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



주체사상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종교의 핵심교리

주체사상은 우선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이다.
주체사상은 인간중심주의 철학과 김일성수령 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주체사상은 칼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사상을 북한의 실정에 맞게 변조한 사회주의이론이다.
김일성은 “종교는 일종의 미신이다. 예수를 믿든 불교를 믿든지 그것은 본질상 다 미신을 믿는 것이다.
종교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며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의식이 없어진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본래 주체사상의 교주 김일성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김일성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에 착실하게 참석했던 사람이다.
중학교 때에는 중국 지린의 손정도 목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교회생활을 했고 학생성가대 지휘를 맡을 정도로 교회활동을 활발히 했었다. 그의 어머니 강반석은 권사의 직분을 가졌고, 그의 외삼촌 강양욱은 목사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김일성은 기독교를 차용, 표절하였다.
어릴 때 배운 하나님 사상을 자기 우상화에 악용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기독교에서 파생된 ‘사생아’(bastard)라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은 기독교를 표절하고 벤치마킹해서 생겨난 사이비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신본주의 창조론을 대표한다면, 주체교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진화론을 대변한다.
주체사상의 핵심교리는 “당의 유일사상 체제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과 수령무오설, 그리고 수령의 사회정치적 생명 수여설로 요약할 수 있다.

유일사상 10대 원칙.
북한에서는 어릴 때부터 성경의 10계명을 표절한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세뇌를 받아 수령에게 절대복종과 절대충성을 다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목적은 김일성 3대를 위한 것이다.
주체사상, 10대 원칙, 노동당 강령 등이 3대 신격화를 위해 종교적 경전과 같이 성문화되어 있다.

주체사상을 이론화한 황장엽은 증언한다:
“북한의 체제는 백성은 당을 위해서 존재하며, 당은 김일성 3대를 위해서 존재한다.” 10대 원칙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해야 한다.

②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⑧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여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지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⑩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여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수령무오설.
주체사상은 수령 김일성(김정은)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으며, 그 권위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법령체계는 김정은의 교시, 로동당 규약, 당강령 및 지침, 헌법, 내각의 정령 및 지침의 순서로 되어 있다. 교황무오설과 같이 수령은 오류가 있을 수 없고 신격화되어 사소한 것도 모독하면 안 되고 심지어 수령과 관련된 물품(사진)도 신성시되어야 한다. 수령무오설에 물든 공산주의자 문재인도 그의 통치 기간에 적폐청산,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등 정책을 결정한 후에 정책수정을 하지 않는 특징을 보였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주체사상이 종교적 신앙으로 심화된 것은 바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 완성되면서부터이다. 인간에게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한한 육체적 생명과 영원한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는데, 수령에게서 수여받는 사회정치적 생명은 대를 두고 계승할 수 있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가르친다.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나지만,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영생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항존법 10계명이 있듯이, 북한은 10대 원칙이라는 율법을 만들어 모든 분야에서 김정은에게 충성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주체교는 10대원칙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행위구원론으로 10대 원칙과 주체사상은 동의어로 통한다. 북조선에서 허용되는 종교는 주체사상교 뿐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동포는 어릴 때부터 세뇌되어 모두 “총 폭탄 정신, 수령결사옹위 정신, 자폭정신”으로 무장하고 살아간다.

기독교에서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할 때, 주체교에서는 자아비판을 통한 인간개조를 말한다. 계급투쟁 혁명을 위해서는 교양과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낡은 사상을 수정해 인간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체사상의 핵심 두 가지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인간중심철학 사상과 매사에 수령의 뜻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수령제일주의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수령제일주의이다. 북한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다. 그리고 건설과 혁명의 주인은 인민이 아니고 수령의 지시를 받는 노동당이다. 북한에서의 자주는 인민의 자주가 아니라 수령의 자주이다.

북한의 국가종교는 의례적인 차원에서 수령의 신화와 관련된 모든 장소를 ‘혁명 전적지’와 ‘혁명사적지’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순례의 대상으로 삼으며, 모든 관공서, 학교, 기업소, 공장 등에 예배의 장소인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을 꾸며 주기적으로 주체사상의 교리와 신화를 학습하고 서로의 신앙생활을 비판하는 ‘생활총화’회합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다.

주체사상을 이론화한 황장엽은 증언한다. “북한의 체제는 백성은 당을 위해서 존재하며, 당은 김일성 3대를 위해서 존재한다.” 김씨 3대는 언제나 숭배와 찬양의 대상이다. 주체사상에서 김일성은 성부 하나님에 해당하며, 김정일은 성자 하나님, 그리고 주체사상(김정은)은 성령에 해당한다.

주체사상에는 반일, 반미사상이 깔려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미국에 있다고 의식화한다. [김일성, 그이는 하나님]이라는 책에 북한의 신앙고백이 나와 있다. “전능하사 당과 인민을 영도하시는 김일성 주석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김정일 동지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공산당으로 잉태하사 미제국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저리로서 인민을 해방하러 오시리라. 아멘.“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 하늘 아래 두 하나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기독교의 종교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전 인민의 주체사상화를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이다. 무신론적 주사파가 가장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것도 기독교이다.

수령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수령론을 지속시키기 위해 북한은 수령세습이라는 신화를 한 가지 더 추가했다. 김일성의 피를 물려받은 김정일에게 이 신화가 세습되고 다시 김정은에게 이 신화를 세습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수령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인데, 사회정치적 생명론에 따라 뇌수는 김일성 수령이고, 당은 혈관이며, 인민은 신체의 각 지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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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 종교의 불모지로

ANC : 한때 한반도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북한지역이 이제는 ‘종교탄압의 중심지’가 됐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홍알벗 기자의 보도입니다.

“왜 죽었냐고 하니까 종교를 해 가지고 그랬대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물을 한 모금도 안 먹여서 말려 죽였다고 했어요.”

북한에서 종교를 믿다 발각돼 고문을 받고 죽은 주민을 봤다는 어느 한 탈북자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북한인권정보센터 부설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9일 ‘2016 북한종교자유백서’를 발간하고,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는 찾을 수 없다고 폭로했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1만 1천 7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99.6%는 ‘북한에서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할 수 없다”고 답했으며, 98.8%는 평양이 아닌 지방에서 당국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예배처소를 본 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북한은 종교를 ‘마약’이라 규정하고 주민들이 종교를 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북한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규정돼 있지만 북한 당국은 실제로 주민들의 종교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탄압이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당국의 강력한 단속과 규제에도 2000년 이후부터는 비밀종교모임, 즉 지하교회에 참석하거나 성경책을 본 경험이 있는 탈북자가 부쩍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하지만, 종교 활동에 대한 처벌 수준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2.8%는 종교활동을 하다 적발돼 노동교화형을 받는 것을 목격했으며, 11.4%는 교화소로, 그리고 51.8%는 정치범수용소행이라고 답했습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북한의 전체 정치범 수용소에 약 12만명이 수감돼 있는데 그 중 3분의 1 또는 4분의 1은 종교활동 때문에 붙잡혀 온 거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탈북자들에 따르면 특히 지하종교활동을 벌인 북한주민들은 북한 보위부들에게 체포되고 구타, 고문, 처형까지 당할 수 있습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1940년대 말만 해도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만큼 한반도 기독교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평양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평양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이유

1907년 1월 2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방위량(邦緯良)’이란 우리 이름을 가진 미국의 블레어(Blair) 선교사의 주관으로 성경 강의를 하는 사경회가 개최됐다.
그가 한국으로 들어와 언어 습득을 마치고 평양, 안주 등 5개군을 관할하는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한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매일 저녁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1천 명 정도였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려면 짧게는 16㎞, 길면 160㎞ 이르는 아주 먼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2주간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주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선교사가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야기와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주민들은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한말 열강들과의 통상교섭이 시작된 이래 평양은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파견되면서 미국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특히 1891년 북장로회의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이 평양에 선교지부를 설립한 이후 평양과 그 일대인 관서지방은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 근거지가 됐다.
미국 북장로회가 평양에서 활발히 선교를 하고 문화교류를 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19세기 말 조선 서북부는 청·일 전쟁으로 인해 고아와 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돌 볼 선교사역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평양선교부에서는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고, 이에 많은 선교사들이 평양과 관서지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둘째,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서지방은 서울 중심의 양반사회와 달리 자립적인 중산층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 기독교 문화를 일찍 받아들이게 됐다.
평양 일대는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아왔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북방민족에 맞서 싸우며 상당히 호전적이었는데 문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중앙세력과 맞지 않았다.
또한 조선 초 세조가 김종서를 제거한 이후 관서지역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아예 배척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관서지방 무사들의 무과 응시를 금지 시켰고, 후대 국왕인 성종은 이러한 세조의 명을 아예 경국대전에 기록하게 했다.
한참 뒤에 정조가 관서지역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였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관서 지역의 차별은 더욱 심해져 결국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차별 때문에 평양 일대에서는 양반 사족의 형성이 약했고, 아무리 글 공부를 열심히 해 과거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관료로 출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현실과 유리된 유교적 지식이나 형식에 거리를 두며 자신의 생계를 직접 꾸려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상공업에 종사하며 대청(代淸)무역과 상업을 통해 부의 축적을 이루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겼다.
이러한 개방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기에 미국의 북장로교회가 기독교 신앙 전파를 했을 때 관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부흥으로 당시 백성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설립된 장로교회의 683개 중 관서지방에 있던 것이 362개로 전체의 과반수를 넘는다.
아울러 한말 근대식 학교 설립도 관서지방이 가장 활발했는데, 1910년 7월 기준 전국 사립학교 2천 82개교 가운데 장로교,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755교였으며 이중 과반수가 관서지방에 세워졌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 일대의 학교는 단순히 목회 및 전도자의 양성에 국한되지 않았고,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조만식, 안창호 등은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 기독교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지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 평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분단으로 인해 평양은 미국과 가장 적대적인 지역이 됐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주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비핵화 방안에 대해 합의하면서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가 한층 진전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한 것과 관련해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루 속히 북한과 미국이 종전선언에 합의하고 과거처럼 다시 경제와 문화교류를 추진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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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기독교사상> , 2018년 9월

해방 이전 자료를 보면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은 1934년 선교 희년 기념식 때 동아일보에 처음 사용되었다. (“朝鮮의 예루살렘 平壤에: 十字軍의 閱兵式,” 『東亞日報』, 1934년 9월 5일.) 그러나 1925년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에 접근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려고 한다. 

평양 기독교의 성장: 소돔에서 예루살렘으로

1915년 평양에서는 일요일에 거의 모든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인구 6만의 10%인 6천 명의 교인들이 여러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와 예배로 안식일을 성수했기 때문에 시내가 적막했다. 장로교회는 장대현(1,157), 신학교(770), 창전리(408), 산정현(385), 남문외(348) 5개 교회 3,068명이었고, 감리교회는 남산현(1,158), 전구리(238), 염점리(160), 이문리(85) 4개 교회 1,631명이었다.(“평양과 기독교,” 『기독신보』, 1915. 2. 19.) 교인 천 명이 넘는 대형교회 시대가 열렸다. 북장로회는 서북부인 신양리와 경창리 일대에 洋村을 형성하고 선교사 사택들, 숭실학당, 숭실대학, 신학교, 남녀성경학교, 숭의여학교, 외국인학교, 제중원 등의 건물이 들어선 넓은 선교지부를 형성했다. 북감리회는 그 아래 대찰리, 순영리, 남산정에 걸치는 지역에 선교지부를 조성하고, 선교사 사택, 기홀의원, 광혜의원, 광성학교 등의 기관을 운영했다.

평양 교회는 1919년 삼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기독교 민족주의를 실천했다. 5개 장로교회의 한국인 담임목사 중 장대현의 길선주, 남문외의 김선두(총회장) 등 4명이 투옥되었고, 13명의 장로도 체포되어 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숭실 재학생 체포령이 내렸다. 시골에서 19개의 장로교회가 불탔다. 26개 교회와 학교들이 3개월 이상 문을 닫았다.

1924년 장로교회는 시내에 6처의 교회(연화동교회 추가)에 약 4,000명의 교인이 있었고, 주변 평양노회 지역을 합하면 교회 120여 처, 교인 21,000여 명, 학교 30여 개에 달하는 큰 세력을 형성했다. 감리교회는 남산현, 유정, 신양리 등 16 교회에 신도는 2,300여 명이었다. 또한 600여 명의 천주교회와 200명의 회중교회(치리자 이낙순)와 50명의 안식교회가 있었다.(김기전·차상찬, “조선문화 기본조사-평남도호,” 『개벽』[1924년 9월], 62.)

당시 인구 비율로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도시는 선천, 재령, 평양, 경성 순이었다. 1925년 평안북도 선천은 인구 만 명 중 절반이 교인이라 ‘기독교 王國’으로, 황해도 재령은 ‘기독교 天下’로, 평안남도 평양은 ‘기독교 首都’ 혹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서북 기독교 시대였다. 선교 개시 한 세대 만에 기생의 도시 ‘조선의 소돔’을 거룩한 기독교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만든 평양 기독교는 개선가를 부르면 토마스 순교 60주년을 기념했다. 

1920년대 전환기적 상황: 신세대 신사조의 등장

1920년대는 전통적인 조선이 사라지고 반권위주의로 무장한 신세대가 등장한 전환기였다. 총독부의 문화정치 아래 다양한 한글 신문 잡지가 발간되고, 일본어 서적을 통해 청년들이 신사상을 수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신문 잡지를 통해 과학(진화론),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담론으로 기독교를 비판했다. 신여성들은 반가부장제와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신구 세대 소통이 단절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했다. 경제 침체로 평지에는 소작인, 산간엔 화전민이 증가했다. 노동자의 파업 투쟁과 학생의 동맹 휴학이 줄을 이었다. 간도와 시베리아로 이주하는 한인이 폭증하여 1920년 북간도에만 40만 명 이상이 거주했다.

총독부는 일본 불교와 일본 조합교회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과 종교를 친일화하려고 재정을 지원하여 급성장시켰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기성교회의 다카하시 목사는 경찰의 후원을 받아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미국 선교사를 떠나 조합교회에 가입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강압적 선전과 친정부 정책은 역효과를 내어 조합교회는 쇠퇴했다.

아시아 민족주의의 고조로 교계는 선교사 교회에서 한국인 교회로 독립하는 토착화를 논의했다. 1923년 중국 복주에서 열린 한중일 남북감리회 대표자 회의는 감독 추천권과 선교회 재산 처리권을 양도해 줄 것을 미국 본부에 요구했다. 1923년 YMCA 총무 이상재는 신임 선교사들에게 “당신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미국인임을 잊는 것이오.”라고 충고하고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했다. 1925년 12월 만국선교위원회 의장 모트가 서울에서 개최한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를 보완하고, 경제 문제, 청년층 선교, 선교사의 권한 이양과 한인과의 협력과 자립 문제, 예루살렘선교대회(1928) 등을 토론했다. 한석진 목사는 선교사들의 장기 체류와 지도권 유지는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되므로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1926년 안식교회 순안병원의 허시모 의사가 과일을 훔친 소년의 얼굴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고 쓴 사건은 반기독교-반선교사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1930년 미국 남북 감리회 한국 선교회들이 하나의 조선감리회로 통합된 것은 자치와 연합의 결실이었으나 쇠퇴하던 감리교회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조선: 반기독교 운동

1920년대의 강력한 신사상은 공산주의였고 반기독교운동을 동반했다. 평양 기독교가 세력을 자랑하며 현실을 외면하자 사회주의자들은『개벽』지를 통해 목사와 장로의 타락을 공격했다. 

그러나 평양은 세력으로나 인수로나 예수교회가 제일 크니까 그 사회의 인물을 먼저 볼 수밖에 없다. 앗다-참 평양이야 말로 목사님도 많고 장로님도 많다. 교회에 가면 물론이어니와 책사에를 가도 목사, 장로, 포목전에를 가도 목사, 장로, 연회에 가도 목사, 장로, 냉면집에를 가도 목사, 장로, 심지어 코머리(퇴기)집에 가도 목사, 장로(쉬-이것은 비밀한 일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간통사건 소송자도 장로, 고리대금업자도 목사, 장로다. 아주 목사 장로의 대풍년들었다. (김기전·차상찬, 앞의 글, 66.) 

개신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신문 잡지의 여론을 주도했는데, 가장 신랄한 비판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었다.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 아니라, 조선 전체를 회칠한 무덤처럼 비정치적인 종교 공간으로 만들고 교권을 가진 기득권층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의 조선’이라는 비판이었다. 개신교가 40년간 한글 보급, 교육, 의료, 여권 신장 등 많은 기여를 했으나, 이제는 현실도피적인 인물만 모여 사회 정의와 평화와 빈부 문제를 외면한다. 정치경제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마음의 평안이나 구하며, “언제나 요단강을 건널까 하여 마음을 가공의 천국에 매어 달아두고” 현실을 저주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있다. 높은 예배당과 선교사와 장로의 큰 주택 아래 개미집 같은 오막살이에서 신자들은 예배당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堅志洞人, “「에루살넴의 朝鮮」을 바라보면서, 朝鮮基督敎 現狀에 對한 所感,” 『開闢』 [1925년 7월], 55~56.)

기독교 왕국 선천에서도 경제가 침체되자 50명의 일본인 창녀가 역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기생을 가진 7개의 고급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宣川에도 花柳界 大繁昌,” 『조선일보』, 1924. 5. 12.) 1929년 선천에는 안식일 성수가 깨어졌고, 교인들은 골목 안에서 밀주를 마신다고 고발했다. (김진구, “北隊,” 『別乾坤』 [1929년 8월], 148.)

장로교회는 계급 모순을 외면하고 김익두의 ‘치유’ 중심의 부흥회로 민중에 접근했다.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뜬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은사 지속론자들은 『죠션예수교회 이적 명증』(1921)을 발간하고 황해노회는 헌법의 은사 중지 조항을 수정하려고 시도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도와 안수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김익두 목사를 ‘기적 전매 특허자’요 과거 미신보다 더 혹세무민하는 ‘개명한 미신’인 기독교를 전파하는 ‘고등 무당’으로 비판하고, 부흥회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이 로마서 13장을 내세워 총독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공격했다. “기독교회여! 灰칠한 무덤과 가튼 예루살넴의 朝鮮이여! 福잇슬진저 너의 집이 터만 남으리로다.”고 저주했다. 박헌영(朴憲永, 1900~56)은 기독교가 서구 제국주의의 영토 이권 확장의 수족이 되었으며, 조선에 미신을 선전하여 금력과 군벌에 인종과 유순을 장려하므로, 기독교를 퇴치하기 위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한다고 주장했다. (朴憲永, “歷史上으로 본 基督敎의 內面,” 『開闢』 (1925년 11월): 64~69.) 

1927년 5월에 쑥섬에서 열린 순교기념사업전도회의 첫 토마스 순교 추모예배에서 설교하는 마페트 목사

토마스 순교자 만들기, 1925~31년

평양 기독교는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근본주의와 평양 성시화 작업으로 대응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처형된 토마스 목사의 순교 기념사업을 위해 전기 출판과 기념교회 설립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1926년 마페트를 중심으로 토마스 순교 6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1927년 순교기념사업전도회가 발족되고 5월에 쑥섬에서 첫 순교 추모예배를 드린 후, 9월 총회 때 토마스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공식 천명했다. 숭의여중 영어교사 오문환(吳文煥, 1903~1962)은 수집한 구전 자료를 중심으로 『도마스 牧師傳』(1928)을 출판했다. 『평양노회 지경각교회 사기』(강규찬, 김선두, 변인서 공저, 1925)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한 것을 발전시켜, 그가 강가의 군중에게 성경을 던졌으며,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고 극적으로 묘사했다. ‘조선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순교의 영웅이 탄생했다. 

근본주의 선언: “종교변호선언,” 1927년

미국에서 1910년대 중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는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근본주의가 형성되었다. 1923년 미국 북장로회 총회는 근본주의 “5대 필수 원리”를 수용했다. 그러나 1924년 성서 무오성을 부인하는 ‘어번 선언’이 나왔고, 1925년 ‘스코프 원숭이 재판’에서 진화론이 승리했다. 1929년에는 프린스턴신학교가 구프린스턴 신학(전통 칼뱅주의)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천명하자, 메이첸을 중심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신학적 전환기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근본주의로 방향을 정했다. 구약학 교수 어드맨과 1924년 조직신학 교수로 평양에 온 레널즈와 신임 박형룡 교수는 『神學指南』을 통해 반종교 담론을 비판했다. 어드맨은 구프린스턴 켈로그 교수의 A Handbook of Comparative Religion(1899)을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소개했다. 1900년대 학생자원운동의 교과서로 사용된 이 책은 기독교의 우월성, 유일성, 초월성을 양보하지 않고 타종교를 기독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런 책을 반종교운동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시대착오였으며 지적인 나태였다.

1927년 조선 북장로회는 반종교운동에 대해 『神學指南』에 “종교 변호 선언서”를 발표하고 9개 항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 기독교와 사회: 이웃을 사랑하되 중생이 사회 발전의 근본이다. 2) 성서와 신앙: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앙의 기초이다. 3) 과학과 기적: 성서의 모든 기적과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4) 예수의 인성과 신성: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믿는다. 5) 그리스도교의 처세: 견고한 지식 위에 생활한다. 6)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7)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8) 타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종교로 천상천하에 유일하다. 9) 신조: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의 가치를 믿는다. (“재죠션북쟝로션교회의 종교변호션언셔,”『神學指南』[1927년 1월]: 5~9.) 근본주의 5대 교리의 수용이었다. 이후 박형룡은 반기독교운동, 진화론,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근본주의의 전사로 나섰다. 

교회 분쟁: 노령화와 노회주의 승리로 교인 대량 유출 사태

1920년대는 교회 분쟁 시대였다. 교회는 내부 분열로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할 힘을 잃었다. 1918년 황해노회 김장호 목사가 조선기독교회를, 1923년 경북노회 이만집 목사가 자치교회를 분립한 것은 선교사가 지배하는 노회에 대한 반발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인 목사의 부정, 불륜, 노령화로 인한 지도력 부재에 대해 교인이 반발하면서 분쟁이 증가했다.

교회 분규와 노회 치리에 대한 항의 사태는 1923년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새 예배당 건축 과정에서 건축위원(김선두 목사, 정일선 목사)이 “돈을 먹었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유임과 분가를 놓고 투표한 결과 목사들의 유임이 결정되었다. 헌법대로 처리되었으나 교인의 불만은 잠복했다. 1926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사회주의에 감염된” 청년들이 변인서 목사를 중심으로 길선주 목사와 장로들에게 지도력 부족으로 사직을 요구하자 분쟁이 지속되었다. 당회와 길 목사를 비난하는 청년들의 선언서가 배부되고, 임시노회와 특별시찰회가 열리고, 강단이 장악되는 파행과 대치가 지속되었다. 결국 변 목사를 시골 교회에 임명하고, 길 목사는 성역 25주년 기념식 후 신도 500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로 분립하고, 반대파 청년들이 교회를 떠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후 지속된 장로교회 분란 사태에서 교권을 가진 선교사와 당회는 개교회 문제는 노회가 결정한다는 노회주의 원칙으로 청년층의 개혁 요구를 무시했다. 당시 30~40대 장로가 많았다. 이들로 구성된 당회가 청장년의 의사를 당회와 노회에 반영했다면 분규는 원만히 처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중주의와 노회주의가 충돌할 때 당회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장로교회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평신도 회중주의가 질식되었다.

교회의 노령화와 노회의 교권주의는 교인 감소를 초래했다. 헌금하지 않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의무 잃은 신자’(오늘날의 ‘가나안 성도’)가 양산되는 교인 유출 현상이 일어났다. 1916년 장대현교회 교인 2,000명 중에 1897년에 방문한 자신을 본 사람이 16명뿐인 사실에 놀랐던 스피어 총무는 1926년 방문 때에도 동일 현상을 확인했다. 한 해 5,521명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으나, 입교자 중 사라진 자가 7,447명으로 사망자를 고려해도 기존 교인들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고 있었다. 1916년~27년 10년간 인구 400만이 증가할 때 예수교인은 20만 명이 줄어(7.5% 감소) 전체 인구의 1.4%로 축소되었다. 

맺음말

1927년 한 신자는 교회가 쇠퇴하는 원인과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쇠퇴 원인은 첫째, 사상 문제로 교회는 사상계 지배 능력이 없어 세속 사상에 요동한다. 둘째, 경제 문제로 사회 경제가 피폐하여 교회는 재정 핍절로 현상 유지를 못한다. 해결책은 첫째, 반계급주의와 반자본주의를 통해 민중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무산계급, 농민, 빈민, 노동자와 멀어져 있다. 둘째, 자각적 전도인과 자각적 신자가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직업적 목회자는 부자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적 설교를 하거나 특정 계급을 변호하는 연설을 한다. 피동적 신자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 신자는 순교적 정신을 배양하고 자율적인 신자가 되어야 한다. (익명, "敎會 衰退의 原因과 希望," 『기독신보』, 1927년 1월 5일.)

1920년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 나왔을 때 교회는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개독교’ 담론이 등장했을 때에도 의제는 무시하고 안티-기독교 행동만 비판했다. 그 결과 지난 30년간 개신교회는 세습한 중대형교회 300개, 가나안 성도 200만 명, 이단 50만 명을 양산했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첫 쇠퇴기였던 1920년대의 담론과 대응을 복기하지 않으면, 시행착오는 반복된다. 교회가 1920년대나 1980년대나 2007년처럼 ‘조선의 예루살렘’ 담론에 취해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수구화의 길을 가면, 바로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시대적 과제를 외면한 죄로 침체와 굴욕과 분쟁의 골짜기를 걸어가야 한다. 화려했던 평양 기독교와 서북 기독교가 사라져 버린 교훈을 되새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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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 약력>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저서로는 『다시 쓰는 초대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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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월 2일 평양 장대현 교회 부흥 운동 "배위량 선교사(베어드)

31년 후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 의식이다

65년 후
1972년
만수대 광장에 20미터 김일성동상 건립


장대현교회가 김일성 우상화의 성지가 되다니…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복음이 한반도에 전해진 이후 가장 뜨겁게 전파되었던 지역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고 그 중심은 평양이었다.
복음의 중심지답게 평양에는 이 땅에서 가장 큰 성경학교가 있었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들이 평양의 신학교에서 배출되었다.

1907년 평양에서는 1906년의 미국 아주사 부흥보다 더 위대한 부흥이라고 평가되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은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시작 되었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성도들의 회개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교인수가 3.5배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 평양대부흥운동은 1909년의 100만인구령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향후 100년간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외국 언론들은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오늘날 평양의 모습은 어떤가?
놀랍게도 현재 평양은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가장 극심히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이 자리 잡고 있다.
공산권 및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오픈도어선교회는 기독교 박해국가 명단을 발표, 이들 나라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북한을 4년 연속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하는 국가’로 지목했다.
오픈도어선교회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나라가 북한이며, 지난 한 해에만 북한에서는 수백명의 기독교인들이 처형을 당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은 장대현교회였다.
예배당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장대현교회가 위치한 장대재 언덕은 평양의 중심지에 있어서, 장대현교회는 명실상부하게 평양 주민들의 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장대재 언덕은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이른바 ‘혁명적 언어’로 개명되어 ‘만수대’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지금 유명한 김일성 동상이 서 있다.
1972년 북한정권은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20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 참배객은 꽃다발을 반드시 준비해야 하고, 헌화한 다음 “2, 3m 뒤로 물러서서 2, 3초 동안 동상을 우러러 본다”라는 행동지침도 있다.
인도하는 사람이 “수령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평양 출신 한 탈북자는 “묵념이라 아니라 살아있는 수령에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에서 요란하게 내세우는 구호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 김일성 동상은 일찍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세우고 모든 백성이 절하도록 명령했던 그 거대한 우상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김일성은 사망했지만 김일성의 우상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성지였던 장대현교회는 지금 이렇게 만수대광장(김일성 광장)으로 변해 김일성 우상화의 성지가 되어 있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역전이 되었을까?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공산독재정권이 둥지를 틀고 있는 사단의 견고한 진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흑암과 저주의 땅이 된 북한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근이 들어 300만명이 아사(餓死)했다.
그리고 현재 차이나 대륙에는 5만명의 탈북 난민들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탈북 남성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고, 탈북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차이나 남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가정부나 매춘부 신세가 된다.
어떤 탈북 여성들은 신부를 구할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한족(漢族) 가정으로 팔려가 차이나 남자와 결혼을 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70년이 차면 황무함이 마치게 하소서!

어찌하여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이 ‘사단의 견고한 진’이 되어 북한이 이렇게 저주와 흑암의 땅이 되었나?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치욕스러운 교단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 바로 ‘평양’에서 가결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9일 장로교 총회는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이므로 받아들인다”고 가결했다.
그 후 한국교회 모든 교단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시행하였다.

하나님께서 1907년에 평양에 큰 부흥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바로 그 땅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에게 절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평양은 이가봇(삼상 4:21)이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의 수도가 되었고, 장대현교회가 있던 장대재 언덕은 오늘날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서있는 ‘만수대광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북녘 동포들은 무신론 공산독재정권의 폭정 아래 포로생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의 황무함을 그치게 해달라고 울며 간구한다면, 자비하신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그 당을 고쳐주실 줄 믿는다.
우리는 평양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북한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북한의 구원과 평양의 회복을 위해 거룩한 손을 들고 애통하며 기도하자.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말할 때, 우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해 가는데 하나님은 두 민족을 선택하셨다. 유대인과 한민족이다. 축구경기로 예를 들면, 전반전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쓰임 받았다면, 이제 후반전엔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쓰임 받을 차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민족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는가? 

이를 위해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있었던 성령강림 대 부흥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건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임했던 성령의 임재와 동일한 사건이었다. 오순절 성령세례의 특징 중 하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명의 제자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아주 놀라운 증언이다. 그런데 평양 대부흥이 이런 놀라운 회개의 사건이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 증언에 의하면, 평양은 기생이 가장 많아 음란한 곳이었고 폭력배들이 들끓는 타락한 도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이야말로 교회를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선교부에 보고한다. 그런데 성령임재를 경험한 평양시는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흐느끼는 모습이 초상집과 같았다 한다. 기생집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온순해지기 시작했다. 주일이면 성수주일을 지키기 위해 시내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 평양의 거상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어서 예수를 믿지 않던 상인조차 팔 물건을 공급받지 못해 문을 닫아야 했단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지금 세계에 두 강대국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군사대국 일본, 하나는 기독교대국 조선이다" 라고 보도했다. 뉴욕트리뷴은 "지금 기독교가 조선의 품격을 바꿔 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주일 아침이면 평양시 280개 교회에서 울려 펴지는 종소리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한다. 장대현교회 출신 성도의 말에 의하면, 당시 복음을 듣고 전도 받아 장대현교회를 출석했던 성도의 수가 1 천명이 넘었다 한다. 이 증언은 우리를 놀랍게 한다. 그래서 이것을 목격한 당시 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양을 가리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칭한 것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우연이 아닌 복음전도를 위해 필수적 사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오시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복음전도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한다. 초기복음이 유대인사회에서 이방인사회로 전해지기 위해 예루살렘 오순절 성령세례가 반드시 필요했던 사건이라면, 이제 복음이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를 지나 땅끝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전해지기 위해선 평양 대부흥의 성령세례 사건이 필수적인 사건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한민족을 선택하셨다는 증거다.   

복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로 흘러간다.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졌고, 특히 영국에서 미국 땅으로 옮겨졌다. 영국 프리머스 항을 출발한 청교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프리머스 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교회를 세웠다. 미국인들은 조상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프리머스항 근처에 큰 기념비(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한 여성입상과 그 입상을 받들고 있으며 동서남북을 향한 네개의 좌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입상 발취에 '신앙(Faith)'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그리고 좌상의 발취에 교육(Education), 자유(Liberty), 도덕(Morality), 법(Law)이란 글귀가 쓰여있다.

미국 최초 이민자 청교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신앙을 기초로 미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미국의 건국이념은 점차 세속화되었다. 16 대 미국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이를 새롭게 하길 원했다. 링컨대통령은 성경에서 비롯된 인권사상에 맞지 않는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그의 마음은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문에 잘 나타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링컨 대통령은 미국남북전쟁이 끝나기 전 1865년 암살 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것이 우연일까?  링컨대통령이 암살 당한 후 1년 뒤, 1866년 최초로 중국말 성경이 조선에 전해졌다. 미국상선 제너럴셔호먼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평양에 입항한 토마스선교사(Robert J. Thomas)는 제대로 선교활동도 해보지 못하고 순교 당했지만, 그가 전달한 중국말 성경은 능력을 발휘했다. 

'야소 (예수의 조선말)을 믿으라'고 외치며 박춘권에게 건네진 중국말 성경은 그 곁에서 순교현장을 지켜보던 소년 최치량에 의해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에게 전달된다. 박영식은 성경을 받아 자기 집 도배지로 사용했는데 박영식이 훗날 벽지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훗날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경영했는데 미국 북장로교회 평양 선교사로 부임한 사무엘 마펫이 그곳에 우연히 묵으면서 그곳에서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골교회'를 개척한다. 이 널다리골교회는 훗날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현장이었던 '장대현교회'로 불려진다.

너무 극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이 소아시아, 유럽, 미국을 지나 태평양을 넘어 이렇게 한국땅에 도착했는데 그복음이 평양 대부흥의 본거지인 장대현교회의 모체 '널다리골교회'를 개척하게하고 평양의 대부흥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의롭다.    

한민족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조선땅에 전해진 성경과 기독서적을 읽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통해 민주주의 3대 기본사상 '개인인격존중사상,' '자유사상,' '만민평등사상'을 깨닫는다.

한성감옥에서 1903년 '신학월보'에 기고한 그의 글은 다음과 같다. "대한 사람의 새 물줄기는 예수교회라...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럼으로 교화로써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順便)하고 순리된 바로다...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요."  훗날 프린스턴에 유학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민주주의 3대 기본사상을 기초로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이승만대통령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처럼, 성경 위에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1866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 최치량이 주운 중국어 성경의 행보, 1903년 이승만의 회심과 깨우침, 1907년 평양 대부흥,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한민족을 택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으로 해석하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