌렸습니다. 믿지 않는 블레셋이 뿌린
씨는 바싹 타 죽었지만 이삭은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믿고 판 우물에 샘물이 터졌습니다, 믿지 않는 블레셋이 판 땅에는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말씀대로 하늘의 별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사람은 별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단 12:3).
성도 여러분. 산 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입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야 일어나라!”,
“다비다야 일어나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言約)’이 말씀 언(言) 자를 쓰지 않습니까.
말씀이 왔을 때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34-38절 말씀을 볼 때 아브라함은 성령을 따라 부활을 약속받는 산 자의 조상이 됐습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성령으로 살아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요 5:24-25).
그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자의 무덤에서 산 말씀을 통해 다시 새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도 자신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삭,야곱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들은 뒤 이 3대의 신관(神觀)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비로소 바로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할 때는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죽은 태(胎)’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경계를 유월절 때처럼 뛰어넘어 버리셨습니다. ‘산 태(胎)’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계 앞에 막히지 않습니다. 통과해
넘어가 버립니다. 사라는 자식이 있겠다는 하나님의 천사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장막에서 몰래 웃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사라가 웃은 것을 알고 “네가 왜 웃느냐?” 물으니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사라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세상이 다 지나가기 전에 이룩한다”고 하는 마태복음 24:34-35 말씀을 꼭 믿으십시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하신 빌립보서 3장 21절 말씀을 믿으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산다.” (요 11:25-26) 하신 말씀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결론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려고 신앙생활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염라대왕처럼 죽은 영혼이나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데리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죽은 하나님이 아닌 산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신 5:26, 수 3:10, 시 42:2, 렘 10:10, 호 1:10, 고후 3:3, 딤전 4:10, 히 3:12). 하나님과 간격을 두지 마시고 기차들이 연결되듯 하나님께 바짝 붙어서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를 부활의 영으로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4-38)
무엇으로 살아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리고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 있습니다.
말씀으로 약속된[言約]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살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한 가지 남은 것은 살아서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 되시고 우리는 신부입니다 (계 19:7-8). 예수님은 만방에 영원히 빛날 선물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 기다리십니다. 그 결혼식에 가기 위해 입성할 때 천군 천사가 우리를 영접합니다. 죽음도, 아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는 세계입니다. 세상 고생은 한 순간에 다 잊어 버립니다(계 21:4). 그날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무슨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욕심이라면 기도할 욕심, 은혜 받을 욕심뿐이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어디 있든지 낙심하지 말고 “나는 산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용기 백배해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언령(言霊. 고토다마)은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믿어지는 신앙으로, 말에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영적인 힘을 말한다.
언혼(言魂)이라고도 쓴다.
소리를 내어 말한 언어가 실제 현실에 무언가 영향을 준다고 믿으며,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불길한 말을 하면 흉사가 일어난다고 여긴다. 때문에 축사를 할 때 절대로 잘못 읽는 일이 없도록 주의 받는다. 오늘날에도 일본에 많이 남아있는데, 결혼식 등에서 사용을 피하는 단어들(떠나다, 자르다, 돌아가다 등)도 언령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일본은 언령의 힘에 의해 복이 찾아오는 나라라고 하여 "언령으로 행복해지고 번영하는 나라"로 불렸다.
이러한 신앙이 생겨난 원인은, 고대에는 "말(言:고토)"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고토)"이 동일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한자가 도입된 당초에도 말과 현실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면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여진 부분이 있다.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을 "말을 입에 올리다(言挙)"라고 하는데, 그때 그 말이 자신의 교만함에 의한 것이었을 경우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 나오는 야마토타케루가 이부키 산에 오를 때 산신의 화신과 만났는데 야마토타케루는 그것을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길에 퇴치하겠다고 “언급”하였다. 그것이 타케루의 자만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타케루는 신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다. 즉, 언령사상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단순한 애니미즘적 사상을 넘어서서, 바른 마음가짐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타 문화권에서도 언령과 비슷한 사상이 발견된다. 구약성경의 "רוח הקודש",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서 '성령, 영'으로 번역되는 프뉴마(Πνεύμα) (동사 “불다:πνεω”를 어원으로 하며, 숨, 혹은 거대한 존재의 숨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가 해당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가 “바람은 자신이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 … 성령으로 난 사람도 모두 이와 같다”라고 언급한 구절에서 '바람'과 '성령'이 동일한 구절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소리나 말은 불길한 영혼을 내쫓고 자리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한다고 여겨진다. (예:신토에서 박수를 치는 것.) 이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제례, 축제, 악령퇴치 때 행해지는 것이다.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치는 큰북, 카니발에서의 피리, 종, 큰북, 중화권의 춘절에 쏘는 폭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람의 말도 주문이나 조서의 형태로 그 영적인 힘이 이용된다. 다만 그 근본이 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제각기 다른 견해가 있다. 예를 들어 “진리란 반석과 같은 것으로 그 위에 교회를 지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진실을 알고 싶다면 거울에 너 자신을 비춰보아라, 그로써 모든 것이 명백해 질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을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의견이 있고, 혹은 그 “현실” 자체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나 시대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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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
전 세계적으로 '말에 힘이 있다.'는 개념은 역사가 기록되기 한참 전부터 이어진, 종교의 역사와 함께한 보편적인 개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식의 속담이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어떤 문화권이건 민간신앙에 있어서 주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만 보아도 언령이라는 것이 인류 보편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미신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배척할 것 같은 이미지인 기독교에서도 '언어 자체에 힘이 있다'는 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당장 창세기에서만 봐도 빛이 있으라 하고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묘사할 정도이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고 "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었다"고 묘사하며, 이 밖에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야훼의 권능을 두고 '말씀'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전통주의 가톨릭 진영에서는 서방 교회의 표준 언어인 라틴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까지 하기도 한다. 한편 불교나 힌두교 등 인도 계통 종교에서는 만트라(진언)라는 개념을 정의하여 특정한 영적/물리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산스크리트나 팔리어 낱말이나 발음, 구절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개념은 민간사상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한민족의 경우만 해도 고조선 시절부터 말을 조심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호랑이를 "산군님"이라고 부르거나 도둑을 "밤손님"이라 부르는 등 그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 제일 먼저 호칭을 피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비슷한 의미에서 고대 중국에서는 아예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피휘라는 개념을 썼고, 그렇게 '삼가는 뜻을 표한다.'는 의미가 맞아떨어져 한반도에서도 줄곧 써먹었다.[1]
[1] 슬라브어파와 게르만어파에서의 곰도 마찬가지다. 다른 단어로 돌려 말하다가 아예 곰을 가리키던 본래 단어가 실전되어 버렸다.[2] 가령 노블레스에서 라이제르의 '꿇어라' 한 마디로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과 상대의 정신을 연결시켜 지배한 뒤 명령을 내리는 것이므로 언령이 아니다. 제시카 존스의 킬그레이브(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역시 범위 내에서만 자신에게 있는 특수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통제할 수 없는 강박을 일으킬 뿐, 위와 같은 정신 조작에 가깝다.[3] 금각은각형제의 호리병 앞에서 대답을 하면 호리병 안에 빨려들어가지만, 말은 어디까지나 트리거에 불과하다.[4] 말한 게 거꾸로 된다.[5] 작중에서 스틱의 힘을 이용해 말하는 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게 한다. 단, 말을 끝까지 해야만 발동된다는 약점이 있다.[6] 언령 마법을 쓸 수 있는 유이한 등장인물.[7] 단순히 화술이 뛰어난 걸 넘어서 그의 말이 권능이나 다름없기에, 그의 언변에 다들 무의식적으로 경계심을 풀고 따르게 된다.[8] 언령 실체화.[9] 소리를 실체화시키거나, 말의 의미를 구현시키는 등 언령과 유사한 능력을 보인다.[10] 저주 한정이라 주언(呪言)이라고 칭한다.[11] 이누마키의 주언을 모방한 바가 있다.[12] 본래는 화술이 뛰어난 정도에 불과하지만, 생각한대로 능력을 구현시키는 회원들을 상대로는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능력을 강화시키거나 봉쇄하는, 그야말로 말에 담긴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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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풍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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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붓다
[이처럼 일본 신도의 신들과 신도적 세계관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일본’이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신예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1973~현재)는 흔히 ‘일본의 램브란트’ 혹은 ‘빛의 작가’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절절하면서 한없이 부드럽고 또 잔혹하기까지 한 배경미술의 모노노아와레적 서정성과 함께 특히 강렬하고 세밀하기
그지없는 빛의 상징을 통한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 그는 실제 풍경을 사진 찍어서 리터칭을 통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든지, 독백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을 선호한다. 그가 최근에 내놓은 <너의 이름은 (君の名は,
2016)>은 <초속5센티미터>라든가 <언어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소설도 쓰고 애니메이션도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6년 8월 일본에서 개봉된 이래 일본영화를 통틀어 역대 2위의 흥행기록을 올려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이목을 모았다. 2017년 1월 한국에서도 공개되었고, 부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장편부문 우수상을 수상받기도
했다. 2018년 2월 까지도 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 제1위를 마크하고 있다.
일본에서 개봉되기 두 달 전에 동명 소설이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에서 출간되어 영화 공개시점까지 매출 50만부를 돌파하고 2016년 문고부문 1위의 매출 기록을 올렸다. 소설과 영화는 스토리상의 큰 차이는 없지만 화자가 조금 다르다. 소설판은 다키와 미쓰하의 1인칭 시점만으로 서술되어 있는 데 비해, 애니메이션판은 3인칭 시점이다. 이 밖에 가노 아라타(加納新太)가 쓴 가도카와 스니커문고(角川スニーカー文庫)판 소설도 있다. 여기에는 신카이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 3개가 추가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소설 <너의 이름은>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다. 처음에 혜성이 낙하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상적인 마을 이토모리에 사는 여고생 미쓰하는 미야미즈(宮水)신사 가문에서 태어난 무녀이다. 그녀와 도쿄에 사는 고교생 다키는 꿈에서 몸이 서로 바뀌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고 둘은 서로가 남긴 메모와 일기를 통해 상대방의 인생을 알아 나가지만,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몸이 바뀌지 않게 된다. 그러자 다키는 자신이 체험한 이토모리 호수 마을의 풍경화를 여러 장 그린 후 어딘지도 모르는 그곳을 찾아 떠난다. 그의 손목에는 언제나처럼 부적 실매듭이 둘러져 있다. 하지만 언제 누구한테 받은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던 때 우연히 들른 라면집 주인이 이토모리 마을 출신이었는데, 그는 3년 전 이토모리 마을이 혜성 ‘티아마트’의 운석 재해로 전체 주민 1500여 명 중 500여 명이 죽고 나머지도 점차 마을을 떠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준다. 운석은 축제 중이던 미야미즈신사 부근에 떨어졌고, 그곳은 원래 있던 이토모리 호수 근처였기 때문에 내부에 물이 흘러들어 하나의 조롱박 형태의 새로운 호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다키는 휴대전화에 입력해 놓았던 미쓰하의 일기를 불러오지만, 그 글씨들이 다키가 보는 앞에서 모두 지워져 버린다. 도서관에서 찾아낸 관련 책자에서 다키는 미야미즈 히토하(82세), 미쓰하(17세), 요쓰하(9세)가 모두 사망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다키가 미쓰하의 구치가미자케(口噛み酒)를 마심으로써 둘은 다시 몸이 바뀌고 순간적이나마 황혼녘 때 극적인 재회를 한다. 그 직후 미쓰하의 몸으로 바뀐 다키는 마을 이장인 아버지를 설득하여 재앙을 피한다. 5년 후 다키와 미쓰하는 모두 상대방의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우연히 도쿄에서 만나 서로 이름을 묻는다.
이 <너의 이름은>은 내가 아는 한 일본 신도의 핵심을 가장 잘 묘사한 서브컬쳐 작품이다. 몸이 바뀐다는 중심 모티브 자체가 몸에서 혼이 빠져나온다는 신도적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새로 즉위한 천황이 최초로 행하는 추수감사제인 대상제(大嘗祭, 다이조사이)에 앞서 행해지는 진혼제(鎭魂祭)는 혼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안정시키는 의식을 가리킨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오나무치(大國主神) 신화에서는 스쿠나히코나(少彦名)가 바다 저편에서 빛을 발하며 다가와 자신을 모시면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오나무치의 행혼(幸魂)・기혼(奇魂)’이라고 밝힌다. 이는 혼과 몸이 분리될 수 있다는 관념이 투영된 신화라 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에서 주인공의 혼이 자기 몸을 빠져나와 상대방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발상의 바탕에는 이와 같은 일본의 전통적 관념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런 몸의 뒤바뀜에 대해 소설판의 다키는 흥미롭게도 “인격이 서로 뒤바뀐다는 일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경험이었지만, ‘나라는 존재로부터 잠시 동안 멀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일종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셈이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우리나라 무속의 경우처럼 한(恨)을 ‘풀어내는’ 자유가 아니라 인도 요가의 경우처럼 ‘묶어내는’ 자유에 속한다. 실제로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는 묶는 것을 뜻하는 일본어 ‘무스비’(結び)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야미즈신사의 여궁사인 미야미즈 히토하는 이 무스비의 의미에 대해 손녀딸 미쓰하와 요쓰하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땅의 수호신을 말이다. 옛말로 ‘무스비’라고 부른단다. 여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지...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전부 같은 말을 쓴단다. 이 말은 신을 부르는 말이자 신의 힘이란다. 우리가 만드는 실매듭도 신의 솜씨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지...한데 모아서 모양을 만든 후에 꼬아서 휘감고, 때로는 되돌리고, 끊기고, 또 이어지고, 그것이 실매듭. 그것이 시간. 그것이 무스비...물이든 쌀이든 술이든, 무언가를 몸에 넣는 행위 또한 무스비라고 한단다. 사람 몸에 들어간 것은 영혼과 이어지는 법이지. 그러니 오늘 올리는 제사는 말이다. 미야미즈 가문의 핏줄이 몇 백 년이고 지켜온, 신과 인간을 단단히 이어주는 아주 소중한 전통이란다.”
“신이란 말이다, 관계를 의미한단다. 말은 사람과 사람을 엮지. 말 자체는 신이 아니지만 말에 의해 엮이는 마음 자체는 신이 되는 거야. 주먹밥은 신이 아니지만 쌀을 만든 땅과 물, 그리고 쌀을 기르고 수확한 사람과 쌀로 밥을 지어 주먹밥으로 만든 사람, 나아가 그 주먹밥을 받아서 먹는 사람을 모두 이어주지. 주먹밥으로 이어지는 그런 관계가 신이라는 뜻이지. 꿈이란 말이다, 평소와 다르게 어디인지 모르는 장소에서 상식을 벗어난 연을 맺는 일이란다. 그것도 ‘무스비’라고 부를 수 있는 게지.”
단적으로 말해 무스비는 신(神)이다. 《고사기(古事記)》는 무스비를 원초적 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신으로서의 무스비는 모든 관계성이자 시간이고 언어이며 실매듭이면서 동시에 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과 실,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 몸과 영혼을 연결시켜 주는 신의 힘 그 자체이다. 이 중 시간과 신을 동격으로 여기는 관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관계성을 신적인 무스비로 여기는 관념은 지극히 일본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간인(間人)주의라든가 장(場)의 윤리, 역(役)의 원리, 세켄(世間), 화(和)의 원리와 같은 일본문화코드를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신을 언어와 연관시키는 발상이다. 사실 고대 일본인은 언어와 사물 사이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여 말 속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었다. 이를 ‘언령(言靈)신앙’이라 한다. 통상 신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구성에 관여하는 근원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신으로서의 무스비를 언어와 동일시하는 위의 관념은 지극히 라캉적이다. 라캉은 언어야말로 그가 상징계라고 이름붙인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구성을 결정짓는 근원적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너의 이름은>이 표현하는 세계는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무스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미쓰하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같은 신을 모시는 이토모리 마을의 오래된 미야미즈신사 집안의 손녀딸이다. 할머니가 신사를 지키는 궁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미쓰하와 요쓰하는 마쓰리 때마다 무녀로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신악무(神樂舞)를 추는 등 주역을 맡는다. <너의 이름은>의 중심 무대인 미야미즈신사는 대대로 여자가 이어받기 때문에 미쓰하는 언젠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신주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신사는 실이나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신의 힘을 ‘무스비’로서 섬기고 있으며, 신체(神體)는 이승과 저승,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장소로 여겨진다. 혜성 티아마트가 떨어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 제신의 이름은 미야미즈 가문의 조상신인 시토리노카미다케하즈치(倭文神建葉槌命)로 별칭 아메노하즈치노오노카미(天羽槌雄神)라고도 한다.
이 신은 《고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고어습유 (古語拾遺)》에서 인간에게 베 짜는 방법을 가르친 베틀의 신으로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 따르면 천신 계열의 무신(武神)인 후쓰누시와 다케미카즈치가 토착신들을 평정하려 했을 때 별의 악신 아메노카가세오(天香香背男)만 토벌하지 못해 곤란해 했다. 이때 그들 대신 나아가 별의 신을 굴복시킨 자가 바로 베틀의 신 시토리노카미다케하즈치였다. 이토모리 마을에는 이 신이 끈을 무수히 엮어서 용을 휘감아 퇴치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처럼 일본 신도의 신들과 신도적 세계관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일본’이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chat0113@daum.net
논문으로
〈현대일본종교와‘마음’(心)의 문제-‘고코로나오시’와 심리통어기법에서 마인드컨트롤까지-〉,〈고대 오사카의 백제계 신사와
사원연구〉등이 있고, 저역서로 《일본문화사》,《신도,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정신의 풍경》,《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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