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3문(제4계명) 해설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3문(제4계명) 해설

도덕법으로서의 4계명

십계명은 도덕법으로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의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영속적 법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계명 가운데 윤리적인 성격을 가진 규범들, 이를 테면,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의 명령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4계명인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는 의식법이나 시민법으로 취급하여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십계명 전체를 도덕법으로 본다면 4계명도 도덕법으로 보아야지 그것만 따로 떼어서 의식법이나 시민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분명히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4계명을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

4계명은 예배를 언제 드릴 것인가 하는 ‘예배의 시기’에 대한 명령이다.

4계명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구약에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매우 중요했고 엄하게 시행되어야 했다.

안식일과 한국교회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안식일(토요일) 대신에 주일(일요일)을 지킨다.
그런데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생각하여 이 날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상당수의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날에 장년들은 생업을 중단했으며 학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운동회 같은 것도 금하였다.
오늘날 이런 입장이 다소 사라진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전혀 다른 날이라고 생각하여 주일에 일하거나 공부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제 안식일이란 폐지되고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것을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전통을 답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안식일에 대한 논의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고 상당히 복잡하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주일을 성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성경적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하며,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정립한 후에,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안식일이 영원히 지켜져야 하는 영속적 규범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안식일 규정이 다른 모든 구약의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분별하여야 한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안식일 이해가 필요하다.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성취자이시며 주인이시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1) : 창조

구약에서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각각 나온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약 40년의 시간 차이를 가지는데, 십계명 가운데 유독 4계명이 두 책에서 다르게 나온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창조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 먼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창세기 2:2-3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여섯 날 동안 창조사역을 하시고, 이제 일곱째 날이 이르자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따라서 일곱째 날은 복된 날이며 거룩한 날이다. 이 날은 다른 날들과 구별된다. 이 날은 특별한 날이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창조사역을 하시던 앞선 여섯 날과 달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가 없다. 이것은 일곱째 날의 무제한성, 곧 영원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안식이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을 만드신 것이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이 안식을 누리는 것이 창조의 완성이다. 따라서 인생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실로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이처럼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안식의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세상을 가꾸고 돌보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궁극적인 목표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했다. 아담은 에덴 한 가운데 있던 생명나무를 바라보면서 생명의 근원이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교통하면서 안식을 향유해야 했다. 이것은 아담이 이미 안식 가운데 있었지만 보다 완전한 안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것을 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안식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2) : 구속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러한 안식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이러한 구원은 과거에 출애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신 사건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역사적 사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탄의 수중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 구원사적인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신자들)이 애굽(사탄)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다. 즉 출애굽 사건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예표 한다.

우리는 출애굽의 구속사적인 의의를 생각하면서 십계명을 담고 있는 또 다른 본문인 신명기 5장을 읽어야 한다. 신명기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과 더불어 그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구원이 언급되어 있다. 즉 출애굽기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창조이지만 신명기 본문에는 그 이유가 구원인 것이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하나님은 억압받던 자들을 구원하셔서 안식을 주셨다. 따라서 그 백성들은 구원을 감사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에서 출애굽 1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지만, 신명기 5장에서 출애굽 2세대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2세대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의 끔찍함을 기억하게 하시면서 안식의 귀중함을 가르치려 하셨다. 즉 1세대의 후손들로서의 2세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셨다. 2세대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후손들임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셨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3) : 언약

출애굽기 31장에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31:12-13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여기서 “대대의 표징”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이어지는 16-17절에서 “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표징”으로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안식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조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복을 주시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어서 출애굽기 31:14-15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질 엄중한 형벌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죽음, 곧 생명의 끊어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안식일 준수는 어떤 종교적 절차 하나를 지키고 지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유지에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안식일을 위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깨뜨린 형벌로 그들이 이웃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7:21-23).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이제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를 살펴보자.
안식일은 구약의 다른 절기나 규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참고. 막 2:28), 안식 그 자체이시다(마 11:28).
구약에는 안식일 외에도 안식년과 희년이 있는데, ‘안식’과 관련된 모든 규례들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안식’을 바라본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공적인 생애를 사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완전히 이루심으로 우리를 다시 창조하셨고, 구원하셨으며,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한 언약 가운데 있게 하셨다. 즉 위에서 언급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충족하셨다.

구약의 절기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여기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제사시간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약시대의 제사시간들을 다시 지킴으로써 그리스도가 단번에 이루신 희생제사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염려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기에 더 이상 율법조항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문자적인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참된 안식일을 이미 지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 즉 안식일이 전망하는 메시아를 믿지 않는 자를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 후 첫날, 즉 일요일에 부활하셨으며,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도 반드시 일요일에 나타나셨다. 이처럼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고 일요일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일요일이 가지는 특별한 가치를 드러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일 후 첫날에 안식하신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제는 안식일 다음날이 안식일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은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하며 교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 20:7의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언급과 고린도전서 16:2의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라는 언급에 잘 나와 있다. 이후에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렀고(참고. 계 1:10), 이후부터 교회도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불렀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안식일 대신 주일에 모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계시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이제 주일에 모인다. 즉 구약의 교회는 토요일(안식일)에 모였지만, 신약의 교회는 일요일(주일)에 모이는 것이다.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4계명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는 주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를 ‘주일성수’(主日聖守)라고 부른다.
각자 흩어져 생활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 되면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즐거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이 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날이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날이고, 천국에서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날이다. 참으로 이 날은 복되고 거룩하며 따라서 이 날을 지키는 것은 특권이요 은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일을 지켜야 한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함

하나님께서 주일에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일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시행되어야 하지만 특별히 주일에 교회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자를 세우셔서 교회를 다스리게 하신다.
하나님은 목사를 세우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장로를 세우셔서 교인들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게 하시며, 집사를 세우셔서 교인들이 말씀을 실천하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살피게 하신다.
특히 목사는 하나님께서 개체교회 회중들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서 전해야 한다. 목사의 가장 주된 업무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다.
목사는 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하나님께 예배드림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주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사 66:23).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말씀을 배워야 하고 성례(세례와 성찬)에 참여해야 하며 주님께 공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교회에서 주일에 행해지는 일 중에 예배를 대체할 그 어떠한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보다 다른 잡다한 프로그램들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은 교회의 타락을 가속화할 것이다.
게다가 예배가 성경적 본질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어지는 모습은 안타깝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독교적인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이러한 자선은 예배 시간에 헌금(연보)을 함으로써 가능하다(고전 16:2).

3. 영원한 안식을 바라봄

하나님께서는 주일에 우리 생애의 모든 날 동안 악한 행위들을 멈추며 주께서 주의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하고 그럼으로써 영원한 안식이 이생에서부터 시작되기를 원하신다.

히브리서 4:3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히브리서 4:9에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의 순간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영원한 안식은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일을 지킴으로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면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실현을 열렬히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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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전통에 깊이 매어 있다가 풀려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앞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 그 외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교훈과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유대인의 잘못된 전통까지 지적하고 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와 안식일, 성경에 기록된 많은 유대 전통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그림자로써 구원을 예시하는 것으로 그 날과 그 절기가 실체는 아닌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느 절기나 날에 매이게 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충분히 놓칠 수 있다. 마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6)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어떻게 지내야 주일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일,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가? 주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각종 부서에서 봉사하며, 오전 예배를 드리고, 또 저녁 예배까지 참석하면 주일을 잘 지낸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는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기를 원하지만 의외로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는 것은 교회 교육에서 사각지대에 속한다. 주일 맞이에 대한 좋은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주일 맞이에 대한 글을 정리한다.


1. 안식일에서 시작된 주일

주일은 안식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식일을 모르고 주일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주일은 안식일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전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데 무엇을 버려야 하고, 또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첫 기록은 하나님의 천지만물을 창조하심과 관련이 있다. 창세기 2:1-3절에 ‘모든 창조의 일을 마치신 하나님은 제 칠 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는데 이것이 안식일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첫째 의미는 일에서 떠나 안식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으면서 만약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주신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하셨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으며,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칠일 가운데 단지 하루를 쉬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안식일에 포함되어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이고, 또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의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구속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3)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 평지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셨다. 신명기 5장 12-15절에 기록된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여기까지는 이미 언급된 안식일 규정과 동일하다. 하지만 15절에 구속의 의미를 더하셨는데,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안식일의 의미 가운데 자유, 구속의 의미를 더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4) 안식일의 의미는 일로부터 안식,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 바로의 종이 되었다가 자유하게 된 것을 기억하는 ‘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인,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2.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을 보면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체결하시면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은 기억 (자호르/ rAk°z")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 (샤모르/ rAmæ²v ')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1)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심,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 바로의 노예되었다가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한 가지를 더하여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음을 기억하며,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르게 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이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한 것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곧 주일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는 날이다.

2) 안식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정확한 해석과 바른 적용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더니 안식일은 역사에서 유대 민족을 구하였다고,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전통도 잘 지키면 마치 영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면, 주일처럼 지킨 안식일이 역사에서 유대 민족을 구하였겠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어느 정도 대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교단이나 각 교회 차원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3)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킨다면, 개인은 경건함에 이를 것이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의 신뢰도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민 교회의 갈등도 상당 부분 해결될 것이며, 명목상 그리스도인 의 위치에서 실재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교회가 감당할 사명들을 충분히 감당해 갈 것으로 믿는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한 방법으로, 먼저 주일을 특별한 날로 알고 주일을 미리 준비한다 (Preparation).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Worship).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주일 식탁에 모여 만찬을 갖는다 (Sunday Family Meal).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주일 만찬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희생양으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가지셨던 주의 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거룩한 의식이었던 것처럼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 갖는 주일 만찬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은혜, 기쁨, 평화, 구원, 믿음을 더할 것이다. 주일 만찬 자리에서 구원을 기억하고, 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켜야 하는 지를 말하고,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1) 안식일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는 안식교, 하나님의교회(안상홍, 장길자), 엘리아선교회(박명호)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자생적인 안식교로서 각 교회마다 잡지나 문헌 자료를 보내는 생애의 빛(강병국)등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미명 아래 제 4계명인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는데, 특히 하나님의교회는 안식일 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신천지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무교절과 칠칠절(맥추절), 초막절(수장절)을 착각하여 유월절과 초막절과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고 성경적으로 무지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유대력을 현재 양력으로 환산하여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안식일이란 어떤 날이며, 오늘날 우리는 과연 4계명에 있는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성경적인 안식일은 토요일이며, 유대인들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를 안식일로 지켰다. 그러나 안식일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날이 아니다. 십계명중 4계명을 성경대로 보면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며 "종도, 육축도, 손님까지도 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20:8-12)


2) 성경적인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 아들, 딸, 여종, 남종, 객, 육축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날 (출20:10)
- 처소에서조차 나오지 못하는 날(출16:29)
- 불도 피울 수 없는 날(출35:3)
- 스스로 괴롭게 하는 속죄의 날(레23:32)
- 장사를 할 수 없는 날(느10:31)
- 성문을 닫으므로 성문 밖에 나갈 수 없음(느13:19)
- 오락을 하지 못함(사58:13)
- 짐을 지지 못하는 날(렘17:21-22)
- 정해진 거리를 갈 수 없는 날(행1:12)

가장 극적인 사항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여야 한다”(출31:15)는 구절로,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안식일을 성경대로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누가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까? 성경은 반드시 죽이라고 말하고 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31:15)

즉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현재 교회를 다닐 수도 없다. 안식일에는 처소에서 나오지도 못하였으며, 먼 거리를 갈 수도 없고, 짐을 들지도 못하며, 불도 피우지 못하므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니 교회 봉사도 하기 어렵고, 매우 불편한 일이 될 것이다.

더욱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전체를 찾아 보아도 단 한구절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안식교가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근거로 다음 성경을 제시하고 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23:3)

위 성경본문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면 정말로 일곱째 날 안식일은 성회를 드리는 날로만 해석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인용은 부분적인 성경인용이 되어진다. 앞뒤의 본문을 보면 엉터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레23:2-6)

이 성경본문은 일곱째 날 안식일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번 있는 절기안식일(무교절기)을 가르킨다. 안식교는 원래 안식절기는 폐하여졌으므로 지키지 않지만, 일곱째 날 안식일은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에서 다음 구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레23:7-8)

즉 일곱째 날만 성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첫날에도 성회로 모이라는 구절로서 안식일에 성회로 모이라는 구절이 아니다.


3) 예수와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켰다?

안식교회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예수님과 바울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다"(눅4:16. 행17:2)는 성경구절을 제시한다. 즉 예수님과 바울도 율법과 규례대로 안식일이면 회당에 감으로서 안식일과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본문에서 ‘규례’(헬라어: 에토)는 ‘전례, 습관, 관습’이라는 해석이 올바른 번역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과 바울이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전례나 습관대로 회당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와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간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함 때문이며, 그 회당에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드리던 경우는 성경에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직 유대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면 안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회당에 나가서 성경을 강론하였다. 즉 많은 유대인들을 동시에 만나기 위하여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며, 전도하기가 가장 쉬운 곳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나 바울의 경우,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은 늘 해오던 습관적인 전도사역이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그 ‘에토’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면, 마태복음 27:15에서 “명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에토)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식교의 주장대로 ‘에토’가 ‘율법’이라고 해석하면, 본디오 빌라도마저 유대인의 율법을 지켰던 것이 된다. 본문에서 ‘에토’(전례)는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 되면 죄수를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또 사도행전17:2에서는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에토’라는 단어가 율법의 규례를 말한다면, 바울은 ‘자기 자신의 율법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것이 된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에토)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17:2)

즉 사도바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에 가서 전례와 습관대로 유대인들을 전도하였던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10:1에서도 예수님은 모여드는 무리들을 위하여 "다시 전례(에토)대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전부터 자주 모여드는 무리들을 가르치셨던 전례와 습관대로 가르치셨음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즉 ‘에토’라고 하는 헬라어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나 습관, 관습등을 의미한다. 실제로 행18:4를 보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기독교적인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또 예배란 십자가 사건 이후 기독교인에 의하여 드려진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였으며 그것은 성전에서 드려졌다.

 
 



4) 신약적인 안식일의 재조명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하셨는데(마12:12),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파격적인 주장이 된다. 또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재해석하시는데 이것도 유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가르침이 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만 하며,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죽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즉 안식일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과 같은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관점이 아니다. 특히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 되어진다. 성경은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여섯 번째 날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멈추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직도 일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 섭리하고 계신다.

히브리서에는 참 안식은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개념으로서,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9)라고 기록하였으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히4:11)라고 말하고 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4-11)

즉 신약에서 안식일의 참 의미는 미래적이며 종말적인 참 안식으로 재조명 되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다. 안식일은 문자적으로 일곱째 날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이다. 구약성경의 안식일은 종말적이고 궁극적인 참 안식의 그림자이며, 예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모형론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4-17)

신약에 와서 안식일이란 문자적이며 숫자적인 일곱째 날이 아니며, 모든 구약의 명절과 절기는 신약에서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장래일의 그림자가 되며 몸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예를 들면 구약의 유월절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즉 유월절(페싸흐)은 장래의 그림자였으며, 예수님이 그 몸의 실체가 되신다. 출애굽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은 하나님의 진노를 건너 뛰게(pass-over) 되었다. 신약에서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을 pass-over 시키는 실체가 되어진다.
또 오순절(칠칠절, 맥추절)도 장래의 그림자였으며, 신약에서 오순절은 성령의 강림과 성령의 열매맺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 안식일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자였고, 안식은 바로 예수 안에서의 구원을 상징한다. 또 초막절(수장절)은 마지막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창고에 저장하는 장래의 그림자를 예표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4)

캘빈은 안식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 4계명에는 모형적(typical) 요소들이 있다. 캘빈은 안식일 계명을 ‘예표’(figure)라고 부른 초대 교부들에게 동의했다. 그 분(예수) 자신이 진리이며, 그 분(예수)의 임재로 모든 모형들이 사라진다. 예수가 몸체이며, 예수의 출현으로 그림자는 뒤로 제쳐진다. 예수는 감히 말하건데,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안식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통하여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적으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안식일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천국에서의 안식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히 4:9).


5)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갈라디아교회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믿음뿐 아니라, 할례를 행하여야만 하며, 유대인의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혼합율법주의자들이었다. 오늘도 그러한 혼합율법주의자를 ‘갈라디안’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할례와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하는 갈라디아의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갈4:10-11)

만약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구원에 중요한 일이었다면 신약성경은 몇번이라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조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단 한마디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구절이 없다는 사실이며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일은 안식일과 달리 예배를 위한 날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기념하여 공식예배일로 지정한 것이다. 안식일과 주일은 그 개념이 다르다. 안식일은 쉬어야 하는 날이지만, 주일은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날이다. 안식교나 하나님의교회는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구원을 잃는다고 말하며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인을 받으며 남는 자손이 된다고 주장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 준수는 구원과 멸망의 조건이 되어진다는 것에 그들의 이단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구원이 오직 믿음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6)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가?

안식교와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교회에서는 모두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황제 이후부터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헌이 남아 있음으로 인하여, 그 문헌을 참고할 수 있는데, 그 문서를 보면 안식교와 안증회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➀ 이그나시우스의 편지

이그나시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으며 속사도 교부로 불려졌다.
그는 죽음에 임박하여 각 교회에 7개의 서신을 보내었는데, 그는 트라쟌 황제 통치시기인 AD98-117년 사이에 순교를 당하였으며, 그 중에서 ‘마그네시아인들에게’(To the magnsians) 이라는 서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오래된 이야기로 인해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요. 우리가 아직 유대주의의 관심을 계속 지킨다면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옛 관심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운 소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에 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그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나쁜 누룩을 피하십시요.....” (The Christianity of Ignatius of Antioch, 1935, 5page: 초대교회의 형성, 성광문화사 66쪽))

‘주의 날’은 계시록 1:4의 ‘주의 날’을 뜻한다. 특히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라는 구절이 뜻하는 것은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초대교회에서 말하는 ‘주의 날’ 즉 주일에 대해서 초대교회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➁ 12사도의 교훈

12사도의 교훈은 그 유명한 ‘디다케’라고 불려진다. 그것은 속사도들의 작품이며,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수리아 지방의 초대교회의 교리문답과 교회규범을 한데 묶어 놓은 문서로서 초대교회를 연구하는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주의 날’은 특별한 날이므로 ‘주의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돌릴 것입니다. 먼저 죄를 고백함으로서 제사를 깨끗하게 드려야 합니다. 이웃과 불의한 사람은 화목할 때까지 여기에 참석하지 말 것입니다.”(기독교 고전전집 1권, 초기기독교교부 171-179, 초대교회의 형성, 성광문화사 77-78쪽)

이미 이그나시우스의 서신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의 날’을 지키자는 내용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으며, 그 날이 분명히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이 된다. 그런데 그 ‘주의 날’에 함께 모여 떡을 뗀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떡을 떼다”라는 구절은 성찬식을 뜻하며, 곧 예배를 드린 것을 말한다. (행2:42, 행20:7, 고전11:23-26) 성경은 주간 첫날에 떡을 떼려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7)

➂ 바나바의 편지

주후 70-13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 바나바의 서신은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말하는 내용인데, 그 편지 15장에는 히브리서의 내용과 같이 안식일을 종말적으로 해석하며 기록하고 있었다.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면, 여덟째날은 주일을 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때에 가서야만 우리는 참으로 쉴 수 있고,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다.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그리고 약속을 받은 후에만 참으로 안식할 수 있다. 여덟째 날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인 바 천년왕국의 안식 후에 마지막 영광을 바라본다.”(바나바서신 15장)

➃ 순교자 저스틴

“이 음식을 성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을 아무나 취할 수 없고, 오직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참되다고 믿는 사람들..... 거룩하게 된 그 음식물은 바로 성육하신 예수님의 살이요, 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예식 후에 우리는 항상 이와 같은 것들을 서로 기억하도록 합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부족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모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인하여 우리는 인류의 주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송축을 올립니다. 그리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한 곳에 모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오래 읽습니다. 독경자가 읽기를 마칠 때에 사회자는 강론을 통해서 그 고상한 교훈들을 모방하도록 권면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말한대로 기도가 끝나면 빵과 물 탄 술을 가져오고, 그리고 사회자가 높이 들고 그 거룩해진 음식물을 나누어 주어 모두 받게 하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사들이 가져다 줍니다.....” (쇼트웰의 순교자저스틴의 성서강해, L.C.C. 66절 286page, 저스틴의 제1변증서)

저스틴은 아예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성찬을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일요일에 ‘빵과 물 탄 술’을 나누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러한 역사와 년륜이 오래된 문헌적인 증거들이 19-20세기의 안식교나 21세기의 안증회의 교리를 대비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일까? 과연 초대교회에서 말한 ‘주의 날’이 언제였을까?

➄ 제롬

제롬도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교도들이 이 날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도 그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 나타나시고 공의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신 날이 바로 이 날이기 때문이다.”(Jerome, In die dominica Paschae Homilia, CCL 78. 성경의 27가지 미스테리, 생명의 말씀사, 261쪽)

➅ 이레니우스의 주해서

초대교회의 어느 교부는 이레니우스의 저술에 대해서 주해서를 썼는데,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일요일 예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 관습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하게 되었다. 리웅의 감독인 순교자 이레니우스가 부활절에 관해라는 논문에서 밝혔듯이, 이 관습은 사도 시대부터 생겼다. 여기서 그는 오순절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사실을 언급한다. 오순절에는 주의 날과 같은 의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Iranaeus, Fragments from Lost Writtings of Irenaeus-Ante-Nicene Fathers)

➆ 일요일 휴업령

안식교와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교회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는데. 콘스탄틴황제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라고 강제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콘스탄틴황제는 321년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이미 일요일에 드려지고 있는 예배를 위하여 일요일 휴업령을 내린 것이며, 이런 교회사에 대한 문제는 교회사 서적을 확인하면 곧 밝혀질 것이다.

“콘스탄틴 치하에서 기독교의 공인은 몇 가지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콘스탄틴은 일요일이 로마의 다른 공휴일과 비슷한 공휴일이 되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예배는 폭넓게 발전할 수 있었고 교회에는 더 많은 회중이 모일 수 있었다”(생명의말씀사, 교회사핸드북 144쪽).

“321년 교회들에게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그로써 합법적인 법인 자격을 부여하였다. 태양의 날(일요일)이자, 기독교의 첫날을 휴일로 정하고 그 날은 노동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기독교회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49-150쪽)

다시 말하여, 콘스탄틴이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어 예배일을 변경시킨 것은 결코 아니다. 콘스탄틴황제는 교회에게 각종 혜택을 주었고, 그 혜택의 일부로서 이미 예배를 드리던 일요일을 편리하게 하도록 휴일로 정하여 준 것이다.

“기독교의 예배일인 주일은 기독교회의 초기부터 성수되었다. 그것은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을 지키는 유대교로부터의 이탈이었다. 한 주간의 첫날로 옮긴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마다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4세기초 콘스탄틴의 시대까지는 주일(일요일)이 공휴일로 지켜지지 못했다. 그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의 이른 아침이나 늦은 시간에 예배모임을 가졌다.” (생명의 말씀사, 라이온사, 교회사 핸드북 9쪽).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 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은 우리 사고·삶·본질의 변화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 진리를 지켜 나가겠다는 고백 실천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진리를 실천하는 일은 진리에 대한 앎과 믿음을 토대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안식일은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명제다. 우리는 안식일을 준수하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산다. 안식일 준수는 우리가 더 이상 일에 지배를 받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는 선언이다. 대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 안식일에 우리는 영적 상태를 점검한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의무를 돌아보고 다시금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현대 유대인들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온 이스라엘에 사이렌이 울리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준비한다.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가족과 함께 율법과 시편을 읽고 묵상하며 자기 삶을 점검하는 시간을 보낸다. 안식일은 무거운 짐과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시는 참된 선물이자 축복이다.

성경에 나타난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 오늘날 안식·주일 개념을 점검하는 일은 매우 의미가 있다. <주일, 거룩한 안식일>(생명의말씀사)을 쓴 아더 핑크는 총 8장으로 구성된 책에서 안식일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1장에선 안식일 개념을 총괄적으로 설명한다. 안식일이 결혼 제도와 함께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결혼 제도를 율법에 명확하게 기록해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다.

2장에서는 십계명 이전 안식일 규례를 설명한다. 우리는 안식일이 십계명 이후에 제정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창세기와 출애굽기 1~8장에도 안식일이 다양하게 기록돼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사용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창세기 2장 3-4절에 나타난 라멕은 자기 아들의 이름에 수고로운 일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창조주에 대한 감사를 담았다. 노아의홍수에서도 칠일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안식일이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모세는 애굽에 돌아가자마자 바로에게 자기 동포들이 안식일을 지키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처럼 안식일은 율법 제정 이전에도 있었다.

3장에서는 십계명을 통한 안식일 규례 갱신을 강조한다. 안식일은 십계명 중 제4계명이다. 이 위치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뜻한다.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인간 사랑'을 뜻한다. 안식일은 하나님 사랑의 마지막과 인간 사랑의 첫 시작에 위치한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4장에서는 안식일 규례의 오염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더럽힌 이스라엘에 국가적 재앙을 내리신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에 의해 함락됐다. 백성들은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더럽히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땅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70년이 흐른 뒤에야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이 다시금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5장부터는 안식일의 현대적 적용을 다룬다. 오늘날 우리는 일 중독에 사로잡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매일 노동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출애굽시키셨다. 광야 생활 중에는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만나도 허락하셨다. 일주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6장은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를 다룬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의 날에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일주일의 모든 날이 다 주님의 날이지만, 그 가운데 하루를 특별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은 이날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뜻한다.

7장에는 안식일(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썼다. 먼저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가 없으면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킬 수 없다. 저자는 안식일을 구별하고 단지 일을 금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활동과 기쁨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는 예배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지만, 참된 기쁨이 없다면 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기뻐하는 날이다. 이를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이다. 이에 대한 관심 없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정체성도 분명히 사라질 것이다. 이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이견이 있다.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구별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주일을 철저히 준비하고 실천해, 하나님 말씀을 올바르게 알고 지키는 데 힘써야 한다.



안식일(安息日)이 주일(主日)로 바뀐 이유

안식일은 제 7일, 지금의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주일인 제 1일(첫째날), 지금의 일요일을 지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1.성경의 약속
구약에서부터 한 다른 날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호2:11, 히4:7, 히7:18-19)

2.삼위 하나님의 모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주일에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주일을 구속사(救贖史)의 중심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마28:1)
②성령님께서 주일에 강림하셨습니다.(행2:1)- 오순절은 지금의 주일임.
③하나님께서 주일에 계시를 주셨습니다.(계1:10)

3.사도들의 모범
예수님 제자였던 초대교회 사도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느끼고
안식후 첫날 곧 주일에 모여 예배했습니다.
(행20:7, 고전16:2, 요19:20-25)

4.교부들의 모범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교부들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The Ante-Nicence Fathers; 교부시대부터 AD325년 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

* 하나님은 그의 뜻을 직접적 진술로만이 아니라 역사적 섭리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


안식일(安息日) 지키는 규례

①구약의 규례
노동 행위 금지 (출20:9-10 ),
상거래 행위 금지 (느10:31,13:15-17),
여행 금지 (사58:13),
오락 금지 (사58:13),
사사로운 말 금지 (사58:13),
즐거워 하며 존귀히 여길 것 (사58:13).
예수님을 통해 주실 영원한 안식 예표 (골2:16-17, 요5:9, 계7;15-17, 21:3-4)

②신약의 규례
날자의 개념이 안식일(土)에서 주일(日)로 바뀜
(호2:11, 히7:18-19, 4:7-10, 마12:8,행20:7, 고전16:2, 요19:20-25).
안식일이 예표하는 실체이신 예수님의 부활 기념 (마28:1).
예배를 통한 영적 기쁨 강조 (눅4:16-17, 행20:7,13:42,16:13).
생명 살리는 일이 강조(마12:11-12, 요5:9-10).

③오늘날 지켜야 할 범주
외부적 방법 보다 영적 목적 중요 (요4:24).
소극적 의미 보다 적극적 의미 중요 (마12:11-12).
내용이 중요시된 다음엔 방법 차원의 규례도 필요 (마23:23).
외부적 규례가 내용을 더욱 온전케 함.

④약속된 복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함 (사58:14)
땅의 높은 곳에 올려 줌 (사58:14)
야곱의 업(業)으로 길러 줌(사58:14, 창28:15).

성을 보존해 주고 제사를 드리게 해줌(렘17:24-27).








미국의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과연 주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주일에 마켓에서 장을 보고, 백화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혹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 아무런 꺼리낌이 없는가? 아니면 부담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의식은 주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으면 해결된다. 이 기사는 주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워싱턴한인목회연구원(원장 김범수 목사)은 2015년 신년 목회자 세미나와 부흥성회를 "이민 목회와 치유"라는 주제로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메시야장로교회에서 열었다. 주강사인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총신대학교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해 강의를 이어나갔다. 이 기사는 강의의 두 번째 내용으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 그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가 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기사의 종교개혁자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불연속성 입장과는 다른 청교도들의 연속성 입장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김남준 교수는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전통을 이어받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는 상징적이다.
 
한국교회의 이런 주일성수에 대한 혼란 속에 김남준 교수는 주일을 안식일 보다 모르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 주일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주일성수에 대한 강제적인 규제보다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 김남준 목사     ©뉴스파워 자료사진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청교도들의 입장-연속성 강조
 
청교도들과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개혁 신학자들은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가 신학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지금 구속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었고, 그리스도가 그 그림자를 따라서 실체로 직접 오셨고, 그래서 구약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성취된 것들이 우주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해 청교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신 안식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종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종말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의 차이가 나타난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안식일의 계명을 언약백성이 하나님께 언약 백성답게 살기위해 연약한 육체를 제어하기위해 노동을 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경배하는 것에 헌신하는 그 날이라는 좁은 생각을 뛰어넘어서 온 인류가 따라야 할 자연법적인 규범이라고 본 것이다. 그것에서 견해차이가 나온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의 이런 독특한 생각은 두 가지의 역사적인 문맥을 고려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배경은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3년부터 5년간 회의를 하면서 작성했다. 그때가 영국의 역사에서 전통적인 농업에서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가기 전에 공장제 가내수공업을 들어가는 시점이다. 영국은 당시에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농촌은 가난하고 농업을 주업으로 할 수가 없어서 남는 많은 인구들이 농업이 아니라 면화나 양털산업으로 몰려들었다. 그것들을 생산해서 무역을 통해 파는 일에 종사했다. 당시에 노동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규제가 없으니 시장에 의해 노동가격이 결정된다. 돈을 조금만 주어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니 노동조건이 악화된다. 그래서 16시간씩 근로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인 안식일을 엄격하게 계승함으로 국민복지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에게 주일시장 통행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었다. 주일에는 시장을 지나가면 안된다. 사람들이 물건을 안사며 주일에는 시장에 문을 닫으라고 압력을 가한다. 공장에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면 일할 수밖에 없지만, 사장이 그리스도인이고 그것을 안지키면 교회에서 치리를 받는다고 하면 사장 한사람 때문에 수백 명의 공장직원들이 쉬게 된다. 직원들이 쉬면 교회에 나온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형식적으로 나마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두번째 배경은 제임스 1세의 포고령이다. 왕이 청교도 위정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순시하다가 그곳 주민으로 부터 탄원서를 받는다. 그 지역은 청교도 위정자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주일에는 놀지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게 한다며 이것을 풀어달라고 했다. 쉬는 날이라고는 주일밖에 없는데 이날 운동도 하고 좀 놀고 싶다는 것. 그런데 제임스 1세는 스코트랜드에서 청교도에게 들볶이다가 내려온 사람이기에 청교도들이 세력이 커지고 그들 뜻대로 나라가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고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일부 지역만 허락했다가 다음해에는 모든 백성들이 지키도록 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엄격한 신앙생활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비중생자들과 비회심자 등 교회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이제 왕의 포고령에 힘을 얻어 뭉쳐서 교회의 지시에 따르는 대신 왕명을 따라야 한다고 반발하고 뛰쳐나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유연한 자세로 물러나면 신앙자체를 양보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정치적인 상황이 되었다. 사실 청교도들이 이런 미묘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양보할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특히 청교도들은 당시에 스코트랜드에서의 엄청난 박해, 잉글랜드에서의 엄청난 억압을 보면서 배교에 노이로제가 걸려있다. 정치적인 억압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배교하는 현실들을 보았기에 청교도들에게 배교는 너무 무서운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배교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입증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중생한 사람은 배교할 수 없으니 그들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런 독특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강력하게 드라이버를 걸고 포고령을 준수하지 않는 1천명을 추방한다.
 
만약에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가 이런 비슷한 박해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했다. 똑 같은 상황이 그 당시에 벌어졌다. 사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남은 기록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에 가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러니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청교도들이 왜 주일에 대해 엄격한 견해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해 공감이 갈 것이다. 우리도 만약에 일제 강점기에 그랬다면 강하게 나가서 완강한 주일성수에 대한 견해를 주장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배경속에 당연히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는 안식일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안식일 대한 이야기를 직접 주일로 끌어온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는 수많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나온다. 그런데 개혁교회에 대표적인 신조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주일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안나온다. 결국은 그 시대의 주일성수를 둘러싼 미묘한 그 당시의 역사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장로교가 세워질 때 이런 것들을 전부 다 고려하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엄격한 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조항들이 들어오게 된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거의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일을 지키는 방식이 얼마동안은 유대인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율법을 따르던 유대인들이 신약의 복음을 깨닫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기까지 잠정적인 시기였다. 신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당분간 유지되었던 것 같이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후 얼마간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던 방식을 주일성수에 적용했는데, 청교도들은 그것을 주일성수에 항구적인 모범이라고 해석하고 이것을 구약 안식일 제도가 가지는 자연법적 질서와 연결 지음으로 자신들의 엄격주의를 정당화했다. 그들이 안식일 제도와 주일 제도 사이에 신학적 연속성을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주의의 원조가 청교도가 아니라 이미 중세시대에 있었다.
 
청교도들의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주의는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을 율법적으로 적용한 전통으로의 회기한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청교도들의 태도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입장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사이에 신학적 불연속성을 강조했던 루터나 칼빈과는 달리 연속성을 주장한 조나단 에드워드도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과 내용이 신약의 주일제도안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의 안식일이 그림자라고 보고 진짜 안식일을 통해서 의도하려고 했던 것이 주일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제임스 1세의 스포츠 선언에서 못하게 한 것이 있다. 가학성 스포츠, 짐승들을 창으로 찌르는 것들은 주일하고는 안 맞는다고 해서 못하게 했다. 제임스 1세는 피흘리는 가학성 스포츠가 아닌 한 교인들이 주일예배를 마친 후 얼마든지 스포츠를 즐겨도 된다고 공포했는데, 여기에는 악기연주, 댄싱, 뛰기, 술잔치, 가면무도회까지 확대허용이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엄격한 주일성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싫어하게 만들 것이고, 주일에 스포츠와 오락을 허용함으로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는 것이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는 국력을 기르는 길이라는 논리를 폈다. 결국 1618년에 나라전체에 시행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 루터보다는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 존 낙스같은 사람은 칼빈에 의해 사사받았던 사람이다. 루터는 기질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했고 사람들에게 권했지만, 칼빈은 천성적으로 샌님 같은 기질이 있어서 스포츠를 취향적으로 안좋아했다. 그랬기에 그러한 칼빈의 특성들이 청교도들에게 전수가 되어서 청교도들을 신체적인 활동에 대해 조심스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런가하면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죄악시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에 몰두하게 될 때 인간의 쾌락과 육체의 즐거움에 빠져서 정신이 방탕해져 하나님을 묵상하고 성경에 집중하고 기도하고 이런것들이 흩어져서 불경건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경계 때문에 청교도들이 인간의 스포츠 활동에 대해 경건과 관련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스포츠를 통해 체력단련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들이 그런 육체적인 활동을 안해도 약해지는데 정신을 분산시켜서 경건을 흩어놓지 않을까 하는 우려들을 특히 젊은 세대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는데 1625년에 또 다른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주일에 저지러지는 여러 부패한 행동들의 처벌에 대한 법령"을 공포한다. 법령은 뜬금이 없다. 아버지가 공포한 스포츠 선언을 이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제임스 1세가 선언한 것이 너무 많은 자유를 주어서 주일에는 하면 안되는 일까지 한다며, 동물들을 학대하고 격투같은 가학적인 스포츠들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상당히 큰 액수 벌금이 규정되어 있었다. 왜 이 선언이 나왔는가 하면 이때는 의회가 왕당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의회파의 세력이 강해졌는데 의회파의 다수를 청교도들이 차지했다. 그래서 국왕에게 압력을 넣어서 아버지 스포cm 선언 폐지는 불가능했고, 이것이라고 발표하게 해서 그래서 더 이상 주일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방지를 한 선언이다.
 
이런 상황이 될 때 반발하는 사람도 나온다. 당연히 왕당파 윌리암 로드 같은 구교의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더 강력하게 선왕의 스포츠 선언을 밀어붙이고 주일에 청교도들의 방식으로 주일이 지켜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맞불을 놓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얼마나 그 사이에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겠는가. 청교도들이 양보하게되면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이었기에 청교도 입장에서는 양보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종교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은 안식일에 대한 엄청난 연구가 이루어진다. 안식일 제도 속에서 기독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온 인류가 준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연법적이고 일반은총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어떤 인류애적인 자연법적인 규범의 토대를 안식일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니 청교도들은 주일보다는 안식일에 집착해야 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의미를 가졌지만 모든 인류가 그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은 그리스도 이전에 온 인류와 관계가 된 사안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국가라는 권력이 이런 자연법적이며 창조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강력하게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비참한 폐해들을 먼저 겪은 나라가 영국이다. 그런 속에서 영국사람들은 실제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기에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안식일에 대한 자연법적 발상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고민없이 간단하게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판단할 성질이 아니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엄격하게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개념을 중심축 자체를 안식일에 놓고 안식일 자체가 온 인류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적 자연법적 일부라고 보았다. 그들이 이상하게 안식일을 둔 그림자와 실체의 개념을 다른 것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그림자가 주어지고 그리스도에 와서 실체가 성립되었다고 안보고 오히려 거꾸로 본 것이다.
 
이 안식일에 이루어질 자연법적 질서는 모든 인류에게 자연법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인데, 모든 나라들이 일반법으로라도 주일을 지키게끔 만들어 백성들의 안식시켜야 한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생각이었다. 이것에 대한 궁극적인 이상은 종말에나 실현되는데 종말까지 가는 이행의 과정이 주일이라고 보았기에 종교개혁자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고 우리가 어느 부분까지 청교도들을 계승하고 어느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의 것들을 계승해야 할 것인가 미묘한 차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부딪치는 성수주일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문제들이다.
 
오늘날의 주일성수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
 
제임스 패커의 언급은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 청교도들은 주일성수 전통을 문자 그대로 우리시대에 적용하려는 방식에 대해 패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우리가 청교도들이 자기 시대의 표현으로 해석했던 4계명의 적용을 우리 자신들에게 엄격하게 부과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를 늘리고 연속시킬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기존의 적용을 물려받으라는 유혹에 저항하고(청교도들이 만들었으니 무조건 이대로 지키면 훌륭한 신앙이고 아니면 날라리 신앙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율법을 우리 자신이 상황에 현실적으로 재적용 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를 판단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어야 하는 원리들이 청교도의 해석에서 비할 수 없이 풍부하고 시사적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패커의 입장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켜야 되겠다는 정신자세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많지만 청교도들이 그런 독특한 상황에서 만들어 놓은 독특한 해석의 산물인 여러가지 주일을 지키는 조항들을 시대에 대한 고려없이 우리가 그래도 받아들여서 흉내내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주일성수에 대한 청교도들의 유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 파커의 생각이다. 주일을 지키는 태도와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에 대한 경계이다. 첫째,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는 먼저 주일을 지키기 위한 사전적인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은 영혼을 위한 날이고 심령의 일을 위한 날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 전날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결정이 된다. 따라서 신자는 토요일 저녁을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구별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에 대한 경계이다. 파커에 의하면 청교도들은 탁월한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규칙들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들을 정죄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성수에 규정을 파쇠하려는 구체적인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신약적인 확신도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떠 올리게 된다.
 
우리는 왜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서 우러나오고 우리의 현실에서 고민한 흔적이 뭍어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없이, 약 370년전 남의 나라의 신앙고백으로 대신하는가? 당시 사람들 대부분 농경사회에서 살던 사람이고, 우리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도 고백의 본질적인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시대의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적실성 있게 할 수 없는가? 웨스트민스트 대소요리 문답의 주일성수 규정들을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적용의 고민없이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처럼 주일성수의 의무는 우리와 상관이 없으므로 그것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고 규범없이 살아야 할 것인가?
 
고백과 현실의 격차에 대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고백에 있어 엄격한 주일성수를 말하며 실제에 있어서는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대해서는 어떤 제재를 가해야 할것인가? 고백과 현실사이에 확대되는 격차 속에서 주일성수의 기준이 자기보다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되는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태도는 방치해도 되는가? 엄격한 주일성수에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과, 주일을 공휴일처럼 지내는 방종한 신도들의 양심가책 없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런 격차에 대한 현실적인 대처에 대해 의문에 제기된다.
 
장로교단 노회 당회가 확고히 표명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트 대소요리 문답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교인들을 권징하고 치리하여 성수의 기강을 세우는 것이 어떨 것인가? 그럴수 없다면 용기가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정당성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인가? 교회가 주일성수에 대한 사항들을 아디아포라에 지나지 않다고 보고 주일의 거룩함이나 구별됨에 대한 의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교인들의 태도를 내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이에 주일성수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제언을 드린다.
 
1.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자
 
우리가 따르는 장로교단 헌법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을 제시한다. 이것들이 가지는 탁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오늘 날에도 상당부분의 아디아포라가 포함된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370년 전 왕정정치하에 농업사회인 영국에서 작성된 기존문서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역사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결정이다.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장로회 1회 노회때 신경과 규칙을 정식으로 채용한 것이 대한예수장로회 최초의 헌장이었고 우리의 생각을 가미해 만든 예배모범이나 주일성수에 대한 기타 조항들이 첨삭을 거치며 개정되어 왔지만 한국교회의 적용되기에는 적실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한국교회가 초기에는 지식도 충분하지 않고 신학자들도 모자라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신앙기준으로 삼은 유서깊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의 가치는 탁월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자유주의, 20세기 사회주의 제국주의 실존주의 허무주의 해체주의를 지나 오늘날은 포스트모더니즘 정오쯤 와 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쳐 첨단 미디어 환경속에서 글로벌 시대의 살고 있으며 여러가지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가 자기시대의 언어로 현실과 치열한 고민과 싸움 속에서 자기 입술로 신앙을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신앙적 고백의 큰 틀 안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에 주일성수에 대한 교단적인 합의를 담아내야 한다.
 
위의 내용은 제가 교단에 올린 헌의문이다. 지금 신학자들도 많이 있으니 모여서 1년이고 2년이고 전반적인 문제-교회정치, 성경, 신조 뿐만 아니라 환경, 역사, 남북분단, 인권, 세계등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 열어놓고 최선을 다해서 성경의 기준과 역사적으로 내려온 정통신학,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혁신학적인 관점에서 우리 시대의 고민들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소 불완전해도 표명하고,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후배 신학자들이 모여서 갱신하고 하는 일을, 독일같이 계속 끓임 없이 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교회들이 표준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고 어떤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리고 어떤 문제들은 우리의 고백과 현실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간격을 어떻게 좁혀갈 것인가 진지한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 옛날 것을 받아놓고 우리는 그것으로 한다. 물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나 문서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가치의 탁월성에 대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깊이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상황과 고민하면서 다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2. 현실적으로 주일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주일에 무엇을 사먹지 말라', '주일에 무엇을 하지말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하는데 교인과 자라나는 세대들이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모른다. 주일하면 학생들은 공차면 안되는 날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물건팔면 안되는 날이고, 모든 개념이 무엇을 못하는 날로만 새겨졌다. 그것은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이다. 주일에 대해서는 안식일만큼도 모른다. 주일의 소중함을 알아야 잘 지킬 텐데 소중한 것을 모르니 잘지킬 수 없다.
 
청교도들은 강조점을 안식일에 두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자의 지침에 따라 강조점을 주일에 둔다. 그러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어려서 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이 주일이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이해되려면 그리스도가 소중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소중하신 분이라는 것은 구속사역등이 모두 소중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쳐지고 인식될 때 주일을 잘 지키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구속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안식일에서 그것을 끌어오기 보다는 그것은 바라보아서 여기서 성취된 것이고 안식일이 아닌 주일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면 주의 시대가 온다.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그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한없이 기뻐하는 그러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날이 오는데, 그날에 누릴 영적인 복락을 그림자로서 앞당겨서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 주일이다. 주일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일이 특별히 상징적이 되어서 그 안에서 종말에 누릴 날에 온전한 영육의 안식을 누리면서 그 안에서 한없이 행복해 하는 것이 주일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주일에 신학적인 의미를 잘 가르쳐야 한다.
 
3.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필요
 
몇해전에 1920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안하는 교인들을 치리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수찬정지등 매주 치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치리만을 가지고 안된다는 것이 보여졌다. 새문안교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리해야 하니 어느 시점에 와서 치리를 포기한다. 사람들을 치리하는 것도 튼튼하게 유지되어야 할 훈육의 전통이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주일을 다른 일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변화없이 치리받을까 무서워서 사먹을 것을 못 사먹고, 무엇을 할 것을 못하는 것으로 교회가 거룩해지지 않는다.
 
4.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주일성수에 대한 것은 아디아포라에 관한 사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칼빈과 나의 생각이다. 커다란 양보할 수 없는 두 원칙은 육체의 노동으로 부터 주일을 쉬자, 우리와 정신과 영혼이 하나님께 집중해서 말씀의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는 일에 심령을 드리자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 일을 하도록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 주일에 물건을 사는가 아닌가는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1부 예배후 하루종일 쇼핑하고 노래하고 이것은 용인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교인에게 들었던 충격을 받은 이야기가 있다. 자녀가 주일 저녁에 친구들하고 영화구경을 한다고 야단쳤다는 것이다. 왜 영화를 보면 안되는가를 물으니 대답을 못했다. 마음속에 뭔가 우리들이 확연하게 정리하지 않은 많은 생각이 있다. 만약에 딸이 마틴 루터가 나오는 종교영화이면 괜찮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제안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따르고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