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하라
"패역한 족속"이란 용어가 한글 성경에서 15회 사용된 것으로 검색됩니다.
인터넷 다국어 성경 사이트에서 검색 결과
그런데 모두 에스겔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12구절)
에스겔 2:5, 6, 8. 3:9, 26, 27. 12:2, 3, 9. 25. 17:12, 24:3
비슷한 용례로는 패역한이란 단어와 족속이란 단어가 분리 되어 사용한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레미야 5:11, 에스겔 20:13, 44:6
패역한 족속(rebellious people) בֵּית מְרִי
패역한 족속(베이트 메리) rebellious people
족속(1004) 바이트( bayith) בַּיִת
어원/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7:1, 레14:35, 삼상1:7), 권속(창18:19,레16:6, 삼하2:3), 궁(창12:15, 삼하7:2), 처소(창24:31, 대하5:7), 집 안(창27:15, 시55:14),전(출34:26, 신23:18), 옥(창39:20, 삿16:21,왕하25:27), 간수장(창39:21), 궁중(창45:2,왕하21:33, 에7:8), 가족(창5:22, 신11:6, 시68:6), 족속(출2:1, 레22;18, 수17:17), 식구(출12:3), 안쪽(출28:26), 가옥(레14:55, 신19:1,사5:8), 친정(레22:13), 종족(민1:2, 대상7:4), 지도자(민25:14), 지파(수22:14), 신전(삿9:4,왕하19:37, 대상10:10), 신당(삿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16:18, 대상29:3), 창고(왕하20:13), 궁궐(왕하21:18, 대상14:1), 성막(대상9:23), 궁전(대상17:1), 곳간(대상26:15,사22:8), 반열(대상28:13), 내전(內殿)(대하3:13), 무더기(욥8:17), 가산(욥20:28), 국고(사22:15), 딸(사10:32), 부엌(겔46:24), 집(미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패역한(4805) 메리(merȋy) מְרִי
발음 / 메리 [ merȋy ]
어원 / 47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반역함(신 31:27, 느 9:17, 겔 2:8), 거역하는 것(삼상 15:23), 반항하는 마음(욥 23:2), 반역(잠 17:11)
구약 성경 / 23회 사용
에스겔 20: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공동번역)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광야에서 나에게 반항하였다. 내가 정해 준 규정을 따르고 내가 세워준 법을 지켰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거절하였다. 그들은 나의 안식일을 무엄하게도 욕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광야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현대인)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나를 거역하여 순종만 하면 살 수 있는 내 법과 규정을 지키지 않고 거절하며 나의 안식일을 완전히 더럽혔다. 그래서 내가 광야에서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그들을 멸망시키겠다고 말하였다.
너는 패역한 족속에게...못하겠느냐하고
'패역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리' (*)는 동사 '마라드'(*, 반역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반역'의 뜻이다(2:3).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 숭배가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그분만을 섬기며 살아야 했으나 우상을 왕으로 삼았기에 반역 행위를 한 것이다.
패역한 원인 세 가지
1. 율례를 지키지 않음
2. 규례를 멸시
3. 안식일을 더럽힘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율례(종교법) –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계명, 율례, 법도, 규례의 차이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law)과 율례(statutes)와 규례(ordinances)에 관해 자주 말한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완전치 않기 때문에 율례들이 보충한다.
이 때문에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례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에 대하여]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법체계와 성경의 법체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 라이프 성경사전 ]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던지다’, ‘(물을) 뿌리다’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말로, 지시, 교훈, 법령, 계명, 법, 관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민 15:16; 시 19:8). 또 헬라어 ‘노모스’는 ‘분배...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율법, 정의 ,규례, 율례, 명령, 계명, 길, 법도 개념들
공의, 정의 : 미쉬팟 Mishphat -
םשףט'ם 복수mishphatim םשפט
심판, 정의의 판단, 재판, 사법정의, 정의의 심판
Judgment, Justice, 사사기는 이 샤팥(재판하다)에서 나온 쇼파팀 (재판관들)의 번역임
홐 Hok,복수 Hukimחק'ם חק
Statutes, Ordinances 규례, 율례, 응식
하나님이 처방해준 처방전, 하나님이 주신 그 처방대로 준행한 사람에게 당연히 돌아가는 응식(레 8:29, 10:13, 15 등에서 종전 개역한글에서는 응식으로 번역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소득, 몫 등으로 번역)
레위기 6장 11, 15절 또한 응식으로 번역됨이 더 정확하다고 분별됩니다. 즉 레위자손들은 성막 봉사로 당연히 그 받을 응식을 갖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응식을 당연히 공급하신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צדק 의 체뎈 Righteousness (Justice – 창 18:19)
멜기세덱은 원래 멜렉키체덱을 그리스어 표기법으로 쓴 것임
이 의는 죄에 대한 개념으로 죄를 사함받았을 때, 속죄되었을 때 의가 나타나므로 대개 속죄, 대속과 관련되고 노아의 경우 당대의 의인이었다는 말에서도 사용됨(창 6:9)
םצוות םצוה 계명, 명령, 미츠바 ( 한글 성경 미스바) 복수 : 미츠보트
명령하다는 뜻의 차바에서 나온 명사형이므로 명령 혹은 계명으로 번역되는 것이 순리로 보임.
דרק 길
출애급기 18장20절
그들에게 율례(후킴)와 법도(토라)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데렉)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 개역개정)
신명기 26장 17절
네가 오늘 여호와가 네 하나님이라고 선언(보증)하였나니, 그분의 길들로 행하며 그분의 규례(율례= 훜킴)들과 그분의 계명들(미츠봇트)과 그분의 의의 판단들(미쉬파팀)을 지키며 그분의 음성(콜)을 청종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명령과 의의 판단들을 좇는 삶은 레일위를 달리는 것과 같은데 기차가 그 레일에서 벗어난 경우에는 그 기차를 기중기로 들어올려 다시 레일 위에 올려 놓아야 달릴 수 있습니다. 이일은 오직 성령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 (토라) = תורה : 율법, 법도
1)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합쳐서 말할 때 토라, 율법이라 말함
2) 신약적으로는 로마서 8장 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지, 어떤 법칙이나 무슨 법을 말할 때도 이 토라를 의미한 것임
3) 토라는 크게 네가지로 나뉘어진다고 분별합니다.
가)성전제사법 – 동물희생과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에 관한 법 :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벽하게 완성되고 대체되었으며 각 신자들은 십자가 희생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를 매일 행하고 있습니다.
나)의식법 – 옷을 어떻게 입으라, 음식은 무엇을 먹지 말라, 몸을 깨끗이 목욕하라 뿐만아니라 성전시대에 관련된 법들, 할례, 안식일을 여기에 포함하여 지켜야 할지는 해석상의 차이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안식후 첫날 예배를 보여주는 한편(행 20:7, 고전 16:2),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존귀하신 태양의 날에 모이도록 강요된 (서기 321년 3월7일부터) 역사적 배경도 있으며 이 둘이 겹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의식법은 성전제사가 대체 폐해졌으므로, 그에 수반되는 법으로서 폐해졌다고 보는 견해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롬 14:1-5은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 형사법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 이러한 형사법들은 그리스도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에 그대로 수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라)도덕법
탐내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 이 모든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안에 수용, 포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성경이 율법이 폐해졌다고 가르친다면 그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완성(플레로), 성취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5, 갈 5:4, 2:16 절, 롬 13:9 등은 많이 오해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 중에서 동물희생들은 십자가로 완벽히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율법 이상의 명령들을 준행합니다.성령을 좇아 행하면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롬 13:9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지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하는 계명을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등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여전히 율법은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휘들의 공부를 마치기 전에 꼭 살펴볼 말씀이 신약에 있습니다.
마태 12장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의의 심판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하리니 ( 정의가 승리에 이르도록 인도하기까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미쉬파팀임은 분명합니다. 즉 정의의 심판이 승리로 종결되어 하나님의 사법정의가 실현되고, 사탄 마귀와 그 추종자들이 심판을 받으며, 의의 사역자들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보상받는 정의가 실현되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시고 자기 목숨을 바쳐 인생들의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과 상한 갈대를꺾지 아니하시고 인생들을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단어들이 갖는 어의를 중심으로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시간이 많이 허락될 때 좀 더 정리하여 각 개념과 내용들을 분석하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아래 몇구절 킹제임스 성경 구절들을 뽑아서 예로 들어봅니다.
창세기 18장 19절
19 왜냐하면 나는 그가 그의 자손과 그 이후의 그의 집을 명하여 여호와의 길을 지키도록 하여 정의(=의, 츠다카)와 의의 판단(정의, 사법정의, 미쉬팟트)을 행하여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를 그에게 가져다 주도록 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Lv 6:11, 15 Gn 47:22 레위기 6:11, 15, 창 47:22
응식의 예들, 제사장들이 마땅히 받을 응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창 47:22에서는 이집트의 태양신 제사장들도 마땅히 공급되는 응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규례-후킴), and his commandments(계명 = 미츠보트), and
his judgments( 사법정의 정의의 판단=미쉬파팀),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음성=콜)
Leviticus 25:18
Wherefore ye shall do my statutes(율례), and keep my judgments(의의 판단들), and do them; and ye shall dwell in the land in safety.
Deuteronomy 5:31
But
as for thee, stand thou here by me, and I will speak unto thee all the
commandments, and the statutes(규례), and the judgments(정의 심판), which thou
shalt teach them, that they may do them in the land which I give them
to possess it
Deuteronomy 26:16
This
day the LORD thy God hath commanded thee to do these statutes(규례) and
judgments(의의 판단): thou shalt therefore keep and do them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Deuteronomy 26:15-17 (in Context) Deuteronomy 26 (Whole Chapter)
Deuteronomy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 and his commandments, and his judgments,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
Deuteronomy 30:16
In
that I command thee this day to love the LORD thy Go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commandments and his statutes and his judgments,
that thou mayest live and multiply: and the LORD thy God shall bless
thee in the land whither thou goest to possess it.
He is the Rock, his work is perfect: for all his ways are judgment: a God of truth and without iniquity, just and right is he.
어원/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의(창 18:19), 법(렘 30:11), 공의(신 16:18, 시 25:9), 율례(왕상 9:4), 양식(출 26:30, 왕상 6:38), 판결(출 28:15, 민27:11, 삼상8:3), 규례(레5:10, 민15:16, 삼상30:25), 법도(레18:4, 신4:1), 재판(레 19:35, 신 1:17), 법(레 24:22, 왕하17:26,27), 사연(민27:5), 판결법(민27:21), 몫(신18:3), 권리(신21:17), 송사(신24:17, 왕상3:11), 방식(수6:15), 관습(삼상2:13), 계명(왕상2:3), 직무(왕상4:28), 일(왕상8:45,59), 모양(왕하1:7), 풍속(왕하17:33,34,40), 반열(대상6:32), 판단(대상16:12), 사정(욥13:18, 사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27:2), 판단력(시72:1), 뜻(습3:8), 작정(잠29: 26), 권리(사10:2, 렘32:7), 재판석(사28:6), 보응(사49:4), 심문(사53:8), 형벌(렘49:12, 습3:15), 화(렘51:9), 죄(겔7:23), 죄악(겔7: 27), 의로움(렘12:1).
[동] 합당하다(신 19:6), 공의롭다(신32:4), 재판받다(수20:6, 삿4:5), 심문하다(왕하25:6), 재판하다(욥14:3), 옳다(욥34:4), 정직하다(욥34:6), 공판하다(시35:23), 심판하다(시119:84, 사3:14), 정직하다(잠12:5), 작정하다(잠16:33), 적당하다(사28:26), 바르게 하다(사32:7), 송사하다(사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욥기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율례(2708) 후카(chuqqâh) חֻקָּה
관련 성경 / 율례(창 26:5, 민 9:3, 왕하 17:34), 규례(출 12:14, 레 16:29), 소득(레 7:36), 풍속(레 18:30, 20:23), 법도(레 25:18, 신 11:1, 욥38:33), 율법(민 31:21).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안식일(7676) 샤바트(shabbâth) שַׁבָּת
발음 / [ shabbâth ]
어원 / 76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안식일(출 16:23, 느 9:14, 암 8:5), 안식(레 25:4, 신 5:14), 안식년(대하 36:21).
[동] 안식하다(레 25:2, 신 5:14).
구약 성경 / 11회 사용
하나님의 소명을 받으려면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감격으로 엎드려져 있기만 해서는 그 소명을 받들어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명 받은 사람은 일어서야 하고, 눈앞에 펼쳐진 소명의 땅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린
에스겔을 향해 말씀이 들려옵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2:1~2).”
익숙하고 자랑스러웠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세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세대의 젊은이가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무엇을 기대했을지 상상해봅니다.
심판과 회복, 망국과 재건의 긴장 속에 서서 하나님께서 혹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고토로 돌아가게 하실지, 그 기쁜 소식을 자신에게 전하게 하시지는 않을는지 기대를 품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을 향한
소명의 말씀은 엄중했습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패역, 그리고 그들을 향해 외칠 자신에게 주어질 환란이 자신의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3~4절).”
일을 부탁하면서 그 일은 안될 일이지만 해보라고 하면 누가 그런 일을 맡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예언자들은 바로 그런 부탁을 받고
일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기막힌 명령을 내리십니다(사 6:10).
이스라엘이 너무나 완고해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채지 못하리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말입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는 아예 그의 사명이 여러 나라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는 일이라 말씀하십니다(렘 1:10).
단어들만 헤아려봐도 세우는 일보다 부수는 일이 두 배쯤
많았으리라고 짐작이 갑니다.
그가 전할 메시지에 온 백성이 격렬히 저항할 테니 예레미야 자신이 요새처럼, 쇠기둥과 놋성벽처럼
강해져야 한다고도 하십니다(1:18).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보람만큼 위험도 큽니다.
예레미야는 여러 번 맞고 갇히고
살해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이사야는 폭군 므낫세를 격노하게 만들어 톱에 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오죽하면 그리스도께서도
팔복을 말씀하실 때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이 선지자들을 뒤따르는 일이라 하셨겠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그러니 소명 받은 자는 강해야 합니다.
아니 강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명령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6~7).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가 섬길 이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의 호응에 대한 환상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전해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보며 그 장엄한 권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하며, 권위있고,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환상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우주적 주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죠.
에스겔이 환상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또 다른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신뢰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일으켜 세웁니다. 에스겔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진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한 조건을 알려주시기 위한 하나의 의도였습니다.
사람, 가정, 교회, 국가 모두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세워지지 않으면 모두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하나님의 영으로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뜻에 따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건강과 지혜와 물질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10절까지 '배반'과 '패역'이라는 단어가 몇 번 등장하는지 세어보세요.
정확히
7번 등장합니다.
완벽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이스라엘,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죠. 패역한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과
지식, 물질을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힘"과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나 아니면 안돼"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패역한 사람들이 오래전과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그 안에 주님이 세운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한 목사가 "내가 선지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중에서 스스로를
"선지자"로 칭한 사람은 거짓 선지자 외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무엘도 사람들이 선지자라고 부르기 시작했기에 선지자로서 서게
되었고, 그 외 많은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이 그를 세우시고, 백성들에게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선지자임을 알게
했습니다. 가짜뉴스와 거짓 정보가 만연한 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과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패역함과 굳은 마음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말씀조차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진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정답을 말해주고,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더해 줄 것입니다.
패역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선지자의 의무는 아주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사람들을 찔레와 전갈로 비유하시며 그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선지자의 마음과 삶을 찌르고 독을 퍼뜨릴 것인지 알게 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므로 패역한 자들이 듣든지 말든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오로지 하나님의
두루마기를 먹여 주심으로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마 4:4)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왜 패역해 졌는지 살펴보면,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솔로몬 시대가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왜
부패해졌냐하면 국교를 기독교로 삼았던 로마 시대가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더 겸손하게 욕심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 위해 늘 마음과 생각을 열어 놓는다면, 우리안에 '패역'과 '배반'은 생겨나지 않겠죠.
오늘 에스겔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잠잠히 살펴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패역과 배반에서
벗어나 찔레와 전갈이 있더라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에스겔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이며,사독 자손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므로 제사장으로 이미 활동하던 자인데 하나님께서 예언자로 부르셨다. 그런 면에서 스가랴나 예레미야와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일찍 부름을 받았고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에스겔은 유다 말기의 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빌론의 이주 정책에 포로로 잡혀가 그발 강변 델아법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바빌론 포로 초기의 제사장이요 예언자로 약 22년간 활동하면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지 130년의 세월이
지났고 국내 정세는 약할 대로 약해지고 강한 외세의 영향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져 도저히 회복 불가능의 포로들에게,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는 예언을 하므로 소망의 예언자로 불리운다.
첫째: 포로기의 사역자 에스겔
1) 그발 강가에서 계시 받음(겔 1:1~3)
에스겔이
소명 받은 곳은 그발 강가라고 했다. 그발 강은 바빌론 북쪽 유브라데 강에서 시작하여 닙푸르를 지나 티그리스 강으로 통하는 대
운하로,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치수사업으로 건설한 여러 운하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 사업에 유대 포로
민들이 관계되었고 그 주변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계시가 에스겔에게 임한 때는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가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정식으로 수행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였는데, 제사장보다는 선지자로서의 직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포로
유대인들이 동원되어 건설 중이던 그발 강의 운하 근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필요한
때에 적절한 인물을 택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르시고 일을 아끼고 사역을 감당케 하셨다. 이때 포로의 상황은 유대 땅을 잃고
포로로 잡혀와 노동하며 너무도 암담한 상황에서 체념하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정착하려는 유대인들에게 포로 초기였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지금의 고난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죄로 인함임을 깨우치며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 소망을 심어주었으므로 그를 가리켜 소망의 예언자로 부른다.
2) 하나님이 강하게 하심(겔 2:8~3:3)
이러한
환경에 둘러싸인 에스겔을 부르신 하나님은 이미 1장에서 네 가지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 부재하심을
보여주었고, 소명을 주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능력도 주셨다(3:8~9). 겔 3:8~9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 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그리고 말씀까지 주셨다. 겔 2:8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2:1~3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은 것을 먹으라, ......내가 입을 벌리니 두루 마리를 내게 먹이시고. 두루 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어느 시대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전달하게 하시는데, 특별히 에스겔에게는 말씀의 구체적이면서 독특한 경험을 하게하여 힘 있는 말씀을 증거 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의지하여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특별히 강해 설교를 강조하는데, 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에스겔에 의해 강한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혼란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데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개혁의 근거와 원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해야 가능하다 믿는다.
둘째: 패역한 백성을 상대한 에스겔
1) 이스라엘의 패역(겔 2:1~7: 3:22~27)
에스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이방인 들처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대해 반역하는 백성임을 패역한(하모르딤)이란 표현에서 입증된다.
2:3~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한 자.
2: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2: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2:6~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라.
2:7~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하라.
3:27~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라.
2:6~ 가시와 찔레와 함께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두려워 말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신
9:6은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했는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할만하다. 전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은 불순종의 연속이요 그로 인한 전멸의 경험을
거듭하면서도 반복되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참상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종을 세워 깨우쳐 왔다.
렘
7:25 "너희 열조가 애급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겔
2:3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아무리 외쳐도 마음이 강퍅하고 패역한 족속이라 돌이키지 않은 것을 알지만 그들에게 에스겔을 보내는
하나님의 입장과, 반면에 고난과 실패가 예견된 사역을 해야만 하는 에스겔의 입장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가야 했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쳐야만 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아무리 그의 백성들이 배반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구속사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2) 회복의 약속(겔 37:1~11)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된 지도 이미 오래 되었고(130년) 남 왕국 유다에서도 바빌론에 의해 포로가 되어 소망이
전혀 없이 보일 때다.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70년이라는 기한이 정해진 포로 초기의 상황에서 암담했으나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 하심으로 포로귀환은 물론 선민으로서의 회복도 예언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
경험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은 물론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경험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까지 주셨다.
겔 37:1~11은 마른 뼈 소생의 환상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가 즐비한 골자기에 데려가셨다.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셨다.
소생이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37:4~5)고 하셨다.
생기는
히브리어로 루아흐인데 호흡, 바람, 기운, 영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숨(breath of
God)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창 2:7에 나오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불어넣은 생기와 동일한
것이다.
6절에서 뼈를 소생시키는 작업이 두 단계로 구분되어있다. 첫 단계는 힘줄. 살, 가죽 등 사람의 형태를 갖추는
작업이고, 둘째 단계는 생명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에스겔이 뼈들을 향하여 대언할 때에 뼈들이
합쳐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인 후, 생기가 시체에 들어갈 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 큰 군대의 무리가
되었다. 이 환상은 이스라엘이 마치 마른 뼈같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될 때 새롭게 회복됨을 보여주셨다.
겔 37:14 "내가 또 내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룰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 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계 21:3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심
겔 2:1-10
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8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겔 2:1-10 /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2)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내가 똑바로 서자 주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 왔다. 3)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겠다. 그들은 반역하는 백성이어서 내게 대항하고 일어섰다, 그들의 조상이 옛날에 저지른 짓을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되풀이하고 있다. 다른 민족들에게도 내가 너를 보내겠지만 4) 우선 저 파렴치하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보내겠다. 너는 그들에게 가서 나 여호와가 네게 하는 말을 전하여라. 5) 비록 그들이 계속 반항하고 네 말을 듣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저희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그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6) 너 사람아,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아무리 너를 위협하더라도 떨지 말아라. 네가 가시덤불과 철조망 속에 갇히고 전갈들 위에 앉게 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7) 그들이 네 말을 듣든지 듣지 않든지 마음 쓰지 말고, 내가 네게 당부한 말만을 그들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반역을 일삼는 백성이라는 사실은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8) 너 사람아, 오직 너만은 내가 이르는 말을 들어라. 저 반역하는 백성처럼 너는 반항하지 말아라! 네 입을 벌리고 내가 주는 것을 먹어라!' 9) 내가 앞을 바라보니, 내 앞에 손이 하나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10) 그리고 그 두루마리가 펼쳐져서 내가 보니, 그 앞뒤로 글씨가 쓰여 있는데 슬픈 노래와 탄식과 절망에 찬 아우성이 가득하게 적혀 있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선지자로 부르심(1-2) 여기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1장 28절에서 에스겔은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네 발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스스로 일어나 설 수 없습니다. ‘인자’(son of man)라는 호칭은 하나님 앞에서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나타냅니다(예수님의 인자 개념과 대조적이다. 예수님의 경우는 메시아 개념이다; 요 3:13-14; 5:27; 단 7:13). 하나님은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그 명령을 실행할 수 있도록 영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고난의 사역(3-7)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절의 ‘백성’(히. 고이)은 일반적으로 이방민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언약백성은 ‘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사 1:2; 렘 33:8; 호 8:1).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 상태를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라고 표현하셨으며(4), 이는 애굽의 바로 왕의 완악한 마음 상태와 같습니다(출 7:3). ‘패역한’이란 단어가 에스겔서에서 14회 사용됩니다(2:5, 6, 8; 3:9, 26, 27; 12:2, 3, 9, 25; 17:12; 24:3, 44:6).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백성에게 에스겔을 보내시는 이유는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5). 유다 백성이 에스겔의 말씀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 자기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역이 힘든 만큼 하나님의 위로도 에스겔에게 넘쳐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격려합니다.
두루마리 책(8-10)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입을 벌리고 먹으라고 주셨는데, 그것은 두루마리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는 안팎에 글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첨가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충족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보고 듣는 것으로 부족하였고, 말씀을 먹고 소화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렘 1:9). 하나님의 종들은 음식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화해야 합니다. 두루마리 책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입니다. 이는 에스겔 4-32장의 내용에 대한 요약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함락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얼마 후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멸망하게 됩니다.
적용: 음식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듯한 경험이 있나요?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느냐고 물어 올 때마다 확실하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하라. 그 다음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부지런히 고민하라.-시어도어 루즈벨트.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회 앞에서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당신은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실 것이라는 믿음, 계산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우리의 삶에 녹아들게 할 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 설 교 >
소명을 이루는 선지자의 특징
에스겔 2:1-10, 겔3:8-9 / 피영민 목사
서 론
에스겔 1장은 복잡하지만 “하나님의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2, 3장도 복잡하지만 한 마디로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정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기록된 사도바울의 간증도 동일한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은 후에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라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근본적인 원리는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철저한 소명의식이 없이 복음을 위한 열정을 가질 수도 없고, 복음 증거에 헌신 할 수도 없습니다. 설교자가 소명감이 없으면 설교 할 수 없고, 성도들도 소명감이 없으면 존재의식을 깨닫고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예언하던 시대는 국가적인 부흥이 있던 시대는 아닙니다. 부흥은 찾아 볼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개인적인 부흥을 체험 한 것입니다. 국가가 부흥이 없다고 해서 개인에게도 부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온 국가가 배역을 해도 에스겔은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하늘이 열렸던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포로 중에 예언하던 에스겔이었고, 또 한 명은 예루살렘에서 예언하던 예레미야 선지자였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하늘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할지라도 하늘문이 닫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든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0년도는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식이 다시 한 번 뜨거워지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문이 닫혀 있는 채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Ⅰ. 에스겔이 받은 소명은 무엇인가?
에스겔 1장에서 하나님의 이상을 본 에스겔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정면으로 만난 사람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뵈었더니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게 신성이 있는 것을 깨닫더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설 수 없으니 나를 떠나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사도요한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나서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보면 자신의 죄성이 드러나고, 누추함이 드러나기 때문에 감히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에스겔도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2장 2절을 보면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더니 에너지를 주고 에스겔을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에스겔 2장 3절로부터 5절까지가 소명의 내용입니다. 이 소명을 보게 되면 두 가지 단어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인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또 하나는 패역한 백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요약하면, 인자인 너는 패역한 백성에게 내 말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전하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십니다. 사람의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사람의 자식이지 짐승의 자식입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에스겔을 사람의 아들 인자라고 부르시는 것입니까? 인자라고 하는 타이틀은 에스겔에 90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말을 들은 선지자는 다니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자라고 하는 타이틀을 가장 많이 사용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에스겔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86번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는 신성을 의미하고, 인자라고 할 때에는 인성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만, 이러한 설명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에도 신성과 인성을 같이 말하는 것이고, 인자라고 할 때에도 신성과 인성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라고 하는 명칭은 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호칭은 예언적인 호칭입니다. “네 인생은 앞으로 이런 인생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적인 호칭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보고 인자라고 부르실 때는 “에스겔아 너의 인생은 이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다가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말씀 증거하는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가시와 찔레와 함께 거하며 전갈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인자라고 하는 것은 선지자의 인생이 거절과 모욕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라 할 때에 하나님은 인자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에스겔의 인생은 상당히 험난할 것임을 예측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패역한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백성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암”입니다. 거기에 소유 대명사가 붙게 되면 “암미”입니다. “내 백성”라는 뜻입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할 때에 부정사는 “로”입니다. 즉 “로암미”가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예언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너희들은 로암미다(not my people)”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하실 때에는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고임”이라고 부르실 때에는 우상숭배하는 이방 나라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면서 “암미”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고임”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패역한 고임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 나라 우상숭배하는 백성들처럼 살아가니 나도 너희를 이방 백성처럼 부르고 대우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패역하고, 배반하고, 범죄하고, 뻔뻔하고, 강퍅한 백성들에게 “너는 인자가 되어 거절되고, 모욕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받은 소명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영혼 추수의 사명을 받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면 삼천 명이 회개하고, 침례도 주니 보람도 있고,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해도 거절과 모욕만 당했습니다. 에스겔이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하면 에스겔 3장 18절 말씀대로 잃어버린 영혼의 피 값을 네게서 찾겠다고 했습니다. 피 값을 찾겠다 하니 안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소명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 백성들 가운데 선지자 한 사람은 있을 줄로 알게 하려고 에스겔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너는 온 세상 사람들이 패역할지라도 너 하나 만큼은 패역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사명은Incarnation(성육신)의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괴로운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Ⅱ. 소명을 이루는 에스겔의 인격적 특징은 무엇인가?
사명을 받은 것을 이루는 사람은 인격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제일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프로레슬링이었습니다. 그 때 김일 선수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TV는 만화가게 밖에 없었습니다. 만화가게에서는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습니다”라고 종이에 써서 붙입니다. 만화가게 가서 10원을 내고 김일 선수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김일 선수는 처음에 잘 싸우다가도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여지없이 김일 선수는 오른발을 들어 상대방 이마를 잡아 박치기를 합니다. 박치기 한 대만 맞아도 흔들흔들 합니다. 두 번째 박치기 하면 피가 흐릅니다. 세 번째 하면 다 쓰러집니다. 그 당시 장동경 목사님 닮은 일본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덩치 큰 안토니오 이노키라 할지라도 세 번만 박치가 하면 쓰러지게 되고, 카운터를 세게 됩니다.
에스겔서에 이런 박치기 경기가 나오는 것을 아십니까? 에스겔 3장 7절로 9절에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김일 선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마가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이라고 했습니다. 화석(flint)이라고 하는 것은 부싯돌이라는 것입니다. 부엌 칼 가는 돌입니다. 돌이 얼마나 단단하면 칼을 갑니까? 이 부싯돌은 단단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의 이마를 부싯돌 보다 강한 금강석이 되게 하셨으니 이마가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에스겔이 한 번만 박치기 하면 흔들흔들하고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즉 에스겔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의 이마만 부싯돌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50장 7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얼굴도 부싯돌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얼굴도 부싯돌 같이 단단한 얼굴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모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생각 할 때 확실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부싯돌처럼 강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말려도 예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려고 가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는 소명을 이루는데 있어서 단호한 얼굴, 결심을 막을 수 없는 표정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소명은 외롭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소명은 허약한 결심을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이마를 금강석처럼 강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동치 않는 단호한 결심, 포기 할 줄 모르는 헝그리 정신, 좌절할 줄 모르는 백절불굴의 정신,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소명을 이루는 선지자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저는 드라마라고 보는 것은 한 가지 있습니다. “수상한 삼형제”입니다. 그 삼형제는 수상합니다. 이 수상한 삼형제의 아버지는 순경입니다. 이름도 김순경입니다. 그 아버지의 얼굴은 금강석 같은 얼굴입니다. 집안이 아무리 어려워도 아버지가 며느리 불러서 “야 남자한테 너무 그러는거 아니다”라고 하면서 용돈을 주며 여행 다녀오라고 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말썽부려도 아버지가 불러다가 “너 여자한테 그렇게 하는거 아니다”라고 한 마디 하면 해결이 됩니다. 아버지 김순경은 단호한 인상을 주고, 소명을 이룬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단호한 얼굴을 하고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 완공을 이루었습니다. 의지가 약한 얼굴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박정희 대통령 테잎을 틉니다. 그 음성을 듣고 나면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 음성에도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명을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얼굴에도 단호한 결심을 주시고 자신의 믿는 바에 대하여 단호한 각오를 주어 결국은 일을 이루어 놓는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에 어려운 소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야들야들한 심정을 갖지 마시고 단호한 결단을 가지고 소명을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언어에서도 여러 번 단호한 결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14절에서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기록되었고, 빌립보서 1장 20절에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4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이루고, 14권이나 되는 신약을 기록한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 성도 중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온 가족이 불교입니다. 그래도 고집하여 기독교 장례로 진행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예수 믿고 가셨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 예수 믿으려면 저렇게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마가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과 같았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올해는 이마를 금강석처럼 하여 결심을 단단히 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선교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대한민국 사람은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Ⅲ. 단호한 결단을 갖게 된 원동력은 무엇인가?
에스겔이 스스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에스겔이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하듯이 하나님이 그를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겔 3장 8절을 보면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주어가 중요합니다. 누가 굳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강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를 강하게 해 주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강하게 해 주셨습니까? 에스겔 2, 3장에는 두 가지 방법이 나옵니다. 하나는 성령의 권능으로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에너지만 가지고 살아서는 별것 아닙니다. 머리가 좋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건강하면 얼마나 건강합니까? 하나님이 “툭” 치시면 쓰러집니다. 우리에게 있는 에너지 가지고 해봐야 그것은 조족지혈(鳥足之血)입니다. 새 발의 피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에너지, 성신의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2장 2절에 보면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에스겔 3장 12절에도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에스겔 3장 14절에는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의 능력의 원천은 성령입니다. 우리에게도 에너지의 원천은 성령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임했다, 떠났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다릅니다. 요엘 2:28에서 29절까지는 신약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예언은 오순절 날 실행되었습니다. 모든 예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이 예수 믿는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고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에너지는 아닙니다. 성령을 모신 사람이 기도를 해야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깐 기도하는 자는 하늘의 에너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무슨 일이든지 기도함으로 에너지를 받아 소명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먹는 것입니다. 비록 심판과 재앙의 말씀이라도 먹는 것입니다. 에스겔 3장 3절을 보면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꿀처럼 먹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수면제처럼 먹습니다. 레위기 두 장만 읽으면 잠이 무척 잘 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꿀처럼 달게 먹어야 용기와 능력이 나와 소명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장 10절에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하나님 말씀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우리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개신교가 들어간 나라는 자본주의가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유명한 존 칼빈 선생이 개신교도들에게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이다”라고 직업소명설을 가르친 것입니다. 목사만 소명이 아니고 선생님도, 판사도, 장사하는 분도, 모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니깐 경제가 발전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회학자가 발견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밥 많이 먹는다고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에너지의 원천은 하나님 말씀이고, 우리 에너지 원천은 성령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우리는 에너지를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이 비실비실 하게 되는 것이고, 약간의 고난에도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말씀은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하루에 십 분만이라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실 때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십분만 기도해도 사단이 그 사람의 인생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에너지를 받아야 장사를 해도 잘 되고, 공부를 해도 잘 되고, 목회를 해도 잘 됩니다. 성령과 말씀 이 두 가지가 에스겔을 강하게 한 것입니다.
결 론
모든 성도의 공통된 소명이 있습니다. 패역한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전 신자 제사장 직분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선지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패역한 세대에서 선지자로, 금강석보다도 강한 이 말을 소유해야 되겠습니다. 명절에 우상숭배하면 안 되겠습니다. 가족들이 압박을 준다고 해서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다. 음식 만들어 놓고선 조상의 영혼이 와서 먹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온 가족이 안 믿고 우상숭배할지라도 믿는 자는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명절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조상에게 은덕을 기리고,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상숭배하라고 강요해도 “내 이마는 금강석보다도 강한 이마다”라고 하고,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명절 때 같이 막걸리 따르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무시하고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금강석 같은 이마를 가지고 예수를 증거하게 되면 “저 사람은 달라. 저 사람 말은 진짜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패역한 세상 가운데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선지자의 사명이 있으니 단호한 헌신과 확실한 소명감으로 이 사명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2010년도는 기도로 성령 충만 받고 말씀을 받되 꿀처럼 받아먹어 하늘의 에너지가 넘치고 하늘이 열리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겔
이동휘 목사
1.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다의 왕 여호야긴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권세 있는 자들, 유능한 장인들, 능력있는 용사들 등 쓸만한 인재들 모두를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모든 금으로 된 기구들 몽땅 약탈해갔습니다. 빈껍데기만 남은 예루살렘에는 여호야긴 왕의 숙브 맛다니야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도 바벨론 식 이름 시드기야 고쳐 부르게 하고 있으나마나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왕하24:13-17) 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그로부터 약 7년 후인 기원전 593년경,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기는 선지자로 에스겔을 부르셨습니다. 에스겔은 본래 제사장이었습니다.
(겔1:2-3)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신 목적은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유배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마음이 닫힌 가운데 완고하고 강퍅하며, 하나님께 대해 반역적이었습니다. 에스겔2:3-4을 보겠습니다.
(겔2:3-4)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참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격려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겔2:6-7)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에스겔에 앞서 활동했던 예레미야는 유배 중인 유대인들에게 그 땅, 바벨론에 정착해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자녀들을 결혼시킬 것을 지시하는 편지를 이미 보냈었습니다. 그래서 유배지이지만 그곳에서 번성하고 인구가 줄어들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곳에서 사는 동안 그곳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유배지이고 원수의 나라이지만 그 나라, 성읍이 평안해야 이스라엘 백성들도 평안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될 때,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 나라 민족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렘29:1-7)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사도 바울도 예수 믿는 성도들이 나라의 지도자들과 고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권세자들을 두시고 그들을 주관하시기 때문에(롬 13:1) 그들이 아무리 합당치 못한 통치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권세자들을 위한 기도는 나라의 평안과 사회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사회가 평안한 상태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안정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외적 장애인 전쟁이 없고, 내적 장애인 근심이 없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경건”과 “단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심과 고상한 품성 및 도덕적인 덕행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위정자들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밀착되어서 자신들의 이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서와 평안의 축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배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는 곳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징계이기 때문에 매를 순히 맞는 것이 지혜롭고, 그래야 징계의 기간 70년이 끝날 때 회복의 소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돕도록 하기 위해 에스겔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포로된 다음 세대가 유다로 돌아가 나라를 재건하도록 그들을 준비시켜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렘29:10-1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예루살렘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바벨론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선포한 메시지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백성들의 입맛을 돋구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거짓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렘29:8-9)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고달픈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고 혼란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한 가운데, 그리고 바벨론에서 살면서 우상숭배와 우상숭배의 문화 환경에 둘러싸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환상), 꿈을 주시며 “나 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59번이나 사용하시고, 에스겔은 적어도 50번 이상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고 말하며 하나님 말씀을 백성들에게 충실하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많은 이상들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면 힘든 시기에 힘든 곳에서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에스겔 선지자를 격려하는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이 본 첫 번째 환상은 “네 생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구름과 번쩍이는 번개를 동반하고 북쪽에서 밀려오는 강한 폭풍우를 보았습니다. ‘폭풍우’는 ‘바벨론’을 상징합니다. 그 폭풍우 중심에 쇳물처럼 강렬한 불이 있었고, 그 불 속에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그 생물 각각에는 4개의 얼굴과 4개의 날개, 그리고 4개의 손이 있었습니다. 4개의 얼굴은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 모습의 얼굴이었습니다. ‘사람’은 지혜를, ‘사자’는 담대함을, ‘황소’는 충실함을, ‘독수리’는 민첩함을 의미합니다. 4개의 날개 중 2개는 서로 연결되어있고, 나머지 둘은 몸을 가리웠습니다. 이 날개는 ‘협력’과 ‘경외’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4개의 손은 사방 날개 밑에 있었는데, 이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네 생물”의 ‘발다닥’이 ‘송아지 발바닥 같다.’고 했는데 이는 ‘원만한 순종’을 상징합니다. 이 네 생물 아래에는 살아서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며 빛을 발하면서 교차하는 수정바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퀴 속에는 눈들이 있었습니다. 그 생물들은 빛처럼 움직였고, 바퀴들은 생물들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각 바퀴가 서로 교차했기 때문에 바퀴들은 오늘날 자동차들이 크게 빙 돌아야 하는 것처럼 돌지 않고도 앞뒤로, 또는 좌우로 바로바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그 생물들과 바퀴들 너머에 반짝이는 얼음 같은 수정 궁창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수레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수정 궁창 위에 남보석 같은 보좌가 있었고, 보좌 위에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낯선 땅에 있던 하나님의 종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가 바벨론에 임했고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환상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너무 놀라 땅에 엎드렸습니다.(겔 1:28, 3:23, 9:8, 11:13, 43:3, 44:4). 그 이상은 두렵게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 백성들이 흩어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참상을 바라보고 슬픈 애가를 불러 하나님께 간구했던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애5:15-22)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여전히 보좌 위에 계시며 영광 중에 다스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으시거나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기 위해 바벨론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광채는 무지개 같았고(겔 1:28), 무지개는 홍수로 다시는 세상을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창9:8-17). 노아는 홍수 후에 무지개를 보았지만, 에스겔은 폭풍우 속에서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폭풍우 속에 있는 것 같을지라도 회복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결코 영원히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과 더불어 인간의 통치, 바벨론의 통치는 약하고 일시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기운이 그 위에 불게 되면 한 순간에 시들어버리게 된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 하나님의 통치만이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40:6-8입니다.
(사40: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이러한 환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만이 영원하심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광 중에 다스리십니다.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본 네 생물 아래 바퀴들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과 신속하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147: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그리고 그 바퀴들 속에 있는 눈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하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시139:1-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한 개인의 인생이든, 한 나라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든 나라이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이, 가장 지혜롭고 복된 삶이 되며 나라의 통치가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과 상황은 너무나 힘들고 고달픈, 그리고 소망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에스겔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섬겼습니다. 지금도 역사 속에 살아계셔서 성도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께서 인생과 나라를 통치하심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어진 삶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에스겔이 본 환상은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8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로마서9:4-5입니다.
(롬9:4-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1) “양자됨”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신 14:1;32:6;사 63:16;64:8;호 11:1;말 1:6;2:10)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 그 중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2) “영광”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나타나셨던 영광이며(출 24:16-17),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 임했던 영광이며(출 40:34-38),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위 시은소(施恩所)에 나타난 영광이며(레 16:2),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법궤를 성소에 옮겼을 때 그 성소를 가득 채웠던 영광입니다.(왕상 8:10, 11;대하 7:1, 2;겔 1:28)
3) “언약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시초의 언약(창 3:14-19), 노아와 그 가족들을 방주에 구원하여 보존하시겠다는 언약(창 6:17-22;8:20-22;9:1-7, 8-17),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이루며 그 이름을 창대케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는 언약(창 12:1;15:1-18;17:1, 2),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의 언약, 곧 십계명(출 34:28;신 4:13;9:9, 11), 그리고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를 주시겠다는 왕국의 언약,(삼하 7:1-29) 등 다섯 가지 언약을 말합니다. 이러한 언약들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목표로 주어진 언약들입니다.
4) “율법을 세우신 것”은 모세를 통해서 시내 산에서 공포된 율법으로,(신 4;13, 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보증하시는 선언이었습니다.
5) “예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 제도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6) “약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에게 특별히 개별적으로 주신 말씀들입니다.
7) “조상들”은 족장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말합니다. 위대하고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을 둔 복을 말합니다.
8)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는 말씀은 세세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영육간에 부유한 나라입니다. 이 8개의 복 가운데 6가지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2가지, ‘성전 예배’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변할 수 있고, 또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를 통해 지은 성막 위에 나타나셨고,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들은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B.C.1050년경, 엘리 제사장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언약궤를 전쟁 승리의 수단으로 삼다 이방 블레셋인에게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삼상4:21-22)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그 후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기 위해 임하셨습니다.
(대하7:1-3)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이 얼마나 더럽혀졌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8:10-13입니다.
(겔8:10-13)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이 행하는 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겔 8:6)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안 지성소, 성소, 성전뜰, 성전 문지방 등 성전 곳곳이 온통 각종 우상의 형상과 그림들로 가득하여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민족들을 심판하실 때, 사람이 지은 성전과 그 성전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를 가증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신 바 있었습니다.
(사66:1-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그곳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요2:16)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요2:19)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라며 의아해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므로 세워질 “성전”, 오늘날 교회를 두고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 고백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이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약속하신대로 강림하여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령강림을 통해 성전, 교회가 세워진 것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요2:21-22) 그래서 신약시대에 스데반은 순교 직전 행한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전에 더 이상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행7:48-50)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됨을 말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 지은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함께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요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고전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 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각 성도와 각 교회 안에 거하십니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이제 예수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된 성도들은 그 성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더럽히게 되면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든 영광이 떠나버리고 맙니다.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엡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거룩한 성소입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 안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우리의 큰 책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과 성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령이 우리 죄 때문에 슬퍼하실 때, 우리에게서 성령의 능력과 영광을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은 곳은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A. W. 토저(A. W. Tozer)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성령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고 있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큰 비극이겠습니까? 오늘날 사역자들 가운데 그 교회 문에 주님이 “이가봇, 즉 영광이 떠났다.” 고 쓰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열정적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며 유쾌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봉사와 사역을 과연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전 14:23-25)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예언하며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14:23-25입니다.
(고전14:23-25)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사도 요한은 성전을 더럽히거나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성전에 있는 촛대를 옮기시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돌아오기에 합당하도록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하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촛대를 옮기고 우리의 증거가 끝나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자백해야 할 죄와 바꾸어야 할 변화를 찾아내도록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메시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하고 더욱 더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촛대 사이에 거니시며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4. 에스겔이 보게 된 세 번째 환상은 성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광을 회복하시리라는 것입니다.(에스겔 40-48장)
(겔43:1-5)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 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장래 이스라엘의 성전과 땅에 되돌아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문을 통해 성전을 떠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영광의 구름이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와 성전을 가득 메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에스겔은 새 성전과 회복된 땅과 거룩한 예배와 거룩한 성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그 도성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의 “여호와 삼마”(겔48:35)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곳에 계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암울하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아오고 싶어하시고, 우리와 당신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로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거룩하고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영구적으로 돌아오셔서 당신의 성전을 당신의 영광으로 채우실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의 삶과 사역에 복 주심으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고후5:17)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 삶으로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그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영광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직,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다윗의 고백, 시편139:1-18을 함께 보겠습니다.
(시139:1-18) 여호와여, 주는 나를 살피셨으니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일하고 쉬는 것을 다 보고 계시며 나의 모든 행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가 할 말을 다 아십니다.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으며 주 앞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주는 거기 계시며 내가 하계에 가서 누워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 저편 가장 먼 곳에 가서 살지라도 주는 거기서도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실 것입니다. 내가 만일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어둡지 않을 것이며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내가 보이지 않는 어머니 태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그 때에도 주는 내 형체를 보고 계셨습니다. 주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보셨으며 나를 위해 작정된 날이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날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내가 깰 때에도 주는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떠한 환경에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항상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거룩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에스겔 2:1-7)
고슴도치 부부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깊게 포옹을 하였습니다.
순간 두 고슴도치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다시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외로워서 지난날의 상처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다시 만났습니다. 역시 서로의 날카로운 침이 상대의 여리고 부드러운 맨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둘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부부는 20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성격이 맞지 않아서 갈등이 심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행위며 말투며 사람들과 자주 다투는 것이며 가정사를 소홀히 하고 빈둥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어 날마다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무시하고 툭하면 싸잡아 욕설을 퍼붓고 하는 일마다 이래라 저래라 쏘아붙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으면 긴장되고 신경질이 납니다. 남편의 잔소리가 없는 곳, 자기를 무시하는 남편의 눈초리가 없는 곳에서 하루라도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아내의 마음입니다. 그들 부부는 날카로운 침을 가진 고슴도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함께 있으면 서로의 날카로운 침에 찔려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20년 만에 이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서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몇 년 동안 헤어져 살았습니다. 그 사이 여자는 자기를 편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만났으나 그 남자에게는 더 날카로운 침이 있어서 얼마 후에 곧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아직도 혼자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스코츠맨(Scotsman)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심령 가운데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 가운데 살아계셔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참다운 성도의 삶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참으로 어려울 때에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놀고 대접 받은 직분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과연 누가 이 고난과 순교의 길을 걸으려고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는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어떤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6절에 4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인간이기에 두렵습니다. 그러나 두려우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과 우리 모두에게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
본문 2절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영어에서 ‘듣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경청하다’(listen)이며 다른 하나는 ‘막연히 듣다’(hear)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의미 없이 막연히 들을 것이 아니라 경청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사용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그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난 후에 그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기에 불순종의 죄를 범했으며 큰 축복을 상실하였습니다.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은혜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분명 체험했으나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그 은혜와 직분과 사명을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다들 바빠서 죽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사는 게 힘이 드는지 사람들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다리가 흔들흔들 거리고 금방이라도 푹 쓰러 질 것처럼 피곤에 쩔고 온 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며 아이고.... 아이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잠시라도 쉴 틈을 얻으면 텔레비전에 아까운 시간을 다 바치고 취미생활 하는데 시간을 다 허비하고 잠자느라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도무지 삶의 희망이 없고 점점 늘어나는 일에 더욱 고단한 삶을 하루하루 그냥 이어갈 뿐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사람이 사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어떤 사람은 ‘돈’에서 오는 줄 알고 열심히 돈을 모으려고 하지만 돈은 그렇게 쉽게 모아지지 않습니다. 돈을 모았다고 해도 금방 나가버립니다. 결국 돈을 쫓는 사람은 허무와 허탈함만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을 쫓아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쁘면 바쁠수록 더욱 신나고 재미있으면서 활기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특별한 장소에, 특별한 시간에만 나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길을 걸어가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밥을 먹는 순간에도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나의 작고 사소한일에도 사사건건 간섭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내 인생을 끌고 가시면서 인도해주시는 안내자이십니다. “성령님, 이 순간 제 마음에 모셔 들이고 인정합니다. 힘주시고 지혜 주시옵소서” 순간순간 성령님을 부르고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말씀과 일치하며 말씀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새해에 하나님 말씀을 경청합시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당연히 들어야 할 말씀을 경청합시다. 세상이나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면 살고 희망이 있고 길이 있고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우리 모두 새해에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라
본문 4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역하였고 배반하였고 범죄한 백성입니다. 또한 얼굴이 뻔뻔한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함으로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스럽게 여기는 철면피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마음이 굳은자라고 하였습니다. 굳었다함은 강퍅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거역하고 반역하는 못된 태도를 말합니다. 목이 곧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을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임명하여 사역의 현장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곳으로 보내십니다. 선지자는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 같은 거리라도 하나님이 보내시면 복음을 들고 가야 합니다. 선지자는 인간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요나처럼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의 메시지를 순종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된 바를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캘리포니아 주에 한 금광촌이 있었습니다. 그 금광촌에는 싸움과 강도, 술 취함과 도박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칠고 교육받지 못한 광부들만 사는 그 금광촌의 주민은 단 한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한 명뿐인 여자가 아기를 낳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죽고 어린 아이만 살아남았으니 광부들은 어떻게 아기를 처리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아기를 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우선 아기를 나무 상자 안에 누이고 때와 기름이 잔뜩 묻은 수건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재우기에는 나무 상자가 너무 더러워 140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시에 사람을 보내 아기 침대를 사오게 했습니다. 아기가 덮고 자는 더러운 수건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부들은 다시 사람을 도시로 보내 이번에는 아기가 입을 옷과 담요를 사오게 했습니다. 광부들은 아기가 잠자는 방의 마루를 물과 비누로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매일 아침 광부들은 금광에 들어가기 전에 아기를 한번 안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손이 너무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비누를 사서 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운 욕도 삼가게 되었고 생활도 깨끗해져서 황폐한 금광촌에 꽃도 심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가 한 아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평화를 주려고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변화의 기적을 맛보기를 소망합니다.
에스겔이 있었던 패역, 배반, 범죄, 뻔뻔함,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이 에스겔의 자리였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지입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새셨습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지역으로 에스겔을 보내듯이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지금 이곳을 꽃밭으로 만들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도 그리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곳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여기가 벧엘입니다. 이곳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평안한 깨끗하고 완전한 곳을 찾아 가려고 하지 말고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변화된 삶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본문 7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에스겔 스스로 지어낸 독창적인 말이나 세상 이야기나 저급한 사상을 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말을 더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빼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듣기는 좋아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는 힘들어도 능력과 생명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의 말은 많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기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임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자기 스스로 지어낸 말을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짓과 짝퉁과 모조품은 많은 법입니다. 요즘은 가짜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분별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속고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만 계속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열매가 없어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총칼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을 섬기고 신사 참배를 한 역사적 오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교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교회와 성도들도 많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갈등과 싸움이 아닌 회개와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무엇도 무서워해서도 안 되고 세상과 타협을 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 그대로 믿고 전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믿고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콤플렉스(complex)가 있습니다. 콤플렉스는 열등감, 욕구 불만, 강박 관념의 형태로 내 삶 가운데 표현이 됩니다. 다음은 세기적인 천재들의 이름입니다. 소크라테스, 시저, 잔 다르크, 미켈란젤로, 루터, 파스칼, 볼테르, 모차르트, 뉴턴, 루소, 베토벤, 괴테, 바이런, 칸트, 나폴레옹, 하이네, 쇼펜하워, 바그너, 비스마르크,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릴케...... 역대 서양 천재들의 정신분석을 한 독일학자 랑게아히비움은 천재들 중 90%가 육체적 결함, 가족관계, 많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역대 인물 33인에 대한 콤플렉스를 분석하여 쓴 이규동 박사의 <위대한 콤플렉스>라는 책에 보면 세조, 이광수, 김소월, 이중섭, 최영, 허균, 김정희, 대원군, 한용운, 윤동주, 김동인, 김영랑...... 모두 콤플렉스를 아름답게 승화시킨 천재들이라고 합니다. 나의 콤플렉스는 무엇인가요? 그것 때문에 지금 아무 일도 못하고 주저 않아있는 것은 아닌가요? 원래 사람은 단점으로 흥하고 장점으로 망합니다. 오히려 콤플렉스를 이용하여 기회를 잡으세요.
무엇도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베르테르 효과’처럼 요즘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유명인 한 사람이 자살을 하면 600명에게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면 우울증, 열등감, 두려움, 절망이 물러가고 용기와 소망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믿고 에스겔처럼 목숨 걸고 전합니다. 놀라운 기적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새해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무엇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읍시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갑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시다. 이 시대에 에스겔처럼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
첫째, “이 목사가 성공한 사람들을 질투하는구나?”란 소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앞선 사람에 대한 질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제게도 스스로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정도의 작은 성공을 주셨습니다. 역사를 보면 문서의 힘은 건물과 숫자의 힘을 능가합니다. 그런데 지금 저도 성경 66권 전권 설교파일의 비전을 상당히 구체화시키고 있고 네트영어의 비전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목회자의 외형적인 성공이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질투심 때문에 초대형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교회도 크지 않은데 그렇게 말해봐야 누가 듣겠는가?”란 소리입니다.
의미 있는 소리를 내는데 들어줄 사람이 너무 없으면 허무한 느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게도 인터넷을 통해 제 얘기를 들어줄 어느 정도의 사람을 주셨습니다. 지금 6100여명의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 회원이 있는데 숫자는 작지만 숫자에 비해 영향력은 큽니다. 온새기 회원 중의 약 3분의 1 이상이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의 홈페이지에서 주일 설교 한 편당 평균 1만 회 가까이 조회되는 옛날 주일설교의 조회자들도 대부분 목회자들입니다. 왜 목사님들이 조회할까요? 설교에 참고하기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저의 설교파일을 선교후원금을 내고 구입한 목회자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처럼 많은 목사님들을 통해 제 설교가 다양하게 재생산되기에 보이지 않는 파급력이 큰 편입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5천 명의 목사님이 제 설교를 참고해 100명에게만 설교해도 50만 명이 듣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제 얘기가 그저 허무한 얘기만은 아닙니다.
셋째, “가까운 친구 목사들이 등을 돌리면 어떻게 해!”란 소리입니다.
가까운 동료 목사나 온새기 회원 목사 중에도 초대형교회 목사가 있는데 그분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관계가 멀어지면 사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진짜 친구나 동료는 그 말들이 개인적인 공격이 아니고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말로 공감하며 계속 제 곁에 머물러주고 오히려 말없이 성원해줄 것입니다. 그런 성원이 큰 힘이 됩니다. 사실 루터의 종교개혁도 루터를 후원했던 독일 제후들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넷째, “이 목사님! 당신은 완벽합니까?”란 소리입니다.
물론 절대 완벽하지 않고 완벽함을 꿈꾸지도 않습니다. 저는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구도자처럼 살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물론 한때 뜨겁게 구도자처럼 살던 때도 있었지만 지나보니까 그런 삶이 성과 속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으로 향하면서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사라도 집에서는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아빠임을 최대한 보여주려고 합니다.
저도 딸 바보 아빠입니다. 딸들이 사랑스러워서 최고로 나눌 줄 아는 믿음의 딸이 되도록 날마다 기도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믿음생활 외에는 특별한 믿음생활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목사 딸이 왜 그렇게 행동하니?”라고 하는 교육을 가장한 편견적이고 폭력적인 말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성도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성도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되지 않고 성도임을 자처하고 목사임을 자처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킬 수 있는지를 저도 잘 압니다.
다섯째, “당신도 초대형 교회 목회자가 되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란 소리입니다.
리더가 공동체의 규모와 나이와 환경 등의 변화를 따라 리더십 스타일에도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것은 분명히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기본과 핵심에는 변질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힘이 생기면 이전의 선한 다짐을 뒤집으려는 수많은 권력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기에 현재의 작은 힘이라도 계속 나누면서 미리 힘을 빼내야 합니다.
여섯째, “너무 초대형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보는 것 아닙니까?”란 소리입니다.
물론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부정적과 긍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습니다. 초대형 교회가 잘하는 분야도 많고 초대형 교회 목사님 중에도 훌륭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의미에서 초대형 교회가 한국 사회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각하게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는 것은 장점이지만 부정까지 긍정으로 고집하는 ‘긍정주의’는 위험합니다.
일곱째, “이 목사님! 그러면 고립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크려고 해요?”란 소리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본적으로 홀로 서야 하고 저는 원래 혼자도 잘 지내는 달란트를 가졌습니다. 물론 저도 외로움도 잘 느끼고 때로는 좋은 사람과의 좋은 만남이 그립습니다. 그래도 혼자 지내라고 하면 혼자서도 잘 지내는 편입니다. 미국 유학을 할 때 깊은 외로움과 향수에 젖기도 했지만 그때 성령님의 동행으로 믿음은 더욱 좋아졌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면 어떻습니까?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성원해주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힘 있는 사람도 붙여주실 것입니다. 외로운 길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그 길로 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바나바나 루디아와 같은 후원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후원자 숫자가 많지 않아도 좋습니다. 모세의 양팔을 들어준 아론과 훌처럼 2명만 전적으로 후원해주어도 리더는 외롭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12제자만 있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공동체에서 함께 기도해주고 비전을 공유하는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의 가정과 영혼과 자녀의 축복을 위해 매일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속속 등장하게 하소서!”
그처럼 여러 소리가 들리면 위축되고 그 일을 피하고 싶고 때로는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나눔을 선도하는 모델교회의 소명을 가지고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고 난 후 외롭고 서럽고 두려운 그 길로 갔기에 그 이름이 성경에 남았고 결국 몇 천 년의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외롭고 서럽고 두렵더라도 소명의 길을 따라 가면 그 길은 하나님이 보증하는 놀라운 축복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지십시오
본문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어렵고 외롭고 두려운 소명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놀라운 형상을 보고 엎드러졌습니다(겔 1:28).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그때 제일 처음 들린 음성이 “인자야!”란 음성이었습니다. ‘인자’란 말은 에스겔서에서 90회 이상 나옵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자’라고 불렸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네 발로 일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곧 일어서게 하실 것을 왜 먼저 엎드러지게 했을까요? 하나님은 누군가를 쓰실 때 항상 먼저 낮추었다가 높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이 되려면 성령 충만으로 자신을 깨뜨린 후에 다시 일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 힘을 얻은 후 세상에 나가 비전을 성취함으로 영성을 실상으로 만드십시오. 영성을 실상의 힘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영성은 헛된 영성입니다.
저는 자주 “성도는 신앙도 좋아야 하지만 신학도 좋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헛된 영성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학과 교리도 잘 활용되면 유익이 많습니다. 가끔 교리가 신앙을 얽매고 성령을 제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교리는 개인의 감정적인 중뿔난 신앙을 막아주고 신앙의 균형을 잡아주는 좋은 역할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면 무엇이 생깁니까? 교리가 생깁니다. 그 교리가 선용되면 다수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 회의 후에 이방인 수용에 관한 지침을 정한 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25절).”고 했습니다. 당시 첨예한 의견대립은 있었지만 그 분분했던 변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그저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선언합니다. 회의를 할 때 큰소리도 날 수 있지만 일단 결론이 나면 딴 소리가 있으면 안 되고 “이렇게 결정했습니다.”란 말만 할 줄 아는 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어떤 주장을 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정되었으면 끝난 것이고 만장일치로 가결했으면 더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합의점을 찾은 후부터는 누구도 딴 말을 못하게 세운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물론 교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지만 불완전한대로 교리는 필요합니다. 교리를 굳건히 내세울 때 자기주장이 강한 신앙인이 ‘자기’를 교리로 삼으려는 폐단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딴 소리를 내고 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본 교리를 성실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교리를 무조건 나쁘게만 보려는 이단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교리 문제 연구를 외면해서 그 문제를 형식적인 신앙인들에게 넘겨버리고 자기 혼자만 영성이 충만하다고 하면 무슨 발전과 지속성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른 비전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에서 위대한 신학자도 한 명쯤은 나와야 합니다. 신학을 외면하고 신앙만 내세우면서 감화력과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어도 배운 사람이 받으면 “아! 그런가 보다!”라고 하는데 대부분 못 배운 갈릴리 시골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으니까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것을 보십시오. 세상이 그렇기에 성도는 외적인 초월성과 내적인 내재성을 다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분당 샛별교회는 신앙과 신학을 동시에 중시하고 영성과 교리를 동시에 중시하고 위대한 능력자와 위대한 신학자를 동시에 배출해야 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무시하면 이원론에 빠져서 균형 잡힌 믿음을 잃고 결국 인물 되는 길에서 멀어집니다.
좋은 공동체가 되려면 ‘위대한 설교가’도 필요하지만 ‘위대한 신학자’도 필요합니다. 자신 속에서도 ‘설교가의 영성’과 ‘신학자의 영성’을 동시에 가져야 복된 성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도 탁월하십시오. 배움을 멀리하고 영성만 자랑하지 마십시오. 역사성과 영속성과 영향력을 가진 공동체가 되려면 신학이란 딱딱한 식물도 소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균형 잡힌 성도를 배출하는 것에 그 공동체 사역의 성패가 달려있고 그 공동체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처럼 엎드러졌다가 일어난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소명을 주시면서 장밋빛 전망 대신에 아주 현실적으로 본문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에스겔아! 패역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얼굴이 뻔뻔한 백성이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하다. 이제 그들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전하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라.”
그 소명이 얼마나 두렵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말씀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이 구절에서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장 필요한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음성입니다.
왜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길까요? 대개 보면 2가지의 결핍 때문입니다. 그 2가지란 ‘사명과 사랑’입니다. 사명감이 강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얼마든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두려움 중에 최고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산을 정복하면 다른 두려움의 산도 거뜬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2대 원천도 바로 ‘사명과 사랑’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저의 어머님이 청평 인근에 있는 강가의 큰 바위 옆에서 수영하다가 깊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졌습니다. 그곳은 반경 5-6미터가 아주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지만 다들 놀란 표정만 하고 아무도 어머님을 구하러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아버님은 바위그늘 밑에서 낮잠을 즐기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님을 구하러 가면 죽는다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다른 가족 2명도 그 장면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바로 그때 중학생이던 저의 누님이 본능적으로 다가가서 어머님 손을 무작정 잡았습니다. 수영이 능숙하지 않은 사람끼리 손을 잡으면 더 위험합니다. 저는 그때 두 분을 한꺼번에 다 잃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물살에 떠밀려 몇 미터 아래의 안전지대로 들어와 두 분 다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그 뒤 약 40년이 흘러서 8남매 중에 그 누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보면 가끔 하나님의 특별한 운명적인 끈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는 엄청나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위급할 때는 그냥 지켜보기만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계산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밉니다. 마음에 진실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고 행동에 나서게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이 두렵거든 사랑하는 일에 나서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뜻을 따라 헌신하는 일에 나서면 그에게 어떻게 축복과 평안이 없겠습니까?
하나님만 두려워하십시오
그렇게 담대함을 권면한 후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에스겔에게 말씀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그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가지고 반역의 백성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그 소명의 길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그래서 그 싫은 길로 가게 하는 강력한 싸인(sign)과 위로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싸인과 위로를 주시려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고 말씀했습니다(8절).
그 말씀과 함께 환상 중에 한 신비한 손이 그를 향해 펼쳐졌습니다. 그 손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었습니다(9절). 그 두루마리 책이 에스겔 앞에서 펼쳐지는데 보통 두루마리에는 한쪽 면에만 글이 쓰여 있는데 그 두루마리에는 안팎에 모두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10절). 전할 말씀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글을 보니까 그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전할 소식은 우울한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환상을 보면서 결국 에스겔은 더욱 강한 소명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에스겔이 자신의 사역을 외적으로 키우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특별한 체험만 이렇게 열심히 선전하고 다니면 됩니다. “여러분! 제가 신기한 체험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입신한 후 다시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손과 그 손이 두루마리 책을 펼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두루마리 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체험을 강조하며 자신을 ‘말씀의 종’이라고 하면 크게 성공할 것입니다. 사실 그런 체험 선전에 빠져서 분별력을 잃고 우르르 몰려갔다가 망가진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특별한 체험을 특별히 좋아합니다. 그 특별해지려는 마음이 바로 사탄의 출입통로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특별한 체험에 있지 않고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의 순간들이고 기적들임을 깨닫고 그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감사하며 열심히 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들은 자기 체험의 특별함을 강조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스스로 종교 권력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 술수에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일확천금 사상과 특별하려는 마음과 인기와 외형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살다 보면 항상 희망적인 말만 많이 듣고 싶지만 때로는 십자가를 도전하는 말도 기쁘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기가 없는 좁은 문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권력의 압력을 받고 두려운 일도 생길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 두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반드시 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어떤 세상 권력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는 사람답게 사십시오
살면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영혼이 미신에게 넘어갑니다. 미신이 싹트는 2가지 토양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의 토양이고 또 하나는 기복주의의 토양입니다. 미신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돈을 벌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신 공동체에서 돈을 버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미신을 강조하는 다단계의 총수와 같은 거짓 목자입니다. 결국 미신은 거짓 목자가 물질을 취하고 자기를 높이려고 애용하는 방법입니다.
왜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까? 거짓 목자들이 두려움을 이용해 마음과 영혼과 물질을 뺏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짓 목자의 모습은 마치 나쁜 카센터 사장이 “바퀴를 갈지 않고 오일 체인지를 하지 않으면 사고 나요.”라고 겁주면서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과 같습니다. 정직한 카센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기에 성공하기 힘듭니다. 그처럼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불편과 불이익을 당해서 고민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희가 이 장소를 매입할 때 대출받은 돈이 있는데 매년 그 대출금을 연장합니다. 그러려면 교회실태 조사서를 매년 내야 합니다. 그 조사서에는 교인수, 헌금 등이 기록되어 신용평가 자료로 씁니다. 그런데 작년에 네트영어 안식년을 맞아서 수입과 지출이 크게 줄어서 고민했습니다. 그것을 사실대로 쓰면 불이익이 생기기에 분을 바르는 분식회계의 유혹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정직하게 원래대로 은행에 자료를 넘겼습니다.
곧 은행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교회 신용등급이 떨어져서 대출금의 일부상환을 하라는 얘기였습니다. “네트영어가 안식년을 맞아서 회계 상의 수치만 떨어진 것이지 교회 재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자기들은 총액 기준으로 보니까 어떻게든 서류상의 숫자가 맞춰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검찰이나 세무서나 은행에서 나와 조사하는 것도 아니기에 “하나님도 이해해주시겠지.”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숫자 몇 개만 바꿔서 서류로 제출하고 은행도 모른 척 눈감아주면 되지만 그것을 못해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 일에 쉽게 타협하면 그 서류를 받으면서 은행원들이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을 실족시키는 셈이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힘든 일이 예상되어도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선한 곳에 뜻을 두면 최선의 길이 반드시 열릴 줄 믿습니다. 그리고 바른 길을 고집함으로 생기는 두려운 일들은 나중에는 선한 영향력을 얻는 축복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살면서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최대한 성도답게 살려고 하십시오.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탐하지 말고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하십시오. 성도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불이익도 많이 당하겠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성도에게 반드시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좋은 인맥과 생각을 초월한 은혜를 주셔서 당대와 후대에 더욱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바르게 살면서도 성공하는 성공모델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선한 도전을 하고 혼탁한 사회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는 맑은 샘 근원이 되십시오.
경기장에서 선수로 선택받은 자의 자세
김필곤 목사
우리 나라가 4강에 올랐습니다. 오늘 아침 us today를 보니 improbable(일어날 듯하지 않은, 정말같지 않은)일이 일어났다고 표현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IMF로 상한 자긍심이 살아났습니다. 국민 모두가 환호와 감격에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새벽 1시가 되었는데도 차 경적을 울리며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벽예배 나오는데 그 때까지도 "대한민국" 하면서 박수를 치고 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밤새워 외쳤을 텐데 참 대단합니다. 어떤 사람의 글을 보니까 경기가 끝나고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술에 취해 거리를 활보하였다고 합니다. 술에 취한 취객 한 명이 횡단 보도에서 마치 황선홍이 골을 넣고 붉은 악마에게로 달리던 모습처럼 맞은 편 붉은 신호등을 보고 돌진하였다고 합니다. 무단 횡단을 감행한 것입니다. 지나가던 택시가 급정거를 하였다고 합니다. 기사 아저씨가 차 문밖으로 머릴 내밀며 "야! 너 미쳤어?" 그러자 취객이 더 큰소리로 "대~한~민~국~~~ !!!!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택시 기사 아저씨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문을 열고 손을 양손을 쭉 펴더니 "짝짝짝짝짝... "하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습니까? 23명의 선수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소속감과 대단한 자긍심을 심어 준 것 같습니다. 관전하고 있는 국민들도 이렇게 감격하는데 직접 경기를 뛰고 승리한 축구 선수들은 얼마나 감격적일까요? 이루 상상할 수 없는 감격에 졌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일 것입니다. 불과 20여일 만에 급격히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몇 억의 상급이 생겼습니다. 어디 가나 대접받는 인기 스타가 되었습니다. 몸값이 올랐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생기고 호텔이 생기고 군면제를 받고 대단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Ⅰ. 경기장의 선수로 선택받은 자의 감격
토요일 아침 교회에 출근하면서 코뼈 부러진 김태영선수의 아버지께서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해운업을 하다 부도나 부부가 막노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를 기를 수 없어 할머니가 길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겨우 23명 엔트리에 뽑혔는데 경기 내내 11명의 주전 선수로 뽑아 주어 히딩크 감독에게 한없이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뽑아준 감독에게 매일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천국의 엔트리로 뽑혔는데 얼마나 감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운동 경기하는데 선수로 선택해 주는 것만으로 그렇게 감격을 하는데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 생명책에 기록해 주었습니다. 존귀한 자로 불러 주었습니다. 천국 시민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에스겔도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선택받은 감격으로 순교할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시대 쓰임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구속사를 이루어 가는 한 시대의 인물로 선택하였습니다. 에스겔 스스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하였습니다. 그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는 포로가 된 제사장입니다. 5년 동안 절망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당시 신흥 바벨론은 차례로 가장 강대한 나라 앗수르와 애굽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대의 나라로 부상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도 이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나라를 잃어 버렸습니다. 과거 일본의 속국이 된 우리나라처럼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젊은이들과 역량있는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에스겔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절망가운데 있는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한 시대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비전을 보여 줍니다. 환상을 보여 줍니다. 네 생물의 환상, 네 바뀌의 환상, 하늘의 보좌의 환상을 보여 줍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그를 불러 하늘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바로 이 시대에 에스겔처럼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엔트리에 뽑힌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전 멘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골잡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골문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벤취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던 어떤 위치에 있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선택에 감격한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감옥에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격합니다. 엡1:3절을 보십시오. 왜그렇게 감격합니까?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긍심입니다. 히딩크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사 44:2)"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사 44:24)"
Ⅱ. 경기장에 선수로 선택받은 자의 자세
선택받은 감격을 가진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어떻게 경기할까요? 적당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해 준 감독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도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엔트리로 선택해 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인생의 경주를 해야 할까요? 먼저 감독의 지시를 철저히 따를 것입니다. 감독이 음식을 절제하라하면 절제하고 감독이 잠자라고 하면 자고 감독이 풀백을 하라하며 풀백을 할 것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비합리적 병폐를 없애기 위해 대표 발탁을 할 때부터 학연주의, 지연주의, 서열주의를 타파하고 오직 실력과 가능성만 기준으로 뽑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도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 같이 않게 하고 형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이름을 사용하게 했고 방도 종전에는 두 명씩 사용하였는데 독방을 사용하게 했다고 합니다. 두 명이 사용하면 후배가 선배의 심부름꾼이 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력과 관계없이 고된 체력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한다면 경기장의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까요? 좋은 선수는 우선 감독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선수로 우리를 한 시대 뽑았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나라에서 교회에서 선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먼저 좋은 선수로 활동하려면
1. 인생의 경기장에 선택받은 선수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한 시대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수로 사용하시는 에스겔을 보십시오. 에스겔이 하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려지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인자야 일어나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라고 합니다. 지금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어나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임무를 줍니다. 7절 같이 읽겠습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할 자들은 패역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심히 패역한 자들입니다. 반역자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전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전하고 싶겠습니까? 에스겔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재간에 의존하여 자신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고 하는 것입니다(4). 말씀을 증거하면 아무리 패역한 백성일지라도 결국 그들은 선지자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5). 에스겔은 인생의 운동장에서 어떤 경우를 만나든 순종합니다. 4장을 보십시오. 성을 쌓으라면 성을 쌓습니다. 옆으로 누워 있으라면 누어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심지어는 쇠똥으로 구운 떡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도 먹습니다. 5장 1절을 보십시오. 칼로 머리털과 수염을 깍아 1/3은 성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을 칼로 치고 1/3은 바람에 흩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고 비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릅니다. 이사를 명령하면 이사를 합니다. 집에 구멍을 뚫으라면 궁멍을 뚫습니다.(12:7) 심지어는 아내가 죽었는데 애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겔24:17-18절을 보십시오. 그대로 따릅니다. 철저히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철저히 순종합니다. 아들까지 바치라고 하니까 바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작전지시에 철저히 순종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 아담이 버림받았습니까? 왜 초대왕 사울이 버림받았습니까? 불순종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우리는 인생의 경기장, 가정, 교회, 직장, 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경기장에서 열광의 환호를 받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성공과 승리의 비결은 먼저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렇게 실패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순종에 있었습니다(히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8)" 인생의 경기장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평강과 기쁨, 참 안식과 환희는 순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인생의 경기장에서 선택받은 선수인 우리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뛰어야 합니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곧 부름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를 때는 쓸데없이 장난삼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선택할 때는 그 선택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선수를 통해 우승을 하기 위해 엔트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을 말씀을 전하는 소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에스겔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낸다고 말씀합니다.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4절을 보십시오. 소명의식이란 바로 나는 보냄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부여된 임무를 수여하는 것입니다. 召命(소명)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의 뜻으로는 불러서 명하다라는 말입니다. 누가 나를 무엇을 위해 불렀는가? 왜 이 직업을 갖게 되었는가 ? 무엇을 위해 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가? 왜 학교를 다니고 있는가? 분명한 목표를 알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시대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불러 소명의식을 주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선수로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으로서의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모세로서의 일이 있습니다. 다윗은 다윗으로 서의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로 바울은 바울로서 해야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어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문제는 분명한 사명의식이 중요합니다. 바울을 예로 보십시오. 골로새서 1장 24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가 일군된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24). 그러므로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힘을 다하여 수고 합니다.
우리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운동장에서 주어진 사명을 이루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똑같이 공을 차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공차는 사람과 되는대로 차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어느 사람이 지나가는데 세 석공이 돌을 다듬고 있었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석공이 자기는 그 저 돌을 다듬고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그 옆의 석공에게도 똑같이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는 먹고살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다고 했답니다. 마지막 석공에게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있는 음성으로 큰 성당을 짓는 데 쓸 귀중한 돌을 다듬고 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왜 직장에 다니느냐? 왜 자녀를 기르느냐?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인생은 세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그저 생존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무엇인가 이루어 잘먹고 잘살기 위해 성공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준 사명을 깨닫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3. 인생의 경기장에서 선택받은 선수인 우리는 환난이나 시련을 극복해야 합니다.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치고 어렵습니다. 이번 야신상 후보에 오른 이운재 선수는 96년 간염으로 운동을 포기할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그 시련 앞에 포기했다면 오늘의 이운재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어제 120분을 뛰는 선수들을 보니까 사력을 다하여 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리를 다치기도 합니다. 코뼈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환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유람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전투함을 탑니다. 때로는 어선을 탑니다. 넘어야 할 파도가 있고 건너야할 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6절에 보십시오. 가시와 찔레가 기다립니다. 전갈 가운데 가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패역한 백성,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들입니다. 열조들이 범죄한 백성들입니다.(3) 열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손들도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입니다. 듣기를 싫어하는 백성들입니다. 다섯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해야 하고 두려워 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담대하게 극복할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보내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입니다. 에스겔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2년 동안 말씀을 전하면서 무수한 고생을 합니다. 백성들에게 박해를 받습니다(겔3:25) 아내가 일찍 죽습니다.(겔24:18) 그래도 그 환난과 역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영웅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룰 때는 항상 순풍만 약속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따릅니다. 한 시대 선택받아 역사의 운동장에서 쓰임받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순탄합니까? 죽음의 위기를 당합니다. 결국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했는데도 좋은 결과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25년 동안을 아들 문제로 고민합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생의 거의 모든 부분을 타향에서 살며 속고 속이는 전쟁터에서 살게 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어릴 때 인신 매매매 되었습니다. 얼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17여년 동안을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닙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요즈음 인기있는 히딩크 감독을 보십시오.
지금 한국 사회는 '히딩크 신드롬'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론은 히딩크를 극찬하고 정치계나 경제계에서도 히딩크를 벤치마킹 해야 한다고 합니다. '히딩크 호텔'도 생기고 '히딩크 거리'도 만들고 항공사는 4년간 1등석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고 보험사는 보험금 10억원 종신보험을 무료로 준다고 합니다. 어떤 시에서는 명예 시민권을 준다고 하고 일부의 네티즌들은 그에게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히딩크 펜클럽이 생겼고 히딩크 사이트가 만들어졌고 심지어는 히딩크 동상도 세운다고 합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히딩크 기도문도 실렸습니다. "전능하사 세계를 하나되게 하신 축구신과 그 외아들 거스 히딩크 감독님을 내가 믿사오니 이는 화란에서 잉태하사 개최국 코리아에 납시고 조중동 냄비 찌라시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포화에 맞아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석달만에 A 매치에서 다시 살아나사 16강에 오르사 전능하신 축구신 옆에 앉아 계시다가 명전술로써 돌려 붙기에서 살아남은 팀들을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승을 믿사오며 거룩한 선수단과 붉은 악마 응원단이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골을 넣으시는 것과 코리아에 귀화하실 것을 믿사옵나이다 " 신앙인들에게는 참람죄에 해당하는 글이지만 히딩크를 신화화하여 히딩크 교라도 금방 생길 듯 합니다. 그의 말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처럼 어록으로 기록되어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떤 언론은 우리 국민 모두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스승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네티즌 가운데는 그는 국민적 영웅이므로 그를 대통령으로 영입하자는 얘기도 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히딩크 복음을 전하듯 설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딩크가 처음부터 이렇게 영웅대접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불과 몇 개월 전 만해도 언론과 축구 관계자들, 축구 팬들은 히딩크를 비난하였습니다. '한국 축구 테스트만 하다 날샌다', '한국 알기 게을리 한다', '한국 축구, 변한게 없다', '체코전은 히딩크 사단이 가진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히딩크호 수비 시스템 대수술 필요', '국내팬 70% 한국, 월드컵 16강 못 갈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사생활까지 들먹이며 '히딩크 감독 여자친구와 재회', '히딩크 장모상 누구 모친이지?' 등과 같은 기사가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컨페더레이션컵에서 프랑스에 패한 뒤에는 인신 공격성 비난까지 합세해 퇴진 문제까지 거론하는 등 선정적인 행태를 극대화하였습니다. 모 방송사는 '100분 토론'에서 '히딩크호 집중 점검'이란 것까지 하였습니다. 누구나 환난과 고난을 격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경기장에서 어떤 환난이 와도 담대하게 주님의지하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이 이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찬양)
우리를 사랑하여 경기장의 선수로 선택해 주신 우리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와 함께하셔셔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우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우리를 선수로서 경기장에서 뛸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신 우리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찬양)
인생은 월드컵과 같은 운동경기와 같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있습니다. 휘슬이 울리기 까지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공을 가지고 경기를 합니다. 그 공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는 공을 어떤 사람은 학문이라는 공을 어떤 사람은 예술이라는 공을 어떤 사람은 사업이라는 공을 각각 주어진 공은 다릅니다. 그러나 같은 것은 경기가 종료되면 평가를 받은 것이고 경기장의 운동 선수가 떠나면 다른 팀들이 다시 경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경기장의 선수로 선택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인생의 경기를 하겠습니까? 어떤 삶의 현장일지라도 말씀에 순종합시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주님의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고난과 환란을 극복해야 합니다. 쓰러져서는 안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빛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편지로 향기로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켜합니다. 썩지 않게 해야 합니다. 어둡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악취를 제거해야 합니다. 23명 지극히 작은 인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과 3주 사이에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전국민을 환호하게 하였습니다. 23명 이 작은 수가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인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펼쳐 주시는 인생의 경기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으로 열광시키는 선수가 되시길 바랍니다.
얼굴이 뻔뻔한 백성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 시절에 가장 정치를 못하였다고 평을 받은 이가 카터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상중에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노벨상이고 노벨상 중에 가장 부러운 상이 평화상입니다.
그가 평화상을 받은 이유를 몇 가지 들었습니다.
1. 세계 분쟁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가 나타나서 평화롭게 하는 데 노력을 하였습니다.
2. 해비타트 프로젝트를 만들어 전 세계 망치를 들고 다니며 집이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집이 망가진 이들에게 다가가서 집을 고쳐주었습니다.
3. 매 주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4. 한 달에 한 번씩은 아내와 더불어 교회 청소를 하였습니다.
5. 늘 전도지를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전도를 하였습니다.
카터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를 보내신 존재이유를 찾아서 그것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결과 평화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에디슨은 인류 역사상 제일 발명을 많이 한 별명의 왕입니다.
그는 평생을 연구실에서 살았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18시간을 연구실에서 연구하면서 살았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 에디슨의 발자국과 손자국을 시멘트가 굳기 전에 찍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작은 체구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오직 연구실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 취미 생활을 합니까?” 이때 에디슨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일한 적이 없다. 하루 18시간 취미 생활만 하고 있다.” 일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성공하는 비결은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았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적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어 하고 갈등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표현하시기를 ‘얼굴이 뻔뻔한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뻔뻔하다의 히브리어 ‘케쉬’는 굳고 완고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함으로 죄를 지었지만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스럽게 여기는 철면피한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거역하고 반역하는 악한 태도를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세상에 전하라고 하셨는데도 우리 자신의 얼굴이 뻔뻔하고 순종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뻔뻔하여 말씀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섭섭하고 귀에 거슬리겠지만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뻔뻔하기는 마찬가지 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기로 결단하는 은혜와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 2절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
영어에서 ‘듣다’에 해당되는 동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경청하다’(listen)이며 다른 하는 ‘막연히 듣다’(hear)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의미 없이 막연히 들을 것이 아니라 경청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사용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수 없고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난 후에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 경청과 사명과 능력은 비례합니다. 경청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기에 불순종의 죄를 범했으며 큰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혜를 상실하게 됩니다. 은혜를 체험한 후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에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길이 지속적인 은혜 생활을 하고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하는 통로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포악한 남편과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매일 밤 술 취하여 들어 왔습니다. 집에 오기만 하면 기물들을 파괴하고 아내를 폭행하였습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었습니다. 내년은 좋아 지려나……. 나이가 들면 철이 들려나……. 세월이 흐르면 고치려나……. 흰 머리가 나면 가정적이 되려나……. 1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마차가지였습니다. 그는 이혼식을 거행하려고 목사님에게 사정을 말씀드리며 이혼식을 부탁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가끔 이혼식을 거행하기도 합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라도 그런 남자와 못 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것만도 위대한 것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이혼식 준비를 하십시다. 그런데 남은 한 달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끝을 좋게 하십시오. 잔소리도 하지 마십시오. 끝이 중요합니다. 절대로 싸우지 마십시오.” 그 여자는 목사님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 왔습니다. 한 달만은 무슨 일을 당하여도 감사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 왔습니다. 아내는 평소처럼 바가지를 긁지 않고 남편을 맞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한지 모르지만 그저 감사합니다.> 평소 같으면 아내가 바가지를 긁으면 남편이 말대답한다고 가구를 내던지고 부수고 때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조용하니까 남편도 조용히 잠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진정으로 감사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그 때는 가구를 부수었는데 오늘은 안 부수니 감사합니다.> 자다가 남편이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감사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그 때에는 똥을 쌌는데 오늘은 오줌을 싸는 군요. 감사합니다.> 아내는 모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집안이 평안하여졌습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났습니다. 내일이 주일인데 오늘 남편이 아내의 손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당신 요즘 달라졌소. 조용하고 감사만 하고 있으니 웬일이요. 나도 사실은 내가 잘못 하는 것을 알았는데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정말 미안하오. 나도 내일부터 교회 따라 가겠소. 그리고 다시는 술 마시지 않고 다시는 물건을 던지지 않겠소.>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서 전혀 다른 부부가 되었습니다. 최악을 생각하면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상대방이 변하고 내가 참으면 모든 것이 형통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함으로 은혜 받고 얼굴이 뻔뻔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6절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자들에게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 에스겔을 위협하고 중상모략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한국 교회의 오점 중 하나는 일제 치하에서 총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총회 기간 중 일본 순사들이 총회장 안팎에서 총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두려워서 신사 참배를 결의 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순사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입니다. 믿음이 컸다면 반드시 순교를 하였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두려움이 없이 기쁨만 충만한 것입니다. 무엇도 그리고 누구도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에 어느 소년이 있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하여 어린 시절을 호강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이 침침해 오기 시작했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의사가 말하기를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대로 두면 앞을 못 보게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그의 성질은 급격히 난폭해졌습니다. 그의 집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기 때문에 방안에는 불상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불상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으며 그 바람에 불상들은 깨어지고 마침내는 강 아래로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갔고 커다란 굿판을 벌리기도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 어두운 인생이 되고 말았고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관하여 자살을 하고자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의 권유로 기독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맹인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소경이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에서 희망을 얻게 되었고 앞 못 보는 불구의 몸 때문에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자신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많은 책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어둠에서 빛을 찾았다’라는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일본 ‘반사원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의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자리를 잡았고 강의가 시작되면 강의실은 물을 뿌린 듯 조용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선생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절망에서 희망의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인생의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아픔과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을 더 믿으면 두려움은 사라지거나 작아지게 됩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6번 나온다고 합니다.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얼굴이 뻔뻔한 사람들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세상 무엇도 두렵지 않은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전해야 합니다.
본문 7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
에스겔 스스로 지어낸 독창적인 말이나 저급한 사상을 전하지 말고 오직 진실 되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는 당부입니다. 하나님 말씀 외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말씀대로 하지 아니하면 이단이고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자기 스스로 지어낸 말을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패역하고 우상에 빠진 사람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 말씀 그대로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면 안 됩니다. 들어야 할 말씀을 전해야 하고 들어야 할 말씀을 들을 때 생명과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능하고 능숙한 바이올린 연주가는 1962년에 세상을 떠난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를 잘 하려면 기술도 좋아야 하지만 바이올린도 좋아야 합니다. 나쁜 바이올린을 가지고 좋은 연주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기술이면 도구가 성패를 좌우합니다. 그는 늘 좋은 바이올린을 찾았습니다. 아무리 비싸도 좋은 바이올린이 있다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구입하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여 생기는 수익금을 늘 자선사업에 사용하는 좋은 바이올린 연주가였습니다. 그래서 모아놓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중에 아주 좋은 바이올린을 찾았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바이올린부터 보았기 때문입니다. 음이 뛰어난 지금까지 그가 사용한 바이올린 중에 최고의 바이올린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여행 중입니다. 돈이 없습니다. 내가 집에 돌아가면 돈을 가지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 동안에 이 바이올린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 주십시오.” 주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여행을 마치고 돈을 여기저기에서 꾸어 모았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바이올린을 사러 그 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약속을 어기고 그 바이올린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바이올린을 산 사람을 백방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찾고 또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는 악기 수집가였습니다. 각종 악기를 수집하는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는 가서 그 바이올린을 산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가입니다. 바이올린은 내 생명입니다. 그 바이올린을 내게 파십시오. 돈을 더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자기는 바이올린 연주가는 아니지만 이 바이올린을 사고 나서 참으로 만족하고 있으니 팔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포기하고 그 집 현관을 나가다 불현 듯 그 바이올린으로 연주나 한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그래서 도로 들어가 서 그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바이올린으로 한번 연주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주인은 그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인 그가 이 바이올린으로 어떤 음을 내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바이올린을 내주었습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그 바이올린을 들고 미친 듯이 연주하였습니다. 하늘의 음악 같았습니다. 천사들의 음성 같았습니다. 거룩한 천사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연주하였습니다. 악기 수집가인 그는 바이올린 연주가 계속 되는 동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습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돌아가려는 데 악기 수집가가 그 바이올린을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당신 손에 들려져야 이 바이올린은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바이올린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 바이올린을 들고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찾으면 됩니다. 하면 됩니다. 길을 찾는 자에게는 길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전도한다고 선포하고 외치고 기도하면 반드시 됩니다. 가족과 이웃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되는 그 날이 옵니다.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고 복음을 전합시다. 아무리 얼굴이 뻔뻔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했어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에스겔이 되어 복음을 전파합시다. 하나님 음성을 듣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말씀을 전합시다. 얼굴이 뻔뻔한 백성들을 향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이 시대의 번동의 에스겔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내가 너를 보내노니(에스겔 2:1-7)
최근에 상영된 영화 ‘교회 오빠’는 고인이 된 복음성가 작곡가 이권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권희는 평화로운 날 속에서 갑자기 찾아온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고난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깨닫고 “내 안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아프리카 선교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파리가 잔뜩 붙어 있고 움직일 힘조차 없어 그대로 누워서 죽어가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아픔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때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면서 환상이 보였습니다.
“하늘 위에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모른 채 죽어가는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아버지 나를 보내 주세요.
험한 산도, 바다 끝이라도 괜찮습니다.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제 목숨조차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기에 마음이 아팠는지 아들을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습니다.”
환상을 본 후 그는 아들의 고백을 그대로 가사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지어진 노래가 사명입니다.
그는 이 노래를 통해 자신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현재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부와 명예를 좇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명이라는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같이 ‘사명’을 부릅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 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 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영광의 환상을 본 에스겔이 선지자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십니다.
본문 3절에 ‘내가 보내노라’는 단어는 ‘솔레아흐’인데 공식적인 파송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에스겔이 자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통해 파송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얼굴이 뻔뻔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뉘우침도 없으며 하나님의 책망도 받아들이지 않는 오만한 태도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끈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임명된 교사들도 하나님이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현장으로 보내십니다.
에스겔처럼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첫째, 말씀을 들어라
동서독이 통일되기 전, 한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베를린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장벽 앞에 서서 ‘베를린 장벽아, 무너져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하지만 끄덕도 하지 않는 장벽을 바라보며 낙심하였습니다.
그 순간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니 ‘네가’라는 단수가 아니라 ‘너희가’라는 복수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다시 장벽 앞에서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보니 시제가 ‘당장 옮겨진다’는 현재가 아니라 ‘옮겨질 것’이라는 미래 시제로 되어 있었습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나더니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여기의 ‘들으니’는 원어로 ‘와에쉬마으’인데 ‘귀담아 듣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연히 듣는 것이 아니라 경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경청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좋아지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음과 사명의 능력은 정비례합니다.
말씀을 경청하지 않으면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든지 말씀을 듣는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불순종의 죄를 범하며 사명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길만이 지속적인 은혜 생활을 하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내신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두려워 말라
‘나의 목발이 희망이 될 수 있다면’이라는 책의 주인공 지성호의 이야기입니다. 198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 때 굶어 죽지 않으려고 열차에서 석탄을 훔치다 팔과 다리를 잃고 꽃제비로 살다가 탈북하였습니다. 2006년 7월 목발로 6천 킬로미터를 걸어 마침내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탈북민 극빈자였던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어나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세운 인권단체 나우(NAUH)를 통해 수백 명의 탈북민을 자유의 땅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 진흥재단에서 수여하는 민주주의상을 받고 UN 본부 북한 인권 상황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자신의 인생 여정에 늘 하나님이 동행하셨다고 말하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도구이자 미래의 희망입니다. 사실 과거를 잊고 싶은 마음도 엄청 큽니다. 북한에서의 25년을 묻어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니까, 목발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제가 고통을 알릴 때, 북한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목발을 들고 고통이 희망이 되도록 열심히 뛰어다닐 겁니다. 목발은 모세의 지팡이기도 하고, 다윗의 물맷돌이기도 합니다. 저를 북한이라는 애굽에서 끌어냈고, 고통의 터널이라는 골리앗을 쓰러뜨린 도구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두려움에 빠져있던 인생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희망적 인생이 된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여기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알 티라’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에스겔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극복할 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할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사실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능력을 입게 됩니다.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열 백성들이 핍박하는 상황을 가시와 찔레와 전갈로 표현하였습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담대히 전하라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동역하며 복음 전도에 힘쓴 레이튼 포드(Leighton Ford) 목사는 ‘사귀는 전도, 나누는 전도’라는 책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아프리카 다카 공항에서 비행기에 기름을 넣기 위하여 기다리는 동안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출신 선교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가 모슬렘 지역에서 10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자, 레이튼 포드 목사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10년 동안 회심자가 얼마나 있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선교사가 ‘두 명’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다른 사람이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까?” 선교사는 그 물음이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이곳에 왜 있느냐고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다.” 레이튼 포드는 공항에서 있었던 그 고백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간증했습니다. 10년 동안 복음을 전하며 사역한 열매가 두 명밖에 없었어도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결코 떠날 수 없었다는 선교사의 고백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10년 동안 수고한 열매가 고작 두 명뿐이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 자리에서 사역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비록 열매가 보이지 않더라도, 사역이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내신 곳이기에 그 자리에서 감당하여야 합니다. 부질없는 짓이고 손해 보는 일이라고 여겨지더라도,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여기의 ‘고할지어다’는 원어로 ‘웨딥바르타’인데 ‘담대하게 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라는 당부입니다. 하나님 말씀 외에 그 무엇도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하지 아니하면 이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의 사명은 패역과 오만에 빠진 백성에게 듣든지 안 듣든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그대로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내심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보내심의 성공 여부는 사람들의 반응에 있지 않습니다. 에스겔은 백성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Maximilian M. Kolbe) 신부는 나치에 의해 아사 감옥에 갇힐 가조우니체크 대신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콜베는 감옥에 들어가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수감자들은 기도와 찬양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아사 감옥은 지옥이었지만, 그가 있었기에 거룩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바티칸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시대에 사랑의 기적을 보여 주었다며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습니다. 콜베는 고난과 고통의 자리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곳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보내심을 받은 이가 할 일은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하였느냐 보다 어떤 결과가 이루어졌는지에 집중합니다. 성공적 사역보다 눈에 보이는 수치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는 결과보다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였느냐? 얼마나 온전히 말씀을 증거하였느냐? 얼마나 맡겨진 사명을 성실하게 이행하였느냐에 마음을 두십니다.
에스겔 선지자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사명의 자리에 보내셨다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보내신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여 보내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사들과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에스겔 2:1-10)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듣는다면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살전2:13)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휼륭한 성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종말에 대한 비밀도 가르쳐 줄 정도로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 있었습니다.
에스겔서에는 “내게 이르시되” 라는 말씀이 약75번 기록할 정도로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은 그 말씀을 듣고만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듣고만 끝나버리는 말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듣고는 끝나버리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던 에스겔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서 2012년 한 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사명을 받은 에스겔
1장에서 에스겔은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1장 18절에 보면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에스겔은 한 마디로 황홀경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그러한 황홀경에 빠진 상태로 있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1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일어서면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황홀경에서 스스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면 그 황홀한 영적 세계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자들이 영적 황홀경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헤매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처음에 영적으로 황홀한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저 또한 그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황홀경에 혼자 빠져 있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 황홀함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일이 더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오라는 것입니다.
나오라고 하는데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황홀함만 원하고 찾는다면 그 신앙은 잘못되어 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놀라운 영적 체험을 보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에다 초막 셋을 짓고 있자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영적 체험을 한 것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왜 영적 체험을 주었는지 깨닫고 더 소중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특이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인자야” 라는 말입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전체에서 “인자야” 라는 말은 다니엘서에서 한번 나오고 에스겔에서만 무려 93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자야” 라는 말에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자야” 라는 말은 곧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사람의 아들” 보았다는 것은 다른 자들은 사람으로 보지 아니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자들은 무엇으로 보았습니까? 패역한 족속으로 보았습니다. 패역은 은혜를 배반하고 말씀을 거역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모르고 말씀을 거역한 자들을 어떻게 사람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면 그런 자는 하나님 앞에 “인자야” 라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절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는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는 것에만 빠져 있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듣는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만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은사주의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은 말씀이 약합니다.
에스겔이 1장에 나오는 영적 체험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2장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말씀을 듣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이 어떤 말씀이었습니까?
1. 내가 너를 패역한 백성에게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이 찾아가야 할 그들은 어떤 자들이였습니까? 패역하고, 배반한 자들이고, 얼굴이 뻔뻔한 자들이고, 마음이 굳은 자들이었습니다.
에스겔 사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사명입니까? 자기 나라에서도 아닌 포로로 끌려온 바벨론 땅에서 그것도 포로 생활로 지쳐있는 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기는커녕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패역하고 뻔뻔하고 강퍅한 자들에게 선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어렵고 힘든 사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영적 체험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그것은 순종이었습니다.
2. 듣는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5절을 주목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다시 말해서 그들이 듣던지 아니 듣던지 너는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네가 백성들을 설득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단지 하나님 이 전하라는 말씀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적인 설교는 사람의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자라게 하시고, 거두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신중하게 들어야 합니다. 건성으로 들으면 하나님도 그런 자에게는 건성으로 대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말씀의 씨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말씀을 아무리 듣고, 깨달아도 길가 밭, 돌 밭, 가시떨기 밭은 어떤 하나님의 역사도 기대할 수 없지만 옥토 밭은 100배, 60배, 30배의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당시에 패역하고 뻔뻔하고 강퍅한 자들에게 말씀을 전한 에스겔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저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전해도 소 귀에 경 읽는 것 같은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차라리 돌에다가 짐승에게 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0년이 넘도록 종말론을 전하며 오직 예수 신앙을 외치고 있는 저의 마음도 에스겔 선지자와 같은 마음입니다. 저 또한 에스겔처럼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할 뿐입니다. 자라게 하시고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전할 뿐입니다.
언제인가 제가 하나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래도록 다시 오실 예수를 전하고, 오직 예수 신앙을 전하는데 무슨 표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엇인가 잘못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때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종아 너는 도구니라. 도구는 그냥 도구 역할만 하면 된다” 그렇습니다. 도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주인 손에 들려진 도구대로 그냥 도구 역할만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또한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는지 전할 뿐입니다.
3.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6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는 말씀이 3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 했습니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패역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강퍅한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뻔뻔한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강하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곧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다 보면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사람을 보고 전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고 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참으로 위험한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배제된 설교는 사람의 설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설교를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는 휼륭한 설교가들도 많이 있지만 오늘날 보편적으로 선포되고 있는 설교들이 하나님보다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져 전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가 무엇일가요?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엎드린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알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45-51절에서 악한 종과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을 구분하시는 말씀을 하셨는데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지 못하면” 악한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때와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세 개가 있는데 크로노스(Chronos)와 헤메라(heemera)는 인간의 때와 시간을 의미하고 카이로스(Kairos) 하나님의 때와 시간을 의미합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라” 는 “때” 는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때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4장 25장이 종말에 대한 말씀인 것처럼 그 “때의 양식” 는 곧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야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담대하게 패역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있다면 담대하게 세상이 심판 받을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하며 깨어있는 자들이 되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미국 핵과학자회보(BAS)는 1월 10일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운명의 날 시계 바늘을 11시 54분에서 11시 55분으로 1분 앞당겼다고 밝혔습니다.
에스겔처럼 사명을 잘 감당하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사명자의 자세
(겔2:8-9)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하나님의 사명자는 반드시 사명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사명자다운 자세를 갖출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혼란하고 타락되어 가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을 잊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학생다운 자세를 갖추어야 하고, 아내는 아내다운 자세를, 남편은 남편다운 자세를 갖추어야 가정도 사회도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교회도 교회다운 자세를 갖추어야 하고, 성도는 그리스도인다운 자세를, 주의 종은 주의 종다운 자세를 갖추어야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습니다.
사명자로서의 자세 세 가지
1.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다른 말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전해야 하기 때문에 들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 듣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에스겔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가운데 있으므로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지 아니하면 안되었을 것입니다.
“내게 이르시되” 라는 말이 약75번 기록되어 있고, “인자야” 라는 말이 95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에스겔이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 마지막 때에 깨어있지 아니하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다니는 악한 원수 마귀에게 미혹당하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오늘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눈 앞에, 손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듣고 볼 수 있는 영적인 귀와 눈이 열려야 할 것이고,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들을 때는 마음을 다해서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패역한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곧 아무리 영적으로 놀라운 체험을 한 에스겔이지만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패역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스스로 성령 충만하다고, 능력 충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항상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성령께 매달리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패역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패역은 은혜를 배반하고 말씀을 거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패역이라는 한자가 거스릴 悖, 거스릴 逆을 쓰고 있습니다.
에스겔도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소홀히 하고 깨어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 은혜를 배반하고 말씀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패역한 자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릅니다.
갈라디아서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들도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지 아니하면 성령으로 시작하였지만 육체로 마치는 패역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그럴리 없다고 자신 만만 하지 마세요. 앞으로 사탄의 역사는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도 강해져야 하지 않습니까?
악의 세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강해져 가는데 교회와 성도들과 주의 종들은 하루가 다르게 약해져만 하고 타협적이 되고 적당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패역한 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날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 받고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는 자들이 되어야 패역한 자들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끝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예수님 음성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3.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먹으라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도 반드시 먹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도 사명자도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는 잘하는데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안듣는 것만 못합니다.
말씀을 들려주신 것은 귀만 즐겁게 하려고 들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가지지 못합니까?
말씀을 듣기는 잘 하는데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말씀의 능력이 그들에게서 생겨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귀로만 듣고 코로만 냄새 맡아서는 내 육에 힘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무엇이라도 먹어야 힘이 되는 것이지 그림의 떡처럼 보고만 있는 다면 내게 무슨 힘이 되고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이 시간에 들려지는 하나님 말씀을 귀로만 듣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입으로 “아멘! 아멘” 하고 맛있게 받아먹으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그 말씀의 능력이 내 영혼과 육에 임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9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라는 말씀이 2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사명자로서 세 가지 자세를 갖추었을 때 두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손이 에스겔을 향해 펴셨습니다.
둘째는 그 손 안에 두루마리 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먹어야 할 것은 곧 하나님 손에 있는 두루마리 책이었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고 먹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람의 소리 듣기 위해서 교회 가는 것 아닙니다.
더욱이 사람 보기 위해서 교회 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그 말씀을 온전히 먹고 어두운 이 세상에서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서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주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전하도록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이 어떤 말씀이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때를 따라 주는 양식”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영이 전하는 다른 예수가 있고 다른 복음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잘 듣고 잘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0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손에 있는 책을 펴니까 안팎에 글이 가득히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그 기록된 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글이었습니다.
모두 슬픈 말씀만 기록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에스겔이 전해야할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말씀의 내용들이 4장부터 32장까지 기록되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되어질 요한계시록도 에스겔이 받은 말씀처럼 안팎으로 써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요한 계시록도 에스겔처럼 마지막 때에 되어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은 곧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이 말씀을 전해야 했고 백성들은 그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진실로 마지막 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의 종들이 무엇을 전해야 하고 성도들은 어떤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만 합니까?
요한계시록에는 “장차” 라는 말씀이 10번 나옵니다.
즉 계시록에 기록되어진 말씀은 장차 되어질 일을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말씀이 세상을 무섭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뿐입니다.
참으로 에스겔처럼 전하기 부담되는 말씀입니다.
먼 이방 땅에서 포로로 고통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이나 기분 좋은 말을 전해도 시원찮을 것인데 심판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에스겔의 마음은 심히 괴롭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경제 속에서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이나 기분 좋은 말을 전하면 얼마나 서로가 편하고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닌 것을 어찌합니까?
하나님은 지금 잠간 평안을 주는 것보다 영원한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조금 아프고 괴롭고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먹으면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공부하기 힘들고 학교가지 싫어한다고 학교도 가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라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몸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고 치료하는게 귀찮아서 아픈 몸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은 조금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일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먹으면 결국에는 그 말씀의 능력이 나를 보호하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길까지 인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담대하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을 살리기 위해서 선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의 자세이고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 모두 진실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패역하고 뻔뻔하고 강퍅한 에스겔 시대처럼 오늘날도 사람들의 마음과 얼굴과 생각이 패역하고 뻔뻔하고 강퍅한 시대입니다.
산에서 소리를 치면 메아리라도 되어서 돌아오건만 이 시대는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귀먹은 자에게 외치는 것같은 마음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외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머리를 자르고 수염을 잘라 불로 태우라고도 하셨고, 모로 누워 자라고도 하셨고, 인분으로 떡을 구우라고 하셨고, 에스겔의 아내까지 죽이면서까지 백성들에게 행위 예언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도 행위 예언을 할까?
제 생각이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저 또한 해야겠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패역하고 무지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이 시대 너는 사람을 보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고, 말씀을 듣는 자들은 듣기만 하지 말고 이제 그 말씀을 맛있게 받아 먹어서 장성한 자가 되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에 부족함 없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스겔 시대보다도 몇 천배 몇 만배 악한 시대입니다.
날마다 깨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으며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 되어 패역한 이 시대와 싸워 능히 이기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