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고경태)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정규철)




칼 바르트,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Karl Barth, 1886. 5. 10 ~ 1968. 12. 10)

스위스 개혁교회 목사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가 남겼다고 하는 유명한 말 가운데에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의 발언을 신앙인은 성경에 대해서 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조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대선 목사는 바르트의 주장을 성경에서 상황으로 순서로 이해했고, 
당시 불트만 계열이 주장했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해석법을 상황에서 성경으로 순서로 제시했다.

해석학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text and context)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성경 텍스트는 1세기 문서이고, 21세기 상황에서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는 중요한 구도일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저자가 21세기 독자에게 텍스트를 보냈는지는 큰 관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1세기 저자와 1세기 독자의 관계 문제를 규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학 비평이 도입되면서 구조 분석을 진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자반응비평(Concept of Reader-Response Criticism)으로 전개되고 있다.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의한 것이다. 

우리는 반틸 박사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로 귀결할 수 밖에 없다. 
해석자가 해석하는 목표(전제)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해서 무엇을 얻어 제공하려는 것인가? 
해석자의 전제를 파악할 수 없다면, 질문하면 된다. 공적 사역자는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신앙과 사회를 균형 있게 바라보라는 권고나, 성경에서 상황의 순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자는 성경과 신문을 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설교한다. 
설교에 적용 부분이 있다고 제시하는데, 필자는 적용이 없어도 좋은 설교라고 생각한다. 
설교는 삶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주의 말씀 들음”을 이루지 못한다면, 설교를 떠나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데, 어디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자기 계시관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관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유에 둔다. 
즉 성경(특별계시)이나 신문(일반계시), 어디에서든지 바르트의 하느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할 수 있고, 그 백성은 어디에서든지 자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있어도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수준에 어떤 문제가 없다. 

어떤 설교나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수납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불신앙이고 이단적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정통 교회는 기본적으로 성경과 교리로 하나님 말씀을 수납하는 구도를 제언한다. 
바르트는 설교하는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주체는 청자(聽者, a listener)에게 전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개혁된 신학에서는 화자(話者, a preacher)와 청자(聽者, a listener) 사이에 성령의 내적 작용이 결합되어야 한다. 
개혁파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없는 화자에게서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긴박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복음이 선포되어도 깨어있지 않는다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깊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바르트에게는 자유가 있고, 필자는 매우 규범적이고 제한적이다.

장대선 목사가 제시한 것처럼 바르트의 해석 방법과 불트만의 해석 방법은 같지 않다. 
방법이 같지 않으며 해석의 목표도 같지 않다. 
불트만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파와 같을 수는 없다. 
불트만을 대적했기 때문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을 개혁파 분야에서 긍정적으로 수납하며,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계시 이해에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제언한다. 
특별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반계시 영역에서 유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불트만의 수제자에서 돌아선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 1926-2009)에게서 잘 드러난다(에타 린네만,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송다니엘 역, 부흥과개혁사, 2010년). 
린네만은 불트만의 지도로 “Gleichnisse Jesu. Einführung und Auslegung”를 발표했고, 숨바쿰라우데(summa cum laude, 최우등상)로 1961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학자이다. 
린네만은 51세에 회심한 뒤 인도네시아로 선교 사역을 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으로 자기 이전 모든 작품을 정죄했다. 
린네만이 거부한 <예수의 비유>는 지금도 비평학계에서는 잘 인용하고 있다. 
린네만은 마가복음 우선설을 거부하고, 공관복음의 원자료설을 거부하고 독립성을 주장한다.

성경해석은 끊임없는 정진에 있다. 
교회 사역자들이 많은 글쓰기를 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글쓰기는 끊임없는 성경 본문 다룸(handling)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역자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 해석을 읽고 듣는 독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바르트의 신학을 수용하는 예장 통합, 바르트의 신학을 부정한다는 예장 합동의 열매가 유사하다면 어떤 포인트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 다 나쁜 확률은 상당히 높지만, 둘 다 좋을 확률은 거의 없다. 
성경을 해석한 해석자와 따르는 사람의 열매를 보자. 바르트, 불트만 등등 당대 시대를 주도했던 현대신학자들의 열매가 100년이 되지 않아 보이고 있는데, 동성애를 넘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로마서 주석》, 《고백교회》, 《바르멘 선언》,[1][2] 그리고 미완성의 대작인 《교회교의학》으로 잘 알려져있다.[3][4][5]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꼽히며, 바르트의 영향력은 학문적 범위를 넘어 대중 문화로 확장되어 1962년 4월 20일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기도 했다.[6]

바르트는 동시대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처럼 아돌프 폰 하르낙,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등에게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 교육을 받았다.[7] 처음에는 스위스 시골 마을 사펜빌(Safenwil)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여 "사펜빌의 빨갱이 목사"로 알려졌다.[8] 이곳에서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적 기독교에 대해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919년 첫 번째 판 로마서 주석(로마서 I)을 집필하여 신약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21년 로마서 주석의 두 번째 판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과의 공개적 단절을 선언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9]

예수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인 인간으로,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으로, 윤리적인 지침서로 이해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으로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그의 계시관과 역사관은 차이점을 보였기에 그의 이러한 신학적인 성격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폴 틸리히, 에밀 브루너루돌프 불트만과 함께 20세기 초 개신교 신학계를 주도했다. 그 외에도 바르트는 디트리히 본회퍼, 위르겐 몰트만, 헬무트 골비처, 제임스 H. 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토마스 F. 토렌스, 한스 큉,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 자크 엘륄과 같은 신학자뿐 아니라, 플래너리 오코너, 존 업다이크, 미클로시 센트쿠시(Miklós Szentkuthy)와 같은 소설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바르트는 현대 기독교 윤리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10][11][12][13] 스탠리 하우어워스, 존 하워드 요더, 자크 엘륄, 올리버 오도너번 등의 윤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10][14][15]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독일어 판 Kirchliche Dogmatik

생애

목회경험

신학자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의 장남인 칼 바르트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베른에서 보냈으며, 1904년 베른 대학교, 베를린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학생 칼 바르트는 교수들의 영향으로 당시 유럽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의 교회에서 개혁교회 목사로 목회하면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복음으로써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본가들로부터는 '빨갱이 목사'(Red Pastor)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부 공장주들은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교파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한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 설교하지 않으며 성경을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4년 8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은 그에게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반박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칼 아담은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유럽신학계의 충격은 컸는데, 칼 바르트 자신도 '나는 우연히 잡은 교회종의 줄을 잡아당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게 한 사람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전통에서 길을 찾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한 후 자신이 속한 개혁교회(Reformed)의 전통에서 길을 찾았다.그는 개혁교회 신학의 뿌리인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 및 제2 스위스 신앙고백 등의 교의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바르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 곧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기독교 사상의 열매를 맺게 했으며, 신학무용론이 지배하는 반지성적인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과 성직자들에게 신학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반 나치 운동

칼 바르트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기독교인들과 개신교 신학생들까지도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고,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면서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하자, 나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히틀러의 나치즘운동이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요, 유대인, 집시등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대중강의와 설교를 통해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반 나치이념의 특징을 보여주는 문헌은 《바르멘 선언》이다. 바르멘 선언은 1934년 독일 바르멘에서 친나치적인 독일 교회에 반대하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인들이 모여서 발표한 反 나치 신학선언으로, 하나님의 말씀(Logos)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으며, 자신을 길이요, 진리로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도, 설교의 주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주요주제이다.

결국 그는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독일밖으로 영구추방당하여, 스위스 바젤 대학교로 이직했다. 칼 바르트의 나치반대운동은 칼 바르트 연구의 핵심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폴 틸리히, 디트리히 본회퍼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었다.

전후활동

전쟁이 히틀러의 패망으로 끝난 후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1948년에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 헝가리를 방문, 헝가리 개혁교회와 대화하였다. 또한 1948년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결성된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성립과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주요 활동은 저술활동으로 《교회교의학》을 저술했으며, 인생의 말년인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는 자신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개신교 신학입문》을 저술하였다. 이중 《교회교의학》은 1968년 바르트의 죽음으로 일부내용이 저술되지 못한 미완성작품이며, 한국어판은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번역,출판 중이다. 현재 4권까지 출판되어 있다. 1968년 별세 전날 20세기의 대표 신학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16]

종교 사회주의 운동 참여

칼 바르트는 1911년부터 스위스 공단지역인 자펜빌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억압과 착취를 받는 현실을 보았으므로 현실참여적 성직자가 되었다. 바르트는 1913년 스위스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당시 유럽 교회가 관심을 갖고 있던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도 중심인물로 참여하였다.

신학

칼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업적은 그의 신학 대작인 《교회교의학》이다. 이 작품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 하나님 교리, 화해의 교리, 구속의 교리를 논하며, 모든 신학적 논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재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학의 방법

바르트의 신학적 구분법은 루터와 칼빈의 전통적 구분법인 원형/모형을 따르지 않고, 칸트의 현상적(phenomenal)/본체적(noumenal)의 구분을 따랐다. 그 뿐만 아니라, 비록 그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 반대각을 세웠지만, 슐레이어마허의 주관적인 관점을 받아들였다. 결국에는 바르트에게 성경은 객관적인 역사에 기초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실존적으로 만나는(existential encounter) 가능성을 뜻하였다.[17]

삼위일체 초점

바르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상실된 것으로 간주된 삼위일체 교리를 개신교 신학에서 회복하는 것이었다.[18] 그의 주장은 하나님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자신의 지식의 대상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며, 성경 속 계시는 인간이 단순히 자신의 직관을 통해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19]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위로부터 수직으로(Senkrecht von Oben)'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일원론 (Christomonism)

바르트는 성경전체를 신구약성서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서, 부적절한 강조라고 코닐리어스 반틸은 말한다.[20]

선택

《교회교의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논란이 된 부분 중 하나는 선택의 교리(선택론, 교회교의학 II/2)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이 각 개인을 구원하거나 정죄하도록 선택한 것이 신적 의지의 목적에 따른 것이며, 왜 어떤 사람은 선택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는 사상을 거부한다.[21]

바르트의 선택 교리는 영원하고 숨겨진 신적 계획이라는 개념을 단호히 거부한다.[22] 바르트는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으로, 인류의 구원이나 정죄를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계획에 귀속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위보다 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요소를 하나님 안에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만약 "절대적 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초기 개혁 신학 전통에서 이중예정 개념을 유지하지만, 하나님의 인류 선택과 인류 죄의 거부를 모두 구현한 것을 예수로 본다.[23]

바르트의 선택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구원론의 개인 구원 예정 교리를 개선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24] 에밀 브루너를 비롯한 이들은 바르트의 관점이 온건한 보편주의(soft universalism)로 이어져 아우구스티누스-칼빈주의와 다르다고 지적한다.[25]

구원

칼 바르트는 엄격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죄와 구원에 대한 관점이 기독교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예정론이 인간을 미리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설정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다수의 인간이 운명적으로 정죄받는다는 인식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바르트의 구원론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의 저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전체와 하나님의 화해가 본질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이미 선택되고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나는 보편구원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며 보편구원론과 거리를 두었다.[26]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영원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단순히 열린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가져야 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신학적 일관성이 우리를 이 방향으로 가장 분명히 이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자유로운 선물로만 주어지고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라며 단순히 전적 화해(total reconciliation)를 희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7]

바르트는 현대에 와서는 "전통적 신학을 상당히 넘어서는 중요한 단계"를 밟았다 평가받는다. 그는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이 다수 또는 대부분의 사람이 정죄받는 것을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반대했다. 바르트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중심이며, 정죄는 절대적인 결론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27]

말씀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명제를 가지고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높이고, 존중하는 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사람으로 오신 말씀(Logos) 예수 그리스도Messiah를 뜻하므로, 바르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말한다. 그는 신학의 출발점과 귀결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기복신앙[28]윤리를 가르쳐 온 일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교회중심의 신학

바르트는 신학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실천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즉,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에게는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학의 지혜에 따라 교회를 이끌 책임이, 신학자에게는 교회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언자적 신학

바르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인도해야 한다고 보았다.그래서 바르멘 선언을 형제교회 성직자들과 함께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 
Rudolf Karl Bultmann(1884. 8. 20 ~ 1976. 7. 30)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칼 불트만 (Rudolf Karl Bultmann, 1884-1976)은 독일의 올덴부르크의 비펠슈테데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1910년 요하네스 바이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바울의 설교 양식과 견유학파 및 스토아학파의 논쟁 화법: Der stil der paulinischen Predigt und die kynisch-stoische Diatribe). 1912년 교수자격 논문 (Die Exegese des Theodor von Mopsuestia) 통과 후 마르부르크에서 신약학을 30년 동안 가르쳤다.

우리는 새삼스럽지 않게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교과서와도 같은 그의 사상에 관한 문제점을 간단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불트만 스스로 자신의 신학 사상의 핵심을 비교적 평이한 문체로 설명했다는 (G. E. Ladd)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이동영 역, 1994)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책의 내용은 불트만이 1951년 10월경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영어로 강의한 것을 정리한 것이기에 영어판이 원본이고 독일어판이 번역본이다.

1. 현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형성되었고 일상적인 삶을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48-9). 성경의 낡은 세계관이 다시 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불러냈다는 성경의 신화적 세계관은 현대인에게 ‘진정한 걸림돌’이다 (같은 책, 49).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 사상이 신화이고,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거나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사탄의 군대와 귀신들이 모든 악의 근원이고 죄와 질병의 원인이라는 이론은 신화론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이 세계가 하늘과 땅과 지옥의 3층 건물로 구성되었다는 세계관도 신화적이다 (같은 책, 17).

불트만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현대인들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적 세계관으로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신화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신화는 현대의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역사적 실제적 사실이 아니라 고대인들이 창작한 이야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 신화의 문제와 비신화화

불트만은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에 따라 성경의 내용들을 신화로 간주하였다. 예를 들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8; 막 9:1)는 구절은 예수님의 진짜 말씀이 아니고 초대교회에 의해 그의 말씀으로 간주 되었던 본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16).

불트만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는데, 하나님 나라 사상도 신화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책, 17). 이런 방식으로 불트만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서 예수님이 인자로서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거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하여 초대교회 교인들이 신화론적 빛 안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19).

헬라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그들은 예수가 하나의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으며, 자신을 고통 가운데 내어주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던 분으로서, 창세 전부터 선재(先在)하고 계셨던 위대한 천상적 존재로 예수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개념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신화임이 명백하며, 이러한 신화들이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같은 책, 19-20).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종말, 구속자, 구원 등의 개념은 신화론적인 세계관으로서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고 폐기 처분된 것이다” (같은 책, 20).

불트만은 그와 같은 개념들이 성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기 위하여 지성을 희생시킬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가능하냐고 질문한다 (같은 쪽). 그래서 불트만은 성경의 이러한 신화적인 개념들을 비신화화 (Entmythologierung, demythologizing)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21). 그러면서 그는 비신화의 목적이 신화론적인 진술들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같은 쪽).

불트만의 신화론 문제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고 이미 폐기 처분된 것으로 성경의 초자연적 내용들을 철저히 배제한 것이다. 그렇다고 불트만의 말대로 신화적 내용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비신화화라는 방식으로 성경의 초자연적 내용들을 해석하여 초자연적 부분들을 현대인들이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의 이러한 해석방침은 성경 본래의 메시지를 희생시켜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맞도록 변형하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3. 실존 철학적 해석

불트만은 성경의 신화적인 개념들을 해석하기 위하여 실존철학을 도입했다. 신화론은 인간 실존의 특정한 이해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안적인 것을 차안적인 것으로 객관화시킨 것이 신화인데, 하늘의 하나님과 땅속의 지옥이라는 신화적 관념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에 위와 아래가 있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허구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실존주의 철학을 성경해석에 도입했다 (같은 책, 59).

“여하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한 명의 전능한 존재가 실존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미리 주어진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80-81). “하느님을 창조주로서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에 관한 이론적 진술이 될 수 없다. 그와 같은 주장은 단지 내 자신이 의존적 피조물로서 나의 실존을 하느님께 의존하는 존재라는 하나의 개인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을 뿐이다” (88). 행동으로서의 하느님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밝히는 것이 바로 비신화화론이다 (같은 책, 97).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상은 지금 여기서 말해지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나의 개인적 실존 속에 현재화된다” (99).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정신이나 인간의 지혜에 의하여 창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 그것의 기원인 것이다...이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100).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은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은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언제나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현존하며, 무시간적 진리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현존한다” (103).

이러한 성경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성경해석은 성경 본문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exegesis) 해야지 해석자의 주관이 드러나게 (eisegesis) 하면 성경의 메시지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이러한 진술들은 우리 기독교와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들을 부정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행동으로서의 하나님

이미 불트만은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이 예수님의 말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삽입한 케리그마이고, 역사적 예수의 선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신약성서신학」, 허 혁 역, 1). 이에 더하여 불트만은 하나님의 의미를 행동으로 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75). 이동영은 “The Meaning of God as Acting”을 “행동하는 자로서의 하느님의 의미”라고 번역하였으나 ‘Acting’은 ‘행동하는 자’가 아닌 ‘행동’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트만의 의도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어느 곳에나 숨겨져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성서 가운데 숨겨져 있다” (91).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역사적 인물이다” (101). 그러나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화론적 묘사이다 (같은 책, 100-101). 이러한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실제로 없다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불트만의 해설은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철학을 적용한 결과물일 뿐이고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해설이 성경이 보도하는 바가 아니고, 행동으로서의 하나님 혹은 행동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해설도 성경에서 표현하는 것을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없다. 선포되는 말씀이란 개념도 불투명하다.

그가 말하는 말씀은 그저 인간의 설교를 케리그마 선포라는 용어로 과대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거론하는 종말 개념도 성경의 종말론이 아니라 실존철학의 현존개념으로 그 의미를 바꾸었다. 이러한 해설은 기독교를 부정하고 대적하는유대교가 환영할만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신약학 교수로 30년 동안 재직했으며, 학교 동료인 하이데거실존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의 비신화화를 시도한 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연구는 《예수》(1926)에 집대성되었다.[1]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름을 따라서 불트만 학파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볼트만은 신약성경 속 선교의 실존론적 해석을 비신화화(非神話化) 방법에 의해서 행할 것을 주장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등 성경의 사건이나 서술이 신화적인 요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 이야기 전체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우주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복음서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지옥의 3층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만일 신화적 요소가 배제된다면 복음서 역사의 참다운 의미가 명확해진다고 주장했다. 즉 선교 내용을 순수하게 파악하고, 실존철학의 도움을 빌려 우리들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독일 및 유럽 신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종교사적인 방법을 구사하면서 실존론적 해석을 적용한 《요한복음서》 주해나 신약 연구의 체계적 성과를 가진 《신약신학》 등의 뛰어난 업적이 있으며, 논문집 《신앙과 이해》도 4권이나 있고 이 밖에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의 강의집 《역사와 종말론》 등을 남겼다.[1]

생애

불트만은 올덴부르크의 비펠슈테데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2] 올덴부르크에 있는 알테스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를 획득한 뒤,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두 학기가 지난 후, 불트만은 몇 학기 동안 베를린 대학교로 갔고, 결국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910년에 요하네스 바이스의 지도 아래 바울로 서신에 대한 논문으로 취득하였다.[3][4] 헤르만 궁켈빌헬름 하이트뮐러에게도 수학했다.[5] 이후 2년간 하빌리타치온을 거친 후에 마르부르크에서 신약학을 가르친다.

브로츠와프기센에서 잠시 강사로 재직한 후 1921년에 마르부르크로 돌아와서 1951년에 은퇴할 때까지 마르부르크에 머물렀다. 불트만은 한스 요나스,[6] 에른스트 케제만,[7] 귄터 보른캄,[8] 헬무트 쾨스터[9] 박사과정을 지도했으며 한나 아렌트도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 해석학파가 형성되었다. 불트만은 고백교회의 구성원으로[10] 유대인에 대한 학대와 과도한 민족주의, 그리고 아리아인이 아닌 기독교 성직자를 퇴출하는 사회적 현상에 반대하는 등[11] 나치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12][13]

신학

성서의 비신화화

 이 부분의 본문은 비신화화입니다.

불트만은 현대의 남성과 여성에게 우주의 외계인을 그리게 하는, 하늘의 도시나 삼층적 우주 같은 신화적인 용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그런 신화적 용어들 때문에 많은 현대인들이, 성서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에 나타나는 고유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대적이고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현대의 남성과 여성은, 신화적인 용어가 더 이상 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불트만은 그의 신학적 저술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신화적인 표현을, 새롭고 실존적인 해석으로 교체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성서의 역사적 관점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성서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요청하는 불트만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았다.

양식비평의 목표는, 주 예수의 말씀이나 비유, 또는 이야기의 조각이 지니는, 원래의 양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차적인 추가와 양식들을 구분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러한 배움은 전통의 역사에서 중요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 불트만, 공관복음서 전승사

불트만의 《공관복음서 전승사 (1921)》는 여전히 복음서 연구에서, 틀에 박힌 수사학적인 어구나, 모여서 복음서를 형성한 이야기 단위들에 대한 그의 분석과 불트만이 가장 영향력있는 해설자이었던 이른바 "양식 비평"이라는, 역사적으로 기원을 분석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학자들에게조차 필수적인 도구로 간주된다.

양식비평

 이 부분의 본문은 양식비평입니다.

불트만은 종교사학파의 연구 방법을 배우고 마르틴 디벨리우스와 함께 공관복음서의 양식사적 연구를 추진하여 극단적인 회의론으로까지 발전시켰는데, 1941년에는 요한복음서에 양식비평을 적용하였다.[1] 그 글에서 그는 요한이라는 복음서 저자가 의존하고 있던, 잃어버린 "복음 표적들"(Signs Gospel)[14]의 존재를 구분하여 드러내었다. 이 학술논문은 당시 상당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하나의 이정표이다. 같은 해에 이루어진 그의 신약성서와 신화 강의는,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비신화화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비신화화의 문제는, 해석자들에게 전통적인 신학을 마르틴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동료가 지닌 철학으로 대체할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현대의 독자들이 예수가 가르친 메시지의 실재에 접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불트만은 예수의 삶이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의 구조에서 우리는 그것이 희생제사 신학(offering theology)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야기의 교훈들은 신화의 익숙한 언어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설명이다. 불트만은 신앙이 현재의 실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에게, 세계의 사람들은 항상 실망스럽거나 소란스러웠다. 신앙은 의지의 결정된 중대한 행동이어야만 하고, 그것은 "고대의 증거들"을 추려 모으거나 격찬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불트만처럼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적인 신뢰도를 의심하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비판한다. 불트만의 모든 영향력은 영어판으로 《케리그마와 신화》(Kerygma and Myth, 1948년)가 출판되고 나서야 비로소 발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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